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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 국가의 성립
고대 국가의 성격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은 그 중에서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성립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단은 5부 체제로 발전하였다.
  이후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기원전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 내면서 성공하였다.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되었다(기원전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 후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점진적인 사회 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쳤다.
  가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다.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전기 가야 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삼국의 정치적 발전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소수림왕 때에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을 통해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한편, 신라는 5세기 초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5세기 말에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삼국 간의 항쟁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재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은 가가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은 각 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하였다.
  그 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과 그 아래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제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삼국에는 왕 아래에 여러 관청을 두었는데, 고구려의 대대로(또는 막리지), 백제의 좌평은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이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6좌평 제도를 두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훨씬 정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병부와 집사부 등 여러 관서를 차례로 두었다. 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왕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 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가 동북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자, 고구려에는 위기감이 점차 높아졌다. 이에,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면서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를 건국한 문제와 뒤를 이은 양제는 거듭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고,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양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살수 대첩, 612).
  수의 뒤를 이은 당도 고구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당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한 민·군이 협력하여 마침내 당군을 물리쳤다(645). 이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는 백제와 대결하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 당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출하였고, 당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갔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동북 아시아의 패권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668).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후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였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의 이용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 낸 사실에서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 삼국의 경제 생활
삼국의 경제 정책
  삼국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소국과 전쟁을 벌여 정복한 지역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하였다. 또, 삼국은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군공을 세운 사람에게 일정 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면서 조세 제도를 마련하였다. 조세는 대체로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호를 나누어 곡물과 포를 거두었으며, 그 지역의 특산물도 거두었다. 왕궁, 성, 저수지 등을 만드는 데에 노동력이 필요하면 국가에서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아울러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늘릴 수 있는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
  또, 삼국은 노비 중에서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여기에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수도 같은 도시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삼국의 국제 무역은 4세기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 및 유목민인 북방 민족과 무역을 하였다.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으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당항성을 통하여 직접 교역하였다.


귀족의 경제 생활
  삼국 시대의 귀족은 본래 스스로 소유하였던 토지와 노비 외에도 국가에서 준 녹읍, 식읍,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전쟁에 참여하였던 토지와 노비 등은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귀족은 노비와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농민을 동원하여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그리고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들어 재산을 늘려 갔다.
  귀족은 기와집, 창고, 마구간, 우물, 주방 등을 갖추고 높은 담을 쌓은 집에서 살면서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보석과 금, 은으로 치장하였다.


농민의 경제 생활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다. 퇴비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을 묵혀 두어야 하였다.
  농기구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과 일부분을 철로 보완한 것을 사용하다가 4, 5세기를 지나면서 철제 농기구가 점차 보급되었다. 쟁기, 호미, 괭이 등 철제 농기구가 6세기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으며, 우경도 점차 확대되었다.
  농민은 국가와 귀족에게 곡물, 삼베, 과실 등을 내야 했고, 성이나 저수지를 쌓는 일, 삼밭을 경작하고 뽕나무를 기르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지방 농민은 전쟁 물자를 조달하거나 잡역부로 동원되었으며, 전쟁에 군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농민은 스스로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어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자연 재해를 당하거나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몰락하여 노비, 유랑민,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귀족, 평민, 천민
  고조선 시대 이래로 존재하였던 신분적 차별은 삼국 시대에 와서 법적으로 더욱 강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신분 구성은 왕족을 비롯한 귀족, 평민, 천민으로 크게 구분된다. 지배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령을 만들었고, 개인의 신분은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신분의 귀천에 따라 인물 크기가 다르게 묘사된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삼국에서는 왕족을 비롯한 채 옛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정치 권력과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평민층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유민이었으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에서 부과하는 조세를 납부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천민의 대부분인 노비는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들은 주인의 집에서 시중을 들며 생활하거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였다. 대개,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거나 죄를 짓거나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빈번하였던 삼국 시대에는 전쟁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 신라 이후로 정복 전쟁이 사라짐에 따라 전쟁 노비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고구려의 사회 모습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고구려에는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고분 벽화에는 이들의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써,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국천왕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피정복민이거나 몰락한 평민이었다.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평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혼인했는데,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신부집에서 재물을 받았을 때에는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백제의 사회 모습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여 선진 문화를 수용하였다. 백제 사람은 키가 크고 의복이 깔끔하다는 중국의 기록은 그 세련된 모습을 알려 준다.
  백제 사람은 상무적인 기풍이 있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한 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베었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재물을 횡령했을 때에는 3배를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실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및 장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신라의 골품 제도와 화랑도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가 함께 모여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던 신라 초기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초기의 전통을 유지한 대표적인 제도가 화백 회의였다. 귀족은 이를 통하여 국왕을 폐위시킨 적도 있었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왕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 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골품 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품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인의 일상 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다. 이 조직은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다.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다.
  신라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웠다.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다.




한자의 보급과 함께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는 5경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 등을 두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 등을 가르쳤다. 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에서도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여러 교육 기관이 설립됨에 따라 유학이 보급되어 갔다. 삼국 시대의 유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이 아니라, 충, 효, 신 등 도덕 규범을 장려하는 정도였다.




역사 편찬과 유학의 보급
  삼국 시대에 학문이 점차 발달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으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대표적 문장가인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유명한 승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 한산주 시방의 지리지인 한산기 등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신라의 유학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다. 통일 신라 초에 활약한 강수는 외교 문서를 잘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설총은 유교 경전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 교육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불교의 수용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는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여러 왕이 불교식 이름을 가졌으며, 원광은 젊은이들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쳤다. 또,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상을 비롯한 음악, 미술, 건축, 공예, 의학 등 선진 문화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불교는 새로운 문화 창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은 불교를 신앙으로 널리 수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상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불교가 왕권과 밀착되어 성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업설과, 미륵불이 나타나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삼국에는 도교도 전래되어 산천 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환영을 받았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으며, 백제 금동 대향로는 신선들이 사는 이상 세계를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을 그린 것으로,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 사상의 발달
  신라의 불교 사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종합하여 한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7세기 후반기에 정립되었다. 삼국 불교의 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더하여 신라 불교는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
  


 고대의 천문학은 천체 관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만들어졌고, 고분 벽화에도 별자리 그림이 남아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도 7세기 선덕 여왕 때에 첨성대를 세워 천체를 관측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천문 현상을 관측하여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일·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 이변 등에 관한 관측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매우 정확한 기록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천체와 천문 현상에 대한 관측을 중시하였던 것은, 천문 현상이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아울러 왕의 권위를 하늘과 연결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높은 수준의 수학이 발달했음을 여러 가지 조형물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석실이나 천장의 구조,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의 황룡사 9층탑 등에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다. 




금속 기술의 발달
  고구려에서는 철의 생산이 중요한 국가적 산업이었으며, 철광석 생산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 등은 그 품질이 우수하며, 고분 벽화에는 철을 단련하고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기술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백제에서도 금속 기술이 발달하였다.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칠지도는 백제 제철 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의 금속 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는 걸작품이다.
  신라에서는 금 세공 기술이 발달하였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들은 순금으로 만든 것과 금으로 도금한 것이 있는데, 제작 기법이 뛰어나며 독특한 모양이 돋보인다. 통일 신라의 성덕 대왕 신종은 아연이 함유된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신비한 종 소리는 당시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고분과 고분 벽화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꾸어 갔다. 돌을 정밀하게 쌓아올린 돌무지무덤은 만주의 집안(지안) 일대에 1만 2000여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7층까지 쌓아올린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널방을 짜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런 무덤은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널려 있다.
  고분 벽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의 생활, 문화, 종교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초기에는 주로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 많이 있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되어 사신도 같은 상징적 그림으로 변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사비 시기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백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에도 벽과 천장에 사신도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을 많이 만들었으며, 삼국 통일 직전에는 굴식 돌방무덤도 만들었다.


건축과 탑
  고대의 건축은 궁궐, 사원, 무덤, 가옥에 그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분과 건축 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궁궐 건축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장수왕이 평양에 세운 안학궁이다. 이 궁궐 터는 사각형 한 변의 길이가 620m나 된다. 사원 건축으로는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가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가옥 건축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 구조가 일부 보인다.
  삼국 시대에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부처의 사리를 봉인하여 예배의 주대상으로 삼던 탑도 많이 건립되었다. 고구려는 주로 목탑을 건립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서탑만 일부가 남아 있는데,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를 계승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부여에 남아 있다. 신라의 탑으로는 황룡사 9층탑과 분황사탑이 유명하다. 분황사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다.
  삼국 시대에는 방어를 위하여 성곽을 많이 축조하였다. 돌로 쌓은 산성이 대부분이고 지형에 따라 흙으로 쌓기도 했는데, 산의 능선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불상 조각과 공예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이나 백제의 서산 마애 삼존불, 신라의 경주 배리 석불 입상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당시 불상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보살 반가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도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이 널리 알려져 있다.


글씨, 그림과 음악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 한문을 널리 사용함에 따라 서예도 발전하였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은 웅건한 서체로 쓰여졌고, 신라의 김생은 질박하면서도 굳센 신라의 독자적인 서체를 열었다.
  그림에서는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가 신라의 힘찬 화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화가로는 신라의 솔거를 꼽을 수 있다. 그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에 날아가던 새들이 앉으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음악과 무용은 종교 및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은 춤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 화랑들도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삼국의 음악가로는 신라의 백결 선생,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의 우륵이 유명하다. 백결 선생은 방아타령을 지어 가난한 아내를 위로했고,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악곡을 지었다.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고 12악곡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에 전해져 우리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 문화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삼국 중에서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가 삼국 문화의 일본 전수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4세기에 아직기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뒤이어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쳤다.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이렇게 전래된 백제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의 세계적 자랑인 고류 사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호류 사 백제 사 백제 관음상이 만들어졌다. 이밖에도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와 천문 박사, 채약사, 그리고 화가와 공예 기술자들도 건너갔는데, 이들에 의하여 목탑이 세워졌고, 나아가 백제 가람 양식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고구려도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초에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하였고, 호류 사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승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혜관은 불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 나라 시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벽화 고분과 흡사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는 일본과 문화 교류는 적었지만, 배 만드는 기술과 제방 쌓는 기술을 전해 주어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다. 삼국의 음악도 전해져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삼국의 문화는 6세기경의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7세기경의 나라 지방에서 발전한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