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stringlengths
1
7
revid
stringlengths
1
8
url
stringlengths
37
43
title
stringlengths
1
182
text
stringlengths
0
170k
552
22827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52
만화
만화(漫畫, , )는 시각 예술의 일종으로, 아이디어를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매체이며 종종 텍스트나 다른 시각적 정보과 결합한다. 일반적으로 이미지 패널의 형식을 취하며 말풍선이나 자막 형태의 글과 그림의 조합으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한다. 만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이론가들과 역사가들 사이에서 어떤 이들은 이미지와 글자, 일부 순차성 또는 다른 이미지 관계, 그리고 대량 복제나 반복되는 인물의 사용과 같은 다른 역사적 측면의 조합을 강조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초기에는 캐리커처나 간단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많은 하위 장르를 가진 예술 매체로 발전했다. 만화는 소설과 그림을 융합한 종합예술이며 두 가지 장르를 합쳤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특출나도 걸작이 나올 수 있다. 대화, 서술, 음향 효과 기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말풍선, 짧은 해설, 의성어 등의 방법을 사용하며, 컷의 크기와 배열로 묘사의 속도를 조절한다. 만화와 유사한 형태의 삽화는 만화에 쓰이는 가장 흔한 이미지 제작의 수단이다. 만화의 일반적인 형태로는 코믹 스트립, 시사 만평, 만화책 등이 있다. 20세기말 이후, 그래픽 노블, 코믹 앨범, 단행본 등의 합본이 점차 흔해졌고, 21세기 들어 웹 만화가 확산되었다. 만화의 역사는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왔다. 학자들은 라스코 동굴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라고 추정해 왔다. 20세기 중반, 만화는 미국, 유럽(특히 프랑스와 벨기에), 일본 등에서 유난히 번창했다. 유럽의 만화는 1830년의 로돌페 퇴퍼( )의 연재 만화로 거슬러 올라가며, 땡땡의 모험와 같은 1930년대의 연재 만화와 만화책의 성공에 힘입어 널리 확산되었다. 미국의 만화는 20세기 초 신문 연재 만화의 등장으로 대중 매체로 부각되었다. 잡지 형식의 만화책은 1938년 슈퍼맨이 등장한 이후 슈퍼히어로 장르가 두드러져 1930년대에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12세기부터 만화가 시작되었음을 제시되었고, 근대적 만화는 20세기 초에 메이지 유신 이후 각종 서양문물의 전파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기에 데즈카 오사무와 같은 만화가의 인기와 함께 만화 잡지와 만화책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만화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저급 문화로 취급받았으나, 20세기 말로 진행되면서 대중과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개요. 만화의 기원은 만화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는데, 15세기 유럽이 될 수도 있고, 멀게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컷과 그림 안의 말풍선을 가진 오늘날의 만화 형식 및 '만화'라는 단어 자체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만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며, 또한 만화의 매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학자들 중 윌 아이스너는 '그림과 단어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만들거나 생각을 각색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는 1996년에 만화를 최종적으로 '만화책 등에서 삽화와 말풍선이 순서에 따라 나열된 것'으로 정의했다. 《만화의 이해》(1993)에서 스콧 매클라우드는 아이스너의 연속예술이라는 표현을 만화의 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정보를 전달하거나 보는 이에게 미적인 반응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림과 그밖의 형상들을 의도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것(juxtaposed pictorial and other images in deliberate sequence, intended to convey information and/or to produce an aesthetic response in the viewer)"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는 패밀리 서커스나 풍자 만화와 같은 한컷 만화를 만화가 아닌 카툰으로 분류한다. 그 반면, 코믹스 저널은 "20세기 최고의 만화 100선"이라는 기사에서 수많은 카툰 및 캐리커처 작가들의 한컷 작품을 포함시켰다. 특징. 문화를 크게 고맥락(high 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 context) 문화로 구분된다. 일본과 한국, 중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맥락 문화에 속하는 나라들인데, 고맥락 문화란, 민족적으로 동질을 이루며 역사, 습관, 언어 등에서 볼 때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 즉 맥락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집단주의와 획일성이 발달하는 문화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깊은 인간관계로 묶여있으며 멤버 간에 공유하는 정보가 많으며 간단한 메시지라도 깊은 의미를 갖기 쉬운 문화이다. 또한, 언어 코드보다 컨텍스트(context: 비언어코드,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환경, 인간관계)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고맥락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언어적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많고 비언어행동에 있어서는 미묘한 것이 많이 존재한다. 반면에, 저맥락 문화는 다인종,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이 대표국이며, 멤버 간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의 비율이 낮아 개인주의와 다양성이 발달하는 문화를 가진다. 저맥락 문화에 속하는 미국만화는 정교한 그림체와 짧은 이야기 구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선악의 확실한 구분과 수많은 말풍선을 사용한 스토리 전개, 소설식 설명구조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처럼 동서양의 만화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서양독자들은 처음 망가를 접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식 이야기 관습에 당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 특유의 느긋한 스토리 구조와 속도조절을 위해 사용되는 감성적 이미지들, 말없는 칸들은 서양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색하며, 감정을 나타내는 많은 기호들과 소리와 움직임뿐 아니라 상황과 심리적 상태까지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그림문자들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표현매체로서 받아들여진다. 만화 산업. 한국 만화 생태계의 기본 구조는 '창작-제작-유통-소비'의 흐름을 가진다. 창작 단계는 개인 창작, 공동 창작, 수입 라이선스 만화로 나뉘며 제작 단계는 온라인과 만화전문 출판사, 일반 출판사, 대여점용 출판사 등의 출판으로 나뉜다. 이 밖에도 신문, 동인지 시장, 모바일 등도 제작 단계에 포함된다. 만화 산업은 다양한 제작 단계와 패키징 과정을 거쳐서 제작되며, 하나의 콘텐츠가 동시다발적으로 가치사슬을 만들며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 콘텐츠는 기획에서부터 다수의 가치 사슬에서 활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만화의 제작 환경. 온라인 제작(웹툰). 온라인이라 하면 보통 웹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웹툰 작가들은 개인창작 위주로 활동한다. 혼자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경우 또한 있다. 웹툰은 대개 규모가 큰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가 된다. 포털 사이트에 연재가 되기 위해서 작가들은 수많은 노력을 통해 정식 연재를 하게 된다. 웹툰은 만화 연재 수에 따라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와 계약을 맺어 일정한 원고료를 받고 포털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포털 사이트 방문 횟수를 늘리기 위한 포털 사이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이버'라는 포털 사이트가 있다. 네이버에서는 무료로 이용자들에게 요일별 웹툰을 제공한다. 요일당 평균 24개 정도의 웹툰을 제공하며 작가들과 계약을 맺어 원고료를 제공하고 웹툰을 무로료 제공하고있다. 신문 제작. 신문 만화는 전통적으로 '시사만화'의 영역이었다. 1개 신문에 적어도 네 칸 만화와 한 칸 만화가 동시에 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네 칸 만화 지면을 폐지할 정도로 시사만화의 창작·제작환경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으로 신문의 판매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로 대여점용 성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과 협조해 적은 비용 혹은 무료로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553
2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53
만화장르
554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54
인터넷 프로토콜
인터넷 프로토콜(IP, Internet Protocol)은 송신 호스트와 수신 호스트가 패킷 교환 네트워크(패킷 스위칭 네트워크, Packet Switching Network)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사용하는 정보 위주의 규약(프로토콜, Protocol)이며, OSI 네트워크 계층에서 호스트의 주소지정과 패킷 분할 및 조립 기능을 담당한다. 줄여서 아이피(IP)라고도 한다. IP의 정보는 패킷 혹은 데이터그램이라고 하는 덩어리로 나뉘어 전송된다. IP에서는 이전에 통신한 적 없는 호스트에 패킷을 보낼 때 경로 설정이 필요없다. IP는 비신뢰성(unreliability)과 비연결성(connectionlessness)이 특징이다. 비신뢰성은 흐름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보낸 정보가 제대로 갔는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전송과정에서 패킷이 손상될 수도 있고, 같은 호스트에서 전송한 패킷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고, 같은 패킷이 두 번 전송될 수도 있으며, 아예 패킷이 사라질 수도 있다. 패킷 전송과 정확한 순서를 보장하려면 TCP 프로토콜과 같은 IP의 상위 프로토콜을 이용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표준 프로토콜은 인터넷 프로토콜의 4번째 판인 IPv4이다. 그러나 IPv4는 주소공간 고갈 문제를 겪고 있어 조만간 6번째 판인 IPv6가 대중화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7, OS X, 리눅스 등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대부분의 운영 체제는 IPv6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대표적인 IP 주소 체계. 다음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IP 주소 (ip address)체계이다. 버전 역사. 관련 버전은 현재 IPv4와 IPv6가 있다. IP 버전 0부터 3까지는 실험적인 버전으로,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사용되었다. 다음의 IEN(Internet Experiment Note) 문서들은 현대 버전의 IPv4 이전의 인터넷 프로토콜 버전을 기술한다:
556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56
페르마의 소정리
수론에서 페르마의 소정리(Fermat小定理, )는 어떤 수가 소수일 간단한 필요 조건에 대한 정리이다. 추상적으로, 소수 크기의 유한체 위의 프로베니우스 사상이 항등 함수임을 의미한다. 정의. formula_1가 소수이고, formula_2가 정수라고 하자. 페르마의 소정리에 따르면, 법 formula_1에서 formula_4와 formula_2는 서로 합동이다. 위 식은 formula_7일 때 자명하게 성립한다. 만약 formula_8일 경우, 양변을 약분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이는 모든 소수가 만족시키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즉, 페르마의 소정리에 나타난 합동식을 만족하는 수가 반드시 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를 만족하면서 소수가 아닌 formula_11를, formula_2를 밑수로 하는 카마이클 수라고 부른다. 역사. 피에르 드 페르마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페르마는 이 정리를 언급했을 뿐, 정확한 증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현재 기록상 남아 있는 증명 가운데 최초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것이다. 증명. 페르마의 소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합동식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 증명 방법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일반화. 오일러 정리. 이 정리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이용하여, 소수가 아닌 정수 n에 대해서까지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n이 자연수, a가 n과 서로소인 자연수일 때, 이 성립한다. 식에서 formula_14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나타낸다. 유한체론. 유한체 이론에서 다항식의 나눗셈에 관련된 결과를 통해 페르마의 소정리를 일반화할 수도 있다. 표수가 formula_1인 유한체 formula_16에 대하여, 다음 두 명제가 성립한다. 여기서,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따라 C(p, k)를 얻는 일반적인 공식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7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557
3285099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57
아키라 (만화)
《AKIRA》()(국내수입명: 폭풍소년)는 오토모 가쓰히로가 창작한 일본의 만화이다. 고단샤가 발행한 만화 잡지 주간 영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화(1988년) 및 게임화도 되었다. 개요. 근미래의 황폐한 세계를 그린 SF 작품으로, 치밀하고 현실적인 묘사나 연출 등이 화제가 되었으며, 만화와 영화 모두 대히트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기술을 가져왔다. 이후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준 영향도 크다. 원작인 만화판은 '만화계의 두 번째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진다(첫 번째는 물론, 데즈카 오사무). 제목인 AKIRA는 오토모 자신이 팬으로 삼고 있으며 큰 영향을 받은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유래한다. 붓으로 쓴 제목은 만화가인 히라타 히로시가 쓴 것이다. 단행본은 주간지와 같은 대형판 사이즈와 절단면에 채색을 하는 등, 이목을 끄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의 만화가 뫼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작자의 치밀한 묘사로서는 이 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 국외에서는 아메리칸 코믹의 스태프가 채색한 외국어판이 유통되었으며, 이것을 일본어로 역번역한 것이 《국제판 AKIRA》 및 《총천연색 AKIRA》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발매됐다. 영화는 제작비에 10억 엔을 건 대규모 작품으로, 치밀한 작화나 음악, 파괴 영상 등으로 당시의 애니메이션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제작 기법으로 애프터 레코딩가 아닌 프리 스코어링을 채용했다. 또, 통상적으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서 인물의 입의 움직임은 3종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음의 수와 같은 5종류로 그려졌다. 일본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평가나 수출의 증가에 공헌했다. 비디오화가 될 때에 많은 컷을 손보거나, 음악과 관련해서도 손을 보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본 작품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서양의 대중시장으로 폭발적으로 넓힌 마일스톤이 되어 해외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2009년 여름에 공개할 예정인 실사영화 제작이 계획되어 있다. 제작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감독은 로리 로빈슨, 워너브라더스 배급이다. 하지만 원작이 워낙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많은 탓에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오기란 쉽지가 않았고 각본마저 제작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다가 2013년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 스토리. 198X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는 1988년이라고 나온다.) 도쿄는 신형 폭탄에 의해 붕괴되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여, 세계는 황폐되어 가고 있었다. 2019년. 도쿄 만에 떠오르는, 동경 23구를 본뜬 인공 도시 네오동경의 어둠에 버려진 고속도로. 폭주족 소년들이 들어와서 질주한다. 그중 한 멤버인 데쓰오는 백발의 소년과 접촉 사고를 일으켜 중상을 입는다. 백발의 소년은 정부의 초능력 연구 기관에서 반정부 게릴라(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빠져나오게 된 초능력자 다카시였다. 데쓰오는 다카시와 함께 연구 기관에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초능력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등장인물. 극장판과 원작에서는 인물의 설정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양자의 공통 사항을 기술하고, 특히 극장판과 원작에서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그 점을 설명한다. 만화. 영 매거진에서 1982년 12월 20일호부터 1990년 6월 25일호에 걸쳐 연재되던 도중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인해 일시 중단됐다. 전 120화. 1984년, 제8회 고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 수상. 2002년, 아이즈너 상 최우수 국제 아가이브 프로젝트 부문 및 최우수 국제 작품 부문을 수상. 또, 그 이전의 1992년에 올 컬러 국제판 AKIRA가 최우수 채색 부문을 수상했다. 극장 애니메이션. 1988년 제작. 상영 시간 124분. 70mm프린트. 제작비 약 10억 엔. 총 셀화 매수 약 15만 장. 신 애니메이션. Anime expo 2019에서 오토모 가츠히로의 신 프로젝트 발표회 스테이지에 게스트로 아사누마 마코토 선라이즈 CEO가 등단하여 프로젝트 중 하나로 AKIRA의 신 애니메이션 기획이 언급되었다. 아사누마는 예전부터 1988년의 AKIRA가 만화의 스토리를 제대로 담지 못해 작화는 좋아도 스토리는 이상한 애니로 여겨지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자신이 성공하면 원작 스토리 기준으로 장편 애니화 하겠다고 라이프워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번에 드디어 실현되는 것이고 스토리도 만화판을 그대로 재현할 것이라고 한다. 실사영화화. 2002년에 워너브라더스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는데 많은 우려를 얻는 실정이다. 2011년 10월 미국 버라이어티지에서는 워너가 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 실사판 제작을 드디어 허가했다고 보도했다. 촬영은 내년 3월 시작 예정으로 카탈루냐 출신의 자우메 코예트세라가 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예산은 9천만 달러로 책정되었으나 확실치는 않다. 무엇보다 현재 CG 수준으론 충분히 원작 묘미를 살릴 수 있으나 그러자면 제작비가 2억 달러 이상 필요할 예정이라 과연 이게 제대로 만들어질지 의문이다. 결국... 제작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세일러문이나 무수한 일본 애니 영화화 판권을 헐리웃 업체들이 사가선 끝내 제작이 불발된 경우처럼 될 가능성도 커 보인다. 결국 제작비 부족으로 제작이 무기한 중단되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6천만 달러 제작비가 들어갈 예정이라서 제작진들이 도저히 이 돈으로 만들기 무리라고 반발이 심한 끝에 이리 되었다고. 그러던 중 2015년 9월 15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AKIRA 영화 감독을 맡는다는 루머가 나왔다. 2015년 9월 9일 뉴스에서 "워너브라더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 영화를 2017년 7월 21일 개봉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9월 15일 나온 내용에 따르면 워너에서 2017년에 AKIRA 영화를 만들 예정인데, 위의 내용과 연결하여 AKIRA의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것이다. 기사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현재 크리스토퍼 놀란은 워너브라더스의 관계자와 3개월째 이 프로젝트에 대해 상의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2017년에 개봉하는 영화는 3부작 중 1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컴퓨터 그래픽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모든 장면을 촬영하길 원한다' 등의 루머가 돌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이 덩케르크 로 확정되면서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7월 1일에는 아키라 실사판 컨셉아트 가 나온 것을 보면 제작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저스틴 린 감독이 연출한다는 루머가 돌고 있다. 실사 영화가 나오기 전에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먼저 등장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AKIRA 애니메이션의 상징적인, 카네다가 모는 바이크가 등장하는 것이다. 2017년 3월에는 다니엘 에스피노사(차일드 44, 라이프)와 데이비드 샌드버드(라이트 아웃) 감독이 제작이 참여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2017년 9월, 실사 영화판 감독으로 의 타이카 와이티티가 논의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감독으로 발탁했지만, 차기작 조조 래빗 개봉 이후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초기 개발 단계이며, 애니판이 아닌 책을 기반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2019년 4월, 마침내 수 년간의 루머들 끝에 촬영 도입이 발표되었고 시놉시스도 공개되었다. 동년 5월에는 2021년 5월 21일로 개봉일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타이카 와이티티가 의 감독을 맡게 됨에 따라 7월에 다시 중단되었다. 참고. 본작에서 AKIRA(28호)가 철인 28호의 오마주인 것은 분명하다. 또, 이것은 주인공인 가네다(쇼타콘의 어원인 가네다 쇼타로)나 데쓰오(철인을 비꼬고 있음)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마약 문화와의 관련성. 본 작품은 일본에서도 1960 ~ 70년대에 유행한 서브컬처인 사이키델릭 문화(마약 문화・히피 문화와도 관계 있음)의 영향이 작중에 있다고 보인다. 이것은 주인공이나 크라운 등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흥분제(이것은 가네다의 자켓의 등에 그려진 캡슐에도 관계 있음), 더욱이 초능력자가 복용하는 치사량에 달하는 위험한 약물 등의 관련성을 밝혀내는 서브컬처 연구자도 적지 않다. 네오동경의 바이크. 작중에서 주인공인 가네다가 다루는 '가네다의 바이크'를 시작으로, 다른 모든 개성적인 바이크는 카울부터 프레임 레이아웃에 이르기까지 세미 이지 오더 시스템(semi-easy order system)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차륜 안에 설치된 상온 초전도 모터를 통해 양륜구동을 실현하고, 전력은 가솔린 엔진에 의한 발전(영화 앞부분에서 데쓰오가 제멋대로 찾아왔고, 원작에서는 가네다가 약을 연료 탱크에 숨기고 있음). 또, 보디의 이곳저곳에 붙여진 스티커는, 1980년대 회고 붐에 의한 유행인 것 같다. 하지만 조커가 타는 대형 아메리칸은 현재와 같은 가솔린 엔진의 후륜구동차라는 설정이며(그의 취미), 큰 머플러가 몇 개씩이나 나와 있다. 원작 단행본. 단행본 4권이 간행된 후에 영화판의 제작이 개시됐으며, 원작 만화의 연재는 장기간 휴재되었다. 5권의 간행까지 실로 3년간을 필요로 했지만, 영화의 세계적인 히트로 발매된 "국제판 AKIRA"(해외에서 발매된 원작 영어판의 역수입)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미발매된 5권의 전반에 상당하는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었다. 국제판은 1권당 수록화가 일본의 것보다 적었는데, 일본에서 5권으로 발매되기에는 부족한 화수라도 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4권의 권말에는 5권의 광고가 게재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5권이 최종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연재 재개 후에는 장기에 걸쳐 정력적으로 연재가 계속되었으며, 5권은 사전 정도의 두께가 되는 게 아닐까 예상되었지만, 결국 5권과 6권으로 나뉘면서, 6권이 최종권이 되었다.
559
75312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59
일본의 애니메이션
아니메(, Anime) 또는 재패니메이션()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기존에 연재되는 동명의 인기있는 만가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제작되며, 장면의 대부분은 셀 애니메이션 방식이 사용된다. ' 아니메 '는 영어 단어 'Animation (애니메이션)'이 변형된 형태이다. 다른 언어에서, 이 용어는 일본에서 온 애니메이션이나 다채로운 그림, 활기찬 캐릭터와 판타지적 주제를 가진 일본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가진 애니메이션을 의미한다. 초기 일본의 상업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이후에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은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캐릭터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경우 1960년대에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에서 나왔으며,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거대한 국내외 시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장에서, 텔레비전 방송으로, 직접 홈 미디어로, 인터넷으로 배포되었고, 다양한 대중의 수요를 잡기 위해 다양한 장르로 나뉘었다. 아니메는 원래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Animation)을 지칭하는 약자였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중 60% 이상을 제작할 정도로 거대해진 오늘날에 '아니메'는 각국의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여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권에서는 " 일본 애니메이션 " 또는 줄여서 " 일본 애니 " , " 일애니 " 라고 하고 있어 아니메란 용어의 비중이 낮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새로 나온 기술에 반응하여 시간에 적응해 온 독특한 제작 방법과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예술의 형태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움직임에는 초점을 덜 맞추고, 패닝과, 줌. 앵글 샷을 비롯한 카메라 효과의 사용과 더불어 주위 환경의 사실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다양한 예술 형태가 사용되었으며, 강조된 감정 표현이나 현실적인 크기의 눈을 포함하여, 등장 인물의 조화와 특징은 꽤 다양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430여 회사가 있는데 그 중 유명 회사는 스튜디오 지브리, 가이낙스, 토에이 애니메이션 등이 있다. 국내 시장을 나눠먹고 있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DVD 판매량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SNS와 스트리밍의 다양화로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어서 일본 밖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많아지기는 했지만, 팬과 산업계 모두 이를 단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할 뿐이다. 2019년 일본의 연간 애니메이션 해외수출액은 사상 처음으로 10조원을 넘었다. 2021년 기준 미국에서 아니메는 외국어 문화콘텐츠중 가장 높은 수요를 차지한다. 역사. 초창기와 군부독재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의 탄생 배경은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대전 특수를 맞이해 경제 부흥을 맞아 해외 문화를 탐닉하던 시대였다. 특히 영화는 대중오락으로 정착되며 영화 스타가 등장하던 시기였고, 닛카쓰, 덴카쓰 등의 영화사들도 설립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이제 막 제작되기 시작했던 미국 (존 랜덜프 브레이)과 프랑스 (에밀 콜)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일본에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모카와 오텐, 고치 준이치,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삼인방은 영화사들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아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하고 분석, 기법을 연구한 뒤 1916년부터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1917년 1월 시모카와 오텐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인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 이야기》를 제작하였는데 칠판에 분필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조악하고 단순하였지만, 훗날 시모카와는 기초적인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기타야마 세이타로는 1917년 5월 《원숭이와 게의 전투》를, 고치 준이치도 6월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를 제작하였다. 이 세 작품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들로 항상 언급된다.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경우 일본에서 최초의 애니메이션 독립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제작소를 설립하기까지 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설비가 파괴되면서 제작을 중단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공백기를 맞았지만, 위기를 딛고 발전을 계속하였다. 기타야마 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 기술자 출신이었던 야마모토 사나에는 1925년 야마모토 만화제작소를 설립, 《노인을 버리는 산》을 시작으로 정부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였고,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 출신의 무라타 야스지는 1926년 첫 작품 《기린의 목은 왜 긴가?》 이후 '무타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컷 아웃 방식의 교육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작, 전쟁 전 최다 작품을 만들어내 달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오후지 노후로는 1929년 일본 최초의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제작하였으며, 마사오카 겐조는 1932년 셀 방식을 이용해 제작된 본격적인 발성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세상》으로 기술을 한층 진보시켰으며, 수년 뒤 《거미와 튤립》을 제작해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와중에 1927년 단편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하는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비롯한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1930년부터 일본에 연이어 수입된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 애니업계는 수입 작품에 비해 비싼 제작비, 엉성한 움직임과 스토리 등으로 경쟁력이 낮았고, 각 영화사들은 흥행 실패를 예감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손을 떼었다. 극장에서 물러난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정부 주관의 교육·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 사회는 군부독재 시절로 서서히 접어들며 1931년 중일 전쟁 발발, 1933년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에 맞춰 전의를 고조시키기 위한 선전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여럿 의뢰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세오 미쓰요의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 《모모타로·바다의 신병》, 오후지 노부로의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 야마모토 사나에의 《스파이 격멸》 등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하는 등 군국주의 색채가 짙었지만,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려 했으며, 《모모타로·바다의 신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은 전후 애니메이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전후 혼란과 도에이 애니메이션. 전쟁이 끝난 뒤 GHQ는 신속한 점령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홍보를 활용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1945년 가을 야마모토 사나에, 무라타 야스지, 마사오 겐지 등을 중심으로 100여명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소집되어 신일본동화사가 설립되었다. 마사오카 겐조는 봄꽃의 평화를 강조하는 《벚꽃》(1946)을 제작하였으나 극장가에 공개되지는 않았고, 《버려진 고양이 도라짱》 (1947) 등을 제작하였지만 GHQ가 바라던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진척되자 디즈니의 역할을 염두에 두었던 GHQ도 이내 포기, 신일본동화사는 1947년에 해산되었다. 신일본동화사의 세 사람은 같은해 일본만화영화사를 설립하나 무라타 야스지만 남고, 무라타는 세오 미쓰요를 불러들여 《임금님의 꼬리》 (1949)를 제작하나 배급사 도호에서 내용 문제를 이유로 비공개 처리, 일본만화영화사는 큰 투자금을 보전하지 못하여 파산하였다. 이외에도 전쟁 전에 활약하던 작가 대부분은 패전의 충격과 사회격변에 순응하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업계를 떠나던 실정이었다. 야마모토 사나에, 마사오카 겐조는 도호의 투자를 받아 '일본동화'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는 모리 야스지, 후쿠이 에이치 등의 인사도 들어와 있었다. 이후 도호의 관련사를 흡수해 투자를 늘려 회사명을 니치도 (日動) 영화로 바꾸고, 1995년에는 도에이의 위탁으로 단편 《흥겨운 바이올린》을 제작한 것을 계기로 도에이가 니치도영화를 매입, 도에이 교육영화 소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삼으며 1956년 7월 '도에이동화'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였다. 도에이동화는 기존의 가내수공업 방식을 타파하고 미국식 분업 제작시스템을 차용,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1957년 13분 분량의 첫 작품 《새끼 고양이의 낙서》를 발표한 뒤, 1958년 10월에는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을 개봉하였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영상으로 인기를 끌며 절찬리에 상영된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메이터 지망생을 낳게 되었다. 이후로도 도에이는 《원숭이 소년 사스케》 (1959), 《서유기》 (1960) 등을 공개하였다. 한편 1952년 〈철완 아톰〉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다, 도에이동화 측에서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서유기》의 제작협력 의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애니메이션의 기본을 배웠다. 1961년 도에이동화에서 퇴사한 데즈카는 사카모토 유사쿠, 요코야마 다카이치 등과 함께 도쿄 후지미다이에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실험작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1962)을 계기로 데즈카 프로덕션은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TV 애니메이션의 시대. 일본이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던 1950년대부터는 애니메이션 환경의 변화도 이뤄졌다. 1953년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고, 1959년에는 주간 단위의 만화잡지들이 창간되어 어린이들은 매주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제작한 무시 프로덕션은 앞으로의 방향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설정하고, 철저한 상업적 작품을 기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가의 제작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니메이션 표현을 생략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을 도입하고, 에피소드 방식의 미국 애니와는 다른 '재미있으면서 복잡한 스토리', 즉 이야기와 세계관에 충실한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무시 프로덕션의 첫 정기작품은 탄탄한 이야기와 세계관을 쌓아가고 있던 〈철완 아톰〉으로 결정되었고, 1년 간의 제작 끝에 1963년 1월 1일 저녁 6시 15분, 후지테레비에서 《철완 아톰》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철완 아톰은 당시 엄청난 시청률로 인기를 구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캐릭터 상품 권리, 최초의 팬클럽 설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철완 아톰》의 성공에 주목한 TV 방송국과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속속 참가하였다. TCJ 스튜디오는 1963년 한 해에 《신선부락》, 《철인 28호》, 《에이트맨》을 제작해 방영 개시하였는데 모두 공상과학 장르에 속해 SF 작가가 각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도에이동화는 《늑대소년 켄》을 제작하였지만 그간 장편애니에 집중한 탓에 비효율적인 제작방식이라는 문제를 겪기도 했다. 1964년 데즈카 오사무는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을 기획하였는데 이미 방영되던 《철완 아톰》이 첫 대상이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정글 대제》를 풀 컬러 애니메이션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기동전사 건담》과 《우주전함 야마토》등의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수용층이 어린이에서 청소년은 물론 성인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80년대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VTR)가 보급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인 지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고, 일본 애니메이션 중의 인기도에서 2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며, 1986년 드래곤볼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 시작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과 1993년부터 시작한 농구만화 슬램 덩크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애니메이션 작품 제작비의 70~80%를 차지하는 인건비가 상승하고, 일본의 버블 경제(잃어버린 10년)가 무너지면서 경제 침체로 이어져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종류. 프로덕션 종류. 기본적으로 판매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배포.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화풍, 애니메이션 기법, 생산, 제작에 있어서 다른 형태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형태를 띈다. 시각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원화가, 감독, 원작가, 스튜디오에 따라 그림체가 상당히 다르다. 어느 한 그림체가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애니메이션 기법과 캐릭터 디자인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애니메이션 기법.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일반적 애니메이션 제작과 마찬가지로 콘티 작성, 목소리 녹음, 캐릭터 디자인, 셀 제작 등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1990년대 이후 애니메이터들은 점차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의 효율성을 올리기 위해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후지 노부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기를 개척한 사람으로, 실험적이었고 흑판에 그린 그림, 종이를 잘라 만든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 실루엣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셀 애니메이션은 점차적으로 유명해져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모치나가 타다히토, 카와모토 키하치로, 무라타 토모야스가 만든 스탑 모션 인형극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독립 단편 영화를 제외하고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들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셀 애니메이션과 섞은 공각기동대,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작품이 있다. 셀을 제작하는 주요 회사인 후지필름은 셀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산업 전반에 셀을 모아야 한다는 충격을 주었고 서둘러서 디지털 작화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 시기가 오기 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pose to pose approach를 사용하는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추세는 비싼 원화를 덜 사용하고 중간에 동화를 많이 끼워넣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기존의 사용했던 장면을 재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선구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중점을 두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프레임을 조금 줄여서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단점을 정성을 들인 작화로 극복하는 등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한 기법은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장치의 개념으로서도 사용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장면은 삼차원 뷰를 달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배경은 작중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구이다. 배경은 항상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에서 배경을 따 오는 경우도 있다. Oppliger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모든 스타급 캐스팅을 합쳐서 매우 강한 감동을 자아내는 드문 매체라고 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화적 효과는 미국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마치 카메라가 찍은 것과 같이, 패닝, 줌, 원거리/단거리 샷과 같이 영화같은 샷을 사용하는데, 현실에서는 만들기 까다로운 훨씬 동적인 샷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사 녹음을 먼저 하고 동화 작업을 하는 북미 애니메이션과 달리 동화 작업을 끝낸 다음에 대사를 녹음한다. 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입 모양과 대사가 맞지 않는 오류도 생길 수 있다. 캐릭터.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신체의 비례는 현실계의 신체 비례를 정확하게 반영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제작자는 머리 높이를 비례의 기본적인 단위로 생각한다. 머리 길이는 다양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키는 7등신에서 8등신 정도이다. 캐릭터 디자이너는 신체가 상당히 변형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몸의 비례를 의도적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몸은 작은데 머리는 큰 균형에 맞지 않는 캐릭터가 있으며 이 경우 2등신에서 4등신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짱구는 못말려 같은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신체 비례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예이며, 서양 애니메이션과 유사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관습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눈 크기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눈이 큰 아니메 캐릭터는 베티 부프와 같은 초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테즈카 오사무가 눈이 상당히 큰 캐릭터를 그린 것이 시초이다. 테즈카는 일본 만화애니 역사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테즈카가 만든 상징적 예술 스타일과 캐릭터 디자인은 사람 감정 전체를 눈 모양을 통해서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작자는 눈 색깔을 다양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밝은 음영, 색조, 어두운 음영을 섞어서 눈 색을 표현한다. 문화 인류학자 Matt Thorn은, 일본 애니메이터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스타일의 눈이 다소 외국인같은 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눈이 다 큰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사실적인 눈 크기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캐릭터의 머리카락 색도 현실적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지 않게 생생하고 다채로우며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과장되어 있으며 머리카락의 과장된 움직임은 액션과 캐릭터의 감정을 시각적 효과로 강조하는 데에 쓰인다. Poitras는 만화 표지 일러스트의 머리카락 색을 조사했는데, 눈을 사롭잡는 그림과 다채로운 색채는 어린이용 만화에 매력적이라고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 국내 시장에서 제작되기는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인종이나 국적은 항상 정의되는 것은 아니며,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같이 의도적으로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특정한 감정과 생각을 이미 정해져 있는 표정 그림을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서양 애니메이션과 다르다. 또한, 그러한 특징에는 특정한 감정과 기분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사용하는 고정된 도해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종종 과장되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전형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인데, 남캐가 화를 낼 때에는 코피가 난다. 순간적으로 단순그림체가 단순해질 때도 있다. 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땀을 그린다거나, 부끄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붉게 그린다거나, 집중해서 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게 표현하는 것 같은 다양한 시각 기호가 사용된다. 음악.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의 오프닝, 엔딩곡은 J-Pop이나 락 음악에 속해 있으며, 때때로는 유명한 밴드의 곡이 사용되기도 한다. 작중 스토리를 마음에 두고 가사를 쓰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시장도 목표를 해서, 주제를 살짝만 내비치는 곡도 나타나며 아예 줄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곡도 나오기도 한다. 음악은 작중에서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배경 음악은 줄거리 노선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단지 애니메이션 장면을 꾸미기 위해 사용된다. 몇몇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에 쓰인 음악을 전부 모아서 OST 앨범을 발매하기도 한다. 장르. 일본 애니메이션은 타겟 연령층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동 만화, 소녀 만화, 소년 만화, 청년 만화, 여성 만화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소녀 만화와 소년 만화는 다양한 성별의 독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남녀 어린이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애니메이션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성인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 전개 속도가 느리고 줄거리 복잡성이 더 크기도 하며, 성인이 좋아할 만한 주제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성인 애니메이션 작품 중 일부는 일본에서 "R18"로 분류가 되는데, 이러한 애니메이션을 헨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조적으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르의 하위 장르로, 성적 행위를 직접 묘사하지는 않으면서 성적인 주제나 암시가 들어가 있는 '엣치'라는 것이 있는데 전형적으로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나 하렘 애니메이션에 이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청소년 계층과 성인 계층에게 인기가 많아서 애니메이션에 판치라를 비롯한 엣치 요소를 넣는 것은 팬 서비스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류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분류와 달라서 간단한 특징으로 분류할 수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대해 책을 쓴 Gilles poitras는 전쟁과 평화를 전쟁 소설로 여기게 하는 것과 유사하게 '건담 0080'과 그것의 복잡한 전쟁 묘사를 거대 로봇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을 비교했다. SF는 일본 애니의 주된 장르이고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이나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철인 28호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도 있다. SF의 하위 장르 중에는 메카물이 잇는데 건담과 같은 작품이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장르 애니메이션 중에은 일본의 옛 이야기에서 소재를 따 온 '이누야샤'와 같이 동서양의 전통과 설화에 기반한 작품이 있고, 위그드라실이라 불리는 컴퓨터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옮겨 온 스칸디나비아 여신을 묘사한 '오! 나의 여신님'이란 작품도 있다. 애니메이션의 장르는 일반적인 경우도 있는데, 드레곤 하프와 같이 판타지와 코미디가 섞인 작품, 카리오스트로의 성과 같이 범죄 애니메이션에 익살스러움을 첨가한 경우도 있다. 다른 하위 장르로는 마법소녀, 하렘, 스포츠, 무술, 문학의 애니화, 전쟁 등이 있다. 동성애를 다룬 장르도 있다. 원래 용어에는 외설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야오이(남성간 동성애)와 백합(여성간 동성애, 百合)는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작품을 설명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동성애 성향이 있는 캐릭터는 재미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성애 캐릭터를 진지하면서도 공감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인상. 한국에서 일본에 서브컬쳐는 그렇게 좋은 인상이 아니다. 오타쿠 즉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본인이거나 찐따다'고 하며 놀리기 일쑤이다. 옛날 대한민국은 국가에서 만화책을 불량도서 취급하며 태우고 없애서 우리 어른들에게는 나쁘다는 인상이 박혀있어 그렇게 좋게 자리잡고 있진 않다. 역대 시청률. 역대 최고 시청률은 다음과 같다.
561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61
백로 (절기)
백로(白露)는 24절기의 15번째로 태양 황경이 165도가 될 때이다. 양력으로는 9월 7일 내지 9월 8일에 해당한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 하여 백로라 한다. 백로는 이슬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562
3603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62
PC
PC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564
5462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64
레오 톨스토이
566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66
해양학
해양학(海洋學, )은 바다(해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질학, 물리학, 생물학, 화학 그리고 이들 각 분야의 학문을 바다와 그 주위에 적용할 공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분야를 포함한다. 해양학의 세부학문으로는 해양지질학(海洋地質學), 물리해양학(物理海洋學), 해양생물학(海洋生物學), 화학해양학(化學海洋學), 해양공학(海洋工學) 등이 있다. 해양지질학은 지구 내부의 성분, 지각의 변동, 해저퇴적물의 특성, 고기후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해양지질학은 순수 학문분야를 넘어 지진예측이나 지하자원의 분포를 분석하는 실용적인 학문에도 영향을 주는 학문분야이다. 물리해양학은 파랑역학, 해류, 해양-대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최근 물리해양학은 공해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예측이 중요해짐에 따라 학문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해양생물학은 해양생물의 분포와 특성, 해양-대기의 상관관계로 인한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해양생물로부터 유용한 물질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화학해양학은 해양의 용존 고체 및 기체와 이들 성분이 해양에 미치는 지질학적·생물학적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해양공학은 석유 플랫폼, 선박, 항만 등 해양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구조물의 건조·설계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또 항해의 안전성 제고에 대한 연구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 초기역사. 해양학은 선사시대에 인류가 바다와 파도와 해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84-322년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트라본이 조수에 대한 관측을 하였다. 바다에 대한 초기탐험은 주로 지도 제작을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이 어부들이 그물에서 기르던 동물과 해양의 표면에 대한 것들로 제한되었으며, 이후 납선을 이용한 바다의 깊이 측정 또한 이루어 졌다. 체계적으로 지속된 최초의 과학적 대규모 프로젝트로는 대서양의 해류와 바람에 대해 연구한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해 캠페인이 있다. 1527년부터 왕실에 임명될 때까지 조종사 및 선임 선원의 교육에 개인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수학자 및 천문학자로서 인정받았던 포르투갈의 수학자 중 한명인 (1502-1578)는 2차원지도에 표시된 두 지점의 지구에서의 최단경로인 사항곡선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이후 “Treatise of the Sphere”이란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기하학적 및 천문학적인 탐색 방법에 대한 논문이 포함되어있다. 카나리아 제도의 남쪽 (또는 Boujdour 남쪽 )에서 오직 항해만을 통해서 출발지로 돌아가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그이유는 바람과 해류의 흐름의 변화 때문이다. 북대서양 환류와 적도 반류와 북동무역풍과 남동무역풍이 만나는 복잡한 바람과 해류의 흐름 때문에 범선이 북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인도와 아프리카 주변을 통과하는 해상 항로를 명확히 하기 위해 포르투갈인이 체계적인 항해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카나리아의 남부지역에서 돌아오는 그 경로를 'volta do largo' 또는 "라 이름 붙였다. 1427년 아소르스제도의 ‘재발견’은 현재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돌아오는 경로에 있는 섬의 전략적 중요성과 사르가소해에 대한 언급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섬은 1436년에는 다시 돌아오는 서쪽항로 쓰였는데, 항해 도중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남동풍과 북동풍을 이용하여 서풍이 선원들을 유럽의 서해안으로 이동시키는데 필요했다. 포르투갈인들의 항해법이 얼마나 체계적이었냐면, 이들은 1년 중 대서양의 계절변화에 따른 해류와 바람의 세기를 고려하여 다양한 경로를 이용할 정도였으며, 포르투갈의 항해법에 대한 정보 중 지도와 경로를 유출하면 사형을 할 정도로 정보관리가 엄중했고, 이런 민감한 정보들을 1775년 리스본 지진으로 파괴된 왕립기록보관소에 보관하였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1487년 8월에 전설적인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를 발견 할 것을 명령받아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을 계획하였다 희망봉을 발견하였고 바스쿠 다 가마는 희망봉이 발견된 후 포르투갈의 숙원이던 인도 항로를 개척하였다. 1493년 3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는데, 1494년 토르데시야스조약을 체결하여 카보베르데섬 서쪽 서경46도 지점을 기준으로 남북방향으로 일직선을 그어 동쪽은 모두 포르투갈이, 서쪽의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이 인도산 후추를 독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남미대륙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 조약으로 인한 것이다. 덴마크의 아라비아 탐험은 1761~1767년에 일어났다. 이 원정대는 프레드릭 5세의 후원으로 1761년 1월 4일 코펜하겐에서 6명이서 출발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나일강을 따라 올라갔다. 이들의 주요목적은 이집트, 아라비아와 시리아의 자연사를 연구하고 지리를 파악해서 지도를 제작하는 거였으며, 부수적으로 구약성서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 원정대에는 해양생물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그물이 있었으며, 스크레퍼를 이용하여 바닥에 있는 샘플까지 수집할 수 있었다. 긴 항해를 마치고 1767년 2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같은 해의 11월에 코펜하겐으로 돌아왔는데 여행도증 5명이 사망하고 1명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태평양의 해류에 대한 정보는 제임스 쿡과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을 포함한 18세기 후반의 탐험가들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은 1777년 희망봉 주위를 항해하며 Scilly 섬 근처의 간헐적 해류에 대해 이해하고(Rennell 's Current라고 함) 대서양과 인도양의 해류를 자세히 설명하는 해양학에 대한 최초의 과학 교과서를 썼다. 현대해양학. 과거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식은 바다의 얕은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바다의 깊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영국 왕립 해군의 모든 세계의 해안선을 도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해양에 대한 과학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순수하게 과학을 목적으로 둔 최초의 해양 탐사는 챌린저 탐사이다. 1871년 영국 정부가 영국 왕립 학회의 권고에 따라 세계의 바다를 탐험하고 해양의 과학적 조사를 실시하는 탐험을 발표를 하였다. 이후 스코트랜드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자연사를 담당하던 찰스 와이빌 톰슨과 캐나다출신인 그의 제자 존 머레이가 시작하였다. 챌린저 호는 톰슨의 감독하에 약 70000해리(130,000km)의 탐사를 여행했다. 1876년 탐사를 끝낸 챌린저호는 심해생물을 발견하였다. 약 4717종의 해양생물을 발견하여 해양생물학이란 학문을 탄생시키기도 하였으며 바다 수온, 퇴적물 채집, 심충수, 해류, 기상관측 등의 자료는 현대 해양학의 기초가 되었다. 챌린저 탐사의 영향으로 서방국가에서는 해양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77년에는 미국의 박물학자 아가시(Alexander Agassiz)가 블레이크 호를 동원하여 355여군데에서 심해를 조사하였으며 이후 최초의 해양 선박인 알바트로스를 이용해 여러 번의 해양 조사를 하여 수많은 해양생물학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기술의 발전에 따라 해양학도 발전하게 되는데 1914년에는 최초로 바닥에서 반사되는 음파로 수짐을 재는 음향 측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1925년에서 1927년까지 약 2년동안 음향측심기를 사용하여 약 70,000개의 해양 깊이를 측정, 수집하여 해저 수심도를 작성하였는데 이 탐사를 메테오 탐사(Meteor Expedition)라고 한다. 1957년에는 핵잠수함 노틸러스호가 북극을 탐사하였다. 20세기 후반에는 그동안 바다에서 진행되던 해양학 연구가 인공위성을 사용하여 하늘 위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1978년 미국은 최초의 해양탐사용 위성 Seasat을 발사하여 해양의 수온, 해안선과 같은 해양 자료를 수집하였다. 1990년에는 10년 연구계획으로 WOCE(World Ocean Circulation Experiment,세계 해양 순환 실험)가 형성되어 미국, 일본, 한국등 다양한 국가가 참여하여 연구를 하였다. 현대의 해양 연구는 지구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생물권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해양에 대한 더 많은 연구는 과학자들이 기후 예측을 더 쉽게 판단할 수 있게해주며 더 나아가 지구 자원의 효율적 활용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세부 분야. 생물해양학 해양생물학은 생물 해양학과 대조될 수 있다. 해양생물은 해양생물학과 생물해양학에서 모두 연구하는 분야이다. 생물 해양학은 생물체가 해양학계의 물리, 화학, 지질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물학적인 해양학은 대부분 바다 속의 미생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생물이 환경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그것이 더 큰 해양 생물과 생태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본다. 생물학적인 해양학은 해양생물학과 비슷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해양생물을 연구한다. 생물 해양학은 먹이 거미줄 측면에서 상향식 접근법을 취하는 반면 해양 생물학은 하향식 관점에서 바다를 연구한다. 생물 해양학은 플랑크톤에 대한 다양성(모형학, 영양 공급원, 운동성, 신진대사), 그들의 생산성과 그것이 전지구적 탄소 순환에서 어떻게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분포(예식 및 생명 주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생물학적인 해양학은 또한 먹이 사슬에서 미생물의 역할과 인간이 바다의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한다. 화학 해양학 화학 해양학자들은 바다에서 발견되는 다른 화학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이들은 pH 측정기, 전기 전도도 측정기, 용존 이산화탄소 측정기와 같은 계측기를 물에 대한 화학물질의 소산율을 측정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들은 또한 대기와 해안선, 그리고 해저에서도 입자 물질을 측정할 수 있다. 화학 해양학자들은 이러한 측정을 사용하여 지구에 대한 결론을 예측하고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주기, 패턴, 화학적 상호작용의 전문가들이다. 수백만년 전 바다가 어땠는지, 아니면 앞으로 몇 세기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는 이 지식으로 말이다. 현대 기술을 이용하여, 화학 해양학자들은 환경과 지구 전체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바다가 있는 상태 또한 나머지 환경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만약 바다가 변하고 있다면, 나머지 환경도 불균형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 바뀔 것이다. 화학 해양학자들은 주로 해양 산성화와 관련이 있다. 해양산성화는 공기 중에 탄소가 과잉일 때, 탄소가 바다로 용해되어 화학적 조성의 균형을 잃고 산도가 상승할 때 일어난다. - 해양 산성화 해양 산성화는 인위적인 이산화탄소(CO2) 배출에 의해 대기 중으로 발생하는 해양 pH의 감소를 설명한다. 바닷물은 약간 알칼리성이며 산업화 전 pH는 약 8.2였다. 보다 최근에, 인공적인 활동은 대기의 이산화탄소 함량을 꾸준히 증가시켰다; 추가된 이산화탄소의 약 30~40%가 해양에 흡수되어, 탄산을 형성하고 해양 산성화로 pH(현재 8.1 미만)를 낮춘다. pH는 2100년에는 7.7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해양동물의 골격에 중요한 요소는 칼슘이지만 탄산칼슘은 압력에 의해 용해되기 때문에 탄산칼슘의 껍질과 골격은 탄산염 보상 깊이 아래로 용해된다. 탄산칼슘은 pH가 낮아지면 수용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해양산성화는 굴, 바지락, 성게, 산호와 같은 석회 껍질이 있는 해양생물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고, 탄산염 보상 깊이는 해수면에 더 가까워진다. 영향을 받은 플랑크톤 유기체는 익룡류, 동석류, 그리고 아미페라를 포함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먹이 사슬에서 중요하다. 열대 지방에서는, 산호가 탄산칼슘 골격을 만들 수 없게 되면서, 다른 암초 거주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현재 해양화학 변화의 속도는 지구 지질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보여 해양생태계가 가까운 미래의 변화 여건에 얼마나 잘 적응할지는 불투명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높은 온도와 낮은 산소 농도의 예상되는 추가 스트레스 요인들과 산성화의 조합이 바다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지질해양학 해양 지질학 또는 지질 해양학은 해저의 역사와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해저와 해안 지대에 대한 지구물리학적, 지질학적, 퇴적물학적, 고생물학적 조사를 포함한다. 해양 지질학은 지구물리학과 물리 해양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양 지질 연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년 동안 해저 확산과 판구조론학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깊은 바다 바닥은 기본적으로 미개척의 마지막 개척지이며 군사(잠수함) 목표와 경제(석유 및 금속 채굴) 목표를 모두 지원하는 상세한 지도이다. 물리해양학 물리적 해양학은 해양 내의 물리적 조건과 물리적 과정, 특히 해양의 움직임과 물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리적 해양학은 해양학이 나뉘는 여러 하위 영역 중 하나이다. 다른 것들로는 생물, 화학, 지질 해양학 등이 있다. 물리적 해양학은 기술적이고 역동적인 물리적 해양학으로 세분될 수 있다. 서술적 물리적 해양학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유체 움직임을 설명하는 관찰과 복잡한 수치 모델을 통해 바다를 연구하려고 한다. 역동적 물리적 해양학은 주로 이론 연구와 수치 모델에 중점을 두고 유체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들은 기상학과 함께 공유되는 지구 물리 유체 역학(GFD)의 큰 영역의 일부이다. GFD는 코리올리스 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공간적 및 시간적 척도에서 발생하는 흐름을 설명하는 유체 역학 하위 영역이다. - 해류 해양학의 초기 해양 탐험 이래로, 주요 관심사는 해류와 온도 측정에 대한 연구였다. 조수, 코리올리스 효과, 바람의 방향과 강도 변화, 염분, 온도 등이 해류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열화칼린 순환(THC, 온도와 염분 함량을 가리키는 -haline)은 주로 바닷물의 밀도에 의존한다. 온도와 염도를 넘어 다른 주행요인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경계 뒤집기 순환'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 해양 열 함량 해양 열 함량(OHC)은 바다에 저장된 열을 가리킨다. 해양 열기의 변화는 열팽창 때문에 해수면 상승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양 온난화는 1971년부터 2010년까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에너지 축적량의 90%를 차지한다. 고생대양학 고생물 해양학은 순환, 화학, 생물학, 지질학, 퇴적 패턴과 생물학적 생산성에 관한 지질학적 과거의 해양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환경 모델과 다른 대용물을 이용한 해양학 연구는 과학계가 과거 기후를 다양한 간격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지구 기후에서 해양 과정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고생대양학 연구는 고생대 기후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568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68
안나 린드
안나 린드(, 1957년 6월 19일 ~ 2003년 9월 11일)는 스웨덴의 정치가이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환경부 장관, 1998년부터 2003년 암살당할 때까지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스톡홀름 태생이며, 1982년 웁살라 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총선 이후에 예란 페르손 내각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적 능력과 인기로 사회민주당에서 페르손의 뒤를 이을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녀는 쇠데르만란드주(Södermanland)의 주지사였던 보 홀름베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암살. 안나 린드는 2003년 9월 10일 오후 4시 정각 직후에 스톡홀름 시내 누디스카 콤파니엣(Nordiska Kompaniet) 백화점에서 쇼핑 중 칼을 든 한 괴한에게 공격을 받아 가슴과 배, 팔 등 급소 부위를 칼에 찔리고 말았다. 당시 관례에 따라 경호원은 곁에 없었으며, 공격직후 카롤린스카(Karolinska)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어 9시간에 걸친 1차 수술을 받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2차 수술에 들어가지만 다음날 아침 5시 29분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후 암살범은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가 미야일로 미야일로비치가 체포되어 범행을 자백,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안나 린드는 스웨덴에서 지난 10년 동안 암살된 두 번째 정치인이며, 19세기부터 따지면 3번째이다. 전 총리 올로프 팔메도 1986년 알 수 없는 범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린드는 생전에 스웨덴의 유로화 채택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녀의 암살은 유로화 사용에 대한 국민투표(9월 14일)가 있기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났다. 암살 사건 이후에 유로화 도입 찬반 진영은 찬반 유세 활동을 중지했지만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실시하여 스웨덴 국민은 유로화 채택을 반대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569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69
에드워드 텔러
에드워드 텔러(, , 1908년 1월 15일 ~ 2003년 9월 9일)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 물리학자이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 헝가리를 떠나 독일에서 고등교육을 받는다. 1930년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괴팅겐에서 2년을 보내고, 1934년에 유대인 구출 위원회(Jewish Rescue Committee)의 도움으로 독일을 탈출한다. 잠시 영국에 머물다가, 닐스 보어가 있던 코펜하겐에서 1년을 지낸다. 1935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41년까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여기서 그는 조지 가모프를 만난다. 1942년 브릭스 위원회(Briggs committee)에서 근무하면서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스 앨러모스 과학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문에 소속되어 핵분열을 이용하는 핵폭탄에서 핵융합을 이용하는 핵폭탄(수소폭탄)으로의 발전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1946년에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 시카고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49년 소련의 핵폭탄 개발 성공 이후 1950년 로스 앨러모스로 돌아와, 수소폭탄 계획에 참여한다. 그와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실제 작동하는 수소폭탄의 설계를 제출하였지만, 그 계획을 지휘하는 장이 되지 못한다. 그는 로스 알라모스를 떠나 1952년 새로 설립된 캘리포니아 대학 방사선 연구소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 지부에 참여하게 된다. 1954년 보안 청문회(security clearance hearings) 때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난하여 사이가 나빠진다. 1958년부터 1960년에 걸쳐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의 소장이 되고, 그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근무한다. 그는 지치지 않는 핵개발론의 옹호자였으며, 지속적인 핵개발을 주장했다. 레이건 정권에서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가 논의되었을 당시, 그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의 한 명이었다. 1975년 퇴직 후 죽을 때까지 리버모어 연구소의 명예소장이었으며, 또한 후버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003년 9월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71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71
브라이언 메이
브라이언 메이(, CBE, 1947년 7월 19일 ~ )는 영국의 음악가이자 천체물리학자이다. 록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로, 독특한 기타 음색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만든 수제 기타 레드 스페셜로 유명하다. 그가 작곡한 히트곡으로는 〈We Will Rock You〉, 〈Tie Your Mother Down〉, 〈Who Wants To Live Forever〉,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등이 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제4대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Liverpool John Moores University) 총장을 지냈다. 음악가 경력과 특징.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연주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그만의 기타 음색은 많은 사람들이 카피를 시도하지만 완벽히 같은 음색을 따라하는 것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는 다양한 종류의 기타를 연주했는데 주로 레드스페셜을 연주한다. 레드스페셜은 그가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와 함께 디자인한 기타로, 18세기에 화로로 썼던 나무로 만들었다. 레드스페셜에 대한 그의 설명을 《Queen In Their Own Words》(믹 마이클 저, 1992)의 62페이지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 큰 넥을 좋아합니다 - 두껍고, 평평한 거요. 핑거보드는 러스틴 플라스틱 코팅으로 칠했고요. 트레몰로는 자전거 안장에 다는 주머니로 만들었는데, 끝부분의 놉은 뜨개질용 바늘로, 스프링은 낡은 오토바이의 벨브 스프링으로 만들었답니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독창성은 메이가 오묘하고 독특한 사운드 효과를 낼 수 있게 도왔다. 예를 들어 〈Procession〉이란 노래에선 오케스트라를 흉내낼 수 있었고, 〈Get Down, Make Love〉에서는 신시사이저로 착각할만한 특이한 사운드 효과를 연출했다. 또한 〈Good Company〉에선 트롬본, 피콜로 등을 흉내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수제 기타와 함께 플라스틱 피크 대신에 영국의 6펜스 동전을 사용하는데, 동전이 딱딱하기 때문에 연주하면서 컨트롤하기에 더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메이는 어린 시절에 클리프 리처드와 더 섀도스의 팬이었는데, 이들은 메이가 거칠고 빠른 곡을 즐겨 연주하도록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퀸의 코러스에서 그는 보통 낮은 음의 배킹 보컬을 맡았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노래 중 〈Some Day One Day〉, 〈All Dead, All Dead〉, 〈Leaving Home Ain't Easy〉, 〈’39〉와 같은 노래에선 직접 보컬을 맡기도 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후, 2개의 솔로 앨범(《Back to the Light》, 《Another World》)을 내기도 했다. 천체물리학자로서의 경력. 메이는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진학하여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행성간 먼지의 속도에 따른 빛의 반사에 대해 연구하였다. 1970년대 초 퀸 활동이 성공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가, 2007년 10월 황도광에 대한 박사 논문(A Survey of Radial Velocities in the Zodiacal Dust Cloud)을 완성하여 2008년 5월 14일 졸업하였다. 2007년 11월 17일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임되어 2008년 취임하였고, 2013년까지 재임하였다. 사생활. 메이는 동료 프레디 머큐리, 로저 테일러, 존 디콘과는 달리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마약이나 문란한 여성 관계 등과도 거리가 멀었다. 술은 아주 가끔 마시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기네스, 가장 좋아하는 리큐르는 베일리스다. 그는 꽤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자살을 기도할 정도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고백했었다. 그 당시 그는 아내와 이혼했고,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프레디의 건강 악화로 라이브 투어까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가 애연가였기 때문에 메이는 담배를 싫어하며 특히 실내에서의 흡연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담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종종 글 중에 내비치곤 한다. 메이는 2000년 11월 18일 배우 애니타 돕슨과 재혼했으며, 그에겐 3명의 자녀가 있다. 서훈. 2005년 12월 6일, 브라이언 메이는 음악 산업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
572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72
팜(palm)은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PDA이다. 저렴한 가격, 휴대성과 실용성이 두드러진다. 2010년 4월 28일에 HP는 팜을 US $12,000,000,000에 인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단종 모델 "파일럿 5000"을 비롯한 초기 모델에서는 팜 파일럿()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더 이상 팜 파일럿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역사. 파일럿()은 1996년 팜 컴퓨팅(, 팜 컴퓨팅은 U.S. 로보틱스의 한 사업부였고 이후 U.S. 로보틱스는 3Com에 합병된다)사에서 생산된 첫 번째 세대의 PDA였다. 출시 당시 파일럿은 간결한 디자인과 수많은 응용 소프트웨어 덕분에 미국 내에서 폭발적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만 년필로 유명한 파일럿 펜사에서 제기한 상표권 침해 소송으로 인해 1997년 두 번째 세대인 팜 파일럿이 탄생하였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팜과 PDA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파일럿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제프 호킨스와 도나 더빈스키, 그리고 에드 콜리건이었다. 이들은 팜 컴퓨팅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의 원래 목적은 그래피티()라 불리는 필기 인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위한 것이었다. 팜 컴퓨팅이 3Com에 합병되자 설립자들은 팜 제품에 대해 깊게 관여하지 못하게 된 것에 분노했고, 1998년 6월 3Com을 떠나 핸드스프링()사를 설립하게 된다. 호킨스는 팜을 떠날 때 팜 OS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 팜 호환 기종인 핸드스프링 바이저()를 생산하였다. 3Com의 팜 컴퓨팅 사업부는 이후 2000년 팜()사로 분사하였고, 이후 핸드스프링과 합병하였다. 2003년에는 하드웨어를 생산 판매하는 팜원()과 소프트웨어를 라이센스하는 팜소스()로 분할되었다. 2005년에 팜원은 다시 팜으로 개명하였고, 팜소스는 일본의 액세스()사가 인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팜 기기들은 초기 모델에서 점점 진화하였다. 초기 모델은 당시에 인기 있었던 모토로라 드래곤볼 프로세서()를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ARM 아키텍처를 채택한 모델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또한 PC와의 연결도 직렬 RS-232C 케이블에서 USB 케이블로 바뀌어 동기화 속도도 향상되었고 심지어는 PC의 하드 드라이브로 인식되게끔 하는 라이프 드라이브() 모델까지도 생산되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스마트폰으로의 진화도 본격화되어 트레오 600/650() 모델이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650은 휴대폰과 통합되어 스마트폰 형태를 가진 모델로 휴대전화 기능은 물론, 전자우편, SMS 등의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1997년 말 한메소프트가 파일럿 5000을 최초로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세스컴, 코오롱정보통신, 팜잇에서 수입, 판매하였으나 대부분 사업을 철수하였다. 모델. 파일럿 1000/5000. 1996년 2분기에 발표되었고, 팜 OS가 탑재된 팜 파일럿의 최초 PDA 모델이다. 한메소프트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최초 수입된 모델이 파일럿 5000이었다. 팜 파일럿 퍼스널/프로페셔널. 1997년 1분기에 팜 파일럿 퍼스널과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을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인 파일럿 5000에 백라이트 기능을 추가하고, 메모리 용량을 늘렸다.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의 경우 최초로 TCP/IP 인터넷 통신 프로토콜과 전자우편 연동기능을 지원하였다. 팜 III. 1998년 1분기에 적외선 통신을 통한 비밍() 기능을 갖춘 팜 파일럿의 3세대 PDA인 팜 III가 발표되었다. 팜 III는 플래시롬()을 탑재한 최초의 모델이었다. 이에 따라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졌다. 팜 IIIx. 1999년 발표되었다. 직전의 팜 III 모델과의 차이점은 메모리뿐이다. 팜 V/Vx. 팜 V모델은 1999년 1분기에, Vx 모델은 같은 해 4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파일럿 모델 중에 가장 뛰어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경우 CEO들이 많이 사용하여 CEO 모델이라고도 불린다. 팜 VII. 팜 최초의 무선 연결이 가능한 모델이다. 오른쪽 후면에 안테나가 있어 이를 플립식으로 올리면 무선통신이 가능해진다. 무선통신 서비스는 일반 TCP/IP 기반의 서비스가 아닌 웹클리핑()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서비스였다. 미국에서만 이용이 가능했다. 월 $9,99의 표준서비스(50KB 제공)와 $24.99의 확장서비스(150KB 제공)가 있었다. 팜 IIIe. 1999년 3분기에 팜 III 시리즈 중 저가 모델로 발표되었다. 플래시롬이 없어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 이후에 발표된 팜 IIIe SE(Special Edition) 모델은 투명 외장으로 되어 있다. 팜 IIIxe. 팜 III 모델 시리즈와 메모리용량을 제외하고는 같은 사양을 가졌으며, 2000년 1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IIIc. 팜 파일럿 최초의 컬러 디스플레이를 갖춘 모델이다. 2000년 1분기에 출시되었다. 1999년 모토로라는 256컬러를 지원하고 33MHz에서 동작하는 VZ 드래곤볼 프로세서를 발표했지만, 팜 IIIc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팜 VIIx. 팜 VII에 이은 후속모델로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반적으로 사양이 확장되었다. 팜 m100.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IIIe를 대체하는 저가 모델로 지금까지의 팜 파일럿 모델과는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스틱 플립커버가 있어 액정 화면을 보호할 수 있었으나 작은 액정 화면은 단점으로 지적되었었다. 아울러 PC와 연결되는 USB 케이블은 제공되었으나 크래들()이라 불리는 거치대는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팜 m105. 2001년 1분기에 발표되었고, 이전 모델인 팜 m100에 비해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 또한 크래들도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었다. 팜 m500/m505. 팜 파일럿의 새로운 고급모델로 2001년 팜 m500과 팜 m505가 나란히 발표되었다. 두 모델의 차이는 디스플레이의 컬러 표시 여부이지만, 팜 파일럿 최초로 SD와 멀티미디어카드(MMC)가 지원되는 확장슬롯이 채택되었다. 전체적으로 팜 파일럿의 흥행 모델이었던 팜 V 시리즈의 뒤를 잇는 외형을 가졌으나 출시 당시 가격이 비싼 편이었고, 디스플레이 화면이 어둡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이 모델부터 팜의 새로운 PC 연결방식인 범용커넥터()가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해 2001년 코오롱정보통신이 팜 m500과 m505를 정식으로 수입판매했었다. 한글 입출력을 위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한팁() 3.1이 제공되었다. 한국 출시가는 m500이 56만원, m505가 66만원, 저가 모델로 m105가 25만원이었다. 팜 m125. 2001년 1분기에 에 발표되었다.이전 모델인 팜 m100/m105와 같은 외형을 가졌으나 확장슬롯과 함께 USB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팜 m130. 2002년 1분기 출시되었으며, m125와 같은 외형을 가졌지만, 컬러 스크린을 지원했다. 컬러를 지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던 모델이었다. 팜 i705. 2002년 1분기에 팜 VII의 후속 모델로 발표되었다. 무선데이터 통신은 북미지역에서만 서비스가 되었다. 팜 m515. 일종의 팜 m505 개선모델로 2002년 발표되었다. 가장 큰 개선점은 디스플레이가 더 밝아지고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팜 자이어(Zire). 팜의 새로운 저가 모델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외형을 가졌다.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이전 저가 모델인 m100이나 팜 IIIe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다. 확장슬롯의 부재와 백라이트가 없음에도 과거 "단순한 팜(Simply Palm)"을 잘 지킨 모델이었다. 텅스텐(Tungsten) T. 팜 최초로 슬라이드 방식과 팜 OS 5.0 버전을 채택한 모델이다. 텅스텐 T에서 T는 텅스텐()을 의미하며,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320 X 320의 높은 고해상도와 블루투스를 지원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양으로 출시되었다. 텅스텐(Tungsten) W. 텅스텐 T와 함께 출시되었다. 모델명에서 W가 무선()의 의미하듯이 이동전화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음성통화와 문자 서비스 기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음성 통화는 헤드셋을 이용해야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동전화 서비스는 AT&T Wireless를 통해 제공되었다. 팜 자이어(Zire) 71. 팜의 보급형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으나 블루투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텅스텐(Tungsten) C. 팜 최초로 무선랜(Wi-Fi)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팜 최초로 인텔 CPU가 사용된 모델이기도 하다. 큰 배터리 용량과 메모리 용량, 그리고 미려한 화면이 장점이나 2.5mm 모노 헤드셋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텅스텐(Tungsten) T2. 텅스텐 T를 잇는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체적으로 텅스텐 T와 사양이 유사하나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고, 화질이 개선되었다. 트레오(Treo) 600. 휴대전화 기능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핸드스프링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같은 해 10월 핸드스프링과 팜의 합병으로 팜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팜원에서 계속 판매되었다. 휴대전화 기능과 PDA가 합쳐진 PDA폰은 이전 모델에서도 종종 출시되었으나 이 모델만큼 시장에서 성공한 모델은 없었다. 팜 파일럿 계열의 PDA를 다시 중흥시킨 모델이다. 트레오 600 모델도 휴대전화 표준에 따라 세분되어 있는데, 싱귤라 와이어리스(), T-모바일() 등은 GSM/GPRS 모델을 지원하고, 스프린트()에서 CDMA 모델을 지원한다. 팜 자이어(Zire) 21.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되었으며 팜 OS 5를 채택한 새로운 저가 자이어 모델이다. 자이어 21, T3, TE는 모두 10월 1일에 출시되었다. 텅스텐(Tungsten) T3. 텅스텐 T2 이후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된, 가상 그래피티와 320X480 해상도의 LCD를 채택한 고급 모델이다. 화면 회전기능인 가로보기와 세로보기가 지원되었다. 텅스텐(Tungsten) E. 2003년 10월 1일 자이어 71, T3와 함께 발표되었다. 저렴한 가격임도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와 단순한 외형으로 인해 많은 인기를 모았다. 팜 자이어(Zire) 31. 2004년 4월 28일에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이었던 자이어와 자이어 21에 비해 SD/MMC 확장 슬롯을 지원하고 160X160 해상도이지만, 컬러 스크린을 장착하였다. 이전 모델과는 달리 인텔계열의 CPU를 사용하였다. 팜 자이어(Zire) 72. 2004년 2분기에 출시되었다. 자이어 71의 개선 모델로 여러 부분에서 사양이 늘어났으며, 블루투스 기능이 내장되었다. 텅스텐(Tungsten) T5. 텅스텐 T3의 후속 모델로 2004년 10월 4일 출시되었다. 외형은 텅스텐 E와 유사하지만, 기존 모델들과의 큰 차이는 160MB의 플래시램()을 가지고 있어 데스크톱 PC와 연결되었을 때 USB 드라이브로서 동작한다는 것이다. 트레오(Treo) 650. 트레오 600의 뒤를 이은 모델로 2004년 10월 25일에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보다 향상된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용량,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큰 인기를 끌었던 모델이었다. 휴대전화 서비스는 CDMA의 경우 스프린트()에서, GSM의 경우 싱귤라 와이어리스()와 AT&T Wireless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텅스텐(Tungsten) E2.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텅스텐 E의 후속모델로 블루투스와 비휘발성 메모리가 추가되었다. 팜 라이프드라이브(LifeDrive). 팜 모델 최초로 소형 하드디스크인 4GB 마이크로드라이브가 내장된 모델이다.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으며, 블루투스와 무선랜이 내장된 최상급 모델이다. 정식 명칭은 팜 라이프드라이브 모바일 매니저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연결하여 USB 드라이브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사양의 모델이나, 기존의 팜 모델에 비해 동작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팜 Z22. $100 미만의 가격이 책정된 PDA 초보자를 위한 저가 모델이다. 자이어와는 다른 제품 라인이다. 고급 모델인 팜 TX와 함께 2005년 4분기에 출시되었다. 팜 TX. 2005년 4분기에 출시된 고급 모델이다. 팜 트레오(Treo) 700w/700wx/700v. 700w는 팜 파일럿 최초로 팜 OS가 아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모바일 운영 체제인 윈도우 모바일 5.0을 탑재한 PDA 폰이다. 700w의 후속모델로 700wx가 출시되었으며, 이 모델은 700w와 비교해 사용자 가용 메모리가 두 배로 증가되었고 외관색이 짙은 회색점만 다르다. 700v는 보다폰용으로 유럽에서 출시된 모델명이다. 팜 트레오(Treo) 700p. 트레오 650의 뒤를 이은 모델이다. 전체적인 외형은 트레오 700w로 거의 같다. 팜 트레오 750/750v. 2007년 1월 발표된 팜 트레오 700w/wx의 후속 모델로 윈도우 모바일을 장착했다.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 팜 파일럿의 핵심을 이루는 팜 OS는 2바이트 문자코드체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한글을 입력하거나 출력하기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대한민국의 수입사들을 중심으로 팜 OS용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번들 형태로 판매되었고, KPUG에서 필명 오마르로 활동하는 개인 개발자에 의해 KOSPI라는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까지 개발되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573
5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73
픽셀
574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74
화소
화소(畵素) 또는 픽셀(; pictures의 축약형 pics와 element의 축약형 el, 즉 pictures element에서 유래한 혼성어)은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표준 디스플레이 해상도. 표준 디스플레이 해상도는 크게 다음과 같다. 메가픽셀. 메가픽셀 (줄여서 MP, Mpx)은 100만 화소를 가리키며 영상의 화소 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요소의 수나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디스플레이 요소의 수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2048x1536 센서 요소는 3.1 메가픽셀 (2048 x 1536 = 3,145,728)를 가진다는 말과 같다. 서브픽셀. 많은 디스플레이와 영상 획득 시스템들은 여러 이유로, 다른 색의 채널들을 하나의 소재에서 보여 주거나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화소 그리드는 표시되는 단일의 색 영역이나, 일정한 거리에서 보이는 느낄 수 있는 색으로 나뉘게 된다. 앤티에일리어싱. 컴퓨터 화면에서는 화소 단위보다 세세하게 표현할 수 없다. 벡터가 아닌 비트맵 방식의 사진이나 그림을 확대하면 거칠게 각져서 두드러진 화소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줄이기 위해, 화소의 모서리를 주변의 색과 비슷하게 바꾸어 색을 매끄럽게 바꾸는 것을 앤티에일리어싱(anti-aliasing)이라고 한다.
577
6249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77
천문학
천문학(天文學, ) 또는 천체학은 별이나 행성, 혜성, 은하와 같은 천체와, 지구 대기의 바깥쪽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현재 민간에서는 전래되어 오는 몇 개의 별자리 이름이나 그의 얽힌 전설, 또는 몇 개의 별의 이름이나 미리내라고 하는 은하수에 대한 고유명들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에도 중국의 천문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특유한 천문학적인 지식이 발달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의 시작 및 진화, 천체의 운동, 물리, 화학, 기상, 진화 등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선사 시대의 여러 문명들은 피라미드, 스톤헨지 같은 천문학적 유물들을 남겼으며, 바빌론, 그리스, 중국, 인도, 이란, 마야 문명 같은 동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밤하늘에 관한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망원경이 발명됨으로써 천문학은 현대 과학으로 발전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천문학은 측성학, 역법, 천체 항법, 그리고 심지어 점성술까지 수많은 분야들을 포함했었는데, 현대의 천문학은 물리학, 화학, 공학 등을 이용한다. 중력파를 측정한 LIGO나 허블 우주망원경, 지구스케일로 분포하여 아주 큰 하나처럼 작동하는 전파 망원경, 웹스터 망원경 등 우주를 관측하는 장비 제작은 공학적으로 도전적인 일이다. 또한 천체의 움직임에서 가장 비중이 큰 힘은 중력이므로 일반상대론을 많이 이용하며, 별의 핵융합, 중성자별, 블랙홀, 퀘이사 등의 연구에는 물리학과 화학의 여러 분야를 쓰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천문학 분야는 관측 분야와 이론 분야로 크게 나뉘었다. 관측 천문학은, 천체에 대한 자료를 얻고, 이를 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두며, 이론 천문학은 천체와 천문학적 현상들을 컴퓨터나 해석적인(analytical) 방법으로 설명하는 모형을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이 두 분야는 상호 보완적이며, 이론 천문학은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하고, 관측 천문학은 이론 결과를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한다. 천문학은 여러 자연과학 분야 중 아마추어들의 공헌이 아직도 큰 분야 중의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특히 혜성·소행성·초신성 같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현상()들을 발견하고 관측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천문학()은 점성술()과 혼동되어서 안된다. 비록 점성술은 천문학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현재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다. 점성술은 천체들의 하늘에서의 위치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체계로서, 자연과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어원과 용어. 천문학의 영어 낱말 "astronomy"은 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stron" ("ἄστρον")과 법칙, 문화를 뜻하는 "nomos" ("νόμος")에서 유래했는데, 문자 그대로 "별의 법칙"(또는 별의 문화)를 의미한다. 천문학은 점성술학(인간의 사건이 천체의 위치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두 분야가 공통된 근원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완전히 구별된다. 천문학과 천체물리학. 일반적으로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엄밀한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천문학은 "지구 대기 밖의 물체들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천체물리학은 "천문학의 한 분야로서 천체 및 천문현상의 물리적, 운동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학 개론서인 "물리적인 우주("The Physical Universe")"에서처럼 "천문학"은 우주·천체·천문현상을 정성적으로 기술하는 분야를, "천체물리학"은 이러한 대상을 보다 물리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는 분야를 의미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측성학 같이 전통적인 천문학에 가까운 분야도 있는 반면, 대부분의 현대 천문학 연구는 물리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므로, 천문학은 실제로는 천체 물리학으로 불릴 수 있다. 여러 대학이나 연구소는 주로 역사적인 이유나, 구성원들의 가지고 있는 학위 등에 따라서 종종 천문학과나 천체물리학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과가 역사적으로 물리학과와 같이 붙어 있었다면, 주로 천체물리학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 저명한 천문학 저널로는 유럽의 천문학과 천체물리학()과 미국의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 저널(), 천문학 저널()이 있다. 기원과 역사.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동·서양의 양쪽에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사와 날씨 예견 그리고 해양, 지리 관측과 측량이 그 주요 동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스톤헨지처럼 천문학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이 건설되기도 했다. 제사 같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이러한 천문대들은 1년의 길이를 재거나, 매해 일정한 시기에 농사를 짓고, 수확하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는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천문관측은 높은 건물 같은 곳에서 맨 눈으로 이루어졌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특히 메소포타미아, 중국, 이집트, 그리스, 인도, 마야 문명 등에서 천문대가 만들어졌고, 우주의 본질에 탐구가 시작되었다. 초기 천문학은 오늘날에는 측성학으로 알려진, 하늘에서 별과 행성들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관측으로부터, 행성의 운동, 태양, 달, 지구의 본질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를 지구중심설, 천동설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바빌론에서 수학·과학적 천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월식이 사로스라는 주기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이 후 다른 문명에서 발달할 천문학적 전통의 기반을 닦았다. 바빌론 이후의 천문학에서의 중요한 발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천문학은 천문 현상에 대해 이성적이고 물리적인 답을 구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는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지구의 크기를 계산하였고, 달과 태양까지의 상대적 거리를 측정하였다. 한편 그는 처음으로 지동설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세기에는 히파르쿠스가 세차를 발견하였고 달의 크기와 거리를 계산하였으며, 어스트로랩()이라고 불리는 천문기구를 발명하였다. 히파르쿠스는 또한 방대한 1020개 별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북반구의 대부분의 별자리는 이러한 그리스 천문학에서 유래했다. 반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하였고, 당시의 천문학을 집대성한〈알마게스트〉를 남겼다. 천동설은 기독교의 교리에 더 부합하였으므로, 중세에 들어서는 이 책은 천문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졌고,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천동설이 널리 믿어지게 된다.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천문학도 중세 유럽에서는 13세기까지 거의 정체되었지만, 이슬람과 다른 지역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약 9세기 초에는 이슬람 지역의 최초의 천문대가 등장했다. 964년에는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 수피()가 안드로메다 은하를 발견하고, ""라는 책에서 이에 대해 서술하였다. 역사상 기록된 가장 밝은 초신성인 SN 1006가 이집트 출신 아랍 천문학자인 과 중국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1006년에 관측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천문학에 많은 공헌을 한 유명한 천문학자로는 , , , , 알비루니, , 등과 ,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이 있다. 이 당시의 아랍 천문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많은 (예를 들어, 베가, 알골)을 도입하였다. 또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팀북투의 유적들도 과거에 천문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도 식민지 시대 이전에 천문학 관측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 혁명. 17세기를 전후하여 발명된 망원경으로 천문학은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발전된 역학, 전자기학 및 상대성 이론과 같은 현대 물리학의 업적은 천문학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우주 공간에서 우주를 관찰·탐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르네상스 기간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안했으며, 이는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좀 더 확장되고 발전되었다. 갈릴레이는 처음으로 천문학에 망원경을 도입하였다. 케플러는 마침내 행성들이 태양을 초점에 놓는 타원궤도를 공전하는 정확한 태양계 모형을 고안해 냈지만,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는 마침내 뉴턴이 천체역학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뉴턴은 또한 새로운 방식의 반사 망원경을 고안하기도 했다. 망원경의 크기과 성능이 향상되면서 많은 천문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천문학자 라카유에 의해 방대한 별의 목록이 만들어졌으며, 허셜은 방대한 성운·성단목록을 제작했고, 1781년에는 처음으로 새로운 행성인 천왕성을 발견하게 된다. 1838년에는 베셀이 백조자리 61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함으로써 처음으로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다. 18-19세기 중에는 오일러, 클레로, 달랑베르 등이 삼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써 달과 태양의 위치를 보다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이러한 노력을 더욱 발전시켜서, 달과 행성의 섭동으로부터 질량을 추정하기도 했다. 분광학과 사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천문학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프라운호퍼는 1814–15년에 태양의 스펙트럼에서 약 600여개의 어두운 띠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1859년에 키르히호프에 의해 각기 다른 원소들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다. 분광학을 다른 별들에 적용함으로써, 별들이 태양과 같은 천체이며, 다만 온도, 질량, 크기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정립되었다. 20세기에 들어 하늘에 보이는 은하수가 별들의 집합인 우리은하라는 사실이 확립되었고, 이어서 우리은하 밖의 외부 은하, 그리고 우주의 팽창이 발견되었다. 현대 천문학은 또한 펄사, 퀘이사, 블레이져, 전파은하 같이 특이한 천체들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관측들은 이를 중성자별·블랙홀로 설명하는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허블의 법칙, 우주의 원소 함량 등의 관측이 지지하는 대폭발 이론의 등장으로, 물리적 우주론은 20세기 들어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주 망원경의 발전으로 지구 대기에 흡수되어서 그동안 관측 할 수 없었던 전자기파의 영역을 통한 관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잘못 알고 있는데, 빅뱅 이론을 말하기 전에, 천동설과 지동설의 뜻을 알아두어야 한다. 1.천동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지구가 중심이고, 그 주위로 태양과 행성, 소행성 등이 돌고 있다고 주장. 2.지동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이 중심이고, 그 주위로 태양과 행성, 소행성 등이 돌고 있다고 주장. 관측천문학. 천문학에서의 모든 정보는 주로 천체로부터의 가시광 영역의 빛, 또는 일반적으로 다른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감지하고 분석함으로써 얻어진다. 관측천문학은 전자기파의 파장대별로 나눌 수 있다. 지상에서 관측이 가능한 파장대의 빛도 있지만 어떤 영역대는 높은 고도의 지역에서나 또는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전파천문학. 전파천문학은 약 1mm보다 긴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전파천문학은 관측천문학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관측된 전파를 개개의 광자로 다루기보다는 파동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짧은 파장 영역의 전자기파와 달리, 전파의 세기(amplitude)뿐만아나라 위상()을 측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어떤 전파는 열적 발산의 형태로 천체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관측 가능한 대부분의 전파는 싱크로트론 복사의 형태이다. (싱크로트론 복사는 전자가 자기장 주변에서 진동할 때 생성된다. 적외선천문학. 적외선천문학은 적외선 영역대(가시광의 붉은색 빛보다 파장이 긴 대역)의 빛을 감지하고 분석하는 분야이다. 근적외선(1-3μm)을 제외하고는, 적외선 영역의 빛은 대기에 의해 대부분 흡수되고, 지구대기 또한 많은 양의 적외선을 내뿜는다. 그 결과, 적외선 관측은 높은 고도의 건조한 곳에 위치한 천문대, 또는 우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적외선을 이용하면 행성이나 원시 행성 원반같이 온도가 매우 낮아서 가시광선을 거의 내지 않는 천체들을 관측할 수 있다. 파장이 긴 적외선은 가시광선을 쉽게 가로막는 성간먼지를 투과할 수 있으므로 우리은하의 중심부와 분자구름 깊은 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젊은 별들을 연구하는데 유용하다. 어떤 분자들은 적외선에서 특히 강한 방출선을 내는데, 이를 이용하여 성간물질의 화학을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적외선 분광학으로 혜성에 존재하는 물분자를 검출하기도 한다. 광학천문학. 광학천문학(가시광선 천문학)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천문학 분야이다. 오랫동안 광학 영상은 손으로 그려져 기록되었으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는 사진이나 건판을 주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디지털 검출기, 특히 CCD 카메라(빛을 전하로 변화시켜 이미지를 얻어내는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 가시광영역은 400 나노미터에서 700 나노미터로, 근자외선(400나노미터에 가까운 자외선 영역)과 근적외선(1μm에 가까운 적외선영역)의 관측에도 같은 기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자외선천문학. 자외선천문학은 10 나노미터에서 320 나노미터 영역대의 자외선 파장을 관측하는 천문학이다. 이 파장대의 빛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천문대는 지구대기층이 얇은 높은 고도, 또는 우주에 세워져야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뜨겁고 파란 별들로부터 나오는 열복사와 방출선들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분야이다. 우리은하 밖의 다른 은하에 위치한 푸른 별들은 몇몇 자외선관측의 주요 관측대상이 되어 왔다. 자외선영역의 또다른 관측대상으로는 행성상 성운, 초신성 잔해,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그러나, 자외선은 성간 먼지에 의해 쉽게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 관측은 소광()을 정확히 보정해 주어야 한다. X-선 천문학. X-선 천문학은 엑스선 파장대의 빛을 내는 천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전형적으로 X-선은 매우 뜨거운 천체들로부터 싱크로트론 복사, 제동복사(), 그리고 흑체복사()의 형태로 방출된다. X-선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높은 고도로 띄우는 풍선, 로켓, 비행선을 이용하거나 우주망원경 형태로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X-선 천체로는 엑스선 이중성, 펄사, 초신성 잔해, 타원은하, 은하단,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감마선천문학. 감마선 천문학은 가장 짧은 전자기 파장대의 천체를 연구하는 천문학 분야이다. 감마선은 콤프턴 감마선 천문대(Compton Gamma Ray Observatory)와 같이 인공위성에 의해, 또는 대기 체렌코프 망원경(atmospheric Cherenkov telescopes)이라 불리는 특화된 망원경을 사용하여 관측된다. 체렌코프 망원경은 감마선을 직접적으로 검출하진 않지만, 감마선이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었을 때 생성되는 가시광 영역의 반짝임(체렌코프 복사)을 감지한다. 대부분의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는 감마선 폭발이다. 감마선 폭발은 짧은 시간 동안 강한 감마선을 방출하고 금방 어두워지는 천체이다. 그 외에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로는 펄사, 중성자별, 활동은하핵이 있다. 전자기파 이외의 천문학. 전자기파(빛)이외에도 중성미자, 중력파 등을 이용하여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또한 탐사선을 이용하여 달이나 혜성 같은 지구 밖의 천체에서 직접 시료를 채취하기도 한다. 뉴트리노는 주로 태양 내부나 초신성 폭발에서 만들어지며,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이 차례로 붕괴하거나 대기의 입자와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는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으므로, 지하시설에 위치한 커다란 용기에 많은 양의 물과 얼음을 채워 놓고 이들이 뉴트리노와 아주 가끔 반응할 때 나오는 미세한 빛을 검출하는 방식으로 관측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 검출기로는 , , Kamioka II/III같은 특별한 지하 시설이 있다. 중력파 천문학은 새롭게 발생한 천문학의 분야로서, 블랙홀, 중성자별 등으로 구성된 쌍성들이 내는 것 같은 중력파를 검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까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 같은 관측소가 만들어졌고, 2016년 중력파 검출에 성공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행성과학자들은 직접적인 관측을 위해, 우주탐사선을 행성에 보내거나 시료를 채취해서 돌아오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탐사선이 행성을 지나쳐 가면서 사진을 찍거나, 행성표면에 직접 착륙해서 실험을 수행하기도 하고, 표면에 탐사선을 충돌시키고 이 때 발생하는 물질들을 원거리에서 관측하기도 한다. 측성학과 천체역학. 측성학()는 천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서 가장 오래된 분야 중의 하나로써,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학문분야이다. 역사적으로 해, 달, 행성, 별들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항해나 달력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측성학은 행성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중력의 섭동에 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이는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천체역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근지구천체를 추적함으로써 이러한 혜성이나 소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비껴가는 위험한 경우를 예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까운 별들의 연주시차를 측정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것은 우주의 크기를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차근차근 정립해나가는 소위 우주 거리 사다리를 구성하는본가 되는 일이다. 또한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재는 일은 별의 절대 광도 같은 물리량을 정확히 잴 수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별들의 시선속도를 재는 것과 함께 고유운동을 재면 별들의 3차원적인 운동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은하 내의 천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연구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는 별의 궤도가 예상과는 달리 약간 흔들거리는 현상()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이러한 별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외계행성을 찾는 방법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론천문학. 이론 천문학자들은 천체나 천문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적인 모형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 모형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각각 장점이 있다. 해석적인 모형은 —다시말해 어떤 문제를 수식으로 서술하는 방법— 어떤 현상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며, 수치적인 모형은 매우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기본 물리 법칙으로부터 계산해 냄으로써 어떤 현상이 존재할 수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론 천문학자들은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연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관측자들은 여러 이론들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려줄 관측 자료들을 모으거나 실험을 계획하게 된다. 새로운 관측 자료가 얻어지면, 이론 천문학자들은 이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 꾸준히 모형을 바꾸고 발전 시킨다. 만약 자신의 이론이 새롭게 얻어진 관측 자료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관측 결과를 맞출 수 있게 모형을 약간 수정할 수 있지만, 만약 이론이 아주 많은 관측 자료와 모순된다면, 그 모형은 폐기되기도 한다. 이론 천문학의 주제로는 천체 역학, 별의 진화, 은하의 형성과 진화, 우주의 거대 구조(), 우주선의 기원, 일반 상대론, 물리우주론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 천문학은 다양한 물리법칙·이론들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상대론은 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주 거대 구조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며, 중력파와 블랙홀등을 연구하는 데 바탕이 된다. 현대 이론 천문학은 급팽창 이론, 암흑 물질, 그리고 기본적인 물리법칙들을 바탕으로 하여 ΛCDM 모형을 정립하였고, 이는 현재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현대 천문학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주제이다. 다음은 이론 천문학에서 어떤 물리 법칙을 바탕으로, 어떤 실험·관측 결과에 기반하여, 이론적인 모형을 만들고, 이로써 어떠한 현상을 설명 또는 예측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연구대상에 따른 천문학의 세부분야. 태양천문학. 태양은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8분 거리에 있으며 가장 연구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항성이고 전형적인 G형 분광형을 지닌, 46억 살의 주계열성이다. 태양은 변광성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흑점 주기로 알려진, 주기적인 밝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11년 주기에 걸쳐 흑점의 숫자가 변화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흑점은 강력한 자기장 활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태양 표면의 다른 곳에 비해 온도가 낮은 지역이다. 태양은 나이를 먹으면서 밝기가 천천히 증가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주계열성으로 생애를 시작했을 때에 비해 지금 40퍼센트 정도 더 밝다. 태양은 탄생 이후 지구의 생태계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밝기가 변해 왔다. 예를 들어 마운더 극소기로 인해 중세에 작은 빙하 시대 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의 바깥 표면을 광구라고 부른다. 광구 위에는 채층으로 불리는 얇은 지대가 존재한다. 채층 위에는 코로나가 형성되어 있으며, 온도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태양의 중심부에는 핵이 있으며 핵융합 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충분히 뜨겁고 압력 또한 크다. 중심핵 위에는 복사층이 있는데 여기서 플라즈마는 에너지 플럭스를 복사 형태로 전달한다. 복사층 위에는 대류층이 존재하는데 이 곳에서는 에너지가 물리적인 가스 교환 형태를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태양의 대류층이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며, 이 자기장으로 인해 태양 표면에 흑점이 생겨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플라즈마 입자로 이루어진 태양풍은 태양으로부터 꾸준히 우주 공간으로 흘러 나와서 태양권계면까지 이어진다. 태양풍은 지구의 자기권과 반응하여 밴 앨런대를 형성하고, 지구의 자기력선이 대기로 내려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로라를 형성한다. 행성천문학. 행성천문학은 행성, 위성, 왜행성, 혜성, 소행성, 기타 태양을 공전하는 다른 천체들, 그리고 외계 행성 집단들을 연구 대상으로 다룬다. 태양계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으며, 과거에는 관측 도구로 주로 망원경을 이용했으며 최근에는 우주 탐사선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련의 탐사로 인해 태양계의 형성과 진화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하여 발견되고 있다. 태양계는 내행성, 소행성대, 외행성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내행성계로 일컫는 지구형 행성들로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있다. 바깥쪽을 공전하고 있는 외행성계는 가스 행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왕성 너머로는 카이퍼대가 존재하며, 가장 바깥쪽에는 최대 1광년에 이르는 거리까지 오르트 구름이 펼쳐져 있다. 행성들은 원시 태양을 두르고 있던 원시행성계원반에서 생겨났다. 중력에 의한 끌어당김, 충돌, 강착 과정을 통하여 원반에 있던 물질들은 큰 덩어리들로 자라났으며 이후 원시행성들로 진화했다. 태양풍에 의한 복사압으로 인해 덩어리로 뭉치지 못한 물질들은 쓸려 나갔고, 자기가 지닌 가스 대기를 잃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천체들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행성들은 계속 커지거나 또는 극심한 충돌로 인해 자기가 갖고 있던 물질을 방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극심한 충돌의 증거는 달이나 수성 등에 있는 많은 충돌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원시행성들 중 일부는 충돌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행성들은 충분한 질량을 획득한 뒤, 무거운 물질은 행성 중심부로 가라앉고 가벼운 물질은 위에 남는, 행성 구별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행성들의 중심에는 철이나 석질의 중심핵이 생성되고 그 위는 보다 가벼운 물질들로 이루어진 맨틀이 형성되었다. 핵 부위는 고체 또는 액체 성분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 행성의 중심핵은 고유의 자기장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자기장은 행성의 대기를 태양풍으로부터 보호하여, 벗겨져 나가지 않게 한다. 행성이나 위성들의 내부열은 이들을 만들었던 물체(방사성 물질로 예를 들면 우라늄, 토륨, 26Al 등이다)들끼리 충돌하여 발생한 열 및, 조석가속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일부 천체들의 경우 화산이나 지각 운동 등 지질학적 활동이 생겨날 정도의 열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들 중 대기를 갖게 되는 천체는 바람이나 물로 인하여 지각의 침식 과정을 겪는다. 질량이 작은 천체들은 빠르게 식었고, 충돌구 생성을 제외한 일체의 지질학적 활동을 멈추었다. 항성천문학. 항성 및 그들의 진화 과정을 아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체물리학은 관측 및 이론, 항성 내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항성 연구에 기여해 왔다. 항성 생성은 거대 분자 구름으로 알려진, 먼지와 가스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시작된다. 분자 구름이 불안정 해지면, 분자 구름이 중력때문에 붕괴하면서 여러 조각들로 깨지게 되고, 각각의 조각들은 원시별을 형성한다. 중심핵 부분이 충분히 밀도가 높고, 뜨거워지면 핵융합 작용이 시작되며, 여기서 주계열성이 탄생하게 된다. 수소와 헬륨, 리튬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들을 천문학에서는 중원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항성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계열성을 벗어난 항성의 진화 과정은 주로 별의 질량에 의해 결정된다. 별이 질량이 크면 클수록 더욱 밝아지며 중심핵에서 수소 연료를 더 빨리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별이 갖고 있던 수소가 헬륨으로 모두 바뀌면, 항성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헬륨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중심핵의 온도가 더 뜨거워져야 하기 때문에 항성의 중심핵 밀도는 증가하며, 부피 또한 커지게 된다. 부피가 증가한 항성은 헬륨을 다 태울 때까지 잠시 동안 적색 거성 단계에 머무른다. 질량이 매우 큰 별들의 경우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태우는 일련의 진화 단계를 따로 걷게 된다. 항성의 최후 양상 역시 마지막에 남은 별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 태양 정도 질량을 갖는 별은 행성상 성운의 형태로 질량을 방출하고 중심부에 백색왜성을 남긴다. 주계열 시절 질량이 태양의 8배 이상이었던 별들의 경우 중심핵이 붕괴하면서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친다. 초신성 폭발 후 중심에 남은 물질은 중성자별이 되거나, 혹은 폭발 후 남은 질량이 태양의 3배가 넘는 경우 블랙홀로 진화한다.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쌍성의 경우 주성에서 나온 물질이 반성인 백색 왜성으로 흘러들어가서 신성 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더욱 복잡한 진화 경로를 겪게 된다. 행성상 성운 및 초신성은 중원소를 성간 공간에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생명체가 탄생할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새롭게 탄생하는 별들 및 행성들은 수소와 헬륨으로만 이루어질 것이고, 지구형 행성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은하 천문학. 우리의 태양계는 국부 은하군에 속해 있는 막대나선은하인 우리 은하()에 속해 있으며, 우리 은하의 중심을 공전하고 있다. 가스,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서로의 중력을 통해 묶여 우리은하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공통 질량중심을 축으로 회전하고 있다. 태양계는 성간 먼지를 포함하는 바깥쪽 나선팔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지가 시야를 가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은하의 모습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 은하 중심부에는 막대 모양의 팽대부가 있으며, 은하 중심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은하중심부는 바깥쪽으로 소용돌이처럼 퍼져나가는 네 개의 나선팔로 둘러싸여 있다. 나선팔은 금속함량이 많고 젊은 항성종족 I 별들이 탄생하는 곳이다. 은하 원반을 구형의 은하 헤일로가 둘러싸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로 늙은 항성종족 II 별들과 별들이 조밀하게 뭉친 구상성단들이 분포하고 있다. 별들 사이에는 가스와 먼지 등으로 이루어진 희박한 성간 물질이 분포하고 있다. 성간 물질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수소 분자 및 다른 원소들로 구성된 분자 구름이 만들어지고, 이 곳에서 별들이 태어난다. 별의 생성은 처음에는 분자구름이 밀집된 암흑 성운의 형태로 시작되며, 이들은 압축되고 붕괴되어 원시별을 형성하게 된다. 질량이 큰 별들이 태어나는 곳의 주변은 빛을 방출하는 가스와 플라스마로 이루어진 H II 영역으로 진화한다. 무거운 별들은 강한 항성풍을 방출하고 초신성 폭발로 일생을 마치는데, 이로 인해 주변의 성간물질이 흩어지게 된다. 때로는 여러 별들로 이루어진 산개 성단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산개 성단의 별들은 점차 흩어지게 되면서 우리 은하의 항성 종족에 편입된다. 우리 은하 및 외부 은하에 대한 운동학적 연구를 통해 보이는 물질보다 더 많은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빛을 내지 않지만 질량은 가지는 암흑물질의 본질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나, 암흑물질 헤일로가 우주에 있는 물질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은하 천문학. 외부은하 천문학은 우리은하 밖의 천체와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주로 은하의 형성과 진화, 외부은하의 형태와 분류, 활동성은하, 은하단과 은하군,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지는 우주의 거대 구조를 연구한다. 대부분의 은하들은 모양에 따라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로 분류된다. 이름대로 타원은하는 하늘에 투영된 모습이 타원을 띄는 은하이다. 타원은하의 별들은 무작위적인 궤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성간물질이 적으며, 새로 생성되는 별이 적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원은하들은 주로 은하단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여러 은하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나선은하는 납작한 회전하는 원반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중심부의 팽대부(또는 막대)와 나선 모양의 팔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선팔들은 성간먼지를 많이 포함하고, 주로 별들이 형성되는 곳으로 푸른 빛을 띠고 있다. 나선은하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헤일로에 둘러 싸여 있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대표적인 나선은하이다. 불규칙은하는 나선은하와 타원은하로 분류할 수 없는 일정한 모양을 갖지 않는 은하이다. 이러한 불규칙한 모양은 다른 은하와의 상호작용 때문에 만들어진다. 활동성 은하는 방출하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별, 먼지, 성간물질 같은 것이 아닌 은하 중심의 다른 에너지 원(블랙홀)으로부터 나오는 은하이다. 이러한 활동은하핵()은 응축원반()을 가진 매우 무거운 블랙홀()이라고 여겨진다. 활동은하에는 시퍼트 은하(), 퀘이사(), 블레이저(), 전파은하()등이 있다. 전파은하는 일반적인 은하와 달리 전파에서 매우 강한 빛을 내며, 퀘이사는 우주에서 가장 밝은 천체 중 하나이다. 우주의 거대구조는 이러한 개개의 은하들이 모여서 이루는 구조를 의미한다. 우주의 거대 구조는 계층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은하들이 모여 은하군을 이루고, 이 은하군들이 모여 은하단을 형성하며, 다시 초은하단을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거대한 군집들은 다시 필라멘트()와 그 사이의 공동()을 이루며 분포한다. 우주론. 물리 우주론()은 우주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는 분야이다. 우주론의 연구 대상으로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대폭발 핵합성, 우주의 거대구조,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등이 있다. 우주론의 밑바탕이 되는 이론은 우주가 약 137억년 전에 시공간의 한 점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팽창하여 왔다는 대폭발 이론이다. 1965년에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이 발견됨으써 대폭발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우주는 여러 중요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대폭발 직후 아주 초기에는 우주가 급팽창이라고 불리는 기하급수적인 빠른 팽창을 겪었다고 생각되며, 이 급팽창 때문에 우주가 현재 관측되는 것처럼 균질()하고 등방적()이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급팽창 이후에는 중수소, 헬륨과 같은 기본적인 원소들이 만들어졌는데,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바리온)이 만들어진 이 과정을 대폭발 핵합성 또는 원시 핵합성이라고 부른다. 우주가 팽창하고 식어감에 따라 중성 원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덕분에 빛이 이온화된 전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우주가 투명해지게 된다. 이 때 발생한 빛이 현재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으로 관측이 된다. 그러나 아직 빛을 낼 수 있는 별들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후의 시기를 우주의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우주에 존재하던 작은 밀도 요동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질들이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뭉치면서, 거대한 가스 덩어리를 만들고, 여기서 처음으로 별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별들은 내부의 핵융합을 통해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게 되고, 이 때 발생하는 빛들은 주위의 가스를 이온화시켜서, 소위 재전리라는 과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별들이 중력에 의해 모이면서 처음으로 은하들을 만들게 되고, 이 은하들이 다시 중력에 의해 분포하면서 은하군이나 은하단 같은 더 큰 구조들을 만들고, 이는 우주의 거대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소위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는 이러한 우주론의 근본적인 구성성분이 되어왔으며, 두 성분을 합쳐서 우주 전체의 96%를 차지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현대 우주론과 천문학의 주요 미해결 문제 중의 하나이다. 학제간 연구.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다른 과학분야와 관련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를 활발하게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고천문학()은 고고학과 융합된 학문으로서 고대 또는 전통적인 천문학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생물학()은 지구 이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주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의 생성, 변화, 소멸등을 연구하는 분야는 천문화학()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물질들은 주로 분자운, 온도가 낮은 별들, 갈색왜성, 그리고 행성들에서 주로 발견된다. 우주화학()은 태양계내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들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원소와 동위원소의 상대적인 비율을 다룬다. 이 두 분야들은 천문학과 화학이 융합된 분야이다. 아마추어 천문학. 천문학은 비전문가들(아마추어들)이 가장 많이 기여를 하는 과학분야 중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다양한 천체와 천문 현상들을 관측한다. 일반적인 관측대상으로는 달, 행성, 별, 혜성, 유성우, 심원천체(성단, 은하, 성운)등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관측에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장비가 사용되기도 한다. 일부 아마추어 천문인들은 밤하늘이나 특정 천체들의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이러한 예술적인 사진을 천문사진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취미활동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천문학 연구에 꾸준히 공헌해왔다. 실제로 천문학은 아직까지도 비전문가들이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해내기도 하고, 변광성을 꾸준히 관측한다. 디지털 관측기기의 발전으로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천문 사진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다. 천문학의 미해결 문제. 비록 천문학은 우주와 그 구성원들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 왔지만, 아직도 중요한 미해결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상·우주 망원경, 그리고 획기적인 이론·실험 물리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578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78
애니메이션
위의 애니메이션은 총 6개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애니메이션은 초당 10 프레임으로 움직인다. 애니메이션()은 여러 장의 화면을 연속촬영 하고, 조작하여 화면이 움직여 보이게 만든 영화의 한 일종이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Anima"에서 비롯하였다. 간단히 동화(動畵)라고도 부른다. '만화'나 '동화'는 그림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각 장면은 그림이 아닐 수 있다. 3차원 모델링을 통해 컴퓨터 화면상으로 재현된 영상의 경우도 애니메이션에 포함된다.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애니라고 짧게 표기하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아니메()로 줄여 부르거나 도가(, 동화)라고 말한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을 일본(Japan)과 애니메이션(animation)의 합성어인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기원 및 발전. 초기 애니메이션은 배경에 그림을 그려 움직이게 하는 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흙이나 모형 등의 피사체를 조금씩 변형하여 각 장면을 촬영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생겼고,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프로그램으로 등장인물의 각 동작과 배경을 구현하는 3D 애니메이션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는 2D의 셀 애니메이션만을 쓰거나, 3D와 셀을 조합하여 사용한다. 종류. 유통 형태. 애니메이션은 유통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제작 기법. 이 외에도 페이퍼 애니메이션, 모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제작 기법이 있다. 창작 경로. 현재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소스들을 바탕으로 창작되고 있다. 성격상 가장 유사한 만화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고, 자체적으로 창작하여 제작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 게임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캐릭터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은 결국 애니메이션 기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독자들이나 필자가 디자이너라면 캐릭터를 미술이나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았다. 프로그래머에게 캐릭터란 결국 메시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런 메시들의 집합을 어떤 애니메이션 방식과 결합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표현 방식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애니메이션 시청자에게 일어나는 심리현상. 심리현상 중 하나인 투사는 지니고 있을 법한 자신의 측면을 타인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타인이 지닌 자신의 측면을 혐오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태도나 특성이 보기 언짢다면 그 캐릭터는 자기 내면의 모습일수도 있고 가정된 상황에서 드러날 수 있는 본인의 측면 중 하나일 수 있다. 전이는 특정 상황에 각별한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장면의 유사 요소가 많은 상황이 찾아오면 해당 애니메이션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정서가 그 실제 상황에 반영돼 느껴진다.
579
75613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79
태풍 매미
태풍 매미(태풍 번호: 0314, JTWC 지정 번호: 15W, 국제명: MAEMI, 필리핀 기상청(PAGASA) 지정 이름: Pogi)는 2003년 9월 12일 한반도에 상륙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태풍이다. “Super Typhoon Maemi” 혹은 “2003년 태풍 제14호”라고도 불리며,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 중 상륙 당시 기준으로 가장 강력한 급이고, 2003년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태풍으로 발달하였다. '매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곤충 매미에서 온 이름이다. 한편 이 태풍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태풍 이름 목록에서 "매미"라는 이름이 영구 제명되어, 후에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무지개"로 재명명되었다. 태풍의 진행. 2003년 9월 4일 괌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은 느리게 발달하면서 북서쪽으로 나아가 약 이틀이 지난 9월 6일 15시 무렵 제14호 태풍 매미가 되었다. 이렇게 열대저기압에서 태풍으로 인정되기까지 발달 속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당초 기상청 등은 이와 같은 느린 발달 경향이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태풍은 9월 9일의 무렵 일본 사키시마 제도 남동쪽 먼 바다에 접근하면서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9월 10일에는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에 달하는 최강 급의 태풍으로 성장했다. JTWC의 해석에서는 1분 평균 최대 풍속 75 m/s (150 kt)의 “카테고리 5급”이며 일본의 기준으로는 “맹렬한 태풍”이고 대한민국의 기준으로는 "초강력 태풍"이다. 최성기를 맞이한 태풍은 진로를 서서히 북쪽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9월 11일 새벽에는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섬을 통과해 동중국해로 들어갔다. 태풍의 중심이 지나간 미야코섬의 기상관청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12.0 hPa, 최대순간풍속 74.1 m/s 가 관측, 일본에서는 수십 년 만의 기록이 되었다. 동중국해에 들어가서는 북북동 방면으로 전향하여 한반도를 향해 북상, 그러면서 차츰 쇠퇴기에 접어들어 11일 오후에 중심 기압 920 hPa / 최대 풍속 50 m/s의 강도 “매우 강”으로 조금 약해진 뒤, 9월 12일 15시에는 중심 기압 935 hPa / 최대 풍속 45 m/s의 세력으로 제주도 남동쪽 해상에 이르렀다. 같은 날 20시 20분경에는 약간 더 쇠약해진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 m/s의 “중형의 강한 태풍”으로서 경상남도 고성군 일대에 상륙, 이후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동부를 관통하여 상륙 후 약 6시간 만인 9월 13일 2시 30분경에 울진 앞 바다로 빠져나와 동해상으로 진출했다. 이어서 일본 홋카이도 부근 해상까지 나아가, 9월 14일 6시경에는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남부 지방과 일본 미야코섬의 큰 피해, 그리고 경로, 위력 등에 있어서 1959년의 제14호 태풍 사라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태풍이다. 특징 및 영향. 2003년 최강의 태풍. 태풍 매미의 최대 세력은 대한민국과 일본 기상청의 해석으로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105 kt)이며, 풍속 값을 1분 평균으로 산출하는 JTWC의 해석으로는 중심 기압 885hPa / 최대 풍속 75 m/s (150 kt) 가 된다. 그 위력은 2003년에 발생한 모든 태풍 중에서 으뜸인 것은 물론, 그 해의 모든 허리케인과 사이클론을 통틀어도 가장 강하다. 게다가 북위 30도 이북에까지 진행하였음에도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 (95 kt)의 강도 “매우 강”에 해당하는 세력을 유지, 북상하면서도 좀처럼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중심 기압 950 hPa / 최대 풍속 40 m/s (80 kt)의 세력으로 상륙 했다. 상륙 시의 중심 기압 950 hPa 은 이전에 강한 세력으로 상륙했던 2000년 제14호 태풍 사오마이 (상륙 시 중심 기압 959 hPa), 2002년 제15호 태풍 루사 (상륙 시 중심 기압 960 hPa)의 기록을 크게 경신하는 것이다. 태풍이 이렇게 강력한 세력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원인을 꼽자면, 당시 한반도 주변 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았던 것과 비교적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평년보다 2~3도 높았던 해수면 온도는 태풍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다소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는 태풍이 미처 쇠약해지기 전에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태풍의 상륙 지점에 가까웠던 여수, 통영, 마산 등의 지역에서는 기록적으로 낮은 기압이 되어, 그중 통영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54.0 hPa를 관측했다. 이것은 태풍에 의해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부문 역대 2위가 되는 기록이다. 특히 일본 기상청의 기록에 의하면 중심 기압 930 hPa 이하의 세력을 북위 30도 이상까지 유지한 태풍은 극히 드물어, 이러한 태풍은 1951년부터 2008년까지 발생한 1450여개의 태풍 중 매미를 포함하여 11개밖에 없다. 강풍. 매우 강한 바람을 동반했던 것이 이 태풍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상륙 시의 폭풍역 (풍속 25 m/s 이상의 폭풍 범위) 이 남동쪽으로 반경 150 km, 북서쪽으로는 반경 55 km 정도로 북서 방향의 폭풍역이 다소 작았기 때문에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최대순간풍속 10~20 m/s 내외의 수준에 그쳤지만, 태풍의 폭풍역에 해당했던 제주도와 전라남도, 경상도, 그리고 대마도 등지에서는 기록적인 강풍이 되었다. 그 결과, 해당 지역에 속한 대부분의 관측 지점에서 종전의 풍속 기록이 바뀌었다. 관측된 최대순간풍속은 제주 60.0 m/s, 고산 60.0 m/s, 여수 49.2 m/s, 부산 42.7 m/s 등으로, 제주도와 여수 등의 지역은 태풍의 가항반원에 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상위 기록의 대부분은 태풍의 중심권에 가까웠던 남부 지방에 집중되었다. 고산에서는 최대 풍속 51.1 m/s 가 함께 관측되어,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최대 풍속 부문 역대 1위 기록이었던, 2000년 제12호 태풍 프라피룬이 흑산도를 내습하면서 세운 최대순간풍속 58.3 m/s, 최대 풍속 47.4 m/s를 3년 만에 다시 경신했다.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역대 1위를 바꾼 60.0 m/s의 풍속이 제주와 고산 두 지점에서 동시에 관측된 것은 대단히 진기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편, 최대순간풍속은 비공식으로는 공식 기록보다 훨씬 높은 값을 관측한 경우가 있어, 일본 미야코섬 자위대 주둔지에서는 공식 기록 (최대순간풍속 74.1 m/s, 미야코섬 기상관청 관측) 을 훨씬 뛰어넘는 86.6 m/s를 기록했는가 하면, 부산에서도 공식 기록인 42.7 m/s를 넘는 비공식 기록이 잇달아, 구덕산 레이다에서 53.4 m/s, 광안대교에서 56.2 m/s, 신선대 부두에서 52.0 m/s 등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기록적인 강풍이 일었던 원인은 물론 강력했던 태풍의 세력이 일차적이지만, 부가적인 요인으로서 두 가지를 더 꼽을 수 있다. 먼저 한반도 상륙 시 45 km/h 정도의 상당히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이 이동속도가 태풍의 풍속 (상륙 시 최대 풍속 40 m/s) 에 더해져 위험반원에서의 바람의 힘을 그만큼 더 강하게 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태풍의 특성상 진행방향의 오른쪽, 다시 말해 위험반원에서는 태풍의 회전과 진행방향이 중첩되어, 태풍의 이동속도가 그대로 풍속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풍 상륙 일인 9월 12일 오후의 한반도 주변 기압배치는 남쪽으로부터 북상하는 매우 낮은 중심 기압의 태풍과 북쪽의 고기압이 마주치는 형국이 되어 있어, 이 부근의 기압경도를 급격하게 만듦에 따라 강풍을 유발시키는 또 하나의 조건을 형성했다. 즉, 이 두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태풍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했던 바람의 힘을 이중 삼중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호우.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람의 이미지가 크게 각인되어 있으나, 강수에 있어서도 꽤 큰 영향을 끼친 태풍이다. 전체적인 강수량은 큰 비를 수반한 대표적인 태풍으로 꼽히는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나 태풍 아그네스 등이 몰고왔던 호우와 같이 극단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남해 410.0 mm, 강릉 307.5 mm, 고흥 291.0 mm 가 기록되는 등, 남해안과 영동 지방을 중심으로 최대 450 mm 에 달하는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 무엇보다 태풍이 다소 빠른 속도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나감에 따라 비구름대가 한반도에 머무른 시간이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강수량이 기록된 것으로서, 비교적 단시간에 강수가 집중되는 형태를 보였다. 위에 언급된 강수량의 대부분은 태풍이 한반도 가까이에 존재했던 12일 오후 늦게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기록된 것이다. 또한 지역별로 강수량의 편차가 꽤 크게 나타났는데, 주로 태풍의 중심권이 통과한 제주도, 전남 동부, 경남 서부, 대구 근방 지역에서 총강수량 200 mm 이상의 기록적인 호우가 관측된 반면, 그 외의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가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남해의 강수량은 약 400 mm 에 이르렀지만 동쪽으로 불과 100 km 정도 떨어진 부산의 강수량은 60 mm 안팎에 지나지 않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태풍 진행방향의 서쪽 (가항반원)으로 꽤 떨어진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는 그보다도 적은 강수를 기록했다. 특히, 대관령과 강릉을 포함한 영동 지방에서는 태풍이 몰고온 온난 다습한 기류와 북동쪽에서 유입된 비교적 한랭한 기류가 태백산맥에서 부딪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강한 비구름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 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형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영동 지방에 300 mm 가 넘는 비가 쏟아진 원인이다. 기록. 일본에서의 기록. 태풍 매미 강타시 일본 미야코섬에서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912.0 hPa 과 최대순간풍속 74.1 m/s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 일본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씩 기록될 만한 값으로, 최저해면기압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4위 기록, 최대순간풍속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7위 기록이다. 피해. 대한민국. 대응. 태풍 매미는 발생에서 소멸까지 태풍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포물선 형태에 가까운 경로를 밟았기 때문에, 진로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한반도 상륙의 가능성도 꽤 일찍부터 예상되었다. 기상청은 9월 10일 오후 5시에 보도자료를 통해 태풍의 한반도 남해안 상륙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여 이 소식은 주요 언론기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9월 11일 오전 4시에는 태풍이 최대순간풍속 74.1 m/s의 맹렬한 강풍과 함께 일본의 오키나와현 미야코섬을 직격하여 태풍에 대한 방재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이곳에서조차 심대한 피해가 발생, 태풍의 위력이 실상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태풍이 곧 당도할 대한민국 역시 큰 피해가 우려되기 시작했다. 이에 기상청은 9월 11일 오후 2시 30분에 2차 보도자료를 발표해 주의를 촉구했으며, 오후 6시에는 본청을 포함한 전국의 기상관서에서 태풍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주요 방송사 및 신문에서는 태풍의 북상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59년의 태풍 사라에 비견되는 태풍 매미가 북상 중”등으로 연달아 보도함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태풍의 영향이 본격화된 9월 12일에는 초특급 태풍의 한반도 내습 소식을 주요 방송사에서 따로 특보를 편성,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부 당국의 대처는 매우 미흡해 마산 지하 상가 참사 등의 결과로 이어졌으며, 또한 전봇대나 송전 철탑 등의 전기 공급 시설을 확실히 정비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으로, 강풍에 의해 정전이 속출하여 이 일대는 뉴스 특보마저 시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세력의 태풍은 당시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으로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에 따른 희생자가 매우 많았고, 재산 피해액은 전년의 태풍 루사에 이어 사상 최대 급에 이르렀다. 피해 상황.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워낙 커, 수도권 일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었다. 해일 피해. 태풍의 상륙 시각이 남해안의 만조 시각과 겹쳐 가공할 만한 해일이 발생, 마산에서는 지하 노래방에 갇힌 사람들이 그대로 익사하는 등 1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마산의 고조(高潮) 높이는 약 180 cm 로 예측되었으나 태풍에 의한 해일은 최대 439 cm 에 달해 예측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해일을 예상하지 못했던 마산 당국은 제대로 된 대피령을 내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부두의 원목 수천여 개가 바닷물과 함께 밀려와 지하 건물의 출구를 막으면서 피해를 더욱 키웠다. 부산에서는 해일에 가까운 높은 파도가 해안가를 휩쓸었는데 이에 대한 신속한 대피가 이루어져 인명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해운대에 위치한 부산 아쿠아리움이 침수되고 해안가에 자리 잡은 많은 건물들이 폐허로 변해 재산 피해가 매우 컸다. 이밖에, 태풍을 피해 남해안에 정박해 있던 선박들의 피해가 상당하여 수천 척의 선박이 해일에 의해 파손되거나 침몰했으며 도심에서는 해일에 밀려온 크고 작은 선박들이 널려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해 지역이 워낙 넓었고, 유입된 물의 양이 많아 복구가 늦어졌기 때문에 함께 밀려왔던 쓰레기 및 폐수의 처리가 늦어져 위생 상태가 나빴던 지역이 많았다. 바람 피해. 태풍에 동반된 최대순간풍속 50 m/s 가 넘는 강풍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신주와 철탑이 쓰러져 전국적으로 145만여 가구가 정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거제도 지역에서는 송전 철탑이 강풍에 파괴되어 약 4일 동안이나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고층 건물에서는 유리창이 바람에 의해 파손되는일이 잇달았고 도심에서는 날린 간판과 뽑힌 가로수, 깨진 유리창 등이 뒤엉켜 굴러다녀, 일부 거리는 마치 폭격을 당한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날려지던 물체의 일부는 주차된 차량을 덮쳐 곳곳에서 파손된 차량이 수천 대에 달했으며 부산항에서는 800톤이 넘는 컨테이너 크레인 11대가 강풍에 의해 무너지거나 궤도를 이탈 하는 한편, 해운대에서는 7000톤이 넘는 해상관광호텔이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전복되어 피해액은 헤아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여기에, 옥상에서 물건을 줍던 사람이 바람에 떠밀려 추락하여 숨지거나 폭풍속에서 배를 살피러 나온 노인이 파도에 휩쓸리는 등, 바람에 대한 경계심 부족이 인명 피해를 가져오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바람 피해는, 태풍의 위험반원에 해당했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다. 호우 피해. 태풍이 통과하던 9월 12일에서 13일 사이에 쏟아진 폭우로 강원도 영동 지방과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400 mm 에 가까운 강수를 관측, 더욱이 이 강수량의 대부분이 태풍이 한반도 내륙에 위치했던 6시간 동안에 집중되어, 짧은 시간 동안의 강렬한 호우로 산간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해 주택가를 덮쳐 많은 인명 피해가 나왔다. 호우에 따른 산사태의 위험성이 제대로 경고되지 않은 것과 대피 명령이 없었던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난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의 교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단시간에 쏟아진 많은 양의 비는 곳곳의 하천을 범람시켜, 농경지가 침수되고 주택가에는 물이 들어차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는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때의 복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태풍 매미에 의한 폭우가 쏟아져 심대한 피해가 되었다. 일본. 태풍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사망 3명, 부상자 110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 했고, 그 피해는 주로 미야코섬에 집중되었다. 미야코섬. 태풍 매미는 거의 최성기의 세력을 유지한 채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섬의 상공을 통과하여, 미야코섬에 1968년의 제16호 태풍 이래 35년 만의 대 재해를 낳았다. 강력한 폭풍으로 약 1300여 동의 주택이 파손되거나 침수된 것과 함께 160여 억엔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1명이 사망하고 90여 명이 부상했다. 미야코섬은 태풍에 대한 수준 높은 방재시스템이 있어 웬만한 태풍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는 곳인 만큼 태풍 매미에 의한 이 같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퇴출. 이 태풍이 대한민국에 입힌 피해가 너무나도 극심했기 때문에, 2005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38차 태풍위원회 총회에서는 이 태풍의 이름이었던 “매미(MAEMI)”를 퇴출시키고 “무지개(MUJIGAE)”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015년에 사용한 무지개라는 이름도 필리핀과 중국에 끼친 심대한 피해로 퇴출되었고 대신 "수리개(SURIGAE)"가 쓰이게 되었다. 그 외. 속보 해석으로 태풍 매미는 북위 30도를 넘은 시점에서 중심 기압 945 hPa까지 약화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기상청의 사후 해석에 의해, 북위 30.5도에서의 세력이 “중심 기압 945 hPa / 최대 풍속 40 m/s”에서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로 상향 수정 되었다. 또한, 사후 해석을 참고하면 태풍의 상륙 지점은 당초 대한민국 기상청이 발표했던 경상남도 사천시 부근보다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가까운 것이 된다.
581
12388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81
베른하르트 리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 1826년 9월 17일~1866년 7월 20일)은 독일의 수학자이다. 해석학, 미분기하학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리만 기하학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술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리만 적분, 코시-리만 방정식, 리만 제타 함수, 리만 다양체 등의 수학 용어에 남아 있다. 그는 리만 가설을 최초로 고안한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생애. 초년. 현재 독일의 다넨베르크(Dannenberg) 근처인 하노버 왕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Friedrich Bernhard Riemann)은 루터 교회의 가난한 목사였고, 리만은 6명의 자녀들 중 둘째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자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보기 드문 수학적 재능을 나타냈지만, 대중 앞에서 말하기에는 너무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었다. 성장기. 1840년 할머니와 살면서 중학교(lyceum, middle school)를 다니기 위해서 하노버(Hanover)에 갔다. 1842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요하네움 뤼넨부르그(Johanneum Lüneburg)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자주 수학으로 돌아가곤 했다. 심지어 창세기의 정확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생각까지 했다. 담당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천재성을 간파했고, 그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당연히 그 제자는 교사의 수학(授學) 능력 범위를 벗어나곤 했다. 1846년 리만이 19세였을 때, 목사가 되어서 가계(家計)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47년 아버지로부터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수학을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자코비(Jacobi), 디리클레(Dirichlet), 슈타이너(Steiner) 등이 가르치는 독일 베를린으로 가서, 2년동안 머물렀다가 1849년 독일 괴팅겐(Göttingen)으로 돌아왔다. 성년. 짧은 일생을 통해서 발표한 논문의 수는 비교적 적지만, 수학의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소함수론(複素函數論)에서 복소 로그나 제곱근 같은 1대1이 아닌 함수의 역을 고려하는 경우에 어울리는 리만 면을 정의하였고, 복소기하학의 초창기에 해당한다고 평가된다. 리만 사상 정리를 통해 복소 평면 상에서 하는 해석학에서 근본적인 정의역의 종류에 대한 위상 수학적인 고찰을 하였고 이를 앙리 푸앵카레가 균일화 정리로 일반화하였다. 1854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에서 그는 리만 적분을 정의하고, 삼각 급수의 수렴(收斂)에 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 적분의 정의인 함수가 적분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후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H.르베그에 의해서 르베그 적분이라는 더욱 포괄적인 정의가 도입되었다. 1854년 취임 강연에서 그는, 기하학의 기초를 논하면서 리만 공간의 개념을 도입해서 리만 공간의 곡률(曲率)을 정의하였다. 이는 리만 기하학으로 부른다. 생애 마지막에 가까워서는 W. E. 베버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 물리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에 관해서 강의하였고, 그가 죽은 뒤 베버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사망. 리만은 40세 생일의 두 달 전인 1866년 7월 20일 사망했다.
585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85
피크
피크()는 기타를 치는 데 쓰는 삼각형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다. 의 일종이다. 피크를 사용해 기타를 연주할 경우 손가락으로 연주할 때보다 강하고 명료한 소리를 낼 수 있다. 피크의 종류에는 물방울, 변형삼각형, 엄지손가락 착용형 등이 있다.
586
93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86
전자기타
588
3306484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88
기타
()는 현(Strings)을 튕겨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로, 스페인 지방에서 유래하였다. 머리(Head), 목(Neck), 몸체(Body)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 부분에는 20여 개의 프렛(Fret)이 박혀 있다. 기타는 주로 6개의 현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경우에는 머리가 없는 기타()나, 프렛이 없는 기타()도 있다.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록, 팝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사용된다. 또한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기타리스트()라고 부른다. 기타는 기타 몸체의 울림구멍(Sound Hole)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고, 프렛을 통해 음정을 제어한다. 현의 양 쪽에는 몸체의 브릿지(Bridge) 위에 위치한 하현주(Saddle)와 목 부분의 상현주(Nut)가 있다. 그리고 현의 장력을 조절하여 음정을 맞추는 페그(Peg)가 머리에 고정되어 있다. 6개의 현은 연주를 위해 기타를 안았을 때 위쪽이 가장 굵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또한 현이 가늘어질수록 음역이 점점 높아진다. 목 부분에는 손가락을 짚는 지판(Finger Board)이 있는데, 지판 위의 프렛에 현을 닿게 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기타의 종류로는, 몸체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통기타(Acoustic Guitar)와 마그네틱 픽업(Pickup)과 앰프(Amplifier)를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전기 기타(Electric Guitar),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역사. 기턴. 근대 기타는 기턴(gittern)에서 유래되었다. 기턴은 류트와 비슷한 작은 악기로 13세기 후반에 무어인의 지배 하에 있던 스페인을 거쳐 유럽에 도입되었다. 4줄의 거트 현이 있는 기턴은 음유시인뿐 아니라 귀족 사이에서도 인기 있었다. 이 악기는 15세기 동안 길게 만들어졌고 현은 3줄의 복현이 각각 D, G, B로 조현되었으며 단현은 E로 조현되었다. 각 복현의 제2현은 한 옥타브 높다. 비우엘라. 스페인에서 기턴은 비우엘라(vihuela)로 변형되었다. 비우엘라는 평평한 악기로써 옆면은 구부러져 있고, 복현 5줄과 단현 1줄로 되어 있다. 이 악기는 스페인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영국의 헨리 8세는 스페인 비우엘라를 4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아라곤왕 페르디난드의 딸 케서린과의 결혼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우엘라는 궁정용 악기인데 반해, 복현 4줄의 기타는 대중적인 음악에 사용된 악기로 16세기 후반에 유럽 도처에 알려졌다. 16세기 중엽에는 특별히 기타를 위한 곡이 작곡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아마트는 1586년에 최초의 교본 《기타라에스파뇨라》를 출판하였다. 100년도 안 되어 기타는 스페인에서 인기 있는 악기가 되었고 비우엘라는 서서히 사라졌다. 르네상스 기타. 15세기 초반에는 4줄의 복현 르네상스 기타가 출연했다. 이 기타는 깃대 플렉트럼으로 연주했으며, 현은 목둘레에 묶인 거트 프렛과 움직이는 줄받침을 거쳐 전면의 줄 고정 장치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타보다 작으며, 작은 크기의 기턴과 비우엘라의 큰 몸통을 결합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4줄에 다섯 번째 복현이 더해졌다. 복현이 단현으로 되면서 연주 기술이 단순화되었고, 18세기에는 옆면이 안으로 굽고 뒤판은 평평한 나무 공명기가 있는, 6현의 근대 기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근대 기타는 오늘날의 기타보다 폭이 좁고 길었다. 유명한 제작자로는 스페인 카디스의 호세 파게스, 파리의 르네 프랑수아즈 라코테, 런던의 루이스 퍼너모 등을 들 수 있다. 근대 기타. 19세기 기타는 몸통의 폭이 넓어졌고 안쪽의 버팀대가 부채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금속 프랫을 목에 끼워 고정시켰고, 줄받침은 높게 제작되었다. 이같은 혁신은 스페인 기타 제작자 안토니오 토레스 후라도에 의한 것이었다. 현을 65cm 길이로 표준화시킨 사람 또한 토레스였다. 20세기에는 나무못으로 만든 줄감개를 금속 나사로 바꾸고, 지판을 울림 구멍까지 아래로 늘리는 등 더 많은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기타를 가장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대중음악 밴드이다. 1930년대에 픽업을 사용하여 현의 음을 증폭시키는 전자 기타가 개발되었고 1940년대에는 단단한 몸체의 기타가 레스 폴에 의해 발명되었다. 록 음악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카포 타스토(이동 줄베개)가 개발되어 조옮김이 쉽게 되었다. 카포 타스토를 프렛판 위에 끼우면 모든 현을 동시에 누를 수 있다. 현대 전기 기타는 굵은 금속 현으로 되어 있으며 플렉트럼으로 연주한다. 현. 현은 6개가 주류이지만 그 밖에 7현, 10현, 12현 기타 등도 존재한다. 또, 베이스 기타는 4개의 현을 갖춘 것이 보통이지만, 5, 6현을 갖춘 것도 널리 사용된다. 현은 금속, 나일론 등이 쓰인다. 나일론 현. 클래식 기타에서 고음의 1~3현에 부드러운 나일론 현을 이용한다. 저음의 4~6현에는 가는 나일론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이용한다. 과거에는 양의 창자를 말려 만든 거트 현을 이용하였으나 안드레스 세고비아 이후로 현대에는 내구성이 높은 나일론 등의 화학 합성 섬유로 만든 현이 주로 쓰인다. 강철 현. 통기타나 전기 기타 대부분은 강철 현의 금속(니켈, 스테인리스 등)의 현을 사용한다. 이 가운데 저음의 현은 가는 금속의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사용한다. 보통 통기타가 3~6현, 전기 기타는 4~6현을 감는다. 현의 종류나 두께에 따라 기타의 음색이 달라지며, 이에 따라 저마다 기타의 느낌이 다르다. 현의 튜닝. 현의 튜닝도 여러 가지가 쓰인다. 보통 저음의 현(6현)부터 E-A-D-G-B-E라는 표준 튜닝이 일반적이다. 이는 수많은 코드나 음계 등을 연주할 때 알맞은 튜닝으로 정착하고 있다. 연주법. 보통 오른손잡이는 반대쪽 왼손으로 넥 부분을 잡고 현을 누르며 오른손으로 현을 탄현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갖출 필요는 없다. 왼손잡이인 사람은 가격, 상품 수 등이 크게 불리하기 때문에 왼손잡이용 기타를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오른손잡이에 맞춰진 기타에 기존의 반대 자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는 있지만, 전기 컨트롤러의 위치가 다를 수 있다. 현을 누르는 손은 넥 부분의 아래쪽을 빠져나가듯이 하여 엄지를 목 뒤쪽에 잡고, 집게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4개의 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클래식 스타일, 곧 기본 자세이다. 또 엄지를 넥 위쪽 핑거보드에 가깝게 목 부분을 잡는 스타일도 주로 록 음악에서 이용된다. 시각이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목의 아래쪽부터 손가락을 위치해 현을 누르지 않고, 위쪽부터 손가락을 감싸듯이 하여 현을 눌러 연주하는 연주인도 있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왼발을 발판에 실어 다리의 위치를 높여서 몸체 측면의 움푹한 곳을 왼발의 넓적다리에 실어 기타를 몸 전체로 감싸 안는 자세로 연주한다. 그 밖의 통기타나 전기 기타의 경우는 발판은 쓰지 않고 기타 측면의 움푹한 곳을 오른쪽 다리의 넓적다리에 실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 무대에서 클래식 기타는 반드시 의자에 앉아 연주하며, 그 밖에는 주로 기타 끈을 매고 어깨에 내려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재즈 기타리스트는 앉아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 때 빅 밴드 시대의 무대 형태의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록 음악인은 앉아서 연주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592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2
전자우편
전자 우편 혹은 이메일()은 컴퓨터 통신망(주로 인터넷)을 통해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해당 편지를 일컫는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전자 메일(electronic mai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무료 이메일인 한메일이나 구글의 지메일처럼 해당 서비스에 가입함으로써 인터넷이 연결되면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웹 메일, 자신의 컴퓨터에 선택적으로 내려 받을 수 있는 POP3, 간단하게 메일을 보내는 SMTP 방식 등이 주로 쓰인다. PC통신 시절에는 유료로 아이디를 만들어서 전자 우편을 사용하곤 했다. 기원. 전자 우편은 인터넷의 발단으로 거슬로 올라가며, 사실 인터넷이 만들어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다.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원격 전화 접속 터미널에서 IBM 7094에 기록할 수 있게 하였고 디스크에서 온라인으로 파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능은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정보를 주고 받는 데 힘을 북돋어 주었다. 전자 우편은 1965년에 시분할 본체 컴퓨터의 여러 명의 사용자들을 위한 방법으로 시작했다. 이렇다 할 만한 역사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시설을 갖춘 첫 시스템들 사이에 SDC의 Q32와 MIT의 CTSS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자 우편은 빠르게 퍼져나가 네트워크 전자 우편이 되었으며, 사용자들이 적어도 1966년까지 다른 컴퓨터들 사이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허용하였다. (SAGE 시스템이 이전에 이와 비슷한 것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파넷(ARPANET) 컴퓨터 네트워크는 전자 우편의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 1969년에 실험적인 교환 시스템 전자 우편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전송된다는 보고가 있다. 1971년에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은 컴퓨터와 사용자의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 @ 사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파넷은 전자 우편의 대중성을 점진적으로 늘려 나갔으며 아파넷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현대적 형태의 전자 우편은 1979년, 당시 14살의 인도계 미국인인 시바 아야두라이()에 의해 구상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이니다. 이메일은 이미 1970년대 중반에 활발히 사용되고 있었으며, 아파넷의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전자우편 주소 구성. 전자우편 주소는 '아이디@메일서버이름'의 형식이다. 전자우편 주소의 아이디로 한글 등 영문 외 문자를 지원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영문, 숫자, 일부 기호만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메일서버이름(domain)은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고 아이디(local-part)는 대소문자를 구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메일 서비스들은 아이디도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무료 전자우편 서비스. 무료 전자우편 서비스로는 전 세계적으로 야후! 메일,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 구글 지메일 등이 많이 쓰이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에서 무료 전자우편 서비스를 운영한다.
593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3
벡터
벡터(, )는 다음의 뜻이 있다.
594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4
행렬
수학에서 행렬(行列, )은 수 또는 다항식 등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실수 1, 9, −13, 20, 5, −16을 2×3 직사각형 위에 배열한 행렬은 다음과 같다. 행렬에는 덧셈과 스칼라배, 곱셈 연산이 존재한다. 크기가 같은 두 행렬은 같은 위치의 성분별로 더할 수 있으며, 첫째 행렬의 열과 둘째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은 두 행렬은 첫째 행렬의 각 행벡터와 둘째 행렬의 각 열벡터의 스칼라곱을 통해 곱할 수 있다. 곱셈의 교환 법칙이나 소거 법칙 등 복소수의 일부 성질들은 행렬 연산에서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가환환 위의 유한 차원 자유 가군(특히, 체 위의 유한 차원 벡터 공간)의 선형 변환을 행렬로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행렬의 중요한 응용이다. 예를 들어,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회전은 회전 행렬 formula_2을 각 열벡터 formula_3에 곱하여 새 열벡터 formula_4를 얻는 함수이다. 행렬의 덧셈과 스칼라배는 선형 변환의 점별 덧셈과 점별 스칼라배, 행렬의 곱셈은 선형 변환의 합성에 대응한다. 행렬은 가우스 소거법 등 연립 일차 방정식의 풀이에도 응용된다. 정사각 행렬과 그 선형 변환의 일부 성질들은 그 행렬식 또는 고윳값과 고유 벡터에서 반영된다. 예를 들어, 가환환의 원소를 성분으로 하는 행렬이 역행렬을 가질 필요 충분 조건은 행렬식이 가역원인 것이며, 특히 체의 경우 필요 충분 조건은 행렬식이 0이 아닌 것이다. 행렬은 과학과 수학의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응용이 있다. 물리학의 전기 회로 이론, 고전역학, 광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 전기역학 등 분야에서 응용되며, 컴퓨터 그래픽스에서 3차원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 투영하거나 사실적인 움직임을 그려내기 위해 사용한다. 확률론과 통계학의 마르코프 행렬과 다변수 미적분학의 헤세 행렬 등 역시 행렬의 응용이다. 행렬 계산은 수치해석학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행렬 분해는 행렬 계산을 이론과 실제 응용에서 모두 단순화할 수 있다. 희소행렬, 띠행렬 등 널리 사용되는 특수한 구조의 행렬들의 경우 특화된 고속 알고리즘들이 존재한다. 천체물리학과 양자물리학 등 분야에서는 무한 행렬도 등장한다. 정의.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 행렬은 각 행 formula_7 및 열 formula_8의 순서쌍 formula_9에 환의 원소 formula_10를 대응시키는 함수 formula_11이다. 행렬 formula_12는 모든 성분을 직사각형으로 배열한 다음 소괄호 또는 대괄호를 추가하여 또는 와 같이 표기한다. 각 formula_15를 formula_12의 formula_17번째 행 formula_18번째 열의 성분(成分, ) 또는 원소(元素, ) 또는 계수(係數, )라고 한다. 행렬 formula_12의 각 성분은 행과 열의 번째수를 첨수로 사용하여 formula_15, formula_21, formula_22, formula_23, formula_24, formula_25 등과 같이 나타낸다. 행과 열의 번째수가 같은 성분 formula_26 (formula_27)을 formula_12의 대각 성분(對角成分, ) 또는 대각 원소(對角元素, ) 또는 대각 요소(對角要素) 또는 주대각선 성분이라고 한다.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 행렬의 집합은 formula_31 또는 formula_32로 표기한다. 크기. 행렬 formula_12의 크기()는 행과 열의 수의 순서쌍 formula_34 또는 formula_6을 뜻한다. 일부 특수한 크기의 행렬들은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행렬 formula_12의 formula_17번째 행벡터와 formula_18번째 열벡터는 각각 와 이며, 이를 통해 행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연산. 행렬들에 대하여 덧셈, 스칼라배, 곱셈, 전치 행렬 등의 연산을 정의할 수 있으며, 정사각 행렬은 역행렬, 대각합, 행렬식 등 연산이 추가로 정의된다. 덧셈은 같은 크기의 두 행렬에 대해서만 정의되며, 곱셈은 오직 첫 번째 행렬의 열의 수와 두 번째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은 경우에만 정의된다. 역행렬은 가역 정사각 행렬에 대하여 정의되며, 행렬식은 가환환 위의 정사각 행렬에 대하여 정의된다. 덧셈과 스칼라배. 환 formula_2 위의 두 formula_6의 행렬 formula_56의 합 formula_57은 두 행렬을 성분별로 합한 formula_6 행렬이다. 즉, 각 행과 열 formula_17, formula_18에 대하여, 이다. 실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의 행렬 formula_65 및 환의 원소 formula_66에 대하여, 왼쪽·오른쪽 스칼라배 formula_67는 각각 행렬의 각 성분의 왼쪽·오른쪽에 스칼라를 곱한 formula_6 행렬이다. 만약 formula_2가 가환환일 경우, 이 두 연산은 일치하며, 이를 스칼라배라고 부른다. 실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 행렬의 집합 formula_31은 위 덧셈과 왼쪽·오른쪽 스칼라배에 따라 formula_76-쌍가군을 이룬다. 만약 formula_2가 가환환일 경우, 이는 (덧셈과 스칼라배에 따른) formula_2-가군이 되며, 특히 만약 formula_2가 체일 경우 formula_2-벡터 공간이다. 이 쌍가군의 덧셈 항등원은 영행렬(즉, 모든 성분이 0인 행렬) 이며, 각 행렬 formula_65의 덧셈 역원은 성분별 덧셈 역원 이다. 특히, 두 행렬 formula_56의 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 행렬의 formula_76-쌍가군 formula_56는 왼쪽 가군으로서 formula_91차원 왼쪽 자유 가군을 이루며, 오른쪽 가군으로서 formula_91차원 오른쪽 자유 가군을 이룬다. formula_2가 가환환일 경우 formula_91차원 자유 formula_2-가군이다. 그 한 기저는 다음과 같다. 곱셈.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 행렬 formula_65와 formula_103 행렬 formula_104의 곱 formula_105는 formula_106 행렬이며, 그 formula_17번째 행 formula_18번째 열 성분은 formula_12의 formula_17번째 행벡터와 formula_111의 formula_18번째 열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둘 모두 formula_113차원 벡터이므로 ‘스칼라곱’이 정의된다). 다음은 실수 행렬의 예다. 행벡터와 열벡터 를 통해 행렬 곱셈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행렬 곱셈은 결합 법칙을 만족시킨다. 즉, 환 formula_2 위의 임의의 formula_6 행렬 formula_65 및 formula_103 행렬 formula_104 및 formula_124 행렬 formula_125에 대하여, 가 성립한다. 행렬 곱셈은 함수 로서 formula_76-쌍선형 함수를 이룬다. 특히, 환 formula_2 위의 정사각 행렬들의 formula_76-쌍가군 formula_40는 그 위의 행렬 곱셈에 따라 formula_2-결합 대수를 이룬다. 특히 환을 이루며, 행렬환(行列環, )이라고 한다. 행렬환의 곱셈 항등원은 단위 행렬(즉, 모든 대각 성분이 1, 그 밖의 성분이 0인 행렬) 이다. 교환 법칙과 소거 법칙의 실패. 행렬환은 일반적으로 가환환이 아니다. 즉, 행렬 곱셈의 교환 법칙은 (체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수 2×2 행렬의 경우 이지만 이다. 물론 가환하는 두 행렬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가환환 위의 스칼라 행렬은 (같은 크기의) 모든 행렬과 가환한다. 또한, 가환환 formula_2 및 정사각 행렬 formula_137에 대하여, 는 가환환이다. 행렬환은 일반적으로 0이 아닌 왼쪽·오른쪽 영인자를 갖는다. 즉, 0이 아닌 두 행렬의 곱은 0일 수 있으며, 소거 법칙이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수 행렬에서 이다. 역행렬. 행렬환 formula_40의 가역원은 가역 행렬이라고 하며, 그 곱셈 역원은 역행렬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행렬환은 (체 위에서도) 0이 아닌 비가역 행렬을 갖는다. 예를 들어, 실수 2×2 정사각 행렬 은 가역 행렬이 아니다. 만약 formula_2가 가환환일 경우, 가역 행렬은 행렬식이 환의 가역원인 것과 동치이며, 특히 체의 경우 행렬식이 0이 아닌 것과 동치이다. 또한, 가역 행렬 formula_143의 역행렬은 행렬식과 수반 행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전치 행렬.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 행렬 formula_65의 전치 행렬 formula_148는 행과 열을 교환한 formula_149 행렬이다. 즉, 각 formula_150 및 formula_151에 대하여, 이다. 다음은 실수 행렬의 예다. 이다. 전치 행렬은 함수 로서 formula_76-쌍가군 동형을 이루며, 그 역함수 또한 (정의역과 공역이 뒤바뀐) 전치 행렬이다. 또한, 임의의 formula_6 행렬 formula_65 및 formula_103 행렬 formula_104에 대하여, 이다. 특히, 환 formula_2 위의 정사각 행렬의 formula_2-결합 대수 formula_40 위에서, 전치 행렬은 formula_40와 그 반대환 formula_165 사이의 대합 formula_2-결합 대수 동형이며, 만약 formula_2가 가환환일 경우 formula_40는 전치 행렬에 따라 formula_2-대합 대수를 이룬다. 대각합.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39 정사각 행렬 formula_137의 대각합은 모든 대각 성분들의 합이다. 대각합 는 formula_76-선형 변환을 이룬다. 또한, 임의의 formula_137에 대하여, 그 대각합은 그 전치 행렬의 대각합과 같다. 만약 formula_2가 가환환일 경우, 임의의 두 행렬 formula_179에 대하여, 두 행렬의 곱의 대각합은 곱하는 순서와 무관하게 같다. 행렬식. 가환환 formula_2 위의 formula_39 정사각 행렬 formula_137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85은 대칭군이며, formula_186는 순열의 부호이다. 행렬 formula_12의 행렬식은 formula_188, formula_189, formula_190 등으로 표기한다. 특히, 2×2 행렬 formula_191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행렬식은 formula_113개의 행벡터(또는 열벡터)의 함수 로서, 단위 행렬의 상이 1인 유일한 formula_2-교대 다중 선형 형식이다. 또한, 행렬식은 두 환의 곱셈 모노이드 사이의 준동형이며, 전치 행렬에 대하여 불변이다. 즉, 임의의 formula_179에 대하여, 이다. 행렬식은 크라메르 공식에서 사용된다. 부분 행렬과 소행렬식. 환 formula_2 위의 formula_6 행렬 formula_65의, 행과 열의 집합 에 속하는 행과 열을 취한 부분 행렬은 다음과 같다. 특히, 가환환 위의 행렬의 부분 정사각 행렬의 행렬식을 소행렬식이라고 한다. 예. 몇몇 특수한 행렬들은 다음이 있다. 역사와 어원. 1848년 수학에 처음으로 실베스터가 사용한 행렬(matrix)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해부학에서 자궁(子宮,모체母體)을 뜻한다. 행렬식에 대해서 행렬의 의미를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595
333321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5
요리
요리()는 음식을 가공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크게 나누어 지역별로, 시대별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용어. 각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들고 시식 후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요리는 여러 조리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그 음식을 말하며 주로 가열한 것을 말한다. 조리(調理)는 요리를 만드는 일이나 그 방법, 과정 등을 말한다. 음식의 조리법을 뜻하는 레서피(또는 레시피, )는 조리법으로 순화어를 쓰도록 되었다. 그리고 가스레인지나 풍로를 비롯, 조리를 자체적으로 하는 행위의 일종인 취사도 역시 요리의 일부를 구성한다. 나라별 요리. 문명이 출현하면서 사회집단 또는 부족에 따라서 전통적인 요리법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기후, 토양, 동물 분포와 같은 지역적인 요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전통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가와 자신들의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 금기를 지키는가에 따라서 요리법이 달라지기도 했다. 전통 음식은 국가, 지역별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59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6
중국 요리
중국 요리(中國料理, )는 동아시아에 있는 중국의 요리이다. 중식(中食, ) 또는 청요리(淸料理)로도 부른다. 중국의 화교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세계 지역의 특성에 맞게 바꾼 요리를 말하기도 한다. 중국은 국토가 아주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내륙 지방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날생선 음식이 적고 가열 조리가 발달하였다. 특수 재료로는 건조시킨 것이 많고, 종류도 풍부해서 이것을 불리는 기술이 뛰어나며, 특히 조리법이 매우 발달하였다. 기름과 녹말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용 방법이 교묘하다. 기름과 함께 파, 생강, 마늘을 사용하여 이 재료들의 특유한 향과 자주 성분으로 다른 재료의 좋지 않은 냄새를 제거시키고 동시에 기름의 느끼함을 완화시켜 준다. 또한 녹말을 사용하여 식품이 가진 맛을 보존시키며 부드러운 향기을 주어 맛의 조화를 이루고 음식이 따뜻함을 지속시키도록 한다. 조리 기구는 한 개의 냄비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여 편리하고 합리적이다. 음식은 하나의 그릇에 담아 돌려가며 덜어 먹는 형식이므로 서빙이 비교적 간단하다. 개요. 중국 요리 거의 대부분은 적당한 크기로 손질되어 바로 집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전통적으로 중국 문화는 식탁에서 칼과 포크를 이용하는 것을 야만스럽게 본다. 이는 이런 도구들이 무기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손님이 직접 음식을 자르는 것도 무례한 것으로 여긴다. 생선 요리는 보통 완전히 요리되어 나오며 젓가락으로 살코기 덩어리를 집어 먹는다. 다른 종류의 요리는 보통 발라내서 먹는데 이와 대조된다. 가능한 신선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는 문화적으로 완전함을 상징하므로 머리와 꼬리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수많은 식당에서 두 개의 숟가락을 이용하여 고기를 나눠 식탁에 올려 놓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닭고기 또한 중국 요리에 있어 자주 사용되는 재료이다. 닭의 살코기를 여러 갈래로 찢어 놓아 벼슬까지 대접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완전함을 상징한다. 요리 계통. 중국 요리에는 요리 계통()이 있다. 4대 요리 계통은 다음과 같다. 8대 요리 계통은 4대 요리 계통에 다음을 더한 것이다. 조리 방법. 식재를 다듬을 때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조리하기. 중화 요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를 한다. 채식주의. 채식주의는 서양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흔하지 않다. 중국 채식주의자들은 두부를 많이 먹는다. 중국의 채식주의자들 대다수가 불교 신자이며 생물의 고통을 줄이는 불교적 가르침을 따른다. 중국의 채식주의적 요리는 커다랗고 다양한 야채를 포함하고 있으며 고기를 모방한 음식도 몇 가지 넣는다. 고기 모방 요리는 대부분 콩 단백질과 글루텐으로 만들어 오리, 닭, 돼지와 유사한 모양과 맛을 낸다. 콘작을 이용한 해산물 모방 요리도 존재한다. 음료. 전통 중국 문화에서, 차가운 음료는 뜨거운 음식을 잘 소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차가운 물이나 청량 음료와 같은 액체는 전통적으로 식사 시간에는 취급하지 않는다. 죽이 나오면, 뜨거운 차나 뜨거운 물 등의 음료가 식탁에 오른다. 차는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맥주와 청량 음료를 중화 음식과 함께 널리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지방의 조그마한 식당의 많은 수가 찬 맥주에 핫 팟을 둔 렁단베이(冷淡杯)라는 음료를 취급하며 이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차. 중국에서 차는 아주 널리 사랑받고 있다. 북방지역에서는 화차, 상해와 절강성 등 중부지방에서는 녹차, 남부지방에서는 우롱차를 즐겨마신다. 이외에도 중국내 생산량의 1/4을 차지하는 홍차와 백차 등도 있다. 손님이 오면 주인은 거듭 석 잔을 권하는데, 처음 두 잔은 자유롭게 마셔도 되지만 마지막 잔은 한 번에 마시는 것이 예절이다. 술. 황주는 3~4천 년의 역사가 있는 술로 곡식으로 제조하는 발효주이며 종류가 다양한데 홍여주가 유명하다. 백주는 천 년의 역사가 있는 곡주로 40도 이상의 증류주로 무색투명하며 특이한 향이 난다. 우량이에, 마오타이가 유명하다. 포도주도 2천 년의 역사가 있으며 장백산 포도주, 통화 포도주 등이 있다. 중국의 맥주 생산량은 세계 3위를 차지한 적도 있는데, 청도맥주, 오성맥주가 유명하다. 보통 식사가 나오기전에 건배를 하며,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면 즉시 따라 주는데, 비우지 않았는데도 첨잔하며 계속 권한다. 술잔은 술을 마신 후 밑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주인이 손님에게 권한다. 코스요리 식사순서. 보통 만찬을 위한 식당에 가면 요리가 나오는 순서가 있는데, 보통 차가운 요리를 먼저 내온 후 더운 요리를 내온다. 더운 요리도 흔히 먹는 볶음요리(热炒)가 먼저 나오고, 가장 중요한 주요리는 그 다음에 나온다. 주요리는 해삼, 전복, 샥스핀, 제비집 등으로 만든 고급 요리 또는 오리나 돼지를 재료로 만든 요리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요리 중간 중간에 뎬신(딤섬)이 나오는데 보통 식욕을 돋우기 위하여 짠맛의 뎬신이 올라오고, 단맛의 뎬신은 디저트로 먹는다. 주요리가 끝나면 밥이나 면으로 식사를 하는데, 요리가 충분하면 건너뛰고 탕을 마신다. 그 다음 단맛이 나는 디저트와 과일을 먹는다. 주문을 할 때에는 이 순서를 고려해서 냉채, 볶음요리, 주요리, 디예신을 각각 선택을 하되, 보통 사람 수 만큼의 주요리를 시키면 적당하다. 식사 예절. 초대를 받았을 때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한다. 원형 테이블이 놓인 자리에서는 안쪽의 중앙이 주인석이다. 일반적으로 식단은 전채 2~4종, 탕 6~8종, 디저트 2종 등 짝수로 나오는데,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내어 먹는다. 보통 손님이 먼저 덜고 주인이 나중에 덜어 낸다. 요리는 한 접시에 한 가지씩만 먹고 여러 요리를 한꺼번에 가져다 먹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 섞이지 않도록 접시를 바꾸어 먹는데, 접시를 들고 먹거나 국수를 소리내어 먹거나 죽 종류는 그릇을 입에 대고 먹지는 않는다. 생선을 먹을 때에는 뒤집어서 먹지 않는데, 이는 배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 주인이 권하면 주빈부터 사양하지 말고 먹도록 한다. 찰기가 없는 중국쌀의 특성으로 인해 국그릇과 접시는 식탁에 올려둔 채로 먹고 밥그릇은 들고 먹어야 한다. 밥그릇을 들고 먹는 이유는 중국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마치 동물이 먹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릇에 입을 대는 것은 금물이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대화 때문에 음식을 식어버리게 하거나, 자기 앞에 고정시키면 안된다. 중국에서는 음식을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이다. 음식을 남김없이 모두 다 먹으면 준비한 음식이 부족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주인이 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단 개인의 앞접시에 담은 음식은 모두 먹는 것이 예의이다. 디저트는 주로 단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조금씩 덜어서 먹도록 한다.
597
7126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7
짜장면
짜장면(-醬麵) 또는 자장면(-醬麵)은 양파 등 채소와 돼지고기에 기름으로 튀긴 춘장을 넣어 굵은 국수에 비벼서 먹는 한국식 중국 요리로, 짬뽕, 우동하고 더불어 트로이카 메뉴로 꼽힌다. 짜장면은 중국의 자장몐이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산동 요리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 한국식 중국 요리처럼 그 대표격인 짜장면은 인천이 시발점이다. 특징. 재료. 굵은 국수에 검은색에 가까운 양념을 얹어 비벼 먹는다. 영양. 짜장면 1인분의 열량은 대략 700kcal 정도로, 이는 한국 성인 기준 남성 1일 섭취량의 28%, 여성의 35%이다. 종류. 종류는 다양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짜장면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공되어 짜장라면 (짜파게티, 짜짜로니 등)이 판매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반 짜장면에 다양한 토핑을 얹어서 먹는 종류의 짜장면도 있다. 유래와 역사. 짜장면은 중국의 산둥 반도 지역의 가정식이었던 자장몐(炸醬麵)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하여 만들어진 음식이다. 지금도 베이징에서는 라오베이징자장몐다왕(老北京炸醬麵大王)등 전문점이 산동식 자장몐을 판다.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 온 부두 근로자인 쿠리(苦力·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작이었다. 이후 청조계지를 중심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식음식점이 많이 생겼는데, 흔히 '원조 짜장면 집'으로 알려진 공화춘은 1905년에 문을 열었다. 1948년 영화장유가 창업하여 짜장면용 면장을 만들어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영화장유의 사장 왕송산은 춘장에 캐러멜을 넣어 단맛이 나도록 하고 사자표 춘장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짜장면은 여러모로 중국의 자장몐과는 다른 음식이 되었다. 1960년대에 짜장면의 원가를 낮추기 위해 감자와 양파를 넣게 되었다. 1960년대~197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펼친 분식장려운동과 조리 시간이 비교적 짧은 점이 산업화 시대와 맞아 떨어지면서 짜장면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대중 문화 속의 짜장면. 짜장면은 저렴한 가격에 어디서나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북극해 횡단을 3개월 만에 마친 등산가 허영호씨는 인터뷰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짜장면을 꼽기도 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는 서민들이 외식할 때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각광 받았으며, 특히 입학·졸업·생일을 축하할 때, 이사를 가는 날 등에 가족들이 같이 즐겨 먹었다. god의 1집에 수록된 《어머님께》에서도 짜장면을 통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살인의 추억》과 드라마 《환상의 커플》 등 많은 작품에서 짜장면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서는 중화요리의 대를 이어온 화교 삼부자 이야기에 등장했다. 표준어 문제. 문교부(현 교육부)가 1986년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과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장면'만이 표준어이고 맞춤법에 맞는 표기로 실려 있었다. 국립국어원 박용찬의 설명에 따르면, 자장면은 짬뽕과는 달리, 중국 된장을 가리키는 '자장'과 한자어인 '면'(麵)이 결합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002년에 발행된 표준 발음 실태 조사(최혜원,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서울·경기 지방 사람 210명 중, 151명이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시인 안도현은 그의 작품 《짜장면》의 제목과 관련해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썼다. 그 밖에도 "짜장면은 자장면으로 쓰면서 짬뽕은 왜 잠봉이 아닌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라면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비판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편, 2009년 5월 17일, SBS TV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SBS 스페셜의 164회 "자장면의 진실"에서 "짜장면"이란 표기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해당 프로그램에서 자체적으로 "자장면"과 "짜장면"의 표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응답자 중 91.8%가 "짜장면"으로 부르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은 아나운서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 "자장면"에 비해 "짜장면"이 실생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현실을 수용해 "짜장면"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가격. 1963년 무렵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은 20 - 30 원 정도였다. 2010년 가격을 100으로 하였을 때 짜장면의 물가 지수 변화는 아래의 표와 같다.
598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8
블랙데이
블랙데이(Black Day)는 매년 4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대중 문화에서 매월 14일째 되는 날에 기념하는 비공식 기념일의 일종이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3월 14일 화이트데이 바로 다음에 돌아오는 14일이라는 점에서 그 두 기념일의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블랙데이 다음에 돌아오는 5월 14일은 로즈데이다. 상세. 블랙데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90년대 신문 기사들로, 어느 신문은 블랙데이에 대해 “애인이 없는 남녀 청소년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짜장면, 아메리카노 등 검은색 음식을 먹으며 서로 위로하는 날”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청소년 사이에서 시작된 유행이 2000년대 들어 2-30대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아니냐 하는 해석도 있다. '블랙데이'라는 명칭은 화이트데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커플들의 기념일인 3월 14일 화이트데이와는 정 반대로, 한달 뒤 솔로들의 날인 4월 14일을 화이트의 반대인 블랙으로 비튼 것이다. 한편 솔로의 우울함을 블랙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여느 '데이'와 마찬가지로, 빼빼로 데이처럼 마케팅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으나, 특정회사의 독점 상품이 아닌 일반적인 짜장면이기 때문에 비판의 근거는 약한 편이다. 실제로 중국집()들이 블랙데이 기념으로 특별히 짜장면을 판촉하지도 않으며, 이날에 한해 매출이 크게 오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599
3302790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599
성당과 시장
에릭 레이먼드가 쓴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은 자유 소프트웨어 철학을 대변하는 유명한 글이다. 레이먼드는 이 글에서 리눅스 커널 개발과정과 패치메일이라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개발한 경험을 들어 오픈 소스 개발 방식의 유효성을 설명한다. 1997년 5월 27일 리눅스 회의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1999년 같은 이름의 책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글에서 저자는 두 가지 방식의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을 대조한다. 글의 주제는 그가 리누스 법칙이라고 이름붙인 "보는 눈만 많다면, 어떤 버그라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테스트하고 훑어보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 코드가 공개되어 있으면 버그는 빨리 잡힐 것이란 뜻이다. 이에 대해 성당 모델에서는 소스 코드를 여러 명의 개발자들만 볼 수 있으므로 버그를 잡는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주장했다. 이 글로 인해 GNU 이맥스와 GCC를 포함한 많은 오픈 소스와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들이 시장식의 열린 개발 모델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넷스케이프가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의 소스를 공개한 것과 모질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성당 모델은 상용 소프트웨어의 전형적인 개발 방식이다. 더욱이 상용 소프트웨어는 보통 출시 때 소스가 같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과 성당"이라는 구문은 종종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와 상용 소프트웨어를 비유하는 데에 쓰인다. 그러나 원래 글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들 중에 두 종류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상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성당과 시장의 예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키백과는 시장식의 프로젝트이고, 누피디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당형의 프로젝트이다.
600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00
에릭 레이먼드
에릭 레이먼드(Eric Steven Raymond, ESR , 1957년 12월 4일~)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해커이며 자신을 인터넷과 해커 문화의 "참여 관찰 인류학자 (observer-participant anthropologist)"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오픈 소스의 형태로 개발되고 발전된 패치 메일의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오픈 소스 철학을 대변하는 문서인성당과 시장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오픈 소스 개발 과정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반복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는 해커들이 쓰는 용어를 설명한 자곤 파일("신 해커사전")을 편집했으며, 넷스케이프의 소스 코드 공개, 모질라의 설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현재 태권도 검은 띠의 소유자이다.
601
6249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01
온라인 게임
온라인 게임(, )은 인터넷이나 기타 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하는 멀티 플레이 비디오 게임이며, 컴퓨터, 휴대전화, 휴대용 게임기 등 다양한 기기에서 각자 다양한 장르의 온라인 게임을 지원한다. 역사. 온라인 게임의 역사는 1970년대 초창기 패킷 교환 기반 컴퓨터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라인 게임의 초기 예는 1978년 개발되고 처음에는 1980년 ARPANet에 연결되기 전 내부망으로 한정된 MUD1을 포함한 MUD였다. 이후 10년 간 여러 상용 게임들이 잇따랐는데 여기에는 1984년 데뷔한 최초의 상용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아일랜드 오브 케스마이(Island of Kesmai), 그리고 1986년 MSX LINKS 액션 게임과 같은 더 그래픽컬한 게임, 1987년 비행 시뮬레이터 에어 워리어, 1987년의 패미컴 모뎀의 온라인 바둑 게임이 포함된다. 1990년대 인터넷의 빠른 보급으로 온라인 게임이 확장되기 시작했는데 저명한 타이틀로는 바람의 나라(1996), 퀘이크월드(1996), 울티마 온라인(1997), 리니지(1998), 스타크래프트(1998), 카운터스트라이크(1999), 에버퀘스트(1999)가 포함된다. 패미컴 모뎀(1987), 세가 메가넷(1990), Satellaview(1995), 세가넷(2000), 플레이스테이션 2(2000), 엑스박스 (2001) 등 비디오 게임 콘솔도 온라인 네트워크 기능들을 수신하기 시작했다. 연결 속도가 개선되면서, 소셜 게임, 그리고 모바일 게임 등의 새 플랫폼과 같은 새로운 장르가 보급되었다. 과금. 사람들이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과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꾸미기 위해서(35%)이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32%), 빠른 성장(18%), 경쟁심(15%)의 이유도 있다. 과금하면 만족한다고 답한 사용자는 39%였고 아니라고 답한 사용자는 20%였다. 과금하지 않는 사용자들은 돈이 아깝거나(33%)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26%) 과금 없이도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19%)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다. 한편 과금이 지나친 경우 피로감을 느낀 이용자가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게임을 찾는 경우도 있다.
603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03
송두율
송두율 (宋斗律, 독문명 Song Du-yul, 1944년 10월 12일 ~ )은 한국계 독일인 사회학자, 철학자로, 독일 뮌스터 대학교의 사회학, 철학 교수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독일식 이름은 Du-yul Song(두율 송)이다. 생애. 1944년 10월 12일 일본 도쿄 아라카와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제주도 출신이다. 아버지 송계범은 일본 도쿄 물리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 경성제국대학 물리학부에서 근무하였다. 송계범이 한국 전쟁 이후 전남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송두율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광주에 거주하며 광주 중앙초등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서울로 이주해, 경기고등학교 입시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동고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훗날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된 최재석이었다. 교사 송찬식(후에 국민대 사학과교수)의 권유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하면서 대학 시절 59학번이던 시인 김지하와 알게 된다. 1967년 독일로 유학해 1972년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 뮌스터 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로 채용되어 정치경제학, 사회학방법론, 후진국사회학을 강의했으며, 뮌스터에서 정정희와 결혼하여 준과 린 두 아들을 낳았다. 1973년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이후 총 18회 북한을 방문하였다. 독일에서 대한민국 학술원을 운영하며 북한에서 지원금을 받았다. 1974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으며, 본에서 벌어진 유신 독재 반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1977년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81년 공산주의에 대해 내재적 방법으로 비판적인 분석을 한 논문 '소련과 중국'을 발표하였고, 1982년 1월 사회학교수자격논문을 마무리하여 교수자격을 받았다. 1988년과 1989년에는 미국 롱아일랜드대학 철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1991년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김일성과 대면하였다. 1994년부터 베를린 훔볼트 대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1997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김일성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북한을 방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에 귀국했으나,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지방법원 최완주 부장판사는 2003년 10월 22일 "범죄사실이 소명되나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해 증거인멸 우려가 있고 높은 처단형이 예상돼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받아 기소되었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는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은 살아온 과정 등을 볼 때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나도 존경한다'고 진술하였다. 2004년 7월 21일 2심 재판부(서울고법, 재판장 김용균 부장판사)는 기소된 사건 내용중 방북 사실을 제외한 간첩 혐의 등 대부분을 무죄로 판정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그날로 송 교수는 구속 9개월 만에 석방됐고, 2004년 8월 초에 부인과 함께 독일로 출국했다. 2004년 7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송두율은 "2003년 10월 24일~11월 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포승줄과 수갑에 묶인 채 검찰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는 등 부당한 계구 사용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는 등의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2단독 최지수 판사는 2005년 1월 7일 "당시 정황상 송두율이 도주하거나 폭행할 우려가 없었는데도 계구를 사용한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국가는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의자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 계구 사용은 합리적이고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해 최소범위에서 허용돼야 한다 무리한 계구 사용은 피의자의 심리를 위축시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는 송두율에게 1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88단독 김래니 판사는 조사과정의 변호인 입회를 불허한 검사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구속상태에 처한 피의자에게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은 인권보장과 방어준비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권리이다"라고 하면서“국가는 500만원, 관련 검사 4명은 각각 100만원씩 모두 9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송두율 측 변호인단은 2003년 10월 송두율이 구속수감된 이후 검찰이 보안을 이유로 변호인 입회를 허용하지 않자 "입회불허 결정을 취소하라"는 준항고를 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변호인 입회불허 취소를 결정했다. 2008년 4월 17일 상고심(2004도4899)에서 외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다가 북한에 간것은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일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2008년 8월 24일 서울고법은 확정 판결을 내렸다. 2009년 여름 학기를 끝으로 뮌스터 대학교에서 퇴임했다. 사회 운동. 1960년대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시도한 유신 체제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다. 이후 독일에 머물며, 남한과 북한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일련의 저서를 썼다. 그 안에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론을 내세우며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5년부터 베이징에서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 학술적인 교류를 갖는 남한/북한 학술 회의를 주도했다.
604
75479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04
대한민국 기상청
기상청(氣象廳, , 약칭: KMA)은 기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1990년 12월 27일 중앙기상대를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에 위치하고 있다. 청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으로 보한다. 역사. 대한제국 농상공부 설치한 관측소가 기상청의 전신이다. 당시 관측소는 러일 전쟁 때 일본의 필요로 설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인천광역시에 설치된 것이 중앙관상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1912년에는 내무부 학무국 소관이 되었다가 해방 후 학무국이 문교부로 독립하면서 문교부 소관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인천에 위치한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한 것은 1948년 3월 1일의 일이다. 다만, 근거 법령은 1949년 8월 18일에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관상대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관상감'(觀象監)이라는 직책에서 유래했다.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을 관장한 기관으로 천체 현상을 관찰해 백성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1956년 3월 16일에는 미국 국무부의 도움을 받아 세계기상기구에 정식 가입했다. 1962년에는 교통부 소속으로, 1967년에는 과학기술처로 이관되었다. 1981년에는 중앙기상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0년에 지금과 같은 기상청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기상업무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상청을 기상기후청으로 개편하는 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기상관측뿐만이 아니라 기후변화 예측·감시 업무까지 수행하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깊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새 정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2022년 2월 정부대전청사로 이전했다. 정원. 기상청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재정. 총수입·총지출 기준 2022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 기상용 슈퍼컴퓨터. 기상청은 슈퍼컴퓨터 1호기를 2000년 9월에 도입하였고, 2005년 8월 2호기, 2010년 12월 3호기, 2015년 12월 4호기를 도입하였으며, 2020년 12월 5호기를 도입할 예정이다. 비판. 2016년 여름철에 장마와 폭염에 대해 오보를 계속 내어 비판을 샀다. 7월에는 소나기 예보를 내린 날에는 해가 뜨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소나기가 내려 '양치기 기상청'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폭염이 절정에 달할 것'이라고 예보했으나 19일이 되어도 폭염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후에도 폭염이 꺾이는 시점에 대한 보도를 16일, 22일, 24일로 계속해서 미루었는데 이에 대해 기상청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공기 흐름이 정체되어 있어 폭염이 끝날 줄 알았으나 계속 이어진다는 등 대기 예측이 매우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한편, 기상청이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슈퍼컴퓨터를 통한 자료를 예보관들이 분석함으로써 알려주는 것인데 오보가 나올 때마다 예보관을 교체해서 해당 분야에 유능한 인재가 머물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606
3326317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06
열대 저기압
열대 저기압(熱帶低氣壓, tropical cyclone)은 지구의 열대 지역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이다. 이들은 발생 지역에 따라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으로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 부근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을 '윌리윌리'로 불렀으나 폐기되었다. 이름. 열대 저기압은 여러날 동안 지속될 수 있고, 예보에서 올 수 있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붙는다. 주변 관계국들이 이름을 붙이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한다. 관측.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최대 풍속은 대한민국 기상청, 일본 도쿄에 위치한 지역특별기상센터(RSMC) 등 대부분의 기관에서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0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하고 있다. 기압은 헥토파스칼(hPa), 강수량은 밀리미터(mm)를 표준 단위로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SSHS)이라는 등급을 이용하여, 5등급을 가장 강력한 열대 저기압으로 분류하고 있다. 2003년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태풍 매미는 5등급 태풍이었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5등급 허리케인이었다. 2008년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 등을 강타하여 10만 명 이상을 사망하게 한 사이클론 나르기스는 4등급 사이클론이었다. 미군은 전 세계에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전 세계에 10여 대의 항공모함 함대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태풍의 경보와 그에 따른 함대의 이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와이주 진주만의 해군해양기상센터(Naval Maritime Forecast Center) 내에 미국 해군과 미국 공군이 합동으로 운영하는, 합동태풍경보센터(JTWC)가 있다. 대부분의 해역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이동 상황 등을 전 세계 미군에게 알려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2008년 4월 21일 국가태풍센터를 제주도에 설립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가태풍센터는 전 세계의 열대 저기압을 감시 하지 않으며, 일본 도쿄 지역특별기상센터처럼 북서태평양의 태풍만 감시하고 관측한다. 역사.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의 넓은 해상에서 발생하고 발달하기 때문에 그 실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주로 남태평양에 있는 몇몇 섬에서 관측이 행해졌고, 그 외에는 때때로 그 해역을 지나가는 배에서 전해 주는 기상통보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존재를 알 뿐이었다. 따라서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고, 강도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때때로 섬을 통과할 때나 배가 태풍 중심에 휘말려 들어갈 때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면 미군의 비행기가 그 중심까지 날아가 관측하게 되어 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관측지 근처에 가까이 오면 각지에 있는 레이다에 의해 저기압을 연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열대성 저기압 주위에 있는 특유한 구름 분포가 찍히는데, 이것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정할 수 있다. 또한 1977년부터 쏘아올린 기상위성에서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구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재는 일기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갑작스럽게 열대성 저기압이 엄습하여 피해를 입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태풍 정찰 비행.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할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하루에 두세 번 미군 비행기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까지 들어가 레이다나 드롭 존데를 이용하여 열대성 저기압을 자세히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의 등압선은 거의 원형이므로 비행기가 언제라도 왼쪽으로 바람을 받아 날아가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다. 중심에 가까이 가면 레이다로 중심의 위치를 잡아 더욱 중심에 가까이 접근한다. 격렬한 동요와 강한 비가 내리는 지역을 뚫고 나가 열대성 저기압의 눈 안에 들어간 다음 그 안에서 8자를 그리듯이 비행한다. 그러면 정확한 중심 위치가 정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드롭 존데를 떨어뜨려 비행 고도에서 해면까지 사이의 기온과 습도를 측정하고, 또 해면에서 중심 기압을 구한다. 그리고 파도의 상태로 해면 부근의 풍속을 추정한다. 레이다에 의한 관측. 열대성 저기압이 200 ~ 300km 거리까지 다가오면 레이다로 열대성 저기압을 관측할 수 있다. 레이다로 찍은 열대성 저기압을 보면 중심 주위를 나선형 구름이 몇 줄 에워싸고 있는데, 이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알 수 있다. 기상위성에서의 관측. 레이다의 경우는 비가 내리고 있는 구름밖에 찍을 수 없지만 위성에서 본 경우에는 상층의 구름 등 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 곳도 찍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연속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진로나 강도의 변화 등도 추정할 수 있다. 미국의 극궤도 기상위성 NOAA는 하루에 두 차례 대한민국 상공을 통과한다. 이러한 기상위성의 관측 데이터는 기상위성센터에서 처리하는데, 구름 화상 사진으로 작성하여 태풍감시나 기상예보에 이용되고 있다. 특징 및 구조. 열대성 저기압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과는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은 그 중심부에 눈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열대성 저기압의 구조도 눈의 안과 밖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구름.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고도 십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적란운이 중심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이 고리 모양의 구름을 벽운(壁雲)이라 하며 그 안쪽을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눈의 크기는 평균 15 ~ 20km 정도이지만 열대성 저기압에 따라 다르며, 같은 열대성 저기압이라도 시간적으로 매우 다르다. 눈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길다란 띠 모양으로 연결된 적란운이 주위에서 모여들어 벽운을 형성하고 있다. 레이다에 찍히는 것은 굵은 빗방울을 내리게 하는 구름뿐이며, 찍히지 않는 검은 부분이라도 실제로는 구름이 있다. 또한 비행기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들어가 보면 태풍의 눈 안에도 구름이 있다. 이 구름은 벽운처럼 길다란 것이 아니라 틈이 있어 해가 비치거나 별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기압과 바람. 일기도상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주위에 동심원 모양을 한 등압선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 간격은 좁아진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이 지나간 관측소의 기압이나 풍속의 변화를 보면, 기압은 중심에 가까우면 급격히 낮아지고 바람도 급격히 강해지지만, 태풍의 눈 안에서는 갑자기 약해진다.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의 주위에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바람이 등압선과 20 ~ 30°각도로 열대성 저기압 안으로 불어들고 있는데,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고 있는 상공의 바람을 비행기에서 보면 중심에서 극히 가까운 곳을 제외하면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해 불어나오고 있다. 기온. 열대성 저기압이 열대 지역에 있는 동안은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 지역 내의 기온에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의 경우에는 난역과 한역(寒域) 사이에 커다란 온도차가 있으므로 열대성 저기압과 상당히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상공의 기온은 매우 특징있는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비행기에서 관측해 보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는 온도가 매우 높고, 주위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그 도중에는 온도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서로 교대로 나타난다. 온도가 높은 띠 모양의 구역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띠 모양의 구름과 일치한다. 태풍의 눈 내부가 기온이 매우 높은 것은 이곳이 하강기류 영역이기 때문이며, 중심 부근에서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것은 구름 속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潛熱)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발생과 소멸.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곳은 편동풍 골의 끝부분이나 중위도에서 뻗어 있는 기압골 위쪽 등 상승 기류가 있는 곳이다. 열대의 해면은 수온이 높고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증발이 활발하여 대기는 충분히 습해져 있다. 또한 라디오 존데 관측 결과에 의하면 열대의 대기는 조건부 불안정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가 어느 정도 상승하여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 그 다음은 점점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어서 적란운이 형성된다. 적란운 안에는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이 방출되기 때문에 온도가 높아진다. 한편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것은 상공에서 커다란 기류의 발산이 있을 때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면의 적란운 주위에서 수렴하여 상승한 기류가 상공에서 발산하여 그것이 하층의 수렴을 웃돌게 되면 기압이 내려간다. 또한, 적란운으로 에워싸인 눈 안에서는 강한 하강 기류가 있기 때문에 공기는 단열적으로 온도가 상승하여 기온이 한층 높아진다. 기온이 높아지면 밀도가 감소하기 때문에 중심부의 기압은 눈 주위보다 더욱 낮아진다. 계산에 따르면, 태풍의 중심부에서는 온도의 상승에 의해 밀도가 감소한 것만큼 기압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기압이 내려가면 주위에서 기류가 수렴하여 적란운을 더 한층 발달시킴에 따라 열대성 저기압이 점점 발달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해면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하여 대기가 충분한 습기를 가지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태풍이 발달하려면 표면 수온이 26 ~ 27°C 이상이어야 한다. 열대의 해양에서도 남동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수온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북서 태평양에서 강한 태풍이 된 것은 모두 수온이 28°C 이상인 곳에서 급속히 발달한 것이다. 지금까지 비행기 관측으로 얻은 열대 저기압의 중심 기압의 최저치는 870hPa로, 열대에서의 평상시 기압보다도 135hPa나 낮은 수치이다. 열대성 저기압은 해면의 수온이 높고 상승 기류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상공에서 큰 발산이 있는 경우에 발달한다. 실제로 태풍의 발달 상황을 조사해 보면 발생하고 나서 2, 3일 후에 급속히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한 차례만 기상 통보를 수신하던 배가 갑자기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여 당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넓은 해면에서는 수온이나 기류의 상태가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가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이와 같은 곳으로 오면 발달이 멈추고 쇠퇴한다. 그러나 일단 발달한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 해상에서 금방 소멸하지는 않는다. 열대성 저기압은 육지에 오르면 해면에서 수증기의 보급이 없어져 표면 마찰이 커지기 때문에 급속도로 쇠퇴한다. 가을에 중위도까지 와서 일단 주춤한 열대성 저기압이 온대성 저기압 성질을 갖기 시작하여 다시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진행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를 필요로 한다.
608
51394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08
자유민주당 (일본)
자유민주당(, ), 약칭 자민당()은 1955년에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쳐져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이며 2021년 현재 총재는 기시다 후미오, 간사장은 모테기 도시미쓰이다. 1955년의 창당 이후 중의원 내에서 지속적으로 여당 자리를 지켜오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 55년 체제라 불리는 양대정당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후 1993년에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연립 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당 우위 정당제가 처음으로 붕괴하였다. 그러나 익년인 1994년 다시 내각을 이룬 이후로도 2009년~2012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제1당의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으며, 계속적으로 총리를 배출해내고 있는 등 일본 국내의 정치계에서의 그 영향력은 거대하다. 소속 의원들은 당내의 특정 파벌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총리나 내각 인사의 선출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요. 1955년에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으로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을 기원으로 하며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핵심을 담당한 익찬의원연맹, 익찬정치회, 대일본정치회 및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동교회, 호국동지회, 일본자유당, 일본진보당, 일본협동당이 자민당의 기원으로 꼽힌다. 이렇게 자민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주도했거나 이를 계승하는 세력과, 제국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면서도 친미, 반공주의 성향을 띠는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으로 출발했다. 자민당은 창당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당 지도부의 힘이 약했고, 대신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각각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을 형성해 각 파벌 간의 대립과 합종연횡을 통해 당이 운영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는 한 정당이 한 선거구에 여러 명의 후보를 내야만 하는 중선거구제를 선거 제도로 채택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같은 선거구에 출마한 자민당 후보들은 서로가 같은 당에 소속된 동지임과 동시에 당선을 다투는 라이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한 선거구에 입후보자가 여러 명이어서 한 후보자가 중앙당의 선거 지원을 독차지할 수 없었기에 각 후보자는 선거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 후원회를 조직하거나, 영향력이 강한 정치인의 파벌에 들어가 그 정치인의 뜻에 따르면서 선거 때마다 파벌의 지원을 받는 방법을 택했다. 이렇게 형성된 파벌 정치는 서로가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선거에 이용하는 금권 정치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자민당은 보수, 우익 정당이지만, 55년 체제 하에서는 서방의 보수 정권과 비교해 사회, 경제 전반에 있어 정부의 개입이 심했고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자민당 정권은 정부가 국가 경제 정책을 모두 관리하면서 여러 산업 분야 중 경쟁력이 부족한 분야의 기업들이 낙오되지 않도록 행정 절차상 인허가 권한 등을 이용해 이들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농업 종사자에게 보조금을 교부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여러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이렇게 강력한 정부 개입으로 추진된 일련의 정책들이 "소득 격차 해소" 및 "리스크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는 평가와 함께 "일본의 전후 자민당 체제는 그들의 이념과는 결함되게도 성공한 사회주의 체제였다"라는 비아냥마저 나오기도 했다. 자민당은 일본의 여러 유명 정치인을 배출했다. 1990년대 이후 정계계편을 통해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된 사람들도 그 뿌리를 따져보면 자민당 출신이 꽤 많다. 자민당 출신으로서 야권에 자리를 잡은 인사로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하토야마 유키오, 오카다 가쓰야, 오자와 이치로, 가메이 시즈카 등이 있다. 당명. 1955년 11월 창당에 즈음하여 신당 창당 준비회가 "당명 위원회"를 따로 구성해 당명을 공모했다. 전국에서 총 2,191건의 공모가 있었는데, 많은 수를 얻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일본보수당"이 546건으로 1위, "민주자유당"과 "보수당"이 각각 187건으로 공동 2위, "일본국민당"이 159건으로 4위였다. 이렇게 "일본보수당"이 1위를 차지했지만 "이런 당명을 써서는 선거에서 불리하다"는 등의 부정적 의견이 제기되어 결국 채택되지 못했고, 이후 당내에서 논의한 결과 신당이 추구하는 핵심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이유로 "자유민주당"이 당명으로 결정되었다. 창당 이후 언론 매체 등에서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과 약칭인 "자민당"을 자유롭게 혼용해 왔으나, 1990년대에 간 나오토 및 하토야마 유키오가 민주당을, 오자와 이치로가 자유당을 창당하고 나서부터는 혼동을 막기 위해 자유민주당을 언급할 때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은 잘 쓰이지 않고 약칭인 "자민당"이 더 자주 쓰인다. 같은 이유로 당의 기관지 이름도 "자유신보"에서 "자유민주"로 바꾸었다. 제45회 총선거 패배로 야당이 된 직후인 2009년 9월에 열린 자민당의 "집권 구상 회의"에서는 "자유민주당"이라는 당명에 여론의 거부 반응이 있다며 당명 변경론이 나왔다. 새 당명으로는 "화혼당()", "자유신당()" 등이 제안되었지만, "당의 체질 개선이 먼저인데 당명을 바꾸자는 건 본말전도인 것 같다"는 등 당 내부의 비판이 나오자 결국 무산되었다. 역사. 창당 및 55년 체제 성립에 이르기까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정치 구도는 좌익과 우익 모두 분열된 상태에 있었다. 전후 일본의 우익 세력은 전쟁 전의 입헌정우회나 입헌민정당의 계보를 잇는 여러 정당으로 나뉘었고, 이들의 통합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55년 10월 13일, 4년 간 온건 세력 및 급진 세력으로 갈라져 있던 좌익 세력이 일본사회당에 재통합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재계 및 각계 인사들이 우익 세력의 통합을 요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시각차 및 일본국 헌법의 정당성 및 개헌 문제, 미국 등 서방 세력에 대한 시각차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던 우익 세력들이 통합되는 계기가 마련, "보수합동"이 이루어지며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초기에는 요시다 시게루를 지지하는 요시다파 및 이에 반대하는 반(反)요시다파와 함께 당인파, 관료 세력, 전전파(戰前派), 전후파(戰後派) 등 내부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보수합동을 주도했던 미키 부키치를 비롯해 당내에서 "10년만이라도 통합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다"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창당 후 첫 총선거인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무소속 입당자를 포함해 총 298석을 확보했다. 일본사회당 역시 167석을 획득하여, 자민·사회 양당이 전체 의석의 99%를 차지하는 양당 체제가 성립되었다(55년 체제). 또한 자민당이 창당 직전인 1954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 백악관 및 국무부의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았던 사실이 훗날 밝혀지기도 했다. CIA는 일본에서 사회당 정권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민당에 금전을 지원하고 나아가 선거 승리를 위한 조언까지 해주는 등 일본 내 우익 세력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을 펼쳤다. 훗날 이러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공개되자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자민당은 부정했다. 고도 경제 성장과 당 안정기. 기시 노부스케 내각 기간인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미일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둘러싼 "안보투쟁"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대규모 시민·학생 운동이 벌어지고, 여야 갈등이 심화되는 등 정국 불안이 이어졌지만, 1960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사회당과 민사당의 분열을 틈타 의석을 오히려 늘렸다. 시민 주도의 대규모 시위에 놀란 자민당 정권은 국가 운영의 우선 순위를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추어, 정부 주도의 장기 경제 발전 계획인 "국민 소득 배증 계획"을 실시하고, 여기에 한국 전쟁 기간 동안의 특수 효과까지 겹치면서 급속도로 경제를 재건한 일본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8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고도경제성장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렇게 일본에서 고도경제성장이 일어남에 따라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감소하면서 사실상 안보투쟁 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퇴조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자민당은 "대화의 정치"를 내세우며 일본사회당 등 야당과의 협력을 도모하여 정국 또한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1963년 10월, 자민당 조직조사회장이었던 미키 다케오가 당의 현대화에 관한 자문 보고서를 정리해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자민당을 지배하고 있던 파벌의 폐해에 대한 내용이 담겼고, 더 이상의 당내 갈등을 막기 위해 파벌을 없애야 할 필요성과 함께 각 파벌 수뇌부에 몰리는 정치 자금을 모두 당 집행부가 관리하는 것으로 일원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담겼다. 그러나 총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미키 보고서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저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비공식 회견에서 말하는 등 각 파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이후 보고서 내용에 따라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파벌이 해산됐지만, 이미 나뉜 당내 세력의 갈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4년, 이케다 하야토는 질병을 이유로 총리대신 및 자민당 총재직에서 사퇴할 뜻을 표명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했다. 같은 해 오노 반보쿠가 사망했고, 다음 해인 1965년 7월에는 고노 이치로가 사망하고 뒤이어 8월에는 이케다 하야토가 사망하면서 사토 에이사쿠를 위협하는 당내 라이벌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1966년에는 "검은 안개 사건"으로 불리는 정치 스캔들이 발생하여 여러 거물급 정치인들이 낙마하는 일이 속출했고, 이에 자민당은 당내외의 비판에 시달리며 여론이 악화, 1967년에 실시된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전이 예상됐지만, 무소속 당선자를 영입하여 안정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자신에 우호적인 인사를 전면에 포진시켜 당을 완벽하게 장악한 뒤, 당 총재 4선을 하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내고, 공해 대책 및 오키나와 반환을 실현하며 7년 8개월간 장기 집권하였다. 이렇게 자민당은 창당 때부터 1960년대까지 선거를 치를 때마다 입후보자가 감소하고 득표율도 조금씩 감소해 갔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기였다. 한편 자민당은 타지역으로부터의 유입 인구가 많은 대도시나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비교적 열세를 보였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일본사회당이나 일본공산당 등 진보 성향 정당이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당이 분열되어 민주사회당이 창당되고, 공명당 등 중도 성향 정당이 약진하며 진보 성향 정당이 도시 지역의 기반을 상당 부분 잃은데 비해, 자민당은 지지 기반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보수·진보 세력의 대립과 당내 갈등. 사토 에이사쿠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며 열린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의 중진들로 이른바 "삼각 찹쌀떡"이라 불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등 4명이 출마하였고, 선거 결과 "일본 열도 개조론"과 중일 국교 정상화를 내세운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다나카 내각은 1972년 9월에 중일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중일 수교가 결정되자 자민당 내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들이 정책 기구를 만들고 중일 수교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다나카 내각은 "일본 열도 개조론"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과 신칸센의 정비 등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비를 증액한 1973년도 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직후 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였고, "광란 물가"로 불릴 만큼 비정상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일본 경제는 큰 혼란에 빠졌다. 다나카는 본인의 경쟁자이면서 균형 재정을 지향했던 후쿠다 다케오를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에 임명하며 총력 대응을 주문했다. 후쿠다는 정부 예산의 감축, 금융 긴축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다나카 내각은 소비 환기 정책에서 소비 억제 정책으로 기조를 전환해 나갔다. 1974년 일본은 전후 처음으로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익년인 1975년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경제 성장률이 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1974년 7월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과반수 의석을 유지했지만, 여야 의석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자금 문제가 불거져 다나카가 총리 및 당 총재직에서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나카의 후임이 될 자민당 총재는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았고, 대신 부총재였던 시나 에쓰사부로의 지명에 따라 양원 의원총회에서 승인을 받은 미키 다케오가 신임 총재로 취임했다. 미키는 당의 현대화와 정치 불신 해소, 경기 침체의 극복을 내걸었다. 1976년 2월에는 록히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6월 자민당 소속인 고노 요헤이와 야마구치 도시오 등 6명의 국회의원이 당의 부패를 이유로 탈당하여 "부패와의 결별"을 모토로 신자유클럽을 결성했다. 같은 해 7월, 도쿄 지방 검찰청 특수부가 다나카 가쿠에이를 구속하였고, 이에 다나카는 자민당을 탈당했다. 이렇게 사태가 전직 총리대신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이르자 국내외의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8월, 다나카는 뇌물죄와 외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키 다케오 총리 및 이나바 오사무 법무대신은 록히드 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이에 당내에서 일부 세력의 반발이 이어지고 미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러한 당내 움직임에 대해 미키는 대응 차원에서 록히드 사건 검찰 수사에 반발하던 각료를 파면하고, 중의원을 해산할 방침까지 내세웠지만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던 만큼 해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같은 해 12월에 실시된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에 못 미치는 의석을 획득하게 되었다(이후 무소속 의원의 입당으로 과반수를 간신히 확보). 미키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후 국회에서는 여야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며 정국이 불안정해졌다. 1976년 12월, 후쿠다 다케오가 자민당 집행부의 추천과 양원 의원총회의 승인을 얻어 새 총재에 취임했다. 당초 후쿠다는 2년간만 재임한 뒤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총재직을 넘긴다는 다이후쿠 밀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쿠다 내각은 출범 당시 지지율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와 외교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여야 대립 구도가 지속되고 있던 상황에서 지도부가 일부 야당에 대해 부분 협력을 호소하는 등 대야 관계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여야 갈등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또한 자민당은 1977년, 총재 선거에 당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당칙을 개정하기로 결정했으며, 당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참여하는 "자유국민회의"도 결성했다. 더욱이 자민당 내부의 통합을 막고 있던 파벌 갈등의 해소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각 파벌은 또다시 형식적으로나마 해산되었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다케오가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다이후쿠 밀약을 무시하고 총재 재선을 위해 입후보했으나, 당내 유력 파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오히라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오히라는 1979년 10월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비세의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자민당은 직전 총선거에 이어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에 당내에서 오히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었으나 오히라는 사퇴 요구를 일축했으며, 이후 자민당은 차기 총리대신 지명을 둘러싸고 극심한 당내 갈등에 빠졌다. 선거 결과에 따라 열린 임시 국회에서의 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오히라가 승리했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의 출범으로 당내 갈등은 봉합되었지만, 이 기간의 혼란은 이후 "40일 항쟁"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자민당 역사상 최악의 당내 갈등 사례로 꼽히고 있다. 1980년 5월 16일, 일본사회당이 중의원에 오히라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자민당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미키파와 후쿠다파 등의 국회의원 69명은 불신임 투표에 불참했으며, 결국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오히라 내각은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자 곧바로 중의원의 해산을 선언했다. 이후 조기 총선 일정이 확정된 5월 30일, 오히라는 심근 경색 발작 증상을 일으키며 입원했으며, 선거 운동 기간인 6월 12일에 급사했다. 오히라는 사망했지만 자민당은 6월 22일에 실시된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및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다. 오히라의 후임으로는 오히라에 우호적이었던 스즈키 젠코가 취임했다. 스즈키는 "화해의 정치"를 내걸며 당내 화합에 주력하고 행정·재정 개혁에도 앞장섰다. 이중 권력 구조와 보수 우위.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 등 진보 정당 소속의 지방자치단체장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과거 진보 정당이 강세를 보였던 대도시 지역에서도 자민당이 우위를 회복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1982년 11월 실시된 총재 선거에 현직인 스즈키 젠코는 입후보하지 않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모토 도시오, 아베 신타로, 나카가와 이치로 등 4명이 입후보했다. 결과는 나카소네의 당선이었다. 그러나 나카소네는 당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당내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의 힘을 빌려 총재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내각 및 당직 인선에서도 다나카파가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우대를 받았기 때문에 제1차 나카소네 내각 기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 때문에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다나카소네 내각"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카소네는 정권의 슬로건으로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었다. 구체적으로는 행정 개혁, 공기업의 민영화, 산업 규제 완화, 민간 분야 활용 확대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교육 개혁, 국방 정책의 재검토,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의 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외교 면에서는 1983년 1월 방미 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일 양국은 태평양을 끼고 있는 운명 공동체"라고 발언하는 등 미일 관계 강화를 강조하고, 냉전 체제에서 서방 국가에 우호적인 나라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1983년 10월 12일, 도쿄 지방 재판소(법원)은 록히드 사건에 관한 다나카 가쿠에이의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야당은 다나카에게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지만 다나카는 이를 거부했고, 국회에서 여야간 충돌이 벌어졌다. 야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자"며 중의원 해산을 요구했다. 결국 중참 양원 의장의 권유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했다(다나카 판결 해산). 이렇게 실시된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획득하지 못했으나 무소속 당선자의 영입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나카소네는 "이제부터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하겠다. 정치 윤리를 고양하고, 당 체질의 근본적 쇄신에 힘쓰며, 청결한 당 문화를 확립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2월 27일에 자민당은 분당되었던 신자유클럽과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연립 정권을 이루어 국회 안정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1986년 6월, 나카소네 총리의 주도 아래 중의원을 해산하여 참의원 선거와 동시에 실시했다. 자민당은 중의원 304석, 참의원 74석(개선 의석)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선거 후에는 선거 승리에 대한 특례로 나카소네의 당 총재 임기 1년 연장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8월에는 신자유클럽이 해산되어 대부분의 당원이 자민당에 재합류했다. 나카소네 내각은 일본전신전화공사 및 일본전매공사의 민영화와 국철분할민영화를 성사시키고, 1987년도 예산에서 방위 예산 1% 한도를 철폐하는 등의 정책을 실현하며 4년 11개월간의 집권을 마쳤다. 나카소네의 후임을 선출하는 1987년 10월의 당 총재 선거에서는 "뉴 리더"로 불렸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등 이른바 "안치쿠미야" 3인방이 모두 입후보했다. 과거처럼 상대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들 3명은 토론을 벌인 결과 후보 단일화 문제를 나카소네에 맡겼다. 결과적으로 다케시타를 후보로 한다는 나카소네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등 불상사도 일어났다. 1988년 7월 임시 국회에서 다케시타 내각은 소비세 법안을 포함한 세제 개혁에 관련된 6개 법안을 제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리쿠르트 홀딩스 관계 회사인 리쿠르트 코스모스사의 비상장 주식이 정관계 및 재계의 유력 인사와 그들의 비서, 가족들에게 뇌물로 제공되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리크루트 사건이 터졌다. 야당은 세제 개혁 관련 법안의 심의보다 리쿠르트 스캔들의 해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면서 법안 심의를 일체 거부하고, 사건 관련자를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시킬 것을 요구하며 국회는 공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야당은 법안 표결을 위한 본회의 때 회의를 지연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였고, 12월 9일에는 부총리 겸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이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채용 비리 문제로 사임했다. 그러나 세제 개혁 관련 6개 법안은 12월 24일 국회를 통과했다. 1989년 1월 7일에는 쇼와 천황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아들인 황태자 아키히토 친왕이 천황에 즉위하였다.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오부치 게이조가 새 연호 "헤이세이"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에는 소비세가 도입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소비세 도입 직후 총리직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5월 22일 도쿄 지검 특수부는 나카소네파 소속인 후지나미 다카오를 리쿠르트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뇌물죄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하였고, 후지나미는 자민당을 탈당하였다. 5월 2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증인으로 출석해 리쿠르트 사건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으며, 심문 직후 나카소네 역시 자민당을 탈당했다. 다케시타의 후임으로는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고 외무대신을 지내고 있던 우노 소스케가 추천되었다. 6월 2일 우노는 자민당 양원 의원총회에서 기립 투표를 거쳐 총재에 선출되었고, 다음 날인 6월 3일에 다케시타 내각은 총사직했다. 그런데 우노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여성 스캔들이 발각되었다. 우노는 이를 명확하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후 7월에 열린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이 스캔들을 비롯해 리쿠르트 사건, 소비세 도입 문제, 농산물 수입 자유화 문제 등 "3종 세트"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자민당이 역풍을 맞아 겨우 36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한편, 도이 다카코 위원장이 이끄는 일본사회당은 여성 후보자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46석을 얻어 약진했다. 자민당은 참의원 제1당을 유지하긴 했으나 여야의 의석 구도가 역전되었다. 우노는 선거 직후 총리 및 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약 2개월만에 다시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가이후 도시키, 하야시 요시로, 이시하라 신타로 등 3명이 출마했다. 여기서 다케시타파, 옛 나카소네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가이후 도시키가 과반수 득표로 총재에 당선되었다. 가이후 내각은 가이후가 당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당내 최대 파벌이었던 다케시타파 회장인 가네마루 신과 역시 같은 다케시타파 소속이자 자민당 간사장이던 오자와 이치로가 사실상 배후에서 조종하는 구조였으며, 이를 "이중 권력"이라 지칭한다. 1991년 9월, 가이후 내각은 당대에 주요 정치 이슈가 되고 있던 "정치 개혁" 문제를 이른 시일 내에 매듭지을 수 있도록 임시 국회 기간에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적용되고 있던 중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치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9월 30일에 돌연 중의원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이사회에서 이 법안의 폐기가 결정됐다. 법안 폐기가 결정되자 가이후는 "중대한 결의로 임한다"며 중의원을 해산할 방침을 보였지만, 당내 반발과 가이후를 지지하던 다케시타파의 해산 반대 기류도 있어 실제로 해산을 하지는 않았다. 이후 가이후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자 같은 해 10월에 열리는 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고 퇴진했다. 55년 체제의 붕괴와 연립 정권 시대의 도래. 1991년 10월 27일에 열린 총재 선거에서 미야자와 기이치가 승리하여 72세에 총리직에 취임했다. 그런데 1992년 가네마루 신의 불법 정치자금 수령 문제로 국민들의 자민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자민당 장기 집권에 따른 금권 정치의 폐해가 자주 거론되었다. 또 가네마루가 실각함에 따라 다케시타파 후계자 싸움에서 패한 오자와 이치로와 하타 쓰토무는 다케시타파가 이름을 바꾼 오부치파와 정치적으로 갈라져 하네다파를 결성했다. 가이후 내각 시절 폐안되었던 정치 개혁 법안을 다시 추진한 미야자와 내각은 법안 성립을 목표로 했으나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로 폐안되고 말았다. 이후 이에 반발한 미쓰즈카파 회장이었던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하네다파 등 일부 세력이 대거 자민당을 탈당했다.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며 이루어진 중의원 해산으로 치러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해산 당시의 의석을 획득하며 중의원 제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고, 대신 자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만든 신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편 자민당과 함께 전후 일본 정치를 좌우해 온 55년 체제의 한 축이었던 일본사회당 역시 참패했다. 그 결과,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이 최초로 성립되어 창당 이래 줄곧 집권 여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던 자민당을 야당으로 전락시켰다. 미야자와 기이치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같은 해 7월 30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와타나베 미치오를 꺾고 고노 요헤이가 당선되었다. 한편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자 자민당 내부에서 연립 여당으로 이적하는 의원도 생겨났다. 선거 결과에 따라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병립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정치 개혁 법안의 성립을 목표로 하였고, 법안 심의 과정에서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되 석패율제를 도입하자는 자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1994년 1월 29일에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수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바뀐 선거 제도는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 적용되었다. 연립 정권은 호소카와 내각을 지나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총리직을 이어받으면서 계속되었지만, 모두 오래가지 못했고 오히려 정책을 둘러싼 의견차로 연립 정권 내의 불협화음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민당은 55년 체제 하에서 대립 구도에 있었던 일본사회당과 함께 새로운 연립 정권을 구성하기로 하였고,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총리로 하고 여기에 신당 사키가케가 참여하는 형태로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정이 출범하였다. 이로써 자민당은 약 1년만에 연립 여당으로서 정권에 복귀했다. 1996년 1월 11일에는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를 총리로 하여 다시 한번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 내각이 출범하였다. 동년의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과반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239석으로 의석을 크게 회복했다. 같은 해 간 나오토, 하토야마 유키오 등의 개혁파 인사들이 창당한 민주당이 사회 개혁을 내세우며 자민당과 대립각을 세우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하시모토 내각이 당내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1993~1994년의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을 담당했던 인사들의 대부분은 신진당에 포진해 있었지만, 자민당의 적극적인 러브콜에 의해 신진당에서 자민당으로 이적하는 의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민당은 1997년에 총선거를 거치지 않고 중의원 과반수 의석을 회복했다. 소속 의원들의 이탈로 당세가 크게 위축된 신진당은 결국 해산되었고, 과반을 회복했기 때문에 성향이 다른 정당과의 연립 정권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자민당은 1998년에 일본사회당에서 개편된 사회민주당 및 신당 사키가케와의 연립 정권을 종료하고 자민당 단독 정권을 구성했다. 하시모토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로 자민당은 1998년 제18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하는 참패를 기록하며 하시모토 내각이 총사직했다. 후임은 오부치 게이조가 되어 오부치 내각이 출범했다. 자민당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1999년 1월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자유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 "자자 연립 정권"이 출범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공명당이 연정에 합류하여 "자자공 연립 정권"으로 바뀌었다. 2000년에는 자유당이 연정에서 이탈하고 대신 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보수당이 연정에 들어와 "자공보 연립 정권"으로 또다시 바뀌었다. 이 시기부터 자민당과 공명당의 본격적인 공조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 오부치가 질병으로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모리 요시로를 새 총리로 하는 모리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모리의 계속되는 실언에 자민당의 정치 공작 의혹까지 더해지며 내각 지지율은 침체 상태에 빠졌고, 이에 당내 일부 세력이 모리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자 코너에 몰린 모리 내각은 총사직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 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이른바 "YKK"가 고이즈미 내각을 수립했다. 구조 개혁과 참의원의 여소야대. 1991년, 일본의 버블 경기가 종말을 맞았다. 이 시기 냉전이 종결되고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기존의 정부 주도형 경제 운영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러한 국제 질서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경제 정책 전환에 실패하였다. 정부는 경기 부양 효과가 크지 않다고 여겨지던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을 비롯해 비효율적인 여러 국책 사업을 밀어붙이며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했는데,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업에서 손실이 발생하면서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모두 막대한 재정 적자를 떠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 일본은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부동산 가격이 실제 가치보다 매우 부풀려진 상태에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야마이치 증권, 산요 증권, 홋카이도 척식 은행, 일본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 등 주요 금융 기관들이 경영 실패로 파산에 이름과 동시에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의 수출 경쟁력 또한 약화되어 해외 투자가 감소하여 주식 및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게 일본의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에 빠지면서 기존에 정부가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이 유지되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추진해 온 경제 정책이 전환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2001년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하면서 재정 적자의 원인이 된 비효율적인 국책 사업을 중단시켜 정부 예산의 낭비를 억제하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권한을 민간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으며, 기존에 정부 주도로 각 지방에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지지 기반을 확보했던 자민당의 관습을 폐지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사자 모양의 헤어 스타일을 가지는 등 차별화를 꾀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고이즈미 돌풍"으로 불릴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이즈미 내각 출범 직후인 2001년 4월에 실시된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역대 내각 지지율 중 최고 수치인 87.1%를 기록했으며, 동기간에 실시된 여론조사 중 가장 낮은 수치인 아사히 신문 조사에서도 78%를 기록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내각관방 산하 내각공보실이 발행하는 인터넷 잡지인 "고이즈미 내각 메일 매거진"을 발행하였는데, 구독자가 2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큰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이즈미의 인기에 힘입어 자민당은 같은 해 7월의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고이즈미는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3년 10월,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고이즈미는 비례대표 의원에 73세 정년제를 적용할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83세의 미야자와 기이치는 정계 은퇴를 선언한 반면 85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완강히 저항하며 용퇴를 거부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 집행부의 강한 의지로 결국 나카소네는 용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실시된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 신보수당의 연립 여당은 절대 안정 다수를 유지했지만, 자민당은 10석이 줄어들었고 여권 전체로는 12석이 줄어들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에 자민당이 신보수당을 흡수 합당하고부터는 자민당과 공명당의 양당 연립 정권으로 개편되었다(자공 연립 정권). 2004년 7월, 제2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는 연금 제도 개혁이 선거 쟁점으로 떠올랐다. 고이즈미 내각은 선거 직전인 6월에 연금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선거 결과 자민당은 49석을 얻는 데 그쳐 50석을 얻은 민주당에 1석 뒤졌다. 2005년 8월에 열린 통상 국회에서는 고이즈미 내각의 핵심 공약이었던 우정 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에서는 가결된 반면에 참의원에서 부결되었고, 법안 표결 직전 "우정 민영화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다면 중의원을 해산하겠다"는 고이즈미의 예고에 따라 중의원이 해산되었다. 이렇게 열린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는 다른 모든 이슈를 "우정 민영화" 단 하나만으로 덮어버리는 선거 전술을 사용하여 자민당 정권에 반대하는 여론을 최소화시켰다. 결국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하고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의석을 합해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327석을 확보하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우정 민영화에 반대했던 당내 일부 의원들이 제명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대부분이 낙선하는 타격을 입으면서,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 내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기류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고이즈미 정권 후반기인 2005년부터는 "포스트 고이즈미"로 불리며 고이즈미를 이을 차기 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는 "포스트 고이즈미"의 대표 4인방으로 꼽혔다. 2006년 9월 20일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선거 전부터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되어 왔고 고이즈미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한 아베 신조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후 9월 21일 고이즈미의 자민당 총재 임기가 만료되었고, 9월 26일 고이즈미 내각이 총사직하며 아베 내각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아베 내각은 사회보험청의 연금 가입자 기록 문제가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으며, 연이어 각료들의 스캔들이 터지는 등 위기에 직면하여 2007년 7월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은 37석을 얻는 데 그쳐 60석을 얻은 민주당에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 제2당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해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다수파가 서로 다른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네지레 국회). 이로 인해 안건을 통과시키려는 여당과 어떻게든 참의원에서 안을 부결시키려는 야당의 대립이 격화되어 국정 운영의 효율성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자민당 정권의 레임덕도 가속화되었으며, 총리도 1년마다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로 바뀌는 등 총리의 지도력도 약화되었다. 2번째 야당 시절과 여당 재복귀. 2009년 7월 12일, 도쿄도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중의원의 4년 임기 만료에 따른 총선거가 늦어도 2009년 10월까지는 실시되어야 했기에 이 선거는 "총선거의 전초전"으로 불렸다. 선거 결과 자민당은 총 127석의 도쿄도의회 의석 중 38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하였고, 야당인 민주당은 54석을 얻어 의회 제1당을 차지했다. 총선거만큼 자민당이 공을 들였던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과가 나오자,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기자회견을 열고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스모(패배)를 당했다. 대단히 귀찮은 결과"라고 말하며 아소 다로 등 당 지도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선거 후 자민당 내에서는 당 총재이자 내각총리대신인 아소 다로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아소 다로는 자신에 대한 퇴진 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선거 다음 날인 7월 13일 오후에 기자회견을 통해 "7월 21일에 중의원을 해산해 8월 30일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며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였고, 일각에서 제기된 당 총재직 사퇴 요구는 일축하였다. 아울러 민주당 등 야권은 선거 결과를 기회로 삼아 중의원에는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참의원에는 총리 문책 결의안을 제출하였으며, 이후 불신임 결의는 중의원(자민당이 제1당)에서 부결, 총리 문책 결의안은 참의원(민주당이 제1당)에서 가결되었다. 이후에도 자민당 내에서는 불협화음이 계속되었고 일부 중진들도 "아소 총재 체제로 총선거를 치르면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라며 지도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아소의 예고대로 2009년 7월 21일 중의원이 해산되었고, 8월 30일에 실시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119석을 얻는 데 그쳐 308석을 얻은 민주당에 대참패를 기록했다. 전직 총리와 유력 파벌의 수장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줄줄이 민주당의 신인 후보에 패하였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중의원 제2당이 되어 야당으로 전락했다. 직전인 1993~1994년의 야당 기간에는 그래도 중의원 제1당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이번에는 완벽한 패배였다. 자민당이 선거 패배의 충격으로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각료 경험자를 비롯한 현직 국회의원의 탈당자가 속출했으며, 2010년 6월까지 약 7개월동안 탈당자가 15명에 달했다. 아소 다로 총재는 선거 다음 날 아침, 참패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아소 내각이 총사직하였고, 아소에 사임에 따라 9월 28일 열린 2009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야당이 된 후 처음 치른 전국 단위 선거인 2010년 7월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민주당 정권의 핵심 인사인 오자와 이치로가 소비세율 인상을 주장하여 여론의 반발을 불렀고, 여기에 오자와의 불법 정치자금 문제, 오키나와현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을 둘러싼 정권 내부 갈등이 겹치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하였으며, 이를 틈타 자민당은 개선 의석 기준으로 51석을 획득하여 44석을 획득한 민주당을 누르고 연립 여당의 참의원 과반 의석 확보를 저지했다. 이후 2012년 12월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절대 안정 의석인 294석을 획득(하토야마 구니오의 복당으로 선거 직후 295석으로 증가)하며 중의원 제1당에 올라섰다. 이후 12월 26일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며 자민당은 공명당과 함께 약 3년 3개월 만에 집권 여당에 복귀했다. 2013년 7월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공명당과 의석을 합하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2014년 12월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291석을 획득해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2016년 7월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한 명을 선출하는 32개의 소선거구에서 자민당은 21승 11패를 기록하는 등 지역구 37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6석을 획득했다(전체 121석). 이 선거를 통해 일본국 헌법의 개정에 찬성하는 이른바 "개헌 세력"(자민당 + 공명당 + 일본유신회 +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 + 기타 개헌에 적극적인 정당 및 무소속 의원 포함)이 중참 양원에서 모두 3분의 2를 넘어 개헌 발의 요건을 충족했다. 선거 직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히라노 다쓰오가 자민당에 입당하면서 27년 만에 참의원에서 단독 과반수 의석(122석)을 확보했다. 2017년 1월 16일,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이후 "일본의 마음"으로 당명 변경)과 참의원에서 통일 회파(교섭단체)를 구성했다. 회파명은 "자유민주당·마음"이다. 2017년 10월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218석, 비례대표 66석으로 총 284석을 획득했다. 자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야당인 민진당이 분열되어 희망의 당과 입헌민주당으로 나뉘어 표가 분산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야권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최대 63개의 지역구에서 당선자가 뒤바뀐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018년 11월, 일본의 마음을 흡수 합병했다. 이에 앞서 참의원에서의 회파명을 "자유민주당·국민의 목소리"로 바꾸었다. 2019년 7월 제2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한 명을 선출하는 32개의 소선거구에서 22승 10패를 기록하며 지역구 38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7석을 획득했다. 이는 직전 제24회 참의원 선거의 56석에서 1석이 증가한 것으로, 이 선거에서 개선 대상이 된 66석에는 못 미쳤다. 자민당, 공명당의 연립 여당은 전체 개선 의석인 121석의 과반수인 63석을 넘는 71석을 획득했지만 개선 대상인 77석에서는 6석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자민당은 참의원 단독 과반수 의석 유지에 실패했다. 비개선(비선출) 의석을 포함한 참의원 전체로는 자민, 공명 연립 여당을 포함해 개헌에 찬성하는 일본유신회와 일부 무소속 의원을 포함한 이른바 "개헌 세력"의 비개선 의석은 79석이므로 개헌이 가능한 전체 의석의 3분의 2인 164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번 선거에서 85석 이상을 얻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81석을 얻는데 그치면서 3분의 2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아베 신조 총재는 국민민주당의 일부 개헌 찬성 세력 등의 협력을 얻어 조기에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경우 개헌 자체에 부정적인 인사들도 많아 실제로 개헌이 이뤄질지의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다. 당직. 총재. 자유민주당의 당수이며, 당의 최고 책임자로서 당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임기는 3년으로, "연속 3기"에 한정하여 재임할 수 있다. 제1당의 총재가 내각총리대신직을 맡게 되는 관례에 따라 일반적으로 자유민주당의 총재는 총리직을 겸하게 된다. 현재 총재는 제27대 총재인 기시다 후미오이다. 지지 기반. 대도시와 지방. 농업 종사자에 보조금을 교부하고, 전국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건설하는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 등 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경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이래 답습해 온 자민당은 농어촌 및 지방 소도시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고, 반대로 대도시 및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열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등의 자유 무역 협정을 추진하여 농수산물 수출입의 전면 개방이 이뤄지면서 농어촌 지역의 지지율이 빠지는 한편,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이후 언론 홍보 및 당의 이미지 개선에 공을 들이면서 종래의 자민당 지지층 외에 대도시 지역 무당층과 정치에 무관심했던 층으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당수의 이미지를 보고 자민당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B층"이 생겨났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인구 밀도가 낮은 지자체에서는 자민당의 득표율이 높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으로 갈수록 득표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자민당이 농업협동조합(농협)을 매개로 한 두터운 기반을 지방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지방자치단체별. 자민당은 현직 내각총리대신이자 당 총재인 아베 신조가 지역구를 두고 있는 야마구치현과 호쿠리쿠 지방 3현(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 그 밖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자민당의 득표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소득 수준별. 과거 10년 간의 자민당 지지율 추이를 가구 소득별로 보면 2005년에는 부유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두 지지율이 비슷했던 반면, 2015년에는 상대적으로 부유층의 자민당 지지가 상승하고 빈곤층의 지지는 하락했다(아래 표 참조).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가구당 연 소득이 300만 엔 미만인 경우 자민당 지지층에서 이탈하여 무당층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총무성 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도쿄도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자의 득표율(나카가와 마사하루 및 아사히 겐타로의 합)은 가구당 평균 소득이 높은 지자체에서는 높았던 반면, 평균 소득이 낮은 지자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다(오른쪽 그래프 참조). 연령별. 연령별로는 20대와 70대 이상에서 많은 표를 얻는 추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자민당이 70대 이상의 고령층 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듯 20대 등 젊은 층에서는 "지지 정당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비율이 자민당 지지율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고, 이들 무당층의 대부분이 투표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자민당의 득표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한 여론조사에서 연령별 자민당 지지율을 보면 70대 이상이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60대, 50대, 40대 순이었으며 30대 이하의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했다. 한편, 무당층의 비율은 30대 이하에서 가장 높았다. 지원 단체.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2013년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를 지원한 종교 단체는 다음과 같다. 비판 및 사건 사고. 역사관. 일본 자유민주당의 역사관은 종종 해외 역사학자들에게 극우적인 역사 왜곡이라고 여겨진다. 자유민주당이 지원하는 교과서에는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에 대한 사건 축소,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군국주의 옹호 등 여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의 증거를 입증할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침략의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인식에 대한 논란이 있다. 더불어 종군위안부는 군에 의한 강제 동원이 아니었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다. 자유민주당의 많은 정치인들은 헌법 9조를 폐기 및 일본 재무장하며,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재 군국주의화라는 주변국의 비판이 존재한다. 더불어 자유민주당의 많은 정치인들은 주변국에 대한 망언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으며,이러한 역사 부정은 자국의 일본 공산당을 위시로 한 혁신 정당 계열에게도 비판받았다. 부정부패. 자유민주당의 총재인 스가 요시히데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의 자유민주당 의원들은 정경 유착 및 부정 부패에 연루되어있다는 의혹을 받으며, 벚꽃 스캔들이라 불리는 스캔들 의혹으로 현재 자유민주당 당직자들 중 상당수가 조사중에 있다. 5억 8천만원이 사용된 벚꽃 축제라는 점에서 횡령의 의심되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2017년 아베 총리는 우익 유치원과 유착해 땅 특혜 매입을 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이 유치원은 우익적 사관을 세뇌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609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09
옴의 법칙
옴의 법칙()은 도체의 두 지점사이에 나타나는 전위차(전압)에 의해 흐르는 전류가 일정한 법칙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두 지점 사이의 도체에 일정한 전위차가 존재할 때, 도체의 저항(resistance)의 크기와 전류의 크기는 반비례한다. formula_1는 도선에 흐르는 전류로 단위는 암페어(A,ampere), formula_2는 도체에 양단에 걸리는 전위차로 단위는 볼트(V,volt), 그리고 formula_3는 도체의 전기저항(resistance)으로 단위는 옴(Ω, ohm)이다. 특히, 옴의 법칙에서 저항 R는 상수이고, 전류와 독립적이다. 회로망에서 저항은 두 노드(node) 사이에 존재한다. 옴의 법칙은 다른 회로 법칙과 함께 회로 해석에 중요한 요소이다. 저항은 물리적으로 특정 형태를 갖는 일정한 길이의 물체로 존재하므로, 전체 전위차가 저항체의 길이 전체에 나누어 분포한다. 그러나 회로망 해석에서는 두 노드 사이에 존재하는 한 점으로 모델링하여 전체 저항값(상수값)을 저항의 대표값으로 취급하여 해석한다. 옴의 법칙은 전자기학의 법칙 중 하나이다. 이름은 독일의 과학자 게오르크 옴의 이름을 딴 것이다.그러나 후에 저항이 없는 물질이 발견됨에 따라 옴의 법칙이 모순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옴의 법칙의 원형. 옴의 법칙은 미시적으로 다음과 같다. J는 전류 밀도이며, σ 는 전기전도율 (비등방성 물질에서 텐서일 수도 있음)이고, E는 전기장이다. 이 방정식은 오직 전도체의 기준계에서만 유효하다. 만약 물체가 자기장 B에 대해 v의 속력으로 움직인다면 이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이 식은 로런츠 힘과 관계를 가지는데, 이로써 옴의 법칙을 로런츠 힘과 (전하 운반체의 속력에 비례하는) 항력이 있다는 가정 아래 유도할 수 있다. 옴의 법칙의 미시적인 형태에서 "전기장과 도선의 전압, 도선의 길이간에 상관관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옴의 법칙의 거시적인 형태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1는 전류 밀도를 적분한 전류이고, formula_3은 비저항 formula_9을 적분하여 얻은 저항이고, formula_2는 전기장을 적분하여 얻은 전압이다.
610
11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0
게오르그 옴
612
22827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2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 1928년 11월 3일 ~ 1989년 2월 9일)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오사카 대학을 졸업한 의사이기도 하다. 본명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다. 《우주소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의 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다작 성향, 선구적 테크닉, 장르의 혁신적인 정립으로 "일본 만화의 아버지", "일본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선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가신 데즈카 미쓰모리이며, 고조, 증조 할아버지도 대대로 에도 시대의 난학자였다.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 부속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 재학 중이던 1946년 1월 1일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 『소국민신문』(少国民新聞)에 연재)으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1947년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가 원안을 그린 만화 단행본 『신보물섬』(新寶島)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오사카에서 아카혼(赤本) 붐을 일으켰다. 1950년부터 만화잡지에 등장,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등 히트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1963년、자신의 작품을 토대로 일본 최초의 30분짜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 이후의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0년대에는 『블랙잭』(ブラック・ジャック), 『삼목동자』(三つ目がとおる), 『붓다』(ブッダ) 등의 히트작을 발표하였다. 또한 만년에도 『양지의 나무』(陽だまりの樹), 『아돌프에게 고한다』(アドルフに告ぐ) 등 청년만화에 있어서도 걸작을 남겼다. 데뷔 때부터 사망(1989년)할때까지 일선에서 작품을 발표해 나갔고, 생전부터 일본 만화계에서 「만화의 신」(マンガの神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藤子・F・不二雄、藤子不二雄A)、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야시로 마사코(矢代まさこ)、하기오 모토(萩尾望都)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데즈카 오사무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접촉이 있었던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생애. 어린 시절. 데즈카 오사무(본명 오사무治)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도요노 군(豊能郡) 도요나카 정(豊中町, 지금의 도요나카시豊中市)에서 데즈카 유타카(手塚粲, 1900년 - 1986년 5월 14일)와 어머니 후미코(文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마침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明治節)이었기에 「메이지」(明治)에서 한 글자를 따서 「治」를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1933년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에 그의 집안은 1년 전에 타계한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효고 현(兵庫県) 가와베 군(川辺郡)의 오하마 촌(小浜村, 지금의 다카라즈카시宝塚市) 가와모(川面)로 이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다카라즈카에는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가 미노오아리마 전기궤도(箕面有馬電気軌道)의 승객 증가를 노리고 전원 풍경 가운데 개발한 신흥 주택지가 산재해 있었고,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宝塚少女歌劇団, 훗날의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의 전신)의 본거지였던 다카라즈카 대극장(宝塚大劇場)、다카라즈카 패밀리 랜드(宝塚ファミリーランド)의 전신인 다카라즈카 신온천(宝塚新温泉)이나 다카라즈카 루나파크(宝塚ルナパーク) 등 행락시설이 차례로 세워져 일종의 별천지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다카라즈카의 인공적인 근대도시 풍경은 데즈카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오사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宝塚ホテル) 안에서 세워진 다카라즈카 구락부(宝塚倶楽部)의 회원이었고 때때로 오사무는 아버지를 따라 다카라즈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또 데즈카 집안의 옆집에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남자배역 톱스타였던 아마쓰 오토메(天津乙女, 본명 도리이 에이코鳥居榮子)와 구모노 가요코(雲野かよ子, 본명 도리이 카코鳥居華子)와 이케노베 쓰루코(池邊鶴子, 본명 도리이 히사요鳥居久代) 세 자매가 살고 있어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이 그 보호자와 함께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등,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여성들과 접할 기회도 많았다. 훗날 데즈카는 자신의 첫사랑 상대도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생도였다는 것, 다카라즈카 생도를 보려고 다카라즈카 대극장에 다녔다는 것, 쓰키오카 유메지(月丘夢路)나 아와시마 지카게(淡島千景) 같은 당찬 여성을 좋아했었다는 것, 1942년작 쓰키오카 주연의 영화 『신설』(新雪)을 스무 번이나 보았다는 것 등을 회고하고 있다. 1935년,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池田師範附属小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교육대학부속 이케다 소학교大阪教育大学附属池田小学校)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도쿄 출신이었던 탓에 긴키 방언을 잘 하지 못했던 그는 학교에서 맴도는 존재였고 2학년때에는 「안경잽이 꼬마」(ガヂャボイ)라는 별명까지 붙어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본 것을 그린 만화 그림이 오사무를 구원해 주게 되는데, 소학교 3학년 때 최초의 만화 「핑핑 세이쨩」(ピンピン生チャン)을 완성했고, 그 뒤 만화 연습을 이어나갔으며 소학교 5학년 때에는 장편만화 「지나의 밤」(支那の夜)을 완성하였다. 그 작품은 급우들 뿐 아니라 학교 교사들 사이에도 화제가 되는 등 이후 교사들로부터도 만화를 그리는 것을 묵인받았다고 한다.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학급 내에서 일약 주목받으며 만화가 계기가 되어 처음에는 그를 괴롭히던 급우가 데즈카의 집에 놀러올 정도가 되는 등 차츰 따돌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데즈카의 생일에는 그의 집에 스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친구들이 집에 올 때는 당시에는 진기한 것이었던 홍차와 과자도 가져왔고 오사무의 생일에는 모둠초밥(五目寿司, 이전 문서에는 모듬초밥이라고 했는데, 여러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모둠이라고 해야 한다. 모듬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숙제 등 학교 공부를 하는 모습을 뜻함.)이며 계란찜 요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린 만화의 일부는 이후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소장 보존되어 있다. 이 시기에 오사무의 동급생 이시하라 마코토(石原実, 오사카 요도야바시淀屋橋 이시하라 시계점石原時計店 사장)와 친해졌고, 그의 영향으로 곤충이나 과학,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데즈카 집안의 넓은 정원에는 곤충 창고가 있었고、또 주위의 전원지대에서도 많은 곤충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곤충 채집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으며, 곤충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해 주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빌린 히라야마 슈지로(平山修次郎)의 『원색천종곤충도보』(原色千種昆蟲図譜)를 읽으며 딱정벌레목 딱정벌레류(オサムシ)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무렵까지는 「治虫」는 그대로 「오사무시」로 읽었다. 청년 데즈카 오사무와 태평양 전쟁. 1941년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부립 기타노 중학교(大阪府立北野中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부립 기타노 고등학교大阪府立北野高等学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 전국은 전쟁 중으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학교에까지 물들어 있었고 소학교 시절과는 달리 만화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학교의 교련 교관에게 그가 만화를 그리는 것이 눈에 띄어서 교관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이 시기 그는 급우들 사이에서 제작한 동호회 회지(会誌) 등을 통해 만화를 집필하는 한편으로 데즈카판(手塚版) 「원색 딱정벌레 도보」(原色甲蟲圖譜) 등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도감을 자체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44년 여름에는 체력이 약한 자가 들어 가는 강제수련소에 보내졌다. 9월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군수공장에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데즈카는 격납고 지붕을 덮는 슬레이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전쟁에 따른 수업 연한 단축에 따라 기타노 중학을 4년만에 졸업하고 6월에 근로봉사로 감시초를 서고 있을 때 오사카 대공습이 벌어졌는데, 오사무의 머리 바로 위로 소이탄이 투하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 공습은 데즈카 자신의 체험담으로써 훗날 그가 1974년에 그린 만화 『종이상자』(紙の砦)나 1979년부터 1년 간 그린 『세게 때리기』(どついたれ) 등 자전적 작품 속에서 묘사된다. 이 체험 이후 데즈카는 공장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1945년 3월에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舊制浪速高等学校)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패전 한 달 전인 7월에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의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에 응시해 입학을 허가받았다. 의학전문부는 전쟁의 장기화로 군의관을 속성으로 길러내기 위해 임시로 오사카 제국대학 내에 부설된 것으로 학제상으로는 구제 의학전문학교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구제중학교에서 입학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사카 대학(大阪大学, 옛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는 1951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한창 《정글대제》와 《우주소년 아톰》을 연재하던 와중이었다. 데뷔, 책의 세계로. 종전 후, 학생인 데즈카 오사무는 전시에 그린 장편 중에서 "유령남(幽霊男)"("메트로폴리스"의 원형)이라는 장편을 마이니치 신문 학예부에 보냈다. 이는 소식 없이 끝났지만, 그 후, 이웃집에 살던 마이니치 신문의 인쇄국에 다니는 여성의 소개로 어린이의 소국민신문(현 매일소학생신문) 학예부의 호도노(程野)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의뢰를 받아 소국민신문의 오사카 판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ァチャンの日記帳)"을 연재(1946년 1월 1일~3월 31일), 이 작품이 데즈카의 데뷔작이 됐다. 이 "마아짱"은 로컬이면서 인기가 있고 인형과 바리 막과자의 캐릭터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마아짱에 이어서 4월부터 교툐일일신문에 4컷 만화 "진념과 쿄짱(珍念と京ちゃん)"을 연재했으며 이들과 함께 4컷 형식의 연재 장편 작품 "A짱 B짱 탐험기(AチャンB子チャン探検記)", "화성에서 온 남자(火星から来た男)", "로스트 월드(ロストワールド)" (후술 하는 것과는 별개) 등도 각지에 그려지고 있지만 4컷 연재 형식에 한계가 있어, 후 2자 어느쪽도 중단에 가까운 형태로 끝났다. 만화가로서 데뷔 전의 1945년경, 2대째 카츠라하루단지가 지방에서 자주 흥행을 할 때의 포스터화를 제공했다(현물은 다카라즈카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2대 하루단지가 다카라즈카시 청황신 거주라는 것도 있어, 친분을 먹으면서, 데즈카의 만화가를 지망하는 진로를 걱정하고, 만담가가 되라고 권했다고 한다. 1946년 동인지 "망가만"의 정례회를 통해서 후원자인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와 알게 되어 사카이에서 장편 스토리 만화의 합작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는 전후 최초의 호화본의 기획이며, 그것까지 장편 만화를 그리다 모으고 있던 테즈카로서는 바라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략적인 구성을 사카이가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테즈카가 자유롭게 그리려고 하는 형태로 200쪽의 그림 장편 "신보물섬"이 제작된다. 1947년 1월에 출판되자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었다. 영화적 구성과 빠른 이야기 전개를 가진 "신보물섬"은 일반적으로 전후 스토리 만화의 원점으로서 포착된다 베스트 셀러가 된 "신보물섬"은 오사카에 적본붐을 일으키면서 데즈카는 이에 타서 그린 단행본 형태로 장편 작품을 발표하게 된 . 데즈카는 바빠지고, 그동안에 그리고 쌓아 온 장편을 바탕으로 학업과 아울러 한달에 1,2권은 작품을 그리 올려야 했다. 1947년에 발표된 "화성박사"(火星博士), "유령 코롱코 박사(怪人コロンコ博士)", "킹콩(キングコング)" 등은 어린이를 의식한 B급 영화적인 작품이었지만 1948년 "지저국의 괴인(地底国の怪人)"에서는 비극적인 전개도 도입하게 되고 SF 모험 등을 소재로 작품 중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그 해 말에 그려진 "로스트 월드"에서는 다양한 입장의 인물이 얽혀 지구 규모의 장대한 이야기가 그려지져, "메트로폴리스"(1949년) "와야할 세계(1951년)와 함께 데즈카의 초기를 대표하는 SF 3부작를 이룬다. 1949년 서부 영화 "권총 천사"에서는 아동 만화에서 최초의 키스 장면을 그렸다. 1950년에는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를 만화화한 것 외에 '영화 제작의 무대 뒤를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도입으로 시작되는 '신비 여행기', 자신의 만화 수법을 체계화하여 보여준 만화 입문 책의 선구적 작품 '만화대학' 등을 발표하고 있다. 만화 집필이 바쁘게 되면 대학의 단위을 얻기가 힘들어지는데, 데즈카는 의업과 만화와 겸직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교수에서 의사가 되기보다는, 만화가가 되라고 충고하고 또 어머니의 뒷받침도 있고, 데즈카는 전업 만화가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1951년 3월에 의학 전문부를 졸업(5년제, 1년 유급. 이 해에 전문부가 폐지되면서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하고 오사카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1년간 인턴을 맡아 1952년 3월에 제십이회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 1953년 9월 18일에 의적이 등록된다. 이 때문에 나중에 데즈카는 자서전 "나는 만화가"에서 "거기에서 지금도 본업은 의사이시고 부업은 만화인데, 누구도 묘한 얼굴을 하고 이 사실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잡지 연재 개시. 데즈카는 오사카에서 아카모토 만화를 그리는 옆, 도쿄에 반입도 하고 있다. 당초에는 코단샤에서는 거절당했지만, 신생각이라는 출판사에서 반입이 성공해, 여기에서 몇 개를 읽은 뒤, 신창간된 잡지 '소년 소녀 만화와 독서'에 1950년 4월부터 '타이거 박사의 진여행'을 연재, 이것이 데즈카의 최초의 잡지 연재 작품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부터 잡지 '만화 소년'(학동사)에서 '정글 대제'의 연재를 개시, 1951년에는 '철완 아톰'(1952년-)의 전신이 되는 '아톰 대사'를 '소년'(코분샤)에 연재하는 등 다수의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했고, 이 해에는 소년 만화지의 대부분에서 데즈카의 만화의 연재가 개시되었다. 1953년에는 "소녀 클럽"(코단샤)에서 『리본의 기사』의 연재를 개시했다. 다카라즈카 가극이나 디즈니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이후의 소녀 잡지에 있어서의 이야기 만화의 선구가 되었다. 1954년에는 '정글 대제' 연재 완결 후에 '만화 소년'에 '불새'의 연재를 시작했다. '불새' 시리즈는 그 후도 휴간 등에 의해 COM, 만화 소년, 야성 시대와 게재지를 바꾸면서 오랜 세월로 그려져, 데즈카의 라이프 워크가 되었다. 월간의 잡지 연재라는 형태는, 데즈카가 그간 단행본으로 다녀온 복잡한 이야기 구성의 재검토를 강요시키고,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나 단순한 이야기 구성 등의 작극 방법에 데즈카를 향하게 되었다 . 한편, 신작 단행본은 1952년의 '밤비' '죄와 벌'의 2권으로 끝을 말하지만, 대신 우편법 개정에 의해 이 시기에 잡지 부록이 급격히 증가해 데즈카는 연재 작품과 평행하여 부록 책자의 형태로 신작 장편 작품을 다수 다루고, 이 형태로 단행본 시대의 작품도 잇달아 리메이크 되었다. 사생활의 면에서는, 1952년에 다카라즈카에서 도쿄로 이주해, 또 다음 1953년에 「만화 소년」편집부로부터의 소개로 도시마구의 도키와 장에 입주 했다. 그 후 도키와 장에는 데즈카에 이어 테라다 히로오 , 후지코 후지오가 입주. 데즈카는 자신이 살고 있던 14호실을 후지코 후지오의 두 사람에게 양도해 도키와 장에서 에서 이동했지만, 그 후에도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후에 유명한 만화가가 되는 사람들이 잇달아 입주해 도키와 장은 만화가의 양산장이 되었다. 이 시기, 데즈카는 도키와 장의 만화가에게 영화를 많이 보도록 추천하고 있어, 데즈카 자신도 십수년간은 해에 365개를 반드시 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53년 데즈카는 간사이의 부호 순위의 화가의 부에서 톱이 되었지만, 직장이 목조2층 건물의 도키와 장이어서 취재하러 온 신문 기자한테 질렸기 때문에, 이후는 의식하고 고가품을 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철완 아톰", "나의 손오공" 등 아동 만화의 인기 작품의 연재를 하면서 데즈카는 1955년에 성인향 만화 잡지 "만화 독본"( 분게이 슌주 신사)에 "제3제국 붕괴", "곤충 소녀의 방랑기"를 발표했으며, 여기에서는 어린이용의 둥그란 그림과 다른 성인향의 터치를 시도하고 있다. 1955년부터 1958년에 데즈카는 지적 흥미를 앞세운 작품을 많이 냈으며,1956년에 SF단편 시리즈 "라이언 북스"를 시작했고, 학습지 "만화 생물학", " 만화 천문학" 등 학습 만화를 발표, 후자는 제3회 쇼가쿠칸 만화상(1957년)의 대상 작품이 되었다. 이 밖에도 유년용 작품이나 그림 이야기, 소설와 에세이 등 만화가의 테두리를 넘은 활동을 하게 되어 있으며,1958년에는 토에이 동화(현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연출가 시라카와 다이사쿠에게 부탁 받고 이 회사의 촉탁이 된 극장용 장편 만화 영화 "서유기"("나의 서유기"가 원작)원안 구성을 맡고 있다. 극화와의 싸움. 1958년경부터 각 만화 잡지에 쿠와타 지로, 타케우치 츠나요시, 요코야마 미츠테루 등의 인기 만화가가 다수 출현하고 있으며, 이 시기의 데즈카는 인기 면에서 그 같은 만화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어 데즈카를 위협했던 것은 이 시기에 새로 생겨난 극화의 존재였다. 사회의 어둠을 솔직하게 스트레이트로 그려 극화의 인기는 당시의 데즈카를 크게 앓고 계단에서 떨어진다던가, 오사카의 극화 작가의 거점으로 몰려가는 집회에 참석했다. 당초는 극화 잡지에서도 연재를 갖는 등 했으나, 데즈카의 어시스턴트까지 대본 극화를 수십권이나 그려면 테즈카는 노이로제에 빠지고 정신 감정도 받았다. 또 이미 1957년에는 "황금의 트렁크"("서일본 신문" 연재)에서 극화 풍의 터치를 시도하면서 서서히 극화의 방법론을 자작에 거두어 가게 된다. 1959년 주간지 붐을 타고 주간 만화 잡지 "소년 매거진(코단샤)및 소년 선데이(쇼가쿠칸)가 창간되며 이후 월간 소년지는 점차 사라지고 나가게 되었다. 이때 데즈카는 권유를 받고 쇼가쿠칸의 전속 작가가 되었는데 코단샤에서도 권유를 받고 곤혹스러워했는데 결국 소년 선데이 창간호에는 자신의 손에 의해 "스릴 박사"을 연재, 소년 매거진쪽에는 연재 13회분의 밑칠만을 하는 이시모리 쇼타로에 "쾌걸 하리마오"의 연재를 시키고 있다. 그 해, 다카라즈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이르기까지. 전술대로, 유년기부터 디즈니 영화을 애호했던 데즈카는 원래 애니메이션(주:1960년대쯤까지는 일반 세간에서 만화 영화라 불렸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의 제작은 염원의 일이었다. 특히 영향을 받은 작품은 디즈니의 "밤비"(1942년 미국공개)이지만, 이것은 일본에서는 전후의 1951년에서야 공개되었다(디즈니의 "백설공주"(미국 공개 1937년)과 "피노키오"(미국 공개 1940년)도 일본에서 공개는 전후가 된 것이다). 일본은 전시 중은 디즈니와 플라이셔 브라더스 등 미국의 애니메이션의 공개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1942년(쇼와 17년)에 전시 중의 일본에서 처음 공개된 애니메이션 작품인 아시아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 "철선공주"(중국,1941년 73분, 흑백)을 보고 감동했다. 전후 상당히 지난 1980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상하이 미술 영화 제작소에서 감독의 완라이밍과 대면을 하고 손오공와 아톰이 악수하는 일러스트를 제작했다. 프로 만화가가 되기 전의 패전의 년인 1945년 데즈카는 불 타버린 오사카의 쇼치쿠좌에 관해서 해군성 제작의 장편 만화 영화 "모모타로 바다 신병"을 보고감격의 눈물, 이 때 장래에 반드시 자기 손으로 만화영화를 만드는 것을 결의했다. 전후 1946년(쇼와 21년)에 상경했을 때 애니메이터 모집의 벽보를 보고 만화영화 제작 회사"아시다 만화 제작소"(아시다 켄)에 가서 채용을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만화는 데즈카의 애니메이션 제작의 자금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평론가의 오오야 소이치로부터(화교처럼 출신지인 오사카를 떠나서 도쿄에서 번다는 의미의 야유로)"판교"와 비웃음 평가될 정도로 만화를 그리며 벌어 댔다. 또 스스로를 "디즈니광"이라고 말했다. 또 전술대로, 토에이 동화에서 부탁 받고 촉탁 업무를 받고 있다. 무시 프로덕션 설립. 1961년, 테즈카는 자신의 프로덕션인 데즈카 프로덕션에 동화부를 설립했다. 당초는 6명의 스태프에서 시작했다. 처음 제작한 작품 "어떤 거리의 이야기"는 스태프의 급료에서 제작비까지 모두 데즈카가 그린 만화의 원고료로 충당했고, 1년 동안 40분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블루 리본상이나 문부성 예술제 장려상 등 여러 가지 상을 받는다. 그 후 1962년에 동화부는 "무시 프로덕션"으로 개명했다. 무시 프로덕션은 전성기에는 400명을 넘어선 수의 정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철완 아톰. 무시 프로덕션에 개명 후, 일본 최초가 되는 30분 범위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당시는 텔레비전 만화라고 말했음) 철완 아톰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초에는 총 10명에도 못 미치는 스태프로 매주 텔레비전 방송용으로 디즈니 같은 그림의 장수를 요구하는 풀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작업량 면에서 전혀 불가능하며, 매주 방송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림의 장수를 대폭 삭감하기 위한 다양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수법을 이용하여 짜내기에 이르렀다. 매주 방송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미 미국의 해나 바베라 등에서도 작업 수를 줄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제작은 이루어졌지만 그것들도 참고해서) 시행 착오와 창의력을 쌓아 만든 다양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과 양식은 이후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전반에 큰 영향을 주게 된되었다. 무시 프로덕션의 아톰은 당시 일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대인기 작품이 되었다. 정글 대제. 1967년에는 자신의 만화가 원작인 '정글대제(한국명: 밀림의 왕자 레오)'가 제28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산마르코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1969년부터 '아니메 라마 3부작'(두번째 작품 '클레오파트라'를 감독)이 제작된다(주: 아니메 라마의 첫번째 작품 '천일야화'와 2번째 작품의 클레오파트라의 기획과 제작에는 데즈카는 강하게 관여하고 있지만, 세 번째 애니메이션 라마 "슬픔의 벨라돈나"는 데즈카가 무시 프로덕션을 그만둔 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데즈카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종래의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영화와는 반대의 위치에 있어, 성인용으로 만들어진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또한, 무시 프로덕션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는 스기이 기사부로, 린 타로, 야마모토 에이이치, 데자키 오사무, 타카하시 료스케, 토미노 요시유키, 요시카와 소지 등, 애니메이터로서는 나카무라 카즈코, 츠키오카 사다오, 카와지리 요시아키, 아시다 토요오, 야스히코 요시카즈, 스기노 아키오, 아라키 신고, 키타노 히데아키, 무라노 모리비, 카나야마 아키히로 등, 제작자로서는 마루야마 마사오, 스즈키 요시타케, 키시모토 요시나리, 타시로 아츠미, 시미즈 타츠마사, 와카오 히로시, 핫타 요코, 아케타가와 스스무, 사카이 아키오, 메노가와 유지 등 후에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되는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저액의 애니메이션의 공죄. 비록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방법을 이용해도 텔레비전 방송의 30분용으로(최저 레벨로) 1개당 2,000장분의 동화을 동화가(애니메이터) 5명으로 담당해, 한사람이 하루 66장 마무리 라는 가혹한 노동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 작품을 1개당 55만엔 이라는 파격적인 제작비로 팔린 것이 제작부의 머리을 조리게 되었다. 데즈카가 애니메이션의 가격을 싸게 팔았던 것은, 당시의 보통의 TV 프로그램의 제작비가 50만 정도였던 것과, 싸게 하면 스폰서에 받아들이기 쉬워지는 것이나, 타인의 경쟁 참가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데즈카 자신이 「대실패였다」 라고 인정한 것처럼, 결과적으로 대오산이었다. '아톰'의 대성공을 보고 타인이 이 분야에 차례차례 진입을 시작해 저예산으로 많은 프로그램이 제작되어 방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초는 경영이 어려웠던 무시 프로도 『아톰』이 대히트하면 판권(머천다이징) 수입으로 막대한 이익이 오르게 되어, 또 해외를 향해 작품의 방영권+파생 상품을 전개할 권리를 판매할 수 있었던 것 등에 의해, 급속하게 규모가 확대해가(최성기에는 사원 총수가 일시는 400명으로부터 최대 550명의 규모가 됨), 「아톰」은 무시 프로덕션을 흑자로 만들었다. 방송이 4년간 계속된 「철완 아톰」은 방영 개시로부터 1년 반으로 데즈카의 만화 원작을 거의 다 사용해 버리고, 그 후에 무시 프로 문예부의 스태프가 독자적으로 만든 에피소드는 인기를 얻기 위한 전투가 그려지는 경향이 강해져, 「철완 아톰」으로부터 데즈카가 좋아한 애니메이션인 것 같은 유머가 없어져 갔다. 또, 데즈카의 존명중에서 “애니메이터의 급료가 싼 것은 데즈카의 탓이다”라고 잡지에서 비난되는 일이 있었지만, 데즈카는 이렇게 반론하고 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이런 목소리가 있어. 데즈카가 그 아톰을 팔 때, 터무니없이 저렴하게 되어버렸으니까, 현재까지 TV 애니메이션은 제작비가 싸고 고생한다고.농담이 아니야." "그 시점에서의 제작비는 저것이 상식이니까, 그 배로 뿌리려고 한다면, 잘못해도 스폰서는 아톰을 사지 않았다. 그러니까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대는 꿈같은 이야기일까?" "분명히 사십 몇만이 제작비였고, 내 반출액은 20만 정도였을까요? 런데 아톰이 맞아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은 당첨된다고 해서, 그로부터 반년 정도 후에는 애니메이션이 금세 탁 터졌어.그 제작비는 무려 백만이에요! 그러니까 그것만 내도 모토가 잡히고 거스름돈이 오면 기업은 밟힌 거야. 그리고 앞은 보시는 것처럼 현재 제작비는 오백만엔이 하한선이고 육,칠백만엔정도는 스폰서가 낼거에요.」. 또한 스기이 기사부로는, 데즈카 오사무가 독자적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수법을 일본에 정착시키지 않으면 일본은 세계 제일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생산국이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아트・애니메이션의 공적. 한편, 아트·애니메이션(데즈카 자신은 상업 애니메이션에 대비해 「실험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했다)의 분야에도 공적을 남기고 있다. 무시 프로로 '어떤 거리 이야기'(1962년, 38분), '오스'(1962년), '메모리'(1964년), '인어'(1964년), '담배와 재'(1965년), '시즈쿠'(1965년), '전시회의 그림'(1966년, 33분), '창세기'(1968년), 그 후 데즈카 프로에서 '점핑'(1984년), '낡은 필름' (1985년), 「푸시」(1987년), 「무라마사」(1987년), 「숲의 전설」(1987년, 29분 20초), 「자화상」(1988년)과 장편, 단편의 비상업작품을 제작했다. 제 1회 히로시마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랑프리에 '낡은 필름'이 선정되고 있다(명예 회장 폴 그리모, 심사 위원장은 라울 세르베 , 선고위원장 앙투아네트 모제스). 무시 프로 사내에는 사장이었던 데즈카의 발안에 의해, 실험 작품의 제작 자금에 대해서 20만엔의 조성 제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데즈카에 따르면, 무시 프로를 설립한 것은 본래는 실험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침체와 부활. 애니메이션 제작에 나선 이후에도 데즈카는 만화 작품을 정력적으로 발표하고 있었다. 무시 프로의 성립 시기는 만화 작품도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기획이 많아지고 있어 애니메이션과 평행해 "철완 아톰" 원작판의 연재나, 일본 최초의 칼라 TV 애니메이션 "정글 대제'"에 연동해의 동 작품 리메이크판의 연재, 당초 애니메이션화의 기획도 있었던 「마그마 대사」의 연재 등이 1963년 - 1965년에 걸쳐 행해지고 있다.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과 관련하여 'W3' 연재 잡지에서의 다툼이 일어난 W3 사건도 1965년의 사건이다. 1966년, 데즈카는 실험 만화 잡지 'COM'을 창간한다. 선행한 시라토 산페이의 극화 작품 "카무이전"을 간판 작품으로 하는 "갈로"에 대항한 것으로 데즈카의 "불새"를 주목적으로 이시노모리 쇼타로, 나가시마 신지 등의 의욕적인 작품이 게재되었다. 1967년에는 괴기 만화 '뱀파이어'에 이어 '도로로'를 '소년 선데이'에 연재. 이들은 당시 미즈키 시게루에 의해 야기된 요괴 붐을 의식한 작품이었다. 1968년에는 청년지 '빅 코믹'(쇼가쿠칸), ' 플레이 코믹'(아키타 쇼텐) 등이 잇따라 창간해, 청년 만화가 본격적으로 스타트하고 있어, 데즈카도 '빅 코믹'에 '지구를 삼키다, '아야코', '키리히토 찬가', '플레이 코믹'에 '공기의 바닥' 시리즈 등 청년을 위한 작품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의 데즈카의 청년용 작품은 안보 투쟁 등의 사회적인 배경도 있어, 어둡고 음참한 내용의 것이 많았다. 한편 소년지에서는 '파우스트'를 일본을 무대로 번안한 '햐쿠모노가타리', 나가이 고'파렴치 학원'의 히트를 받아, ' 성교육 만화'라고 명명된 ' 야켓파치의 마리아 '(주간 소년 챔피언), 「아폴로의 노래」(주간 소년 킹) 등을 발표하고 있지만, 이 시기에는 소년지에서 데즈카는 이미 낡은 타입의 만화가로 간주되게 되어 있어 인기도 생각만큼 잡히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애니메이션 사업도 경영 부진이 계속되고 있어, 1973년에 스스로가 경영자로 있던 무시 프로 상사, 그 다음에 무시 프로덕션이 파산해, 데즈카도 개인적으로 추정 1억 5000만 엔의 부채 를 짊어지게 되었다. 작가로서의 궁지에 세워져 있던 1968년부터 1973년을, 데즈카는 스스로 "겨울의 시대"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1973년에 "주간 소년 챔피언"(아키타 쇼텐)에서 연재 개시된 "블랙 잭"도, 원래는 소년지·유년지에서 인기가 침체하고 있던 데즈카의 최후를 간취하자는, 카베무라 타이조 편집장의 후의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간 계속되는 싸움으로 독자를 유치하려고 하는 작품 뿐이었던 당시의 소년만화지에 있어서, "블랙 잭"의 매회 읽어낸 형식에서의 연재는 신선하고, 후기의 데즈카를 대표하는 히트작으로 성장해 가게 되었다. 게다가 1974년, "주간 소년 매거진"(코단샤) 연재의 "세번째가 온다"도 계속되어, 데즈카는 본격적 부활을 이루었다. 1976년, 중단된 채로 있던 "불새"가 「만화 소년」(아사히 소노라마)의 창간에 의해 재개. 1977년 시점에서, 데즈카는 '블랙 잭', '세번째가 온다', '붓다', '불새', '유니코', 'MW'와 6개의 연재를 안고 있었다. 또, 동시기의 만화 문고본 붐에 수반해 데즈카의 과거의 작품도 잇달아 재간되고, 또한 같은 해 6월부터의 코단샤 「데즈카 오사무 만화 전집」간행에 의해, 데즈카는 '만화의 일인자', '만화의 신'이라는 평가를 확실히 했다. 말년. 1980년대가 되면 에도막부 말기 부터 메이지까지의 시대에 자신의 뿌리를 따랐던 '양지의 나무'(빅 코믹)와 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일반 주간지에서 연재된 '아돌프에게 고한다'(주간문춘) 등 청년만화의 새로운 대표작을 다루게 된다. '양지의 나무'는 제29회 쇼가쿠칸 만화상,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제10회 코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을 수상했다. 1985년, NHK로부터 취재를 받은 시점에는 하루에 불과 1~2시간의 수면으로 만화의 집필이나 애니메이션 제작을 해내고 있었다. "동그라미를 잘 그릴 수 없다"라고 신체 능력의 쇠퇴를 인정하면서도, 취재진에 대해 "(몸의 노화를 극복할 수 있으면) 앞으로 40년(100세)은 그릴게요, 나는, 아이디어만은, 이미 바겐 세일해도 좋을 정도 있어"라고 창작 활동에의 강한 의욕을 보였다. 사망.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988년 3월 15일, 갑자기 복부의 격통에 휩쓸려 구급 반송된다. 검사 결과 진행성의 스킬스 위암으로 판명되어 한조몬 병원에 입원, 위의 4분의 3을 절제한다. 5월에 퇴원해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다작을 보였지만 입원전에 비해 점차 신체는 마르고 가늘고, 가끔 휴식을 끼지 않으면 계속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같은 해 10월에 재입원. 11월, 만전의 상태라고는 할 수 없는 가운데 '참가하지 않으면 국제 문제입니다'와 주위의 제지를 뿌리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에서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참석하지만, 귀국과 동시에 상태가 악화. 12월에 다시 수술을 받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말기 상태이며, 간으로까지 암이 전이하고 있었다. 다음 1989년 1월 21일에 데즈카 프로 사장의 마츠타니 타카유키가 병문안 왔을 때에는, 「내 병상은 무엇이야, 너 들어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위암이라는 것은 엎드린 뒤 의사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자면 "그런가…"라고 한마디만 말했다고 한다. 데즈카는 병원 침대에서도 의사와 아내의 제지를 뿌려 만화의 연재를 계속하고 있었다. 같은 해 1월 25일 이후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의식이 회복되면 '연필을 줘'라고 말했다. 아들 마코토는 "(이 무렵의 아버지는) 혼수가 깨면 연필을 쥐게 하지만 곧 의식이 없어지는 반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죽을 때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부탁이니까 일을 시켜줘」라고 일어나려고 하고, 아내는 「이제 괜찮아」라고 잠들려고 하는 등 끝까지 일에의 집착심을 없애지 않았다. 1989년 2월 9일 오전 10시 50분, 한조몬 병원의 병실에서 사망. 60세몰. 데즈카 오사무의 죽음을 만난 마츠타니에 의하면, 데즈카 오사무의 마지막 말은, 「부탁이니까, 일을 해 줘」. 이 말에서도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쳐나고 있다. 통야는 2월 11일, 히가시쿠루메시의 자택에서, 장례는 3월 2일,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오야마 장례식소에서 데즈카 프로덕션의 사장으로서 각각 영업되었다. 데즈카의 죽음에 의해, "그린고", "루드 비히 B", "네오 파우스트" 등의 작품이 미완인 채 남겨졌다. 또, 우메하라 타케시의 소설 "길가메시"의 애니메이션화에 의욕적이었지만, 구상중 그대로 끝났다. 죽기 3주 전(1989년 1월 15일)까지 쓰여진 자신의 일기에는, 그 때의 상태나 신작의 아이디어 등이 적혀 있었다. 주위의 인간은 아무도 데즈카에게 위암임을 전하지 않고, 데즈카 자신은 계속 살아가는 것에 아무것도 의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데즈카가 병원에서 그린 유작 중 하나인 "네오 파우스트"에서는 주요 인물이 위암에 걸려 의사와 주위가 걱정하고 위암임을 전하지 않지만 본인은 위암임을 알고 있고 사망한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스타일. 데즈카는 서양에서 수입된 영화와 소설에서 서양 문학을 일본적인 양식으로 도입한 것과 창의적인 스토리로 유명하며, 초기 작품은 《밤비》와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을 포함하고 있다. 데즈카가 어린 시절에 읽은 밀트 그로스의 초기 그래픽 노블인 《히 던 허 롱》("He Done Her Wrong")의 영향을 받은 데즈카의 영화적인 컷 배치는 후에 데즈카의 족적을 따르는 만화가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평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하자, 만화가로서 데즈카가 세운 업적을 전면 긍정하였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애니메이션 작가로서의 데즈카가 일본의 애니메이션사에서 차지한 역할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TV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데즈카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무시 프로덕션) 제작 프로그램을 원가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가격에 팔아치운 것이, 현재까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극도로 낮게 책정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발언은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613
75312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3
우주소년 아톰
《우주소년 아톰》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쇼넨》(少年)지에 연재한 SF만화이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21세기의 미래를 무대로 소년 로봇 아톰의 활약상을 그렸다. 원제는 철완 아톰()이다. 고단샤에서 2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여러 차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개요.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만화계의 대표적 작가로, "일본의 만화는 오사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오사무는 1951년 발표한 〈아톰대사〉(アトム大使)에서 아톰 캐릭터를 선보였고 이 캐릭터를 살려 1952년 《쇼넨》에 철완 아톰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등장인물. 아톰. 그러나 아톰을 알아본 오차노미즈 박사에 의해 구출되어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후 도쿄를 위협하는 악당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1982년 판 2003년 판 실사판. 1959년 3월 7일부터 1960년 5월 28일까지 마이니치 방송(舊 NET 계열)에서 제작·방송된 드라마이다. 애니메이션. 1957년에는 KRTV(현:TBS)에서 '모험만화인형극 철완 아톰'을 방영하였고 실사판은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마이니치 방송제작, 후지 TV계열로 방영하였지만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후지 TV에서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방영되었다. 흑백 화면으로 총 193화가 제작되어 평균 3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컬러로 총 52화가 제작되면서 니혼 TV에서 방영하였고,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는 후지 TV, 한국에서는 SBS에서 1995년 2월 27일부터 1995년 6월 7일까지 총 50화로 방영했고, 이후 2003년 11월 19일부터 2004년 6월 9일까지 재방영되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며 높은 시청률을 과시했다. 또한 2010년 1월에는 이 헐리우드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애니메이션 (1980년). 1980년대 TV 시리즈로 제작된 내용과 관련성은 확신할 수 없으나, 일본 국내 영화 방송이었던 "수요 로드쇼"에서 극장판의 형식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아톰에서 보기 드문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주제로한 내용이었으며 배경은 하와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행이 과거로 갔을 때 유적에 직접 새겨둔 문양을 현대에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유식한 박사의 시간 여행이 사실임을 확인하며 웃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애니메이션 (2003년). 2003년 4월 6일부터 2004년 3월 28일까지 후지 TV에서 제작·방송된 애니메이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SBS를 통해 2003년 11월 19일부터 2004년 6월 9일까지 방영되었다. 로봇 아톰 (2014년). 데즈카 프로덕션 및 요미우리 TV 방송에서 나이지리아의 방송국 Channels TV와 제휴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며, 총 8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 내에서는 방영되지 않았다. GO! GO! 아톰 (2019년). 2019년 10월 3일부터 2020년 10월 1일까지 TV 도쿄 계열에서 방송되었던 애니메이션이다. 그 후로 대한민국에서도 VOD보기 가능하며, 2021년 7월부터 재능TV에서 고 아스트로보이 고!란 타이틀로 방영 중이다. 영화. 2010년 1월 13일 개봉된 . 줄거리. 가까운 미래,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사람들은 큰 산을 떼어내어 구름의 윗부분으로 올려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메트로시티는 로봇과함께 번성한다. 메트로 시티의 로봇문명을 탄생시킨 텐마 박사는 정부의 압력으로 전투로봇인 '피스키퍼'를 만들게 되고, 이것을 보고 싶어한 텐마 박사의 아들 '토비'는 실험을 보다가 호기심에 실험현장에 너무 가까이 가서 폭주한 '피스키퍼'에 흡수당해 죽는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텐마 박사는 아들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게 되고, '토비'의 DNA와 블루 코어를 넣어 로봇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로봇이 '토비'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텐마 박사는 로봇을 버린다. 가출한 로봇은 블루 코어 에너지를 노린 '스톤 총리'의 추격 때문에 '서페이스'로 떨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대부인 헴에그와 코라를 만나게 된다. 코라 일행과 함께 살던 '아스트로' 로봇 혁명단을 만나고, 토목공사용 로봇인 '조그'를 되살리게 된다. 그러나 '조그'를 끌고오는 과정에서 아스트로가 로봇임을 안 '헴에그'는 로봇 격투장에서 아스트로를 계략에 빠뜨린 후 격투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러나 '아스트로'는 나오는 로봇을 족족 부숴버리고, 화가 난 '헴에그'는 '아스트로'를 공격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메트로 시티 전함이 나와 아스트로를 끌고 간다. 다시 '텐마 박사'와 대면한 아스토로는 블루 코어가 빠져 작동 정지 되고, 블루 코어는 '스톤 총리'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총리가 '아스트로'를 장난감이라고 한 것에 대해 화가 난 '텐마 박사'는 블루 코어를 빼돌려 '아스트로'를 부활시킨다. 부활한 아스트로는 과학청을 탈출하고, 분노한 스톤 총리는 레드코어를 '피스키퍼'에 장착, '아스트로'를 잡고 블루 코어를 되찾아 오게 한다. 그러나 폭주한 '피스키퍼'는 오히려 '스톤 총리'를 흡수하고, 도시를 공격한다. 한편 도시를 탈출한 '아스트로'는'피스키퍼'가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유리 청소 로봇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돌아가 '피스키퍼'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한편 '서페이스'에서는 아이들이 헴에그를 붙잡아 에어카를 탈취하고 메트로 시티로 향한 후 위기에 빠진 '아스트로'를 구하지만 쫓아온 '피스키퍼'가 발전소를 파괴해 메트로 시티가 추락할 위기에 놓인다. '아스트로'는 코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트로 시티를 위기에서 구한 후 다시 '피스키퍼'와 대결하지만 '피스키퍼'의 로봇팔에 잡히고 중심부로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블루 코어와 레드 코어의 충돌로 둘은 튕겨진다. 이후 텐마 박사한테서 레드 코어와 블루 코어가 충돌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낸 아스트로는 '피스키퍼'의 중심부로 돌진하여 동반자살한다. 이후 살아난 스톤 총리는 경찰에 체포되고 아스트로는 에너지를 '조그'한테서 받아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이때 외계인이(?) 메트로 시티를 공격하고 아스트로는 '외계인'에게 펀치를 날린다.
614
714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4
제롤라모 카르다노
61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6
소거법
소거법(消去法, )은 연립방정식(특히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간단한 기법이다. 미지수의 개수를 줄여나가는 것은 소거법의 관건이며, 아래와 같은 서로 비슷한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 소거법을 통해 연립방정식의 해가 만족해야 할 일련의 필요조건들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들 중 어떤 조건이, 연립방정식의 해가 될 충분조건이기도 하면, 그 조건이 곧 연립방정식의 정확한 해이다. 만약 필요조건들이 모순이라면, 연립방정식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의의 연립일차방정식은 소거법만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 불능 여부 등에 대한 판단 없이는 다소 맹목적이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의 실질을 추상화하여 얻어진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법이다. 소거법은 일반적인 연립방정식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소거법만으로 풀이되는 특별한 연립방정식은 연립일차방정식 이외에도 존재한다. 연립일차방정식의 예.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을 가감법으로 풀이할 것이다. 두 방정식을 더해서(즉 ) formula_2를 소거하면 이를 첫번째 방정식에 대입하면 따라서 이다. 당연히 이므로, 튜플 이 바로 (유일한) 해이다. 다르게는, 만약 대입법과 등치법에 의해 formula_2를 소거한다면, 그 과정은 각각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삼원일차 연립방정식 은, 그리고 을 통해 얻은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에서 formula_16를 구해서 에 대입하면 해 formula_17를 구할 수 있다. 다음 예시는 앞선 것들과 조금 다르다. 반대로 따라서 정확한 해는, 임의의 formula_20 꼴의 튜플이다. 해일 수 있는 튜플에 대한 반대 방향으로의 검증은, 해의 구조를 미리 알면 어느 정도 생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지수와 방정식의 개수가 같은 연립일차방정식에 대해서는, 만약 계수행렬의 행렬식이 0이 아니면, 해가 유일하다는 결론이 있다. 다른 예. 자유낙하 시의 속도-시간, 변위-시간 관계식 으로부터, formula_22를 소거하여, 속도-변위 관계식 를 얻을 수 있다. 가우스 소거법.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을 구체화, 정형화하여 얻는, 연립일차방정식의 해법이다. 소거법은 엄밀히는 연립일차방정식이 성립할 필요조건만을 제시하므로, 정확한 해집합을 구하기 위해선 해의 후보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하지만, 가우스 소거법은 원래와 동일한 해집합을 갖는 연립일차방정식으로 전환시키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
617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7
가우스 소거법
선형대수학에서 가우스 소거법(Gauß消去法, )이란,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알고리즘이다. 풀이 과정에서, 일부 미지수가 차츰 소거되어 결국 남은 미지수에 대한 선형 결합으로 표현되면서 풀이가 완성된다. 가우스 소거법은 보통 행렬을 사용하며, 첨가 행렬을 그와 풀이가 같은 더 간단한 행렬로 변환하여 풀이를 완성한다. 가우스 소거법은 행렬식과 역행렬의 계산에도 응용된다. 정의. 체 formula_1에 대하여, formula_2개의 미지수에 대한 formula_3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연립일차방정식 이 주어졌다고 하자. 여기서 은 주어진 formula_6 행렬이고, 은 formula_2개의 미지수를 포함하는 열벡터이다. 즉, 이는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기본 행 연산. 이 경우, 이 연립방정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산을 가할 수 있다. 이들을 기본 행 연산(基本行演算, )이라고 한다. 행사다리꼴행렬. 일반적으로 사다리꼴행렬(Echelon matrix,에쉴론 메트릭스, 또는 행사다리꼴행렬)은, formula_6 행렬 formula_13에 대하여, formula_27이라고 하면, formula_28를 formula_14번째 행의 선행 계수(先行係數, )라고 한다. 선행 계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formula_6 행렬 formula_13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13을 행사다리꼴행렬(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formula_6 행렬 formula_13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13을 기약행사다리꼴행렬(旣約行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즉,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의 항들이 대략 위에는 사다리꼴, 밑에는 0인 형태의 행렬이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 조건은 행사다리꼴행렬 조건보다 더 강한 조건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행렬은 행사다리꼴행렬이다. 다음과 같은 행렬은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이다. 가우스 소거법. 가우스 소거법은 formula_49 행렬 formula_13을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행사다리꼴행렬로 만드는 알고리즘이며, 다음과 같다. 먼저 첫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그 뒤, 두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뒤에 오는 다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한다. 일반적으로, formula_66번째 행은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만약 어떤 formula_77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formula_78번째 행에서 멈춘다. 만약 항상 formula_68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formula_80번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하며, formula_81으로 둔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을 원한다면, 찾았던 모든 formula_82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추가로 거친다. 여기서 formula_90이며 formula_91인 데 주의하자. 사실, 이는 행렬의 계수이다. 성질. 기본행연산.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모두 가역 연산이다. 두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이 하나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행동치라고 한다. 첨가 행렬이 행동치라면, 연립방정식의 풀이는 서로 같다. 기본 행렬은 단위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한 번 가하여 얻는 행렬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기본 행렬 곱셈과 같다. 행사다리꼴행렬. 가우스 소거법 알고리즘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은 그와 같은 해를 갖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행렬로 변환할 수 있다. 따라서,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에 대한 풀이로 귀결된다. formula_6 행사다리꼴행렬 formula_93에 대한 연립일차방정식 formula_94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존재하는 formula_94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달리 말해, 해가 존재하는 formula_94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행렬식의 계산.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을 계산할 수 있다. 이는 정사각행렬에 대하여 다음 사실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역행렬의 계산.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역행렬을 계산할 수 있다. formula_100 행렬 formula_13의 역행렬은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formula_13에 formula_100 단위행렬을 추가하여 formula_104 행렬로 만든다. 이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로 만든다면, 행렬 formula_107은 formula_108과 같다. 계수 계산.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행렬의 계수를 계산할 수 있다. formula_49 행렬 formula_13의 계수는 가우스 소거법을 가하여 얻는 행사다리꼴행렬에서 0이 아닌 행의 계수(즉, 선행 계수의 개수) formula_78이다. 예. 해가 유일한 연립 선형 방정식. 다음과 같은 선형 방정식이 주어졌다고 하자. 첫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li value="3"> 둘째 식의 1배를 셋째 식에 더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다. 이제 행렬이 사다리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미지수들을 가장 밑의 행으로부터 순서대로 대입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을 후방대입(back substitution)이라 한다. 역행렬의 계산. 다음과 같은 행렬 formula_13의 역행렬을 계산한다고 하자. 기본행연산을 가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formula_108은 다음과 같다.
618
3255339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8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1790년 11월 17일 ~ 1868년 9월 26일)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리고, 생애. 오늘날 작센안할트주 나움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하인리히 뫼비우스()였으며, 아버지는 춤 강습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이었다. 1820년 도로테아 크리스티안 율리안 로테와 결혼했으며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13년 괴팅겐 대학교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만나서 공부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철학학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 1816년 1월 22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천문대 관찰사가 되며 천문학과 특별교수가 되었다. 1844년 엔 고등 역학, 고등 천문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플라이센부르크에서 고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업적. 일반에게 가장 유명한 업적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이며, 그는 주로 기하학과 역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저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짧은 논문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619
333830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19
이승엽
이승엽(1976년 10월 11일 (음력 8월 18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이자, 현 KBO 홍보대사, 이승엽야구재단 이사장, SBS와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다. 선수 시절. 아마추어 시절. 중앙초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해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5년 KBO 리그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이 나와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는데 당시 삼성 1루수 요원 중에서는 김성래가 시범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해 전열에서 이탈한 데다 부상에서 회복한 1993년부터 본격적인 주전 우익수로 나선 이종두가 어깨와 허리통증을 호소해 전년도인 1994년부터 완전히 지명타자로 바꾼 양준혁이 우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바람에 같은 해(1994년)부터 포지션을 바꾼 이만수 외엔 쓸만한 1루수 자원이 없어 그가 1루수로 전향했다.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2004년.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5년.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0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해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때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됐다. 시즌 최종 타율은 2할대 타율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현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했다. 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됐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을 쳐 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이 재팬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밀려 제팬 시리즈 MVP 수상에 실패했다. 2005년 시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3번과 6번 타자로 출전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6년. 2005년 시즌 후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며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지바 롯데 마린스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2006년 1월 19일에 이적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했는데, 이에 부응해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팀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2007년. 2006년 시즌 후 MLB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팀의 우승 후로 연기했다.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000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엔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2007년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2할대 타율,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인 일본전에서 2점 홈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2점 홈런을 쳐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 45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OPS 0.755,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진행했는데 여기에서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 12삼진이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2009년.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 16홈런, 2할대 타율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에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2010년.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팀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됐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시즌후 2010년 11월 16일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2011년.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한국 프로야구 복귀. 삼성 라이온즈 복귀. 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2012년. 3할대 타율,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상대적으로 1루수로 출장한 경기가 적어 처음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2013년. 시즌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의 대결에서 6-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을 기록했다. 2013년 8월 28일 NC와의 경기에서 3,000루타를 달성했으며, 이는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이다. 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2할대 타율, 13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됐다.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돼 7경기에서 타율 0.148(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11월 1일 7차전까지 단 1타점도 기록하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의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해 그 해 골든 글러브(지명타자)를 타격왕을 차지한 이병규에게 내 줬다. =2014년. 타격 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30홈런-세 자릿수 타점을 달성하며 국민 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했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쳐 내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해 총 9번을 수상하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 2015년.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구승민을 상대로 장외 홈런이자 시즌 10호 홈런,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한일 통산 559호 홈런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15타수 6안타, 타율 4할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후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2월 8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KBO 리그 최초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시즌 후 FA 선언을 해 2년 36억원에 잔류했다. 2016년. 8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KBO 리그 통산 1390타점을 기록했고, KBO 리그 통산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웠다. 그 후 9월 14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재우를 상대로 한일 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했다. 2017년. 시즌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5월 21일 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했고,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 4000루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경기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경기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 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18년부터 KBO 홍보대사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SBS와 SBS 스포츠의 야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에 지도자 연수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620
3254976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20
한국야구위원회
사단법인 한국야구위원회 또는 KBO(Korea Baseball Organization), 또는 KBO 사무국(Office of the Commissioner, KBO)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 조직.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 총재. KBO 총재는 KBO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621
2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21
국민학교
623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23
언어학
언어학(言語學, )은 인간의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과 본질을 과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법과 같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지식을 체계화, 규칙화하는 것에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인지 및 사회적인 부분도 다루기 때문에 인문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지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언어 체계의 분석은 크게 문장의 구조와 규칙에 대한 통사론, 의미론, 단어의 구조에 대한 형태론, 음성학, 음운론, 화용론으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진화 등 생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생물언어학, 심리학적 요소를 고려한 심리언어학 등의 분과도 존재한다. 언어학은 이론적인 연구와 실용적인 연구를 모두 포괄한다. 이론언어학은 언어철학 등 인간 언어의 이론적인 부분을 다룬다. 응용언어학은 언어교육이나 문해와 같이 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한다. 언어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연구할지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을 기준으로 어떤 한 순간의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으로 구분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언어의 개수에 따라 다중언어와 단일언어로 그 대상을 구분할 수도 있고, 아이와 어른으로 구분할 수도 있으며, 학습한 것과 습득한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분야. 언어학의 연구 분야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 중의 하나는 어떤 한 순간의 언어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다음은 언어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분야이다. 이러한 구분은 언어가 낮은 단계의 소리에서 높은 단계의 뜻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위에서 형태론과 통사론을 문법론으로 묶기도 한다. 다음 분야들은 그 연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분야들로 전통언어학의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휘론은 단어들의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에 해당하고 어원론은 언어의 시간적인 변화, 방언학은 언어의 공간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어떠한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분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에 제시된 대상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음운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역사음운론, 전산적인 차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전산의미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통사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이론통사론 등으로 불린다.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등의 방법론을 이용한 접근법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순수한 언어학이 아니라 학제간 연구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로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해 응용언어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또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존재한다. 언어학의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를 하는 메타언어학과 언어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사가 있다. 이외에도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문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는 문체론과 수사학,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기호학 등이 있다. 응용 분야. 언어와 관련된 실질적인 분야를 다루는 응용언어학에는 언어 관련 교재 개발, 교수법, 번역과 통역, 사전 편찬, 언어치료, 언어정책, 전산처리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인접 분야와 학제적 연구. 언어학은 연구 주제에서 문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특정 학문 분야의 하위 분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야들은 흔히 학제적연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일부 분야는 언어에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커리큘럼. 대한민국에서는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대학교, 충남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과 같이 주요 언어학에 대한 커리큘럼을 가진 언어학과들은 전공 학위에서 문학사로 분류하고 있다.
624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24
한국정보올림피아드
한국정보올림피아드(, KOI)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한민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이다. 알고리즘 설계 능력을 평가하는 경시 부문과 학생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공모 부문으로 나뉜다. 부문별 우승자는 각각 국제정보올림피아드와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14개 교육청에서 주관하며, 한국정보과학회에서 후원한다. 역사.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했다. 국가적으로 정보산업을 육성하자는 의도였다. 대통령 산하에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출범하여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는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4월 22일,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지금과 같이 전국에서 선발된 초·중·고 학생들이 300명이 참가하여, 3시간 동안 문제를 풀었다. 개회식은 오전 9시에 열렸고 실제 대회는 9시 20분에 시작되었다. 참가 대상이 국민학생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교사부가 있었다. 공모부문도 1회부터 있었는데, 참가 대상에 제한이 없어서 단체도 참가할 수 있었다. 사용기종은 8비트 컴퓨터, 사용언어는 베이직과 어셈블리어였다. 역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같은 날 개최되었다. 전두환 방문으로 강제 정전. 이 첫 대회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전 10시 20분에 체육관 전체가 정전되어 참가자와 관계자를 비롯해 모든 컴퓨터가 꺼진 것이다. 항의가 쏟아지자 대회 마감 시각이 12시 20분에서 2시간 연장되어 14시 20분으로 미루어졌다. 정전 원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었다. 전두환이 예정에 없이 대회장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자 대통령 경호실이 경비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회장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응시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처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일개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갈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정부의 정보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경진대회 입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도 함께 먹었다. 초등학생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다. 정전만큼이나 놀라운 일은, 컴퓨터를 고작 10개월밖에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 하형진(대구 계성국민학교 6학년)이 기라성 같은 중, 고등학생들을 다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하형진은 여러 차례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게임회사 KOG에서 프로그래머로 재직 중이다.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13회까지 열린 후 1996년부터 현재와 같이 정보올림피아드로 이름을 바꿔 개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시 부문. 경시 부문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부문이다. 지역 예선 필기를 통과하면 전국 본선에 진출한다. 2016년 이전에는 시 단위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또 시 도별 지역 본선도 통과해야 했다. 경시부문 우수자(통상 금상 이상)에게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지역 예선. 예선은 필기 시험으로 치른다. 수학적 규칙을 찾는 능력과 작성된 코드를 파악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지역 본선. 컴퓨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기로 치른다. 2016년에 예선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전국 본선. 실기로 치른다. 문제는 대체로 네 개가 출제되고, 시험시간은 3시간 가량이다. 구체적인 시상 규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장려상은 0점자와 미참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시상된다. 항상 위 표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매년 세부 시행계획에서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다. 공모 부문. 공모 부분은 학생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도별 추천작품이 본선에 올라간다. 지역 예선 대회 개최 여부는 시·도마다 다르다. 공모부문 우수 시상자에게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의 컴퓨터 공학 부문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다음은 그 시상 규모와 내용이다. 경시부문과 마찬가지로,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회의 심사에 따라 수상인원은 변경될 수 있다. 논란. 메모리 제한. 2014년에는 이전과 달리 배열 크기가 제한되었으며 각 교육청은 이를 학생들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지역 본선(대구시정보올림피아드)이 치러질 당시 대구시교육청 산하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수험생에게 이를 안내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잘못을 인정하고 재채점을 진행하였다. 이 채점에서 5명이 구제되면서 대구시에서 전국 본선에 진출하는 고등부 수험생은 기존 7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났다. 표준 입출력. 2015년에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문제풀이 형식을 파일 입출력에서 표준 입출력으로 변경하였다. 몇몇 학생과 학부모는 시험 방식이 변경된 사실이 제대로 공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대회에 응시한 일부 학생은 파일 입출력을 사용한 코드를 작성하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응시자 주의사항과 감독관을 통하여 충분히 강조했을 뿐더러 기존 방식대로 푼 학생을 구제하면 문제를 제대로 읽고 풀이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면서, 구제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파일 입출력에 맞춘 코드를 작성한 학생들은 결국 0점 처리가 되었다. 지역 예선 문제 오류. 2018년 4월에 개최된 지역대회에서는 총 일곱 문항이 '정답없음', '복수정답' 처리되었다. 보기로 제시된 코드에 오타나 정의되지 않은 행동(Undefined behavior)이 포함된 데다가 컴파일러가 비주얼 스튜디오임을 전제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등, 상당히 많은 문제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에 학생과 학부모가 거세게 반발하자,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과 한국정보과학회 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출제 오류로 피해를 본 전원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기존에 합격점을 받은 600명에 구제된 147명을 더해 도합 747명이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정보올림피아드 발전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그 해 6월 정보올림피아드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공청회를 주최하였다. 공청회에서 대책위는 영재교육 위주 대회에 공교육 취지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문제 난이도 등 기준이 명확히 세워지지 않은 것, 출제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뽑지 못한 것, 기존 영재교육 전문가와 새로 들어온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 전문가가 제대로 협업하지 못한 것을 출제 오류 사태의 원인으로 꼽았다. 채점 지연. 2018년 7월 개최된 전국대회에서는 고등부 채점이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보올림피아드 본선에서는 답안을 서버에 제출하면 프로그램이 채점하여 즉시 결과를 돌려주는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도 채점 결과가 나오지 않아 참가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주관 측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은 국제정보올림피아드의 채점 지연 시 대응 규정을 준용하여 경시 시간을 30분 연장하였고, 대회가 종료된 뒤 채점 결과를 참가자들에게 따로 통보하였다. 이후 진흥원은 예비소집 때 실시한 채점 환경 점검과 대회를 마친 후 진행한 원인 분석에서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데이터가 대량으로 몰리는 경시 시간 동안에만 일어나는 문제로 판단된다고 해명했다. 채점위원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지연되었으므로 기존 채점 기준대로 채점하였다고 밝혔다.
625
125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25
베이직
초심자용 다목적 기호명령부호(初心者用 多目的 記號命令符號,) 또는 단순히 베이직(BASIC, )은 사용하기 쉽도록 설계된 범용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다. 1964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존 케메니(John Kemeny)와 토머스 커츠(Thomas Kurtz)가 개발했다. 그들은 비과학 분야의 학생들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거의 모든 컴퓨터들은 과학자들과 수학자들만이 배우는 경향이 있는 맞춤 소프트웨어를 쓰는 것을 필요로 했다. 1970년대 중반에 마이크로컴퓨터가 등장하면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Microsoft BASIC)을 비롯한 여러 베이직 방언이 개발되었다. 이 기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주 메모리(흔히 4KB)로 인해 다양한 타이니 베이직 방언도 만들어졌다. 베이직은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고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정용 컴퓨터 시스템을 위한 사실상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되었다. 이러한 PC에는 거의 항상 기본 인터프리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종종 펌웨어나 때로는 ROM 카트리지에 설치되어 있었다. 베이직은 1990년대에 더 강력한 마이크로컴퓨터가 시장에 나왔고 파스칼과 C와 같은 고급 기능을 가진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1991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시각적 폼 빌더를 결합한 업데이트된 버전의 베이직인 비주얼 베이직을 출시했다. 교육용으로 개발되어 언어의 문법이 쉬우며, 다트머스의 최초 제품 이래로 인터프리터 방식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컴파일러 방식도 많다. 현재는 다양한 종류의 베이직이 존재하며 서로 문법도 많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소스 코드는 호환되지 않는다. 예제. Hello World. 아래 예는 모든 ANSI/ISO 호환 베이직과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마이크로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베이직에서 동작한다. 10 PRINT "Hello, world!" 20 END 이러한 기종에 설치된 베이직은 줄번호가 생략된 즉각 모드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음 예를 실행할 때에는 RUN 명령어가 필요없다. PRINT "Hello, world!" ? "Hello, world!" 이후의 베이직은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며 코드에서 줄번호가 사라졌다. 다음 예는 현대적인 베이직의 거의 대부분에서 RUN 명령으로 실행할 수 있다. PRINT "Hello, world!" END 많은 베이직에서 End 선언문은 빼도 된다. 사용자 입력 개수 만큼 별 출력. Visual Basic .NET. Class stars Sub Main() Dim UserName, Answer, stars As String ' UserName$, Answer$, stars$ may be used as well. Dim NumStars, I As Integer Console.Write("What is your name: ") UserName = Console.ReadLine() Console.WriteLine("Hello {0}", UserName) Do Console.Write("How many stars do you want: ") NumStars = CInt(Console.ReadLine()) stars = New String("*", NumStars) Console.WriteLine(stars) Do Console.Write("Do you want more stars? ") Answer = Console.ReadLine() Loop Until Answer <> "" Answer = Answer.Substring(0, 1) Loop While Answer.ToUpper() = "Y" Console.WriteLine("Goodbye {0}", UserName) End Sub End Class
62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26
인터프리터
인터프리터(, )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소스 코드를 바로 실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환경을 말한다. 원시 코드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와 대비된다. 인터프리터는 다음의 과정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언어로 작성된 원시코드 명령어들을 한번에 한 줄씩 읽어들여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고급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인터프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명령어들을 중간 형태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실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컴파일러는 고급 명령어들을 직접 기계어로 번역한다. 컴파일된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인터프리터를 이용해 실행시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행된다. 그러나 인터프리터의 장점은 기계어 명령어들이 만들어지는 컴파일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컴파일 과정은 만약 원시 프로그램의 크기가 크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터프리터는 고급 프로그램을 즉시 실행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터프리터는 종종 프로그램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한번에 적은 양의 내용을 추가하고 그것을 빠르게 테스트 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터프리터를 이용하면 프로그래밍을 대화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는 둘 다 대부분의 고급언어에 적용이 가능하지만 BASIC 이나 LISP과 같은 일부 언어들은 개발 당시에는 특별히 인터프리터에 의해서만 실행되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포스트스크립트와 같은 페이지 기술 언어 들도 인터프리터를 사용한다. 모든 포스트스크립트 프린터는 포스트스크립트 명령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다. 역사. 최초의 인터프리트 방식의 고급 언어는 리스프였다. 리스프는 1958년 스티브 러셀이 IBM 704 컴퓨터에 최초로 구현하였다. 러셀은 존 매카시의 논문을 읽고 리스프의 eval 함수가 기계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맥캐시를 놀라게 했다. 작업 중인 리스프 인터프리터가 그 결과 만들어졌으며 리스프 프로그램의 실행, 더 정확히 말해, "리스프 식의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
629
3267081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29
라이프 게임
라이프 게임() 또는 생명 게임은 영국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가 고안해낸 세포 자동자의 일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세포 자동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 1970년 10월호 중 마틴 가드너의 칼럼 〈Mathematical Games(수학 게임)〉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단순한 규칙 몇가지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 게임은 컴퓨터 과학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프 게임이 범용 튜링 기계와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진 세포 자동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설명. 이 ‘게임’은 사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게임의 진행을 결정하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약간 많이 다르다. 라이프 게임의 진행은 처음 입력된 초기값만으로 완전히 결정된다. 라이프 게임은 무한히 많은 사각형(혹은 ‘세포’)으로 이루어진 격자 위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세포 주위에는 인접해 있는 여덟 개의 ‘이웃 세포’가 있으며, 또 각 세포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가지 상태 중 한가지 상태를 갖는다(‘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격자를 이루는 세포의 상태는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으로 변화한다. 즉, 현재 세대의 세포들 전체의 상태가 다음 세대의 세포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각각의 세포가 다음 세대에서 갖는 상태는 현재 자신의 상태와 이웃하는 여덟 개의 세포들 중 몇 개가 살아있는 상태인지만을 따져서 결정된다. 존 호턴 콘웨이의 규칙들이다. 존 호턴 콘웨이는 규칙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 설정하였다. 패턴의 예. 라이프 게임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고정된 패턴(정물 靜物, still life), 일정한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진동자, oscillator — 정물은 주기가 한 세대인 진동자라고 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 패턴(우주선, spaceship) 등 여러 패턴이 존재한다. 아래에 간단한 예가 있다. 살아 있는 셀은 검은 색으로, 죽어 있는 셀은 흰색으로 표현했다. ‘block’과 ‘boat’는 정물이고, ‘blinker’와 ‘toad’는 진동자, 그리고 ‘글라이더(glider)’와 ‘경량급 우주선(lightweight spaceship — LWSS)’은 우주선에 속한다. 그리고 무한히 이을 수 있는 패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배(boat)는 무한정 이을 수 있다.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많은 세대가 필요한 패턴도 있는데, ‘methuselah(므두셀라)’라고 불린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펜토미노 퍼즐의 모양 중 R-펜토미노(R-Pentomino)는 세포는 5개이지만 1130세대가 지나서야 안정화된다. (이는 6개 미만 세포 패턴 중 가장 활동적인 패턴이다.) ‘다이하드(diehard)’는 130세대가 지나서야 사라진다. ‘도토리(acorn)’는 5206세대가 지나서야 13개의 글라이더(glider)와 수많은 진동자 또는 정물을 남기고 안정화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패턴 중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가장 많은 세대를 거친 패턴은 리드카(Lidka)로, 무려 29,055 세대가 지나야 안정화된다. 라이프 게임이 처음 소개된 〈Mathematical Games〉에서, 콘웨이는 세포 수가 무한히 많아지는 패턴을 찾은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 해커 빌 가스퍼(Bill Gosper)가 1970년 11월에 처음 그러한 패턴들을 찾아 상금을 탔다. 패턴들 가운데에는 ‘글라이더’나 ‘우주선’을 발사하는 ‘총’과 안정화한 패턴들을 꼬리에 남기며 전진하는 ‘기관차’, 그리고 양쪽을 다 행하는 ‘갈퀴’ 패턴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제곱 비례로 성장하는 패턴인 ‘사육사’ 패턴도 찾아냈는데, 이것은 ‘총’ 패턴을 꼬리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한다. 이 후로 글라이더를 이용한 논리 게이트, 가산기, 소수 발생기와 라이프 게임을 더 큰 스케일과 느린 속도로 모방하는 단위 세포 등 다양한 패턴들이 만들어졌다. 맨 처음 발견된 ‘총’이 여전히 알려진 가장 작은 총이다: 가스퍼의 글라이더 건 무한히 성장하는 더 단순한 패턴들이 그 후에도 발견되었다. 아래의 세 패턴은 모두 무한히 성장한다. 처음 것은 10개의 살아있는 세포만을 가지며 이보다 적은 세포를 가진 무한 성장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5x5의 정사각형 안에 포함되는 패턴이고, 세 번째는 두께가 1인 패턴이다. 여러 개의 글라이더가 합성되어 재미있는 결과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두 개의 글라이더를 적당한 방법으로 블록에 충돌시키면, 블록은 글라이더가 발사된 곳을 향해 한 칸 다가간다. 세 개의 글라이더를 다른 방법으로 충돌시키면 블록은 발사된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한 칸 다가간다. 이것은 ‘움직이는 블록 메모리’라고 불리며 카운터를 모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더를 이용해 AND, OR, NOT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개의 카운터와 연결된 유한 상태 오토마타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능 튜링 기계와 똑같은 계산능력을 가지며, 이는 라이프 게임이 무한한 메모리를 가진 어떤 컴퓨터와도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글라이더 건의 패턴을 이용하여 새로운 개체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며, 원본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만능 건축사’ 패턴은 튜링 머신과 동등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라이프 게임의 변종들. 라이프 게임을 시작으로,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을 가진 변종들이 존재한다. 원래의 라이프 게임은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며, 2개 또는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생존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사망한다. 이 규칙은 ‘23/3’으로 표시할 수 있다. 앞쪽 숫자들은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하며, 뒤쪽 숫자들은 세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6/6’은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세포가 새로 태어나고, 1개나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생존하며 나머지 경우 사망하는 규칙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라이프(HighLife) 규칙은 원래 규칙에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새로 태어난다는 규칙이 추가되며, 이는 ‘23/36’으로 표시된다. HighLife는 ‘복제자’ 패턴들로 유명하지만, 이 규칙의 대부분의 패턴들이 너무 복잡하거나 황폐한 패턴들을 생성한다. Life32/game of life 프로그램에 따름.
649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49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 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쇼와 황제 재위기에 활동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쟁범죄자이다. 1941년 10월 18일에 군인의 신분으로 행정수반인 총리대신을 되었으며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육군대신, 내무대신, 참모총장을 겸임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여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공포정치의 일종인 ‘헌병정치’를 실시하여 군부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이 점차 미국의 반격에 밀려 전세가 기울자 1944년 7월 18일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패전 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군인가문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후 군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일국의 총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미국을 이길수 없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전진훈(戰陣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 훈령을 내려 많은 젊은군인들에게 목숨바쳐 전투에 임할 것을 독려했으나 정작 자신은 패전후 비굴한 처신으로 일관했다. 고의성 짙은 자살미수사건을 벌인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책임을 회피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함으로 사무라이 후예로서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생애와 경력. 1884년 도쿄부 고지정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토세(千歳)이며 본적지는 이와테현으로, 그의 두 형은 도조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는 1909년에 (伊藤勝子)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육군 보병 대위가 되어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19년 스위스에 주재 무관으로 급파되었고, 1920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소좌로 승진되었다. 1921년에는 다시 해외로 파견돼 독일에서 주재하였다. 도조는 1922년 육군대학교의 교관을 맡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1929년 중좌로 승진되었다. 1920년대, 그는 군 파벌에 연루되어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그리고 나가타 데쓰잔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를 표방했던 파벌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인 파벌 황도파를 이끄는 아라키 사다오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조는 후에 나가타 데쓰잔 사망 이후 통제파의 1인자로서 일본 육군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붙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는데, 이는 그의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의 확대를 유도하였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 일본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돼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연임하였다. 도조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해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참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허용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준비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던 와중에는 도조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어 자살공격을 통한 옥쇄(玉碎)를 부추였다. 도조는 이로써 내각을 장악해 군사 국가 체제로 일본 제국 전역을 군사강국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의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해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처형. 도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48년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아 그 해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지 않았으며 요코하마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유회와 함께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를 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고,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옮겨져 숨겨졌다. 사후. 1958년 무덤을 새로 만들자는 계획이 부상해 1960년 아이치현의 산가네 산(三ヶ根山) 꼭대기에 이장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순국 칠사묘가 축조되어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고, 1978년 합사되었다. 평가. 우지 도시히코는 자신의 책에서 도조는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해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의 전쟁으로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장성훈은 그의 저서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를 통하여 도조 히데키를 비겁한 사무라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도조 히데키는 전통적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의 정예 엘리트로서 군내 요직을 두루 거친 핵심요원이다.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다는 강경파의 선봉으로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총리에 임명된후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직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다. 특히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사무라이의 후예답게 명예롭게 죽으라는 '전진훈(戰陣訓)'과 하찮은 기와로 온전하게 남기보다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죽으라는 '와전옥쇄(瓦全玉碎)'의 영을 내린 장본인이다. 이 훈령에 의해 일본의 무수한 젊은이들은 조국을 위해 하나뿐인 자신을 목숨을 던지며 전장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이 항복한후 고의성이 짙은 '자살미수 소동'을 일으켰으며, 전범으로 체포된후 벌어진 재판에서 전임자의 결정을 단순히 집행한것 뿐이라고 책임을 회피한채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할복 등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독려할 수는 없으나 사무라이 정신이 넘치는 일본군인의 대표로서 모범이 되어야 할 자가 지극히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사무라이 후예로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며, 도조 히데키을 비롯한 A급전범들의 예에서 보듯이 일본이 지나치게 사무라이 정신을 미화하고 있다고 장성훈은 주장하였다.
653
1593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53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 , 약칭 한국철도 또는 철도공사 또는 코레일())는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본사는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소제동 철도기관 공동사옥)에 있으며 한국철도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 사옥. 2006년 12월 착공한 한국철도공사 대전 본사는 2009년 8월 완공되었으며, 쌍둥이 빌딩 형식으로 서관에 한국철도공사, 동관에 한국철도시설공단(現 국가철도공단)이 입주하였다. 본사는 연면적 23,507m2이며,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이다.
654
17319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54
대한민국의 교통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교통에 대해 서술한다. 도로 교통. 한국의 도로 교통은 삼국시대의 역원제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경흥, 평해(지금의 울진), 동래, 제주, 강화 등 6개 방면으로 발달되었다. 1900년대 초에 옛길이 신작로(새길, 포장로)로 바뀌고 1911년에 관용 자동차가 도입되며 1912년 택시와 버스가, 1928년부터는 화물자동차가 등장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 버스가 등장하고, 이후로 전국 각지에 고속 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 거의 모든 도시 내부 및 도시간의 주요한 대중 교통 수단으로 각종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소비패턴이 변화함에 따라 자동차의 보유대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도로화율은 점차 둔화되고 있어 심각한 적체·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율 또한 해마다 질·양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총 1,449만 6,844대로 1998년 1,046만 9,599대에 비해 약 1.4배, 2000년 대비 1.2배 증가를 나타냈다. 업종별로는 영업용이 74만 5,912대로 전체 차량의 5.1%를, 비영업용이 1,375만 932대로 94.9%를 차지하고 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020만 2,813대, 버스 125만 6,728대, 화물자동차 299만 3,280대, 특수차량 4만 4,023대로 나타났다. 동년기준으로 운수업체 수는 총 29만 8,148사이며, 종별로는 시내버스 390사, 시외버스 159사, 고속버스 21사, 전세버스 462사, 택시 1,832사, 노선화물 23사, 구역화물 등화물 1,305사, 용달 605사, 장의자동차 404사 등이다. 운수업체 종사자수는 총 54만 6,214명이며, 이 중 운전자는 버스업종 7만8,823명, 택시업종 25만3,370명, 화물업종 16만명이고 정비원은 1만2,477명, 기타 3만8,898명이다. 도로. 대한민국에서는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 등의 7종의 종류로 도로를 구분하며, 나열한 순서대로 등급을 설정하고 있다. 도로의 정의에 관해서는 《도로법》을, 도로에서의 안전 수칙 등과 관련해서는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버스 교통. 대한민국의 버스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를 일컫는다. 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운송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시내 버스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현재 각급 버스의 인킬로는 48003105384.3725명킬로미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 기업체는 경기고속으로, 577개의 일반 시내버스, 15개의 광역버스, 340개의 시외버스, 56개의 고속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택시 교통. 대한민국의 경우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하면, 택시는 정식적으로는 택시여객 자동차운송사업이라 말하며, 1개의 계약으로 승차 정원 6명 이하의 자동차를 이용, 승객을 운송하는 사업이라고 하며 특정한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택시를 운행할 수 없다. 운수회사에 속한 회사택시와 개인이 영업하는 개인택시가 있는데, 개인택시의 경우 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에 맞아야 한다. 지역별로 택시 색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2009년 12월4일 하이브리드택시가 서울에 도입되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모든 택시를 하이브리드카로 바꿀 예정이다. 철도 교통. 전통적인 장거리 대량운송 수단인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화, 서비스의 부재, 경영의 진부화 등으로 한때 심각한 재정악화와 퇴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지속적인 노후시설대체, 서비스개선, 경영합리화 작업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궤도 총연장 6,819km로 영업노선이 45개 노선에 3,101.2km고, 이 중 복선화율은 28.4%, 전철화율은 18%이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철도수송장비는 동력차가 총 2,851량으로 디젤기관차 482량, 전기기관차 96량, 디젤동차 610량, 전기동차 1,662량, 증기기관차 1량이며, 객차는 총 1,678량, 화차는 1만 4,113량으로 역(驛)은 총 631개이다.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은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거나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현재 9개의 광역전철과 지하철 노선이 있으며, 1개 노선이 건설 중, 여러 개의 경전철을 추가로 계획 중이다. 이 노선은 현재 한국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세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도권 지역의 것까지 합치면 현재 운영되고만 있는 것만 해도 11개, 지선과 건설되고 있는 것을 합치면 26개나 된다. 또한 수도권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지하철들이 건설되어 인천광역시 (2개 노선), 대구광역시 (3개 노선), 대전광역시 (1개 노선), 부산광역시 (6개 노선), 광주광역시 (1개 노선) 등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각각의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단 부산에 있는 부산김해경전철은 민간기업이 운영한다 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코레일이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증기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몇몇 지방도시에서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다만 협궤 철도는 수인선이 공식적으로는 영업 정지 상태여서 철도 통계에는 존재한다. (현재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표준궤로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전차. 과거에는 서울전차, 부산전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선되었다. 해상 교통.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항공 교통.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공항이 국내외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6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3월에 민영화 정책으로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1970년대 여객·수출입화물의 증가로 본궤도에 올라 고속성장을 지속해온 업종이었다. 1988년 대한항공의 독점을 마무리하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 항공이 국내선에 취역함으로써(국제선취역은 1990년 1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였다. 2002년 말 현재 항공기보유대수는 총 295대로 수송기 183대, 경비행기 28대, 헬리콥터 60대이었다. 국제항공노선은 26개국 63개 도시에 79개(16개 중복노선)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이 중 여객노선은 69개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진에어,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등 많은 저가항공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의 항공 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65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56
존 맥스웰 쿳시
존 맥스웰 쿳시(, 1940년 2월 9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경력.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이며, 아프리칸스어도 사용했으나, 영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작품도 영어로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영어식인 존 맥스웰 쿳시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대 초 영국으로 이주하여 IBM을 거쳐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인 IC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이 때의 경험은 《Youth》(2002)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 1971년 뉴욕주 버펄로의 뉴욕 주립 대학교 버펄로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버펄로에서 첫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을 착수하였다. 그 사이 그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허락되지 않자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2001년까지 재직했다. 1974년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등단한 이후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야만스러운 서구 문명에 그 근본 원인을 찾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83년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로 영어권 작가에게 수여하는 영국의 유명 문학상인 맨 부커 상을 받았다. 1999년 《추락(Disgrace)》으로 다시 부커상을 받아,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부커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문학 활동을 한 이래 거의 은둔하며 지냈기 때문에 두 차례 모두 수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커먼웰스상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상, 프랑스의 페미나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부커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외자의 놀라운 관여를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였으며,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네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는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정년퇴임 후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영문학부 명예 연구원이 되었고, 2003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교환교수를 겸임했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도 취득했다.
658
331149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58
수도권
수도권(首都圈, ) 또는 수도 지역(首都 地域), 수도 지구(首都 地區)란 수도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주변 도시권 지역을 하나로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각국의 주요 기능(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다. 또한 수도권은 어느 한 나라의 수도와 함께 가까운 지역이 수도권에 포함된다. 그리고 수도권이나 수도에는 법정구역이 대부분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은 비수도권으로 부른다. 세계의 수도권. 대한민국의 수도권. 대한민국의 경우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지방의 전역을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순천시, 평성시, 황해북도 중화군, 상원군 일대를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659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59
특별시
특별시(特別市)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이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특별시는 서울특별시가 유일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켜 경기도에서 분리하였으며, 대한민국 출범 후 1949년에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개칭하였다. 광역시 및 특별자치시 및 도와 동급인 광역지방자치단체이지만, 특별시장은 차관급인 광역시장 및 도지사보다 더 높은 장관급이다. 사건 및 논란. 세종특별시 승격 추진. 2017년 4월 27일 오전 이경희 한국국민당 대선후보가 세종특별자치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종시를 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와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을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대전특별시 승격 추진. 2017년 4월 17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거리에서 대전을 특별시로 승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충청의 중심 대전이 충청의 중심으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며 반드시 대통령이 돼서 충청의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전주특별시 승격 추진. 2017년 3월 22일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전라북도의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안희정 후보는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하고 전주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문화전통의 도시로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하겠다며,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새만금특별시 신설 추진. 2017년 5월 1일 오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전주시 전동성당 인근에서 거점유세를 열고 "전국의 모든 첨단산업을 새만금으로 모아보자"며 "새만금특별법을 통과시켜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홍준표 후보는 새만금 개발 추진에 조건이 있다며 "전북에서 20% 이상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해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새만금을 홍콩 식으로 개발을 해보겠다"며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난 뒤에 1국2체제 형식으로 운영했다. 홍콩의 자본주의를 손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서 모든 규제를 싹 없애버리고 환경, 경찰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1국 2체제로 개발하자는 것"이라며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끌어내서 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특별시 승격 추진. 부산의 특별시 승격 주장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수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서도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공회의소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 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공회의소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1949년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부산시는 한국 전쟁 중에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의 시세(市勢)가 강해졌고 부산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부산시를 특별시로 지정해야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후에 서울특별시와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4.19 이후 다시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주장되었으나 장면 내각은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경부축을 발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박정희의 의지로 부산시는 특별시보다 한 단계 낮은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2003년 2월 17일 부산의 6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옛 부산경제가꾸기 시민연대)´가 올해 ´부산의 특별시 승격´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2003년 전개할 시민경제운동 10대 사업을 발표하면서 ´특별시 승격운동을 신규사업으로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새 정부가 주요 국정지표로 내세운 분권적 차원에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세계경쟁력을 강화하는 국가전략 투자도시로서 부산을 특별시로 승격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부산발전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또 ´부산특별시´승격을 전제로 한 경상남도 양산시 및 진해시 웅동지역의 발전적 통합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2003년 6월 23일 홍성철 진해문화원 이사는 창원대학교 국제홀에서 지방분권운동경남본부(상임대표 안홍준) 주최로 열린 ‘부산광역시의 대도시 패권주의 대응 토론회’에서 ‘진해신항 건설에 따른 경제적 효과 분석’을 주제 발표하고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진해는 물론 김해·양산까지 부산에 편입시켜 서울에 버금가는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은 진해 용원동 일대에 건설되는 진해신항의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독식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또 경남과 부산이 함께 발전하려면 경남 땅의 부산 편입 논리에 벗어나 양산·김해를 지켜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진해시민과 전체 경상남도민이 힘을 모아 부산의 진해 신항 편입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 이사는 “현재 부산항은 컨테이너 선석 21개만으로도 항만관련 매출액이 연간 20조원을 웃돈다”며 “신항만은 부산항의 1.5배인 30선석으로 어느 자치단체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이익의 향배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산항의 20조원 매출은 부산 부가가치의 40%며 항만의 고용효과도 전체의 27%”라며 “신항의 30선석 가운데 18선석만 소속돼도 개당 1만5000원인 컨테이너세가 도세 수입으로 연간 724억원”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산은 이처럼 항만의 가치를 잘 알고 신항만을 한 손에 틀어쥐려고 끈질기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양산·김해·진해를 부산에 집어넣어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도 핵심은 진해 땅에 있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앞서 토론한 박동철 경남신문 편집국장도 “부산의 목적은 신항만 독자 운영을 위한 진해권역 편입”이라며 “부산은 진해 웅동·용원동 일대만 손에 넣어도 크게 만족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26일 YTN은 부산광역시청이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양 관련 산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중앙정부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양특별시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해양특별시가 되면 항만시설을 비롯해 해양자원개발사업 시행자와 관련기업에 대한 조세감면은 물론 정부의 예산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독자적으로 해양개발에 나설 수 있고 해양부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부산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최우용 동아대학교 교수는 "해양특별시 법률안의 제정방안은 국가균형발전과 해양도시의 국가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추진에 난항이 예상된다. 2004년 12월 3일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은 "해양수도로서 부산특별시를 설치하며 국가가 부산시를 국제해양수도로 개발하기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추진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특히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국가나 특별시로 승격되는 부산시가 항만시설과 해양자원, 해양산업의 개발사업자 등에 대해 조세와 각종 부담금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또 부산 여행객이 지정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할 경우 면세와 환급특례를 부여하고 카지노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관광진흥법에 특례를 두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유 의원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차등적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유수한 경쟁 항만들의 독주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부산이 살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2009년 7월 16일 민주당 조경태 의원이 부산 국제신문사 대강당에서 ‘부산해양특별시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 김인세 부산대학교 총장,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박경문 전 경성대학교 총장, 신정택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오거돈 한국해양대학교 총장, 범어사 주지 정여스님, 정홍섭 신라대학교 총장, 조규향 동아대학교 총장 등 지역 내 유력인사들이 추진위 상임고문을 맡고, 조 의원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조 의원은 국회에서 <폴리뉴스>와 만나 “정치권의 이념적, 정략적 접근을 떠나 해양특별시를 바라는 부산시민들의 염원을 이뤄내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실천적 행동”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해양특별시로 부산의 차세대 성장 동력인 해양물류와 해양관광을 적극 육성하고, 장기적으론 우리나라의 경제수도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이라며 “미국, 호주,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정치수도와 경제수도로 이원화돼 있는데,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각 전문가 150여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에서 부산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동시에 구체적 실무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약 1년6개월 후엔 특별법 발의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2012년 7월 27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부산을 해양거점도시로 만들고, 부산특별시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이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산·울산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이 같이 밝히며 "세종시도 특별시, 제주도도 특별자치도다. 가능하냐고 물어보겠지만 확실히 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부산의 그린벨트도 지금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것을 시가 직접 관리하도록 바꾸고, 도시계획과 여러 규제도 시로 위임하겠다"며 "부산을 좀 더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부산·울산 통합 특별시 승격 추진. 2007년 2월 13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가칭 동북아 부산포럼(대표 조관홍 동아대학교 교수) 초청특강에서 "국토 동남지역 광역경제권을 수도권에 상응하는 규모로 활성화하고 해양물류도시로서 상해, 천진 등 인근 항만 도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산·울산·거제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해 특별시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손학규 측 관계자도 "100만과 400만의 도시 규모로는 국제적인 경제에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해양특별시를 염원하는 부산과 산업특별시를 추구하는 울산을 통합하여 광역경제권을 형성하고 수도권 중심의 1극체제가 아닌 양극체제로 우리나라 경제권을 편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산과 울산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보완적 성격으로 통합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이며, 수도권·중부권·호남권·동남권의 4대 경제권과 강원도와 제주도의 2개 경제권을 부르짖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4+2체제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울산광역시청은 '정치인의 주장으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울산 상공계에서도 "부산과 울산을 통합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부산을 염두에 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정치적인 면은 제쳐두고라도 인구만 봐도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울산이 부산과 대등한 통합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에 하나 양도시가 통합된다면 울산은 부산을 먹여 살리는 생산기지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해운대관광특별시 승격 추진. 2011년 6월 28일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창조도시 전략세미나에서 배덕광 해운대구청장은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을 민선 5기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청장은 "지난 7년 동안 3선 구청장으로서 구정을 운영해오면서 지방재정에서부터 인사 등 모든 권한이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어 지방분권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해운대의 무궁무진한 인프라와 역량을 이용해 관광 특별시를 조성한다면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해운대구청은 내부적으로 T/F팀을 구성하고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지난 2006년 제주도청이 제주특별자치도청으로 지정된 것처럼 해운대를 영상과 컨벤션, 관광산업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해운대구청은 해운대특별자치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 2012년도에 계획된 지방행정체제 개편 방안에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해운대구청은 한발 나아가 관광특별시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인근 구군과의 통합을 제안할 계획이지만 해당 지역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련 지방자치단체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해운대구청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는 기장군의 오규석 군수는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묻고 싶다"며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지자체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현욱 수영구청장 또한 "주변 지방자치단체와의 통합을 논하기 하기 전에 해운대구 안에서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의 독단적인 관광특별시 발표에 불쾌함을 나타냈다. 더욱이 최근 수년 동안 논란이 되어온 부산지역의 동서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서부산시민협의회 김영주 공동대표는 "부산지역 내 동서 간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운대구가 관광특별시 조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며 "이같은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부산에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주특별시 승격 추진. 2002년 8월 15일 경주신문은 문화재보호에 따른 경주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주발전 전략의 한 방안으로 거론되던 '경주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키자'는 운동이 지역의 한 민간단체에 의해 본격 추진된다고 보도하였다.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 전 국회의원)는 최근 경주 특별시 승격추진 계획 건의서를 한나라당을 비롯한 각 정당과 경주시청 등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문화특별시 승격 추진 논의는 1990년대 후반 지역내 일부 교수들에 의해 처음제기됐으나 그동안 경주시청과 경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주지역출신 국회의원 등이 주로 고도보존특별법 제정운동에 주력하는 바람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2002년 11월 2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시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대선후보에게 요구하기로 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중앙정부 주도로 경주의 문화재를 종합정비하고 예산의 집중배정 등으로 외국인 유치에 노력하고 시민들의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11월 4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의 국무총리 산하 문화특별시 지정을 골자로 성타(性陀) 불국사 회주스님, 백상승 경주시장, 이진구 경주시의회 의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을 비롯해 경주시의원 18명 등이 연대서명한 ‘경주 문화특별시 승격 건의서’를 각 정당 16대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불국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개 지구를 비롯 2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도시인 경주가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도굴과 훼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라며 “이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시 지정과 함께 이미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고도보존법의 조속한 통과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특히, “세계각국은 문화재 관리로 인해 시민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법률을 제정해 문화재 보호와 사유재산권 행사를 조화롭게 해결해 오고 있는 추세”라며 “지금까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시민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지금 시민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경주발전협의회는 밝혔다. 경주발전협의회 황윤기 회장은 “경주 특별시 지정이 대선공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각 정당을 순회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8년 11월 1일 경주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2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의 특별강연에서 경북대학교 문경현 명예교수는 ‘경주시의 문화특별시 지정 당위성’이라는 주제로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경주가 세계적 유물과 유적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에 이같은 고적보존과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개발을 해야됨에도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으로는 재정감당이 안돼 수많은 유적지가 훼손일로에 있으므로 하루빨리 특별시로 승격시켜 국가가 특별예산지원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남해안해양특별시 신설 추진. 2013년 1월 10일 미디어워치에 따르면 일각에서 망국적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신설되는 해양수산부 주도로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남해안해양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남해안해양특별시’는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계획으로 단순히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공동대표 한나라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의원)은 지난 2011년 12월 27일 ‘남해안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도시들 묶어 인구 130여만명의 ‘섬진광역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가칭 ‘섬진광역시’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및 경상남도 남해군, 하동군, 사천시가 포함되며, 교육과 관광, 미래 첨단기술과 성장동력 산업을 결합시킨 미래 친환경 복지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 '남해안해양특별시'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권 이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선산업 관리기능 이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및 해양수산부)의 도서 및 해양과 이어진 육지부분 개발권 이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행정구역개편 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라선특별시와 남포특별시, 개성특별시가 특별시로 설치되어 있다. 라선시는 2010년 1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특급시'에서 특별시로 승격시킴으로써 생겨났다. 중화민국.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인구 백만명이 넘는 난징, 상하이, 베이징, 톈진, 칭다오, 충칭, 시안, 광저우, 한커우(현재 우한시의 일부), 선양, 하얼빈시의 11개 도시를 특별시로 지정했다. 이후 "원할시"로 개칭하면서 특별시라는 이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660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0
팔도
 <br> 팔도의 위치 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 구역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시행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눈 13도제가 시행되었다. '팔도'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며, 여러 지방의 아리랑이 '팔도 아리랑'으로, 여러 지방의 김치가 '팔도 김치'로도 불린다. 그러므로 '팔도'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각 도의 이름은, 그 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도시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들었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수도(京) 사방 500리 이내로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땅'이란 뜻으로 '기(畿)'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래의 표는 도청 소재지와 지방 이름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및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따라서 정리한 것이다.
661
333698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1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大韓民國의 行政 區域)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자치도, 1개의 특별자치시로 구성된다. 이상 총 17개의 행정구역은 광역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시는 자치구로, 광역시는 자치구와 자치군으로, 도는 자치시와 자치군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이상의 행정구역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자치도와 특별자치시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으며, 특별자치도에는 자치시가 아닌 행정시를 둔다. 행정시는 특별자치도지사 직속으로 그 역할을 하며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 8개 도와 6개 광역시에는 총 75개의 자치시와 82개의 자치군이 설치되어 있으며, 특별시와 6개 광역시에는 총 69개의 자치구가 설치되어 있다.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명 이상의 자치시에는 일반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어, 특별·광역시에 설치된 자치구와 구별된다. 일반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보(補)하고 시장이 임명한다. 구청장은 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 및 지방자치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 시(자치시, 행정시)와 구(자치구, 일반구)는 읍·면·동으로, 군은 읍·면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다시 읍·면은 리로, 동은 통으로 나뉜다. 통 및 행정리는 말단 행정 구역인 반으로 나뉜다. 행정 구역 현황. 경기도. 경기도는 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8시 3군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남부는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 경기북부는 의정부시에 소재한 경기도청북부청사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는 하위 행정구역으로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지방자치단체이다. 행정시는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아니다.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산하에 이북5도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도지사 및 시장·군수, 읍·면장을 임명하고 있다.
663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3
노벨 문학상
노벨 문학상( - 文學賞, , )은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중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 때때로 작가 개인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특정 작품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에서 "기여"란 한 작가가 쓴 작품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특정 년도에 상을 받을 사람을 결정하며 수상자의 이름을 10월 초에 발표한다. 이 상은 다섯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895년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었다. 다른 노벨상은 노벨 화학상, 노벨 물리학상, 노벨 평화상, 노벨 생리학·의학상 그리고 노벨 경제학상이 있다.
664
3312898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4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잠든 미녀()』, 『고도()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생애.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군(西成郡)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 「석일(원제: )」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 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신조()』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 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작품 목록. 이 외 다수. 일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사망에 대하여.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자살설. 이상이 가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665
69654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5
보사노바
보사노바(, 새로운 성향)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한 형식으로 1960년대에 브라질의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보사 노바의 신이라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가 발전시켰다. 삼바(Samba)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1960년대에 미국,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다.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Negro)》(수록곡 카니발의 아침(Manhã de Carnaval))가 1960년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스탠 겟츠(Stan Getz)와 조아웅 지우베르뚜가 함께 녹음한 앨범 Getz/Gilberto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며 아스트루지 지우베르뚜(Astrud Gilberto)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1965년 미국 빌보드,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보사 노바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독일 재즈 평론가 요아힘 E 베렌트는 저서 '재즈북'에서 "보사 노바는 삼바와 쿨 재즈가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666
38662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6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1927년 1월 25일 ~ 1994년 12월 8일)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와 엘리스 헤지나, 세르지우 멘데스,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스탠 게츠,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 조빙이 브라질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시인이자 외교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1956년 연극 《Orfeu de Conceição》의 음악을 맡았을 때였다.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은 〈Se todos fossem iguais a você〉(내 삶을 밝혀줄 누구)였다. 이후 이 연극을 원작으로 프랑스 제작자인 Sacha Gordine가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de Negro)를 만들 때 Gordine은 새로운 곡으로만 영화를 채우고 싶어 했고, 모라이스와 조빙에게 새로운 곡을 써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모라이스는 제작당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머물고 있었고, 둘은 전화를 통해서 단지 3개의 곡만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A Felicidade〉, 〈Frevo〉, 〈O Nosso Amor〉이다. 이 둘의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모라이스는 조빙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의 가사를 써 주었다. 편곡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클라우스 오거만(Claus Ogerman)은 조빙의 많은 곡들을 편곡해 주었다. 조빙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1963년 《게츠/질베르투》(GETZ/GILBERTO) 앨범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앨범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투가 부른 대히트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빙은 수많은 아름다운 앨범을 작곡한다. 조빙과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재즈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와 프랑크 시나트라는 각각 《Ella Abraça Jobim》 (1981) 와《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1967)란 앨범에서 조빙의 곡들을 불렀다. 조빙의 앨범인 《Wave: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1996)은 오스카 피터슨,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투츠 틸레망 등의 연주를 수록하고 있다. 조빙은 세계적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4년 12월 8일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계속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앨범인 《Antonio Brasileiro》은 사후 발매되었다. 조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조앙 바치스타(São João Batista) 묘지에 묻혔으며,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의 이름은 1999년 그를 기념하여 갈레앙-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공항(Galeão - Antônio Carlos Jobim)으로 바꾸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패럴림픽 마스코트인 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668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8
A
A, a(에이)는 로마자의 1번째 글자이다. 역사. A는 소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에서부터 왔다. 기타. 상표 등에서는 A에서 가운데의 가로줄을 빼서 'Λ'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러면 그리스 문자 Λ나 키릴 문자 Л와 모양이 같아진다. 예를 들면 SΛMSUNG이나 KIΛ. 국제음성기호에서는 A와 비슷하되 다른 발음으로 Λ를 쓰기도 한다.
669
71266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69
F
F, f는 로마자의 6번째 글자이다. 역사. F는 갈고리를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왔다.
670
8259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70
K
K, k( )는 로마 문자의 11번째 글자이다. 역사. K는 손바닥을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유래했다.
671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71
블로그
블로그()는 정보 공유나 의견 교환을 목적으로 올리는 글을 모아 월드 와이드 웹상에 게시하는 웹사이트의 일종이다. 블로그라는 말은 웹(web)과 로그(log, 기록)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일기처럼 차곡차곡 적어 올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 다른 사람도 보고 읽을 수 있으며, 보통 시간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글부터 보인다. 그러나 글 쓴 시간을 수정할 수 있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시간을 고쳐 글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게시판(BBS)과는 달리 한 사람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올릴 수 있다. 블로그를 소유해 관리하는 사람은 블로거(blogger)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저작한 내용을 허가 없이 무단으로 복사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하는 사용자는 스플로거(splogger)로 부른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어떤 대형 미디어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1인 미디어'라 부른다. 순화어는 누리사랑방이라고 지정되어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줄여 부르면 누사가 된다. 개요. 블로그의 시초는 원래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던 것이며,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서비스와 환경이 제공됨으로써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처음에 나왔던 블로그에는 단순히 텍스트인 글을 올리고 읽는 기능만 있었으나, 사진,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또한, 블로그에 댓글(Reply)과 트랙백(Trackback)을 달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와 블로거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었다. RSS나 Atom으로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텍스트 중심에서 분화되어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도 발전하고 있다. 역사. 1994년 미국의 저스틴 홀이 시작한 온라인 일기가 가장 초기의 블로그중 하나로 뉴욕 타임즈 등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웹페이지에는 새글(What's new)과 차례표(Index) 페이지가 있었으며 이때 차례표는 보통 가장 최신의 글이 위에서부터 게시되거나 순서대로 제목이 나열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자게시판 동호회의 것과 같다. 개인 블로그는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대체로 다른 뉴스를 베껴 온다. 그러나 매트 드러지가 만든 드러지 리포트 사이트는 전문 뉴스 채널 못지 않는 속보와 특종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초기의 블로그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이나 HTML 편집만으로도 가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 워드프레스, 무버블 타입, 블로거 나 라이브 저널 같은 블로그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웹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에서도 이러한 블로그 기능이 추가되어 개인화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03년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폭격에 한 이라크인이 블로그를 통하여 평화를 주장하여 블로그는 대중화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2년 11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blog.co.kr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음에서 블로거뉴스라는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포털 첫화면에 신문 기사와 함께 개인 블로그 포스트를 노출시키면서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졌다. 종류. 국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접속은 국가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블로그 분류에 국적을 고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티스토리 등 블로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회원가입 또는 웹호스팅이 필요한지 여부로 블로그를 분류한다. 가입형 블로그. 가입형 블로그는 회원 가입만 하면 손쉽게 블로그를 생성할 수 있다. 포털, 신문사, 인터넷 서점,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 등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한다. 커뮤니티(관심, 즐겨찾기, 이웃 등) 형성, 콘텐츠(뉴스 기사, 책 정보 등) 퍼가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HTML, CSS를 고칠 수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설치형 블로그. 설치형 블로그는 서버에 블로그 저작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다. 서버의 다른 공간에 위키나 게시판을 운영할 수도 있고 플러그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거나 웹호스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도의 비용이 생기며, 컴퓨터, 네트워크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형 블로그 소프트웨어로 텍스트큐브, 워드프레스, 텍스타일, 무버블 타입 등이 있다. 다른 유사 서비스와 비교. 블로그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들로 카페, 개인 홈페이지, SNS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 유형들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온라인 동호회. 인터넷 이전 시대인 1980년대부터 유즈넷이나 상업적인 전자게시판 서비스를 통해 동호회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유료 PC 통신에서 여러 가지 동호회 기능을 서비스하고 이들 동호회에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보는 것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게시판에 글이 자주 올라왔고, 회원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자연스레 생김으로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회나 카페 등 커뮤니티는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블로그와 다르다. 개인 홈페이지. PC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서부터 시작해 다음의 카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기반 서비스’만이 평정해왔던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개인으로 처음 옮겨온 것은 네띠앙이다. 네띠앙은 개인 홈페이지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개인 홈페이지 사이의 관계 맺기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단점으로 인해 네띠앙은 점차 몰락한다. 블로그는 댓글, 트랙백, RSS 등 교류 기능을 기본적으로 제공해주고, 편리하게 내용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홈페이지는 편집이 어렵고 다른 사용자와 의견을 나누기도 까다롭다. SNS. 네띠앙이 쇠락하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홈피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을 통틀어 SNS라고 한다. SNS는 주로 오프라인 인맥에 기반하고 사생활들이 다뤄지기 때문에 대체로 블로그보다 폐쇄적이다. SNS도 댓글 기능이 있지만, 트랙백, RSS 기능은 없다. SNS 중에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yozm) 등과 같이 마이크로 블로그로 불리는 것들은 글자 수 제한이 있는 대신 RSS 기능이 제공된다. 미투데이와 요즘(yozm)은 각각 2014년, 2013년 서비스를 종료했다. 수익. 블로그에 광고를 포함시켜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한다.
672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72
구심력
구심력(求心力, )은 원운동에서 운동의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여 물체의 경로를 바꾸는 힘이다. 힘의 방향은 물체의 순간의 운동방향과 늘 직교하며, 방향은 곡면의 중심이다. 원운동은 운동방향이 늘 바뀌므로 등속도 운동이 아니다. 원운동 하는 물체의 경우 운동의 방향이 늘 바뀌므로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뉴턴의 운동 제1법칙에 따라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힘을 구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은 물체의 속도 벡터에 수직으로 작용하므로, 물체의 속도의 방향만을 변화시키고 속도의 크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구심력은 물체와 물체의 운동의 중심을 잇는 선과 그 작용선이 항상 평행하므로, 구심력에 의한 돌림힘은 0이 된다. 따라서 구심력 외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등속 원운동의 경우,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구심력과 정반대 방향의 힘이 자신에게 구심력과 같이 작용하여 힘의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심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된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의 크기. 질량이 "m" 인 물체가 "v" 의 속도로 반지름 "r" 의 원운동을 할 때 받는 구심력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formula_2는 구심 가속도이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받는 힘의 방향은 원의 중심이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속도가 2배가 되면 힘은 4배가 된다. 반지름이 힘에 반비례 하므로 반지름이 절반이 되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힘이 두배가 되어야 한다. 구심력은 각속도 "ω"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각속도와 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공전주기 "T"를 이용하여 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공전주기와 각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입자가속기에선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관성이 커지므로 똑같이 가속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γ는 이며 로런츠 인자라 불린다. 구심력의 발생. 줄 끝에 묶여있는 물체가 수평면을 따라서 원운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물체에 가해지는 구심력은 밧줄의 장력에 의해 가해진다. 이때 밧줄의 경우 끌어당기는 힘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벽의 수직항력에 의한 미는힘도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뉴턴이 생각했던 구심력은 현대의 중심력에 해당한다. 어떤 인공위성이 행성의 주변에서 궤도운동을 할 때, 중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편심성 궤도의 경우 중력의 방향은 초점으로 향하지만, 구심력은 곡률중심을 향하지 않는다. 구심력의 다른 예로는 자기장 내에서 나선운동하는 하전입자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자기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673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73
원심력
원심력(遠心力)은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관찰되는 관성력으로, 회전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된다. 하지만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실제 존재하는 힘은 아니다. 가속하는 계(비관성좌표계) 안의 물체들은 관성에 따라 운동하려하기 때문에, 계를 기준으로 하여 계가 받는 가속도의 반대방향 가속도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힘이 관성력이다. 원심력은 관성력 중에서도 회전하고 있는 계 안의 관찰자가 느끼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물체는 관성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원운동하는 좌표계는 가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원운동하는 계 안의 관찰자는 물체가 마치 바깥쪽으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이를 원심력이라 한다. 관성좌표계에서 이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 이 물체에 대해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은 없으며, 물체는 단지 관성에 따라 등속도로 운동하려는 것뿐이다. 원심력과 구심력.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되는 원심력’은, ‘비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하기 위한 가상적인 힘이고, 실존하는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지만,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는 아니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원심력만 관찰될 뿐, 구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구심력과 이에 대한 반작용만 존재할 뿐,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즉, 좌표계에 따라 구심력과 원심력 중 하나만 관찰된다. 따라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 하나의 좌표계에서 (혹은 좌표계를 명시하지 않고)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와 원심력.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고, 구심력과 그 반작용만 존재한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이란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을 줄에 매달아 손으로 회전시키는 경우를 보자. 관성좌표계에서 관찰시, 회전하는 공에는 줄을 통하여 구심력이 작용되고 이로 인해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반작용력은 손에 전달된다. 이 반작용력은 공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원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쉽게말해 원심력은 나가려는 힘, 구심력은 당기는 힘이다.
674
3331676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74
유니코드
유니코드()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다. 유니코드는 유니코드 협회()가 제정한다. 또한 이 표준에는 ISO 10646 문자 집합, 문자 인코딩, 문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문자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유니코드의 목적은 현존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들을 모두 유니코드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인코딩들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한정되어 있고, 다국어 환경에서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유니코드가 다양한 문자 집합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니코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와 지역화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의 기술인 XML, 자바, 그리고 최신 운영 체제 등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유니코드에서 한국어 발음을 나타날 때는 예일 로마자 표기법의 변형인 ISO/TR 11941을 사용하고 있다. 기원 및 개발. 유니코드의 기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제록스의 조 베커와 애플의 리 콜린스, 마크 데이비스가 통일된 문자 집합을 만드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조 베커는 유니코드라는 이름의 국제/다언어 문자 인코딩 시스템(international/multilingual text character encoding system, tentatively called Unicode)를 위한 초안을 출판하였다. 유니코드 변환 형식과 국제 문자 세트. 유니코드는 2가지 매핑 방식이 있다: 유니코드 변환 형식(Unicode Transformation Format, UTF) 인코딩, 국제 문자 세트(Universal Coded Character Set, UCS) 인코딩. UTF 인코딩은 다음을 포함한다:
680
3305972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0
언어
언어(言語)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예의 일부이다. 언어학은 이러한 언어가 발현되는 부분, 즉 음성, 의미, 문법, 형태 등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언어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며 연구하는 학문, 즉 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유형론) 등까지를 포괄한다. 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컴퓨터나 수학 등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상호 효과적인 의사교환을 위해 고안된 것을 인공어라고 한다. 세계의 언어. 자연어 중에 세계적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괄호 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나타낸다. 어족과 분류. 자연어는 어족 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은 고립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현재 고립어로 분류돼 있으며, 일본어 및 알타이어와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다. 수화. 손의 모양으로 의사 소통하는 수화도 언어의 일종이며 음성언어와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인공어. 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인공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기타.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외부 링크. 언어:사람이 하는 목소리
681
46155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1
심리학
심리학(心理學, )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목으로서, 인문과학에서부터 자연과학, 공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연구인 심리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정보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된 문제들이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에는 감각, 지각, 사고, 성격, 지능, 적성 등의 인간 특징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기저 원리를 밝히는 심리학은 미래 사회에서 그 중요성을 점점 더해갈 것이다. 심리학은 연구 분야에 따라 크게 심리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다루는 '기초심리학'과 이러한 원리와 이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용심리학'으로 나뉘며,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우에는 14개 분과, 미국의 경우 본과 제외 56개 분과가 있다. 정의.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과정, 영혼에 대한 학문” 이라고 정의되는 심리학은 다양한 접근방법 만큼이나 조금씩 그 정의의 폭을 달리할 수 있겠으나 과학적인 절차를 수용하기 시작한 근대의 심리학 이후에서는 적어도 '행동에 대한 과학'이라는 협의의 정의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역사. 철학 및 과학적인 바탕. 기원전부터 '심리학'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심리학에 대한 생각은 쭉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은 1010년 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라틴어 이름: 루돌프 고클레니우스)는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릭은 조건을 사용한 그의 작업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Psychologia empirica and Psychologia rationalis", 1732년-1734년)》을 출간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랑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의사 윌리스(1621년 - 1675년)는 정신과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심리학은 철학에서 완전히 분화되어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심리학의 성립. 1879년, 흔히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분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첫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실험실을 개설하였다. 그는 심리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 내성법'을 주장하였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는 1890년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을 출간하였다. 그는 당시 심리학에서 다루는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저술하였다. 에빙하우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기억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수행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다. 형태주의 심리학. 형태주의 심리학(또는 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 Wertheimer)가 자신의 논문 <운동지각에 관한 실험연구>(Experimental studies on the perception of movement)을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 에렌펠스, 칼 슈툼프(Carl Stumpf)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흐는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주장하여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슈툼프(Stumpf)는 분트(Wundt)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apparent motion)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phi)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코프카(Koffka)와 콜러(Kohler)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슈툼프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코프카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콜러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라 이름붙여 발표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빈(Lewin)은 여러 가지 이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이다. 레빈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차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심리학. 189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과 의식,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이 중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의식'의 발견, 그리고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후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유명한 학자로는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 등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곧 과학적 엄밀성의 결여, 경험적 증거의 부족, 이론체계의 반증불가능성 등으로 인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과학철학자 포퍼에 의해 유사과학의 세 가지 사례들 중 하나로 지적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칼포퍼가 주장한 반증 가능성과 경험적 증거가 과학의 주요한 속성이라는 주장이 속속히 반박당하고 오류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지적은 상당부분 수그러들었다.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들과 문제점,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발감 등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어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지 않으며, 그들은 미국 심리학회 단체들 중 가장 큰 단체인 APA의 10% 미만,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단체인 APS의 5% 미만을 차지한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기초심리학자들) 중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학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정신분석은 문학비평 등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라 할 수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 20세기 초 1920년대를 전후해서 왓슨, 손다이크, 헐(C. Hull), 톨먼(E. Tolman), 스키너 등에 의해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창되었다. 이들은 쥐, 비둘기 등의 동물을 이용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학습이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주장하였다. 이 자극 반응 이론(S-R 이론)으로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 여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특히 심리학의 과학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검증 가능한 것'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검증 가능한 것'들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 이전의 큰 심리학적 흐름이었던 정신분석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행동주의자들은 그러나 '검증가능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정작 심리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심적, 내적 과정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한 결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인지혁명 이후 주된 패러다임의 자리를 인지심리학 등 다른 분야에 내주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과장된 비유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원래 뜻은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 본능이 행동으로 직결되며 이 외의 요소나 우연 등의 예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이나 언어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로 얻은 정보와 연관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성격을 확신하여 규명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뜻이다. 인본주의 심리학. 1950년대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가 주창한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인본주의 심리학이 파급되었다. 주요 심리학자로는 욕구이론을 주창한 매슬로, 인간중심 심리치료를 주창한 로저스, 직관적이며 전체적 인지를 중시한 장 이론인 게슈탈트 심리학을 주창한 펄스(F. Perls) 등이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과 인본주의 심리학은 같다.) 인지주의 심리학. 인지심리학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으로 거슬러올라갈수있겠으나 20세기 후반(196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지혁명'은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보았는데, 이로 인해 행동주의 심리학은 '블랙박스 심리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 측정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의 심적, 내적 과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러한 자극-반응이 어떠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거의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엄 촘스키 등 언어학자들과 앨런 튜링,폰 노이만 등의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지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촘스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내적 심리과정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당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인지주의 심리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지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달리 내적인 심리과정을 중시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 특히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접 학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로 인해 인지심리학은 흔히 인간정보처리론(human information processing)이라고도 불린다. 인지심리학은 현재 인접 학문들-철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언어학 등-과 협력하여 인간 인지과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크게 간학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지주의 심리학의 거장으로는 알버트 엘리스, 아론 벡등이 거론된다. 심리학의 연구방법론. 심리학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질적 연구방법과 양적 연구방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전자는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후자는 주로 기초 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나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도 많다. 양적 연구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성을 수치화, 계량화하기 용이한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연구방법이 적합한 사례로는 반응시간(response time)연구, 지능 연구와 같은 것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은 통계학의 지식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의 특성을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적 연구방법론에는 IRT(문항반응이론), 다층 모형(Multilevel model), 구조방정식모형(Structural equation model), 경로분석(path analysis), 요인분석(Factor analysis)등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론의 가장 큰 강점은 일반화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질적 연구방법은 이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례를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임상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상담, 질문지 작성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내담자나 연구대상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있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은 심리학을 경험과학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심리학의 분야. 기초 심리학. 과학자형 모델로 대표되는 기초 심리학은 심리학의 학문적 바탕의 확립을 목표로 기초적 지식과 심리적 기제를 실험을 통해서 연구한다. 주로 인지 심리학, 학습 심리학, 발달심리학, 사회심리학, 생리심리학, 신경심리학 등이 포함되며 이는 귀납적 사고를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연역적 사고도 이용한다. 한편 이러한 주요한 과학자형 모델에는 구성개념을 전제로 하는 심리통계, 심리측정 및 검사 등의 수학적 접근이 포함된다. 응용 심리학. 전문가형 모델로 대표되는 응용 심리학은 심리학의 실재 현장 장면의 적용을 목표로 적용 방법과 원리를 연구한다. 심리학의 방법과 결과를 실제 생활이나 실제 문제에 응용하려는 학문으로 심리학의 한 분야이다. 산업 심리학, 임상 심리학, 교육 심리학, 범죄 심리학, 건강 심리학, 여성심리학등이 이에 속한다. 임상 심리학. 임상 심리학은 정신건강에관한 정신적 이슈가 다루질 필요성에서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이다.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취약성-스트레스 모델등 통합적으로 의학적 조건(medical conditions)과 임상 과정(clinical process) 및 인지주의 또는 행동주의심리학등 여러 심리학적 접근을 다룬다. 상담 심리학. 상담 심리학(Counseling Psychology)은 정신적 이슈를 가진 사람들을 진단하거나 심리적 부담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가진 심리학 분야이다. 상담 심리학 교육과정에는 검증된 상담이론을 비롯한 성격심리학•발달 심리학 등 다양한 이론 교육과 개인•집단상담 기법, 심리진단•평가, 사례 분석 등 다양한 실습 교육이 있다. 약물 처방권을 가진 정신과 의사와 비교해서 상담심리사는 생리심리학이나 약물심리학 또는 건강심리학 등을 고려해 다양한 치료기법과 기술을 통해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특정상황을 고려한 정신건강의 이슈에따라 이의 개선을 위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가 병행되거나 약물치료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 또한 다른 심리학처럼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현재 상담 심리학은 기업, 학교, 기관 등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682
29389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2
잠() 또는 수면(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 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 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 사람의 잠. REM 수면의 기능. 렘(REM, 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고 있는 역설수면이다. 역설수면(逆說睡眠)은 몸은 잠을 자고 있으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波)를 보이는 수면 상태이다. 자율신경성 활동이 불규칙적인 수면의 시기로, 보통 안구가 신속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기에 렘수면으로 언급된다. 한편 영아기에는 렘수면이 수면의 50%를 차지하다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면 시간. 사람은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잔다. 성인은 하루에 대략 5시간~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한다.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6시간 15분 정도, 미국은 7시간 정도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를 느끼고 감정이 날카로워져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쉬워진다. 또한, 잠이 부족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 등 여러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건강에 유익하고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 7시간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은데, 5시간~6시간 30분을 잘 때 수명이 가장 길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적절한 수면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다. 연령대별로 얼마만큼 자야 적당한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수면재단에 따르면 26-64세 성인은 7-9시간을 권장하며, 6-10시간이면 적당하고, 6시간 이하 또는 10시간 이상이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취침 시간, 수면 시간이 매일 달라지면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683
75312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3
마약
마약(痲藥, )은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출시된 제품이다. 좁은 의미로는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만을, 즉 "아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약이다."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향정신성 약품 및 중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 모두를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관례적으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것으로서 이를 사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물질로 분류되지 않은 민간제조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 등을 말하며. 거의 대부분 진정쌍떡잎식물군에 속한 식물이기도 하다. 일부 국내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물질 중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등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쓰인다.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할 경우 먀약중독과 신체에 손상을 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사망을 유발하게 된다. 마약을 복용하면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환자가 아닌 이상 전혀 효과가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대외적으로 마약 청정국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실상은 마약 청정국하고는 다르다. 역사. 마약은 그리스의 의사 갈렌이 만든 마비와 감각 상실을 일으키는 약이다. 갈렌은 맨드레이크 뿌리, 알테쿠스(에클라타), 씨앗, 양귀비차를 마약의 재료로 사용했다. 마약은 원래 고통을 줄이고, 감각을 둔하게 하거나, 수면제 같은 역할을 하는 모든 약품을 말했다. 지금의 마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약은 아토피오이드 수용체와 결합하는 물질로 정의할 수 있지만 불법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마약은 아편, 아편 유도체를 가리킨다. 마약의 첫 사용은 1600년이지만 마약은 1926년에 기록되었다. 마약은 많은 종류가있는데 마약의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형태는 모르핀과 코데인이다. 통증을 줄이기 위해 아편의 염기로 만들어진 합성 마약은 펜타닐, 옥시코돈, 트라마돌, 페티딘, 하이드로코돈, 메타돈, 하이드로모르폰이렇게 7개다. 종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면서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약물이라도 약물에 따라 작용부위 및 작용기전이 달라 다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여 여러 분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 CNS(중추 신경계) 흥분제. 흥분제로 중추 신경계(이하 CNS)를 흥분시켜 감각 및 운동기능을 항진시키는 약물이다. 소량 투여시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분이 약간 고양되며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올라간다. 과량 투여시 환각 및 다행감 또는 신경이 예민해져 불안감을 유발하여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기분 고조로 인해 주관적으로는 강해진 것 같고 우월감을 느끼게되며 객관적으로는 말이 많아지고 초조해하며 불안해지고 과민상태가 된다. 중추신경억제제. 진정제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며, 진통 효과가 있다. 환각제. 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의 감각을 왜곡하여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상태로 느끼는 반면 불쾌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나라별 법률. 대한민국 법률상 마약. 현재 대한민국 법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마약류는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를 뜻한다. 마약은 양귀비, 아편, 코카잎 및 그의 알칼로이드와 화학적 합성품을, 향정신성의약품은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오남용시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질을 뜻하며 대마는 대마초{칸나비스 사티바 엘("Cannabis sativa L.")}와 그 수지(수지) 및 대마초 또는 그 수지를 원료로 하여 제조된 모든 제품을 말하나, 대마초의 종자(종자)·뿌리 및 성숙한 대마초의 줄기와 그 제품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편을 제외한 마약은 마약류관리법에서 다루나 아편은 형법에서 규정 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형법상 마약 처벌.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형법 조항은 형법 347조인데, 50g 이상의 마약을 제조 판매했을 때 15년 이상의 징역, 최고 사형까지 선고된다. 특히 1kg 이상의 마약을 유통하다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한다. 독일의 마약 규제. 독일의 경우 스스로 마약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침해에 대해서는 형법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를 위해 무허가로 마약을 소지하는 것은 마약법 제29조 제1항에 의해 처벌 대상 -미국- 1)미국정부는 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을 5가지 항목으로 분류하여 관리한다. 1.스케줄1:남용가능성이 높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되지 않은 약물이다. 아편의 일부 유도체(헤로인), 마리화나, 합성 아편제, 환각제 등이다. 2.스케줄2:남용가능성이 높으나 의학적 사용이 허가된 약물이다. 일부 아편제제, 암페타민, (ADHD 치료제의 성분이다.)합성마약류, 코카인 등이다. 응급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로는 모르핀과 메페리딘이 있다. 3.스케줄3:남용가능성이 낮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된 약물이다.(일부 마약 성분 함유) 코데인은 다른 진통제의 진통 효과를 상승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약이다. 이 혼합물을 사용한 예는 코데인 함유 아세트나미노펜이다. 4.스케줄4:남용가능성은 낮으나 신체적, 정신적 의존성을 일으킬 수 있는 약품이다. 바륨이 들어간 항우울제, 흥분제 및 진정제가 이에 속한다. 5.스케줄5:남용가능성이 가장 낮은 약품이다. 코데인을 함유한 진해제, 아편을 함유한 지사제 등이 이에 속한다.
685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5
고전적 조건형성
고전적 조건형성(古典的條件形成, Classical Conditioning)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으로, 특정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자극(중성자극)이 그 반응을 무조건적으로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반복적으로 연합되면서 그 반응을 유발하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이에 관하여 잘 알려져 있다. 이론. 고전적 조건형성이론(古典的條件形成理論)은 특정한 자극에 따라 생기는 반응은 그와 다른 성질의 자극으로도 똑같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습 이론으로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가 주장하였다. 개요. 중성 자극 직후에 무조건 자극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자극을 〈조건 자극〉 (CS; Conditioned Stimulus)이라고 하며,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반응을 〈조건 반응〉 (CR; Conditioned Respons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조건형성이 학습된 개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조건 자극이며, 이 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는 것은 조건 반응이다. 조건 형성. 이반 파블로프는 조건 형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건 형성이란 평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자극이 무조건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자극과 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 자극이 되어 조건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을 이반 파블로프의 조건 형성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고전적 조건 형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유기체가 조건자극을 제공받으면 곧이어 무조건자극도 함께 제공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이 제공된다는 신호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조건 형성을 실험한 예는 위의 예 말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Watson&Rayner 사람은 원래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는 반응을 한다. 여기서 큰 소리는 무조건자극이 되고, 놀라는 반응은 무조건반응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흰쥐와 큰소리를 지속적으로 연합하면 흰 쥐만 보아도 놀라는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고전적 조건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차적 조건 형성. 조건자극은 본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이었다. 그러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무조건자극과 같이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렇게 조건 형성이 된 자극은 다른 중성자극도 조건 형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위의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 형성이 된 종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을 보여주면 파란 불빛만 봐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차적 조건 형성이라고 하며 그 이상의 조건 형성을 삼차적 조건 형성, 사차적 조건 형성 등등 고차적 조건 형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삼차적 조건 형성 이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런 고차적 조건 형성에서는 조건자극들이 연달아 제공되고,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소거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거. 소거는 조건 형성이 풀어져 조건자극이 다시 중성자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자극인 종소리만 들려주고 계속해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개는 조건자극인 종소리를 듣고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건자극과 함께 무조건자극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수반성을 제거한다면 조건반응은 잘 형성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수반성은 일관성과 관계있다. 그러나 소거가 되었다고 해서 조건반응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종소리를 갑자기 제시하면 침을 흘린다. 이런 과정을 자발적 회복이라고 한다. 이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 영속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배운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두뇌에서 아예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다시 함께 종소리와 음식을 제공한다면 종소리는 중성자극에서 다시 조건자극으로 회복되며 종소리(조건자극)와 음식(무조건자극)의 연결은 더욱 단단해지게 될수도 있다. 한편 수반성은 자극 제시의 시간간격과 횟수에서 일관성이 없는 경우에서도 약화될 수 있지만 여러 자극의 강도 차에서도 수반성을 약화시킬수있는 확률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자발적 회복. 자발적 회복 소거절차가 이루어진 후에도 음식물과 연합시키지 않은 채 다시 종소리만 반복적으로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소거되었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반응이 재훈련 없이 다시 나타난다. 이를 조건반응의 자발적 회복이라 한다. 이때 반응의 강도는 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자극일반화. 자극일반화란, 조건자극과 유사한 다른 자극에 동일한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우리 속담이 가지는 의미와 같다. 갈치구이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적이 있는 아이가 식사 때마다 생선을 피하려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시가 많지 않거나 씹어 먹으면 되는 생선통조림을 우연히 먹은 아이는 다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변별이라고 한다. 변별. 변별 자극을 구분하여 반응하는 것을 변별이라 한다. 즉, 자극일반화는 자극 변별에 실패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미각혐오학습. 이렇게 고전적 조건 형성은 보통 수차례 반복이 되어야 자극 간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르시아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쥐에게 먹이를 주고 어느 정도 후에 열을 가해 매스꺼움과 구토등을 유발시켰더니 그 후에도 그러한 종류의 먹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차례 반복을 통한 연합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바로 조건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686
3324480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6
학습
학습(學習) 또는 배움은 본능적인 변화인 성숙과는 달리, 직간접적 경험이나 훈련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인지하며, 변화시키는 행동 변화이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생체의 일반적 적응과 신체적인 피로, 손상 등 일시적인 동기 부여 등에서 초래된 행동의 변화와는 구별된다. 학습과 공부가 대비되는 점은 학습이 외부적인 교육이나 현상에 대해 영향을 받는 데 비해 공부는 자발적인 면이 강하다. 미리 학습하는 것은 예습(豫習)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과 도구적 조건형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687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7
발달심리학
발달 심리학(發達 心理學, )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 동안 연령 및 환경에 따른 정신과정과 행동상의 변화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개인의 지적·정서적·사회적 과정의 전개에 관심을 둔다. 발달 원리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행동 유형이 형성되는 생후 20세까지의 시기에 적용되는 것과 함께 이러한 발달의 향상적인 기간뿐만 아니라 이후 발달의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면까지도 발달과정으로 보는 전생애적인 발달과정을 다루는 것이 발달심리학의 관심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체성, 인간관계, 창의력 등을 삶의 중요한 세 영역으로 본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별로 형성되는 특성을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접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연구 영역은 신체적·지적·정의적(情意的)·사회적 발달로 나누기도 하고, 태아기·영아기·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중년기·노년기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어떤 특수 영역, 예를 들어 뇌의 발달, 양심의 발달, 성격의 발달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운동능력의 발달, 인지발달, 성격 발달 등 심리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방법과 주제를 포괄하기도 한다. 변화는 크게 질적 변화(구조적 변화, 단계적 변화)와 양적 변화(연속적 변화, 비단계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발달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반응의 범위 모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적응. 장 피아제는 그의 인지발달론에서 동화와 조절의 개념으로 적응을 설명하면서 발달의 중요한 면을 언급한바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신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있어서 동화는 자신에게 맞추어 환경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라면 조절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으로 기술된다.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 에릭슨의 성격 발달 이론은 전생애에 걸친 발달을 강조한다. 1)신뢰감 대 불신감(영아기, 0-1세) 2)자율성 대 수치와 회의 (1-3세) 3)주도성 대 죄책감(유치기, 3-6세) 4)근면성 대 열등감(아동기, 6-11세) 5)정체감 대 정체감 혼란(청소년기, 11-18세) 6)친밀성 대 고립감(청년기, 18-40) 7)생산성 대 침체감(중년기, 40-65) 8)통합성 대 절망(노년기, 65세 이상)
688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8
반응의 범위 모형
반응의 범위 모형(reaction range concept)은 사람의 발달은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선천적으로 발달이 가능한 범위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환경 풍요도에 따라 발달의 수준이 변한다. 이 모형은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689
5668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89
인지발달
690
3327984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90
피아제의 인지 발달론
인지 발달론(認知發達理論, 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은 인간의 인지 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한 피아제의 이론이며, 심리학의 인지이론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피아제는 심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인식론은 인간이 발생학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론 또한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피아제는 한 사람의 아동기가 사람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지 발달은 신체적 성숙과 환경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과정의 점진적 재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지 발달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으며 언어는 인지 발달을 통해 습득된 지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알프레드 비네의 실험실에서 아동지능검사와 관련하여 일한바 있다고 알려져있다. 인지 발달론의 주요 개념.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은 파란 신호일 때 길을 건너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되, 그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제는 도식과 적응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예를 들어 5세 유아가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라고 배웠다고 생각해 보자. 이를 통해 이 아이는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와 같다"는 도식을 보유하게 된다. 몇 가지의 도식은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빨기 도식이나 잡기 도식과 같은 것인데, 빨기 도식의 경우 그러나 그 기능면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서 적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발전하게 된다. 적응은 우리에게도, 또 동식물에게도 흔히 찾을 수 있다. 홍관조의 수컷은 선명한 붉은색인 반면에 암컷은 눈에 띄지 않게 엷은 갈색을 띠면서 종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줄인다.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지적으로는 도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새로운 도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도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물체를 새라고 배운 아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것이 털도 없고, 날개도 펄럭이지 않는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새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되면서 불평형의 상태가 된다. 피아제에게 동화는 외부적 요소를 생활 또는 환경,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의 구조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 도식에 맞추는 과정이다. 새로운 경험에서의 동화는 기존의 개념에 맞추거나 조절하기 위해 재해석되며 동화는 사람들이 새롭거나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직면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학습한 정보를 언급하는 것이다. 조절은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에 맞지 않을 때, 유기체는 불평형의 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을 변경하거나 새롭게 만들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불평형의 상태가 되었던 아이는 이제 새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을 조절이라고 한다. 혹은 누군가가 그것은 새가 아니라 비행기라고 일러 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조절이라고 하는데, 조절의 과정에서는 도식의 형태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조절은 특정 환경에서 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고 기존의 도식을 새 정보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식(지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새 대상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변화되길 요구한다. 피아제는 사람의 두뇌는 평형화를 위한 진화를 통해 짜여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화와 조절을 통한 내/외부적 과정에 의한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기존의 정신 도식에 동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대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조절해야 한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알게 되기(동화시키기) 위하여 그 대상의 외양에 집중(조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대상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발달은 두 기능 사이의 평형화를 증대시킨다. 아까 새와 비행기를 구분하게 되었던 아이는 이제 날아다니는 대상의 하위 범주로 새와 비행기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직화를 거듭함으로써 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화는 인지적 발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인지 발달의 단계.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은 네 단계를 통하게 되며, 질적으로 다른 이 단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된다고 한다. (감각운동기(0-2세). 감각적 동작(의 시기 : 출생 직후 ~ 2세 감각운동기에는 신생아의 단순한 반사들이 나타나는 출생에서 초기의 유아적 언어가 나타나고,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2세 경에 끝난다. 이 단계에서 아동의 행동은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과 운동기술을 사용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대상영속성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아동은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또 이 시기가 지나면 모방이나 기억이 가능한,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게 되며 초기의 단순한 반사행동은 사라지고 점차 자신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목적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전조작기(2 - 6,7세). 전조작기의 시기 : 2세 ~ 6, 7세 조작이란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전조작기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전의 단계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는 대략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표상을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전조작기 사고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 조작기(7~11세). concrete operational stage 보존 개념(conservation)이란, 모양이 넓은 같은 모양의 컵에 같은 양의 우유를 보여준 뒤, 한 컵의 우유를 모양이 다른 긴 컵에 부어도 긴 컵과 넓은 컵의 우유의 양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동일성, 보상, 역조작의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수의 개념에서도 달걀과 컵을 나란히 놓은 뒤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면 컵과 달걀의 수가 같다고 대답하지만 달걀이나 컵을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달걀과 컵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전조작기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조작기 아동은 같은 양의 진흙으로 만든 두 개의 공을 보여준 뒤 아동 앞에서 하나를 핫도그처럼 길게 만들면 어느새 양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보존개념을 획득한 구체적 조작기에는 모양이 달라져도 그 양이나 수는 보존된다는 개념을 획득한다. 같은 모양의 구슬을 보고 쇠구슬과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 있게 됨 연역적 사고가 가능하게 됨 분류,서열 등 집합적 관계에서뿐만아니라 공간적이거나 인과적인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형식적 조작기(11, 12세 이후) 또는 추상적 조작기. Formal operational stage 새로운 상황에 직면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가설적 상황을 설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시험하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현실 상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는 없는 개념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자신과 다른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언어적 진술에 의한 명제의 논리를 평가할 수 있다. 사회문화적 발달. 한편 이러한 맥락의 연대기적인 개인 연령수준에서의 인지 발달론 유형과는 대조적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 상호간의 섬세하고 협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 전달 측면에서 인지 발달을 다루는 레프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이론이 언급되고있다. 참고. 피아제(Jean Piaget)와 비고츠키(Lev S. Vygotsky)의 인지발달이론을 중심으로,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제18권 제3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542663 (송지성, 이성애. (2012).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8(3), 215-227.)
696
66951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96
생태계
생태계(生態系, )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생태학(ecology)이라고 한다.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루면 이를 '생태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곧 상호의존성과 완결성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 사는 유기체들은 먹이사슬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물질이 여러 유기체에 걸쳐 순환하고 에너지도 같이 이동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생겨난다. 개관. '생태계'라는 용어가 서구 사회에 정립된 것은 1930년 로이 클라팸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환경 전반의 유기체와 생물들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탄스리가 앞서 정리한 로이의 연구 결과를 정제하여 발표한 것이 현재의 생태계(Ecosystem)이다. 생태계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든 자연환경 상에 있어 모든 생물이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의 생태학적 개념이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거대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이 서로 밀접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한다. 생태계의 예로는 크게 육상 생태계, 연안 생태계, 육지 생태계로 나뉜다. 기능. 인류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계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자 상품과 용역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재나 유제품과 같은 제품들이다. 야생동물에서 얻은 육류는 생태학적 관념을 적용하면 훨씬 더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 수초를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케냐와 남아프리카 일대의 연구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야생 생태계의 구조를 이용한 상업구조는 이렇다 할 성과가 많이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생태 관광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산업이 가장 성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생태 관광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자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이라고 여겨진다.
698
10645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98
유전자
유전자(遺傳子, 영어: gene)는 유전의 기본단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현대 유전학에서 유전자는 "게놈 서열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구간으로서 유전형질의 단위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게놈 서열 안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의 일부분을 이루며 조절 구간, 전사 구간, 기타 기능이 부여된 구간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대립형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형질은 유전자 서열에 의해 나타나는 유전형질의 한 종류이다. 유전자의 개념은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히 특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멘델의 특질은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50년대 DNA가 발견되면서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해명되었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에 의한 다양한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난다. 눈 색깔, 혈액형과 같은 것을 비롯하여 특정한 유전적 질환과 같은 것도 유전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수 천 가지의 생화학 작용도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소수의 경우, 유전자가 세포주기의 간기때 유전정보가 잘못복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인해 기존의 형질과 다른 새로운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세포 내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 가운데 정보를 갖는 부분을 뜻한다. DNA의 대부분은 정보가 없는 무작위 서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비부호화 DNA 서열이라 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99%가 비부호화 DNA 서열에 해당한다. 한편, 생쥐의 비부호화 DNA 가운데 80%가 인간의 것과 상동성을 보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두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유전자는 "부호화된 DNA 서열"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의해 진행되는 전사 (생물학) 등의 과정을 통해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유전자 발현이라 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개체의 발생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개체와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에 발현된 특징을 발현형질이라 한다. 발현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역사. 1850년대 그레고어 멘델이 완두콩 실험을 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였다. 완두콩 시험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하나의 유전형질이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하지 않는 개체를 순종으로, 이 순종들의 교배를 통해 형질변화가 일어나는 개체를 잡종으로 불렀다. 잡종의 1세대에는 두 부모 개체의 대립형질 가운데 한 가지만이 발현되었는데 이를 우성, 1세대에 발현되지 않는 특성은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잡종 교배 시험을 통해 1세대에 열성이 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며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다시 발현한다는 것과 발현의 빈도가 통계적으로 분명한 법칙에 의한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의 발견으로서 멘델은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초창기 멘델의 발견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 휘호 더프리스가 《세포간 범생설》("Intracellular Pangenesis")을 출간하면서 멘델의 이론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프리스는 멘델이 제시한 유전학 개념의 용어를 정리하여 유전형질, 발현형질과 같은 용어를 고안하였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1900년대에 이르러 멘델의 법칙은 다시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유전자가 염색체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건은 특정한 유전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1928년 모건은 초파리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지도를 제작하였다. 1928년 영국의 의사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페렴쌍구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피스 실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시험을 통해 그리피스는 유전형질이 세균 사이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매끈한 균주를 형성하는 S형과 거친 균주를 형성하는 R형 두 종류의 폐렴쌍구균을 이용하여 실험하였다. S형을 생쥐에 주사하면 쥐는 하루 만에 죽지만 R형은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피스는 폐렴 백신을 만들기 위해 S형 균을 열처리하여 죽인다음 생쥐에 주사하였다. 죽은 S형 균은 병을 유발하지 않아 생쥐는 생존하였다. 그다음 그는 죽은 S형 균과 살아있는 R형 균을 혼합하여 주사하였는데 생쥐는 폐렴으로 죽었다. 죽은 생쥐의 혈액을 관찰한 결과 모든 균이 S형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S형 균의 무엇인가가 R형 균을 S형 균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피스는 이 현상을 형질변환이라 불렀다. 1941년 조지 웰스 비들과 에드워드 로리 테이툼은 돌연변이가 대사회로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를 연구하여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여 생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 콜린 먼로 매클라우드, 매클라인 매카시는 DNA에 유전자 정보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피스가 관찰한 형질변환은 바로 이 DNA의 이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었다. 이로써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는 하나의 유전자는 사실상 DNA의 염기서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DNA의 염기서열이 RNA에 의해 전사되고 리보솜에 전달되면 그로부터 지정된 아미노산 서열의 결합이 이루어져 효소와 같은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1972년 월터 피어스의 연구팀은 박테리오파지 MS2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서열을 판독하였다. 유전자 전체의 서열을 게놈이라 한다. 2007년 8월 햅맵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 지도를 판독하였다. 개체차를 반영한 인간의 게놈 판독 결과는 2008년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699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699
DNA
DNA(, 데옥시리보핵산, 디옥시리보 핵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인 두 개의 긴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이다. 세포 핵에서 발견되어 핵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이 핵 이외의 세포소기관도 독립된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DNA는 4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중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닥은 사이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은 독특한 핵염기(nucleobase)로 구분되기 때문에 흔히 DNA 염기서열이라고 부른다. DNA 염기서열은 유전정보를 나타내는 유전자 구간과 그렇지 않은 비부호화 DNA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기능을 가진 유전자였더라도 돌연변이를 통해 기능을 상실한 슈도진이 되면 비부호화 DNA가 된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정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게 한다. 유전자는 DNA 사슬의 특정 구간으로 실제 단백질 형성과 같은 발현에 관여하는 엑손 구간과 그렇지 않은 인트론을 포함한다. DNA가 직접 유전자 발현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발현 과정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mRNA)가 지닌 코돈에 의해 진행된다. 코돈은 세 개의 염기서열이 묶인 유전단위로 시작 코돈과 종결 코돈 그리고 그 사이에 실제 아미노산 결합을 지시하는 코돈들로 이루어져 있다. mRNA는 리보솜에서 효소와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한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DNA는 유전의 원인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어 왔으며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이 확인되었고 1952년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의 허시-체이스 실험으로 확정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네이처지에 실은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그러나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DNA의 X선 회절 사진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것이었으며, 그녀와 앙숙이었던 동료 과학자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하고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연구가 가능했기에 이후 그들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프랭클린은 암으로 1958년에 사망하여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였다. 구조.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중합체 두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인산염이 결합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4 종류의 핵염기 가운데 하나가 결합되어 있다. 디옥시리보스와 인산기가 중합 과정을 통해 사슬 한 가닥의 뼈대를 이루고 핵염기들이 서로 상보적인 수소 결합을 통해 염기쌍을 이루며 이중나선을 만든다. 한편 이러한 DNA의 상보성은 한쪽만으로 상대편을 예측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중나선 구조는 DNA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이다.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유전정보를 저장하는데 수소 결합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쉽게 풀렸다 닫힐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을 위해 일부분이 풀렸다가 닫힐 수도 있고 세포 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풀리면서 복제될 수도 있다. 일부 또는 전체가 풀린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이 종료되거나 복제가 끝나면 다시 닫히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인이 된다. 뉴클레오타이드.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은 인산염이 다른 한 쪽은 핵염기(nucleobase)가 결합되어 있는 DNA의 단위체이다. 생체에는 여러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으며 저마다 독자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아데노신은 결합된 인산염의 수에 따라 아데노신일인산, 아데노신이인산, 아데노신삼인산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아데노신삼인산은 인체의 모든 세포에 화학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세포의 에너지 동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데노신삼인산에서 인산염 하나가 분리되어 아데노신이인산이 되면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DNA를 이루는 것은 이것보다 인산염 하나가 더 적은 아데노신일인산이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시토신(C), 구아닌(G), 아데닌(A), 티민(타이민)(T)의 네 종류이다. 이들 핵염기와 연결된 뉴클레오타이드는 마치 레고 블럭처럼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아데닌은 티민과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염기쌍을 이룬다. 염기의 모양과 화학구조 때문에 상보적인 두 핵염기만이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DNA 가닥의 한쪽 염기서열만 알면 다른쪽은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쪽 가닥의 염기서열이 -A-C-G-T- 라면 다른 쪽 가닥의 염기서열은 -T-G-C-A- 가 된다. 아데닌(A)과 티민(T)은 두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 수소결합의 개수 때문에 A-T 결합은 G-C 결합보다 결합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쉽다. 생명체가 죽으면 DNA 역시 여러 이유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A-T 쪽이 먼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티민은 계속적인 손상을 입어 우라실로 대체되며 이렇게 손상을 입은 DNA는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 대부분의 생물은 위 네 핵염기만이 DNA의 단위체이지만 바이러스의 일종인 일부 박테리오파지는 우라실도 단위체로 사용된다. 박실루스 슈브틸리스("Bacillus subtilis") 종에 속하는 박테리오파지 PBS1과 PBS2 그리고 예르시니아("Yersinia") 박테리오파지 piR1-37의 DNA는 티민이 우라실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생물에서 우라실은 RNA의 단위체로서만 관여한다. 이중나선. DNA가 나선 모양으로 꼬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의 중합 형성으로 생기는 구조 때문이다. 리보스와 디옥시리보스는 모두 탄소 5개로 이루어진 오탄당으로 단원자 산소를 매개로 오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단원자 산소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탄소마다 1번에서 5번까지 번호를 붙여 위치를 나타낸다. 뉴클레오타이드에서 디옥시리보스의 1번 탄소는 핵염기와 결합하고, 2번과 3번은 하이드록시기(-OH)와 결합하며 4번 탄소와 연결된 5번 탄소가 인산염과 결합한다. 그리고 다른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하는 것은 5번 탄소에 연결된 인산염이다. 따라서 DNA 염기서열 사슬은 언제나 인산염을 사이에 두고 5번 탄소와 3번 탄소가 연결되게 된다. 이를 5' → 3' 연결 방향성이라고 부른다. 인산염의 결합 위치때문에 DNA 가닥은 3차원에서 나선 구조를 지니며 꼬이게 된다. 한편, 두 가닥의 염기서열 뼈대에 연결된 핵염기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한 쪽 가닥 말단이 3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5번 탄소이게 되고 그 반대로 한 쪽의 말단이 5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3번이게 된다. 그 결과 A-T 및 G-C 두 염기서열 뼈대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란한 역평행성과 상보성을 보인다. 이와 같이 하여 DNA는 두 개의 염기서열 뼈대가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가 되고 두 사슬의 핵염기가 마치 사다리처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이중나선의 종류. DNA 이중나선은 대개 오른 나사 방향으로 꼬이는 B형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널리 알려진 유형으로는 A-DNA, B-DNA, Z-DNA가 있다. DNA 이중나선은 나선 사이에 홈이 패이게 되는데 넓게 패이는 주홈과 좁게 패이는 부홈을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B-DNA의 경우 한 번 감긴 나선 마다 10개의 염기쌍이 놓인다. 그런데 A-DNA는 나선의 기울기가 수직축을 기준으로 30°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더 큰 폭으로 회전한다. 이 경우 나선 사이의 홈도 비슷하게 패여서 주홈과 부홈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며 나선 하나에 놓이는 염기쌍도 11개로 B형 보다 1개 더 많다. 한편 Z-DNA는 나사의 회전 방향이 B-DNA와 거울상 대칭을 보이고 나선 하나에 12개의 염기쌍이 놓이게 된다. 그 결과 Z-DNA는 B-DNA보다 길고 홀쭉하게 보이게 된다. DNA는 대부분 B형을 보이지만 매우 긴 DNA 사슬은 여러 형태의 DNA 사슬구조가 섞여 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반복하여 염기서열을 이룰 때 Z형 나선을 이루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자와 인접한 Z형 나선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환형 DNA와 초나선 DNA. 오랫동안 DNA 이중나선은 기다란 끈 모양으로 여겨져 왔지만, 전자현미경 관찰을 통해 많은 경우 양 끝이 공유결합을 통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환형 DNA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DNA 이중나선 역시 다시 한 번 꼬여서 초나선을 이룰 수 있다. DNA가 이렇게 고리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슬의 방향성 때문에 한쪽 끝의 3' 말단이 반대편 끝의 5'말단과 공유결합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려면 DNA 사슬 자체가 1 회 이상 더 회전하여야 한다.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나선을 더 단단히 조이는 효과가 일어나고 이를 양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반대로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함으로 인해서 고리를 만든다면 DNA 나선을 풀어주는 효과가 나타나고 이를 음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실제 DNA는 그것의 나선 1회전 당 염기쌍 수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변형하여 초나선에 의한 영향에 맞선다. 예를 들어 B-DNA는 나선축이 휘어져 나선 1회 당 10개의 염기쌍 주기를 유지한다. DNA의 위상적 구조가 갖는 생물학적 기능은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DNA 구조는 늘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풀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변한다. DNA 회전효소는 초나선 현상을 완화하는 효소로, 공유결합된 말단을 풀어 고리를 끊고 너무 꼬여버린 줄을 풀어준다음 다시 연결한다. 기능. DNA에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담겨있다. 그러나 DNA의 염기서열 모두가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염기서열을 유전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비부호화 DNA라고 한다. 비부호화 DNA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유전자로 기능하였으나 돌연변이 등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슈도진이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가 직접 생물을 이루는 물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전자에는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한 정보만이 담겨있다. 따라서 DNA는 생물의 설계도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요리책처럼 해야할 작업을 순서대로 적은 레시피에 가깝다. DNA의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고 처리되어 최종 결과물 생성에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DNA의 기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전자 발현. 유전자는 DNA의 일정 구간에 걸쳐 있는 염기 서열이다. 유전자에는 실제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엑손 구간과 발현에 관여하지 않는 인트론 구간이 있다. 엑손 구간의 시작은 촉진유전자(Promoter, 프로모터)에서 시작한다. 촉진유전자는 DNA 나선 두 가닥 중 어느쪽이든 있을 수 있다. DNA에 있는 유전자는 정보만을 지정하고 실제 단백질의 형성과 같은 일은 리보솜과 같이 세포 핵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 이 정보 전달은 전령 RNA(messenger RNA, mRNA)라고 불리는 "전령"이 담당한다. 촉진유전자는 바로 이 전령이 생성되는 시작점으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DNA의 두 가닥 가운데 어느 쪽을 이용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읽어야 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지정한다. 촉진유전자의 염기 서열 자체가 한 방향으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거꾸로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인 mRNA는 RNA 중합효소에 의해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위치인 촉진유전자에 결합하는데 촉진유전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RNA 중합효소가 정확히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단의 염기서열이 있다. RNA 중합효소는 이 유도 표지를 따라 접근하여 정확한 시작위치에 결합한 다음 DNA 사슬을 풀고 DNA와 상보적으로 형성되는 RNA 사슬을 엮는다. DNA와 달리 RNA는 아데닌의 상보적 핵염기로 우라실(U)이 사용된다. RNA 중합효소가 지나가면 DNA는 스스로 다시 감긴다. RNA 중합효소는 계속하여 mRNA를 결합하다가 종결 위치를 만나면 전사를 멈춘다. 종결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한 종류 이상이다. 유전자가 전사된 mRNA는 염기서열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데 실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코돈이다. 코돈은 시작 코돈, 아미노산 지정 코돈, 종결코돈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라실 셋이 모인 코돈 UUU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네개의 염기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 경우의 수는 formula_1 이므로 모두 64가지의 코돈이 있지만, 코돈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아미노산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지정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이다. 또한 코돈에는 한 개의 시작 코돈과 세 개의 종결 코돈이 있다. 진핵생물의 경우 전사는 두 단계를 거친다. DNA에서 곧바로 전사된 1차 전사체는 엑손 부분과 인트론 부분이 함께 전사되며 있다. 최종 형성되는 mRNA는 이 가운데 인트론 부분을 잘라내 버린다. 대개의 경우 인트론 전사체 RNA의 절단은 전사가 종결된 뒤 핵 안에서 이루어지고, 핵 안에는 잘려진 다양한 크기의 RNA 분자가 남게 된다. RNA 절단에 관여하는 소자는 스프라이소좀으로 유전자 서열 자체에 어느 부분이 절단될 것인지를 지정하는 염기서열이 따로 있어서 매우 정교하게 잘라내어 접합한다. 잘려나가는 부위는 때로 전체 전사체의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형성된 mRNA는 리보솜으로 옮겨가 번역된다. 리보솜은 세포내의 "공장"으로 실제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한 조립공처럼 일한다. mRNA에는 리보솜 결합 부위라는 번역 개시 신호가 있어 어디서부터 아미노산 결합을 시작할 지 지시한다. 리보솜은 mRNA를 "읽어"들이고 그에 맞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는 운반 RNA(transfer RNA, tRNA)를 받아들인 후 아미노산은 펩티드 결합에 사용하고 tRNA는 방출한 다음 다음 코돈을 읽는다. 이런 과정을 종결 코돈이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비유하자면 mRNA는 작업지시서, tRNA는 운반도구, tRNA에 결합한 아미노산은 재료가 되는 셈이다. tRNA는 독특한 접합이 있는 RNA로 한쪽 끝엔 mRNA와 상보적인 안티코돈이 있고 다른 한쪽엔 특정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구간을 지니고 있다. DNA에는 tRNA를 만들 수 있는 전사 구간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역시 유전자의 하나이다. tRNA는 세포 내에서 자신과 짝을 이루는 아미노산과 결합해 있다가 근처의 리보솜에 끌려들어가 아미노산 합성에 참여하고 방출된 뒤에는 다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 이 과정은 세포 내 물질의 밀도에 의존한다. 유전자 발현에서 단백질 합성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은 대부분 체내에서 합성되어 있다가 mRNA가 전달한 정보에 따라 단백질로 결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전체를 모두 체내에서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있다. 사람의 경우 20개의 아미노산 가운데 트립토판, 메티오닌, 발린, 트레오닌, 페닐알라닌, 류신, 이소류신, 리신의 8 개는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한다. 이들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우유, 계란, 고기 등에 풍부하므로 육식을 할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의 경우엔 콩이나 두부, 기타 여러 곡물 등을 혼합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 지지 않도록 식단에 주의하여야 한다. 결국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 mRNA와 DNA의 다른 구간에서 형성된 tRNA가 재료인 아미노산을 이용하여 리보솜에서 아미노산 사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전자 발현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 사슬은 단백질 접힘과정을 거쳐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이 된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효소가 있다. 효소는 체내의 생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로서 3차원 구조가 기능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소가 작용하는 부위를 효소의 활성자리라고 하는데 효소의 구조가 변하면 이 활성 자리 역시 바뀌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돌연변이. 유전자의 염기서열 어느 한 곳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돌연변이의 결과 코돈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최종 형성되는 아미노산 역시 바뀌게 된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개의 아미노산 변형은 자식에게 유전된다. 돌연변이는 자연적으로 계속하여 생성되며 방사선을 쬐거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생물은 DNA 수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돌연변이를 계속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돌연변이를 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유전정보의 변이가 발생한다. DNA에는 유난히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나는 구간이 있으며 메틸화된 핵염기를 치환하면서 오류를 보인다. 유전 정보를 담지 않는 비부호 염기서열도 동일하게 이러한 돌연변이를 겪을 수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절 부위는 별다른 유전자 발현을 하지 않으면서 돌연변이가 빈번하여 집단의 친연관계를 추적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전자의 동일한 위치를 놓고 원래의 유전정보 A와 변형된 유전정보 A'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즉 어느 유전자가 후손에게서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 가 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이렇게 발생한 대립형질에 우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환경이 어느 한 쪽 형질에 유리할 경우 점차 유리한 형질만이 살아남게 되어 생물 집단 전체의 유전형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진화의 기본 조건은 계속하여 발생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복제.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생물은 생장과 발달을 포함한 생애 전 단계에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필요로 한다. 세포가 분열될 때에는 그 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 정보 역시 빠짐 없이 나누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DNA 복제가 일어난다. DNA 사슬이 어떻게 풀리고 복제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1957년 메튜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의 실험을 통해 두 가닥이 풀린 후 각 가닥마다 새로운 상보적 염기서열이 형성되어 두 개의 DNA가 형성되는 반보존적 복제가 이루어짐을 확인하였다. 즉, 복제된 DNA 두 개는 각자 원래의 DNA 가닥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게 된다. DNA 회전효소가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생기는 과도한 꼬임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나선에 결합한다. 그 후 헬리카아제가 실제 이중나선의 결합을 푼다. 이중나선이 풀리면 DNA 중합효소가 복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DNA 복제에는 RNA로 이루어진 프라이머가 필요하다. DNA 복제를 진행하는 DNA 중합효소가 DNA의 시작점부터 직접 복제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소의 하나인 프리마아제가 열려진 DNA의 한쪽 가닥에 프라이머를 결합시킨 뒤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DNA 중합효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이중나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운 DNA 이중나선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성된다. 원래의 DNA 나선에 DNA 회전효소가 지나가며 지퍼를 열듯이 나선을 분리하면 이렇게 열리는 방향과 같이 진행되는 선도 사슬(Leading strand)는 진행 방향을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사슬(Lagging strand)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의 DNA 이중나선이 풀리고 충분한 길이의 새로운 염기서열이 확보 되어야 계속해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리마아제가 헬리카아제의 뒤에 연결되어 임시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프리미어 RNA를 만들고 뒤에 거꾸로 향하는 DNA 중합효소가 절편을 만들며 잇는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 오카자키 절편이라 한다. 이러한 복제 과정을 거치면 지연 사슬의 끝은 더 이상 프리미어를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그 결과 DNA 사슬의 말단 일부는 복제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때문에 복제가 거듭되면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은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편,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자식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감수분열을 한다. 정자와 난자같은 생식세포는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는 감수분열을 통해 성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 정보의 절반을 갖게 된다. 진핵생물의 세포에는 DNA와 핵 이외에도 여러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대개의 세포소기관은 난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관행적으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n, 수정 이후의 유전 정보를 2n으로 표기하여 동수의 유전정보가 암수에게서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포유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2n이 되도록 하거나 난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발생을 유도한 실험 모두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정자를 통해 와야하고 또 다른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난자를 통해 유전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게놈과 염색체. DNA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사슬은 염색체를 형성한다. 게놈.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하여 명명한 낱말로 1920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 한스 빙클러가 제안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어로는 유전체(遺傳體)가 쓰인다. 게놈의 길이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먼저 게놈이 해독된 예쁜꼬마선충의 경우 게놈의 크기는 1억 쌍의 염기서열 정도이지만,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완료된 인간 게놈의 경우 DNA 한 가닥당 3,234.83 Mb(메가베이스)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어 두 가닥을 합친 총 염기서열 양은 6,469.66 Mb이 된다. 각각의 세포마다 들어있는 게놈의 길이는 약 1.8 m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의 세포 핵의 크기는 5 μm에 불과하기 때문에 DNA는 매우 가늘고 긴 사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의 경우 매우 거대한 게놈을 갖기도 한다. 백합의 게놈은 인간보다 18배나 더 크다. 게놈이 해독되었다고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염색체. DNA는 평소 세포 핵 내부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색질을 이룬다. 염색질은 매우 가늘고 긴 실과 같으므로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포분열 과정에선 염색체 단위로 뭉치게 되어 광학현미경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생물 종마다 수와 크기가 다르다. 인간의 경우 22 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가 있다. 상염색체는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와 같이 번호로 불리고 성염색체는 x 염색체와 y 염색체 등으로 불린다. 성염색체는 동물마다 달라 어류는 ZO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결정은 XX인 경우가 암, XY인 경우가 수로 수컷이형을 보이지만, ZO 성결정 체계는 Z 유전자 하나만 있을 경우 암, ZZ인 경우 수로 암컷이형을 보인다. XY 성결정 체계와 달리 ZO 성결정 체계는 암수의 유전적 구별이 보다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류의 경우 400여 종에서 생애 주기에 따라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감성돔은 모두 수컷으로 태어나지만 2~3년이 지나면 암컷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5~6년생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된다. 한편 조류의 경우엔 ZW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염색체는 DNA 사슬이 염색질을 단위로 뭉친 것이다. DNA 사슬은 단백질의 일종인 히스톤을 실패삼아 감긴다. 히스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히스톤 H2A, H2B, H3, H4 가 각 한 쌍씩 8개가 팔량체를 이뤄 실제 실패와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히스톤 실패에 감긴 DNA를 뉴클레오좀이라 하는데 이것이 DNA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146개의 염기쌍이 히스톤 실패를 1.65번 감는다. 한편 실패를 이루지 않는 히스톤 H1은 실패 밖에서 DNA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좀은 다시 꼬여서 더 두꺼운 코일을 형성하는데 나선 1회전에 6 개의 뉴클레오좀이 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일은 또다시 접혀져 루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차례 겹쳐 만들어진 루프가 염색체를 이룬다. 염색체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 개의 염색분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된다. 이 염색분체들은 세포분열 말기에 각자 다른 딸 세포의 극으로 끌려가 새로운 세포 핵을 형성하게 된다. 염색체는 동원체를 중심으로 긴 팔과 짧은 팔이 구분되데 긴 쪽을 q 팔, 짧은 쪽을 p 팔이라고 한다. q와 p는 염색체 위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정할 때 기준이 된다. 동원체에서 가까운 쪽에서부터 q1 또는 p1과 같이 번호를 붙이며 멀수록 p20 또는 q40과 같이 큰 번호가 부여된다. 1p1은 1번 염색체의 짧은 팔에서 동심원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ABL2 효소 합성을 지시하는 ABL2 유전자는 1번 염색체의 1q25.2 에 위치해 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염색체 위의 유전자 위치를 밝혀내는 지도 작성은 매우 길고 복잡한 DNA 염기서열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거대한 염기서열 전체를 한 번에 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지도 작성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 DNA 절편을 이용한다. 자잘하게 잘린 절편들은 겔 전기 영동법과 같은 방법으로 분리되어 염기서열이 해독된다. 동일한 정보를 갖는 여러 가닥의 DNA를 사용하면 직소 퍼즐을 맞추듯이 서도 들어 맞는 절편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나의 절편은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대량으로 복제하여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해독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1983년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 고안되어 소량의 시료로부터 라이브러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삽입한 핵염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광자를 직접 검출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더욱 빠른 해독이 가능해졌다. 세포소기관의 독립적 DNA.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DNA를 갖는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에는 2 개의 RNA 유전자, 22 개의 tRNA 유전자, 13 개의 단백질 합성 유전자가 있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별개의 생물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진핵 생물의 조상과 공생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엽록체 DNA는 보통 120~150여개의 유전자가 배열되어 있으며 염기서열은 약 150 kb 내외이다. 발견의 역사. 핵산과 염색체의 발견.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미셔가 핵산을 발견한 직후 세포 핵에서 막대모양의 구조를 매우 진하게 염색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염색질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세포 분열 과정에서 뭉쳐저 염색체가 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셔의 뉴클레인과 플레밍의 염색질은 동일한 물질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염색질이 유전에 관여한다고 추측하였고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유전자의 발견. 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염색체와 유전의 관계를 입증하였다. 그는 애초에 초파리의 짧은 세대 주기를 이용해 진화를 재현할 생각으로 2년간 실험했지만 실패하였다. 초파리를 빛이 들지 않는 암실에서 70세대 이상 사육하였으나 초파리의 눈이 퇴화한다거나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초파리의 눈이 하얗게 변하는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그는 정상인 붉은눈 초파리와 돌연변이 흰눈 초파리를 교배하여 2세대에서 모두 붉은눈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한 다음 3세대에서는 붉은눈과 흰눈이 섞여 나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른 우성/열성 유전형질 발현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흰눈 초파리가 모두 수컷이었다. 그는 초파리의 눈을 희게 만든 열성인자가 초파리의 성염색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실험을 계속하여 여러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였다. 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를 놓고 가설을 세웠다. 영국의 아치볼드 게로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효소를 지정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하였고, 1941년 조지 비들과 E. L. 테이텀이 붉은빵곰팡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였다. 이들은 곰팡이에 엑스선을 쬐어 특정한 아미노산을 형성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점돌연변이 때문에 돌연변이 곰팡이는 다른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합성하지 못하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효소를 만들지 못했다. DNA의 역할 확인.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1928년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폐렴쌍구균은 면역반응에 걸려 병을 유발하지 못하는 R형과 폐렴을 유발하는 S형이 있는데, S형이라 할지라도 열을 가해 균을 죽이면 폐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S형 균을 R형 균에 섞어 넣었더니 R형이 모두 S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S형의 어떤 요소가 R형에게 전달되어 형질변환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 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에이버리의 실험 이후에도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DNA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강력한 후보였으나 단백질 역시 만만찮은 후보였다. DNA와 단백질 가운데 어떤것이 유전 요인인지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알프레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더욱 정교한 통제 조건으로 허시-체이스 실험를 실시하였다.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과 DNA에 방사성 동위원소 표식을 달아 대장균에 주입한 후 무엇이 유전에 관여하는 지를 관찰하고 그것이 DNA임을 확정하였다. DNA의 구조 발견. DNA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DNA의 구조 역시 오랫동안 여러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었다. 1935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피버스 레빈은 뉴클레오타이드가 인산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분자 화합물인 DNA의 크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실제로는 핵염기의 구성비 역시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레빈은 DNA를 이루는 핵염기 4종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짝을 이루는 사각형 구조를 가설로 제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DNA의 핵염기 비율은 4종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레빈의 가설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의 핵염기가 모두 동일한 양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은 언제나 동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샤가프 스스로는 이 발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DNA 핵염기의 상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이끄는 캐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는 1948년부터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구조를 직접 관찰하고자 하였다. X선도 일종의 빛이기 때문에 굴절, 반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회절은 작은 물질을 지나가는 빛이 물질의 그림자 영역까지 애돌아 나가는 현상이다. 결정의 모양에 따라 회절 모양도 달라지게 되므로 역으로 이용하면 물질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X선을 결정에 조사하면 브래그 법칙을 만족하는 방향으로만 X선이 회절되어 결정구조가 반영된 패턴을 남긴다. 195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이후 DNA의 구조 파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진 51을 촬영하였다. 프랭클린의 사진 51은 프랜시스 크릭을 거쳐 제임스 왓슨에게 전달되었고 둘은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사진 51은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데이터로서 1953년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지에 사진 51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둘이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핵염기들이 A-T, G-C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며 두 가닥의 사슬이 서로 꼬여 이중나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복제 메커니즘의 발견. DNA는 구조가 규명되자 마자 그것이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임을 암시하였다. 핵염기는 오직 하나의 상보적 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NA 사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닥이 분리되면 곧바로 새로운 이중나선을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 콘버그는 이러한 DNA의 복제가 효소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1953년 DNA 중합효소를 발견하였다. DNA 사슬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제된다. DNA 이중나선이 풀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선도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진행이 있다. 선도 진행이 연속적인 복제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지연진행은 DNA 이중나선의 물리적 특징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1968년 부부였던 오카자키 레이지, 오카자키 츠네코를 비롯한 일본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지연 진행되는 DNA 사슬이 일정한 크기의 절편 단위로 복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카자키 절편은 DNA 복제 과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이다. 관련 주제. 유전자 가위. 1970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해밀턴 O. 스미스는 DNA의 특정 부위를 절단하는 제한 효소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제한 효소는 훗날 HindII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DNA 염기서열에서 GTYRAC 구간을 찾아내 절단한다. Y는 T또는 C, R은 A또는 G가 될 수 있다. 이 효소는 1세대 유전자 가위가 되어 분자생물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유전자 가위로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효소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크리스퍼가 유전자 가위로 쓰인다. 유전자 가위로 DNA의 원하는 부분을 절단하면 그것을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DNA에 주입하여 대량으로 복제시킬 수 있다. 이렇게 원하는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클로닝이라고 한다. 클로닝은 DNA 감식,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용도에 두루 활용된다. 유전자 편집. 유전자 가위와 클로닝 기술은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곡물이나 구근 식물은 농업의 주요 품종으로 여러 이유에서 유전자 변형이 연구되었으며 2002년 말 16개국에서 유채, 옥수수, 감자 등 15작물 68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생물의 안전성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유전자 편집은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도 적용 가능하다. 실험 동물에 특정한 유전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2018년 중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줄기 세포. DNA 염기서열에 있는 수 많은 유전자들이 발생의 어느 시점에서 발현하고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고정되는 가 하는 주제는 발생유전학의 중요 관심사이다. 다세포 생물은 발생과 발달 과정에서 일정 시기를 지나면 세포 마다 발현될 특징이 결정된다. 피부에선 피부 세포만이 발현되고 간에선 간 세포만이 발현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분화가 결정된 세포는 때어내어 다른 곳에 이식하여도 결정된 대로 발달한다. 줄기 세포는 아직 그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 무엇으로든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이다. 배아의 발생단계에서 미분화한 배아줄기세포와 성체가 되었지만 일부 계속해서 남아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한 배아의 세포에서, 성체줄기세포는 혈액, 골수 등에서 얻는다. 줄기세포는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분화한 줄기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황우석 사건으로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황우석은 복제된 배반포에서 배아줄기세포를 획득하였다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실험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어 논문이 철회되었다. DNA 감식. DNA는 매우 큰 정보량을 갖고 있으며 개인 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DNA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다. DNA 감식에는 보통 STR 분석이 쓰이는데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반복구간이 개인마다 다른 점을 이용한다. 유전자 감식은 각종 사건 사고의 신원확인, 실종자 확인과 같은 수사에 이용되며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의 유해 감식에도 쓰인다. DNA 감식은 범죄의 증거로도 채택된다. 감식의 결과 동일인으로 판정되면 충분히 해당 개인을 특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죄 확정된 범죄자의 DNA 시료를 채취하여 등록하고 있다. 유전성 질환.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질병을 유전성 질환이라고 한다. 유전성 질환은 자식 세대에 유전되는데 우성/열성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고 유전 인자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유전성 질환으로는 백색증, 혈우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과 같은 것들이 있다.
700
3327227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00
RNA
리보핵산(RNA)은 유전자의 코딩, 디코딩, 조절 및 발현에서 다양한 생물학적 역할에 필수적인 고분자 분자이다. RNA와 디옥시리보핵산(DNA)은 핵산이다. 지질, 단백질 및 탄수화물과 함께 핵산은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필수적인 4가지 주요 거대분자 중 하나를 구성한다. DNA와 마찬가지로 RNA는 뉴클레오타이드 사슬로 조립되지만 DNA와 달리 RNA는 한 쌍의 이중 가닥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접힌 단일 가닥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세포 유기체는 유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메신저 RNA(mRNA)를 사용한다(G, U, A로 표시되는 구아닌, 우라실, 아데닌 및 사이토신의 질소 염기를 사용). 및 C) 특정 단백질의 합성을 지시한다. 많은 바이러스는 RNA 게놈을 사용하여 유전 정보를 암호화한다. DNA와의비교. RNA의 화학 구조는 DNA의 화학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세 가지 주요 방식에서 다르다. 구조. RNA는 오탄당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사슬구조를 이룬다. 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리보스에 있는 다섯개의 탄소에 번호를 붙였을 때 1번 탄소가 핵염기와 연결되며(이 그림의 경우 구아닌) 3번과 5번은 인산에 연결된다. 1번 탄소에 연결되는 핵염기는 구아닌 이외에도 아데닌, 우라실, 시토신이 있다. 인산은 당과 당 사이를 연결하여 사슬을 이룬다. 핵염기는 보통 다음과 같은 약자로 쓰인다. 핵염기는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을 이루어 결합할 수 있다. 아데닌은 우라실(DNA의 경우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 RNA는 DNA와 달리 1개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단일 가닥이며, 자체적으로 상보적 염기쌍을 형성해 접힘으로써 고유의 입체 구조를 가질 수 있다. RNA에 존재하는 리보스의 2번 탄소에 결합된 하이드록시기는 당-인산 골격의 인산이에스터 결합을 분해하는데 관여한다. 따라서 RNA는 DNA보다 빠르게 가수 분해되어 덜 안정하다. 종류. RNA는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기능에 따라 9가지로 나뉜다. 이외에도 형태에 따라 단일 가닥은 ssRNA, 이중 가닥은 dsRNA라는 약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역할. 바이러스와 같은 일부 미생물에서 RNA는 유전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핵생물과 다세포생물은 DNA가 유전자의 역할을 하고 RNA는 세포에서 단백질 형성 과정에서 DNA와 리보솜 사이의 통신을 맡는 역할을 한다. 단백질 형성과정. 세포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의 형성에는 RNA, DNA, 리보솜, 효소 등이 관여한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전사와 mRNA 생성. DNA의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상보적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순서대로 연결하여 RNA 사슬을 형성하는 중합반응을 전사라 한다. 전사의 과정에는 RNA 중합 효소가 관여한다. RNA 중합효소는 DNA 염기서열 중 전사를 시작할 곳을 찾아 DNA의 이중나선을 열고 두 가닥 중 한쪽을 사용하여 상보적인 염기서열대로 mRNA를 전사한다. 전사의 종료를 알리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전사를 마치고 DNA 이중나선을 닫는다. 전사의 시작 지점을 알리는 DNA의 위치는 프로모터()라 하는데 전사 시작을 알리는 특정 염기서열과 첫 번째로 전사될 염기 및 전사를 조절하는 염기서열로 구성되어 있다.<br clean"all"> 코돈. 코돈은 mRNA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세개의 뉴클리오드 염기 순열이다. 생물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으로 이를 지정하는 mRNA의 코돈은 아래의 표와 같다. mRNA 순열중 UAA, UAG, UGA는 아미노산 연결 종료를 지시한다. tRNA. tRNA는 75 - 95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작은 RNA 분자이다. 비교적 짧은 RNA 사슬이 접혀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tRNA의 주요 역할은 리보솜에 들어온 mRNA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20종 이므로 세포 속에 있는 tRNA의 종류도 20종이다. tRNA의 말단은 아미노산과 연결되어 있고 접혀있는 특정 부분은 안티코돈이 된다. 예를 들어 왼쪽 그림의 페닐알라닌 tRNA의 안티코돈은 AAG로 리보솜에서 mRNA의 UUC코돈과 연결된다. (RNA 핵염기의 상보성은 A(아데닌)-U(우라실), G(구아닌)-C(사이토신)이다.)
701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01
리보솜
리보솜() 또는 리보좀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리보솜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리보솜은 대단위체와 소단위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두 단위체가 결합하여 단백질 합성을 수행한다. 개요. 리보솜은 지름이 약 20nm(200Å)이고 65%의 리보솜 RNA와 35%의 리보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고균, 진정세균 및 진핵생물의 리보솜은 서로 다른 다양한 단백질과 RNA로 구성되어 있다. 리보솜은 전령 RNA(mRNA)의 코돈을 번역하여 운반 RNA(tRNA)에 연결된 아미노산을 배열하여 단백질을 형성한다. 리보솜은 별도의 막이 없는 세포소기관이다. 단백질과 RNA로 이루어진 리보솜과 조금 다른 리보자임은 효소처럼 작용하는 RNA분자이다. 이것에 의해 RNA 세계 기원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단백질을 형성하지 않는 동안 RNA는 내부 원형질인(세포기질 cytosol) 때에는 RNA로부터 구성되는데, 이는 RNA 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리보솜은 1950년대 중반 루마니아 생물학자인 게오르그 에밀 팔라데에 의해 최초로 관찰되었다. 팔라데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를 관찰하던 중 리보솜을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보솜이라는 이름은 1958년 리처드 B. 로버트가 명명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리보솜의 분자 구조와 기능이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아다 요나트(이스라엘),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미국)과 토머스 A. 스타이츠(미국)는 리보솜의 기능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20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분류. 리보솜은 크게 단백질을 합성하는 자유 리보솜(free-ribosome)과, 소포체(endoplasmic reticulum, ER) 표면에 붙어서 막단백질이나 분비단백질을 등을 합성하는 ER-리보솜, 두가지로 나뉜다. 이 둘은 상호전환이 가능하며, ER-리보솜이 자유 리보솜이 될 수도, 자유 리보솜이 거친면 소포체로 들어가 ER-리보솜이 되는 경우도 있다. 생성. 세균의 리보솜은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인 오페론을 전사하여 생성된다. 진핵생물의 경우 세포핵 안에 있는 핵소체에서 4 종류의 리보솜 RNA가 만들어지며 리보솜 단백질과 결합되어 리보솜이 생성된다. 구조. 리보솜은 크게 2개의 소단위체(subunit)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대 리보솜 소단위체 (large subunit, LSU)와 소 리보솜 소단위체 (small subunit, SSU)이다. 리보솜은 스베드버그(Svedberg) 침강 계수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원핵세포의 리보솜과 진핵세포의 리보솜이 다르다. 이때 리보솜의 크기를 스베드버그의 이름 약자를 따서 S라는 단위로 센다. 원핵세포의 경우 전체가 70S 리보솜이고 각각 50S 및 3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 진핵세포의 리보솜은 전체가 80S 리보솜이고 각각 60S 및 4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 단백질 생성과정. 리보솜이 mRNA의 코돈을 인식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이라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생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의 에너지원은 GTP의 가수분해이다.
702
62969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02
바이러스
바이러스(, , ) 또는 여과성 미생물(濾過性微生物), 병독(病毒)은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전염성 감염원이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비세포성 반생물)이다. 초현미경적, 여과성 병원체이기도 하다. 기생과 증식을 위해서는 숙주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동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러시아의 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노프스키(Dmitri Iosifovich Ivanovsky)의 1892년 연구가 다루었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 이래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 안에 있지 않거나 세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 있는 동안 독립적인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온이라고도 하는 이 바이러스 입자들은 DNA나 RNA로 만들어진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 외피와 단백질 외피를 둘러싸는 긴 분자인 이 바이러스 입자들의 모양은 몇몇 바이러스 종들을 위한 단순한 나선형과 타원형 형태에서부터 다른 종들을 위한 더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종들은 너무 작아서 광학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 평균적인 비리온은 평균적인 박테리아 크기의 약 100분의 1이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서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고, 세포들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DNA의 플라스미드 조각들로부터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진화 과정에서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을 운반하고, 생식하고,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체로 분류하는데 필요한 주요 특성(예를 들어 세포 구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체" 및 복제 물질로 묘사되어 왔다. 바이러스의 발견과 연구의 역사.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병원체를 찾을 수 없어서 현미경을 이용하여 매우 작은 병원균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1884년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찰스 챔버랜드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구멍을 지닌 필터를 발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필터를 통해 박테리아를 포함한 용액을 통과시켜 이 용액으로부터 이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Ivanovskii, D. I.)는 이 필터를 이용하여 현재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감염된 담배잎으로부터 으깬 잎 추출물이 필터 과정을 거쳤더라도 감염성이 유지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바놉스키는 이 감염이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독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생각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당시, 모든 감염체들은 필터를 통해 존속되어 영양배지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는 질병의 배종설(매균설)의 일부가 되었다. 1898년에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 마루티누스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는 이 실험을 되풀이하였고 필터 처리된 용액에 새로운 형태의 감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 감염체가, 분리된 세포에서만 증식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contagium vivum fluidum"로 불렀으며 이 낱말을 바이러스("virus")라 하였다. 베이젠리크는 바이러스가 자연 상에서는 액체 상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은 나중에 웬들 스탠리가 바이러스가 미립자성을 띠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뢰플러와 프로시는 최초의 동물성 바이러스(구제역을 일으키는 아프타바이러스)를 비슷한 필터를 통해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바이러스의 기원. 19세기 후반 바이러스 발견 직후 생물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세포로 진화하지 못한 원형질체의 일부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바이러스와 숙주세포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정되었다. 두 번째 가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핵산을 필요로 하는 세포내 기생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내로 들어가면 핵산을 비롯하여 바이러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숙주세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가설은 바이러스가 세포로부터 방출되었기 때문에 복제를 위해 숙주세포로 되돌아가야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분류. 바이러스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서 식물 바이러스·동물 바이러스 및 세균 바이러스(파지)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 증식의 근원이 핵산에 있으므로 핵산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게 되었다. 즉, 2종류의 핵산 중에서 어느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DNA바이러스 아문과 RNA바이러스 아문으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강·목·과로 세분화된다.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면서 숙주가 가진 것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천연두나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대장균에 기생하는 T파지는 DNA바이러스이다. 이에 대해, 유행성 이하선염(항아리손님)·홍역·광견병·소아마비·일본뇌염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RNA바이러스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는 바이러스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구조. 바이러스는 RNA나 DNA의 유전물질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캡시드)로 구성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진다. 단백질 껍질(캡시드)은 구슬 모양의 단백질(capsomere, 캡소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이외에 지질로 이루어진 막을 가지기도 한다. 위의 그림에서 하단의 바이러스가 지질로 이루어진 층을 가지는 Enveloped Virus(외피로 둘러싸인 바이러스)이다. 이 지질층은 숙주세포의 세포막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징.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영양 배지에서는 배양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증 ·증식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기 위해서, 미생물학자들은 1900년대 초, 페트리 접시에서 자라는 세포층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세포배양)을 개발하였다. 발견 초기에는 누구나 바이러스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바이러스가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인 생물학 차원에서 무생물(비생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바이러스 복제. 바이러스 감염주기는 용균성(lytic) 또는 용원성(lysogenic)으로 분류된다. 바이러스 복제 방법은 크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바이러스의 이로운 사용.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숙주 세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항생제의 급격한 사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면(파지 요법)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파지 요법 연구가 중단되었지만,항생제 때문에 요즘 다시 파지 요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703
33378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03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전라도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도 부안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 화순군수, 진안군수, 군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협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유년기. 조부 김요협은 전북 고창 부안면에 집을 짓고 거주하였고, 김기중과 김경중 형제는 줄곧 그 곳에서 거주하였으며 김성수 역시 조부가 세운 집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김성수는 조부 김요협 내외와 부모 김기중 내외, 생부모 김경중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양가와 생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하나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에 가세를 일으켰지만 할아버지 김요협은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였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맏손자인 인촌에게만큼은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유년기의 김성수는 장난기가 심한 소년이었다 한다. 엽전을 삼켰다며 병이 나으려면 호두를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집안 일가가 호두를 가져오자 엽전을 먹은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머니였노라고 하기도 하였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7세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선행가언을 배우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7세 때 훈장을 모셔와 사설 서당을 차려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리 아이들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소년 판석은 어린아이임에도 동네 아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이 어려워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리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비하, 모욕을 주지 않았다. 그는 유년기때 부모로부터 양반이 갖춰야할 예의범절과 한문 등을 배웠다. 9세 무렵 생부 김경중 내외에게 다섯째 아들이자 친동생인 김연수가 태어났다. 한편 백부 김기중의 소실인 공주김씨에게서도 서자이자 그의 서제인 김재수가 태어난다.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 청소년기. 5살 연상과 결혼. 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는 장흥 고씨로 전라도 창평군(현 담양)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규장각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그는 장학재단인 호남학회(湖南學會)의 발기인에 참여하여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정주는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 장인 고정주는 특별히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영학숙을 열고 자신의 아들 고광준(高光駿, 고재욱의 부)과 사위 김성수 등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 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는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고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송진우와의 만남.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 후일 김성수는 송진우의 첫인상을 두고 이르기를, 쉽게 속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나 심지가 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였다.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수학과 서구 문물 수용. 1906년 겨울 다시 전북 고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친구인 송진우와 친분을 쌓은 뒤 김성수는 이를 부모에게 보고하였다. 담양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양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송진우라는 친구를 얻었다고 했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가 모두 고창군 인촌리에서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주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한편 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 1907년 봄 김성수의 가족은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했다. 1907년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의 청련암(淸蓮庵)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했다.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가 다시 찾아왔다. 내소사 청련암에서는 백관수도 함께 수학했다. 백관수는 내소사 남쪽 20리쯤에 위치한 부안군 덕흥 출신으로 집안 어른들끼리 교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송진우, 백관수와 더욱 우의를 두텁게 했고 이러한 우정은 평생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촌은 백관수에게서는 한문의 힘을 빌었고, 송진우에게서는 식견(識見)의 힘을 빌렸지만, 김성수 역시도 백관수에게는 신학문의 영향을 주었고, 송진우에게도 실천하는 힘의 영향을 깨우쳐 주었다.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일본이라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 학창시절과 교육활동. 도일 유학.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동경유학을 결심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는 정치강연회가 있으면 먼길이라도 찾아서 참석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교육·계몽 활동.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이때 경영난에 빠졌던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의 생부모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양아버지 김기중만이 그의 의견에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 일제 강점기 활동. 기업 경영과 독립운동. 기업 활동과 민족자본 육성 활동.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 독립운동 준비와 만세운동 계획 수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상하이에서 한인청년단이 1919년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측 대표자를 파견한다는 것을 접하고, 범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계의 참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김규식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호응하여 사건을 벌여야 된다고 하자 이를 입수한 그는 송진우와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의 포섭과 협력을 주선했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승만 밀서를 되돌려보냈다. 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3·1 운동 전후. 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측 대표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속을 뒤적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1919년 10월 3.1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한 이아주(李娥珠)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이아주의 문병을 갔다. 이 인연으로 후일 이아주와 재혼하게 되었다. 이아주는 용인이씨 이봉섭(李鳳涉)과 김해김씨의 딸로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아주는 후에 2005년 3월 7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의류사업 확장과 경성방직회사 창업.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한편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미쓰이>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 언론 활동 및 교육활동. 민족개량주의.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언론과 계몽운동. 송진우 출감 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3년 5월 송진우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920년 10월초 유근이 출옥하자, 출옥한 유근을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추진한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을 주도하며 일경의 눈총을 샀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 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물산장려운동과 국산품 애용 운동. 1920년초부터 그는 강연 활동을 다니며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병로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경성방직 50년>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실력 양성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었다. 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 자치, 실력양성 운동.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5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활란 등과 자주 만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논의하곤 했다. 11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 아들의 활동에 짐이 될 것과 손자들의 건강을 우려해 귀국하였다. 인천까지의 배삯은 마련하였으나, 의지할 데가 없던 곽낙원은 차비 마련이 어려웠다. 곽낙원은 고심하다가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서울에 갈 차표와 차비를 구하였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송진우가 곽낙원과 손자의 차비를 지불해주었다. 곽낙원의 동아일보 인천지국 및 본사 방문 소식을 접한 김성수는 직접 찾아가 곽 여사에게 생활에 쓰시라며 봉투를 건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1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간디의 영향, 세계 일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 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신간회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브나로드 운동.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 인수와 사업 경영난. 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부친 상중에도 그는 친히 현장을 와서 현장감독들을 독려하곤 했다. 1934년 4월 길에서 문일평을 만났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한 집에 하숙하였고, 함께 하숙집 주인의 딸을 연모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문일평의 손을 잡고 "어찌하여 세상 일이 여기에 이르렀소,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끝내 보기 어려운 것이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문일평 등에게도 따로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안창호 등에게도 자금을 보냈다. 1934년 동생 김연수와 함께 해동은행의 대주주였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일장기 말소 사건과 교육활동.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통치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미술품과 작품의 외국 반출을 막아야 된다며 거금을 치르고서라도 미술품, 서예 작품을 매입해들였고, 전형필, 송진우, 장택상 등도 그의 견해애 동조하여 거액을 들여서라도 미술품 입찰에 가서 그림, 서화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 보고 귀국했다. 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 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 1930년대 후반.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쟁 전후.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은 모면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김선기 등이 김성수를 찾아갔더니 그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며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며 이극로의 안부를 걱정했다. 잡혀간 이극로는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책임자로 있던 김성수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 술 한 잔 사겠다는 이유로 김성수를 술집 청향원으로 불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는 이극로의 자백을 들려주며 추궁하였는데 김성수는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했고 일본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 직전.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국내 각지를 순찰하던 그는 경기도 전곡(全谷)의 농장을 거쳐서 경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친일 행적 논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통치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그러나 김성수의 성명으로 발표된 것이 자의에 의한 발표인지, 단순 명의 도용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 1993년 7월 8일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인물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김성수를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 해방 이후. 광복과 군정기. 한민당 창당 조직.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10월초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미 군정을 세우자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한 뒤,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반탁독립투쟁위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였다. 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6년 2월 민주의원이 창립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기금을 냈다. 46년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지명되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위 반대. 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 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1947년 1월 18일 김구,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성수는 김구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광복 초기 정치활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 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끝내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 1947년 우익정당의 통합 논의에서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1947년 12월 한국독립당 김석황계열에 의한 장덕수의 암살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조소앙 등은 방북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 암살 미수와 김구와의 결별. 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강점기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 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났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김규식이 일방적으로 김구가 송진우도 암살하고 김성수도 암살하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영어 못하는 점을 악용해서 보고 했으나, 김구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그는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한민당측은 김성수 암살 기도의 실패 이후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총리 인준 부결과 야당화.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 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월 29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김성수는 한민당 당원으로 민족청년단의 간부 훈련을 받은 조영규(曺泳珪)를 통해 방문 연락을 제의했고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7월 29일 저녁 만찬에서 김성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각의 각료배석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내각 책임제.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승만을 찾아 내각 책임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 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부통령 취임 이후. 정치 활동.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1948년 8월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농지개혁 조항인 헌법 제86조가 대규모의 농토를 갖고 있던 인촌의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의 호남 지역에 소유한 농지가 무려 3,247 정보로 최대의 지주여서 농지개혁법 제86조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 당시 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 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 제2대 부통령. 민국당 조직과 전란. 1949년까지 그는 한국민주당을 이끌어 오다가 2월 10일 한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제2공화국 집권여당 민주당의 전신)을 창당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이었다. 그해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다. 8월 20일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자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였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피난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쟁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9.28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에 친 자식처럼 보살피던 이인수를 잃고 고통스러워했다. 이인수는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중앙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쳤고 고려대 교수로 유능한 교육자였는데, 6.25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밀려들어와서 강압적으로 반미 선전에 동원하여 마지못해 가담한 이력을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인촌은 이인수를 구명하려고 이승만을 찾아갔는데 얼른 재빨리 처형한 북한 앞잡이 신성모 국방 장관이 늦었다고 하여 항의를 하기도 했다. 제2대 부통령. 5.10 총선을 적극 동조했는데,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의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민족이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하여 여러번 출마를 사양하였다. 5월 17일 국회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65표, 이갑성은 53표, 함태영은 17표로 과반수가 넘지 못하여 결선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김성수 78표, 이갑성 75표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갑성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공화구락부가 민국당에 합세하여 민국당의 부통령후보였던 그를 밀어준 결과였다. 5월 17일 제2대 부통령(副統領)에 취임하였다. 김성수는 처음에 부통령직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통령 사퇴. 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를 혐오하였다. 자신을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한민당, 민국당원들에게도 자제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 사건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여 그는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내용을 준비하여 연설을 하려 하였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다. 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 8월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자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했다. 이때 조봉암이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 김성수는 김창숙·이동하·신익희·장면 등 8명이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성명을 낼 때 참여하였다. 1953년초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친구인 최두선의 회갑연에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문하였다. 야당 결성 운동. 1954년부터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년의 김성수는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중풍과 여러 질병으로 김성수는 신당 창당 활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성수는 병상에서 혁신계의 조봉암을 신당 운동에 참가시키는 민주세력의 대동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기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60명과 기타 자유당 탈당파 장면 등이 호헌동지회를 구성할 때 김성수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하는 서상일, 박기출, 장택상과 반대하는 장면, 김준연, 김도연, 조병옥 등으로 나뉘었을 때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논쟁이 벌어졌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사망. 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 그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초 병세에 호전을 보이던 그는 보행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었다. 치료 끝에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2월 15일 밤 11시경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 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던 그는 2월 18일 오전 11시경에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혼수상태에서 의사의 지시로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전 11시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라 하였다 허정은 김성수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조국이 그를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꼭 있어야 할 인물인 그가 이 나라를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원망과 질책이 어린 슬픔이요 아쉬움이었다. 65세라는 원숙한 나이를 생각할 때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룩했을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133번지 자택에서 심근염(心筋炎) 등이 악화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김성수의 나이 만 65세였다. 곧 범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례위원으로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변영만,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다.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치러졌다. 사후. 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소와 고려대 경내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91년 6월 29일 각계 인사 840여 명이 모여 '인촌선생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은 발간되었고,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에서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평가와 비판. 평가. 일제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평하였다. 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는 것이다. 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김성수론>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도 평가하였다.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 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 ·사업을 자신속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김성곤은 인촌을 본받아 자신도 금성방직,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고, 고향의 현풍학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한다. 비판. 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 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 사상과 신념. 실력 양성론. 김성수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부르짖었다.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은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는 교육, 물산 장려, 언론 육성을 제시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문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일본이나 주변국보다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길러내 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육성을 위해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사립 전문학교 설립을 여러 번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스스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데 있다. 이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산 장려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원료와 자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생산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장려하여 국가의 산업자본과 경제력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면과 마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 면직물과 마직물을 생산하는 회사 설립을 추진하여 경성직뉴를 인수한 뒤, 경성방직회사로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국산품을 애용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올바른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보의 전달과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었다. 종교적 측면. 임종 직전에 장면의 권고로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그는 별다른 종교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가훈을 이어 유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나 유학 이후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시적으로 전도 권고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세례명: 바오로) 각하 명칭 삭제. 그는 제2대 부통령 재임 중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각하 라는 호칭은 다시 부활했고, 1960년 제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각하 라는 경칭은 5.16 군사 정변 이후 다시 부활, 198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공약, 당선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할 때까지 항상 각하 라는 경칭이 계속 통용되었다. 소탈함. 그는 억지로 꾸밈이 없었고, 부유함을 내세워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겉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였다. 화려한 것 보다는 내실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외양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속이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 허정은 후일 회고담에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고 평하였다. 신념. 공선사후(公先私後) 또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주장하였다. 개인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였다. 또한 신의일관(信義一貫)도 그의 좌우명이었다. 또한 쓸 곳에 쓴다, 돈은 잃어도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좌우명도 있었다. 성격.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다. 또한 그는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억지로 겉치레를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우, 장덕수가 연이어 암살당하면서 정계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 조건을 제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였다. 허정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사람의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호남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검소하였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뒤에서 돕기를 좋아했다. 허정은 이것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과 이타심(利他心)이 없으면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도 어려운 인촌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주저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뒤에 숨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인촌은 이해로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도를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를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허정은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했다. 술이 건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던 인촌 김성수 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사심이 없었는데, 허정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는 실제로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독립운동과 보성전문학교, 중앙학교, 동아일보 등에 대부분 투자했다. 일화.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 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 부통령 재임 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며 응대하였다. 조선 총독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철승의 징병 거부 면담을 하면서 이철승의 스승을 물어보며 "김성수 군은 물샐틈 없는 인물이지.." 하며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익 정당 통합 운동. 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 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 다. 김구의 김성수 암살 기도 사건.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동상 수난 사태. 1989년 3월 부정입학과 학내 등록금 인상 문제로 본관을 점거한 1천명의 고대생들이 인촌 김성수 동상을 검은 천으로 싸서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 며칠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재단측의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1989년 4월 고려대학교 경내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에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이 올라가 하얗고 굵은 광목 끈으로 칭칭 동여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상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계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었고, 교내 운동권을 탄압하는 재단과의 물리적인 갈등의 성격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성수의 동상은 친일파라 하여 민족고대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이 쓰러뜨리려 시도했으나 재단과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선배들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때마다 재단측이 창립자의 동상을 훼손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여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89년 4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교사 내외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김성수의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졸업생이 나타나 김성수를 변호했고, 일부 학생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상 수난 사태는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해에 고대 사상 처음으로 <인촌동상철거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2005년 3월 9일에는 한승조 사태와 관련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한승조 교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성수의 동상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다. 유병문 총학생회장은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동상이 학교 정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립 1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대로 고대의 친일 문제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 가족 관계. 기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고창의 어른, 전북의 어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 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 하였다.
705
66951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05
심근 경색
심근 경색(心筋梗塞, , ) 또는 대중적으로 심장 마비(心臟痲痺, )는 허혈성 심질환의 하나이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하나, 이는 심근 경색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원인. 심장 근육은 관상동맥이라 부르는 3가닥의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일생 동안 혈액을 전신으로 펌프질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따라서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심장 근육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상동맥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가장 안쪽 층을 내피세포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피세포가 건강한 경우에는 혈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흡연 등에 의해서 내피세포가 손상을 받게 되어 죽상경화증이 진행되고, 관상동맥 안을 흐르던 혈액 내의 혈소판이 활성화되면서 급성으로 혈전이 잘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혈전이 혈관의 70% 이상을 막아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파괴(괴사)되는 경우가 심근경색증이고, 괴사되지는 않지만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것이 협심증이다. 이 같은 상황을 잘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들은 다음과 같다. 증상. 환자는 대부분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대개 '가슴을 쥐어짠다', '가슴이 쎄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하며 주로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없이도 '명치가 아프다' 또는 '턱끝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흉통 없이 구역, 구토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화가 안 된다', '속이 쓰리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흉통은 호흡곤란과 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왼쪽 어깨 또는 왼쪽 팔의 안쪽으로 통증이 퍼지는(방사) 경우도 있다. 흉통은 대개 30분 이상 지속되며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혀 밑에 투여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흉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급성으로 심근경색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치료. 심근경색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태로 구별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의 치료는 크게 막힌 혈관을 넓히는 관혈적 치료와 이후 약물치료로 나뉜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넓히는 시술 또는 약물이 요구된다. 비 ST절 상승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 쇼크가 동반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약물 치료 후 안정화된 상태에서 시술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대형 병원에서 응급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 혈전용해술을 시행하여 경과 및 예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은 노동맥 또는 넙다리동맥을 통하여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여 막힌 혈관을 찾아낸 후, 혈관 안으로 도관을 삽입하여 풍선으로 넓히고 스텐트라는 철망을 삽입하여 혈관을 수리하는 시술이다.심근경색증에 의한 합병증이 없다면 대부분 병원에서 1주일 이내에 퇴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술 직후 흔히 재관류에 의해 심장 근육에 2단계 충격이 오기 때문에 시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경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을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다혈관 질환일 경우에는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향후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실의 변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스텐트를 삽입한 경우에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겨서 혈관이 다시 막히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약물 치료 목적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스텐트 혈전증의 치사율이 5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혈전 억제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포함하여 심장 보호 효과가 부가적으로 있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며, 고지혈증 약물 그리고 당뇨가 있는 경우에는 경구 혈당 강하제, 인슐린을 처방받게 된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혈관 확장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심근경색증 치료 중에 죽은 심장 근육을 획기적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의 연구팀들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 근육을 재생시키는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현재도 대규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개선된 프로토콜로 임상시험에 환자를 등록하고 있어서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에서 시행하는 매직셀(MAGIC-CELL)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골수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이토카인을 이용해서 골수 줄기세포를 말초혈액으로 동원한 후 이를 말초혈액에서 쉽게 채취하는 방법으로서, 환자 부담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심기능 호전 효과가 뚜렷하여, 2004년도 Lancet, 2005년도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2006년도 Circulation, 2007년도 American Heart Journal, 2008년도 Heart와 같이 심혈관계의 세계 최고 권위지에 매직셀 프로그램의 장기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점점 그 추이가 늘고있다. 개의 심근경색. 개도 물론 심근경색에 걸릴 수도 있다. 강아지 심근 경색의 원인은 가족력, 면역력, 스트레스, 과로, 운동 후유증, 지속되는 분리불안증 등이다.
707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07
대구광역시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는 대한민국 동남부 내륙에 있는 광역시이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청송군, 군위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한다. 팔공산과 비슬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편에 속하는 도시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면서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달성군,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 고산면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1일에 달성군을 편입하였다.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 1가 이고, 별관은 산격동의 옛 경상북도청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7구 1군이다. 상징. 로고. 대구시의 로고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친환경적인 도시를 표현한다. 브랜드 슬로건. 색채가 “다양한, 다채로움”을 의미하여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제공하여 다양한 모습의 발전적인 대구를 나타낸다. 역사. 조선. 조선 시대에는 대구도호부의 영역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서구, 동구(안심동 제외), 북구(옛 칠곡동 지역 제외), 수성구(고산동 제외), 달서구, 달성군(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제외),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불렀다. 지리. 위치. 대구광역시는 한반도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구는 영남 지방 내륙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군위군, 칠곡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계를 접한다. 지형. 대구는 높고 규모가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북쪽에는 팔공산(1,193m)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비슬산(1,084m)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금호강과 합쳐진다. 대구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기후. 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이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이다. 1942년에 기록한 40도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에 속한다. 이러한 여름 기온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언론, 방송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대구의 기후는 온대하우기후, 또는 온대동계건조기후(Cwa)를 띄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행정 구역. 대구광역시는 7개 구와 1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2018년 12월 31일 주민등록 인구는 1,021,266세대 2,489,802명이다. 경북권. 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1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구미시, 영천시, 경산시, 군위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의 창녕군이 경북권으로 규정되어 있다. 주거 지구. 택지개발사업은 대구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공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주택 시민에게 양질의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도로·수도·전기·통신·도시가스·난방 등 생활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고, 공원·학교·녹지·운동장 등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행정. 대구광역시의 일반행정은 대구광역시청이, 유·초·중등교육행정은 대구광역시교육청이 담당한다. 두드리소. 두드리소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감이 느껴지면서, 민원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대구광역시의 민원 서비스이다. 두드리소((http://dudeuriso.daegu.go.kr ) 인터넷, 모바일, 콜센터, SNS로 신청한 모든 민원과 제안의 처리과정을 신청방법과 상관없이 한 곳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120달구벌콜센터. 120달구벌콜센터는 대구시에 관한 민원이나 궁금한 사항을 상담해주는 콜센터이다. 전화, 문자상담, 온라인상담, 예약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외국어상담(영어, 중국어, 일본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외국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뚜봇. ‘스마트시티 아시태평양 어워드 2018’에서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 된 뚜봇은 자가학습을 통해 자동 답변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공지능 자동상담시스템이다. 24시간 여권, 차량등록, 지역축제, 시정 등 다양한 분야의 민원을 채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인구. 대구광역시의 연도별 인구 추이 문화·관광. 2020년 4월, 한국관광공사는 야간관광 100선으로 대구의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 ‘아양기찻길’, ‘앞산공원’, ‘수성못’, ‘서문시장 야시장’을 선정하였다. 대구시는 대한민국 관광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선정된 5개 장소를 비롯하여 숨겨진 야간 관광 자원들을 적극 발굴해 육성하기로 했다. 축제. 대구광역시 대표 축제에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오페라축제, 치맥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관광코스. 대구광역시의 테마별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팔공산 힐링 코스'이 4가지 권역별 관광코스가 있다. 시티투어. 대구시의 관광자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00년 12월 2일 시작된 시티투어는 각종 문화유적, 관광지, 시정현장 등을 순회하며 대구의 문화와 역사, 관광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체험 프로그램이다. 대구 12경. 대구광역시가 선정한 대구 12경으로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 있다. 음식. 납작만두, 야끼우동, 중화비빔밥, 석쇠불고기(북성로), 닭똥집튀김(평화시장), 뭉티기, 막창구이, 곱창구이(안지랑) 등이 대구광역시에서 유명한 음식이다. 대구 10미. 대구광역시 10미에는 육개장, 막창 구이, 뭉티기(소 생고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가 있다. 교통. 대구는 버스와 도시철도가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외부 지역 및 국가와는 철도, 버스, 항공 등으로 연결된다. 도로. 경부고속도로가 대구를 관통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 등 7개 고속도로 노선 및 5개 국도 노선이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천대로, 앞산순환로, 신천동로 등 도시고속도로로 확충되어 있다. 택시. 중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3,3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10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1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소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8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5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경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2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2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2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철도. 대구역과 동대구역에서 경부선, 경북선, 대구선, 동해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KTX와 SRT는 동대구역과 서대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다. 공항. 동구 지저동에 대구국제공항이 있다. 대구국제공항은 제주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등 국내외 도시와 연결되어있다. 대구국제공항의 항공편은 매년 동계항공기간이 끝나면 대폭 늘어난다. 대구공항에서는 국내선 제주․김포 2개 노선이 매주 215편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베이징, 싼야) 24편, 일본(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오키나와, 구마모토, 사가) 177편, 동남아(홍콩, 세부, 방콕, 타이베이, 다낭, 마카오, 하노이) 148편, 대양주(괌) 14편,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14편이 운항되고 있다. 경제. 2012년 대구의 지역내 총생산(GRDP)은 38조 7,00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4%이다. 2013년 대구광역시의 1인당 개인소득은 16개 시도 중 6번째로 상위권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지역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1인당 개인소득은 1,538만원으로 울산 1,916만원, 서울 1,869만원, 부산 1,618만원, 대전 1,576만원, 제주 1,564만원에 이어 16개 시ㆍ도중 6번째로 높았다. 시ㆍ도 전체 명목 개인소득은 796조원으로 1년 전보다 30조원(3.9%)이 늘었다. 실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경제성장률)도 3.8%로 전국 5위를 나타냈다. 이밖에 대구의 지역 총소득은 52조 6,000억원으로 전국의 3.7%를 차지했으며 지역 내 총생산 대비 지역 총소득 비율은 117.3 수준이었다. 2018년 대구의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는 50조 8,000억원으로 전국의 2.9%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개인소득은 2천60만원으로 증가했다. 산업. 농업. 대구의 농업은 1995년 달성군과의 도농 통합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2015년 기준 농가호수는 16,571호, 농가인구는 44,542명, 농경지면적은 8.291ha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상업. 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미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이름을 떨쳤다. 2017년 기준 대구에는 9개의 백화점과 21개의 대형마트, 7개의 쇼핑센터, 151개소의 등록시장, 1개의 종합유통단지가 있다. 공업. 대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을 통해 지속 성장해 왔다. 과거 섬유업체 수가 전채 사업체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였으나. 2017년 대구시 전체 산업단지 내 업체 수는 기계·금속공장이 3,882개소로 섬유공장 1,736개소보다 비중이 크다. 미래 신성장 산업. 대구는 미래첨단의료 선도도시, 미래형 자동차 선도도시, ICT․IoT 기반의 스마트시티 조성,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통한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첨단 의료. 의료산업 분야는 2018년까지 국책연구기관 15개, 의료기업 130개, 양질의 일자리 창출 4,300개, 의료관광객 유치 25,000명을 목표로 「메디시티 대구」 조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첨단의료복합단지의 글로벌 수준 발전과 의료관광의 확대 등을 통해 대구를 세계적인 메디시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미래형 자동차. 미래형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전기상용차 생산공장 건립 투자협약, 대동공업-르노삼성 컨소시엄을 통한 1톤급 전기상용차 개발 및 생산 확정,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단지 지정(국토부),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인프라 구축 등 미래형자동차 선도도시로서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스마트시티. 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혁신플랫폼인 ‘대구형 스마트시티’ 조성하기 위하여 ICT·IoT(사물인터넷) 융합기술 경쟁력확보, SW융합 산업육성, ICT융복합스포츠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시는 스마트시티 조성을 위한 인프라 건설과 운영체계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2020년 1월 22일 영국 왕립 표준협회(BSI)로부터 스마트시티국제표준 인증서 ISO 37106 인증을 받았다. 스마트시티국제표준은 2018년 ‘ 국제표준화기구 (ISO)’가 마련한 기준으로, BSI가 비전, 시민중심, 디지털, 개방 및 협력 등 4개 기준에 맞는 도시에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 한국 내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대구가 처음으로 ISO인증을 받았다. 신재생 에너지. 대구광역시는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203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보급률 20% 이상, 에너지 소비 15% 절감 목표로 에너지 신사업 Test-bed 구축. 분산전원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지역에너지 관련 산업 육성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생활. 코로나 극복. 2020년 대구는 코로나19 범유행 시국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철저한 방역과 치료를 통해 코로나19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세계 부부의 날 위원회는 ‘2020 세계 부부의 날 국가 기념행사’에서 대구시민 일동과 대구시 의료진(대구시의사회, 대구시간호사회)에게 ‘2020 올해의 특별 가족상’을 수상하였으며, “대구시민과 의료진 등 모든 구성원들이 선진 시민의식을 발휘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코로나19를 극복해 전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적을 창출했기에 특별 가족상의 취지와 부합한다”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수도관 세척. 2020년 6월 11일 대구상수도사업본부는 시민들이 믿고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수돗물을 가정집 수도꼭지까지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해 대구 시내 수도관 전체를 세척할 계획을 발표했다. 언론·통신.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전역을 방송권역으로 하는 민영 방송사인 TBC, 공영 방송사인 KBS대구방송총국, 대구문화방송이 주요 방송사이다. 그 밖에 라디오 방송사는 대구교통방송, CBS 대구방송, 대구극동방송, 대구가톨릭평화방송, 대구불교방송, 대구원음방송, 대구국악방송 등이 있다. 케이블 방송사는 CMB 대구방송, HCN 금호방송, TCN 대구방송, 한국케이블TV푸른방송 등이 있다. 주요 신문사로는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대구신문, 대구일보 등이 있다. 스포츠.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와 2002년에 창단된 K리그1 대구 FC와 1994년에 창단된 KBL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이 있다. 군사. 한강 이남에서는 대전권(대전, 계룡, 논산, 세종)과 함께 주요 국방 도시이기도 하다. 제2작전사령부, 제50보병사단, 제5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육군 부대와 공군 1방공유도탄여단, K2 공군비행장에 공군공중전투사령부, 중앙방공통제소, 공군군수사령부, 제11전투비행단 등과 주한 미군 부대 캠프 워커, 캠프 헨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교류. 대구광역시는 다음 도시와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었다. 달빛 동맹. ‘달구벌’(대구)과 ‘빛고을’(광주)에서 이름을 딴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를 놓고 지자체 간 갈등이 심해지자 소모적인 경쟁 대신 어느 곳이 선정돼도 연구개발 사업을 공동으로 하기로 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대구-광주 내륙철도사업, 대구에 광주시민의 숲을, 광주에 대구 시민의 숲을 조성하는 등 문화·예술·민간까지 교류·협력이 확산됐다. 두 지역 통기타 뮤지션들의 모임인 ‘달빛통맹’도 있고, 양 지자체가 두 지역 미혼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달빛오작교’ 행사도 매년 열리고 있다. 2020년에는 광주광역시에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병상 부족이 현실화하자 대구가 광주에 병상나눔을 제안하였다.
712
68649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12
관상동맥
관상동맥(冠狀動脈, )은 심장의 근육(심근)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들을 말한다. 심장 동맥이라고도 한다. 심장은 온몸에 피를 보내는 펌프로 인체에서 심장에 의해 피를 공급받지 않는 기관이나 조직은 없으며, 심장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관상동맥은 심장이 필요로 하는 피를 공급하는 동맥과 그 가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상동맥은 대동맥의 기시부에서 좌우 두갈래로 분지하며 심장 전체를 둘러싸는데, 둘러싸는 모양이 관(冠)과 같다 하여 관상동맥이라 불린다. 관상동맥은 대동맥, 오른관상동맥(RCA)과 왼관상동맥(LCA) 총 3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왼관상동맥은 왼앞내림동맥(LAD)과 휘돌이가지(LCx)로 나누어진다. 관상동맥의 동맥경화는 관상동맥질환이라 불리며 협심증과 심근경색의 원인이 된다.
714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14
선저우 5호
선저우 5호 (神舟五号)는 2003년 10월 15일,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된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다. 선저우 5호는 현지 시각 9시(UTC +8) 정각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어, 9시 10분에 궤도로 진입했다. 이 우주선에는 전 전투기 조종사 양리웨이(楊利偉) 중령이 탑승했다. 이 발사로 중국은 소련, 미국에 이어 사람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킨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 발사 장면은 생중계되지는 않았고, 발사 직후 CCTV를 통해 짧게 소개되었다. 우주선은 지구 궤도를 14회 선회한 다음 발사된 지 21시간 만에 귀환했다.
716
3319816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16
나노미터
나노미터(, , 단위: nm)는 미터의 십억분의 일에 해당하는 길이의 단위다. 1나노미터는 10-9m다. 역사. 나노미터의 과거 명칭은 밀리마이크로미터(millimicrometre), 더 간단히 말하면 밀리마이크론(millimicron)인데 이는 이것이 마이크론(마이크로미터)의 이었기 때문이다. 옹스트롬. 원자의 크기나 분자의 크기를 다루는 단위인 옹스트롬(Å)은 1Å = 약 0.1nm(나노미터)이다. 물(H2O)분자는 약 0.2nm , 염분(NaCl,소금) 분자는 약 3.7nm로 알려져 있다. 한편 염소 원자의 크기는 79 pm(피코미터) 이고 나트륨 원자의 크기는 190 pm이다.
717
3309155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17
미터
미터(, , , 기호: m)는 길이나 거리의 SI 단위이다. 이 단위는 현재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에 측정 기술이 길이와 단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제안된 것으로, 시간의 경우에는 1013의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다. 유래 및 역사. 미터(m)라는 단어는 ‘’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단위’를 뜻하는 ‘’가 그 기원이다. 1790년, 프랑스 정부에서 전 세계적인 단위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터법을 제정할 당시, 거리의 기준을 지구로 삼았다. 이에 따라 지구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10,000km, 이 거리의 4배인 지구 전체 자오선 길이인 40,000km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법이 제정되었다. 참고로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인 10,000km를 십진법상의 표준이 된 이유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리적으로 1m는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1797년 처음 영어에서의 활용이 보고되었다. 초기의 1m의 표준 원기는 금속 물질로 제작했으나,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의 환경에 따른 미세한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미터에 적용된 SI 접두어. SI 접두어를 갖는 미터는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719
17319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19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 , )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1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으로 시작하여 후작, 공작으로 승작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하였다. 전공은 화학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하였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 번 스오 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소년기.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청년기. 요시다의 문하생.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막부 타도와 존왕양이 운동.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영국 유학과 귀국.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등 이른바 장주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 되었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인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 정책을 수행하였다. 막부 타도 운동.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정치 활동. 정계 입문 초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권력 장악.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 총리대신. 1차 총리 취임과 퇴임.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 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다카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 2번째 총리직.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 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3번째 총리직.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4번째 총리직.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외교 활동. 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생애 후반. 한국 고종 양위 주도.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한국 고종 양위 사건의 여파.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퇴직과 사망.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 사망에 이르는 과정.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역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 및 콴청쯔()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 및 (다음 역인)하얼빈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장례식. 시신 운구 작업.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제국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 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국장 거행.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렀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조선의 반응.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사후.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가족 관계.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는 공작에 올랐다. 사상과 신념. 개화론자로 전환.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여성 교육에 대한 입장. 1886년 그는 한참 개항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토는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것은 인식하지 않고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이토는 우연히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86년 여자 교육 장려 회의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887년 이 단체를 한층 발전시켜 정식으로 일본 여성교육 장려 협회를 출범한다. 이후 그는 위원회를 주도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일본 각지에 홍보하고 다닌다. 이후 그의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와 에이치, 이와사키 등이 참가, 도쿄 여자 대학관(도쿄 여자 대학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여성 교육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이토는 일본 여자 대학의 창시자인 진조 나루세()로부터 여대 설립 계획에 협력을 요청을 받자,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 일화. 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
722
17319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22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太極旗)로 흰 바탕의 기 위에 짙은 적색과 남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싼 모양이다. 태극기의 최초 도안자는 대한제국의 박건영이다. 태극기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대한민국의 정식 국기로서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태극기. 조선. 조선은 현대적인 의미의 국기가 없었으나,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조선 임금의 어기가 있었다. 태극기는 조선군주의 어기인 '태극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고종이 직접 도안하여 제작하였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된다.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1882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지만 국기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탓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제작법고시」를 통해 국기 제작 방법을 확정·발표했다. 1882년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하였고,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였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다. 대한제국.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제강점기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자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사용하다가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군정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고, 태극기는 광복 해방된 한국의 당연한 국기로 인식되어 1946년 1월 14일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정권 수립 선포를 앞둔 1948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폐지하고 인공기로 교체하였다. 현대.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공식 제정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통용되어 통일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를 위해 정부가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안이 수렴되었으며, 여러 토론 끝에 '우리국기보양회'의 안이 채택되었다. 최종적으로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로서 현행과 같은 태극기 규격이 정해졌다. 1984년 2월 21일 대통령령으로 기존의 '국기제작법'과 '국기게양방법에 관한 건'으로 이원화된 것을 통합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고, 2007년 7월 27일부터 새로운 '대한민국 국기법'이 시행되어 태극기의 제작, 게양,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아주 자랑스러운 국기로 불리고 있다. 도안과 상징. 태극기는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 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문양과 네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낸다.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해낸 것이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다. 사괘.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건곤감리. 건곤감리는 태극기 네 모서리에 그려진 4괘(四卦)로, 각각 하늘(건·乾)과 땅(곤·坤), 물(감·坎), 불(리·離)을 상징한다. 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이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데,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태극기의 바탕인 흰색은 백의 민족으로 불리던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한다.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태극기는 1882년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은 이후 점차 공식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건곤감리는 나누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나누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의 조합으로 구성된다(Lim, 1998). 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태극기 안에서 건곤감리는 양효나 음효가 셋을 이루거나 1대2 또는 2대1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고 있으며, 태극문양과 함께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곤감리는‘주역’의 기본 괘이자,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의 모서리에 표현되어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는 4개의 괘(卦)이다. ‘乾 건괘 건, 坤 곤괘 곤, 坎 감괘 감, 離 이괘 리’가 합쳐진 말로 태극기는 흰색 바탕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로 돼 있다. 태극기를 달 때는 건곤감리의 위치를 기억하면 된다. 왼쪽 위 괘가 '건', 오른쪽 아래가 '곤', 오른쪽 위가 '감', 왼쪽 아래가 '리'이다. ‘주역’에서는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팔괘를 기본으로 하여, 천지만물을 상징하는 육십사괘를 설정했다. 건괘(乾卦)는 하늘을 상징하며, 오행(五行)의 금(金)을 뜻한다. 곤괘(坤卦)는 땅을 의미하며, 오행의 토(土)를 뜻한다. 기본 괘 가운데서도 건괘와 곤괘는 모든 괘의 중심이며,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감괘(坎卦)는 달과 물을 상징하며, 오행의 수(水)를 뜻한다. 이괘(離卦)는 해와 불을 상징하며, 오행의 화(火)를 뜻한다. 각각의 괘의 형상은 효(爻)로 표현되는데, 효는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끊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로 나뉜다. 괘의 형상은 이 양효와 음효가 홀로 셋을 이루거나 1 대 2 또는 2 대 1 등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는 것이다. 건괘는 양효만 세 줄로 표현되고,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표현되며,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표현된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에서 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한다. 네 모서리에 그려진 건곤감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양효와 음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4괘는 각각 하늘·땅·물·불을 상징하며,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룬다. 건괘는 기면(旗面)의 왼쪽 윗부분에, 곤괘는 오른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무궁한 정신을 나타낸다. 감괘는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이괘는 왼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광명의 정신을 나타낸다. 규격. 태극기의 규격은 다음과 같다. 색상. 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공식 색상은 1997년 10월 25일에 정해졌다. 올리는 날.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국기 게양 시간. 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 해야한다. 국기 게양과 강하시각. 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
723
3018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23
한국어의 품사
727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27
알고리즘
알고리즘(), 셈법은 수학과 컴퓨터과학, 언어학 또는 엮인 분야에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이다. 계산을 실행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문제 풀이에 필요한 계산절차 또는 처리과정의 순서를 뜻한다. 프로그램명령어의 집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연산, 데이터 마이닝(기계 학습) 또는 자동화된 추론을 수행한다. 이름. 산법(算法), 셈법, 계산절차(計算節次)라고도 한다. 알고리즘은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인 무함마드 알콰리즈미의 이름을 라틴어화한 알고리스무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영어로 의 발음 기호는 또는 이며 을 '알고리즘'으로 표기하는 것은 를 '지스'로, 을 '리즘'으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알고리즘이라는 표기가 알고리듬이라는 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정의. 멈춤문제의 결과로 알고리즘멈추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단순한 직관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알고리즘의 공식적인 정의는 없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유한한 수의 규칙에 따라 구별 가능한 기호들을 조작하여 입력 정수에서 출력 정수를 생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작업을 정의한다. 다음은 좋은 알고리즘의 특징이다. 구현. 알고리즘은 자연어, 의사코드, 순서도, 프로그래밍언어, 인터프리터가 작업하는 제어테이블, 유한상태기계의 상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음은 알고리즘 개발의 정형적인 단계이다.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기술에는 운용과학의 방법, 를 써먹는 방법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지만, 전기 회로나 생물학적 신경회로를 사용하기도 한다. 분류. 복잡성. 입력의 크기가 formula_1일 경우, 점근 표기법 formula_2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대문자 O 표기법의 정의상 아래의 복잡도는 그 위의 복잡도를 포함하므로,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formula_17의 수행 시간을 가진다. 예. 알고리즘의 예시.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는 임의로 나열된 숫자들 가운데 가장 큰 수를 찾는 것이다. 다음은 목록 안에 있는 모든 수를 살펴보는 알고리즘이다. Input: A list of numbers "L". Output: The largest number in the list "L". if "L.size" = 0 return null "largest" ← "L"[0] for each "item" in "L", do if "item" > "largest", then "largest" ← "item" return "largest"
730
514184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30
위키책
위키책(Wikibooks)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2003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는 공동으로 집필한 책 형태의 공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이트는 미디어위키 기반이며, 따라서 누구나 편집단추를 눌러 위키책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 프로젝트는 영어 위키백과 사용자인 가 고급교육의 기회를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비용과 제한이 없는 열린 콘텐츠의 생화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의 범위(교과서만 할 것인가,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와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이름, URL)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생들은 위키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재를 직접 편집, 교재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교과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위키주니어. 위키주니어(Wikijunior)는 위키책의 서브프로젝트(subproject)로서, 어린이용 책을 다루는 위키이다. 이 프로젝트는 잡지와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네덜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카탈루냐어, 튀르키예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핀란드어판 위키책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위키주니어는 벡 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