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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QL
MySQL(마이에스큐엘, )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오픈 소스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이다. 다중 스레드, 다중 사용자 형식의 구조질의어 형식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서 오라클이 관리 및 지원하고 있으며, Qt처럼 이중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하나의 옵션은 GPL이며, GPL 이외의 라이선스로 적용시키려는 경우 전통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선스의 적용을 받는다. 위와 같은 지원 방식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프로젝트에 저작권을 적용하는 방법과 비슷한 JBoss의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반코드가 개인의 소유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는 아파치 프로젝트와는 다르다. MySQL AB는 또한 MaxDB라고 불리는 MySQL AB와는 기반코드가 다른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을 판매했으나 2007년 이래로 MaxDB는 SAP AG가 소유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0억 달러에 인수되었으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며 같이 넘어갔다. 인터페이스. MySQL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거나 자료를 관리하기 위한 GUI 관리툴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용자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하고, 데이터를 백업하는데, 상태를 검사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생성하는데, 또는 데이터 레코더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MySQL 프론트엔드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나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한다. 공식적인 MySQL 프론트엔드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오라클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픽. 공식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사용자에게 MySQL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그래픽적으로 지원하게 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조의 설계도 시각적으로 하게 해주는 MySQL AB에 의해 개발된 자유로운 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패키지 소프트웨어였던 MySQL GUI 툴즈를 대체하였다. 여타의 제3자 패키지와 유사하지만, MySQL 현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이용자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모델링, SQL 관리(MySQL 쿼리 브라우저 대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관리(MySQL Administrator 대체)까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MySQL 워크벤치는 2가지 판이 존재하는데, MySQL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보통의 자유, 공개 소스인 ‘커뮤니티 판’("Community Edition")과 커뮤니티 판을 확장하여 개선시킨 유료의 ‘스탠더드 판’("Standard Edition")이 존재한다. 프로그래밍 언어. 응용 프로그램에서 MySQL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API를 사용할 수 있다. 이들 API는 언어에 종속적이다. MySQL은 공식적으로 아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MySQL은 MyODBC라고 불리는 ODBC 인터페이스를 지원해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그 예로 ASP와 콜드퓨전을 들 수 있다. MySQL은 대부분 ANSI C로 구현되었다. 사용. MySQL은 미디어위키와 드루팔과 같은 인기있는 웹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된다. 그리고 LAMP, MAMP, WAMP (리눅스/매킨토시/윈도-아파치-MySQL-PHP/펄/파이썬)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구성체로서 작동하며 버그질라와 같은 오픈소스 버그 추적 도구에도 사용된다. 웹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MySQL의 인기는 PHP의 인기도와 맞물려 있다. PHP는 종종 MySQL과 결합되며,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터넷 상의 여러 웹사이트, 혹은 서적을 통해서 MySQL과 PHP의 연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의 플랫폼에서는 이들의 연동을 자동으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SUN 인수 이후, 중소기업이나 개인용 사이트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키백과, 구글(검색 엔진은 제외), 페이스북, 트위터, 플리커, 노키아닷컴, 유튜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역사. 버전 별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MySQL 서버 6.0.11-알파가 6.0 라인의 최신 판으로 2009년 5월 22일 발표되었다. 이후의 MySQL 서버 개발은 새로운 릴리스 모델을 사용할 것이다. 6.0은 미리 출시판으로 통합될 것이다. MySQL 5.6은 새로운 출시판의 시금석이 될 예정으로 2011년 MySQL 이용자 컨퍼런스에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으로 쿼리 옵티마이저에 대한 성능 향상과 InnoDB의 고성능 트랜잰션 결과, 새로운 NoSQL-스타일 메모리 캐시된 API, 대용량 테이블의 조작과 퀘리를 위한 파티셔닝의 성능 향상, 복제와 성능 모니터링 개선을 PERFORMANCE_SCHEMA를 통해 데이터 확장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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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베이직
비주얼 베이직(, )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의 하나이다. 비주얼 베이직은 사건 기반 프로그래밍의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에 따른 풍부한 구성 요소를 가진 통합 개발 환경 및 RAD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주얼 베이직은 초보자가 접근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각적인 개발 환경과 더불어 베이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비주얼 베이직은 베이직의 영향을 받았으며, GUI 응용 프로그램의 RAD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며,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을 데이터 액세스 오브젝트, 원격 데이터 오브젝트, 또는 ActiveX 데이터 오브젝트들, 그리고 Active X컨트롤과 개체의 생성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이나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와 같은 스크립트 언어들은 문법적으로 비주얼 베이직과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다르다.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제공하는 구성 요소를 응용 프로그램에 삽입할 수 있다. 또한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윈도우 API를 사용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외부 함수 선언이 필요하다. 비주얼 베이직의 마지막 버전은 1998년에 출시된 비주얼 베이직 6.0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장 지원 기간은 2008년 3월에 끝났으며, 공식적인 후계 제품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이다. 특징.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비주얼 베이직은 쉽게 배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비주얼 베이직은 간단한 GUI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그램의 개발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에서의 프로그래밍은 폼(Form)위에 놓인, 시적으로 정렬된 GUI 위젯(비주얼 베이직에서는 컨트롤이라고 한다)들의 조합이다. 이 컨트롤들은 특별한 속성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능의 확장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의 입력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속성과 역할이 이들 컨트롤에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많은 코딩 없이 만들 수 있다. 성능상의 문제가 이전 버전에서 많이 보고되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컴퓨터 성능 향상과 원시 코드(Native Code) 컴파일을 통해 이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비주얼 베이직 5.0부터 원시 코드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 작성이 가능해졌지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된 실행 파일은 여전히 1메가바이트 정도 크기의 라이브러리 파일을 필요로 한다. 이 파일은 윈도우 2000과 이후 윈도 버전에서 기본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의 윈도우 95, 윈도우 98, 윈도우 NT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실행 파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라이브러리 파일 또한 함께 배포하여야 했다. 폼은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커서를 통해 텍스트 상자, 단추 등과 같은 컨트롤들을 폼 위에 놓는다. 컨트롤들은 속성을 가지며, 이벤트 처리자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기본값들은 컨트롤이 만들어질 때 함께 제공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많은 속성값들은 프로그램이 실행 중일 때, 응용 프로그램의 사용자의 조작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으며, 이것은 동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의 'Resize(크기 변경)' 이벤트 처리자에 컨트롤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컨트롤이 계속해서 창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거나, 창 전체를 다 채우는 등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 상자의 'KeyPress(키 눌림)' 이벤트 처리자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해당 응용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입력된 문자의 대소문자를 변환하거나, 특정 문자의 삽입을 막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실행 파일, ActiveX 컨트롤, DLL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주얼 베이직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 용도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용 응용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 조작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 덜 기능적인 대화 상자들은 팝업 능력에 사용된다.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코드를 적당한 이벤트 처리자에 삽입해야 하긴 하지만, 컨트롤들은 응용 프로그램에 기본적인 기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문자열의 입력이 가능한 드롭 다운 리스트 컨트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가진 목록을 보여주며, 사용자가 항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사용자에 의해 항목이 선택될 때, 이벤트 처리자가 호출되며, 이 이벤트 처리자는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으로 코딩한 코드를 처리하는데, 이때 사용자가 선택한 항목의 관련 항목의 출력과 같은, 사용자의 컨트롤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에 따른 처리를 할 수 있다. 한편, 비주얼 베이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을 통한 Active X 개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서버 측면에서의 처리나 추가 모듈을 가능하게 해 준다. 비주얼 베이직은 레퍼런스 카운팅을 통한 쓰레기 수집을 수행하며, 방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들과, 기본적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위젯들이 초기 프로젝트 구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대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달리, 비주얼 베이직은 일반적으로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으며, 대신에 키워드를 표준 대소문자 설정으로 변환한 뒤, 강제로 변수명의 대소문자를 기호 테이블의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문자열 비교에 관해서는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원한다면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의 컴파일러는 다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C, C++)과 호환성이 있지만, IDE상의 제한으로 인해 윈도 모델 DLL이나 스레드의 사용 등은 불가능하다. 다른 언어와의 비교. 비주얼 베이직은 C 언어 계열의 언어들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발전. 비주얼 베이직 1.0은 1991년 5월 발표되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있어서의 끌어다 놓기 방법은 앨런 쿠퍼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폼 제작기에서 온 것이며, 쿠퍼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트라이포드"라고 불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3.0용 프로그래밍 가능 폼 제작 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쿠퍼의 개발팀과 계약 한 후,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을 "루비"라고 명명하였다. (루비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관계 없다.) 트라이포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주얼 베이직을 만들기 위해 루비와 베이직 언어를 합치기로 결정했다. 루비 인터페이스 개발기는 비주얼 베이직의 "시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소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오메가"용으로 설계된 "EB"(임베디드 베이직 엔진)와 합쳐졌다. 루비는 또한 훗날 비주얼 베이직 확장(VBX)이라고 명명될 추가적인 컨트롤들을 포함하기 위한 DLL 로드 기능을 지원하였다. 버전 5.0에서 Win16 코드와의 호환성을 버리고 전반적인 기능을 강화했다. 버전 6.0에서는 인터넷 관련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기존 버전과 다르게, 닷넷의 일부분으로 동작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강화되었다. 또한 기존 버전과의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기존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닷넷 코드로 옮겨 주는 마법사가 있다. 그러나 네이티브 비주얼 베이직은 버전 6.0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완전히 포기하여 사라진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11년 기준으로, 프로그래밍 입문 언어로서 시스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변수, 메모리 등)이 없이도 프로그래밍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액셀 등 오피스에서 사용되는 VBA의 문법이 비주얼 베이직 6.0 버전과 호환됨에 따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문용으로도 또 실무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스크립트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자체는 베이직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다음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에서 파생한 것이다: 지원 중단. MS는 무료 지원과 중요 업데이트 제공을 끝으로 2005년 3월 말 VB6에 대한 표준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서비스 모두 앞으로 3년 동안은 유료 서비스로 남아있게 된다. MS는 2000년 VB.NET을 내놓았으며 그 후 VB6 이하 버전을 사용하는 개발자들은 끊임없이 감소해왔다. 비주얼 베이직을 등지고 떠난 많은 개발자들은 VB.NET으로 옮겨가지 않고, MS의 언어가 아닌 자바로 옮겨갔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다. 2005년 현재, 북미 전체 개발자 중 비주얼 베이직 닷넷 개발자가 34%인데 비해 비주얼 베이직 개발자들은 45%다. 기존 VB6 응용 프로그램을 VB 닷넷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2008년 VB6 SP6에 대한 일부 취약한 보안 문제와 관련된 패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추후 공개할 윈도우 8부터 비주얼 베이직 및 기반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예제 코드. 다음은 이 언어의 예제 코드이다. 창이 호출되면 "Hello, World!" 메시지 상자를 표시한다: Private Sub Form_Load() ' Hello, World라는 내용의 메시지 상자를 띄웁니다. MsgBox ("Hello, World!") End Sub 아래 코드는 Count 변수가 1초에 1씩 올라가도록 한다.(작동을 위해서는 타이머 컨트롤이 필요하다) Option Explicit Dim Count As Integer Private Sub Form_Load() Count = 0 Timer1.Interval = 1000 ' 밀리초 단위 End Sub Private Sub Timer1_Timer() Count = Count + 1 lblCount.Caption = Count End S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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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35
프로그래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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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736
디버그
디버깅() 또는 디버그()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단계 중에 발생하는 시스템의 논리적인 오류나 비정상적 연산(버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밝히고 수정하는 작업 과정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디버깅을 하는 방법으로 테스트 상의 체크, 기계를 사용하는 테스트,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테스트하는 법이 있다. 용어의 기원. 버그(bug)와 디버깅(debugging)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그레이스 호퍼가 기원이다. 그러나 "기술적 오류"라는 문맥에서의 "버그"는 적어도 1878년과 토머스 에디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프트웨어 버그 문서 참고) 도구. 디버거()는 디버그를 돕는 도구이다. 디버거는 주로 원하는 코드에 중단점을 지정하여 프로그램 실행을 정지하고,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살펴보며, 실행을 재개하거나, 코드를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등의 동작을 한다. 고급 디버거들은 메모리 충돌 감지, 메모리 누수 감지, 다중 스레드 관리 등의 기능도 지원한다. 안티 디버깅. 안티 디버깅(Anti-Debugging)이란 디버깅을 방해하고 분석을 방해하는 기술이다. 디버깅을 당한다면 해당 디버거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거나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방해한다. 안티 디버깅 기술에는 수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를 우회하는 기술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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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
춘천시(春川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서부에 있는 시이자 강원도청 소재지이다. 태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영서 지방의 거점 도시이다. 경춘선 철도의 시·종점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교차한다.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태백산맥 정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봉의산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충적지에 도심을 이룬다.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 등 호수가 많아 하류의 홍수 조절과 관광지 및 내륙수로 역할을 한다. 시청은 옥천동에 있고, 행정 구역은 1읍 9면 15동이다. 역사. 춘천 지역은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로서 후일 고구려, 신라에 차례로 정복되었으며, 637년(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라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춘주(春州)라 칭하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안양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5번째 유수부로 춘천유수부(留守府)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 지리. 춘천시는 강원도의 서북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인제군, 양구군, 서쪽으로 경기도 가평군, 북쪽으로 화천군, 남쪽으로 홍천군과 접한다. 춘천시가 포함된 춘천 분지는 전형적인 차별 침식 분지로, 시가는 호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水鄕) 도시를 이루며, 호반의 도시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 기후. 춘천시의 기후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a)이다. 행정 구역. 춘천시의 행정 구역은 15동 1읍 9면이다. 면적은 1,116.35 km2이고, 이 중 시내 동 면적은 52.66 km2이다. 인구는 2017년 3월 31일 기준으로 116,273세대, 282,43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139,427명, 여성 144,092명이다. 춘천권.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춘천시, 홍천군, 화천군, 철원군, 양구군 등을 춘천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구. 춘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정치. 대통령 선거. 춘천시·군(춘성군)의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은 여타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41,774표를 얻었고 박정희가 28,984표를 얻었다. 다만 춘성군 지역에서는 박정희에 투표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성향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 후보가 약 2천여표 차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다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48,607표를 얻고 김대중이 38,802표를 얻는 등 강원도의 일반적인 성향과 유사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1987년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65,431표를 얻었고 김영삼이 34,751표를 얻었으며 김대중이 12,220표를 얻어 전국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비등했던 과는 달리 노태우 후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46,580표를 얻었고 김대중이 18,716표를 얻었으며 정주영이 44,675표를 얻어 전국 개표 결과와는 달리 김영삼과 정주영이 거의 유사한 득표율을 보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33,598표를 얻었고 이회창이 57,576표를 얻었으며 이인제가 38,011표를 얻어 이인제가 오히려 당선되었던 김대중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 64,221표를 얻었고 노무현 54,187표를 얻었으며 권영길이 6,523표를 얻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66,113표를 얻었고 정동영이 22,632표를 얻었으며 문국현이 9,591표를 얻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가 93,414표를 얻었으며 민주통합당 문재인은 69,365표를 획득하였다. 행정. 춘천시의회. 현재 시의원 선거구는 총 8개 선거구로 되어 있으며 한 선거구당 1~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되어있다. 2019년 기준으로 춘천시의회는 제10대 시의회이다. 1991년 초대 춘천시 · 춘성군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통합 시의회가 출범하였고 제2대 의회가 개원하였다. 춘천시의회 정당별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 경제. 농업. 경지 면적 7,015ha 중 논 2,222ha, 밭 ,793ha이며, 농가 가구 5,878, 농가 인구 15,272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다. 공업. 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군사구역 등 각종 규제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2008년에 거두리 농공단지, 2013년 수동 농공단지가 준공하였다. 광업. 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상업. 중앙시장·풍물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중 약사명동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며 최근 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약사천 복원사업으로 인해 약사동에 위치하였던 풍물시장이 온의동 경춘선 하부 공간으로 이전하였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하며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사농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퇴계동에 수산물 유통센터가 있어 신선한 농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 문화·관광. 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 관광지. 춘천은 의암호·춘천호·소양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0만여 명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교통. 과거,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노선인 경춘선이 있어 수도권에 접근하는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으며,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개량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수도권 전철 노선으로 개편되면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2012년 2월 25일에는 ITX-청춘이 경춘선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춘천에서 출발하여 대구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까지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고, 2009년, 서울특별시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양양군으로 이어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타 지역과의 도로 연결망도 잘 갖추어진 편이다. 2016년 7월 8일 서울∼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사업이 최종 확정되어 기존 경춘선 복선전철 연장되어 속초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스포츠. 강원 FC는 2016년 12월 성남 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2017년부터는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후 스플릿 라운드부터 다시 송암레포츠타운을 홈구장으로 사용중이다. 국방. 대한민국 육군 2군단 본부 및 그 예하 부대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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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소프트웨어
협업 소프트웨어, 혹은 그룹웨어(groupware)는 여러 사용자가 각기 별개의 작업 환경에서 통합된 하나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이다. 로터스 소프트웨어의 로터스 노츠 (Lotus Notes)가 그 효시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일정을 기록함으로 인해 일정 기록이 매우 유용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룹웨어의 확장으로 협업 미디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웹사이트 내의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협업 미디어의 예로는 위키와 슬래시닷 (slashdot)을 들 수 있다. 협업의 수준. 그룹웨어는 협업의 수준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나뉘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커뮤니케이션 도구, 회의 도구, 그리고 협업 관리도구이다. 협업 소프트웨어들은 웹 기반일 수도 있고, 데스크톱 PC 상의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모바일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모바일에서의 업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있다. 구분. 방법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영역 별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적용. 협업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유도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고용자들이 협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여하는 데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그 대가는 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인 형태로 주어진다. 많은 경우 협동작업은 회사의 사내문화와 잘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오히려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쟁적인 것에서 협동적인 것으로 사내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조직의 모든 단계의 변화가 요구된다 협업 소프트웨어의 예. 그룹웨어는 클라우드 기반 협업 서비스 개념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해외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Office 365와 구글의 G.Suite등이 서비스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페이스북도 Worksplace라는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차세대 그룹웨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국내의 경우 통신사형 그룹웨어, 호스팅형 그룹웨어, 개발형 그룹웨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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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인류학(人類學, )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으로서 체계화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학은 보다 전문적인 여러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다. 하위 학문으로는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형질인류학의 연구분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분야와 현대 인류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은 선사시대와 같은 오래된 인류의 유적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문화 등을 규명하는 것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있다. 문화인류학은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밖에도 민족학(ethnology), 민속학(folklore) 등을 인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하면 사회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류학과 연관된 사회나 문화를 중심으로한 연구분야는 많은 현대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핵심적 기초과학 학문이다. 관점. 인류학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비교문화론·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그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며 특정한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반대되는 용어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다. 비교문화론(또는 비교문화론적 접근)이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를 다른 문화와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라는 추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방법은 없다. 오직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 뿌리나 원리(the root and the nature)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접근이란 근대의 다른 학문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한하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기계적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자들은 복잡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문화인류학은 총체론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치·종교·역사·경제·법·제도·예술 등등이 기계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총체"로서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이며 경제가 역사라는 안목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전체와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분류. 보통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언어인류학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들에 관한 자연 그대로의 설명과 해석이 인류학의 특징이지만 그 주제나 연구방법이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역사와는 다르다. 이는 인류학이 민족·제도·종교 또는 관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자료를 통한 설명보다 인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생산물에 대해 가능한 한 직접 관찰을 중요시 한다. 또한 이런 모든 연구 결과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기록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적·문화적인 발전과 관련된 복합적인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정신의 다양성과 집단적인 차이를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접근방법은 생리학 또는 심리학과도 다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전역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특정 집단과 활동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 형질인류학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진화학적 틀에서 연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 넓게 퍼져 살게 되었는가가 관심분야이며 어떻게 지역적으로 인류가 다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등 종족으로서 인류를 연구한다. 문화인류학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족지같은 현장에서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고고학은 물질적 인간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을 통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다. 언어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음성이나 비음성적인 다양한 언어를 시간과 공간, 사회적 언어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련을 연구한다. 역사에 따른 구분. 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료인류학 등이 있다. 역사. 19세기 이전. 현대 인류학은 대륙발견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던 유럽 문화는 다양한 토착문화와 폭넓게 접촉하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이 문화들을 일괄적으로 '야만' 또는 '원시' 문화로 규정했다. 19세기. 19세기 중반에 학문에 대한 종교적인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인간의 기원, 인종 분류, 비교해부학, 언어와 같은 주제가 유행했고,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 출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 개념을 언급함에 따라 인류발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문화 발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당대 유행하던 주제와 비교의 관점, 진화론·우생학 등 학문의 지적 유산에 영향을 받은 인류학은, 친족형태의 진화, 문명의 진화, 종교의 진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의 발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때 (19세기 후반) 주류였던 인류학은 단선적인 역사개념을 토대로, 모든 인간집단은 문화적인 진화의 특정 단계들, 즉 '야만' 또는 '미개' 상태를 거쳐 '문명인'(예를 들면 서구 유럽인)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와는 다른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일련의 지배원리를 결정한다. 이 지배원리는 생산양식이 변한 후에도 한동안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며, 그결과 지배원리와 생산양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긴다. 이러한 통일된 이론들은 여행가·상인·선교사 들이 수집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 같은 대중적인 저서와 달리 몇 년 안 되어 학문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성숙한 사회과학 분과로 발전하는 동안 형질인류학은 자연현상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양한 인종의 신체적인 차이를 분류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가운데, 형질인류학자들은 고대인류를 추적하는 데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유럽과 북아메리카 초기 인류학자들이 갖고 있던 강한 문화적인 편견이 점점 사라지고, 사회와 문화의 폭넓은 다양성에 대한 다원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바탕을 둔 이 입장은 모든 문화를 물리적인 환경, 문화적인 접촉,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의 독특한 산물로 파악했다. 이러한 견해에 뒤이어 경험적인 자료, 현지조사, 일정한 문화적·자연적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행한 가장 주요한 본보기가 된 사람은 문화사학파의 시조로 알려진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보아스였다. 1900년 초기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고전적 인류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접근법 (언어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체질인류학)의 기초를 닦았다. 보아스와 베네딕트, 미드, 사피어 등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을 통해 미국 인류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화사학파는 문화적인 자료에 기능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한 문화에 속한 여러 다양한 양식·특징·관습을 조화시켜 표현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파리대학교의 민족학연구소 설립자인 모스는 인간사회를 자기조절 할 뿐 아니라, 문화통합체계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총체적인 체계로 보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시켰다. 모스는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 영국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과 같이 이질적인 접근방법을 꾀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말리노프스키는 계속 엄격한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했으며,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두 학파는 사회사를 사회이론의 토대로 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그 현상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이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폭넓은 현상의 구조적 성격 및 대상을 알아내려 했다. 1930년대에 베네딕트가 행한 미국 남서부 인디언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문화심리학이라는 문화인류학의 파생분야가 생겨났다. 베네딕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천천히 발전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심리적인 성향'을 갖게 하는데, 구성원들은 환경적인 요소에 상관없이 문화를 통해 정해진 방향을 따라 현실을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통사회는 물론,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통합' 또는 가치체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와 인성(人性)의 상호관계는 폭넓은 연구주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형질인류학.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인종이 분류되었으며, 고등 영장류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개괄이 이루어졌다. 1900년 멘델의 일반유전법칙이 재발견되고, ABO식 혈액형계가 처음 발견되면서 종(種)의 진화적인 변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형질인류학자들은 두개골 화석에서 나타난 증거를 바탕으로 약 50만 년 동안의 인류진화과정을 도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현대인류학의 관심과 기법은 물리학·생물학·행동과학·사회과학 등 폭넓은 전문분야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 덕분에 고고학적인 발굴물의 상대적인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과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여러 민족의 지리적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유럽 집시들이 원래 인도 태생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기술을 응용해 혈액형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 민족들의 가족관계,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종교적·법적인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신분석이론에 주로 바탕을 둔 심리학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다. 연구방법. 인류학자는 현지조사(fieldwork, 현지연구, 현장연구, 현장조사 등으로 번역됨)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헌연구의 허구성을 통렬히 반박하며 "발로 뛰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실천적 성격을 형성하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문자사회를 연구하는 경우 1년 이상 현장 연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1년이란 기간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의 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인류학자는 먼저 해당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고 라포르(rapport), 즉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를 몇 개 월을 걸쳐서 먼저 확립하고, 실질적인 조사는 그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면 무문자사회 또는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그러나 이때 무문자사회라는 것도 반드시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있더라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사회'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자가 있는 사회나 심지어는 예컨대 서구와 같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조사는 내실적으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 등이 포함되는데,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민족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 사회 기여. 모든 학문은 당대의 관념을 반영하며, 특히 인류학처럼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회와 각종 영향관계가 폭넓고도 깊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학은 인종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우월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인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의 특성이며, 국민국가 형성기에 벌어진 타자화의 과정 속에서 다른 학문들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과오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여느 학문과 달리 상대론적 세계관을 재빨리 확립하였고, 이어서 연구대상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즉 진화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문화를 현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각종 논리와 사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에는 지구촌 차원에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등함을 인식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소수민족 연구는 현대 도시 내에서의 타자로 전락한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인류학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앞장서서 각종 의제를 던지고 기존의 거대담론이 갖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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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 커닝햄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 1949년 5월 26일 ~ )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위키의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1995년에 Portland Pattern Repository라는 최초의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전히 운영중인 그 사이트는 "사람, 프로젝트, 패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아이디어들의 비공식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패턴 언어에 대한 정보라든지, extreme programming의 방법론 등을 담고 있는 사이트이다. 커닝햄 자신은 위키의 개념을 착안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그 개념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은 하이퍼 카드(HyperCard) 스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카드를 사용해서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위키의 전신인 패턴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는 (Bo Leuf와 함께) "The Wiki Way"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커닝햄&커닝햄 사의 설립자이다. 그는 또한 Wyatt Software 사의 개발 책임자로서 근무했었고, Tektronix Computer Research Laboratory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워드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방법론의 일종인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공헌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힐사이드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현재 인디애나주 미시간 시티 (인디애나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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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저작물
자유 저작물()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 복사, 수정 및 재배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제한이 없는 작품이나 창작물, 정보를 말한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개념을 모든 저작물로 확장한 개념이다. 반의어로는 비자유 저작물로 부른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은 물론, 저작권이 있지만 위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허락된 저작물도 포함한다. 자유 저작물 라이선스. 자유 저작물은 저작물의 내용을 수정한 후에도 역시 같은 제한을 가진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하는 카피레프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정한 버전은 다른 조건으로 (때로는 자유 저작물이 아닌 조건으로) 배포할 수도 있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의 대표적인 예이고, BSD 허가서는 카피레프트가 아닌 라이선스의 예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배포된 작품의 경우, "비영리"나 "변경금지" 제한이 없는 경우는 자유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비영리 혹은 변경금지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자유 저작물에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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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
쑹메이링(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 여사는 전부 근대 중국의 출현 동안 눈에 띈 세 명의 쑹 자매중에 막내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상하이 출신으로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진 그녀는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중국의 부유한 감리교도인 쑹 자매의 부친 찰스 존스 쑹은 미국에서 수학하였고, 쑹메이링을 로 유학을 보내어 그녀는 석사와 함께 1917년 졸업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그녀에게 청혼하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의 첫 부인과 이혼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활동적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신생활 운동을 일으키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에 오르면서 쑹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를 유능한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그녀는 넓게 여행을 다녀 중국의 곤경을 알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성원을 유도하였다. 1943년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두번째 여성이었다. 1948년 쑹 여사는 국민당의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러 미국에 갔다. 1949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설립 후, 그녀는 장제스 총통의 부인으로서 중화민국의 정치에서 현저한 역할을 하였다. 25년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고, 2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한번은 남편과 함께, 한번은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혼자였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그녀는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사망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받았다. 어린 시절. 본적은 하이난섬 원창으로 상하이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하카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쑹자수는 영어로 된 이름 "찰스 존스 쑹"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성경을 출판한 목사였으며 쑨원의 친구이자 재정적 성원자였다. 쑹메이링은 6명의 자식들 중에 셋째로 그녀의 첫째 언니는 쑹아이링, 자신 위의 언니는 쑹칭링이었고, 3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쑹칭링은 후에 쑨원과 결혼하였다. 메이링의 첫째 언니 쑹아이링은 조지아주 메이컨에 있는 에서 수학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쑹메이링은 8세의 나이에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사립 학교인 모타이어 스쿨에 입학하였다. 1913년 그녀는 자신의 언니들의 모교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대학을 시작하였으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자신의 남동생 쑹타에원에게 가까워지기 위하여 웰즐리 칼리지로 옮겼다. 1917년 6월 19일 쑹메이링은 영문학에서 주요 전공과 철학에서 소수 전공과 영예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그녀는 33명의 듀랜트 장학생들 중의 하나로서 인정을 얻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로서 그녀는 후에 미국의 관중들과 자신의 연결에 도움을 준 조지아주 말투와 함께 상당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였다. 장제스의 부인. 1920년 쑹메이링은 쑨원과 결혼한 자신의 언니 쑹칭링의 저택에서 당시 쑨원을 섬긴 군사 장교 장제스를 만났다. 그녀보다 11세 연상인 장제스가 결혼하여 2명의 아들을 두고 불교 신자였던 이래 쑹메이링의 모친은 둘 사이에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장제스가 자신의 이혼에 관하여 증명을 보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약속한 후 결국 동의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의 훗날 장모에게 종교는 알약처럼 삼키지 않고 점차 흡수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에 즉시 개종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장제스가 잠시 망명에 있는 동안 그들은 1927년 12월 1일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실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따랐어도 감리교로 세례를 받았다. 부부는 아무 자식을 두지 않았다. 1925년 형부 쑨원이 서거한 후, 장제스는 중국 북부를 통치한 군벌들에 대항하는 데 북벌을 지도하였다. 쑨원의 지도 아래 중국국민당 (KMT)은 새로운 중국공산당과 협력하였다. 하지만 1927년 장제스는 중국공산당에 반대하여 공산당원들을 학살하는 데 국민당에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원들은 도시로부터 시골 지역들로 달아나 국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조직하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중국 본토를 침입하기 위하여 기초로 사용하는 데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을 설립하였다. 1936년 시안 사건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군사 지도자들은 공산당원들에 싸움을 멈추는 데 장제스를 강요하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데 국공합작을 형성하는 운동에서 시안의 외부 화청지에서 그를 납치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그들의 요구들로 동의하는 데 자신의 남편을 납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신생활 운동을 일으켜 중국 정치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 그리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이었다. 1945년 그녀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데 상승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상, 그의 전망, 그의 청각이며 특히 그의 가장 충성적인 옹호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의 대의를 촉진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과 동등하게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유산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과 서양 양쪽의 문화에서 정통한 그녀는 중국과 해외 양쪽에서 인기있게 되었다. 그녀의 두드러짐은 자신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돼야 할 기행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이끌었다. 쑹메이링은 중국을 위한 재료와 군사 성원을 위하여 수도 없이 미국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30,000명의 사람들 만큼 큰 관중들을 끌었고, 두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처음에 "올해의 남성과 아내"로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그리고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홀로였다. 남편과 부인은 둘다 국민당을 위하여 미국의 대중으로부터 돈과 성원을 모으는 데 자주 노력한 타임 잡지의 상급 편집자이자 공동 창립자 헨리 루스와 함께 좋은 조건들에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2번째 여성이 되었다. 쑹메이링 여사는 11월 장제스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는 데 카이로 회담에서 남편을 동행하였다. 3명의 정상들은 일본이 침입한 영토들의 통치를 포기하고, 타이완과 만주가 중국으로 반환되고 한국이 완전한 독립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였다. 그녀는 또한 일본에 대항하는 데 중국을 성원하고 있던 스틸웰 중장과 장제스 사이에 의사 소통을 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말과 일본의 항복 후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에서 내전으로 돌아왔다. 1948년 쑹메이링 여사는 국민당을 위한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데 미국으로 갔으나 미국은 중국의 정세에 그 비참여 정책을 변경하는 데 거부하였다. 그녀는 1949년 국공내전에서 남편의 정부의 패배까지 미국에 남아있었고 1950년 타이완에서 남편에게 가입하였다. 그녀의 언니 쑹칭링은 공산당과 편에 있으면서 중국 본토에 머물렀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설립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지속적으로 국제적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중화민국과 그 이익들을 대표하러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장려자, 영국 중국 기금 원조 연합의 명예 의장과 권리 기념 사회의 첫 명예 회원이었다. 장제스가 노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통역"의 역할을 취하여 권력을 말하였다. 25년의 세월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후의 생애. 1975년 자신의 남편의 사후 쑹메이링 여사는 대중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쑹메이링 여사가 어려운 관계를 가지면서 이전의 결혼 생활로부터 태어난 자신의 장남 장징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계승되었다. 1975년 그녀는 타이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자신의 거실에 완전한 군사 예복 차림의 남편의 초상화를 간직한 롱아일랜드 래팅타운에 자신의 가족의 36 에이커 (14.6 헥타르)의 사유지에서 살았다.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오랜 동맹들 중에 성원을 강화하는 데 1988년 장징궈의 사망에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총통으로서 장징궈의 후임자 리덩후이는 그녀보다 정치에서 더욱 능숙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안, 쿠데타〉 (1937), 〈이것이 우리의 중국이다〉 (1940), 〈중국은 다시 상승해야 한다〉 (1942)와 〈확실한 승리〉 (1955)를 포함한 다수의 기사와 몇몇의 책들을 썼다. 1995년 제2차 세계 대전 50 주년의 축제와 함께 연결에서 자신의 명예에 캐피톨 힐에서 열린 축하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드문 공개적 출연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해 타이완으로 자신의 마지막 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2000년 타이완에서 열린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은 그녀가 의미있게 무소속 후보 쑹추위 (그녀와 관련 없음)에 국민당 후보 롄잔을 성원한 것에서 그녀로부터 편지를 제시하였다. 편지의 확실성은 타이완에서 위대한 토론의 주제였다. 쑹추위는 자신이 리덩후이를 성원했을 때 자신의 일찍이 그녀에 대한 가려진 비판을 위하여 앙갚음으로서 쓰여졌을 것 같은 편지의 확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해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롱아일랜드 사유지를 팔았고,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그레이시 스퀘어 아파트에서 나머지 일생을 보냈으며 자신이 지나가면서 로비를 청소한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에 의하여 둘러싸였다. 2003년 10월 23일 쑹메이링은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맨해튼 아파트 저택에서 평화롭게 사망하였다. 그녀의 시체는 뉴욕주 하츠데일에 있는 펀클리프 묘지에 일시적으로 안치되었고, 타이완 치후 대영묘에 묻힌 자신의 고인된 남편과 함께 결국적인 매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시된 의도는 한번 정치적 상태가 가능하게 만들 때 둘다 중국 본토에 묻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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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찰스 존 허펌 디킨스(, , 1812년 2월 7일 - 1870년 6월 9일)는 영국인 작가이자 사회 비평가이다. 그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 속의 인물을 만들어냈고,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소설가이다. 화가 시모어(Robert Seymour)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곡 소설 《The Pickwick Papers(원제: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픽윅 보고서)를 분책(分冊)으로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으로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을 비롯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 생애. 어린시절. 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존 디킨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배로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1812년 2월 7일 태어났다. 찰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갇히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디킨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디킨스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글을 쓰다. 디킨스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아침 신문》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보즈’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중에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된다. 세상을 떠나다. 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6월 9일 58세의 나이로 개즈 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소설 작품. 사회비판.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몇 작품 든다면,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Little Dorrit》은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명작이다. 디킨스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기록을 작품으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였다. 연극. 디킨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한 수단으로 연극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에 녹아 있다. 디킨즈 자신도 자신의 작품의 장면들을 대중들 앞에서 매우 자주 낭독하여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공연 투어를 통해 영국 전역과 미국을 널리 여행했다. 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 —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 — 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 중의 몇몇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그의 작품중에는 유령이 등장하거나, 유령 이야기가 나열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탄절 벨]에는 일곱 명의 유령이 등장하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스크루지가 묘사된다. 비판. 그와 동시대 작가 중 몇몇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반유대주의로 비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의 패긴이라는 인물은 메부리코와 탐욕스러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디킨즈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에 살았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그러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악역인 스크루지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혼혈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연민.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실업자, 성 노예자 등의 인물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볼 수 있다. 성찰.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 찰스 디킨스는 가난에 대한 경험, 부의 경험도 누려본 작가로서 둘에 대한 비판을 수월하게 해내었다. 하지만 요즘에 화두에 오르는 매체에 의하면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할 때에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루머일 뿐, 찰스 디킨스의 디킨지안(dickensian) 소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문체. 디킨스는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 , 감상 소설 등에서 다양한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영국 전기 작가 는 디킨스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아리비안 나이트’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중심은 풍자와 아이러니다. 코미디도 피카레스크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로렌스 스턴, 헨리 필딩, 이 주축이 된 영국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을 이끌었다. 필딩의 ‘기아 톰 존스의 이야기(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는 디킨스를 포함한 19세기 후반 소설가들에게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디킨스는 필딩의 책을 유년시절에 읽고 그의 아들에게 ‘헨리 필딩 디킨스’ 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디킨스의 문체는 언어적 창의성이 풍부하다. 캐리커처에 재능이 있는 디킨스는 풍자를 실감나게 잘한다. 초기 평론가들은 디킨스가 예리하고 실용적인 감각으로 유쾌한 삶을 포착해내는 점이 로코코 시대의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가스와 다르게 디킨스는 동시대의 인기 있는 극장의 관습을 반영하여 내용을 다양한 계층 언어로 표현하였고 이에 극찬을 받았다. 디킨스는 독자들을 사로잡을 등장인물의 이름을 창작해는 것에 집중하였는데 독자들이 연관성을 느끼고, “우화적 자극”으로 소설의 의미를 주제에 담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예시들 중 하나를 가져오자면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에서의 등장인물 ‘에드워드 머드스톤(Edward Murdstone)’은 쌍둥이가 암시한 살인(murder)과 돌(stone)처럼 차가운 냉기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디킨스의 문체는 환상과 현실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디킨스가 영국의 귀족적 속물 근성을 풍자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 로 불렀다) 환상의 비행이라고 극찬 받은 비유에는 고아를 주식/배당금에, 사람들을 줄다리기에, 저녁 만찬 손님을 가구에 비유한 것이 있다. 디킨스는 삽화가들에게 전체적 스토리를 먼저 제공하여 등장인물 및 설정을 그가 생각한대로 정확히 그려 낼 수 있게 했다. 삽화가에게 1달분의 삽화 계획을 미리 준 후 디킨스는 글을 썼다. 책 “”의 삽화가인 마커스 스톤은 디킨스를 회상하며 그가 “한 등장인물의 아주 작은 특징과 내가 창작해 낸 인물의 생애를 세세하게 묘사할 준비”를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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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오피스
오픈오피스(, OpenOffice.org)는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피스 제품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2003 포맷을 비롯한 다양한 포맷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교환을 위한 고유 파일 포맷으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을 지원한다. 오픈오피스는 스타디비전이 개발하고 1999년 8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지금의 오라클)가 인수한 스타오피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높은 품질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2000년 7월에 스타오피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다. 이후 오픈오피스 커뮤니티(OpenOffice.org)에서 오픈오피스 개발 및 관련 활동을 책임지고 있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오피스 커뮤니티에 소스 기여/자금 기여/인력 기여 등을 통해 오픈오피스 개발과 활동을 지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그리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그렇게 개발되는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전용 구성 요소를 추가한 스타오피스를 판매하였다. 그 뒤 현재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관리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아파치 라이선스 2.0을 따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역사. 원래 독일 회사인 스타디비전이 스타오피스라는 독점 소프트웨어로 개발했으나 1999년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코드를 인수했다. 1999년 8월에는 스타오피스 버전 5.2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2000년 7월 19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스타오피스에 대한 오픈 소스 개발 커뮤니티를 형성할 의도로 LGPL과 SISSL에 따라 소스 코드를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이름은 OpenOffice.org이며, 2000년 10월 13일에 공식 웹 사이트가 열렸다. 2003년 초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목표로 버전 2.0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 확대, 성능 개선, 속도 향상과 메모리 사용량 감소, 폭넓은 스크립팅 지원, 그놈과의 향상된 통합, 보고서, 양식, 쿼리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론트엔드, 새로운 내장 SQL 데이터베이스, 향상된 사용성. 베타 버전은 2005년 4월에 출시되었다. 2005년 9월 2일, 썬은 SISSL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오픈오피스 커뮤니티 협의회는 다시는 오픈오피스를 이중 라이선스로 제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올 버전은 LGPL만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2005년 10월 20일, 오픈오피스 2.0이 공식적으로 출시되었다. 버전 2.0이 출시된 지 8주 후에 업데이트 버전인 오픈오피스 2.0.1이 출시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버그 수정과 새로운 기능이 포함되었다. 오픈오피스는 2.0.3 버전부터 업데이트, 기능 향상, 버그 수정을 배포하기 위한 배포 주기를 종전의 18개월에서 3개월로 변경했다. 현재, 새로운 기능을 포함한 버전(feature release)은 그 사이에 나오는 버그 수정 버전(bug fix release)과 번갈아 가며 6개월마다 배포된다. 스타오피스. 썬은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한 상용 독점 소프트웨어 스타오피스를 위해 오픈오피스 개발을 보조하고 있다. 스타오피스는 버전 6.0 이후로 오픈오피스 소스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추가 독점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OpenOffice.org XML 파일 포맷을 포함하여 스타오피스의 많은 기능을 물려받았는데, 이 포맷은 버전 2에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 기능. 선언문을 보면, 오픈오피스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동작하고, 오픈 컴포넌트에 기반을 둔 API와 XML에 기반을 둔 파일 형식을 통해서 모든 기능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하는 오피스 제품군을 만드는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경쟁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비슷한 외관과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이 사용하는 파일 형식 중 대부분을 읽고 쓸 수 있다. 이는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이전 버전 파일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열지 못하는 손상된 새 버전의 파일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 매킨토시 워드 파일(MCW)은 열 수가 없다. 플랫폼. 오픈오피스는 리눅스, 윈도우, OS X, 솔라리스, FreeBSD, OpenVMS, IRIX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은 윈도우, 리눅스, 솔라리스이다. 오에스 텐용 버전의 경우 2.x버전의 경우 X11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제한적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3 버전부터는 OS X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에서 네이티브로 작동하는 향상된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로 OS X 전용으로 개발된 네오오피스도 있다. 네오오피스는 오픈오피스에서 떨어져 나간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오피스 2.X 시절부터 아쿠아 버전의 오픈오피스를 제공하였다. 구성 프로그램. 오픈오피스는 최신 오피스 제품군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공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각 프로그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 요소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구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퀵스타터. 윈도와 리눅스에서 컴퓨터 시작 시 구동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시작될 때 오픈오피스를 위한 핵심 파일들과 라이브러리들을 로드하여 나중에 제품군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빨리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픈오피스 응용 프로그램들의 시작 시간은 1.0 버전의 제품군에서 공통된 불만이었으며, 퀵스타트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버전 2.2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매크로 기록기. 사용자의 동작을 기록하여 이를 OOoBasic(오픈 오피스 오브젝트 베이직)을 이용하여 재생함으로써 작업의 자동화에 도움을 주는 다이알로그 프로그램으로 매크로 기록기는 다이알로그 인터페이스외에도 오픈오피스베이직의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제공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프로그래밍언어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매크로 기록기는 오픈오피스베이직으로 소스코드에의한 직접적인 사용방법도 가능하다. 내장된 오픈오피스(오브젝트)베이직(OpenOfficeBasic)이 기본으로 구동되지만 파이썬, 빈 쉘(Bena Shell), 자바 스크립트등도 연동시킬수있다. 윈도에서는 이들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설치할 수는 있어도 별개로 다운로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리눅스 배포판에서는 이 구성 요소들을 패키지로 쪼개서 배포하며 따로따로 다운로드하고 설치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스타오피스 베이직에 기초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응용 프로그램용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BA)과 비슷하다. 오픈오피스 2.0 노벨 에디션은 추가로 마이크로소프트 VBA 매크로를 지원하며, 이 기능은 주 버전에서도 곧 통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라이터(Writer)와 칼크(Calc) 응용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다. 이는 서브루틴이나 매크로를 부르는 함수로 쓰이며, 각 매크로는 한 문단에서 단어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특히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지 않은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유용하다. 오픈오피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 베이스는 라이터를 이용해 리포트와 폼을 만들기 때문에, 베이스 또한 오픈오피스 베이직으로 프로그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그래밍작업은 같이 제공되는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이용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 예. 다음은 라이터(Text Document)에서 다수의 매쓰(Fomula)오브젝트들을 삽입한후 "글자크기,폰트,가운데정렬"을 위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이다. REM ***** BASIC ***** Sub Main embeddedObjects = ThisComponent.getEmbeddedObjects() elementNames = embeddedObjects.getElementNames() for i=0 to UBOUND(elementNames) element = embeddedObjects.getByName(elementNames(i)).Model if (element.supportsService("com.sun.star.formula.FormulaProperties")) then element.BaseFontHeight = 11 element.FontNameVariables= "Noto Serif CJK KR,Italic" element.FontNameFunctions = "나눔명조" element.FontNameNumbers= "Noto Serif CJK KR" element.Alignment =com.sun.star.style.TabAlign.CENTER endif next i ThisComponent.reformat() End Sub API.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퍼티를 구성하는 API는 사용자가 거의 대부분의 오픈오피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픈오피스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버전의 스타오피스의 전통을 유지하므로 여전히 API 참조에서도 스타오피스의 프레임을 찾아볼 수 있다. 탁상출판. 탁상출판(DTP)용도를 완전히 지원한다. 다양한 출판물의 사이즈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며, 이미지 뿐만아니라 그래픽SVG등과 수학등의 수식을 삽입하는 출판물에 활용도가 높다. 파일 형식. 오픈오피스는 ISO/IEC 표준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을 만들었고, 이를 기본 고유 형식으로 사용한다. 또한, 많은 예전 전용 형식들(예: 워드 퍼펙트, 로터스 소프트웨어, MS 웍스, 리치 텍스트 형식)을 읽을 수 있으며, 일부는 쓰기도 가능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형식으로 일부 버전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보다 오히려 더 잘 읽어들인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피스 오픈 XML을 쓰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응하여, 노벨은 오픈오피스를 위한 오피스 오픈 XML을 플러그인을 자유로운 BSD 라이선스 조건으로 내놓았는데(GNU GPL 그리고 LGPL 라이선스 라이브러리들과 병행하여), 이는 OpenOffice.org 프로젝트 안으로 포함되도록 제공될 것이다. 이는 오픈오피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만들어진 .docx 파일을 읽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개발. 개요. 오픈오피스 API는 유니버설 네트워크 오브젝트(UNO)로 알려진 컴포넌트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CORBA와 같은 인터페이스 서술 언어에서 정의된 광범위한 인터페이스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용되는 문서 파일 형식은 XML 형식과 여러 가지 내보내기/가져오기 필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픈오피스가 읽어들이는 모든 외부 형식들은 내부 XML 표현을 통해 서로 변환된다. XML을 디스크에 저장할 때에는 압축을 사용하여 똑같은 이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문서들보다 더 작다. 버전 1.0에서 문서 저장을 위해 쓰던 고유 파일 형식은 OASIS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 표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는 버전 2.0에서는 기본 파일 형식이 되었다. 제품군 개발 버전은 OpenOffice.org 웹 사이트의 개발자 존에서 몇 주마다 한 번씩 나오고 있다. 이 배포 버전들은 새로운 특징을 테스트해보고 싶거나 단순히 앞으로 있을 변경들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 이들은 실무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고유 데스크톱 통합. 오픈오피스 1.0은 운영되는 플랫폼을 위해서 고유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의 룩 앤드 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버전 2.0을 시작하면서, 오픈오피스는 고유 응용 프로그램들과 더 잘 어울리고 사용자들에게 더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플랫폼에 걸쳐 있는 고유 위젯 툴키트, 아이콘, 그리고 폰트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적용했다. 특히 GNOME과 KDE 양쪽과 통합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나 맥 OS X에서 뚜렷한데, 표준 유저 인터페이스가 윈도나 X-11 기반 데스크톱 환경 어느 쪽과는 눈에 보이게 많이 다르며, 대부분 오픈오피스 개발자와는 친숙하지 않은 프로그래밍 툴킷을 쓰라고 요구한다. 오에스 텐에서 오픈오피스를 쓸 수 있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오픈오피스 Mac OS X (X11). 공식 버전은 X11.app 또는 XDarwin을 설치하여 달라고 요구하며, 잘 테스트된 유닉스 버전에 딱 들어맞는 포팅이다. 이는 기능으로는 유닉스 버전과는 동등하며, 유저 인터페이스는 그 버전의 룩 앤드 필과 닮았다. 예를 들어 응용 프로그램은 화면 상단의 오에스 텐 메뉴 대신에 자체 메뉴를 사용한다. 이는 또한 오픈오피스를 위한 X11 형식의 시스템 글꼴이 필요한다(이는 응용 프로그램 설치 도중에 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아쿠아. 오픈오피스 아쿠아는 X11 오픈오피스를 대체하여 현재에는 정식 버전의 맥용 오픈오피스 지칭한다. 그러므로 오픈오피스 아쿠아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다른 프로젝트들.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프로젝트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오피스와 네오오피스가 있고, 그룹웨어 솔루션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보완 프로그램도 있다. 네오오피스. 이는 독자적인 포팅으로 OS X의 아쿠아 유저 인터페이스를 자바, 카본, 그리고 점점 더 비중이 높아지는 코코아 툴킷을 써서 통합을 구현하였다. 네오오피스는 OS X UI 표준에 꽤 가까우며, OS X에 설치된 글꼴과 프린터들을 직접 사용한다. 이는 공식 오픈오피스 X11 릴리즈보다는 뒤처져서 발표되는데, 개발팀이 규모가 작고 유저 인터페이스를 포팅하는 데에 쓰는 기술 개발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OpenGroupware.org. OpenGroupware.org는 OpenOffice.org 문서, 캘렌더, 주소록,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그리고 블랙 보드를 공유할 수 있고 다른 그룹웨어 응용 프로그램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OOExtras에서는 문서 템플릿과 쓸모 있는 추가물들을 만들고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 외부 프로그램에서 OpenOffice.org 문서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펄 확장기능들을 CPAN에서 구할 수 있다. 이들 라이브러리는 OpenOffice.org API를 쓰지 않는다. 이들은 펄 표준 압축/압축 풀기, XML 접근, 그리고 UTF-8 인코딩 모듈을 이용해서 OpenOffice.org 파일을 직접 읽고 쓴다. 휴대용 프로그램. “휴대용 OpenOffice.org”라고 부르는 OpenOffice.org 배포판은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서 제품군을 돌리고자 설계되었다. OxygenOffice 프로페셔널. OpenOffice.org보다 향상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옵션으로 다음이 제공되며, 개인과 업무용으로 무료로 쓸 수 있다. 확장 기능. 버전 2.0.4부터, OpenOffice.org는 모질라 파이어폭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기능을 지원한다. OpenOffice.org 서지 프로젝트는 강력한 참고 문헌 관리 소프트웨어를 이 제품군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주요 추가물들은 2007년 후반이나 2008년 중반에 나올 표준 OpenOffice.org 릴리즈에 포함되기 위한 후보로 정해져 있으나, 프로그래머들의 선호도에 따라서 더 늦어질 수도 있다. 보안. 오픈오피스는 보안 팀을 따로 가동하고 있으며, 보안 사이트인 Secunia는 2007년 9월 현재까지 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패치 되지 않은 보안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카스퍼스키 연구소에서는 오픈오피스에 존재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는 오픈오피스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는 없다. 프랑스 국방성의 비공개회의에서, 매크로에 관련된 보안 문제가 제기되었다. 오픈오피스 개발자들은 이 폭로에 가깝게 발표된 취약점이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서 발표되지 않았으며, 국방부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추측되는 취약점에 대해서는 개발자들과 연구원들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시장 반응. 시장 점유율. 오픈오피스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 미러 사이트, 피어투피어 네트워크, CD, 리눅스 배포판 등 다양한 경로로 배포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픈오피스 측에서는 표본 조사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전체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픈오피스와 스타오피스는 2004년에는 대형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14%를, 중소규모 비즈니스 시장에서는 2005년에 19%를 확보했다. 오픈오피스 웹 사이트는 2009년 10월 28일에 다운로드 수 1억 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오픈오피스를 대규모로 쓰는 사용자는 싱가포르 국방부, 그리고 영국의 브리스톨 시청 등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픈오피스가 소프트웨어 조달을 합리화시키면서도 안정되고, 기록 보관을 위한 표준 파일 형식을 원하는 지역과 국가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리눅스를 쓰는 인도 대법원과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은 완전히 오픈오피스에 의존하고 있다. 2005년 10월 4일, 선과 구글은 전략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합의 일부로써, 선은 구글 검색 바를 오픈오피스에 추가하고, 선과 구글은 공동 마케팅 활동은 물론 공동 연구 개발을 약속했으며, 구글은 오픈오피스 배포를 도울 것이다. 스타오피스 말고도,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업 제품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SISSL 라이선스로 개발되었다(오픈오피스 2.0 베타 2까지 유효하다.). 대체로 이들은 지역 특화 또는 틈새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음성 인식 모듈, 자동 데이터베이스 연결, 또는 더 나은 CJK 지원과 같은 전용 애드-온이 들어 있다. 자바 논란. 예전에 오픈오피스는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바 런타임 환경에 의존성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이 자바 창시자이자 오픈오피스의 선도 후원자라는 사실은 이 기술 채택에 숨은 뜻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버전 1은 몇몇 보조 기능을 위하여 현재 사용자 컴퓨터에 있는 자바 런타임 환경(JRE)에 의존하지만, 버전 2에서는 자바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 제품군은 JRE를 요구한다. 그에 대응하여, 레드햇은 자유 자바 구현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늘렸다. 레드햇의 페도라 코어 4(2005년 6월 13일 출시)는 GCJ와 GNU Classpath에서 동작하는 오픈오피스 버전 2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어화. 오픈오피스의 한국어화 작업은 처음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의뢰로 미지리서치가 스타오피스를 한국어화하고 그 결과물을 오픈오피스에 반영하였다. 이후 한국어판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지역화 팀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2008년 4월 배포된 2.4판 이후부터는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어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리눅스, OS X에서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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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제품군
업무용 응용 소프트웨어 제품군()은 워드 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 스프레드시트 등의 응용 소프트웨어의 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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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눅스
리눅스()는 1991년 9월 17일 리누스 토르발스가 처음 출시한 운영 체제 커널인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둔 오픈 소스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 계열이다. 리눅스는 일반적으로 리눅스 배포판 안에 패키지 처리된다. 배포판에는 리눅스 커널과 지원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라이브러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다수가 GNU 프로젝트에 의해 제공된다.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은 배포판 이름에 "리눅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GNU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에 일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GNU/리눅스(GNU/Linux)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저명한 리눅스 배포판에는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가 포함된다. 상용 배포판에는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RHEL), 수세 리눅스 엔터프라이즈 서버가 포함된다. 데스크톱 리눅스 배포판에는 X11이나 웨이랜드 등의 윈도잉 시스템, 그리고 그놈, KDE 플라스마 등의 데스크톱 환경이 포함된다. 서버용 배포판은 그래픽스 기능이 제되어 있거나 LAMP 등의 솔루션 스택이 포함될 수 있다. 리눅스는 자유로이 재배포가 가능하므로 누구든지 어떠한 목적으로든 배포판을 만들 수 있다. 리눅스는 처음에는 인텔 x86 아키텍처에 기반한 개인용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나 그 뒤로 기타 운영 체제 외에 더 많은 플랫폼으로 이식되었다. 스마트폰에 안드로이드(리눅스 기반임)가 우세해지면서 리눅스는 또한 모든 범용 운영 체제 가운데 가장 많은 설치 기반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데스크톱 컴퓨터 중 대략 2.3%만이 리눅스를 사용하지만, 리눅스 커널 기반 크롬 OS를 구동하는 크롬북은 미국 K-12 교육 시장을 지배하며 미국 내 300달러 미만 노트북 컴퓨터 가운데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리눅스는 서버 시장에서 주도적인 운영 체제이며(상위 100만 대 웹 서버 운영 체제 중 96.4% 이상이 리눅스이다), 메인프레임 컴퓨터 등의 기타 빅 아이언 시스템을 주도하며 TOP500 슈퍼컴퓨터에 쓰이는 유일한 운영 체제이다.(2017년 11월 이후로 모든 경쟁자를 점차적으로 제거하였다). 리눅스는 또한 일반적으로 운영 체제가 펌웨어로 빌드되면서 시스템에 높은 수준으로 맞추어진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도 동작한다. 여기에는 라우터, 자동화 컨트롤, 스마트 홈 기술(예: 구글 네스트), 텔레비전(삼성전자, LG전자의 스마트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자동차(예: 테슬라,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현대자동차, 도요타는 모두 리눅스에 의존함),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비디오 게임기, 스마트워치가 포함된다. 팰컨 9와 드래곤 2의 항공 전자기기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버전을 사용한다. 리눅스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협업의 매우 저명한 예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스 코드는 누구든지 GNU GPL 등 개별 라이선스에 따라 상업적으로나 비상업적으로 이용, 수정, 배포가 가능하다. 턱스. 턱스는 리눅스의 공식 마스코트이다. 통통한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96년 래리 유잉이 만들었다.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펭귄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는 리눅스 커널의 작성자 리누스 토르발스에게서 나왔다. 역사. 선구자. 유닉스 운영 체제는 1969년 미국 AT&T의 벨 연구소에서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러스 매클로이, 조 오사나(Joe Ossanna)에 의해 착안되어 구현되었다. 1971년 처음 출시된 유닉스는 온전히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어셈블리어로 작성하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1973년 주된 선구자적 접근으로 데니스 리치가 일부 하드웨어 및 입출력 루틴을 제외하고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재작성하였다. 유닉스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구현체의 이용이 가능하게 되면서 다른 컴퓨터 플랫폼으로 이식이 더 용이해졌다. 유닉스의 컴퓨터 사업 진입을 금지하던 초기 미국의 독점금지법으로 인해 AT&T는 운영 체제의 소스 코드를 모든 요청자에게 라이선스할 필요가 있었다. 1984년, AT&T는 벨 연구소와 분리되어 자유 라이선스를 요구하는 법적 책무를 면제하였고 벨 연구소는 유닉스를 사유 제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사용자는 유닉스 수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1983년 리처드 스톨먼이 시작한 GNU 프로젝트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구성된 "완전한 유닉스 호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드는 목표를 두었다. 작업은 1984년 시작되었다. 나중에 1985년, 스톨먼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시작하였고 1989년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PL)를 작성하였다. 1990년대 초, 운영 체제에 필요한 프로그램들 다수(예: 라이브러리, 컴파일러, 문서 편집기, 유닉스 셸, 윈도 시스템)가 완성되었으나 장치 드라이버, 데몬, GNU/허드라는 이름의 커널 등 저급(low-level) 요소들이 정체되거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1991년 당시 GNU 커널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자기 스스로 개발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법적 문제로 인해 1992년까지 출시되지 못했음에도 NetBSD, OpenBSD, FreeBSD의 기원이 된 386BSD의 개발이 리눅스의 개발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또, 토르발스는 386BSD가 당시 이용 가능했더라면 아마 리눅스를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언급하였다. 미닉스는 컴퓨터 과학 교수 앤드루 타넨바움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운영 체제의 원리를 학습하고자 한 학생들과 다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소형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로서 1987년 출시되었다. 미닉스의 소스 코드 전체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음에도 라이선스 조항으로 인해 2000년 4월 라이선스 변경이 될 때까지 자유 소프트웨어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개발. 1991년, 헬싱키 대학교의 재학생이었던 토르발스는 운영 체제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교육용으로만 국한되었던 미닉스 라이선스에 실망한 토르발스는 궁극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되었던 자신만의 운영 체제 커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토르발스는 미닉스에서 리눅스 커널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미닉스용으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 또한 리눅스에서 사용되었다. 나중에 리눅스는 성숙하여 더 나아가 리눅스 커널 개발이 리눅스 시스템에서 이루어졌다. GNU의 응용 프로그램들 또한 모든 미닉스 구성 요소를 대체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숙한 운영 체제에 GNU 프로젝트에 자유로이 이용 가능한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GNU GPL로 라이선스된 코드는 동일하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로 출시하는 한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재사용이 가능하였다. 토르발스는 상용 재배포를 금지하였던 자신의 오리지널 라이선스로부터 GNU GPL로의 전환을 시작하였다. 개발자들은 GNU 구성 요소들을 리눅스 커널로 통합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온전히 기능하는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명칭. 리누스 토르발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Freax로 호칭하길 원했는데 이는 free, freak, x(Unix의 암시)의 혼성어였다. 그가 시스템에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동안 프로젝트의 makefile 중 일부에 약 6개월 동안 Freax라는 이름이 포함되었다. 토르발스는 이미 이 이름을 "리눅스"(Linux)로 고려하였으나 처음에는 이 이름이 너무 독선적인 단어로 일축하였었다. 개발을 용이케 하기 위해 파일은 1991년 9월 FUNET의 FTP 서버(codice_1) 에 업로드되었다. 헬싱키 공과 대학교(Helsinki University of Technology, HUT)의 토르발스의 동업자 아리 렘케(Ari Lemmke)는 당시 자발적인 FTP 서버 관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Freax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토르발스와 상의 없이 서버상에서 Linux로 명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토르발스는 리눅스의 명칭 사용에 동의하였다. 토르발스가 쓴 뉴스그룹 게시물에 따르면, "Linux"라는 용어는 ( -리눅스-로 발음하는 것이 좋겠다고 언급되었다. 어떻게 리눅스가 발음되는 것이 좋을지를 추가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커널 소스 코드에 오디오 가이드()를 포함하였다. 상업적, 대중적 활용. 호비스트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지 않고 운영 환경에 리눅스를 채택하는 일은 1990년대 중반 슈퍼컴퓨팅 커뮤니티에서 처음 불붙기 시작했는데, NASA(미국 항공 우주국) 등의 단체들이 점차 비용이 많이 드는 자신들의 기계들을 리눅스 구동의 저렴한 일상 컴퓨터 클러스터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델과 IBM, 이후 휴렛 팩커드가 데스크톱 운영 체제를 독점하던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해방되고자 리눅스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리눅스 시스템은 임베디드 시스템에서 사실상 모든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컴퓨팅 전반에 사용되며, 대중적인 LAMP 애플리케이션 스택 등 서버 설치본에 자리잡았다. 가정과 기업 내 리눅스 이용은 증가되고 있다. 리눅스 배포판은 넷북 시장에서 대중화되기도 했으며 수많은 장치들에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미리 설치되었고 구글은 넷북용으로 설계된 자신들의 크롬 OS를 출시하였다. 소비자 시장에서 리눅스의 가장 위대한 성공은 모바일 장치 시장으로 볼 수 있는데,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가장 지배적인 운영 체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태블릿, 그리고 최근에는 웨어러블에서도 매우 대중화되었다. 리눅스 게이밍은 리눅스 지지를 표방하고 자체 게이밍 지향 리눅스 배포판인 스팀OS를 출시한 밸브의 성장과 함께하고 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또한 다양한 지역, 그리고 브라질 연방 정부 등 국가 정부들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의 개발. 그레그 크로하트맨(Greg Kroah-Hartman)은 리눅스 커널의 주도적인 유지보수자로서 개발을 가이드하고 있다. 윌리엄 존 설리반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이사로서 GNU 구성 요소들을 지원하고 있다. 개인과 기업들은 GNU가 아닌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을 개발한다. 이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은 커널 모듈과 사용자 애플리케이션, 라이브러리를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리눅스 벤더들과 커뮤니티들은 커널, GNU 구성 요소, GNU가 아닌 구성 요소를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형태로 추가적인 패키지 관리자와 결합하여 배포한다. 설계. 수많은 오픈 소스 개발자들은 리눅스 커널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된 것임에 동의한다. 토르발스는 유닉스의 설계가 발판 역할을 하였음에도 리눅스는 수많은 돌연변이와 함께 성장했으며 돌연변이는 무작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DNA의 알파 입자보다 더 빠르고 더 자발적인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이먼드는 리눅스의 혁명적인 면모를 기술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 리눅스 이전에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소규모 단체들에 의해 주의깊게 설계되었으나 리눅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거의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해서만 조직화되는 상당한 수의 자발적 이용자들에 의해 무심코 해킹되었다. 품질은 엄격한 기준이나 독재적으로 관리되지 않았고 수일 동안 사용자 수백 명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매주 릴리스하는 단순한 전략을 취함으로써 개발자들이 도입한 돌연변이의 빠른 다윈 선별 정렬 방식을 만들어냈다. 리눅스 기반 시스템은 모듈 방식의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며 1970년대와 1980년대 중 유닉스 안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기초적 설계 대부분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스템은 프로세스 제어, 네트워킹, 주변기기 접근, 파일 시스템을 관리하는 모놀리식 커널을 사용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커널에 직접 통합되어 있거나 시스템 실행 중에 로드되는 모듈로 추가된다. GNU 유저랜드는 리눅스 커널에 기반한 대부분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안드로이드가 바로 주목할만한 예외이다. 프로젝트의 C 라이브러리의 구현체는 커널 사용자 공간 인터페이스에 필수적인 리눅스 커널의 시스템 호출의 래퍼로서 동작하며 툴체인은 리눅스 커널을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컴파일러 모음집이며 코어유틸리티는 수많은 기초적 유닉스 도구들을 구현한다. 이 프로젝트는 또한 저명한 CLI 셸인 Bash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리눅스 시스템에 쓰이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는 X 윈도 시스템 구현체 위에 빌드된다. 근래에 리눅스 커뮤니티는 X 윈도 시스템 대신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서 웨이랜드 사용을 추구한다. 수많은 기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리눅스 시스템에 기여한다. 설치되는 리눅스 시스템 구성 요소는 다음이 포함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셸로 알려진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또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일반적인 관련 하드웨어에 부착된 컨트롤일 수 있다. 데스크톱 시스템의 경우 기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그래픽이지만 터미널 에뮬레이터 창이나 별도의 가상 콘솔을 통해 CLI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CLI 셸은 텍스트 기반 사용자 인터페이스이며 입출력을 위해 모두 텍스트를 사용한다. 리눅스에 사용되는 저명한 셸은 Bash(본 어겐 셸)이며 본래 GNU 프로젝트용으로 개발되었다. 유저랜드의 다양한 부분을 포함하는 가장 낮은 단계의 리눅스 구성 요소들은 예외적으로 CLI를 사용한다. CLI는 특히 반복적이거나 지연되는 작업의 자동화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매우 단순한 프로세스 간 통신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시스템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GUI 셸이며 KDE 플라스마, 그놈, 메이트, 시나몬, LXDE, Pantheon, Xfce 등 확장 데스크톱 환경과 함께 패키징되지만 다양한 추가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이른바 X로 불리는 X 윈도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 네트워크 투명성을 제공하며 특정 시스템에서 실행 중인 그래픽 애플리케이션이 다른 시스템에서 표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용자가 애플리케이션과 통신할 수 있다. 그러나 X 윈도 시스템의 특정 확장 기능들은 네트워크를 경유하여 동작하지 못한다. 참고 구현체를 포함(가장 대중적인 것이 X.Org 서버)하여 일부 X 디스플레이 서버들이 존재한다. 서버 배포판은 개발자와 관리자들을 위해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으나 시스템의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최종 사용자를 위한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는 다른 시스템에 상주하는 클라이언트를 통해 접근되며 꼭 리눅스 기반일 필요는 없다. 일부 유형의 창 관리자는 X11용으로 존재하며, 틸팅, 동적, 스택, 컴포지트 방식이 포함된다. 창 관리자는 개별 애플리케이션 창의 위치와 모습을 제어하는 수단을 제공하며 X 윈도 시스템과 통신한다. 더 단순한 X 윈도 관리자, 이를테면 dwm, ratpoison, i3wm, herbstluftwm과 같은 것들은 미니멀리스트적 기능을 제공하지만 FVMM, 인라이튼먼트, 윈도 메이커 등의 더 세련된 창 관리자들은 내장 작업 표시줄, 테마와 같은 더 많은 기능들을 제공하지만 데스크톱 환경들과 비교할 때 여전히 가벼운 편에 속한다. 데스크톱 환경에는 자체 표준 설치본의 일부로서 Mutter(그놈), KWin(KDE), Kfwm(kfce) 등의 창 관리자를 포함하지만 사용자는 원하는 경우 각기 다른 창 관리자를 골라서 쓸 수 있다. 웨이랜드는 X11 프로토콜을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된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다. 2014년 기준으로, 폭넓게 채택되지는 못한 상황이다. X11과 달리 웨이랜드는 외부 창 관리자와 컴포지트 관리자가 필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웨이랜드 컴포지터는 디스플레이 서버, 창 관리자, 컴포지트 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웨스턴(Weston)은 웨이랜드의 참조 구현체이지만 그놈의 Mutter와 KDE의 KWin이 독립적인 디스플레이 서버 형태로 웨이랜드에 포팅되고 있다. 인라이튼먼트는 이미 버전 19부터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 비디오 입력 기반 구조. 리눅스는 현재 비디오 입력 장치를 관리하기 위한 2개의 현대적 커널 유저스페이스 API를 갖추고 있다: 비디오 스트림과 라디오를 위한 V4L2 API, 디지털 TV 수신을 위한 DVB API. 장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이유로, 또 해당 API가 관리하는 수많은 포맷과 표준들로 인해 이 기반 구조는 다른 장치들과 더 잘 호환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다. 또, 양호한 유저스페이스 장치 라이브러리는 유저스페이스 애플리케이션들이 해당 장치들에 의해 지원되는 모든 포맷과 성공적으로 동작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멀티 부팅. 리눅스는 부팅 수준에서 GRUB 등을 통해 여러 OS로 부팅하는 것을 지원한다. 또한 리눅스는 GRUB를 통해 콘솔모드 부팅뿐만 아니라 콘솔 모드에서 X 윈도 시스템 환경인 GUI 모드와 상호 변환을 완벽히 지원한다. 이식성. 리눅스 커널은 원래 IA-32 아키텍처의 Intel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광범위한 아키텍처에 포팅된 운영 체제 중 하나이며, 포팅뿐 아니라 이러한 장치를 위한 배포판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HP 아이팩과 같은 PDA에서부터 메인프레임 최신 장비인 IBM zEnterprise Syste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에서 이용된다. 개발. 리눅스와 기타 수많은 대중적인 당대 운영 체제들과의 주된 차이점은 리눅스 커널과 기타 구성 요소들이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점이다. 리눅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일한 운영 체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운영 체제이다. 일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는 카피레프트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카피레프트로 된 소프트웨어에서 파생된 작품은 그 자체가 카피레프트여야 한다는 논지이다. 가장 일반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인 GNU GPL은 카피레프트의 일종이며 리눅스 커널과 GNU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에 사용되고 있다. 리눅스 기반 배포판들은 개발자들이 다른 운영 체제 및 기반 컴퓨팅 표준들과의 상호 운용성을 위해 고안되었다. 리눅스 시스템은 POSIX, SUS, LSB, ISO, ANSI 표준을 가능한 준수하지만, 오늘날까지 오직 하나의 리눅스 배포판인 Linux-FT만이 POSIX.1 인증을 받았다. 협업을 통해 개발된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개발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가 명시적으로 재배포를 허가한다는 사실은 그러나 독립적인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되는 소프트웨어를 대형 프로젝트들이 수집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며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리눅스 배포판 형태로 이용될 수 있게 한다.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은 네트워크 연결을 경유하여 다운로드와 설치를 통해 원격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응용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수집하고 관리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들은 저만의 필요에 따라 운영 체제에 순응해나간다. 배포판들은 개인, 유동적인 팀, 자발적인 단체, 상업 단체들에 의해 유지보수된다. 배포판은 설치된 리눅스 커널의 기본 구성, 일반 시스템 보안,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을 하나의 일관된 패키지로 통합하는 일을 떠맡는다. 배포판은 일반적으로 apt, yum, zypper, 팩맨, portage 등의 패키지 관리자를 사용하여 특정 지점으로부터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설치, 제거,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하드웨어 지원. 리눅스 커널은 널리 이식된 운영 체제 커널로서, 휴대 전화에서부터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치에서 이용이 가능하다. 매우 다양한 범위의 컴퓨터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는데, 여기에는 휴대용 ARM 기반 iPAQ와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 z9이나 시스템 z10이 포함된다. 주류에서 조금 벗어난 아키텍처를 위한 특수한 배포판과 커널 포크(fork)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ELKS 커널 포크는 인텔 8086이나 인텔 80286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동작하는 반면 µClinux 커널 포크는 메모리 관리 장치(MPU)가 없는 시스템에서 동작할 수 있다. 커널은 또한 매킨토시 컴퓨터(파워PC와 인텔 프로세서 모두), PDA, 비디오 게임기,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휴대 전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제조사가 만든 운영 체제의 이용을 염두에 둔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기도 한다. 프리덤HEC와 같이 리눅스 하에서 다양한 하드웨어의 지원을 유지보수하고 개선하는 일을 맡은 여러 산업 협회들과 하드웨어 콘퍼런스가 존재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눅스에서 각기 다른 하드웨어의 지원이 개선되었으며 호환성 개선이 이루어졌다. 2014년, 테스트된 모든 하드웨어 구성 데이터베이스를 자동으로 수집하기 위한 새로운 이니셔티브가 시작되었다. 이용. 데스크톱과 서버에 쓰이는 범용 목적으로 설계된 리눅스 배포판 외에도 각기 다른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한 특수 제작된 배포판도 존재한다: 컴퓨터 아키텍처 지원, 임베디드 시스템, 안정성, 보안, 특정 지역이나 언어로의 지역화, 특정 사용자 그룹 타게팅, 실시간 애플리케이션 지원, 주어진 데스크톱 환경에 대한 기여. 게다가 일부 배포판은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2015년 기준으로 400개가 넘는 리눅스 배포판들이 현재 개발되고 있으며 그 중 약 12개 정도의 배포판이 범용 목적으로 대중화되어 쓰이고 있다. 한국형 리눅스 배포판 가운데에는 하모니카 등이 포함된다. 데스크톱. 표준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에서 리눅스의 인기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들은 그래픽 사용자 환경을 포함하며, 2015년 기준으로 가장 대중적인 환경으로는 KDE 플라스마 데스크톱과 Xfce, 이렇게 2가지가 있다. 단독의 공식 리눅스 데스크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스크톱 환경과 리눅스 배포판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풀에서 구성 요소를 선택하며 어느 정도는 유연한 디자인 가이드를 구현하는 GUI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그놈은 인간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을 디자인 가이드로 삼고 있어서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를 중요한 역할로 제공하는데, 단순히 그래픽 디자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며 보안에도 초점을 둔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의 '협업'이라는 특징 덕분에 여러 곳에 분산된 팀들이, 사유 시스템의 지역화가 비용 효율적이지 않은 일부 리눅스 배포판의 언어 지역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 예로 싱할라어 버전의 Knoppix 배포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XP를 싱할라어로 번역하기 전까지 중요한 수준으로 취급되며 이용되었다. 이 건과 관련하여 랑카 리눅스 유저 그룹이 대학교 교수, 언어학자, 지역 개발자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져 지역화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성능과 애플리케이션. 데스크톱에서 리눅스 성능은 논란의 주제로 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콘 콜리바스는 서버 위주로만 성능을 우선시한다는 이유로 리눅스 커뮤니티를 고소하였다. 그는 데스크톱에 초점을 아예 두지 않는 것에 실망감이 들어 리눅스 커널 개발을 그만두었으며 이 주제에 관한 진실을 모두 폭로하는 인터뷰를 했다. 그 뒤로 데스크톱 경험 개선에 초점을 둔 상당한 개발이 진척되었다. systemd와 Upstart(2014년 구식화됨)과 같은 프로젝트들은 더 빠른 부팅 시간에 초점을 둔다. 웨이랜드(Wayland)와 미르(Mir) 프로젝트는 X11을 대체하는 대신 데스크톱 성능, 보안, 화면 표시 부분을 개선한다. 수많은 대중적인 애플리케이션들이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이용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모질라 파이어폭스, OpenOffice.org/리브레오피스, 블렌더는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한 버전이다. 게다가 예를 들어 피진과 GIMP과 같이 일부 애플리케이션은 처음부터 리눅스용으로 개발되었는데, 이것들은 인기의 상승으로 인해 윈도우, macOS 등 다른 운영 체제들에도 이식되었다. 또, 상당한 수의 사유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 또한 리눅스에서 지원되는데, 이를테면 하이엔드 애니메이션 및 시각 효과 분야의 오토데스크 마야, 더 파운드리스 누크가 있다. 상세 내용은 리눅스용 사유 소프트웨어 목록()을 참고할 것. 자신들만의 또는 다른 기업들의 게임을 리눅스로 이식하는 여러 기업들 또한 존재하며, 리눅스는 저명한 스팀과 Desura 디지털 배급 서비스의 지원 플랫폼이 되었다. 그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macOS용으로 이용 가능한 수많은 유형의 애플리케이션들이 리눅스에서도 실행된다. 공통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은 다른 운영 체제에서 보이는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해당 애플리케이션이 리눅스에서 동작하는 버전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예: 스카이프, 그리고 도타 2와 팀 포트리스 2 등의 일부 비디오 게임) 게다가 와인 프로젝트는 수정되지 않은 기존 윈도우 애플리케이션들을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윈도우 호환성 계층을 제공한다. 와인의 상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코드위버스를 포함한 상업체들에 의해 후원을 받는다. 2009년 이후로 구굴은 와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오픈 소스 와인 프로젝트에 기반한 사유 솔루션 크로스오버(CrossOver)는 윈도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Intuit 애플리케이션(예: Quicken, 퀵북스), 어도비 포토샵 버전들(CS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수많은 대중적인 게임들의 실행을 지원한다. 탁상출판, 프로페셔널 오디오와 같은 부문에서 일부 소프트웨어의 리눅스 포팅판이 없는 경우에서도 리눅스에서 이용 가능한 동등한 수준의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또, 안드로이드용으로 개발된 애플리케이션은 Anbox를 사용하는 다른 리눅스 버전에서 실행이 가능하다. 구성 요소와 설치. X 윈도 매니저와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구성 요소들 외에 D-Bus나 펄스오디오와 같은 freedesktop.org가 호스팅하는 프로그램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2개의 주요 데스크톱 환경들인 그놈과 KDE는 이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각기 그에 상응하는 툴킷(GTK나 Qt)을 사용하여 개발된 그래피컬 프론트엔드를 제공한다. 디스플레이 서버는 오랜 기간 X11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 클라이언트와의 통신을 맡은 또다른 구성 요소이다. X11 통신을 하는 저명한 소프트웨어로는 X.Org 서버와 Xlib이 있다. 번거로운 X11 코어 프로토콜에 대한 실망, 특히 수많은 확장 기능으로 인해 웨이랜드라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 탄생하게 되었다. 리눅스에서 소프트웨어를 설치, 업데이트, 제거하는 일은 시냅틱 패키지 매니저, 패키지킷, Yum 익스텐더와 같은 패키지 관리자를 이용하여 수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주요 리눅스 배포판들은 광활한 저장소를 갖추고 있고 수천 수만의 패키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공식 저장소로부터 받아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자는 비공식 저장소로부터 패키지를 설치하거나 웹사이트로부터 직접 미리 컴파일된 패키지를 다운로드하거나 직접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여 쓸 수 있다. 이 모든 방식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수준의 난이도가 있다.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규 리눅스 사용자들에게는 도전 과제로 간주될 수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에서는 꼭 필수적으로 간주되지는 않으며 리눅스에 특화된 방식 또한 아니다. 넷북. 리눅스 배포판들은 넷북 시장에서도 대중화되었으며 여기에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설치된 Asus Eee PC, Acer Aspire One이 포함된다. 2009년, 구글은 미니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로서 크롬 OS를 발표하였으며 이 운영 체제는 주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크롬 브라우저를 사용한다. 크롬 OS는 처음에 기 포함된 파일 관리자와 미디어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웹 기반이 아닌 애플리케이션은 아예 실행하지 못했다.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특정 수준의 지원이 이후 버전에 추가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구글은 컨테이너 안에서 리눅스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으며 크롬 OS가 다른 모든 리눅스 배포판처럼 사용될 수 있게 하였다. 이 운영 체제를 사용하는 넷북은 크롬북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2011년 6월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버, 메인프레임, 슈퍼컴퓨터. 리눅스 배포판은 서버 운영 체제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으며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저명도가 있다. 넷크래프트는 2006년 9월 가장 신뢰성 높은 인터넷 호스팅 기업 10곳 중 8곳이 해당 기업들의 웹 서버에 리눅스 배포판을 구동하였다고 보고함으로써 리눅스를 최상위로 두었다. 2008년 6월,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5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2개를 차지했다. 2010년 2월 이후로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6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1개를 차지하여 리눅스가 최상위를 유지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개발자들 간 대중성을 달성하고 웹사이트 호스팅의 일반적인 플랫폼 가운데 하나가 된 LAMP 서버 소프트웨어 결합(리눅스, 아파치, 마리아DB/MySQL, 펄/PHP/파이썬)의 초석이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메인프레임에서 대중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저렴한 가격과 오픈 소스 모델 때문이다. 2009년 12월, 거대 컴퓨터 기업 IBM은 자사가 주로 메인프레임 기반 엔터프라이즈 리눅스 서버의 마케팅과 판매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리눅스콘 노스아메리카 2015에서 IBM은 리눅스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실행을 위해 설계된 메인프레임 시리즈 리눅스원을 발표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슈퍼컴퓨터용 운영 체제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500 목록에 오른 모든 슈퍼컴퓨터들은 일부 유형의 리눅스를 구동한다. 스마트 장치.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가정 자동화(예: 구글 네스트) 등의 스마트 장치, 스마트TV(삼성전자와 LG 스마트 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시스템(예: 오토모티브 그레이드 리눅스)에 쓰이는 일부 운영 체제들은 리눅스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시스템을 위한 주된 플랫폼으로는 안드로이드, 파이어폭스 OS, Mer, 타이젠이 포함된다.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모바일 운영 체제가 되었는데,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에 판매된 기기 중 79.3%가 이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안드로이드 스마트 TV와 차량용 인토테인먼트 시스템 또한 시장에 등장하였다. 안드로이드가 수정된 버전의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용어가 안드로이드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는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리눅스 재단, 구글의 오픈 소스 관련 주요 인물 크리스 디보나, 여러 기자들에 따르면 안드로이드는 리눅스 배포판이다. 구글 엔지니어 패트릭 브래디와 같은 기타 인물들은 안드로이드가 전통적인 유닉스 계열 리눅스 배포판 측면의 리눅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드로이드는 GNU C 라이브러리를 포함하지 않으며(대체 C 라이브러리로 바이오닉을 사용) 리눅스 배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타 구성 요소 중 일부 또한 사용하지 않는다. 아스테크니카는 "안드로이드가 리눅스 커널 위에 빌드되긴 하지만 이 플랫폼은 전통적인 데스크톱 리눅스 스택과 공통성이 거의 없다"고 썼다. 오픈 소스 플랫폼 위에서 리눅스를 구동하는 전화와 PDA들은 2007년부터 일상화되었다. 그 예로 노키아 N810, 오픈모코의 Neo1973, 모토로라 ROKR E8을 들 수 있다. 추세에 힘입어 팜(나중에 HP가 인수)은 새로운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 webOS를 제작하여 Palm Pre 스마트폰 계열에 도입되었다. 최초의 모바일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인 노키아의 마에모는 데비안 기반이었다. 나중에 또다른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인 인텔의 모블린과 병합되어 MeeGo가 탄생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모바일 장치를 대상으로 하는 운영 체제인 타이젠을 선호하게 되면서 종료되었다. 타이젠은 리눅스 재단 내의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일부 삼성전자 제품들은 이미 타이젠을 구동하고 있는데 가장 저명한 예가 삼성 기어 2이다. 삼성 Z 스마트폰은 안드로이드 대신 타이젠을 사용한다. MeeGo의 종료에 따라 Mer 프로젝트는 모바일 지향 운영 체제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Meego 코드베이스를 포크하였다. 2012년 7월, Jolla는 Mer 기술에 기반을 둔 자신들만의 운영 체제인 세일피시 OS를 발표했다.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OS는 리눅스 커널,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 웹 표준 기반 런타임 환경, 사용자 인터페이스, 통합 웹 브라우저로 구성되어 있다. 캐노니컬은 이 모바일 운영 체제와 데스크톱 상응 운영 체제 우분투에서 사용자 경험을 컨버전스(집중)하기 위해 우분투 터치를 출시하였다. 또, 이 운영 체제는 외부 모니터와 연결될 때 온전한 우분투 데스크톱을 제공한다. Librem 5는 Purism이 개발한 스마트폰의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회사가 만든 리눅스 기반 PureOS를 사용하지만 다른 리눅스 배포판도 구동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분투 터치처럼 PureOS는 컨버전스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으므로 데스크톱 프로그램들이 스마트폰에서 실행될 수 있다. 한 예로 데스크톱 버전의 모질라 파이어폭스를 들 수 있다. 또다른 스마트폰은 컴퓨터 제조업체 파인64가 제조한 파인폰이다. 파인폰은 우분투 터치, 포스트마켓OS와 같은 다양한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할 수 있다. 임베디드 장치. 낮은 비용과 커스터마이즈의 용이성 덕분에 리눅스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자주 사용된다. 모바일이 아닌 통신 장비 부문에서 고객 댁내 장치(CPE) 하드웨어 대부분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OpenWrt는 OEM 펌웨어 릴리스 다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운영하는 한 예시이다. 예를 들어 대중적인 TiVo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또한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스코/링크시스 등 제조사들의 여러 네트워크 방화벽과 라우터들 또한 그러하다. Korg OASYS, Korg KRONOS, 야마하 모티프 XS/모티프 XF 뮤직 워크스테이션, 야마하 S90XS/S70XS, 야마하 MOX6/MOX8 신시사이저, 야마하 모티프-랙 XS 톤 제네레이터 모듈, 롤랜드 RD-700GX 디지털 피아노 또한 리눅스를 구동한다. 또, 리눅스는 WholeHogIII 콘솔 등 무대 조명 제어 시스템에도 사용된다. 게이밍. 과거에 즐길 수 있는 리눅스용 게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근래 수년 간 AAA 타이틀 게임 일부를 제외한 더 많은 게임들이 리눅스 지원과 함께(특히 인디 게임) 출시되었다. 리눅스 커널을 사용하는 대중적인 모바일 플랫폼 안드로이드는 많은 개발자 관심을 받았으며 아이폰과 아이패드 장치용 애플 iOS 운영 체제와 더불어 모방리 게임 개발을 위한 주된 플랫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2013년 2월 14일 밸브는 PC의 대중적인 게임 배포 플랫폼 스팀의 리눅스 버전을 출시하였다. 수많은 스팀 게임들이 리눅스로 이식되었다. 2013년 12월 13일, 밸브는 베타 테스팅을 위해 데비안 기반의 게이밍 지향 운영 체제인 스팀OS를 출시하였으며 게이밍 및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스팀 머신을 채용할 예정이다. 또, 밸브는 비디오 게임 개발에 도움을 주도록 고안된 OpenGL 디버거 VOGL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소스 게임 엔진이 데스크톱 리눅스로 포팅되었다. 밸브의 노력에 의해 도타 2, 팀 포트리스 2, 포탈, 포탈 2, 레프트 4 데드 2와 같은 일부 저명한 게임들이 데스크톱 리눅스에서 네이티브로 지원된다. 2013년 7월 31일, 엔비디아는 특수 게이밍 플랫픔으로서 안드로이드를 사용할 목적으로 실드를 출시하였다. 일부 리눅스 사용자들은 와인이나 크로스오버 리눅스를 통해 윈도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2018년 8월 22일, 밸브는 게이밍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톤(Proton)이라는 이름의 자체 와인을 출시하였다. 순수 와인에 일부 개선이 추가되었는데, 예를 들면 벌칸 기반 DirectX 11/12 구현체, 스팀 연동, 더 나은 전체 화면 및 게임 컨트롤러 지원, 멀티스레드 지원 게임의 개선된 성능을 들 수 있다. 특수 용도. 리눅스의 유연성, 커스터마이즈 기능, 자유-오픈 소스의 특징 덕분에 특수 목적을 위해 상당한 튜닝을 거친 리눅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수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기 위해 2가지 주된 방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목적에 쓰이는 배포판들은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그 자체가 데비안 기반임), 아치 리눅스, 젠투, 슬랙웨어를 포함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예 처음부터 개발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범용 기반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 필수적인 구성 요소만 포함하되 배포판의 이용에 과도한 것으로 간주되는 구성 요소로 인해 발생되는 자원 부하를 회피하는 JeOS 철학에 초점을 둔다. 홈 시어터 PC. 홈 시어터 PC(HTPC)는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특히 홈 시어터 시스템으로 주로 사용되는 PC를 말한다. 텔레비전에 보통 연결되며 추가적인 오디오 시스템이 포함되기도 한다.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 Kodi를 통합한 리눅스 배포판 OpenELEC는 HTPC용으로 개발된 운영 체제이다. JeOS 철학을 고수하여 개발된 이 운영 체제는 매우 가벼운 편이며 HTPC 범주에서만 사용 시 매우 적절하다. 우분투의 특별판인 Mythbuntu 등 MythTV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는 특수 에디션인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디지털 보안. 칼리 리눅스는 디지털 포렌식과 침투 시험을 위해 설계된 데비안 기반 리눅스 배포판이다. 보안 취약점의 침투 시험 및 식별을 위한 여러 응용 소프트웨어가 사전 설치되어 있다. 우분투 파생판 백박스는 도덕적 해킹(화이트 해킹)을 위해 보안 및 네트워크 분석 도구들이 사전 설치되어 있다. Arch 기반 BlackArch는 침투 및 보안 연구를 위한 도구 2,100개가 포함되어 있다. 프라이버시, 기밀, 네트워크 익명성, 정보 보안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Tails, 틴햇 리눅스, 틴포일 햇 리눅스가 포함된다. 라이트웨이트 포터블 시큐리티는 아치 리눅스 기반 배포판의 하나로서, 미국 국방부가 개발한 것이다. Tor-ramdisk는 네트워크 익명 소프트웨어 토르의 호스팅 전용 목적으로 개발된 초소형 배포판이다. 시스템 복구. 리눅스 라이브 CD 세션은 고장난 컴퓨터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한 도구로서, 또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다. 이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이 목적을 위한 여러 리눅스 배포판들이 등장했는데, 이 중 다수가 파티션 편집기 GParted, 그리고 추가 데이터 복구 및 시스템 수리 소프트웨어를 포함하고 있다: 우주에서. 스페이스X는 팰컨 9 로켓의 장애 허용 디자인에서 여러 비행 컴퓨터를 사용한다. 각 멀린(Merlin) 엔진은 3대의 보팅(Voting)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며 컴퓨터 1대당 2개의 물리적 프로세서는 다른 컴퓨터의 작동을 지속적으로 검사한다. 리눅스는 태생적으로 장애 허용이 아니지만 비행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이 목적을 위해 장애를 허용한다. 유연성을 위해 방사능 내성 부품 대신 출하 대기 부품들과 시스템 방사능 허용 디자인이 사용된다. 2019년 7월 기준으로 스페이스X는 2010년 이후로 팰컨 9을 76회 이상 발사하였다. 드래곤 2 크루 캡슐은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해 크로미엄 OS와 결합된 리눅스를 사용한다. 우주 정거장에서는 임무에 중요하지 않은 노트북에는 윈도우가 운영 체제로 채용되었으나 나중에 리눅스로 대체되었다. 우주의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 Robonaut 2 또한 리눅스 기반이다. 제트 추진 연구소는 무인 우주 비행 및 심해 탐험 구성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리눅스를 사용해 왔다. NASA는 화성 탐사로봇의 로봇공학에 리눅스를 사용하며 위성으로부터 오는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우분투 리눅스를 사용한다. 교육. 리눅스 배포판은 학생들이 직접 코딩과 소스 코드를 다루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라즈베리 파이와 같은 장치용으로 개발되었다. 실제 장치를 개발하는 것 외에 실제 작동 원리를 학생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우분투 파생판 에듀분투와 리눅스 스쿨 프로젝트, 데비안 파생판 스콜리눅스는 교육 지향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학교 컴퓨터실과 컴퓨터 기반 교실을 관리하고 만드는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예: 리눅스 터미널 서버 프로젝트/LTSP) 기타. 인스턴트 웹키오스크와 웹컨버저는 브라우저 기반 리눅스 배포판으로, 주로 키오스크와 디지털 사이니지에 사용된다. 씬스테이션은 씬 클라이언트용으로 설계된 미니멀리스트 배포판이다. 록스 클러스터 디스트리뷰션은 HPCC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정 언어나 지리에 속한 사용자처럼 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범용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중국어 사용자를 대상으로는 우분투 기린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블랙온(BlackOn)이 있다. 직무 특화 배포판들로는 미디어 제작을 위한 우분투 스튜디오, 생물정보학을 위한 DNA리눅스를 들 수 있다. 이슬람 지향 배포판 Sabily는 일부 이슬람교 도구를 제공한다. 특정 기관들은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리눅스 배포판들을 사용하는데, 프랑스 육군 현병대(National Gendarmerie)에 쓰이는 GendBuntu, 구글에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Goobuntu, 러시아군용으로 개발되는 아스트라 리눅스가 있다. 시장 점유율과 활용.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여러 양적 연구는 시장 점유율과 신뢰성을 포함한 주제에 초점을 두며 수많은 연구가 리눅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리눅스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리눅스를 구동하는 서버,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의 소득은 2008년 35,700,000,000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었다. 분석가들과 지지자들은 리눅스의 상대적 성공을 보안, 신뢰성, 낮은 비용, 벤더 락인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저작권, 상표, 이름. 리눅스 커널은 GNU GPL 버전 2로 라이선스된다. GPL는 해당 라이선스의 소스 코드에 기반한 소프트웨어를 배포하는 누구든지 동일 조항으로 소스 코드(수정사항 포함)를 배포해야 한다. 일반적인 리눅스 배포판의 주된 기타 구성 요소들 또한 주로 GPL로 라이선스되지만 다른 라이선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라이선스들은 GPL보다 더 허용점이 많은 LGPL을 사용하며 X 윈도 시스템의 X.Org 구현체는 MIT 라이선스를 사용한다.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이 GPL 버전 2에서 버전 3로 이동되지 않을 것이라 언급하였다. 그는 디지털 권리 관리 내에서 소프트웨어의 이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라이선스를 싫어하였다. 수천에 달하는 모든 저작권 보유자들로부터 권한을 취득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2001년 레드햇 리눅스 7.1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30,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다. COCOMO(Constructive Cost Model) 하에서 이루어진 이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대략 인간 나이로 8000년의 개발 시간이 요구되었다. 또, 연구에 따르면 이 소프트웨어가 전통적인 사유 수단으로 개발되었다면 미국에서 개발 시 대략 $( 미국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소스 코드 대부분(71%)이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되었으나 그 외 C++, 리스프, 어셈블리어, 펄, 파이썬, 포트란, 다양한 셸 스크립트 언어를 포함한 수많은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모든 코드 줄의 절반 이상이 GPL로 라이선스되었다. 리눅스 커널 그 자체는 2,400,000개 줄로 구성되며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이후 연구에서 동일 분석이 데비안 버전 4.0에 대해 수행되었다(2007년 출시). 이 배포판은 283,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으며 전통적인 수단으로 개발한다고 보았을 때 인간 나이로 대략 7300년의 개발 시간, US$( 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 미국에서 리눅스라는 이름은 리누스 토르발스가 등록한 상표명이다. 처음에 누구도 등록하지 않다가 1994년 8월 15일 윌리엄 R. 델라 크로스 주니어는 리눅스라는 상표를 신청한 다음 리눅스 배포자들로부터 로열티를 요구했다. 1996년, 토르발스와 일부 영향을 받은 단체들은 상표가 토르발스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고소했으며 1997년 논쟁이 해결되었다. 상표의 라이선스 부여는 그 뒤로 리눅스 마크 인스티튜트(LMI)가 관리하고 있다. 토르발스는 오직 다른 사람이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칭을 등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LMI는 원래 상표의 일부로서 리눅스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명목적 2차 라이선스 비용을 청구하였으나 나중에 무료의 계속되는 전 세계적 2차 라이선스를 선호하게 되면서 이를 변경하였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리눅스 배포판을 FSF의 회장 리처드 스톨만이 1983년 시작한 GNU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눅스 커널 기반 운영 체제이기도 한 안드로이드 OS에 대해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에 대해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지 않았는데, GNU가 그 일부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톨만과 FSF 외 소수의 유명 인사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특히 데비안(1996년까지 FSF의 후원을 받음) 또한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매체와 일반 이용 시에는 운영 체제 계열을 말할 때 단순히 "리눅스"라고 부르며 이는 수세 리눅스,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처럼 수많은 대형 리눅스 배포판을 가리킬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GNU/리눅스 또는 단순히 GNU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Trisquel GNU/Linux, Parabola GNU/Linux-libre, BLAG Linux and GNU, gNewSense를 들 수 있다. 2011년 5월 기준으로, 우분투의 Natty 릴리스를 구성하는 소스 코드 줄을 셀 경우 현대 리눅스 배포판의 약 8~13%는 GNU 구성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이 범위는 그놈이 GNU의 일부에 속해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한편, 6%는 리눅스 커널이 차지하며 직접적인 의존성을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9%로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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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합중국(美合衆國, , USA), 약칭 합중국(合衆國, , US) 또는 미국(美國)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에 위치한 하와이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캐나다와 남쪽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닿는다. 또한 북아메리카 북서측에 있는 알래스카는 동측으로는 캐나다와 서측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 해외 영토를 보유한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 번째로 넓은 국가이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문화 국가 중 하나로, 주로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 미국의 경제는 2019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21조 4394억 달러로,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경제를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원주민들의 수는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결국엔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와 산업화된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를 선도하는 나라이다. 명칭. 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 국호의 축약형인 'United States'도 표준 명칭이다. 그 밖에 흔히 쓰이는 명칭으로는 'the U.S.', 'the USA', 'America'가 있다.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이름으로는 'the U.S. of A.'와 'the States'도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명칭인 '컬럼비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말로,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도 나오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 미국인을 이를 때 데모님으로 '아메리칸'(American)을 사용한다. 또 미국의 정식 수식어는 'United States of America'이지만, 'America'나 보통 A를 제외한 'U.S.'가 가장 흔히 미국을 일컫는 수식어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서는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ㅈㅉㅌㅂ.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ㅇㅉㅌㅂ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 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거의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섬의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의 이전 수도) 등 허드슨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절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거의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 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독립과 영토 확장.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 ~ 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내전과 산업화.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거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인 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회의와 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냉전, 저항 정치, 사회 변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 ~ 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61년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 마틴 루서 킹 2세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이 반전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 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오늘날.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21년에는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리·기후·자연 환경.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000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000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주 면적은 160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또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 4위인데, 중국과 유사한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 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의 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인 미시시피 강-미주리 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 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 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은 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 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나 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 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과 워싱턴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 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 관리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 환경문제. 1970년대 이후로 환경 문제가 국가 의제에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원료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논쟁, 공기와 수질 오염, 야생동물(주로 늑대나 매, 고라니, 독수리, 사슴 외)과 산림 벌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 환경갈등이 계속되었다. 환경문제는 거의 대부분 연방정부와 국가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점은 1970년대 대통령명으로 만들어진 미국 환경보호국 (ERA)이다. 1964년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토지 중 황무지를 사용하는 일환으로 원시지역 보호법을 만들었다. 1973년 절멸 위기종 보호법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 미국의 주. 주(州, state)는 미국의 최고 단계 행정구역으로, 총 50개가 있다. 인구 통계. 인종과 언어. 미국의 인구는 2019년 기준 329,676,200명으로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이다. 2000년 조사된 인구 분포도를 보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75.1~81.1%, 흑인이 약 12.3~12.6%, 아시아계 3.7~3.9%, 미국원주민이 0.8%다.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중에서도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미국의 발전은 그 역사를 통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로부터의 이민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 이들 민족은 융합하여 새로운 아메리카 민족을 구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국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분명히 몇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백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중에서도 출신 국가별로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최초로 이주해 온 것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이 밖에 독일인 등이 추가되었지만 중심은 영국인이었으므로 현재도 미국에서는 영어가 일상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미국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어휘나 문법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는 종래의 북유럽계의 이민에 비하여 이탈리아인·슬라브인 등의 남유럽계·동유럽계 이주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할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이민을 가장 많이 온 때는 188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이며, 그 전후를 포함하여 1820년부터 1961년까지의 4,200만 명이 입국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멕시코인·쿠바인·푸에르토리코인 등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총칭하여 신이민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 이주하게 된 유대인은 특이한 존재로서, 현재 전 세계 1,500만의 유대인 중 약 550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자산가나 훌륭한 학자가 많고, 각지에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미국 사회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 비(非) 백인 가운데 가장 큰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은 히스패닉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유입 및 높은 출산율 등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소수 집단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넘어섰다. 또한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 히스패닉계 주민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그들의 거주지가 미국에 병합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남부, 북부와 중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아시아계 이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나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주류는 아니다. 한국계 주민들은 약 2백만명, 중국인은 약 3백만명, 일본인은 약 80만명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 많다. 미국 남부에는 흑인이 많이 밀집해있으며, 이 지역의 백인은 주로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다. 동북부 지역의 인종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중북부 지역은 독일계, 아일랜드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백인이, 남서부는 히스패닉이, 서부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공용어는 사실상 영어 (미국 영어)이나, 히스패닉계 인구가 많은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를, 특정 민족의 인구가 많은 구역은 그 민족의 언어를 공공 표지판 등에 병기하기도 한다.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해당하는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 그리고 이들의 현대 후손이다. 이 표현은 광범위한 부족, 국가, 민족을 포괄하며 이 중 많은 무리들은 오늘날에 정치적 공동체로 살아남았다. 도시와 지역. 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 및 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는 세계대전과 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 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과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 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와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콜로라도주의 덴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 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 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 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 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 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 있다. 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고 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 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 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정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다음은 인구순으로 나열한 도시 목록이다. 국민성. 다양하고 복잡한 국민성을 다음의 항목에 열거하였다. 미국의 이민 정책.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다. 초기에 미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유색인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일터에 뿌리를 내린 백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유색인 이민문호를 조절했다. 미국은 1850년 무렵부터 아시아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 조짐이 있자, 1882년 중국인 이민부터 금지시키더니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보다 앞선 1913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막았는데, 표적은 아시아계였다. 토지를 소유하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미국시민(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는데 아시아계 이민 1세는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2차 대전에서 중국과 연합국으로 싸우게 되자 중국에 이민문호를 개방한 것이 1943년, 인도가 1946년,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1952년에 와서야 이민문호를 다시 열었다. 문호를 개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민이 허용되는 숫자는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52년 개정법으로 아시아 이민 1세도 미국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투표권이 있다는 말로 크건 작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면서도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인종 문제가 사회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인종 문제. 앵글로-색슨족(Saxons)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북방계의 이주자들은 이주 시기가 빨랐다는 점도 있어 일찍이 융합하였으며,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이주한 신이민들은 일반적으로 신참자(新參者)로서 생활의 기반이 약한 데다가 유대인·아시아인 등은 인종·문화가 구(舊) 이민과 이질적이어서 동화하기 어려우며, 배척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인종문제로서 최대의 문제는 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흑인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팔려 온 그들은 해방 후 전국 어느 곳에나 거주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선 교육·취직·거주 등의 분야에 불평등한 점이 남아 있고, 이에 항의하는 흑인의 행동도 차츰 격렬해지고 있어, 오늘날 미국 내에서 최대의 사회 문제로 되어 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인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절대수도 많지는 않은데 신이민으로서 흑인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상태는 차츰 사회문제화되어 가고 있다. 종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민 온 개신교 신자들 즉, 청교도들은 초기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전통종교를 배격했으며, 같은 기독교 종파들인 성공회와 천주교회도 성공회 기도서 사용 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천주교회 신자 이민거부로 배척했다. 하지만 건국 후에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미국의 특징상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지만,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 1회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가 다수며 그외 가톨릭교회 및 기타 다양한 종교가 있다. 또한 유대교도도 많아서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앙심도 미국인들은 매우 높아 신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94%에 달할만큼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천주교회와 유대인을 공격했던 시기도 있었고, 존 F. 케네디외에는 천주교 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같은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같이 종교나 민족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적지 않다. 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천주교회에서 분리된 이후,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전통들을 배척한 성경주의자들로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에 이주한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 분리주의자 형제’들을 후에 침례교 또는 침례교인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1620년 이주한 이들은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는데,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플리머스 정착지에 이주했다. 이 플리머스 정착지는 메사추세스 식민지에 흡수된다. 후에 이들을 일컬어 '필그림 파더스'라고 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되었다는 미국의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기독교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적인 신화라는 설명도 있다. 그 실례로 개혁교회 신학자이자 목사인 마이클 호턴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에서 독립혁명으로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신론자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로서 초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집례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다소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로저 윌리엄스() 前 성공회 사제는 제정분리사상 즉, 종교와 정치의 분리사상을 주장하여, 1635년 청교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로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남부에 정착하여 프로비던스(, 현재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에, 앤 허친슨처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앤 허친슨은 보스턴 주민이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26절과 디도에게 보낸 편지 2장 3~5절에 근거, 여성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추방명령을 받았고, 프로비던스로 피신했다. 물론 로저는 앤 허친슨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녀를 프로비던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의 종교적 자유 포용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절대다수 청교도들은 이것을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두려워했다. 이것은 1692년 살렘 마녀 사냥으로 폭발하는데, 메사추세스주 살렘에서 일부 시민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치사 또는 사형당한 사건으로, 50000명 중 1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초기 청교도 사회의 오점 중 하나다. 근대 미국과 유럽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기독교와 시대의 연관성을 추구했다. 특히 미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리성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는 등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미국 성공회, 감리교,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장로교는 뉴욕 유니온을 중심으로 한 축을 형성하였을 뿐 여전히 정통 칼뱅주의가 주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은 소수 보수파 칼뱅주의 감리교회와 소수의 장로교회(예:칼 매킨타이어)와 절대다수의 침례교회에서 영향력을 보였는데, 1915년 출판된 《근본》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의 재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경무오설이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특징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구원관, 음주나 흡연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신학 교육과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도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70.6%가 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46.5%며,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있다. 이중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19세기 소위 환원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발생한 자생적인 교파다. 천주교회는 20.8%로 단일 교단으로는 최대 규모다. 정교회는 3%다. 그 중 미국 그리스 정교회 관구 대교구 소속 신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들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학교 졸업식에 개신교 목사가 기도를 할 정도로 개신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다. 한편, 미국 천주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 법조계 인사들은 보수 정치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에야 차별이 완화된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법조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현재 미국 법조계 내 보수주의 대변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인데, 2005년 감리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데 이어, 또 다시 보수 천주교 신자 새뮤얼 얼리토를 대법관으로 추천하는 등 미국 보수 천주교와 보수적 복음주의간의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 그 외 미국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 성공회()가 있는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시기에는 성공회 기도서 사용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등의 탄압을 받았으나,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일부 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 관구장 즉,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얼 쇼리 주교(1957년생)다. 정치. 미합중국은 1776년 성립되어,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방 국가다. 미국은 "법에 의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 최상위 법전인 헌법에 규정된 견제와 균형 체제에 따라 통제된다. 미국의 연방 제도에서 시민은 보통 세 단계의 정부 즉 연방, 주, 지역 단위에 속한다. 미국 헌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을 구성 주에서 위임받았는데, 그 가운데 국방·외교 정책·대외 무역의 조정 기능,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은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권에 속한다. 주 정부의 주요 기능은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공공안녕, 교도행정, 주내 통상의 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다. 지역 정부의 업무는 보통 각 군과 시 정부에 나눠 맡기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행정부와 입법부 공무원은 구역별로 시민의 다수 투표에 따라 선출된다.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는 없으며, 하위 정부 단위에서도 이 제도는 극히 드물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주로 정치제도나 정치행동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브리엘 앨몬드(Gabriel A. Almond)가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정치문화는 동질적이고 세속적이다.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문화·경제 등에 걸쳐서 차이가 크며 시민의 이해(利害)도 대립하기 쉽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부터 정치의 목표는 항상 현실적이며, 동의에 입각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많은 가치가 복합된 정치문화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경험적인 정치문화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무대는 마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시장을 방불케 한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정치 참여 원칙이 관철되어 왔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3권분립을 엄격히 고수하고, 독립국에 가까운 주(州)제도를 채용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분립된 3권간에는 권력의 중복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정치체제 간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중복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연방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는 구성주정부가 연방정부에 위임하는 권한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그 외의 권한은 국민과 50개의 주가 보유하고 있다. 50개주는 연방 정부와 마찬가지로 주 정부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각부는 연방 정부의 각부와 동등한 기능 및 영역을 지닌다. 각 주의 행정 수반은 주지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권력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권력 분포와 행사에 있어서 중복현상과 마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강력하다. 단지 시대적인 차원에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50개주에 포함되지 않는 괌, 북마리아나제도 등의 속령 등 해외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 군대 최고 통수권자의 직함을 가지며, 국방 장관과 합동 참모총장을 임명한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을 비롯한 군 전체를 총괄한다. 해안 경비대의 경우 평화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전시에는 미 해군에서 관할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체벌이 크게 줄었다. 현재 미국 내 학교 체벌을 적극 허용하거나 이를 규제하는 법안 및 관행이 없는 주는 19개다. 이외 31개 주에서는 공립학교에서의 체벌을 불법으로 금지, 아이오와, 몬타나, 델라웨어, 메릴랜드, 뉴저지 및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공립 뿐 아니라 사립학교에서도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 국방. 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과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공군, 우주군, 해병대를 포함한 군대를 통솔한다. 해안경비대는 평상시에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전쟁 상황에는 미 해군에서 통솔한다. 2008년 현역으로 있는 군인이 140만 명을 넘겼다. 예비군과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230만 명이 넘는다. 또한 국방부는 계약직을 포함하지 않은 민간인 7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모병제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의무 징병 등록제를 통해 거의 대부분 징병제로 뽑는다. 미국 군대는 공군의 신속한 수송기, 해군의 11대 현역 항공모함, 해병 원정부대 해군 함대사령부와 태평양 함대를 통해 빠르게 투입할 수도 있다. 또한 해외에 865개의 해외 주둔 기지를 두고 있고, 25개 국가에는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주둔군은 미국 "제국의 기반"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2011년 총 국방비 지출은 7,000억 달러 이상인데, 이는 세계 국방비의 41%며 상위 14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미군 국방비는 GDP 전체의 4.7%로, 상위 15개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CIA에 따르면 2012년 GDP 대비 미국 국방비 지출은 세계에서 23번째라고 한다. 미국 국방비는 냉전 시대 이후 최근 수 십년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1953년 전체 GDP의 14.2%, 1954년 연방비 69.5%를 맡은 것에 비해 2011년에는 GDP의 4.7%, 연방비는 18.8%로 감소했다. 2012년 국방비 예산은 2011년보다 4.2% 증가한 5,530억 달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 때문에 1,180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 경제. 미국의 경제 체제는 민주주의적 혼합 경제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높은 생산성을 누리고 있다. 미국이 부유한 경제를 이룩한 것은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존재와, 기술혁신이 뒷받침된 국내 산업이나 해외에서의 활발한 투자활동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것이다.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조 4128억 달러로, 시장 환율로 세계총생산(GWP)의 23%, 구매력 평가(PPP) 대비 세계총생산의 약 21%를 차지한다고 한다. 미국의 GDP는 세계 최대 규모며, 1인당 명목 GDP 9위, 구매력 평가 1인당 GDP 10위다. 미국은 세계 최대 재화 수입국이며, 수출 규모는 세계 1위인데 1인당 수입액은 비교적 낮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이 있다. 2007년, 자동차는 주요 수출입 품목이었다.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 약 6년간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2007년 12월부터 침체기를 맞고 있다. 한편 미국은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 2009년 미국 경제에서 개인 부문은 전체 중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연방 정부 활동은 24.1%, 주 및 지역 정부 활동(연방 이전액 포함)은 20.6%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탈산업화 단계로, 서비스 산업이 GDP의 67.8%를 차지하지만, 지금도 미국은 산업 강국이다. 기업 총수령액 기준 주요 사업 문야는 도소매 무역이며, 순수입 기준으로는 제조업이 주된 분야다. 화학 공학 제품은 주요 제조업 분야이다. 미국은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며,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미국은 전기 및 핵 에너지를 비롯하여 액화 천연 가스, 황, 인지질, 소금 생산에서 세계 1위다. 농업은 미국 GDP의 1%를 넘지 미국은 옥수수와 콩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달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기업이다. 2009년 3/4분기에 미국 노동 인구는 1억 5,440만 명이었다. 이 중 고용 인구의 81%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2,240만 명을 거느린 미국 정부는 주요 고용처다. 미국 노동자의 노동 조합 조직률은 12% 정도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 세계 은행은 미국을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 1위로 들었다. 1973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199시간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에 미국은 시간당 노동 생산성 면에서 십년 전까지만해도 미국보다 높던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따라 잡았다. 유럽과 견주어 미국의 자산 및 법인 소득세율은 보통 높은 편이며, 노동 특히 소비세율은 낮다. 미국은 내수경제가 튼실한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내수 위주로 산업기반을 바꾸기도 했다. 세계최대 석유 비축량에 셰일 가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최첨단 공산품을 많이 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계층이 적고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여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토는 넓고 자원은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공급된다. 교육. 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 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 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와 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와 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와 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 교통. 개인 교통수단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자동차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망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데 1억 3천 만개의 도로가 펼쳐져 있다.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며, 미국인 1,000명당 765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자동차 보급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용 자동차의 40%는 밴, SUV, 소형 트럭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9마일 (47 km)을 다니며 55분을 운전하는데 보낸다. 미국인 전체 출퇴근자의 9%는 매스 트랜싯을 이용한다. 철도를 이용한 화물수송은 광범위 한 반면에 여객 철도 이용률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암트랙의 국가 여객 철도 시스템의 이용자 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37%가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매년 경전철 개발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은 국토가 넓은 덕에 항공 산업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항공사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가 모두 미국에 있으며 2013년 아메리칸 항공이 US 에어웨이즈와 합병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30개 중 미국에서 가장 바쁜 공항인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포함해 16개 공항이 이름을 올렸다. 문화.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이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대중 매체. 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ref>.
755
33135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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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 ,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 현대의 바이올린 테크닉을 완성하였으며, 초인적인 기교로 당시의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고,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언급할 때, '파가니니의 재래', '21세기의 파가니니' 등과 같은 타이틀을 붙이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번 등이 유명하다. 생애.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결국 사망하였다.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평가. 작곡가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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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크라이튼
마이클 크라이튼(John Michael Crichton, 1942년 10월 23일 ~ 2008년 11월 4일)은 미국의 과학소설가이자 텔레비전·영화 프로듀서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와 메디컬 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작품.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1991)이 있다. 그는 또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텔레비전 시리즈 《ER》의 책임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 외 유명한 작품으로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69), 《스피어》(1987), 《프레이》(2002), 《콩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떠오르는 태양》, 《타임라인》 등이 있다. 앤마리 마틴과 공동으로 영화 《트위스터》(1996)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과학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자신의 자전적인 일을 다룬 《Travel》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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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윌리엄 헨리 빌 게이츠 3세(, 1955년 10월 28일 ~ )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이자 기업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자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창립했다. 그는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해석프로그램과 알테어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알테어 베이직을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면서 게이츠는 2014년 5월까지 회장, 최고경영자, 사장,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선구자이자 가장 잘 알려진 기업가 중 한 사람이다.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자란 게이츠는 1975년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설립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 최대의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었다. 게이츠는 2000년 1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회장 겸 CEO로 회사를 이끌었지만 회장으로 남아 소프트웨어 설계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2006년 6월 게이츠는 자신과 아내 멜린다 게이츠가 2000년에 설립한 개인 자선재단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전일제로 근무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파트타임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에서 물러나, 새로 임명된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를 지원하기 위한 기술자문위원직을 새로 맡았다. 1987년 이후 그는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부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95년부터 2017년까지 그는 포브스지 선정에서 4년을 제외하고 모두 세계 최고 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2017년 10월에는 아마존 창업자 겸 CEO 제프 베조스에게 추월당했다. 2020년 8월 현재 게이츠는 추정 순자산이 1,137억 달러로, 제프 베조스와 일론 머스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게이츠는 이후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제 근무를 그만둔 이후 여러 자선 활동을 추구해 왔다.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 자선단체로 알려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여러 자선단체와 과학 연구 프로그램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 2009년에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더기빙플레지()를 설립했는데, 이 서약서를 통해 자신과 다른 억만장자들은 적어도 재산의 절반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 생애. 성장 과정.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는 1955년 10월 28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와 어머니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계 미국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며,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그의 가정은 상중류층으로,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한다. 또한 외할아버지인 J. W. 맥스웰은 미국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다. 게이츠에게는 누나 크리스티앤(Kristianne)과 리비(Libby)가 있었다. 그는 그의 가문에서 윌리엄 게이츠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네 번째 남자이지만 실제로는 윌리엄 게이츠 3세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에서 '3세'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그가 법조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13세 때 상류층 사립 학교인 에 입학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 단말기와 제네럴 일렉트릭 (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게이츠는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프로그래밍을 더 연습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컴퓨터를 상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다른 게임인 달 착륙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입력된 코드를 언제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 기계에 매료되었다. 게이츠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는 '그때 그 기계는 나에게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회의 기부금이 바닥나자, 게이츠와 몇몇 학생들은 DEC의 미니컴퓨터의 사용 시간을 샀다. 이 시스템 중 일부는 PDP-10이라는 것으로 컴퓨터 센터 코퍼레이션(CCC)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훗날 게이츠를 포함한 네 명의 레이크사이드 스쿨 학생(폴 앨런, 릭 와일랜드, 켄트 에번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가 가진 버그를 이용해 공짜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이 회사로부터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1달 동안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예과를 전공했으나 재학 중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 그는 사업이 안 풀리면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BASIC. 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시연한 '포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 1975년 1월호를 읽고, 마이크로인스트레이팅시스템(MITS)에 연락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플랫폼용 BASIC 인터프리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현실에서 게이츠와 앨런은 알테어(Altair)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코드를 쓰지 않았다.그들은 단지 MITS의 관심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MITS의 에드 로버츠 사장을 만나 시범을 보이기로 했고, 몇 주 동안 그들은 미니컴퍼터로 작동하는 알테어 에뮬레이터를 개발한 뒤 BASIC 인터프리터를 개발했다. 시험 설명회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는 MITS 사무실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MITS와 계약으로 이어졌다. MITS는 앨런을 고용했고 게이츠는 1975년 11월 앨런과 함께 MITS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를 휴학했다. 앨런은 그들의 파트너십을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합성어인 "Micro-Soft"라고 이름 지었고, 그들의 첫 번째 사무실을 앨버커키에 위치했다. 게이츠와 앨런이 고용한 첫 번째 직원은 그들의 고등학교 협력자 Ric Weiland이다. 그들은 1년 안에 하이폰을 떨어뜨리고 1976년 11월 26일 뉴멕시코주 장관에게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라는 상호를 공식적으로 등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Altair BASIC은 컴퓨터 취미 활동가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게이츠는 시장 이전 복사본이 유출되어 널리 복사되고 배포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76년 2월, 그는 MITS 뉴스레터에 취미활동가에게 보내는 공개서신(Open Letter to Hobbyists)을 작성했는데, 이 서신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알테어 베이직의 사용자 중 90% 이상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돈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는 전문 개발업자들의 고품질 소프트웨어를 생산, 유통, 유지하도록 하는 동기를 없애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편지는 많은 컴퓨터 취미 생활자들에게 반감을 샀지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6년 말 MITS로부터 독립하였고, 다양한 시스템용 프로그래밍 언어 소프트웨어를 계속 개발하였다. 회사는 1979년 1월 1일 앨버커키에서 워싱턴 벨뷰로 이전하였다. 게이츠는 회사가 처음 5년 동안 생산한 모든 코드 라인을 개인적으로 검토하고 종종 다시 썼다고 말했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관리자 역할로 전환했고, 그 후 임원으로 전환했다. IBM과 파트너쉽. 당시 컴퓨터 장비의 선도적 공급 업체였던 IBM은 1980년 7월 곧 출시될 개인용 컴퓨터인 IBM PC의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접근했다. IBM은 먼저 마이크로소프트가 BASIC 인터프리터를 쓸 것을 제안했다. IBM의 대표들도 운영체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했고 게이츠는 이를 널리 사용되는 CP/M 운영체제의 제조업체인 디지털 리서치(DRI)에 의뢰했다. 그러나 IBM와 DRI의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라이선스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IBM의 대표인 잭 샘스는 게이츠와의 후속 회의에서 라이센싱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제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몇 주 후, 게이츠와 앨런은 CP/M과 유사한 운영 체제인 86-DOS를 사용하여 시애틀 컴퓨터 제품(SCP)의 팀 패터슨이 PC와 유사한 하드웨어용으로 만들었다고 제안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SCP와 86-DOS의 독점 라이선스 에이전트로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정식 소유자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패터슨을 고용하여 PC[59]용 운영체제를 적응시켰고, 이를 일회성 수수료 5만 달러에 IBM에 PC DOS로 납품했다. 그 계약 자체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수수료를 벌 수 있었으나 그것은 IBM이 그들의 운영체제를 채택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가 소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츠는 다른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IBM의 PC 하드웨어를 복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운영체제에 관한 저작권을 IBM에 양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IBM과 호환되는 PC를 사실상의 표준인 DOS를 실행하면서 그렇게 했다. MS-DOS(IBM 이외의 고객에게 판매되는 DOS 버전)의 판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업계의 주요 주체가 되었다. 언론은 재빨리 마이크로소프트가 IBM PC에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확인했다.PC 매거진은 게이츠가 "the man behind the machine?"(기계 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게이츠는 1981년 6월 25일, 워싱턴 주에 회사를 재법인화하며 이사회 의장과 회장으로서 회사를 총괄했으며, 폴 앨런은 부회장과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1983년 초 앨런은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고 회사를 떠났고,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 대한 논쟁으로 수개월 전에 경색되었던 게이츠와 앨런의 공식적인 사업 파트너십은 사실상 종료했다. 10년 후, 게이츠는 앨런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두 사람은 함께 그들의 어린 시절 학교인 레이크사이드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게이츠는 2018년 10월 앨런이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아 있었다. WINDOWS. 마이크로소프트는 1985년 11월 20일 첫 번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버전을 출시했다. 이듬해 8월 IBM과 OS/2라는 별도의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은 새 시스템의 첫 번째 버전을 성공적으로 개발했지만 의견 차이가 커져 파트너십이 틀어졌다. 경영 스타일. 빌 게이츠는 미래학자 이상의 시대적 감각으로 소비자들의 요구를 컴퓨터 산업에 접목시켜왔다. 개인용 컴퓨터(PC)가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고 소프트웨어가 도약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빌 게이츠의 통찰력이 바로 성공 신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통찰력은 지속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차례 미국 서북부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은둔하면서 ‘생각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1주일 동안 가족들 방문도 차단한 채 세계 각국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성과물을 만들어 왔다. 빌 게이츠는 직원들 누구나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켜 의사소통의 장벽을 없앴다. 소비자들과 경영진의 접점에 있는 직원들이 보고서를 통해 저변의 시장흐름을 생동감 있게 전달했음은 물론이다. 철저한 고객관리와 상호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빌 게이츠 특유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이후.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 업무를 그만둔 이후 자선 사업을 비롯한 프로젝트에 힘쓰고 있다. 게이츠는 2014년 3월 27일자 롤링스톤지에 실렸던 인터뷰에서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기후 변화, 그의 자선 활동, 다양한 기술 회사들과 관련자들, 그리고 미국의 상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게이츠는 50년 후를 내다볼 때 가장 두려운 것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향후 50년, 혹은 100년 안에 매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나, 나는 전세계적 유행병, 핵이나 생화학 테러 행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게이츠는 또 혁신을 '진보의 진정한 원동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이 지금까지보다 훨씬 나은 오늘을 보내고 있다"고 선언했다." 빌 게이츠는 슈퍼지능의 잠재적인 해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 기계들은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관리한다면 인공지능은 긍정적일 것이다. 그 후 몇 십 년이 지나면 인공지능은 걱정거리가 될 만큼 강력할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일론 머스크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왜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게이츠는 2015년 3월 바이두 최고경영자(CEO) 로빈 리와 함께 TED 컨퍼런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닉 보스트롬의 최근 저서인 '초지능' "매우 추천한다"고 밝혔다. 2019년 COVID-19로 인해 전세계가 펜데믹 상황에 빠지기 전에 이 회의에서 게이츠는 전세계가 유행병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게이츠는 2018년 3월 시애틀의 자택에서 사우디의 개혁적인 왕세자 겸 사실상의 통치자인 모하메드 빈 살만과 만나 사우디 비전 2030에 대한 투자 기회를 논의했다. 2019년 6월 게이츠는 안드로이드에 모바일 운영체제 경쟁에서 진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인정했다."그때 안드로이드를 쳐내야 했는데 ...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해 아쉽다. 반독점법 위반 소송 때문에 온통 정신이 팔려 모바일 시장에 집중하지 못했다. 윈도 모바일 OS를 더 잘 다듬었거나 안드로이드를 구글보다 먼저 인수했더라면 지금 모바일 시장은 (애플 iOS와 함께) 윈도 모바일이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2020년 3월 1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가 버크셔 해서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직을 떠나 기후 변화, 세계 보건 및 개발, 교육 등과 같은 자선 활동에 헌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선 활동.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의 90%는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데, 이 나라들이 보유한 보건 자원은 전 세계 보유량의 10%에 불과하다.”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게이츠 재단(Gates Foundation) 또는 B&MGF는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민간 재단 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단이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에 의해 2000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게이츠 가의 관심과 열정에 의해 운영된다'. 주 운영 목적은 국제적 보건의료 확대와 빈곤 퇴치,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교육 기회 확대와 정보 기술에 대한 접근성 확대이다. 빌게이츠가 자선 활동가로 변모시킨 사람으로 세 명이 언급되는데 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그의 아내 멜린다, 석유왕 록펠러이다. 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이정표(milestone)로 1993년에 읽었던 한 보고서를 꼽는다. 이 보고서의 그래프에는 로타바이러스로 한 해 어린이 50만명이 사망한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었다. 게이츠는 “비행기 사고로 100명이 사망해도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하는데, 50만명이 사망하는 질병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본격적인 기부 활동에 나서기 전 빌 게이츠는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의 도움을 구했다. 1994년에 자선단체 ‘윌리엄 H. 게이츠 재단’을 설립한 아버지가 기부 활동에 있어서는 선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멜린다도 결혼 전까지 기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빌 게이츠를 설득해 자선가로 변신시킨 인물로 언급된다. 빌 게이츠는 지난 2010년부터 다른 백만장자들에게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권유하기 시작했는데, 이 활동에 멜린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절반의 힘(The Power of Half)’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멜린다가 게이츠에게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하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윌리엄 게이츠는 돈에 대한 아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게이츠는 부유한 변호사였지만, 돈을 그냥 물려주면 자식을 망친다는 생각으로 빌 게이츠에게 창업 자금을 주지 않았다. 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 역시 세 자녀에게 각각 1000만달러(약 108억원)씩만 물려주고 재산의 나머지 95%는 기부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게이츠 부부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과 함께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전기차 업체 테슬라 CEO 엘론 머스크, 록펠러 가문의 수장인 데이비드 록펠러, 페이스 북 CEO 마크 저커버그 등 120여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자동차왕’ 포드 등 미국의 자본주의를 개척한 초기의 부호들도 빌 게이츠의 변신에 영향을 미쳤다. 게이츠는 2013년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자선 활동과 관련, “1세대 대(大) 자선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중에서도 게이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히는 인물이 존 D. 록펠러이다. 록펠러와 게이츠는 비슷한 점이 많다. 정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록펠러는 저가 공세로 경쟁사를 차례차례 무너뜨리며 석유업계를 독점했다. 그래도 생전에 교회에 십일조는 꼬박꼬박 냈고, 이후 아들 세대에 막대한 기부를 하면서 무자비한 자본가라는 오명(汚名)을 씻었다. 게이츠가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도 초창기에는 ‘윈도’ 운영체제 안에 웹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기본 탑재해 시장을 독점한다는 논란에 시달렸다. 게이츠는 과거 인터뷰에서 “돈을 버는 것과 번 돈을 남에게 그냥 줘버리는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선가로 변신하기 전까지는 기부나 자선 활동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교육과 의료 사업에 집중적으로 기부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록펠러는 록펠러 재단을 세워 황열병 치료 등을 지원했고 시카고 대학교, 록펠러 대학교를 설립했다. 게이츠 앤 멜린다 재단의 활동도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 집중돼 있다. 저개발 국가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가 가장 큰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재단은 “특정 개인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창조적 자본주의.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나 표현수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가난했고 예방할 수도 있는 병들에 시달렸으며 생명을 지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정부와 비영리 단체들이 그들을 돕는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 그 일을 하게 되면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발명품들을 만들 기술은 기업체들이 갖고 있다. 이런 기술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2008년 1월 스위스의 다보스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역설했다.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을 ‘의무’로 한층 끌어올린 개념이다. 기업 활동을 위해 돈을 버는 동시에 자선 활동도 ‘의무적’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창조적 자본주의’라고 지칭한 것이다. 자선 스포츠 행사. 2017년 4월 29일, 게이츠는 시애틀의 매진된 키 아레나에서 열린 비경쟁 테니스 경기인 아프리카 4차전에서 스위스의 테니스 전설 로저 페더러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 행사는 아프리카에서 로저 페더러 재단의 자선 활동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페더러와 게이츠는 이번 10년 동안 미국 선수 1위 존 이스너와 펄 잼의 리드 기타리스트 마이크 매크레디와 맞붙었다. 그 두 사람은 6대 4로 시합에서 이겼다. 그들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200만 달러를 모금했다. 로저 페더러는 2018년 3월 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Still flying high from last night! Thanks to everyone who made the #MatchForAfrica a great success!"이라는 문구와 함께 빌 게이츠, 잭 소크와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페더러는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복식조를 구성해 잭 소크와 NBC 투데이쇼 진행자 사바나 거스리조와 자선 경기를 펼쳤다. 게이츠와 페더러는 함께 6-3으로 두 번째 경기 승리를 기록했고 경기는 25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백신개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전 세계로 확산 양상을 보이던 지난 2020년 5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설립한 재단을 통해 코로나 19 백신 개발을 위한 연구 자금으로 써 달라는 요청과 함께 한국의 바이오기업에 360만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미 4월 문 대통령과 코로나 19 대응을 위해 전화통화를 나눴던 빌 게이츠 회장은 한국의 코로나 방역과 리더십에 다시 한번 신뢰를 나타냈다. 특히 그는 코로나 백신 개발을 위해 한국정부와 기업 등과 협력을 약속하면서, 국내 바이오 기업인 에스케이(SK) 바이오사이언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코로나 백신 민간 분야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다"면서 "SK 바이오사이언스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내년 6월께 연간 2억개의 백신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를 통해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벤처 기업 투자 (부분 목록). 게이츠는 다양한 분야의 지분을 보유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를 넘어 다음과 같은 여러 벤처 사업에 투자했다. 식물성 고기 제조 대체육 기업 생명과학, 소재과학 소프트웨어 업체로 제약·바이오텍·소재 연구에 쓰이는 화학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제작 기업 폐기물 처리 업체 1995년에 민영화된 캐니다 국립 철도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 스타트업 트위터(Twitter)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기업 월마트(Walmart) 미국의 다국적 유통기업 개인사생활. 아내 멜린다와 결혼. 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의 관계는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두사람이 만난 것은 멜린다가 MS의 제품매니저로 입사한 직후다. 그녀가 입사한 지 몇개월 후 빌은 그녀에게 첫 데이트를 신청했다. 당시 빌 게이츠가 멜린다에게 전화를 걸어와 “저기...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번호를 준다면 우린 오늘 밤부터 2주일 안에 데이트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멜린다는 진지하지 않다고 여겼고, 되물었다. 멜린다는 “나는 그에게 ‘오늘 밤으로부터 2주일 후라고요? 나는 2주일 후에 내가 뭘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나 보이지 않는군요’라고 말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빌 게이츠는 한 시간 뒤에 전화를 걸어서는 ‘이러면 당신에게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난 것처럼 보이나요?’라고 물었지요“라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그리고 그녀는 이 날 데이트에 응했다. 빌과 멜린다는 7년 간의 데이트 끝에 1994년 1월 1일 하와이의 라나이섬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리면서 결혼에 골인했다. 자녀교육. 빌 게이츠는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컴퓨터를 사 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책을 사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컴퓨터 황제'로 통하는 빌 게이츠도 컴퓨터보다 책이 어린 시절 꿈과 상상력, 창의력을 키우는 데 더 중요한 무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자녀들의 컴퓨터 사용 시간을 하루 45분, 주말 1시간으로 제한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빌 게이츠가 제니퍼, 로리, 포비 자신의 3자녀에게 많은 돈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빌 게이츠는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많은 부는 그들(자녀)에게 좋지 못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게이츠는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길 꺼렸으나 신문은 게이츠가 `자녀들에게 1000만달러씩 물려줄 것`이라는 그간의 보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 정도의 돈은(1000만달러) 내 전체 재산의 아주 극소수"라며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부로 자녀들이 인생이 영향받지 않기를 원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 자녀들은 현재 집안일을 하고 용돈을 받는 평범한 아이들"이라며 "교육, 건강과 관련한 자녀들의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지만, 그들은 향후 직장에 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 "그와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는 동갑내기이며 순진하게도 낙관적이었고 커다란 회사를 세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제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모든 환상을 모두 이뤄냈다. 그리고 대부분을 라이벌 관계에서 만들어 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상대방이 아플 때에도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소통해 왔다""잡스는 천재였고 나는 그를 많이 질투했다"면서 "잡스는 사람들에게 뭔가 엄청난 동기를 부여하는 대단한 마법사였다면 나는 소소한 마법사였다"1955년생 동갑내기인 게이츠와 잡스는 젊은 시절 70년대 후반부터 30년 넘게 애증관계를 이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잡스는 캘리포니아 노동자 집안에서 자랐으며 모든 제품에 대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닫힌 생태계를 창조했으며, 디자인을 통해 제품에 프리미엄을 불어넣었다. 반면, 워싱턴주 상류층에서 자란 게이츠는 개방형 생태계를 믿었고 디자인은 중시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스타일까지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게이츠는 잡스에 대해 "기본적으로 괴짜"라며 "인간으로서는 괴상하게 흠집난 친구"라고 평가했고, 잡스는 게이츠를 "마약을 한 번 해보거나 어렸을 때 히피촌에 갔더라면 좀 더 생각이 넓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IT 산업에 있어서도 게이츠는 "잡스는 정말 IT에 대해 모른다"면서 "대신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채는 놀라운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잡스는 "빌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이 없고 아무것도 발명한 적이 없다"면서 "그래서 그가 그가 이제는 IT보다 자선사업을 더 편안하게 여길 것"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서로의 태도에 대해 애플 매킨토시 개발팀의 일원이었던 앤디 허츠펠드는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다"면서도 "하지만 스티브는 취향과 스타일 때문에 일반적으로 빌을 자신보다 약간 떨어지는 사람처럼 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빌은 프로그래밍을 못한다는 점 때문에 스티브를 무시했다"고 회상했다.하지만 2011년 잡스의 타계 이후 게이츠는 그를 그리워하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같은 해 10월5일 게이츠는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미치도록 훌륭하게 명예스러운 일(insanely great honor)이었다"면서 잡스의 표현인 '미치도록 훌륭한'이란 표현을 빌어 그를 추모했다. 당시 그는 "스티브와 나는 약 30년 전에 만나, 동료이자 경쟁자 그리고 친구로 삶의 절반 이상을 함께 보냈다"면서 "그가 많이 그리울 것이며 잡스가 세상에 미친 강력한 영향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애도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도 게이츠는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높게 평가하면서 "나는 연설을 잘하기 위해 힘들여 노력해야 했지만 잡스는 항상 자연스러웠다"면서 "내가 잡스처럼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있었다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가난 퇴치·질병 예방 연구 등 국제 사업에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잡스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진 '천재'였고, 나도 그를 따라하고 싶었다"면서 "잡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사람들이 그의 주문을 따르는 것을 봐왔다"면서 "나는 그를 너무나 질투했다"고 덧붙였다. 워런 버핏과의 관계. “난 내 친구들을 대부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워런 버핏만은 예외다. 그의 만남이 나와 아내 멀린다의 삶을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5년 전 오늘이다. 1991년 7월5일.”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1991년 7월 5일 버핏을 처음 만났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후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게이츠는 버핏이 사실상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으로 세상에 끼친 영향은 '계산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둘은 아버지뻘 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는데 빌 게이츠의 사무실 전화 단축번호에 집과 워런 버핏의 번호만 저장돼 있을 정도다. 대학 강연이나 기부 활동도 같이한다. 워런 버핏의 기부금 대부분도 빌 게이츠 부부가 설립한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으로 들어간다. ‘배움과 웃음의 25년’이란 글을 통해 “버핏은 나와 멀린다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내 삶을 바꿔줬다”며 “그는 내가 오마하에 들를 때 지금도 직접 운전해 나를 공항에 데리러 나온다”고 전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버핏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게이츠는 “컴퓨터만 아는 괴짜와 이메일 한 번 쓰지 않는 투자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버핏은 젊은 사업가에게 정중히 MS의 사업 전략에 대해 예리하게 질문했고, 두 사람은 서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대화에 빠져들었다. 게이츠는 버핏 특유의 ‘초딩 입맛’에 대해서도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는 “버핏이 우리 집에 묵었을 때 아침식사로 오레오 쿠키를 먹었다”며 “워런의 입맛은 마치 여섯 살짜리 꼬마 같다”고 전했다. 또 “햄버거나 아이스크림, 코카콜라를 달고 사는 버핏과 식사하러 나가는 게 즐겁다”며 “솔직히 젊은이들에게 그의 식단은 최악이겠지만, 왠지 그에겐 잘 통하는 식단인 것 같다”고 적었다. 독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문난 독서광이다. 그는 일 년에 50여권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블로그에 독후감을 남긴다. 미국 CNBC는 21일(현지시간) 이 억만장자 독서광이 책을 읽은 후 그 내용을 기억하는 빌게이츠 독서 비법을 소개했다. 빌 게이츠가 밝히는 독서 기억법의 핵심은 ‘맥락’이다. 그는 ‘쿼츠’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읽다보면 이 내용과 저 내용이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면서 “만일 커다란 틀을 갖고 있다면 모든 것을 그 틀 안에 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어떤 주제에 관해 기본적인 이해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다음에 새로운 정보들이 들어오면 그 위에 적절히 배치해 놓는 것이다. 게이츠는 “그러므로 계속 쌓이는 지식을 풍요롭게 유지 관리하는 것이 훨씬 덜 이용이해진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날 수 있지만 일단 그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지식의 조각들이 제 자리를 잡게 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과학과 관련된 독서를 하는 경우, 게이츠는 과학자의 역사에 관한 독서와 과학자의 업적에 관한 독서는 상호 관련되는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큰 틀이나 맥락 속에 놓고 보면 세부적인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말하자면 연대순이나 지도, 혹은 과학의 지류 등을 틀로 삼을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게이츠에게 있어서 독서는 취미나 소일거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2017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독서는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은 배움을 멈추지 않는 한 노쇠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독서가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왔다고 설명했다. “책 한권 한권이 내게 새로운 것을 일깨워주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내게 늘 책을 읽도록 격려해주신 부모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독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공급해줬다. 그 호기심이 내가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고 지금 몸담고 있는 재단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게이츠는 책을 읽을 때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는 편이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내용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끝까지 돌파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읽다가 중간에 멈추는 걸 싫어한다”면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책을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를 적느라 (좋아하는 책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밝혔다. 예술품 수집. 예술품 수집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는 지난 1994년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필사본인 72쪽짜리 레스터사본(Leicester Codex)을 3,100만달러에 사들였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인 윈슬로 호머의 작품도 3,000만달러를 주고 구입한 바 있다. 유튜브. 빌 게이츠가 유튜브로부터 구독자 100만명 이상 유튜버에게 수여되는 골드 버튼을 받았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빌 게이츠'서 골드버튼 언박싱 영상을 게재했다. 그리고는 구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메시지가 나온 뒤 짤막한 영상이 마무리됐다. 그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다양한 영상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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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햏햏
아햏햏은 다양한 뜻을 지니는 대표적인 인터넷 유행어이다. 아햏햏은 2002년과 2003년에 유행하였으며 국립국어연구원에 의해 짤방과 같이 신조어로 정식 인정된 적도 있으나(2002년 신어 보고서에 수록), 2003년까지 쓰였으나 2004년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아햏햏이 만들어진 디시인사이드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아햏햏은 디시인사이드 사용자들이 이 모호하고 기분이 언짢은 상황을 표현했던 글로 의성어로는 어리석다는 뜻과 혀과 꼬이면서 당혹스러운 상황을 표현한다. 표기와 발음. 한자로는 亞行杏(아행행)으로 표기하며, 로마자로는 보통 ahehheh으로 표기한다. 재미로 '아헿헿', '아핳핳', '으흫흫'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햏햏은 현대 국어에 잘 쓰이지 않는 'ㅎ' 받침을 써서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발음을 생각지 않고 태어난 신조어이니만큼 아무렇게나 발음해도 상관 없다는 의견이 있지만, 여러 의견 중에서 발음 가능한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햏햏의 유래. 2002년 4월 엽기갤러리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같은 내용의 댓글만 다는 고정리플 유저들이 생겨났다. 홀맨, 피바다, 정신과전문의 표진인 등등 고정리플들을 다는 사람들이 한창 활동하던 중 한 유저가 "아햏햏 소피티아"라는 고정 리플을 달면서 엽기 갤러리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햏자. 햏자[행자, 行者]는 아햏햏으로부터 파생된 말의 하나로,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던 단어이다. 이들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거나 라면을 주로 먹으며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에 "아햏햏"을 쓰는 등의 자신들의 특징을 "수햏"하는 활동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평소에 합성사진을 만들어 공유하거나 게시물에 답변을 먼저 달기 위해 경쟁하는 등수놀이, 성인물 감상 등을 즐겨하였다. 아햏햏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자신을 햏자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다(다른 사람을 부를 땐 쓴다). 햏자의 다른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혹은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파생어로 햏테(햏력 테스트=햏자 능력 테스트;짤방을 어디서 찍었는지 알아맞추는 테스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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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스톨먼
리처드 매슈 스톨먼(, 1953년 3월 16일 ~)은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심 인물이며, GNU 프로젝트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설립자이다. 그는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또한 탁월한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그는 문서 편집기인 Emacs, GNU 컴파일러 모음 컴파일러, GDB 디버거 등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이들 모두를 GNU 프로젝트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도덕적, 정치적, 법적인 기초를 세우는 데 본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며, 이는 독점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급에 대한 대안이 되었다. 살아온 길. 스톨먼은 1953년 3월 16일, 엘리스 립맨과 대니얼 스톨먼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그의 고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시내에 있던 연구소인 IBM 뉴욕 과학센터에서 일하면서, 스톨먼은 고등학교 졸업 후의 여름을 보냈고 거기에서 그의 첫 번째 프로그램인 IBM 7064를 위한 전처리기(pre-processor)를 PL/I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했다. 다음과 같이 그는 회상했다. 1971년에 하버드 대학의 신입생으로 스톨먼은 MIT 인공지능 실험실의 해커가 되었다. 해커 문화의 타락. 1980년대, 스톨먼의 삶이었던 해커 공동체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업화로 인해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특히, 실험실 내의 다른 해커들은 심볼릭스(Symbolics)라는 회사를 차리고는, 기존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그들만의 독점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1983년에서 1985년 사이의 2년동안, 스톨먼은 연구실 내에서 혼자 힘으로 심볼릭스의 결과물들과 똑같은 기능의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그들의 독점을 막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그는 그의 세대 중에서 마지막 해커였다. 그는 비밀 유지 합의서에 사인하기를 요구받았으며, 그의 원칙인 다른 이들과의 공유나 이웃을 돕는 것에 위배되는 작업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 GNU를 설립하다.. 1985년, 스톨먼은 GNU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유닉스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한 그의 의지와 동기를 역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비영리 기관인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는 1989년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내에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허드(Hurd) 커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GNU 시스템이 거의 동시에 완성되었다. 1991년, 리누스 토르발스는 GPL로 리눅스 커널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완벽하게 기능하는 GNU 시스템인 GNU/리눅스 운영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자유 소프트웨어 대 오픈 소스. 리처드 스톨먼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동기는 그를 매우 논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코드를 공유하자는 개념에 동의하는 프로그래머들 중 많은 수가 스톨먼의 도덕주의적인 입장과 개인적인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의 한 결과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대안인 오픈 소스 운동이 생겨났다. 수상경력. 스톨먼은 그의 작업들로 인해 다음과 같이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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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
해킹은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 침입하여 데이터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이다. 전자 회로나,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웹사이트 등 각종 정보 체계가 본래의 설계자나 관리자, 운영자가 의도하지 않은 동작을 일으키도록 하거나 체계 내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정보를 열람, 복제, 변경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또한 해킹은 크래킹과 개념이 다르다. 해킹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에 정당한 접근 권한 없이 접근하거나 허용된 접근 권한의 범위를 초과하여 침입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면, 크래킹은 그러한 불법적 접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해커는 해킹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낱말의 유래. 본래 거칠게 자르거나 헤집는다는 뜻의 해크()이라는 낱말에 지금의 의미를 부여한 것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한 동아리 회원들이 자신들을 해커()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개념 정의. 해킹의 정의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초기에는 '컴퓨터의 호기심이나 지적욕구의 바탕 위에 컴퓨터와 컴퓨터간의 네트워크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했다. 이후 악의적인 행동이 늘어나면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침입할 때 파괴적인 계획을 갖고 침입하는 행위'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일명 크래킹이라 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해킹이란 의미는 대체적으로 '어떠한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박연호에 침입하는 모든 행위'로서 문성혁을 통하여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엑세스 권한 없이 무단 침입하여 부당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며, 여기서 부당 행위란 불법적인 시스템 사용, 불법적인 자료 열람, 유출 및 변조 등을 뜻한다. 반면 긍정적 의미로는 '각종 정보 체계의 보안 취약점을 미리 알아내고 보완하는 데에 필요한 행위'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무선해킹. 조금 더 나아가, 해킹의 형태나 방식을 알아보면 유선 네트워크 환경에서 멀웨어, DDos, 정보탈취 등 다양한 해킹 형태로 진행 중인 유선해킹과 기업 내 Wi-Fi 무선랜 환경을 통해 내부망에 접속해 위협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네트워크 해킹 그리고 무선 스파이칩 또는 비인가 장치를 바로 서버에 연결해 외부에서 무선 전파로 조종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데이터 해킹 등이 있다. 대응 방식으로 NAC(Net Access Control) IP 및 네트워크 접근제어로 유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하거나, IPS(Intrusion Prevention System) 또는 WIPS(Wireless IPS) 침해 방지 시스템을 구축하여 유무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무선 데이터 해킹으로부터의 보안을 위해서는 전체 무선 주파수를 분석하고 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선 데이터 해킹의 경우, 자연스럽게 공급되는 IT장비를 통한 위험성이 상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서버 메인보드에 스파이칩이 심어진 형태로 공급되는 경우에는 서버 설계도에 따라 부품을 하나하나 대조해 보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며, 놀랍게도 일반적인 무선 키보드나 무선 마우스 등 PC 주변 장치나 일상생활 용품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내장되어 공급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USB메모리와 달리 별다른 보안 절차 없이 서버 PC와 연결되어 해킹 도구로 사용이 가능하다. 무선 데이터 해킹 장치는 점점 고성능화 및 소형화 되는 추세이며, Wi-Fi나 Bluetooth 등을 포함해 다양한 무선통신 기술이 적용된다. 특정 무선통신기술을 활용한 제품의 경우 수십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무선해킹을 통한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하다. 이러한 무선 데이터 해킹 방식은 기업이나 기관의 외부망과 내부망을 분리하여 외부 공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춰 놓은 상태더라도 내부 서버에 무선 스파이칩만 연결하면 외부에 있는 해커가 마음대로 활동이 가능하여 기존의 보안체계가 무용지물이 될 우려가 높고, 흔적이 남게 되는 유선 해킹과는 달리, 내부망에 직접 연결하는 무선 데이터 해킹은 해커가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흔적이 남지 않아 피해 사례 파악이 어렵다. 법률적 해석. 대한민국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해킹을 "침해사고"의 한 원인으로 나열하고 있다. 사회 문제. 진용진은 불법 게임 핵을 성인층이 제작하고 판매하여 유통한다는 고정관념과 달리 일부 청소년층도 포함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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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동음이의)
뉴욕(New York)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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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사전(辭典)은 낱말의 뜻을 서술하는 것 내지는 도표와 함께 모아 놓은 것, 또는 어떤 낱말과 대응하는 다른 나라말의 낱말을 가나다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많은 사전들은 발음기호도 포함하고 있으며 응용, 역사, 어원, 그림, 사용법, 예문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는 종이로된 문서 형식의 사전을 많이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 사전의 역사. 발견된 가장 오랜 사전은 기원전 2300년경 쓰인 아카드 제국의 쐐기문자 조각으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대역쌍 목록이다. 우라 후불루 용어집(Urra=hubullu glossary)이라 불리는 이 사전의 이름은 용어집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자가 붙는 채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근대 유럽의 사전들은 이중언어 사전으로 시작했다. 1502년에 나온 언어학자이자 수사인 암브로조 깔레피노(Ambrogio Calepino)의 코르누코파이아(Cornucopia)가 그것인데 이중언어사전이라기 보다는 다국어사전이다. 라틴어를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불어, 독어로 설명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은 영어사전의 역사에서 한 이정표였다. 이전까지의 사전은 대부분 유사 어휘들을 분류해서 기술하는, 기린 옆에 사자를 나열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존슨은 그 모든 어휘를 예외 없이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여 첫 번째 근대적인 사전을 완성했다. 사전의 구조. 사전은 해당 항목의 대표형을 보여주는 표제어 아래 크게보아 뜻풀이와 예문 그리고 기타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뜻풀이는 해당 의미를 대상언어로 해설한 것이고 예문은 그 의미로 사용된 문장의 사례이다. 기타정보에는 발음, 품사, 통사구조, 형태정보, 관련어 등 해당 항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문법적 해설이나 부가적인 해설을 말한다. 사전의 분류. 사전은 크게 어학사전(辭典, dictionary, 말모이)과 백과사전(百科事典, encyclopedia)으로 나뉘는데 이 둘 사이에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담는 책이라는 공통점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차이점이 있다. 기존에 종이책으로만 출간이 가능했을 때에는 이러한 구분이 비교적 엄격했으나 인터넷 사전의 경우 사람들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찾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전부터 한국어의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일본어의 코지엔과 같은 어학사전들은 백과사전다운 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어학사전. 어학사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뜻풀이 대상언어에 따라 일국어사전과 이중언어사전이 있다. 일국어사전은 한국어사전, 영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같은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것도 모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이 더 자상한 뜻풀이를 담고있다. 이중언어사전은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다른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국어사전이라고도 한다. 같은 영한사전이라고 해도 영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한국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편집 체제가 많이 다르다. 사전의 기술 태도에 따라서 어휘를 규정(pr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고 기술(d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다. 규정하는 것은 정의를 적고 이후 해당 정의에 해당되는 예문을 찾거나 추가설명하는 방식이고 기술하는 것은 말뭉치언어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당 어휘의 사용빈도와 사용분포를 살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는 방식이다. 이 구분은 상대적일 뿐 기술사전도 규정하는 면이 있고 또 규정사전도 기술하는 면이 있다. 범용 사전(general dictionary)은 흔히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라 부르는 언어사전을 말한다.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구분된 의미는 많이 사용되는 순서로 나열될 수도 있고, 오래된 용법 순서대로 나열될 수도 있다. 일상어를 대상으로 한다. 특수 사전(specialized dictionary)은 한정적인 분야를 다룬 사전이다. 제주어 사전이라거나 윤동주 시어사전처럼 특정 범위를 가지고 특화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전이다. 좀 더 특화된 사전들도 있다. 유의어사전(thesaurus)은 유의어, 반의어 등을 모아놓은 사전으로 글쓰기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유사한 형태로 단어의 계통을 정리해놓은 사전인 갈래사전이 있다. 자전(字典)은 한자사전을 말하는데, 한자문명권에서는 개별 한자가 특별한 형태소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한자어 말고도 개별 한자에 대한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형태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듣기, 읽기에 적합한 수동사전(passive dictionary)이 있고 말하기, 쓰기에 적합한 능동사전(active dictionary)이 있다. 이 외에도 외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특수 사전이 나오고 있다. 연어사전, 구동사사전, 관용구사전 등이 그것이다. 백과사전. 용어사전(specialized dictionary 혹은 glossary)은 해당 분야의 전문용어만을 모아놓은 용어집이다. 용어사전이 많이 모이면 백과사전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백과라는 말 자체가 수많은 분야라는 의미를 가진다. 백과사전은 인간 지식중에서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균형있게 골라 서술한 책이다. 백과사전이 넓고 평평한 범위를 다루는 사전이고 용어사전은 좁고 깊은 범위를 다룬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의 가장 큰 차이라면 백과사전은 일상적인 의미를 잘 다루지 않고 개별 영역의 전문적인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다. 어학사전이 기능어를 많이 다룬다면 백과사전은 고유명사를 주로 다룬다고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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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자료(資料, , 데이터, )는 문자, 숫자, 소리, 그림, 영상, 단어 등의 형태로 된 의미 단위이다. 보통 연구나 조사 등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말하며, 자료를 의미있게 정리하면 정보가 된다. 자료(data)와 정보(information)는 서로 교환되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료와 정보의 의미는 다르다. 즉, 자료는 또한 "주어진" 자료의 정신에 반대하여 높은 해석상의 본질을 가진 인문학 (특히 발전되어가는 digital humanities) 에 사용되어 오고있다. 가능성의 엄청난 수와 그 주의를 지향하게한 하위 집단간의 구별을 위해 Peter Checkland는 용어 "capta" ("~을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apere"로 부터온)를 소개했다.‘Johanna Drucker’는 인문학이 지식의 생성이 "놓여있고, 불완전하고, 구성적인" 과 같다고 단언함과, "자료"의 사용은 별개이거나 관찰자 독립적인 현상과 같은 역효과를 일으키는 추정들을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구성요소와 같은 관찰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인 "capta"는 인문학에서의 시각적 묘사들을 위한 "자료"의 대안으로 제공되었다. 구분. 자료는 질적 자료와 양적 자료로 구분된다. 질적 자료. 질적 자료(qualitative data, 정성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불가능한 자료이다. 분류 자료 또는 범주형 자료(categorical data)라고도 한다. 양적 자료. 양적 자료(quantitative data, 정량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가능한 자료이다. 또는 수치적 자료(Numerical data)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 온도, 지능지수, 절대온도, 가격, 주가지수, 실업률, 매출액, 기업내 과장의 수 등. 양적자료의 한계. 양적자료는 풍부한 의미를 상실할 여지를 비롯해서 수치가 갖는 약점도 있다. Parsimony(간결성)의 문제를 갖는 것이다. 수치화되지 않는 개념을 양화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측정하는 데 어떤 것을 포함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선택한 요소의 의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의미들이 배제된다. 그렇기에 어떤 정교한 양적 측정도 이에 상응하는 질적 기술에 비해 의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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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체제
운영체제(運營 體制, ) 또는 오퍼레이팅 시스템(, )은 사용자의 하드웨어, 시스템 리소스를 제어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일반적 서비스를 지원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이다. 시스템 하드웨어를 관리할 뿐 아니라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하여 하드웨어 추상화 플랫폼과 공통 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가상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실제 하드웨어가 아닌 하이퍼바이저(가상 머신) 위에서 실행되기도 한다. 또한 입출력과 메모리 할당과 같은 하드웨어 기능의 경우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컴퓨터 하드웨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용 프로그램 코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체제는 휴대 전화, 게임기에서부터 슈퍼컴퓨터, 웹 서버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서 볼 수 있다. 운영체제는 한 면으로는 소비자를, 다른 한 면으로는 프로그램 개발자를 함께 하나의 시장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양면 플랫폼이다. 잘 알려진 현대의 PC 운영체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X, 리눅스가 있다. 이 밖에 BSD, 유닉스 등의 PC용 운영체제도 존재한다. 운영체제는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와 CPU,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더불어, 이들을 추상화하여 파일 시스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멀티태스킹을 지원하는 경우, 여러 개의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동안, 운영체제는 이러한 모든 프로세스들을 스케줄링하여 마치 그들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다. 또한 운영체제는 컴퓨터 과학의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종류. 싱글태스킹 운영체제 / 멀티태스킹 운영체제. 싱글 태스킹 운영체제는 한번에 오직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으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운영체제의 작업 스케줄링 하부 시스템에 의해 제각기 반복적으로 인터럽트 처리되는 여러 프로세스 사이에서 이용 가능한 프로세서 시간을 쪼개는 시분할을 통해 이루어진다. 멀티태스킹의 경우 선점형과 협동형(비선점형)이 있다. 선점형 멀티태스킹의 경우 운영체제는 CPU 시간을 쪼개어 프로그램들 각각에 슬롯을 할당해준다. 솔라리스, 리눅스, 아미가OS와 같은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들은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한다. 협동형 멀티태스킹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른 프로세스들에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각 프로세스에 의존함으로써 수행된다. 16비트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협동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32비트 버전의 윈도우 NT, 윈도우 9x의 경우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단일 사용자 운영체제 /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 단일 사용자 운영체제는 사용자 구별이 없으나 여러 프로그램이 나란히 실행하는 것은 허용한다.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는 디스크 공간과 같은 리소스와 프로세스를 식별하는 기능을 갖춘 멀티태스킹의 기본 개념을 확장하며, 여러 사용자에 속해 있으면서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시스템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한다. 시분할 운영체제들은 시스템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태스크를 스케줄링하며, 프로세서 시간, 기억 공간, 인쇄, 기타 자원을 여러 사용자에게 비용적으로 할당하기 위한 회계 소프트웨어를 포함할 수 있다. 분산 운영체제. 분산 운영체제는 구별된 컴퓨터 그룹을 관리하고 이들이 마치 하나의 컴퓨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서로 연결되어 통신하는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이 개발되면서 분산 컴퓨팅이 활성화되었다. 분산되는 연산들은 하나 이상의 컴퓨터에서 수행된다.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 컴퓨터들이 협업을 할 때 분산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판형 운영체제. 운영체제에서, 배포 형식 및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에서 판형은 하나의 가상 머신 이미지를 게스트 운영체제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며, 실행 중인 여러 개의 가상 머신을 위한 도구로 이를 저장한다. 이 기법은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관리에 둘 다 사용되며, 대형 서버 웨어하우스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임베디드 운영체제. 임베디드 운영체제는 임베디드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PDA처럼 조그마한 기계에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제한된 수의 자원으로 동작한다. 매우 크기가 작고 극히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임베디드 운영체제의 예로 윈도우 CE와 미닉스 3이 있다. 실시간 운영체제. 실시간 운영체제는 특정한 짧은 시간 내에 이벤트나 데이터의 처리를 보증하는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운영체제는 싱글태스킹일 수도 있고, 멀티태스킹일 수도 있으며 멀티태스킹의 경우 특수한 스케줄링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라이브러리. 라이브러리 운영체제는 네트워크 등 일반적인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운영체제의 구성. 운영체제는 많은 부분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커널인데, 커널은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프로세스를 제어한다. 얼마나 메모리를 읽고 쓸 것인지, 어느 프로세스를 실행할 것인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를 통해 어떠한 정보를 주고받을 것인지, 네트워크를 통해 받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제어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컴퓨터 사용자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어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운영체제의 기능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아이콘과 바탕 화면을 지닌 그래픽이나 명령 줄을 지닌 문자를 이룰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기능으로 API가 있는데 이것은 응용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와 코드 라이브러리가 한데 모여 있으며 운영체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운영체제에 따라 이러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가 실질적인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윈도우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운영체제의 일부로 여기는데 반해 수많은 버전의 리눅스는 그렇지 않다. 목적. 운영체제의 중요한 목적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시스템 구성. 일반적인 응용 프로그램들을 제외한 컴퓨터 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세 개의 구성 요소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 세 부분은 운영체제, 셸, 그리고 (낮은 수준의) 필수 유틸리티들이다. 셸은 사용자가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본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다. 이런 셸의 행동들은 결국 운영체제에 명령을 내리는 일이 된다. bash 등의 이러한 셸은 그러나 엄밀히 운영체제의 일부가 아니며 운영체제 입장에서는 셸이나 필수 유틸리티들이나 모두 응용 프로그램일뿐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필수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하드웨어 ↔ 운영체제 ↔ 셸 / 응용 프로그램 ↔ 사용자 역사. 초기의 컴퓨터들은 계산기처럼 일련의 단일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속으로 자동 실행하여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레지던트 모니터와 같이, 1950년대에는 기본적인 운영체제의 기능들이 개발되었다. 운영체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현대의 운영체제와 같이 더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드웨어 기능에 런타임 라이브러리, 인터럽트, 병렬 처리가 추가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애플, 아타리, IBM, 아미가와 같은 기업 덕택에 1980년대에 유명해졌다. 이 업체들은 한때 메인프레임과 미니 컴퓨터에 널리 쓰였던 운영체제 기능을 추가하였다. 나중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같은 수많은 기능들이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를 위해 개별적으로 개발되었다. 1950년대 초에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었다. 각 사용자는 컴퓨터만을 사용하여 예약된 시간에 천공 카드와 테이프의 프로그램과 데이터에 접근하여야 했다. 프로그램이 컴퓨터에 적재되면 컴퓨터는 프로그램이 끝나거나 충돌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 동작하였다. 토글 스위치와 패널 불빛을 이용하여 앞면 패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수 있었다. 그 뒤에 나온 컴퓨터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셈블리어로부터의 기계어 발생이나 입출력과 같은 기능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용자 프로그램을 연결해 놓은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것이 현대의 운영체제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일만 할 수 있었다. 메인프레임. 1950년대를 통해 일괄 처리, 입출력 인터럽트, 버퍼링, 멀티태스킹, 스풀링, 런타임 라이브러리, 파일 정렬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한 수많은 주요 기능들이 운영체제 분야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은 프로그래머의 취향에 따라 응용 소프트웨어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포함되지 않기도 했다. 1959년에 IBM 704, 709, 7090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한 셰어 운영체제(SHARE)가 통합 유틸리티로 출시되었다. 마이크로컴퓨터.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는 메인프레임과 미니컴퓨터를 위해 개발해 둔 운영체제에 대한 필요성도 그만한 용량도 없었다. 모니터스("Monitors")라는 이름의 매우 작은 운영체제가 개발되었으며 롬에서 불러들였다. 눈에 띄는 초기의 디스크 기반 운영체제로 CP/M이 있었는데 수많은 초기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지원되었으며 IBM PC에 널리 쓰였던 MS-DOS(IBM 버전의 것은 IBM DOS, 곧 PC-DOS로 불렸다)와 매우 비슷하였다. 1980년대에 애플 컴퓨터사(지금의 애플사)가 애플 II 시리즈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버리고, 혁신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맥 OS 운영체제에 갖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를 도입하였다. 32비트 아키텍처에 페이징 기능을 갖춘 인텔 80386 CPU 칩이 도입되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초기의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실행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DEC용 VMS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던 데이비드 커틀러를 해고함으로써 이러한 진행에 응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기반을 다룰 윈도우 NT 운영체제 개발을 이끌었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NeXT 컴퓨터사를 차렸고 유닉스 계열 넥스트스텝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다. 넥스트스텝은 훗날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FreeBSD 코드가 맥 OS X의 중심이 되었다.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이 사유 유닉스 운영체제를 대체하는 자유 소프트웨어를 목표로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유닉스 여러 곳의 기능을 복제하는 데 큰 성공을 이루자 GNU 허드 커널 개발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1991년 핀란드 컴퓨터 과학부 학생인 리누스 토르발스는 최초의 리눅스 커널 버전을 출시하였다. 곧 GNU 유저랜드와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병합되면서 컴퓨터 운영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BSD는 유닉스 계열로서 1970년대에 시작하여 수많은 미니컴퓨터에 포팅되었으며 마침내 FreeBSD, NetBSD, OpenBSD와 같이 개인용 컴퓨터에도 쓰이게 되었다. 운영체제의 예.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 유닉스는 처음에는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다. 켄 톰프슨은 BCPL에 기반을 둔 B를 작성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닉스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멀틱스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C는 B를 대체하였으며 유닉스는 현대의 모든 운영체제에 영향을 미쳤던 크고 복잡한 계열의 상호 관련 운영체제로 발전하였다. (역사 참조)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유닉스에서 파생한 계열이며 시스템 V, BSD, GNU/리눅스,와 같은 주된 하부 분류가 몇 가지 있다. 유닉스라는 이름은 어느 운영체제와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표명한 오픈 그룹의 상표이다. 유닉스 계열은 원래의 유닉스를 닮은 커다란 집합의 운영체제들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인다.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에서 돌아간다. 이들은 비즈니스 분야의 서버와 학술 및 공학 환경에서의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쓰인다. GNU/리눅스와 BSD와 같은 자유 유닉스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HP의 HP-UX와 IBM의 AIX는 제조업체의 하드웨어에만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솔라리스와 같은 것들은 x86 서버와 PC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넥스트스텝, 마하, FreeBSD에서 파생한 하이브리드 커널 기반의 BSD류인 애플의 맥 OS X은 유닉스 계열이 아니었던 애플의 초기 맥 OS를 대체하였다. 유닉스의 정보 처리 상호 운용성은 POSIX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드러난다. POSIX 표준은 이것이 비록 다양한 유닉스 계열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다른 어떠한 운영체제에라도 적용할 수 있다. BSD 및 BSD 계열. 유닉스 계열의 하부 집합 가운데 하나로 BSD 계열이 있다. 여기에는 FreeBSD, NetBSD, OpenBSD를 포함한다. 이러한 운영체제들은 웹 서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로의 역할도 한다. 인터넷은 BSD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데,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데이터를 주고 받는 데 흔히 쓰이는 현재의 프로토콜들 가운데 다수가 BSD에서 정의하여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또, 월드 와이드 웹은 넥스트스텝이라는 BSD 기반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수많은 컴퓨터에서 처음 입증되었다. BSD는 유닉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는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시간이 지나 컴퓨터 과학부의 학생들과 직원들은 그곳에서 문서 편집기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러한 것들에 일찍이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버클리 대학교가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이 설치된 새로운 VAX 컴퓨터를 1978년에 도입하였을 때 대학생들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이용하기 위하여 유닉스를 수정하였다. 미국 국방부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이에 관심을 가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교와 회사, 정부 단체들은 이를 알아채고 AT&T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인 것이 아닌 버클리 버전의 유닉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애플을 떠났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스텝이라 불리는 BSD류를 실행하는 고성능 컴퓨터를 제조하였던 기업 NeXT사를 세웠다. 이러한 컴퓨터들 가운데 하나는 팀 버너스 리가 최초의 웹 서버로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OS X. 맥 OS X은 매킨토시 컴퓨터에 미리 최신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도 애플이 개발하여 판매한 사유 그래픽 운영체제이다. 맥 OS X은 1984년 이후로 애플의 사유 운영체제였던 원래의 맥 OS의 뒤를 잇는 것이다. 전작과 달리 맥 OS X은 1980년대 2/4 분기부터 애플이 1987년 초에 이 회사를 사들일 때까지 NeXT에서 개발한 기술로 만든 유닉스 운영체제이다. 이 운영체제는 1999년에 맥 OS X 서버 1.0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하였으며 그 뒤 2001년 3월에 데스크톱 지향 버전인 맥 OS X v10.0을 출시하였다. 그 뒤로 맥 OS X의 "클라이언트", "서버" 에디션 여섯 가지가 공개되었으며, 최신 제품은 2020년에 출시된 OS X 빅서이다. 서버 에디션인 맥 OS X 서버는 구조적으로 데스크톱의 것과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의 매킨토시 서버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맥 OS X은 메일 전송 에이전트, 삼바, LDAP 서버, DNS 등을 비롯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워크 그룹 관리 및 관리 소프트웨어 도구를 포함하고 있다. 플랜 9.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라스 맥길로이는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운영체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벨 연구소의 프로그래머들은 현대의 배포 환경을 위해 계획된, 플랜 9와 인페르노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플랜 9는 네트워킹 운영체제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으며 당시 그래픽이 제공되지 않았던 유닉스와 달리 그래픽을 내장하였다. 하에 출시되었다. 인페르노는 Vita Nuova Holdings에 팔려 GPL/MIT 라이선스로 배포되고 있다. 리눅스와 GNU. 리눅스는 BSD 및 그 변종과 달리 실제 유닉스 코드 없이 개발된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이다. 슈퍼컴퓨터에서부터 손목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기에 쓰인다. 리눅스 커널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배포되므로 누구나 코드를 읽고 수정할 수 있다. 리눅스는 다양한 전자 기기에서 동작하도록 수정되고 있다. GNU 프로젝트는 완전한 원래의 코드를 제외하고 유닉스와 비슷하게 완전하게 자유롭고 열려 있는 운영체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프로그래머들의 협동적인 노고 그 자체이다. 이 프로젝트는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이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리눅스의 수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이 까닭에 리눅스는 GNU/리눅스로 불리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운영체제를 위한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에 배포된다. 이 가운데 리눅스 커널은 핀란드의 대학교 학생이었던 리누스 토르발스의 부차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1991년에 토르발스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학생과 프로그래머를 위한 뉴스그룹에 게시하였다. 구글 크롬 OS. 크롬은 구글이 리눅스 커널을 기반으로 설계한 운영체제이다. 크롬은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으로 보내는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기술적으로는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도 없는 웹 브라우저만을 이용하며 문서 작성이나 미디어 보기와 같은 작업을 위해 웹 브라우저에 쓰이는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개인용 컴퓨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사유 운영체제 계열이다.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가장 흔한 운영체제이며 약 9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최신 버전은 개인용 컴퓨터의 경우 윈도우 11이, 서버의 경우 윈도우 서버 2019이다. 1981년에 IBM PC용의 오래된 MS-DOS 운영체제에 추가 기능으로 나온 것이 기원이다. 198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컴퓨터의 비즈니스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산업 표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윈도우 XP를 시작으로 현대의 모든 윈도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재 나오는 윈도우 버전은 IA-32와 x86-64 프로세서에서 동작하지만 그 이전에 나왔던 버전들은 다른 아키텍처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기타. 틈새 시장에 존재하는 오래된 운영체제로는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OS/2, 애플 맥 OS X의 유닉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전작 맥 OS, 또 BeOS와 XTS-300이 있다. RISC OS, MorphOS, 아미가OS 4도 열성적인 커뮤니티와 전문 분야를 위한 소수 플랫폼으로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DEC의 OpenVMS도 휴렛 패커드가 계속 개발하고 있다. 도스 등의 운영체제도 FreeDOS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밖의 운영체제는 운영체제 교육용이나 학술용, 또는 운영체제 개념의 연구 등을 위해 예외적으로 쓰인다. 학술과 연구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시스템의 전형적인 예로 미닉스가 있다. 반면 순수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것으로는 싱귤래러티가 있다. 구성 요소. 운영체제를 이루는 요소는 컴퓨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하게 만들기 위하여 존재한다. 금융 데이터베이스부터 영화 편집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는 모두 소프트웨어에 쓰이는 하드웨어가 단순히 마우스나 키보드만 이용하든지 아니면 인터넷 연결같이 복잡한 방식을 이용하든지 상관 없이 하드웨어를 이용하기 위하여 운영체제로 말미암아 실행해야 한다. 커널. 펌웨어와 장치 드라이버의 도움을 받아 커널은 모든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에 대한 가장 기초 수준의 제어권을 제공한다. 커널은 램을 통해 프로그램을 위한 메모리 접근을 관리하며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할지를 결정하며 CPU의 동작 상태를 늘 최적으로 설정 및 초기화하고 디스크, 테이프, 플래시 메모리와 같은 매체의 파일 시스템을 갖춘 장시간 비휘발성 기억 장치를 위한 데이터를 정리한다. 운영체제 내에서의 커널의 영역과 그 구성에 따라 모노리딕 커널(monolithic kernel), 마이크로 커널(micro kernel) 등으로 분류한다. 프로그램 실행.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사이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을 단순하게 하는 서비스의 집합이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운영체제가 프로세스를 만든다. 커널은 메모리와 다른 자원을 할당하여 프로세스를 만들며, 이로써 멀티태스킹 환경에서 프로세스에 대한 우선 순위를 확립하고, 메모리에 프로그램 코드를 적재하며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 뒤 프로그램은 사용자 및 장치와 상호작용한 다음 원하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운영체제는 프로세스 들을 생성하거나 삭제하고, 중단시키거나 재개시킨다. 프로세스 간의 동기화와 통신, 교착상태 처리에 관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인터럽트. 인터럽트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데에 효율적인 방법을 운영체제에 제공하므로 운영체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작을 요구하는 이벤트(폴링)를 위한 다양한 소스의 입력을 운영체제가 감시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스택이 매우 작은 구형 운영체제에서 볼 수 있으나 스택이 큰 현대의 운영체제에서는 드문 편이다. 인터럽트 기반의 프로그래밍은 현대의 대부분의 CPU에서 직접적으로 지원된다. 인터럽트는 자동으로 로컬 레지스터 컨텍스트를 저장하고 이벤트에 반응하는 특정 코드를 실행하는 방법을 컴퓨터에 제공한다. 매우 기초적인 컴퓨터들은 모두 하드웨어 인터럽트들을 지원하며 이벤트가 발생할 때 실행될 코드를 프로그래머가 지정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운영체제에 인터럽트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하드웨어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운영체제의 커널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어권을 커널에 넘겨준다. 그 뒤 커널은 요청을 수행한다. 프로그램이 메모리(또는 공유 자원)와 같은 추가 자원이 필요하면 커널이 집중할 수 있게 인터럽트를 발생시킨다. 모드. 현대의 CPU는 여러 모드의 명령을 지원한다. 이러한 기능을 지원하는 CPU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보호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는 메모리의 기록 및 삭제 방식을 제어하는 것과 그래픽 카드와 같은 장치와 통신하는 것과 같이 운영체제의 커널이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액세스해야 하는 낮은 수준의 태스크를 위해 사용한다. 반대로 보호 모드는 그 밖의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된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보호 모드 안에서 동작하며, 수퍼바이저 모드의 모든 것을 제어하는 커널과 통신해야만 하드웨어를 이용할 수 있다. CPU는 오래된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가상 모드와 같이 보호 모드와 비슷한 다른 모드들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32비트에서 16비트 프로세서를, 아니면 64비트에서 32비트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할 때) 컴퓨터가 처음 시동할 때 자동으로 수퍼바이저 모드에서 실행된다. 컴퓨터를 켜자마다 먼저 실행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들이 바이오스와 부트로더이며 운영체제는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접근한다. 그리고 운영체제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제어권을 보낼 때 CPU를 보호 모드에 놓을 수 있다. 메모리 관리. 멀티프로그래밍 운영체제 커널은 현재 프로그램이 이용하는 모든 시스템 메모리를 관리해야 한다. 이로써 어느 특정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메모리와 상호 작용하지 않게 한다. 프로그램이 시분할하므로 각 프로그램은 메모리에 독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상 메모리. 페이징이나 세그먼테이션과 같은 가상 메모리 어드레싱을 이용하면 커널은 어느 메모리를 각 프로그램이 주어진 시간에 사용할 수 있게 할지 설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운영체제가 여러 개의 태스크에 같은 메모리 위치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는 메모리 범위에 없는 메모리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할당되면 커널은 프로그램이 마치 할당된 메모리를 초과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터럽트 처리한다. 유닉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터럽트를 페이지 실패라고 부른다. 커널이 페이지 실패를 감지하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프로그램의 가상 메모리 영역을 수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써 요청된 메모리에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현대의 운영체제에서 자주 접근하지 않는 메모리는 일시적으로 디스크나 다른 매체에 저장하여 다른 프로그램에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이를 스왑 처리(swapping)라고 하며 이를 통해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특정한 메모리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 멀티태스킹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나의 컴퓨터에 실행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태스크들이 동시에 수행하는 것처럼 보여 준다. 대부분의 컴퓨터가 한 번에 최대 한 두개를 수행할 수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시분할을 통해 수행된다. 다시 말해 각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실행 시간의 일부를 사용한다. 운영체제 커널은 스케줄러라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각 프로그램이 실행에 소비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여기서 실행 제어권이 프로그램에 넘어갈 수 있게 한다. 제어권은 프로그램이 CPU와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커널로 말미암아 프로세스로 넘어간다.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CPU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어권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하여 커널로 반환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 간의 제어권 이동을 이른바 문맥 교환이라고 부른다. 디스크 접근 및 파일 시스템.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것은 모든 운영체제의 기본 기능이다. 컴퓨터는 더 빠른 접근, 더 높은 신뢰성을 위해, 또 드라이브의 남은 공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파일을 이용하여 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파일을 디스크에 저장하는 이러한 방식을 파일 시스템이라고 부르며 파일이 이름과 특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또, 이러한 파일들을 디렉터리 트리로 정렬되는 특정 계급의 디렉터리와 폴더에 저장하게 한다. 초기의 운영체제는 일반적으로 한 종류의 디스크 드라이브와 한 종류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였다. 초기의 파일 시스템들은 용량, 속도, 또 파일 이름과 디렉터리 구조의 종류에 제한이 있었다. 이러한 제한은 설계된 운영체제의 제한에 반영되므로 특정한 운영체제가 하나 이상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더 단순한 수많은 운영체제들은 기억 장치의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한 제한된 옵션들을 지원하였는데, 유닉스와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들은 가상 파일 시스템(VFS)이라는 기술을 지원한다. 유닉스와 같은 운영체제는 공통 API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이나 디자인에 관계 없이 다양한 기억 장치를 지원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장치 접근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VFS는 다양한 파일 시스템에,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와 파일 시스템 드라이버를 사용하여 프로그램들이 무제한의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운영체제에 제공한다. 연결된 하드 드라이브와 같은 기억 장치들은 장치 드라이버를 통해 접근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드라이브의 특정한 언어를 이해하고 이 언어를 운영체제가 모든 디스크 드라이브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표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유닉스에서 이를 블록 장치의 언어라고 한다. 장치 드라이버. 장치 드라이버는 하드웨어 장치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특정한 종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장치 드라이버의 주된 설계 목적은 추상화이다. 하드웨어의 모델은, 특히 같은 종류의 장치라 하더라도 각기 다르다. 제조업체들은 더 신뢰할만한,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 더 새로운 모델들을 출시하고 이러한 새로운 모델들은 다르게 동작하기도 한다. 컴퓨터들과 운영체제들은 현재든 앞으로든 모든 장치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체제들은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장치가 제어될 것인지를 지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장치 드라이버의 기능이 이러한 운영체제의 함수 호출을 장치 특유의 호출로 번역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제어되는 새로운 장치는 적절한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올바르게 동작한다. 새로운 드라이버는 운영체제의 관점에서 장치가 평소처럼 동작하과 있음을 보증하게 된다. 비스타 이전의 윈도우, 2.6 미만의 리눅스 버전에서는 모든 드라이버 실행이 협동적이어서, 드라이버가 무한 루프에 진입하면 시스템이 정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더 최근에 나온 운영체제들은 커널 선점을 사용한다. 이 경우 태스크 제공을 위해 커널이 드라이버를 간섭하며 장치 드라이버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프로세스로부터 분리시키며 더 많은 태스크를 부여할 수 있다. 네트워킹. 현재 대부분의 운영체제는 다양한 통신 프로토콜, 하드웨어, 응용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다시 말해, 서로 비슷하지 않은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자원(유무선 연결을 이용한 연산, 파일, 프린터, 스캐너)을 공유하기 위해 같은 망에 참여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원격 컴퓨터의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치 리소스가 로컬 컴퓨터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는 컴퓨터의 그래픽, 사운드 하드웨어를 공유하거나 네트워킹 파일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 단순한 통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부 네트워크 서비스는 컴퓨터의 자원을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SSH는 네트워크로 이어진 사용자들이 컴퓨터의 명령 줄 인터페이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한다. 보안. 컴퓨터의 보안은 수많은 기술이 올바르게 동작하고 있는 지에 달려 있다. 또, 운영체제는 보안을 위하여 특정 환경에 대한 권한을 사용자나 프로그램에 개별적으로 설정하고 인증 프로세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보안은 특히 여러 사용자가 사용하는 시스템에 적절하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각 사용자는 개인 파일을 다른 사용자가 읽을 수 없게 할 수 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어떠한 종류의 입력을 받는 모든 컴퓨터는 사람이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이를 위한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역사적으로 컴퓨터 명령어를 한 줄씩 입력해 나가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와 일반적으로 창, 단추, 아이콘을 이루는 시각 환경이 존재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나뉜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현대의 대부분의 컴퓨터 운영체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맥 OS와 같은 일부 컴퓨터 시스템에서 GUI는 커널에 통합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운영체제의 서비스가 아니지만 운영체제 커널에 통합하면 GUI가 출력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문맥 교환을 없앰으로써 GUI를 더 반응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운영체제로는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커널과 운영체제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듈성이 있다. 1980년대 유닉스에서 VMS 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운영체제였다. GNU/리눅스 및 맥 OS X 또한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 윈도우 비스타와 같은 현대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거의 사용자 공간에 위치한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지만 윈도우 NT 4.0과 윈도우 서버 2003 버전 사이의 그래픽 구현 루틴은 거의 커널 공간에 존재한다. 윈도우 9x는 인터페이스와 커널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다. 수많은 컴퓨터 운영체제는 사용자가 원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설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X 윈도 시스템을 GNOME이나 KDE와 함께 쓰면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시스템에서 이러한 설정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윈도우 셸 치환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윈도우 셸을 교체하는 방식을 쓰지만 윈도우로부터 셸 자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 실시간 운영체제. 실시간 운영체제 (RTOS)는 정해진 기간 안에 수행이 끝나야 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위하여 만들어진 멀티태스킹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연산) 이러한 응용 프로그램들에는 조그마한 임베디드 시스템,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 산업 로봇, 우주선, 산업 제어 장치, 일부 대형 컴퓨터 시스템 등이 있다. 초기의 대형 실시간 운영체제는 이를테면 아메리칸 항공과 IBM이 사브레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하여 개발한 트랜잭션 프로세싱 퍼실리티(TPF)가 있다. 일부 임베디드 시스템은 실시간 연산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심비안 OS, 팜 OS, BSD,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를 이용한다. 취미 활동을 통한 운영체제 개발. 운영체제 개발은 컴퓨팅에 취미를 둔 사람들이 관여하는 가장 복잡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취미로 만드는 운영체제는 기존의 운영체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코드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들과 활동 개발자들의 수는 적은 편이다. 취미 활동으로 개발된 운영체제의 예로는 ReactOS와 Syllable 등이 있다. 시장 점유율. 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 범위 및 논란. 운영체제는 잘 정의된 인터페이스를 가지므로 운영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만,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체제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음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1998년 미국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요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제에 너무 많은 기능을 포함시켜 응용 프로그램 제작업체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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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한글날() 또는 조선글날(朝鮮--)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계양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고 있다. 유래와 역사. 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로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1906년에 제안했던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명명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이것은 1582년 이전의 윤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매기고, 1582년에 생략된 날짜는 고려하지 않고 잘못 환산한 것이었다. 1446년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실제로는 율리우스력으로 10월 18일이 된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기간도 그레고리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는 역산 그레고리력(proleptic gregorian calender)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합의가 나와 그에 따라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그러던중에 한글이 반포된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에 따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므로 새로이 한글날을 10월 9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16일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 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 2005년, 2011년에는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쉬었다. 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1월 16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 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되면서, 제0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 기념.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과 국어기본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별표]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 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별표]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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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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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소프트웨어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람이 이미지나 모델을 시각적으로(visually)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또는 프로그램 모음을 의미한다. 화상 편집 소프트웨어라고도 한다. 크게 공간에 따라 3차원(입체)과 2차원(평면)으로 나뉘며, 좌표 설정 방식에 따라 벡터방식과 래스터(픽셀) 방식으로 나뉜다. 역사. 슈퍼페인트(, 1973년 4월)가 최초의 그래픽 응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이다. Fauve Matisse(이후 매크로미디어 xRes로 명칭 변경)는 1990년대 초에 선구적인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객 소프트웨어 내에 레이어 개념을 도입하였다. 현재 미국에서는 어도비 포토샵이 가장 흔히 사용되고 가장 잘 알려진 그래픽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이다. 코렐드로는 유럽에서 어도비 보다 더 강력한 사용자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GIMP는 어도비 포토샵을 대체하는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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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링 기계
수학 또는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 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개론.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 정의.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 formula_1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 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다른 정의들. 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formula_9를 formula_10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 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0=”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k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 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 상태. 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 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 튜링 머신과 동치인 다른 모델들.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등이 있다. 범용 튜링 기계.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 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 실제 기계와의 비교.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 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 역사.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 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 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 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 판정문제. 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앨런 튜링의 a-기계. 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 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 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 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로 환원시켜 생각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 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 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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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글꼴
글꼴은 컴퓨터로 보는 글자들의 모양새 또는 그 전자적 데이터 파일을 뜻한다. 표시 방식. 크게 비트맵 방식과 벡터, 그리고 스트로크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운영 체제에서 사용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글꼴은 벡터 방식에 비트맵 글꼴을 임베딩(추가)하여 넣는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는 비트맵 글꼴만으로는 축소, 확대, 출력에 문제가 있어(일반적으로는 확대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지 않기 때문에: 실제 글꼴 규격에는 확대, 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을 수 있다.) 벡터 방식을 같이 이용하는 것이다. 비트맵 방식은 화면에서 해당 비트맵 그대로 보이는 반면, 벡터 방식은 아웃라인이 화면에 표현되면서 왜곡이 발생하게 되고 원치 않는 형태로 깨져보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특정 크기에 맞추어 비트맵 디자인을 한 후, 벡터 방식에 임베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너비의 변화. 글꼴을 글자들의 너비 변화에 따라 고정폭 글꼴과 가변폭 글꼴로 나눌 수 있다. 좀 더 세밀하게 모습을 조정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를테면 'VA'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커닝(자간 여백)이 많은 경우 폰트 자체에 커닝 문자 쌍의 정보가 있거나 수동으로 커닝을 직접 지정해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문자들에 따라서 가변폭 글꼴을 많이 쓰지 않거나 아예 쓰기 힘든 경우도 자주 있다. 이를테면, 한자는 가변폭 글꼴을 만들기 힘들며, 그 영향으로 가나나 한글 글꼴도 고정폭인 경우가 많다. 글꼴의 속성. 글꼴은 컴퓨터에서 표시될때에 여러 가지 속성 설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글꼴 형식. 타입 1, 타입 3 글꼴. 타입 1, 타입 3 글꼴은 어도비사가 전문 디지털 타이프세팅을 위하여 개발한 것이다. 포스트스크립트를 사용하면 입방 베지에 곡선의 외곽선 글꼴이 된다. 타입 1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부분집합에 제한을 받으며 어도비의 힌팅 시스템을 사용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쓰였다. 타입 3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무제한적 사용을 허용하지만 힌팅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저해상도의 기기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와 컴퓨터 화면)에서 깨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오픈타입 글꼴. 오픈타입은 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설계한 스마트폰트 시스템이다. 오픈타입 글꼴은 넓은 범위의 메타데이터를 곁들여 트루타입이나 타입 1 (실제로 CFF) 포맷의 외곽선을 포함하고 있다. 트루타입 글꼴. 트루타입은 애플이 개발한 글꼴 체제이다. 타입 1 글꼴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타입 1 글꼴과 달리 트루타입은 베지에 곡선으로 그려진다. 현재에 이르러 널리 쓰이고 있으며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 적용되고 있다. 메타폰트. 메타폰트(METAFONT)는 다른 종류의 글꼴이다. 트루타입과 달리 벡터 글꼴의 체제를 갖추었다. 관련 기술. 웹 폰트. 웹 폰트는 동적 폰트(dynamic fo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동적 폰트는 글꼴이 사용자의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지 않아도 볼 수 있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안된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웹 폰트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웹 폰트의 포맷은 비트스트림의 .pfr 형식과 마이크로소프트의 .eot 형식, 이렇게 2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pfr은 넷스케이프와 모질라까지 지원하고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반면, .eo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특정 버전 이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지원되고 파일 형식은 공개되지 않아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는 사용하지 못한다. .eot 형식은 MS의 WEFT 응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으며, 웹폰트가 사용될 사이트의 URL(인터넷 주소)을 넣을 수 있어 해당 URL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불법 사용 또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웹 폰트가 사용된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웹 브라우저에서 웹폰트를 접속자의 컴퓨터에 자동으로 내려받아 해당 웹페이지를 웹폰트로 보여준다. 따라서 웹폰트의 파일 용량이 크면 클수록 내려 받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고, 실제 웹페이지가 웹 폰트로 대체되어 표시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웹 폰트를 쓰는 일부 포털에서는 해당 글꼴이 비트맵 방식이면 출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eot와 pfr 말고도 GlyphGate에서 개발한 웹 폰트 형태가 있다. 표시 기술. 앤티에일리어싱. 앤티에일리어싱은 높은 해상도의 신호를 낮은 해상도에서 나타낼 때 생기는 에일리어싱(깨진 패턴)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운영 체제와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 이미 이 기술을 기본 지원하고 있다. 클리어타입. 클리어타입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기술로, 액정 화면에서 더욱 깨끗하게 글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액정 화면의 한 개 픽셀은 RGB(빨간색, 녹색, 파란색)의 3개의 서브픽셀(sub-pixel)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클리어타입은 가로방향으로만 RGB의 서브픽셀을 이용한 안티에일리어싱 효과가 나기 때문에, 세로방향에 대해서는 계단 현상의 느낌이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클리어타입에 세로방향으로 안티알리아싱 효과를 더한 래스터라이징 기술을 개발하여 발표하였고, 그로 인해, 외곽선의 계단현상이 최소화되어 보다 나은 래스터라이징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정확한 래스터라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힌팅 정보를 필요로 하는데 거의 모든 상용 한글 글꼴에는 제대로 된 힌팅 정보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클리어타입의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선명성에서 큰 향상은 없는 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7에 기본 글꼴로 사용되는 한글 글꼴 ‘맑은 고딕’은 한글 글꼴의 힌팅 정보를 포함하여 클리어타입 기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최초의 한글 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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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 인도 인민당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정당이다. 일당 독재 체제로 국가를 통치하는 공산당 가운데 하나로, 약칭은 중공()이다. 중국공산당은 1919년 공산주의 조직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인민민주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으며 천두슈와 마오쩌둥, 리다자오, 리다, 마오둔, 덩중샤, 장궈타오, 리한쥔, 위슈쑹 등이 초기 구성원이었다.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천두슈 등이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0년 10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등이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1920년 11월, 창사에서 마오쩌둥 등이 창사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1년 3월, 광저우에서 천궁보 등이 광저우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회로부터 공산당 당원의 골간을 이뤘다. 그 이후로, 중국국민당과 대립 노선을 분명히 해가고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파업을 주도해가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 옌안 공산 혁명 근거지 시기를 거쳐 1949년까지 중국국민당에 맞서 도시 노동자, 농민, 하급 지식인, 학생 등을 대거 마오쩌둥 진영에 유입시켰고, 스탈린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인민민주독재를 여러 방면으로 파급해갔으며, 두 번째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싸워 승리하며 중국 대륙 본토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상인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정치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합리적인 비판과 민주적인 토론을 통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해 나간다는 사상이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기구는 5년마다 열리는 전국대표회의로, 전국대표회의가 개회되지 않았을 때에는 중앙위원회가 최고 결정권을 가진다. 중국공산당의 당수는 중국의 최고직인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국의 군사력 자체를 총괄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가 주석 등의 자리를 모두 역임하게 되며, 결국 중국공산당의 당수가 곧 중국의 최고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2012년 18대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된 시진핑이다. 중국공산당은 공산당 주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 혁명 노선을 문화 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한 후,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목표가 된 계급 투쟁 노선의 종결을 공식 선포하고, 개혁과 개방 노선을 취해오고 있으며,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개혁과 개방 공산당 영도와 경제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정강 정책을 확립하면서, 1992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개요. 중국공산당은 2014년 기준으로 86,700,000명의 당원을 거느릴 정도로 매우 거대한 규모의 정당이다. 중국은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사례로 베이징 대학 대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이유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공산당 당원이 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를 통제하는 독재적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지닌 이 정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을 계속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현대화 이후 상대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 특히 경제적인 영역에서 중국공산당 이외의 인물과 조직의 공식적인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해안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 및 그 산하 위원회가 모든 중요한 정부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에 대해 정치적인 지침을 내리고 있으므로 비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의 규율에 도전하는 자치기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정부 조직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국공산당의 통제력은 굉장히 강력하며 노동조합도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다. 역사. 창당.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1919년 일어난 5·4 운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급진적인 중국 엘리트층이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은 사회적 이념들을 접하며 큰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활약하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널리 펼치기 시작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공산당을 만들자는 의견이 강해지게 되었다.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가 처음으로 혁명 이론과 공산주의의 세계화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으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또다른 주요 지식인이었던 천두슈와는 다르게 중화민국 건국에 불참하지는 않았다. 다만 리다자오와 천두슈 둘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세기의 전환점이며, 이를 계기로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동일했다. 초기 중국공산당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전위당론에 입각하여 창당되었다.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이 당시에는 오직 50여 명의 당원들만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팽창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본디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되었으나, 회의 중간인 7월 30일에 프랑스 경찰의 탄압으로 인하여 상하이에서 쫓겨나 31일에는 저장성 난호 위에 떠있는 배 위에서 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때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의 탄압으로 워낙 혼란스러웠던 터라 리다자오나 천두슈도 이 회의에 참여치 못하였고, 오직 12명의 대표들만 모여 회의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회의 마지막 날이었던 31일, 대표들은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천두슈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당시 쑨원의 지휘를 받고 있던 국민당에 가입하였는데, 이를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좌익을 맡았으며, 우익 세력들과 함께 권력을 다투었다. 쑨원이 1925년 3월에 세상을 떠나자, 우익 세력의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그의 자리를 맡았다. 장제스는 성공적으로 제1차 북벌을 끝낸 이후 칼 끝을 몇 만명에 달하는 공산당 세력에게 겨누었다. 그는 우한의 국민당 중앙 간부들의 만류도 뿌리친 후 군대를 이끌고 공산당이 장악했던 상하이로 행군했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했으나, 장제스는 본심을 드러내고 5,000여 명의 공산당원들과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를 4·12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장제스는 우한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공산당 장군에 가로막혔다. 장제스와 그의 동맹들은 직후 중국 전역을 돌며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베이징에서는 군벌 장쭤린의 지시 하에 19명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암살당했으며 장사에서는 수 백명에 달하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총살당했다. 그해 5월에 이르자 몇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살해당했으며 중국공산당은 최종적으로 25,000여 명의 당원들 중 15,000여 명의 당원들을 잃으며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중국공산당은 이후에도 우한의 중화민국 정부를 계속 지지했으나, 중화민국은 1927년 7월에 모든 공산당 당적 인사들을 정부 요인 명단에서 제거하였다. 공산당은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군대인 '홍군'을 창군하며 이에 대응했다. 홍군은 국민당이 장악한 중화민국군에 대항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1927년 8월 1일에는 주더 장군이 이끄는 홍군이 난창을 공격하며 난창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막대한 공세를 퍼붓는 중화민국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공산군은 산터우로 후퇴한 이후 푸젠성 임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이 때 마오쩌둥이 홍군의 지도자로 등장했고, 장시성 일대에서 추수 봉기를 일으키며 농민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중화민국에 맞서 싸워주기를 바랐다. 그는 9월에 중화민국의 도시들을 삼면에서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으나, 중화민국과의 압도적인 전력 차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결국 패배를 시인할수 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후 1,000여 명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 동쪽으로 행군해갔다.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국공산당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은 공산당 조직 자체를 뒤흔들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민주집중제를 채택하였으며 정치국을 설립하여 각기 다른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형태로 바뀌었다. 중앙 정치국은 당의 모든 인사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분열과 내분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천두슈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자 1929년 리리싼이 일시적으로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리리싼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고 공산당은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중국공산당의 상황을 보다 못한 코민테른이 개입하여 리리싼을 쫓아낸 이후 마오쩌둥을 정치국 위원과 비공식적인 지도자로 세웠다. 당의 전 대표였던 저우언라이와 장원톈은 마오쩌둥을 옆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홍군도 이 때 재구성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중앙집중제 형태로 개편되어 마오쩌둥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군대로 바뀌었다,허나 국민당의 5차 공산당토벌로 대장정의 길을 걷고 1년을 걸어서 산시성에서 독립적인 형태로 재등장한다. 2차 중일 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손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2차 국공합작이 만들어졌고,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함께 침략군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처지가 된 것이다. 2차 국공합작은 공식적으로는 1945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실질적인 협력은 이미 1940년에 끝났다. 이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뿌리깊은 불화 때문이었기에 서로를 믿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공산당은 전쟁을 당세를 늘리고 나중에 국민당에 대항할 세력을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국민당도 공산당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1939년부터는 점차 공산당의 팽창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이때문에 종종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공공의 적인 일본이 존재하였던 탓에 이 충돌들은 크게 번지지 않고 작은 규모에서 일단락되었다. 1943년부터는 국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확장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1945년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전쟁은 본격적인 국공 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중국 내전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일본이 망한 1945년 8월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평화 협상이 종결된 1946년 6월까지이다. 1945년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에는 국민당의 중화민국 군대가 공산당보다 3배나 많은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훨씬 더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협조 하에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지역들을 큰 저항없이 장악할 수 있었으나, 이 점령지들에서 중화민국은 부패한 관료들과 무력 행사로 인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국민당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장악한 시골 지역들을 탈환하는데에 처참히 실패하였고, 공산당은 점차 소련의 원조를 받아 만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46년 7월에서 1947년 6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국민당은 중국 대륙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허나 이는 빈껍데기일 뿐이었는데, 이는 국민당 내부의 고질적인 불화와 장제스의 독재적인 면모로 인하여 국민당은 점차 내부에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47년 7월에서부터 1948년 8월까지로, 이 시기에 공산당이 점차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원을 장악하고 북부 지역을 평정하였으며 북동부 지역도 거의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편 국민당은 크게 약화되었고 대략 3백만명에 달하는 군사들을 잃으며 큰 타격을 입었을 뿐더러, 부패와 무능으로 사람들의 지지도 얻는데 실패하며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단계는 1948년 9월에서 1949년 12월까지로, 이 시기에 중국 본토가 완전히 공산당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대만으로 국부천대하며 세력이 크게 쪼그라들었다. 현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정식 선포했다. 그해 말이 되자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혔고,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공산당을 이끌어간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과 같은 핵심 인물들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러한 풍조는 단순히 이들에만 그치지 않았고, 중국의 전반적인 사회적, 정치적 지형에서 개인적인 연과 친분이 매우 중요해지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사상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지속적인 혁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반혁명분자와 지주계급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문화 대혁명을 일으키며 수 백만명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참사를 저질렀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 자리를 두고 화궈펑과 덩샤오핑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덩샤오핑이 결국 화궈펑을 누르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고, 1978년에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확고한 중국의 1인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등과 같은 개혁파의 도움에 힘입어 개방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개념을 도입하며 중국공산당을 여타 공산당과 소련과 차별화하려 노력하였다. 덩샤오핑의 통치기에 중국은 시장을 개방했는데, 이는 마오쩌둥과는 달리 자본주의화되지 않고서도 시장을 개방하여 자유로운 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은 덩샤오핑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였다. 허나 이같은 개방 조치는 마오쩌둥을 신봉하던 보수세력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에게까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는 덩샤오핑의 개혁 조치가 만족할 만큼 개방되었거나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같은 불만을 결국 1988년 천안문 사태로 폭발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무력으로 깔아뭉개며 중국의 민주화 움직임을 압살하였으나 다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큰 성취를 이루며 경제 대국으로의 길을 열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사회적 시장 경제의 개념이 등장하였고, 1997년에는 덩샤오핑주의가 아예 중국의 헌법에 못박혔다. 중국공산당의 장쩌민 주석은 1990년대에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으며, 덩샤오핑의 정책들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덩샤오핑 이전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대부분 국가 수립 이전,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고 싸웠던 급진적인 혁명가들이었던 데에 반해, 장쩌민 주석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공산당 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안정된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유능한 정치인들이었으며, 경제적, 사회적 이 두 분야 모두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은 점차 규칙과 법에 기반한 체제를 이룩하기 시작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마구잡이로 간부들을 승진시키거나 좌천하는 악습에서 벗어나 능력, 실무, 학력 등에 기반하여 간부들을 양성하고 채용하는 등 제대로 된 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군사적인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을 익힌 전문 군사 간부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점차 힘을 키우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3년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문화했다. 삼개 대표사상이란 장쩌민의 정치적 유산들 가운데 하나로, 후임자들과 미래 세대를 위하여 중국의 발전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삼개 대표사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장쩌민의 뒤를 이어 총서기에 오린 후진타오는 2002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1인 독재를 추구하였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는 모두 집단지도체제를 중시하였으며 권력이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2000년대 중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지나치게 빠른 성장은 빈부격차, 경제 규모에 걸맞는 사회의식의 부재와 같은 부작용도 가지고 왔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후진타오 총서기은 '과학적인 발전'과 '조화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내세우며 국가의 안정을 닦고자 하였다.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 18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사임하였으며, 자신의 자리를 후임자인 시진핑에게 넘겼다. 시진핑 총서기은 집권 이후부터 강력한 반부패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전임자들과는 달리 집단지도체제를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재림이라는 평을 외신들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시진핑 총서기은 중국 국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켰으며, 201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헌법에 명기하였다. 이같은 일은 후진타오, 장쩌민 총서기도 임기 내에 하지 못한 전례없는 사건이었다. 또한 시진핑 총서기이 2022년에 10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점차 외신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조직.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극좌경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재건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공의 최고 기구는 적어도 5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중공은 전국대표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이 대회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당 헌장의 변경을 추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이어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당의 전국 대표대회 이전에 이미 정해지며, 전국 대회의 주목적은 앞으로의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당의 정책과 비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하위의 당 기구들은 아래와 같다. 당 권력의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이다. 중앙 정치국 위원과 마찬가지로, 상임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은 전국대회와 함께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의 공식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새로운 권력 구조에 대한 내용이 간접적으로 발표된다. 상임위원회원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전에 비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2002년 16대 전국 대표대회 때 위원회의 인원은 9명으로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어가는 정치 권력 중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 두 가지 주요기관이 더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이념. 최근들어 외국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은 일관된 이념이 없으며 그저 실용적으로 그때그때 가장 쓸모있는 정책들을 채택하여 사용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허나 중국공산당은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으나, 이같은 의견에 못마땅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에 '서양 세력들이 우리를 분열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또는 '서양의 국제적인 힘은 강한데 반면 중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공산당은 학교에 다니는 중국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을 들어붓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으며 스스로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하며 단순한 공산주의가 아닌, 중국만의 사회주의라고 강변하고 있다. 다만 학자들은 본디 중국에서는 절대적인 이념이 있으면 그에 따라 정책을 맞추어 가는 순서였으나, 실용성을 중시하였던 덩샤오핑의 등장과 함께 가장 실용적인 정책을 고른 후에 그 다음에 이념을 그에 맞추어 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이에 대하여 크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딱딱하고, 창의적이지 못하며 현실과 괴리된 소련의 정책들이 결국 소련의 붕괴를 불러왔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만일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안정화시키고 싶다면 이념을 상황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중국공산당의 제1 이념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이다. 중국공산당에 의하면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인간 사회의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법칙을 밝힌다'라고 한다. 또한 '현재의 불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일면을 보여주며, 미래에 세계가 맞이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성을 증명하고 있다'라고도 한다. 또한 국영 신문인 인민일보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들여와 입맛대로 변형한 마오이즘은 마르크스 레닌 주의를 중국 특성에 맞추어 변형한 한 분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고, 중국공산당이 거의 국가와 동일시되는 중국의 특성에 따라 마오이즘은 단순히 중국공산당의 이념이 아니라 중국 전체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외국의 전문가들이 대부분 마오이즘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거부하고 생겨난 일종의 변종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반해, 중국공산당 스스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쩌민이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시했을 때에 이미 중국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포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학자들은 이에 '장쩌민은 그저 사회적인 장애물을 치워버렸을 뿐, 절대로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당을 강하게 만들었다. 가장 가까운 예만 들어도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며 함부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최종 목표'는 여전히 지상에 사회주의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고,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중국이 어느정도 사회주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여긴다. 다만 몇몇 당 내 극렬적인 공산주의 학자들은 지금의 중국이 지나치게 '자본주의화'되어 있다고 여기며 이같은 주장에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 뜻을 달리하는 조금 더 온건적인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일뿐'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은 여전히 정통 사회주의 국가라고 피력한다. 14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주의가 처음으로 중국 헌법에 공식적으로 명시되었다. 이 때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회주의 초기 단계 등과 같은 단어들이 처음으로 등장했으다. 덩샤오핑주의는 크게 국가 사회주의와 통제가 굳이 경직된 사회주의 체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독점물이 아니며, 시장경제는 부패한 자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아무런 특성이 없는 중성적인 요소라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당이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한 이념에만 집착하여 일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실로부터 기반한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4회 대표대회에서 장쩌민은 덩샤오핑 전 주석의 흑묘백묘론을 언급하며, 어떤 것이 자본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 묻기 전에 그 것의 실효성과 타당성에 대하여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연설에서 밝혔다. 이후 장쩌민이 자신의 정치 유산으로 삼개대표사상을 추가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중국에 맞춘 또다른 사상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평가했으나, 정작 장쩌민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후 자신의 사상은 그저 변화하는 세계의 경제 법칙에 맞춘, 조금 더 생산적인 방식의 마르크스주의라고 주장했다. 시진핑은 2018년에 '시진핑 사상'이라고 불리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19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에 추가했으며, 이 사상도 전임자들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중국에 맞추어 개조한 사상이라고 평가받는다. 경제.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국가 통제 경제와 시장 경제의 차이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정의는 계획 경제가 아니다... 시장 경제도 계획 경제의 일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사회주의 아래에서도 충분히 잘 작동할 수 있다'라고 믿었다. 장쩌민도 덩샤오핑의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고, 중요한 것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그 정책이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고, 14회 대회에서는 외교관들에게 '시장의 힘이 국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발휘하여야만 한다'라고 발언도 하였다. 다만 공산당 내부의 보수적인 세력들 탓에 완전한 시장 경제를 실현하지는 못하였고, '공공' 경제의 충분한 발전이 있은 후에야만 시장 개인 경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공산당은 세계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 두 세력으로 본다. 허나 유물사관을 신봉하는 공산당은 최종적으로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꺾고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급격한 세계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마르크스의 책을 그대로 인용하여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주도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세계화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산당에 의하면 세계화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며 중립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이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일부 도입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중국이 세계화와 국제 무역에 활발히 참여해야만 더 나은 미래를 맞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엄격한 입당 절차. 중국공산당은 당원을 받아들일 때 능력이 검증된 사람만 뽑도록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중국공산당은 입당을 희망하는 자에 대해 3년 동안의 헌신과 직장에서의 능력, 타인과의 관계 등을 관찰하며 공산당 당원과 비공산당 당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입당 여부를 검토한다. 공산당원이 된 후에도 1년에 한 번씩 지난 1년 동안의 실적을 판단하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 입당 조건은 18세 이상이며, 노동에 종사하고 있어야 하지만, 2001년부터 자본가의 입당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입당 희망자는 두 명의 당원에게 추천을 받아야 한다. 추천 주체는 해당 지원자에게 당사(黨史)를 교육시켜야 한다. 교육이 완료된 지원자는 예비당원이 되며, 입당 예비 선서를 하게 된다. 예비당원이 되면 1년 동안 당 조직의 감독을 받게 되며, 당이 추진하는 교육 사업 및 활동에 참가해야 한다. 1년이 지나게 되면 지역당 조직은 예비당원이 몸담고 있는 직장을 직접 현지 조사하게 된다. 이 현지 조사에 합격하게 되면, 예비당원은 비로소 입당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지역당 조직은 입당원서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해당 예비당원에 대한 입당 비밀투표를 진행한다. 이 투표에서 입당이 허락되면 예비당원은 정식 입당 선서 과정을 거쳐서 정식당원이 된다. 개혁개방 이전 공산당 입당 심사는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성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졌으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직업 기술 및 학업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정식당원은 중국공산당 당헌에 따라 인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발전 촉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예비당원 단계에서 입당이 거절됐다면, 지원자는 1년의 심사를 다시 거치고 입당원서를 다시 제출해야 한다. 두 번 이상 불합격되면 예비당원 자격이 박탈되며, 처음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입당을 두 번 이상 실패했을 경우 영원히 당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례로 시진핑 총서기는 열 번의 입당 시도 끝에 정식당원이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입당자는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이지만, 공산주의청년단에 포함이 되었다고 해서 입당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은 당내 관료주의가 당원의 수준을 하락시키고, 당과 군중을 괴리시키는 요소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당내에는 민주적인 토론 문화가 상당히 강하며, 당직을 맡을 당원을 뽑는 과정은 입당 절차보다 까다로운데, 특히 당원의 학습 능력과 내실을 매우 중시한다. 중국공산당은 무자격자가 당원이 되고, 당직을 맡으면 당이 쉽게 부패하여 붕괴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 있기에 입당 및 당직 임명에서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은 철저히 배제된다. 입당 후에는 의무적으로 당비를 내고, 당이 주관하는 정치 행사에 참여해야 하며, 지속적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6개월 이상 이 과정을 무시할 경우 곧바로 출당 조치가 이루어진다. 또한, 중국공산당 당규에 따라 공산당원은 주식 투자를 비롯한 금융 활동, 미신을 믿는 행위, 사교 조직(교우회·학우회·향우회 등 모든 형태의 사적인 조직) 구성 및 참가 등을 할 수 없게 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종교를 믿을 수 없다. 게다가 특정 범죄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되며,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하지 않을 경우 당규에 따라 얼마든지 출당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정책.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2002년 11월에 열린 제16대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 겸 비서장이 대표적인 정책 변화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는 "인민의 민주 독재" 상태이지만, 기업가와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인민들이 당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공산당 간부가 자본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2008년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는 농촌경제 성장을 위한 토지 경작권의 매매허용(토지유동화정책), 통화와 재정정책 규제완화, 경기 부양을 위한 거시 경제정책마련 등의 변화가 있었다. 비판. 탄허 스님에 따르면, 현시대의 조류는 금수운(禽獸運)이다. 이하는 呑虛禪師의 四敎會通思想, 文光 著, 민족사 출판, p.369-p.370 참고바람. "유교학으로 보아도 소강절이 <황극경세서> 가운데에 시대의 조류를 평해 놓았는데, 삼황(三皇), 오제(五帝), 삼왕(三王), 오패(五覇), 이적(夷狄), 금수(禽獸)라고 했습니다. 삼황은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이며, 오제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皇帝), 요(堯), 순(舜)이며, 삼왕은 우(禹), 탕(湯), 문왕(文武)이며, 오패는 진목공(秦穆公), 진문공(晉文公), 제환공(齊桓公), 초장왕(楚莊王), 송양왕(宋襄王)이죠. 그러면 오패 때까지는 소강절이 보았다고 하지만 오패 이후는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이적운(夷狄運)은 청조가 되죠. (...) 청조의 이적운이 지나고 지금은 금수운(禽獸運)입니다." (...「皇極經世書」, 觀物外偏下, 第 9章: 但用無為則皇也, 用恩信則帝也, 用公正則王也, 用智力則霸也, 霸以下則是夷狄, 夷狄而下是禽獸也...:무위로써 통치하는 것은 皇이고, 은혜와 믿음으로 다스리는 것은 帝이며, 공평함과 바름으로 다스리는 것은 王이고, 지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霸이고, 패 이하는 오랑캐이니, 오랑캐 바로 다음은 금수이다.) 소강절은 북송 오자 중의 한 명으로, 그가 포함된 북송 오자는 주자에게 사상적,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주자는 이를 바탕으로 주자학을 집대성했다. 소강절은 역학에 능통했다. 역학은 주역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언하여 세상이 좀 더 바른 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학문이다. 그리고 위 문단은 유불선에 능통했던 탄허가 동양학 강의를 할 때 소강절이 시대를 평하고 예언한 대목을 소개한 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탄허는 20세기 중반~중후반에 활발한 강학 활동을 펼쳤으니 그가 이 말을 했을 때를 전후하여,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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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워싱턴(, )은 다음을 가리킨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이 수교협정한 이후 한국에는 화성돈(華盛頓)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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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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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준
문희준(文熙晙, 1978년 3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보이 그룹 H.O.T. (High-five Of Teenagers)의 리더를 맡았으며, 팀이 해체된 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곡으로〈Alone〉, 〈Red & White〉, 〈아낌없이 주는 나무〉, 〈G선상의 아리아〉, 〈전설〉, 〈기억이란 작은 마을〉 등이 있다. 활동. H.O.T.와 솔로 전향. 문희준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정동(현재는 송파구 관할)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송파구에서 주로 노란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가, 1996년 H.O.T.의 멤버로 데뷔한다. 한편, H.O.T.로 데뷔하기 전 남성 2인조 그룹 녹색지대 멤버가 될 뻔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불발되었다. 군 입대 이후. 2005년 11월 21일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으며, 운전병으로 복무하다가 2006년에 연예병사에 지원하여 발탁되었으며 2007년 국군방송(KFN) FM 〈문희준의 Music Talk Show〉의 DJ로 진행을 맡은 바가 있다. 그의 입대는 당시 여러 남성 연예인들이 군복무 기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쳤다. 2007년 11월 20일에 전역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동년 12월 1일에 결혼하였다. 안티팬. H.O.T.에서 솔로 데뷔때부터 남성들을 중심으로한 안티 세력이 생겼다.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에는 문희준의 음악 실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대개 외모나 와전된 발언을 비하하는 인신 공격 수준의 단순한 비난이었다. 그들은 은어로 10대 열성 소녀팬들을 비하하기 위해 속칭 빠순이라 지칭하였으며, 문희준을 무뇌충(無腦蟲)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빠순이라는 은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연예 뉴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디시인사이드나 웃긴대학과 같은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속칭 필수요소가 된 문희준을 희화화한 합성사진과 유행어들이 끊임없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노래 가사 중의 일부를 따온, 뷁과 같은 부정적인 속어도 유행하였다. 한 웹사이트에서 주최한 《2003 최악의 딴따라 워스트 어워드》에서 “최악의 가수 부문” 및 무려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가수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는 특히 2002년 무렵부터 집요해졌다. 안티들의 기세에 힘입어 김구라는 자신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문희준에게 인신공격이 포함된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의 발언들은 이른바 ‘문희준 어록’이라 불리며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하지만, 그 내용중 대부분은 문희준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사실이 대부분이며 안티들이 지적하는 이른바 ‘건방진’ 언행들은 대부분 신문 기사나 네티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팬들의 웹상에서의 말 실수를 문희준의 말 실수로 오해한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무려 100만 여건의 악플이 달린 네이버 뉴스의 댓글은 국내 뉴스 댓글중 기네스에 오르며 안티계의 최고봉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안티들의 행동은 문희준이 2007년 11월 20일에 현역 만기 제대한 이후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후에, 김구라는 '문희준은 보살'이란 말과 함께 문희준에게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퍼부었던 인신공격들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혔다. 잘못된 소문에 대한 해명. 제대후 MBC의 토크쇼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문희준 어록'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어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 “레드 제플린을 모른다”라는 부분은 문희준이 방송 DJ이던 시절, DJ의 입장에서 “레드 제플린에 대해 소개해 달라”라는 취지의 질문을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오이 3개만 먹고 연습했다”라는 발언은 인디 아티스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때 몸이 많이 불어나는 바람에 다이어트 차원에서 오이만 먹었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오인용 플래시에 나온 내용과 달리 문희준은 군 면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문희준의 소속사는 한때 안티팬들을 상대로 고소하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지만, 후에 오히려 본인이 고소를 취하했다. 앨범. H.O.T. 때의 앨범은 해당 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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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보통 인터넷 게시물 밑에는 댓글란이 있어 그 게시물과 관련하여 독자는 의견을 표할 수 있다. 덧글, 코멘트(), 리플(←reply)이라고도 한다. 댓글을 통해 다양한 대화와 논리적인 토론 및 토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감정적인 반대 표현이나 지극히 단순한 맞장구와 같은 일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유래. 대한민국 인터넷 초창기 시절 유즈넷(USENET)에서는 인터넷 활성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때 영문으로 되어 있는 누리집 용어를 한글화시키자는 과정에서 생긴 신종 단어이다. 유즈넷(USENET) 뉴스그룹 초창기 시절 'reply'를 '리플라이', '답장' 등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인터넷 용어 한글화를 주제로 토론을 나누는 자리에서 '리플라이', '덧글', '댓글' 등이 거론되었다. '리플라이'는 영어의 한글식 표기인 데다가 내용까지 길어져서 지지도가 약하였다. '덧글'의 경우는 '덧붙여 쓰는 글', '댓글'의 경우는 '대롱 대롱 이어지는 덧대어 쓰는 글'로 두 단어가 혼용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덧글'의 경우 글을 게시한 작성자가 추가로 덧붙여 쓰는 글의 의미가 강하여 사용이 줄어들었고 뉴스그룹 댓글 모양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어 '댓글'로 통일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댓글'은 '본문에 대어서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사용되었다. 용도. 댓글 저널리즘. 댓글이 네티즌들의 토론과 지식 공유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댓글 저널리즘'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형성하였다. 특히 '양방향적 속성'을 갖고 있는 댓글은 특정 이슈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뉴스 기사 등 원문을 읽고 나서 독자가 다양한 의견들을 작성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독자들에게 원문에서 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댓글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012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는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이은주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연구가 세계적인 언론학 학술지 <Columbia Journalism Review>에 소개됐다고 밝혔다. 이 학술지는 온라인 뉴스 기사의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면서 이은주의 연구를 주요 논거로 상세히 소개했다. 소개된 연구는 <Journal of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JCMC)> 2012년 10월호에 실린 이은주의 단독 논문이었다. 논문 내용은 독자의 뉴스 기사에 대한 인식이 댓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특히 기사의 이슈에 관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댓글을 접했을 경우 미디어가 왜곡돼 있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논문을 통해 이은주는 온라인 미디어 시대의 뉴스 공정성에 대한 독자의 인식은 기사 자체 뿐 아니라 댓글에도 영향을 받고 댓글이 매체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침을 보여줬다. 놀이. 댓글은 기존의 답글과 기술적으로 비슷하지만, 즉각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인하여 답글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댓글은 그 웹사이트의 성격이나 유행어 등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논리적인 반박글이나 동의하는 글보다는 짧은 감상평 위주이다. 댓글이 없는 상태를 '무플'(無플←無리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무플에 댓글을 다는 '무플 방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1빠', '1등' 등과 같이 누가 먼저 댓글을 달았는지 겨루는 '등수 놀이'를 하기도 한다. 홍보. 댓글에 일부 인터넷 사이트나 기업이 광고를 달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유해 웹사이트 링크를 걸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회원들 또는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 사이에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행위에 대해 그 목적이 의심될 경우 '상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댓글 문화가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댓글이 끼치는 영향을 이익과 연결하려는 현상이 발생하여 댓글 알바라는 신종 직업도 발생하였고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범죄. 댓글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악의적으로 남을 공격하고 상습적으로 남을 헐뜯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댓글 문화인 '악플문화'가 발전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악플'은 '악성 리플'의 줄임말로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악성 댓글은 언어 폭력인데, 그 대상이 여성인 경우 더 악랄한 댓글이 달리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인터넷에 비방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게재해 명예훼손을 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 수 있다. 악플도 형법상 모욕죄·협박죄,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 명예 훼손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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햏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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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곱
선형대수학에서 스칼라곱(scalar곱, ) 또는 점곱()은 유클리드 공간의 두 벡터로부터 실수 스칼라를 얻는 연산이다. 스칼라곱이 유클리드 공간의 내적을 이루므로, 이를 단순히 '내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칼라곱의 개념의 물리학 배경은 주어진 힘이 주어진 변위의 물체에 가한 일을 구하는 문제이다. 정의. 차원이 formula_1인 유클리드 공간 formula_2의 두 벡터 formula_3의 스칼라곱 formula_4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스칼라곱의 기호에는 가운뎃점 '⋅'을 사용하며, 수의 곱셈 기호와는 다르게 생략할 수 없다. 대수적 정의. 두 벡터의 좌표가 각각 formula_5와 formula_6라면, 이 둘의 스칼라곱은 같은 위치의 성분을 곱한 뒤 모두 합하여 얻는 값이다. 예를 들어, 두 3차원 벡터 formula_8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다. 이 경우 스칼라곱의 정의는 벡터의 좌표에 의존하여 정의하지만, formula_2에 기존의 좌표계가 아닌 새로운 좌표계를 주더라도, 이 좌표계가 정규 직교 좌표계라면, 스칼라곱을 나타내는 공식은 바뀌지 않는다. 즉, 임의의 정규 직교 좌표계 아래 스칼라곱은 위치가 같은 두 좌표의 곱을 합한 것과 같다. 유클리드 공간의 벡터는 종종 열벡터로 간주되며, 이 경우 두 벡터 formula_11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우변의 formula_13는 formula_14의 전치 행렬이며, 곱셈 기호가 생략된 곱셈은 행렬 곱셈이다. 이 경우 앞선 예시에서의 내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기하학적 정의. 스칼라곱은 기하학적 성질인 '길이'와 '각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예를 들어, 만약 두 벡터의 길이가 모두 2이며, 둘 사이의 각도의 코사인 값이 1/2이라면, 이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2 × 2 × 1/2 = 2이다. 이 정의에서 스칼라곱은 두 벡터의 길이와 위치 관계에만 의존하므로, 스칼라곱이 좌표계와 무관함이 더욱 뚜렷하다. 반대로 두 벡터를 똑같은 등거리 변환에 의하여 변환시켰을 때,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정의로부터 자명하다. 몇 가지 특수한 각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또한, 이 정의로부터 두 벡터 사이의 각도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 성질. 임의의 벡터 formula_38 및 스칼라 formula_39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반면 스칼라곱이 만족시키지 않는 성질에는 다음이 있다. 응용. 스칼라 사영. 벡터 formula_14의 벡터 formula_35 위의 스칼라 사영() formula_68은 formula_14를 formula_35로 수직 사영하여 얻는 벡터의 길이이다. 스칼라 사영은 다음과 같이 단위 벡터와의 스칼라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반대로,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스칼라 사영과 벡터의 길이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코사인 법칙. 삼각형의 세 변 formula_74와 formula_75가 마주보는 각 formula_76에 대한 코사인 법칙은 스칼라곱의 성질을 통해 유도할 수 있다. 벡터 formula_77가 그림과 같다고 하면,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삼중곱. 3차원 유클리드 공간 formula_79 속 벡터에 대한 곱셈은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두 벡터 formula_80의 벡터곱 formula_81은 스칼라곱과 달리 두 벡터로부터 또 다른 벡터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3차원이 아닌 유클리드 공간에서 의미를 잃는다. 스칼라 삼중곱은 formula_79에서 스칼라곱과 벡터곱을 사용하여 정의된다. 세 벡터 formula_83의 스칼라 삼중곱은 formula_84로 정의된다. 벡터 삼중곱은 formula_79에서 두 번의 벡터 곱으로 정의된다. 세 벡터 formula_83의 벡터 삼중곱은 스칼라곱을 계수로 하는 선형 결합 전개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물리학. 물리학의 여러 가지 개념은 스칼라곱을 통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일은 힘과 변위의 스칼라곱이며, 자기 선속은 자기 선속 밀도와 면적 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물론 변하는 힘이나 일정하지 않은 자기 선속의 경우 적분을 사용한다. 일반화. 복소수 벡터의 경우. 차원이 formula_1인 복소수 곱공간 formula_89 속의 벡터 formula_90에 대하여 스칼라곱과 비슷한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92는 formula_93의 (열벡터로서의) 켤레전치이며, formula_94는 formula_95의 켤레 복소수이다. 이러한 함수는 양의 정부호성을 만족시킨다. 즉, 영벡터가 아닌 복소수 벡터와 자기 자신의 스칼라곱은 항상 실수이며 0보다 크다. 그러나 실수 벡터의 스칼라곱과 달리 쌍선형성을 만족시키지 않으며, 대신 다음과 같은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임의의 formula_96 및 formula_97에 대하여, 또한 대칭성(교환 법칙) 대신 다음과 같은 켤레 대칭성을 만족시킨다. 이 경우, 영벡터가 아닌 두 복소수 벡터의 사잇각을 나타내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02는 복소수 formula_103의 실수부이다. 만약 이 함수의 정의에서 켤레 복소수를 생략한다면, 이는 쌍선형성과 대칭성을 유지하지만 양의 정부호성을 잃는다. 이는 대략 formula_104이기 때문이다. 사실,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함수 formula_105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함수의 존재가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함수의 경우. 두 실숫값 함수 formula_116의 내적 formula_117은 급수 대신 적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숫값 함수 formula_119의 내적 formula_120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행렬의 경우. 사이즈가 같은 두 실수 행렬 formula_122의 프로베니우스 내적() formula_123은 위치가 같은 두 성분의 곱들을 합한 결과이며, 대각합과 행렬 곱셈을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다음과 같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수 행렬 formula_122의 프로베니우스 내적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27는 formula_128의 켤레전치이다.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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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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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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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말린스
마이애미 말린스()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 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와 함께 후발주자로 1993년에 창단하였고, 1997년, 2003년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우승 팀이다.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를 제외하고 가장 단시간 안에 2번째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기도 하다. 또한 이 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와일드 카드로만 두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두 번 다 우승한 팀으로, 지구우승이 없지만 리그 우승이 두 번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미술수집상인 제프리 로리아가 현재 구단주로 있으며, 감독으로는 프레디 곤잘레스, 단장으로는 마이클 힐이 있으며 야구운영팀장으로는 래리 바인페스트가 있다. (직책상의 단장은 마이클 힐이지만, 실제 단장 역할은 바인페스트가 모두 하고 있다.) 콜로라도가 지난 95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데에 자극을 받아 말린스는 97년에 마이애미 출신의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 내야수 보비 보니아, 외야수 모이스 알루 등 내로라 하는 자유계약선수들을 돈으로 끌어 모았다. 흔히 '말린스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우승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97년과 2003년 둘다 당시 와일드 카드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했고, 베테랑 선수들과 루키계약을 맺고 있던 선수들의 대활약으로 우승했다는 것이다. 97년의 말린스 팀의 주축이 베테랑 위주였다면, 2003년에는 신예들이 위주였으며, 특히 이 차이는 투수력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또한 특이한 점은 97년의 겨울에 있었던 이른바 '대방출' 사건으로, 이는 말린스 주력 선수들의 재계약들이 (재계약과 메이저 리그 계약)이 이 겨울에 몰려있었던 것으로,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을 두려워한 구단주에 의해 대부분의 주력선수들이 유망주와 맞트레이드되는 조건으로 다른 구단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이 현상은 2003년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이 '대방출'은 2008년 초에 이루어진 돈트렐 윌리스와 미겔 카브레라, 이 두 선수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유망주 6명을 받고 트레이드한 것으로 다시금 마무리되었다. 2008년 3월 31일 말린스 팀 연봉은 뉴욕 양키스 선수들인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제이슨 지암비 선수의 개인 연봉보다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는 한국인 1호 타자 메이저리거 최희섭(전 KIA 타이거즈)과 김병현(전 KIA 타이거즈)가 뛰었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2시즌부터 팀명을 마이애미 말린스로 변경하고 홈구장도 말린스 파크(2011년 11월 11일에 개장한다.)로 옮겼으며 이에 앞서 2006년 초 라스베이거스 샌안토니오 포틀랜드 노퍽 북부 뉴저지 이전설이 있었으나 무산됐다. 2019시즌엔 팀 로고, 유니폼, 경기장을 새롭게 바꾸었고 팀 색상도 주황색 대신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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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한식에는 여러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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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학
전자기학(電磁氣學, )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장을 이룬다. 자기 현상은 이미 기원전 2000년 무렵 중국 문헌에 등장하며, 전기 역시 기원전 700년 무렵 고대 그리스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기가 전자기력이라는 동일한 기본 상호작용에 의한 현상이라는 점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전기장. 양털로 만든 옷감에 플라스틱 빗을 여러 번 문지른 후 머리카락에 갖다 대면 머리카락이 빗에 달라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체가 전기를 띄게 되는 것을 대전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탈레스는 호박(琥珀)을 마찰하면 호박에 작은 물체가 달라 붙는 것을 관찰하였다. 전기를 뜻하는 는 호박을 뜻하는 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 든 예와 같이 두 물체를 마찰하여 대전된 전기를 정전기라고 하는데, 정전기가 대전되는 까닭은 물체를 이루는 원자가 지니는 전자 가운데 일부가 적은 에너지로도 쉽게 원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자로부터 벗어나 움직이는 전자를 자유 전자라고 한다. 금속과 같이 자유 전자를 많이 지닌 물질은 언제나 전자들이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대전되었더라도 다른 물체와 닿게 되면 전기가 쉽게 전달되어 버린다. 이런 물체를 도체라고 한다. 반면에 고무나 유리와 같은 물질은 자유전자가 매우 적어서 한 번 대전되면 전하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이런 물체를 부도체라고 한다. 물질 가운데에는 상태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런 물질들은 반도체라고 부른다. 반도체는 최근 여러 전자 제품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기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하가 있어서 같은 것은 밀쳐내고 다른 것과는 끌어당긴다. 18세기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두 전하를 한 쪽은 양 전하, 다른 쪽은 음 전하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척력과 인력의 크기는 물체가 갖고 있는 전하의 양과 두 물체 사이의 거리에 관계된다. 이렇게 정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쿨롱의 법칙으로 계산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대전된 한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할 때, 이 물체 근처로 지나가는 다른 대전된 물체는 쿨롱의 법칙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더 강한 힘을 받게 된다. 반대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두 전하 사이의 힘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하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전기장이라고 한다. 전기장의 세기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물체가 단위 전하당 얼마만큼의 힘을 받는지로 계산한다. 국제단위계로 나타내면 쿨롱당 뉴턴, 즉 formula_1로 나타낸다. 물체에 고여있는 정전기와 달리 전류는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흐르는 전기의 흐름이다. 1800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알레산드로 볼타는 황산 수용액에 구리막대와 아연막대를 담은 후, 두 막대를 금속선으로 이어 전지를 발명하였다. 볼타 전지는 최초로 전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장치였다. 자기장. 고대 중국에서는 자석에 철이달라붙는 다는 사실과 자석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침반은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항해에 필수적인 장비가 되었다. 자석은 전하와 같이 같은 극끼리는 밀치고 다른 극끼리는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관례적으로 자석에서 북극을 가리키는 쪽을 N극, 반대편을 S극이라고 한다. 물질이 자기를 띄게 되는 것은 원자가 스스로 전류 고리를 갖기 때문이다. 원자핵의 자전과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공전과 자전때문에 원자에 전류 고리가 생기고 이 때문에 원자 자체에 N극과 S극의 성질을 나타내는 자기쌍극자가 형성된다. 전기의 기본 단위인 전하가 음전하 또는 양전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는 자기쌍극자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기초 단위에서부터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자석에 철과 같은 물질이 달라붙는 현상을 자기라고 하고, 자석에 달라붙는 물질을 자성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자성체로는 철 이외에 니켈과 같은 것이 있다. 자기에 반응하지 않는 물질은 비자성체라고 하며, 이 외에 자석에 아주 약하게 반응하는 알루미늄, 크롬과 같은 물질은 상자성체, 구리, 금, 은과 같이 자석이 가까이 가면 약하게 반발하는 물질은 반자성체라고 한다. 대부분의 물질은 원자단위의 자기쌍극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자기가 상충되어 자성을 띄지 않지만, 철이나 니켈같은 물질들은 원자의 배열이 자기가 한 쪽 방향으로 정렬되기 쉽도록 되어 있어서 쉽게 자성을 띄게 되고 한 번 자석이 되면 계속하여 자성을 유지하게 된다. 자성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는 자석을 영구 자석이라고 한다. 철 막대를 자석의 한 극으로 내려 치면 철 원자의 자기쌍극자가 한 쪽으로 정렬되어 영구 자석이 된다. 한편, 영구 자석이 된 철이라고 하더라도 약 770℃ 가 되면 자성을 잃는데, 열에 의해 원자가 무질서하게 운동하기 때문이다. 전기장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미치는 공간을 자기장이라고 한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의 단위 자극인 자하는 전하와 달리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쌍극자로 존재하므로 N극에서 나와 S극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자기 흐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되는 자기 흐름을 자기력선이라고 하는데, 자기장은 일정 공간에 자기력선이 얼마나 많이 모여있는지와 그렇게 모인 자기력선이 얼마나 센 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자기력선이 일정 공간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지는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束密度)라고 하며, 관례적으로 formula_2로 나타낸다. 한편, 특정 위치에서 자기장의 세기는 formula_3로 나타내는데, 그곳에 놓인 자하가 받는 힘을 뜻한다. 국제단위계에서는 자기장의 단위로 테슬라(T)를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우스(G)가 더 많이 쓰인다. 자기장의 경우에 자기 선속 밀도와 자기장의 세기가 다른 까닭은 자기장이 통과하는 매질마다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 자화되어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을 투자율(透磁率)이라고 하고 그리스 문자 μ로 나타낸다. 투자율은 물질마다 고유의 값이 있는데 투자율이 수백에 근접하는 강자성 물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물질은 1에 가까운 투자율을 가지고 있다. 진공 또는 자유공간의 투자율은 특히 μ 0로 나타내며, 그 값은 formula_4이다. 자기장의 자기 선속 밀도 formula_2는 자기장의 세기formula_3에 투자율 μ를 곱한 것과 같은 값을 갖는다. 즉,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전자기 유도. 전기와 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현상이었지만, 이 둘이 사실은 같은 상호 작용이란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1820년 덴마크의 과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 나침반을 두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전류와 자기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프랑스의 과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논문을 읽고 자신도 같은 실험을 하여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 생기는 자기장의 방향을 관찰하였다. 앙페르는 전류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흐를 때 자기장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말아쥔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오른손 엄지를 위로 치켜 든다면 나머지 말아 쥔 네손가락은 반시계방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앙페르의 오른나사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수리 모형이 만들어져 앙페르의 회로 법칙이 수립되었다. 1824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스터전은 전류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전자석을 만들었다. 스터전이 처음 만든 전자석은 말굽 모양의 철심을 자기 코어로 이용한 것이었다. 스터전은 자기 코어에 굵은 구리 전선을 18 번 감아 전자석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절연체가 없었기 때문에 스터전은 구리 도선에 바니시를 발라 절연체로 사용하였다. 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장에서도 전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자석을 도선 가까이에서 움직이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구 자석이든, 전자석이든 자기장을 형성하는 것이기만 하면 도선가까이에서 움직이면(즉, 자기장의 변화가 일어나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정리하여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표하였다. 자기에서 전기가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것을 이용한 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자기 유도를 이용하여 교류 발전기를 발명하였다. 맥스웰 방정식. 1864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기존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이론의 수리 모형들을 약 20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맥스웰은 나중에 의미가 같은 방정식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본질적인 네 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이 다루는 전자기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맥스웰은 전자기학에 대한 법칙들의 수리 모형을 정리하면서 로런츠 힘은 다루지 않았다. 로렌츠 힘은 전하를 띈 물체가 전기장 안에서 받는 힘을 뜻한다. 오늘날 전자기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맥스웰은 맥스웰 방정식을 정리한 후, 자계가 사인파와 같은 파동을 보이며 변화한다면 전계 역시 그에 따라 사인파 파동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므로, 전기와 자기의 성질을 모두 갖는 파동, 즉 전자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맥스웰이 예측한 전자파는 1888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후, 전기 회로에서 생성된 전자파를 안테나를 통해 방출하거나 수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무선 통신이나 방송과 같은 전자파를 이용한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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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전기(電氣, )란 전하의 존재 및 흐름과 관련된 물리현상들의 총체이다. 전기는 번개, 정전기, 전자기 유도, 전류 등 일상적인 효과들의 원인이다. 또한 전기는 전파 따위의 전자기 복사를 발산하고 또한 수집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전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기공학에서는 전기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역사. 전기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기물고기의 전기충격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750년의 고대 이집트 문헌에는 이 물고기들을 "나일 강의 뇌신"이라 부르며 다른 모든 물고기의 "수호자"라고 했다. 이후 1천년기가 지난 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박물학자들과 의사들도 전기물고기의 존재를 기록했다. 대 플리니우스나 스크리보니우스 라르구스 같은 고대 사람들은 전기메기 및 전기가오리의 전기충격 효과 및 그 충격이 충격을 전달(오늘날 용어로 전도)할 수 있는 물체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통풍이나 두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어 치료가 되라고 전기물고기를 만지게 하는 처방도 이루어졌다. 번개와 여타 출처의 전기가 같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아랍인들일 것이다. 15세기 이전부터 아랍어에서는 전기가오리를 가리키는 말로 "번개()라는 말을 사용했다. 지중해 주변의 고대 문화에서는 특정한 물체. 예컨대 호박을 고양이 털로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기원전 600년경 정전기에 관한 다양한 관찰을 남겼다. 그는 마찰이 호박을 자성을 띠게 하며, 이는 자철석과 같은 문지르지 않아도 자성을 가지는 광물과 대조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마찰된 호박의 인력 작용이 자성의 효과라고 생각한 점에서 틀렸다. 그러나 훗날의 과학자들은 자기와 전기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논란이 많은 학설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이 전기도금의 원리를 알고 있었지도 모른다. 1936년 발견된 바그다드 전지가 그 증거로 제시되는데, 이 유물은 마치 갈바니 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유물이 전기적 성질을 정말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전기는 단순히 지식인들의 호기심 대상에 불과했다. 1600년 잉글랜드의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와 자기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수행하여 자철석 효과와 정전기 효과는 서로 다른 것임을 구분해냈다. 길버트는 문지른 호박이 작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라틴어로 "엘렉트리쿠스( < )"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이것이 영어 낱말 "electric" 과 "electricity"의 어원이 되었으며, 이 두 낱말은 토머스 브라운의 《프세우도독시아 에피데미카》(1646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연구해보니 1646년보다 더 앞선 1435년에 안토니오 맥서니의 프라도니칸 길버르튼이라는 연구책에서 이 두 낱말을 언급한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오토 폰 게르니케, 로버트 보일, 스티븐 그레이, 샤를 프랑수아 드 시스테르네 등이 전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재를 팔아가면서 전기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프랭클린은 1752년 6월 물에 적신 연줄 끝에 금속 열쇠를 매달고 천둥치는 날 연을 띄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다만 프랭클린이 이 실험을 정말 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열쇠를 통해 그의 손등으로 전달된 스파크는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확실히 알게 하였다. 또한 프랭클린은 음전하와 양전하라는 개념을 내놓아 전하 저장 장치인 라이덴병의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질이 사실 역설이 아님을 설명해냈다. 1791년 루이지 갈바니가 생물전기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는 전기가 뉴런을 통해 근육에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는 아연판과 구리판을 겹쳐 만든 볼타 전지를 개발하여 과학자들이 그전까지 사용되던 정전기 기계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819년-1820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와 앙드레마리 앙페르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전자기 개념의 단초를 발견했다. 182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동기를 발명했고, 1827년에는 게오르크 옴이 전기회로를 수학적으로 분석해냈다. 그리고 1861년-1862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유명한 논문 〈물리적 역선에 관하여〉에서 전기와 자기(와 빛)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렇듯 19세기 초가 전기과학의 급속한 발전 시대였다면, 19세기 말은 전기공학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블라시 오토, 토머스 에디슨, 갈릴레오 페라리스, 올리버 헤비사이드, 예디크 아노이시, 켈빈 남작, 찰스 앨저넌 파슨스, 베르너 폰 지멘스, 조지프 스완, 니콜라 테슬라,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기를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부터 근대적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전환시켰고, 이는 제2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자외선을 쬔 전극이 전기 스파크를 더 잘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이산적인 양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빛의 에너지가 전자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광전효과로 인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양자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광전효과는 태양광판을 비롯한 광검출기에 이용되는 원리로서 오늘날 상업적 전기 생산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개념. 전하. 전하(電荷, electric charge)는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으로, 어떤 물질이 갖고 있는 전기의 양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 단위는 쿨롱이며, 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10의 18제곱 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의 양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10^-1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전류. 전기의 흐름 전류는 물분자가 전하와 함께 이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전기는 물분자가 가지는 전하의 상태를 의미하고, 물분자의 수소원자의 전하가 양전하 상태를 갖고 물분자의 산소원자가 음전하의 상태를 가지며 물분자 크기 180pm이내에서 갖는 전하는 한국과학으로 직류전기로 표기되어 있다.그러므로 전류와 전기의 구분은 물분자가 전기도체인 구리선과 함께 움직이느냐와 물분자의 수소원자 전하와 산소원자의 전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기와 전류가 한국과학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기장. 전기를 띤 물체 주위의 전기 작용이 존재하는 공간. 전계(電界). 전장(電場). 전위. 전기적인 위치에너지 전압과 비슷한 개념이다. 전자석. 철심에 코일을 감고 코일에 전류를 흘리게 되면 철심이 자성을 띄게 되는데 이것을 전자석이라고 한다. 전기화학. 전기화학은 물질간의 전자의 이동과 그것들에 의한 여러 현상을 취급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화학, 분석화학, 화학공학 등과의 연관이 깊다. 전기회로. 전기 회로는 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전원과 함께 설치된 닫힌 회로다. 회로에는 저항기, 축전기, 코일 등 다양한 전기적 소자가 전기 전도체인 전선에 의해 연결된다. 전력. 전기에너지의 힘 직류에서의 전력 공식은 P=VI 교류에선 전력이 세가지로 피상전력,무효전력,유효전력이 있다. 전자공학. 전자공학은 구동력으로서 전력을 이용하는 구성장치, 시스템 또는 여러 장비들을 개발하기 위하여 전자들의 운동에 대한 영향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공학의 한 분야이다. 전자기파. 전자기파는 특정 전자기적인 과정에 의해 복사되는 에너지이다. 가시광선도 전자기파에 속하며 전파, 적외선, 자외선, X선 같은 전자기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전 역학에서 전자기복사는 동시에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구성된 전자기파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들은 진공에서 빛의 속력으로 전달된다. 두 장의 진동은 서로 수직이며 진행방향에 수직이고 횡파이다.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크거나 작은 순서대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라디오파,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이 포함된다. 생산과 이용. 산업에 미친 영향.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은 파괴적 기술이 아주 잘나가는 기업들을 몰락시키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를 조명함으로써 경제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전기화'는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기술 중 하나였다. 이는 21세기의 ICT 혁명에 따른 '디지털화'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20세기의 처음 몇십 년 동안 전기화는 미국 제조업에 마치 대량 멸종에 흡사한 위기를 야기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미국의 제조업은 '산업의 트러스트(industrial trusts)'라고 불리는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기업들은 합병을 통해 독접적 지위를 구축한 대기업들이었다. 이 대기업의 소유주들은 생산, 구매, 유통, 판매 등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용하고자 했다. 몇몇 트러스트 소유주들은 시장을 독접함으로써 가격을 결정할 힘을 확보할 만큼 거대한 기업 집단을 구축하기를 원했다. 1904년에 발표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그런 트러스트가 300개가 넘었다. 당시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장기간 동안 지배를 유지할 것처럼 보였다. 자본이 충분했고, 1세대 전문 경영자들이 운영했고, 새로운 기술에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전신을 통해 통신하고, 철도로 상품을 실어 나르는 것이 좋다는 점을 금방 알았으며, 공장을 증기력에서 전력으로 바꿀 의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화가 확산될 때 이를 계속 실행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 즉 사업 분야의 많은 영역들에서 - 모두가 자원과 역량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제학자 쇼 리버모어(Shaw Livermore)가 1935년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다르면, 1888~1905년에 설립된 산업 트러스트 중 1930년대 초에 도산한 사례가 40퍼센트를 넘었다. 또 11퍼센트는 "서류상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뒤섞인 ... '비틀거리는' 집단들이었다. ... 대체로 조사한 기간 중 최근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더 나빴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트러스트 중 대부분은 규모가 훨씬 축소되었다. 경제학자 리처드 케이브스(Richard Caves) 연구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05년에 시장 지배력을 발휘한 기업 중 49곳이 1929년에도 존속했지만, 이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은 평균 69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3분의 1 이상 감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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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전하(電荷, )는 전자기장내에서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Q)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단위는 쿨롱이며, 단위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량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또한,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이렇게 전하를 띄는 물체는 대전체(帶電體)로 부른다. 개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호박을 문지르면 옷자락이나 먼지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언어들에서 전기를 뜻하는 단어들(, , )은 호박을 뜻하는 에서 기원하였다. 18세기 중엽 벤저민 프랭클린은 뇌우 속으로 연을 날리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통해 번개가 호박에 의해 발생되는 것과 동일한 전기임을 입증하였다. 같은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척력이 작용하고 다른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한다. 이 두 종류의 전하를 양전하와 음전하라고 한다. 물체가 양전하 또는 음전하를 띄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 입자의 전하 때문이다. 전자는 음전하를 띄고 두 개의 위 쿼크와 하나의 아래 쿼크로 이루어진 양성자는 양전하를 띈다. 기본 입자를 고려하지 않는 원자 단위 이상에서 전하량은 모두 전자 한 개의 전하량인 1.6021773349 에 대한 정수배로 존재한다. 즉, 일반적인 경우 전자 한 개가 갖는 전하량이 전하량의 최소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의 수가 균형을 이루어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원자의 가장 바깥 껍질에 위치한 전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마찰과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쉽게 원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전자들이 이동하게 되면 전자를 잃은 쪽 물질은 양전하를 띄게 되고 반대편의 물질은 음전하를 띄게 된다. 마찰과 같은 것에 의해 축적되어 흐르지 않는 전기를 정전기라고 한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가 마찰하면 정전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겨울철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걷는다면 마찰로 인해 우리 몸에 정전기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정전기는 자동차 문 손잡이와 같은 금속을 만나면 전기충격을 줄 수도 있다. 전하에 작용하는 힘.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0t 트럭 1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전하량. 하나의 전자가 갖는 전하량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전하량을 측정하는 SI 단위인 쿨롱은 6.24150962915265개의 전자가 한꺼번에 수송하는 전하량을 사용한다. 이 때 전류의 단위 암페어는 1초 동안 1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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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롱 법칙
쿨롱 법칙() 또는 쿨롱 힘 법칙()은 두 전하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정전기적 인력이 두 전하의 곱에 비례하고, 두 입자 사이의 거리(formula_1)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역제곱 법칙의 하나다. 1785년 샤를 드 쿨롱이 발표했다 쿨롱의 실험.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 수학적 표현.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밀어내고, 다르면 끌어당긴다.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formula_9 (Kg중)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t 트럭 10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역제곱 법칙. 쿨롱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역제곱 법칙, 즉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가해지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는 공간이 3차원일 때 일정한 밀도로 퍼져나가는 전기장이 어떤 거리에서 2차원 면을 이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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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
전기장(electric field)은 관찰 대상인 전하를 띤 물체가 공간 상의 어느 점 P에 있는 시험 전하에 가해주는 단위 전하량 당 전기력을 뜻한다. 즉, 시험 전하가 느끼는 전기력을 시험 전하의 전하량으로 나눈 값이다. 전기장은, 어느 전하가 다른 전하에 전기력을 가할 때, 순간적인 원격 작용이 아니라 이러한 전기력을 매개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다. 즉, 전기력이 갖고 있는 원격력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전하가 주위에게 전기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위공간을 적합하게 변형시킨 것이 전기장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기장은 공간상에 전하가 존재할 때, 그 전하에 의해 생기는 공간상 각 지점의 전위의 기울기를 말한다. 전위의 기울기이기 때문에, 단위는 V/m가 된다. 또한 일반적으론, 공간상의 한 점의 전기장의 크기는 그 지점에 단위전하(+1 C)을 놓았을 때 그 전하가 받는 전기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단위는 N/C이며, 단위는 위와 동일하게 V/m이다. formula_1 formula_1 formula_5 formula_6 formula_9 : 단위 전하가 갖는 에너지 = 전위 formula_10 쌍극자 사이의 전기장. formula_11가 두 전하 사이의 중점으로부터 특정 위치까지의 거리이고, formula_12는 전기 쌍극자모멘트라고 할 때, 다음 공식이 성립한다. formula_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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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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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스 법칙
가우스 법칙()은 폐곡면을 통과하는 전기 선속이 폐곡면 속의 알짜 전하량과 동일하다는 법칙이다. 맥스웰 방정식 가운데 하나다. 정의. 가우스 법칙은 미분 형태와 적분 형태가 있다. 두 형태는 발산정리에 대등하다. 가우스 법칙의 적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는 변위장(전속밀도), formula_3는 표면 "A" 위의 미소 면적을 나타내는 벡터 (그 지점의 접평면에서 바깥쪽을 향하는 법선 벡터), formula_4는 폐곡면 속의 알짜 자유 전하량이다. formula_5는 표면 "A"전체에 대한 면적분이다. 가우스 법칙의 미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7는 발산 연산자, formula_2는 변위장(전속밀도), formula_9는 자유 전하 밀도다. 위 공식은 자유 전하에 대한 가우스 법칙이다. 즉, formula_4와 formula_9는 매질 속의 분극 전하를 포함하지 않는다. 분극 전하를 포함한 모든 전하에 대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4는 알짜 전하 (분극 전하 포함), formula_15는 전하 밀도 (분극 전하 포함)다. formula_16는 전기장이다. formula_17는 진공의 유전율로, 기본 상수다. 적용. formula_18 formula_19 formula_20 (면) formula_21 (구 껍질 또는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표면) formula_22 (구 껍질에서, r<R인 구의 표면) formula_23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단위면적당 전하) 역사.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1835년에 발견하고, 1867년에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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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
전위(, ) 또는 전기 퍼텐셜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전기장에서 단위 전하가 가지게 되는 전기적 위치 에너지다. 국제단위계에서 단위는 볼트다. 정의.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formula_1인데, 정전기학에서는 전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자기장이 없고, 따라서 이 값이 0이 된다. 즉 formula_2의 회전이 0이 되므로 이를 어떤 스칼라함수의 기울기로 표현할 수 있다. 보통 그 스칼라 함수를 formula_3라고 쓰고, formula_4를 전위라고 부른다. 즉 formula_5가 된다. 위치 에너지가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두 지점 사이의 위치 에너지 차이만이 절대적인 값인 것처럼, 전위 또한 상대적인 값이다. 즉 특정 지점의 전위는 임의로 정의할 수 있고, 두 지점의 전위차만이 물리적 의미를 갖는다. (전위차는 전압이라고도 불린다.) 수학적인 이유는 formula_4에 어떤 상수를 더해준 값인 formula_7에 대해서도 formula_8가 되어 같은 전기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이론 물리학에서는 통상적으로 계에서 "무한히 먼 곳"에서의 전위를 0으로 놓는다. 전기 회로에서는 보통 접지(接地, )의 전위를 0으로 놓거나, 아니면 회로도에 어느 점의 전위를 0으로 정의하는지 표시한다. 전위는 에너지와 전하의 비(단위전하가 가지고 있는 정전기 퍼텐셜 에너지)이다. 즉, 전위의 국제 단위인 볼트는 다음과 같다. 두 점의 전위차(formula_13)는 두 점 사이의 전기장을 선적분 한 값이다. 이때, 전기장은 보존장이기 때문에 적분구간의 모양은 상관 없고, 적분구간의 시작점과 끝점만 중요하다. 하나의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formula_14 여러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formula_16 전기 쌍극자의 전위. formula_19 연속적인 전하 분포. formula_20 전기장과의 관계. formula_21 formula_22 대전입자 계의 전기 퍼텐셜 에너지. formula_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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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전
축전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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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류
전류(電流, electric current)는 전하의 흐름으로, 단위 시간 동안에 흐른 전하의 양으로 정의된다. 전하의 흐름은 전선과 같은 도체, 전해질의 특성을 갖는 이온, 플라스마 등에서 일어난다. 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로 1 암페어는 1 초 당 1 쿨롱의 전하가 흐르는 것을 뜻한다. 암페어는 기호 A로 표기한다. 정의와 단위. 전류는 일정 시간 동안 흐른 전하량의 비율로 정의된다. 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이고 기호 A로 표기한다. 1 암페어는 1 초에 1 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을 뜻한다. 종류와 밀도. 전류의 종류로는 도체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흐름인 전도 전류와 진공관과 같은 것에서 일어나는 전하를 갖는 대전 입자의 흐름인 대류 전류가 있다. 전도 전류는 금속과 같은 도체에서 원자는 물체의 결합구조를 유지한채 전자의 이동만으로 이루어지는 전류인 반면, 대류 전류는 대전 입자 자체가 이동하여 일어나는 전류이다. 대류 전류는 전도 전류와 달리 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전류의 방향에 대해 수직인 단면에서 단위면적 당 전류의 세기를 전류밀도라고 한다. SI 단위는 제곱미터 당 암페어(A/m²)이다. 정의에 따라서 전류와 전류밀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전류밀도는 전류의 종류에 따라 전도전류밀도와 대류전류밀도로 구분된다. 직류와 교류. 도체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흐름인 전도 전류는 한 방향으로 연속하여 흐르는 직류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전류의 방향이 바뀌는 교류로 구분된다. 직류와 교류의 전류 흐름이 다른 것은 전류를 만드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전지와 같이 일정한 전위차가 유지되는 전원에 연결된 전기회로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지속적인 전류가 흐르게 된다. 한편, 교류는 발전기와 같은 것을 전원으로 한 전류이다. 현재 대부분의 가정에는 교류전원이 공급되나, 가전제품에는 주로 직류가 사용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기 제품은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정류기를 사용하거나 둘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앙페르의 법칙.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는 오른쪽 그림과 같이 자기장이 형성되는데 이를 앙페르의 회로법칙이라고 한다. 앙페르의 회로법칙은 전자기역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옴의 법칙. 직류 전기회로에서 전류의 세기는 전원의 전압과 회로의 전기저항에 의해 결정되어 전압의 크기에 비례하고 전기저항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이를 옴의 법칙이라 한다. 한편 교류에서는 전기저항 대신 다음의 식과 같이 임피던스가 전류의 세기에 관계한다. 따라서, 비록 저항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교류에서도 여전히 옴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전류의 방향. 전기회로에서 실제 전자의 흐름은 음극(-)에서 양극(+)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최초 정의한 전류의 흐름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 다르게 양극(+)에서 음극(-)인 양전하의 흐름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실제 전류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정의한 까닭은 전류의 흐름을 발견할 당시 과학자들이 전자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정공, 양이온처럼 양전하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전류의 방향은 양전자의 이동 방향과 같은데, 양전하가 이동할 때나 음전하가 이동할 때 만들어진 전류에 현상적인 차이는 없으므로 옛부터 전류의 방향을 양전하의 흐름으로 통일하였다. 1830년대 마이클 패러데이는 아래 그림처럼 전해전도 실험을 하였다. 패러데이는 이 실험을 통해 전해질의 전도를 통해 축적한 은의 양을 측정하여 전류의 이동을 입증하였으며, 현대 SI 단위를 정의하기 전까지 전류의 단위 1 암페어는 "1초 동안 0.001118 그램의 은을 축적한 전류의 세기"로 정의했었다. 또한, 패러데이는 계속하여 새로운 은 원자를 제공하는 은막대를 양극(anode), 은 원자가 축적되는 강철 쪽을 음극(Cathode)로 정의하고 전류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이때문에 전류가 실제로는 전자의 흐름이라는 게 밝혀진 오늘날에도 전류의 방향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는 반대로 여전히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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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저항
전기저항(電氣抵抗, )은 도체에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국제단위계 단위는 옴이고 formula_1로 나타낸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간단히 줄여 저항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전기를 얼마나 잘 흐르게 하는 지를 나타내는 물리량은 전기 전도도(電氣傳導度, electrical conductance)라고 하고 formula_2로 나타낸다. 전기 전도도는 전기저항의 역수이다. 개요. 전기저항은 세기 성질과 크기 성질을 모두 보인다. 물질마다 서로 다른 값을 갖는 비저항은 전기저항의 세기 성질이고, 물질의 모양은 크기 성질이다. 전기저항의 비저항(比抵抗, resistivity)은 물질에 따라 서로 다르다. 물체의 저항은 비저항이 클수록, 물체의 길이가 길수록, 단면적이 작을수록 커진다. 어떤 물질의 비저항을 formula_3, 길이를 formula_4, 단면적을 formula_5라고 할 때 저항 formula_6의 크기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보인다. 전기 회로에서 저항은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여 전압 강하를 일으킨다. 따라서 회로의 두 지점 사이의 저항 formula_6은 전압 formula_9와 전류 formula_10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회로의 전기 전도도는 저항의 역수로 나타낼 수 있다. 비저항. 비저항의 크기가 작아 전기를 잘 전달하는 물질을 도체, 비저항의 크기가 커서 전기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물질을 부도체라고 한다. 반도체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특징을 모두 보일 수 있는 물질이다. 잘 알려진 물질의 상온 비저항은 다음과 같다. 온도와의 관계. 물질의 비저항은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온도에 따른 비저항 변화 비율을 저항온도계수라고 하고 일반적으로 formula_13로 나타낸다. 온도의 변화를 formula_14라고 하면 상온 비저항 formula_6에 대한 변화된 비저항 formula_16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전기회로에 사용되는 저항기의 저항온도계수는 1백만분의 1 °C를 기준으로 하는 ppm/°C 로 나타낸다. 금속피막형 저항기의 경우 저항온도계수는 약 ±50 - ± 200 ppm/°C 정도이다. 옴의 법칙. 독일의 물리학자 게오르크 옴이 발견한 옴의 법칙은 전류와 전압 사이에 일정한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법칙이다. 옴은 전압과 전류의 이러한 비례 관계를 토대로 전기저항을 정의하고 다음과 같은 관계를 정리하였다. 온저항. 전기 회로에서 직류와 달리 교류는 일정한 주기를 갖고 전압과 전류가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전압, 전류의 변화는 사인파 형태를 띈다. 따라서 한 주기를 놓고 보았을 때 전체 전압 또는 전류의 총 변화량은 0 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실제 전기 회로가 하는 일의 양은 0 이 아니므로 특정 순간의 전압과 전류의 양인 순시값과 일정 주기에서 실재 투여되는 실효값을 고려하여야 한다. 온저항()은 교류에 옴의 법칙을 적용하여 교류의 전류에 대한 전압의 비를 나타낸 것이다. 약어로는 formula_20가 쓰인다. 회로 이론에서는 영어인 임피던스로 표기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전기 회로가 저항 성분만을 갖는다면 전압과 전류의 위상변화는 없고 온저항 역시 전원의 실효 전압과 실효 전류로만 계산될 수 있다. 그러나, 유도계수를 갖는 유도자나 전기용량을 갖는 축전기는 전류와 전압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순수한 유도계수 회로나 전기용량 회로에서 전압과 전류는 90°의 위상차이를 보인다. 실재 모든 전기 회로는 저항 성분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는 0°와 90°사이의 어떠한 값이 된다. 교류 전기 회로에서 온저항은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여 계산하게 된다. 위상차에 의해 발생하는 저항 성분의 변위 백터를 반응저항이라고 한다. 반응저항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지만 전기 에너지의 일부를 흡수하거나 배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온저항의 값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교류 회로의 전기저항은 빛과 열을 발생시키며 전기 부하의 역할을 하는 실효저항과 유도자나 축전기 등의 위상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반응저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실재 전기 부품은 유도자나 축전기 역시 스스로도 자체 저항값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부품 자체의 실효저항을 직렬 연결한 것으로 파악하는 등가회로를 이용하여 계산한다. 전기용량에 의한 위상 변화는 전류가 전압보다 90° 앞서고, 순수 유도계수에 의한 위상 변화에서는 전류가 전압보다 90°뒤에 놓인다. 어느 경우든 전기회로에서 이러한 위상 변화는 결국 전류 진행 방향에 반대되는 기전력을 일으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이것이 빛과 열을 발생하지 않음에도 이들이 저항으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실효저항은 formula_6, 유도반응저항은 formula_23, 용량반응저항은 formula_24로 표기한다. 유도반응저항 formula_23과 용량반응저항 formula_24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온저항은 실효저항과 반응저항의 제곱평균제곱근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온저항을 formula_20라 하면, 온저항은 반응저항의 위상 변화를 복소평면에 두어 계산할 수 있다. 이때 온저항은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온저항 백터를 나타내는 복소평면에서 허수축은 반응저항에 따른 위상 변화의 발생을 나타낸다. 반응저항이 0보다 크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회로에서 측정하는 두 지점 사이에 흐르는 전류의 위상이 전압 위상의 변화보다 지연된다는 의미이고 0보다 작다면 그 반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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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전력(電力, electric power)은 단위 시간 당 전류가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말한다. 전력의 단위로는 와트를 사용하고 W로 표시한다. 정의. 전기 회로에서 전력은 전류와 전기저항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그림과 같은 단순한 전기 회로에서 전기저항 R은 전류를 소비하면서 열을 발생시킨다. 1840년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 줄은 전기 회로에서 저항에 의해 발생하는 열량이 다음과 같은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줄의 법칙 이라고 한다. 전기 회로의 저항에서 열이 발생하는 까닭은 저항을 통과하는 전자들이 저항 내의 원자들과 충돌하면서 전기적 위치 에너지를 잃기 때문이다. 전자들이 잃은 에너지는 저항 내에 있는 원자들의 진동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결과 열이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하는 열을 줄열이라고 하고 그러한 변환을 formula_2 손실이라고 한다. 전력은 전기 회로 전체가 소비하는 단위 시간당 줄열 발생량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전압은 전류와 저항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위 식은 아래와 같이 간단히 할 수 있다. 따라서 전력은 전압과 전류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구분.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하여 흐르는 전류를 직류라고 하고, 주기적으로 전류의 방향이 바뀌는 전류를 교류라고 한다. 전기 회로에서 저항으로 작용하는 구성 요소인 전기 부하는 직류와 교류에서 서로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전력 역시 직류 전력과 교류 전력의 계산 방식이 다르다. 한편, 교류 전력의 경우 파동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위상에 따른 성질을 지닌다. 직류 전력. 직류 전력의 계산은 전력의 정의에서와 같이 간단히 기전력을 일으키는 전압과 전류의 양으로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전기 회로에 1.5V의 전압으로 300 mA의 전류가 흐른다면 전력은 0.45 W 가 될 것이다. 전기 회로에 여러 전기 부하가 직렬 또는 병렬로 연결되면 전체 전력은 각 부분 부하가 소비하는 전력의 합과 같다. 교류 전력. 교류의 경우엔 계산이 몹시 복잡해진다. 교류는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에 따라 생성되어 일정한 주기를 갖고 방향을 바꾸는 파동 에너지이다. 발전원에 따라 다양한 파형이 있을 수 있으나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쓰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원은 사인파의 형태를 띈다. 교류의 주기는 보통 50 Hz 또는 60 Hz가 쓰이며, 대한민국의 경우 60Hz이다. 교류의 전압과 전류는 아래의 식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순간의 전력은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위의 교류 전력식 P(t)는 일정한 주기를 갖는 주기 함수이다. 교류 전력은 일정한 주기를 갖기 때문에 주기를 단위로 하여 합하면 상쇄되어 0 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매 시각의 전력은 분명 0 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조화 함수를 사용하여 제곱평균제곱근의 양으로 전압과 전류의 실효값를 계산하고 이를 통해 유효 전력을 나타낸다. 교류 전력을 사용하는 전기 회로에서 부하를 통과하는 전류는 부하의 특성에 따라 전압과 전류의 위상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때문에 교류 전기 회로의 전력은 전기저항(Residence), 유도계수(Inductance), 전기용량(Capacitance)에 대하여 따로 계산되기도 한다. 전류가 각각의 부하를 통과할 때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은 저항 성분에서만 발생하고 유도자나 축전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교류의 전체 전력은 조화 함수를 이용하여 아래와 같이 나타낸다. 저항 성분을 통해 발생하는 유효 전력과 달리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의해 소모되는 전력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무효 전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효 전력도 실제 전력 변화에는 관여하기 때문에 유효 전력은 전체 복소 전력의 절대값인 피상 전력을 포함하여 계산하게 된다. 교류 전력 삼각형은 복소 전력과 유효 전력, 무효 전력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역률 개선. 교류 전력에서 실제 부하에 사용되는 전력은 유효 전력이고 무효 전력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효 전력을 높이고 무효 전력을 낮추어야 한다. 위 식에서 보면 유효 전력과 무효 전력의 위상이 0 이 될 때 formula_13가 되어 유효 전력은 100% 사용하고 무효 전력은 0 %로 낮추는 이상적인 상태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전기회로에서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상태는 불가능하므로 최대한 formula_14의 값이 1에 가깝게 되도록 노력한다. 이때 formula_14를 역률이라고 하고 이 값을 크게 하려는 활동을 역률 개선이라고 한다. 단상 전력과 삼상 전력. 교류는 위상을 가지므로 상의 수에 따라 단상전력과 3상전력으로 나뉜다. 상이 하나인 것은 단상, 셋인 것은 삼상이라고 부른다. 삼상은 단상 교류 셋을 위상을 달리하여 결합한 것이다. 단상전력은 위에서 설명한 일반적인 전력 관계식을 따른다. 삼상전력의 상전압 formula_19 과 선전압 formula_20 은 아래의 관계식을 따른다. 삼상전력은 순간 전력 총합이 언제나 일정하기 때문에 전동기를 가동할 때 일정한 전력을 계속하여 공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단상에 비해 전기 누설의 위험이 크므로 사용에 주의하여야 한다. 삼상 전력은 전동차나 대형 에어컨과 같이 전동기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기계에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사용. 전력은 전원을 통해 공급된다. 전원은 크게 보아 직류와 교류로 구분되며 가전제품이나 전자제품은 대부분 직류로 작동된다. 그러나 직류를 발전하여 한 지역에 공급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대규모 전력 공급은 교류로 제공되며 각각의 전기 기기는 정류기를 이용하여 교류를 직류로 변환해 사용한다. 교류를 계속하여 공급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사용하는 기기인 휴대전화와 같은 이동용 기기에는 전지가 사용된다. 송전선과 전력.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류는 송전선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송전선 역시 일정한 저항을 갖는 도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전기가 전달되는 동안 열을 발생시켜 전력 손실이 일어난다. 줄의 법칙에 따라 같은 전력을 전달할 때 전류와 저항은 반비례 관계에 놓인다. 따라서 송전선의 전력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전선의 저항을 낮추거나 전압을 올려야 한다. 전선의 저항을 낮추는 것은 기술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압을 올리는 쪽이 경제적이다. 발전소에서 고압의 전류를 송전하는 이유다. 어떤 경우에는 765 kV까지 전압을 올린 고압 전류를 송전한다. 이렇게 전송된 전류는 도시나 공장과 같은 소비지 근처의 변전소까지 전달되고, 이 곳의 변압기를 통해 22.9 kV로 낮추어진 다음 다시 곳곳에 설치된 변압기를 거쳐 220 V 또는 380V 와 같은 사용 전압으로 낮춰져 쓰인다. 대한민국의 가정용 단상 교류 전압은 220V 이고,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나라에선 110V 가 가정용 소비 전압으로 제공된다. 사이리스터나 인버터 등 전력 전자공학이 발달한 현재는 손실이 적은 고압직류송전방식이 사용되는 구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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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벨기에 왕국(, , , ), 줄여서 벨기에(, , )는 서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이다. 공용어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이다. 역사. 독립. 벨기에는 본래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년) 이후 북부와 분열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93년 프랑스는 벨기에를 합병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벨기에는 북부의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합쳐지게 되었으나 절대주의적 통치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신앙적인 차이로 인해 왈롱인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내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난 1830년, 이 혁명에 자극받은 왈롱인들이 8월 5일경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벨기에 사람들은 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 날을 독립 기념일로 여긴다. 네덜란드가 편성한 진압군은 벨기에군을 간단히 격파하였으나 벨기에를 병합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프랑스의 무력 및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831년 휴전을 맺고 1839년에는 런던조약에 서명하여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여야만 했다. 식민지 개척. 벨기에는 국가로 인정받은 이후 해군(Marine Royale; 1865년에 해체되었다가 1917년에 다시 창설)을 창설하고, 식민지 개척을 장려한다. 레오폴 2세 치하인 1878년에는 콩고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콩고 자유국으로 만들었다.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콩고 자유국에서는 수백만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무력과 착취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집단 살해 사건은 고무 테러라고 불린다. 1899년 조지프 콘래드는 자신의 저서 ‘암흑의 핵심’에서 처음으로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콩고의 참혹한 역사를 처음으로 고발했다. 이 시기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충격적인 책은 1999년 아담 호츠쉴드의 ‘레오폴드왕의 유령:식민지 아프리카의 탐욕과 테러, 영웅주의의 이야기’였다. 호츠쉴드는 이 책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간 수천명과 함께 수많은 콩고 민중들이 상아와 고무에 대해 레오폴 2세가 정한 생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학살을 당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레오폴 2세는 한번도 자신이 사유지화한 콩고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콩고로부터 착취한 자원은 그로 하여금 궁전과 기념비, 박물관을 짓고 어린 딸에게 호화스런 옷과 빌라를 사줄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살당한 콩고인의 수가 10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나 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후 레오폴드의 콩고 자유국 지배의 실태가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는 물론 본국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커졌고 1908년 벨기에 의회는 레오폴드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빼앗아 합병하고 인권침해 금지법안을 제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하여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를 만들어냈다. 한편 이 시기에 르완다, 부룬디에서 형성된 후투족과 투치족의 민족주의가 1990년대 르완다 내전의 불씨가 된다.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 6월 30일에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는 1962년 7월 1일에 르완다 공화국과 부룬디 공화국으로 각각 독립했다. 나치 독일의 지배. 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국토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나라이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해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루뱅에서는 독일군이 자행한 학살로 많은 시민들이 무고하게 죽었다(벨기에 사람들은 이를 루뱅 시 학살 사건이라 하여 추념하며, 루뱅에서는 지금도 독일 국기를 게양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부흥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나라이며 1920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기도 했다. 벨기에 사람들은 레오폴 3세를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레오폴 3세와 전왕(前王)인 알베르 1세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알베르 1세는 전쟁이 터졌을 때 국민과 군인들을 자주 만나고, 자신도 전쟁에 나섰다고 하여 국민들이 칭송하지만 레오폴트 3세는 나치 독일의 군대가 벨기에를 포위할 때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는 1951년에 퇴위를 선언하고, 보두앵을 국왕으로 임명한다. 연립정부. 벨기에는 1993년에 연방 국가로 탈바꿈했으나, 최근 북부와 남부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국왕의 중재 아래 2008년 3월에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 또한 벨기에는 1993년 11월 1일 유럽연합이 탄생되면서 유럽연합의 본부가 설치된 나라이기도 하다. 지리. 벨기에는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한다. 전체 면적은 33,990km2로 저지대를 뺀 온전한 땅만을 취한다면 30,528km2이다. 기후. 쾨펜의 기후구분에 따르면 서안해양성 기후인 Cfb이다. 정치. 이 나라는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헌 군주제이다. 현재 국왕은 필리프 1세다. 정치적으로는 의원내각제를 실행하고 있다. 현재 총리는 혁신운동 출신의 소피 월메스이다. 벨기에는 언어 사용 지역별로 지역주의가 굉장히 강하며, 벨기에 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원내 정당은 지역정당이다. 플랑드르 지역은 신플람스 연맹, 열린 플람스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당과 플람스, 다른 사회당, 녹색당, 플람스의 이익이, 왈롱 지역은 사회당, 혁신운동, 생태당, 인문민주중도당, 데피, 인민당이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무역. 2017년 기준으로 벨기에의 주요 수입출 상대국은 독일(16.61%), 프랑스(14.89%), 네덜란드(12.01%), 영국(8.42%), 이탈리아(4.91%)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네덜란드(17.20%), 독일(13.84%), 프랑스(9.48%), 미국(7.19%), 영국(4.83%)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429,98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06,41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제품(25,532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20,8454백만 달러), 자동차 (11,053백만 달러), 다이아몬드 (10,911백만 달러), 독극물(8,067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제품(18,838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15,831백만 달러), 원유(15,285백만 달러), 자동차(12,648백만 달러), 가솔린(9,243백만 달러)이다. 주민. 전국민의 약 57%를 차지하는 북쪽의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플랑드르인(자신들은 '플라밍'라고 부른다. : Vlaming)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고, 32%를 차지하는 남쪽의 왈로니 지역에서는 왈로니인(왈롱, wallons)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살고 있으며, 벨기에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모로코, 터키와 콩고 (대부분 브뤼셀에 거주) 등지에서 온 이민들이다. 언어. 공식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이다. 벨기에 왕실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구사해야 하며, 미스 벨기에 역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10%를 차지하는 수도 브뤼셀 지역은 법적으로는 네덜란드어 및 프랑스어 두 언어를 병용하지만, 브뤼셀의 주민 8할 이상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나라의 언어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1993년에 개정한 헌법과 그에 따른 연방제의 구조를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독일어 사용지역(벨기에 독일어 공동체)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가 독일로부터 할양받은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 독일의 라인 지방의 일부였던 이 지역을 얻은 1919년에 독일어가 공식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벨기에의 모든 학교에서는 영어가 외국어 필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스페인어 등을 제2외국어로 선택한다. 그리고 왈롱에서는 네덜란드어를, 플란데런에서는 프랑스어를 외국어로 배운다. 종교. 이 나라의 국민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다. 그 밖에도 정교회나 개신교 종파가 존재하며, 이민자들로 인해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다. 군사. 벨기에의 국군 통수권자는 국왕이며, 4만 1천명의 정규군이 존재한다. 행정 구역. 1993년 7월 14일 개정된 헌법은 벨기에를 독특한 연방제 국가로 만들었다. 연방은 세 계층으로 구성된다. 문화. 벨기에는 맥주와 초콜릿, 그리고 벨기에 와플로 유명하다. 또한 스머프와 탱탱의 모험 같은 만화들을 제작해내기도 하였다. 수도 브뤼셀에는 오줌싸개 동상이 있어 세계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언론. 이 나라의 공영방송으로는 네덜란드어권의 VRT, 프랑스어권의 RTBF, 독일어권의 BRF가 있으며, 민영방송으로 네덜란드어권의 VTM, 프랑스어권의 RTL-TVI가 있다. 대외 관계. 대한민국. 한국과의 수교 및 한국전쟁 참전. 벨기에는 1901년에 대한 제국과 수교하였고, 1905년에 단교하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벨기에군과 룩셈부르크 군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보병 1개 대대(일명 벨룩스 대대, 벨기에 대대에 룩셈부르크가 소대 병력으로 합류)를 파병했다. 휴전 때까지 연인원 약 3천500명이 참전해 106명이 전사했다. 2016년 기준으로 생존자는 약 730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사관. 브뤼셀에 대한민국 대사관(주 룩셈부르크 대사관, 주 유럽연합 대표부 겸임)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벨기에 수출은 22억5537만USD, 벨기에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억5033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벨기에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35위의 수출국이자 제38위의 수입국이다. 모두 824 명(재외국민 751명, 시민권자 73명)의 한민족들이 벨기에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2002년 FIFA 월드컵 때는 대표팀이 일본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대한민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으로 갔으나, 1988년 하계 올림픽 때는 벨기에가 서울에 선수단을 직접 파견하였다. 2014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겐트 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섰다. 1995년에는 아시아나항공이 벨기에로 가는 항공편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인해 단항되었다. 한편, 설기현이 벨기에 주필러 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으며 벨기에 선수도 K-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001년에 공식 수교하였다. 이로써 벨기에는 사실상 한반도의 두 개 정부를 모두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파키스탄. 벨기에는 이슬라마바드에 대사관, 카라치와 라호르에 각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파키스탄은 브뤼셀에 대사관, 헨트, 안트베르펜, 그리고 벨기에령 룩셈부르크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6위 규모의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수입국이며, 양국의 무역 규모는 6억 USD에 육박하고 있다. 2008년 초, 파키스탄의 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그의 유럽 순방(영국, 프랑스, 스웨덴 포함) 중에 벨기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브뤼셀 방문 중, 당시 벨기에 총리 히 버르호프스타트와 함께 무역 및 상호 방위 협약에 대하여 논의한 바 있다. 터키. 벨기에는 앙카라에 대사관, 이스탄불에 총영사관, 안탈리아와 이즈미르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터키는 브뤼셀에 대사관, 안트베르펜에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825
19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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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6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6번째(윤년일 경우 177번째) 날에 해당한다.
826
66951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826
도쿄도
도쿄도() 또는 도쿄, 동경은 일본의 수도이며 간토지방에 위치하는 도(都)로, 일본의 도 행정구역 가운데서 인구 수가 2021년 기준 14,049,146으로 가장 많은 지역이다. 동부는 태평양 연안 도쿄만이 접한다. 서부는 구모토리산이 최고봉이며 간토산지가 있다. 도부(23구) 다마지역(26시 3정 1촌) 및 도서부(2정 7촌)로 이어져 있고, 현청 소재지는 신주쿠구에 있다. 행정기관, 금융기관이나 대기업 등이 집중되어 신문·방송·출판 등의 문화면, 대학·연구기관 등의 교육·학술면에서도 일본의 중추를 이룬다. 교통면에서도 철도망, 도로망, 항공로의 중심이며, 경제, 문화, 교통, 상업, 금융 등 여러 부분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이다. 도쿄도와 주변 7현으로 수도권을 구성하고 있다.특히 도쿄권(도쿄도,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의 총인구는 약 3500만명에 달해, 일본 인구의 약 30%를 차지한다. 개요. 관할하는 영역은 도쿄도 구부(도쿄 23구), 다마 지역(26시,3정 1촌) 및 도쿄도 도서부(오시마, 미야케, 하치조, 오가사와라) 4개의 지청(2정 7촌)이 구성되어 있다. 오키노토리 암초와 미나미토리섬을 오가사와라 제도를 포함시키기 위해 일본의 극점에 위치한 도도부현이다. 도가 공인한 '도쿄도'의 영어 표기는 Tokyo Metropolis (Tokyo Met.) 그 외 Tokyo Prefecture와 Tokyo Metropolitan Prefecture가 있다. 인구는 2021년 7월 1일 기준으로 14,049,146명으로 돌파했으며. 일본 도도부현 중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으며 일본 인구의 약 11%를 차지하고 있다.인구밀도도 도도부현 안에서 가장 높다.도쿄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쿄 도시권은 인구 3700만명을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권이다.일본 인구의 대략 3할이 집중해, 폴란드나 모로코, 캐나다 등의 나라의 총인구에 필적한다. 도쿄는 에도 막부가 놓인 예전의 에도가 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시 계획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 막말에는 동란을 거쳐 메이지 원년의 문서로부터 「도쿄」라고 표기되었다. 1869년 2월 11일 헤이안쿄 (교토)로부터 천도되어 (도쿄전도, 옛 수도 목록을 참고하라) 1878년에 부제가 시행되면서 도쿄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7월 1일 수도의 행정구역을 강화할 목적에서 도쿄도제를 시행하였다. 이로써 도쿄부와 도쿄시가 폐지되고 이를 통합하는 형태로 도쿄도가 설치된다. 종전 후인 1947년 일본 지방자치법이 시행에 따라, 1943년에 도쿄도제는 폐지되었지만, 「도쿄도」의 명칭과 행정 구역은 변경하지 않았다.즉 도쿄도제에 의해 도의 직할로 여겨진 구는 지방자치법 시행에 의해 특별지방공공단체인 특별구가 되어 시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일부 사무나 징세권은 계속해서 도에 유보된다. 이 때문에 도쿄도청은, 지금도 「23구를 포괄하는 시청으로서의 기능」과「현청으로서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도쿄도의 의결기관인 도쿄도의회가 설치되었으며 수장인 도쿄도지사가 역할을 한다. 그 권능은 일본 지방자치법에 의해 정해져 있으며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임기는 4년. 지사 보좌직으로 도쿄도 부지사가 4명으로 놓여진다. 2017년 4월 현재 도청의 직원 수(이른바 '도의 직원')는 지사부국 등의 일반행정직원이 약 2만 5천명이며 공기업 부문(교통, 상수도, 하수도이 1만 3천명이고 또한 도쿄 소방청및 경시청 직원, 도쿄도 내의 국립학교 교직원까지 합치면 총계 약 16만 8천 명이다. 도쿄도청사 (본청사)는 오랫동안 지요다구 유라쿠초에 있다가 1991년 4월 1일에 신주쿠구 니시신주쿠로 이전하였다. 이전에 따라 지방자치법에 따라 조례가 개정되어 이후 도청 소재지는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신주쿠 2초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 등의 도청 소재지 표기는 편의상 '도쿄'가 사용되어 국토지리원에 따르면 도쿄 이외의 도부현청 소재지는 시의 명칭을 사용하는데 반해, 도쿄의 경우는 실제 소재지인 신주쿠구를 포함한 23구를 통합하여 '도쿄'로 표기한다. 교과서에서도 국토 지리원과 같이 「도쿄」라고 하고 있는 것이 많다. 특별구가 시정촌이 아닌점, 시정촌이 가지는 업무 권한의 일부를 가지지 않은 점, 구부가 과거 도쿄시라는 하나의 시였던 점 등이 원인이 된다.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도시에 속하며, 일본의 민간 연구소가 2016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도시에서는 뉴욕, 런던과 함께 뒤이어 세계 3위로 평가되었다. 이코노미스트의 조사 부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에 의해 2021년도 조사에서 도쿄도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세계 5위이며 아시아에서는 1위로 선출되었다. 또, 미국의 싱크탱크 또한, 2020년 세계도시 랭킹(GCI 2020)에서는 뉴욕과 런던 파리가 세계 4위의 도시로 평가되었으며 영국기관이 발표하고 있는 2021년의 세계금융센터지수에선 세계 7위, 아시아 5위의 금융 센터로 평가되었다. 세계 경제권 명목 GDP 순위로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간토 지방이 전 세계 유일하게 2조 달러를 넘은 지역으로 세계 1위이다. 수도. 도쿄 도심은 예전의 에도에 해당하며, 에도 막부 성립 이래 일본 정치·행정의 실질적인 중심지였다.1868년에 헤이안쿄에서 에도로 황궁과 태정관 등의 수도 기능이 이동했다고 하여(도쿄전도) 그 후 에도를 도쿄부로 개칭하고 수도가 되었다. 대일본제국기에는 제도라고도 불린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3년 도쿄부와 도쿄시가 통합되면서 다시 도쿄도가 수도가 됐다. 전후인 1950년에 도쿄도를 일본의 수도로서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수도건설법이 시행되었으나, 이 법은 1956년에 수도권정비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수도건설법 폐지로 도쿄도는 법적으로는 일본의 수도라는 근거가 없지만, 일본국 정부의 공식견해나 공문서상으로는 수도로 여겨져 도쿄도에 일본의 중추기능이 존재하고 있다. 2018년 2월에는 중의원 의원 아이사카 세이지의 질문에 대해 "수도를 도쿄라고 직접 규정한 법령은 없지만, 도쿄도가 일본의 수도라는 것은 사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정부 견해가 나왔다. 또, 수도권 정비법에서는, 도쿄도는 수도권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어 도쿄도의 공식 영어 표기 「Tokyo Metropolis」의 metropolis에는 「대도시, 대도시권」외에 「수도」의 의미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도쿄도를 수도로 직접 규정하는 것은 일본 헌법 및 일본 법률에는 없지만, 수도로서 그 중심부(특히 도쿄 23구)에 일본 정부의 국회의사당, 내각총리대신관저와 주요 부처, 최고재판소를 비롯한 3권의 중추기관이 설치된다. 이 밖에도 법률에 의해 그 기관을 도쿄도에 두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있다 역사. 도쿄는 원래 작은 어촌으로 에도라고 명명되었다. 1457년에 오타 도칸은 에도 성을 세웠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를 근거지로 삼아 1603년에 쇼군이 되었으며 도시는 막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의 18세기 무렵에 인구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263년 후에 막부는 메이지 유신 하에 전복되었다. 1869년에 17세의 메이지 천황은 에도로 천도하였다. 에도는 이미 일본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있었고 예전의 에도 성은 고쿄가 되었다. 1889년 도쿄부 동부에 도쿄시가 설치되었다. 도쿄는 20세기에 두 번의 대재해를 겪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번은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14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또 한번은 1945년의 도쿄 대공습으로 7만 5천 명에서 최대 20만 명이 사망하였고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1943년에는 도쿄부와 도쿄시를 도쿄도로 합쳤고, 이전의 도쿄시 지역은 도쿄도 구부(東京都區部)로 불리게 되었다. 전쟁 후에 도쿄는 완전히 재건되었고 196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에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는 선샤인60과 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섰고 1978년에는 도쿄 인근 지바현 나리타시에 나리타 국제공항이 건설되었으며 인구는 증가하여 도쿄도의 인구는 1,1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도쿄 지하철과 통근 철도망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곳이 되었다. 1980년대에 도쿄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여 버블을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에 버블이 터지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한 많은 회사와 은행, 개인들은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다. 경기의 후퇴가 뒤따르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쿄는 여전히 많은 곳에 새로운 도시 개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의 계획으로는 에비스 공원과 덴노즈 아일, 시오도메, 롯폰기 힐스, 시나가와, 도쿄역의 마루노우치 부분이 포함된다. 중요한 건물들이 오모테산도 힐스와 같은 최신식 쇼핑 시설을 위해 헐리고 있다. 도쿄의 토지 매립 계획 또한 몇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다이바 지역으로 현재 쇼핑과 오락의 중심지이다. 2020년에 두 번째로 개최되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인프라를 비롯한 자본 정비가 새롭게 추진되어 갈 예정이다(2020년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확인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의 영향으로 도쿄 대회는 2021년으로 연기 예정이다) 지리. 도쿄도의 본토 부분은 도쿄만의 북서쪽에 놓여있고 대략 동서의 길이는 90 km, 남북의 길이는 25 km 정도이다. 동쪽으로 지바현, 서쪽으로 야마나시현, 남쪽으로 가나가와현, 북쪽으로 사이타마현과 접한다.구와 서부의 다마 지역으로 나뉜다. 또한 도쿄도의 행정 경계는 정남쪽의 두 개의 태평양의 열도를 포함한다. 하나는 이즈 제도이고 또 하나는 일본 본토에서 1000 km 이상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이다. 이들 섬들과 서부의 산지 지방 때문에 도쿄도의 인구 밀도는 도쿄의 도시 및 교외 지역의 실제 인구 밀도보다 훨씬 낮게 나타난다. 도쿄 23구. 도쿄도의 특별구는 예전에 도쿄시를 이루었다. 1943년 7월 1일에 도쿄시는 도쿄부와 합쳐져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합병의 결과로서 일본의 다른 구들과 달리 특별구는 어떤 대도시의 일부로 취급되지 않는다. 각각의 구들은 일본의 다른 도시들처럼 각자의 시장과 의회를 선출한다. 이들 구들은 도 정부와 독특한 행정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들과 다르다. 수도, 하수, 소방과 같은 일부 지자체의 기능은 도 정부가 다룬다. 이러한 행정 비용을 위해 도 정부는 구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 사실상 일본의 수도·경제·정치·방송을 담당하며 관동지방이나 동경 경제권의 중심지이다. 도쿄 23구(동경 23구)는 다음과 같다. 다마 지역. 1943년 이전에는 도쿄부에 속했던 지역이다. 도쿄 23구의 서쪽에 위치하며 시와 정, 촌으로 이루어져있다. 도쿄 중심가의 업무 기능을 위한 '침상도시' 역할을 하며 일부는 지역의 상업과 공업의 기반이다. 도쿄 23구는 물론 도쿄도와 붙어있는 가나가와현보다도 집값이 싼데다가 전철노선이 잘 갖추어져있어 이곳에서 도쿄 23구 혹은 요코하마 등의 다른 대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 다마 지역에는 26개의 도시가 있다. 도쿄도 정부는 도쿄 중심의 도시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하치오지시(), 다치카와시, 마치다시, 오메시, 다마 신시가지는 다마 지역의 지역 중심지로 지정하였다. 군, 정, 촌. 도쿄도의 극서부에는 니시타마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산지로 도시화에 적합하지 않다. 도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구모토리산(2017m)를 비롯해 다카수산(1737m), 오다케산(1266m), 미타케산(929m)이 이곳에 있다. 야마나시현 주변의 다마강에 위치한 도쿄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오쿠타마호가 있다. 도서 지역. 도쿄도에는 특별구의 도심으로부터 1850km까지 뻗어있는 수많은 외곽의 섬들이 있다. 신주쿠의 도청사와 섬들의 거리 때문에 지역 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한다. 이즈 제도는 화산 열도로 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섬들로는 도쿄 본토에서 가까운 순으로 이즈오섬, 도시마, 니지마섬, 시키네섬, 고즈섬, 미야케섬, 미쿠라섬, 하치조섬, 아오가섬이 있다. 이즈오섬과 하치조섬은 정이다. 섬들에는 6개의 촌이 있으며 니지마와 시키네섬은 하나의 촌을 이룬다. 도쿄도에는 오가사와라 제도가 포함되며 섬들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치지마섬, 니시노섬, 하하지마섬, 기타이오섬, 이오섬, 미나미이오섬이 있다. 오가사와라 지청은 또한 두 개의 조그마한 섬을 관할한다. 하나는 미나미토리섬으로 일본의 최동단에 있고 도쿄 중심부에서 1850 km 떨어진 가장 먼 섬이다. 또 하나는 오키노토리섬으로 일본의 최남단에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사람이 살지 않는 암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잔 열도와 외곽의 섬들은 영구적인 정착민은 없지만 자위대가 상주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오직 지치지마 섬과 하하지마 섬에만 살며 이 섬들은 오가사와라촌을 이루고 있다. 국립 공원. 도쿄도에는 다음과 같은 국립공원들이 있다. 상징. 도쿄도는 공식적으로 2개의 상징물이 있다. 하나는 문장(紋章)이고 나머지는 심벌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상징물이 들어간 깃발도 공식적으로 쓰인다. 문장. 도쿄도문장(東京都紋章)은 1943년 11월 2일부터 쓰이고 있으며 제 9대 도쿄도지사와 귀족원의원(현재의 참의원)을 지낸 와타나베 히로모토가 디자인하여 1889년 12월부터 쓰인 도쿄시의 문장과 같다. 고시 제 464호로 인하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6개의 햇살이 뻗어가는 태양을 나타내며 도쿄가 일본의 중심임을 나타낸다.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색이 채택되지 않았다. 이 문장은 간지인 東京(도쿄)의 京(쿄)를 닮았지만 고시에서는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쿄도기(東京都旗)는 1964년 10월 1일부터 쓰이고 있으며(고시 제 1042호) 진보라(江戸紫, 에도의 전통색)색 바탕의 중심에 하얀색의 도쿄도문장이 가운데에 들어가 있다. 비율은 2:3이다. 심벌. 도쿄도의 심벌마크(東京都のシンボルマーク)는 1989년 6월 1일 고시 제577호로 채택되었다. 디자인은 도쿄도심벌마크전형위원회의 20명의 지원자가 선택한 것으로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인 레이 요시무라(レイ吉村)가 만든 것이다. 선명한 초록색 심벌을 3개의 호가 있는 은행나무(도쿄도의 나무)의 잎이며 Tokyo의 T를 나타낸다. 도쿄도심벌기(東京都シンボル旗)는 1989년 9월 30일 고시 제 978호로 채택되었다. 도쿄도의 심벌마크가 흰색 바탕의 기 중앙에 있다. 비율은 2:3이다. 기후. 도쿄는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로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온화하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연평균 기온은 15.9℃이다. 눈보라가 이따금씩 발생하며 거의 매년 태풍이 찾아온다. 장마가 6월 중순경부터 시작되므로 봄·가을에 여행하는 것이 좋다. 인구. 2016년 6월 기준으로 도쿄 도의 인구는 13,613,660명 도쿄 23구의 인구는 896만 7천 명으로 추정되었다. 주간에는 인접한 지역으로부터 통근하는 250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이 결과 도심인 지요다구, 주오구, 미나토구의 2005년 인구는 야간에는 32만 6천 명이지만 주간에는 240만 명에 달했다. 도의 인구는 주간에는 300만 명 이상 증가한다. 도쿄의 인구가 절정에 달했던 1965년에 23구의 인구는 889만 3094명에 달했고 1995년에 80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현재 인구는 전에는 14만명을 넘어섰으나 최근엔 도쿄도 전체 인구는 13,971,109명으로 하락했으며 최근 문서상에 따르면 인구조사에서 10,673명이 유출 된것으로 확인되었다. 결정적인 원인은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와 밀집지역 기피현상이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했다. 2005년에 도쿄 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중국인 (123,661), 한국인 (106,697), 필리핀인 (31,077), 미국인 (18,848), 영국인 (7,696), 브라질인 (5,300) 프랑스인 (3,000) 순이었다. 고령자. 2010년 시점에서 도쿄도의 고령화율은 20.4%이며 즉 고령자가 5명 중 1명에 이르고 있다,(향후 노인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2020년에는 도쿄에 사는 4명 중 1명이 고령자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독신 고령자는 2010년 시점에서 62만명이다.(그 10년 후인 2020년에는 80만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됨) 연소자. 도쿄도의 연소자(0~14세) 인구는, 이미 노인 인구보다 작다.(장래에도 감소가 전망된다). 주간 인구 및 야간 인구, 주간 유입 인구. 2015년 기준 도쿄도의 주간 인구는 약 1592만명이며 그에 비해 야간 인구는 1352만명이나 되고 이는 도쿄도 내의 직장으로 통근하는 사람들과 도내의 학교로 통학하는 사람들로 인해 낮에 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낮에만 도쿄에서 주변의 도도부현으로 통근·통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수보다 유입되는 인구가 더 크므로 차감하여 낮에 241만 명이 많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마 지역과 도쿄 주변현(인접하지 않는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의 남부 포함)에는 도쿄의 베드타운이 점재하며 시즈오카현 동부와 니가타현 남부 등에서의 신칸센 통근자도 존재한다. 23구 지역으로의 주간 유입 인구는 1980년에 266만명이던 것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5년에 372만명으로 정점을 맞았으며 그 후에는 서서히 감소해 2015년에 318만 명이 되었다. 주간 유입 인구가 많다는 것은 이들이 구 지역에서 낮에 다양한 활동(생산 활동이나 소비 활동)을 벌여 활기를 주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재해시에는 대량의 귀가 곤란자가 생기는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의미한다[동일본 대지진 때에는, 도쿄도에서 약 352만명이 귀가 곤란자가 되었다고 추계되었다(내각부가 2011년 11월 22일에 발표한 인터넷 조사에 근거하는 추계.자세한 것은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귀가 곤란자」의 기사를 참조할 것). 행정. 《일본 지방자치법》 하에서 도쿄는 도(都)로 지정되어 있다. 행정 구조는 일본의 다른 도도부현과 유사하다. 도쿄도는 1943년까지 도쿄시를 이루었던 23개의 특별구를 포함하며 이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각자의 구장과 의회를 가지고 있어 사실상 도시의 지위를 가진다. 도쿄도는 또한 각자의 지역 정부를 가진 26개의 시와 5개의 정, 8개의 촌을 포함한다. 도쿄도 정부는 공개적으로 선출된 도지사와 도 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도쿄도청은 신주쿠구에 있다. 도 정부는 호수, 강, 댐, 농장, 먼곳의 섬, 국립 공원과 번화가, 마천루, 지하철 등을 포함한 도쿄의 모든 것을 관할한다. 교육. 도쿄에는 많은 대학, 전문 대학, 직업 학교가 존재 하고 있다. 많은 일본의 권위있는 대학들이 도쿄에 있다. 사립 대학. 구와 지자체에 의해 운영되는 공립 유치원, 소학교(1학년~6학년), 중학교(7학년~9학년)이 있다. 도쿄의 공립 고등학교는 도쿄도 교육위원에 의해 운영되고 "도 고등학교"로 불린다. 그밖에 도쿄에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많은 사립 학교가 있다. 경제. 도쿄는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 3대 금융 중심지 중 하나이다. 또한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권 경제이다. 도쿄도의 2019년 총 GDP는 115조 7000억 엔로 세계의 도시들 중 1위를 차지했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목록에서 도쿄에 기반을 둔 기업은 51개로 2위 파리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도쿄는 주요 국제 금융 중심지이고 몇몇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과 보험 회사들의 본사가 입지해있으며 일본의 교통, 출판, 방송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중앙집권화된 성장에 따라 많은 대기업들이 정부와의 더 좋은 접근성을 얻기 위해서 역사적인 상업 수도인 오사카 같은 도시에서 도쿄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도쿄의 지속적인 인구 성장과 높은 생계 비용 때문에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도쿄는 이코노미스트에 의해 2006년까지 14년 동안 생계 비용이 가장 비싼 도시로 선정되었다. 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 일본 경제의 중추는 도쿄에 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일본에서 가장 큰 증권 거래소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증권 거래소이다. 1990년의 일본 자산 가격 버블 때 도쿄는 세계 주식 시장 가치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2003년에 도쿄도의 경작지는 8460헥타르였다. 농지는 주로 도쿄도의 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상하기 쉬운 야채, 과일, 꽃을 편리하게 도의 동부로 선적할 수 있다. 고마츠나와 시금치는 가장 중요한 야채로써 2000년에 도쿄도는 중앙 생산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마츠나의 32.5%를 공급하였다. 전체 면적의 36%가 숲으로 덮여있고 도쿄도의 서부 산지에서는 삼나무와 편백이 광범위하게 자란다. 목재 가격의 하락, 생산 비용의 증가, 임업 인구의 노령화로 도쿄도의 생산량은 감소하고 있다. 도쿄만은 한때 주요 어장이었으며 현재 도쿄도의 어업 생산량 대부분은 이즈오섬, 하치조섬과 같은 바깥의 섬들로부터 온다. 가다랑어, 노리(김), 전갱이과가 대양에서 생산된다. 관광업 또한 도쿄의 경제에 상당 부분 기여를 한다. 교통. 공항. 도쿄도에는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 조후 비행장, 오시마 공항, 미야케지마 공항, 하치조지마 공항,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이 있다. 도쿄 국제공항(東京国際空港)은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라고도 불리며, 오타구 남부에 위치하여 있다. 1978년 5월, 나리타 국제공항이 개항한 이후로는 국내선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2010년 10월에 신 국제선 터미널이 완공되었다. 도심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일본 정부의 전용기, 국빈급 승객이 이용하는 일본 이외 국가의 특별기도 도쿄 국제공항을 많이 사용한다. 도심과의 교통수단으로는 터미널 바로 아래에서 탈 수 있는 도쿄 모노레일과 게이큐 선이 있으며, 이외에도 리무진 버스가 공항과 도쿄도 내 또는 인근 도도부현의 주요 역, 주요 호텔 등을 잇는다. 이외에 노선 버스나 택시 등도 이용할 수 있다. 도쿄 국제공항에서 발착하지 않는 국제선은 주로 지바현 나리타시에 있는 나리타 국제공항(成田国際空港)에서 발착한다. 개항 당시에는 도심에서 공항으로의 교통수단이 히가시칸토 자동차도를 경유하는 리무진 버스와 터미널에서 가까웠던 당시의 나리타 공항역(현 히가시나리타 역)까지 운행하였던 게이세이 전철의 스카이라이너 뿐이었지만, 1991년 3월부터 공항 터미널 바로 아래에 역이 신설되어(제3터미널 제외) 동일본여객철도와 게이세이 전철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쿄도 도심부에서 공항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되며, 2010년 7월에는 나리타 고속철도 액세스가 개통하였다. 다마 지역에는 조후 비행장(調布飛行場)이 있으며, 신추오항공이 이즈 제도로의 정기편을 운항하고 있다. 다른 공항들은 도서 지역의 공항이다. 이즈오섬에 있는 오시마 공항(大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 하치조지마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미야케지마 공항(三宅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하치조지마 공항(八丈島空港)에는 하네다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에는 공항이 없으며, 교통 상황의 개선을 위해 공항을 건설해야 하는가, 자연 보호를 위해 건설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철도. 도쿄에 위치한 역수는 654개 역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의 도도부현에서 가장 역수가 많아 가장 면적이 넓은 홋카이도의 522개 역을 비교해도 100개 역을 많이 가지고 있다. 동일본여객철도의 야마노테선이 순환선을 운행하고 있으며 연선을 주기적으로 이어지는 도쿄역, 시나가와역, 시부야역, 우에노역, 이케부쿠로역 등의 역이 철도 각선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에노 도쿄 라인과 게이힌 도호쿠선, 요코스카·소부 쾌속선등이 운행을 하고 있으며 그외에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까지 직통 열차가 하루종일 운행되고있다. 문화. 도쿄에는 많은 박물관들이 있다. 우에노 공원 안에는 네 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중 하나인 도쿄 국립박물관은 일본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전통 일본 예술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국립서양미술관과 4만 개가 넘는 일본과 외국 영화를 비롯해 많은 일본 현대 예술품들을 소장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또한 우에노 공원에는 국립과학박물관과 우에노 동물원이 있다. 다른 박물관으로 아오야마의 네주 미술관과 도쿄 도심에서 스미다강 너머 스미다구의 에도-도쿄 박물관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고쿄 주변에 위치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도쿄에는 공연을 하는 많은 극장들이 있다. 이들은 노와 가부키와 같은 일본 전통극을 공연하는 많은 국영 및 민영 극장들을 포함한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다른 음악 협회들이 서양과 일본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도쿄에서는 또한 친숙한 클럽에서부터 국제적으로 알려진 일본 무도관까지의 다양한 곳에서 일본 현대음악과 서양의 팝과 락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도쿄에서는 많은 축제들이 열린다. 주요 행사로 히에 신사의 산노, 아사쿠사 신사의 산자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신전제가 있다. 해마다 7월의 마지막 토요일에는 스미다강에서 성대한 불꽃 축제가 열리고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봄에 벚꽃이 만개할 때 많은 도쿄의 시민들이 우에노 공원, 이노카시라 공원, 신주쿠 교엔으로 소풍을 나온다. 시부야와 이웃한 하라주쿠는 젊은이들의 스타일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도쿄의 주요 지하철역들에는 대규모 쇼핑센터들이 들어서 있다. 쇼핑 지구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백화점과 고급 상점들, 극장, 레스토랑 들이 모여 있는 긴자이다. 간다 지역에는 백여 개의 고서점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아키하바라에는 전자제품과 컴퓨터 및 부속 기기 등을 취급하는 대규모 쇼핑센터들과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다. 스포츠. 도쿄는 일본 스포츠의 중심이다. 야구, 축구, 스모 프로 팀들이 경쟁하고 있으며 1964년 하계 올림픽과 2020년 하계 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2개의 프로 야구팀이 도쿄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데,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메이지 진구 구장)과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이 그것이다. 일본 스모 협회의 본부 또한 도쿄의 료고쿠 국기관 스모 경기장에 있고 이 곳에서 매년 3회(1월, 5월, 9월)에 스모 대회가 열린다. J리그에는 도쿄 베르디, FC 도쿄, FC 마치다 젤비아 3개 구단이 도쿄 도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도쿄 23구를 직접 연고지로 하는 J리그 소속 구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쿄는 1964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이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수많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열렸다. 세계적인 수준의 개최지로서 도쿄에서는 종종 테니스, 수영, 마라톤, 미식축구, 유도, 가라테 대회와 같은 국내외의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 시부야구 센다가야에 있는 도쿄 체육관은 수영장, 훈련실, 커다란 실내 경기장을 포함한 대형 스포츠 복합단지이다. 2020년 하계 올림픽이 도쿄에서 개최됨에 따라 새로운 도쿄 신국립경기장이 건립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많은 스포츠 시설들이 개보수중이다. 자매 결연 도시. 단, #표시는 우호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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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대학이다. 대한제국 광무 9년인 1905년 이용익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로 출발하였다. 을사조약이 학교 설립 이후 체결되자 이용익이 망명하여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가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김성수가 1932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46년 4년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며 고려대학교로 개칭하였다. 1952년 12월에는 문과대학을 문리과대학으로 개편하고 1971년에는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흡수 합병해 이공·인문·의예·예체능 관련 학과를 고루 갖추게 됐다. 고려대학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1960년 4·19 혁명의 촉매제가 된 4·18 의거를 비롯한 각종 시위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4월에 공포한 긴급조치 제7호는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상징 동물은 호랑이, 교색(校色)은 크림슨, 교목(校木)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철쭉이며, 교훈(校訓)은 ‘자유·정의·진리’()이다. 약칭으로 고대(高大)라고 불린다. 연혁. 고려대학교의 모태. 고려대학교의 모태는 대한제국 내장원경 이용익이 1905년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다. 1932년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했고 1934년에는 안암동에 현재의 자리로 학교를 옮겼다. 1944년 학교 이름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변경했다. 광복 이후. 종합대학으로의 승격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의 흡수·합병. 1946년에는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개칭됐으며, 이와 동시에 종합대학으로의 설립이 인가됐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본교는 애기능 인근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이는 후일 이곳에 이공계캠퍼스가 자리 잡는 기반이 된다. 1971년 12월에는 1970년에 시작된 장기발전계획에 따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흡수 및 합병하였다. 반복적인 시위와 잦은 휴교 사태. 1960년 4월 11일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과 관련하여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들의 주도로 수많은 학생들이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할 것을 요구하면서 장외시위를 벌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매년 4월 18일에 4·18 의거로 기록되는 독재정권에 맞선 선배들의 정의로운 행동을 계승하기 위해 ‘4·18 구국대장정’ 행사가 열린다. 구국대장정 행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연례 행사 단락을 참조하도록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휴교 사태가 빈발한 시기이기도 하다. 1965년 9월 4일에는 한일협정 반대시위 사태로 무기한 휴업 명령을 받았으며, 1971년 10월 15일에는 27일 간의 강제 휴교 조치를 동반한 교내 군 투입 및 위수령 조치가 단행되기도 하였다. 1975년 4월에는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제7호가 발동되기도 하였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독재정권을 향한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교육시설의 확충.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중앙도서관 구관이 1935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개관한 데 이어 1975년에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앙도서관 신관을 신축하여 1978년 3월에 개관하였다. 1973년 10월 서독 정부의 무상원조에 의해 농과대학 캠퍼스가 준공돼 1977년부터 활용되기 시작되는 한편 1978년 5월 착공한 기숙사가 1979년 11월에 준공돼 이듬해인 1980년 3월에 개관하였다. 한편 당국의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에 따라 1980년 1월에 8개 학과, 초기 정원 400명 규모의 조치원분교 설립이 인가됐는데 이것이 현재의 세종캠퍼스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 2000년대 이후. 졸업요건의 변화. 200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화 되는 추세에서 고려대학교 졸업자의 실력은 세계적인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Global KU 프로젝트’ 등의 영향으로 졸업요건이 대폭 강화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2000년 3월 신입생부터는 졸업 인증제도로 인해서 TOEIC 및 TOEFL 등 일정 수준 이상의 공인영어 성적을 획득하여야 졸업이 가능해지게 됐으며, 2004년 3월 신입생부터는 한자 2급 수준의 졸업요건이 신설됐으나 2011년 들어 일부 학과들이 이 요건을 폐지하였다. 또한 2004년 3월 신입생부터는 심화전공이나 이중전공, 연계전공, 이렇게 세 가지 항목 가운데 한 가지를 의무적으로 선택하여 학생설계전공으로 세분화할 수 있는 제2 전공을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게 됐다.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 2005년에는 고려대학교가 개교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같은 해 5월 5일에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2003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출범 및 지층에 7천평 규모의 1백주년 기념관에는 박물관과 디지털 도서관을 건립 하는 등 교내에서 다양한 기념사업들이 추진됐다. 한편 고려중앙학원에서는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3대 마스터플랜을 기획, 중앙광장과 백주년기념관, 화정체육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 가운데 중앙광장이 2002년 3월에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이후 백주년기념 삼성관과 화정체육관이 각각 2005년, 2006년에 건립됐다. 위상. 세계 대학 순위 평가. 어윤대 총장의 재임기간 동안 고려대학교는 2006년 영국 《타임즈》지가 발표한 세계대학순위에서 종합 150위에 오르는 등 많은 성과를 기록하였다. 사회과학·경영, 인문·예술, 자연과학, 생명과학·의학, 공학·기술 분야에서 조사를 시행한 ‘2012 조선일보·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 고려대학교는 경영학, 법학, 행정학, 교육학 등이 포함되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시아 12위를 차지한 바 있다. 한편,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은 2009년 경영대학 평가 전문기관인 이 전 세계 경영대 학장 10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추천하고 싶은 대학’ 국내 1위에 올랐으며, 2010년 대한민국 경영대 평가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2012년 랭킹에서는 86위에 올라 대한민국 대학 중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MBA는 교육과학기술부의 BK21 평가에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였다. BK21의 후속 사업인 BK21 플러스의 2013년 초기 선정 결과도 사업단 수와 지원 금액에서 서울대학교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으며, 특히 공과대학의 모든 분야가 Bk21 플러스에 선정됐다. 대한민국 경영대학 가운데 AACSB와 두 곳의 인증을 최초로 받은 곳 역시 고려대학교다. 2011년에 신규 임용된 42기 사법연수생 가운데 고려대학교 출신자는 189명으로 서울대학교 다음으로 많았다. 2009년에 치러진 51회 사법시험에서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서 155명의 합격자를 내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기도 하였다. 세계 대학 평가 기관. 고려대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3대 세계 대학 평가 기관(중화인민공화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 영국 타임스 고등교육 세계 대학 평가를 뜻한다)이 2015년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나타냈다. 중화인민공화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에서 연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과대학교, 성균관대학교와 함께 공동 201~300위를 기록했다.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에서는 104위로 연세대학교를 제치며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했고, 영국 타임스 고등교육 세계 대학 평가에서는 연세대학교와 공동 200~225위를 기록했다(아시아 대학 순위에서는 26위로, 28위를 차지한 연세대학교를 제쳤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 평가 기관인 US 뉴스&월드 리포트에서는 157위로 대한민국 대학들 중에서는 서울대학교의 뒤를 이어서 2위를 차지했다. 거기다가 상하이 자오퉁 대학이 가장 최근에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에서는 224위로 대한민국 사립대들 중에서는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2015년 세계대학평가 기관인 QS가 발표한 세계대학평가 학과별 평가에서 고려대학교는 전체 평가 항목 36개 분야 중 20개 학과에서 세계 100위권 이내에 들어 대한민국 사립대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성과를 보였다. 최근의 세계 대학 평가 결과. 2016년 9월 발표한 QS 세계대학평가에서는 전년 대비 6순위 상승한 98위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종합사립대학으로서는 가장 먼저 세계 100위 안에 진입한 대학이 됐다. 대한민국의 세계 대학순위 100위권에는 고려대학교 외에도 세 곳이 포함되었으며 국립 대학인 서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과대학교 등이다. 2017년 전년 대비 8순위 상승한 90위에 등극하였다. 2018년에는 전년 대비 4순위 향상한 86위에 등극하였다. 2018년 QS 세계대학평가 기준으로 100위 안에 진입한 대한민국 대학은 고려대학교(86위)를 포함해 서울대학교(36위), 한국과학기술원(40위), 포항공과대학교(83위), 성균관대학교(100위) 등 총 다섯 곳이다. 개설 학과·전공.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다. 학부 과정. 2022년 기준으로 본교인 서울캠퍼스에는 12개 단과대학이, 분교인 세종캠퍼스에는 5개 단과대학이 설치돼 있다. 2009학년도부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개원함에 따라 법과대학은 폐지되었으며, 대신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여 기존의 법학과 신입생 정원을 대체하고 있다. 사이버국방학과는 정보대학 소속의 학과로 국방부와의 협약을 통해 2012년에 처음 개설된 학과이다. 컴퓨터교육과의 경우 2014학년도를 시작으로 컴퓨터학과로 개편되면서 더이상 사범대학이 아닌 정보통신대학의 소속으로 변경됐다. 일부 학과에서는 학부제로 모집을 하며 학부제로 입학한 학생의 경우 2학년 진급시 자신의 전공을 배정받는데, 전공을 배정하는 기준은 단과대학 사정에 따라 다르게 설정돼 있다. 학부과정에서는 2004년 입학생부터 심화전공, 이중전공, 융합전공, 학생설계전공으로 세분화할 수 있는 제2전공의 이수가 의무화 돼있다. 복수의 학과·학부가 협력하여 개설한 융합전공은 2004년에 처음 도입됐다. 2004학번부터 이수가 의무화 된 제2전공의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 대학원 과정. 일반대학원과 전문대학원, 특수대학원으로 구분돼 있다. 의학전문대학원의 경우 전문대학원 53명을 의학과 53명과 병행하여 임시로 운영하였으나 2015년에 폐지됐다. 2009년에 개원한 법학전문대학원은 120명을 배정받았다. 교육 방침상의 특징. 국제 교류. 국제처에서는 국제 교류의 갈래로 SEP(Student Exchange Program)와 VSP(Visiting Student Program)의 두 종류를 운영하고 있다. SEP는 본교와 학술 교류 협정이 체결된 외국 대학과 학부 또는 대학원생을 교환하는 프로그램이다. 본교는 해당 학교가 요구하는 자격을 갖춘 자를 교환학생으로 추천하며, 추천된 교환학생에 대한 입학 허가 여부는 해당 학교에서 결정한다. 자비유학과 방문학생과 달리 본교에만 등록금을 납부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SEP와는 별도로 VSP 또한 국제 교류의 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소수의 학교와 별도의 협정을 체결하여 본교의 학생들을 대규모로 파견하는 것이 VSP 프로그램의 요지이다.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영국의 , 호주의 그리피스 대학교,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캠퍼스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이 그 대상이다. 등록금은 파견교와 본교에 모두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가운데 본교에 납부한 등록금의 대부분은 장학금의 형태로 반환된다. 한편, 일부 단과대학은 본교와는 별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제2 전공의 의무화. 2004학년도 학부 입학생부터 적용된 졸업요구조건의 하나이다. 2004학번 이후의 학부생들은 제1전공과 함께 심화전공이나 이중전공, 융합전공, 학생설계전공으로 분류되는 제2전공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다. 일부 학과에서는 학부제로 모집을 하며 학부제로 입학한 학생의 경우 2학년 진급시 자신의 전공을 배정받는다. 졸업학점을 모두 이수함과 동시에 영어강의, 졸업논문이나 공인영어성적, 한자인증과 같이 자신이 이수하고 있는 전공에서 부가적으로 요구하는 졸업요구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학생에 한하여 졸업이 가능하다. 영어강의의 경우 대개 5과목 이상 수강이 졸업요건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경영대학과 같이 이와 상이하게 요건을 정하고 있는 학과 또한 존재하므로 자신의 학과가 지정한 요건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학번별로 졸업요건이 상이할 수가 있으므로 자신에게 해당되는 졸업요건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졸업요구학점을 모두 이수하였으나 기타 졸업요구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 수료상태로 남게 된다. 비록 학칙에서는 전과 제도가 있지만, 현재 전과제도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제1전공 이수학점이 상대적으로 연세대학교보다 10 학점이상 낮기 때문에 연세대학교에서 시행되는 전과 제도를 이용하지 않고도, 복수로 전공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학교 관계자학적·수업지원팀 유신열 과장이 밝혔다. 2004학번부터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제2전공 정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학교에서 흔히 말하는 ‘복수전공’ 또는 이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2전공'과는 다른 제도이다. 캠퍼스 및 학교 소유 시설. 서울캠퍼스는 인문·사회계 캠퍼스, 자연계지역, 녹지 캠퍼스, 정릉캠퍼스를 포함한다. 전체적으로 건물 양식이 일관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어윤대 총장이 재임하던 시기에 3,500억 원의 발전 기금을 유치하고 기업체의 후원을 받아내 교내 전체 건물의 40% 정도를 신축 및 리모델링함에 따라 전체적으로 건물 양식이 일관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중앙광장과 하나스퀘어가 각각 인문사회계지역과 자연계지역에 위치하여 각 지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분교인 세종캠퍼스의 건물들 또한 웅장한 분위기의 건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두 캠퍼스 이외에 ‘창조캠퍼스’라는 이름으로 제3캠퍼스 설립을 세종캠퍼스에 추가로 추진하고 있다. 제3캠퍼스는 약 52만m2 규모로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부지매입 협상 중이다. 본교 홈페이지에서는 본교와 분교의 캠퍼스 지도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서울캠퍼스(본교). 인문·사회계 캠퍼스. 중앙광장과 본관이 위치한 지역으로, 본관 ~ 중앙광장 ~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관과 대학원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구 중앙도서관 건물은 각각 사적 제285호와 제286호로 지정돼 있다. 구역별로 본관과 중앙광장 주변, 중앙도서관 주변, 민주광장 주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문사회계지역의 중심축을 이루는 본관과 그 주변 건물들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한다. 자연계(이공계) 캠퍼스. 자연계 캠퍼스에는 2006년 9월 완공된 하나스퀘어를 중심으로 공과대학, 이과대학, 정보통신대학, 생명과학대학, 보건과학대학, 정보대학의 교수 연구실 및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다. 녹지 캠퍼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의 교수연구실이 위치하고 있고 기숙사와 체육 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모든 부지는 안암동에 속해 있다. 녹지운동장이 있어 ‘녹지 캠퍼스’로 불린다. 정릉캠퍼스. 정릉캠퍼스는 원래 우석대학교의 의과대학/의과기술초급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과가 있던 캠퍼스였다. 1971년 고려대학교의 우석대학교 인수 이후 2004년까지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대학이 이곳에 위치했으나, 2005년 10월 25일 교육인적자원부가 고려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대학의 통합을 승인하면서 고려대학교에 신규 단과대학인 보건과학대학이 이 곳에 신설됐다. 정릉캠퍼스는 정의관, 진리관, 호림관, 학생회관, KU-MAGIC 연구원 등 5개의 건물로 구성된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및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또한 정릉캠퍼스에 위치하고 있다. 2015년에 보건과학대학은 안암동 자연계 캠퍼스에 신축한 하나과학관으로 모두 이전하였으며, 이에 따라 2016년부터 정릉캠퍼스는 KU-MAGIC(Medical Applied R&D Global Initiative Center) Project One의 연구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세종캠퍼스(분교).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고려대학교의 분교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려대학교'는 서울의 서울캠퍼스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교인 세종캠퍼스는 법적, 행정적으로 엄연히 다른 대학으로 취급된다. 1980년에 개교하였으며 2010년에는 개교 30주년을 맞았다. 기존의 명칭은 ‘서창캠퍼스’였으나, 2008년 3월에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2011년에 문을 연 약학대학은 이 곳에 위치해 있다. 의료원 및 기타 시설. 고려대학교 의료원 산하에 안암병원과 구로병원, 안산병원 등 세 곳의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안암병원은 1051병상을 가동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구로병원 또한 1057병상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위치한 안산병원은 710병상을 가동하고 있다. 구로병원은 1983년에 개원하였으며, 2008년에 증축이 완료됐다. 안산병원은 1985년에 개원했으며, 1998년 증축하면서 시설을 확대 및 개선하였다. 또한, 2013년 3월 26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10개의 연구중심병원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과 구로병원이 포함돼 유일하게 1개 대학에서 2곳의 병원이 선정됐다. 그 밖에 본교 소유의 시설 중 수련원 시설로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에 위치한 낙산수련원, 충청남도 보령시 신흑동에 위치한 대천수련원,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에 위치한 완도수련원이 있으며 이 중 완도수련원은 2010년 8월 10일에 완공됐다. 이 밖에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송추운동장,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읍에 위치한 덕소농장이 있다. 덕소농장에서는 참기름을 생산하고 있지만 상용화된 제품으로는 판매하지 않으며, 교내에서만 선물용으로 판매하고 있다. 서울캠퍼스 주변 상권. 이전 초기에는 정문 앞과 제기동 주변이 학교 주변의 가장 주요한 상권이었으나 안암병원의 개원과 더불어 개운사길의 복개가 이루어져 그 중심이 유흥 상권이 형성돼 있는 안암로터리 부근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6호선 안암역 개통을 계기로 안암로터리 부근의 상권이 안암역 사거리까지 확장되어 현재의 참살이길을 형성하였다. 정경대학 후문의 24시간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근래에 들어서 단순히 상권의 위치만 옮겨간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식사시간만 되면 밥집 앞에 길게 줄을 서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지만 학생들의 식생활 변화와 연이은 물가 상승 등의 이유로 학교 주변에 위치한 밥집들이 상당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대 초반에는 정문 앞 캠퍼스타운 개발 문제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섰다. 주요 학생 단체. 총학생회. 총학생회는 학교 당국과 독립적인 학생들의 요구를 대외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학생자치기구이다. 총학생회의 기원은 이승만 정권 당시 존재한 중앙학도호국단의 해체와 관련이 깊다. 1960년 4·19 혁명 후 학생들은 1949년 9월 이승만 정권 당시 대통령령 86호로 결성된 학도호국단과 관련하여 ‘어용기구인 중앙학도호국단에서 탈퇴하여 이의 해산을 강력히 주장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와 같은 주장이 5월 4일 국무회의를 통해 실현된 것이 현재 총학생회의 기원이다. 1965년 교칙위반을 이유로 활동정지 처분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1975년 6월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로 학도호국단으로 재편되는 수모를 겪는 등 탄압으로 인해 그 명맥이 끊어질 뻔한 적도 있었으나 1984년 학도호국단을 폐지한 이래 매년 선거로 총학생회가 선출되고 있으며 2019년에는 51대 총학생회 ‘SYNERGY’가 활동하였고, 2020~21년에는 총학생회 중앙비상대책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학생처가 총학생회 활동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며 학생 복지를 관장하는 기구로 학생복지위원회라는 별도의 기구가 존재한다. 동아리. 고려대학교의 동아리는 인문계 캠퍼스 학생회관에 동아리방이 있는 고려대학교 동아리연합회 소속의 중앙동아리와 자연계 캠퍼스 애기능학생회관에 동아리방이 있는 고려대학교 애기능동아리연합회 소속의 애기능중앙동아리로 나뉘며, 두 동아리연합은 동격이다. 이 외에도 단과대, 학과별 동아리도 존재한다. 연례행사. 사발식. 사발식(沙鉢式)은 커다란 사발에 부어진 막걸리를 선배들이 불러주는 ‘막걸리찬가’에 맞추어 신입생들이 마시는 행사를 말하며, 고려대학교의 교우로 남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사발식의 기원이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와 같은 문화가 1970년대 즈음에 생겨났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신입생환영회에서 많은 양의 막걸리를 마시도록 하는 것에는 “그간의 획일화된 교육과 얽매인 생활의 묵은 때를 모두 토해 비워버리고 학문의 진리와 민족의 정의를 위해 나아가는 고대인이 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동아리 박람회. 동아리 박람회(-博覽會; 약칭 '동박')는 고려대학교에 소속된 각 동아리들이 학부 신입생들에게 홍보를 하는 행사이다. 매년 3월 중에, 고려대학교 중앙동아리연합회 주최의 동아리 박람회와 애기능동아리연합회 주최의 동아리 박람회가 각각 이틀 간 민주광장과 애기능학생회관 앞에서 열린다. 2010년 3월 기준으로 모두 185개의 동아리가 교내에 등록돼 있다. 동아리 구성원들은 박람회 외에도 포스터나 공연, 콘서트, 지인을 통한 여러 홍보활동을 통해 그들이 속한 동아리를 알린다.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고, 전체동아리대표자회의를 거쳐 가등록과 정식 등록 절차를 거친 동아리는 중앙동아리로 활동할 수 있으며, 이미 등록된 동아리들도 매년 재등록신청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애기능동아리연합회 소속의 동아리로 활동하고자 할 때도 비슷한 절차를 거치게 된다. 중앙동아리로 인가를 받으면 동아리방을 배정받고 학교의 지원금을 받게 되는데, 교비를 지원받으려면 정해진 기간 내에 교비 지원 신청을 해야 한다. 4·18 기념 마라톤과 구국 대장정. 매년 4월 18일에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4·18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4·18 기념 마라톤과 구국대장정을 진행한다. 헌화 행사에 이어 오전에는 기념 마라톤이, 오후에는 구국대장정이 진행된다. 기념 마라톤은 1969년 당시 총학생회에서 처음으로 만든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학교를 출발하여 국립 4·19 묘지를 거쳐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총 16.2km의 코스로 구성돼 있다. 최종 목적지가 국립 4·19 묘지로 설정되어 있는 것에는 4·18이 4·19 정신으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와 같은 행사는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도 이어져 마라톤이라는 형식을 빌려 불의에 맞서 싸우는 기능 또한 담당하였다. 구국대장정은 각 단과대별로 모여 교내 중앙광장을 출발하여 수유동 국립 4·19 묘지까지 행진한 다음, 4·19 기념탑에서 참배한 후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형식을 띄는 행사로, 이 행사 또한 1969년에 처음으로 개최됐다. 행사 초기에는 시민들의 불편을 우려하여 참가자 수에 제한을 두었으나 1984년부터 이 제한이 폐지됐다. 이 행사에서의 구호는 해당연도의 이슈 또는 시대적인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이를 구호뿐만 아니라 팜플렛을 통해서도 시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한다기보다는 고대생이 되기 위한 하나의 절차 정도로 인식되는 것과 관련하여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의견들이 존재하는 반면, 꾸준히 행사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석탑대동제. 매년 5월 중에는 석탑대동제(石塔大同祭)라는 이름의 학생 축제가 열린다. 1962년 5월 4일부터 3일간 개최된 ‘석탑축전’이 이 행사의 연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석탑’이라는 이름은 당시 본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조지훈이 지었다고 한다. 석탑축전이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대동제(帶同祭)라는 의미는 직역을 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는 것 + 추모하는 제(祭)를 지내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대학생들이 독재정권 항쟁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학생들을 추모하면서 살아있는 학샐들의 참여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독재 정권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학생들을 추모하는 합동위령굿 등을 지내면서 3년 후인 1987년에는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열 정도로 ‘대동제’라는 이름은 대학가 전역에 널리 퍼져나갔다.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정태환은 ‘교내 구성원 간에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낀다는 면에서 스트레스 해방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면서 교내 축제에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1956년 개교기념일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민주화 투쟁이 발생하는등 개교 기념일에 여러 가지 이벤트가 발생하였다. 석탑대동제는 개교기념일의 대표 행사였으나 2000년대 들어 개최기간이 길게는 3주까지 미뤄지며 개교기념일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대동제 기간에는 여러 학과/반 학생회와 동아리에서 주점을 비롯한 각종 이벤트들이 교내 곳곳에서 개최되며, 주요 행사 일정은 교내에 비치된 고대신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동제 기간에 애기능 지역에서는 애기능동아리연합회의 주도로 별도의 행사가 열리며 2011년의 경우 공과대, 생명대, 이과대, 보과대, 정통대의 5개 단과대학이 참여하여 노벨광장을 주 무대로 ‘Sound Festival’(사운드 페스티벌)과 ‘애기능 실루엣 가요제’, ‘애기능 요리 경연대회’ 등과 더불어 각종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입실렌티 지·야의 함성. 입실렌티 지·야의 함성(Ipselenti: 知野의 喊聲)은 주로 석탑대동제 마지막 날 저녁을 기해 고려대학교 응원단이 주최하는 응원제로 2011년에 34회째를 맞았다. ‘입실렌티’(Ipselenti)란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사용된 고려대학교의 교호(校號)의 일부이며, ‘지·야’란 지성(知性)과 야성(野性)을 가리킨다. 학우들의 참여 프로그램, 초청 연예인들의 공연과 응원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가와 교호로 행사를 마무리한다. 교가와 교호로 행사를 마무리하는 방식은 입실렌티 이외의 공식적인 행사에서도 일반적이다. 교명이 고려대학교로 개명된 뒤, 교호는 아래와 같이 수정됐다. 고려대학교 교호는 입실렌티(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체이홉(안톤 체호프? 동명이인 체호프?), 카시코시 코시코(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그리스 카시코시우스?), 칼마시(카를 마르크스)까지 모두 네 사람이 계시는(케시케시) 의미이다. 이들은 출생 연대는 서로 다르지만 사회 저항비판 의식이 강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교호를 만든 사람은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케시 코시코에게 순서에 관계없이 ‘자유’, ‘정의’, ‘진리’라는 교훈(校訓)을 부여해 고대생에게 사회 저항의식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고연전. 고연전은 애교심을 고양하고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양교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포츠 경기를 비롯한 강연, 온라인 게임, 사회공헌활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세대학교와 승부를 겨루는 행사 일체를 의미한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옥스브릿지(Ox-Bridge)전(戰)’과 일본의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소케이센’() 등과 유사한 형태이다. 고연전은 매년 9월에 연세대학교 5개 종목의 운동부 선수들과 맞붙는 ‘정기 고연전’ 과 정기 고연전 이외의 기간에 열리는 ‘비정기 고연전’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교내에 축구부, 럭비부, 야구부, 농구부, 아이스하키부 등 5개 종목의 스포츠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고연전’이라는 명칭은 ‘정기 고연전’을 의미하며, 아래에 이어지는 설명도 ‘정기 고연전’에 관한 것이다. 운동부. 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럭비 등 여러 종목의 운동부를 운영하고 있다.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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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831
안중근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도마,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9시30분에 암살하여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혔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아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억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안기옥(安起玉)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반과 후반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安毅)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 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의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안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安仁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 초기 활동.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안중근은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다. 또 서당 공부를 빼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날이 적어 할아버지가 중근의 원래 이름인 응칠 대신 무거울 중에 뿌리 근자를 써서 이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소년기.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동학 농민군이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고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에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입교.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뮈텔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에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안중근》(조정래 지음, 문학동네)에 의하면, 뮈텔 주교(한국이름 민주교)가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비판으로써 의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청인 난타 사건.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했다.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했다.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重根은 明治三十七年(一九◯四) 봄 黃海道 載寧에서 淸國人과 爭鬪한 끝에 그가 携帶한 短銃으로 淸國人을 射殺하였으므로 淸國領事로부터 外部에 交涉하는 바가 되어 事件이 重大하게 되려고 하였으므로 重根은 上海로 逃走하고 父 泰勳은 그 사이에서 當時의 外部大臣 李夏榮에게 哀願하여 간신히 無事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조금 다르게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안중근이 경성에 가서 외무부에 청원서를 올렸고, 재판이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되어서 서씨와 같이 재판을 받게 됐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는 서씨의 만행이 드러나고 안중근이 옳다는 판결이 났다. 이후 안중근은 어떤 청나라 사람의 소개로 서씨와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독립운동가 서상돈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독립운동 투신.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의병 활동.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다.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 어로 라고 3번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 총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가끔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 과정에서 재판소 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 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영향.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승만과 김구는 광복 이후로 매년 그를 기리고 그의 동상을 찾아가 헌화, 참배하였다. 윤치호를 포함하여 일부는 역시 그의 사상에 대체적으로 공감하기는 하나, 하얼빈에서의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로 한일병합조약을 촉진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또는일제침략에 맞서싸웠으며 단지동맹을한 안중근의사의 애국심에는 높게 평가를내린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의 지성인, 정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량치차오, 장타이옌, 쑨원, 위안스카이 등이 추모와 애도의 글을 발표하였고, 1927년부터 중화민국에서는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을 기리는 노래를 합창하게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병합조약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도쿄에서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적 있다.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병합조약을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묵살되었다. 사상과 신념.. 동양평화론.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 ‘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은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 안중근은 1894년 16세 나이로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서 공을 세웠다. 그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동학군을 "'동학당'(현 일진회의 뿌리이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구실로 군현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었다(이때가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된 기초로, 일본과 청나라와 러시아가 개전하게 된 원인을 만든 병균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어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안중근의 부정적 시각은 생애 말년 옥중에서 쓰던 <동양평화론> 전감(前鑑)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간 해(갑오년) 일청전쟁을 논하더라도 그때 조선의 좀도둑떼와 같은 동학당의 소요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군사를 움직여 건너와 무단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안중근은 대한제국 멸망 원인에 대해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민영익을 비롯한 고위 층의 무책임한 처사, 일제의 강도짓 등을 거론한다. 그러면서도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선 정부의 실정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동학군을 '좀도둑떼'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상당한 책임을 돌린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안중근은 조선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는 근왕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서 및 유묵.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시.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쥐도적'이라 지칭했다.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기타. 거사 동지 우덕순, 일제 밀정 확인. 2019년 KBS 탐사보도부가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밀정을 추적했다. 지난 8개월 동안의 추적이었다.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취재진은 김좌진 장군의 참모 이정을 포함해 지금까지 모두 895명의 실명을 확인했다. 밀정 혐의자들이다. 8월 13일과 20일 방송되는 <밀정 2부작>(밤 10시, KBS1TV)에서 나눠 공개한다. 여기에 안중근의 거사 동지 우덕순이 밀정이었음이 드러났다. 1920년대 들어 우덕순은 이상 행적을 보인다.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 등을 보면 우덕순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주요 간부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당시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다. 정보 수집이 주요 역할이었다. 일반 한국인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면밀히 감시하고 정보를 끌어모았다. 취재진은 우덕순이 일제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 등을 입수했다. 중국 지역 한국독립운동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다. 우덕순도 현재 독립유공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우덕순, 김구 등이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정근은 김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안창호를 따랐지만, 안공근은 김구의 부하가 되어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당특무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한다. 신앙. 안중근은 19세 때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천주교 영세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토마스(Thomas)이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먼저 영세를 받아 입교한 후, 그의 집안은 모두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안중근은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사목 중이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주교와도 인연을 맺고, 성당 건축에 필요한 헌금을 봉헌하는 등 왕성한 신앙생활을 해왔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의 의거 이후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사형집행 직전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 행위로 단죄, 조선교구의 신부들로 하여금 안중근에게 성사를 배푸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니콜라 빌램 신부가 뮈텔 주교의 명을 어기고 뤼순 감옥으로 찾아가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해주었고, 안중근은 성사를 받고 순국했다. 뮈텔 주교는 주교에게 불순명했다는 이유로 빌렘 신부의 성사집행권을 정지시켰으나, 빌렘 신부가 교황청 교회법원에 이의를 제기해 성사집행권 정지는 해제되었다. 한편 천주교 신앙이 독실했던 안중근은, 자신의 아들인 안분도를 사제로 키우려고 계획했었다. 오랜 기간동안 한국 천주교에서 살인자로 단죄되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 안중근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평가가 변화하기 시작했고 1993년 8월, 탄신 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안 의사의 당시 행위는 살인이 아니라 독립운동이자 정당방위로 봐야 마땅하다" 라는 입장을 밝히며 한국 천주교에서 안중근의 평신도 신분은 완전히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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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화
유덕화(, , , , 1961년 9월 27일 ~ )는 홍콩의 영화배우, 영화제작자, 영화연출가, 가수이다. 생애. 별명은 유복영(劉福榮,)이며, 필명은 자혜(紫慧), 불교식 법명은 혜과(慧果)이다. 애칭은 華仔, 華哥, 劉天王, 華Dee, 劉華, 華神, 民間特首이 있다. 영국령 홍콩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장먼 시 신후이 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신장은 174cm이고, 혈액형은 AB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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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물리학자(物理學者)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이다. 직업으로서는 연구소의 연구원, 대학의 교수 등이 전형적이며, 분야에 따라 응용분과의 경우 다양한 기업체와 개발직등의 직종에 포진되어 있다. 특이한 경우로, 금융권을 비록한 증권 분석가, 컨설턴트 등의 분야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야 하나, 현대 물리학의 전문성 때문에 대개는 대학원 이상의 공부가 필요하다. 분야에 따라 수학이나 공학에 관해서도 전문성이 어느정도 있어야 한다. 연구소의 연구원은 크게 분야가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으로 나뉘게 되며 대학 산하 연구소, 기업체 연구소 등 다양한 연구직종에서 일하게 된다. 대표적인 물리학자는 영국의 아이작 뉴턴,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스티븐 호킹,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독일의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미국의 오펜하이머, 에드워드 위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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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 1935년 1월 31일 ~ )는 일본의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한다. 시코쿠 에히메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8세 때에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 학생 시절이었던 195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동시대 프랑스와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쿄 대학 불문과 재학 당시 사르트르 소설에 심취했으며 <사육(飼育)>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초기에는 전후파 작가답게 전쟁 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결혼 후 장애가 있는 아들이 태어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 어렵게 키운 경험을 소재로 개인적인 체험을 써서 전후세대의 인권 문제를 파헤쳤다는 찬사를 들었다. 이 외에도 핵 시대의 지구와 우주와의 관계를 그린 미래소설도 썼다. 그는 1994년 12월 8일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수상) 이후 26년 만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기념 연설문, 《애매한 일본의 나》를 통해 그는 스웨덴의 아동문학작품 《닐스의 모험》을 읽으며 꿈꿨던 어린 시절 196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회의, 전자공학이나 자동차 생산 기술로 유명한 조국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한국의 김지하나 중국 작가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 와타나베 가즈오에게서 배운 휴머니즘 정신을 말하였다. 이 연설문은 노벨상 위원회가 책으로 출판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들이자 장애인 음악가인 오에 히카리와 부인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아들 히카리를 작곡가로 키운 이야기는 문화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재연극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인물. 자라난 내력으로부터 작가 데뷔까지. 그는 에히메현 우치코의 오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7형제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할머니에게 예술을 배웠다. 그의 할머니는 1944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그 다음해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오에를 가르치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 같은 책을 사주었는데, 그는 그 책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말하였다. 고향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가, 그는 마츠야마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18세가 되는 해에 처음 동경에 다녀와서 그 이듬해 동경대학교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의 스승은 가주오 와타나베로 프랑수아 라블레에 대한 전문가였다. 그는 1957년 학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였는데, 그의 글은 프랑스와 미국의 현대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아쿠다가와상 작가로서. 데뷔한 다음 해인 1958년, 자신의 첫 장편소설 <아이 싹 훑기(芽むしり仔撃ち)>를 발표했다. 같은 해에 <사육(飼育)>으로 제 39회 아쿠타가와상을 23세의 나이에 수상하였다. 1956년에 수상한 이시하라 신타로에 이어 당시 최연소 타이 수상자가 되었다. 전형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오에 겐자부로는 시대도, 재능도, 작풍도 다르지만, 스물 서 너 살짜리 학생이 기묘한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썼다는 점이 아쿠타가와와 닮은 꼴로 보여 그에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름이 걸린 상을 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한편, 후나하시 세이치는 이전 회 아쿠타가와상 전형에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사육>보다는 <죽은 자의 사치(死者の奢り)>야말로 상을 받았어야 했다며 비판한 바 있다. 또한, 같은 해인 1958년에 이시하라 신타로, 에토 준, 다니카와 슌타로, 데라야마 슈지, 아사리 게이타, 에이 로쿠스케, 마유즈미 도시로, 후쿠다 요시유키 등 젊은 문화인들과 ‘젊은 일본 모임(若い日本の会)’을 결성하여 60년 안보(안보투쟁)에 반대하였다. 1959년에는 도쿄대를 졸업하였다. 졸업논문의 제목은 <사르트르 소설의 이미지에 대하여>. 같은 해에 새로운 장편 《우리들의 시대(われらの時代)》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청년으로서 느끼는 우울함과 허무감, 괴상하고 폐쇄적인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전면에 내세워 통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으로 작품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해 작곡가인 다케미쓰 토오루를 알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60년, 이타미 유카리(이타미 주죠의 누이동생)와 결혼했다. 1961년, <정치와 성(政治と性)>의 주제를 집대성한 작품인 <세븐틴(セヴンティーン)>을 《문학계(文學界)》 1월호에, <정치소년 죽다(政治少年死す)-세븐틴 제 2부>를 익월호에 발표하였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에서 촉발되어 범인인 야마구치 오토야를 모델로 ‘성을 탐닉하고, 정치에 도취한 우익소년’ (문고본 뒷면 소개글에서)을 그렸으나, 풍류몽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둘러싸고 문예춘추 등이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이 때문에 <정치소년 죽다>는 그 이후 어떠한 단행본으로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단, 《오에 겐자부로 전작품 1》에 수록된 자필연보에 따르면, 본 작품이 “현재까지 단편집에 실리지 않은 것은 작가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1963년, 두개골에 이상이 있어 지적장애를 안은 장남 오에 히카리가 태어났다. 무거운 장애를 안은 아이의 탄생은 전후사회에서 희망이 없는 청년과 그 사회에 맞선 절망적 반항과 저주를 독자적으로 그려 온 작가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964년, 히카리의 탄생을 기점으로 쓴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個人的な体験)》으로 제 11회 신초샤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아버지 '버드(Bird)'가 온갖 정신편력을 겪은 끝에 상상력에 의해 현실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원래 사르트르의 영향으로 그 의식이 깊어진 '상상력'이라는 개념은 이후 오에 겐자부로에게 상당히 큰 주제/수법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해에 히로시마를 수차례 방문했던 경험과 세계원수폭금지대회에 참가한 경험을 토대로 한 르포르타주 《히로시마 노트》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은 아이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 체험'과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류 고유의 비극'을 대응시켜 자신의 주제로써 심화시켜나가고 있다. 노벨상 수상까지. 1967년, 30대 초반에 장편소설 《만연원년의 풋볼》을 발표하고, 최연소(2010년까지도 기록으로 남아있음)로 제3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만연원년(1860년)에서는 시코쿠의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과 100년후의 안보투쟁을 결합시켜 폐쇄적 정황에 대한 혁신적인 반항을 그려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당시 현저했던 오에 특유의 문체는 틀이나 주석,수식,피수식의 관계가 혼탁했기 때문에 여러차례 난해한 문장이라고 지적을 받았지만, 노벨문학상에 선출되었을 당시의 수상이유로 현재의 표준어인 도쿄방언에 대항하는(산문) 시적인 문체를 들었다(단지, 그 후부터는 작품에 어울리는 문체를 적절히 조절하여 쓰는 방법으로도 사용하고 있다).현재는 오에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전에 오에를 평가 한 에토 준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오랜 기간동안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일본사회와 공존하는 비정상적이고 작은 세상들을 그려낸 단편집《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1969년)를 출판하고, 1971년에 발표된 중편<스스로 눈물을 닦는 아픈 날>,<달의 남자(Moon Man)>에서는 그 전년도의 이쓰시마 사건을 토대로 천황관을 개혁할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 후에 《내 영혼에 이르러》(1973년, 노마문예상수상),《핀치러너 조서》(1976년)에서는 천황제나 핵문제 대해 고민하고, 리얼리즘을 초월한 세계관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에의 후기작에서는 <영혼의 문제>,《기도,허락》같은 종교적인 사상에 깊이있게 접근하고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 40대부터는 야마구치 마사오의 문화인 수학에 영향을 받아, 1979년에 발표된 《동시대 게임》에서 <마을=국가=우주>의 역사를 쓰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썼지만, 문화평론가로부터 명성을 얻은 후의 사치스런 것이라고 비판 받았다. 다만, 오에 자신은 우주의 창조자인 <망가뜨리는 자>나 영혼의 문제를 작품속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82년, 연작집 《레인트리(Rain Tree)를 듣는 여자들》을 발표하고 다음해에 제34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다케미쓰 토오루는 연작집의 첫 번째 이야기인 <머리 좋은 <레인트리»에 영감을 얻어 <비의 수목>(Rain Tree)를 작곡했다. 연작집의 두 번째 이야기 《레인트리를 듣는 여자들》은 이 곡의 연주를 처음 들으며 집필했으며 소설속에 콘서트의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1983년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에서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여 그의 문헌이나 관련 연구를 반복해서 읽는 것으로 깨달은 사상을 오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며, 세심한 필체로 자서체 소설로 사생활을 그려내어 제10회 오사라기 지로 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연합적군 사건을 사상적으로 총괄해 낸 《하마에게 물리다》,1986년에는 《동시대 게임》의 세계관을 현실세계로 비추어 낸 《M/T와 숲의 이상한 이야기》,1987년에는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자신의 반생,사상의 편력, 주역의 변천등을 서사적으로 그려낸 《그리운 날들로의 편지》를 발표했다. 1989년에 《인생의 친척》에서는 장편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아이를 잃은 여자의 비극과 재기하기까지를 그려 내 제1회 이토세이 문학상을 수상했다.1989-1990년에 발표 된 연작 《치료탑》 과 그 연속편인 《치료탑혹성》에서는 넓은 의미로의 SF형식을 사용하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빌려 핵과 인류구제의 주제를 그리고 있다. 1993년 9월부터 《신조》에 있어서 가장 긴 장편소설 3부작 《타오르는 푸른 나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연재중이었던 1994년 10월 13일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후 26년만에 일본인으로써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기념 강연으로 가와바타의 <아름다운 일본과 나>를 풍자한 <애매한 일본과 나>를 주제로 삼았다. 11월부터 《타오르는 푸른 나무》간행을 시작했다. 시코쿠의 마을을 무대로 한 <구세주>에 의한 전통 계승과 부활, 교회의 <구세주> 일파로의 공격, 시민과 교회의 격한 대립을 줄거리로 하여 아우구스티누스나 예이츠를 인용 <영혼의 구제>를 주제로 집필하여 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1995년 1월, 1994년도에 조일상을 수상하였다. 후기의 일(근황). 오에는 1995년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타오르는 푸른 나무》를 완성했지만, 1996년 다케미쯔 토오루의 영결식에서 그를 위해 신작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1999년 《공중회전》에서 집필을 다시 시작했다.테러를 막기 위해 <탈교>한 교주 <의사(성인)>의 파란과 살인속에서 교단의 재건을 삼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전환작이 되었다. 이후의 창작활동은 오에 자신의 말을 빌려 <후기의 작품활동(Late Work)>이라고 불린다. 이타미 쥬죠의 죽음을 위해 쓴 작품 《뒤바뀐 아이(체인지링)》(2000년), 《우울한 얼굴의 아이》(2002년), 《안녕,나의 책이여!》(2005년)은 전부 <스워드커플(이상한 2인조)>가 등장한 3부작이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안녕,나의 책이여!》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문제를 자신의 인생에 투영시켜 데뷔작 《기묘한 일들》로 회귀하는 듯한 복잡한 구성을 택했다.3부작을 집필하고 있던 2002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동화 《200년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그 후 2007년에는 수장되었던 영화를 재구성하여 <이상한 노인>들의 늘그막의 모험담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 가 신조사, 2009년에는 익사한 아버지의 죽음을 그려내려고 한 작가의 행동을 다양하게 표현해 낸 《익사》가 강담사에 각각 실렸다. 《타오르는 푸른 나무》의 총괄편이라고도 불리는 《공중제비》이외의 <후기의 작품>들 모두가 자신을 투영시킨 소설가나 옛의인을 둘러싼 거짓과 진실의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에서 허구를 섞어 자신의 생각을 고쳐 말하는 것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이러한 형식에서는 오에 자신도 자각적으로 《익사》속에서 <노작가의 사랑도 변하지 않는 자기모순이다>라는 등의 도회하는 듯한 표현을 썼다).또한, 모든 작품에 있어서 선행되었던 문학,예술 등에 자유로운 인용을 덧붙여 과거 자신의 인용이나 옛 이야기를 현대의 언어로 해석, 환골탈태, 재구성을 하였다. 창작활동 이외에는 2006년에 오에 겐자부로상이 설립되어 다음세대의 젊은 작가들을 응원하는 움직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정치 사상. 전후 민주주의자임을 자인하며 국가주의, 특히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입장으로 핵무기나 헌법 제 9조(일본 헌법 삼대원칙 중 하나인 평화주의를 규정하고 있음)에 대해 에세이나 강연에서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자위대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1994년 노벨상 기념 강연회를 가졌을 때에는 덴마크 문법학자 크리스토프 니로프의 ‘(전쟁에) 항의하지 않는 인간은 공모자나 다름없다’라는 발언을 빌려 ‘항의하는 것’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거나 문화훈장을 받는 문학가의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국민이 주는 상으로 여기겠다”라고 하며 상을 받았으나, 그 직후에 천황이 손수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함께 수여하려 하자,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이므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 수상을 거부했다. 한편, 2002년에는 공화국인 프랑스의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03년에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을 때에는 “이라크에는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제공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 “전쟁 후 반세기 남짓한 가운데서도 일본이 이 정도로 미국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적은 없다”라고 하며 분노를 표명했다. 2004년에는 헌법 9조 ‘전쟁 포기’의 이념 수호를 목적으로 가토 슈이치, 쓰루미 슌스케 등과 함께 9조회를 결성하여 전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외국문학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중국으로 가서 난징대학살기념관 등을 방문하였다. 베이징대 부속중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하며 “일본과 일본 젊은 세대의 장래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북한 관련 발언. 2009년 6월 2일, 강연에서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 사이의 신뢰관계가 없으면 핵무기 폐기가 시작될 수 없다.우리들이 싸우지 않는 태도를 일관한다면, 북한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만들어내는 커다란 조건이 되지 않을까"라는 뜻의 발언을 했다. 때마침 이 발언은 5월 25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나온 발언이여서 많은 물의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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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브루크너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1824년 9월 4일 ~ 1896년 10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향곡, 종교음악, 모테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화성, 복잡한 폴리포니, 유도동기, 긴 연주시간으로 유명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낭만파 최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생애. 브루크너는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보조교사로도 일했고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으며 마침내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전에 오르가니스트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즉흥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여러 스승에게 작곡이나 대위법 등을 배워나갔으며 빈 음악원과 빈 대학에서 교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열한 개의 교향곡과 세 개의 미사, 테 데움 등의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살아있는 동안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바그너의 추종자(바그너파)로 알려져 브람스를 신봉하는 많은 비평가(브람스파)의 조건 없는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뢰베, 프란츠와 요제프 샬크 형제 등은 항상 그의 음악을 청중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명분으로 개작하도록 브루크너를 압박했고 이에 브루크너 자신의 유약함 내지 꼼꼼함이 덧붙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수많은 개정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브루크너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제7번과 제8번 교향곡, 테 데움의 성공을 맛볼 수 있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아래에 안장되어 있다. 작품 성향. 브루크너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과 종교음악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실내악 작품이나 피아노 독주곡 등을 음반으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서양고전음악에서 브루크너 작품의 위치는 슈만, 브람스가 계승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조와 슈베르트가 보여준 개성화된 내용의 결합이며 이러한 경향은 구스타프 말러로 계승된다. 한편,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 교회 오르가니스트였기에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이후 낭만주의 종교음악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종교음악은 대규모 합창과 교향악의 결합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장엄미사의 맥을 잇는 것이다. 작품. "브루크너의 작품목록" 작품 번호"WAB"는 음악학자 레나토 글라스베르거(Renate Grasberger)가 편찬한 "브루크너 작품 목록"(Werkverzeichnis Anton Bruckner)의 번호이다. 번호는 149번까지 한다. 교향곡. 바단조 교향곡(00번)은 브루크너가 습작용으로 작곡해 첫 번째로 시작되는 일련번호를 붙이지 않은 곡이다. 교향곡 0번은 후년에 애정을 느껴 파기할 수 없다고 느낀 작곡자가 고의로 제0번으로 한 것이지 실제로는 첫 작곡 후에 다룰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마지막 교향곡 제9번은 미완성 작품이다. (실질적은 반쪽 완성) 자세한 내용은 각 교향곡의 문서로 다룬다. 이상 외에 1869년에 착수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한 교향곡 내림나장조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스케치의 단편만 남아 있다. 브루크너와 바그너. 두 사람의 교제. 브루크너가 바그너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그가 31세 때인 린츠에 옮겨서부터이다. 그 무렵 그는 지몰 제히터에게 대위법을 배우기 위해 때때로 빈으로 갔었는데, 그때에 바그너가 지휘하는 연주회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고 그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863년에는 당시 작곡 스승이었던 오토 키츨러의 권유로 [탄호이저]의 스코어를 연구하여 매우 흥미를 갖게 되었고, 게다가 그 해 안에 린츠에서 [탄호이저]의 실제 상연을 접하여 전격적인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키츨러 자신이 지휘하는 로엔그린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브루크너는 여태까지 그가 접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음악에 강한 감명을 받았다. 2년 후인 1865년에는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이 열리게 되었는데, 브루크너는 이 악극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곳의 호텔 피아 야레스차이덴(4계 호텔)에는 유명한 음악가들이 숙박하고 있었는데 브루크너는 거기에 가서 안톤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에게 자신이 만든 교향곡 1번의 악보를 보이기도 했다. 뷜로가 바그너에게 이 젊은 작곡가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바그너도 흥미를 갖게 되어 두 사람의 첫 회견이 실현되었다. 브루크너는 처음에는 대선생님을 만날 용기가 없었으나 권유를 받아 바그너를 찾아갔다. 그때 어떠한 화제가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브루크너에 의하면 바그너는 매우 친절했었다고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브루크너는 일단 린츠로 돌아왔으나 6월 19일에는 다시 뮌헨으로 나가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제3회 공연을 보고 '감격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린츠에서 브루크너는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외에도 프로진이라는 남성 합창단 지휘자를 맡고 있었는데, 1868년 이 합창단의 기념 축하공연에 노래하는 합창단을 위하여 바그너에게, 이전에 작곡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지 한 곡 빌려줄 수 없는가 하고 부탁했다. 바그너는 기쁜 마음으로 최근 작곡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5막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한스 작스의 연설에서 이어서 나오는 '환희의 합창'이었다. 4월 4일에 이것을 지휘한 브루크너의 감격은 매우 컸었다. 1872년 5월, 그 무렵 빈에 살았던 브루크너는 바그너가 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역으로 마중하러 나갔다. 거기에는 빈 음악계의 면면들이 즐비하였는데 열차에서 내린 바그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브루크너 쪽으로 달려와서 "오, 오! 브루크너 이리 와요. 자네는 내 동료이다."고 말했다. 이미 그 무렵에 브루크너는 빈 음악원과 대학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명강사, 교수였다. 그 이듬해 브루크너는 바이로이트에 가서 바그너를 방문하고 자작인 2번과 3번을 보여준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브루크너 자신이, 보르초겐에게 보낸 편지로 이 회견에 대해 상세히 말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그는 바그너가 교향곡 3번의 [제1부]를 다 훑어보았다고 썼다. 이때 제4악장은 아직 스케치뿐이었기 때문에 바그너에게는 그것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 3번을 바그너에게 헌정하였는데 그 때문에 뒤에 이 곡은 [바그너 교향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다음에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75년 바그너가 또다시 빈에 나타났을 때이며 브루크너가 그를 찾아갔을 때, "자네 교향곡을 연주해야 한다!"고 외쳤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만날 때마다 "자네 교향곡을 연주해주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것은 헛소리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이나 빈 필하모닉에게 연주해 주도록 권했었지만, 악단 쪽에서는 비평가 한슬리크의 불만을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채택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82년 7월 파르지팔 초연 직전에 바이로이트에서였다. 브루크너는 검은 예복을 입고 바그너 집 앞에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며 또 "내가 자네 교향곡과 모든 작품을 상연하겠다."고 말했다. 브루크너는 "오, 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숭배합니다."라고 감격에 차서 말할 뿐이었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정말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얼마만큼이나 숭배하고 있었을까? 프리드리히 브루메는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숭배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순수하게 존중하기에는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었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분명히 브루크너를 종종 칭찬했지만, 바그너 쪽에서 접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브루크너의 모든 작품을 상연하겠다고 말해 놓고는 교향곡 3번 '바그너' 이외의 작품을 알려고 하는 관심조차도 없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바그너가 종종 교향곡 3번을 진심으로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고, 브루크너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베르너 볼프를 따르면, 바그너의 아들 지크프리트는 그 뒤에 말하기를 "아버지가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을 자신이 연주하겠다고 말한 것은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진상에 가까울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 '바그너'를 높이 평가하여, 실제로 상연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하여 상연한다는 것이나 상연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힘을 쓴다는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을 세상에 인정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것이 특별히 자기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이상)하지 않았었고, 게다가 자기 작품의 창작과 자작의 상연을 위한 일 때문에 시간을 뺏겨서 그럴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브루크너 자신도 바그너에 의해 자작이 상연될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그 자신이 너무나도 강하게 바그너 당에 끌어들여 지는 것을 회피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브루크너 자신은 순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말 뿐인 약속만 하는 바그너에 대해서는 약간 좋지 않은 기분을 가졌을 것이다. 뒤에 친구에게 "바그너는 주의하는 것이 좋겠다. 자기 이익이 될 때에는 친절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전혀 무관심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니벨룽의 반지도 파르지팔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서 보았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후의 바그너 오페라를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작곡가 바그너에 바친 커다란 숭배의 마음은 끝내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브루크너 교향곡(작품)에서의 바그너의 영향. 브루크너의 바그너 악극에 대한 감탄의 마음은 전적으로 음악에만 한정되었었다. 이 선배의 악극 사상이나 그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브루메에 따르면, 브루크너는 트리스탄의 피아노 스코어를 열심히 사보하였으나 거기에 붙여진 텍스트를 베끼기는커녕 읽지도 않았다고 하며 발퀴레를 보았을 때 그 끝막에서 '브륀힐데는 왜 화형에 처하는가'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고 한다. 브루크너가 최초의 교향곡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는 바그너 음악을 접했었고 또한 키츨러로부터 바그너 작품을 연구하도록 권유를 받기도 했었다. 브루크너보다 10살 아래인 이 린츠의 악장은 제히터처럼 대위법 이론에만 집중하지 않고 베토벤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작품, 분석을 브루크너에게 하게 시켰다. 브루크너가 바그너에게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크로마틱(반음계)와 엔하모닉(딴 이름 한 소리)의 넓은 이용법이었다. 키츨러 지도로 작곡된 교향곡 0번과 그 뒤의 1번에는 이와 같은 바그너의 새로운 수법이 발견된다. 악기 사용법에서도 1번 1악장의 트롬본은 브루크너가 처음으로 접한 바그너 작품인 탄호이저를 생각나게 한다. 교향곡 2번에서는 1악장에 바그너의 리엔치 중의 '리엔치의 기도'에 나오는 동기가 거의 그대로 오보에에 나타난다. 그러나 브루크너가 의식적으로 바그너에게 기울어짐을 나타낸 것은 교향곡 3번 '바그너'인데, 거장에게 헌정된 곡인 만큼 화성이나 악기법에 바그너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발퀴레에서 인용한 것도 몇몇 보이지만, 이러한 인용은 나중에 작곡가 자신이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그너적 색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특히 제2악장 전체에는 발퀴레의 안정된 낭만적 분위기가 짙게 나타난다. 주부인 제2주제인 졸림의 동기에 흡사하다. 제4악장조차도 반음계적 화성의 활용이나 현의 세밀한 음형, 그리고 끝맺음에 이르는 장대한 금관악기의 부르짖음 등 탄호이저 이후의 바그너 세계를 방불케 한다. 1878년 작곡된 현악5중주 F장조에 관하여, 가이링거는 "그 화성이나 조바꿈에 있어서 '지크프리트'의 방랑자 장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이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 곡의 끝 악장에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베크메이서의 동기와 흡사한 선율도 나타난다. 브루크너는 마지막 세 개의 교향곡에 바그너 튜바를 사용함으로써 바그너에게 대한 숭배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제7교향곡 제2악장의 스케치가 1883년 1월 22일에 완성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죽음을 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3월 13일 바그너는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다음날 14일 브루크너는 그 통보를 받았다. 이때 브루크너는 음악원에서 이 제2악장 아다지오의 마지막 부분을 작곡 중이었는데 장송의 뜻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아다지오의 코다로 35마디를 덧붙여 썼다고 한다. 이 부분의 처음과 끝에 오는 무거운 금관 합주에서는 바그너 튜바의 울림은 물론이고 전체가 [반지]와 [파르지팔]을 방불케 한다. 그로부터 2년 후 브루크너는 성플로리안에서 이 코다의 음악과 신들의 황혼의 지크프리트 장송 음악을 결부시켜서 즉흥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그는 간혹 바그너의 선율을 주제로 한 오르간의 즉흥연주를 하였다. 7번, 8번, 9번이라고 하는 3곡의 교향곡에서는 모두 느린 악장이 특히 바그너 수법에 대한 접근을 보여준다. 8번의 제3악장 아다지오는 터치가 부드럽고 깊숙한 음향에서 트리스탄과 공통된다. 기분을 풀 길이 없는 불안한 주제의 반음계적인 움직임, 특히 그 반주의 당김음에 의한 셋잇단음표의 흔들림, 무한선율, 그리고 반음계 화음의 상승 등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세계이다. 초기의 브루크너에 관해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인 섬세한 미가 바그너를 통해서 꽃피었다. 한슬리크가 말했듯이 여기서 하프를 사용한 것도 바그너에 대한 접근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교향곡 9번의 첫머리는 파르지팔을 상기시킨다. '제1주제는 바그너의 파르지팔 제3막의 전주곡, 성 금요일의 음악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위로받지 못하는 기분 속에서 개시되지만, 곧 '창의 동기'의 연상을 거치면서 '그랄(성배)'적인 상승을 이룬다. 다만 이 브루크너의 백조의 노래가 바그너의 백조의 노래와 다른 점은 후자가 드라마의 객관성이 갖는 기분을 전하려고 하는 데 비해 전자는 절대음악이며 그 배후에 아무것도 없는 청결함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주 기분 나쁠 정도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을 듣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을 텐데 말이다. 브루크너와 나치의 전용.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함께 전용(專用)되었으며 그의 교향곡은 나치 독일 시절 철저하게 나치의 선전용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나치와의 과거 문제에 때문에 큰 오명을 얻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게르만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자가 아닌 게 밝혀졌고 유대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친한 사제관계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별다른 외부 저항 없이 레퍼토리로 이용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음악은 연주금지가 되지 않았고 자주 연주된다. 브루크너와 오스트리아의 합병, 나치 수정주의와 전유의 정치학. 1937년, 레겐스부르크의 잊을 수 없는 악명높은 사진에서 나치의 군복을 차려입은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브루크너의 대리석 흉상을 존경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서 있다. 국가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따라서, 아돌프 로덴베르거가 만들어낸 이 흉상은 철십자를 잡아채고 있는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나치 문양과 그 곁에는 금으로 둘러싸인 제단 위에 올려져 있다. 브루크너는, 1841년에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1세의 지시 아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만들어진 레겐스부르크의 신전, 즉 과거 독일의 문화적 영웅들로 가득한 이 신전에 독일 문화의 또 다른 선각자로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브루크너는 제3제국 속으로 충분히 들어올 자격이 있는 독일 작곡가들 속으로 브루크너를 충분히 우상화시켜 합류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나, 실제로 이것은 8개월 후의 독일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합병의 징조였다. 피터 가블, 막스 아우어(국제 브루크너 협회 회장), 괴벨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한 연설 등을 포괄하는 이러한 레겐스부르크의 행사는 일련의 음악회,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행사, 그리고 독일 나치 당의 모임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음악 정치적 행사의 가장 핵심적이었다. 브루크네리안의 편협한 시각으로 이 행사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단지 지난해의 브루크너 사망 40주년 기념행사를 마무리하는 행사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 후반의 나치의 정치적 전략의 더욱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합병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었다. 1936년은 이러한 브루크너 사망 40주기를 포함하여, 괴벨스에 의하면, 모든 베르사유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해였다. 독일은 다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1936년이야말로 오스트리아, 체코, 그리고 폴란드로 영토를 넓혀가기 위해 전진하는 해였다. 이제 괴벨스가 스스로 '위험 지대'라고 명명했던 동원의 시기인 1936년 시기에 동시에 이루어졌던 복잡한 국내 선전 캠페인 속에 이 작곡가의 이미지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의 문화적 우상으로서의 브루크너의 중요성은 단순히 대리석 흉상부터 출발하여, 깃발, 철십자에 이르기까지 주목받았으며, 심지어는 게르만의 문화적 애국주의로까지 확대되었다. 브루크너를 제3제국의 문화적, 정치적 목적에 연결하려는 행사들은 시시한 것에서 예술적으로 매우 모호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고, 지금 현대 사람들의 귀에는 매우 순수하게 들리는 그의 음악도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대중들의 귀에는 매우 다른 의미로 각인되었다. 히틀러 개인의 관심. 만약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브루크너를 한 인간으로서, 작곡가로서, 그리고 북오스트리아의 같은 형제로서 브루크너를 생각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브루크너를 미화하는 나치의 선전 캠페인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유년 시절, 브루크너의 교향곡에 매우 감동되었다. 히틀러의 예술가로서의 젊은 시절의 투쟁은 매우 잘 알려졌다. 브라나우에서 온 이 평범하고 젊은 예술가는 빈의 미술계에 들어가려고 하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그리고 그는 분명히 이러한 그의 신세를 초기에 빈의 예술계로부터 촌사람으로서 아웃사이더나 다름없었던 브루크너와 동일시하게 된다. 괴벨스의 1941년 3월 13일의 일기를 보면, 또한 히틀러가 빈과 관련해서 크게 상처받았고, 이는 결국 직접 브루크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플로리안으로 가라! 브루크너가 작곡하던 수도원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바로크 건물인가! 우리는 이곳으로부터 나온 성직자에게 관심을 돌려 그 음악동료와 브루크너 협회를 위한 보금자리를 찾아내었다. 얼마나 장대한 계획인가! 그의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한 시골 청년! 오늘날 이 구역이 얼마나 문화, 역사, 심지어 예술적 힘에 있어서 풍요로운가! 위대한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여기에 문화의 중심지를 세우려고 한다. 빈과 평형을 이루는 평형추로서, 그리고 빈은 서서히 철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린츠를 더욱 좋아한다. 그는 순전히 그의 비용으로 성 플로리안에 그 대안을 만들려고 한다." 한스 크레크치의 탁월한 논문은 종전까지의 히틀러의 브루크너에 대한 집착, 특히 그의 개인적 보호 아래 성 플로리안을 바이로이트처럼 만들려는 계획을 비롯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소위 '브루크네리안 바이로이트'는 세 가지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첫째, 성 플로리안은 '브루크너의 불멸 작품을 위한 성스러운 전당'(브루크너의 전통을 유지하고 촉진하기 위해)이 되어야 한다. 둘째, 바이로이트와 같이 브루크너 페스티벌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 플로리안은 음악 협회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와 별도로, 브루크너의 음악(교향곡)은 라이브 음악회와 라디오 방송에서 공식적인 의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알버트 스피어는 뉘른베르크에서의 대규모 당 행사에서의 그의 문화에 대한 연설에 앞서 매번 브루크너 교향곡의 한 악장이 연주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37년 6월 30일의 악명높은 '건강한' 독일 예술을 찬양하는 나치 주최의 퍼레이드는 브루크너 3번 교향곡의 팡파르로 시작되었다. 지타가 공인하듯, 브루크너의 멜로디는 어떠한 장엄하고, 의례적인(ceremonial) 면이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은 바로 바이로이트의 대 작곡가에게 헌정된 3번 교향곡과 관련하여 바그너 자신이 언급한 바로 그 주제였다는 점이다. 바그너와 바이로이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지 첫해에 이미 새로운 체제에 의해 정치화되었다. 그리고 나치는 이제 브루크너의 상투성을 '바그너-심포니스트'로서 강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더욱 많은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1934년에 있었던 'Die Musik'에 드러난 나치의 친위대 음악회 비판으로 더욱 확장된다, 그 논평자는 베토벤을 제3제국의 선구자로서 포함한다. "바이로이트의 거장, 즉 독일 변혁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며, 제3제국의 가장 대담한 제사장인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서곡에 의해 묘사되었다. 그리고 브루크너의 기념비적인, '에로이카(영웅)'로 불릴 수 있는 7번 교향곡은 영웅적으로 전체 작품의 음조에서 뿐만 아니라 느린 악장의 장송행진곡에서도 베토벤의 영웅교향곡과 연결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그 느린 악장은 또한 어떤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가와도 같은데, 그 영웅은 바로 바그너와 관련이 있다." 1945년 4월, 7번 교향곡의 아다지오가 독일 라디오의 히틀러의 죽음 소식에 이어 흘러나올 때, 그 브루크너의 음악은 또다른 '영웅'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었을 것이다. 브루크너, 바그너, 그리고 국제 브루크너 협회. 초기, 나치와 바이로이트와의 긴밀한 관계는, 그들의 우호적인 관계에도 국가사회주의자들과 국제 브루크너 협회 간의 사소한 마찰을 유발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에, 이 협회의 목적은 매우 단순했다. 즉 그들의 목적은 안톤 브루크너의 작품을 널리 퍼뜨리고, 작품들의 진정한 에디션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비공식적인 두 개의 목적이 또한 있었다. 브루크너를 널리 유포된 브람스파의 패러다임과 어울리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작곡가로서 소개하는 것이었고, '바그너-심포니스트'로서의 브루크너의 판에 박힌 이미지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국제 브루크너 협회는 나치의 재정적 지원에는 매우 기뻐했으나(괴벨스는 그의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진정한 브루크너 에디션을 위한 자금의 지원을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이러한 상호 만족 뒤에는 브루크너와 바그너에 관계된 풀 수 없는 긴장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긴장은 1937년 5월, 레겐스부르크 연설이 있기 한 달 전에 아우어가 두 작곡가 사이의 확연한 스타일에서의 차이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자, 표면화되었다. 아우어의 목적은 극음악의 세계에서 바그너의 뿌리를 브루크너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의 그것과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중요한 차이점은 오케스트레이션과 관계되었다. 브루크너의 언어는 오르간 주자로서의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그 음향은 바그너의 영향을 제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후기 교향곡에서는 바그너 튜바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우어의 논문에서 이상한 점은 자신과 협회는 반 바그너주의를 '주장하거나 주장했던' 것은 아니라는 주석을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더블 스페이스로 매우 강조한 상태로 말이다. 이러한 거부의 정치적 함축의 의미는, 특히 체제 그 자체와의 충돌을 무릅썼던, 제3제국 시대의 바그너를 비판하는 음악 해설자에게는 그 의미가 확실한 것이다. 아우어 자신은 명백히 브루크너와 바그너를 분리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서 주요 흐름을 거스르기는 했지만, 그의 노력은 그가 바이로이트 음악축제가, 오페라가 연주되지 않는 날,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함으로써 브루크너 음악축제와 잘 통합될 것이라고 말한 바로 그 보고서에 의해 똑같은 이유로 평가절하되었다. 괴벨스는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즉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행사의 공동 후원자인 협회를 모욕하고 싶지도, 두 작곡가를 연결하려는 널리 보급된 국가 사회주의 문화 관점을 훼손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두 번 그의 연설에서 바그너를 암시하였다. 초기에 그의 연설에서 그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바그너 예술의 교향악적 왜곡'이라고 본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브루크너의 '오르가니스트-교향곡 작곡가 패러다임'의 지지자인 아우어는 괴벨스가 다음과 같이 언급했을 때,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브루크너의 바그너에 대한 경험은 그의 음악적 언어의 공명에서 거의 혁명에 가까운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만이 그것을 우리가 진정한 브루크너의 스타일로서 인식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앞으로, 그 교회 음악가는 동시에 거의 완전하게 후퇴하여, 그로부터 나와 특유한 교향곡 작곡가가 된다." 괴벨스가 언급한 것은, 바그너에 의해 자극된 변형(metamorphosis)이다, 즉 교회음악가로부터 교향곡 작곡가로의. 더욱 고고한 세속적 영역에로의 브루크너 격상의 이미지는 괴벨스의 1936년 이후의 국내 선전 캠페인의 필수적이었다. 브루크너의 음악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미학'. 히틀러의 개인적 관심과 바그너와의 관련성 외에, 나치에게 있어서 브루크너 음악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음악에서 '독일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제3제국 동안 음악 비평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제였다. 그것은 독일 문화에서 중요한 역사와 관련된, 인종적인 숨겨진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있었던 반 멘델스존 캠페인과 그 세기 후반에 있었던 브람스-브루크너 논쟁 등에 관한 탐구였다. 그러한 이슈는 제1차대전이 끝난 후에 조금은 다른 형태로 다시 표면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국가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학자들과 언론가들 사이에서 문화적 동질성을 위한 탐구를 촉진하던 때였다. 이러한 탐구 중 초기 1차 대전 후의 내셔널리즘의 몇 가지 예는 가볍고, 별로 심사숙고한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대부분은 1930년에 이르러서는 매우 강력하게 이데올로기화되고,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적으로 되었다. 그때까지 얻은 결론은 매우 간단했다. 즉 아리안의 음악은 영웅적이고, 고상하고, 체계적이고, 숭고하며, 철학적이고, 그리고 영적이다. 반면, 비아리안의 음악은 매우 시시하고, 피상적이고, 열등하고(특히 유태적인 특성이 있다고 여겨짐), 내용 없이 장식적이며, 절충주의적이고, 그리고 뿌리 없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W. 헤르조그는 게르만 패러다임에 적합한 특별한 예를 제시하였다. 바흐의 평균율, 푸가의 기법, 베토벤의 합창교향곡과 레오노레 서곡 3번,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브루크너의 5번과 9번 교향곡 등이 그것이다. 그는 특별히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 5번의 푸가적인 피날레와 9번 교향곡의 아다지오 악장을 예로 들었다. 헤르조그의 글은 특히 푸가를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귀족적인 독일의 역사가 있었으나, 1차 대전 후, 그것의 '영웅적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푸가와 코랄, 즉 성스러운 독일 예술의 두 개의 축은 '황금의 20세기' 동안 타락됐던 것이다. 그것들은 예를 들어 쿠르크 바일의 작품, 'Die Dreigroschenoper' 등에서 심지어 희화화되어 왔다. 바이마르 시대의 비관주의, 냉소주의 등의 인지된 배경에 반대하여, 즉 도시의 문화적 가치가 시골의 그것에 비해 널리 유포되고, 그리고 실내 교향곡이 새로운 교향악적 패러다임으로 된 그곳에서 브루크너의 음악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나타났음에 틀림이 없다. 북오스트리아의 교사였던 브루크너는 질풍노도의 이상적인 상징으로서 대접받았고, 푸가와 코랄은 그의 음악적 표현에서 핵심이었으며, 그의 서사적인 교향악적 설계는 그 규모에 있어서 심지어 그 당대에도 전무후무한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에게 호소하였던 것은 바로 장엄함과 화려함, 그리고 영적인 면을 지닌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이 지닌 기념비적인 규모였다. 히틀러 자신은 브루크너 교향곡의 피날레를 감상하였고, 특별히 그는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의 당 행사에 이 음악을 엔딩 음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브루크너만이 19세기에 깊고, 중후한, 그리고 대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푸가를 작곡했었는가? 브람스도 역시 그의 4번 교향곡의 피날레에서 장엄하고, 중후한 푸가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브람스는 나치의 모델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연관이 없는 부르주아 빈 음악계의 주류에 속해 있었다. 그는 질풍노도의 이미지에 맞기에는 너무나도 인텔리적이었고, 도시적이었다. 그럼 대규모 관현악곡을 즐기던 그 당시 생존했던 위대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작곡가는 나치의 선전에 어울렸을까? 잘 알려진, 불편했던 1930년대 중반의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관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살아 있는 작곡가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예증시켜주었다. 그들은 너무도 독립적이었고, 이기주의적이었고, 너무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내셔널리스트였던 한스 피프츠너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궁극적으로는 제3제국의 정치적 목적에 비우호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 오직 죽은 작곡가만이 나치의 문화부 선전 목적에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으며, 바로 브루크너가 이상적이었다. 그에 관한 많은 일화, 편지, 그리고 출판된 많은 인쇄물에도, 브루크너는 항상 음악 뒤의 인간에 대해서는 그의 일대기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이상적이었다. 리하르트 타루스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아마도 공허함을 싫어하며, 역사적 대중작가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브루크너의 대중작가는 아마도 괴벨스였고, 그의 레겐스부르크에서의 17분간의 연설은 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를 재창조하는 캠페인에서의 정초를 제공하였다. 괴벨스의 레겐스부르크 연설. 히틀러 자신은 이날 아침, 의식에서 연설하지 않기로 했다. 브루크너를 재창조하는 임무는 선전 담당 장관인, 괴벨스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매우 탁월하게 간결하고, 효율적인 연설로 그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연설은 3개 부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 부분은 브루크너의 시골 출신으로서의 뿌리를 낭만적으로 언급하였고, 두 번째는 그에 대한 음악 비평가들의 비난에는 그가 희생양이었음을 강조하였으며, 마지막으로는 브루크너를 그의 천재성과 영적인 면이 '교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한 작곡가로서 규정하였다. 이 마지막 부분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1936년의 나치와 바티칸 간의 관계의 붕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시골 심포니스트. 괴벨스는 그가 언급하는 이 작곡가의 감상적인 초상화 속에서 다양한 상투 어구를 나열한다. 그는 그의 지적인 호기심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 같음이 여전히 남아 있던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작곡가로서, 그의 '초라한 사무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일 음악의 창조성'의 위력을 통해 성공하고, 유명하게 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또한 브루크너의 촌부로서의 일대기를 강조하고, 그의 대지와의 연관성, 그의 '자연과의 신비로운 친화성', 그리고 그의 손상되지 않은 촌부로서의, 즉 히틀러와 나누어 가진 그러한 뿌리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시골 천재의 역설은 오직 혈통과 인종의 요소적인 힘을 이해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것 외에도, 브루크너의 '검소한 사무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괴벨스에 의해 강조된 부분인 그의 교사로서의 그의 작품이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인지하였고, 제3제국의 천년왕국을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치의 교화 정책의 선봉은 교육되어야만 생각했던 것이다. 나치주의에 동조하는 교사들은 그들이 상승한 책임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였으나, 그들의 임무는 바이마르 시대 동안 지속하여오던 그것과는 너무도 관련이 없었다. 지적인 발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나치의 교육자들은 아리안의 인종적 교화를 포함하는 개인의 인격을 형성해야만 했다. 교육 잡지들은 인종적·정치적 도그마를 강화하는데 봉사하였다. 실제로, 'Der Deutsche Erzieher'(독일 교육가)의 전체적인 이슈는 브루크너에게 바쳐졌다. 그 속에는 레겐스부르크에서의 브루크너 축제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출판된 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에세이의 대부분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즉 그것은 브루크너를 슈베르트와 막스 레거의 좋은 동료로 인식되게 하는 직업인 그 자신의 교사와 교사의 아들로서의 브루크너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교육가로서, 브루크너는 인종적으로 순수하였고, 북 오스트리아 토양과 그의 관계는 세대에까지 미쳤다. 브루크너, 유대인 비평의 희생양. 사악한 빈 비평의 희생양으로서의 브루크너를 강조한 괴벨스의 연설의 두번째 부분은, 더욱 광범위한 문화적 목적을 충족하였다. 한슬리크와 그 일파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은 괴벨스로 하여금 최근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적인 교의, 즉 음악 비평의 견딜 수 없음(또는 더욱 일반적으로는 예술비평)에 대해 선언하도록 하였다. 1936년의 가을에, 괴벨스는 음악, 예술, 그리고 영화 등의 저널에 널리 유포된 신조인 '예술 비평(Kunstkritik)'에 반대하는 공적인 선언을 하게 이른다. 예술 비평은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을 따를 때에만 적절하며, 그렇지 않으면 '예술에 대한 주석과 설명'만이 저널리즘에서 허용될 수 있는 형태라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브루크너를 이러한 새로운 신조의 형성과 관련하여 인정한다. "만약 예술에 대한 주석과 설명의 공개적인 실천이 '새로운' 독일 안에서의 공식적인 채널에만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법으로 제한됐다면, 우리는 또한 그를 괴롭히는 비평가들에 의해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던, 고독 속에서 투쟁했던 브루크너의 은혜를 갚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반유대주의적인 언급은, 그것이 오늘날에는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청중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언급은 유대인을 비생산적이고, 심지어는 기생한다고 비난하는 나치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와 막스 칼벡은 작곡할 수 없었고, 그들은 작곡을 했던 창조적이고, 정직한 예술가들에 대해서 쓰거나 어쩌면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괴벨스의 연설이 브루크너, 비평과 국제적인 반유대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모호하다고 할지라도 프리츠 스코르체니의 아래와 같은 언급은 그러한 모호성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있다. "브루크너가 그의 예술가로 사는 생활을 시작했을 때, 국제적인 반유대주의 유럽 자유주의란 탈을 쓴, 이미 독일의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 투쟁을 착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술에서 자극적이고, 선동적이었다." 이러한 왜곡된 유대인에 대한 인식, 즉 한몫 보려 돌아다니는 떠돌이로서의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은 괴벨스에 의해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인 'Der ewige Jude'라는 선전용 영화 속에서 그 후 가장 첨예하게 나타났다. 이 영화는 공장 속에서 분투하는 건강한 아리안의 노동자의 솜씨 있는 장면을 조심스럽게 의심할 것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아리안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을 놓고 승강이를 벌이는 게토의 천박하고 수염을 기른 유대인과 나란히 비교하고 있었다 브루크너와 신앙. 그러나 괴벨스는 브루크너 수정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지막 연설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것은 브루크너가 바그너와 알게 된 후, 교회 음악가로서의 역할로부터 후퇴하고, 바그너의 영향으로부터 빠져나온 후에 어떻게 독보적인 교향곡 작곡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교묘한 전기 서술이었다. 바그너의 세계와 관련을 맺은 후에 브루크너는, 예배식에 대한 의무적인 위치를 넘어서, 교향악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로 상승하였다. "여기서 그의 천재성은 교회에 속박된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형식을 만든다는 의기양양한 도취감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자유에 대한 한없는 열망이 그의 영혼 내부에서 울부짖었다." 물론 테데움과 시편 150편과 같은 후반부의 성스런 작품들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게르만 음악 학자들과 비평가들 모두가 결코 시도한 적이 없는 실수였다. 브루크너가 로마 가톨릭에 헌신했다는 사실이나 심지어는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었다는 사실조차 레겐스부르크의 연설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은 간단히 "신에 대한 믿음"(Gottglaubig)이라고 묘사되었는데, 이는 나치의 빈틈없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담은 정치적인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신앙심(Gottglaubigkeit)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3년부터 36년까지 교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 간략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6년에는 단지 브루크너의 기념일을 정하고 예술 비평 금지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중대한 사안을 담고 있었던 1936년 7월의 회칙과, 그로부터 겨우 4개월 후에 공식적이면서 대안적인 종교 고백으로서의 'Gottglaubig'의 성립으로 더욱 증폭된 국가 사회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 간의 관계가 심각하게 냉각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치와 교회의 관계는 히틀러의 공적으로 문제를 피하려고 한 히틀러 개인의 욕망으로 더욱 복잡하고 거대한 주제가 되었다. 심지어는 '나의 투쟁'(Mein Kampf)은 이 이슈를 더욱 피해 갔다. 그러나 히틀러의 반 교권적인 신념은 내부에서는 전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종교의 문제는 총통과의 협상 과정에서 다시금 문제화된 것이었다. 헤르만 라우스칭(Hermann Rausching)은 히틀러가 "게르만의 기독교는 하나의 왜곡이며, 게르만인이 되거나 아니면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둘 다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마음속에서 신을 믿고 느끼는 자유로운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고 개인적으로 언급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불확실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무익할 뿐 아니라, 나약함의 표시라는 점이라는 것이었다. 조직화한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적개심은 고대 그리스가 현대 독일의 중요한 모델이라는 관점과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특히 니체와 바그너를 포함하는 독일 예술가와 지식인들에 의해 지지가 된 확신이었다. 히틀러는 조직화된 종교에 대해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사용하였고, 그는 황제의 퇴위 직후에, 정치적 방향이 없었던 개신교도들에 관해서는 일찍이 성공적이었다. 이 독일 개신교도들에게 있어 반유대주의는 그다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는 그다지 크게 가톨릭 교회를 방해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공식적인 관계에 심각한 방해물은 나치의 소문에 들리는 '공산주의적' 성격이었다. 게다가 바티칸은 볼셰비즘을 히틀러의 1933년 전체주의의 원형이 되었던 그들의 무솔리니와의 1929년의 라테란 협정으로 예시된 것과 같은 전체주의보다 더욱 중대한 국제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독일의 11월 혁명 이후에 교황청은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공식적인 협정 조인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은 히틀러를 이길 수 없었다. 1933년의 이 국가적 협정은 로마에 대한 많은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하였다. 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 성직자의 법적 지위 보장,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일이나 바티칸에 대한 직접 연관 등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나치의 서약, 그러나 높은 세금이 부과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수준에서 국가 정치의 하나로서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 나치가 가톨릭의 일에 대해 방관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해졌다. 그들은 비공식적인 협박을 위한 능숙한 전략을 세웠고 그것에 의해 설교는 감시받고, 신부들은 괴롭힘을 당했으며, 물론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선전활동도 나치의 청소년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1936년까지 독일과 바티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정점은, 젊은이들에게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주의를 정치적으로 주입하고 시민의 자유를 침범했을 뿐 아니라 총통(Fuehrer)을 신격화한 나치를 비난하는 교황의 회칙(Mit brenner Sorge)이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교회에 대한 정책, 특별히 바티칸에 대한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치즘을 하나의 종교 그 자체로 인식하고, Gottglaubig를 공식적인 용어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용어는"게르만의 본성에 맞는 종족적이고 적절한 신앙"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이교도적인 것도 아닌 이러한 비기독교적인 지향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여전히 종교적이라고 믿게끔 하였으나, 그것은 또한 그들의 신앙을 버린 유대인들이 독일인에게 포함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교회 밖에서의 영적인 본성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은 물질적이고 무신론적인 볼셰비즘에 대한 반대가 나치 교의의 불변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필수적이었다. 요컨대 제3제국은 그들이 믿는 모든 것, 즉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정신적이라는 그 무언가를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독일 예술은 점차 성스런 예술이 되어 갔으며, 음악은 나치의 가장 성스런 현시였다. 성스런 예술로서의 음악에 대한 관점이 나치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19세기 후반 독일 전반에 퍼져 있었던 의식이었고, 작곡가들과 철학가들에 의해서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철학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성스런 예술로서의 음악은 1903년대에 불안한 정치적 소용돌이와 함께 곧 소생되었다. 1937년 레겐스부르크 기념식은 브루크너를 성 발할라(Valhalla) 사원의 하나의 신으로 지정했다. 그의 음악은 성스런 언어와 나치즘의 신화적 종교가 될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의 브루크너 기념식과 3제국의 새로운 종교 전략 간의 연결은 바로 그날 오후 군중의 대집회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레겐스부르크에 모인 약 200,000명의 사람에게 하는 연설을 통해서 히틀러는 처음으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이라는 용어를 공식 사용했다.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이 민족을 다시 흩어지게 하거나 종교적 견해차로 인한 싸움으로 우리를 어렵게 만들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앞으로 대대로 우리 역사 속에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치는 늘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민족과 영광, 자유,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의무를 실천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에 대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을 가지고 미래로 정진해 갈 것입니다. 신이 우리를 돕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독실한 브루크너는 그 '신성한 신'의 메신저가 될 것이었다. 그의 교향곡, 특히 슈베르트의 "천상의 범위(Heavenly Length)"를 능가하는 영혼적인 느릿한 진행은 하나의 종교적인 체험으로 간주할 만했고, 혈연과 지연을 나눈 이들만이 완전히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940년대 초반, 빈의 음악축제(Dunkelkonzerte)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어두운 빈의 콘서트하우스가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닌, 브루크너의 음악을 듣는 성스런 곳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작곡가들도 그런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브루크너의 교향곡이었다. 그러한 한 프로그램 안내서의 사본은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중간휴식 전에는 모차르트의 레지나 챌리가, 직후에는 브루크너가 유일하게 신 자체에 헌정했던 제9번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작곡가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신의 메신저'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독교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교회 음악가로서의 브루크너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레겐스부르크에서의 기념식과 동시에, 1937년의 한 기사의 작성자는 브루크너의 가톨릭 주의에 대해 비난을 하려고 시도했다. 피터 라베(Peter Raabe)는 물질세계에 대한 브루크너의 "초연함(deafness)"을 강조했다. "신성함은 마음의 순수함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하면서 그는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라베는 "신과 대화하는" 교향곡 작곡자를 묘사하면서, 그러나 그가 중요하지도 않은 교회 음악을 쓰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신앙심(Gottglaubigkeit)의 맥락 이외에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베르너 코르테(Werner Korte)는 한슬르크(Hanslick)의 맹렬한 비난에 대한 근거로 브루크너의 가톨릭적인 뿌리를 인용했으나, 브루크너를 "가톨릭 정신의 순교자"로 보거나 그의 음악을 "기독교를 위한 사죄 행위"로서 인식하는 데에는 반대를 했다. 라인홀드 짐머만(Reinhold Zimmermann)은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했는데, 즉 "가톨릭적인 것"과 "아리안"적인 것은 모순된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브루크너를 완전히, 심지어는 원천적으로 가톨릭적이라고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인성과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의심할 바 없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작품이나 인생의 인종 지향적인 인식이다." 짐머만의 생각은 모든 사람은 게르만인이던가, 아니면 기독교인이라는, 히틀러가 헤르만 라우스칭(Hermann Rausching)에게 보내는 지극히 개인적인 논평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괴벨스의 레겐스부르크 연설은 장엄하고 의식적인 그 순간을 오스트리아 합병의 필연성과 연관시키면서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대로, 그의 전략은 이를 하나의 교조적인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는 보다 광범위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었다. 1940년대의 성 플로리안에 대한 잘 짜인 히틀러의 계획은 좀 더 나아가 전쟁을 통해 어떻게 브루크너를 나치의 문화적 우상으로 남길 것인지를 묘사하고 있다. 비록 브루크너의 그러한 상승이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린츠 제국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Linzer Reichs Bruckner Orchestra)와 브루크너 합창단은 1942년 독일 라디오와 인연을 맺었고 일반 공연과 방송을 통해 1945년 봄까지 공연을 계속했다. 전후 시기. 브루크너 교향곡(음악)에 대한 나치의 전용은 전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아니면 이것은 어떻게 남용된 것일까? 혹자는 아마도 특히 원작이 없거나 덜 실용적인 음악이 시대를 불문하고 그러한 남용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그저 자전적인 수정주의의 복잡한 그물 속의 한 가닥 줄이었고, 그 안에서 브루크너의 인생은 급진적인 정책들을 지지하고, 'Kunskritik에 대한 공격을 유효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정치적 신화를 위해 종교적 우상을 만드는데 다시 쓰였다. 동시대의 독일 관객들이 나치의 선전을 믿었든 안 믿었든 간에, 또 그들이 아다지오에선 신과 소통하고 푸가의 피날레에서는 튜턴족(게르만)의 영웅주의를 느끼게 하는 전원적인 스케르초에서 그들 공동의 나라(영토)를 느꼈던 안 느꼈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이다. 경우가 어떠하든 간에 나치의 브루크너 캠페인에 대한 전후의 즉각적인 국내의 영향은 오래가지 않은 것 같았다. 린츠 브루크너 오케스트라는 연합국 지배하에 있던 1945년 5월에 필하모닉 브로드캐스팅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의 브루크너에 대한 지향은 겨우 한 달 후 눈 깜짝할 새에 그 이름을 브루크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바꾸게 했다. 틀림없이 이 작고 단독적인 사건은 전후 브루크너의 평판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나치와의 과거 문제 때문에 큰 오명을 얻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별다른 외부 저항없이 레퍼토리로 이용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음악은 보이콧되지 않았다. 그러나 추축국 외에서의 브루크너에 대한 대접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았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특히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럽지역에서 특히 1940년에서 50년대에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필연적으로 독일 점령을 상기시킬 만하였다. 전후 미국에서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울려 퍼질 수 없었다. 그의 음악은 나치의 문화적 캠페인에 대해서도 역시 모르고 있던 대부분의 콘서트 관객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사실 4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 브루크너 르네상스의 일말의 징조가 보이는 듯도 하였다. 그것은 1948년에 미국 브루크너 협회가 협회지 코드 앤 디스타드(Chord and Dischord)를 재발간했을 때를 전후해서였다. 그 회지는 발간 공백에도 불구하고 1969년까지 잘 운영되었으며, 그 때에는 더는 브루크너의 공연이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이겐 요훔(Eugen Jochum)과 후에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클라우스 텐슈테트(Klaus Tennstedt), 그리고 기타 여러 음악가가 브루크너 교향곡을 음반화하는데 열정을 보였다. 좀 더 최근에는 CD의 발달과 함께, 그런 작업은 그의 제2번, 제3번, 제4번, 제8번 교향곡의 원본 버전과 같은 진품들도 만들어 냈다. 브루크너에 관한 기사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잡지에서도 계속 나타났다. 물론 나치의 캠페인이 벌어지던 시기의 규모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전후의 학문은 더욱 실증적인 논조를 띠었다. 인종과 민족에 관한 연구는 사설이나 분석적인 문제들에서나 볼 수 있었다. 독일 학자들은 열렬한 게르만 민족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고 판명된 브루크너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한, 그 잡지들과 편집장들은 나치 지배 동안 바로 그들 잡지에 게재된, 인종과 종교와 브루크너에 관련된 왜곡들에 대해서 억지로 부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문제는 대부분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회상보다는 재건이 중요하다는 노판트(Nullpunkt) 정책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은 전후를 넘는 기간까지 확장되었는데, 레오폴트 노바크(Leopold Nowak)의 브루크너 전기인 뉴 그로브(New Grove)는 그 좋은 예가 된다. 나치의 그 엄청난 이데올로기적이고 선동적인 기사들은 노바크의 참고 자료에서 제외되었다. 그러한 그가 이용한 얼마 되지 않는 나치의 케케묵은 저작들은 대부분 그 어떤 정치적인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2차대전 종전 이듬해는 브루크너 사망 50주기가 되는 해였고, 린츠에서는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기념행사가 있었다. 1946년 7월 27일에는 명망 있는 협회의 의장이었던 막스 아우어(Max Auer)가 지난 12년간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했다. "우리는 안톤 브루크너 사망 50주기에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그의 삶과 새로운 부활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선언 아래에서 뭉칠 것입니다. 왕은 죽었지만, 그 왕은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브루크너는 왕입니다. 절대 음악의 왕입니다." 비록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와 바그너의 환영(幻影)은 아우어의 말들에 나타났다. 표면적으로 아우어는 브루크너의 죽음을 기리고 있었으며, 다시 브루크너를 연구하고 대접하는 새로운 시대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유령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왕이 죽고, 즉 총통의 죽음에 잇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브루크너는 나치 선동의 잿더미로부터 부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음악의 왕"은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음악적, 정치적 연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아우어의 숨겨진 또 다른 언급은 1937년, 그가 총통에게 브루크너 메달을 수여했던 그 해에 있었다. 그 언급은 겨우 1년 전에 그가 발표한 내용을 다시 되풀이했던 것일까? 그 때 괼러리히-아우어(Gollerich-Auer) 자서전의 최종판의 서문에서 그는 바이마르 시대의 물질주의(즉물주의)에 대한 공격을 서서히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 때는 바로 "예술적인 볼셰비즘이 극단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때였고, 브루크너의 "신을 신성시하는 예술"은 (총통을) 보다 나은 세상 1936년의 세계로 이끄는데 이바지했다. 10년 뒤에 아우어의 린츠 연설은 브루크너의 오스트리아 혈통과,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과 나치 교리를 분명히 부인하는 그의 주장 모두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연설이 성공적으로 아우어 자신의 이전 발언들을 상쇄시켰던 것일까? 그가 과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도 모호하게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브루크너 협회를 재건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더 많은 공연을 위해 또 더 많은 관객층의 확보를 위해서 누가 과거의 상처들을 다시 꺼내고 싶어했겠는가? 브루크너와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결코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이나, 혹은 전후에도 코드 앤 디스타드지에 언급된 적이 없다는 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미국에서 브루크너는 미국 내의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곡 스타일이 그 당시 미국 학계에 만연되어 있던 논리나 균형, 규모를 중시하는 브람스적인 패러다임에서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주류에서 벗어났다. 그의 음악은 오히려 최근에 콘서트의 레퍼토리나 음반 목록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러나 브루크너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미국의 음악적 담론의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 현재의 브루크너 작품집은 그저 그러한 경향에 약간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비록 사설적,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분석적 문제와 같은 중요한 이슈들이 여기서 처음으로 혹은 새로운 관점으로 논의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브루크너에 대한 이미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얼마나 나치의 선전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연구해야 할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전후 브루크너에 대한 중요한 해석(느린 템포들이나 풍부한 하모니를 그 예로 들 수 있다)이 나치의 종교적 우상으로서의 브루크너의 성향을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교향곡 무대나 녹음 스튜디오에 옮겨다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날 "솔직함", "순수성", "유기체" 등과 같은 말들이 나치 시대의 브루크너에 대한 담론들과 함께 명백하게 정치적으로 기호화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브루크너를 분석하고 수정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러한 질문들은 이 에세이가 다룬 영역 외에서도 광범위하게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궁극적으로는 해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브루크너 연구는 과거 사실에 대한, 특히 제3제국 시대 동안의 브루크너에 대한 어두운 평가를 외면한 채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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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하였고,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관념론과 기독교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 이외에도 하늘나라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한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니체는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멸망적 교리만을 전했다며 기독교를 비판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삶. 출생과 학업 (1844 – 1868). 출생.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예전의 프로이센 (독일)의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인 뢰켄(Röcken)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어있었다(니체는 훗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1813-1849)는 루터교회 목사이자 전직 교사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년에 결혼하였다.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는 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죽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 두 하녀들과 함께 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년에 세상을 하직하자,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이사했다. 학교. 185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에 다녔다. 두 친구는 모두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배웠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신앙도 상실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s")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공부와 군복무.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군에 자원하여, 1867년 10월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철학과 군복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도중, 한 꿈을 꾸게 된다. 내용은 어떤 시집을 읽었다는 것인데,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것을 기억해내 전쟁과 싸움을 잊고 학문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어 철학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 해 동안 복무하였다. 그러나 1868년 3월에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가슴을 심하게 다쳐 후송되었으나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는 군복무를 5년 이상 하였고, 높은 직위에도 올랐었다. 라이프치히 대학. 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다시 학업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1868년 10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바젤 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 (1869–1879). 바젤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 24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그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 . 다시 바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강연. 그는 대학교에서 취임 강의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 을 연설했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여러 강연회에 연사로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바그너와의 만남과 결별.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게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젤에 있을 당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이후 바그너의 뛰어난 제자의 한사람으로도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점차 기독교화되고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기독교적인 도덕주의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그와 결별했다. 박사학위.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하지만 리츨과 같은 니체의 동료들은 이 책에 대해 별로 열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술. 1873년과 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뉜다. 네 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1873년이 시작할 무렵,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니체는 말비다 폰 메이센부르크와 한스 폰 뷔로우를 만났고, 1876년에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초기 저작해소시킨, 파울 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대중의 천박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년 니체는 그 특유의 경구가 가득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즈음에 혼인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면서 니체는 바젤 대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다. 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는데, 가끔 두통이나 복통을 겪기도 했다. 1868년에 낙마사고와, 1870년에 걸린 병 때문에 니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바젤 대학교에서 휴가를 많이 갖기도 했다. 퇴직. 1879년 이후 건강상의 악화와 자유로운 철학의 정립을 위해 35세에 바젤대학교를 퇴직하고,조용히 산 속으로 들어가 요양과 집필에 전념했다. 독립 철학자 생활 (1879–1888)과 죽음. 35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퇴직한 이후 그는 강연도 그만두고,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계획을 접고 만다.(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겼고,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안장했다. 니체 정신병의 원인. 니체는 말년에 정신적인 붕괴를 겪고 10년 동안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었다. 그의 정신 착란이 매독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뜬소문에 불과하다. 니체가 매독에 걸렸다는 설을 반박하는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사상. 퇴폐성 비판. 그는 기존의 도덕적 세계관이 삶을 옥죄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에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종래의 도덕적 사상들을 데카당(퇴폐적인 것)이라 칭하며 비판한다. 플라톤 연구자이기도 한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일원론 (생기 존재론). 권력의지를 중심으로 하는 니체의 일원론은 근대 철학의 이원론과 배치되며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탈피하였다. 니체는 진리라는 것은 없으며 단지 진리를 추구하는 힘만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상 세계는 허구이며 오직 현상 세계만이 존재하고, 결과가 없이 언제나 과정으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이성의 철학이 아닌 반이성의 철학, 실체의 철학이 아닌 관계의 철학, 정적인 철학이 아닌 동적인 철학, 계몽의 철학이 아닌 허무의 철학을 주장하였다. 신은 죽었다. 신의 죽음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이란, 종교 혹은 이상주의 등의 신앙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달리말해, "신의 죽음이란 허무주의의 도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최고가치의 상실과 허무주의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삶의 최고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책에서 니체는 일견 불교에 대해 호평을 내리지만 이내 기독교와 불교 양자를 퇴폐적인(데카당트) 종교로 규정짓는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며, 불교는 삶에 지친 노인들을 위한 종교이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소개한다. 여기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그리스 비극'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해석 탓인지, 니체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리스 비극 정신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드러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 비극 정신이란, 니힐리즘을 근본으로 하는 고통을 힘의지로 승화시키는 태도이다. 니체는 탈아의 도덕을 뛰어넘는 인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를 위버멘쉬라 부를 수 있다. 위버멘쉬는 또한 종래의 안일한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유형이다. 이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종래의 성(聖)과 속(俗)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허무주의. 니체는 《유고》에서 허무주의(Nihilismus)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수동적 허무주의'란 염세주의라고 생각하면 쉽다. 허무감에 사로잡힌 상태를 뜻한다. 달리말해, '허무하다', '무의미하다', '무가치하다' '없다(니힐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의 인간은 결과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잃고 향락주의나 물질주의에 빠져들게 될 공산이 크다. 외부에서 신으로부터 주어진 의미가 없기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주어진 의미를 찾기에 수동적이다. 다음으로, '능동적 허무주의'란 '없다는 느낌(=무의미하다는 느낌 = 무가치하다는 느낌 = 니힐하다 = 허무주의)'에서 더 나아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의미를 찾기보다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가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의미가) 없으면 만든다는 식이다. 짧게 말해, (유럽에서) 가치와 규범과 의미를 제공해주던 일체가 - 그걸 신이라고 불러도 좋고,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나 칸트라고 불러도 좋다 - 그 확실성을 잃게 되었기에 허무주의(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도래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위버멘쉬 (Übermensch) 위버멘쉬는 어원적으로 '뛰어넘는(Über) 인간(mensch)'을 뜻한다. 다시 말해 극복하는 인간이며, 극복함으로써 창조하는 인간이다. 위버멘쉬는 근대적 가치와 도덕 및 신앙을 뛰어넘는 인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종래의 규범들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위버멘쉬는 탈아의 도덕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다. 이를테면 극기복례 혹은 순교자 개념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며, 그럼으로서 창조해내는 인간이다. 위버멘쉬 개념은 '풍습의 도덕'과 대립될 뿐 아니라,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과도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이란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형 혹은 권력욕에 물든 인간을 가리킨다. 위버멘쉬는 초월적,신적인 힘을 갖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탈아적 가치를 극복하고 새 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을 의미한다. 힘에의 의지 (Wille zur Macht). 니체 철학에서 힘에의 의지란 자기 보존 본능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주창한 생에의 의지라는 개념과 대립되는 개념. 찰스 다윈이 주장한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과도 대립된다. 니체는 '생존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덕비평. 니체 철학에서 도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개념의 족보를 다루며, 도덕과 그 부대개념들이 역사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인지를 기술한다. 주인도덕은 좋음과 나쁨을 가려 물으며 이를 가치평가의 잣대로 삼는다. 노예도덕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선과 악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상정한다. 다시 말해, 주인도덕은 개인의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하고, 노예도덕은 사회적 선악(善惡)을 기준으로 한다. 주인에게 '좋음'이란, 자신과 타자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주인에게 '나쁨'이란,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대립된다. 주인은 자신을 기준으로 '선'을 상정하지만, 노예는 먼저 '악'을 떠올린다. 노예도덕에서는 '주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자발적 용서'로 둔갑한다. 노예도덕에서는 노예가 느끼는 무력감이 미덕으로 위장한다. 주인의 미덕이 약자의 눈에는 악덕으로 비쳐진다. 도덕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도덕의 계보》 이외에도 니체가 쓴 《아침놀》이나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아침놀》에서 니체는 '관습의 도덕'이라는 개념을 거론하며 이를 비판한다. 《고르기아스》를 읽다보면 중간 즈음부터 칼리클레스가 등장하여 자연과 규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칼리클레스는 '규범'이 약자 패거리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며, 규범이란 소수에 불과한 강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입장은 칼리클레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니체 윤리학에서 지칭하는 '주인' 혹은 '강자'라는 개념은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는 상인계급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 회귀" 사상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이다. 이 사상은 1881년 실스마리아에서 니체를 압도적인 영감으로 덮친 사상이다. 이것은 도달 가능한 최고의 긍정 형식이다. (자세한 내용은 "영원 회귀" 문서 참고) 미학 이론. 비극의 탄생. 니체 미학의 고대적 발판.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의 결정적 새로움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인들에게서 발견되는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탄생"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죽음"에 니체의 마음이 쏠렸다. 니체에게 소크라테스는 기독교 종교의 예비자를 구현하고 있었으며,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반(反)그리스도"이고 "예술가 신"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선악을 넘어선" 염세주의와 비도덕적인 디오니소스 신의 "예술-종교"를 통해서, 간단하게 말해서 현존재가 예술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어서 나타나는 "예술가-형이상학"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구현된 현존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로적 명징성과 유쾌함, "지식의 빛"과 자아 인식의 인간적 구현이다.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바쿠스적 소동과 춤"의 "어두운 심연", "사랑의 도취에서 생긴 자아망각"을 대표한다.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니체 미학의 두 가지 근본적 범주이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의미에서 조화롭게 대립된 두 예술 충동의 "접합"의 결과물이 니체에게는 단지 아테네 비극의 탄생만이 아니라, 예술 전체의 탄생이다. 첫 작품에서도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인 "미학적 상태"의 특징과 아폴로적인 것이 지닌 소크라테스주의와의 친근성은 이미 후기 니체의 저서에서 점점 강하게 드러나는 아폴로적인 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우세를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 점과 연관된 디오니소스적 특성이 니체 미학이 지닌 독특한 새로움이다. 그것은 대립된 개념이고, 그것을 통해서 초기 니체는 반 고전주의적 미학의 전령이 되고 후기 니체는 영원 회귀의 반(反)기독교적 예술-종교의 선생님이 된다. 니체에게는 예술 신의 전형이 된 "아폴로적 디오니소스"는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이다. 그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이 탄생했다. 그는 비극의 탄생 속에서만이 아니라 비극적 후기 철학의 핵심 인물이다. 거인족에 의해서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가 아폴로에 의해서 다시 맞추어지는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르페우스교의 자그레우스 신화는 니체에게는 비극의 신비적 가르침이다. 그는 비극적 신화 그 자체이다. 이런 토양 속에서만 니체의 미래 미학이 성장하고, 젊은 니체의 예술가-형이상학이 자라난 것은 아니다. 신들의 황혼을 쓰는 후기 니체,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도 결국 이 토대 위에 다시 서게 된다. 니체는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누스, 크로이처와 라살을 통해서 오르페우스교 자그레우스 신화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폴로적-디오니소스적"이라는 유명한 대립 쌍이 결코 니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니체는 크로이처, 라살, 미슐레 그리고 포이어바흐 등등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독자적 미학 이론을 만들어냈다.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이라는 환영 속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술가, 예술 수용자 그리고 예술 작품의 분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화해한 축제를 기리는"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의 모습 속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혹은 생산자와 생산품의 분리가 들어설 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음악극의 탄생 시기에 대한 중요한 근본 경험으로부터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면서 니체는 하나의 발전을 미리 보게 된다. 그러한 발전은 전래의 "예술 작품의 예술", 즉 개인적 예술가들의 예술 작품으로부터 바그너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종합예술"인 "축제극"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바그너에 대해서 점점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종적 단계에서 세상을 보편적 예술 작품으로 보는 미학적 관찰로 이끈다. 바이로이트의 "축제극"에서 진정한 종합 예술작품인 "세계극"이 생겨난다. 더 이상 예술 작품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관찰된다. "모든 것이 유희다", "모든 것이 예술이다". "정오", 아폴로적 디오니소스가 현현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드러난다. 완벽하게 되고 미학적으로 정당화된 세계는 스스로를 잉태하는 예술작품으로 나타난다. 예술로서의 힘의지. 사람들이 "힘의지"라는 마술적 공식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애를 쓴지도 이미 100년이 훨씬 더 지났다. 1901년 부분적으로는 어제도 규범적인, 세기적인 니체 유고의 편집 본이 권력 의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오랫동안 니체의 주요 저작으로 잘못 간주했다. 오래전에 표어가 되어버린 그리고 정치적으로 잘못 해석된 권력(쟁취) 의지 이론은 실제로는 결코 실행되지 못했던 니체의 계획을 표시한다. 그 계획은 니체의 미학 이론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쇼펜하우어와는 대조적으로 니체는 자유 의지를 "파국적인 철학자들의 고안물"로 비판하고 여러 번 "어떤 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권력 의지를 "세상의 정수",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고찰한다. 그것은 권력 의지가 욕구가 없는 의지, 즉 원하는 자아가 없는 의지일 경우에만 서로 일치한다. 니체는 권력 의지라는 생각으로 분명 "나는 원한다."라는 문장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처럼 (힘이 넘치는 위버멘쉬)의 개인적 의지라는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특별히 차라투스트라의 첫 연설("세 가지 변신에 대해서")에서 분명해진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난 다음에, "너는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낙타에게 내려진다. 정신이 사자가 되었을 때, 사자의 정신은 말한다. "나는 원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신은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정신의 세 번째이고 가장 심오한 변화이다, 그 변화 속에서 기독교적 도덕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 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나는 원한다."는 말도 아이의 순진함, 창조의 유희 속에서 "자기긍정"을 얻기 위해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위버멘쉬는 "금발의 야수"가 아니라, 사자의 정신과 "나는 원한다."는 것을 극복하는 인간이다, 그의 정신은 아이가 된다. 3번째 정신의 변화 후에 생기는 욕구 없는 의지를 지니고, 자아를 잊어버린 주체의 고대적 모범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B52에 나오는 유희하는 아이다. 이 단편에서 삶의 유희 혹은 세계-시간, 즉 아이온Aion은 유희하는 아이로 묘사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유희하는 아이는 신의 세 번째 변화 후에 생기는 니체의 유희하는 아이의 선행 인물이다. 즉 그 아이는 위버멘쉬의 선행 인물인 것이다. 이 단편과 니체가 자신의 생각 속에 재해석한 것은 접합점으로 드러나고, 그 속에서 비극의 탄생을 쓴 초기 니체로부터 차라투스트라를 쓴 후기 니체로 이끌고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라는 두 개의 어려운 생각을 결합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여러 개의 결합선이 모여 있다.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해석한 것 속에 나타나는 세계-시간의 “위대한 년도”인 아이온은 영원 회귀가 신적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세계-아이인 아이온이 벌이는 세계-놀이가 지닌 이름이 권력 의지이다. 아이온의 목적 없는 유희 속에서는 욕구 없는 의지가 지배하며, 아이온은 권력 의지의 신적 의인화이다. 권력 의지와 영원 회귀는 동일한 아이온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한 편으로는 아폴로적 디오니소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제우스의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 아이온이 니체의 비극적 후기 철학에서 예술로서의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의 예술가-형이상학을 주관하는 신으로 합쳐진다. 미학사적 문맥. 미학 이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실, 니체가 고전 문헌 학자였다는 사실은 고대의 밑바닥에서부터 그가 신랄하게 비판한 현대의 꼭대기로 곧장 도약을 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도약은 특히 니체의 미학적 성찰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니체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먼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모든 예술이 내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의존되어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그는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을 "우리 문하의 최고의 스승"으로 칭찬한다. 기독교 신은 죽었고 그와 함께 형이상학도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형이상학 이전의 시대에서, 즉 비극적 그리스인들의 시대에 있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니체의 철학적 고생물학은 고대 토양의 점진적 재획득,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산재된 사유들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서 그보다 앞서 살았던 헤겔처럼 단순하게 임시적인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니체보다 나중에 살았던 하이데거처럼 모범적인 것을 보았다. 니체의 퇴행은 다름 아니라 진보이다. 니체는 플라톤 이전-형이상학 이전의 철학으로 자신이 되돌아간 것을 미래 미학으로 도약을 하기 위한 도움닫기로 이해를 한다("미래의 시간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비극 책이 쓰이던 시기에 미래의 미학이 바그너의 작품 속에서 미리 구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나중에 자신이 꿈꾸었던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사산(死産)으로 인식을 해야만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신전을 발굴한 것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비극적 철학의 재생을 위한 니체의 의지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이론의 서곡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별히 초기 형이상학 시기의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학적 "세계-유희"로서의 "삶의 유희", 대립되는 것의 조화와 추한 것 속에도 존재하는 미의 편재성에 대해서 느낀 경험을 통해서 니체는 후기형이상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대한 선조가 되었다. 그것으로써 니체가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특징Nachvorsokratismus은 동시에 존재하는 모더니즘 이전과 이후의 특징Vorpostmodernismus이기도 하다. 평가.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성 비방과 음해에 시달렸으나, 사후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재에는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된다. 니체의 사상은 그 전복적 성향으로 인해 자주 오해되고 비판받았다. 이런 니체의 성향은 온갖 권위에 불복했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체에 대한 평은 극으로 갈릴 때가 많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종교인들에게서는 혹평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에게서는 호평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현대 철학사(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등과 함께 근대철학을 전복시킨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니체는 가끔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인종주의의 시초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는 나치정권과 니체의 여동생이 공동으로 니체의 사상을 왜곡한 결과 확산된 인식에 불과하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저서를 짜집기해서 나치정권에 유리하게 아부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후일 연구자들의 노고로 '비평판 니체 전집'이 출간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흩어졌던 그의 저서들을 모아 일종의 보관소까지 열었으며, 미쳐 있던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히틀러에게 '니체의 위버멘쉬란 당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니체에게 붙어다니는 해괴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실제 니체는 개인주의자였으며 반(反)국가주의자였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1961년 《니체》를 출간한 이후 달리 평가되어 오늘날 니체에 대한 이상한 오해는 거의 해결되었다. 실제 니체는 자국인 독일을 매우 싫어했고 민족주의 또한 매우 혐오했다. 수용. 니체 본인은 자신의 저서에 대한 반응을 갈망했지만 허사였다. 그가 정신을 잃기 몇 년 전에서야 그의 사상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니체는 철학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삶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학과 문체 그리고 삶의 양식을 통해서, 니체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샤르트르 그리고 카뮈 같은 작가들,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심리학자, 슈펭글러와 슈타이너와 같은 비밀스런 종교의 스승, 벤, 게오르게, 지드, 헤세, 호프만슈탈, 말로,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모르겐슈타인, 무질, 오닐, 릴케, 쇼, 예이츠 등등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예를 들면 조형 예술에서 "발견한 대상"(뒤샹)의 경우에 드러나는 "작품의 부재"와 같은 현상으로 특징지어지는-가 시작되기 직전에 니체는 현재의 대부분의 미학 이론보다 20세기 예술 정신을 생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것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위버멘쉬”와 “힘에의 의지”라는 핵심 개념과 도발적인 문장 때문에 보이믈러의 해석에 나타나는 것처럼 최초의 나치로 쉽게 오해받았던 니체가 특별히 동구권에서는 오랫동안 파시즘의 예비자와 "파시즘 미학의 선구자"로 오해되고 왜곡되고 모함을 당한 이후에, 그는 현재 그 곳에서, 특히 구동독 지역에서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니체의 전 저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편집한 콜리와 몬티나리의 대단한 작업은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현 시대에도 지속되는 지적 반향의 표시이다. "세계의 유희에 대한 미학적 기본 지각"을 지닌 니체의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예술가-형이상학"의 수용은 프랑스에서는 오늘날까지 중단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발터 카우프만의 니체 연구 이후로 미국에서도 니체에 대한 연구는 강화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더불어 동아시아에 많이 알려졌다 저작. 니체 저작의 판본. 니체가 쓰러진 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를 산책하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이후 간헐적으로 제정신을 회복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상 죽기 전까지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니체()는 1888년 ~ 1889년 해가 바뀔 무렵 정신적 암흑에 빠졌다. 그의 저작들은 정본이라 할 만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부분적으로 예전 저작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었으나, 두 저작은 — 니체가 잘못된 곳들을 지적한 가운데 — 인쇄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아울러 인쇄되지 않은 자료들이 다양한 마무리 수준 상태로 존재했다. 이 인쇄되지 않은 자료는 프란츠 오버베크()가 하인리히 쾨젤리츠()(페터 가스트())와 협의하여 처음으로 수집했다. 이들은 또한 니체의 최종 출판업자인 콘스탄틴 게오르크 나우만()과 함께 계속적인 출판작업을 두고 논의했다. 그리고 1890년 말에 처음으로 파라과이에서 귀향한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가 가족을 대표하여 논의에 참견했다. 그간에 니체 저술의 판매고가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1892년 초에 처음으로 전집판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전집판은 나우만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쾨젤리츠가 이를 담당했다. 니체 왜곡과 사후. 니체는 전체주의, 도덕주의, 국가주의, 종교, 실체론,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사후 게오르크 헤겔과 함께 파시즘의 상징적 존재로 왜곡되고 악용되었다.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그의 사후 그의 누이 엘리자베드 때문이었다. 엘리자베드는 광적인 국가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였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엘리자베드는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하려 했다. 이무렵의 니체는 정신이 붕괴된 상태였기에 여동생의 멍청한 짓거리에 대처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드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니체의 저작에 관심을 보이고, 시중에서 니체의 사상이 유행하게 되자 탐욕에 사로잡혔던 그의 누이는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짜집기해서 〈힘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1901) 등을 출간했다. 엘리자베드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는데, 히틀러의 니체 추종 보다는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히틀러와 연결짓게 되었다. 1930년 저작권 보호기간의 만료. 1930년, 니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었다. 작곡. 니체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13세 무렵부터 20세 무렵에 걸쳐 가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그 후 작곡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바그너와의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고, 바젤 시절에 몇 개의 곡을 남겼다. 작풍은 전기 낭만파적으로, 슈베르트나 슈만을 연상케 한다. 그가 후에 전혀 작곡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본업으로 바쁘게 보냈다고 하는 이유 외에, 자신의 작품인 《만프레드 명상곡》을 한스 폰 뷜로에게 혹평 받은 것이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작곡가로서 인식되는 일은 전무하지만, 저명한 철학자가 작곡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부 연주가가 녹음하게 되었고, 서서히 그의 '작곡도 하는 철학자'로서의 측면이 밝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가곡이나 피아노곡이지만, 2인 연탄곡 작품 중에는 《맨프레드 명상곡(Manfred-Meditation)》 교향시 《에르마나리히(Ermanarich)》 등,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작품도 있다. 또, 오페라의 스케치를 남기고 있는데, 2007년에 지크프리트 마트스가 그의 스케치를 골자로 한 오페라 《코지마(Cosima)》를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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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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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타라
투아타라(tuatara)는 옛도마뱀목에 속하는 파충류로 뉴질랜드에 2종이 분포한다. ‘투아타라’라는 이름은 마오리어로 ‘가시돋힌 등’이라는 뜻을 가졌다. 2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체는 길이 24cm, 몸무게 500g 정도까지 자란다. 다른 파충류들과 구분되는 특징으로는 치아가 턱뼈에 유착되어 있으며, 낮은 온도(16-21°C)에서 잘 견디고, 오히려 27°C이상의 온도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까지 적어도 10년 이상 걸리며, 4년에 한번씩 알을 낳기 때문에 번식이 더디다. 이들의 수명은 매우 길어서 보통 60년정도이고, 심지어 100년을 넘게 살기도 하는데, 뉴질랜드 자연박물관의 투아타라가 111살의 나이로 새끼를 낳은 일도 있다. 개체수가 적고, 서식지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 1895년부터 국제적으로 멸종위기종(endangered species)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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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도마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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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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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목
뱀목 또는 유린목(有鱗目, , scaled reptiles)은 파충강의 한 목이다. 도마뱀과 뱀을 포함한다. 하위 분류. 분류학적으로, 뱀목은 3개의 아목으로 분류된다. 이들 중, 도마뱀은 다계통군을 형성한다. 도마뱀아목(Sauria)이라는 좀 더 최근의 분류명은 일반적으로 파충류와 조류 등에 사용되며, 뱀목(Squamata)은 다르게 나뉜다. 이들 아목 사이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뱀목(Squamate)의 거의 대부분(60%)을 포괄하는 하나의 잠정적인 독을 지닌 분류군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분류명 Toxicofera는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분류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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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악어(鰐魚)는 악어목(鰐魚目)에 속하는 파충류의 총칭으로, 약 2억 2천만 년 전에 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룡이나 새와 근연관계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23종이 알려져 있다. 생태. 악어는 물을 수는 있어도 씹지는 못하기 때문에 잡은 동물들을 빙글 돌리면서 몸통을 잘라 통째로 먹는다. 주로 물가에 매복하였다가 물 마시는 가젤, 누, 임팔라, 박쥐 등을 잡아 먹는다. 재규어에게는 천적 대상이다. 악어는 동족포식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영역에 침범한 작은 개체에 대해선 거침없이 공격성을 표출한다. 악어의 동족포식 현상이 야생에서만 발견되지는 않는다. 좁은 공간에 여러 개체를 한데 모아 전시하는 동물원에서도 자주 동족포식 현상이 발견된다. 악어는 알을 수십개 낳고 땅에 묻어 몇 개월을 지키지만 주변에 있는 왕도마뱀이나 개코원숭이들이 훔쳐가기 때문에 몇 개가 남지 않고 부화되지만 물 속에서 살아남는 최후의 새끼는 소수이다. 원시 악어. 중생대 백악기, 무리생활을 했던 3미터쯤 되는 길이의 원시 악어는 육식공룡처럼, 긴 꼬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앞발을 든 채 긴 뒷다리로 민첩하게 걷고 달리면서 백악기 호수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 악어목은 크게 가비알과, 앨리게이터과, 크로커다일과의 세 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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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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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
파충류(爬蟲類, , )는 용궁류(蜥形類, ) 파충강(爬蟲綱)에 속하는 척추동물(脊椎動物)이다. 린네식 분류법으로 파충류로 분류되는 동물들을 뜻하며, 공기로 호흡하고, "냉혈(冷血,Cold-Blooded)" 물질대사를 하고, 딱딱한 껍질을 갖고 양막(羊膜, amnion)을 지닌 알을 낳는다. 태생을 할 경우에도 유사한 막(membrane)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피부는 비늘과 껍질로 이루어져 있다. 네개의 다리를 지니거나 네발을 지닌 선조에서 유래한 네발동물(영어: Tetrapod)이며, 배(胚, embryo)가 양막이란 막(膜, membrae)에 의해 둘러쌓인 구조인 양막형 알(amniotic eggs)을 낳는다. 현재의 파충류들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분포하며, 네 개의 목(目, order)으로 분류된다. 최근에는 조강과 함께 용궁류의 분기군(分岐群, "Clade")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의 파충류는 조강을 제외하고, 거북목을 포함한다. 대표적인 파충류에는 뱀, 도마뱀, 카멜레온, 거북, 자라, 악어 등이 있다. 과거 번성했던 공룡은 파충류로 보고 있으며, 전설에 나오는 용(dragon)은 파충류 모양을 본 뜬 것이다. 파충류는 양서류와 달리 물속에서 살아가는 유생 단계(예, 개구리의 올챙이, 도롱뇽의 올챙이 시기)를 거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파충류는 알을 낳으며(oviparous (egg-laying)) 비늘을 가진 몇몇 종은 새끼를 낳는다. 새끼를 낳는 경우는 난태생 (ovoviviparity, 알이 만들어지지만 어미 몸 속에서 오래 머물면서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 몸 밖으로 배출됨)과 태생(viviparity, 석회질의 껍질을 만들지 않고 새끼를 출산함) 둘 중 하나이다. 태생(viviparous)을 하는 파충류들은 포유류의 태반과 닮은 다양한 형태의 태반을 이용하여 태아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며, 난태생하는 종의 경우에는 초기에 많은 영양분을 알 속에 넣어주고 알이 깨어날 때까지 돌봐준다. 현존하는 파충류들은 성체의 크기가 1.7 cm(0.6 in)인 작은 도마뱀붙이(게코 도마뱀, "Sphaerodactylus ariasae")에서부터 길이가 6m, 몸무게가 1,000kg에 달하는 바다악어("Crocodylus porosus")까지 다양한 크기로 존재한다. 파충류를 연구하는 과학을 양서파충류학(兩棲爬蟲類學, Herpetology)이라 한다. 분류. 분류의 역사. 파충류들은 양서류들과 함께 분류되어 있던 부류에서 떨어져 나왔다. 보통의 살무사나 풀뱀 등이 물에서 사냥하는게 종종 보고되는 등, 종의 다양성이 적었던 스웨덴에서 연구를 했던 칼 폰 린네는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에서 모든 파충류와 양서류를 "III-양서류"라는 하나의 강(class)으로 분류하였다. 분류 체계. 파충류의 계통수는 아래와 같다. 이 중 현존하는 종 가운데 조강을 제외하여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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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
동물학(動物學, )은 생물학의 한 갈래로서 동물을 대상으로 생명 현상(生命現象)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동물의 분류, 발생, 생태, 형태, 유전, 진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역사. 동물학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왕국의 연구를 추적한다. 하나의 일관성 있는 분야로서 동물학의 개념이 훨씬 나중에 발생하였지만, 동물학은 박물학으로부터 병합되며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노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고대의 노고는 중세시대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등의 이슬람 물리학자들과 학자들에 의해 더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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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
식물학(植物學, )은 생물학의 한 갈래로서, 식물을 대상으로 생명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식물학의 범위는 식물의 구조, 성장, 생식, 물질대사, 진화, 질병, 화학적 특성, 그리고 다른 식물들과의 진화적인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포함한다. 가장 오래된 과학 분야의 하나인 식물학의 첫 걸음은 식용, 약초, 그리고 독초()를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식물에 대한 이러한 오랜 관심으로 식물은 현재 약 550,000여 종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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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부호
유전 부호(遺傳符號, ) 또는 유전 암호(遺傳暗號)는 각 코돈(codon)이 어떤 아미노산을 부호화(encoding)할지를 정해놓은 규칙이다. 상보적으로 맞아떨어져야만 하도록 쌍을 이루어놓아서 이러한 맥락에서 암호화(encryption)의 의미가 있으나 유전 암호라는 번역 외에도 유전 부호라는 표현도 있다. 이러한 유전 부호의 의미는 모스 부호(Morse code), 아스키 코드(ASCII code), 유니코드(Unicode)처럼 부호(code)화 시스템이 AES나 RSA같은 암호화 시스템(cryptosystem)보다 더 잘 설명될 수도 있다. 유전 부호에 속하는 하나 하나의 부호(code)를 코돈()이라고 부른다. 코돈. 코돈(codon)은 유전자 발현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전령 RNA와 운반RNA의 유전 정보이다. 역사. 어떻게 단백질이 부호화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은 DNA 구조가 1953년에 발견된 이후로 시작되었다. 미국의 천체물리학자인 조지 가모우(George Gamow)는 20가지로 지정된 표준 아미노산은 세 개의 염기로 구성되어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따르면, 염기의 총류는 총 네 가지이고, 표준 아미노산은 세 개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기에 총 64가지의 서열이 존재할 수 있다. 이 주장은 1961년에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 레슬리 바넷(Leslie Barnett) 그리고 R.J. 와츠-토빈(R.J. Watts-Tobin)의 공동 실험에 의해 실증적으로 증명되었다. 같은 연도에는 코돈의 구조에 대해 연구되었고 그 구조가 마셜 워런 니런버그(Marshall Warren Nirenberg)와 하인리히 마테이(Heinrich Matthaei)의 실험으로 밝혀졌다. 전사와 코돈의 형성. 유전자 발현에서 새로운 단백질의 형성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다. DNA 사슬을 구성하는 특정한 염기 서열이 전사를 지시하는데 전사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억제자 효소가 부착되어 있어 전사를 막는다. 특정한 단백질의 생산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받으면 억제자는 DNA 사슬에서 떨어져 나가고 RNA 중합효소에 의해 전사가 시작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지점에 있는 프로모터의 염기서열에 의해 전사의 방향과 전사할 DNA 사슬을 선택하고 오퍼레이터에 결합되어 DNA 사슬을 풀어낸 후 전사를 시작된다. RNA 중합효소는 주형이 되는 DNA 사슬과 상보적인 리보뉴클레오타이드를 이용하여 전령 RNA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령 RNA의 염기서열은 세개씩 짝을 이뤄 코돈을 형성한다. 한편 RNA 중합효소는 전사 종결을 지시하는 DNA 염기서열을 만나면 전사를 중단하고 DNA에서 떨어져 나간다. 안티코돈. 안티코돈은 운반 RNA의 RNA 사슬을 이루는 특정 구간의 염기서열이다. 전령 RNA의 코돈은 리보솜에서 번역되어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운반 RNA의 안티코돈과 상보적으로 결합한다. 그런데 이렇게 상보적으로 결합을 하는 안티코돈이지만 그 개수는 64개가 아니라 45개가 존재한다. 단백질의 형성. 운반 RNA는 RNA 사슬의 일부 구간이 안티코돈으로 작용하고 사슬의 끝에는 해당 아미노산을 결합시킨다. 이렇게 충전된 운반 RNA는 리보솜으로 들어가 전령 RNA의 코돈과 결합하고 리보솜은 운반 RNA의 끝에 달린 아미노산을 떼내어 폴리펩타이드 결합을 만든다. 아미노산이 떨어져 나간 운반 RNA는 리보솜 밖으로 나와 다시 아미노산을 전한다. 한편, 리보솜에서 만들어진 폴리펩타이드는 적당한 3차원 구조로 접혀서 단백질이 된다. 아미노산. 20가지(페닐알라닌,세린,티로신,시스테인,류신,트립토판,프롤린,히스티딘,아르기닌,글루타민,이소류신,트레오닌,아스파라긴,리신,메티오닌,발린,알라닌,글리신,아스파라긴산,글루타민산)로 지정된 표준 아미노산은 세 개의 염기로 구성되어있다. 추가로 스톱코돈(stop codon 또는 종결코돈)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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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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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
생화학(生化學, )은 살아있는 생물체 내에서 그리고 생물체와 관련된 화학적 과정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물화학(生物化學, )이라고도 하지만, 보통 줄여서 생화학이라고 한다. 생화학적 과정들은 생명의 복잡성을 야기한다. 생물학과 화학의 하위 분야인 생화학은 분자유전학, 단백질 과학, 물질대사의 세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20세기의 지난 수 십년 동안 생화학은 이들 세 가지 분야를 통해 생명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생명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들이 생화학적 방법론과 연구에 의해 밝혀지고 발전하고 있다. 생화학은 생체분자들이 어떻게 살아있는 세포 내에서 그리고 세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을 발생시키는지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는 차례로 조직, 기관, 개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연구와 이해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 생화학은 DNA에 암호화되어 있는 유전 정보가 생명의 과정을 일으킬 수 있는 분자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인 분자생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화학의 대부분은 단백질, 핵산, 탄수화물, 지질과 같은 생물학적 고분자의 구조, 기능, 상호작용 등에 대해 다루며, 이들 생체분자들은 세포의 구조를 형성하고 생명활동과 관련된 많은 기능들을 수행한다. 세포의 화학작용은 더 작은 분자들과 이온들에 달려있다. 이것들은 물, 금속 이온과 같은 무기 화합물이거나 단백질 합성에 사용되는 아미노산과 같은 유기 화합물일 수 있다. 세포가 화학 반응을 통해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이용하는 메커니즘은 물질대사로 알려져 있다. 생화학에서의 발견은 주로 의학, 영양학, 농업에 적용된다. 의학에서 생화학자들은 질병의 원인과 질병의 치료 방법 및 의약품에 대해 연구한다. 영양학에서 생화학자들은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과 영양소 결핍의 영향에 대해 연구한다. 농업에서 생화학자는 양과 비료를 조사하고, 작물 재배, 작물의 저장 및 해충 방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역사. 생화학을 가장 넓은 정의로 보면 생물체의 구성 요소와 구성 체제,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생물체가 되는가에 대한 연구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생화학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특정 과학 분야로서의 생화학은 생화학의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19세기 또는 이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어떤 이들은 생화학의 시작이 앙셀름 파얜이 1833년에 최초로 효소인 다이아스테이스(오늘날 아밀레이스라 불리는)를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 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에두아르트 부흐너가 세포 추출물에서 복잡한 생화학적 과정인 알코올 발효를 최초로 증명한 것을 생화학의 탄생으로 여기기도 한다. 일부는 1842년에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생리학 및 병리학에서 물질대사에 대한 화학적 이론을 제시한 유기화학에서의 영향력 있는 연구를 생화학의 시작이라 꼽기도 하며, 또는 보다 이른 시기인 18세기에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발효 및 세포 호흡에 대한 연구를 생화학의 시작이라 보기도 한다. 생화학의 복잡성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준 이 분야의 많은 개척자들도 현대 생화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에밀 피셔는 단백질 화학에 대한 연구를, 프레더릭 가울랜드 홉킨스는 효소와 생화학의 역동적인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생화학(biochemistry)"이라는 용어 자체는 "생물학(biology)"과 "화학(chemistry)"의 결합으로부터 유래하였다. 1877년에 펠릭스 호페 자일러(Felix Hoppe-Seyler)는 《생리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Physiologische Chemie) 제1호의 서문에서 생화학이란 용어를 생리화학의 동의어로 사용하였고, 생화학 여구 기관의 설립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독일의 화학자 칼 노이베르크(Carl Neuberg)가 1903년에 생화학이란 용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이들은 프란츠 호프마이스터(Franz Hofmeister)가 생화학이란 용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때는 생명체와 생명체의 물질들이 무생물과 구별되는 어떤 본질적인 특성이나 물질(흔히 "생기론"으로 일컬어짐)을 가지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졌고, 오직 생명체만이 생명의 분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828년에 프리드리히 뵐러는 요소 합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유기 화합물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 이후 생화학은 특히 20세기 중반부터 크로마토그래피, X선 결정학, 이중 분극 간섭계, 핵자기 공명분광법, 방사성 동위원소 표지법, 전자현미경, 분자동역학 시뮬레이션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발달하면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은 해당과정 및 시트르산 회로와 같은 세포의 많은 분자들과 대사 경로의 발견과 상세한 분석을 가능하게 했으며, 분자 수준에서 생화학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필립 랜들(Philip Randle)은 1963년에 발견한 랜들 회로(포도당-지방산 회로) 및 당뇨병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랜들은 지방산이 근육에 의한 포도당의 산화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지방 산화가 인슐린 저항성의 원인이었다. 생화학에서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유전자와 세포에서 정보 전달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역할의 발견이었다. 생화학에서 이러한 부분을 흔히 분자생물학이라고 부른다. 1950년대에 제임스 D. 왓슨, 프랜시스 크릭, 로절린드 프랭클린, 모리스 윌킨스는 DNA 구조를 밝혀내고, 유전 정보의 전달 관계를 제안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지 비들과 에드워드 테이텀은 균류에서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생성한다는 것을 보여준 공로로 1958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콜린 피치포크(Colin Pitchfork)는 1988년에 DNA 증거로 살인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사람으로, 이것은 법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앤드루 파이어와 크레이그 멜로는 유전자 발현의 침묵에서 RNA 간섭(RNAi)의 역할을 발견한 공로로 2006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작 물질: 생명의 화학 원소. 자연에서 발견되는 92가지의 화학 원소들 중 약 24가지는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에 필수적이다. 지구 상의 희토류 원소는(셀레늄과 아이오딘을 제외하고는) 생명체에서 사용되지 않고, 몇 가지 흔한 원소들(알루미늄과 티타늄)도 생명체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생물체들은 필요로 하는 원소들의 종류가 공통적이지만, 식물과 동물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바다 조류는 브로민을 사용하지만, 육상 식물과 동물은 브로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동물은 나트륨을 필요로 하지만, 일부 식물은 나트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식물은 붕소와 규소가 필요하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또는 극소량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슘, 인의 6가지 원소들은 사람의 세포를 포함한 살아있는 세포 질량의 약 99%를 차지한다. 인체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6가지 주요 원소 외에도, 사람은 18가지 이상의 미량 원소들을 필요로 한다. 생체분자. 생체분자의 4가지 주요 부류는 탄수화물, 지질, 단백질, 핵산이다. 많은 생물학적 분자(생체분자)들은 중합체이다. 단위체는 중합체로 알려진 큰 고분자를 생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분자들이다. 단량체가 서로 연결되어 생체고분자를 합성할 때 탈수 반응을 거치게 된다. 서로 다른 고분자들은 더 큰 복합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복합체들은 종종 생물활성에 필요하다. 탄수화물. 탄수화물의 주요 기능 중 두 가지는 에너지의 저장과 구조의 형성이다. 당(糖)은 탄수화물이지만, 모든 탄수화물이 당인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탄수화물들이 존재한다. 탄수화물은 에너지 저장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세포와 세포 사이의 상호작용 및 세포 신호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탄수화물은 단당류이며, 대부분 탄소, 수소, 산소가 1:2:1의 비율로(일반적인 화학식은 CnH2nOn,여기서 n은 3이상) 포함되어 있다. 포도당(C6H12O6)은 가장 중요한 탄수화물이다. 과당(C6H12O6)은 과일의 단맛과 관련있는 단당류이며, 디옥시리보스(C5H10O4)는 DNA의 구성 성분이다. 단당류는 선형 또는 고리형으로 존재할 수 있다. 선형의 단당류는 카보닐기와 하이드록시기의 반응으로 산소 원자가 고리에 포함된 탄소 고리의 형태를 형성할 수 있다. 고리형 분자는 알도스이면 헤미아세탈, 케토스이면 헤미케탈이다. 이들 고리형에서, 고리는 보통 5개 또는 6개의 원자를 갖는다. 5원자 고리형은 5원자 고리 화합물인 푸란을 닮아서 푸라노스라고 하며, 6원자 고리형은 6원자 고리 화합물인 피란을 닮아서 피라노스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알도헥소스인 글루코스(포도당)은 1번 탄소의 카보닐기와 4번 탄소의 하이드록시기 사이에 결합이 만들어져 헤미아세탈이 형성되면, 글루코푸라노스라고 불리는 5원자 고리 구조를 생성할 수 있다. 같은 반응이 글루코스의 1번 탄소의 카보닐기와 5번 탄소의 하이드록시기 사이에 일어나면, 글루코피라노스라고 불리는 6원자 고리 구조를 생성할 수 있다. 두 개의 단당류는 물 분자가 방출되는 탈수 반응을 통해 글리코사이드 결합을 형성하여 이당류를 생성할 수 있다. 이당류는 가수분해 반응으로 글리코사이드 결합이 분해되어 2개의 단당류를 생성할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당류는 포도당 1분자와 과당 1분자로 구성된 수크로스(설탕)이다. 또 다른 주요 이당류는 포도당 1분자와 갈락토스 1분자로 구성된 우유에서 발견되는 젖당이다. 젖당(락토스)는 락테이스에 의해 가수분해될 수 있으며, 락테이스의 결핍은 젖당불내증을 초래한다. 몇 개(약 3~6개)의 단당류들이 결합하면, 올리고당("올리고(oligo-)"는 "소수(few)"를 의미)을 형성한다. 올리고당은 표지 및 세포 신호 뿐만 아니라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수 많은 단당류들이 중합되면 다당류를 형성한다. 단당류들은 긴 선형 사슬의 형태로 결합되거나, 분지(가지 구조)를 형성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다당류로 셀룰로스, 녹말, 글리코젠이 있는데, 이들 세 가지 다당류들은 포도당 단위체들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셀룰로스는 식물의 세포벽의 중요한 구조적 구성 성분이며, 녹말은 식물의 에너지 저장 형태로, 글리코젠은 동물의 에너지 저장 형태로 사용된다. 탄수화물은 환원 말단 또는 비환원 말단을 가질 수 있다. 탄수화물의 환원 말단은 선형의 알데하이드(알도스) 또는 케톤(케토스) 형태와 평형을 이룰 수 있는 탄소 원자이다. 이러한 환원 말단의 탄소 원자에서 단위체의 결합이 일어나는 경우, 피라노스 또는 푸라노스 형태의 자유 하이드록시기는 다른 당의 하이드록시기 측쇄와 교환되어, 완전한 아세탈을 생성한다. 이것은 알데하이드 또는 케톤의 형태로 사슬이 열리는 것을 방지하고, 수정된 잔기를 비환원성으로 만든다. 젖당에서 포도당 잔기는 환원 말단을 가지고 있고, 갈락토스 잔기는 포도당의 4번 탄소의 하이드록시기(-OH)와 완전한 아세탈을 형성한다. 수크로스는 포도당의 1번 탄소의 알데하이드와 과당의 2번 탄소의 케톤 사이에 완전한 아세탈의 형성으로 인해 환원 말단을 가지지 않는다. 지질. 지질은 다양한 종류의 분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왁스, 지방산, 인지질, 스핑고지질, 당지질 및 테르페노이드(예: 레티노이드와 스테로이드)를 포함한 생물로부터 기원한 비교적 물에 불용성이고, 비극성 화합물들을 포괄하는 화합물들이다. 일부 지질들은 선형의 지방족 화합물이며, 다른 지질들은 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부 지질들은 방향족 화합물(고리형의 평명 구조를 가진)인 반면, 다른 지질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지질들은 유연한 반면, 다른 지질들은 경직된 것도 있다. 지질은 보통 글리세롤 1분자에 다른 분자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트라이글리세라이드는 1분자의 글리세롤과 3분자의 지방산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경우에 지방산은 포화(탄소 사슬에 이중 결합이 없음)되거나 불포화(탄소 사슬에 하나 이상의 이중 결합이 있음)될 수 있다. 대부분의 지질들은 전체적으로 비극성이지만, 일부분이 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질 구조의 대부분은 물과 같은 극성 용매와 상호 작용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극성 또는 소수성이다. 지질 구조의 또 다른 부분은 극성 또는 친수성이며, 물과 같은 극성 용매와 상호작용을 잘하는 경형이 있다. 소수성 부분과 친수성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는 분자를 양친매성 분자라고 한다. 콜레스테롤의 경우 극성 부위는 하이드록시기(-OH)이다. 인지질의 경우 극성 부위는 인산을 포함하는 머리 부분이다. 지질은 사람의 일상 식단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사람들이 주로 섭취하는 대부분의 기름들과 버터, 치즈, 기와 같은 유제품들은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성 기름은 다양한 다불포화 지방산이 풍부하다. 지방 함유 식품은 체내에서 소화 과정을 거치며, 지방의 최종 분해 산물인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분해된다. 또한 지질, 특히 인지질은 다양한 의약품에서 사용되는데, 공동가용화제(예: 비경구 투입) 또는 약물 운반체의 성분(예: 리포솜 또는 트랜스퍼솜)으로 사용된다. 단백질.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고 불리는 단위체로 만들어진 매우 큰 고분자 중합체이다. 아미노산은 알파(α) 탄소라고 불리는 키랄 탄소에 아미노기(–NH2), 카복시기(–COOH), 수소 원자(–H), 곁사슬(R기, –R)이 결합되어 있는 화합물이다. 아미노기와 카복시기는 생리적인 조건 하에서는 –NH3+ 와 –COO− 로 존재한다. 곁사슬(R기)는 각각의 아미노산의 종류마다 다르며, R기의 특성은 단백질의 전체적인 3차원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떤 아미노산은 그 자체로 또는 변형된 형태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글루탐산은 중요한 신경전달물질로 기능을 한다. 아미노산들은 펩타이드 결합을 통해 서로 결합될 수 있다. 이러한 탈수 반응으로 물 분자가 제거되고, 하나의 아미노산의 아미노기의 질소와 다른 하나의 아미노산의 카복실기의 탄소가 펩타이드 결합에 의해 연결된다. 두 개의 아미노산이 펩타이드 결합으로 연결된 분자를 다이펩타이드라고 하며, 짧은 길이의 아미노산(보통 30개 이하)이 연결된 분자를 펩타이드 또는 폴리펩타이드라고 한다. 단백질은 많은 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중요한 혈장 단백질인 알부민은 585개의 아미노산 잔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백질은 구조적, 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백질인 액틴과 마이오신의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골격근의 수축을 일으킨다. 많은 단백질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 중 하나는 특정 분자나 특정 분자들의 유형에 특이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결합은 매우 선택적일 수 있다. 항체는 특정 유형의 분자와 결합하는 단백질의 한 예이다. 항체는 중쇄와 경쇄로 구성된다. 2개의 중쇄는 아미노산들 사이의 다이설파이드 결합을 통해 2개의 경쇄와 연결된다. 항체는 N-말단 도메인의 차이에 기초한 변형을 통해 특이적이게 된다. 실제로 항체를 사용하는 효소결합면역흡착검사(ELISA)은 현대 의학에서 다양한 생체분자를 검출하는데 사용하는 가장 민감한 검사 중 하나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단백질은 효소이다. 살아있는 세포의 거의 모든 반응에는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기 위한 효소가 필요하다. 효소는 기질이라고 불리는 특정 반응물 분자를 인식한 다음 반응을 촉매한다. 활성화 에너지를 낮춤으로써 효소는 반응 속도를 1011배 이상으로 증가시킨다. 자발적으로 반응이 완료되는데 3,000년이 걸릴 반응은 효소 반응으로 1초도 채 걸리지 않을 수 있다. 효소 자체는 반응에서 소모되지 않으며, 다음 반응에서 재사용된다. 다양한 작용기를 사용하여 효소의 활성을 조절하고, 세포 전체의 생화학적 조절을 가능하게 한다. 단백질의 구조는 전통적으로 4가지 단계의 계층 구조로 설명된다. 단백질의 1차 구조는 아미노산의 선형적인 배열 순서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알라닌-글리신-트립토판-세린-글루탐산-아스파라긴-글리신-리신-…"과 같은 배열 순서이다. 2차 구조는 국지적인 형태와 관련이 있다. 아미노산들의 일부 조합은 α-나선이라고 불리는 코일 형태 또는 β-시트라고 불리는 시트 형태를 형성한다. 위의 헤모글로빈을 나타낸 그림에서도 일부 α-나선들을 볼 수 있다. 3차 구조는 단백질의 전체적인 3차원 입체 구조 형태이다. 이러한 단백질의 3차 구조는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로 아미노산 1개가 바뀌어도 전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헤모글로빈의 β 소단위체는 146개의 아미노산 잔기로 구성되어 있다. 헤모글로빈의 β 소단위체의 6번째 아미노산인 글루탐산 잔기가 발린 잔기로 치환되면 헤모글로빈의 입체 구조가 바뀌어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을 일으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4차 구조는 4개의 소단위체를 가지고 있는 헤모글로빈과 같이 여러 개의 폴리펩타이드 소단위체를 가지고 있는 단백질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모든 단백질이 두 개 이상의 소단위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섭취된 단백질은 일반적으로 소장에서 단일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흡수된다. 그리고 나서 아미노산들은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결합될 수 있다.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 오탄당 인산 경로의 중간생성물들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20가지 아미노산들을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세균과 식물은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모든 효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 및 다른 포유류들은 단백질 합성에 사용되는 20가지 아미노산들 중 절반 정도만 합성할 수 있다. 이들은 아이소류신, 류신, 리신, 메싸이오닌, 페닐알라닌, 트레오닌, 트립토판, 발린을 합성할 수 없다. 이들은 필수 아미노산이기 때문에 섭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포유류는 알라닌, 아스파라긴, 아스파르트산, 시스테인, 글루탐산, 글루타민, 글리신, 프롤린, 세린, 티로신과 같은 비필수 아미노산들은 합성하는 효소들을 합성하는 효소들을 가지고 있다. 포유류는 아르지닌과 히스티딘을 합성할 수 있지만, 어리고 생장 중인 동물은 충분한 양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아르지닌과 히스티딘은 종종 필수 아미노산으로 간주된다. 아미노산에서 아미노기가 제거되면, α-케토산이라고 불리는 탄소 골격이 남는다. 아미노기 전이효소는 아미노산의 아미노기를 다른 α-케토산으로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아미노산의 생합성에서 중요한데, 많은 생화학적 경로의 중간생성물들이 α-케토산 골격으로 전환된 다음, 아미노기 전이반응을 통해 아미노기가 추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아미노산들은 서로 결합하여 단백질을 생성할 수 있다. 비슷한 과정이 단백질 분해에 사용된다. 단백질은 먼저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으로 가수분해된다. 혈액 중에 암모늄 이온(NH4+)으로 존재하는 유리 암모니아(NH3)는 생명체에 독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질소 노폐물을 배설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 존재해야 한다. 동물들의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배설 방법들이 진화해 왔다. 단세포 생물은 간단하게 암모니아를 환경으로 방출한다. 마찬가지로 경골어류는 암모니아를 물 속으로 방출한다. 일반적으로 포유류는 요소 회로를 통해 암모니아를 요소로 전환시킨 다음, 요소를 배설한다. 서로 다른 두 단백질이 관련이 있는지, 즉 그들이 동종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서열 비교 방법을 사용한다. 서열 정렬 및 구조 정렬과 같은 방법은 과학자들이 관련 분자들 사이의 상동성을 식별하는데 도움을 주는 강력한 도구들이다. 단백질 간의 상동성을 발견하고, 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은 단백질족의 진화적인 패턴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두 단백질 서열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발견함으로써, 단백질의 구조와 그에 따른 기능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핵산. 핵산은 세포핵에서 주로 발견되는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생체고분자이다. 핵산은 모든 살아있는 세포와 바이러스에서 유전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복잡한 고분자량의 생화학적 거대 분자이다. 핵산은 뉴클레오타이드를 단위체로 하는 중합체이다. 뉴클레오타이드는 핵염기(퓨린 계열 염기 또는 피리미딘 계열 염기), 5탄당, 인산의 세 가지 성분으로 구성된다. 가장 일반적인 핵산은 디옥시리보핵산(DNA)과 리보핵산(RNA)이다. 각 뉴클레오타이드의 당과 인산은 서로 결합하여 핵산의 골격을 형성하고, 핵염기의 서열은 정보를 저장한다. 가장 일반적인 핵염기는 아데닌, 사이토신, 구아닌, 티민, 유라실이다. 핵산의 각 가닥의 핵염기들 사이에서 상보적인 염기쌍이 형성된다. 아데닌은 티민, 유라실과 수소 결합을 형성하고, 구아닌은 사이토신과 수소 결합을 형성한다. 세포의 유전 물질을 형성하는 것 외에도, 뉴클레오타이드는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주요 에너지 운반 분자인 아데노신 삼인산(ATP)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2차 전달자 역할을 한다. DNA와 RNA에서 발견되는 핵염기는 서로 다른데, 아데닌, 사이토신, 구아닌은 DNA와 RNA에서 모두 발견되는 반면, 티민은 DNA에서만 발견되고, 유라실은 RNA에서만 발견된다. 물질대사. 에너지원으로서의 탄수화물. 포도당은 대부분의 생명체에서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다당류는 효소에 의해 단량체로 분해된다. 글리코젠 포스포릴레이스는 다당류인 글리코젠으로부터 포도당 잔기를 분해한다. 젖당이나 수크로스(설탕)과 같은 이당류는 두 개의 단당류로 분해된다. 해당과정. 포도당은 해당과정이라고 불리는 10단계 과정으로 대사되며, 그 결과로 포도당 1분자가 피루브산 2분자로 분해된다. 해당과정은 또한 2분자의 NAD+(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의 산화형)을 2분자의 NADH(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의 환원형)으로 전환시키고, 세포의 에너지 화폐인 ATP 2분자를 순생성한다. 해당과정은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포가 산소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 피루브산을 젖산(예: 사람에서)으로 전환시키거나, 피루브산을 이산화 탄소와 에탄올(예: 효모)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NADH를 NAD+로 산화시켜서 NAD+를 해당과정에 공급한다. 갈락토스 및 과당과 같은 다른 단당류들은 해당과정의 중간생성물로 전환될 수 있다. 시트르산 회로와 산화적 인산화. 대부분의 사람 세포에서와 같이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는 세포에서 피루브산은 더 대사될 수 있다. 피루브산은 아세틸-CoA로 비가역적으로 전환되고, 이 과정에서 이산화 탄소가 방출되고, NAD+가 NADH로 환원된다. 1분자의 포도당으로부터 생성된 2분자의 아세틸-CoA는 시트르산 회로로 들어가서 4CO2로 완전 분해되고, 이 과정에서 6NADH, 2FADH2, 2ATP를 생성한다. 생성된 NADH와 FADH2는 전자전달계로 전달되는데, 전자전달계는 궁극적으로 전자를 산소(O2)로 전달하고,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로 막(진핵세포의 경우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경계로 한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를 형성한다. 따라서 산소(O2)는 물(H2O)로 환원되고, 원래의 전자수용체인 NAD+와 FAD는 재생된다. 이것이 사람이 산소(O2)를 들이마시고, 이산화 탄소(CO2)를 내뿜는 이유이다. NADH와 FADH2의 고에너지 전자는 전자전달계를 전달되고,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는 막을 경계로 한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로 보존된 다음, ATP 생성효소를 통해 ATP로 전환된다. 포도당 1분자가 세포 호흡에 사용되면, 해당과정에서 기질수준 인산화로 2ATP, 시트르산 회로에서 기질수준 인산화로 2ATP, 산화적 인산화에서 28ATP(NADH당 2.5ATP, FADH2당 1.5ATP)가 합성되므로, 총 32ATP가 생성된다. 포도당을 완전히 산화시키기 위해 산소를 사용하는 것은 산소를 사용하지 않는 어떤 대사 과정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생물체에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것이 지구의 대기에 많은 양의 산소가 축적되고 나서야 복잡한 생명체가 출현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된다. 포도당신생합성. 척추동물에서 격렬하게 수축하는 골격근(예를 들어, 역도 또는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동안)은 에너지 요구량을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혐기성 대사 과정으로 전환되어 피루브산을 젖산으로 전환시킨다. 간은 포도당신생합성이라는 과정을 사용하여 포도당을 재생성한다. 포도당신생합성은 해당과정과 반대되는 과정이 아니며, 실제로 해당과정에서 얻은 에너지양의 3배를 필요로 한다(해당과정에서 얻은 2ATP와 비교하여 포도당신생합성은 6ATP를 필요로 함). 위와 같은 반응으로 생성된 포도당은 에너지가 필요한 조직에서 해당과정으로 들어가거나, 글리코젠(식물에서는 녹말)으로 저장되거나, 다른 단당류로 전환되거나, 이당류 또는 올리고당류로 결합될 수 있다. 운동 중의 근육세포의 해당과정, 근육세포의 피루브산이 젖산으로 전환된 다음 혈액으로 방출되고, 간세포에서 젖산이 피루브산으로 전환된 다음 포도당신생합성을 통해 포도당을 합성하고 포도당을 혈액으로 방출하는 순환을 코리 회로라고 한다. 다른 분자 규모의 생물학과의 관계. 생화학 연구자들은 생화학 고유의 특정 기술들을 사용하지만, 유전학, 분자생물학, 생물리학 분야에서 개발된 기술, 아이디어를 점점 더 결합시켜 사용하고 있다. 이들 분야 중에서 내용과 기술의 측면에서 강경한 적은 없었다. 오늘날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이라는 용어는 서로 교환이 가능하다. 다음의 그림은 각 분야들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주해. a. 과당은 과일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당은 아니다. 포도당과 수크로스는 다양한 과일에서 다양한 양으로 발견되며, 때때로 과당보다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추의 식용 부분의 32%는 포도당인데 비해, 과당은 24%, 수크로스는 8%이다. 그러나 복숭아는 과당(0.93%)이나 포도당(1.47%)보다 수크로스(6.66%)가 더 많다. 외부 링크. Poirot, Marc; Soules, Regis; Mallinger, Arnaud; Dalenc, Florence; Silvente-Poirot, Sandrine. Biochimie. Oct2018, Vol. 153, pp. 139–149 Afify, Heba M. American Journal of Biomedical Sciences. 2016, Vol. 8 Issue 3, pp. 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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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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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
단백질(蛋白質, )은 생화학에서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고분자 유기 물질이다. 흰자질이라고도 한다. 단백질 영어명 프로틴()은 그리스어의 proteios(중요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단백질의 한자 표기에서 단(蛋)이 새알을 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단백질은 달걀 등의 새알의 흰자위를 이루는 주요 성분이다. 단백질이라는 한자어는 독일어 아이바이스슈토프()에서 비롯되었는데, 독일어를 직역하면 "흰자 물질"이라는 뜻이다. 수많은 아미노산의 연결체로 20가지의 서로 다른 아미노산들이 펩타이드 결합이라고 하는 화학 결합으로 길게 연결된 것을 폴리펩타이드라고 한다. 여러 가지의 폴리펩타이드 사슬이 4차 구조를 이루어 고유한 기능을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단백질이라고 불리며 단백질과 폴리펩타이드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분자이지만 경우에 따라 구분 없이 쓰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분자량이 비교적 작으면 폴리펩타이드라고 하며, 분자량이 매우 크면 단백질이라고 한다. 단백질은 생물체 내의 구성 성분, 세포 안의 각종 화학반응의 촉매 역할(효소), 항체를 형성하여 면역을 담당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화학식은 (NH2CHRnCOOH)n이다. 단백질은 트립신이라는 단백질 분해효소의 작용에 의해 소화된다. 그런데 콩에는 트립신의 활동을 방해하는 콩트립신 저해제라는 단백질이 들어있어 콩을 날로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콩을 가열할 경우 이 단백질 성분이 변성되어 저해기능을 잃는다. 결국 트립신이 활성화되어 소화효소의 침입이 용이해지는 것이다. 단백질의 변성은 천연단백질이 물리적인 요인(가열, 건조, 교반, 압력, X선, 초음파, 진동, 동결)이나 화학적인 요인(산, 염기, 요소, 유기용매, 중금속, 계면활성제) 혹은 효소의 작용 등으로 원래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현상이다. 구조. 단백질은 고유한 3차원 구조로 접히는(Folding) 폴리펩타이드 사슬을 말한다. 단백질이 자연 상태에서 접히는 구조는 단백질의 이 폴리펩타이드를 이루는 아미노산들의 서열(sequence)에 의해 결정된다. 생화학자들은 단백질의 구조를 4개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아미노산 서열이 복잡한 3차 구조를 이루는 과정을 단백질 접힘(Protein Folding)이라고 한다. 보통은 각자 단백질의 고유한 3차 구조는 그 아미노산 서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유 에너지가 낮은 상태이다. 또한 자유 에너지가 낮은 상태가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활성 상태이다. 하지만 단백질은 이 보다 높은 에너지 상태에도 존재할 수가 있다. 단지 그 에너지가 높기에, 자연 상태에서 높은 에너지 상태에 존재하는 단백질의 양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가장 안정한 상태에서 단백질의 구조가 완전히 풀리는 상태(2, 3, 4차 구조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단백질의 열역학적인 안정성을 결정한다. 아미노산 서열의 양끝단을 N 말단과 C 말단이라고 한다. 이는 단백질의 한쪽 끝이 아미노기(-NH₂)를 가지고, 다른 쪽은 카복실기(-COOH)를 갖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연구 방법. 용액 내의 단백질 검출 방법은 뷰렛 반응 또는 크산토프로테인 반응을 이용하는 것이다. 단백질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은 X선 회절법이다. 단백질의 결정에 X선을 쬐어, 그 X선이 휘는 모양을 관측하여 구조에 대해 연구한다. 또한 고해상도의 원자간력 현미경(AFM; Atomic Force Microscope)을 이용하여 단백질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관찰하기도 한다. 또한 단백질의 서열을 알기 위해서는 에드만 분해(Edman Degradation), 질량 분석법(Mass Spectrometry)등을 사용한다. 요즘에는 시간이 오래걸리는 에드만 분해보다는 질량 분석법을 주로 사용한다. 단백질 서열 분석에 질량 분석법을 사용하는 연구에 2002년 노벨 화학상이 시상되었다. 그 외에 전기영동(Electrophoresis), 분석(Assay)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단백질을 연구한다. 역사. 단백질은 18세기 앙투안 푸르크루아 등에 의해 독립적인 생물학적 분자들로 인식되었으며, 열기나 산(acid)을 이용한 치료를 통해 응고, 응집을 할 수 있는 분자의 능력으로 식별되었다. 단백질은 네덜란드의 화학자 헤라르뒤스 요하네스 멀더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으며 1838년 스웨덴의 화학자 야코브 베르셀리우스에 의해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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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분류학
식물분류학(植物分類學)은 식물계를 구성하는 모든 식물을 명명하고 기재하며 무리로 나누어 계통체계를 세우고, 계통 간의 관계를 밝히는 학문이다. 식물 분류학에는 알파 분류학, 베타 분류학, 감마 분류학이 있다. 알파 분류학의 경우 이름을 붙이고 그 종에 대한 설명에 기반을 둔 방법이다. 생물 종마다 독특한 외형이나 생화학적 특징에 기초해 분류한다. 베타 분류학은 계층을 만들어 구분하는 것인데 종속과목강문계의 계층으로 분류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Individuals(식물 개체), Populations(한 곳에 사는 같은 종의 식물), Species(종, 種), Genus(속, 屬), Family(과, 科), Order(목, 目), Class(강, 綱), Phylum(문, 門), Kingdom(계, 界), Domain(역, 域) 등의 분류를 말한다. 감마 분류학은 같은 종(Species)내의 생물들의 변화나 그 진화과정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동정(identification)과 분류(classification). 식물 분류학의 두 가지 목적은 식물의 동정(identification)과 분류(classification)이다. 이 두 가지 목적의 구분은 중요하며 종종 간과된다. 식물의 동정은 기존에 수집된 표본이나 분류 도감과 비교하여 알려지지 않은 식물의 정체를 결정하는 것이다. 동정의 과정은 식물 표본을 기존 식물 분류군과 연결한다. 한번 식물 표본이 동정되면, 그 이름과 속성은 알려진 것으로 된다. 식물의 분류는 알려진 식물을 어떤 관계를 알 수 있도록 특정 그룹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생물의 분류는 결과를 표준화시키는 규칙을 따라 이루어지며, 다수의 생물 범주(category)를 하나의 계통으로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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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양귀비
개양귀비(-楊貴妃)는 양귀비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꽃양귀비, 우미인초(虞美人草) 등으로도 불린다. 특징.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30~80 cm 정도 자라는 두해살이풀로, 보통 붉은색 내지 주황색 꽃이 피지만 흰색 꽃이 피는 것도 있다. 꽃은 3~4장의 단엽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농작물로 재배해 왔으며, 풍년을 상징하는 꽃으로 오랫동안 여겨 왔다. 씨는 빵에 넣어서 먹거나 기름을 짜서 쓰며, 줄기는 채소로, 빨간 꽃잎은 시럽이나 술을 담는 데에 쓴다. 동양의학에서는 복통, 설사 등에 처방한다. 관상용으로는 개양귀비를 개량한 셜리양귀비()를 많이 심는다. ‘양귀비’라는 이름 때문에 아편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개양귀비로는 마약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양귀비와는 달리 재배를 규제받지 않는다. 하지만 관상용으로 심은 개양귀비가 아편양귀비로 오해를 받아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문화.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장터에서 캐나다군 중령 존 맥크래가 쓴 시 〈개양귀비 들판에서〉가 유명해 지면서 영연방 국가에서는 영령 기념일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꽃으로 개양귀비를 쓴다. 중국에서는 개양귀비를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하는데, 항우의 애첩 우미인의 무덤에 개양귀비가 피었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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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인초
《우미인초》(虞美人草)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다. 우미인초는 개양귀비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1907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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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과
양귀비과(楊貴妃科, )는 미나리아재비목의 과이다. 주로 북반구의 온대·아열대에 분포하며, 약 30속의 500종 정도이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는 자주괴불주머니·흰양귀비·개양귀비·두메양귀비 등의 6속 16종이 분포하고 있다. 대부분이 초본이며, 보통 기름이나 색깔이 있는 즙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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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솜 RNA
리보솜 RNA(ribosomal RNA), 줄여서 rRNA는 리보솜을 구성하는 RNA이며, 세포 내 RNA의 약 80%를 차지한다. rRNA는 세포핵 속의 핵소체에서 전사된 후 단백질과 결합하여 리보솜으로 합성된다. rRNA은 세포핵의 핵공을 통해 세포질로 빠져나오며, 이후 단백질과 결합하여 리보솜으로 합성된 뒤, 단백질 합성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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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탄의 개척자
카탄의 개척자(, )은 다양한 요소를 지닌 보드게임으로, 클라우스 토이버(Klaus Teuber)에 의해 제작되었다. 1995년에 독일의 출판사인 코스모스에서 처음 출시되었다. 발매 당시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독일 보드 게임쇼에서 연거푸 상을 받았으며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카탄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유럽까지 유행하게 된 게임으로도 유명하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헝가리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기본판에 추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확장팩들도 이미 시중에 나와 있다. 게임의 배경은 카탄이라는 무인도 섬에 여러 부족들이 정착을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각 부족들이 자신의 세력을 넓혀서, 카탄의 진정한 정착자가 되려 하는 것이 이 게임의 목적이다. 설명. 플레이어들은 목재, 벽돌, 밀, 양 자원을 모아 마을을 짓고 1500년 도시 또는 승점카드를 모아 승점 10점을 얻는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게임이다. 플레이 시간은 약 1시간-2시간, 적정 연령은 13세 이상이다. 게임 개발자가 5-6인용 확장이 마지막 확장팩이 될 것이라 하고 카탄 시리즈의 러시가 종료되었다. 하지만 제작사와 플레이어들의 요청으로 2016년 탐험가와 해적이라는 이름의 확장이 발매가 확정되었다. 게임 목표. 게임 방법은 정착한 무인도 섬에서 자원을 얻어 그 자원을 이용해 길, 집, 도시, 배(바다가 나오는 맵에서만)를 만들어 점수를 먼저 내는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각각의 섬에는 숫자칩이 놓이는데 주사위를 돌려 그 숫자에 놓인 자원을 얻게 된다. 물론 그 무인도에 집이나 도시가 정착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원을 받게 된다. 집과 도시는 각각 1 VP, 2 VP(이점수를 합산하여 점수를 낸다.)이며 집과 도시 이외에도 Development카드중 1 VP를 얻을 수 있는 카드도 점수를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카탄확장판 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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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핀 (물리학)
스핀()은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운동과 무관한 고유 각운동량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스핀 양자수 1/2, 광자는 스핀 양자수 1을 갖는다. 어원과는 달리, 실제로 입자는 어떤 축을 중심으로 고전적으로 회전하지 않는다. 드 하스 아인슈타인 실험에서 외부 자기장으로 스핀을 정렬시키자 전체 각운동량의 보존 때문에 시스템이 회전하는 현상이 보고되었다. 흔히 공간의 양자화로 부르는 양자화된 입자의 스핀의 양은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으로 밝혀낼 수 있게 되었으며, 비균일 자기장에 대해 불연속적인 반응을 주는 내부 인자를 가리킨다. 역사. 1924년에 볼프강 파울리는 알칼리 금속의 방출 스펙트럼의 제이만 효과를 연구하던 도중 파울리 배타 원리를 발견하였다. 이 원리에 따르면 두 전자는 같은 양자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양자수가 같은 두 개의 전자가 존재했으므로, 파울리는 기존에 알려진 양자수 이외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와 −의 값을 가지는 또다른 양자수의 존재를 예측하였다. 1925년에 조지 윌렌벅()과 사뮈엘 하우드스밋()이 파울리가 가정한 미지의 양자수를 전자의 기본 각운동량으로 해석하였다. 스핀-자기장 상호작용. 파울리는 처음에 입자의 스핀과 자기장 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항을 해밀토니안에 도입하였다. formula_2는 파울리 행렬을 성분으로 갖는 파울리 벡터를 의미한다. 이 항을 유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formula_3와 함께, 감마 행렬 대신 파울리 행렬을 사용하여 디락 방정식과 유사한 형태로 해밀토니안을 세우면, 이 된다. 파울리 행렬과 관련된 공식 formula_5을 이용해서 해밀토니안의 식을 풀면, 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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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퍽
브레인퍽()은 우어반 뮐러(Urban Müller)가 1993년 경에 만든 최소주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이름에 포함된 fuck이 욕설이기 때문에, 정중한 표현을 위해서 때때로 Brainf*ck, Brainf***, 혹은 단순히 BF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어의 설계. 뮐러는 가장 작은 컴파일러로 구현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튜링 완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언어는 여덟 개의 명령어로 구성되어 있다. 아미가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원래 컴파일러의 둘째 판은 크기가 240 바이트 밖에 안 된다. 그는 다른 난해한 프로그래밍 언어이자, 컴파일러 크기가 1024바이트인 False의 영향을 받았다. 이름이 말해 주듯이, 브레인퍽 프로그램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하지만 튜링 기계는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할 수 있고, 브레인퍽이 튜링 완전하기 때문에 브레인퍽 또한 복잡하기는 해도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다. 이 언어는 프로그램 외에, 0으로 초기화된 바이트 단위의 배열과, 처음에 배열의 맨 첫 바이트를 가리키는 포인터, 그리고 입출력 스트림으로 구성된 간단한 기계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명령어들. 여덟 개의 명령어들은 각각 한 개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 위의 정의 대신에, codice_1에 ‘짝이 되는 앞쪽의 codice_2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사용할 수 있다. 이는 간단하지만 대칭적이지 못 하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 두 정의는 모든 브레인퍽 프로그램에 대해서 동일한 행동을 보인다.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동일한 또 다른 정의로는, codice_2가 ‘짝이 되는 뒤쪽의 codice_1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codice_1가 ‘포인터가 가리키는 바이트의 값이 0이 아니면 짝이 되는 앞쪽의 codice_2 다음 명령어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있다. 브레인퍽 프로그램들은 codice_7이 codice_8 형이라 가정할 때 다음과 같은 치환을 사용해서 C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해설. 참고로 여기서는 배열의 각각의 원소들을 바이트로 서술했기 때문에, - 명령은 필요가 없으며 255개의 + 명령으로 고칠 수 있다. 비슷하게, 만약 배열이 유한하고 환형이면, < 명령은 (배열 크기 - 1)개의 > 명령으로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이 언어가 튜링 완전하려면 배열의 크기와 각각의 원소들의 크기가 모두 제한이 없어야 한다. (이는 엄밀히 말할 때 현대의 PC가 튜링 완전하지 않은 이유와 동일하다.) 예제. 헬로 월드 프로그램. 명령어에 쓰이는 8개의 문자(+-<>[].)만 사용한 코드는 다음과 같다. 브레인퍽은 이 8개의 문자외에는 모두 무시하므로, 가독성을 위해 공백과 줄바꿈을 넣고 주석을 추가하여 다시 쓴 코드는 다음과 같다. +++ +++++ initialize counter (cell #0) to . [ use loop to set the next four cells to 70/100/30/10 > +++++ ++ add 7 to cell #1 > +++++ +++++ add 10 to cell #2 > +++ add 3 to cell #3 > + add 1 to cell #4 «« - decrement counter (cell #0) > ++ . print 'H' > + . print 'e' +++ ++ . print '. . print 'l' + . print '. > ++ . print ' ' « +++++ +++++ +++++ . print 'W' > . print 'o' + . print '. ----- - . print 'l' ----- --- . print 'd' > + . print '!' > . print '\n' ROT13. -,+[ Read first character and start outer character reading loop -[ Skip forward if character is 0 »++++[>++++++++<-] Set up divisor (32) for division loop (MEMORY LAYOUT: dividend copy remainder divisor quotient zero zero) <+<-[ Set up dividend (x minus 1) and enter division loop >+>+>-[»>] Increase copy and remainder / reduce divisor / Normal case: skip forward <]<[ Zero that flag unless quotient was 2 or 3; zero quotient; check flag ++++++++++++<[ If flag then set up divisor (13) for second division loop (MEMORY LAYOUT: zero copy dividend divisor remainder quotient zero zero) >-[>+»] Reduce divisor; Normal case: increase remainder >[+[<+>-]>+»] Special case: increase remainder / move it back to divisor / increase quotient ««<- Decrease dividend ] End division loop »[<+>-] Add remainder back to divisor to get a useful 13 >[ Skip forward if quotient was 0 -[ Decrement quotient and skip forward if quotient was 1 -«[-]» Zero quotient and divisor if quotient was 2 ]«[«-»-]» Zero divisor and subtract 13 from copy if quotient was 1 ]«[«+»-] Zero divisor and add 13 to copy if quotient was 0 ] End outer skip loop (jump to here if ((character minus 1)/32) was not 2 or 3) <[-] Clear remainder from first division if second division was skipped <.[-] Output ROT13ed character from copy and clear it <-,+ Read next character ] End character reading loop 관련 항목. 비슷한 언어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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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9·11 테러() 또는 약칭인 9/11은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 미국에 대항하는 이슬람 과격 테러단체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네 차례의 연쇄 테러 공격을 의미한다. 9월 11일 아침 미국 북동부에서 캘리포니아주로 향하는 민항 여객기 4기가 알카에다 테러범들에게 비행 중 연쇄적으로 납치당했다. 납치범 무리는 5명으로 이루어진 3개 무리와 4명으로 이루어진 4개 무리 총 19명이었다. 납치범의 각 무리 내에 비행 훈련을 받고 항공기를 장악해 조종한 납치범이 1명씩 있었다. 납치범들은 미국의 유명한 건물에 비행기를 부딪쳐 대규모 인명 피해를 일으키고 테러 대상 건물을 부분적으로 파괴하거나 완전히 붕괴하게 만들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납치당한 항공기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이었다. 이 비행기는 현지 시각 8시 46분 미국 뉴욕 로어맨해튼에 있는 세계 무역 센터 북쪽 타워(1WTC)에 충돌하였다. 17분 뒤인 9시 3분에는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세계 무역 센터 남쪽 타워(2WTC)에 충돌하였다.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은 모두 화재 발생 1시간 42분만에 붕괴되어 이 여파로 7 세계 무역 센터(7WTC) 등 다른 세계 무역 센터 건물도 붕괴되고 주변 건물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세 번째로 납치된 항공기는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아메리칸 항공 77편으로 오하이오주 상공에서 납치되었다. 9시 37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군에 있는 미 국방부 본부인 펜타곤의 서쪽 면에 충돌하여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납치당한 항공기인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워싱턴 D.C.를 향해 비행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항공기는 목표물에 타격하지 않은 유일한 항공기로 10시 3분 경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인근 들판에 추락하였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장악한 항공기 조종석 통제권을 되찾으러 시도했고, 결국에는 테러범들이 의도한 목표물을 타격하는 데 실패하게 만들었다. 수사관들은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원래 목표물은 백악관이나 미국 국회의사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테러 발생 직후 곧바로 알카에다가 테러를 일으켰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 내 알카에다 세력을 축출하고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인도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한 탈레반을 몰아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처음에는 빈 라덴이 자신이 테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나 2004년 빈 라덴은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공식적으로 자신이 테러를 기획한 것이라고 밝혔다. 알카에다와 빈 라덴은 테러를 일으킨 동기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이라크에 대한 제재조치 등을 꼽았다. 빈 라덴은 테러 후 10년 간 은신하였으나 2011년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는 자신의 은거지에서 미군의 넵튠 스피어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테러로 세계 무역 센터와 인근 인프라가 크게 파괴되었고 이는 뉴욕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세계적인 경제 불황도 초래하였다. 전 세계의 많은 국가가 9·11 테러 이후 테러방지법을 강화하였으며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 법집행기관과 정보기관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미국과 캐나다의 민항 항공편은 9월 13일까지 폐쇄되었으며 월가의 금융 거래는 9월 17일에야 재개되었다. 그 외에도 추가적인 테러 우려로 수많은 폐쇄 조치, 대피, 행사 취소가 잇다랐다. 붕괴된 세계 무역 센터 부지는 2002년 5월 정리가 끝났으며 펜타곤은 테러 1년만에 재정비를 완료하였다. 구 세계 무역 센터를 대체할 새 건물의 건설 공사는 2006년 11월 시작하여 2014년 11월 완공해 개방하였다. 9·11 테러로 2,977명이 사망하고 25,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그 외에도 상당한 보건 문제를 일으켰고 인프라 파괴로 최소 100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ref name="PEARL9/11"></ref> 또한 이 테러는 역사상 가장 사망자가 많은 테러이자 미국의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소방관과 법 집행관이 사망한 사건으로 소방관 340명과 법 집행관 72명이 순직하였다. 테러 이후에는 사망자를 추모하는 뉴욕의 내셔널 셉템버 11 메모리얼 & 뮤지엄, 버지니아 앨링턴군의 펜타곤 메모리얼, 펜실베이니아주 추락 현장의 93편 국립 추모관 등 수많은 추모 및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배경. 알카에다. 알카에다의 기원은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사마 빈 라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으로 소련과 맞서 싸운 경험이 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와 함께 하면서 오사마 빈 라덴은 보다 극단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96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철수하여야 한다는 첫 파트와를 발표하였다. 1998년 오사마 빈 라덴은 두번째 파트와를 통해 걸프전 이후에도 미군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외교 정책은 그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빈 라덴은 이슬람 경전을 인용하여 부당한 처사가 철회될 때까지 무슬림이 미군을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적으로 이슬람의 법을 해석하는 울라마는 무슬림 국가의 적을 파괴하는 개인들의 지하드를 승인하여 왔다"고 말한 바 있다. 오사마 빈 라덴. 오사마 빈 라덴은 9·11 테러를 계획하였다. 사후에 빈 라덴은 자신의 개입을 부정하였으나 훗날 밝혀진 증거들을 보면 빈 라덴의 부정은 거짓이다. 사건 직후인 9월 16일 알자지라는 빈 라덴이 "나는 내가 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 일은 각 개인들이 스스로의 동기에 의해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을 방송하였다. 2001년 11월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의 파괴된 건물에서 수집한 비디오 테이프를 복원하였다. 2001년 12월 7일 복원된 영상이 공개되었고 여기서 빈 라덴은 알카에다 활동을 같이 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칼레드 알하르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건 직후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의 개입을 부정했지만,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 부시가 당선되자 비디오 영상물을 통해 알카에다가 9·11 테러를 주도했다는 것을 공인하였다. 그는 "우리는 자유인이다 … 우리 나라의 자유를 되찾고자 한다. 당신들이 우리의 안전을 훼손하는 것만큼, 우리도 당신들을 훼손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 비디오에서 빈 라덴은 자신과 동료들이 직접 세계 무역 센터와 펜타곤을 공격하였다고 말하였다. 2006년 9월 알자지라가 입수한 또 다른 비디오에서 빈 라덴은 알카에다가 비행기 납치와 테러를 계획하였다고 밝힌다. 미국은 9·11 테러 이전에 단 한 번도 오사마 빈 라덴을 공식적으로 비난한 바 없지만, 탄자니아의 다레스살람과 케냐 나이로비의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이후 FBI의 최우선 수배 목록에 올라있었다. 9·11 테러 이후 10년에 걸친 추적 끝에 2011년 5월 1일 버락 오바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에서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이 진행되었고, 빈 라덴은 사망하였다.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 알자지라의 기자 요스리 포우다는 2002년 4월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가 람지 빈 알시브를 따라 9·11 테러에 가담하였다고 시인했다는 보도를 하였다. 2004년 9/11 위원회 보고서는 모하메드가 미국에 대한 증오로 "미국 외교 정책의 이스라엘 편애"를 폭력을 통해 거부하기 위해 9·11 테러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고 기록하였다. 모하메드는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에도 자금을 대고 지원한 바 있다. 모하메드는 2003년 3월 1일 파키스탄의 라왈핀디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관타나모만 수용소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물고문을 포함한 고문을 받았다. 2007년 3월 모하메드는 알카에다가 9·11 테러에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였다는 자백을 하였다. 2019년 7월 26일 맨해튼에서 열린 법정에서 모하메드의 변호인은 9·11 테러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역할을 증언하고 테러 희생자와 유족을 도울 수 있도록 사형을 면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유족측 변호인은 모하메드가 그런 역할에 무슨 쓸모가 있겠냐고 반문하였다 모하메드는 현재 미국 내에서 복역하면서 사형 선고에 대해 항소 중이며 인권 단체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있었던 고문에 대해 군 당국과 미국 정부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동기. 알케에다의 수장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은 1998년 파트와를 통해 미국과 성전을 선포하였다. 사건 이후 조사 결과와 2002년 11월 빈라덴이 쓴 "미국에 보내는 편지"를 종합하면 빈 라덴의 테러 동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테러 이후 빈 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추가적인 비디오 촬영물과 오디오 녹음물을 통해 자신들의 테러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반복하였다. 이들 주장 가운데 중요하게 다루어 지는 것으로 "2002년 미국에 보내는 편지"와2004년 빈 라덴의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 빈 라덴은 무함마드가 "이교도 군대의 아라비아 영구 주둔"을 금했다고 해석한다. 1996년 빈 라덴의 파트와는 이를 근거로 미군의 사우디 아라비아 철수를 요구하였다. 1998년 알카에다는 "미군이 성스러운 땅 아라비아 반도를 7년째 점령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번영하며 영구히 살 수 있는 사람은 무슬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999년 인터뷰에서 빈 라덴은 미군이 메카에 너무 가까이 주둔한다고 말하면서 이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도발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살 테러 공격에 대한 어느 분석은 미군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주둔하지 않았다면 알카에다가 자살 테러 가담자를 모으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1998년 파트와에서 알카에다는 미국의 이라크 개입을 "알라, 그의 사자, 그리고 무슬림"에 대한 도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파트와는 이전의 것 보다 더 극단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미국인을 살해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라고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주장을 계속하던 알카에다는 결국 9·11 테러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사건 이후인 2004년 빈 라덴은 세계 무역 센터를 파괴하려는 생각은 1982년부터 지니고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레바논과 전쟁을 벌이던 이스라엘군이 고층 빌딩을 폭파시키는 것을 보고 자신도 미국의 빌딩을 부숴야 겠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였다. 메르사이머와 월트 같은 분석가들은 미국의 이스라엘 편들기 역시 테러의 명분을 제공하였다고 본다. 2004년과 2010년 빈 라덴은 또다시 9·11 테러를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연결시켰다. 빈 라덴은 부시 대통령이 있는 미국이 파산하기를 희망한다고도 하였다. 미국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모욕하려는 것도 테러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또한 알카에다가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이슬람 세계 내의 여러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미국에 대한 테러가 범이슬람권 혁명의 일환이라고 주장하였다. 모의. 9·11 테러를 구상한 사람은 1996년부터 오사마 빈 라덴과 함께한 칼리드 사이크 모하메드였다. 그가 빈 라덴을 처음 만날 당시 알카에다는 수단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1998년 알카에다는 아프리카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폭탄 테러를 벌였고, 그해 빈라덴은 미국에 대한 테러를 표방하는 파트와를 발표하였다. 이후 알카에다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를 계획하였다. 1998년 후반에서 1999년 초 사이 빈 라덴은 모하메드에게 테러를 실행할 조직을 구성하라고 제안하였다. 1999년 초 모하메드와 빈 라덴, 그리고 빈라덴의 참모였던 모하메드 아테프는 여러 차례 만나 모의하였다. 아테프가 작전 지원을 맡아 목표의 선정과 비행기 납치를 위한 여정 등의 초안을 마련하였고 빈 라덴은 모하메드를 지휘하면서 로스앤젤레스의 미국 뱅크 타워와 같이 따로 떨어져 있는 목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제외하였다. 빈 라덴은 테러의 총책과 자금 마련 역할을 하면서 가담자 선정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보스니아에서 테러 활동을 하였던 나와프 알하즈미와 칼리드 알미흐다를 영입하여 2000년 1월 중순 무렵 미국으로 보냈다. 이들은 그해 초 캘리포니아 산디에고의 비행 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을 배웠지만 영어를 잘 하지 못하여 그다지 성과가 없었고 2차 비행기 납치를 맡게 된다. 1999년 말 모하메드 아타, 마르완 알셰히, 지아드 자라, 람지 빈 알시브 등의 사람들이 함부르크를 출발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교육 정도가 높고 영어를 할 수 있으며 서구에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빈 라덴은 이들을 테러에 가담시켰다. 또한 알카에다는 이미 비행사 자격증이 있는 하니 한조르를 새롭게 영입하였다. 모하메드는 훗날 서구 의상을 입는 법과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법과 같은 것들을 가르쳤다고 진술하였다. 한조르는 2000년 12월 8일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도착하여 하즈미와 합류하였다.<ref name="9/11 commission staff statement No. 16"></ref> 그들은 곧바로 애리조나로 떠나 그곳에서 훈련하였다. 마르완 알세히는 2000년 5월 말에, 아타는 6월 3일에, 자라는 6월 27일에 각각 미국에 입국하였다. 빈 알시브는 예멘 여권의 비자 승인을 여러 차례 신청하였으나 거절되어 미국에 갈 수 없었다. 빈 알시브는 함부르크에 머무르면서 아타와 모하메드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에 입국한 함부르크 소조 셋은 플로리다 남부의 허프만 비행장에서 비행 훈련을 받았다. 2001년 봄 2차 비행기 납치 팀이 미국에 입국하였다. 2001년 7월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시브와 만나 음모의 세부 사항을 점검하고 최종 목표를 선정하여 빈 라덴의 승인을 받았다. 빈 라덴은 가능한 빠른 실행을 지시하였다. 테러 가담자들의 일부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공무원으로 있는 자기 가족을 포섭하여 여권을 발급 받았고, 다른 이들은 위조 여권을 사용하였다. 테러를 일으킬 날짜로 9월 11일을 고른 것은 미국의 응급 전화번호가 911 이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1683년 9월 11일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 있었던 빈 전투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빈 라덴은 이 전투를 서방이 이슬람 세계를 침입하기 시작한 때로 언급한 바 있다. 사전 정보. 1999년 후반기 알카에다는 칼라드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던 왈리드 빈 아타시에게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미흐다르와 접촉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자리엔 하즈미와 아부 바라 알 예멘도 참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국가안보국은 미흐다르와 나와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하즈미의 전화를 감청하여 이 모임을 인지하였다. 국가안보국의 요원은 "무언가 사악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하였지만 추가적인 조치는 없었다. 중앙정보국은 이미 사우디 아라비아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미흐다르와 하즈미가 알카에다에 속해있다는 경고를 받은 상태였고, 중앙정보국은 미흐다르가 머물던 두바이의 호텔 객실을 급습하여 미흐다르의 미국 비자를 발견하였다. 중앙정보부의 빈 라덴 담당 부서였던 알렉 스테이션도 이를 세계 각지의 요원들에게 경보하였지만 FBI와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2000년 1월 5일 말레이시아 경찰 특수부는 두 명의 알카에다 조직원으로부터 미흐다르와 하즈미, 칼라드가 방콕으로 갔다는 첩보를 얻고 중앙정보국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보국은 다른 정보 기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미국 국무부에도 미흐다르가 감시 명단에 있는 지 문의하지 않았다. FBI에서 파견한 알렉 스테이션의 요원이 이 모임과 관련한 정보를 요청하였으나 중앙정보국은 "FBI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라는 답변만 하였다. 2000년 6월 말 대테러 부서 요원 리처드 A. 클라크와 조지 터넷 부장은 "심각한 공격이 행해지려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나, 중앙정보국은 이러한 공격이 사우디 아라비아나 이스라엘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7월 초 클라크는 미국내 요원들에게 "최고 경보"를 발령하며 "조만간 정말 거대한 일이 여기서 일아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FBI와 국무부에 각국의 대사관, 경찰서, 국방부에 대해 "델타 컨디션"의 경계를 유지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사건 이후 클라크는 "중앙정보국의 어느 부서는 알카에다로 판명된 두 명의 테러리스트가 미국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FBI의 어느 부서는 미국의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 각각의 테러리스트가 벌이는 일들의 개별적인 정보로만 취급하였기 때문에, 나나 백악관 어디에서도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2000년 7월 13일 중앙정보국의 톰 윌셔 요원은 FBI 국제 테러 부서로부터 전달받은 하즈미가 미국 내에 있으며 미흐다르가 미국 비자를 지니고 있었다는 정보를 중앙정보국 대테러 센터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보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같은 날 중앙정보국 대테러 센터에 파견되어 있던 FBI 분석가 마거렛 질러스파이는 말레이시아 모임을 재검토 하였다. 그는 미국내의 특별한 징후를 언급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은 미흐다르와 하즈미의 감시 사진을 질러스파이에게 보여 주었으나 그들이 어떤 인물인 지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두 기관의 공동 데이터베이스도 별 다른 정보가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FBI는 두 인물의 추가 정보를 중앙정보국에 요구하였으나 미흐다르의 생년월일과 여권 번호와 같은 기본 정보의 제공마저 거절되었다. 2001년 8월 말 질러스파이는 국무부의 이민 관리부와 관세청 그리고 FBI에 하즈미와 미흐다르를 감시 명단에 등록하도록 요청하였지만, FBI는 이 둘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사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보다 이른 7월에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FBI 요원이 FBI 본부와 알렉 스테이션, 뉴욕 지부에 이들이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되어 미국에 민간 비행 학교의 학생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을 통보하였다. 케네스 윌림엄스 요원은 미국 비행 학교에 등록된 모든 아랍계 학생과 학교 관계자를 면담하여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같은 달, 요르단은 알카에다가 미국 내에서 비행기와 관련된 음모를 진행 중이며 "한달 이내에" 시행될 이 음모의 작전 암호명은 "커다란 결혼식"이라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2001년 8월 6일 중앙정보국의 대표일일공보관은 빈 라덴이 미국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FBI가 전달한 "나타난 패턴으로 보아 국낸에서 비행기 납치 또는 다른 형태의 공격이 예상된다"는 정보를 덧붙여 "대통령 직보"로 보고하였다. 8월 중순 미네소타의 비행 학교는 FBI에 자카리아스 모사오위가 "수상한 질문"을 해 왔다고 FBI에 신고하였다. FBI는 모사오위가 파키스탄 여행 경력이 있는 극단적 사상을 가진 인물로 파악하였고 이민국은 모사오위의 프랑스 비자가 만료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불법 체류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민국은 FBI에 모사오위의 노트북 조사 결과를 요청하였지만 FBI는 테러 가담에 대한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각 정보 당국은 9·11 테러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개별적 첩보로 수집하고 있었지만, 정보 당국 사이의는 각 정보 당국1995년 미국 법무부가 통신 감청과 같은 민감한 정보를 정보 당국 사이에 공유하는 것을 규제한 것도 테러 정보 공유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2004년 4월 9/11 청문회에서 법무장관 존 에시크라프트는 각 정보기관 사이의 장벽이 테러의 전말을 밝히지 못한 이유라고 증언하였다. 사건 흐름. 사건은 4대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사건과 그 여파. 이 테러로 테러범을 포함하여 2,996명의 사망자와 최소 6,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은 전원 사망하였고,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이 125명, 세계무역센터에서는 약 2,500명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미국 전역은 하루 만에 일어난 큰 테러 사건으로 인해 비상사태에 빠지게 되었고, 뉴욕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테러 발생 직후 CNN 방송망을 시작으로 사건의 상황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9·11 테러는 순식간에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경제적인 피해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가치 11억 달러(1조 4300억 원), 테러 응징을 위한 긴급지출안 400억 달러(약 52조 원), 재난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약 12조 원), 이외에도 각종 경제활동이나 재산상 피해를 더하면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테러에 이용된 각 항공기마다 4~5명의 납치범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조사 결과 범인들은 모하메드 아타 등 19명의 알 카에다 조직원들로 알려졌다. 테러범들은 비행기 충돌과 동시에 전원 사망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카에다를 주요 용의자로 지적했으며, 그 밖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산하의 무장조직인 하마스(HAMAS), 이슬람 원리주의 기구인 지하드,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다른 이슬람 테러조직들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았다. 항공기가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과 충돌한 직후인 09시 29분,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 테러사건을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 공격'으로 규정하고, 이어 전국의 정부 건물에 대피령을 내리는 한편, 국제연합(UN), 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 디즈니랜드 등 주요 건물을 폐쇄하였다. 같은 날 금융시장 폐장 결정을 내린 뒤, 뉴욕과 워싱턴에 해군의 구축함 등 장비를 파견하였다. 테러와의 전쟁.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테러 단체, 국가에 맞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001년 10월 7일, 미국·영국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 주변에 350여 기의 항공 전력을 배치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에서 자유로운 전투·폭격기를 이용한 공습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함락하였다. 이어 다음 달 22일 연합군은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탈레반과의 전쟁을 종결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 전쟁의 목표로 삼았던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카에다를 뿌리뽑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후 미국은 2003년 3월 20일에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알카에다와 동맹한 이라크 정부를 20일 만에 함락시키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출범시키는 등 대테러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후 2011년 5월 제로니모 작전의 일환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 후 수장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지 3개월 만인 2000년 12월 11일 존 애슈크로프트 미국 법무장관은 로버트 멀러 연방수사국(FBI) 국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모로코계 프랑스인인 자카리아스 무사위를 6가지의 혐의로 기소했다"고 발표하고 "알 카에다는 이제 매우 싫어하는 재판과 두려워하는 판결과 맞닥뜨릴 것"이라고 했다. 독일 검찰은 9·11테러 비행기 납치범 가운데 한 명인 모하메드 아타가 이끄는 함부르크의 알-카에다 세포조직 창설 멤버로 조직의 자금거래를 지원하고 조직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며 모로콜 출신의 독일 유학생 압델가니 음주디(32)에 대해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구형했으나 변호인들은 음주디가 9·11테러의 주범들과 친분은 있지만 테러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지는 못했다면서 혐의를 부인했다. 함부르크 고등법원이 구속된 음주디에 대해 2003년 12월 "독일 연방범죄수사국(BKA)이 최근 법원에 출처를 밝히지 않고 제출한 자료에 음주디가 9·11테러 계획을 몰랐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면서 "이 정보의 신빙성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나 허위임을 입증할 수도 없다"고 밝히며 석방을 명령하고 재판을 진행하여 2004년 2월 무죄를 선고했다. 독일 연방재판소도 2005년 6월 9일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전 세계에서 911 테러로 기소된 첫 번째 무죄확정이나 오토 쉴리 독일 내무부 장관은 "국제테러리즘을 지지하는 위험인물"이라고 하면서 추방을 명령했다. 군사법원은 이들이 지난 2012년 5월 정식 기소됐으며, 30차례 넘는 재판 전 심리를 거쳐 공식 재판 일정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테러 주범으로 알려진 알카에다의 전 작전사령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를 비롯해 피고인 5명은 2002년과 2003년 파키스탄에서 체포된 뒤 미국 해군기지인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를 약속한 오바마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뉴욕연방법원에서 재판이 추진됐으나 정치적 논란 속에 군사법원이 2012년 5월 기소하여 관타나모 특별군사법정에서 30차례의 재판 전 심리를 거쳐 정식재판에 회부되어 2021년 1월 재판을 시작한다. '9·11 테러의 설계자(The principal architect of the 9·11)'로 불리는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추격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다 2003년 3월 1일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체포되어 911 테러를 포함해 전쟁범죄 및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됐고, 2006년부터 13년 동안 관타나모에 수감 중이며 2008년 관타나모 군사위원회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이것은 내가 원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순교를 기다려왔다"고 말했으나 9·11 테러 피해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소송에서 변호인을 통해 법원에 보낸 편지에서 "현재는 모하메드가 법정 진술에 동의하지 않지만, 마음이 바뀔 수 있다"며 "미국 정부가 사형집행을 면하게 해줄 경우 테러 피해자들을 위해 알카에다의 조직 및 명령 체계 등에 대해 진술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고 말했다. 음모론. 9·11 테러 자작극 음모론. 9·11 테러 자작극 음모론이란 부시 정권이 유태 세력과 공동으로 9·11 테러를 실시했다는 자작극 혐의를 말한다. '진보연구학회'를 이끄는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9·11사건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그룹이 초기에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의혹을 다룬 영화 'JFK'를 감독한 올리버 스톤은 9·11사건을 다룬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개봉하면서 "음모론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미국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9·11이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국내에 잘못 들어온 소식으로는 "하지만 급작스러운 테러 상황에서 유대인이 장악한 언론이 실시간으로 그 장면을 촬영했으며, 쌍둥이 빌딩의 20%를 렌트하고 있는 유대인은 한 명도 죽지 않은 데다가 부시 정권이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한 것을 비추어 보아 유대인과 부시 정부의 합작 테러사건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는 소문이 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실제 통계 조사한 결과는 이들 주장의 오류를 훤히 드러내고 있다. 윙딩스 음모론. 알카에다가 컴퓨터로 테러 정보를 서로 교환했다는 음모론이다. 당시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비행기 편명인 'Q33NY'를 워드에 입력한 후, 이를 윙딩스(wingdings) 글씨체로 바꾸어서 보면 테러를 암시하는 문양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테러에 이용된 비행기 4대 중 'Q33NY'라는 편명의 비행기는 없으며, 전문가들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이야기라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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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치-튜링 논제
처치-튜링 논제(Church-Turing thesi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논제(thesis)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어떤 함수는 튜링 기계가 계산할 수 있으면, 그리고 그 때만 알고리즘으로 계산 가능하다는 명제이다. 알론조 처치와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튜링 기계는 모든 범용 프로그래밍 언어로 번역될 수 있으므로, 이것은 어떤 컴퓨터에게든 충분한 시간과 메모리가 주어진다면 존재하는 모든 알고리즘의 결과를 출력할 수 있다는 명제와 동치이다. 처음 이 명제가 나왔을 때에는 "효과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effectively computable) 함수"와 같이 비형식적인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명제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후 수학자들은 모호한 말 대신 계산 가능한 함수를 사용한다. 실제로 증명되거나 반증된 적은 없으며, 영원히 증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다만 현재까지 인간이 발명한 모든 종류의 계산법(양자 컴퓨터를 포함하여)이 적절한 형태의 튜링 기계로 표현될 수 있음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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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
에스페란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인공어이다. "에스페란토"라는 이름은 1887년 발표한 국제어 문법 제1서에 쓰였던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의 필명인 "D-ro Esperanto(에스페란토 박사)"에서 유래하였다.(Esperanto는 본래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국제적 의사소통을 위해, 배우기 쉽고 중립적인 언어를 목표로 하여 만들어졌다. 원래는 국제어()라고 불리었다. 현재 에스페란토는 여행, 의사교환, 문화 교류, 편지, 언어교육 등 많은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전 세계 200만 명의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로 대화할 수 있다. 그중에서 약 2,000~3,000명은 에스페란토를 말할 줄 아는 부모 사이에서 에스페란토를 모어로 습득하였다. 특징. 에스페란토는 말이 서로 다른 민족 간 의사 소통과 상호 이해, 나아가서 인류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중립적이고 배우기 쉬우면서 모든 표현이 가능한 언어로서, 국제적으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끔 고안되었다. 그러나 '정말 배우기 쉬운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을 에스페란티스토라고 한다. 에스페란티스토는 국제어를 쓰는 사람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대한민국에도 에스페란토 협회인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존재한다. 전 세계 에스페란티스토는 라 에스페로를 언어가(歌)로 사용하고 있으며, 언어기(旗)도 라 에스페로라고 부른다. 역사. 폴란드의 안과 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는 자신이 살고 있었던 지역의 언어 문제가 곧 주민들 사이에 불화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만 있으면 적어도 그러한 분쟁은 종식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에스페란토를 창안하게 되었다. 처음에 자멘호프는 라틴어의 복구가 언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라틴어를 배우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영어를 배우면서 그 문법이 간단하다는 것과 동사의 인칭변화가 필요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많은 단어를 알아야 한다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길을 걸으며 우연히 러시아어로 된 두 개의 간판을 보고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두 개의 간판 (경비실), (과자가게)에는 공통적으로 (장소라는 뜻)라는 접미사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어근만 외우면 접미사를 써서 다양한 단어를 파생해 낼 수 있도록 구상하였다. 어휘는 다양한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단어를 채용하기로 하였다. 1878년, 현재 에스페란토의 시험판인 링그베 우니베르살라를 만들어 고등학교 동급생에게 가르쳤다. 그 후 6년간, 우선 각 민족어로 된 문학작품과 시를 번역하며, 언어를 발전시켜 갔다. 그는 1895년 러시아 에스페란티스토 보로프코(N. Borovko)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이 언어는 1878년에 이미 완전히 완성된 듯 했지만, 나는 이 언어가 완벽해지도록 6년을 더 소비하였다.’라고 적었다. 그는 완성된 언어를 발표하려 하였지만,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 정부의 검열에 의해 출판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성서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하고, 언어를 개량하였다. 1887년 제1서로 에스페란토를 최초로 발표하였다. 언어 사용 지역의 지리적 위치와 인구. 지리학과 인구학. 에스페란토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인공어이다. 이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유럽과 동아시아에 가장 많은데, 특히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에스페란토는 유럽의 북부와 중부 국가에서 특히 유행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에스페란토 클럽을 만든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언어 구사자의 수. 에스페란토 구사자들의 수를 예측한 사람은 은퇴한 심리학 교수인 시드니 컬버트(Sidney S. Culbert)이다. 이 교수는 워싱턴 대학에서 활동했으며 오랫동안 에스페란토를 사용했다. 그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십 개의 국가에서 에스페란토 구사자들에 대해 조사했다. 컬버트는 백만 명에서 이백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를 Foreign Service Level 3 수준인, ‘전문적으로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안다는 결론을 내렸다. (Foreign Service Level 3는 Foreign Service Level language ability measures 등급 중 하나로 복잡한 생각들을 망설임 없이 표현할 수 있고 연설과 라디오 방송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뜻한다.) 연감에서 그는 언어 구사자들의 수를 백만의 자리에서 반올림 하였다. 따라서 에스페란토 구사자들의 수는 이백만 명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이 최종 수치는 에스놀로그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 수치가 정확하다면, 세계 인구의 0.03 %가 이 언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멘호프가 꿈꾸던 보편적 언어의 목표는 아니지만, 이는 다른 어떤 인공어도 도달하지 못한 수치로 에스페란토의 유명한 정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핀란드의 언어학자이자 에스페란토의 모어 사용자 전문가인, 유코 린드스테드(Jouko Lindstedt)은 에스페란토 사용 지역의 전체적인 언어 사용 능력 비율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추정안을 내놓았다. 컬버트 박사의 구체적인 샘플 데이터 또는 인구 통계 데이터가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에, 언어 구사자의 정확한 수치를 알기는 불가능하다. 2009년도에 루 분시-롤셔븐(Lu Wunsch-Rolshoven)은 헝가리와 리투아니아의 2001년도 인구 통계 데이터를 사용하여 160,000에서 300,000명의 사람들이 이 언어를 능숙하거나 활발하게 사용한다고 추정했다. 그리고 이 중 80,000에서 150,000명은 유럽 연합 국가의 국민들이라고 추정했다. 모국어 사용자. 에스페란토의 모어 사용자인, 에스페란토 원어민()은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 언어를 배웠다. 이런 현상은 다문화 가정 내에서 에스페란토가 제1언어 또는 유일한 공통 언어일 경우에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가끔 열렬한 에스페란토 사용 가족 내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에스놀로그의 15번째 에디션에서는 1996년도에 200에서 2,000명 사이의 에스페란토 모국어 사용자들이 있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수치들은 16, 17번째 에디션에서 삭제되었다. 언어학적 특성. 분류. 발음체계는 슬라브어의 영향을 받았으나, 어휘는 주로 로망스어(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약 75%), 게르만어(독일어, 영어 등; 약 20%)로부터 채용하였다. 자멘호프가 정의하지 않은 문법상의 언어 사용은 초기 사용자의 모어였던 러시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다. 어순은 라틴어나 그리스어처럼 비교적 자유로우나 SVO형이 주로 쓰이며, 형용사가 명사 앞에 오는 경우가 많다. 전치사를 사용하며, 교착어적 성질도 가지고 있다. 문법. 에스페란토는 성이 없고, 규칙적으로 동사가 변화하는 교착어이다. 명사와 형용사는 주격과 대격, 즉 2개의 격을 가진다. 수는 단수와 복수가 있고, 형용사의 복수형이 존재한다. 동사의 인칭변화는 없고, 대격어미(-n)는 이동을 나타내거나, 전치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대격이 있으므로 러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일본어, 한국어와 같이 비교적 어순이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 어원. 에스페란토의 어휘는 대부분 유럽 언어에서 왔지만, 최근에 생긴 어휘는 비유럽어권에서 온 경우도 있다. 가장 주요한 어원은 라틴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이다. 다국어주의에 의해 대부분의 어휘는 서로 유사한 다양한 언어의 공통적인 부분에서 가져왔다. 글자. 에스페란토는 로마자에 6글자를 더하고 q, w, x, y 4글자를 뺀 28글자를 쓴다. 윗부호. 여섯 글자 에는 윗부호()라고 부르는 발음 구별 기호인 다른소리부호(^)와 짧은소리부호(˘)가 있다. 윗부호를 쓸 수 없을 때 바꾸어 쓰는 방식은 '에스페란토 기초'에서 제시한 H-체계와 현재 주로 쓰이는 X-체계가 있다. 비판과 개선안. 에스페란티도. 에스페란토가 발표된 이후, 수십 가지의 개선안과 에스페란토에서 파생된 인공어가 만들어졌다. 이를 에스페란티도라고 한다. 에스페란토는 유럽인에게만 유리한 언어인가? 이는 에스페란토는 다른 언어에 비해 학습을 위해 1/10 가량 시간이 적게 걸린다는 장점을 말하기도 하지만, 유럽인들에 비해 동아시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힘들다는 단점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에스페란토의 대부분의 어휘가 유럽에서 기원하였으므로 그 언어와 관계없는 언어의 사용자는 에스페란토 어휘의 의미와 정확한 쓰임을 외우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고 볼 수 있다. 대격. 에스페란토는 대격(또는 목적격)을 나타내기 위해 어미 -n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어의 경우 대격(또는 목적격) 조사 '-을/를'을 사용하여,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대격의 존재로 인해 에스페란토의 어순이 더 자유로워지고, 의미가 분명히 전달되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많은 유럽어의 경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유럽인들이 -n의 사용법을 배우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동의어. 에스페란토는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데 일정한 규칙이 없으며, 필요에 의해 누군가가 만든 단어가 일정 수준 이상 널리 알려지면, 그런 새로운 단어를 모아서 발표하는, 소극적 방식으로 어휘를 늘려가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인해 같은 뜻을 가진 두 단어 이상이 널리 사용할 경우, 동일하게 쓰이는 단어임에도 배우는 이의 입장에서는 둘다 외우는 수밖에 없다. 유럽 사용자의 경우,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에스페란토화하는 것을, 비유럽권에서는 기존 단어를 사용하여 합성어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두개 이상 동시에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합성어의 경우에도 사람마다 합성어를 만드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뜻을 가진 여러 개의 합성어가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다. 또한, 원래 하나였던 단어가 여러 개로 분화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에스페란토에는 자연어만큼은 아니나 동의어가 많으며, 에스페란토 학회가 동의어 정리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학습자가 동의어를 모두 외워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발음. 학습자의 모어에 따라 일부 발음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올 수 있다. 한국어 화자가 자주 하는 실수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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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수
수학에서 사원수(四元數, ) 또는 해밀턴 수()는 복소수를 확장해 만든 수 체계이다. 네 개의 실수 성분을 가지며, 덧셈과 곱셈의 결합법칙 및 덧셈의 교환법칙을 만족시키지만 곱셈의 교환법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정의. 사원수의 집합 formula_1는 집합으로서 formula_2이다. 이 위에 다음과 같은 덧셈과 곱셈 연산을 정의하여, 환으로 만들 수 있다. 덧셈은 각 성분의 합이다. 곱셈은 겹선형 연산이며, 기저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사원수의 기저 formula_4는 이 곱셈에 대하여 유한군을 이루며, 이를 사원수군 formula_6라고 한다. 즉, 사원수환은 군환 formula_7의 몫 과 같다. (군환 formula_7는 8차원 실수 단위 결합 대수이며, 위 아이디얼로 몫을 취하면 4차원 실수 대수를 얻는다.) 이렇게 덧셈과 곱셈을 정의하면, 사원수의 환 formula_1는 나눗셈환을 이룬다. 그러나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는 체를 이루지 않는다. 실수부와 허수부. 사원수 formula_11에 대하여, "w"를 q의 실수부 또는 스칼라부 formula_12, formula_13를 q의 허수부 또는 벡터부 formula_14라고 한다. 사원수 formula_11의 켤레 사원수() formula_16는 그 허수부의 부호를 뒤집은 사원수이다. 즉 사원수 "q"의 노름 또는 절댓값 |"q"| 는 이다. 성질. 사원수환 formula_1는 노름을 갖춘 나눗셈환이자 formula_20-대수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사원수 formula_21에 대하여, 벡터와의 관계. 사원수의 실수부는 스칼라로, 허수부는 3차원 벡터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사원수는 스칼라와 3차원 벡터의 순서쌍 formula_28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원수의 합과 곱은 다음과 같다. 행렬 표현. 사원수는 2×2 복소 행렬로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32는 파울리 행렬이다. 그렇다면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사원수 formula_33에 대하여, 마지막 식에서, 우변은 행렬 지수 함수이다. 역사. 해밀턴 이전.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1748년 5월 4일 크리스티안 골드바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일러의 네 제곱수 항등식을 발표하였다. 이는 두 사원수 formula_40, formula_41에 대하여 formula_42인 것과 같다. 올랭드 로드리그()는 1840년에 오일러의 네 제곱수 항등식을 강체의 회전에 응용하였다. 사원수의 발견. 해밀턴은 복소수가 2차원 평면상의 점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3차원 공간에서 점을 표현하는 같은 방법을 찾으려 하였다. 3차원 공간에서의 정점은 3개의 수로 이루어지며, 해밀턴은 그 3개의 수들을 어떻게 더하고 곱할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는 두개의 정점간의 나누기를 어떻게 정의할지 알지 못했고,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1843년 10월 16일, 해밀턴은 그의 아내와 더블린의 로열 운하(, )를 걷고 있었다. 브로엄 다리(, 현재는 브룸 다리 )를 걷고 있을 때, 나누기에 관한 해답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3개의 성분을 가진 값은 나눗셈을 정의할 수 없지만, 4개의 성분을 가진 값은 나눗셈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4개의 성분 가운데 세 개를 사용하여 3차원 공간의 직교좌표를 표현할 수 있다. 해밀턴은 이 수체계의 기본 규칙을 다리에 새겨놓았다. 해밀턴은 위의 기본적인 규칙을 적용한 4개의 요소를 "사원수"()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넷, 넷으로 구성된 것)에서 유래한다. 다음날 해밀턴은 이 발견에 대하여 친구 수학자인 존 그레이브스()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다. 이 편지는 저널에 출판되었으며, 편지에서 해밀턴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해밀턴은 이 발견을 1844년에 〈사원수에 대하여: 또는 대수학에서의 새로운 허수 체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출판하였다. 이후 해밀턴은 이 논문의 속편을 17편 더 같은 저널에 수록하였다. 그 후 그는 사원수를 연구하고 알리는데 그의 여생을 바쳤다. 그는 "사원수론자"()라는 학파를 창시하고, 1853년에는 《사원수 강해》()를 출판하였다. 해밀턴 사후, 해밀턴의 아들 윌리엄 에드윈 해밀턴()은 아버지의 마지막 책인 800여 쪽의 《사원수 원론》()을 편집하여 1866년에 출판하였다. 해밀턴 사후. 해밀턴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인 피터 거스리 테이트는 사원수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당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는 사원수가 의무 수강 과목의 하나였다. 현재는 공간 운동학, 맥스웰 방정식 등의 벡터를 이용하여 설명하는 물리와 기하학의 논제들은 그 당시에는 모두 사원수를 이용하여 설명되었다. 1899년에 국제 사원수 학회()가 설립되었고, 1900년~1913년 동안 《사원수 학회 저널》()을 출판하였다. 전성기 동안 60여 명의 회원을 가졌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사라졌다. 1880년대 중반부터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와 올리버 헤비사이드가 제안한 벡터 해석학이 사원수 표현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벡터는 사원수와 같은 현상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고전 사원수 연구에서 많은 아이디어와 용어 등을 빌려왔다. 그러나 벡터 해석이 보다 간결한 개념과 표기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원수는 수학과 물리에서 비주류가 되었다. 이는 해밀턴의 사원수가 이해하기 난해하고, 표기가 친숙하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물에 길고 불분명한 표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원수는 20세기 말에 공간상에서의 회전에 관한 사원수의 유용성에 의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원수를 이용한 회전의 표현은 행렬을 사용하는 표현에 비해 더욱 간결했고 계산이 빨랐다. 이런 이유로, 사원수는 컴퓨터 그래픽, 제어이론, 신호처리, 자세제어(attitude control), 물리학, 생물정보학, 분자동역학, 컴퓨터 시뮬레이션, 궤도역학(orbital mechanics) 등에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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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 베이직
GW 베이직(GW-BASIC)은 원래 마이크로소프트가 컴팩을 위해 개발한 베이직의 일종이다. 이름의 GW는 초기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이었던 그렉 위튼(Greg Whitten, 별명은 'gee-whiz')의 이름 첫글자를 딴 것이다. GW-BASIC는 마이크로소프트/IBM BASICA와 호환성이 있으며, 디스크 기반으로 실행에 IBM PC에 포함된 ROM 베이직의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GW-BASIC을 IBM PC의 운영 체제 MS-DOS에 기본 포함시켜서 제공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좀 더 빠른 프로그램을 위해 BASCOM이라는 베이직 전용 컴파일러를 판매하기도 했다. 초기 마이크로컴퓨터 버전의 베이직 언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GW-BASIC도 구조화 프로그래밍에 필요한 지역 변수 등의 구조가 없고, 인터프리터형 언어의 특성상 실행 속도가 비교적 느렸으나, 그 뒤로 수많은 그래픽 관련 명령어가 추가되었고, 레코드형 디스크 입출력 부분이 추가·보완되었다. MS-DOS 5.0 버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는 GW 베이직을 번들로 제공하지 않고, 대신 큐베이직(QBasic)으로 대체했다. 헬로 월드 예제. 10 PRINT "Hello, World!"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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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 R. 톨킨
존 로널드 로얼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J. R. R. 톨킨, , CBE, 1892년 1월 3일~1973년 9월 2일)은 영국의 영어학 교수, 언어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룩 칼리지에서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고대영어학 교수로, 1945년에서 1959년 사이에는 같은 대학 머튼 칼리지의 영어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평생 써 온 소설을 통해 인생 후반에 큰 명성을 얻었는데, 이것에는 《반지의 제왕》과 《호빗》 등의 가운데땅 관련 세계관 책이 있다. 톨킨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과 관련한 일을 하기도 했으며, 언어학 교수로도 재직했다. 톨킨은 언어학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의 작품 내에 인공적인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언어들 중, 퀘냐와 신다린 등이 대표적이다. 톨킨은 인간 세계와는 다른 세계와 다른 종족을 만들어 내었고, 이로써 현대 판타지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크게 발전시킨 작가로 손꼽힌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반지의 제왕》 삼부작과 《호빗》 등의 가운데땅에 대한 작품들의 지속적인 인기와 영향력은 그의 명성을 끌어올려 그를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라 불리게 하였다. 또한 그는 베오울프와 가웨인 경과 녹기사 등에 대한 많은 비평도 남겼다. 그의 열열한 팬들은 톨키니스트라고 불리며 일부 매우 열열한 톨키니스트는 이 소설 시리즈를 거의 신앙 수준으로 여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내의 문학 토론 모임인 잉클링스의 멤버였으며, 같은 잉클링스 멤버였던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 S. 루이스와는 절친으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톨킨은 1972년 신년서훈명단에 올라 3등급 대영 제국 훈장(CBE)을 받았고, 이후 1973년 9월 2일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아버지 톨킨의 집필을 정리하여 《실마릴리온》을 비롯해 많은 책을 출간하였다. 또 톨킨은 더 타임스에서는 2008년 영국의 위대한 작가 6위로 그를 선정하였고, BBC 투표에서는 지난 천년동안 위대한 영어 작가 6위에 뽑혔다. 생애. 톨킨의 조상. 톨킨의 직계 조상은 런던과 버밍엄에서 시계와 피아노를 만들던 장인이었다. 톨킨의 조상들은 퀴니히스베르크 인근의 프로이센 크로이츠 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의 조상인 미셸 톨킨이 1620년경에 태어났다. 미셸의 아들인 크리스티 누스 톨킨은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톨킨과 클리치부르크에서 단치히 자유시로 이사하였고, 후에 그는 두 아들과 런던으로 이사하였다. 그의 남동생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의 조상이 되었다. 1792년 톨킨의 증조부는 지인과 한 제조업체를 인수해 시계를 제작해 판매하였다. 하지만 톨킨의 증조부는 영국 시민이 된적이 없었다. 다른 독일의 친척들도 런던의 두 형제와 합류했다. 톨킨의 성이나 유사한 철자를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존 로널드 로웰 톨킨과 같은 가족에 속하며 그들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동 프로이센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실제로 톨킨은 저지대 프러시안어로 '톨의 자손'이라는 뜻인데, 톨킨 스스로는 '저돌적'이라는 뜻의 독일어 '톨퀸(tollkühn)'에서 왔다고 말하고 다녔다. 어린시절. 톨킨은 1892년 1월 3일 오렌지 자유국(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블룸폰테인에서 태어났다. 톨킨에게는 1894년 2월 17일에 태어난 남동생 힐러리 로웰 톨킨이 있다. 또한 톨킨은 어렸을 때 큰 거미에게 물렸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3살 때 글을 읽기 시작했으며, 4 살때 영국 버밍엄으로 이주했다. 4살 때부터 글을 유창하게 쓸수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톨킨이 3살 때 류마티스 열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가족은 소득이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톨킨의 어머니는 집에서 자식들을 가르쳤다. 톨킨의 어머니는 톨킨에게 식물학을 가르쳤다. 어린 톨킨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톨킨의 어머니는 라틴어 기초를 일찍 가르쳤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외가 모두가 열성적인 성공회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심하였다. 톨킨의 어머니가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심하자 성공회(Anglican) 신자였던 친척들은 톨킨 일족에게 등을 돌리고 경제적 지원을 끊음에 따라 톨킨 모자는 가난하게 생활하게 된다. 톨킨은 다시 킹스 히스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탐험하기를 좋아했으며, 후에 그의 소설에 종종 이름이 비슷하게 등장한다. 톨킨의 어머니는 톨킨이 12살 때 당뇨 합병증으로 죽었지만, 톨킨은 그의 나머지 생애 동안 그의 어머니가 믿음으로 인해 순교했다고 생각했고, 이는 그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톨킨의 독실한 신앙은 성공회 신자인 C.S.루이스와의 대화에도 깊이 베어 있으며, 그의 작품 속에도 다양한 상징과 가치로 나타난다. 10대 시절 톨킨은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학교과 성 필립 문법학교를 다녔다. 청년기. 10대 초반 톨킨은 사촌인 메리와 마조리 인클던의 발명품인 동물 언어를 처음으로 접했다. 그는 당시 라틴어와 앵글로색슨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 언어에 대한 관심은 곧 사라졌지만 메리와 톨킨은 새롭고 복잡한 언어를 개발하였다. 후에 톨킨은 다음으로 작업해 새로운 언어인 나파린을 만들어내었다. 톨킨은 1909년 에스페란토를 공부하고 알게 되었다. 후에 그는 16페이지 짜리 "The Book of the Foxrook"라는 공책을 쓰게되었는데, 여기에서 톨킨의 초기 언어가 등장하였다. 이 공책은 에스페란토로 작성되었다. 1911년 톨킨은 스위스 루터 브루 넨 밸리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1968년 편지를 보면 이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였으며, 이 경험은 톨킨의 리븐델을 창조하는데 영향을 주었으며, 호빗에서 빌보 배긴스가 난쟁이들과 야영하는 이야기에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10월, 톨킨은 옥스포드 전문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고전을 공부했지만 1913년에 영어와 문학으로 과정을 변경하여 1915년 일류 명예를 받고 졸업하였다. 톨킨이 에디스 브렛을 만나 처음 사랑에 빠진 것은 그가 16세일 때였으며 당시 에디스는 톨킨보다 3살 많았다. 에디스는 개신교였기에 이를 좋지 않게 생각한 당시 톨킨의 후견인 모건 신부는 톨킨이 21살이 되기 전까지 그들이 만나는 것을 금지하였고 톨킨은 이에 따랐다. 톨킨은 21세가 되던 생일날 톨킨은 에디스에게 청혼하는 편지를 쓰고 결국 둘은 1916년 3월 22일 결혼하게 된다. 세계 1차대전 시기. 톨킨은 제1차 세계 대전 시작 후 1915년 7월 15일, 영국군에 지원하였고, 임시 부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케논 체이스13 보충 대대에서 11개월간 훈련을 받았고, 훈련을 마친 그는 영국 파견부대 11대대 소속으로 1916년 6월 2일에 프랑스에 투입되었다. 프랑스. 1916년 6월 5일, 톨킨은 밤새 프랑스의 칼레로 향했다. 처음으로 도착한 톨킨은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원정대 기지로 보내졌다. 6월 7일, 그는 영국 육군의 11대대에 신호 장교로 배정되었다는 것이 통보되었다. 대대는 제 25사단 제 74여단 소속이었다. 그의 부대가 소환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톨킨은 지루함에 빠졌다. 그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가 칼레로 넘어올 때의 감정에서 얻은 영감으로 "외로운 섬"이라는 시를 지었다. 영국군의 우편 검열을 피하기 위해 그만의 점자 코드를 만들기도 하였다. 1916년 6월 27일, 톨킨은 아미앵 근처의 도시에 합류하였다. 그는 그곳의 광산, 제분 및 직조 마을에서 끌려온 후 입대한 사람들을 지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톨킨은 이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느꼈지만, 영국에서 다른 계급끼리 과한 우정을 제한하여서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솜 전투. 톨킨은 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참혹하다고도 알려진 솜 전투에도 참가했다. 톨킨은 1916년 7월 초 솜에 도착하였고, 그는 부진 코트에서 라이프치히 돌출부에 대한 전투에 참여하였다. 톨킨의 전투 시간은 그의 아내인 에디스에게는 끔찍한 스트레스였는데, 이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톨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려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916년 10월 27일에 톨킨은 레지나 해구로 돌격하는 도중 이가 옮기는 참호열에 걸려 11월 8일 영국으로 후송되었다. 톨킨이 후송된 후 톨킨과 친한 친구들의 대부분이 살해되었고, 부대는 거의 전멸하였다. 회복 기간. 병을 회복하는 기간 동안 북유럽의 신화와 민간 전승에 기반한 우화의 시리즈인 '잃어버린 이야기들의 책'(The Book of Lost Tales)을 쓰었다. 요양중인 이무렵 톨킨은 에디스와 함께 독미나리 숲을 거닐다가 에디스가 톨킨을 위로하는 춤을 추었고 아내의 귀여운 행동에 영감을 얻어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 반영하여 설정하였고, 그것은 베렌과 루시엔이 되었다. 베렌과 루시엔은 《실마릴리온》에 등장하는 인물로 톨킨이 쓴 '잃어버린 이야기들의 책'에 쓴 내용에서 《반지의 제왕》 앞부분에 해당하는 것을 톨킨의 사후에 그의 아들이 출판한 책이다. 톨킨은 그의 아내를 종종 "나의 루시엔"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대학교수 시절.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톨킨은 잠시 동안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에 관련한 일을 했다. 그가 주로 담당한 것은 알파벳 'W'로 시작하는 언어의 기원과 재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1920년에 리즈 대학에서 영어 언어학 조교로 강의하다가 1924년 리즈 대학교에서 정교수가 된다. 1925년에는 톨킨은 다시 옥스퍼드 대학교로 가서 교수직을 맡게 된다. 톨킨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들이 모여 출판된 책이 《호빗》이었다. 호빗은 어른들에게까지 인기를 얻게 되고 호빗의 출판사는 톨킨에게 후속작을 요청한다. 이에 톨킨은 작가 토론모임인 잉클링스와 C.S. 루이스의 조언을 받으며 《반지의 제왕》을 10여년에 걸쳐 저술한다. 톨킨의 절친한 친구이자 톨킨과 마찬가지로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C.S. 루이스는 톨킨과 함께 독서 모임인 잉클링스의 회원이었다. 둘은 잉클링스에서 문학, 역사, 종교, 신화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루이스는 톨킨이 생각하고 저술했던 가운데 땅 이야기를 경청하고 격려해 주었다. 톨킨과 루이스는 말년에는 소원해 지기도 하였지만 둘은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였다. 톨킨은 1963년 루이스가 죽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우리들을 맺어준 깊은 우정은 지금도 그대로이다"라고 하였다. 은퇴. 1959년부터 1973년 사망할 때까지 은퇴한 톨킨은 꾸준히 대중적인 관심과 문학적인 명성을 얻었다. 1961년 그의 친구인 C.S. 루이스는 그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하기도 하였다. 그의 책이 수익성이 높아지자 톨킨은 조기 퇴직을 한 것을 후회 할 정도가 되었다. 팬들의 관심이 너무 높아서 톨킨은 공개하였던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았고, 에디스와 본머스에서 살게되었다. 그 당시 본머스는 영국 중산층이 이용하던 휴양지였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그곳의 정중한 사회 진입은 쉬었을 수 있지만, 그는 옥스퍼드대와 잉클링스의 생활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은퇴 당시 톨킨은 1966년 예루살렘 성경의 컨설턴트이자 번역가이었다. 톨킨은 1972년 신년 명예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으며, 1972년 3월 28일 버킹엄 궁전에서 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옥스포드 대학은 그에게 문학 박사 명예를 수여하였다. 죽음. 톨킨의 아내가 1971년 11월 29일 죽었을 때 톨킨은 아내의 묘지 비석에 루시엔(Lúthien)이라고 아내의 이름 아래에 새겼다. 21개월 뒤인 1973년 9월 2일 톨킨이 81세의 나이로 출혈성 궤양과 흉부 감염으로 인해 사망했을 때 같은 곳에 묻혔는데, 이 때 비석에 베렌(Beren)이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베렌은 《실마릴리온》의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비석의 전체 내용은 아래와 같다. 또한 톨킨의 유언장은 1973년 12월 20일 190,577 파운드에 낙찰되었다. 출판물. 톨킨 생애에 출판. 《베오울프:괴물과 비평가들》. 톨킨은 그의 소설과 함께 대학 문학 비평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1936년 강의내용이 나중에 기사로 출판되게 되고, 앵글로 색슨의 서사시 베오울프를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그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논문은 고전 영문학 공부하는데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 또한 이것은 톨킨의 후기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세부 사항에서 각색이 드러났다. 아이들을 위한 책과 단편. 톨킨은 신화적인 작곡과 더불어, 그의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판타지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매해 크리스마스 편지를 산타할아버지가 보내는 형식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썼고 그 편지에는 짧은 이야기 시리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모아져 《산타할아버지의 편지》로 출판된다. 한국에서는 《북극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다른 이야기로는 《미스터 블리스》와 《로버랜덤》,《니글의 나뭇잎》《톰 봄바딜의 모험》,《요정 이야기에 관하여》,《큰 우튼의 대장장이》,《햄의 농부 가일스》 등이 있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전설관에서 아이디어를 빌렸다. 《호빗》. 톨킨은 자신의 허구적인 이야기들이 인기를 얻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호빗》은 톨킨의 자녀들을 위해 쓴 소설이었다. 1936년 우연한 기회에 호빗을 읽게 된 런던의 조지 알렌 & 언윈(George Allen & Unwin) 출판사 여직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호빗》을 출판하였다. 출판 이후 《호빗》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까지 인기를 끌게 되고 출판사는 톨킨에게 속편을 요청하게 된다. 《반지의 제왕》. 톨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반지의 제왕》은 《호빗》의 후속편을 제작해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에 의해 시작하였고 10여 년에 걸쳐 반지의 제왕을 쓰게 된다. 처음 출판은 1954년부터 1955년에 1권으로 출판하려 했지만 너무 많은 인쇄비 때문에 3권으로 출판되었다.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는 동안 그는 잉클링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특히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톨킨은 처음 《반지의 제왕》을 《호빗》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로 쓰려 했다. 그러나 소설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심각해지게 되면서 성인 독자들에게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반지의 제왕》 집필전에 그가 구상하고 집필한 벨레리안드(Beleriand) 배경 이야기는 그의 사후에 《실마릴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소설의 성공은 판타지 장르 소설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반지의 제왕은 1960년대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판매와 독자평 둘다에서 20세기에 가장 인기있는 소설 중에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2003년 BBC에서 개최한 "대단한 책"(Big Read) 조사에서 반지의 제왕은 "영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책"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또한 반지의 제왕은 Amazon.com 고객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천년의 책"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2004년 반지의 제왕은 BBC가 "대단한 책"(Big Read)을 독일인으로 투표를 진행하였을 때 약 250,000명이 반지의 제왕을 좋아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후 출판. 톨킨의 사후에 출판한 책은 대부분 크리스토퍼 톨킨이 묶어 편집하였다. 《실마릴리온》. 톨킨은 베렌과 루시엔의 이야기가 포함된 '신화의 초안'(Sketch of the Mythology)을 간략하게 썼다. 그 내용은 나중에 퀜타 실마릴리온에 포함되게 된다. 톨킨은 실마릴리온 이야기가 반지의 제왕과 함께 출판 되기를 바랬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에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하는 바람에 생전에 출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전쟁 직후이기 때문에 인쇄비가 너무 높았던 것도 그 이유였으며 반지의 제왕도 3부로 나누어 출판하게 된다. 톨킨은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에게 그의 사후에 작품 발표에 대한 저작권을 위임하였고 크리스토퍼 톨킨는 그의 아버지의 미출판 원고들을 정리, 편집하여 책 《실마릴리온》으로 1977년 출판하게 된다. 이는 톨킨이 죽은 후 4년 뒤의 출판이었다. 《실마릴리온》은 가운데땅에서의 신화와 역사를 기록한 소설로서 작가가 《호빗》과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기 전에 《잃어버린 이야기들의 책》이라고 적힌 노트에 1937년부터 쓰기 시작해 죽기전까지 집필한 것으로서 《반지의 제왕》 앞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서도 동명의 제목(실마릴리온)으로 출판되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가운데땅 역사서》. 1980년 크리스토퍼 톨킨은 톨킨의 유작 원고 자료들을 모아 《누메노르와 가운데땅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출간한다. 이후 크리스토퍼 톨킨은 1983년부터 1996년까지 톨킨의 저서를 모아 《잃어버린 이야기들의 책》 1부와 2부와 《벨레리안드의 노래》를 비롯한 12권의 책을 출간하고, 나중에 학문적으로 설명한 해설과 각주를 달아 이를 《가운데땅 역사서》라는 이름의 12권으로 재정리한다. 《후린의 아이들》. 2007년 《후린의 아이들》이 하퍼 콜린스(Harper Collins)와 휴튼 미플린(Houghton Mifflin)에 의해 출판되었다. 《후린의 아이들》은 톨킨이 1918년에 집필을 시작했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작품으로, 내용은 톨킨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실마릴리온》, 《끝나지 않은 이야기》, 《가운데땅 이야기》 등에서 원고를 모은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중간계이며 《반지의 제왕》의 시대 배경 제3시대보다 6500년 앞선 제1시대의 영웅 투린의 비극적인 투쟁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대한민국에서도 2008년 7월 출간되었다. 《지구르드와 구드룬의 전설》. 2009년 5월 휴튼 미플린 하코트(Houghton Mifflin Harcourt) 출판사와 하퍼 콜린스에서 톨킨의 미발행 작품을 지구르드와 구드룬의 전설(The Legend of Sigurd and Gudrú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크리스토퍼 톨킨이 편집하고 소개를 덧붙였다. 내용은 노르웨이의 전설에 관한 책으로 1930년대 톨킨이 옥스퍼드 대학에 교수로 있을 무렵에 썼던 서사시이다. 영향. 다른 많은 작가들이 톨킨의 이전에 많은 판타지 소설을 써왔지만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대성공은 판타즈 소설 장르가 대중적인 부활과 현대 판타지 소설 장르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후 현대 판타지 장르의 "아버지"로 불리었으며, 2008년 더 타임스는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에 선정하였다. 또한 톨킨은 더 타임스에서는 2008년 영국의 위대한 작가 6위로 그를 선정하였고, BBC 투표에서는 지난 천년동안 위대한 영어 작가 6위에 뽑혔다. 톨킨의 가운데땅 판타지 책, 특히 반지의 제왕과 실마릴리온은 그의 대한 철학적 관심, 기독교, 신화, 고고학 등에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게르만어, 켈트어, 핀란드어, 그리스어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재능 있는 언어 학자였다. 또한 톨킨의 영국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과 버밍엄의 성장은 톨킨에게 샤이어의 창조에 영향을 미쳤고, 세계 1차 대전의 참호는 모르도르를 창조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팬덤. 톨킨의 열성적인 팬들은 톨키니스트라고 불린다. 열성적인 톨키니스트들은 다른 팬덤의 팬들과 규모와 깊이를 달리한다. 대부분의 팬덤의 팬들은 상업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톨키니스트들은 학문, 철학적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톨킨만을 연구하는 톨킨학이 있을정도이다. 정치와 인종. 톨킨의 판타지 저작은 인종에 대한 구식적인 태도를 구현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톨킨은 오크의 이미지를 몽골에서 따왔다고 지인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점을 들어 일부 사람들은 고의는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백인우월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지않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톨킨의 편지를 읽어보면 요정이 모르고스에 의해 타락해서 오크가되었다고 묘사되었으며, 트롤 역시 엔트가 타락하여 형성되었다 묘사되었다고 묘사되어있다. 또한 톨킨을 인종차별을 증오하기까지 했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을 뼛속까지 증오했다고 지인들에게 자주 말했을 정도로 인종차별을 증오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치 독일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모습을 지인들 앞에서 보여주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증오하였다고 한 톨킨도 백인들의 인종차별에서 톨킨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나마 인종차별이 가장 덜한 미국 서부에서도 아직 인종차별 반대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이다. 또한 미국 몽고메리시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버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서 흑인 봉기가 일어난 것도 반지의 제왕을 쓴 후에 일어났다. 또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를 연설을 하기 10년전에 반지의 제왕이 씌어지고 난 뒤다. 자연. 대부분의 생물 보존주의는 아직 정치적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톨킨 자신은 숲에 대한 그의 사랑과 삼림 벌채에 대한 슬픔에 대한 개인적인 편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견해를 직접 표현하지 않았다. 나중에 톨킨에 대한 전기 또는 문학 분석의 많은 저자는 반지의 제왕을 쓰는 동안 톨킨의 야생 및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가치와 야생 자연의 남은 것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갖게되었다. 출판 목록.       은 가운데땅과 관련있는 책이다. 참고. 톨킨을 연구한 저서. 다음은 톨킨과 그의 세계에 대한 수많은 책들 중에 중요한 것들을 추린 것이다. 저자는 톨킨이 아니며 톨킨 문학을 연구한 사람들의 책이다.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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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1440
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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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1441
물고기
물고기 또는 어류(魚類)는 척추동물아문에 속하는 동물의 하나이다. 또한 척추동물 중에서 네발동물은 제외된다. 대체적으로 물 속에 살며 아가미로 호흡하며 지느러미로 움직이고 몸 표면이 비늘로 덮여 있는 냉혈동물로 주위 온도에 영향을 받는다. 또한 물고기는 지구상의 여러 수생 환경에서 분포하며, 그 서식지는 열대지방에서 극권, 내륙의 담수 지역에서 해수 지역, 또한 해양의 표층에서 깊은 바다에까지 이르는 등 다양하다. 어류 전체의 종 수는 25,000~31,000 정도이며, 이는 척추동물 전체의 과반수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생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보통 음식으로 분류된 이름이다. 상업적이고 자급자족을 하는 어부들은 생선을 야생에서 직접 잡든지, 아니면 호수나 바다의 우리에서 길러낸다. 오락으로 낚시광들에게 많이 잡히며, 물고기 애호가들은 잡아서 키우기도 한다. 여러 세기에 걸쳐 물고기는 문화적인 역할도 담당해 왔다. 신이나 종교적 기호로서 추앙 받기도 하였고 예술, 책, 영화의 주제로도 쓰였다. 물고기의 다양성. 물고기라는 용어는 정확하게 말하면 사지동물이 아니면서 두개골이 있고, 평생에 걸쳐서 아가미가 있고, 만약 다리가 있다면 지느러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호칭한다. 조류나 포유류와는 달리 어류는 단 하나의 분기군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측계통군으로 이루어진 계통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먹장어, 칠성장어, 상어 및 가오리, 조기어류, 실러캔스, 폐어가 포함된다. 전형적인 물고기들은 변온 냉혈동물이다. 이들은 빠르게 헤엄쳐 나가기 위한 유선형의 몸체를 지녔으며, 아가미를 통해 물에서 산소를 추출해 내든지, 대기의 산소를 이용하기 위한 부수적인 호흡기관을 사용한다. 또한 이들은 두쌍의 지느러미를 지니고 있고, 한두 개(드물게는 세 개도 있다)의 등지느러미,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가 있으며, 턱이 있고 보통 비늘로 덮인 피부가 있으며 알을 낳는다. 모든 기준에는 예외가 있다. 참치, 황새치, 또 상어의 몇몇 종들은 어느 정도의 온혈 적응을 나타낸다. 이들은 주위 수온보다 확실하게 체온을 높일 수 있다. 물고기마다 유선형의 정도와 수영능력의 효율은 각기 다른데, 참치, 연어 그리고 전갱이는 자신의 몸 길이의 10배에서 20배까지도 초당 수영이 가능한 반면, 뱀장어나 가오리등과 같이 초당 자신의 몸 길이의 반 정도도 못가는 종류들도 있다. 수많은 민물고기류는 물에서처럼 다양한 구조들을 이용하여 공기에서부터도 산소를 추출해 내는데, 폐어들은 사지동물들의 그것과 비슷한 한 쌍의 허파를 지니고 있고, 구라미들은 코리도라스 등의 메기들에서 많이 보이는, 내장기관이나 장을 이용한 산소 추출 과정과 비슷한 작용을 해 주는 미로기관이라 불리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몸체의 형태와 그 지느러미들의 배열은 매우 다양한데, 해마, 복어, 아구 또는 심해어인 풍선장어에서 보이는 전혀 물고기 같지 않은 형태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 비슷하게 "피부의 표면"도, 벗겨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판금모양으로 분류되는(보통의 상어와 가오리)것들, 코스모이드(cosmoid)로 분류되는 것들(멸종된 폐어와 실러캔스에서 볼 수 있음), 경린어로 분류되는 것들(다양한 멸종어류에서 보이지만 가아와 폴립테루스에서는 아직도 발견된다), 원린어로 분류되는 것들, 즐린류로 분류되는 것들 등(마지막의 두 가지는 경골어류이다)의 많은 종류의 다양한 비늘로 덮인 것들이 있다. 육지에서 대부분 살아가는 물고기들도 있다. 말뚝망둥어들은 개펄에서 먹이도 먹고, 다른 망둥어들과 교류를 하다가 동굴에 숨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간다. 메기, "Phreatobius cisternarum"는 땅속에서 사는데, 지하거주라 불리고, 상대적으로 물에 흠뻑 젖은 낙엽 더미 안에서 산다. 물고기들의 크기는 16 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고래상어에서부터, 8 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스타우트 인펀트피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개, 오징어, 불가사리, 가재, 해파리와 같이 미국에서 보통 물고기(fish)라 부르는 많은 종류의 수생동물들은 사실 위의 기준으로 분류하면 "물고기"가 아니다. 과거에는 생물학자들조차 제대로 된 구분을 하지 못했었다. 16세기의 자연 역사학자들은 수생 무척추동물들은 물론, 바다표범, 고래, 양서류, 악어, 거기다가 하마까지도 물고기로 분류했었다. 어떤 문헌들에서는 수산양식을 위한 것들에서 더욱 특별하게,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기 위해 진정한 물고기들을 "지느러미 물고기(fin fish)"라고 부른다. 분포. 모든 물고기는 물 속에서 서식한다. 수중에 포함되어 있는 염분의 환경에 따라, 바다 및 염분이 포함된 호수 등에서 생활하는 해수어와 강, 냇가와 습지 등의 민물 지역에서 생활하는 담수어로 편의상 나눈다. 물론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섞이는 강의 어귀 등의 지역에서 생활하는 물고기나, 바닷물과 민물 어디서든 생활할 수 있는 물고기도 있어, 바닷물에 사는 물고기와 민물에 사는 물고기를 엄밀하게 나누지는 않는다. 그 밖에, 수심 200미터 이하의 심해 지역에서 생식하는 심해어나, 지하수 등지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도 있다. 한편 물고기는 대부분 아가미로 호흡하지만, 예외적으로 허파, 피부 등으로 호흡하며, 갯벌이나 습지와 같은 지역에서 생활하는 물고기도 있다. (예: 망둥이) 그러나 이러한 물고기도 육지에 있는 시간이 긴 경우에도 피부가 건조해지는 경우 살아가지 못하며, 번식이나 치어 등의 생활환경은 물 속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류. 예전엔 어류를 어상강(魚上綱)이라는 하나의 상강으로 묶어 놓고 분류하였으나, 최근에는 어상강이란 분류를 없애고 다시 나누어서 뼈가 연골인 어류는 상강의 분류가 없는 연골어강 또는 판피어강으로, 뼈가 경질인 어류는 경골어상강으로 분류한다. 어류는 측계통군이다. 이는 모든 어류를 포함하고 있는 어떤 분기군이든지, 그 분기군안에는 어류가 아닌 네발동물들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래된 참고 문헌 등에서 보이는 "어강(魚綱, Pisces)"과 같은 분류는 더 이상 공식적인 분류로 사용하지 않는다. 어류는 다음과 같은 주요 그룹으로 분류한다. 일부 고생물학자들은 코노돈트가 척색동물이기에 초기 어류라고 주장한다. 더 많은 자료를 위해서는 척추동물 부분을 보라. 다양한 종류의 어류 집단들은 반 이상이 척추동물이라고 간주된다. 현존하는 종은 28,000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27,000개가 딱딱한 뼈가 있는 생선들이고, 970개가 상어, 가오리, 그리고 은상어 등의 연골어류이다. 108개 정도는 먹장어와 칠성장어의 종이다. 이러한 종들의 3분의 1은 9개의 거대한 과(family)에 포함된다. 가장 큰 과부터 가장 작은 과까지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잉어과, 망둑어과, 키클리과, 카라신과, 로리카리아과, 종개과, 농어과, 놀래기과, 그리고 볼락과가 그것들이다. 64개의 과들이 하나의 종(Species)만을 가진 단형종이다. 생존하는 모든 종의 숫자는 32,500개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해부. 외부 구조.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다양한 기능을 하는데, 가슴지느러미는 물고기의 좌우 균형을 잡으며, 배 지느러미는 알을 옮기는 등의 기능을 한다. 뒷지느러미는 몸의 흔들림을 방지하고 전진운동을 도우며, 꼬리지느러미는 추진력을 낸다. 등지느러미는 몸을 지지하고 전진운동을 도우며, 극조와 연조로 나눌 수 있다. 옆줄(측선)은 물의 온도, 흐름, 수압, 진동을 감지한다. 호흡기관. 대부분의 어류는 인두의 양 옆에 달려있는 아가미를 이용해서 기체를 교환한다. 아가미는 필라멘트라 불리는 실 같은 구조를 지닌다. 각각의 필라멘트는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교환하기 위한 넓은 면적을 제공하는 모세혈관의 망상조직을 지니고 있다. 어류는 산소가 풍부한 물을 입을 통해서 빨아들여, 아가미를 통해 내뿜으로써 기체를 교환한다. 어떤 어류는 물과는 반대 반향으로 모세관을 흐르는 혈액이 역흐름교환을 만들어 내면서 흐른다. 아가미는 인두 양 옆의 열리는 부분을 이용해서 산소가 없어진 물을 뱉어낸다. 상어나 칠성장어류는 여러 개의 아가미 입구를 가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류는 양옆에 한쌍의 아가미입구가 있다. 이 입구는 삭개(영어: operculum)로 불리는 단단한 뼈 아래 숨어 있다. 어린 비처허파고기는 아가미가 바깥에 달려 있다. 이는 양서류의 유충에서도 볼 수 있는 매우 원초적인 형태이다. 많은 어류는 다양한 절차를 이용해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 뱀장어과어류는 피부를 통해 산소를 빨아들인다고 알려져 있다. 전기뱀장어의 움푹 파인 볼의 기관은 공기를 흡입하는 기관이라 여겨진다. 로리카리아과, 칼리크티스과, 그리고 스콜로플레이시드과의 메기들은 소화관을 통해 산소를 빨아들인다. 폐어와 폴립테루스들은 네발동물들과 비슷한 한쌍의 폐를 갖고있다. 이들은 신선한 공기를 입으로 들이마시고, 아가미로 뱉어내기위해 떠올라야만 한다. 가아와 보우핀은 똑같은 작용을 하도록 혈관이 발달된 부레를 갖고있다. 미꾸라지, 울프피쉬, 그리고 많은 메기들은 공기를 내장에 통과시킴으로써 숨을 쉰다. 망둥어들은 피부로 산소를 빨아들이는데, 이는 개구리와 비슷하다. 꽤 많은 어류가 숨쉬는 부속기관이라 불리는 기관들을 지니도록 진화했다. 구라미와 베타같은 물고기들은 아가미 위에 이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미로기관을 지니고 있다. 다른 몇몇 어류는 미로기관과 형태와 기능에서 비교되는 구조들을 갖는다. 가장 많이 알려진것은 가물치, 그리고 공기호흡메기과에 속하는 메기들이다.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원래 계절마다 물의 수위가 달라짐으로써 그 물에 녹아 있는 산소량 또한 계절별로 줄어드는 늪지대에 서식하는 어류들을 위한 적응이다. 진흙보다 약간 더 젖어있다고 여겨질만한 물에서는, 공기 호흡이 가능한 물고기들은 훨씬 오래 생존하는 반면, 파치나 시클리드와 같은 순전히 용해된 산소에만 의존하는 물고기들은 쉽게 질식사한다.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 몇몇 종의 폐어들은 습기가 많은 굴 안에서 다시 물이 돌아올 때까지 여름잠(aestivation)라 불리는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몇 주에 걸쳐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어류는 "불가피한 공기 호흡어"와 "임의적인 공기호흡어"로 분류할 수 있다. 아프리카 폐어같은 불가피한 공기호흡어는 주기적으로 공기를 호흡해야"만"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질식사한다. 플레코 같은 임의적인 공기 호흡어들은 그들이 원할때만 호흡하고, 그 밖에는 아가미를 이용해 산소를 호흡한다. 대부분의 공기호흡어들은 지상에서 서는데 사용되는 에너지 비용이나, 지상의 포식동물에게 노출되는데 따른 체력적 비용을 피하는 "임의적인 공기호흡어"들이다. 순환기관. 어류는 폐쇄순환회로를 지니고 있다. 심장은 하나의 경로를 통해 신체에 혈액을 공급한다. 대부분의 어류에서 심장은 두 개의 방과 입구, 출구의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얇은 벽을 지닌 주머니인 정맥동이다. 이것은 어류의 두 번째 부분인, 거대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방인 심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맥으로부터 혈액을 모은다. 심방은 결방으로써 혈액을 일방통행시키는 역할과 세 번째 부분인 심실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심실은 또다른 근육으로 이루어진 방인데, 첫 번째 부분부터 네 번째 부분인 동맥구로 혈액을 뿜어준다. 동맥구는 큰 관인데 이를 통해 심장 바깥으로 나간다. 동맥구는 산소를 얻기위해 혈액이 아가미로 흐르는 대동맥으로 연결된다. 소화기관. 어류의 턱뼈는 식물에서부터 다른 기관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게 해준다. 어류는 음식을 입으로 섭취하고, 식도로 부셔서 내려보낸다. 내장에서 음식은 더욱 소화되어 많은 어류에서 손가락 모양의 유문수라 불리는 주머니 안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에 의해 영양분으로 흡수된다. 간이나 췌장같은 기관들은 음식이 소화기관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화효소와 다양한 화학물질들을 더한다. 장에서는 소화의 과정과 영양분의 흡수를 끝낸다. 배설기관. 다른 많은 해양 동물들처럼 대부분의 어류는 질소 폐기물들을 암모니아의 형태로 배출한다. 어떤 폐기물들은 아가미를 통해 확산된다. 혈액의 폐기물들은 신장에서 걸러진다. 해수어들은 삼투(영어:osmosis)로 인해 물을 잃게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신장은 물을 다시 신체로 되돌려준다. 반대의 작용이 담수어에서 일어난다. 이들은 삼투압으로 인해 물을 흡수하게 된다. 이들의 신장은 배설을 위해 묽은 소변을 만든다. 어떤 어류는 민물, 즉 담수에서 해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적응된 신장을 지닌다. 비늘. 어류의 비늘은 피부를 이루는 중배엽(영어: mesoderm)에서 기원한다. 보통 이빨과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고 본다. 비늘에는 식물의 나이테와 같은 원 모양의 테두리가 있는데, 이 테두리가 곧 나이라는 설이 있다. 감각수용, 신경기관. 중앙신경기관. 어류는 다른 척추동물과 몸크기와의 상적 비율로 비교해볼때, 전형적으로 작은 뇌를 지닌다. 이는 다른 비슷한 크기의 조류나 포유류의 뇌의 용적의 1/15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어류는 상대적으로 큰 뇌를 지니는데, 엘레펀트 피쉬나 상어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뇌는 거의 조류나 주머니쥐의 몸 크기 당 뇌 용적과 비슷하다. 어류의 뇌는 몇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앞쪽이 한쌍의 구조를 지니고, 두개의 후신경으로부터 신호를 받고 처리하는, 뇌의 후엽이다. 먹장어, 상어 그리고 메기 등의 사냥을 위해 냄새를 주로 사용하는 물고기들에게서 이 후엽은 매우 크다. 이 후엽은 고등 척추동물에서의 대뇌와 같은 구조적 위상을 지닌, 두개의 둥글게 말린 종뇌로 이어진다. 어류에서 종뇌는 대개 후각에 관계된다. 이 두개의 구조가 "전뇌"를 구성한다. 간뇌는 이 "전뇌"와 "중뇌"를 연결한다. (그림에서 이 구조는 시엽(영어: optic lobes)에 위치함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간뇌는 호르몬과 항상성과 관련된 작용을 수행한다. 송과체는 이 간뇌의 바로 위에 놓여있다. 이 구조는 빛을 감지하고 일주기성의 리듬을 유지시켜준다. 또한 색의 변화에도 관여한다람쥐. 중뇌는 두개의 시엽을 포함하고 있다. 무지개송어나 시클리드와 같은 시각에 의존하여 사냥하는 종들에서는 이 시엽이 상당히 크다. 후뇌는 특히 수영과 균형에 관여하는 부분이다. 소뇌는 하나의 둥글게 말린 구조체이며 일반적으로 뇌에서 가장 큰 부분이다.엘레펀트 피쉬의 소뇌가 거대하고 명백하게 그들의 전기감각에 관여하고 있는 반면, 막장어와 칠성장어는 비교적 작은 소뇌를 가졌다. 뇌간은 뇌의 끝부분이다. 몇몇 근육과 신체기관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적어도 경골어류에서는 이 뇌간이 호흡과 삼투조절을 관리한다. 감각 기관. 대부분의 어류는 매우 발달된 감각 기관을 지닌다. 거의 모든 낮에 활동하는 물고기들은 인간에 필적하거나 더 좋은 시각을 지닌다. 또한 많은 물고기들은 특기할만큼 맛과 냄새에 반응하는 화학수용기관을 지닌다. 그러나 귀를 갖고는 있어도, 많은 물고기들은 소리를 잘 듣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물고기들은 미세한 물의 흐름과 진동을 감지하고, 옆의 물고기와 먹이의 움직임을 느끼는 측선기관(영어:lateral line system)을 형성하는 감각 수용기를 지닌다. 메기나 상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낮은 수준의 전류를 감지하는 기관을 가진다. 전기뱀장어같은 다른 어류는 전류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고기들은 경계표를 이용해 방향을 잡으며, 아마도 여러개의 경계표나 상징들을 기반으로 한 심리적 지도를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통각에 대한 수용력. 윌리엄 타볼가에 의해 수행된 실험들은 물고기가 고통을 느끼고 공포에 반응한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타볼가의 실험에서 복어는 전기적으로 충격을 받을때나, 계속된 실험후에는 전기봉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꿀꿀거리는 소리를 냈다. 2003년 에딘버러 대학의 스코틀랜드의 과학자들과 로즐린 협회는 무지개송어의 탐구 행동들은 종종 다른 동물들간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고통과 연관된다고 결론내렸다. 입술 안에 투여된 벌침에 있는 독과아세트산은 물고기로 하여금 몸을 뒤흔들게 하고, 그들의 입술을 수조벽과 바닥 주변에 문지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뉴런은 인간의 뉴런반응양식과 비슷하게 반응한다. 와이오밍 대학의 제임스 D. 로즈 교수는 위의 실험이 물고기가 "인지적 자각, 특히 우리 인간과 의미가 있을만큼 비슷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자각"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하지 않았기에 그 연구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로즈교수는 "어류의 뇌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자각"이 없다라고 볼만큼 인간의 뇌와는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그것과 비슷해보이는 고통에 대한 반응도 사실은 다른 이유를 가졌다"라고 논쟁한다. 그러나 동물학자인 템플 그랜딘은 어류는 "다른 종(영어:species)들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뇌의 구조와 시스템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대뇌의 신피질이 없이도 어류는 여전히 자각을 갖는다."라고 논쟁한다. 동물복지옹호론자들은 낚시질로 인해 어류에게 가해질 수 있는 고통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높이고 있다. 독일과 같은 어떤 국가들은 특정 종류의 낚시를 금지했다. 또한 영국의 RSPCA는 현재 공식적으로 물고기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기소 중에 있다. 근육기관. 대부분의 어류는 대안적 방법인 등뼈 양옆에 위치하는 쌍으로 존재하는 근육들을 수축함으로써 움직인다. 이러한 근육의 수축은 몸을 따라 내러가는 S자 모양의 곡선들을 형성한다. 각각의 곡선이 꼬리 지느러미에 닿으면서, 뒤로 향하는 힘이 물에 작용한다. 그리고 꼬리 지느러미와 함께 물고기는 앞으로 나아간다. 어류의 지느러미들은 비행기의 보조익처럼 작용한다. 또한 이들은 꼬리의 표면적을 넓힘으로써 속도를 증가시켜준다. 유선형의 몸체는 물에서부터 오는 마찰의 양을 줄여준다. 몸체를 구성하는 조직들이 물보다 밀도가 높기에 어류들은 그 차이를 보상해내지 못하는한 가라앉을 수 밖에 없다. 많은 경골어류들은 기체의 조절을 통해 그들의 부력을 조절해주는 부레라는 내부기관을 지닌다. 항온성. 대부분의 어류가 거의 수생, 변온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상황 모두에 예외가 존재한다. 몇몇 분류군에 속하는 어류들은 장기간에 걸친 기간동안 물 바깥에서도 살 수 있다. 망둥어 같은 수륙양용물고기(영어:Amphibious fish)들은 몇일간 육지에서 살면서 이동도 할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종의 어류는 높은 체온을 유지한다. 온혈 경골어류(영어:teleost, bony fish라고도 불림)들은 모두 고등어아목에 속하고, 새치들과 참치들, 한 종류의 "원시" 고등어를 포함한다. 짧은 지느러미 청상아리, 긴 지느러미 청상아리, 백상아리, 악상어, 연어상어 등의 악상어과의 모든 상어들도 온혈이다. 또한 환도상어과(영어:Alopiidae)의 종들도 온혈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발견된다. 내부열(영어:endothermy)의 온도는 눈과 뇌만을 따듯하게 만드는 새치들로부터 체온을 주변의 수온보다 20도 정도 높게 유지하는 참치(참다랑어)와 악상어까지 각기 다르다. "거대온혈항목을 참조하라." 온혈은 대사적으로는 높은 비용이 들어감에도, 향상된 근육의 힘, 중앙신경계의 빠른 속도, 그리고 고효율의 소화 등의 이점을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번식기관. 기관. 어류의 생식기관에는 정소와 난소가 있다. 대부분의 종에서 이와같은 생식소들은 부분적으로나 완전하게 융합될 수 있는 비슷한 크기의 대응되는 한 쌍으로 되어있다. 생식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이차기관들이 있는 종도 있다. 정원세포(영어: spermatogonia)의 분배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골어류의 정소는 두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정세관(영어: seminiferous tubule)의 모든 부분에서 정원세포가 발생하는 가장 흔한 케이스이고, 두 번째는 "아테리노몰프 물고기"에 보이는 이러한 구조들의 말단에서만 국한되어 정소가 발생하는 케이스이다. 물고기들은 포낭안에서 정세관의 안쪽면을 향해 생식세포를 놓아주는 상태에 따라 포낭형 혹은 반 포낭형의 정자발생(영어:spermatogenesis)을 나타낼 수 있다. 물고기의 난소(영어:ovary)는 세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짐오베리안, 이차짐오베리안 혹은 시스트오베리안이 그것들이다. 첫 번째 분류에서는 난모세포(영어:oocyte)들은 체강(영어:coelom)의 공동으로 직접적으로 방출된 후, 구멍으로 들어가 수란관(영어:oviduct)을 지난 후 제거된다. 이차짐오베리안 형태의 난소는 난자(영어:ova)를,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수란관(영어:oviduct)으로 가는 체강(영어:coelom)안에 흘린다. 세 번째 부류에서는 난모세포(영어:oocyte)들은 수란관(영어:oviduct)를 통해 외부로 이동된다. 짐오베리는 폐어, 철갑상어, 그리고 보우핀 등에서 발견되는 원시적 형태이다. 시스트오베리는 난소 안쪽 벽이 수란관과 연결된 경골어류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차짐오베리는 연어과와 약간의 다른 경골어류에서 발견된다. 경골어류에서의 난조세포(영어:Oogonia)의 발전은 군에 따라 다르다. 또한 난자발생의 역학을 결정하는 것은 성숙분열(영어:maturation)과 수태(영어:fertilization)의 과정의 이해를 가능케 한다. 핵, 난형질(영어:ooplasm), 그리고 감싸는 층들의 변화는 난모세포(영어:oocyte)의 성숙분열(영어:maturation) 과정을 특징짓는다. 배란후의 여포들은 난모세포의 방출에 뒤이어 형성된 구조이다. 이들은 내분비기능이 없고, 넓고 불규칙한 내부공간을 가지며, 여포세포들의 세포사멸을 포함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재흡수된다. 여포의 폐쇄과정(영어:follicular atresia)이라고 불리는 퇴화 과정은 낳지 않은 난황형성 난모세포를 재흡수한다. 이 과정은 또한 빈번하지는 않지만 다른 발전단계의 난모세포안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떤 물고기들은 정소와 난소를 모두 가진 자웅동체이다. 이는 크게 그들의 생활환상에서 다른 상태에서만 발생하거나, 아니면 햄릿에 볼 수 있듯이 동시에 정소와 난소 두가지 모두 갖고 있는 종류로 나뉜다. 번식방법. 모든 알려진 어류의 97% 이상은 난생이다. 즉, 난자가 모체의 바깥에서 생성된다. 난생의 어류의 예에는 연어, 금붕어, 시클리드, 참치 그리고 뱀장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종들의 대부분에서 암컷과 수컷은 그들의 생식세포들을 주변의 물에 흩뿌리면서, 모체의 바깥에서 수정을 한다. 그러나, 몇몇 난생 어류는 수컷이 정자를 암컷의 성기의 입구에 전달하기 위해 특정한 삽입기관을 이용하여 내부 수정의 형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같은 수정을 하는 종으로는 뿔상어와 같은 난생 상어들과, 홍어와 같은 난생 가오리가 유명하다. 이러한 예들에서 수컷들은 클레스퍼라고 알려져있는 변형된 한쌍의 배지느러미를 갖고있다. 해양 어류들은 종종 트인 물의 기둥(영어: water column)속으로 방출되는 많은 수의 난자들을 생산할 수 있다. 난자들은 평균 1mm의 직경을 지닌다. 새롭게 부화한 어린 난생 어류는 유생(영어:larva)이라고 불린다. 이 유생들은 보통 불완전한 형태이며, 영양공급을 위해 큰 난황난(영어:yolk sac)을 지니고 초생(영어:juvenile)이나 성체 표본들과는 매우 다른 외양을 지닌다. 난생 어류의 유생의 시기는 몇 주 정도로 상대적으로 짧고, 유생은 빨리 자라나 초생이 되기 위해 외양과 구조를 바꾼다. (이 과정을 변태(영어:metamorphosis)라고 한다.) 이 변화의 기간동안 유생들은 그들의 영양 공급원을 얻는 과정을 난황난에서 동물성플랑크톤의 사냥으로 바꾸어야만한다. 이러한 과정은 전형적으로 동물성 플랑크톤의 밀도나 유생들의 배고픔등에 따라 달라진다. 난태생 어류에게서 난자는 내부의 수정 후에 모체 안에서 개발된다. 그러나 모체로부터 영양은 난황의 크기에 따라 조금만 받거나 아예 못 받는다. 각각의 태아는 그들만의 난자안에서 자라난다. 난태생에 속하는 과(영어:family)에 해당하는 예로는 구피, 전자리상어 그리고 실러캔스등이 있다. 어떤 어류 종들은 태생(영어:viviparous)이다. 이러한 종들에서는 모체가 난황과 태아로의 영양공급을 유지한다. 전형적으로 태생어류들은 포유류에게서 보이는, 모체의 혈액을 배아의 혈액과 연결해주는, 태반(영어:placenta)과 비슷한 구조를 갖는 기관을 갖고있다. 태생어류의 예로는 망성어(영어:surf-perches), 구데아과, 그리고 레몬상어가 있다. 어떤 태생 어류들은 난식(영어:oophagy)이라는 행태를 보이는데, 이는 자라나는 배아가 모체가 생산한 다른 난자들을 먹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청상아리와 악상어와 같은 상어들 중에서 처음으로 관찰되었지만, 학공치 중의 하나인 "노멀햄푸스 에브라드티"와 같은 몇몇 경골어류에서 역시 알려져있다. 가장 큰 태아가 약하거나 작은 형제,자매들을 먹어버리는 카니발리즘은 태생의 더욱 희한한 상태이다. 이러한 행동또한 보통 그레이 너스 샤크와 같은 상어중에서 대부분 발견되는데, "노멀햄푸스 에브라드티"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사육가들은 난태생과 태생 어류를 보통 태생어(영어:livebearer)라고 언급한다. 면역체계. 면역체계는 물고기들에 따라 다 다르다. 칠성장어와 먹장어같은 무악어(영어: jawless fish)들 중에는 진정한 임파기관이 없다. 이러한 물고기들은 면역 세포들을 생산하기 위한 다른 기관의 임파조직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적혈구와 대식세포(영어:macrophage), 그리고 원형질세포들은 신장전엽에서 (혹은 앞콩팥) 그리고 내장의 일부분(과립성 백혈구가 성숙하는 곳)에서 생산된다. 이들은 먹장어의 원시적 골수와 유사하다. 상어와 가오리같은 연골어류는 더욱 발달된 형태의 면역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연골어류에 세 개의 특화된 기관을 지닌다. 생식선을 둘러싸는 포유류의 뼈와 유사한 임파조직인 조혈기관, 연골어류의 식도의 벽들 안에 있는 레이딕스 기관, 그리고 창자의 나선형 판막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관들은 와 과립성 백혈구, 임파구, 그리고 원형질 세포와 같은 전형적인 면역세포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 이들은 확실한 흉선(영어: thymus)과 이들의 가장 중요한 면역기관인 잘 발달된 비장(영어: spleen)을 갖고 있다. 이 비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임파구들과, 원형질 세포, 그리고 대식세포(영어: macrophage)들이 개발되고 저장된다. 철갑상어와 주걱 철갑상어, 그리고 폴립테루스와 같은 조기어류(영어: Chondrostean)들은 중앙신경조직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인 뇌막들과 관련된 거대한 덩어리 안에 과립성 백혈구의 생산을 위한 주된 부위를 갖고 있다. 이들의 심장은 자주 임파구, 세망세포(영어: reticular cell), 그리고 약간의 대식세포를 가진 조직으로 둘러쌓인다. 조기어류의 신장은 중요한 조혈(영어: hemopoietic)기관이다. 이 신장에서 적혈구(영어: erythrocyte), 과립성 백혈구(영어: granulocyte), 임파구(영어: lymphocyte), 그리고 대식세포(영어: macrophage)가 발달한다. 조기어류처럼, 경골어류의 주된 면역 조직은 신장, 특히 많은 다른 면역 세포들을 포함하는 신장전엽(영어: anterior kidney)을 포함한다. 더하여 경골어류는 흉선(영어: thymus), 비장(영어: spleen) 그리고 피부와 아가미, 내장, 그리고 생식선과 같은 점액질의 조직 안에 산재된 면역부를 갖는다. 보다 포유류의 면역체계와 유사하게 경골어류의 적혈구(영어: erythrocyte), 호중성 백혈구(영어: neutrophil) 그리고 과립성 백혈구(영어: granulocyte)들은, 흉선안에서 발견되는 임파구가 주된 세포형태인, 비장 안의 어디에든 존재한다고 믿어진다. 2006년, 포유류안의 임파 조직과 비슷한 임파조직이 경골어류의 종들 중 하나인 제브라 다니오에서 발견되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은 항원을 기다리는 동안 아직 알려지지 않은, 즉 아직 자극 받지 않은 T 세포들이 축적되는 장소일 것으로 여겨진다. 질병들. 다른 동물들처럼 어류 역시 질병들과 기생충들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질병을 막기위해 어류들은 다양한 방어체계를 갖고있다. 표피에 의해 보호되는, 미생물(영어: microorganism)들을 잡거나 그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점액층(영어: mucus layer)을 비롯한, 피부와 비늘이 "평상적"인 방어체계들이다. 병원균(영어: pathogen)들이 이러한 방어체계를 뚫고 침투하면, 물고기들은 , 감염된 곳을 향해 혈류를 증가시킴으로써 병원균을 상대하기 위한 백혈구를 전달하는, 염증반응을 시작할 수 있다. 특정한 방어체계는 물고기의 신체에 의해 판별된 특정한 병원균에 반응한다. 예로, 면역반응이 있다. 최근에, 백신이 수산양식(영어: aguaculture)과 관상용 물고기 사육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로는 잉어에게 발병하는 잉어포진 바이러스와, 양식된 연어에서 사용되는 절종증(영어: furunculosis)백신이 있다. 어떤 종들은 외부의 기생충을 없애기 위해 청소어(영어: cleaner fish)를 사용한다. 이러한 예들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인도양과 태평양의 산호초(영어: coral reef)에서 발견되는 "레보리데스"속(영어: genus)을 청소해주는 청줄청소놀래기이다. 이러한 작은 어류는 다른 어류들이 모여서, 청소어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특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소위 "청소지역"을 유지한다. 이러한 청소 행위는, 같은 속의 두 시클리드들이, 청소를 하는 쪽인 "에트로플러스 매큘래터스"와 그에 비해 훨씬 큰 "에트로플러스 수러텐시스"로 나뉘는 흥미로운 예를 포함하는, 몇개의 어류군(영어: group)에서 관찰되어왔다. 진화. 어류는 하나의 단일계통적(영어:monophyletic)인 군을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어류의 진화"란 하나의 사건으로 연구되지 못한다. 어류의 확산은 명백히 관절이 있는 턱의 출현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무악어들은 아주 적은 후손들만을 남겼기 때문이다.칠성장어(영어:lamprey)들은 턱이 있기 전의 어류와 가깝다고 추측된다. 첫 번째로 진화된 턱뼈가 있는 어류는 판피어강(영어: placodermi)의 화석에서 발견되었다. 관절이 있는 턱이 가진 이익이 더 큰 악력, 개선된 호흡, 혹은 그 둘 모두를 주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어류는 아마도 산호처럼 보이는 멍게(영어: sea squirt)와 비슷한 생명체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유충이 원시어류와 중요한 여러 방면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류의 첫 번째 조상들은,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약간의 현존하는 멍게들이 지금도 하고 있는 유형성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에게의 중요함. 경제적 중요함. 크로마뇽인들은 뼈로 낚시 바늘과 작살을 만들었다. 이로써 이들은 새로운 식량인 물고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보호. 2006년도 국제 자연 보전 연맹의 적색 목록은 1,173종의 어류를 멸종 위기 목록에 등재하였다. 포함된 종은 대서양대구(영어: Atlantic Cod), 데빌의 구멍 홉피쉬(영어:Devil's Hole Pupfish), 실러캔스(영어: coelacanth), 그리고 백상아리와 같다. 어류들이 물 아래에서 살기 때문에, 이들은 육지동물들이나 식물들보다 연구하기가 더 어렵고, 어류의 개체수에 대한 정보들도 보통 부족하다. 그러나 민물고기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용적의 물 안에 살기 때문에, 확실히 위기에 처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데빌의 구멍 홉피쉬는 오직 하나의 3*6(m)의 웅덩이에서만 살고있을 뿐이다. 남획. 남획은 대구(영어: cod)와 참치(영어: tuna)와 같은 식용 생선들에게 주된 위험이다. 남획은 살아남은 물고기들이 잡힌 물고기들을 대체할만한 어린 새끼들을 충분히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스탁(영어: stock)이라고 알려져 있는 양식 개체군 동태론에서의 붕괴의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업적 멸절이 종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양식업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나의 양식업 붕괴의 잘 연구된 사례는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이루어지는 학명 "Sadinops sagax caerulues"인 태평양 정어리의 양식업이다. 이 물고기의 어획량은 1937년도에 나타났던 790,000톤의 최고치로부터 1968년에는 24,000톤으로까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경제적으로 실용적이지 못하게 되었다. 양식학(영어: fisheries science)과 양식업(영어: fishing industry)사이의 주된 갈등은 두 집단이 집중어획을 위한 양식업의 복원력(영어: resiliency)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들과 자원보호론자(영어: conservationist)들이, 많은 스탁들이 50년안에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긴급한 보호를 위한 압력을 가한다. 서식지 파괴. 민물에서 그리고 바다의 생태계에 압박을 주는 중요 요인들은 수질오염, 댐의 건설, 인간이 쓰기위한 물의 제거 그리고 새로운 종들의 소개등을 포함한 서식지의 붕괴이다. 서식지 붕괴 때문에 위험에 처한 물고기의 하나의 예는 철갑상어(영어: pallid sturgeon)이다. 이 물고기는 북아메리카의 민물에 사는데 인간활동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강들에 서식한다. 특이종. 외래종은 수많은 서식지로부터 들어왔다. 가장 잘 연구된 본보기 가운데 하나는 1960년에 빅토리아 호수에 방류된 나일파치(영어: Nile perch)이다. 나일 퍼치는 점진적으로 그 호수에 살고 있던 500마리 정도의 토종 시클리드들을 근절시켰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 인공 사육 프로그램에 의해 생존해 있지만, 다른 종들은 아마도 멸종한 것으로 보인다. 잉어, 가물치과, 틸라피아, 유럽농어, 브라운 송어, 무지개 송어, 그리고 바다 칠성장어들은 선취특권환경들에 들어감으로써 문제를 일으킨 물고기들의 다른 예이다. 문화. 요나의 책(영어: Book of Jonah)에서는 한 "거대한 물고기"가 예언자인 요나를 집어삼킨다. 반인 반어의 전설들은 한스 크리스티안 앤더슨의 이야기들에서, 또 스플래시와 같은 영화의 스토리들에서 나타났다. (인어를 참조하라) 물고기의 모습을 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신들에는 폴리네시아의 이카-로아, 다양한 고대의 셈족에게서 전해져오는 다곤, 하와이의 상어-신들, 그리고 인도의 드라비다에 나오는 메스야(영어: Matsya)가 있다. 어류는 다양한 다른 방법으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자면 익투스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벵갈인 사이에서 비옥함의 상징인 물고기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물고기는 "니모를 찾아서"와 같은 영화들에서, 혹은 "노인과 바다"와 같은 책들을 통해서 예술과 문학분야에서 눈에 띄게 보인다. 특히 상어와 같은 거대한 물고기들은 자주 공포영화와 스릴러물의 주제가 되어왔다. 가장 유명한 것은 소설 죠스인데 이것은 뒤이어, "상어이야기", "가물치의 공포(영어: Snakehead Terror)", 그리고 1978년도 영화 "피라냐"와 같은 '비슷한 영화와 패러디 작품들을 만들어냈던, 영화 죠스와 같은 후속작들로 이어졌다. 불교의 기호인 애쉬타망갈라(영어: Ashtamangala)의 기호속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메스야라고 불리는 금붕어는 윤회(영어: samsara)안에서 해로움이 없는 대양으로 인지되며, '부처의 눈들' 혹은 '자각의 눈'으로 일컬어지는, 공포가 없는 부유 상태를 의미한다. 물고기는 고통의 윤회의 바다에서 빠져죽을 위험이 없는, 즉 공포가 없는 상태안에서, 또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듯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이 가르침에서 저 가르침으로 이주할 수 있는 상태로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길조로 상징화된다. 물고기들은 힌두교, 자이나교 그리고 불교의 문화에서 뿐만 아니라, 익투스로서 처음 표명되었고, 특별히 사막에서 무리를 먹이심을 인용함으로써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종교적인 상징성을 가진다. 불교의 다르마에서는 물고기는 물안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누림으로써 행복을 상징한다. 물고기들은 풍요와 풍부를 상징한다. 동양에서는 이따금씩 이들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크기, 그리고 목숨으로 거룩하게 여겨지는 잉어()로서 그려지기도 한다. 캐나다의 도시명인 코퀴틀람, 영국 콜럼비아는 "조그만 빨간 물고기"를 뜻하는 해안 샐리쉬어군(영어: Salish)에서 왔다고 보이는 "kwikwetlem"이란 단어에서부터 유래한다. 용어. 영어 환경. 영어 낱말 물고기에는 물고기("Fish")와 물고기들("Fishes")이 있다. 영어에서 자주 상호 보환되게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Fish"와 "Fishes"는 서로 다른 의미들을 가졌다. "Fish"는 하나의 단수 명사나 한 종에서부터 추출한 개체군들을 뜻하는 상황에서 사용된다. "Fishes"는 다른 어류 종들의 군을 뜻한다. 고기떼. 단지 식량이나 둥지의 장소들 같은 어떤 일정지역에 국한한 자원들을 사용하는 한무리의 어류의 집단은 간단하게 집합체(영어: aggregation)라고 알려져 있다. 물고기들이 서로 모여서 상호작용을 하고, 사회적인 군을 형성한다면, 그때에 그들은 그 유기적 구조의 정도에 따라서 떼(영어: "shoal" or "school")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shoal이란 각각의 물고기들이 서로 개별적으로 헤엄치고, 음식을 찾아다니는 등의 서로 약하긴 하지만, 군(영어: group)내의 다른 개체들에게 끌리고, 수영속도같은 이들의 움직임의 조정하는 구조를 가진 군(영어: group)이다. 물고기의 Schools 이란 수영에 있어서 훨씬 더 강한 구조를 지니게 되고, 동기화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물고기들이 같은 속도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러한 떼를 이루는 행동은 다양한 이점들을 제공한다는 믿음이 있다. 예시: 강한떼나 약한떼들이 생물학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반면, 영국영어에서는 어떤 물고기의 떼이던지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약한떼"(영어: shoal)'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반면, 미국 영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자주 "강한떼"(영어: school)라는 용어를 느슨하게 사용했듯이, 비 전공자들에게는 종종 유의어로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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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상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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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골어류
전통적인 분류법에서 경골어상강(硬骨魚上綱)은 척삭동물문의 강이며, 통틀어서 경골어류(硬骨魚類)라 부른다. 아강으로 조기어류와 폐어류를 포함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별도의 강으로 나뉘었다. 뼈의 일부 또는 전체가 딱딱한 뼈로 되어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물에서 육지로 이동한 최초의 척추동물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현재 일반적으로 말하는 물고기들의 조상이다. 내비공(內鼻孔)이 있는 폐어류와 내비공이 없는 조기어류(條鰭魚類, Actinopterygii) 및 완기어류(腕鰭魚類, Cladistia)로 구분된다. 어류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전 세계의 담수역과 해수역에 고루 분포한다. 일반적으로 몸은 비늘에 싸였고 옆줄(측선)이 있다. 몸은 전체적으로 날씬한 유선형이며 앞쪽 새공까지의 머리부분, 새공에서 항문까지의 허리부분, 항문에서 꼬리까지의 꼬리부분 등 3부분으로 구분된다. 머리 끝에서 눈까지를 문(吻)이라 하며 그 끝에 입이 있다. 연골어류에는 없는 신경분비물을 저장 또는 방출하는 기관인 미부하수체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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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골어류
연골어류(軟骨魚類)는 연골어강(軟骨魚綱, Chondrichthyes)에 속하는 물고기로 딱딱한 뼈 대신에 질긴 피부와 가벼운 물렁뼈를 가지고 있다. 뼈가 단단한 경골어류는 기체로 채워진 부레(풍선모양의 주머니)로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가라앉거나 하지만, 연골어류는 부레가 없다. 때문에 연골어류는 가벼운 지방을 축적하여 약간의 부력을 얻고, 계속 물에 떠 있기 위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