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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 제타 함수
정수론에서 리만 제타 함수() formula_1는 소수들의 정수론적 성질을 해석적으로 내포하는 유리형 함수이다. 해석적 수론에서 소수의 분포를 연구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또한 L-함수 이론의 모태이다. 정의. 리만 제타 함수는 실수부가 1보다 큰 임의의 복소수 formula_2에 대해, 다음과 같은 디리클레 수열로 정의된다. 이 무한급수는 formula_4의 영역에서 수렴하고, 위 식은 정칙함수를 정의한다. 리만은 제타 함수가 "s" ≠ 1인 모든 점에서 정의된 유리형 함수로 유일하게 해석적 연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리만 가설에 등장하는 제타 함수는 확장된 리만 제타 함수를 뜻한다. 성질. 해석적 연속과 함수 방정식. 야코비 세타 함수 를 쓰자. 이므로, 자이 함수(formula_8 function)를 얻을 수 있다. 오른쪽의 적분은 모든 복소수 formula_9에 대하여 수렴하지 않으나, 다음 식의 적분은 모든 formula_9에 대하여 수렴한다. 한편 여기서 세타 함수의 성질 를 사용하면, 를 보일 수 있다. 이로부터 제타 함수의 해석적 연속과 함수 방정식 를 얻는다. 특수한 값들. 다음은 작은 수에 대한 제타 함수의 값이다. 현재 리만 제타 함수가 실수부가 짝수(formula_29)인 실수에서는 formula_30의 유리수배, 즉 초월수임이 알려졌다. 홀수일 때에는 3의 제타 함수 값은 무리수이며, 5, 7, 9, 11의 제타 함수 값 중 적어도 하나가 무리수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 오일러 곱셈과 디리클레 덧셈.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리만 제타 함수가 소수와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서 우변의 모든 소수의 배수를 없애주면 특정 합성수는 항상 소수의 곱으로써 나타낼 수 있다는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라서 분모가 합성수 또는 소수인 수가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1만이 남는다. 즉 위에서 제시되는, 이것은 디리클레 급수(디리클레 덧셈)이다. 따라서, 리만 제타 함수는 규칙적으로 모든 자연수에 대한 무한급수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방법으로 성질을 탐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리만 제타 함수는 오일러 곱을 통해 소수와 연결된다. 따라서, 이 식을 이용하면 소수의 비밀을 수학적으로 파헤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식은 중요하게 이용된다. 즉 리만 제타 함수는 모든 소수 formula_39에 대해 위와 같은 무한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 식은 오일러의 곱셈 공식이라 불리며, 등비급수의 식과 산술의 기본 정리로부터 유도해낼 수 있다. 그 간단한 증명은 다음과 같다. 우변의 분모에서 2의 배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계속해서 반복하면, 동일한 절차로 우변의 분모에서 3의 배수가 모두 사라진다. 영점. 함수 방정식에 따라, 리만 제타 함수는 음의 짝수 formula_48에서 영점을 가진다. 이 영점들을 자명한 영점()이라고 한다. 리만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영점들은 다음과 같은 임계 구역()에 존재한다. 임계 구역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집합을 임계 직선()이라고 한다. 임계 직선 위에는 무한히 많은 영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계산된 모든 비자명 영점들은 임계 직선 위에 존재하고 있지만, 모든 영점들이 실제로 임계 직선 위에 있는지 여부는 아직 증명되거나 반증되지 못했다. 이는 리만 가설로 일컬어지는 문제로, 현대 수학의 주요 난제로 꼽힌다.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들은 해석적 수론에서 소수의 분포에 대한 연구에 대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소수 정리는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들에 대한 동치인 명제로 바뀌어 증명될 수 있다. 일반화. 리만 제타 함수를 일반화한 몇 가지 제타 함수가 있다. 그중 가장 간단한 것은 후르비츠 제타 함수이며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 함수는 formula_52일 때 리만 제타 함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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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렌스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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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계
좌표계(座標系, coordinate system) 혹은 자리표계는 유클리드 공간과 같은 다양체의 점이나 기타 기하학적 요소를 고유하게 결정하기 위해 하나 이상의 숫자인 좌표를 사용하는 체계이다. 스칼라 튜플을 이용해 n차원 공간의 각 지점을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서 스칼라는 보통 실수, 경우에 따라서는 복소수나 다른 일반적인 환(ring)의 원소를 말하기도 한다. 복잡한 우주에서 스칼라는 우주 전체에 대해 효과적인 좌표계를 산출하지 못하기도 한다. 좌표를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인 직교좌표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발명했다. 그는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직교좌표계를 발명해 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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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느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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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베르트 공간
함수해석학에서 힐베르트 공간(Hilbert空間, )은 모든 코시 열의 극한이 존재하는 내적 공간이다. 유클리드 공간을 일반화한 개념이다. 정의. formula_1가 formula_2 또는 formula_3라고 하자.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5은 완비 거리 공간을 이루는 formula_1-내적 공간이다. 내적 공간으로서, 힐베르트 공간은 표준적인 위상 공간 및 거리 공간 및 벡터 공간 및 노름 공간의 구조를 갖는다. 이와 동치로, formula_1-힐베르트 공간을 다음과 같은 평행사변형 항등식(平行四邊形恒等式, )을 만족시키는 formula_1-바나흐 공간 formula_9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경우, 내적 구조는 가 된다. 분류.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의 정규 직교 기저 formula_13는 다음과 같은 두 성질을 만족시키는 부분집합이다. 초른 보조정리에 의하여, 모든 힐베르트 공간은 정규 직교 기저를 갖는다. 주어진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의 모든 정규 직교 기저의 크기는 항상 같은 기수임을 보일 수 있으며, 이 기수를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 formula_17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힐베르트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는 벡터 공간의 기저를 이루지 않으며,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보다 작거나 같다. 이는 벡터 공간의 경우 formula_18를 필요로 하지만, 힐베르트 공간의 경우 formula_19가 오직 조밀 집합임이 족하기 때문이다. 두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 formula_22 사이에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따라서, 힐베르트 공간들은 차원에 따라 완전히 분류된다. 또한,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즉,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음이 아닌 정수이거나 아니면 가산 무한 formula_31이다. 성질. 리스 표현 정리에 따라서,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는 스스로의 연속 쌍대 공간 formula_33와 동형이며, 만약 formula_34일 경우 이는 표준적() 동형이다. 예. formula_1가 formula_2 또는 formula_3라고 하고, formula_38가 측도 공간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다면 L2 공간 formula_39는 formula_1-힐베르트 공간을 이룬다. 만약 formula_41가 셈측도가 부여된 집합이라면 이며, 함수 는 formula_39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룬다. 만약 formula_46가 분해가능 시그마 대수(formula_47로 정의한 거리 공간이 분해 가능 공간인 경우)이며, 또한 formula_41가 시그마 유한 공간(가산개의 유한 측도 부분집합들의 합집합)이라면, formula_39는 분해 가능 공간이다. 응용. 힐베르트 공간은 해석학의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며, 특히 편미분 방정식 이론에서 널리 쓰인다. 힐베르트 공간 중 하나인 소볼레프 공간이 편미분 방정식을 다룰 때 주로 등장한다. 푸리에 해석이 힐베르트 공간에서 이뤄진다. 양자역학에서, 양자계의 상태 공간은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으로 나타내어진다. 역사. 1907년에 리스 프리제시와 Ernst Sigismund Fischer가 독립적으로 힐베르트 공간 중 하나인 가 완비 거리 공간임을 증명하였다. 1907년에 힐베르트 공간론에서 핵심적 정리 중 하나인 리스 표현 정리가 증명되었다. 1908년에 다비트 힐베르트와 에르하르트 슈미트가 발표한 적분방정식에 대한 논문에서 제곱 적분 가능한 두 함수의 내적 formula_50이 등장한다. 이 공간은 힐베르트 공간인 formula_51공간이 된다. 다비트 힐베르트가 1912년에 힐베르트 공간 formula_52을 정의하였다. 이는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최초의 힐베르트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후 1929년에 존 폰 노이만 이 힐베르트 공간을 추상적으로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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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양자역학(量子力學, )은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 등 미시적인 계의 현상을 다루는 즉, 작은 크기를 갖는 계의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이다. 또는 아원자 입자 및 입자 집단을 다루는 현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이다.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은 컴퓨터의 주요 부품인 반도체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등 과학기술,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론으로 평가된다. 19세기 중반까지의 실험은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 입자와 관련된 실험들의 결과는 고전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할 경우 모순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양자역학은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계기로 하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에 의해 만들어진 전적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학문이다. 양자역학에서 플랑크 상수를 0으로 극한을 취하면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으로 수렴하는데, 이를 대응 원리라 한다. 양자역학은 기본적으로 불연속적인 물리량을 다루는 미시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고전역학은 주로 연속적인 물리량을 다루는 거시세계에서 탐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관찰 기준의 차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한 비유로 우리가 모래사장을 멀리서 바라본다고 하면 이는 우리가 물리현상을 거시세계에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찰에서 모래사장의 표면은 연속적으로 보인다. 이는 거시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물리현상에서 물리량이 연속적으로 관찰된다는 것에 비유된다. 만약 우리가 점점 모래사장에 가까이 다가가 모래사장을 관찰한다면 이는 거시세계에서 미시세계로 관찰의 단위를 줄인 것이다. 모래사장 가까이서 모래사장을 관찰한다면 모래사장의 표면은 불연속적으로 관찰 될 것이다. 이는 미시세계에서 물리현상에 물리량이 불연속적으로 관찰 된다는 것과 비슷하다. 즉, 거시세계에서 특정 물리량을 관찰하면 그 물리량의 불연속성이 미시세계의 관찰 기준에 비해 너무 미세해 마치 그것이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관찰 단위가 거시세계보다 작은 미시세계에서 대상을 관찰하면 그 불연속성이 보이더라'라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모든 역학, 전자기학(일반 상대성 이론은 제외)을 포함하는 고전 이론을 일반화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는 거시적으로는 관측이 어렵지만 고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 개념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드하스-판알펜 효과는 양자역학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영역에서는 분명해진다. 양자역학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이 처음 제시했다. 독일어 'Quantenmechanik(퀀텐메카닉)'이 영어 'Quantum mechanics'로 번역되었고 일본에서 이를‘量子力學(료오시리키가쿠)’라 번역했는데 이것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와 ‘양자역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양자’와 ‘역학’을 각각 살펴보는 것이 좋다. ‘양자(量子)’로 번역된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는 ‘힘의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힘을 받는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과 운동’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형성기.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평화의 회복과 더불어 물리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도의 노벨상은 패전국 독일의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에게 수여되었으며(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21년, 닐스 보어 1922년),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양자론이 진전되었다. 그 주요 중심지는 1921년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개설된 코펜하겐(닐스 보어)을 비롯하여 뮌헨(아르놀트 조머펠트), 괴팅겐(막스 보른, 막스 플랑크), 레이던(파울 에렌페스트)이며, 그 밖에 취리히의 에르빈 슈뢰딩거, 베를린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담하였다. 이 형성기는 또한 젊은 세대의 활약이 특징적이었다. 양자역학 형성의 길은 두 갈래로 되어 있다. 한쪽은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 출발하여 대응원리(對應原理)에서 행렬 역학으로 통한 길이다. 또 한쪽은 아인슈타인의 광자로 비롯하며, 루이 드브로이의 물질파를 거쳐서 도달하는 파동역학의 길이었다. 이 둘은 그 형성과정이나 수립된 이론이 전혀 달랐지만 얼마 안 가서 실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통일체로서의 양자학으로 간추려졌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의 형성이 일단락될 무렵, 물리학은 재차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 성립기.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였고, 전혀 다른 형태를 갖추고 형성되었으나, 그 이룩한 결과는 일치했다.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에르빈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에서 행렬역학의 유도를 시도하여 양자의 동등성(同等性)을 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폴 디랙과 파스쿠알 요르단()은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으로 두 개의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어 1926년경에는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 양자역학의 형식은 성립되었어도, 그 물리적 해석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예컨대 파동의 개념에 대하여서도 파동역학의 창시자 슈뢰딩거는 이것을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을 받고, 보른의 확률해석이 이에 대체되었으나, 마침내 이것도 불충분하여 많은 모순으로 유도되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낡은 물리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양자론의 개념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음이 차차 확실해졌고, 드디어 1927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등장하였다. 파와 입자의 두개의 상(像)을 결부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이 관계는, 미시적 세계에서는 일상경험에서 만들어진 관념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어는 이 생각을 다시 자연인식 일반에 펼쳐 양자역학의 일관된 해석을 수립하려고 하여, 같은 해 상호보완성 원리를 제창하였다. 현상의 시공적(時空的)인 기술과 인과적 관계와는 서로 보충하는 동시, 서로 배제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새로운 양자론의 해석에 찬성하지 않고 일관하여 EPR 역설 등 의문을 계속 제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양자역학의 주장은 당시의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주어, 물질의 부정이나 주관주의·실증주의 경향의 세력이 증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철학적 함의.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결론들은 당시 과학자(및 일반인)들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이 이론이 실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대해 많은 해석과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 많은 수의 물리학자들은 보어 등이 개발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적 측면들은 우리의 지식의 부족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 실재 그 자체이며, 따라서 결정론적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양자역학을 개발한 이들 중 한 명인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의 무작위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의 현상인 도깨비 원격현상등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양자역학의 근본에는 보다 깊은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해 여러 가지 반박을 제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EPR 역설이라 불린다. 벨은 EPR 역설을 이용해, 조건법적 명확성()을 가정한 경우 양자역학과 국소적 이론 사이에 실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차이가 있음을 증명했다. 실험을 통해서, 실제 세계는 조건법적으로 명확하지 않거나 비국소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인 루이스는 비결정론이 그의 철학적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양자역학을 불완전한 이론으로 보았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존재론적 비결정성이 아닌 인식론적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이유에서 숨은 변수 이론을 지지했다. 코펜하겐 해석을 둘러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당시의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현재 표준적인 양자역학의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이나,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 --파동함수·불확정성 원리 등장- 앎의 한계 지적-- 양자역학이라는 새 이론은 원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었다. 학자들은 이 이론을 토대로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새로운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새로 꺼내기 시작했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한 하이젠베르크. <출처: (CC) German Federal Archive> 원자와 관련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은 ‘파동함수6)’라고도 하고 ‘상태함수’라고도 하는 수학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양자역학이 제안된 초창기부터 많은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전까지 물리학에서는 대체로 수학을 이용해 방정식이나 공식을 만들면, 그 의미를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방정식이나 공식에 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는 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 안에 소위 ‘불확정성 원리7)’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실용적으로 물리현상을 아주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 있는데, 정작 그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보다 불과 100여 년 전에 프랑스의 피에르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물리학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파동함수와 불확정성 원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가 원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 개념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의 영향. 프랑크와 보어의 초기 양자역학은 전자의 궤도가 점프하는 현상을 강조한 반면 후기의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전자의 위치가 확률적 분포로밖에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양자역학은 원자폭탄, 반도체 등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고 후기의 양자역학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후기 양자역학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성을 인정함으로써 현대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실험가능한 물리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험이 불가능한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을 내포하기도 했다. 물리학은 실제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의 21세기 초반까지 끈 이론, 통일장 이론 등 여러 이론을 내놓았으나 실험이 불가능한 가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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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수학 공식화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화는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개념들과 공식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C* 대수 이론, 스튀름-리우빌 이론 등이 쓰일 수 있지만, 보통은 힐베르트 공간중 하나인 L2 공간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를 통해 기술한다. 이는 존 폰 노이만이 1930년대에 완성한 것으로, 20세기 이전에 개발된 물리학의 수학적 모형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나타나는 구조들 중 상당수는 함수해석학에서 나온 것이다. 에너지와 운동량 등의 물리적 관측량은 더이상 위상 공간상의 함수의 값이 아닌 선형 연산자의 고윳값으로 다루어진다. 전개. 편의상 브라-켓 표기법과 슈뢰딩거 묘사를 쓰자. 양자역학의 공준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6는 플랑크 상수다. 이를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대신 밀도 연산자 formula_4를 쓰면, 그 시간 변화는 다음과 같다. 이 수학적 틀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비가환 연산자에 대한 정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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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 1901년 12월 5일 ~ 1976년 2월 1일)는 독일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양자역학의 주요 선구자 중 하나이다. 그는 1925년에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쓴 후속 논문에서는 양자역학의 행렬역학이 더욱 정교해졌다. 그는 1927년에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하다.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양자역학의 창안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난류의 유체동역학 이론, 원자핵, 강자성, 우주선, 그리고 아원자 입자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제2차 세게대전 동안 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의 대표 과학자였다. 그는 또한 1957년 뮌헨의 연구용 원자로와 함께 카를스루에에 최초의 원자로를 계획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곧 막스 플랑크 협회로 개명됨)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뮌헨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그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막스 플랑크 물리학 맟 천체물리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 and Astrophysics)의 소장이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독일 연구협회의 회장, 원자력 물리학 위원(Commission for Atomic Physics) 위원장, 핵 물리학 연구 그룹(Nuclear Physics Working Group)의 의장, 그리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Alexander von Humboldt Foundation)의 회장이었다. 어린 시절과 학업. 어린 시절.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카스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Kaspar Ernst August Heisenberg와 아내인 애니 베클레인Annie Wecklein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 시스템에서 중세와 현대 그리스어 연구에 대한 독일의 유일한 오르덴틀리헤르ordentlicher 교수 (일반 교수)가 된 고전 언어의 중등학교 교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루터교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하이젠베르크는 십대 후반에 바이에른 알프스에서 하이킹을 하면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었다. 그는 뮌헨, 괴팅겐 및 코펜하겐에서 과학 교육을 받는 동안 동료 학생 및 교사와 원자 이해에 대한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철학, 플라톤 등을 연구함으로써 내 마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은 확실히 플라톤에게 유리하게 결정되었다. 사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는 일반적인 의미의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그것들은 오직 수학적 언어로만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아이디어인 형태들이다."라고 표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1년 전 수립된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과 싸우기 위해 1919년 자유군단의 일원으로 뮌헨에 도착했다. 50년 후 그는 그 시절을 "경찰, 강도 등의 놀이; 그것은 전혀 심각하지 았았던 것"과 같은 젊음의 즐거움으로 회상했다. 대학교 학업. 1920년부터 1923년까지 그는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빌헬름 빈에게, 게오르그-아우구스트 괴팅겐 대학교에서 막스 보른과 제임스 프랑크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그리고 다비트 힐베르트에게 수학을 공부했다. 1923년 뮌헨에서 좀머펠트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괴팅겐에서, 보른 아래에서, 그는 1924년에 변칙적인 제이만 효과에 대한 하빌리타치온슈라프트Habilitationsschrift(하빌리타치온 논문)로 그의 하빌리타치온을 완료했다. 1922년 6월 조머팰트는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으로 데려가 '보어 축제'에 참가했는데, 조머펠트는 그의 학생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원자 물리학에 대한 닐스 보어의 이론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흥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행사에서 보어는 객원 강사였고 양자 원자 물리학에 대한 일련의 포괄적인 강의를 했으며 그리고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를 처음으로 만났는데, 이는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머펠트 제안한 주제인 하이젠베르크의 박사학위 논문은 난류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논문은 층류의 안정성 과 난류의 성질 둘다를 논의했다. 안정성 문제는 층류로부터의 작은 교란을 위하여 4차 선형 미분방정식인 오르-조머팰트Orr-Sommerfeld 방정식을 사용하여 조사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잠시 이 주제로 돌아왔다. 그는 젊은 시절에 독일 스카우트 협회이자 독일 청년 운동의 일원인 '노이파드핀데르(Neupfadfinder)'의 회원이자 스카우트 리더였다.1923년 8월 로베르트 혼젤Robert Honsell과 하이젠베르크는 뮌헨에서 이 협회의 스카우트 그룹과 함께 핀란드 여행을 계획했다. 개인적 생활. 하이젠베르크는 클래식 음악을 즐겼고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미래의 아내를 만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37년 1월, 하이젠베르크는 개인 음악 발표회에서 엘리자베스 슈마허Elisabeth Schumacher (1914–1998)를 만났다. 엘리자베트는 유명한 베를린 경제학 교수의 딸이었고, 그녀의 오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인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였다. 하이젠베르크는 4월 29일 그녀와 결혼했다. 1938년 1월에 이란성 쌍둥이 마리아Maria와 볼프강Wolfgang이 태어났으며, 이에 따라 볼프강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의 "쌍 창조"-기본 입자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과정에 대한 단어 놀이-를 축하했다. 그들은 이후 12년 동안 다섯 명의 자녀를 더 두었는데; 바바라Barbara, 크리스틴Christine, 요헨Jochen, 마르틴Martin, 베레나Verena. 1936년 그는 독일 남부 우르펠트 암 발첸제(Urfeld am Walchensee)에 가족을 위한 여름 별장을 구입했다. 교육 경력. 괴팅겐, 코펜하겐, 라이프치히.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괴팅겐의 프리바트도젠트Privatdogent였는데, 이것은 그가 교수직이 없이 독립적으로 가르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4년 9월 17일부터 1925년 5월 1일까지, 국제 교육 위원회 록펠러 재단 연구비로써, 그는 코펜하겐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인 닐스 보어와 연구하러 갔다. 1925년 9월 그의 세미나 논문인 "Über quantentheoretische Umdeutung kinematischer und mechanischer Beziehungen"("운동학과 역학 관계의 양자 이론적인 재해석")이 출판되었다. 그는 괴팅겐으로 돌아와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약 6개월에 걸쳐 양자역학의 행렬 역학을 개발했다. 1926년 5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 대학 강사와 보어의 조교가 되었다. 1927년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연구하면서 불확정성 원리를 발전시켰다. 2월 23일, 하이젠베르크는 동료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에게 편지를 써서 처음으로 그의 새로운 원리를 설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 논문에서는 불확정성이 아닌 "Ungenauigkeit"("부정확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일반 교수(ordentlicher Professor-professor ordinarius)이자 물리학부의 학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28년 2월 1일 그곳에서 취임 강의를 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그의 첫 번째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강자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파울리 배타 원리를 이용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와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박사과정 학생들과 대학원생 맟 연구 동료들의 높은 자질은 후에 찬사를 받는다. 여러 기간 동안에 그들은 에리히 바게Erich Bagge, 펠릭스 블로흐, 우고 파노Ugo Fano, 지그프리드 플뤼게Siegfried Flügge, 윌리엄 버밀리언 휴스턴William Vermillion Houston, 프리드리히 훈트, 로버트 멀리컨, 루돌프 파이얼스, 조지 플라제크George Placzek,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프리츠 자우터Fritz Sauter, 존 C. 슬레이터John C. Slater, 에드워드 텔러, 존 해즈브룩 밴블렉, 빅토어 바이스코프,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그레고르 벤첼Gregor Wentzel, 그리고 클라렌스 제너Clarence Zener를 포함했다. 1929년 초,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상대론적 양자장론의 기초를 닦는 두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다. 또한 1929년에 하이젠르크는 중국, 일본, 인도, 미국을 순회 강연했다. 1929년 봄, 그는 시카고 대학교의 객원강사으며, 거기서 양자역학을 강의했다. 1928년,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폴 디랙이 양자역학의 상대론적 파동 방정식을 도출했는데, 이것은 양극의 전자의 존재를 암시했고, 나중에 양전자로 명명되었다. 1932년, 우주선의 안개 상자 사진을 통해, 미국의 물리학자 칼 데이비드 앤더슨은 양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자취track임을 확인했다. 1933년 중반, 하이젠베르크는 양전자 이론을 발표했다. 디랙의 이론과 그 이론의 추가 전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두 개의 논문에 제시되었다. 첫 번째인 "Bemerkungen zur Diracschen Theorie des Positrons"("양전자에 관한 디랙의 이론에 관한 언급")은 1934년에, 두 번째인 "Folgerungen aus der Diracschen Theorie des Positrons("양전자에 관한 디랙 이론의 결과")는 1936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디랙 방정식을 비-교환자(anti-commutators)를 포함하는 양자화 조건에 따라 스핀 ħ/2의 모든 점 입자에 대해서 "고전적" 장 방정식으로 재해석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와같이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을 전자들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양자) 장 방정식으로 재해석하여, 물질을 입자 생성과 파괴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상대론적 양자 장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전자기학과 같은 기초 위에 놓았다. (헤르만 바일은 이미 192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기술했다.) 행렬 역학과 노벨상. 양자역학을 확립한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은 물리학자와 역사가들에게는 수수께끼였다. 그의 방법은 독자가 크라머르스-하이젠베르크 전이 확률 계산에 친숙하다고 가정한다. 주요 새로운 아이디어인 비가환 행렬은 관찰할 수 없는 양을 거부함으로써 정당화된다. 그가 당시에 행렬 수학적 이론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응 원리에 기초한 물리적 추론에 의한 행렬의 '비-가환 곱셈'을 도입한다.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로는 1977년 매키논MacKinnon에서 재구성되었으며, 자세한 계산은 아이치슨Aitchison 등에서 수행되었다.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와 헨드릭 크라머르스는 원자보다 파장이 큰 복사선 원자의 분산 혹은 산란에 관한 논문을 공동으로 작성했다. 그들은 이전에 크라머르스가 개발한 성공적인 공식이 보어 궤도를 기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전이 주파수가 일정하지 않은 레벨 간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정확한 고전 궤도의 푸리에 변환에서 발생하는 주파수는 동일한 간격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들어오는 복사선이 원자가(valence), 또는 외곽애서는, 전자를 붕괴되는 가상 상태로 들뜨게 하는 반semi-고전적 가상 상태(virtual state) 모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었다. 후속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이 가상 진동자(virtual oscillator) 모형이 형광 복사의 편광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두 성공과, 보어-조머펠트 모형이 비정상적인 지만 효과의 뛰어난 문제를 설명하는 데에서의 계속적 실패는 하이젠베르크로 하여금 가상 진동자(virtual oscillator) 모형을 사용하여 스펙트럼 주파수를 계산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현실적인 문제에 즉시 적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그는 더 간단한 예인 비조화 진동자(anharmonic oscilator)로 방향을 바꾸었다. 쌍극자 진동자(dipole oascillator)는 외부 전하와 같은 외력에 의해 섭동을 일으키는 스프링 상의 하전 입자로 생각되는 단순 조화 진동자(simple harmonic oscilator)로 구성된다. 진동하는 전하의 운동은 그 진동자의 주파수에서 푸리에 급수로 표현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양자 거동을 해결했다. 첫째, 그는 가상 진동자 방법으로 시스템을 처리하여 외부 소스에 의해 생성될 레벨 간의 전환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는 비조화anharmonic 포텐셜 항을 조화 진동자에 대한 섭동으로 취급하여 그와 보른이 개발한 섭동 방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문제를 해결했다. 두 방법 모두 1차 및 매우 복잡한 2차 수정 항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계산 뒤에 한 일관된 설계(consistent scheme)가 있음을 시사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가상 진동자 모형에 대한 명시적인 의존 없이 이러한 결과를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공간 좌표에 대한 푸리에 확장을, 가상 진동자 방법의 전이 계수에 해당하는 행렬로 대체했다. 그는 양자역학은 관찰 가능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보어의 대응 원리와 양자역학은 관측 가능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파울리의 학설doctrine에 호소함으로써 이러한 대체를 정당화했다. 7월 9일, 하이젠베르크는 보른에게 이 논문을 검토를 위해 주었고 또한 출판을 위해 제출했다. 보른이 그 논문을 읽었을 때, 그는 공식이 그가 브레슬라우 대학교의 수학자 야콥 로자네스Jakob Rosanes에게 배운 행렬의 체계적인 언어로 옮겨지고 확장될 수 있는 공식임을 알았다. 보른은 그의 조수이자 전 학생이었던 파스쿠알 요르단의 도움으로 즉시 전사 및 전개을 시작했고 출판을 위해서 결과를 제출했는데; 이 논문은 하이젠배르크의 논문이 발표된 지 60일 만에 접수되었다. 3명의 저자 모두가 연내 발표를 위해서 후속follow-on 논문을 제출했다. 이때까지 물리학자들은 행렬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순수수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구스타프 미에Gustav Mie는 1912년 전기역학에 관한 논문에서 그것들을 사용했고 보른은 1921년 결정의 격자 이론에 관한 연구에서 그것들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우에 행렬이 사용되었지만, 행렬의 곱셈이 있는 행렬의 대수학은 양자 역학의 행렬 공식화에서 같은 묘사picture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1928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을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지명했다. 1932년 노벨 물리학상 발표는 그해 11월로 연기되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 그중에서도inter alia, 수소의 동소체allotropic 형태의 발견으로 인도한 그 적용의 양자역학의 창안으로" 1932년 수상자로 발표된 것은 그 때였다. 양자 이론의 해석. 양자역학의 발전과 무엇이 "실제"인지에 대한 명백한 모순적 함의는 과학적 관찰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포함하여 심오한 철학적 함의를 가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루이 드 브로이는 입자가 항상 객관적으로 참된 운동량과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실재론자들이었으나 (둘 다 측정할 수는 없더라도), 하이젠베르크는 "실재"의 직접적인 지식은 과학의 범위를 벗어난다는 반-실재론자anti-realist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책 물리학자의 자연 개념 (The Physicist's Conception of Nature)》에서 쓰기를, 궁극적으로 우리는 입자에 대한 무엇인가something을 기술하지만 입자 자체에 대한 "진정한" 접근access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지식'(표에서의 숫자)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를: 우리는 더 이상 관찰 과정과 독립적으로 입자의 거동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최종 결과로 양자 이론에서 수학적으로 공식화된 자연 법칙은 더 이상 기본 입자 자체가 아니라 기본 입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다루고 있다. 이 입자들이 시공간에 존재하는지 객관적으로 묻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 시대의 엄밀한 과학에서 자연의 그림을 말할 때 우리는 자연의 그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우리의 관계의 그림'을 말한다. ... 과학은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자연을 대면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러한 상호 작용에서 스스로를 행위자로 본다. 분석하고, 설명하고 및 분류하는 과학적 방법은 개입에 의해 조사 대상을 변경하고 재창조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방법과 객체는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 친위대(SS) 조사.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직후, 하이젠베르크는 핵의 중성자-양성자 모형에 대한 세 개의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 하이젠베르크는 언론에서 "백인 유대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도이체 물리학(Deutsche Physik)' 또는 아리안 물리학(Aryan Physics)의 지지자들은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주요 이론 물리학자들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부터 반-유대주의 및 반-이론물리학 운동인 '도이체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 환경에서 적용되었듯이, 가장 두드러진 두 지자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필리프 레나르트와 요하네스 슈타르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요인이 학문적 능력보다 우선했다. 하이젠베르크를 많은 독일 대학의 교수로 임명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실패했다. 아르놀트 조머펠트의 후계자로 임명받으려는 그의 시도는 '도이체 물리학' 운동의 반대 때문에 실패했다. 1935년 4월 1일,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박사학위 고문인 저명한 이론 물리학자 조머펠트는 명예교수emeritus 지위를 취득했다. 그렇지만, 조머펠트는 1939년 12월 1일까지 걸린 후임자 선출 과정 동안 그의 자리를 유지했다. 뮌헨 교수단의 선택과 독일 교육부와 '도이체 물리학'의 지지자들 사이의 학문적, 정치적 차이로 인해서 그 과정은 오래 걸렸다. 1935년 뮌헨 교수단 이론물리학의 일반 교수이자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인 조머펠트를 대신할 후보자 목록을 작성했다. 세 명의 후보자는 모두 조머펠트의 이전 학생이었는데: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 193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피터 디바이; 그리고 리처드 베커Richard Becker였다. 뮌헨 교수단은 이 후보자들을 확고하게 지원했으며 하이젠베르크가 첫 번째 선택이었다. 그러나 '도이체 물리학'의 지지자들과 교육부(REM)의 요원들은 그들만의 후보자 목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싸움은 4년 이상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하이젠베르크는 '도이체 물리학'의 지지자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한 공격은 하인리히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SS)의 신문인 《검은 군단(The Black Corps)》에 실렸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는 "사라져야" 마땅한 "백인 유대인"(즉, 유태인처럼 행동하는 아리아인)이라고 불렸다. 유대인들이 폭력적인 공격을 받고 투옥됨에 따라서 이러한 공격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이젠베르크는 문제를 해결하고 명예를 되찾기 위해 한 사설과 히믈러에게 보내는 편지와 더불어 반격했다. 어느 순간,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는 힘러의 어머니를 방문하였다. 두 여성은 하이젠베르크의 외할아버지와 힘러의 아버지가 바이에른 하이킹 클럽의 목사이자 회원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알고 있었다. 결국, 히믈러는 1938년 7월 21일 친위대 집단지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하이젠베르크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서 하이젠베르크 사건을 진정시켰다. 하이드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힘러는 하이젠베르크가 한 세대의 과학자들을 가르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독일은 그를 잃거나 침묵시킬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히믈러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이 편지가 가족의 추천으로 보내졌다며 하이젠베르크에게 전문적인 물리학 연구 결과와 관련 과학자들의 개인적아고 정치적 태도를 구별하라고 경고했다.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는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조머펠트의 자리를 대체했다. 뮐러는 이론물리학자도 아니었고, 물리학 저널에도 발표되지 않았으며, 독일 물리학회 회원도 아니었다. 그의 임명은 조롱거리로 여겨졌고 이론물리학자들을 교육하는데 해로웠다. 하이젠베르크의 SS 수사를 이끈 세 명의 조사관은 물리학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그들 중 한 명의 박사 시험에 참여했었다. 세 명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요하네스 줄프스Johannes Juilfs였다. 그들은 하이젠베르크뿐만 아니라 이론물리학 및 학계에서 '도이체 물리학' 운동의 이념 정책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의 지자자가 되었다.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유대인 물리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가르치던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물리학계와 SS의 비판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는 본인의 명예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설을 쓰는 등 적극적으로 본인을 충실한 독일 시민으로 포장했다. 1939년에 핵분열의 발견 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력 프로젝트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1년 9월 15일부터 22일까지,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지배하에 있던 코펜하겐을 방문해서 닐스 보어와 이론 물리와 핵 물리학을 논했다. 이 만남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와 하이젠베르크와 나치의 사람들의 관계는 수십 년간 과학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만남은 마이클 프레인의 연극 '코펜하겐'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전쟁전 물리학 연구. 1936년 중반, 하이젠베르크는 두 개의 논문에서 우주선의 샤워 이론을 발표했다. 그 후 2년 동안 4편의 논문이 더 나왔다. 1938년 12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자연과학(The Science of Nature)》에 우라늄에 중성자들로 충돌시킨bombarding 후에 바륨 원소를 검출했고 오토 한은 우라늄의 '폭발bursting'로 결론짓는 원고를 보냈고; 동시에 그해 7월에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그후 스웨덴으로 간 친구 리제 마이트너에게 이 결과들을 연락했다. 마이트너와 조카 오토 로버트 프리쉬Otto Robert Frisch는 한과 슈트라스만의 결과를 핵분열로 올바르게 해석했다. 프리쉬는 1939년 1월 13일 실험적으로 이것을 확인했다. 1939년 6월과 7월에 하이젠베르크는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사무엘 구드스미트Samuel Goudsmit를 방문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여행했다. 그렇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으로 이주하는 초청을 거절했다. 그는 6년 후 구드스미트가 제2차 세계대전 끝무렵에 알소스 작전(Alsos Mission)의 수석 과학 조언자가 될 때까지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우란베라인의 멤버쉽. '우란베라인(Uranverein)'으로 알려진 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 형성되었다. '헤레스와페남트Heereswaffenamt'(HWA, 육군 병기청)는 '라이히지훙스미니스트라임Reichserziehungsministerium'(REM, 제국 교육부)에서 '라이히스포르슈스라트Reichsforschungsrat'(RFR, 제국 연구위원회)를 짜내어 군사 후원 하에 공식적인 독일 원자력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1939년 9월 16일 첫 회의를 가졌다. 이번 회의는 쿠르트 디브너Kurt Diebner HWA 고문이 주관하고 베를린에서 열렸다. 초청인으로는 발터 보테, 지크프리트 플뤼게Siegfried Flügge, 한스 가이거, 오토 한, 폴 하텍Paul Harteck, 게르하르트 호프만Gerhard Hoffmann, 요제프 마타우치Josef Mattauch, 게오르그 슈테터Georg Stetter가 포함되었다. 곧이어 하이젠베르크, 클라우스 클라우시우스Klaus Clusius, 로베르트되펠Robert Döpel,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등이 두 번째 회의를 열었다. 베를린-달렘(Dahlem)에 위치한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는 다이브너가 관리소장이 되어 HWA의 권한에 속하게 되었고, 핵 연구에 대한 군사 통제가 시작되었다. 디브너가 HWA 프로그램 하에서 KWIP를 관리하던 시기에, 디브너와 카를 비츠Karl Wirtz와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를 포함한 하이젠베르크의 내부 서클 사이에 상당한 개인적, 직업적 적대감이 발전하였다. 1942년 2월 26~28일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열린 육군 무기 사무국이 소집한 과학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제국 관리들에게 핵분열을 통한 에너지 획득에 관한 강의를 했다. "Die theoretischen Grundlagen für die Energiegewinning aus der Uranspaltung"("우라늄 핵분열로부터 에너지 생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라는 제목의 강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하이젠베르크가 사무엘 구드스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제국 장관의 지적 수준에 맞추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핵분열의 엄청난 에너지 잠재력에 대해 강의하면서 원자핵의 분열을 통해 2억 5천만 전자볼트가 방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연쇄 반응을 달성하기 위해 순수한 U-235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위원소 를 순수한 형태로 얻는 우라늄 농축과 기계 속에서 일반 우라늄과 감속재의 대체 적층 방법 및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탐구했다. 그는 이 기계가 차량, 선박 및 잠수함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실용적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과학적 노력에 대한 육군 무기 사무소의 재정적, 물질적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두 번째 과학 회의가 이어졌다. 국방과 경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현대물리학의 문제들에 대한 강의가 들렸다. 회의에는 베른하르트 루스트 제국 과학교육문화부 장관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루스트 장관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에서 핵개발 계획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제국 연구위원회가 그 프로젝트를 맡기로 되었다. 1942년 4월, 육군은 물리학 연구소를 카이저 빌헬름 협회(KWIP)에 반환하고, 하이젠베르크를 연구소장으로 임명했다. KWIP에서 이 직책을 맡으면서 하이젠베르크는 첫 번째 교수직을 얻었다. 피터 디바이는 여전히 연구소의 소장이었지만, HWA가 KWIP의 관리권을 장악했을 때 독일 시민이 되는 것을 거부한 후 미국으로 떠났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아직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로베르트되펠Robert Döpel과 그의 아내 클라라 되펠Klara Döpel에 의해 우란베라인을 위한 연구를 수행해온 그의 물리학과를 갖고 있었다. 1942년 6월 4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군부수 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우란베라인 연구룰 핵무기 개발로 전환할 가능성에 대해 보고하도록 소환되었다.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슈페어에게 상당한 자금력과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1945년 이전에는 폭탄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우란베라인 프로젝트는 제국 연구회의 지도 하에 배치된 후 원자력 생산에 중점을 두어 '전쟁의 중요성'(kriegswichtig) 지위를 유지했고; 따라서 출자는 군대에서 계속되었다. 원자력 프로젝트는 우라늄 및 중수 생산,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및 원자로(Uranmaschine 우라늄 기계)의 주요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그 후 프로젝트는 본질적으로 여러 연구소로 나뉘었고, 이 곳에서는 감독이 연구를 주도하고 자신의 연구 의제를 설정했다. 군대가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 1942년의 시점은 인원수로는 프로젝트의 절정이었다. 약 70명의 과학자가 이 프로그램을 위해 일했으며 약 40명의 과학자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핵분열 연구에 할애했다. 1942년 이후, 응용 핵분열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수는 극적으로 감소했다. 주요 연구소와 함께 일하지 않는 많은 과학자들은 핵분열 연구를 중단하고 보다 시급한 전쟁 관련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다. 1942년 9월, 하이젠베르크는 가본 입자 물리학의 산란 행렬 또는 S-행렬에 대한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다. 처음 두 개의 논문은 1943년에 출판되었고, 세 번째 논문은 1944년에 출판되었다. S-행렬은 충돌 과정에서 입사 입자의 상태, 충돌에서 나오는 입자의 상태 및 안정적인 경계 상태만을 설명하고; 간섭 상태에 대한 참조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1925년에 관찰 가능한 것들만을 사용하여 양자역학의 행렬 공식화의 기초가 된 것으로 판명된 것과 같은 선례였다. 1943년 2월, 하이젠베르크는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현재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4월에는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선출이 승인되었다. 같은 달, 그는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폭격이 증가함에 따라 가족을 우르패트(Urfeld)에 있는 은신처로 옮겼다. 여름에 그는 같은 이유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첫 번째 직원을 헤칭겐(Hechingen)과 슈바르츠발트 가장자리에 있는 그 이웃 마을인 하이겔로흐(Haigerloch)로 파견했다. 10월 18일부터 26일까지 그는 독일이 점령한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1943년 12월,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를 방문했다. 1944년 1월 24일부터 2월 4일까지 하이젠베르크는 독일군이 보어의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몰수한 후 점령된 코펜하겐으로 여행했다. 그는 4월에 짧은 귀국 여행을 했다. 12월에 하이젠베르크는 중립국 스위스에서 강의했다. 미국 전략사무국은 모 버그 요원Moe Berg을 보내 권총을 갖고 강의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강의에서 독일이 원자폭탄 완성에 가까워졌다는 내용이 나오면 하이젠베르크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5년 1월, 하이젠베르크는 나머지 직원 대부분과 함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슈바르트발트 내의 시설로 이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 알소스 임무. 알소스 임무(Alsos Mission)는 독일이 원자폭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독일의 원자 관련 시설, 연구, 물자, 과학 인력을 이용하려는 연합군의 노력이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일반적으로 연합군의 통제 하에 있던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때로는 여전히 독일군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베를린은 많은 독일 과학 연구 시설의 위치였다. 사상자와 장비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전쟁 말기에 이 시설들 중 다수는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는 1943년과 1944년에 대부분 슈바르츠발트 끝자락에 있는 헤칭겐과 그 인근 마을인 하이겔로흐로 옮겨졌고, 결국 프랑스 점령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알소스 임무의 미국 특수부대는 핵 연구와 관련된 많은 독일 과학자들을 구금할 수 있었다. 3월 30일, 알로스 임무단은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여 발터 보테, 리하르트 쿤, 필리프 레나르트, 볼프강 거트너를 포함한 중요한 과학자들을 붙잡았다.조사 결과 오토 한은 테일핑겐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폰 라우에는 헤칭겐의 하이젠베르크의 실험실에 있었으며, 하이젠베르크 팀이 베를린에 건설한 천연 우라늄 원자로는 하이겔로흐로 옮겨졌다. 이후 알소스 임무의 주요 초점은 뷔르템베르크 지역의 핵 시설에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45년 5월 3일 우르펠트에서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는 영토에서 산악 작전을 벌이다 붙잡혀 체포되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로 옮겨져 1939년 앤아버 방문 이후 처음으로 5월 5일 구드스미트를 만났다. 독일은 이틀 만에 항복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프랑스와 벨기에를 가로질러 1945년 7월 3일 영국으로 이동하면서 8개월 동안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다. 1945: 히로시마에 대한 반응. 우란베라인의 일원으로 핵물리 연구보고서(Nuclear Physics Research Reports)에 보고서를 발표한 저명한 독일 과학자 중 9명은 알소스 작전에 의해 체포되어 엡실론 작전(Operation Epsilon)아래 영국에서 투옥되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10명의 독일 과학자들이 영국의 팜 홀(Farm Hall에 억류되었다. 그 시설은 영국의 해외 정보국 MI6의 안전가옥이였다. 구금된 동안 그들의 대화는 녹음되었다. 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대화는 전사되어 영어로 번역되었다. 녹취록은 1992년에 발표되었다. 1945년 8월 6일 팜 홀의 과학자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폭탄이 만들어지고 떨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후 몇 주 동안 독일 과학자들은 미국이 어떻게 폭탄을 만들 수 있었는지 논의했다. 팜 홀 기록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는 오토 한과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를 포함하여 팜 홀에 억류된 다른 물리학자들과 함께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과학자들에게 자신은 폭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에너지를 생산하는 원자 파일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치를 위한 폭탄 제작의 도덕성도 논의되었다. 소수의 과학자들만이 핵무기의 가능성에 대해 진정한 공포를 표했고,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데 신중했다. 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원자폭탄 제작에 실패하자,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는 1942년 봄에 정부에게 원자폭탄을 건설하기 위해서 120,000명을 고용해야 한다고 권고할 도덕적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전후 연구 경력. 독일 연구 기관의 임원 직위. 1946년 1월 3일, 10명의 엡실론 작전 억류자들이 독일의 알스웨데로 이송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연합군이 점령한 독일의 영국 지역인 괴팅겐에 정착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즉시 독일에서 과학 연구를 촉진하기 시작했다. 연합군 통제 위원회(Allied Control Council)에 의해 카이저 빌헬름 협회가 폐지되고 영국 지역에 막스 플랑크 협회가 설립된 후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의 소장이 되었다. 막스 폰 라우에가 부소장으로 임명되었고 칼 비르츠Karl Wirtz,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루트비히 비어르만Ludwig Biermann이 합류하여 하이젠베르크의 연구소 설립을 도왔다. [[w:Heinz Billing|하인츠 빌링Heinz Billing은 전자 컴퓨팅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50년에 합류했다. 연구소의 핵심 연구 초점은 [[우주선]]이였다. 연구소는 매주 토요일 오전에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헤르만 라인Hermann Rei과 함께 포르슝스라트Forschungsrat(연구 위원회)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새로 설립된 [[독일 연방 공화국]]과 독일에 기반을 둔 과학계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이 포르슝스라트를 계획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포르슝스라트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51년 독일 과학 비상 협회([[w:Notgemeinsc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Notgemins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와 통합되었고 같은 해 [[독일 연구협회]](Deutschungsgemeinshaft)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합병에 이어서 하이젠베르크는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58년에 [[w: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는 뮌헨으로 이전되어 확장되었으며 [[w:Max Planck Institute for Astrophysics|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체 물리학 연구소(Max-Planck-Institut für Physik und Astrophysik)]](MPIFA)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 사이에 하이젠베르크와 천체물리학자 [[w:Ludwig Biermann|루트비히 비어르만Ludwig Biermann]]은 MPIFA의 공동 책임자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뮌헨 대학교|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MPIFA의 단독 책임자였다. 하이젠베르크는 1970년 12월 31일에 MPIFA의 책임자직을 사임했다. 국제 과학 협력 촉진. 1951년 하이젠베르크는 유럽의 핵물리학 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유네스코]] 회의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과학대표가 되는 데 동의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목표는 [[서구권]] 과학자들의 자원과 기술을 활용하여 대형 [[입자 가속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1953년 7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연방 공화국을 대표하여 [[CERN]]을 설립하는 협약에 서명했다. CERN의 창립 과학 책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대신, 그는 CERN의 과학 정책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CERN에서 과학 프로그램을 결정했다. 연구 관심 분야. 1946년에 [[오브닌스크]]의 제5연구소 소장인 독일 과학자 [[w:Heinz Pose|하인츠 포즈Heinz Pose]]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소련에서 연구하도록 초대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소련의 노동 조건과 가용 자원, 독일 과학자에 대한 소련의 호의적인 태도를 칭찬했다. 배달원이 1946년 7월 18일자 채용 편지를 하이젠베르크에게 전달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1947년에 하이젠베르크는 [[케임브리지]], [[에든버러]], [[브리스톨]]에서 강연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1947년에과 1948년에 두 개의 논문으로 [[초전도]] 현상의 이해에 기여했는데, 그 중 하나는 [[막스 폰 라우에]]와 함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기간에 하이젠베르크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인 기류로 잠시 돌아왔습다. 1948년에 3편의 논문과 1950년에 1편이 출판되었다. 전후 기간에 하이젠베르크는 중간자 다중 생성에 대한 고려와 함께 우주선 샤워showers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계속했다. 그는 1949년에 3편의 논문, 1952년에 2편의 논문, 1955년에 1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55년 말에서 1956년 초 사이에 하이젠베르크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에서 물리학의 [[정신사|지적 역사]]에 대해 [[기포드 강연]]을 했다. 강의는 나중에 《물리학과 철학: 현대 과학의 혁명 (Physics and Philosophy: Revolution in Modern Science)》로 출판되었다. 1956년과 1957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원자력 위원회(Deutsche Atomkommission, DAtK)의 위원회 II "연구와 성장"(Fachkommission II "Forschung und Nachwuchs")의 핵물리학 실무그룹(Arbeitskreis Kernphysik) 의장이었다. 1956년과 1957년에 원자력 물리학 실무그룹의 다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발터 보테]], [[w:Hans Kopfermann|한스 코퍼만Hans Kopfermann]] (부의장), [[w:Friedrich Bopp|프리츠 보프Fritz Bopp]], [[w:Wolfgang Gentner|볼프강 겐트너Wolfgang Gentner]], [[w:Otto Haxel|오토 학셀Otto Haxel]], [[w:Willibald Jentschke|빌리발트 연트쉬케Willibald Jentschke]], [[w:Heinz Maier-Leibnitz|하인츠 마리-라이프니츠Heinz Maier-Leibnitz]], [[w:Josef Mattauch|요세프 마트아우흐Josef Mattauch]], 볼프강 리즐러Wolfgang Riezler, [[w:Wilhelm Walcher|빌헬름 발허Wilhelm Walcher]] 및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볼프강 파울]]도 1957년 이 그룹의 멤버였다. 1957년, 하이젠베르크는 [[w:Göttingen Manifesto|괴팅거 선언문(Göttingen Manifesto)]]에 서명하여 [[핵무기]]로 무장한 [[독일 연방 공화국]]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파스쿠알 요르단]]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핵 과학자들의 이 말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거 선언이 정치인들이 고려해야 할 "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w:Walther Gerlach|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여론이 느슨해질 위험 때문에 우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돌아와해야 할 것이다." 1961년 하이젠베르크는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와 [[w:Ludwig Raiser|루드비히 라이저Ludwig Raiser]]와 함께 [[w:Memorandum of Tübingen|튀빙겐 각서(Memorandum of Tübingen)]]에 서명했다. 과학자들와 정치인들 사이에 공개 토론이 이어졌다. 저명한 정치인, 작가, 사교계 명사들이 핵무기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자 각서 서명자들은 "전업적 지적 불순응주의자들nonconformists"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57년부터 Heisenberg는 [[플라스마]] 물리학과 [[핵융합]] 과정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또한 [[제네바]]에 있는 국제 원자 물리학 연구소와 협력했다. 그는 연구소의 과학 정책 위원회 위원이었고 몇 년 동안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w:Oder–Neisse line|오데르-나이세 선(Oder–Neiße line)]]을 [[독일]]과 [[폴란드]]의 공식 국경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서독]]의 핵무장 가능성에 반대하는 [[w:Memorandum of Tübingen|튀빙겐 각서(Memorandum of Tübingen)]]의 서명자 8명 중 하나였다. 1973년 하이젠베르크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양자역학|양자 이론]] 개념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강의했다. 1973년 3월 24일 하이젠베르크는 바바리아 가톨릭 아카데미(The Catholic Academy of Bavaria) 앞에서 연설을 하여 로마노 과르디니 상(Romano Guardini Prize)을 수상했다. 그의 연설을 영어로 번역한 것은 《과학적 및 종교적 진실 (Scientific and Religious Truth)》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그 인용문은 이 기사의 뒷부분에 나온다. 철학과 세계관. 하이젠베르크는 [[동양 철학]]을 존경했고 동양 철학과 양자 역학 사이의 유사점을 보았고 자신을 [[w:The Tao of Physics|《물리학의 도 (The Tao of Physics)》]]라는 책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인도 철학]]에 대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대화한 후 "너무 미친 것처럼 보였던 일부 아이디어가 갑자기 훨씬 더 이해가 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관련하여 하이젠베르크는 [[논리철학 논고|《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싫어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과 언어에 대한 그의 철학"은 매우 좋아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하이젠베르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보내는 마직막 편지에서 쓰기를: "우리는 선하신 주 하나님이 아원자 입자의 위치를 알고 계셔서 인과관계 원리가 계속 타당성을 가지도록 하신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불확실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양자 물리학은 불완전함에 틀림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하이젠베르크가 1974년 [[로마노 구아르디니]] 상을 받았을 때 그는 연설을 했고 나중에 《과학과 종교의 진리 (Scientific and Religious Truth)》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기를: 과학의 역사에서 유명한 [[w: Galileo affair|갈릴레오의 재판]] 이후로, 과학적 진리는 세상의 종교적 해석과 조화될 수 없다고 반복해서 주장되어 왔다. 나는 이제 과학적 진리가 그 자신의 분야에서 공격할 수 없다고 확신하지만, 종교적 사고의 내용을 단순히 인류 의식의 시대에 뒤떨어진 단계의 일부, 우리가 포기해야 할 부분으로 일축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따라서 나는 살아오면서 이 두 사고 영역의 관계에 대해 반복적으로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의 실재성을 결코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하이젠베르크 1974, 213 자서전과 사망. [[파일:Hund Heisenberg Born 1966 Göttingen.jpg|섬네일|upright=1.2|프리드리히 훈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보른 괴팅겐 1966년]] [[파일:Werner Heisenberg Briefmarke.jpg|섬네일|upright=1.2|독일 우표 속의 하이젠베르크]] 하이젠베르크의 아들인 마르틴 하이젠베르크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w:Neuroscientist|신경생물학자]]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요헨 하이젠베르크는 [[뉴햄프셔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60대 후반에 하이젠베르크는 대중 시장mass market을 위해 자서전을 썼다. 1969년에 이 책은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1971년 초에는 영어로 출판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다른 언어로 출판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66년 그의 공개 강의가 철학과 종교의 주제로 점차 바뀌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출판을 위해 히르젤 베를라그(Hirzel Verlag)와 [[존 와일리 & 선즈|존 와일리 & 선즈(John Wiley & Sons)]]에게 [[통일장 이론]]에 관한 교과서의 원고를 보냈다. 그가 출판사 중 한 사람에게 쓴 이 원고는 그의 자서전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그는 자서전을 구성하기를: 1) 정확한 과학의 목표, 2) 원자 물리학에서 언어의 문제, 3) 수학과 과학에서의 추상화, 4) 물질의 가분성 또는 칸트의 이율배반, 5) 기본 대칭 6) 과학과 종교 등으로 하였다. 하이젠베르크는 회고록을 일련의 대화 형식으로 썼고, 그의 생애를 망라했다. 이 책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과학사가들에게는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서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역사적 사건을 더 간결하게 만들기 위해 요약했다고 썼다. 출판 당시 [[w:Paul Forman|파울 포르만Paul Forman]]은 《과학 (Science)》 저널에서 "이제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대화 형식의 회고록이 있다. 그리고 갈릴레오가 잘 알고 있는 대화는 그 자체로 가장 교활한 문학적 장치이라서: 활기차고, 재미있고, 특히 의견을 암시하는 데 적합하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은 회피한다." 과학 회고록은 거의 출판되지 않았지만 [[콘라트 로렌츠]]와 [[w:Adolf Portmann|아돌프 포르트만Adolf Portmann]]은 광범위한 청중에게 학문을 전달하는 대중적인 책을 저술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서전을 작성하여 뮌헨의 [[w:Piper Verlag|피페르 베르라그(Piper Verlag)]]에서 출판햌다. 하이젠베르크는 처음에 《원자 물리학에 대한 대화 (Gespräche im Umkreis der Atomphysik)》이라는 제목을 제안했다. 자서전은 결국 《[[부분과 전체]] (Der Teil und das Ganz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71년 영어 번역은 《[[w:Physics and Beyond|물리학 및 그 너머 (Physics and Beyond)]]: 만남과 대화 (Encounters and Conversation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76년 2월 1일 자택에서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다음날 저녁, 그의 동료와 친구들은 물리학 연구소에서 그의 집까지 추모하기 위해 걸어가서 촛불을 켜고 그의 문 앞에 두었다. 하이젠베르크는 [[w:Munich Waldfriedhof|뮌헨 발트프리드호프(Waldfriedhof)]]에 묻혔다. 1980년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하이젠베르크는 《정치인의 정치 생활 (De, Das politische Leben eines Unpolitischen)》을 출판했다. 그 책에서 그녀는 하이젠베르크를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사람, 그 다음은 뛰어난 과학자, 그 다음은 매우 재능 있는 예술가, 그리고 네 번째로 의무감으로부터의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로 묘사했다. 서훈과 수상. 하이젠베르크는 많은 서훈을 받았다: 핵물리학에 대한 연구 보고서. 다음 보고서는 독일 [[우란프로옉트|우란베라인]]의 내부 간행물인 [[w:Kernphysikalische Forschungsberichte|《핵물리학 연구보고서 (Kernphysikalische Forschungsberichte)》]]에 게재되었다. 보고서는 [[기밀정보|극비]]로 분류되었고 배포가 매우 제한적이었고 저자는 사본을 보관할 수 없었다. 보고서는 연합군 [[w:Alsos Mission|알소스 작전]]에 따라 압수되었고 평가를 위해 [[미국 원자력 위원회]]로 보내졌다. 1971년에 보고서는 기밀 해제되어 독일로 반환되었다. 그 보고서는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카를스루에 핵연구 센터]]와 [[w:American Institute of Physics|미국 물리학 연구소]]에서 볼 수 있다. 대중 문화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성은 케이블 TV채널 [[AMC]]의 범죄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인 [[w:Walter White (Breaking Bad)|월터 화이트Walter White]]가 고등학교 화학교사에서 [[메스암페타민|메스]] 제조자와 마약왕으로 변신하는 동안 주요 [[가명]]으로 사용된다. 하이젠베르크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더 캐쳐 워즈 어 스파이]]》에서 스파이 [[w:Moe Berg|모에 베르그]]의 암살 표적이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필립 K. 딕]]의 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를 각색한 아마존 프라임(Amazon Prime) TV시리즈에서 액시스Axis가 사용한 원자폭탄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는다. 이 우주에 있는 원자폭탄은 하이젠베르크 장치라고 불린다. 하이젠베르크는 게임 《[[레지던트 이블 빌리지]]》의 2차 적대자 칼 하이젠베르크과 동명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강자성에 대한 연구는 캐릭터의 자기 능력에 대한 영감으로 공헌했다. 외부 링크. [[분류: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분류:1901년 출생]] [[분류:1976년 사망]] [[분류:독일의 물리학자]] [[분류:독일의 대학 교수]] [[분류:양자역학]] [[분류:과학철학자]]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뷔르츠부르크 출신]] [[분류:뮌헨 대학교 동문]] [[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 [[분류: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교수]] [[분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분류:독일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교황청 과학원의 회원]] [[분류: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 수훈자]] [[분류:대연방공로십자성현장 수훈자]] [[분류:20세기의 자유군단 관련자]] [[분류:신장암으로 죽은 사람]] [[분류:양자물리학자]] [[분류:20세기 물리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분류: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자]] [[분류:유체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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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250년 무정의 통치기인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경)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하 문명은 여러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본토에서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이래 약 5000년 동안 수많은 여러 왕조가 흥망을 반복해 왔다. 한나라 때는 현재 중국 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당나라는 서방의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도 하였다. 한나라의 멸망 이후 한족들이 취약해지고 서진의 멸망 이후로 북방 민족들이 화북 지역에 대대적으로 쳐들어온 뒤부터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화북은 이민족들의 무대가 된다. 한족들이 건국한 송나라 때는 중국 중세 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군사력이 너무 약해 주변 이민족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다가 남송이 몽골족의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사라진다. 이후 몽골제국이 4개의 칸국하고 원나라로 분열되었으며 한족들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명나라는 영락제 때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포함해 정화의 원정 등으로 큰 전성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나라가 약해지자 여진족은 이틈을 타서 후금을 건국한 이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건국하여 지배자로서 중국을 손에 넣고 통치한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 전쟁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중국 본토는 "아시아의 병자"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대만과 만주는 일본 제국에 지배당하고 중국 한족의 남조의 수도로서 상징적이던 난징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했던 것처럼 현대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난징 대학살과 강간으로 유린당한다. 홍콩은 영국이 지배했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하였다.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한족의 개혁파들에 의해 양무 운동과 변법 자강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힘이 없었고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보수파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에 의해 포섭되기도 하는 각지의 군벌에 의해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몽골, 티베트의 독립 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혼란에 싸여 분열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침략에 의해 중국 동부 지역을 잃고 난징이 유린을 당하며 중국 자체가 지배당할 뻔한 위험한 시기를 보냈다. 이 때 일본의 중국 정복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으나 러시아 또한 중국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중국 영토로 남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중국에서는 보통 “해방 전쟁”이라 칭함)과 중일 전쟁(중국에서는 보통 “항일전쟁”이라 칭함)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 정부가 2개 이상인 때에도 있었다. 많은 중국인 가난한 농민, 소작농 계급들로 구성된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힘을 키웠고 그 후 중일 전쟁 중에 일본의 세력 아래에 있던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세력을 늘려 온 중국공산당은 계속되는 오랜 내전으로 군인들에 의해 반복되던 민간인에 대한 살인과 강간, 방화에 지친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었다.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고 나서 중국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일어나던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매년 10월 1일을 국경절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신대.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고대의 전설적 제왕들이다. 삼황(三皇)은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여와씨(女媧氏)를 말하며, 오제(五帝)는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를 지칭한다. 중국 문명. 선진 시대. 중국에서는 이 시기를 ‘선진 시기’(先秦時期)라고도 한다. 하(夏) (기원전 21세기 - 기원전 17세기)의 경우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대체로 실존했던 국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를 무너뜨리고 세운 상(商) (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1세기 중반)은 은허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 은(殷)이라고도 부르며, 한때 신화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은허의 유적 발굴 이후 실존했던 국가로 인정되었다. 주(周) (기원전 1050년 경 - 기원전 256년)는 본래 상(은)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상(은)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폭압으로 상(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은 나라다. 이 때 주의 왕을 처음으로 ‘천자’(天子)라고 불렀다. 주의 패권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가 되면서 약해지기 시작한다. 춘추 시대에는 여러 주나라의 제후국들이 주의 천자를 존중하고 각자의 세력을 다투던 시기로, 세력이 강한 제후국들 중에 주 왕실의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한 제(齊)-환공(桓公), 진(晉)-문공(文公), 초(楚)-장왕(莊王), 오(吳)-합려(闔閭), 월(越)-구천(勾踐)의 5제후를 춘추 오패라고 부른다. 전국 시대로 들어서면서 천자에 대한 충성마저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진(秦), 한(韓), 제(齊), 위(魏), 조(趙), 연(燕), 초(楚)라는 전국 칠웅이 차례로 왕을 칭하고 오로지 천하 통일을 위해 질주하였다. 중화 제국. 진 시황제는 기원전 221년에 스스로를 "황제"(황제)라고 선언했고 통치자들은 기원후 1911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할 때까지 이 용어를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이 기간을 전통적으로 중화 제국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초기, 중기 및 후기의 세 하위 기간으로 나뉘며 초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중국의 진나라 통일과 한족의 교체, 제1분할 후 금나라 통일, 북중국의 상실 등이 있다. 중기에는 수의 통일과 당, 제2분할, 송의 통일이 보충되었다. 후기 기간에는 원, 명, 청 왕조가 포함된다. 고대사. 진한 시기. 진(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은 한(韓), 제(齊), 위(魏), 조(趙), 연(燕), 초(楚)를 무너뜨리고 중국 본토를 통일하였다. 진은 이어 모든 제후국을 폐지하고 조정에서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처음 실시하였다. 이어 진왕 영정은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진(秦)나라의 무리한 통치와 폭압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진 이세황제의 치세에 몰락하여, 그 뒤 멸망하였고, 초한전을 거쳐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다. 한나라는 200년 넘게 유지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서양에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나라이기도 하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서기 9년)은 한나라(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 (9년 - 23년)에 의해 잠시 명맥이 끊기나, 신나라는 급격한 개혁이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각지의 반란으로 망하였고, 한나라(전한)를 계승한 국가인 후한(後漢) (25년 - 220년)이 다시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나, 화제 이후의 황권은 환관들과 외척들로 인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위에게 멸망당했다. 위진 남북조 시기. 대한민국에서는 삼국 시대(三國時代) (220년 - 280년)라고 하지만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년 - 589년)까지 포괄하여 위진 남북조 시기라고 한다. 위(魏)는 조비가 후한의 황제로부터 직접 제위를 물려받은 국가로 중원 지역을 차지하였다. 촉(蜀) 후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계승하였으나, 세력권은 서남 지방에 한정되었다. 한편 손권의 오(吳)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장강 이남을 차지하였다. 위는 사마염의 서진(西晉) (265년 - 316년)에게 승계되며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게 되나, 초기부터 황실 분란인 팔왕의 난 등으로 혼란스럽다가, 흉노족의 전조에게 멸망당한다. 서진의 멸망 이후 서진이 있던 자리에 16개의 국가가 들어서 패권을 겨뤘으니 이를 십육국 시대(十六國時代) (316년 - 439년)라 한다. 비한족 국가인 전조(前趙)·후조·전연(前燕)·후연· 남연, 관중(關中)에 있던 전진(前秦)·후진·서진 및 하투(河套)의 하(夏), 사천(四川)의 성한(成漢), 하서(河西)의 후량·북량·남량과, 한족 국가인 북연, 하서(河西)의 전량(前涼), 서량이 있었으며, 전조, 후조, 전진 등이 한때 큰 세력권을 과시했으나 결국 북조의 북위로 통합된다. 북위(北魏)는 선비족 탁발씨의 국가로, 3대 태무제의 시기에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북위는 곧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리되고, 동위는 북제(北齊), 서위는 북주(北周)로 이어진다. 북제는 이후 북주에 흡수되고, 북주는 왕실 외척인 양견에 의해 수(隋)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한편 서진 황실의 계승을 천명한 동진(東晉)은 서진의 영토를 되찾으려 여러 차례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세력권은 주로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동진을 계승한 국가들이 이어진 왕조를 남조라고 하며, 송(宋)=유송(劉宋), 제(齊)=남제(南齊), 양(梁), 진(陳)이 있다. 수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수나라, 당나라 시대. 수(隋) (581년 - 618년)는 북주의 외척인 양견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하나, 무리한 원정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고, 당(唐) (618년 - 907년)으로 이어진다. 당나라는 비단길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켜 중국 고대 문화를 서양에 전파하였다. 한편 당나라의 황후이던 측천무후가 조정을 장악하고 아들인 당의 황제를 황태자로 격하시키고 국호를 잠시 주(周) (690년 - 705년)로 바꾼다. 측천무후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으나, 인재 중심의 정치 역시 펼쳐서 백성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측천무후 이후 다시 국호를 당으로 바꾸게 된다. 후량에게 멸망당한다. 중세사. 오대십국 시대 (907년 - 960년)는 화북의 정권을 다투던 5개의 대국과 나머지 10개의 소국이 혼재했던 시기이다.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宋) (960년 - 1279년)이 다시 중원을 통일하였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비 해군을 창설하였다. 또한 문화 정치를 펼친 왕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으며,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몽골 지역과 만주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이 세운 국가인 요(遼) (916년 - 1125년)에 의해 베이징 이북의 많은 지역을 빼앗기고, 요나라와 서하에 사실상의 조공을 납부하며 별 위세를 떨치지 못하다가, 요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여진족이 요나라를 정복하고 세운 금(金) (1115년 - 1234년)에게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이 때까지를 북송(北宋)시대라고 하고, 이후 북송의 황실을 계승한 왕조를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몽골 제국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몽골 제국을 계승한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근대사. 원(元) (1271년 - 1368년)은 만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유럽까지 지배한 몽골 제국의 적장자인 쿠빌라이 칸이 몽골고원, 만주, 화북력들을 아우르는 지역의 한족식으로 세운 국가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주원장이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몰아내고 명(明) (1368년 -1644년)이라는 한족 왕조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외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과시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진왜란 등 외부 원정의 부담과 문화 침체로 쇠퇴하다가 사르후에서의 패배와 숭정제의 실책으로 멸망한다. 명나라의 몰락을 틈타 금나라의 후예인 만주족이 후금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청(淸) (1616년 - 1912년)은 후금을 계승한 왕조로, 초기에는 한족을 정책적으로 차별했으나, 전체적인 제도 및 왕조의 분위기는 명나라와 유사하였다. 양무 운동을 통해 근대 국가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서구 열강 세력들의 이권침탈이 심화되면서 더욱 더 쇠퇴하고, 1912년에 신해 혁명으로 멸망한다. 청나라 소조정이 1912년부터 1924년까지 유지되었지만 결국 붕괴되었다. 그 사이에 청나라 복벽사건이 일어나서 1917년 7월 1일부터 청 황조가 복벽되었으나 1917년 7월 12일에 끝을 맺었다. 한편 남명(南明) (1644년 - 1662년)은 멸망당한 명나라의 왕실을 계승한 나라로, 명의 부흥을 기도하였으나 청나라에 망하였다. 남명의 신하였던 정성공은 타이난으로 건너가 정씨왕국을 설립하여 청나라에 대항하지만 3대째에 복속당한다. 현대사.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년 - 현재)은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이후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군벌로 등장하였다. 특히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거느리는 북양 군벌을 이끌고 쑨원으로부터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았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 사망하자, 이후 그의 부하들이 할거했는데, 대표적으로 안휘파의 돤치루이, 직예파의 펑궈장, 차오쿤, 오패부, 봉천파의 장쭤린, 산시파의 옌시산 등이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최초의 공화정 체제인 북양 정부는 1928년까지 존속했다. 그 후 북벌이 재개되고 모든 세력이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국국민당 주도의 국민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천두슈(陳獨秀)와 마오쩌둥(毛澤東)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중국국민당은 중국공산당과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냈으나, 북벌 과정에서 분열이 일어나,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 정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중일전쟁 중에 수도 난징이 점령당하고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해 옮겼지만, 끝내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난징으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내분이 생겨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다. 한편 국공 내전 중에 정부는 새로운 중화민국 헌법을 통과시켜 국민 정부를 헌정 체제로 격상시킨다. 1949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도 난징을 점령하면서 중국공산당이 사실상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기세를 몰아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이후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패닉 상태에 빠져, 국민당에 내분이 일어나 공산당 밑으로 들어가거나(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타이완, 영국령 홍콩 또는 국외 등지로 피난하는 국민당 관계자도 속출했다. 한편 중국국민당은 장제스의 지도하에 현재의 타이베이 시로 정부를 이전하여 지금까지 중화민국의 법통이 계승되고 있다.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 덕분에 중화민국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어도 국제적 위상이 거의 변함없었다. 그러나 점차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실리 외교를 선호하는 세계 다수의 국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쪽으로 기울었다. 현재 중화민국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있는 나라 수는 대폭 감소했지만, 서로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자처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중국’으로 정부가 병립된 분단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한편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정부로 왕징웨이 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이 있으나 국민 정부에 통합된다. 국공 내전으로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1949년 - 현재)이 건국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의 유대 관계를 통해 여러 가지 경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국경 분쟁을 일으키는 등 소련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를 통해 중화민국을 제치고 유엔에 입성하였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널리 인정받게 된다. 1971년 '핑퐁외교'로 불리던 리처드 닉슨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마침내 1979년 중화민국의 강력한 후원국이던 미국과도 수교하게 된다. 덩샤오핑() 이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 대국 반열에 진입하였다. 1990년대에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차례로 편입하였다. 2008년에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이, 2010년에는 상하이 엑스포가 개최되으며, 2022년에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인구의 변천. 아래의 데이터는 양학통의 《計劃生育是我国人口史発展的必然》(1980년)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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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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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켓 표기법
브라-켓 표기법(영어:)은 양자역학에서 양자 상태를 표현하는 표준 표기법으로, 추상적인 벡터와 선형 범함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이 표기법은 꺾쇠괄호 '⟨', '⟩'와 , 수직선 '|' 을 사용하여 표기한다. 오른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켓이라고 하며, 주로 열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 왼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브라라고 하며, 주로 행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 여기에서 는 '켓-'로 읽고, 는 '브라-'로 읽는다. 유한차원벡터공간에 포함된 브라와 켓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다음이 성립한다. 이때, 은 의 켤레 복소수이다. 브라와 켓, 그리고 연산자의 조합은 행렬 곱셈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브라-켓 표기법은 복소벡터공간에서 벡터의 스칼라곱 또는 벡터 위로의 선형 범함수의 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내적이나 작용은 브라-켓 표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같은 레이블인(같은 내용물을 가진)브라와 켓은 서로에게 에르미트 수반이다. 쌍대공간의 각 브라 벡터에는 꼭 한 개의 켓벡터가 대응된다는 리스 표현 정리에 의해 〈"ψ"| 는 다음과 같이 켓벡터 |"ψ"〉 와 대응되며 잘 정의되어 있다. 브라-켓 표기법은 1939년에 폴 디랙에 의해 소개되었기 때문에 디랙 표기법이라고도 한다. 브라-켓 표기법이 생겨나기 100년 전쯤에 헤르만 그라스만이 내적을 formula_7 으로 표기한 전례가 있다. 소개. 브라-켓 표기법은 선형 대수학의 표기법으로, 특히 유한/무한 차원의 복소 벡터 공간에서의 벡터, 내적, 선형 연산자, 에르미트 수반, 쌍대공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으며, 특히 양자역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연산들을 쉽게 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양자역학에서 브라-켓 표기법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양자역학으로 설명되는 많은 현상들이 브라-켓 표기법을 사용하여 표현된다. 표기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켓 은 열벡터이며, 같은 레이블의 브라  의 켤레 전치(행벡터)이다. 그리고 브라, 켓, 선형 연산자를 나란히 쓰는 것은 행렬 곱셈을 의미한다. 그러나, 켓은 열벡터로 쓰여지기 어려운 불가산 무한차원 벡터 공간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숫자들의 목록으로 열벡터를 쓰기 위해서는 기저가 필요한데, 이에 반해 "이라고 쓰는것은 어떠한 특정한 기저를 정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특성은 자주 다른 기저(예를 들자면 위치 기저, 운동량기저, 에너지 고유기저 등)로 바꿔야하는 양자역학에서의 계산에 유용하며, 그래서 브라-켓 표기법은 행렬로 쓰이기 어려운 기저벡터를 명시적으로 표현하기에 좋다.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중요한 두 기저 벡터가 단순히"와""로 표현될 때도 있다. 일부 물리학자들이 선호하는 내적에 대한 표준 수학적 표기법은 다음의 관계로 브라-켓 표기법과 정확히 같은 뜻을 나타낸다. 브라와 켓은 또한 다른 방법으로 구성되어 등의 다른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 다음의 구성은 외적을 나타낸다. 또한 행렬 곱셈(즉, 열벡터 곱하기 행벡터는 행렬)을 나타낼 수도 있다. 만약 켓이 벡터공간의 한 원소일 경우, 대응되는 브라는 쌍대공간의 원소이다. — 리스 표현 정리를 참고하라. 벡터 공간. 벡터와 켓의 차이점. 수학에서 "벡터"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벡터 공간의 한 원소를 일컫는 데에 사용된다. 하지만 물리학에서 "벡터"라는 용어는 대부분 실세계의 세 차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물리량(변위, 속도 등)들을 일컫는 데에만 사용된다. 이러한 벡터는 일반적으로 화살표를 위에 표시하거나()또는 굵게 표시하여 () 쓰여진다. 양자역학에서 양자 상태는 일반적으로 추상복소벡터공간의 원소로 표현되는데, 예를 들어 모든 가능한 파동함수(삼차원 공간의 각 점에서 복소수로 대응되는 함수)의 유한 차원 벡터 공간 등이 있다. 그러나 "벡터"라는 용어가 이미 다른 것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면서(이전 단락을 참고하라.) 이러한 추상복소수벡터공간의 원소들은 일반적으로 "켓"으로 불리게 되고 켓 표기법을 사용하여 표기하게 되었다. 켓 표기법. 디랙이 발명한 켓 표기법은 수직선과 꺽쇠괄호를 사용한다(예시: ). 켓 표기법이 사용된 것들은 "켓"이라고 불리며, 는 "켓-A"로 읽는다. 이러한 켓들은 선형대수학의 일반적인 법칙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다음의 수식은 그 예시이다. 참고로, 어떠한 기호, 문자, 숫자, 심지어 단어라도 레이블로 적절하다면 무엇이든지 켓 안에 레이블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 수식의 마지막 줄은 각 실수 마다 있는 무한히 많은 켓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기호"는 " 자체의 의미와 관계 없이 구체적이고도 보편적인 수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는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켓 안의 레이블은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붙여진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 에너지 고유켓은 일반적이고 관습적으로 양자수를 나열한 것으로 붙여진다. 내적과 브라. 내적은 일반화된 스칼라곱으로, 두 벡터의 내적은 스칼라이다. 중성 표기법(오로지 내적에만 사용되는 표기법)에서, 내적은  으로 쓰일 수 있다. 여기에서 와 는 모두 추상벡터공간의 원소, 즉, 둘 다 켓이다. 와 의 내적은 브라–켓 표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다. 브라–켓 표기법은 "브래킷(괄호)"으로 불리는 내적을 다음과 같이 "브라"와 "켓"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는 브라로 불리며, "브라-A"로 읽고, 는 위에서와 같이 켓이다. 내적을 브라와 켓으로 "나누는" 목적은 브라 와 켓 는 "둘다" ,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내적 밖의 다른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와 켓을 분리하는 의미는 크게 두가지가 있지만, 표현 는 아래에 있는 두번째 해석, 즉, 선형 범함수의 작용으로 해석된다. 브라와 켓을 행벡터와 열벡터로 해석. 고정된 정규 직교 기저를 사용하는 유한차원 벡터공간에서, 내적은 다음과 같이 행벡터와 열벡터의 행렬 곱셈으로 쓰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면, 브라와 켓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서는 브라 옆에 켓을 놓는 것이 행렬 곱셈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브라의 켤레 전치("에르미트 수반"으로도 알려져 있다.)는 켓과 일치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브라, 가 있을 때, 켤레 복소수를 취하고 행렬을 전치하면 다음과 같은 켓이 되기 때문이다. 브라를 선형범함수로 해석. 무한차원공간으로 일반화하기에 더 쉬운, 동치의 추상적인 정의는 브라를 켓의 공간에서의 선형 범함수로, 즉, 켓을 입력으로 하고 복소수를 출력하는 선형 변환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브라로 표현되는 선형 범함수는 내적과 똑같이 정의된다. 따라서, 만약 가 리스 표현 정리 아래에서 와 상응하는 선형 범함수라면 다음과 같이 함수로 표시할 수 있다. 즉, 이것 또한 내적과 똑같은 복소수를 만들어낸다. 우변의 표현은 여전히 두개의 켓을 포함하지만 "내적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이 혼란스러울 수는 있지만, 결국 같은 숫자가 만들어지므로 내적으로 계산해도 큰 문제는 없다. 수학 용어에서, 브라의 벡터 공간은 켓의 벡터공간의 쌍대 공간이며, 상응하는 브라와 켓은 리스 표현 정리에 따라 연관되어있다. 규격화 불가능 상태와 비힐베르트 공간에서의 브라-켓 표기법. 브라–켓 표기법은 힐베르트 공간이 아닌 벡터 공간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무한의 노름을 가지고 있는 켓, 즉, 규격화 불가능 파동함수들은 관습적으로 쓰이고 있다. 예시로는 디랙 델타 함수나 무한 평면파가 파동 함수로 사용되는 상태 등이 있다. 기술적으로, 이러한 상태는 힐베르트 공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힐베르트 공간"의 정의는 이러한 상태들을 포함하도록 확장될 수 있다.(겔판트-나이마르크-세갈 구성과 조작된 힐베르트 공간을 참고하라.) 브라–켓 표기법은 이러한 넓은 맥락에서도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바나흐 공간은 힐베르트공간의 다른 정규화이다. 바나흐 공간 에서, 벡터는 켓으로, 선형 범함수는 브라로 표기될 수 있다. 사실, 위상 공간이 아닌 어떠한 벡터공간에서도 벡터를 켓으로 선형 범함수를 브라로 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더 일반적인 맥락에서 꺾쇠괄호는 리스 표현 정리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내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의 사용. 양자역학의 수학적 구조들의 대부분은 선형대수학을 기반으로 한다. 벡터와 선형 연산자를 포함한 양자역학의 모든 계산은 사실상 브라-켓 표기법으로 표기될 수 있다. 아래는 그에 대한 몇가지 예시이다. 스핀이 없는 위치공간 파동함수. 스핀-0 점입자의 힐베르트 공간은 "공간기저" 위에 펼쳐져있으며, 이때 레이블 은 모든 점들의 위치 공간의 집합으로 확장된다. 이 레이블은 몇몇 기저 상태에서 작용하는 위치 연산자의 고유값, formula_19이다. 불가산 무한한 수의 벡터의 원소는 기저에 있는, 이것은 불가산 무한 차원 힐베르트 공간.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일반적으로 무한한) 그리고 위치 공간(보통 1,2,3)은 섞이지 않는다. 이러한 힐베르트 공간에서 시작하는 어느 켓  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동함수로도 알려져 있는 스칼라 함수 을 정의할 수 있다. 왼쪽의 은 공간상의 어느 점으로부터 복소수로의 대응이며, 오른쪽의 는 켓이다. 그 다음에는 관습적으로 파동함수(켓)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운동량 연산자 는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간혹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표기법의 남용이다. 미분 연산자는 반드시 위치기저 에 사영되는, 켓에 작용하는, 파동함수를 미분하는 효과를 가진 추상적인 연산자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량 기저에서, 연산자는  와 같이 단순한 곱셈 연산자에 해당한다. 상태의 중첩. 양자 역학에서 식 은 일반적으로 상태가 상태 으로 붕괴할 확률 진폭으로 해석된다. 수학적으로는 가 으로 사영될 때의 계수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상태 의 상태 로의 사영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핀- 입자에 대한 기저 변환. 정적인 스핀- 입자는 이차원 힐베르트 공간을 가진다. 그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가 각운동량 연산자 "Sz" 의 값이 확실히 인 상태이고, 는  각운동량 연산자 의 값이 확실히 인 상태이다. 이러한 기저를 통해, 입자의 "어떠한" 양자 상태도 두 기저의 선형결합(즉, 양자 중첩)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이때 "aψ" 와 "bψ" 는 복소수이다. 다음처럼 같은 힐베르트 공간에 대한 "다른" 기저도 존재한다. 이 상태들은 대신 의 관점에서 정의된 것이다. 또한, 입자의 "어떠한" 상태도 위의 두 기저의 선형 결합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어떠한 기저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른 벡터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벡터의 "좌표"는 사용된 기저에 의존한다. 이것은 , 와 , 의 수학적 관계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저 변환을 참고하라. 잘못된 사용. 표기법의 몇가지 관례와 오용이 물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러한 표기법은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 같은 방정식에서 "레이블"과 상수로 같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formula_30에서 기호 formula_31는 동시에 "연산자의 이름" , "고유벡터"  그리고 연관된 "고유값" 로 사용되었다. 벡터의 요소를 표기할 때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동 (대문자)는 전통적으로 파동함수와 연관되었고,  (소문자)는 같은 맥락에서 파동함수 또는 복소상수 레이블을 표시하는데 사용되며, 아래첨자에 의해서만 구분된다. 주된 남용은 벡터 레이블 안에 연산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용은 벡터의 크기변환을 빠르게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다. 즉, 만약 벡터 가 배 크기변환될 때, 이것을 으로 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법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 함수나 숫자가 아닌 레이블(이름)이기 때문에 연산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용은 와 같이 벡터를 텐서곱으로 표현할 때 레이블의 일부가 표기법의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뜻을 갖고있는 세 벡터의 레이블의 일부분이 아래첨자 1, 2와 같이 켓의 바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 첫번째 벡터의 노름(벡터의 크기)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용되었다. 선형 연산자. 켓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 켓을 입력으로 하고 켓을 출력으로 하는 선형 연산자를 맵이라고 한다. ("선형"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몇가지 속성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만약 가 선형 연산자이고 가 켓일 때, 은 또다른 켓이다. -차원 힐베르트 공간에서,  는  열벡터로 쓰일 수 있으며, 는 복소수 항목을 포함한  행렬로 쓰일 수 있다. 켓 는 일반적인 행렬 곱셈으로 계산될 수 있다. 선형 연산자는 양자역학 이론의 어떠한 부분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나 운동량 같은 관측가능량은 자기 수반 연산자로 표현되며, 변화 과정은 회전이나 시간의 진행과 같은 유니터리 선형 연산자로 표현된다. 브라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 연산자는 브라의 "오른쪽"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표기된다. 특히, 만약 가 선형 연산자이고,  가 브라이면, 는 규칙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또 다른 브라이다. -차원 힐베르트 공간에서, 는   행벡터로 쓰일 수 있고,(이전 단락에서와 같은)  는  행렬으로 쓰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브라  는 일반적인 행렬 곱셈으로 계산될 수 있다. 만약 같은 상태 벡터가 다음과 같이 브라와 켓쪽에 둘다 나타나면 이 표현은 상태 에 있는 물리학 계에 대해 관측 가능한 표현 연산자 의 기대값 또는 평균을 나타낸다. 외적. 힐베르트 공간  에서 선형 연산자를 정의하는 편리한 방법은 외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만약 가 브라이고 이 켓이면, 외적 은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 계급-1 연산자를 나타낸다. 유한차원 벡터 공간에 대해, 외적은 간단한 행렬 곱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외적은 선형 연산자로 볼 수 있는  행렬이다. 외적의 사용 용도 가운데 하나는 사영작용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노름이 1인 주어진 켓 에 대해, 에 펼쳐진 하위공간으로의 직교사영은 다음과 같다. 에르미트 수반 연산자. 브라와 켓이 서로 변환될 수 있는 것처럼(를 으로 만듦으로써), 에 상응하는 쌍대공간의 원소는 이다. 이때  는 연산자 의 에르미트 수반이다. 다시말해, 만약  가  행렬로 표현된다면,   는 의 켤레전치이다. 인 자기수반연산자는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관측가능량은 항상 자기수반연산자로 표현된다. 만약  가 자기수반연산자이면, 는 항상 실수이다(복소수가 아니다). 이것은 관측가능량의 기댓값이 실수임을 의미한다. 성질. 브라-켓 표기법은 선형대수 표현의 조작을 쉽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여기에는 조작을 쉽게 하는 몇몇 특성들을 목록으로 정리해두었다. 무엇을 다음과 같이, 과  는 임의의 복소수이고,   는 의 켤레 복소수를 의미하며, 와 는 임의의 선형 연산자를 나타내고, 이러한 특성은 브라와 켓 어느것을 골라도 적용된다. 연관성. 브라-켓 표기법으로 쓰여진 복소수, 브라, 켓, 내적, 외적, 선형 범함수와 연관된 모든 주어진 식에서, 괄호로 묶는것은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즉, 연결결합법칙 속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등과 같다. 식의 오른쪽(어떠한 괄호도 없는)과 표현은 중의적이지만 표현되는 것이 허용된다. "왜냐하면" 왼쪽의 표현과 같기 때문이다. 참고로 결합성은 물리의 비선형 시간 역전 연산자와 같은 비선형 연산자 표현까지 적용되지는 않는다. 에르미트 수반. 브라–켓 표기법은 특히 에르미트 수반(또는 데거라고 하며 으로 표시한다.)의 표현입니다. 공식적인 규칙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규칙은 어떠한 표현에 대해서라도 에르미트 수반을 구하기에 충분하다. 아래는 몇가지 예시이다. 브라와 켓의 합성. 두 힐베르트 공간 와  는 텐서곱을 통해 또다른 공간  을 형성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복합계를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만약 계가 각각  와  로 설명되는 두개의 부분계의 합성인 경우, 전체 계의 힐베르트 공간은 두 공간의 텐서곱이다. ( 두 부분계가 동일입자인 경우는 예외이며, 이러한 경우, 상황은 약간 더 복잡해진다.) 만약 가 에 속한 켓이고, 는 ,에 속한 켓일 때, 두 켓의 직접 곱은  에 속한 켓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표기법으로 쓰여진다. 이러한 곱의 적용은 양자 얽힘과 EPR 역설을 참고하라. 단위 연산자. 완비정규직교계(기저)이고, 인 노름이 내적인 힐베르트 공간를 고려하자. 기초적인 함수해석에서, 어떠한 켓 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은 힐베르트 공간 위에서의 내적이다. 이것은 켓의 (복소)스칼라의 교환법칙에 따라 다음의. 는 반드시 각 벡터를 자기 자신으로 보내는 '항등 연산자'여야 한다. 수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표기법. 브라-켓 표기법을 사용할 때 물리학자가 고려하는 대상은 힐베르트 공간 (완비 내적 공간)이다. 를 힐베르트 공간이라고 하고, 를 안의 벡터라고 하자. 물리학자들이 로 나타내고 싶은 것은 벡터 그 자체이다. 즉, 를 의 쌍대 공간이라고 하자. 이것은   위에서의 선형 범함수의 공간이다. 위상 동형 는 정의된 모든 에 대해  으로 정의된다. 이때, , , , 그리고, 는 단지 힐베츠트 공간의(또는 처음 세 표기법의 경우, 내적 공간에서도) 두 원소 사이의 내적을 표현하는 다른 표기법일 뿐이다. 표기의 혼동은 , 와 , 를 각각 식별하는데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상징적 대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라고 하자. 이러한 가정은 다음과 같은 식을 제공한다 괄호를 무시하고 두개의 세로선을 제거한 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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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한민국(大韓民國, , ROK), 약칭 남한(南韓, ), 한국(韓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에 자리한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 국가는 관습상 애국가, 국화는 관습상 무궁화이다.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수도는 서울이다. 인구는 약 5,160만 명으로, 전체 인구 중 절반 정도(약 2611만 명)가 수도권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하였다. 대한민국은 20세기 후반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등의 부침이 있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2022년 1인당 국민 총소득 (GNI)은 명목 3만 4,994달러이다. 2020년 유엔개발계획 (UNDP)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 (HDI) 조사에서 세계 22위를 기록하였다. 2021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 마지막 회의에서 한국의 지위를 선진국 그룹으로 ‘의견 일치’로 변경하고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다만 높은 자살률, 장시간 근로 문화와 높은 산업 재해 사망률, 저출산 등의 사회 문제가 이 같은 성과와 병존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 2019년 기준 23위의 8.0점을 기록한 바와 같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수준이 가장 높은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주요 20개국 (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 개발 원조 위원회 (DAC), 파리 클럽 등의 회원국이다. 1948년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각각 남북에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면적은 약 22만 km2이며, 인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합쳐 2019년을 기준으로 약 7,700만 명에 달한다. 국명.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국호 중 ‘한’ 또는 ‘대한(大韓)’은 우리 민족이 한민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긴 말로서 이는 고조선과 ‘한(韓)’이 우리 민족의 혈통이며, ‘한(韓)’은 환웅을 모시고 백성들을 다스린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세분의 책임자로서 위대한 지도자,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한다. 나중에는 한(汗)이 군주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후 여기에 민국(民國)을 더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는 이승만,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大韓)"이나 "한국(韓國)", "한(韓)"으로 대체하여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며,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해 한반도 남부에 있다 하여 "남한"으로도 불리는데, 특히 대한민국 한반도 북부를 점거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을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韓國) 또는 남한(南韓)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반국가단체로 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명칭 대신에 남조선(南朝鮮)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은 과거엔 구한국(舊韓國), 신한국(新韓國)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국제사회에서는 관습상 대한민국을 간단히 코리아(Korea)라 부르며, 이 이름은 동아시아의 고대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하였다. 코리아(Korea)란 영문 국호의 어원은 동아시아의 중세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하였다. 고구려가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한 것을 918년 건국된 중세 왕조 고려(高麗)가 계승하여 '고려'라는 국명이 아라비아 상인등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유럽인들이 '고려'를 코레(Core, Kore), 코리(Kori)로 불렀고, 이 명칭에 '~의 땅'을 의미하는 '-a'를 붙어 '고려인의 땅'이라는 '코레-아'(Corea), '코리-아'(Korea), '코리-아'(Koria)가 되어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서, 약칭 'R.O.K.'이며 관습상으로는 간단히 Korea라고 불리며 국제 표준화 기구에서는 약칭 'KOR'로 불린다.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았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 5월 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일본,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 , )이라 부른다. 다만 여전히 한반도 전체를 부를 때는 조선(, , )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지리. 지형. 서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황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일본과 동해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북한과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한반도는 제3기 마이오세 이후에 일어난 단층과 요곡운동의 결과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급경사로 동해안에 임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를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라 한다.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부 지방에 치우쳐서 한반도의 등줄기라 불리는 태백산맥에 자리한다. 태백산맥의 대표적인 산이 설악산이다. 태백산맥의 남서쪽으로 소백산맥이 이어지며 그중에는 지리산이 유명하다. 제주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사화산인 한라산이 있다. 하천의 유량은 극히 불규칙하여 여름에는 집중 호우로 연 강수량의 약 60% 이상이 홍수로 유출되며, 갈수기에는 강바닥을 거의 드러내는 하천이 많다. 대표적인 강은 위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등이다. 대다수의 강이 산지가 많은 동쪽에서 평평하고 낮은 구릉이 대부분인 서쪽으로 흐르며 중하류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산맥은 교통에 적지 않은 제약을 주어, 산맥을 경계로 지역의 문화나 풍습이 크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방은 고개를 넘어 왕래했는데 영서 지방과 영동 지방을 연결하는 태백산맥의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서부와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소백산맥의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등이 산맥을 넘는 주요한 교통로로 사용된다. 한반도의 서쪽은 황해, 동쪽은 동해, 남쪽은 남해와 맞닿아 있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이며, 가장 큰 부속 도서인 제주도 남쪽으로는 동중국해와 접한다. 황해와 남해 연안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클 뿐만 아니라 해안 지형도 꽤 평탄하여 넓은 간석지가 전개된다. 또한 수많은 섬이 있어서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반면에 동해 연안은 대부분 해안선이 단조롭고 수심이 깊으며 간만의 차가 적다. 해안 근처에는 사구·석호 등이 형성되어 있고 먼 해상에 화산섬인 울릉도가 있으며 그보다 동쪽으로 약 87.4km 거리에 대한민국 최동단인 독도가 위치한다. 서쪽에는 평지가 발달됐다. 기후. 북위 33도~38도, 동경 126~132도에 걸쳐 있어 냉대 동계 소우 기후와 온대 하우 기후,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 겨울에 북부 지역은 편서풍으로 인해 시베리아와 몽골 고원의 영향을 받아 대륙성 기후를 띠어서 건조하고 무척 추우나 남부 지역은 이런 영향을 적게 받아 상대적으로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의 특색을 보여서 고온다습하다. 계절은 사계절이 뚜렷이 나타나며 대체로 북부 지역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남부 지역은 봄과 가을이 길다. 3월 초에서 5월 초에 걸쳐 포근한 봄 날씨, 5월경에서 8월 초에는 무더운 여름이, 8월 말에서 10월 말까지는 화창하고 건조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11월에 기온과 습도가 점차 낮아지기 시작하여 12월에서 2월까지는 춥고 건조한 겨울 날씨를 보인다. 중부 산간 지방을 제외하고 대체로 연 평균 기온은 10 ~ 16℃이며, 가장 무더운 달인 8월은 23 ~ 36℃, 5월은 16 ~ 19℃, 10월은 11 ~ 19℃, 가장 추운 달인 1월은 -6 ~ 3℃이다. 비는 주로 여름에 많이 내리는데 연 강수량의 50 ~ 60%가 이때 집중된다. 이를 장마라고 하며 특히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를 장마철이라 한다. 각 지역의 연 평균 강수량은 중부 지방이 1100 ~ 1400mm, 남부 지방이 1000 ~ 1800mm, 경북 지역이 1000 ~ 1200mm이다. 경상남도 해안 지역은 약 1800mm이며 제주도는 1450 ~ 1850mm이다. 습도는 7월과 8월이 높아서 전국에 걸쳐 80% 정도이고 9월과 10월은 70% 내외이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연평균 28개 정도가 발생하여, 이 중 두세 개가 영향을 미친다. 본래 4계절이 뚜렷한 기후 환경이었으나 지구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봄, 가을의 기간이 급격히 줄어들며 게릴라성 폭우로 특징되는 열대성 호우가 잦아 아열대화가 진행되면서 어업이나 농업에 변화가 있다. 동식물. 한반도 전역에 동식물 10만 여 종이 분포한다. 호랑이 중에서 가장 큰 종인 백두산호랑이가 과거 살았었으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맹수로는 반달곰과 표범이 있으며 소수 개체군이 생존한다. 그 밖에도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등의 포유류와 까치, 꿩, 참새, 비둘기를 비롯한 텃새, 두루미, 기러기 같은 철새가 서식하며 지네나 거미, 수많은 곤충류도 서식한다. 삼면이 바다여서 난류와 한류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패류와 고래도 존재한다. 또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한류성 어류가 감소하고 불가사리나 해파리가 급증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산삼이나 진달래, 소나무 등 많은 식물은 약용이나 기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제주도에는 열대림과 비슷한 야자수가 번육하며 지리산이나 태백산맥에는 북방계형의 특산 식물들이 자생한다. 백두산에는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침엽수림과 같은 북방계 식물류가 자란다. 중부 지방에는 높은 산지로 말미암아 고산형 식물과 약용 식물 여러 종이 자생한다. 천연자원. 시멘트 공업과 석회공업(石灰工業)의 원료인 석회암은 한국의 주요 자원으로 각지에 대량 분포한다. 다른 자원은 양이 적거나 품질이 낮아 채산성이 맞지 않으므로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다만 21세기에 와서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기술의 발전으로 재개장하는 광산이 있다. 석탄은 무연탄만이 있으며 삼척, 태백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철광석은 양양, 충주 등지에서 주로 캤다. 텅스텐은 매장량이 매우 많으며 특히 영월에 대규모의 광산이 있다. 울산 앞바다에 천연가스층을 발견하고 개발중이며, 독도 부근 해저에서 메테인 하이드레이트 대규모 매장량을 발견했다. 석유는 제주도 남방 해역 대륙붕 제7광구에 천연가스와 함께 매장 가능성을 언급하나 실제로 탐사하지 않았다. 이곳은 1974년에 체결한 한일 대륙붕 협정에 따라 2028년까지 한일이 공동 관리한다. 역사. 기원. 한반도에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약 70만 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현생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2만 5천 년 전부터 해안과 강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 화석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상시굴과 두루봉동굴, 제천시 점말굴 등에서 현생인류로 추정되는 사람 뼈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빗살무늬 토기인, 무문토기인등 여러 인종의 유입과 주변 세력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명이 발전했다. 다만 초기 구성원들의 이동과 외부 세력 유입의 구체적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한반도 일대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록하였고 《동국통감》에서 그 시기를 기원전 2333년이라 하였다. 날짜는 대종교에서 임의로 음력 10월 3일로 약속하고 개천절이라 불렀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 날을 양력으로 고쳐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고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부여, 옥저, 동예, 진국,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생겨났고,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이어졌으며 이 중 신라가 삼국을 부분적으로 통일하는 한편 북쪽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 10세기 고려가 등장하면서 한민족 단일 국가의 시대를 시작했다. 14세기 조선이 이를 계승했다. 한국의 역사. 한반도의 국가로는 전설적으로 단군이 건국한 단군조선이 있다. 4세기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가 한반도 내에서 대립하였다. 6세기에는 가야제국이 신라 등에 병합되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패권을 다툰 후 당나라와 동맹한 신라는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 고구려왕을 투항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의 최종 목표는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의 문무대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676년 나당 전쟁이 발발 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그후 당나라의 지배력이 쇠퇴함과 동시에 677년 통일신라를 세웠다. 그후 북쪽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 이후 통일신라의 약체로 892년 후삼국시대가 시작된 후, 918년 건국된 고려가 936년 전국을 통일하였다.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몽골 제국을 세웠다. 그 후, 1231년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 저고여가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거란족에게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후 고려는 7차에 걸친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내며, 약 30년간의 장기 항전에 들어갔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약화되었고, 1392년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고려 공양왕을 폐위하고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조선이 성립되었다. 조선(朝鮮)은 계속되는 세도정치로 왕족들은 힘을 쓰지 못했고, 왕권도 매우 약해져 있었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교를 하지도 보지도 않았고, 눈과 귀를 닫는다. 대원군은 1866년(고종 3)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당시 우리나라에 잠입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였다. 잇따라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단호한 쇄국정책을 천명하였다. 19세기 근대화의 물결이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가운데 조선은 점차 약화해 갔으며, 19세기 중반부터 서구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을 위한 3·1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대체로 각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장(시장)의 개장일에 맞추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4월 11일,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군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으로 여러 인사들이 빠져나가면서 국무령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였다. 이후 김구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 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세력과 김성숙, 유림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미국 OSS와도 연계하여 1945년 9월을 기한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이 3·1운동에 따라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한국의 군정기.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에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구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여운형,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임정정통론'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조선인민공화국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인공 내각은 해산되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를 놓고 한반도 내에는 좌, 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미소공위가 개최되었으나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결렬되었다. 이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개시하여 미소공위를 재개하고자 하였지만, 한민당과 남로당 등 좌우익세력간에 불참으로 중도파 세력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에 여운형 암살 등 해방정국의 잇단 사건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미군정청이 1946년 7월 서울지역 1만여 명에게 실시한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고 밝힌 상황에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벌인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과 사회주의적인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과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되어버리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했고, 총회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구 등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 등을 추진하여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정읍 발언) 사실상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한 모양새가 되었다. 1948년 1월부터 한반도의 정국은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 협상을 통한 정부 수립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분단은 사실상 불가피하게 되었다. 5월 10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제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구성되었다. 7월 22일에는 국회의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그러한'은 대한민국이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주민들 대다수의 자유 의사에 따라 수립되었고, (분단상태를 고려할 때)선거가 가능했던 그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임을 뜻한다. 이미 48년 9월 9일에 한반도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음에 미루어 그 해 12월의 결의는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만든 새 교육과정에서 교과서 집필진이 학회에 자문한 결과 "1948년 12월 유엔 결의에서 대한민국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됐으며, 남북한이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했기 때문에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 명시하는 것은 시비의 소지가 있다"고 하면서 '유일한 합법정부는 1948년 정부에 한정'되어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합법 정부'를 제외했으나 정부 측의 요구로 포함시켰는데 2019년 5월 2일 공개된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 시안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이 빠졌다. 6.25 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남침을 기도하여 공산주의화 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준비하였다.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에서 지원받은 수십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이 전혀 없었고 야포와 전투기 등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총만 가진 거의 맨 몸의 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군이 침략한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무장한 인민군을 상대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한국군은 결국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배수진으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학도병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갔으며 많은 사상자와 인명피해가 초래되었다. 하지만 유엔군이 파병으로 지원하고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해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유엔 내부에서 맺어진 새로운 결의로 유엔군의 목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완전히 공략하려는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참전하고 소련이 군사를 지원하여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이후 38도선 인근 중부 지방에서 교착을 거듭하던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오전 10시에 체결된 후에 효력이 발생한 22시에 완전히 전투가 종료되고 군사 분계선이 형성되면서 오늘날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으로 20만 명이 과부가 되었고 10만여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1천만여 명 이상이 이산 가족 신세가 되었다. 한반도 내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된 탓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가 도래하여 한국과 북한의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국의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분단한 지 70여년에 이르고 있다. 제1·2공화국. 한국 전쟁이 휴전 협정을 맺은 후 19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던 시기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고위 관료는 부패해 국민의 불만을 샀다. 의원 내각제였던 제1대 내각에서 재선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승만은 이범석과 장택상을 비롯한 측근들과 족청계,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부산정치파동(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을 일으키고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택상 등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이기붕 계열을 등용한다. 이기붕 계열은 또한 친 자유당 성향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을 활용하여 야당 의원의 집회를 탄압, 제1공화국 후반기는 혼란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부통령 장면의 피격 사건(1958)과 조봉암 사법살인(1959) 등의 조치까지 겸해졌고 언론의 자유마저 통제당했다. 1959년 곳곳에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집회가 시작, 1960년 3월 15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4·19 혁명이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 전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제1공화국은 붕괴했다.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 내각을 거쳐 장면을 수상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제2공화국은 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구성했고, 언론 자유와 혁신계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제2공화국 당시 각계 각층의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도 했는데, 집권 여당인 민주당 사이에서 신파와 구파가 나뉘어버려서 개혁 의지가 미약한 탓에 이러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데모가 연이어 벌어졌고, 장면이 단호한 조치를 계획하던 중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쿠데타로 내각 각료들이 체포되면서 장면 내각은 1년 남짓밖에 집권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뒤 윤보선은 형식적인 민정을 실시하였으나 군사정변 세력에게 구정치인 정화법(1962)으로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사퇴(1962.3.22)함으로써 1962년 3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5·16 군사정변 세력이 설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법권·행정권·입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제3·4공화국. 1963년 12월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박정희 등에 의해 제3공화국이 수립됐다. 야당 후보인 윤보선과의 두 차례의 선거전에서 10만 표 안팎의 근소한 차로 집권하였다. 재임 초반 시위를 무력 진압하며 강행했다. 5.16부터 1979년까지 한국은 여러 차례 외환위기와 부도위기를 겪었고, 마이너스 성장만해도 1963년과 1964년의 2분기, 1961년, 1962년, 1965년, 1966년, 1979년의 각각 3분기, 1970년과 1978년 1분기, 1967년과 1968년의 4분기 등 1961~1979 박정희 집권 74분기 중 14분기(19%)에 이르렀으며, 1960년대 개발 독재의 일환으로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발전과 베트남 전쟁, 한독근로자채용협정등을 통한 외화 획득으로 경제 발전을 꾀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과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저임금 노동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도 남겼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1971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같은 해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나는 선전을 이룬 데다가 제1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성장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돌풍으로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해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로 수정하는가 하면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노동운동계, 재야와 학생 세력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잇따른 긴급조치를 통해 억눌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및 노동운동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미국이 한국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한미 간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 제2차 석유 파동까지 겪으면서 경제위기와 내부 혼란이 크게 가중되었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과 YH 사건, 부마 항쟁 등의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권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되면서(10·26 사건) 박정희의 17년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10·26 사건 이후 유신 체제 하에서 국무총리 최규하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다. 유신 헌법 폐지를 통해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기,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일부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고, 1979년 12월과 1980년 2월, 1980년 4월에 대사면령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이들이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고, 급기야 최규하 대통령에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0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최규하 정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제5공화국.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세로 떠올랐고, 민주화 일정을 지체시켰다. 1980년 초부터 국회와 정부는 유신 헌법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고, 대학생과 재야 세력도 정치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요구를 바탕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확대하면서,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 금지", "보도검열 강화", "휴교령" 등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폐쇄했다. (5.17 쿠데타)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 및 특전여단을 투입해 유혈진압을 하고,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국을 주도했다.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제5공화국은 경제 안정에 매진하는 한편, 1981년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유치하기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내걸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으로 임기 중반부터 3저호황으로 인한 수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성립하고 민주주의 탄압 및 고문·정치사찰·용공조작으로 대변되는 인권 유린행위를 자행했으며, 정경유착·부정축재·친인척 비리가 빈발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치사하는 사건이 터지자 정부 퇴진과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에 정부는 호헌조치를 취하며 "개헌할 의도가 없음"을 내세웠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빗발쳐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총재 노태우를 통해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88년 2월 취임식과 함께 제5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와 문민정부.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여야가 합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야권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나왔다. 민주정의당은 불리한 여론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조치를 단행(국정감사)하고 민간인들을 정계에 대폭 고용하기도 했다(과거와의 단절). 외교 면에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1991년 9월 유엔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또한 1992년에는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군인 출신이었고, 12·12 사태를 주도하고 5공 성립 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도 정경유착은 물론 비자금 형성·민간인 사찰·고문 등 5공의 파쇼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는 결국 민주화 시위(1991) 등으로 이어졌고, 노태우는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으며 끝내 김영삼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막을 내렸다. 1992년 치러진 제14대 대선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 1993년에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은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윤보선 정부 이후 30여년만에 민간인 정부로 회귀했다. 문민정부는 하나회 군부 숙청, 금융실명제, 표현의 자유 허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부활, OECD 가입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군사 정변을 주도할 위험이 있는 군 내 사조직을 숙청하고, 12.12 관련자 및 5.18 관련 정치군인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기 괌 추락 사고, 우암상가아파트,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 사회적인 혼란을 겪기도 했다. 또한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준비없는 대규모 개방을 강행했고, 외환관리에 실패해 IMF 구제금융사건을 초래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높아진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야당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IMF 위기의 극복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자유주의' 경제정책 추진과 금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2001년까지 외채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으며, 국제 기준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체제를 도입해 기업의 체질 개선 등을 단행했다. 국민의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서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였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억 원에 달하는 현금을 북한 정권에게 불법 송금했다는 혐의가 사후 드러나 큰 비판을 받았다. 대북유화책을 추진했지만 연평해전, 핵실험 등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이 계속되어 햇볕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또한,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은 승자 독식의 기형적 사회구조를 구축했다는 비판이 있으며, 지나친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등으로 대량의 실업자를 양산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2004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겪으며 위기를 맞았으나, 여론의 반발과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으로 마무리되었다. 같은해 열린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역풍을 맞은 야당을 누르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국정 탄력을 받았다. 참여정부는 권위주의 타파, 균형 발전 등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을 수립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설치를 통한 과거사 정리, 세종특별자치시 추진으로 균형 발전을 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보수진영의 반발이라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적 개혁과 대통령의 과격한 발언 등으로 보수층과 중도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 씨의 측근 비리 등 각종 악재로 인하여 임기 중반에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하였다. 진보진영에서 선출된 대통령이었지만 신자유주의와 친미 외교정책을 펼치는 등, 진영논리에 따른 정부가 아닌 보수, 진보를 넘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보수진영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이명박 정부는 선진화 원년과 747 공약을 내세워 경제 활성화를 추구하였으나,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위기와, 한미 FTA 체결 과정에서 광우병소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동시에 겪었다. 고환율정책으로 금융위기의 안정적 극복을 이뤄냈으며,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 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로 대표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의 비리 의혹, 국정원 여론조작과 미디어법 개정으로 인한 언론 장악 논란, 세종시 수정안 등 재임 기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12년 제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으로 출범부터 논란에 휩싸였고, 이어 잇따른 인사 실패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창조경제와 노동개혁, 국정교과서 추진, 한일 위안부 합의 등 여러 정책에 대해 사회적 비판과 갈등을 겪었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에 처하면서 정치적 난관에 처한 박근혜 정부는, 같은해 10월 민간인 신분인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폭로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고,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키며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확립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된 대통령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 2017년 전임 대통령의 파면으로 조기에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진보진영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문재인 정부는 탈권위주의 정책 및 적폐 청산 노선으로 임기 초 높은 지지율을 누리는 한편으로, 코리아 패싱과 한반도 긴장 고조로 인한 외교적 난관 속에서도 경색된 남북관계를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맞물려 전개된 남북관계 화해 국면에 따라 판문점 회담과 평양 회담을 여는 동시에 북미회담을 통한 비핵화 협상 주선에 힘썼다. 이와 더불어 2020년 코로나19 유행의 방역에서 선방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고, 국정농단의 여파로 인한 야당의 입지 약화와 함께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에서 여당의 유례없는 압도적 승리라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우며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하고 탈원전 추구, 가상화폐 규제 등의 경제정책을 펼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찬반론을 불러일으켰으며, 계속되는 경기불황과 부동산 대책 실패로 비판 여론을 받았다. 또 2017년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과 2018년 여권 인사의 미투 운동 연루, 2019년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논란 등 정부와 여당의 도덕성 논란이 부정적 평가에 일조함과 동시에, 2018년 남북 단일팀 추진과 대북 석탄 밀수 사건,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한 남북관계 경색 등에 있어서도 반발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는 대통령제를 바탕으로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혼합된 모습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무총리가 존재하며 국회의원이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의 직을 겸직할 수 있는 사실은 이에 기인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입법권을 갖는 대한민국 국회와 행정권을 갖는 대한민국 행정부, 사법권을 갖는 대한민국 법원으로 구성되며 이는 권력기관의 상호 견제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고 제헌 국회에 의해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제정되었다. 동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제 1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호로서 대한민국 제헌 헌법은 대한민국 제헌 국회에 의해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다. 이후 수차례의 군사 독재 및 민주화 운동을 수반하는 정치적 변화로 9차례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현행 헌법은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서, 5년 단임제의 대통령 직선제를 근간으로 삼권 분립을 실현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정당. 대한민국에서는 헌법 제8조에 의해 자유롭게 정당을 결성할 수 있으며, 복수정당제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의 정당 정치는 비교적 정당의 수명이 짧고 정당 간 합당이나 분당이 자주 일어나는 특징이 있다. 최근에 21대 국회가 2020년 5월 30일 개원하였다. 21대 국회는 문재인 정부 여당이자 현재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제1야당으로 더불어민주당과 동일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국민의힘이 있다. 비교섭단체 정당으로는 정의당, 국민의당, 기본소득당, 시대전환이 있다. 교섭단체는 국회의원 20인 이상이 모여 결성하는 단체로, 20석 이상을 확보한 정당은 교섭단체의 지위에 오른다. 국회에 의석이 없는 정당은 노동당, 녹색당, 민생당, 진보당 등이 있다. 정부. 입법부. 입법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는 현재 총 300석의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부였던 임시의정원을 기원으로 두고 있으며, 1948년 5월 10일 구성된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이다. 매년 1회의 정기회(100일 이내)와 30일 이내의 임시회가 열리며, 회기 중에 국회는 법의 의결권과 예산안의 심사, 국정 감사와 헌법에 명시된 기관장의 임명 동의 및 조약의 체결 및 비준 동의 등의 활동을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임기 중 의사진행과 관한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과 회기 중 불체포특권을 가진다. 공직선거법에 따른 피선거권을 충족한 인물로, 국회의원 총선거나 재선거 및 보궐선거, 혹은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비례대표 의석승계 결정에 따라 선출된다.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부의장은 국회의원 중에서 본회의의 무기명 투표를 거쳐 선출되며, 그 임기는 국회 회기의 절반에 해당되는 2년이다. 행정부. 대한민국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여 입법부에서 법률로써 정한 사안들을 실행한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무회의의 조력을 받아 업무를 처리한다. 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한 법률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한 번 거부한 법률을 국회가 다시 통과시킨다면(단,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 법률은 그대로 통과된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3인과 대법관 등을 임명할 수 있다.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국군을 통수하며 공무원 임명을 할 수 있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방대한 권한을 행사한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 내각을 통할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 국무총리를 두고 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되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국무총리는 내각의 구성원을 대통령에게 임명을 제청하며 내각을 통솔한다. 대통령의 유고 시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며 국무총리가 유고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순으로 권한을 대행한다. 사법부.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헌법 제5장에 따른 법원과 헌법 제6장에 따른 헌법재판소로 관할권에 따라 이원화되어 있다. 법원은 헌법재판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 대해 포괄적인 관할권을 가지며, 대법원을 최고 법원으로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지니는 최고 법원이다. 대다수의 현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일반법원은 재판에 있어서 공정한 심판을 위해 널리 3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1조 제2항에 따라 대법원이 최고 법원으로서 상고심을 관할하며, 그 밑에 법원조직법 제3편에 따라 민사·형사 등 일반분야사건을 폭넓게 관할하는 일반법원으로서 고등법원, 지방법원 및 그 지원과, 지적재산권·가사·행정 등 전문분야사건을 관할하는 전문법원으로서 특허법원, 가정법원, 행정법원, 회생법원이 설치되어 있다. 한편 헌법 제110조 제1항에 따른 특별법원으로서 군사법원법에 따라 각 국군 부대에 설치된 군사법원이 군사재판을 할 수 있으나, 그 상고심(최종심급)은 대법원이 관할한다. 헌법 제104조에 따라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에 따라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법관의 수는 헌법이 아닌 법원조직법 제4조 제2항에 따라 2022년 기준 14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헌법 제105조에 따라 대법원장 및 대법관의 임기는 6년으로 규정되어 있고, 대법원장은 중임이 불가능하다. 사법권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불의한 역사의 반성에서 1988년 헌법을 개정하여 사법권이 법원에 있는 원칙의 예외로 설치한 헌법재판소에서는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판가름하는 위헌법률심판, 대통령을 비롯한 공무원의 탄핵 소추를 심사하는 탄핵심판, 위헌 정당의 해산 여부를 심사하는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을 등 헌법재판에 관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은 총 9명이며,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헌법 제112조에 따라 헌법재판소장을 포함하는 재판관의 임기는 모두 6년이다. 현행 헌법은 사법부를 이루는 법원과 헌법재판소에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 제103조, 제106조, 제112조를 통해 법관(대법관) 및 재판관의 신분보장을 헌법상 명시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각각 법원행정처와 헌법재판소사무처를 통해 자체적으로 예산과 인사 등 사법행정을 구현하고 있어 외부로부터의 영향력을 적게 받고 있다. 법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관할에 따라 여러 개의 최고 법원을 두는 독일, 프랑스처럼 대륙법계에 가까운 형태로 조직되어 있으며, 불고불리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로부터 소(訴)가 제기된 경우에만 재판을 할 수 있다. 다만 재판의 진행방식에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사건에서 직권주의와 당사자주의가 혼재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다양한 현대적 선진 사법제도의 요소를 다수 도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관예우', '유전무죄' 등 표현으로 상징되는 재판의 공정성 및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일반인들의 불신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위에 대한 분쟁. 대한민국은 1919년 3.1 운동에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건국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 거주자들의 자유 선거를 통하여 1948년 공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갔다.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를 통해 유엔으로부터 한국 대다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유엔이 감시 가능한 지역(38선 이남 지역)에서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탄생한 한국 유일한 정부로서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한 한반도 남반부와 부속도서에서만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이 있다. 1991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에 UN에 가입하였다. 한편 국제법 상의 관례와 통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하였다 하여, 가맹국들 상호 간에도 당연히 그 국가성이 승인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러한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시하여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성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어 국가 성립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인정되는 지역은 '한반도 남반부와 부속도서'이었다는 점과 이후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등에 의하여 상호 공존을 약속하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별개의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되는 일부 국제법규와 대한민국 헌법의 시각이 대치되어 문제점이 존재한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이북5도위원회를 설치하고 있다. 외교. 대한민국의 외교에 관한 업무는 외교부가 맡고 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한국 전쟁을 겪은 뒤 적대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햇볕 정책, 곧 대북유화책을 시도했으나 차후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등 대남 도발 행위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연평도 도발, 천안함 폭침, 목함 지뢰 사건 등이 발생함과 동시에 대북 강경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따라 남북 관계가 상대적으로 경색되었다. 대한민국의 외교는 한국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과는 1965년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현재 유엔 회원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리아, 쿠바 등 3개국과 외교 관계가 없으며, 이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외에 서사하라, 중화민국, 팔레스타인, 코소보 등도 외교 관계가 없다. 이 중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수교국이었으나 1992년에 국교가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양국은 양국 수도에 서로 대표부(타이베이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 중에 있고 상호 간의 왕래와 민간교류는 자유롭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대한민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 중에 있다. 과거에는 통상에 관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외교통상부 산하 통상교섭본부를 설치해 운영하였으나,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되었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 이어도 등에 대하여 이웃한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엔과 WTO, OECD, 그리고 G-20의 구성원이며 또한 APEC와 동아시아 정상회의의 창립 가맹국이며, 미국의 주요 비NATO 동맹국(MNNA)이다. 남북 관계.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국가로 승인하지 않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하여 국제법상 교전단체의 지위만을 인정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헌법을 비롯한 국내법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 일체를 대한민국의 고유한 영토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국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반국가단체로 본다. 국민의 정부 당시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물자 교류는 참여정부 말까지 활발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도발 등으로 인해 2013년 금강산 관광 산업, 개성공단까지 중지된 상태이였지만 남북회담을 통해 재가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계속해서 대남 도발, 핵 실험, 미사일 발사 등을 진행함에 따라 다시 중지되었다. 한미 관계.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는 19세기 중반인 1871년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완강히 버티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 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풀고 세계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자 미국은 1882년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미국은 특사를 파견하여 축하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 뒤부터 뒤틀어졌는데 당시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엘리스 루스벨트가 미국을 대표하여 대한제국에 방문했을 때 고종의 환대에도 없는 사람 취급하였고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황후 무덤 앞의 말 조각상에서 앉아 사진을 찍는 무례함을 범했기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이래로 미국의 대량 원조를 통해 매우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왔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휴전 이후에도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에 의한 군사적 보호속에서 매우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제5공화국 때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도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서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등으로 일부 반미 감정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문서 공개 이후 한동안 상당한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은 촛불 시위로 비화되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을 겪었다. 한편 이명박 정부가 출범된 이후 한미 관계가 상당히 강화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군사, 외교, 경제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한일 관계. 양국은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양국 간에 역사 인식, 영토 등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숭배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나 독도 문제, 동해 명칭 문제, 일본군 위안부도 민감한 문제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과 아베 신조 내각 당시에는 한일 셔틀외교가 중단되는 등 양국 관계가 멀어졌으나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일본 후쿠다 야스오·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출범과 한일 관계를 보다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관계가 개선과 악화를 반복하다가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취임하면서 한일 관계가 강화되었다. 2002년에는 양국이 공동 주관하여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한류 열풍"이 불어 양국 간 교류가 많이 증진되었다. 그러나 역사·영토(독도) 문제 등 여러 부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강화함으로써 양국 관계도 점차 경직되어가고 있다. 한중 관계.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의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북진하여 평양을 넘어 압록강까지 도달했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하여 한국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하였다. 그 후에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 관계가 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는 1992년까지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1992년 공식 수교하면서, 기존의 중화민국과 단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여러 문제가 있는 와중에도 양국은 외교 관계를 이루고 있다. 2016년 주한 미군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THAAD)' 배치 추진과 미・중 무역 갈등 문제 등 국제 사회에서의 충돌로 인하여 한중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한러 관계. 러시아는 구 소비에트 연방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갈등이었던 동・서 냉전으로 인해 대한민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탈냉전 이후에 한소수교가 199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와 경제, 문화, 우주기술협력, 군사(불곰사업) 등에서 밀접한 관계를 추진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둔도 문제를 포함해서 연해주 등 잠재된 영토 문제가 아직 남아있지만 남북분단으로 인해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위성인 나로호 발사도 러시아의 협조 하에 발사했다. 현재 12만 5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아에로플로트 등 여러 항공사가 매일 운항하고 있다. 국방.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립으로 인해 일찍부터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으며 1990년대까지는 양적 위주의 성장을 추진했으나,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무기 기술의 개발과 발달로 인해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국군(國軍)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다. 2020년 12월 기준 병력 규모는 현역이 약 555,000명, 대한민국 예비군은 약 3,100,000명이다. 세계에서 11번째로 탄도미사일을 독자 개발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여군은 기갑, 포병, 잠수함 병과에는 진출할 수 없었으나 2014년 9월 창군이래 최초 여군 포병장교가 탄생하였고 기갑병과에도 여군이 진출함에 따라 다양한 병과에서 여군들이 활약하고 있다. 육군. 대한민국 육군은 병력 약 520,000명, 전차 약 2,300대, 장갑차 약 2,500대, 견인포/자주포/다연장 로켓포 약 5,200문, 유도무기 30기, 헬기 600기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전차 K2 전차(K2 흑표, Black Panther)를 개발했다. K-2 전차는 2014년 대한민국 육군에 정식으로 배치된다. K-21 전투장갑차는 2012년경 전력화하였고 복합형 소총인 K-11 소총을 운용하고 있다. 2012년 1월 육군에는 현재 39개 사단(전방 기계화보병사단 6개, 그 외 상비 사단 16개, 향토 방위 12개, 동원 예비군 5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해군 예하 해병대 2개 사단이 있다. 2020년까지 1군사령부와 3군사령부를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하며, 5개의 지역군단(수도방위사령부도 지역군단으로 함)과 2개의 기동군단으로 개편하고, 향토사단 자체는 존치하며, 동원사단은 4개로 줄이고 전 부대를 기계화부대로 편성한다. 병사들의 개인화기 및 개인장비, 피복을 개선시키는 중이다. 전투력 향상을 위해 고글+무릎(팔꿈치)보호대+장갑+방탄복+야간 야시장비+스코프+도트사이트+광학장비를 지급하고 보병장비, 개인장비, 장구류, 군장이 늘어나고 저격소총, 옵션장비 ,사격장, 1인당 교탄증가가 되었다. 소대장이 항공근접지원을 직접 유도할 수 있고 병사들은 무인 항공기를 수시로 띄울 수 있다. 시가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신속대응 훈련과 CQB 훈련과 시가전 훈련을 자주 진행 중이다. 실전 훈련처럼 진행한다. 현대전에 맞추기 위해 육군 전 부대 대대급 현대화가 진행 중이다. 저격수, 정찰 저격수들을 육군 전 부대(소대급)에서 양성 중이다. 저격수 학교를 창설한다. 저격수 규범은 미국 저격수 규범과 똑같은 저격수 교범을 채택하였다. 공군. 대한민국 공군의 장비는 F-15K 59대, KF-16 (Block 52+) 134대와 F-16C/D (Block 52+) (PB형) 35여대, F-4E 80대 (퇴역 중),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 195대, T-103 러시아제 훈련기 IL-103 72대, KT-1 기본 훈련기 105대, KA-1 전선항공통제기/경공격기 20대, T-50 고등 훈련기 60대+98대 생산 확정, T-50B (블랙 이글스) 10대를 보유 중이며, TA-50 전술입문기 (LIFT) 22대를 운용 중이고 KF-16에 버금가는 다목적 전투기인 FA-50 60~120대를 도입 중에 있다. F-4E,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등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있어서 F-5E (타이거 II), KF-5E/F (제공호)는 FA-50 60대로 대체되고, F-4E는 F-35A로 대체되며 T-103 훈련기 72대 역시 기체 노후화로 한국항공우주산업이 개발한 KC-100 나라온으로 대체된다. 수송기는 전략 전술 수송기인 C-130J-30 4대 C-130H 12대, CN-235-220M 18대가 있으며 VIP 수송용으로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보잉 747-400 1대를 비롯해 보잉 737-300 1대, VCN-235 2대, VC-118 1대, BAe-748 2대가 있다. 정찰기로는 호커800기를 개조한 금강정찰기와 백두정찰기, RF-4C 18대, RKF-16 5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으며,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보잉 E-737 피스아이 4대를 운용 중이며 회전익 항공기 (헬기)는 구조.탐색용인 HH-60 페이브호크, HH-47 치누크, 카모프 Ka-32가 있으며 병력 수송용인 벨 205, 212, 412, UH-60 블랙호크 등이 있다. 이외에도 VIP 수송용인 VH-92, VH-60, AS-362 '수퍼퓨마'가 있다. 또한 공군은 국산 헬기인 수리온을 2기 주문하였다. 사병들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소화기 실탄 사격장 및 1인당 실탄사격 훈련의 내실화와 사병들의 개인 장비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공군 전력사업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인 한국형 전투기 사업인 KF-X 사업과 차기 대통령전용기 사업인 VC-X사업, 원격지원전자전기 사업, 스텔스 무인 전투기(UCAV)의 개발 및 사업을 진행 중이며 최근 KC-X 사업의 최종 후보로 에어버스 A330 MRTT가 선정, 4대 구매를 체결하였다. 해군.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8,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 척, 지원함정 20 척, 대잠헬기 및 해상초계기 50 대를 보유하고 있고 차기 군함들을 비롯해 모든 군함들은 선체 전체에 광범위하게 스텔스 설계를 적용하고 레이다 반사율을 줄이기 위해 경사설계를 적용한다. 총 3개 함대와 4개 전단을 두고 있다. 해병대. 대한민국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군 예하에 편성되어 있는 군으로서 국가 전략 기동군으로서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수행한다.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9,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척, 지원함정 20척, 헬기/해상초계기 약 50대, K1A1 전차와 K9 자주포, 상륙돌격장갑차(KAAVP7A1) 등의 기갑 차량, 상륙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초대 지휘관에 신현준 중령이 임명되고,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해군 예하의 국가 전략기동군으로서 상륙 작전을 주임무로 하며, 그 외 김포, 강화, 포항, 경주, 진해, 제주, 도서지역 등 방어, 상륙작전을 하고, 예비군 교육 및 훈련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2014년 기준으로, 2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고, 이외에도 연평도와 진해, 제주도 및 기타 여러 도서 지역들에도 해병 부대들을 주둔시키고 있다. 경제. 개관.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할 때 대한민국은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 체제를 채택하였다. 이를 1988년 헌법 개정에서 ①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로 변경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관료 양성으로 시작된 경제는 4·19 혁명으로 세워진 장면 정부가 기존에 양성된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경제 개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발발로 실행되지 못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경제 개발 계획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경공업 육성을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했다. 1973년 이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발전 정책으로 철강, 전자, 조선 산업 등이 크게 발달하며 수출을 증대 시키고 국가 경제를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 시켰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때에는 3저호황과 중화학공업 과잉 투자 조정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수준의 공업국가로 올라섰다. 1960~80년대 고속 경제 성장으로 한때 중화민국,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혹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로 불렸으며, 1994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성장 촉진 정책으로 누적된 병폐는 1997년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사건을 겪으면서 한계를 노출하게 했고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하고 세계적인 닷컴 버블 경제세 편승하여 2년 만에 상당부분 회복하고 경제위기를 해결했음을 선언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고용 환경을 낳은 고용 유연화에 따른 노동 불안정과 대량 해고, 청년 실직자 문제, 니트족 현상 등의 부작용이 함께 나타났다. 그 후 노무현 정부가 세계적인 거품 경제에 따른 활황 국면에서 꾸준한 경제 개혁을 통해 2007년까지 매년 백억 달러 이상의 경상흑자와 평균 4%대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명목 국민소득 2만 달러, 실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를 이루어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국제금융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2007년 골드만삭스는 대한민국이 2050년, 브릭스+넥스트 일레븐+G7 1인당 명목 GDP가 90,294 달러가 되어 91,683달러인 미국에 이어 주요 경제국 중 2위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PPP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3만 6,601달러이며 이것은 세계 29위 수준이다. 대한민국은 자본력이 부족한 환경에 따라 독특한 형태의 경제발전을 진행시켜 왔는데, 박정희 당시 계획경제체제를 시행, 수출을 통한 성장을 목적으로, 자본 및 기술적 기반이 약한 중소기업보다는 재벌기업이 주류인 대기업을 축으로 하는 기업경제구조를 세웠으며, 천연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가공무역을 핵심으로 삼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수출과 수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며, 현재 주요 무역 상대국은 중국, 미국, 베트남, 일본, 홍콩, 대만, 싱가포르, 인도, 호주,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러시아, 말레이시아 등이다.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을 비롯하여 1983년부터 세계 조선 1위를 지켜오고 있는 현대, 백색가전의 LG, 세계 철강 4위인 포스코 등의 여러 기업 집단을 가지고 있으며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17개가 대한민국 기업이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상장기업에는 개인지배주주가 존재한다. 반면에 기업발전에 따른 외부자본조달로 지배주주의 지분율 하락이 불가피한 가운데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간 이해상충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규모기업집단의 경우 지배구조가 계열사간 피라미드 및 순환식 소유구조에 의해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는 현금권과 통제권 간의 상당한 괴리를 가져와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경영권 행사에 따른 사적 경영권 혜택이 과도하여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경영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비효율적 산업구조는 대한민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내의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자 기업들은 임금이 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에 진출해있는 대한민국 기업이 많으며,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 최근에 중앙유럽 국가들이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여 관세가 철폐되면서 중앙유럽으로 진출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성공단에 입주하는 기업도 늘어났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도발로 인한 남북 관계 경색으로 가동이 전면 중단된 상태이다. 부채. 대한민국의 가계부채는 1999년 ~ 2001년 급증, 2002년 ~ 2004년 감소, 다시 2005년 ~ 2007년까지 급증,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로 그 증가세가 지속되어 2011년 처음으로 가구당 가계부채가 5000만원을 넘어섰다. 이는 자산 증가보다 부채 증가가 더 빨라짐에 따라 빚을 갚을 능력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소득이 적을수록 부채상환 능력이 크게 떨어졌는데, 2010년 소득 하위 20%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2009년 보다 68.2% 급증한 279.5%에 이르러 소득의 3배에 달하였다. 이는 소득이 적은 20, 30대 가구와 저소득층의 재무건전성 악화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저축은행들이 건설업체의 잇따른 부도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부실해지면서 금리가 높은 가계대출 비중을 늘림과 더불어 전월세값을 포함한 물가의 급등과 교육비 지출에 따른 ‘생계형 대출’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축소된 가계부채 상환 능력에 대하여 이명박 정부는 고소득층의 가계 빚이 가계부채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빚을 갚을 능력이 양호하며 자산불평등도 외국에 비해 낮다는 것을 이유로 당장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낮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 30대와 저소득층의 가계부실이 본격화되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가계부채 대란'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부채와 공기업의 공공부분 부채는 2011년 3분기 말 한국은행이 파악한 것만 789조 3600억 원으로 1년 만에 9.2% 급증했으며 이중 공기업의 부채는 1년 만에 14.4%나 급증한 363조 8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공기업 부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정부가 보금자리 주택이나 4대강 공사 등 국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사채 발행 등으로 마련한 결과로 보고있다. 소득 양극화 지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6년 2.12%, 2008년 2.05%, 2010년 0.89%로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조금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9년 5.65%, 2010년 2.73%으로 계속 높게 나타났다. 공적연금 지출은 30개국 중 29위,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30개국 중 30위로 나타났다. 경제중심도시는 서울및 광역시이며 행정도시는 세종특별자치시이다. 산업. 농업. 1960년대까지의 대한민국의 주요 산업은 농업에 의존하였다. 1963년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공업화,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농업인구는 격감하여 1970년 1천4백42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44.7%였고, 2010년 기준 한국의 농업인구는 3백2만1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와 함께 농업인구의 고령화까지 진행되면서 나중에 식량위기가 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공업. 대한민국의 공업은 중급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산업들에 특화되었고, 주요 산업으로는 조선, 전자, 자동차, 반도체 등이 있다. 특히 조선 산업은 2008년 기준 세계 전체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전자 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있다. 자동차 생산력은 세계 5위이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로봇, 친환경 에너지 등의 미래형 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 또한 늘리고 있다. 반면, 국가경제 발전수준에 비해 서비스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며, 발달수준도 미흡한 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는 삼성, 현대자동차와 같은 재벌 대기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한국 공업의 역사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대부터 제철, 제련 공업이 발달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이 자발적으로 확산되었고 1920년대에는 김성수는 자본을 투자하여 경성방직, 경성직류 등 방직과 면 공업을 육성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 안재홍, 김성수 등에 의해 물산 장려 운동이 진행되어 국산 공업품을 활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한국의 공업 수준은 미미했으나, 1960년대 이후 출범한 제3공화국 정권은 경제성장의 기반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60년대에는 수공업, 수제품 공업, 기술, 근로자 파견 위주로 진행되었고, 식료품과 담배, 섬유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입 대체 산업이 발달하였다. 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 제조업, 수출 위주의 공업정책이 진행되었다. 1980년대 이르러 섬유, 의류 산업뿐 아니라 전자 제품, 건설,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동반 성장. 대한민국의 골목 상권은 정부가 개입, 규제하지 않는 시장 경제를 채택하였고 군사정권 몰락 이후 이러한 시장 경제 체제가 대폭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형 슈퍼마켓(SSM), 빵집 등, 프랜차이즈와 대기업의 다양한 분야 시장 독과점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10년 동반성장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중소기업적합업종을 선정, 대통령이 직접 언급 하는 등 제재가 가해지고 있다. 이에 일부 대기업이 속속 사업에서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기업형 슈퍼마켓 기업은 중소 업체를 사들이는 등 여전히 많은 대기업은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교통. 육상 교통. 도로. 대한민국에는 우측 통행을 하며, 자동차 운전석은 왼쪽에 있다. 4,000km에 달하는 31개의 고속도로 및 국도, 지방도 등의 도로가 있어 대한민국의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는 AH1 노선의 일부이며 국도 제7호선은 AH6 노선의 일부이다. 버스. 전국적으로 버스의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1462만명이다. 과거에는 현금과 함께 회수권과 토큰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지역이 대부분이며 현금도 대부분 사용 가능하나 환승 혜택이 없다. 또한 교통카드를 통한 환승 할인 혜택 등으로 사용자를 유도하는 중이다. 또한 이를 통한 도시철도와의 연계를 목적으로 수도권의 버스 노선 체계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었고 수도권 통합요금제가 수립되게 되었다. 현재 버스 체계는 크게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로 나눌수 있으며 시내버스 특정 지역의 면허에 귀속된다. 또한 비교적 작은 지역에서의 운행을 위한 마을버스도 부산, 서울, 경기도 등에서 운행되는 중이다. 시내버스의 경우 시계를 넘어서면 시계 추가 요금이 부과되며 서울, 경기도, 인천의 시내버스는 거리에 따른 추가 요금이 부과된다. 시외버스는 시외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정거장에서 주로 승하차가 이루어지며 대부분 교통카드를 사용할 수 없지만 가끔씩 사용 가능한 노선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버스 회사 중에서는 KD그룹이 가장 규모가 크며 대한민국내 여객용 버스의 10%를 소유하고 있으며 경기도 노선의 절반을 관리한다. 또한 현재 자가용 이용자들을 대중교통으로 유도하기 위해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장애인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자치 단체들이 생기고 있으며 수도권의 도심 지역의 혼란이 극심한 대한민국의 상황에 걸맞은 굴절버스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 도입하였으나 대부분 비용 문제 등으로 취소되었다. 철도. 대한민국의 철도 및 광역전철의 총 연장 길이는 3,000km에 달한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철도시설은 1963년 9월 1일 교통부 산하에 철도청을 신설하여 이때부터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였으나 2005년에는 기업체로 전환하여, 공기업의 형태인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국유 철도를 관리하고 있다. 또 2016년 12월에는 한국철도공사가 자본을 출자한 민간기업 SR에서 운행하는 수서고속철도가 개통되며 철도경쟁시대가 도래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철도선에는 경부선, 호남선, 충북선, 경전선, 장항선, 전라선, 경춘선, 중앙선 등이 있다. 특히 경의선 철도는 평부선·평의선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수도권과 동남권,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 등에서 운행되고 있다. 시내를 운행하는 도시철도를 일컬어 '지하철' 또는 '전철'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개통된 수도권 지역은 1~9호선을 비롯하여 총 23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985년 개통된 두 번째로 큰 부산 도시철도는 총 길이가 100km를 상회하며, 6개 노선이 운행된다. 이 외에도 대구에는 3개 노선, 광주와 대전에는 1개 노선이 운영되는 등 일부 광역시를 중심으로 도시철도가 마련되었다. 요금은 지자체마다 다르나, 대부분의 노선에서 복지 정책으로 65세 이상의 노인과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무임으로 승차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대체로 운행 시간이 정확하고 위생환경과 전반적인 이용이 쾌적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나 실내먼지 오염농도가 높고, 출퇴근 시간에 사용자가 많은 일부 역에서 혼란이 빚어지는 등 개선점도 지적된다. 또한, 화재 확산 방지를 위하여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이후 열차의 내부 자재를 불연성 재질로 제작하고 있으며, 방독면이나 소화기 등도 역사와 차내에 비치되어 있다. 선로 추락 사고나 자살 등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으로 전국의 모든 도시철도 역에 승강장 안전문이 설치되었다. 항공 교통.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선 공항이 대한민국 내외의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민영으로 운항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1988년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최근에는 진에어, 에어부산 등 여러 저가항공사도 운행되고 있다. 해상 교통.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사회. 2010년 10월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주민등록상 5000만 명을 돌파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자동으로 건강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되며 국가가 피부양자로 지정된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은 무상의무교육이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 국민의 대부분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민족이다. 고대부터 중국 대륙 등지로부터의 인구 유입도 잦았으나 그들도 같은 민족으로 융화되었다. 다만 1990년대 이후 중국,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국가에서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다민족적인 요소 또한 증가하고 있다. 2018년 통계청 기준 인구는 총 51,629,512명이다. 민족구성을 보면 한국인 49,977,951명(96.8%), 중국인 101만2000명(2.5%) , 베트남인 169,177명(0.33%), 태국인 151,104명(0.3%), 미국인 66,003명(0.13%), 우즈베키스탄인 57,998명(0.11%), 필리핀인 47,532명(0.09%), 캄보디아인 45,144명(0.087%), 인도네시아인 38,890명(0.075%), 네팔인 37,346명(0.072%), 몽골인 32,704명(0.063%), 미얀마인 25,874명(0.05%), 카자흐스탄인 25,850명(0.05%), 스리랑카인 24,727명(0.047%), 일본인 18,801명(0.036%), 러시아인 18,615명(0.036%), 캐나다인 13,602명(0.026%), 방글라데시인 13,555명(0.026%), 파키스탄인 10,550명(0.02%) 등이 있다. 사회적 소수자. 노동자. 2016년 8월 기준 전체 대한민국의 임금노동자는 19,627,000명으로 그 가운데 2,664,000명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으로 추산됐다고 통계청은 전했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6년 전국 노조 조직현황'에 따르면 국내 전체 노조 조직률은 전년보다 0.1%포인트 오른 10.3%로 집계됐다. 노조 조합원 수는 196만6681명으로 전년보다 2만8136명(1.5%) 증가했다. 이 수치는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며 통계에서 빠진 수치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연맹체로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등이 있다. 성소수자. 대한민국에서는 수구,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계에서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등이 존재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홍석천, 하리수, 이시연 등의 등장 이전에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따돌림, 학교 폭력에 노출되거나 취업 등에 불이익 등을 받아왔다. 성소수자들은 1992년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 성소수자 단체 초동회가 처음 결성되고 1년 뒤에는 남자 동성애자인 게이, 트랜스젠더 모임인 친구사이와 레즈비언 단체인 끼리끼리로 분리되었다. 1997년에는 대학생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이 결성되고 이듬해 동성애자인권연대로 명칭 변경, 2015년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로 명칭 변경하였다. 1998년 5월 17일에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 오세인이 1997년 자신이 게이임을 가족에게 밝혔다가 추방당한 후, 활동하던 단체 사무실에서 자살하였고, 2003년 4월 26일에는 동성애자를 악마, 사탄 등으로 비판하는 개신교계의 공격과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 단어, 음란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 등 성소수자 혐오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는 시인 겸 작가 육우당이 끝내 자살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2000년 이후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한 홍석천을 시작으로 트랜스젠더인 하리수, 이시연 등의 공개적 활동 등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이 사회적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부 단체와 일부 사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성소수자들의 활동을 지지, 성소수자 문화제 개최 등의 행사가 본격 등장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내 대표적인 성소수자 인권단체 연맹체로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무지개행동)이 있다. 한편, 보수 기독교단체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되면 동성애자를 욕해도 처벌받는다거나 동성애자 부부에 대해 주례를 거부한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며 제17대 국회에서부터 대한민국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를 예배나 각종 집회를 통해 선동하였고 또, 자유한국당 안상수 의원은 2019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정한 차별금지 대상에서 성적 취향을 제외하자"는 개정안을 발의하며 논란을 낳았다. 여성.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에서의 여성의 활약이 미미하다고 분석되는데, 2017년 이코노미스트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의 고위직 여성 비율은 10.5%, 기업 이사회 내 여성 임원 비율은 2.4%로 나타나 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국회 내 여성 비율은 17%로 이는 OECD 평균(28.2%)보다 낮은 수치다. 근 십여 년간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이 외국인 임원과 여성 관리자를 뽑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몇 년도 버티지 못했다. 2010년 SK의 첫 외국인 여성 임원(2008~2010년)이었던 린다 마이어스는 "한국 기업은 다양성 문제에서 너무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리다"고 평가했다. 이주민. 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아랍, 독립국가연합 등을 비롯한 세계 여러지역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한국인이 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이주가정"이라고 부른다. 특히 농촌 지역 기준 결혼 등록건수의 50%에 해당하는 1만여 건 정도가 국제결혼으로 등록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 남아선호사상이 잔존하였으며, 1970년대의 박정희 정부의 "둘만 낳자"는 가족 계획과 1980년대 전두환 정부의 "하나 낳아 알뜰살뜰" 등의 가족 계획으로 여자 아이에 대한 낙태 현상 등으로 1970년~1990년대 초반 출생자들 사이에서는 남녀 간의 성 비율이 깨져 여성에 비교하여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은 현상이 도래하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농촌 기피 현상으로 일부 농촌 지역 노총각들이 결혼, 연애가 어려운 것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증가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외국에서 배우자를 찾는 농촌 총각들이 증가하였다. 이주노동자는 1990년대 이후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1970년대 이후 고졸이던 평균 학력이 1995년 고교평준화와 학력고사 등의 폐지 이후 대졸 내지는 초대졸로 변화하였다. 그에 따라 청년층이 "3D 업종" 또는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3D 업종과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종 외에도 중소기업과 일부 공장 등에 대한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취업 비자를 받고 입국한 산업연수생과 불법적으로 들어온 불법 체류자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이주노동자라 하면 이들 둘을 통틀어 가리킨다. 201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이주노동자 수는 55만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일각에서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의 비율은 10% 대를 넘지 않고 있다. 난민. 대한민국 내 난민의 대부분은 경제적 곤란 등의 이유로 북측에서 나온 탈북자로, 정부에서는 이들을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한 상징적인 영토 규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영토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의 집단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영역으로 들어온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서 국적 부여, 생활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정치적 난민을 인정하기 시작하여 아프리카나 아랍권의 일부 국가로부터 정치적 혹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입국한 이들을 인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수는 일반적인 선진국에 비해 많지 않다. 2017년에는 양성애자 여성이 난민 인정을 신청하여 성 정체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로 인해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사례가 있었다. 한편, 2018년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해 난민 인정 신청을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찬반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인구. 2012년 6월 23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통계청은 총인구가 50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세계 194개국 중 26위이다. 1945년에는 해외 동포들이 귀국하고, 6.25전쟁 때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들이 많이 월남했는데 1945년 직후에는 약 180만 명, 6.25전쟁에 약 100만 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60년대 이후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하게 되는 도시화 현상이 일어났으나, 최근에는 쾌적한 생활을 위한 역도시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1970년 이전까지 5백여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1988년에 1천만 명을 돌파하였다. 이후 서울의 인구 증가는 정체 상태에 있으나, 인근 경기도의 인구가 급증하여 2007년 10월 말 수도권 거주 인구는 2390만 3785명으로 전국 인구의 48.6%를 차지하였다. 인구 밀도는 503명/km2이다. 1990년대 들어 감소 경향을 보이던 서울의 인구는 2000년대 들어 소폭 증가하기 시작, 2009년에는 1046만 명으로 6년 연속 증가했다. 인구 유입 등으로 수도권 전체 인구는 증가하는 반면 부산은 지속적 감소로 1995년 381만 명에서 2013년 356만 명으로 급감했으나 대신 인근 경상남도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대구 역시 253만 명에서 25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인천은 약 298만 명, 대전 155만 명, 광주 148만명 울산 117만 명 등이다.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81.5%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도시화된 국가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2020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인구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하여, 2045년에는 인구 5천만 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8년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은 0.98명으로 세계 최초의 출산율 0명대 국가가 되어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어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2017년 1년 출생아 수가 40만 명 선이 붕괴되었고, 2017년 2월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현재 인구는 51,712,221명이다. 교육과 문화.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이 의무교육이다. 고등학교는 3년 과정이며, 일반계(인문계, 자연계)·전문계(실업계)·특수 목적 고등학교(특목고)로 분리되어 있다. 고등교육에는 4~6년제 대학교와 2~3년제 전문대학이 있다.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교육을 받는 정규학교 재학자는 1089만 명(24.7%), 졸업자는 2987만(67.8%), 중퇴자는 96만 명(2.2%)이고, 졸업자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 졸업자는 750만 명(24.5%), 고등학교 졸업자는 1263만 명 (41.2%), 대학 졸업 이상은 1050만 명(34.3%)을 나타내는데, 이는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높은 교육수준은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기인된 현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현재에는 오히려 학력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청년실업의 증가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대학교 진학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르게 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혹은 고등학교 졸업에 상응하는 학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치를 수 있다. 이 외에도 각 대학에서는 수시입학전형, 특별전형 등을 통하여 개별 대학의 요구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은 사교육 시장이 크게 발달되어 있어,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각 가정마다 월평균 70여만원을 웃돌고 있다. 복지. 대한민국의 생계·의료 등 기초생활보장, 차상위계층, 기초연금, 장애인연금, 한부모지원 등 소득·재산조사를 실시하는 15개 복지사업은 기존 수급자, 수급희망이력관리제 신청자 및, 신규 신청자를 대상으로 우선 도입했으며,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서비스 대상이 확대될 예정이다. 의료복지는 기본적으로 건강보험제도가 있다. 복지 예산은 2019년에 148.9조였으며 2020년에는 167조, 2021년에는 185조였다. 사회 갈등.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우파와 좌파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 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갈등은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여론에 기반한 전국적인 규모의 촛불 집회로 종종 표출되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대규모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는 이념 진영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촛불 집회에 대하여 좌파 진영은 시민들의 민주 의식 신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냈다는 점, 인터넷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에 다가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우파 진영은 선동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왜곡과 특정 정파 이해집단의 욕구를 위한 창구로 활용된다는 점을 들어 사회 혼란,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한국의 노사갈등에 대하여 상당수의 국민들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국제경영개발원에 의하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57개국 중 56위로 선정되어 시급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 이념 대립의 연장선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방식에서 국가주도의 사회운영과 성장을 주장하는 국가주의세력과 개인의 자유에 따른 사회 운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분배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 간 논리의 충돌도 있다. 이는 서방세계와 같은 좌우 대립의 이념지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데서 기인한 사회 갈등인데 그 원인으로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반공반북을 중요시하여 좌파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환경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 진영에 의해 만들어진 좌우 대립의 이념지형도 1990년대 초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사라져 서방세계와 같은 이념지형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갈등·소통 지수. 대한민국의 갈등 지수는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OECD 회원국 중 4위에 해당하였으며, 이 같이 높은 사회 갈등에 따른 비용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7%인 약 300조원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소통 지수는 2011년 아시아포럼21이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 중 이명박 정부의 소통 지수는 45.8점, 한나라당의 소통 지수는 42.6점,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 소통 지수는 36.2점으로 모두 50점 이하인 걸로 나타났다. 심리. 인종 차별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유독 심하며, 백인은 차별이 거의 없으나, 흑인 및 황인은 오히려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어를 모르는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경우가 있으며, 유럽 같은 경우에는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경쟁 심리도 심각하다. 대한민국은 어려서부터 성적, 경쟁 위주의 교육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게 함으로써 경쟁과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에 따라 남과 나를 비교하며 오직 높은 곳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성인이 되어서 학력 위주 경쟁, 스펙 위주 경쟁, 실적 위주 경쟁,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으로 획일화된다. SBS와 한국갤럽이 2011년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우리 사회의 경쟁 수준은 평균 76점으로 10년 전보다 20점 가까이 높아져 경쟁이 계속 가속화됨을 보여주었으며, 국민 10명 중 8명이 "과도한 경쟁에 부담을 느낀다"라고 대답하여 상당수가 부담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은 모두를 스트레스 속에 놓이게 하며, 장기간 스트레스는 매우 예민해지게 만들고, 분노, 불면증, 우울증 등의 신체·정신적 증상을 동반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담당하는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 치료의 횟수가 늘어나고 있으나, 여전히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불리는 등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어 상당수가 기피하는 실정이다. 또 경쟁은 다수의 패배자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는 다수의 자존감 저하와 수치심, 분노심 상승의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사회 전반의 동질성 추구와 이질성 거부 심리, 경쟁 심리는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외국인 차별, 왕따, 학교 폭력, 인터넷 악플 등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피해로 정신 이상자의 수를 늘리거나, 그런 정신 이상자를 방치하게 되어 자살자를 늘리거나, 사회에 불만을 품고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는 묻지마범죄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에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1년 10월 '대한민국 3, 4차 정부보고서에 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최종 견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학생의 성적에 따른 차별과 경쟁적인 교육체제에 대해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하였다. 대응. 학력 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라디오 연설에서 "학력차별 없는 사회"를 강조하였으며, 고용노동부가 고등학교 직업 교육에 지원을 강화하는 등 능력 중심의 열린 고용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백혈병이 생겨 산업 재해로 인정 받는 학생도 있었고, 음료공장 실습중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지하철 청소 실습 중 지하철에 치어 숨지는 사고 등으로 고등학교 현장 실습이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2011년 정부에 의해 명칭을 "정신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 변경하는 등 다양한 진료를 하는 분야임을 알리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남녀 심리,치료,범죄 심리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 주제로 사용하거나, 교수가 직접 매체로 나와 강의를 하는 등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과거 대학교의 비인기 학과였던 '심리학과'가 상위 경쟁률을 기록하고, 관련 주제의 책이 대거 출간되고,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여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 중 게임이 29.9%로 가장 높았다. 연령별 연령별로는 30대 미만의 경우 역시 게임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30대 이상 연령층은 영화와 TV 시청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2013년 4.12편으로 미국의 3.88편을 제치고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여가생활에 대한 불만족 이유들로는 ‘시간 부족’ 비율이 45.9%였고, 그 다음으로는 ‘경제적 부담’이라는 이유가 45.6%로 나타났다. 문화.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고대의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 등 이웃 나라에서 들어온 외래 문화와 한국 고유의 독자적 문화와 융합하여 발전했다. 언어. 관습적인 공용어이자 법적인 공용어는 한국어로, 그 계통이 학계에서 확증되지 않은 고립된 언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알타이어족과 연관성 있음을 주장한 바 있고, 특히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으로 1446년 반포하였다. 한글은 각 자음과 모음이 하나의 기호로 표시되고, 그 자음과 모음을 모아써서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이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하늘:ㆍ),지(땅:ㅡ),인(사람:ㅣ)을 나타내는 각 부호의 조합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창제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써왔던 한자와 이를 당시의 한국인이 쓰던 입말에 맞는 한자의 소리만 따서 문자로 표기한 향찰, 구결, 이두 등이 한국어 기록 수단이었다. 한자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양반층 및 관공서에서 계속 써왔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글의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한글 대신 한자로 직접 표기하기도 한다. 1962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면서 표기문자의 주류로 등장했고, 현재 한자 표기는 중의적 표현을 막기 위해 부수적으로 쓰고 있다.(한글맞춤법 참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의무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2외국어로는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때 수험생이 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다. 특히 중국어와 일본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이기도 하다. 언론.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일간 신문은 크게 전국지와 지방지로 나뉜다. 전국지는 대한민국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되며, 지방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 지면을 할애한다. 지방지는 특정 지역에 연고를 둔 신문으로 전국적인 뉴스를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해당 지역의 뉴스를 다룬다. 전국지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보수적인 신문, 이른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신문 등의 진보적인 신문, 이른바 '한경오'으로 분류되고 있다. 2008년 한국언론재단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시장점유율은 조선일보 11.9%, 중앙일보 9.1%, 동아일보 6.6%, 경향신문 2.7%, 한겨레신문 1.7%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지들도 있으며, 크게 경제에 관련된 소식을 다루는 경제지와,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스포츠지를 들 수 있다. 한편 주요 도시의 공공시설에서 출근 시간대에 무료로 배포되는 무가지가 존재하며, 인터넷 매체를 통한 인터넷 신문도 존재한다. 2008년 기준 대한민국 일간지의 수는 약 288종, 주간지의 수는 약 2,896종, 월간지의 수는 약 3,293종, 격월간지의 수는 약 459종, 계간지의 수는 약 981종, 년 2회의 수는 약 325종, 인터넷 신문의 수는 약 1,040종 정도가 있다. 방송의 경우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FM라디오 방송, AM라디오 방송, 단파 라디오 방송, 케이블 방송, 디지털위성방송, 지상파 DMB 방송 등이 있다. 현재 전국 단위 지상파 방송으로 국공영 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와 준공영방송인 문화방송(MBC)이 있다. 지역 단위 지상파 민영 방송으로는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MBC)을 중심으로 한 계열과 서울지역의 지역민영방송인 SBS를 중심으로 한 SBS 네트워크 계열이 있으며, 그외 독자적인 지방 민영방송인 경인지역의 경인TV가 있다. 그외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 따른 공영방송인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이 지상파 방송으로 있다. 종합편성채널 4사로는(JTBC, MBN, 채널A, TV조선)와 보도 채널인 연합뉴스TV와 YTN 등 2개의 보도 채널이 존재하며, 케이블TV 최대 PP사업자인 CJ E&M과 티캐스트도 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인 KBS, MBC, SBS, EBS가 점유하는 주파수와 기타 CBS (대한민국의 방송사)(CBS), 극동방송(FEBC), 불교방송(BBS), 평화방송(PBC), 원음방송(WBS) 등 종교방송의 주파수, 교통안내 전문 방송인 교통방송(서울은 TBS, 기타 지역은 TBN 한국교통방송), 국악 전문의 국악방송, 그리고 국방홍보 목적의 국군방송 등의 여러 방송사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이 연결된 나라이며, 세계 최고 속도의 인터넷 속도를 보유하고 있다. 높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인터넷 이용률을 보이는 대한민국은 2000년 초중반 인터넷 신문을 표방한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 신문과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언론 매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인터넷 언론 매체들은 인터넷 매체 특유의 신속성과 높은 접근성 등을 강점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론 형성에 상당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단순 뉴스 전달자에 불과했던 포털사이트가 하나의 언론세력으로 성장하는 변화를 보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인터넷 신문사, 포털사이트를 언론 기관으로 보고 법적 규제를 마련했다. 종교. 대한민국에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적인 토착신앙으로서 무교(무속신앙)이 있다. 불교와 유교는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었으며, 불교는 5세기부터 14세기 말(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 이르는 약 1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융성하여 많은 사찰과 문화유산을 남기고 현재 단일 종교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다. 14세기 말 조선에서는 유교가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유교를 학문과 사상, 가치관 그리고 철학으로서 배우는 사람은 있으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유교는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풍습이나 습관, 습성, 가치관, 사상, 생활 방식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 천주교는 조선 후기에 이승훈 등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교세가 확장되자 병인박해, 신유박해 등 대규모 박해 사건이 일어난 일 때문에 프랑스의 병인양요가 일어난 계기가 되어 조선 정부의 탄압이 거세졌다. 당시의 순교자 중 103명이 천주교회에서 시성되어 성인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학교와 개신교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 시기에 감리교, 장로회 등의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선교사가 파송됨으로써 전파되었고 양적인 성장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는 비록 짧으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종교활동 및 선교가 활발하다. 현재 성공회, 천주교와 정교회,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는 전 종교 중에서 가장 많다. 그 밖에 천도교(동학), 대종교, 원불교, 증산도, 통일교 등 여러 신흥 종교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한국에서 창시되어 현재까지 신봉되고 있다. 예술. 음악.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전통 민요로는 아리랑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지방마다 다른 민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많은 가수들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권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시장(K-POP)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K-POP 가수로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비스트, 티아라, 인피니트, 방탄소년단, 핑클 등이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싸이(박재상)의 "강남스타일(Gangnam Style)"로 세계에 강남스타일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노래는 원더걸스의 Nobody 이후, 미국 빌보드 차트에 2위까지 올랐다. 또한 방탄소년단의 "버터"로 빌보드 차트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였다. 미술. 한국 미술은 약 기원전 7천여 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조선 시기에는 제의를 위해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 동경 (거울), 방울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을 위한 예술이 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 백제의 금동대향로, 신라의 금관이 대표적이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도자기의 일종인 고려 청자와 먹으로 그리는 문인화가 발달했다. 조선 시대 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을 성리학에 기반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들은 문인화와 백자를 선호하였다. 이들 문화는 다분히 사대주의적이었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원들이 나타나 특색 있는 미술을 만들었다. 동시에 조선시대에는 서민적인 미술인 민화가 발달했다. 그 후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서양 고전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이 도입되었고, 미국, 프랑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유학생들이 현대 미술을 시도하였다. 현대 한국 미술은 서양적 기술과 재료를 바탕으로 한 혼합된 서양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서예, 동양화와 같은 전통미술 역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백남준은 독창적인 비디오 아트를 선보여 한국 출신 작가 중 가장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순수미술 분야는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건축, 그래픽디자인, 산업디자인, 게임 같은 상업미술 분야에서는 점차 주목받고 있다. 스포츠. 한국의 스포츠는 고대부터 무술에 근거한 체육 활동이 발달했으며, 특히 대한민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기도 하였다. 태권도 이외에도 한국 전통 무술(스포츠)인 궁술(국궁), 택견, 씨름이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참가했다. 또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였으며,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종합 4위를 기록하였다.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강세를 보이는 종목으로는 양궁, 사격, 탁구, 배드민턴, 쇼트트랙, 핸드볼, 유도, 태권도, 역도가 있으며, 최근 20년간 하계 올림픽의 경우 시드니 올림픽을 제외하면 메달 종합 10위 이내의 성적을 올렸다. 특히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동계 올림픽의 경우 201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5위를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은 또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2002년 아시안 게임, 2014년 아시안 게임 등을 개최했으며, 종합 1위는 1995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200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차지한 적이 있다. 실제로 즐겨하는 생활스포츠 그리고 국가대표팀 경기와 프로 경기 포함 TV로 가장 즐겨보는 스포츠 등 각종 부분에서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로 선정되고 있으며 축구, 야구, 농구, 배구, e스포츠, 바둑의 6개의 종목이 프로 리그를 갖추고 있다. 프로 리그에서 인기 종목으로는 야구와 축구 등이 꼽히며, 한국의 발전에 밑거름에 이어 근래에는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 축구는 2002년 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며 대회 4위에 오른 적이 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원정 16강에 성공하였으며, 2018년 대회까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에서는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야구는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우승의 경력이 있다. 1990년대 말 게임 및 전자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e스포츠는 2001년 '한국e스포츠협회' 창립 후 선수 관리, 경기 규칙, 대회 방식이 체계화되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대중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았다. 2004년부터 파트 3 경마국으로 지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의 서러브레드 경주마 생산은 1000여 마리였다. 경기도 과천시, 경상남도 김해시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제주도에 경마공원이 있고 32개의 KRA 플라자(장외 마권 발매소)가 있다. 한편 대한민국이 개최했거나 개최 예정인 스포츠 대회는 다음과 같다. 한류. 한류(韓流, Korean wave)는 대한민국의 대중문화가 주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외국에서 대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97년 무렵부터, 문화 수출국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책을 배경으로, 2000년 전후부터 대한민국 드라마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방송되었다.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도 한국의 대중문화가 널리 유입되어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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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가
애국가(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국가이다. 1919년 안창호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스코틀랜드 민요인 〈작별〉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 1935년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한국환상곡》에 가사를 삽입해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가사의 작사자는 윤치호 설, 안창호 설, 윤치호와 최병헌 합작설 등이 있다. 윤치호의 작사설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애국가를 바꾸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변호로 계속 애국가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의 정부 수립 이후 국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10년 국민의례 규정에서 국민의례시 애국가를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작사.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 초에 쓰여졌다. 작사자는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미상이다. 작사자 윤치호 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1907년에 써서 후에 그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08년에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에 수록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일제 강점기의 애국가 출판물은 윤치호를 작사자로 돌리고 있는 등 윤치호 설에는 증거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尹致瑛)은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 가사의 일부를 썼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은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윤치호가 지은 노래 중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안창호가 다시 고쳤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 작곡.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가곡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로버트 번스 작사·윌리엄 쉴드 작곡)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하여 1936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6년 10월호에 애국가 악보 광고가 붙기도 하였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1942년 뉴욕한인교회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사용. 애국가는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졌고 국가로 채택되었으나 한반도에는 전해지지 못했다. 다만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을 매일 방송하였다. 한반도의 독립 이후 새 애국가의 악보가 전해졌고, 이후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의 사실상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애국가의 악보는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대한민국의 성문법에서는 국가를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법령상 규정되어 있는 바는 없으나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되어 있어 국가적인 행사 따위에서 연주 또는 가창된다. 라디오 방송은 해방 이후에는 1945년 9월 9일(사실상 1948년 정부 수립)부터,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 5월부터 1959년 2월까지, 1961년 12월 31일 이후부터 방송 시작맨트와 종료맨트(국명 고지)을 통해 애국가를 매일 방송하고 있다. 1980년 12월 언론통폐합 이후 애국가는 KBS에서 제작한 사장조 애국가가 사용되어 현행 1995년 행정안전부의 KBS 교향악단 공식음원 배포이후에도 2000년대 후반까지 주로 사용되었다. 이후 1990년대들어 SBS가 개국한 이후에는, 1993년부터 선명회 합창단이 부른 애국가 사용을 하기 시작하였고, EBS도 마찬가지로 1993년에 제작한 자체 애국가 사용을 한적이 있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SBS가 제작한 국립합창단과 선명회합창단이 부른 방송 애국가가 2009년 12월 31일까지 사용되어 이후 2010년 1월 1일에 제작한 과천시립예술단이 부른 애국가로 바뀌었고, 같은해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KBS 교향악단이 배포한 YBM 서울음반의 "의식의 노래" 애국가를 통해 제작, 배포되어 현재까지도 행정안전부의 공식음원으로 지정되어 이후 모든 방송국에 확대 편성되었지만, 2005년 저작권 기증이후에도 저작인접권으로 인해 국민의례용도로 제한적인 사용이 가능했었다. 그리고 2018년 12월 18일에 박인영이 작곡한 애국가를 편곡하였으며,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서울시합창단이 공동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제작 · 배포하였다. 그리고 새 편곡음원 애국가는 국민의례와 더불어 상업적으로 자유로운 사용이 가능한 편곡음원이다. 2019년 3월에 최초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SBS가 처음으로 사용을 시작했으며, 9월 이후에 기독교방송, 가톨릭평화방송, TBS 시민의 방송으로 확대되었다. 2020년 들어 1월에 한국교통방송, 3월에는 마포공동체라디오, 5월에는, EBS와 YTN, 국회방송이 8월 19일에 금강공동체라디오로, 또 2021년 하반기에는 KTV 국민방송으로 확대 편성되었다. 2020년이후 모든 국경일과 국가기념일 기념식 실황 중계의 애국가 제창 및 연주 영상으로 나온다. 간혹 2020년 현충일 및 6.10 민주항쟁 기념식, 2021년 제102주년 삼일절 기념식, 현충일 기념식 한정으로, 박인영이 편곡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제작 · 배포한 애국가를 사용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홈 경기는 평양이 아닌 중국에서 치러졌었다. 다만 2013년 평양에서 열린 아시안컵 및 아시아 클럽 대항 역도선수권대회에서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가 허용되었다. 한국어 가사. 1 2 3 4 논란. 표절 논란.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초대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서울에서 받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음악제를 추진한 안익태를 상대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서 애국가의 가락이 도브리치 시의 시가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일어날 것입니다"(If Bulgarian singers came to Korea and sang "O Dobrujanski Krai", Korean audiences would stand up!) 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다만 두 곡은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가 다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이고, 그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이듬해인 1936년이었기 때문에 그가 불가리아 민요를 접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니콜로프의 논리는 1966년 안익태의 전기인 김경래의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현암사)에서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유학시절 무려 40여 개국의 국가를 수집했다. 또한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삼았다"는 증언에 맞지 않는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1976년 이유선은 그의 책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다”고 썼다. 이에 안익태기념사업회 측은 반론자료와 함께 정부 각 부처에 진정서를 보냈다. 문화공보부와 국회사무처는 애국가가 30년 동안 국가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발표했다. 저작권 문제. 과거에는 애국가의 저작권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고 안익태의 유족이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1992년부터 이에 따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신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2003년에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는 프로축구단 경기에서 애국가를 무단으로 사용한 두 구단을 고소하였으며, 이에 따라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애국가의 저작권을 국가에서 사들이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며, 결국 2005년 3월 16일 안익태의 유족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저작권을 기증함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기타. 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히 추정되는 윤치호가 말년에 일본 제국의 관료로 일했다는 점이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 때 수감을 당한 적이 있는 근대 개화 사상을 전파한 지식인으로서 일제 초기에는 독립 운동가였지만, 105인 사건 후 전향하면서 30여년을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또한 작곡가인 안익태도 생전에 친일 활동을 했다 하여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한다.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개사하였다는 논란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곡의 음악성에 관하여, 그 선율 자체가 처음에 못갖춘마디처럼 들려, 이로 인해 뒷부분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YB가 편곡한 애국가에서는 첫마디만 못갖춘마디로 바뀌어 있다. 1977년 한국음악협회의 회장 조상현은 애국가의 표절 의혹과 함께 가사와 선율의 불일치, 소극적인 내용의 가사 등의 이유를 들어 1월 26일 총회에서 새 국가를 만들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 다음 통과되면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발표했다. 하지만 총회에서 새 국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고 한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정부는 앞으로 국가를 새로 만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9년 애국가의 친일성 문제와 안익태의 친일 및 친나치 행적이 지적되면서 청와대 국민청원에 국가 교체 청원이 나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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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물리학상
노벨 물리학상( - 物理學賞, , )은 6개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년에 한 번 스웨덴 왕립 과학원에 의해 수여된다.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은 1901년, 엑스선을 발견한 독일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에게 수여되었다. 이 상은 노벨 재단이 주관하며,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은 물리학계에서 최고의 영예로 꼽힌다. 노벨 물리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에 스톡홀름에서 수여된다. 2007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프랑스의 알베르 페르와 독일의 페터 그륀베르크가 거대 자기저항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공동 수상하였고, 상금인 1천만 스웨덴 크로나를 나누어 가졌다. 노벨 물리학상은 사람들이 그 과학자의 업적의 중요성을 알기까지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의 경우 그 이론은 이미 1930년에 이미 발표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50여년이 지나서야 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201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앙글레르의 경우 그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게 되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49년 뒤 그의 업적이 사실로 확인되어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론과 발견이 사람들에게 중요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론이나 발견을 발표한 과학자가 이미 죽어버렸기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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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안익태(安益泰)(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태생의 스페인의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초반에는 독립운동가로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중반부터는 당시 일본과 친밀감이 있던 독일로 넘어가 만주국 건국10주년 기념 음악을 만들고, 음악회를 지휘하였다. 1941년에는 일본의 궁중음악인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하였다. 일생.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와 커티스 음악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유럽 시기 (1936~1944).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때 파울 힌데미트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안 에키타이(, 서양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tai Ahn))라는 일본어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로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는 주장이 광복회 일부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안익태 후손은 '에키타이'는 일본 이름이 아니고 '익태'라는 한국 이름을 영어나 기타 외국어로 표현할 때 일제시대 당시 관행에 따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며, 이것은 성과 이름을 한자부터 일본식 이름(4글자)으로 고치는 창씨개명과는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당시 조선인이 외국을 나갈 때 필요한 여권을 발급하는 기관이 일제 총독부였기 때문에, 여권을 발급받아 해외에서 활동한 조선인의 경우 이름의 영문 표기가 일본식 발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를 친일 행적의 증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역시 한자 이름은 그대로 쓰지만 발음은 '손 기테이(Kitei)'로, 남승룡은 '난 쇼류(Shoryu)'로 표기되었다. 참고로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 4글자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은 안익태가 독일로 건너가고 한참이 지난 1940년부터 일제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조선인이 일본식 이름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 안익태는 1937년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주베를린 만주국 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살았다.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의 가사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인 일본 제국·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3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가 썼다고 한다. 에하라는 물밑에서 독일 내의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안익태 본인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1930년대 후반에 만났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베를린에 머물렀던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스페인 시기 (1944~1965).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독일의 우방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6년에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행적 연구.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2000년에는 음악연속간행물 '객석'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지휘에 대한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李京粉)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어 논란이 있었다. 안익태의 명단 포함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친일 논란. 2008년에 친일처벌위원회의 친일파 명단에 친일 음악가 부문에 선정되어 논란이 있었다. 그 뒤, 안익태가 한국과 일본중 일본편을 들었다는 여러 설이 발견되었고, 그가 친일파 활동을 한 기록도 발견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국가를 애국가 말고 다른 걸로 바꿔야한다는 주장이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안익태의 친일 행동에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역사학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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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이었고, 고려의 남경이었으며, 한성부(漢城府)가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이다. 중앙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릉산, 청계산, 아차산 등의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면적은 605.23 km2로 대한민국 면적의 0.6%이고, 인구는 약 950만 명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이며, 25개의 자치구가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등을 개최하였다. 2018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은 422조원이었다. 지명. "서울" 어원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 원래 의미에 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신라까지 포함하여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에 관한 정확한 발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게 없으며, 그 발음은 훈민정음 창제 후 ""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서울 한자 음차 표기로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증보문헌비고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의 서올(徐兀)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서울은 한양, 한성(漢城) 외에도 서울(),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예도 있다. 이 가운데 한양과 한성을 제외하면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 명사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 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 명사 '서울'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 로마자 표기 "은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로 표기한 데서 비롯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처럼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오세훈 서울시장 재임 기간인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 서브슬로건()을 《》로 지정하였다. 서울은 순우리말 지명이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이전 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청(, 한성)이라 불렀고, 1988년 서울올림픽도 한성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2005년에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서우얼'(, 수이)을 서울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다. 일본어 표기는 '소우루'()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 문서에서, 서울특별시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로 번역한 게 굳어져 'Seoul Special City'로 되었다. 하지만 서울특별시청 홈페이지에서 서울특별시 공식 영어 명칭은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이다. 지리. 서울은 북위 37° 34′, 동경 126° 59′의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한강이 흐르고, 서울 도심에는 남산(270m), 인왕산(338m)이 있다. 시 주변으로 북한산(836m), 관악산(629m), 도봉산(740m), 수락산(641m), 불암산(510m), 구룡산(306m), 우면산(293m), 아차산(295m), 지양산 등이 서울을 둘러싸며 경기도 및 인천광역시와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km이며, 면적은 약 605.25 km2이다. 서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0.6%이며 남북한 면적의 0.265%이다. 서울특별시의 최북단은 도봉구 도봉동이고 최남단은 서초구 원지동이며 최동단은 강동구 강일동, 최서단은 강서구 오곡동이다. 산. 서울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가 만나는 지대에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836m)·도봉산(717m)·인왕산(338m)·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 북악산(342m)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125m),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 숭례문을 지나 남산(265m)·응봉(175m)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296m)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 한강 남쪽에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는 관악산(629m), 청계산(618m), 구룡산(306m), 우면산(293m) 등이 있다. 그 외에 서울 동부에 불암산, 수락산, 망우산, 아차산 등이 있다. 강 / 하천. 서울의 중심에는 한강 하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하류이기 때문에 구배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 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 여의도는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 하중도이다. 한강물은 서울시민의 수돗물로도 공급되는데, 과거에는 뚝섬과 선유도 등에도 취수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잠실 수중보와 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공급하고 있다. 한강은 일제강점기까지 별다른 정비가 없었다가, 1960년대 이후 한강을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밤섬을 폭파한 뒤 여의도를 개발하였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잠실 개발계획으로 잠실섬과 부리도의 남쪽 물길(송파강)을 막아 육지로 만들었다. 1982년 시작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둔치를 조성하고, 강변 양쪽에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놓았다. 2006년에는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한강 주변을 다시 정비하였다. 한강 이외의 주요 하천으로는 불광천,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탄천, 양재천, 여의천, 홍제천 등이 있다. 임야. 서울의 임야 면적은 2006년을 기준으로 157.35 km2으로, 임야의 51.5%는 국공유림이고 49.5%는 사유림이다. 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 노원구에 17.73 km2, 관악구에 17.53 km2, 강남구에 16.11 km2가 있어서 전 임야의 3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임야 면적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도심. 서울 도심 주변에는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계속된 침식으로 북악산과 남산에서 산기슭이 발달되어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 을지로에 있던 구리개, 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黃土峴)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 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복 때문에 이 지역에는 고개 또는 현(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에는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治峴), 인현(仁峴)·종현(鍾峴)·진고개(泥峴), 계동(桂洞) 일대에 관상감현(觀象監峴), 가회동 일대에 맹현(孟峴)·홍현(紅峴)·안현(安峴)·송현(松峴)·배고개(梨峴) 등이 있다. 이러한 지형은 조선시대에 잘 이용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에는 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는 궁인(宮人)·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 이 지역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 동대문에서 세종로 사이의 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 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 숭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해발 36.6m)가 되어, 동으로는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한다. 지질. 한반도 내의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경기 지괴 내에 위치한 서울의 지질은 주로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류와 이들을 관입한 중생대의 화강암류로 구성되며, 하천을 중심으로 이 모두를 부정합으로 덮는 제4기의 충적층이 분포한다. 선캄브리아기 편마암. 선캄브리아기의 암석 중 가장 주된 것은 서울도폭(1982)에서 정의된 호상흑운모편마암(PCEbngn; Precambrian biotite gneiss)이다. 지형적으로 저지대를 이루면서 강서구 화곡동,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은평구, 영등포구, 동작구, 강남구, 서초구 등지에 분포한다. 이 암석은 경기편마암복합체의 일부로서, 이 지역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암석으로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 서울 동부지역으로 가면 선캄브리아기의 암석이 조금 더 세분화되어, 논현동 일대에 분포하는 안구상 편마암(PCEagn)이나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일대에 흩어져 분포하는 운모편암(PCEms) 등으로 분류된다. 중생대 화강암. 중생대의 화강암은 이 지역에서 흑운모 화강암(Jbgr; Jurassic biotite granite, 서울도폭, 1982) 또는 서울 화강암(Jsgr; Jurassic Seoul granite, 뚝섬도폭, 1981)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서울시 북부인 중구, 동대문구, 성북구, 종로구, 노원구, 북한산 지역에 분포한다. 이 화강암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는 주요 화강암인 대보 화강암의 일부이며,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류를 관입하고 있다. 신갈 단층. 신갈 단층은 한반도 경기 지괴 내 연천군에서 서울특별시와 성남시 분당구 등을 지나 평택시까지 이어지는 연장 130km의 주향 이동 단층이다. 추가령 단층대의 일부이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지질도 에 의하면 도봉구, 성북구, 동대문구, 강남구, 서초구 남부 등 서울특별시 동·북부를 지난다. 특히 한강 이북지역에서는 거의 중랑천을 따라가는데, 이미 뚝섬도폭(1981)에서 그 존재가 간접적으로나마 언급된 바 있다. 도폭 설명서에서 대놓고 신갈 단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북쪽으로 의정부도폭(2005), 남쪽으로 둔전도폭(1982)으로 이어지고 남-북 주향의 대단층인 것으로 설명되어 있어, 대규모 단층이 지나감을 암시하였다. 기타. 화강암은 조립질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 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 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봉우리가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이곤 했다. 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형으로 쉽게 벗겨져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 기후. 서울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 또는 온대 하우 기후에 속하며, 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최근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으로 인해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 °C보다 높은 -2.4 °C로 높아져 대한민국 기상청은 온대 하우 기후("Cwa")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열섬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외곽 지역은 여전히 -3 °C 미만으로 내려간다는 점과 냉대 기후의 최한월 평균기온 기준을 0 °C 미만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온대기후와 냉대기후의 중간정도 되는 기후이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28.1 °C로 매우 크기 때문에,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덥다. 최근 30년(1991년~2020년) 기준으로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8 °C 이고, 최난월인 8월 평균 기온은 26.1 °C,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1.9 °C이다. 특히 최한월의 평균 기온은 같은 위도 상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시내의 기온 분포는 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 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도심의 기온은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 간에 평균기온은 1.8 °C, 일 최저 기온의 연평균치는 3.1 °C씩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계절은 여름이 가장 길고 그 다음 겨울, 봄 순서대로이고 가을이 가장 짧다. 봄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 기온이 5 °C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맑고 따뜻해진다. 그러나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불어올 때 황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은 20 °C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C 내외, 심하면 35°C 이상의 무더운 날씨가 많다. 또한 장마나 집중호우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시작된다. 겨울은 최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은 여름에 비하면 훨씬 적어 건조한 날씨가 많다. 최근 30년(1991년 ~ 2020년) 기준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17.9mm이나, 1990년에는 2,355.5mm, 1949년에는 633.7mm가 내릴 정도로 연 강수량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계절별 강수량은 여름철에 892.1mm, 겨울철에 67.3mm로 여름철에 강수가 크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반도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분다. 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분다. 역대 최저 기온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 °C, 역대 최고 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39.6 °C이다. 대기. 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태양광선이 제대로 땅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 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 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서울 시야를 나쁘게 하고 있다. 2011년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오염물질을 조사한 결과, 전국의 미세먼지 평균농도는 51㎍/m3이고,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는 49㎍/m3로 나타났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하여 서울시는 전국 16개 지방에서 8위를 하였고, 광역시나 특별시 중에서는 4위(3위: 대구 5위: 울산)를 하였다.(중위권)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청정연료 확대보급, 경유자동차 저공해화, 도로비산먼지 청소, 공사장 비산먼지 관리 등과 같은 대기질 개선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대기질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나,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상황과 역대 가장 긴 장마 때문에 서울의 미세먼지는 110일 동안 보통 이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행정 구역.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2022년 5월말 기준으로 25개 자치구와 426개 행정동이 있다. 한강 남쪽에 11개, 한강 북쪽에 14개 자치구가 있다. 2020년 4월말 주민등록 인구는 9,726,787명이다. 가장 인구가 많은 구는 송파구, 가장 인구가 적은 구는 중구이다. 선거구. 21대 국회의원 선거 기준 49개 선거구로 나뉜다. 주민등록 인구(외국인 제외)에 따라 29만5천 명 미만인 자치구는 1개, 29만5천 명 이상 ~ 59만 명 미만인 자치구는 2개, 59만 명 이상인 자치구는 3개의 선거구를 가진다. 인구. 고려 멸망 후 조선이 천도(1394년)한 후 조선 태종 때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으며, 이후 1900년대까지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의 인구는 지방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여 과밀화 현상을 빚고 있다. 1919년에 인구 25만 명, 인구밀도 6,874명/km2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인구 34만 명, 인구밀도 9,297명/km, 1930년에는 인구 33만 명, 인구밀도 9,824명/km2, 1935년에는 인구 40만 명, 인구밀도 11,172명/km2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시역을 확장하여 인구는 73만 명으로 증가하고 인구밀도는 5,430명/km2으로 감소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의 인구는 90만 명, 인구밀도 6,628명/km2이었는데, 외국에서의 귀국, 한반도 북부지역 출신 등으로 1946년에는 인구가 127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인구밀도는 9,309명/km2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구 171만 명에 인구밀도 12,055명/km2으로, 1949년에는 136.05 km2이었던 시의 면적이 268,35 km2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42만 명, 인구밀도는 5,284명/km2이 되었다. 1951년에는 한국 전쟁으로 인구가 65만 명, 인구밀도는 2,416명/km2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1953년에 휴전과 환도로 다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5년에는 인구 157만 명, 인구밀도 5,869명/km2, 1960년에는 인구 245만 명(전체 인구의 10%), 인구밀도 913명/km2, 1970년에는 인구 543만 명(전체 인구의 18%), 인구밀도 9,013명/km2, 1980년 인구는 836만 명, 인구밀도 13,074명/km2, 1990년에는 1,061만 명, 인구밀도가 15,532명/km2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증가하던 인구도 1992년 인구 1,097만 명, 인구밀도 18,121명/km2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에 따른 것으로. 서울 교외에 분당·일산·평촌·중동과 산본 등의 1기 신도시가 개발되었고 이 마저도 포화상태로 현재 운정, 판교, 동탄등 2기 신도시 개발에 따른 이주에 의한 것이다. 계속 감소하던 인구는 2003년 인구 1,028만 명, 인구밀도 16,975명/km2을 정점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뉴타운'으로 불리는 서울 시내 대규모 재개발로 인한 인구 유입의 영향이 크다. 2009년 12월말 기준 인구는 10,464,051명, 4,116,660세대이고, 인구밀도는 17,289명/km2이다. 서울의 인구증가를 보면 1960년경부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각종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용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서울 지킴자금 농촌에서는 생계가 어려워 무작정 서울로 온 이농 인구 덕분이었다. 서울은 자연증가보다 사회증가에 의하여 과밀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서울에는 교육기관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서울에서 취업을 하거나 생활 터전을 마련한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서울의 높은 전세로 인해 서울의 인구순유출 속도가 한국 도시들 중 가장 빠르며,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서울 인구가 1,000만명 선 아래로 떨어졌다. 사실상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000만명을 넘어선 서울의 인구가 28년만에 100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8년 5월 기준으로 서울의 인구는 980만명이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인구는 경기도로 이동하고 있으며, 세종시나 제주도로의 이동도 이루어지는 역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주요 기관.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등 국가의 통치 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종로구에는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중앙 행정 기관과 헌법재판소 등 국가 중요 기관이 있고, 중구 정동에는 각국의 외교 대사관이 밀집해 있다. 또한 여의도에는 국회가, 서초구에는 대법원을 비롯한 법조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경제. 2014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327조 602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2%이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롯데 등 주요 대기업의 본사가 있다. 대한민국 GDP의 22%를 창출하고 있으며, 금융 기관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공업. 서울의 공업은 1919년에 영등포에 세워진 방직공장을 시초로 한다. 영등포에는 그 외에도 피혁공장과 철도공작창이 지어졌으며, 1940년대 들어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일본의 군수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영등포와 용산을 중심으로 군수 산업이 발달하였다. 8·15 광복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침체 상태에 있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로 인해 서울의 공업은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1971년 형성된 구로동 수출산업공단은 섬유·전자기계·고무합성수지제품·금속·광학기기류 등의 생산으로 서울 최대의 산업단지가 되었으며, 인근의 영등포 기계공단과 묶여 경인공업지구를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까지 용산·영등포·천호동·노원구 등에 공업지구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수도권이 팽창하면서 인천·시흥·안산·부천 등 인근 지역으로 옮겨갔다. 2000년대 들어 첨단산업이 발달하면서 구로동·가산동 지역의 대규모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탈바꿈하여 현재는 수많은 IT 벤처 기업이 있다. 상업. 서울의 상업은 4대문 안 서울 도심인 종로·남대문로·충무로·명동·을지로와 청계천 등의 상가와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중부시장 등의 시장과 백화점, 대형 할인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60년대 들어 대단위 슈퍼마켓과 연쇄점·지하상가가 시내 요소에 설치되어 새로운 상가를 형성하였다. 전문상가로는 전국에 의류를 공급하는 남대문 의류상가와 동대문 평화시장,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노량진수산시장, 용산전자상가, 경동시장 등이 있다. 교육. 서울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 국공립 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균관대학교(인문사회캠퍼스), 한양대학교,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광운대학교, 홍익대학교, 국민대학교, 숭실대학교, 세종대학교 등 사립 대학교들이 소재하고 있다. 대학교 40개교, 교육대학 1개교, 방송통신대학교 1개교, 전문대학 12개교 등이 있다. 문화와 관광 그리고 주요시설. 서울은 대한민국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도서관·박물관·신문사·출판사·방송국·공원과 기타 문화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 관광. 서울은 최근 K 문화의 인기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어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서울관광재단에서는 서울 여행을 계획하거나 서울을 여행중인 관광객들을 위해 '비짓서울'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 공식 관광 정보 웹사이트인 '비짓서울'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각종 행사, 축제, 전시 정보는 물론이고 명소, 맛집, 쇼핑 등 다양한 관광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관광 정보를 발 빠르게 제공하여 관광객들이 서울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비짓서울'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간체, 중국어 번체, 러시아어, 말레이어 총 7가지 언어를 제공한다. 문화재, 박물관. 서울에는 132개의 국보, 380개의 보물, 61개소의 사적, 11개의 천연기념물, 32개의 무형문화재, 46개의 중요민속자료 등이 있다. 또한 경복궁 등의 고궁과 각종 공원 등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운동경기장으로는 잠실에 잠실종합운동장, 목동에 목동운동장, 성산동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 6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 도서관. 서울에는 시립 도서관 23개 소가 있으며, 시립 도서관의 경우 대부분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각 자치구에서 설립한 구립 도서관이 있다. 최근 구립 도서관의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장서(藏書) 100만여 권을 가진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외에도 공공 및 사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이 있다. 대중매체. 서울의 도심 지역에는 대형 종합 신문사들의 본사가 몰려 있다. 도심인 중구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매일경제신문, 종로구에는 동아일보, 한국일보 본사가 있고, 마포구에는 한겨레가 위치하고 있다. 유적지. 고궁. 서울시티투어버스는 광화문을 기점으로 서울의 중심 관광지를 순환하고 있다. 스포츠. 서울은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1988년 하계 패럴림픽을 개최하였으며 2002년 FIFA 월드컵의 개막전과 4강전을 비롯한 총 3경기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졌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 폐막식이 있었던 서울올림픽주경기장과 이를 기념하는 올림픽공원이 있으며, 마포구에는 월드컵공원이 있다. 노원구에는 종합선수합숙훈련장인 태릉선수촌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프로스포츠팀을 보유한 도시이며 특히 프로스포츠 양대 산맥인 프로축구 K리그와 프로야구 KBO 리그에서 1990년 럭키금성 황소와 LG 트윈스 그리고 2016년 FC 서울과 두산 베어스의 2차례 동반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교통. 승용차와 대중교통인 지하철, 버스, 택시 등이 주된 시내 교통 수단이다. 주요 환승지로는 1호선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시티,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 남부터미널, 1,2호선 시청역, 2호선 강남역, 신도림역, 2,4호선 사당역 등이 있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자동차 등록 대수는 2,933,286대로 수송 분담률은 2006년 기준으로 지하철 34.7%, 버스 27.6%, 택시 6.3%, 자가용이 26.3% 등이다. 1899년부터 운행하던 전차가 1968년 없어지면서 서울의 대중 교통 수단은 많이 달라졌다. 1966년부터는 시가지의 대폭적인 재개발로 건물의 고층화와 함께 도로의 입체화가 진전되었다. 대중 교통 수단의 재배치는 서울 도시 구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왔다. 대표적인 예로 1기 지하철, 특히 당초 계획과는 달리 거대 순환선으로 변경된 2호선이 서울의 공간에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도로. 경부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등이 남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는 서쪽에 있는 인천광역시와 연결된다. 시 외곽에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다. 도시 내부에는 강변을 따라가는 강변북로, 올림픽대로, 내부순환로, 동부간선도로, 서부간선도로, 남부순환로, 북부간선도로 등의 간선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강변북로는 고양시와 파주시, 올림픽대로는 인천광역시와 부천시, 동부간선도로는 성남시와 의정부시, 서부간선도로는 안양시와 광명시, 북부간선도로는 구리시와 연결된다. 서울시내의 주요 도로로는 테헤란로, 세종대로, 종로, 강남대로, 시흥대로 등이 있다. 버스. 서울에서 버스가 처음으로 운행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경성 부영버스'라는 이름으로 10대를 운영했다. 1949년 17개 회사가 서울시로부터 면허를 받고 버스 운영에 뛰어들었다. 이후로 여러 차례의 확장과 개편을 거쳤으며, 2004년 서울특별시 버스 개편으로 버스 준공영제와 환승할인 제도가 도입되었다. 현재 시내버스, 간선버스, 마을버스, 광역버스 등을 포함한 수백개의 버스노선이 시내를 연결하고 있다. 택시. 서울에서 택시는 1912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고, 1919년 최초의 택시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26년에는 미터기가 도입되었다. 8·15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1970년 콜택시가 등장하고, 1988년에는 콜택시 대체용으로 도입된 중형택시, 1992년에는 모범운전수가 운전하고 콜택시를 도입하는 등 서비스 수준을 높인 모범택시가 선을 보였다. 또한 2009년에는 소형택시 부활이 결정된 이후 2011년 12월부터 소형택시 70여대가 운행되고 있다. 2015년 10월에는 고급택시가 운행을 시작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서울시 소형택시의 기본요금은 2100원, 중형택시는 3800원, 모범택시는 5000원, 고급택시는 8000원이다. 철도. 서울은 한반도 철도의 중심지이다. 서울에서 다른 도시간을 잇는 철도 교통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역이 나뉘어 있어, 서울역에서는 경부선과 경전선 KTX, 용산역에서는 호남선·전라선·장항선, 청량리역에서는 중앙선·태백선·영동선 강릉선열차가 출발한다. 그 외에도 영등포역 등의 중간역에서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서울역까지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철도관제센터 또한 서울에 위치해 있어 그곳에서 대한민국 전역의 모든 철도를 총괄 관리 및 명령한다. 1968년 서울전차의 퇴역으로 이를 대신할 대중교통수단 건설이 논의되었고,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개통으로 본격적인 도시 철도 시대를 열었다. 1기 지하철 사업으로 2호선, 3호선과 4호선이 개통되었고, 그다음 2기 지하철 사업으로 5호선, 6호선, 7호선, 8호선이 새로 건설되어 추가되었다. 이후 9호선이 건설되면서, 2011년 현재 한국철도공사 관할 구간을 제외하고 9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을 이어주며, 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은 서울의 공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의 경우에는 최초로 한강 아래로 터널을 뚫어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포함한 일부 노선은 한국철도공사의 수도권 전철과 연계 또는 직결 운행하여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들을 연결한다. 항공. 동아시아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단거리 국제선과, 대한민국 국내선은 주로 김포국제공항을, 나머지 중장거리 국제선은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한다. 서울 도심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인천국제공항철도 또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수상 교통. 과거에는 뚝섬과 마포에 포구가 있어 번창하였으나, 육상교통이 발달되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또한 노량도(서울 시흥)·양화도(서울 인천)·한남도(서울 용인)·송파도(서울 광주)·광나루(서울 광주) 등의 나루터가 있었으나 한강대교가 가설된 후부터 옛날의 나루터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강 개발 이후가 된 후 관광용으로, 또한 통근용으로 수상 교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6년 10월 26일부터 관광용 한강 유람선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8개 선착장에서 운행하고 있다.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 10월 11일부터 한강 수상택시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한강변 18개 승강장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교통수단 뿐만 아니라 관광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운항정지 중이다. 자매 도시. 서울특별시는 2014년 2월 기준 20개국, 24개 해외 자매도시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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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
앙카라()는 튀르키예의 수도이다.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5,156,573명이고(2021년 통계), 앙카라 주의 인구는 5,747,325명(2021년 통계)이다. 앙카라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중심지로,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자, 이스탄불을 대신해 수도로 지정됐다. 앙카라는 공무원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공업의 중심지이며, 도로와 철도 교통의 중심지다. 앙카라에는 중동전문대학(Hacettepe Üniversitesi)와 앙카라대학(Ankara Üniversitesi)이 있다. 또 국립도서관, 고고학박물관, 민속학박물관과 국립극장, 대통령 관현악단이 앙카라에 있다. 앙카라가 수도가 된 이후의 개발로 옛 도심지였던 울루스(Ulus)와 신 개발지대인 예니세히르(Yenisehir)로 구분된다. 울루스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양식의 옛 건물과 좁은 도로로 대표되는 데 반해 예니세히르에는 넓은 도로, 호텔, 극장과 아파트 건물이 들어차 더 현대도시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부 청사와 외국 공관도 예니세히르에 소재해 있다. 역사. 고대사. 앙카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까지 히타이트 문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이 곳에 정착했고, 프리기아의 수도인 고르디움이 현재 앙카라 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포랏르에 있었다.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나 후에 지진으로 고르디움은 파괴되었다. 미다스의 손 신화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프리기아의 왕이었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에도 계승됐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로마 시대 때까지 계속됐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王道)가 이곳을 지나갔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주권은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갖고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움을 통해 앙카라에 입성했고 짧은 기간만 머물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마케도니아 제국은 뿔뿔히 나뉘어서 안티고노스 1세가 앙카라 지역을 차지한다, 기원전 300년 경에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 폰토스가 무역거점으로 삼기위해서 이 지역에 진출했다. 그리고 앙카라의 이름의 기원이 된 안키라(Áγκυρα, 그리스어로 닻)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켈트 시대. 그 후 기원전 232년경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족(라틴어 Tectosages)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시대.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들에 대한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 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 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튀르크 제국 시대. 1073년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툴루즈의 레이몽 4세가 1101년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동로마 제국은 앙카라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어 그 후 셀주크 튀르크와 다른 경쟁 세력들은 앙카라를 두고 서로 싸웠다. 13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인 오르한 1세가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원정 때 앙카라를 포위 공격해 1402년 빼앗았다. 그러나 1403년에 앙카라는 다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돌아와서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의 종반 무렵, 현재의 터키 지방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터키 민족주의 지도자 케말 파샤(후의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의 저항운동 본부를 1919년 앙카라에 세웠다(터키 독립전쟁 참조).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앙카라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터키의 수도로 정해졌다. 터키 공화국 시대. 앙카라가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된 이후, 구시가지는 울루스(Ulus)로, 신시가지는 예니셰히르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시대, 동로마시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유적들과 오래된 시장, 옛 관공서 등은 울루스에, 대로, 신식 호텔, 극장, 쇼핑몰, 신식 관공서, 대사관 등은 크즐라이(Kızılay)를 중심으로 하는 신시가지에 위치하게 됐다. 그 이후,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24년에는 앙카라의 인구는 3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286,781명이 사는 도시가 되었고, 2014년에는 5,150,072명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가 되었고, 현재 터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됐다. 2015년 10월 10일 현지시각 오전 10시 4분에(EEST) 앙카라 중앙역 앞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102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이 테러는 터키 공화국의 역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테러였다. 기후. 앙카라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즉 내륙에 위치하다보니 대륙성 기후를 띈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가,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주로 가을과 봄에 비가 내린다. 앙카라는 고지대에 위치하다보니 여름에는 낮에 덥고 건조하지만, 밤에는 시원하다. 연간 강수량은 402mm 이고 1월 평균기온은 0.4 °C, 7월 평균기온은 23.6 °C이다. 인구. 1923년 터키의 수도가 될 당시 앙카라는 원래 인구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로 계획이 되었다. 1927년 앙카라의 인구는 75,000명에 불과했지만,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하였다. 2013년에는 5,045,083명(남자 2,507,525명, 여자 2,537,558명)으로 집계되었다. 경제. 앙카라는 중요한 상업·공업도시이며 주변의 농업 지대에게는 중요한 시장이다. 역사적으로 앙고라 염소털로 만든 모헤어, 앙고라 토끼 털로 만든 앙고라 울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 발달했었다. 또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특히, 카바클데레 와인(Kavaklıdere wine)이 유명하다. 공업에서는 TAI(Turkish Aerospace Industries), MKE, 아셀산(ASELSAN), 하벨산(Havelsan), 로켓산(Roketsan), 누롤 마키나(Nurol Makina) 등의 항공산업 및 방위산업 관련 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하여있다. 이들 업체의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또한, 독일의 버스, 트럭 제조 회사인 MAN SE의 공장도 위치하여있다. 또한, 앙카라에 위치한 앙카라 대학교, 중동공과 대학교, 빌켄트 대학교 등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꾸준히 산업에 투입되고 있다. 정부기관의 고용 역시 앙카라 경제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각국의 대사관에서 일하는 외국인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쇼핑.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장은 울루스에 위치한 츠크르크츠라르 요쿠수("Çıkrıkçılar Yokuşu")로 주로 양탄자, 가죽 제품 등을 판매한다. 바클크라르 시장(Bakırcılar Çarşısı)은 장식품, 카펫, 골동품 등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앙카라성 근처에도 향신료,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다. 또한, 스히예 광장 주변에는 매일 전통시장이 열린다. 현대적인 쇼핑몰은 크즐라이나 찬카야의 투나르 힐미 에비뉴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크즐라이역 주변에는 크즐라이 쇼핑몰이 있는데 푸드코드, 스타벅스, 옷가게가 입점해있다. 아트리움 몰(Atrium Mall) 옆에 바로 옆에 있는 아타쿨레 타워의 꼭대기 층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AŞTİ역 주변에는 아르마다 쇼핑 몰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케치외렌의 에트리크 지역에 대형 슈퍼마켓, 오락실, H&M 등이 입점해있는 안타레스 쇼핑몰이 위치하고 있다. 아르마다, CEPA, 켄트파크 쇼핑 몰이 고속도로 변에 있고, 갈레리아, 알자디움, 골디온이 위밋쾨이에 위치한다. H&M, ZARA 등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앙카몰은 앙카라에서 가장 큰 쇼핑몰로 아크쾨프뤼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2014년에는 넥스트 레벨과 타우루스 쇼핑몰이 오픈했다. 정치. 앙카라는 정치적으로 이슬람주의 보수당인 정의개발당(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 케말주의 중도좌파인 공화인민당(CHP, Cumhuriyet Halk Partisi) 민족주의 극우인 민족주의자운동당(MHP, Milliyetçi Hareket Partisi)가 의석을 나누어 갖고 있다. 선거구 수는 25개이다. 2014년 선거 결과 공화인민당은 2개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나, 앙카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찬카야(Çankaya)에 의석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은 2개의 의석을 갖고 있다. 전반적으로 정의개발당이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앙카라는 이즈미르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 때 앙카라에서도 이스탄불, 이즈미르 못지 않은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고, 다수의 사상자도 있었다. 멜리흐 괵체크(Melih Gökçek)가 1994년부터 현재까지 앙카라의 시장으로 재임 중이며, 터키 복지당(RP, Refah Partisi)에서 선행당(FP, Fazilet Partisi)으로 그리고 정의개발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멜리흐 괵체크는 1994년 선거를 시작으로 1999년, 2004년, 2009년까지 당선되었으며, 2014년 선거에서도 당선되면서 5선 시장이 되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에서 2009년 보수 정치인인 만수르 야바쉬(Mansur Yavaş)를 내세웠으나 낙선했다. 멜리흐 괵체크는 2009년 선거에서 1% 차이로 승리했으며, 만수르 야바쉬는 이를 조직적인 부정 선거라고 주장했다. 만수르 야바쉬는 터키 최고선거관리위원회에 제소했으나 기각당했고, 그 후에 유럽 인권 재판소에 이를 다시 재소했다. 멜리흐 괵체크가 5번이나 당선됐지만, 2009년 선거는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부정선거로 인식하고 있다. 교통. 앙카라 지하철과 대부분의 버스는 EGO(The Electricity, Gas, Bus General Directorate)에서 운영한다. 대다수의 버스는 교통카드만을 이용해서 사용이 가능하지만, 일부 개인이 운영하는 버스에서는 현금으로만 탑승이 가능하다. 현재 앙카라에는 경전철인 앙카라이(Ankaray, A1)와 M1, M2, M3까지 3개의 지하철이 운행중이며, M4가 건설중이다. 또한, 쉔테페와 예니마할레역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도 운행 중이다. 앙카라 중앙역(Ankara Railway Station)은 터키 철도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터키 국영철도에서 앙카라에서 이스탄불, 에스키쉐히르, 시바스 등 전국 각지로 여객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신잔역(Sincan)에서부터 카야쉬역(Kayaş)까지 광역철도도 운행중이다. 2009년 3월 13일에 앙카라와 에스키쉐히르를 잇는, 2011년 8월 23일에는 앙카라와 코냐간, 2014년 7월 25일에는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3시간 30분만에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YHT(Yüksek Hızlı Tren)가 각각 개통되었다. 앙카라는 또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기에 버스 교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스 터미널인 AŞTİ(Ankara Şehirlerarası Terminal İşletmesi)는 거의 모든 노선을 갖추고 있다. 앙카라의 공항은 시 북서쪽에 위치한 에센보아 국제공항이 있다.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나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 비해 노선수가 적지만 터키 국내선과 프랑크푸르트, 모스크바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다. 스포츠. 터키의 타지역처럼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1923년 창단된 겐츨레르비를리이 SK가 앙카라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으로 쉬페르리그에서 활동중이다. 겐츨레르비를리이 SK는 1987년과 2001년에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또한, 1910년 창단된 MKE 앙카라귀쥐는 가장 오래된 축구팀이지만 현재는 TFF 2. 리그에 소속되어있다. MKE 앙카라귀쥐는 1972년과 1981년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겐츨레르비르 B팀과 하제테페 SK도 쉬페르리그에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 위의 모든 팀들은 앙카라 19 마으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한다. 또한 앙카라스포르도 앙카라를 홈으로 하는 팀으로 2018년까지 쉬페르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다. 홈 구장은 예니켄트 아사쉬 스타디움으로 신잔에 위치한다. 또한, 신잔을 홈으로 하는 부그사쉬스포르, 에티메스구트를 홈으로 하는 에티메스구트 쉐케르스포르, 예니마할레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스포르, 찬카야를 홈으로 하는 앙카라 데미르스포르, 케치외렌의 케치외렌귀쥐, 케치외렌스포르, 푸르사클라르스포르, 바룸스포르, 알튼닥을 홈으로 하는 페트롤 오피시 스포르 같은 군소 팀들도 존재한다. 또한, 농구 역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앙카라에는 앙카라 아레나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과 TOBB 스포츠 홀을 홈으로 하는 카사 테드 콜레즈리레르 두 개의 농구팀이 있다. 배구에서는 할크뱅크 앙카라가 통산 6회 터키 남자 배구 리그(Türkiye 1. Voleybol Ligi)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 아이스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 경기도 앙카라 버즈 파테니 사라이(Ankara Buz Pateni Sarayı)에서 열린다. 1980년대 이후로는 스케이트 보드장도 많이 만들어졌다. 2012년 완공된 THF 스포츠 홀에서는 터키 핸드볼 쉬페르 리그(Türkiye Hentbol Süper Ligi)와 여자 핸드볼 리그(Türkiye Kadınlar Hentbol Süper Ligi)가 개최된다. 교육. 대학교. 앙카라는 이스탄불과 더불어 대학교가 모여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공원. 앙카라에는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울루스에 위치한 겐츨리크 공원(Gençlik Parkı)에는 놀이공원과 호수가 있어서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크즐라이에 위치한 귀벤 공원(Güven Park)에는 시미트와 꽃을 파는 행상들이 많이 있으며,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있다. 카바크르레데에 위치한 쿨루 공원(Kuğulu Park)에는 중국 정부에서 선물받은 백조와 흑조, 오리 등이 살고 있다. 알튼 공원(Altın Park)는 넓은 공원과 호수가 있으며, 배를 탈 수 있다. 앙카라 외곽지역인 에르야만에는 야경과 호수가 아름다운 괵수 공원(Göksu Park)가 있다. 또한, 앙카라 아레나 주변에는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터키 군인을 기리기 위한 한국 공원(Kore Bahçesi)이 있다. 겐츨리크 공원은 1952년부터 1976년까지 100 튀르키예 리라의 뒷면에 그려져 있었다. 또한, 시내에 아타튀르크 오르만 치프트리이(Atatürk Orman Çiftliği)라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농장일을 하던 농원이 있는데, 이 곳에는 동물원과 농장, 레스토랑 등이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생가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은 집도 있다. 농장인 치프틀리크(Çiftlik)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농장에서 생산되는 치즈, 전통 맥주, 아이스크림 등을 맛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다. 상징물. 앙고라 고양이. 앙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양이 품종인 터키시 앙고라(Ankara kedisi)가 살던 지방이다. 터키시 앙고라는 주로 희고, 부드러운 긴 털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품종 개량을 통해 검은털이나 붉은털을 가진 터키시 앙고라도 많다. 터키시 앙고라는 페르시안 고양이나 터키시 밴과도 가까운 품종이다. 눈은 파란색, 녹색, 황색인 경우도 있지만 간혹가다 한쪽 눈과 다른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도 있다. 귀는 크고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생겼다. 앙고라 토끼. 앙고라 토끼(Ankara tavşanı)는 앙카라 주변에 살던 길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이다. 앙고라 토끼는 가장 오래된 가축용 토끼 중에 하나인데, 중세시대에 프랑스 왕실의 애완용 토끼로 유명하다. 미국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앙고라 토끼는 털인 앙고라 울로 유명한데, 앙고라 울은 희고 길며 가벼워서 의복 재료에 많이 쓰인다. 앙고라 토끼를 사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앙고라 울을 얻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앙고라 토끼는 온순하지만, 주의 깊게 다뤄주어야 한다. 여름에는 털을 짧게 깎기도 하는데, 긴 털 때문에 여름에 열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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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도
가속도(加速度, )는 시간에 따라 속도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일반적으로 물체는 속력이나 운동방향이 바뀌면서 속도가 변하는데, 이와 같이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할 때는 가속도가 있다고 한다. 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량으로 나타낸다. SI 단위로는 m/s2를 사용하며, 주로 a라는 문자를 사용하여 가속도를 표기한다 고전 물리학에서, 일정한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체는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해 다음 식을 만족하게 된다. 여기서 F는 물체에 주어지는 힘을, m은 물체의 질량을, a는 물체의 가속도를 나타낸다. 정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시간간격 formula_2동안 속도가 변한 정도 formula_3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를 평균가속도 formula_4라 한다. 어떠한 순간의 가속도는 이 시간간격을 0으로 보내는 극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하는 가속도를 순간가속도 formula_6라 한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는 어느 순간의 속도를 시간으로 미분한 것으로도 정의된다. 가속운동. 등속운동. 등속운동은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에 비례한다. 이에 반하여 속도 혹은 속력이 시간에 따라 일정하게 증가하는 등가속운동에서는 변위(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가속운동. 가속운동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증가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때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또는 등가속운동이라 한다. 등가속운동. 등가속운동 또는 등가속도운동은 시간에 따른 속도의 변화 즉 가속도가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에 비례하지만 등가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뉴턴역학에서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므로, 힘과 질량이 일정하다면 물체는 가속도가 일정한 등가속운동을 한다. 지구 표면에서 물체는 일정한 가속도로 운동하며 이를 지구의 중력가속도라고 한다. 감속 운동. 감속운동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감소하는 운동을 말한다.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혹은 등가속운동이라고 하는데,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감속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등감속운동의 용어는 사용하지는 않고 음(−)의 등가속운동으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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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속도(速度, , )는 어떠한 물체의 위치 변화를 뜻하는 변위를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을 나눈 값이다. 변위는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이기 때문에 속도 역시 벡터이다. 단위 시간당 변위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 국제단위계에서는 미터 매 초(m/s, 초속 미터)를 사용하며, 일상에서는 킬로미터 매 시간(km/h, 시속 킬로미터)도 자주 쓰인다. 기호로는 주로 v를 사용한다. 정의. 속도란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므로, 시간간격 formula_1동안 위치가 변한 정도 formula_2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속도를 평균속도라고 한다. 평균속도 formula_3는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속도는 물체가 갖는 어떠한 순간의 속도, 즉 순간속도이다. 순간속도는 평균속도를 측정하는 시간간격을 매우 짧게 하여 0에 접근시킨 극한값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순간속도를 formula_5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와 같이 순간속도는 변위를 시간에 대하여 미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속도라고 할 때는 순간속도를 의미한다. 속도와 속력. 속도가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량인 반면, 속력은 크기만을 갖는 스칼라량이다. 속력은 물체가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에 대하여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50초 동안 앞으로 30m 전진한 다음 80m를 후진하였다고 하자. 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양으로 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음으로 나타내면 변위는 formula_7가 되지만,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는 formula_8가 된다. 따라서 이 자동차의 평균속도와 평균 속력은 다음과 같이 계산 할 수 있다. 순간속도는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 변화가 0에 접근하기 때문에 변위와 전체 경로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순간속도를 나타내는 벡터의 크기는 순간속력과 같다. 그러나 보다 큰 시간 간격을 고려하는 평균속도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평균속력과 다르다. 상대속도. 상대속도는 한 좌표계 안의 두 물체의 속도를 비교한 것이다. 두 물체 A, B의 속도를 각각 formula_11, formula_12라고 하면, 고전물리학에서는 A에 대한 B의 상대 속도를 다음과 같이 계산 한다. 예를 들어 두 자동차 A, B가 직선 상에서 마주 보며 달리고 있을 때 A의 속도가 3m/s 이고 B의 속도가 -5m/s 라면 A에 대한 B의 상대속도는 -8m/s 이고 B에 대한 A의 상대속도는 8m/s 가 된다. 일차원 운동만을 고려한다면 상대속도는 스칼라값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물체의 속도가 매우 빠를 때 상대속도가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관성계가 다르더라도 빛의 속도는 일정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두 물체의 속도 관계는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위 식에서 빛의 속도 c는 매우 큰 값이기 때문에 A와 B의 속도가 충분히 느릴 경우 formula_15는 0에 접근하게 되고 그 결과 상대속도는 고전물리학의 계산과 같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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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량
운동량 (運動量, )은 물리학 특히, 뉴턴 역학에서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운동량의 국제 단위는 뉴턴 초 (N · s) 또는 킬로그램 미터 매 초 (kg · m/s)이고, 통상적인 기호는 라틴 소문자 "p"이다. 선형 운동량() 혹은 병진 운동량()이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어 빠르게 움직이는 무거운 트럭 같은 물체는 운동량이 크다. 무거운 트럭을 빠른 속도까지 가속시키기 위해서는 큰 힘을 한참 동안 가해야 하고, 반대로 그 트럭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도 큰 힘을 오랫동안 가해야 한다. 트럭이 더 가볍다거나 더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만큼 운동량도 작아질 것이다. 선형 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에 의한 영향이 없는 닫힌계의 선형 운동량의 총합은 바뀌지 않는다. 고전역학에서는 선형 운동량 보존법칙이 뉴턴의 운동 법칙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공식을 약간 수정한 형태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일반화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은 적절한 정의를 이용하면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장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존 법칙이다. 고전역학에서의 운동량. 고전역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갖는 벡터다. 즉, 운동량을 p, 질량을 "m", 속도를 v라고 하면, 운동량은 다음과 같다. 운동량 보존 법칙. 만약 어떤 계에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계의 총 운동량은 바뀌지 않는다. 두 물체가 충돌할 때도, 두 물체의 운동량의 합은 일정하다. 즉, 두 물체의 질량을 formula_2, formula_3, 충돌 전의 속도를 formula_4, formula_5, 충돌 후의 속도를 formula_6, formula_7라고 하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이 때 formula_9를 반발 계수라고 부르고, 0 이상 1 이하의 값을 가진다. 만약 e = 1인 경우의 충돌은 탄성 충돌이라고 부르고, 이 때에는 운동 에너지 보존 법칙, 즉 이 성립한다. 1차원 공간의 탄성 충돌에서, 두 물체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 반면, e < 1인 경우는 비탄성 충돌()이라고 하고, 특히 e = 0인 경우는 완전 비탄성 충돌이라고 부른다. 이 때에는 충돌한 두 물체의 속도차, 즉 입자 사이 상대 속도가 같다. 충격량. 충격량은 어떤 시간 동안에 운동량의 변화이다. 이에 따라, 충격량의 단위는 운동량의 단위와 같다. 충돌 전후 두 물체가 주고받은 충격량의 합은 무조건 0이 된다. 힘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운동량의 시간에 따른 변화율이므로, 일정한 시간 "t"에 대한 힘 F에 대한 충격량 I는 이다. 만약 힘의 세기나 방향이 시간에 따라 바뀌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힘의 정의를 이 식에 다시 사용하면, 다음 식을 유도할 수 있다. 상대론적 운동량.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3차원의 운동량은 에너지와 함께 사차원 벡터를 이루는데, 이를 사차원 운동량이라고 부른다. 즉,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E는 계의 총 에너지이며, p는 계의 상대론적 (3차원) 운동량이다. 상대론적 3차원 운동량은 정지 질량 formula_19과 로런츠 인자 formula_20, 속도 formula_21의 곱이다. 즉, 여기서 formula_22는 신속도이다. 광자등과 같이 정지 질량이 0인 입자도 운동량을 가진다. 정지 질량이 0인 입자의 경우, 에너지 formula_23와 운동량 formula_24는 서로 비례한다. 즉 양자역학의 운동량. 양자역학에서, 운동량은 파동함수에 대한 연산자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입자의 운동량은 (입자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는 한)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정성을 갖는다. 전하와 스핀이 없는 입자의 운동량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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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나가 신이치로
도모나가 신이치로(, 1906년 3월 31일 ~ 1979년 7월 8일)는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공로로 1965년 리처드 파인먼과 줄리언 슈윙거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생애. 1906년 그는 도쿄도에서 도모나가 산주로(朝永三十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병약하였으며 1913년 부친이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교토로 이사갔다. 1937부터 1939년까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래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등에서 연구하였다.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이다. 유카와 히데키와는 제삼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동창으로, 평생의 동료이자 라이벌로 지냈다. 권위적인 유카와 히데키와 달리 도모나가는 소탈한 성품이었으며, 유카와는 직관을 중시함에 비해 도모나가는 논리적인 전개를 선호했다. 학창시절에는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성적이 더 좋았으나, 정작 노벨물리학상을 유카와 히데키가 먼저 받게 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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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와 히데키
유카와 히데키(, 1907년 1월 23일 ~ 1981년 9월 8일)는 일본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교토부 교토시 출신이다. 원자핵 내부에 있어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매개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1947년, 영국의 물리학자 세실 프랭크 파월이 우주선 중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 ‘유카와 이론’이 증명돼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반핵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플랑크와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렸고 중간자 이론 외에 비국소장이론, 소영역이론 등의 이론을 계속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창이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고 도모나가와 마찬가지로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고 전해진다. 교토 대학·오사카 대학 명예교수, 교토시 명예시민이었다. 1943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학위는 이학박사이다. 인물. 유년 시절 ~ 학창 시절. 1907년 1월 23일, 도쿄부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이베이정(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에서 부친이자 지질학자인 오가와 다쿠지와 모친인 오가와 고유키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1살 때 부친인 다쿠지(와카야마현 출신)의 교토 제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것에 따라 가족 모두가 교토부 교토시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아자부의 집에서는 출생 후 1년 2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1살 때부터 대학까지는 교토에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잠깐 동안 오사카나 니시노미야에 있었던 적이 있으나 인생의 대부분을 교토에서 생활했다(그러나 노벨상 수상의 대상이 됐던 중간자론을 발표한 것은 유카와가 오사카 제국대학에 근무했던 때였으며 당시에는 니시노미야의 구라쿠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나의 기억은 교토로 이사왔던 때부터 시작된다. 역시 교토가 고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 외가쪽은 유카와의 외할아버지인 오가와 고마키쓰는 예전 기슈번의 번사였으며, 또한 유카와가 자체가 선조 대대로 와카야마현 출신이었기 때문에 “와카야마 출신”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지만 유카와 본인에 의하면 교토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의 실업가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고향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출생지’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카와의 필체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유카와 본인은 와카야마에서 살았던 경험은 없다. 5, 6세 때 외할아버지인 고마키쓰에 의해서 한문 서적을 읽고 배웠다. 고마키쓰는 한학에 대한 소양이 풍부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서양학문을 배워 말년까지 계속해서 런던 타임스를 구독하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해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고쿠 보통소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에는 교토 부립 교토 제1 중학교(현: 교토 부립 라쿠호쿠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의 유카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는데 별명은 ‘곤베에’()였다. 또한 사춘기 때부터는 거의 말을 안들었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말 안하겠다’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등 ‘이왕 짱’()이라고 불렸지만 의외로 《바보 이반》에서 따온 별명 같다고 유카와가 스스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 말수가 적을 정도의 과묵한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다쿠지로부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홀대를 받았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낮다고 보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문학교에라도 보낼까’라고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교토 제1 중학교의 동기로는 학자가 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고 후에 학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똑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교토 제1 중학교의 1년 선배이며 제3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기였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29년에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의 조수가 됐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일본 수학물리학회 연회가 열렸을 때 야기 히데쓰구와 알게 됐는데 당시 오사카 제국대학의 이학부 물리학과(는 시오미 이화학 연구소)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한 야기에게 부탁해서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게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작고 강의는 꽤 난해했다고 전해졌다. 이 즈음에 오사카 위장 병원(1950년에 유카와 위장 병원이라고 개칭)의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본명은 스미코)와 결혼해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가 됐다. 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 전혀 성과가 없던 유카와를 야기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주의를 준 뒤 “본래라면 도모나가를 오게 했을텐데 너의 형으로부터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채용했으니까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질책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의하면 야기는 비수같은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 1934년에 중간자 이론 구상을 했고 이듬해 1935년에는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중간자(현재의 파이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했다. 알 수 없는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서 유럽과 미국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양자론 개척자인 닐스 보어는 1937년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자네는 그렇게 새로운 입자를 만들고 싶은 건가?”라고 유카와를 비판했다고 한다. 중일 전쟁 격화에 따른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던 일본인 과학자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진 않았다. 그러나 중간자와 비슷한 무게의 새로운 입자(‘뮤 입자’)가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진다는 ‘우주선’ 안에서 발견됐다고 칼 데이비드 앤더슨이 발표함으로써 유카와의 중간자론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 1939년, 유카와는 솔베이 회의에 초청됐다. 회의 자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됐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과 친분을 가졌다. 이러한 업적에 높은 평가를 받아서 1940년에 학사원 은사상을 수상했고 1943년에는 최연소로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6월에는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한 원폭 개발 프로젝트(F연구) 회의에 초청됐으나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에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유카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전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이러한 배경을 기록한 일기가 2017년 12월 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 자료실에 공개된 바있다. 더 나아가 1947년에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실제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서 194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인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작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뒤를 이은 세 번째의 수상자였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이 뉴스는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에게 큰 힘을 주었다. 또한 2000년에 유카와의 노벨상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후에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지만 이론적 성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한편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서는 “전하가 이나 같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또 한편으로는 반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 등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중에는 아라카쓰 분사쿠가 이끄는 교토 대학 그룹에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 후. 1956년에 원자력 위원장인 쇼리키 마쓰타로의 요청으로 위원이 됐다. ‘원자로를 외국에서 구입해 오더라도 5년째까지는 실용적인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쇼리키의 지론에 대해 “기초 연구를 생략한 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서두르는 것은 장래에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며 거세게 반발, 하루 만에 그만두려고 했으나 모리 가즈히사 등이 만류해서 사임을 철회했다. 그 이후에도 쇼리키와의 대립은 깊어졌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이듬해인 1957년, 재임 1년 3개월 만에 사임했다. 1956년 1월, 궁중에서 열린 가회시에 초대받았던 유카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1970년에 교토 대학을 정년 퇴임해 교토 대학 명예교수가 됐으며 말년에는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특히 생명 현상에 있어서 정보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에도 시대 후기의 사상가인 미우라 바이엔의 심취에 깊이 빠졌다. 휘호를 부탁받으면 자주 ‘지어락’(, ちぎょらく)이라고 썼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라’()는 장자의 ‘추수’(秋水)의 마지막 한 구절이다. 1966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돼 있었다는 사실이 노벨 재단이 공표한 후보자 명단에 의해 판명됐다. 교토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인 1975년에 전립선암이 발병돼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의해서 암의 진행은 막았지만 그 이후에는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하면서 학술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양국의 긴장 격화로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의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1981년 6월, 15년 만에 회의 개최가 성사됐다. 이때 이미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서 회의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 참석해 핵폐기를 호소했다. 3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폐렴에 심부전 합병증으로 교토시 사쿄구의 자택에서 향년 7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소재한 지온인에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평화의 상 〈와카바〉(若葉)의 대좌에는 유카와가 지은 단카인 “재앙의 불이여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마라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만이지 이곳은”()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학술적 업적. 강한 힘의 이론·중간자. 4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힘, 약한 힘) 가운데 강한 힘을 어떻게 정식화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당시로서는 문제가 됐고 여러 가지 시도가 이뤄졌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유카와는 전자의 200배의 질량을 갖는 중간자를 힘의 매개 입자(보스 입자)를 가정해서 핵력인 강한 힘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강한 힘으로부터 페르미의 약한 힘을 이끌었다. 중간자론은 약한 힘, 강한 힘,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이론으로서 당시에는 가장 기본적인 장의 이론인 것으로 간주됐다. 또한 힘을 입자가 매개하는 것도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을 정착시켰다. 단, 전자가 강한 힘을 전달한다는 생각을 하이젠베르크가 유카와 이전에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이전부터 존재가 알려지면서 이론으로서도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은 확립돼 있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나 보어는 관찰되지 않은 소립자로 장을 설명하는 유카와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보어는 유카와에게, 하이젠베르크는 도모나가에게 이것을 알리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유카와의 강한 힘을 낳는 중간자론은 소립자론의 길을 열었다고 당시에는 높이 평가했다. 유카와는 강한 힘의 중간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후의 일을 장의 양자론에서 스스로 찾아낸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다. 인과율 파괴의 제기. 초다시간이론과 비국소장 - 유카와의 원. 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에서의 확률 진폭을 정의하면 인과율이 파괴된다는 문제를 유카와가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생애를 걸었다(이 문제를 ‘유카와의 원()’이라고 말한다. 유카와가 이 문제를 제기한 후 폴 디랙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도모나가의 기여는 있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주장하고 있다. 물리학은 유카와의 기본 문제를 회피하여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한다. 유카와 이전에는 일정한 시간으로 확률 진폭이 정의돼 있었다. 은사·제자·동료 및 관계자. ※이 항목에서는 일본 국내에서의 저명한 인물을 둔다. 제자의 제자에는 현재 활약하는 수많은 이론물리·물성물리·우주물리·천문·수리생물학자가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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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헌
정몽헌(鄭夢憲, 1948년 9월 14일 ~ 2003년 8월 4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현대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1975년 11월 현대중공업에 입사, 현대전자 대표이사 사장과 회장, 현대그룹 부회장,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전신)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2002년 9월부터 대북 불법송금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도중 2003년 8월 4일 현대계동사옥 12층에서 갑자기 투신자살하였다. 그의 유서 1장이 사라진 점, 타살 현장에 지문이 없는 점, 진술 후 갑작스럽게 사망한 점, 고층에서 투신했으나 시신에 상처가 별로 없는 점 등 의혹이 존재하며, 일설에는 타살설 의혹이 있다. 본관은 하동. 생애. 생애 초기. 정몽헌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다섯 번째 아들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1962년 ~ 1965년 송파구의 보성중학교, 1965년 ~ 1968년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페어레이디킨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5년 11월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현대그룹에서 활동했다. 1977년 2월 현대건설 이사가 되고, 1981년 2월부터 1988년 2월 현대상선 대표이사 사장, 1984년부터 1991년 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 사장, 1992년 1월부터 2000년 5월까지 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 회장이었다. 1996년 현대전자 대표이사 회장으로 현대그룹 부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현대상선 대표이사 회장직을 겸했다. 현대그룹 총수. 1983년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경영권 갈등 이후 현대그룹이 쪼개지면서 투자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2001년 채권단에 매각, 하이닉스에 흡수된다. 1998년 현대그룹 부회장에서 공동회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버지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 왕자의 난. 2000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차남인 정몽구 당시 현대그룹 공동 회장과 5남인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공동 회장이 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 3월 14일 밤 기습적으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시킨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현대그룹의 경영권 계승을 둘러싸고 정주영 회장의 차남 정몽구와 갈등, 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조선시대 이방원과 이방석 사이의 대립에 빗대 현대그룹 왕자의 난이라 불렀다. 2000년 3월 24일 귀국한 정몽헌 회장은 자신과 아버지의 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현대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한다. 정몽구 회장은 26일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내지만 몇 시간 뒤 정몽헌 회장과 그의 측근들이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다시 그 명령을 무효화시킨다. 2000년 3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정몽구 회장은 8월 현대자동차와 기타 자동차 관련 계열사들을 가지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를 실시해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든다. 생애 후반. 현대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는데, 이후 2002년 9월에 5억 달러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2003년에 검찰 조사를 받았고, 추진하던 대북사업의 차질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재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2003년 8월 4일, 서울시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으나 타살 의혹이 있다. 재계 인사들은 '부친의 숙원 사업이었던 대북 사업 등 가업을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동기'로 추측했다. 그밖에 그의 유서는 5장인데 4장만 발견된 것 등에 대한 의혹도 있다. 정몽헌의 사망 후 배우자 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검단산 정주영의 묘소 100m 지점 아래에 안장되었다. 창우동 검단산 선영에는 그의 아버지 정주영의 묘, 조부모의 가묘,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 어머니 변중석, 형 정몽구의 처 이정화 등이 안장되어 있다. 논란과 의혹. 정몽헌 회장은 3000만 달러 해외송금 진술 열흘 후인 8월 4일 사망했다. 정 회장의 죽음은 자살로 알려졌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의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다. 타살 논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鄭회장의 모습」과 對北 비밀송금 사건, 現代 비자금 사건 등은 鄭회장의 죽음과 관련 여러 가지 의혹들을 낳았다. 혹시 타살된 것은 아니냐는 의혹들이었다. 특히 12층 높이에서 떨어졌는 데도 시신 발견 당시 외부로 드러난 상처가 심하지 않았다는 점도 의혹의 대상이었다. 사건 수사를 맡았던 당시 종로경찰서 곽영진 형사계장(現 202경비대 副대장)은 『사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수사를 오픈하다시피 했던 사건이라면서 『정 회장이 타살됐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했다. 현장의 지문 부재 의혹. 현장에서 두 차례의 현장감식에 정몽헌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키 174cm에 70kg이 넘는 정 회장이 성인이 통과하기 어려운 반 개폐식 창문틀을 통과하면서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쳐 현장 지문감식을 실시한 경찰도 그의 지문을 확보하지 못했다. 창문틀에는 산 자의 지문만 남았을 뿐, 죽은 자의 지문은 없었다. 정회장의 지문이 사라진 것도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서 1장 실종 의혹. 정몽헌의 측근은 경찰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 정 회장 주변 인물이 정 회장 사무실에 먼저 다녀갔다. 그 과정에서 유서 1장이 없어졌다고 밝혔다. 월간조선의 기자가 취재 도중 기자는 익명을 요구한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으로부터 사라진 유서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최초 鄭회장의 사무실에는 경찰이 발표한 것과 달리 유서 5장이 정 회장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대목은 월간조선 2월호의 검찰관계자 증언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정 회장의 최측근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애초 정 회장이 투신한 사무실의 책상에는 월간조선 2월호에서 검찰관계자가 증언한 대로 유서가 4장이 아니라 5장이 놓여 있었다며 유서 1장은 정 회장 주변 인물이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 없앤 걸로 안다고 했다. 정몽헌의 유서 중 1장은 누가 가져갔으며, 언제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숨기고 있다면 누가 보관하고 있는지 여부가 확인된 것이 없다. 기타. 1999년 1월 금강산 개발 관련 전담법인의 이름을 아산으로 제안했다 한다. 현대는 당초 전담법인의 이름을 '금강산개발주식회사'로 추진했으나, 정몽헌 회장이 '아산'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은 그의 아버지 정주영의 고향 마을 이름이자 아호였다. 정몽헌은 보성고등학교 58기 졸업생이고, 그의 삼촌 정세영은 보성고등학교 39기 졸업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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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조선(), 남북한(), 또는 코리아()는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한 지역 또는 한민족의 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오늘날에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이르는 말이다. 넓은 의미로 한국은 고조선 건국 이후 한반도에서 설립된 한민족 국가를 통칭하는 말이다. 한국의 영토는 현재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들이 해당되나, 역사적으로 만주와 연해주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역사를 한국사 라고 한다. 오늘날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면적은 약 22만 km2이며, 북쪽과 남쪽을 합한 총인구는 2019년을 기준으로 약 7,700만 명에 달한다. 지리. 한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및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는 서쪽으로 서해( 황해), 동쪽으로 동해, 남쪽으로 남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한반도 및 부속도서의 최북단은 함경북도의 온성, 최서단은 평안북도의 마안도, 최동단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섬 독도, 최남단은 마라도이다. 한반도의 동부 및 북부는 비교적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산지 지형을 특징으로 하고, 서쪽으로 갈수록 대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에 의해 형성된 여러 충적평야와 구릉지들이 나타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2,744m)이며, 관모봉(冠帽峰, 2,541m), 북수백산(北水白山, 2,522m)의 순이다. 한국 북부의 개마고원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고지대이며, 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산맥인 태백산맥은 백두대간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의 주요한 섬으로는 면적순으로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도 등이 있는데, 대부분의 섬이 서해와 남해의 근해에 형성되어 있는 한편 제주도와 울릉도는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되어 비교적 고립되어 있다. 한국의 서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되어 있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극지역. 한반도 전체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문화.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들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했다. 전통 음악은 풍물놀이, 아리랑 등이 있다. 인구. 조선시대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대체로 7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조세와 부역 등을 피하려고 호구조사를 기피하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40% 가까이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실제 인구는 조선 시대 중기에 와서 1천만 명 내외, 후기에는 약 1,300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인구는 약 1,312여만 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대적 인구 조사를 한 1925년에는 1,900만여 명, 1935년에는 2,289만9천여 명 1944년에는 2,59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11년의 성비(여자 100명 당 남자의 수)는 110.9로 심한 불균형 현상을 보였고, 1944년에는 99.4로 여성이 증가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102.1에서 1955년에는 100.1로 성비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1980년~90년도 사이에는 여아낙태가 증가하여 1888년에 113.2로 남성이 크게 증가 하였다. 2017년 12월 말 기준으로 외국인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5천177만8544 명 이고, 2016년 12월 말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약 2천537만 명으로 추산된다. 약 700만 명인 해외 거주 한인(韓人) 중 400여만 명인 외국국적자를 제외한 전체 한국인 수는 약 8천만 명이다. 언어와 문자. 한국어. 반도 전체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 수화를 추가 공용어로 두고 있다. 한국어는 교착어로 분류되기도 하며, 또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한글. 한국어를 표기하는 글자는 한글이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말소리를 기호로 표시하는 표음 문자이고,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는 음소 문자이며, 발음의 유사성에 따라 형태의 규칙성을 띠는 매우 정교한 자질 문자(예. ㄱ·ㅋ·ㄲ, ㅏ·ㅑ·ㅐ·ㅒ)이다. 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글자를 결합해 하나의 음절을 독립적으로 표시하는 글자를 만드는 형태로 표기한다는 점에서 다른 문자와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조선의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직접 만든 문자 체계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후 정인지·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를 만들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자(漢字)로 문서가 작성되었으나, 표의 문자인 한자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향찰, 구결, 이두 등 차자 표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지배층인 양반(兩班)층과 관공서에서는 한자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한글은 19세기까지 주로 편지글·시조·가사·한글소설 등에 사용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다. 1945년 이후 본격적으로 널리 쓰여져 한국문화 발달의 기틀이 되었다. 최근에는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나 약어(略語)의 구별 등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글은 처음 만들었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으나, 지금은 ㅿ(반시옷), ㆆ(여린히읗), ㆁ(옛이응), ㆍ(아래아) 네 글자가 사라져서 스물네 글자가 되었다. 행정 구역. 한국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므로 해당 지역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의 체계와 형식적으로 통치를 주장하는 지역의 행정구역 체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행정구역. 대한민국은 현재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로 편제되어 있다. 3단계 행정체계로 도/특별시/광역시 > 시/군/구 > 읍/면/동으로 구분된다. 다만, 서울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 이상 대도시에는 시 아래에 행정구를 둘 수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광역시, 특별시, 특별자치시, 특별자치도이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역 구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현재 1직할시, 3특별시, 3지구, 9도로 편제되어 있다. 또한 3단계 행정체계로 도 > 시/군 > 동/리로 구분된다. 이는 광복 직후와는 다른 것으로 면은 통합하여 군으로 승격하고, 읍은 군의 중심지역을 이르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이 외에 로동자구와 직할시에 소속된 구역 등이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직할시,특별시이며, 지구와 함께 행정상의 특혜를 받게 되어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이 같은 행정구역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당시의 행정구역만을 인정한다(이북5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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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방정식
미분 방정식(微分方程式, differential equation)은 미지의 함수와 그 도함수, 그리고 이 함수들의 함수값에 관계된 여러 개의 변수들에 대한 수학적 방정식이다. 미분방정식의 계수(order)는 미분 횟수가 가장 많은 독립 변수의 계수가 결정짓고, 차수(degree)는 계수를 결정 지은 독립 변수의 미분꼴이 거듭제곱된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 응용 수학에서 한 매개 변수가 다른 매개 변수에 대한 의존성을 알 수 없는 문제가 종종 발생하지만 한 매개 변수가 다른 매개 변수 (미분)에 대한 변화율에 대한 표현을 작성할 수 있다. 이 경우 문제는 다른 표현과 관련된 도함수로 함수를 찾는 것으로 축소된다. 미분 방정식은 엔지니어링, 물리학, 경제학 등 수학 외의 학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유체역학, 천체역학 등의 물리적 현상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미분 방정식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있는 넓은 학문이다. 물체의 운동이 물체의 위치와 시간값의 변화에 따른 속도로 표현되는 고전역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물체의 미지의 위치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표현하고, 물체의 위치·속도·가속도·그리고 물체에 작용하는 힘 등을 그 함수에 대한 미분 방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이 변량들을 역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흔히 운동방정식이라고 부르는 이 미분 방정식은 아주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미분 방정식을 사용하여 실세계를 표현한 예로는, 중력과 공기저항만 고려하여 공중에서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 땅을 향한 공의 가속도는 중력에 의한 가속도 마이너스 공기저항에 의한 가속도이다. 중력은 일정하다고 치고, 공기저항은 공의 속도에 비례한다고 하자. 이것은 공의 가속도, 즉 공의 속도의 도함수가 공의 속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나타내면 이 미분 방정식을 풀 수 있다. 수학에서 미분 방정식은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는데, 대개 그 해―방정식을 만족시키는 함수의 집합―에 대한 연구가 흔하다. 명쾌한 함수의 형태로 해가 구해지는 것은 가장 간단한 미분 방정식들 뿐으로, 어떤 미분 방정식은 명확한 해를 구하지 않고, 그 특징만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만약 해를 독립적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컴퓨터를 이용해 수적 근사값을 구할 수도 있다. 동역학계 이론에서는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계의 질적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주어진 정확도 안에서 해를 구하기 위한 많은 수치 해석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의 목표는 다음 세가지이다. 미분 방정식에 대해 해가 있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해가 유일한지 등의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들은 대개 주어진 미분 방정식을 푸는 데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고, 여기서 얻어진 해는 전기회로, 다리, 자동차, 비행기, 하수도 등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의 종류. 미분 방정식 이론은 잘 발전되어 왔으며, 학습을 위해 방정식의 형태에 따라 그것을 의미있게 분류시키기도 한다. 상미분 방정식과 편미분 방정식. 상미분 방정식은 미지 함수와 종속변수가 하나의 독립변수를 가지는 함수인 미분 방정식을 말한다. 간단한 형태로 미지함수가 실수 또는 복소수 함수 형태를 가진다. 미지 함수의 독립 변수가 둘 이상인 미분 방정식이다. 선형과 비선형. 선형 미분 방정식은 y도함수 앞의 계수가 변수가 아닌 경우이고 y도함수가 모두 1승인 것을 말한다. 비선형 미분 방정식은 선형 미분 방정식과 다르게 y도함수 앞의 계수가 변수이며, 대표적 예시인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에서는 y도함수 앞의 계수가 유체의 성질을 나타내는 매개변수이다. 비선형 미분 방정식은 매개변수의 테일러 급수로 근사해를 구하는 방식이 있다. 미분 방정식의 예. 제1차 상미분 방정식. 1차 제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형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함수이며, 이 방정식은 간단히 변수를 다음과 같이 양변으로 분리하여 놓아서 풀 수 있다. 위 식을 적분하여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 formula_4 양변에 e를 취하면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formula_8는 임의의 상수이다. (이 결과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이 식을 원래의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된다.) formula_2가 상수가 아닌 함수이고, 어떤 함수의 경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더라 하더라도) 그 적분이 불가능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풀이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 1차 비제차 상미분 방정식. 1차 선형 상미분 방정식 중 일부는 위의 예처럼 분리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1차 비제차 상미분 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적분인자를 알아야 한다. 이 방법을 아래에 설명하고 있다.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적인 형태를 생각해 보자. 이 방정식을 푸는 방법은 특별한 "적분 인자", formula_11 에 달려있다. 위의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양변에 formula_11를 곱하자. 우리가 선택한 특별한 formula_11의 성질에 의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모양으로 변형된다. 미분에 대한 곱의 법칙에 의해 위 식은 다시 다음과 같이 변형된다. 양변을 적분하면, 를 얻고, 마지막으로 formula_19에 대해 풀고, formula_11로 양변을 나누면, 를 얻는다. formula_11는 formula_23의 함수이므로 더 이상 간단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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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푸스의 12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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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운동량
각운동량(角運動量)은 물리학에서 어떤 원점에 대해 선운동량이 돌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각운동량은 좌표의 원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각운동량을 다룰 때에는 둘을 합하거나 그에 관련한 연산을 하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신중히 고려하며 사용해야 한다. 각운동량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여러 공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응용분야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각운동량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각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이 되기 때문이다.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간의 회전대칭성 때문이다. 이러한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수학적 정의. 어떤 원점에 대한 입자의 각운동량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이다. 물리계가 여러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 때에는, 한 원점에 대한 총 각운동량은 각각의 각운동량을 더해서 구하거나, 좀 더 복잡한 부피를 가지는 물체의 각운동량은 미소질량에 대해 각운동량을 적분하여 얻을 수 있다. 많은 경우, 고정된 특정한 한 축에 대한 각운동량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각운동량을 3차원 벡터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반시계방향의 회전은 양으로, 시계방향의 회전은 음으로 취급하여 스칼라로 놓기도 한다. 이렇게 할 때에는 벡터곱의 크기로 각운동량을 표기하게 된다. 여기서 formula_10는 formula_5로부터 formula_4까지 재는 각도이다. 각운동량의 보존. 각운동량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돌림힘 formula_13 가 된다. 만약 어떤 원점을 기준으로 계에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이 되어 각운동량이 보존되게 된다. 이를 각운동량 보존 법칙 또는 간단히 각운동량 보존()이라고 부른다. 각운동량 보존 법칙은 특히 중심력이 작용하는 운동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중심력이 작용하는 입자들의 운동에서 두 입자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에서 고립된 계를 이루고, 원점은 두 입자를 잇는 선 위의 한 점으로 잡는다. 서로 작용하는 힘의 방향이 언제나 원점에서 입자들까지의 위치벡터와 같은 방향이 되므로, 앞에서 잡은 원점을 기준으로 한 알짜 토크는 언제나 0이 된다. 따라서, 각운동량은 보존된다. 일정한 각운동량을 갖는 이와 같은 경우는 행성, 위성, 보어의 원자모형등의 분석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관성 모멘트와 각운동량. 관성 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질량과 운동량사이의 관계 와 유사하게 꼴의 식이 있다. 경우에 따라 스칼라 관성모멘트 formula_19나 관성텐서 formula_20중 하나를 사용한다. 회전축이 변하지 않는 경우. 회전축이 변하지 않는 경우에 각운동량은 간단히 스칼라 관성모멘트 formula_19와 각속도 formula_22의 곱으로 쓰일 수 있다. 위 식은 스칼라 관성 모멘트의 정의 와 각속도의 공식 (formula_22와 formula_5이 수직일 때만 성립.) 을 사용하여 각운동량의 정의로부터 간단히 유도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입자 하나에 대해서만 유도를 하였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도 관성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이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일반적인 경우. 회전축도 변하는 일반적인 회전의 경우, 각운동량과 각속도벡터는 평행하지 않다. 때문에 스칼라 관성모멘트를 사용한 식이 성립하지 않고, 좀 더 일반적인 식인 관성텐서 formula_20를 사용한 아래의 식을 사용한다. 관성텐서의 각 성분 formula_31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와 속도와 각속도의 일반적 관계 를 사용하면 각운동량과 관성텐서 사이의 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 각운동량의 정의에 이를 대입하면, 를 얻고, 여기서 삼중곱을 전개하면 아래와 같은 식을 얻는다. 이제, formula_3을 성분 formula_37로 표현해 formula_38를 분리한다. 관성텐서의 정의를 대입하면, 가 되어 맨 처음 식이 성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의 각운동량. 고전적인 각운동량에 대응하는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은 궤도 각운동량 formula_41이다. 다른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과 마찬가지로, 궤도 각운동량의 값은 디랙 상수 formula_42의 정수 또는 반정수()배로 양자화된다.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에는 고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각운동량 항이 존재하는데, 이를 스핀 formula_43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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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율
원주율(圓周率, )은 원둘레와 지름의 비 즉,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수학 상수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그리스 문자 π로 표기하고, 파이(π)라고 읽는다. 원주율은 수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상수 가운데 하나이다. 무리수인 동시에 초월수이다. 아르키메데스의 계산이 널리 알려져 있어 아르키메데스 상수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원주율을 계산한 이후 뤼돌프 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주율의 값은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69399375105820974944...로,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무리수)이기 때문에 근삿값으로 3.14를 사용하거나 기호 파이(π)로 사용한다. 개요. 유클리드 평면에서 원은 크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닮은 도형이다. 따라서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는 언제나 일정하며, 이를 원주율이라 한다. 즉, 원의 지름을 d, 둘레를 C라 하면 원주율 π는 다음의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 π는 1706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가 최초로 사용했다. 이것은 둘레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페리페레스"(περιφηρής) 또는 "페리메트론"(περίμετρον)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윌리엄 존스는 “특정 도형의 길이나 넓이를 구하는 계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원을 예로 들면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약 3.14159…= π로 표기하는 것이다.”라고 기호 π의 사용을 제안하였다. 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순환마디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비순환소수이다.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통해 만드는 난수표와 성질이 같다. 원주율은 십진법으로는 값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계산에서는 근삿값을 이용한다. 한편, 원주율은 계수가 유리수인 유한 차수 다항식의 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수를 초월수라 부른다. 이 사실은 1882년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증명하였다. 여기에서 원주율은 어떤 정수에 적당한 유리수를 곱하고 제곱근을 씌우는 등의 연산을 조합하여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주율이 초월수라는 사실을 통해, 그리스 3대 난제 중 하나였던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하여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원적문제”가 유한한 대수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원과 원주율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주율이 보이는 복잡한 수열에 비해 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라이프니츠가 정리한 다음 계산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 고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원주율의 값으로 3이 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원주율을 3으로 계산하였고, 구약성경 열왕기상 7장 23절과 역대하 4장 2절에는 직경과 둘레의 길이를 기술하여 원주율이 3정도 임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고대 중국의 수학책인 《구장산술》에서도 3을 원주율로 제시하였다. 《구장산술》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실려 있다. 구장산술의 계산은 평균값으로 이루어져있다. (1) 원둘레가 30보인 경우 반지름은 30=2r*3.14 r=4.78 이경우의 면적은 71.74 (2) 지름이 10보인 경우 면적은 78.5. (1)과 (2)의 평균은 75보. 그러므로 구장산술의 계산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구장산술에 실린 계산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은 왼쪽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름이 1인 원에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는 3이고 실제 원의 둘레는 그것과는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문제였고 값을 보다 정확하게 구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통형 바퀴를 굴려 직접 측정해 원주율을 계산하였는데 =3.16049……를 사용하였다. 한편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근대 적분이 없었던 당시에 무한소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소거법을 사용하여 formula_3의 근삿값을 계산하였다. 이 방법은 임의 차원의 미지항에 대해 극한을 취하는 것으로, 귀류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계산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해답을 얻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변이 매우 많은 다각형이 임의의 원에 내접하는 경우와 외접하는 경우를 비교하여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즉, 임의의 원의 둘레는 그것에 외접하는 다각형의 둘레보다 짧고 내접하는 다각형보다 길다. 이때 다각형의 변이 많아질수록 외접하는 경우와 내접하는 경우의 둘레 차는 작아지므로 원의 둘레에 근사한다. 즉, 지름이 d인 원에 내접하는 변의 개수가 n인 정다각형의 둘레 Pn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함수의 극한을 취하면 원주율을 얻을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정구십육각형을 이용하여 formula_3의 값을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결과에 따라 formula_3의 근삿값으로 3.1416을 제시하였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면적이 formula_8임을 증명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저서 《구와 원기둥》에서 어떠한 크기가 주어지더라도 임의의 크기에 적당한 수를 곱하여 주어진 크기를 초과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를 실수에서의 아르키메데스 성질이라고 한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 수학자 유휘는 《구장산술》에 주해를 달아 다시 출판하였는데,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원주율을 =3.14 로 계산하였다. 유휘가 계산한 원주율 근삿값은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 2세기에 들어 중국의 장형은 원주율을 3.1623으로 계산하였고 5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조충지는 3.141592로 계산하였다.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컴퓨터를 도입하기 이전에 가장 긴 자리수의 원주율을 계산한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 샹크스였다. 그는 15년이나 걸려 1873년까지 소수점 이하 707자리까지 원주율 값을 계산해냈다. 하지만 후에 그 계산은 528자리까지만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컴퓨터를 통한 원주율 계산. 1949년 9월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70시간에 걸쳐 소수점 아래 2,037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원주율 계산에 컴퓨터를 도입한 이후 원주율 계산은 단순 알고리즘의 무한 반복에 불과한 작업이 되어 수학적 의미를 잃었다. 이 계산은 종종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2005년 일본 도쿄 대학의 가네다 야스마사 교수는 컴퓨터를 601시간 56분 동안 사용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1,241,100,000,000자리까지 구하였다. 2009년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 쓰쿠바 대학 계산과학연구센터는 17일, 슈퍼컴퓨터를 사용한 원주율 계산에서, 2조 5769억 8037만 자리수의 세계기록을 수립했다고 한다. (73시간 59분 소요)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2조 7천억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2010년 8월 3일에는 일본의 회사원 곤도 시게루(近藤茂)가 소수점 이하 5조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90일 7시간 소요, 검증 기간 포함 / PC 사용) 2016년 11월 11일 스위스의 입자 물리학자인 페터 트뤼프(Peter Trüb)는 105일 동안 계산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22조 4591억 5771만 8361자리(formula_9조 개)까지 계산했다. 원주율의 값. formula_3 값의 소수점 아래 1,000자리 수는 다음과 같다. formula_3 값의 소수점 아래 100만 자리, 10억 자리, 1조 자리 수는 Peter Trüb의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또는 다른 웹사이트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학적 특성. 원주율은 두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또한, 계수가 유리수인 다항식의 근이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 무리수.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에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람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탄젠트 함수의 연분수 전개식을 이용하여 이를 증명하였다. formula_13가 formula_14이 아닌 유리수일 때 위에 전개된 연분수를 십진기수법으로 나타내면 언제나 순환하지 않는 소수이므로 항상 무리수이다. 한편, formula_15 이므로 formula_16는 반드시 무리수여만 한다. 따라서 formula_3 역시 무리수이다. 초월수. formula_18 오일러 등식은 기초 수학의 여러 개념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원주율이 초월수임은 오일러 등식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오일러 등식은, 이다. 이 때 π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formula_20의 근이라면 formula_21이다. 따라서 formula_22 역시 성립하여야 한다. 이제 y=iπ라 하면 π=-iy 이고 -π=iy 이므로, iπ는 다음 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정계수 대수방정식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제 formula_24을 ν차원의 방정식이라 하면 그 근인 y1, y2,……, yν에는 iπ가 존재하여야 하므로, 식 (1)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만족하는 대수방정식의 근이 유리수라고 가정하면 무한히 약분할 수 있어서, 이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 유리수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유리수의 정의에 어긋나므로 π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formula_20의 근이라는 최초의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원주율은 초월수이다. 자세한 증명은 링크한 주석을 참고하기 바란다. 수열. 개요에서 밝혔듯이 원주율은 반복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수열을 이룬다. 네덜란드 수학자 라위트전 브라우어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브라우어르는 이 수열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이 수열을 어느 정도까지만 확인한 결과만으로는 위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실제 소수점 이하 762번째에서부터 수열 999999 가 출현한다. 이 수열은 파인만 포인트로 알려져 있으며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수열에서 확률 0.08%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경험적 방법으로는 위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브라우어르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중률 은 유한한 개수를 대상으로 한 것에만 적용 수 있을 뿐 무한한 것에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원주율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사용해 만든 난수표의 성질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원주율의 수열이 완전한 무작위성을 보이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계산식. 원주율은 무리수이기 때문에 그 값은 근삿값으로밖에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계산에는 3.14나 22/7 라는 근삿값을 사용해도 충분하다. 355/113은 외우기 좋고, 정밀도도 좋다. 좀 더 정밀한 기술의 계산에서는 3.1416 또는 3.14159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상 예보나 인공 위성 등의 계산에는 소수점 아래 30자리까지 나아간 근삿값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불규칙적인 패턴을 가지는 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규칙적인 수식을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더 정확한 값을 얻으려면 수식을 연장하기만 하면 된다. 위 식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전개한 것으로 흔히 라이프니츠의 공식이라고 부른다. 이 식 외에도 원주율을 계산하는 공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7세기의 프랑스 수학자 프랑수아 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무한급수로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또한, 스털링 근사를 사용해 원주율을 유도할 수도 있다. 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연분수로 표현할 수 있다. 1996년 데이빗 베일리는 피터 보어와인, 시몽 플루프와 공동으로 π에 관련된 새로운 무한급수를 발견했다. 이 식을 이용하면 2진수 그리고 16진수로 표기한 π값의 소수점 아래 "n"자리 값을 "n"-1째 자리까지 구하지 않고 바로 계산해 낼 수 있다. 베일리의 홈페이지 에선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구현한 실제 예를 볼 수 있다. 적용. 원주율은 수학과 물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적용한다. 기하학. 아르키메데스는 원과 구의 다음과 같은 성질을 증명하였다. 한편, 원은 이심률이 0인 타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타원 방정식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때 타원의 넓이를 A라 하면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각의 크기를 나타내는 무차원 단위인 라디안은 오른쪽 그림과 같이 정의하여 반지름과 호의 길이가 같을 때 1라디안이 된다. 따라서, 원 전체는 2π라디안이고 이를 도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바젤 문제. 1687년 스위스의 바젤의 수학 교수였던 야코프 베르누이와 요한 베르누이 형제는 조화급수가 발산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조화급수의 각 분모를 제곱한 다음 식을 닫힌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며 논문의 끝에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면 알려주기 바란다고 적었다.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이 문제는 바젤 문제로 알려지며 해석학자의 악몽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레온하르트 오일러로 1735년에 이 급수의 값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후일 이 급수는 다음과 같은 일반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이 리만 제타 함수이다. 리만 제타 함수는 s가 짝수일 때 위 식을 이용하여 그 값을 쉽게 계산할 수 있으나 홀수일 때는 자명하지 않다. 1978년 s가 3일 때 무리수로 수렴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수렴값은 아페리 상수라고 한다. 복소수 계산. 복소수 formula_43는 극좌표계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복소해석학에서 π는 복소수 변수가 지수 함수에서 보이는 행동과 연관이 있으며 오일러의 공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i"는 허수 단위이기 때문에 "i"2 = −1 이므로 이를 π라디안(=180°)과 함께 자연로그의 밑 "e"의 지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오일러 등식을 얻는다. 따라서 "n" 번째 단위근은 다음과 같다. 이제 가우스 적분으로 나타내면, 이 결과는 반정수의 감마 함수가 √π의 유리수 곱임을 뜻한다. 확률과 통계. 확률과 통계에서 원주율이 등장하는 정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된다.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이 제기한 뷔퐁의 바늘 문제는 원주율의 근삿값을 구하는 경험주의적인 방법으로 거론된다. 길이가 L인 바늘을 일정 간격으로 그린 평행선에 떨어뜨린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평행선의 간격 S가 바늘의 길이보다 크다고 하면, 바늘을 떨어뜨린 횟수 n번에 대해 바늘이 평행선 밖으로 나간 횟수 x번(단, x>0)에는 몬테카를로 방법에 의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즉, 뷔퐁의 바늘 문제에서 바늘을 떨어뜨리는 횟수가 매우 많아지면 바늘이 평행선을 벗어나는 횟수에 대한 바늘을 떨어뜨린 전체 횟수의 비는 원주율에 근사한다. 물리학. 원주율 자체는 물리 상수가 아니지만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두루 사용한다. 이는 자연 현상의 상당수가 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전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등속원운동에서 각속도와 원주속도는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이 외에 물리학에서 원주율을 사용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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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프리고진
일리야 로마노비치 프리고진(, , 1917년 1월 25일 - 2003년 3월 28일)은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벨기에의 화학자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브뤼셀 자유대학(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산일구조(散逸構造), 복잡계, 비가역성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1977년 비평형 열역학, 특히 소산 구조론의 연구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벨기에의 보두앵 1세 국왕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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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탈피
엔탈피(, )는 열역학계의 성질로, 계의 내부 에너지에 압력 곱하기 부피를 더한 값으로 정의된다. 대기압이나 수압과 같이 일정한 압력에 둘러싸인 계를 다룰 때 유용하게 사용되는 상태함수이다. 기호는 대개 라틴 대문자 "H"이다. 국제단위계상에서 줄이, 영국 열량 단위에서 칼로리가 엔탈피를 나타내기 위한 단위로 사용된다.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하면 계의 내부에너지 변화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가한 열량과 해준 일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등압과정에서는 계가 받은 열량이 계의 엔탈피 변화량과 같게 된다. 따라서 일의 양을 매번 계산하기 번거롭다는 등의 실용적인 이유로 등압과정에서 측정된 엔탈피 변화량()이 주로 사용된다. 화학 물질에 대해 엔탈피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대부분 표준상태, 즉 부근의 압력과 부근의 온도를 상정한다. 엔탈피 변화량은 흡열 과정에서 양의 값을, 발열 과정에서는 음의 값을 가진다. 정의. 엔탈피는 다음 식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는 계의 엔탈피를, 는 계의 내부 에너지를, 는 계의 압력을, 는 계의 부피를 의미한다. 엔탈피는 크기 성질로, 성분이 동일하다면 계의 크기와 비례하여 값이 달라진다. 세기 성질로 사용하고 싶다면 비엔탈피 나, 몰엔탈피 를 정의해 사용할 수 있다. 이 때 은 질량을, 은 몰수를 의미한다. 불균질한 계의 경우 총 엔탈피 값은 각 부분의 엔탈피의 총합으로 구할 수 있는데,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총 엔탈피 값을, 는 각 부분계를, 는 그 부분계의 엔탈피를 의미한다. 중력장 내에 놓인 닫힌 계를 고려해보자. 이 경우 압력 는 고도에 반비례하여 즉각적으로 달라지지만, 온도 는 평행이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는다. 이 경우 엔탈피는 다음과 같이 적분을 사용해 나타낸다. 여기서 (로)는 밀도를, 는 비엔탈피를 나타내며 따라서 는 엔탈피 밀도를 나타낸다. 는 무한히 작은 부피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적분은 모든 부피를 무한히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서 각 부분의 엔탈피를 더한 것과 같다. 위의 엔탈피의 정의는 그 값이 기준을 어떤 점으로 잡느냐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쓰이는 것 보다는 계의 어떤 상태와 다른 상태 간의 엔탈피 차이(ΔH)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어떠한 과정에서 압력의 변화가 0인 경우엔(ΔP=0), 엔탈피의 변화량은 계가 주변과 열교환의 형태로 주고받은 에너지인 열량을 나타낸다. formula_3 따라서 주변의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반응의 전후 열량 출입을 나타내는 데에 많이 쓰인다. 반응 엔탈피. 계의 엔탈피는 직접 측정할 수 없으며, 계의 엔탈피 변화로 대신 측정된다.엔탈피 변화는 다음 방정식으로 정의된다. 반응 엔탈피(ΔH) = 엔탈피 변화량 formula_4 E출입량 formula_4E 차이값 between 반응물 & 생성물 formula_4 반응열 formula_7 ΔH는 "엔탈피 변화량"이다. formula_8는 계의 최종 엔탈피이다. formula_9는 계의 초기 엔탈피이다. ΔH의 구성 = 부호 + 크기 ΔH 부호의 의미 - (+) 부호 : 흡열 반응 - (-) 부호 : 발열 반응 ΔH 크기의 의미 - E 출입량 = E 차이 between 반응물 & 생성물 역반응 ΔH = -정반응 ΔH 엔탈피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 달라지므로 온도와 압력을 표시한다. 온도와 압력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 25도씨, 1기압 상태이다. 엔탈피의 변화. 엔탈피 변화는 화학 반응을 일으킬 때 열역적 계 또는 주위에서 관찰된 엔탈피의 변화를 설명한다. 화학반응이 완료된 후 엔탈피 값은 달라진다. 이는 생성물과 반응물간의 엔탈피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엔탈피 변화값 (ΔH)은 (생성물의 엔탈피 값의 총합) - (반응물의 엔탈피 값의 총합)으로 나타 낼 수 있다. 일반적인 엔탈피 변화의 예로서는 표준 생성엔탈피가 있다. 이러한 엔탈피의 측정은 표준화된 환경 또는 표준 조건에서 측정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다. 표준 조건 (Standard conditions)으로는 엔탈피의 종류. 연소열(연소 엔탈피). 물질 1몰이 완전 연소하여 가장 안정한 생성물이 될 때 방출하는 열량 보통 연소 엔탈피(ΔH)는 음수이다. 생성열(생성 엔탈피). 물질 1몰이 가장 안정한 원소로부터 생성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 생성열 formula_4 생성반응식의 E 차이 홑원소 물질 생성열 =0 -> 예외 : <chem>O3 </chem>, 다이아몬드(C)의 생성열 formula_110 생성열 = 연소열인 반응 -> C(흑연) + <chem>O2</chem>-> <chem>CO2</chem> ΔH=C(흑연) 연소열 = <chem>CO2</chem> 생성열 -> <chem>H2 + 1/2O2 -> H2O</chem> ΔH=<chem>H2</chem> 연소열 = <chem>H2O</chem> 생성열 25도씨 1기압에서의 생성열 = 표준 생성열 formula_4 생성열 일부 표준 형성의 열은 아래 표에 열거되어 있다. 분해열(분해 엔탈피). 물질 1몰이 가장 안정한 원소로 분해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 분해열 = - 생성열 중화열(중화 엔탈피). 산과 염기가 중화되어 <chem>H2O</chem>1몰이 생성될 때 방출하는 열량 -산과 염기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정 (ΔH=-56.2 kJ/mol) 용해열(용해 엔탈피). 물질 1몰이 다량의 물에 용해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 엔탈피의 측정. 간이 열량계에 의한 연소열 측정. 원리 :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이 흡수한 열 연소열(kJ/mol) = 물이 흡수한 열량/연소한 물질의 수 = (물의 (비열 X 질량 X 온도변화)) / ((연소한 연료질량/연료의 화학식량)) 통 열량계에 의한 연소열 측정. 원리 :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과 열량계가 흡수한 열 연소열(kJ/mol) = (물이 흡수한 열량 + 열랑계가 흡수한 열량) / (연소한 물질의 몰수) = ((물(비열 X 질량 X 온도변화)) + (열량계(열용량 X 온도변화)) / ((연소된 물질 질량) / (연소된 물질 화학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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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에너지
운동 에너지()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 또는 입자가 갖는 에너지이다. 주어진 물체의 어떤 속도에서의 운동에너지는 그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그 속도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의 양으로 정의된다. 가속이 되어 운동 에너지를 얻게 되면 속도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 한 그 운동에너지를 유지한다. 또한, 그 운동 상태에서 정지 상태까지 감속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 또한 원래 그 물체의 운동 에너지와 같다. 고전 역학에서 질량이 m인 비회전체의 속도의 크기가 v일 때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formula_1이다. 역사. 고전역학에서 "E ∝ mv2"라는 원리는 처음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이 때 운동 에너지를 "살아있는 힘()"라고 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는 이 관계의 실험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물체를 점토 블럭에 떨어뜨리면서 그라브산드는 그들의 관통 깊이가 충돌 속도 크기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브르퇴유는 실험 결과가 암시하는 바를 인지하였고 자신의 설명을 발표하였다. "운동 에너지" 와 "일"이라는 용어의 현대의 과학적 의미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리올리는 1829년에 "Du Calcul de l'Effet des Machines"를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려고 시도하였다. 윌리엄 톰슨은 약 1849-51년도에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도입. 에너지는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전자기 복사, 중력 에너지, 전기 에너지, 탄성 에너지, 핵 에너지, 정지 에너지 등과 같이 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바로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이다.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어떻게 전환이 되는지 살펴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는 음식에서 제공되는 화학 에너지를 자전거를 가속 시키는데 사용한다. 평평한 표면에서 이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저항과 마찰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을 빼면 더 이상 필요한 일이 없다. 이 과정에서 화학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지만 그 과정은 완전히 효율적인 것이 아니고 열을 부가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운동하는 사이클리스트와 자전거의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가 충분히 높은 언덕을 만나 페달을 밟지 않은 채로 언덕 정상에서 멈추게 되었다고 하자. 그럼 운동 에너지는 완전히 중력 위치 에너지로 변환되게 되고 이것은 언덕을 다시 내려오면서 운동 에너지로 바뀌게 된다. 마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이 생기므로 추가적으로 페달을 밟지 않는 한 원래의 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마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이번엔 싸이클리스트가 바퀴 하나에 발전기를 연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하강하는 과정에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게 된다. 그럼 발전기가 없었을 때보다 싸이클리스트는 언덕 아래에서 더 적은 속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에너지 일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환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브레이크를 밟게 될 경우 운동 에너지는 마찰에 의해서 열로 빠르게 전환 될 것이다. 다른 속도의 함수인 물리량과 같이 물체의 운동 에너지 또한 물체와 관찰자의 기준계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물체의 운동 에너지가 불변량인 것은 아니다. 우주선은 공전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운동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부터 얻는다. 완벽한 원 궤도의 경우 지구 근방의 우주 공간은 마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운동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다시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올 경우 운동 에너지는 열로 전환된다. 만약 궤도가 타원형이거나 쌍곡선의 형태라면 공전하는 동안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교환된다. 근일점에서 운동 에너지는 최대, 위치 에너지는 최소가 되고 원일점에서는 운동 에너지는 최소, 위치 에너지는 최대가 된다. 그렇지만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합은 보존된다.(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 에너지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달될 수 있다. 당구에서 플레이어가 당구공을 큐로 치게 되면 그 공에게 운동 에너지를 전달하게 된다. 만약 그 공이 다른 공과 충돌한다면 에너지가 전달 되기 때문에 멈춰 있던 공은 가속되고 다른 공은 급격하게 느려진다. 당구에서의 충돌은 탄성 충돌에 가깝다. 따라서 운동 에너지는 보존된다. 비탄성 충돌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열, 소리 등)로 분산된다. 플라이휠은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운동 에너지가 회전 운동의 형태로 저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물리적 상황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뉴턴 역학(고전 역학)에서의 ½mv² 공식이 가장 적합하다. 하지만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가까워지면 상대론적인 효과가 나타나며 상대성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만약 물체가 원자나 아원자 수준의 크기라면 양자 역학적인 효과가 두드러지며 양자 역학이 필요하게 된다. 뉴턴 운동 에너지. 강체의 운동 에너지. 고전 역학에서 점 입자(너무 작아서 질량이 한 점에 집중해 있다고 봐도 되는 물체) 혹은 비회전 강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의 속력과 질량에 의존한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과 질량의 곱에 1/2을 곱한 것과 같다. 따라서 formula_2 이고, 여기서 formula_3은 물체의 질량 formula_4는 물체의 속력(혹은 속도)이다. SI 단위에서 질량은 킬로그램, 속도는 m/s로 측정된다. 그리고 운동 에너지의 단위는 [[줄 (단위)그냥 줄 중에는 영어로 j라고 한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80kg의 물체가 18m/s로 운동할 때 운동에너지를 계산하려고 한다면 formula_5 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을 던진다면 당신은 공을 가속시키기 위해 [[일 (물리학)|일]]을 가할 것이고, 그 공이 어떤 물체에 부딪히고 그 물체를 움직이게 한다면 부딪힐 때 공이 그 물체에게 일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운동 에너지는 정지 상태에서 어떤 속력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이므로 알짜힘 x 변위 = 운동 에너지인 것이다. 즉, formula_6 이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물체의 속력이 두 배가 된다면 운동 에너지는 네 배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차가 다른 동일한 질량의 차보다 두 배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하자. 두 차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마찰력이 동일하다고 하면 속력이 두 배 빠른 차가 네 배더 많은 거리를 브레이크를 밟아야 완전히 멈출 수 있다. 이는 감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네 배인 것을 의미한다.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또한 [[운동량]]과도 관계가 있는데, 이는 다음을 만족한다. formula_7 여기서, formula_8는 물체의 운동량, formula_3은 물체의 질량이다. [[평행 이동|병진]]식 운동 에너지, [[강체]]의 선형 운동에서의 운동 에너지 또한 formula_10 이다. 여기서 formula_3은 물체의 질량 formula_4는 강체의 [[질량 중심]]의 속력이다.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에 의존한다. 하지만 에너지가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는 고립계에서의 전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켓 엔진에서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는 화학 에너지는 기준계에 따라 우주선체와 배기 가스에 다른게 나뉜다. 이를 오베르트 효과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떤 기준계를 선택하든지 운동 에너지, 연료의 화학 에너지 등을 포함한 전체 에너지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기준계를 따라 움직이는 서로 다른 관측자들이 관측한 전체 에너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기준계에 따라 계의 운동 에너지는 달라지는데 운동량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기준계에서 측정할 때 운동 에너지는 최소값을 가진다. 이는 이 기준계에서 계의 총 운동량이 0이기 때문이다. 유도. 극소 시간 "dt" 동안 입자를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은 "힘" 과 "변위"의 [[스칼라곱|내적]]과 같다. 따라서, formula_13 이고, 여기서 formula_14 라고 가정하였다. 내적의 성질을 이용하면, formula_15 이므로, 질량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다음과 같다. formula_16 따라서 이것은 전미분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적분]]하여 운동 에너지를 구할 수 있게 된다. 물체가 0초 일 때 정지해있다고 가정하고 0부터 t까지 시간에 대해 적분하면 formula_17 이다. 이 식은 운동 에너지("Ek")가 [[속도]](v)와 운동량(p)의 [[무한소|미소]] 변화의 [[스칼라곱|내적]]과 같음을 의미한다. 또한 물체는 처음에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회전체의 운동 에너지. 강제 Q가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어떤 선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면 회전 운동 에너지(formula_18)가 존재하게 된다. 이는 움직이는 부분들의 운동 에너지 합과 같다. 따라서, formula_19 여기서 이 식에서 [[관성]] 모멘트는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하며 각속도 또한 그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한다. 물체의 편심된 모양때문에 생기는 떨림 운동이 있는 물체의 관한 좀더 일반적인 식도 존재한다. 계의 운동 에너지. 계에서의 물체는 계와의 상대적인 운동에 의해 생기는 내적인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태양계]]에서는 행성과 미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가스 탱크 안에서는 분자들이 거의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때 계의 운동에너지는 계가 포함하는 모든 물체의 운동 에너지의 합이다. 정지한 거시적인 물체(즉, 물체의 운동량 중심을 따라 이동하는 기준계)는 원자 또는 분자 수준에서 분자의 병진, 회전, 진동이나 전자의 병진과 스핀 또는 핵 스핀 등 때문에 운동 에너지 형태의 다양한 내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이들 모두는 물체 질량을 구성하게 된다. 거시적인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때 운동 에너지는 거시적인 운동에만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형태의 내적 에너지들은 물체의 질량, 관성, 전체 에너지를 구성하게 된다. 기준계. 한 물체의 속력 혹은 위치 에너지는 계에 의존적이며 어떤 [[관성 좌표계|관성계]]를 선택하든 음수가 아닌 값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측자 옆으로 총알이 지나간다고 해보자. 그럼 총알은 관측자의 기준계에서 운동 에너지를 갖게 된다. 이번엔 관측자가 총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고 해보자. 그럼 그 관측자의 기준 계에서 총알의 운동 에너지는 0이 된다. 한편, 계의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한 어떤 관성계를 선택하든 전체 운동 에너지가 0이 되도록 할 수 없다. 즉, 관성계를 정했을 때 그 안에서 모든 물체가 정지한 상태가 아니면 전체 운동 에너지는 0이 아닌 최소값을 가진다. 계의 전체 운동 에너지는 관성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운동량 중심을 기준계로 하였을 때 전체 운동에너지와 같거나 혹은 전체 질량이 질량 중심에 집중 되었을 때 그 전체 질량이 갖는 운동 에너지와 같다. 이것을 간단히 나타내보자. formula_25를 어떤 기준계 "k" 에서의 질량 중심 기준계 "i"의 상대적인 속도라고 하자. 그런데, formula_26 이므로 formula_27 이다. formula_28를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운동 에너지라고 한다면 formula_29는 단순히 전체 운동량이 될 것이고 이것은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 정의에 의해 0이 된다. 그리고 formula_30는 전체 질량이므로 다음을 얻는다. formula_31 그러므로 계의 운동에너지는 운동량 중심 기준계 즉, 질량 중심이 정지해있는 기준계(질량 중심 기준계 또는 다른 운동량 중심 기준계)에서 최소값을 가진다. 이외에 다른 기준계에서는 질량 중심의 속력으로 이동하는 전체 질량에 해당하는 추가적인 운동 에너지가 존재한다. 운동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계의 운동 에너지는 불변량이다. 계에서의 회전. 가끔 물체의 운동 에너지를 물체 질량 중심의 병진 운동 에너지와 질량 중심에 대한 회전 에너지로 나누는 것은 편리한 방법이다. 즉, formula_32 이고, formula_33는 전체 운동 에너지, formula_34는 병진 운동 에너지, formula_35은 질량 중심을 관통하는 선을 회전축으로 하는 회전 운동의 에너지이다.(질량 중심의 기준계에서 관측할 때) 강체의 상대론적 운동 에너지. 만약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꽤 가까울 때, 운동 에너지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상대론을 적용해야 한다. [[특수 상대성이론|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선형 운동량의 표현은 고전 역학에서와 다르다. 물체의 [[불변 질량|정지 질량]]을 formula_3, formula_37와 formula_4를 각각 속도와 속력, formula_39를 진공에서의 빛의 속력이라고 한다면 선형 운동량은 formula_40 formula_41 이다. 한편, [[부분적분|부분 적분]]에 의해 formula_42 이고, formula_43 이므로 formula_44 이다. formula_45는 [[부정적분|부정 적분]]의 [[적분상수|적분 상수]]이다. 표현을 간단히 하면 formula_46 이다. formula_45는 formula_48일 때 formula_49인 것을 대입하면 formula_50 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formula_51 이다. 이 공식에 의하면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도록 가속할 때 필요한 일의 양이 무한대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물체를 빛의 속도 보다 빠르게 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식의 부산물은 바로 [[질량–에너지 등가|질량-에너지 동등성]]-정지한 물체는 formula_52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가지고있다-이다. formula_53일 때, 상대론적 운동 에너지는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 에너지와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이항근사나 [[테일러 급수|테일러 전개]]의 앞 두 항만을 취할 때 얻을 수 있다. 즉, formula_54 따라서 낮은 속력에서 전체 에너지 formula_55는 정지 질량 에너지 더하기 뉴턴 운동 에너지로 나뉜다. 빛보다 매우 낮은 속력으로 운동할때(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운동), 첫 테일러 전개의 첫 두항이 지배적인 값을 차지한다. 테일러 전개의 다음항까지 근사를 하면 formula_56 인데 여기서 맨 오른쪽 식의 두번째 항은 낮은 속력에서 매우 작다. 예를 들어, 10km/s로 운동하는 물체의 경우 두번째 항은 0.0417J/kg(첫번째 항은 50MJ/kg)이다. 100km/s 일때는 417J/kg(첫번째 항은 5GJ/kg)이다. 따라서 첫번째 항에 비해 매우 작은 값을 가짐을 알 수 있다. 상대론에서 운동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는 formula_57 로 주어진다. 이 또한 테일러 전개를 할 수 있으며 첫번째 항이 뉴턴 역학에서의 표현과 일치한다. 양자 역학에서의 운동 에너지. [[양자역학|양자 역학]]에서 운동 에너지와 같은 관측할 수 있는 물리량들은 [[연산자]]의 형태로 나타내어진다. 입자의 질량이 "m" 이라면 운동 에너지 연산자는 [[해밀토니언 (양자역학)|해밀토니안]]에서 하나의 항으로 나타나며 좀 더 기본적인 연산자인 운동량 연산자 formula_58를 사용하여 정의된다. 운동 에너지 연산자를 formula_59라고 하면, formula_60 이다. 이는 고전 역학에서 운동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 formula_7 와 유사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슈뢰딩거 묘사|슈뢰딩거의 묘사]]에서 formula_58는 각각의 위치 좌표에 대해 미분을 취한 형태인 formula_63이며, 따라서 formula_64 이다.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 formula_65는 각 전자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의 합이다. formula_66 formula_67는 전자의 질량이며 formula_68는 i번째 전자에 대한 라플라시안이다. 양자 역학에서 [[밀도범함수 이론|밀도범함수]] 형식화(formailsm)에서는 오로지 전자 밀도에 대한 정보만 필요로한다. 다시 말해서, 보통 파동 함수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자 밀도 함수를 formula_69라고 하면,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는 알 수 없지만 1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formula_70 formula_71는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바이츠제커]]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이다. 입자의 운동 에너지. 열을 가진 모든 입자 또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기체]]의 운동에너지는 [[몰 (단위)|몰]]수 "n" 과 [[절대온도]] "T"에 비례한다. 즉, formula_72 와 같다. 여기서 "R"은 [[기체 상수]]이다. 참고 문헌. [[분류:동역학]] [[분류: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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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카나
가타카나(, , )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음절 문자 중 하나이다. 히라가나와 함께 가나라고 부른다. 가타카나는 해당하는 음을 갖는 한자의 일부분을 가져와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한문을 뜻으로 읽기 위해 신라의 각필구결 일부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가타카나를 히라가나보다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라 일본 유아들이 가나를 배울 때 히라가나를 먼저 배운 뒤에 가타카나를 배우고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쓴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한영 자판 상태에서 가타카나 입력을 하려면 ㅃ+한자 키를 써야 한다. 히라가나가 ㄸ과 한자 키의 조합 방식과 유사한 개념이 될 수도 있다. 용례. 일본어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쓰인다. 이밖에도, 일본에서 어떤 항목들을 열거할 때 그 순서를 구별해 나타내는 기호 (ア, イ, ウ…)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이로하순 (일본의 가나다순)대로 적는 경우가 많다. 과거 메이지 유신기부터 태평양 전쟁기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제국 시대에 작성된 공문서와 법령은 무조건 가타카나와 한자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가타카나라는 말 자체는 '片仮名'라는 한자 표기로 되어 있으나 이를 다시 가타카나로, 즉 'カタカナ'라고 적는 경우도 있다. 또 'v'음을 나타낼 때 쓸 수 있는 가나는 가타카나의 'ヴ' 뿐이며, 그 활용형인 'ヴァ, ヴィ, ヴェ, ヴォ' 역시 가타카나로만 적을 수 있다. 한편 일본어 이외에도 아이누어를 표기할 때 주로 사용되며, 과거 일제 점령기의 중화민국에서도 타이완어를 표기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타이완어는 한자 내지는 알파벳 표기법을 따라쓰고 있다. 가타카나 50음도. 로마자 표기는 헵번 표기법을, 한글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의 어중/어말 표기법을 따랐다.(다만, 근현대에 추가된 가타카나에 대해서는 표기법에 정해진 한글 표기가 없다.) 회색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들 또는 사용이 드문 글자들이다. 역사. 고대 일본에서 한자의 일부 획을 따서 문자로 삼은 것은 일찍이 7세기부터였으나, 오늘날 가타카나의 직접적 기원은 9세기 초 나라 지방의 고종파 (古宗派)에 속한 학승들이 불경에 쓰인 한문을 일어로 훈독하기 위해 만든 글자 체계에서 비롯됐다. 이들이 만든 글자는 한문 옆에 작게 붙여 쓰는 일종의 훈점 (訓点)으로, 한자음만 빌려 쓰는 만요가나의 일부 획을 다시금 생략하여 만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カ"(카)는 "加(더할 가)"의 왼쪽 부분을 따서 만들었다. 초창기만 해도 경전의 각 행간 여백에 오코토텐 (ヲコト点)과 같이 쓰였으나 점차 빠르고 조그맣게 적기 위해 형태의 간략화가 이뤄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쓰는 가타카나의 원형이 된 것은 물론, 오코토텐의 역할을 대신하여 훈독에 널리 쓰이기에 이르렀다. 가타카나는 그 유래에서 짐작되듯이 승려나 박사들이 한자의 음과 훈을 주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가 많았으며, 꽤 초창기부터 현대 일본어처럼 한자와 가나를 번갈아 쓴 사례도 발견된다. 나중에는 한문의 주석 역할을 벗어나 노래 가사집이나 이야기집과 같이 일상 속 필기에도 쓰이는 등 사용 범위가 넓어졌지만, 히라가나로 쓰인 글이 미적 가치를 평가받고 감상하는 수준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아직까지 기호적인 성격이 강했다. 초창기 가타카나는 그걸 쓰는 개개인과 집단마다 글꼴의 차이가 컸고, 1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체자 (異体字)의 종류가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글꼴이 통일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모습에 가깝게 되었다. 가타카나가 히라가나와 같은 하나의 문자 체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 시대 중기이다. 이때 쓰여진 <우쓰호모노가타리> (宇津保物語) '국양 상' (国譲) 권의 '글씨의 모범' (書の手本)에 가타카나가 실려 있다. 또 에도 시대의 학자였던 반 노부토모 (伴信友)의 설에 따르면, 헤이안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츠츠미추나곤모노가타리> (堤中納言物語)의 '무시메즈루 공주님' (虫めづる姫君) 편에 무시메즈루 공주가 남자에게 보낸 연애편지에서 "가나 (히라가나)는 아직 쓰지 못하오니 가타칸나 (가타카나)로"라는 구절이 있어, 이 당시 문자를 습득하는 순서는 가타카나에서 시작해 히라가나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일어학자 고마쓰 히데오 (小松英雄)는 '무시메즈루 공주님'에서 보이는 서술은 기본적으로 허구인 이야기에서 쓰인 특수한 사례이며, 실제로는 가나 (히라가나)를 아릅답게 쓸 수 있게 배우는 것이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서양 외래어 유입에 따라 그 활용 빈도가 한층 높아졌으며, J. C. 햅번이 지은 일영사전인 <일영어림집성> (和英語林集成)의 도표에서 메이지 초의 가타카나 글꼴을 찾아볼 수 있다. 1900년 소학교령 시행 규칙으로 한 소리 한 글자라는 원칙에 따라 표준 글꼴만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지금의 가타카나가 확립되었다. 한편 가타카나는 히라가나에 비해 학문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보다 정식적인 문자로 취급되어 법령과 기타 공문의 표기 문자로 쓰였고, 교육상으로도 히라가나에 앞서 가르쳤다. 그래서 이 당시 교과서를 보면 가타카나와 한자로만 서술된 것이 많다. 하지만 신문이나 문예집 등 민간 분야에서의 서술법에까지 가타카나 사용이 강제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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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체
위상수학과 기하학에서 다양체(多樣體, )는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닮은 위상 공간이다. 즉, 국소적으로는 유클리드 공간과 구별할 수 없으나, 대역적으로 독특한 위상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정의. 음이 아닌 정수 formula_1에 대하여, formula_2차원 국소 유클리드 공간(局所Euclid空間, ) formula_3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이다.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네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을 다양체라고 한다. 성질. 만약 어떤 위상 공간 formula_3가 formula_13차원 다양체이자 formula_2차원 다양체이며, formula_15이라면 formula_3는 공집합이다. 모든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양체이다. 국소 유클리드 공간 formula_17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모든 제2 가산 다양체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파라콤팩트 분해 가능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낮은 차원의 다양체의 분류. 위상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위상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예. 다양체의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다양체가 아닌 국소 유클리드 공간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비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다양체는 (정의에 따라 파라콤팩트 공간이지만) 제2 가산 공간이 아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다양체에 대하여 제2 가산 공간인 것은 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것과 동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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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현대그룹 창업주로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개요.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였던 1940년대 초반 시절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 현대건설의 전신)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뛰어난 상업과 기업경영능력으로써 현대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초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선출되었으며,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해 12월에 제14대 대선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을 추진하였다. 1998년 6월 16일을 기하여 1차 소 500마리, 10월 27일 2차 소 5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 이 유일하다. 양반 가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몽필의 생모가 천한 출신이라 양반 가문인 정주영과 맺어지지 못했다는 소문도 존재한다. 그러나 남한 지역의 양반들은 북한 지역의 양반들에 대해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진실을 알 수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상업을 익히다. 당시 4%만 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공부를 잘하였으나 공부하기 싫다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던 농사도 하기 싫어했다. 상대적으로 보면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편이었으나 국가가 가난했기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였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의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 중구 신포동(도로명:신포로)에 위치한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부기를 할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아,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경일상회는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복흥상회를 폐업해야 했다. 기업 활동. 자동차 공장 설립. 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현대그룹 설립.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창업 전반기와 전후 복구 사업.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중공업에도 진출하였다. 경제건설사업 참여.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1966년에 발행된 500원 지폐 앞면에는 남대문 뒷면에는 거북선 함대가 그려진 지폐가 존재했기에 시계열상 일치한다) 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사회 활동.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여, 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년 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에 선출되었고, 1970년대 중근동 지역 건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7년부터는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다. 올림픽 유치 추진 활동.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올림픽의 서울특별시 유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1년 3월에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 1981년 11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생애 후반. 정계 입문 초기.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해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 출마.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김영삼과의 경쟁구도 때문에 생긴 감정 때문인지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 다른 행적이 없다가, 이후 김대중정권을 적극 도우며 방북을 한다던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방북과 금강산 개발. 그러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가 실시한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정부의 햇볕정책을 따른다는 뜻 외에도,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이 남한이 아닌, 북한영토인 강원도가 고향이라는 사실도 북한에 소를 가져간 이유이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그해 11월 18일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사망.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 한편 정주영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아내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기타. 1992년 11월에는 MBC 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진행자의 한사람인 최병서가 사회 저명인사를 흉내, 풍자할 때 그의 성대 모사와 함께 풍자를 하기도 했다. 1992년 12월에도 14대 대통령 선거를 전에 두고 다른 대통령후보자들과 함께 최병서의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했다. 현대그룹 회장으로 재직시 아들들과 함께 평소에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본사까지 걸어서 출근하였다. 평소에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매일 아침 6시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아침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주로 미역국을 준비했으며 이 때문에 현대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2004년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영웅시대》가 제작되었다. 2021년 아산사회복지재단은 20주기를 맞아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독후감 대회를 개최했다. 책에 담긴 기업가 정신과 역경 극복 사례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며, 2021년 1월 5일부터 2월 25일까지 접수 후 3월 중에 시상이 진행된다. 시상은 중/고등학생 부문, 대학생/대학원생/일반 부문 총 2개 부문으로 나뉘며, 총 49명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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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가드너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 1914년 10월 21일 ~ 2010년 5월 22일)는 미국의 과학 저술가이다. 특히 유희수학() 분야의 저술로 이름이 높다. 생애. 오클라호마주 털사 태생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유희수학(recreational mathematics) 분야를 집대성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수학을 비롯한 과학뿐 아니라 마술, 문학(그는 루이스 캐럴의 전문가이다), 유사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져 6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제임스 랜디와 함께 회의주의 운동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미국 노스캐럴라이나 주의 헨더슨빌(Hendersonville)에 만년을 보내다가 2010년 5월 22일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노먼(Norman)에서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그는 미국의 대중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1956년부터 1981년까지 수학 게임(Mathematical Games) 컬럼을 연재하였다. 그가 연재를 그만둔 후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컬럼을 물려받았는데, 마틴 가드너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수학 게임'의 애너그램인 "Metamagical Themas"를 자신의 컬럼 제목으로 정하였다. 1993년이래 그의 유희수학에 대해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부정기적으로 모여 "Gathering for Gardner"(G4G)란 콘퍼런스를 열기도 한다. 저술. 그는 자신의 컬럼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주제들을 대중에 소개하였다. 65권의 책을 썼으며, 초정상주장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the Scientific Investigation of Claims of the Paranormal)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이비과학을 반박하는 책과 글을 다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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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
프리먼 존 다이슨(, 1923년 12월 15일 ~ 2020년 2월 28일)은 영국 태생의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저명한 물리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평생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 생애 및 업적. 프리먼 다이슨은 1923년 12월 15일 영국 버크셔주 크로손()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서 1941년까지 윈체스터 칼리지를 다녔다. 18살이던 1940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아래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입대하여 20살의 나이에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에서 분석가로 일했다. 전쟁이 끝나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7년에는 두 개의 정수론 논문을 출판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47년부터 코넬 대학교 박사과정에 등록하여 한스 베테의 지도 아래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연구에 뛰어들면서 이후 평생 동안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 프리먼 다이슨의 가장 널리 알려진 학문적 업적은 양자장론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작업들이다. 그는 1949년에 양자전기역학을 기술하는 두 가지 방법, 즉 리차드 파인만의 파인만 도표를 이용한 경로적분과 줄리안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제안한 연산자 계산이 동치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파인만 도표를 가지고 재규격화 계산을 구현한 논문을 최초로 썼다. 또한 다이슨 급수라는 기법을 발명했으며, 이것은 워드-다카하시 항등식으로 확장되는 기반이 되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는 핵추진기를 이용한 우주비행 계획인 오리온 계획에 참여하였다. 시험 기종은 보통의 폭발물을 사용했으나, 우주에서의 핵무기 사용 금지 조약에 의해 계획은 중도에 파기됐다. 이후 제러드 오닐()이 설립한 우주학 연구소()에서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생애의 후기에, 다이슨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항성계의 태양을 완벽히 둘러싸 항성에서 나오는 복사 에너지를 완전히 사용하고 바깥쪽으로는 적외선을 복사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르면 밤하늘에서 적외선을 복사하는 거대한 물체를 찾아보는 것이 외계 문명체를 탐사하는 SETI 계획의 한 방법이 된다. 다이슨은 복사 차폐물로 자그마한 운석들의 구름을 생각했지만, 과학 소설에선 이어진 고체 구조물이 선호되어 왔다. 이러한 상상 속의 구조를 다이슨 구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다이슨 나무라는 것도 제안했는데, 이는 유전자 조작으로 혜성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다이슨은 혜성을 조작하여 내부에 생물이 숨쉴 수 있는 대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며, 태양계 밖으로 인간을 보낼 수 있는 서식지를 조성할 수 있다고 했다. 프리먼 다이슨은 2020년 2월 28일, 98세의 나이로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딸 에스더 다이슨은 기업가이자 투자자이다. 아들 조지 다이슨은 역사가로, 과학사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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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트 아이겐
만프레트 아이겐(, 1927년 5월 9일 ~ 2019년 2월 6일)은 독일의 생물리학자이다. 인물. 괴팅겐 대학교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괴팅겐의 막스 플랑크 생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1967년에는 매우 짧은 간격의 에너지 펄스로 유도된 극히 빠른 화학 반응에 대한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로널드 조지 레이퍼드 노리시, 조지 포터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영국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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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마굴리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년 3월 5일 ~ 2011년 11월 22일)는 미국의 생물학자로서 매사추세츠 대학 앰허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대학교의 지구과학과 교수이다. 세포 생물학과 미생물의 진화 연구,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굴리스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국의 지구생물학과 화학 진화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NASA의 지구생물학에 관한 실험들을 지도하였다. 마굴리스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의 기원을 진핵세포로 들어간 외부 조직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러한 세포 내 공생설은 당시 충격적인 가설로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100여 종의 논문과 더불어 10여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주창한 가이아 이론을 지지하며, 가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한 칼 세이건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도리언 세이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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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은 영장류의 일종이다. 지구상의 사람을 통틀어 인류(人類), 인간(人間, Human)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사유, 언어 사용, 자기반성, 문제 해결을 쉽게 할 수 있고,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지니고 있으며, 이로써 인간은 개인이 스스로를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지적, 심리적 능력과 함께, 직립 보행을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팔을 이용해 다른 종보다 훨씬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2019년 12월 기준으로 약 73억 명으로 추산된다. 사람은 현재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대륙에 살고 있으며, 이 중 약 85%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프로-유라시아, 구세계)에 살며 나머지 15%는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신대륙)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고등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자기표현, 생각의 교환, 사회적 조직화를 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비롯한 의사소통 체계를 이용하는 데 능숙하다. 역사. 기원.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동한 단일 종이 전 세계로 이주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인류가 진화했다는 다지역 기원설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비롯한 여러 과학적 증거를 통해 학계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문명의 발생. 사람은 다른 동물보다 지식의 축적면에 있어서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문명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기원전 수천 년 무렵에 황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강 등에 최초의 도시와 초기의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외에 세계 곳곳에서 특징적인 문화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명의 발전은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몽골 제국와 같은 거대한 제국을 이루기도 하고 자금성, 피라미드,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 유산을 남기기도 하였다.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에 의한 파괴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원자폭탄과 같이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무기를 만들어 이용하기도 하였다. 문화. 문화는 예절, 의상, 언어, 종교, 의례, 법이나 도덕 등의 규범, 가치관과 같은 것들을 포괄하는 '사회 전반의 생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이다. 군집 생활. 사람은 대부분 여러 개체가 모여 살며 이러한 군집을 사회(社會)라고 한다. 사회의 단위는 작게는 가정 또는 가족에서 크게는 국가(國家)로 나뉜다. 서기 2012년 기준으로 세계에는 200여 개의 국가가 있다. 이러한 군집 생활에서 사람은 서로를 구분하고 부르기 위해 사람마다 이름을 부여한다. 또한 이름과 함께 자손을 따라 대대로 이어지는 공통의 이름인 성씨가 사용되며 이를 통해 혈통을 구분하거나 서로 호칭을 한다. 성씨는 남성 쪽을 따라 이어지는 부계성(父系姓)이나 여성 쪽을 따라 이어지는 모계성(母系姓)이 있으며 부계성과 모계성을 모두 갖거나 아예 성씨를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사람은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 남녀가 짝을 이루며 이를 결혼이라고 하는데, 문화권에 따라 다르나 한 쌍의 남녀가 짝을 이루는 일부일처제(일처일부제)와 한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일부다처제가 흔하고 이외에 한 여성과 여러 남성이 짝을 이루는 일처다부제, 여러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다부다처제(난혼)의 경우도 나타난다. 언어.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언어와 문자를 이용하며 이는 사람의 사회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분류에 따라 다르나 대략 6천여개로 알려져 있는데 점차 쓰이지 않는 언어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언어를 표기하고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는 5천년 전부터 쓰여온 것이 확인된다. 인간에 대한 안내. 1977년 보이저 1호에 실려 우주로 보내진 보이저 금제 음반에는 115개의 그림과 파도, 바람, 천둥, 새와 고래의 노래와 같은 자연의 소리,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의 음악, 55개의 언어로 된 인삿말이 실려 있다. 이는 외계의 생명체에게 보내는 인간에 대한 안내서다. 생물학적 특징. 해부학적 특징. 키(신장)는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 성인의 경우 보통 남자는 160 cm~195 cm 여자는 145 cm~175 cm 정도이다. 남자의 경우 200cm 이상, 여자의 경우 180cm 이상부터는 장신으로 분류된다. 반면 대한민국 기준 남자는 140cm 미만, 여자는 135cm 미만부터 왜소증으로 분류되어 장애인 등록증이 발급된다. 직립보행으로 이동하며 손을 사용하여 물건을 이용하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뇌의 무게는 태어날 때는 약 300g이고 만 5세 무렵에 성인의 뇌 무게인 1300~1400g에 이른다. 성인 기준으로 몸무게에 대한 뇌 무게의 비율은 약 2%이다. 털은 퇴화되어, 피부 부위에 따라 털이 없거나 매우 짧아 피부를 완전히 덮지 못한다. 단, 머리 윗부분, 겨드랑이, 생식기 주위에는 각각 머리카락, 겨드랑이 털, 음모가 나 있는데 이 털은 피부를 덮을 만큼 길고 많다. 머리카락은 어린이 시기부터 있으나, 겨드랑이 털과 음모는 이차성징 이후로 자란다. 또한, 이차성징 이후로 남자에 한해서 입술과 턱 주변에 수염이 난다. 털의 색깔은 검정, 갈색, 금색, 붉은색 등으로 다양하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이르면 점차 멜라닌이 퇴화되어 흰색으로 바뀐다. 야행성이던 원시 영장류가 주행성으로 바뀌면서 청각보다 시각에 의존하게 돼 귀를 움직이는 능력은 쇠퇴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이 낯선 소리를 들었을 때 귀 주변 근육으로 향하는 신경반응의 강도는 씹기, 미소 짓기, 의도적으로 귀 움직이기 등을 할 때보다 10분의 1∼100분의 1 수준 정도로 약했지만, 사람도 다른 동물처럼 무의식적으로 귓바퀴를 관심 있는 소리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생. 사람의 평균 수명은 86세 정도이며, 보통은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긴 편이다. 인간의 성에 따라 나뉘는 남성과 여성은 성행위를 통해 생식하며, 성행위를 통해 수정된 배아는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임신 기간을 거친다. 보통 한 번에 하나의 태아(胎兒)를 임신하며, 드물게 둘 이상의 태아를 동시에 임신하기도 하는데, 이를 쌍둥이(쌍생아)라고 한다. 임신기간은 38주 (266일)로 이 기간을 지난 태아는 출산과정을 거쳐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영아(嬰兒)가 된다. 영아기의 사람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하며, 젖을 떼는 시기는 개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략 생후 1년에서 6년 사이의 사람을 유아(幼兒)라고 하며, 이 시기에 기초적인 언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따라 그 나라의 모국어부터 습득한다.) 습득이 이루어진다. 이후 대략 만 20세까지는 그 초기를 어린이 또는 소년, 후기를 청소년이라고 하며, 이 시기에 대부분의 외형적 성장이 끝난다. 또한 이 시기에 이차성징이 일어나 남성과 여성의 외형적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며, 초경이나 사정, 몽정을 경험하는 등 생식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후 대략 만 20세에서 만 40세 사이를 청년, 대략 만 40세에서 만 50세 사이를 장년, 대략 만 50세에서 만 60세 사이를 중년, 만 60세를 넘어서면 노년이라고 하나 이러한 시기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장이 끝난 사람은 청년기 이후로 조금씩 노화되기 시작한다. 중년에서 노년 정도가 되면 노화의 결과로서 신장(身長)의 축소, 각종 감각 기관들의 둔감화, 생식 능력의 감퇴 등의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생식 능력의 경우 남성은 늦게는 70세 이후까지도 생식이 가능하나 청년기를 정점으로 고환에서 생성되는 정자의 수와 운동능력이 점차 감소하기 때문에 임신 성공 가능성도 같이 떨어지며, 여성은 중년기 (개인차가 있으나 대개 40~50세이다.)에 폐경이 일어나 난자의 배란이 중지되므로 이후 생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기후, 사회 문화 등이 수명에 큰 영향을 준다. 습성 (생활). 사람은 주행성 동물로, 대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잔다.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지는데,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자며 성인은 하루에 대략 6시간 ~ 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하며, 사람에 따라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 현대인은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의 3가지를 기본요소를 필요로 하고, 이외에도 사회로의 적응과 능력 향상을 위해 교육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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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슈워제네거
아놀드 알로이스 슈워제네거(, , , , 1947년 7월 30일~)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의 배우, 보디빌더, 정치인이다. 배우가 되기 전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보디빌더로 활동했으며, 38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이기도 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보디빌더로서는 전설적인 존재이며 그의 이름 자체가 근육질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헐리웃 근육질 배우. 20살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보디빌딩 대회 미스터 올림피아를 7번이나 우승했고, 전성기는 <코난>으로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속편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터미네이터>, 샤론스톤과 공연한 <토탈리콜>, <터미네이터2> 와 <트루 라이즈>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었었다. 스탤론과 비슷한 나이, 이미지로 항상 비교되던 액션배우. 47년생 188센티. 생애. 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탈에서, 오스트리아 헌병 부사관 출신으로 지역 경찰서장이었던 구스타프 슈바르체네거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961년 보디빌더가 됐으며 1970년까지 미스터 유니버스 1위 5회,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미스터 올림피아 1위 7회 등 역대 최다 우승 타이틀을 얻었다. 병역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나를 기회가 많다는 이유로 전차병으로 이행했으며 실제로도 전차 조종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1968년 미국 이민 후 1983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본래 이중국적을 허락하지 않아 다른 국가로 귀화한 오스트리아 시민권자들은 국적을 포기해야 하지만, 슈와제너거는 미국 시민권 취득 전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 오스트리아 국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불리던 슈워제네거는 1973년 기네스북에 '지구상에서 상체근육이 가장 잘 발달된 사람'에 기록되기도 했다. 어렸을 때 보디빌더 출신 영화 배우 레그 파크(Reg Park)가 헤라클레스 영화에 나오는 걸 보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보디빌더를 시작했다고 한다. 1969년 <뉴욕의 헤라클레스>로 데뷔했으나 초기 10여년간은 배우로서는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코난》(1982), <터미네이터> (1984)로 할리우드에서 인기배우로 자리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1988년, 1990년, 1991년, 1994년, 1996년, 1997년, 2000년, 2003년 '헐리우드 머니메이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11년까지의 주지사 임기중에는 영화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1990년엔 '최초의 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 이에 그치지 않고 출연료가 끝없이 오르고 올라 1996년엔 '최초의 2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 2003년엔 편당 3천 만 달러에 전 세계 흥행수익의 20%를 받아 '최초의 3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가 되어 본인 스스로가 최고 기록인 자신의 기록을 또다시 갱신하는 등 헐리우드에서 수 십년간 1인자의 위치를 지켜왔다. <> (1991)는 슈워제네거에게 최고의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로 꼽힌다. 액션 장르에만 만족하지 않고 <트윈스> (1988), <유치원에 간 사나이> (1990), <솔드 아웃> (1996)등의 코미디와 <배트맨과 로빈> (1997)의 악역에도 도전하여 모두 크게 성공하여 배우로서의 연기의 폭을 넓혔다. 원래 슈워제네거는 레드 소냐를 촬영하면서 만난 브리짓 닐센과 연인 사이였으나 평소 슈워제네거는 미국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브리짓 닐센과 결별하고 1986년 존 F. 케네디의 조카이자 NBC의 유명 언론인이자 기자인 민주당파 마리아 슈라이버와 9년 동안 연애 끝에 결혼했다. 슈워제네거는 사업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다. 198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주어지는 보디빌딩 대회 '아널드 클래식'을 설립하였다. 오래전부터 공화당 지지파였는데 1983년 미국 시민권 취득 이후 공화당에 입당하여 1990년 조지 H 부시로부터 '문화 체육관광부 의장'에 직접 임명되어 4년간의 임기를 지내며 미국 전국 51개주를 철통 호위를 받으며 직접 순회하기도 했다. 1991년 1200만 달러 짜리 자가용 제트기를 받기도 했다. 1991년엔 실베스터 스탤론, 브루스 윌리스, 데미 무어 등과 'Planet Hollywood'라는 체인 레스토랑을 설립했다. 1992년엔 자선단체 'After School All Stars' 설립했다.. 1997년 대형 심장 수술을 받기도 했다. 2003년 10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2006년 11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민주당 후보를 56% 대 39%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영화로 축적한 부(富) 때문에 주지사 임기중 매년 연봉인 17만5천달러를 받지 않고 모두 사회에 전면 기부하기도 했다.2004년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타임지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2008년엔 <터미네이터>(1984)가 '역대 최고의 영화 top 10'에 선정되었으며, 美의회 도서관에 영구 보존되기 시작했다. 2008년 미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을 공식지지했다. 슈워제네거는 2010년 12월 17일 LA Times 인터뷰에서, 퇴임후 오바마 행정부에 입각할 의사도 있다고 말했다. 8년간의 주지사 임기(2003.11~2011.1) 중에는 몇몇 영화의 카메오 출연을 제외하곤 (2009)를 비롯하여 모든 영화의 제의를 거절해왔다. 정치성향은 중도우파 성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녹색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민주당과 연대하여 친환경주의 정책들을 기용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스웨덴 출신 10대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와 독대를 가지기도 했다. 2011년 1월 4일 주지사에서 퇴임하였고, 다시 헐리우드 복귀를 공식 선언했는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5탄과 6탄을 비롯하여 30여편의 제의를 받아 기나긴 공백과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해 5월 일명 '가정부 스캔들'로 이혼 소송제기를 받았는데 재산이 7500억원 정도(2012년 기준)로 이는 이전까지의 역대 최고의 위자료 액수였던 마이클 조던의 기록(2800억원)도 훨씬 뛰어넘는 신기록이였으며, 헐리우드 최고의 갑부로 드러났다. 첫 컴백작 <라스트 스탠드> (2013) 촬영에 앞서 친구 실베스터 스탤론의 요청에 따라 <익스펜더블 2> (2012)에 카메오로 4일간 촬영했는데 그 대가로 1천만달러(2012년 기준 약 120억원)를 받았다. 2012년 8월에는 스스로 2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남가주대 슈워제네거국가 및 국제 정책 연구소"를 설립하여 고문위원회 회장과 교수가 되었다. 같은해 8월, 'The Sun'지는 "최고의 액션 히어로는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고, 슈워제네거가 '최고의 액션 히어로'에 뽑혔다. 2013년 1월 개봉의 김지운 감독의 헐리우드 진출작으로도 화제가 됐던 <라스트 스탠드> (2013)와 실베스터 스탤론과 공동 주연을 맡은 <이스케이프 플랜> (2013) 등을 시작으로 다시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 본격 복귀하였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새로운 리부트 3부작의 첫번째 영화 <> (2015)에 주인공 터미네이터로 돌아오는데, 이는 지난 2003년 개봉한 블록버스터 <> (2003) 이후 12년 만이다. 2015년 1월 26일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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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自由文書使用許可書,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GNU FDL, GFDL)는 일종의 자유문서를 위한 저작권 라이선스의 한 형태로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 "Free Software Foundation")에서 GNU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착안되었다. GFDL에 따라 만든 문서는 자유롭게 복사, 수정, 재배포가 가능하며, 2차 저작물 역시 GFDL을 따라야 한다. GFDL을 따르는 문서는 기본적으로 무료로 배포되지만, 대량으로 제작된 경우 유료로 판매될 수도 있다. 현재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에 따라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가장 큰 프로젝트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바로 위키백과다. 위키백과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L)와 GNU 자유 문서(GFDL)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 개요. 사용 허가서는 소프트웨어의 문서와 다른 이와 유사한 지침서를 대상으로 한다. 이 허가서에 따르는 모든 문서의 복사 및 변경은 역시 이 사용 허가서의 규준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복사 및 변경된 소프트웨어나 자료는 다시 변경되거나 배포 및 판매될 수 있다. 역사.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1999년 말 의견 수렴을 위한 초안이 발표되었으며, 검토와 수정을 거쳐 1.1 버전이 2000년 3월에, 1.2 버전이 2002년 11월에, 1.3 버전이 2008년 11월 3일에 공표되었다. 현재의 최종 버전은 1.3이다. 다른 라이선스와의 호환성. 여기서의 '호환'이라는 의미는 다른 라이선스의 저작물을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는 저작물과 섞어 쓸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CC-BY-SA와의 호환성. 두 허가서가 비슷한 저작권 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GFDL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와 호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1.3판에서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고 있는 특정 웹 사이트의 저작권을 CC-BY-SA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 예외 조항은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GFDL 기반의 다중 저자 협력 프로젝트 사이트 (Massive Multiauthor Collaboration Site)에서 CC-BY-SA-3.0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라이선스의 재허용을 허가하는 11장의 조항은 2009년 8월 1일 이후에는 효력이 상실된다. GPL과의 비호환성.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와 호환되지 않는다. 같이 보기. 또 다른 자유 콘텐츠 사용 허가 유형. 아래 목록들 중 몇 가지는 GNU FDL과는 별개로 발전해 온 것들이다. 그리고 몇 가지는 GNU FDL의 결함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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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U
GNU(, 그누)는 운영 체제의 하나이자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모음집이다. GNU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GNU 프로젝트의 GPL로 라이선스된다. GNU는 "GNU's Not Unix!"(GNU는 유닉스가 아니다!)의 재귀 약자이며, 이렇게 선정된 이유는 GNU의 디자인이 유닉스 계열이지만 자유 소프트웨어인 점과 유닉스 코드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을 두려는 것이다. GNU 프로젝트에는 운영 체제 커널인 GNU HURD가 들어있는데, 원래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에서 거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허드(Hurd) 커널이 아직 산업용으로 사용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서, 그 대신 GNU가 아닌 커널(리눅스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을 GNU 소프트웨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다. 현재 GNU와 LINUX를 결합하여 너무나 많이 사용되므로, 이 조합을 짧게 'LINUX'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으며, GNU/LINUX라고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삽화에 나와있는 GNU는 생물의 종 이름이다. 프로젝트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GNU를 "사회에 대한 기술적 수단'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Lawrence Lessig는 스톨먼의 책 《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사회》 제2판에서 스톨먼은 소프트웨어의 사회적 관념과 어떻게 자유 소프트웨어가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조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고 언급하였다. GNU/리눅스. 오늘날 GNU의 안정판은 리눅스 커널이 포함된 GNU 패키지로 구성되어 동작하며 기능적인 유닉스 계열 시스템을 만들어준다. GNU 프로젝트는 이를 GNU/리눅스로 부르며, 제공되는 기능들은 다음과 같다: GNU 자유 시스템 배포 가이드라인. GNU 자유 시스템 배포 가이드라인(GNU Free System Distribution Guidelines, GNU FSDG)은 GNU/리눅스 배포판과 같은 설치 가능한 시스템 배포판이 자유적인 특성이 있고 배포판 개발자들이 배포판들을 해당 특성에 맞출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 배포 약속이다. GNU 허드. GNU 프로젝트가 GNU 운영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결과물 카테고리인 자유 소프트웨어 디렉터리에서 보이는 것과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추구하고 있는 바가 운영 체제의 핵심인 커널 즉, GNU 허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소프트웨어적인 면과 하드웨어적인 면을 통해 온전한 자유로운 운영 체제를 만드는 것이 GNU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한다면, GNU Hurd는 하드웨어를 통괄 제어하는 GNU 운영 체제의 커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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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빅
셀빅(CellVic)은 대한민국에서 생산했던 PDA의 일종이며, jTel에서 개발하였다. 후일 코오롱이 인수한 후 Cellvic으로 개명되었다. jTel은 팜 파일럿을 벤치마크하여 한국 내 환경에 맞게 자체 O/S를 제작해 한국 내 최초의 PDA OS로서 의의를 가졌다. jTel은 1년에 4회의 애플리케이션 공모전을 통하여 애플리케이션 확보에 박차를 기했으며, 개인개발자에 대한 지원과 이에 힘입은 개인개발자들의 노력으로 다수의 애플리케이션을 확보하였다. 또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대표적인 커뮤니티로는 CoolView(후에 상표등록 문제로 셀북으로 개명됨) 제작자인 연승훈씨가 운영하는 kcug.net(현재 운영중단)을 들 수 있다. 셀빅은 팜 파일럿에 비하여 대한민국 기업의 제품인만큼 한글 지원은 원활하였다. 세계 최소, 최경량 PDA인 CellVic i부터 휴대폰과 카메라 모듈탑재가 가능한 CellVic XG, 더 발전된 형태로서 스마트 폰 mycube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으나, 코오롱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 PocketPC를 탑재한 스마트폰의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끝내 2004년부터 더 이상 후속 지원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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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와 유리의 실험
밀러와 유리의 실험() 또는 밀러 실험()은 초기 지구의 가상적인 환경을 실험실에서 만들어, 그 조건에서 화학진화가 일어나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실험(오파린과 홀데인의 가설에 따르면, 원시 지구는 무기 화합물이 유기 화합물로 합성되기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밀러와 유리의 실험은 이 가설을 검증하려 했다.)이다. 이 실험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전적인 실험으로 여겨지며, 1953년 시카고 대학의 스탠리 밀러와 해럴드 클레이턴 유리가 처음으로 실행했다. 실험 과정. 실험에는 수증기(H2O), 메테인(CH4), 암모니아(NH3), 수소(H2)가 사용된다. 화학 물질들은 살균된 유리관과 플라스크로 이루어진 루프형의 실험기구 안에 밀봉된다. 실험기구 중에 플라스크 하나에는 물이 반쯤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한 쌍의 전극이 들어있다. 물은 가열하여 기화시키고, 수증기가 포함된 내부 공기중에 불꽃을 튀겨, 자연의 번개를 재현해 낸다. 그리고, 다시 공기는 식혀져서 수증기는 물이 되고 처음 플라스크로 돌아가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일주일 동안 계속 실험을 행한 결과, 유리와 밀러는 10~15%의 탄소가 유기 화합물로 합성된 것을 관찰하였다. 더욱이, 2%의 탄소는 살아 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에 몇 종류의 형태라는 결과도 얻었다. 결론적으로 밀러는 원시 대기의 조성을 기초하여 원시 지구의 모형을 만들고 결과 반응을 조사하는 것이 연구의 테마였다. 해석. 생성된 분자들은 완전한 살아있는 생화학적 시스템을 이루기에는 상대적으로 모자란 단순한 유기물질이었다. 그러나, 실험은 이미 있는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고,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립시켰다. 이후의 연계 실험들. 스탠리 밀러는 이후에 원시 대기에 관한 연구를 좀 더 진행하여,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하였으며, 사망시까지 연구에 손을 놓지 않았다. 밀러가 사망한 뒤 그의 제자이자 오랜 동료였던 제프리 베다 교수는 밀러의 유품에서 1950년대 실험에서 얻은 물질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담긴 박스를 발견했다. 최신 분석 장비로 이 물질의 조성을 분석한 결과 당시 밀러가 확인했던 것보다 더 많은 유기분자(아미노산 22종과 아민 5종)가 들어있음을 확인해 2008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2008년, 제프리 베다 교수는 화산 분출의 구조와 스파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더 많은 아미노산이 발견됨을 보여주었다. 이 실험에는 고출력의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와 질량분석기등이 이용되었다. 그 결과 22가지 아미노산, 5종류의 아민을 비롯한 수많은 수산화물이 생성되었다. 이 실험은 2010년에 황화수소 스파크 실험으로 재현되었으며, 발견된 아미노산은 아래에 표기한다. 다른 실험들. 폭스의 실험으로 아미노산 같은 간단한 유기물은 폴리펩타이드, 핵산과 같은 복잡한 유기물로 합성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결론. 밀러(Miller, S.)와 유리(Urey, H.)의 실험은 오파린(Oparin, A. I.)과 홀데인(Haldane, J. B. S)의 원시 수프 모델에 의한 화학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일부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들. 한국창조과학회 등의 운동 단체들이 밀러의 실험에는 오류들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타당한 근거는 없으며 모두 반박되었다. 원시 대기의 조성. 1. 이들은 원시 대기 환경이 수소, 메테인, 암모니아 등 환원성 기체가 아닌 질소 (N2)와 이산화탄소 (CO2)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페리스(J. Ferris) 박사와 첸(C. Chen)박사가 원시 대기의 재료로 산화성 대기를 사용했고 그 결과 아미노산은 생성되지 못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 이들은 원시 지구암석에서 발견된 산소 또한 원시 대기에 포함이 된다면 밀러의 실험대로 아미노산이 생성되어도 금방 파괴되어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시대기에는 풍부한 산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된다. 3. 이들은 원시대기에는 오존층이 없었기 때문에, 대기중에서 합성된 유기물에 자외선이 쪼여지면, 복잡한 분자들이 파괴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 역시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되었다. 아미노산 생성. 1. 밀러와 유리의 실험에선 L-형 아미노산과 D-형 아미노산 두 가지가 생성되었다. 창조설자들은 D-형 아미노산은 죽은 생명체에서 L-형 아미노산이 변화하여 서로 분자의 수가 같아지는데 밀러와 유리의 실험에서도 L-형과 D-형의 아미노산이 발견되므로 생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2. 밀러와 유리의 실험을, 이산화탄소, 질소, 수증기로만 이루어진 조건에서 실험하면 어떠한 아미노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3. 스탠리 밀러의 오리지날 화학진화 실험은 20개의 아미노산에서 오직 4개만이 생성되었으마, 후에 그럴 듯한 조건에서 실험을 다시하여도 아미노산 20가지를 모두 생성하지는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다: 4. 밀러와 유리의 실험은 시아나이드나 포름알데하이드와 같은 독성 물질을 생성하지, 아미노산을 생성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사실과 어긋난다: 실험의 인위성. 창조설자들은 밀러는 원시 대기환경을 실험관에 그대로 옮긴 후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하려 했으나 밀러와 유리의 실험 장치와 실제 번개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한 이유는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함이다. 결과로 보면, 이는 번개보다 에너지가 적지만 그보다 적은 에너지로도 충분히 아미노산이 합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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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水, )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화학 물질이다. 화학식 를 가지며 표준 온도 압력(STAP : 섭씨 25°C 1바)에서 무색 투명하고, 무취무미하다.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매로 보통 액체 상태의 물을 가리킨다. 고체 상태인 것을 얼음, 기체 상태인 것을 수증기라고 부른다. 인공적으로는 수소와 산소를 혼합한 뒤 방전을 일으켜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열량이 없고 유기 영양분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 요소다.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질이며, 생체의 주요한 성분이다. 인체는 약 70%, 어류는 약 80%, 그 밖에 물 속의 미생물은 약 95%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현상은 여러 물질이 물에 녹아있는 수용액에 의해서 일어나는 화학변화가 복잡하게 얽힌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물은 지표면의 71% 정도를 덮고 있으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체 물의 97.5%는 바닷물이다. 인간이 이용가능한 담수(민물)는 2.5%인데, 그 중에서 68.7%는 빙하와 만년설이고, 지하수와 토양의 수분 등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물은 전체 담수의 0.3% 정도이며, 이는 지구 전체 물의 양에 0.007%에 불과하다. 한국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1,280㎜로 세계 평균 강수량(약 970㎜)에 비해 약 1.3배이며, 잠재적으로 사용가능한 전체 수자원의 약 26% 정도를 이용하고 있다. 지구상의 존재하는 물의 총량은 일정하며 증발, 증산, 응축, 강수, 유출을 통해 순환한다. 바닷물, 대기의 수증기, 구름, 토양의 물, 지표수, 지하수, 동식물 사이에서 지속적인 이동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서 기후 변화를 좌우하고 끓임없이 지구 생태계와 인류문명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성. 물 분자는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0.096 nm의 결합 길이를 가진 공유결합을 한 H-O-H의 굽은형의 물질이다. 물 분자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가 각각 전자를 내놓아 전자 쌍을 만들고, 이 전자쌍을 함께 나누어 가짐(공유)으로써 결합되어 있다. 화학식은 H2O이다. 물은 자연적으로 세 가지 물질의 상태로 나타나며 지구상에서 여러 형태를 지닌다. 수증기와 구름은 하늘에 있으며 바닷물과 빙산은 극지 바다에 있고 빙하와 강은 산에 있으며 대수층의 물은 땅속에 있다. 화학적 성질. 물은 화학적으로 많은 성질을 갖는다. 대표적인 성질은 공유결합, 산과 염기의 생성, 그리고 금속과의 산화(결합 및 부식)이다. 수소결합. 물에서의 수소결합(평균 결합 길이: 0.197 nm)은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수소 원자가 약한 세기의 양이온의 성질을 띠고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산소원자가 강한 세기의 음이온의 성질을 띰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물은 극성 공유결합 물질이다. 또한, 중심 원자로 작용하는 수소 원자의 비공유 전자쌍과 산소와의 결합 고리인 수소결합(공유 전자쌍)의 작용력을 비교할 때 쌍극자 모멘트 값이 0이 아니므로 극성 분자로 분류된다. 한편 물은 높은 비열을 갖는데 이 또한 수소결합에 그 원인이 있다. 물을 가열할 때 쓰이는 에너지의 일부는 수소결합을 끊는 데 쓰이고 나머지의 에너지가 물의 온도를 높이는데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물이 다른 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정한 열에너지의 첨가로 온도를 올리기 어려운 물질이 되는 것이다. 수소결합으로 인해 물은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물질에 비해 녹는점, 끓는점, 융해열, 기화열이 크다. 물의 비열과 기화열이 크다는 점은 생물체의 수분과 체온이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물보다 얼음의 밀도가 작은 것은 수소결합에 의한 육각형 구조와 관련된다. 또한 표면장력과 모세관 현상도 수소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은 다른 분자와 달리 그 점성에 비교해 표면장력이 큰데, 표면에 있는 물 분자가 공기 중으로 끌려가지 않고 내부에 있는 물 분자의 수소결합력을 받기 때문이다. 모세관 현상은 수소나 산소원자를 포함하지 않은 물질(예: 금속)에서는 잘 안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물이 모세관 현상을 일으킬 때 그 관을 이루는 분자와 수소결합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리관을 이루는 유리는 SiO2이므로 수소결합력이 작용한다.) 산과 염기. 물은 보통 금속류를 녹여 염기를 만들고 비금속류를 녹여 산을 만든다. 산과 염기의 기준은 양이온으로 하전된 수소 이온과 음이온으로 하전된 수산화이온이며, 수소이온이 많으면 산성이고 수산화이온이 많으면 염기성이며, 두 이온의 값이 0에 가까우면 중성이 된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염산, 질산, 황산 등이 있으며 이 3가지의 산은 모두 강한 산이다. 대표적인 알칼리(염기)로는 수산화나트륨, 수산화 칼륨, 암모니아수 등이 있으며 3가지 모두 강한 염기이다. 한편 산과 염기는 수소이온이나 수산화이온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전해질이고, 이온 물질을 갖는 모든 물이 전해질이다. 금속과의 결합 및 부식. 물은 산소와 함께 금속을 잘 부식시키는 성질이 있다. 철의 경우 반응성이 크나 직접적으로는 산소와 잘 반응하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산화철을 생성한다. 하지만 물이 묻은 철은 상황이 다른데, 그 원인은 물이 철을 이온화하면서 전자를 내놓고 이 전자를 받은 산소원자가 양이온으로 하전된 철 분자와 결합을 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화는 물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아 결국 속까지 모두 산화시키고 만다. 금속의 산화를 막기 위해 기름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기름과 물 사이의 반발력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찬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포타슘, 칼슘, 소듐 등이 있고, 뜨거운 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마그네슘, 알루미늄, 아연 등이 있다. 공학에서의 물. 수리학에서 1기압 하에서 물의 단위 중량은 보통 ω나 γw로 쓰며, 1000kg중/m³(1t중/m³=1g중/cm³)으로 나타낸다. 지구상에서 물의 단위중량을 다룰 때는 편의상 '중'(force)을 빼고 1000kg/m³(1t/m³=1g/cm³)으로 쓴다. 맛과 냄새 그리고 색깔. 물은 수많은 물질을 녹일 수 있어서 맛과 냄새가 다양하다. 사람과 다른 짐승들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부패한 물을 피하기 위하여 마실 수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진보된 감각을 갖고 있다. 샘이나 광천수로 광고하는 맛은 그 안에 녹아있는 광물에서 비롯한 것이다. 순수 H2O는 무취무미하다. 물의 색깔과 냄새는 식수로서 일차적인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자연의 물. 우주 속의 물. 물은 생명체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지구 이외의 천체에서 물이 발견되면 항상 관심을 받게 된다. 수증기는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액체로 된 물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얼음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물과 거주가능 영역.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액체와 기체, 고체로서의 물은 지구 위에 사는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지구는 태양계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에 위치하여 있다. 태양으로부터 살짝 더 가까이 있거나 살짝 더 멀리 있었더라면 (약 5%, 곧 800만 킬로미터 정도) 기체, 고체, 액체라는 세 가지 형태가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 지구의 중력은 물이 대기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대기 속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는 온도에 대한 완충 작용(온실 효과)을 제공하므로 표면 온도를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지구가 더 작았더라면 대기가 더 얇아져 온도가 극단으로 치우칠 것이므로 화성과 같이 극관을 제외한 물의 형성을 막는다. 지구의 표면 온도는 들어오는 태양 복사(일사) 수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는 온실 기체와 표면 및 대기 반사가 동반되면서 지구 온도가 유동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 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를 가이아 이론이라고 부른다. 한 행성 위의 물의 상태는 주위 압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한 행성의 중력이 결정한다. 어느 행성의 용적이 충분히 크다면 그곳 위의 물은 온도가 높아도 고체 상태를 유지한다. 그 까닭은 중력이 높은 압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인데 글리제 436 b와 글리제 1214 b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지구 상의 물. 물의 분포. 지구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약 70% 정도가 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수구(水球)라고 표현할 수 있다. 태양계의 행성과 위성들 중에 오직 지구만 표면에 물이 세가지 형태, 즉 고체인 얼음, 기체인 수증기, 액체인 물로 존재한다. 지구상에 있는 물의 총량은 일정하며 그 양은 대략적으로 13억 3000만km3 (1,330,000,000 km3) 정도가 되고 흙이나 바위 속에 스며 있거나 지하수의 상태로 약 820만㎦가 존재한다. 물의 대부분은 염분을 포함한 액체 형태의 바닷물이며, 물의 분포는 바닷물 (97.5%), 빙하 (2.04%), 지하수 (0.41%), 호수와 강 (0.007%) 그리고 기타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에게 실질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유용한 수자원은 지하수와 민물이다. 물의 순환. 총량이 늘 일정한 물은 바다, 대기, 토양의 물, 지표수, 지하수, 동식물 사이에서 이동한다. 이런 순환으로 인하여 생태계가 회복되고 문명이 지속될 수 있었다. 물의 순환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민물. 표면 유출한 일부 물은 이를테면 호수와 같이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갇히게 된다. 높은 고도에서 겨울 동안 극북과 극남에서 눈은 만년설, 설괴빙원, 빙하 안에 모인다. 물은 또 땅에 스며들어 대수층으로 이동한다. 그 뒤 지하수는 샘이나 온천, 간헐천 표면으로 거슬러 흘러간다. 또, 지하수는 우물로 말미암아 인공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 이러한 물은 깨끗한 민물이며 사람과 길짐승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만큼 중요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민물은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바닷물. 바닷물은 평균 3.5%의 염분에 적은 양의 기타 물질을 포함한다. 바닷물의 물리적 속성은 민물과 비교하여 몇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더 낮은 온도 (-1.9 °C)에서 얼고, 온도를 어는 점으로 낮추면 밀도가 올라간다. 일반적인 바다물의 염도는 발트 해의 0.7% 정도에서 비롯하여 홍해, 페르시아해의 4.0%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염도는 해류, 바닷물의 깊이, 증발량과, 강수량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염분의 농도는 다른데 북대서양의 표면수의 염도(鹽度)는 다른 대양보다 높아서, 북위 20~30° 해역에서 3.7%에 달한다. 또한 북대서양의 평균 표면수 염도는 3.55%이며, 남대서양의 3.45%보다 높은데 이는 강한 증발작용으로 염도가 높아진 지중해의 해수가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대양부 해수와 교류하기 때문이다. 조석. 조석은 달과 태양이 대양에 미치는 기조력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대양 표면이 오르내리는 일을 가리킨다. 조석은 바다와 삼각강 수체의 깊이 변화를 일으키며 조류를 만들어낸다. 특정 장소에서 바뀌는 이러한 조석은 지구 회전의 영향과 지역적인 수심측량에 따라, 지구 기준에서 태양과 달의 위치가 바뀌어 일어난다. 삶에 미치는 영향. 생물학적 관점에서 물은 다른 물질과 구별되는 점으로 생명의 증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수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물은 비열용량이 매우 큰 편이기 때문에 생물이 체온을 조절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바다와 호수, 강은 물로 이루어져 있기에 생명 활동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한다. 유기 화합물이 궁극적으로 복제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들은 물에 의존한다. 물은 체내의 수많은 용질이 녹이는 용매일뿐 아니라 또 체내의 물질대사에 필수적인 부분이므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은 광합성과 호흡에 필수적이다. 광합성을 하는 세포는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의 수소를 산소에서 분리시킨다. 수소는 기체나 물에서 흡수한 CO2와 결합하여 포도당을 형성하고 산소를 내뱉는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들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하고, 수소와 산소를 산화시켜 태양 에너지를 포획하며, 그 과정 가운데 물과 CO2를 다시 형성한다. (세포 호흡) 물 속 생활. 지표의 물에는 생물로 가득하다. 생물의 최초의 형태는 물에서 발생하였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예외 없이 물 속에서 살며 돌고래, 고래와 같은 수많은 종류의 해양 포유류가 있다. 양서류와 같은 특정한 종류의 짐승들은 물과 땅을 오가며 산다. 켈프, 말과 같은 식물들은 물에서 자라며 일부 물속 생태계를 위한 기반으로 자리잡혀 있다. 플랑크톤은 일반적으로 바다 먹이 사슬의 토대가 된다. 바다의 척추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산소를 보유하여야 하며 보유 방법은 다양하다. 물고기는 허파가 아닌 아가미를 가지고 있으나 폐어와 같은 어떠한 종류의 물고기들은 아가미와 허파 둘 다 지니고 있다. 돌고래, 고래, 수달, 물개와 같은 해양 포유류들은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지표로 올라와야 한다. 일부 양서류들은 피부를 통하여 산소를 마실 수 있다. 물과 문명. 문명의 발달. 물은 사람들의 일상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된다. 갈증해소를 위해 마셔야 하고, 요리를 할때도 사용하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로도 사용한다. 물은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천 주변의 땅은 비옥해서 농사가 잘되었고 여행과 수송도 강물따라 뱃길을 이용했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물가에는 마을이 생기고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수자원이 풍푸한 강을 중심으로 발달해왔다. 중국 황허 강 유역에서 발생한 황허 문명, 인도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인더스 문명, 이집트 나일 강 유역에서 발생한 이집트 문명, 이라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이 그러하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민족은 나일 강에 온전히 의지하였다. 로테르담, 런던, 몬트리올, 파리,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하이, 도쿄, 시카고, 홍콩과 같은 거대 도시들은 물에 다가가기 쉬운 곳에 있고 결과적으로 무역이 팽창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도 이와 같은 까닭으로 번성하였다. 한국의 서울이나 대부분의 대도시들도 강을 끼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이 더 부족한 북아프리카와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은 인간 발전에 주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건강과 오염. 물은 생명의 원천으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지구상에 처음으로 생명체가 태어난 곳은 물이다. 물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없으며 모든 생명체는 몸속에 일정한 양의 물을 유지해야 건강하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 양은 생물에 따라 다르지만 사람의 경우 몸무게의 70% 정도는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개인차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땀, 오줌, 똥 등으로 하루에 약 1.5리터 정도의 수분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보충해주어야 한다. 만약 1~2% 정도의 수분 손실이 발생하면 갈증을 느끼고, 3%정도 손실이 발생하면 탈수증상을 보이고 10%정도의 수분손실이 발생하면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음료수라고 한다. 마시기에 알맞지 않은 물은 걸러내거나 정제하는 등의 다양한 물 처리로 말미암아 마실 물로 바꿀 수 있다. 마실 수는 없으나 헤엄을 치거나 몸을 씻는 데 사람에게 해가 없는 물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를 안전한 물로 부른다. 개발도상국에서 모든 폐수의 90%가 정화 및 처리되지 않은 채로 지역 강과 개울로 흘러간다. 또한 물의 섭취는 동물의 기초대사량을 증가시켜 체중감량과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사람의 이용. 농업. 농업에서 물은 관개에 이용하며 이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는 주된 요소로 자리잡혀 있다. 관개는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최대 90% 물을 차지하며 선진국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잡혀 있다. (미국의 경우 민물의 30%가 관개에 이용된다) 음수. 사람의 몸은 체형에 따라 최저 55%에서 최고 75%의 물을 지닌다.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날마다 1~5리터의 물을 마시어야 탈수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섭취하여야 하는 정확한 물의 양은 활동 수준, 온도, 습도 등의 요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은 물을 직접 마시는 것보다 음식이나 음료수를 통하여 소화시켜 물을 흡수한다. 건강한 사람이 물을 얼만큼 섭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은 없으나 날마다 6~8잔의 물 (거의 2리터)을 마시는 것이 최소한의 적절한 양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옹호자들의 생각이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는 식수에 적합한 최대의 민물 원천이다. 이곳은 소금과 칼슘이 매우 적으므로 상당히 깨끗하다. 관련단체 및 행사. 세계 물의 날.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 물의 날()은 매년 3월 22일이며, 1992년 유엔 총회에서 선포된후 이듬해부터 관련행사를 해오고 있다. 인구와 경제활동의 증가로 인하여 수질이 오염되고 전 세계적으로 먹는 물이 부족해지자, 물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정한 날이다. 국제연합 가입국들은 세계 물 자원에 대한 구체적인 활동을 권고하는 유엔의 프로그램에 따라 대중매체를 이용한 교육 프로그램, 물 절약 캠페인, 하천 정화운동, 학생을 대상으로 한 홍보 등을 하고 있다. 1997년부터는 매 3년마다 '세계 물의 날'인 3월 22일을 전후하여 세계 물 위원회(World Water Council)가 '세계 물 포럼'(World Water Forum)을 개최하고 있다. 아울러 대한민국 환경부는 1995년이래 매년 세계 물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으며 한국의 각 지자체, 관련단체, 업체들도 도심과 하천정화 작업 기타 다양한 캠패인과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국제물관리연구소. 1984년에 설립된 국제물관리연구소는 스리랑카 콜롬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제연구기관인 국제관수관리연구소를 개편한 것으로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운영된다. 먼저 개발도상국서의 관개농업 및 관개능력 향상법 개발과 보급이 첫 번째 목적이며 두 번째는 물 관리, 홍수관리, 물 부족 문제해결에 관한 연구이다. 주요 사업으로는 연구사업, 국가사업, 교육 및 훈련사업이 있으며 약 10가지 정기 간행물이 있다. 국제물위생센터. 전 세계 정부, NGO, 기업가 및 사람들과 협력하여 물과 위생 관리의 글로벌 위기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는 국제적인 비영리기구다. 1968년에 설립된 국제물위생센터(IRC, International Water and Sanitation Centre)는 네덜란드 법에 따라 1980년부터 재단으로 등록되었다. 사회적, 교육적, 과학적인 정보를 포함하는 물과 위생을 향상시킬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가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전문가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여 활동하며, 개발도상국의 빈곤층에게 지속적인 물과 위생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본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으며 부르키나파소, 에티오피아, 가나, 말리, 우간다에 사무실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102명의 직원과 27명의 관계자가 활동하고 있다. 세계 물 위원회. 세계 물 위원회(World Water Council, 약칭 WWC)는 국제 물 정책기구로 1996년에 설립되었으며, 프랑스 마르세유에 본부가 있다. 전세계 수자원의 관리를 개선하며, 물의 효율적 보전, 보호, 개발, 계획, 관리, 사용 등을 지속가능하게 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 유익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매 3년마다 세계 물 포럼(World Water Forum)을 개최하며, 현재 40여 개국에서 358개 단체가 회원(2020년 2월 기준)으로 가입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수자원공사와 한국농어촌공사가 가입하였다. 세계 물 포럼. 세계 물 포럼(World Water Forum, WWF)은 21세기 물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계 물 위원회(World Water Council) 주관으로 3년마다 개최하는 물에 관한 국제회의이다. '세계 물의 날'인 3월 22일을 전후하여 개최되며 전 세계 정부, 전문가, NGO 등이 참가하고 있다. 세계 물문제 해결을 논의하고자 세계물위원회에서 제창하여 창설된 포럼으로서, 물 관련으로는 지구촌 최대의 행사로, ‘세계수자원회의’라고도 불린다. 국가 수반회의, 장관급 회의, 지역별 회의, 주제별 세션, 세계 물엑스포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진다. 제1회는 1997년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개최되었다. 제7차 세계물포럼 회의가 2015년 4월에 한국의 대구와 경주에서 개최된 바가 있다. 한국 물 포럼. 물 분야에 있어서 국제적인 활동과 협력을 주도하는 한국의 대표 기구로 2005년 10월 12일에 설립되었다.(koreawaterforum.org) 지구촌 물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물 관련 정책과 비전제시, 이해관계자 간의 교류 및 소통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설립후 세계 물위원회, 아시아-태평양 물포럼, 델타 코얼리션, 네덜란드 워터파트너십, 프랑스 워터파트너십, 글로벌 워터파트너십 등과 공동 세미나 개최, 업무협약 체결을 통한 교류 활동 및 공동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있다. 제7차 세계 물포럼을 경북 대구에 유치하는데 앞장선바 있으며 국내에서도 다양한 공익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세계 물포럼 기념센터. '세계 물포럼 기념센터'는 '2015 대구경북세계물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고, 안동을 물산업 비즈니스 관광의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해서 수자원 공사에서 건립했다. 2015년 4월 10일날 개관식이 진행되었고 위치는 경북 안동시 성곡동에 있다. 안동댐 입구 대지 43,665㎡, 연면적 2,552㎡ 규모에 세계물포럼 기념센터, 수천루, 수천각, 생명의 못, 기념정원, 치유의 숲이 들어서 있다. 정식 명칭은 물과 하늘이 만나는 장소라는 뜻을 가진 '수천전(水天殿)'이다. '2015 대구경북세계물포럼' 폐막이후에는 물의 소중함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지역주민의 문화 공간과 교육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국가 물관리위원회. 물관리 정책을 결정하고 물분쟁을 조정하는 대통령 소속 기구로, 2019년 8월 27일 출범했다. 2018년도에 제정된 '물관리기본법'에 따라 국가물관리기본계획과 물 관련 중요 정책 및 현안을 심의·의결하고 물분쟁을 조정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위원회는 국가 차원의 물관리 정책 수립, 정책현안 결정, 물 관리 관련 분쟁 조정 등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들을 다룬다. 기구는 국무총리와 충남도립대 총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고, 물관리 관련 학계·시민사회 등 사회 각계를 대표하는 당연직·위촉직 포함 총 39인(위원장 포함)의 위원으로 구성되어있다. 물 부족 국가. '국제인구행동단체(PAI)'는 세계 각국의 연간 1인당 가용한 재생성 가능 수자원량을 산정하여 이를 발표하고 있다. 이 단체에서는 강우 유출량을 인구수로 나누어 1인당 물 사용 가능량이 매년 천톤 미만은 물 기근 국가, 천톤 이상에서 1700톤 미만은 물 부족 국가, 1700톤 이상은 물 풍요 국가로 분류한다. 이 연구소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2007년도에 1,452톤으로 물 부족 국가로 분류하였다. 또 지부티·쿠웨이트·몰타·바레인·바베이도스·싱가포르 등 19개국이 물 기근 국가로, 리비아·모로코·이집트·오만·키프로스·남아프리카공화국·폴란드·벨기에·아이티 등이 물 부족국가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사설 연구소이며 인구증가에 따른 물 부족 현상을 경계하기 위하여 국토면적과 인구밀도, 강우량만 반영하였을 뿐으로 수도 보급률이나 수질, 물 이용 효율, 운영기술 등은 반영되지 않은 단순한 지표를 기준삼았다는 비판이 존재하기도 한다. 2006년 세계물포럼에서 발표한 각국의 물 빈곤지수(WPI;Water Poverty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147개국 가운데 43위로 물 사정이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하며, UN이 2012년 발표한 물부족 국가 지도에 따르면 한국은 '물 부족이 아닌 국가'에 해당한다. 일산화 이수소. 일산화 이수소 속임수(一酸化二水素-)는 물을 화학적으로 풀어낸 용어인 일산화 이수소(一酸化二水素), 산화이수소(酸化二水素) 또는 디하이드로젠 모노옥사이드(Dihydrogen monoxide, DHMO)를 이용한 속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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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어 (통신언어)
외계어(外界語)는 통신언어의 일종으로 컴퓨터 문서상에서 쓰이는 한국어의 변칙적인 표기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2000년대 초 정보화의 발달과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화로 통신언어가 발달하였고, 통신언어의 한글 변용 정도가 심하여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를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에 빗대어 외계어라 한다. 주로 청소년 층에서 자주 쓰였으며, 일본의 갸루 문자와 비슷하다. 개요. 통신언어의 일종인 외계어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통, 어미에서 -ㅗ와 -ㅛ가 -ㅓ와 -ㅕ로 변화되는 등의 통신체와 병행해서 쓰인다. 이모티콘과 닿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표현(예: ㅇㅋ, ㅋㅋㅋ, ㄴㄴ 등)과 인터넷에서 쓰이는 유행어(예: 즐) 등의 표현을 통신에서 쓰는 사람은 위의 것만을 외계어로 여긴다. 하지만 유행어와 닿소리 표현, 이모티콘까지 통틀어서 외계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외계어를 일부에서는 ‘언어 파괴’라고 비판하지만 이를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 청소년층 안에서도 외계어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비판하는 대상인 ‘외계어’의 범주의 차이는 다양하다. 외계어는 2000년대 초반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외계어에 대한 논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한편 미술가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한글이 아닌 문자로 한글을 표현하는 실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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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츠 추측
콜라츠 추측(Collatz conjecture)은 1937년에 처음으로 이 추측을 제기한 로타르 콜라츠의 이름을 딴 것으로 3n+1 추측, 울람 추측, 혹은 헤일스톤(우박) 수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콜라츠 추측은 임의의 자연수가 다음 조작을 거쳐 항상 1이 된다는 추측이다. 예를 들어, 6에서 시작한다면, 차례로 6, 3, 10, 5, 16, 8, 4, 2, 1 이 된다. 또, 27에서 시작하면 무려 111번을 거쳐야 1이 된다. 77번째에 이르면 9232를 정점으로 도달하다가 급격히 감소하여 34단계를 더 지나면 1이 된다. 이 추측은 컴퓨터로 268까지 모두 성립함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모든 자연수에 대한 증명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5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던 에르되시 팔은 "수학은 아직 이런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과 같은 통계적인 설명을 생각하면 이 추측은 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콜라츠 추측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콜라츠 추측의 공식 표현. 콜라츠 추측의 함수표현 공식 콜라츠 추측 공식의 합동산술(modular arithmetic) 표현식 콜라츠 그래프. 1부터 200까지 핸드링 콜라츠 그래프의 분기. 콜라츠 그래프에서 특정 짝수는 홀수에대한 formula_22의 수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formula_23수가 되는 분기점이 된다. 만약 콜라츠 추측이 성립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formula_26을 제외한 모든 자연수가 formula_10과 연결되기 위한 마지막 분기점이다. 따라서, 홀수에 대한 formula_22의 수 이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formula_23수가 되는 분기점 짝수 formula_32은 formula_33에서 formula_34의 수이다. 콜라츠 그래프 분기점 수열. 콜라츠 그래프의 분기점 짝수 formula_32은 규칙적으로 출현한다. 최초 출현 수열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콜라츠 그래프 분기점 수열은 6씩 증가하는 수열이다. 또한 십진수 30을 주기로 5개의 자리수 formula_38이 순환적으로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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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게시판
전자 게시판(電子揭示板, bulletin board system, BBS, 또는 computer Bulletin Board Service, CBBS)은 일반적으로 대학의 게시판 또는 중세 도시의 지역 사회 광고판을 컴퓨터 네트워크에 적용한 시스템으로, 보통 특정 전자게시판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말한다. 사용자들은 전화선과 터미널 프로그램을 써서 시스템에 접속하고 소프트웨어를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고 게임, 뉴스, 메시지 교환 등을 할 수 있다. 전성기인 1980년대 처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BBS들은 아마추어 시삽들이 여가 시간에 운영하는 무료 서비스였으며 몇몇 BBS들은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BBS는 여러 면에서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과 인터넷의 다른 프로토콜들의 전신이기도 하다. BBS는 친교 목적으로 많이 쓰였으며 논문을 발표하거나 자유 프로그램이 퍼지는 경로이며 게임과 기타 다른 응용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BBS는 인터넷 프로토콜 또는 웹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바뀌어갔다. 역사. 공개 게시판의 전신은 1973년 8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시작된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였다. 유용한 마이크로컴퓨터가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모뎀은 비싸면서도 속도가 느렸다. 이러한 까닭에 커뮤니티 메모리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구동되었으며 여러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주변 지역들에 위치한 터미널들을 통해 접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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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정보(情報, )는 컴퓨터공학에서 특정 목적을 위하여 광(光) 또는 전자적 방식으로 처리되어 부호, 문자, 음성, 음향 및 영상 등을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자료 또는 지식을 말한다. 정보는 일상 용어에서 전문 용어까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언어, 화폐, 법률, 자연환경 속의 빛이나 소리, 신경, 호르몬 등의 생체 신호부터 비롯한 모든 것을 정보라고 할 수 있다. 개념. 요즘에는 컴퓨터의 정보 처리를 기반으로 한 정보(데이터)가 많이 대두된다. 정보의 원래 뜻에 따라, 정보와 자료(데이터)를 구별하고, 정보를 “뜻을 가지는 자료”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러한 분야에서는 전체적으로 정보의 뜻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경우는 별로 없으므로, 특별히 정보와 자료는 구별하지 않는다. 구분하자면, 데이터를 모아 둔 것이 자료라면 자료를 특정한 목적의 의사결정을 위해 가공한 형태를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훌륭한 정보는 목적 적합성과 신뢰성 및 적시성을 유지해야 한다. 적시성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첩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하며 가공을 통해 비교적 장기간 활용이 가능한 정보를 지식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와 자료는 다른 의미이다. 정보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그 속도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개인이 하나의 정보를 선택하게 되면 변화에 의해서 불확실성이 커지게 되고, 정보의 가치가 적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된 정보보다 선택되지 않은 정보가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불안감을 갖게 한다. 맥도너(A.M.McDonough)는 '정보란 사실 내지 자료에 지적인 처리를 가하여 얻어진 지식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보는 자료에 특정 의미가 주어진 것으로서 직접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모든 정보는 자료이나, 모든 자료는 모든 정보라고 할 수 없다. 포레스터(J.W.Forrester)는 '경영은 정보를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과정(Process)이다.'고 하였다. 이는 경영상의 의사결정에 정보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모든 자료가 정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정보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정보는 가치지향적이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어느 정도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정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정보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정리해 놓은 자료의 집합이며,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이용자, 즉 어떤 목적을 갖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료가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보는 이용자를 위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재배열, 요약, 삭제하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 어원. 프랑스어의 renseignement(안내, 정보)를 번역한 말로 사용된 것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정보를 신식(信息)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첩보라는 뜻도 있다. 수학적 정의. 정보는 상대방에게 사건을 알릴 때 전달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집에 불이 났는지 아닌지 알리는 것도 정보 전달의 한 예이다. 전달 형태가 불이 "났는지 또는 안 났는지"의 두 가지 방법만 존재한다면 1 비트로 전달이 가능하다. 동전도 마찬가지다. 던진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알려 주면 되기 때문에 1 비트로 표현된다. 16가지의 경우가 나오는 회전 룰렛을 사용하여 경기를 한다면, 그 결과를 위해 4 비트를 할당해야 한다. 앞서 말한 3가지 사건에서 사건 요소인 formula_1는 불이 났는지, 앞면이 d던져졌는지, 회전 룰렛에서 1번 칸이 선택되었는지에 해당한다. 각각의 확률을 생각해 보면, 각 사건의 경우의 수가 가지는 확률인 formula_2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순서대로 1/2, 1/2 그리고 1/16이 된다. 이때 비트 단위 정보량은 와 같이 구해지고 각각 값은 1, 1, 4가 된다. 물론 불이 날 확률formula_4이 불이 나지 않을 확률formula_5보다 높은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불이 나지 않을 확률 formula_6이 되어, 이를 나타내는 정보량도 formula_7이 된다. 법학. 대한민국의 전자거래기본법에 따르면, “전자문서”라 함은 정보처리시스템에 의하여 전자적 형태로 작성, 송신ㆍ수신 또는 저장된 정보를 말한다(전자거래기본법 제2조 제1호). 신용정보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융거래 등 상거래에 있어서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식별·신용도·신용거래능력 등의 판단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정보로서 대통령이 정하는 정보를 말한다. (동법 제2조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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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낱말사전
위키낱말사전()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공개된 위키 형식으로 다언어 사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종 목표는 "모든 언어의 모든 낱말을 정의하는 것"이다. 대니얼 올스턴(Daniel Alston)과 몇몇을 포함한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현재의 모양새를 갖춘 프로젝트를 처음 출범시켰다. 역사. 위키낱말사전 프로젝트는 2002년 12월 12일 시작되었고, 2002년 12월 26일 공식 주소를 얻어, 2003년 6월 20일 위키미디어 재단의 일원이 되었다. 2016년 2월, 한국어 위키낱말사전은 20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었으나 2018년 7월, 21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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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
채팅()은 네트워크에서 두 명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글을 주고받는 행동을 말한다. 채팅은 본래 PC통신 때부터 즐겨 쓰던 방법으로, 대화방으로 사용자들이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웹캠의 발달로 음성 채팅 및 화상 채팅 등의 새로운 기술이 널리 퍼졌다. 또한, 대화방을 사용하지 않는 간편한 인스턴트 메신저도 널리 쓰인다. 개요.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나누는 대화와 같이 인터넷이나 온라인서비스에 접속한 이용자끼리 서로 메시지를 입력해서 주고받는데, 이런 개인적인 대화를 위한 통신망을 대화방이라고 부른다. 온라인 서비스, 즉 PC통신으로 하는 채팅은 주로 국내에서 한정되지만 인터넷으로 하는 채팅은 전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이라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으면 온라인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인터넷에는 대화방 채널이 많이 있다. 어떤 대화방은 어린이끼리만 있고, 또 어떤 곳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이야기를 한다. 우리말을 사용하는 곳도 프랑스어, 일본어 등을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대분분의 대화방은 영어를 사용한다. 역사. 최초의 온라인 채팅 시스템은 1973년 일리노이 대학교의 플라토 시스템에서 Doug Brown과 David R. Woolley에 의해 개발되었다. 소프트웨어, 프로토콜. 여러 개의 프로토콜을 지원하는 채팅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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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cam)은 기계공학에서 동력 전달 장치의 하나로 회전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꾸는 철덩어리이다. 원동축의 정속(定速) 회전에 대응하여 종동 링크를 복잡한 경과를 더듬게 왕복직선 운동과 왕복 각운동을 부여하는 데는, 운동의 성질에 응해서 각종 기구가 쓰인다. 그중에서도 임의의 경과를 더듬는 운동을 가장 재빠르게 행하게 하는 데에는 캠장치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평면 캠과 확동 캠, 입체 캠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개요. 캠은 회전운동에서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철덩어리로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예는 자동차의 캠축으로, 엔진의 회전 운동을 실린더의 흡배기 밸브 작동에 필요한 왕복운동으로 변환한다. 순/역방향 운동이나 원형운동을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크랭크라는 철덩어리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휠의 동작에 필요한 회전운동을 전환시키고,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취하는 자동차의 크랭크축은 그 예이다. 캠은 또한 저장된 정보와 도구전송 정보를 볼 수 있게 한다. 스크류 머신의 다양한 도구와 척의 움직임, 또는 뮤직 박스의 노트를 지시하는 'CAM-DRUM'은 그 예이다. 캠에 의해 전송되고 저장된 정보는 ‘어떤 행동이 일어나고, 언제쯤 일어날까?’ 라는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 (이 주제를 설명하기에는, 비록 뮤직 박스 캠이 더 나은 예 일지라도, 자동차 캠 샤프트에도 본질적으로 이 물음을 답할 수 있다.) 어떤 캠은 축에 대해 회전하는 캠으로 만들어진 롤러 follower의 변화가 반영되는 변위 다이어그램에 의해서 특별할 수 있다. 이 다이어그램은 반경변위의 그 위치에서 각도 위치와 관련된다. 몇 가지 주요 용어는 플레이트 캠의 구조와 연관성이 있다. 변위 다이어그램은 전통적으로 음수가 아닌 값을 그래프로 표시된다. 캠장치. 캠장치는 인도할 운동에 상응한 윤곽을 지닌 회전체(캠)을 일정한 속도로 돌리고, 둥글거나 또는 평면의 단면을 가진 종동절(從動節)을 그것에 대해 밀어붙임으로써, 필요로 하는 운동을 하게끔 한 것이다. 하트캠은 판(板)캠의 일종으로, 종동절의 끄트머리가 나이프에지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캠의 회전 중심을 통과하는 직선상으로 왕복운동 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캠장치이다. 캠은 각종 자동 기계류에 많이 쓰이고 있는데, 엔진 등의 연료판(瓣)이나 흡배기 밸브의 작동을 제어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 배력장치. 배력장치(倍力裝置)는 원동절(原動節)의 변위에 비교해서, 어떤 종동절의 변위가 매우 작을 경우는, 그 종동절에 현저하게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다. 직선운동 기구. 엄밀히 직선을 그리는 링크장치는, 포슬리에 기구(機構) 외에 여러 종류가 있지만, 미끄럼기구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기구가 복잡하게 되므로, 기구를 간단하게 해서 근사적(近似的)인 직선운동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도 여러 종류의 기구가 있는 데 〔그림〕-39는 그 일종으로서, 점 P가 그리는 렘니스케이트곡선(雙葉曲線)의 일부가 직선을 거의 닮고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선박용 하역크레인으로 짐을 거의 수평으로 이동하도록 한 기구이다. 구면링크장치의 응용. 구면링크장치에서는, 축선(軸線)이 이루는 중심각이 평면링크장치의 링크의 길이에 상당하며, 중심각이 90°인 것은 평면링크장치의 슬라이더 즉 미끄럼자(子)에 상당한다. 구면링크장치에서도 4절(節)의 것이 기초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실제로 쓰이고 있는 것은 중심각이 90°인 링크 3개를 지니는 구면양(兩)미끄럼자 크랭크 연쇄로부터 고정링크의 교체로서 얻어지는 회전미끄럼자 기구와 요동(搖動)미끄럼자(子)기구 등이 주이다. 예전에 기차의 천장에 설치된 천장선풍기의 목흔들기 기구도 이의 응용이다. 역사. 초기 캠은 기원전 3 세기부터 헬레니즘 문명의 수력식 자동화기기에 내장되었다. 후에 캠축에 캠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랍 발명가 알 자자리에 의해 채용되었다. 유럽기계에는 캠 및 캠축이 14세기부터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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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
PC통신(PC通信, , )은 개인용 컴퓨터(PC)를 다른 컴퓨터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하여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전화망을 사용하여 문자, 숫자, 영상, 음성 데이터 등을 전송한다. 개인용 컴퓨터끼리 서로 연결한 통신 형태도 포함되지만, 보통은 정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호스트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설치하고 여기에 가입한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로 접속하여 이용하는 형태의 전화 회선을 통한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를 가리킨다. 이때 통신 회선은 주로 전화 모뎀을 통한 전화 회선(PSTN)이 사용되지만 ISDN 등의 다른 회선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1990년대에 게시판과 대화방, 그리고 자료실을 제공하는 PC통신 서비스 회사가 설립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초고속인터넷 서비스가 보편화되며 PC통신은 포털사이트와 VT 서비스를 결합한 형태로 서비스를 이어갔으나, 이마저도 2000년대 중반부터는 크게 쇠퇴하여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PC통신. 대형 PC통신 서비스. 대한민국의 PC통신은 천리안과 하이텔 서비스로 시작되었다. 먼저 천리안은 1984년 5월에 (주)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하여, 1985년 10월 생활정보DB, 1986년 9월 화상정보서비스 '천리안', 1987년 4월 한글전자사서함 '한-메일(H-mail)', 1988년 5월 문자정보서비스 '천리안 II'로 이어져, 1990년 1월에는 'PC-Serve'가 개통되고 1992년 12월 '천리안 II'와 'PC-Serve'가 통합하여 천리안이 되었다. 한편 하이텔은 1986년 11월 1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한국경제 프레스텔(Korea Economic Prestel)'을 개통하여 1987년 4월 15일 '한경 KETEL'로 변경, 1987년 5월 1일에는 한경KETEL 영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1989년 11월 '케텔(KETEL)' 서비스를 시작한 뒤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PC통신(주)를 설립하면서 1992년 3월 서비스를 코텔(KORTEL)로 변경하고 같은 해 7월에 명칭을 하이텔(HiTEL)로 변경하였다. 케텔 당시 한국경제신문사에서는 컴퓨터 통신을 홍보하고 회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가입자들 중 추첨을 통해서 1200 BPS모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모뎀은 상당히 비싸서 10~20만원의 고가 장비였으며, 구입하여 집에 직접 와서 설치도 해주었다. 1994년 나우누리, 1996년 유니텔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PC통신 서비스는 다양해졌으며, 접속프로그램인 터미널 에뮬레이터도 큰사람 정보통신의 이야기 위주에서 새롬 데이타맨, 특정 PC통신회사의 전용 에뮬레이터 등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또한, PC통신은 MUD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즉, PC통신을 통하여 현재의 온라인 게임 및 커뮤니티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1999년 정부의 국민PC 사업과 함께 전국에 초고속인터넷 망이 설치되면서 PC통신은 초고속 인터넷에 밀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초반, PC통신 업체들 대부분이 포털로 진출하여 VT서비스와 포털을 함께 운영하였으며 이러한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초고속인터넷의 빠른 보급 속에서도 인터넷 시장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2003년 1월 25일, KT 혜화지사의 인터넷 서버가 디도스 공격을 받아 전국 인터넷망이 일시적으로 마비된 1.25 인터넷 대란이 일어났을 당시 인터넷망을 쓸 수 없었던 사용자들은 PC통신 VT서비스로 일괄 몰려갔다. 이 사건은 99년 인터넷망 설치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PC통신의 VT서비스가 대중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마지막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같은 해인 2003년 8월, 하이텔이 PC통신 VT서비스와 완전 단절된 포털 서비스 운영에만 집중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에 경쟁업체였던 나우누리와 천리안 역시 VT서비스 운영을 포기하고 완전한 포털기반을 전환하였다. 2세대 PC통신을 불리는 채널아이는 서비스 종료, 넷츠고는 2002년 말 라이코스 코리아와 함께 네이트닷컴으로 합병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 문화의 유행이 블로그형 서비스로 급격히 넘어가면서, 인터넷 시장의 판도는 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2004년 싸이월드의 미니홈피 서비스와 네이버 블로그 서비스가 급부상하며 1세대 포털사이트는 모두 몰락하게 되었으며 PC통신 서비스 역시 완전 퇴장하게 되었다. 하이텔은 2004년 8월, 자사의 인터넷 포털 서비스 한미르와 합병하여 파란으로 재오픈하며 명맥을 이어갔으나 천리안과 나우누리는 잉용자가 급격히 빠지며 경영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VT 서비스는 2007년 2월 28일 하이텔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27일 천리안, 2013년 1월 31일에는 나우누리가 서비스를 폐지하면서 완전히 중단되었다. VT모드 텍스트 기반 서비스는 다음과 같다. 그 밖에 민간주도의 지역 기반 PC통신망은 다음과 같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전용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제공되는 인터넷 기반 통신망도 생겨났다. 이와 같은 대형 서비스 이외에도 특정 분야 또는 지역에 특화된 통신망도 존재하였고, 소규모 기업 및 단체, 심지어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BBS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사설 BBS. 사설 BBS는 개인 또는 단체가 운영하는 주로 비영리 목적의 소규모 PC통신 서비스였다. 자발적으로 발생한 이러한 사설 BBS들은 상용 PC통신 서비스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PC통신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사설 BBS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The FIRST'과 1988년 5월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 네트(Byte-Net)'가 효시로 알려져 있다. 곧이어 대구에서 XENIX 환경에서 4개의 접속노드를 갖추어 다중접속자를 지원하는 '달구벌'이 개설되고, 이듬해에는 '엠팔(EMPal) BBS'가 개설되는데, 이 두개의 BBS는 당시 한국데이터통신에서 제공한 전자사서함 'H-mail'의 사용자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또 와일드캣과 8개의 전화 회선을 이용하여 운영하는 '네트워크 서울'도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사설 BBS들은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주로 와일드캣—을 한글화 해서 사용했는데,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주인',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나왔고, 이와 별도로 1991년 최오길의 '호롱불'이 등장하여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당시 유명 사설 BBS는 다음과 같다. 공중정보서비스. 한편, 흔히 01410으로 알려진 한국통신하이텔은 전화망을 활용한 부가통신 서비스의 일종이며, 처음에는 접속번호 157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014XY 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01410을 접속번호로 하였다. 서비스 방식은 접속망 "하이텔"을 한국통신(현 KT)이 운영하면서 "인포샵"이라는 명칭으로 개별 정보제공업체(CP)이 정보서비스를 판매하는 형태이며 현재는 "파우와우"로 이름이 변경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프랑스의 미니텔 서비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미니텔과 마찬가지로 문자 및 비디오텍스(VTX)가 지원되는 전용 단말기 하이텔 단말기를 도입하여 전화가입자들에게 무상임대하였다. 이 하이텔망은 인포샵 서비스 이외에도 다른 여러 PC통신 서비스의 접속 관문의 역할도 하였고, 아울러 전화접속 패킷망으로서 HiNET-P, HiNET-F 등의 네트워킹 서비스도 제공되었다. 나중에는 종량제 PPP 접속서비스도 제공된다. 서비스 명칭 "하이텔"이 PC통신 하이텔과 공유되어 있으나, 서로 구분되는 별도 서비스이다. 이 서비스 내에는 한국PC통신의 하이텔 이외에도 한국통신이 직접 운영하는 소규모 PC 통신으로 HiTEL-POP도 함께 존재했는데, 이것은 이후 미래텔로 이름이 바뀌었었다가 나중에 PC통신 하이텔로 흡수되었다. 014XY 접속번호. 5자리로 구성된 014XY 전화번호는 전기통신번호 관리세칙에 의한 부가통신사업자 식별번호로서, 전화회선을 이용한 데이터 통신에 할당되는 전용 접속번호이다. 처음에는 PC통신용 접속 번호로 도입되었으나 나중에는 다이얼업 PPP 접속 번호로도 활용되었고, 음성통화에 비하여 40% 요금 할인 또는 정액요금제 등의 혜택이 있었다. 현재는 광대역망의 보급으로 모뎀 사용이 격감하여 대부분의 014XY 번호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공식 서비스는 2017년 8월 31 종료되었으며 다음해까지도 01410 파우와우 서비스는 낮은 접속 성공률로 매회 수분간 접속이 되었으나 더이상 제공되는 컨텐츠와 서비스는 없었으며, 2018년 7월 경 일자불상에 모든 014xy 전화번호가 퍠쇄되었다. 따라서 2018년 7월 현재 이하 명기된 모든 일체의 서비스는 더 이상 접속이 불가능하다.아울러, 1544 국번으로 시작하던 관련 서비스는 현재 타 기업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2007년 1월 기준으로 부여되어 있는 식별번호는 다음과 같다. 별 표시(*)는 2007년 12월 기준으로 접속 불능 ASCII 아트 및 ANSI 아트. ASCII 아트는 문자를 조합하여 한 화면상에 그림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문자 기반 표시장치만 존재했던 초창기 컴퓨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ANSI 아트는 터미날의 제어코드(ESC 이스케이프)를 활용하여, 색상 표시, 화면 갱신들을 이용해 동적인 화면을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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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체
통신체(通信體)는 컴퓨터를 통해 발달한 한국어의 독특한 문체와 그 형태를 의미한다. 통신체의 역사. 1980년대 말에서 2000년대~2000년대 말까지 PC통신이 널리 쓰이던 때에는 자판을 한 번 치는 시간도 전화요금으로 청구되었다. 그래서, 시간과 돈, 노력을 절약하는 수단으로 통신체가 각광받으며 널리 퍼졌다. 당시 유행하던 '통신체'로는, '어솨요(어서오세요), 리하이(리하)(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_^/^-^(재미있네요)', '방가방가(반가워요, 반가워요)'등이 있었다. 그 이후, 리니지 등의 게임이나, 디시인사이드같은 유저포탈의 생성으로 즐, 원츄, 아햏햏, 뷁 등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 종류. 문화관광부 연구보고서인 “바람직한 통신 언어 확립을 위한 기초 연구”에 따르면, 통신 언어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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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네트워크(network), 망(網)은 다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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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햄버거(, )는 샌드위치 패스트 푸드의 일종인 음식이다. 또한 햄버거는 양념, 빵가루 등에 고기를 갈아 넣고 버무린 뒤 구워낸 햄버그 스테이크(패티), 채소, 양념 등을 두 장 이상의 동그랗거나 길쭉한 빵 사이에 넣어 만들며, 보통 손으로 쥐면서 들고 먹는다.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사먹는다. 수많은 패스트푸드 식당들은 햄버거, 감자 튀김, 콜라 등을 하나로 묶어서 세트로 판매하기도 한다. 유래. 독일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이 지난날 몽골에서 독일로 가져온 음식이었던 타르타르 스테이크를 모방하여 그 지역 요리사가 다진 육회를 재료로 반죽하여 뭉친 것을 불에 구운 것으로 햄버그 스테이크 또는 '함부르크 스테이크'라 한다. 18세기 초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 출신 이민자들에게서 이 스테이크가 미국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함부르크에서 온 스테이크라는 이름인 햄버그 스테이크(Hamburg steak)로 불리게 된다. 이후 미국 각지에서 햄버그 스테이크를 사용하여 햄버거라는 요리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시초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을 뿐 정확히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큰 이견이 없다. 햄버거의 시초를 둘러싼 주장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한 요리사가 샌드위치를 만들던 중 너무 바쁜 나머지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일반 고기 대신 샌드위치 빵에 넣어 판매한 것이 오늘날 햄버거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종류. 들어가는 패티의 원료나 양념에 따라서 치킨버거, 불고기버거, 비프버거 등으로 구별해 불리기도 한다. 또 패티 이외의 소에 따라 치즈버거로도 불린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채소만 넣어 만들거나 콩을 원료로 한 패티로 만든 샌드위치(베지 버거)역시 햄버거로 불릴 때가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치의 맛을 낸 김치 버거와 밥을 뭉쳐 모양을 낸 것을 빵 대신 사용한 라이스 버거도 존재한다. 안전. 익히지 않은 햄버거에는 초기에 종종 부적절한 고기 준비로 인해 O-157과 같은 식품 매개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해로운 세균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관리와 조리 중에 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식품 매개 질병의 잠재성으로 인해 미국 농무부(USDA)는 햄버거의 내부 온도를 71°C(160°F)로 조리할 것을 권고한다. 이 온도로 조리할 경우 웰 던(well-done)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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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놀이() 또는 유희(遊戱)는 인간이 재미를 얻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한다. 물질적 보상 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이며 외부의 강제에 의한 행위도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이나 일과 구별되지만, 노동에도 유희적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놀이는 기분전환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 규정되며, 서양 기원의 승부와 관련 있는 놀이는 게임(game)으로 불리기도 한다. 즐거움 외에도 민첩성이나 사회성 등 성장에 필요한 경험을 얻기 위해 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정의. 놀이를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관해서는 종래 많은 학설이 있다. 잉여정력설(剩餘精力說)·생활준비설·반복설·휴양설·생물학설 등이 있다. 놀이를 작업과의 대립개념으로 했을 때 그 본질은 분명해진다. 작업은 진지한 것이며, 피곤함과 고됨이 따른다. 또한 의무적·강제적인 것임에 반해서, 놀이는 자기목적적이며, 자기충족적 운동으로, 활동에는 쾌감이 따르고, 또한 자발적·해방적인 것이다. 놀이에는 기본적인 요소로 참여자와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rule)이 추가 요소로 포함될 때도 있다. 근대의 놀이는 기본적으로 방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놀이의 핵심은 '즐거움'이다. 놀이의 참여자는 놀이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여러 가지 행위를 하면서 '즐거움'을 얻거나, 특정 행위 이후에 돌아오는 보상으로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즉, 한 사람 이상의 참여자가 과정 또는 목표를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행위를 '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통념상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느끼는 '긴장감, 성취감, 기쁨' 등의 건강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 유아기와 놀이. 유아기(乳兒期)에는 작업과 놀이가 미분화상태이기 때문에, 놀이에 대해서 어른의 작업에 대한 것과 같이 진지하다. 이 미분화성 때문에 이 시대에서는 놀이 가운데서 작업(간단한 심부름 등)을 시키는 일도 가능하며, 또한 완구(玩具)를 보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도구가 그 역할을 한다. 유아에게는 혼잣놀이나 평행놀이가 많다. 아동기의 중기부터 후기는 집단적 놀이가 특징이며, 소위 갱(gang)시대를 이룬다. 유희집단의 성원 수도 연령과 함께 변화한다. 집단참가의 인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2~4명이던 것이 고학년에 가서는 6~10명으로 증가한다. 그 후 청년기가 됨에 따라 다시 감소한다. 동일유희라도 발달에 따라서 그 구조가 변화한다. 오가와타로(小川太郞)에 의하면, 유희는 혼자서 가능한 조직없는 유희로부터 단순한 규칙을 가진 단순한 조직놀이로, 다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복잡한 조직놀이로 변화한다. 아동기부터 청년기에는 놀이가 집단적으로 행해지며, 규칙이 정해진 그룹조직이라든가 운동경기 등이 왕성하게 실시된다. 이 놀이집단을 통해서 협조성이나 자기통제와 같은 성격형성이 가능해지며, 신체의 훈련, 규칙 존중 등의 사회성의 증진이 학습될 가능성이 많다. 분류. 뵐러(Ch. Buhler)는 놀이를, ① 기능놀이(감각을 사용한다든지, 손발을 움직인다), ② 상상(想像)놀이(소위 경쟁놀이), ③ 구성놀이(토막쌓기·찰흙빚기·描畵 등), ④ 수용(受容)놀이(그림극·레코드 등을 보고 들으며 즐기는 것)등으로 분류하여 발달을 고찰한다. 파텐(M. B. Parten)은 사회적 행동양식에 의해서, 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행동, ② 방관적 행동, ③ 혼잣놀이, ④ 평행놀이, ⑤ 연합놀이, ⑥ 협동놀이로 분류한다. 유아기의 놀이 형태. 유아기의 놀이의 형태는, 대개 유희활동의 경과형식(經過形式)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그 발달 차이를 알아보고 있다. 가장 원시적인 유희활동. 거의 2-3분 간격으로 다른 활동을 나타내며, 더욱이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유희라고 이름붙일 수 없을 정도로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1세아에 많다. 대부분 적응적 목적을 위해 습득한 어떤 하나의 기제로 순환적 반응을 반복하는 행위가 주를 이룬다. 이 시기는 심상이 아닌 기능적 동화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단계와 구별된다. 단편적 유희행동이 모자이크식으로 접합한 것이다. 10분간 정도씩 유희(遊戱)가 계속되나 다음 유희와의 관계성이 없이 이루어지는 놀이 방법으로, 1시간에 4~9종의 놀이가 나타난다. 2~3세아에 가장 많다. 이 시기에 이르른 아동은 단순한 감각운동적 면에서 탈피해 상징적 가작화를 통한 놀이에 집중한다. 하지만 아동은 사진의 행동을 가작화로써 이해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의식화하는데에만 머무르며, 이는 누적형놀이와 연속형 놀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같은 종류의 유희가 1시간 가까이 연속된다. 하나의 유희가 그것과 관계 있는 유희로 발전한다든지, 혹은 다른 유희를 도입하여, 잡다(雜多)하게 하나의 유희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5세아에 비교적 많다. 이 때에부터는 놀이가 습관화된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징적 도식의 형태를 취한다. 정지된 유희활동이 1시간에 2가지나 3가지의 비율로 실시된다. 4~6세아에 많다. 분절형의 유희가 다시 오래 계속된다. 1시간 내의 대부분이 하나의 유희이다. 분절형 놀이의 상위유희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언뜻 보기에는 연속형 놀이와 비슷해보이지만, 각각의 유희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것으로 연속형 놀이와 구분된다. 놀이의 예.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없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있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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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게임
비디오 게임(, )은 컴퓨터가 게임 사용자의 입력을 받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처리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출력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전자게임(electronic game)이다. 비디오 게임은 글자나 그림, 소리만으로 출력될 수도 있지만, 많은 비디오 게임이 영상표시장치를 이용한 시각적 출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더 많다. 21세기 들어 급성장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2016년에는 영화와 음악 시장을 합한 규모보다 더 크게 성장했다. 개요. 플랫폼. "플랫폼"(platform)이라는 용어는 전자 부품의 특정한 조합이나 컴퓨터 하드웨어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소프트웨어와 결합하여 비디오 게임이 동작할 수 있게 한다. "시스템"(system)이라는 용어 또한 흔히 사용된다. 아래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으며 하나 이상의 플랫폼을 연결하는 게임이 있을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뿐 아니라, 게임을 즐길 수 있으나 전용 비디오 게임 머신이 아닌 다른 장치들도 존재한다. (스마트폰, PDA, 공학용 계산기) 분류. 컨트롤러. 비디오 게임은 여러 종류의 입력 장치를 사용하여 사람의 행위를 게임에 번역, 전달할 수 있으며, 가장 흔한 게임 컨트롤러는 PC 게임의 경우 키보드, 마우스이며, 콘솔의 경우 게임패드, 휴대용 콘솔의 경우 버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의 게임 컨트롤러는 일반적으로 레이싱 휠, 라이트 건, 댄스 패드가 있다. 디지털 카메라 또한 플레이어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게임 컨트롤러로 사용할 수 있다. 개발. 이스터 에그. 이스터 에그는 개발자들의 메인 게임의 일부가 아닌 곳에 남겨둔 숨겨진 메시지나 농담이다. 사회적 양상. 혼자서 하는 게임. 비디오 게임은 게임으로서는 드물게 혼자서 하는 게임(1인용 게임)이 많았다. 그것은 컴퓨터 자체가 여러 사람이 함께하기 어려우며,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컴퓨터가 알아서 적절한 상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게임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처리하고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서사적 특징을 띠기도 한다. 다른 참여자와의 상호 작용에 크게 의지했던 기존의 게임과는 달리, 다른 참여자가 없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게임이 제공하는 내용이 그 경험 수준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사적 특징의 하나는 주인공의 존재인데, 보통의 게임은 여러 인간 참여자가 이루어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인공이 없던 반면, 혼자 하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유일한 인간 참여자에 그 비중이 맞추어진다. 그래서 모든 게임 환경과 컴퓨터 참여자들이 주인공인 인간 참여자의 행동에 맞추어 작용함으로써 의도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나아가 컴퓨터가 더는 참여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인간 참여자 개인에 맞추어지는 환경으로서 제공되는 게임도 많다. 그를 위해 비디오 게임은 영화와 소설 등의 다른 서사 매체의 문법을 빌려와 게임 참여자에게 높은 수준의 경험을 제공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신 기술의 발달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함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온라인 게임이 대두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전의 게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사람들이 동시에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 이론》의 저자인 라프 코스터는 2007년 게임 개발자 회의에서 과거 1인용 게임들의 성행은 놀이의 기형적인 변화였고, 온라인 게임의 시대가 오면서 진정한 놀이로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비디오 게임을 새로운 서사 형태의 출현으로 보는 사람들은 혼자서 하는 비디오 게임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멀티미디어. 비디오 게임은 종종 다양한 전자 매체가 결합한 멀티미디어의 궁극적 형태로 언급된다. 현대의 비디오 게임은 영화, 문학, 음악 등 여러 표현이 모두 결합하여 상호 작용의 형태로 제공되는 경험 매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의 본질은 그 구조이며 영상과 음악, 문학 등의 표현은 그것을 돕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가상 세계.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임의로 연산된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교육/선전 도구.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으로 재미를 제공하며 일련의 학습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디지털의 특성상 널리 배포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교육이나 선전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게임의 효과. 과도한 비디오 게임은 심각한 게임 중독 문제로 이어진다. 한편 게임의 효과에 대한 연구결과들도 있다. 2013년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2개월 이상 하루 30분 이상 슈퍼 마리오 64 게임을 한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하여 일부 뇌 부위가 커졌다. 물론 모든 게임이 이런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고 논문에서 제시하는 한계점들도 있다. 2013년 또다른 논문에 따르면 실시간 전략 게임이 인지 유연성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폭력적인 게임을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게임을 한 사람보다 폭력성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일수록 문제 행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 등 비디오 게임의 부정적 효과에 주목하는 연구결과들도 많이 있는 상태다. 알고리즘. 비디오 게임은 원시 인공지능 기술이 들어간다. 그 이유인 즉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적들은 가만히 냅둬도 자기들이 알이서 움직이며 플레이어의 유닛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위치와 스킬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해서 움직이는 것이 원시적인 인공지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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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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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 1941년 3월 26일~ )는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이다. 그는 1995년부터 200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중의 과학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석좌교수"직과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2009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그는 역시 많은 저명한 언론매체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엔카르타 백과사전과 진화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 무신론적 박애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수석편집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으며 과학적 회의론 잡지의 창립멤버로 편집이사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왕실이 수여하는 패러데이 상의 심사위원, 영국TV 아카데미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으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생물학 부문 수장이기도 하다. 도킨스는 진화에 대한 유전자 중심적 관점을 대중화하고 밈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1976년 저서 《이기적 유전자》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1982년 그는 표현형의 효과가 유기체 자신의 신체만이 아니라 다른 유기체들의 신체를 포함한 넓은 환경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준 저서 《확장된 표현형》으로 진화생물학계에서 폭넓은 인용을 받았다. 도킨스는 무신론자이며, 철저한 인본주의자, 회의주의자, 과학적 합리주의자 및 브라이트 운동 지지자이다. 그는 미디어에서 여러 차례 "다윈의 로트바일러" 로 불렸는데, 이는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가 자연 선택을 지지하면서 "다윈의 불독"으로 불린 것에서 유추되었다. 2006년에 발표한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초자연적 창조자가 거의 확실히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적 신앙은 굳어진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007년 11월 현재 《만들어진 신》의 영어판은 150만 권 이상 판매되어 그의 책들 중 1위를 기록했으며, 31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도킨스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대중과학서를 집필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다. 2004년 옥스퍼드의 베일리얼 칼리지(Balliol College)는 그의 이름을 딴 도킨스 상을 만들어 인간에 의해 멸종위기에 빠진 동물의 행동양식과 복지에 기여하는 논문을 발표한 사람에게 수상하고 있다. 삶. 리처드 도킨스는 1941년 3월 26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클린턴 존 도킨스는 2차대전중 연합군으로 영국에서 케냐로 이주하였으며 도킨스가 8세가 되던 1949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부모 모두 과학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도킨스의 질문들에 과학적 언어로서 답을 해 주었다고 한다. 도킨스는 그의 어린시절을 전형적인 평범한 영국 소년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략 9세 되던 무렵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자연에 있는 방향성, 규칙성, 목적성, 질서와 이런 것들의 조합등을 인식하고 다시 신의 존재를 믿도록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영국성공회의 관습들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신보다는 윤리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후에 그가 생물의 진화과정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종교적인 관점은 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 없이도 진화론의 자연선택이 생명의 복잡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 도킨스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온들 스쿨(Oundle School)을 다녔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동물학을 수학했는데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동물행태학자 니콜라스 틴버겐(Nikolaas Tinbergen)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62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그 후 틴버겐의 지도하에 옥스퍼드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1966년에 받게 된다. 틴버겐은 동물행태연구의 개척자였는데 특히 본능의 문제들, 학습과 선택에 있어 선구자이다. 이 시기에 도킨스의 연구는 동물결정모델에 관한 것이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도킨스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물학 조교수로 재직한다. 이 시기 UC 버클리에서는 당시의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운동이 거세었는데 도킨스도 행동가로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 깊이 개입했다. 그는 1970년에 다시 옥스퍼드로 동물학을 강의하러 돌아 왔으며 현재까지 옥스퍼드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5년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찰스 시모니(Charles Simonyi)가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며 기부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저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도킨스는 생명과학을 일반대중에 쉽게 설명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7년, 도킨스는 동료 학자 매리언 스탬프와 결혼했고 1984년에 이혼했다. 그 해 도킨스는 Eve Barham과 재혼했으며 사이에 딸 Juliet Emma Dawkins를 두었으나 역시 이혼했다. Barham은 1999년 암으로 사망했다. 1992년에 그는 여배우 랠라 워드(Lalla Ward)와 결혼했다. 도킨스와 워드는 그들의 공통 친구인 더글러스 애덤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워드는 도킨스 책 중 절반 이상의 삽화를 그렸으며 두 책의 오디오버전(《조상 이야기》와 《만들어진 신》)의 나레이터를 맡았다. 2009년, 그는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 도킨스는 만물은 신이 창조했다는 종교적 믿음인 창조과학에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창조과학을 불합리하고 지성을 축소시키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1986년에 나온 책 《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에서 창조론자의 중요한 논점인 설계론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18세기 영국신학자 윌리엄 패일리(William Paley)의 저서 "자연신학"에서 주장되어 유명해진 시계공비유에 대해 반박했다. 패일리는 그의 저서에서 "시계는 너무 복잡하고 기능적이어서 단순히 우연의 산물로 출현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도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었다"라고 확언했다. 하지만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론의 자연선택도 생물계의 규칙성과 복잡성, 그리고 기능성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에 있어서 지성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시계제작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86년에 도킨스는 옥스퍼드 헉슬리기념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젊은 지구 창조론자인 A. E. 윌더-스미스(A. E. Wilder-Smith), 성경적창조론회 수장인 에드거 앤드루스(Edgar Andrews) 등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만약 그가 그런 토론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창조과학자들이 노리는 기독교인들로부터의 명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만류한 그의 동료 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충고를 따라 이후 창조과학자들과 공식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 도킨스는 토론을 제의하는 창조과학자들이 그런 논쟁에서 완패당하든 아니든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에 따르면 그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화학자와 논쟁을 벌임으로써 얻어지는 명성이었던 것이다. 2004년 12월 미국 언론인 빌 모이어스(Bill Moyers)와 인터뷰할 때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느 과학만큼이나 확실하다." 모이어스가 그에게 "이론"이란 단어의 사용에 대해 질문했을 때,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화는 이제까지 관측되어 왔다.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을 관측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그것은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경찰이 그 범인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 형사는 당연히 살인이 일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형사는 많은 실마리와 엄청난 양의 상황증거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진화는 진정한 과학자에게 마치 영어단어게임에서 하나 하나 스펠링을 불러주는 것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도킨스는 아이들의 과학교육에 지적설계를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으며 단지 종교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 진실"이란 영국단체를 강하게 비판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단체가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도록 홍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러한 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을 통해 책, DVD, 팸플릿을 제작해서 학교에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교육 스캔들"이라고도 표현했다. 비판.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 책인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저자 런던 대학교 교수 스티븐 로즈(Steven Rose)는 도킨스를 초다윈주의자(Ultradarwinist)로 명명하면서, 유기체가 아닌 유전자 수준에서 여러 가지 자연 선택과정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도킨스의 유전자론은 유기체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유기체를 유전자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개체로 격하시켜 진화의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 도킨스는 로즈가 비판하는 유전자 결정론이란 사회생물학자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념임을 지적하고, 로즈의 주장은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다고 답했다. 저서. · '에덴 밖의 강'은 사이언스북스에서 '에덴의 강'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판했다. 연설과 강의. 도킨스는 또한 수많은 연설과 강의를 했는데 그중엔 헨리 시즈위크(Henry Sidgwick) 기념연설 (1989), 첫 번째 에라스무스 다윈(first Erasmus Darwin) 기념강의 (1990),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강의 (1991), T.H. 헉슬리 기념 강연(T.H. Huxley Memorial Lecture) (1992), 어빈 기념 강의(Irvine Memorial Lecture)(1997), 쉘든 도일강의(Sheldon Doyle Lecture) (1999), 틴베르헨 강연 (2004), 그리고 태너 강의(Tanner Lectures)(2003)등이 대표적이다. 1991년에 그는 어린이를 위한 왕실학교 크리스마스 특강을 했고 이것은 2007년에 "이 우주에서 성장한다는 것은"이란 DVD 타이틀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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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델브뤼크
막스 루트비히 헤닝 델브뤼크(, ForMemRS, 1906년 9월 4일 ~ 1981년 3월 9일)은 독일 제국 베를린 출신의 미국의 생물학자이다. 1969년에 바이러스의 복제 기작과 유전적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앨프리드 허시,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생애. 델브뤽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천문물리학을 공부하다가 이론물리로 전향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영국과 덴마크, 스위스 등 여러 나라들을 순회했다. 볼프강 파울리와 닐스 보어를 만나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32년 베를린에 돌아와 리제 마이트너의 조수가 된다.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초파리(drosophila) 유전자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며 미국에 머물렀다. 1941년 매리 브루스(Mary Bruce)와 결혼하면서 나중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네 아이를 얻었다. 1942년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박테리아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잘 조절된 변화가 아닌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공로로 1969년 앨프리드 허시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1950년대 이후 델브뤽은 유전학보다는 생리학쪽의 연구에 집중했고 또한 쾰른 대학교에 분자유전학 연구소를 세우기도 하였다. 가족 관계.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의 손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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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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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수
수학에서 유리수(有理數, )는 두 정수의 비율 또는 분수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이다. 단, 분모가 0이 아니어야 한다. 특히, 분모가 1일 수 있으므로 모든 정수는 유리수이다. 유리수체의 기호는 formula_1이며, 몫을 뜻하는 영어 quotient에서 따왔다. 정의. 유리수체 formula_1는 정수환 formula_3의 분수체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추상적 정의. 엄밀히 말해, 유리수체 formula_1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시키는 (동형 아래 유일한) 체이다. 구체적 정의. 유리수체 formula_1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집합 formula_10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 formula_11를 줄 수 있다. 유리수체 formula_1는 집합으로서 몫집합 formula_14이며, 그 위의 덧셈과 곱셈은 다음과 같다. 체가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인 각종 연산 법칙과 덧셈 항등원 formula_17 및 각 유리수 formula_18의 덧셈 역원 formula_19 및 곱셈 항등원 formula_20 및 0이 아닌 각 유리수 formula_21의 곱셈 역원 formula_22의 존재가 성립하므로, 이는 체를 이룬다. 정수환과 유리수체 사이의 표준적인 단사 환 준동형은 다음과 같다. 각 유리수 formula_18를 분수 꼴 formula_26으로 나타내면, 유리수를 마치 두 정수의 비율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 표현. 분수 표현. 유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이므로, 나눗셈 기호와 의미가 같은 분수 기호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과 3의 비를 분수로 나타내면 이다. 분자와 분모를 동시에 그 공약수로 나누어 원래와 값이 같지만 꼴이 더 단순한 분수를 얻는 과정을 약분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서로소이어서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 분{sfrac|12|18}}을 최대 공약수 6으로 나눠 약분하면 기약 분수 을 얻는다. 분자가 분모보다 작은 분수를 진분수, 작지 않은 분수를 가분수라고 한다. 가분수는 정수와 진분수의 합으로 표현한 것을 대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의 대분수 표현은 1이다. 무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분수 표현이 불가능하다. 십진법 표현. 유리수의 진법 전개는 유한 소수이거나 순환 소수이다. 십진법 전개가 가장 흔하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분수를 소수로 전환하려면 나머지 있는 나눗셈을 통해 순환 마디를 구하면 된다. 유한 소수나 순환 소수를 분수로 전환하려면 = 0.1, = 0.01, = 0.001 및 = 0.111..., = 0.010101..., = 0.001001001... 따위를 이용하면 된다. 반면 무리수의 진법 전개는 비순환 소수이다. 연분수 표현. 유리수는 유한 연분수 표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분수를 연분수로 나타내려면, 분자와 분모에 유클리드 호제법을 응용하면 된다. 무리수의 경우, 연분수 표현은 항상 무한 연분수이다. 연산. 등식과 부등식. 두 유리수가 같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유리수가 다른 어떤 유리수보다 작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덧셈과 뺄셈. 두 유리수의 덧셈에는 통분 기법이 쓰이며, 이는 다음과 같다. 유리수의 반수를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두 유리수의 뺄셈은 반수를 더하는 것과 같다. 분모의 최소 공배수를 공분모로 취하여 통분하면 더 간단히 구할 수 있다. 곱셈과 나눗셈. 두 유리수의 곱셈은 다음과 같다. 0이 아닌 유리수의 역수는 다음과 같다. 두 유리수의 나눗셈은 역수를 곱하는 것과 같다. 성질. 집합 formula_1는 정수의 집합 formula_3으로 만든 분수체이며, 따라서 formula_1는 사칙연산이 자유로운 체이다. 집합 formula_1는 표수가 0인 가장 작은 체이다. 즉, 표수가 0인 체는 formula_1와 동형인 체를 반드시 포함한다. 서로 다른 어떤 두 유리수 사이에도 또다른 유리수가 존재하므로 집합 formula_1는 조밀 집합이다. 그러나 formula_1와 formula_3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므로, formula_1는 가산 무한 집합이다. 유리수체에는 표준적인 절댓값과 p진 절댓값을 줄 수 있으며, 이들에 의한 완비화는 각각 실수체와 p진수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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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방
피시방(PC房, )은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LAN 게임 카페()이자 다중 PC 카페이다. 보통 피시방은 시간당 요금 또는 정액 요금을 내고 컴퓨터로 인터넷, 온라인 게임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다. 또한 피시방의 시간당 요금은 지역마다 다르다. 대부분은 40~80분에 1000원 정도로 가격을 책정한다. 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전자 카페는 혜화동에 김형준이 개업한 피씨카페이다. (인터넷의 개발은 미국이 빨랐으나, 민간용 인터넷은 한국의 전길남 박사에 의해 한국이 오히려 미국보다 빨랐다. 일본의 인터넷 보급은 한국보다 3년 정도 늦었다. 민간용 인터넷이 가장 먼저 보급된 한국에서 생긴 피씨카페가 사실상 세계 최초의 피씨방이다.) 피씨카페는 1988년 3월에 첫 개장하여 1991년에 폐장된 엠팔의 멤버였던 안상수와 금누리가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만든 ‘일렉트로닉 카페’(전자 카페)이다. 당시 16비트 컴퓨터 두 대를 놓아 전화선으로 PC통신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후 세계 최초의 인터넷 카페는 1994년 4월에 정민호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BNC(BIT COMMUNCATION CAFE)라는 이름으로 첫 개장한, 인터넷카페이다. BNC 인터넷 카페는 당시 최초의 인터넷 카페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언론에서 소개한 인터넷 카페들은 전부 "전자카페"였으나 1994년부터 "인터넷카페" "모뎀카페", "네트워크카페", "사이버카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1995년 여름에 종로, 홍대 등지에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대학생들이 인터넷 카페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인터넷 카페에서는 ISDN과 전화모뎀을 이용한 PC통신으로 하이텔에 연결하여 텍스트 위주의 통신이 가능하였으며,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PC와 TV를 연결하여 모르는 사람이 통신을 이용한 바둑을 둘 수 있었고 쥬라기 공원같은 통신을 이용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그 뒤, 1996년 여름에는 PC방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다음해인 1997년 11월, IMF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피시방의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이 IMF라는 커다란 혼란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장인 PC방 창업에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1998년부터 1999년까지는 창업 열풍에 맞추어 상승세를 타게 된다. 또한 1998년에 발매된 미국의 컴퓨터 게임 제작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는 5년 동안 대한민국의 피시방 2만 곳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영향. PC방의 대중화로 인하여 1998년 여름부터는 PC방의 창업이 대한민국의 컴퓨터 산업이 호황세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업체들이 PC방을 시장으로 이용하였고, 많은 사업들이 성공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생각되었다. 비디오 게임산업이 발전하면서, 그 비디오 게임에 맞는 컴퓨터 사양이 필요하였고, PC의 고사양화가 가속화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2001년부터는 PC방 개인사업의 통신선 설치가 일반 가정집까지 연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피시방은 미국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1998년 4월 발매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함께 널리 퍼졌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터넷에 연결되었고, 컴퓨터 게임을 하기에 적합해졌다. 2000년에 들어서는 화상 채팅이 퍼지면서, 많은 피시방들이 웹캠을 설치하였다. 또한 넥슨, 넷마블 등의 온라인 게임 서비스 업체들은 피시방을 중심으로 자사가 서비스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을 이벤트 등의 방식으로 홍보하기도 하며, 피시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이용할 경우 보너스 경험치 같은 혜택을 주기도 한다. 피시방은 컴퓨터를 비치하여 방문자가 이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스낵이나 음료수를 판매한다. 그러나, 2002년 이후 각 가정의 인터넷 접속 방법의 발달과 증가로, 현재 피시방은 사라지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이용료 인하, 시설의 고급화·대형화, 또는 플레이스테이션 4 같은 비디오 게임기를 비치하는 등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논란. 관련된 문제. 피시방은 어린 학생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이용자의 상당수가 청소년 및 어린이지만, 상당수의 피시방이 금연구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지않아 간접흡연의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인터넷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피시방에서 장시간 사용하면서 생활을 망치는 경우가 있으며, 간혹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피시방 사장들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에게 노동착취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또한 금연법의 시행으로 2014년 1월 1일부터 100m²이상의 전 사업장, 2015년 1월 1일부터는 100m²이하의 전 사업장이 실시대상이 된다. 또, 주민등록번호나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다. 일부 PC방에서는 회원가입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생일,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수집하고 있으며 PC방의 메인 관리 컴퓨터가 해킹당하거나 업주의 악의적인 이용으로 피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14년 8월 7일부터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이 금지되면서 PC방에서의 주민등록번호 수집 역시 불법이 되었다. 이로 인해 회원가입 수단이 문자 인증으로 바뀌는 추세이긴하나 인증으로 인한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15세 이용가 게임인 오버워치가 유행할 당시 일부 PC방 손님들이 오버워치를 하며 PC방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신고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이로 인해 PC방 업주들과 경찰과의 갈등이 많이 벌어졌고, 현재 PC방은 게임 이용등급을 지켜서 게임을 하라는 안내판을 부착하는 곳이 많다. 피시방은 저녁 10시 이후에 청소년 출입이 불가능하며 20살이 되어도 고등학교 졸업을 해야지만 저녁 10시 이후에 출입이 가능하다. 학교 근방에서 PC방 설치금지. PC방 업주들이 PC방은 더 이상 청소년유해시설이 아닌데도 학교정화구역 안에 일률적으로 설치를 금지하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헌재는 PC방을 학교 근방 200m이내에 설치할 수 없다는 법규가 기본권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직업수행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이버지식정보방. 사이버지식정보방 (知識情報房)은 대한민국 국군에 장병 복지를 위해 설치된 이용 시설로, 사지방 혹은 싸지방이라 부른다. 사이버지식정보방 (사지방)에 개방형 리눅스 OS인 하모니카가 도입되었다. 피시토랑. 피시토랑은 피시방+레스토랑의 합성어로 피시방에서 게임을 즐기면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옛날처럼 컵라면과 같은 즉석식품만 있는게 아니라 직접 조리해서 주는 여러 종류의 덮밥과 라면, 핫도그, 떡볶이, 튀김 등 다양한 음식이 있고 음료수도 스무디, 에이드, 커피 등 종류가 다양하며 자리에서 주문하고 계산까지 편하게 할 수 있다. 가격도 일반 식당보다 저렴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으며 피시방에서 게임도 하고 밥과 커피 등을 같이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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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노동조합(勞動組合}, , , ) 또는 노조(勞組, )은 노동자들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만든 노동자의 사회단체를 말한다. 개요. 인간의 노동은 선사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것이나 임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 계급의 출현은 산업화 이후의 일이다. 노동자는 기업가와 더불어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산업혁명 초기부터 기업가에 비해 매우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후 자본가와 국가에 대하여 집단적인 조직체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시드니 웹(S.Webb)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정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노동 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 단체"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조직적인 기초가 되며, 직업·기업·산업별로 조직된다. 시드니 웹의 정의에서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계급분화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질서에 도전하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면서 협상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등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본가와 대립하는 노동자 진영의 주요 조직으로 파악한다. 법률상 정의.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의 성격을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체로서 노동자의 여러 이익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나 연합단체로 보고 있다. 역사. 초기 노동조합. 산업혁명 이후 기계에 밀려 직조공과 같은 숙련 기술자들이 사라진 대신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산업화 국가의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근로하였으나 이들은 아무런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게 되었다. 초기 노동조합 활동은 자본가와 국가의 탄압을 받았으며 법률적으로 엄금되었다. 최초의 노동조합은 17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결성한 우애조합, 공제조합 등이었다. 영국 의회는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이들 조직은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띠었다. 초기 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은 일정한 조합비를 걷었다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급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였다. 미국 노동운동. 탄압의 역사. 미국에서는 19세기 여러 단위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자본가들은 최악의 경우 노동조합 간부를 청부살인하는 등 악랄하고 극심한 탄압을 하였으나 노동운동의 발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1869년 결성된 노동자 기사단은 후일 세계산업노동자로 개칭하였으며 이 단체의 마더 존스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은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8시간 노동제 쟁취.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8만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미시건 거리에서 파업집회를 가졌다. 19세기 미국 노동자들은 10-12시간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임금삭감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석유사업 및 탄광사업가인 록펠러가 고용주인 슈일킬 탄광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문제인 임금삭감에 항의하다가 주동자들이 교수형으로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즉,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한 단결이었다. 이 날 노동자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나 경찰은 이들을 폭도로 몰아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포가 있었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언론들도 미국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빨갱이 딱지 붙이기 곧 공산주의 딱지를 붙이기를 했다. 이후 제2 인터네셔널은 이날을 노동절로 기념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은 큰 사회적 반향을 가져왔고 결국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8시간 노동제가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노동운동. 수 많은 노동자들의 노력끝에 1820년대 영국은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법률(단결엄금법, 18세기 제정)을 폐지하였고 노동조합 활동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산업화된 국가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계속되어 1890년 무렵에는 서구 열강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이 합법화되었다. 1890년 5월 1일 첫 노동절 기념집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어 노동조합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노동운동. 산업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노동운동 역시 파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겪은 일본은 1912년 일본 노동운동 역사 처음의 노동조합인 우애회(友愛會)가 설립되었고 1925년 무렵에는 457개 노동조합에 25만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었다. 한국의 노동운동.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이던 192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친목회, 노동회, 노우회와 같은 지역합동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또한 인쇄공과 같은 숙련노동자들은 직업별 노동조합을 세웠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1924년 4월 조선노동총연맹이 출범하였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인권 쟁취를 위한 단결투쟁과 함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노동계에서는 부두에서 짐을 배로 실어나르는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하는 등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이 단결투쟁만이 노동인권을 쟁취하는 수단임을 깨닫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원산투쟁. 대표적인 노동조합 관련 운동으로는 1929년의 원산의 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투쟁이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가 된 제3세계에서 노동조합의 독립운동 참여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 또한 1930년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도 있다. 고무공장 주주들은 15~20%의 배당이익을 챙기면서도, 노동자 임금 10% 삭감을 결의하여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130원의 저임금을 받아 3~4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사용자들의 임금삭감은 곧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고무노조(위원장 김유창)는 단체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업투쟁으로써 단결투쟁을 하였다.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930년 8월 7일 국제고무공장을 시작으로 11개 공장 1천8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사용자들과 경찰은 대체인력 투입, 빨갱이 딱지 붙이기, 활동가 체포, 용역 불량배를 통한 폭력으로써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방해하고 탄압했으나, 노동자들은 현장복귀 거부와 선전전으로써 저항하였다. 또한 강주룡이라는 노동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미로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80년대. 1970년대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이들의 편에 선 관리자들로부터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였으므로,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탄압 및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악선전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인권을 쟁취하여갔다. 1980년대 노동자들도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여갔다. 당시 노동자들은 단결함으로써, 시간외 수당 또는 초과노동수당을 주지 않는 착취근절, 어용노조 폐지(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불량도시락 거부투쟁(1986년), 임금인상 투쟁(현대중공업)등을 실천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 활동가에 대해 노무관리라는 구실로 회사에서 감시, 가압류, 임금에서의 불이익, 회유를 하여,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 열사가 분신자살을 하는 등 곧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자본에 의해 탄압되는 등 노동조합은 해결할 과제가 많이 있다. 노동자의 정치참여. 20세기에 들어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이 생겨나면서 노동조합의 영향력 역시 증대되었다. 1924년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램지 맥도널드는 최초의 노동조합 출신 영국 총리가 되었다. 또한, 1919년 국제노동기구가 설립되어 국제적인 노동 인권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1930년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사회민주당의 활동과 노동조합의 활동을 전면 엄금 시키는 등 독일에서는 노동조합 운동의 큰 위기가 있기도 하였으나 2차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유형. 조직 대상에 따른 구분.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을 기업별로 하여 결성된 노동조합을 기업별 노동조합이라 하고 산업 직군에 따라 조직된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이라 한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산별노조라고도 한다. 산업별 노조. 산업별 노조는 산업직군 곧 하는 일이 같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해 만든 노조이다. 해당 산업직군에서의 노동을 위해 구직하거나 공부하는 노동자까지도 가입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도 있다. 본문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산업별 노조를 소개한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예를 들어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자동차, 기계, 조선업, IT, 전자, 전기같은 금속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만든 산업별 노조이다. 금속노동자들은 정규직, 사내하청 등의 비정규직, 한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구분없이 누구나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으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은 일다니는 회사에 어용노조나 유령노조가 있더라도 회사와 단체협약 곧 노동조건과 임금에 대한 약속을 체결할 수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건설업에 종사하거나 일하려는 노동자들의 산업별 노조이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들은 단체교섭을 일다니는 회사와 체결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건설노동자는 거의 대부분 일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가 아닌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기업별 노조. 한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과 같이 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이 된다. 가입 유형에 따른 구분. 노동조합은 조직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오픈 숍의 형태로 운영된다. 클로즈드 숍의 인정은 각 나라의 법률에 따라 다르다. 영국은 산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는 반면, 미국은 1935년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와그너 법을 제정하여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였으나 1947년 새롭게 제정된 노사관계법인 테프트-하틀리 법에 의해 금지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항운노조연맹이 클로즈드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수 정체성에 따른 노동조합. 대한민국에서 노동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노동자, 이른바 이주 노동자들은 차별, 열악한 노동환경, 대한민국 정부의 출입국 정책 등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므로 민주노총 이주노동자 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는 소속 조합원 노동자의 연령에 일부 제한을 둔 대신 고용 형태나 소속기업을 따지지 않는 노동조합이 있는데, 대표적인 조직은 청년유니온이다. 청년유니온은 상급단체를 두지 않은 독립된 노동조합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 연대. 전 세계 최대 노동조합 연대 기구로는 국제 자유 노동조합 연맹(ICFTU)과 세계 노동 연맹(WCL)을 합병하여 2006년 11월 결성된 국제 노동조합 연맹(ITUC)으로 전 세계 국가별 노동조합 305개, 노동자 1억 7,500만명이 151개국에서 가입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조합 국제 연대 기구는 세계 노동조합 연맹(WFTU)이 조직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연맹체. 대한민국에는 다음과 같은 노동조합 연맹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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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로그의 밑
자연로그의 밑(base of the natural logarithm)은 무리수인 상수로 formula_1로 나타내어지며 기호 formula_2로 표기한다. 명칭. 정식 수학 용어는 자연로그의 밑이지만, 수학교육학 분야에 한정하면 로그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많고 이 때에는 상수 formula_2로 지칭한다. 그외의 용어는 모두 비공식 용어이다.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이름을 따서 부르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오일러가 발견한 수가 많아서 통용되지 않고 있다. 그 외 로그 계산법을 도입한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를 기려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정작 그것을 발전시켜 밝혀낸 사람은 그가 아닌 야코프 베르누이어서 무산되었다. 역사. formula_2의 값이 계산된 최초의 기록은 1618년 존 네이피어에 의해 발간된 로그표이다. 그러나 네이피어는 로그 계산의 과정에서 나온 결과 값만을 간단히 다루었을 뿐 formula_2를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네이피어의 로그는 formula_19 과 동치이다. 이를 오일러가 정의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로그함수 정의로 옮기면 네이피어의 로그는 인 로그함수이다. 위의 로그에서 사용된 밑은 formula_2의 역수인 와 매우 가까운 근삿값이다. 후일 윌리엄 오트레드가 네이피어의 로그표를 사용하여 로그 계산자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formula_2를 특별한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formula_2가 특정한 상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야코프 베르누이이다. 그는 복리 이자의 계산이 다음과 같은 극한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르누이는 위의 식이 수렴한다는 것과 그것이 특정한 값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 값은 formula_2이다. 베르누이가 정리한 위의 급수를 처음으로 상수로서 표현한 사람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이다. 라이프니츠는 1690년에서 1691년 사이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 급수를 “b”로 표현하였다. 한편, 오일러는 1727년에서 1728년 사이에 이 상수를 formula_2로 표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formula_2 라는 표기가 정식 출판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36년 출판된 오일러의 《메카니카》이다. 그 이전에는 수학자 마다 여러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 상수를 표기하였으나 《메카니카》의 출판이후 formula_2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자연로그. formula_2를 밑으로 하는 로그인 자연로그는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로그함수는 정의에 의해 여러 밑을 가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밑을 따로 표기하지 않은 formula_30는 자연로그를 뜻했다. 하지만 상용로그와 헷갈리는 문제 때문에 현재는 formula_31로 표기한다. 로그함수 formula_32의 도함수는 formula_33이다. 즉, 이고, 이다. 이는 formula_2를 밑으로 한 자연로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수가 등차적으로 증가할 때 로그곡선의 기울기는 등비적으로 감소한다는 의미가 된다. formula_2를 밑으로 하는 자연로그는 여러 가지 증정도와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연수에서 주어진 수가 충분히 클때 1에서부터 주어진 수까지의 소수의 개수는 로그함수에 점근한다는 소수 정리가 있다. 리만 가설에서 출발한 이 정리는 1896년 프랑스의 자크 아다마르와 벨기에의 발레푸생이 서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하여 증명하였다. 이외에도 자연로그는 물리와 화학 등 여러 자연 과학의 변화량에서 사용된다. 다음은 자연로그가 자연 과학에 사용된 예이다. 특성. formula_2는 무리수에 속하며 초월수로 알려져 있다. 초월수. formula_2는 대수적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 1873년 프랑스의 수학자 샤를 에르미트에 의해 formula_2가 초월수임이 증명되었다. formula_2가 초월수임을 증명하는 방식은 귀류법에 의한 것으로 만일 formula_2가 대수적인 수라고 가정하면 다항식을 구성하는 계수가 무한히 약분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무리수. 또한 formula_2는 무리수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증명은 다음과 같다. 먼저 formula_2의 테일러 전개는 이 성립한다. 이제 formula_2를 유리수라 가정하면 양의 정수 formula_51, formula_52에 대해 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어야 하고 이 부등식의 각 변에 formula_55를 곱하면 이 된다. 한편, formula_2 = 라 가정하였으므로 이 된다. 이에 따라 formula_59와 formula_60 formula_52는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하므로 formula_62 역시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식 (1)에서 formula_62는 0보다 크고 1보다 작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자연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formula_2는 두 양의 정수의 비, 즉 유리수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formula_2의 근삿값은 다음과 같은 연분수의 전개를 통하여 계산할 수 있다. 계산. 테일러 전개를 이용한 formula_2의 근삿값 계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를 사용하여 8차항까지 더하면 위 계산은 소수점 아래 4자리까지 유효하다. 계승이 증가함에 따라 역수는 빠르게 formula_73 에 접근하므로 몇 차례의 계산으로도 formula_2에 매우 근접한 근삿값을 구할 수 있다. 한편 formula_75인 지수함수의 테일러 급수는 이다. 함수론. formula_2는 함수의 미분과 적분에서 특별하게 취급된다. formula_2에 대한 임의 차원의 지수함수인 formula_80는 이를 미분한 도함수가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함수이다. 또한, 곡선 formula_80에 대한 formula_82에서 formula_15까지 아래 넓이는 formula_2이다. 먼저 formula_80의 미분을 보면, 이다. 이에 대한 증명은 다음과 같은 계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오른쪽 그림과 같은 formula_90의 그래프에서 formula_82에서 formula_15까지 아래 넓이는 아래와 같다. 적용. 복리문제. 복리 적금의 원리합계는 다음의 식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00원을 예금하였을 때의 복리 합계는 이율에 따라 다음과 같이 계산 된다. 위의 식을 이용하면 원리합계가 목표하는 금액이 되기 위해서 얼마의 기간이 필요한 지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천원을 복리 5%로 예금할 때 원리합계가 1억원을 넘기 위해서는 236년이 걸린다. 또한, 위의 표를 보면 이율과 기간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일정 기간이 지났을 때의 원리합계는 특정한 비율을 나타내게 된다. 베르누이는 기간이 n 일 때 이율을 이라 하면, 이 원리 합계의 극한이 다음과 같이 네이피어의 로그표에 사용된 밑에 점근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일러의 공식. 1714년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는 자연 로그 함수를 복소수로 확장할 경우 다음과 같은 삼각함수의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이 식을 지수함수로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이를 오일러의 공식이라 한다. 오일러의 공식은 복소평면에서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복소수를 복소평면 위의 한 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코츠나 오일러 모두 이러한 발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소평면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복소수를 복소평면의 한 점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오일러 공식이 발표된 뒤 5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오일러 공식은 테일러 급수를 통해 유도될 수 있다. 아래는 오일러 공식의 유도 과정을 소개한 것이다. 절댓값이 1 보다 작은 어떤 수 x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무한 차수 다항식이 성립한다. 삼각함수 역시 위와 같은 조건을 만족하므로 다음과 같은 무한 차수 다항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 삼각함수의 무한 차수 다항식이 실제 무한히 전개된다는 것은 영국의 브룩 테일러가 증명하였기 때문에 이 전개를 흔히 테일러 급수라고 한다. 사인 함수와 코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는 다음과 같다. 한편 formula_100인 지수함수의 테일러 급수는 이다. 이때, formula_102라 하면 이 테일러 급수의 전개는 다음과 같이 변환될 수 있다. 위 식에서 짝수 차수 항과 홀수 차수 항을 따로 모아 정리하면 가 된다. 위 식을 살펴 보면 실수항은 코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이고 허수항은 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오일러 공식이 성립한다. 여기에서 "x"에 π를 대입하면 이 되고, 이를 오일러의 등식formula_107이라고 한다. 미해결 문제. formula_2와 연관된 여러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문제로는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γ 가 무리수나 초월수인지를 밝히는 것인데, 아직까지 증명되지 않고 있다. γ 는 조화 급수와 자연로그의 차에 대한 극한으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e의 소수점 아래 첫 500자리. formula_2의 소수점 아래 첫 500자리는 아래와 같다. (줄당 100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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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영
방일영(方一榮,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경제인·기업인이며 조선일보(朝鮮日報)의 2대 회장이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까지 근무했다. 그 밖에 일신방직의 사외이사로 초빙되기도 하였고, 각종 장학 사업을 후원하였으며 1994년에는 방일영국악상을 제정하여 매년 한국의 우수 국악인들을 시상하였고,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1945년 잠시 양주군청의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의 손자이자, 이후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방우영의 형이다. 첫째 아들 방상훈은 2006년 기준으로 조선일보 사장이며, 둘째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 호텔 대표이사이다. 밤의 대통령, 밤의 황제이라는 별칭이 있다. 평안북도 박천출신으로 본관은 온양이며, 아호는 우초(愚礎)이다. 생애. 생애 초기.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변 동문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초(愚礎)이다. 본관은 온양(溫陽)이고, 본적은 경기도 의정부(議政府市)이며, 출신지는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가산면(嘉山面: 현 남신리)이다.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곤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삼촌 방응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방재윤은 방응모의 양자가 됐고, 그는 방응모의 손자로 출생했다. 그 뒤 할아버지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1963년 의정부시로 승격)로 이주하였다.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교 전신)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중앙대학 예과를 졸업한 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 이사 고문직을 사임할 때까지 55여 년 동안 조선일보에 몸담아 왔다. 태평양 전쟁 전후. 1943년 입사, 그해 사장비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일보를 차지한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한 방재윤의 장남으로, 1943년 조부인 방응모의 비서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 때가 조선일보 폐간 시점이어서 '신문 없는 조선일보사' 직원이 된 셈이다. 그러나 돈이 아까운 줄 모른다는 이유로 조부에 의해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방일영은 1944년 11월 세 살 아래 박현숙과 결혼했다. 박현숙은 한학자인 부친 박순흠과 고영선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한 해 전 동생 방우영의 영어교사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방응모를 찾아온 것이 결혼으로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 당시 그도 학도병 징집 대상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방응모는 손자 방일영이 학병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병원 설립자인 고향 후배 백인제를 불러 상의했다. 이때 백인제는 방일영의 왼쪽 뺨 귀 밑에서부터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을 집도했다. 그런 뒤 방일영은 일단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를 했다.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양주군청 소속 면서기를 지냈다. 기자 활동.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의 복간에 참여하였다. 조선일보가 복간된 뒤인 1950년 7월 사장 방응모가 납북되자 같은 해 10월 17일 취체역(이사)에 선임됐고 한국 전쟁 이후 피난했다가 휴전 후 귀환, 1954년 31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일보의 대표 취체역에 취임해 경영권을 잡았다. 그러나 방응모의 납북 9년 뒤까지는 형식적으로 방응모가 대표였고, 조선일보의 1979년 발행분까지도 발행인은 방응모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방응모 사후 몰락한 조선일보를 다시 일으켰다. 한독당원에 김구의 노선을 추종한 방응모는 야당 인사로 분류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어 사망하면서 조선일보는 몰락했으나 내분을 수습하고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1974년 방일영장학회를 조직,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조선일보 회장 추대 이후. 1964년 11월 15일 회장에 취임하는 동시에 동생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조선일보 대표이사 겸 사장으로 임명해 일선 경영을 맡겼으며, 1970년까지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했다. 방우영은 1970년부터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기를 주도하게 된다. 1993년 3월에는 지병인 당뇨로 인해 조선일보 이사 고문직까지 사퇴하며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조선일보 재직기간 중이던 1980년대 조선일보를 급팽창시켜 발행유가부수 1위의 신문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과정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큰 밑바탕이 됐고, 코리아나 호텔 특혜 의혹 등 적잖은 시비를 낳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선거 등 주요한 정치전환기마다 강한 정파성을 드러내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족벌언론' 논란에 휘말려있는 상태다. 1975년 방일영의 사재(私財)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법인으로 발족했다. 방일영은 방우영과 형제가 보유한 15%를 재단의 기금으로 새로 출연하고, 20년간 운영되어 왔던 '방일영장학회'의 장학기금 15억 여원을 합해 그 해 11월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방일영장학회(재단)을 설립했다. 방일영장학회는 1974년부터 서울대·연대·고대 학생들을 매년 10여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해 왔다. 지금까지 3백3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수혜 폭을 넓혔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서중회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조선일보 회장직을 사퇴, 회장직을 동생 방우영에게 넘기고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되었다.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1994년 방일영국악상 등을 제정하여 우수 국악인을 발굴하여 직접 포상하기도 했다. 그 밖에 온양방씨 중앙종친회 제3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말년.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에 대한 후원사업을 주관했다. 1999년 일신방직 사외이사에 선임되었고, 동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그해에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조선일보사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2003년 8월 8일 새벽 2시 5분경 서울대 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만81세였다. 사후. 8월 8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그 날 오후, 이복 숙부 방재선이 가족을 데리고 빈소에 조문하러 왔다가 상주들로부터 조문거부를 당하고 강제로 추방되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6월 충남 아산시 용화동 '온양방씨(溫陽方氏) 중시조신단묘원'에 방일영 송덕비가 세워졌다. 평가와 비판. 언론문화의 창달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비판으로는 제3공화국, 4공화국 당시 밤의 황제으로 군림하며 권언유착에 가담한 장본인의 한사람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 밖에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기타. 2001년 9월 숙부 방재선으로부터 호주상속권 소송을 당했다. 그러나 법원은 서자와 양손자가 있을 경우 양손자에게 호주상속권이 적용된다며 방일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생활. 방일영은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다. 사후의 유산다툼에서 장남 방상훈의 변호사는 '잘 아시겠지만, 선대 회장님은 대한민국 기생들 머리를 가장 많이 올리신 분'이라고 말했다. 사후 일부 혼외자들이 조선일보와 방일영의 혼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계. 그의 장남 방상훈은 독립운동가 겸 계몽운동가 윤치호의 증손녀이자 철도청 부이사관 윤영구의 딸 윤순명과 결혼했다. 혼내자 3명(1녀 2남), 혼외자 6명(첫 번째 간통상간녀 3남, 두 번째 간통상간녀 2녀 1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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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줄여서 FSF)은 미국의 자유 소프트웨어 관련 재단이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리처드 스톨만이 세운 재단으로, 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배포하고 수정하는 보편적인 자유를 제고한다. 설립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기금은 GNU 프로젝트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고용하는데 대부분 사용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이 재단의 직원들과 자발적인 기여자들은 대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과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를 위한 법적,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작업을 처리하고 있다. 2002년 11월 25일,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연합 멤버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목표를 지속하기 위해 오직 자유 소프트웨어만이 FSF의 컴퓨터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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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소프트웨어()는 복사와 사용, 연구, 수정, 배포 등의 제한이 없는 소프트웨어 혹은 그 통칭이다. 소프트웨어의 수정 및 수정본의 재배포는 인간이 해독 가능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소스 코드는 GPL 등의 라이선스를 통하거나, 혹은 극히 드물게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되기도 한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은 초창기의 컴퓨터 사용자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1983년에 시작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자유 소프트웨어 대신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자유로운 사용을 강조하는 대신 기술적인 면에 치우친 용어라는 점에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용어 대신 "자유 소프트웨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독점 소프트웨어 혹은 비자유 소프트웨어 등의 용어도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완전히 무료로 또는 최소한의 금액만을 받고 자유롭게 배포되어야 하며 자유 소프트웨어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대개 고객 지원이나 커스터마이징 등을 통한 것들이다. 반면 독점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사용자가 합법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위한 허가를 위해서 반드시 일정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 소프트웨어와는 맞지 않는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이제 거대한 전 세계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되었으며, 개인 및 거대 단체와 정부 기관 등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파치 웹 서버나 MySQL 데이터베이스, PHP 스크립트 언어 같은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서버 측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완벽히 자유로운 컴퓨터 환경은 리눅스나 FreeBSD 등의 시스템 소프트웨어들을 기본으로 한 많은 패키지들을 통해서 구성할 수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웹 브라우저나 오피스 제품군 혹은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등의 거의 대부분의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들을 자유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많은 영역에서 개인 사용자를 위한 이런 소프트웨어들은 경쟁 독점 소프트웨어들에 비해 미미한 시장 점유율만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온라인으로 무료로 제공되거나, 오프라인으로 적당한 가격으로 배포된다. 그러나 이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경제적 가능성은 IBM이나 레드햇,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등의 거대 회사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주력 산업이 IT 영역이 아닌 많은 회사들이 인터넷의 홍보 및 판매 사이트를 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애플리케이션을 쉽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를 선택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이외의 산업에서도 그 연구와 개발을 위해서 자유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좀 더 공개된 개발 과정을 생각하고 있었고, 마이크로칩과 같은 하드웨어들은 카피레프트 라이선스가 적용된 명세서와 함께 개발되기 시작했다.(오픈코어 프로젝트를 참조.) 크리에이티브 커먼스나 자유 문화 운동 등의 움직임들도 또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례이다. 정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유에 무게중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유는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유롭게 이용함을 말한다. 자유에는 일정한 책임이 따르게 된다. 자유롭게 이용하더라도 출처를 밝히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유는 본인 혼자서 자유롭게 쓴다 하더라도 결국 재생산, 재배포 등의 활동이 수반될 수 있기 때문에 책임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 자유는 결국 책임을 수반한다고 보고 책임을 다하는 것은 출처를 밝히고 사용조건을 준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의는 남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최소한의 조건을 이행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역사.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컴퓨터 사용자들은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하게 소프트웨어를 서로 공유했고,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하드웨어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들이 제작되는 것을 기꺼워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복제권을 법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여, 사용자들이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거나 수정하지 못하도록 바이너리 형태로만 배포하는 등의 기술적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은 컴퓨터 산업의 이러한 변화에 저항해 GNU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84년에는 GNU 운영 체제의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1985년 10월에 설립되었다. 그는 카피레프트를 주창하며 자유 소프트웨어의 정의를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소프트웨어로 소개하였다. 1991년에는 핀란드에서 리누스 투르발스가 리눅스를 발표하였고 이것이 GNU 프로젝트에 통합되면서,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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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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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eneral Public License, GNU GPL 또는 GPL)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만든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로, 소프트웨어의 실행, 연구, 공유, 수정의 자유를 최종 사용자에게 보장한다. 대표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이용하는 사용 허가이다. GPL은 가장 널리 알려진 강한 카피레프트 사용 허가이며, 이 허가를 가진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면 파생된 프로그램 역시 같은 카피레프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철학에서 GPL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자유 소프트웨어의 권한을 누리며 카피레프트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자유가 보전되고, 이전 작업 내용을 수정하거나 다른 내용을 추가하는 것도 허용됐다. 이는 허용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사용 허가로서, BSD 사용 허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GNU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The 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 LGPL)는 이를 변형하여 더 허가된 형태로서,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GNU FDL)은 GNU 소프트웨어에 대한 문서의 사용 허가로 시작하였으나 위키백과 프로젝트와 같이 다른 문서 형태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만 현재까지 이 허가서는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 등에서만 법원의 판단 등으로 합법한 허가서로 인정받았고,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에 따른 법률적 판단을 받은 바 없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직접 이 허가서가 합법한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없었으며, 다만 허가서라는 특성상 준법행위를 하는 다수는 분쟁없이 이 허가서의 제약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한 차례 법원의 판단을 받을 뻔했던 엘림넷과 하이온넷 사건이 있었으나, 회사 기밀 유출 사건으로 형사기소되는 바람에 중요 쟁점일 수 있었던 GPL에 대한 판단은 형사법원에서 다루지 않고 다른 이유로 1, 2심 법원에서 유죄를 판결, 최종 확정한 바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적어도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통해 표준 약관심의 따위를 받아 확정지을 필요가 있으며,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표준 허가서가 부당하다는 법률적 판단도 없으므로, 이 허가서의 조건을 위반할 시 저작자로부터 기소당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에 관련된 다섯 가지 의무.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는 누구에게나 다음의 다섯 가지의 의무를 저작권의 한 부분으로서 강제한다. GPL의 유래. GPL은 미국의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이 GNU-프로젝트로 배포된 프로그램의 라이선스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이것은 Emacs, GNU 디버거(GDB), GNU 컴파일러 모음(GCC)에서 사용된 라이선스의 초기 판의 통합에 기반하고 있다. 이 라이선스들은 현재 GPL과 비슷한 조항들이 있으나, 각각의 프로그램 고유의 라이선스였다. 스톨만의 목표는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라이선스를 만들어서 여러 프로젝트에서 코드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저작권의 형태로서 GPL이 1989년 1월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1990년에 이르자 몇몇 라이브러리에서 전략적으로 규제를 약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에 대한 조치로 라이브러리-GPL(LGPL, 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1991년 6월에 배포된 GPL의 두 번째 판을 따라 LGPL도 두 번째 판으로 같은 번호를 붙여서 두 라이선스가 상호보완적임을 나타내었다. 1999년에는 "LGPL"은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Lesser General Public License)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되면서 2.1판으로 숫자를 바꾸게 되었다. GPL은 오늘날 자유 소프트웨어 저작권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고 있으며, 대부분의 GNU 프로젝트는 GPL과 LGPL의 규준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모든 LGPL의 규준에 따르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는 동시에 GPL의 규준에 따르고 있다. GPL 버전. GPLv1. GPL의 버전 1은 1989년 1월에 발표되었다(GPLv1 전문). 이것은 자유 소프트웨어에서의 두 가지 중요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는데, 하나는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지 않은 채 바이너리 파일만 배포하는 것을 막는 경우로 이것을 막기 위해 GPLv1에는 프로그램을 GPLv1로 배포할 때는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소스 코드를 같이 배포해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두 번째 문제는 프로그램에 추가적인 제약을 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GPLv1 프로그램을 수정한 프로그램은 원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GPLv1을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GPLv2. GPL 버전 2는 1991년 6월에 발표되었다(GPLv2 전문). 중요한 변경 사항은 "자유냐 죽음이냐"Section 7에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이 내용은 GPL 프로그램을 배포하는 것을 막는 조건, 예를 들어 특허로 인하여 추가적으로 돈을 지불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여 소스 코드의 공개가 불가능하고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만 배포하려고 한다면 소스 코드 뿐만 아니라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조차 배포할 수 없도록 보완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에 대해서는 조금 약화된 GPL 라이선스가 전략적으로 더욱 유용하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이에 대한 내용을 LGPL(the 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하여, 1991년 6월에 발표된 GPLv2와 동시에 같이 발표되었다. 이 두 가지의 내용은 1999년 LGPL v2.1로 발전되었고 LGPL(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불렀다. GPLv3. GPL 버전 3은 2007년 6월 29일에 발표되었다. 2005년 후반에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GPL의 세 번째 판을 개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6년 1월 16일 첫 번째 초안이 발표되었다. 2판과 다른 점도 비공식적으로 나와 있다 . 2006년 2월 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FOSDEM 발표에서 리처드 스톨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6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GPL의 바뀔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열두달간의 공공자문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소프트웨어 자유 법률 센터, 유럽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의견을 조정했다. 비판. 마이크로소프트. 2001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인 스티브 발머가 "건드리는 모든 지적 재산권에 퍼지는 암같은 존재(a cancer that attaches itself in an intellectual property sense to everything it touches)"라며 비판했다. 2009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GPL 라이선스를 위반한 하이퍼V의 컴포넌트의 소스코드 20,000여줄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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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일본어( 니혼고, 닛폰고, ), 는 주로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줄인 말로 일어(日語)라고도 한다. 문자는 히라가나 가나와 한자()를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사실상 법적 공용어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대부분의 사람은 일본어를 모어로 한다. 일본어의 문법 체계나 음운 체계를 반영한 수화로는 일본어대응수화가 있다. 사용 인구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일본 국내의 인구 및 일본국 국외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계 외국인, 일본에는 약 1억 3천만 명 이상이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통계에 따라 수치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수치가 맞다면 일본어는 모어 화자 수순 언어 목록에서 상위 10위 이내에 드는 언어다.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언어별 사용자 수에서 일본어는 아홉 번째로 사용자 수가 많다. 2021년 9월 wordtips는 구글 키워드 플래너를 이용하여 세계인들이 학습하고 싶어하는 언어검색을 조사했으며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 국가에서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언어로 일본어가 선정되었다. 특징. 일본어의 음운은〈〉와〈〉을 제외하고 모음으로 끝나는 개음절 언어의 성격이 강하고, 또한 표준어를 포함해 많은 방언이 모라를 가지고 있다. 악센트는 고저 악센트를 띤다. 이와 더불어 본래의 옛 일본어인 야마토 고토바()에서는 원칙적으로 등의 특징이 있었다. 문장은 주어 - 수식어 - 술어의 어순으로 구성된다. 수식어는 피수식어의 앞에 위치한다. 또한 명사의 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순이나 어미를 바꾸는 것이 아닌 문법적인 기능을 나타내는 기능어(조사)를 뒤에 덧붙인다. 이러한 구성에 따라 언어유형론상에서 어순적으로는 SOV형의 언어로, 형태적으로는 교착어로 분류된다. 어휘는 옛날의 야마토 고토바 이외에 근대 이후에 들어서는 서양어를 중심으로 하는 외래어가 증가하고 있다. 대우 표현으로는 문법적, 어휘적으로 발달한 경어 체계가 있으며, 서술되는 인물 간의 미묘한 관계 차이를 나타낸다. 일본어는 지방별로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특히 류큐 제도의 방언은 다른 방언들과 차이가 두드러진다. 근세 중기까지는 교토 방언이 중앙어의 지위에 있었지만 근세 후기에는 에도 방언의 지위가 높아졌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의 현대 일본어에서는 도쿄의 야마노테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언(야마노테코토바)을 기반으로 표준어(공통어)가 형성되었다.(〈표준어#일본〉문서 참조) 표기 체계는 그 밖의 여러 언어들에 비해 복잡하다. 한자(국자를 포함한다. 음독 및 훈독으로 읽는데 쓰인다.)와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일본어에 쓰이는 주요 문자이며, 항상 이 세 종류의 문자를 짝지어 표기한다. 그 밖에 로마자나 그리스 문자(의학・과학 용어에 주로 이용) 등도 자주 쓰인다. 또한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병용된다.(표기 체계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일본어의 표기 체계〉문서 참조) 음운은 〈자음+모음〉 음절을 기본으로 하며, 모음은 다섯 종류밖에 없는 등 알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진 한편, 직음()과 요음()의 대립, 〈1음절 2모라〉의 존재, 무성화모음, 말의 구조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고저 악센트 등의 특징이 있다. 사용 지역. 일본어는 주로 일본에서 쓰인다. 일본어 사용 인구에 대한 조사는 일본국 국내외를 불문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본국의 인구수가 곧 화자 인구수라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어를 직접적으로 일본의 공용어 내지 국어로 정하는 법적 규정은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법령은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재판소법에서는 “재판소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한다.”(동법 74조)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문자·활자문화진흥법에서는 “국어”와 “일본어”를 동일시한다(동법 3조, 9조). 그 밖의 많은 법령에서도 일본어가 유일한 공용어 및 국어임이 당연한 전제로 깔려 있다. 또한 법문뿐만이 아닌 공용문은 모두 일본어만 쓰이며, 일본국의 학교 교육에서는 일본어가 “국어” 과목으로서 교육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TV나 라디오, 영화 등의 방송, 소설이나 만화, 신문 등의 출판 분야에서도 거의 대부분 일본어가 쓰이고 있다. 일본국 외의 드라마나 영화가 방송되는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자막이 달리거나 음성이 일본어로 더빙되어 방송되는 등 시청자 및 청취자가 일본어만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러한 자막이나 더빙이 달려 방송된다. 외국어 그대로 방송되거나 출판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해외로 발표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논문이나 혹은 일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또는 외국어 학습자 등 한정된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절대다수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일본 외에서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파라과이 등)나 하와이 등의 일본인 이민자 사이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관찰되지만, 일본계 사람의 3세, 4세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비일본어 화자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패전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었던 한반도, 타이완, 구 만주국 영토, 사할린섬, 남양 제도(현재의 괌,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등의 지역에서 일제 당시 일본어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중 현재에도 일본어를 기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조사도 있다. 타이완에서는 타이완 원주민이 다른 부족과 대화할 때 일본어가 종종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팔라우의 앙가우르주에서는 일본어를 공용어의 하나로 채용하고 있지만 현재 앙가우르주 내에는 일본어를 일상 회화에 쓰는 주민은 존재하지 않아 실질적인 주 공용어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국과의 우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요소로만 남아 있다. 일본국 외의 일본어 학습자는 대한민국에 약 53만 명, 중화인민공화국에 약 83만 명, 인도네시아에 약 72만 명을 비롯해 365만 명에 이르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학습자 수가 전체 학습자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어 교육이 행해지는 지역은 125개국과 8지역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일본국 국내의 일본어 학습자는 아시아 지역의 학습자 약 14만 명을 중심으로 약 17만 명에 이른다. 계통. 일본어를 포함하는 일본어족의 계통은 분명하지 않다. 계통에 관한 몇 가지 이론과 가설이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의견이 모이지 않고 있다.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설은 메이지 시대 말부터 특히 주목받았다. 이러한 설의 근거로는 고대 일본어(야마토 고토바)의 어두에 r음(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 가 보이는 점 등이 있다. 다만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 자체는 언어 간의 친족 관계가 증명되어 있지 않아 고대 일본어에 위와 같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 일본어가 유형상 〈알타이형〉 언어 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남방계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는 음운 체계나 어휘가 유사하다고 지적되고 있지만, 그러한 예시가 충분치 않고 단순한 추정이나 불확정된 예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드라비다어족과의 관련을 주장하는 설도 있지만 이를 인정하는 연구자는 적다. 오노 스스무는 일본어의 어휘나 문법 등이 타밀어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지만 비교언어학의 방법상의 문제로 인해 비판이 많다. 아이누어는 어순(SOV형)에 있어서는 일본어와 유사하지만 문법과 형태는 유형론적으로 일본어와는 다른 포합어에 속하며, 음운 구조도 유성, 무성의 구별 없이 폐음절이 많은 등의 차이가 있다. 기초 어휘가 유사하다는 지적 도 있지만, 그 예시가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일본어와 닮아있는 아이누어 중에는 일본어에서 아이누어로 간 차용어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계통적 관련성을 나타내는 자료는 부족하다. 한국어는 문법 구조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기초 어휘가 크게 차이 난다. 음운면도 고유어에 있어서 어두에 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가 보이는 점 등 앞에서 언급한 알타이어족과 공통되는 유사점이 있는 반면, 폐음절이나 자음 연결의 존재나 유성 및 무성이 없는 점 등 일본어와는 큰 차이도 있다. 한반도의 사어인 고구려어와는 수사 등 유사한 점이 있다고 일컬어지지만, 고구려어의 실태는 거의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시점에는 계통론상의 판단 자료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렙차어, 히브리어 등과의 동계론(同系論)도 과거 존재했지만, 거의 대부분 의사언어비교의 범주에 머물렀다. 난세이 제도(구 류큐국 영역)의 언어는 일본어와 계통을 같이하는 언어 중 하나(“류큐어” 내지 “류큐어족”)로 간주해 일본어와 한데 모아 일본어족으로 보는 관점과 일본어의 방언 중 하나(“류큐 방언”)로 보는 관점이 있지만, 연구자와 견해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일본어의 방언. 일본어는 크게 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서일본 방언()과,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하는 동일본 방언()으로 크게 양분된다. 이즈 제도 남부에는 고대어 표현이 많이 남는 독특한 방언이 있어, 하치조어()라고 불린다. 방언에 관한 일본국의 문헌적인 기록은 현존하는 일본국의 최고의 시가집인 만요슈에서 나오는데 여기에는 아즈마 지방(현재의 간토 지방)의 방언의 노래가 있다. 나라 시대에도 이미 나라 지방을 중심으로 중앙어와 그 외 지역의 방언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국의 방언 연구는 에도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동일본 방언에는 도호쿠 방언, 간토 방언, 나고야 방언 등의 주부 방언이 있고, 서일본 방언에는 호쿠리쿠 방언, 긴키 방언(간사이 방언), 히로시마 방언 등의 주고쿠 방언, 시코쿠 방언, 하카타 방언 등의 규슈 방언 등 수많은 지역성이 강한 방언이 존재한다. 특히 오사카의 방언은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온화한 인상의 도쿄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준어에 비해 오사카는 해상 교통이 있는 상업 도시였기 때문에 오사카 방언은 활발한 억양이 특징이다. 교토 방언은 ‘위쪽 말’()이라고도 하는데 수도가 오랫동안 교토에 있었다가 도쿄에 옮겨졌기 때문에 품위 있고 격조 높은 말로 여겨져 왔다. 도쿄 방언은 거의 표준어에 가깝기 때문에 표준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 에도 방언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히)와 (시)의 발음의 구별이 되지 않는 등 표준어와는 다르다. 홋카이도 방언도 거의 표준어에 가깝지만 특히 형용사 등에 홋카이도 특유의 방언이 포함된다. 현재 공식 장소 등에서는 평상시 방언을 말하는 사람도 표준어를 이용한다. 발음. 닿소리. 일본어 음소는 /m/, /n/, /p/, /b/, /t/, /d/, /k/, /g/, /s/, /z/, /h/, /r/, /y/, /w/, /N/, /Q/가 있다. 악센트. 일본어는 고저 악센트를 가진 언어이다. 문자. 일본어에서는 보통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 등 세 종류의 문자를 주로 사용하여 표기되며, 그 밖에 로마자와 아라비아 숫자도 함께 사용한다. 이들 가운데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표음문자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전통적으로 메이지 시대 초반까지는 일본어의 맞춤법에서는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고 히라가나만을 사용하거나 교육용 문서에서는 단어 사이에 공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구두점 등을 사용할 때도 서양의 문장 부호들(따옴표, 물음표, 느낌표, 온점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오늘날 현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 단락 부호로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 및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이 넓게 이용되고 있다. 1951년 10월 30일, 일본국의 국어심의회 건의 제3의 5의 주2에서는 ‘,’및 ‘.’를 사용하도록 가이드라인이 짜여졌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 준수되고 있지 않다. 오십음도. 아래는 일본어의 오십음()이다. '[  ]'의 안은 국제 음성 기호(IPA) 표기이다. 한자의 발음. 일본어에는 본래 일본어의 고유어인 야마토 고토바가 있었고, 한자는 뒤에 중국에서 직접 전해지거나 혹은 한반도 서해안(특히 백제 또는 고구려)을 경유하여 전래되었다. 한자를 읽을 방법은 크게, 한자와 함께 전해진 한자 본래의 음에서 온 음독( 또는 )과, 그 한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야마토 고토바()의 발음을 적용시켜 발음하는 훈독( 또는 )으로 나눌 수 있다. 같은 한자도 음독이나 훈독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본어에서는 하나의 한자에 여러 개의 발음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生”(날 생)에는 47종류의 발음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水”(물 수)를 '수'라고는 읽지만 '물'이라고는 읽지 않는데, 그에 반해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스이(すい)'라고도 읽고 훈독으로 '미즈(みず)'라고도 읽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어에서는 “金”(쇠 금, 성 김)을 '금'으로, 성씨로 쓰일 때 한정으로 '김'이라고는 읽으나, '쇠'라고는 읽지 않는데,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킨(きん)' 혹은 '콘(こん)'으로도 읽고 훈독으로 '카네(かね)'라고도 읽는다. 한자의 위(세로쓰기에서는 오른쪽)에 작은 크기의 가나로 발음을 적은 것을 후리가나라고 한다. 후리가나를 붙일 때는 읽는 독음이 온요미인지 쿤요미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온요미의 경우에는 가타카나로, 쿤요미의 경우에는 히라가나로 붙이는 게 정석이나, 구별이 필요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상관없이 히라가나로 표기하기도 한다. 만요슈에는 한자를 차용하여 표음문자처럼 이용한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이로하 노래. 일본어와 가나를 외우기 위한 방법으로 이로하 노래()가 있다. 여기에는 "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한 번씩 들어 갔으며, 일부 변형에는 "도 들어가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 노래의 순서대로 가나의 순을 매기기까지 했었고 현재까지도 종종 쓰인다. 이런 종류의 문장을 팬그램이라 부른다. 그 밖에 이전에도 유사한 방법으로 아메쓰치노우타나 대위이 노래 등이 있었다. 일본어 표현의 예. 다음은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일본어 표현들이다. 로마자 표기는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다. 대한민국의 일본어 교육.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7세기 이전에도 교류가 있어서 일본어를 접한 건 오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교육시키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된 것은 조선 말기이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정부 수립 이후였다. 1970년대 초에 고등학교 교과목에 일본어가 제2외국어 중 하나로 추가되었고, 2001년에는 '생활 일본어'가 중학교 교과목에 포함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 수험생들은 수능에서 일본어 I을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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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는 실수가 아닌 복소수를 뜻한다. 실수의 특성상, 제곱하면 무조건 0 또는 양수가 되기 때문에 이차방정식 formula_1에서는 실수의 범위에서 해를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한 수직선에 모든 실수를 하나하나 대응시키면, 수직선은 빈틈없이 채워지는 것으로 볼 때,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수는 실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formula_1 꼴과 같이 실수 범위에서 전혀 구할 수 없는 해를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실수의 성질로는 불가능한 제곱해서 음수가 되는 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제곱하여 -1이 되는 수 formula_3를 만들어내면, 위의 이차방정식의 해는 formula_4또는formula_5이 되므로 이 수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이 수가 수학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허수로 정의했고, formula_3만 있으면 모든 허수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 수를 imaginary number의 앞글자를 따서 허수 단위 formula_7라고 정의했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를 포괄하는 수이며, formula_8 (단, a, b는 실수)로 나타낼 수 있고, 이때 a를 실수부, b를 허수부라고 한다. 또한, 허수는 기존에 있었던 수직선, 실수축(가로)에 허수축(세로)를 덧붙여 복소수평면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허수가 정의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의 개념은 1차원적이었다. 즉, 수의 개념은 오직 수직선으로만 표현되었다. 그러나 허수가 정의된 후, 수의 개념은 2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즉, 수의 개념은 복소평면으로 표현된 것이다. 수의 틀을 직선에서 평면으로 확장시킨 것은 모두 허수의 덕택임을 알 수 있다. 역사.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헤론은 거듭제곱하여 음수가 되는 수에 대한 개념을 기록한 바 있다. 1572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라파엘 봄벨리가 허수 단위를 정의하였다. 이후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의 부록 〈기하〉()에서 상상의 수(imaginary numbers)라고 부른 데에서 허수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허수라는 이름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오일러는 허수 단위 기호로 formula_7를 도입하였다. 또한 오일러는 이것을 방정식formula_10 일 때 이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때 사용하였다. 1799년 카스파르 베셀이 복소수의 기하학적 표현을 완성하였다. 1843년 윌리엄 로언 해밀턴은 복소수를 확장하여 사원수 체계를 만들었다. 미국 수학에서 허수란 formula_11 형태, 즉 순허수이다. 즉 실수에 허수단위 formula_12가 곱해진 형식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제곱하면 음수가 된다. 기하학적 해석. 한 평면상에 직교 좌표계를 정하고 이에 대한 한 점 Z의 위치 (x, y)를 formula_13로 정하여 복소수를 평면상의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이 때, 좌표와 복소수는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 또한, 이렇게 나타낸 점 Z(x,y)는 극좌표를 사용하여 원점에서부터 점 Z 사이의 반지름과 각도로서도 나타낼 수 있다. 즉, 가 된다. 한편, 왼쪽의 그림과 같이 실수부는 같고 허수부의 부호만 반대인 formula_15 와 formula_16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켤레복소수(복소켤레)라고 한다. 켤레 복소수는 극좌표에서 반지름이 같고 x축에 대해 대칭인 점이 된다. 복소평면에서 허수의 위치를 극좌표를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으므로, 임의의 단위 원을 그려 복소수와 삼각함수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1714년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는 자연로그가 다음과 같은 삼각함수의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이 식을 지수함수로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이를 오일러의 공식이라 한다. 수 체계. 수 체계에서 허수는 복소수와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복소수체라고 하며 formula_19 로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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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대수학
선형대수학(線型代數學, )은 벡터 공간, 벡터, 선형 변환, 행렬, 연립 선형 방정식 등을 연구하는 대수학의 한 분야이다. 현대 선형대수학은 그중에서도 벡터 공간이 주 연구 대상이다. 추상대수학, 함수해석학에 널리 쓰이고 있다. 선형대수학은 자연과학과 공학에도 널리 활용된다. 선형 연립방정식을 푸는 좋은 방법으로는 소거법과 행렬식이 있다. 기초. 선형대수학은 2차원 혹은 3차원의 직교 좌표계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선형대수학에서 기본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통 3차원까지의 벡터는 그림 등으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벡터는 벡터의 각 구성요소를 괄호 안에 나열함으로써 표기한다. 여러 가지 문제를 수학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선형대수학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데, 선형화 혹은 선형 근사를 통해, 복잡한 비선형 방정식 문제를 간단한 선형 방정식 문제로 변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형성. 선형대수학의 선형성()이라는 성질은 직관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formula_1(formula_2는 상수를, formula_3는 변수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선형성은 변수의 지수승(formula_4)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차함수(formula_5)와 같은 형태를 가리킨다. 선형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비선형이 있는데, formula_6 등 일차함수와 같은 형태의 성질을 만족시키지 않는 함수들을 가리킨다. 선형의 직관적인 이해는 일차함수와 동일시해서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선형의 엄밀한 의미는 일차함수보다 더 확장된다. 수학적으로 정확한 선형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정의역 formula_7에서 임의의 원소 formula_8를 치역 formula_9에 대응시키는 연산 formula_10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만족시킬 때 "선형"이라고 한다.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이다. 예를 들어 일차함수 formula_13를 생각해보자. formula_14로 (1)번 조건을 만족시키고 formula_15로 (2)번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이 함수는 선형이다. 이차함수 formula_16의 경우에는 formula_17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다른 선형연산의 예로는 회전변환, 원점을 지나는 직선에 대한 대칭변환, 어떤 벡터 공간에 대한 수직입사 등이 있다. "선형"이라는 성질은 행렬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연산이 선형이라면 그것은 행렬로 표현이 가능하며, 어떤 행렬은 반대로 어떤 선형연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선형대수학의 행렬이론은 수학의 이론뿐만 아니라 물리학, 전자공학, 컴퓨터 그래픽, 기계공학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학부과정. 학부과정에서 가르치는 선형대수학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 내용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가르치는 내용이며 각 학교마다 비중있게 다루는 부분이 다를 수 있고 내용을 추가하거나 뛰어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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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U/리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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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널 (컴퓨팅)
컴퓨터 과학에서 커널()은 컴퓨터 운영 체제의 핵심이 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시스템의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 운영 체제의 다른 부분 및 응용 프로그램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핵심(核心)이라고도 한다. 커널의 역할. 커널은 운영 체제의 핵심 부분이므로, 커널의 역할 역시 운영 체제의 핵심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초기의 커널. 초창기의 컴퓨터에서 운영 체제 커널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초기의 프로그램은 하드웨어 추상화나 운영 체제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컴퓨터만으로 불러들인 다음 실행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초창기 컴퓨터들의 일반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가 켬으로써 다시 입력자료를 읽어들여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로더와 디버거 같은 작은 프로그램들이 상주해 있는 것이, 다른 프로그램으로 교체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더, 디버거들이 초기 운영 체제 커널의 기초가 되었다. 종류. 단일형 커널. 단일형 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을 정의한다.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은 기본 연산 집합과 관리자 모드에 작동하는 모듈인 프로세스 관리, 동시성, 메모리 관리 등의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한 시스템 콜으로 되어 있다. 이 연산들을 제공하는 모든 모듈이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더라도 모든 모듈이 같은 주소 공간에서 실행되기 때문에 코드의 집적도는 매우 조밀하며 수정하기 어렵고 한 모듈의 버그는 시스템 전반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구현이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되면 구성 요소의 내부 집적이 내부의 시스템 이용을 효과적이게 하여 좋은 단일형 커널은 높은 효율을 보인다. 단일형 커널의 지지자들은 코드의 정확성 여부와 그런 코드(부정확한 코드)가 커널에 포함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은 마이크로커널에 비해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리눅스, FreeBSD, 솔라리스와 같은 최신의 단일형 커널은 실행 모듈을 실시간으로 읽어들일 수 있다. 실시간으로 실행 모듈을 읽는 특징은 커널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손쉽게 확장할 수 있게 커널 공간의 코드의 양을 최소한으로 유지시켜 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NT 제품군(NT, 2000, XP, 2003, 비스타,7,8,8.1,10)은 처음에는 혼합형 커널이었으나 나중에 나온 것들은 단일형 커널로 바뀌었다. 윈도우 NT 시리즈는 상위의 서비스들을 NT executive이라는 서버로 구현하였다. Win32 특성은 처음에는 사용자 모드의 서버 형태로 구현되었으나, 최근 버전에서는 관리자 주소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다양한 서버들이 로컬 프로시저 콜(LPC: Local Procedure Call)이라 불리는 주소 영역간 매커니즘을 통해 통신하며, 성능을 최적화하기 위해 공유 메모리를 이용한다. 주로 다음 운영 체제들의 커널이 단일형 커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크로커널. 마이크로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매우 간결한 추상화를 정의한다. 기본 연산 집합과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한 스레드 관리, 주소 공간, 프로세스간 통신의 작은 시스템 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커널이 제공하는 네트워킹과 같은 다른 서비스들은 사용자 공간 프로그램인 서버로 구현한다. 운영 체제는 서버를 다른 일반적인 프로그램처럼 간단히 시작하고 끌 수 있다. 이를테면 네트워킹 지원이 필요 없는 작은 시스템에서는 간단히 서버를 끄면 된다. 이 경우 전통적인 시스템에서는 재컴파일이 필요했고 일반 사용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론적으로 마이크로커널에서 시스템은 더 안정적이다. 서버가 중단될 때 커널의 충돌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하나의 프로그램만 내려버리면 된다. 그러나 서버가 실패한 후 시스템 상태도 잃어버릴 경우 응용 프로그램이 계속 수행되는 것은 그 응용 프로그램이 막 복사된 다른 서버를 이용하게 되더라도 보통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TCP/IP 연결을 요구하는 (이론적인) 서버가 다시 시작되면 응용 소프트웨어는 연결이 "끊어졌습니다."라고 말하고 서버의 새 인스턴스를 찾아서 다시 연결한다. 그러나 파일과 같은 다른 시스템 객체는 이렇게 편리한 의미론이 없다. 이러한 편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기록할 정보들은 모두 미리 보관해 두어야 한다. 서버 간의 하나의 서버를 다시 시작할 때 중요 상태를 보호하기 위해 트랜잭션, 복제, 대조점의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은 전통적인 디자인의 수행을 잘못하고 때로는 극적이다. 이유는 응용과 서버 간의 자료 교환을 위해 커널을 출입하는 문맥 교환 때문이다. 주의 깊은 조율이 오버헤드를 극적으로 줄여줄 것으로 믿어져 왔으나 9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시도를 포기했다. 최근에 새 마이크로커널은 성능을 최우선으로 설계하며 이 문제를 넓은 부분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현재 운영 체제 시장은 자기 몸 사리며 마이크로커널 설계에 소극적이다. 마이크로커널과 마이크로커널에 기반한 운영 체제의 예 혼합형 커널(수정 마이크로커널). 혼합형 커널은 본질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을 따르나, 일부 커널의 비(非)본질적 기능이더라도 사용자 레벨에서 수행될 때 성능상 느린 코드들을 커널 레벨에서 수행하도록 수정한 것을 말한다. 이는 다양한 운영 체제 개발자들이 마이크로커널 기반의 설계를 받아들이던 시점에 순수한 마이크로커널의 성능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협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OS X의 커널인 XNU는 Mach 커널 3.0 마이크로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전통적인 마이크로커널 설계의 지연 현상을 줄이기 위해 BSD 커널의 일부 코드들을 들여와 동일한 주소 영역에서 실행하고 있다. DragonFly BSD는 첫 번째 비 Mach 기반의 BSD OS로 혼합형 커널 구성을 적용한 예이다. 하이브리드 커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혼합형 커널이라는 말을 부팅 후에 모듈을 읽어들일 수 있는 단일형 커널과 혼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혼합형 커널은 단일형 커널과 마이크로커널 설계 양쪽의 구조적 개념과 작동방법에 대한 특히 메시지 전달과 어떤 중요하지 않은 코드는 사용자 공간에 들어가는 반면 어떤 코드는 성능의 이유로 커널 공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엑소커널. 엑소커널은 운영 체제 설계에 대한 급진적인 신개념으로 말단 이론을 따르는 수직 구조의 운영 체제이다. 엑소커널의 구상은 개발자에게 강제적인 추상화를 줄여 하드웨어 추상화에 대해 선택지를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엑소커널은 기능이 보호를 보장하는 것과 자원을 분배하는 것만 하기에 매우 작아 편익보다 단순함을 제공한다. 이런 특성은 오히려 모든 사용자가 각기 실제 호스트 컴퓨터의 자원을 모방한 컴퓨터를 받는 VM/370 운영 체제와 비슷하다. 반면에 모놀리식 커널이든 마이크로 커널이든 전통적인 커널 설계는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HAL)이나 장치 드라이버 아래 자원을 숨김으로써 하드웨어를 추상화한다. 한 예로 전통적인 시스템에서 물리 메모리가 할당할 때 실제 위치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프셋과 기억 관리 장치를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노커널. TUNES Project 와 UnununiumOS 는 노커널 실험이다. 노커널 소프트웨어는 단일 중앙 입구의 제약이 없다. 모놀리식 커널 대 마이크로 커널 논쟁. 1990년대 초기 모놀리식 커널은 진부한 것으로 여겨졌다. 리누스 토르발스와 앤드류 타넨바움간에 일어난 리눅스의 설계인 모놀리식 커널과 마이크로커널에 대한 프레임 워는 유명했다. 타넨바움과 토르발스의 토론에 제시된 두 진영의 의견은 일장일단이 있다. 두 진영의 성공 사례가 있다. 모놀리식 커널은 정확한 설계가 쉽고 마이크로커널 기반 시스템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마이크로커널은 종종 임베디드 로봇 산업이나 의료 컴퓨터 등에 이용될 수 있다. 운영 체제의 컴포넌트를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고 메모리 공간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모듈을 읽어오는 모놀리식 커널에서도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Mach는 일반적인 용도의 마이크로커널로 알려졌지만 특별한 용도로 설계된 마이크로커널도 있다. L3는 마이크로커널이 느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L4는 L3의 후예로 Fiasco 구현으로 대중적인데 L4 프로세스들과 별도의 공간에서 리눅스 구동이 가능하다. 이런 특성의 스크린샷은 freshmeat.net에서 구할 수 있다. Pistachio라 불리는 새 버전도 역시 가능하다. QNX는 1980년 초에 나타난 운영 체제로 극 최소주의 마이크로커널 설계로 이루어졌다. 이 시스템은 Mach가 목표로 했던 마이크로커널 이념을 더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QNX는 우주 왕복선의 로봇 팔과 (작은 실수가 수십억의 손실을 입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의 거울 등의) 오차에 민감한 유리를 닦는 기계에도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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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
도스(, 디스크 오퍼레이팅 시스템, DOS)는 디스크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서 디스크에 읽고 쓰기 등의 명령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명령어를 직접 입력하는 명령 줄 기반이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또 부분적으로 MS-DOS 기반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95, 98, 미)를 포함한 2000년까지는 MS-DOS가 IBM PC 호환기종 시장을 장악하였다. 도스는 MS-DOS, PC DOS, DR-DOS, 프리도스, ROM-DOS, PTS-DOS를 포함한 비슷한 명령 줄 시스템의 계열이다. 이 시스템들 중 어느 것도 간단히 "도스"라고 불리진 않았다. (1960년대의 이와 관련이 없는 IBM 메인프레임 운영 체제에만 사용되었음) 이와 무관한 수많은 비x86 마이크로컴퓨터 디스크 운영 체제는 "도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이들을 사용하는 컴퓨터에 대해 논할 때 단순히 "도스"라고 부르곤 했다. (아미가도스, AMSDOS, 애플 도스, 아타리 도스, 코모도어 도스, CSI-DOS, 프로도스, TRSDOS) 역사. 초기의 도스. 디지털 리서치의 CP/M이 가장 대표적인 도스의 원형이다. 8비트 개인용 컴퓨터에는 CP/M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애플 II는 독자적인 애플 도스(정식 명칭은 그냥 DOS)를, MSX는 MSX-DOS를 썼다. 이들 컴퓨터도 나중에 CP/M을 지원하지만 디스크의 포맷이 달라서 서로 바꾸어 쓸 수는 없었다. IBM-PC에서는 이를 모방한 QDOS로부터 PC-DOS와 MS-DOS가 나왔으며, 나중에 CP/M은 16비트 버전인 CP/M-86 바탕으로 DR-DOS로 나왔다. 현재는 DR-DOS의 후기작인 오픈도스와, NTFS 등을 지원하는 공개 도스 프로젝트인 프리도스가 있다. MS-DOS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도스이다. PC-DOS는 IBM의 도스이다. 버전 5.0까지는 사실상 MS-DOS와 같은 제품이었으나 그 이후 추가된 내용이 달라졌다. DR-DOS는 디지털 리서치사에서 만든 도스이다. 이것은 나중에 노벨 도스(Novell DOS)로 바뀌었다가 다시 칼데라 오픈 도스(Caldera OpenDOS)로 바뀐다. 쇠퇴. 윈도우 3.1 이하의 버전과 같이 초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별도 버전의 도스 위에서 실행되었다. 1990년대 초에 윈도우의 그래픽 셸은 도스 시스템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1995년에 윈도우 95가 별도의 도스 라이선스를 요구하지 않은 독립형 운영 체제로 번들되었다. 윈도우 95(및 이를 따랐던 윈도우 95과 ME)는 기본 OS 커널을 인계 받았지만 MS-DOS 구성 요소는 호환성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었다. 윈도우 미를 제외한 윈도우 95, 98과 더불어 MS-DOS 구성 요소는 윈도우를 시작하지 않고도 구동이 가능하였다. 윈도우 NT 계열 운영 체제가 널리 사용되면서, 윈도우 사용을 위해 더 이상 도스가 필요없게 되자 PC 사용자들 다수가 도스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계속된 이용. 2012년 기준으로, 프리도스, DR-DOS, ROM-DOS, PTS-DOS, RxDOS, REAL/32와 같은 도스 운영 체제를 이용할 수 있다. 델, HP를 포함한 일부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FreeDOS를 OEM 운영 체제를 포함한 컴퓨터들을 판매한다. 임베디드 시스템. 하드웨어에 직접 접근하는 도스 구조는 임베디드 장치에서 이용할 때 매우 이상적이다. 최신 판의 DR-DOS가 현재에도 이 시장에 초점을 두고 있다. ROM-DOS가 캐논 파워샷 프로 70의 임베디드 시스템에 사용되었다. 에뮬레이션. 리눅스 하에서 도스 프로그램들을 거의 네이티브 속도로 구동할 수 있는 DOSEMU라는 리눅스 네이티브 가상 머신을 이용하여 여러 도스 사본들을 실행할 수 있다. 도스박스를 포함하여 여러 버전의 유닉스에서 도스를 구동하기 위한 다른 수많은 에뮬레이터들이 있다. 도스 에뮬레이터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하에서 게임이나 다른 도스용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기에 적절한 방법인데, 현대 버전은 도스와의 완전한 호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 오래된 게임을 즐기도록 고안된 도스박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상에서 도스 운영 체제의 사본으로 도스 응용 프로그램들을 구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오버헤드는 증가되지만 더 나은 호환성을 제공한다. 설계. 모든 MS-DOS형 운영 체제들은 인텔 x86 호환 CPU를 갖춘 컴퓨터, 주로 IBM-PC 및 호환기종에서 동작한다. 특정 기계에 의존적인 MS-DOS 버전들은 수많은 비 IBM 호환 x86 기반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며, 여기에는 제조업체 이름을 딴 마이크로소프트의 배포판에서부터 비 IBM-PC 호환 하드웨어와 동작하도록 설계된 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응용 프로그램들이 직접 하드웨어 접근 대신 도스 API를 사용하는 한 IBM-PC 비호환 머신들에서도 실행이 가능하다. 1985년, 디지털 리서치는 또한 모토로라 68000 CPU용 컨커런트 도스 68K 버전 및 1990년대 초에 모토로라 CPU용 DOS/NT 파생 오리지널 프리도스 커널 DOS-C가 있었다. 이 시스템들이 도스 구조와 유사하긴 했지만, 응용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x86이 아닌 CPU의 비호환 명령 집합으로 인해 이진 호환성이 없었다. 그러나 고급 언어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들은 쉽게 포팅이 가능했다. 도스는 재진입성이 없는 기본 커널 기능들을 갖춘 단일 사용자, 싱글태스킹 운영 체제이다. 즉,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 해당 커널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도스 스스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을 한 번에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없다. 도스 커널은 문자 입출력, 파일 관리, 메모리 관리, 프로그램 적재 및 종료와 같이 프로그램을 위한 다양한 함수를 제공한다. 도스는 기본적으로 배치 파일(파일 확장자는 codice_1)을 통해 셸 스크립트를 위한 기능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텍스트 파일로서, 문서 편집기를 이용해서 작성이 가능하다. 컴파일된 프로그램과 동일한 방식으로 실행되며, 배치 파일의 각 줄을 명령 단위로 실행한다. 배치 파일은 또한 여러 내부 명령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GOTO와 조건문을 들 수 있다. GOSUB 및 단순 산술은 DR-DOS COMMAND.COM 및 4DOS와 같은 일부 서드 파티 셸을 통해 지원되지만, 실질적인 형태의 프로그래밍이 지원되는 것은 아니다. 이 운영 체제는 문자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을 허용하는 API를 제공하지만 그래픽 카드, 프린터, 마우스와 같은 하드웨어 대부분의 접근을 위한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머들이 직접 하드웨어에 접근하게 하려면 각 프로그램이 개별 하드웨어 주변기기에 맞는 자체 장치 드라이버를 갖추어야 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은 사양을 공개하여 대중화된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한 장치 드라이버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증해야 했다. 파일 시스템. 도스는 8.3 파일 이름을 지원하는 파일 시스템을 사용하며, 여기에서 파일 이름이 8자, 확장자의 경우 3자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도스 2를 기점으로 계층적 디렉터리가 지원된다. 또, 각 디렉터리는 8.3 형식이지만 최대 디렉터리 경로 길이는 64자인데, 이는 도스가 관리하는 내부적인 현재 디렉터리 구조(CDs) 테이블 때문이다. 드라이브 이름을 포함하여, 도스가 온전히 지원하는 최대 길이는 마지막의 널 바이트를 포함, "드라이브:\경로\파일명.확장자"를 이용하여 80자이다. 도스는 파일 할당 테이블(FAT) 파일 시스템을 사용한다. 본래 드라이브 당 최대 4078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2였다. 도스 3.0에는 16비트 할당 엔트리를 사용하여 드라이브 당 최대 65517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6 지원을 추가하였다. 도스 3.31은 32 MB 드라이브 제한을 제거하고 최대 2 GB까지 지원하는 FAT16B의 지원을 추가하였다. 마지막으로 MS-DOS 7.1(윈도우 9x의 도스 구성 요소)은 32비트 핟랑 엔트리를 사용하는 FAT32의 지원을 추가함으로써 하드 드라이브를 최대 137 GB 이상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도스 3.1을 시작으로 파일 리다이렉터 지원이 도스에 추가되었다. 초기에 네트워킹 지원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MSCDEX를 이용한 CD-ROM 드라이브 지원에 사용되었다. IBM PC DOS 4.0 또한 IFS(installable file system)를 지원했으나 사용되지 않아 도스 5.0에서 제거되었다. 드라이브 명명 계획. 도스에서 드라이브들은 식별 가능한 문자들을 가리킨다. 표준화된 관습으로, "A'와 "B"는 플로피 드라이브를 위해 할당한다. 오직 하나의 플로피 드라이브를 가진 시스템에서 도스는 이 드라이브에 두 개의 문자를 할당하며, 프로그램들이 이들을 교체할 때 사용자에게 디스크를 스왑할 것인지 묻게 된다. 플로피에서 플로피로 복사하거나 다른 곳에서 데이터를 접근하는 동안 특정 플로피로부터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할 때 이용된다. 하드 드라이브들은 본래 문자 "C"와 "D'로 할당되었다. 도스는 드라이브 당 하나의 활성 파티션만 지원할 수 있었다. 예약된 장치 이름. 도스에는 내부 문자 장치로 점유하고 있는 까닭에 파일 이름을 사용할 수 없는 예약 장치명이 있다. 또, 이러한 제한은 여러 윈도우 버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어떠한 경우에는 충돌이나 보안 취약성을 야기하기도 한다. 메모리 관리. 도스는 원래 인텔 8086/8088 프로세서용으로 설계되었으므로 최대 1 MB의 램에만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PC 아키텍처로 인해 최대 640 KB만 사용 가능하며(기본 메모리) 그 중 상위 384KB가 예약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도스 시스템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이용한다. 프로그램들은 명령 프롬프트에서 파일 이름을 입력하여 시작할 수 있다. 도스 운영 체제들은 시스템 유틸리티와 같은 몇 가지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프로그램들과 관련되지 않는 내부 명령어라 불리는 추가 프로그램들도 제공한다. 사용자에 더욱 친숙한 환경을 제공하려는 시도 속에, 수많은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들은 메뉴나 아이콘 기반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파일 관리 프로그램들을 작성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가 잘 알려진 예인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x가 프로그램 로더를 기본 내장하면서 가장 흔히 쓰이는 PC 호환 프로그램 로더로서 도스를 대체하였다. 텍스트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들에는 Mdir, 노턴 커맨더, 도스 내비게이터, 볼코프 커맨더, 쿼터데스크 DESQview, 사이드킥이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에는 디지털 리서치의 그래픽 인바이런먼트 매니저(본래 CP/M용으로 작성됨)와 GEOS가 있다. 마침내, 주요 도스 시스템 제조업체들이 자신들만의 환경 관리자를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MS-DOS/IBM DOS 4는 도스 셸을 포함하였다. 이듬해에 출시된 DR DOS 5.0은 GEM 기반의 뷰맥스를 포함하였다.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 도스는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도스는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Terminate and Stay Resident, TSR)을 제공하여 여러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에 상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시스템 타이머나 키보드 인터럽트를 후킹하여 이들이 백그라운드에서 작업을 수행하게끔 하거나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적시에 호출할 수 있게 한다. codice_2 명령어는 이를 수행하여 백그라운드 인쇄 스풀링을 구현하였다. 볼랜드 사이드킥도 이 기법을 사용한다.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들은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기능을 제공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CED와 도스키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COMMAND.COM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 이상으로 명령 줄 편집 기능을 제공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CD-ROM 확장 (MSCDEX)과 같은 프로그램들은 CD-ROM 디스크의 파일을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일부 TSR들은 초기 수준의 태스크 전환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셰어웨어 프로그램 백 앤드 포스 (1990년)은 단축키를 이용하여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의 상태를 디스크로 저장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불러와 전환할 수 있었다. 소프트웨어. 도스는 지배적인 PC 호환 플랫폼이었으며 수많은 유명한 프로그램들이 도스를 위해 작성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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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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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 변환
라플라스 변환()은 어떠한 함수 formula_1에서 다른 함수로의 변환으로, 선형 동역학계와 같은 미분 방정식을 풀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라플라스 변환을 이용하면, 미분 방정식을 계수방정식으로 변환하여,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초기값 문제의 경우 일차적으로 일반해를 구하는 단계가 필요없게 되고, 비제차 미분방정식의 경우에는 대응하는 제차미분방정식을 먼저 풀 필요가 없다. 라플라스 변환은 주어진 식을 간단한 식으로 변환한 뒤, 변형된 식을 푼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진 해를 다시 원식으로 변환한다. 정의. 함수 formula_1의 라플라스 변환은 모든 실수 t ≥ 0 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함수 formula_3로 정의된다. 여기서 formula_5는 formula_6를 간단히 나타낸 것이고 복소수 formula_7, σ와 ω는 실수이다. 실제 사용시에는 엄밀히 정확하지는 않지만 formula_8로 표기하기도 한다. 성질. "t" shifting. 참고: formula_19는 층계 함수이다. 역변환. 함수 formula_1의 라플라스 변환을 formula_3라 하면 다음 식을 통해 formula_3로부터 formula_1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위의 계산을 직접 하기 보다는 이미 알려져 있는 라플라스 변환들을 이용해 역변환을 구하는 것이 쉽다. 예를 들어 로 formula_3가 주어져 있는 경우 부분분수 분해를 통해 를 얻게되고 라플라스 변환의 선형성으로부터 formula_1는 다음과 같다. 미분방정식의 풀이. 상수 계수를 갖는 선형 상미분 방정식. 다음과 같은 formula_32차 연립 상미분 방정식을 고려하자 양변에 라플라스 변환을 취하면 이고 이를 formula_35에 관해 정리하면 이다. 따라서, formula_37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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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국제 사무기기 회사(國際事務機器會社, )는 미국의 다국적 기술 및 컨설팅 회사이다. 천공 카드 시스템을 고안한 허먼 홀러리스가 1896년 창설한 제표기기회사가 1911년에 국제시간기록회사, 컴퓨팅 스케일 컴퍼니, 번디 제조회사와 합병해 세운 전산제표기록회사(CTR)가 이 회사의 전신이다. 터뷰레이팅 머신의 자동 표작성기는 1890년의 미국 국세 조사(國勢調査)에 사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CTR은 한때 경영 부진에 빠졌으나 1914년 토머스 J. 왓슨을 사장으로 영입해 급성장의 계기를 이룩했다. 이후 1924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토머스 왓슨의 아들 토머스 J. 왓슨 주니어의 노력으로 PC를 개발했다. IBM이 PC를 개발한 뒤 내부를 공개하였으며 수많은 업체들은 PC의 주변기기를 개발하였고 IBM은 로열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PC의 기술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래서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PC를 사용하고 있다. IBM은 PC의 기능을 보강하여 PS/2라는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기도 하였다. PS/2에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업체들과 사용자들은 PS/2를 외면하였다. 결국 PS/2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IBM은 주로 메인프레임을 위주로 한 하드웨어 업체였으나, 1990년대부터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으로 분야를 넓혀왔다. 2000년대부터는 매출액 중 서비스/컨설팅 비중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리눅스를 강력히 지원하기 시작했다. 2002년 루이 거스너로부터 경영탑을 인수한 후 IBM를 크게 발전시킨 새뮤얼 팔미사노는 이 회사를 파멸에서 건져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론에서는 IBM사를 ‘빅 블루’(Big Blue)라고도 부르는데, 이 회사의 로고 마크가 푸른 색으로 그려졌고, 또한 주식도 우량 주식(블루 칩) 가운데서도 뛰어난 최우량주(블루)이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 혁명에 중요한 회사이다. IBM 소프트웨어 그룹. 이 그룹은 IBM의 주된 부서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과 같은 다양한 브랜드가 존재한다: 지배 구조. 이사회는 10인~14인이 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은 상황 및 추천된 후보의 자질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될 수 있다. 현재는 이사 12인(사내 1, 사외 11)이며, 2010년도 주총 이후에는 13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사무엘 팔미사노(Samuel J. Palmisano)가 이사회 의장(Chairman of the Board)과 대표이사(President), CEO를 겸하고 있다. CEO의 성과는 집행 평가 및 경영자원 위원회(Executive Compensation and Management Resources Committee)에서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이사회의 집행 부분(executive session)에서 매년 검토하며, 이사회 의장은 정기적으로 승계 계획 및 경영진 계발에 대해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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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탈
프랙탈() 또는 프랙털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이런 특징을 자기 유사성이라고 하며, 다시 말해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 구조라고 한다. 브누아 망델브로가 처음으로 쓴 단어로, 어원은 조각났다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fractus’이다. 프랙탈 구조는 자연물에서 뿐만 아니라 수학적 분석, 생태학적 계산, 위상 공간에 나타나는 운동모형 등 곳곳에서도 발견되어 자연이 가지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불규칙하며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을 배후에서 지배하는 규칙도 찾아낼 수 있다. 복잡성의 과학은 이제까지의 과학이 이해하지 못했던 불규칙적인 자연의 복잡성을 연구하여 그 안의 숨은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복잡성의 과학을 대표하는 혼돈 이론에도 프랙탈로 표현될 수 있는 질서가 나타난다. 프랙탈은 수학적 도형으로도 연구되고 있다. 프랙탈 도형은 종종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재귀적이거나 반복적인 작업에 의한 반복되는 패턴으로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프랙탈 도형에는 망델브로 집합, 칸토어 집합, 시에르핀스키 삼각형, 페아노 곡선, 코흐 곡선 등이 있다. 프랙탈은 결정론적이거나 추계학적일 수 있으며, 혼돈적 계와 연관지어 발생할 수도 있다. 프랙탈 기하학은 프랙탈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과학, 공학, 컴퓨터 예술에 적용되기도 한다. 자연계에서도 프랙탈 구조가 자주 발견되며 구름, 산, 번개, 난류, 해안선 및 나뭇가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프랙탈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며, 현실 세계의 매우 불규칙한 물체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일 수 있다. 프랙탈 기법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물론, 기술적으로 이미지 압축 등에서도 사용된다. 역사. 프랙탈의 역사는 주로 이론적 연구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현대적인 적용에 이르는 길을 따르며, 그 과정에서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 공식적인 프랙탈 형태를 만들었다. Pickover에 따르면, 프랙탈의 수학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Leibniz가 반복적인 자기유사성을 생각했을 때인 17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그는 직선만이 자기 유사라고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저서에서, Leibniz는 "fractional exponents(분수적인 지수)"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기하학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실, 다양한 역사적 설명에 따르면, 그 이후로는 몇 명의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심했고, 그들에 의해 때로는 수학적 "괴물"이라고도 불리는, 낯설게 떠오르는 개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불분명했던 작업들이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1872년 7월 18일 Karl Weierstrass가 왕립 프러시안 과학 아카데미에서 오늘날 프랙탈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연속이지만 모든 곳에서 미분 불가능한, 비직관적인 특성을 가진 함수의 첫 번째 정의를 나타낸 것은 2세기가 지난 후였다. 또한 가산 지표가 커짐에 따라서 계차는 임의로 커진다. 그 뒤 1883년에 바이어 슈트라스의 강의에 참석한 Georg Cantor는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은 프랙탈로 인식되는, 지금은 칸토어 먼지로 알려진 실제 선의 하위 집합들의 예를 출판하였다. 또한, 세기 말에 펠릭스 클라인과 앙리 푸앵카레는 "self-inverse“ 프랙탈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도입했다. 다음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1904년에 온 것인데, 이 때, 푸앵카레의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바이어 슈트라스의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정의에 불만을 품은 헬 폰 코흐는, 지금은 코흐 눈꽃송이라고 불리는 비슷한 함수에 대해 손으로 그린 이미지를 포함한 더 기하학적인 정의를 내렸다. 또 다른 획기적인 사건은 10년 후인 1915년에 왔는데, 그 때 바츠와프 시에르핀스키는 그의 유명한 삼각형을 만들었고, 그 1년 후에, 시어핀스키의 양탄자를 만들었다. 1918년까지, 두 명의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파투와 가스통 쥘리아는, 독립적으로 연구했긴 했으나 복소수와 반복적 함수를 구조화하고, 더 나아가 끌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현대에는 프랙탈의 특성으로 불리는 결과에 동시에 도착했다. 그 연구가 발표된 직후 1918년 3월에 펠릭스 하우스 도프는 프랙탈이라는 정의의 발전을 위해 "차원"의 정의를 상당히 확대하여 프랙탈들이 정수 차원이 아닌 차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자기 유사 곡선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의 1938년 종이 평면이나, 공간 곡선 그리고 새로운 프랙탈 곡선과 유사한 부품들로 이루어진, 폴 레비에 의해 더 나아갔다. 다른 연구원들은 현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 초기 연구원들이 그들이 수동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들은 간단하게 사람의 손으로 그리는 반복 작업들로 만들 수 있는 것들로 제한되었고,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의 의미를 시각화하고 높이 평가할 수단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쥘리아 집합은 간단한 그림들에 대한 반복적인 수행으로 시각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누아 망델브로가 리차드손의 초기 연구에서 나아간 "영국의 해안은 얼마나 길까? 프랙탈 차원과 통계학적 자기 유사성“와 같은 논문에 자기 유사성에 대해 쓰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다. 1975년에 만델브로는 "프랙탈"이라는 단어로 수백년에 걸친 사고와 수학적 발전을 굳히고, 인상적인 컴퓨터 건축 시각화로 그의 수학적 정의를 묘사했다. 망델브로 집합과 같은 그의 공식적인 이미지들은 많은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은 반복에 기초해서 만들어졌고, 프랙탈이라는 용어의 대중적인 의미로 이끌었다. 1980년 로렌 카펜터는 SIGGRAPH에서 프랙탈로서 풍경을 만들고 표현하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였다. 분류. 프랙탈을 네 가지 생성 기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중 기하학적 프랙탈만이 완벽한 자기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망델브로 집합은 느슨하며,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확대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프랙탈은 자기 유사성의 강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뉠 수도 있다. 시간매개형 프랙탈.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은 아래 점화식으로 만들어진다. formula_1 여기서 z와 c는 복소수이다. 쥘리아 집합은 정해진 c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z의 초기값을, 망델브로 집합은 정해진 z의 초기값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c를 의미한다. 발산 속도에 따라 점의 색을 다르게 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formula_2에 대해 생각해보자. formula_3 의 초기값을 formula_4로 하여 점화식을 반복하여 계산한다. 그 결과는 formula_5값에 의존한다. 즉formula_5 값에 따라 formula_7가 하나의 값으로 수렴하기도 하고 여러 값 사이를 순환적으로 맴돌기도 하고 아주 큰 값으로 발산하기도 한다. 만델브로트 집합은 초기값을 formula_4로 했을 때 formula_1을 발산시키지 않는 복소수 들의 모임이다. formula_5를 고정했을 때 발산하지 않는 formula_7를 충만한 쥘리아 집합(filled-in julia set) formula_12 이라 한다. 쥘리아 집합은 충만한 쥘리아 집합의 경계이다. 만델브로트 집합과 쥘리아 집합의 관계. ① formula_13 가 만델브로트 집합이면, formula_14가 수렴하는 formula_15는 충만한 쥘리아(formula_16: filled in Julia set) 집합이다. ② formula_13가 만델브로트 집합에 속하지 않으면, 비연결 쥘리아 집합 formula_18이다. ③ 쥘리아 집합은 충만한 쥘리아 집합의 경계이다. ④ 쥘리아 집합이 비연결이면 충만한 쥘리아 집합(formula_16)과 쥘리아 집합(formula_20)은 같아진다. ⑤ 만델브로트집합에서 나타나는 주기는 쥘리아 집합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⑥ 만델브로트 집합은 한 개이지만, 쥘리아 집합은 여러 개이다. ⑦ 쥘리아 집합은 내부가 공집합이다. ⑧ 복소수 formula_13에 대하여, 모든 쥘리아 집합은 각각 다르다. 반복함수계. 규칙적 프랙탈.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프랙탈의 경우 대부분 부분과 전체의 모양이 대략적으로 비슷할 뿐이나 반복함수계의 경우 전체와 부분의 형태가 완전히 일치한다. 무작위적 프랙탈. 통계학적 프랙탈. 기이한 끌개. 자기유사성이 핵심 개념인 프랙탈 이론은 위상수학 분야에 속하고, 초기조건의 민감성이 핵심인 카오스 이론은 미분방정식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랙탈 도형은 가까운 두 점이 가진 정보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초기조건의 민감성을 가지고 있고, 카오스 이론의 끌개는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프랙탈의 차원. 프랙탈에서의 차원은 자가복제를 하기 위해 필요한 도형의 숫자로 정의된다. 즉, 어떤 도형의 길이를 x배 크게 하였을 때 그 도형의 면적이 n배 증가한다면 그 도형의 차원은 log"x""n"으로 정의된다. 하우스도르프 차원의 개념.이에 따라 자연수가 아닌 차원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의 경우 프랙탈에서의 차원의 값은 log23으로 나타난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탈의 사례.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탈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연에서는 자기 닮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유한한 구조물들이 자주 발견된다. 응용 분야. 프랙탈이나 혼돈 이론을 적용한 기술들은 인공 지능, 시뮬레이션, 우주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험적 예술 등에도 적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렌더링 기술을 이용하여 부다브로같은 것도 이미지를 합성하여 만들수 있다. 프랙탈 시각예술. 프랙탈의 형태적 특징을 기하학적 조형성으로 이용하여 만든 디자인이다. 프랙탈의 성질은 형태적으로 '반복', '자기유사성', '회전'이며, 질서, 통일, 반복, 조화같은 기본적인 디자인 원칙하에 프랙탈의 형태적 특성이 나타난다. 프랙탈 디자인에서의 자기유사성은 기본적 형태요소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배열되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런 기본형태요소는 끝없이 반복되며, 이 가운데서 통일성과 질서 조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해준다. 프랙탈 디자인은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컴퓨터 그래픽 툴로 만들 수 있다. 그래픽 툴로 프랙탈 디자인을 만드는 방법은 기본형태를 복사해서 크기를 점점 줄이거나, 점점 늘리면서 반복해서 확장시키는 것이다. 프랙탈 디자인이 적용된 대표적인 예로 존 마에다가 디자인한 Morisawa poster가 있다. 프랙탈 음악. Richard F.Voss와 John Clarke가 물질적인 소리 신호에 대한 수학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연구에서 파워 스펙트럼(노이즈) 중에서 주파수 변화량 f에 따라 1/f 특성을 가진 pink noise가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자연현상과 유사한 형태를 가짐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1/f 패턴을 갖는 음악을 프랙탈 음악이라 한다. Voss와 Clarke는 pink noise(프랙탈 음악)이 적절한 보통의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랙탈 음악도 자연에서의 프랙탈처럼 전체 구조와 유사한 작은 구조가, 전체 안에서 반복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프랙탈적인 공간 채움과 조화로운 음 연결도 프랙탈 음악의 특성이다. 최근에는 자연의 패턴을 음악으로 만들어 작곡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프랙탈 음악에는 바흐가 작곡한 클래식부터 컴퓨터로 작곡한 현대 음악 등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로키 산맥의 산봉우리의 높낮이를 음악으로 변환하여 그럴듯한 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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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과
초파리는 초파리과(Drosophilidae) 동물의 총칭으로, 세계에 3,00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노랑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는 Morgan 이후 유전학 실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다세포 생물이다. 큰 이유는 초파리의 한 세대는 12일 전후로 상대적으로 짧아서 교배 실험에 효율적이다. 그리고 한 쌍의 교배로 약 500개의 알을 얻을 수 있어 고전적인 통계를 처리할 때에도 좋은 표본이 될 수가 있다. 몸집이 매우 작아서 많은 개체수를 사육하여도 어렵지 않다는 장점이 있고, 환경에서 직접 채취하여 사육하기도 쉽다. 돌연변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염색체 수가 적어서 염색체 지도를 작성하기에도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초파리의 거대 침샘염색체는 매우 잘 알려진 유전자 실험 재료다. 동양안충은 초파리를 중간숙주로 삼는 기생충이다. 형태. 기본적으로 몸이 머리, 가슴, 배로 나뉘며 다리가 6개, 날개는 앞날개 1쌍만 발달하고 뒷날개는 퇴화된 파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몸 크기는 작아서 대체로 2~5mm 정도이며 대체로 암컷이 수컷에 비해 크다. 겹눈은 붉은 빛, 더듬이는 어두운 색을 띠는 경우가 많으며, 몸 색깔은 노란색, 갈색, 검은색 등으로 다양하다. 유전학. 특징. 초파리의 유전체는 4개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고, 침샘 거대 염색체를 통해 쉽게 관찰 및 분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대다수의 유전·생물학자들은 초파리를 사용하여 많은 연구를 진행 하였다. 또한 크기가 작고 실험실에서 키우기가 쉬우며, 한 세대가 약 2주 정도로 매우 짧고, 한세대에서 많은 자손을 번식하며 수컷에서는 감수분열 과정에서 재조합(meiotic recombination)이 일어나지 않아서 유전학적으로 염색체를 추적하기가 용이하다. 유전학의 역사. 과거. 1933년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모건(Thomas Hunt Morgan)을 빼놓을 수 없다. 1910~191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초파리를 연구하고 있었던 그는 그동안 몰랐던 염색체의 유전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생물의 유전형질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쌍을 이루어 염색체에 선상배열을 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유전메커니즘인 염색체 지도를 초파리의 실험으로 입증했다. 그의 공로로 이전까지 방향을 잡지 못했던 유전자 연구가 튼튼한 기반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모건 학파의 일원이었던 허먼 멀러(Hermann J. Muller) 역시 초파리 연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X선에 의한 인공 돌연변이의 유발 효소를 결정화한 공로로 194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캠브리지 대학의 마이클 애쉬버너(Michael Ashburner) 교수는 1970년대 초파리 연구를 통해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사람에게 발생하고 있는 질병들을 규명해냈다. 그의 제자인 사이먼 콜리어(Simon Collier) 박사는 25년 동안의 초파리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초파리를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마치 사람이 연가를 부르는 것과 같은 수컷과 암컷 사이의 애절한 구애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초파리 애벌레의 침샘에 있는 다사염색체(polytene chromosome)는 핵분열 없이 염색체가 반복적으로 복제되어 크기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유전자의 관찰이 용이하고 유전자의 작용을 연구하기에 적당하다. 최근의 유전학 연구는 다수가 이 염색체를 이용하여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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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003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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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슈왈제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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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1913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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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001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며, 이 해는 21세기와 제3천년기의 첫 번째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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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1950년대는 1950년부터 1959년까지를 가리킨다. 1950년대는 전후 경제호황에 힘입어 제2차 세계 대전으로부터의 상흔을 회복하는 기간이었다. 출생률이 증가하고 베이비붐 세대가 나타나는 등 높은 인구성장률도 보였다. 이러한 회복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후반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던 냉전은 1960년대 초까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치열한 경쟁으로 발전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적 충돌은 특히 북반구에서 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부터 쿠바 혁명,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촉발된 베트남 전쟁, 1957년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서 비롯한 우주 경쟁 등 1950년대를 지배했다. 또한 핵실험이 잦아지며 긴박한 지정학적 상황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하였다.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감정적 반공주의의 물결이 의회에서 양원의 의회 청문회를 이끌어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도 탈식민지화가 시작되었으며 가속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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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20세기(20世紀, )는 1901년 1월 1일부터 2000년 12월 31일까지의 기간으로, 제2천년기의 마지막 세기이다. 20세기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발생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두 진영으로 갈려 싸운 전쟁이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이외에도 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전쟁과 같이 이념이나 종교, 인종의 차이를 앞세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국제 사회는 국제법을 확립하고 상호 안보 공조와 경제 협력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유엔을 만들었지만,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세계는 이념에 따라 양분되어 냉전 체제를 유지하였고 두 진영의 대리전 성격을 띈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동안 맹위를 떨쳤던 서구 열강에 의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대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고비로 쇠락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수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여 신생독립국들이 세워졌다. 식민지의 독립은 인도와 같이 평화적으로 진행된 경우도 있었으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리비아 같은 국가들처럼 독립전쟁을 치르고서야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어느 진영에도 가입하지 않는 비동맹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냉전의 양 진영에 대비되어 흔히 제3세계로 불렸다. 한국의 역사에서 20세기는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분단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은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8,800명 밖에 남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한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3·1 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맞서는 전민족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독립운동이 있었다. 해외에서는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하는 한편 각국을 상대로한 외교적 노력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수탈에 항거하여 각종 파업과 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거세지던 냉전의 영향력 아래 단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북의 두 정권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결국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큰 피해를 남기고 휴전을 맞았고, 이후 두 국가는 체제 경쟁을 지속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쟁이후 김일성주의를 표방하고 이후 유일체제라고 불리는 주체사상을 바탕으로한 일당 독재 국가를 이루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장기 독재에 저항한 4·19 혁명이 일어났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 의한 군사 독재가 이루어졌고, 박정희의 사망 이후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에 의해 군사 독재가 지속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87년 개정 헌법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는 현행 헌법이기도 한다.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이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한편, 20세기 동안 과학, 기술은 전분야에 걸쳐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에 그레고어 멘델에 의해 발견된 멘델의 유전법칙은 20세기 초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현대 유전학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유전 물질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어 1928년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고, 1952년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여 DNA가 유전물질임을 증명하였으며,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혔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아인슈타인인 자신의 발견에 대해 “상대성 이론은 돌파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심각하고 깊은 옛 이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 새로운 이론은 일관성과 간결함을 유지하면서 옛 이론의 모순을 강력히 해결한다.”고 자평하였다. 로켓 공학과 무선 통신의 발달, 그리고 컴퓨터의 출현에 힘입어 인류는 처음으로 우주 공간으로 나갈 수 있었다. 1961년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이 달에 착륙하였다. 20세기 화학 분야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인공적인 고분자화합물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것을 꼽을 수 있다. 20세기 레오 베이클랜드가 페놀과 포름알데히드를 반응시켜 베이클라이트를 합성한 이후 다양한 플라스틱이 개발되어 생활 전반에 사용되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도구들이 등장하였다. 비행기, 냉장고, 라디오, 텔레비전, 인공위성, 이동통신, 컴퓨터, 휴대폰, 스마트폰 등 20세기와 발명품들은 오늘날에도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방송과 통신의 발달로 대중 매체가 크게 성장하였고, 이를 통해 대중음악이 세계적으로 동시에 유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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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수학에서 실수(實數, )는 주로 실직선 위의 점 또는 십진법 전개로 표현되는 수 체계이다. 예를 들어, -1, 0, , "e", π 등은 모두 실수이다. 실수에 대하여 사칙 연산(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을 실행할 수 있다. 실수는 크기비교가 가능하며, 실직선에서 더 왼쪽에 있는 수가 더 오른쪽에 있는 수보다 작다. 특히, 실수는 0보다 큰 양수 · 0보다 작은 음수 · 0으로 분류된다. 또한, 실수는 정수의 비인 유리수와 그렇지 않은 무리수로도 분류되며, 정수 계수 다항식의 근인 대수적 수와 그렇지 않은 초월수로도 분류된다. 실직선은 복소 평면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실수는 허수와 함께 복소수를 이룬다. 공리적으로, 실수는 완비 순서체로 정의되고, 이는 동형 의미 아래 유일하다. 구성적으로, 실수는 유리수 코시 수열의 동치류 · 데데킨트 절단 · 십진법 전개의 동치류로서 구성된다. 실수의 완비성은 공집합이 아닌 실수 유계 집합이 항상 상한과 하한을 갖는다는 성질이다. 이는 유리수와 구별되는 중요한 성질이다. 실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다. 즉, 자연수 집합과 실수 집합은 둘다 무한 집합이나, 그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자연수 집합의 크기보다 크다. 연속체 가설은 자연수 집합보다 크며 실수 집합보다 작은 크기를 갖는 실수 부분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이다. 연속체 가설은 ZFC(즉, 선택 공리를 추가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으며, 연속체 가설을 만족하거나, 그 부정을 만족하는 ZFC의 모형이 모두 존재한다. 정의. 실수 체계 formula_1는 실수의 공리계를 통해 정의하거나, 구체적인 모형을 구성하여 정의할 수 있다. 공리적 정의. 실수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이다. 마지막 완비성은 실수를 유리수와 구분짓는 성질이다. 이들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는 동형 의미 하에 유일하다. 구성적 정의. 실수는 다음과 같은 대상으로서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한 실수는 실수 공리계의 모형을 이룬다. 즉, 실수 공리계의 모든 공리들을 만족한다. 연산. 사칙 연산. 실수 집합 위에는 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 ÷이 정의되어 있으며, 이들 중 덧셈과 곱셈은 교환 법칙, 결합 법칙, 분배 법칙을 만족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0과 1은 사칙 연산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formula_10과 그 반수 formula_11를 더하면 0이다. 즉, 0이 아닌 실수 formula_13과 그 역수 formula_14를 곱하면 1이다. 즉, 뺄셈과 나눗셈은 다음과 같이 덧셈과 곱셈으로 귀결된다. 거듭제곱과 거듭제곱근. 양수(=실직선에서 0의 우측의 실수=0보다 큰 수) 밑, 실수 지수의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다. 실수에 대하여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실수의 완비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략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음수(=실직선에서 0의 좌측의 실수=0보다 작은 수) 밑의 거듭제곱 역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유리수 지수에 한하며, 또한 이렇게 확장된 거듭제곱은 위의 연산 법칙을 비롯한 좋은 성질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순서. 실수들 사이에는 순서(즉, 크기 비교)가 존재한다. 두 실수 formula_23의 순서 formula_24가 더 왼쪽에, formula_25가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다. formula_26는 formula_27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실수의 순서는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또한, 실수의 순서는 실수의 연산과 호환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양수()는 0보다 큰 실수를 뜻하며, 음수()는 0보다 작은 실수를 뜻한다. 위의 성질들에 따라, 모든 실수는 양수, 음수와 0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또한, 양수 곱하기 양수는 항상 양수이며, 양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음수이며, 음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양수이다. 특히, 임의의 실수의 제곱은 항상 음수가 아닌 실수이다.(제곱해서 음수가 되는 수는 허수라고 불리고, 수직선 상에 표시할 수 없다.) 구간. 구간은 특별한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주어진 두 실수 사이의 실수를 원소로 갖거나, 주어진 한 실수를 시작점으로 하는 반직선에 놓인 실수를 원소로 갖는다. 예를 들어, 임의의 formula_10에 대하여, 다음과 같다. 퇴화 구간은 구간과 비슷한 집합으로서, 두 끝점의 순서가 정상적인 구간의 반대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상한 공리. 수들의 집합(예를 들어, 유리수 집합이나 실수 집합)의 모든 수들보다 작지 않은 수를 그 집합의 상계라고 한다. 이는 보통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면 여럿이 같이 존재한다. 수들의 집합에 상계들이 존재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가 존재한다면, 이를 상한이라고 한다. 실수 집합 formula_40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이를 상한 공리이라고 한다. 상한 공리는 실수의 완비성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이다. 데데킨트 완비성. 실수의 완비성은 실수의 가장 중요한 성질의 하나이다. 데데킨트 절단()을 통해 서술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실수 집합 formula_40의 두 부분 집합 formula_43의 쌍 formula_44이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formula_44를 formula_40의 데데킨트 절단이라고 한다. 이제, 실수의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다.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는 상한 공리와 서로 동치이다. 기타 성질. 실수 집합은 아르키메데스 성질을 만족한다. 즉, 두 실수 formula_56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formula_57가 아무리 작고 formula_58가 아무리 크더라도, formula_57를 충분히 많은 횟수 formula_60만큼 더하면, formula_58를 초과한다. 즉, 실수 집합 위의 순서는 조밀 순서이다. 즉,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실수 formula_63에 대하여, 항상 그 사이에 또 다른 실수 formula_64가 존재한다. 위상. 실수 집합 위에는 표준적인 위상 공간 · 거리 공간 · 노름 공간 · 내적 공간 구조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실수 부분 집합 formula_71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사실, 모든 유클리드 공간에 대하여, 위 네 조건은 서로 동치이며, 모든 거리 공간에 대하여, 앞에 세 조건은 서로 동치이다. 또한, formula_71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분류. 실수는 유리수와 무리수로 분류된다. 실수 formula_75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예를 들어, 1/3 = 0.333...은 유리수이며, "e" = 2.7182...와 π = 3.1415...는 무리수이다. 성질. 집합론적 성질. 실수 집합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89은 알레프 0이다. 달리 말해, 실수는 자연수 부분 집합과 일대일 대응한다. 이 둘 사이의 일대일 대응은 여러 가지 만들 수 있다. 역사. 실수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게오르크 칸토어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리수로부터 실수를 이론적으로 확장하여 그 성질을 규정짓게 된 것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게오르크 칸토어,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같은 수학자들의 공이 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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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 약칭 한총련)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학생운동단체이다. 표어는 1993년 창립시에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였으며 1995년에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변경하였다. 1992년를 마지막으로 전대협은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창립하였다. 기존의 각 대학교 총학생회장단의 협의체 수준이었던 전대협을 확대하여 전국 모든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까지를 대의원으로 하는 학생회 연합체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러나 한총련은 특유의 권위주의적 성향과 패권적 운동관으로 인해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한양대 출범식 사건으로 여러 학생운동그룹들과 상당수 학교들이 탈퇴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됐다. 당시 한총련을 탈퇴한 학생운동그룹들은 전국학생회협의회, 전국학생연대회의, 참대학 등의 독자적인 학생운동조직, 학생회협의체를 건설하였다. 한총련이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되었고 한총련에 가입한 단과대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면 자동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위반자가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 1997년 191명이 구속되어 전원 기소되었고 1998년 127명 구속되어 121명 기소, 1999년 162명 구속 149명 기소, 2000년 101명 구속 95명 기소, 2001년8월까지 13명 구속 4명 기소로 전체 594명이 구속되어 560명이 재판을 받았다.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판결이 나서 집중적으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기소한 건수가 늘었던 김대중 정부에서 전체 국가보안법위반 구속자의 53%가 한총련 대의원이다. 구체적으로 한총련 제5기(1997년) 사법처리 대상자 388명 중에 206명이 구속, 160명이 불구속되어 351명 구공판 기소, 115명 기소유예,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 22명이었으며 1998년 제6기는 301명 중에 145명이 구속되고 118명이 불구속 6명 내사종결되어 구공판기소 252명 기소유예 11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32명이며 7기(1999년)는 291명 중에 97명이 구속되고 48명이 불구속 16명 내사종결이며 구공판 137명 기소유예 8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130명으로 5~7기 전체 사법처리 대상자 980명 가운데 448명이 구속되고 740명이 재판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었으며 2013년 기준으로는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2000년대 초반 한총련 소속 일부 세력이 독자적인 한대련을 만들고, 이후 몇년간 두조직이 함께 존재하였다. 역사. 1993년 기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약칭 : 전대협)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전북대학교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갖고 고려대학교에서 8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출범했다. 그러나 한총련은 1996년 여름, 연세대학교에서의 8.15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력 시위로 인하여, 정부의 대대적 제재 및 폭력 시위에 대한 학생들의 부정적 시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대법원에 의해 4기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학생들의 무관심이 증대되면서 한총련의 활동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또한 이후의 5기, 6기 한총련도 대법원에 의하여 이적단체로 규정되었고 10기 한총련(2002년, 서울산업대학교(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에서 출범식 개최) 또한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적(利敵)단체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선전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단체를 말한다. 2008년 3월 한총련은 신임 의장 선거에서 후보자를 찾지 못해 출범 16년 만에 처음으로 의장 선출에 실패했다. 한총련은 28일 한양대 캠퍼스에서 한총련 소속 전국 40여 개 대학교 총학생회장과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등 대의원 60여 명을 비롯해 1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긴급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김현웅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16기 한총련 투쟁본부장'으로 추대했다. 활동. 조직. 2007년 기준으로 한총련의 대표자인 의장과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 상임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 상설의결기구인 중앙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또한 집행기구로는 중앙집행위원회와 그 산하에 중앙집행국, 중앙정책위원회, 중앙조직위원회, 연대사업위원회, 사무처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특별기구로는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와 조국통일위원회를 설치하여, 학내문제와 조국통일문제를 가장 주된 과제로 밝히고 있다. 지역별로는 서울(서총련), 강원(강총련), 경기인천(경인총련), 충청(충청총련), 광주전남(남총련), 전북(전북총련), 대구경북(대경총련), 부산경남(부경총련)으로 지역별 총학생회 연합이 있으며 각 지역총련별로 지구를 둔다. 제주(제총협)지구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지역총련과 동격인 특별지구로 한다. 1987년 8월 `전남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계승해 출범한 단체로 1993년에 전남.광주지역 22개 대학이 가입했으며 5공화국,6공화국 청산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5.18 진상규명 및 미군 철수와 함께 북한의 핵사찰반대, 고려연방제 채택 등을 주장하는 『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남총련)은 1993년 11월 2일과 3일 광주 미문화원과 안기부 목포출장소 기습시위를 주도하는 등 1993년에 검찰청과 경찰청, 미국 관련시설,정당 당사 등을 100여차례 기습 또는 항의 방문했으며 화염병과 쇠파이프, 돌 등을 동원한 시위로 중상자 36명을 포함한 경찰관 413명이 부상을 입고 경찰차량 10대를 파손시키기도 하여 정부당국으로부터 「과격폭력집단」으로 규정받고 있다. `자주.민주.통일의 실현' `반미 자주화 외세배격' `민중생존권 쟁취'를 3대 투쟁목표로 내걸고 있는 남총련 (의장 오창규)은 2백∼1천명 단위로 연인원 2만6천여명이 54 차례에 걸쳐 가두 시위를 벌인 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 산하 지역 단체 중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를 벌여 운동권내에서 대정부 투쟁의 선봉대다. 남총련 소속 학생은 1000여명인데 시위 때마다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 진압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극렬 선봉대원이 600여명에 이른다고 경찰은 밝혔다. 활동.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金在容한양대총학생회장)은 1993년 5월 29일 오전8시10분부터 고려대 학생회관 1층 생활도서관에서 제1기 출범식 행사의 하나로 마련한 북한및 해외 학생대표들과 국제전화를 통해 「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金在容한총련의장 등 남측본부 의장단 11명은 서울에서, 허창조 조선학생위원장 등 6명의 북측 본부 의장단은 중국 북경 연경호텔에서, 김창오 재일한국청년동맹위원장 등 해외본부 의장단 6명은 일본 동경에서 국제전화로 회의를 열고 스피커를 통해 공개적으로 2시간여 동안 통일방안과 제3차 청년학생통일축전 등에 대해 논의했다. 1993년 3월초 북한에 귀환한 리인모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사무총장인 임민식이 북경에서 대독한 연대사에서 "나는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다. 우리 모두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회의를 마친 뒤 남.북.해외 본부 공동의장단은 한반도 평화정착, 8.15 범민족회담 성사, 6.12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개최, 범청학련 연대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등의 공동 결의뮨울 채택했다. 대검 공안부(부장 최환)는 1993년 6월 13일 "그동안 한총련이 주도한 대규모 옥외집회에 대해서도 평화시위를 조건으로 개최를 허용해왔으나 한총련측이 그동안 두차례나 당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법적인 폭력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떠한 형태의 집회개최도 허용치 않기로 했다"는 이유로 김춘도 순경 사망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주관하는 옥외집회를 일체 금지했다. 학생대중단체의 분화가 잇따르고, 다양한 의견그룹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북미평화협정체결, 6·15 남북 공동선언 이행, 학원자주화 등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등과 연대하고 있다. 또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가맹단체이다. 전에는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을 한총련 의장이 겸하였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논란 및 사건사고. 1996년 연세대학교 사태.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광복절을 기념해 북한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2명의 학생을 남측 대표로 참가시켰다. 한총련 지도부는 두 학생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 판문점으로 행진하는 것과 연세대학교에서의 집회를 열기로 기획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의 한총련 소속 학생들이 서울로 모였으나 김영삼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집회를 원천 봉쇄하려 하였다. 당시 연세대학교에는 2만 명 정도의 학생이 모였고, 정부는 서울·경기 지역의 전경을 동원해 연세대를 포위했다. 이때 연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들이 한양대, 홍익대, 동국대 등을 거점으로 삼아, 연세대에 포위된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수대를 만들어 신촌 등 연세대 주변지역에서 전경과 산발적인 싸움을 벌였다. 이후 경찰은 연세대에 진입해 학생조직을 검거하려는 당초의 시도가 실패하자 백골단을 투입해 연세대 인근에서 산발적으로 돌격하던 사수대를 제압해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어 전기, 수도, 식량 등을 차단했다. 연세대에 갇힌 2만 여명의 학생은 5일 동안 농성을 하며 버텼다. 학생들은 이과대학 입구와 생활관 각 층마다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농성을 했지만 정부는 헬리콥터를 동원해 학생들이 머문 층의 창문으로 최루탄을 살포해 제압했다. 집회와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연행됐고, 연세대 교내 시설은 크게 파손됐다. 이 같은 학교 분위기로 인해 연세대와 고려대가 해마다 치루던 정기전은 연세대가 고려대에 양해를 구해 열리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사태는 그해 열린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고 사람사랑 학생회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적성 논란. 창원지법 형사1부(재판장 안영율 부장판사)는 한총련이 제작한 이적표현물을 소지,배포하고 화염병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뒤 검찰이 정한 한총련 탈퇴시한을 지키지 않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추가 기소된 인제대 총학생회장 김진영씨(26·법학4)에 대해 『한총련의 이적성 여부에는 아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재판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명확하게 규정한다』라고 판단하면서 징역 2년6월에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했다 전국 법원 가운데 처음으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대법원(주심 대법관 이임수)은 1998년 7월 30일 한총련 5기 의장 강위원에 대한 상고심을 기각함으로써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확정하였다. 2000년 대법원에 의해 제6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적화통일노선에 부합하는 폭력혁명노선을 채택함으로써 그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며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서 국가보안법 제7조가 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적 단체로 규정되었다. 그 후 2004년 대법원은 재차 10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또한 그 강령 및 규약의 일부 변경하였으나 그 사상과 투쟁목표에 있어서 종전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없어, 그 지향하는 노선이 반국가단체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노선과 그 궤를 같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거나 적어도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이적단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한총련과 전대협을 이적단체로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재야와 학생운동계에서 반발, 논란이 진행 중에 있다. 1998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 소속 대학 학생대표들은 선출되는 순간 수배자가 되어 길게는 7년까지 수배생활을 했다. 한총련 대의원 구속자는 2000년 71명, 2001년 72명, 2002년 90명이지만, 이중 실형선고를 받은 이는 2000년 1명, 2001년 3명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 출범을 전후하여 한총련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 선고를 받은 대의원 등에 대한 사면,복권 논의가 이루어졌다. 1997년 한총련 활동을 한 혐의로 인천지검에 의해 구속기소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9년 8월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되고 2000년 8월15일 잔형 집행을 면제하는 특별사면과 함께 복권 조처된 정모(30)씨에 대해 인천지검은 이어 8월22일 집행과로 정씨의 사면 사실을 통지했으나, 집행과에서 이의 기록을 누락하면서 2001년 10월 별개의 사건으로 서울지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을 때 인천지검은 서울지검에 정씨의 잔형 집행이 면제된 사실을 모르고 그 집행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정씨는 2001년 12월 당시 사건과 관련해 보석 허가를 받고도 남은 형기 79일을 수감되고난 이후인 2003년 3월 6일 형기 종료로 출소했다. 1990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한 대한민국에 대해 규약 감시기구인 유엔 인권이사회가 2005년 7월 열린 제84차 위원회에서 “한총련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한총련 대의원을 처벌하는 것은 국제인권규약 제22조가 정한 ‘결사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이는 규약 제18조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권리’에도 위배된다 한총련에 가입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에 대해 어떤 실제적인 위협이 있는지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결정했다. 인권이사회는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를 개정하고, △피해자에게 적절한 보상과 구제를 하고, △비슷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인권이사회는 1992년과 99년에도 ‘국가보안법을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2002년 8월 이정은(31·9기 한총련 대의원) 전 건국대 부총학생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김승교 변호사는 한총련의 이적단체 규정을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소했으며, 이씨는 200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한양대학교 프락치 오인 치사 사건. 1997년 6월 한양대학교에서 발생한 이석 치사 사건은 선반기능공 이석이 동료 학생 길소연, 권순욱, 이호준, 정용욱 등에 의해 구타당한 사건이다. 폭행치사 혐의로 길소연, 권순욱, 이호준, 정용욱 등이 구속되었다. 이호준은 5년, 정용욱은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중 길소연과 이호준은 1999년 2월 특별사면되어 가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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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선일보》(朝鮮日報)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언론사인 조선미디어그룹의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는 조간일간지이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으며, 현재까지 존재하는 한국어 신문들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신문이다. 2020년 기준, 대한민국 내에서 유료 부수 100만부가 넘는 유일한 신문이자, 대한민국에서 영향력 있는 미디어로 손꼽힌다. 역사. 조선일보는 1919년 3.1운동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1920년 3월 5일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 해 4월 28일자 에 실린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 당했고 같은 해 8월 15일에 대정실업친목회가 약속했던 자본금 불입을 하지 못해서 대정실업친목회 부회장이었던 초대 사장 조진태가 물러나고 변호사 출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한 논설을 실어서 1주간 정간을 당했다. 같은 해 9월 5일자에 실린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이후 조선일보의 항일 논조를 부담스러워하던 총독부는 1921년 4월 8일 조선일보 판권을 송병준에게 인수하였고, 독립 정신이 강했던 조선일보 편집국 분위기를 알고 있었던 송병준은 스스로 사장에 취임하지 않고, 열렬한 독립투사로 유명했던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그리고 1924년 9월 13일에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항일 독립 신문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히 했고, 4대 사장인 이상재가 취임한 후에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우리나라의 문화보전에 힘썼다. 이후 5대 사장은 조선 독립민족주의 성향의 신석우가 맡았다. 이후 1931년에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6대 사장 안재홍이 연루되어 구속되고, 7대 사장 유진태 8대 사장 조만식을 거쳐 9대 사장 방응모가 취임한 후 한일 학생의 교육차별을 비판하는 논설 '교육필화'로 인해 총독부에게 기사가 압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부사장이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민족개량주의까지 합세하여 더욱 항일적인 신문이 되었다. 그러나 1936년부터 총독부의 개입으로 인해 항일 성향이 줄어들었으나,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평론하는 사설과 신문내용을 여러차례 보내면서 간접적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그 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표적이 되어 발간을 중단하였고, 이에 당시 사장이었던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창간하면서까지 신문을 이어나갔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속간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어가던 백범 김구는 조선일보의 복간에 대해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크게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9대 사장인 방응모의 한국독립당 입당과 반탁운동 가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의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으며, 1947년 이후 민족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던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노선을 지지하게 된다. 마침내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하자 이승만 정부의 출범을 지지하였고, 동시에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 반민족 행위자 강력처벌과 처단을 주장했다. 한편,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을 때 남용소지에 대해 비판을 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의 사용 규범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에게 조선일보가 넘어가면서 한때 조선일보는 인민군 기관지로 전락했지만, 1950년 10월 1일 동부전선에서 육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하며 전세가 역전되면서 다시 대한민국의 기관지로 회복됨과 동시에 북한의 남침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한국전쟁 이슈들을 많이 다뤘고, 1951년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을 완전히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과 국군에 불리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는 보수주의 색이 강해져서 대한민국과 한국전쟁 당시 국군을 도와줬던 UN 등 국제적인 자유 진영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일보는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이승만 정부의 부산 정치파동을 다루지 않았고, 이승만 정부와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추진했던 반공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진보당 사건, 진공관 구입 밀수출 사건,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금정산 공비 사건,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박정호 간첩 사건, 김정제 간첩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공안정국에는 반공주의 기준과 이승만 정부를 옹호하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금성사 설립 기사와 삼성 관련 기사를 많이 보도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대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외에도 능의선 기공식과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완간을 보도했고, 가짜 이강석 사건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당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민 통합에 앞장섰다. 하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국민의 편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하야를 이뤄내었다. 그리고 제2공화국 장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1960년 당시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원노조 운동 탄압과 노동운동 탄압에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을 지지함과 동시에 1961년부터 1962년까지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신문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그 당시 공안사건들이던 민족일보 사건, 사대당 사건, 교원노조 사건, 유족회 사건 등에 대해 반공주의적 기준과 박정희 군정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또 이 당시 삼성물산 설립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문화방송, 한국방송 설립 기사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군사원호청 발족 기사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립 기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발족 기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발족 기사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다시 반정부적인 성향으로 돌아섰는데 이후 최석채 주필이 재직하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조선일보는 상당히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와 노동운동 세력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강행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미법도 주민 간첩단 사건, 제1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 사건, 분지 필화사건, 언론계 침투 무전 간첩단 사건, 경향신문 간첩사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의 사법처리 과정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삼척군 해안가 간첩 사건, 군내 반정부 음모사건, 진장언 하사 간첩사건, 송추 간첩사건 같은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반공주의적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서도 삼성을 상당히 비판하는 논조로 보도를 했다. 그리고 한국전력, 중소기업은행 설립을 호의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부터는 조금씩 다시 박정희 정부에 우호적인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박정희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고 이 시기 제2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영호남·서해안 무전 고정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언론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가게 되고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같은 공안정국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또다시 보수언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969년,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 이후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성향으로 완전히 돌아서는데 당시 유럽 간첩단 사건과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3선 개헌을 지지하는 보도 또한 여러 차례 내보냈다. 또 그 당시 대한항공 민영화 기사, 삼성전자 설립 기사, 현대자동차 설립 기사, MBC 개국, 일간스포츠 창간, 진주 남강댐 준공도 여러차례 보도했다. 1970년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기사, 사설들을 여러차례 내보냈으며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의 준공 기사와 정부중앙청사 준공 기사, 병무청 발족 기사, 남산1호터널 개통, MBC 뉴스데스크 첫 방송, 100원 주화 사용 기사 또한 여러차례 내보냈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지지하는 사설과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한 당시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 KAL기 납북미수 사건, 남파간첩 백귀남 사건 등 공안정국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실미도 사건과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일보는 이를 정부의 입장에서 보도했다. 또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2년에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서자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을 적극 찬양하고 지지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유신 체제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에서는 포항제철 설립,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남해고속도로 개통, 호남고속도로 개통, 삼성중공업 설립, 강남-여의도 개발, 각종 고층건물 건설, 대우중공업 설립 등을 상당히 보도했고 정치 면에서는 민주공화당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고 10월 유신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다. 또한 1973년 당시 발생한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때도 중앙정보부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썼으며 당시 북제주도 우도 무장 침투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귀화 간첩 사건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후 전남대 불온 삐라 살포사건,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 고려대 NH회 사건, 서울대 공대 조교수 간첩사건, 나쓰야 간첩사건, 김장현 간첩사건, 김철우 조총련계 간첩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 개장과 현대중공업 설립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유신체제 당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연이어 발생한 여간첩 채수정 사건, 대전·전주 고정간첩단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1,2호 위반 사건, 김영작 간첩사건, 김승효 간첩사건, 부산·경남 거점 고정간첩단 사건, 재일동포 진두현 간첩단 사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재일동포 김달남 간첩사건, 재일동포 유정식 간첩사건, 학원침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귀화 일본인 간첩단 사건, 박복순 남파 간첩단 사건, 겨울공화국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유신체제 당시의 공안정국 확성기 노릇을 했다. 그리고 1975년 당시에는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준공 기사와 학도 호국단 창설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 민방위대 창설과 부처님 오신 날, 어린이날 공휴일 제정, 영동고속도로 준공 등을 기사로 내보냈다. 그 뒤 1976년에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한민통 간첩사건 또한 집중적으로 보도해서 공안정국의 확성기 노릇을 계속했다. 그리고 연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보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과 문화 면에서 신용보증기금 설립 기사와 용인자연농원 개장, 반월 신도시 건설, KBS 여의도 사옥 설립, 태권V 개봉, 아이미 개발 등에 대한 기사도 여러차례 보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최은희 납북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으며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자연보호헌장 선포 등의 기사도 내보냈다. 또한 1979년에는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 재건 음모 사건, 부산·삼천포 고정 간첩단 사건 등을 여러차례 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10.26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특종 보도를 많이 했다. 10.26 사건 이후에는 12.12 쿠데타를 많이 보도했다. 1972년 3월 5일 52주년 기념호를 통해 독자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공식 선언하고, 1974년에는 미국 ASI의 조사 결과 정기구독자 비율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79년 2월에 발행부수 100만부를 돌파하여, 1991년에 사상 최초로 발행부수 200만부를 돌파하였다. 조선일보사는 1968년에 《주간조선》을, 1980년에 《월간조선》을 각각 발간하였고 1991년 《소년조선일보》를 창간하였다. 1999년 3월 2일에는 전면 가로쓰기 체제를 도입했다. 1995년 (주)디지틀조선일보를 설립해 인터넷 서비스를 강화하여 2008년 3월 5일부터는 조선일보 지면을 PC상에서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아이리더’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창립 역사. 조선일보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를 모체로 조진태사장으로 시작하였으나, 자금력부족으로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1924년 남궁훈은 민족주의자였던 신석우가 인수해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 받던 이상재를 추대할 때까지 사장으로 재임한다 1924년 이 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 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계속적인 경영 악화로 조만식을 거쳐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 후 보수적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사를 주도하면서, 보수주의 관점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인물. 일제시대 초기 조선일보에는 다양한 경력과 능력의 소유자들이 집결했다.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보수주의자를 비롯해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들과 활동가들이 어울려 민족의 '정신적 정부'를 자임했다.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남궁훈,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은 민족 지도자들이었다.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서 일제를 규탄하고 총독 암살을 계획했던 독립운동가 방한민(方漢旻), 일제의 조선인 학살 현장에 달려가 목숨걸고 취재한 이석, 한홍정 등은 펜으로 일제의 총칼에 직접 맞선 행동파였다. 독일 유학 후 혁명의 모스크바로 파견된 김준연,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에서 화려한 학력을 쌓은 이관용, 미국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훈구, 그리고 중국 내전 현장을 누빈 이상철, 홍양명, 홍종인 등은 세계 정세와 선진 문물을 알리는 전령사들이었다. 자매 언론기관. 조선일보사는 일간지 외에도 주간지 '주간조선', 스포츠지인 '스포츠조선', 관광 숙박시설에 대한 잡지 '월간 산', 취미 문화에 관한 잡지 '월간낚시' 등의 시사지와 잡지를 발행한다. 자회사로는 '디지틀조선', '월간조선', '조선에듀케이션', '헬스조선' 등이 있으며 이 중 '디지틀조선'은 코스닥에 상장하였고, 2004년부터 연간 80억 정도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1931년부터 '어린이조선일보'를 발행하고 있으며, 일반단행본과 백과사전들을 편집하는 출판사업도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출판한 단행본으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1998년)나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장애인 배형진씨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형진아》등이 있다. 또한 온라인버전 조선닷컴이외에 영어판, 일본어판, 중국어판 온라인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자회사 '조선일보 일본어판'(구 조선일보JNS)에서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7년에 비즈니스앤을 개국하고, 2008년 11월에는 방송기자와 피디를 모집, 2008년 2월에는 대구방송, KNN과 함께 "아워 아시아"를 제작, 배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일보는 종합편성방송 심사에서 2위로 통과한 'TV조선'을 소유하고 있으며, TV조선과 조선일보는 보수적 논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0년 조선일보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그 관계사를 아우르는 미디어그룹인 조선미디어를 출범시켰다. 이외에도 '주간조선' '월간조선' 등을 제작하는 조선뉴스프레스라는 자회사가 있다. 발행 부수. 대한민국 신문 구독률 36.8% 가운데 조선일보는 11.9%를 차지하였으며, 구독점유율은 24% ~ 30% 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신문 구독 여부에 관계없이 지난 일주일간 어떤 신문의 기사를 봤는지를 알아보는 주간열독률 조사에서 조선일보의 열독률은 16.2%였다. 2009년 한국ABC협회가 실시한 집계에서 발행부수 1,844,783부로 집계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유료 발행 부수는 1,353,159부였다. 2011년 7월부터 가판 가격이 인상되어 현재 부당 1000원이나 월 구독료는 15,000원으로 변함없다. 한국ABC협회가 2020년 발행·유료 부수 현황을 공개한 자료에서 조선일보는 121만부의 공식 발행 부수를 가진 국내 최대 신문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료부수 100만부가 넘는 신문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21만2208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동아일보(92만5919부)·중앙일보(86만1984부)·매일경제(70만6760부)·한국경제신문(52만6908부) 등의 순이었다. 실제 판매량을 집계하는 유료 부수에서도 '조선일보'가 1위(116만2953부)였다. 2·3위인 '동아일보', '중앙일보'와는 각각 29만, 35만부 격차였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지표. 2014년 시사저널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설문조사의 언론 매체 영향력 및 신뢰도·열독률 조사 결과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순위 조사에서 KBS와 조선일보의 양강 체제가 굳건하였다. KBS 59.6%와 조선일보 51.2%로 네이버 32.1%, MBC 22.0%, 중앙일보 15.9% 등 다른 매체들을 압도했다. ‘가장 열독하는 언론 매체’ 조사에서는 조선일보(21.8%)가 2위를 차지했고, KBS(20.0%)가 그 뒤를 이었다. 한국갤럽이 2013년 9월 30일부터 2주간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집에서 유료로 정기구독하는 신문'을 기준으로 조사한 가구 구독률에서 조선일보는 11.9%로 압도적 1위였다. 부정적 지표. 2009년 "시사IN"이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어느 매체를 가장 불신하느냐는 질문에는 중복응답을 기준으로 할 때 조선일보의 응답률이 20%에서 크게 늘어 34.2%를 차지하여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제치고 1위로 나타났다. 한편 한국기자협회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하여 조사한 현직 기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로는 한겨레가 15.4%, MBC 14.3%, KBS 11.2%, 경향신문 8.7%, 한국일보 4.0%에 이어서 조선일보는 2.4%를 차지하였다. '시사IN'이 행한 '가장 불신하는 매체' 조사에서 2017년 2위, 2018, 2019년에는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2017년 조사에서 조선일보는 '가장 불신하는 매체' 순위 2위, TV조선은 4위에 위치하였다. 2018년 조사에서는 조선일보(25%)와 TV조선(12%)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여 조선일보 계열이 '가장 불신하는 매체' 부문에서 약 40% 가량을 독식하였다. 2019년 조사에서도 조선일보가 1위(24%), TV조선이 3위(7%)를 차지하여 조선일보 계열은 2019년에도 '가장 불신하는 매체' 부문에서 30% 가량을 독식하였다. 이는 해당 부문 2위인 KBS (10.7%)의 약 3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개한 2018년 매체신뢰도 순위에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15개 매체 중 각각 14위, 15위에 올라 조선일보 계열이 최하위권에 머무른 가운데 2019년 매체신뢰도 순위에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14개 매체 중 각각 14위, 13위를 차지하여 사실상 2년 연속으로 조선일보 계열의 매체는 가장 신뢰도가 낮은 매체로 꼽혔다. 기타. 내일은 늦으리.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환경보전 슈퍼 콘서트의 부제이다. 말 그대로 환경보호를 위해 톱스타군단이 총출동한 대형 콘서트이다. 한국신문상 수상. 한국신문협회는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를 2014년 한국신문상 뉴스취재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인 용기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며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조선일보를 높이 평가했다. 조선뉴스라이브러리.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념으로 뉴스 다시보기 서비스의 1920년 창간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무료 열람을 볼 수 있으며, 별도 무료와 유료 서비스이다. 그리고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과거 신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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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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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 (수학)
스칼라(scalar)는 선형대수학에서 선형공간을 정의 할 때, 선형공간의 원소와 스칼라 곱을 하는 체의 원소이다. 예를 들어, 1차 실수 계수 다항식들의 선형공간 formula_1에서 스칼라는 실수이다. 정의. 스칼라의 정의는 N차원 공간에서 N의 0승개의 수로 표현할 수 있는 물리량이다. 그러므로 좌표계가 변환되어도 그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양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속도 벡터가 두 개의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x축 방향으로 100 km/h, y축 방향으로 0 km/h) 각각의 성분은 크기만을 가지고 있지만 스칼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도를 나타내기 위한 좌표계가 바뀌면 각각의 성분도 바뀌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x'축 방향으로 80 km/h, y'축 방향으로 60 km/h 라는 식으로). 하지만 막대의 길이가 1 m이면 어느 좌표계에서 재어도 1 m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막대의 길이는 스칼라이다(단 상대론적으로 움직이는 좌표계는 논외로 한다). 수학에서도 스칼라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전산학에서는 스칼라를 단순히 '하나의 수'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한다. 유래. 스칼라(scalar)라는 말은 '사다리'를 뜻하는 라틴어 scala의 형용사형인 scalaris에서 따온 것이다. 이 용어를 수학에서 처음으로 쓴 사람은 프랑수아 비에트로, 그의 저서 《해석학입문In artem analyticem isagoge》(1591년)에 쓰였다. 한편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영어에서 이를 처음 쓴 사람은 윌리엄 로언 해밀턴으로, 1846년에 사원수의 실수부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면서 사용하였다. 해밀턴의 용례는 사원수 표기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회전을 하나의 스칼라(사원수의 실수부)로 표현하고 벡터를 나머지 세개의 허수부로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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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수
수학에서 자연수(自然數, )는 수를 셀 때나 순서를 매길 때 사용되는 수다. 양의 정수(陽-整數, ) 1, 2, 3, ...로 정의되거나, 음이 아닌 정수(陰-整數, ) 0, 1, 2, 3, ...로 정의된다. 범자연수(汎自然數, , )라는 용어는 첫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음이 아닌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이에 대응하는 문화어와 영어는 둘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자연수의 집합은 대문자 N을 써서 표기하며, 보통 칠판 볼드체 ℕ를 사용한다. 약수 관계나 소수 분포를 비롯한 자연수의 성질들은 수론의 연구 대상이며, 분할이나 계수를 비롯한 자연수의 문제들은 조합론의 연구 대상이다. 자연수는 많은 연산에 대하여 닫혀있지 않다. 정수는 자연수를 뺄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하여 얻는 수 체계이며, 유리수는 자연수를 추가로 나눗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수 체계이다. 실수는 추가로 코시 수열의 극한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며, 복소수는 추가로 다항식의 근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유한하지만, 무한 집합을 이룬다. 자연수의 집합은 "가장 작은 크기"의 무한 집합이며, 자연수와 크기가 같은 집합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자연수가 만족시켜야 하는 일련의 공리들을 제시하여 자연수를 일종의 무정의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수의 공리들이 이루는 체계 가운데 가장 자주 사용되는 하나는 페아노 공리계이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이론에 해당된다. 자연수를 특별한 집합으로서 간주하여 다룰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보통 자연수의 집합은 최소 재귀 집합으로 정의된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모형에 해당된다. 자연수의 수를 세는 역할을 일반화하면 기수의 개념을 얻으며, 자연수의 순서를 매기는 기능을 일반화하면 순서수의 개념을 얻는다. 자연수의 집합의 대수적 성질을 일반화하면 반환의 개념을 얻는다. 특히 자연수는 많은 스포츠 점수 같은 경기나 게임에 사용될수 있으며 우리가 가장 흔히 보는 수로도 볼 수 있다. 정의. 공리적 정의 (페아노 공리계). 가장 통용되는 자연수 이론인 페아노 공리계는 상수 formula_1 및 함수 formula_2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리들로 이루어진 2차 논리 이론 formula_3이다. 이 공리들 가운데 2차 논리 공식은 셋째 공리뿐이다. 이 셋째 공리를 1차 논리 공리꼴로 대신하면, 페아노 산술을 얻으며, 이는 보다 더 약한 공리계이다. 집합론적 정의 (폰 노이만). 자연수 이론의 한 가지 모형 formula_14을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이 경우, 각 자연수는 그보다 작은 자연수들의 집합이다. 예를 들어, 처음 몇 자연수는 다음과 같다. 집합론적 정의 (프레게와 러셀). 고유 모임이 허용되는 집합론의 경우, 자연수를 유한 집합의 대등 관계에 대한 동치류로서 정의할 수 있다. 즉, 각 자연수는 그 자연수를 원소 개수로 하는 집합들의 모임이다. 즉, 이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고유 모임을 사용하므로, 분류 공리꼴을 만족시키는 집합론에서 사용할 수 없다. 성질. 자연수의 집합은 가환 순서 반환을 이룬다. 수학적 귀납법. 자연수의 집합 formula_3의 정의에 따라, 수학적 귀납법이 성립한다. 즉,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28는 주어진 성질이며, 자연수 부분 집합 formula_30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명제를 증명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귀납법에 따르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특히, formula_36인 경우 이 조건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formula_31인데, 이는 이 조건의 전제가 항상 참이기 때문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재귀 정리에 따르면, 수열을 점화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즉, 집합 formula_38에서 값을 취하는 수열 formula_39은, 그 일반항을 통하지 않고서도,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줌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41는 formula_38에서 값을 취하는 각 유한 수열에 formula_38의 원소를 대응시키는 함수이다. 특히, 이 점화식에서 formula_36인 경우, 이 점화식이 뜻하는 바는 공(空)수열 formula_45의 함숫값 formula_46을 첫항 formula_47으로 정의하는 식 formula_48이다. 무한 강하법. 자연수의 집합은 정렬 집합이다. 즉, 공집합이 아닌 자연수 부분 집합 formula_49은 항상 최소 원소 formula_50를 갖는다. 귀류법을 사용하여, formula_28가 최소 원소를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이제 formula_52임을 강한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하자. 만약 formula_53라면, formula_54이다. 그렇지 않다면 formula_55이므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formula_56이며, 이는 모순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에서 무한 강하법이 성립한다. 즉,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 formula_57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위에서 증명한 자연수의 정렬성을 통해 엄밀하게 증명할 수 있다. 즉, 만약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이 존재한다면, 그 수열의 항들의 집합은 자연수의 부분 집합인데, 이는 공집합이 아니면서 최소 원소를 갖지도 않으므로 모순이다. 무한 강하법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려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집합론적 성질. 자연수의 집합 formula_3은 무한 집합이다. 자연수의 집합의 크기를 알레프 0 formula_64으로 정의하며, 이는 최소 무한 기수이다. 즉, 임의의 무한 집합 formula_28에 대하여, formula_66인 부분 집합 formula_67가 존재한다. 자연수의 집합과 크기가 같은 집합(=전단사 함수 formula_68가 존재하는 집합 formula_28)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리수의 집합 formula_70는 가산 무한 집합이며, 실수의 집합 formula_71는 비(非)가산 무한 집합이다. 수론적 성질. 자연수에 대한 곱셈식 formula_72이 성립할 때, formula_73가 formula_74의 약수라고 하며, 반대로 formula_74를 formula_73의 배수라고 한다. 0은 모든 자연수를 약수로 가지며, 0의 배수는 0뿐이다. 그러나, 양의 정수의 경우만을 생각하기도 한다. 항등식 formula_77에 따라, 자연수는 항상 1과 자기 자신을 약수로 가지는데, 약수가 이들뿐인 자연수를 소수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자연수를 합성수라고 한다. 다만, 0과 1은 소수도 합성수도 아니라고 정의한다.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르면, 모든 합성수는 유한 개의 소수들의 곱으로 표현 가능하며, 이러한 표현은 소수들을 곱하는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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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실시간 전략 게임이다. 1998년 3월 31일 북미와 중국에, 4월 9일에는 대한민국에 발매되었다. 게임의 배경은 26세기 초반의 미래의 우주로, 지구 집정 연합에게 버림받은 범죄자들의 테란()과 집단 의식을 가지고 다른 종족을 흡수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저그(), 초능력과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외계 종족인 프로토스() 사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후속작으로 와 스타크래프트 2가 있다. 《스타크래프트》와 그 확장팩인 《》는 1998년 4월(브루드 워는 11월)부터 1999년 1월까지 두달 동안 전 세계에서 150만 장 이상 판매되어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 되었고, 2007년 5월 20일 기준으로 블리자드는 950만 장 이상이 팔렸다고 집계했으며, 2009년 2월 28일까지 110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1998년 최고의 컴퓨터 전략 게임으로 오리진스 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다수의 올해의 게임, 올해의 전략 게임, 올해의 멀티플레이어 게임 상을 받았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1월 31일까지 세계 판매량의 대략 40%정도인 450만 장이 팔렸으며,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프로 선수와 팀이 생겨 스타크래프트 경기가 방송에도 중계되는 등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스타크래프트》는 LG소프트를 통해 발매되었다. 한국어로 수정하지 않고 영문판 그대로 출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영문판을 그대로 발매함에 따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게이밍 서비스인 배틀넷에서 한글 채팅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1999년부터는 한글이 지원되는 한스타와 같은 프로그램이 배포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2005년 2월 스타크래프트의 버전이 1.12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는 2009년 1월부터 1.16.1 버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8년이 지난 2017년 3월 26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I <3 StarCraft(아이 러브 스타크래프트) 행사에서 1.17패치를 건너 뛴 1.18패치와 를 공개하였다. 이후 동월 3월 31일 1.18버전을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안정성의 문제로 테스트 버전이 먼저 공개되었다. 그 이후 밸런스 문제와 그래픽 카드 호환성 문제로 인해 여러번 연기되었다가 종료되었다. 다음날 4월 19일 새벽부터 정식으로 1.18 패치가 배포되어 전세계 서버가 오픈되었고, 기존 스타크래프트 엔솔로지는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상당한 버그와 화질 개선이 이루어졌고 현재 OS 에 맞춘 환경이 지원하는 패치가 이루어졌다. 게임플레이. 《스타크래프트》의 기본적인 게임 전개는 플레이어가 자원을 모아 건물을 짓고 테크 트리를 발전시키며 유닛을 생산해 상대방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자원에는 모든 종류의 생산 활동에 필수인 '광물'과, 고급 유닛이나 건물의 생산, 각종 업그레이드 연구 등에 사용되는 '베스핀 가스'가 있다. 자원은 종족 별로 존재하는 일꾼 유닛(테란의 ‘SCV’, 프로토스의 ‘프로브’, 저그의 ‘드론’)을 통해 채취할 수 있다. 베스핀 가스는 베스핀 간헐천 위에 가스 채집을 위한 건물을 건설해야 채취할 수 있다. 한 번씩 채취할 때 마다 8의 수치가 축적된다. 게임에는 유닛의 생산을 한정 짓는 한계 수치가 존재한다. 이 한계 수치는 테란의 ‘서플라이 디포’와, 프로토스의 ‘파일런’과 같은 지원 관장 건물을 건설해서 늘릴 수 있다. 저그의 경우 지원용 건물이 아니라 수송 유닛인 ‘오버로드’를 통해 한계 수치를 늘린다. 기본적으로 최대 유닛 단위는 종족 당 200으로 한정되어 있다.하지만 프로토스의 다크 아칸을 사용할 경우 200을 넘길 수는 있긴 하지만 그럴 일은 딱히 없다. (어차피 다크 아칸 자체를 잘 사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토스의 스카웃만큼 버림받은 유닛이다.) 상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다양한 전략을 수립해야 하고, 적의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각종 업그레이드와 기지 확장을 통한 효율적인 자원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종족별로 저마다의 특징이 있어 그것이 전략 수립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서로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자신의 움직임에 속임수를 넣는 심리전도 중요하다) 달라진 점.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의 또 다른 게임인 "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향상되었다. 워크래프트에서의 종족들은 특수능력과 업그레이드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였을 뿐 거의 성격이 같았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워 윈드에서 사용된 각 종족의 불균형을 해결하는 방식을 사용해 워크래프트보다 향상된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 종족은 저마다의 개성적인 일면을 가진다. 처음 발매될 당시에는 세 종족 간에 약간의 불균형이 있었지만, 확장 팩과 약 스무 번에 걸친 패치로 지금은 종족 간 균형이 비교적 잘 맞추어져 있다. 블리자드에서 1998년에 출시한 스타크래프트의 확장 팩인 에서는 본편과 이어지는 캠페인과 함께 종족 별로 새로운 유닛들과 업그레이드들이 추가되었다. 종족의 특성. 스타크래프트에는 테란, 저그, 프로토스 세 종족이 있다. 이 세 종족은 각자 특유한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유닛의 생김새만 다르고 큰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던 타 전략시뮬레이션에 비해 인구수 관리, 건설, 유닛 생산 등의 기본 시스템부터 각 종족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이 인기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게임플레이 시 운영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는데, 테란은 수비 위주의 정면 싸움 중심, 저그는 게릴라 위주의 속도전 중심, 프로토스는 양쪽 특성을 포괄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테란(Terran). 테란은 인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종족이다. 원래는 개발 중이었던 게임 산산조각난 국가(Shattered Nations)에 등장하려고 했으나 무기한 연기로 인하여 취소되어 이곳에서 테란이라는 종족으로 등장했다. 스토리에 의하면 서기 24세기 지구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범죄자가 늘어나서 멸망할 지경에 지구는 강대국연합연맹(UPL)을 중심으로 뭉친다. 그들은 한 프로젝트를 계획하는데, 사형할 범죄자나 반정부인사, 복제인간 등을 4대의 우주선에 태워 지구에서 내보내는 것이였다. 이 중 세이렌고 호는 파괴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고, 남은 3대가 코프룰루 구역에 정착한 것이 테란의 시작이다. 건물은 건설 가능한 땅이 있으면 지을 수 있으며, 대다수는 공중에 띄울 수도 있다. 다만 피해를 많이 입어 체력 게이지가 붉은색이 되었을 때에는 공격이 없어도 계속 손상되어 결국엔 파괴되기 때문에 재빨리 건설로봇으로 수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저그의 디파일러가 사용하는 기술 '플레이그'에 약하다. 저그만큼은 아니지만 테란도 배틀크루저, 사이언스 베슬, 발키리를 빼면 유닛의 하나하나는 비교적 약한 편이고, 대부분 이동 속도가 느린 편이다. 크게 마린, 메딕, 파이어뱃, 고스트등의 생체 유닛(일명 바이오닉 유닛을 가리킨다.)과 그보다 생산 시간이 길고 공격력이 강한 기계(일명 메카닉 유닛을 가리킨다.)유닛으로 나뉘며, 기계 유닛이 많이 모일수록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게 된다. 대다수 유닛이 원거리 공격을 하기 때문에 컨트롤이 많이 필요하고, 따라서 손이 많이 가는 종족이다. 후반에 고스트와 전투순양함 체제를 같이 쓰려면 과학 시설 건물을 두 개 지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고스트의 경우는 기계 유닛을 무력화시키는 락다운과 핵이란 무기를 통해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다만 핵을 쏠려면 사이언스 퍼실리티에다 코버드 옵스를 에드온하고 커맨드 센터에다 뉴클리어 사일로를 건설하여서 핵을 생산해야 가능하다. 배틀크루저는 강력한 필살 마법 무기인 야마토 건도 가지고 있다. 테란의 건물과 유닛의 체력은 자동 회복이 불가능하지만 기계 유닛과 건물은 건설로봇의 수리로, 생체 유닛은 확장팩 추가 유닛인 메딕의 치료를 통해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 중재자의 '리콜' 기술이나 저그의 나이더스 커널 건물 같은 대규모 유닛을 순간적으로 이동·수송하는 방법이 테란에게는 없고, 지상방어의 측면에서는 저그의 지하 군체나 프로토스의 광자포 같은 구조물과는 다르게 테란은 방어 유닛을 생산하여 배치해야만 공격이 가능한 건물 '벙커'를 이용해야 한다. 테란이 다른 종족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는 소리가 많지만, 테란도 약점에 잘못 걸리면 지는 종족이 되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테란은 세 종족 중 유닛과 건물의 체력이 가장 약한 종족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조, 회복, 건물 수리 및 방해 스킬도 존재한다. 메딕의 경우에는 레스토레이션 외에 상대 유닛의 시야를 차단하는 옵티컬 플레어도 존재한다. 저그(Zerg). 에일리언을 연상시키는 우주 괴물인 저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설정에 의하면 프로토스의 창조주 젤나가가 프로토스의 실패를 바탕으로 창조한 종족이 저그이고, 개체 하나하나가 자아를 가지고 있는 프로토스와는 반대로 저그는 단 하나의 자아 의식을 가진 초월체(Overmind)를 중심으로 수많은 개체가 군단을 구성한다. 저그가 특정 지역에 정착하면 '점막'(크립)이라고 불리는 생체 물질이 주위 지면을 뒤덮는다. 저그는 이 점막 위에만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종족은 그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점막은 해처리와 같은 중앙 건물에 의해 최초 생성되고 점막 군체로 확장된다. 자원 수집 역할과 애벌레를 만들어 내 유닛을 생산하도록 하는 부화장의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이것은 테란의 병영과 프로토스의 관문 같은 유닛 생산 건물이 따로 필요하다는 점과 매우 대조적이며, 저그는 다른 종족보다 더 속도감 있게 게임이 진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처음에 오버로드라는 공중 유닛이 주어지기 때문에 초반 정찰에 유용하다. 또한 테란 건설로봇의 건물 건설과 프로토스 프로브의 건물 워프와 달리 저그의 일꾼 유닛인 드론은 자신이 건물로 직접 변태한다. 결국 건물 건설을 위해서는 드론 하나를 희생할 수 밖에 없다. 유닛 하나하나가 적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약해서 쉽게 죽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생산시간이 짧아 빠르게 충족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 이동속도가 매우 빨라 기동성의 측면에서 타 종족에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체력이 자동으로 회복이 되는 특징도 있으나, 그 속도가 매우 느리다. 타 종족은 건물로 인구수를 충족시키는 반면 저그는 유닛인 오버로드가 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공격을 받아 죽는 경우에 인구수에 차질이 생긴다. 또한 타 종족에 비해 저그는 울트라리스크와 디바우러를 빼곤 나머지 유닛들은 생존력이 매우 낮아 타 종족의 유닛들에 비해 쉽게 죽는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테란의 전투순양함이나 프로토스의 우주모함만큼 막강한 유닛은 없지만 대신 유닛의 필요 인구수 수치가 낮아 개체수를 타 종족보다 가장 많이 운용할 수 있고, 테란과 프로토스에는 없는 0.5 짜리 인구수 유닛(스커지, 저글링)도 저그에만 존재한다. 저그는 엄청난 물량으로 상대를 이기는 종족이다. 프로토스(Protoss).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외계종족 프로토스 역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설정에 의하면 젤나가가 아이어에서 살고 있는 종족에서 '최초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들에게 젤나가의 모든 것을 부여하여 탄생한 종족이 회복 기사, 암흑 기사이다. 암흑 기사는 체력도 회복 가능하다. (하지만 프로토스 종족들은 머리가 비상하며, 계속해 거듭하는 진화를 통해 자신들의 창조주인 젤나가의 존재까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젤나가가 이 종족을 버렸다는 시나리오이다.) 유닛의 기본능력(공격력, 방어력, 체력)이 매우 뛰어나서 강력한 편이지만, 생산 시간이 길고 가격이 비싸며 타 종족들보다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기동성은 여러 가지 이동 속도 업그레이드를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유닛 크기와 피해 형태. 유닛 크기(Unit Size)와 피해 형태(Damage Type)는 서로 다른 유닛간의 강하고 약한 상성 관계를 설계하는 데 사용된 모델이다. 스타크래프트에 존재하는 모든 유닛은 대형, 소형, 중형 중 하나로 구분된다. 이들 구분은 유닛이 어떤 피해 형태를 가진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느냐를 결정한다. 일반형 공격은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유닛에게 100% 피해를 준다. 진동형 공격은 소형 유닛에게 100%의 피해를, 중형 유닛에게 50%의 피해만을, 대형 유닛에게 25%의 피해만을 준다. 폭발형 공격은 소형 유닛에게 50%의 피해만을, 중형 유닛에게 75%의 피해만을, 대형 유닛에게 100%의 피해를 준다. 2가지 자원. 스타크래프트에서는 광물(Minerals)과 베스핀 가스(Vespene Gas)라는 두 가지 형태의 자원을 지원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더욱 전략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광물에 비해 베스핀 가스는 희소성도 있고, 노동력을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는다. 보통 광물은 7~10 덩어리가 주어진다. 광물 하나를 채취하면 8씩 늘어난다. 여러 일꾼 유닛이 하나의 광물을 동시에 채취할 수는 없다. 대신에 자원 채취가 끝나면 다른 일꾼이 바로 달라붙어 자원을 캐므로 일꾼이 많을수록 자원채취의 공백이 안 생기므로 짧은 시간동안 많은 자원을 충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 덩어리당 2.5기의 일꾼이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그러니 너무 많으면 효율성도 떨어진다. 베스핀 가스와 마찬가지로 광물도 한계 지점이 있지만, 베스핀 가스가 자원 기지 당 1개소에서만 캘 수 있는 것에 비해서 여러 덩어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광물을 모으는 일꾼 유닛이 많아질수록 단위시간당 채취 자원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또 다른 자원인 베스핀 가스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나의 베스핀 가스 채취구에는 일꾼 유닛을 한번에 3기 까지(특정 방향은 4기) 배치하는 것이 가장 채취량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이상 일꾼 유닛을 투입해도 채취량은 올라가지 않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베스핀 가스의 단위 시간당 채취량은 항상 일정하다. 게다가 베스핀 가스는 무한한 양을 채취할 수 있으나, 일정 정도 수집 후에는 채취 가능한 양이 8에서 2로 줄어든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베스핀 가스는 광물에 비해 항상 부족하다. 때문에 베스핀 가스의 채취량을 늘리려면 베스핀 가스 채취구가 있는 자원 기지를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더욱이 게임에 등장하는 강력한 고급 유닛들은 대부분 많은 베스핀 가스를 필요로 한다. 멀티플레이어.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게이밍 서비스인 배틀넷을 통해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할 수 있다. 한 게임에서 최대 여덟 명이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고, 사람 대신 컴퓨터 플레이어를 인원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플레이어 간에 동맹을 맺어 협동 플레이도 가능하며, 한 쪽의 숫자가 부족한 핸디캡 경기를 가질 수도 있다. 배틀넷에서 유즈 맵 세팅을 제외한 모든 게임은 조기에 게임이 종료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승/패가 기록으로서 남게 되는데, 간혹 네트워크 연결상의 문제로 게임이 종료되면 DISC(Disconnected)로 표시될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 역시 배틀넷 상에서 편법적인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해킹 프로그램이 존재하는데, 블리자드는 이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를 발견하면 자사의 모든 배틀넷 망으로부터 그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래더 랭킹 시스템. 밀리 (melee) 게임은 랭킹에 기록되는 게임으로, 인증 받은 전용 맵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다. 공정한 게임을 위해 해킹 방지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게임이 별개의 서버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무한 맵' 등 인증되지 않은 맵으로는 밀리 게임을 할 수 없다. 사용자들의 실력을 고려하여 공정하고 편리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스타크래프트 밀리 랭킹 시스템은 발매 초기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으며 밀리 랭킹 시스템을 이용한 대회 진행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4년 1월에 래더 (ladder) 랭킹 시스템을 폐지하였다. 2017년 8월 15일에 출시 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서 새로워진 래더 랭킹 시스템이 개선되었고, 전국 PC방의 순위도 기록하게 되는 전용 래더 랭킹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1.19패치에서도 적용되었다. 서버. 스타크래프트 멀티플레이어 시스템을 배틀넷이라고 하며 배틀넷 서버는 공식적으로 Asia, US East, US West, Europe 4개 서버가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 사설서버인 Fish 서버와 Brain 서버가 있다. 사용자는 사설 서버를 이용하기 위해 레지스트리 설정을 수정해서 서버에 접속할 수 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 1.18 패치가 이루어지면서 사설 서버였던 피쉬 서버가 레지스트리 설정 없이 자동으로 등록되었다. 1.19패치 이후로 아시아 서버의 분리작업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플레이어를 위한 Korea 서버와 일본/중국/대만 등 기타 아시아 국가를 위한 Asia 서버로 분리되었다. 따라서 2017년에 이르러 접속 가능한 배틀넷 서버는 U.S. West, U.S. East, Europe, Korea, Asia, Fish (Korea) 6개 서버가 있다. 그러나 피쉬커뮤니케이션측은 10월 1일부터 서비스 종료되어 서버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스타에디터. 스타크래프트 에디터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게임 내 탑재된 스타크래프트 캠페인 에디터(Campagin Editor)가 있다. 많은 초보 맵 개발자가 사용하지만 기능의 한계를 문제로 이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은 세디터(SSEditor), 스타포지(Star Forge) 등의 고급에디터를 많이 사용한다. 리마스터 발매 이후 역언덕, 넓은 언덕 등이 기본 에디터에 내장되었고, 여러 기능의 추가로 고급에디터를 굳이 설치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쓸만한 수준으로 기본 에디터가 발전했지만 시간이 지나 기본 에디터가 삭제되었다. 사용자 제작 지도. 스타에디트()라는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설치되는 맵을 만들거나 편집할 수 있는 도구로 트리거(Trigger)라는 개념을 통해 특정한 논리를 사용자 맵 내에 삽입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타크래프트의 멀티플레이 네트워크의 명칭인 배틀넷에서는 본래의 스타크래프트 게임과는 관계 없는 '유즈 맵 세팅(Use Map Settings)'이라는 별개의 게임이 성행한다. 이들 게임은 유닛의 이름, 속도, 공격력, 방어력, 체력, 생산비용, 생산시간, 업그레이드 시간, 보유 에너지량 등을 변경할 수 있다. 영향. 대한민국에서의 성공과 영향. 《스타크래프트》는 1998년 출시된 오래된 게임이지만, 2016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의 하나로 꼽혔다. 또한 《스타크래프트》는 대한민국에 PC방을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 7월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스타크래프트 리그인 KPGL이 개최되었으며, 1999년 4월 KPGL과 PKO의 양대 리그가 성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활성화하였다. 이를 계승한 온게임넷과 MBC 게임은 2011년까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2002년부터는 스타리그의 프로게이머 중에서는 연봉이 2억이 넘는 선수가 최초로 생겼고, 기업들의 광고와 후원도 많아졌다. 2004년 7월 SKY 프로 리그 2004 결승전에서는 10만 명의 관중이 모여 그 인기를 증명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수많은 RTS 게임들이 스타크래프트를 누르기 위해 도전했으나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실패를 기록했다. 다른 매체. 《스타크래프트》는 그 설정과 줄거리, 인물 등을 활용한 공식 소설과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또한 만화가 김성모가 스타크래프트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이 작품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드라군 놀이가 유행하였다. 2000년 경에는 신해철, 허니패밀리, 남궁연 등이 참여해서 스타크래프트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음반이 나오기도 하였다. 게다가 스프라이트를 이용하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로부터 공인받아 제작한 E스포츠 만화《스타크래프트 에쒸비》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과거에는 스타크래프트를 소재로 한 상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후속 작품.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스타크래프트: 종족 전쟁》은 1998년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 의해 발표된 스타크래프트의 확장팩이다. 이 확장 팩에서는 새로운 캠페인과 각각의 종족에 대해 두 개의 유닛, 새 음악, 새 특수능력과 기술이 추가되었다. 캠페인은 원래 스타크래프트의 이야기, 즉 초월체가 프로토스의 태사다르에 의해 파괴당하고, 프로토스는 저그의 공격을 피해 아이어를 떠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닌텐도 64판. 2000년 6월 16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매스 미디어가 《스타크래프트》를 닌텐도 64로 이식한 《스타크래프트 64》를 공동 개발해 닌텐도를 통해 출시되었다. 이 게임은 PC용 원작과 그 확장 팩인 〈〉의 모든 맵을 담았고, 이 게임에서만 가능한 미션과 튜토리얼, 숨겨진 미션인 'Resurrection IV'도 추가되었다. 또한 온라인 멀티 플레이어 게임을 지원하지 않는 대신, 화면 분할 방식의 멀티 플레이어 기능이 포함되었다. 추가적으로, 온라인 멀티플레이 기능을 본판보다 줄였고 미션 브리핑과 컷씬도 줄였다. Resurrection IV은 저그에게 납치되었던 지구에서 온 인물 알렉세이 스투코프를 짐 레이너가 구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브루드 워 미션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닌텐도 64 익스팬션 팩을 필요로 한다. 본래에는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개발할 예정이였으나 대신 닌텐도 64로 개발되었다. 닌텐도 64판은 컨트롤러 중앙에 있는 아날로그 스틱을 이용해서 커서를 조작하는데, 이 방식이 마우스에 비해 불편했고, 온라인 기능이 없다는 점 때문에 PC판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 《스타크래프트: 고스트》(영어: StarCraft: Ghost)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하였던 1인칭 슈팅 게임으로, 스타크래프트의 설정을 기반으로 한다. 블리자드는 이 게임을 2002년에 발표했지만, 2006년 3월 24일 게임의 개발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곧 블리자드는 개발 중인 게임 목록에서 이 게임을 지웠고, 웹페이지도 삭제했다. 주인공으로 설정된 여성 유령요원 노바는 에서 나온다. 스타크래프트 II. 《스타크래프트 II》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공식적인 스타크래프트의 후속작으로 개발한 PC 게임으로, 2007년 5월 19일 서울에서 개최된 2007 블리자드 월드와이드 인비테이셔널(WWI; World Wide Invitational)에서 스타크래프트2 중 프로토스가 공개되었다. 마침내 2010년 7월 27일 정식 출시가 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9월 18일을 기준으로 오픈베타가 끝나고, 정식으로 출시되었다. 2013년 3월 12일 확장팩인 군단의 심장이 출시되고, 2015년 11월 10일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확장팩인 공허의 유산이 출시되었다. 이후 DLC로 노바의 비밀작전이 출시되었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영어: StarCraft: Remastered)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1년 6개월동안의 비밀 리마스터 작업 끝에 2017년 3월 26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아이 러브 스타크래프트 행사에서 중대 발표를 통해 세계최초로 공개되었다. 기존작과 달리 SD 스프라이트가 HD 스프라이트로 전환하게 되었고, 16:9 HD와 4K UHD까지 지원한다. 한국어를 포함한 13개국 언어를 지원하고 클래식 베틀넷 계정과 현재의 베틀넷 계정까지 연동이 가능하다. 기존 스타크래프트 엔솔로지는 무료로 배포되며, 리마스터 업그레이드판은 유료로 2017년 8월 15일에 출시되었다. 수상. 다음은 《스타크래프트》가 세계 게임 매체들로부터 상을 받고 평가받은 내역이다. 대표적인 수상 실적만 표기하였으며 전체 수상 내역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수상 목록 페이지에 정리되어 있다. 블리자드의 저작권 논란. 대한민국 내에서 열리는 스타크래프트 관련 경기 대회는 다른 국가에서는 블리자드가 직접 대회를 주관한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 e-스포츠협회에서 주관한 것으로, 블리자드는 이것을 문제삼아 e-스포츠협회와 대회 중계방송사에 지적재산권 보상을 요구해왔으나 e-스포츠협회와 대회 중계방송사 측은 거절하였으며 대회 진행을 강행했다.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다만 비영리 게임대회에 대해서는 지적저작권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결국 블리자드는 2010년 10월 28일 서울지방법원에 MBC플러스미디어(MBC GAME)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다음해에 블리자드가 소송을 취하하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저작권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어 11월 3일에는 온미디어(현CJ E&M)(온게임넷)를 대상으로 저작권 침해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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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90
그레고리 하인스
그레고리 올리버 하인즈(Gregory Oliver Hines, 1946년 2월 14일 ~ 2003년 8월 9일)는 미국인 배우이자 춤꾼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그 세대의 최고의 탭댄서로 생각하고 있다. 뉴욕주 뉴욕 태생으로, 하인즈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형에게서 탭댄싱을 배웠다. 5살이 되었을 때부터 형과 춤으로 돈을 벌었으며, 유명한 활동 무대는 할렘의 아폴로 극장이었다. 그는 영화 백야(White Nights)에서의 연기로 가장 유명할 것이다. 다른 출연작품으로는 커튼 클럽(The Cotton Club), Running Scared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다수의 TV 시리즈 물에도 출연했다. 그는 여러 번 토니상 후보에 올랐었고, 1992년 뮤지컬 "Jelly's Last Jam."으로 토니상을 수상한다. 하인즈는 암으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57년의 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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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93
고트롭 프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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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96
시삽
시삽()은 전자 게시판(BBS)이나 온라인 서비스 가상 공동체 등 다중 사용자 컴퓨터 시스템의 관리자이다. 기타 인터넷 기반 네트워크 서비스들의 관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스템 운영자()의 줄임말이며, 시솝, 시샵 이라고도 한다. 사용자들과의 창구 역할을 맡고, 시스템 상의 문제를 고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용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등의 일을 한다. 본래 기술자를 지칭하는 용어인 이 말은, 1989년 케텔의 등장 이후 PC통신 동호회들의 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오프라인에서 "동호회장"으로 불렸을 말을 "동호회 시삽"으로 부른 것인데, 처음에는 PC통신 서비스 운영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가 동호회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동호회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확장된 것이다. 이 당시의 동호회는 PC통신 내부의 단체로서 서비스 회사와 '운영계약'을 체결하는 형식을 취하여, 동호회 시스템을 할당해주는 형태였고 해당 시스템의 관리자 ID도 발급되었다. (하이텔의 경우 k2****, 천리안은 ZS**** 형식으로 ****부분은 동호회 인덱스로 된 ID였다.) 따라서, 동호회 운영진은 동호회의 동호회 내에서는 시스템 관리자의 역할도 맡게 되므로 시삽으로 지칭된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동호회 운영자들을 "삽질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불렀는데, 시삽의 "삽"에서 말을 따온 것이다. '삽질'이란 표현은 쓸데없는 노력을 일컫는 유머스러운 속어로도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