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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불가리아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불가리아의 역사История на България 오드뤼사이 왕국(기원전 460년 ~ 기원후 46년) 대불가리아(632년 ~ 668년) 볼가 불가르(7세기 ~ 1240년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년 ~ 1018년) 기독교화 황금기(896년 ~ 927년) 코미토풀리 왕조(968년 ~ 1018년) 비잔티움령 불가리아(1018년 ~ 1185년) 불가리아 제2제국(1185년 ~ 1396년) 제2의 황금기(1230년 ~ 1241년) 몽골의 침입(1274년 ~ 1300년) 복구와 팽창(1300년 ~ 1371년) 불가리아-오스만 전쟁(1371년 ~ 1396년) 오스만령 불가리아(1396년 ~ 1878년) 독립운동(1762년 ~ 1878년) 독립전쟁(1877년 ~ 1878년) 불가리아 공국(1879년 ~ 1908년) 불가리아 왕국(1908년 ~ 1946년) 발칸 전쟁(1912년 ~ 1913년) 제1차 세계 대전(1915년 ~ 1918년) 제2차 세계 대전(1941년 ~ 1945년) 공산 불가리아(1946년 ~ 1990년) 전환기(1990년 ~ 현재) v • d • e • h 불가리아의 역사는 불가리아인들의 역사와 그들의 기원을 포함하여 현대 불가리아 지역의 정착에서 민족 국가 형성까지에 이른다. 기원전 44,000년경 오늘날 불가리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기원전 5,000년경 이미 정교한 문명이 존재하였고 도자기와 보석이 생산되었다. 이후 기원전 3,000년경에 트라키아인들이 발칸 반도에 등장하였고, 기원전 500년경 그들은 오드뤼사이 왕국을 건국하여 번영하였으나 곧 쇠퇴하고 트라키아인들은 마케도니아의 지배 하에 놓였다. 632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불가르족[1] 이 흑해 근교에서 쿠브라트의 주도하에 대불가리아로 알려진 국가를 세웠다. 하자르 칸국의 압박 속에 대불가리아는 7세기 후반에 분열되었다. 쿠브라트의 아들 중 한명인 아스파루흐는 몇몇 불가르 부족을 이끌고 도나우 강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소스키타이와 모에시아 지역을 정복하여 발칸 반도 내에서 그의 새로운 왕국을 확장하였다.[2] 681년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플리스카를 수도로 정하여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작이 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트라키아의 유민들과 불가르족 치하의 슬라브족들이 모여 있었고, 상호 동화가 천천히 시작되었다. 이후 세기에 불가리아는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발칸 반도를 지배하였고, 이는 고유한 민족 정체성 형성과 이어졌다.[3] 민족적이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은 같은 종교, 문화, 문자를 통해 통합되었고 이는 외세의 침략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보존하였다. 11세기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은 루스와 비잔티움 제국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고, 1185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아센 왕가의 페터르와 아센 형제가 주도하여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이 성립되어 불가리아 국가가 부활하였다. 1230년에 절정을 맞은 후 불가리아는 많은 이유들, 특히나 다방면에서의 외세의 끊임없는 침입에 시달리게 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돼지치기 출신의 이바일로가 주도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 그는 차르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은 불가리아 국가의 통합에 핵심적이었다. 1300년 이후 중흥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1371년 내분으로 불가리아가 세 국가로 분열하면서 끝이 났다. 1396년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였다. 튀르크에 의해 불가리아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제거된 후, 불가리아는 억압과 지적 정체, 실정의 시기를 맞았고 불가리아의 문화를 파괴하고 500년 가까이 유럽과 격리되게 만들었다. 몇몇 문화적 유산은 이를 채택하고 발전시킨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00년대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부활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불가리아 귀족들은 사라졌고, 농촌 사회와 함께 조금이지만 도시의 중산층도 성장하였다. 19세기에 불가리아 르네상스는 독립을 위한 노력의 핵심이 되었지만 1876년 4월 봉기가 실패하면서 끝이 났고, 그 결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여 불가리아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산스테파노 조약은 서구 열강들에게 거부되어 베를린 회의의 결과로 불가리아의 영토는 모에시아와 소피아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이는 국경선 밖의 많은 불가리아인들을 남겼고, 이는 불가리아의 지역 전쟁에서의 군사 활동을 제한하였고 양 대전에서 독일에 대한 충성하게 만들었다. 2차 대전 이후 불가리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토도르 지브코프에게 35년 간 통치되었다. 이 시기 불가리아의 경제 성장은 1980년대에 들어 정체 상태에 들어섰고, 결국 중앙유럽 전체에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함과 동시에 국가의 발전의 전환점을 맞았다. 1990년대의 일련의 위기들은 불가리아의 산업과 농업을 뒤흔들어 놓았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불가리아는 2004년 나토에 가입하였고 2007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목차 1 선사시대 2 고대 2.1 남슬라브족 2.2 불가르족 2.3 대 불가리아 (605년 ~ 642년) 3 중세 3.1 불가리아 제1제국 (681년 ~ 1018년) 3.1.1 크리스트교화 3.2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1018년 ~ 1185년) 3.3 불가리아 제2제국 (1185년 ~ 1396년) 3.3.1 오스만 제국의 침입 4 오스만 제국의 지배 (1396년 ~ 1878년) 4.1 오스만 통치 4.2 4월 봉기와 러시아-튀르크 전쟁(1870년대) 5 근대 5.1 불가리아 자치 공국 (1878년 ~ 1908년) 5.2 불가리아 왕국 (1908년 ~ 1945년) 6 현대 6.1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45년 ~ 1989년) 6.2 불가리아 공화국 (1990년 ~ 현재) 7 함께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선사시대[편집] 오늘 날의 불가리아에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기원전 4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000년 경에 이미 정교하게 발달한 문명이 존재하여 몇몇 도자기들과 보석을 남겼다. 기원전 3000년 이후 트라키아인들이 발칸 반도에 등장하였다. 기원전 500년 경 트라키아인들은 오드뤼사이 왕국을 세워 번영하였으나 곧 마케도니아, 켈트인,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들의 혼혈은 서기 500년 경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되는 슬라브족에게 동화되었다. 고대[편집] 남슬라브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남슬라브족입니다. 슬라브족은 6세기 전역에 동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서슬라브족, 동슬라브족, 남슬라브족의 세 분파로 갈라졌다. 가장 동쪽의 남슬라브족은 6세기 동안에 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에 정착하였다. 대부분의 트라키아인들은 그리스화되거나 로마화된 상태였고, 마지막 남은 무리들은 5세기까지 외곽 지역에 남아있었다.[4] 동쪽의 남슬라브족 집단은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이 그들을 합병할 때까지 대부분의 트라키아인들과 동화되었다.[5] 대불가리아. 볼가 불가르. 불가르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르족입니다. 불가르족은 2세기부터 북부 카프카스 지역의 스텝 지대와 볼가 강 유역에 거주했던 중앙아시아를 기원으로 하는 튀르크계 반유목민족의 후예였다. 그들의 일파가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국하였다. 불가르족들은 세습적인 칸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은 군사 직위를 가진 귀족 계층이 지배 계급을 형성하였다. 불가르족은 다신교를 신봉하였지만 주로 최고 신격인 텡그리를 숭배하였다. 대 불가리아 (605년 ~ 642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대 불가리아입니다. 632년 쿠브라트 칸은 세개로 갈라져있던 불가르족을 통합하였고, 이 국가는 후대에 대 불가리아(Great Bulgaria)라고 불렸다. 이 국가는 서쪽으로는 도나우 강 하류, 남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 해, 동쪽으로는 쿠반 강, 남쪽으로는 도네츠 강에 이르렀다. 수도는 아조프 해의 파나고리아였다. 635년, 쿠브라트 칸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불가르 왕국을 발칸 지역까지 확장시켰다. 이후, 쿠브라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에게 귀족 칭호를 받았다. 불가르 왕국은 쿠브라트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다. 하자르족과의 몇차례 전쟁 끝에, 불가르족은 결국 패배하여 각지로 이주하였고 주로 5세기부터 불가르족이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으로 거주하고 있던 서쪽의 발칸 지역으로 탈출하였다. 쿠브라트의 계승자 중 한명인 코트락은 아홉 불가리아 부족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해 현재의 러시아 지역은 볼가 강 유역에 정착하였고, 7세기 후반 볼가 불가르 왕국을 세웠다. 볼가 불가르는 아랍, 노르만족, 아바르족과의 무역에서 독점을 형성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이후 북부 지역의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볼가 불가르는 몽골 제국의 첫 침입을 격퇴해내면서 유럽을 10년 간 보호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몽골의 무수한 침입은 볼가 불가르를 파괴하였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아시아 지역에 노예로 팔렸다. 쿠브라트의 또 다른 계승자이자 코트락의 계승자였던 아스파루흐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베사라비아 지역 남부를 장악하였다. 680년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아스파루흐의 칸국은 소 스키티아 지역까지 정복하였고, 681년 비잔티움 제국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 해는 오늘날 불가리아의 성립으로 간주되며 아스파루흐는 첫번째 불가리아의 통치자로 간주된다. 아스파루흐의 형제인 쿠베르가 세운 또다른 칸국은 판노니아 지방에 정착하였다.[6] 중세[편집] 불가리아 제1제국 (681년 ~ 1018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제1제국입니다. 불가리아 제1제국. 8세기 초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에게 남부 아랍 세력의 침입에 대한 연합을 제의하였다. 이 연합은 아랍 세력을 패퇴시켰고 테르벨은 '황제 다음가는 인물'을 뜻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칭호 '카이사르'를 받았다. 크룸 칸의 재위 기간(802-814)에 불가리아는 북동부와 남부로 팽창하여, 도나우 강과 몰도바 강 중류 지역(현재의 루마니아)을 점령하였고, 809년에는 소피아를, 812년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였다. 크룸은 가난을 줄이기 위한 법제 개혁을 실시하여 그의 국가 내에 유대감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오무르타그 칸의 치세(814-831) 동안 프랑크 왕국과의 도나우 강 중류 국경 지역은 굳건히 정착되었다. 화려한 궁궐, 이교 사원, 통치자의 거주지, 요새, 성채, 급수 시설, 목욕 시설들이 석재와 벽돌을 이용하여 수도 플리스카에 지어졌다. 크리스트교화[편집] 보리스 1세의 치세에 불가리아는 크리스트교 국가가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플리스카에 독립적인 불가리아 수좌주교구를 허용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선교사 키릴과 메토디 형제를 중심으로 글라골 문자가 슬라브 세계에 전파되었으며, 886년부터 불가리아는 이를 채택하였다. 글라골 문자와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886년 보리스 1세가 프레슬라프와 오흐리드에 설립한 문예 학교를 중심으로 문학적, 문화적으로 발전하였다. 10세기 초에는 새로운 문자인 키릴 문자가 프레슬라프 문예 학교에서 개발되었다.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반, 불가리아는 남쪽으로는 에피루스와 테살리아, 서쪽으로는 보스니아, 북쪽으로는 오늘날 루마니아 전역과 동부 헝가리까지 팽창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불가리아에 종속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받은 차르 시메온 1세(시메온 대제)의 치하에 불가리아는 다시금 비잔티움 제국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의 팽창 정책은 그의 주요 동맹인 지역 내의 유목민들과 연합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시메온은 비잔티움 제국의 외교와 정치 문화 원리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유목민족 사회 구조로 변화시키려 하였다.[7]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불가리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로 즉위하고자 하였고, 그의 긴 재위 기간(893-927) 동안 비잔티움 제국과 계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의 치세 말기에 불가리아의 영토는 남쪽으로는 펠로폰네소스에 이르렀고, 당대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시메온은 자신을 교황으로부터 받은 칭호인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차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수도 프레슬라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이벌로 불렸고[8][9], 불가리아 정교회는 초기 크리스트교의 5명의 총대주교 이후 첫번째 독립 수좌대주교가 되었고, 불가리아어로 번역된 성경이 슬라브 세계 전역에 확산되었다.[10] 시메온의 사후, 불가리아는 크로아티아인, 마자르족, 페체네그인과 세르비아인들과의 전쟁으로 약화되었고 이단인 보고밀주의가 확산되었다.[11][12] 루스와 비잔티움 제국의 연이은 침입의 결과로 971년에는 프레슬라프가 비잔티움 제국에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13] 사무일의 치세에, 불가리아는 다소 세력을 회복하였고 세르비아와 두클랴를 정복하는데 힘썼다.[14] 986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십여 년 간 이어진 전쟁 끝에 1014년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고, 4년 후 원정은 끝이 났다. 1018년 마지막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죽음과 함께 불가리아 귀족들은 비잔티움 제국에 복속하였다.[15] 하지만, 불가리아는 독립을 상실하였으며 170여년 간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국가의 멸망과 함께, 불가리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밑에 편성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오흐리드 대주교를 통제하였다.[16]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1018년 ~ 1185년)[편집] 비잔티움 제국 지배 하의 처음 10년 간은 어떠한 저항이나 반란의 움직임이 없었다. 크라크라, 니클리차, 드라가슈와 같은 비잔티움 제국에 위협적인 적들을 고려하면 그러한 소극성은 설명하기 힘들다. 몇몇 역사가들은[17] 이를 바실레이오스 2세가 불가리아 귀족들의 충성을 위해 타협을 한 결과로 설명하였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 과거 국경선을 분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아르콘이나 스트라테고이 등의 비잔티움 작위를 받은 불가리아 귀족들의 지역내 특권을 폐지하지 않았다. 또한 바실레이오스 2세의 특별 헌장은 불가리아의 오흐리드 대주교의 자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 경계를 설정하여 사무일 시대의 주교 확장 범위와 그들의 자산과 다른 특권들을 인정하였다. 바실레이오스 2세 사후 비잔티움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040년, 페터르 델얀이 조직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불가리아 국가를 회복하는데는 실패하였고 그는 살해당했다. 얼마 뒤, 콤네노스 왕조가 계승하여 제국의 쇠퇴를 막았다.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은 안정과 발전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1180년 마지막 유능한 콤네노스 황제였던 마누엘 1세가 사망하고 상대적으로 무능한 앙겔로스 왕조로 바뀌었고, 몇몇 불가리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185년 페터르와 아센 형제의 주도하에 불가리아인, 왈라키아인, 쿠만족이 섞인 반란이 일어났다.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 제국의 독립을 인정하여야 했다. 페터르는 자기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왈라키아인의 차르"로 칭했다. 불가리아 제2제국 (1185년 ~ 1396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제2제국입니다. 불가리아 제2제국. 부활한 불가리아의 영토는 흑해와 도나우 강, 발칸 산맥에 이르렀으며, 동부 마케도니아와 베오그라드, 모라바 계곡을 포함하였다. 또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통제권을 행사하였다.[18] 차르 칼로얀의 재위 기간(1197-1207)에 로마 교황과 연합하였고, 비록 그는 "황제"나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차르"의 칭호로 인정받길 원했지만 왕(Rex)의 칭호를 인정받았다. 그는 1204년 이후 제4차 십자군 및 라틴 제국과 전쟁을 벌여, 트라키아의 대부분과 로도피 산맥 근교, 마케도니아 전역을 정복하였다.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칼로얀은 라틴 제국에게 승리를 거두였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헝가리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서부와 북서부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반 아센 2세의 재위 기간(1218-1241)에 불가리아는 다시 한번 지역내의 강국으로 떠올랐으며, 베오그라드와 알바니아를 점령하였다. 1230년 수도 터르노보에 남긴 비문에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실한 차르이자 아센의 아들인 불가리아인의 전제군주"로 자신을 칭하였다. 123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인정 하에 불가리아 수좌주교구가 복구되었고, 교황과의 연합도 끝이 났다. 이반 아센 2세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군주로 명성을 얻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서방 세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과 교류하였다. 수도 터르노보는 중요한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로 성장하여 쇠퇴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신해 "제 3의 로마"로 불렸다.[19]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대제 때와 같이, 이반 아센 2세의 영토는 세 바다(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까지의 마지막 성채였던 메데아까지 병합하여 1235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하였다.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아센 왕조가 단절된 1257년부터 내부 갈등,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의 계속적인 공격과 몽골 제국의 침입에 직면하면서 쇠퇴하였다.[5][20] 정치적 혼란은 더해갔고, 불가리아는 점차적으로 영토를 잃었다. 이는 1280년 돼지치기 출신의 농민 이바일로의 반란을 불러왔고, 이바일로는 차르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제위에 즉위하기도 하였다.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재위 기간 1300-1322)의 시대에 다시 중흥을 맞기도 하였으나 1330년 불가리아는 벨버즈드 전투에서 세르비아에게 대패하였고, 이후 발칸 반도의 주도권은 세르비아에게로 넘어 갔다. 오스만 제국의 침입[편집] 14세기 약화된 불가리아 제국은 1354년부터 유럽에 진출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1371년, 봉건 영주들 간의 다툼으로 불가리아 제국은 3분열-비딘, 터르노보, 도브루자-하였고, 몇몇 반독립적인 공국들과 비잔티움 제국, 헝가리, 세르비아와 베네치아 및 제노바까지 뒤엉켜 전쟁을 벌였다. 분열되고 약해진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큰 저항이 되지 못했다. 1362년 오스만 제국은 플로프디프를 점령했으며, 1382년에는 소피아를 점령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로 관심을 돌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393년 오스만 제국은 3달 간의 포위 끝에 터르노보를 점령하였다. 1396년에는 비딘 또한 점령되었으며, 제 2차 불가리아 제국과 불가리아의 독립은 끝났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396년 ~ 1878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오스만령 불가리아입니다. 1393년 오스만 제국은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인 터르노보를 3달 간의 포위 끝에 함락시켰다. 1396년에는 비딘도 니코폴리스 전투 끝에 점령당하였다. 이와 함께 오스만 제국은 마침내 불가리아를 정복하였다.[4][21][22] 1444년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를 주축으로 결성된 폴란드-헝가리 십자군이 불가리아와 발칸 반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조직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전사하였다. 새로운 권력은 불가리아의 통치 기구를 해체하였고, 비록 1767년까지 오흐리드에 작지만 자치권이 있는 불가리아 주교가 있었으나 불가리아 교회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병합시켰다. 오스만 튀르크는 반란을 막기 위해 중세 불가리아의 요새들을 파괴하였다. 오스만 지배하에 많은 지역들이 인구가 감소하였다.[23] 오스만 튀르크는 일반적으로 크리스트교 신자들에게 이슬람교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들은 종교적으로 관용 정책을 취한듯 보였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로도피 지역에서 많은 강제적인 개인적, 집단적 개종의 사례가 존재하였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불가리아인들은 포마치(Помаци)라고 불렸고,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면서 이슬람교의 옷과 관습을 받아들였다.[4][22] 포마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25][26] 오스만 통치[편집] 오스만 제국의 체제는 17세기부터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붕괴하였다. 중앙 정부는 점점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몇몇 지역에서 지방 통치자들이 개인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27] 18세기 후반의 20년과 19세기 전반의 10년 간 발칸 반도는 실질적인 전제군주들에게 분할되었다.[4][28] 불가리아에서는 이 시기를 커르잘리(Кърджалии)라고 불리는 튀르크 군벌 세력에게 통치된 시기로 보며 커르잘리국(Кърджалийствот) 시대로 부른다.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농촌에서 인근 마을과 언덕, 숲으로 달아났으며 몇몇은 도나우 강을 넘어 몰다비아, 왈라키아, 남부 러시아로까지 이주하였다.[4][28] 오스만 제국의 쇠퇴 속에서 점진적인 불가리아 문예 부흥이 일어났고, 이는 민족 해방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19세기 몇몇 지역에서는 점차 상황이 나아졌다. 가브로보, 트랴브나, 카를로보, 코프리슈티챠, 로베치, 스코페와 같은 몇몇 도시는 발전하였다. 불가리아 농민들은 비록 공식적으로는 술탄의 소유하였지만 그들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19세기에는 통신과 교통, 무역도 발전하였다. 1834년 슬리벤에 불가리아 최초의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1865년에는 루세와 바르나를 연결하는 첫 철도가 부설되었다. 불가리아 민족주의는 19세기 초반 프랑스 혁명 이후 그리스를 통해 서구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유입되면서 형성되었다. 1821년 그리스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는 불가리아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리스의 영향은 그리스의 통제 하에 놓여있던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분노에 제한되었고 이는 처음으로 불가리아 민족주의 감정이 일어난 것이었다. 1870년 술탄의 칙령에 이해 불가리아 주교구가 만들어졌고 첫 주교인 안팀 1세는 자연스럽게 불가리아 민족 해방의 리더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불가리아 주교를 파문하였으며 이는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강화하였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투쟁은 불가리아 혁명 중앙 위원회(BRCK)의 주도로 발발하였으며 내부 혁명 조직(VRO)의 바실 레프스키, 흐리스토 보테프, 류벤 카라벨로프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4월 봉기와 러시아-튀르크 전쟁(1870년대)[편집] 1876년 4월 불가리아인들은 4월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조잡하게 조직되었고 예정 시기 이전에 시작되었다. 이는 비록 북부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슬리벤 지역도 동참하였지만 플로프디프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봉기는 이는 바쉬-바조크라고 하는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군에게 분쇄당하였다. 많은 마을들이 약탈당하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하였고, 대부분은 플로프디프 지역의 바타크, 페루슈티챠, 브라치고보 등의 반란자들이었다. 이 학살은 자유주의적인 유럽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불가리아 학살"에 대한 원정을 개시하였다. 이 원정은 유럽 지식인들과 유명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큰 반향은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유럽에서 4월 봉기에 대한 대중적인 격렬한 반응은 1876년-1877년 강대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로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회담 결정에 대한 거부는 러시아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오랜 기간의 목적 실현을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기회를 주었다. 1877년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불가리아인들은 러시아의 편에 서서 싸웠다. 러시아군은 플레벤의 쉬프카 가도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으며 1878년 1월 불가리아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근대[편집] 불가리아 공국. 불가리아 자치 공국 (1878년 ~ 1908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공국입니다. 불가리아의 독립의 불을 당긴것은 1876년에 일어난 대봉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과잉 진압으로 불가리아 참사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일어났다. 전근대적이고 낙후적인 군사 시스템을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대패하였다. 이 전쟁 이후 맺어진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가 완전히 독립했고 불가리아에는 동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합친 대불가리아 자치 공국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한 열강은 베를린 회의에서 불가리아의 영토를 북부 지방에만 한정시켰다. 그러나 1885년 동루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의 조카였던 알렉산더르 대공은 불가리아의 영토를 늘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동루멜리아를 합병하였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일어났지만(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그는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친러시아파 장교들의 쿠데타로 알렉산더르 대공은 퇴위하고, 뒤를 이어 도이치계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페르디난드 1세가 즉위하였다. 페르디난드 1세는 1894년 '불가리아의 비스마르크'라 불리던 수상 스테판 스탐볼로프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통치기에 불가리아는 190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였다. 불가리아 왕국 (1908년 ~ 1945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왕국입니다. 불가리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가 왕국을 선포한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 1차 발칸 전쟁에서 승리한 불가리아는 남부 트라키아 지방과 마케도니아 지방의 일부를 얻었으나 마케도니아를 얻으려는 욕심에 1913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발칸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오스만 제국까지 가세하여 불가리아는 패배하였고, 서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 세르비아에게, 동트라키아는 오스만에게 할양해야 했다. 결국 이 전쟁은 당시 국제 정세와 맞물려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고, 1차 대전에서 도이치 제국 편에 붙었던 불가리아는 패배하여 페르디난드 1세는 퇴위하고 아들인 보리스 3세가 뒤를 이었다. 보리스 3세는 1923년 민주정을 대표하던 농민당의 알렉산다르 스탐볼리스키 총리를 암살하고 청년장교들과 경찰들의 도움을 얻어서 독재정치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의 나치와 동맹을 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편에 섰다. 그러나 1943년, 히틀러와 격렬한 논쟁 끝에 불가리아로 돌아가던 그는 나치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어린 아들 시메온 2세가 즉위했으나 그는 소련군에게 쫓겨나고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4년 소련군이 침입하고 공산당의 파르티잔 투쟁이 본격화되어 동년 10월 양측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29] 현대[편집]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45년 ~ 1989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입니다. 1946년 수립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좌익정부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1947년 인민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다.[29]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1949년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그뒤에 체르벤코프가 후임에 올랐으나 1952년 실권자는 토도르 지프코프가 되었다. 1954년 정권을 이양받은 지프코프 이후 불가리아는 동구권의 대표적인 친소노선을 나타냈다.[29] 그는 1962년 총리직에 올라 정권을 장악한뒤 1965년 군부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친소노선을 펼쳤다. 그리고 산업화를 서서히 추진하여 불가리아의 경제력을 향상시켰고, 실제로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의 원인은 비교적 온건했던 지프코프의 노선과 소련의 강력한 지원이 밑바탕되었던 것이었다. 소련 및 동구제국과의 우호협력관계 유지가 외교 기조인 불가리아는 경제계획 추진을 위해 1970년부터 대서방 접근을 보였으나 친소노선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1971년 헌법개정으로 최고권력기관인 국가평의회가 신설되어 지프코프가 의장(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29] 그러나 1980년대 개혁, 개방의 물결이 불가리아를 덮쳤고, 결국 1989년 지프코프가 퇴임하고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공산주의 붕괴를 맞았다. 불가리아 공화국 (1990년 ~ 현재)[편집] 1990년 1월에 공산당은 다당제 정치체제를 승인했다. 그해 8월에 불가리아의회는 민주세력연합의 젤류 젤레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29] 지프코프 퇴임후 불가리아 공산당(BCP)은 불가리아 사회당(BSP)로 개명하고 1990~1991년의 기간 동안 안드레이 루카노프가 취임했으나 곧 그가 사임하고 디미타르 포포프가 과도 내각을 이끌었다. 그러나 대선에서 젤류 젤레프가 중심이 된 민주세력연합(UDP)가 승리하여 필리프 디미트로프가 총리에, 젤류 젤레프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필리프 디미트로프는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해 1992년 결국 무당파의 루벤 베로프가 집권하였으며, 1995년에 BSP가 승리하여 잔 비데노프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비데노프 내각은 대통령선거에서 UDP의 페타르 스토야노프에게 패배하고 사임하였다. 그 뒤 총리직에는 이반 코스토프가 1997~2001의 기간 동안 집권하고 이어 전(前)국왕 시메온 2세가 2001년 시메온 2세 국민운동당(MNSII)으로 승리하여 2005년까지 집권하였고, 2005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하여 세르게이 스타니셰프가 취임했다. 2009년 7월 총선에서 유럽발전시민당(GERB)가 승리하여 보이코 보리소프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대통령직은 2001년 이후 게오르기 파르바노프가 집권하여 2012년까지 재임하였다. 함께 보기[편집] 불가리아의 군주 각주[편집] ↑ "Bulgar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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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Net. 2011년 10월 22일에 확인함. И така, през пролетта на 1018 г. "партията на капитулацията" надделяла, а Василий II безпрепятствено влязъл в тогавашната българска столица Охрид.  (in Bulgarian) ↑ Encyclopedia Britannica, Bulgaria. ↑ Zlatarski, vol. II, pp. 1–41 ↑ “Войните на цар Калоян (1197 - 1207 г.) (in Bulgarian)” (PDF).  ↑ Ivanov, Lyubomir (2007). 《ESSENTIAL HISTORY OF BULGARIA IN SEVEN PAGES》. Sofia: Bulgarian Academy of Sciences. 4쪽. 2011년 10월 26일에 확인함. The capital Tarnovo became a political, economic, cultural and religious center seen as 'the Third Rome' in contrast to Constantinople's decline after the Byzantine heartland in Asia Minor was lost to the Turks during the late 11th century.  ↑ The Golden Horde Archived 2011년 9월 16일 - 웨이백 머신, Library of Congress Mongolia country study. Accessed 4 Decem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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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pchick: The Balkans: from Constantinople to Communism, 2002 ↑ 가 나 다 라 마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불가리아의 역사 WWW-VL: History: Bulgaria Essential History of Bulgaria in Seven Pages vdeh유럽의 역사 독립국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라트비아 러시아[* 1]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바티칸 시국 벨기에 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2]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3]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제르바이잔[* 1] 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영국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2] 조지아[* 1] 체코 카자흐스탄[* 1]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3] 터키[* 1]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속령 건지섬 멘섬 스발바르 제도 아크로티리 데켈리아[* 3] 올란드 제도 저지섬 지브롤터 페로 제도 체첸 공화국 인구시 공화국 다게스탄 공화국 아디게야 공화국 미승인국 아르차흐 공화국[* 3] 남오세티야[* 1] 북키프로스[* 3] 압하지야[* 1] 트란스니스트리아 노보로시야 연방국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일부 영토가 아시아에도 속한다. ↑ 가 나 일부 영토가 아프리카에도 속한다. ↑ 가 나 다 라 마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불가리아의_역사&oldid=23915828" 분류: 불가리아불가리아의 역사숨은 분류: CS1 - 마케도니아어 인용 (mk)CS1 - 불가리아어 인용 (bg)불가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Ido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mburgs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TürkçeУкраїнськаWalon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6일 (화) 02: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불가리아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불가리아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불가리아의 역사История на България 오드뤼사이 왕국(기원전 460년 ~ 기원후 46년) 대불가리아(632년 ~ 668년) 볼가 불가르(7세기 ~ 1240년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년 ~ 1018년) 기독교화 황금기(896년 ~ 927년) 코미토풀리 왕조(968년 ~ 1018년) 비잔티움령 불가리아(1018년 ~ 1185년) 불가리아 제2제국(1185년 ~ 1396년) 제2의 황금기(1230년 ~ 1241년) 몽골의 침입(1274년 ~ 1300년) 복구와 팽창(1300년 ~ 1371년) 불가리아-오스만 전쟁(1371년 ~ 1396년) 오스만령 불가리아(1396년 ~ 1878년) 독립운동(1762년 ~ 1878년) 독립전쟁(1877년 ~ 1878년) 불가리아 공국(1879년 ~ 1908년) 불가리아 왕국(1908년 ~ 1946년) 발칸 전쟁(1912년 ~ 1913년) 제1차 세계 대전(1915년 ~ 1918년) 제2차 세계 대전(1941년 ~ 1945년) 공산 불가리아(1946년 ~ 1990년) 전환기(1990년 ~ 현재) v • d • e • h 불가리아의 역사는 불가리아인들의 역사와 그들의 기원을 포함하여 현대 불가리아 지역의 정착에서 민족 국가 형성까지에 이른다. 기원전 44,000년경 오늘날 불가리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기원전 5,000년경 이미 정교한 문명이 존재하였고 도자기와 보석이 생산되었다. 이후 기원전 3,000년경에 트라키아인들이 발칸 반도에 등장하였고, 기원전 500년경 그들은 오드뤼사이 왕국을 건국하여 번영하였으나 곧 쇠퇴하고 트라키아인들은 마케도니아의 지배 하에 놓였다. 632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불가르족[1] 이 흑해 근교에서 쿠브라트의 주도하에 대불가리아로 알려진 국가를 세웠다. 하자르 칸국의 압박 속에 대불가리아는 7세기 후반에 분열되었다. 쿠브라트의 아들 중 한명인 아스파루흐는 몇몇 불가르 부족을 이끌고 도나우 강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소스키타이와 모에시아 지역을 정복하여 발칸 반도 내에서 그의 새로운 왕국을 확장하였다.[2] 681년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플리스카를 수도로 정하여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작이 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트라키아의 유민들과 불가르족 치하의 슬라브족들이 모여 있었고, 상호 동화가 천천히 시작되었다. 이후 세기에 불가리아는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발칸 반도를 지배하였고, 이는 고유한 민족 정체성 형성과 이어졌다.[3] 민족적이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은 같은 종교, 문화, 문자를 통해 통합되었고 이는 외세의 침략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보존하였다. 11세기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은 루스와 비잔티움 제국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고, 1185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아센 왕가의 페터르와 아센 형제가 주도하여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이 성립되어 불가리아 국가가 부활하였다. 1230년에 절정을 맞은 후 불가리아는 많은 이유들, 특히나 다방면에서의 외세의 끊임없는 침입에 시달리게 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돼지치기 출신의 이바일로가 주도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 그는 차르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은 불가리아 국가의 통합에 핵심적이었다. 1300년 이후 중흥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1371년 내분으로 불가리아가 세 국가로 분열하면서 끝이 났다. 1396년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였다. 튀르크에 의해 불가리아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제거된 후, 불가리아는 억압과 지적 정체, 실정의 시기를 맞았고 불가리아의 문화를 파괴하고 500년 가까이 유럽과 격리되게 만들었다. 몇몇 문화적 유산은 이를 채택하고 발전시킨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00년대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부활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불가리아 귀족들은 사라졌고, 농촌 사회와 함께 조금이지만 도시의 중산층도 성장하였다. 19세기에 불가리아 르네상스는 독립을 위한 노력의 핵심이 되었지만 1876년 4월 봉기가 실패하면서 끝이 났고, 그 결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여 불가리아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산스테파노 조약은 서구 열강들에게 거부되어 베를린 회의의 결과로 불가리아의 영토는 모에시아와 소피아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이는 국경선 밖의 많은 불가리아인들을 남겼고, 이는 불가리아의 지역 전쟁에서의 군사 활동을 제한하였고 양 대전에서 독일에 대한 충성하게 만들었다. 2차 대전 이후 불가리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토도르 지브코프에게 35년 간 통치되었다. 이 시기 불가리아의 경제 성장은 1980년대에 들어 정체 상태에 들어섰고, 결국 중앙유럽 전체에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함과 동시에 국가의 발전의 전환점을 맞았다. 1990년대의 일련의 위기들은 불가리아의 산업과 농업을 뒤흔들어 놓았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불가리아는 2004년 나토에 가입하였고 2007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목차 1 선사시대 2 고대 2.1 남슬라브족 2.2 불가르족 2.3 대 불가리아 (605년 ~ 642년) 3 중세 3.1 불가리아 제1제국 (681년 ~ 1018년) 3.1.1 크리스트교화 3.2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1018년 ~ 1185년) 3.3 불가리아 제2제국 (1185년 ~ 1396년) 3.3.1 오스만 제국의 침입 4 오스만 제국의 지배 (1396년 ~ 1878년) 4.1 오스만 통치 4.2 4월 봉기와 러시아-튀르크 전쟁(1870년대) 5 근대 5.1 불가리아 자치 공국 (1878년 ~ 1908년) 5.2 불가리아 왕국 (1908년 ~ 1945년) 6 현대 6.1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45년 ~ 1989년) 6.2 불가리아 공화국 (1990년 ~ 현재) 7 함께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선사시대[편집] 오늘 날의 불가리아에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기원전 4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000년 경에 이미 정교하게 발달한 문명이 존재하여 몇몇 도자기들과 보석을 남겼다. 기원전 3000년 이후 트라키아인들이 발칸 반도에 등장하였다. 기원전 500년 경 트라키아인들은 오드뤼사이 왕국을 세워 번영하였으나 곧 마케도니아, 켈트인,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들의 혼혈은 서기 500년 경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되는 슬라브족에게 동화되었다. 고대[편집] 남슬라브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남슬라브족입니다. 슬라브족은 6세기 전역에 동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서슬라브족, 동슬라브족, 남슬라브족의 세 분파로 갈라졌다. 가장 동쪽의 남슬라브족은 6세기 동안에 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에 정착하였다. 대부분의 트라키아인들은 그리스화되거나 로마화된 상태였고, 마지막 남은 무리들은 5세기까지 외곽 지역에 남아있었다.[4] 동쪽의 남슬라브족 집단은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이 그들을 합병할 때까지 대부분의 트라키아인들과 동화되었다.[5] 대불가리아. 볼가 불가르. 불가르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르족입니다. 불가르족은 2세기부터 북부 카프카스 지역의 스텝 지대와 볼가 강 유역에 거주했던 중앙아시아를 기원으로 하는 튀르크계 반유목민족의 후예였다. 그들의 일파가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국하였다. 불가르족들은 세습적인 칸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은 군사 직위를 가진 귀족 계층이 지배 계급을 형성하였다. 불가르족은 다신교를 신봉하였지만 주로 최고 신격인 텡그리를 숭배하였다. 대 불가리아 (605년 ~ 642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대 불가리아입니다. 632년 쿠브라트 칸은 세개로 갈라져있던 불가르족을 통합하였고, 이 국가는 후대에 대 불가리아(Great Bulgaria)라고 불렸다. 이 국가는 서쪽으로는 도나우 강 하류, 남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 해, 동쪽으로는 쿠반 강, 남쪽으로는 도네츠 강에 이르렀다. 수도는 아조프 해의 파나고리아였다. 635년, 쿠브라트 칸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불가르 왕국을 발칸 지역까지 확장시켰다. 이후, 쿠브라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에게 귀족 칭호를 받았다. 불가르 왕국은 쿠브라트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다. 하자르족과의 몇차례 전쟁 끝에, 불가르족은 결국 패배하여 각지로 이주하였고 주로 5세기부터 불가르족이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으로 거주하고 있던 서쪽의 발칸 지역으로 탈출하였다. 쿠브라트의 계승자 중 한명인 코트락은 아홉 불가리아 부족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해 현재의 러시아 지역은 볼가 강 유역에 정착하였고, 7세기 후반 볼가 불가르 왕국을 세웠다. 볼가 불가르는 아랍, 노르만족, 아바르족과의 무역에서 독점을 형성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이후 북부 지역의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볼가 불가르는 몽골 제국의 첫 침입을 격퇴해내면서 유럽을 10년 간 보호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몽골의 무수한 침입은 볼가 불가르를 파괴하였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아시아 지역에 노예로 팔렸다. 쿠브라트의 또 다른 계승자이자 코트락의 계승자였던 아스파루흐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베사라비아 지역 남부를 장악하였다. 680년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아스파루흐의 칸국은 소 스키티아 지역까지 정복하였고, 681년 비잔티움 제국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 해는 오늘날 불가리아의 성립으로 간주되며 아스파루흐는 첫번째 불가리아의 통치자로 간주된다. 아스파루흐의 형제인 쿠베르가 세운 또다른 칸국은 판노니아 지방에 정착하였다.[6] 중세[편집] 불가리아 제1제국 (681년 ~ 1018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제1제국입니다. 불가리아 제1제국. 8세기 초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에게 남부 아랍 세력의 침입에 대한 연합을 제의하였다. 이 연합은 아랍 세력을 패퇴시켰고 테르벨은 '황제 다음가는 인물'을 뜻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칭호 '카이사르'를 받았다. 크룸 칸의 재위 기간(802-814)에 불가리아는 북동부와 남부로 팽창하여, 도나우 강과 몰도바 강 중류 지역(현재의 루마니아)을 점령하였고, 809년에는 소피아를, 812년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였다. 크룸은 가난을 줄이기 위한 법제 개혁을 실시하여 그의 국가 내에 유대감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오무르타그 칸의 치세(814-831) 동안 프랑크 왕국과의 도나우 강 중류 국경 지역은 굳건히 정착되었다. 화려한 궁궐, 이교 사원, 통치자의 거주지, 요새, 성채, 급수 시설, 목욕 시설들이 석재와 벽돌을 이용하여 수도 플리스카에 지어졌다. 크리스트교화[편집] 보리스 1세의 치세에 불가리아는 크리스트교 국가가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플리스카에 독립적인 불가리아 수좌주교구를 허용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선교사 키릴과 메토디 형제를 중심으로 글라골 문자가 슬라브 세계에 전파되었으며, 886년부터 불가리아는 이를 채택하였다. 글라골 문자와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886년 보리스 1세가 프레슬라프와 오흐리드에 설립한 문예 학교를 중심으로 문학적, 문화적으로 발전하였다. 10세기 초에는 새로운 문자인 키릴 문자가 프레슬라프 문예 학교에서 개발되었다.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반, 불가리아는 남쪽으로는 에피루스와 테살리아, 서쪽으로는 보스니아, 북쪽으로는 오늘날 루마니아 전역과 동부 헝가리까지 팽창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불가리아에 종속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받은 차르 시메온 1세(시메온 대제)의 치하에 불가리아는 다시금 비잔티움 제국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의 팽창 정책은 그의 주요 동맹인 지역 내의 유목민들과 연합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시메온은 비잔티움 제국의 외교와 정치 문화 원리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유목민족 사회 구조로 변화시키려 하였다.[7]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불가리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로 즉위하고자 하였고, 그의 긴 재위 기간(893-927) 동안 비잔티움 제국과 계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의 치세 말기에 불가리아의 영토는 남쪽으로는 펠로폰네소스에 이르렀고, 당대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시메온은 자신을 교황으로부터 받은 칭호인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차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수도 프레슬라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이벌로 불렸고[8][9], 불가리아 정교회는 초기 크리스트교의 5명의 총대주교 이후 첫번째 독립 수좌대주교가 되었고, 불가리아어로 번역된 성경이 슬라브 세계 전역에 확산되었다.[10] 시메온의 사후, 불가리아는 크로아티아인, 마자르족, 페체네그인과 세르비아인들과의 전쟁으로 약화되었고 이단인 보고밀주의가 확산되었다.[11][12] 루스와 비잔티움 제국의 연이은 침입의 결과로 971년에는 프레슬라프가 비잔티움 제국에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13] 사무일의 치세에, 불가리아는 다소 세력을 회복하였고 세르비아와 두클랴를 정복하는데 힘썼다.[14] 986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십여 년 간 이어진 전쟁 끝에 1014년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고, 4년 후 원정은 끝이 났다. 1018년 마지막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죽음과 함께 불가리아 귀족들은 비잔티움 제국에 복속하였다.[15] 하지만, 불가리아는 독립을 상실하였으며 170여년 간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국가의 멸망과 함께, 불가리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밑에 편성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오흐리드 대주교를 통제하였다.[16]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1018년 ~ 1185년)[편집] 비잔티움 제국 지배 하의 처음 10년 간은 어떠한 저항이나 반란의 움직임이 없었다. 크라크라, 니클리차, 드라가슈와 같은 비잔티움 제국에 위협적인 적들을 고려하면 그러한 소극성은 설명하기 힘들다. 몇몇 역사가들은[17] 이를 바실레이오스 2세가 불가리아 귀족들의 충성을 위해 타협을 한 결과로 설명하였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 과거 국경선을 분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아르콘이나 스트라테고이 등의 비잔티움 작위를 받은 불가리아 귀족들의 지역내 특권을 폐지하지 않았다. 또한 바실레이오스 2세의 특별 헌장은 불가리아의 오흐리드 대주교의 자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 경계를 설정하여 사무일 시대의 주교 확장 범위와 그들의 자산과 다른 특권들을 인정하였다. 바실레이오스 2세 사후 비잔티움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040년, 페터르 델얀이 조직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불가리아 국가를 회복하는데는 실패하였고 그는 살해당했다. 얼마 뒤, 콤네노스 왕조가 계승하여 제국의 쇠퇴를 막았다.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은 안정과 발전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1180년 마지막 유능한 콤네노스 황제였던 마누엘 1세가 사망하고 상대적으로 무능한 앙겔로스 왕조로 바뀌었고, 몇몇 불가리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185년 페터르와 아센 형제의 주도하에 불가리아인, 왈라키아인, 쿠만족이 섞인 반란이 일어났다.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 제국의 독립을 인정하여야 했다. 페터르는 자기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왈라키아인의 차르"로 칭했다. 불가리아 제2제국 (1185년 ~ 1396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제2제국입니다. 불가리아 제2제국. 부활한 불가리아의 영토는 흑해와 도나우 강, 발칸 산맥에 이르렀으며, 동부 마케도니아와 베오그라드, 모라바 계곡을 포함하였다. 또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통제권을 행사하였다.[18] 차르 칼로얀의 재위 기간(1197-1207)에 로마 교황과 연합하였고, 비록 그는 "황제"나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차르"의 칭호로 인정받길 원했지만 왕(Rex)의 칭호를 인정받았다. 그는 1204년 이후 제4차 십자군 및 라틴 제국과 전쟁을 벌여, 트라키아의 대부분과 로도피 산맥 근교, 마케도니아 전역을 정복하였다.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칼로얀은 라틴 제국에게 승리를 거두였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헝가리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서부와 북서부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반 아센 2세의 재위 기간(1218-1241)에 불가리아는 다시 한번 지역내의 강국으로 떠올랐으며, 베오그라드와 알바니아를 점령하였다. 1230년 수도 터르노보에 남긴 비문에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실한 차르이자 아센의 아들인 불가리아인의 전제군주"로 자신을 칭하였다. 123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인정 하에 불가리아 수좌주교구가 복구되었고, 교황과의 연합도 끝이 났다. 이반 아센 2세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군주로 명성을 얻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서방 세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과 교류하였다. 수도 터르노보는 중요한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로 성장하여 쇠퇴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신해 "제 3의 로마"로 불렸다.[19]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대제 때와 같이, 이반 아센 2세의 영토는 세 바다(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까지의 마지막 성채였던 메데아까지 병합하여 1235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하였다.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아센 왕조가 단절된 1257년부터 내부 갈등,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의 계속적인 공격과 몽골 제국의 침입에 직면하면서 쇠퇴하였다.[5][20] 정치적 혼란은 더해갔고, 불가리아는 점차적으로 영토를 잃었다. 이는 1280년 돼지치기 출신의 농민 이바일로의 반란을 불러왔고, 이바일로는 차르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제위에 즉위하기도 하였다.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재위 기간 1300-1322)의 시대에 다시 중흥을 맞기도 하였으나 1330년 불가리아는 벨버즈드 전투에서 세르비아에게 대패하였고, 이후 발칸 반도의 주도권은 세르비아에게로 넘어 갔다. 오스만 제국의 침입[편집] 14세기 약화된 불가리아 제국은 1354년부터 유럽에 진출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1371년, 봉건 영주들 간의 다툼으로 불가리아 제국은 3분열-비딘, 터르노보, 도브루자-하였고, 몇몇 반독립적인 공국들과 비잔티움 제국, 헝가리, 세르비아와 베네치아 및 제노바까지 뒤엉켜 전쟁을 벌였다. 분열되고 약해진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큰 저항이 되지 못했다. 1362년 오스만 제국은 플로프디프를 점령했으며, 1382년에는 소피아를 점령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로 관심을 돌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393년 오스만 제국은 3달 간의 포위 끝에 터르노보를 점령하였다. 1396년에는 비딘 또한 점령되었으며, 제 2차 불가리아 제국과 불가리아의 독립은 끝났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396년 ~ 1878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오스만령 불가리아입니다. 1393년 오스만 제국은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인 터르노보를 3달 간의 포위 끝에 함락시켰다. 1396년에는 비딘도 니코폴리스 전투 끝에 점령당하였다. 이와 함께 오스만 제국은 마침내 불가리아를 정복하였다.[4][21][22] 1444년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를 주축으로 결성된 폴란드-헝가리 십자군이 불가리아와 발칸 반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조직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전사하였다. 새로운 권력은 불가리아의 통치 기구를 해체하였고, 비록 1767년까지 오흐리드에 작지만 자치권이 있는 불가리아 주교가 있었으나 불가리아 교회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병합시켰다. 오스만 튀르크는 반란을 막기 위해 중세 불가리아의 요새들을 파괴하였다. 오스만 지배하에 많은 지역들이 인구가 감소하였다.[23] 오스만 튀르크는 일반적으로 크리스트교 신자들에게 이슬람교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들은 종교적으로 관용 정책을 취한듯 보였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로도피 지역에서 많은 강제적인 개인적, 집단적 개종의 사례가 존재하였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불가리아인들은 포마치(Помаци)라고 불렸고,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면서 이슬람교의 옷과 관습을 받아들였다.[4][22] 포마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25][26] 오스만 통치[편집] 오스만 제국의 체제는 17세기부터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붕괴하였다. 중앙 정부는 점점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몇몇 지역에서 지방 통치자들이 개인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27] 18세기 후반의 20년과 19세기 전반의 10년 간 발칸 반도는 실질적인 전제군주들에게 분할되었다.[4][28] 불가리아에서는 이 시기를 커르잘리(Кърджалии)라고 불리는 튀르크 군벌 세력에게 통치된 시기로 보며 커르잘리국(Кърджалийствот) 시대로 부른다.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농촌에서 인근 마을과 언덕, 숲으로 달아났으며 몇몇은 도나우 강을 넘어 몰다비아, 왈라키아, 남부 러시아로까지 이주하였다.[4][28] 오스만 제국의 쇠퇴 속에서 점진적인 불가리아 문예 부흥이 일어났고, 이는 민족 해방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19세기 몇몇 지역에서는 점차 상황이 나아졌다. 가브로보, 트랴브나, 카를로보, 코프리슈티챠, 로베치, 스코페와 같은 몇몇 도시는 발전하였다. 불가리아 농민들은 비록 공식적으로는 술탄의 소유하였지만 그들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19세기에는 통신과 교통, 무역도 발전하였다. 1834년 슬리벤에 불가리아 최초의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1865년에는 루세와 바르나를 연결하는 첫 철도가 부설되었다. 불가리아 민족주의는 19세기 초반 프랑스 혁명 이후 그리스를 통해 서구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유입되면서 형성되었다. 1821년 그리스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는 불가리아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리스의 영향은 그리스의 통제 하에 놓여있던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분노에 제한되었고 이는 처음으로 불가리아 민족주의 감정이 일어난 것이었다. 1870년 술탄의 칙령에 이해 불가리아 주교구가 만들어졌고 첫 주교인 안팀 1세는 자연스럽게 불가리아 민족 해방의 리더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불가리아 주교를 파문하였으며 이는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강화하였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투쟁은 불가리아 혁명 중앙 위원회(BRCK)의 주도로 발발하였으며 내부 혁명 조직(VRO)의 바실 레프스키, 흐리스토 보테프, 류벤 카라벨로프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4월 봉기와 러시아-튀르크 전쟁(1870년대)[편집] 1876년 4월 불가리아인들은 4월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조잡하게 조직되었고 예정 시기 이전에 시작되었다. 이는 비록 북부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슬리벤 지역도 동참하였지만 플로프디프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봉기는 이는 바쉬-바조크라고 하는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군에게 분쇄당하였다. 많은 마을들이 약탈당하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하였고, 대부분은 플로프디프 지역의 바타크, 페루슈티챠, 브라치고보 등의 반란자들이었다. 이 학살은 자유주의적인 유럽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불가리아 학살"에 대한 원정을 개시하였다. 이 원정은 유럽 지식인들과 유명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큰 반향은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유럽에서 4월 봉기에 대한 대중적인 격렬한 반응은 1876년-1877년 강대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로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회담 결정에 대한 거부는 러시아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오랜 기간의 목적 실현을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기회를 주었다. 1877년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불가리아인들은 러시아의 편에 서서 싸웠다. 러시아군은 플레벤의 쉬프카 가도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으며 1878년 1월 불가리아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근대[편집] 불가리아 공국. 불가리아 자치 공국 (1878년 ~ 1908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공국입니다. 불가리아의 독립의 불을 당긴것은 1876년에 일어난 대봉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과잉 진압으로 불가리아 참사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일어났다. 전근대적이고 낙후적인 군사 시스템을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대패하였다. 이 전쟁 이후 맺어진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가 완전히 독립했고 불가리아에는 동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합친 대불가리아 자치 공국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한 열강은 베를린 회의에서 불가리아의 영토를 북부 지방에만 한정시켰다. 그러나 1885년 동루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의 조카였던 알렉산더르 대공은 불가리아의 영토를 늘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동루멜리아를 합병하였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일어났지만(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그는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친러시아파 장교들의 쿠데타로 알렉산더르 대공은 퇴위하고, 뒤를 이어 도이치계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페르디난드 1세가 즉위하였다. 페르디난드 1세는 1894년 '불가리아의 비스마르크'라 불리던 수상 스테판 스탐볼로프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통치기에 불가리아는 190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였다. 불가리아 왕국 (1908년 ~ 1945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왕국입니다. 불가리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가 왕국을 선포한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 1차 발칸 전쟁에서 승리한 불가리아는 남부 트라키아 지방과 마케도니아 지방의 일부를 얻었으나 마케도니아를 얻으려는 욕심에 1913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발칸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오스만 제국까지 가세하여 불가리아는 패배하였고, 서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 세르비아에게, 동트라키아는 오스만에게 할양해야 했다. 결국 이 전쟁은 당시 국제 정세와 맞물려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고, 1차 대전에서 도이치 제국 편에 붙었던 불가리아는 패배하여 페르디난드 1세는 퇴위하고 아들인 보리스 3세가 뒤를 이었다. 보리스 3세는 1923년 민주정을 대표하던 농민당의 알렉산다르 스탐볼리스키 총리를 암살하고 청년장교들과 경찰들의 도움을 얻어서 독재정치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의 나치와 동맹을 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편에 섰다. 그러나 1943년, 히틀러와 격렬한 논쟁 끝에 불가리아로 돌아가던 그는 나치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어린 아들 시메온 2세가 즉위했으나 그는 소련군에게 쫓겨나고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4년 소련군이 침입하고 공산당의 파르티잔 투쟁이 본격화되어 동년 10월 양측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29] 현대[편집]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45년 ~ 1989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입니다. 1946년 수립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좌익정부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1947년 인민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다.[29]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1949년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그뒤에 체르벤코프가 후임에 올랐으나 1952년 실권자는 토도르 지프코프가 되었다. 1954년 정권을 이양받은 지프코프 이후 불가리아는 동구권의 대표적인 친소노선을 나타냈다.[29] 그는 1962년 총리직에 올라 정권을 장악한뒤 1965년 군부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친소노선을 펼쳤다. 그리고 산업화를 서서히 추진하여 불가리아의 경제력을 향상시켰고, 실제로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의 원인은 비교적 온건했던 지프코프의 노선과 소련의 강력한 지원이 밑바탕되었던 것이었다. 소련 및 동구제국과의 우호협력관계 유지가 외교 기조인 불가리아는 경제계획 추진을 위해 1970년부터 대서방 접근을 보였으나 친소노선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1971년 헌법개정으로 최고권력기관인 국가평의회가 신설되어 지프코프가 의장(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29] 그러나 1980년대 개혁, 개방의 물결이 불가리아를 덮쳤고, 결국 1989년 지프코프가 퇴임하고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공산주의 붕괴를 맞았다. 불가리아 공화국 (1990년 ~ 현재)[편집] 1990년 1월에 공산당은 다당제 정치체제를 승인했다. 그해 8월에 불가리아의회는 민주세력연합의 젤류 젤레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29] 지프코프 퇴임후 불가리아 공산당(BCP)은 불가리아 사회당(BSP)로 개명하고 1990~1991년의 기간 동안 안드레이 루카노프가 취임했으나 곧 그가 사임하고 디미타르 포포프가 과도 내각을 이끌었다. 그러나 대선에서 젤류 젤레프가 중심이 된 민주세력연합(UDP)가 승리하여 필리프 디미트로프가 총리에, 젤류 젤레프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필리프 디미트로프는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해 1992년 결국 무당파의 루벤 베로프가 집권하였으며, 1995년에 BSP가 승리하여 잔 비데노프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비데노프 내각은 대통령선거에서 UDP의 페타르 스토야노프에게 패배하고 사임하였다. 그 뒤 총리직에는 이반 코스토프가 1997~2001의 기간 동안 집권하고 이어 전(前)국왕 시메온 2세가 2001년 시메온 2세 국민운동당(MNSII)으로 승리하여 2005년까지 집권하였고, 2005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하여 세르게이 스타니셰프가 취임했다. 2009년 7월 총선에서 유럽발전시민당(GERB)가 승리하여 보이코 보리소프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대통령직은 2001년 이후 게오르기 파르바노프가 집권하여 2012년까지 재임하였다. 함께 보기[편집] 불가리아의 군주 각주[편집] ↑ "Bulgar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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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Net. 2011년 10월 22일에 확인함. И така, през пролетта на 1018 г. "партията на капитулацията" надделяла, а Василий II безпрепятствено влязъл в тогавашната българска столица Охрид.  (in Bulgarian) ↑ Encyclopedia Britannica, Bulgaria. ↑ Zlatarski, vol. II, pp. 1–41 ↑ “Войните на цар Калоян (1197 - 1207 г.) (in Bulgarian)” (PDF).  ↑ Ivanov, Lyubomir (2007). 《ESSENTIAL HISTORY OF BULGARIA IN SEVEN PAGES》. Sofia: Bulgarian Academy of Sciences. 4쪽. 2011년 10월 26일에 확인함. The capital Tarnovo became a political, economic, cultural and religious center seen as 'the Third Rome' in contrast to Constantinople's decline after the Byzantine heartland in Asia Minor was lost to the Turks during the late 11th century.  ↑ The Golden Horde Archived 2011년 9월 16일 - 웨이백 머신, Library of Congress Mongolia country study. Accessed 4 December 2011. Quote:"The Mongols maintained sovereignty over eastern Russia from 1240 to 1480, and they controlled the upper Volga area, the territories of the former Volga Bulghar state, Siberia, the northern Caucasus, Bulgaria (for a time), the Crimea, and Khwarizm". ↑ Lord Kinross, The Ottoman Centuries, Morrow QuillPaperback Edition, 1979 ↑ 가 나 D. Hupchick, The Balkans, 2002 ↑ Bojidar Dimitrov: Bulgaria Illustrated History. BORIANA Publishing House 2002, ISBN 954-500-044-9 ↑ René Ristelhueber, A History of the Balkan Peoples, p.27, Ardent Media, 1971 ↑ Hunter, Shireen: "Islam, Europe's second religion: the new social, cultural, and political landscape" 2002, pp.177 ↑ Poulton, Hugh: "Muslim identity and the Balkan State" 1997, pp.33 ↑ Kemal H. Karpat, Social Change and Politics in Turkey: A Structural-Historical Analysis, BRILL, 1973, ISBN 90-04-03817-5, pp. 36-39 ↑ 가 나 Dennis P. Hupchick: The Balkans: from Constantinople to Communism, 2002 ↑ 가 나 다 라 마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불가리아의 역사 WWW-VL: History: Bulgaria Essential History of Bulgaria in Seven Pages vdeh유럽의 역사 독립국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라트비아 러시아[* 1]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바티칸 시국 벨기에 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2]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3]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제르바이잔[* 1] 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영국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2] 조지아[* 1] 체코 카자흐스탄[* 1]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3] 터키[* 1]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속령 건지섬 멘섬 스발바르 제도 아크로티리 데켈리아[* 3] 올란드 제도 저지섬 지브롤터 페로 제도 체첸 공화국 인구시 공화국 다게스탄 공화국 아디게야 공화국 미승인국 아르차흐 공화국[* 3] 남오세티야[* 1] 북키프로스[* 3] 압하지야[* 1] 트란스니스트리아 노보로시야 연방국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일부 영토가 아시아에도 속한다. ↑ 가 나 일부 영토가 아프리카에도 속한다. ↑ 가 나 다 라 마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불가리아의_역사&oldid=23915828" 분류: 불가리아불가리아의 역사숨은 분류: CS1 - 마케도니아어 인용 (mk)CS1 - 불가리아어 인용 (bg)불가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Ido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mburgs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TürkçeУкраїнськаWalon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6일 (화) 02: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손진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손진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손진영기본 정보출생 1985년 10월 31일(1985-10-31) (33세)대한민국 인천직할시 (現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직업 가수 배우 방송인활동 시기 2009년 ~ 현재 종교 개신교[1]소속사 공감엔터테인먼트웹사이트 손진영 팬 클럽[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손진영 - 트위터 손진영(1985년 10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겸 연기자이다. 목차 1 생애 2 앨범 2.1 디지털 싱글 2.2 OST 2.3 오디션 3 출연작 3.1 드라마 3.2 예능 4 별명 5 각주 생애[편집] 그는 2009년 뮤지컬 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2010년 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정식 데뷔하였다. 앨범[편집] 디지털 싱글[편집] 번호 음반 정보 트랙 리스트 1 《바보라서》 발매일 : 2012년 6월 21일 바보라서 바보라서 (Inst.) 2 《진짜 사나이》 발매일 : 2013년 11월 13일 진짜 사나이 진짜 사나이 (Inst.) 3 Romantic Christmas 발매일 : 2013년 11월 28일 Romantic Christmas (With 노수람) 설레는노래 (로맨틱크리스마스) (With 노수람) Romantic Christmas (Inst.) (With 노수람) 4 《미안해》 발매일 : 2014년 6월 9일 미안해 미안해 (Inst.) 5 《한잔하자》 발매일 : 2014년 12월 9일 한잔하자 한잔하자 (Inst.) 6 GongGam Project Album 2015 발매일 : 2015년 12월 3일 하루가 멀다 (With 허공) 하루가 멀다 (Inst.) (With 허공) OST[편집] 《가족을 지켜라 OST Part 7》 (2015년) 《다시 시작해 OST Part 6》 (2016년) 《빛나라 은수 OST Part 2》 (2016년) 오디션[편집]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 (정동하, 손진영, 백청강, 이태권) 《이외수, 김태원의 청춘을 위하여》 (손진영, 백청강, 이태권) 출연작[편집] 드라마[편집] 2011년~2012년 MBC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빛과 그림자》 - 홍수봉 역 2012년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97》 - 어린 윤준혁 역 (특별출연) 2012년 MBC 일일시트콤 《엄마가 뭐길래》 - 손진영 역 2013년 MBC 수목드라마 《7급 공무원》 - 김풍언 역 2014년 MBC 《드라마 페스티벌 - 원녀일기》 - 이방 역 2015년 MBC 에브리원 《0시의 그녀》 - 광철 역 2015년 MBC 에브리원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 조선왕조실톡 시즌1》 - 수양대군 역 2016년 MBC 에브리원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시즌 2 - 조선왕조실톡 시즌2》 - 신주환 (47세) 역 예능[편집] 2010년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1》 (MBC) 2013년 《추석특집 - 스타 애정촌》 (SBS) 2013년 《일밤 - 진짜 사나이》 (MBC) 2013년 《백만장자 게임 마이턴》 (tvN) 2013년 《해피투게더 시즌 3》 (KBS2) 2014년 《퀴즈쇼 사총사》 (KBS2) 2014년 《출발드림팀 시즌 2》 (KBS2) 2014년 《비타민》 (KBS2) 2014년 《별바라기》 (MBC) 2014년 《위기탈출 넘버원》 (KBS2) 2014년 《브라질월드컵 특집 아이돌 풋살 월드컵》 (MBC) 2014년 《특별생방송 헌혈, 생명을 나눕시다》 (KBS1) 2014년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축제, 농악》 (KBS1) 2014년 《이제 만나러 갑니다》(채널A) 2015년 《청춘 익스프레스》 (KBS2) 2016년 《수상한 휴가》 (KBS2) 2016년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 전설의 포수 백두산》 (MBC) 별명[편집] 구멍 병사 2호 아니지 일병 위대한탄생 손날두 각주[편집] ↑ 종교신념 표출 자제 요청에도 “하나님 감사” 25명 조계종 종평위, 방송3사 연말시상 소감 모니터링 결과 vdeh 일밤복면가왕출연자 김성주 ,김구라 외 판정단 및 참가자 역대 종영된 코너 이경규의 양심냉장고(출연 : 이경규) 김국진의 국민투표(출연 : 김국진) 시네마 천국 이휘재의 인생 극장(출연 : 이휘재, 김원희) 신동엽의 신장개업(출연 : 신동엽) 몰래카메라(출연 : 이경규) 이경규가 간다(출연 : 이경규) 해결 대작전(출연 : 신동엽) 스타 워즈(출연 : 신동엽) 러브하우스(출연 : 신동엽, 박수홍, 윤정수) 사랑의 게릴라콘서트(출연: 김진수, 박수홍 외) 주영훈의 공포별장(출연: 주영훈) 공포 체험 스타 119(출연: 주영훈 외) 해결 대작전(출연 : 신동엽) 상상원정대(출연 : 이경규, 정형돈, 이윤석 외) 경제야 놀자!(출연 : 김용만, 조형기, 김성주, 오상진 외) 브레인 서바이버(출연 : 김용만 외) 아빠! 어디가?(출연 : 김성주, 성동일, 정웅인, 윤민수, 안정환, 류진, 김민율, 성빈, 정세윤, 윤후, 안리환, 임찬형) 대단한 도전(출연 : 이경규, 김용만, 박수홍, 윤정수, 조형기, 이윤석) 동안클럽 노다지 오빠밴드 단비 우리 아버지 헌터스 뜨거운 형제들 오늘을 즐겨라 신입사원 집드림 바람에 실려 나는 가수다 룰루랄라 꿈엔들 남심여심 승부의 신 나는 가수다 II 매직콘서트 이것이 마술이다 애니멀즈 진짜 사나이 은밀하게 위대하게 오지의 마법사 두니아 처음 만난 세계 궁민남편 가시나들 분리 편성된 코너우리 결혼했어요 세상을 바꾸는 퀴즈 나는 가수다 세모방 : 세상의 모든 방송 진짜 사나이 300 vdeh 출발드림팀 시즌 2출연자고정(반고정 포함) 박재민 최성조 쇼리 손진영 하차1 이상인 조성모 은혁 준호 민호 데니 안 상추 진온 마르코 김동준 남창희 조세호 리키 김 붐(공동 MC) 이이경 권태호 상훈 김동성 오승윤 진행자 이창명 전속 해설위원 이병진 방영 목록 출발 드림팀 시즌 2의 방영 목록 1. 고정 멤버에서 하차 포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손진영&oldid=24171415" 분류: 198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가수2009년 데뷔20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작사가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방송인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비디오 자키뮤지컬 감독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참가자대한민국의 개신교도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인천광역시 출신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10: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손진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손진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손진영기본 정보출생 1985년 10월 31일(1985-10-31) (33세)대한민국 인천직할시 (現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직업 가수 배우 방송인활동 시기 2009년 ~ 현재 종교 개신교[1]소속사 공감엔터테인먼트웹사이트 손진영 팬 클럽[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손진영 - 트위터 손진영(1985년 10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겸 연기자이다. 목차 1 생애 2 앨범 2.1 디지털 싱글 2.2 OST 2.3 오디션 3 출연작 3.1 드라마 3.2 예능 4 별명 5 각주 생애[편집] 그는 2009년 뮤지컬 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2010년 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정식 데뷔하였다. 앨범[편집] 디지털 싱글[편집] 번호 음반 정보 트랙 리스트 1 《바보라서》 발매일 : 2012년 6월 21일 바보라서 바보라서 (Inst.) 2 《진짜 사나이》 발매일 : 2013년 11월 13일 진짜 사나이 진짜 사나이 (Inst.) 3 Romantic Christmas 발매일 : 2013년 11월 28일 Romantic Christmas (With 노수람) 설레는노래 (로맨틱크리스마스) (With 노수람) Romantic Christmas (Inst.) (With 노수람) 4 《미안해》 발매일 : 2014년 6월 9일 미안해 미안해 (Inst.) 5 《한잔하자》 발매일 : 2014년 12월 9일 한잔하자 한잔하자 (Inst.) 6 GongGam Project Album 2015 발매일 : 2015년 12월 3일 하루가 멀다 (With 허공) 하루가 멀다 (Inst.) (With 허공) OST[편집] 《가족을 지켜라 OST Part 7》 (2015년) 《다시 시작해 OST Part 6》 (2016년) 《빛나라 은수 OST Part 2》 (2016년) 오디션[편집]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 (정동하, 손진영, 백청강, 이태권) 《이외수, 김태원의 청춘을 위하여》 (손진영, 백청강, 이태권) 출연작[편집] 드라마[편집] 2011년~2012년 MBC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빛과 그림자》 - 홍수봉 역 2012년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97》 - 어린 윤준혁 역 (특별출연) 2012년 MBC 일일시트콤 《엄마가 뭐길래》 - 손진영 역 2013년 MBC 수목드라마 《7급 공무원》 - 김풍언 역 2014년 MBC 《드라마 페스티벌 - 원녀일기》 - 이방 역 2015년 MBC 에브리원 《0시의 그녀》 - 광철 역 2015년 MBC 에브리원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 조선왕조실톡 시즌1》 - 수양대군 역 2016년 MBC 에브리원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시즌 2 - 조선왕조실톡 시즌2》 - 신주환 (47세) 역 예능[편집] 2010년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1》 (MBC) 2013년 《추석특집 - 스타 애정촌》 (SBS) 2013년 《일밤 - 진짜 사나이》 (MBC) 2013년 《백만장자 게임 마이턴》 (tvN) 2013년 《해피투게더 시즌 3》 (KBS2) 2014년 《퀴즈쇼 사총사》 (KBS2) 2014년 《출발드림팀 시즌 2》 (KBS2) 2014년 《비타민》 (KBS2) 2014년 《별바라기》 (MBC) 2014년 《위기탈출 넘버원》 (KBS2) 2014년 《브라질월드컵 특집 아이돌 풋살 월드컵》 (MBC) 2014년 《특별생방송 헌혈, 생명을 나눕시다》 (KBS1) 2014년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축제, 농악》 (KBS1) 2014년 《이제 만나러 갑니다》(채널A) 2015년 《청춘 익스프레스》 (KBS2) 2016년 《수상한 휴가》 (KBS2) 2016년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 전설의 포수 백두산》 (MBC) 별명[편집] 구멍 병사 2호 아니지 일병 위대한탄생 손날두 각주[편집] ↑ 종교신념 표출 자제 요청에도 “하나님 감사” 25명 조계종 종평위, 방송3사 연말시상 소감 모니터링 결과 vdeh 일밤복면가왕출연자 김성주 ,김구라 외 판정단 및 참가자 역대 종영된 코너 이경규의 양심냉장고(출연 : 이경규) 김국진의 국민투표(출연 : 김국진) 시네마 천국 이휘재의 인생 극장(출연 : 이휘재, 김원희) 신동엽의 신장개업(출연 : 신동엽) 몰래카메라(출연 : 이경규) 이경규가 간다(출연 : 이경규) 해결 대작전(출연 : 신동엽) 스타 워즈(출연 : 신동엽) 러브하우스(출연 : 신동엽, 박수홍, 윤정수) 사랑의 게릴라콘서트(출연: 김진수, 박수홍 외) 주영훈의 공포별장(출연: 주영훈) 공포 체험 스타 119(출연: 주영훈 외) 해결 대작전(출연 : 신동엽) 상상원정대(출연 : 이경규, 정형돈, 이윤석 외) 경제야 놀자!(출연 : 김용만, 조형기, 김성주, 오상진 외) 브레인 서바이버(출연 : 김용만 외) 아빠! 어디가?(출연 : 김성주, 성동일, 정웅인, 윤민수, 안정환, 류진, 김민율, 성빈, 정세윤, 윤후, 안리환, 임찬형) 대단한 도전(출연 : 이경규, 김용만, 박수홍, 윤정수, 조형기, 이윤석) 동안클럽 노다지 오빠밴드 단비 우리 아버지 헌터스 뜨거운 형제들 오늘을 즐겨라 신입사원 집드림 바람에 실려 나는 가수다 룰루랄라 꿈엔들 남심여심 승부의 신 나는 가수다 II 매직콘서트 이것이 마술이다 애니멀즈 진짜 사나이 은밀하게 위대하게 오지의 마법사 두니아 처음 만난 세계 궁민남편 가시나들 분리 편성된 코너우리 결혼했어요 세상을 바꾸는 퀴즈 나는 가수다 세모방 : 세상의 모든 방송 진짜 사나이 300 vdeh 출발드림팀 시즌 2출연자고정(반고정 포함) 박재민 최성조 쇼리 손진영 하차1 이상인 조성모 은혁 준호 민호 데니 안 상추 진온 마르코 김동준 남창희 조세호 리키 김 붐(공동 MC) 이이경 권태호 상훈 김동성 오승윤 진행자 이창명 전속 해설위원 이병진 방영 목록 출발 드림팀 시즌 2의 방영 목록 1. 고정 멤버에서 하차 포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손진영&oldid=24171415" 분류: 198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가수2009년 데뷔20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작사가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방송인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비디오 자키뮤지컬 감독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참가자대한민국의 개신교도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인천광역시 출신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10: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어머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머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엄마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어머니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엄마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엄마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어미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언어에서의 어미에 대해서는 어미 (언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캄보디아의 어머니와 자식, 2009년 촬영. 한자의 어머니 모 어머니는 자식의 여성 부모이다.[1] 엄마라고도 한다. 한국어에서 어머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나 시어머니, 장모, 또는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높여부르기 위해 쓰이는 말[2]로 자신의 살아계신 어머니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쓰지 않는다.[3]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에는 자당(慈堂)과 같은 말이 있고[3], 자신의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때에는 자친(慈親)이라고 한다.[4] 어머니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의 여성 모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1] 일반적으로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땐 모친(母親)이라고 한다.[5] 며느리를 손자의 입장에서 부를 때나 어머니가 자식에게 스스로를 낮추어 부를 때 어미라고 하고[6], 간혹 어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주해 1] 어머니는 생물학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자식을 직접 낳은 유전학적인 어머니는 생모(生母), 친어머니라고 하고, 아버지가 사별이나 이혼과 같은 이유로 새로 결혼하여 맞이한 어머니는 의붓어머니 , 계모, 새어머니와 같이 불린다. 입양된 가정의 어머니는 양어머니, 입양하지 않았더라도 후견을 하여준 경우는 수양어머니라고 한다.[7] 가족 관계에 있지 않은 경우에도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한다.[1] 과학기술의 발달로 다른 여남의 수정체를 이식하여 출산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 경우 대리모라는 명칭이 쓰인다. 대리모의 법률적 인정 여부는 국가마다 다르며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이다.[8] 목차 1 어원 2 역할과 관계 3 모성애 4 보건과 안전 5 폭력 6 예술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조주 어원[원본 편집]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이 지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비문에 阿㜷가 어머니를 가리키는 신라어라고 기록되어 있어[9] 신라 시대에 이미 어미라는 말이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할과 관계[원본 편집] 가족사회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자식을 낳고 길러 세대 재생산을 한다.[10] 인간의 아이는 미숙한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모부의 양육을 필요로 한다.[11] 인류학에서는 모부의 양육 역할에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출산은 분명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지만, 양육의 분담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일부 인류 집단에서는 양육이 여의치 않은 경우 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11] 출산과 양육, 그리고 가족 관계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생물학적 역할과 사회적 역할로 구분할 수 있다. 19세기까지도 많은 문화에서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이유로 양육의 책임을 여성 모부에게 전가하는 일이 당연시 되었다. 이마누엘 칸트는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가족 관계 내에서도 역할이 다르며 그 역할은 서로 상보적이지만 남성성이야 말로 만물의 척도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를 줄 수 없다는 차별적인 주장을 펼쳤다.[12]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18세기와 19세기의 남성 철학자들 다수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견해였다. 이들은 상보적 성 역할 이론으로 모성을 미화하고 숭배하였다. 철학의 모성 숭배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사이 정점을 찍었다.[13] 초기 여성주의 저술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모성의 관점에서 옹호하는 일도 있었으나[13], 이후 여성주의 철학은 신화적인 모성 숭배가 만들어낸 여성성인 "이상적인 모성" 이 오히려 여성에 대한 억압의 근거로 작용하였다고 지적한다.[14] 여성주의는 가부장을 정점으로 하는 공동체로 가족을 설명하는 기능주의적 묘사가 불평등을 감추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15] 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가 미화하는 이상적 모성은 강요된 것으로 현실에서는 사회 제도가 임신과 출산, 양육, 가사 노동 등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떠미는 수단이 될 뿐이라고 본다.[16] 현실에서 여성은 출산에 대해 일방적인 압박을 느끼며[17], 가족 관계 내에서 어머니의 성 역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 갈등 요소이다.[18] 그러나 제2세대 여성주의의 출현 이후 여성주의 일각에서는 모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 역시 반여성적이라는 비판도 있다.[19] 이들은 모성을 "인간적 모성"과 "가부장적 모성"으로 나누고 가부장제에 의해 이데올로기화 된 모성이 아닌 생명, 소통, 평화등을 기반으로한 인간적 모성의 실현을 강조한다.[20] 한편, 가족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계속하여 변화하고 있는데, 역사 속에서 할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 등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하고[11], 최근에는 아버지의 양육 의무가 강조되기도 한다.[21] 모성애[원본 편집] 모성애(母性愛)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을 가리킬때 사용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자녀의 출산 및 성장에 있어서 갖게되는 사랑중 여성의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이러한 모성애가 박탈되는 환경 즉 모성애박탈(母性愛剝奪)은 어린아이의 성장기 발달 초기에 어머니 또는 이러한 영향력을 제공할수있는 양육자로부터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상태. 또는 그러한 상태를 체험하는 경험으로서 아이의 장차 여성상형성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어주는 경험의 결핍으로 애착 형성 곤란, 성장 및 지적 발달 지연, 상황의 긍정적 해결에 있어서 좀더 불안정한 인식를 야기할 수 있다.[22][23] 보건과 안전[원본 편집] 임산부 사망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세계보건기구는 임산부 사망률의 집계 기준을 "여성이 임신 중에 있거나 출산, 중절, 또는 여타의 이유를 막론하고 임신이 종료 된 뒤 42일 이내에 사망한 경우"로 하고 있다.[24] 세계보건기구에서 집계되는 임산부 사망 건수 가운데 58%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29%는 남아시아에서 일어난다.[25] 세이브 더 칠드런의 2006년 조사에서는 출산 위험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스칸디나비아를 꼽았다.[26] 폭력[원본 편집]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는 폭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기원전 101년에 사망한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식 간의 왕위 문제에 개입하였다가 결국 아들에게 살해되었다.[27] 2012년 미국의 살인 사건 집계 가운데 자식이 어머니를 살해한 경우는 130건, 어머니가 자식을 살해한 경우는 383 건이었다.[28] 한국에서는 서래마을의 외국인 가정에서 일어난 영아살해 사건이 사회적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29] 예술[원본 편집] 메리 카사트 - 목욕시키는 어머니 케테 콜비츠 - 쌍둥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 어머니는 오랫 동안 예술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어 왔다. 기독교의 영향이 깊은 문화에서는 성모에 대한 숭배 전통이 있어 왔고, 이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를 표현한 다수의 예술품을 남겼다.[30] 메리 카사트는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31]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관점에서 모성을 그린 소설이다.[32] 케테 콜비츠는 전쟁이야말로 자식잃은 어미의 가장 큰 적이라고 보았고 모성을 평화의 근간으로 파악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33]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통해서 전쟁의 덧없음을 그렸다.[34] 나혜석은 《모 된 감상기》에서 자신이 자식을 낳고 기른 경험을 통해 신화로 만들어진 "본능적인 모성"을 부정하였다.[35] 같이 보기[원본 편집] 위키데이터에 관련 속성이 있습니다. 친어머니 (P25)(사용 현황)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어머니 가족 부모 아버지 부계불확실성 성 역할 임신·출산·육아 모자보건법 가족계획 양부모 아내 각주[원본 편집] 내용주[원본 편집] ↑ 어멈은 원래 어미를 대접하여 부르는 말이었지만(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낮은 계급의 나이든 여성을 가리키는 경우로도 쓰였기 때문에 현대 언어로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참조주[원본 편집] ↑ 가 나 다 어머니_0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어머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가 나 부모에 대한 호칭어·지칭어, 국립국어원 언어예절 ↑ 자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모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어미_0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조 ↑ 대리모 허용, 불허하는 국가들, 한국일보, 2015년 12월 23일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비문(1)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해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Pregnancy: Condition Information, NIH ↑ 가 나 다 한나 홈스, 박종성 역, 《인간생태보고서: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 웅진지식하우스, 2010년, ISBN 978-89-01-10807-0, 281-332쪽 ↑ 론다 쉬빈저, 조성숙 역, 《두뇌는 평등하다》, 서해문집, 2007년, ISBN 978-89-7483-327-5, 310쪽 ↑ 가 나 거다 러너,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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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다른 뜻에 대해서는 한니발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한니발의 대리석 조각상. 생애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181년? 출생지 카르타고 사망지 리빗사 별명 전략의 아버지 복무 카르타고 제국 최종 계급 카르타고 군의 총사령관 주요 참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사군툼 공성전 티키누스 전투 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에 전투 실라루스 전투 헤르도니아 전투 자마 전투 한니발 바르카(라틴어: Hannibal Barca, 그리스어: Ἀννίβας Βάρκας,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또는 기원전 181년)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지도자로, 대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니발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있었다. 또 공정한 하스드루발과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제국, 마케돈 및 시라쿠사,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국가들 모두 얼키고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다 갔다.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간 것이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 한니발은 세 차례의 전투(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에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강약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의 동맹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역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게 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함으로써 로마 최악의 적수였던 한니발을 무찌르고, 이베리아 반도에 웅거하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까지 토벌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고문관이 되었다.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다. 한니발의 도피생활은 비티니아에서 끝났고, 한니발은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어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넘겨지게 되었고,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자살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피로스와 함께 고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로 사료된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일화가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말하고 그들을 이어 세째 가는 것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댁은 자신에게 지지 않았냐는 스키피오의 물음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대왕마저 뛰어넘어 제일이 되었을 것이라 답했다.[1] 이 이야기의 또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들어가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다.[2]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한니발의 적이었던 로마마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3] 이 “전략의 아버지”라는 찬사로 한니발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반열에 드는 위대한 전략가로 여겨지게 된다. 목차 1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 2 제2차 포에니 전쟁 2.1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은 이유 2.2 한니발의 리더십 2.3 타키누스 전투 2.4 늪지대 통과 2.5 트라시메네호 전투 2.6 칸나이 전투 2.7 한니발의 몰락 2.7.1 카르타고의 군사적 패배 2.7.2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전략 2.7.3 스키피오의 전략 3 자살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편집]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어로 '천둥'을 뜻한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광산을 개발한 카르타고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여 로마를 두렵게 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의 실력을 두려워한 강경노선의 정치인이 "(로마 공화정이 카르타고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카르타고를 몰락시켜야 합니다."라고 연설할 정도였다.[4] 제2차 포에니 전쟁[편집] 한니발의 침입로를 보여주는 지도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했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9살에 로마를 쳐부술 것을 카르타고의 신 타니트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매형의 뒤를 이어,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했다.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은 이유[편집] 알프스를 넘고 있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젊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는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화가 충실히 되어 로마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였으므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였으므로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훗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은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먼 훗날의 나폴레옹에 의해 재현되나 후대의 두사람이 여름에 산맥을 넘은 것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나 나폴레옹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 이전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장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험의 정도에서 한니발이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한니발의 리더십[편집] 한니발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에 대해 역사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작전에 몰두한 한니발의 열정과 자신들을 방해하는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는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으로 복종시킨 지도력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과학자 이종호는 한니발에게 과학지식이 있었다고 본다. 고대 군인들은 갈증과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식초를 갖고 다녔는데, 한니발은 산성인 식초를 이용해서 행군을 방해하는 바위를 갈라지게 하여 제거했다는 것이다.[4] 타키누스 전투[편집]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그를 추격해 온 집정관 스키피오를 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긴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인 샘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강가에서 대파한다. 이로써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늪지대 통과[편집] 다음해인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로 싸움터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남하하는 두 가도를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게미니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봉쇄하고 있었는대 한니발은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운데에 있는 늪지대를 통과한다. 이 늪지대는 수백킬로미터에 걸쳐 무릎까지 차는 물이 고여있었고 따라서 막사를 지어 병사들이 숙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한니발은 이 늪지대를 3일 밤낮 쉬지않고 행군을 하였고, 이런 혹사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또한 행군 도중 한니발 역시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는다. 트라시메네호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편집] 위의 혹독한 행군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진입한 한니발은 서둘러 추격해온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여 매복하고 있었던 트라시메노 호숫가로 유인하는데 성공,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서 2만 7천 명의 로마 군인과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학살한다. 플라미니우스가 사망한 이후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법을 통해 한니발의 회전을 피하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는데 주력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다.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붉은색)의 파괴를 보여주는 그림 칸나이 전투[편집] 다음해에 새로 선출된 바로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만 7천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이로 향한다. 한니발은 바로와 아이밀리우스가 지휘하는 8만 7천 명의 대군에 겨우 5만 명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이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측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 으로 카르타고 군은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로마군을 7만이나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그러자 로마에게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의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 섬에마저 적을 두게 된다. 한니발의 몰락[편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흉상 카르타고의 군사적 패배[편집]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전히 카르타고와의 전쟁의 의지가 강했고, 전쟁에 쓸 수 있는 인적 자원도 풍부한 상태였다. 또한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거듭하여 한니발이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을 고갈시켰다.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스페인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형제들에게 사라고사에서 대패를 한다. 사르디냐 섬의 반란을 돕기위해 침공한 2만여의 카르타고 군은 주둔중인 로마군에 의해 전멸당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한니발이 직접 이끄는 병력에 거의 맞먹는 병력을 이끌고 있던 한노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베네벤툼에서 노예로 구성된 그라쿠스 군을 만나 의해 궤멸당한다. 칸나이 전투 이후 이들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당한 패배는 이미 칸나이에서 전사한 로마군의 수를 능가하였으며 이러한 패배는 한니발이 승기를 굳힐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전략[편집] 로마의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지구전은 보급을 방해하는 한편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은 군대엔 적극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방법이였는데 이는 곧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 들 중엔 로마 장군들에 맞먹는 지휘관이 없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이탈리아 중부에서 연승을 거듭하여 로마의 6개 군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쓸어버리는 등의 활약을 하였으나, 한니발이 이렇게 싸우는 동안 로마군은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를 겹겹이 포위한다. 한니발은 이 카푸아의 포위를 풀기 위해 주력부대로 한쪽 포위망을 급습하나 로마군은 이 공격을 물리친다. 이 포위를 풀고자 한니발은 생애 최초아지 마지막으로 로마를 직접 공격해 보지만, 로마군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지 않았고 로마의 성벽은 상당히 견고하였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를 잃고 얼마 안있어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도시도 로마군에 의해 함락된다. 그 뒤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강력한 도시인 타렌툼마저 친 로마 성향의 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편에 선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부임하여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를 완전히 격파하고, 카르타고 세력을 그 지역에서 내몰았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남아있던 자신의 병력을 모두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에 진입하나, 한니발에 앞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목숨을 잃는다. 점점 전황이 한니발에게 불리하게 되자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 끝인 칼라브리아로 쫓겨갔다. 스키피오의 전략[편집] 기원전 204년 겨우 31세에 불과한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의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왔지만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더욱 우수하게 습득한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와 자마에서 싸워 완패했다. 이 전투로 인해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종언을 맞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된다. 자살[편집] 한니발의 아내, 시밀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하던 동생, 하스드루발과 또다른 동생 마고는 로마와의 전쟁 중에 죽었으며, 자신도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아시아로 도망쳤다가 수년 후 공을 세우고 싶어한 한 로마인 백인대장이 자신을 찾는것을 알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셔 자살을 하였다. 이때 그는 향년 64세 또는 66세였다 (기원전 183년) 같이 보기[편집] 노블레스 오블리주 각주[편집] ↑ Plutarch, Life of Titus Flamininus 21.3-4. ↑ Plutarch, Life of Pyrrhus 8.2. ↑ Ayrault Dodge, Theodore (1995). 《Hannibal: A History of the Art of War Among the Carthaginians and Romans Down to the Battle of Pydna, 168 BC》. Da Capo Press.  ↑ 가 나 《과학으로 여는 세계불가사의 1 - 신과 미지의 수수께끼에 도전한 인간들의 이야기》2부 신화의 무대-8장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비밀의식 /이종호 지음/문화유람 외부 링크[편집] 네이버캐스트 - 한니발 vdeh유명한 카르타고인 디도 마고 1세 마고 (농업작가) 마고 바르카 마하르발 소포니스바 아드 헤발 카르탈로 하밀카르 (드레파눔) 하밀카르 바르카 항해자 히밀코 하스드루발 기스코 하스드루발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병대 사령관) 공정한 하스드루발 한노 대왕 항해자 한노 연장자 한노 한노(보밀카르의 아들) 한니발 바르카 한니발 기스코 한니발 모노마쿠스 한니발 (로디아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1819384 LCCN: n50034033 ISNI: 0000 0001 2129 582X GND: 118545655 SELIBR: 259709 SUDOC: 02759680X BNF: cb11960266k (데이터) ULAN: 500354945 NLA: 61542262 NDL: 00620785 NKC: jn20000700666 BNE: XX83293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니발&oldid=24184204" 분류: 기원전 247년 태어남기원전 183년 죽음카르타고의 장군육군 군인포에니 전쟁자살한 군인음독 자살한 사람애꾸눈이바르카 가한니발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8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그리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བོད་ཡིག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ಕನ್ನಡKurdî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LimburgsLumbaartLietuviųLatviešuМокшеньMalagasyBaso Minangkaba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irandésPlattdüütsch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est-Vlams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0: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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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다른 뜻에 대해서는 한니발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한니발의 대리석 조각상. 생애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181년? 출생지 카르타고 사망지 리빗사 별명 전략의 아버지 복무 카르타고 제국 최종 계급 카르타고 군의 총사령관 주요 참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사군툼 공성전 티키누스 전투 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에 전투 실라루스 전투 헤르도니아 전투 자마 전투 한니발 바르카(라틴어: Hannibal Barca, 그리스어: Ἀννίβας Βάρκας,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또는 기원전 181년)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지도자로, 대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니발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있었다. 또 공정한 하스드루발과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제국, 마케돈 및 시라쿠사,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국가들 모두 얼키고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다 갔다.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간 것이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 한니발은 세 차례의 전투(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에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강약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의 동맹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역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게 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함으로써 로마 최악의 적수였던 한니발을 무찌르고, 이베리아 반도에 웅거하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까지 토벌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고문관이 되었다.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다. 한니발의 도피생활은 비티니아에서 끝났고, 한니발은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어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넘겨지게 되었고,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자살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피로스와 함께 고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로 사료된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일화가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말하고 그들을 이어 세째 가는 것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댁은 자신에게 지지 않았냐는 스키피오의 물음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대왕마저 뛰어넘어 제일이 되었을 것이라 답했다.[1] 이 이야기의 또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들어가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다.[2]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한니발의 적이었던 로마마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3] 이 “전략의 아버지”라는 찬사로 한니발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반열에 드는 위대한 전략가로 여겨지게 된다. 목차 1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 2 제2차 포에니 전쟁 2.1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은 이유 2.2 한니발의 리더십 2.3 타키누스 전투 2.4 늪지대 통과 2.5 트라시메네호 전투 2.6 칸나이 전투 2.7 한니발의 몰락 2.7.1 카르타고의 군사적 패배 2.7.2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전략 2.7.3 스키피오의 전략 3 자살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편집]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어로 '천둥'을 뜻한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광산을 개발한 카르타고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여 로마를 두렵게 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의 실력을 두려워한 강경노선의 정치인이 "(로마 공화정이 카르타고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카르타고를 몰락시켜야 합니다."라고 연설할 정도였다.[4] 제2차 포에니 전쟁[편집] 한니발의 침입로를 보여주는 지도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했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9살에 로마를 쳐부술 것을 카르타고의 신 타니트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매형의 뒤를 이어,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했다.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은 이유[편집] 알프스를 넘고 있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젊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는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화가 충실히 되어 로마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였으므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였으므로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훗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은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먼 훗날의 나폴레옹에 의해 재현되나 후대의 두사람이 여름에 산맥을 넘은 것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나 나폴레옹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 이전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장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험의 정도에서 한니발이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한니발의 리더십[편집] 한니발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에 대해 역사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작전에 몰두한 한니발의 열정과 자신들을 방해하는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는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으로 복종시킨 지도력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과학자 이종호는 한니발에게 과학지식이 있었다고 본다. 고대 군인들은 갈증과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식초를 갖고 다녔는데, 한니발은 산성인 식초를 이용해서 행군을 방해하는 바위를 갈라지게 하여 제거했다는 것이다.[4] 타키누스 전투[편집]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그를 추격해 온 집정관 스키피오를 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긴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인 샘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강가에서 대파한다. 이로써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늪지대 통과[편집] 다음해인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로 싸움터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남하하는 두 가도를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게미니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봉쇄하고 있었는대 한니발은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운데에 있는 늪지대를 통과한다. 이 늪지대는 수백킬로미터에 걸쳐 무릎까지 차는 물이 고여있었고 따라서 막사를 지어 병사들이 숙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한니발은 이 늪지대를 3일 밤낮 쉬지않고 행군을 하였고, 이런 혹사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또한 행군 도중 한니발 역시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는다. 트라시메네호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편집] 위의 혹독한 행군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진입한 한니발은 서둘러 추격해온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여 매복하고 있었던 트라시메노 호숫가로 유인하는데 성공,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서 2만 7천 명의 로마 군인과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학살한다. 플라미니우스가 사망한 이후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법을 통해 한니발의 회전을 피하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는데 주력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다.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붉은색)의 파괴를 보여주는 그림 칸나이 전투[편집] 다음해에 새로 선출된 바로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만 7천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이로 향한다. 한니발은 바로와 아이밀리우스가 지휘하는 8만 7천 명의 대군에 겨우 5만 명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이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측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 으로 카르타고 군은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로마군을 7만이나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그러자 로마에게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의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 섬에마저 적을 두게 된다. 한니발의 몰락[편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흉상 카르타고의 군사적 패배[편집]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전히 카르타고와의 전쟁의 의지가 강했고, 전쟁에 쓸 수 있는 인적 자원도 풍부한 상태였다. 또한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거듭하여 한니발이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을 고갈시켰다.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스페인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형제들에게 사라고사에서 대패를 한다. 사르디냐 섬의 반란을 돕기위해 침공한 2만여의 카르타고 군은 주둔중인 로마군에 의해 전멸당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한니발이 직접 이끄는 병력에 거의 맞먹는 병력을 이끌고 있던 한노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베네벤툼에서 노예로 구성된 그라쿠스 군을 만나 의해 궤멸당한다. 칸나이 전투 이후 이들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당한 패배는 이미 칸나이에서 전사한 로마군의 수를 능가하였으며 이러한 패배는 한니발이 승기를 굳힐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전략[편집] 로마의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지구전은 보급을 방해하는 한편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은 군대엔 적극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방법이였는데 이는 곧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 들 중엔 로마 장군들에 맞먹는 지휘관이 없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이탈리아 중부에서 연승을 거듭하여 로마의 6개 군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쓸어버리는 등의 활약을 하였으나, 한니발이 이렇게 싸우는 동안 로마군은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를 겹겹이 포위한다. 한니발은 이 카푸아의 포위를 풀기 위해 주력부대로 한쪽 포위망을 급습하나 로마군은 이 공격을 물리친다. 이 포위를 풀고자 한니발은 생애 최초아지 마지막으로 로마를 직접 공격해 보지만, 로마군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지 않았고 로마의 성벽은 상당히 견고하였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를 잃고 얼마 안있어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도시도 로마군에 의해 함락된다. 그 뒤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강력한 도시인 타렌툼마저 친 로마 성향의 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편에 선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부임하여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를 완전히 격파하고, 카르타고 세력을 그 지역에서 내몰았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남아있던 자신의 병력을 모두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에 진입하나, 한니발에 앞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목숨을 잃는다. 점점 전황이 한니발에게 불리하게 되자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 끝인 칼라브리아로 쫓겨갔다. 스키피오의 전략[편집] 기원전 204년 겨우 31세에 불과한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의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왔지만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더욱 우수하게 습득한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와 자마에서 싸워 완패했다. 이 전투로 인해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종언을 맞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된다. 자살[편집] 한니발의 아내, 시밀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하던 동생, 하스드루발과 또다른 동생 마고는 로마와의 전쟁 중에 죽었으며, 자신도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아시아로 도망쳤다가 수년 후 공을 세우고 싶어한 한 로마인 백인대장이 자신을 찾는것을 알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셔 자살을 하였다. 이때 그는 향년 64세 또는 66세였다 (기원전 183년) 같이 보기[편집] 노블레스 오블리주 각주[편집] ↑ Plutarch, Life of Titus Flamininus 21.3-4. ↑ Plutarch, Life of Pyrrhus 8.2. ↑ Ayrault Dodge, Theodore (1995). 《Hannibal: A History of the Art of War Among the Carthaginians and Romans Down to the Battle of Pydna, 168 BC》. Da Capo Press.  ↑ 가 나 《과학으로 여는 세계불가사의 1 - 신과 미지의 수수께끼에 도전한 인간들의 이야기》2부 신화의 무대-8장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비밀의식 /이종호 지음/문화유람 외부 링크[편집] 네이버캐스트 - 한니발 vdeh유명한 카르타고인 디도 마고 1세 마고 (농업작가) 마고 바르카 마하르발 소포니스바 아드 헤발 카르탈로 하밀카르 (드레파눔) 하밀카르 바르카 항해자 히밀코 하스드루발 기스코 하스드루발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병대 사령관) 공정한 하스드루발 한노 대왕 항해자 한노 연장자 한노 한노(보밀카르의 아들) 한니발 바르카 한니발 기스코 한니발 모노마쿠스 한니발 (로디아인)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1819384 LCCN: n50034033 ISNI: 0000 0001 2129 582X GND: 118545655 SELIBR: 259709 SUDOC: 02759680X BNF: cb11960266k (데이터) ULAN: 500354945 NLA: 61542262 NDL: 00620785 NKC: jn20000700666 BNE: XX83293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니발&oldid=24184204" 분류: 기원전 247년 태어남기원전 183년 죽음카르타고의 장군육군 군인포에니 전쟁자살한 군인음독 자살한 사람애꾸눈이바르카 가한니발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8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그리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Башҡортса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བོད་ཡིག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rysk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ಕನ್ನಡKurdîКыргызчаLatinaLëtzebuergeschLimburgsLumbaartLietuviųLatviešuМокшеньMalagasyBaso Minangkaba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MirandésPlattdüütsch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est-Vlams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0: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현직:이효성 2017년 7월 31일 취임 초대 최시중성립 2008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放送通信委員會 委員長)은 방송통신위원회를 대표하는 직위로, 장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보한다. 목차 1 임명 2 역할 3 역대 위원장 3.1 방송위원회 위원장 3.2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4 같이 보기 5 각주 임명[편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역할[편집] (정부조직법 제7조제1항) 각 행정기관의 장은 소관사무를 통할하고 소속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6조제1항) 위원장은 위원회를 대표하고 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하며 소관사무를 통할한다. 역대 위원장[편집] 방송위원회 위원장[편집] 정부 대수 이름 임기 비고 제5공화국 초대 윤석중(尹石重) 1981년 3월 30일 ~ 1982년 3월 18일 2대 1982년 3월 19일 ~ 1984년 4월 24일 3대 정희택(鄭喜澤) 1984년 4월 25일 ~ 1986년 4월 11일 4대 고병익(高柄翊) 1986년 4월 12일 ~ 1987년 4월 10일 5대 1987년 4월 11일 ~ 1988년 8월 2일 노태우 정부 6대 강원용(姜元龍) 1988년 8월 3일 ~ 1990년 12월 5일 7대 1990년 12월 6일 ~ 1991년 3월 19일 8대 고병익(高柄翊) 1991년 4월 8일 ~ 1993년 4월 24일 김영삼 정부 9대 김창열(金昌悅) 1993년 6월 9일 ~ 1997년 6월 19일 10대 1997년 6월 20일 ~ 1999년 8월 13일 김대중 정부 11대 김정기(金政起) 1999년 9월 6일 ~ 2002년 1월 22일 12대 강대인(姜大仁) 2002년 2월 22일 ~ 2003년 5월 7일 노무현 정부 13대 노성대(盧成大) 2003년 5월 10일 ~ 2006년 7월 12일 14대 이상희(李相禧) 2006년 7월 14일 ~ 2006년 8월 25일 - 최민희(崔敏姬) 2006년 8월 26일 ~ 2006년 9월 25일 직무대행 15대 조창현(趙昌鉉) 2006년 9월 26일 ~ 2008년 2월 28일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편집] 정부 대수 이름 임기 비고 이명박 정부 초대 최시중(崔時仲) 2008년 3월 26일 ~ 2011년 3월 27일 2대 2011년 3월 28일 ~ 2012년 2월 22일 - 홍성규(洪性奎) 2012년 2월 22일 ~ 2012년 3월 9일 직무대행 3대 이계철(李啓徹) 2012년 3월 9일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정부 - 김충식(金忠植) 2013년 2월 25일 ~ 2013년 4월 17일 직무대행 4대 이경재(李敬在) 2013년 4월 17일 ~ 2014년 3월 25일 5대 최성준(崔成俊) 2014년 4월 8일 ~ 2017년 4월 7일 - 고삼석(高三錫) 2017년 4월 8일 ~ 2017년 6월 8일 직무대행 문재인 정부 6대 이효성(李孝成) 2017년 7월 31일 ~ 같이 보기[편집]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각주[편집]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관련 항목vdeh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감사원 국가정보원 방송통신위원회 위원회 소속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제외한 3인) 방송통신사무소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위원회 목록) 산하 공공기관 시청자미디어재단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소관기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한국교육방송공사 한국방송공사 방송문화진흥회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3인) 등 총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합의제 행정기관이다. 위원장은 장관급이며 부위원장 및 상임위원(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제외한 3인)은 차관급이다. vdeh 대한민국 중앙행정기관의 장원장 감사원장 최재형 국정원장 서훈 장관 기재부 장관 홍남기 교육부 장관 유은혜 과기정통부 장관 유영민 외교부 장관 강경화 통일부 장관 김연철 법무부 장관 박상기 국방부 장관 정경두 행안부 장관 진영 문체부 장관 박양우 농식품부 장관 이개호 산업부 장관 성윤모 복지부 장관 박능후 환경부 장관 조명래 고용부 장관 이재갑 여가부 장관 진선미 국토부 장관 김현미 해수부 장관 문성혁 중기부 장관 박영선 실장 대통령비서실장 노영민 국가안보실장 정의용 국무조정실장 노형욱 국무총리비서실장 정운현 위원장 방송통신위원장 이효성 공정거래위원장 김상조 금융위원장 최종구 국민권익위원장 박은정 원자력안전위원장 엄재식 처장 경호처장 주영훈 보훈처장 피우진 인사처장 황서종 법제처장 김형연 식약처장 이의경 외청장 국세청장 한승희 관세청장 김영문 조달청장 정무경 통계청장 강신욱 검찰총장 문무일 병무청장 기찬수 방사청장 왕정홍 경찰청장 민갑룡 소방청장 정문호 문화재청장 정재숙 농진청장 김경규 산림청장 김재현 특허청장 박원주 기상청장 김종석 행복청장 김진숙 새만금청장 김현숙 해경청장 조현배 감사원장, 기획재정부 장관 및 교육부 장관은 부총리급 대우를 받는다. 국무총리비서실장,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처장 및 외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단, 국가보훈처장과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그 외의 직책은 모두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vdeh 대한민국의 장관급 고위공무원입법부국회사무총장 ·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장 ·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16인) 상임위원장 국회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정무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국방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정보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특별위원장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윤리특별위원회 행정부중앙부처 장관과학기술정보통신부 · 외교부 · 통일부 · 법무부 · 국방부 · 행정안전부 · 문화체육관광부 · 농림축산식품부 · 산업통상자원부 · 보건복지부 · 환경부 · 고용노동부 · 여성가족부 · 국토교통부 · 해양수산부 · 중소벤처기업부위원장방송통신위원회 · 공정거래위원회 · 금융위원회 · 국민권익위원회 · 중앙노동위원회국립대학교 총장강릉원주대 · 공주대 · 군산대 · 목포대 · 부경대 · 순천대 · 안동대 · 창원대 · 경남과학기술대 · 서울과학기술대 · 한국교원대 · 한국교통대 · 한국방송통신대 · 한국해양대 · 한국예술종합학교 거점국립대학교 강원대 총장 충북대 총장 충남대 총장 전북대 총장 전남대 총장 경북대 총장 부산대 총장 경상대 총장 제주대 총장 해외 주재 대사주 미국 대사 · 주 러시아 대사 · 주 중국 대사 · 주 일본 대사 · 주 UN 대표부 대사국군 대장합동참모의장 · 육군참모총장 · 해군참모총장 · 공군참모총장 ·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 지상작전사령관 · 제2작전사령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 국가정보원장 · 대통령비서실장 · 정책실장 · 국가안보실장 · 국무조정실장 · 국가보훈처장 · 검찰총장사법부대법관(대법원장을 제외한 13인 ; 1인은 재판에 관여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 겸임)독립 기구헌법재판소 재판관(헌법재판소장을 제외한 8인) ·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 ·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지방직서울특별시장 대학서울시립대학교 총장부총리급 · 장관급 · 차관급 vdeh대한민국 국회의 공직자 인사청문 대상자인사청문특별위원회 대상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관 (대법원장을 제외한 13명) 헌법재판소 재판관 (국회 선출 3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국회 선출 3명) 인사청문회 대상 국무위원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국가정보원장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금융위원회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국세청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합동참모의장 한국은행 총재 특별감찰관 한국방송공사 사장 헌법재판소 재판관 (헌법재판소장, 국회 선출을 제외한 5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국회 선출을 제외한 6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의_방송통신위원회_위원장&oldid=24423813" 분류: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대한민국의 관직과 칭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1: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현직:이효성 2017년 7월 31일 취임 초대 최시중성립 2008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放送通信委員會 委員長)은 방송통신위원회를 대표하는 직위로, 장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보한다. 목차 1 임명 2 역할 3 역대 위원장 3.1 방송위원회 위원장 3.2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4 같이 보기 5 각주 임명[편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역할[편집] (정부조직법 제7조제1항) 각 행정기관의 장은 소관사무를 통할하고 소속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6조제1항) 위원장은 위원회를 대표하고 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하며 소관사무를 통할한다. 역대 위원장[편집] 방송위원회 위원장[편집] 정부 대수 이름 임기 비고 제5공화국 초대 윤석중(尹石重) 1981년 3월 30일 ~ 1982년 3월 18일 2대 1982년 3월 19일 ~ 1984년 4월 24일 3대 정희택(鄭喜澤) 1984년 4월 25일 ~ 1986년 4월 11일 4대 고병익(高柄翊) 1986년 4월 12일 ~ 1987년 4월 10일 5대 1987년 4월 11일 ~ 1988년 8월 2일 노태우 정부 6대 강원용(姜元龍) 1988년 8월 3일 ~ 1990년 12월 5일 7대 1990년 12월 6일 ~ 1991년 3월 19일 8대 고병익(高柄翊) 1991년 4월 8일 ~ 1993년 4월 24일 김영삼 정부 9대 김창열(金昌悅) 1993년 6월 9일 ~ 1997년 6월 19일 10대 1997년 6월 20일 ~ 1999년 8월 13일 김대중 정부 11대 김정기(金政起) 1999년 9월 6일 ~ 2002년 1월 22일 12대 강대인(姜大仁) 2002년 2월 22일 ~ 2003년 5월 7일 노무현 정부 13대 노성대(盧成大) 2003년 5월 10일 ~ 2006년 7월 12일 14대 이상희(李相禧) 2006년 7월 14일 ~ 2006년 8월 25일 - 최민희(崔敏姬) 2006년 8월 26일 ~ 2006년 9월 25일 직무대행 15대 조창현(趙昌鉉) 2006년 9월 26일 ~ 2008년 2월 28일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편집] 정부 대수 이름 임기 비고 이명박 정부 초대 최시중(崔時仲) 2008년 3월 26일 ~ 2011년 3월 27일 2대 2011년 3월 28일 ~ 2012년 2월 22일 - 홍성규(洪性奎) 2012년 2월 22일 ~ 2012년 3월 9일 직무대행 3대 이계철(李啓徹) 2012년 3월 9일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정부 - 김충식(金忠植) 2013년 2월 25일 ~ 2013년 4월 17일 직무대행 4대 이경재(李敬在) 2013년 4월 17일 ~ 2014년 3월 25일 5대 최성준(崔成俊) 2014년 4월 8일 ~ 2017년 4월 7일 - 고삼석(高三錫) 2017년 4월 8일 ~ 2017년 6월 8일 직무대행 문재인 정부 6대 이효성(李孝成) 2017년 7월 31일 ~ 같이 보기[편집]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각주[편집]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관련 항목vdeh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감사원 국가정보원 방송통신위원회 위원회 소속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제외한 3인) 방송통신사무소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위원회 목록) 산하 공공기관 시청자미디어재단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소관기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한국교육방송공사 한국방송공사 방송문화진흥회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3인) 등 총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합의제 행정기관이다. 위원장은 장관급이며 부위원장 및 상임위원(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제외한 3인)은 차관급이다. vdeh 대한민국 중앙행정기관의 장원장 감사원장 최재형 국정원장 서훈 장관 기재부 장관 홍남기 교육부 장관 유은혜 과기정통부 장관 유영민 외교부 장관 강경화 통일부 장관 김연철 법무부 장관 박상기 국방부 장관 정경두 행안부 장관 진영 문체부 장관 박양우 농식품부 장관 이개호 산업부 장관 성윤모 복지부 장관 박능후 환경부 장관 조명래 고용부 장관 이재갑 여가부 장관 진선미 국토부 장관 김현미 해수부 장관 문성혁 중기부 장관 박영선 실장 대통령비서실장 노영민 국가안보실장 정의용 국무조정실장 노형욱 국무총리비서실장 정운현 위원장 방송통신위원장 이효성 공정거래위원장 김상조 금융위원장 최종구 국민권익위원장 박은정 원자력안전위원장 엄재식 처장 경호처장 주영훈 보훈처장 피우진 인사처장 황서종 법제처장 김형연 식약처장 이의경 외청장 국세청장 한승희 관세청장 김영문 조달청장 정무경 통계청장 강신욱 검찰총장 문무일 병무청장 기찬수 방사청장 왕정홍 경찰청장 민갑룡 소방청장 정문호 문화재청장 정재숙 농진청장 김경규 산림청장 김재현 특허청장 박원주 기상청장 김종석 행복청장 김진숙 새만금청장 김현숙 해경청장 조현배 감사원장, 기획재정부 장관 및 교육부 장관은 부총리급 대우를 받는다. 국무총리비서실장,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처장 및 외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단, 국가보훈처장과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그 외의 직책은 모두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vdeh 대한민국의 장관급 고위공무원입법부국회사무총장 ·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장 ·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16인) 상임위원장 국회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정무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국방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정보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특별위원장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윤리특별위원회 행정부중앙부처 장관과학기술정보통신부 · 외교부 · 통일부 · 법무부 · 국방부 · 행정안전부 · 문화체육관광부 · 농림축산식품부 · 산업통상자원부 · 보건복지부 · 환경부 · 고용노동부 · 여성가족부 · 국토교통부 · 해양수산부 · 중소벤처기업부위원장방송통신위원회 · 공정거래위원회 · 금융위원회 · 국민권익위원회 · 중앙노동위원회국립대학교 총장강릉원주대 · 공주대 · 군산대 · 목포대 · 부경대 · 순천대 · 안동대 · 창원대 · 경남과학기술대 · 서울과학기술대 · 한국교원대 · 한국교통대 · 한국방송통신대 · 한국해양대 · 한국예술종합학교 거점국립대학교 강원대 총장 충북대 총장 충남대 총장 전북대 총장 전남대 총장 경북대 총장 부산대 총장 경상대 총장 제주대 총장 해외 주재 대사주 미국 대사 · 주 러시아 대사 · 주 중국 대사 · 주 일본 대사 · 주 UN 대표부 대사국군 대장합동참모의장 · 육군참모총장 · 해군참모총장 · 공군참모총장 ·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 지상작전사령관 · 제2작전사령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 국가정보원장 · 대통령비서실장 · 정책실장 · 국가안보실장 · 국무조정실장 · 국가보훈처장 · 검찰총장사법부대법관(대법원장을 제외한 13인 ; 1인은 재판에 관여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 겸임)독립 기구헌법재판소 재판관(헌법재판소장을 제외한 8인) ·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 ·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지방직서울특별시장 대학서울시립대학교 총장부총리급 · 장관급 · 차관급 vdeh대한민국 국회의 공직자 인사청문 대상자인사청문특별위원회 대상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관 (대법원장을 제외한 13명) 헌법재판소 재판관 (국회 선출 3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국회 선출 3명) 인사청문회 대상 국무위원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국가정보원장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금융위원회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국세청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합동참모의장 한국은행 총재 특별감찰관 한국방송공사 사장 헌법재판소 재판관 (헌법재판소장, 국회 선출을 제외한 5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국회 선출을 제외한 6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의_방송통신위원회_위원장&oldid=24423813" 분류: 대한민국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대한민국의 관직과 칭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01: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구리아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리아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리아 주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구리아 주გურიის მხარეGuriis Mkhare 현시대의 정치적 구획, 강조된 부분조지아에 있는 구리아의 역사적 지역, 강조된 부분. 국가 조지아 수도 오주르게티 구 수 3 통치 기관 - 주지사 넓이 - 도합 2,033 km2(784.9평방마일i) 인구(2002년) - 총원 143,357명 - 인구밀도 36/km2 (93.2/sq mi) ISO 3166 GE-KA 구리아(조지아어: გურია)는 조지아의 주(므카레)로, 조지아 서부에 위치하고 있고 흑해의 동쪽 끝에 그 경계가 있다. 그 지역의 인구는 143,367명(2002년)[1]이며 오주르게티가 수도이다. 목차 1 지리 2 역사 3 "구리아"의 어원 4 경제 5 인구 통계 6 유명 인사들 7 각주 지리[편집] 구리아는 북쪽 사메그렐로, 북서쪽에 이메레티, 동쪽에 삼츠헤-자바헤티, 남쪽에 아자리아, 서쪽에 흑해가 경계이다. 구리아 주의 면적은 2,003km2이다. 구리아는 북동부에 동일 위도 경도 선이 가로지른다. 구리아는 3개 행정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주르게티 란치후티 초카타우리 역사[편집] 구리아 공국의 깃발 지명 "구리아"는 프세우도-주안셰르의 조지아 연대기에서 약 800년경에 처음 등장한다.[2] 구리아는 1352년 경에 바르다니스제-다디아니 가문의 봉토로 처음 출현한다. 그리고 1463년에 그 가문의 후손의 한 혈족의 통치 하에 있는 조지아 왕국의 군주 공국으로 독립 했고, 그 후 통치 가문은 구리엘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현시대의 구리아 지역과 바투미가 있는 아자라의 상당 지역을 포함하던 그 공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연속적인 충돌로 인해 차츰 넓이가 줄어들었고 황폐화되었다. 러시아의 보호 제도는 1810년 6월 19일에 구리엘리 마미아 5세가 제국과의 조약을 체결함으로 수립되었고 마지막 왕자인 다비드 다비트가 섭정하던 기간 중이었던, 1829년에 공국은 러시아에 합병되었다.[3] 1819년에 러시아 통치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1841년에도 재차 일어났다. 1840년에 구리아는 나라(우예즈트)를 만들었고 나라의 주요 마을들 중에서 한 지역의 이름인 오주르게티로 개명했다. 1846년에, 그 나라는 새로운 쿠타이스 행정 단위로 바뀌었다. 인구는 10만명도 채 안되는 인구가 거의 532,000에이커(2,150km2)의 산악 지역들과 늪지 계곡들에 자리잡고 옥수수 밭들, 포도원들, 차 농원들을 일궜다. 고수준의 필독 능력을 갖췄고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 자립도가 높은 소작농들과 소수의 시골 귀족들이 거의 대다수의 인구를 구성했던 그 지역은 조지아의 역사적 상동의 지역이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조지아인과 민족적으로 동일했다. 1902년에 소작농들이 저항 시위를 조직했고 1905년 러시아 혁명 기간 동안에 폭동은 절정에 달했는데, 그 시위는 제국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조직적인 소작농 운동이었다. 구리아 공화국이라고도 불리었던 소작농들의 자치-정부는 1906년의 코사크 형벌 원정로 인한 충돌과 유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4] 1918~1921년에 그 지역은 조지아 민주 공화국의 조지아 사회주의(멘셰비키)당의 기본 세력 기반이었다. 1920년대 구리아는 소비에트 통치에 대한 군사적 강요 저항의 게릴라전 무대였다. 구리아의 소비에트 정부는 그 지역 토지를 행정상의 3구역으로 분할했다. 1995년 조지아 정부는 그 지방의 역사적인 이름이 공식 명칭으로 복원된 구리아 주(므하레)를 구획 법령으로 정했다. 리카우리와 셰모크메디의 정교회는 그 지방에서 주된 역사적 건물들이다. "구리아"의 어원[편집] 구리아의 이름에 대한 어원으로는, 몇 가지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 단어의 근원은 쉼없음의 단어로 사료되며 그 단어는 "분주한 땅"을 의미하는 것 같으며 18세기에 작성된 바크슈티 바그라티오니의 역사서에서 묘사된 "레온이 압하제티의 왕이되고, 구룰스가 오조라코의 통치자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고, 아다르나세와 바그라티오니의 아쇼트 1세와의 봉신 관계를 끊고, 레온과 통합"하던 8세기와 9세기의 기간동안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구리아가 "니코프시아에서 다루반드까지" 영역을 넓히던 때인, 조지아의 전성기에 대한 후일의 해석에 따르면, 구리아는 조지아 영토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위의 가설에 대한 증거로는 메그렐리아어로 "심장"을 뜻하는 "구리"라는 사실이다. 경제[편집] 아열대 농업과 관광 산업은 그 지역 경제의 주춧돌이다. 수자원은 구리아의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이다. 그 지방은 화학 성분이 보르조미의 광천수와 같은 나베글라비의 광천수와 흑해 우레키의 사철이 풍푸한 건강 휴양지로 유명하다. 또한 구리아는 조지아에서 가장 큰 차농업지 중의 하나이다.[1] 인구 통계[편집] 구리아인(구룰레비)은 조지아어의 한 방언을 사용하는 민족이며 민족적으로 조지아인에 속한다. 유명 인사들[편집] 가브리엘 키코제(19세기), 이메레티의 주교. 에크브티메 타카이슈빌리(1862~1952년), 역사가. 칼리스트라테, 1932년~1921년의 모든 조지아의 가톨리코스-파트리아르츠. 오네 조르다니아, 1928~1921년의 조지아 민주 공화국의 국무총리. 파블레 잉고로크바(1893~1990년), 역사가, 철학자, 공공 자선 사업가.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조지아의 전직 대통령. 노다르 둠바제, 작가. 각주[편집] ↑ 2002 Georgia census Archived 2009년 11월 13일 - 웨이백 머신. State Department of Statistics of Georgia. Retrieved on December 16, 2007. ↑ Rapp, Stephen H. (2003), Studies In Medieval Georgian Historiography: Early Texts And Eurasian Contexts, p. 427. Peeters Bvba, ISBN 90-429-1318-5. ↑ Yust, Walter (ed., 1952),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 A new survey of universal knowledge. Volume 14, p. 6. ↑ Stephen F. Jones (2005), Socialism in Georgian Colors: The European Road to Social Democracy, 1883-1917, pp. 131-2.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 0-674-01902-4. vdeh 조지아의 행정 구역자치 공화국 압하지야1 아자리야 주 구리아 이메레티2 카헤티 크베모카르틀리 므츠헤타므티아네티2 라차레츠후미크베모스바네티2 사메그렐로제모스바네티 삼츠헤자바헤티 시다카르틀리2 특별시트빌리시 (수도)1 압하지야는 사실상의 독립 국가다. 2 이 지역들의 일부분은 남오세티야라는 비공식 자치 공화국을 구성한다. 좌표: 북위 41° 58′ 동경 42° 12′  / 북위 41.967° 동경 42.200°  / 41.967; 42.20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구리아주&oldid=23681626" 분류: 구리아주조지아의 주숨은 분류: 조지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АҧсшәаالعربيةAzərbaycanca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Cebuano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NederlandsNorsk nynorskNorskИронKapampanganPolski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РусскийSicilianuScots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11: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구리아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리아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리아 주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구리아 주გურიის მხარეGuriis Mkhare 현시대의 정치적 구획, 강조된 부분조지아에 있는 구리아의 역사적 지역, 강조된 부분. 국가 조지아 수도 오주르게티 구 수 3 통치 기관 - 주지사 넓이 - 도합 2,033 km2(784.9평방마일i) 인구(2002년) - 총원 143,357명 - 인구밀도 36/km2 (93.2/sq mi) ISO 3166 GE-KA 구리아(조지아어: გურია)는 조지아의 주(므카레)로, 조지아 서부에 위치하고 있고 흑해의 동쪽 끝에 그 경계가 있다. 그 지역의 인구는 143,367명(2002년)[1]이며 오주르게티가 수도이다. 목차 1 지리 2 역사 3 "구리아"의 어원 4 경제 5 인구 통계 6 유명 인사들 7 각주 지리[편집] 구리아는 북쪽 사메그렐로, 북서쪽에 이메레티, 동쪽에 삼츠헤-자바헤티, 남쪽에 아자리아, 서쪽에 흑해가 경계이다. 구리아 주의 면적은 2,003km2이다. 구리아는 북동부에 동일 위도 경도 선이 가로지른다. 구리아는 3개 행정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주르게티 란치후티 초카타우리 역사[편집] 구리아 공국의 깃발 지명 "구리아"는 프세우도-주안셰르의 조지아 연대기에서 약 800년경에 처음 등장한다.[2] 구리아는 1352년 경에 바르다니스제-다디아니 가문의 봉토로 처음 출현한다. 그리고 1463년에 그 가문의 후손의 한 혈족의 통치 하에 있는 조지아 왕국의 군주 공국으로 독립 했고, 그 후 통치 가문은 구리엘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현시대의 구리아 지역과 바투미가 있는 아자라의 상당 지역을 포함하던 그 공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연속적인 충돌로 인해 차츰 넓이가 줄어들었고 황폐화되었다. 러시아의 보호 제도는 1810년 6월 19일에 구리엘리 마미아 5세가 제국과의 조약을 체결함으로 수립되었고 마지막 왕자인 다비드 다비트가 섭정하던 기간 중이었던, 1829년에 공국은 러시아에 합병되었다.[3] 1819년에 러시아 통치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1841년에도 재차 일어났다. 1840년에 구리아는 나라(우예즈트)를 만들었고 나라의 주요 마을들 중에서 한 지역의 이름인 오주르게티로 개명했다. 1846년에, 그 나라는 새로운 쿠타이스 행정 단위로 바뀌었다. 인구는 10만명도 채 안되는 인구가 거의 532,000에이커(2,150km2)의 산악 지역들과 늪지 계곡들에 자리잡고 옥수수 밭들, 포도원들, 차 농원들을 일궜다. 고수준의 필독 능력을 갖췄고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 자립도가 높은 소작농들과 소수의 시골 귀족들이 거의 대다수의 인구를 구성했던 그 지역은 조지아의 역사적 상동의 지역이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조지아인과 민족적으로 동일했다. 1902년에 소작농들이 저항 시위를 조직했고 1905년 러시아 혁명 기간 동안에 폭동은 절정에 달했는데, 그 시위는 제국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조직적인 소작농 운동이었다. 구리아 공화국이라고도 불리었던 소작농들의 자치-정부는 1906년의 코사크 형벌 원정로 인한 충돌과 유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4] 1918~1921년에 그 지역은 조지아 민주 공화국의 조지아 사회주의(멘셰비키)당의 기본 세력 기반이었다. 1920년대 구리아는 소비에트 통치에 대한 군사적 강요 저항의 게릴라전 무대였다. 구리아의 소비에트 정부는 그 지역 토지를 행정상의 3구역으로 분할했다. 1995년 조지아 정부는 그 지방의 역사적인 이름이 공식 명칭으로 복원된 구리아 주(므하레)를 구획 법령으로 정했다. 리카우리와 셰모크메디의 정교회는 그 지방에서 주된 역사적 건물들이다. "구리아"의 어원[편집] 구리아의 이름에 대한 어원으로는, 몇 가지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 단어의 근원은 쉼없음의 단어로 사료되며 그 단어는 "분주한 땅"을 의미하는 것 같으며 18세기에 작성된 바크슈티 바그라티오니의 역사서에서 묘사된 "레온이 압하제티의 왕이되고, 구룰스가 오조라코의 통치자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고, 아다르나세와 바그라티오니의 아쇼트 1세와의 봉신 관계를 끊고, 레온과 통합"하던 8세기와 9세기의 기간동안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구리아가 "니코프시아에서 다루반드까지" 영역을 넓히던 때인, 조지아의 전성기에 대한 후일의 해석에 따르면, 구리아는 조지아 영토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위의 가설에 대한 증거로는 메그렐리아어로 "심장"을 뜻하는 "구리"라는 사실이다. 경제[편집] 아열대 농업과 관광 산업은 그 지역 경제의 주춧돌이다. 수자원은 구리아의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이다. 그 지방은 화학 성분이 보르조미의 광천수와 같은 나베글라비의 광천수와 흑해 우레키의 사철이 풍푸한 건강 휴양지로 유명하다. 또한 구리아는 조지아에서 가장 큰 차농업지 중의 하나이다.[1] 인구 통계[편집] 구리아인(구룰레비)은 조지아어의 한 방언을 사용하는 민족이며 민족적으로 조지아인에 속한다. 유명 인사들[편집] 가브리엘 키코제(19세기), 이메레티의 주교. 에크브티메 타카이슈빌리(1862~1952년), 역사가. 칼리스트라테, 1932년~1921년의 모든 조지아의 가톨리코스-파트리아르츠. 오네 조르다니아, 1928~1921년의 조지아 민주 공화국의 국무총리. 파블레 잉고로크바(1893~1990년), 역사가, 철학자, 공공 자선 사업가.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조지아의 전직 대통령. 노다르 둠바제, 작가. 각주[편집] ↑ 2002 Georgia census Archived 2009년 11월 13일 - 웨이백 머신. State Department of Statistics of Georgia. Retrieved on December 16, 2007. ↑ Rapp, Stephen H. (2003), Studies In Medieval Georgian Historiography: Early Texts And Eurasian Contexts, p. 427. Peeters Bvba, ISBN 90-429-1318-5. ↑ Yust, Walter (ed., 1952),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 A new survey of universal knowledge. Volume 14, p. 6. ↑ Stephen F. Jones (2005), Socialism in Georgian Colors: The European Road to Social Democracy, 1883-1917, pp. 131-2.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 0-674-01902-4. vdeh 조지아의 행정 구역자치 공화국 압하지야1 아자리야 주 구리아 이메레티2 카헤티 크베모카르틀리 므츠헤타므티아네티2 라차레츠후미크베모스바네티2 사메그렐로제모스바네티 삼츠헤자바헤티 시다카르틀리2 특별시트빌리시 (수도)1 압하지야는 사실상의 독립 국가다. 2 이 지역들의 일부분은 남오세티야라는 비공식 자치 공화국을 구성한다. 좌표: 북위 41° 58′ 동경 42° 12′  / 북위 41.967° 동경 42.200°  / 41.967; 42.20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구리아주&oldid=23681626" 분류: 구리아주조지아의 주숨은 분류: 조지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АҧсшәаالعربيةAzərbaycanca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Cebuano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NederlandsNorsk nynorskNorskИронKapampanganPolskiپنجابیPortuguêsRuna SimiРусскийSicilianuScots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მარგალური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11: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982년 한국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2년 한국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82년 한국시리즈 팀 승(무승부) OB 베어스 (전기 1위) 4(1) 삼성 라이온즈 (후기 1위) 1(1) 경기 정보 경기 일정 1982년 10월 5일 ~ 10월 11일 MVP 김유동 팀 정보 OB 베어스 (전기 1위) 감독 김영덕 시즌 성적 56승 24패 전기리그 1위 (29승 11패) 후기리그 2위 (27승 13패) 삼성 라이온즈 (후기 1위) 감독 서영무 시즌 성적 54승 26패 전기리그 2위 (26승 14패) 후기리그 1위 (28승 12패)   1983 >  1982년 한국시리즈는 1982년 출범 원년이었던 한국프로야구의 초대 우승팀을 가린 시리즈로 10월 5일부터 10월 11일까지 6차전을 치러서, OB 베어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4승 1무 1패로 누르고 초대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최종전에서 역전 만루 홈런을 친 OB의 김유동이 차지했다. 목차 1 프로야구 출범 첫 시즌 2 경기 결과 2.1 1차전 2.2 2차전 2.3 3차전 2.4 4차전 2.5 5차전 2.6 6차전 프로야구 출범 첫 시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2년 한국 프로 야구입니다. 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패 승률 1위 OB 29 11 .752 2위 삼성 26 14 .650 3위 MBC 22 18 .550 4위 해태 20 20 .500 5위 롯데 13 27 .325 6위 삼미 10 30 .250 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패 승률 1위 삼성 28 12 .700 2위 OB 27 13 .675 3위 MBC 24 16 .600 4위 해태 18 22 .450 4위 롯데 18 22 .450 6위 삼미 5 35 .125 1982년 3월 27일에 KBO 리그가 출범했다. 당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어서 각 리그의 우승 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전기리그는 OB 베어스가 29승 11패로 2위 삼성 라이온즈를 3경기차(26승 14패)로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으며, 후기리그는 반대로 삼성 라이온즈가 28승 12패로 OB 베어스를 1경기차(27승 13패)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한국시리즈는 OB와 삼성의 대결로 열리게 되었다. 경기 결과[편집] 1차전[편집] 10월 5일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0 0 2 0 0 1 0 0 0 0 0 0 3 3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2 0 0 0 1 0 0 0 0 0 0 0 0 0 0 3 13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없음  패전 투수 : 없음  세이브 : {{{세이브투수}}}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함학수(6회 2점) 한국시리즈 최초 무승부 경기; 15이닝 무승부 삼성 함학수 한국시리즈 최초의 홈런 기록 1차전 선발 투수로 삼성은 권영호가, OB는 강철원이 각각 등판하였다. OB는 1회말 윤동균이 중견수 앞 안타를 치며 나간 상황에서 신경식의 좌익수를 넘어가는 적시 2루타와 김유동의 중견수 앞 적시타로 먼저 2점을 얻으며 앞서 나갔다. 5회말에도 윤동균이 2루타를 치고 나간 상황에서 김우열이 우익수 앞 적시타로 3-0으로 달아났다. 이어진 6회초에서 삼성은 오대석과 이만수가 연속 볼넷으로 나간 후 맞이한 1사 상황에서 함학수가 OB 선발 강철원의 낮은 직구를 걷어 올려 왼쪽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9회초 2사 상황에서 삼성은 배대웅이 중견수 키를 넘기는 적시 2루타를 기록하며 3-3 동점이 되었다. 이후 양팀은 투수전으로 팽팽히 맞섰다. 특히 OB의 선우대영은 예상을 깨고 6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하였다. 그렇게 양 팀은 15회말까지 4시간 35분 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2차전[편집] 10월 6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0 0 0 0 0 0 0 0 0 5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0 6 0 2 0 0 0 1 X 9 9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이선희  패전 투수 : 계형철  세이브 : 성낙수  홀드 : {{{홀드투수}}} 삼성 한국시리즈 최초의 승리 삼성 한국시리즈 최초의 타자 일순: 2회 삼성 이선희 한국시리즈 최초의 승리 투수 삼성 성낙수 한국시리즈 최초의 세이브 기록 2차전 선발 투수로 삼성은 이선희가, OB는 계형철이 각각 등판하였다. 2회말부터 삼성은 OB 수비진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삼성은 함학수의 중견수 앞 안타, 볼넷, 허규옥이 스리 번트를 시도하여 만든 야수 선택 등으로 만든 무사 만루 상황에서 김한근이 2타점 적시타를 터뜨렸고, OB 계형철의 폭투와 내야 실책 등으로 2점을 더 보탰다. OB는 박상열로 투수를 교체하였지만 삼성은 다시 2점을 더 보태며 6-0으로 달아났다. 4회말에도 삼성은 배대웅의 불규칙 바운드로 만든 3루타 등으로 다시 2점을 보탰고, 8회에 1점을 더 보태며 승기를 잡았다. 삼성 이선희는 5 ⅔이닝 동안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였고 6회부터 구원 등판한 성낙수가 3 ⅓이닝 동안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삼성이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기록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이 날 경기에서는 삼성의 1회말 공격에서 허규옥의 내야 땅볼을 OB 유지훤이 더블 플레이로 만들었다는 OB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OB가 초반부터 대량 실점하게 되자 경기를 포기한 OB 선수들이 대부분 삼성 투수의 초구를 때리기도 하였다. 3차전[편집] 10월 8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1 0 0 0 2 0 3 8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0 0 1 0 2 1 1 0 X 5 11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선우대영  패전 투수 : 권영호  세이브 : 박철순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정현발(8회 2점) 4차전[편집] 10월 9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0 0 1 1 0 5 0 0 7 -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0 0 2 2 0 0 2 0 0 6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황태환  패전 투수 : 황규봉  세이브 : 박철순  홀드 : {{{홀드투수}}}홈런 :  OB – 김우열(4회 1점), 정종현(5회 1점)  삼성 – 장태수(3회 2점) 5차전[편집] 10월 10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0 2 0 2 0 0 4 -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3 0 1 0 0 0 0 0 1 5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황태환  패전 투수 : 이선희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오대석(5회 2점), 박찬(7회 2점)  OB – 김유동(1회 2점), 김우열(3회 1점) 6차전[편집] 10월 12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1 1 0 1 0 0 0 5 8 -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2 0 1 0 0 0 0 0 0 3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박철순  패전 투수 : 이선희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OB – 김유동(2회 1점, 9회 4점) OB 김유동, 한국시리즈 1호 만루홈런 - 9회 vdehOB 베어스 -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전기리그 1위, 승률 1위)감독 40 김영덕 코치 38 김성근 1 이광환 투수 21 박철순 23 강철원 11 계형철 29 선우대영 9 박상열 15 황태환 포수 22 김경문 25 조범현 2 김진홍 정종현 내야수 19 신경식 20 구천서 16 양세종 6 유지훤 4 김광수 이근식 외야수 3 김우열 10 윤동균 8 김유동 17 정혁진 7 이근식 14 이홍범 1982년 정규시즌 MVP, 다승왕, 최우수 평균자책점 박철순(24승, 1.84)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 vdehKBO 한국시리즈 · 0000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0000 · 0000 ·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함에 따라 한국시리즈가 개최되지 않았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82년_한국시리즈&oldid=24341188" 분류: 한국시리즈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1982년 야구1982년 10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0일 (목) 20: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982년 한국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2년 한국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82년 한국시리즈 팀 승(무승부) OB 베어스 (전기 1위) 4(1) 삼성 라이온즈 (후기 1위) 1(1) 경기 정보 경기 일정 1982년 10월 5일 ~ 10월 11일 MVP 김유동 팀 정보 OB 베어스 (전기 1위) 감독 김영덕 시즌 성적 56승 24패 전기리그 1위 (29승 11패) 후기리그 2위 (27승 13패) 삼성 라이온즈 (후기 1위) 감독 서영무 시즌 성적 54승 26패 전기리그 2위 (26승 14패) 후기리그 1위 (28승 12패)   1983 >  1982년 한국시리즈는 1982년 출범 원년이었던 한국프로야구의 초대 우승팀을 가린 시리즈로 10월 5일부터 10월 11일까지 6차전을 치러서, OB 베어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4승 1무 1패로 누르고 초대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최종전에서 역전 만루 홈런을 친 OB의 김유동이 차지했다. 목차 1 프로야구 출범 첫 시즌 2 경기 결과 2.1 1차전 2.2 2차전 2.3 3차전 2.4 4차전 2.5 5차전 2.6 6차전 프로야구 출범 첫 시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2년 한국 프로 야구입니다. 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패 승률 1위 OB 29 11 .752 2위 삼성 26 14 .650 3위 MBC 22 18 .550 4위 해태 20 20 .500 5위 롯데 13 27 .325 6위 삼미 10 30 .250 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패 승률 1위 삼성 28 12 .700 2위 OB 27 13 .675 3위 MBC 24 16 .600 4위 해태 18 22 .450 4위 롯데 18 22 .450 6위 삼미 5 35 .125 1982년 3월 27일에 KBO 리그가 출범했다. 당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어서 각 리그의 우승 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전기리그는 OB 베어스가 29승 11패로 2위 삼성 라이온즈를 3경기차(26승 14패)로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으며, 후기리그는 반대로 삼성 라이온즈가 28승 12패로 OB 베어스를 1경기차(27승 13패)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한국시리즈는 OB와 삼성의 대결로 열리게 되었다. 경기 결과[편집] 1차전[편집] 10월 5일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0 0 2 0 0 1 0 0 0 0 0 0 3 3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2 0 0 0 1 0 0 0 0 0 0 0 0 0 0 3 13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없음  패전 투수 : 없음  세이브 : {{{세이브투수}}}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함학수(6회 2점) 한국시리즈 최초 무승부 경기; 15이닝 무승부 삼성 함학수 한국시리즈 최초의 홈런 기록 1차전 선발 투수로 삼성은 권영호가, OB는 강철원이 각각 등판하였다. OB는 1회말 윤동균이 중견수 앞 안타를 치며 나간 상황에서 신경식의 좌익수를 넘어가는 적시 2루타와 김유동의 중견수 앞 적시타로 먼저 2점을 얻으며 앞서 나갔다. 5회말에도 윤동균이 2루타를 치고 나간 상황에서 김우열이 우익수 앞 적시타로 3-0으로 달아났다. 이어진 6회초에서 삼성은 오대석과 이만수가 연속 볼넷으로 나간 후 맞이한 1사 상황에서 함학수가 OB 선발 강철원의 낮은 직구를 걷어 올려 왼쪽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9회초 2사 상황에서 삼성은 배대웅이 중견수 키를 넘기는 적시 2루타를 기록하며 3-3 동점이 되었다. 이후 양팀은 투수전으로 팽팽히 맞섰다. 특히 OB의 선우대영은 예상을 깨고 6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하였다. 그렇게 양 팀은 15회말까지 4시간 35분 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2차전[편집] 10월 6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0 0 0 0 0 0 0 0 0 5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0 6 0 2 0 0 0 1 X 9 9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이선희  패전 투수 : 계형철  세이브 : 성낙수  홀드 : {{{홀드투수}}} 삼성 한국시리즈 최초의 승리 삼성 한국시리즈 최초의 타자 일순: 2회 삼성 이선희 한국시리즈 최초의 승리 투수 삼성 성낙수 한국시리즈 최초의 세이브 기록 2차전 선발 투수로 삼성은 이선희가, OB는 계형철이 각각 등판하였다. 2회말부터 삼성은 OB 수비진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삼성은 함학수의 중견수 앞 안타, 볼넷, 허규옥이 스리 번트를 시도하여 만든 야수 선택 등으로 만든 무사 만루 상황에서 김한근이 2타점 적시타를 터뜨렸고, OB 계형철의 폭투와 내야 실책 등으로 2점을 더 보탰다. OB는 박상열로 투수를 교체하였지만 삼성은 다시 2점을 더 보태며 6-0으로 달아났다. 4회말에도 삼성은 배대웅의 불규칙 바운드로 만든 3루타 등으로 다시 2점을 보탰고, 8회에 1점을 더 보태며 승기를 잡았다. 삼성 이선희는 5 ⅔이닝 동안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였고 6회부터 구원 등판한 성낙수가 3 ⅓이닝 동안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삼성이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기록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이 날 경기에서는 삼성의 1회말 공격에서 허규옥의 내야 땅볼을 OB 유지훤이 더블 플레이로 만들었다는 OB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OB가 초반부터 대량 실점하게 되자 경기를 포기한 OB 선수들이 대부분 삼성 투수의 초구를 때리기도 하였다. 3차전[편집] 10월 8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1 0 0 0 2 0 3 8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0 0 1 0 2 1 1 0 X 5 11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선우대영  패전 투수 : 권영호  세이브 : 박철순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정현발(8회 2점) 4차전[편집] 10월 9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0 0 1 1 0 5 0 0 7 -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0 0 2 2 0 0 2 0 0 6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황태환  패전 투수 : 황규봉  세이브 : 박철순  홀드 : {{{홀드투수}}}홈런 :  OB – 김우열(4회 1점), 정종현(5회 1점)  삼성 – 장태수(3회 2점) 5차전[편집] 10월 10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0 2 0 2 0 0 4 -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3 0 1 0 0 0 0 0 1 5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황태환  패전 투수 : 이선희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오대석(5회 2점), 박찬(7회 2점)  OB – 김유동(1회 2점), 김우열(3회 1점) 6차전[편집] 10월 12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1 1 0 1 0 0 0 5 8 -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2 0 1 0 0 0 0 0 0 3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박철순  패전 투수 : 이선희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OB – 김유동(2회 1점, 9회 4점) OB 김유동, 한국시리즈 1호 만루홈런 - 9회 vdehOB 베어스 -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전기리그 1위, 승률 1위)감독 40 김영덕 코치 38 김성근 1 이광환 투수 21 박철순 23 강철원 11 계형철 29 선우대영 9 박상열 15 황태환 포수 22 김경문 25 조범현 2 김진홍 정종현 내야수 19 신경식 20 구천서 16 양세종 6 유지훤 4 김광수 이근식 외야수 3 김우열 10 윤동균 8 김유동 17 정혁진 7 이근식 14 이홍범 1982년 정규시즌 MVP, 다승왕, 최우수 평균자책점 박철순(24승, 1.84)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 vdehKBO 한국시리즈 · 0000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0000 · 0000 ·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함에 따라 한국시리즈가 개최되지 않았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82년_한국시리즈&oldid=24341188" 분류: 한국시리즈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1982년 야구1982년 10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0일 (목) 20: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982년 한국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2년 한국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82년 한국시리즈 팀 승(무승부) OB 베어스 (전기 1위) 4(1) 삼성 라이온즈 (후기 1위) 1(1) 경기 정보 경기 일정 1982년 10월 5일 ~ 10월 11일 MVP 김유동 팀 정보 OB 베어스 (전기 1위) 감독 김영덕 시즌 성적 56승 24패 전기리그 1위 (29승 11패) 후기리그 2위 (27승 13패) 삼성 라이온즈 (후기 1위) 감독 서영무 시즌 성적 54승 26패 전기리그 2위 (26승 14패) 후기리그 1위 (28승 12패)   1983 >  1982년 한국시리즈는 1982년 출범 원년이었던 한국프로야구의 초대 우승팀을 가린 시리즈로 10월 5일부터 10월 11일까지 6차전을 치러서, OB 베어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4승 1무 1패로 누르고 초대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최종전에서 역전 만루 홈런을 친 OB의 김유동이 차지했다. 목차 1 프로야구 출범 첫 시즌 2 경기 결과 2.1 1차전 2.2 2차전 2.3 3차전 2.4 4차전 2.5 5차전 2.6 6차전 프로야구 출범 첫 시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2년 한국 프로 야구입니다. 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패 승률 1위 OB 29 11 .752 2위 삼성 26 14 .650 3위 MBC 22 18 .550 4위 해태 20 20 .500 5위 롯데 13 27 .325 6위 삼미 10 30 .250 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패 승률 1위 삼성 28 12 .700 2위 OB 27 13 .675 3위 MBC 24 16 .600 4위 해태 18 22 .450 4위 롯데 18 22 .450 6위 삼미 5 35 .125 1982년 3월 27일에 KBO 리그가 출범했다. 당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어서 각 리그의 우승 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전기리그는 OB 베어스가 29승 11패로 2위 삼성 라이온즈를 3경기차(26승 14패)로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으며, 후기리그는 반대로 삼성 라이온즈가 28승 12패로 OB 베어스를 1경기차(27승 13패)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한국시리즈는 OB와 삼성의 대결로 열리게 되었다. 경기 결과[편집] 1차전[편집] 10월 5일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0 0 2 0 0 1 0 0 0 0 0 0 3 3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2 0 0 0 1 0 0 0 0 0 0 0 0 0 0 3 13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없음  패전 투수 : 없음  세이브 : {{{세이브투수}}}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함학수(6회 2점) 한국시리즈 최초 무승부 경기; 15이닝 무승부 삼성 함학수 한국시리즈 최초의 홈런 기록 1차전 선발 투수로 삼성은 권영호가, OB는 강철원이 각각 등판하였다. OB는 1회말 윤동균이 중견수 앞 안타를 치며 나간 상황에서 신경식의 좌익수를 넘어가는 적시 2루타와 김유동의 중견수 앞 적시타로 먼저 2점을 얻으며 앞서 나갔다. 5회말에도 윤동균이 2루타를 치고 나간 상황에서 김우열이 우익수 앞 적시타로 3-0으로 달아났다. 이어진 6회초에서 삼성은 오대석과 이만수가 연속 볼넷으로 나간 후 맞이한 1사 상황에서 함학수가 OB 선발 강철원의 낮은 직구를 걷어 올려 왼쪽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9회초 2사 상황에서 삼성은 배대웅이 중견수 키를 넘기는 적시 2루타를 기록하며 3-3 동점이 되었다. 이후 양팀은 투수전으로 팽팽히 맞섰다. 특히 OB의 선우대영은 예상을 깨고 6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하였다. 그렇게 양 팀은 15회말까지 4시간 35분 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2차전[편집] 10월 6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0 0 0 0 0 0 0 0 0 5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0 6 0 2 0 0 0 1 X 9 9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이선희  패전 투수 : 계형철  세이브 : 성낙수  홀드 : {{{홀드투수}}} 삼성 한국시리즈 최초의 승리 삼성 한국시리즈 최초의 타자 일순: 2회 삼성 이선희 한국시리즈 최초의 승리 투수 삼성 성낙수 한국시리즈 최초의 세이브 기록 2차전 선발 투수로 삼성은 이선희가, OB는 계형철이 각각 등판하였다. 2회말부터 삼성은 OB 수비진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삼성은 함학수의 중견수 앞 안타, 볼넷, 허규옥이 스리 번트를 시도하여 만든 야수 선택 등으로 만든 무사 만루 상황에서 김한근이 2타점 적시타를 터뜨렸고, OB 계형철의 폭투와 내야 실책 등으로 2점을 더 보탰다. OB는 박상열로 투수를 교체하였지만 삼성은 다시 2점을 더 보태며 6-0으로 달아났다. 4회말에도 삼성은 배대웅의 불규칙 바운드로 만든 3루타 등으로 다시 2점을 보탰고, 8회에 1점을 더 보태며 승기를 잡았다. 삼성 이선희는 5 ⅔이닝 동안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였고 6회부터 구원 등판한 성낙수가 3 ⅓이닝 동안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삼성이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기록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이 날 경기에서는 삼성의 1회말 공격에서 허규옥의 내야 땅볼을 OB 유지훤이 더블 플레이로 만들었다는 OB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OB가 초반부터 대량 실점하게 되자 경기를 포기한 OB 선수들이 대부분 삼성 투수의 초구를 때리기도 하였다. 3차전[편집] 10월 8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1 0 0 0 2 0 3 8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0 0 1 0 2 1 1 0 X 5 11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선우대영  패전 투수 : 권영호  세이브 : 박철순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정현발(8회 2점) 4차전[편집] 10월 9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0 0 1 1 0 5 0 0 7 -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0 0 2 2 0 0 2 0 0 6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황태환  패전 투수 : 황규봉  세이브 : 박철순  홀드 : {{{홀드투수}}}홈런 :  OB – 김우열(4회 1점), 정종현(5회 1점)  삼성 – 장태수(3회 2점) 5차전[편집] 10월 10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0 0 0 2 0 2 0 0 4 - - {{{원정팀볼넷}}} OB 베어스 3 0 1 0 0 0 0 0 1 5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황태환  패전 투수 : 이선희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오대석(5회 2점), 박찬(7회 2점)  OB – 김유동(1회 2점), 김우열(3회 1점) 6차전[편집] 10월 12일 - 동대문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베어스 0 1 1 0 1 0 0 0 5 8 - -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2 0 1 0 0 0 0 0 0 3 - - {{{홈팀볼넷}}} 승리 투수 : 박철순  패전 투수 : 이선희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OB – 김유동(2회 1점, 9회 4점) OB 김유동, 한국시리즈 1호 만루홈런 - 9회 vdehOB 베어스 -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전기리그 1위, 승률 1위)감독 40 김영덕 코치 38 김성근 1 이광환 투수 21 박철순 23 강철원 11 계형철 29 선우대영 9 박상열 15 황태환 포수 22 김경문 25 조범현 2 김진홍 정종현 내야수 19 신경식 20 구천서 16 양세종 6 유지훤 4 김광수 이근식 외야수 3 김우열 10 윤동균 8 김유동 17 정혁진 7 이근식 14 이홍범 1982년 정규시즌 MVP, 다승왕, 최우수 평균자책점 박철순(24승, 1.84)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 vdehKBO 한국시리즈 · 0000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0000 · 0000 ·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함에 따라 한국시리즈가 개최되지 않았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82년_한국시리즈&oldid=24341188" 분류: 한국시리즈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1982년 야구1982년 10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0일 (목) 20: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정아미 (배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아미 (배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아미 (1964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정아미(1964년)출생 1964년 6월 5일(1964-06-05) (55세)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군직업 배우활동 기간 1983년 ~ 현재소속사 마라톤 엔터테인먼트 학력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영화과자녀 슬하 1남 1녀수상 2008년 한국연극배우협회 올해의 배우상 수상웹사이트 마라톤 엔터테인먼트 정아미정아미 - 페이스북 정아미(본명: 정선자, 1964년 6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연극 《환도와 리스》를 통해 데뷔하였다. 현대극장을 거쳐 연극계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목차 1 학력 2 출연작 2.1 드라마 2.2 영화 2.3 연극 3 수상 4 외부 링크 학력[편집]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영화과 출연작[편집] 드라마[편집] 2018 KBS2 아침드라마 《차달래 부인의 사랑》 ... 박하린 역 2018 tvN 수목 드라마 《아는 와이프》 2018 MBC 주말 드라마 《부잣집 아들》 2018 SBS 주말 드라마 《착한마녀전》 ... 다도장인 역 2018 MBN 수요 드라마 《연남동 539》 ... 정아미 주부회원 역 2017 OCN 주말 드라마 《블랙》 ... 호프집 여사장 역 2017 KBS2 주말 연속극 《황금빛 내 인생》 ... 손여사 역 2017 SBS 주말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 ... 여회장 역 2017 tvN 수목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 김현준 모 역 2017 MBC 일일 연속극 《돌아온 복단지》 ... 여판사 역 2017 KBS2 월화 드라마 《쌈 마이웨이》 ... 천가네 사장 역 2017 MBC 수목 드라마 《군주 - 가면의 주인》 ... 한상궁 역 2016 SBS 일일 연속극 《사랑이 오네요》 ... 장미자 교수 역 2016 MBC 일일 연속극 《다시 시작해》 ... 원장부인 역 2016 MBC 주말 연속극 《가화만사성》 ... 예절강사 역 2015 KBS2 수목 드라마 《어셈블리》 ... 박최고 역 2015 KBS2 주말 연속극 《파랑새의 집》 ... 박회장 사모 역 2015 SBS 월화 드라마 《미세스 캅》 ... 세영 모 역 2015 KBS2 일일 연속극 《결혼 이야기》 ... 동하 엄마 역 2008 MBC 드라마 스페셜 《베토벤 바이러스》 ... 김갑용 며느리 역 1996 SBS 주말 드라마 《임꺽정》 ... 주모 역 영화[편집] 2010 《오늘》 ... 소피아 역 2011 《나는 아빠다》 ... 집주인 역 2012 《댄싱퀸》 ... 필제부인 역 2013 《용의자》 ... 김요한목사 부인 역 2015 《순수의 시대》 ... 가희모 역 2015 《늙은 자전거》 ... 순대집 아줌마 역 2016 《커터》 ... 세준 모 역 2016 《연애담》 ... 지수 엄마 역 2016 《불청객 - 반가운 손님》 ... 지훈 엄마 역 2017 《해빙》 ... 배정자 역 2018 《신과함께: 인과 연》 ... 강문직부인 역 2019 《귀신의 향기》 ... 동석 모 역 연극[편집] 2018 《여자만세2》 ... 홍마님 역 2017 《원맨쇼》 ... 엄마 역 2017 《집나간 아빠》 ... 수림 모 역 2017 《이구아나》 ... 명부장 역 2016 《비껴치기》 ... 정선미 역 2016 《챠이카》 ... 아르까지나 역 2014 《마요네즈》 ... 엄마 역 2014 《사라와 제니퍼》 ... 배여사 역 2013 《베드룸 파스》 ... 델리아 역 2012 《생사계》 ... 여인 역 2011 《로베르토 쥬코》 ... 우아한 부인 역 2011 《상계동 덕분이》 ... 덕분이 역 2010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 안여사 역 2010 《굿닥터》 ... 1인 3역 역 2009 《미아모르》 ... 할머니 역 2008 《블라인드》 ... 엘레나 역 2008 《적빈》 ... 매촌댁 역 수상[편집] 2008 한국연극배우협회 올해의 배우상 수상 2008 거창국제연극제 연기대상 수상 1982 전국청소년연극 경연대회 최우수연기상 수상 외부 링크[편집] (영어) 정아미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정아미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정아미 - 한시네마 이 글은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정아미_(배우)&oldid=24511047" 분류: 1964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1983년 데뷔광양시 출신서울예술대학교 동문숨은 분류: 배우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21:5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쿠바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바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쿠바의 역사Historia de Cuba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쿠바 총독부 쿠바 독립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쿠바 보호령 쿠바 공화국 쿠바 혁명 쿠바 미사일 위기 오늘날의 쿠바 v • d • e • h 쿠바에는 수 천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중에 폭발한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공산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1961년에는 그 혁명이 사회주의적임을 천명하였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혁명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무장 봉기를 지원하였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독재자들을 원조하였다.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쿠바는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 경제에서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일관하였다. 쿠바에는 양심수가 500명에 이르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2008년, 병이 중해진 피델 카스트로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넘겨 주었다. 목차 1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의 쿠바 정복 2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 3 독립과 미국의 간섭 4 세계 대전 시기 5 바티스타의 집권 6 쿠바 혁명 7 쿠바 혁명 이후 8 탈 냉전 시대 9 각주 10 외부 링크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의 쿠바 정복[편집] 아라왁족(族)의 여인 쿠바 섬에는 원래 최소한 천년전, 그리고 아마도 6~8천년전에 남부· 중부·북부 아메리카에서 건너왔던 원주민이 물고기를 잡거나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후손인 타이노족(族)·시보네족으로 불리는 5만여 명의 원주민들은 고도로 발달된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거주하고 있었다.[1] 타이노족은 농경생활을, 시보니족은 농경과 수렵, 채취 생활을 하는 종족이었다. 일부에서는 구리 무역이 성행했다고 주장해 오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유물[2] 이 아메리카 대륙 본토에서 발견되었다. 1492년 10월 27일, 제1차 항해중이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현재의 쿠바 섬을 발견하고 이 섬을 스페인 영토로 잠시 점유하고, 왕자 후안(Juan)의 이름을 따서, 후안 섬(Isla Juana)이라고 명명했다.[3] 1511년 스페인 제국의 정착지가 스페인에서 파견한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에 의해서 바라코아에 최초로 세워졌다. 1512년 벨라스케스는 300명을 이끌고 이스파니올라를 떠나 쿠바로 향하여 본격적으로 스페인령임을 선포하고는 2년동안 일곱 곳의 개척지를 건설했다. 미래에 수도가 될 산 크리스토발 데 라 아바나(San Cristóbal de la Habana, 1515년 설립) 등 다른 마을도 그 뒤를 이었다. 2년동안 스페인인은 수천 명의 원주민을 죽였으며 벨라스케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원주민을 모두 서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당시 쿠바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1516년 벨라스케스가 멕시코로 네 번의 원정을 후원하여 그 중 1519년에서 1521년까지의 에르난 코르테스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에 쿠바는 남미로 가는 스페인의 관문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엔코미엔다 제도가 구축되면서 커다란 사유지가 형성되었고, 스페인은 기독교로의 개종에 저항하는 약 10만명의 원주민을 억압하고 종교 교육의 구실 아래 인디언에 대한 노예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 1542년에 엔코미엔다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혹독한 착취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질병에 의해 인디언 인구는 5,000여 명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사금(砂金)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원주민들은 1528년의 대(對)스페인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을 거쳐, 1세기 만에 모두 사라졌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감염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지배적인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4][5] 이런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노예 노동력의 수를 유지했다. 북미의 노예 매매와 다르게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별로 함께 살게 되어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문화 중 몇몇 측면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목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고 소와 관련된 생산 - 가죽이나 말린 소고기 -은 18세기에 담배가 쿠바의 주요 돈벌이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산업이 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편집] 쿠바는 1511년부터 1898년까지 거의 4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다가 1898년 미서전쟁의 결과 미국에 넘어갔다. 이 기간 중, 점점 다른 유럽 국가의 세력이 카리브해의 스페인 지배를 위협하였는데 1655년에 영국이 자메이카를 차지하고 아이티는 1697년에 프랑스 수중에 떨어졌으며 쿠바 역시 계속해서 공격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 군대는 1762년 6월 6일 쿠바를 침입하여 아바나를 포위하고 11개월 동안 점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4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고 쿠바의 무역망을 광대한 범위로 넓혔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스페인 식민지 시절, 경제의 기반은 담배·사탕수수 재배 등 플랜테이션 농업, 광업, 유럽으로의 - 그리고 나중에는 북 아메리카로의- 사탕수수·커피·담배 수출에 두었다. 1783년 미국 독립으로 인한 시장의 창출과 1791년 하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쿠바 설탕 생산의 최대 경쟁자가 사라짐에 따라 설탕 생산이 쿠바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수입되는 수만 명의 노예들 덕분에 1820년까지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국가였다. 농업에 의하여, 다른 스페인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스페인계 후손인 지주들이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여 사회적·경제적 권력을 지녔다. 이것은 이 섬에서 태어난 스페인사람(이들을 스페인 본토 출신의 스페인 사람과 구별하여 크리올라고 불렀다.)과 다른 유럽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들 덕택이었다. 더욱이 쿠바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곳을 총독령(總督領)으로 만들고 신대륙 경영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본국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으로 쿠바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권리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19세기 초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 182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들이 봉기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했을 때, 쿠바에도 파급되어 쿠바에도 1812년에는 아폰테의 지도 아래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나는 등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쿠바는 스페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고, 이로 인해 스페인 황실은 쿠바에게 "La Siempre Fidelisima Isla"(항상 가장 충성스러운 섬)이라는 모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충성심은 쿠바가 스페인과 무역 의존도가 높았고, 스페인이 해적·노예의 봉기로부터의 쿠바를 보호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기인하고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1810년에서 1825년까지 시몬 볼리바르가 남미에서 펼친 혁명 활동 이후에 서반구에서 스페인 식민지로 남게 된 나라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뿐이었다. 스페인 충성파는 예전 식민지를 떠나 쿠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세스페데스 쿠바와 미국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이 내부적인 자치권을 얻으려는 크리올 사회를 달래는 동안 미국은 이 식민지를 병합하려고 준비중이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남부 출신의 정치인들은 미국 내 흑인 노예제도 옹호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쿠바를 합병할 음모를 세웠고, 그러는 동안 일단의 쿠바 반란군이 미국으로 망명해 스페인 식민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다. 1848년 친(親)합병 폭동이 진압되었고, 플로리다로부터 쿠바를 침입하여 합병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다. 또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구입하려고 하는 제안도 있었다. 그 후 노예제도 폐지, 농민혹사 금지와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1868년 10월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이끈 반란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리엔테 지방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크리올 농장주였으며, 그의 노예들을 해방해 주었다. 그는 전쟁을 선포하고 "무장 쿠바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다. 이것은 독립을 위한 세력과 지방의 지지를 받는 스페인군 간의 십년전쟁(1868∼1878년)이라 불리는 긴 투쟁을 낳았다. 이 독립전쟁 기간 중 공화제 헌법이 공포되고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었고, 10년 동안 200,000명이 죽었지만 결국은 반란군은 모든 힘을 다 써버렸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면을 보장하는 조약인 1878년의 산혼 조약(Paz de Zanjón)은 이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스페인이 쿠바에 좀 더 많은 자치권을 인정하고 정치·경제의 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 투쟁 이후 독립 운동은 잠시 숨죽였다. 1879년부터 1880년까지, 쿠바의 애국자 칼릭스토 가르시아(Calixto García)는 또 다른 전쟁(La Guerra Chiquita)을 시도하였으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6] 산혼조약에서 스페인이 한 경제 재건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는데, 다만 미국의 압력도 일부분 영향을 미쳐, 노예제도는 1886년에 폐지되었다. 1893년에는 형식적으로 시민의 평등권이 보장되었으나, 아프리카 출신의 후손인 소수인종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억압이 지속되었다. 1868년의 스페인 혁명으로 스페인 농촌이 곤궁해지자, 그 여파로 더 많은 스페인사람들이 쿠바로 이주해 왔다. 1890년대에는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것은 스페인이 쿠바에 대한 무역제한 조치에 대한 분노, 스페인의 쿠바에 대한 갈수록 심해지는 압박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쿠바 정부의 무능함으로 촉발되었다. 1895년 4월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을 이끈 작가이자 시인이자 국민적 영웅 호세 마르티(José Martí)는 미국에서의 도피 생활중 10년 넘게 전쟁을 조직하였다. 그는 쿠바를 독립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동부 원정군과 함께 쿠바에 상륙하자 마자 몇 주 뒤에 백마를 타고 눈에 잘 띄는 마르티는 스페인과 접전 중에 도스 리오스(Dos Ríos)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의 죽음은 그를 불멸케 하여, 그는 쿠바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고메스와 반란군 지도자인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는 서쪽으로 진군하며 지나는 동안 설탕 농장, 밭, 마을 등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스페인은 거의 내전 수준이 되어버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를 보냈고 20만명의 스페인 군대는 주로 게릴라와 파괴 전술에 의존하는 반란군을 수적으로 압도하였다. 쿠바의 군사 통치자인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 장군은 "레콘센트라도스"(reconcentrados)라 명명한 곳으로 농촌 주민들을 몰아 넣었다. 국제적 관찰자에 따르면 이것은 요새화된 마을이었다. 이 캠프는 20세기의 집단 수용소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7] 20~40만명의 쿠바 시민들이 이 기간 동안 이 캠프에서 배고픔과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숫자는 적십자사와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전쟁성장관인 레드필드 프록터(Redfield Proctor)에 의하여 검증되었었다. 미국과 유럽은 쿠바에서 자행된 스페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항의하였다.[8] 웨일러의 대책은 성공했지만 쿠바의 농업 중심 경제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897년 6월 쿠바 독립에 대해 강경파의 입장을 고수하던 스페인 수상, 안토니오 카노바스(Antonio Cánovas del Castillo)가 쿠바와 연관이 있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미국의 간섭을 두려워한 새로운 스페인 정부는 쿠바에 대해 좀 더 회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즉 선거로 선출된 의회와 지방자치를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반란세력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였고 독립을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쿠바를 병합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독립과 미국의 간섭[편집]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전투함 메인(Maine)호는 쿠바에 거주하는 8천명의 미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구실로 1898년 1월 25일 아바나에 정박 승인 없이 도착하였다. 스페인과 쿠바의 친 스페인파는 이것을 협박으로 여겼다. 2월 15일, 아바나 항에서 메인호가 폭발하였고 266명(외국인 81명 포함)의 생명을 앗아갔다. 1898년 3월 33일, 미국 해군 조사위원회(Naval Board of Inquiry)는 그 선박을 조사하고 나서, "메인호의 파괴에 관하여 어떤 개인이나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울만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다"고 밝혔다.[9] 만약 기뢰가 있었다면 그것은 스페인정부가 그 기뢰를 설치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사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신문들은 전쟁 분위기를 선동했다. 이어 스페인이 쿠바를 $3억 불에 팔라는 미국의 제의를 거절하자, 국가주의적 감정이 휩쓸었기 때문에, 미국 의회는 내정 간섭을 요청하는 결의를 통과시켰고,[10]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이를 즉각 승인하였다. 미국의 선전포고는 쿠바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미국-스페인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의 산물로, 1898년 파리 조약에 의해 스페인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과 함께 미국에 양도하였다.[11]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미국은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 총독으로 세웠고 그와 그의 후임들은 공공 사업을 연이어 추진하여 학교를 세우고 공중 보건을 개선시키는 등 모든 것들이 쿠바가 미국에 종속되도록 계획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였고 쿠바의 독립운동에 동정심을 가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1년에 윌리엄 매킨리에 이어서 미국의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20년 조약 안을 폐기하였다. 대신에 쿠바는 1902년 5월 20일 형식상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독립운동가인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Tomás Estrada Palma)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쿠바의 새 헌법 하에서, 미국은 쿠바에 관한 사항에 간섭하고 재정·외교문제를 감독할 권리를 보유하였다. 그리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은 미국이 쿠바 국내의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자유 재량으로 개입할 권리를 주는 것으로 플랫 수정안을 승인하거나 아니면 무기한 미국의 군사 지배하에 남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은 쿠바는 울며 겨자먹기로 덜 나쁜 것을 선택하였다. 플랫 수정안 하에서, 쿠바는 미국의 해군기지로 사용할 관타나모를 임차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1903년에 관타나모만(灣)를 강점(1999년 예정)하고 해군기지를 만들었으며, 쿠바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도록 했다.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 기지는 쿠바에게는 모욕이며 미국에게는 말만으로 쿠바의 자율적인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1906년에서 1909년까지 총독 통치를 하였다. 미국의 군정 종결과 함께 1902년 5월 E.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양질의 토지, 사탕산업, 교통수단 등 쿠바 경제의 중추적 기능은 미국자본이 장악하였다. 1906년,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선거에 뒤이어, 독립운동 참전자들이 이끄는 무장 반란이 에스트라다 팔마에게 충성을 다하는 무력한 정부군을 패퇴시켰고 미국이 이에 개입하였다.[12] 쿠바는 미국이 점령하였고, 미국의 총독 찰스 에드워드 마군(Charles Edward Magoon)이 3년간 통치하였다. 많은 쿠바 역사가들은 그 이후로 수년간, 마군의 통치 기간 동안에 더 많은 정치적 부패가 자행되었다며, 그의 쿠바 통치를 부정적인 견해에서 평가하였다.[13] 1908년, 호세 미겔 고메스(재임 1909년 ~ 1913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치가 회복되었으나, 미국의 쿠바 간섭은 계속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은 수뢰(收賂)·부패·실정(失政)· 무책임으로 상징된다. 1912년 유색인독립당(Partido Independiente de Color)이 오리엔테 지방에 별도의 흑인 공화국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14] 추정되기로는, 그 단체는 무기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주요 전술은 상점과 주택에 방화하는 것이었다.[15] 그 단체의 움직임은 실패로 끝났고, 몬테아구도(Monteagudo) 장군은 반란군을 학살함으로써 제압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의 전모의 해석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한다. 세계 대전 시기[편집] 관타나모 기지에서 일하는 쿠바 노동자들(1920년경) 1912년에는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3,000여 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상선이 독일 제국 잠수함에 격침되었을 때 쿠바도 마찬가지로 당했다. 그리하여 쿠바의 마리오 가르시아 메노칼(Mario García Menocal) 대통령(재임 1913년 ~ 1921년)은 미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한 지 하루가 지나서 파나마와 함께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다. 사야스(재임 1921년 ~ 1925년), 미국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한 마차도(재임 1925년 ~ 1933년)의 독재·부패 정치가 계속되는 등 잦은 소동이 일어났으나, 헌법에 의해 구성된 정부는 1930년까지 유지되었다. 이 때는 헤라르도 마차도(Gerardo Machado)가 헌법을 정지시킨 때이다. 1920년대 미국 회사들은 쿠바 농장의 2/3를 소유했으며 미국이 금주법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동안 관세로 인해 쿠바의 제조 산업은 불구가 되었지만 도박이나 매춘에 기반을 둔 관광산업은 성행하였다. 마차도의 집권 기간 동안, 여러가지 주요한 국가발전 계획이 착수됨과 함께 국가주의적 경제 계획가 추구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사회적 동요로 번졌으나 헤라도 마차도 대통령에 의해 난폭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대공황에 따라 농산물 수출 수요가 감소하고, 독립전쟁의 참전자들의 공격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암암리에 활동하는 테러 조직때문에 마차도의 권력은 약화되었다.[16] 공산당이 마차도의 지위를 빼앗은 총파업 기간 동안,[17] 쿠바 군의 상급 부대는 마차도 대통령을 1933년 8월에 축출하였고, 쿠바 건국의 아버지의 아들인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 이 케사다(Carlos Manuel de Céspedes y Quesada)를 대통령으로 옹립하였다. 1933년 9월 4일과 9월 5일에 일어난 두 번째 쿠데타로 세스페데스 정권이 무너지고 제1차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Ramón Grau San Martín)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광폭한 시기에 특기할 사건으로는 나시오날 호텔 포위와 아타레스 성(城)의 포위가 있다. 이 정부는 100일간 유지되었으나, 쿠바 사회에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변화를 꾀하였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을 거부하였다. 1934년 육군 하사관인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와 그의 군대는 대통령을 카를로스 멘디에타 이 몬테푸르(Carlos Mendieta y Montefur)로 교체하였다. 바티스타는 속임수·군대·암살을 통하여 권력을 유지한 인물로 악명이 높다. 1940년 쿠바는 자유 선거를 치렀다.[18][19] 1940년 쿠바공산당에 힘입어,[20] 바티스타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의 행정부는 주요한 사회 개혁을 시행하였다. 공산당의 일부 인원은 그의 행정부에서 관직에 참여하였다. 바티스타 행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9일 일본에게, 1941년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각각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1944년에는 라몬 그라우(Ramón Grau)가, 1948년에는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Carlos Prío Socarrás)가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투자 유입은 전면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하는 붐을 일으켰고, 대부분의 도시 지역에서 부유한 중산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빈부 격차는 더욱 넓고 분명해졌다.[21] 바티스타의 집권[편집] 1952년 선거는 3파전이었다. 오르토독소스(Ortodoxos) 당의 로베르토 아그라몬테가 모든 여론 조사에서 앞서가는 가운데 그 뒤를 아우텐티코(Auténtico) 당의 아우레릴오 에비아(Aurelio Hevia)가 2위로, 그리고 정권을 되찾으려는 바티스타는 한참 뒤처진 3위였다. 아그라몬테와 에비아는 라몬 바르킨 대령을 선거가 끝난 뒤 쿠바의 군대를 이끌도록 임명할 것을 결정하였었다. 당시 워싱턴 DC에서 외교관으로 있던 바르킨은 직업 군인들의 존경을 받는 최고의 행정관리였고, 그는 군대 내의 부패를 제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바티스타는 바르킨이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을 축출할 것을 우려하고 바티스타가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952년 3월 10일 쿠데타를 꾀하였다. 이로써 선거는 취소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친미 정권을 반대하는 쿠바 주민들의 반미 투쟁이 강화되자 이 군사정변을 조작하여 친미적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세워 쿠바를 계속 지배한 것이었다. 바티스타는 군대 내의 국가주의자들의 후원으로 권력을 얻어내고 그 후 2년간 "임시 대통령"을 지냈다. 후스토 카리요(Justo Carrillo)는 1952년 3월 워싱턴에서, 권력 중추부의 측근 그룹은 바티스타가 그에게 대한 쿠데타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즉시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민주주의와 시민 정부를 수호하기 위하여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52년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산티아고의 몬카타요새(要塞)를 공격하여 이른바 7·26운동이라고도 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54년 바티스타는 선거에 동의하였다. 아우텐티코 당은 전 대통령 그라우를 후보로 내세웠으나, 바티스타가 미리 선거를 조작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가운데, 그는 후보를 사퇴하였다. 1956년 4월, 바티스타는 바르킨에게 쿠바군의 수장이 되어줄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대와 쿠바인들의 사기를 높히고자 쿠데타를 미리 결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1956년 4월 4일, 바르킨 대령이 이끈 수백명의 직업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리오스 모레혼(Ríos Morejón)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쿠데타로 인해, 쿠바군의 중추가 흔들렸다. 그 군인들은 쿠바 계엄령에 의하여 허용된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바르킨에게는 8년간의 독방 구금이 선고되었다. 라 콘스피라시온 데 로스 푸로스(La Conspiración de los Puros)는 지휘관들의 수감과 군사 학교의 폐교라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고기·야채·곡물의 1인당 소비율과 자동차·전화·라디오의 1인당 보급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22]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이탈리아와 거의 비슷하였고, 일본보다는 상당히 높았다.[23][24] 쿠바에서는 아마도, 해고와 기계화의 금지를 포함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 특권이 영향을 미쳤다. 이 노동조합의 특권의 상당 부분은 무직자와 농부들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었고, 불균형을 가져왔다.[25] 1933년부터 1958년 사이에, 쿠바는 광범위하게 경제 관련 규제를 확대하였고 이는 경제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20][26] 졸업생들이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등 실업 문제가 비교적 커졌다.[20] 중산층들은, 미국과 쿠바를 비교해서, 실업으로 인하여 점점 실망해 갔고, 반면에 노동 조합은 최후까지 바티스타를 지지하였다.[18][20] 20년이 넘도록 부패한 바티스타가 정권을 잡고,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유지하는 동안 쿠바는 무너져갔으며 국가의 자산은 점점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 쿠바 혁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쿠바 혁명입니다. 쿠바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좌)와 체 게바라(중앙) 쿠바 혁명(1953년 7월 26일 ~ 1959년 1월 1일)은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 에르네스토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을 벌여 1959년 1월 1일 완수한 혁명을 말한다. 7월 26일단과 혁명 조직들이 당시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공평으로 점절된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의 독재 정권을 전복하여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또 "쿠바 혁명"이란 표현은 독재 정부를 뒤엎은 뒤 들어선 새 정부가 마르크스주의 정책 등 사회/정치적 계획을 실행한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즉, 이후 두차례에 걸쳐 실시된 토지개혁(1959년 5월, 1963년 10월)과 산업국유화(1960년 10월)도 쿠바 혁명에 포함될 수 있다. 1956년 12월 2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무리가 무장 저항 운동 단체를 설립할 목적으로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도착하였다. 1958년말, 그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박차고 나와, 봉기를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이들이 산타 클라라(Santa Clara)를 점령하자, 바티스타는 4000만 US$의 정부 기금을 가지고 쿠바를 벗어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갔다. 바르킨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및 그의 형제 피델 카스트로와 지휘권의 상징적인 변화에 대하여 협상하였다. 이것은 대법원이 그 혁명의 법원성(法源性)을 인정하고, 그 대표자가 명령권을 가진다고 결정한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카스트로의 군대는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하였다.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Manuel Urrutia Lleó)가 권력을 쥔지 얼마 후, 피델 카스트로가 그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는 미국으로 탈출하였다. 또 "쿠바 혁명"이란 표현은 독재 정부를 뒤엎은 뒤 들어선 새 정부가 마르크스주의 정책 등 사회/정치적 계획을 실행한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즉, 이후 두차례에 걸쳐 실시된 토지개혁(1959년 5월, 1963년 10월)과 산업국유화(1960년 10월)도 쿠바 혁명에 포함될 수 있다. 쿠바 혁명 이후[편집] 쿠바와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포스터 1961년까지 수십만명이 미국으로 피신하였다.[27] 쿠바는 1961년 1월 자유 진영의 중심국인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미국은 수차례 쿠바정부를 전복을 시도했다. 가장 유명한 실패는 냉전의 절정기에 일어난 피그스 만 침공이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CIA의 도움을 받는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스 만 침공(1961년 4월)을 감행하도록 지원하였고, 교수이자 혁명 이후 최초의 총리인 호세 미로 카르도나(José Miró Cardona)가 임시 수장을 담당하면서 쿠바에서 다수당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도록 지원하였다.[28] 그러나, 케네디는 미군이나 그밖의 직접적인 개입을 부정하였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이 섬에 침공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 존 F. 케네디는 쿠바의 사회주의 정책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어들게 할 것으로 보아 침공했으나, 군인들이 모두 생포 및 사살되어 미국의 침공은 실패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쿠바에서의 주권침해행위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봉쇄 정책을 단행하였고,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개시하였다. 1963년까지, 카스트로는 소련을 모범으로 삼아 쿠바에서 완전히 성장한 공산주의 체계를 갖추었다.[29] 1961년 4월 16일, 피그스 만 침공을 물리친 데 대해 쿠바군을 칭찬하는 연설을 하며,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이어서, 1961년 7월 피델 카스트로의 7월 26일단과 블라스 로카의 사회주의인민당(구 공산당), 파우레 초몬의 3월 13일 혁명 지도자단이 통합되어 통합 혁명 기구(IRO)가 출범했다. 1962년 3월 26일 통합 혁명 기구는 쿠바 사회주의 통합당(PURSC)이 되었고, 1965년 10월 3일에 쿠바 공산당이 되고 카스트로가 제1비서에 오르고, 블라스 로카(Blas Roca)가 제2비서가 되었다. 로카의 자리는 라울 카스트로가 잇게 되는데, 그는 국방부 장관이자 피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는데, 정부에서 가장 강력한 제2인자가 되었다. 라울 카스트로의 지위는 체 게바라가 떠남에 따라 강화되었다. 1970년대, 카스트로는 앙골라의 "앙골라 해방을 위한 대중 운동"(MPLA)과 에티오피아의 지도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돕기 위하여 수만명의 군대를 급파하였다.[30] 체 게바라는 콩고 민주 공화국과 이어서 볼리비아에서 폭동 운동을 시도하였는데 실패하였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미국 고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되었다. 그 외에도 쿠바는 자이레, 모잠비크에도 인민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나 고문을 파견하였다. 미국의 대응은 이들 나라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쿠바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려 양국 간의 교역과 여행을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삶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고 간소하였으며 불평이 가득찼다.[31] 피델 카스트로는 1970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경제 정책의 실패를 시인하였다.[31] 쿠바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소련이 지원하는 전쟁에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쿠바는 1962년에 미주 기구에서 축출되었고, 엠바고를 당했으나, 1975년 미주 기구는 쿠바에 대한 모든 제재조치를 해제하였다. 1976년에 혁명 승리 후 첫 헌법을 제정하고 11월에 "인민 주권 민족 회의 대의원 선거"를 진행하였으며 12월에 혁명정부가 행사해 오던 입법권을 인민 주권 민족 회의에 넘겼다. 1959년부터 1993년까지 약 120만명의 쿠바인(현재 인구의 10%)이 미국을 향해 쿠바를 떠났다.[32] 주로 이들은 작은 보트나 허술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1980년 4월 6일 일요일, 1만여명의 쿠바인들이 정치적 피난처를 찾아서 아바나 주재 페루 대사관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4월 7일 월요일, 쿠바 정부는 페루 대사관으로 망명하려한 쿠바인들의 이주를 허락하였다.[33] 4월 16일 5백명의 쿠바 시민들이 코스타 리카를 향해 페루 대사관을 출발하였다. 4월 21일, 많은 쿠바인들이 개인 보트를 타고 마이애미에 도착하기 시작하였으나 4월 23일 미국 주 정부는 이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보트 탈출 행렬은 계속되었다. 카스트로가 누구든지 나라를 떠나고 싶다면 마리엘 항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이민 행렬은 "마리엘 보트리프트"(영어: Mariel boatlift)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6월 15일 배의 행렬이 멈출 때까지 12만 5천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34] 혁명 전 쿠바는 뒤떨어진 농업국가였으나 혁명 승리후 민족 경제 건설에 힘을 기울인 결과 식민지적 예속성과 기형성을 극복하고 급속히 발전하는 농업과 공업을 가지게 되었다. 탈 냉전 시대[편집] 쿠바를 방문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한 라울 카스트로 (2008) 소련이 제공하는 대규모 원조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경제는 황폐화되었고 양국 간의 관계 역시 1989년 동유럽이 무너지자 러시아가 11,000명에 달하는 군인과 기술자를 철수시키면서 곧 악화되었다. 카스트로의 통치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쿠바에서는 "평화시대의 특별한 시기(Período especial en tiempo de paz)"라고 한다)의 여파로 심각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은 엄격한 무역 금지 조치를 고수하였고 쿠바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빠르게 고립되었다. 1991년 12월 쿠바 헌법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하도록 고쳐졌다. 카스트로는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을 언급하였지만 소련식 모델에 대한 개혁은 벌써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다. 식량난은 북조선과 유사하였다. 우선권은 엘리트 계층과 군인들에만 있을 뿐이었고, 일반 서민들은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35][36] 쿠바 정부는 1993년까지 미국의 식량·의약품·금전 원조를 받기를 거부하였다.[35] 1993년 쿠바인이 미국 달러를 가지거나 사용할 수 있으며 100가지의 상업 분야에서 자영업을 허락하고 산지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미국 달러 수입이나 이익에 대한 세금이 1994년에 징수되었고 1996년 10월에는 외국 회사가 전적으로 사업을 소유하거나 운영할 수 있으며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개방에 대해 미국이 취한 행동이란 해묵은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1996년 헬름스-버튼 법을 만들어 미국의 투자자들이 쿠바에서 몰수한 재산을 이용하는 외국 회사에 대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쿠바에 대해 차관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충고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새로운 원조자로서 등장하였다. 또한 쿠바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과 새로운 유대 관계를 맺었다. 두 나라 모두 석유와 천연가스의 주요 수출국이다.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정치적인 탄압으로 인해 단지 쿠바의 현재 지도체제를 비판한다는 이유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을 규합하려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진 양심수는 적어도 500여명에 이른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한탄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센 이웃 나라인 미국이 항상 쿠바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998년 쿠바를 방문하는 동안 쿠바 정부의 고집과 미국 정부의 금수 조치에 대해 함께 비난함으로써 이것을 인정했다. 당시 교황의 방문에는 5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이것은 미국이 양국 간의 직항편 운행을 2년 동안 금지시킨 조치를 철회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1998년 10월에 찾아온 허리케인 죠지는 교황처럼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됐다. 인명피해는 소수에 그쳤지만 수천 명의 주민이 수재민이 되었으며 많은 가옥이 거센 바람에 파괴되었고 더 많은 집들이 폭풍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번진 홍수를 피하기 위해 버려졌다. 2003년 쿠바 정부는 블랙 스프링(Black Spring)이라 알려진 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와 충돌하였고 몇십명이 투옥되었다.[37][38] 2006년 7월 31일, 피델 카스트로는 그의 주요 권력을 남동생이자 제1부통령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하였다. 이 권력 이양은 피델 카스트로가 지속적인 출혈을 동반한 급성 위급통증으로 고통받은 후에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서 한시적이었다. 카스트로는 2006년 12월 2일에 열린 그란마 호 상륙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던 당시 병이 중하였는데, 이는 카스트로가 위암에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39] 그러나 2006년 12월 26일 스페인 의사 가르시아 사브리도는 그의 병이 소화 문제일 뿐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40] 2008년 1월, 카스트로가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만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 장면에서 카스트로는 허약하기는 하지만, 3개월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었다. 2008년 2월 카스트로는 쿠바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였다.[41] 2008년 2월 24일, 라울 카스트로가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42] 그는 수락 연설에서, 쿠바인들의 일상 생활을 제한하는 몇가지 것들이 철폐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43] 2009년 3월,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 카스트로 집권 시에 재직했던 공직자들을 숙청하였다. 쿠바와 유럽 연합은 5년 동안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으나 2008년 10월 23일에 다시 정상화되었다.[44] 각주[편집] ↑ AFP 2007 (accessed 11-18 2007) Arqueología Hallazgo podría dar pistas sobre primeros habitantes de la Is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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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바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쿠바의 역사Historia de Cuba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쿠바 총독부 쿠바 독립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쿠바 보호령 쿠바 공화국 쿠바 혁명 쿠바 미사일 위기 오늘날의 쿠바 v • d • e • h 쿠바에는 수 천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중에 폭발한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공산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1961년에는 그 혁명이 사회주의적임을 천명하였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혁명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무장 봉기를 지원하였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독재자들을 원조하였다.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쿠바는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 경제에서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일관하였다. 쿠바에는 양심수가 500명에 이르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2008년, 병이 중해진 피델 카스트로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넘겨 주었다. 목차 1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의 쿠바 정복 2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 3 독립과 미국의 간섭 4 세계 대전 시기 5 바티스타의 집권 6 쿠바 혁명 7 쿠바 혁명 이후 8 탈 냉전 시대 9 각주 10 외부 링크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의 쿠바 정복[편집] 아라왁족(族)의 여인 쿠바 섬에는 원래 최소한 천년전, 그리고 아마도 6~8천년전에 남부· 중부·북부 아메리카에서 건너왔던 원주민이 물고기를 잡거나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후손인 타이노족(族)·시보네족으로 불리는 5만여 명의 원주민들은 고도로 발달된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거주하고 있었다.[1] 타이노족은 농경생활을, 시보니족은 농경과 수렵, 채취 생활을 하는 종족이었다. 일부에서는 구리 무역이 성행했다고 주장해 오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유물[2] 이 아메리카 대륙 본토에서 발견되었다. 1492년 10월 27일, 제1차 항해중이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현재의 쿠바 섬을 발견하고 이 섬을 스페인 영토로 잠시 점유하고, 왕자 후안(Juan)의 이름을 따서, 후안 섬(Isla Juana)이라고 명명했다.[3] 1511년 스페인 제국의 정착지가 스페인에서 파견한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에 의해서 바라코아에 최초로 세워졌다. 1512년 벨라스케스는 300명을 이끌고 이스파니올라를 떠나 쿠바로 향하여 본격적으로 스페인령임을 선포하고는 2년동안 일곱 곳의 개척지를 건설했다. 미래에 수도가 될 산 크리스토발 데 라 아바나(San Cristóbal de la Habana, 1515년 설립) 등 다른 마을도 그 뒤를 이었다. 2년동안 스페인인은 수천 명의 원주민을 죽였으며 벨라스케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원주민을 모두 서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당시 쿠바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1516년 벨라스케스가 멕시코로 네 번의 원정을 후원하여 그 중 1519년에서 1521년까지의 에르난 코르테스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에 쿠바는 남미로 가는 스페인의 관문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엔코미엔다 제도가 구축되면서 커다란 사유지가 형성되었고, 스페인은 기독교로의 개종에 저항하는 약 10만명의 원주민을 억압하고 종교 교육의 구실 아래 인디언에 대한 노예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 1542년에 엔코미엔다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혹독한 착취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질병에 의해 인디언 인구는 5,000여 명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사금(砂金)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원주민들은 1528년의 대(對)스페인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을 거쳐, 1세기 만에 모두 사라졌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감염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지배적인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4][5] 이런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노예 노동력의 수를 유지했다. 북미의 노예 매매와 다르게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별로 함께 살게 되어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문화 중 몇몇 측면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목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고 소와 관련된 생산 - 가죽이나 말린 소고기 -은 18세기에 담배가 쿠바의 주요 돈벌이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산업이 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편집] 쿠바는 1511년부터 1898년까지 거의 4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다가 1898년 미서전쟁의 결과 미국에 넘어갔다. 이 기간 중, 점점 다른 유럽 국가의 세력이 카리브해의 스페인 지배를 위협하였는데 1655년에 영국이 자메이카를 차지하고 아이티는 1697년에 프랑스 수중에 떨어졌으며 쿠바 역시 계속해서 공격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 군대는 1762년 6월 6일 쿠바를 침입하여 아바나를 포위하고 11개월 동안 점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4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고 쿠바의 무역망을 광대한 범위로 넓혔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스페인 식민지 시절, 경제의 기반은 담배·사탕수수 재배 등 플랜테이션 농업, 광업, 유럽으로의 - 그리고 나중에는 북 아메리카로의- 사탕수수·커피·담배 수출에 두었다. 1783년 미국 독립으로 인한 시장의 창출과 1791년 하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쿠바 설탕 생산의 최대 경쟁자가 사라짐에 따라 설탕 생산이 쿠바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수입되는 수만 명의 노예들 덕분에 1820년까지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국가였다. 농업에 의하여, 다른 스페인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스페인계 후손인 지주들이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여 사회적·경제적 권력을 지녔다. 이것은 이 섬에서 태어난 스페인사람(이들을 스페인 본토 출신의 스페인 사람과 구별하여 크리올라고 불렀다.)과 다른 유럽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들 덕택이었다. 더욱이 쿠바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곳을 총독령(總督領)으로 만들고 신대륙 경영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본국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으로 쿠바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권리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19세기 초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 182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들이 봉기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했을 때, 쿠바에도 파급되어 쿠바에도 1812년에는 아폰테의 지도 아래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나는 등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쿠바는 스페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고, 이로 인해 스페인 황실은 쿠바에게 "La Siempre Fidelisima Isla"(항상 가장 충성스러운 섬)이라는 모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충성심은 쿠바가 스페인과 무역 의존도가 높았고, 스페인이 해적·노예의 봉기로부터의 쿠바를 보호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기인하고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1810년에서 1825년까지 시몬 볼리바르가 남미에서 펼친 혁명 활동 이후에 서반구에서 스페인 식민지로 남게 된 나라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뿐이었다. 스페인 충성파는 예전 식민지를 떠나 쿠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세스페데스 쿠바와 미국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이 내부적인 자치권을 얻으려는 크리올 사회를 달래는 동안 미국은 이 식민지를 병합하려고 준비중이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남부 출신의 정치인들은 미국 내 흑인 노예제도 옹호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쿠바를 합병할 음모를 세웠고, 그러는 동안 일단의 쿠바 반란군이 미국으로 망명해 스페인 식민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다. 1848년 친(親)합병 폭동이 진압되었고, 플로리다로부터 쿠바를 침입하여 합병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다. 또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구입하려고 하는 제안도 있었다. 그 후 노예제도 폐지, 농민혹사 금지와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1868년 10월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이끈 반란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리엔테 지방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크리올 농장주였으며, 그의 노예들을 해방해 주었다. 그는 전쟁을 선포하고 "무장 쿠바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다. 이것은 독립을 위한 세력과 지방의 지지를 받는 스페인군 간의 십년전쟁(1868∼1878년)이라 불리는 긴 투쟁을 낳았다. 이 독립전쟁 기간 중 공화제 헌법이 공포되고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었고, 10년 동안 200,000명이 죽었지만 결국은 반란군은 모든 힘을 다 써버렸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면을 보장하는 조약인 1878년의 산혼 조약(Paz de Zanjón)은 이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스페인이 쿠바에 좀 더 많은 자치권을 인정하고 정치·경제의 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 투쟁 이후 독립 운동은 잠시 숨죽였다. 1879년부터 1880년까지, 쿠바의 애국자 칼릭스토 가르시아(Calixto García)는 또 다른 전쟁(La Guerra Chiquita)을 시도하였으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6] 산혼조약에서 스페인이 한 경제 재건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는데, 다만 미국의 압력도 일부분 영향을 미쳐, 노예제도는 1886년에 폐지되었다. 1893년에는 형식적으로 시민의 평등권이 보장되었으나, 아프리카 출신의 후손인 소수인종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억압이 지속되었다. 1868년의 스페인 혁명으로 스페인 농촌이 곤궁해지자, 그 여파로 더 많은 스페인사람들이 쿠바로 이주해 왔다. 1890년대에는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것은 스페인이 쿠바에 대한 무역제한 조치에 대한 분노, 스페인의 쿠바에 대한 갈수록 심해지는 압박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쿠바 정부의 무능함으로 촉발되었다. 1895년 4월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을 이끈 작가이자 시인이자 국민적 영웅 호세 마르티(José Martí)는 미국에서의 도피 생활중 10년 넘게 전쟁을 조직하였다. 그는 쿠바를 독립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동부 원정군과 함께 쿠바에 상륙하자 마자 몇 주 뒤에 백마를 타고 눈에 잘 띄는 마르티는 스페인과 접전 중에 도스 리오스(Dos Ríos)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의 죽음은 그를 불멸케 하여, 그는 쿠바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고메스와 반란군 지도자인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는 서쪽으로 진군하며 지나는 동안 설탕 농장, 밭, 마을 등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스페인은 거의 내전 수준이 되어버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를 보냈고 20만명의 스페인 군대는 주로 게릴라와 파괴 전술에 의존하는 반란군을 수적으로 압도하였다. 쿠바의 군사 통치자인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 장군은 "레콘센트라도스"(reconcentrados)라 명명한 곳으로 농촌 주민들을 몰아 넣었다. 국제적 관찰자에 따르면 이것은 요새화된 마을이었다. 이 캠프는 20세기의 집단 수용소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7] 20~40만명의 쿠바 시민들이 이 기간 동안 이 캠프에서 배고픔과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숫자는 적십자사와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전쟁성장관인 레드필드 프록터(Redfield Proctor)에 의하여 검증되었었다. 미국과 유럽은 쿠바에서 자행된 스페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항의하였다.[8] 웨일러의 대책은 성공했지만 쿠바의 농업 중심 경제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897년 6월 쿠바 독립에 대해 강경파의 입장을 고수하던 스페인 수상, 안토니오 카노바스(Antonio Cánovas del Castillo)가 쿠바와 연관이 있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미국의 간섭을 두려워한 새로운 스페인 정부는 쿠바에 대해 좀 더 회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즉 선거로 선출된 의회와 지방자치를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반란세력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였고 독립을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쿠바를 병합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독립과 미국의 간섭[편집]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전투함 메인(Maine)호는 쿠바에 거주하는 8천명의 미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구실로 1898년 1월 25일 아바나에 정박 승인 없이 도착하였다. 스페인과 쿠바의 친 스페인파는 이것을 협박으로 여겼다. 2월 15일, 아바나 항에서 메인호가 폭발하였고 266명(외국인 81명 포함)의 생명을 앗아갔다. 1898년 3월 33일, 미국 해군 조사위원회(Naval Board of Inquiry)는 그 선박을 조사하고 나서, "메인호의 파괴에 관하여 어떤 개인이나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울만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다"고 밝혔다.[9] 만약 기뢰가 있었다면 그것은 스페인정부가 그 기뢰를 설치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사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신문들은 전쟁 분위기를 선동했다. 이어 스페인이 쿠바를 $3억 불에 팔라는 미국의 제의를 거절하자, 국가주의적 감정이 휩쓸었기 때문에, 미국 의회는 내정 간섭을 요청하는 결의를 통과시켰고,[10]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이를 즉각 승인하였다. 미국의 선전포고는 쿠바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미국-스페인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의 산물로, 1898년 파리 조약에 의해 스페인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과 함께 미국에 양도하였다.[11]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미국은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 총독으로 세웠고 그와 그의 후임들은 공공 사업을 연이어 추진하여 학교를 세우고 공중 보건을 개선시키는 등 모든 것들이 쿠바가 미국에 종속되도록 계획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였고 쿠바의 독립운동에 동정심을 가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1년에 윌리엄 매킨리에 이어서 미국의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20년 조약 안을 폐기하였다. 대신에 쿠바는 1902년 5월 20일 형식상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독립운동가인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Tomás Estrada Palma)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쿠바의 새 헌법 하에서, 미국은 쿠바에 관한 사항에 간섭하고 재정·외교문제를 감독할 권리를 보유하였다. 그리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은 미국이 쿠바 국내의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자유 재량으로 개입할 권리를 주는 것으로 플랫 수정안을 승인하거나 아니면 무기한 미국의 군사 지배하에 남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은 쿠바는 울며 겨자먹기로 덜 나쁜 것을 선택하였다. 플랫 수정안 하에서, 쿠바는 미국의 해군기지로 사용할 관타나모를 임차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1903년에 관타나모만(灣)를 강점(1999년 예정)하고 해군기지를 만들었으며, 쿠바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도록 했다.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 기지는 쿠바에게는 모욕이며 미국에게는 말만으로 쿠바의 자율적인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1906년에서 1909년까지 총독 통치를 하였다. 미국의 군정 종결과 함께 1902년 5월 E.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양질의 토지, 사탕산업, 교통수단 등 쿠바 경제의 중추적 기능은 미국자본이 장악하였다. 1906년,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선거에 뒤이어, 독립운동 참전자들이 이끄는 무장 반란이 에스트라다 팔마에게 충성을 다하는 무력한 정부군을 패퇴시켰고 미국이 이에 개입하였다.[12] 쿠바는 미국이 점령하였고, 미국의 총독 찰스 에드워드 마군(Charles Edward Magoon)이 3년간 통치하였다. 많은 쿠바 역사가들은 그 이후로 수년간, 마군의 통치 기간 동안에 더 많은 정치적 부패가 자행되었다며, 그의 쿠바 통치를 부정적인 견해에서 평가하였다.[13] 1908년, 호세 미겔 고메스(재임 1909년 ~ 1913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치가 회복되었으나, 미국의 쿠바 간섭은 계속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은 수뢰(收賂)·부패·실정(失政)· 무책임으로 상징된다. 1912년 유색인독립당(Partido Independiente de Color)이 오리엔테 지방에 별도의 흑인 공화국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14] 추정되기로는, 그 단체는 무기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주요 전술은 상점과 주택에 방화하는 것이었다.[15] 그 단체의 움직임은 실패로 끝났고, 몬테아구도(Monteagudo) 장군은 반란군을 학살함으로써 제압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의 전모의 해석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한다. 세계 대전 시기[편집] 관타나모 기지에서 일하는 쿠바 노동자들(1920년경) 1912년에는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3,000여 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상선이 독일 제국 잠수함에 격침되었을 때 쿠바도 마찬가지로 당했다. 그리하여 쿠바의 마리오 가르시아 메노칼(Mario García Menocal) 대통령(재임 1913년 ~ 1921년)은 미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한 지 하루가 지나서 파나마와 함께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다. 사야스(재임 1921년 ~ 1925년), 미국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한 마차도(재임 1925년 ~ 1933년)의 독재·부패 정치가 계속되는 등 잦은 소동이 일어났으나, 헌법에 의해 구성된 정부는 1930년까지 유지되었다. 이 때는 헤라르도 마차도(Gerardo Machado)가 헌법을 정지시킨 때이다. 1920년대 미국 회사들은 쿠바 농장의 2/3를 소유했으며 미국이 금주법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동안 관세로 인해 쿠바의 제조 산업은 불구가 되었지만 도박이나 매춘에 기반을 둔 관광산업은 성행하였다. 마차도의 집권 기간 동안, 여러가지 주요한 국가발전 계획이 착수됨과 함께 국가주의적 경제 계획가 추구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사회적 동요로 번졌으나 헤라도 마차도 대통령에 의해 난폭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대공황에 따라 농산물 수출 수요가 감소하고, 독립전쟁의 참전자들의 공격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암암리에 활동하는 테러 조직때문에 마차도의 권력은 약화되었다.[16] 공산당이 마차도의 지위를 빼앗은 총파업 기간 동안,[17] 쿠바 군의 상급 부대는 마차도 대통령을 1933년 8월에 축출하였고, 쿠바 건국의 아버지의 아들인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 이 케사다(Carlos Manuel de Céspedes y Quesada)를 대통령으로 옹립하였다. 1933년 9월 4일과 9월 5일에 일어난 두 번째 쿠데타로 세스페데스 정권이 무너지고 제1차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Ramón Grau San Martín)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광폭한 시기에 특기할 사건으로는 나시오날 호텔 포위와 아타레스 성(城)의 포위가 있다. 이 정부는 100일간 유지되었으나, 쿠바 사회에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변화를 꾀하였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을 거부하였다. 1934년 육군 하사관인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와 그의 군대는 대통령을 카를로스 멘디에타 이 몬테푸르(Carlos Mendieta y Montefur)로 교체하였다. 바티스타는 속임수·군대·암살을 통하여 권력을 유지한 인물로 악명이 높다. 1940년 쿠바는 자유 선거를 치렀다.[18][19] 1940년 쿠바공산당에 힘입어,[20] 바티스타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의 행정부는 주요한 사회 개혁을 시행하였다. 공산당의 일부 인원은 그의 행정부에서 관직에 참여하였다. 바티스타 행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9일 일본에게, 1941년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각각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1944년에는 라몬 그라우(Ramón Grau)가, 1948년에는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Carlos Prío Socarrás)가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투자 유입은 전면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하는 붐을 일으켰고, 대부분의 도시 지역에서 부유한 중산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빈부 격차는 더욱 넓고 분명해졌다.[21] 바티스타의 집권[편집] 1952년 선거는 3파전이었다. 오르토독소스(Ortodoxos) 당의 로베르토 아그라몬테가 모든 여론 조사에서 앞서가는 가운데 그 뒤를 아우텐티코(Auténtico) 당의 아우레릴오 에비아(Aurelio Hevia)가 2위로, 그리고 정권을 되찾으려는 바티스타는 한참 뒤처진 3위였다. 아그라몬테와 에비아는 라몬 바르킨 대령을 선거가 끝난 뒤 쿠바의 군대를 이끌도록 임명할 것을 결정하였었다. 당시 워싱턴 DC에서 외교관으로 있던 바르킨은 직업 군인들의 존경을 받는 최고의 행정관리였고, 그는 군대 내의 부패를 제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바티스타는 바르킨이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을 축출할 것을 우려하고 바티스타가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952년 3월 10일 쿠데타를 꾀하였다. 이로써 선거는 취소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친미 정권을 반대하는 쿠바 주민들의 반미 투쟁이 강화되자 이 군사정변을 조작하여 친미적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세워 쿠바를 계속 지배한 것이었다. 바티스타는 군대 내의 국가주의자들의 후원으로 권력을 얻어내고 그 후 2년간 "임시 대통령"을 지냈다. 후스토 카리요(Justo Carrillo)는 1952년 3월 워싱턴에서, 권력 중추부의 측근 그룹은 바티스타가 그에게 대한 쿠데타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즉시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민주주의와 시민 정부를 수호하기 위하여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52년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산티아고의 몬카타요새(要塞)를 공격하여 이른바 7·26운동이라고도 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54년 바티스타는 선거에 동의하였다. 아우텐티코 당은 전 대통령 그라우를 후보로 내세웠으나, 바티스타가 미리 선거를 조작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가운데, 그는 후보를 사퇴하였다. 1956년 4월, 바티스타는 바르킨에게 쿠바군의 수장이 되어줄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대와 쿠바인들의 사기를 높히고자 쿠데타를 미리 결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1956년 4월 4일, 바르킨 대령이 이끈 수백명의 직업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리오스 모레혼(Ríos Morejón)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쿠데타로 인해, 쿠바군의 중추가 흔들렸다. 그 군인들은 쿠바 계엄령에 의하여 허용된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바르킨에게는 8년간의 독방 구금이 선고되었다. 라 콘스피라시온 데 로스 푸로스(La Conspiración de los Puros)는 지휘관들의 수감과 군사 학교의 폐교라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고기·야채·곡물의 1인당 소비율과 자동차·전화·라디오의 1인당 보급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22]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이탈리아와 거의 비슷하였고, 일본보다는 상당히 높았다.[23][24] 쿠바에서는 아마도, 해고와 기계화의 금지를 포함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 특권이 영향을 미쳤다. 이 노동조합의 특권의 상당 부분은 무직자와 농부들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었고, 불균형을 가져왔다.[25] 1933년부터 1958년 사이에, 쿠바는 광범위하게 경제 관련 규제를 확대하였고 이는 경제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20][26] 졸업생들이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등 실업 문제가 비교적 커졌다.[20] 중산층들은, 미국과 쿠바를 비교해서, 실업으로 인하여 점점 실망해 갔고, 반면에 노동 조합은 최후까지 바티스타를 지지하였다.[18][20] 20년이 넘도록 부패한 바티스타가 정권을 잡고,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유지하는 동안 쿠바는 무너져갔으며 국가의 자산은 점점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 쿠바 혁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쿠바 혁명입니다. 쿠바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좌)와 체 게바라(중앙) 쿠바 혁명(1953년 7월 26일 ~ 1959년 1월 1일)은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 에르네스토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을 벌여 1959년 1월 1일 완수한 혁명을 말한다. 7월 26일단과 혁명 조직들이 당시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공평으로 점절된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의 독재 정권을 전복하여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또 "쿠바 혁명"이란 표현은 독재 정부를 뒤엎은 뒤 들어선 새 정부가 마르크스주의 정책 등 사회/정치적 계획을 실행한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즉, 이후 두차례에 걸쳐 실시된 토지개혁(1959년 5월, 1963년 10월)과 산업국유화(1960년 10월)도 쿠바 혁명에 포함될 수 있다. 1956년 12월 2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무리가 무장 저항 운동 단체를 설립할 목적으로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도착하였다. 1958년말, 그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박차고 나와, 봉기를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이들이 산타 클라라(Santa Clara)를 점령하자, 바티스타는 4000만 US$의 정부 기금을 가지고 쿠바를 벗어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갔다. 바르킨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및 그의 형제 피델 카스트로와 지휘권의 상징적인 변화에 대하여 협상하였다. 이것은 대법원이 그 혁명의 법원성(法源性)을 인정하고, 그 대표자가 명령권을 가진다고 결정한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카스트로의 군대는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하였다.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Manuel Urrutia Lleó)가 권력을 쥔지 얼마 후, 피델 카스트로가 그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는 미국으로 탈출하였다. 또 "쿠바 혁명"이란 표현은 독재 정부를 뒤엎은 뒤 들어선 새 정부가 마르크스주의 정책 등 사회/정치적 계획을 실행한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즉, 이후 두차례에 걸쳐 실시된 토지개혁(1959년 5월, 1963년 10월)과 산업국유화(1960년 10월)도 쿠바 혁명에 포함될 수 있다. 쿠바 혁명 이후[편집] 쿠바와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포스터 1961년까지 수십만명이 미국으로 피신하였다.[27] 쿠바는 1961년 1월 자유 진영의 중심국인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미국은 수차례 쿠바정부를 전복을 시도했다. 가장 유명한 실패는 냉전의 절정기에 일어난 피그스 만 침공이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CIA의 도움을 받는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스 만 침공(1961년 4월)을 감행하도록 지원하였고, 교수이자 혁명 이후 최초의 총리인 호세 미로 카르도나(José Miró Cardona)가 임시 수장을 담당하면서 쿠바에서 다수당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도록 지원하였다.[28] 그러나, 케네디는 미군이나 그밖의 직접적인 개입을 부정하였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이 섬에 침공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 존 F. 케네디는 쿠바의 사회주의 정책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어들게 할 것으로 보아 침공했으나, 군인들이 모두 생포 및 사살되어 미국의 침공은 실패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쿠바에서의 주권침해행위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봉쇄 정책을 단행하였고,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개시하였다. 1963년까지, 카스트로는 소련을 모범으로 삼아 쿠바에서 완전히 성장한 공산주의 체계를 갖추었다.[29] 1961년 4월 16일, 피그스 만 침공을 물리친 데 대해 쿠바군을 칭찬하는 연설을 하며,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이어서, 1961년 7월 피델 카스트로의 7월 26일단과 블라스 로카의 사회주의인민당(구 공산당), 파우레 초몬의 3월 13일 혁명 지도자단이 통합되어 통합 혁명 기구(IRO)가 출범했다. 1962년 3월 26일 통합 혁명 기구는 쿠바 사회주의 통합당(PURSC)이 되었고, 1965년 10월 3일에 쿠바 공산당이 되고 카스트로가 제1비서에 오르고, 블라스 로카(Blas Roca)가 제2비서가 되었다. 로카의 자리는 라울 카스트로가 잇게 되는데, 그는 국방부 장관이자 피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는데, 정부에서 가장 강력한 제2인자가 되었다. 라울 카스트로의 지위는 체 게바라가 떠남에 따라 강화되었다. 1970년대, 카스트로는 앙골라의 "앙골라 해방을 위한 대중 운동"(MPLA)과 에티오피아의 지도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돕기 위하여 수만명의 군대를 급파하였다.[30] 체 게바라는 콩고 민주 공화국과 이어서 볼리비아에서 폭동 운동을 시도하였는데 실패하였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미국 고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되었다. 그 외에도 쿠바는 자이레, 모잠비크에도 인민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나 고문을 파견하였다. 미국의 대응은 이들 나라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쿠바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려 양국 간의 교역과 여행을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삶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고 간소하였으며 불평이 가득찼다.[31] 피델 카스트로는 1970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경제 정책의 실패를 시인하였다.[31] 쿠바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소련이 지원하는 전쟁에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쿠바는 1962년에 미주 기구에서 축출되었고, 엠바고를 당했으나, 1975년 미주 기구는 쿠바에 대한 모든 제재조치를 해제하였다. 1976년에 혁명 승리 후 첫 헌법을 제정하고 11월에 "인민 주권 민족 회의 대의원 선거"를 진행하였으며 12월에 혁명정부가 행사해 오던 입법권을 인민 주권 민족 회의에 넘겼다. 1959년부터 1993년까지 약 120만명의 쿠바인(현재 인구의 10%)이 미국을 향해 쿠바를 떠났다.[32] 주로 이들은 작은 보트나 허술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1980년 4월 6일 일요일, 1만여명의 쿠바인들이 정치적 피난처를 찾아서 아바나 주재 페루 대사관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4월 7일 월요일, 쿠바 정부는 페루 대사관으로 망명하려한 쿠바인들의 이주를 허락하였다.[33] 4월 16일 5백명의 쿠바 시민들이 코스타 리카를 향해 페루 대사관을 출발하였다. 4월 21일, 많은 쿠바인들이 개인 보트를 타고 마이애미에 도착하기 시작하였으나 4월 23일 미국 주 정부는 이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보트 탈출 행렬은 계속되었다. 카스트로가 누구든지 나라를 떠나고 싶다면 마리엘 항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이민 행렬은 "마리엘 보트리프트"(영어: Mariel boatlift)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6월 15일 배의 행렬이 멈출 때까지 12만 5천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34] 혁명 전 쿠바는 뒤떨어진 농업국가였으나 혁명 승리후 민족 경제 건설에 힘을 기울인 결과 식민지적 예속성과 기형성을 극복하고 급속히 발전하는 농업과 공업을 가지게 되었다. 탈 냉전 시대[편집] 쿠바를 방문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한 라울 카스트로 (2008) 소련이 제공하는 대규모 원조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경제는 황폐화되었고 양국 간의 관계 역시 1989년 동유럽이 무너지자 러시아가 11,000명에 달하는 군인과 기술자를 철수시키면서 곧 악화되었다. 카스트로의 통치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쿠바에서는 "평화시대의 특별한 시기(Período especial en tiempo de paz)"라고 한다)의 여파로 심각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은 엄격한 무역 금지 조치를 고수하였고 쿠바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빠르게 고립되었다. 1991년 12월 쿠바 헌법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하도록 고쳐졌다. 카스트로는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을 언급하였지만 소련식 모델에 대한 개혁은 벌써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다. 식량난은 북조선과 유사하였다. 우선권은 엘리트 계층과 군인들에만 있을 뿐이었고, 일반 서민들은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35][36] 쿠바 정부는 1993년까지 미국의 식량·의약품·금전 원조를 받기를 거부하였다.[35] 1993년 쿠바인이 미국 달러를 가지거나 사용할 수 있으며 100가지의 상업 분야에서 자영업을 허락하고 산지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미국 달러 수입이나 이익에 대한 세금이 1994년에 징수되었고 1996년 10월에는 외국 회사가 전적으로 사업을 소유하거나 운영할 수 있으며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개방에 대해 미국이 취한 행동이란 해묵은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1996년 헬름스-버튼 법을 만들어 미국의 투자자들이 쿠바에서 몰수한 재산을 이용하는 외국 회사에 대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쿠바에 대해 차관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충고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새로운 원조자로서 등장하였다. 또한 쿠바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과 새로운 유대 관계를 맺었다. 두 나라 모두 석유와 천연가스의 주요 수출국이다.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정치적인 탄압으로 인해 단지 쿠바의 현재 지도체제를 비판한다는 이유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을 규합하려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진 양심수는 적어도 500여명에 이른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한탄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센 이웃 나라인 미국이 항상 쿠바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998년 쿠바를 방문하는 동안 쿠바 정부의 고집과 미국 정부의 금수 조치에 대해 함께 비난함으로써 이것을 인정했다. 당시 교황의 방문에는 5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이것은 미국이 양국 간의 직항편 운행을 2년 동안 금지시킨 조치를 철회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1998년 10월에 찾아온 허리케인 죠지는 교황처럼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됐다. 인명피해는 소수에 그쳤지만 수천 명의 주민이 수재민이 되었으며 많은 가옥이 거센 바람에 파괴되었고 더 많은 집들이 폭풍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번진 홍수를 피하기 위해 버려졌다. 2003년 쿠바 정부는 블랙 스프링(Black Spring)이라 알려진 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와 충돌하였고 몇십명이 투옥되었다.[37][38] 2006년 7월 31일, 피델 카스트로는 그의 주요 권력을 남동생이자 제1부통령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하였다. 이 권력 이양은 피델 카스트로가 지속적인 출혈을 동반한 급성 위급통증으로 고통받은 후에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서 한시적이었다. 카스트로는 2006년 12월 2일에 열린 그란마 호 상륙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던 당시 병이 중하였는데, 이는 카스트로가 위암에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39] 그러나 2006년 12월 26일 스페인 의사 가르시아 사브리도는 그의 병이 소화 문제일 뿐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40] 2008년 1월, 카스트로가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만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 장면에서 카스트로는 허약하기는 하지만, 3개월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었다. 2008년 2월 카스트로는 쿠바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였다.[41] 2008년 2월 24일, 라울 카스트로가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42] 그는 수락 연설에서, 쿠바인들의 일상 생활을 제한하는 몇가지 것들이 철폐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43] 2009년 3월,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 카스트로 집권 시에 재직했던 공직자들을 숙청하였다. 쿠바와 유럽 연합은 5년 동안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으나 2008년 10월 23일에 다시 정상화되었다.[44] 각주[편집] ↑ AFP 2007 (accessed 11-18 2007) Arqueología Hallazgo podría dar pistas sobre primeros habitantes de la Is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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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바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쿠바의 역사Historia de Cuba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쿠바 총독부 쿠바 독립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쿠바 보호령 쿠바 공화국 쿠바 혁명 쿠바 미사일 위기 오늘날의 쿠바 v • d • e • h 쿠바에는 수 천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중에 폭발한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공산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1961년에는 그 혁명이 사회주의적임을 천명하였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혁명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무장 봉기를 지원하였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독재자들을 원조하였다.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쿠바는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 경제에서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일관하였다. 쿠바에는 양심수가 500명에 이르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2008년, 병이 중해진 피델 카스트로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넘겨 주었다. 목차 1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의 쿠바 정복 2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 3 독립과 미국의 간섭 4 세계 대전 시기 5 바티스타의 집권 6 쿠바 혁명 7 쿠바 혁명 이후 8 탈 냉전 시대 9 각주 10 외부 링크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의 쿠바 정복[편집] 아라왁족(族)의 여인 쿠바 섬에는 원래 최소한 천년전, 그리고 아마도 6~8천년전에 남부· 중부·북부 아메리카에서 건너왔던 원주민이 물고기를 잡거나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후손인 타이노족(族)·시보네족으로 불리는 5만여 명의 원주민들은 고도로 발달된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거주하고 있었다.[1] 타이노족은 농경생활을, 시보니족은 농경과 수렵, 채취 생활을 하는 종족이었다. 일부에서는 구리 무역이 성행했다고 주장해 오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유물[2] 이 아메리카 대륙 본토에서 발견되었다. 1492년 10월 27일, 제1차 항해중이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현재의 쿠바 섬을 발견하고 이 섬을 스페인 영토로 잠시 점유하고, 왕자 후안(Juan)의 이름을 따서, 후안 섬(Isla Juana)이라고 명명했다.[3] 1511년 스페인 제국의 정착지가 스페인에서 파견한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에 의해서 바라코아에 최초로 세워졌다. 1512년 벨라스케스는 300명을 이끌고 이스파니올라를 떠나 쿠바로 향하여 본격적으로 스페인령임을 선포하고는 2년동안 일곱 곳의 개척지를 건설했다. 미래에 수도가 될 산 크리스토발 데 라 아바나(San Cristóbal de la Habana, 1515년 설립) 등 다른 마을도 그 뒤를 이었다. 2년동안 스페인인은 수천 명의 원주민을 죽였으며 벨라스케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원주민을 모두 서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당시 쿠바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1516년 벨라스케스가 멕시코로 네 번의 원정을 후원하여 그 중 1519년에서 1521년까지의 에르난 코르테스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에 쿠바는 남미로 가는 스페인의 관문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엔코미엔다 제도가 구축되면서 커다란 사유지가 형성되었고, 스페인은 기독교로의 개종에 저항하는 약 10만명의 원주민을 억압하고 종교 교육의 구실 아래 인디언에 대한 노예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 1542년에 엔코미엔다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혹독한 착취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질병에 의해 인디언 인구는 5,000여 명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사금(砂金)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원주민들은 1528년의 대(對)스페인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을 거쳐, 1세기 만에 모두 사라졌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감염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지배적인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4][5] 이런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노예 노동력의 수를 유지했다. 북미의 노예 매매와 다르게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별로 함께 살게 되어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문화 중 몇몇 측면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목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고 소와 관련된 생산 - 가죽이나 말린 소고기 -은 18세기에 담배가 쿠바의 주요 돈벌이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산업이 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편집] 쿠바는 1511년부터 1898년까지 거의 4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다가 1898년 미서전쟁의 결과 미국에 넘어갔다. 이 기간 중, 점점 다른 유럽 국가의 세력이 카리브해의 스페인 지배를 위협하였는데 1655년에 영국이 자메이카를 차지하고 아이티는 1697년에 프랑스 수중에 떨어졌으며 쿠바 역시 계속해서 공격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 군대는 1762년 6월 6일 쿠바를 침입하여 아바나를 포위하고 11개월 동안 점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4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고 쿠바의 무역망을 광대한 범위로 넓혔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스페인 식민지 시절, 경제의 기반은 담배·사탕수수 재배 등 플랜테이션 농업, 광업, 유럽으로의 - 그리고 나중에는 북 아메리카로의- 사탕수수·커피·담배 수출에 두었다. 1783년 미국 독립으로 인한 시장의 창출과 1791년 하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쿠바 설탕 생산의 최대 경쟁자가 사라짐에 따라 설탕 생산이 쿠바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수입되는 수만 명의 노예들 덕분에 1820년까지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국가였다. 농업에 의하여, 다른 스페인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스페인계 후손인 지주들이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여 사회적·경제적 권력을 지녔다. 이것은 이 섬에서 태어난 스페인사람(이들을 스페인 본토 출신의 스페인 사람과 구별하여 크리올라고 불렀다.)과 다른 유럽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들 덕택이었다. 더욱이 쿠바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곳을 총독령(總督領)으로 만들고 신대륙 경영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본국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으로 쿠바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권리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19세기 초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 182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들이 봉기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했을 때, 쿠바에도 파급되어 쿠바에도 1812년에는 아폰테의 지도 아래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나는 등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쿠바는 스페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고, 이로 인해 스페인 황실은 쿠바에게 "La Siempre Fidelisima Isla"(항상 가장 충성스러운 섬)이라는 모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충성심은 쿠바가 스페인과 무역 의존도가 높았고, 스페인이 해적·노예의 봉기로부터의 쿠바를 보호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기인하고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1810년에서 1825년까지 시몬 볼리바르가 남미에서 펼친 혁명 활동 이후에 서반구에서 스페인 식민지로 남게 된 나라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뿐이었다. 스페인 충성파는 예전 식민지를 떠나 쿠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세스페데스 쿠바와 미국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이 내부적인 자치권을 얻으려는 크리올 사회를 달래는 동안 미국은 이 식민지를 병합하려고 준비중이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남부 출신의 정치인들은 미국 내 흑인 노예제도 옹호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쿠바를 합병할 음모를 세웠고, 그러는 동안 일단의 쿠바 반란군이 미국으로 망명해 스페인 식민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다. 1848년 친(親)합병 폭동이 진압되었고, 플로리다로부터 쿠바를 침입하여 합병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다. 또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구입하려고 하는 제안도 있었다. 그 후 노예제도 폐지, 농민혹사 금지와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1868년 10월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이끈 반란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리엔테 지방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크리올 농장주였으며, 그의 노예들을 해방해 주었다. 그는 전쟁을 선포하고 "무장 쿠바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다. 이것은 독립을 위한 세력과 지방의 지지를 받는 스페인군 간의 십년전쟁(1868∼1878년)이라 불리는 긴 투쟁을 낳았다. 이 독립전쟁 기간 중 공화제 헌법이 공포되고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었고, 10년 동안 200,000명이 죽었지만 결국은 반란군은 모든 힘을 다 써버렸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면을 보장하는 조약인 1878년의 산혼 조약(Paz de Zanjón)은 이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스페인이 쿠바에 좀 더 많은 자치권을 인정하고 정치·경제의 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 투쟁 이후 독립 운동은 잠시 숨죽였다. 1879년부터 1880년까지, 쿠바의 애국자 칼릭스토 가르시아(Calixto García)는 또 다른 전쟁(La Guerra Chiquita)을 시도하였으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6] 산혼조약에서 스페인이 한 경제 재건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는데, 다만 미국의 압력도 일부분 영향을 미쳐, 노예제도는 1886년에 폐지되었다. 1893년에는 형식적으로 시민의 평등권이 보장되었으나, 아프리카 출신의 후손인 소수인종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억압이 지속되었다. 1868년의 스페인 혁명으로 스페인 농촌이 곤궁해지자, 그 여파로 더 많은 스페인사람들이 쿠바로 이주해 왔다. 1890년대에는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것은 스페인이 쿠바에 대한 무역제한 조치에 대한 분노, 스페인의 쿠바에 대한 갈수록 심해지는 압박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쿠바 정부의 무능함으로 촉발되었다. 1895년 4월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을 이끈 작가이자 시인이자 국민적 영웅 호세 마르티(José Martí)는 미국에서의 도피 생활중 10년 넘게 전쟁을 조직하였다. 그는 쿠바를 독립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동부 원정군과 함께 쿠바에 상륙하자 마자 몇 주 뒤에 백마를 타고 눈에 잘 띄는 마르티는 스페인과 접전 중에 도스 리오스(Dos Ríos)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의 죽음은 그를 불멸케 하여, 그는 쿠바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고메스와 반란군 지도자인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는 서쪽으로 진군하며 지나는 동안 설탕 농장, 밭, 마을 등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스페인은 거의 내전 수준이 되어버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를 보냈고 20만명의 스페인 군대는 주로 게릴라와 파괴 전술에 의존하는 반란군을 수적으로 압도하였다. 쿠바의 군사 통치자인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 장군은 "레콘센트라도스"(reconcentrados)라 명명한 곳으로 농촌 주민들을 몰아 넣었다. 국제적 관찰자에 따르면 이것은 요새화된 마을이었다. 이 캠프는 20세기의 집단 수용소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7] 20~40만명의 쿠바 시민들이 이 기간 동안 이 캠프에서 배고픔과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숫자는 적십자사와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전쟁성장관인 레드필드 프록터(Redfield Proctor)에 의하여 검증되었었다. 미국과 유럽은 쿠바에서 자행된 스페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항의하였다.[8] 웨일러의 대책은 성공했지만 쿠바의 농업 중심 경제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897년 6월 쿠바 독립에 대해 강경파의 입장을 고수하던 스페인 수상, 안토니오 카노바스(Antonio Cánovas del Castillo)가 쿠바와 연관이 있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미국의 간섭을 두려워한 새로운 스페인 정부는 쿠바에 대해 좀 더 회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즉 선거로 선출된 의회와 지방자치를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반란세력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였고 독립을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쿠바를 병합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독립과 미국의 간섭[편집]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전투함 메인(Maine)호는 쿠바에 거주하는 8천명의 미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구실로 1898년 1월 25일 아바나에 정박 승인 없이 도착하였다. 스페인과 쿠바의 친 스페인파는 이것을 협박으로 여겼다. 2월 15일, 아바나 항에서 메인호가 폭발하였고 266명(외국인 81명 포함)의 생명을 앗아갔다. 1898년 3월 33일, 미국 해군 조사위원회(Naval Board of Inquiry)는 그 선박을 조사하고 나서, "메인호의 파괴에 관하여 어떤 개인이나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울만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다"고 밝혔다.[9] 만약 기뢰가 있었다면 그것은 스페인정부가 그 기뢰를 설치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사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신문들은 전쟁 분위기를 선동했다. 이어 스페인이 쿠바를 $3억 불에 팔라는 미국의 제의를 거절하자, 국가주의적 감정이 휩쓸었기 때문에, 미국 의회는 내정 간섭을 요청하는 결의를 통과시켰고,[10]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이를 즉각 승인하였다. 미국의 선전포고는 쿠바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미국-스페인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의 산물로, 1898년 파리 조약에 의해 스페인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과 함께 미국에 양도하였다.[11]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미국은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 총독으로 세웠고 그와 그의 후임들은 공공 사업을 연이어 추진하여 학교를 세우고 공중 보건을 개선시키는 등 모든 것들이 쿠바가 미국에 종속되도록 계획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였고 쿠바의 독립운동에 동정심을 가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1년에 윌리엄 매킨리에 이어서 미국의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20년 조약 안을 폐기하였다. 대신에 쿠바는 1902년 5월 20일 형식상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독립운동가인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Tomás Estrada Palma)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쿠바의 새 헌법 하에서, 미국은 쿠바에 관한 사항에 간섭하고 재정·외교문제를 감독할 권리를 보유하였다. 그리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은 미국이 쿠바 국내의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자유 재량으로 개입할 권리를 주는 것으로 플랫 수정안을 승인하거나 아니면 무기한 미국의 군사 지배하에 남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은 쿠바는 울며 겨자먹기로 덜 나쁜 것을 선택하였다. 플랫 수정안 하에서, 쿠바는 미국의 해군기지로 사용할 관타나모를 임차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1903년에 관타나모만(灣)를 강점(1999년 예정)하고 해군기지를 만들었으며, 쿠바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도록 했다.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 기지는 쿠바에게는 모욕이며 미국에게는 말만으로 쿠바의 자율적인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1906년에서 1909년까지 총독 통치를 하였다. 미국의 군정 종결과 함께 1902년 5월 E.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양질의 토지, 사탕산업, 교통수단 등 쿠바 경제의 중추적 기능은 미국자본이 장악하였다. 1906년,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선거에 뒤이어, 독립운동 참전자들이 이끄는 무장 반란이 에스트라다 팔마에게 충성을 다하는 무력한 정부군을 패퇴시켰고 미국이 이에 개입하였다.[12] 쿠바는 미국이 점령하였고, 미국의 총독 찰스 에드워드 마군(Charles Edward Magoon)이 3년간 통치하였다. 많은 쿠바 역사가들은 그 이후로 수년간, 마군의 통치 기간 동안에 더 많은 정치적 부패가 자행되었다며, 그의 쿠바 통치를 부정적인 견해에서 평가하였다.[13] 1908년, 호세 미겔 고메스(재임 1909년 ~ 1913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치가 회복되었으나, 미국의 쿠바 간섭은 계속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은 수뢰(收賂)·부패·실정(失政)· 무책임으로 상징된다. 1912년 유색인독립당(Partido Independiente de Color)이 오리엔테 지방에 별도의 흑인 공화국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14] 추정되기로는, 그 단체는 무기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주요 전술은 상점과 주택에 방화하는 것이었다.[15] 그 단체의 움직임은 실패로 끝났고, 몬테아구도(Monteagudo) 장군은 반란군을 학살함으로써 제압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의 전모의 해석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한다. 세계 대전 시기[편집] 관타나모 기지에서 일하는 쿠바 노동자들(1920년경) 1912년에는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3,000여 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상선이 독일 제국 잠수함에 격침되었을 때 쿠바도 마찬가지로 당했다. 그리하여 쿠바의 마리오 가르시아 메노칼(Mario García Menocal) 대통령(재임 1913년 ~ 1921년)은 미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한 지 하루가 지나서 파나마와 함께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다. 사야스(재임 1921년 ~ 1925년), 미국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한 마차도(재임 1925년 ~ 1933년)의 독재·부패 정치가 계속되는 등 잦은 소동이 일어났으나, 헌법에 의해 구성된 정부는 1930년까지 유지되었다. 이 때는 헤라르도 마차도(Gerardo Machado)가 헌법을 정지시킨 때이다. 1920년대 미국 회사들은 쿠바 농장의 2/3를 소유했으며 미국이 금주법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동안 관세로 인해 쿠바의 제조 산업은 불구가 되었지만 도박이나 매춘에 기반을 둔 관광산업은 성행하였다. 마차도의 집권 기간 동안, 여러가지 주요한 국가발전 계획이 착수됨과 함께 국가주의적 경제 계획가 추구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사회적 동요로 번졌으나 헤라도 마차도 대통령에 의해 난폭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대공황에 따라 농산물 수출 수요가 감소하고, 독립전쟁의 참전자들의 공격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암암리에 활동하는 테러 조직때문에 마차도의 권력은 약화되었다.[16] 공산당이 마차도의 지위를 빼앗은 총파업 기간 동안,[17] 쿠바 군의 상급 부대는 마차도 대통령을 1933년 8월에 축출하였고, 쿠바 건국의 아버지의 아들인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 이 케사다(Carlos Manuel de Céspedes y Quesada)를 대통령으로 옹립하였다. 1933년 9월 4일과 9월 5일에 일어난 두 번째 쿠데타로 세스페데스 정권이 무너지고 제1차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Ramón Grau San Martín)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광폭한 시기에 특기할 사건으로는 나시오날 호텔 포위와 아타레스 성(城)의 포위가 있다. 이 정부는 100일간 유지되었으나, 쿠바 사회에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변화를 꾀하였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을 거부하였다. 1934년 육군 하사관인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와 그의 군대는 대통령을 카를로스 멘디에타 이 몬테푸르(Carlos Mendieta y Montefur)로 교체하였다. 바티스타는 속임수·군대·암살을 통하여 권력을 유지한 인물로 악명이 높다. 1940년 쿠바는 자유 선거를 치렀다.[18][19] 1940년 쿠바공산당에 힘입어,[20] 바티스타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의 행정부는 주요한 사회 개혁을 시행하였다. 공산당의 일부 인원은 그의 행정부에서 관직에 참여하였다. 바티스타 행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9일 일본에게, 1941년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각각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1944년에는 라몬 그라우(Ramón Grau)가, 1948년에는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Carlos Prío Socarrás)가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투자 유입은 전면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하는 붐을 일으켰고, 대부분의 도시 지역에서 부유한 중산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빈부 격차는 더욱 넓고 분명해졌다.[21] 바티스타의 집권[편집] 1952년 선거는 3파전이었다. 오르토독소스(Ortodoxos) 당의 로베르토 아그라몬테가 모든 여론 조사에서 앞서가는 가운데 그 뒤를 아우텐티코(Auténtico) 당의 아우레릴오 에비아(Aurelio Hevia)가 2위로, 그리고 정권을 되찾으려는 바티스타는 한참 뒤처진 3위였다. 아그라몬테와 에비아는 라몬 바르킨 대령을 선거가 끝난 뒤 쿠바의 군대를 이끌도록 임명할 것을 결정하였었다. 당시 워싱턴 DC에서 외교관으로 있던 바르킨은 직업 군인들의 존경을 받는 최고의 행정관리였고, 그는 군대 내의 부패를 제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바티스타는 바르킨이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을 축출할 것을 우려하고 바티스타가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952년 3월 10일 쿠데타를 꾀하였다. 이로써 선거는 취소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친미 정권을 반대하는 쿠바 주민들의 반미 투쟁이 강화되자 이 군사정변을 조작하여 친미적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세워 쿠바를 계속 지배한 것이었다. 바티스타는 군대 내의 국가주의자들의 후원으로 권력을 얻어내고 그 후 2년간 "임시 대통령"을 지냈다. 후스토 카리요(Justo Carrillo)는 1952년 3월 워싱턴에서, 권력 중추부의 측근 그룹은 바티스타가 그에게 대한 쿠데타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즉시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민주주의와 시민 정부를 수호하기 위하여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52년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산티아고의 몬카타요새(要塞)를 공격하여 이른바 7·26운동이라고도 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54년 바티스타는 선거에 동의하였다. 아우텐티코 당은 전 대통령 그라우를 후보로 내세웠으나, 바티스타가 미리 선거를 조작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가운데, 그는 후보를 사퇴하였다. 1956년 4월, 바티스타는 바르킨에게 쿠바군의 수장이 되어줄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대와 쿠바인들의 사기를 높히고자 쿠데타를 미리 결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1956년 4월 4일, 바르킨 대령이 이끈 수백명의 직업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리오스 모레혼(Ríos Morejón)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쿠데타로 인해, 쿠바군의 중추가 흔들렸다. 그 군인들은 쿠바 계엄령에 의하여 허용된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바르킨에게는 8년간의 독방 구금이 선고되었다. 라 콘스피라시온 데 로스 푸로스(La Conspiración de los Puros)는 지휘관들의 수감과 군사 학교의 폐교라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고기·야채·곡물의 1인당 소비율과 자동차·전화·라디오의 1인당 보급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22]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이탈리아와 거의 비슷하였고, 일본보다는 상당히 높았다.[23][24] 쿠바에서는 아마도, 해고와 기계화의 금지를 포함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 특권이 영향을 미쳤다. 이 노동조합의 특권의 상당 부분은 무직자와 농부들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었고, 불균형을 가져왔다.[25] 1933년부터 1958년 사이에, 쿠바는 광범위하게 경제 관련 규제를 확대하였고 이는 경제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20][26] 졸업생들이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등 실업 문제가 비교적 커졌다.[20] 중산층들은, 미국과 쿠바를 비교해서, 실업으로 인하여 점점 실망해 갔고, 반면에 노동 조합은 최후까지 바티스타를 지지하였다.[18][20] 20년이 넘도록 부패한 바티스타가 정권을 잡고,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유지하는 동안 쿠바는 무너져갔으며 국가의 자산은 점점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 쿠바 혁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쿠바 혁명입니다. 쿠바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좌)와 체 게바라(중앙) 쿠바 혁명(1953년 7월 26일 ~ 1959년 1월 1일)은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 에르네스토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을 벌여 1959년 1월 1일 완수한 혁명을 말한다. 7월 26일단과 혁명 조직들이 당시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공평으로 점절된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의 독재 정권을 전복하여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또 "쿠바 혁명"이란 표현은 독재 정부를 뒤엎은 뒤 들어선 새 정부가 마르크스주의 정책 등 사회/정치적 계획을 실행한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즉, 이후 두차례에 걸쳐 실시된 토지개혁(1959년 5월, 1963년 10월)과 산업국유화(1960년 10월)도 쿠바 혁명에 포함될 수 있다. 1956년 12월 2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무리가 무장 저항 운동 단체를 설립할 목적으로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도착하였다. 1958년말, 그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박차고 나와, 봉기를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이들이 산타 클라라(Santa Clara)를 점령하자, 바티스타는 4000만 US$의 정부 기금을 가지고 쿠바를 벗어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갔다. 바르킨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및 그의 형제 피델 카스트로와 지휘권의 상징적인 변화에 대하여 협상하였다. 이것은 대법원이 그 혁명의 법원성(法源性)을 인정하고, 그 대표자가 명령권을 가진다고 결정한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카스트로의 군대는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하였다.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Manuel Urrutia Lleó)가 권력을 쥔지 얼마 후, 피델 카스트로가 그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는 미국으로 탈출하였다. 또 "쿠바 혁명"이란 표현은 독재 정부를 뒤엎은 뒤 들어선 새 정부가 마르크스주의 정책 등 사회/정치적 계획을 실행한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즉, 이후 두차례에 걸쳐 실시된 토지개혁(1959년 5월, 1963년 10월)과 산업국유화(1960년 10월)도 쿠바 혁명에 포함될 수 있다. 쿠바 혁명 이후[편집] 쿠바와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포스터 1961년까지 수십만명이 미국으로 피신하였다.[27] 쿠바는 1961년 1월 자유 진영의 중심국인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미국은 수차례 쿠바정부를 전복을 시도했다. 가장 유명한 실패는 냉전의 절정기에 일어난 피그스 만 침공이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CIA의 도움을 받는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스 만 침공(1961년 4월)을 감행하도록 지원하였고, 교수이자 혁명 이후 최초의 총리인 호세 미로 카르도나(José Miró Cardona)가 임시 수장을 담당하면서 쿠바에서 다수당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도록 지원하였다.[28] 그러나, 케네디는 미군이나 그밖의 직접적인 개입을 부정하였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이 섬에 침공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 존 F. 케네디는 쿠바의 사회주의 정책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어들게 할 것으로 보아 침공했으나, 군인들이 모두 생포 및 사살되어 미국의 침공은 실패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쿠바에서의 주권침해행위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봉쇄 정책을 단행하였고,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개시하였다. 1963년까지, 카스트로는 소련을 모범으로 삼아 쿠바에서 완전히 성장한 공산주의 체계를 갖추었다.[29] 1961년 4월 16일, 피그스 만 침공을 물리친 데 대해 쿠바군을 칭찬하는 연설을 하며,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이어서, 1961년 7월 피델 카스트로의 7월 26일단과 블라스 로카의 사회주의인민당(구 공산당), 파우레 초몬의 3월 13일 혁명 지도자단이 통합되어 통합 혁명 기구(IRO)가 출범했다. 1962년 3월 26일 통합 혁명 기구는 쿠바 사회주의 통합당(PURSC)이 되었고, 1965년 10월 3일에 쿠바 공산당이 되고 카스트로가 제1비서에 오르고, 블라스 로카(Blas Roca)가 제2비서가 되었다. 로카의 자리는 라울 카스트로가 잇게 되는데, 그는 국방부 장관이자 피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는데, 정부에서 가장 강력한 제2인자가 되었다. 라울 카스트로의 지위는 체 게바라가 떠남에 따라 강화되었다. 1970년대, 카스트로는 앙골라의 "앙골라 해방을 위한 대중 운동"(MPLA)과 에티오피아의 지도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돕기 위하여 수만명의 군대를 급파하였다.[30] 체 게바라는 콩고 민주 공화국과 이어서 볼리비아에서 폭동 운동을 시도하였는데 실패하였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미국 고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되었다. 그 외에도 쿠바는 자이레, 모잠비크에도 인민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나 고문을 파견하였다. 미국의 대응은 이들 나라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쿠바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려 양국 간의 교역과 여행을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삶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고 간소하였으며 불평이 가득찼다.[31] 피델 카스트로는 1970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경제 정책의 실패를 시인하였다.[31] 쿠바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소련이 지원하는 전쟁에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쿠바는 1962년에 미주 기구에서 축출되었고, 엠바고를 당했으나, 1975년 미주 기구는 쿠바에 대한 모든 제재조치를 해제하였다. 1976년에 혁명 승리 후 첫 헌법을 제정하고 11월에 "인민 주권 민족 회의 대의원 선거"를 진행하였으며 12월에 혁명정부가 행사해 오던 입법권을 인민 주권 민족 회의에 넘겼다. 1959년부터 1993년까지 약 120만명의 쿠바인(현재 인구의 10%)이 미국을 향해 쿠바를 떠났다.[32] 주로 이들은 작은 보트나 허술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1980년 4월 6일 일요일, 1만여명의 쿠바인들이 정치적 피난처를 찾아서 아바나 주재 페루 대사관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4월 7일 월요일, 쿠바 정부는 페루 대사관으로 망명하려한 쿠바인들의 이주를 허락하였다.[33] 4월 16일 5백명의 쿠바 시민들이 코스타 리카를 향해 페루 대사관을 출발하였다. 4월 21일, 많은 쿠바인들이 개인 보트를 타고 마이애미에 도착하기 시작하였으나 4월 23일 미국 주 정부는 이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보트 탈출 행렬은 계속되었다. 카스트로가 누구든지 나라를 떠나고 싶다면 마리엘 항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이민 행렬은 "마리엘 보트리프트"(영어: Mariel boatlift)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6월 15일 배의 행렬이 멈출 때까지 12만 5천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34] 혁명 전 쿠바는 뒤떨어진 농업국가였으나 혁명 승리후 민족 경제 건설에 힘을 기울인 결과 식민지적 예속성과 기형성을 극복하고 급속히 발전하는 농업과 공업을 가지게 되었다. 탈 냉전 시대[편집] 쿠바를 방문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한 라울 카스트로 (2008) 소련이 제공하는 대규모 원조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경제는 황폐화되었고 양국 간의 관계 역시 1989년 동유럽이 무너지자 러시아가 11,000명에 달하는 군인과 기술자를 철수시키면서 곧 악화되었다. 카스트로의 통치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쿠바에서는 "평화시대의 특별한 시기(Período especial en tiempo de paz)"라고 한다)의 여파로 심각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은 엄격한 무역 금지 조치를 고수하였고 쿠바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빠르게 고립되었다. 1991년 12월 쿠바 헌법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하도록 고쳐졌다. 카스트로는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을 언급하였지만 소련식 모델에 대한 개혁은 벌써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다. 식량난은 북조선과 유사하였다. 우선권은 엘리트 계층과 군인들에만 있을 뿐이었고, 일반 서민들은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35][36] 쿠바 정부는 1993년까지 미국의 식량·의약품·금전 원조를 받기를 거부하였다.[35] 1993년 쿠바인이 미국 달러를 가지거나 사용할 수 있으며 100가지의 상업 분야에서 자영업을 허락하고 산지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미국 달러 수입이나 이익에 대한 세금이 1994년에 징수되었고 1996년 10월에는 외국 회사가 전적으로 사업을 소유하거나 운영할 수 있으며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개방에 대해 미국이 취한 행동이란 해묵은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1996년 헬름스-버튼 법을 만들어 미국의 투자자들이 쿠바에서 몰수한 재산을 이용하는 외국 회사에 대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쿠바에 대해 차관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충고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새로운 원조자로서 등장하였다. 또한 쿠바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과 새로운 유대 관계를 맺었다. 두 나라 모두 석유와 천연가스의 주요 수출국이다.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정치적인 탄압으로 인해 단지 쿠바의 현재 지도체제를 비판한다는 이유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을 규합하려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진 양심수는 적어도 500여명에 이른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한탄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센 이웃 나라인 미국이 항상 쿠바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998년 쿠바를 방문하는 동안 쿠바 정부의 고집과 미국 정부의 금수 조치에 대해 함께 비난함으로써 이것을 인정했다. 당시 교황의 방문에는 5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이것은 미국이 양국 간의 직항편 운행을 2년 동안 금지시킨 조치를 철회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1998년 10월에 찾아온 허리케인 죠지는 교황처럼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됐다. 인명피해는 소수에 그쳤지만 수천 명의 주민이 수재민이 되었으며 많은 가옥이 거센 바람에 파괴되었고 더 많은 집들이 폭풍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번진 홍수를 피하기 위해 버려졌다. 2003년 쿠바 정부는 블랙 스프링(Black Spring)이라 알려진 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와 충돌하였고 몇십명이 투옥되었다.[37][38] 2006년 7월 31일, 피델 카스트로는 그의 주요 권력을 남동생이자 제1부통령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하였다. 이 권력 이양은 피델 카스트로가 지속적인 출혈을 동반한 급성 위급통증으로 고통받은 후에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서 한시적이었다. 카스트로는 2006년 12월 2일에 열린 그란마 호 상륙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던 당시 병이 중하였는데, 이는 카스트로가 위암에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39] 그러나 2006년 12월 26일 스페인 의사 가르시아 사브리도는 그의 병이 소화 문제일 뿐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40] 2008년 1월, 카스트로가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만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 장면에서 카스트로는 허약하기는 하지만, 3개월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었다. 2008년 2월 카스트로는 쿠바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였다.[41] 2008년 2월 24일, 라울 카스트로가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42] 그는 수락 연설에서, 쿠바인들의 일상 생활을 제한하는 몇가지 것들이 철폐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43] 2009년 3월,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 카스트로 집권 시에 재직했던 공직자들을 숙청하였다. 쿠바와 유럽 연합은 5년 동안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으나 2008년 10월 23일에 다시 정상화되었다.[44] 각주[편집] ↑ AFP 2007 (accessed 11-18 2007) Arqueología Hallazgo podría dar pistas sobre primeros habitantes de la Is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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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York Times. 2008년 2월 20일.  다음 글자 무시됨: ‘http://www.nytimes.com/2008/02/20/world/americas/20castro.html ’ (도움말); |확인날짜=는 |url=을 필요로 함 (도움말) ↑ “쿠바, 라울 카스트로 시대로… 새 국가평의회 의장에 선출”. 동아일보. 2008년 2월 26일. 2008년 2월 24일에 확인함.  ↑ “Byte by b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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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내이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포내이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양한 세포내이입 세포내이입(Endocytosis, 細胞內移入)은 세포가 에너지를 이용하여 단백질 같은 분자를 세포 내로 옮기는 과정이다. 세포에게 필요한 물질은 극성 분자인 경우가 많아 소수성 세포막을 지날 수 없기 때문에 특수한 운송 과정이 필요하다. 세포내이입과 반대되는 과정은 세포외유출이다.[1] 목차 1 세포내이입 경로 2 주요 구성요소 3 클라트린 매개 세포내이입 4 같이 보기 5 각주 및 참고 문헌 6 외부 링크 세포내이입 경로[편집] 시냅스 소포 막에서 일어나는 클라트린 매개 세포내이입(왼쪽)과 클라트린 비의존성 세포내이입 모식도 세포내이입 경로는 아래 네 부류로 나뉜다.[2] 클라트린 매개 세포내이입은 지름 100 nm 정도의 작은 소포에 의해 매개된다. 소포는 단백질 복합체(대개 세포질 단백질인 클라트린)로 이루어진 피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클라트린 피막 소포는 거의 모든 세포에 있고, 클라트린 피막 홈(clathrin-coated pit)이라고 하는 원형질막의 특정한 구역을 이룬다. 리간드가 수용체에 결합하면 피막 홈에서 수용체가 집합하여 리간드를 세포내이입한다. 리간드에는 저밀도 지질단백질, 트랜스페린, 성장 인자, 항체 등이 있다. 카베올리(caveolae)는 세포내이입 싹(bud) 중 클라트린 피막 이외에 가장 흔한 구조이다. 카베올리는 콜레스테롤 결합 단백질 카베올린(caveolin, Vip21), 콜레스테롤과 당지질이 풍부한 이중층 막으로 이루어진다. 카베올리는 지름이 약 50 nm인 플라스크형 홈으로 동굴(cave) 모양과 유사하다(이름의 어원).[3] 평활근, 제1형 허파꽈리세포(호흡허파꽈리세포), 섬유모세포, 지방세포, 혈관내피세포 등에는 특히 카베올리가 풍부하여 막의 1/3까지 채울 수 있다.[4] 포토사이토시스(potocytosis)는 카베올리를 사용하여 수용체에 붙은 분자를 세포에 들여온다.[3] 거대음작용(macropinocytosis)은 원형질막의 매우 주름진 영역에서 일어난다. 세포막을 주머니 형태로 함입하고 소포를 형성하도록 찝어서 막에서 분리한다. 지름은 0.5-5 μm이다. 소포에는 클라트린 피막 소포의 ~100배에 해당하는 세포외액과 세포외 분자가 들어있고, 이들은 무작위로 소포에 들어간다. 소포는 이후 세포질액에서 엔도솜이나 리소좀 등 다른 소포와 융합한다.[5] 포식작용은 세포가 지름 0.75 μm 정도의 입자와 결합하여 세포 내로 들여오는 과정이다. 특정한 세포만 포식작용을 한다. 포식작용되는 입자에는 크기가 작은 먼지 입자, 세포 잔해, 미생물, 세포자살한 세포 등이 있다. 포식작용은 클라트린 매개 세포내이입이나 카베올리 경로에 비하여 큰 막 영역을 흡수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형태학적으로 세포내이입 과정을 분류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클라트린에 의존하는 특정한 경로 및 그 아형과 클라트린에 의존하지 않는 세포내이입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한 방법이다. 포식작용도 아니고 클라트린에 의존하지도 않는 세포내이입이 기계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Graf1라는 단백질이 클라트린 비의존적이고 매우 흔한 세포내이입 경로인 CLIC/GEEC 경로를 어떻게 조절하는지 연구된 바 있다.[6] Graf1은 작은 G 단백질 신호전달과 막 개조 과정 사이의 협력을 통하여 소포에 있는 화물이 세포 내로 들어오게 한다. 주요 구성요소[편집] 포유류 세포의 세포내이입은 별개의 막 구획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포내이입에 쓰인 구성요소는 원형질막에서 분자를 안으로 들여오고 다시 세포 표면으로 돌아가거나(초기 엔도솜과 재활용 엔도솜), 분해된다(후기 엔도솜과 리소좀). 세포내이입 경로의 주요 구성요소는 아래와 같다.[2] 초기 엔도솜은 세포내이입된 소포가 처음 만나는 구조물이다. 초기 엔도솜은 세포의 가장자리에 주로 위치하고 세포 표면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종류의 소포를 받는다. 초기 엔도솜은 특징적인 대롱이 있는 소포 구조로, 소포 지름은 최대 1 μm이고 연결된 대롱의 지름은 약 50 nm이다. 내부는 약산성을 띤다. 초기 엔도솜은 기본적으로 분류 기능을 하는 세포소기관이다. 엔도솜 내의 약산성 pH에서 수용체는 리간드와 분리되어 대롱을 통해 세포 표면으로 돌아간다.[7][8] 트랜스사이토시스(transcytosis) 경로로 가는 다소포체(multivesicular body)와 엔도솜 운반 소포(endosomal carrier vesicle)도 여기서 분류된다. 후기 엔도솜은 세포내이입으로 들어와 리소좀으로 가는 물질을 받는다. 초기 엔도솜에 있는 물질, 생합성 경로에서 트랜스 골지 경로로 온 물질, 포식작용으로 포식소체에 들어온 물질이 여기 포함된다.[9] 후기 엔도솜은 소포나 리소좀 막 당단백질이나 산성 가수분해효소 등 리소좀의 특성을 띠는 막 구조 혹은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다. 산성(pH 5.5)이고, 6-인산 만노스 표지가 붙은 리소좀 효소를 수송하는 6-인산 만노스 수용체 수송 경로의 일부이다. 후기 엔도솜은 리소좀으로 물질이 운반되기 전에 최종 분류하는 역할을 한다. 리소좀은 세포내이입 경로의 마지막 구획이다. pH 4.8이고 전자현미경 상에서는 대개 지름이 1-2 μm인 액포에 전자 밀도가 높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리소좀은 세포에서 가수분해를 담당하는 구획으로,[10][11] 세포질그물에서 합성되어 골지체에서 수식을 거친[12] 40여 종의 가수분해효소가 들어있다. 주로 세포 폐기물, 지방, 탄수화물, 단백질 및 기타 거대분자를 단순한 화합물로 분해하는 기능을 한다. 분해 산물은 세포질로 돌아가 세포를 구성하는 새로운 물질로 쓰인다. 아이소좀(eisosome)이 효모에서 세포내이입 관문으로 작용한다는 보고가 있다.[13] 클라트린 매개 세포내이입[편집] 클라트린 매개 세포내이입 클라트린 매개 세포내이입은 세포내이입 경로 중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다. 클라트린은 원형질막 안쪽 표면에 피막 홈을 형성한다. 홈은 세포질로 함입되어 피막으로 둘러싸인 소포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세포 표면의 작은 영역과 소량의 세포외액이 세포 내로 들어온다.[14][15][16] 피막은 소포를 만들기 위하여 막을 변형시키고, 소포에 들어갈 화물을 선택하는 기능도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피막 복합체는 피막 단백질 I(COP-I), II(COP-II), 클라트린이 있다.[17][18] 클라트린 피막은 주요 수송 단계에 관여한다. 원형질막에서 초기 엔도솜으로 수용체 매개 세포내이입과 액상 세포내이입, 트랜스 골지망에서 엔도솜으로 운반 등이 그것이다. 클라트린은 원형질막의 세포질쪽 면에 붙어서 오목한 홈을 형성하고, 함입과 분리를 거친다. 배양된 세포에서 클라트린 피막 홈이 소포로 분리되기까지 최대 1분이 걸리고, 분당 수 백에서 수 천개의 소포가 생성된다.[19] 클라트린 피막 구조를 이루는 주요소는 클라트린 중쇄(190 kD)와 경쇄(25 kD)이고, 다리가 셋인 삼합체 트리스켈리온(triskelion)을 이룬다. 소포는 물질을 특이적으로 농축하고 특정 단백질은 제외한다. 원형질막에 있는 AP2 연결기(AP2 adaptor)가 이 기능을 한다. 포유류 세포의 피막 소포에 흔히 있는 수용체로는 LDL을 혈류에서 제거하는 저밀도 지질단백질 수용체, 트랜스페린에 결합한 철 이온(ferric ion)을 세포 내로 가져오는 트랜스페린 수용체, 표피성장인자 등 특정 분자의 수용체가 있다. 섬유모세포 막의 25%는 피막 홈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막 홈이 세포로 함입하기 전에 약 1분간 지속되므로, 섬유모세포는 스스로의 표면을 16분에 한 번씩 교체한다. 피막 소포의 지름은 36 nm, 수명은 수 초 이내이다. 피막 홈이 소포로 전환되는 데에는 클라트린 이외에 세포질 단백질 다이나민(dynamin)과 연결기 어댑틴(adaptin)이 관여한다. 피막 홈과 소포는 맷 라이언스(Matt Lions)와 파커 조지(Parker George)가 전자현미경으로 조직 절편을 관찰하던 중 처음 발견하였다. 저밀도 지질단백질을 혈류에서 제거하는 과정에서 피막 홈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R. G. 앤더슨(Anderson), 마이클 스튜어트 브라운( Michael S. Brown), 조지프 골드스타인(Joseph L. Goldstein)이다(1976년). 피막 소포는 클라트린 피막 분자를 발견한 바버라 피어스에 의해 처음 분리 정제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능동수송 세포 외 유출 식작용 음세포작용 각주 및 참고 문헌[편집] ↑ Marsh M, McMahon HT (1999년 7월). “The Structural Era of Endocytosis”. 《Science》 (영어) 285 (5425): 215–20. PMID 10398591. doi:10.1126/science.285.5425.215. 2009년 6월 19일에 확인함.  ↑ 가 나 Marsh, Mark (2001). 《Endocytosis》 (영어). Oxford University Press. vii쪽. ISBN 978-0-19-963851-2.  ↑ 가 나 Silverthorn DU (2011년 3월 1일). 〈5장 막의 역동성〉. 고영규 외 역. 《인체생리학》 5판. 라이프사이언스. ISBN 978-89-6154-101-5.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Parton RG, Simons K (2007년 3월). “The multiple faces of caveolae”. 《Nature Reviews Molecular Cell Biology》 (영어) 8 (3): 185–94. PMID 17318224. doi:10.1038/nrm2122.  ↑ Falcone S, Cocucci E, Podini P, Kirchhausen T, Clementi E, Meldolesi J (2006년 11월). “Macropinocytosis: regulated coordination of endocytic and exocytic membrane traffic events”. 《Journal of Cell Science》 (영어) 119 (Pt 22): 475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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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의료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립중앙의료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중앙의료원의 시그니처국가 대한민국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43개원 1958년 10월 2일상급기관 보건복지부종류 중앙응급의료센터병상수 569[1]웹사이트 http://www.nmc.or.kr/main.asp 국립중앙의료원의 위치 국립중앙의료원(國立中央醫療院, National Medical Center)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특수법인이다.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의 의료진과 의료 장비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보건복지부 산하 기타공공기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목차 1 설립 근거 2 기관 연혁 3 의료부 4 미디어 5 각주 6 외부 링크 설립 근거[편집]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기관 연혁[편집] 1958년 11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스칸디나비아 3국) 지원으로 개원 1959년 7월 간호학교 설치('79. 1. 1 간호전문대학으로 승격) 1968년 10월 정부에서 운영권 인수, 국립의료원특별회계 설치 2000년 1월 책임운영기관 지정 2001년 11월 중앙응급의료센터 개소 2007년 2월 국립의료원간호대학 폐지 2009년 4월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공포 2010년 4월 2일 특수법인 국립중앙의료원 출범[2] 의료부[편집] 일반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비뇨기과 안과 치과 일반내과 신경과 정신과 흉부내과 소아과 응급의학과 재활의학과 가정의학과 진단방사선과 치료방사선과 해부병리과 임상병리과 마취과 약제과 간호과 한방진료부(한방과·침구과) 미디어[편집] KBS 《다큐멘터리 3일》 (717회, 2019.03.03) 각주[편집] ↑ 의료기관백과사전 - 국립중앙의료원 ↑ 국립의료원 52년만에 법인으로 새출발《연합뉴스》2010년 4월 1일 정주호 기자 외부 링크[편집] 국립중앙의료원 - 공식 웹사이트 국립중앙의료원 관련 항목vdeh 서울특별시의 종합병원공원 | 교통 | 도로 | 도서관 | 동굴 | 박물관 | 산 | 서원 | 섬 | 성 | 온천 | 저수지 | 종합병원 | 축제 | 하천 | 해수욕장상급종합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강북삼성병원 건국대학교병원 경희의료원 고려대학교구로병원 고려대학교안암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학교병원 서울성모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중앙대학교병원 한양대학교병원 종합병원 강남차병원 강남고려병원 강남성심병원 강동경희대학교병원 강동성심병원 구로성심병원 국립경찰병원 국립중앙의료원 금강아산병원 녹색병원 대림성모병원 대한병원 동부제일병원 동신병원 명지성모병원 미즈메디병원 베스티안병원 보라매병원 부민서울병원 삼육서울병원 중앙보훈병원 서울백병원 서울성심병원 서울의료원 서울적십자병원 서울특별시동부병원 성애병원 세란병원 소화아동병원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 양지병원 여의도성모병원 우리들병원 은평성모병원 이화여자대학교목동병원 이화여자대학교서울병원 상계백병원 원자력병원 을지병원 제일병원 청구성심병원 충무병원 한강성심병원 한전병원 혜민병원 홍익병원 희명병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vdeh 대한민국의 공공병원지방자치단체산하 공공병원서울특별시 서울의료원(본원 · 강남분원)1 어린이병원 서북병원 은평병원 보라매병원 동부병원 북부병원 서남병원 장애인치과병원 용인정신병원 백암정신병원 축령정신병원 고양정신병원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의료원(본원 · 백령분원)1 경기도 경기도의료원(수원병원 · 의정부병원 · 파주병원 · 이천병원 · 안성병원 · 포천병원)1 강원도 원주의료원1 강릉의료원1 속초의료원1 영월의료원1 삼척의료원1 충청북도 청주의료원1 충주의료원1 충청남도 천안의료원1 공주의료원1 홍성의료원1 서산의료원1 전라북도 군산의료원1 남원의료원1 진안군 진안군의료원1 전라남도 순천의료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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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국립중앙의료원&oldid=24122562" 분류: 대한민국의 공공병원권역응급의료센터1958년 설립1958년 설립된 병원대한민국의 기타공공기관서울특별시의 병원특수법인 (보건복지부 소관)대한민국의 의학 단체공공기관 (보건복지부 소관)서울미래유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Norsk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30일 (화) 00: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어글리 베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글리 베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어글리 베티 Ugly Betty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미국 방송 채널 ABC 방송 기간 2006년 9월 28일 ~ 2010년 4월 14일 방송 시간 매주 토요일 낮 12:50 ~ 1:40(50분) 방송 분량 50분 방송 시즌 4 방송 횟수 85회 추가 채널 KBS 2TV 기획 KBS 편성 기획부 제작자 KBS 미디어 음성 1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시각·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화면 해설·자막 방송 《어글리 베티》(Ugly Betty)는 ABC에서 방영된 미국의 드라마이다. 뉴욕의 패션 잡지사를 배경으로 하여 직장인들의 생활을 전개하는 코미디 드라마의 내용을 담고있다. 특히 골든 글러브 상과 SAG상을 수상한 드라마로 주목받고있다. 대한민국은 2007년 2월 3일부터 7월 14일까지 시즌 1이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되었다. 목차 1 방송 시간 2 출연 3 한국어판 성우 출연 및 제작진 4 에피소드 목록 4.1 시즌 1 4.2 시즌 2 4.3 시즌 3 4.4 시즌 4 5 외부 링크 방송 시간[원본 편집] 방송 채널 방송 기간 방송 시간 KBS 2TV 2007년 2월 3일 ~ 7월 14일 매주 토요일 낮 12:50 ~ 1:40(50분) 출연[원본 편집] 아메리카 페레라 — 베티 수아레스(Betty Suarez) 에릭 매비어스 — 대니얼 미드(Daniel Meade) 앨런 데일 — 브래드퍼드 미드(Bradford Meade) 버네사 윌리엄스 — 월러미나 슬레이터(Wilhelmina Slater) 베키 뉴턴 — 어맨다(Amanda) 애나 오티즈 — 힐다 수아레스(Hilda Suarez) 애슐리 젠슨 — 크리스티나 매킨리(Christina McKinney) 토니 플라나 — 이그나시오 슈아레즈(Ignacio Suarez) 마이클 우리 — 마크 세인트제임스(Marc St. James) 마크 인델리카토 — 저스틴 수아레스(Justin Suarez) 케빈 서스먼 — 월터(Walter) 리베카 로민 — 알렉스/알렉시스 미드(Alexis Meade) 살마 아예크 - 소피아(Sophia) 한국어판 성우 출연 및 제작진[원본 편집] 성우출연 이선 - 베티(아메리카 페레라) 구자형 - 대니얼(에릭 매비어스) 박상일 - 브래드 퍼드(앨런 데일) 안경진 - 월레미나(버네사 윌리엄스) 조진숙 - 어맨다(베키 뉴턴) 이진화 - 힐다(애나 오티즈) 손정아 - 크리스티나(애슐리 젠슨) 원호섭 - 이그나시오(토니 플라나) 박찬희 - 마크(마이클 우리) 윤동기 - 월터(케빈 서스먼) 강희선 - 소피아(살마 아예크,시즌 1) 이경자 - 파비아(지나 거숀,시즌 1) 제작진 녹음:김학건 그래픽:권미정 편집:윤수아 번역:양미진 연출:서원석 에피소드 목록[원본 편집] 시즌 1[원본 편집] 1화 - 베티, 취직하다(Pilot) 2화 - 미운 오리의 화려한 외출(Queens for a Day) 3화 - 토끼의 실종(The box and the bunny) 4화 - 살기 위해 뭉치다(Fey's Sleigh Ride) 5화 - 미스 월화수목금(The lying, the watch and the wardrobe) 6화 - 바람둥이 길들이기(Trust, Lust ad Must) 7화 - 특별한 야근(After Hours) 8화 - 네 번의 추수감사절과 한번의 장례식(four thanksgiving and a funeral) 9화 - 오늘은 베티가 대장(Lose the boss) 10화 - 사랑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제 증상들(fake plastic snow) 11화 - 구찌백의 추억(Swag) 12화 - 소피아의 배신(Sofia's choice) 13화 - 살.생.부(In or Out) 14화 - 동생으로 산다는 것(I'm coming out) 15화 - 왕자들의 난(Brothers) 16화 - 친구와 애인 사이(Derailed) 17화 - 이별의 생일 케이크(Icing on the Cake) 18화 - 대리 애인(Don't ask, don't tell) 19화 - 내겐 너무 귀찮은 그녀(Punch out) 20화 - 모델 사기사건(Petra-gate) 21화 - 비서의 날(Decretaries day) 22화 - 과다라하라에 한그루의 나무가 자라네(A tree grows in Guadalajara) 23화 - 이스트사이드 스토리(East Side Story) 시즌 2[원본 편집] 1화 - How Betty Got Her Grieve Back 2화 - Family/Affair 3화 - Betty's Wait Problem 4화 - Grin and Bear It 5화 - A League of Their Own 6화 -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 7화 - A Nice Day for a Posh Wedding 8화 - I See Me, I.C.U. 9화 - Giving Up the Ghost 10화 - Bananas for Betty 11화 - Zero Worship 12화 - Odor in the Court 13화 - A Thousand Words Before Friday 14화 - Twenty Four Candles 15화 - Burning Questions 16화 - Betty's Baby Bump 17화 - The Kids Are Alright 18화 - Jump 시즌 3[원본 편집] 1화 - The Manhattan Project 2화 - Filing for the Enemy 3화 - Crimes of Fashion 4화 - Betty Suarez Land 5화 - Granny Pants 6화 - Ugly Berry 7화 - Crush'd 8화 - Tornado Girl 9화 - When Betty Met YETI 10화 - Bad Amanda 11화 - Dress for Success 12화 - Sisters on the Verge of a Nervous Breakdown 13화 - Kissed Off 14화 - The Courtship of Betty's Father 15화 - There's No Place Like Mode 16화 - Things Fall Apart 17화 - Sugar Daddy 18화 - A Mother of a Problem 19화 - The Sex Issue 20화 - Rabbit Test 21화 - The Born Identity 22화 - In the Stars 23화 - Curveball 24화 - The Fall Issue 시즌 4[원본 편집] 1화 - The Butterfly Effect Part 1 2화 - The Butterfly Effect Part 2 3화 - Blue on Blue 4화 - The Weiner, the Bun, and the Boob 5화 - Plus None 6화 - Backseat Betty 7화 - Level (7) with Me 8화 - The Bahamas Triangle 9화 - Be-Shure 10화 - The Passion of the Betty 11화 - Back in Her Place 12화 - Blackout! 13화 - Chica and the Man 14화 - Smokin' Hot 15화 - Fire and Nice 16화 - All the World's a Stage 17화 - Million Dollar Smile 18화 - London Calling 19화 - The Past Presents the Future 20화 - Hello Goodbye - 최종회 외부 링크[원본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어글리 베티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한국방송공사 어글리 베티 홈페이지 미국 IMDb 어글리 베티 블로그 미국 TV닷컴 어글리 베티 블로그 TV가이드 어글리 베티 블로그 (영어) 어글리 베티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이 글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어글리_베티&oldid=23681550" 분류: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ABC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미국)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 외화 드라마골든 글로브상 뮤지컬 코미디 작품상(텔레비전) 수상작ABC 스튜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venska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11: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어글리 베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글리 베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어글리 베티 Ugly Betty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미국 방송 채널 ABC 방송 기간 2006년 9월 28일 ~ 2010년 4월 14일 방송 시간 매주 토요일 낮 12:50 ~ 1:40(50분) 방송 분량 50분 방송 시즌 4 방송 횟수 85회 추가 채널 KBS 2TV 기획 KBS 편성 기획부 제작자 KBS 미디어 음성 1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시각·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화면 해설·자막 방송 《어글리 베티》(Ugly Betty)는 ABC에서 방영된 미국의 드라마이다. 뉴욕의 패션 잡지사를 배경으로 하여 직장인들의 생활을 전개하는 코미디 드라마의 내용을 담고있다. 특히 골든 글러브 상과 SAG상을 수상한 드라마로 주목받고있다. 대한민국은 2007년 2월 3일부터 7월 14일까지 시즌 1이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되었다. 목차 1 방송 시간 2 출연 3 한국어판 성우 출연 및 제작진 4 에피소드 목록 4.1 시즌 1 4.2 시즌 2 4.3 시즌 3 4.4 시즌 4 5 외부 링크 방송 시간[원본 편집] 방송 채널 방송 기간 방송 시간 KBS 2TV 2007년 2월 3일 ~ 7월 14일 매주 토요일 낮 12:50 ~ 1:40(50분) 출연[원본 편집] 아메리카 페레라 — 베티 수아레스(Betty Suarez) 에릭 매비어스 — 대니얼 미드(Daniel Meade) 앨런 데일 — 브래드퍼드 미드(Bradford Meade) 버네사 윌리엄스 — 월러미나 슬레이터(Wilhelmina Slater) 베키 뉴턴 — 어맨다(Amanda) 애나 오티즈 — 힐다 수아레스(Hilda Suarez) 애슐리 젠슨 — 크리스티나 매킨리(Christina McKinney) 토니 플라나 — 이그나시오 슈아레즈(Ignacio Suarez) 마이클 우리 — 마크 세인트제임스(Marc St. James) 마크 인델리카토 — 저스틴 수아레스(Justin Suarez) 케빈 서스먼 — 월터(Walter) 리베카 로민 — 알렉스/알렉시스 미드(Alexis Meade) 살마 아예크 - 소피아(Sophia) 한국어판 성우 출연 및 제작진[원본 편집] 성우출연 이선 - 베티(아메리카 페레라) 구자형 - 대니얼(에릭 매비어스) 박상일 - 브래드 퍼드(앨런 데일) 안경진 - 월레미나(버네사 윌리엄스) 조진숙 - 어맨다(베키 뉴턴) 이진화 - 힐다(애나 오티즈) 손정아 - 크리스티나(애슐리 젠슨) 원호섭 - 이그나시오(토니 플라나) 박찬희 - 마크(마이클 우리) 윤동기 - 월터(케빈 서스먼) 강희선 - 소피아(살마 아예크,시즌 1) 이경자 - 파비아(지나 거숀,시즌 1) 제작진 녹음:김학건 그래픽:권미정 편집:윤수아 번역:양미진 연출:서원석 에피소드 목록[원본 편집] 시즌 1[원본 편집] 1화 - 베티, 취직하다(Pilot) 2화 - 미운 오리의 화려한 외출(Queens for a Day) 3화 - 토끼의 실종(The box and the bunny) 4화 - 살기 위해 뭉치다(Fey's Sleigh Ride) 5화 - 미스 월화수목금(The lying, the watch and the wardrobe) 6화 - 바람둥이 길들이기(Trust, Lust ad Must) 7화 - 특별한 야근(After Hours) 8화 - 네 번의 추수감사절과 한번의 장례식(four thanksgiving and a funeral) 9화 - 오늘은 베티가 대장(Lose the boss) 10화 - 사랑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제 증상들(fake plastic snow) 11화 - 구찌백의 추억(Swag) 12화 - 소피아의 배신(Sofia's choice) 13화 - 살.생.부(In or Out) 14화 - 동생으로 산다는 것(I'm coming out) 15화 - 왕자들의 난(Brothers) 16화 - 친구와 애인 사이(Derailed) 17화 - 이별의 생일 케이크(Icing on the Cake) 18화 - 대리 애인(Don't ask, don't tell) 19화 - 내겐 너무 귀찮은 그녀(Punch out) 20화 - 모델 사기사건(Petra-gate) 21화 - 비서의 날(Decretaries day) 22화 - 과다라하라에 한그루의 나무가 자라네(A tree grows in Guadalajara) 23화 - 이스트사이드 스토리(East Side Story) 시즌 2[원본 편집] 1화 - How Betty Got Her Grieve Back 2화 - Family/Affair 3화 - Betty's Wait Problem 4화 - Grin and Bear It 5화 - A League of Their Own 6화 -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 7화 - A Nice Day for a Posh Wedding 8화 - I See Me, I.C.U. 9화 - Giving Up the Ghost 10화 - Bananas for Betty 11화 - Zero Worship 12화 - Odor in the Court 13화 - A Thousand Words Before Friday 14화 - Twenty Four Candles 15화 - Burning Questions 16화 - Betty's Baby Bump 17화 - The Kids Are Alright 18화 - Jump 시즌 3[원본 편집] 1화 - The Manhattan Project 2화 - Filing for the Enemy 3화 - Crimes of Fashion 4화 - Betty Suarez Land 5화 - Granny Pants 6화 - Ugly Berry 7화 - Crush'd 8화 - Tornado Girl 9화 - When Betty Met YETI 10화 - Bad Amanda 11화 - Dress for Success 12화 - Sisters on the Verge of a Nervous Breakdown 13화 - Kissed Off 14화 - The Courtship of Betty's Father 15화 - There's No Place Like Mode 16화 - Things Fall Apart 17화 - Sugar Daddy 18화 - A Mother of a Problem 19화 - The Sex Issue 20화 - Rabbit Test 21화 - The Born Identity 22화 - In the Stars 23화 - Curveball 24화 - The Fall Issue 시즌 4[원본 편집] 1화 - The Butterfly Effect Part 1 2화 - The Butterfly Effect Part 2 3화 - Blue on Blue 4화 - The Weiner, the Bun, and the Boob 5화 - Plus None 6화 - Backseat Betty 7화 - Level (7) with Me 8화 - The Bahamas Triangle 9화 - Be-Shure 10화 - The Passion of the Betty 11화 - Back in Her Place 12화 - Blackout! 13화 - Chica and the Man 14화 - Smokin' Hot 15화 - Fire and Nice 16화 - All the World's a Stage 17화 - Million Dollar Smile 18화 - London Calling 19화 - The Past Presents the Future 20화 - Hello Goodbye - 최종회 외부 링크[원본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어글리 베티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한국방송공사 어글리 베티 홈페이지 미국 IMDb 어글리 베티 블로그 미국 TV닷컴 어글리 베티 블로그 TV가이드 어글리 베티 블로그 (영어) 어글리 베티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이 글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어글리_베티&oldid=23681550" 분류: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ABC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미국)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 외화 드라마골든 글로브상 뮤지컬 코미디 작품상(텔레비전) 수상작ABC 스튜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venska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11: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논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논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논란은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언론의 취재 등과 발표를 근거로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한 각종 논란을 정리하였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였고 이 사고에 대해 청해진해운과 세월호 운행 승무원, 한국해운조합, 한국선급 등 선박 관련 기관들, 그리고 대한민국 행정부가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또한 이 사고와 관련해 유명인사나 정치인 등의 막말 논란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사상자가 많이 늘어난 데에는 최초 침몰 징후 후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초기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승객들 몰래 탈출한 선장 이준석과 승무원들의 책임이 대두되고 있으며, 배를 무리하게 운행한 청해진 해운 역시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또한 해수부 마피아로 불리는, 해운계의 정경유착 역시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해경의 뒤늦은 대처 역시 책임론이 있다. 지나가는사람:저는 이글을보고있는사람입니다. 언니 오빠들 명복을 빕니다 .ㅜ 목차 1 구조장비 투입 지연 논란 1.1 통영함 1.2 다이빙벨 2 구조 방법 2.1 첫 시신 발견 3 대한민국 정부 3.1 수 많은 대책본부 3.2 인원집계 3.3 해양경찰청 3.4 잇따른 탑승자 수 혼선 3.5 해수부 마피아 4 교육당국 5 정치권 6 일베저장소 7 언론 7.1 청와대의 징계 7.2 한국방송공사 7.3 문화방송 7.4 SBS 8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 9 루머 10 기타 논란 11 각주 구조장비 투입 지연 논란[편집] 통영함[편집] 최첨단 수상구조함인 통영함은 천안함 사건 이후 겪었던 어려움을 교훈으로 삼아 대한민국 정부가 자체 기술로 만든 3,500t급 최첨단 수상구조함이다. 2012년 9월 4일에 진수된 통영함은 실링 로보틱스 HD ROV로 최대 수중 3,000m까지 탐사할 수 있고 해난구조대(SSU)가 수심 90m에서 구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도 갖추었다. 통영함은 세월호 사고처럼 선체 진입이 어렵고 6,800t의 무게 때문에 크레인 인양작업에도 난항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꼭 필요하다. 그런데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통영함 일부 장비, 음파탐지장비·수중로봇장비가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이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함정을 진수한 지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해군이 장비 점검도 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1] 논란 끝에, 4월 20일 밤에 조종사인 미국 해군 2명과 실링 로보틱스 HD ROV 2대가 현장에 투입되었다.[2] 해군본부는 사고 당일인 4월 16일 황기철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통영함을 세월호 총력 구조 작전에 지원하라는 지시를 두 차례 보냈다. 수신자는 해군작전사령관, 해군 제5전단장, 통영함장 등이다. 지원 일시는 사고 당일 낮 12시부터 ‘별도 협의시까지’로 돼 있다. 이에 따라 같은 날 해군과 방위사업청, 통영함을 보관 중인 대우조선해양은 ‘청해진함, 통영함 진도근해 좌초선박 구조 참가에 관한 합의각서’를 작성하고 공동 서명했다. 각서에는 황 총장을 대신해 해군 기획관리참모부 최양선 준장이 서명했다. 방위사업청, 대우조선해양도 각각 청장과 대표를 대리해 실무 담당자들이 서명했다. 하지만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사고 이틀 후인 4월 18일 “통영함에 탑재돼 시운전 중인 음파탐지기, 수중로봇 장비 등 구조 관련 장비들이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 측에서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었다. 이에 김광진 의원은 “민간 잠수사와 어선까지 총동원된 참사 현장에 1600억여원을 쏟아 부은 통영함은 가지 못했다”며 “해군참모총장이 두 차례나 긴급지원 지시를 내렸음에도 통영함이 투입되지 않은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해군 측은 “곧바로 투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라며 “예비조치로서 통영함을 준비시켜 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3] 다이빙벨[편집] 다이빙 벨(잠수종)은 수중 작업을 위해 잠수부를 바다 속으로 이동시키는 장치로, 해난 구조 등에 이용된다.[4] 해난구조 및 선박인양 전문가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이 기술을 세월호 침몰 사건에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대표는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유속과 시계로 크게 나눈 뒤, 시계보다는 유속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잠수종은 선체 옆에 붙어 있는 출입구까지 일종의 엘레베이터를 설치하는 것과 같아 이를 통해 다이버가 이동을 하면, 유속이 세도 출입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잠수종의 기본적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이대표에 따르면 알파잠수기술공사는 2000년도에 잠수종을 제작을 하여 이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다이버는 감압을 위해 상당 시간을 물속에서 보내야 하는데, 잠수종은 공기 공간이므로 다이버가 춥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경우엔, 조류를 피할 수 있는 어떤 피난처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파잠수기술공사 측에 그러한 기술이 있고, 수심 100m까지 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다이빙계와 군에도 알려져 있음에도, 잠수종이 세월호 침몰 사고 구조에는 채택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이대표는 잠수종 시스템을 이용한 지속적인 작업이 하루에 20시간이 지속 된다면 2, 3일이면 3층·4층·화물칸의 수색이 모두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대표는 지금 구조작업 체계에서는 정부 측에서 책임을 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이미 주도가 진행되고 있는 어떤 체계에서는 민간작업자가 끼는 것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구조작업에 대한 전제적인 지휘를 자신에게 넘겨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가능한 것은 단지 인력·장비·안전을 보조하는 것뿐이고, 주수색작업을 위해서 계급이 배제된 실질적인 능력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6] 하지만 황대식 한국해양구조협회 본부장은 다이빙벨 투입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유속에 상관없이 엘리베이터 형식으로 내려갈 수 있어 20시간 동안 작업이 가능하다는 게) 그럴 수 있지만 이쪽의 조류가 워낙 세고 탁도가 높기 때문에 부피가 큰 다이빙벨을 선체 내부에 넣지는 못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다이버에 의한 수색 구조 방법을 사용을 하면서 그 다이버들이 안전하게 오랜 시간 동안 수색 구조를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려할 때 그런 것(다이빙벨 등)들도 후차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걸 설치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색 구조 활동을 놓칠 수가 없다”는 이견을 보여 논란이 있다.[7] 이 대표는 4월 21일 새벽, 자비를 털어 다이빙 벨, 작업용 CCTV 등 수십톤의 장비와 인력을 바지선에 싣고 인천항에서 팽목항으로 이동했다. 일부 다이빙벨 투입을 원하는 실종자 가족들이 해경 측에 다이빙벨 투입을 건의했고 이 결과 10여 시간 만에 다이빙벨이 사고현장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빙벨이 기존 작업에 방해가 되고 이미 바지선이 설치돼 있어 안전 사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구조당국의 허가가 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8] 이종진 대표는 결국 다이빙 벨 등의 장비를 철수시키며 "생존자 찾아 에어포켓까지 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구조지 지금 이게 구조인가"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전해진다.[9] 그러나, 안전 문제로 이종인 알파잠수기술 대표가 제안한 잠수장비 '다이빙 벨'을 불허한 해경이 대학에서 다이빙 벨을 비공개로 현장에 투입되어 논란이 있다. 고발뉴스는 “23일 새벽 2시30분 강릉 모 대학으로부터 위급한 상황이 있다며 다이빙벨을 빌렸다더라. 언론 몰래 비밀리에 아침 9시에 현장으로 보내는 과정을 포착했다”라고 했다. 이어 “강릉의 모 대학과 통화해 구조 당국이 다이빙벨을 빌린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대학의 한 교수는 돈을 받은 것은 아니고, 위급하다며 협조 요청이 들어와 빌려줬다”고 말했다.[10] 해경측은 "(다이빙 벨을) 실제 구조작업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보였다.[11] 이에 대해 언딘측의 공식발표에는 언딘에서 단독으로 가지고 온 것이며 이는 현장에 당장 투입하기에 어려운 조건인데 이종인의 다이빙벨이 여론화되자 자신들도 다이빙벨 장비를 가지고 있다라는 목적으로 빌렸다고 밝혔다.[12]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은 24일 오후 팽목항을 찾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 이종인 대표의 작업 참여를 강력히 요구해 다이빙벨 투입을 약속 받았고,[13] 이에 따라 이 대표는 25일 오전 11시 40분쯤 팽목항에서 출항했지만 앵커(일종의 닻)를 설치하지 못했고 거센 조류에도 밀려 다이빙벨 투입에 실패한 뒤 26일 낮 12시쯤 팽목항으로 귀항했다.[14] 그 후, 30일에 재투입되어 2시 55분께 버팀줄 선체 이음매 조이기에 성공했으나, 버팀줄에서 선내 진입구까지 단거리 유도선 설치에 실패했다. 높은 파고로 알파 바지선의 가로·세로 움직임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15] 오후 3시 45분에 다이빙벨을 선미 쪽에 투입했지만 투입 과정에서 잠수부 1명의 공기호스가 다이빙벨 운용 와이어에 씹혀 터지는 바람에 다이빙벨은 투입된지 28분만에 밖으로 건져졌다.[16] 다음 날인 5월 1일 새벽, 사고 해역에 다이빙벨을 투입한 뒤 잠수부 두 명이 세월호 선내에 진입해 각각 20여 분씩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실종자들을 찾지는 못했다. 오전 11시쯤 사고 해역에서 바지선과 다이빙벨을 철수시켰으며, 이 대표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17] 하지만 세월호 침몰 해역에 투입돼 다이빙벨 잠수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1시간여 만에 철수한 것과 관련해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다.[18] 다이빙벨이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하면서 이에 대한 피해 가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투입 여부 논란 탓에 구조에 시간만 빼앗겼다는 것이다.[19] 구조 방법[편집] 사고 초기, 적은 수색인원 투입 당일(2014년 4월 16일)에 해경과 해군이 투입한 수중 수색 인원은 모두 16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있다. 뉴스타파는 자신들이 입수한 당시 상황보고서엔 침몰 첫 날 동원된 잠수 요원은 해경 140명과 해군 42명 등 모두 182명으로 나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9%만이 실제 수중수색 작업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300명 넘는 실종자가 선내에 갇혀 있었던 상황에서 소극적 대응을해 인명피해를 키운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20] 미군 헬기 구조 거절 진도 해상 유람선 여객선 참사 당시 사고 해역 인근에서 작전중이던 미군 함정이 구명용 보트를 탑재한 구조 헬기를 현장에 급파했으나 우리 해군의 승인을 얻지 못해 되돌아갔다. 2014년 4월 16일 미 국방성 보도 매체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 당시 사고 해역에서 118마일 떨어진 서해상에서 작전중이던 미군 상륙함 본험 리처드함이 여러 개의 구명보트를 실은 2대의 MH-60 헬기를 파견했지만, 구조 작업에 투입되지 못한 채 돌아갔다. 미국 해군이 이날 오전에 발표한 보고서(문서번호: NNS140416-02) 역시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전달 받은 미 해군이 인근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함정의 구조 헬기를 즉각 파견했지만 한국 측이 ‘조치의 효율성’을 이유로 한국측 현장 지휘자의 요청을 기다리며 초동 구조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기했다고 밝혔다.[21] 최첨단 수상구조함 통영함 최첨단 수상구조함인 통영함은 천안함 사건 이후 겪었던 어려움을 교훈으로 삼아 대한민국 정부가 자체 기술로 만든 3,500t급 최첨단 수상구조함이다. 그런데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통영함 일부 장비, 음파탐지장비·수중로봇장비가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이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함정을 진수한 지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해군이 장비 점검도 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22] 논란 끝에, 4월 20일 밤에 조종사인 미국 해군 2명과 실링 로보틱스 HD ROV 2대가 현장에 투입되었다.[23] 세월호 참사 당시 상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통영함 출동을 끝까지 고집했던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참모들을 소집, 인근에 있던 통영함을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상부는 정확한 이유와 설명도 없이 그의 명령을 제지했고, 이에 황 전 총장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통영함에 재차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윗선의 제지로 통영함 출동은 끝내 좌절됐다. 해군 최고 수뇌부의 통영함 출동 명령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상부에 의해 두 번이나 거부된 것이다. 2014년 12월 감사원은 '통영함 납품 비리' 누명으로 황 전 총장을 인사조치하도록 국방부 장관에게 공식 통보했고, 보직 해임된 황 전 총장은 이듬해 3월 구속됐다. 하지만 그는 1심과 2심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악의 해상참사를 맞아 통영함을 구조에 투입하려 했던 해군 참모총장의 뜻이 '누군가'에 의해 좌절됐고, 그 때문에 미운 털까지 박힌 그가 누명까지 쓴 채 군복을 벗게 됐다는 이재명 시장의 발언 등의 논란이 있다.[24] 무인잠수정 투입 실패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2014년 4월 21일 오후 3시 20분쯤 수색을 위해 '로봇물고기'로 알려진 수중탐사로봇(ROV)을 투입했고, 선내 진입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나, 이러한 발표 역시 사실과는 달랐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특조위가 입수한 TRS 교신에서 해경 관계자는 "되지도 않는 ROV…ROV 줄하고 엉킬까 봐 지금 언딘 샐비지가 다이빙을 못 하고 있다. 철수하다가 줄이 엉켜가지고 지금 어디로 유실됐는지 찾지를 못하고 있음"이라고 말했다. 이후 오후 6시쯤 구조본부는 3009함에 "ROV가 수색 중단하고 출수한 사유가 뭔지 파악 바람"이라고 교신했고, 3009함은 "수중탐색했으나 선체 내부 탐색은 실시하지 못함. 선내 진입 못 하고 출수"라고 답했다. 해경구조본부는 당시 로봇이 선내에 진입하지 못하고 유실됐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와 반대되는 내용을 발표해 구조작업의 성과를 포장한 했다.[25] 현장에 출동한 응급헬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고 갑판에 생존자가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당시, 현장에 출동한 5,000억원 규모 이상의 구조헬기가 구조를 실시하지 않고 육지에 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응급구조를 실시하던 아주대 외상외과 응급구조헬기 AW-139는 구조 중 급유협조를 받지 못해 인근 비행장에도 불구하고 산림청까지 가서 급유를 받아 구조가 지연되었다.[26] 첫 시신 발견[편집] 사고 발생 나흘째인 지난 19일 새벽 4시 20분쯤, 자원봉사에 나선 민간 잠수사들이 구조작업을 하다 처음으로 세월호 안에 있는 시신 3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한 민간 잠수사는 언딘의 고위 간부가 "시신을 언딘이 발견한 것으로 해야 한다"며 "지금 시신을 인양하면 안 된다", "이대로 시신이 인양되면 윗선에서 다칠 분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민간 잠수사들은 해경이 나흘 동안 구조작업을 한 상황에서 민간잠수사가 먼저 시신을 인양하면 해경의 구조 능력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언딘 측이 "직원으로 계약을 해주겠다"면서 "모든 일은 비밀로 한다"는 조건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공식 브리핑에선 언딘이 시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언딘 측은 민간 잠수사들이 시신을 발견한 게 맞고 실력이 좋아 함께 일하자고 한 건 사실이라고 시인했지만, 나머지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으며 "윗선에서 다칠 분이 많다"는 등의 발언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27] 대한민국 정부[편집] 수 많은 대책본부[편집] 이번 침몰 사고와 관련해 설치된 대책본부는 총 10여 곳이다.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라 안전행정부가 서울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설치하였다. 뒤이어 정부세종청사에는 해양수산부와 교육부가 각각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차렸다. 해양수산부는 선박사고에 관한 주무부처란 점에서, 교육부는 수학여행을 가던 고교생들이 대거 승선했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경기도와 도교육청, 안산시는 안산올림픽기념관에 합동대책본부를 차렸으며 안산교육지원청에도 경기도교육청 대책본부가 만들어졌다.[28] 구조·수색 등 사고수습에 주된 책임이 있는 해양경찰청도 인천과 목포에 각각 지방사고수습본부를 꾸렸다. 이와 별도로 산하기관인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목포에 중앙구조본부를 설치했다. 여러 곳에 대책본부가 난립하자 국무총리실은 목포에 범부처 사고대책본부를 설치하겠다고 나섰다가 철회하는 소동도 벌어졌다.[29] 결국, 17일 진도군청에 해양수산부를 중심으로 11개 부처가 합동으로 범부처 사고대책본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본부장은 정홍원 국무총리가 맡고, 부본부장은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맡기로 했다.[30][31] 본부의 대변인은 해양수산부 대변인이 맡기로 하고, 언론 등에 대한 브리핑 창구도 일원화하겠다고 밝혔다.[32] 뒤이어 19일에는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다.[33] 이를 두고 명령과 보고 체계에 집착한 탁상 행정과 부처 이기주의와 무능함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34][35] 인원집계[편집] 계속 변하는 인원파악이 논란이 되고 있다. 단원고 측은 16일 오전 "11시 5분께 해경으로부터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고 밝혔다. 경기도교육청 측도 학교 측 발표에 따라 11시 7분과 16분에, 출입기자들에게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와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해경 공식 발표'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각각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학교에 몰려온 학부모 300여명은 환호하고 안도하였다. 그러나 위 발표들은 모두 사실과 달랐는데,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이날 정오, 공식발표를 통해 "탑승객 477명 가운데 179명을 구조 했으며 2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에 상황이 다시 '구조 중'인 것으로 확인되자 학부모들은 오열과 분통을 터뜨렸다.[36] 긴급 가동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측 역시도 인원집계의 오류로 논란이 되고 있다. 중대본은 16일 오후 1시 30분경 "476명 탑승, 구조자 368명, 사망 2명 확인"이라고 밝혀, 구조자수가 늘어감에 따라 국민들이 그나마 피해 최소화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가지게끔 하였다. 그러나 돌연, 오후 15시경 "구조자 집계 수 오류 ... 확인 중"이라고 앞선 발표를 번복함에 따라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어 중대본 측은 오후 16시 30분경 "459명 탑승, 구조 164명, 사망 2명, 실종 293명"이라고 정정하였다. 그러던 중 정홍원 국무총리가 17일 새벽 여객선 침몰 보호소가 설치된 전남 실내체육관을 방문하였다. 정홍원 총리는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물병을 맞아 논란이 되었다. 실종자 가족은 정부의 구조 활동 지체와 피해상황 집계혼란에 답답해하며, 유관 기관들을 총괄하는 책임을 지닌 국무총리 등 정부 당국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했다.[37] 그러나 인원집계 혼란은 끝이 아니었다. 총리실 등 주요부처가 꾸린 범부처사고대책본부는 19일 진도군청에서 브리핑을 하고 인원집계를 승선자 476명, 구조자 174명으로 또다시 변경했다. 이평현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안전총괄부장은 선사가 작성한 명부를 기초로 확인한 결과, 2명이 안개로 인해 출항이 불명확함에 따라 각각 비행기를 타거나 귀가했으며 생존자 중 3명이 승선원 명부를 작성하지 않고 차량에 동승해 결과적으로 명부보다 1명이 늘었다고 말했다. 구조자 정정의 이유는 다수 기관이 구조와 이송을 하는 과정에서 유사성명 기재로 동일인이 중복집계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해양수산부 박승기 대변인은 "지금부터 세월호 여객선 침몰 관련 언론 발표는 범부처사고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조정한다"며 정홍원 국무총리의 언론 발표체계 조정 지시를 전달했다. 이에 따라 향후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서해지방해양경찰청과 진도 실내체육과, 팽목항 등 현장은 범부처사고대책본부에서 공지하는 내용을 일원화해서 발표하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확정된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38] 국정원 세월호 유가족 사찰·여론전 개입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가 조사한 ‘국정원의 세월호 여론조작 및 사찰 의혹’ 조사를 심사한 결과, “국정원 국내정보부서가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부터 2015년 7월까지 세월호 사고 관련 보수단체 집회 동향과 각계 세월호 관련 여론을 파악해 국정원 지휘부와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개혁위 발표를 보면, 국정원은 2014년 6월 청와대 보고한 ‘국정운영 제언’에서 세월호 참사를 ‘2014년 하반기 국정운영의 가장 큰 위기이자 기회’로 지목하고, “세월호 집회가 과격시위로 변질될 수 있다”, “유사 안전사고 되풀이시 대정부 투쟁 재점화 불씨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 등의 우려를 전한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정원 국내부서는 세월호 추모 행사인 ‘청춘열차‘를 비판하는 ‘한국대학생포럼’ 칼럼의 보수매체(<뉴데일리>) 기고와 ‘어버이연합’의 세월호 참사 규탄 집회 및 현수막 설치, ‘교육과 학교를 위한 학부모연합’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규탄 기자회견 및 세월호 교재 퇴출 촉구 기자회견 등에도 개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정원 개혁위는 “국정원이 보수단체에 요청해 세월호 관련 비판칼럼 배포, 맞대응 시위, 온라인 활동을 하도록 한 것은 직무범위 일탈로 판단돼 관련자 징계 등을 검토하고, 제도 개선을 국정원에 권고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개혁위는 국정원 직원이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가 단식을 하다 입원한 병원에서 병원장과 주치의 등을 상대로 김씨 관련 정보를 얻은 정황도 확인됐다고 밝혔다.[39] 박근혜 대통령 발언에 대한 외신들의 비판 외신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4월 21일)에서 “선장 이준석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라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의 세월호 참사는 진정 끔찍하지만, 살인이 아니다’(The South Korea ferry disaster is truly awful, but it is not murder)는 기사에서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 비극은 극심한 감정을 유발하지만 세월호 선원들에 대해 너무 쉽게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며 “번역의 복잡함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살인자’란 단어는 눈에 띈다”고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역시 '박 대통령, 세월호 선장에 '살인과도 같다'…옳았나?’(Was Park Right to Condemn Ferry Crew?)라는 기사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사고 초기 (구조자 수 집계 등) 오보와 느리고 분별력 없는 대응으로 비판받은 정부의 재해 대처에 대한 주의를 돌리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이 나온다”고 주장해 논란이 있다.[40]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7월 10일 국회 '세월호 침몰사고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청와대 비서실·국가안보실 기관보고에 출석해 세월호 참사의 컨트롤타워 논란과 관련, "일반적 의미로 청와대가 국정 중심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컨트롤타워라면 이해되지만 법상으로는 다르다"며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의하면 재난의 최종 지휘본부는 안전행정부 장관이 본부장이 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라고 말했다. 이는 세월호 사고 직후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이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재난컨트롤타워가 아니다"고 언급한 것과 같은 취지의 발언이다. 김 비서실장은 '훈령에는 청와대가 최고 지휘체계로 돼 있다.'는 새정치민주연합 김현미 의원의 지적에도 "법이 대통령령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반박했다. 대통령 역할과 관련해서도 "현장에서 하는 일과 대통령이 하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서 "전쟁으로 비유하면 대통령은 전쟁 지휘를 해야지 전투 지휘를 하면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사고 당시 청와대가 사고 상황을 지휘·통제했느냐는 물음에는 "청와대 상황실에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확인해서 대통령께 보고하는 역할이었지, 구조를 지휘한 일은 없다"고 부인했다. 김 비서실장은 또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현장 구조세력의 전문성과 훈련이 부족해 구조활동이 매우 미흡했다는 사실"이라면서 "해경이 충분한 훈련도 없고 전문성도 부족해 초반에 구조를 잘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며 해경에 직격탄을 날렸다. 김 비서실장은 야당 의원들의 사퇴 요구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만두는 순간까지 성심껏 일할 뿐"이라면서 인사실패에 대한 비난에도 "인사가 잘못되고 잘된 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라고 말했다.[41]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4월 23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국가안보실이 재난 컨트롤타워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오보”라 밝혔다. 민 대변인은 “국가안보실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재난 상황에 대한 정보도 빨리 알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며 “NSC의 역할은 정보를 습득해서 각 수석실에 전달해주는 것이지 재난 상황의 컨트롤타워라는 지적은 맞지 않다”고 부연했다. 안전행정부에 설치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이번 사고의 컨트롤타워라는 얘기다. 그는 이어 “(NSC는) 국가안보와 관련해서 해야할 일이 많은 부서”라며 “왜 안보실이 모습을 안 드러내느냐는 지적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실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이번 참사와 관련해 각 부처들의 미숙한 대응, 책임 떠넘기기와 마찬가지로 군색한 책임 회피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42] 서남수 교육부 장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사고 당일인 4월 16일 오후 4시 경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그는 구조된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누군가 마련해 준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 등을 먹으며, 자신을 수행하던 이에게 함께 먹자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43] 서 장관이 컵라면을 먹은 곳은 세월호 구조자들이 응급치료를 하던 테이블임이 드러나 논란은 더욱 커졌다.[44] 또, 4월 18일 오후 6시께 안산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단원고등학교 학생 이모 군의 빈소에 서 장관이 수행원 3~4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 가운데 한 수행원이 서 장관보다 몇 걸음 먼저 빈소 앞에 다가가 유족에게 입구 쪽을 가리키며 "교육부장관님 오십니다"라고 귓속말을 건넸다. 유족은 곧바로 수행원을 향해 "어쩌란 말이냐. 장관 왔다고 유족들에게 뭘 어떻게 하라는 뜻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윽고 도착한 서 장관이 조문하는 동안에도 유족은 수행원을 몰아붙였고, 조문을 마치고 나온 서 장관은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말하고 바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45]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팽목항 사고상황실에서 기념 촬영을 시도해 물의를 일으킨) 안전행정부(안행부) 공무원은 사표를 수리했는데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국민 정서상 모든 것을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됐다"고 언급하며, 질문과 대답 간의 논점이 상이해 논란이 있다.[46] 또, 민 대변인은 “안보실의 역할은 통일, 안보, 정보, 국방의 컨트롤 타워다. 자연재해 같은 거 났을 때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며, “국가 안보와 관련해서 봐야할 것이 많은 곳이다. 재난에 대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세월호 침몰의 심각성이 확인되지 않았던 사고 초기, 사고를 직접 챙기며 충분히 사고에 대응할 수 있다는 듯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줘 논란이 있다.[47] 5월 9일, 유가족들 항의방문을 받자 청와대는 KBS와의 중재를 급하게 끌어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변인이 '순수 유가족'이란 용어를 써서 또 논란이 됐다. 민경욱 대변인은 기자들을 만나 유가족과의 접촉 계획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순수 유가족"이라고 만날 대상을 한정했다. 그러면서 "순수 유가족은 120명 와있다고 보고를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항의대는 25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던 상황이었고, 민 대변인의 발언이 "유가족 주변에 선동세력이 있다"는 여권 내 의혹제기와 맥이 닿아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졌다.[48] 팽목항 현지에는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이 5월 24일 오후 기자들과의 오찬자리에서 '민간잠수사가 일당 100만원, 시신 1구 인양 시 50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는 전언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49] 이 발언에 대해 민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제 일부 기자들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세월호 희생자 구조, 수색 문제와 관련한 주제로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다"며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소개했다. 또 "이 과정에서 현재 잠수사들이 오랜 잠수활동에 심신이 극도로 피곤하고, 시신 수습 과정에 심리적 트라우마도 엄청나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덧붙였다. 민 대변인은 "이런 문맥에서 현장에 있는 가족들은 잠수사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마지막 한 명을 수습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랄 것이고, 또 가능하다면 정부가 인센티브를 통해서라도 피곤에 지친 잠수사를 격려해주기를 희망할 것이라는 저의 개인적 생각을 얘기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 취지야 어쨌든 발언이 보도되는 과정에서 현장에서 묵묵히 헌신적인 구조와 수색활동을 벌이시는 잠수사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까 깊이 우려된다"고 유감을 표했다.[50]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부적절한 발언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사고 17일째인 5월 2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나라사랑' 전문 강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요즘 세월호 침몰 사건 때문에 우리 (박근혜)대통령님과 정부가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두둔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지금 무슨 큰 사건만 나면 우선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한다"며 미국과 비교했다.[51] 또 "대통령이 성공해야 성공한 대한민국이 된다"며 박근혜 대통령을 우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강연을 들었던 한 '나라사랑' 강사는 그의 발언이 "바람직한 발언이란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며 "(대통령을 향한) 아부"라고 지적했다.[52] 송영철 안전행정부 국장의 기념사진 논란 송영철 안전행정부 국장은 20일 오후 6시경, 진도 여객선 세월호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상황 본부의 세월호 침몰 사망자 명단 앞에서 공무원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하려하였다. 이에 현장에 있던 실종자 가족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와 같은 논란에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20일 트위터를 통해, “사망자 명단 앞 기념촬영 안행부 국장 직위 박탈”이라는 기사를 링크하며, “그 앞에서 인증 샷 찍을 기분이 나냐. 이 정도면 일베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해도 해도 너무 하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을까”라고도 언급했다. 현재 안전행정부 국장은 직위해제된 상태로, 안전행정부는 “앞으로 징계위 회부 등 절차가 남아 있다. 향후 관련 절차에 따라 엄히 문책할 방침이다”라고 전했다.[53] 프랑스 한국대사관의 분향소 방문시 신분증 제시 및 신상 기재 분향소를 찾아온 교민들에게 대사관쪽은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고 '책임자와 상의를 해야 한다'며 20여분을 길에서 기다리게 했다고 교민들은 전했다. 프랑스 한국대사관 쪽이 공지한 분향 안내에는 '신분증 필참'이란 문구가 없었으나, 대사관은 분향을 하러 찾아온 교민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신상을 기재한 뒤 5명씩만 들어가라고 요구했다. 교민들은 항의 끝에 서류에 신상명세를 쓰고 10명씩 들어가 분향을 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고 전했다. 교민들은 "분향소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소수의 인원만 들어갈 수 있다는 (대사관쪽의) 변명과 달리 분향소는 아주 넓기만 했다"며 "이 날 70대의 한 교민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공무원들의 이러한 태도가 바로 오늘의 세월호 참사를 만든 것"이라고 꾸짖었다.[54] 정보당국의 통제 의혹 세월호 참사로 정부의 재난관리 대응에 대한 비판(미흡한 초동 대처, 부처간 혼선, 구조활동)여론이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고 구조에서의 골든타임 낭비로 인한 인적 피해와 주먹구구식 인력 운용, 장비의 후진성 등 민감한 문제들이 대학 교수들의 비판이 이어졌었다. 그러나 사고 발생 6일째, 21일부터는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정부의 재난 대응에 대한 문제제기는 관련 전문가들이 큰 몫을 하였다. 노컷뉴스는 기자가 목포해양대에 전화를 했을때, 조교가 교수들의 입장을 대신 전했다고 주장했다. 조교가 "선생님들이 인터뷰를 피하고 계시는 입장이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55] 구급차로 출퇴근하는 보건복지부 공무원들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구급차량을 이용한 공무원들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팽목항은 진입도로가 좁아 원활한 환자수송을 위해 구급차량 말고는 통행이 제한된다. 그런데 걸어야하는 거리가 불과 1km 정도에 불과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구급 차량을 멋대로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병원이나 보건소 구급차량을 쓸 일이 거의 없어 대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56][57] 해군의 방송 연출 4월 22일 오후 6시 50분쯤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에 정박한 대한민국 해군 청해진함 갑판. 해군 해난구조대(SSU) 소속의 잠수사 A상사가 흠뻑 젖은 잠수복 차림으로 방송사 카메라에 둘러싸여 실종자 수색 상황을 설명했다. TV에서 이 인터뷰 장면을 볼 시청자들은 A상사가 막 수색 작업을 마치고 선상에 오른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실은 바닷물이 아니라 맹물이었다. 그는 이 날 오전 수색 작업을 마치고 대기하던 중 인터뷰 10분 전에 불려왔다. 해군 관계자들은 '현장감 있는 영상이 필요하다'는 방송사 몇 곳의 요청을 받자, A상사에게 드라이수트(방수 잠수복)로 갈아 입으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현장감이 덜하다고 판단했는지, 해군 관계자는 급기야 장병을 시켜 갑판에 설치된 수도 장치로 A상사의 전신에 물을 뿌려 적시기 시작했다. 해군은 '말 맞추기'도 했다. A상사가 바다 속 상황에 대해 "오늘은 시정이 50~60cm로 이전보다 잘 보인다"고 말하자, 해군 관계자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시계가 좋아 보이잖아. 30~40cm로 가자."[58] 사복 경찰의 미행 경기 안산에서 전남 진도로 향하던 세월호 사고 유가족 30여 명은 5월 19일 오후 7시 40분께 전북 고창 고인돌휴게소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뒤따른 남성 2명의 신원이 안산 경찰인 것을 확인하고 항의했다. 유가족들은 "사복경찰이 불법 사찰하고 있다"며 일부는 이들과 함께 안산으로 돌아와 해명을 요구했다. 당시 유가족을 뒤따랐던 사복 경찰 2명은 안산단원경찰서 정보보안과 소속 보안계 직원들이었다. 최동해 경기지방경찰청장은 20일 오전 0시 8분께 안산 화랑유원지 정부합동분향소 앞에서 유가족 100여 명에게 "사전 동의없이 사복 경찰이 유가족을 뒤따른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최 청장은 "사전 동의를 거치지 않은 절차는 잘 못"이라면서도 "유가족을 보호하거나 활동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한(뒤따랐던) 것이지 불이익을 줄 마음은 아니었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찰이나 미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론 어떤 경우에서든 유가족의 동의 내에서만 사복 경찰은 활동하겠다"고 약속했다.[59] 장관 의전에 따른 구조 지연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이 오히려 구조를 지연시켰다는 주장이 나왔다. 오후 2시 넘어 항구에 도착한 강 장관의 격려 행사 때문에 민간 잠수사들의 출항이 무려 20분이나 늦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4월 말 구조 지연 논란이 불거졌을 때의 해명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안전행정부는 당시 30초 정도 잠수사와 악수를 한 것이라며 지연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의 말은 달랐다. 한편,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은 사고 당일 해경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해양수산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장관은 사고 당일 오후 12시40분 전남 무안에서 해경의 헬기를 타고 사고 해역에 있던 지휘 함정으로 이동했다. 이후 헬기는 함정에서 1시간 이상을 대기했다. 이 시각, 잠수특공대 16명은 헬기가 없어 배를 타고 현장에 가야 했다.[60] 특위 기관보고 관련 6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기관보고에서 행안부 기관보고에 출석한 강병규 장관은 "표면공급 잠수방식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물음에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곧바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실종자 구조 방식하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여야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61] 세월호를 부양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리프트백'은 사실 부양 역할이 아니라 부표 역할로 활용했다고 백승주 국방부 차관이 밝혔다.[62] 7월 2일 열린 국정조사에서는 해경 상황실 유선전화 녹취록에 대한 '왜곡 발언' 논란으로 여야가 충돌해 한때 파행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이번 충돌은 녹취록을 인용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김광진 의원의 발언이 불씨가 됐다. 김 의원은 "사고 당일 오전 9시 50분 청와대에서 (사고현장) 화면을 보여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며 해경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수행하느라 구조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청와대 관계자가 "다른 일은 그만두고 영상 중계 화면 배만 띄워라. 내가 요청하는 게 아니다. VIP(박 대통령)가 좋아하고 제일 좋아하니까 그것부터 하라"라는 발언을 했고, 녹취록에도 이 발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은 김 의원이 인용한 발언이 녹취록에 담기지 않았다며 "녹취록 어디에 'VIP가 영상을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나. 우리도 같은 녹취록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가 있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희생자 가족이 회의를 서둘러 진행하라고 촉구하자, 조 의원은 "당신 누구냐"라고 큰 소리로 내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새누리당은 김 의원의 특위 사퇴를 요구하며 회의 참석을 거부, 오후 2시 30분에 재개될 예정이던 기관보고가 파행되었다. 파행 후 희생자 가족 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성역없는 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재개를 촉구했고, 새정치연합 간사인 김현미 의원도 브리핑에서 "김 의원의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킨 점에 대해 저도 사과하겠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새누리당은 회의장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결국 특위는 약 5시간 가량 중단된 끝에 오후 7시 30분부터 가까스로 재개됐다.[63] 수색 방법의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한 대책본부 7월 4일 오후 2시부터 범정부사고대책본부에선 수색 구조 TF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이날 회의에서도 새로운 대책은 나오지 못했다. 회의에서는 새로운 잠수방식의 도입여부에 대해 논의했는데, 지난 80일간 유지해온 표면공기 공급방식을 폐기하고 재호흡기, 일명 리브리더를 투입할지 여부를 검토한 것이다. 일단 재호흡기는 물속에서 호흡할 때 내뱉는 이산화탄소를 정화해 다시 호흡할 수 있게 돕는 장치인데, 수중에서 1시간 이상 작업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정부사고대책본부 측은 회의에서 리브리더를 사용할 경우 잠수시간의 연장은 가능하지만 잠수시간이 늘어날 수록 감압시간도 그만큼 늘어나 효율이 떨어지며, 현재 표면공기 공급방식과 달리 수중 잠수요원과 바지선 위의 통제요원 간의 실시간 소통이 불가능해 위험하다고 밝혔다. 이에 실종자 가족 측은 전문가들이 모여 가족들의 제안이 불가능한 이유만 설명하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냐며 강하게 반발했는데, 당분간 '선체 내부 10분 수색'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64] 해양수산부 항적 은폐 의혹 다큐멘터리 <인텐션>을 만들고 있는 김지영 감독은 '한겨레TV'의 시사탐사쇼 ‘김어준의 파파이스’(이경주 피디·박연신 작가) 81회에서, 기기 오작동 혹은 은폐를 걷어낸 항적을 공개했다. 앞서 해양수산부가 세월호의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토대로 공개한 항적, 침몰 전 마지막 5분이 담긴 해군 레이다 기록 뿐 아니라 사고 직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던 둘라에이스 호의 레이다와 영상이 기록한 세월호의 위치가 모두 다르다. 정부와 해군이 밝힌 항적과 달리, 세월호가 사고현장 부근 섬인 병풍도에 바짝 붙어 운항했다는 것. 김 감독은 정부와 해군이 밝힌 항적과 달리, 세월호가 사고현장 부근 섬인 병풍도에 바짝 붙어 운항했음을 자료를 통해 밝혔다. 김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생존자 최은수 씨는 "세월호가 섬을 받아버리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떠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화물기사인 최 씨는 세월호 사고 이전 1년 동안 한 달에 세 차례 이상 세월호, 혹은 같은 항로로 운항한 오하마나호를 이용해 제주도를 오간 경험이 있어 항로와 주변 풍경에 익숙한 편인데, 사고 당일 “세월호의 항로가 평소와 달랐다”고 말했다.[65] 해양경찰청[편집] 관계자의 실언 목포해양경찰서의 한 간부는 세월호 침몰 사고 다음 날인 17일 ‘세월호 사고에 대한 해경의 초기 대응이 미진하지 않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해경이 못 한 게 뭐가 있느냐.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80명 구했으면 대단한 것 아니냐”며 항의해 논란이 있다. 발언이 알려진 후 해양경찰청은 그를 직위 해제했다.[66] 사고 당일의 잘못된 보고 사고 당시 '370명을 구조했다'는 잘못된 보고는 해경이 청와대에 잘못 보고하면서 비롯된 것이며, 청와대는 오후 2시 30분이 넘도록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경은 사고 4시간 30분이 지난 오후 1시 16분 유선으로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보고하면서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생존자 370명이라고 한다"고 했고, 이어 "진도 행정선에서 (생존자가) 약 190명이 승선하고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오후 1시 42분에는 "370명이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일부 중복이 있었다고 한다"고 말을 바꾸었고, 오후 2시 36분 보고에서야 "(구조자가) 166명이다"라고 보고를 정정했다. 이를 들은 청와대 관계자는 "큰일났다. VIP(대통령) 보고까지 끝났다. 나머지 310명은 다 배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큰거 아닌가"라며 "중대본에서 발표한 것도 해경에서 보고를 받았을 텐데, (대 언론) 브리핑이 완전 잘못 됐다. 여파가 크겠다"고 말했다. 이같이 해경이 잘못 보고하게 된 경위에 대해 김석균 해경청장은 7월 2일 국정조사 기관보고에 출석해 "제가 파악한 바로는 진도항 현장에서 178명 구조된 이후에 190명이 추가로 구조돼 온다는 소식이 퍼졌고, 현장에 설치된 간이 상황판에 (누군가가) 그렇게 적어놨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간이상황판을 경찰 정보관이 촬영해 해경 정보관에 알려줬고, 이것이 서해해경청을 통해 본청으로 전달됐다. 본청에서 상황보고를 맡은 직원이 사실 확인 없이 중대본에 나간 담당 과장에게 전화한 것이 오류로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119 중앙상황실은 사고 당일 오후 1시께 해경 본청 상황실로 전화를 걸어 "우리 헬기가 현장에 2대 도착을 했고, 수난구조전문요원들이 다 탑승을 하고 있다. 배안에 요구조자가 있으면 바로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경에서는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 할뿐 별도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67] TRS(Trunked Radio System, 주파수공용통신) 무전교신 기록 은폐 의혹 2016년 5월 말 세월호특조위가 당시 인천 송도에 있던 해경 본청에서 TRS 교신기록을 발견했고, 기록이 저장된 3대의 하드디스크를 분석한 결과 2014년 4월 15일부터 12월 말까지 100만개가 넘는 파일이 담겨 있었다. 이중 TRS 기록 파일은 4만7000건에 해당한다고 해경은 밝혔다. 특조위는 기록의 훼손을 막기 위해 6월 초 해당 하드디스크 자체를 밀봉하고서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전체 파일에 대한 실지조사를 요구했으나 해경은 보안문제를 검토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를 들어 일단 2014년 4월 15일부터 5월 2일까지 2주일 분량에 해당하는 파일 7000여건만 제공했다. 이후 특조위 측은 나머지 8개월 치에 해당하는 나머지 TRS 파일중 외교·작전상 비밀사항을 제외한 기록을 추가 요구했다. 그러나 해경은 "서버 담당 직원이 을지훈련을 끝내고 세종청사에서 돌아온 뒤 26일쯤 오라"더니 사흘 만에 별안간 "허가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 "세월호 거짓말 밝힌 해경 TRS 교신기록 '행방불명'" - CBS노컷뉴스, 2016년 9월 8일 TRS 교신기록은 사고 직후 수색과정에서 선내에 공기를 주입하고 수중로봇을 투입했다던 정부 발표가 거짓이었다는 점을 드러낸 핵심 증거다. (관련 기사: 세월호 공기주입·수중로봇·잠수기록 다 거짓말 "靑 보고용" - CBS노컷뉴스, 2016년 9월 3일) 잇따른 탑승자 수 혼선[편집] 사고 초기인 16일 오전 10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는 여객선에 476명이 승선했고 이 중 110여 명을 구조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오전 11시 9분쯤 경기도교육청은 출입기자들에게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학부모와 국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후 중대본은 오전 11시 30분 161명이 구조됐다고 발표했다. 낮 12시 30분엔 179명으로 생존자가 늘었다고 밝혔다. 이후 단원고 학생을 포함한 사망자들이 확인되면서 '학생 전원 구조' 발표는 허위로 드러났다. 더 심각한 것은 중대본이 오후 2시 "368명이 구조됐다"고 공식 발표한 대목이다. 이경옥 안행부 2차관은 오후 3시 30분 "368명 구조는 집계 착오였으며 정확한 생존자 숫자를 확인해보겠다"고 번복했다. 오후 4시 30분 중대본 발표에 따르면 탑승자 459명 중 구조자는 164명에 그쳤고, 293명이 실종 상태인 것으로 집계됐다. 오후 9시 중대본 측은 또다시 "선원 3명이 늘어 승선자는 모두 462명"이라고 정정하고 "구조자는 174명으로 늘었고 실종자는 284명으로 줄었다"고 말을 바꿨다. 해경은 오후 11시쯤 구조자가 175명이라고 정정했다.[68] 이후에도 두 차례나 번복을 하며 불신을 자초했는데, 해경은 여러 기관이 구조에 참여하면서 구조자 이름이 중복 집계됐다며 스스로 착오를 인정했다.[69] 5월 7일 정부는 세월호 탑승객 현황을 또 다시 정정했다. 탑승자 명부에 없던 중국인 2명이 신용카드 매출전표 확인을 통해 추가로 발견되면서 실종자가 늘었고, 중복 기재와 동승자 오인 신고로 구조자가 2명 줄어든 것인데, 이로써 정부의 탑승객 통계는 무려 7차례나 정정되었다.[70] 그 밖에도 아기가 2명 정도 누락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탑승 인원에 대한 의문이 또 나오고 있다.[71] 해수부 마피아[편집] 선박의 정식 항해를 위해 선사는 첫 출항 1주일 전 해경에 운항관리규정을 심사, 증명 받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이 공개한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에서 선원들의 역할을 명시한 비상 부서 배치표는 총 44쪽 중 2쪽에 불과하다. 또한, 비상부서 배치표에는 선원 직책별 임무와 비상신호 체계가 적힌 게 전부였다. 다른 선박의 운항관리규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함에도,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은 승인을 받았다.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은 해경과 운항관리실(해운조합), 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이 포함된 위원회에서 심사해 지난해 2월 25일 인천해양경찰서가 최종 승인했다. 그러나 해경은 4월 22일 기준, 언론의 회의록 공개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해경 측은 회의록 공개에 대해 "유관기관이 모두 합의해야 가능한 사안"이라고 언급했다.[72] 교육당국[편집] 탑승자 전원 구조 문자 메시지 경기도교육청 대책반은 16일 오전 11시 20분께 "단원고 학생이 전원 구조됐다"고 출입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발송했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측도 학생과 교사 338명이 전원 구조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오보였다. 경기도교육청 대책반과 학교 측은 현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적으로 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73][74] 대통령 비판글 조사 대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물어 대통령을 비판한 글을 자신의 SNS에 올린데 대해, 7일 대구광역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동부교육지원청이 관할 지역의 모 초등학교 교사를 상대로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경위를 조사했다고 한다. 교육청 관계자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한 뒤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75] 교사들의 집회 참여 금지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1일 일선 학교에 ‘집회 관련 복무관리 철저 알림’이라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7일 밝혀졌다. 경기도교육청은 공문에서 “최근 세월호 사고로 인한 전국민적 추모 분위기 속에 공무원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므로 각급 학교(기관)장께서는 소속 공무원에게 전파하여 주시고, 복무관리에 철저를 기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또, 애초 교육부 공문에 있던 “5·1에 민주노총 주최 노동절 집회가 서울 등 전국적으로 계최될 예정”이라는 부분도 삭제했다. 노동절 집회 이외에 추모 집회 참가도 폭넓게 금지한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원천 봉쇄한 조처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안전행정부(안행부)가 보낸 ‘5·1 노동절 집회 관련 복무관리 철저 요청’ 공문을 이첩한 것이라며 “추모 집회가 아니라 노동절 집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교육부 관계자는 “추모 집회는 참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며, 추후 집회의 성격과 양상 등을 고려해 판단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경기도 김포교육지원청을 통해 공문 내용을 전달받은 한 공립학교 교사는 <한겨레신문>에 “슬퍼는 하되, 문제제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냐. 손발을 묶고 입도 조심하라는 압박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교육 활동 중에 학생과 교사들이 숨졌다. 추모 집회에서 교사의 품위를 손상시키거나 불법행위를 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집회 참석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76] 정치권[편집]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 세월호 참사와 관련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한 번 도와주소"라며 정부 비판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질 조짐이 보이자 홍보수석이 이 같은 문자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실종자 수색이 이어지고 있고 사고 원인 등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은 불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어서 논란이 불가피하다.[77] 유정복 당시 안전행정부 장관 2월 14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유정복 당시 안전행정부 장관은 '이전 정권에서는 해마다 10명 이상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지만, 지난해에는 50년 만에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고 한 당국자는 전했는데, 불과 사흘 만에 경주 마우나 오션 리조트가 붕괴되는 사고로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부산외대 학생 10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연이어 4월에는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유 장관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57] 국회의원 한기호(새누리당)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새누리당 한기호(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군)가 20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드디어 북한에서 선동의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좌파 단체와 좌파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이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입니다. 국가 안보 조직은 근원부터 발본 색출해서 제거하고, 민간 안보 그룹은 단호히 대응해 나가야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있다. 앞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8일 세월호 침몰 사건을 보도하면서 “남한의 한 방송사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실종자 가족들이 품었을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정부 당국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에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은 SNS 상에서 “세월호에 대한 대응 체계 붕괴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종북 프레임을 들고 나왔군요. 자식을 잃고 비탄에 빠진 학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네요”라고 지적했으며, 한 누리꾼도 SNS 상에서“구조를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건 사회 분열을 노리는 종북이거나 그러한 북한의 지령에 놀아나는 행위라는 게 새누리 국회의원(한기호)부터 온갖 수구보수들의 주장이로군. 대단한 병자들”이라고 꼬집었다. 파문이 확산되자 한 의원의 글은 페이스북에서 삭제됐지만, SNS 상에서는 이 글이 갈무리돼 전파되고 있다. 그러자 그는 페이스북에 “북한이 이번 참사 수습을 무능한 정부 탓이라고 비난한 것이 사실 아닌가요? 여기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데 문제가 있나요?”라는 글로 반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자 페이스북을 모두 비공개로 전환했다.[78] 가짜 실종자 대표(새정치민주연합)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았던 남성이 안산 지역구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6·4 지방선거에 나가려던 사람이란 것이 밝혀져 논란이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 후 자신을 아동센터를 운영하는 목사라고 소개한 송정근은 실종자 가족 대표로 활동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나란히 단상에 서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 탑승자 가운데 송정근의 가족은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실종자 가족들은 격앙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송정근은 “처음부터 정치적 이유는 없었다”고 해명했다.[79] 그러나 그가 실종자 가족이나 유족이 아님은 현지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일이고, 단원고등학교를 포함한 안산 지역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해온 그의 이력에 비춰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일부의 반론도 있다. 송정근은 목회자(목사)로서 가출청소년 상담 등을 해왔으며, 대통령과의 간담회 후 이 문제가 언론에 불거지기 전인 지난 18일 도의원 예비후보직을 사퇴했다. 인터넷 등에서는 새누리당 국회의원 등 여당 정치인들이 세월호 참사 와중 일으킨 논란을 덮으려는 '물 타기'라는 의심까지 나오기도 했다. 송정근은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자신이 이날 오후 탈당계를 제출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 변호했다.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게 된 경위에 대해 그는 "(진도에) 도착했을 때 여러 교회 목사님들과 학부모들이 있었는데 '누군가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분들이 '일단 맡아달라'고 요청해서 맡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80] 이윤석 전남도당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 사고 당일날 늦은 저녁, 이윤석 의원은 해경경비정을 타고 사고 해역을 다녀왔다가 '특혜' 논란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애를 태우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도 현장에 가고 싶어도 배편이 없어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이윤석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식 브리핑 등을 통해 "해경은 안전의 이유 때문에 밤중에는 학부모들을 원하는 대로 다 태울 수 없다는 방침을 갖고 2분만 태운 것으로 확인됐다"며 "어떤 국회의원이 그 밤중에 비 맞으면서 풍랑을 헤치고 특권을 가지고 5시간에 걸쳐 현장을 다녀오겠나, 특혜라는 것은 억울하다"고 밝혔다.[43] 국회의원 권은희(새누리당) 새누리당 권은희 의원은 지난 4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인의 글을 보고 퍼왔다"며" 세월호 실종자 가족 행세를 하며 정부를 욕하며 공무원들 뺨때리고 악을 쓰고 욕을 하며 선동하는 이들. 학부모 요청으로 실종자 명찰 이름표를 착용하자 잠적해버린 이들. 누구일까요? 뭘 노리고 이딴 짓을 하는 걸까요?" 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명찰 나눠주려고 하자 그거 못하게 막으려고 유가족인척 하면서 선동하는 여자"라면서 관련 동영상을 링크했다. 이어 "그런데 위의 동영상의 여자가 밀양송전탑 반대 시위에도 똑같이 있네요"라며 "세월호 탑승 희생자의 유가족인 동시에 송전탑 시위 관계자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라며 문제의 여성이 희생자 가족이 아닐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장에 혼란과 불신, 극한 대립을 일으키는 전문 선동꾼들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인지?"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는 이 와중에도 이를 이용하는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온라인에 도는 터무니없는 비방과 악의적인 루머도 잘 판단해야겠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한 때입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권은희 의원이 의심한 당사자들은 실제 '실종자 가족'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선동꾼이라고 지목한 밀양송전탑 권모 씨의 사진은 '덧씌운' 사진으로 밝혀졌다. 논란이 커지자 권은희 의원은 "자세히 못 살펴 죄송하다"며 글을 삭제했다. 선동꾼으로 매도된 권모 씨는 권은희 의원을 고발하겠다는 태도다. 권모 씨는 권은희 의원의 게시물과 관련 경찰에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로 알려졌다.[81] 5월 12일 대구 성서경찰서에 따르면 권 의원은 지난 10일 오후 경찰에 나와 수 시간 동안 페이스북에 해당 내용의 글을 올린 경위 등을 조사받았다.[82] 국회의원 이완영(새누리당)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지난 7월 1일 국회에서 진행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기관보고 모니터링 보고서를 통해 "과연 국회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를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며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은 다른 의원의 질의 시간에 장시간 조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완영 의원이) 국정조사 진행에 분통을 터뜨리는 유가족을 보고선 '경비는 뭐하나'라고 말해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완영 의원실 보좌관은 "세월호 국조 특위를 준비하면서 보좌진과 의원 모두 밤을 새다시피 했다"며 "질문을 빠뜨린 것도 아니고 다른 의원 질의할 때 잠깐 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적반하장 식의 해명을 했다. 또 이완영 의원의 '경비는 뭐하나'라는 조롱하는 듯한 태도에 대해서는 "소란스러워질 때마다 경비원들이 계속 제지를 하던 상황이었다"며 "그래서 너무 시끄러워지길래 경비는 뭐하느냐고 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었다"고 전했다.[83] 국회의원 조원진(새누리당) 조원진 새누리당 간사는 7월 2일 세월호 국정조사에서 야당과의 다툼을 말리는 유가족에게 "당신들은 누구야"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어라"고 언성을 높인 것으로 알려졌다.[84] 또 그는 세월호 사고를 조류인플루엔자(AI)에 비유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조 의원은 7월 11일의 회의에서 청와대가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 주장에 반발하면서 “AI와 산불 등 재난에 대통령이 ‘수습’을 지시했다고 컨트롤타워로 볼 수는 없지 않으냐”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방청석의 일부 유족들은 “어떻게 닭과 비교하느냐” “희생자가 닭이에요”라며 강력 반발했다. 심재철위원장은 고성을 지른 유가족에게 “함부로 회의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후 방청석에서 항의성 발언이 나오자 결국 유족 1명이 퇴장 조치됐다. 나머지 가족들까지 회의장을 박차고 나서자 심 위원장은 퇴장조치를 취소한 뒤 정회를 선언했다. 국조특위 야당 의원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심재철 위원장과 조원진 간사는 사과하고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심 위원장도 회견을 열어 “퇴장시킨 가족은 하루라도 소리를 안 지른 날이 없다. 참고 참다가 오전에 ‘더 그러시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를 했다”고 말했다. 조 의원은 “국가 재난의 여러 예를 들었는데 유가족분들 마음이 많이 상하셨다면 정말로 사과를 드린다”고 밝혔다.[85] 전 국회의원 송영선 송영선 전 국회의원은 "이번 기회가 너무나 큰 불행이지만 우리를 재정비할 수 있는, 국민의식부터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꼭 불행인 것만은 아니다"며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발언해 질타를 받고 있다. 그러자 송영선 전 의원은 4월 23일 채널 A와의 전화통화에서 "제 말에 의해 상처를 받으신 분, 털끝만큼이라도 상처받으신 분이 계시다면, 용서하십시오. 너무 죄송합니다"라고 공식 사과했다.[86] 국회의원 정몽준의 아들 새누리당 정몽준 국회의원의 막내아들이 세월호 실종자 가족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고 있다. 그는 사고 이틀 후인 4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대통령에 소리 지르고 욕하고 국무총리에 물세례.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라는 글을 올렸다. 이는 지난 17일 일부 실종자 가족이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한 정홍원 국무총리에게 생수병을 던진 것에 대한 글이다. 이에 대해 비난여론이 일자 정몽준 의원은 2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라고 말했다.[87] 사죄 드립니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짓에 아버지로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희 아이도 반성하고 근신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2014. 4. 21. 정 몽 준 올림[88] 진중권 교수는 트위터를 통해, 이 논란에 참여했다. 그는 "그가(정몽준 의원의 아들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사람들이 울부짖는 세계가 이상(미개)하게 느껴졌을 것이라며, 이를 몇 천 억을 가진 이들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초현실이자, 비현실로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비교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치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게 미개한 정서라면 이 사회에서 문명인은 오직 하나 사이코패스 뿐"라고도 결론 내렸다.[89] 한편, 세월호 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은 이런 발언을 한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아들을 경찰에 고소했다.[90] 보수논객 지만원 인터넷 사이트 시스템클럽을 운영하는 대한민국의 보수논객 지만원은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시체 장사"로 지칭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 2의 5·18 폭동을 대비하라"고 말했다.[91] 일베저장소[편집] 일베저장소(일간베스트저장소)의 일부 누리꾼들이 세월호 실종자 및 희생자 가족들을 '유족충(蟲)'이라고 부르며, 적나라하게 모욕해 논란이 있다. 이에 경찰청은 해당 게시글 작성자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고 19일 밝혔다.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16일 이후, 일베저장소 게시판에는 피해자 가족을 조롱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사고 지역이 전라남도이고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전라도 출신이라면서, 노골적인 지역차별 정서를 부추기는 내용이 많다. 또 피해자 가족을 '(진도) 유족충'이라고 조롱하며, 비속어를 섞어 비아냥대는 글도 상당수다. 수학여행 도중 희생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신을 조롱거리로 삼는 글도 있다. 경찰은 이들 게시글 가운데 일부를 삭제하고 IP를 확보해서 작성자를 추적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근거 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행위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해 검거할 것"이라고 밝혔다.[92] 이 방침에 따라, 피해 여학생과 여교사를 대상으로 성적 모욕성 게시물을 올린 A(28)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A는 경찰에서 자신의 행위의 이유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주목받기 위해 게시물을 작성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93] 그런데, 이 와중에 "일베저장소 일동"이란 이름의 근조화환을 한 일베회원이 보내기도 하여 누리꾼들 사이에 진정성 논란이 일었으며,[94] 또한 이들은 노란 리본을 "일베"의 자음인 ㅇㅂ 모양으로 바꾸거나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등의 사진으로 바꾸어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95] 사고가 일어난 달인 4월 말 서울 경신고교 1학년 중간고사 국어 시험에서는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인터넷 댓글 반응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찾으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이 문제의 5개 보기 중 오답인 4가지는 모두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예시였다. '전라도 홍어들이 고향 용궁으로 돌아가겠다는데 왜 막냐…' '간만에 전라도에서 흐뭇한 소식이네… 염전 조심해라? 점심 신나게 홍어탕 먹어야지' '아무리 대한민국서 제일 가깝고 가기 쉬운 해외라 해도 전라국으로 여행가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선박 사고와 전라도 섬노예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등이 오답 보기로 나왔다.[96] 출제 교사는 '전혀 다른 의도는 없이 아이들에게 와닿도록 최근의 예문을 출제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문제를 내게 됐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97] 전라도 지방의 비하, 특히 홍어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일베저장소에서 주로 쓰는 방식이라 알려져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는 희생자들을 인터넷 게시판에서 성적으로 모욕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정모씨를 구속기소했다고 6월 5일 밝혔다. 평소 일베에 익명으로 글을 자주 남기던 정씨는 서울 금천구의 고시원에 앉아 글을 쓴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정씨가 일베 회원들의 관심을 끌고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을 써가며 글을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98] 언론[편집] JTBC 기자가 구조된 학생과 인터뷰 도중 학우의 사망을 알리는 부적절한 질문을 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JTBC 측에서 해당 기자를 대신해, 9시 뉴스 앵커 손석희가 깊이 사죄드린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99] 또한 SBS 기자가 뉴스를 보도하던 중 기자들의 웃는 모습이 등장했던 방송사고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SBS는 20일 오후 뉴스 공식 트위터를 통해 "세월호 승선자 가족들과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100][101] MBN 뉴스특보 프로그램(4월 18일 오전 6시)에서는 민간 잠수사라고 자칭하는 홍가혜가 인터뷰를 통해 정부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하고 있으며, 바다 속에서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은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양경찰청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한 사실이 없고 이날도 70여명이 동참하고 있었다고 해명하였고, 한국구조연합회 회장인 배우 정동남은 "해경이 민간잠수부 활동을 막는다는 허무맹랑한 소문들을 퍼뜨리는데 그것은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02] 스포츠월드 김용호 기자가 자신의 트위터에 홍가혜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글을 올린 것이 알려지고,[103] 홍가혜의 인터뷰 내용이 사실 왜곡 논란과 구조 현장에서의 혼선을 일으키자 MBN 보도국장 이동원은 직접 방송에 출연하여 공식 사과하였다.[104], 전남지방경찰청은 4월 19일 잠적한 홍가혜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영장을 신청하였고 21일 그녀를 검거하였다.[105][106][107][108] 그러나 재판부는 홍가혜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홍씨의 카카오스토리 내용과 방송 인터뷰는 구조작업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취지로 구조작업의 실체적 모습을 알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며 "허위사실이라고 인식하기 어렵고, 해경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보기에도 어렵다"고 판시했고, 이어 "판결이 피고인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라고 밝혔다.[109] 문화일보와 내일신문은 침몰사고 초기에 '477명 탄 여객선 침몰... 대형 참사 날 뻔했다'란 기사제목으로 사고 초기에 오보하여 관련 학부모들과 학교관계자 및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초기 대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74] 연합뉴스는 24일자 '물살 거세지기 전에... 사상 최대 규모 수색총력'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9일째인 24일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바다 위와 수중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 작업을 벌였다.", "해군과 해군구조대, 소방 잠수요원, 민간 잠수사, 문화재청 해저발굴단 등 구조대원 726명이 동원됐고 함정 261척, 항공기 35대 등의 장비가 집중 투입됐다"고 보도했다. <광굦나널실 제 현장에서는 연합뉴스 멘트대로의 구조 장비와 인원이 전혀 투입된 바가 없었다. 함정 261척은 고사하고 잠수사 조차 겨우 2명이 투입되었다. 청해진 해운과 해경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업체인 언딘의 잠수사 외에는 모든 자원봉사 잠수사는 불허상태이며, 언딘의 소속 잠수사는 겨우 10여명 내외로 밝혀졌다. 그 밖에 대한민국 언론의 속보 경쟁 폐단과 실종자 가족 취재의 보도 윤리 문제에도 논란이 있으며, 세월호 침몰 사고를 계기로 한국 저널리즘을 성찰해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10] 사고 현장에서 언론은 실종자 가족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도 했다. 불신은 심지어 기자들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몇몇 기자들은 수첩을 뺏기고 멱살을 잡혔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세월호 침몰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온 외신에 대해서 비교적으로 호의적으로 대했다.[111][112] 또, 사고 초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 과도한 취재 또한 논란이 되었고, 이는 4월 24일 단원고 3학년 학생이 기자들에게 쓴 글이 발표되면서 이에 대한 논란과 반성 또한 급부상하였다.[113] 한편, NBC는 4월 24일 로이터 통신의 기사를 받아 ‘한국 여객선 선원: 침몰하는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South Korea Ferry Crew: We Were Ordered to Abandon Sinking Ship)’고 보도했다. NBC는 “신원 불명의 이 선원은 법원에서 유치장으로 돌아가면서 기자들과 잠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수술용 마스크와 야구 모자, 그리고 상의의 후드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승객들이 갇혀 있는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발언을 하였으며 이 발언의 진위 여부에 관심이 일고 있다.[114] 그러나 이러한 선원의 발언만으로는 그같은 명령이 (선장인지 아니면 회사측인지)누구로부터 내려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보도에 대해 ‘뉴스프로’는 기자의 칼럼을 통해 “의문점은 선원들은 모두 선원복을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따로 접근한 해경 구조선에 갈아 탔다는 것이다. 해군 경비정은 세월호가 침몰할 경우 빨려들어갈 위험 때문에 세월호 멀리서 구명보트를 보내기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선장과 선원들을 특별히 구조하기 위해 세월호에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115][116] 청와대의 징계[편집] 이른바 '서남수 교육부 장관 라면 사건'을 보도한 것과 관련,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8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비보도 전제’(오프 더 레코드) 발언을 보도한 <한겨레신문>에 ‘청와대 춘추관(기자실) 출입정지 28일(4주)’의 징계를 결정했다. 기자단은 또 민 대변인의 발언을 보도한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에 출입정지 63일(9주), <한국일보>에 출입정지 18일(3주)을 결정해 각 언론사에 통보했다. 징계를 받게 되면, 해당 언론사 기자는 그 기간에 청와대가 제공하는 보도자료 등 일체의 자료를 받을 수 없게 된다.[117] 한국방송공사[편집] KBS는 국가재난주관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며 속보경쟁에 나서 오보를 내는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현장을 방문했을 때 실종자 가족들의 항의 대신 박수를 치는 장면만 편집해 내보내는 등 현장의 목소리를 왜곡해 유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118] 앵커들 "검은 옷 입지 말라"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는 30일 성명을 통해 “보도국 책임자라는 자가 검을 옷을 입고 진행을 한 앵커를 나무라며 뉴스 진행자들은 검은 옷을 입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희생자 가족들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청와대와 대통령만 바라보는 철저히 권력지향적인 보도 행태는 이번 사건에 대한 공감 능력의 결여와 맞닿아 있다”고 비판했다. 이 간부는 김시곤 보도국장인 것으로 알려졌다.[119]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는 김 국장이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4월 말께, 부서 회식 자리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이 노조 측 주장이다. 이에 대해 김 국장은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세월호 사건을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치부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인데, 그렇다면 내가 사고 현장에 기자를 100여 명 보내며 밤새워 보도할 이유가 있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세월호 사고 사망자수와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비교해 발언한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부적절한 비유 아니냐'는 지적에 김 국장은 "평소 교통사고 안전 사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지만 부지불식간에 매해 세월호 이상의 참사를 겪고 있다는 뜻"이라며 "기자들에게 안전사고에 대한 인식을 재확인시키는 차원에서 한 발언"이라고 일축했다.[120] 이에 대해 김 국장은 KBS 새노조가 "KBS 및 KBS 간부에 대해 일방적 주장을 제기하며 명예를 훼손했다"고 비판하며, 새노조를 향해 "정파적·미시적 관점 벗어나 합리적으로 언론사 제도 개선 운동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카메라 취재를 하면서 현장음이 잘 안 담길 수도 있다"며 "의도해서 편집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며, "KBS 보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른 언론사 못지않게 목표를 높게 잡고 노력해나간다"며 "진도 등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많은 취재진들이 고생하고 있다"고 전했다.[121] 문화방송[편집] 조급증이 잠수사 죽음 불렀다는 주장 MBC 뉴스데스크는 5월 7일 '함께 생각해봅시다'라는 데스크 리포트에서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란 제목으로 세월호 사고 해상에서 수색작업을 하다 숨진 이광욱 잠수부에 대해 조급증에 걸린 우리사회가 그를 떠민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라며 우리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조를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리포트를 한 박상후 MBC 전국부장은 해당 리포트에서 "실제로 지난달 24일 일부 실종자 가족들은 해양수산부 장관과 해양경찰청장 등을 불러 작업이 더디다며 압박했다"며 "논란이 된 다이빙 벨 투입도 이 때 결정됐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조급증이 빚어낸 해프닝"이라고 말했다.[122] 전국언론노조 MBC 본부는 “잠수사 사망 사고는 발생해선 안 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며 “하지만 언론이 죽음의 원인을 짚어보는 것과 죽음을 소재 삼아 특정한 결론을 내리거나 확대 해석, 왜곡하는 일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밝혔다. 실제 사고 당일인 6일 MBC와 달리 KBS와 SBS는 잠수사 의료ㆍ안전 지원이 매우 열악하고 바지선 전문 의료진도 없었다는 등의 내용을 보도했다.[123] 김장겸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 <한겨레신문>은 김장겸 MBC 보도국장이 4월 25일 오전 편집회의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보고를 받던 도중, 유가족들을 향해 “완전 깡패네, 유족 맞아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이 같은 발언은 박상후 전국부장이 ‘유가족들이 해양수산부 장관, 해양경찰청장과 가족들의 대화 현장을 보고받은 뒤 나온 답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겨레>는 김장겸 보도국장이 같은 날 팽목항 상황에 대해 “누가 글을 올린 것처럼 국민 수준이 그 정도”라며 “(정부 관계자)의 무전기를 빼앗아 물에 뛰어들라고 할 수준이면 국민 수준이 아프리카 수준”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달 21일 ‘국민 수준이 미개하다’는 내용의 페이스북 글을 올린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 아들의 발언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는 당시 편집회의에 참석했던 복수의 MBC 관계자에게 사실 확인을 거쳤다고 밝혔다.[124] 하지만 MBC 정책홍보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김장겸 보도국장은 그런 발언이 한 적이 없다며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보도에 대해) 법적대응을 할 것”이라며 “<한겨레>에서 문의가 들어왔을 때도 ‘사실무근’이라고 이미 전달했다”고 밝혔다.[125] '전원구조'가 사실이 아님을 묵살 한승현 목포 MBC 보도부장은 사고 당일 오전 박상후 전국부장한테 '전원구조'가 사실이 아님을 알렸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목포 MBC 김선태 보도국장은 “진도 부근 어업지도선 쪽 어민에게 전화가 왔고, 마침 해경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침몰사고 해역으로 해경들이 많이 갔다고 들었고 구조에 나선 사람들과 직접 통화를 했다. (전원구조가 아닌 것 같아)현장기자들에게 ‘전원구조’가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고 그날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보도부장에게도 (전국부에)직접 이야기하라고 했고, 했지만 전국부에서 ‘알았다’고 하고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우리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제보해준 어민과 직접 연락하게 해줄테니 어민의 전화번호를 서울 MBC에 주도록 보도부장에게 지시했고, 보도부장이 전국부에 이야기했지만 그 뒤로도 소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목포 MBC 보도국에 따르면 이들은 보도국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3차례, 취재기자가 2차례 등 최소 5차례 이상 전국부에 ‘전원구조’가 오보일 가능성을 보고했다. 하지만 결국 MBC도 ‘전원구조’라는 자막을 띄워 오보 대열에 동참했다. 김 국장은 목포MBC의 보고에 대한 전국부의 대처에 대해 “100% 묵살”이라고 했다. 김 국장은 “어떤 한 사람이라도 우리에게 다시 ‘사실이냐’고 확인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MBC 지역 기자들이 모인 전국MBC기자회는 앞서 13일 성명에서 “ MBC의 오보는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기사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낸 ‘미필적 고의에 의한 명백한 오보’”라고 비판했다.[126] SBS[편집] 세월호 관련 심층 보도 제작 중단 지시 5월 31일 방영을 목표로 준비 중이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 참사’ 관련 방송이 제작본부장의 지시로 제작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논란은 지난 9일 장광호 제작본부장이 세월호 아이템을 승인한 지 하루 만에 말을 바꿔 제작 중단을 지시하면서 촉발됐다.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진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KBS와 청와대 항의방문을 취재한 다음 날이었다. 장 본부장은 ‘6·4 지방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라는 이유와 <그것이 알고 싶다>의 특성상 새로운 내용을 확보하지 않으면 방송이 어렵다며 제작 중단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SBS 내부에선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본부장이 ‘세월호 사고 방송’ 아이템을 승인하고 이를 다시 번복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외부 압력이 작용한 게 아닌지 의구심도 나온다.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 정부의 전방위적인 보도통제 의혹이 꾸준히 제기된 데다가 KBS 내부에선 청와대가 ‘해경 비판을 삼가라’ 했다는 폭로까지 나온 뒤라 이런 의혹은 더해지고 있다.[127]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편집] 세월호 가족대책위 유가족 5명이 2014년 9월 17일 오전 0시 40분께 영등포구 여의도 거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과 함께 있다가 대리기사, 행인 2명과 시비가 붙어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당초 유가족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했다가 조사 도중 혐의가 충분히 입증됐다고 판단, 전원을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다.[128] 2014년 9월 19일 출석한 유가족들은 묵비권 행사를 하지 않았지만 일부 수사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행을 목격하고 이를 말리려 한 시민 2명은 정당방위로 면책될 것으로 보인다.[129] 김병권 위원장과 김형기 수석부위원장, 유경근 대변인 등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 대책위원회 집행부 9명은 2014년 9월 17일 대리기사 폭행 사건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였다.[130] 2014년 9월 21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신임 위원장에 전명선 전 진상규명분과 부위원장이 선출되었다.[131] 하지만 CCTV원본에서는 대리기사는 싸움에서 뒤로 빠져있었던 상황이였고 목격자와 함께 다수의 행인이 유가족과 싸움을 하는 장면[132]만 있는 상황이였고, 유가족은 이가 부러지고 깁스를 착용까지할 정도로 부상이 심했으나 대리기사는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걸로 인해 실제로 대리기사를 폭행한게 아니라 대리기사가 지나가는 행인을 부추여서 폭행을 주도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루머[편집] 사고 발생 시점과 관련해 KBS의 아침 정규 방송인 '굿모닝 대한민국 생방송' 중, 7시 20분에 자막으로 세월호 침몰 관련 자막이 나왔고, KBS가 재방송에서 이 자막을 삭제했다는 루머가 SNS를 통해 알려졌으나, 이는 방송 중 영화 소개장면에서 21:9 와이드 화면을 위아래로 길게 늘리기 위한 일반적인 편집중 생긴 확대이며 자막은 없었다.[133] 또한 인터넷에서 KBS가 4월 16일 8시 59분에 자사의 트위터 계정으로 오전 7시 20분부터 구조작업이 시작되었다는 트윗을 발송함으로써, 적어도 7시 20분 이전에 사고가 일어난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으나 이는 트위터의 시간이 트위터 서버의 시간이 미국시간으로 올라와서 생긴 문제로서 사고 당일에 올라온 트윗은 아니다.[134] 일부 누리꾼들은 정부가 서울시 공무원 간첩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사과문 발표가 난 가운데 갑자기 사건이 발생한 것이 의심스럽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종편방송 언론사 채널A는 이런 의심을 '엉뚱한 음모론'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35] 한편 정재학 편집의원은 16일 데일리저널에 올린 '세월호 침몰이 이상하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세월호가 침몰한 해역이 암초가 없었으며, 당시 가시거리가 나쁘지 않고, 물결도 잔잔했으며, 세월호가 상시 운항하던 곳이라" 다른 선박과 부딪혀 침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또한, "그래서 어떤 배와 부딪혔는지 의문"이 생긴다며, 암초도 아니고 충돌선박에 대한 선장의 보고도 없었으므로, 그 충격은 북한의 소행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136] 이와 같이 일부 언론들이 제기하는 북한 소행설에 대하여, 정부는 '수사 중'이라고만 짧게 대답했다.[137]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침몰된 배 안에 생존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퍼졌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세월호 생존자가 보낸 것으로 추정된 메시지가 허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서 논란이 있다.[138][139] 경찰청 사이버테러 대응센터는 17일 "실종자 전체의 휴대전화 번호를 확보해 침몰 사고 이후인 16일 정오부터 이날 오전 10시까지 이용 내역을 확인한 결과 모두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최초 유포자를 추적해 사법처리할 것이라 밝혔다.[140][141] 기타 논란[편집] 사고의 공식 명칭 이 사고를 처음에는 '진도앞바다 여객선 침몰 사고'로 부르다가 '세월호 침몰 사고'로 바꾸었으나, 사고의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선사의 이름을 포함하여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불러야 한다는 논란이 있다. 사고 발생 시간 실제 배에 문제가 생긴 시점과는 별개로 나중에 침몰과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사고가 외부에 인지된 시점에 대하여는 여러 논란이 있다. 공식적으로 세월호 침몰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32초 (KST),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 전화가 걸려옴으로써 알려졌다. 하지만 세월호가 최초 신고 40여 분전 이미 해경과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정황을 담은 교육청의 내부 일지가 발견되어 오전 8시 10분에 이미 사고를 교육청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142] YTN의 보도 영상에는 사고 일시가 4월 16일 08:00 경으로 기록된 사고 개요 보고서가 안행부에 보고된 화면이 포함되어 있다.[143]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의 신문광고 <문화일보> 7월 28일자 31면 하단에 실린 의견광고를 보면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전합니다”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하지만 이 광고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세월호 특별법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문화일보 광고국은 경향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해당 광고를 의뢰한 곳은 ‘어버이연합’”이라며 “문화일보는 광고를 받은 그대로 게재했을 뿐 광고에 대한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당 광고엔 ‘우리 국민들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월호 특별법안의 주요 골자’라며 ‘사망자 전원 의사자 처리, 공무원 시험 가산점 부여, 단원고 피해학생 전원 대입특례전형 및 수업료 경감, 사망자 형제자매 대입특례전형 및 수업료 경감, 유가족을 위한 주기적 정신적 치료 평생 지원, 유가족 생활안정 평생 지원, 기타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근로자 치유 휴직,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 금융거래 관련 협조 요청’ 등 17개 항목이 실려 있다. 또 이 광고는 말미에 “세월호 특별법입니까? 평생 노후보장 특별법입니까?”라고 묻는다. 한정애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은 7월 29일 오전 긴급브리핑을 열어 “어제 <문화일보>에 세월호 특별법이 ‘평생노후보장 특별법’이라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출처불명의 흑색선전 광고가 실렸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일”이라며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온라인상으로 허위사실이 유포되는 것뿐만 아니라 지하철 등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단지가 대량으로 살포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한 대변인은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며 “전단지의 내용이 새누리당이 ‘대외비’라며 의도적으로 유포시킨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승리만 하면 된다는 것인가”라며 배후로 새누리당을 지목했다. 새정치연합이 문제삼은 전단지는 최근 ‘일베저장소’ 등에 올라온 것이기도 하다. 일베에 게재된 전단지에는 “세월호 특별법입니까? 평생 노후보장 특별법입니까”라는, <문화일보>에 실렸던 제목과 동일한 제목이 빨간 글씨로 적혀 있기도 하다. 한 일베 회원은 지난 22일 문제의 전단지 전문을 게재한 뒤,“어버이연합에서 제작할 세월호 관련 전단지”라면서 “21일 프린터로 소량 인쇄를 해서 광화문 KT 앞에서 배포를 했지만 22일 대량 인쇄 주문 들어간다”고 밝히기도 했다.[144] 부적절한 홍보 코오롱스포츠는 할인 행사 문의로 세월호 침몰 사고를 당한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며 "더 늦기 전에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 논란이 있다. 이에 코오롱스포츠 측은 트위터에 해당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145][146] 종교계(목사)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는 지난 4월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가주(캘리포니아) 사랑의 교회 세미나에서 '국민정서 미개' 글로 물의를 일으킨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의 아들을 두둔하며 "정몽준씨 아들이 미개하다고 그랬잖아요. 그건 사실 잘못된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거든요"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광작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부회장은 지난 5월 20일 한기총 긴급임원회의에서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될 일이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가족들은 "희생당한 학생을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고 적시한 것은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일 뿐 아니라, 죽은 학생들의 부모에 대해서도 명예훼손 또는 모욕적 표현에 해당한다"며 이들을 고소하였다.[147] 해병대 전우회 4월 19일에 진도에 도착한 광주·전남 해병대 전우회측은 민간 잠수단체인 한국수중환경협회가 바다 구조를 나가 천막을 비워둔 사이에 그 천막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그 협회가 달아놓았던 협회의 현수막을 완전히 가리면서 '해병대 특수구조대 지휘본부'라는 자신들의 현수막을 동의도 없이 달아놓았다.[148] 한국수중환경협회는 사고 발생 직후 일찌감치 도착해 성실히 구조 활동을 하던 단체였고, 그 날도 회원 한 명이 구조 활동을 하다가 눈 부상까지 당했던 상황이었다.[149] 항의를 받은 뒤 협상 끝에 현수막을 위 아래로 나란히 거는 것으로 일단락 됐으나, 현장 자원봉사자들이 이런 자초지종을 트위터에 올려 해당 해병전우회원들이 누리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148] 길환영 사장의 사고 현장 기념촬영 한국방송공사 노조 특보에 따르면, 길 사장은 사고 직후인 4월 19일 침몰지점 200m 앞에서 생방송 중이던 KBS 페리 선박을 10여명의 수행단과 함께 찾았다. 여기서 길 사장은 “이왕 온 김에 모두 사진 한 번 찍자”라고 말했고, 사장 지시에 따라 휴식 중이던 방송요원들 15명이 불려나와 사진을 찍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길 사장은 이후에도 “다른 스탭들도 다 오라고 하지”라며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 30여명과 모여 한 차례 더 사진을 찍었다. 해당 사진은 사장 전속 사진사가 현장에 동행하지 않아 국장급 인사가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KBS 노조는 “관광지 등에서 흔히 단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그대로였다”며 “그들이 페리 선상에서 두 차례 촬영 포즈를 취하는 바로 앞 200미터 전방에서는 꽃다운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죄 없는 300여명이 침몰한 세월호 속에 갇혀 생사를 넘나들고 있고 그 주변에는 어떻게든 선내에 진입하기 위한 잠수부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직원 격려 차원이었다는 사측의 해명에 대해서는 “버젓이 단체사진을 찍어댄 행위가 직원 격려라는 황당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라며 “최소한의 철학도 갖추지 못한 상식 이하의 행위이자 생사를 넘나들던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한, 반인륜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특히 노조는 기념사진 촬영 다음날 행정안전부 국장이 사고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가 직위해제되는 등 논란이 일고 노조가 취재에 들어가자, 사측이 입단속을 시키고 사진을 삭제하는 등 증거인멸에 나섰다고 주장했다.[150] 분향하다 쫒겨난 KBS 간부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한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KBS 간부들이 8일 오후 경기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가 유가족들로부터 뺨을 맞는 등 격한 항의를 받았다.[151] 이에 KBS 측은 9일 새벽,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조문 갔던 보도본부 간부들이 폭행·억류당했습니다'라는 제목의 공식입장을 전했다. 이들은 폭행과 장시간 억류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라고 밝혔다.[152] 정부 관계자와 언론의 부적절한 남도국악원 숙소 점거 국립남도국악원 숙소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쓰자고 건의했지만 거절한 사실이 확인됐다. 해당 숙소는 KBS, KTV, 정부 부처 관계자가 사용했다.국립남도국악원 시설담당 관계자는 9일 "전남 진도 관내에서 한국전력과 경찰서 관계자 등이 모여 지난달 19일 기관단체장 회의를 했다"며 "당시 숙소 관련 시설이 부족하다는 얘기에 원장이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진도 팽목항에서 차로 40분 거리(약 23km)에 있는 진도체육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남도국악원은 차로 20분 거리(약 10km)에 위치해 있으며 50여명 수용 가능한 A동은 공사 중이지만, 6인실과 8인실 등 총 15개실이 있는 B동에는 9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남도국악원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전남도청, 해양수산부, 교육부 직원들이 진도 관내 숙소가 없다며 숙소를 이용했다. 또 KBS와 KTV 관계자도 해당 숙소를 이용했다. 이들은 지난 2일까지 남도국악원을 숙소로 사용했으며 하루 동안 제일 많이 이용한 규모는 80여명으로 전해졌다. 국악원은 지난 2일 진도 관내 다른 숙박업소 이용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정부 부처 관계자들의 숙소 이용을 금지했다. [153] 해군 참모 총장의 첨단 구조함 통영함 투입 명령 묵살 의혹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잠수사들의 처우 실종자 수색을 강행하고 있는 잠수사들이 식사도, 숙소도 형편 없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세월호 선미 쪽 수색을 맡았던 민간 잠수사들을 통해 입수한 최근 식사 모습 사진 중 반찬을 보면 단무지와 무침, 그리고 김치 뿐이었고, 그마저 식었다고 잠수사는 전한다. 심지어 밥을 나르던 중에 바닷물까지 섞인 적도 있다고 전해졌다. 취침 공간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전기 장판이 없어 찬 바닥에서 잠을 잤고, 낮에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곳은 햇볕 아래 뿐이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기 장판을 구해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고 한다.[154] 새정치민주연합 김현미 의원은 6월 16일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구조작업하는 잠수사에게 두 달 간 임금이 단 한 푼도 지급되지 않았다"며 잠수사 처우 개선을 정부에 촉구했다. 김 의원은 "잠수사에 대한 임금 산정 기준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면서 "식대조차 지급되지 않아서 이들이 속한 언딘(민간 잠수업체)이란 회사에서 대신 식대를 지급하거나 유가족이 식대를 지급하는 일도 있다"고 주장했다.[155] 논란이 불거진 다음 날인 6월 17일 정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민간 잠수사에게 지급할 수난구호비용 지급방안을 심의 의결했다. 잠수사 수난구호비용은 위험한 환경에서 장기간 작업을 고려해 세금을 포함 1일 98만원으로 책정됐으며 해양경찰청 자체 예산으로 즉시 지급할 방침이다.[156] 각주[편집] ↑ 류정화 (2014년 4월 18일). “최첨단 수상구조함 '통영함', 구조에 투입 못 해 논란”. JTBC. 2014년 4월 18일에 확인함.  ↑ “<세월호참사> 미국 원격조종 무인잠수정, 효과는?”. 연합뉴스. 2014년 4월 21일. 2014년 4월 21일에 확인함.  ↑ 통영함 투입 지시·각서까지 썼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끝내 투입 안해 미스터리 - 국민일보, 2014-05-12 ↑ Monica Mark. Nigerian sailor 'a phenomenon' for surviving in air pocket for 60 hours. The Guardian. 12 June 2013. ↑ 손석희. “이종인 "공기 주입, 생존자 있을 만한 곳에 해야..조타실은 의문"세월호 사고원인 '변침' 잠정결론 ... 시간대별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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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논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논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논란은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언론의 취재 등과 발표를 근거로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한 각종 논란을 정리하였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였고 이 사고에 대해 청해진해운과 세월호 운행 승무원, 한국해운조합, 한국선급 등 선박 관련 기관들, 그리고 대한민국 행정부가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또한 이 사고와 관련해 유명인사나 정치인 등의 막말 논란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사상자가 많이 늘어난 데에는 최초 침몰 징후 후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초기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승객들 몰래 탈출한 선장 이준석과 승무원들의 책임이 대두되고 있으며, 배를 무리하게 운행한 청해진 해운 역시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또한 해수부 마피아로 불리는, 해운계의 정경유착 역시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해경의 뒤늦은 대처 역시 책임론이 있다. 지나가는사람:저는 이글을보고있는사람입니다. 언니 오빠들 명복을 빕니다 .ㅜ 목차 1 구조장비 투입 지연 논란 1.1 통영함 1.2 다이빙벨 2 구조 방법 2.1 첫 시신 발견 3 대한민국 정부 3.1 수 많은 대책본부 3.2 인원집계 3.3 해양경찰청 3.4 잇따른 탑승자 수 혼선 3.5 해수부 마피아 4 교육당국 5 정치권 6 일베저장소 7 언론 7.1 청와대의 징계 7.2 한국방송공사 7.3 문화방송 7.4 SBS 8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 9 루머 10 기타 논란 11 각주 구조장비 투입 지연 논란[편집] 통영함[편집] 최첨단 수상구조함인 통영함은 천안함 사건 이후 겪었던 어려움을 교훈으로 삼아 대한민국 정부가 자체 기술로 만든 3,500t급 최첨단 수상구조함이다. 2012년 9월 4일에 진수된 통영함은 실링 로보틱스 HD ROV로 최대 수중 3,000m까지 탐사할 수 있고 해난구조대(SSU)가 수심 90m에서 구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도 갖추었다. 통영함은 세월호 사고처럼 선체 진입이 어렵고 6,800t의 무게 때문에 크레인 인양작업에도 난항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꼭 필요하다. 그런데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통영함 일부 장비, 음파탐지장비·수중로봇장비가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이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함정을 진수한 지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해군이 장비 점검도 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1] 논란 끝에, 4월 20일 밤에 조종사인 미국 해군 2명과 실링 로보틱스 HD ROV 2대가 현장에 투입되었다.[2] 해군본부는 사고 당일인 4월 16일 황기철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통영함을 세월호 총력 구조 작전에 지원하라는 지시를 두 차례 보냈다. 수신자는 해군작전사령관, 해군 제5전단장, 통영함장 등이다. 지원 일시는 사고 당일 낮 12시부터 ‘별도 협의시까지’로 돼 있다. 이에 따라 같은 날 해군과 방위사업청, 통영함을 보관 중인 대우조선해양은 ‘청해진함, 통영함 진도근해 좌초선박 구조 참가에 관한 합의각서’를 작성하고 공동 서명했다. 각서에는 황 총장을 대신해 해군 기획관리참모부 최양선 준장이 서명했다. 방위사업청, 대우조선해양도 각각 청장과 대표를 대리해 실무 담당자들이 서명했다. 하지만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사고 이틀 후인 4월 18일 “통영함에 탑재돼 시운전 중인 음파탐지기, 수중로봇 장비 등 구조 관련 장비들이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 측에서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었다. 이에 김광진 의원은 “민간 잠수사와 어선까지 총동원된 참사 현장에 1600억여원을 쏟아 부은 통영함은 가지 못했다”며 “해군참모총장이 두 차례나 긴급지원 지시를 내렸음에도 통영함이 투입되지 않은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해군 측은 “곧바로 투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라며 “예비조치로서 통영함을 준비시켜 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3] 다이빙벨[편집] 다이빙 벨(잠수종)은 수중 작업을 위해 잠수부를 바다 속으로 이동시키는 장치로, 해난 구조 등에 이용된다.[4] 해난구조 및 선박인양 전문가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이 기술을 세월호 침몰 사건에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대표는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유속과 시계로 크게 나눈 뒤, 시계보다는 유속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잠수종은 선체 옆에 붙어 있는 출입구까지 일종의 엘레베이터를 설치하는 것과 같아 이를 통해 다이버가 이동을 하면, 유속이 세도 출입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잠수종의 기본적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이대표에 따르면 알파잠수기술공사는 2000년도에 잠수종을 제작을 하여 이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다이버는 감압을 위해 상당 시간을 물속에서 보내야 하는데, 잠수종은 공기 공간이므로 다이버가 춥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경우엔, 조류를 피할 수 있는 어떤 피난처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파잠수기술공사 측에 그러한 기술이 있고, 수심 100m까지 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다이빙계와 군에도 알려져 있음에도, 잠수종이 세월호 침몰 사고 구조에는 채택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이대표는 잠수종 시스템을 이용한 지속적인 작업이 하루에 20시간이 지속 된다면 2, 3일이면 3층·4층·화물칸의 수색이 모두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대표는 지금 구조작업 체계에서는 정부 측에서 책임을 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이미 주도가 진행되고 있는 어떤 체계에서는 민간작업자가 끼는 것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구조작업에 대한 전제적인 지휘를 자신에게 넘겨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가능한 것은 단지 인력·장비·안전을 보조하는 것뿐이고, 주수색작업을 위해서 계급이 배제된 실질적인 능력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6] 하지만 황대식 한국해양구조협회 본부장은 다이빙벨 투입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유속에 상관없이 엘리베이터 형식으로 내려갈 수 있어 20시간 동안 작업이 가능하다는 게) 그럴 수 있지만 이쪽의 조류가 워낙 세고 탁도가 높기 때문에 부피가 큰 다이빙벨을 선체 내부에 넣지는 못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다이버에 의한 수색 구조 방법을 사용을 하면서 그 다이버들이 안전하게 오랜 시간 동안 수색 구조를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려할 때 그런 것(다이빙벨 등)들도 후차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걸 설치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색 구조 활동을 놓칠 수가 없다”는 이견을 보여 논란이 있다.[7] 이 대표는 4월 21일 새벽, 자비를 털어 다이빙 벨, 작업용 CCTV 등 수십톤의 장비와 인력을 바지선에 싣고 인천항에서 팽목항으로 이동했다. 일부 다이빙벨 투입을 원하는 실종자 가족들이 해경 측에 다이빙벨 투입을 건의했고 이 결과 10여 시간 만에 다이빙벨이 사고현장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빙벨이 기존 작업에 방해가 되고 이미 바지선이 설치돼 있어 안전 사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구조당국의 허가가 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8] 이종진 대표는 결국 다이빙 벨 등의 장비를 철수시키며 "생존자 찾아 에어포켓까지 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구조지 지금 이게 구조인가"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전해진다.[9] 그러나, 안전 문제로 이종인 알파잠수기술 대표가 제안한 잠수장비 '다이빙 벨'을 불허한 해경이 대학에서 다이빙 벨을 비공개로 현장에 투입되어 논란이 있다. 고발뉴스는 “23일 새벽 2시30분 강릉 모 대학으로부터 위급한 상황이 있다며 다이빙벨을 빌렸다더라. 언론 몰래 비밀리에 아침 9시에 현장으로 보내는 과정을 포착했다”라고 했다. 이어 “강릉의 모 대학과 통화해 구조 당국이 다이빙벨을 빌린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대학의 한 교수는 돈을 받은 것은 아니고, 위급하다며 협조 요청이 들어와 빌려줬다”고 말했다.[10] 해경측은 "(다이빙 벨을) 실제 구조작업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보였다.[11] 이에 대해 언딘측의 공식발표에는 언딘에서 단독으로 가지고 온 것이며 이는 현장에 당장 투입하기에 어려운 조건인데 이종인의 다이빙벨이 여론화되자 자신들도 다이빙벨 장비를 가지고 있다라는 목적으로 빌렸다고 밝혔다.[12]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은 24일 오후 팽목항을 찾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 이종인 대표의 작업 참여를 강력히 요구해 다이빙벨 투입을 약속 받았고,[13] 이에 따라 이 대표는 25일 오전 11시 40분쯤 팽목항에서 출항했지만 앵커(일종의 닻)를 설치하지 못했고 거센 조류에도 밀려 다이빙벨 투입에 실패한 뒤 26일 낮 12시쯤 팽목항으로 귀항했다.[14] 그 후, 30일에 재투입되어 2시 55분께 버팀줄 선체 이음매 조이기에 성공했으나, 버팀줄에서 선내 진입구까지 단거리 유도선 설치에 실패했다. 높은 파고로 알파 바지선의 가로·세로 움직임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15] 오후 3시 45분에 다이빙벨을 선미 쪽에 투입했지만 투입 과정에서 잠수부 1명의 공기호스가 다이빙벨 운용 와이어에 씹혀 터지는 바람에 다이빙벨은 투입된지 28분만에 밖으로 건져졌다.[16] 다음 날인 5월 1일 새벽, 사고 해역에 다이빙벨을 투입한 뒤 잠수부 두 명이 세월호 선내에 진입해 각각 20여 분씩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실종자들을 찾지는 못했다. 오전 11시쯤 사고 해역에서 바지선과 다이빙벨을 철수시켰으며, 이 대표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17] 하지만 세월호 침몰 해역에 투입돼 다이빙벨 잠수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1시간여 만에 철수한 것과 관련해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다.[18] 다이빙벨이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하면서 이에 대한 피해 가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투입 여부 논란 탓에 구조에 시간만 빼앗겼다는 것이다.[19] 구조 방법[편집] 사고 초기, 적은 수색인원 투입 당일(2014년 4월 16일)에 해경과 해군이 투입한 수중 수색 인원은 모두 16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있다. 뉴스타파는 자신들이 입수한 당시 상황보고서엔 침몰 첫 날 동원된 잠수 요원은 해경 140명과 해군 42명 등 모두 182명으로 나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9%만이 실제 수중수색 작업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300명 넘는 실종자가 선내에 갇혀 있었던 상황에서 소극적 대응을해 인명피해를 키운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20] 미군 헬기 구조 거절 진도 해상 유람선 여객선 참사 당시 사고 해역 인근에서 작전중이던 미군 함정이 구명용 보트를 탑재한 구조 헬기를 현장에 급파했으나 우리 해군의 승인을 얻지 못해 되돌아갔다. 2014년 4월 16일 미 국방성 보도 매체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 당시 사고 해역에서 118마일 떨어진 서해상에서 작전중이던 미군 상륙함 본험 리처드함이 여러 개의 구명보트를 실은 2대의 MH-60 헬기를 파견했지만, 구조 작업에 투입되지 못한 채 돌아갔다. 미국 해군이 이날 오전에 발표한 보고서(문서번호: NNS140416-02) 역시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전달 받은 미 해군이 인근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함정의 구조 헬기를 즉각 파견했지만 한국 측이 ‘조치의 효율성’을 이유로 한국측 현장 지휘자의 요청을 기다리며 초동 구조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기했다고 밝혔다.[21] 최첨단 수상구조함 통영함 최첨단 수상구조함인 통영함은 천안함 사건 이후 겪었던 어려움을 교훈으로 삼아 대한민국 정부가 자체 기술로 만든 3,500t급 최첨단 수상구조함이다. 그런데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통영함 일부 장비, 음파탐지장비·수중로봇장비가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이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함정을 진수한 지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해군이 장비 점검도 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22] 논란 끝에, 4월 20일 밤에 조종사인 미국 해군 2명과 실링 로보틱스 HD ROV 2대가 현장에 투입되었다.[23] 세월호 참사 당시 상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통영함 출동을 끝까지 고집했던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참모들을 소집, 인근에 있던 통영함을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상부는 정확한 이유와 설명도 없이 그의 명령을 제지했고, 이에 황 전 총장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통영함에 재차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윗선의 제지로 통영함 출동은 끝내 좌절됐다. 해군 최고 수뇌부의 통영함 출동 명령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상부에 의해 두 번이나 거부된 것이다. 2014년 12월 감사원은 '통영함 납품 비리' 누명으로 황 전 총장을 인사조치하도록 국방부 장관에게 공식 통보했고, 보직 해임된 황 전 총장은 이듬해 3월 구속됐다. 하지만 그는 1심과 2심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악의 해상참사를 맞아 통영함을 구조에 투입하려 했던 해군 참모총장의 뜻이 '누군가'에 의해 좌절됐고, 그 때문에 미운 털까지 박힌 그가 누명까지 쓴 채 군복을 벗게 됐다는 이재명 시장의 발언 등의 논란이 있다.[24] 무인잠수정 투입 실패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2014년 4월 21일 오후 3시 20분쯤 수색을 위해 '로봇물고기'로 알려진 수중탐사로봇(ROV)을 투입했고, 선내 진입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나, 이러한 발표 역시 사실과는 달랐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특조위가 입수한 TRS 교신에서 해경 관계자는 "되지도 않는 ROV…ROV 줄하고 엉킬까 봐 지금 언딘 샐비지가 다이빙을 못 하고 있다. 철수하다가 줄이 엉켜가지고 지금 어디로 유실됐는지 찾지를 못하고 있음"이라고 말했다. 이후 오후 6시쯤 구조본부는 3009함에 "ROV가 수색 중단하고 출수한 사유가 뭔지 파악 바람"이라고 교신했고, 3009함은 "수중탐색했으나 선체 내부 탐색은 실시하지 못함. 선내 진입 못 하고 출수"라고 답했다. 해경구조본부는 당시 로봇이 선내에 진입하지 못하고 유실됐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와 반대되는 내용을 발표해 구조작업의 성과를 포장한 했다.[25] 현장에 출동한 응급헬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고 갑판에 생존자가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당시, 현장에 출동한 5,000억원 규모 이상의 구조헬기가 구조를 실시하지 않고 육지에 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응급구조를 실시하던 아주대 외상외과 응급구조헬기 AW-139는 구조 중 급유협조를 받지 못해 인근 비행장에도 불구하고 산림청까지 가서 급유를 받아 구조가 지연되었다.[26] 첫 시신 발견[편집] 사고 발생 나흘째인 지난 19일 새벽 4시 20분쯤, 자원봉사에 나선 민간 잠수사들이 구조작업을 하다 처음으로 세월호 안에 있는 시신 3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한 민간 잠수사는 언딘의 고위 간부가 "시신을 언딘이 발견한 것으로 해야 한다"며 "지금 시신을 인양하면 안 된다", "이대로 시신이 인양되면 윗선에서 다칠 분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민간 잠수사들은 해경이 나흘 동안 구조작업을 한 상황에서 민간잠수사가 먼저 시신을 인양하면 해경의 구조 능력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언딘 측이 "직원으로 계약을 해주겠다"면서 "모든 일은 비밀로 한다"는 조건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공식 브리핑에선 언딘이 시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언딘 측은 민간 잠수사들이 시신을 발견한 게 맞고 실력이 좋아 함께 일하자고 한 건 사실이라고 시인했지만, 나머지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으며 "윗선에서 다칠 분이 많다"는 등의 발언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27] 대한민국 정부[편집] 수 많은 대책본부[편집] 이번 침몰 사고와 관련해 설치된 대책본부는 총 10여 곳이다.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라 안전행정부가 서울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설치하였다. 뒤이어 정부세종청사에는 해양수산부와 교육부가 각각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차렸다. 해양수산부는 선박사고에 관한 주무부처란 점에서, 교육부는 수학여행을 가던 고교생들이 대거 승선했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경기도와 도교육청, 안산시는 안산올림픽기념관에 합동대책본부를 차렸으며 안산교육지원청에도 경기도교육청 대책본부가 만들어졌다.[28] 구조·수색 등 사고수습에 주된 책임이 있는 해양경찰청도 인천과 목포에 각각 지방사고수습본부를 꾸렸다. 이와 별도로 산하기관인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목포에 중앙구조본부를 설치했다. 여러 곳에 대책본부가 난립하자 국무총리실은 목포에 범부처 사고대책본부를 설치하겠다고 나섰다가 철회하는 소동도 벌어졌다.[29] 결국, 17일 진도군청에 해양수산부를 중심으로 11개 부처가 합동으로 범부처 사고대책본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본부장은 정홍원 국무총리가 맡고, 부본부장은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맡기로 했다.[30][31] 본부의 대변인은 해양수산부 대변인이 맡기로 하고, 언론 등에 대한 브리핑 창구도 일원화하겠다고 밝혔다.[32] 뒤이어 19일에는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다.[33] 이를 두고 명령과 보고 체계에 집착한 탁상 행정과 부처 이기주의와 무능함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34][35] 인원집계[편집] 계속 변하는 인원파악이 논란이 되고 있다. 단원고 측은 16일 오전 "11시 5분께 해경으로부터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고 밝혔다. 경기도교육청 측도 학교 측 발표에 따라 11시 7분과 16분에, 출입기자들에게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와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해경 공식 발표'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각각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학교에 몰려온 학부모 300여명은 환호하고 안도하였다. 그러나 위 발표들은 모두 사실과 달랐는데,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이날 정오, 공식발표를 통해 "탑승객 477명 가운데 179명을 구조 했으며 2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에 상황이 다시 '구조 중'인 것으로 확인되자 학부모들은 오열과 분통을 터뜨렸다.[36] 긴급 가동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측 역시도 인원집계의 오류로 논란이 되고 있다. 중대본은 16일 오후 1시 30분경 "476명 탑승, 구조자 368명, 사망 2명 확인"이라고 밝혀, 구조자수가 늘어감에 따라 국민들이 그나마 피해 최소화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가지게끔 하였다. 그러나 돌연, 오후 15시경 "구조자 집계 수 오류 ... 확인 중"이라고 앞선 발표를 번복함에 따라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어 중대본 측은 오후 16시 30분경 "459명 탑승, 구조 164명, 사망 2명, 실종 293명"이라고 정정하였다. 그러던 중 정홍원 국무총리가 17일 새벽 여객선 침몰 보호소가 설치된 전남 실내체육관을 방문하였다. 정홍원 총리는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물병을 맞아 논란이 되었다. 실종자 가족은 정부의 구조 활동 지체와 피해상황 집계혼란에 답답해하며, 유관 기관들을 총괄하는 책임을 지닌 국무총리 등 정부 당국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했다.[37] 그러나 인원집계 혼란은 끝이 아니었다. 총리실 등 주요부처가 꾸린 범부처사고대책본부는 19일 진도군청에서 브리핑을 하고 인원집계를 승선자 476명, 구조자 174명으로 또다시 변경했다. 이평현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안전총괄부장은 선사가 작성한 명부를 기초로 확인한 결과, 2명이 안개로 인해 출항이 불명확함에 따라 각각 비행기를 타거나 귀가했으며 생존자 중 3명이 승선원 명부를 작성하지 않고 차량에 동승해 결과적으로 명부보다 1명이 늘었다고 말했다. 구조자 정정의 이유는 다수 기관이 구조와 이송을 하는 과정에서 유사성명 기재로 동일인이 중복집계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해양수산부 박승기 대변인은 "지금부터 세월호 여객선 침몰 관련 언론 발표는 범부처사고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조정한다"며 정홍원 국무총리의 언론 발표체계 조정 지시를 전달했다. 이에 따라 향후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서해지방해양경찰청과 진도 실내체육과, 팽목항 등 현장은 범부처사고대책본부에서 공지하는 내용을 일원화해서 발표하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확정된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38] 국정원 세월호 유가족 사찰·여론전 개입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가 조사한 ‘국정원의 세월호 여론조작 및 사찰 의혹’ 조사를 심사한 결과, “국정원 국내정보부서가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부터 2015년 7월까지 세월호 사고 관련 보수단체 집회 동향과 각계 세월호 관련 여론을 파악해 국정원 지휘부와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개혁위 발표를 보면, 국정원은 2014년 6월 청와대 보고한 ‘국정운영 제언’에서 세월호 참사를 ‘2014년 하반기 국정운영의 가장 큰 위기이자 기회’로 지목하고, “세월호 집회가 과격시위로 변질될 수 있다”, “유사 안전사고 되풀이시 대정부 투쟁 재점화 불씨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 등의 우려를 전한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정원 국내부서는 세월호 추모 행사인 ‘청춘열차‘를 비판하는 ‘한국대학생포럼’ 칼럼의 보수매체(<뉴데일리>) 기고와 ‘어버이연합’의 세월호 참사 규탄 집회 및 현수막 설치, ‘교육과 학교를 위한 학부모연합’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규탄 기자회견 및 세월호 교재 퇴출 촉구 기자회견 등에도 개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정원 개혁위는 “국정원이 보수단체에 요청해 세월호 관련 비판칼럼 배포, 맞대응 시위, 온라인 활동을 하도록 한 것은 직무범위 일탈로 판단돼 관련자 징계 등을 검토하고, 제도 개선을 국정원에 권고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개혁위는 국정원 직원이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가 단식을 하다 입원한 병원에서 병원장과 주치의 등을 상대로 김씨 관련 정보를 얻은 정황도 확인됐다고 밝혔다.[39] 박근혜 대통령 발언에 대한 외신들의 비판 외신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4월 21일)에서 “선장 이준석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라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의 세월호 참사는 진정 끔찍하지만, 살인이 아니다’(The South Korea ferry disaster is truly awful, but it is not murder)는 기사에서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 비극은 극심한 감정을 유발하지만 세월호 선원들에 대해 너무 쉽게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며 “번역의 복잡함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살인자’란 단어는 눈에 띈다”고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역시 '박 대통령, 세월호 선장에 '살인과도 같다'…옳았나?’(Was Park Right to Condemn Ferry Crew?)라는 기사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사고 초기 (구조자 수 집계 등) 오보와 느리고 분별력 없는 대응으로 비판받은 정부의 재해 대처에 대한 주의를 돌리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이 나온다”고 주장해 논란이 있다.[40]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7월 10일 국회 '세월호 침몰사고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청와대 비서실·국가안보실 기관보고에 출석해 세월호 참사의 컨트롤타워 논란과 관련, "일반적 의미로 청와대가 국정 중심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컨트롤타워라면 이해되지만 법상으로는 다르다"며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의하면 재난의 최종 지휘본부는 안전행정부 장관이 본부장이 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라고 말했다. 이는 세월호 사고 직후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이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재난컨트롤타워가 아니다"고 언급한 것과 같은 취지의 발언이다. 김 비서실장은 '훈령에는 청와대가 최고 지휘체계로 돼 있다.'는 새정치민주연합 김현미 의원의 지적에도 "법이 대통령령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반박했다. 대통령 역할과 관련해서도 "현장에서 하는 일과 대통령이 하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서 "전쟁으로 비유하면 대통령은 전쟁 지휘를 해야지 전투 지휘를 하면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사고 당시 청와대가 사고 상황을 지휘·통제했느냐는 물음에는 "청와대 상황실에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확인해서 대통령께 보고하는 역할이었지, 구조를 지휘한 일은 없다"고 부인했다. 김 비서실장은 또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현장 구조세력의 전문성과 훈련이 부족해 구조활동이 매우 미흡했다는 사실"이라면서 "해경이 충분한 훈련도 없고 전문성도 부족해 초반에 구조를 잘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며 해경에 직격탄을 날렸다. 김 비서실장은 야당 의원들의 사퇴 요구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만두는 순간까지 성심껏 일할 뿐"이라면서 인사실패에 대한 비난에도 "인사가 잘못되고 잘된 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라고 말했다.[41]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4월 23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국가안보실이 재난 컨트롤타워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오보”라 밝혔다. 민 대변인은 “국가안보실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재난 상황에 대한 정보도 빨리 알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며 “NSC의 역할은 정보를 습득해서 각 수석실에 전달해주는 것이지 재난 상황의 컨트롤타워라는 지적은 맞지 않다”고 부연했다. 안전행정부에 설치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이번 사고의 컨트롤타워라는 얘기다. 그는 이어 “(NSC는) 국가안보와 관련해서 해야할 일이 많은 부서”라며 “왜 안보실이 모습을 안 드러내느냐는 지적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실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이번 참사와 관련해 각 부처들의 미숙한 대응, 책임 떠넘기기와 마찬가지로 군색한 책임 회피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42] 서남수 교육부 장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사고 당일인 4월 16일 오후 4시 경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그는 구조된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누군가 마련해 준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 등을 먹으며, 자신을 수행하던 이에게 함께 먹자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43] 서 장관이 컵라면을 먹은 곳은 세월호 구조자들이 응급치료를 하던 테이블임이 드러나 논란은 더욱 커졌다.[44] 또, 4월 18일 오후 6시께 안산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단원고등학교 학생 이모 군의 빈소에 서 장관이 수행원 3~4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 가운데 한 수행원이 서 장관보다 몇 걸음 먼저 빈소 앞에 다가가 유족에게 입구 쪽을 가리키며 "교육부장관님 오십니다"라고 귓속말을 건넸다. 유족은 곧바로 수행원을 향해 "어쩌란 말이냐. 장관 왔다고 유족들에게 뭘 어떻게 하라는 뜻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윽고 도착한 서 장관이 조문하는 동안에도 유족은 수행원을 몰아붙였고, 조문을 마치고 나온 서 장관은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말하고 바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45]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팽목항 사고상황실에서 기념 촬영을 시도해 물의를 일으킨) 안전행정부(안행부) 공무원은 사표를 수리했는데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국민 정서상 모든 것을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됐다"고 언급하며, 질문과 대답 간의 논점이 상이해 논란이 있다.[46] 또, 민 대변인은 “안보실의 역할은 통일, 안보, 정보, 국방의 컨트롤 타워다. 자연재해 같은 거 났을 때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며, “국가 안보와 관련해서 봐야할 것이 많은 곳이다. 재난에 대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세월호 침몰의 심각성이 확인되지 않았던 사고 초기, 사고를 직접 챙기며 충분히 사고에 대응할 수 있다는 듯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줘 논란이 있다.[47] 5월 9일, 유가족들 항의방문을 받자 청와대는 KBS와의 중재를 급하게 끌어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변인이 '순수 유가족'이란 용어를 써서 또 논란이 됐다. 민경욱 대변인은 기자들을 만나 유가족과의 접촉 계획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순수 유가족"이라고 만날 대상을 한정했다. 그러면서 "순수 유가족은 120명 와있다고 보고를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항의대는 25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던 상황이었고, 민 대변인의 발언이 "유가족 주변에 선동세력이 있다"는 여권 내 의혹제기와 맥이 닿아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졌다.[48] 팽목항 현지에는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이 5월 24일 오후 기자들과의 오찬자리에서 '민간잠수사가 일당 100만원, 시신 1구 인양 시 50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는 전언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49] 이 발언에 대해 민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제 일부 기자들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세월호 희생자 구조, 수색 문제와 관련한 주제로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다"며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소개했다. 또 "이 과정에서 현재 잠수사들이 오랜 잠수활동에 심신이 극도로 피곤하고, 시신 수습 과정에 심리적 트라우마도 엄청나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덧붙였다. 민 대변인은 "이런 문맥에서 현장에 있는 가족들은 잠수사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마지막 한 명을 수습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랄 것이고, 또 가능하다면 정부가 인센티브를 통해서라도 피곤에 지친 잠수사를 격려해주기를 희망할 것이라는 저의 개인적 생각을 얘기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 취지야 어쨌든 발언이 보도되는 과정에서 현장에서 묵묵히 헌신적인 구조와 수색활동을 벌이시는 잠수사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까 깊이 우려된다"고 유감을 표했다.[50]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부적절한 발언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사고 17일째인 5월 2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나라사랑' 전문 강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요즘 세월호 침몰 사건 때문에 우리 (박근혜)대통령님과 정부가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두둔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지금 무슨 큰 사건만 나면 우선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한다"며 미국과 비교했다.[51] 또 "대통령이 성공해야 성공한 대한민국이 된다"며 박근혜 대통령을 우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강연을 들었던 한 '나라사랑' 강사는 그의 발언이 "바람직한 발언이란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며 "(대통령을 향한) 아부"라고 지적했다.[52] 송영철 안전행정부 국장의 기념사진 논란 송영철 안전행정부 국장은 20일 오후 6시경, 진도 여객선 세월호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상황 본부의 세월호 침몰 사망자 명단 앞에서 공무원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하려하였다. 이에 현장에 있던 실종자 가족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와 같은 논란에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20일 트위터를 통해, “사망자 명단 앞 기념촬영 안행부 국장 직위 박탈”이라는 기사를 링크하며, “그 앞에서 인증 샷 찍을 기분이 나냐. 이 정도면 일베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해도 해도 너무 하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을까”라고도 언급했다. 현재 안전행정부 국장은 직위해제된 상태로, 안전행정부는 “앞으로 징계위 회부 등 절차가 남아 있다. 향후 관련 절차에 따라 엄히 문책할 방침이다”라고 전했다.[53] 프랑스 한국대사관의 분향소 방문시 신분증 제시 및 신상 기재 분향소를 찾아온 교민들에게 대사관쪽은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고 '책임자와 상의를 해야 한다'며 20여분을 길에서 기다리게 했다고 교민들은 전했다. 프랑스 한국대사관 쪽이 공지한 분향 안내에는 '신분증 필참'이란 문구가 없었으나, 대사관은 분향을 하러 찾아온 교민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신상을 기재한 뒤 5명씩만 들어가라고 요구했다. 교민들은 항의 끝에 서류에 신상명세를 쓰고 10명씩 들어가 분향을 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고 전했다. 교민들은 "분향소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소수의 인원만 들어갈 수 있다는 (대사관쪽의) 변명과 달리 분향소는 아주 넓기만 했다"며 "이 날 70대의 한 교민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공무원들의 이러한 태도가 바로 오늘의 세월호 참사를 만든 것"이라고 꾸짖었다.[54] 정보당국의 통제 의혹 세월호 참사로 정부의 재난관리 대응에 대한 비판(미흡한 초동 대처, 부처간 혼선, 구조활동)여론이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고 구조에서의 골든타임 낭비로 인한 인적 피해와 주먹구구식 인력 운용, 장비의 후진성 등 민감한 문제들이 대학 교수들의 비판이 이어졌었다. 그러나 사고 발생 6일째, 21일부터는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정부의 재난 대응에 대한 문제제기는 관련 전문가들이 큰 몫을 하였다. 노컷뉴스는 기자가 목포해양대에 전화를 했을때, 조교가 교수들의 입장을 대신 전했다고 주장했다. 조교가 "선생님들이 인터뷰를 피하고 계시는 입장이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55] 구급차로 출퇴근하는 보건복지부 공무원들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구급차량을 이용한 공무원들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팽목항은 진입도로가 좁아 원활한 환자수송을 위해 구급차량 말고는 통행이 제한된다. 그런데 걸어야하는 거리가 불과 1km 정도에 불과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구급 차량을 멋대로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병원이나 보건소 구급차량을 쓸 일이 거의 없어 대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56][57] 해군의 방송 연출 4월 22일 오후 6시 50분쯤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에 정박한 대한민국 해군 청해진함 갑판. 해군 해난구조대(SSU) 소속의 잠수사 A상사가 흠뻑 젖은 잠수복 차림으로 방송사 카메라에 둘러싸여 실종자 수색 상황을 설명했다. TV에서 이 인터뷰 장면을 볼 시청자들은 A상사가 막 수색 작업을 마치고 선상에 오른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실은 바닷물이 아니라 맹물이었다. 그는 이 날 오전 수색 작업을 마치고 대기하던 중 인터뷰 10분 전에 불려왔다. 해군 관계자들은 '현장감 있는 영상이 필요하다'는 방송사 몇 곳의 요청을 받자, A상사에게 드라이수트(방수 잠수복)로 갈아 입으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현장감이 덜하다고 판단했는지, 해군 관계자는 급기야 장병을 시켜 갑판에 설치된 수도 장치로 A상사의 전신에 물을 뿌려 적시기 시작했다. 해군은 '말 맞추기'도 했다. A상사가 바다 속 상황에 대해 "오늘은 시정이 50~60cm로 이전보다 잘 보인다"고 말하자, 해군 관계자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시계가 좋아 보이잖아. 30~40cm로 가자."[58] 사복 경찰의 미행 경기 안산에서 전남 진도로 향하던 세월호 사고 유가족 30여 명은 5월 19일 오후 7시 40분께 전북 고창 고인돌휴게소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뒤따른 남성 2명의 신원이 안산 경찰인 것을 확인하고 항의했다. 유가족들은 "사복경찰이 불법 사찰하고 있다"며 일부는 이들과 함께 안산으로 돌아와 해명을 요구했다. 당시 유가족을 뒤따랐던 사복 경찰 2명은 안산단원경찰서 정보보안과 소속 보안계 직원들이었다. 최동해 경기지방경찰청장은 20일 오전 0시 8분께 안산 화랑유원지 정부합동분향소 앞에서 유가족 100여 명에게 "사전 동의없이 사복 경찰이 유가족을 뒤따른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최 청장은 "사전 동의를 거치지 않은 절차는 잘 못"이라면서도 "유가족을 보호하거나 활동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한(뒤따랐던) 것이지 불이익을 줄 마음은 아니었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찰이나 미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론 어떤 경우에서든 유가족의 동의 내에서만 사복 경찰은 활동하겠다"고 약속했다.[59] 장관 의전에 따른 구조 지연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이 오히려 구조를 지연시켰다는 주장이 나왔다. 오후 2시 넘어 항구에 도착한 강 장관의 격려 행사 때문에 민간 잠수사들의 출항이 무려 20분이나 늦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4월 말 구조 지연 논란이 불거졌을 때의 해명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안전행정부는 당시 30초 정도 잠수사와 악수를 한 것이라며 지연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의 말은 달랐다. 한편,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은 사고 당일 해경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해양수산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장관은 사고 당일 오후 12시40분 전남 무안에서 해경의 헬기를 타고 사고 해역에 있던 지휘 함정으로 이동했다. 이후 헬기는 함정에서 1시간 이상을 대기했다. 이 시각, 잠수특공대 16명은 헬기가 없어 배를 타고 현장에 가야 했다.[60] 특위 기관보고 관련 6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기관보고에서 행안부 기관보고에 출석한 강병규 장관은 "표면공급 잠수방식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물음에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곧바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실종자 구조 방식하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여야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61] 세월호를 부양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리프트백'은 사실 부양 역할이 아니라 부표 역할로 활용했다고 백승주 국방부 차관이 밝혔다.[62] 7월 2일 열린 국정조사에서는 해경 상황실 유선전화 녹취록에 대한 '왜곡 발언' 논란으로 여야가 충돌해 한때 파행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이번 충돌은 녹취록을 인용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김광진 의원의 발언이 불씨가 됐다. 김 의원은 "사고 당일 오전 9시 50분 청와대에서 (사고현장) 화면을 보여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며 해경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수행하느라 구조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청와대 관계자가 "다른 일은 그만두고 영상 중계 화면 배만 띄워라. 내가 요청하는 게 아니다. VIP(박 대통령)가 좋아하고 제일 좋아하니까 그것부터 하라"라는 발언을 했고, 녹취록에도 이 발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은 김 의원이 인용한 발언이 녹취록에 담기지 않았다며 "녹취록 어디에 'VIP가 영상을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나. 우리도 같은 녹취록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가 있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희생자 가족이 회의를 서둘러 진행하라고 촉구하자, 조 의원은 "당신 누구냐"라고 큰 소리로 내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새누리당은 김 의원의 특위 사퇴를 요구하며 회의 참석을 거부, 오후 2시 30분에 재개될 예정이던 기관보고가 파행되었다. 파행 후 희생자 가족 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성역없는 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재개를 촉구했고, 새정치연합 간사인 김현미 의원도 브리핑에서 "김 의원의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킨 점에 대해 저도 사과하겠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새누리당은 회의장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결국 특위는 약 5시간 가량 중단된 끝에 오후 7시 30분부터 가까스로 재개됐다.[63] 수색 방법의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한 대책본부 7월 4일 오후 2시부터 범정부사고대책본부에선 수색 구조 TF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이날 회의에서도 새로운 대책은 나오지 못했다. 회의에서는 새로운 잠수방식의 도입여부에 대해 논의했는데, 지난 80일간 유지해온 표면공기 공급방식을 폐기하고 재호흡기, 일명 리브리더를 투입할지 여부를 검토한 것이다. 일단 재호흡기는 물속에서 호흡할 때 내뱉는 이산화탄소를 정화해 다시 호흡할 수 있게 돕는 장치인데, 수중에서 1시간 이상 작업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정부사고대책본부 측은 회의에서 리브리더를 사용할 경우 잠수시간의 연장은 가능하지만 잠수시간이 늘어날 수록 감압시간도 그만큼 늘어나 효율이 떨어지며, 현재 표면공기 공급방식과 달리 수중 잠수요원과 바지선 위의 통제요원 간의 실시간 소통이 불가능해 위험하다고 밝혔다. 이에 실종자 가족 측은 전문가들이 모여 가족들의 제안이 불가능한 이유만 설명하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냐며 강하게 반발했는데, 당분간 '선체 내부 10분 수색'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64] 해양수산부 항적 은폐 의혹 다큐멘터리 <인텐션>을 만들고 있는 김지영 감독은 '한겨레TV'의 시사탐사쇼 ‘김어준의 파파이스’(이경주 피디·박연신 작가) 81회에서, 기기 오작동 혹은 은폐를 걷어낸 항적을 공개했다. 앞서 해양수산부가 세월호의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토대로 공개한 항적, 침몰 전 마지막 5분이 담긴 해군 레이다 기록 뿐 아니라 사고 직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던 둘라에이스 호의 레이다와 영상이 기록한 세월호의 위치가 모두 다르다. 정부와 해군이 밝힌 항적과 달리, 세월호가 사고현장 부근 섬인 병풍도에 바짝 붙어 운항했다는 것. 김 감독은 정부와 해군이 밝힌 항적과 달리, 세월호가 사고현장 부근 섬인 병풍도에 바짝 붙어 운항했음을 자료를 통해 밝혔다. 김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생존자 최은수 씨는 "세월호가 섬을 받아버리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떠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화물기사인 최 씨는 세월호 사고 이전 1년 동안 한 달에 세 차례 이상 세월호, 혹은 같은 항로로 운항한 오하마나호를 이용해 제주도를 오간 경험이 있어 항로와 주변 풍경에 익숙한 편인데, 사고 당일 “세월호의 항로가 평소와 달랐다”고 말했다.[65] 해양경찰청[편집] 관계자의 실언 목포해양경찰서의 한 간부는 세월호 침몰 사고 다음 날인 17일 ‘세월호 사고에 대한 해경의 초기 대응이 미진하지 않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해경이 못 한 게 뭐가 있느냐.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80명 구했으면 대단한 것 아니냐”며 항의해 논란이 있다. 발언이 알려진 후 해양경찰청은 그를 직위 해제했다.[66] 사고 당일의 잘못된 보고 사고 당시 '370명을 구조했다'는 잘못된 보고는 해경이 청와대에 잘못 보고하면서 비롯된 것이며, 청와대는 오후 2시 30분이 넘도록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경은 사고 4시간 30분이 지난 오후 1시 16분 유선으로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보고하면서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생존자 370명이라고 한다"고 했고, 이어 "진도 행정선에서 (생존자가) 약 190명이 승선하고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오후 1시 42분에는 "370명이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일부 중복이 있었다고 한다"고 말을 바꾸었고, 오후 2시 36분 보고에서야 "(구조자가) 166명이다"라고 보고를 정정했다. 이를 들은 청와대 관계자는 "큰일났다. VIP(대통령) 보고까지 끝났다. 나머지 310명은 다 배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큰거 아닌가"라며 "중대본에서 발표한 것도 해경에서 보고를 받았을 텐데, (대 언론) 브리핑이 완전 잘못 됐다. 여파가 크겠다"고 말했다. 이같이 해경이 잘못 보고하게 된 경위에 대해 김석균 해경청장은 7월 2일 국정조사 기관보고에 출석해 "제가 파악한 바로는 진도항 현장에서 178명 구조된 이후에 190명이 추가로 구조돼 온다는 소식이 퍼졌고, 현장에 설치된 간이 상황판에 (누군가가) 그렇게 적어놨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간이상황판을 경찰 정보관이 촬영해 해경 정보관에 알려줬고, 이것이 서해해경청을 통해 본청으로 전달됐다. 본청에서 상황보고를 맡은 직원이 사실 확인 없이 중대본에 나간 담당 과장에게 전화한 것이 오류로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119 중앙상황실은 사고 당일 오후 1시께 해경 본청 상황실로 전화를 걸어 "우리 헬기가 현장에 2대 도착을 했고, 수난구조전문요원들이 다 탑승을 하고 있다. 배안에 요구조자가 있으면 바로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경에서는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 할뿐 별도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67] TRS(Trunked Radio System, 주파수공용통신) 무전교신 기록 은폐 의혹 2016년 5월 말 세월호특조위가 당시 인천 송도에 있던 해경 본청에서 TRS 교신기록을 발견했고, 기록이 저장된 3대의 하드디스크를 분석한 결과 2014년 4월 15일부터 12월 말까지 100만개가 넘는 파일이 담겨 있었다. 이중 TRS 기록 파일은 4만7000건에 해당한다고 해경은 밝혔다. 특조위는 기록의 훼손을 막기 위해 6월 초 해당 하드디스크 자체를 밀봉하고서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전체 파일에 대한 실지조사를 요구했으나 해경은 보안문제를 검토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를 들어 일단 2014년 4월 15일부터 5월 2일까지 2주일 분량에 해당하는 파일 7000여건만 제공했다. 이후 특조위 측은 나머지 8개월 치에 해당하는 나머지 TRS 파일중 외교·작전상 비밀사항을 제외한 기록을 추가 요구했다. 그러나 해경은 "서버 담당 직원이 을지훈련을 끝내고 세종청사에서 돌아온 뒤 26일쯤 오라"더니 사흘 만에 별안간 "허가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 "세월호 거짓말 밝힌 해경 TRS 교신기록 '행방불명'" - CBS노컷뉴스, 2016년 9월 8일 TRS 교신기록은 사고 직후 수색과정에서 선내에 공기를 주입하고 수중로봇을 투입했다던 정부 발표가 거짓이었다는 점을 드러낸 핵심 증거다. (관련 기사: 세월호 공기주입·수중로봇·잠수기록 다 거짓말 "靑 보고용" - CBS노컷뉴스, 2016년 9월 3일) 잇따른 탑승자 수 혼선[편집] 사고 초기인 16일 오전 10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는 여객선에 476명이 승선했고 이 중 110여 명을 구조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오전 11시 9분쯤 경기도교육청은 출입기자들에게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학부모와 국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후 중대본은 오전 11시 30분 161명이 구조됐다고 발표했다. 낮 12시 30분엔 179명으로 생존자가 늘었다고 밝혔다. 이후 단원고 학생을 포함한 사망자들이 확인되면서 '학생 전원 구조' 발표는 허위로 드러났다. 더 심각한 것은 중대본이 오후 2시 "368명이 구조됐다"고 공식 발표한 대목이다. 이경옥 안행부 2차관은 오후 3시 30분 "368명 구조는 집계 착오였으며 정확한 생존자 숫자를 확인해보겠다"고 번복했다. 오후 4시 30분 중대본 발표에 따르면 탑승자 459명 중 구조자는 164명에 그쳤고, 293명이 실종 상태인 것으로 집계됐다. 오후 9시 중대본 측은 또다시 "선원 3명이 늘어 승선자는 모두 462명"이라고 정정하고 "구조자는 174명으로 늘었고 실종자는 284명으로 줄었다"고 말을 바꿨다. 해경은 오후 11시쯤 구조자가 175명이라고 정정했다.[68] 이후에도 두 차례나 번복을 하며 불신을 자초했는데, 해경은 여러 기관이 구조에 참여하면서 구조자 이름이 중복 집계됐다며 스스로 착오를 인정했다.[69] 5월 7일 정부는 세월호 탑승객 현황을 또 다시 정정했다. 탑승자 명부에 없던 중국인 2명이 신용카드 매출전표 확인을 통해 추가로 발견되면서 실종자가 늘었고, 중복 기재와 동승자 오인 신고로 구조자가 2명 줄어든 것인데, 이로써 정부의 탑승객 통계는 무려 7차례나 정정되었다.[70] 그 밖에도 아기가 2명 정도 누락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탑승 인원에 대한 의문이 또 나오고 있다.[71] 해수부 마피아[편집] 선박의 정식 항해를 위해 선사는 첫 출항 1주일 전 해경에 운항관리규정을 심사, 증명 받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이 공개한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에서 선원들의 역할을 명시한 비상 부서 배치표는 총 44쪽 중 2쪽에 불과하다. 또한, 비상부서 배치표에는 선원 직책별 임무와 비상신호 체계가 적힌 게 전부였다. 다른 선박의 운항관리규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함에도,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은 승인을 받았다.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은 해경과 운항관리실(해운조합), 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이 포함된 위원회에서 심사해 지난해 2월 25일 인천해양경찰서가 최종 승인했다. 그러나 해경은 4월 22일 기준, 언론의 회의록 공개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해경 측은 회의록 공개에 대해 "유관기관이 모두 합의해야 가능한 사안"이라고 언급했다.[72] 교육당국[편집] 탑승자 전원 구조 문자 메시지 경기도교육청 대책반은 16일 오전 11시 20분께 "단원고 학생이 전원 구조됐다"고 출입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발송했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측도 학생과 교사 338명이 전원 구조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오보였다. 경기도교육청 대책반과 학교 측은 현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적으로 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73][74] 대통령 비판글 조사 대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물어 대통령을 비판한 글을 자신의 SNS에 올린데 대해, 7일 대구광역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동부교육지원청이 관할 지역의 모 초등학교 교사를 상대로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경위를 조사했다고 한다. 교육청 관계자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한 뒤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75] 교사들의 집회 참여 금지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1일 일선 학교에 ‘집회 관련 복무관리 철저 알림’이라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7일 밝혀졌다. 경기도교육청은 공문에서 “최근 세월호 사고로 인한 전국민적 추모 분위기 속에 공무원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므로 각급 학교(기관)장께서는 소속 공무원에게 전파하여 주시고, 복무관리에 철저를 기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또, 애초 교육부 공문에 있던 “5·1에 민주노총 주최 노동절 집회가 서울 등 전국적으로 계최될 예정”이라는 부분도 삭제했다. 노동절 집회 이외에 추모 집회 참가도 폭넓게 금지한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원천 봉쇄한 조처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안전행정부(안행부)가 보낸 ‘5·1 노동절 집회 관련 복무관리 철저 요청’ 공문을 이첩한 것이라며 “추모 집회가 아니라 노동절 집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교육부 관계자는 “추모 집회는 참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며, 추후 집회의 성격과 양상 등을 고려해 판단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경기도 김포교육지원청을 통해 공문 내용을 전달받은 한 공립학교 교사는 <한겨레신문>에 “슬퍼는 하되, 문제제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냐. 손발을 묶고 입도 조심하라는 압박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교육 활동 중에 학생과 교사들이 숨졌다. 추모 집회에서 교사의 품위를 손상시키거나 불법행위를 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집회 참석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76] 정치권[편집]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 세월호 참사와 관련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한 번 도와주소"라며 정부 비판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질 조짐이 보이자 홍보수석이 이 같은 문자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실종자 수색이 이어지고 있고 사고 원인 등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은 불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어서 논란이 불가피하다.[77] 유정복 당시 안전행정부 장관 2월 14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유정복 당시 안전행정부 장관은 '이전 정권에서는 해마다 10명 이상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지만, 지난해에는 50년 만에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고 한 당국자는 전했는데, 불과 사흘 만에 경주 마우나 오션 리조트가 붕괴되는 사고로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부산외대 학생 10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연이어 4월에는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유 장관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57] 국회의원 한기호(새누리당)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새누리당 한기호(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군)가 20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드디어 북한에서 선동의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좌파 단체와 좌파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이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입니다. 국가 안보 조직은 근원부터 발본 색출해서 제거하고, 민간 안보 그룹은 단호히 대응해 나가야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있다. 앞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8일 세월호 침몰 사건을 보도하면서 “남한의 한 방송사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실종자 가족들이 품었을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정부 당국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에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은 SNS 상에서 “세월호에 대한 대응 체계 붕괴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종북 프레임을 들고 나왔군요. 자식을 잃고 비탄에 빠진 학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네요”라고 지적했으며, 한 누리꾼도 SNS 상에서“구조를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건 사회 분열을 노리는 종북이거나 그러한 북한의 지령에 놀아나는 행위라는 게 새누리 국회의원(한기호)부터 온갖 수구보수들의 주장이로군. 대단한 병자들”이라고 꼬집었다. 파문이 확산되자 한 의원의 글은 페이스북에서 삭제됐지만, SNS 상에서는 이 글이 갈무리돼 전파되고 있다. 그러자 그는 페이스북에 “북한이 이번 참사 수습을 무능한 정부 탓이라고 비난한 것이 사실 아닌가요? 여기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데 문제가 있나요?”라는 글로 반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자 페이스북을 모두 비공개로 전환했다.[78] 가짜 실종자 대표(새정치민주연합)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았던 남성이 안산 지역구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6·4 지방선거에 나가려던 사람이란 것이 밝혀져 논란이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 후 자신을 아동센터를 운영하는 목사라고 소개한 송정근은 실종자 가족 대표로 활동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나란히 단상에 서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 탑승자 가운데 송정근의 가족은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실종자 가족들은 격앙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송정근은 “처음부터 정치적 이유는 없었다”고 해명했다.[79] 그러나 그가 실종자 가족이나 유족이 아님은 현지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일이고, 단원고등학교를 포함한 안산 지역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해온 그의 이력에 비춰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일부의 반론도 있다. 송정근은 목회자(목사)로서 가출청소년 상담 등을 해왔으며, 대통령과의 간담회 후 이 문제가 언론에 불거지기 전인 지난 18일 도의원 예비후보직을 사퇴했다. 인터넷 등에서는 새누리당 국회의원 등 여당 정치인들이 세월호 참사 와중 일으킨 논란을 덮으려는 '물 타기'라는 의심까지 나오기도 했다. 송정근은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자신이 이날 오후 탈당계를 제출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 변호했다.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게 된 경위에 대해 그는 "(진도에) 도착했을 때 여러 교회 목사님들과 학부모들이 있었는데 '누군가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분들이 '일단 맡아달라'고 요청해서 맡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80] 이윤석 전남도당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 사고 당일날 늦은 저녁, 이윤석 의원은 해경경비정을 타고 사고 해역을 다녀왔다가 '특혜' 논란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애를 태우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도 현장에 가고 싶어도 배편이 없어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이윤석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식 브리핑 등을 통해 "해경은 안전의 이유 때문에 밤중에는 학부모들을 원하는 대로 다 태울 수 없다는 방침을 갖고 2분만 태운 것으로 확인됐다"며 "어떤 국회의원이 그 밤중에 비 맞으면서 풍랑을 헤치고 특권을 가지고 5시간에 걸쳐 현장을 다녀오겠나, 특혜라는 것은 억울하다"고 밝혔다.[43] 국회의원 권은희(새누리당) 새누리당 권은희 의원은 지난 4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인의 글을 보고 퍼왔다"며" 세월호 실종자 가족 행세를 하며 정부를 욕하며 공무원들 뺨때리고 악을 쓰고 욕을 하며 선동하는 이들. 학부모 요청으로 실종자 명찰 이름표를 착용하자 잠적해버린 이들. 누구일까요? 뭘 노리고 이딴 짓을 하는 걸까요?" 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명찰 나눠주려고 하자 그거 못하게 막으려고 유가족인척 하면서 선동하는 여자"라면서 관련 동영상을 링크했다. 이어 "그런데 위의 동영상의 여자가 밀양송전탑 반대 시위에도 똑같이 있네요"라며 "세월호 탑승 희생자의 유가족인 동시에 송전탑 시위 관계자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라며 문제의 여성이 희생자 가족이 아닐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장에 혼란과 불신, 극한 대립을 일으키는 전문 선동꾼들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인지?"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는 이 와중에도 이를 이용하는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온라인에 도는 터무니없는 비방과 악의적인 루머도 잘 판단해야겠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한 때입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권은희 의원이 의심한 당사자들은 실제 '실종자 가족'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선동꾼이라고 지목한 밀양송전탑 권모 씨의 사진은 '덧씌운' 사진으로 밝혀졌다. 논란이 커지자 권은희 의원은 "자세히 못 살펴 죄송하다"며 글을 삭제했다. 선동꾼으로 매도된 권모 씨는 권은희 의원을 고발하겠다는 태도다. 권모 씨는 권은희 의원의 게시물과 관련 경찰에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로 알려졌다.[81] 5월 12일 대구 성서경찰서에 따르면 권 의원은 지난 10일 오후 경찰에 나와 수 시간 동안 페이스북에 해당 내용의 글을 올린 경위 등을 조사받았다.[82] 국회의원 이완영(새누리당)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지난 7월 1일 국회에서 진행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기관보고 모니터링 보고서를 통해 "과연 국회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를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며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은 다른 의원의 질의 시간에 장시간 조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완영 의원이) 국정조사 진행에 분통을 터뜨리는 유가족을 보고선 '경비는 뭐하나'라고 말해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완영 의원실 보좌관은 "세월호 국조 특위를 준비하면서 보좌진과 의원 모두 밤을 새다시피 했다"며 "질문을 빠뜨린 것도 아니고 다른 의원 질의할 때 잠깐 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적반하장 식의 해명을 했다. 또 이완영 의원의 '경비는 뭐하나'라는 조롱하는 듯한 태도에 대해서는 "소란스러워질 때마다 경비원들이 계속 제지를 하던 상황이었다"며 "그래서 너무 시끄러워지길래 경비는 뭐하느냐고 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었다"고 전했다.[83] 국회의원 조원진(새누리당) 조원진 새누리당 간사는 7월 2일 세월호 국정조사에서 야당과의 다툼을 말리는 유가족에게 "당신들은 누구야"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어라"고 언성을 높인 것으로 알려졌다.[84] 또 그는 세월호 사고를 조류인플루엔자(AI)에 비유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조 의원은 7월 11일의 회의에서 청와대가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 주장에 반발하면서 “AI와 산불 등 재난에 대통령이 ‘수습’을 지시했다고 컨트롤타워로 볼 수는 없지 않으냐”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방청석의 일부 유족들은 “어떻게 닭과 비교하느냐” “희생자가 닭이에요”라며 강력 반발했다. 심재철위원장은 고성을 지른 유가족에게 “함부로 회의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후 방청석에서 항의성 발언이 나오자 결국 유족 1명이 퇴장 조치됐다. 나머지 가족들까지 회의장을 박차고 나서자 심 위원장은 퇴장조치를 취소한 뒤 정회를 선언했다. 국조특위 야당 의원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심재철 위원장과 조원진 간사는 사과하고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심 위원장도 회견을 열어 “퇴장시킨 가족은 하루라도 소리를 안 지른 날이 없다. 참고 참다가 오전에 ‘더 그러시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를 했다”고 말했다. 조 의원은 “국가 재난의 여러 예를 들었는데 유가족분들 마음이 많이 상하셨다면 정말로 사과를 드린다”고 밝혔다.[85] 전 국회의원 송영선 송영선 전 국회의원은 "이번 기회가 너무나 큰 불행이지만 우리를 재정비할 수 있는, 국민의식부터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꼭 불행인 것만은 아니다"며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발언해 질타를 받고 있다. 그러자 송영선 전 의원은 4월 23일 채널 A와의 전화통화에서 "제 말에 의해 상처를 받으신 분, 털끝만큼이라도 상처받으신 분이 계시다면, 용서하십시오. 너무 죄송합니다"라고 공식 사과했다.[86] 국회의원 정몽준의 아들 새누리당 정몽준 국회의원의 막내아들이 세월호 실종자 가족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고 있다. 그는 사고 이틀 후인 4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대통령에 소리 지르고 욕하고 국무총리에 물세례.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라는 글을 올렸다. 이는 지난 17일 일부 실종자 가족이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한 정홍원 국무총리에게 생수병을 던진 것에 대한 글이다. 이에 대해 비난여론이 일자 정몽준 의원은 2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라고 말했다.[87] 사죄 드립니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짓에 아버지로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희 아이도 반성하고 근신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2014. 4. 21. 정 몽 준 올림[88] 진중권 교수는 트위터를 통해, 이 논란에 참여했다. 그는 "그가(정몽준 의원의 아들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사람들이 울부짖는 세계가 이상(미개)하게 느껴졌을 것이라며, 이를 몇 천 억을 가진 이들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초현실이자, 비현실로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비교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치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게 미개한 정서라면 이 사회에서 문명인은 오직 하나 사이코패스 뿐"라고도 결론 내렸다.[89] 한편, 세월호 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은 이런 발언을 한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아들을 경찰에 고소했다.[90] 보수논객 지만원 인터넷 사이트 시스템클럽을 운영하는 대한민국의 보수논객 지만원은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시체 장사"로 지칭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 2의 5·18 폭동을 대비하라"고 말했다.[91] 일베저장소[편집] 일베저장소(일간베스트저장소)의 일부 누리꾼들이 세월호 실종자 및 희생자 가족들을 '유족충(蟲)'이라고 부르며, 적나라하게 모욕해 논란이 있다. 이에 경찰청은 해당 게시글 작성자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고 19일 밝혔다.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16일 이후, 일베저장소 게시판에는 피해자 가족을 조롱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사고 지역이 전라남도이고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전라도 출신이라면서, 노골적인 지역차별 정서를 부추기는 내용이 많다. 또 피해자 가족을 '(진도) 유족충'이라고 조롱하며, 비속어를 섞어 비아냥대는 글도 상당수다. 수학여행 도중 희생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신을 조롱거리로 삼는 글도 있다. 경찰은 이들 게시글 가운데 일부를 삭제하고 IP를 확보해서 작성자를 추적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근거 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행위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해 검거할 것"이라고 밝혔다.[92] 이 방침에 따라, 피해 여학생과 여교사를 대상으로 성적 모욕성 게시물을 올린 A(28)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A는 경찰에서 자신의 행위의 이유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주목받기 위해 게시물을 작성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93] 그런데, 이 와중에 "일베저장소 일동"이란 이름의 근조화환을 한 일베회원이 보내기도 하여 누리꾼들 사이에 진정성 논란이 일었으며,[94] 또한 이들은 노란 리본을 "일베"의 자음인 ㅇㅂ 모양으로 바꾸거나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등의 사진으로 바꾸어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95] 사고가 일어난 달인 4월 말 서울 경신고교 1학년 중간고사 국어 시험에서는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인터넷 댓글 반응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찾으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이 문제의 5개 보기 중 오답인 4가지는 모두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예시였다. '전라도 홍어들이 고향 용궁으로 돌아가겠다는데 왜 막냐…' '간만에 전라도에서 흐뭇한 소식이네… 염전 조심해라? 점심 신나게 홍어탕 먹어야지' '아무리 대한민국서 제일 가깝고 가기 쉬운 해외라 해도 전라국으로 여행가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선박 사고와 전라도 섬노예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등이 오답 보기로 나왔다.[96] 출제 교사는 '전혀 다른 의도는 없이 아이들에게 와닿도록 최근의 예문을 출제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문제를 내게 됐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97] 전라도 지방의 비하, 특히 홍어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일베저장소에서 주로 쓰는 방식이라 알려져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는 희생자들을 인터넷 게시판에서 성적으로 모욕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정모씨를 구속기소했다고 6월 5일 밝혔다. 평소 일베에 익명으로 글을 자주 남기던 정씨는 서울 금천구의 고시원에 앉아 글을 쓴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정씨가 일베 회원들의 관심을 끌고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을 써가며 글을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98] 언론[편집] JTBC 기자가 구조된 학생과 인터뷰 도중 학우의 사망을 알리는 부적절한 질문을 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JTBC 측에서 해당 기자를 대신해, 9시 뉴스 앵커 손석희가 깊이 사죄드린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99] 또한 SBS 기자가 뉴스를 보도하던 중 기자들의 웃는 모습이 등장했던 방송사고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SBS는 20일 오후 뉴스 공식 트위터를 통해 "세월호 승선자 가족들과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100][101] MBN 뉴스특보 프로그램(4월 18일 오전 6시)에서는 민간 잠수사라고 자칭하는 홍가혜가 인터뷰를 통해 정부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하고 있으며, 바다 속에서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은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양경찰청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한 사실이 없고 이날도 70여명이 동참하고 있었다고 해명하였고, 한국구조연합회 회장인 배우 정동남은 "해경이 민간잠수부 활동을 막는다는 허무맹랑한 소문들을 퍼뜨리는데 그것은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02] 스포츠월드 김용호 기자가 자신의 트위터에 홍가혜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글을 올린 것이 알려지고,[103] 홍가혜의 인터뷰 내용이 사실 왜곡 논란과 구조 현장에서의 혼선을 일으키자 MBN 보도국장 이동원은 직접 방송에 출연하여 공식 사과하였다.[104], 전남지방경찰청은 4월 19일 잠적한 홍가혜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영장을 신청하였고 21일 그녀를 검거하였다.[105][106][107][108] 그러나 재판부는 홍가혜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홍씨의 카카오스토리 내용과 방송 인터뷰는 구조작업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취지로 구조작업의 실체적 모습을 알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며 "허위사실이라고 인식하기 어렵고, 해경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보기에도 어렵다"고 판시했고, 이어 "판결이 피고인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라고 밝혔다.[109] 문화일보와 내일신문은 침몰사고 초기에 '477명 탄 여객선 침몰... 대형 참사 날 뻔했다'란 기사제목으로 사고 초기에 오보하여 관련 학부모들과 학교관계자 및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초기 대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74] 연합뉴스는 24일자 '물살 거세지기 전에... 사상 최대 규모 수색총력'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9일째인 24일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바다 위와 수중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 작업을 벌였다.", "해군과 해군구조대, 소방 잠수요원, 민간 잠수사, 문화재청 해저발굴단 등 구조대원 726명이 동원됐고 함정 261척, 항공기 35대 등의 장비가 집중 투입됐다"고 보도했다. <광굦나널실 제 현장에서는 연합뉴스 멘트대로의 구조 장비와 인원이 전혀 투입된 바가 없었다. 함정 261척은 고사하고 잠수사 조차 겨우 2명이 투입되었다. 청해진 해운과 해경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업체인 언딘의 잠수사 외에는 모든 자원봉사 잠수사는 불허상태이며, 언딘의 소속 잠수사는 겨우 10여명 내외로 밝혀졌다. 그 밖에 대한민국 언론의 속보 경쟁 폐단과 실종자 가족 취재의 보도 윤리 문제에도 논란이 있으며, 세월호 침몰 사고를 계기로 한국 저널리즘을 성찰해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10] 사고 현장에서 언론은 실종자 가족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도 했다. 불신은 심지어 기자들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몇몇 기자들은 수첩을 뺏기고 멱살을 잡혔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세월호 침몰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온 외신에 대해서 비교적으로 호의적으로 대했다.[111][112] 또, 사고 초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 과도한 취재 또한 논란이 되었고, 이는 4월 24일 단원고 3학년 학생이 기자들에게 쓴 글이 발표되면서 이에 대한 논란과 반성 또한 급부상하였다.[113] 한편, NBC는 4월 24일 로이터 통신의 기사를 받아 ‘한국 여객선 선원: 침몰하는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South Korea Ferry Crew: We Were Ordered to Abandon Sinking Ship)’고 보도했다. NBC는 “신원 불명의 이 선원은 법원에서 유치장으로 돌아가면서 기자들과 잠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수술용 마스크와 야구 모자, 그리고 상의의 후드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승객들이 갇혀 있는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발언을 하였으며 이 발언의 진위 여부에 관심이 일고 있다.[114] 그러나 이러한 선원의 발언만으로는 그같은 명령이 (선장인지 아니면 회사측인지)누구로부터 내려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보도에 대해 ‘뉴스프로’는 기자의 칼럼을 통해 “의문점은 선원들은 모두 선원복을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따로 접근한 해경 구조선에 갈아 탔다는 것이다. 해군 경비정은 세월호가 침몰할 경우 빨려들어갈 위험 때문에 세월호 멀리서 구명보트를 보내기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선장과 선원들을 특별히 구조하기 위해 세월호에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115][116] 청와대의 징계[편집] 이른바 '서남수 교육부 장관 라면 사건'을 보도한 것과 관련,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8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비보도 전제’(오프 더 레코드) 발언을 보도한 <한겨레신문>에 ‘청와대 춘추관(기자실) 출입정지 28일(4주)’의 징계를 결정했다. 기자단은 또 민 대변인의 발언을 보도한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에 출입정지 63일(9주), <한국일보>에 출입정지 18일(3주)을 결정해 각 언론사에 통보했다. 징계를 받게 되면, 해당 언론사 기자는 그 기간에 청와대가 제공하는 보도자료 등 일체의 자료를 받을 수 없게 된다.[117] 한국방송공사[편집] KBS는 국가재난주관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며 속보경쟁에 나서 오보를 내는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현장을 방문했을 때 실종자 가족들의 항의 대신 박수를 치는 장면만 편집해 내보내는 등 현장의 목소리를 왜곡해 유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118] 앵커들 "검은 옷 입지 말라"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는 30일 성명을 통해 “보도국 책임자라는 자가 검을 옷을 입고 진행을 한 앵커를 나무라며 뉴스 진행자들은 검은 옷을 입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희생자 가족들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청와대와 대통령만 바라보는 철저히 권력지향적인 보도 행태는 이번 사건에 대한 공감 능력의 결여와 맞닿아 있다”고 비판했다. 이 간부는 김시곤 보도국장인 것으로 알려졌다.[119]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는 김 국장이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4월 말께, 부서 회식 자리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이 노조 측 주장이다. 이에 대해 김 국장은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세월호 사건을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치부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인데, 그렇다면 내가 사고 현장에 기자를 100여 명 보내며 밤새워 보도할 이유가 있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세월호 사고 사망자수와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비교해 발언한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부적절한 비유 아니냐'는 지적에 김 국장은 "평소 교통사고 안전 사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지만 부지불식간에 매해 세월호 이상의 참사를 겪고 있다는 뜻"이라며 "기자들에게 안전사고에 대한 인식을 재확인시키는 차원에서 한 발언"이라고 일축했다.[120] 이에 대해 김 국장은 KBS 새노조가 "KBS 및 KBS 간부에 대해 일방적 주장을 제기하며 명예를 훼손했다"고 비판하며, 새노조를 향해 "정파적·미시적 관점 벗어나 합리적으로 언론사 제도 개선 운동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카메라 취재를 하면서 현장음이 잘 안 담길 수도 있다"며 "의도해서 편집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며, "KBS 보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른 언론사 못지않게 목표를 높게 잡고 노력해나간다"며 "진도 등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많은 취재진들이 고생하고 있다"고 전했다.[121] 문화방송[편집] 조급증이 잠수사 죽음 불렀다는 주장 MBC 뉴스데스크는 5월 7일 '함께 생각해봅시다'라는 데스크 리포트에서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란 제목으로 세월호 사고 해상에서 수색작업을 하다 숨진 이광욱 잠수부에 대해 조급증에 걸린 우리사회가 그를 떠민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라며 우리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조를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리포트를 한 박상후 MBC 전국부장은 해당 리포트에서 "실제로 지난달 24일 일부 실종자 가족들은 해양수산부 장관과 해양경찰청장 등을 불러 작업이 더디다며 압박했다"며 "논란이 된 다이빙 벨 투입도 이 때 결정됐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조급증이 빚어낸 해프닝"이라고 말했다.[122] 전국언론노조 MBC 본부는 “잠수사 사망 사고는 발생해선 안 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며 “하지만 언론이 죽음의 원인을 짚어보는 것과 죽음을 소재 삼아 특정한 결론을 내리거나 확대 해석, 왜곡하는 일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밝혔다. 실제 사고 당일인 6일 MBC와 달리 KBS와 SBS는 잠수사 의료ㆍ안전 지원이 매우 열악하고 바지선 전문 의료진도 없었다는 등의 내용을 보도했다.[123] 김장겸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 <한겨레신문>은 김장겸 MBC 보도국장이 4월 25일 오전 편집회의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보고를 받던 도중, 유가족들을 향해 “완전 깡패네, 유족 맞아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이 같은 발언은 박상후 전국부장이 ‘유가족들이 해양수산부 장관, 해양경찰청장과 가족들의 대화 현장을 보고받은 뒤 나온 답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겨레>는 김장겸 보도국장이 같은 날 팽목항 상황에 대해 “누가 글을 올린 것처럼 국민 수준이 그 정도”라며 “(정부 관계자)의 무전기를 빼앗아 물에 뛰어들라고 할 수준이면 국민 수준이 아프리카 수준”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달 21일 ‘국민 수준이 미개하다’는 내용의 페이스북 글을 올린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 아들의 발언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는 당시 편집회의에 참석했던 복수의 MBC 관계자에게 사실 확인을 거쳤다고 밝혔다.[124] 하지만 MBC 정책홍보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김장겸 보도국장은 그런 발언이 한 적이 없다며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보도에 대해) 법적대응을 할 것”이라며 “<한겨레>에서 문의가 들어왔을 때도 ‘사실무근’이라고 이미 전달했다”고 밝혔다.[125] '전원구조'가 사실이 아님을 묵살 한승현 목포 MBC 보도부장은 사고 당일 오전 박상후 전국부장한테 '전원구조'가 사실이 아님을 알렸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목포 MBC 김선태 보도국장은 “진도 부근 어업지도선 쪽 어민에게 전화가 왔고, 마침 해경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침몰사고 해역으로 해경들이 많이 갔다고 들었고 구조에 나선 사람들과 직접 통화를 했다. (전원구조가 아닌 것 같아)현장기자들에게 ‘전원구조’가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고 그날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보도부장에게도 (전국부에)직접 이야기하라고 했고, 했지만 전국부에서 ‘알았다’고 하고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우리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제보해준 어민과 직접 연락하게 해줄테니 어민의 전화번호를 서울 MBC에 주도록 보도부장에게 지시했고, 보도부장이 전국부에 이야기했지만 그 뒤로도 소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목포 MBC 보도국에 따르면 이들은 보도국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3차례, 취재기자가 2차례 등 최소 5차례 이상 전국부에 ‘전원구조’가 오보일 가능성을 보고했다. 하지만 결국 MBC도 ‘전원구조’라는 자막을 띄워 오보 대열에 동참했다. 김 국장은 목포MBC의 보고에 대한 전국부의 대처에 대해 “100% 묵살”이라고 했다. 김 국장은 “어떤 한 사람이라도 우리에게 다시 ‘사실이냐’고 확인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MBC 지역 기자들이 모인 전국MBC기자회는 앞서 13일 성명에서 “ MBC의 오보는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기사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낸 ‘미필적 고의에 의한 명백한 오보’”라고 비판했다.[126] SBS[편집] 세월호 관련 심층 보도 제작 중단 지시 5월 31일 방영을 목표로 준비 중이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 참사’ 관련 방송이 제작본부장의 지시로 제작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논란은 지난 9일 장광호 제작본부장이 세월호 아이템을 승인한 지 하루 만에 말을 바꿔 제작 중단을 지시하면서 촉발됐다.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진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KBS와 청와대 항의방문을 취재한 다음 날이었다. 장 본부장은 ‘6·4 지방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라는 이유와 <그것이 알고 싶다>의 특성상 새로운 내용을 확보하지 않으면 방송이 어렵다며 제작 중단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SBS 내부에선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본부장이 ‘세월호 사고 방송’ 아이템을 승인하고 이를 다시 번복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외부 압력이 작용한 게 아닌지 의구심도 나온다.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 정부의 전방위적인 보도통제 의혹이 꾸준히 제기된 데다가 KBS 내부에선 청와대가 ‘해경 비판을 삼가라’ 했다는 폭로까지 나온 뒤라 이런 의혹은 더해지고 있다.[127]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편집] 세월호 가족대책위 유가족 5명이 2014년 9월 17일 오전 0시 40분께 영등포구 여의도 거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과 함께 있다가 대리기사, 행인 2명과 시비가 붙어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당초 유가족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했다가 조사 도중 혐의가 충분히 입증됐다고 판단, 전원을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다.[128] 2014년 9월 19일 출석한 유가족들은 묵비권 행사를 하지 않았지만 일부 수사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행을 목격하고 이를 말리려 한 시민 2명은 정당방위로 면책될 것으로 보인다.[129] 김병권 위원장과 김형기 수석부위원장, 유경근 대변인 등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 대책위원회 집행부 9명은 2014년 9월 17일 대리기사 폭행 사건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였다.[130] 2014년 9월 21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신임 위원장에 전명선 전 진상규명분과 부위원장이 선출되었다.[131] 하지만 CCTV원본에서는 대리기사는 싸움에서 뒤로 빠져있었던 상황이였고 목격자와 함께 다수의 행인이 유가족과 싸움을 하는 장면[132]만 있는 상황이였고, 유가족은 이가 부러지고 깁스를 착용까지할 정도로 부상이 심했으나 대리기사는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걸로 인해 실제로 대리기사를 폭행한게 아니라 대리기사가 지나가는 행인을 부추여서 폭행을 주도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루머[편집] 사고 발생 시점과 관련해 KBS의 아침 정규 방송인 '굿모닝 대한민국 생방송' 중, 7시 20분에 자막으로 세월호 침몰 관련 자막이 나왔고, KBS가 재방송에서 이 자막을 삭제했다는 루머가 SNS를 통해 알려졌으나, 이는 방송 중 영화 소개장면에서 21:9 와이드 화면을 위아래로 길게 늘리기 위한 일반적인 편집중 생긴 확대이며 자막은 없었다.[133] 또한 인터넷에서 KBS가 4월 16일 8시 59분에 자사의 트위터 계정으로 오전 7시 20분부터 구조작업이 시작되었다는 트윗을 발송함으로써, 적어도 7시 20분 이전에 사고가 일어난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으나 이는 트위터의 시간이 트위터 서버의 시간이 미국시간으로 올라와서 생긴 문제로서 사고 당일에 올라온 트윗은 아니다.[134] 일부 누리꾼들은 정부가 서울시 공무원 간첩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사과문 발표가 난 가운데 갑자기 사건이 발생한 것이 의심스럽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종편방송 언론사 채널A는 이런 의심을 '엉뚱한 음모론'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35] 한편 정재학 편집의원은 16일 데일리저널에 올린 '세월호 침몰이 이상하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세월호가 침몰한 해역이 암초가 없었으며, 당시 가시거리가 나쁘지 않고, 물결도 잔잔했으며, 세월호가 상시 운항하던 곳이라" 다른 선박과 부딪혀 침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또한, "그래서 어떤 배와 부딪혔는지 의문"이 생긴다며, 암초도 아니고 충돌선박에 대한 선장의 보고도 없었으므로, 그 충격은 북한의 소행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136] 이와 같이 일부 언론들이 제기하는 북한 소행설에 대하여, 정부는 '수사 중'이라고만 짧게 대답했다.[137]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침몰된 배 안에 생존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퍼졌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세월호 생존자가 보낸 것으로 추정된 메시지가 허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서 논란이 있다.[138][139] 경찰청 사이버테러 대응센터는 17일 "실종자 전체의 휴대전화 번호를 확보해 침몰 사고 이후인 16일 정오부터 이날 오전 10시까지 이용 내역을 확인한 결과 모두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최초 유포자를 추적해 사법처리할 것이라 밝혔다.[140][141] 기타 논란[편집] 사고의 공식 명칭 이 사고를 처음에는 '진도앞바다 여객선 침몰 사고'로 부르다가 '세월호 침몰 사고'로 바꾸었으나, 사고의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선사의 이름을 포함하여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불러야 한다는 논란이 있다. 사고 발생 시간 실제 배에 문제가 생긴 시점과는 별개로 나중에 침몰과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사고가 외부에 인지된 시점에 대하여는 여러 논란이 있다. 공식적으로 세월호 침몰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32초 (KST),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 전화가 걸려옴으로써 알려졌다. 하지만 세월호가 최초 신고 40여 분전 이미 해경과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정황을 담은 교육청의 내부 일지가 발견되어 오전 8시 10분에 이미 사고를 교육청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142] YTN의 보도 영상에는 사고 일시가 4월 16일 08:00 경으로 기록된 사고 개요 보고서가 안행부에 보고된 화면이 포함되어 있다.[143]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의 신문광고 <문화일보> 7월 28일자 31면 하단에 실린 의견광고를 보면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전합니다”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하지만 이 광고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세월호 특별법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문화일보 광고국은 경향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해당 광고를 의뢰한 곳은 ‘어버이연합’”이라며 “문화일보는 광고를 받은 그대로 게재했을 뿐 광고에 대한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당 광고엔 ‘우리 국민들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월호 특별법안의 주요 골자’라며 ‘사망자 전원 의사자 처리, 공무원 시험 가산점 부여, 단원고 피해학생 전원 대입특례전형 및 수업료 경감, 사망자 형제자매 대입특례전형 및 수업료 경감, 유가족을 위한 주기적 정신적 치료 평생 지원, 유가족 생활안정 평생 지원, 기타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근로자 치유 휴직,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 금융거래 관련 협조 요청’ 등 17개 항목이 실려 있다. 또 이 광고는 말미에 “세월호 특별법입니까? 평생 노후보장 특별법입니까?”라고 묻는다. 한정애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은 7월 29일 오전 긴급브리핑을 열어 “어제 <문화일보>에 세월호 특별법이 ‘평생노후보장 특별법’이라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출처불명의 흑색선전 광고가 실렸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일”이라며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온라인상으로 허위사실이 유포되는 것뿐만 아니라 지하철 등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단지가 대량으로 살포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한 대변인은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며 “전단지의 내용이 새누리당이 ‘대외비’라며 의도적으로 유포시킨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승리만 하면 된다는 것인가”라며 배후로 새누리당을 지목했다. 새정치연합이 문제삼은 전단지는 최근 ‘일베저장소’ 등에 올라온 것이기도 하다. 일베에 게재된 전단지에는 “세월호 특별법입니까? 평생 노후보장 특별법입니까”라는, <문화일보>에 실렸던 제목과 동일한 제목이 빨간 글씨로 적혀 있기도 하다. 한 일베 회원은 지난 22일 문제의 전단지 전문을 게재한 뒤,“어버이연합에서 제작할 세월호 관련 전단지”라면서 “21일 프린터로 소량 인쇄를 해서 광화문 KT 앞에서 배포를 했지만 22일 대량 인쇄 주문 들어간다”고 밝히기도 했다.[144] 부적절한 홍보 코오롱스포츠는 할인 행사 문의로 세월호 침몰 사고를 당한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며 "더 늦기 전에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 논란이 있다. 이에 코오롱스포츠 측은 트위터에 해당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145][146] 종교계(목사)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는 지난 4월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가주(캘리포니아) 사랑의 교회 세미나에서 '국민정서 미개' 글로 물의를 일으킨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의 아들을 두둔하며 "정몽준씨 아들이 미개하다고 그랬잖아요. 그건 사실 잘못된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거든요"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광작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부회장은 지난 5월 20일 한기총 긴급임원회의에서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될 일이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가족들은 "희생당한 학생을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고 적시한 것은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일 뿐 아니라, 죽은 학생들의 부모에 대해서도 명예훼손 또는 모욕적 표현에 해당한다"며 이들을 고소하였다.[147] 해병대 전우회 4월 19일에 진도에 도착한 광주·전남 해병대 전우회측은 민간 잠수단체인 한국수중환경협회가 바다 구조를 나가 천막을 비워둔 사이에 그 천막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그 협회가 달아놓았던 협회의 현수막을 완전히 가리면서 '해병대 특수구조대 지휘본부'라는 자신들의 현수막을 동의도 없이 달아놓았다.[148] 한국수중환경협회는 사고 발생 직후 일찌감치 도착해 성실히 구조 활동을 하던 단체였고, 그 날도 회원 한 명이 구조 활동을 하다가 눈 부상까지 당했던 상황이었다.[149] 항의를 받은 뒤 협상 끝에 현수막을 위 아래로 나란히 거는 것으로 일단락 됐으나, 현장 자원봉사자들이 이런 자초지종을 트위터에 올려 해당 해병전우회원들이 누리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148] 길환영 사장의 사고 현장 기념촬영 한국방송공사 노조 특보에 따르면, 길 사장은 사고 직후인 4월 19일 침몰지점 200m 앞에서 생방송 중이던 KBS 페리 선박을 10여명의 수행단과 함께 찾았다. 여기서 길 사장은 “이왕 온 김에 모두 사진 한 번 찍자”라고 말했고, 사장 지시에 따라 휴식 중이던 방송요원들 15명이 불려나와 사진을 찍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길 사장은 이후에도 “다른 스탭들도 다 오라고 하지”라며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 30여명과 모여 한 차례 더 사진을 찍었다. 해당 사진은 사장 전속 사진사가 현장에 동행하지 않아 국장급 인사가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KBS 노조는 “관광지 등에서 흔히 단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그대로였다”며 “그들이 페리 선상에서 두 차례 촬영 포즈를 취하는 바로 앞 200미터 전방에서는 꽃다운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죄 없는 300여명이 침몰한 세월호 속에 갇혀 생사를 넘나들고 있고 그 주변에는 어떻게든 선내에 진입하기 위한 잠수부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직원 격려 차원이었다는 사측의 해명에 대해서는 “버젓이 단체사진을 찍어댄 행위가 직원 격려라는 황당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라며 “최소한의 철학도 갖추지 못한 상식 이하의 행위이자 생사를 넘나들던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한, 반인륜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특히 노조는 기념사진 촬영 다음날 행정안전부 국장이 사고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가 직위해제되는 등 논란이 일고 노조가 취재에 들어가자, 사측이 입단속을 시키고 사진을 삭제하는 등 증거인멸에 나섰다고 주장했다.[150] 분향하다 쫒겨난 KBS 간부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한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KBS 간부들이 8일 오후 경기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가 유가족들로부터 뺨을 맞는 등 격한 항의를 받았다.[151] 이에 KBS 측은 9일 새벽,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조문 갔던 보도본부 간부들이 폭행·억류당했습니다'라는 제목의 공식입장을 전했다. 이들은 폭행과 장시간 억류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라고 밝혔다.[152] 정부 관계자와 언론의 부적절한 남도국악원 숙소 점거 국립남도국악원 숙소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쓰자고 건의했지만 거절한 사실이 확인됐다. 해당 숙소는 KBS, KTV, 정부 부처 관계자가 사용했다.국립남도국악원 시설담당 관계자는 9일 "전남 진도 관내에서 한국전력과 경찰서 관계자 등이 모여 지난달 19일 기관단체장 회의를 했다"며 "당시 숙소 관련 시설이 부족하다는 얘기에 원장이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진도 팽목항에서 차로 40분 거리(약 23km)에 있는 진도체육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남도국악원은 차로 20분 거리(약 10km)에 위치해 있으며 50여명 수용 가능한 A동은 공사 중이지만, 6인실과 8인실 등 총 15개실이 있는 B동에는 9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남도국악원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전남도청, 해양수산부, 교육부 직원들이 진도 관내 숙소가 없다며 숙소를 이용했다. 또 KBS와 KTV 관계자도 해당 숙소를 이용했다. 이들은 지난 2일까지 남도국악원을 숙소로 사용했으며 하루 동안 제일 많이 이용한 규모는 80여명으로 전해졌다. 국악원은 지난 2일 진도 관내 다른 숙박업소 이용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정부 부처 관계자들의 숙소 이용을 금지했다. [153] 해군 참모 총장의 첨단 구조함 통영함 투입 명령 묵살 의혹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잠수사들의 처우 실종자 수색을 강행하고 있는 잠수사들이 식사도, 숙소도 형편 없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세월호 선미 쪽 수색을 맡았던 민간 잠수사들을 통해 입수한 최근 식사 모습 사진 중 반찬을 보면 단무지와 무침, 그리고 김치 뿐이었고, 그마저 식었다고 잠수사는 전한다. 심지어 밥을 나르던 중에 바닷물까지 섞인 적도 있다고 전해졌다. 취침 공간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전기 장판이 없어 찬 바닥에서 잠을 잤고, 낮에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곳은 햇볕 아래 뿐이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기 장판을 구해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고 한다.[154] 새정치민주연합 김현미 의원은 6월 16일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구조작업하는 잠수사에게 두 달 간 임금이 단 한 푼도 지급되지 않았다"며 잠수사 처우 개선을 정부에 촉구했다. 김 의원은 "잠수사에 대한 임금 산정 기준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면서 "식대조차 지급되지 않아서 이들이 속한 언딘(민간 잠수업체)이란 회사에서 대신 식대를 지급하거나 유가족이 식대를 지급하는 일도 있다"고 주장했다.[155] 논란이 불거진 다음 날인 6월 17일 정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민간 잠수사에게 지급할 수난구호비용 지급방안을 심의 의결했다. 잠수사 수난구호비용은 위험한 환경에서 장기간 작업을 고려해 세금을 포함 1일 98만원으로 책정됐으며 해양경찰청 자체 예산으로 즉시 지급할 방침이다.[156] 각주[편집] ↑ 류정화 (2014년 4월 18일). “최첨단 수상구조함 '통영함', 구조에 투입 못 해 논란”. JTBC. 2014년 4월 18일에 확인함.  ↑ “<세월호참사> 미국 원격조종 무인잠수정, 효과는?”. 연합뉴스. 2014년 4월 21일. 2014년 4월 21일에 확인함.  ↑ 통영함 투입 지시·각서까지 썼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끝내 투입 안해 미스터리 - 국민일보, 2014-05-12 ↑ Monica Mark. Nigerian sailor 'a phenomenon' for surviving in air pocket for 60 hours. The Guardian. 12 June 2013. ↑ 손석희. “이종인 "공기 주입, 생존자 있을 만한 곳에 해야..조타실은 의문"세월호 사고원인 '변침' 잠정결론 ... 시간대별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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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보싱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제 보싱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조제 보싱와 개인 정보전체 이름 José Bosingwa da Silva출생일 1982년 8월 24일(1982-08-24) (36세)출생지 콩고 민주 공화국 음반다카키 183 cm포지션 풀백 (오른쪽)청소년 클럽 기록1996-19971997-2000 포르노스 데 아우고드레스 보아비스타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2000-20032000-20012003-20082008-20122012-20132013-20152016 보아비스타 → 프레아문데 (임대) 포르투 첼시 퀸스 파크 레인저스 트라브존스포르 트라브존스포르 0410(0)0110(0)1070(3)0890(3)0230(0) 0510(0) 0120(0)국가대표팀 기록‡2003-2004 2004 2007-2015 포르투갈 U-21 포르투갈 U-23포르투갈 0180(0) 0270(0)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5년 5월 31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5년 3월 29일 기준이다. 주제 보싱와 자 시우바 (포르투갈어: José Bosingwa da Silva, 1982년 8월 24일 ~ )는 포르투갈 출신의 옛 축구 선수이다. 그의 아버지는 포르투갈인이며, 어머니는 콩고 민주 공화국인인 뮬라토이다.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끊임없는 오버래핑과 날카로운 크로스가 강점이다. 수비력도 준수한 편인데, 태클이나 대인 방어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며, 상대를 비생산적인 지역으로 공을 몰고 가도록 하는 수비 방식을 선호한다. 목차 1 클럽 경력 2 특이 사항 3 국가대표팀 3.1 경력 3.2 수상 클럽 경력[편집] 어린 시절 포르투갈로 건너온 보싱와는 보아비스타 FC 유스 출신으로 처음에는 주로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가끔은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뛰었다. 2000-01 시즌, 포르투갈의 2부 리그 팀인 SC 프레아문데에서 성인 데뷔 무대를 치렀다. 2001-02 시즌부터는 친정팀인 보아비스타 FC에서 활약했다. 2002-03 시즌 주전 자리를 확보한 보싱와는 당시 FC 포르투의 감독이었던 조제 모리뉴의 눈에 띄었고, 2003년 여름, FC 포르투로 이적하였다. 2003-04 시즌에는 포지션 경쟁자인 파울루 페헤이라에 밀려 주전으로 기용되지는 못했으나, 2004년 5월 파울루 페헤이라가 첼시 FC로 이적하면서 2004-05 시즌부터 FC 포르투의 주전 오른쪽 풀백으로 자리잡았다. 2008년 5월, 첼시 FC로 이적하였지만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011-2012 시즌이 끝난 후 계약기간 만료로 방출된다. 특이 사항[편집]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 4강 1차전에서 경고 누적으로 결장한 애슐리 콜을 대신해 왼쪽 풀백으로 출전, FC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를 막아내며 첼시 FC의 무실점에 기여하였다. 국가대표팀[편집] 경력[편집] 2004년 하계 올림픽 국가대표 UEFA 유로 2008 국가대표 수상[편집] UEFA 유로 2008 올스타 팀 vdeh트라브존스포르 – 현재 명단 -- 외뮈르 -- 카라 -- 은드와예 -- 더글라스 프랑쿠 테이셰이라 -- 젱긴 -- 알바라도 -- 카스티요 -- 타슈 -- 알산 -- 부랄 -- 아르타슬란 -- 듀리차 -- 이바녜스 -- 베로 -- 메키지 -- 베시르 -- 데미르 -- 니잠 -- 악바슈 -- 윰루 -- 오나지 -- 요쿠슐루 -- 크브락 -- 오스카르 레네 카르도소 마린 -- 후르마즈 -- 외뷔치 -- 셰이다예프 -- 을마즈 -- 카라데니즈 -- 아칵포 -- 데미록 -- 차크르 -- 에르도안 -- 야즈즈 -- 야브루 -- 석현준 감독: 에르순 야날 vdeh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 2004년 하계 올림픽 1 모레이라 2 세르지오 3 메이렐르스 4 B. 알베스 5 코스타 (주장) 6 메이라 7 호날두 8 비아나 9 알메이다 10 마르틴스 11 히베이루 12 프레차우트 13 보아 모르테 14 보싱와 15 로렌코 16 주앙 파울로 17 다니 18 발르 감독: 호망 vdeh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2008 1 히카르두 2 페헤이라 3 알베스 4 보싱와 5 메이라 6 메이렐르스 7 호날두 8 프티 9 알메이다 10 모티뉴 11 시망 12 누누 13 미겔 14 히베이루 15 페페 16 카르발류 17 쿠아레즈마 18 벨로주 19 나니 20 데쿠 21 누누 고메스 (주장) 22 파트리시우 23 포스티가 감독: 스콜라리 이 글은 축구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제_보싱와&oldid=24384557" 분류: 198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포르투갈의 축구 선수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보아비스타 FC의 축구 선수FC 포르투의 축구 선수첼시 FC의 축구 선수퀸스 파크 레인저스 FC의 축구 선수트라브존스포르의 축구 선수콩고 민주 공화국계 포르투갈인2004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UEFA 유로 2008 참가 선수포르투갈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포르투갈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잉글랜드의 외국인 축구 선수터키의 외국인 축구 선수포르투갈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포르투갈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프리메이라리가의 축구 선수쉬페르리그의 축구 선수잉글랜드에 거주한 포르투갈인포르투갈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포르투갈 U-15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포르투갈 U-16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포르투갈 U-17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포르투갈 U-18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숨은 분류: 포르투갈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축구인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ietuviųMalagasyМакедонскиМонголमराठी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Kiswahili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18: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냉장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냉장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가정용 냉장고. 가정용 냉장고의 홈바. 이렇게 냉장고의 문에 자주 쓰는 것을 보관하는 문이 있기도 한다. 냉장고(冷藏庫, 문화어: 랭장고) 또는 냉동고(冷凍庫, 문화어: 랭동고), 냉동기(冷凍機, 문화어: 랭동기)는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저온으로 신선하게 보관하는 장치이다. 세탁기와 마찬가지로 주로 흰색으로 만들어지며, 가정에서는 프레온 같은 냉매의 기화열을 이용한 전기냉장고를 주로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965년에 주식회사 금성사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목차 1 원리 2 구조 3 냉동고 4 각주 5 같이 보기 6 참고 자료 7 외부 링크 원리[편집] 압축 냉동 사이클 – A: 열방출 공간 (부엌), B: 열흡수 공간 (냉장고 안), I: 절연(단열재), 1: 응축기, 2: 팽창 밸브, 3: 증발기, 4: 압축기 액체가 기화할 때 밖으로부터 열을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하였다. 냉각시키는 데 쓰이는 물질을 ‘냉매’(冷媒)라고 한다. 암모니아나 프레온 12 등의 냉매를 열이 잘 전도되는 용기에 넣고, 단열재로 둘러싼 상자의 상층부에 놓고서 냉매를 기화시키면 상자 속은 냉장고가 된다. 단열재는 냉장고의 바깥상자와 속상자의 사이에 넣으며, 글라스 울이나 포말 플라스틱(泡沫 plastic)이 사용되고 있다. 냉매는 증기가 되고 다시 액체로 액화시켜서 되풀이하여 사용한다. 냉매의 순환방식으로는 압축식과 흡수식이 있다. 보통 가정용 전기냉장고는 압축식이고 가스냉장고는 흡수식이다.[1] 구조[편집] 전기냉장고의 냉각작용은 압축기·방열기(放熱器)·모세관·냉각기로 된 냉동사이클에 의해 이루어진다. 냉동사이클 속에는 '프레온12'라는 휘발성이 강한 냉매가 봉입(封入)되어 있다.[2] 압축기로 고압이 된 냉매 가스는 방열기의 가느다란 파이프를 지나는 동안에 열을 방출한다. 다시 말하면 바깥 공기로 냉각되어 액체 상태가 되어 모세관을 지나서 냉각기에 오면 주위에서 열을 빼앗으면서 갑자기 증발하는데, 이 때 냉각작용을 일으킨다. 냉장고 속의 온도는 증발기의 온도로 작동하는 온도조절기(thermostat)의 스위치로 압축기를 작동시키거나 정지시키면서 조절한다.[3] ‘냉동실’은 냉동기로 둘러싸인 작은 칸을 특별히 별개의 문으로 차단시킨 것으로서 -20℃ 정도까지 내려가게 할 수 있다. 냉동기에 생기는 서리는 히터로 녹이거나 전환(轉換)코크로 온도가 높은 고압냉매를 응축기를 통과시키지 않고 직접 냉동기로 흘려서 자동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데, 이 기구를 ‘자동 서리 제거 장치’라고 한다.[3] 냉동고[편집] 냉동고는 가정, 산업, 상업용으로 쓰인다. 대부분의 냉동고는 0 °F (−18 °C) 정도로 맞추어져 있다. 가정용 냉동고는 냉장고 안에 별도의 칸막이로 포함되어 있거나 별도의 제품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대용량 냉동고가 대세다. 각주[편집] ↑ 냉장고, 《글로벌 세계 대백과》 ↑ 환경 문제로 프레온 12는 1990년대 이후로 R134a로 대체되었다. ↑ 가 나 전기냉장고,《글로벌 세계 대백과》 같이 보기[편집] 에너지 스타 흡수 냉동기 김치냉장고 미니바 4도어냉장고 매직바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냉장고 위키낱말사전에관련된 항목이 있습니다. 냉장고 냉장고의 역사 전거 통제 GND: 4133461-9 NDL: 00569362 이 글은 기술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전자제품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냉장고&oldid=23546268" 분류: 가전제품잉글랜드의 발명품미국의 발명품숨은 분류: 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위키낱말사전과 연결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기술에 관한 토막글전자제품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Boarisch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Mìng-dĕ̤ng-ngṳ̄НохчийнTsetsêhestâheseکوردیQırımtatarca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eilge贛語GalegoગુજરાતીGaelgHausaעבריתहिन्दीHrvatskiKreyòl ayisyen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Patois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ಕನ್ನಡKurdîКыргызчаLatinaLadinoLëtzebuergeschLingálaLietuviųLatviešuМокшеньОлык марий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Bahasa MelayuMirandésPlattdüütschNedersaksiesNederlandsNorsk nynorskNorskNouormandOccitanLivvinkarjala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संस्कृतम्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ChiShonaShqipСрпски / srpskiSeelterskBasa SundaSvenskaKiswahiliதமிழ்తెలుగుТоҷикӣ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WalonWinaray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7일 (일) 07: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는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의 사운드 트랙 시리즈이다. 목차 1 00 ST@RTER BEST 2 01 Star!! 3 02 Memories 4 03 -LEGNE- 적대하는 검 빛의 선율 5 04 Happy×2 Days 6 05 LET'S GO HAPPY!! 7 06 ØωØver!! 8 07 갓 나온 Evo! Revo! Generation! 9 08 GOIN'!!! 10 각주 11 외부 링크 00 ST@RTER BEST[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0 ST@RTER BESTCINDERELLA PROJECT[1]의 베스트 음반발매일 2015년 1월 21일장르 J-POP (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CINDERELLA PROJECT[1] 연표 ANIMATION PROJECT 00 ST@RTER BEST(2015년) ANIMATION PROJECT 01 Star!!(2015년) 2015년 1월 21일 발매. 'CINDERELLA MASTER'에서 애니메이션의 메인이 되는 신데렐라 프로젝트의 멤버 14명의 악곡을 수록한 베스트 앨범. 수록곡 Never say never 노래: 시부야 린 (후쿠하라 아야카) 작사·작곡: NBGI (토야마 아키타카), 작사: NBGI (야시로 유타), 편곡: 세키 쥰지로우 안즈의 노래 노래: 후타바 안즈 (이가라시 히로미) 작사·작곡·편곡: NBGI (사토 타카후미), 작사: NBGI (야시로 유타) 쇼콜라·티아라 노래: 미무라 카나코 (오오츠보 유카) 작사: 후루야 신, 작곡·편곡: NBGI (kyo) DOKIDOKI 리듬 노래: 죠가사키 리카 (야마모토 노조미) 작사·작곡·편곡: NBGI (사토 타카후미) 꽃봉오리 꿈꾸는 광시곡 ~혼의 인도~ 노래: 칸자키 란코 (우치다 마아야) 작사: NBSI (히가시노미야 아야), 작곡·편곡: NBSI (히로카와쿄 추니), 편곡: NBSI (후치가다니 조지) 조르기 Shall We~? 노래: 마에카와 미쿠 (타카모리 나츠미) 작사: azusa, 작곡·편곡: NBSI (사토 타카후미) 마시멜로☆키스 노래: 모로보시 키라리 (마츠자키 레이) 작사·작곡·편곡: NBSI (토리네) S(mile)ING! 노래: 시마무라 우즈키 (오오하시 아야카) 작사: NBSI (야시로 유타), 작곡·편곡: NBSI (Yoshi) Twilight Sky 노래: 타다 리이나 (아오키 루리코) 작사·작곡·편곡: NBSI (와타나베 료) 세 개의 별☆☆★ 노래: 혼다 미오 (하라 사유리) 작사: NBSI (야시로 유타), 작곡·편곡: NBSI (kyo) Romantic Now 노래: 아카기 미리아 (쿠로사와 토모요) 작사: NBSI (MC TC), 작곡·편곡: NBSI (Taku Inoue) 비너스 신드롬 노래: 닛타 미나미 (스자키 아야) 작사: 후루타니 신, 작곡·편곡: NBSI (kyo) 바람색 멜로디 노래: 오가타 치에리 (오오조라 나오미) 작사·작곡·편곡: NBSI (토리네) You're stars shine on me 노래: 아나스타샤 (우에사카 스미레) 작사: 카이다 유리코, 작곡·편곡: NBSI (코바야시 케이키) 전진하라☆소녀여 ~jewel parade~ 노래: CINDERELLA PROJECT 작사: 모리 유리코, 작곡·편곡: 타나카 히데카즈 (MONACA) 01 Star!![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1 Star!!CINDERELLA PROJECT의 싱글발매일 2015년 2월 18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 (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 모리 유리코작곡·편곡: 타나카 히데카즈 (MONACA)CINDERELLA PROJECT 싱글 연표 ANIMATION PROJECT 00 ST@RTER BEST(2015년) ANIMATION PROJECT 01 Star!!(2015년) ANIMATION PROJECT 08 GOIN'!!!(2015년) 2015년 2월 18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의 주제가와 제1화 삽입곡·엔딩을 수록한 CD. 초회 한정반에는 Blu-ray Video로서 애니메이션 OP의 논테롭판, Blu-ray Audio로서 CD와 같은 곡을 각각 수록한 Blu-ray DISC가 부속된다. 수록곡 Star!! 가: CINDERELLA PROJECT 작사: 모리 유리코, 작곡·편곡: 타나카 히데카즈 (MONACA) 부탁해! 신데렐라 가: 타카가키 카에데 (하야미 사오리), 죠가사키 미카 (요시무라 하루카), 코히나타 미호 (츠다 미나미), 토토키 아이리 (하라다 히토미), 카와시마 미즈키 (토야마 나오), 히노 아카네 (아카사키 치나츠), 코시미즈 사치코 (타케타츠 아야나), 사쿠마 마유 (마키노 유이), 시라사카 코우메 (오우사키 치요) 작사: marhy, 작곡·편곡: BNSI (우치다 테츠야) 메시지 가: 시마무라 우즈키 (오오하시 아야카), 시부야 린 (후쿠하라 아야카), 혼다 미오 (하라 사유리)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편곡: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Star!! 오리지널 가라오케 02 Memories[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2 MemoriesLOVE LAIKA[닛타 미나미(스자키 아야)·아나스타샤(우에사카 스미레)]의 싱글발매일 2015년 3월 18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 (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 카이다 유리코작곡: ESTi편곡: ESTi, BNSI (kyo)LOVE LAIKA[닛타 미나미(스자키 아야)·아나스타샤(우에사카 스미레)] 싱글 연표 - ANIMATION PROJECT 02 Memories(2015년) - 2015년 3월 18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서 결성된 닛타 미나미와 아나스타샤의 유닛 'LOVE LAIKA'의 데뷔곡과 엔딩의 리믹스판을 수록한 CD. 수록곡 Memories 노래: LOVE LAIKA 작사: 카이다 유리코, 작곡: ESTi, 편곡: ESTi, BNSI (kyo) 저녁노을 프레젠트 -LOVE LAIKA 리믹스 노래: LOVE LAIKA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 BNSI (Yoshi), 편곡: BNSI (Yoshi),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보너스 드라마 '매직 아워- LOVE LAIKA 특별편' Memories 오리지널·가라오케 03 -LEGNE- 적대하는 검 빛의 선율[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3 -LEGNE- 仇なす剣 光の旋律Rosenburg Engel[칸자키 란코 (우치다 마아야)]의 싱글발매일 2015년 3월 25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 BNSI (히가시노미야 아야)작곡: 온다 료헤이편곡: TAKTRosenburg Engel[칸자키 란코 (우치다 마아야)] 싱글 연표 - ANIMATION PROJECT 03 -LEGNE- 적대하는 검 빛의 선율(2015년) - 2015년 3월 25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서 결성된 칸자키 란코의 솔로 유닛 "Rosenburg Engel"의 데뷔곡과 엔딩 테마의 리믹스 버전을 수록한 CD. 보너스 드라마는 칸자키 란코 특유의 난해한 대사가 있기 때문에, 소책자에 드라마의 각본과 대사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수록곡 -LEGNE- 적대하는 검 빛의 선율 노래: Rosenburg Engel 작사: (히가시노미야 아야), 작곡: 온다 료헤이, 편곡: TAKT (TRYTONELABO) 저녁노을 프레젠트 -Rosenburg Engel 리믹스- 노래: Rosenburg Engel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 BNSI (Yoshi), 편곡: BNSI (Yoshi),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보너스 드라마「매직 아워-Rosenburg Engel 특별편」 -LEGNE- 적대하는 검 빛의 선율 오리지널·가라오케 04 Happy×2 Days[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4 Happy×2 DaysCANDY ISLAND[후타바 안즈 (이가라시 히로미), 미무라 카나코 (오오츠보 유카), 오가타 치에리 (오오조라 나오미)]의 싱글발매일 2015년 4월 1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작곡: 키무라 유키편곡: 오카노 유지로 (TRYTONELABO)CANDY ISLAND[후타바 안즈 (이가라시 히로미), 미무라 카나코 (오오츠보 유카), 오가타 치에리 (오오조라 나오미)] 싱글 연표 - ANIMATION PROJECT 04 Happy×2 Days(2015년) - 2015년 4월 1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서 결성된 후타바 안즈, 미무라 카나코, 오가타 치에리의 유닛 "CANDY ISLAND"의 데뷔곡과 엔딩 테마의 리믹스 버전을 수록한 CD. 수록곡 Happy×2 Days 노래: CANDY ISLAND 작사·작곡: 키무라 유키, 편곡: 오카노 유지로 (TRYTONELABO) 저녁노을 프레젠트 -CANDY ISLAND 리믹스- 노래: CANDY ISLAND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 BNSI (Yoshi), 편곡: BNSI (Yoshi),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보너스 드라마「매직 아워- CANDY ISLAND 특별편」 Happy×2 Days 오리지널·가라오케 05 LET'S GO HAPPY!![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5 LET'S GO HAPPY!!데코레이션[죠가사키 리카 (야마모토 노조미), 모로보시 키라리 (마츠자키 레이), 아카기 미리아 (쿠로사와 토모요)]의 싱글발매일 2015년 4월 8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 유우노 요시미 (IOSYS)작곡·편곡: ARM (IOSYS)데코레이션[죠가사키 리카 (야마모토 노조미), 모로보시 키라리 (마츠자키 레이), 아카기 미리아 (쿠로사와 토모요)] 싱글 연표 - ANIMATION PROJECT 05 LET'S GO HAPPY!!(2015년) - 2015년 4월 8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서 결성된 죠가사키 리카, 모로보시 키라리, 아카기 미리아의 유닛 '데코레이션'의 데뷔곡과 엔딩 테마의 리믹스를 수록한 CD. 수록곡 LET'S GO HAPPY!! 노래: 데코레이션 작사: 유우노 요시미 (IOSYS), 작곡·편곡: ARM (IOSYS) 저녁노을 프레젠트 -데코레이션 리믹스- 노래: 데코레이션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 BNSI (Yoshi), 편곡: BNSI (Yoshi),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보너스 드라마「매직 아워- 데코레이션 특별판」 LET'S GO HAPPY!! 오리지널·가라오케 06 ØωØver!![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6 ØωØver!!*(Asterisk)[마에카와 미쿠 (타카모리 나츠미), 타다 리이나 (아오키 루리코)]의 싱글발매일 2015년 4월 15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 마에카와 미쿠, 타다 리이나작곡: 오노 타카미츠편곡: 타마키 치히로*(Asterisk)[마에카와 미쿠 (타카모리 나츠미), 타다 리이나 (아오키 루리코)] 싱글 연표 - ANIMATION PROJECT 06 ØωØver!!(2015년) - 2015년 4월 15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서 결성된 마에카와 미쿠, 타다 리이나의 유닛 '* (Asterisk)'의 데뷔곡과 엔딩 테마의 리믹스를 수록한 CD. 수록곡 ØωØver!! 노래: *(Asterisk) 작사: 마에카와 미쿠 (타카모리 나츠미), 타다 리이나 (아오키 루리코, 작곡: 오노 타카미츠, 편곡: 타마키 치히로 저녁노을 프레젠트 -*(Asterisk) 리믹스- 노래: *(Asterisk)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 BNSI (Yoshi), 편곡: BNSI (Yoshi),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보너스 드라마「매직 아워- *(Asterisk) 특별판」 ØωØver!! 오리지널·가라오케 07 갓 나온 Evo! Revo! Generation![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7 갓 나온 Evo! Revo! Generation!new generations [시마무라 우즈키 (오오하시 아야카), 시부야 린 (후쿠하라 아야카), 혼다 미오 (하라 사유리)]의 싱글발매일 2015년 4월 22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 미에노 히토미작곡·편곡: BNSI (kyo)new generations [시마무라 우즈키 (오오하시 아야카), 시부야 린 (후쿠하라 아야카), 혼다 미오 (하라 사유리)] 싱글 연표 - ANIMATION PROJECT 07 갓 나온 Evo! Revo! Generation!(2015년) - 2015년 4월 22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서의 시마무라 우즈키, 시부야 린, 혼다 미오의 유닛 'new generations'의 데뷔곡과 엔딩 테마의 리믹스를 수록한 CD. 수록곡 갓 나온 Evo! Revo! Generation! 노래: new genertions 작사: 미에노 히토미, 작곡·편곡: BNSI (kyo) 저녁노을 프레젠트 -new generations 리믹스- 노래: new generations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 BNSI (Yoshi), 편곡: BNSI (Yoshi),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보너스 드라마「매직 아워- new generations 특별판」 갓 나온 Evo! Revo! Generation! 오리지널·가라오케 08 GOIN'!!![편집] THE IDOLM@STER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08 GOIN'!!!CINDERELLA PROJECT[1]의 싱글발매일 2015년 5월 13일포맷 맥시 싱글장르 J-POP(캐릭터 송)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작사·작곡 작사: 모리 유리코, 작곡: 미야자키 마유, 편곡: 미야자키 마코토CINDERELLA PROJECT[1] 싱글 연표 ANIMATION PROJECT 01 Star!!(2015년) ANIMATION PROJECT 08 GOIN'!!!(2015년) - 2015년 5월 13일 발매.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13화에서 사용된 CINDERELLA PROJECT의 신곡과 엔딩 테마, 제 3화에서 사용된 〈TOKIMEKI 에스컬레이트〉의 LIVE MIX를 수록한 CD. 초회한정판에는, 블루레이 비디오로 애니메이션 엔딩의 논크레딧 판이, 블루레이 오디오로 C와 같은 곡을 각각 수록한 블루레이 디스크가 부속된다. 수록곡 GOIN'!!! 노래: CINDERELLA PROJECT[1] 작사: 모리 유리코, 작곡: 미야자키 마유, 편곡: 미야자키 마코토 저녁노을 프레젠트 노래: CINDERELLA PROJECT 작사: 엔도 후비트, 작곡: BNSI (Yoshi), 편곡: BNSI (Yoshi), 타키자와 슌스케 (TRYTONELABO) TOKIMEKI 에스컬레이트 -LIVE MIX- 노래: 죠가사키 미카 (요시무라 하루카) 작사: marhy, 작곡·편곡: BNSI (우치다 테츠야) GOIN'!!! 오리지널·가라오케 저녁노을 프레젠트 오리지널·가라오케 각주[편집] ↑ 가 나 다 시마무라 우즈키·시부야 린·혼다 미오·후타바 안즈·미무라 카나코·죠가사키 리카·칸자키 란코·마에카와 미쿠·모로보시 키라리·타다 리이나·아카기 미리아·닛타 미나미·오가타 치에리·아나스타샤의 14명 외부 링크[편집] 컬럼비아 CINDERELLA GIRLS ANIMATION PROJECT 소개 페이지 vdeh아이돌마스터 시리즈게임 아케이드 Xbox 360 LIVE FOR YOU! SP Dearly Stars 2 신데렐라 걸즈 (스타라이트 스테이지, 뷰잉 레벌루션) SHINY FESTA 밀리언 라이브! (시어터 데이즈) 원 포 올 SideM (LIVE ON ST@GE!) 머스트 송스 플래티넘 스타즈 스텔라 스테이지 샤이니 컬러즈 등장인물 게임 (및 게임 준거작품)의 등장인물 애니메이션 XENOGLOSSIA 2011년판 애니메이션 (극장판) 푸치마스! 신데렐라 걸즈 신데렐라 걸즈 극장 SideM SideM 이유있어 Mini! 파치슬롯 LIVE in SLOT! 텔레비전 드라마 아이돌마스터.KR - 꿈을 드림 (OST 및 관련 악곡 목록) 악곡싱글 CD 미열 S.O.S!! 잔혹이여 희망이 되어라 Colorful Days 오버마스터 The world is all one !! SMOKY THRILL READY!! CHANGE!!!! 라♪ 라♪ 라♪ 원더랜드 M@STERPIECE 라무네빛 청춘 무지갯빛 미러클 Yes! Party Time!! Beyond The Dream Cybernetics Wars ZERO SE@SONAL WINTER CD 시리즈765 프로 MASTERPIECE MASTERWORK MASTER ARTIST MASTER LIVE 패미송 8BIT MASTER SPECIAL DREAM SYMPHONY Vocal Collection BEST OF 765+876=!! MASTER ARTIST 2 ANIM@TION MASTER 생방임까 SPECIAL Twelve Seasons! GRE@TEST BEST! Twelve Campaigns! MASTER ARTIST 3 PLATINUM MASTER MASTER PRIMAL STELLA MASTER 신데렐라 걸즈 CINDERELLA MASTER jewelries! ANIMATION PROJECT STARLIGHT MASTER LITTLE STARS! MASTER SEASONS! 밀리언 라이브! LIVE THE@TER PERFORMANCE LIVE THE@TER HARMONY LIVE THE@TER DREAMERS THE@TER ACTIVITIES LIVE THE@TER FORWARD THE@TER GENERATION M@STER SPARKLE THE@TER BOOST SideM SideM ST@RTING LINE SideM 2nd ANNIVERSARY DISC ORIGIN@L PIECES ANIMATION PROJECT 3rd ANNIVERSARY DISC WORLD TRE@SURE WakeMini! MUSIC COLLECTION THE IDOLM@STER SideM 4th ANNIVERSARY DISC「LIVE in your SMILE/DREAM JOURNEY」 KR KR MUSIC 샤이닝 컬러즈 BRILLI@NT WING FR@GMENT WING 기타 CD MASTER OF MASTER Jupiter The Remixes Collection THE IDOLM@STER TO D@NCE TO 목록 악곡 목록 라디오라디오 오사카 THE IDOLM@STER RADIO THE IDOLM@STER STATION!!! (제1기) animate.tv 라디오de아이마SHOW! Radio For You! P.S. 프로듀서 라디오de아이마STAR☆ 라디오de아이마CHU!! 란티스 웹 라디오 하루카와 야요이의 야요이식 라디오 HiBiKi Radio Station 아이마스튜디오 데레라디 데레라디A 데레라디☆ 초!A&G+ THE IDOLM@STER STATION!!+ 니코니코 생방송 THE IDOLM@STER MillionRADIO CINDERELLA PARTY! THE IDOLM@STER STATION!!! (제2기) 315프로Night! 관련항목 남코 반다이 남코 게임스 아이돌마스터 프로젝트 일본 컬럼비아 란티스 A-1 Pictures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THE_IDOLM@STER_CINDERELLA_GIRLS_ANIMATION_PROJECT&oldid=19668324" 분류: 아이돌마스터의 음악2014년 음반2015년 싱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9월 25일 (월) 11: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조시 베켓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시 베켓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조시 베켓 Josh Beckett 기본 정보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80년 5월 15일(1980-05-15) (39세) 출신지 미국 텍사스주 스프링 신장 196 cm 체중 99.8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99년 드래프트 순위 1999년 드래프트 1순위 첫 출장 2001년 9월 4일 마지막 경기 2014년 8월 3일 획득 타이틀 3회 올스타 (2007, 2009, 2011) 월드 시리즈 (2003, 2007) 월드 시리즈 MVP (2003)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2007) 연봉 $17,000,000(2014년) 경력 플로리다 말린스 (2001 ~ 2005) 보스턴 레드삭스 (2005 ~ 201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 2014) 조슈아 패트릭 베켓(Joshua Patrick Beckett, 1980년 5월 15일 ~ )는 미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이다. 3회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였던 그는 플로리다 말린스, 보스턴 레드삭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우수한 고등학교 경력 후, 그는 199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2번째 선발과 함께 말린스에 의하여 드래프트 되었다. 그는 말린스와 2003년 월드 시리즈를, 레드삭스와 2007년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였고, 2007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MVP 상과 2003년 월드 시리즈의 MVP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2006년 말린스에서 레드삭스로, 그리고 2012년 레드삭스에서 다저스로 이적되었으며, 둘다 다수의 선수 처리들의 일부로서였다. 베켓은 2013년 시즌의 거의를 놓치는 원인을 가져온 심각한 부상으로부터 회복되었고, 다저스를 위하여 2014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무안타 경기를 투구하여 다저스 역사상 그렇게 하는 데 19번째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즌은 또다시 부상의 이유로 짧아지고, 그해 10월 7일 자신의 은퇴를 공고하였다. 목차 1 초기 생애 2 야구 경력 2.1 플로리다 말린스 (1991 ~ 2005) 2.1.1 마이너 리그 2.1.2 메이저 리그 2.2 보스턴 레드삭스 (2006 ~ 12) 2.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 14) 3 외부 링크 초기 생애[편집] 베켓은 같은 텍사스주 출신 선수들 놀런 라이언과 로저 클레멘스를 우상화 하면서 자라왔다. 청소년으로서 그는 리틀 리그 올스타 팀들에 나왔다. 그는 후에 스프링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등급들과 함께 위기를 가졌고, 자신의 신입생 해 동안 자신의 코치에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그의 코치는 그와 굉장히 좌절하여 그를 팀에서 쫓아냈다. 그는 자신의 2학년 해 번에 성장 급등을 통하여 가면서 자신의 속구에 속력을 추가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성적 평균을 올리고, 팀에 돌아올 수 있었으며 2학년생으로서 1.18의 방어율과 함께 9 승 3 패의 기록을 가졌으며, 3개의 무안타 경기를 던졌다. 고등학교의 주니어로서 베켓은 베이스볼 아메리카에 의하여 최고의 고등학교 팀으로서 국가와 자신의 팀에서 최고의 고등학교 전망으로서 순위에 들어왔다. 그는 13 승 2 패로 갔고, 전부 시즌에서 20명 만의 타자들을 볼넷하는 동안 한 이닝에 2.1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자신의 시니어 시즌에 베켓은 USA 투데이에 의하여 "올해의 고등학교 선수"로 임명되었다. 베켓은 텍사스 A&M 대학교를 위하여 투수로 목적의 편지를 서명하였으나 그와 조시 해밀턴은 199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유용한 최고의 두 선수로서 보였다. 베켓의 파악된 거만에 근심을 가진 탬파베이 데빌레이스는 첫 선택과 함께 해밀턴을 골랐다. 베켓은 플로리다 말린스에 의하여 2번째 선택과 함께 선발되었다. 속구에 자신의 신임을 보인 베켓은 2년 안에 메이저 리그로 이루어 2001년에 의하여 올스타 경기에서 활약할 것을 예언하였다. 야구 경력[편집] 플로리다 말린스 (1991 ~ 2005)[편집] 마이너 리그[편집] 베켓은 자신이 잠시 블린 주니어 칼리지에 등록한 동안 말린스와 함께 일정 기간 동안 계속되는 협상들에 관여되었으나 1999년 8월 28일 결국적으로 4년, 7백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다. 그의 3십 2억 2천 5백만 달러의 서명 보너스는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를 제외한 메이저 리그 명부에 말린스가 지불한 것보다 컸다. 2000년 3월 베켓은 한 시간에 94에서 96 마일로 시간이 매겨진 속구와 좋은 커브와 함께 팀과 자신의 첫 봄 훈련에서 말린스에 인상을 주었다. 그는 또한 다른 선수가 기증한 것보다 더 많이 팀의 자선 재단에 10만 달러를 기증하여 팀에 자신의 위임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프로 데뷔를 이루는 데 클래스 A 중서부 리그의 케인카운티 쿠가스에 지정되었다. 쿠가스를 위한 오프닝 데이의 출발 선수로서 그는 4개의 이닝을 투구하고, 앨버트 푸홀스에 의한 2루타에 하나의 만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그 시즌에 베켓은 부상들을 겪었다. 그는 쿠가스를 위하여 13개의 경기에서 투구하고, 2.12의 방어율과 61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2 승 3 패의 기록과 함께 끝냈다. 그는 말린스의 최고 전망으로서 베이스볼 아메리카에 의하여 선발되었고, 중서부 리그에서 최고의 속구를 가짐은 물론 전체 마이너 리그에서 19번째 최고였다. 그는 또한 올스타 퓨처스 대회에 활약하는 데 선발되기도 하였다. 말린스는 2001년 시즌의 시작에서 플로리다 주립 리그의 브레버드카운티 매너티스로 지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38과 3분의 2 이닝에서 득점을 허용하지 않았고, 13개의 경기에서 1.23의 방어율과 101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6 승 0 패로 갔다. 말린스의 총지배인 데이브 돔브로스키는 그의 향상에 "그는 내가 여태까지 교제한 아무 전망 선수로서 플로리다 주립 리그에 투수를 맡았다"고 의견을 남겨 동부 리그의 더블 A 포틀랜드 시독스로 진급으로 이끌었다. 베켓은 6월 16일 자신의 시독스 데뷔에서 자신이 향한 첫 9명의 타자들 중 8명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8월 13일 그는 빙엄턴 메츠를 상대로 무안타를 던지는 데 2명의 다른 시독스 투수들과 합쳤다. 팀을 위한 13개의 출발 경기에서 그는 8 승 1 패의 기록을 가졌고, 102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그는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로서 베이스볼 아메리카, USA 투데이와 스포팅뉴스에 의하여 선발되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또한 그를 말린스의 최고 전망과 야구의 전부에서 3번째로 최고 선수로 랭킹에 놓았으며, 말린스는 그에게 "올해의 말린스 조직상 마이너 리그 선수"로서 그에게 수여하였다. 메이저 리그[편집] 베켓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데뷔는 2001년 9월 4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였고, 자신의 첫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우승을 들어올리는 데 6개의 봉쇄 이닝에 하나의 안타를 내주었다. 그는 경기에서 또한 2루타를 매기기도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블라디미르 게레로에 2개의 득점 홈런을 내주기 전에 자신의 첫 10개의 이닝에서 하나의 득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4개의 경기가 시작되면서 그는 2001년 시즌을 2 승 2 패의 기록과 1.50의 방어율과 끝냈다. 2002년 물집의 문제들에 의하여 방해된 베켓의 하이라이트는 하나의 경기에서 12명의 엑스포스 선수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킨 6월 21일에 있었으며, 9 이닝 경기에서 17개 스트라이크아웃의 말린스 기록에 몇몇의 구원 투수와 결합시켰다. 그해 말린스를 위한 23개의 출연(2개의 구원 투수 출연을 포함)에서 그는 4.10의 방어율과 113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6 승 7 패였다. 베켓은 2003년 말린스의 오프닝 데이 출발 투수로 임명되었고, 23세의 나이로 팀 역사상 최연소 오프닝 데이 출발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2개의 실책과 하나의 패스된 공의 결과로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3루에서 5개의 상대 팀의 실수로 얻은 득점을 매기면서 2와 3분의 2 이닝 만을 지속하였다. 그는 감독 제프 토보그를 해고시키는 데 공헌한 부상들 중의 일부로서 5월 중순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가 삐면서 즉시 장애자 명단에 놓였다. 그는 7월 1일 부상으로부터 돌아와 9 승 8 패의 기록, 3.04의 방어율과 152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시즌을 끝냈다. 베켓은 2003년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의 오프닝 경기에서 자신의 포스트시즌 데뷔를 이루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7개의 이닝에서 하나 만의 득점을 허용하였으나 제이슨 슈미트가 완료의 경기 봉쇄를 투구하면서 패배를 얻었다. 하지만 말린스는 4개의 경기에서 시리즈를 우승하는 데 돌아왔다. 그의 다음 출발 경기인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그해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첫 경기에서 첫 이닝에 그가 4개의 득점을 허용하면서 잘 되어가지 않았다. 말린스는 복수하고, 여분의 이닝에서 경기를 우승하였다. 컵스는 다음 3개의 경기를 차지하고, 베켓이 5번째 경기에서 투수판으로 돌아올 때 시리즈를 우승하는 데 한번 더만을 필요하였다. 그는 경기에서 본루에 도달하는 데 3명만의 컵스 선수들을 허용하였다. 말린스는 또한 6번째 경기를 차지하여 유명한 스티브 바트먼의 사고에 부분적으로 감사하였다. 7번째 경기에서 이틀의 휴식에 베켓은 불펜의 밖으로 나와 4개의 이닝을 투구하고, 말린스는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을 잡는 데 9 대 6으로 우승하였다. 말린스가 뉴욕 양키스를 꺾으면서 3일간 휴식에 강한 상연들과 함께 베켓은 2003년 월드 시리즈 MVP 상을 수상하였다. 3번째 경기에서 그는 10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키고, 7과 3분의 1 이닝에서 2개만의 득점을 허용하였으며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6번째 경기에서 그는 완료의 경기에서 양키스를 봉쇄하여 9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켜 시리즈를 잡았다. 베켓은 2004년 다시 말린스를 위하여 오프닝 데이의 출발을 이루어 엑스포스를 상대로 7개의 이닝에서 하나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그는 시즌 동안 장애자 명단에 3개의 여행을 이루었으나 아직도 경력 사상 26개의 출발과 156과 3분의 2 이닝을 투구하였다. 그는 3.79의 방어율과 함께 9 승 9 패였고, 정렬에서 2번째 해를 위하여 152개의 스트라이크아웃을 가졌으나 말린스는 막바지의 분전에 넘어지고, 포스트시즌을 이루지 않았다. 2005년 그는 29개의 경기에서 3.38의 방어율과 166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15 승 8 패였다. 말린스와 함께 자신의 5개 시즌에서 베켓은 106개의 경기에서 41 승 34 패의 기록, 3.46의 방어율을 가졌으며, 총 607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보스턴 레드삭스 (2006 ~ 12)[편집] 2005년 추수감사절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거래에서 베켓은 마이너 리그의 유격수 핸리 라미레스와 투수들 아니발 산체스, 헤수스 델가도와 하비 가르시아를 위하여 3루수 마이크 로웰과 구원 투수 길레르모 모타와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되었다. 베켓과 로웰은 흘려진 샐러리로 노력에서 이적된 말린스 베테랑들의 형저한 명단에 놓였다. 이 일은 조직적으로 시장 수정으로 이름 지엇다. 레드삭스와 자신의 첫 출발에서 베켓은 2006년 4월 5일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우승을 얻는 데 7개의 이닝에서 하나 만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2008년 보스턴 레드삭스 활약 시절의 베켓 5월 20일 인터리그 경기가 열리는 동안 자신이 필리스의 투수 브렛 마이어스를 깊게 데려갈 때 지명 타자의 규칙의 출현 이래 베켓은 35년만에 홈런을 치는 데 첫 레드삭스 투수가 되었다. 7월 18일 그는 2010년을 위하여 1천만 달러의 클럽 선택과 함께 3년, 3천만 달러의 연장 계약을 맺었다. 베켓은 16 승 11 패의 기록과 5.01 방어율과 함께 레드삭스와 자신의 첫 시즌을 완료하였다. 204와 3분의 2 이닝에서 그는 191개의 안타를 내주었고, 74개의 볼넷을 가진 동안 158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그는 36개의 홈런을 허용하기도 하여 메이저 리그에서 2번째로 가장 많은 기록을 동점매겼다. 2007년 시즌의 시작에서 베켓은 더 많은 파괴 투구를 던지고, 적은 속구를 던지는 데 조절하였다. 동시에 그는 힘에 의하여 스트라이크들을 단순히 얻는 것보다 자신의 투구들에 위치를 정하는 것을 배웠다. 베켓은 자신들의 첫 7개의 출발 경기를 우승하는 데 역사상 6명의 레드삭스 투수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지 윈터와 미키 해리스가 한 시즌에 자신들의 첫 7개 출발 경기들을 우승하고, 베이브 루스, 데이브 페리스와 로저 모렛이 한 시즌에 자신들의 첫 8개 출발 경기들을 우승하였다. 강한 전반기 후, 3.44의 방어율과 함께 12 승 2 패의 기록을 게시한 그는 그해 메이저 리그 올스타 경기에 아메리칸 리그 팀으로 선발되었다. 베켓은 2개의 이닝을 투구한 후, 경기에서 승리를 얻어 하나 만의 안타를 내주고 2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베켓은 2005년 이래 하나의 시즌에서 20개의 경기를 우승하는 데 첫 투수가 되어 40개 만의 볼넷과 17개의 홈런 만을 허용하여 20 승 7 패의 기록, 3.27의 방어율, 194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1.14의 삼진률과 함께 시즌을 끝냈다. 베켓은 그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첫 경기를 시작하였고, 8개의 이닝에서 자신이 11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키고 우승을 위하여 6개의 이닝을 투구하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베켓의 2 승 0 패의 기록과 1.93의 방어율은 그에게 그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상을 수여하였다. 그는 그러고나서 출발하고,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2007년 월드 시리즈의 첫 경기를 우승하여 7개의 이닝을 투구하고, 6개의 안타에 하나의 득점을 허용하여 9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레드삭스는 시리즈에서 로키스를 휩쓸었다. 2008년 5월 8일 베켓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브랜던 잉어가 7번째 이닝에서 스윙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킬 때 자신의 1,000번째 경력 스트라이크아웃을 기록하였다. 그는 27개의 출발 경기에서 4.03의 방어율과 함께 12 승 10 패였다.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상대로 2008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의 3번째 경기에서 그는 5개의 이닝에 4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그는 그러고나서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그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2개의 출발을 이루어 9.64의 방어율을 가졌다. 2009년 레드삭스와 함께 자신의 첫 오프닝 데이 출발이 있는 동안 베켓은 레이스에 5 대 3의 승리에서 하나 만의 득점과 2개의 안타를 허용한 7개의 이닝을 통하여 10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4월 14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베켓이 에인절스의 외야수 보비 애브루의 머리 위에 고의적으로 공을 던진 것에 그에게 벌금을 물게 하고, 6개의 경기에 그를 출장 정지 시켰다. 베켓은 후에 출장 정지를 호소하고, 5개의 경기들로 축소되었다. 6월 20일 전 레드삭스의 투수 데릭 로를 상대로 시합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그는 3년만에 자신의 첫 완료 경기 봉쇄 기록을 세웠다. 봉쇄는 레드삭스의 유니폼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7월 5일 그는 그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경기에서 레드삭스를 대표하는 데 선발되었다. 7월 12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완료 경기 봉쇄를 투구하여 자신의 100번째 경력 우승을 기록하였다. 8월 7일 양키스를 상대로 그는 15개의 이닝, 5 시간 33 분의 경기로 변화시킨 전 말린스 동료 선수 A. J. 버넷과 투구 시합에 관여하였다.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끝내기 홈런을 칠 때 15번째의 말기에 결국적으로 경기를 패하였다. 그는 3.86의 방어율과 32개의 출발 경기와 함께 시즌에 17 승 6 패로 갔다. 포스트시즌에 그는 그해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의 2번째 경기에서 에인절스에게 자신의 하나의 출발 경기를 패하였다. 2010년 4월 5일 레드삭스와 베켓은 2014년을 통하여 4년, 6천 8백만 달러의 확장 계약에 동의하였다. 5월 7일 그는 9개의 득점을 허용하고, 8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이 일은 1911년 시즌 동안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잭 쿰스 이래 하나의 경기에서 결합을 가진 메이저 리그 투수로서 처음이었다. 그는 등 아래에 긴장과 함께 5월 19일 장애자 명단에 놓였고, 7월 23일에 복귀하였다. 9월 16일 그는 6번째 이닝에서 레이스의 벤 조브리스트를 상대로 레드삭스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1,000번째 스트라이크아웃을 기록하였다. 그해 21개의 출발 경기에서 그는 5.78의 방어율과 함께 6 승 6 패였다. 2011년 그는 방어율 (2.89), 상대 타구 평균 (.211) 과 삼진율 (1.03)에서 경력 최고 기록을 게시하였다. 그는 30개의 경기에서 13 승 7 패였으며, 자신의 3번째 올스타 경기로 선발되었다. 2011년 시즌의 말기에 레드삭스는 난처하게 되어 플레이오프들로 이루는 데 실패하였다. 베켓과 2명 더의 출발 투수들 존 래키와 존 레스터는 자신들이 투구를 하고 있지 않던 경기가 있는 동안 셋이서 술을 마신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또한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비디오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베켓은 이 일의 지도자로서 주목되었고, 어떤이들은 이 행동을 팀의 부족한 활약을 위한 이유 중의 일부로서 인용하였다. 베켓은 2012년 시즌에 분투하여 레드삭스의 선수로서 5.23의 방어율과 함께 5 승 11 패로 갔다. 8월 19일 양키스를 상대로 6개의 이닝에서 4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7개의 시즌에 그는 89 승 58 패의 기록, 4.17의 방어율과 1,108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레드삭스를 위하여 194개의 정규 시즌 경기를 시작하였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 14)[편집]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함께 2012년 8월 25일 그는 제임스 로니, 이반 데헤수스 주니어, 앨런 웹스터와 임명될 2명의 선수(제리 샌즈와 루비 데 라 로사)를 위하여 에이드리언 곤살레스, 칼 크로퍼드와 닉 푼토와 현금에 1천 1백만 달러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르 이적되었다. 그는 이적 후, 다저스를 위하여 7개의 경기를 출발하고 2.93의 방어율과 함께 2 승 3 패로 갔다. 베켓은 8개의 출발 경기에서 0 승 5 패의 기록과 5.19의 방어율과 함께 2013년 시즌의 초기 일부에서 분투하였다. 그는 사타구니 긴장과 함께 5월 15일 장애자 명단에 놓였다. 장애자 명단에 놓인 동안 그는 자신의 손에 쑤시게 되어 자신이 다시는 투구할 수 없는 것처럼 의심을 표현하였다. 시즌을 끝내는 수술을 피하는 데 노력에서 그가 엄한 갱생 프로그램에 진단되는 동안 한달간 투수 활약으로부터 그를 막았다. 하지만 쑤시는 감각이 6월 후순 베켓이 자신의 투수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는 시도를 할 때 돌아왔다. 그는 그해 7월 10일 그에게 수술을 받도록 요구한 흉곽 배출 증후군과 진단되어 그의 2013년 시즌을 끝냈다. 갈비뼈를 옮긴 것을 포함한 베켓의 수술은 2014년으로 향하는 다저스를 위하여 그에게 의문을 만들었다. 그는 4월 9일 다저스로 돌아와 지난 해 5월 이래 자신의 첫 출발을 이루어 4개의 이닝에서 4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5월 13일 그는 2012년 이래 자신의 첫 우승을 들어올렸다. 2014년 5월 25일 일요일 베켓은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무안타를 던져 다저스 역사상 21번째 무안타이며, 1996년 시즌에 노모 히데오가 그렇게 한 이래 처음이었다. 그는 128개를 투구하고, 6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켰으며 승리로 향하는 도중에 3개의 볼넷을 가졌다. 베켓은 2004년 랜디 존슨이 완벽한 경기(40세)를 던진 이래 무안타를 던지는 데 최연장 투수(34세)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그 경기의 결과로서 "이번 주의 내셔널 리그 선수"로서 명예를 얻었다. 7월 8일 베켓은 시즌이 지나면서 왼쪽 절강이 충돌과 부상을 당하여 장애자 명단에 상륙하였다. 그는 7월 22일에 복귀하였으나 분투하였다. 8월 3일 출발 경기에서 그는 컵스를 상대로 4개의 이닝을 투구할 수 있었다. 9월 3일 다저스의 감독 돈 매팅글리는 기자들에게 베켓의 시즌은 그의 부상의 이유 같이 보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베켓은 그해 10월 7일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조시 베켓 (영어) 경력 통계와 선수 정보 - MLB,  ESPN,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The Baseball Cube,  Baseball-Reference (Minors) vdeh플로리다 말린스 - 2003년 월드 시리즈 우승 1 루이스 카스티요 7 이반 로드리게스 9 후안 피에르 10 레니 해리스 11 알렉스 곤살레스 12 마이크 모데카이 14 토드 홀랜즈워스 18 제프 코나인 19 마이크 로웰 20 미겔 카브레라 21 조시 베켓 (월드 시리즈 MVP) 22 브라이언 뱅크스 25 데릭 리 31 브래드 페니 35 돈트렐 윌리스 38 릭 헬링 40 네이트 범프 41 브래든 루퍼 43 후안 엥카르나시온 45 칼 파바노 49 채드 폭스 52 마이크 레드먼드 55 마크 레드먼 58 마이클 테헤라 74 우게스 어비나 감독 15 잭 맥키언 코치 38 브래드 안스버그 67 피에르 아르세노트 47 제프 콕스 13 아지 기옌 16 페리 힐 28 빌 로빈슨 제프 토보그 vdeh보스턴 레드삭스 - 2007년 월드 시리즈 우승 7 J. D. 드루 10 코코 크리스프 12 에릭 힌스키 13 알렉스 코라 15 더스틴 페드로이아 17 매니 델카먼 18 마쓰자카 다이스케 19 조시 베켓 (ALCS MVP) 20 케빈 유킬리스 23 훌리오 루고 24 매니 라미레스 25 마이크 로웰 (월드 시리즈 MVP) 28 더그 미라벨리 31 존 레스터 32 보비 켈티 33 제이슨 베리텍 34 데이비드 오르티스 37 오카지마 히데키 38 커트 실링 39 카일 스나이더 40 저코비 엘즈버리 48 하비에르 로페스 49 팀 웨이크필드 50 마이크 팀린 51 훌리안 타바레스 58 조너선 파펠본 83 에릭 가녜 감독 47 테리 프랭코나 벤치 코치 2 브래드 밀스 1루 코치 16 루이스 알리세아 타격 코치 29 데이브 매거던 3루 코치 35 드말로 헤일 투수 코치 52 존 패럴 불펜 코치 57 게리 턱 불펜 포수 65 이노 게레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시_베켓&oldid=23932441" 분류: 198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텍사스주 출신 야구 선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플로리다 말린스 선수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선수아메리칸 리그 올스타올스타 퓨처스 게임 참가 선수월드 시리즈 최우수 선수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최우수 선수텍사스 A&M 대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PortuguêsSimple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9일 (금) 09:0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조시 베켓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시 베켓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조시 베켓 Josh Beckett 기본 정보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80년 5월 15일(1980-05-15) (39세) 출신지 미국 텍사스주 스프링 신장 196 cm 체중 99.8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99년 드래프트 순위 1999년 드래프트 1순위 첫 출장 2001년 9월 4일 마지막 경기 2014년 8월 3일 획득 타이틀 3회 올스타 (2007, 2009, 2011) 월드 시리즈 (2003, 2007) 월드 시리즈 MVP (2003)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2007) 연봉 $17,000,000(2014년) 경력 플로리다 말린스 (2001 ~ 2005) 보스턴 레드삭스 (2005 ~ 201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 2014) 조슈아 패트릭 베켓(Joshua Patrick Beckett, 1980년 5월 15일 ~ )는 미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이다. 3회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였던 그는 플로리다 말린스, 보스턴 레드삭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우수한 고등학교 경력 후, 그는 199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2번째 선발과 함께 말린스에 의하여 드래프트 되었다. 그는 말린스와 2003년 월드 시리즈를, 레드삭스와 2007년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였고, 2007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MVP 상과 2003년 월드 시리즈의 MVP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2006년 말린스에서 레드삭스로, 그리고 2012년 레드삭스에서 다저스로 이적되었으며, 둘다 다수의 선수 처리들의 일부로서였다. 베켓은 2013년 시즌의 거의를 놓치는 원인을 가져온 심각한 부상으로부터 회복되었고, 다저스를 위하여 2014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무안타 경기를 투구하여 다저스 역사상 그렇게 하는 데 19번째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즌은 또다시 부상의 이유로 짧아지고, 그해 10월 7일 자신의 은퇴를 공고하였다. 목차 1 초기 생애 2 야구 경력 2.1 플로리다 말린스 (1991 ~ 2005) 2.1.1 마이너 리그 2.1.2 메이저 리그 2.2 보스턴 레드삭스 (2006 ~ 12) 2.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 14) 3 외부 링크 초기 생애[편집] 베켓은 같은 텍사스주 출신 선수들 놀런 라이언과 로저 클레멘스를 우상화 하면서 자라왔다. 청소년으로서 그는 리틀 리그 올스타 팀들에 나왔다. 그는 후에 스프링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등급들과 함께 위기를 가졌고, 자신의 신입생 해 동안 자신의 코치에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그의 코치는 그와 굉장히 좌절하여 그를 팀에서 쫓아냈다. 그는 자신의 2학년 해 번에 성장 급등을 통하여 가면서 자신의 속구에 속력을 추가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성적 평균을 올리고, 팀에 돌아올 수 있었으며 2학년생으로서 1.18의 방어율과 함께 9 승 3 패의 기록을 가졌으며, 3개의 무안타 경기를 던졌다. 고등학교의 주니어로서 베켓은 베이스볼 아메리카에 의하여 최고의 고등학교 팀으로서 국가와 자신의 팀에서 최고의 고등학교 전망으로서 순위에 들어왔다. 그는 13 승 2 패로 갔고, 전부 시즌에서 20명 만의 타자들을 볼넷하는 동안 한 이닝에 2.1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자신의 시니어 시즌에 베켓은 USA 투데이에 의하여 "올해의 고등학교 선수"로 임명되었다. 베켓은 텍사스 A&M 대학교를 위하여 투수로 목적의 편지를 서명하였으나 그와 조시 해밀턴은 199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유용한 최고의 두 선수로서 보였다. 베켓의 파악된 거만에 근심을 가진 탬파베이 데빌레이스는 첫 선택과 함께 해밀턴을 골랐다. 베켓은 플로리다 말린스에 의하여 2번째 선택과 함께 선발되었다. 속구에 자신의 신임을 보인 베켓은 2년 안에 메이저 리그로 이루어 2001년에 의하여 올스타 경기에서 활약할 것을 예언하였다. 야구 경력[편집] 플로리다 말린스 (1991 ~ 2005)[편집] 마이너 리그[편집] 베켓은 자신이 잠시 블린 주니어 칼리지에 등록한 동안 말린스와 함께 일정 기간 동안 계속되는 협상들에 관여되었으나 1999년 8월 28일 결국적으로 4년, 7백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다. 그의 3십 2억 2천 5백만 달러의 서명 보너스는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를 제외한 메이저 리그 명부에 말린스가 지불한 것보다 컸다. 2000년 3월 베켓은 한 시간에 94에서 96 마일로 시간이 매겨진 속구와 좋은 커브와 함께 팀과 자신의 첫 봄 훈련에서 말린스에 인상을 주었다. 그는 또한 다른 선수가 기증한 것보다 더 많이 팀의 자선 재단에 10만 달러를 기증하여 팀에 자신의 위임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프로 데뷔를 이루는 데 클래스 A 중서부 리그의 케인카운티 쿠가스에 지정되었다. 쿠가스를 위한 오프닝 데이의 출발 선수로서 그는 4개의 이닝을 투구하고, 앨버트 푸홀스에 의한 2루타에 하나의 만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그 시즌에 베켓은 부상들을 겪었다. 그는 쿠가스를 위하여 13개의 경기에서 투구하고, 2.12의 방어율과 61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2 승 3 패의 기록과 함께 끝냈다. 그는 말린스의 최고 전망으로서 베이스볼 아메리카에 의하여 선발되었고, 중서부 리그에서 최고의 속구를 가짐은 물론 전체 마이너 리그에서 19번째 최고였다. 그는 또한 올스타 퓨처스 대회에 활약하는 데 선발되기도 하였다. 말린스는 2001년 시즌의 시작에서 플로리다 주립 리그의 브레버드카운티 매너티스로 지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38과 3분의 2 이닝에서 득점을 허용하지 않았고, 13개의 경기에서 1.23의 방어율과 101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6 승 0 패로 갔다. 말린스의 총지배인 데이브 돔브로스키는 그의 향상에 "그는 내가 여태까지 교제한 아무 전망 선수로서 플로리다 주립 리그에 투수를 맡았다"고 의견을 남겨 동부 리그의 더블 A 포틀랜드 시독스로 진급으로 이끌었다. 베켓은 6월 16일 자신의 시독스 데뷔에서 자신이 향한 첫 9명의 타자들 중 8명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8월 13일 그는 빙엄턴 메츠를 상대로 무안타를 던지는 데 2명의 다른 시독스 투수들과 합쳤다. 팀을 위한 13개의 출발 경기에서 그는 8 승 1 패의 기록을 가졌고, 102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그는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로서 베이스볼 아메리카, USA 투데이와 스포팅뉴스에 의하여 선발되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또한 그를 말린스의 최고 전망과 야구의 전부에서 3번째로 최고 선수로 랭킹에 놓았으며, 말린스는 그에게 "올해의 말린스 조직상 마이너 리그 선수"로서 그에게 수여하였다. 메이저 리그[편집] 베켓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데뷔는 2001년 9월 4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였고, 자신의 첫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우승을 들어올리는 데 6개의 봉쇄 이닝에 하나의 안타를 내주었다. 그는 경기에서 또한 2루타를 매기기도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블라디미르 게레로에 2개의 득점 홈런을 내주기 전에 자신의 첫 10개의 이닝에서 하나의 득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4개의 경기가 시작되면서 그는 2001년 시즌을 2 승 2 패의 기록과 1.50의 방어율과 끝냈다. 2002년 물집의 문제들에 의하여 방해된 베켓의 하이라이트는 하나의 경기에서 12명의 엑스포스 선수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킨 6월 21일에 있었으며, 9 이닝 경기에서 17개 스트라이크아웃의 말린스 기록에 몇몇의 구원 투수와 결합시켰다. 그해 말린스를 위한 23개의 출연(2개의 구원 투수 출연을 포함)에서 그는 4.10의 방어율과 113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6 승 7 패였다. 베켓은 2003년 말린스의 오프닝 데이 출발 투수로 임명되었고, 23세의 나이로 팀 역사상 최연소 오프닝 데이 출발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2개의 실책과 하나의 패스된 공의 결과로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3루에서 5개의 상대 팀의 실수로 얻은 득점을 매기면서 2와 3분의 2 이닝 만을 지속하였다. 그는 감독 제프 토보그를 해고시키는 데 공헌한 부상들 중의 일부로서 5월 중순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가 삐면서 즉시 장애자 명단에 놓였다. 그는 7월 1일 부상으로부터 돌아와 9 승 8 패의 기록, 3.04의 방어율과 152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시즌을 끝냈다. 베켓은 2003년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의 오프닝 경기에서 자신의 포스트시즌 데뷔를 이루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7개의 이닝에서 하나 만의 득점을 허용하였으나 제이슨 슈미트가 완료의 경기 봉쇄를 투구하면서 패배를 얻었다. 하지만 말린스는 4개의 경기에서 시리즈를 우승하는 데 돌아왔다. 그의 다음 출발 경기인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그해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첫 경기에서 첫 이닝에 그가 4개의 득점을 허용하면서 잘 되어가지 않았다. 말린스는 복수하고, 여분의 이닝에서 경기를 우승하였다. 컵스는 다음 3개의 경기를 차지하고, 베켓이 5번째 경기에서 투수판으로 돌아올 때 시리즈를 우승하는 데 한번 더만을 필요하였다. 그는 경기에서 본루에 도달하는 데 3명만의 컵스 선수들을 허용하였다. 말린스는 또한 6번째 경기를 차지하여 유명한 스티브 바트먼의 사고에 부분적으로 감사하였다. 7번째 경기에서 이틀의 휴식에 베켓은 불펜의 밖으로 나와 4개의 이닝을 투구하고, 말린스는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을 잡는 데 9 대 6으로 우승하였다. 말린스가 뉴욕 양키스를 꺾으면서 3일간 휴식에 강한 상연들과 함께 베켓은 2003년 월드 시리즈 MVP 상을 수상하였다. 3번째 경기에서 그는 10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키고, 7과 3분의 1 이닝에서 2개만의 득점을 허용하였으며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6번째 경기에서 그는 완료의 경기에서 양키스를 봉쇄하여 9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켜 시리즈를 잡았다. 베켓은 2004년 다시 말린스를 위하여 오프닝 데이의 출발을 이루어 엑스포스를 상대로 7개의 이닝에서 하나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그는 시즌 동안 장애자 명단에 3개의 여행을 이루었으나 아직도 경력 사상 26개의 출발과 156과 3분의 2 이닝을 투구하였다. 그는 3.79의 방어율과 함께 9 승 9 패였고, 정렬에서 2번째 해를 위하여 152개의 스트라이크아웃을 가졌으나 말린스는 막바지의 분전에 넘어지고, 포스트시즌을 이루지 않았다. 2005년 그는 29개의 경기에서 3.38의 방어율과 166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15 승 8 패였다. 말린스와 함께 자신의 5개 시즌에서 베켓은 106개의 경기에서 41 승 34 패의 기록, 3.46의 방어율을 가졌으며, 총 607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보스턴 레드삭스 (2006 ~ 12)[편집] 2005년 추수감사절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거래에서 베켓은 마이너 리그의 유격수 핸리 라미레스와 투수들 아니발 산체스, 헤수스 델가도와 하비 가르시아를 위하여 3루수 마이크 로웰과 구원 투수 길레르모 모타와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되었다. 베켓과 로웰은 흘려진 샐러리로 노력에서 이적된 말린스 베테랑들의 형저한 명단에 놓였다. 이 일은 조직적으로 시장 수정으로 이름 지엇다. 레드삭스와 자신의 첫 출발에서 베켓은 2006년 4월 5일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우승을 얻는 데 7개의 이닝에서 하나 만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2008년 보스턴 레드삭스 활약 시절의 베켓 5월 20일 인터리그 경기가 열리는 동안 자신이 필리스의 투수 브렛 마이어스를 깊게 데려갈 때 지명 타자의 규칙의 출현 이래 베켓은 35년만에 홈런을 치는 데 첫 레드삭스 투수가 되었다. 7월 18일 그는 2010년을 위하여 1천만 달러의 클럽 선택과 함께 3년, 3천만 달러의 연장 계약을 맺었다. 베켓은 16 승 11 패의 기록과 5.01 방어율과 함께 레드삭스와 자신의 첫 시즌을 완료하였다. 204와 3분의 2 이닝에서 그는 191개의 안타를 내주었고, 74개의 볼넷을 가진 동안 158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그는 36개의 홈런을 허용하기도 하여 메이저 리그에서 2번째로 가장 많은 기록을 동점매겼다. 2007년 시즌의 시작에서 베켓은 더 많은 파괴 투구를 던지고, 적은 속구를 던지는 데 조절하였다. 동시에 그는 힘에 의하여 스트라이크들을 단순히 얻는 것보다 자신의 투구들에 위치를 정하는 것을 배웠다. 베켓은 자신들의 첫 7개의 출발 경기를 우승하는 데 역사상 6명의 레드삭스 투수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지 윈터와 미키 해리스가 한 시즌에 자신들의 첫 7개 출발 경기들을 우승하고, 베이브 루스, 데이브 페리스와 로저 모렛이 한 시즌에 자신들의 첫 8개 출발 경기들을 우승하였다. 강한 전반기 후, 3.44의 방어율과 함께 12 승 2 패의 기록을 게시한 그는 그해 메이저 리그 올스타 경기에 아메리칸 리그 팀으로 선발되었다. 베켓은 2개의 이닝을 투구한 후, 경기에서 승리를 얻어 하나 만의 안타를 내주고 2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베켓은 2005년 이래 하나의 시즌에서 20개의 경기를 우승하는 데 첫 투수가 되어 40개 만의 볼넷과 17개의 홈런 만을 허용하여 20 승 7 패의 기록, 3.27의 방어율, 194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1.14의 삼진률과 함께 시즌을 끝냈다. 베켓은 그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첫 경기를 시작하였고, 8개의 이닝에서 자신이 11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키고 우승을 위하여 6개의 이닝을 투구하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베켓의 2 승 0 패의 기록과 1.93의 방어율은 그에게 그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상을 수여하였다. 그는 그러고나서 출발하고,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2007년 월드 시리즈의 첫 경기를 우승하여 7개의 이닝을 투구하고, 6개의 안타에 하나의 득점을 허용하여 9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레드삭스는 시리즈에서 로키스를 휩쓸었다. 2008년 5월 8일 베켓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브랜던 잉어가 7번째 이닝에서 스윙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킬 때 자신의 1,000번째 경력 스트라이크아웃을 기록하였다. 그는 27개의 출발 경기에서 4.03의 방어율과 함께 12 승 10 패였다.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상대로 2008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의 3번째 경기에서 그는 5개의 이닝에 4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그는 그러고나서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그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2개의 출발을 이루어 9.64의 방어율을 가졌다. 2009년 레드삭스와 함께 자신의 첫 오프닝 데이 출발이 있는 동안 베켓은 레이스에 5 대 3의 승리에서 하나 만의 득점과 2개의 안타를 허용한 7개의 이닝을 통하여 10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4월 14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베켓이 에인절스의 외야수 보비 애브루의 머리 위에 고의적으로 공을 던진 것에 그에게 벌금을 물게 하고, 6개의 경기에 그를 출장 정지 시켰다. 베켓은 후에 출장 정지를 호소하고, 5개의 경기들로 축소되었다. 6월 20일 전 레드삭스의 투수 데릭 로를 상대로 시합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그는 3년만에 자신의 첫 완료 경기 봉쇄 기록을 세웠다. 봉쇄는 레드삭스의 유니폼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7월 5일 그는 그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경기에서 레드삭스를 대표하는 데 선발되었다. 7월 12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완료 경기 봉쇄를 투구하여 자신의 100번째 경력 우승을 기록하였다. 8월 7일 양키스를 상대로 그는 15개의 이닝, 5 시간 33 분의 경기로 변화시킨 전 말린스 동료 선수 A. J. 버넷과 투구 시합에 관여하였다.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끝내기 홈런을 칠 때 15번째의 말기에 결국적으로 경기를 패하였다. 그는 3.86의 방어율과 32개의 출발 경기와 함께 시즌에 17 승 6 패로 갔다. 포스트시즌에 그는 그해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의 2번째 경기에서 에인절스에게 자신의 하나의 출발 경기를 패하였다. 2010년 4월 5일 레드삭스와 베켓은 2014년을 통하여 4년, 6천 8백만 달러의 확장 계약에 동의하였다. 5월 7일 그는 9개의 득점을 허용하고, 8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이 일은 1911년 시즌 동안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잭 쿰스 이래 하나의 경기에서 결합을 가진 메이저 리그 투수로서 처음이었다. 그는 등 아래에 긴장과 함께 5월 19일 장애자 명단에 놓였고, 7월 23일에 복귀하였다. 9월 16일 그는 6번째 이닝에서 레이스의 벤 조브리스트를 상대로 레드삭스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1,000번째 스트라이크아웃을 기록하였다. 그해 21개의 출발 경기에서 그는 5.78의 방어율과 함께 6 승 6 패였다. 2011년 그는 방어율 (2.89), 상대 타구 평균 (.211) 과 삼진율 (1.03)에서 경력 최고 기록을 게시하였다. 그는 30개의 경기에서 13 승 7 패였으며, 자신의 3번째 올스타 경기로 선발되었다. 2011년 시즌의 말기에 레드삭스는 난처하게 되어 플레이오프들로 이루는 데 실패하였다. 베켓과 2명 더의 출발 투수들 존 래키와 존 레스터는 자신들이 투구를 하고 있지 않던 경기가 있는 동안 셋이서 술을 마신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또한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비디오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베켓은 이 일의 지도자로서 주목되었고, 어떤이들은 이 행동을 팀의 부족한 활약을 위한 이유 중의 일부로서 인용하였다. 베켓은 2012년 시즌에 분투하여 레드삭스의 선수로서 5.23의 방어율과 함께 5 승 11 패로 갔다. 8월 19일 양키스를 상대로 6개의 이닝에서 4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7개의 시즌에 그는 89 승 58 패의 기록, 4.17의 방어율과 1,108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레드삭스를 위하여 194개의 정규 시즌 경기를 시작하였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 14)[편집]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함께 2012년 8월 25일 그는 제임스 로니, 이반 데헤수스 주니어, 앨런 웹스터와 임명될 2명의 선수(제리 샌즈와 루비 데 라 로사)를 위하여 에이드리언 곤살레스, 칼 크로퍼드와 닉 푼토와 현금에 1천 1백만 달러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르 이적되었다. 그는 이적 후, 다저스를 위하여 7개의 경기를 출발하고 2.93의 방어율과 함께 2 승 3 패로 갔다. 베켓은 8개의 출발 경기에서 0 승 5 패의 기록과 5.19의 방어율과 함께 2013년 시즌의 초기 일부에서 분투하였다. 그는 사타구니 긴장과 함께 5월 15일 장애자 명단에 놓였다. 장애자 명단에 놓인 동안 그는 자신의 손에 쑤시게 되어 자신이 다시는 투구할 수 없는 것처럼 의심을 표현하였다. 시즌을 끝내는 수술을 피하는 데 노력에서 그가 엄한 갱생 프로그램에 진단되는 동안 한달간 투수 활약으로부터 그를 막았다. 하지만 쑤시는 감각이 6월 후순 베켓이 자신의 투수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는 시도를 할 때 돌아왔다. 그는 그해 7월 10일 그에게 수술을 받도록 요구한 흉곽 배출 증후군과 진단되어 그의 2013년 시즌을 끝냈다. 갈비뼈를 옮긴 것을 포함한 베켓의 수술은 2014년으로 향하는 다저스를 위하여 그에게 의문을 만들었다. 그는 4월 9일 다저스로 돌아와 지난 해 5월 이래 자신의 첫 출발을 이루어 4개의 이닝에서 4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5월 13일 그는 2012년 이래 자신의 첫 우승을 들어올렸다. 2014년 5월 25일 일요일 베켓은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무안타를 던져 다저스 역사상 21번째 무안타이며, 1996년 시즌에 노모 히데오가 그렇게 한 이래 처음이었다. 그는 128개를 투구하고, 6명의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시켰으며 승리로 향하는 도중에 3개의 볼넷을 가졌다. 베켓은 2004년 랜디 존슨이 완벽한 경기(40세)를 던진 이래 무안타를 던지는 데 최연장 투수(34세)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그 경기의 결과로서 "이번 주의 내셔널 리그 선수"로서 명예를 얻었다. 7월 8일 베켓은 시즌이 지나면서 왼쪽 절강이 충돌과 부상을 당하여 장애자 명단에 상륙하였다. 그는 7월 22일에 복귀하였으나 분투하였다. 8월 3일 출발 경기에서 그는 컵스를 상대로 4개의 이닝을 투구할 수 있었다. 9월 3일 다저스의 감독 돈 매팅글리는 기자들에게 베켓의 시즌은 그의 부상의 이유 같이 보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베켓은 그해 10월 7일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조시 베켓 (영어) 경력 통계와 선수 정보 - MLB,  ESPN,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The Baseball Cube,  Baseball-Reference (Minors) vdeh플로리다 말린스 - 2003년 월드 시리즈 우승 1 루이스 카스티요 7 이반 로드리게스 9 후안 피에르 10 레니 해리스 11 알렉스 곤살레스 12 마이크 모데카이 14 토드 홀랜즈워스 18 제프 코나인 19 마이크 로웰 20 미겔 카브레라 21 조시 베켓 (월드 시리즈 MVP) 22 브라이언 뱅크스 25 데릭 리 31 브래드 페니 35 돈트렐 윌리스 38 릭 헬링 40 네이트 범프 41 브래든 루퍼 43 후안 엥카르나시온 45 칼 파바노 49 채드 폭스 52 마이크 레드먼드 55 마크 레드먼 58 마이클 테헤라 74 우게스 어비나 감독 15 잭 맥키언 코치 38 브래드 안스버그 67 피에르 아르세노트 47 제프 콕스 13 아지 기옌 16 페리 힐 28 빌 로빈슨 제프 토보그 vdeh보스턴 레드삭스 - 2007년 월드 시리즈 우승 7 J. D. 드루 10 코코 크리스프 12 에릭 힌스키 13 알렉스 코라 15 더스틴 페드로이아 17 매니 델카먼 18 마쓰자카 다이스케 19 조시 베켓 (ALCS MVP) 20 케빈 유킬리스 23 훌리오 루고 24 매니 라미레스 25 마이크 로웰 (월드 시리즈 MVP) 28 더그 미라벨리 31 존 레스터 32 보비 켈티 33 제이슨 베리텍 34 데이비드 오르티스 37 오카지마 히데키 38 커트 실링 39 카일 스나이더 40 저코비 엘즈버리 48 하비에르 로페스 49 팀 웨이크필드 50 마이크 팀린 51 훌리안 타바레스 58 조너선 파펠본 83 에릭 가녜 감독 47 테리 프랭코나 벤치 코치 2 브래드 밀스 1루 코치 16 루이스 알리세아 타격 코치 29 데이브 매거던 3루 코치 35 드말로 헤일 투수 코치 52 존 패럴 불펜 코치 57 게리 턱 불펜 포수 65 이노 게레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시_베켓&oldid=23932441" 분류: 198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텍사스주 출신 야구 선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플로리다 말린스 선수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선수아메리칸 리그 올스타올스타 퓨처스 게임 참가 선수월드 시리즈 최우수 선수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최우수 선수텍사스 A&M 대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PortuguêsSimple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9일 (금) 09:0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안양시 (허난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양시 (허난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양 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중국 허난성의 도시에 관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경기도의 도시에 대해서는 안양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安阳市 Ānyáng 약자: 豫E 안양 시에 있는 은허 행정 단위 지급시 청사소재지 원펑구 면적 7,355km² 인구 (2007년) 인구밀도 5,610,000 763/km² 지역전화 372 우편번호 455000 시차 UTC+8 웹사이트: www.anyang.gov.cn 안양(안양, 중국어 간체자: 安阳, 정체자: 安陽, 병음: Ānyáng)은 중국 허난성의 최북단에 있는 도시이다. 목차 1 지리 2 역사 3 경제 4 기후 5 행정구역 6 외부 링크 지리[원본 편집] 동쪽으로 푸양시, 남쪽으로 허비시, 신샹시와 접하고 서쪽으로 산시성, 북쪽으로 허베이성과 접한다. 연평균 기온은 13.6도이고 대부분이 평지이다. 서쪽에는 타이항 산맥이 우뚝 솟아 있고 여기서 흐르는 장허(하이허 수계의 웨이허의 지류)가 허베이성 한단시와의 경계를 흐른다. 역사[원본 편집] 도시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샤오난하이(小南海)는 석기시대의 선사시대 동굴이 있는 곳이다. 샤오난하이 문화를 대표하는 석기와 동물 뼈 화석을 포함한 7,000개가 넘는 유물이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BC2000년 경에 전설의 현명한 왕 전욱과 제곡이 나라의 수도를 이 곳 주변에 세웠다. 안양은 이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들의 능이 오늘날 네이황현의 남쪽 산양 촌에 위치해있다. BC14세기 초엽에 상나라의 반경은 환 허 기슭의 현재 도시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수도를 세웠다. 은허라고 알려진 이 도시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 고정된 수도로써 상나라는 은나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상나라의 힘이 절정에 달하던 무정 때를 포함해 BC1046년에 서주 무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8대 12명의 왕 통치기에 수도 역할을 하였다. 안양의 탕인현 웨 촌은 남송의 유명한 장군 악비가 태어난 곳이다. 명나라가 시작되던 1368년에 안양은 재건되었다. 1949년 8월에 안양은 푸양, 신샹과 함께 허난성에서 떨어져나가서 핑위안 성에 속하게 되었다. 1953년 11월에 핑위안 성이 해체되면서 3개 모두 허난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경제[원본 편집] 안양은 외부 세계에 개방되면서 외국과의 경제 관계와 무역은 급속도로 발달되었다. 16개의 외국 투자기업(합작기업, 협력기업, 외국인 소유 기업)이 세워졌다. 안양에 총 면적 22.8km2의 경제기술개발구가 세워졌고 많은 국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안양의 경제 발전을 위한 모든 외국과의 관계 및 교역망이 놓여져있다. 기후[원본 편집] Anyang (1971–200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20.7 (69.3) 27.2 (81) 31.3 (88.3) 37.0 (98.6) 39.5 (103.1) 43.2 (109.8) 41.8 (107.2) 39.5 (103.1) 39.3 (102.7) 34.6 (94.3) 27.7 (81.9) 26.3 (79.3) 43.2 (109.8) 평균최고기온 °C (°F) 4.4 (39.9) 7.9 (46.2) 13.8 (56.8) 21.7 (71.1) 27.1 (80.8) 31.8 (89.2) 31.7 (89.1) 30.4 (86.7) 26.8 (80.2) 21.2 (70.2) 13.0 (55.4) 6.6 (43.9) 19.7 (67.5) 일평균기온 °C (°F) −0.9 (30.4) 2.2 (36) 8.0 (46.4) 15.7 (60.3) 21.2 (70.2) 25.9 (78.6) 27.0 (80.6) 25.7 (78.3) 21.2 (70.2) 15.0 (59) 7.2 (45) 1.1 (34) 14.1 (57.4) 평균최저기온 °C (°F) −5.1 (22.8) −2.4 (27.7) 3.0 (37.4) 10.0 (50) 15.1 (59.2) 20.1 (68.2) 22.7 (72.9) 21.6 (70.9) 16.3 (61.3) 9.9 (49.8) 2.5 (36.5) −3 (27) 9.2 (48.6) 최저기온기록 °C (°F) −21.7 (−7.1) −16.7 (1.9) −10.1 (13.8) −2.7 (27.1) 5.5 (41.9) 10.2 (50.4) 15.8 (60.4) 11.6 (52.9) 5.5 (41.9) −1.4 (29.5) −11.4 (11.5) −18.1 (−0.6) −21.7 (−7.1) 평균 강수량 mm (인치) 4.8 (0.19) 7.7 (0.3) 17.8 (0.7) 23.1 (0.91) 39.7 (1.56) 60.7 (2.39) 178.7 (7.04) 123.3 (4.85) 44.8 (1.76) 34.2 (1.35) 16.3 (0.64) 5.8 (0.23) 556.9 (21.92) 평균강수일수 (≥ 0.1 mm) 2.2 2.9 4.4 4.6 6.6 7.5 12.2 10.1 7.1 5.4 3.8 2.4 69.2 평균 상대 습도 (%) 60 57 57 57 60 60 77 80 73 69 67 64 65 평균 월간 일조시간 142.0 148.9 180.2 219.4 251.6 232.5 190.2 200.1 187.1 180.2 152.8 140.3 2,225.3 가능 일조율 46 49 49 56 58 54 43 48 50 52 50 47 50 출처: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행정구역[원본 편집] 안양 시는 산하에 4개 시할구 1개 현급시 4개 현을 관리한다. 안양시 현급 행정구역도 시할구 베이관구(北关区) 원펑구(文峰区) 인두구(殷都区) 룽안구(龙安区) 현급시 린저우시(林州市) 현 안양현(安阳县) 화현(滑县) 네이황현(内黄县) 탕인현(汤阴县) 외부 링크[원본 편집] (중국어/영어) 공식 웹사이트 vdeh허난성의 행정 구역 성도: 정저우시 정저우시 중위안구 진수이구 얼치구 후이지구 관청 후이족구 상제구 궁이시 신정시 신미시 덩펑시 싱양시 중무현 카이펑시 룽팅구 순허 후이족구 구러우구 위왕타이구 샹푸구 치현 퉁쉬현 웨이스현 란카오현 뤄양시 시궁구 라오청구 젠시구 찬허 후이족구 뤄룽구 지리구 옌스시 멍진현 루양현 이촨현 뤄닝현 쑹현 이양현 신안현 롼촨현 핑딩산시 신화구 웨이둥구 잔허구 스룽구 루저우시 우강시 바오펑현 예현 자현 루산현 안양시 베이관구 원펑구 인두구 룽안구 린저우시 안양현 화현 네이황현 탕인현 허비시 치빈구 산청구 허산구 쉰현 치현 신샹시 웨이빈구 훙치구 펑취안구 무예구 웨이후이시 후이셴시 신샹현 훠자현 위안양현 창위안현 펑추현 옌진현 자오쭤시 제팡구 중잔구 마춘구 산양구 친양시 멍저우시 슈우현 원현 우즈현 보아이현 푸양시 화룽구 푸양현 난러현 타이첸현 칭펑현 판현 쉬창시 웨이두구 젠안구 위저우시 창거시 옌링현 샹청현 뤄허시 위안후이구 옌청구 사오링구 린잉현 우양현 싼먼샤시 후빈구 산저우구 이마시 링바오시 몐츠현 루스현 난양시 워룽구 완청구 덩저우시 전핑현 네이샹현 시샤현 시촨현 신예현 퉁바이현 팡청현 탕허현 난자오현 서치현 상추시 량위안구 쑤이양구 융청시 닝링현 위청현 민취안현 샤이현 저청현 쑤이현 신양시 스허구 핑차오구 황촨현 화이빈현 시현 신현 상청현 구스현 뤄산현 광산현 저우커우시 촨후이구 샹청시 상수이현 화이양현 타이캉현 루이현 시화현 푸거우현 선추현 단청현 주마뎬시 이청구 췌산현 신차이현 상차이현 시핑현 비양현 핑위현 루난현 쑤이핑현 정양현 성직할 현급시 지위안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안양시_(허난성)&oldid=24086652" 분류: 안양시 (허난성)허난성의 지급시국가역사문화명성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БуряадCatalàMìng-dĕ̤ng-ngṳ̄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हिन्दीItaliano日本語GĩkũyũҚазақшаLietuviųMalagasyമലയാളം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Kapampang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2일 (월) 18: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안양시 (허난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양시 (허난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양 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중국 허난성의 도시에 관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경기도의 도시에 대해서는 안양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安阳市 Ānyáng 약자: 豫E 안양 시에 있는 은허 행정 단위 지급시 청사소재지 원펑구 면적 7,355km² 인구 (2007년) 인구밀도 5,610,000 763/km² 지역전화 372 우편번호 455000 시차 UTC+8 웹사이트: www.anyang.gov.cn 안양(안양, 중국어 간체자: 安阳, 정체자: 安陽, 병음: Ānyáng)은 중국 허난성의 최북단에 있는 도시이다. 목차 1 지리 2 역사 3 경제 4 기후 5 행정구역 6 외부 링크 지리[원본 편집] 동쪽으로 푸양시, 남쪽으로 허비시, 신샹시와 접하고 서쪽으로 산시성, 북쪽으로 허베이성과 접한다. 연평균 기온은 13.6도이고 대부분이 평지이다. 서쪽에는 타이항 산맥이 우뚝 솟아 있고 여기서 흐르는 장허(하이허 수계의 웨이허의 지류)가 허베이성 한단시와의 경계를 흐른다. 역사[원본 편집] 도시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샤오난하이(小南海)는 석기시대의 선사시대 동굴이 있는 곳이다. 샤오난하이 문화를 대표하는 석기와 동물 뼈 화석을 포함한 7,000개가 넘는 유물이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BC2000년 경에 전설의 현명한 왕 전욱과 제곡이 나라의 수도를 이 곳 주변에 세웠다. 안양은 이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들의 능이 오늘날 네이황현의 남쪽 산양 촌에 위치해있다. BC14세기 초엽에 상나라의 반경은 환 허 기슭의 현재 도시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수도를 세웠다. 은허라고 알려진 이 도시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 고정된 수도로써 상나라는 은나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상나라의 힘이 절정에 달하던 무정 때를 포함해 BC1046년에 서주 무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8대 12명의 왕 통치기에 수도 역할을 하였다. 안양의 탕인현 웨 촌은 남송의 유명한 장군 악비가 태어난 곳이다. 명나라가 시작되던 1368년에 안양은 재건되었다. 1949년 8월에 안양은 푸양, 신샹과 함께 허난성에서 떨어져나가서 핑위안 성에 속하게 되었다. 1953년 11월에 핑위안 성이 해체되면서 3개 모두 허난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경제[원본 편집] 안양은 외부 세계에 개방되면서 외국과의 경제 관계와 무역은 급속도로 발달되었다. 16개의 외국 투자기업(합작기업, 협력기업, 외국인 소유 기업)이 세워졌다. 안양에 총 면적 22.8km2의 경제기술개발구가 세워졌고 많은 국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안양의 경제 발전을 위한 모든 외국과의 관계 및 교역망이 놓여져있다. 기후[원본 편집] Anyang (1971–200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20.7 (69.3) 27.2 (81) 31.3 (88.3) 37.0 (98.6) 39.5 (103.1) 43.2 (109.8) 41.8 (107.2) 39.5 (103.1) 39.3 (102.7) 34.6 (94.3) 27.7 (81.9) 26.3 (79.3) 43.2 (109.8) 평균최고기온 °C (°F) 4.4 (39.9) 7.9 (46.2) 13.8 (56.8) 21.7 (71.1) 27.1 (80.8) 31.8 (89.2) 31.7 (89.1) 30.4 (86.7) 26.8 (80.2) 21.2 (70.2) 13.0 (55.4) 6.6 (43.9) 19.7 (67.5) 일평균기온 °C (°F) −0.9 (30.4) 2.2 (36) 8.0 (46.4) 15.7 (60.3) 21.2 (70.2) 25.9 (78.6) 27.0 (80.6) 25.7 (78.3) 21.2 (70.2) 15.0 (59) 7.2 (45) 1.1 (34) 14.1 (57.4) 평균최저기온 °C (°F) −5.1 (22.8) −2.4 (27.7) 3.0 (37.4) 10.0 (50) 15.1 (59.2) 20.1 (68.2) 22.7 (72.9) 21.6 (70.9) 16.3 (61.3) 9.9 (49.8) 2.5 (36.5) −3 (27) 9.2 (48.6) 최저기온기록 °C (°F) −21.7 (−7.1) −16.7 (1.9) −10.1 (13.8) −2.7 (27.1) 5.5 (41.9) 10.2 (50.4) 15.8 (60.4) 11.6 (52.9) 5.5 (41.9) −1.4 (29.5) −11.4 (11.5) −18.1 (−0.6) −21.7 (−7.1) 평균 강수량 mm (인치) 4.8 (0.19) 7.7 (0.3) 17.8 (0.7) 23.1 (0.91) 39.7 (1.56) 60.7 (2.39) 178.7 (7.04) 123.3 (4.85) 44.8 (1.76) 34.2 (1.35) 16.3 (0.64) 5.8 (0.23) 556.9 (21.92) 평균강수일수 (≥ 0.1 mm) 2.2 2.9 4.4 4.6 6.6 7.5 12.2 10.1 7.1 5.4 3.8 2.4 69.2 평균 상대 습도 (%) 60 57 57 57 60 60 77 80 73 69 67 64 65 평균 월간 일조시간 142.0 148.9 180.2 219.4 251.6 232.5 190.2 200.1 187.1 180.2 152.8 140.3 2,225.3 가능 일조율 46 49 49 56 58 54 43 48 50 52 50 47 50 출처: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행정구역[원본 편집] 안양 시는 산하에 4개 시할구 1개 현급시 4개 현을 관리한다. 안양시 현급 행정구역도 시할구 베이관구(北关区) 원펑구(文峰区) 인두구(殷都区) 룽안구(龙安区) 현급시 린저우시(林州市) 현 안양현(安阳县) 화현(滑县) 네이황현(内黄县) 탕인현(汤阴县) 외부 링크[원본 편집] (중국어/영어) 공식 웹사이트 vdeh허난성의 행정 구역 성도: 정저우시 정저우시 중위안구 진수이구 얼치구 후이지구 관청 후이족구 상제구 궁이시 신정시 신미시 덩펑시 싱양시 중무현 카이펑시 룽팅구 순허 후이족구 구러우구 위왕타이구 샹푸구 치현 퉁쉬현 웨이스현 란카오현 뤄양시 시궁구 라오청구 젠시구 찬허 후이족구 뤄룽구 지리구 옌스시 멍진현 루양현 이촨현 뤄닝현 쑹현 이양현 신안현 롼촨현 핑딩산시 신화구 웨이둥구 잔허구 스룽구 루저우시 우강시 바오펑현 예현 자현 루산현 안양시 베이관구 원펑구 인두구 룽안구 린저우시 안양현 화현 네이황현 탕인현 허비시 치빈구 산청구 허산구 쉰현 치현 신샹시 웨이빈구 훙치구 펑취안구 무예구 웨이후이시 후이셴시 신샹현 훠자현 위안양현 창위안현 펑추현 옌진현 자오쭤시 제팡구 중잔구 마춘구 산양구 친양시 멍저우시 슈우현 원현 우즈현 보아이현 푸양시 화룽구 푸양현 난러현 타이첸현 칭펑현 판현 쉬창시 웨이두구 젠안구 위저우시 창거시 옌링현 샹청현 뤄허시 위안후이구 옌청구 사오링구 린잉현 우양현 싼먼샤시 후빈구 산저우구 이마시 링바오시 몐츠현 루스현 난양시 워룽구 완청구 덩저우시 전핑현 네이샹현 시샤현 시촨현 신예현 퉁바이현 팡청현 탕허현 난자오현 서치현 상추시 량위안구 쑤이양구 융청시 닝링현 위청현 민취안현 샤이현 저청현 쑤이현 신양시 스허구 핑차오구 황촨현 화이빈현 시현 신현 상청현 구스현 뤄산현 광산현 저우커우시 촨후이구 샹청시 상수이현 화이양현 타이캉현 루이현 시화현 푸거우현 선추현 단청현 주마뎬시 이청구 췌산현 신차이현 상차이현 시핑현 비양현 핑위현 루난현 쑤이핑현 정양현 성직할 현급시 지위안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안양시_(허난성)&oldid=24086652" 분류: 안양시 (허난성)허난성의 지급시국가역사문화명성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БуряадCatalàMìng-dĕ̤ng-ngṳ̄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हिन्दीItaliano日本語GĩkũyũҚазақшаLietuviųMalagasyമലയാളം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Kapampang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2일 (월) 18: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디디에 드로그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디디에 드로그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디디에 드로그바 개인 정보전체 이름 Didier Yves Drogba Tébily출생일 1978년 3월 11일(1978-03-11) (41세)출생지 코트디부아르 아비장키 188cm포지션 스트라이커청소년 클럽 기록1989-19911991-19931993-19971997-1998 아베빌 반 르발루아 르망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98-20022002-20032003-20042004-20122012-20132013-20142014-20152015-20162017-2018 합계 르망 갱강 마르세유 첼시 상하이 선화 갈라타사라이 첼시 몬트리올 임팩트 피닉스 라이징 0640(12)0450(20)0350(19)2260(100) 0110(8)0370(15)0280(4)0330(21)0220(14)0497 0(210)국가대표팀 기록2002-2014 코트디부아르 1040(65)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8년 11월 9일 기준이다. 디디에 이브 드로그바 테빌리(프랑스어: Didier Yves Drogba Tébily, 1978년 3월 11일 ~ )는 코트디부아르의 전 축구 선수로, 현재 미국 유나이티드 사커 리그의 피닉스 라이징의 공동 구단주이다. 드로그바는 코트디부아르가 낳은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되고 있으며 코트디부아르를 3회 연속 FIFA 월드컵 본선 진출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목차 1 클럽 경력 1.1 국가대표팀 경력 2 기록 2.1 클럽 2.2 국가대표팀 3 수상 4 일화 5 경력 6 각주 7 외부 링크 클럽 경력[편집]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빅 이어"를 들고 경기장을 활보하는 드로그바 드로그바는 1978년 3월 11일 코트디부아르의 최대 도시인 아비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지냈으나, 곧 프랑스에 양자로 보내졌다. 5살 때 처음으로 태어난 나라를 벗어나 프랑스로 왔다. 그의 삼촌이자 축구 선수였던 미셸 고바가 있던 브르타뉴 지역에 위치한 브레스트로 향했다. 그는 삼촌과 함께 브레스트, 앙굴레움, 둔케르 등지에서 3년을 보낸 뒤, 코트디부아르로 돌아갔다. 이후 르망, 갱강, 올랭피크 마르세유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올랭피크 마르세유를 2003-04 시즌 UEFA컵 결승전에 올려 놓으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UEFA컵 결승전에서 드로그바의 능력을 알아본 조제 모리뉴는 첼시의 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곧바로 드로그바를 영입하였다. 드로그바는 2005년에 에르난 크레스포가 첼시에 임대 영입 형식으로 들어오자, 크레스포와 포지션이 같은 탓에 매우 치열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크레스포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끝내 첼시를 떠나자 첼시 부동의 주전이 되었다. 드로그바는 탁월한 골결정력으로 짧은 시간 내 첼시의 없어서는 안될 공격 자원으로 등극하였으며, 2005-06 시즌에는 11개의 어시스트를 하면서 프리미어리그 도움왕에 올랐다. 프리미어리그 2006-07에서는 20골을 넣으며 아프리카인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에 올랐다. 2008-09 시즌 초반에는 부상 및 경기력 기복 등으로 인해 인테르나치오날레 이적이 거론되었으나, 거스 히딩크가 첼시 지휘봉을 잡으며 급속도로 경기력을 회복하였다. 안첼로티 감독 부임 이후인 2009-10 시즌에는 웨인 루니(26골)의 부상을 틈타 29골을 기록하며 다시 득점왕을 거머쥘 만큼 절정의 결정력을 보여주였다. (그 중 페널티킥에 의한 득점은 1골에 불과했다.) 2011-12 시즌 초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과의 마찰로 출전 기회가 적어지고 부진도 겹쳐 선수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으나, 로베르토 디 마테오 대행 체제 이후 FC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에 선발 출장하여 전반 추가 시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득점을 기록하였다. 2012년 5월 19일 드로그바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패색이 짙던 88분에 동점골을 넣었고, 승부차기에서 첼시의 5번째 키커로 나와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챔피언스리그 첫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2년 첼시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첼시를 떠나 중국의 상하이 선화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년 6개월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적응 실패 및 팀과의 갈등으로 인해 상하이 선화에서 이탈하였다. 2013년 1월 28일 드로그바는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SK로 이적하였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이었으며 주급 40만 유로를 지급하는 조건 외에 출전 수당으로 1만 5천 유로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 선화는 드로그바의 이적을 방해하려고 항의서를 제출했지만, FIFA는 갈라타사라이 이적을 승인했다. 갈라타사라이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2013-14년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었다. 2014년 7월 25일 첼시 FC와 1년 계약을 맺었고 2년만에 첼시로 복귀했다. 2014-15 시즌, 총 7골을 넣었고,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다. 시즌 종료와 함께 첼시에서의 계약도 종료되었다.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드로그바는 첫 출전한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비록 고국 팀이 탈락했지만,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코트디부아르 대표 공격수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경고 누적으로 마지막 경기였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전에서는 결장했고, 그 경기에서 코트디부아르는 보나방튀르 칼루와 아뤼나 댕단의 멀티골로 FIFA 월드컵 첫 승리를 신고했다. 그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과의 친선 경기에서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와의 몸싸움 도중 부상을 입어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는 듯 하였으나,[1]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그는 조별 리그에서 1득점 1도움을 기록하였으나, 팀은 16강전에 오르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북한과의 최종전에서 무득점에도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다. 2014년 FIFA 월드컵 일본과의 조별리그 1번째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였고, 그의 출장과 함께 팀은 2-1로 역전승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같은 조에 속한 콜롬비아,그리스와의 대결에서 분전 끝에 패하며 팀은 조3위로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2014년 FIFA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기록[편집] 클럽[편집] 클럽 시즌 리그 2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르망 1998–99 2 0 0 0 0 0 0 0 0 0 2 0 1999–00 30 7 0 0 2 0 0 0 0 0 32 7 2000–01 11 0 3 1 0 0 0 0 0 0 14 1 2001–02 21 5 1 1 2 1 0 0 0 0 24 7 합계 64 12 4 2 4 1 0 0 0 0 72 15 클럽 시즌 리그 1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갱강 2001–02 11 3 0 0 0 0 0 0 0 0 11 3 2002–03 34 17 3 4 2 0 0 0 0 0 39 21 합계 45 20 3 4 2 0 0 0 0 0 50 24 클럽 시즌 리그 1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마르세유 2003–04 35 19 2 1 2 1 16 11 0 0 55 32 합계 35 19 2 1 2 1 16 11 0 0 55 32 클럽 시즌 프리미어리그 FA 컵 리그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첼시 2004–05 26 10 2 0 4 1 9 5 0 0 41 16 2005–06 29 12 3 1 1 0 7 1 1 2 41 16 2006–07 36 20 6 3 5 4 12 6 1 0 60 33 2007–08 19 8 1 0 1 1 11 6 0 0 32 15 2008–09 24 5 6 3 2 1 10 5 0 0 42 14 2009–10 32 29 4 3 2 2 5 3 1 0 44 37 2010–11 36 11 2 0 0 0 7 2 1 0 46 13 2011–12 24 5 3 2 0 0 8 6 0 0 35 13 합계 226 100 27 12 15 9 69 34 4 2 341 157 클럽 시즌 중국 슈퍼 리그 중국 FA 컵 리그 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상하이 선화 2012 11 8 0 0 - - 0 0 0 0 11 8 합계 11 8 0 0 – – 0 0 0 0 11 8 클럽 시즌 쉬페르리그 터키 컵 리그 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갈라타사라이 2012–13 13 5 0 0 - - 4 1 0 0 17 6 2013–14 24 10 3 1 - - 8 2 1 1 36 14 합계 37 15 3 1 – – 12 3 1 1 53 20 클럽 시즌 프리미어리그 FA 컵 리그 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첼시 2014–15 28 4 2 0 5 1 5 2 0 0 40 7 합계 28 4 2 0 5 1 5 2 0 0 40 7 총합 444 178 41 20 28 12 102 50 5 3 620 263 국가대표팀[편집] 대표팀 년도 친선 경기 국제 대회 총합 출전 득점 출전 득점 출전 득점 코트디부아르 2002 0 0 1 0 1 0 2003 4 1 3 3 7 4 2004 3 3 4 3 7 6 2005 3 1 5 6 8 7 2006 7 4 7 4 14 8 2007 6 3 2 1 8 4 2008 2 1 6 3 8 4 2009 1 1 5 6 6 7 2010 5 2 6 2 11 4 2011 2 1 3 4 5 5 2012 4 2 10 7 14 9 2013 2 1 7 3 9 4 2014 3 3 1 0 4 3 총합 42 23 60 43 102 65 수상[편집] 마르세유 리그앙 올해의 골 1회 리그앙 올해의 팀 1회 리그앙 올해의 선수 1회 첼시 프리미어리그 : 우승 (2004-05, 2005-06, 2009-10, 2014-15) FA컵 : 우승 (2006-07, 2008-09, 2009-10, 2011-12) 커뮤니티 실드 : 우승 (2005, 2009), 준우승 (2006, 2007, 2010, 2012, 2015) 풋볼 리그 컵 : 우승 (2004-05, 2006-07) UEFA 챔피언스리그 : 우승 (2011-12), 준우승 (2007-08) 갈라타사라이 쉬페르리그 : 우승 (2012-13) 터키컵 : 우승 (2013-14) 터키 슈퍼컵 : 우승 (2013) 코트디부아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 준우승 (2006, 2012)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 : 2006, 2009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득점왕 : 2012 개인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 2006-07, 2009-10 프리미어리그 도움왕 : (2005-06) 프리미어리그 리그컵 MVP 1회 FA컵 FA컵 결승 MVP 1회 커뮤니티 실드 커뮤니티 실드 MVP 1회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팀 1회 첼시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1회 FIFPro 월드 베스트 XI : 2007 2010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 vs. 북한 (조별리그) BBC선정 올해의 아프리카 선수 1회 온제도르 1회 PFA 올해의 팀 2회 ESM 올해의 팀 1회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100명 선정 1회 골든 풋 1회 일화[편집] 2005년 10월, 드로그바의 조국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02년부터 장기적인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쥔 뒤 드로그바는 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조국 여러분, 적어도 1주일 동안 만이라도 전쟁을 멈춥시다." 라고 호소하였다. 실제로 이후 1주일 동안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2년 후인 2007년에는 5년간 계속되어 왔던 내전이 완전히 종결되었다.[2] 그 후 2011년 코트디부아르에 또다시 내전이 발생하자 드로그바는 "코트디부아르에는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 고 말해 코트디부아르의 평화를 바라는 발언을 한다. 또는 그는 유엔에서 만든 위원회에서 활동한다. "드로그바, 코트디부아르 화합 촉구" 드로그바는 2008-09 시즌UEFA 챔피언스리그 FC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 첼시가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탈락하자 격분하며 톰 헨닝 외브레뵈 주심에게 욕설을 퍼붓고, TV 중계 카메라를 향해서도 욕설을 하여[3] UEFA로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조별 리그전에서 3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2010년 5월, 드로그바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대비한 일본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가졌는데, 일본 대표팀의 월드컵 16강 전망을 묻는 질문에 "일본에게 기회는 없다", "일본은 물소 등 위의 작은 새" 라 혹평하며 일본 대표팀을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평가전에서 일본 수비수 툴리오와 공을 두고 경합을 벌이던 도중 강한 태클에 심각한 팔 골절상을 입어 FIFA 월드컵 출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그의 걸출한 기량과 해결사적 면모에 감탄하며 마치 신(神)과 같다는 뜻으로 그에게 "드록신"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드로그바 본인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듣고 그에 대해 굉장한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2] 2011-12 시즌 28R 스토크 시티와의 홈 경기에서 첼시에서의 득점을 하며 프리미어리그 통산 100골을 기록하는 겹경사를 이루었다. 이 경기에서는 첼시가 스토크 시티에게 1:0으로 이겼다. 드록바는 첼시의 역사 레전드로 평가 받는다 경력[편집]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06년 FIFA 월드컵 국가대표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0년 FIFA 월드컵 국가대표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4년 FIFA 월드컵 국가대표 각주[편집] ↑ “"드로그바, 일본과 경기 중 팔꿈치 부상...월드컵 어떻게 되나?"”. 2011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7일에 확인함.  ↑ 가 나 드로그바 "내 심장은 코트디부아르와 함께 뛴다" ↑ 드로그바 "심판, 당신은 수치 그 자체야"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디디에 드로그바 Chelsea profile Didier Drogba's official website – available in English and French BBC profile BBC World Service: African Footballer of the Year 2008 ESPN Profile 수상vdeh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1970년대 1970: 케이타 1971: 선데이 1972: 술레이만 1973: 브왕가 1974: 무킬라 1975: 파라스 1976: 밀라 1977: 디아브 1978: 라자크 1979: 은코노 1980년대 1980: 망가 옹겐 1981: 벨루미 1982: 은코노 1983: 엘 카티브 1984: 아베가 1985: 티무미 1986: 자키 1987: 마제르 1988: 브왈랴 1989: 웨아 1990년대 1990: 밀라 1991: 아베디 펠레 1992: 아베디 펠레 1993: 아베디 펠레 & 예키니 1994: 웨아 & 아무니케 1995: 웨아 1996: 카누 1997: 이크페바 1998: 하지 1999: 카누 2000년대 2000: 음보마 2001: 디우프 2002: 디우프 2003: 에토 2004: 에토 2005: 에토 2006: 드로그바 2007: 카누테 2008: 아데바요르 2009: 드로그바 2010년대 2010: 에토 2011: 투레 2012: 투레 2013: 투레 2014: 투레 2015: 오바메양 2016: 마레즈 2017: 살라흐 2018: 살라흐 vdeh프리미어리그 최다 득점자 1993: 셰링엄 1994: 콜 1995: 시어러 1996: 시어러 1997: 시어러 1998: 서턴 • 더블린 • 오언 1999: 하셀바잉크 • 오언 • 요크 2000: 필립스 2001: 하셀바잉크 2002: 앙리 2003: 판 니스텔로이 2004: 앙리 2005: 앙리 2006: 앙리 2007: 드로그바 2008: C. 호날두 2009: 아넬카 2010: 드로그바 2011: 베르바토프 • 테베즈 2012: 판 페르시 2013: 판 페르시 2014: 수아레스 2015: 아궤로 2016: 케인 2017: 케인 vdehFIFPro 월드 베스트 XI 2007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GK 잔루이지 부폰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비오 칸나바로 존 테리 카를레스 푸욜 MF 카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스티븐 제라드 FW 호나우지뉴 디디에 드로그바 리오넬 메시 vdeh첼시 FC 올해의 선수 1967: 보네티 1968: 쿠크 1969: 웹 1970: 홀린스 1971: 홀린스 1972: 웹 1973: 오스굿 1974: 록크 1975: 쿠크 1976: 윌킨슨 1977: 윌킨슨 1978: 드로이 1979: 랭글레이 1980: 워커 1981: 보로타 1982: 필러리 1983: 존스 1984: 네빈 1985: 스피디 1986: 니즈베키 1987: 네빈 1988: 도리고 1989: 로버츠 1990: 몬쿠 1991: 타운샌드 1992: 엘리엇 1993: 싱클레어 1994: 클라크 1995: 존슨 1996: 휠릿 1997: 휴스 1998: 와이즈 1999: 졸라 2000: 와이즈 2001: 테리 2002: 쿠디치니 2003: 졸라 2004: 램퍼드 2005: 램퍼드 2006: 테리 2007: 에시엔 2008: 콜 2009: 램퍼드 2010: 드로그바 2011: 체흐 2012: 마타 2013: 마타 2014: 아자르 2015: 아자르 2016: 윌리앙 2017: 아자르 2018: 캉테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 1 티지에 2 아칼레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쿠아시 7 파에 8 칼루 9 A. 코네 10 야피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조로 14 B. 코네 15 댕단 16 냐누앙 17 도모로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드멜 21 에부에 22 로마리크 23 바리 감독: 미셸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06년 FIFA 월드컵 1 티지에 2 아칼레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쿠아시 7 파에 8 칼루 9 A. 코네 10 야피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조로 14 B. 코네 15 댕단 16 냐누앙 17 도모로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드멜 21 에부에 22 로마리크 23 바리 감독: 미셸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4위 1 바리 2 자크파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고후리 7 파에 8 칼루 9 A. 코네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로마리크 14 B. 코네 15 댕단 16 로부에 17 티에네 18 케이타 19 Y. 투레 20 사노고 21 에부에 22 조로 23 T. 코네 감독: 질리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1 바리 2 앙구아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Y. 투레 7 파에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고소 14 B. 코네 15 댕단 16 조그보 17 야피 18 케이타 19 E. 코네 20 드멜 21 에부에 22 밤바 23 앙방 감독: 할릴호지치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0년 FIFA 월드컵 1 바리 2 앙구아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고후리 7 둠비아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고소 13 로마리크 14 코네 15 댕단 16 조그보 17 티에네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드멜 21 에부에 22 밤바 23 예보아 감독: 에릭손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 1 바리 2 앙구아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고소 7 둠비아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보니 13 야 코난 14 쿨리발리 15 그라델 16 예보아 17 티에네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롤로 21 에부에 22 밤바 23 냐누앙 감독: 자호위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1 바리 2 A. 코네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로마리크 7 라자크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보니 13 야 코난 14 I. 트라오레 15 그라델 16 예보아 17 티에네 18 L. 트라오레 19 Y. 투레 20 롤로 21 에부에 22 밤바 23 손가리 감독: 라무시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4년 FIFA 월드컵 1 바리 2 비에라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볼리 7 아크파아크프로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보니 13 야 코난 14 디오망데 15 그라델 16 보우오 17 오리에 18 자크파 19 Y. 투레 20 디에 21 시오 22 밤바 23 망데 감독: 라무시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4478933 LCCN: n2008049136 ISNI: 0000 0001 2314 5171 GND: 136063659 SUDOC: 125312334 BNF: cb15764728k (데이터) BIBSYS: 14057241 NKC: xx021142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디디에_드로그바&oldid=23927770" 분류: 197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코트디부아르의 축구 선수축구 공격수르망 FC의 축구 선수EA 갱강의 축구 선수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축구 선수첼시 FC의 축구 선수상하이 뤼디 선화의 축구 선수갈라타사라이의 축구 선수몬트리올 임팩트의 축구 선수피닉스 라이징 FC의 축구 선수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코트디부아르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프랑스의 외국인 축구 선수잉글랜드의 외국인 축구 선수터키의 외국인 축구 선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캐나다의 외국인 축구 선수미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리그 1의 축구 선수리그 2의 축구 선수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중국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쉬페르리그의 축구 선수메이저 리그 사커의 축구 선수유나이티드 사커 리그의 축구 선수200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201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201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수상자아비장 출신코트디부아르계 프랑스인프랑스에 거주한 코트디부아르인잉글랜드에 거주한 코트디부아르인중국에 거주한 코트디부아르인프랑스로 귀화한 사람FIFA 센추리 클럽숨은 분류: 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zərbaycancaتۆرکجه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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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드로그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디디에 드로그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디디에 드로그바 개인 정보전체 이름 Didier Yves Drogba Tébily출생일 1978년 3월 11일(1978-03-11) (41세)출생지 코트디부아르 아비장키 188cm포지션 스트라이커청소년 클럽 기록1989-19911991-19931993-19971997-1998 아베빌 반 르발루아 르망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1998-20022002-20032003-20042004-20122012-20132013-20142014-20152015-20162017-2018 합계 르망 갱강 마르세유 첼시 상하이 선화 갈라타사라이 첼시 몬트리올 임팩트 피닉스 라이징 0640(12)0450(20)0350(19)2260(100) 0110(8)0370(15)0280(4)0330(21)0220(14)0497 0(210)국가대표팀 기록2002-2014 코트디부아르 1040(65)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8년 11월 9일 기준이다. 디디에 이브 드로그바 테빌리(프랑스어: Didier Yves Drogba Tébily, 1978년 3월 11일 ~ )는 코트디부아르의 전 축구 선수로, 현재 미국 유나이티드 사커 리그의 피닉스 라이징의 공동 구단주이다. 드로그바는 코트디부아르가 낳은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되고 있으며 코트디부아르를 3회 연속 FIFA 월드컵 본선 진출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목차 1 클럽 경력 1.1 국가대표팀 경력 2 기록 2.1 클럽 2.2 국가대표팀 3 수상 4 일화 5 경력 6 각주 7 외부 링크 클럽 경력[편집]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빅 이어"를 들고 경기장을 활보하는 드로그바 드로그바는 1978년 3월 11일 코트디부아르의 최대 도시인 아비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지냈으나, 곧 프랑스에 양자로 보내졌다. 5살 때 처음으로 태어난 나라를 벗어나 프랑스로 왔다. 그의 삼촌이자 축구 선수였던 미셸 고바가 있던 브르타뉴 지역에 위치한 브레스트로 향했다. 그는 삼촌과 함께 브레스트, 앙굴레움, 둔케르 등지에서 3년을 보낸 뒤, 코트디부아르로 돌아갔다. 이후 르망, 갱강, 올랭피크 마르세유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올랭피크 마르세유를 2003-04 시즌 UEFA컵 결승전에 올려 놓으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UEFA컵 결승전에서 드로그바의 능력을 알아본 조제 모리뉴는 첼시의 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곧바로 드로그바를 영입하였다. 드로그바는 2005년에 에르난 크레스포가 첼시에 임대 영입 형식으로 들어오자, 크레스포와 포지션이 같은 탓에 매우 치열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크레스포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끝내 첼시를 떠나자 첼시 부동의 주전이 되었다. 드로그바는 탁월한 골결정력으로 짧은 시간 내 첼시의 없어서는 안될 공격 자원으로 등극하였으며, 2005-06 시즌에는 11개의 어시스트를 하면서 프리미어리그 도움왕에 올랐다. 프리미어리그 2006-07에서는 20골을 넣으며 아프리카인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에 올랐다. 2008-09 시즌 초반에는 부상 및 경기력 기복 등으로 인해 인테르나치오날레 이적이 거론되었으나, 거스 히딩크가 첼시 지휘봉을 잡으며 급속도로 경기력을 회복하였다. 안첼로티 감독 부임 이후인 2009-10 시즌에는 웨인 루니(26골)의 부상을 틈타 29골을 기록하며 다시 득점왕을 거머쥘 만큼 절정의 결정력을 보여주였다. (그 중 페널티킥에 의한 득점은 1골에 불과했다.) 2011-12 시즌 초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과의 마찰로 출전 기회가 적어지고 부진도 겹쳐 선수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으나, 로베르토 디 마테오 대행 체제 이후 FC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에 선발 출장하여 전반 추가 시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득점을 기록하였다. 2012년 5월 19일 드로그바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패색이 짙던 88분에 동점골을 넣었고, 승부차기에서 첼시의 5번째 키커로 나와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챔피언스리그 첫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2년 첼시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첼시를 떠나 중국의 상하이 선화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2년 6개월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적응 실패 및 팀과의 갈등으로 인해 상하이 선화에서 이탈하였다. 2013년 1월 28일 드로그바는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SK로 이적하였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이었으며 주급 40만 유로를 지급하는 조건 외에 출전 수당으로 1만 5천 유로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 선화는 드로그바의 이적을 방해하려고 항의서를 제출했지만, FIFA는 갈라타사라이 이적을 승인했다. 갈라타사라이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2013-14년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었다. 2014년 7월 25일 첼시 FC와 1년 계약을 맺었고 2년만에 첼시로 복귀했다. 2014-15 시즌, 총 7골을 넣었고,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다. 시즌 종료와 함께 첼시에서의 계약도 종료되었다.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드로그바는 첫 출전한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비록 고국 팀이 탈락했지만,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코트디부아르 대표 공격수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경고 누적으로 마지막 경기였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전에서는 결장했고, 그 경기에서 코트디부아르는 보나방튀르 칼루와 아뤼나 댕단의 멀티골로 FIFA 월드컵 첫 승리를 신고했다. 그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과의 친선 경기에서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와의 몸싸움 도중 부상을 입어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는 듯 하였으나,[1]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그는 조별 리그에서 1득점 1도움을 기록하였으나, 팀은 16강전에 오르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북한과의 최종전에서 무득점에도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다. 2014년 FIFA 월드컵 일본과의 조별리그 1번째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였고, 그의 출장과 함께 팀은 2-1로 역전승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같은 조에 속한 콜롬비아,그리스와의 대결에서 분전 끝에 패하며 팀은 조3위로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2014년 FIFA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기록[편집] 클럽[편집] 클럽 시즌 리그 2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르망 1998–99 2 0 0 0 0 0 0 0 0 0 2 0 1999–00 30 7 0 0 2 0 0 0 0 0 32 7 2000–01 11 0 3 1 0 0 0 0 0 0 14 1 2001–02 21 5 1 1 2 1 0 0 0 0 24 7 합계 64 12 4 2 4 1 0 0 0 0 72 15 클럽 시즌 리그 1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갱강 2001–02 11 3 0 0 0 0 0 0 0 0 11 3 2002–03 34 17 3 4 2 0 0 0 0 0 39 21 합계 45 20 3 4 2 0 0 0 0 0 50 24 클럽 시즌 리그 1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마르세유 2003–04 35 19 2 1 2 1 16 11 0 0 55 32 합계 35 19 2 1 2 1 16 11 0 0 55 32 클럽 시즌 프리미어리그 FA 컵 리그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첼시 2004–05 26 10 2 0 4 1 9 5 0 0 41 16 2005–06 29 12 3 1 1 0 7 1 1 2 41 16 2006–07 36 20 6 3 5 4 12 6 1 0 60 33 2007–08 19 8 1 0 1 1 11 6 0 0 32 15 2008–09 24 5 6 3 2 1 10 5 0 0 42 14 2009–10 32 29 4 3 2 2 5 3 1 0 44 37 2010–11 36 11 2 0 0 0 7 2 1 0 46 13 2011–12 24 5 3 2 0 0 8 6 0 0 35 13 합계 226 100 27 12 15 9 69 34 4 2 341 157 클럽 시즌 중국 슈퍼 리그 중국 FA 컵 리그 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상하이 선화 2012 11 8 0 0 - - 0 0 0 0 11 8 합계 11 8 0 0 – – 0 0 0 0 11 8 클럽 시즌 쉬페르리그 터키 컵 리그 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갈라타사라이 2012–13 13 5 0 0 - - 4 1 0 0 17 6 2013–14 24 10 3 1 - - 8 2 1 1 36 14 합계 37 15 3 1 – – 12 3 1 1 53 20 클럽 시즌 프리미어리그 FA 컵 리그 컵 대륙간 컵 기타 합계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첼시 2014–15 28 4 2 0 5 1 5 2 0 0 40 7 합계 28 4 2 0 5 1 5 2 0 0 40 7 총합 444 178 41 20 28 12 102 50 5 3 620 263 국가대표팀[편집] 대표팀 년도 친선 경기 국제 대회 총합 출전 득점 출전 득점 출전 득점 코트디부아르 2002 0 0 1 0 1 0 2003 4 1 3 3 7 4 2004 3 3 4 3 7 6 2005 3 1 5 6 8 7 2006 7 4 7 4 14 8 2007 6 3 2 1 8 4 2008 2 1 6 3 8 4 2009 1 1 5 6 6 7 2010 5 2 6 2 11 4 2011 2 1 3 4 5 5 2012 4 2 10 7 14 9 2013 2 1 7 3 9 4 2014 3 3 1 0 4 3 총합 42 23 60 43 102 65 수상[편집] 마르세유 리그앙 올해의 골 1회 리그앙 올해의 팀 1회 리그앙 올해의 선수 1회 첼시 프리미어리그 : 우승 (2004-05, 2005-06, 2009-10, 2014-15) FA컵 : 우승 (2006-07, 2008-09, 2009-10, 2011-12) 커뮤니티 실드 : 우승 (2005, 2009), 준우승 (2006, 2007, 2010, 2012, 2015) 풋볼 리그 컵 : 우승 (2004-05, 2006-07) UEFA 챔피언스리그 : 우승 (2011-12), 준우승 (2007-08) 갈라타사라이 쉬페르리그 : 우승 (2012-13) 터키컵 : 우승 (2013-14) 터키 슈퍼컵 : 우승 (2013) 코트디부아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 준우승 (2006, 2012)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 : 2006, 2009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득점왕 : 2012 개인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 2006-07, 2009-10 프리미어리그 도움왕 : (2005-06) 프리미어리그 리그컵 MVP 1회 FA컵 FA컵 결승 MVP 1회 커뮤니티 실드 커뮤니티 실드 MVP 1회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팀 1회 첼시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1회 FIFPro 월드 베스트 XI : 2007 2010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 vs. 북한 (조별리그) BBC선정 올해의 아프리카 선수 1회 온제도르 1회 PFA 올해의 팀 2회 ESM 올해의 팀 1회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100명 선정 1회 골든 풋 1회 일화[편집] 2005년 10월, 드로그바의 조국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02년부터 장기적인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쥔 뒤 드로그바는 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조국 여러분, 적어도 1주일 동안 만이라도 전쟁을 멈춥시다." 라고 호소하였다. 실제로 이후 1주일 동안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2년 후인 2007년에는 5년간 계속되어 왔던 내전이 완전히 종결되었다.[2] 그 후 2011년 코트디부아르에 또다시 내전이 발생하자 드로그바는 "코트디부아르에는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 고 말해 코트디부아르의 평화를 바라는 발언을 한다. 또는 그는 유엔에서 만든 위원회에서 활동한다. "드로그바, 코트디부아르 화합 촉구" 드로그바는 2008-09 시즌UEFA 챔피언스리그 FC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 첼시가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탈락하자 격분하며 톰 헨닝 외브레뵈 주심에게 욕설을 퍼붓고, TV 중계 카메라를 향해서도 욕설을 하여[3] UEFA로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조별 리그전에서 3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2010년 5월, 드로그바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대비한 일본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가졌는데, 일본 대표팀의 월드컵 16강 전망을 묻는 질문에 "일본에게 기회는 없다", "일본은 물소 등 위의 작은 새" 라 혹평하며 일본 대표팀을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평가전에서 일본 수비수 툴리오와 공을 두고 경합을 벌이던 도중 강한 태클에 심각한 팔 골절상을 입어 FIFA 월드컵 출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그의 걸출한 기량과 해결사적 면모에 감탄하며 마치 신(神)과 같다는 뜻으로 그에게 "드록신"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드로그바 본인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듣고 그에 대해 굉장한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2] 2011-12 시즌 28R 스토크 시티와의 홈 경기에서 첼시에서의 득점을 하며 프리미어리그 통산 100골을 기록하는 겹경사를 이루었다. 이 경기에서는 첼시가 스토크 시티에게 1:0으로 이겼다. 드록바는 첼시의 역사 레전드로 평가 받는다 경력[편집]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06년 FIFA 월드컵 국가대표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0년 FIFA 월드컵 국가대표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국가대표 2014년 FIFA 월드컵 국가대표 각주[편집] ↑ “"드로그바, 일본과 경기 중 팔꿈치 부상...월드컵 어떻게 되나?"”. 2011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7일에 확인함.  ↑ 가 나 드로그바 "내 심장은 코트디부아르와 함께 뛴다" ↑ 드로그바 "심판, 당신은 수치 그 자체야"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디디에 드로그바 Chelsea profile Didier Drogba's official website – available in English and French BBC profile BBC World Service: African Footballer of the Year 2008 ESPN Profile 수상vdeh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1970년대 1970: 케이타 1971: 선데이 1972: 술레이만 1973: 브왕가 1974: 무킬라 1975: 파라스 1976: 밀라 1977: 디아브 1978: 라자크 1979: 은코노 1980년대 1980: 망가 옹겐 1981: 벨루미 1982: 은코노 1983: 엘 카티브 1984: 아베가 1985: 티무미 1986: 자키 1987: 마제르 1988: 브왈랴 1989: 웨아 1990년대 1990: 밀라 1991: 아베디 펠레 1992: 아베디 펠레 1993: 아베디 펠레 & 예키니 1994: 웨아 & 아무니케 1995: 웨아 1996: 카누 1997: 이크페바 1998: 하지 1999: 카누 2000년대 2000: 음보마 2001: 디우프 2002: 디우프 2003: 에토 2004: 에토 2005: 에토 2006: 드로그바 2007: 카누테 2008: 아데바요르 2009: 드로그바 2010년대 2010: 에토 2011: 투레 2012: 투레 2013: 투레 2014: 투레 2015: 오바메양 2016: 마레즈 2017: 살라흐 2018: 살라흐 vdeh프리미어리그 최다 득점자 1993: 셰링엄 1994: 콜 1995: 시어러 1996: 시어러 1997: 시어러 1998: 서턴 • 더블린 • 오언 1999: 하셀바잉크 • 오언 • 요크 2000: 필립스 2001: 하셀바잉크 2002: 앙리 2003: 판 니스텔로이 2004: 앙리 2005: 앙리 2006: 앙리 2007: 드로그바 2008: C. 호날두 2009: 아넬카 2010: 드로그바 2011: 베르바토프 • 테베즈 2012: 판 페르시 2013: 판 페르시 2014: 수아레스 2015: 아궤로 2016: 케인 2017: 케인 vdehFIFPro 월드 베스트 XI 2007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GK 잔루이지 부폰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비오 칸나바로 존 테리 카를레스 푸욜 MF 카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스티븐 제라드 FW 호나우지뉴 디디에 드로그바 리오넬 메시 vdeh첼시 FC 올해의 선수 1967: 보네티 1968: 쿠크 1969: 웹 1970: 홀린스 1971: 홀린스 1972: 웹 1973: 오스굿 1974: 록크 1975: 쿠크 1976: 윌킨슨 1977: 윌킨슨 1978: 드로이 1979: 랭글레이 1980: 워커 1981: 보로타 1982: 필러리 1983: 존스 1984: 네빈 1985: 스피디 1986: 니즈베키 1987: 네빈 1988: 도리고 1989: 로버츠 1990: 몬쿠 1991: 타운샌드 1992: 엘리엇 1993: 싱클레어 1994: 클라크 1995: 존슨 1996: 휠릿 1997: 휴스 1998: 와이즈 1999: 졸라 2000: 와이즈 2001: 테리 2002: 쿠디치니 2003: 졸라 2004: 램퍼드 2005: 램퍼드 2006: 테리 2007: 에시엔 2008: 콜 2009: 램퍼드 2010: 드로그바 2011: 체흐 2012: 마타 2013: 마타 2014: 아자르 2015: 아자르 2016: 윌리앙 2017: 아자르 2018: 캉테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 1 티지에 2 아칼레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쿠아시 7 파에 8 칼루 9 A. 코네 10 야피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조로 14 B. 코네 15 댕단 16 냐누앙 17 도모로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드멜 21 에부에 22 로마리크 23 바리 감독: 미셸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06년 FIFA 월드컵 1 티지에 2 아칼레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쿠아시 7 파에 8 칼루 9 A. 코네 10 야피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조로 14 B. 코네 15 댕단 16 냐누앙 17 도모로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드멜 21 에부에 22 로마리크 23 바리 감독: 미셸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4위 1 바리 2 자크파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고후리 7 파에 8 칼루 9 A. 코네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로마리크 14 B. 코네 15 댕단 16 로부에 17 티에네 18 케이타 19 Y. 투레 20 사노고 21 에부에 22 조로 23 T. 코네 감독: 질리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1 바리 2 앙구아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Y. 투레 7 파에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메이테 13 고소 14 B. 코네 15 댕단 16 조그보 17 야피 18 케이타 19 E. 코네 20 드멜 21 에부에 22 밤바 23 앙방 감독: 할릴호지치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0년 FIFA 월드컵 1 바리 2 앙구아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고후리 7 둠비아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고소 13 로마리크 14 코네 15 댕단 16 조그보 17 티에네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드멜 21 에부에 22 밤바 23 예보아 감독: 에릭손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 1 바리 2 앙구아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고소 7 둠비아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보니 13 야 코난 14 쿨리발리 15 그라델 16 예보아 17 티에네 18 케이타 19 Y. 투레 20 롤로 21 에부에 22 밤바 23 냐누앙 감독: 자호위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1 바리 2 A. 코네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로마리크 7 라자크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보니 13 야 코난 14 I. 트라오레 15 그라델 16 예보아 17 티에네 18 L. 트라오레 19 Y. 투레 20 롤로 21 에부에 22 밤바 23 손가리 감독: 라무시 vdeh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 2014년 FIFA 월드컵 1 바리 2 비에라 3 보카 4 K. 투레 5 조코라 6 볼리 7 아크파아크프로 8 칼루 9 티오테 10 제르비뉴 11 드로그바 (주장) 12 보니 13 야 코난 14 디오망데 15 그라델 16 보우오 17 오리에 18 자크파 19 Y. 투레 20 디에 21 시오 22 밤바 23 망데 감독: 라무시 전거 통제 WorldCat VIAF: 54478933 LCCN: n2008049136 ISNI: 0000 0001 2314 5171 GND: 136063659 SUDOC: 125312334 BNF: cb15764728k (데이터) BIBSYS: 14057241 NKC: xx021142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디디에_드로그바&oldid=23927770" 분류: 197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코트디부아르의 축구 선수축구 공격수르망 FC의 축구 선수EA 갱강의 축구 선수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축구 선수첼시 FC의 축구 선수상하이 뤼디 선화의 축구 선수갈라타사라이의 축구 선수몬트리올 임팩트의 축구 선수피닉스 라이징 FC의 축구 선수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코트디부아르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프랑스의 외국인 축구 선수잉글랜드의 외국인 축구 선수터키의 외국인 축구 선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캐나다의 외국인 축구 선수미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리그 1의 축구 선수리그 2의 축구 선수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중국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쉬페르리그의 축구 선수메이저 리그 사커의 축구 선수유나이티드 사커 리그의 축구 선수200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201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201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수상자아비장 출신코트디부아르계 프랑스인프랑스에 거주한 코트디부아르인잉글랜드에 거주한 코트디부아르인중국에 거주한 코트디부아르인프랑스로 귀화한 사람FIFA 센추리 클럽숨은 분류: 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Azərbaycancaتۆرکجه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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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 공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퍼스 공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퍼스 공항Perth Airport IATA: PER – ICAO: YPPH 개요 공항종별 민간 시간기준 UTC+8 소유기관 Westralia Airports Corporation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위치 레드클리프 해발고도 20 m / 67 ft 좌표 남위 31° 56′ 45″ 동경 115° 58′ 35″ / 남위 31.94583° 동경 115.97639°  / -31.94583; 115.97639 웹사이트 http://www.perthairport.com/ 지도 PER퍼스 공항 위치 활주로 방향 면적(m*m) ILS 표면 길이 폭 03/21 3444 45 YES 아스팔트 06/24 2163 45 YES 아스팔트 World Aero Data 퍼스 공항(영어: Perth Airport, IATA: PER, ICAO: YPPH)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주도인 퍼스의 주요 공항으로, 퍼스 근교 길퍼드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퍼스 공항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내선부터, 가깝게는 아시아나 인도양 지역, 멀리는 남아프리카나 중동 지역까지도 항공기가 운항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내에서 4번째로 붐비는 공항이기도 하다. 목차 1 운항 노선 1.1 1 터미널 1.2 2 터미널 1.3 3 터미널 1.4 4 터미널 1.5 GA 터미널 1.6 화물 노선 2 각주 3 외부 링크 운항 노선[편집] 가나다 순 1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 발리, 자카르타 남아프리카 항공 요하네스버그 로얄 브루나이 항공 반다르스리브가완 말레이시아 항공 쿠알라룸푸르 중국남방항공 광저우 전일본공수 도쿄(나리타) - (2019년 9월 1일 신규취항) 싱가포르 항공 싱가포르 에미레이트 항공 두바이 에티하드 항공 아부다비 에어뉴질랜드 오클랜드계절편: 크라이스트처치 에어모리셔스 포트루이스 에어아시아 X 쿠알라룸푸르 인도네시아 에어 아시아 발리, 롬복 제트스타 항공 발리, 싱가포르, 롬복 제트스타 아시아 항공 싱가포르, 자카르타 캐세이패시픽 항공 홍콩 콴타스 항공 계절편: 오클랜드[1] 타이거 항공 싱가포르 타이 항공 방콕, 푸켓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덴파사르(발리)[2], 푸켓, 크리스마스 섬, 코코스 제도 스쿠트 싱가포르[3] 카타르 항공 도하 2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얼라이언스 항공 아가일, 바리무야, 콘델와나, 칼굴리, 카라, 렌스터, 레오노라, 마운트키스, 뉴먼, 포트헤들랜드, 텔퍼, 더그랜티스 타이거 항공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 멜버른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리저널 항공 뉴먼, 데넘(멍키미아), 브룸, 아가일, 에스페란스, 엑스머스, 올버니, 제럴턴, 카나본, 카라타, 칼굴리, 칼바리, 쿠누누라, 클라우드 브레이크, 포트헤들랜드 3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네트워크 항공 렌스터, 모라와 마룸바 항공 마운트마그넷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브리즈번, 브룸, 다윈, 카라, 뉴먼, 멜버른, 포트헤들랜드, 시드니 4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에어노스 다윈, 쿠누누라 제트스타 항공 멜버른, 시드니, 애들레이드, 케언즈 콴타스 링크 뉴먼, 브룸, 앨리스스프링스, 울룰루, 카라타, 칼굴리, 파라버두, 포트헤들랜드 콴타스 항공 다윈, 브룸,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 애들레이드, 카라타, 칼굴리, 캔버라, 포트헤들랜드, 런던(2018년 3월 25일부터~) GA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스키퍼스 항공 라버튼, 레오노라, 렌스터, 마운트마그넷 공항 메카타라, 윌루나 코밤 항공 배로우, 브록, 바리무야, 콘델와나, 코스모스니켈마인, 벨뷰, 디그루사, 캄발다, 엑스머스, 뮤린뮤린 화물 노선[편집] 항공사목적지 오스트레일리안 에어 익스프레스멜버른 톨 프라이어리티브리즈번, 멜버른 각주[편집] ↑ Qantas launches new Auck-Perth service. NZ Herald. Retrieved on 2013-08-14. ↑ “PACIFIC BLUE TO LAUNCH FLIGHTS FROM AUSTRALIA TO INDONESIA”. Virgin Blue.  ↑ http://aegwaspotters.blogspot.com.au/2013/10/scoot-confirms-perth-services-from-12.html?m=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퍼스 공항 좌표: 남위 31° 56′ 36″ 동경 115° 57′ 22″ / 남위 31.94335° 동경 115.956071°  / -31.94335; 115.956071 (영어) 공식 홈페이지 vdeh 오스트레일리아의 공항수도 준주 캔버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 마운트 갬비어 세두나 애들레이드 올림픽댐 쿠퍼페디 킹스코트 포트링컨 포트오거스타 프라미넌트힐 화이앨러 뉴사우스웨일스 주 그래프턴 그리피스 나라브리 나란데라 뉴캐슬 두보 로드하우 리스모어 머지 메림불라 모리 모리야 밸리나 배서스트 브로큰힐 시드니 아미 앨버리 오렌지 와가와가 코바 코프스 하버 쿠마 탬워스 테리 파크스 포트맥쿼리 태즈메이니아 주 데번포트 론세스톤 버니 킹 플린더스 호바트 노던 준주 고브 그루트 다윈 라미닝마이링 레이크 엘비아 마닌그라다 맥아더 리버라인 미리킴빌 빅토리아 리버 다운 앨리스 스프링스 에어즈록 앨코 탠네트 테리토리 후커크리크 퀸즐랜드 주 골드코스트 그레이트배리어리프 글래드스톤 기나우 노던넥 노먼턴 단리 달고민다 도오메드그리 레드카피 로마 록하트 리버 록햄프턴 롱리치 리차드 리치몬드 마레이 마부그 마운트아이사 마크레이 모닝턴 모라 몬란바하 바두 바케다인 버즈빌 버크타운 번다버그 보울리아 보이구 브리즈번 블랙얼 블랙워터 비두리 사이바이 샤르빌 선샤인코스트 얌 에메랄드 오루쿤 요크 워라바 위파 윈드라우 윈톤 쥴리아크릭 친칠라 카룸바 케언스 코엔 코완야마 코코넛 쿠니아미울라 쿠빈 쿡타운 퀼파이 클론커리 타운즈빌 탕굴 팜 페르세포네(휫선데이 코스트) 해밀턴 허그핸덴 허비베이 혼 빅토리아 주 마운틴 호탬 멜버른 무라빈 밀두라 아발론 에센든 포틀랜드 해밀턴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뉴맨 래버튼 렌스터 리번스로프 리어노러 마운트 마넷 메카타라 브롬 샤크베이 아길 에스퍼런스 올버니 윌우라 제럴턴 카나본 칼굴리 볼더 칼바리 캐러사 쿠누누라 파라버두 퍼스 포트헤들랜드 굵은 색 표시는 국제선을 운항하는 공항으로 이퀼리티 표시는 과거에 국제선을 취항한 공항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퍼스_공항&oldid=24188319" 분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공항퍼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1938년 개항한 공항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Cebuano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Galego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Тоҷикӣ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0: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퍼스 공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퍼스 공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퍼스 공항Perth Airport IATA: PER – ICAO: YPPH 개요 공항종별 민간 시간기준 UTC+8 소유기관 Westralia Airports Corporation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위치 레드클리프 해발고도 20 m / 67 ft 좌표 남위 31° 56′ 45″ 동경 115° 58′ 35″ / 남위 31.94583° 동경 115.97639°  / -31.94583; 115.97639 웹사이트 http://www.perthairport.com/ 지도 PER퍼스 공항 위치 활주로 방향 면적(m*m) ILS 표면 길이 폭 03/21 3444 45 YES 아스팔트 06/24 2163 45 YES 아스팔트 World Aero Data 퍼스 공항(영어: Perth Airport, IATA: PER, ICAO: YPPH)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주도인 퍼스의 주요 공항으로, 퍼스 근교 길퍼드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퍼스 공항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내선부터, 가깝게는 아시아나 인도양 지역, 멀리는 남아프리카나 중동 지역까지도 항공기가 운항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내에서 4번째로 붐비는 공항이기도 하다. 목차 1 운항 노선 1.1 1 터미널 1.2 2 터미널 1.3 3 터미널 1.4 4 터미널 1.5 GA 터미널 1.6 화물 노선 2 각주 3 외부 링크 운항 노선[편집] 가나다 순 1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 발리, 자카르타 남아프리카 항공 요하네스버그 로얄 브루나이 항공 반다르스리브가완 말레이시아 항공 쿠알라룸푸르 중국남방항공 광저우 전일본공수 도쿄(나리타) - (2019년 9월 1일 신규취항) 싱가포르 항공 싱가포르 에미레이트 항공 두바이 에티하드 항공 아부다비 에어뉴질랜드 오클랜드계절편: 크라이스트처치 에어모리셔스 포트루이스 에어아시아 X 쿠알라룸푸르 인도네시아 에어 아시아 발리, 롬복 제트스타 항공 발리, 싱가포르, 롬복 제트스타 아시아 항공 싱가포르, 자카르타 캐세이패시픽 항공 홍콩 콴타스 항공 계절편: 오클랜드[1] 타이거 항공 싱가포르 타이 항공 방콕, 푸켓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덴파사르(발리)[2], 푸켓, 크리스마스 섬, 코코스 제도 스쿠트 싱가포르[3] 카타르 항공 도하 2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얼라이언스 항공 아가일, 바리무야, 콘델와나, 칼굴리, 카라, 렌스터, 레오노라, 마운트키스, 뉴먼, 포트헤들랜드, 텔퍼, 더그랜티스 타이거 항공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 멜버른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리저널 항공 뉴먼, 데넘(멍키미아), 브룸, 아가일, 에스페란스, 엑스머스, 올버니, 제럴턴, 카나본, 카라타, 칼굴리, 칼바리, 쿠누누라, 클라우드 브레이크, 포트헤들랜드 3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네트워크 항공 렌스터, 모라와 마룸바 항공 마운트마그넷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브리즈번, 브룸, 다윈, 카라, 뉴먼, 멜버른, 포트헤들랜드, 시드니 4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에어노스 다윈, 쿠누누라 제트스타 항공 멜버른, 시드니, 애들레이드, 케언즈 콴타스 링크 뉴먼, 브룸, 앨리스스프링스, 울룰루, 카라타, 칼굴리, 파라버두, 포트헤들랜드 콴타스 항공 다윈, 브룸,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 애들레이드, 카라타, 칼굴리, 캔버라, 포트헤들랜드, 런던(2018년 3월 25일부터~) GA 터미널[편집] 항공사목적지 스키퍼스 항공 라버튼, 레오노라, 렌스터, 마운트마그넷 공항 메카타라, 윌루나 코밤 항공 배로우, 브록, 바리무야, 콘델와나, 코스모스니켈마인, 벨뷰, 디그루사, 캄발다, 엑스머스, 뮤린뮤린 화물 노선[편집] 항공사목적지 오스트레일리안 에어 익스프레스멜버른 톨 프라이어리티브리즈번, 멜버른 각주[편집] ↑ Qantas launches new Auck-Perth service. NZ Herald. Retrieved on 2013-08-14. ↑ “PACIFIC BLUE TO LAUNCH FLIGHTS FROM AUSTRALIA TO INDONESIA”. Virgin Blue.  ↑ http://aegwaspotters.blogspot.com.au/2013/10/scoot-confirms-perth-services-from-12.html?m=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퍼스 공항 좌표: 남위 31° 56′ 36″ 동경 115° 57′ 22″ / 남위 31.94335° 동경 115.956071°  / -31.94335; 115.956071 (영어) 공식 홈페이지 vdeh 오스트레일리아의 공항수도 준주 캔버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 마운트 갬비어 세두나 애들레이드 올림픽댐 쿠퍼페디 킹스코트 포트링컨 포트오거스타 프라미넌트힐 화이앨러 뉴사우스웨일스 주 그래프턴 그리피스 나라브리 나란데라 뉴캐슬 두보 로드하우 리스모어 머지 메림불라 모리 모리야 밸리나 배서스트 브로큰힐 시드니 아미 앨버리 오렌지 와가와가 코바 코프스 하버 쿠마 탬워스 테리 파크스 포트맥쿼리 태즈메이니아 주 데번포트 론세스톤 버니 킹 플린더스 호바트 노던 준주 고브 그루트 다윈 라미닝마이링 레이크 엘비아 마닌그라다 맥아더 리버라인 미리킴빌 빅토리아 리버 다운 앨리스 스프링스 에어즈록 앨코 탠네트 테리토리 후커크리크 퀸즐랜드 주 골드코스트 그레이트배리어리프 글래드스톤 기나우 노던넥 노먼턴 단리 달고민다 도오메드그리 레드카피 로마 록하트 리버 록햄프턴 롱리치 리차드 리치몬드 마레이 마부그 마운트아이사 마크레이 모닝턴 모라 몬란바하 바두 바케다인 버즈빌 버크타운 번다버그 보울리아 보이구 브리즈번 블랙얼 블랙워터 비두리 사이바이 샤르빌 선샤인코스트 얌 에메랄드 오루쿤 요크 워라바 위파 윈드라우 윈톤 쥴리아크릭 친칠라 카룸바 케언스 코엔 코완야마 코코넛 쿠니아미울라 쿠빈 쿡타운 퀼파이 클론커리 타운즈빌 탕굴 팜 페르세포네(휫선데이 코스트) 해밀턴 허그핸덴 허비베이 혼 빅토리아 주 마운틴 호탬 멜버른 무라빈 밀두라 아발론 에센든 포틀랜드 해밀턴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뉴맨 래버튼 렌스터 리번스로프 리어노러 마운트 마넷 메카타라 브롬 샤크베이 아길 에스퍼런스 올버니 윌우라 제럴턴 카나본 칼굴리 볼더 칼바리 캐러사 쿠누누라 파라버두 퍼스 포트헤들랜드 굵은 색 표시는 국제선을 운항하는 공항으로 이퀼리티 표시는 과거에 국제선을 취항한 공항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퍼스_공항&oldid=24188319" 분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공항퍼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1938년 개항한 공항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Cebuano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Galego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Тоҷикӣ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0: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재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재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재로의 초상화, 1738년(57세)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갔을 때 모습 김재로(金在魯, 1682년 ~ 1759년)는 조선의 정치가이다. 자는 중례, 호는 청사, 본관은 청풍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김구이고, 조부는 전라도관찰사 김징이다. 노론 벽파의 거두 김상로,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는 사촌동생이다. 다른 사촌형제인 김익로는 우사 김규식의 6대조이다. 김상로, 김양로 등 노론벽파에 가담한 친척들과 달리 노론 내 청명파에 가담하여 노론 청명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목차 1 생애 2 가족 3 같이 보기 4 각주 생애[편집]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716년 옛 선비들에게 없는 죄를 거짓으로 꾸며 벌을 주었던 소론의 유봉휘·정 식 등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경종 때 이조참의·대사간·개성부 유수 등을 지냈으나, 신임사화 때에 귀양을 갔었다. 영조 때 풀려나와 대사간이 되어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을 사형시키게 하였다. 당시 수어사, 형조참판, 이조참판, 예조참판, 부제학, 대사간, 병조참판, 대사성, 우부승지, 한성부좌윤 등을 지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충주 목사로 기용되어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병조판서, 약방제조, 지경연사, 예문관제학, 좌참찬, 우참찬, 호조판서, 판돈녕부사, 종묘제조,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고, 경상도 관찰사도 지냈다. 그리고 황해도 관찰사도 지냈다. 그 후 지춘추관사로서 실록도청 당상을 겸직하면서 《경종수정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고 신임사화로 죽은 김창집·이이명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738년, 판중추부사로 청에 가서 《명사》(明史)를 얻어왔다. 그는 노론 벽파에 가담한 친척 김상로, 김양로 등과 달리 노론 내 벽파도 아니고, 노론 시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노론 탕평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노론 청명파에 가담하였다. 그의 아들 김치인과 종손자 김종수는 노론 청명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고 1740년 의정부영의정에 올랐고, 관직 생활의 절반은 모두 대신으로 있으면서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하며 노론의 선봉자로 활약했다. 저서로 청사유집(淸沙遺集) 본말록(本末錄) 청사일기(淸沙日記),예기보주(禮記補註) 경오보(庚午譜)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 좌씨집선속(左氏輯選續) 금석록(金石錄) 난여(爛餘)등이 있다. 가족[편집] 조부 : 김징(金澄) 생부 : 김구(金構) 생모 : 이몽석의 딸 부인 : 심징의 딸 장남 : 김치인(金致仁) 형 : 김희로(金希魯)[1] 같이 보기[편집] 노론 벽파 김상로 김치인 김종수 김종후 김규식 김재로 묘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호 각주[편집] ↑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갑진(1724, 옹정2) 12월 28일(정유) 기사참조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종묘배향공신 94현문묘 동시 배향 6현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종묘배향 94현 태조실: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정종실: 익안대군 태종실: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실: 황희 허조 최윤덕 신개 양녕대군 효령대군 이수 문종실: 하연 세조실: 한확 권람 한명회 예종실: 박원형 성종실: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정광필 인종실: 홍언필 김안국 명종실: 심연원 이언적 선조실: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실: 이원익 신흠 신경진 이귀 능원대군 이서 김류 효종실: 김상헌 김집 송시열 민정중 민유중 인평대군 현종실: 김좌명 정태화 김수항 김만기 숙종실: 남구만 윤지완 박세채 김만중 최석정 김석주 경종실: 이유 민진후 영조실: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실: 민백상 이종성 정조실: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실: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조만영 남연군 문조실: 남공철 김로 조병귀 헌종실: 이상황 조인영 철종실: 이헌구 김수근 익평군 고종실: 신응조 박규수 이돈우 민영환 이 글은 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조선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재로&oldid=22528215" 분류: 조선의 문신1682년 태어남1758년 죽음조선의 정치인영의정김규식조선의 공신청풍 김씨노론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한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조선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9월 23일 (일) 14: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킬러의 보디가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킬러의 보디가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킬러의 보디가드The Hitman's Bodyguard 감독 패트릭 휴스 제작 데이비드 엘리슨마크 길데이나 골드버그매슈 오툴존 톰슨레스 웰던 각본 톰 오코너 출연 라이언 레이놀즈새뮤얼 L. 잭슨게리 올드먼엘로디 융살마 아예크 촬영 줄스 올로플린 편집 제이크 로버츠 제작사 밀레니엄 필름스크리스털 픽처스 배급사 라이언스게이트 필름스 개봉일 2017년 8월 18일 (2017-08-18) (미국)2017년 8월 30일 (2017-08-30) (대한민국) 시간 118분 국가 미국 언어 영어 제작비 3000만 달러[1] 《킬러의 보디가드》(영어: The Hitman's Bodyguard)는 2017년 미국의 액션 코미디 영화로, 살인청부업자와 그의 보디가드 콤비의 이야기를 그린다. 패트릭 휴스 감독이 연출하고 라이언 레이놀즈, 새뮤얼 L. 잭슨, 게리 올드먼, 엘로디 융, 살마 아예크가 출연한다.[2] 목차 1 줄거리 2 출연진 3 각주 4 외부 링크 줄거리[편집] 잘나가는 트리플A급의 경호원이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경호대상의 암살을 막지못해 트리플 A급을 박탈당한 마이클 브라이스. 이후 그는 인터폴 요원이었던 여자친구 아멜리아 루셀하고도 헤어지게 된다. 루셀이 경호대상의 신원을 노출시켰다고 생각하며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린 탓이었다. 2년후, 약쟁이 변호사나 보호하는 삼류경호원으로 전락한 마이클은 어느날 루셀로부터 O형 수혈봉지 3봉을 들고 자신이 말하는 곳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이후, 시키는대로 루셀을 찾아간 마이클은 그곳에서 자신을 28번이나 죽일뻔한 최악의 킬러 다리우스 킨케이드를 만난다. 철천지 원수였던 두사람은 만나자마자 드잡이를 벌이지만 그때 다리우스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터라 얼마 못가 기절해버리면서 상황은 종료됐다. 그리고 루셀은 마이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독재자로 악명높았던 벨라루스의 전 대통령 블러드슬라프 두코비치는 군대를 동원한 민간인 학살혐의로 구속됐고 헤이그 법정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두코비치는 반성하기는커녕 사람을 풀어 재판에 출석하기로 한 증인들을 암살한뒤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날 술수를 부리고 있었고 남은 증인은 다리우스가 유일했다. 인터폴에선 감옥에 수감된 아내 소니아를 출소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다리우스에게 증언을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인 다리우스를 헤이그 법정으로 향하던 도중 정체모를 피습을 당해 경호를 맡은 요원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고 극적으로 생명을 부지한 루셀은 급히 다리우스를 데리고 안전가옥으로 피신한 다음 마이클에게 SOS를 취한 것이다. 마이클이 해야할 일은 두코비치가 고용한 킬러들을 따돌리고 다리우스를 무사히 헤이그 법정까지 데려와 재판에 출석시키는 것. 하지만 뭐든 신중을 가하는 마이클과 몸부터 날리고 보는 다리우스의 동행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고 루셀은 다리우스로부터 인터폴 내부에도 두코비치가 고용한 첩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첩자를 찾기위해 인터폴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출연진[편집] 라이언 레이놀즈 - 마이클 브라이스 역 새뮤얼 L. 잭슨 - 다리우스 킨케이드 역 게리 올드먼 - 두코비치 역 살마 아예크 - 소니아 킨케이드 역 엘로디 융 - 아멜리아 루셀 역 조아킹 드 알메이다 - 푸셰 역 로드 핼렛 - 아시모프 교수 역 커스티 미첼 - 하르 역 샘 헤이즐딘 - 가렛 역 리차드 E. 그랜트 - 세이퍼트 역 조세핀 드 라 바움 - 인터폴 요원 역 오리 파이퍼 - 바클린 역 바리 아츠마 - 모레노 역 미카일 고레보이 - 리비틴 역 앨런 맥켄나 - 쿠퍼 역 칼 파러 - 법정 변호사 역 아툴 샤르마 - 변호사 역 솔로몬 타이워 저스티파이드 - 행인 역 크리스 윌슨 - ICC 판사 역 벨리저 비네브 - 시위자 역 아비 호에스 - 꽃집 점원 역 각주[편집] ↑ “'The Hitman's Bodyguard' Review: Ryan Reynolds, Samuel L. Jackson End Summer With A B-Movie Blast”. 《Forbes》. 2017년 8월 10일. 2017년 8월 12일에 확인함.  ↑ “[오늘뭐보지?]'킬러의 보디가드' 예매율 1위…흥행돌풍”. 《머니투데이》. 2017년 9월 2일. 2017년 9월 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킬러의 보디가드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킬러의 보디가드 – 로튼 토마토 (영어) 킬러의 보디가드 – 메타크리틱 (한국어) 킬러의 보디가드 - 네이버 영화 이 글은 영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킬러의_보디가드&oldid=22655997" 분류: 2017년 영화영어 영화 작품미국의 액션 코미디 영화추적 영화버디 영화패트릭 휴스 감독 영화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화벨라루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영화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불가리아에서 촬영한 영화암스테르담에서 촬영한 영화런던에서 촬영한 영화라이온스 게이트 엔터테인먼트 영화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화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Արեւմտահայերէն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Українська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일 (수) 16:0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폴 티베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폴 티베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폴 티베츠 출생지 미국 일리노이주 퀸시 사망지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복무 미국 복무 기간 1937년 - 1966년 최종 계급 준장 근무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수훈 십자 훈장 에어 메달 (4회) 훈공장(Legion of Merit) 공군 수훈 십자 훈장 명예 전상장 공군 수훈장 기타 이력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2003년의 티베츠 폴 워필드 티베츠 2세(Paul Warfield Tibbets, Jr., 1915년 2월 23일 - 2007년 11월 1일)는, 제2차 세계 대전기의 미국 공군에서 매우 유명한 조종사 중 한 사람이다. 히로시마 시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 B-29 슈퍼포트리스의 기장이었다. 목차 1 생애 2 원자폭탄 3 전후 4 죽음과 평가 5 자손 생애[편집] 폴 티베츠는 1915년 일리노이주 퀸시에서 폴 워필드 티베트와 에놀라 게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이오와주에서 산 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이사했다. 1928년에 일리노이주 알톤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33년에 플로리다 대학에 입학하고 그 후 신시내티 의과대학에 입학해 1937년에 같은 대학을 졸업했다. 오하이오주 데이튼의 라이트 필드에서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 1937년 2월 25일에 켄터키주 포트 토머스에서 육군 사관후보생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제29 폭격대에서 B-17 폭격기를 조종했다. 그 후 플로리다주 탄파의 마크디르 공군 기지에서 제40 항공단 97 폭격대의 지휘관이 된다. 1942년에는 나치 독일을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원자폭탄[편집] 1944년 12월, 원자폭탄 투하 부대인 제509혼성비행대 대장으로서 임명되어 부대를 편성한다. 이후 네바다주의 사막의 비밀 기지에서 원자폭탄 투하 훈련을 진행했고 다음 해에 부대가 태평양의 티니안 섬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제509혼성비행대는 일본 제국 본토에서 펌킨 폭탄으로 불리는 모의 원자 폭탄을 사용해 교토, 히로시마, 니가타, 기타큐슈 등을 폭격해 일본제국 민간인 백여 명을 죽이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장소를 히로시마로 선정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2시 45분 , 미국 공군 대령 폴 티베츠는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티니안 섬에서 이륙하게 했다. B-29는 북향해 7시간 비행하여 일본 본토에 도착했다. 오전 8시 15분, 폴 티베츠는 히로시마 시 상공에서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떨어뜨렸다. 참고로, 이 B-29에 붙여진 에놀라 게이는, 폴 티베츠의 어머니의 이름이다. 전후[편집] 전후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폴 티베츠는 많은 원자폭탄 실험에 조언했고 미국 최초 제트 폭격기인 보잉 B-47의 개발에도 공헌했다. 1954년에는 NATO의 임원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일했다. 1959년에는 준장으로 승진해 마크디르 공군기지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폴 티베츠는 1966년 8월 31일 공군에서 퇴역하고 1976년에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본거지를 둔 제트 에이비에이션사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1976년, 텍사스 에어쇼에서 버섯구름까지 연출하는 원자폭탄 투하쇼를 재현했다. 이 쇼는 일각에서 강하게 비난받아 미국 행정부가 일본 행정부에 공식으로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폴 티베츠는 "일본인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라고 변명했다. 한편 그는, 자신이 관여한 핵 공격 임무를 "군인으로서 명령받은 이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부했지만, 싸우기 좋아하는 사상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1995년 한 인터뷰에서 "나는 대일본제국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할 수 있는 일체를 하려고 했다. 악당들을 죽이고 싶었다!"라며 "(원자폭탄 투하로) 죽인 사람보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는 내 확신은 불변했다. 원자폭탄을 보유하면서도 사용하지 않아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면 더 큰 잘못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죽음과 평가[편집] 2007년 11월 1일, 심장병을 앓던 폴 티베츠는 뇌졸중으로 92세에 죽었다. 폴 티베츠는 원자폭탄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서 친구에게 사후에 장례식을 실시하거나 묘비를 만들지 말도록 부탁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졌다. 일각에서는 그가 평생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다. 자손[편집] 폴 티베츠의 손자인 폴 티베츠 4세는, 2005년 현재 미국 공군 제509폭격비행단(509 BW)에서 스텔스 폭격기 B-2 스피릿의 조종사로서 복무한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폴 티베츠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3036142 LCCN: n78000305 ISNI: 0000 0000 8223 6615 GND: 13374838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폴_티베츠&oldid=23865269" 분류: 1915년 태어남2007년 죽음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미국 육군 군인미국 공군 준장미국의 비행사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플로리다 대학교 동문인도에 거주한 미국인콜럼버스 (오하이오주) 출신퀸시 (일리노이주) 출신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हिन्दी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5일 (금) 17: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폴 티베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폴 티베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폴 티베츠 출생지 미국 일리노이주 퀸시 사망지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복무 미국 복무 기간 1937년 - 1966년 최종 계급 준장 근무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수훈 십자 훈장 에어 메달 (4회) 훈공장(Legion of Merit) 공군 수훈 십자 훈장 명예 전상장 공군 수훈장 기타 이력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2003년의 티베츠 폴 워필드 티베츠 2세(Paul Warfield Tibbets, Jr., 1915년 2월 23일 - 2007년 11월 1일)는, 제2차 세계 대전기의 미국 공군에서 매우 유명한 조종사 중 한 사람이다. 히로시마 시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 B-29 슈퍼포트리스의 기장이었다. 목차 1 생애 2 원자폭탄 3 전후 4 죽음과 평가 5 자손 생애[편집] 폴 티베츠는 1915년 일리노이주 퀸시에서 폴 워필드 티베트와 에놀라 게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이오와주에서 산 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이사했다. 1928년에 일리노이주 알톤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33년에 플로리다 대학에 입학하고 그 후 신시내티 의과대학에 입학해 1937년에 같은 대학을 졸업했다. 오하이오주 데이튼의 라이트 필드에서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 1937년 2월 25일에 켄터키주 포트 토머스에서 육군 사관후보생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제29 폭격대에서 B-17 폭격기를 조종했다. 그 후 플로리다주 탄파의 마크디르 공군 기지에서 제40 항공단 97 폭격대의 지휘관이 된다. 1942년에는 나치 독일을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원자폭탄[편집] 1944년 12월, 원자폭탄 투하 부대인 제509혼성비행대 대장으로서 임명되어 부대를 편성한다. 이후 네바다주의 사막의 비밀 기지에서 원자폭탄 투하 훈련을 진행했고 다음 해에 부대가 태평양의 티니안 섬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제509혼성비행대는 일본 제국 본토에서 펌킨 폭탄으로 불리는 모의 원자 폭탄을 사용해 교토, 히로시마, 니가타, 기타큐슈 등을 폭격해 일본제국 민간인 백여 명을 죽이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장소를 히로시마로 선정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2시 45분 , 미국 공군 대령 폴 티베츠는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티니안 섬에서 이륙하게 했다. B-29는 북향해 7시간 비행하여 일본 본토에 도착했다. 오전 8시 15분, 폴 티베츠는 히로시마 시 상공에서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떨어뜨렸다. 참고로, 이 B-29에 붙여진 에놀라 게이는, 폴 티베츠의 어머니의 이름이다. 전후[편집] 전후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폴 티베츠는 많은 원자폭탄 실험에 조언했고 미국 최초 제트 폭격기인 보잉 B-47의 개발에도 공헌했다. 1954년에는 NATO의 임원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일했다. 1959년에는 준장으로 승진해 마크디르 공군기지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폴 티베츠는 1966년 8월 31일 공군에서 퇴역하고 1976년에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본거지를 둔 제트 에이비에이션사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1976년, 텍사스 에어쇼에서 버섯구름까지 연출하는 원자폭탄 투하쇼를 재현했다. 이 쇼는 일각에서 강하게 비난받아 미국 행정부가 일본 행정부에 공식으로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폴 티베츠는 "일본인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라고 변명했다. 한편 그는, 자신이 관여한 핵 공격 임무를 "군인으로서 명령받은 이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부했지만, 싸우기 좋아하는 사상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1995년 한 인터뷰에서 "나는 대일본제국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할 수 있는 일체를 하려고 했다. 악당들을 죽이고 싶었다!"라며 "(원자폭탄 투하로) 죽인 사람보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는 내 확신은 불변했다. 원자폭탄을 보유하면서도 사용하지 않아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면 더 큰 잘못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죽음과 평가[편집] 2007년 11월 1일, 심장병을 앓던 폴 티베츠는 뇌졸중으로 92세에 죽었다. 폴 티베츠는 원자폭탄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서 친구에게 사후에 장례식을 실시하거나 묘비를 만들지 말도록 부탁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졌다. 일각에서는 그가 평생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다. 자손[편집] 폴 티베츠의 손자인 폴 티베츠 4세는, 2005년 현재 미국 공군 제509폭격비행단(509 BW)에서 스텔스 폭격기 B-2 스피릿의 조종사로서 복무한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폴 티베츠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3036142 LCCN: n78000305 ISNI: 0000 0000 8223 6615 GND: 13374838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폴_티베츠&oldid=23865269" 분류: 1915년 태어남2007년 죽음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미국 육군 군인미국 공군 준장미국의 비행사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플로리다 대학교 동문인도에 거주한 미국인콜럼버스 (오하이오주) 출신퀸시 (일리노이주) 출신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हिन्दी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5일 (금) 17: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00년 AFC 아시안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0년 AFC 아시안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00년 AFC 아시안컵كأس آسيا 2000대회 개요개최국 레바논개최 기간 10월 12일 ~ 10월 29일예선 참가국 42개국참가국 12개국경기장 3개 최종 순위● 우승국 일본 (2번째 우승)● 준우승국 사우디아라비아● 3위 대한민국● 4위 중국통계총 경기수 26경기득점 총합 77 (한 경기 평균 2.96골)최다 득점 선수 이동국 (6골)최우수 선수 나나미 히로시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96 2004 → v • d • e • h 2000년 AFC 아시안컵은 2000년 10월 12일부터 10월 29일까지 레바논에서 개최된 12번째 AFC 아시안컵이다. 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결승전에서 모치즈키 시게요시의 결승골로 1-0으로 누르고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목차 1 개최국 선정 2 예선 3 개최 도시 및 경기장 4 선수 명단 5 조별 리그 5.1 A조 5.2 B조 5.3 C조 5.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6 결선 토너먼트 6.1 8강전 6.2 준결승전 6.3 3,4위전 6.4 결승전 7 우승국 8 최종 순위 9 수상 9.1 MVP (최우수 선수) 9.2 최다 득점자 9.3 최고의 수비수 9.4 최고의 골키퍼 9.5 페어플레이 수상 9.6 올스타 팀 10 득점 선수 11 팀 득점 기록 12 각주 개최국 선정[편집] 레바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중국, 홍콩이 2000년 AFC 아시안컵 유치를 신청했다.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1996년 12월 20일에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레바논을 2000년 AFC 아시안컵 개최국으로 선정했다.[1][2] 예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예선입니다. 레바논은 개최국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96년 AFC 아시안컵 우승 팀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42개국이 예선에 참가해 10개의 조로 나뉘어 각 조의 1위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이 팀들은 레바논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본선에 진출한 10개국이다. 중국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일본   쿠웨이트 대한민국 카타르 태국 우즈베키스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베이루트 시돈 트리폴리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사이다 국제경기장 국제 올림픽 경기장 수용인원: 48,837명 수용인원: 22,600명 수용인원: 22,400명 선수 명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선수 명단입니다. 조별 리그[편집] 모든 시간은 현지 시간(UTC+2)을 따름.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이란 7 3 2 1 0 6 1 +5 이라크 4 3 1 1 1 4 3 +1 태국 2 3 0 2 1 2 4 -2 레바논 2 3 0 2 1 3 7 -4 2000년 10월 12일 15:05 이라크 2 – 0 태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드레인  27'마지드  58' 2000년 10월 12일 18:45 레바논 0 – 4 이란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루쥔 바게리  18'에스틸리  75', 87'다에이  90' 2000년 10월 15일 17:05 이란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다에이  73' 피투라타나  12' 2000년 10월 15일 19:45 레바논 2 – 2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김영주 차루르  28'호제이즈  77' 칼라프  4', 22' 2000년 10월 18일 19:35 이란 1 – 0 이라크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루쥔 다에이  77' 2000년 10월 18일 19:35 레바논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페르난데스  82' 피투라타나  57'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중국 5 3 1 2 0 6 2 +4 쿠웨이트 5 3 1 2 0 1 0 +1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인도네시아 1 3 0 1 2 0 7 -7 2000년 10월 13일 17:05 대한민국 2 – 2 중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이영표  29'노정윤  57' 마밍위  35'판즈이  65' (페널티골) 2000년 10월 13일 19:45 쿠웨이트 0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16일 17:05 중국 4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리밍  1'선쓰  7' (페널티골)양천  15'치훙  89' 2000년 10월 16일 19:45 대한민국 0 – 1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알후와이디  42' 2000년 10월 19일 19:35 중국 0 – 0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2000년 10월 19일 19:35 대한민국 3 – 0 인도네시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이동국  30', 75', 89'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일본 7 3 2 1 0 13 3 +10 사우디아라비아 4 3 1 1 1 6 4 +2 카타르 3 3 0 3 0 2 2 0 우즈베키스탄 1 3 0 1 2 2 14 -12 2000년 10월 14일 17:05 사우디아라비아 1 – 4 일본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리오카 90′ (자책골) 야나기사와  22'다카하라  37'나나미  53'오노  88' 2000년 10월 14일 19:45 카타르 1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알발루시  60' 카시모프  73' 2000년 10월 17일 17:05 일본 8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모리시마  7'니시자와  14', 24', 49'다카하라  17', 20', 57'기타지마  78' 루샨  28' 2000년 10월 17일 19:45 사우디아라비아 0 – 0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20일 19:35 사우디아라비아 5 – 0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김영주 알오타이비  18'샬후브  35', 78', 86'알테미아트  88' 2000년 10월 20일 19:35 일본 1 – 1 카타르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니시자와  60' 알오바이달리  22'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조별 예선이 끝난 뒤, 각 조에서 3위를 차지한 팀은 승점, 골득실을 비교하여 그 중에서 높은 점수를 낸 두 팀은 8강에 진출한다. 조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결과 B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8강전 진출 C 카타르 3 3 0 3 0 2 2 +0 8강전 진출 A 태국 2 3 0 2 1 2 4 -2 지역 예선 탈락 대한민국과 카타르가 각각 1, 2위를 차지함에 따라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10월 23일 - 시돈           중국  3 10월 26일 - 베이루트   카타르  1     중국  2 10월 24일 - 베이루트     일본  3     일본  4 10월 29일 - 베이루트   이라크  1     일본  1 10월 23일 - 트리폴리     사우디아라비아  0   이란  1 10월 26일 - 베이루트   대한민국 (AET)  2     대한민국  1 3·4위전 10월 24일 - 베이루트     사우디아라비아  2     쿠웨이트  2   중국  0   사우디아라비아 (AET)  3     대한민국  1 10월 29일 - 베이루트 8강전[편집] 2000년 10월 23일 16:45 이란 1 – 2(연장전) 대한민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바게리  71' 김상식  90'이동국 99' 2000년 10월 23일 19:45 중국 3 – 1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리밍  9'치훙  38'양천  54' 알에나지  65' 2000년 10월 24일 16:45 일본 4 – 1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나나미  8', 29'다카하라  11'묘진  62' 오베이드  4' 이라크가 일본과의 8강전에서 1-4로 대패했을 때 골키퍼 하심 하산, 수비수 압둘 자베르, 공격수인 카탄 차티르는 우다이 후세인의 경호원들에게 3일 동안 채찍질을 당했다. 4일째 되던 날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렇게 많은 골을 먹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3] 2000년 10월 24일 19:45 쿠웨이트 2 – 3(연장전)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바샤르 압둘라  61'알후와이디  67' 알테미아트  45+1' 108'알메샬  67' 준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6일 16:45 대한민국 1 – 2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이동국  90' 알메샬  76', 80' 2000년 10월 26일 19:45 중국 2 – 3 일본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치훙  30'양천  48' 판즈이 21′ (자책골)니시자와  53'묘진  61' 3,4위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6:05 중국 0 – 1 대한민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이동국  76' 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8:45 일본 1 – 0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치즈키  29' 우승국[편집] AFC 아시안컵 우승 일본 1 1  제12대 아시아 챔피언 (2회 우승) 1992년・2000년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일본 6 5 1 0 21 6 +15 16 2 사우디아라비아 6 3 1 2 11 8 +3 10 3 대한민국 6 3 1 2 9 6 +3 10 4 중국 6 2 2 1 11 7 +4 8 5 이란 4 2 1 1 7 3 +4 7 6 쿠웨이트 4 1 2 1 3 3 0 5 7 이라크 4 1 1 2 5 7 -2 4 8 카타르 4 0 3 1 3 5 -2 3 9 태국 3 0 2 1 2 4 -2 2 10 레바논 3 0 2 1 3 7 -4 2 11 인도네시아 3 0 1 2 0 7 -7 1 12 우즈베키스탄 3 0 1 2 2 14 -12 1 수상[편집] MVP (최우수 선수)[편집] 나나미 히로시 최다 득점자[편집] 이동국 - 6골 최고의 수비수[편집] 이영표 최고의 골키퍼[편집] 장진 페어플레이 수상[편집] 중국 올스타 팀[편집]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장진 홍명보 모하메드 알킬라이위 자말 무바레크 나나미 히로시 나와프 알테미아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카림 바게리 나카무라 슌스케 이동국 다카하라 나오히로 득점 선수[편집] 6 골 이동국 5 골 니시자와 아키노리 다카하라 나오히로 3 골 치훙 양천 알리 다에이 나나미 히로시 탈랄 알메샬 모하마드 알샬후브 나와프 알테미아트 2 골 리밍 카림 바게리 하미드 레자 에스틸리 사바 자디르 칼라프 묘진 도모카즈 자셈 알후와이디 사케산 피투라타나 1 골 판즈이 선쓰 쑤마오전 카탄 드레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하이다르 마흐무드 마지드 기타지마 히데아키 모치즈키 시게요시 모리시마 히로아키 오노 신지 야나기사와 아쓰시 바샤르 압둘라 압바스 차루르 루이스 페르난데스 무사 호제이즈 모하메드 골람 알발루시 모하메드 살렘 알에나지 압둘 나시르 알리 알오바이달리 마르주크 모하메드 알오타이비 김상식 이영표 노정윤 미르잘롤 카시모프 세르게이 루샨 자책골 판즈이 (일본전) 모리오카 류조 (사우디아라비아전) 팀 득점 기록[편집] 21골 일본 11골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9골 대한민국 7골 이란 5골 이라크 3골 쿠웨이트 레바논 카타르 2골 태국 우즈베키스탄 0골 인도네시아 각주[편집] ↑ “<아시안컵축구 낙수> 레바논, 제12회대회 유치 가능성”.  ↑ “2천년 아시안컵 축구 레바논서 개최 결정”.  ↑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120쪽.  vdehAFC 아시안컵본선 홍콩 1956년 대한민국 1960년 이스라엘 1964년 이란 1968년 태국 1972년 이란 1976년 쿠웨이트 1980년 싱가포르 1984년 카타르 1988년 일본 1992년 아랍에미리트 1996년 레바논 2000년 중국 2004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2007년 카타르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2015년 아랍에미리트 2019년 중국 2023년 2027년 예선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2023년 2027년 결승전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선수 명단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1956년부터 1968년까지는 결승전은 없었으며, 대신 우승국을 조별 리그전으로 정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00년_AFC_아시안컵&oldid=24274579" 분류: 2000년 AFC 아시안컵레바논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2000년 축구2000년 레바논2000년 10월숨은 분류: 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ietuvių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5일 (토) 05: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00년 AFC 아시안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0년 AFC 아시안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00년 AFC 아시안컵كأس آسيا 2000대회 개요개최국 레바논개최 기간 10월 12일 ~ 10월 29일예선 참가국 42개국참가국 12개국경기장 3개 최종 순위● 우승국 일본 (2번째 우승)● 준우승국 사우디아라비아● 3위 대한민국● 4위 중국통계총 경기수 26경기득점 총합 77 (한 경기 평균 2.96골)최다 득점 선수 이동국 (6골)최우수 선수 나나미 히로시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96 2004 → v • d • e • h 2000년 AFC 아시안컵은 2000년 10월 12일부터 10월 29일까지 레바논에서 개최된 12번째 AFC 아시안컵이다. 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결승전에서 모치즈키 시게요시의 결승골로 1-0으로 누르고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목차 1 개최국 선정 2 예선 3 개최 도시 및 경기장 4 선수 명단 5 조별 리그 5.1 A조 5.2 B조 5.3 C조 5.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6 결선 토너먼트 6.1 8강전 6.2 준결승전 6.3 3,4위전 6.4 결승전 7 우승국 8 최종 순위 9 수상 9.1 MVP (최우수 선수) 9.2 최다 득점자 9.3 최고의 수비수 9.4 최고의 골키퍼 9.5 페어플레이 수상 9.6 올스타 팀 10 득점 선수 11 팀 득점 기록 12 각주 개최국 선정[편집] 레바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중국, 홍콩이 2000년 AFC 아시안컵 유치를 신청했다.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1996년 12월 20일에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레바논을 2000년 AFC 아시안컵 개최국으로 선정했다.[1][2] 예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예선입니다. 레바논은 개최국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96년 AFC 아시안컵 우승 팀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42개국이 예선에 참가해 10개의 조로 나뉘어 각 조의 1위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이 팀들은 레바논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본선에 진출한 10개국이다. 중국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일본   쿠웨이트 대한민국 카타르 태국 우즈베키스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베이루트 시돈 트리폴리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사이다 국제경기장 국제 올림픽 경기장 수용인원: 48,837명 수용인원: 22,600명 수용인원: 22,400명 선수 명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선수 명단입니다. 조별 리그[편집] 모든 시간은 현지 시간(UTC+2)을 따름.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이란 7 3 2 1 0 6 1 +5 이라크 4 3 1 1 1 4 3 +1 태국 2 3 0 2 1 2 4 -2 레바논 2 3 0 2 1 3 7 -4 2000년 10월 12일 15:05 이라크 2 – 0 태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드레인  27'마지드  58' 2000년 10월 12일 18:45 레바논 0 – 4 이란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루쥔 바게리  18'에스틸리  75', 87'다에이  90' 2000년 10월 15일 17:05 이란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다에이  73' 피투라타나  12' 2000년 10월 15일 19:45 레바논 2 – 2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김영주 차루르  28'호제이즈  77' 칼라프  4', 22' 2000년 10월 18일 19:35 이란 1 – 0 이라크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루쥔 다에이  77' 2000년 10월 18일 19:35 레바논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페르난데스  82' 피투라타나  57'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중국 5 3 1 2 0 6 2 +4 쿠웨이트 5 3 1 2 0 1 0 +1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인도네시아 1 3 0 1 2 0 7 -7 2000년 10월 13일 17:05 대한민국 2 – 2 중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이영표  29'노정윤  57' 마밍위  35'판즈이  65' (페널티골) 2000년 10월 13일 19:45 쿠웨이트 0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16일 17:05 중국 4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리밍  1'선쓰  7' (페널티골)양천  15'치훙  89' 2000년 10월 16일 19:45 대한민국 0 – 1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알후와이디  42' 2000년 10월 19일 19:35 중국 0 – 0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2000년 10월 19일 19:35 대한민국 3 – 0 인도네시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이동국  30', 75', 89'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일본 7 3 2 1 0 13 3 +10 사우디아라비아 4 3 1 1 1 6 4 +2 카타르 3 3 0 3 0 2 2 0 우즈베키스탄 1 3 0 1 2 2 14 -12 2000년 10월 14일 17:05 사우디아라비아 1 – 4 일본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리오카 90′ (자책골) 야나기사와  22'다카하라  37'나나미  53'오노  88' 2000년 10월 14일 19:45 카타르 1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알발루시  60' 카시모프  73' 2000년 10월 17일 17:05 일본 8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모리시마  7'니시자와  14', 24', 49'다카하라  17', 20', 57'기타지마  78' 루샨  28' 2000년 10월 17일 19:45 사우디아라비아 0 – 0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20일 19:35 사우디아라비아 5 – 0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김영주 알오타이비  18'샬후브  35', 78', 86'알테미아트  88' 2000년 10월 20일 19:35 일본 1 – 1 카타르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니시자와  60' 알오바이달리  22'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조별 예선이 끝난 뒤, 각 조에서 3위를 차지한 팀은 승점, 골득실을 비교하여 그 중에서 높은 점수를 낸 두 팀은 8강에 진출한다. 조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결과 B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8강전 진출 C 카타르 3 3 0 3 0 2 2 +0 8강전 진출 A 태국 2 3 0 2 1 2 4 -2 지역 예선 탈락 대한민국과 카타르가 각각 1, 2위를 차지함에 따라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10월 23일 - 시돈           중국  3 10월 26일 - 베이루트   카타르  1     중국  2 10월 24일 - 베이루트     일본  3     일본  4 10월 29일 - 베이루트   이라크  1     일본  1 10월 23일 - 트리폴리     사우디아라비아  0   이란  1 10월 26일 - 베이루트   대한민국 (AET)  2     대한민국  1 3·4위전 10월 24일 - 베이루트     사우디아라비아  2     쿠웨이트  2   중국  0   사우디아라비아 (AET)  3     대한민국  1 10월 29일 - 베이루트 8강전[편집] 2000년 10월 23일 16:45 이란 1 – 2(연장전) 대한민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바게리  71' 김상식  90'이동국 99' 2000년 10월 23일 19:45 중국 3 – 1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리밍  9'치훙  38'양천  54' 알에나지  65' 2000년 10월 24일 16:45 일본 4 – 1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나나미  8', 29'다카하라  11'묘진  62' 오베이드  4' 이라크가 일본과의 8강전에서 1-4로 대패했을 때 골키퍼 하심 하산, 수비수 압둘 자베르, 공격수인 카탄 차티르는 우다이 후세인의 경호원들에게 3일 동안 채찍질을 당했다. 4일째 되던 날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렇게 많은 골을 먹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3] 2000년 10월 24일 19:45 쿠웨이트 2 – 3(연장전)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바샤르 압둘라  61'알후와이디  67' 알테미아트  45+1' 108'알메샬  67' 준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6일 16:45 대한민국 1 – 2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이동국  90' 알메샬  76', 80' 2000년 10월 26일 19:45 중국 2 – 3 일본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치훙  30'양천  48' 판즈이 21′ (자책골)니시자와  53'묘진  61' 3,4위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6:05 중국 0 – 1 대한민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이동국  76' 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8:45 일본 1 – 0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치즈키  29' 우승국[편집] AFC 아시안컵 우승 일본 1 1  제12대 아시아 챔피언 (2회 우승) 1992년・2000년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일본 6 5 1 0 21 6 +15 16 2 사우디아라비아 6 3 1 2 11 8 +3 10 3 대한민국 6 3 1 2 9 6 +3 10 4 중국 6 2 2 1 11 7 +4 8 5 이란 4 2 1 1 7 3 +4 7 6 쿠웨이트 4 1 2 1 3 3 0 5 7 이라크 4 1 1 2 5 7 -2 4 8 카타르 4 0 3 1 3 5 -2 3 9 태국 3 0 2 1 2 4 -2 2 10 레바논 3 0 2 1 3 7 -4 2 11 인도네시아 3 0 1 2 0 7 -7 1 12 우즈베키스탄 3 0 1 2 2 14 -12 1 수상[편집] MVP (최우수 선수)[편집] 나나미 히로시 최다 득점자[편집] 이동국 - 6골 최고의 수비수[편집] 이영표 최고의 골키퍼[편집] 장진 페어플레이 수상[편집] 중국 올스타 팀[편집]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장진 홍명보 모하메드 알킬라이위 자말 무바레크 나나미 히로시 나와프 알테미아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카림 바게리 나카무라 슌스케 이동국 다카하라 나오히로 득점 선수[편집] 6 골 이동국 5 골 니시자와 아키노리 다카하라 나오히로 3 골 치훙 양천 알리 다에이 나나미 히로시 탈랄 알메샬 모하마드 알샬후브 나와프 알테미아트 2 골 리밍 카림 바게리 하미드 레자 에스틸리 사바 자디르 칼라프 묘진 도모카즈 자셈 알후와이디 사케산 피투라타나 1 골 판즈이 선쓰 쑤마오전 카탄 드레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하이다르 마흐무드 마지드 기타지마 히데아키 모치즈키 시게요시 모리시마 히로아키 오노 신지 야나기사와 아쓰시 바샤르 압둘라 압바스 차루르 루이스 페르난데스 무사 호제이즈 모하메드 골람 알발루시 모하메드 살렘 알에나지 압둘 나시르 알리 알오바이달리 마르주크 모하메드 알오타이비 김상식 이영표 노정윤 미르잘롤 카시모프 세르게이 루샨 자책골 판즈이 (일본전) 모리오카 류조 (사우디아라비아전) 팀 득점 기록[편집] 21골 일본 11골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9골 대한민국 7골 이란 5골 이라크 3골 쿠웨이트 레바논 카타르 2골 태국 우즈베키스탄 0골 인도네시아 각주[편집] ↑ “<아시안컵축구 낙수> 레바논, 제12회대회 유치 가능성”.  ↑ “2천년 아시안컵 축구 레바논서 개최 결정”.  ↑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120쪽.  vdehAFC 아시안컵본선 홍콩 1956년 대한민국 1960년 이스라엘 1964년 이란 1968년 태국 1972년 이란 1976년 쿠웨이트 1980년 싱가포르 1984년 카타르 1988년 일본 1992년 아랍에미리트 1996년 레바논 2000년 중국 2004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2007년 카타르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2015년 아랍에미리트 2019년 중국 2023년 2027년 예선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2023년 2027년 결승전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선수 명단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1956년부터 1968년까지는 결승전은 없었으며, 대신 우승국을 조별 리그전으로 정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00년_AFC_아시안컵&oldid=24274579" 분류: 2000년 AFC 아시안컵레바논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2000년 축구2000년 레바논2000년 10월숨은 분류: 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ietuvių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5일 (토) 05: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00년 AFC 아시안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0년 AFC 아시안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00년 AFC 아시안컵كأس آسيا 2000대회 개요개최국 레바논개최 기간 10월 12일 ~ 10월 29일예선 참가국 42개국참가국 12개국경기장 3개 최종 순위● 우승국 일본 (2번째 우승)● 준우승국 사우디아라비아● 3위 대한민국● 4위 중국통계총 경기수 26경기득점 총합 77 (한 경기 평균 2.96골)최다 득점 선수 이동국 (6골)최우수 선수 나나미 히로시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96 2004 → v • d • e • h 2000년 AFC 아시안컵은 2000년 10월 12일부터 10월 29일까지 레바논에서 개최된 12번째 AFC 아시안컵이다. 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결승전에서 모치즈키 시게요시의 결승골로 1-0으로 누르고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목차 1 개최국 선정 2 예선 3 개최 도시 및 경기장 4 선수 명단 5 조별 리그 5.1 A조 5.2 B조 5.3 C조 5.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6 결선 토너먼트 6.1 8강전 6.2 준결승전 6.3 3,4위전 6.4 결승전 7 우승국 8 최종 순위 9 수상 9.1 MVP (최우수 선수) 9.2 최다 득점자 9.3 최고의 수비수 9.4 최고의 골키퍼 9.5 페어플레이 수상 9.6 올스타 팀 10 득점 선수 11 팀 득점 기록 12 각주 개최국 선정[편집] 레바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중국, 홍콩이 2000년 AFC 아시안컵 유치를 신청했다.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1996년 12월 20일에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레바논을 2000년 AFC 아시안컵 개최국으로 선정했다.[1][2] 예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예선입니다. 레바논은 개최국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96년 AFC 아시안컵 우승 팀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42개국이 예선에 참가해 10개의 조로 나뉘어 각 조의 1위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이 팀들은 레바논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본선에 진출한 10개국이다. 중국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일본   쿠웨이트 대한민국 카타르 태국 우즈베키스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베이루트 시돈 트리폴리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사이다 국제경기장 국제 올림픽 경기장 수용인원: 48,837명 수용인원: 22,600명 수용인원: 22,400명 선수 명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선수 명단입니다. 조별 리그[편집] 모든 시간은 현지 시간(UTC+2)을 따름.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이란 7 3 2 1 0 6 1 +5 이라크 4 3 1 1 1 4 3 +1 태국 2 3 0 2 1 2 4 -2 레바논 2 3 0 2 1 3 7 -4 2000년 10월 12일 15:05 이라크 2 – 0 태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드레인  27'마지드  58' 2000년 10월 12일 18:45 레바논 0 – 4 이란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루쥔 바게리  18'에스틸리  75', 87'다에이  90' 2000년 10월 15일 17:05 이란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다에이  73' 피투라타나  12' 2000년 10월 15일 19:45 레바논 2 – 2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김영주 차루르  28'호제이즈  77' 칼라프  4', 22' 2000년 10월 18일 19:35 이란 1 – 0 이라크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루쥔 다에이  77' 2000년 10월 18일 19:35 레바논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페르난데스  82' 피투라타나  57'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중국 5 3 1 2 0 6 2 +4 쿠웨이트 5 3 1 2 0 1 0 +1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인도네시아 1 3 0 1 2 0 7 -7 2000년 10월 13일 17:05 대한민국 2 – 2 중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이영표  29'노정윤  57' 마밍위  35'판즈이  65' (페널티골) 2000년 10월 13일 19:45 쿠웨이트 0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16일 17:05 중국 4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리밍  1'선쓰  7' (페널티골)양천  15'치훙  89' 2000년 10월 16일 19:45 대한민국 0 – 1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알후와이디  42' 2000년 10월 19일 19:35 중국 0 – 0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2000년 10월 19일 19:35 대한민국 3 – 0 인도네시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이동국  30', 75', 89'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일본 7 3 2 1 0 13 3 +10 사우디아라비아 4 3 1 1 1 6 4 +2 카타르 3 3 0 3 0 2 2 0 우즈베키스탄 1 3 0 1 2 2 14 -12 2000년 10월 14일 17:05 사우디아라비아 1 – 4 일본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리오카 90′ (자책골) 야나기사와  22'다카하라  37'나나미  53'오노  88' 2000년 10월 14일 19:45 카타르 1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알발루시  60' 카시모프  73' 2000년 10월 17일 17:05 일본 8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모리시마  7'니시자와  14', 24', 49'다카하라  17', 20', 57'기타지마  78' 루샨  28' 2000년 10월 17일 19:45 사우디아라비아 0 – 0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20일 19:35 사우디아라비아 5 – 0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김영주 알오타이비  18'샬후브  35', 78', 86'알테미아트  88' 2000년 10월 20일 19:35 일본 1 – 1 카타르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니시자와  60' 알오바이달리  22'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조별 예선이 끝난 뒤, 각 조에서 3위를 차지한 팀은 승점, 골득실을 비교하여 그 중에서 높은 점수를 낸 두 팀은 8강에 진출한다. 조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결과 B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8강전 진출 C 카타르 3 3 0 3 0 2 2 +0 8강전 진출 A 태국 2 3 0 2 1 2 4 -2 지역 예선 탈락 대한민국과 카타르가 각각 1, 2위를 차지함에 따라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10월 23일 - 시돈           중국  3 10월 26일 - 베이루트   카타르  1     중국  2 10월 24일 - 베이루트     일본  3     일본  4 10월 29일 - 베이루트   이라크  1     일본  1 10월 23일 - 트리폴리     사우디아라비아  0   이란  1 10월 26일 - 베이루트   대한민국 (AET)  2     대한민국  1 3·4위전 10월 24일 - 베이루트     사우디아라비아  2     쿠웨이트  2   중국  0   사우디아라비아 (AET)  3     대한민국  1 10월 29일 - 베이루트 8강전[편집] 2000년 10월 23일 16:45 이란 1 – 2(연장전) 대한민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바게리  71' 김상식  90'이동국 99' 2000년 10월 23일 19:45 중국 3 – 1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리밍  9'치훙  38'양천  54' 알에나지  65' 2000년 10월 24일 16:45 일본 4 – 1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나나미  8', 29'다카하라  11'묘진  62' 오베이드  4' 이라크가 일본과의 8강전에서 1-4로 대패했을 때 골키퍼 하심 하산, 수비수 압둘 자베르, 공격수인 카탄 차티르는 우다이 후세인의 경호원들에게 3일 동안 채찍질을 당했다. 4일째 되던 날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렇게 많은 골을 먹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3] 2000년 10월 24일 19:45 쿠웨이트 2 – 3(연장전)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바샤르 압둘라  61'알후와이디  67' 알테미아트  45+1' 108'알메샬  67' 준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6일 16:45 대한민국 1 – 2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이동국  90' 알메샬  76', 80' 2000년 10월 26일 19:45 중국 2 – 3 일본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치훙  30'양천  48' 판즈이 21′ (자책골)니시자와  53'묘진  61' 3,4위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6:05 중국 0 – 1 대한민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이동국  76' 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8:45 일본 1 – 0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치즈키  29' 우승국[편집] AFC 아시안컵 우승 일본 1 1  제12대 아시아 챔피언 (2회 우승) 1992년・2000년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일본 6 5 1 0 21 6 +15 16 2 사우디아라비아 6 3 1 2 11 8 +3 10 3 대한민국 6 3 1 2 9 6 +3 10 4 중국 6 2 2 1 11 7 +4 8 5 이란 4 2 1 1 7 3 +4 7 6 쿠웨이트 4 1 2 1 3 3 0 5 7 이라크 4 1 1 2 5 7 -2 4 8 카타르 4 0 3 1 3 5 -2 3 9 태국 3 0 2 1 2 4 -2 2 10 레바논 3 0 2 1 3 7 -4 2 11 인도네시아 3 0 1 2 0 7 -7 1 12 우즈베키스탄 3 0 1 2 2 14 -12 1 수상[편집] MVP (최우수 선수)[편집] 나나미 히로시 최다 득점자[편집] 이동국 - 6골 최고의 수비수[편집] 이영표 최고의 골키퍼[편집] 장진 페어플레이 수상[편집] 중국 올스타 팀[편집]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장진 홍명보 모하메드 알킬라이위 자말 무바레크 나나미 히로시 나와프 알테미아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카림 바게리 나카무라 슌스케 이동국 다카하라 나오히로 득점 선수[편집] 6 골 이동국 5 골 니시자와 아키노리 다카하라 나오히로 3 골 치훙 양천 알리 다에이 나나미 히로시 탈랄 알메샬 모하마드 알샬후브 나와프 알테미아트 2 골 리밍 카림 바게리 하미드 레자 에스틸리 사바 자디르 칼라프 묘진 도모카즈 자셈 알후와이디 사케산 피투라타나 1 골 판즈이 선쓰 쑤마오전 카탄 드레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하이다르 마흐무드 마지드 기타지마 히데아키 모치즈키 시게요시 모리시마 히로아키 오노 신지 야나기사와 아쓰시 바샤르 압둘라 압바스 차루르 루이스 페르난데스 무사 호제이즈 모하메드 골람 알발루시 모하메드 살렘 알에나지 압둘 나시르 알리 알오바이달리 마르주크 모하메드 알오타이비 김상식 이영표 노정윤 미르잘롤 카시모프 세르게이 루샨 자책골 판즈이 (일본전) 모리오카 류조 (사우디아라비아전) 팀 득점 기록[편집] 21골 일본 11골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9골 대한민국 7골 이란 5골 이라크 3골 쿠웨이트 레바논 카타르 2골 태국 우즈베키스탄 0골 인도네시아 각주[편집] ↑ “<아시안컵축구 낙수> 레바논, 제12회대회 유치 가능성”.  ↑ “2천년 아시안컵 축구 레바논서 개최 결정”.  ↑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120쪽.  vdehAFC 아시안컵본선 홍콩 1956년 대한민국 1960년 이스라엘 1964년 이란 1968년 태국 1972년 이란 1976년 쿠웨이트 1980년 싱가포르 1984년 카타르 1988년 일본 1992년 아랍에미리트 1996년 레바논 2000년 중국 2004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2007년 카타르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2015년 아랍에미리트 2019년 중국 2023년 2027년 예선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2023년 2027년 결승전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선수 명단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1956년부터 1968년까지는 결승전은 없었으며, 대신 우승국을 조별 리그전으로 정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00년_AFC_아시안컵&oldid=24274579" 분류: 2000년 AFC 아시안컵레바논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2000년 축구2000년 레바논2000년 10월숨은 분류: 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ietuvių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5일 (토) 05: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00년 AFC 아시안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0년 AFC 아시안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2000년 AFC 아시안컵كأس آسيا 2000대회 개요개최국 레바논개최 기간 10월 12일 ~ 10월 29일예선 참가국 42개국참가국 12개국경기장 3개 최종 순위● 우승국 일본 (2번째 우승)● 준우승국 사우디아라비아● 3위 대한민국● 4위 중국통계총 경기수 26경기득점 총합 77 (한 경기 평균 2.96골)최다 득점 선수 이동국 (6골)최우수 선수 나나미 히로시이전 대회 / 다음 대회 ← 1996 2004 → v • d • e • h 2000년 AFC 아시안컵은 2000년 10월 12일부터 10월 29일까지 레바논에서 개최된 12번째 AFC 아시안컵이다. 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결승전에서 모치즈키 시게요시의 결승골로 1-0으로 누르고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목차 1 개최국 선정 2 예선 3 개최 도시 및 경기장 4 선수 명단 5 조별 리그 5.1 A조 5.2 B조 5.3 C조 5.4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6 결선 토너먼트 6.1 8강전 6.2 준결승전 6.3 3,4위전 6.4 결승전 7 우승국 8 최종 순위 9 수상 9.1 MVP (최우수 선수) 9.2 최다 득점자 9.3 최고의 수비수 9.4 최고의 골키퍼 9.5 페어플레이 수상 9.6 올스타 팀 10 득점 선수 11 팀 득점 기록 12 각주 개최국 선정[편집] 레바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중국, 홍콩이 2000년 AFC 아시안컵 유치를 신청했다.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1996년 12월 20일에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레바논을 2000년 AFC 아시안컵 개최국으로 선정했다.[1][2] 예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예선입니다. 레바논은 개최국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96년 AFC 아시안컵 우승 팀으로서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했다. 42개국이 예선에 참가해 10개의 조로 나뉘어 각 조의 1위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이 팀들은 레바논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본선에 진출한 10개국이다. 중국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일본   쿠웨이트 대한민국 카타르 태국 우즈베키스탄 개최 도시 및 경기장[편집] 베이루트 시돈 트리폴리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사이다 국제경기장 국제 올림픽 경기장 수용인원: 48,837명 수용인원: 22,600명 수용인원: 22,400명 선수 명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000년 AFC 아시안컵 선수 명단입니다. 조별 리그[편집] 모든 시간은 현지 시간(UTC+2)을 따름. A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이란 7 3 2 1 0 6 1 +5 이라크 4 3 1 1 1 4 3 +1 태국 2 3 0 2 1 2 4 -2 레바논 2 3 0 2 1 3 7 -4 2000년 10월 12일 15:05 이라크 2 – 0 태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드레인  27'마지드  58' 2000년 10월 12일 18:45 레바논 0 – 4 이란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루쥔 바게리  18'에스틸리  75', 87'다에이  90' 2000년 10월 15일 17:05 이란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다에이  73' 피투라타나  12' 2000년 10월 15일 19:45 레바논 2 – 2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김영주 차루르  28'호제이즈  77' 칼라프  4', 22' 2000년 10월 18일 19:35 이란 1 – 0 이라크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루쥔 다에이  77' 2000년 10월 18일 19:35 레바논 1 – 1 태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페르난데스  82' 피투라타나  57' B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중국 5 3 1 2 0 6 2 +4 쿠웨이트 5 3 1 2 0 1 0 +1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인도네시아 1 3 0 1 2 0 7 -7 2000년 10월 13일 17:05 대한민국 2 – 2 중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오메르 알메한나 이영표  29'노정윤  57' 마밍위  35'판즈이  65' (페널티골) 2000년 10월 13일 19:45 쿠웨이트 0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16일 17:05 중국 4 – 0 인도네시아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리밍  1'선쓰  7' (페널티골)양천  15'치훙  89' 2000년 10월 16일 19:45 대한민국 0 – 1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알후와이디  42' 2000년 10월 19일 19:35 중국 0 – 0 쿠웨이트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2000년 10월 19일 19:35 대한민국 3 – 0 인도네시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가미카와 도루 이동국  30', 75', 89' C조[편집]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일본 7 3 2 1 0 13 3 +10 사우디아라비아 4 3 1 1 1 6 4 +2 카타르 3 3 0 3 0 2 2 0 우즈베키스탄 1 3 0 1 2 2 14 -12 2000년 10월 14일 17:05 사우디아라비아 1 – 4 일본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리오카 90′ (자책골) 야나기사와  22'다카하라  37'나나미  53'오노  88' 2000년 10월 14일 19:45 카타르 1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알발루시  60' 카시모프  73' 2000년 10월 17일 17:05 일본 8 – 1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모리시마  7'니시자와  14', 24', 49'다카하라  17', 20', 57'기타지마  78' 루샨  28' 2000년 10월 17일 19:45 사우디아라비아 0 – 0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2000년 10월 20일 19:35 사우디아라비아 5 – 0 우즈베키스탄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김영주 알오타이비  18'샬후브  35', 78', 86'알테미아트  88' 2000년 10월 20일 19:35 일본 1 – 1 카타르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니시자와  60' 알오바이달리  22' 각 조 3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편집] 조별 예선이 끝난 뒤, 각 조에서 3위를 차지한 팀은 승점, 골득실을 비교하여 그 중에서 높은 점수를 낸 두 팀은 8강에 진출한다. 조 팀 승점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골득실 결과 B 대한민국 4 3 1 1 1 5 3 +2 8강전 진출 C 카타르 3 3 0 3 0 2 2 +0 8강전 진출 A 태국 2 3 0 2 1 2 4 -2 지역 예선 탈락 대한민국과 카타르가 각각 1, 2위를 차지함에 따라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선 토너먼트[편집]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10월 23일 - 시돈           중국  3 10월 26일 - 베이루트   카타르  1     중국  2 10월 24일 - 베이루트     일본  3     일본  4 10월 29일 - 베이루트   이라크  1     일본  1 10월 23일 - 트리폴리     사우디아라비아  0   이란  1 10월 26일 - 베이루트   대한민국 (AET)  2     대한민국  1 3·4위전 10월 24일 - 베이루트     사우디아라비아  2     쿠웨이트  2   중국  0   사우디아라비아 (AET)  3     대한민국  1 10월 29일 - 베이루트 8강전[편집] 2000년 10월 23일 16:45 이란 1 – 2(연장전) 대한민국 트리폴리, 국제 올림픽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바게리  71' 김상식  90'이동국 99' 2000년 10월 23일 19:45 중국 3 – 1 카타르 시돈, 사이다 국제경기장 심판: 모드 나즈리 압둘라 리밍  9'치훙  38'양천  54' 알에나지  65' 2000년 10월 24일 16:45 일본 4 – 1 이라크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타자딘 파레스 나나미  8', 29'다카하라  11'묘진  62' 오베이드  4' 이라크가 일본과의 8강전에서 1-4로 대패했을 때 골키퍼 하심 하산, 수비수 압둘 자베르, 공격수인 카탄 차티르는 우다이 후세인의 경호원들에게 3일 동안 채찍질을 당했다. 4일째 되던 날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렇게 많은 골을 먹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3] 2000년 10월 24일 19:45 쿠웨이트 2 – 3(연장전)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브라이언 홀 바샤르 압둘라  61'알후와이디  67' 알테미아트  45+1' 108'알메샬  67' 준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6일 16:45 대한민국 1 – 2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사드 카밀 알파들리 이동국  90' 알메샬  76', 80' 2000년 10월 26일 19:45 중국 2 – 3 일본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샴술 마이딘 치훙  30'양천  48' 판즈이 21′ (자책골)니시자와  53'묘진  61' 3,4위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6:05 중국 0 – 1 대한민국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아마드 나빌 아야드 이동국  76' 결승전[편집] 2000년 10월 29일 18:45 일본 1 – 0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카밀 샤문 스포츠 시티 경기장 심판: 알리 부지사임 모치즈키  29' 우승국[편집] AFC 아시안컵 우승 일본 1 1  제12대 아시아 챔피언 (2회 우승) 1992년・2000년 최종 순위[편집] 순위 팀 경기수 승 무 패 득 실 득실차 승점 1 일본 6 5 1 0 21 6 +15 16 2 사우디아라비아 6 3 1 2 11 8 +3 10 3 대한민국 6 3 1 2 9 6 +3 10 4 중국 6 2 2 1 11 7 +4 8 5 이란 4 2 1 1 7 3 +4 7 6 쿠웨이트 4 1 2 1 3 3 0 5 7 이라크 4 1 1 2 5 7 -2 4 8 카타르 4 0 3 1 3 5 -2 3 9 태국 3 0 2 1 2 4 -2 2 10 레바논 3 0 2 1 3 7 -4 2 11 인도네시아 3 0 1 2 0 7 -7 1 12 우즈베키스탄 3 0 1 2 2 14 -12 1 수상[편집] MVP (최우수 선수)[편집] 나나미 히로시 최다 득점자[편집] 이동국 - 6골 최고의 수비수[편집] 이영표 최고의 골키퍼[편집] 장진 페어플레이 수상[편집] 중국 올스타 팀[편집]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장진 홍명보 모하메드 알킬라이위 자말 무바레크 나나미 히로시 나와프 알테미아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카림 바게리 나카무라 슌스케 이동국 다카하라 나오히로 득점 선수[편집] 6 골 이동국 5 골 니시자와 아키노리 다카하라 나오히로 3 골 치훙 양천 알리 다에이 나나미 히로시 탈랄 알메샬 모하마드 알샬후브 나와프 알테미아트 2 골 리밍 카림 바게리 하미드 레자 에스틸리 사바 자디르 칼라프 묘진 도모카즈 자셈 알후와이디 사케산 피투라타나 1 골 판즈이 선쓰 쑤마오전 카탄 드레인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하이다르 마흐무드 마지드 기타지마 히데아키 모치즈키 시게요시 모리시마 히로아키 오노 신지 야나기사와 아쓰시 바샤르 압둘라 압바스 차루르 루이스 페르난데스 무사 호제이즈 모하메드 골람 알발루시 모하메드 살렘 알에나지 압둘 나시르 알리 알오바이달리 마르주크 모하메드 알오타이비 김상식 이영표 노정윤 미르잘롤 카시모프 세르게이 루샨 자책골 판즈이 (일본전) 모리오카 류조 (사우디아라비아전) 팀 득점 기록[편집] 21골 일본 11골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9골 대한민국 7골 이란 5골 이라크 3골 쿠웨이트 레바논 카타르 2골 태국 우즈베키스탄 0골 인도네시아 각주[편집] ↑ “<아시안컵축구 낙수> 레바논, 제12회대회 유치 가능성”.  ↑ “2천년 아시안컵 축구 레바논서 개최 결정”.  ↑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120쪽.  vdehAFC 아시안컵본선 홍콩 1956년 대한민국 1960년 이스라엘 1964년 이란 1968년 태국 1972년 이란 1976년 쿠웨이트 1980년 싱가포르 1984년 카타르 1988년 일본 1992년 아랍에미리트 1996년 레바논 2000년 중국 2004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2007년 카타르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2015년 아랍에미리트 2019년 중국 2023년 2027년 예선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2023년 2027년 결승전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선수 명단 1956년 1960년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1956년부터 1968년까지는 결승전은 없었으며, 대신 우승국을 조별 리그전으로 정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00년_AFC_아시안컵&oldid=24274579" 분류: 2000년 AFC 아시안컵레바논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2000년 축구2000년 레바논2000년 10월숨은 분류: 아랍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مصرى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Lietuvių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5일 (토) 05:0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새서울고속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새서울고속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새서울고속 주식회사New Seoul Express Co.,Ltd. 산업 분야 운수업 창립 2000년 9월 27일 시장 정보 비상장 국가 대한민국 본사 소재지 대한민국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죽천로 33 (복대동) 핵심 인물 권영선, 권오석 (대표이사) 제품 시외버스 자본금 500,000,000원 (2014년) 매출액 24,808,663,041원 (2014년) 영업이익 2,568,631,452원 (2014년) 순이익 2,275,922,535원 (2014년) 자산총액 15,935,841,802원 (2014년) 계열사 서울고속, 대한상운, 삼부개발 웹사이트 서울고속 새서울고속(―高速)은 충청북도의 시외버스 업체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에 본사가 있다. 계열사로는 같은 충청북도의 시외버스 업체인 서울고속을 비룻하여 삼부개발과 서울특별시의 택시업체인 대한상운이 있다. 목차 1 역사 2 명칭에 대한 오해 3 운행 노선 3.1 고속버스 3.2 시외버스 4 운행 차량 5 더 보기 6 각주 역사[편집] 회사의 전신은 1962년 12월 29일 직행버스 면허를 취득한 충일고속으로 2000년 9월 27일 서울고속이 충일고속을 인수한 후 재창립되었다. 고속버스 면허는 2006년 6월 15일에 취득하였다. 명칭에 대한 오해[편집] 원래 있던 서울고속이 충일고속의 시외버스 사업을 인수하면서 법인 자체가 아닌 차량과 면허, 인력만을 인수하여 기존의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서울고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새서울고속과 서울고속은 서울특별시와 전혀 무관하다. 또한 경기도 평택시에 소재한 경기 서울고속과도 관계없는 별개 업체이다. 운행 노선[편집] 2015년 12월 기준이다.[1] 운행업체 면허 대수 대수 합계 직행형 고속형 예비 새서울고속 129 119 8 2 고속버스[편집] 2019년 4월 기준이다.[2] 모든 노선이 시외버스에서 고속버스로 전환된 노선이다. 운행노선 공동운행사 운행구간 경유지 운행 대수 비고 일반 우등 서울남부 ↔ 북청주 서울고속 서울남부 ↔ 북청주 오창산단 - 7 미운행 노선 청주 ↔ 경주 청주 ↔ 경주 - 2 2016년 3월 2일 고속버스로 전환 인가 시외버스[편집] 남서울발 노선 남서울 ~ 청주 ~ 보은 ~ 속리산 남서울 ~ 청주 ~ 보은 ~ 상주 남서울 ~ 오송읍주민센터 ~ 오송역 ~ 오송생명과학단지 청주발 노선 청주 ~ 센트럴시티 (일부 노선 속리산발) 청주 ~ 남서울 (일부 노선 속리산, 상주발) 청주 ~ 안산 (금남고속, 경기대원삼흥고속 공동 운행) 청주 ~ 성남 (경기대원삼흥고속 공동 운행) 청주 ~ 의왕 ~ 안양 (금남고속, 경기대원삼흥고속 공동 운행) 청주 ~ 오산 ~ 수원 (경기대원삼흥고속 공동 운행) 청주 ~ 신갈 ~ 영통 ~ 아주대학교 ~ 수원 청주 ~ 송탄 청주 ~ 평택 (경기대원삼흥고속, 충북리무진 공동 운행) 청주 ~ 보은 ~ 속리산 청주 ~ 보은 ~ 상주 청주 ~ 경주 ~ 불국사 ~ 입실 ~ 울산 청주 ~ 강구 ~ 포항(아성천마고속 공동 운행) 청주 ~ 제천 (고속도로 직통) 북청주발 노선 북청주 ~ 센트럴시티 (일부 시간대 청주국제공항 경유) 북청주 ~ 오창과학산업단지 ~ 수원 포항발 노선 포항 ~ 경주 ~ 동서울 (경기대원삼흥고속, 아성천마고속과 공동 운행) 포항 ~ 경주 ~ 구리 ~ 의정부 (경기대원삼흥고속, 아성천마고속 공동 운행) 운행 차량[편집] 기아자동차 기아 그랜버드 SD 시리즈 기아 뉴 그랜버드 그린필드 기아 뉴 그랜버드 파크웨이 현대자동차 현대 유니버스 스페이스 력셔리 더 보기[편집] 서울고속 각주[편집] ↑ 시외고속버스 면허대수 현황, 충청북도청 교통물류과, 2015년 12월 작성. ↑ 고속버스 운행계통표, 국토교통부, 2019년 4월 12일. vdeh충청북도의 버스 기업시내버스 업체 단양버스 동양교통 동일버스 동일운수 삼화버스공사 신흥운수 아성교통관광 옥천버스운송 우진교통 음성교통 제천교통 제천운수 진천여객 청신운수 청주교통 충주교통 한성운수 시외버스 업체 금호속리산고속 새서울고속 서울고속 충북리무진 친선고속 코리아와이드대성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새서울고속&oldid=24120013" 분류: 충청북도의 시외버스 기업충청북도의 고속버스 기업충청북도의 공항버스 기업2000년 설립청주시의 교통흥덕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29일 (월) 15: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박원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원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14년 1월) 박원규(朴元圭, 1957년 11월 2일~2014년 1월 18일)는 충북대학교 농업생명환경대학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로서, 목재의 나이테를 측정하는 연륜연대학 연구자이다. 목차 1 숭례문 조사 2 관련보도 3 더 보기 4 각주 숭례문 조사[편집] 박교수는 충북대의 교수연구실에서 목을 매어 사망했으며, 양복 주머니에서 '너무 힘들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메모가 발견되어, 자살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자살하는 사람이 아내와 점심식사를 약속하고 그 시간에 갑자기 자살했다는 것은 그렇게 상식적인 사례는 아니다.[1] 2014년 1월 3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숭례문 복구와 앞선 광화문 복원 공사에서 나무를 공급한 신응수 대목장이 관급 목재를 빼돌리고 값싼 러시아산 소나무로 바꿔치기했다는 의혹과 관련하여 법원의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신 대목장 서울 자택과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강릉 W 목재상, 광화문 안에 있는 신 대목장의 치목장(나무를 다듬는 곳) 등 5∼6곳을 압수수색했다. 박교수가 경찰측의 수사에 대한 과학적 검증을 맡았다.[2] [박원규/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 : 준경묘(금강송) 채취가 아님이 유력한 것으로 2개, 5개는 판단 불가가 되겠습니다.]. 이 보도는 2014년 1월 17일에 보도되었다.[3] 그리고 하루 뒤에 아내와의 점심식사를 약속한 상태에서 갑자기 교수연구실에서 사망했다. 관련보도[편집] 2000년 충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의 박원규 박사가 폴란드 순수예술원의 코마스 봐즈니 교수 등과 함께 경복궁 경회루에 사용된 소나무의 나이테를 검사한 결과 이 목재가 1864∼1866년 겨울에 벌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경회루 축조 연대(1867년)와 일치하는 것으로 연륜연대측정법의 정밀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4] 충북대 농업과학기술연구소 박원규(42.산림과학부) 교수는 폴란드 순수예술원보존학부 토마스 봐즈니(Tomasz Wazny) 교수 등 5명과 공동으로 최근 발표한 `고목재 나이테를 이용한 한국 전통목조건축의 연대측정' 제하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5] 우리나라는 충북대에 있는 목재연륜소재은행(은행장 박원규 교수)이 지난 10년간 소나무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800년 전까지 나이테 패턴을 확보해 두었다.[6] 2010년 박원규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는 "건축물 나무 부재(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의 벌채 연도를 알면 건축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며 "숭례문 목부재 68점의 나이테 연대를 측정한 결과 1860년대에 대대적인 지붕 공사가 있었던 흔적을 찾았고, 조선 태조 때 사용됐던 건축양식을 가진 목부재도 알아냈다"고 말했다.[7] 더 보기[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각주[편집]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59&oid=449&aid=0000005604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682774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024438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078&aid=0000006342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07146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11&aid=0000210492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32400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원규&oldid=23596882" 분류: 1957년 태어남2014년 죽음목 매달아 자살한 사람대한민국의 과학자숨은 분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4년 1월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1일 (목) 04: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박원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원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14년 1월) 박원규(朴元圭, 1957년 11월 2일~2014년 1월 18일)는 충북대학교 농업생명환경대학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로서, 목재의 나이테를 측정하는 연륜연대학 연구자이다. 목차 1 숭례문 조사 2 관련보도 3 더 보기 4 각주 숭례문 조사[편집] 박교수는 충북대의 교수연구실에서 목을 매어 사망했으며, 양복 주머니에서 '너무 힘들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메모가 발견되어, 자살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자살하는 사람이 아내와 점심식사를 약속하고 그 시간에 갑자기 자살했다는 것은 그렇게 상식적인 사례는 아니다.[1] 2014년 1월 3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숭례문 복구와 앞선 광화문 복원 공사에서 나무를 공급한 신응수 대목장이 관급 목재를 빼돌리고 값싼 러시아산 소나무로 바꿔치기했다는 의혹과 관련하여 법원의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신 대목장 서울 자택과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강릉 W 목재상, 광화문 안에 있는 신 대목장의 치목장(나무를 다듬는 곳) 등 5∼6곳을 압수수색했다. 박교수가 경찰측의 수사에 대한 과학적 검증을 맡았다.[2] [박원규/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 : 준경묘(금강송) 채취가 아님이 유력한 것으로 2개, 5개는 판단 불가가 되겠습니다.]. 이 보도는 2014년 1월 17일에 보도되었다.[3] 그리고 하루 뒤에 아내와의 점심식사를 약속한 상태에서 갑자기 교수연구실에서 사망했다. 관련보도[편집] 2000년 충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의 박원규 박사가 폴란드 순수예술원의 코마스 봐즈니 교수 등과 함께 경복궁 경회루에 사용된 소나무의 나이테를 검사한 결과 이 목재가 1864∼1866년 겨울에 벌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경회루 축조 연대(1867년)와 일치하는 것으로 연륜연대측정법의 정밀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4] 충북대 농업과학기술연구소 박원규(42.산림과학부) 교수는 폴란드 순수예술원보존학부 토마스 봐즈니(Tomasz Wazny) 교수 등 5명과 공동으로 최근 발표한 `고목재 나이테를 이용한 한국 전통목조건축의 연대측정' 제하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5] 우리나라는 충북대에 있는 목재연륜소재은행(은행장 박원규 교수)이 지난 10년간 소나무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800년 전까지 나이테 패턴을 확보해 두었다.[6] 2010년 박원규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는 "건축물 나무 부재(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의 벌채 연도를 알면 건축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며 "숭례문 목부재 68점의 나이테 연대를 측정한 결과 1860년대에 대대적인 지붕 공사가 있었던 흔적을 찾았고, 조선 태조 때 사용됐던 건축양식을 가진 목부재도 알아냈다"고 말했다.[7] 더 보기[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각주[편집]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59&oid=449&aid=0000005604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682774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024438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078&aid=0000006342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07146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11&aid=0000210492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32400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원규&oldid=23596882" 분류: 1957년 태어남2014년 죽음목 매달아 자살한 사람대한민국의 과학자숨은 분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4년 1월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1일 (목) 04: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황산벌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산벌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황산벌 전투신라의 백제 정벌의 일부날짜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장소황산벌, 현재 논산시 연산면 인근결과 신라의 승리, 백제의 수도 사비성 포위백제 멸망교전국 백제 신라지휘관 계백† 충상 상영 김유신 김흠순 김품일 김천존 김반굴† 김관창†김법민병력 5,000명 50,000명피해 규모 4,980명 불명 황산벌 전투(黃山벌 戰鬪)는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황산벌(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삼국유사》 태종무열왕조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 목차 1 배경 2 전투 3 결과 4 황산벌 전투를 다룬 작품 5 주해 6 각주 7 외부 링크 배경[편집] 642년(의자왕 2)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1]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2]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劉伯英), 풍사귀(馮士貴)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케 했다.[3]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3]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강(白江) 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炭峴)[주 1] 쪽으로 쳐들어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오자, 의자왕은 대소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친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1] 또한,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는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과 탄현을 선점해 연합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한 반면, 대신들은 연합군이 각각 백강과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했다.[1]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 다투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 명을 뽑아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처자식을 모두 죽인 후 출전하였다.[4] 전투[편집]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렸다. 당시 달솔 계백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였다.[주 2]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6]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과연 백제군은 사기가 올라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격파하였다. 신라군은 네 번의 패배로 전세가 불리해지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투입하니, 반굴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반굴이 죽자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은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을 시켜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관창은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 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7]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그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7]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한 후 또다시 백제군에 쳐들어 갔다. 결국 계백은 관창을 잡아 목을 베었다. 관창의 죽음에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덤비니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부하들과 함께 계백은 죽었다. 결과[편집] 이때 백제군은 모두 전멸한 것이 아니라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살아 남아 신라의 포로로 잡혔다. 황산벌 전투가 있던 날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신라군과 합류하였다.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독군(新羅督軍) 김문영(金文穎)을 참수하려 하였다. 김유신은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8] 이 말을 들은 동보량(董寶亮)이 소정방에게 귓속말로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김문영을 풀어주었다.[8] 11월이 되어 전공을 논할 시 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충상, 상영 등을 최대한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높은 신분인 6두품과 제7관등인 일길찬의 관직을 주고, 기타 백제인들에게도 백제 시절의 서열을 고려하여 그에 걸맞은 두품과 관직을 하사하였다.[9] 전사한 관창(官昌)은 급찬(級湌)에 추증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 주었으며, 그 집에는 당나라 비단 3십 필, 20승포 3십 필과 곡식 1백 섬을 내려 주었다.[10] 황산벌 전투를 다룬 작품[편집] 《황산벌》 (이준익, 2003년) 주해[편집] ↑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세천동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사이의 고개로 비정됨 ↑ 백제군은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를 비롯하여 세 곳에 5천씩 총 1만5천 명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5] 각주[편집] ↑ 가 나 다 노중국, 황산벌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신라의 삼국통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가 나 《삼국유사》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列傳) 제7 > 계백(階伯) > 계백이 출정의 의지를 다지다(660년 06월(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김용만,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계백의 5000 결사대 황산벌서 '최후의 전투', 《소년한국일보》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列傳) 제7 > 계백(階伯) > 황산 벌판에서 싸우다(660년 06월 (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가 나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660년 07월09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가 나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660년 07월09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660년 11월22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列傳) 제7 > 관창(官昌) > 급찬으로 추증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외부 링크[편집]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 제7(第七) 계백(階伯)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 제7(第七) 관창(官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百濟本紀) 제6(第六) 의자왕(義慈王) - 위키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제1(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신라의 삼국통일"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황산벌_전투&oldid=23632456" 분류: 백제의 전투신라의 전투660년 분쟁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تۆرکجهEnglishEspañolفارسیBahasa IndonesiaNorsk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4일 (월) 13: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황산벌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산벌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황산벌 전투신라의 백제 정벌의 일부날짜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장소황산벌, 현재 논산시 연산면 인근결과 신라의 승리, 백제의 수도 사비성 포위백제 멸망교전국 백제 신라지휘관 계백† 충상 상영 김유신 김흠순 김품일 김천존 김반굴† 김관창†김법민병력 5,000명 50,000명피해 규모 4,980명 불명 황산벌 전투(黃山벌 戰鬪)는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황산벌(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삼국유사》 태종무열왕조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 목차 1 배경 2 전투 3 결과 4 황산벌 전투를 다룬 작품 5 주해 6 각주 7 외부 링크 배경[편집] 642년(의자왕 2)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1]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2]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劉伯英), 풍사귀(馮士貴)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케 했다.[3]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3]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강(白江) 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炭峴)[주 1] 쪽으로 쳐들어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오자, 의자왕은 대소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친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1] 또한,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는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과 탄현을 선점해 연합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한 반면, 대신들은 연합군이 각각 백강과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했다.[1]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 다투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 명을 뽑아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처자식을 모두 죽인 후 출전하였다.[4] 전투[편집]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렸다. 당시 달솔 계백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였다.[주 2]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6]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과연 백제군은 사기가 올라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격파하였다. 신라군은 네 번의 패배로 전세가 불리해지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투입하니, 반굴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반굴이 죽자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은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을 시켜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관창은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 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7]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그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7]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한 후 또다시 백제군에 쳐들어 갔다. 결국 계백은 관창을 잡아 목을 베었다. 관창의 죽음에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덤비니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부하들과 함께 계백은 죽었다. 결과[편집] 이때 백제군은 모두 전멸한 것이 아니라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살아 남아 신라의 포로로 잡혔다. 황산벌 전투가 있던 날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신라군과 합류하였다.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독군(新羅督軍) 김문영(金文穎)을 참수하려 하였다. 김유신은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8] 이 말을 들은 동보량(董寶亮)이 소정방에게 귓속말로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김문영을 풀어주었다.[8] 11월이 되어 전공을 논할 시 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충상, 상영 등을 최대한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높은 신분인 6두품과 제7관등인 일길찬의 관직을 주고, 기타 백제인들에게도 백제 시절의 서열을 고려하여 그에 걸맞은 두품과 관직을 하사하였다.[9] 전사한 관창(官昌)은 급찬(級湌)에 추증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 주었으며, 그 집에는 당나라 비단 3십 필, 20승포 3십 필과 곡식 1백 섬을 내려 주었다.[10] 황산벌 전투를 다룬 작품[편집] 《황산벌》 (이준익, 2003년) 주해[편집] ↑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세천동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사이의 고개로 비정됨 ↑ 백제군은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를 비롯하여 세 곳에 5천씩 총 1만5천 명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5] 각주[편집] ↑ 가 나 다 노중국, 황산벌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신라의 삼국통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가 나 《삼국유사》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列傳) 제7 > 계백(階伯) > 계백이 출정의 의지를 다지다(660년 06월(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김용만,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계백의 5000 결사대 황산벌서 '최후의 전투', 《소년한국일보》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列傳) 제7 > 계백(階伯) > 황산 벌판에서 싸우다(660년 06월 (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가 나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660년 07월09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가 나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660년 07월09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660년 11월22일(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 권제47 열전(列傳) 제7 > 관창(官昌) > 급찬으로 추증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외부 링크[편집]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 제7(第七) 계백(階伯)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 제7(第七) 관창(官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百濟本紀) 제6(第六) 의자왕(義慈王) - 위키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제1(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신라의 삼국통일"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황산벌_전투&oldid=23632456" 분류: 백제의 전투신라의 전투660년 분쟁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تۆرکجهEnglishEspañolفارسیBahasa IndonesiaNorsk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4일 (월) 13: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계명대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계명대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계명대 7번 출구 승강장 (영남대 방면) 개괄 관할 기관 대구도시철도공사 소재지 대구광역시 달서구달구벌대로 지하1140 좌표 북위 35° 51′ 05″ 동경 128° 29′ 30″ / 북위 35.851524° 동경 128.491649°  / 35.851524; 128.491649 개업일 2005년 10월 18일 역 번호 220 승강장 구조 2면 2선 노선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문양 기점 6.6 km ← 강창 (1.1 km) 성서산업단지 →(1.2 km) 계명대역(啓明大驛)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에 있는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의 전철역이다. 목차 1 특징 2 역명의 유래 3 역 구조 4 역사 4.1 승강장 5 역 주변 6 승차량 변동 7 인접한 역 8 각주 9 외부 링크 특징[편집] 신당네거리에 역이 있으며, 인근에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가 소재하여 계명대역이라는 역명이 부여되었다. 대구권 4년제 대학교 중 대구교육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지하철이 연계되었다. 계명대학교의 정문은 이 역의 1번 출구에서 약 365m로 거리가 있는 편이기 때문에,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입구가 이 역의 7번 출구에서 약 6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이곳을 통해 더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 개찰구가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반대편 승강장으로 횡단할 수 없으며, 2호선의 상대식 역들 중 강창역과 함께 단 둘뿐이다. 역명의 유래[편집] 인근에 있는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에서 유래되었다. 역 구조[편집] 2면 2선의 상대식 승강장이 있는 지하 역이다. 출구는 7개가 설치되어 있고, 모두 신당동에 소재하고 있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역사[편집] 2005년 10월 18일 :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2016년 9월 10일 : 스크린도어 설치 승강장[편집] 강창 ↑ 하 | | 상 ↓ 성서산업단지 상행 ■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강창·대실·문양 방면 하행 반월당·범어·영남대 방면 이 역은 반대방향으로 횡단이 불가능한 역이다. 역 주변[편집] 신당동 계명대학교 성서3차산업단지 성서첨단산업단지 우리은행 성서공단지점 E&C이노비즈타워 신흥버스 차고지 모다아울렛 성서병원 대구한마음병원 대구신당초등학교 신당중학교 신당종합사회복지관 성서종합사회복지관 성서주공1단지 성서주공3단지 성서종합시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구·경북지역대학 신당동 우체국 대구신서초등학교 성서농협 신당동지점 성서새마을금고 계명문화대학교 대구은행 계명대지점 계명아트센터 다사읍 서재리·방천리 방면 승차량 변동[편집] 역 인근에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도 있고, 주변 유동인구가 많아서 이용객이 많은 편이다. 현재 2호선의 역들 중 다섯 번째로 이용객이 많다. 노선 승차 인원[1] 주석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호선 6,615 7,091 6,971 7,216 7,265 7,769 7,897 8,234 8,399 8,500 8,347 8,248 인접한 역[편집] 대구 도시철도 2호선 219 강창문양 방면 ■ 대구 도시철도 2호선 221 성서산업단지영남대 방면 각주[편집] ↑ 원자료는 알림판>지하철자료실>통계자료, 대구지하철 승객량 통계 1997~2008 외부 링크[편집] 대구도시철도공사 2호선 계명대역 소개 (철도 통합정보시스템) vdeh대구 도시철도 2호선문양 - 다사 - 대실 - 강창 - 계명대 - 성서산업단지 - 이곡 - 용산 - 죽전 - 감삼 - 두류 - 내당 - 반고개 - 청라언덕 - 반월당 - 경대병원 - 대구은행 - 범어 - 수성구청 - 만촌 - 담티 - 연호 - 대공원 - 고산 - 신매 - 사월 - 정평 - 임당 - 영남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계명대역&oldid=23226338" 분류: 대구 도시철도 2호선대구 달서구의 전철역2005년 개업한 철도역숨은 분류: 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8일 (토) 19: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계명대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계명대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계명대 7번 출구 승강장 (영남대 방면) 개괄 관할 기관 대구도시철도공사 소재지 대구광역시 달서구달구벌대로 지하1140 좌표 북위 35° 51′ 05″ 동경 128° 29′ 30″ / 북위 35.851524° 동경 128.491649°  / 35.851524; 128.491649 개업일 2005년 10월 18일 역 번호 220 승강장 구조 2면 2선 노선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문양 기점 6.6 km ← 강창 (1.1 km) 성서산업단지 →(1.2 km) 계명대역(啓明大驛)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에 있는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의 전철역이다. 목차 1 특징 2 역명의 유래 3 역 구조 4 역사 4.1 승강장 5 역 주변 6 승차량 변동 7 인접한 역 8 각주 9 외부 링크 특징[편집] 신당네거리에 역이 있으며, 인근에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가 소재하여 계명대역이라는 역명이 부여되었다. 대구권 4년제 대학교 중 대구교육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지하철이 연계되었다. 계명대학교의 정문은 이 역의 1번 출구에서 약 365m로 거리가 있는 편이기 때문에,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입구가 이 역의 7번 출구에서 약 6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이곳을 통해 더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 개찰구가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반대편 승강장으로 횡단할 수 없으며, 2호선의 상대식 역들 중 강창역과 함께 단 둘뿐이다. 역명의 유래[편집] 인근에 있는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에서 유래되었다. 역 구조[편집] 2면 2선의 상대식 승강장이 있는 지하 역이다. 출구는 7개가 설치되어 있고, 모두 신당동에 소재하고 있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역사[편집] 2005년 10월 18일 :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2016년 9월 10일 : 스크린도어 설치 승강장[편집] 강창 ↑ 하 | | 상 ↓ 성서산업단지 상행 ■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강창·대실·문양 방면 하행 반월당·범어·영남대 방면 이 역은 반대방향으로 횡단이 불가능한 역이다. 역 주변[편집] 신당동 계명대학교 성서3차산업단지 성서첨단산업단지 우리은행 성서공단지점 E&C이노비즈타워 신흥버스 차고지 모다아울렛 성서병원 대구한마음병원 대구신당초등학교 신당중학교 신당종합사회복지관 성서종합사회복지관 성서주공1단지 성서주공3단지 성서종합시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구·경북지역대학 신당동 우체국 대구신서초등학교 성서농협 신당동지점 성서새마을금고 계명문화대학교 대구은행 계명대지점 계명아트센터 다사읍 서재리·방천리 방면 승차량 변동[편집] 역 인근에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도 있고, 주변 유동인구가 많아서 이용객이 많은 편이다. 현재 2호선의 역들 중 다섯 번째로 이용객이 많다. 노선 승차 인원[1] 주석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호선 6,615 7,091 6,971 7,216 7,265 7,769 7,897 8,234 8,399 8,500 8,347 8,248 인접한 역[편집] 대구 도시철도 2호선 219 강창문양 방면 ■ 대구 도시철도 2호선 221 성서산업단지영남대 방면 각주[편집] ↑ 원자료는 알림판>지하철자료실>통계자료, 대구지하철 승객량 통계 1997~2008 외부 링크[편집] 대구도시철도공사 2호선 계명대역 소개 (철도 통합정보시스템) vdeh대구 도시철도 2호선문양 - 다사 - 대실 - 강창 - 계명대 - 성서산업단지 - 이곡 - 용산 - 죽전 - 감삼 - 두류 - 내당 - 반고개 - 청라언덕 - 반월당 - 경대병원 - 대구은행 - 범어 - 수성구청 - 만촌 - 담티 - 연호 - 대공원 - 고산 - 신매 - 사월 - 정평 - 임당 - 영남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계명대역&oldid=23226338" 분류: 대구 도시철도 2호선대구 달서구의 전철역2005년 개업한 철도역숨은 분류: 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8일 (토) 19: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16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6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개막식 2016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 선정 경기장 마스코트 성화 봉송 메달 집계 (메달리스트) 개회식 (기수) 폐회식 논쟁 패럴림픽 IOC · COB · COJOPR 2016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은 2016년 8월 5일 금요일 (현지)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오후 8시 (현지 시간, 한국 시각 8월 6일 오전 8시)에 시작됐다.[1] 올림픽의 개막식은 올림픽 헌장의 수칙에 의하여 국제 스포츠 행사의 일반적인 개회 식순 (환영사와 국기 게양, 선수단 입장)과 더불어 개최국의 문화를 보여주는 예술적인 연출을 혼합 구성하게 된다. 이날 개막식에는 78,000명의 관객이 참석했다.[2] 목차 1 준비 2 장소 3 개막식 3.1 성화 점화 4 참석 귀빈 5 각주 6 외부 링크 준비[편집] 개막식의 연출 감독은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다니엘라 토마스, 안드루샤 워징턴이 맡았다.[3] 브라질의 유명 안무가 데보라 코우케르는 개막식의 안무를 담당할 자원봉사자 6,000명을 선발하고, 2016년 5월 말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4] 메이렐리스는 2016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과 폐회식에 들어가는 예산이 총 합쳐서 2012년 하계 올림픽에 들어간 예산의 10% 수준에 불과하여 최근 몇 차례의 올림픽보다 상당히 적은 예산이 들어간다고 밝혔다. 메이렐리스는 "위생 시설도 부족하고 교육도 예산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런던이 쓴 만큼 낭비하기엔 부끄러울 것"이라면서, "미친 듯이 돈을 쓰지 않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만큼 부족한 예산으로 작업하게 되어 행복하다. 왜냐하면 브라질로서는 알맞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메이렐리스는 적은 예산으로 인해 개막식에 움직이는 무대나 드론 같은 "하이테크" 방식은 삼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공동 감독을 맡은 레오나르두 카에타누는 개막식의 컨셉트가 "호사로움"을 넘어선 "독창성", 그리고 "창의성과 리듬과 감정으로 보충할 것"이라고 이어 밝혔다.[5][6] 2016년 7월 15일, 가수 아니타, 카에타누 벨로주, 지우베르투 지우가 개막식 동안 공연에 참여할 것으로 발표됐다. 지우와 벨로주는 개막식 연출 자문가로도 참여했었다. 다니엘라 토마스 감독은 이들 가수의 참여가 브라질 음악의 "최고"를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7] 장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마라카낭 스타디움입니다. 개막식이 열린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2014년 FIFA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을 위해 대규모 개조 공사가 착수됐다. 기존에 있던 2단 배치의 좌석층은 철거하고 1단 좌석층으로 새로 꾸몄다.[8] 스타디움에 원래 있던 콘크리트 지붕도 철거하고 팽팽한 섬유 유리에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을 덮어 대체했다. 이렇게 새로 올려진 지붕은 2층의 일부 좌석과 각 구역의 출입구 위만 가렸던 기존의 설계와는 달리, 스타디움 내에 있는 좌석의 95%까지 가려주게 되었다. 개막식[편집] 2016년 하계 올림픽 나라별 기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5년 9월 페르난두 메이렐리스는 개막식이 브라질의 비전과 "내가 바라는 브라질의 미래"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메이렐리스는 클리셰 (뻔한 내용)를 넣지 않으려 애썼으나 전부 피하긴 어려웠다고 밝혔는데, 예를 들어서 리우 카니발이 개막식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했다.[9] 개막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다니에우 조빙이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를 부르는 가운데 2015년 은퇴한 브라질 출신의 유명 모델 지젤 번천이 스타디움을 가로질러 워킹을 선보이는 것이었다.[10][11] 한편 레아 T가 개막식 공연에 참여하여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트랜스여성이 참가하게 되었다.[12] 성화 점화[편집] 개막식의 마무리는 올림픽 성화 봉송이 장식했다. 마지막으로 구스타부 케르텡이 올림픽 성화봉을 들고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오고, 올림픽 성화를 오르텐시아 마르카리에게, 마르카리는 다시 반데를레이 코르데이루 지 리마에게 전달했다. 반데를레이 코르데이루 지 리마는 최종 주자가 되어 성화를 성화대에 붙였다.[13] 참석 귀빈[편집] 처음에는 최소 100명의 국가 수장이 개막식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일부 국가에서는 진행중인 자국 정치 현안이나 다른 사정으로 인해 참석을 보류하게 되었다.[14] 최종적으로는 총 28개국에서 자국 대표가 개막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공식 확인했다.[15] 마르크 뤼터 총리[16] 에딧 스히퍼르스 장관[16] 빌럼 국왕[16] 프레데리크 왕세자[17] 메리 왕세자빈[17]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18]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대통령[19] 알베르 2세 대공[20] 존 케리 국무장관 필리프 국왕[21]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22] 프린세스 로열 앤 (여왕 대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14] 마테오 렌치 총리[22] 기오르기 마르그벨라슈빌리 대통령[23] 류옌둥 상무부총리[24] 밀로시 제만 대통령[25]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국왕 캐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존스턴 총독[26] 하심 타치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22] 오라시오 카르테스 대통령[22] 마르셀루 헤벨루 드 소자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14]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27] 올림픽 포털 각주[편집] ↑ “Tickets”. 2015년 3월 31일. 2015년 6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6월 14일에 확인함.  ↑ “Opening Ceremony of Rio 2016 Summer Olympics”. 2016년 8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8월 6일에 확인함.  ↑ “Rio Olympics committee reveals opening ceremony details”. 2015년 7월 29일.  ↑ “Opening ceremony choreographer promises masterpiece of dance and passion”.  ↑ “Rio Olympics Ceremony to Cost 10% of London's Lavish Event Open”. 《Bloomberg》. 2016년 7월 6일에 확인함.  ↑ “Rio 2016 promise "original" Olympic Opening Ceremony despite low budget”. 《InsideTheGames.biz》. 2016년 7월 6일에 확인함.  ↑ “Rio Olympics: Anitta, Caetano Veloso, Gilberto Gil to Perform at Opening Ceremony”. 《Billboard》. 2016년 7월 31일에 확인함.  ↑ “Maracanã”. 《The Stadium Guide》.  ↑ “Rio Olympics organizers: Opening ceremony will be cheap”. 《CBC 스포츠》. 2015년 9월 22일.  ↑ Heldman, Breanne L. “Gisele Bündchen dazzles at the Olympics Opening Ceremony in Rio”. 《Entertainment Weekly》. 2016년 8월 5일에 확인함.  ↑ “Gisele Bündchen to Walk the 2016 Olympics Opening Ceremony”. 2016년 7월 18일.  ↑ “Who is Lea T, the transgender model taking part in the Rio 2016 opening ceremony?”. 《rio2016.com》. 2016년 8월 6일에 확인함.  ↑ 〈Opening Ceremony〉. 《2016 Summer Olympics》. 2016년 8월 5일. NBC.  ↑ 가 나 다 “Foreign leaders slow to commit to Rio opening ceremony”.  ↑ “Fewer heads of state than expected to attend Rio 2016 Olympics: Sources”. 2016년 8월 4일.  ↑ 가 나 다 “Koning en ministers naar Spelen in Rio”.  ↑ 가 나 “Demark & Monaco royals arrive in Rio for 2016 Olympics”.  ↑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rio2016.com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 “D. Grybauskaitė tikisi, kad Rio triumfuos tik garbingas sportas”. 2016년 8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8월 6일에 확인함.  ↑ “Príncipe Albert II, de Mônaco, desembarca no Rio”.  ↑ “Koning Filip en koningin Mathilde op openingsceremonie OS”.  ↑ 가 나 다 라 “Mais de 40 chefes de estado assistirão abertura da Olimpíada, diz Serra”. 2016년 7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7월 28일에 확인함.  ↑ “Georgia’s President to attend Rio Olympic Games”. Agenda.ge. 2016년 7월 29일. 2016년 8월 5일에 확인함.  ↑ “Vice-Premier Liu Yandong greets media ahead of Rio Olympics”. State Council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016년 8월 6일.  ↑ “Czech President confirms he will attend Opening Ceremony of Rio 2016”. 《Inside the Games》. 2016년 7월 28일에 확인함.  ↑ Toolkit, Web Experience (2016년 7월 25일). “Governor General to be Canada’s official representative at Rio 2016 Olympic Games”.  ↑ “Áder az olimpia nyitó-, Orbán a záróünnepségén képviseli hazánkat” (헝가리어). OrientPress Hírügynökség. 2016년 8월 2일. 2016년 8월 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Sports24Hours: 각국 시간대별 올림픽 개막식 시작 시간 vdeh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개막식하계 올림픽 1896 1900 1904 1908 1912 1920 1924 1928 1932 1936 1948 1952 1956 1960 1964 1968 1972 1976 1980 1984 1988 1992 1996 2000 2004 2008 2012 2016 2020 동계 올림픽 1924 1928 1932 1936 1948 1952 1956 1960 1964 1968 1972 1976 1980 1984 1988 1992 1994 1998 2002 2006 2010 2014 2018 2022 폐막식하계 올림픽 1896 1900 1904 1908 1912 1920 1924 1928 1932 1936 1948 1952 1956 1960 1964 1968 1972 1976 1980 1984 1988 1992 1996 2000 2004 2008 2012 2016 2020 동계 올림픽 1924 1928 1932 1936 1948 1952 1956 1960 1964 1968 1972 1976 1980 1984 1988 1992 1994 1998 2002 2006 2010 2014 2018 202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6년_하계_올림픽_개막식&oldid=24260621" 분류: 2016년 하계 올림픽브라질의 축제올림픽 개막식숨은 분류: 참조 오류가 있는 문서CS1 - 헝가리어 인용 (hu)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বাংলা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orsk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17: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콜린 퍼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콜린 퍼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콜린 퍼스Colin Firth 콜린 퍼스 (2017년)본명 콜린 앤드루 퍼스Colin Andrew Firth출생 1960년 9월 10일(1960-09-10) (58세)잉글랜드 햄프셔주 그레이숏국적 영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1983년 ~ 현재 형제자매 케이트 퍼스(여동생) 조너선 퍼스(남동생) 배우자 메그 틸리 (결혼 1989; 이혼 1994) 리비아 주졸리 (결혼 1997)자녀 3남수상 수상 목록 콜린 앤드루 퍼스(영어: Colin Andrew Firth, CBE[1], 1960년 9월 10일 ~ )는 잉글랜드의 배우이다. 퍼스가 출연한 영화 42편이 세계적으로 30억 달러 이상 수익을 올렸다.[2] 그는 미국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두 번의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세 번의 미국 배우 조합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가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은 조지 6세를 연기한 영화 《킹스 스피치》로 미국 아카데미상 외에도 많은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전세계적으로 4억 1,421만 1,549 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다.[3] 퍼스는 1980년대 말 영국의 유망한 청춘 배우를 일컫는 "브릿 팩(Brit Pack)"의 구성원 중 한명으로, 1995년 TV 시리즈 《오만과 편견》의 "피츠윌리엄 다아시(Mr. Darcy)" 역할로 배우 경력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밖의 이목을 끈 영화로는 《잉글리쉬 페이션트》, 《브리짓 존스의 일기》(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후보 지명), 《셰익스피어 인 러브》, 《러브 액츄얼리》에 출연하였다. 2009년 《싱글맨》으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2011년 그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였고, 《타임》지에서 선정한 "올해의 100인"에 선정되었다.[4] 그는 2007년 원체스터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와 2012년에는 런던시 자유상을 받았다. 퍼스는 원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단체 "서바이벌 인터내셔널"의 구성원으로 그는 또한 망명 신청자 및 난민의 권리와 환경 문제에 대한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5] 목차 1 초기 삶 2 사생활 3 출연 작품 3.1 영화 3.2 텔레비전 3.3 연극 4 수상 및 후보 목록 5 서훈 6 각주 7 외부 링크 초기 삶[편집] 퍼스는 햄프셔주 그레이숏(Grayshott)에서 교육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셜리 진 퍼스(옛 성씨는 롤즈)은 킹 앨프리드 칼리지(현 윈체스터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노먼 루이스 퍼스는 킹 앨프리드 칼리지 역사학 조교수와 나이지리아 정부의 교육장으로 재직했다.[6][7][8] 퍼스는 3남매 중 장남으로 여동생 케이트 퍼스는 연극 배우 겸 보컬 코치이며, 남동생 조너선 퍼스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퍼스의 부모는 인도에서 성장했으며,[9] 그의 외조부모는 회중 교회 목사였고, 그의 친조부는 성공회 성직자로 해외 선교 활동을 하였다.[10][11][12][13] 퍼스는 부모의 일로 여러 지역을 이동했고, 나이지리아에 몇년간 거주했다.[14] 그는 또한 만 11세때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던 때를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한다.[15] 가족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는 햄프셔주 윈체스터에 위치한 몽고메리 오브 알라메인 스쿨(중학교, 현재 킹스 스쿨)에 다녔다. 그는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지역 노동 계급의 햄프셔 악센트를 사용했는데, 학업에 대한 흥미의 부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6] 그가 만 14세가 된 무렵, 퍼스는 이전에 만 10세때부터 연극 워크샵을 참석했던 것을 계기로 배우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나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난 그냥 썩 좋지는 않고 따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가르치는 것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라고 말했다.[15] 그러나, 햄프셔 주 이스트레이에 위치한 바턴 페버릴 식스 팜 칼리지(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교사 페니 에드워드의 열정적인 가르침 덕분에 영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바턴 페버릴에서의 2년 동안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다.”라고 말한다.[17] 그는 이후 런던으로 처음 이동해 내셔널 유스 극장(National Youth Theatre)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의상 감수 일을 하며 연기와 병행하면서 세계의 많은 연기를 접했다.[16] 그리고 그는 드라마 센터 런던(Drama Centre London)에서 공부했다.[18] 사생활[편집] 2011년 1월, 퍼스와 아내 리비아 퍼스. 퍼스는 《발몽》에서 같이 연기한 배우 메그 틸리와 1989년 동거를 시작해, 다음해 1990년 첫 아들 윌리엄 "윌" 조셉 퍼스가 태어났다. 이후 퍼스 가족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로어메인랜드로 이주했다. 1994년 콜린 퍼스는 메그 틸리와 결별했고, 영국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연기 일을 잠시 줄였다.[19] 1997년, 퍼스는 9살 연하의 영화 제작자 겸 감독 리비아 퍼스(옛 성씨는 주졸리)와 재혼하였다. 두 사람은 현재 런던과 로마에 거주하고 있으며,[20] 루카(2001년 출생), 마테오(2003년 출생) 등 2명의 아들이 있다. 아내 리비아는 이탈리아인으로 퍼스도 어느정도로 유창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고, 아스날 FC의 팬이다. 퍼스는 2007년 10월 19일 원체스터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21][22] 2011년 1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행사에서 톰 후퍼 감독과 후퍼 2011년 1월 13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2429번째 스타로 입성하였다.[23] 2011년 4월,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명으로 퍼스를 선정했다.[24] 2011년 6월에 퍼스는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CBE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었고,[1] 2012년 3월 8일에는 런던시 자유상을 받았다.[25] 출연 작품[편집] 영화[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4 어나더 컨트리 토미 주드 1985 1919 젊은 시절의 알렉산더 셰르바토브 1986 잃어버린 제국 Lost Empires 리처드 헌캐슬 1987 시골에서의 한 달 A Month in the Country 톰 버킨 1987 비밀의 화원 The Secret Garden 콜린 크레븐 1988 포클랜드의 생과 사 Tumbledown 로버트 로렌스 1989 아파트 제로 에이드리언 르덕 1989 발몽 발몽 1990 너무도 매력적인 여자 Femme Fatale 조지프 프린스 1990 명성의 날개 Wings of Fame 브라이언 스미스 1991 아웃 오브 더 블루 Out of the Blue 알랜 1993 변호사 The Hour of the Pig 리샤르 쿠르투아 1994 마스터 오브 더 무어 Master of the Moor 스티븐 월비 1994 플레이 메이커 Playmaker 마이클 콘드론 / 로스 탈버트 1995 단짝 친구들 Circle of Friends 사이먼 웨스트워드 1996 잉글리쉬 페이션트 제프리 클리프턴 1997 천 에이커 A Thousand Acres 제스 클라크 1997 피버 피치 폴 애슈워스 1998 셰익스피어 인 러브 웨식스 경 1999 블랙애더: 백 앤 포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단편 영화 1999 지금까지의 내 인생 My Life So Far 에드워드 페티그루 1999 여인들의 은밀한 웃음 The Secret Laughter of Women 매슈 필드 2000 상대적 가치 Relative Values 피터 잉글턴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마크 다시 2001 컨스피러시 빌헬름 슈투카르트 2001 네가 어디 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We Know Where You Live 본인 국제 앰네스티, 다큐멘터리 2002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잭 워딩 2003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요하네스 베르메르 2003 홉 스프링스 콜린 웨어 2003 러브 액츄얼리 제이미 베넷트 2003 왓 어 걸 원츠 헨리 대시우드 2004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마크 다시 2004 트라우마 벤 슬라이터 2005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 Nanny McPhee 세드릭 브라운 2005 스위트 룸 Where the Truth Lies 빈스 콜린스 2006 본 이퀄 마크 아미테이지 2006 축하 파티 Celebration 러셀 단편 영화 2007 마지막 군단 The Last Legion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2007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And When Did You Last See Your Father? 블레이크 모리슨 2007 덴 쉬 파운드 미 프랭크 2007 세인트 트리니안스 제프리 스웨이츠 2007 감옥에서의 삶 In Prison My Whole Life 본인 다큐멘터리 2008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 The Accidental Husband 브래드 브래턴 2008 맘마 미아! 해리 브라이트 2008 이지 버츄 짐 휘터커 2008 제노바 조 2009 크리스마스 캐롤 프레드 (목소리 출연) 2009 도리언 그레이 헨리 워튼 경 2009 싱글 맨 조지 폴커너 2009 세인트 트리니안스 2: 프리튼 교장의 황금 전설 제프리 스웨이츠 2010 킹스 스피치 조지 6세 2010 메인 스트리트 거스 리로이 2010 스티브 스티브 2011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빌 헤이든 2012 스타즈 인 쇼츠 스티브 2012 갬빗 해리 딘 2013 아서 뉴먼 Arthur Newman, Golf Pro 아서 뉴먼 2014 레일웨이 맨 에릭 로맥스 2014 데블스 놋 론 랙스 2014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스탠리 / 웨이 린 수 2014 내가 잠들기 전에 벤 루커스 2015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해리 하트 / 갤러해드 2015 아이 인 더 스카이 프로듀서 2016 지니어스 맥스웰 퍼킨스 2016 러빙 프로듀서 2016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마크 다시 2017 킹스맨: 골든 서클 해리 하트 2018 행복한 왕자 레기 터너 2018 더 머시 도날드 크로허스트 2018 맘마미아! 2 해리 브라이트 2018 메리 포핀스 리턴즈 윌리엄 웨더럴 윌킨스[26] 제작 후반 발표 예정 쿠르스크[27] 데이비드 러셀[28] 제작 후반 발표 예정 시크릿 가든 아치 볼드 크레이븐 경 텔레비전[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4 카미유 으라망 듀발 텔레비전 영화 1985 네덜란드 소녀들 Dutch Girls 네일 트루러브 텔레비전 영화 1987 펫 호비 Pat Hobby: Teamed with Genius 러네이 윌콕스 PBS 단편 스페셜 1993 인질들 Hostages 존 매카시 HBO 텔레비전 드라마 1994 깊고 푸른 바다 The Deep Blue Sea 프레디 페이지 텔레비전 드라마 1995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피츠윌리엄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 1995 홀로이드 부인의 과부 되기 The Widowing of Mrs. Holroyd 찰스 홀로이드 BBC 텔레비전 드라마 1997 노스트로모 찰스 굴드 텔레비전 드라마 1999 도노반 퀵 도노반 퀸 / 대니얼 퀸 텔레비전 영화 1999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 마스터 텔레비전 드라마 2001 포플레이 엘렌 포트랜드 HBO 텔레비전 영화 2017 레드 노즈 데이 액츄얼리 제이미 텔레비전 단편 영화 연극[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3 어나더 컨트리 가이 베넷 1984 닥터의 딜레마 루이스 듀베댓 1985 외로운 길 The Lonely Road 펠리스 1987 느릅나무 밑의 욕망 Desire Under the Elms 에벤 1991 관리인 The Caretaker 애스턴 1993 차스키 차스키 1999 3일간의 비 워커 / 네드 수상 및 후보 목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콜린 퍼스의 수상 및 후보 목록입니다. 서훈[편집] 2011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 수훈[1][29] 각주[편집] ↑ 가 나 다 “Supplement No. 1: Birthday Honours List - United Kingdom”. 《The Gazette》 (영어) (런던) (59808): B7. 2011년 6월 11일. 2016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Colin Firth's Box Office Stats”. 《The Movie Times》. 2013년 1월 23일에 확인함.  ↑ “The King's Speech box office statistics”. 《Box Office M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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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퍼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콜린 퍼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콜린 퍼스Colin Firth 콜린 퍼스 (2017년)본명 콜린 앤드루 퍼스Colin Andrew Firth출생 1960년 9월 10일(1960-09-10) (58세)잉글랜드 햄프셔주 그레이숏국적 영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1983년 ~ 현재 형제자매 케이트 퍼스(여동생) 조너선 퍼스(남동생) 배우자 메그 틸리 (결혼 1989; 이혼 1994) 리비아 주졸리 (결혼 1997)자녀 3남수상 수상 목록 콜린 앤드루 퍼스(영어: Colin Andrew Firth, CBE[1], 1960년 9월 10일 ~ )는 잉글랜드의 배우이다. 퍼스가 출연한 영화 42편이 세계적으로 30억 달러 이상 수익을 올렸다.[2] 그는 미국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두 번의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세 번의 미국 배우 조합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가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은 조지 6세를 연기한 영화 《킹스 스피치》로 미국 아카데미상 외에도 많은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전세계적으로 4억 1,421만 1,549 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다.[3] 퍼스는 1980년대 말 영국의 유망한 청춘 배우를 일컫는 "브릿 팩(Brit Pack)"의 구성원 중 한명으로, 1995년 TV 시리즈 《오만과 편견》의 "피츠윌리엄 다아시(Mr. Darcy)" 역할로 배우 경력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밖의 이목을 끈 영화로는 《잉글리쉬 페이션트》, 《브리짓 존스의 일기》(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후보 지명), 《셰익스피어 인 러브》, 《러브 액츄얼리》에 출연하였다. 2009년 《싱글맨》으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2011년 그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였고, 《타임》지에서 선정한 "올해의 100인"에 선정되었다.[4] 그는 2007년 원체스터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와 2012년에는 런던시 자유상을 받았다. 퍼스는 원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단체 "서바이벌 인터내셔널"의 구성원으로 그는 또한 망명 신청자 및 난민의 권리와 환경 문제에 대한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5] 목차 1 초기 삶 2 사생활 3 출연 작품 3.1 영화 3.2 텔레비전 3.3 연극 4 수상 및 후보 목록 5 서훈 6 각주 7 외부 링크 초기 삶[편집] 퍼스는 햄프셔주 그레이숏(Grayshott)에서 교육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셜리 진 퍼스(옛 성씨는 롤즈)은 킹 앨프리드 칼리지(현 윈체스터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노먼 루이스 퍼스는 킹 앨프리드 칼리지 역사학 조교수와 나이지리아 정부의 교육장으로 재직했다.[6][7][8] 퍼스는 3남매 중 장남으로 여동생 케이트 퍼스는 연극 배우 겸 보컬 코치이며, 남동생 조너선 퍼스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퍼스의 부모는 인도에서 성장했으며,[9] 그의 외조부모는 회중 교회 목사였고, 그의 친조부는 성공회 성직자로 해외 선교 활동을 하였다.[10][11][12][13] 퍼스는 부모의 일로 여러 지역을 이동했고, 나이지리아에 몇년간 거주했다.[14] 그는 또한 만 11세때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던 때를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한다.[15] 가족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는 햄프셔주 윈체스터에 위치한 몽고메리 오브 알라메인 스쿨(중학교, 현재 킹스 스쿨)에 다녔다. 그는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지역 노동 계급의 햄프셔 악센트를 사용했는데, 학업에 대한 흥미의 부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6] 그가 만 14세가 된 무렵, 퍼스는 이전에 만 10세때부터 연극 워크샵을 참석했던 것을 계기로 배우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나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난 그냥 썩 좋지는 않고 따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가르치는 것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라고 말했다.[15] 그러나, 햄프셔 주 이스트레이에 위치한 바턴 페버릴 식스 팜 칼리지(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교사 페니 에드워드의 열정적인 가르침 덕분에 영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바턴 페버릴에서의 2년 동안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다.”라고 말한다.[17] 그는 이후 런던으로 처음 이동해 내셔널 유스 극장(National Youth Theatre)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의상 감수 일을 하며 연기와 병행하면서 세계의 많은 연기를 접했다.[16] 그리고 그는 드라마 센터 런던(Drama Centre London)에서 공부했다.[18] 사생활[편집] 2011년 1월, 퍼스와 아내 리비아 퍼스. 퍼스는 《발몽》에서 같이 연기한 배우 메그 틸리와 1989년 동거를 시작해, 다음해 1990년 첫 아들 윌리엄 "윌" 조셉 퍼스가 태어났다. 이후 퍼스 가족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로어메인랜드로 이주했다. 1994년 콜린 퍼스는 메그 틸리와 결별했고, 영국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연기 일을 잠시 줄였다.[19] 1997년, 퍼스는 9살 연하의 영화 제작자 겸 감독 리비아 퍼스(옛 성씨는 주졸리)와 재혼하였다. 두 사람은 현재 런던과 로마에 거주하고 있으며,[20] 루카(2001년 출생), 마테오(2003년 출생) 등 2명의 아들이 있다. 아내 리비아는 이탈리아인으로 퍼스도 어느정도로 유창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고, 아스날 FC의 팬이다. 퍼스는 2007년 10월 19일 원체스터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21][22] 2011년 1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행사에서 톰 후퍼 감독과 후퍼 2011년 1월 13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2429번째 스타로 입성하였다.[23] 2011년 4월,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명으로 퍼스를 선정했다.[24] 2011년 6월에 퍼스는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CBE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었고,[1] 2012년 3월 8일에는 런던시 자유상을 받았다.[25] 출연 작품[편집] 영화[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4 어나더 컨트리 토미 주드 1985 1919 젊은 시절의 알렉산더 셰르바토브 1986 잃어버린 제국 Lost Empires 리처드 헌캐슬 1987 시골에서의 한 달 A Month in the Country 톰 버킨 1987 비밀의 화원 The Secret Garden 콜린 크레븐 1988 포클랜드의 생과 사 Tumbledown 로버트 로렌스 1989 아파트 제로 에이드리언 르덕 1989 발몽 발몽 1990 너무도 매력적인 여자 Femme Fatale 조지프 프린스 1990 명성의 날개 Wings of Fame 브라이언 스미스 1991 아웃 오브 더 블루 Out of the Blue 알랜 1993 변호사 The Hour of the Pig 리샤르 쿠르투아 1994 마스터 오브 더 무어 Master of the Moor 스티븐 월비 1994 플레이 메이커 Playmaker 마이클 콘드론 / 로스 탈버트 1995 단짝 친구들 Circle of Friends 사이먼 웨스트워드 1996 잉글리쉬 페이션트 제프리 클리프턴 1997 천 에이커 A Thousand Acres 제스 클라크 1997 피버 피치 폴 애슈워스 1998 셰익스피어 인 러브 웨식스 경 1999 블랙애더: 백 앤 포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단편 영화 1999 지금까지의 내 인생 My Life So Far 에드워드 페티그루 1999 여인들의 은밀한 웃음 The Secret Laughter of Women 매슈 필드 2000 상대적 가치 Relative Values 피터 잉글턴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마크 다시 2001 컨스피러시 빌헬름 슈투카르트 2001 네가 어디 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We Know Where You Live 본인 국제 앰네스티, 다큐멘터리 2002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잭 워딩 2003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요하네스 베르메르 2003 홉 스프링스 콜린 웨어 2003 러브 액츄얼리 제이미 베넷트 2003 왓 어 걸 원츠 헨리 대시우드 2004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마크 다시 2004 트라우마 벤 슬라이터 2005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 Nanny McPhee 세드릭 브라운 2005 스위트 룸 Where the Truth Lies 빈스 콜린스 2006 본 이퀄 마크 아미테이지 2006 축하 파티 Celebration 러셀 단편 영화 2007 마지막 군단 The Last Legion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2007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And When Did You Last See Your Father? 블레이크 모리슨 2007 덴 쉬 파운드 미 프랭크 2007 세인트 트리니안스 제프리 스웨이츠 2007 감옥에서의 삶 In Prison My Whole Life 본인 다큐멘터리 2008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 The Accidental Husband 브래드 브래턴 2008 맘마 미아! 해리 브라이트 2008 이지 버츄 짐 휘터커 2008 제노바 조 2009 크리스마스 캐롤 프레드 (목소리 출연) 2009 도리언 그레이 헨리 워튼 경 2009 싱글 맨 조지 폴커너 2009 세인트 트리니안스 2: 프리튼 교장의 황금 전설 제프리 스웨이츠 2010 킹스 스피치 조지 6세 2010 메인 스트리트 거스 리로이 2010 스티브 스티브 2011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빌 헤이든 2012 스타즈 인 쇼츠 스티브 2012 갬빗 해리 딘 2013 아서 뉴먼 Arthur Newman, Golf Pro 아서 뉴먼 2014 레일웨이 맨 에릭 로맥스 2014 데블스 놋 론 랙스 2014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스탠리 / 웨이 린 수 2014 내가 잠들기 전에 벤 루커스 2015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해리 하트 / 갤러해드 2015 아이 인 더 스카이 프로듀서 2016 지니어스 맥스웰 퍼킨스 2016 러빙 프로듀서 2016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마크 다시 2017 킹스맨: 골든 서클 해리 하트 2018 행복한 왕자 레기 터너 2018 더 머시 도날드 크로허스트 2018 맘마미아! 2 해리 브라이트 2018 메리 포핀스 리턴즈 윌리엄 웨더럴 윌킨스[26] 제작 후반 발표 예정 쿠르스크[27] 데이비드 러셀[28] 제작 후반 발표 예정 시크릿 가든 아치 볼드 크레이븐 경 텔레비전[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4 카미유 으라망 듀발 텔레비전 영화 1985 네덜란드 소녀들 Dutch Girls 네일 트루러브 텔레비전 영화 1987 펫 호비 Pat Hobby: Teamed with Genius 러네이 윌콕스 PBS 단편 스페셜 1993 인질들 Hostages 존 매카시 HBO 텔레비전 드라마 1994 깊고 푸른 바다 The Deep Blue Sea 프레디 페이지 텔레비전 드라마 1995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피츠윌리엄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 1995 홀로이드 부인의 과부 되기 The Widowing of Mrs. Holroyd 찰스 홀로이드 BBC 텔레비전 드라마 1997 노스트로모 찰스 굴드 텔레비전 드라마 1999 도노반 퀵 도노반 퀸 / 대니얼 퀸 텔레비전 영화 1999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 마스터 텔레비전 드라마 2001 포플레이 엘렌 포트랜드 HBO 텔레비전 영화 2017 레드 노즈 데이 액츄얼리 제이미 텔레비전 단편 영화 연극[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3 어나더 컨트리 가이 베넷 1984 닥터의 딜레마 루이스 듀베댓 1985 외로운 길 The Lonely Road 펠리스 1987 느릅나무 밑의 욕망 Desire Under the Elms 에벤 1991 관리인 The Caretaker 애스턴 1993 차스키 차스키 1999 3일간의 비 워커 / 네드 수상 및 후보 목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콜린 퍼스의 수상 및 후보 목록입니다. 서훈[편집] 2011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 수훈[1][29] 각주[편집] ↑ 가 나 다 “Supplement No. 1: Birthday Honours List - United Kingdom”. 《The Gazette》 (영어) (런던) (59808): B7. 2011년 6월 11일. 2016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Colin Firth's Box Office Stats”. 《The Movie Times》. 2013년 1월 23일에 확인함.  ↑ “The King's Speech box office statistics”. 《Box Office M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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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UK. 2011년 6월 1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콜린 퍼스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콜린 퍼스 – 올무비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콜린 퍼스 콜린 퍼스의 수상 목록vdeh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1928-1950 에밀 야닝스 (1928) 워너 백스터 (1929) 조지 알리스 (1930) 라이어널 배리모어 (1931) 프레드릭 마치/월리스 비어리 (1932) 찰스 로턴 (1933) 클라크 게이블 (1934) 빅터 매클래글렌 (1935) 폴 무니 (1936) 스펜서 트레이시 (1937) 스펜서 트레이시 (1938) 로버트 도냇 (1939) 제임스 스튜어트 (1940) 게리 쿠퍼 (1941) 제임스 캐그니 (1942) 폴 루커스 (1943) 빙 크로스비 (1944) 레이 밀랜드 (1945) 프레드릭 마치 (1946) 로널드 콜먼 (1947) 로런스 올리비에 (1948) 브로더릭 크로퍼드 (1949) 호세 페레르 (1950) 1951-1975 험프리 보가트 (1951) 게리 쿠퍼 (1952) 윌리엄 홀든 (1953) 말런 브랜도 (1954) 어니스트 보그나인 (1955) 율 브리너 (1956) 앨릭 기니스 (1957) 데이비드 니븐 (1958) 찰턴 헤스턴 (1959) 버트 랭커스터 (1960) 막시밀리안 셸 (1961) 그레고리 펙 (1962) 시드니 포이티어 (1963) 렉스 해리슨 (1964) 리 마빈 (1965) 폴 스코필드 (1966) 로드 스타이거 (1967) 클리프 로버트슨 (1968) 존 웨인 (1969) 조지 C. 스콧 (1970) 진 해크먼 (1971) 말런 브랜도 (1972) 잭 레먼 (1973) 아트 카니 (1974) 잭 니컬슨 (1975) 1976-2000 피터 핀치 (1976) 리처드 드라이퍼스 (1977) 존 보이트 (1978) 더스틴 호프먼 (1979) 로버트 드 니로 (1980) 헨리 폰다 (1981) 벤 킹즐리 (1982) 로버트 듀발 (1983) F. 머리 에이브러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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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퍼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콜린 퍼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콜린 퍼스Colin Firth 콜린 퍼스 (2017년)본명 콜린 앤드루 퍼스Colin Andrew Firth출생 1960년 9월 10일(1960-09-10) (58세)잉글랜드 햄프셔주 그레이숏국적 영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1983년 ~ 현재 형제자매 케이트 퍼스(여동생) 조너선 퍼스(남동생) 배우자 메그 틸리 (결혼 1989; 이혼 1994) 리비아 주졸리 (결혼 1997)자녀 3남수상 수상 목록 콜린 앤드루 퍼스(영어: Colin Andrew Firth, CBE[1], 1960년 9월 10일 ~ )는 잉글랜드의 배우이다. 퍼스가 출연한 영화 42편이 세계적으로 30억 달러 이상 수익을 올렸다.[2] 그는 미국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두 번의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세 번의 미국 배우 조합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가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은 조지 6세를 연기한 영화 《킹스 스피치》로 미국 아카데미상 외에도 많은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전세계적으로 4억 1,421만 1,549 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다.[3] 퍼스는 1980년대 말 영국의 유망한 청춘 배우를 일컫는 "브릿 팩(Brit Pack)"의 구성원 중 한명으로, 1995년 TV 시리즈 《오만과 편견》의 "피츠윌리엄 다아시(Mr. Darcy)" 역할로 배우 경력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밖의 이목을 끈 영화로는 《잉글리쉬 페이션트》, 《브리짓 존스의 일기》(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후보 지명), 《셰익스피어 인 러브》, 《러브 액츄얼리》에 출연하였다. 2009년 《싱글맨》으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2011년 그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였고, 《타임》지에서 선정한 "올해의 100인"에 선정되었다.[4] 그는 2007년 원체스터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와 2012년에는 런던시 자유상을 받았다. 퍼스는 원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단체 "서바이벌 인터내셔널"의 구성원으로 그는 또한 망명 신청자 및 난민의 권리와 환경 문제에 대한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5] 목차 1 초기 삶 2 사생활 3 출연 작품 3.1 영화 3.2 텔레비전 3.3 연극 4 수상 및 후보 목록 5 서훈 6 각주 7 외부 링크 초기 삶[편집] 퍼스는 햄프셔주 그레이숏(Grayshott)에서 교육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셜리 진 퍼스(옛 성씨는 롤즈)은 킹 앨프리드 칼리지(현 윈체스터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노먼 루이스 퍼스는 킹 앨프리드 칼리지 역사학 조교수와 나이지리아 정부의 교육장으로 재직했다.[6][7][8] 퍼스는 3남매 중 장남으로 여동생 케이트 퍼스는 연극 배우 겸 보컬 코치이며, 남동생 조너선 퍼스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퍼스의 부모는 인도에서 성장했으며,[9] 그의 외조부모는 회중 교회 목사였고, 그의 친조부는 성공회 성직자로 해외 선교 활동을 하였다.[10][11][12][13] 퍼스는 부모의 일로 여러 지역을 이동했고, 나이지리아에 몇년간 거주했다.[14] 그는 또한 만 11세때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던 때를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한다.[15] 가족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는 햄프셔주 윈체스터에 위치한 몽고메리 오브 알라메인 스쿨(중학교, 현재 킹스 스쿨)에 다녔다. 그는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지역 노동 계급의 햄프셔 악센트를 사용했는데, 학업에 대한 흥미의 부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6] 그가 만 14세가 된 무렵, 퍼스는 이전에 만 10세때부터 연극 워크샵을 참석했던 것을 계기로 배우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나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난 그냥 썩 좋지는 않고 따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가르치는 것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라고 말했다.[15] 그러나, 햄프셔 주 이스트레이에 위치한 바턴 페버릴 식스 팜 칼리지(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교사 페니 에드워드의 열정적인 가르침 덕분에 영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바턴 페버릴에서의 2년 동안이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다.”라고 말한다.[17] 그는 이후 런던으로 처음 이동해 내셔널 유스 극장(National Youth Theatre)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의상 감수 일을 하며 연기와 병행하면서 세계의 많은 연기를 접했다.[16] 그리고 그는 드라마 센터 런던(Drama Centre London)에서 공부했다.[18] 사생활[편집] 2011년 1월, 퍼스와 아내 리비아 퍼스. 퍼스는 《발몽》에서 같이 연기한 배우 메그 틸리와 1989년 동거를 시작해, 다음해 1990년 첫 아들 윌리엄 "윌" 조셉 퍼스가 태어났다. 이후 퍼스 가족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로어메인랜드로 이주했다. 1994년 콜린 퍼스는 메그 틸리와 결별했고, 영국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연기 일을 잠시 줄였다.[19] 1997년, 퍼스는 9살 연하의 영화 제작자 겸 감독 리비아 퍼스(옛 성씨는 주졸리)와 재혼하였다. 두 사람은 현재 런던과 로마에 거주하고 있으며,[20] 루카(2001년 출생), 마테오(2003년 출생) 등 2명의 아들이 있다. 아내 리비아는 이탈리아인으로 퍼스도 어느정도로 유창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고, 아스날 FC의 팬이다. 퍼스는 2007년 10월 19일 원체스터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21][22] 2011년 1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행사에서 톰 후퍼 감독과 후퍼 2011년 1월 13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2429번째 스타로 입성하였다.[23] 2011년 4월,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명으로 퍼스를 선정했다.[24] 2011년 6월에 퍼스는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CBE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었고,[1] 2012년 3월 8일에는 런던시 자유상을 받았다.[25] 출연 작품[편집] 영화[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4 어나더 컨트리 토미 주드 1985 1919 젊은 시절의 알렉산더 셰르바토브 1986 잃어버린 제국 Lost Empires 리처드 헌캐슬 1987 시골에서의 한 달 A Month in the Country 톰 버킨 1987 비밀의 화원 The Secret Garden 콜린 크레븐 1988 포클랜드의 생과 사 Tumbledown 로버트 로렌스 1989 아파트 제로 에이드리언 르덕 1989 발몽 발몽 1990 너무도 매력적인 여자 Femme Fatale 조지프 프린스 1990 명성의 날개 Wings of Fame 브라이언 스미스 1991 아웃 오브 더 블루 Out of the Blue 알랜 1993 변호사 The Hour of the Pig 리샤르 쿠르투아 1994 마스터 오브 더 무어 Master of the Moor 스티븐 월비 1994 플레이 메이커 Playmaker 마이클 콘드론 / 로스 탈버트 1995 단짝 친구들 Circle of Friends 사이먼 웨스트워드 1996 잉글리쉬 페이션트 제프리 클리프턴 1997 천 에이커 A Thousand Acres 제스 클라크 1997 피버 피치 폴 애슈워스 1998 셰익스피어 인 러브 웨식스 경 1999 블랙애더: 백 앤 포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단편 영화 1999 지금까지의 내 인생 My Life So Far 에드워드 페티그루 1999 여인들의 은밀한 웃음 The Secret Laughter of Women 매슈 필드 2000 상대적 가치 Relative Values 피터 잉글턴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마크 다시 2001 컨스피러시 빌헬름 슈투카르트 2001 네가 어디 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We Know Where You Live 본인 국제 앰네스티, 다큐멘터리 2002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잭 워딩 2003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요하네스 베르메르 2003 홉 스프링스 콜린 웨어 2003 러브 액츄얼리 제이미 베넷트 2003 왓 어 걸 원츠 헨리 대시우드 2004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마크 다시 2004 트라우마 벤 슬라이터 2005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 Nanny McPhee 세드릭 브라운 2005 스위트 룸 Where the Truth Lies 빈스 콜린스 2006 본 이퀄 마크 아미테이지 2006 축하 파티 Celebration 러셀 단편 영화 2007 마지막 군단 The Last Legion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2007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And When Did You Last See Your Father? 블레이크 모리슨 2007 덴 쉬 파운드 미 프랭크 2007 세인트 트리니안스 제프리 스웨이츠 2007 감옥에서의 삶 In Prison My Whole Life 본인 다큐멘터리 2008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 The Accidental Husband 브래드 브래턴 2008 맘마 미아! 해리 브라이트 2008 이지 버츄 짐 휘터커 2008 제노바 조 2009 크리스마스 캐롤 프레드 (목소리 출연) 2009 도리언 그레이 헨리 워튼 경 2009 싱글 맨 조지 폴커너 2009 세인트 트리니안스 2: 프리튼 교장의 황금 전설 제프리 스웨이츠 2010 킹스 스피치 조지 6세 2010 메인 스트리트 거스 리로이 2010 스티브 스티브 2011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빌 헤이든 2012 스타즈 인 쇼츠 스티브 2012 갬빗 해리 딘 2013 아서 뉴먼 Arthur Newman, Golf Pro 아서 뉴먼 2014 레일웨이 맨 에릭 로맥스 2014 데블스 놋 론 랙스 2014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스탠리 / 웨이 린 수 2014 내가 잠들기 전에 벤 루커스 2015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해리 하트 / 갤러해드 2015 아이 인 더 스카이 프로듀서 2016 지니어스 맥스웰 퍼킨스 2016 러빙 프로듀서 2016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마크 다시 2017 킹스맨: 골든 서클 해리 하트 2018 행복한 왕자 레기 터너 2018 더 머시 도날드 크로허스트 2018 맘마미아! 2 해리 브라이트 2018 메리 포핀스 리턴즈 윌리엄 웨더럴 윌킨스[26] 제작 후반 발표 예정 쿠르스크[27] 데이비드 러셀[28] 제작 후반 발표 예정 시크릿 가든 아치 볼드 크레이븐 경 텔레비전[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4 카미유 으라망 듀발 텔레비전 영화 1985 네덜란드 소녀들 Dutch Girls 네일 트루러브 텔레비전 영화 1987 펫 호비 Pat Hobby: Teamed with Genius 러네이 윌콕스 PBS 단편 스페셜 1993 인질들 Hostages 존 매카시 HBO 텔레비전 드라마 1994 깊고 푸른 바다 The Deep Blue Sea 프레디 페이지 텔레비전 드라마 1995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피츠윌리엄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 1995 홀로이드 부인의 과부 되기 The Widowing of Mrs. Holroyd 찰스 홀로이드 BBC 텔레비전 드라마 1997 노스트로모 찰스 굴드 텔레비전 드라마 1999 도노반 퀵 도노반 퀸 / 대니얼 퀸 텔레비전 영화 1999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 마스터 텔레비전 드라마 2001 포플레이 엘렌 포트랜드 HBO 텔레비전 영화 2017 레드 노즈 데이 액츄얼리 제이미 텔레비전 단편 영화 연극[편집] 년도 제목 역할 참고 1983 어나더 컨트리 가이 베넷 1984 닥터의 딜레마 루이스 듀베댓 1985 외로운 길 The Lonely Road 펠리스 1987 느릅나무 밑의 욕망 Desire Under the Elms 에벤 1991 관리인 The Caretaker 애스턴 1993 차스키 차스키 1999 3일간의 비 워커 / 네드 수상 및 후보 목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콜린 퍼스의 수상 및 후보 목록입니다. 서훈[편집] 2011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 수훈[1][29] 각주[편집] ↑ 가 나 다 “Supplement No. 1: Birthday Honours List - United Kingdom”. 《The Gazette》 (영어) (런던) (59808): B7. 2011년 6월 11일. 2016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Colin Firth's Box Office Stats”. 《The Movie Times》. 2013년 1월 23일에 확인함.  ↑ “The King's Speech box office statistics”. 《Box Office M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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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UK. 2011년 6월 1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영어) 콜린 퍼스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어) 콜린 퍼스 – 올무비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콜린 퍼스 콜린 퍼스의 수상 목록vdeh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1928-1950 에밀 야닝스 (1928) 워너 백스터 (1929) 조지 알리스 (1930) 라이어널 배리모어 (1931) 프레드릭 마치/월리스 비어리 (1932) 찰스 로턴 (1933) 클라크 게이블 (1934) 빅터 매클래글렌 (1935) 폴 무니 (1936) 스펜서 트레이시 (1937) 스펜서 트레이시 (1938) 로버트 도냇 (1939) 제임스 스튜어트 (1940) 게리 쿠퍼 (1941) 제임스 캐그니 (1942) 폴 루커스 (1943) 빙 크로스비 (1944) 레이 밀랜드 (1945) 프레드릭 마치 (1946) 로널드 콜먼 (1947) 로런스 올리비에 (1948) 브로더릭 크로퍼드 (1949) 호세 페레르 (1950) 1951-1975 험프리 보가트 (1951) 게리 쿠퍼 (1952) 윌리엄 홀든 (1953) 말런 브랜도 (1954) 어니스트 보그나인 (1955) 율 브리너 (1956) 앨릭 기니스 (1957) 데이비드 니븐 (1958) 찰턴 헤스턴 (1959) 버트 랭커스터 (1960) 막시밀리안 셸 (1961) 그레고리 펙 (1962) 시드니 포이티어 (1963) 렉스 해리슨 (1964) 리 마빈 (1965) 폴 스코필드 (1966) 로드 스타이거 (1967) 클리프 로버트슨 (1968) 존 웨인 (1969) 조지 C. 스콧 (1970) 진 해크먼 (1971) 말런 브랜도 (1972) 잭 레먼 (1973) 아트 카니 (1974) 잭 니컬슨 (1975) 1976-2000 피터 핀치 (1976) 리처드 드라이퍼스 (1977) 존 보이트 (1978) 더스틴 호프먼 (1979) 로버트 드 니로 (1980) 헨리 폰다 (1981) 벤 킹즐리 (1982) 로버트 듀발 (1983) F. 머리 에이브러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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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한국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7년 한국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87년 한국시리즈 팀 승(무승부) 해태 타이거즈 (후기 2위, PO 승자) 4 삼성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 우승) 0 경기 정보 경기 일정 1987년 10월 21일 ~ 10월 25일 MVP 김준환 팀 정보 해태 타이거즈 (후기 2위, PO 승자) 감독 김응용 시즌 성적 55승 5무 48패 전기리그 3위 (27승 2무 25패) 후기리그 2위 (28승 3무 23패) PO : 3승 2패 (vs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 우승) 감독 박영길 시즌 성적 64승 44패 전기리그 1위 (33승 21패) 후기리그 1위 (31승 23패)  < 1986 1988 >  1987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10월 21일부터 10월 25일까지 모두 4경기를 치러, 해태 타이거즈가 삼성 라이온즈를 4승 무패로 누르고 통산 세 번째이자 프로야구 첫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한국시리즈 4경기 동안 무려 12타수 6안타(2홈런) 4타점의 눈부신 활약을 펼친 해태의 김준환이 차지했다. 목차 1 정규 시즌 2 플레이오프 결과 3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 3.1 1차전 3.2 2차전 3.3 3차전 3.4 4차전 정규 시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7년 한국 프로 야구입니다. 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무 패 승률 1위 삼성 33 0 21 .611 2위 OB 31 1 22 .583 3위 해태 27 2 25 .519 3위 롯데 27 2 25 .519 5위 MBC 24 3 27 .472 6위 빙그레 24 2 28 .463 7위 청보 18 0 36 .333 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무 패 승률 1위 삼성 31 0 23 .574 2위 해태 28 3 23 .549 3위 롯데 27 3 24 .528 4위 MBC 26 4 24 .519 5위 OB 20 0 32 .444 5위 청보 23 2 29 .444 5위 빙그레 23 2 29 .444 플레이오프 결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7년 한국 프로 야구 포스트시즌입니다. 승리팀 경기 결과 상대팀 플레이오프 해태 타이거즈(후기리그 2위) 3 - 0 - 2 OB 베어스(전기리그 2위) 삼성이 전.후기 통합 우승을 차지하면서,한국시리즈에 직행했으며, 해태가 OB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 삼성과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다.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편집] 1차전[편집] 10월 21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타이거즈 3 0 0 0 0 0 0 2 0 5 7 0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1 1 0 0 0 0 0 0 1 3 11 2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차동철  패전 투수 : 김시진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해태 – 한대화(1회 투런), 김성한(8회 솔로) 삼성은 김시진을, 해태는 김대현을 선발로 기용했다. 그리고 승부는 1회초에 결판이 났다. 1사후 포볼을 고른 이순철이 2루스틸과 삼성포수 이만수의 2루악송구로 3루까지 점령했을 때 김성한이 라이트쪽으로 평범한 플라이를 띄워올렸다. 삼성 우익수 장효조는 3루를 태그업하는 이순철의 빠른 발을 의식, 홈송구를 서두르다 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장면은 포구 후 제2동작에서 낙구한 것인지, 애당초 포구동작에서 낙구한 것인지는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 쪽이 우세한 가운데 김동앙 선심은 후자로 판정, 타자주자 김성한의 1루 세이프를 선언함으로써 해태에 대량득점 기회가 마련됐다. 뒤이어 한대화가 2점홈런이라는 결정타를 터뜨려 3 대 0을 만들었다. 해태 선발 김대현도 1, 2회말 이만수와 장효조에게 적시타를 허용하며 3 대 2로 쫓겼으나 차동철이 3회 무사1루에서 구원등판, 잔여이닝을 8안타 7탈삼진 1실점으로 막아내 5 대 3 승리를 따냈다. 해태는 8회초 김성한이 솔로홈런, 대타 김일환은 우전적시타로 김시진을 두들기면서 2점을 보태 불안하던 1점차 리드를 승리로 굳혔다. 2차전[편집] 10월 22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타이거즈 1 1 0 0 0 0 0 0 0 2 5 1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1 0 0 0 0 0 0 0 0 1 4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김정수  패전 투수 : 김기태  세이브 : 선동열  홀드 : {{{홀드투수}}} 해태선발은 김정수, 삼성선발은 언더핸드스로 김기태였다. 해태는 투구동작이 크고 느린 김기태의 약점을 기동력으로 파고들며 1회초에만 무려 3개의 도루를 뽑아내면서 김종모의 희생플라이로 기선을 제압했다. 삼성 이만수는 1회말 2사3루에서 내야안타를 때려 1 대 1 동점을 만들었으나 2회초 1사1·3루에서 차영화가 2루를 훔칠 때 2루 악송구를 저질러 3루주자 김준환에게 손쉬운 득점을 허용했다. 이것이 이 게임의 결승점이었다. 경기벽두에 흔들리던 김정수는 2회부터 제 컨디션을 찾아 8회 1사1·3루에서 선동열에게 마무리를 맡길 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삼성 역시 3회부터 릴리프한 양일환이 나머지 7이닝을 3안타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선발기용 미스의 아쉬움만 더했다. 3차전[편집] 10월 24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2 0 0 0 0 0 0 0 0 2 5 1 {{{원정팀볼넷}}} 해태 타이거즈 0 0 2 1 1 0 0 0 X 4 9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문희수  패전 투수 : 권영호  세이브 : 차동철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이만수(1회 투런)  해태 – 김준환(4회 솔로) 해태 노장선수들의 타력이 돋보인 한판이었다. 삼성은 1회초 이만수의 2점홈런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3회말 2사1·2루에서 김성한의 2타점 2루타로 동점을 만든 해태는 4회말 1사후 김준환이 삼성선발 권영호를 우월 솔로홈런으로 두들겨 역전시켰고 5회말에는 1사2루에서 김봉연이 좌전적시타를 터뜨려 4 대 2로 승리를 굳혔다. 1회초 선발 신동수가 홈런을 맞자마자 지체없이 구원에 나선 문희수는 9회 무사1·2루에서 차동철에게 마운드를 넘기기까지 3안타로 삼성 타선을 무실점 처리, 승리투수가 됐고 1차전 승리투수 차동철은 세이브를 따냈다. 4차전[편집] 10월 25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1 0 0 1 0 0 0 0 2 7 2 {{{원정팀볼넷}}} 해태 타이거즈 0 2 0 1 3 3 0 0 X 9 14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김정수  패전 투수 : 김시진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해태 – 김준환(2회 투런) 벼랑끝으로 몰린 삼성은 에이스 김시진을 기용하는 수밖에 없었고 해태는 김대현으로 맞섰다. 삼성은 2회초 이종두의 적시2루타로 선제점을 올렸으나 김준환이 2회말 2점홈런으로 전세를 뒤집어 전날의 복사판을 만들었고 4회말 이순철이 추가점 중전적시타를 터뜨리면서 김시진은 강판당하고 말았다. 한국시리즈 통산 7번째 패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라설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삼성은 5회초 홍승규의 센터 희생플라이로 3 대 2로 따라붙고나서 2사1·3루의 찬스가 이어졌을 때 비밀리에 연습해두었던 ‘비장의 작전’을 꺼냈다. 장효조가 구원투수 김정수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안타를 뽑기가 어렵다고 판단, 1루주자 허규옥이 일부러 견제구에 걸리는 틈에 더블스틸로 동점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3루주자의 호흡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서 허규옥만 2루에서 태그아웃 당해 버림으로써 김시진을 패배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위기를 넘긴 해태는 5회말 집중 5안타로 3점, 6회말 김준환의 밀어내기 및 김무종의 2타점 적시타 등으로 3점을 더 보태면서 승세를 결정짓고 9 대 2로 낙승, 4게임만으로 2연패의 영광을 안았다. 해태, 한국시리즈 첫 선발 전원안타 vdeh해태 타이거즈 - 1987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후기리그 2위)감독 39 김응용코치 김인식투수 18 선동열 | 20 문희수 | 47 김정수 | 김대현 | 31 차동철 | 방수원 | 16 이상윤 | 송유석 | 32 신동수 | 강상진포수 25 김무종 | 22 장채근내야수 11 김성한 | 6 서정환 | 8 한대화 | 2 백인호 | 27 김봉연 | 김일환외야수 10 김준환 | 14 이순철 | 7 김종모 | 1 김일권 | 44 송일섭 | 24 박철우 | 이건열 | 조재환최우수 평균자책점 선동열,올스타전 MVP 김종모, 한국시리즈 MVP 김준환 vdehKBO 한국시리즈 · 0000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0000 · 0000 ·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함에 따라 한국시리즈가 개최되지 않았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87년_한국시리즈&oldid=17997448" 분류: 한국시리즈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1987년 야구1987년 10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월 3일 (화) 18: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987년 한국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7년 한국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87년 한국시리즈 팀 승(무승부) 해태 타이거즈 (후기 2위, PO 승자) 4 삼성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 우승) 0 경기 정보 경기 일정 1987년 10월 21일 ~ 10월 25일 MVP 김준환 팀 정보 해태 타이거즈 (후기 2위, PO 승자) 감독 김응용 시즌 성적 55승 5무 48패 전기리그 3위 (27승 2무 25패) 후기리그 2위 (28승 3무 23패) PO : 3승 2패 (vs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 우승) 감독 박영길 시즌 성적 64승 44패 전기리그 1위 (33승 21패) 후기리그 1위 (31승 23패)  < 1986 1988 >  1987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10월 21일부터 10월 25일까지 모두 4경기를 치러, 해태 타이거즈가 삼성 라이온즈를 4승 무패로 누르고 통산 세 번째이자 프로야구 첫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한국시리즈 4경기 동안 무려 12타수 6안타(2홈런) 4타점의 눈부신 활약을 펼친 해태의 김준환이 차지했다. 목차 1 정규 시즌 2 플레이오프 결과 3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 3.1 1차전 3.2 2차전 3.3 3차전 3.4 4차전 정규 시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7년 한국 프로 야구입니다. 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무 패 승률 1위 삼성 33 0 21 .611 2위 OB 31 1 22 .583 3위 해태 27 2 25 .519 3위 롯데 27 2 25 .519 5위 MBC 24 3 27 .472 6위 빙그레 24 2 28 .463 7위 청보 18 0 36 .333 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무 패 승률 1위 삼성 31 0 23 .574 2위 해태 28 3 23 .549 3위 롯데 27 3 24 .528 4위 MBC 26 4 24 .519 5위 OB 20 0 32 .444 5위 청보 23 2 29 .444 5위 빙그레 23 2 29 .444 플레이오프 결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7년 한국 프로 야구 포스트시즌입니다. 승리팀 경기 결과 상대팀 플레이오프 해태 타이거즈(후기리그 2위) 3 - 0 - 2 OB 베어스(전기리그 2위) 삼성이 전.후기 통합 우승을 차지하면서,한국시리즈에 직행했으며, 해태가 OB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 삼성과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다.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편집] 1차전[편집] 10월 21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타이거즈 3 0 0 0 0 0 0 2 0 5 7 0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1 1 0 0 0 0 0 0 1 3 11 2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차동철  패전 투수 : 김시진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해태 – 한대화(1회 투런), 김성한(8회 솔로) 삼성은 김시진을, 해태는 김대현을 선발로 기용했다. 그리고 승부는 1회초에 결판이 났다. 1사후 포볼을 고른 이순철이 2루스틸과 삼성포수 이만수의 2루악송구로 3루까지 점령했을 때 김성한이 라이트쪽으로 평범한 플라이를 띄워올렸다. 삼성 우익수 장효조는 3루를 태그업하는 이순철의 빠른 발을 의식, 홈송구를 서두르다 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장면은 포구 후 제2동작에서 낙구한 것인지, 애당초 포구동작에서 낙구한 것인지는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 쪽이 우세한 가운데 김동앙 선심은 후자로 판정, 타자주자 김성한의 1루 세이프를 선언함으로써 해태에 대량득점 기회가 마련됐다. 뒤이어 한대화가 2점홈런이라는 결정타를 터뜨려 3 대 0을 만들었다. 해태 선발 김대현도 1, 2회말 이만수와 장효조에게 적시타를 허용하며 3 대 2로 쫓겼으나 차동철이 3회 무사1루에서 구원등판, 잔여이닝을 8안타 7탈삼진 1실점으로 막아내 5 대 3 승리를 따냈다. 해태는 8회초 김성한이 솔로홈런, 대타 김일환은 우전적시타로 김시진을 두들기면서 2점을 보태 불안하던 1점차 리드를 승리로 굳혔다. 2차전[편집] 10월 22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타이거즈 1 1 0 0 0 0 0 0 0 2 5 1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1 0 0 0 0 0 0 0 0 1 4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김정수  패전 투수 : 김기태  세이브 : 선동열  홀드 : {{{홀드투수}}} 해태선발은 김정수, 삼성선발은 언더핸드스로 김기태였다. 해태는 투구동작이 크고 느린 김기태의 약점을 기동력으로 파고들며 1회초에만 무려 3개의 도루를 뽑아내면서 김종모의 희생플라이로 기선을 제압했다. 삼성 이만수는 1회말 2사3루에서 내야안타를 때려 1 대 1 동점을 만들었으나 2회초 1사1·3루에서 차영화가 2루를 훔칠 때 2루 악송구를 저질러 3루주자 김준환에게 손쉬운 득점을 허용했다. 이것이 이 게임의 결승점이었다. 경기벽두에 흔들리던 김정수는 2회부터 제 컨디션을 찾아 8회 1사1·3루에서 선동열에게 마무리를 맡길 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삼성 역시 3회부터 릴리프한 양일환이 나머지 7이닝을 3안타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선발기용 미스의 아쉬움만 더했다. 3차전[편집] 10월 24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2 0 0 0 0 0 0 0 0 2 5 1 {{{원정팀볼넷}}} 해태 타이거즈 0 0 2 1 1 0 0 0 X 4 9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문희수  패전 투수 : 권영호  세이브 : 차동철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이만수(1회 투런)  해태 – 김준환(4회 솔로) 해태 노장선수들의 타력이 돋보인 한판이었다. 삼성은 1회초 이만수의 2점홈런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3회말 2사1·2루에서 김성한의 2타점 2루타로 동점을 만든 해태는 4회말 1사후 김준환이 삼성선발 권영호를 우월 솔로홈런으로 두들겨 역전시켰고 5회말에는 1사2루에서 김봉연이 좌전적시타를 터뜨려 4 대 2로 승리를 굳혔다. 1회초 선발 신동수가 홈런을 맞자마자 지체없이 구원에 나선 문희수는 9회 무사1·2루에서 차동철에게 마운드를 넘기기까지 3안타로 삼성 타선을 무실점 처리, 승리투수가 됐고 1차전 승리투수 차동철은 세이브를 따냈다. 4차전[편집] 10월 25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1 0 0 1 0 0 0 0 2 7 2 {{{원정팀볼넷}}} 해태 타이거즈 0 2 0 1 3 3 0 0 X 9 14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김정수  패전 투수 : 김시진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해태 – 김준환(2회 투런) 벼랑끝으로 몰린 삼성은 에이스 김시진을 기용하는 수밖에 없었고 해태는 김대현으로 맞섰다. 삼성은 2회초 이종두의 적시2루타로 선제점을 올렸으나 김준환이 2회말 2점홈런으로 전세를 뒤집어 전날의 복사판을 만들었고 4회말 이순철이 추가점 중전적시타를 터뜨리면서 김시진은 강판당하고 말았다. 한국시리즈 통산 7번째 패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라설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삼성은 5회초 홍승규의 센터 희생플라이로 3 대 2로 따라붙고나서 2사1·3루의 찬스가 이어졌을 때 비밀리에 연습해두었던 ‘비장의 작전’을 꺼냈다. 장효조가 구원투수 김정수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안타를 뽑기가 어렵다고 판단, 1루주자 허규옥이 일부러 견제구에 걸리는 틈에 더블스틸로 동점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3루주자의 호흡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서 허규옥만 2루에서 태그아웃 당해 버림으로써 김시진을 패배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위기를 넘긴 해태는 5회말 집중 5안타로 3점, 6회말 김준환의 밀어내기 및 김무종의 2타점 적시타 등으로 3점을 더 보태면서 승세를 결정짓고 9 대 2로 낙승, 4게임만으로 2연패의 영광을 안았다. 해태, 한국시리즈 첫 선발 전원안타 vdeh해태 타이거즈 - 1987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후기리그 2위)감독 39 김응용코치 김인식투수 18 선동열 | 20 문희수 | 47 김정수 | 김대현 | 31 차동철 | 방수원 | 16 이상윤 | 송유석 | 32 신동수 | 강상진포수 25 김무종 | 22 장채근내야수 11 김성한 | 6 서정환 | 8 한대화 | 2 백인호 | 27 김봉연 | 김일환외야수 10 김준환 | 14 이순철 | 7 김종모 | 1 김일권 | 44 송일섭 | 24 박철우 | 이건열 | 조재환최우수 평균자책점 선동열,올스타전 MVP 김종모, 한국시리즈 MVP 김준환 vdehKBO 한국시리즈 · 0000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0000 · 0000 ·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함에 따라 한국시리즈가 개최되지 않았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87년_한국시리즈&oldid=17997448" 분류: 한국시리즈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1987년 야구1987년 10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월 3일 (화) 18: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987년 한국시리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87년 한국시리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87년 한국시리즈 팀 승(무승부) 해태 타이거즈 (후기 2위, PO 승자) 4 삼성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 우승) 0 경기 정보 경기 일정 1987년 10월 21일 ~ 10월 25일 MVP 김준환 팀 정보 해태 타이거즈 (후기 2위, PO 승자) 감독 김응용 시즌 성적 55승 5무 48패 전기리그 3위 (27승 2무 25패) 후기리그 2위 (28승 3무 23패) PO : 3승 2패 (vs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 우승) 감독 박영길 시즌 성적 64승 44패 전기리그 1위 (33승 21패) 후기리그 1위 (31승 23패)  < 1986 1988 >  1987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10월 21일부터 10월 25일까지 모두 4경기를 치러, 해태 타이거즈가 삼성 라이온즈를 4승 무패로 누르고 통산 세 번째이자 프로야구 첫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한국시리즈 4경기 동안 무려 12타수 6안타(2홈런) 4타점의 눈부신 활약을 펼친 해태의 김준환이 차지했다. 목차 1 정규 시즌 2 플레이오프 결과 3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 3.1 1차전 3.2 2차전 3.3 3차전 3.4 4차전 정규 시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7년 한국 프로 야구입니다. 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무 패 승률 1위 삼성 33 0 21 .611 2위 OB 31 1 22 .583 3위 해태 27 2 25 .519 3위 롯데 27 2 25 .519 5위 MBC 24 3 27 .472 6위 빙그레 24 2 28 .463 7위 청보 18 0 36 .333 후기 리그 순위 순위 구단 승 무 패 승률 1위 삼성 31 0 23 .574 2위 해태 28 3 23 .549 3위 롯데 27 3 24 .528 4위 MBC 26 4 24 .519 5위 OB 20 0 32 .444 5위 청보 23 2 29 .444 5위 빙그레 23 2 29 .444 플레이오프 결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1987년 한국 프로 야구 포스트시즌입니다. 승리팀 경기 결과 상대팀 플레이오프 해태 타이거즈(후기리그 2위) 3 - 0 - 2 OB 베어스(전기리그 2위) 삼성이 전.후기 통합 우승을 차지하면서,한국시리즈에 직행했으며, 해태가 OB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 삼성과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다.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편집] 1차전[편집] 10월 21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타이거즈 3 0 0 0 0 0 0 2 0 5 7 0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1 1 0 0 0 0 0 0 1 3 11 2 {{{홈팀볼넷}}} 승리 투수 : 차동철  패전 투수 : 김시진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해태 – 한대화(1회 투런), 김성한(8회 솔로) 삼성은 김시진을, 해태는 김대현을 선발로 기용했다. 그리고 승부는 1회초에 결판이 났다. 1사후 포볼을 고른 이순철이 2루스틸과 삼성포수 이만수의 2루악송구로 3루까지 점령했을 때 김성한이 라이트쪽으로 평범한 플라이를 띄워올렸다. 삼성 우익수 장효조는 3루를 태그업하는 이순철의 빠른 발을 의식, 홈송구를 서두르다 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장면은 포구 후 제2동작에서 낙구한 것인지, 애당초 포구동작에서 낙구한 것인지는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 쪽이 우세한 가운데 김동앙 선심은 후자로 판정, 타자주자 김성한의 1루 세이프를 선언함으로써 해태에 대량득점 기회가 마련됐다. 뒤이어 한대화가 2점홈런이라는 결정타를 터뜨려 3 대 0을 만들었다. 해태 선발 김대현도 1, 2회말 이만수와 장효조에게 적시타를 허용하며 3 대 2로 쫓겼으나 차동철이 3회 무사1루에서 구원등판, 잔여이닝을 8안타 7탈삼진 1실점으로 막아내 5 대 3 승리를 따냈다. 해태는 8회초 김성한이 솔로홈런, 대타 김일환은 우전적시타로 김시진을 두들기면서 2점을 보태 불안하던 1점차 리드를 승리로 굳혔다. 2차전[편집] 10월 22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타이거즈 1 1 0 0 0 0 0 0 0 2 5 1 {{{원정팀볼넷}}} 삼성 라이온즈 1 0 0 0 0 0 0 0 0 1 4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김정수  패전 투수 : 김기태  세이브 : 선동열  홀드 : {{{홀드투수}}} 해태선발은 김정수, 삼성선발은 언더핸드스로 김기태였다. 해태는 투구동작이 크고 느린 김기태의 약점을 기동력으로 파고들며 1회초에만 무려 3개의 도루를 뽑아내면서 김종모의 희생플라이로 기선을 제압했다. 삼성 이만수는 1회말 2사3루에서 내야안타를 때려 1 대 1 동점을 만들었으나 2회초 1사1·3루에서 차영화가 2루를 훔칠 때 2루 악송구를 저질러 3루주자 김준환에게 손쉬운 득점을 허용했다. 이것이 이 게임의 결승점이었다. 경기벽두에 흔들리던 김정수는 2회부터 제 컨디션을 찾아 8회 1사1·3루에서 선동열에게 마무리를 맡길 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삼성 역시 3회부터 릴리프한 양일환이 나머지 7이닝을 3안타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선발기용 미스의 아쉬움만 더했다. 3차전[편집] 10월 24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2 0 0 0 0 0 0 0 0 2 5 1 {{{원정팀볼넷}}} 해태 타이거즈 0 0 2 1 1 0 0 0 X 4 9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문희수  패전 투수 : 권영호  세이브 : 차동철  홀드 : {{{홀드투수}}}홈런 :  삼성 – 이만수(1회 투런)  해태 – 김준환(4회 솔로) 해태 노장선수들의 타력이 돋보인 한판이었다. 삼성은 1회초 이만수의 2점홈런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3회말 2사1·2루에서 김성한의 2타점 2루타로 동점을 만든 해태는 4회말 1사후 김준환이 삼성선발 권영호를 우월 솔로홈런으로 두들겨 역전시켰고 5회말에는 1사2루에서 김봉연이 좌전적시타를 터뜨려 4 대 2로 승리를 굳혔다. 1회초 선발 신동수가 홈런을 맞자마자 지체없이 구원에 나선 문희수는 9회 무사1·2루에서 차동철에게 마운드를 넘기기까지 3안타로 삼성 타선을 무실점 처리, 승리투수가 됐고 1차전 승리투수 차동철은 세이브를 따냈다. 4차전[편집] 10월 25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팀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라이온즈 0 1 0 0 1 0 0 0 0 2 7 2 {{{원정팀볼넷}}} 해태 타이거즈 0 2 0 1 3 3 0 0 X 9 14 1 {{{홈팀볼넷}}} 승리 투수 : 김정수  패전 투수 : 김시진  세이브 :   홀드 : {{{홀드투수}}}홈런 :  해태 – 김준환(2회 투런) 벼랑끝으로 몰린 삼성은 에이스 김시진을 기용하는 수밖에 없었고 해태는 김대현으로 맞섰다. 삼성은 2회초 이종두의 적시2루타로 선제점을 올렸으나 김준환이 2회말 2점홈런으로 전세를 뒤집어 전날의 복사판을 만들었고 4회말 이순철이 추가점 중전적시타를 터뜨리면서 김시진은 강판당하고 말았다. 한국시리즈 통산 7번째 패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라설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삼성은 5회초 홍승규의 센터 희생플라이로 3 대 2로 따라붙고나서 2사1·3루의 찬스가 이어졌을 때 비밀리에 연습해두었던 ‘비장의 작전’을 꺼냈다. 장효조가 구원투수 김정수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안타를 뽑기가 어렵다고 판단, 1루주자 허규옥이 일부러 견제구에 걸리는 틈에 더블스틸로 동점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3루주자의 호흡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서 허규옥만 2루에서 태그아웃 당해 버림으로써 김시진을 패배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위기를 넘긴 해태는 5회말 집중 5안타로 3점, 6회말 김준환의 밀어내기 및 김무종의 2타점 적시타 등으로 3점을 더 보태면서 승세를 결정짓고 9 대 2로 낙승, 4게임만으로 2연패의 영광을 안았다. 해태, 한국시리즈 첫 선발 전원안타 vdeh해태 타이거즈 - 1987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후기리그 2위)감독 39 김응용코치 김인식투수 18 선동열 | 20 문희수 | 47 김정수 | 김대현 | 31 차동철 | 방수원 | 16 이상윤 | 송유석 | 32 신동수 | 강상진포수 25 김무종 | 22 장채근내야수 11 김성한 | 6 서정환 | 8 한대화 | 2 백인호 | 27 김봉연 | 김일환외야수 10 김준환 | 14 이순철 | 7 김종모 | 1 김일권 | 44 송일섭 | 24 박철우 | 이건열 | 조재환최우수 평균자책점 선동열,올스타전 MVP 김종모, 한국시리즈 MVP 김준환 vdehKBO 한국시리즈 · 0000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0000 · 0000 ·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함에 따라 한국시리즈가 개최되지 않았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987년_한국시리즈&oldid=17997448" 분류: 한국시리즈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1987년 야구1987년 10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월 3일 (화) 18: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도둑놈, 도둑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둑놈, 도둑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도둑놈, 도둑님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MBC 방송 기간 2017년 5월 13일 ~ 2017년 11월 5일 방송 시간 매주 주말 밤 10:00 ~ 11:15 방송 분량 75분 방송 횟수 50부작 추가 채널 MBC 드라마넷 기획 이재동 제작사 메이퀸픽쳐스 제작자 김진천 연출 오경훈, 장준호 극본 손영목, 차이영 출연자 지현우, 서주현, 김지훈, 임주은 외 음성 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도둑놈, 도둑님 홈페이지 《도둑놈, 도둑님》은 2017년 5월 13일부터 2017년 11월 5일까지 방송된 문화방송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다. 목차 1 도둑놈 도둑님 역사 2 기획 의도 3 방송 시간 4 등장 인물 4.1 주요 인물 4.2 장돌목의 주변인물 4.3 강소주의 주변인물 4.4 중태집안 & 홍씨일가 4.5 산운율 사람들 4.6 검찰청 4.7 그 외 인물 4.8 특별출연 5 시청률 6 결방 사유 및 연속 방송 및 편성 변경 7 수상 8 각주 9 외부 링크 도둑놈 도둑님 역사[편집] 다소 늘어진 전개와 MBC 파업이 맞물리면서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는데 MBC 총파업 이후 편성 시간 변경이 잦아졌다[1]. 기획 의도[편집] 대한민국을 조종하는 기득권 세력에 치명타를 입히는 도둑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고 통쾌하게 다룬 드라마 방송 시간[편집] 방송 채널 방송 기간 방송 시간 방송 분량 MBC TV 2017년 5월 13일 ~ 2017년 10월 15일 매주 주말 밤 8:45 ~ 10:00 75분 2017년 10월 28일 매주 토요일 밤 8:45 ~ 11:15 150분 (회당 75분 2회 연속방송) 2017년 11월 5일 매주 일요일 밤 8:45 ~ 11:15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지현우 : 장돌목 / 김수현 역 (아역 허준우, 김강훈) 서주현 : 강소주 역 (아역 김아인, 문소희) 김지훈 : 한준희 / 장민재 역 (아역 문우진, 남다름) -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 장판수의 친 아들 임주은 : 윤화영 역 (아역 강지우) - 국제변호사, 거대로펌 변호사. 윤중태의 외동딸 장돌목의 주변인물[편집] 안길강 : 장판수 역 - 장돌목과 한준희(장민재)의 아버지 정경순 : 박하경 역 - 장돌목과 장민재의 어머니 신은정 : 민해원 / 민정혜 역 - 장돌목(김수현)의 어머니 강소주의 주변인물[편집] 김정태 : 강성일 역 - 강력반 형사. 소주의 아빠 중태집안 & 홍씨일가[편집] 최종환 : 윤중태 역 - 검사장 출신 3선 국회의원. 화영의 아버지 최수린 : 홍신애 역 - 윤중태의 아내, 화영의 엄마. 천문그룹 회장 홍일권의 둘째 딸 장광 : 홍일권 역 - 천문그룹 회장. 홍신애, 홍미애의 아버지 서이숙 : 홍미애 역 - K채널 이사장. 신애의 배다른 언니이자 홍일권의 큰 딸. 이윤호의 어머니 김진호 : 이창영 역 - 이윤호의 아버지 미상 : 양기영 역 한재석 : 이윤호 역 (아역 전진서) - 천문전자 본부장. 미애와 창영의 아들 한정수 : 최태석 역 - 홍일권의 비서 산운율 사람들[편집] 이주실 : 김순천 역 - 산운율의 주인이자 인사동 골동품 가게 주인 이정은 : 권정희 역 - 김순천의 비서 우희진 : 박선진 역 - 여울의 엄마 이세창 : 이은석 역 이상우 : 오송식 역 윤지원 : 고은지 역 - 권정희의 딸 류지안 : 박여울 역 - 선진의 딸 소준섭 : 허종범 역 - 돌목의 친구 검찰청[편집] 김준원 : 최강규 역 이봉원 : 남종합 역 - 한준희 수사관(10회부터 합류)[2] 그 외 인물[편집] 조덕현 : 김찬기 역 - 김수현(장돌목)의 아버지 강지원 : 허비서 역 고병완 : 송국현 역 이성우 서승원 최윤준 이수용 이영수 박건률 진현광 : 수사관 역 정기선 최홍일 장태민 오화열 김현우 임지현 전해룡 조용상 옥주리 권오경 홍부향 최교식 김병철 이민웅 이우신 : 이사장 역 서광재 : 교장 역 이동희 손영순 : 할머니 역 성찬호 박노식 : 강성일의 살해범 역 조찬우 김재철 이채경 : 선생님 역 손성찬 염동헌 : 유선호 교장 역 해선 주동희 손인용 여진 박옥출 성낙경 박도준 박진성 홍석빈 신원우 김모범 이선영 권희락 유민주 조미녀 백승태 원진호 신하준 홍기준 권혁수 김현 : 담임 선생님 역 김광섭 이진권 손상연 : 불량학생 역 정태야 동윤석 이수용 이준희 신동훈 용경빈 오기환 고진명 손건우 : 김형덕 검사 역 정두겸 : 박상호 의원 역 박성균 박수민 임지영 권홍석 석보배 강지원 이민희 이정건 고유경 이서율 이윤상 이석현 윤효식 하남우 민상우 한여울 한태일 하경민 홍석연 유광수 유지혁 이진목 우혜영 김재협 김도하 박민지 안지은 박지유 김상일 하루비 : 명선 역 이해 엄준식 : 수사관 역 황주호 민대식 이재욱 : 한준희 고등학교 선생님 역 이상옥 윤부진 서진욱 여운복 이종신 이태검 장현 구자은 김정수 : 감정사 역 신치영 한창현 손인용 송경화 문경민 오민정 최정인 김태영 김정구 박용 엄준식 김광인 : 의무과장 역 최요운 황석하 이장미 이성준 송진우 : 김실장 역 정희중 윤미영 강문경 서병덕 양재원 손선근 정수인 김익태 : 김수현(장돌목)의 조부(백산장군의 아들) 역 이상홍 유지연 김재흠 정희중 추교진 염지혜 이승철 김남표 주성 최은선 박진수 강철성 문경민 최리호 김한준 마민희 정현우 이종신 김미희 윤종원 박상휘 김대국 : 보도 기자 역 지성근 이택근 이혜란 : 정이 역 윤현 이태윤 유영복 차명욱 김민석 이성훈 김보미 강학수 전민협 김미란 공재원 남상란 김오복 심영민 윤종구 이무녕 최영 이은숙 정영훈 : 사법연수원생 역 특별출연[편집] 김대성 김영희 윤용현 : 이철호 역 유형관 김예원 : 반예원 역 홍희원 : 의사역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7년 회차 방송일 TNmS 시청률[3] AGB 시청률[4]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제1회 5월 13일 8.7% 9.4% 9.2% 9.1% 제2회 5월 14일 10.1% 10.1% 8.9% 9.0% 제3회 5월 20일 6.8% 7.4% 6.6% 7.1% 제4회 5월 21일 8.8% 8.8% 9.4% 9.4% 제5회 5월 27일 9.7% 9.5% 9.5% 9.2% 제6회 5월 28일 11.0% 11.6% 11.6% 11.7% 제7회 6월 3일 8.9% 9.3% 10.4% 10.1% 제8회 6월 4일 10.4% 11.2% 10.7% 10.3% 제9회 6월 10일 9.4% 10.4% 10.8% 11.1% 제10회 6월 11일 11.7% 11.5% 11.8% 11.9% 제11회 6월 17일 9.3% 9.6% 11.6% 12.1% 제12회 6월 18일 11.4% 11.2% 13.2% 12.7% 제13회 6월 24일 9.7% 10.4% 10.4% 10.3% 제14회 6월 25일 10.2% 9.8% 12.3% 12.1% 제15회 7월 1일 8.5% 9.6% 10.9% 11.3% 제16회 7월 2일 11.3% 11.9% 11.0% 11.0% 제17회 7월 8일 10.5% 11.2% 10.5% 10.6% 제18회 7월 9일 11.0% 11.8% 11.9% 11.4% 제19회 7월 15일 10.1% 10.9% 10.4% 10.4% 제20회 7월 16일 11.9% 12.9% 12.0% 12.1% 제21회 7월 22일 10.5% 10.1% 9.9% 9.8% 제22회 7월 23일 11.3% 11.0% 11.3% 11.1% 제23회 7월 29일 10.1% 10.0% 9.7% 9.5% 제24회 7월 30일 11.8% 11.4% 11.9% 11.5% 제25회 8월 5일 9.2% 9.6% 9.4% 9.0% 제26회 8월 6일 10.1% 10.3% 10.8% 10.5% 제27회 8월 12일 8.9% 8.4% 8.6% 8.4% 제28회 8월 13일 10.3% 10.5% 10.5% 10.2% 제29회 8월 19일 9.9% 9.8% 9.6% 9.6% 제30회 8월 20일 9.4% 9.2% 11.0% 10.8% 제31회 8월 26일 9.1% 8.2% 8.7% 8.6% 제32회 8월 27일 10.6% 9.9% 12.1% 12.1% 제33회 9월 2일 6.7% 6.7% 8.0% 7.9% 제34회 9월 3일 10.0% 10.0% 10.5% 10.2% 제35회 9월 9일 7.9% 7.6% 8.0% 7.6% 제36회 9월 10일 9.5% 8.1% 10.2% 9.9% 제37회 9월 16일 7.7% 7.9% 8.4% 8.1% 제38회 9월 17일 9.9% 9.6% 11.4% 10.6% 제39회 9월 23일 7.7% 6.6% 8.3% 8.0% 제40회 9월 24일 10.5% 10.6% 11.8% 11.2% 제41회 9월 30일 7.8% 7.5% 8.5% 8.4% 제42회 10월 1일 9.8% 9.8% 11.6% 10.9% 제43회 10월 8일 10.1% 10.3% 11.4% 11.6% 제44회 8.9% 8.8% 11.7% 11.7% 제45회 10월 14일 7.8% 7.6% 8.3% 7.8% 제46회 10월 15일 10.6% 9.7% 12.5% 12.3% 제47회 10월 28일 9.6% 9.6% 9.6% 9.6% 제48회 11.8% 11.9% 11.8% 11.1% 제49회 11월 5일 9.2% 8.5% 9.9% 9.5% 제50회 12.2% 11.6% 13.4% 12.4% 결방 사유 및 연속 방송 및 편성 변경[편집] 2017년 10월 7일 : MBC 추석특선영화 라라랜드 편성으로 인해 결방 2017년 10월 8일 : 밤 10시부터 2회 연속방송 (43회, 44회) 2017년 10월 21일 : MBC 주말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 2회 연속방송으로 인한 결방 2017년 10월 22일 : MBC 노조 총파업으로 인한 결방 2017년 10월 28일 : 밤 8시 45분부터 2회 연속방송 (47회, 48회) 2017년 10월 29일 : MBC 특선영화 부산행 편성으로 인해 결방 2017년 11월 4일 : MBC 주말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 2회 연속방송으로 인한 결방 2017년 11월 5일 : 밤 8시 45분부터 2회 연속방송 (49회, 50회) 수상[편집] 2017년 MBC 연기대상 주말극 황금 연기상 안길강 2017년 MBC 연기대상 신인상 서주현 각주[편집] ↑ 신미래 (2017년 11월 5일). “[‘도둑놈 도둑님’ 종영①] 화제성+고구마전개 두 마리 토끼 다 놓친 아쉬운 作”. MBN. 2018년 10월 14일에 확인함.  ↑ 정유나 (2017년 6월 8일). “[공식]이봉원, '도둑놈 도둑님' 전격합류…검찰수사관 役”. 스포츠조선. 2019년 3월 4일에 확인함.  ↑ TNmS 멀티미디어 홈페이지 참조. ↑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 참조. 외부 링크[편집] MBC 도둑놈, 도둑님 공식 홈페이지 문화방송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 (2016년 11월 12일 ~ 2017년 5월 7일) 도둑놈, 도둑님 (2017년 5월 13일 ~ 2017년 11월 5일) 돈꽃(2017년 11월 11일 ~ 2018년 2월 3일) vdeh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2000년대 후반2005년 《제5공화국》 《신돈》 2006년 《불꽃놀이》 《도로시를 찾아라》(단막) 《발칙한 여자들》 《환상의 커플》 《기적》(단막) 2007년 《하얀거탑》 《케 세라 세라》 《에어시티》 《9회말 2아웃》 《겨울새》 2008년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 《달콤한 인생》 《내 여자》 2009년 《2009 외인구단》 《친구, 우리들의 전설》 《보석비빔밥》 2010년대 전반2010년 《된장 군과 낫토 짱의 결혼 전쟁》(단막)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김수로》 《욕망의 불꽃》 2011년 《내 마음이 들리니》 《애정만만세》 2012년 《신들의 만찬》 《닥터 진》 《메이퀸》 2013년 《백년의 유산》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 《황금 무지개》 2014년 《호텔킹》 《마마》 《전설의 마녀》 2010년대 후반2015년 《여왕의 꽃》 《내 딸, 금사월》 2016년 《결혼계약》 《옥중화》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 2017년 《도둑놈, 도둑님》 《돈꽃》 2018년 《데릴남편 오작두》 《이별이 떠났다》 《숨바꼭질》 《신과의 약속》 2019년 《슬플 때 사랑한다》 《이몽》 아침 | 일일 (일일  · 특별기획) | 월화 | 수목 | 금 | 예능 | 주말 (특별기획  · 연속극) | 시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도둑놈,_도둑님&oldid=24226659" 분류: 2017년 드라마문화방송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손영목 시나리오 작품차이영 시나리오 작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Bahasa Melayu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5일 (수) 17: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도둑놈, 도둑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둑놈, 도둑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도둑놈, 도둑님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MBC 방송 기간 2017년 5월 13일 ~ 2017년 11월 5일 방송 시간 매주 주말 밤 10:00 ~ 11:15 방송 분량 75분 방송 횟수 50부작 추가 채널 MBC 드라마넷 기획 이재동 제작사 메이퀸픽쳐스 제작자 김진천 연출 오경훈, 장준호 극본 손영목, 차이영 출연자 지현우, 서주현, 김지훈, 임주은 외 음성 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도둑놈, 도둑님 홈페이지 《도둑놈, 도둑님》은 2017년 5월 13일부터 2017년 11월 5일까지 방송된 문화방송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다. 목차 1 도둑놈 도둑님 역사 2 기획 의도 3 방송 시간 4 등장 인물 4.1 주요 인물 4.2 장돌목의 주변인물 4.3 강소주의 주변인물 4.4 중태집안 & 홍씨일가 4.5 산운율 사람들 4.6 검찰청 4.7 그 외 인물 4.8 특별출연 5 시청률 6 결방 사유 및 연속 방송 및 편성 변경 7 수상 8 각주 9 외부 링크 도둑놈 도둑님 역사[편집] 다소 늘어진 전개와 MBC 파업이 맞물리면서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는데 MBC 총파업 이후 편성 시간 변경이 잦아졌다[1]. 기획 의도[편집] 대한민국을 조종하는 기득권 세력에 치명타를 입히는 도둑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고 통쾌하게 다룬 드라마 방송 시간[편집] 방송 채널 방송 기간 방송 시간 방송 분량 MBC TV 2017년 5월 13일 ~ 2017년 10월 15일 매주 주말 밤 8:45 ~ 10:00 75분 2017년 10월 28일 매주 토요일 밤 8:45 ~ 11:15 150분 (회당 75분 2회 연속방송) 2017년 11월 5일 매주 일요일 밤 8:45 ~ 11:15 등장 인물[편집] 주요 인물[편집] 지현우 : 장돌목 / 김수현 역 (아역 허준우, 김강훈) 서주현 : 강소주 역 (아역 김아인, 문소희) 김지훈 : 한준희 / 장민재 역 (아역 문우진, 남다름) -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 장판수의 친 아들 임주은 : 윤화영 역 (아역 강지우) - 국제변호사, 거대로펌 변호사. 윤중태의 외동딸 장돌목의 주변인물[편집] 안길강 : 장판수 역 - 장돌목과 한준희(장민재)의 아버지 정경순 : 박하경 역 - 장돌목과 장민재의 어머니 신은정 : 민해원 / 민정혜 역 - 장돌목(김수현)의 어머니 강소주의 주변인물[편집] 김정태 : 강성일 역 - 강력반 형사. 소주의 아빠 중태집안 & 홍씨일가[편집] 최종환 : 윤중태 역 - 검사장 출신 3선 국회의원. 화영의 아버지 최수린 : 홍신애 역 - 윤중태의 아내, 화영의 엄마. 천문그룹 회장 홍일권의 둘째 딸 장광 : 홍일권 역 - 천문그룹 회장. 홍신애, 홍미애의 아버지 서이숙 : 홍미애 역 - K채널 이사장. 신애의 배다른 언니이자 홍일권의 큰 딸. 이윤호의 어머니 김진호 : 이창영 역 - 이윤호의 아버지 미상 : 양기영 역 한재석 : 이윤호 역 (아역 전진서) - 천문전자 본부장. 미애와 창영의 아들 한정수 : 최태석 역 - 홍일권의 비서 산운율 사람들[편집] 이주실 : 김순천 역 - 산운율의 주인이자 인사동 골동품 가게 주인 이정은 : 권정희 역 - 김순천의 비서 우희진 : 박선진 역 - 여울의 엄마 이세창 : 이은석 역 이상우 : 오송식 역 윤지원 : 고은지 역 - 권정희의 딸 류지안 : 박여울 역 - 선진의 딸 소준섭 : 허종범 역 - 돌목의 친구 검찰청[편집] 김준원 : 최강규 역 이봉원 : 남종합 역 - 한준희 수사관(10회부터 합류)[2] 그 외 인물[편집] 조덕현 : 김찬기 역 - 김수현(장돌목)의 아버지 강지원 : 허비서 역 고병완 : 송국현 역 이성우 서승원 최윤준 이수용 이영수 박건률 진현광 : 수사관 역 정기선 최홍일 장태민 오화열 김현우 임지현 전해룡 조용상 옥주리 권오경 홍부향 최교식 김병철 이민웅 이우신 : 이사장 역 서광재 : 교장 역 이동희 손영순 : 할머니 역 성찬호 박노식 : 강성일의 살해범 역 조찬우 김재철 이채경 : 선생님 역 손성찬 염동헌 : 유선호 교장 역 해선 주동희 손인용 여진 박옥출 성낙경 박도준 박진성 홍석빈 신원우 김모범 이선영 권희락 유민주 조미녀 백승태 원진호 신하준 홍기준 권혁수 김현 : 담임 선생님 역 김광섭 이진권 손상연 : 불량학생 역 정태야 동윤석 이수용 이준희 신동훈 용경빈 오기환 고진명 손건우 : 김형덕 검사 역 정두겸 : 박상호 의원 역 박성균 박수민 임지영 권홍석 석보배 강지원 이민희 이정건 고유경 이서율 이윤상 이석현 윤효식 하남우 민상우 한여울 한태일 하경민 홍석연 유광수 유지혁 이진목 우혜영 김재협 김도하 박민지 안지은 박지유 김상일 하루비 : 명선 역 이해 엄준식 : 수사관 역 황주호 민대식 이재욱 : 한준희 고등학교 선생님 역 이상옥 윤부진 서진욱 여운복 이종신 이태검 장현 구자은 김정수 : 감정사 역 신치영 한창현 손인용 송경화 문경민 오민정 최정인 김태영 김정구 박용 엄준식 김광인 : 의무과장 역 최요운 황석하 이장미 이성준 송진우 : 김실장 역 정희중 윤미영 강문경 서병덕 양재원 손선근 정수인 김익태 : 김수현(장돌목)의 조부(백산장군의 아들) 역 이상홍 유지연 김재흠 정희중 추교진 염지혜 이승철 김남표 주성 최은선 박진수 강철성 문경민 최리호 김한준 마민희 정현우 이종신 김미희 윤종원 박상휘 김대국 : 보도 기자 역 지성근 이택근 이혜란 : 정이 역 윤현 이태윤 유영복 차명욱 김민석 이성훈 김보미 강학수 전민협 김미란 공재원 남상란 김오복 심영민 윤종구 이무녕 최영 이은숙 정영훈 : 사법연수원생 역 특별출연[편집] 김대성 김영희 윤용현 : 이철호 역 유형관 김예원 : 반예원 역 홍희원 : 의사역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7년 회차 방송일 TNmS 시청률[3] AGB 시청률[4]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제1회 5월 13일 8.7% 9.4% 9.2% 9.1% 제2회 5월 14일 10.1% 10.1% 8.9% 9.0% 제3회 5월 20일 6.8% 7.4% 6.6% 7.1% 제4회 5월 21일 8.8% 8.8% 9.4% 9.4% 제5회 5월 27일 9.7% 9.5% 9.5% 9.2% 제6회 5월 28일 11.0% 11.6% 11.6% 11.7% 제7회 6월 3일 8.9% 9.3% 10.4% 10.1% 제8회 6월 4일 10.4% 11.2% 10.7% 10.3% 제9회 6월 10일 9.4% 10.4% 10.8% 11.1% 제10회 6월 11일 11.7% 11.5% 11.8% 11.9% 제11회 6월 17일 9.3% 9.6% 11.6% 12.1% 제12회 6월 18일 11.4% 11.2% 13.2% 12.7% 제13회 6월 24일 9.7% 10.4% 10.4% 10.3% 제14회 6월 25일 10.2% 9.8% 12.3% 12.1% 제15회 7월 1일 8.5% 9.6% 10.9% 11.3% 제16회 7월 2일 11.3% 11.9% 11.0% 11.0% 제17회 7월 8일 10.5% 11.2% 10.5% 10.6% 제18회 7월 9일 11.0% 11.8% 11.9% 11.4% 제19회 7월 15일 10.1% 10.9% 10.4% 10.4% 제20회 7월 16일 11.9% 12.9% 12.0% 12.1% 제21회 7월 22일 10.5% 10.1% 9.9% 9.8% 제22회 7월 23일 11.3% 11.0% 11.3% 11.1% 제23회 7월 29일 10.1% 10.0% 9.7% 9.5% 제24회 7월 30일 11.8% 11.4% 11.9% 11.5% 제25회 8월 5일 9.2% 9.6% 9.4% 9.0% 제26회 8월 6일 10.1% 10.3% 10.8% 10.5% 제27회 8월 12일 8.9% 8.4% 8.6% 8.4% 제28회 8월 13일 10.3% 10.5% 10.5% 10.2% 제29회 8월 19일 9.9% 9.8% 9.6% 9.6% 제30회 8월 20일 9.4% 9.2% 11.0% 10.8% 제31회 8월 26일 9.1% 8.2% 8.7% 8.6% 제32회 8월 27일 10.6% 9.9% 12.1% 12.1% 제33회 9월 2일 6.7% 6.7% 8.0% 7.9% 제34회 9월 3일 10.0% 10.0% 10.5% 10.2% 제35회 9월 9일 7.9% 7.6% 8.0% 7.6% 제36회 9월 10일 9.5% 8.1% 10.2% 9.9% 제37회 9월 16일 7.7% 7.9% 8.4% 8.1% 제38회 9월 17일 9.9% 9.6% 11.4% 10.6% 제39회 9월 23일 7.7% 6.6% 8.3% 8.0% 제40회 9월 24일 10.5% 10.6% 11.8% 11.2% 제41회 9월 30일 7.8% 7.5% 8.5% 8.4% 제42회 10월 1일 9.8% 9.8% 11.6% 10.9% 제43회 10월 8일 10.1% 10.3% 11.4% 11.6% 제44회 8.9% 8.8% 11.7% 11.7% 제45회 10월 14일 7.8% 7.6% 8.3% 7.8% 제46회 10월 15일 10.6% 9.7% 12.5% 12.3% 제47회 10월 28일 9.6% 9.6% 9.6% 9.6% 제48회 11.8% 11.9% 11.8% 11.1% 제49회 11월 5일 9.2% 8.5% 9.9% 9.5% 제50회 12.2% 11.6% 13.4% 12.4% 결방 사유 및 연속 방송 및 편성 변경[편집] 2017년 10월 7일 : MBC 추석특선영화 라라랜드 편성으로 인해 결방 2017년 10월 8일 : 밤 10시부터 2회 연속방송 (43회, 44회) 2017년 10월 21일 : MBC 주말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 2회 연속방송으로 인한 결방 2017년 10월 22일 : MBC 노조 총파업으로 인한 결방 2017년 10월 28일 : 밤 8시 45분부터 2회 연속방송 (47회, 48회) 2017년 10월 29일 : MBC 특선영화 부산행 편성으로 인해 결방 2017년 11월 4일 : MBC 주말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 2회 연속방송으로 인한 결방 2017년 11월 5일 : 밤 8시 45분부터 2회 연속방송 (49회, 50회) 수상[편집] 2017년 MBC 연기대상 주말극 황금 연기상 안길강 2017년 MBC 연기대상 신인상 서주현 각주[편집] ↑ 신미래 (2017년 11월 5일). “[‘도둑놈 도둑님’ 종영①] 화제성+고구마전개 두 마리 토끼 다 놓친 아쉬운 作”. MBN. 2018년 10월 14일에 확인함.  ↑ 정유나 (2017년 6월 8일). “[공식]이봉원, '도둑놈 도둑님' 전격합류…검찰수사관 役”. 스포츠조선. 2019년 3월 4일에 확인함.  ↑ TNmS 멀티미디어 홈페이지 참조. ↑ AGB 닐슨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 참조. 외부 링크[편집] MBC 도둑놈, 도둑님 공식 홈페이지 문화방송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 (2016년 11월 12일 ~ 2017년 5월 7일) 도둑놈, 도둑님 (2017년 5월 13일 ~ 2017년 11월 5일) 돈꽃(2017년 11월 11일 ~ 2018년 2월 3일) vdeh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2000년대 후반2005년 《제5공화국》 《신돈》 2006년 《불꽃놀이》 《도로시를 찾아라》(단막) 《발칙한 여자들》 《환상의 커플》 《기적》(단막) 2007년 《하얀거탑》 《케 세라 세라》 《에어시티》 《9회말 2아웃》 《겨울새》 2008년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 《달콤한 인생》 《내 여자》 2009년 《2009 외인구단》 《친구, 우리들의 전설》 《보석비빔밥》 2010년대 전반2010년 《된장 군과 낫토 짱의 결혼 전쟁》(단막)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김수로》 《욕망의 불꽃》 2011년 《내 마음이 들리니》 《애정만만세》 2012년 《신들의 만찬》 《닥터 진》 《메이퀸》 2013년 《백년의 유산》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 《황금 무지개》 2014년 《호텔킹》 《마마》 《전설의 마녀》 2010년대 후반2015년 《여왕의 꽃》 《내 딸, 금사월》 2016년 《결혼계약》 《옥중화》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 2017년 《도둑놈, 도둑님》 《돈꽃》 2018년 《데릴남편 오작두》 《이별이 떠났다》 《숨바꼭질》 《신과의 약속》 2019년 《슬플 때 사랑한다》 《이몽》 아침 | 일일 (일일  · 특별기획) | 월화 | 수목 | 금 | 예능 | 주말 (특별기획  · 연속극) | 시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도둑놈,_도둑님&oldid=24226659" 분류: 2017년 드라마문화방송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손영목 시나리오 작품차이영 시나리오 작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Bahasa Melayu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5일 (수) 17: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용환 (1887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용환 (1887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용환출생 1887년경북 안동시사망 1946년국적 대한민국 직업 독립운동가상훈 건국훈장 애족장(1995년) 김용환(金龍煥, 1887년 ~ 1946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목차 1 생애 1.1 독립운동 2 사후 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5 각주 생애[편집] 독립운동[편집] 의성 김씨 학봉파의 후손으로,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할아버지의 사촌이자 의병장이었던 김흥락(金興洛)이 일본군에게 사망한 모습을 목격한 후 항일의 뜻을 품었다.[1] 1908년 의병장 이강년, 1911년 김상태 의진등에서 의병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도만(渡滿)한 독립운동자들과 연결되어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세 번이나 체포되어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에는 의용단에서 서기를 역임해 활동하였다.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으며, 1922년에 다시 일제에 체포되었다. 한편 그가 지원한 군자금은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300억원이라고 한다. 그는 독립운동을 숨기기 위해 도박으로 종가 재산을 모두 날린 노름꾼 행세를 하였다. 이 때문에 파락호로 불리었다. 사후[편집]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김용환의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부친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 1995년에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서간문을 남겼다.[3]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같이 보기[편집] 파락호 외부 링크[편집]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 김용환 각주[편집] ↑ 사람의 길고(故) 김시인(金時寅) 선생 영전에서 학봉종택의 닭 주간경향 2008년 3월 4일 뉴스메이커 764호 ↑ '서프라이즈' 故 김용환, 노름꾼으로 위장한 독립운동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티브이데일리 2012년 5월 6일 ↑ 출처 : 김후옹,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용환_(1887년)&oldid=24476793" 분류: 1887년 태어남1946년 죽음한국의 독립운동가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의성 김씨안동시 출신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25일 (화) 05: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워런 G. 하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워런 G. 하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7월) 워런 G.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임기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부통령 캘빈 쿨리지 전임: 우드로 윌슨(제28대)후임: 캘빈 쿨리지(제30대) 신상정보 출생일 1865년 11월 2일 출생지 미국 오하이오주 코르시카 사망일 1923년 8월 2일 (57세) 사망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학력 오하이오 센트랄 대학교 정당 공화당 배우자 플로렌스 클링 하딩 종교 침례교 워런 개멀리얼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865년 11월 2일 ~ 1923년 8월 2일)은 미국의 29번째(제34대) 대통령(1921~23)이다. 그리고 임기 중 사망한 여섯번째 대통령이다. 목차 1 초기 생애 1.1 어린 시절 1.2 신문 경력 1.3 결혼 2 정치 경력 2.1 초기 정계 입문 2.2 미국 상원 2.3 막후 협상실 2.4 현관 앞의 선거 운동 3 대통령 재임 3.1 정상으로 복귀 3.2 정부의 스캔들 3.3 사망 4 외부 링크 4.1 음성과 영화 링크 4.2 주요 자료 초기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오하이오주 코르시카(현재의 블루밍 그로브) 근처에서 조지 트라이언 하딩과 피비 디커슨 하딩의 8명 자식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는 동종요법 의사가 되면서 농부로서 작은 수입을 보충하였다. 그는 1642년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영국인 가족의 자손이다. 워런은 코르시카와 캘리도니아의 그래머 스쿨들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절반을 소유한 주간 신문 〈캘리도니아 아거스 (Caledonia Argus)〉에 타자치는 것을 배웠다. 아이베리아에 있는 오하이오 센트럴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에 학교 신문을 편집하였다. 신문 경력[편집] 17세의 하딩 1882년 하딩은 자신이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데 시험을 합격하였다. 그는 오하이오 주 매리언 근처에 있는 한 방의 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에 강의하였다. 후에 강의가 자신에게 가장 어려운 직업이라고 불렀다. 하딩은 또한 〈매리언 민주당 거울 (Marion Democratic Mirror)〉를 위하여 일하였다. 그러나 188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제임스 G. 블레인을 지지한 이유로 해고당하고 말았다. 하딩과 그의 두 친구들은 그러고나서 파산한 신문 〈매리언 스타 (Marion Star)〉를 300달러에 사들였다. 결혼[편집] 플로렌스 하딩 여사 1891년 두드러진 매리언 은행원의 딸 플로렌스 클링 더 월프(1860~1924)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하딩보다 5세 연상이었다. 지배적인 성격들과 남편을 위하여 거대한 야망들을 가진 이유로 "여공작"이란 별명이 붙었다. 플로렌스 여사는 〈스타〉지를 번영하는 신문으로 만드는 데 남편을 도왔으며, 하딩은 몇몇 주식회사의 사장과 트리니티 침례 교회의 수탁인이 되었다. 하딩 부부는 자식이 없었다. 정치 경력[편집] 초기 정계 입문[편집] 하딩은 곧 편집자와 실력있는 웅변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889년 공화당 주상원에 선출되었고, 2년 후에도 재선되었다. 그는 1903년 부지사에 선출되었으나 1910년 주지사 선거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주립 정계에 있는 동안에 하딩은 영리한 정치적 전략가 해리 M. 도허티의 현신적인 우정을 얻었다. 몇년 후에 도허티는 하딩을 대통령이 되는 데 열심히 일하였다. 1912년 하딩은 공화당 국립 회의에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두 번째 임기 기간을 위하여 후보로 지명하는 데 선택되었다. 이 명예로 그는 자신에게 자신의 후보 지명보다 더 위대한 감동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1916년 국립 회의에서 하딩은 기조 연설을 하고 영구적인 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미국 상원[편집] 도허티와 부인에 의한 주장으로 하딩은 1914년 미국 상원 선거에 성공적으로 나갔다. 인기있고 정다운 그는 좋은 친교와 상원의 위신을 즐겼으나 자신의 6년 임기 동안에 아무런 주요 법안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는 출석 조사의 거의 절반을 놓쳤고, 입법을 공부하는 것보다 자신의 친구들을 위하여 구직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딩은 보통 공화당 지도자력고 함께 투표하였다. 그는 높은 관세에 호의를 가졌고 국제 연맹과 산업의 연방적 규칙을 반대하였다. 그는 금주법과 여성의 참정권을 위하여 투표하였으나 양쪽에 원인에 굳은 위탁이 없었다. 막후 협상실[편집] 1919년 초순에 어떤 신문들은 하딩을 타협적 대통령 후보로서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하딩은 상원이 "대통령 후보가 가능적으로 될 수 있는 것보다 나의 애호에 가장 멀리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딩 여사의 협조로 도허티는 그에게 자신의 선거 운동 담당자가 되는 데 설득하였다. 1920년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국립 회의에서 많은 대의원들은 일리노이주지사 프랭크 O. 로우던, 전 육군 참모 총장 레너드 우드 중장, 캘리포니아주의 상원 하이럼 W. 존슨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도허티의 출석은 장면들의 뒤에서 바빴다. 그의 환영인들은 모든 대의원들을 반기었고 그들에게 하딩을 지지하도록 몰아냈다. 투표의 첫날에 회의는 4개의 결정 선거 후에 정돈을 휴회하였다. 그날 밤에 권력있는 상원과 정치적 보스들의 작은 단체는 도허티가 "막후 협상실"이라 부른 블랙스톤 호텔에서 만났다. 새벽 2시 쯤에 그들은 하딩이 타협적인 후보라는 동의를 하였다. 대의원들은 다음날 10번째 결정 선거에서 하딩을 후보로 임명하였으며, 매사추세츠주지사 캘빈 쿨리지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였다. 민주당은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를 대통령 후보, 해군 보조 장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현관 앞의 선거 운동[편집] 1920년 선거 운동 때의 하딩 하딩은 매리언의 자택으로부터 현관 앞의 선거 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거기서 연설을 하고 방문한 대의원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비서들에게 악수가 자신이 가장 기쁘게 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딩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상원을 지내는 동안에 선출된 첫 대통령이 되었다. 그 일은 모든 여성이 투표할 수 있던 첫 선거였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공개되었다. 대통령 재임[편집] 자신 행정부의 시작으로부터 하딩은 의회와 자신의 내각에 지도력을 공급하는 데 의지하였다. 대부분의 공화당원들처럼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 속한 권력들을 차지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상으로 복귀[편집] 하딩은 국제 연맹에 정돈을 끝내는 데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언맹이 독일과 다른 중앙 권력들과 함께 계약이 포함되지 않은 평화 조약들을 맺었다. 의회는 국재적 입법에서 지도자력을 차지하였다. 1921년 처음으로 이민에 몫을 놓았고 세금을 줄였다. 1922년에 관세를 기록 신장으로 올렸다. 농업 장관 헨리 C. 월리스는 농업부와 농부들에게 이득을 준 진흥적 입법을 인정하였다. 당시 상업 장관 허버트 후버는 상업적인 비행과 라디오 방송을 위한 규정들을 제안하였고 철강업에서 12시간의 근로일을 끝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국무 장관 찰스 에반스 휴스의 지도력 아래 워싱턴 군축회의가 1921년과 1922년에 열렸다. 정부의 스캔들[편집] 하딩은 오하이오 갱이라 알려진 많은 친구들을 워싱턴 D. C.로 데려왔다. 그중에 어떤이들은 신뢰할 수 없었으나 그는 그들을 사회적으로 즐겼고 그들에게 중요한 직업들을 주었다. 부패의 경향이 곧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티포트 돔 스캔덜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정부 소유의 석유 예비금들을 개인적 회사들에 임대한 뇌물을 받아들인 내무 장관 앨버트 B. 폴을 연루시켰다. 1929년 그는 투옥되어 1931년에 징역살이를 하였다. 하딩이 법무 장관으로 임명한 해리 도허티는 1926년 에일리언 재산 관리인의 사무실의 자신의 행정을 근심시킨 책임들로 재판을 받았다. 2명의 배심원들은 판단에 동의하는 데 실패하여 도허티가 풀려났다. 도허티의 친구 제시 W. 스미스는 1923년 5월 자살하였다. 스미스가 법무부와 법률적 폭력인들 사이에 청산을 배치시킨 것이 드러났다. 재향군인국에서 기금의 오용이 중개인의 입법적 조언자 찰스 F. 크래머의 자살과 운영인 찰스 R. 포브스의 투옥의 결과를 가져왔다. 사망[편집] 하딩의 장례 행렬 농업 경제의 대공황이 1922년의 의회적 선거에서 공화당원들이 나쁜 실수를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23년 6월 하딩은 담화 순회를 만들어 자신의 행정부에서 신임을 재생하는 일을 찾았다. 부인과 큰 공무적 당과 함께 그는 국가를 가로질러 캐나다와 알래스카를 방문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 워싱턴으로부터 긴 전갈이 하딩의 통로를 도달하였다. 그 일은 석유 임대들의 상원적 투자에 관한 소식을 방해하고 말았다. 기자들은 우울해진 하딩이 자신의 친구들에 의하여 배신당할 때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냐에 그들에게 의문하였다. 자신의 기차가 시애틀을 지나갈 때 하딩은 식중독에 걸려 병이 들기 시작하였다. 여행은 의사들이 하딩은 폐렴에 걸렸다고 보고한 샌프란시스코에서 멈췄다. 하딩은 거기서 8월 2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58세. 그의 시체가 워싱턴으로 돌아오면서 수많은 애도자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유해는 매리언으로 옮겨졌으며, 플로렌스 여사도 1924년 11월 21일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암살설도 있었으나, 훗날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워런 G. 하딩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워런 G. 하딩 (영어) 워런 G. 하딩 - 미국 의회 인명 사전 Miller Center of Public Affairs, University of Virginia, Warren Gamaliel Harding (1865–1923) White House, 29. Warren G. Harding 1921–1923 Warren G. Harding's Inauguration March 4, 1921 Memorial U.S. postage stamp issued after Harding's death Warren G. Harding at C-SPAN's American Presidents: Life Portraits Booknotes interview with Robert Ferrell on The Strange Deaths of President Harding, January 12, 1997. Booknotes interview with John Dean on Warren G. Harding, March 14, 2004. 음성과 영화 링크[편집] "Return to Normalcy" Speech, May 14, 1920 1920 Presidential Campaign; "Front Porch"; Marion, Ohio. Wearing cowboy hat Playing golf during Jazz Age 주요 자료[편집] Inaugural Address First State of the Union Address of Warren Harding Second State of the Union Address of Warren Harding 제29대 미국 대통령 전 임우드로 윌슨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후 임캘빈 쿨리지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0173269 LCCN: n50023001 ISNI: 0000 0000 9418 9326 GND: 11872035X SUDOC: 028318935 BNF: cb120179344 (데이터) NLA: 35170495 NKC: mzk2005306694 US Congress: H00019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워런_G._하딩&oldid=22957195" 분류: 워런 G. 하딩1865년 태어남1923년 죽음미국의 대통령오하이오주 출신 정치인워런 G. 하딩 행정부공화당 (미국)의 정치인1916년 미국 대통령 후보1920년 미국 대통령 후보오하이오주의 연방 상원의원네덜란드계 미국인웨일스계 미국인스코틀랜드계 미국인잉글랜드계 미국인공화당 (미국) 대통령 후보미국의 침례교도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Žemaitėška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islama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CebuanoCorsu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RipoarischKurdîKernowekLatinaLingua Franca NovaLumbaartLietuviųLatviešuMalagasy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مازِرونی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Kapampangan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umantschRomânăРусскийKinyarwanda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9일 (금) 07: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워런 G. 하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워런 G. 하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7월) 워런 G.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임기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부통령 캘빈 쿨리지 전임: 우드로 윌슨(제28대)후임: 캘빈 쿨리지(제30대) 신상정보 출생일 1865년 11월 2일 출생지 미국 오하이오주 코르시카 사망일 1923년 8월 2일 (57세) 사망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학력 오하이오 센트랄 대학교 정당 공화당 배우자 플로렌스 클링 하딩 종교 침례교 워런 개멀리얼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865년 11월 2일 ~ 1923년 8월 2일)은 미국의 29번째(제34대) 대통령(1921~23)이다. 그리고 임기 중 사망한 여섯번째 대통령이다. 목차 1 초기 생애 1.1 어린 시절 1.2 신문 경력 1.3 결혼 2 정치 경력 2.1 초기 정계 입문 2.2 미국 상원 2.3 막후 협상실 2.4 현관 앞의 선거 운동 3 대통령 재임 3.1 정상으로 복귀 3.2 정부의 스캔들 3.3 사망 4 외부 링크 4.1 음성과 영화 링크 4.2 주요 자료 초기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오하이오주 코르시카(현재의 블루밍 그로브) 근처에서 조지 트라이언 하딩과 피비 디커슨 하딩의 8명 자식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는 동종요법 의사가 되면서 농부로서 작은 수입을 보충하였다. 그는 1642년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영국인 가족의 자손이다. 워런은 코르시카와 캘리도니아의 그래머 스쿨들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절반을 소유한 주간 신문 〈캘리도니아 아거스 (Caledonia Argus)〉에 타자치는 것을 배웠다. 아이베리아에 있는 오하이오 센트럴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에 학교 신문을 편집하였다. 신문 경력[편집] 17세의 하딩 1882년 하딩은 자신이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데 시험을 합격하였다. 그는 오하이오 주 매리언 근처에 있는 한 방의 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에 강의하였다. 후에 강의가 자신에게 가장 어려운 직업이라고 불렀다. 하딩은 또한 〈매리언 민주당 거울 (Marion Democratic Mirror)〉를 위하여 일하였다. 그러나 188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제임스 G. 블레인을 지지한 이유로 해고당하고 말았다. 하딩과 그의 두 친구들은 그러고나서 파산한 신문 〈매리언 스타 (Marion Star)〉를 300달러에 사들였다. 결혼[편집] 플로렌스 하딩 여사 1891년 두드러진 매리언 은행원의 딸 플로렌스 클링 더 월프(1860~1924)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하딩보다 5세 연상이었다. 지배적인 성격들과 남편을 위하여 거대한 야망들을 가진 이유로 "여공작"이란 별명이 붙었다. 플로렌스 여사는 〈스타〉지를 번영하는 신문으로 만드는 데 남편을 도왔으며, 하딩은 몇몇 주식회사의 사장과 트리니티 침례 교회의 수탁인이 되었다. 하딩 부부는 자식이 없었다. 정치 경력[편집] 초기 정계 입문[편집] 하딩은 곧 편집자와 실력있는 웅변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889년 공화당 주상원에 선출되었고, 2년 후에도 재선되었다. 그는 1903년 부지사에 선출되었으나 1910년 주지사 선거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주립 정계에 있는 동안에 하딩은 영리한 정치적 전략가 해리 M. 도허티의 현신적인 우정을 얻었다. 몇년 후에 도허티는 하딩을 대통령이 되는 데 열심히 일하였다. 1912년 하딩은 공화당 국립 회의에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두 번째 임기 기간을 위하여 후보로 지명하는 데 선택되었다. 이 명예로 그는 자신에게 자신의 후보 지명보다 더 위대한 감동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1916년 국립 회의에서 하딩은 기조 연설을 하고 영구적인 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미국 상원[편집] 도허티와 부인에 의한 주장으로 하딩은 1914년 미국 상원 선거에 성공적으로 나갔다. 인기있고 정다운 그는 좋은 친교와 상원의 위신을 즐겼으나 자신의 6년 임기 동안에 아무런 주요 법안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는 출석 조사의 거의 절반을 놓쳤고, 입법을 공부하는 것보다 자신의 친구들을 위하여 구직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딩은 보통 공화당 지도자력고 함께 투표하였다. 그는 높은 관세에 호의를 가졌고 국제 연맹과 산업의 연방적 규칙을 반대하였다. 그는 금주법과 여성의 참정권을 위하여 투표하였으나 양쪽에 원인에 굳은 위탁이 없었다. 막후 협상실[편집] 1919년 초순에 어떤 신문들은 하딩을 타협적 대통령 후보로서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하딩은 상원이 "대통령 후보가 가능적으로 될 수 있는 것보다 나의 애호에 가장 멀리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딩 여사의 협조로 도허티는 그에게 자신의 선거 운동 담당자가 되는 데 설득하였다. 1920년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국립 회의에서 많은 대의원들은 일리노이주지사 프랭크 O. 로우던, 전 육군 참모 총장 레너드 우드 중장, 캘리포니아주의 상원 하이럼 W. 존슨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도허티의 출석은 장면들의 뒤에서 바빴다. 그의 환영인들은 모든 대의원들을 반기었고 그들에게 하딩을 지지하도록 몰아냈다. 투표의 첫날에 회의는 4개의 결정 선거 후에 정돈을 휴회하였다. 그날 밤에 권력있는 상원과 정치적 보스들의 작은 단체는 도허티가 "막후 협상실"이라 부른 블랙스톤 호텔에서 만났다. 새벽 2시 쯤에 그들은 하딩이 타협적인 후보라는 동의를 하였다. 대의원들은 다음날 10번째 결정 선거에서 하딩을 후보로 임명하였으며, 매사추세츠주지사 캘빈 쿨리지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였다. 민주당은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를 대통령 후보, 해군 보조 장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현관 앞의 선거 운동[편집] 1920년 선거 운동 때의 하딩 하딩은 매리언의 자택으로부터 현관 앞의 선거 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거기서 연설을 하고 방문한 대의원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비서들에게 악수가 자신이 가장 기쁘게 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딩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상원을 지내는 동안에 선출된 첫 대통령이 되었다. 그 일은 모든 여성이 투표할 수 있던 첫 선거였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공개되었다. 대통령 재임[편집] 자신 행정부의 시작으로부터 하딩은 의회와 자신의 내각에 지도력을 공급하는 데 의지하였다. 대부분의 공화당원들처럼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 속한 권력들을 차지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상으로 복귀[편집] 하딩은 국제 연맹에 정돈을 끝내는 데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언맹이 독일과 다른 중앙 권력들과 함께 계약이 포함되지 않은 평화 조약들을 맺었다. 의회는 국재적 입법에서 지도자력을 차지하였다. 1921년 처음으로 이민에 몫을 놓았고 세금을 줄였다. 1922년에 관세를 기록 신장으로 올렸다. 농업 장관 헨리 C. 월리스는 농업부와 농부들에게 이득을 준 진흥적 입법을 인정하였다. 당시 상업 장관 허버트 후버는 상업적인 비행과 라디오 방송을 위한 규정들을 제안하였고 철강업에서 12시간의 근로일을 끝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국무 장관 찰스 에반스 휴스의 지도력 아래 워싱턴 군축회의가 1921년과 1922년에 열렸다. 정부의 스캔들[편집] 하딩은 오하이오 갱이라 알려진 많은 친구들을 워싱턴 D. C.로 데려왔다. 그중에 어떤이들은 신뢰할 수 없었으나 그는 그들을 사회적으로 즐겼고 그들에게 중요한 직업들을 주었다. 부패의 경향이 곧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티포트 돔 스캔덜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정부 소유의 석유 예비금들을 개인적 회사들에 임대한 뇌물을 받아들인 내무 장관 앨버트 B. 폴을 연루시켰다. 1929년 그는 투옥되어 1931년에 징역살이를 하였다. 하딩이 법무 장관으로 임명한 해리 도허티는 1926년 에일리언 재산 관리인의 사무실의 자신의 행정을 근심시킨 책임들로 재판을 받았다. 2명의 배심원들은 판단에 동의하는 데 실패하여 도허티가 풀려났다. 도허티의 친구 제시 W. 스미스는 1923년 5월 자살하였다. 스미스가 법무부와 법률적 폭력인들 사이에 청산을 배치시킨 것이 드러났다. 재향군인국에서 기금의 오용이 중개인의 입법적 조언자 찰스 F. 크래머의 자살과 운영인 찰스 R. 포브스의 투옥의 결과를 가져왔다. 사망[편집] 하딩의 장례 행렬 농업 경제의 대공황이 1922년의 의회적 선거에서 공화당원들이 나쁜 실수를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23년 6월 하딩은 담화 순회를 만들어 자신의 행정부에서 신임을 재생하는 일을 찾았다. 부인과 큰 공무적 당과 함께 그는 국가를 가로질러 캐나다와 알래스카를 방문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 워싱턴으로부터 긴 전갈이 하딩의 통로를 도달하였다. 그 일은 석유 임대들의 상원적 투자에 관한 소식을 방해하고 말았다. 기자들은 우울해진 하딩이 자신의 친구들에 의하여 배신당할 때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냐에 그들에게 의문하였다. 자신의 기차가 시애틀을 지나갈 때 하딩은 식중독에 걸려 병이 들기 시작하였다. 여행은 의사들이 하딩은 폐렴에 걸렸다고 보고한 샌프란시스코에서 멈췄다. 하딩은 거기서 8월 2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58세. 그의 시체가 워싱턴으로 돌아오면서 수많은 애도자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유해는 매리언으로 옮겨졌으며, 플로렌스 여사도 1924년 11월 21일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암살설도 있었으나, 훗날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워런 G. 하딩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워런 G. 하딩 (영어) 워런 G. 하딩 - 미국 의회 인명 사전 Miller Center of Public Affairs, University of Virginia, Warren Gamaliel Harding (1865–1923) White House, 29. Warren G. Harding 1921–1923 Warren G. Harding's Inauguration March 4, 1921 Memorial U.S. postage stamp issued after Harding's death Warren G. Harding at C-SPAN's American Presidents: Life Portraits Booknotes interview with Robert Ferrell on The Strange Deaths of President Harding, January 12, 1997. Booknotes interview with John Dean on Warren G. Harding, March 14, 2004. 음성과 영화 링크[편집] "Return to Normalcy" Speech, May 14, 1920 1920 Presidential Campaign; "Front Porch"; Marion, Ohio. Wearing cowboy hat Playing golf during Jazz Age 주요 자료[편집] Inaugural Address First State of the Union Address of Warren Harding Second State of the Union Address of Warren Harding 제29대 미국 대통령 전 임우드로 윌슨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후 임캘빈 쿨리지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전거 통제 WorldCat VIAF: 40173269 LCCN: n50023001 ISNI: 0000 0000 9418 9326 GND: 11872035X SUDOC: 028318935 BNF: cb120179344 (데이터) NLA: 35170495 NKC: mzk2005306694 US Congress: H00019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워런_G._하딩&oldid=22957195" 분류: 워런 G. 하딩1865년 태어남1923년 죽음미국의 대통령오하이오주 출신 정치인워런 G. 하딩 행정부공화당 (미국)의 정치인1916년 미국 대통령 후보1920년 미국 대통령 후보오하이오주의 연방 상원의원네덜란드계 미국인웨일스계 미국인스코틀랜드계 미국인잉글랜드계 미국인공화당 (미국) 대통령 후보미국의 침례교도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Aragoné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Žemaitėška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islamaবাংলাBrezhoneg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CebuanoCorsu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ދިވެހިބަސް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客家語/Hak-kâ-ngî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RipoarischKurdîKernowekLatinaLingua Franca NovaLumbaartLietuviųLatviešuMalagasy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مازِرونیPlattdüütsch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KapampanganPolskiPiemontèisپنجابیPortuguêsRumantschRomânăРусскийKinyarwanda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吴语მარგალურიייִדיש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9일 (금) 07: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시장 (경제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장 (경제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시장(市場)이란 경제학적으로 권리, 용역, 제품(이들을 재화라 한다.)의 소유권의 교환을 촉진하기 위하여 경제학적인 또는 경제학적인 방향을 가진 인간의 상호작용으로 발전된 자연적인 사회 구조이다. 일상 생활에서 시장은 생활에 필요한 소매품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한 장소 (시장)를 말하지만,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거래의 목적물과 판매자, 구매자만 있으면 거래 장소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시장이라 표현한다. 시장에서 매매되는 재화를 상품이라 한다. 목차 1 기능 2 시장 종류 3 시장 실패 4 각주 기능[편집]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는 재화의 종류, 가격, 대금의 지급 조건등을 서로의 약속에 따라 정하고 매매한다. 아무리 초보적인 시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곳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는 선택된 곳이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다면 통상적인 의미의 경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고 단지 자급자족, 혹은 비(非)경제 속에 갇힌 생활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활동과 인간이 교환하는 잉여가 이 시장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렵게 시작되었으나 그 시장은 점차 커지고 또 많아지며, 그러다가 이 과정의 마지막에 가면 "시장이 일반화된 사회"(프랑스어: société à marché généralisé)로 된다. 이것은 그 과정의 마지막에 가서, 즉 뒤늦게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도 지방마다 달라서 결코 같은 때에 같은 방식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장의 발전에 관한 단순하고 단선적인 역사와 같은 것은 없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것, 고졸한 것, 근대적인 것, 대단히 근대적인 것 등이 혼재한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1] 시장 종류[편집] 뉴욕증권거래소 재화를 현실에서 직접 주고 받는 것이 아닌 추상적 공간에서 거래하는 시장이다. 금융 시장: 금융 재화를 거래의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다. 주식 시장: 주식을 거래하는 시장이다. 주식 뿐만 아니라 채권과 같은 유가 증권 및 주가 지수와 같은 추상적 재화도 함께 취급한다. 외환 시장: 여러 나라의 통화를 거래의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다. 환율과 같은 추상적 재화도 함께 취급한다. 시장 실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시장 실패입니다. 시장경제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체제이다. 하지만 시장이 스스로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시장의 실패라고 한다.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거나 원료 독점 등으로독과점이 나타나는 경우, 환경오염 등 외부 효과가 발생하는 경우, 국방·치안처럼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을 시장에 맡기기 힘든 공공재의 경우 등을 들 수 있다.또 좋은 투자계획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불완전으로 단지 중소기업이라는 이유로 대출을 받지 못하는 것도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러한 시장 실패가 나타나면 보통 정부가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 역시 시장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와 능력의 한계 등으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를 정부의 실패라고 한다. 예컨대 적자 기업이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고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연명하는 것은 정부의 실패이다. 각주[편집] ↑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Ⅱ-1 : 교환의 세계 上》. 주경철 옮김. 까치. 20쪽.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초판발행일자= (도움말) 전거 통제 GND: 4037621-7 NDL: 0057134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시장_(경제학)&oldid=22841928" 분류: 시장 (경제학)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ymar aru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PatoisქართულიKongoҚазақшаLatinaLëtzebuergeschLumbaartLingálaລາວ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NouormandOccitanਪੰਜਾਬੀ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Саха тыла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ChiShonaShqip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ไทยTagalogTok Pisin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inarayייִדיש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4일 (수) 14: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시장 (경제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장 (경제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시장(市場)이란 경제학적으로 권리, 용역, 제품(이들을 재화라 한다.)의 소유권의 교환을 촉진하기 위하여 경제학적인 또는 경제학적인 방향을 가진 인간의 상호작용으로 발전된 자연적인 사회 구조이다. 일상 생활에서 시장은 생활에 필요한 소매품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한 장소 (시장)를 말하지만,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거래의 목적물과 판매자, 구매자만 있으면 거래 장소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시장이라 표현한다. 시장에서 매매되는 재화를 상품이라 한다. 목차 1 기능 2 시장 종류 3 시장 실패 4 각주 기능[편집]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는 재화의 종류, 가격, 대금의 지급 조건등을 서로의 약속에 따라 정하고 매매한다. 아무리 초보적인 시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곳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는 선택된 곳이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다면 통상적인 의미의 경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고 단지 자급자족, 혹은 비(非)경제 속에 갇힌 생활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활동과 인간이 교환하는 잉여가 이 시장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렵게 시작되었으나 그 시장은 점차 커지고 또 많아지며, 그러다가 이 과정의 마지막에 가면 "시장이 일반화된 사회"(프랑스어: société à marché généralisé)로 된다. 이것은 그 과정의 마지막에 가서, 즉 뒤늦게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도 지방마다 달라서 결코 같은 때에 같은 방식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장의 발전에 관한 단순하고 단선적인 역사와 같은 것은 없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것, 고졸한 것, 근대적인 것, 대단히 근대적인 것 등이 혼재한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1] 시장 종류[편집] 뉴욕증권거래소 재화를 현실에서 직접 주고 받는 것이 아닌 추상적 공간에서 거래하는 시장이다. 금융 시장: 금융 재화를 거래의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다. 주식 시장: 주식을 거래하는 시장이다. 주식 뿐만 아니라 채권과 같은 유가 증권 및 주가 지수와 같은 추상적 재화도 함께 취급한다. 외환 시장: 여러 나라의 통화를 거래의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다. 환율과 같은 추상적 재화도 함께 취급한다. 시장 실패[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시장 실패입니다. 시장경제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체제이다. 하지만 시장이 스스로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시장의 실패라고 한다.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거나 원료 독점 등으로독과점이 나타나는 경우, 환경오염 등 외부 효과가 발생하는 경우, 국방·치안처럼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을 시장에 맡기기 힘든 공공재의 경우 등을 들 수 있다.또 좋은 투자계획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불완전으로 단지 중소기업이라는 이유로 대출을 받지 못하는 것도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러한 시장 실패가 나타나면 보통 정부가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 역시 시장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와 능력의 한계 등으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를 정부의 실패라고 한다. 예컨대 적자 기업이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고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연명하는 것은 정부의 실패이다. 각주[편집] ↑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Ⅱ-1 : 교환의 세계 上》. 주경철 옮김. 까치. 20쪽.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초판발행일자= (도움말) 전거 통제 GND: 4037621-7 NDL: 0057134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시장_(경제학)&oldid=22841928" 분류: 시장 (경제학)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ymar aru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PatoisქართულიKongoҚазақшаLatinaLëtzebuergeschLumbaartLingálaລາວ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मराठीBahasa Melayuनेपालीनेपाल भाषाNederlandsNorsk nynorskNorskNouormandOccitanਪੰਜਾਬੀPolski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Саха тыла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ChiShonaShqipСрпски / srpskiBasa SundaSvenskaไทยTagalogTok Pisin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inarayייִדיש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4일 (수) 14: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태균 (희극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태균 (희극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태균 金泰均 김태균 (오른쪽)출생 1972년 9월 16일(1972-09-16) (4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국적 대한민국직업 연극배우 희극배우 가수 가요 작사가 뮤지컬 배우 뮤지컬 제작자활동 기간 1993년 ~ 현재종교 개신교 학력 경희사이버대학교 호텔경영학과배우자 이지영자녀 김재원 (아들)소속사 빅바이러스웹사이트 김태균 - 인스타그램 김태균(金泰均, 1972년 9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개그맨, 가수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방송 활동 3.1 TV 3.2 라디오 3.3 영화 3.4 광고 4 가수 활동 4.1 컬트 삼총사 4.2 컬투 4.3 하이봐 5 가족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93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94년 7월 MBC 5기 공채 개그맨으로 정식 데뷔, 이후 정성한, 정찬우와 함께 컬트 삼총사이라는 이름으로 개그 뮤지컬 그룹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정성한이 탈퇴, 현재까지 컬투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2006년에는 여성 보컬 김미려를 영입, 하이봐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학력[편집] 서울동성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전문대학 방송연예학과 전문학사 경희사이버대학교 호텔경영학과 학사 방송 활동[편집] TV[편집] 1994년 : MBC 오늘은 좋은 날 1995년 : MBC 젊음의 다섯 마당 1998년 : KBS2 가족오락관 게스트 2003년 ~ 2010년 :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 2010년 : MBC 스페셜 도시의 유인원 - 내레이션 2010년 ~ 현재 : KBS2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진행자 2012년 : 지식콘서트 내일 진행자 2013년 : 컬투의 베란다쇼 진행자 2014년 : 컬투의 어처구니 진행자 2014년 : 채널A 압도적 7 진행자 2015년 ~ 현재 : SBS 영재 발굴단 진행자 015년 : MBC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냉혈인간 사이보그 2015년 : SBS 바람의 학교 - 내레이션 2016년 ~ 2018년 : TV조선 NEW 코리아 헌터 - 내레이션 라디오[편집] 2006년 5월 1일 ~ 현재 : SBS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 영화[편집] 2001년: 빨간 피터의 고백 2001년: 별주부 해로 2004년: 귀여워 ... 토크쇼 출연자 역 2011년: 원더풀 라디오 2011년: 체포왕 ... 목소리 출연 〔컬투〕 역 2012년: 몬스터 호텔 ... 미이라/할머니 그램린/콰지모도 한국어 더빙 2013년: 썬더와 마법저택 ... 잭/카를라/라산드라 한국어 더빙 2016년: 날, 보러와요 ... 라디오 목소리 〔컬투〕 역 2017년: 몬스터 패밀리 ... 드라큘라 한국어 더빙 광고[편집] 맛있는 두유 GT 진짜진짜 라면 가수 활동[편집] 컬트 삼총사[편집] 멤버 : 김태균, 정성한, 정찬우 1997년 1집 사랑은 야야야 1998년 2집 Over Girl 1999년 3집 어설픈 엘비스와 살찐 마돈나의 사랑 2000년 4집 Dancing Love 컬투[편집] 멤버 : 김태균, 정찬우 (정성한이 탈퇴) 2003년 1집 선수 입장 하이봐[편집] 멤버 : 김태균, 정찬우, 김미려 2006년 1집 생일 가족[편집] 처 : 이지영 (1976년 생) 장남 : 김범준 (2006년 8월 11일 생) 외부 링크[편집] 김태균 미니홈피 - 싸이월드 인스타그램 KBS 연예대상 《쇼/오락 MC부문 우수상》 2011년 2012년황신혜, 정찬우, 김태균 (컬투) 2013년 김승우, 김경란 - 이 글은 희극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한국 가수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태균_(희극인)&oldid=24402832" 분류: 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1993년 데뷔대한민국의 팝 가수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대한민국의 기업인비디오 자키대한민국의 작사가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뮤지컬 감독197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개신교도선덕고등학교 동문서울예술대학교 동문경희사이버대학교 동문숨은 분류: 희극 배우에 관한 토막글한국 가수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9일 (일) 20: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혜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혜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혜민스님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혜민법명 혜민출생 1973년 12월 12일(1973-12-12) (45세)대한민국 대전광역시국적 대한민국 → 미국 속명 라이언 봉석 주(영어: Ryan Bongsuk Joo)학력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종교학 학사하버드 대학교 종교학 석사프린스턴 대학교 종교학 박사직업 불교 승려, 작가 혜민(慧敏, 1973년 12월 12일 ~)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비구 승려이며, 속명은 라이언 봉석 주(영어: Ryan Bongsuk Joo)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햄프셔 칼리지에서 7년간 종교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뉴욕불광선원 부주지와 서울 마음치유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의 사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젊은날의 깨달음》이란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트위터리언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출간 7개월 만에 100만부를 돌파, 인문·교양 단행본 중 '최단기간 100만부 돌파' 기록을 세웠고 출간 3개월 만에 종합 베스트셀러(교보문고 기준) 1위에 올라 16주간 자리를 지켰다.[1] <시사저널>에 따르면 2012년 영향력 있는 종교인으로 불교계 인물로써는 법정스님과 성철스님, 법륜스님에 이어 9위를 차지하였다.[2] 훈계가 아닌 공감을 통해 삶의 문제에 다가가고, 추상적 의미를 구체적이고도 쉬운 화법으로 소통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매일 올라오는 카카오스토리의 "혜민스님의 따뜻한 응원' 은 1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독중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저서 4 방송활동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대전광역시 출생으로 서울에서 자라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공부하였다. 고등학생때부터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하던 중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읽고 종교와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후 대학생 시절부터 인도와 대한민국, 미국 등지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 등을 비롯한 많은 불교계 스승들을 만나 그들을 사사했다. 학문으로만 공부했던 깨달음을 몸소 체험해 보고 싶은 바램으로 2000년에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으면서 조계종 승려가 되었고 2008년 직지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봉암사, 안국선원, 플럼 빌리지, 다람살라 등지에서 수행 했으며 2015년 미국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어려운 이웃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하기 위해 전문 치유사 선생님들과 함께 마음치유학교를 만들었다. 가족을 먼저 보낸 분들, 암 진단을 받으신 분들, 장애인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들, 힘든 취업 준비생들, 유산의 아픔이 있으신 분들 등등을 위한 무료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고, 국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돕는 위스타트 나눔대사로 2012년부터 꾸준히 활동중이다.[3]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수녀인 이해인, 대한민국의 개신교 목회자인 조정민등의 비불교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깊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 간 이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현재 미국 국적 소지자인 걸로 밝혀졌다. 한국 남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대를 가야 하는데 병역문제 기피로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것인 지 논란이 되고 있다. 학력[편집]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종교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 박사 저서[편집]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수오서재, 2016 ISBN 979-11-95322-18-3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쌤앤파커스, 2012 ISBN 978-89-6570-060-9 《젊은 날의 깨달음》, 클리어마인드, 2010, ISBN 978-89-93293-13-5 방송활동[편집] 2012년 《지식나눔 콘서트 아이러브인 시즌2》 2016년 《김제동의 톡투유 - 걱정 말아요! 그대》 - 35회 게스트 2016년 《무한도전》 - 469회 게스트 2017년 《내 방을 여행하는 낯선 이를 위한 안내서》 2018년 《냉장고를 부탁해》 2019년 《어쩌다 어른》 각주[편집] ↑ 혜민 스님 책, 최단기간 100만부 돌파 조선일보 2012.08.28 ↑ 시사저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012.08.16 ↑ http://www.westart.or.kr/?tag=%ED%98%9C%EB%AF%BC%EC%8A%A4%EB%8B%98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마음치유학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혜민&oldid=24198103" 분류: 197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전광역시 출신프린스턴 대학교 동문하버드 대학교 동문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대한민국의 승려대한민국의 작가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미국의 승려미국의 작가미국의 불교 신자미국으로 귀화한 사람한국계 미국인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Nederlands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0: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헨트 대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헨트 대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헨트 대학교Universiteit Gent 표어 Audere Sapiens/ Dare to Think (라틴어)담대하게 생각하라 종류 공립설립 1817년총장 안느 드 파프학부생 수 41,000[1]교직원 수 9,000[1]국가 벨기에위치 헨트, 코르트레이크웹사이트 www.ugent.be [www.ghent.ac.kr] 헨트 대학교(네덜란드어: Universiteit Gent, 영어: Ghent University)는 벨기에 헨트에 위치한 공립 대학교이다. 1817년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국왕 빌럼 1세가 세웠으며 1830년에 벨기에 혁명으로 벨기에가 독립한 뒤로는 벨기에가 운영하고 있다. 플랑드르의 대형 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191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리스 마테를링크, 193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코르네유 하이만스, 제8대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자크 로게, 벨기에의 제47대 총리를 지낸 히 버르호프스타트, 벨기에의 제48대 총리를 지낸 이브 르테름, 지휘자 필리프 헤레베허 등을 배출했다. 또한 1943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헤베시 죄르지 등이 교수를 지낸 바 있다. 벨기에 헨트와 코르트레이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도 캠퍼스를 두고 있다. 상하이 교통 대학 세계대학평가(Academic Ranking of World Universities) 70위 (생명과학분야 37위), 타임즈 세계대학평가(Times Higher Education World University Rankings) 90위(생명과학분야 37위)에 위치하는 등 유럽을 선도하는 유수한 대학이자 연구기관 중 하나이다. 목차 1 역사 2 순위 3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인천 송도) 4 학교 동문 5 외부 링크 6 각주 역사[편집] 헨트 대학교는 1817년 10월 9일에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국왕 빌럼 1세가 네덜란드 연합왕국 남부의 교육과 학문을 중흥시키고자 세웠으며 190명의 학생과 16명의 교수가 있었고 초대 총장은 의사 출신의 J. C. 판 로테르담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인문학부와 법학부, 약학부, 이학부의 네 학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수업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벨기에 혁명 전에는 학생이 414명까지 늘었으나 혁명으로 인해 학생 숫자가 감소했다. 1835년에는 헨트 대학교가 현대 유기화학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교수 아우구스트 케쿨레가 벤젠의 분자 구조를 밝혀냈으며 케쿨레의 제자였던 아돌프 폰 바이어도 유기화학에 큰 공헌을 남겼다. 벨기에 혁명이 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라틴어 대신에 프랑스어로 수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 플랑드르의 정치인이었던 로더베이크 더 라엇은 네덜란드어로 수업을 할 것을 주장했고, 1906년에 첫 네덜란드어 강의가 열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점령국인 독일 제국이 이른바 플랑드르 정책(Flamenpolitik)을 펼쳤고, 헨트 대학교는 벨기에에서 최초로 네덜란드어 사용 대학교가 됐다. 1923년에는 장관 피에르 놀프가 헨트 대학교를 완전한 네덜란드어 대학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1930년에 완전한 네덜란드어 대학교가 됐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헨트 대학교를 독일식으로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많은 저항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들어서 벨기에 정부의 고등교육기관 민주화 정책에 따라 대학교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1953년에는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1969년에는 1만1천여 명 이상의 학생들이 있었다. 또한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는 수차례의 학생 운동이 벌어졌는데, 1969년에는 프랑스 5월 혁명의 영향으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1991년에는 플란데런어 공동체 정부의 자치권이 늘어남에 따라 대학교의 공식 이름을 헨트 주립 대학교(Rijksuniversiteit Gent)에서 오늘날의 이름인 헨트 대학교(Universiteit Gent)로 바꾸었다. 순위[편집] 헨트 대학교는 벨기에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고등교육기관으로 꾸준히 선정되고 있다. 2016년 상해교통대학 순위평가에서 85위에서 61위로 상승했으며, 이는 벨기에 소재 대학 중 가장 높은 순위일 뿐만 아니라 유럽 대학 가운데에서도 21위에 해당하는 순위를 기록하였다.[2] 2018년 영국 QS 세계대학순위에서 125위를 기록하였으며(2017년도 131위), 학과별로는 수의학과가 세계 20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으며, 심리학과 세계 34위, 체육계열학과 세계 41위, 농업산림계열학과 세계 46위, 의학생명과학과 세계 85위, 및 그 외에 간호학, 발달연구학, 지리학, 해부생리학, 역사학, 생명공학, 환경공학, 의약, 고고학, 법학 등 다수의 학과가 모두 세계 50-100위권을 기록하였다.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인천 송도)[편집] 헨트 대학교는 대한민국 산업통상자원부와 대한민국 교육부, 인천광역시 경제자유구역청이 함께 추진하는 해외 우수대학 국내 유치사업에 초빙돼 2014년 9월에 헨트 대학교 글로벌캠퍼스를 설립하였다.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는 한국에 진출한 최초의 유럽대학이며, 벨기에 본교의 분자생명공학과(Molecular Biotechnology), 환경공학과(Environmental Technology), 식품공학과(Food Technology) 학부과정을 개설하였다. 1~2학년은 공통기초과목으로 3개 학과의 핵심 과목들을 이수하며, 3~4학년에는 전공심화과목을 이수하게 된다. 이 중 4학년 과목은 벨기에 본교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본교와는 다르게 모든 수업은 현지 영어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졸업생에게는 벨기에 본교와 동일한 이공학 학사 학위가 수여된다.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의 모든 교수진은 벨기에 본교 파견교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로벌캠퍼스에 상주하여 강의 및 연구 활동을 수행을 하고 있다. 전공심화과목의 경우, 본교의 저명한 교수를 초빙하여 특별 지도 프로그램 운영하고 있다. 학교 동문[편집] 분류:헨트 대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헨트 대학교 헨트 대학교 - 공식 웹사이트 각주[편집] ↑ 가 나 Universiteit Gent-Feiten en cijfers ↑ ARWU World University Rankings 2016 vdeh 인천광역시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경인교육대학교 (인천캠퍼스) 인천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인천지역대학) 사립 가천대학교 (메디컬캠퍼스)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인천가톨릭대학교 인하대학교 청운대학교 (인천캠퍼스) 전문대학 경인여자대학교 인천재능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 한국폴리텍Ⅱ대학 (인천캠퍼스) 대학원대학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주안대학원대학교 외국계대학 겐트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 조지메이슨대학교 (송도캠퍼스)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이 글은 대학교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헨트_대학교&oldid=23884170" 분류: 헨트 대학교벨기에의 대학교공립 대학인천광역시의 대학교1817년 개교숨은 분류: 대학 정보 틀에서 그림크기 변수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네덜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대학교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КыргызчаLatinaNederlandsNorskPolskiپنجابیPortuguêsРусский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Walon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9일 (화) 16: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헨트 대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헨트 대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헨트 대학교Universiteit Gent 표어 Audere Sapiens/ Dare to Think (라틴어)담대하게 생각하라 종류 공립설립 1817년총장 안느 드 파프학부생 수 41,000[1]교직원 수 9,000[1]국가 벨기에위치 헨트, 코르트레이크웹사이트 www.ugent.be [www.ghent.ac.kr] 헨트 대학교(네덜란드어: Universiteit Gent, 영어: Ghent University)는 벨기에 헨트에 위치한 공립 대학교이다. 1817년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국왕 빌럼 1세가 세웠으며 1830년에 벨기에 혁명으로 벨기에가 독립한 뒤로는 벨기에가 운영하고 있다. 플랑드르의 대형 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191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리스 마테를링크, 193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코르네유 하이만스, 제8대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자크 로게, 벨기에의 제47대 총리를 지낸 히 버르호프스타트, 벨기에의 제48대 총리를 지낸 이브 르테름, 지휘자 필리프 헤레베허 등을 배출했다. 또한 1943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헤베시 죄르지 등이 교수를 지낸 바 있다. 벨기에 헨트와 코르트레이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도 캠퍼스를 두고 있다. 상하이 교통 대학 세계대학평가(Academic Ranking of World Universities) 70위 (생명과학분야 37위), 타임즈 세계대학평가(Times Higher Education World University Rankings) 90위(생명과학분야 37위)에 위치하는 등 유럽을 선도하는 유수한 대학이자 연구기관 중 하나이다. 목차 1 역사 2 순위 3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인천 송도) 4 학교 동문 5 외부 링크 6 각주 역사[편집] 헨트 대학교는 1817년 10월 9일에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국왕 빌럼 1세가 네덜란드 연합왕국 남부의 교육과 학문을 중흥시키고자 세웠으며 190명의 학생과 16명의 교수가 있었고 초대 총장은 의사 출신의 J. C. 판 로테르담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인문학부와 법학부, 약학부, 이학부의 네 학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수업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벨기에 혁명 전에는 학생이 414명까지 늘었으나 혁명으로 인해 학생 숫자가 감소했다. 1835년에는 헨트 대학교가 현대 유기화학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교수 아우구스트 케쿨레가 벤젠의 분자 구조를 밝혀냈으며 케쿨레의 제자였던 아돌프 폰 바이어도 유기화학에 큰 공헌을 남겼다. 벨기에 혁명이 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라틴어 대신에 프랑스어로 수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 플랑드르의 정치인이었던 로더베이크 더 라엇은 네덜란드어로 수업을 할 것을 주장했고, 1906년에 첫 네덜란드어 강의가 열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점령국인 독일 제국이 이른바 플랑드르 정책(Flamenpolitik)을 펼쳤고, 헨트 대학교는 벨기에에서 최초로 네덜란드어 사용 대학교가 됐다. 1923년에는 장관 피에르 놀프가 헨트 대학교를 완전한 네덜란드어 대학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1930년에 완전한 네덜란드어 대학교가 됐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헨트 대학교를 독일식으로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많은 저항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들어서 벨기에 정부의 고등교육기관 민주화 정책에 따라 대학교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1953년에는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1969년에는 1만1천여 명 이상의 학생들이 있었다. 또한 196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는 수차례의 학생 운동이 벌어졌는데, 1969년에는 프랑스 5월 혁명의 영향으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1991년에는 플란데런어 공동체 정부의 자치권이 늘어남에 따라 대학교의 공식 이름을 헨트 주립 대학교(Rijksuniversiteit Gent)에서 오늘날의 이름인 헨트 대학교(Universiteit Gent)로 바꾸었다. 순위[편집] 헨트 대학교는 벨기에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고등교육기관으로 꾸준히 선정되고 있다. 2016년 상해교통대학 순위평가에서 85위에서 61위로 상승했으며, 이는 벨기에 소재 대학 중 가장 높은 순위일 뿐만 아니라 유럽 대학 가운데에서도 21위에 해당하는 순위를 기록하였다.[2] 2018년 영국 QS 세계대학순위에서 125위를 기록하였으며(2017년도 131위), 학과별로는 수의학과가 세계 20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으며, 심리학과 세계 34위, 체육계열학과 세계 41위, 농업산림계열학과 세계 46위, 의학생명과학과 세계 85위, 및 그 외에 간호학, 발달연구학, 지리학, 해부생리학, 역사학, 생명공학, 환경공학, 의약, 고고학, 법학 등 다수의 학과가 모두 세계 50-100위권을 기록하였다.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인천 송도)[편집] 헨트 대학교는 대한민국 산업통상자원부와 대한민국 교육부, 인천광역시 경제자유구역청이 함께 추진하는 해외 우수대학 국내 유치사업에 초빙돼 2014년 9월에 헨트 대학교 글로벌캠퍼스를 설립하였다.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는 한국에 진출한 최초의 유럽대학이며, 벨기에 본교의 분자생명공학과(Molecular Biotechnology), 환경공학과(Environmental Technology), 식품공학과(Food Technology) 학부과정을 개설하였다. 1~2학년은 공통기초과목으로 3개 학과의 핵심 과목들을 이수하며, 3~4학년에는 전공심화과목을 이수하게 된다. 이 중 4학년 과목은 벨기에 본교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본교와는 다르게 모든 수업은 현지 영어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졸업생에게는 벨기에 본교와 동일한 이공학 학사 학위가 수여된다. 헨트 대학교 글로벌 캠퍼스의 모든 교수진은 벨기에 본교 파견교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로벌캠퍼스에 상주하여 강의 및 연구 활동을 수행을 하고 있다. 전공심화과목의 경우, 본교의 저명한 교수를 초빙하여 특별 지도 프로그램 운영하고 있다. 학교 동문[편집] 분류:헨트 대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헨트 대학교 헨트 대학교 - 공식 웹사이트 각주[편집] ↑ 가 나 Universiteit Gent-Feiten en cijfers ↑ ARWU World University Rankings 2016 vdeh 인천광역시의 대학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국립 경인교육대학교 (인천캠퍼스) 인천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인천지역대학) 사립 가천대학교 (메디컬캠퍼스)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인천가톨릭대학교 인하대학교 청운대학교 (인천캠퍼스) 전문대학 경인여자대학교 인천재능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 한국폴리텍Ⅱ대학 (인천캠퍼스) 대학원대학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주안대학원대학교 외국계대학 겐트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 조지메이슨대학교 (송도캠퍼스)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이 글은 대학교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헨트_대학교&oldid=23884170" 분류: 헨트 대학교벨기에의 대학교공립 대학인천광역시의 대학교1817년 개교숨은 분류: 대학 정보 틀에서 그림크기 변수를 사용하고 있는 문서네덜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대학교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КыргызчаLatinaNederlandsNorskPolskiپنجابیPortuguêsРусский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Walon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9일 (화) 16: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강이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강이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강이식 출생 미상사망 미상국적 고구려 별칭 진주 강씨 시조직업 수륙양군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은 진주 강씨의 시조이다. 족보에는 고구려 영양왕 때의 장군이라고 하나, 삼국사기, 구당서(舊唐書) 등 정사(正史)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목차 1 생애 2 유적 3 관련 작품 3.1 드라마 4 같이 보기 5 외부 링크 생애[편집] 수나라가 597년에 고구려에 무례한 국서를 보내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598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자 이에 맞서 강이식이 병마원수(兵馬元帥)가 되어 5만의 정병을 이끌고 출전하였다고 한다. 수나라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하다 거짓으로 패하였고, 이에 수 문제가 양양(楊諒)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임유관에서 출정하게 하고 주나후(周羅喉)에게 수군을 맡겼다. 주나후는 수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겠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강이식은 속임수를 간파하고 요하로 향하는 수군을 요격하여 격파하였다. 이후 성채를 지키면서 지구전을 펼쳐 수나라 군대는 양식이 떨어지고 장마로 인해 전염병이 돌아 퇴군하였다. 이에 강이식 장군이 이를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였다. 유적[편집] 묘소는 만주 심양현(선양)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 경남 진주시 상봉동 885에 봉산사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한다.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연개소문》(KBS, 2006년~2007년, 배우:김시원) 같이 보기[편집] 진주 강씨 (강이식) 임유관 전투 강민첨 외부 링크[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조선상고사/제10편 KBS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진주 비봉산 봉산사 vdeh삼국시대의 국왕을 제외한 주요 인물1 ~ 2세기고구려 괴유 호동 명림답부 을파소 백제 비류 신라 김알지 기타 공손탁 3 ~ 4세기고구려 밀우 유유 창조리 백제 왕인 목라근자 신라 석우로 기타 관구검 모용외 아도 5 ~ 6세기고구려 온달 백제 곤지 백가 신라 박제상 이차돈 이사부 사다함 거칠부 세종 기타 우륵 7세기고구려 을지문덕 연개소문 안시성주(양만춘) 연남생 검모잠 안승 백제 성충 계백 예식진 부여효 부여융 부여풍 복신 도침 흑치상지 신라 비담 알천 김유신 김인문 강수 원광 원효 기타 우중문 소정방 설인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강이식&oldid=24417400" 분류: 고구려의 군인한국의 장군여수전쟁 관련자진주 강씨생몰년 미상6세기 사람비주류 역사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2일 (수) 21: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황재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재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배우에 대해서는 황재원 (배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황재원 개인 정보로마자 표기 Hwang Jae-Won출생일 1981년 4월 13일(1981-04-13) (38세)출생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키 186cm포지션 센터백클럽 정보현 소속팀 대전 시티즌등번호 88청소년 클럽 기록1997-19992000-2003 강화고등학교아주대학교클럽 기록*연도 클럽 출전 (골)2004-20102010-20112012-201320152016-20172018- 포항 스틸러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성남 일화 충주 험멜대구 FC대전 시티즌 079 0(5)018 0(2)009 0(1)023 0(2)036 0(2)003 0(0)국가대표팀 기록‡2008-2011 대한민국 011 0(1)지도자 기록2018- 대전 시티즌 (플레잉 코치)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18년 2월 18일 기준이다.‡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11년 3월 25일 기준이다. 황재원(黃載元, 1981년 4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다. 목차 1 개요 2 학력 3 축구인 생활 3.1 선수 생활 3.2 국가 대표 생활 3.3 국가대표 A매치 골 4 그 외 5 경력 5.1 선수 경력 6 수상 6.1 개인 6.2 클럽 6.2.1 포항 스틸러스 7 참고 자료 8 각주 9 외부 링크 개요[편집]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출생하였다. 세트피스 기회에서 곧잘 공격에 가담해 골을 만들어 '골 넣는 수비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학력[편집] 강화중학교 졸업 강화고등학교 졸업 아주대학교 졸업 축구인 생활[편집] 선수 생활[편집] 2004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K리그에 데뷔했으나, 2년 동안 하우젠 컵을 포함하여 12경기를 뛰는데 그쳤다. 2006년에서야 리그에서 12경기를 뛰며 경기 출전횟수를 늘리기 시작하였고, 2007년 K리그 우승, 2008년 FA컵 우승과 2007년 FA컵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009년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1] 2009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2010년 7월, 20억원 이상의 이적료로 중동으로 이적하는 것이 유력하였으나 계약이 막판에 결렬되며 K리그 팀들이 영입전에 나섰고,[2] 결국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크고 작은 부상과 그로 인한 컨디션 저하로 1시즌 반 동안 리그 18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치며 기대에 못미치는 모습을 보이다 2012 시즌을 앞두고 조동건과 트레이드되어 성남으로 이적하였다. 성남 이적 이후 2011년 받은 무릎 수술의 여파로 7월까지 1군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나 8월 5일 포항과의 경기에 출전하며 성남에서의 데뷔전을 치렀다. 2013 시즌이 끝난 후, 2014년 2월 11일 부로, 성남과 계약을 해지하여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되었다. 2015 시즌을 앞두고 충주 험멜로 이적하였으며, 2016 시즌을 앞두고 대구 FC로 이적하였다. 2018년 플레잉 코치로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였다. 국가 대표 생활[편집] 2008년 1월 30일 칠레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으나, 2월 14일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하여 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3] 이후 한동안 선발되지 못하다가 2009년 3월 28일 이라크와의 친선경기에서 13개월만에 재발탁되었으나,[4] 그 경기에서 자책골을 넣어 위기를 자초하였고, 경기 후에 황재원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라이트에 눈이 가려져 공을 잘못 걷어냈다고 해명하였다.[5] 2011년 AFC 아시안컵 일본과의 4강전 경기에서 연장전 전반에 페널티킥을 허용했으나, 연장전 후반 15분 극적으로 골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과의 3위·4위전 전반전에 페널티킥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국가대표 A매치 골[편집] # 경기일 경기장소 상대팀 득점 결과 비고 1 2011/01/25 카타르 도하, 알가라파 경기장 일본 2 – 2 2 – 2 (0-3p) 2011년 AFC 아시안컵 그 외[편집] 2008년 2월 14일 전 미스코리아였던 김주연이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황재원이 낙태를 종용하였다는 글을 올렸고,[6] 이에 황재원은 2월 21일 기자회견을 갖고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하여 축구팬들에게 사과하며, 김주연과 둘이서 원만하게 해결했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7][8] 하지만 4월 14일 김주연 측은 황재원이 자신을 폭행하여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주장하였고,[9] 이에 황재원 측은 김주연 측에서 먼저 낙태를 종용했다고 반박하였다.[10][11] 결국 김주연은 4월 22일 낙태치상 및 상해치상 혐의로 황재원을 고소하였고,[12] 4월 25일 기자회견을 갖고 증거물인 '낙태 종용문자'를 공개하여,[13]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4][15] 이후 황재원에 무혐의 판결이 내려지며 사건은 종결되었다.[16] 경력[편집] 선수 경력[편집] 2004년 ~ 2010년 포항 스틸러스 2010년 ~ 2011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2년 ~ 2013년 성남 일화 천마 2015년 충주 험멜 2016년 ~ 2017년 대구 FC 2018년 ~ 대전 시티즌 수상[편집] 개인[편집] 2007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2016년 K리그 챌린지 베스트 11 선정 클럽[편집] 포항 스틸러스[편집] K리그 우승 1회 (2007년) K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FA컵 우승 1회 (2008년) FA컵 준우승 1회 (2007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2009년) A3 챔피언스컵 준우승 1회 (2005년) 참고 자료[편집] 황재원의 축구,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각주[편집] ↑ 포항, 2009 시즌 스틸러스 이끌 주장에 황재원 선임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수원 이적 추진' 황재원, 중동행 실패 후 국내 이적 선회”. 스포탈코리아. 2010년 7월 20일.  ↑ 수비수 황재원, 축구 대표팀에서 제외 ↑ 허정무, 이근호 선발...황재원 13개월 만에 재발탁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황재원, "자책골은 라이트 탓" ↑ ‘낙태 종용설’에 태극마크 반납 황재원 “돌아가 해결하겠다” ↑ “황재원, "공인으로 물의 일으켜 죄송"”. 2015년 4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22일에 확인함.  ↑ '미스코리아 구설수' 황재원 "둘이서 해결하게 지켜봐줬으면" ↑ 김주연 '낙태스캔들' 입열어 "황재원 때문에 아기 잃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황재원측 "낙태는 그쪽서 먼저 시키자고 했다" ↑ '미스코리아 구설수' 황재원-김주연, 사건 일지…황재원측 주장 ↑ 김주연, 22일 상해치상 혐의로 황재원 고소 ↑ 김주연 기자회견 "황재원이 보낸 '낙태 종용문자' 폭로"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김주연, 22일 황재원 고소로 법정공방 ↑ '낙태 스캔들' 황재원-김주연의 엇갈린 주장들 ! ↑ [홍재민의 축구話] 이천수 평가기준은 사생활이 아니라 축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황재원 K리그 기록 - 한국프로축구연맹 vdeh대전 시티즌 – 현재 명단 1 박주원 2 김예성 3 황재훈 4 이광준 5 윤경보 7 뚜르스노프 8 박수창 9 박인혁 10 윤용호 11 김승섭 12 전상훈 13 신학영 14 윤성한 15 조귀범 16 고준희 17 장주영 19 김세윤 20 안상현(C) 22 윤신영 23 김진영 24 권영호 25 문용휘 26 김지훈 27 키쭈(VC) 28 황재정 29 김민성 30 가도예프 31 김태양 32 유진석 33 유해성 34 황도연 38 강한빛 39 이호빈 40 안동민 41 공용훈 42 이정문 44 이지솔 66 박수일 77 서우민 88 황재원 99 안주형 감독: 박철 (대행) vdeh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011년 AFC 아시안컵 3위 1 정성룡 2 최효진 3 황재원 4 조용형 5 곽태휘 6 이용래 7 박지성 (주장) 8 윤빛가람 9 유병수 10 지동원 11 손흥민 12 이영표 13 구자철 14 이정수 15 홍정호 16 기성용 17 이청용 18 김보경 19 염기훈 20 김신욱 21 김용대 22 차두리 23 김진현 감독: 조광래 K리그 베스트 11vdeh2007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GK 김병지 DF 아디 마토 황재원 장학영 MF 따바레즈 이관우 김기동 김두현 FW 이근호 까보레 vdeh2009 K리그 베스트 11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GK 신화용 DF 김상식 김형일 황재원 최효진 MF 최태욱 기성용 김정우 에닝요 FW 이동국 데닐손 vdeh2016 K리그 챌린지 베스트 11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GK 조현우 DF 정우재 황재원 이한샘 정승용 MF 황인범 바그닝요 세징야 이현승 FW 포프 김동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황재원&oldid=24104545" 분류: 1981년 태어남인천광역시 출신강화군 출신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축구 선수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선수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축구 선수성남 FC의 축구 선수충주 험멜 FC의 축구 선수대구 FC의 축구 선수K리그1의 축구 선수K리그2의 축구 선수2011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강화고등학교 동문아주대학교 동문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K리그2 베스트 11 수상자대전 시티즌의 축구 선수대전 시티즌의 코칭스태프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6일 (금) 15: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승현 (배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승현 (배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승현출생 1981년 3월 18일(1981-03-18) (38세)대한민국 경기도 시흥직업 모델, 배우활동 기간 1997년 ~ 현재종교 개신교소속사 씨엔씨 엔터테인먼트 학력 경기대 다중매체영상학 학사부모 아버지:김도윤(김언중)(1948년생)어머니:백수아(백옥자)(1957년생)형제자매 동생:김승환(1982년생)자녀 딸 김수빈(2000년 출생)웹사이트 김승현 - 인스타그램 김승현(1981년 3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이다. 목차 1 이력 2 학력 3 연기 활동 3.1 드라마 3.2 영화 4 그 외 활동 4.1 광고 4.2 뮤지컬 4.3 연극 4.4 진행 5 수상 6 각주 7 외부 링크 이력[편집] 신장은 184cm이고 체중은 74kg인 그는 1997년 잡지 '렛츠'의 모델로 활동하게 되면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1][2][3]. 어려서부터 미술을 전공하였는데, 2009년과 2010년 KASF코리아아트썸머페스티벌에 전시작가로서 참여하였다[4]. 배우로서의 첫 데뷔는 1998년 SBS 청춘시트콤 《나 어때》이다[5]. 학력[편집]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 학사 (2009년) 연기 활동[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 제목 역할 비고 1997 MBC 남자 셋 여자 셋 1998 SBS 사랑해 사랑해 KBS2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SBS 나 어때 승현 SBS 흐린 날에 쓴 편지 1999 SBS 행진 김승현 2001 SBS 외출 모태호 2002 SBS 오렌지 2003 MBC 아르곤 박정환 하사 2004 KBS 꽃보다 아름다워 2005 MBC 자매바다 어린 우충근 2010 MBC 욕망의 불꽃 김영식 SBS Plus 키스 앤 더 시티 2011 KBS2 두근두근 달콤 최재영 채널A 해피앤드 101가지 부부이야기 - 아내의 주홍글씨 재혁 2013 tvN 환상거탑 강동민 2014 MBC 엄마의 정원 보영의 남편 2016 MBC 아름다운 당신 변진호 KBS1 임진왜란 1592 이선지 SBS 사랑은 방울방울 2017 KBS2 최고의 한방 매니저 2018 MBN 철수씨와 02 김동민 MBC 배드파파 김윤수 특별출연 2019 KBS2 하나뿐인 내편 수정의 오빠 특별출연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비고 1998 짱 뺀질이 1999 질주 승현 2000 여름이야기 강성제 2002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2003 주글래 살래 이소룡 2015 엄마의 남자 성식 2017 길 종광 2018 누에치던 방 정의현 한주 최형사 2019 질투의 역사 김홍 그 외 활동[편집] 광고[편집] 1998년 에리트 베이직 1999년 빙그레 하트유 1999년 LG유플러스 019 예스 서비스 2000년 모토로라 윙스 2018년 알리바바버거 2019년 서울우유 나 100% 뮤지컬[편집] 2004년 십이야 2006년 밴디트 연극[편집] 2011년 옆방 웬수 2013년 행복한 유령 진행[편집] 1999년 KBS2 《뮤직뱅크》 1999년 ~ 2000년 SBS 파워FM 《텐텐클럽》 2017년 ~ 현재 KBS2 《살림하는 남자들》 수상[편집] 2018 KBS 연예대상 버라이어티 우수상 《살림하는 남자들》 각주[편집] ↑ 김민정.김승현 “진영이 형 하늘에서 지켜보시죠…형 몫까지 연기 잘 할게요” Archived 2017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동아일보.2011년 3월 11일. ↑ 박아름. 김승현 “동안이라고? 나이 그거밖에 안먹었냐던데”(인터뷰). 뉴스엔. 2012년 2월 9일. ↑ 최보란. 김승현 "드라마서도, 인생서도 '반전'노려요"(인터뷰). 머니투데이. 2011년 3월 5일. ↑ 김승현 탤런트 . 매일경제. 2011년 7월 28일. ↑ 김민지. 김승현 “송혜교-조여정과 같은 시트콤 출연”(올드스쿨).뉴스엔.2015년 7월 6일. 외부 링크[편집] Daum 데이터 사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승현_(배우)&oldid=24489459" 분류: 198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모델20세기 대한민국 사람시흥시 출신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어린이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자유 연애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비디오 자키대한민국의 방송인대한민국의 미술가대한민국의 기업인1997년 데뷔경기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개신교도광산 김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09: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승현 (배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승현 (배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승현출생 1981년 3월 18일(1981-03-18) (38세)대한민국 경기도 시흥직업 모델, 배우활동 기간 1997년 ~ 현재종교 개신교소속사 씨엔씨 엔터테인먼트 학력 경기대 다중매체영상학 학사부모 아버지:김도윤(김언중)(1948년생)어머니:백수아(백옥자)(1957년생)형제자매 동생:김승환(1982년생)자녀 딸 김수빈(2000년 출생)웹사이트 김승현 - 인스타그램 김승현(1981년 3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이다. 목차 1 이력 2 학력 3 연기 활동 3.1 드라마 3.2 영화 4 그 외 활동 4.1 광고 4.2 뮤지컬 4.3 연극 4.4 진행 5 수상 6 각주 7 외부 링크 이력[편집] 신장은 184cm이고 체중은 74kg인 그는 1997년 잡지 '렛츠'의 모델로 활동하게 되면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1][2][3]. 어려서부터 미술을 전공하였는데, 2009년과 2010년 KASF코리아아트썸머페스티벌에 전시작가로서 참여하였다[4]. 배우로서의 첫 데뷔는 1998년 SBS 청춘시트콤 《나 어때》이다[5]. 학력[편집]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 학사 (2009년) 연기 활동[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 제목 역할 비고 1997 MBC 남자 셋 여자 셋 1998 SBS 사랑해 사랑해 KBS2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SBS 나 어때 승현 SBS 흐린 날에 쓴 편지 1999 SBS 행진 김승현 2001 SBS 외출 모태호 2002 SBS 오렌지 2003 MBC 아르곤 박정환 하사 2004 KBS 꽃보다 아름다워 2005 MBC 자매바다 어린 우충근 2010 MBC 욕망의 불꽃 김영식 SBS Plus 키스 앤 더 시티 2011 KBS2 두근두근 달콤 최재영 채널A 해피앤드 101가지 부부이야기 - 아내의 주홍글씨 재혁 2013 tvN 환상거탑 강동민 2014 MBC 엄마의 정원 보영의 남편 2016 MBC 아름다운 당신 변진호 KBS1 임진왜란 1592 이선지 SBS 사랑은 방울방울 2017 KBS2 최고의 한방 매니저 2018 MBN 철수씨와 02 김동민 MBC 배드파파 김윤수 특별출연 2019 KBS2 하나뿐인 내편 수정의 오빠 특별출연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비고 1998 짱 뺀질이 1999 질주 승현 2000 여름이야기 강성제 2002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2003 주글래 살래 이소룡 2015 엄마의 남자 성식 2017 길 종광 2018 누에치던 방 정의현 한주 최형사 2019 질투의 역사 김홍 그 외 활동[편집] 광고[편집] 1998년 에리트 베이직 1999년 빙그레 하트유 1999년 LG유플러스 019 예스 서비스 2000년 모토로라 윙스 2018년 알리바바버거 2019년 서울우유 나 100% 뮤지컬[편집] 2004년 십이야 2006년 밴디트 연극[편집] 2011년 옆방 웬수 2013년 행복한 유령 진행[편집] 1999년 KBS2 《뮤직뱅크》 1999년 ~ 2000년 SBS 파워FM 《텐텐클럽》 2017년 ~ 현재 KBS2 《살림하는 남자들》 수상[편집] 2018 KBS 연예대상 버라이어티 우수상 《살림하는 남자들》 각주[편집] ↑ 김민정.김승현 “진영이 형 하늘에서 지켜보시죠…형 몫까지 연기 잘 할게요” Archived 2017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동아일보.2011년 3월 11일. ↑ 박아름. 김승현 “동안이라고? 나이 그거밖에 안먹었냐던데”(인터뷰). 뉴스엔. 2012년 2월 9일. ↑ 최보란. 김승현 "드라마서도, 인생서도 '반전'노려요"(인터뷰). 머니투데이. 2011년 3월 5일. ↑ 김승현 탤런트 . 매일경제. 2011년 7월 28일. ↑ 김민지. 김승현 “송혜교-조여정과 같은 시트콤 출연”(올드스쿨).뉴스엔.2015년 7월 6일. 외부 링크[편집] Daum 데이터 사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승현_(배우)&oldid=24489459" 분류: 198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모델20세기 대한민국 사람시흥시 출신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어린이 배우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자유 연애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비디오 자키대한민국의 방송인대한민국의 미술가대한민국의 기업인1997년 데뷔경기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개신교도광산 김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27일 (목) 09:4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파이널 파이트 2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파이널 파이트 2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파이널 파이트 2ファイナルファイト2개발사 캡콤발행사 캡콤 시리즈 파이널 파이트플랫폼 슈퍼패미콤출시일 1993년 5월 22일장르 횡스크롤 액션게임이전작 파이널 파이트후속작 파이널 파이트 3 《파이널 파이트 2》(일본어: ファイナルファイト2, 영어: Final Fight 2)는 1993년 슈퍼패미콤으로 발매 된 파이널 파이트의 두 번째 시리즈이다. 2부터 아케이드 게임이 아닌 콘솔로만 발매되었다. 사용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해거, 겐류사이 마키, 카를로스 미야모토. 아케이드판의 전작과 비교하면 조작성은 비슷하지만 슈퍼패미콤판(코디,해거 선택),가이(가이,해거 선택)판과 비교하면 꽤 진보한 모습이다. 게다가 전작 슈퍼패미콤판에선 불가능했던 2인플레이가 가능해졌고 컨티뉴를 할 때도 스테이지 도중에서 플레이를 재개할 수 있다. (전작은 컨티뉴 할 경우 스테이지 처음으로 돌아간다.) 또 비밀커맨드(↓,↓,↑,↑→,←,→,←,L,R)를 입력하면 같은 캐릭터를 동시에 골라서 플레이가능. 목차 1 줄거리 2 사용가능한 캐릭터 3 신생 매드기어 3.1 졸개캐릭터 3.2 보스캐릭터 4 아이템 4.1 회복아이템 4.2 득점아이템 4.3 무기아이템 4.4 특수아이템 5 라운드 구성 6 참고 문헌 줄거리[편집] 전작에서 매드기어는 괴멸했지만 매드기어의 잔당이 해거일행에게 복수하기 위해 가이의 약혼자인 레나와 스승 겐류사이를 유괴하였고 해거, 마키, 카를로스가 이 두명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시대설정은 1993년(해거가 이 작품에서 50세라는 설정) 사용가능한 캐릭터[편집] 겐류사이 마키 겐류사이의 차녀로 레나의 동생. 전작의 가이와 비슷한 성능으로 삼단뛰기가 가능. 잘 쓰는 무기는 통파로 다른 캐릭터보다 빨리 휘두른다. 카를로스 미야모토 수수께끼의 일본계출신. 마이크 해거에게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해거와 같이 참전한다. 펀치나 던지기 성능은 마키와 비슷하다. 통상공격의 위력은 3명중 가장 낮지만 펀치나 날아차기의 리치가 길다. 코디같이 단검을 계속 쓸 수있다. 마이크 해거 펀치, 날아차기, 잡기 성능은 다른 캐릭터와 비슷하다. 위력은 약간 더 세며 전작의 가이, 코디와 비교하면 성능의 차가 거의 없다. 신생 매드기어[편집] 매드기어의 잔당이 모인 조직. 본거지는 일본으로 홍콩과 유럽에 지부를 두었다. 졸개캐릭터[편집] 믹, 마크 탱크탑과 쫄바지를 입은 졸개. 믹은 선글라스를 쓴 대머리에 파란 바지. 자신만만한 성격. 마크는 리젠트헤어로 노란 바지. 남자를 좋아하는 성격. 가장 약한 졸개캐릭터. 공격은 펀치와 킥뿐이다. 킥이 좀 더 세다. 숏, 잭 찣어진 탱크탑을 입은 졸개. 숏은 모히컨머리로 오렌지 탱크탑. 머리를 만지는 걸 싫어하며 밴드경험이 있다. 잭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녹색 탱크탑. 모자는 대머리를 감추기위해 쓰고 있다. 공격패턴은 펀치대신 어퍼컷을 쓰는 것 빼고는 믹, 마크와 비슷하다. 불, 엘리죠 상반신을 탈의한 졸개. 불은 모히컨머리를 하고 수염을 기른 회색 바지. 버려진 개를 줍는 다정한 성격. 엘리죠는 장발에 붉은 바지. 거칠한 머리가 자랑. 어머니를 공경한다. 공격패턴은 믹, 마크와 비슷하다. 엘리어스, 엘리엇 경봉을 가지고 조끼를 착용한 키 큰 사나이. 엘리어스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모자와 조끼는 보라색. 별점이 특기. 일주일에 가라오케에 몇번 정도 간다. 엘리엇은 반다나를 두르고 수염을 길렀다. 반다나와 조끼는 검은색. 밀매품창고의 열쇠를 맡고 있다. 술에 취하면 운다. 주된 공격방법은 경봉과 발차기로 플레이어가 뒤를 돌아보고 있으면 다가온다. 조 엘리엇의 다른 색으로 붉게 물든 옷을 입고 검은 피부를 하고 있다. 화염병을 던지고 도망간다. 체력이 극단적으로 적다. 아틀라스, 조니 근육질의 몸에 칼자국이 나있는 거한. 아틀라스는 올백으로 파란 바지. 안기는 버릇이 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 조니는 스킨헤드로 주황색 바지. 쉽게 욱하는 성격. 펀치공격을 가드한다. 잡기 공격이 강력하다. 마리, 엘리자 양손에 칼을 가진 여성. 체중은 모두 4?kg로 가려서 표기되어있다. 녹색 핫팬츠를 입은 은발이 마리. 매일 아침 조깅을 한다. 바퀴벌레를 싫어한다. 파란색 핫팬츠에 갈색머리가 엘리자. 금방 질려하는 성격. 현재 애인모집 중. 칼로 베는 공격과 높이 점프해 밟기 공격을 한다. 전작의 포이즌, 록시와 마찬가지로 일본국외판에선 레온과 로버트라는 남성으로 바뀌어서 나온다. (오렌지색옷에 검은 피부가 레온, 청자색 옷에 흰 피부가 로버트) 엘릭 발전기를 가지고 있는 작은 비만형 사나이. 비만인 것을 신경쓰며 몰래 에어로빅에 다니고 있다. 돌진은 펀치로 막을 수 없으며 피하기 어렵다. 감전공격이 강력하다. 앙드레Jr, 앙드레, G.앙드레 전작에도 등장하는 거한. 파란색 오버올이 앙드레Jr, 붉은색이 앙드레, 흰색이 G.앙드레. 이번 작에서 G.앙드레는 일반 졸개처럼 나온다. 공격패턴은 전작과 비슷하나 모두 위력이 낮아졌으며 펀치도 느리게 휘두른다. 보스캐릭터[편집] 웡웡 홍콩의 보스. 토박이 폭력단도 한 수 물러서는 변발의 거한. 펀치와 손에 든 식칼(일본국외판에선 가지고 있지 않다.)로 공격하거나 갑자기 화면 밖에서 엘보드롭을 가한다. 프레디 프랑스의 보스. 미해병대에서 쫓겨난 거한. 점핑니킥 이외에는 앙드레와 공격패턴이 비슷하다. 브라켄 네덜란드의 보스. 프랑켄슈타인같은 외모에 몹시 흉폭한 거한. 하지만 반대로 마더콤플렉스. 감옥문을 발로 차서 부수며 등장한다. 화면 밖에서 날아차기를 잘하며 공격력이 강하다. 필립 영국의 보스. 삐에로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겉으로는 세계를 유랑하는 서커스단의 단장이지만 비밀리에 불법상품을 밀매하고 있다. 손에 든 스틱으로 화물차의 벽을 부수며 등장하는데 이 스틱은 플레이어를 때릴 때만 사용한다. 체력은 다른 스테이지 보스와 비교하면 적은 편이다. 로렌토 이탈리아의 보스. SFC판에선 이번 작이 첫등장. 전작과 달리 평소에도 빠르게 이동한다. 이번 작에서만 이름 영문표기가 ROLENT로 되어있다. 레츠 신생 매드기어의 보스. 가부키 배우같은 모습을 한 거한. 몸을 가볍게 움직이며 펀치나 전신을 회전시켜서 발차기를 한다. 마무리를 하면 방의 장지문을 뚫고 초고속으로 날아간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동명 CPU와는 동명이인. 아이템[편집] 전작과 마찬가지로 장애물을 부수면 출현한다. 기둥같은 배경에 숨겨진 경우도 있다. 회복아이템[편집] 체력게이지가 풀이면 점수. 거의 100% 회복(10000점) - 바비큐 약 50% 회복(5000점) - 텐돈, 고기만두, 랍스타 약 25% 회복(3000점) - 빵, 도너츠, 시금치통조림 약 10% 회복(1000점) - 콜라, 우유, 초콜릿, 커피 득점아이템[편집] 플레이어의 몫이 최초 10만점, 이후 20만점마다 1몫씩 보너스. 10000점 - 다이아몬드, 금괴 5000점 - 달러꾸러미, 트로피 3000점 - 라디오카세트, 모기향 1000점 - 운동화, 렌치, 손목시계 무기아이템[편집] 나이프 - 전작과 마찬가지로 날리는 도구인데 위력은 약해졌다. 통파 - 공격력이 강하다. 전작의 일본도와 비교하면 리치가 짧아졌다. 각목 - 리치가 길다. 전작의 파이프와 비슷하다. 특수아이템[편집] 가이인형 - 보너스 1몫 추가 겐류사이인형 - 일정시간 무적 라운드 구성[편집] 라운드1 - 홍콩 (오후 0시) 거리-지하-항구(보스)로 진행. 거리배경에 춘리가 밥을 먹고 있다. 라운드2 - 프랑스 (오후 5시) 카페 앞-고속도로-공항통로-공항 격납고 앞(보스)으로 진행. 보스전 배경에서 가일같은 인물이 있다. 보너스스테이지1 차 부수기. 부숴야하는 포인트는 전작과 같다. 이 스테이지에는 통파와 각목이 놓여져있다. 라운드3 - 네덜란드 (오후 4시) 지뢰가 있는 황무지-폐옥1층-폐옥2층-폐옥이 있는 황무지-하수도 터(보스)로 진행. 라운드4 - 영국 (오후 8시) 화물열차 부근 선로 앞-화물열차의 지붕-화물차의 차량 앞(보스)로 진행. 보너스스테이지2 드럼통 부수기. 드럼통에서 불이 솓구치므로 불에 맞지 않게 타이밍을 맞춰서 부순다. 라운드5 - 이탈리아 (오전 12시) 물가-관광선-엘리베이터-빌딩옥상(보스)로 진행. 엘리베이터는 전작의 공업지대 스테이지와 비슷하다. 라운드6 - 일본 (오후 11시 30분) 레츠의 저택 앞-정원-저택1층-저택2층-레츠의 방(보스)로 진행 참고 문헌[편집] ALL ABOUT 캡콤대전격투게임 1987-200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파이널_파이트_2&oldid=21478063" 분류: 캡콤 게임1993년 비디오 게임슈퍼 패미컴 게임버추얼 콘솔 게임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吴语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5월 30일 (수) 13: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2017년 바르셀로나 테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17년 바르셀로나 테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테러가 발생한 람블라스 거리 (2011년) 2017년 8월 17일 (현지 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캄브릴스에서 차량 추돌 테러가 발생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테러만 13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쳤으며, 이후 사망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목차 1 테러 발생 1.1 알카나르 폭발 1.2 바르셀로나 테러 1.3 캄브릴스 테러 2 용의자 3 여파 3.1 대응 3.2 반응 4 각주 테러 발생[편집] 알카나르 폭발[편집] 17일 (현지 시각) 카탈루냐 정부는 바르셀로나 인근 도시인 알카나르의 한 주택에서 폭발이 일어나 최소 1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당국은 테러범들이 이곳에서 '폭발물 실험'을 한 결과 폭발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1] 바르셀로나 테러[편집] 2017년 8월 17일 오후 5시 (현지 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의 람블라스 거리와 카탈루냐 광장이 만나는 지점에서 흰색 밴 차량이 갑자기 보도에 있던 시민들을 향해 돌진했다.[2][3] 차량은 약 500m를 지그재그 모양으로 질주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덮쳤으며,[3] 운전자는 차가 멈춰선 직후 빠져나와 도주하였다.[3] 차량 테러로 현재까지 13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되었다.[3]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호아킴 포른 내무장관은 "현재 확인된 사망자는 1명이지만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부상자 30여 명 중에 10여 명은 중상인 것으로 집계되었다.[2] 캄브릴스 테러[편집] 18일 오전 1시 30분 (현지 시각)에는 바르셀로나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도시 캄브릴스에서도 차량 돌진 테러가 발생하였다.[1] <엘 파이스>에 따르면 관광 리조트가 밀집한 캄브릴스 대로에서 무장 괴한들이 행인들을 향해 아우디 A3 승용차를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1] 이 테러로 인해 6명이 부상당했는데, 그 중 2명은 중상자로 집계되었고 경찰 1명도 포함되었다.[1] 테러 발생 직후 경찰은 진압에 나서 용의자 4명을 사살하고 1명은 부상당한 상태로 생포하였으나, 끝내 숨지고 말았다.[1] 목격자에 따르면 테러 용의자들은 사건 당시 폭탄을 벨트로 착용한 것으로 보였다고 알려졌으며, 경찰도 폭탄 처리반이 용의자 시신에서 벨트 착용 여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1] 용의자[편집] 바르셀로나 테러의 용의자는 총 두 명으로 조사되었다.[3] 한 명은 모로코 국적의 28세 남성으로, 이름은 드리스 엘와크비르이다. 드리스는 테러에 사용된 차량을 렌트했다가 경찰의 추적으로 체포됐다.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 된 용의자로, 경찰은 가정폭력 전과는 있으나 지하드 활동 전력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3] 본인은 자신의 신분서류가 도용당했다며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3] 또 다른 한 명은 스페인령 멜리야 출신으로, 전날 밤에는 바르셀로나 교외의 주택에서 폭발 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 한편 무장단체 IS 는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IS는 산하 선전 매체인 아마크 통신을 통해 "IS의 전사들"이 이번 공격을 자행했다고 밝혔다.[3] 여파[편집] 대응[편집] 카탈루냐 경찰청은 트위터를 통해 람블라스 거리 인근에 접근하지 말라는 통지를 내렸다.[2] 또 현장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해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인근 상점의 일시 폐쇄를 명령하는 한편 근처의 지하철 출입구도 통제하였다.[2] 경찰은 이번 사건을 테러 공격으로 규정하고, 용의자가 체포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현장 주변에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테러 경계작전을 펼쳤다.[2] 반응[편집] 테러 직후 각국 정상들과 시장들이 애도를 표명하고 반테러 노력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테러 공격을 규탄하며 도움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돕겠다"고 트위터로 밝혔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부 장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사디크 칸 런던 시장 파올로 젠틸로니 이탈리아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크리스티앙 에스트로시 니스 시장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김혜지 (2017년 8월 18일). “공포로 물든 스페인…'연쇄 테러'에 13명 사망(종합)”. 《뉴스1》 (서울). 2017년 8월 22일에 보존된 문서.  ↑ 가 나 다 라 마 김용래 (2017년 8월 18일). “바르셀로나 차량 테러로 1명 숨지고 30여명 다쳐…용의자 도주(종합2보)”. 《연합뉴스》 (파리). 2017년 8월 22일에 보존된 문서.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손고운 (2017년 8월 18일). “지그재그로 행인 향해 돌진… 아비규환된 카탈루냐 광장”. 《문화일보》. 2017년 8월 22일에 보존된 문서.  ↑ 옥철; 황정우; 현윤경 (2017년 8월 18일). “바르셀로나 희생자 애도 물결…세계 정상들 "테러에 맞설 것"”. 《연합뉴스》 (로스엔젤레스 런던 로마). 2017년 8월 22일에 보존된 문서.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2017년 바르셀로나 테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2017년_바르셀로나_테러&oldid=21792888" 분류: 2017년 스페인2017년 테러 사건2017년 8월카탈루냐의 역사바르셀로나의 역사스페인의 테러 사건자동차에 의한 테러 사건8월 17일이슬람교의 테러 사건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LatinaLumbaartLietuvių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7월 17일 (화) 10: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영양 천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양 천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영양 천씨 (潁陽 千氏) 관향 중화인민공화국 산둥 성 타이안 시 닝양 현 시조 천암 (千巖) 주요 중시조 천만리 (千萬里) 주요 집성촌 중화인민공화국 허난 성 우즈 현대전광역시 유성구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죽본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합금리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부암리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주요 인물 천광록, 천세헌, 천병규, 천세기, 천경자, 천관우, 천영성, 천상병, 천성순, 천명기, 천용택, 천경송, 천영세, 천신일, 천장호, 천영우, 천정배, 천성관, 천홍욱, 천호진, 천호선, 천해성, 천경훈, 천명훈, 천정명, 천수연, 천우희, 천영기, 천지혜, 천사랑 인구(2015년) 100,014명 영양천씨 중앙종친회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중국에서 유래한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천암(千巖)은 명나라 도총장(都總將), 판도승상(版圖丞相)을 역임하였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명나라 영량사 겸 총독장(領糧使兼摠督將)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지냈으며,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었다.[1] 목차 1 역사 2 기원 3 본관 4 분파 5 인물 6 집성촌 7 항렬자 8 함께 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역사[편집] 『영양천씨매헌공가승보(潁陽千氏梅軒公家乘譜)』에 의하면 시조 천암(千巖)은 중국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도총장(都總將), 판도승상(版圖丞相)을 역임하였다. 후손들이 영양(潁陽)에 세거하였으므로 관향으로 삼았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자가 원지(遠之), 호가 사암(思庵), 시호가 충장공(忠莊公)이다. 천만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두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와 조선에 건너와 평양(平壤), 곽산(郭山), 동래(東萊)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마귀(麻貴) 제독을 따라 중사마(中司馬)로서 울산(蔚山)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후 두 아들과 조선에 귀화하였다.[2]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천 장군의 묘가 있으며,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 호암서원에서 음력 8월 1일에 향사한다. 조선 선조는 천만리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여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하였으며, 장남 천상(千祥)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차남 천희(千禧)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으로 승진시켜 자손에게 세록을 전수받게 하였다.[3] 기원[편집] 천(千; qiān)씨의 기원은 쓰촨(四川)성 일대에 살았던 고대 소수민족인 저(氐)족이다. 저족 일부는 중국 삼국(위·촉·오)시대부터 천씨 성을 쓰기 시작했고, 산시(陝西)성을 거쳐 허난성 일대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허난 지역 신문인 동방금보(東方今報)는 2014년 3월 7일 허난성 우즈(武陟) 현에 있는 천씨 집성촌을 취재하고 “중국 천씨와 한국 천씨는 조상이 같다”고 보도했다.[4] 매년 5월 한국의 영양 천씨 종친회원들은 중국 허난성 덩펑 시(登封市)에 있는 가문 사당을 방문하여 중국 천씨 종친회와 함께 제를 드리고 있다. 본관[편집] 영양(潁陽)은 중국 하남성 등봉현 영양진이다. 분파[편집] 좌윤공파(左尹公派) 천상(千祥) 처사공파(處士公派) 선전공파(宣傳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송암공파(松庵公派) 찰방공파(察訪公派) 천희(千禧) 영장공파(營將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감역공파(監役公派) 인물[편집] 조선시대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선전관을 역임했던 천경주(耕疇)와 호조정랑을 지낸 천태주(泰疇) 형제가 유명했으며, 찰방 천희(禧)의 아들 천거주와 천자주는 영월군수와 이원현감을 각각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그외 통훈대부로 선공감역을 지낸 천장주(長疇), 광주부윤 천찬명(贊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천순명(順銘), 군자감정 천인명(仁銘), 칠원현감 천경필(慶弼), 형조참의 천우열(宇烈), 훈련원 판관을 지냈던 천해, 한성부좌윤 천록, 예조참판 천용서(龍瑞), 동지중추부사 천인운(仁雲) 등이 가통을 이었다. 천위영(緯永)과 천후근(厚根)·천하영(夏永) 등은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문과 급제자로는 철종 때의 천일성(千馹成), 고종 때의 천광록(千光祿)이 있다. 천세필(千世弼) : 7세손. 1760년(영조 36년) 별군직(別軍職), 1777년(정조 원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칠원현감(柒原縣監)을 거쳐 1796년 오위장(五衛將)에 올랐다. 천수경(千壽慶, ? ∼ 1818년) : 조선 후기의 시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창단. 천광록(千光祿, 1851년 ∼ 1931년) : 1892년(고종 29)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장원(壯元)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으며, 1893년(고종 30) 종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천세헌(千世憲) : 조선 고종 때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역임한 후 도미하여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고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천수점(千手漸) :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우규(姜宇奎) 등과 노인단(老人團 :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을 조직 활약 천세광(千世光) : 목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수감, 대한성결교회 총회의장, 서울신학대학 이사 천병규(千炳圭) : 제10대 국회의원, 제14대 재무부 장관 천시권(千時權) : 제11대 경북대 총장 천세기(千世基) : 제3·5대 국회의원, 제10대 교통부 정무차관 천명기(千命基) : 제8·9·10대 국회의원, 제19대 보건사회부 장관 천관우(千寬宇) : 언론인, 역사학자 천경자(千鏡子) : 화가, 대학 교수 천상병(千祥炳) : 시인, 평론가 천성순(千性淳) : 제7대 KAIST 원장 천용택(千容宅) : 제34대 국방부 장관. 15대~16대 국회의원. 제23대 국가정보원 원장 천경송(千慶松) : 대법관 천영우(千英宇) : 외교통상부 제2차관, 이명박 정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 천정배(千正培) : 제57대 법무부 장관, 15대~19대 국회의원 천성관(千成寬) : 제51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5] 천신일 : 세중 회장,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 천영세(千永世) : 제17대 국회의원 천홍욱(千泓昱, 1960년 ~ ) : 제27대 관세청장 천호선(千皓宣) : 제16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 천해성(千海成, 1964년 ~ ) : 제24대 통일부 차관 천호진 : 배우 천정명 : 배우 천명훈 : 가수 천수연 : 배우 송지효(개명 전 천성임) 천우희 : 배우 천유진 : 방송작가 집성촌[편집] 중국 허난성 우즈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 삼정리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죽본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합금리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부암리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항렬자[편집]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광(光) 기(冀)익(翼)우(愚) 口봉(鳳)口윤(胤)口욱(旭) 병(昞)병(柄) 口우(宇)口녕(寧)口필(弼) 성(成)세(歲)기(璣) 口희(熙)口범(範) 용(庸)강(康) 口재(宰)口벽(璧) 정(廷)임(任) 口규(揆)口임(任) 홍(洪)임(任) 口림(林)口식(植) 영(煐)형(炯) 口균(均)口기(基) 함께 보기[편집] 한국의 외래 귀화 성씨 각주[편집] ↑ 《조선왕조실록》 고종 41권, 38년 9월 30일(양력) 2번째기사 ↑ 천만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 영남일보, 2015-01-29 ↑ “'별그대' 천송이 千씨는 중국 허난성이 뿌리”. 조선일보. 2014년 3월 8일.  ↑ “영양 천(千)씨 종친회 임원명단 살펴보니…”. 조선일보. 2009년 7월 4일.  외부 링크[편집] 영양천씨 중앙종친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영양_천씨&oldid=24434705" 분류: 영양 천씨천씨본관별 성씨한국 외 소재 성씨산둥성 출신타이안시중국계 한국인의 성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6일 (일) 03: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베르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르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베르겐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베르겐 시 Bergen 시기 휘장 베르겐북위 60° 23′ 22″ 동경 05° 19′ 48″ / 북위 60.38944° 동경 5.33000°  / 60.38944; 5.33000좌표: 북위 60° 23′ 22″ 동경 05° 19′ 48″ / 북위 60.38944° 동경 5.33000°  / 60.38944; 5.33000 행정 나라 노르웨이 행정구역 호르달란주 역사 설립 1070년 경 인구 인구 278,121 명 (2016년) 지리 면적 465.56 km2 기타 시간대 CET (UTC+1)CEST (UTC+2) 우편번호 5003–5268 (P.O.box 5802-5899) 지역번호 (+47) 5556 https://www.bergen.kommune.no/ 베르겐 베르겐 역사지구 베르겐(노르웨이어: Bergen)은 노르웨이 서남부, 호르달란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25만(2008). 노르웨이 서남부 해안의 깊숙이 들어간 피오르에 위치한다. 수도 오슬로에서 서북쪽으로 400km 떨어져 있으며, 노르웨이에서 오슬로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이다. 북위 60° 22′의 고위도에 위치하나,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철에도 평균기온이 영상이며, 지형적인 영향으로 연평균 강수량이 2,000mm 이상으로 유럽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 중 하나이다. 반면 눈은 노르웨이에서는 적게 오는 곳에 속한다. 목차 1 역사 2 문화 3 기후 4 자매 도시 5 각주 역사[편집] 시의 역사는 1070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3세 국왕이 건설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 후 성곽이 생기면서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12∼13세기에는 이 나라 수도였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한 후 영국 선원들이 들어오면서 무역항으로 중요해졌다. 중세(中世)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에서는 최대의 항구이며 무역의 중심이었다. 또한 이때 한자 동맹에 가입하여 스칸디나비아의 서해안의 무역을 지배하며 수백년 동안 크게 번창하였다. 19세기까지도 노르웨이의 최대 도시였다가 크리스티아나(현재의 오슬로)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문화[편집] 19세기에는 이 곳을 강타한 대화재와 크리스티아나의 발전으로 다소 침체했으나, 그 후 다시 서해안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대화재를 계기로 목재건축은 금지하고 있으나, 한자 동맹 시절의 중심가에는 독특한 목재 건물들이 남아 있으며,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피오르식 해안관광의 출발점인 베르겐은 화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각종 미술관·박물관이 있는 문화도시이다.[1] 한자 박물관(Hanseatisk Museum)은 베르겐 시가 항구도시로서, 예부터 어업과 해외무역이 발달,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세하여 더욱 발전을 거듭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시장 북쪽 브리겐 거리에 위치하며, 1702년 건립된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2] 마리아 교회(Mariakirken)는 브리겐 거리 북서쪽에 위치한 베르겐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바로크풍의 선교단이 있다.[3] 트롤하우겐(Troldhaugen)은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집이다. 트롤은 보는 사람에 따라 선인과 악인으로 변하는 숲속의 요정으로 트롤하우겐은 트롤이 살고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그리그가 사용했던 피아노, 악보,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4] 베르겐 수족관(Bergen Aquarium)은 노르네스 반도 서쪽 끝에 있는 노르웨이 최대의 수족관으로, 9개의 큰 수족관과 42개의 작은 수족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표범, 해수어, 펭귄, 바다새를 볼 수 있다.[5] 판토프트 통널 교회(Fantoft Stavkirke)는 베르겐 교외의 판토프트(Fantoft)에 있는 독특한 통널 교회이다. 1150년에 처음 송네피오르드에 세워졌던 것인데, 보존을 위해 1883년 이곳으로 이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7년 6월 6일 재건축했다. 지붕이 5층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6] 기후[편집] 베르겐, 평균 온도와 강수량 1981~2010년, 햇빛 1961-1990년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16.9 (62.4) 13.2 (55.8) 17.2 (63) 22.5 (72.5) 27.6 (81.7) 29.9 (85.8) 31.8 (89.2) 31.0 (87.8) 27.1 (80.8) 23.1 (73.6) 17.9 (64.2) 13.9 (57) 31.8 (89.2) 평균최고기온 °C (°F) 4.3 (39.7) 4.5 (40.1) 6.5 (43.7) 10.4 (50.7) 14.7 (58.5) 17.3 (63.1) 19.1 (66.4) 18.6 (65.5) 15.4 (59.7) 11.4 (52.5) 7.3 (45.1) 4.8 (40.6) 11.2 (52.2) 일평균기온 °C (°F) 2.2 (36) 2.2 (36) 3.8 (38.8) 7.0 (44.6) 10.9 (51.6) 13.6 (56.5) 15.6 (60.1) 15.4 (59.7) 12.4 (54.3) 8.8 (47.8) 5.1 (41.2) 2.7 (36.9) 8.3 (46.9) 평균최저기온 °C (°F) 0.1 (32.2) −0.2 (31.6) 1.1 (34) 3.6 (38.5) 7.0 (44.6) 9.9 (49.8) 12.2 (54) 12.1 (53.8) 9.4 (48.9) 6.2 (43.2) 2.8 (37) 0.6 (33.1) 5.4 (41.7) 최저기온기록 °C (°F) −16.3 (2.7) −13.4 (7.9) −11.3 (11.7) −5.5 (22.1) −0.1 (31.8) 0.8 (33.4) 2.5 (36.5) 2.5 (36.5) 0.0 (32) −5.5 (22.1) −10.0 (14) −13.0 (8.6) −16.3 (2.7) 평균 강수량 mm (인치) 252.7 (9.95) 197.8 (7.79) 200.3 (7.89) 133.7 (5.26) 104.5 (4.11) 119.4 (4.7) 151.1 (5.95) 198.4 (7.81) 254.9 (10.04) 270.8 (10.66) 261.4 (10.29) 267.8 (10.54) 2,412.9 (95) 평균강우일수 (≥ 1 mm) 19.1 16.4 17.3 14.0 12.8 12.7 14.5 15.9 17.0 19.1 18.1 18.5 195.4 평균 상대 습도 (%) 78 76 73 72 72 76 77 78 79 79 78 79 76 평균 월간 일조시간 19 56 94 147 186 189 167 144 86 60 27 12 1,187 출처 #1: Météo Climat[7] NOAA (humidity and sunshine)[8] 출처 #2: Voodoo Skies for extremes[9] 자매 도시[편집] 에리트레아 아스마라 스웨덴 예테보리 독일 뤼베크 영국 뉴캐슬어폰타인 캐나다 퀘벡 독일 로스토크 미국 시애틀 핀란드 투르쿠 덴마크 오르후스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베르겐〉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자 박물관〉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마리아 교회〉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그리그의 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베르겐 수족관〉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스타브 교회〉 ↑ “Météo climat stats – Bergen”. Météo Climat. 2017년 3월 20일에 확인함.  ↑ “BERGEN - FLORIDA Climate Normals: 1961-1990”.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2014년 3월 16일에 확인함.  ↑ “Archived copy”. 1 November 2016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6 September 2015에 확인함.  vdeh유럽 문화 수도 1985 아테네 1986 피렌체 1987 암스테르담 1988 서베를린 1989 파리 1990 글래스고 1991 더블린 1992 마드리드 1993 안트베르펜 1994 리스본 1995 룩셈부르크 1996 코펜하겐 1997 테살로니키 1998 스톡홀름 1999 바이마르 2000 레이캬비크, 베르겐, 볼로냐, 브뤼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아비뇽, 크라쿠프, 프라하, 헬싱키 2001 로테르담, 포르투 2002 브뤼허, 살라망카 2003 그라츠 2004 릴, 제노바 2005 코크 2006 파트라 2007 룩셈부르크, 시비우 2008 리버풀, 스타방에르 2009 린츠, 빌뉴스 2010 에센, 이스탄불, 페치 2011 탈린, 투르쿠 2012 기마랑이스, 마리보르 2013 마르세유, 코시체 2014 리가, 우메오 2015 몽스, 플젠 2016 브로츠와프, 산세바스티안 2017 오르후스, 파포스 2018 레이우아르던, 발레타 2019 마테라, 플로브디프 2020 리예카, 골웨이 2021 티미쇼아라, 엘레프시나, 노비사드 2022 카우나스, 에슈쉬르알제트 2023 베스프렘 vdeh북유럽 50대 대도시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올란드 제도 페로 제도 그린란드 1. 스톡홀름 1,372,565 2. 코펜하겐 1,263,698 3. 헬싱키 1,214,210 4. 오슬로 958,378 5. 예테보리 549,839 6. 탐페레 325,025 7. 말뫼 280,415 8. 오르후스 261,570 9. 투르쿠 260,367 10. 베르겐 250,420 11. 스타방에르 210,874 12. 레이캬비크 209,510 13. 오울루 193,817 14. 트론헤임 175,068 15. 오덴세 173,814 16. 웁살라 140,454 17. 올보르 132,578 18. 이위배스퀼래 120,306 19. 라흐티 117,424 20. 드람멘 113,534 21. 베스테로스 110,877 22. 프레드릭스타드-사릅스보르그 108,636 23. 외레브로 107,038 24. 린셰핑 104,232 25. 헬싱보리 97,122 26. 포르스그룬-시엔 91,737 27. 옌셰핑 89,396 28. 노르셰핑 87,247 29. 쿠오피오 86,034 30. 포리 84,509 31. 룬드 82,800 32. 우메오 79,594 33. 에스비에르 72,060 34. 예블레 71,033 35. 바사 66,911 36. 보로스 66,273 37. 요엔수 65,686 38. 에스킬스투나 64,679 39. 쇠데르텔리에 64,619 40. 칼스타드 61,685 41. 라네르스 61,664 42. 테뷔 61,272 43. 벡셰 60,887 44. 크리스티안산 60,583 45. 콜링 58,757 46. 할름스타드 58,577 47. 호르센스 56,536 48. 라펜란타 55,429 49. 바일레 53,975 50. 콧카 52,600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49552590 LCCN: n79021216 ISNI: 0000 0004 0375 5599 GND: 1027742-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베르겐&oldid=24183167" 분류: 베르겐호르달란주의 도시노르웨이의 도시노르웨이의 항구 도시북해의 항구 도시한자동맹 교역소 소재지노르웨이의 옛 수도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노르웨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ষ্ণুপ্রিয়া মণিপুরীBrezhonegBosanskiCatalàНохчийнCebuano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GalegoHausaעבריתHrvatskiHornjoserbsce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KalaallisutLatinaLëtzebuergeschLimburgsLumbaartLietuviųLatviešuMāoriМакедонскиमराठीBahasa MelayuЭрзяньNāhuatlPlattdüütschNedersaksies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ИронPolskiPiemontèis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Ślůnskiதமிழ்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ChiTumbuk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est-VlamsVolapükWinarayZeêuws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베르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르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베르겐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베르겐 시 Bergen 시기 휘장 베르겐북위 60° 23′ 22″ 동경 05° 19′ 48″ / 북위 60.38944° 동경 5.33000°  / 60.38944; 5.33000좌표: 북위 60° 23′ 22″ 동경 05° 19′ 48″ / 북위 60.38944° 동경 5.33000°  / 60.38944; 5.33000 행정 나라 노르웨이 행정구역 호르달란주 역사 설립 1070년 경 인구 인구 278,121 명 (2016년) 지리 면적 465.56 km2 기타 시간대 CET (UTC+1)CEST (UTC+2) 우편번호 5003–5268 (P.O.box 5802-5899) 지역번호 (+47) 5556 https://www.bergen.kommune.no/ 베르겐 베르겐 역사지구 베르겐(노르웨이어: Bergen)은 노르웨이 서남부, 호르달란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25만(2008). 노르웨이 서남부 해안의 깊숙이 들어간 피오르에 위치한다. 수도 오슬로에서 서북쪽으로 400km 떨어져 있으며, 노르웨이에서 오슬로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이다. 북위 60° 22′의 고위도에 위치하나,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철에도 평균기온이 영상이며, 지형적인 영향으로 연평균 강수량이 2,000mm 이상으로 유럽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 중 하나이다. 반면 눈은 노르웨이에서는 적게 오는 곳에 속한다. 목차 1 역사 2 문화 3 기후 4 자매 도시 5 각주 역사[편집] 시의 역사는 1070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3세 국왕이 건설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 후 성곽이 생기면서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12∼13세기에는 이 나라 수도였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한 후 영국 선원들이 들어오면서 무역항으로 중요해졌다. 중세(中世)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에서는 최대의 항구이며 무역의 중심이었다. 또한 이때 한자 동맹에 가입하여 스칸디나비아의 서해안의 무역을 지배하며 수백년 동안 크게 번창하였다. 19세기까지도 노르웨이의 최대 도시였다가 크리스티아나(현재의 오슬로)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문화[편집] 19세기에는 이 곳을 강타한 대화재와 크리스티아나의 발전으로 다소 침체했으나, 그 후 다시 서해안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대화재를 계기로 목재건축은 금지하고 있으나, 한자 동맹 시절의 중심가에는 독특한 목재 건물들이 남아 있으며,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피오르식 해안관광의 출발점인 베르겐은 화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각종 미술관·박물관이 있는 문화도시이다.[1] 한자 박물관(Hanseatisk Museum)은 베르겐 시가 항구도시로서, 예부터 어업과 해외무역이 발달,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세하여 더욱 발전을 거듭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시장 북쪽 브리겐 거리에 위치하며, 1702년 건립된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2] 마리아 교회(Mariakirken)는 브리겐 거리 북서쪽에 위치한 베르겐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바로크풍의 선교단이 있다.[3] 트롤하우겐(Troldhaugen)은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집이다. 트롤은 보는 사람에 따라 선인과 악인으로 변하는 숲속의 요정으로 트롤하우겐은 트롤이 살고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그리그가 사용했던 피아노, 악보,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4] 베르겐 수족관(Bergen Aquarium)은 노르네스 반도 서쪽 끝에 있는 노르웨이 최대의 수족관으로, 9개의 큰 수족관과 42개의 작은 수족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표범, 해수어, 펭귄, 바다새를 볼 수 있다.[5] 판토프트 통널 교회(Fantoft Stavkirke)는 베르겐 교외의 판토프트(Fantoft)에 있는 독특한 통널 교회이다. 1150년에 처음 송네피오르드에 세워졌던 것인데, 보존을 위해 1883년 이곳으로 이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7년 6월 6일 재건축했다. 지붕이 5층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6] 기후[편집] 베르겐, 평균 온도와 강수량 1981~2010년, 햇빛 1961-1990년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16.9 (62.4) 13.2 (55.8) 17.2 (63) 22.5 (72.5) 27.6 (81.7) 29.9 (85.8) 31.8 (89.2) 31.0 (87.8) 27.1 (80.8) 23.1 (73.6) 17.9 (64.2) 13.9 (57) 31.8 (89.2) 평균최고기온 °C (°F) 4.3 (39.7) 4.5 (40.1) 6.5 (43.7) 10.4 (50.7) 14.7 (58.5) 17.3 (63.1) 19.1 (66.4) 18.6 (65.5) 15.4 (59.7) 11.4 (52.5) 7.3 (45.1) 4.8 (40.6) 11.2 (52.2) 일평균기온 °C (°F) 2.2 (36) 2.2 (36) 3.8 (38.8) 7.0 (44.6) 10.9 (51.6) 13.6 (56.5) 15.6 (60.1) 15.4 (59.7) 12.4 (54.3) 8.8 (47.8) 5.1 (41.2) 2.7 (36.9) 8.3 (46.9) 평균최저기온 °C (°F) 0.1 (32.2) −0.2 (31.6) 1.1 (34) 3.6 (38.5) 7.0 (44.6) 9.9 (49.8) 12.2 (54) 12.1 (53.8) 9.4 (48.9) 6.2 (43.2) 2.8 (37) 0.6 (33.1) 5.4 (41.7) 최저기온기록 °C (°F) −16.3 (2.7) −13.4 (7.9) −11.3 (11.7) −5.5 (22.1) −0.1 (31.8) 0.8 (33.4) 2.5 (36.5) 2.5 (36.5) 0.0 (32) −5.5 (22.1) −10.0 (14) −13.0 (8.6) −16.3 (2.7) 평균 강수량 mm (인치) 252.7 (9.95) 197.8 (7.79) 200.3 (7.89) 133.7 (5.26) 104.5 (4.11) 119.4 (4.7) 151.1 (5.95) 198.4 (7.81) 254.9 (10.04) 270.8 (10.66) 261.4 (10.29) 267.8 (10.54) 2,412.9 (95) 평균강우일수 (≥ 1 mm) 19.1 16.4 17.3 14.0 12.8 12.7 14.5 15.9 17.0 19.1 18.1 18.5 195.4 평균 상대 습도 (%) 78 76 73 72 72 76 77 78 79 79 78 79 76 평균 월간 일조시간 19 56 94 147 186 189 167 144 86 60 27 12 1,187 출처 #1: Météo Climat[7] NOAA (humidity and sunshine)[8] 출처 #2: Voodoo Skies for extremes[9] 자매 도시[편집] 에리트레아 아스마라 스웨덴 예테보리 독일 뤼베크 영국 뉴캐슬어폰타인 캐나다 퀘벡 독일 로스토크 미국 시애틀 핀란드 투르쿠 덴마크 오르후스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베르겐〉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자 박물관〉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마리아 교회〉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그리그의 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베르겐 수족관〉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스타브 교회〉 ↑ “Météo climat stats – Bergen”. Météo Climat. 2017년 3월 20일에 확인함.  ↑ “BERGEN - FLORIDA Climate Normals: 1961-1990”.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2014년 3월 16일에 확인함.  ↑ “Archived copy”. 1 November 2016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6 September 2015에 확인함.  vdeh유럽 문화 수도 1985 아테네 1986 피렌체 1987 암스테르담 1988 서베를린 1989 파리 1990 글래스고 1991 더블린 1992 마드리드 1993 안트베르펜 1994 리스본 1995 룩셈부르크 1996 코펜하겐 1997 테살로니키 1998 스톡홀름 1999 바이마르 2000 레이캬비크, 베르겐, 볼로냐, 브뤼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아비뇽, 크라쿠프, 프라하, 헬싱키 2001 로테르담, 포르투 2002 브뤼허, 살라망카 2003 그라츠 2004 릴, 제노바 2005 코크 2006 파트라 2007 룩셈부르크, 시비우 2008 리버풀, 스타방에르 2009 린츠, 빌뉴스 2010 에센, 이스탄불, 페치 2011 탈린, 투르쿠 2012 기마랑이스, 마리보르 2013 마르세유, 코시체 2014 리가, 우메오 2015 몽스, 플젠 2016 브로츠와프, 산세바스티안 2017 오르후스, 파포스 2018 레이우아르던, 발레타 2019 마테라, 플로브디프 2020 리예카, 골웨이 2021 티미쇼아라, 엘레프시나, 노비사드 2022 카우나스, 에슈쉬르알제트 2023 베스프렘 vdeh북유럽 50대 대도시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올란드 제도 페로 제도 그린란드 1. 스톡홀름 1,372,565 2. 코펜하겐 1,263,698 3. 헬싱키 1,214,210 4. 오슬로 958,378 5. 예테보리 549,839 6. 탐페레 325,025 7. 말뫼 280,415 8. 오르후스 261,570 9. 투르쿠 260,367 10. 베르겐 250,420 11. 스타방에르 210,874 12. 레이캬비크 209,510 13. 오울루 193,817 14. 트론헤임 175,068 15. 오덴세 173,814 16. 웁살라 140,454 17. 올보르 132,578 18. 이위배스퀼래 120,306 19. 라흐티 117,424 20. 드람멘 113,534 21. 베스테로스 110,877 22. 프레드릭스타드-사릅스보르그 108,636 23. 외레브로 107,038 24. 린셰핑 104,232 25. 헬싱보리 97,122 26. 포르스그룬-시엔 91,737 27. 옌셰핑 89,396 28. 노르셰핑 87,247 29. 쿠오피오 86,034 30. 포리 84,509 31. 룬드 82,800 32. 우메오 79,594 33. 에스비에르 72,060 34. 예블레 71,033 35. 바사 66,911 36. 보로스 66,273 37. 요엔수 65,686 38. 에스킬스투나 64,679 39. 쇠데르텔리에 64,619 40. 칼스타드 61,685 41. 라네르스 61,664 42. 테뷔 61,272 43. 벡셰 60,887 44. 크리스티안산 60,583 45. 콜링 58,757 46. 할름스타드 58,577 47. 호르센스 56,536 48. 라펜란타 55,429 49. 바일레 53,975 50. 콧카 52,600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49552590 LCCN: n79021216 ISNI: 0000 0004 0375 5599 GND: 1027742-0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베르겐&oldid=24183167" 분류: 베르겐호르달란주의 도시노르웨이의 도시노르웨이의 항구 도시북해의 항구 도시한자동맹 교역소 소재지노르웨이의 옛 수도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노르웨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ষ্ণুপ্রিয়া মণিপুরীBrezhonegBosanskiCatalàНохчийнCebuano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NordfriiskFryskGaeilgeGalegoHausaעבריתHrvatskiHornjoserbsceMagyarՀայերենԱրեւմտահայերէ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nterlingue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KalaallisutLatinaLëtzebuergeschLimburgsLumbaartLietuviųLatviešuMāoriМакедонскиमराठीBahasa MelayuЭрзяньNāhuatlPlattdüütschNedersaksies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ИронPolskiPiemontèis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Davvisámegiell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Ślůnskiதமிழ்ไทย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ChiTumbukaУкраїнськаاردوOʻzbekcha/ўзбекчаVènetoTiếng ViệtWest-VlamsVolapükWinarayZeêuws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바리공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리공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리데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바리데기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바리데기 (소설) 문서를, 드라마에 대해서는 바리데기 (드라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바리공주는 관북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상의 인물로, 흔히 무당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발리공주(鉢里公主) 혹은 사희공주(捨姬公主)라고 하여 바리때를 지니며 베푸는 공주를 뜻하였다. 해원 굿의 원형으로 오구굿의 한마당에서 나오는데 남자가 아닌 확실시 되는 여신이다.바리데기라고도 한다.[1] 목차 1 전승 2 줄거리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문헌 전승[편집] 바리공주 설화는 무속의 오구굿 또는 해원굿의 일부를 구성하는 서사무가(敍事巫歌)로 구전되어 왔다. 무당이 굿을 하기 전이나 하는 중간에 등장하는 사설(辭說)에 이 설화가 포함되어 있다. 무당은 바리공주 서사무가를 진오기굿의 말미거리에서 장고를 세우고 방울을 흔들며 서너 시간에 걸쳐 구송한다. 전국 모든 무당이 바리공주를 조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바리공주 무가가 전해져 오지 않는 곳에서는 미륵을 조상이라 하기도 한다. 바리공주 설화도 다른 서사무가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부분이 한국 민족 고유의 서사무가인지, 불교의 이야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한 예로 바리공주는 불로장생약이 있는 저승에 가기 위해 서천서역국을 가는데, ‘서천서역국’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부르는 말이다. 왕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전남지역에서는 오구시왕이다. 오구는 원한맺힌 귀신이라는 뜻이며 시왕은 불교의 열명의 판관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왕에게 판결을 받아 어디로 갈것인지 결정이 된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한국 서사무가에 드리워진 불교의 영향을 알 수 있다.[1] 줄거리[편집] 설화에 따르면, 옛 한국의 어느 왕이 있었는데 (어비대왕 혹은 오구대왕이라고 한다) 혼례를 일년 미루어야 아들을 낳고, 길하다는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한 탓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딸만 계속 낳다가 마침내 일곱째도 딸로 태어나 버렸다. 바리공주가 태어나자 왕이 공주를 버려, 바리공주는 한 노부부에 의해 구해져 양육되었다. 후에 왕과 왕비가 죽을 병이 들어 점을 쳐 보니 저승의 생명수로만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섯 공주 모두가 부모를 위해 저승에 가길 거부했는데 바리공주가 이를 알게 되어,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에 가겠다고 하였다. 바리공주가 저승에 가 약이 있는 곳까지 갔는데, 저승의 수문장이 바리공주와 일곱 해를 살고 일곱 아들을 낳아야 약을 주겠다고 하였다. 바리공주가 그 조건을 채운 뒤 수문장과 일곱 아들과 함께 약을 갖고 이승에 돌아오는데, 궁에서 나오는 왕과 왕비의 상여와 마주쳐, 가져온 영약으로 되살렸다. 왕이 바리공주에게 물어 바리공주의 남편이 된 저승의 수문장은 장승이, 일곱 아들은 칠원성군이 되었고 바리공주는 이러한 연유로 왕에게 자청하여 한국 무당의 조상이 되었다.[1] 같이 보기[편집] 무당 바리데기 진오기굿 각주[편집] ↑ 가 나 다 『관북지방무가』(임석재·장주근, 문화재관리국, 1965), 『한국무가집』 Ⅰ·Ⅱ·Ⅲ·Ⅳ(김태곤, 집문당, 1980),『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6) 참고 문헌[편집] 서사무가 '바리공주 전집' 1,2,3 민속원 간 홍태한, 이경엽 편 vdeh한국의 신화창세신화 함흥 창세가 오산 시루말 당고마기굿 바리공주 천지왕본풀이 삼태자풀이 마고 설화 마고성 설문대할망 영등할망 등 건국신화 고조선의 건국 신화 부여의 건국 신화 고구려의 건국 신화 백제의 건국 신화 신라의 건국 신화 가야의 건국 신화 고려의 건국 신화 조선의 건국 신화 등 전설과 민담 당장경 천도 설화 아기장수 우투리 목도령 대홍수 설화 방이 설화 유리태자 설화 해명태자 설화 법우화상 설화 황금 돼지 설화 금척 설화 뱀신랑 설화 장자못 설화 지귀 설화 보희 설화 미추 이사금 설화 여우 구슬 설화 사금갑 설화 지증왕 성기 설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만파식적 설화 연오랑과 세오녀 자명고 설화 당나귀 귀 설화 광포 설화 고려장 설화 일월노리푸념 등 본풀이 천지왕본풀이 삼승할망본풀이 초공본풀이 이공본풀이 삼공본풀이 차사본풀이 세경본풀이 지장본풀이 문전본풀이 칠성본풀이 군웅본풀이 제석본풀이 등 영웅 설화 동명왕 신화 금와왕 설화 추모왕 신화 박혁거세 신화 김알지 신화 김수로왕 신화 탈해 이사금 신화 미천왕 설화 알평 설화 박제상 설화 견훤 설화 거타지 설화 처용 설화 바보 온달 무왕 설화 작제건 설화 강감찬 설화 이성계 설화 김덕령 설화 임경업 설화 등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바리공주&oldid=24191304" 분류: 한국 신화설화전설무속무속의 신시간과 운명의 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Magyar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4: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더 유즈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더 유즈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더 유즈드 기본 정보 국가 미국 장르 얼터너티브 록포스트 하드코어 활동 시기 2001년 ~ 현재 레이블 호프리스 레코드, 리프리즈 레코드, 워너브라더스 레코드 웹사이트 theused.net 구성원 버트 매크라켄퀸 알먼제프 하워드댄 화이트사이즈 이전 구성원 브랜든 스타이네커트 더 유즈드(The Used)는 미국 유타주 오렘 출신 록 밴드이다. 목차 1 역사 2 멤버 2.1 이전 멤버 3 음반 목록 3.1 정규 음반 3.2 비정규 음반 4 외부 링크 역사[편집] 더 유즈드(The Used)는 1994년 결성된 밴드 스트레인지 이치(Strange Itch)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제프 하워드, 브랜든 스타이네커트, 조엘 팩, 맷 브라운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1998년에 첫 음반을 발매하였으며, 1999년에는 퀸 알먼이 기타리스트로 합류하였다. 같은 해에 이들은 이름을 덤 럭(Dumb Luck)으로 바꾸고, 2000년에 EP를 발매하였다. 얼마 후에 버트 매크라켄이 보컬로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이름을 다시 유즈드(Used)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동일한 이름의 밴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름을 다시 더 유즈드(The Used)로 변경하였다. 유즈드는 2002년에 데뷔 음반 《The Used》를 발표하였으며, 두 번째 음반 《In Love and Death》는 2004년에 발매되었다. 2006년 9월, 드러머 브랜든 스타이네커트가 밴드를 탈퇴하였으며, 2007년에 그의 공석을 채울 드러머로 댄 화이트사이즈가 합류하였다. 현재 스타이네커트는 펑크 록 밴드 랜시드의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다. 유즈드의 세 번째 정규 음반 《Lies for the Liars》는 2007년 5월 22일에 발매되었다. 또한 유즈드는 2008년 8월 15일, 서태지의 컴백무대인 ETPFEST에 참여해 첫 내한공연을 가졌다. 2010년 유즈드는 리프리즈 레코드 (워너브라더스 레코드)를 떠나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호프리스 레코드와 계약을하여 2012년 첫 싱글 I Come Alive를 공개하였으며, 이후 그들의 정규 앨범 6집인 Vulnerable을 발매하였다. 2013년 정규 앨범 6집 리패키지 Vulnerable (II)가 발매되었다. 2013년 7월 EP 앨범 The Ocean Of The Sky가 발매되었다. 2014년 4월 1일 정규 앨범 7집 Imaginary Enemy를 발매할 예정이다. 멤버[편집] 버트 매크라켄(Bert McCracken) - 보컬 퀸 알먼(Quinn Allman) - 기타 제프 하워드(Jeph Howard) - 베이스 댄 화이트사이즈(Dan Whitesides) - 드럼(2007년 ~ 현재) 이전 멤버[편집] 브랜든 스타이네커트(Branden Steineckert) - 드럼(2001년 ~ 2006년) 음반 목록[편집] 정규 음반[편집] 《The Used》(2002년) 《In Love and Death》(2004년) 《Lies for the Liars》(2007년) 《Shallow Believer》(2008년) 《Artwork》(2009년) 《Vulnerable》(2012년) 《Vulnerable II》(2013년 리패키지) 《Imaginary Enemy》(2014년) 비정규 음반[편집] 《Maybe Memories》(2003년 컴필레이션 앨범) 《Berth》(2007년 라이브 앨범) 《Shallow Believer》(2008년 EP) 《The Ocean Of The Sky》(2013년 EP) 외부 링크[편집] (영어) 유즈드 공식 웹사이트 (영어) 유즈드 공식 유튜브 채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더_유즈드&oldid=22324187" 분류: 미국의 록 밴드미국의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2001년 결성된 음악 그룹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ymraeg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Basa SundaSvenska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1일 (화) 15: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국의 섬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섬 목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의 섬 목록은 대한민국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의 목록이다. 목차 1 대한민국의 섬 목록 1.1 도서 분포 현황 1.2 면적 순 섬 목록 1.3 그 밖의 주요 섬 1.3.1 국토 끝섬 1.3.2 하중도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 목록 2.1 강원도 2.2 평안남도 2.3 평안북도 2.3.1 하중도 2.4 함경남도 2.5 함경북도 2.5.1 하중도 2.6 황해남도 3 각주 4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섬 목록[편집] 도서 분포 현황[편집] 출처 : 해양수산부 연안포탈[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면적 단위 : (km²) 광역시/도 해안선 연장 (km²) 도서부 유인도서 계 유인 도서 무인 도서 가구수 (가구) 인구수 개소 면적 개소 면적 개소 면적 인천광역시 880.30 154 687.02 42 680.91 112 6.11 33,046 94,172 경기도 303.57 65 44.57 11 43.74 54 0.83 2,768 7,215 충청남도 1,204.60 261 163.01 37 150.48 224 12.54 6,867 20,26 전라북도 301.70 109 37.95 26 35.31 83 2.64 1,985 6,468 전라남도 5,554.90 2210 1,836.49 278 1,790.55 1,688 45.92 78,071 219,542 경상남도 2,173.64 428 930.05 82 918.21 346 11.84 99,673 313,551 부산광역시 313.92 82 75.80 6 69.16 76 6.64 119,402 384,366 울산광역시 135.83 8 0.09 - - 8 0.09 - - 경상북도 428.00 47 73.73 4 73.60 43 0.13 3,840 10,426 강원도 318.10 32 0.26 - - 32 0.26 - - 제주특별자치도 419.95 63 15.45 8 13.80 55 1.65 2,232 5,98 총계 12,035 3,215 3,824 494 3,736 2,721 89 347,884 1,061,984 면적 순 섬 목록[편집] 출처 : 2012년 지적통계연보[1] 면적 단위 : (km²) 순위 섬 이름 소재지 면적 1 제주도 제주특별자치도 1,833.162 2 거제도 경상남도 거제시 379.233 3 진도 전라남도 진도군 374.981 4 강화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302.582 5 남해도 경상남도 남해군 300.935 6 안면도 충청남도 태안군 113.460 7 영종용유도 인천광역시 중구 97.480 8 완도 전라남도 완도군 90.074 9 울릉도 경상북도 울릉군 72.861 10 돌산도 전라남도 여수시 70.307 11 거금도 전라남도 고흥군 64.765 12 지도 전라남도 신안군 54.703 13 창선도 경상남도 남해군 54.127 14 자은도 전라남도 신안군 52.193 15 백령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51.086 16 압해도 전라남도 신안군 49.232 17 안좌도 전라남도 신안군 48.923 18 교동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47.141 19 비금도 전라남도 신안군 46.249 20 고금도 전라남도 완도군 45.558 21 도초도 전라남도 신안군 43.398 22 석모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42.344 23 임자도 전라남도 신안군 40.049 24 암태도 전라남도 신안군 37.251 25 청산도 전라남도 완도군 32.963 26 보길도 전라남도 완도군 32.142 27 신의도 전라남도 신안군 31.668 28 신지도 전라남도 완도군 30.832 29 조약도 전라남도 완도군 28.701 30 금오도 전라남도 여수시 27.508 그 밖의 주요 섬[편집] 가덕도 거금도 고금도 교동도 금오도 금호도 내나로도 노화도 대흑산도 덕적도 도초도 백령도 보길도 비금도 사옥도 석모도 소안도 신의도 신지도 안좌도 암태도 압해도 영도 영흥도 외나로도 임자도 자은도 장산도 조약도 증도 죽도 지도 창선도 청산도 팔금도 평일도 하도 하의도 하조도 한산도 흑산도 국토 끝섬[편집] 최동단 - 독도 최서단 - 백령도 최남단 - 마라도 최북단 - 백령도 하중도[편집] 한강 서울특별시 - 여의도, 밤섬, 노들섬, 선유도, 난지도 강원도 - 남이섬, 붓꽃섬, 중도 낙동강 부산광역시 - 을숙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 목록[편집] 강원도[편집] 국도(國島, 통천군) 삼도(三島) 송도(松島, 고성군) 평안남도[편집] 초도(椒島, 남포시) 덕도(德島, 남포시) 상취라도(上吹螺島, 온천군) 피도(避島, 남포시) 하취라도(下吹螺島, 온천군) 평안북도[편집] 가도(椵島, 철산군) 납도(蠟島, 선천군) 대감도(大甘島, 곽산군) 대화도(大和島, 철산군) 반성열도(盤城列島, 철산군) 삼차도(參瑳島, 철산군) 소감도(小甘島, 곽산군) 소랍도(小蠟島, 선천군) 소화도(小和島, 철산군) 신미도(身彌島, 선천군) 애도(艾島, 정주시) 우리도(牛里島, 철산군) 운무도(雲霧島, 정주시) 탄도(炭島, 철산군) 하중도[편집] 압록강 관마도(官馬島, 의주군) - 구리도(九里島)의 부속섬. 섬의 서쪽에 소관마도(小官馬島, 새알섬)가 있다. 구리도(九里島, 의주군) 다지도(多智島, 북부 의주군, 남부 신의주시) - 옛 검동도(黔同島), 난자도(蘭子島), 다지도(多智島), 마도(麻島) 등이 퇴적으로 합쳐진 섬. 동류초도(東柳草島, 신의주시) 류초도(柳草島, 신의주시) 비단섬(緋緞島, 신도군) - 신도(薪島)와 마안도(馬鞍島) 등을 1958년에 둑으로 연결하여 만든 인공섬. 마안도(馬鞍島, 신도군) - 한국의 가장 서쪽 땅. 수구도(水口島, 의주군) - 섬의 동서쪽 양 끝이 중국 영토와 붙어 있다. 어적도(於赤島, 의주군) - 옛 어적도와 승아도(勝阿島)가 퇴적으로 합쳐진 섬. 위화도(威化島, 신의주시) - 조선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조선 왕조를 개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도(荏島, 신의주시) - 옛 임도와 그 서쪽의 신도(薪島)가 퇴적으로 합쳐진 섬. 황금평(黃金坪, 신도군) - 옛 이름은 황초평(黃草坪)으로, 중국 영토와 붙어 있다. 함경남도[편집] 금초도(金椒島) 대저도(大猪島) 마양도(馬養島) 소저도(小猪島) 신도(薪島) 여도(麗島) 웅도(熊島) 화도(花島) 황토도(黃土島) 함경북도[편집] 난도(卵島) 대초도(大草島) 소초도(小草島) 쌍도(雙島) 양도(洋島) 적도(赤島) 피도(避島) 하중도[편집] 두만강 큰섬 (라선특별시) 류다섬(柳多島, 경원군) 매기도(每基島, 경원군) 황해남도[편집] 기린도(麒麟島) 대수압도(大睡鴨島) 마합도(麻哈島) 무도(茂島) 석도(席島) 소수압도(小睡鴨島) 순위도(巡威島) 어화도(漁化島) 용매도(龍媒島) 용호도(龍湖島) 월내도(月乃島) 창린도(昌麟島) 각주[편집] ↑ “120417(조간)_2012년도_지적통계연보_발간(지적기획과1)” (HWP). 2012년 4월 16일. 2013년 5월 13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 한국의 해안 하중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의_섬_목록&oldid=24507121" 분류: 한국의 섬섬 목록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Norsk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03: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국의 섬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섬 목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의 섬 목록은 대한민국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의 목록이다. 목차 1 대한민국의 섬 목록 1.1 도서 분포 현황 1.2 면적 순 섬 목록 1.3 그 밖의 주요 섬 1.3.1 국토 끝섬 1.3.2 하중도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 목록 2.1 강원도 2.2 평안남도 2.3 평안북도 2.3.1 하중도 2.4 함경남도 2.5 함경북도 2.5.1 하중도 2.6 황해남도 3 각주 4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섬 목록[편집] 도서 분포 현황[편집] 출처 : 해양수산부 연안포탈[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면적 단위 : (km²) 광역시/도 해안선 연장 (km²) 도서부 유인도서 계 유인 도서 무인 도서 가구수 (가구) 인구수 개소 면적 개소 면적 개소 면적 인천광역시 880.30 154 687.02 42 680.91 112 6.11 33,046 94,172 경기도 303.57 65 44.57 11 43.74 54 0.83 2,768 7,215 충청남도 1,204.60 261 163.01 37 150.48 224 12.54 6,867 20,26 전라북도 301.70 109 37.95 26 35.31 83 2.64 1,985 6,468 전라남도 5,554.90 2210 1,836.49 278 1,790.55 1,688 45.92 78,071 219,542 경상남도 2,173.64 428 930.05 82 918.21 346 11.84 99,673 313,551 부산광역시 313.92 82 75.80 6 69.16 76 6.64 119,402 384,366 울산광역시 135.83 8 0.09 - - 8 0.09 - - 경상북도 428.00 47 73.73 4 73.60 43 0.13 3,840 10,426 강원도 318.10 32 0.26 - - 32 0.26 - - 제주특별자치도 419.95 63 15.45 8 13.80 55 1.65 2,232 5,98 총계 12,035 3,215 3,824 494 3,736 2,721 89 347,884 1,061,984 면적 순 섬 목록[편집] 출처 : 2012년 지적통계연보[1] 면적 단위 : (km²) 순위 섬 이름 소재지 면적 1 제주도 제주특별자치도 1,833.162 2 거제도 경상남도 거제시 379.233 3 진도 전라남도 진도군 374.981 4 강화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302.582 5 남해도 경상남도 남해군 300.935 6 안면도 충청남도 태안군 113.460 7 영종용유도 인천광역시 중구 97.480 8 완도 전라남도 완도군 90.074 9 울릉도 경상북도 울릉군 72.861 10 돌산도 전라남도 여수시 70.307 11 거금도 전라남도 고흥군 64.765 12 지도 전라남도 신안군 54.703 13 창선도 경상남도 남해군 54.127 14 자은도 전라남도 신안군 52.193 15 백령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51.086 16 압해도 전라남도 신안군 49.232 17 안좌도 전라남도 신안군 48.923 18 교동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47.141 19 비금도 전라남도 신안군 46.249 20 고금도 전라남도 완도군 45.558 21 도초도 전라남도 신안군 43.398 22 석모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42.344 23 임자도 전라남도 신안군 40.049 24 암태도 전라남도 신안군 37.251 25 청산도 전라남도 완도군 32.963 26 보길도 전라남도 완도군 32.142 27 신의도 전라남도 신안군 31.668 28 신지도 전라남도 완도군 30.832 29 조약도 전라남도 완도군 28.701 30 금오도 전라남도 여수시 27.508 그 밖의 주요 섬[편집] 가덕도 거금도 고금도 교동도 금오도 금호도 내나로도 노화도 대흑산도 덕적도 도초도 백령도 보길도 비금도 사옥도 석모도 소안도 신의도 신지도 안좌도 암태도 압해도 영도 영흥도 외나로도 임자도 자은도 장산도 조약도 증도 죽도 지도 창선도 청산도 팔금도 평일도 하도 하의도 하조도 한산도 흑산도 국토 끝섬[편집] 최동단 - 독도 최서단 - 백령도 최남단 - 마라도 최북단 - 백령도 하중도[편집] 한강 서울특별시 - 여의도, 밤섬, 노들섬, 선유도, 난지도 강원도 - 남이섬, 붓꽃섬, 중도 낙동강 부산광역시 - 을숙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 목록[편집] 강원도[편집] 국도(國島, 통천군) 삼도(三島) 송도(松島, 고성군) 평안남도[편집] 초도(椒島, 남포시) 덕도(德島, 남포시) 상취라도(上吹螺島, 온천군) 피도(避島, 남포시) 하취라도(下吹螺島, 온천군) 평안북도[편집] 가도(椵島, 철산군) 납도(蠟島, 선천군) 대감도(大甘島, 곽산군) 대화도(大和島, 철산군) 반성열도(盤城列島, 철산군) 삼차도(參瑳島, 철산군) 소감도(小甘島, 곽산군) 소랍도(小蠟島, 선천군) 소화도(小和島, 철산군) 신미도(身彌島, 선천군) 애도(艾島, 정주시) 우리도(牛里島, 철산군) 운무도(雲霧島, 정주시) 탄도(炭島, 철산군) 하중도[편집] 압록강 관마도(官馬島, 의주군) - 구리도(九里島)의 부속섬. 섬의 서쪽에 소관마도(小官馬島, 새알섬)가 있다. 구리도(九里島, 의주군) 다지도(多智島, 북부 의주군, 남부 신의주시) - 옛 검동도(黔同島), 난자도(蘭子島), 다지도(多智島), 마도(麻島) 등이 퇴적으로 합쳐진 섬. 동류초도(東柳草島, 신의주시) 류초도(柳草島, 신의주시) 비단섬(緋緞島, 신도군) - 신도(薪島)와 마안도(馬鞍島) 등을 1958년에 둑으로 연결하여 만든 인공섬. 마안도(馬鞍島, 신도군) - 한국의 가장 서쪽 땅. 수구도(水口島, 의주군) - 섬의 동서쪽 양 끝이 중국 영토와 붙어 있다. 어적도(於赤島, 의주군) - 옛 어적도와 승아도(勝阿島)가 퇴적으로 합쳐진 섬. 위화도(威化島, 신의주시) - 조선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조선 왕조를 개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도(荏島, 신의주시) - 옛 임도와 그 서쪽의 신도(薪島)가 퇴적으로 합쳐진 섬. 황금평(黃金坪, 신도군) - 옛 이름은 황초평(黃草坪)으로, 중국 영토와 붙어 있다. 함경남도[편집] 금초도(金椒島) 대저도(大猪島) 마양도(馬養島) 소저도(小猪島) 신도(薪島) 여도(麗島) 웅도(熊島) 화도(花島) 황토도(黃土島) 함경북도[편집] 난도(卵島) 대초도(大草島) 소초도(小草島) 쌍도(雙島) 양도(洋島) 적도(赤島) 피도(避島) 하중도[편집] 두만강 큰섬 (라선특별시) 류다섬(柳多島, 경원군) 매기도(每基島, 경원군) 황해남도[편집] 기린도(麒麟島) 대수압도(大睡鴨島) 마합도(麻哈島) 무도(茂島) 석도(席島) 소수압도(小睡鴨島) 순위도(巡威島) 어화도(漁化島) 용매도(龍媒島) 용호도(龍湖島) 월내도(月乃島) 창린도(昌麟島) 각주[편집] ↑ “120417(조간)_2012년도_지적통계연보_발간(지적기획과1)” (HWP). 2012년 4월 16일. 2013년 5월 13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 한국의 해안 하중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국의_섬_목록&oldid=24507121" 분류: 한국의 섬섬 목록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Norsk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03: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카샤파 1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샤파 1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시야파 1세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인도 힌두교 점성술 존숭 신에 대해서는 카샤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7년 4월) 카샤파 1세Kashyapa I 지위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 대리집정 재위 473년 ~ 479년 전임자 부왕 다투세나 군주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 제2대 군주 재위 479년 ~ 495년 후임자 이복 남동생 모갈라나 1세 군주 신상정보 출생일 448년 출생지 판드얀 드라비다 왕국 아누라다푸라 사망일 495년 (47세) 사망지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 아누라다푸라에서 자살 왕조 마우리안 가 가문 모리안 왕가 부친 다투세나 모친 다투세나의 정실 왕비(아누라다푸라 천가 출신) 기타 친인척 모갈라나 1세(이복 아우) 종교 불교 카샤파 1세(Kashyapa I, 448년 ~ 495년)는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의 제2대 군왕이다. 목차 1 생애 1.1 아버지 다투세나 장군의 권력 야욕으로 인한 어린 시절 그의 굴레 1.2 부왕(父王)을 참(斬)한 왕실 쿠데타와 보위 찬탈, 그리고 평생 후환을 심려한 외로운 치세(治世) 1.3 사후 2 직계 친척 관계 생애[편집] 아버지 다투세나 장군의 권력 야욕으로 인한 어린 시절 그의 굴레[편집] 그의 아버지는 본래 판드얀 드라비다 왕국의 불교도 군벌 정치가였던 다투세나 장군(Dhatusena 將軍)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다투세나는 그가 4세 시절이던 452년에 판드얀 드라비다 왕국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판드얀 드라비다 왕국 제6대 국왕(國王)이었던 피티야 군주(Pithiya 君主)를 시해하였고 급기야는 판드얀 드라비다 왕국을 멸국(滅國)하고 나서 아버지인 다투세나 자신이 판드얀 마우리아 제후국을 성립하여 집정총독(執政總督)의 직위에 취임함으로써 452년부터 455년까지 3년을 집정총독 직위에 재임하였으며 455년에는 판드얀 마우리아 제후국을 스스로 허물고 모리안 아누라다푸라 대공국을 건국하여 대공(大公) 보위에 즉위하여 455년부터 463년까지 8년을 대공으로 재위하였더니 463년에는 모리안 아누라다푸라 대공국을 또다시 스스로 허물고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을 재건립하여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의 초대 군주로 보위에 등극하였고 465년 카샤파 왕자 그가 17세 시절 부왕 다투세나 군주는 판드얀 드라비다 육군총장군 전역을 하여 군벌 일선에서는 일단 일보 물러났다. 부왕(父王)을 참(斬)한 왕실 쿠데타와 보위 찬탈, 그리고 평생 후환을 심려한 외로운 치세(治世)[편집] 그 또한 자신의 부왕(父王)인 다투세나 군주(Dhatusena 君主)의 기벽(奇癖)을 이어받았는지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의 왕자(王子)가 되고 나서부터는 점점 자라면서 권력에 눈이 먼 카샤파 왕자가 자신의 군사 병력을 증강하더니 급기야는 473년에 왕실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다투세나 군주를 시해하고 473년부터 479년까지 6년을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의 대리집정(代理執政)로 있다가 479년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 제2대 군주 카샤파 1세로 보위에 올랐으나 치세 기간 동안 자신의 이복 아우 모갈라나 왕자(Moggallana 王子)가 복수를 할 것이 끝끝내 두려운 나머지 바위산 꼭대기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왕궁을 지었는데 이 왕궁은 현재 스리랑카에서 우수 문화재로 기념되고 있지만 그 시절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의 군주 보위에 있었던 그는 바위산 꼭대기의 왕궁에서 어언 16년의 외로운 치세를 보내다가 남인도 지방에 방축되어 있던 이복 아우 모갈라나 왕자(Moggallana 王子)가 495년에 군사를 이끌고 수도 거병 침입을 시도하자 하바라나 군현에서 전투하였지만 코끼리를 타고 전투하던 카샤파 1세 군주가 코끼리에서 낙상하여 수렁에 추락하자 카샤파 1세 군주의 군사들이 사기를 잃고 도주하며 결국 카샤파 1세 군주는 스스로 배와 목을 베어 향년 47세로 자살 붕어하였다. 사후[편집] 495년에 카샤파 1세 군주가 향년 47세로 자살 승하하고 난 직후 거병 개입에 성공한 이복 아우 모갈라나 왕제(Moggallana 王弟)가 495년에서 497년까지 2년간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의 대리집정(代理執政)에 올랐다가 497년에 비로소 바라트 스리 랑카 모리안 세일론 아누라다푸라 신할레스 왕국의 제3대 군주 모갈라나 1세로 보위에 등극하였다. 직계 친척 관계[편집] 이복 아우: 모갈라나 1세 이 글은 스리랑카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군주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카샤파_1세&oldid=23876198" 분류: 448년 태어남495년 죽음섭정아시아의 군주인도계 사람부친 살해자쿠데타로 집권한 군주5세기 아시아 사람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폐위된 군주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작전 중 사망자자살한 군주화기로 자살한 사람불교도 군주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7년 4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스리랑카에 관한 토막글군주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Françaisසිංහලதமிழ்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7일 (일) 17:4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미국 문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국 문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미국 문학(美國文學, American literature)이란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저술된 문학 작품을 가리키지만, 미국 영토 내에서가 아니라 미국 출신 작가가 해외에서 쓴 작품도 미국문학에 속한다. 목차 1 칼뱅주의 및 계몽주의 문학 (1620-1820) 1.1 초기 문학 1.2 식민지시대 1.3 독립혁명기 1.4 문학적 과도기 2 낭만주의 및 초월주의 문학 (1820-1865) 2.1 독창적인 미국 스타일 2.2 미국의 낭만주의 문학 2.3 초월주의 문학의 태동 3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 (1865-1914) 3.1 마크 트웨인 3.2 지역 문학가 3.3 제임스 4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문학 (1914-1945) 4.1 문학의 사회적 고발 4.2 전후 사회에 대한 환멸 4.3 대공황 시대의 문학 5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문학 (1945-1970) 5.1 미국의 모더니즘 문학 5.2 반체제적 리듬의 문학 5.3 전후 미국 문학의 지평 6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 (1970-현재) 6.1 현대 미국시 6.2 현대 미국 소설 6.3 현대 미국 극문학 7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인 8 같이 보기 9 출처 10 외부 링크 칼뱅주의 및 계몽주의 문학 (1620-1820)[편집] 초기 문학[편집] 존 스미스의 작품 〈버지니아, 뉴잉글랜드와 서머제도의 역사개관〉, 표지 콜럼버스가 1492년에 미대륙에 상륙한 이후에도, 영국은 오랫동안 이 신대륙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1607년에 처음으로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버지니아 회사는 이주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사유재산권을 인정했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담배 재배가 성공하자 점차 대농장주 중심의 경작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남부 특유의 봉건적 사회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뉴잉글랜드에서는 1620년 102명의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매사추세츠주의 해안에 상륙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개척했다. 또 1630년에는 윈스럽의 지도아래 보스턴을 중심으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를 만들었다. 얼마후 이 식민지와 기존에 건설한 플리머스 식민지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이 통합지역의 거주민들은 존 캘빈의 교리를 신앙의 기초로 하는 청교도 사회를 건설해 갔다. 그들은 또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하버드 대학을 설립했고 출판물의 인쇄를 위해 인쇄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이들 이주민의 대다수는 종교, 경제상의 이유로 신천지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로서 무엇보다도 식민지의 개척과 생활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본국의 문학을 바로 미대륙이라는 새로운 토양에 이식시킬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선주 민족에 남아있는 시가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없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미국문학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주로 기록문학, 종교문학 등이 보고문서, 역사서, 설교집, 자서전, 전기문, 일기 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식민지시대[편집] 미국 문학의 최초의 등장으로 인정되는 작품은 영국탐험가 존 스미스|스미스(1579-1631)가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건설을 기록한 《버지니아의 사정》(A True Relation of Virginia (1608))인데, 역사서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편,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총독 윈스럽의 일기("Journal")와 편지들, 플리머스 식민지 총독 브래드퍼드(1590-1657)의 《플리머스 식민지에 대해》 등도 귀중한 기록 문학으로 인정되고 있다. 종교 문학에 있어서는, 당대의 청교도 계관시인으로 불리던 위글워스(M. Wiggleworth, 1631-1703)의 시 《심판의 날》이 특히 유명하며, 64년간 목사직에서 종사했던 매더(1663-1728)의 "미국에서의 그리스도의 위업" (Magnalia Christ Americana (1702))는 그의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이신론의 공세에 밀려서 세가 약해졌던 청교도주의는 에드워즈(1703-1758)에 의해서 놀라운 종교부흥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청교도주의를 체계화한 그의 저술들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에드워즈와 대조적으로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였던 프랭클린(1706-1790)은 철저한 합리주의자로서 미국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활발하고 눈부신 활동을 하여 오늘날 미국식 직업윤리와 물질문명의 기반적 철학과 사상을 제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자서전" (Autobiography)은 신학중심의 시대에서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로 미국사회가 전환되어가는 시점이었던 당대의 정신사를 보여주고 있다. 독립혁명기[편집] 제임스타운의 식민지 건설이 시작된 이후, 약 150여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는 여러가지 반목과 대립이 나타났고, 드디어 독립전쟁이 발발하여 8년간의 전쟁 끝에 1783년에서야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 거주민들의 여론을 자극하고 환기시켜 혁명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저술들이 많이 나왔는데,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한 문인은 영국 출신의 페인(1737-1809)이었다. 그는 1776년 1월에 10만 부 이상 팔린 《상식》(Common Sense)을 출간하여 《미국 독립 혁명》의 사상적 중요성을 역설하고, 독립전쟁 중에도 《미국의 위기》 (The American Crisis, 1776-1783)라는 총서를 발행하여 미국민들의 사기와 위세를 진작시켰다. 이 시기에, 프랑스 출신인 생 장 드 크레브쿠르(St. Jean De Crevecoeur, 1735-1813)는 미국사회의 실상을 서간형식으로 묘사한 《어느 미국 농부의 편지》(Letters from an American Farmer, 1782)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한편,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두 번이나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던 시인 프레노(Philip Freneau, 1752-1832)는 미국적인 주제를 처음으로 시에 도입하여 미국의 자연을 노래하고 애국적인 시들을 많이 발표하여 ‘미국독립전쟁의 시인’으로 불리었다. 대체적으로, 이 시대의 미국문학은 영국 고전주의의 모방에 치우친 모습을 많이 드러냈으며 가치있는 순수문학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곧 다가올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태동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다. 문학적 과도기[편집] 제퍼슨 독립 전쟁이 끝나자, 해밀턴(1755 혹은 1757 - 1804), 매디슨(1751 - 1836)과 존 제이(1745 - 1829)의 《더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라는 수필은 미국 정부의 조직과 공화제 가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인 논쟁을 저술 하였다. 제퍼슨(1743 - 1826)이 쓴 《미국독립선언문》, 그리고 미국 헌법에 대한 영향력, 그 자서전 《버지니아주에 관한 주석》(Notes on the State of Virginia)과 많은 편지 등 초기 미국의 가장 재능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그 평가를 굳히고 있다. 에임스(1758 - 1808), 오티스(1725 - 1783)와 헨리(1736 - 1799)도 그 정치적 저작물이나 연설에 중점을 두었다. 새롭게 탄생한 최고 국가의 초기 문학 대다수는 기존의 문학 장르에서 미국의 소리를 직접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소설에 반영되었다. 유럽 형식과 스타일이 미국에 옮겨오면 많은 비평가들은 그들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낭만주의 및 초월주의 문학 (1820-1865)[편집] 독창적인 미국 스타일[편집] 어빙 1783년 《파리 조약》을 거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인들은 이 정치적 독립에 걸맞은 지적, 정신적 독립을 점차 원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미국문학 창조의 욕구도 이에 따라 활성화되었다. 미국의 낭만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 미국민 특유의 개척정신, 미국의 자연과 과거, 복음주의 종교 등 주로 미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사정에 영향을 받아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이는 혁명기에 이미 그 싹을 보이고 있었지만 문학사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로 들어선 이후였고, 그 정점은 1830년 - 1830년이었다. 1812년 전쟁과 미국만의 문학과 문화를 만들어 내자는 점점 커지는 욕구로 많은 새로운 핵심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 어빙, 브라이언트, 쿠퍼, 그리고 포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미국 최초의 전문 직업작가로서 활동한 어빙은 정기간행물 《샐마군디》(Salmagundi)에서 같이 유머러스한 작품과 《뉴욕의 역사, 디트리히 니커보커》(A History of New York, by Diedrich Knickerbocker, 1809)에서와 같이 풍자적인 작품을 썼다. 그는 1819년에 《스케치북》(Sketch Book)을 발표하여 미국 작가로서의 명성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날렸다. 뉴잉글랜드의 대표적 시인으로 유명했던 브라이언트는 초기 로맨틱하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시를 써냈는데, 다양한 창작과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자신의 시를 통해 미국 낭만주의 흐름의 기틀을 잡고 제시하였다. 이것은 유럽의 원류와는 거리가 먼 진화였다. 1832년에 포는 《붉은 죽음의 가면》(The Masque of the Red Death), 《함정과 진자》(The Pit and the Pendulum), 《어셔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The Murders in the Rue Morgue) 등과 같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숨겨진 인간 심리의 정도를 탐험하고, 미스터리와 판타지 소설의 경계로 진일보한 것이었다. 쿠퍼가 5부작에 걸쳐 발표한 《모히칸 족의 최후》가 포함되어 있는 《네티 범포》(Natty Bumppo)에 대한 가죽스타킹 이야기는 미국과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그는 그것을 통해 미국 변경지역과 인디언들을 등장시킨 전기적 모험소설을 창조하였다. 뉴잉글랜드의 세바 스미스와 벤자민 P. 쉴라버 그리고 데비 크로켓, 오거스트 볼드윈 롱스트리트, 존슨 J. 후퍼, 토마스 뱅스 토페, 그리고 미국 프런티어에 대해 글을 쓴 조지 워싱턴 해리스 등도 유머러스하고 인기있는 작가였다. 보스톤 브라만(Boston Brahmin)은 하버드 대학과 매사추세츠 캠브릿에 있는 작가단체였다. 핵심 멤버는 제임스 러셀 로웰, 롱펠로 그리고 올리버 웬델 홈즈 시니어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매티슨(F. O. Matthiessen, 1902-1950)은 저서 《미국의 르네상스》(American Renaissance, 1941)에서 이 시기를 《미국의 르네상스》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셰익스피어가 활약하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영국 르네상스에 견주는 미국인의 문화적 자부심이 드러나있다. 미국 문학사에 있어서 낭만주의 시대는 주로 19세기 초에서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날 무렵까지를 일컫는다. 미국의 낭만주의 문학[편집] 에머슨. 콩코드(Concord)의 철인이라고 불리었던 사상가 에머슨(1803-1882)은 초월주의라는 명칭 아래 그를 중심으로 모인 문인들과 함께 미국 초월주의라는 철학적 조류를 만들고 이끌었다. 1836년 "자연"(Nature) 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개인주의의 범신론적 신비주의의 결합과 그 초월적 문학화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강연문인 "미국학자론" (The American Scholar, 1837)은 당대에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서 받아들여졌다. 당대의 대표적인 초월주의자였던 소로(1817-1862)는 그의 대표작 《월든》(1854)에서 당대 급부상하던 산업주의, 물질주의에 대항한 적극적인 문학적 시도를 부여주었으며, 정신적인 자연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깊이있는 문학적 성찰을 보여주었다. 그의 급진적인 글쓰기는 미국인의 성격에 내재하는 뿌리 깊은 개인주의 성향을 표현하고 있다. 초월주의에 영향을 받은 다른 작가들로는 올컷, 풀러, 리플레이, 브라운슨, 베리가 있다.[1] 미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포(1809-1849)는시, 단편소설, 추리소설, 평론 등 다방면에서 특출하고 독보적인 문학세계를 그려내었다. 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포우는 그의 뒤를 이은 인간 심연의 암흑세계에 대한 문학적, 철학적 통찰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호손과 멜빌의 어두운 로맨스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미와 비정산, 괴기와 공포에 대한 탐구는 후대의 많은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초월주의 문학의 태동[편집] 호손. 1850년대 초에 주요 작품들을 발표했던 호손(1804-1864)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지나칠 정도로 낙관주의였던 에머슨의 사상과는 반대로 인간 심연의 암흑의 힘을 탐색하고 문학화하려 하였다. 다양의 심리적 죄의 양상과 갈등의 이면들을 그려낸 그의 단편 소설들과 로맨스들은 미국낭만주의의 정점의 깊은 심연을 드러내었다. 그의 대표작 《주홍글씨》(1850)는 미국의 역사적 무의식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으며 개개인들의 미국사회에서 겪는 도덕적, 정신적 갈등과 깊이의 심연을 깊은 통찰력으로 드러내주었다. 멜빌(1819-1891)은 호손과 더불어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중의 한명이지만 그의 생애에서는 결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깊이있게 받지 못한 멜빌은 젊은 시절 남태평양에서의 모험을 문학의 소재로 삼았으며, 폴리네이사 원주민들에게 사로잡힌 실제 경험담을 처녀작인 《타이피》(Typee (1846}}로 당시 미국과 영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비딕》에서는 고래 사냥을 떠나는 모험은 그런 강박 관념과 악한 본성, 그리고 그러한 요소에 저항하는 인간의 투쟁 등이 매개체가 되었다. 또 다른 걸작 중의 하나인 단편 소설 《빌리 버드》 (Billy Budd)에서는 멜빌이 전쟁 때 배를 타야 하는 의무와 열정에 대한 갈등을 희화화 시킨다. 일단 대중적인 작가로 안착을 하는 듯 보였으나, 그는 점차 역사적, 철학적 주제들을 깊이있게 파고 들어갔으며 다양한 문학 주제와 양식, 형식 등을 과감하게 실험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잃어갔다. 휘트먼, 1856. 휘트먼(1819-1892)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도시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문학활동에 참여하였다. 21세가 되기 직전에 그는 맨해튼에서 문예주간지에 글을 기고하며 본격적인 문인활동을 시작하였다. 1848년 여름부터 휘트먼은 뉴욕에서 실험적인 시들을 집필하기 시작하였고 1855년 7월에 이르러 그의 대표작인 《풀잎》 ("Leaves of Grass" (1855)을 발표하였다.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 (1865-1914)[편집] 마크 트웨인[편집] 트웨인, 1907. 트웨인(1835 - 1910)은 미국 동부 해안에서 떨어진 미주리주 경계에서 태어난 미국인 작가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토지를 무대로하는 그의 책 자서전 《미시시피의 삶》(Life on the Mississippi)과 소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다. 이것이 미국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그의 등장 인물은 방언과 신조어 및 지역의 억양까지 사용하여 실제 사람처럼 말하고, 분명히 미국 사람처럼 보인다. 지역 문학가[편집] 그 외 지역차나 방언에 흥미를 가진 작가로서는, 조지 W 케이블(1844 - 1925), 토마스 넬슨 페이지(1853 - 1922), 죠엘 챈들러 해리스(1848 - 1908), 메어리 노아이유 머프리(1850 - 1922, 필명 찰즈 에그버트 크래덕), 새라 온 쥬엣트(1849 - 1909), 메어리 E 윌킨스 프리맨(1852 - 1930), 헨리 커일러 버너(1855 - 1896) 및 오 헨리(1862 - 1910)가 있다. 하우얼스도 《사일러스 레이펌의 출세》(The Rise of Silas Lapham)와 같은 소설과 〈애틀랜틱 먼슬리〉의 편집자 일을 통해 리얼리스트의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제임스[편집] 제임스(1843 - 1916)는 구세계 - 신세계에 대해 직접 쓰게 됨으로써 딜레마에 직면했다. 제임스는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후 대부분 영국에서 보냈다. 그의 많은 소설들이 미국에 살고 있거나 또는 유럽에 여행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제임스의 소설은 그 절제되고, 고급스런 문장과 심리적, 정신적 패턴 분석은 아찔한 경향이 있다. 유럽에 온 매력적인 미국인 소녀를 그린 소설 《데이지 밀러》(Daisy Miller)와 수수께끼 같은 괴담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은 아직도 접하기 쉬운 작품이다.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문학 (1914-1945)[편집] 문학의 사회적 고발[편집] 헤밍웨이, 제1차 세계대전의 군복차림 20세기 초에 미국의 소설가는 소설의 사회적인 영역을 상류에서 하류까지 넓혀 나갔다. 때때로 리얼리즘의 성격을 가진 작품도 등장하였다. 워튼(1862 - 1937)은 단편이나 소설에서 그녀가 자란 미국 동부 해안 상류 계급 사회를 관찰했다. 그 걸작 중에서도 《순수의 시대》(1920)는 매력적인 외부인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수용되는 여자와의 결혼을 선택한 한 남자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당시 남북 전쟁 소설 《붉은 무공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로 알려진 크레인(1871년 - 1900)는 《거리의 여자 매기》(Maggie : A Girl of the Streets, 1893 )에서 뉴욕 창녀의 생애를 그렸다. 또한 드라이저(1871 - 1945)는 《시스터 캐리》(Sister Carrie, 1900)에서 시카고로 이사를 와서 연인이 될 시골 출신의 젊은 여성을 그렸다. 햄린 갈랜드(1861년 - 1940)와 프랭크 노리스(1870 - 1902)는 자연주의자의 관점에서 미국 농부의 문제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 썼다. 시인 파운드(1885 - 1972)는 아이다호주에서 태어 났지만, 성인이 된 후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다. 그 작품은 복잡하며, 때로는 어둡고, 서양과 동양 모두 다른 예술 형태와 광범위한 문학에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파운드는 다른 많은 시인, 특히 다른 해외 거주자인 엘리엇(1888 - 1965)에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은 상징성 짙은 구조로 진행되는 간결하고, 지성에 호소하는 시를 썼다. 작품 《황무지》(The Waste Land)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사회를 일그러진 생각이 붕괴되고, 악몽에 시달리는 이미지로 표현 했다. 파운드의 작품을 닮은 엘리엇의 시는 고도로 암시적이고, 《황무지》의 몇몇 시집은 시인 자신에 의해 보충된 각주가 제공되었다. 1948년, 엘리엇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전후 사회에 대한 환멸[편집] 피츠제럴드, 칼 밴 베쿠텐 촬영, 1937년 미국 작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환멸을 표현했다. 피츠제럴드(1896 - 1940)의 단편이나 소설은 1920년대 공허한 기쁨, 굶주리고, 반항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피츠제럴드의 특징적인 주제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렬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젊은이의 금빛 꿈이 실패와 좌절 속에서 사라져가는 분위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피츠제럴드는 또 20세기 초 사회적 압력으로 심하게 위협받던 자유사회의 통합, 좋은 정부와 평화 등 미국독립선언에 담겨 있던 미국의 중요한 이상이 붕괴된 것도 표현하였다. 루이스(1885 -1951년, 1930년 노벨문학상)와 앤더슨(1876 - 1941)도 미국 생활을 비판하는 소설을 썼다. 파소스(1896 - 1970)는 전쟁을 배경으로 대공황까지 연결된 이야기인 《미합중국 3부작》을 썼다. 헤밍웨이(1899 - 1961)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앰불런스 운전기사로서 폭력과 죽음을 가까이에 체험하였고, 대학살에 의해서 추상적인 말이 가장 공허하고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작품에서 불필요한 말을 제거하고, 문장 구조를 단순화시켜, 구체적인 대상과 행동에 집중시켰다. 압력 아래에서의 우아함을 강조하는 도덕률을 충실하고, 그 주인공은 강하고, 과묵한 남자이지만, 여성은 약간 어색한 면이 많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무기여 잘있거라》는 그의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헤밍웨이는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대공황 시대의 문학[편집] 스타인벡 대공황 시대의 문학은 그 사회 비판에서 있어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스타인벡(1902 - 1968 )은 캘리포니아주 살리나스에서 태어나 그곳을 많은 소설의 무대로 등장시켰다. 그 스타일은 단순하고, 시사적인 면이 많아 독자의 공감을 불렀일으켰지만, 비평은 그렇지 않았다. 스타인벡은 종종 가난한 노동자 계급과 착실하고 정직한 삶을 위한 투쟁적인 글을 썼다. 그는 그 당시의 가장 사회 의식을 투철하게 가진 작가였다. 그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인 《분노의 포도》는 오클라호마주 출신으로 더 나은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가난한 가족 죠의 가정의 그린 강한 사회 지향적 소설이다. 이외에도 《토틸라 마을》(Tortilla Flat),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 《캐너리 로》(Cannery Row)와 《에덴의 동쪽》 등을 썼다. 스타인벡은 196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무산 계급파의 일부로 간주되는 다른 소설가로 너새니얼 웨스트(1903 - 1940), 올리브 티르포드 다간(1869 - 1968), 톰 크로마(1906 - 1969), 로버트 캐트웨르(1908 - 1978)와 에드워드 앤더슨이 있었다. 밀러(1891년 - 1980)가 파리에 쓰고, 간행했던 반자전적 소설이 미국에서 판금되었을 때, 1930년대의 미국 문학계에서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북회귀선》(Tropic of Cancer)과 《어두운 봄》(Black Spring)은 1962년까지 미국 내에서 판매와 출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그 주제와 스타일 혁신은 미국의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문학 (1945-1970)[편집] 미국의 모더니즘 문학[편집] 메일러, 칼 밴 벤첸 사진, 194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략적으로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전반까지의 시대는 미국사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몇 편의 작품이 출판된 시기였다. 보다 현실적인 모더니즘 문학의 마지막 몇사람과 함께 폭넓게 낭만주의 문학이 이 시대를 지배하였고,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되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심으로 그들에 주목해야 할 큰 영향을 주었다. 캐나다 태생이자, 시카고에서 자란 벨로(1915 - 2005)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수십 년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소설가가 되었다. 《오기 마치의 모험》(The Adventures of Augie March)이나 《비의 왕 핸드슨》(Henderson the Rain King)이라는 작품으로, 벨로는 미국 도시의 생생한 모습과 거기에 사는 전형적인 사람들을 그렸다. 벨로는 197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샐린저(1919 - 2010)의 《아홉 이야기》(Nine Stories)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플래스(1932 - 1963)의 《종 항아리》(The Bell Jar)까지 미국의 광기는 국민 문학 표현의 최전선에까지 나타났다. 《롤리타》를 썼던 나보코프(1899 - 1977)와 같은 이민 작가가 그 주제로 대두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비트닉(Beatnik)은 동양적인 관념이나 기분전환용 마약에 대해 그림으로써 그들 자신만의 스타일과 톤을 개발함으로써 그들의 부모세대인 잃어버린 세대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반체제적 리듬의 문학[편집] 비트 세대의 시와 소설은 대부분 뉴욕 컬럼비아 대학 주변에 형성된 지식인 서클에서 태어나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정립되어 시대의 것이 되었다. '비트'라는 말은 동시에 재즈 신의 반체제 문화적인 리듬에 사용되어 전후 사회의 보수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반항적 의미뿐 아니라 약물, 알코올, 철학과 종교, 특히 선(禪)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영적인 체험의 관심사에도 사용되었다. 긴즈버그(1926 - 1997)는 휘트먼류의 작품인 시 '하울'(Howl)에서 "나는 광기에 의해 파괴된 내 세대의 최고의 마음을 보았다"로 시작하여 이 운동의 분위기를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친구인 케루악(1922 - 1969)은 비트의 '들떠서 돌고, 너글너글하고 변덕스러운 생활양식'을, 많은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가장 인기 있던 소설 《길 위에서》로 기념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후시대에 전쟁 소설에 대해 미국에서는 문학적인 폭발이 있어났다. 메일러(1923 - 2007)의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The Naked and the Dead, 1948), 헬러(1923 - 1999)의 《캐치-22》(1961) 및 보니것(1922 - 2007)의 《도살장 5》(Slaughterhouse-Five, or The Children’s Crusade, 1969) 등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다. 바버라 가슨(1941 - )이 쓴 《맥버드》(MacBird)는 전쟁의 어리석음을 백일 하에 노출한 또 하나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전후 미국 문학의 지평[편집] 대조적으로 업다이크(1932년 -)는 미국 생활에서 보다 목가적인 면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을 발표하여 조용하지만 파괴적인 문체로 다가섰다. 1960년에 발표한 《달려라 토끼》(Rabbit, Run)는 그 성격 묘사와 미국 중산층의 생활상을 자세히 그렸으며, 발표와 동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서술에 현재 시제를 사용한 최초의 소설 중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앨리슨(1914 - 1994)의 1953년작 소설인 《투명인간》(Invisible Man)은 종전 후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가장 힘있는작품으로 바로 인정을 받았다. 이 소설은 북부 도시에 사는 흑인의 이야기이며, 당시 국내적으로 일반적으로 억압되었던 인종문제를 노출하여, 실존적인 성격 묘사를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오코너(1925 - 1964)도 트웨인과 같은 미국 문학사에서 선도적인 작가들이 중요시 여겼던 미국 문학의 "남부"라는 주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다. 그 작품은 《현명한 피》(Wise Blood, 1952)과 《폭력이 그것을 끌고 갔다》(The Violent Bear It Away, 1960), 《오르다 보면 한곳에 모이게 마련》(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 등은 가장 잘 알려진 단편이다. 그의 사후 1965년에 간행된 《오코너 단편집》이 있다.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 (1970-현재)[편집] 현대 미국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en:American poetry입니다. 현대 미국 소설[편집] 19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가장 잘 알려진 문학 분야는 포스트 모더니즘이지만, 그 호칭은 다양한 이견이 있다. 오늘날 현대 미국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카버(1938 - 1988), 로스(1933 -), 매카시(1933 -) 등이 있다. 현대 미국 극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en:Theater of the United States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인[편집] 1930년 싱클레어 루이스 1936년 유진 오닐 1938년 펄 벅 1949년 윌리엄 포크너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1962년 존 스타인벡 1976년 솔 벨로 1978년 아이작 싱어 1987년 조지프 브로드스키 1993년 토니 모리슨 같이 보기[편집] 영국 문학 미국 남부 문학 출처[편집] ↑ 필립 F. 귀라(Gura, Philip F.) 《미국 초월주의: 역사》(American Transcendentalism: A History). 뉴욕: 힐과 왕(New York: Hill and Wang), 2007: 7–8. ISBN 0-8090-3477-8 외부 링크[편집] 문학 포털 예일 대학교 English Course - 1945년 이후의 미국 소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웹사이트 A Student's History of American Literature (1902) by Edward Simonds Electronic Texts in American Studies vdeh 미국 미국 미국인 언어 국가 국기 수도 문화 음식 문학 축제 음악 드라마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유학 천연기념물 종교 공휴일 명절 자살 세계유산 스포츠 대학 목록 외국인 경제 교통 행정 구역 지리 주 주기 역사 법 연방 정부 정치 정당 대외 관계 대통령 전거 통제 NDL: 0056016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국_문학&oldid=24363955" 분류: 미국 문학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SuomiFrançais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മലയാളം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پنجابیPortuguêsРусский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venska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일 (일) 23: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미국 문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국 문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미국 문학(美國文學, American literature)이란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저술된 문학 작품을 가리키지만, 미국 영토 내에서가 아니라 미국 출신 작가가 해외에서 쓴 작품도 미국문학에 속한다. 목차 1 칼뱅주의 및 계몽주의 문학 (1620-1820) 1.1 초기 문학 1.2 식민지시대 1.3 독립혁명기 1.4 문학적 과도기 2 낭만주의 및 초월주의 문학 (1820-1865) 2.1 독창적인 미국 스타일 2.2 미국의 낭만주의 문학 2.3 초월주의 문학의 태동 3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 (1865-1914) 3.1 마크 트웨인 3.2 지역 문학가 3.3 제임스 4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문학 (1914-1945) 4.1 문학의 사회적 고발 4.2 전후 사회에 대한 환멸 4.3 대공황 시대의 문학 5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문학 (1945-1970) 5.1 미국의 모더니즘 문학 5.2 반체제적 리듬의 문학 5.3 전후 미국 문학의 지평 6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 (1970-현재) 6.1 현대 미국시 6.2 현대 미국 소설 6.3 현대 미국 극문학 7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인 8 같이 보기 9 출처 10 외부 링크 칼뱅주의 및 계몽주의 문학 (1620-1820)[편집] 초기 문학[편집] 존 스미스의 작품 〈버지니아, 뉴잉글랜드와 서머제도의 역사개관〉, 표지 콜럼버스가 1492년에 미대륙에 상륙한 이후에도, 영국은 오랫동안 이 신대륙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1607년에 처음으로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버지니아 회사는 이주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사유재산권을 인정했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담배 재배가 성공하자 점차 대농장주 중심의 경작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남부 특유의 봉건적 사회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뉴잉글랜드에서는 1620년 102명의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매사추세츠주의 해안에 상륙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개척했다. 또 1630년에는 윈스럽의 지도아래 보스턴을 중심으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를 만들었다. 얼마후 이 식민지와 기존에 건설한 플리머스 식민지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이 통합지역의 거주민들은 존 캘빈의 교리를 신앙의 기초로 하는 청교도 사회를 건설해 갔다. 그들은 또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하버드 대학을 설립했고 출판물의 인쇄를 위해 인쇄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이들 이주민의 대다수는 종교, 경제상의 이유로 신천지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로서 무엇보다도 식민지의 개척과 생활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본국의 문학을 바로 미대륙이라는 새로운 토양에 이식시킬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선주 민족에 남아있는 시가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없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미국문학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주로 기록문학, 종교문학 등이 보고문서, 역사서, 설교집, 자서전, 전기문, 일기 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식민지시대[편집] 미국 문학의 최초의 등장으로 인정되는 작품은 영국탐험가 존 스미스|스미스(1579-1631)가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건설을 기록한 《버지니아의 사정》(A True Relation of Virginia (1608))인데, 역사서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편,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총독 윈스럽의 일기("Journal")와 편지들, 플리머스 식민지 총독 브래드퍼드(1590-1657)의 《플리머스 식민지에 대해》 등도 귀중한 기록 문학으로 인정되고 있다. 종교 문학에 있어서는, 당대의 청교도 계관시인으로 불리던 위글워스(M. Wiggleworth, 1631-1703)의 시 《심판의 날》이 특히 유명하며, 64년간 목사직에서 종사했던 매더(1663-1728)의 "미국에서의 그리스도의 위업" (Magnalia Christ Americana (1702))는 그의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이신론의 공세에 밀려서 세가 약해졌던 청교도주의는 에드워즈(1703-1758)에 의해서 놀라운 종교부흥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청교도주의를 체계화한 그의 저술들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에드워즈와 대조적으로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였던 프랭클린(1706-1790)은 철저한 합리주의자로서 미국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활발하고 눈부신 활동을 하여 오늘날 미국식 직업윤리와 물질문명의 기반적 철학과 사상을 제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자서전" (Autobiography)은 신학중심의 시대에서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로 미국사회가 전환되어가는 시점이었던 당대의 정신사를 보여주고 있다. 독립혁명기[편집] 제임스타운의 식민지 건설이 시작된 이후, 약 150여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는 여러가지 반목과 대립이 나타났고, 드디어 독립전쟁이 발발하여 8년간의 전쟁 끝에 1783년에서야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 거주민들의 여론을 자극하고 환기시켜 혁명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저술들이 많이 나왔는데,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한 문인은 영국 출신의 페인(1737-1809)이었다. 그는 1776년 1월에 10만 부 이상 팔린 《상식》(Common Sense)을 출간하여 《미국 독립 혁명》의 사상적 중요성을 역설하고, 독립전쟁 중에도 《미국의 위기》 (The American Crisis, 1776-1783)라는 총서를 발행하여 미국민들의 사기와 위세를 진작시켰다. 이 시기에, 프랑스 출신인 생 장 드 크레브쿠르(St. Jean De Crevecoeur, 1735-1813)는 미국사회의 실상을 서간형식으로 묘사한 《어느 미국 농부의 편지》(Letters from an American Farmer, 1782)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한편,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두 번이나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던 시인 프레노(Philip Freneau, 1752-1832)는 미국적인 주제를 처음으로 시에 도입하여 미국의 자연을 노래하고 애국적인 시들을 많이 발표하여 ‘미국독립전쟁의 시인’으로 불리었다. 대체적으로, 이 시대의 미국문학은 영국 고전주의의 모방에 치우친 모습을 많이 드러냈으며 가치있는 순수문학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곧 다가올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태동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다. 문학적 과도기[편집] 제퍼슨 독립 전쟁이 끝나자, 해밀턴(1755 혹은 1757 - 1804), 매디슨(1751 - 1836)과 존 제이(1745 - 1829)의 《더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라는 수필은 미국 정부의 조직과 공화제 가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인 논쟁을 저술 하였다. 제퍼슨(1743 - 1826)이 쓴 《미국독립선언문》, 그리고 미국 헌법에 대한 영향력, 그 자서전 《버지니아주에 관한 주석》(Notes on the State of Virginia)과 많은 편지 등 초기 미국의 가장 재능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그 평가를 굳히고 있다. 에임스(1758 - 1808), 오티스(1725 - 1783)와 헨리(1736 - 1799)도 그 정치적 저작물이나 연설에 중점을 두었다. 새롭게 탄생한 최고 국가의 초기 문학 대다수는 기존의 문학 장르에서 미국의 소리를 직접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소설에 반영되었다. 유럽 형식과 스타일이 미국에 옮겨오면 많은 비평가들은 그들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낭만주의 및 초월주의 문학 (1820-1865)[편집] 독창적인 미국 스타일[편집] 어빙 1783년 《파리 조약》을 거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인들은 이 정치적 독립에 걸맞은 지적, 정신적 독립을 점차 원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미국문학 창조의 욕구도 이에 따라 활성화되었다. 미국의 낭만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 미국민 특유의 개척정신, 미국의 자연과 과거, 복음주의 종교 등 주로 미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사정에 영향을 받아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이는 혁명기에 이미 그 싹을 보이고 있었지만 문학사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로 들어선 이후였고, 그 정점은 1830년 - 1830년이었다. 1812년 전쟁과 미국만의 문학과 문화를 만들어 내자는 점점 커지는 욕구로 많은 새로운 핵심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 어빙, 브라이언트, 쿠퍼, 그리고 포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미국 최초의 전문 직업작가로서 활동한 어빙은 정기간행물 《샐마군디》(Salmagundi)에서 같이 유머러스한 작품과 《뉴욕의 역사, 디트리히 니커보커》(A History of New York, by Diedrich Knickerbocker, 1809)에서와 같이 풍자적인 작품을 썼다. 그는 1819년에 《스케치북》(Sketch Book)을 발표하여 미국 작가로서의 명성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날렸다. 뉴잉글랜드의 대표적 시인으로 유명했던 브라이언트는 초기 로맨틱하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시를 써냈는데, 다양한 창작과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자신의 시를 통해 미국 낭만주의 흐름의 기틀을 잡고 제시하였다. 이것은 유럽의 원류와는 거리가 먼 진화였다. 1832년에 포는 《붉은 죽음의 가면》(The Masque of the Red Death), 《함정과 진자》(The Pit and the Pendulum), 《어셔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The Murders in the Rue Morgue) 등과 같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숨겨진 인간 심리의 정도를 탐험하고, 미스터리와 판타지 소설의 경계로 진일보한 것이었다. 쿠퍼가 5부작에 걸쳐 발표한 《모히칸 족의 최후》가 포함되어 있는 《네티 범포》(Natty Bumppo)에 대한 가죽스타킹 이야기는 미국과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그는 그것을 통해 미국 변경지역과 인디언들을 등장시킨 전기적 모험소설을 창조하였다. 뉴잉글랜드의 세바 스미스와 벤자민 P. 쉴라버 그리고 데비 크로켓, 오거스트 볼드윈 롱스트리트, 존슨 J. 후퍼, 토마스 뱅스 토페, 그리고 미국 프런티어에 대해 글을 쓴 조지 워싱턴 해리스 등도 유머러스하고 인기있는 작가였다. 보스톤 브라만(Boston Brahmin)은 하버드 대학과 매사추세츠 캠브릿에 있는 작가단체였다. 핵심 멤버는 제임스 러셀 로웰, 롱펠로 그리고 올리버 웬델 홈즈 시니어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매티슨(F. O. Matthiessen, 1902-1950)은 저서 《미국의 르네상스》(American Renaissance, 1941)에서 이 시기를 《미국의 르네상스》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셰익스피어가 활약하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영국 르네상스에 견주는 미국인의 문화적 자부심이 드러나있다. 미국 문학사에 있어서 낭만주의 시대는 주로 19세기 초에서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날 무렵까지를 일컫는다. 미국의 낭만주의 문학[편집] 에머슨. 콩코드(Concord)의 철인이라고 불리었던 사상가 에머슨(1803-1882)은 초월주의라는 명칭 아래 그를 중심으로 모인 문인들과 함께 미국 초월주의라는 철학적 조류를 만들고 이끌었다. 1836년 "자연"(Nature) 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개인주의의 범신론적 신비주의의 결합과 그 초월적 문학화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강연문인 "미국학자론" (The American Scholar, 1837)은 당대에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서 받아들여졌다. 당대의 대표적인 초월주의자였던 소로(1817-1862)는 그의 대표작 《월든》(1854)에서 당대 급부상하던 산업주의, 물질주의에 대항한 적극적인 문학적 시도를 부여주었으며, 정신적인 자연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깊이있는 문학적 성찰을 보여주었다. 그의 급진적인 글쓰기는 미국인의 성격에 내재하는 뿌리 깊은 개인주의 성향을 표현하고 있다. 초월주의에 영향을 받은 다른 작가들로는 올컷, 풀러, 리플레이, 브라운슨, 베리가 있다.[1] 미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포(1809-1849)는시, 단편소설, 추리소설, 평론 등 다방면에서 특출하고 독보적인 문학세계를 그려내었다. 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포우는 그의 뒤를 이은 인간 심연의 암흑세계에 대한 문학적, 철학적 통찰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호손과 멜빌의 어두운 로맨스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미와 비정산, 괴기와 공포에 대한 탐구는 후대의 많은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초월주의 문학의 태동[편집] 호손. 1850년대 초에 주요 작품들을 발표했던 호손(1804-1864)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지나칠 정도로 낙관주의였던 에머슨의 사상과는 반대로 인간 심연의 암흑의 힘을 탐색하고 문학화하려 하였다. 다양의 심리적 죄의 양상과 갈등의 이면들을 그려낸 그의 단편 소설들과 로맨스들은 미국낭만주의의 정점의 깊은 심연을 드러내었다. 그의 대표작 《주홍글씨》(1850)는 미국의 역사적 무의식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으며 개개인들의 미국사회에서 겪는 도덕적, 정신적 갈등과 깊이의 심연을 깊은 통찰력으로 드러내주었다. 멜빌(1819-1891)은 호손과 더불어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중의 한명이지만 그의 생애에서는 결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깊이있게 받지 못한 멜빌은 젊은 시절 남태평양에서의 모험을 문학의 소재로 삼았으며, 폴리네이사 원주민들에게 사로잡힌 실제 경험담을 처녀작인 《타이피》(Typee (1846}}로 당시 미국과 영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비딕》에서는 고래 사냥을 떠나는 모험은 그런 강박 관념과 악한 본성, 그리고 그러한 요소에 저항하는 인간의 투쟁 등이 매개체가 되었다. 또 다른 걸작 중의 하나인 단편 소설 《빌리 버드》 (Billy Budd)에서는 멜빌이 전쟁 때 배를 타야 하는 의무와 열정에 대한 갈등을 희화화 시킨다. 일단 대중적인 작가로 안착을 하는 듯 보였으나, 그는 점차 역사적, 철학적 주제들을 깊이있게 파고 들어갔으며 다양한 문학 주제와 양식, 형식 등을 과감하게 실험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잃어갔다. 휘트먼, 1856. 휘트먼(1819-1892)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도시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문학활동에 참여하였다. 21세가 되기 직전에 그는 맨해튼에서 문예주간지에 글을 기고하며 본격적인 문인활동을 시작하였다. 1848년 여름부터 휘트먼은 뉴욕에서 실험적인 시들을 집필하기 시작하였고 1855년 7월에 이르러 그의 대표작인 《풀잎》 ("Leaves of Grass" (1855)을 발표하였다.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 (1865-1914)[편집] 마크 트웨인[편집] 트웨인, 1907. 트웨인(1835 - 1910)은 미국 동부 해안에서 떨어진 미주리주 경계에서 태어난 미국인 작가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토지를 무대로하는 그의 책 자서전 《미시시피의 삶》(Life on the Mississippi)과 소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다. 이것이 미국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그의 등장 인물은 방언과 신조어 및 지역의 억양까지 사용하여 실제 사람처럼 말하고, 분명히 미국 사람처럼 보인다. 지역 문학가[편집] 그 외 지역차나 방언에 흥미를 가진 작가로서는, 조지 W 케이블(1844 - 1925), 토마스 넬슨 페이지(1853 - 1922), 죠엘 챈들러 해리스(1848 - 1908), 메어리 노아이유 머프리(1850 - 1922, 필명 찰즈 에그버트 크래덕), 새라 온 쥬엣트(1849 - 1909), 메어리 E 윌킨스 프리맨(1852 - 1930), 헨리 커일러 버너(1855 - 1896) 및 오 헨리(1862 - 1910)가 있다. 하우얼스도 《사일러스 레이펌의 출세》(The Rise of Silas Lapham)와 같은 소설과 〈애틀랜틱 먼슬리〉의 편집자 일을 통해 리얼리스트의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제임스[편집] 제임스(1843 - 1916)는 구세계 - 신세계에 대해 직접 쓰게 됨으로써 딜레마에 직면했다. 제임스는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후 대부분 영국에서 보냈다. 그의 많은 소설들이 미국에 살고 있거나 또는 유럽에 여행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제임스의 소설은 그 절제되고, 고급스런 문장과 심리적, 정신적 패턴 분석은 아찔한 경향이 있다. 유럽에 온 매력적인 미국인 소녀를 그린 소설 《데이지 밀러》(Daisy Miller)와 수수께끼 같은 괴담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은 아직도 접하기 쉬운 작품이다.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문학 (1914-1945)[편집] 문학의 사회적 고발[편집] 헤밍웨이, 제1차 세계대전의 군복차림 20세기 초에 미국의 소설가는 소설의 사회적인 영역을 상류에서 하류까지 넓혀 나갔다. 때때로 리얼리즘의 성격을 가진 작품도 등장하였다. 워튼(1862 - 1937)은 단편이나 소설에서 그녀가 자란 미국 동부 해안 상류 계급 사회를 관찰했다. 그 걸작 중에서도 《순수의 시대》(1920)는 매력적인 외부인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수용되는 여자와의 결혼을 선택한 한 남자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당시 남북 전쟁 소설 《붉은 무공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로 알려진 크레인(1871년 - 1900)는 《거리의 여자 매기》(Maggie : A Girl of the Streets, 1893 )에서 뉴욕 창녀의 생애를 그렸다. 또한 드라이저(1871 - 1945)는 《시스터 캐리》(Sister Carrie, 1900)에서 시카고로 이사를 와서 연인이 될 시골 출신의 젊은 여성을 그렸다. 햄린 갈랜드(1861년 - 1940)와 프랭크 노리스(1870 - 1902)는 자연주의자의 관점에서 미국 농부의 문제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 썼다. 시인 파운드(1885 - 1972)는 아이다호주에서 태어 났지만, 성인이 된 후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다. 그 작품은 복잡하며, 때로는 어둡고, 서양과 동양 모두 다른 예술 형태와 광범위한 문학에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파운드는 다른 많은 시인, 특히 다른 해외 거주자인 엘리엇(1888 - 1965)에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은 상징성 짙은 구조로 진행되는 간결하고, 지성에 호소하는 시를 썼다. 작품 《황무지》(The Waste Land)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사회를 일그러진 생각이 붕괴되고, 악몽에 시달리는 이미지로 표현 했다. 파운드의 작품을 닮은 엘리엇의 시는 고도로 암시적이고, 《황무지》의 몇몇 시집은 시인 자신에 의해 보충된 각주가 제공되었다. 1948년, 엘리엇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전후 사회에 대한 환멸[편집] 피츠제럴드, 칼 밴 베쿠텐 촬영, 1937년 미국 작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환멸을 표현했다. 피츠제럴드(1896 - 1940)의 단편이나 소설은 1920년대 공허한 기쁨, 굶주리고, 반항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피츠제럴드의 특징적인 주제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렬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젊은이의 금빛 꿈이 실패와 좌절 속에서 사라져가는 분위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피츠제럴드는 또 20세기 초 사회적 압력으로 심하게 위협받던 자유사회의 통합, 좋은 정부와 평화 등 미국독립선언에 담겨 있던 미국의 중요한 이상이 붕괴된 것도 표현하였다. 루이스(1885 -1951년, 1930년 노벨문학상)와 앤더슨(1876 - 1941)도 미국 생활을 비판하는 소설을 썼다. 파소스(1896 - 1970)는 전쟁을 배경으로 대공황까지 연결된 이야기인 《미합중국 3부작》을 썼다. 헤밍웨이(1899 - 1961)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앰불런스 운전기사로서 폭력과 죽음을 가까이에 체험하였고, 대학살에 의해서 추상적인 말이 가장 공허하고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작품에서 불필요한 말을 제거하고, 문장 구조를 단순화시켜, 구체적인 대상과 행동에 집중시켰다. 압력 아래에서의 우아함을 강조하는 도덕률을 충실하고, 그 주인공은 강하고, 과묵한 남자이지만, 여성은 약간 어색한 면이 많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무기여 잘있거라》는 그의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헤밍웨이는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대공황 시대의 문학[편집] 스타인벡 대공황 시대의 문학은 그 사회 비판에서 있어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스타인벡(1902 - 1968 )은 캘리포니아주 살리나스에서 태어나 그곳을 많은 소설의 무대로 등장시켰다. 그 스타일은 단순하고, 시사적인 면이 많아 독자의 공감을 불렀일으켰지만, 비평은 그렇지 않았다. 스타인벡은 종종 가난한 노동자 계급과 착실하고 정직한 삶을 위한 투쟁적인 글을 썼다. 그는 그 당시의 가장 사회 의식을 투철하게 가진 작가였다. 그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인 《분노의 포도》는 오클라호마주 출신으로 더 나은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가난한 가족 죠의 가정의 그린 강한 사회 지향적 소설이다. 이외에도 《토틸라 마을》(Tortilla Flat),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 《캐너리 로》(Cannery Row)와 《에덴의 동쪽》 등을 썼다. 스타인벡은 196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무산 계급파의 일부로 간주되는 다른 소설가로 너새니얼 웨스트(1903 - 1940), 올리브 티르포드 다간(1869 - 1968), 톰 크로마(1906 - 1969), 로버트 캐트웨르(1908 - 1978)와 에드워드 앤더슨이 있었다. 밀러(1891년 - 1980)가 파리에 쓰고, 간행했던 반자전적 소설이 미국에서 판금되었을 때, 1930년대의 미국 문학계에서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북회귀선》(Tropic of Cancer)과 《어두운 봄》(Black Spring)은 1962년까지 미국 내에서 판매와 출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그 주제와 스타일 혁신은 미국의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문학 (1945-1970)[편집] 미국의 모더니즘 문학[편집] 메일러, 칼 밴 벤첸 사진, 194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략적으로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전반까지의 시대는 미국사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몇 편의 작품이 출판된 시기였다. 보다 현실적인 모더니즘 문학의 마지막 몇사람과 함께 폭넓게 낭만주의 문학이 이 시대를 지배하였고,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되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심으로 그들에 주목해야 할 큰 영향을 주었다. 캐나다 태생이자, 시카고에서 자란 벨로(1915 - 2005)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수십 년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소설가가 되었다. 《오기 마치의 모험》(The Adventures of Augie March)이나 《비의 왕 핸드슨》(Henderson the Rain King)이라는 작품으로, 벨로는 미국 도시의 생생한 모습과 거기에 사는 전형적인 사람들을 그렸다. 벨로는 197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샐린저(1919 - 2010)의 《아홉 이야기》(Nine Stories)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플래스(1932 - 1963)의 《종 항아리》(The Bell Jar)까지 미국의 광기는 국민 문학 표현의 최전선에까지 나타났다. 《롤리타》를 썼던 나보코프(1899 - 1977)와 같은 이민 작가가 그 주제로 대두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비트닉(Beatnik)은 동양적인 관념이나 기분전환용 마약에 대해 그림으로써 그들 자신만의 스타일과 톤을 개발함으로써 그들의 부모세대인 잃어버린 세대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반체제적 리듬의 문학[편집] 비트 세대의 시와 소설은 대부분 뉴욕 컬럼비아 대학 주변에 형성된 지식인 서클에서 태어나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정립되어 시대의 것이 되었다. '비트'라는 말은 동시에 재즈 신의 반체제 문화적인 리듬에 사용되어 전후 사회의 보수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반항적 의미뿐 아니라 약물, 알코올, 철학과 종교, 특히 선(禪)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영적인 체험의 관심사에도 사용되었다. 긴즈버그(1926 - 1997)는 휘트먼류의 작품인 시 '하울'(Howl)에서 "나는 광기에 의해 파괴된 내 세대의 최고의 마음을 보았다"로 시작하여 이 운동의 분위기를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친구인 케루악(1922 - 1969)은 비트의 '들떠서 돌고, 너글너글하고 변덕스러운 생활양식'을, 많은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가장 인기 있던 소설 《길 위에서》로 기념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후시대에 전쟁 소설에 대해 미국에서는 문학적인 폭발이 있어났다. 메일러(1923 - 2007)의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The Naked and the Dead, 1948), 헬러(1923 - 1999)의 《캐치-22》(1961) 및 보니것(1922 - 2007)의 《도살장 5》(Slaughterhouse-Five, or The Children’s Crusade, 1969) 등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다. 바버라 가슨(1941 - )이 쓴 《맥버드》(MacBird)는 전쟁의 어리석음을 백일 하에 노출한 또 하나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전후 미국 문학의 지평[편집] 대조적으로 업다이크(1932년 -)는 미국 생활에서 보다 목가적인 면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을 발표하여 조용하지만 파괴적인 문체로 다가섰다. 1960년에 발표한 《달려라 토끼》(Rabbit, Run)는 그 성격 묘사와 미국 중산층의 생활상을 자세히 그렸으며, 발표와 동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서술에 현재 시제를 사용한 최초의 소설 중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앨리슨(1914 - 1994)의 1953년작 소설인 《투명인간》(Invisible Man)은 종전 후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가장 힘있는작품으로 바로 인정을 받았다. 이 소설은 북부 도시에 사는 흑인의 이야기이며, 당시 국내적으로 일반적으로 억압되었던 인종문제를 노출하여, 실존적인 성격 묘사를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오코너(1925 - 1964)도 트웨인과 같은 미국 문학사에서 선도적인 작가들이 중요시 여겼던 미국 문학의 "남부"라는 주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다. 그 작품은 《현명한 피》(Wise Blood, 1952)과 《폭력이 그것을 끌고 갔다》(The Violent Bear It Away, 1960), 《오르다 보면 한곳에 모이게 마련》(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 등은 가장 잘 알려진 단편이다. 그의 사후 1965년에 간행된 《오코너 단편집》이 있다.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 (1970-현재)[편집] 현대 미국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en:American poetry입니다. 현대 미국 소설[편집] 19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가장 잘 알려진 문학 분야는 포스트 모더니즘이지만, 그 호칭은 다양한 이견이 있다. 오늘날 현대 미국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카버(1938 - 1988), 로스(1933 -), 매카시(1933 -) 등이 있다. 현대 미국 극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en:Theater of the United States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인[편집] 1930년 싱클레어 루이스 1936년 유진 오닐 1938년 펄 벅 1949년 윌리엄 포크너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1962년 존 스타인벡 1976년 솔 벨로 1978년 아이작 싱어 1987년 조지프 브로드스키 1993년 토니 모리슨 같이 보기[편집] 영국 문학 미국 남부 문학 출처[편집] ↑ 필립 F. 귀라(Gura, Philip F.) 《미국 초월주의: 역사》(American Transcendentalism: A History). 뉴욕: 힐과 왕(New York: Hill and Wang), 2007: 7–8. ISBN 0-8090-3477-8 외부 링크[편집] 문학 포털 예일 대학교 English Course - 1945년 이후의 미국 소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웹사이트 A Student's History of American Literature (1902) by Edward Simonds Electronic Texts in American Studies vdeh 미국 미국 미국인 언어 국가 국기 수도 문화 음식 문학 축제 음악 드라마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유학 천연기념물 종교 공휴일 명절 자살 세계유산 스포츠 대학 목록 외국인 경제 교통 행정 구역 지리 주 주기 역사 법 연방 정부 정치 정당 대외 관계 대통령 전거 통제 NDL: 0056016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국_문학&oldid=24363955" 분류: 미국 문학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SuomiFrançaisहिन्दी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മലയാളം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پنجابیPortuguêsРусский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venska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일 (일) 23: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QEMU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QEMU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QEMU 원저자 패브리스 벨라드(Fabrice Bellard) 개발자 QEMU 팀:Fabrice Bellard, Paul Brook 등. 최근 버전 4.0.0 / 2019년 4월 24일 (2달 전)(2019-04-24)[1] 운영 체제 크로스 플랫폼 종류 하이퍼바이저 라이선스 GNU GPL v2 웹사이트 http://www.qemu.org/ QEMU는 가상화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다. Fabrice Bellard가 만들었으며 x86 이외의 기종을 위해 만들어진 소프트웨어 스택 전체를 가상머신 위에서 실행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동적 변환기(Portable dynamic translation)를 사용한다. 목차 1 허가서 2 지원 모드 3 기능 4 가상 구현 시스템 5 가속기 5.1 KQEMU 5.2 QVM86 6 최신 버전 7 함께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허가서[편집] 여기 를 볼 것. 소프트웨어 자체, 가속기: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가상 CPU 중심부 라이브러리: GNU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드웨어 장치 모듈: BSD 허가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에서 실행할 때는 독점 라이브러리인 FMOD를 쓰기도 한다. 지원 모드[편집] QEMU는 두 가지 운영 모드가 있다: 사용자 모드 에뮬레이션 이 모드에서 QEMU는 다른 명령어 집합으로 컴파일된 단일 리눅스, 다윈/맥 오에스 X 프로세스를 실행할 수 있다. 시스템 콜은 엔디언과 32/64비트 미일치를 위해 주소 변환 된다. 와인과 DOSEMU는 QEMU의 주요 대상이다. 완전한 컴퓨터 시스템 모드 에뮬레이션 QEMU 는 프로세서와 가상 주변 기기들을 포함한 완전한 컴퓨터 시스템을 에뮬레이트한다. 한 컴퓨터에 여러 개의 가상 컴퓨터의 가상 호스팅을 제공하는 데 쓸 수 있다. QEMU는 리눅스 윈도, 도스, BSD와 같은 많은 게스트 운영 체제들을 시동할 수 있다. 여러 개의 x86, amd64, alpha, mips, 그리고 sparc과 같은 하드웨어 플랫폼들의 에뮬레이션을 지원한다.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LGPL을 따른다. - 사용자 모드 에뮬레이션은 GPL을 따른다. (윈도 포트가 FMOD 사운드 계층을 사용하지만)[2]. 기능[편집] IA-32 (x86) PC, AMD64 PC, MIPS R4000, 선 SPARC sun4m, 선 SPARC sun4u, ARM 개발 보드 (Integrator/CP, Versatile/PB), SH4 SHIX 보드, 파워피씨 (PReP 및 파워 매킨토시), ETRAX CRIS 아키텍처의 에뮬레이션 지원. 호스트 시스템과 에뮬레이트 시스템 두 곳에서 다른 아키텍처 지원 (자세한 것은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속도 개선: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은 실시간에 가깝게 실행할 수 있다. Copy-On-Write 디스크 이미지 포맷 추가. 수 기가바이트의 가상 드라이브를 선언할 수 있으며, 이 드라이브의 디스크 이미지는 실제로 사용되는 만큼만 용량을 차지할 것이다. 오버레이 이미지 추가. 게스트 운영 체제의 스냅샷을 유지하고 별도의 이미지 파일에 변경 사항을 기록할 수 있다. 게스트 운영 체제에 문제가 생기면 해당 스냅샷으로 되돌릴 수 있다. 다른 아키텍처에서 돌아가는 리눅스 바이너리 파일 실행 지원. 컴퓨터의 상태를 저장하고 저장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가상 네트워크 카드 에뮬레이션. SMP 지원. 게스트 운영 체제는 패치나 수정이 필요 없다. 0.11.x 판까지는 KQEMU 커널 모듈이 쓰일 때 성능이 개선되나, 그 이후 판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명령 줄 도구는 X11을 돌리지 않고도 QEMU를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게 도와 준다. 가상으로 구현된 컴퓨터를 통합 VNC 서버를 거쳐 원격으로 제어한다. USB 태블릿 지원: "-usb -usbdevice tablet"로 활성화하여 사용할 수 있다. 관리자 권한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 가상 구현 시스템[편집] QEMU는 CPU를 제외하고 다음의 시스템을 가상으로 구현한다. i440FX 호스트 PCI 브리지, PIIX3 PCI to ISA 브리지 시러스 CLGD 5446 PCI VGA 카드 또는 Bochs VESA 확장을 지원하는 더미 VGA 카드 (비표준 모드를 포함하는 하드웨어 수준). PS/2 마우스 및 키보드 하드 디스크와 CD-ROM을 지원하는 2 개의 PCI IDE 인터페이스 플로피 디스크 NE2000 PCI 네트워크 어댑터 직렬 포트 애드립(OPL2) - 야마하 YM3812 호환 칩 크리에이티브 사운드 블라스터 16 사운드 카드 엔소닉 오디오PCI ES1370 사운드 카드 그라비스 울트라사운드 인텔 HD 오디오[3] PCI UHCI USB 컨트롤러 및 가상 USB 허브. 가속기[편집] KQEMU[편집] 페브리스 벨러드(Fabrice Bellard)는 KQEMU (QEMU 가속기)라는 이름으로 리눅스 커널 모듈을 작성하였다. i386 플랫폼에서 i386 에뮬레이션 속도를 눈에 띄게 개선해 준다. 사용자 모드 코드를 호스트 컴퓨터의 CPU에서 바로 실행하고 커널 모드와 리얼 모드 코드에만 주변 기기와 프로세서의 에뮬레이션을 사용함으로써 속도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 KQEMU는 또 호스트 CPU에서 커널 모드 코드의 일부를 실행하는 커널 에뮬레이션 모드를 지원한다. QEMU의 가속기 모듈인 KQEMU는 원래 무료로 배포되긴 했지만, 클로즈드 소스 제품으로 공개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 2월 5일에 버전 1.3.0pre10이 공개되면서[4] GNU 일반 공중 라이선스를 통해 소스가 공개되었다. KQEMU는 Win4Lin Pro Desktop 제품을 통해 Win4Lin으로 라이선스되어 왔다. KVM과 달리, KQEMU는 호스트 CPU가 하드웨어 가상화를 지원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게스트 운영 체제의 코드를 실행할 수 있고, 나중에 하드웨어 확장 지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5], 0.12.0 판 이후 QEMU에서 기본으로 확장 메모리를 지원(large memory supported)하면서 KQEMU 지원을 중단하였다. QVM86[편집] QVM86은 QEMU 에뮬레이터에 x86 가상화 기능을 제공하는 리눅스 커널 모듈이었다. 가상화는 CPU 보호 계획을 사용하여 권한 이벤트를 가로채거나 가상으로 구현하여 에뮬레이션 코드가 호스트 CPU에 네이티브로 실행할 수 있게 도와 준다. GNU GPLv2 라이선스로 공개되었다. 원래 GPL 라이선스의 클로즈드 소스 KQEMU의 대안으로 개발되었다. QVM86의 개발자는 버추얼박스의 공개로 인해 2007년 1월 21일에 개발을 중단하였다. 최신 버전[편집] 위치는 공식 저장소, 기종은 x86, 버전은 최신 안정 버전 기준입니다. 공식 저장소: 0.11.0-rc1(2009년 7월 30일 출시) 데비안: 0.9.1-10lenny1 우분투(통상): 0.10.0-1ubuntu1 우분투(장기 지원 - dapper): 0.8.0-3ubuntu1 우분투(장기 지원 - hardy): 0.9.1-1ubuntu1 페도라: 0.10.6 오픈수세: 0.10.1 아치: 0.10.6-1 젠투: 0.11.1 함께 보기[편집] 가상 머신 FreeOsZoo OpenBIOS QEMU 포트와 프론트엔드 Q QVM86 Win4Lin 다윈 다른 가상 머신 Bochs Cooperative Linux KVM Microsoft Virtual PC Parallels Workstation Simics User-mode Linux VirtualBox VMware 각주[편집] ↑ “qemu.git/summary”. 2018년 1월 15일에 확인함.  ↑ FMOD music & sound effects system ↑ “ChangeLog/0.14”. 2011년 8월 8일에 확인함.  ↑ KQEMU 1.3.0pre10 released - under the GPL [LWN.net] ↑ https://web.archive.org/web/20070206215404/http://fabrice.bellard.free.fr/qemu/kqemu-tech.html#SEC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QEMU QEMU 홈페이지 QEMU 포럼 윈도에서의 QEMU 우분투에서의 QEMU 오픈솔라리스를 위한 QEMU 젠투에서의 QEMU QVM86 프로젝트 페이지 QEMU 포럼에서의 QVM86 vdeh가상화 소프트웨어플랫폼 가상화 소프트웨어 비교하드웨어가상화(하이퍼바이저)네이티브 Adeos CP/CMS 하이퍼-V KVM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가상화 LDoms / 오라클 VM 서버 포 SPARC LynxSecure SIMMON VM웨어 ESXi VM웨어 v스피어 v클라우드 VM웨어 인프라스트럭처 젠 오라클 VM 서버 포 x86 XenClient XtratuM z/VM 호스트 방식특수한 방식 Basilisk II bhyve Bochs Cooperative Linux 도스박스 DOSEMU L4Linux 맥-온-리눅스 맥-온-맥 PCem SheepShaver SIMH Veertu 윈도우 온 윈도우 가상 도스 머신 Win4Lin 독립 방식 마이크로소프트 버추얼 서버 페러럴즈 워크스테이션 페러럴즈 데스크톱 페러럴즈 서버 포 맥 피어PC QEMU 버추얼박스 버추얼 아이언 VM웨어 퓨전 VM웨어 플레이어 VM웨어 서버 VM웨어 워크스테이션 윈도우 가상 PC 도구 Ganeti oVirt 버추얼 머신 매니저 OS 수준가상화 cgroups 기반 CoreOS lmctfy 리눅스-VServer LXC 도커 OpenVZ FreeBSD jail iCore Virtual Accounts 쿠버네티스 리눅스 네임스페이스 솔라리스 컨테이너 워크로드 파티션 데스크톱가상화 시트릭스 젠앱 시트릭스 젠데스크톱 리모트 데스크톱 서비스 VM웨어 호라이즌 뷰 응용 프로그램가상화 Ceedo 시트릭스 시스템즈 달빅 인스톨프리 마이크로소프트 앱-V 리모트 데스크톱 서비스 스푼 시만텍 워크스페이스 버추얼라이제이션 VM웨어 씬앱 ZeroVM 네트워크가상화 DOVE NVGRE 오픈 v스위치 버추얼 시큐리티 스위치 VXLAN 관련 항목: 에뮬레이터 목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QEMU&oldid=24308826" 분류: 가상화 소프트웨어자유 소프트웨어안드로이드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리눅스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윈도우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X86 에뮬레이터크로스 플랫폼 자유 소프트웨어자유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자유 가상화 소프트웨어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吴语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9일 (수) 07:5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QEMU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QEMU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QEMU 원저자 패브리스 벨라드(Fabrice Bellard) 개발자 QEMU 팀:Fabrice Bellard, Paul Brook 등. 최근 버전 4.0.0 / 2019년 4월 24일 (2달 전)(2019-04-24)[1] 운영 체제 크로스 플랫폼 종류 하이퍼바이저 라이선스 GNU GPL v2 웹사이트 http://www.qemu.org/ QEMU는 가상화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다. Fabrice Bellard가 만들었으며 x86 이외의 기종을 위해 만들어진 소프트웨어 스택 전체를 가상머신 위에서 실행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동적 변환기(Portable dynamic translation)를 사용한다. 목차 1 허가서 2 지원 모드 3 기능 4 가상 구현 시스템 5 가속기 5.1 KQEMU 5.2 QVM86 6 최신 버전 7 함께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허가서[편집] 여기 를 볼 것. 소프트웨어 자체, 가속기: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가상 CPU 중심부 라이브러리: GNU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드웨어 장치 모듈: BSD 허가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에서 실행할 때는 독점 라이브러리인 FMOD를 쓰기도 한다. 지원 모드[편집] QEMU는 두 가지 운영 모드가 있다: 사용자 모드 에뮬레이션 이 모드에서 QEMU는 다른 명령어 집합으로 컴파일된 단일 리눅스, 다윈/맥 오에스 X 프로세스를 실행할 수 있다. 시스템 콜은 엔디언과 32/64비트 미일치를 위해 주소 변환 된다. 와인과 DOSEMU는 QEMU의 주요 대상이다. 완전한 컴퓨터 시스템 모드 에뮬레이션 QEMU 는 프로세서와 가상 주변 기기들을 포함한 완전한 컴퓨터 시스템을 에뮬레이트한다. 한 컴퓨터에 여러 개의 가상 컴퓨터의 가상 호스팅을 제공하는 데 쓸 수 있다. QEMU는 리눅스 윈도, 도스, BSD와 같은 많은 게스트 운영 체제들을 시동할 수 있다. 여러 개의 x86, amd64, alpha, mips, 그리고 sparc과 같은 하드웨어 플랫폼들의 에뮬레이션을 지원한다.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LGPL을 따른다. - 사용자 모드 에뮬레이션은 GPL을 따른다. (윈도 포트가 FMOD 사운드 계층을 사용하지만)[2]. 기능[편집] IA-32 (x86) PC, AMD64 PC, MIPS R4000, 선 SPARC sun4m, 선 SPARC sun4u, ARM 개발 보드 (Integrator/CP, Versatile/PB), SH4 SHIX 보드, 파워피씨 (PReP 및 파워 매킨토시), ETRAX CRIS 아키텍처의 에뮬레이션 지원. 호스트 시스템과 에뮬레이트 시스템 두 곳에서 다른 아키텍처 지원 (자세한 것은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속도 개선: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은 실시간에 가깝게 실행할 수 있다. Copy-On-Write 디스크 이미지 포맷 추가. 수 기가바이트의 가상 드라이브를 선언할 수 있으며, 이 드라이브의 디스크 이미지는 실제로 사용되는 만큼만 용량을 차지할 것이다. 오버레이 이미지 추가. 게스트 운영 체제의 스냅샷을 유지하고 별도의 이미지 파일에 변경 사항을 기록할 수 있다. 게스트 운영 체제에 문제가 생기면 해당 스냅샷으로 되돌릴 수 있다. 다른 아키텍처에서 돌아가는 리눅스 바이너리 파일 실행 지원. 컴퓨터의 상태를 저장하고 저장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가상 네트워크 카드 에뮬레이션. SMP 지원. 게스트 운영 체제는 패치나 수정이 필요 없다. 0.11.x 판까지는 KQEMU 커널 모듈이 쓰일 때 성능이 개선되나, 그 이후 판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명령 줄 도구는 X11을 돌리지 않고도 QEMU를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게 도와 준다. 가상으로 구현된 컴퓨터를 통합 VNC 서버를 거쳐 원격으로 제어한다. USB 태블릿 지원: "-usb -usbdevice tablet"로 활성화하여 사용할 수 있다. 관리자 권한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 가상 구현 시스템[편집] QEMU는 CPU를 제외하고 다음의 시스템을 가상으로 구현한다. i440FX 호스트 PCI 브리지, PIIX3 PCI to ISA 브리지 시러스 CLGD 5446 PCI VGA 카드 또는 Bochs VESA 확장을 지원하는 더미 VGA 카드 (비표준 모드를 포함하는 하드웨어 수준). PS/2 마우스 및 키보드 하드 디스크와 CD-ROM을 지원하는 2 개의 PCI IDE 인터페이스 플로피 디스크 NE2000 PCI 네트워크 어댑터 직렬 포트 애드립(OPL2) - 야마하 YM3812 호환 칩 크리에이티브 사운드 블라스터 16 사운드 카드 엔소닉 오디오PCI ES1370 사운드 카드 그라비스 울트라사운드 인텔 HD 오디오[3] PCI UHCI USB 컨트롤러 및 가상 USB 허브. 가속기[편집] KQEMU[편집] 페브리스 벨러드(Fabrice Bellard)는 KQEMU (QEMU 가속기)라는 이름으로 리눅스 커널 모듈을 작성하였다. i386 플랫폼에서 i386 에뮬레이션 속도를 눈에 띄게 개선해 준다. 사용자 모드 코드를 호스트 컴퓨터의 CPU에서 바로 실행하고 커널 모드와 리얼 모드 코드에만 주변 기기와 프로세서의 에뮬레이션을 사용함으로써 속도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 KQEMU는 또 호스트 CPU에서 커널 모드 코드의 일부를 실행하는 커널 에뮬레이션 모드를 지원한다. QEMU의 가속기 모듈인 KQEMU는 원래 무료로 배포되긴 했지만, 클로즈드 소스 제품으로 공개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 2월 5일에 버전 1.3.0pre10이 공개되면서[4] GNU 일반 공중 라이선스를 통해 소스가 공개되었다. KQEMU는 Win4Lin Pro Desktop 제품을 통해 Win4Lin으로 라이선스되어 왔다. KVM과 달리, KQEMU는 호스트 CPU가 하드웨어 가상화를 지원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게스트 운영 체제의 코드를 실행할 수 있고, 나중에 하드웨어 확장 지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5], 0.12.0 판 이후 QEMU에서 기본으로 확장 메모리를 지원(large memory supported)하면서 KQEMU 지원을 중단하였다. QVM86[편집] QVM86은 QEMU 에뮬레이터에 x86 가상화 기능을 제공하는 리눅스 커널 모듈이었다. 가상화는 CPU 보호 계획을 사용하여 권한 이벤트를 가로채거나 가상으로 구현하여 에뮬레이션 코드가 호스트 CPU에 네이티브로 실행할 수 있게 도와 준다. GNU GPLv2 라이선스로 공개되었다. 원래 GPL 라이선스의 클로즈드 소스 KQEMU의 대안으로 개발되었다. QVM86의 개발자는 버추얼박스의 공개로 인해 2007년 1월 21일에 개발을 중단하였다. 최신 버전[편집] 위치는 공식 저장소, 기종은 x86, 버전은 최신 안정 버전 기준입니다. 공식 저장소: 0.11.0-rc1(2009년 7월 30일 출시) 데비안: 0.9.1-10lenny1 우분투(통상): 0.10.0-1ubuntu1 우분투(장기 지원 - dapper): 0.8.0-3ubuntu1 우분투(장기 지원 - hardy): 0.9.1-1ubuntu1 페도라: 0.10.6 오픈수세: 0.10.1 아치: 0.10.6-1 젠투: 0.11.1 함께 보기[편집] 가상 머신 FreeOsZoo OpenBIOS QEMU 포트와 프론트엔드 Q QVM86 Win4Lin 다윈 다른 가상 머신 Bochs Cooperative Linux KVM Microsoft Virtual PC Parallels Workstation Simics User-mode Linux VirtualBox VMware 각주[편집] ↑ “qemu.git/summary”. 2018년 1월 15일에 확인함.  ↑ FMOD music & sound effects system ↑ “ChangeLog/0.14”. 2011년 8월 8일에 확인함.  ↑ KQEMU 1.3.0pre10 released - under the GPL [LWN.net] ↑ https://web.archive.org/web/20070206215404/http://fabrice.bellard.free.fr/qemu/kqemu-tech.html#SEC1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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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빵왕 김탁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빵왕 김탁구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대한민국 방송 채널 KBS 2TV 방송 기간 2010년 6월 9일 ~ 2010년 9월 16일 방송 시간 수, 목 밤 9시 55분 ~ 11시 15분 방송 분량 1시간 20분 방송 횟수 30부작 + 스페셜 1부작 추가 채널 KBS 1TV, KBS 드라마, 드라맥스KBS N 라이프, CNTV (유료방송) 기획 KBS 드라마 제작국 제작사 삼화네트웍스 제작자 안재현, 신상윤 연출 이정섭, 이은진 조연출 김기성, 신대식 극본 강은경 출연자 윤시윤, 주원, 유진, 이영아 외 여는 곡 이필호 - 제빵왕 김탁구 음성 2채널 스테레오(아날로그)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 · 방송 외부 링크  제빵왕 김탁구 홈페이지 《제빵왕 김탁구》는 2010년 6월 9일부터 2010년 9월 16일까지 방영된 한국방송공사 수목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경제 개발기를 배경으로 주인공 김탁구가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의 제빵인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다루었다. 성인 분량의 배경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이며 아역 분량의 배경은 주인공들의 나이가 12세인 1976년이다. 한편, 6회부터 시청률 30%를 돌파하였으며, 17회에는 40%를 넘겼다(AGB 전국 시청률 기준). 마지막 회는 50%를 압도적으로 돌파하였다(TNmS 전국 시청률 기준).[1] 목차 1 줄거리 2 등장 인물 2.1 거성가 사람들 2.2 팔봉 제빵점 사람들 2.3 그 외 인물 2.4 특별출연 3 시청률 4 OST 4.1 Part.1 4.2 Part.2 4.3 Part.3 4.4 Part.4 4.5 Part.5 4.6 Part.6 4.7 Part.7 4.8 Part.8 5 수상 경력 6 해외에서의 방송 7 참고 사항 8 동시간대 드라마 9 같이 보기 10 각주 11 외부 링크 줄거리[편집] 1964년 거성가 안주인 서인숙은 딸만 둘을 낳았단 이유로 시어머니 홍 여사에게 멸시를 당한다. 애정없는 정략 결혼으로 맺어진 구일중과 서인숙은 각각 잘못된 방법을 통해 두 아들 김탁구와 구마준을 얻는다. 어머니 김미순과 단둘이 자란 탁구는 12세 때 거성가에 입성해 아버지를 만나지만, 상처만 입은 채 행방불명된 어머니와 어머니를 데려간 바람개비 조진구를 찾기 위해 전국을 떠돈다. 성인이 된 탁구는 운명처럼 아버지의 스승 팔봉 선생의 수하생이 되고, 이복동생 마준, 운동권 대학생이 된 첫사랑 유경과도 재회한다. 시간별 스토리 구성 연도 1957년 26세 구일중, 거성식품 창립 1961년 구자경 출생 1963년 구자림 출생 1964년 양미순 출생 1965년 김탁구-구마준-신유경 출생 1976년 12세 김탁구, 거성가 입성 1987년 거성식품 창립 30주년김탁구-구마준, 팔봉 제빵점 입성23세 김탁구-구마준-신유경 재회 1989년 25세 김탁구-구마준 경합 시작 등장 인물[편집] 거성가 사람들[편집] 거성가는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것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장소는 충청북도 청원군(현재 청주시)에 위치한 청남대이다. 윤시윤 : 김탁구(金卓求[2]) 역 (아역 오재무) - 제빵사. 1965년 5월 출생(황소자리). 12세, 23세, 25세. 구일중의 장자이자 김미순의 아들 유경의 첫사랑이며, 거성가 장남. 제빵의 명인 팔봉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수제자가 된다.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생모 김미순의 말을 신조로 삼고 산다. 촌스럽다. 성격 단순하다. 솔직함과 정직함으로 사람을 감동 시키는 선한 매력이 있는 녀석. 한번이라도 그 녀석의 진심을 맛본 사람은 그의 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마음으로 사람을 얻는 힘, 그것이 바로 김탁구가 가지고 태어난 운명 같은 힘이다. 밑바닥에서 부터 온갖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제빵에 타고난 천부적인 후각과 선한 마음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제빵인으로 거듭난다. 주원 : 구마준 역 (아역 신동우) - 제빵사. 1965년 9월 출생. 12세, 23세, 25세. 탁구의 경쟁자 가명 서태조. 서인숙-한승재의 아들. 12세 때,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아버지 구일중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탁구를 미워한다. 우월 의식이 대단하다. 까칠하고 까탈스러우며 자기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한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해낸다. 구일중을 빼닮은 탁구에게 참을 수 없는 피해 의식을 품게 되면서 빵을 배우기로 결심, 탁구와 경쟁하지만 한계에 부딪힌다. 방송 후반 유경과 결혼했으나 유경에 대한 오해로 상처를 입어 외도를 한다. 이에 유경과의 관계도 틀어지지만 결국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유경에게 사죄하고 탁구와도 화해한다. 유진 : 신유경 역 (아역 조정은) - 대학생(사회학과 84학번), 후에 거성식품 비서. 1965년 출생. 12세, 23세, 25세. 탁구의 첫사랑 탁구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떠돌고, 유경이 보육원에 들어가면서 헤어졌다가 10 여 년 후 재회한다. 어린 시절 극도의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후, 대학생이 되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학생 운동에 투신한다. 꿈 많고 열정 가득한 학생 운동가였으나 서인숙과 자림, 마준 등 상류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좌절한다. 탁구와 마준, 두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탁구에게 '제빵왕 김탁구'가 새겨진 모자를 선물한다. 방송 말미에는 마준과 결혼하며 거성가 둘째 며느리가 된다. 신유경의 어머니는 술주정뱅이 남편과 결혼 이혼을 했고 어린 딸 유경이를 집에 놔둔채로 연락두절이 되버린다 이영아 : 양미순 역 - 제빵사. 1964년 출생. 24세, 26세 팔봉선생의 외손녀로 절대미각과 절대 손감각을 물려받아 다섯 살때부터 빵을 만들어온 빵신동! 지금은 시골 변두리 제빵집에서 일하지만 화려한 파리 블랑제를 꿈꾸며 양미순표 생크림 케익 개발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제빵에 있어서만큼은 자부심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녀 앞에 김탁구가 나타나면서 빵을 만드는 설레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탁구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탁구에게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란 소리를 들으며 후일 거성가 맏 며느리가 된다. 전광렬 : 구일중 역 - 거성식품 창업주 겸 총수. 1932년 출생. 탁구의 부친. 서인숙의 남편 가난으로 친한 친구를 잃고 1957년 양산 제과 회사인 거성식품을 창립한다. 신념이 강하고 부지런하다. 보수적이고 엄격하다.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한만큼 결과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규벌을 강화하기 위해 서인숙과 사랑없는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하던 중 김미순에게 마음을 주게 되면서 그녀에게서 탁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서인숙과 한승재의 견제와 모략에 의해 결국 김미순과 탁구를 영영 잃게 되고 마는데... 전인화 : 서인숙 역 - 거성식품 안주인. 1935년 출생. 구일중의 아내. 탁구의 적대 세력 아들 마준에게 거성식품을 물려주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겉으로는 기품 있고 세련된 부잣집 사모님. 허나 안으로는 계략과 모사에 능하며, 뒷거래에 능숙한 여인이다. 탁구와 팔봉제빵점에 끊임없는 시련을 안겨주면서 마준의 막강파워 배후세력으로 자리매김하는 인물. 정략결혼한 구일중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끝끝내 채우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외로워한다. 상류 사회에 속한 여자의 비참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성모 : 한승재 역 - 거성식품 비서실장. 1932년 출생 구일중과 어렸을 때부터 한 집 살이를 한 집안의 가신. 젊은 시절 사랑했던 서인숙이 구일중과 결혼하면서 상처를 입지만 친구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걸 감수해왔다. 그러나 서인숙과 마준을 지키고자 했던 그가 어느새 야심을 품게 되고, 두 사람의 인생에 점점 더 깊게 개입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가는데.. 마준의 친부이나 마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서인숙과 마준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서인숙을 위해 탁구와 미순 모자를 끈질기게 괴롭혔지만 친 아들 마준으로 인해 감옥에 간 후 개과천선 한다. 전미선 : 김미순 역 - 거성가 보모, 간호사, 탁구의 모친 어렸을 적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부모님과 친분이 있던 홍여사의 선처로 거성가에 들어왔다. 구일중과 하룻밤의 인연을 맺으면서 탁구를 갖게 되지만 서인숙과 한승재의 음모로 거성가에서 쫓겨나는데... 탁구를 위해서 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하나 뿐인 아들에게 ‘이 세상은 착한 사람이 이기게 돼 있다’는 인생의 좌우명을 심어주는 따뜻하고 강한 어머니. 최자혜 : 구자경 역 (아역 하승리) - 거성식품 홍보실장 거성가의 장녀이자 구일중-서인숙의 맏딸. 탁구의 이복누나이며, 마준의 이부 누나. 1961년 출생. 16세, 27세, 29세. 책임감 강하고, 부지런하고 당당한 커리어우먼. 가족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기에 탁구를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최윤영 : 구자림 역 (아역 김소현) - 대학생(가정교육과 84학번) 거성가의 차녀이자 구일중-서인숙의 작은 딸. 탁구의 이복누나이며, 마준의 이부 누나. 1963년 출생. 14세, 25세, 27세. 유경과 대학 동기이자 동아리 친구. 호기심에 학생 운동 동아리에 가입했다 고초를 겪는다. 사치스럽지만 솔직하고 티 없이 맑은 아가씨. 정혜선 : 홍 여사 역 - 거성식품 안주인. 구일중의 모친 완고하고 꼬장꼬장하며 엄격하다. 가부장적 사고 방식과 남아선호사상으로 똘똘 뭉친 전형적 시어머니. 며느리가 대를 잇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중, 거성가의 보모 김미순에게 마음을 둔 사실을 눈감아주며 그녀에게서라도 대를 얻고자 한다. 그래서 결국 탁구를 얻었지만, 그 일로 인해 그녀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구씨 집안에 일대 풍파가 시작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데... 전성애 : 공주댁 역 - 거성가 가사 관리인, 김미순의 조력자 팔봉 제빵점 사람들[편집] 팔봉 제빵점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세트장이 위치하고 있다. 장항선 : 팔봉선생(오두용) 역 - 제빵사. 1918년 출생 제빵계의 살아있는 전설. 구일중의 옛 스승이자 탁구의 스승. 겉보기엔 철없는 동네 할배로 보이지만 실은 제빵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개성상인의 마지막 후예. 사려깊은 마음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르다. 죽음의 문턱까지 버려진 탁구를 거두어 빵을 통해 인생의 철학과 휴머니티를 가르치면서 성장시킨다. 죽음의 문턱에서 김탁구를 구해준 장본인이 팔봉 선생이라 부르는 오두용은 탁구를 구해주면서 12년후 재회했던 성인이 된 탁구를 알아보게 되면서 경합 1차 시작을 하게됨으로써 탁구가 빵을 만드는데 성공된 빵을 팔게 된다. 박상면 : 양인목 역 - 제빵사 팔봉 선생의 사위이자 팔봉 제빵점의 총대장. 반죽의 달인. 구일중의 옛 동료. 보수적이고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7, 80년대 전형적인 가장이다. 체면과 입장을 중시하고, 융통성도 없는데다 철인기질을 갖고 있는 그, 힘이라면 항우장사 부럽지 않다. 팔봉제빵집에 들어온 탁구를 잡아먹을 듯 부려먹고 거친 훈련으로 몰아넣는 한편, 탁구에게 실질적으로 빵을 가르치는 제빵실 대장. 탁구를 끝까지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탁구의 긍정적인 힘과 진정성을 인정해준다. 박성웅 : 조진구 역 - 제빵사 일명 바람개비. 굽기의 달인. 전과 3범의 칼잡이. 아픈 여동생이 있다. 과묵하고 신중하다. 탁구를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줌으로서 탁구와 탁구모 미순에게 진 빚을 갚는다. 황미선 : 오영자 역 - 팔봉 제빵점 안주인 팔봉 선생의 딸. 미순의 모친. 팔봉제빵점 총괄 매니저 (계산의 달인). 배움도 짧고, 글도 짧지만 삶의 지혜가 깊은 7,80년대 전형적인 엄마. 남편 양인목과는 달리 미순이가 원하는 일을 할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응원해주고 지지해준다. 탁구를 아주아주 귀여워한다. 미순이가 탁구를 좋아하게 된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뒤로 말없이 두 사람이 잘되기를 은근히 바라며 밀어준다. 이한위 : 허갑수 역 - 제빵사 구식케익 성형의 달인. 어느 날 불쑥 팔봉제빵집에 굴러들어온 탁구로 인해 후계자 자리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사사건건 탁구의 행적에 파토를 내며 위기를 일으킨다. 친절한척 하지만 상당히 뒤끝있는 성격으로 요주의 인물. 박용진 : 고재복 역 - 제빵사 허갑수의 꼬봉노릇을 하고 있는 팔봉집 막내. 허갑수와 2인조로 탁구를 괴롭히다가 점점 탁구의 인간성에 반해 허갑수로부터 독립을 선언!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게 된다. (미순이를 짝사랑한다) 그 외 인물[편집] 김정학 : 닥터 윤(윤승현) 역 - 의사, 거성가 주치의. 보건소에서 김미순과 인연을 맺은 후 조력자가 된다. 주은 : 여은진 역 - 거성식품 비서, 유경의 입사 선배 김광인 : 의사 역 최윤준 : 우체국 직원 역 이건 : 차준현 역 - 거성식품 비서, 탁구의 비서 안수민 : 미스 장 역 - 김미순의 비서 권용운 : 유경의 아버지 역 - 술주정뱅이에 난봉꾼. 어린 딸 유경을 폭행해 격리됐다가 유경이 성인이 된 후 재회한다. 유채목 : 유경의 어머니 역 - 술주정뱅이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집을 나간 뒤 연락두절 이종구 : 제빵기술협회 고문 역 특별출연[편집] 최일화 : 박춘배 역 - 제빵사. 1921년 출생. 천부적 후각의 소유자 시청률[편집] 최저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0년 회차 방송일 TNmS 시청률[3] AGB 시청률[4]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대한민국(전국) 서울(수도권) 제1회 6월 9일 15.7% 16.3% 14.2% 13.8% 제2회 6월 10일 16.9% 18.4% 14.4% 14.5% 제3회 6월 16일 28.5% 29.1% 26.4% 28.3% 제4회 6월 17일 25.3% 26.4% 24.2% 26.3% 제5회 6월 23일 28.5% 28.6% 27.1% 28.4% 제6회 6월 24일 32.2% 32.5% 31.1% 31.8% 제7회 6월 30일 33.4% 33.6% 31.0% 32.2% 제8회 7월 1일 35.8% 35.9% 31.6% 30.8% 제9회 7월 7일 38.1% 38.6% 33.4% 34.7% 제10회 7월 8일 34.5% 34.9% 33.0% 33.8% 제11회 7월 14일 35.9% 35.2% 34.1% 34.0% 제12회 7월 15일 36.9% 36.1% 35.3% 35.2% 제13회 7월 21일 38.5% 37.7% 37.3% 37.0% 제14회 7월 22일 38.4% 36.5% 37.9% 38.2% 제15회 7월 28일 39.7% 39.2% 36.6% 35.7% 제16회 7월 29일 39.9% 38.6% 37.9% 38.1% 제17회 8월 4일 42.5% 42.3% 39.5% 39.8% 제18회 8월 5일 44.4% 44.0% 40.5% 40.2% 제19회 8월 11일 44.9% 44.0% 42.3% 42.4% 제20회 8월 12일 44.6% 43.8% 42.6% 43.9% 제21회 8월 18일 44.0% 42.6% 41.9% 42.4% 제22회 8월 19일 43.7% 42.9% 42.3% 41.9% 제23회 8월 25일 44.1% 44.1% 43.6% 44.6% 제24회 8월 26일 44.7% 44.2% 41.9% 41.9% 제25회 9월 1일 45.8% 44.9% 44.0% 44.4% 제26회 9월 2일 48.4% 47.2% 45.0% 46.1% 제27회 9월 8일 47.5% 47.0% 43.3% 43.2% 제28회 9월 9일 48.2% 46.4% 44.7% 44.5% 제29회 9월 15일 46.5% 45.5% 45.3% 44.2% 제30회 9월 16일 50.8% 49.7% 49.3% 48.3% 평균 시청률 38.61% 38.21% 36.39% 36.69% OST[편집] 제빵왕 김탁구 OST Part.1V.O.S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6월 11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엔에이치엔벅스 Part.1[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하루의 끝에  미끼김희원V.O.S 4:08 2. 하루의 끝에 (Inst.)   김희원  4:08 제빵왕 김탁구 OST Part.2KCM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6월 25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엔에이치엔벅스 Part.2[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죽도록 사랑해  김혜선홍진영KCM (Feat. 소울다이브) 3:25 2. 죽도록 사랑해 (Inst.)   홍진영  3:25 제빵왕 김탁구 OST Part.3이승철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7월 14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엔에이치엔벅스 Part.3[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그 사람  김상익, NO.1홍진영이승철 3:56 2. 그 사람 (Inst.)   홍진영  3:56 제빵왕 김탁구 OST Part.4바다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7월 22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엔에이치엔벅스 Part.4[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단 한 사람  김선미차길완, 이상준바다 4:13 제빵왕 김탁구 OST Part.5규현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8월 5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엔에이치엔벅스 Part.5[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희망은 잠들지 않는 꿈    규현 4:45 2. 희망은 잠들지 않는 꿈 (Inst.)      4:45 제빵왕 김탁구 OST Part.6미쉘유진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8월 12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엔에이치엔벅스 Part.6[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나를 위해    미쉘유진 2:54 2. 나를 위해 (Acoustic Ver.)    미쉘유진 2:54 3. 나를 위해 (Inst.)    미쉘유진 2:54 제빵왕 김탁구 OST Part.7성환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8월 19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엔에이치엔벅스 Part.7[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너 하나만  성환성환윤시윤 2:35 2. 사랑이야  성환성환이영아 4:10 3. 내사랑  성환성환주원 3:51 4. 너 하나만 (Inst.)   성환  2:35 5. 사랑이야 (Inst.)   성환  4:10 6. 내사랑   성환  3:51 제빵왕 김탁구 OST Part.8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10년 9월 8일장르 드라마음악레이블 (주)벅스 Part.8[편집] # 제목작사작곡가수 재생 시간 1. 지금 만나러 간다    코드 V 3:07 수상 경력[편집] 연기상 2010년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 전인화 2010년 K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부문 남자 우수연기상 윤시윤 2010년 K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부문 여자 우수연기상 유진 2010년 KBS 연기대상 청소년 연기상 오재무 2010년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신인 연기상 윤시윤 2011년 아시아모델상시상식 뉴 스타상 주원 작품상 2010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대통령 표창 작가상 2010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국무총리상 제23회 2010 한국방송작가상 2010년 KBS 연기대상 작가상 강은경 2010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KDF) 작가상 연출상 2010년 코리아드라마어워즈 미니시리즈 부문 연출상 김규태 2011년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해외에서의 방송[편집] KBS의 국제방송 채널인 KBS 월드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후지TV를 비롯하여 간사이 TV(이하 KTV - 긴키 광역권), 도카이 TV(이하 THK - 주쿄 광역권), TV 니시닛폰(이하 TNC) 등 26개 FNN 지역 민방 네트워크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일제히 송출하였다. 필리핀의 GMA NETWORK과 인도네시아에서 방영되었으며, 특히 필리핀의 Kapatid TV5에서는 필리핀 식으로 리메이크해 Baker King이라는 이름으로 방송한 적이 있다. 참고 사항[편집] 이 작품은 당초 한준서, 이정섭 공동 연출로 기획되었지만[5] 한준서 PD는 제작사 등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작 전에 하차하였다.[6] KBS는 해당 작품에 앞서 《전우》를 편성할 예정이었지만 같은 소재(전쟁)의 MBC 《로드 넘버원》이 수목 미니시리즈로 편성되자[7] 《거상 김만덕》 후속 1TV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로 편성을 수정하였다.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스타 반열에 오른 윤시윤[8]의 드라마 데뷔작으로서 그의 역할인 김탁구의 연적에 해당하는 구마준 역에 드라마 경험이 없는 뮤지컬 배우 주원[9]이 캐스팅 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정섭 PD는 드라마 경험이 없는 신인의 캐스팅을 반대하였으나, 강은경 작가의 고집으로 캐스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촬영을 마치면서는 "주원은 자신에게 로또 같은 배우"라고 칭찬하였다.[10] 공중파 재방송 시간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10분 ~ 5시 15분, 매주 수요일 오전 11시 50분 ~ 오후 2시(2회 연속 방송)이다. 유료 방송 채널(KBS 드라마와 드라맥스)에서도 재방송되었다. 또한, 2011년 5월 24일부터 2011년 7월 13일까지 월요일 ~ 목요일 오후 1시에 KBS 1TV에서 《KBS 걸작선》으로 재방영되었다. 드라마의 이야기 인물 등은 실제가 아닌 작가에 의해 창작된 픽션 드라마임을 밝힌 바 있다.[11] 시청 등급은 15세 이상 시청가이나, 불륜 장면이 묘사된 4화 방송분에 한해 19세 이상 시청가로 방송되었다.[12] SPC그룹에서 제빵 기술 레세피를 자문하고, 김탁구빵을 출시 하였다. SPC그룹은 이 드라마의 제빵 대역을 지원하고 제빵 기술·레시피 자문에 응하는 등의 제작 지원과 협찬을 하였다.[13] 청주 맥아당의 나병일 대표가 제빵기술자문과 주요 배역인 팔봉선생, 김탁구, 구일중 회장의 손 대역을 맡았다.[14] 드라마가 인기를 얻자, SPC그룹의 파리바게뜨는 주인공 김탁구가 만든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과 드라마에 등장하는 ‘봉빵’을 재현해 ‘배부른 보리밥빵’과 ‘주종봉단팥빵’을, 삼립식품은 ‘제빵왕 김탁구 단팥크림빵’, ‘제빵왕 김탁구 소보루빵’ 등 7종의 신제품을 만들어 슈퍼와 편의점 등에서 판매한 바 있다.[15] 1987년을 배경으로 한 탁구(윤시윤)과 유경(유진)이 재회하는 신에서 지하철이 너무 현대적(철도공사 소속의 보증금 환급기가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으며, 1989년을 배경으로 한 19화 방송분에서 탁구와 유경이 함께 스티커 사진을 찍는 신이 방영되었으나 국내 스티커 사진이 도입된 시기가 1990년대 중반이라는 점 때문에 '옥의 티'라는 지적이 있었다. 고재복 역의 박용진은 도로교통법 위반 및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 결국 하차하였다.[16] 동시간대 드라마[편집] MBC 수목 미니시리즈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2010년 5월 26일 ~ 2010년 6월 9일) 《런닝, 구》 (2010년 6월 10일 ~ 2010년 6월 17일) 《로드 넘버원》 (2010년 6월 23일 ~ 2010년 8월 26일) 《장난스런 키스》 (2010년 9월 1일 ~ 2010년 10월 21일) SBS 수목 미니시리즈 《나쁜 남자》 (2010년 5월 26일 ~ 2010년 8월 5일)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2010년 8월 11일 ~ 2010년 9월 30일) 같이 보기[편집] 국희 내 이름은 김삼순 보리밥빵 꿈빛 파티시엘 각주[편집] ↑ “'제빵왕 김탁구', 꿈의 시청률 50% 돌파하며 종영”. 세계일보. 2010년 9월 17일.  ↑ 본 방송에서 “탁구를 잘해서 김탁구가 아니라 ‘높을 탁’과 ‘구할 구’자를 써서 김탁구라고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 TNmS 멀티미디어 홈페이지 Archived 2012년 11월 12일 - 웨이백 머신 ↑ AGB 닐슨 미디어 리서치 홈페이지 ↑ 김진욱 (2010년 6월 16일). “제빵왕 김탁구, 방송직전 한준서PD '하차' 왜?”. TV리포트. 2017년 9월 26일에 확인함.  ↑ 최보란 (2014년 5월 14일). “'호텔킹' PD교체 논란..연출자 중도교체 사례는?”. 텐아시아. 2017년 9월 26일에 확인함.  ↑ 이다정 (2010년 3월 23일). “전쟁터 방불 안방극장, '살기 위한' 변칙편성 득과 실은?”. 스포츠조선. 2017년 9월 26일에 확인함.  ↑ “신세경 윤시윤 어딨니?”. 동아일보. 2010년 4월 14일. 2014년 7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7월 14일에 확인함.  ↑ 이언혁 기자 (2010년 5월 19일). “뮤지컬배우 주원 ‘제빵왕김탁구’ 윤시윤 맞수 악역 캐스팅”. 뉴스엔.  ↑ “피터팬의 영혼가진 ‘굿 액터’”. 한겨레신문. 2013년 11월 5일.  ↑ 드라마 1회 시작 시점에서 자막으로 고지하였다. ↑ “15세 관람가 '제빵왕 김탁구' 4회만 '19금(禁)'된 사연은?”. TV 리포트. 2010년 6월 18일.  ↑ 김지연 (2010년 8월 27일). “SPC '김탁구빵 시리즈' 9종 출시(종합)”. 연합뉴스. 2010년 11월 12일에 확인함.  ↑ 윤기윤 (2015년 1월 8일). “청주 명물 직지빵 굽는 '맥아당' 나병일 대표”. 충북일보. 2017년 9월 26일에 확인함.  ↑ 문수정 (2010년 8월 27일). “추억 버무린 단팥·크림·보리밥빵… ‘김탁구표 빵’ 불티”. 국민일보. 2017년 9월 26일에 확인함.  ↑ 안민 (2010년 9월 7일). “탤런트 박용진 불구속 입건, 결국 `김탁구'에서 하차”. 뉴스웨이. 2010년 9월 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KBS 제빵왕 김탁구 홈페이지 日후지TV 제빵왕 김탁구 홈페이지 한국방송공사 수목드라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신데렐라 언니(2010년 3월 31일 ~ 2010년 6월 3일) 제빵왕 김탁구(2010년 6월 9일 ~ 2010년 9월 16일) 도망자 플랜 B(2010년 9월 29일 ~ 2010년 12월 8일) KBS 걸작선 신데렐라 언니(2011년 4월 18일 ~ 2011년 5월 23일) 제빵왕 김탁구(2011년 5월 24일 ~ 2011년 7월 13일) 성균관 스캔들(2011년 7월 14일 ~ 2011년 8월 22일) vdehKBS의 텔레비전 드라마현재 1TV 일일연속극(《여름아 부탁해》) 2TV 일일연속극(《태양의 계절》) 월화 미니시리즈(《퍼퓸》) 수목 미니시리즈(《저스티스》) 주말연속극(《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드라마 스페셜† 특집드라마 (1TV  · 2TV)† 해외걸작드라마† 과거1TV 걸작선 농촌드라마 대하드라마 웹드라마 스페셜 인간극장 UHD 명품역사관 2TV 2TV 일일연속사극 TV 소설 결혼 이야기 금요극장 금요드라마 금토드라마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드라마시티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시트콤 아침드라마 어린이 드라마 일요아침드라마 정글피쉬 정글피쉬 2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테마 드라마 해외 특별기획 드라마 †부정기적 프로그램 KBS MBC SBS tvN OCN JTBC MBN 채널A TV조선 vdeh 수목드라마2000년대 전반2000년 《소설 목민심서》 《천둥소리》 2001년 《명성황후》 2002년 《태양인 이제마》 《장희빈》 2003년 《로즈마리》 2004년 《꽃보다 아름다워》 《4월의 키스》 《풀하우스》 《두 번째 프러포즈》 《해신》 2000년대 후반2005년 《부활》 《장밋빛 인생》 《황금사과》 2006년 《굿바이 솔로》 《연어의 꿈》(단막) 《위대한 유산》 《투명인간 최장수》 《특수수사일지: 1호관 사건》(단막) 《도망자 이두용》(단막) 《황진이》 2007년 《달자의 봄》 《마왕》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단막) 《경성스캔들》 《사육신》 《인순이는 예쁘다》 2008년 《쾌도 홍길동》 《아빠 셋 엄마 하나》 《태양의 여자》 《2008 전설의 고향》 《바람의 나라》 2009년 《경숙이 경숙아버지》(단막) 《미워도 다시 한 번 2009》 《그저 바라 보다가》 《파트너》 《아가씨를 부탁해》 《아이리스》 2010년대 전반2010년 《추노》 《신데렐라 언니》 《제빵왕 김탁구》 《도망자 플랜 B》 《프레지던트》 2011년 《가시나무새》 《로맨스 타운》 《공주의 남자》 《영광의 재인》 2012년 《난폭한 로맨스》 《적도의 남자》 《각시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전우치》 2013년 《아이리스 2》 《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 《칼과 꽃》 《연애를 기대해》(단막) 《비밀》 《예쁜 남자》 2014년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 《골든크로스》 《조선 총잡이》 《아이언맨》 《왕의 얼굴》 2010년대 후반2015년 《고맙다, 아들아》(단막) 《착하지 않은 여자들》 《복면검사》 《어셈블리》 《장사의 신 - 객주 2015》 2016년 《태양의 후예》 《마스터 - 국수의 신》 《함부로 애틋하게》 《공항 가는 길》 《오 마이 금비》 2017년 《맨몸의 소방관》(단막) 《김과장》 《추리의 여왕》 《7일의 왕비》 《맨홀 - 이상한 나라의 필》 《정마담의 마지막 일주일》(단막) 《강덕순 애정 변천사》(단막) 《매드 독》 《흑기사》 2018년 《추리의 여왕 2》 《슈츠》 《당신의 하우스헬퍼》 《오늘의 탐정》 《죽어도 좋아》 2019년 《왜그래 풍상씨》 《닥터 프리즈너》 《단, 하나의 사랑》 《저스티스》 《동백꽃 필 무렵》 TV 소설 | 1TV 아침 | 2TV 아침 | 1TV 일일 | 2TV 일일 | 월화 | 수목 | 금요 | 금토 | 주말 (연속극  · 특별기획) | 대하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빵왕_김탁구&oldid=24417301" 분류: 2010년 드라마한국방송공사 수목드라마KBS 걸작선요리를 소재로 한 작품조리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강은경 시나리오 작품삼화네트웍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PortuguêsไทยTagalog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2일 (수) 20: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토요타 코롤라(Toyota Corolla) WRC 2002 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World Rally Championship, WRC)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랠리 자동차 경주 대회이다. 국제 자동차 연맹(FIA)에서 주관하고 있으며 1991년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 14개국에서 열리고 있다. 대회 초기에는 자동차 제작사의 순위만 가르다가 1979년부터는 운전자 부문이 신설되어 완전 분리 수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점수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2003년도 WRC처럼 스바루 자동차를 운전하는 페터 솔베르크가 운전자 트로피를 차지할 수 있지만, 시트로엥이 제조사 트로피를 차지할 수도 있는 등 이변이 연출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현대자동차가 최초로 WRC에 진출했다. 당시 현대 월드랠리팀은 베르나로 상위권 진입에 성공했다. 이후 2013년 WRC 복귀를 선언하고 현대 i20을 출전시킨다 2014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리타이어했지만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열린 독일 라인란트팔츠주(州) 바움홀더에서 열린 9라운드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1] 목차 1 경주용 자동차 2 역대 챔피언 3 출처 4 외부 링크 경주용 자동차[편집] WRC 대회는 총 16개 랠리로 이루어져 있고, 양산 차량을 근간으로 WRC 규정에 따라 배기량 2.0리터 엔진에 터보차저가 장착된 사륜구동(4WD) 자동차를 사용해야 한다. 이 규정은 2012년에 배기량 2.0리터에서 1.6리터로 하향 조정되었다. 최근에 우승을 차지한 랠리 자동차들로는 시트로엥 엑사라(프랑스어: Citroën Xsara), 포드 포커스 RS,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푸조 307, 스코다 파비아(Skoda Fabia), 그리고 스바루 임프레자가 있다. WRC 대회는 공식적으로 그룹 A와 그룹 B 랠리 자동차로 나누어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참가 차량들의 엔진 마력이 증가하면서 차량 사고의 위험이 증대하였고, 결국은 1986년 심각한 사고가 발생하여 그룹 B가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후 1997년 그룹 A 차량들이 WRC 경주용 자동차의 규격으로 발전하여 자동차 제조 회사들은 새로운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하기가 용이해졌다. 이외에도 WRC 대회에는 양산차 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Production World Rally Championship)와 28세 미만의 운전자만 참가할 수 있는 주니어 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Junior World Rally Championship)가 함께 개최되고 있다. 역대 챔피언[편집] 시즌 운전자 부문 제작사 부분 운전자 차량 제작사 차량 2014 세바스티앵 오지에 폭스바겐 폴로 R WRC 폭스바겐 폭스바겐 폴로 R WRC 2013 세바스티앵 오지에 폭스바겐 폴로 R WRC 폭스바겐 폭스바겐 폴로 R WRC 2012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DS3 WRC 시트로엥 시트로엥 DS3 WRC 2011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DS3 WRC 시트로엥 시트로엥 DS3 WRC 2010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C4 WRC 시트로엥 시트로엥 C4 WRC 2009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C4 WRC 시트로엥 시트로엥 C4 WRC 2008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C4 WRC 시트로엥 시트로엥 C4 WRC 2007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C4 WRC 포드 포드 포커스 RS WRC 06/07 2006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Xsara WRC 포드 포드 포커스 RS WRC 06 2005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Xsara WRC 시트로엥 시트로엥 Xsara WRC 2004 세바스티앵 뢰브 시트로엥 Xsara WRC 시트로엥 시트로엥 Xsara WRC 2003 페터 솔버그 스바루 임프레자 WRC 2003 시트로엥 시트로엥 Xsara WRC 2002 마커스 그뢴홀름 푸조 206 WRC 푸조 푸조 206 WRC 2001 리처드 번즈 스바루 임프레자 WRC 2001 푸조 푸조 206 WRC 2000 마커스 그뢴홀름 푸조 206 WRC 푸조 푸조 206 WRC 1999 토미 마키넨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VI 토요타 토요타 코롤라 WRC 1998 토미 마키넨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V 미쓰비시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V 1997 토미 마키넨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IV 스바루 스바루 임프레자 WRC 1996 토미 마키넨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III 스바루 스바루 임프레자 555 1995 콜린 맥레이 스바루 임프레자 555 스바루 스바루 임프레자 555 1994 디디에 오리올 토요타 셀리카 Turbo 4WD 토요타 토요타 셀리카 Turbo 4WD 1993 유하 칸쿠넨 토요타 셀리카 Turbo 4WD 토요타 토요타 셀리카 Turbo 4WD 1992 카를로스 사인스 토요타 셀리카 Turbo 4WD 란치아 란치아 Delta HF Integrale 1991 유하 칸쿠넨 란치아 Delta Integrale 16V 란치아 란치아 Delta Integrale 16V 1990 카를로스 사인스 토요타 셀리카 GT-Four 란치아 란치아 Delta Integrale 16V 1989 미키 비아시온 란치아 Delta Integrale 란치아 란치아 Delta Integrale 1988 미키 비아시온 란치아 Delta Integrale 란치아 란치아 Delta Integrale 1987 유하 칸쿠넨 란치아 Delta HF 4WD 란치아 란치아 Delta HF 4WD 1986 유하 칸쿠넨 푸조 205 Turbo 16 푸조 푸조 205 Turbo 16 E2 1985 티모 살로넨 푸조 205 Turbo 16 푸조 푸조 205 Turbo 16 E2 1984 스티그 블롬크비스트 아우디 콰트로 아우디 아우디 콰트로 1983 하누 미콜라 아우디 콰트로 란치아 란치아 Rally 037 1982 발터 뢰를 오펠 Ascona 400 아우디 아우디 콰트로 1981 아리 바타넨 포드 Escort RS1800 타르보 타르보 Sunbeam Lotus 1980 발터 뢰를 피아트 131 Abarth 피아트 피아트 131 Abarth 1979 비욘 월데가드 포드 Escort RS1800* 포드 포드 Escort RS1800 1978 마르쿠 알렌*** 피아트 131 Abarth** 피아트 피아트 131 Abarth 1977 산드로 무나리*** 란치아 Stratos HF 피아트 피아트 131 Abarth 1976 운전자 부문 없음 란치아 란치아 Stratos HF 1975 운전자 부문 없음 란치아 란치아 Stratos HF 1974 운전자 부문 없음 란치아 란치아 Stratos HF 1973 운전자 부문 없음 알파인-르노 알파인-르노 A110 * 랠리 중 2회는 메르세데스-벤츠 450 SLC 운전 ** 랠리 중 2회는 란치아 Stratos HF 운전 *** 1977년~1978년 운전자 부문은 FIA Cup for Rally Drivers 출처[편집] ↑ 현대차 WRC팀, 개막전 2대 모두 탈락…눈길서 미끄러져 데일리안, 2014년 1월 17일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 (영어) WRC.com 공식 WRC 사이트 - 경주 일정, 통계, 경주 결과 등의 정보를 알아 볼 수 있다. 전거 통제 VIAF: 247853077 GND: 4779599-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세계_랠리_선수권_대회&oldid=23988293" 분류: 자동차 경주 시리즈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숨은 분류: 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mburgsLietuviųLatvieš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8일 (월) 02: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수난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난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수난곡(受難曲)은 배우의 연기 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성악을 주로 한 종합 예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라토리오와 비슷하지만, 성경의 사복음서를 기초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주로 담았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고, 독일 계열 작곡가들에게 주로 쓰인 개념이다. 수난 또는 수난곡을 뜻하는 영어 'Passion' 2세기에 나타난 라틴어 passio에서 유래하며, 예수의 생애와 고난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사복음서명을 따서 '마태오 수난곡', '마르코 수난곡', '루카 수난곡', '요한 수난곡'의 4개가 있다. 목차 1 역사 2 구성 3 대표적인 수난곡 4 참고 문헌 역사[편집] 옛날부터 성(聖) 금요일이나 성주간(聖週間)에는 수난극이나 이와 비슷한 행사를 하였다. 12세기경부터 복음서에 따라 그리스도 수난의 이야기를 3인의 신부가, 한 사람은 복음사가(福音史家)의 역(테너)을, 또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역(베이스)을, 나머지 한 사람은 군중의 역(알토)을 맡아 낭독조로 노래하는 습관이 되었다. 이것이 그 뒤의 수난곡의 기원이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된 수난곡을 '코랄 수난곡'이라 하며, 대략 17세기경까지 만들어졌다. 특히 유명한 작품으로는 쉬츠의 《마태오 수난곡》이 있다. 이와 함께 16세기-17세기에는 다른 타입의 '모테토 수난곡'이 생겼다. 이것은 텍스트의 전체를 등장인물의 수와 관계없이 일관하여 모테토풍의 다성부 합창으로 노래한다. 음악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17세기 중엽경에 성립한 '오라토리오 수난곡'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서의 텍스트를 자유롭게 시로 만들어 코랄 또는 솔로의 아리아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도 아리아, 레치타티보, 합창, 통주저음, 기악반주를 썼으며, 오라토리오의 형태와 흡사하다. 이 장르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바흐의 《요한 수난곡》과 고금 최대의 걸작이라고 칭찬받고 있는 《마태오 수난곡》이 있다. 구성[편집] 복음사가의 레치타티보 예수 제자들의 독창 및 합창 아리아 대표적인 수난곡[편집]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사복음서 모두 작곡했다고 전해지나, 마태오 수난곡, 요한 수난곡만이 전해진다. 하인리히 쉬츠 참고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악곡의 형식반복 형식 두도막 형식 세도막 형식 론도 론도 소나타 형식 리토르넬로 형식 변주곡 비를레 소나타 형식 소나티네 아치 형식 계속 형식정한가락형식 오르가눔 중세의 모테트 코랄 모방형식 르네상스 시대의 모테트 리체르카레 카논 인벤션 푸가 복합 형식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 모음곡 칸타타 미사곡 레퀴엠 수난곡 악극 오페라 오라토리오 순환 형식 소곡성격 소품 간주곡 교향시 노벨레테 녹턴 랩소디 로망스 무궁동 무언가 바가텔 발라드 서곡 세레나데 스케르초 아리아 에튀드 유머레스크 전주곡 즉흥곡 카프리치오 토카타 행진곡 환상곡 고전 무곡 가보트 가야르드 렌틀러 루르 리고동 뮈제트 미뉴에트 바스 당스 부레 브랑르 사라반드 살타렐로 샤콘 시칠리아노 알르망드 앙글레즈 에코세즈 지그 카롤 쿠랑트 파바느 파사갈리아 파스토랄레 파스피에 근·현대 무곡 갈로프 룸바 마주르카 볼레로 삼바 세기디야 왈츠 타란텔라 탱고 트레팍 판당고 폴로네즈 폴카 폭스 트롯 하바네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난곡&oldid=23727027" 분류: 악곡의 형식기독교 음악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Suomi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LimburgsLatvieš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8일 (월) 14: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신칸센 E5계 전동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 신칸센 E5계 전동차 제작 및 운영 주 용도 비즈니스 및 장거리 여행객 수송용 제작사 가와사키 중공업히타치 제작소 제작 연도 2009년 ~ 현재 생산량 47편성 470량 사용량 47편성 470량 제원 차량 정원 선두차 29명중간차 59~100명그린차 55명그랜클래스 18명 편성 정원 731명 전장 25,000(선두차량은 26,500) mm 전폭 3,350 mm 전고 3,650 mm팬터그래프 상면고 : 4,490 mm 편성 중량 453.5 t 궤간 1,435 mm 성능 전기 방식 교류 25,000V, 50Hz 제어 방식 히타치 VVVF 인버터 제어 (IGBT) 기어비 2.645 기동가속도 1.71 km/h/s 영업 최고 속도 320 km/h 설계 최고 속도 360 km/h 전동기 출력 300 kW 편성 출력 9,960(1만 1천760 마력) kW 구동 장치 3상 유도전동기 MT207WN 평행카르단 구동방식 제동 방식 회생제동 병용 전기지령식 공기제동(응하중장치 포함) MT비 8M2T 보안 장치 DS-ATC 비고 제55회(2012년) 블루리본상 수상 E6계 중련 영업중인 신칸센 E5계 영업중인 신칸센 H5계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일본어: 新幹線E5系 ・ H5系電車)는 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신칸센 차량이다. 본 항에서는 홋카이도여객철도(JR홋카이도)가 신칸센 E5계 전동차와 동일한 사양으로 도입하는 신칸센 H5계 전동차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목차 1 개요 2 모델 3 운행 노선 3.1 현재 운행 노선 4 구조 4.1 차량 외관 4.2 주요 기기 4.2.1 대차 4.2.2 집전장치 4.2.3 전원·제어기기 5 성능 6 객차 구성[28] 6.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6.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7 현황 7.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7.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8 각주 9 사진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동일본여객철도는 2000년에 책정한 중기경영계획 뉴 프론티어 21에서 '세계 제일의 철도 시스템 구축'을 제시했다. 그 중에는 신칸센을 최고속도 360km/h로 영업운전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에 기초해 2002년에 사내에서 발족시킨 신칸센 고속화 추진 프로젝트에 의해, 신칸센 고속 시험차량 파스텍 360을 개발하여 2005년부터 지상설비를 포함한 각종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환경대책이나 비용대 효과를 고려하면 최고 영업 속도 320km/h이 타당한 것으로 재검토되어, 현재의 E5계가 개발·제조되었다. 1편성(10량)당 제조 비용은 약 45억엔이다.[1] 이 계열이 사용되는 열차의 애칭은 공모에 의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다. 또, 'MADE IN DREAM.' '21세기의 꿈의 초특급을 만들면, 이렇게 되었습니다'를 캐치 카피로 하였다. 2009년 5월에 도호쿠 신칸센 노선에 시범 운행을 위해 신칸센 종합 차량 센터에 인도되었다.[2] 1호차부터 5호차까지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히타치 제작소, 6호차부터 10호차까지 효고현에 위치한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제작했다.[3] 2009년 12월 9일에 최초로 도쿄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했다.[4] 2013년 2월에 U1편성으로 변경되었다.[5] 2010년 5월에 신칸센 E5계 전동차 이름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는데, 2009년 3월 폐지된 침대특급열차의 명칭이다. 같은 해 12월에 U2편성이 도입되었다.[6] 이후 2편성이 추가로 반입되면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에 배치되었다.[7][8] 2011년 3월 5일부터 영업운전을 개시하였으며, 2012년 5월, 제55회 일본철도클럽에서 매년 개최하는 블루리본상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9] 같은 해 11월 20일에 공식 발표가 열렸다.[10] 2013년 3월 16일, 다이야 개정으로 최고 우츠노미야 ~ 센다이 구간 최고 영업 속도가 320km/h를 증가했다.[11] 2014년 4월에 홋카이도 신칸센 개통에 따른 세부 열차 사항이 발표되었다.[12] H1편성이 고베 시 카와사키 중공업에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로 배치되었다.[13] 같은 해 10월에 H2편성이 반입되었고[14] 이후 홋카이도 신칸센에서 시범 운행을 시작하면서 최고 영업 속도 260km/h를 도달했고[15], 2015년 11월에 도호쿠 신칸센 구간에 시범 운행을 개시했다.[16] 2017년 3월 25일 도호쿠 신칸센 개업 35주년을 맞이해 조에쓰 신칸센을 운행했고 니가타 ~ 하치노헤간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17] 모델[편집] 이 열차는 E7계·W7계와 마찬가지로 E2계 모델을 기반으로 개발된 차량으로, E5계·H5계 열차 모델은 파스텍 360 모델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18][19] 열차 선두부에 옥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그 외에도 분홍색과 보라색을 적용했다. 로고 의 경우 파스텍을 의미하며 회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동일본여객철도와 홋카이도여객철도 회사 사명까지 포함되었다. E5계 차량 로고 H5계 차량 로고 그랜클레스 로고 운행 노선[편집] 현재 운행 노선[편집] 도호쿠 & 홋카이도 신칸센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구조[편집] 차량 외관[편집] 차체는 알루미늄 합금에 의한 중공 트러스 단면의 더블스킨 구조를 채용했다. 터널 미기압파를 감소시키기 위해 차체 높이를 E954형(FASTECH 360S)과 같은 3,650 mm로, 차체폭은 3,350 mm로 하였다. 차체 경사(틸팅)를 고려하여 차체 측면을 안쪽으로 기울게 설계했다.[20] 선두 형상은 E954형 8호차의 '애로우 라인'을 기본으로 한 '더블 카스프'형으로 하여, 터널 미기압파 저감을 도모하고 있다. 또, 노즈의 길이를 E954형의 16m에서, 약 15m로 단축하고 있다. 캐노피형으로 된 운전대 상부에 전조등(4개)과 미등을 설치했다. 양산 선행차인 U1편성에서는 N700계와 같이 양 선두차(1호차와 10호차)의 운전대 쪽 승객용 문에 플러그 도어가 설치되어 있고, 다른 승객용 문은 통상의 미닫이형으로 되어 있었지만, 양산차량인 U2편성 이후의 편성에서는 모두 미닫이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차체의 색은, 미래를 느끼게 하는 선진적 이미지와 스피드감을 표현하기 위해 E954형 'FASTECH 360S'를 기본으로 상부를 '토키와 그린', 하부를 '비운 화이트'으로 하여, 그 경계선이 되는 중앙에 '하야테 핑크'색 띠를 배치하며, 2014년에 도입하는 홋카이도 여객철도 소유의 H5계 전동차의 경우 '아야카(사이카) 퍼플'색 띠를 배치한다. 주요 기기[편집] 소음 대책으로서 차체 측면부에 점검 마개를 겸한 판을 설치하여 차체 하반부를 가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 차체 연결 부분에는 전주 덮개(全周幌)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어, 소음 저감과 차체간의 흔들림이 저감되었다. 전주 덮개는 캔틸레버 지지방식으로 되어 있어, 지붕 부분과 측면 부분으로 분할되어, 연결시에는 차량의 2위측에 고정되어, 옆 차량의 1위측에 링 기구로 눌러 붙이는 구조가 되어 있다.[21] 또 차체 측면의 대차 부근에는 대차 커버가 채용되어 있다. 대차 커버는 경량화를 위해 카본 파이버 제로 되어 있으며, 흡음재를 채용하는 것으로 소음 저감을 꾀했다[21]. 대차[편집] 차체 연결 부분. 전주 덮개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다. 대차는 E2계의 대차를 베이스로 하여 내구성·제동성을 강화한 볼스터리스 대차를 채용했다. 제동력 강화를 위해 이전에는 공압유압변환식이었던 캘리퍼 식 차륜 디스크 브레이크(동력대차에 장비)과 캘리퍼 식 차축 디스크 브레이크(부수대차에 장비)를 공압식으로 변경하였으며, 차륜의 휠 부분 양측과 차축에 장착된 브레이크 디스크의 체결 볼트를 내주체결식(内周締結式)에서 중앙체결식으로 변경하여 볼트의 부담과 디스크 면의 변형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대차 형식은 전동대차가 DT208, 부수대차가 TR7008이며, 선두차량 운전대 쪽은 레일과 차륜과의 점착력을 높이기 위한 세라믹 분사장치를 갖춘 TR7008A이다. 또, 차체와 대차 프레임을 토션 바로 연결하여, 대차의 사행동을 억제하는 토션바 식 안티 롤링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전 차량에 E2계의 공기식보다 개량된 전자식(電磁式) 액추에이터를 사용하여 회전력으로 좌우의 상위를 제어하는 롤러 나사식(ローラーネジ式) 풀 액티브 서스펜션과 공기 용수철에 의한 차체경사 제어 장치를 탑재하였다.[22][23] 공기식으로부터 전기식으로 변경하는 것에 의해, 공기배관이나 탱크가 필요없게 되어, 경량화를 이루었다.[24] 집전장치[편집] PS208형 팬터그래프 편성 안에서 사용하는 팬터그래프는 2기 중 1기 뿐(3, 7호차에 탑재된 것 중 진행방향에 대해 후방에 있는 것)이므로, 이선이 쉽게 발생하지 않는 12분할 접촉판이 붙은 저소음 팬터그래프를 장비하고 있다. 분할된 접촉판 안에는 스프링이 내장되어 있어, 가선에 부드럽게 추종한다. 양산선행차에서는 '<' 자형 메인 프레임(くの字主枠)과 일체형 메인 프레임의 두 타입을 장비하여, 비교 실험을 실시했다[25]. 그 결과, E954형에서 테스트된 PS9037을 베이스로 한, '<'자형 메인 프레임의 싱글암 팬터그래프(PS208)이 탑재되어 있다. 팬터그래프 측면의 대형 차음판 이외에도, 애자 측면부에 소형 차음판이 설치되어 있다.[26] 소음 저감을 위해, 특고압 인통선은 E2계 0번대와 같이 차내 천장부에 배치했다.[27] 전원·제어기기[편집] 주전동기(MT207)는 농형 3상 유도전동기다. 냉각방식은 자기(自己) 통풍으로, 정격출력은 300kW이다. 성능[편집] 영업운전의 최고속도는 320km/h로, 3‰의 상구배에서의 균형속도는 360km/h이다. 표준 편성은 10량으로, 전동차와 부수차의 구성(MT비)는 8:2이다. 기동가속도는 1.71km/h/s이지만, E3계와의 병결시에는 E3계의 성능에 맞추어 1.6km/h/s로 운행한다 곡선통과시의 승차감을 향상시켜 반경 4,000m의 커브에서도 320km/h로 주행할 수 있도록, 공기 용수철 스트로크식 틸팅 시스템을 이용하여 차체를 최대 1.5도 기울일 수 있다. 객차 구성[28][편집] 전 편성 3호차와 7호차에 팬터그래프가 존재한다.[6]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호차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E523 E526-100 E525 E526-200 E525-400 E526-300 E525-100 E526-400 E515 E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번호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H523 H526-100 H525 H526-200 H525-400 H526-300 H525-100 H526-400 H515 H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10호차 그랜클래스 9호차 그린차 3호차 지정석 E5계 콘텐츠 현황[편집] 총 47 편성이 도입되었으며, 전 차량 운행 중이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U1호 2009년 운행 중 도입 초기 S11호로 도입했다. U2호 2010년 운행 중 U3호 2011년 운행 중 U4호 운행 중 U5호 운행 중 U6호 운행 중 U7호 운행 중 U8호 운행 중 U9호 운행 중 U10호 2012년 운행 중 U11호 운행 중 U12호 운행 중 U13호 운행 중 U14호 운행 중 U15호 운행 중 U16호 운행 중 U17호 운행 중 U18호 운행 중 U19호 운행 중 U20호 운행 중 U21호 운행 중 U22호 2013년 운행 중 U23호 운행 중 U24호 운행 중 U25호 운행 중 U26호 운행 중 U27호 운행 중 U28호 운행 중 U29호 2015년 운행 중 U30호 운행 중 U31호 2016년 운행 중 U32호 2017년 운행 중 U33호 운행 중 U34호 운행 중 U35호 운행 중 U36호 운행 중 U37호 운행 중 U38호 2018년 운행 중 U39호 운행 중 U40호 운행 중 U41호 운행 중 U42호 2019년 운행 중 U43호 운행 중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H1호 2014년 운행 중 H2호 운행 중 H3호 2015년 운행 중 H4호 운행 중 각주[편집] ↑ 『東洋経済』2009년 7월 4일호「鉄道進化論」P45 ↑ E5系S11編成仙台港に陸揚げ [E5 series set S11 unloaded at Sendai Port].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Koyusha Co., Ltd. 2009년 5월 24일. 2009년 5월 25일에 확인함.  ↑ JR車両の動き  [JR Rolling Stock Changes]. 《Tetsudō Daiya Jōhō》 38 (Japan: Kōtsū Shim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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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13. 64쪽.  ↑ JR電車編成表 2016冬 [JR EMU Formations - Winter 2016] (일본어). Japan: Kotsu Shimbunsha. 2015년 11월 18일. 12쪽. ISBN 978-4-330-62315-3.  ↑ 北海道新幹線用車両について - 北海道旅客鉄道、2014年4月16日 ↑ “H5系が川崎重工から出場” [H5 series shipped from Kawasaki Heavy Industries].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Japan: Koyusha Co., Ltd. 2014년 10월 12일. 2014년 10월 13일에 확인함.  ↑ フル編成、堂々 北海道新幹線、線路に [A complete Hokkaido Shinkansen trainset proudly takes to the rails]. 《Doshin Web》 (일본어). Japan: The Hokkaido Shimbun Press. 2014년 11월 1일. 2014년 1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월 16일에 확인함.  ↑ Ito, Hisami (March 2015). 北海道新幹線H5系 雪中で順調に試運転中 [Hokkaido Shinkansen H5 series: Test-running proceeds in the snow]. 《Japan Railfan Magazine》 (일본어) 55 (Japan: Koyusha Co., Ltd.). 57쪽.  ↑ H5系が東北新幹線内で試運転 [H5 series test run on Tohoku Shinkansen].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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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4779608186.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鉄道ジャーナル2009年10月号》. 鉄道ジャーナル社. 2009. p.72쪽.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JR東日本 E5系新幹線電車(量産車) [JR East E5 series Shinkansen (full-production version)]. 《Tetsudō Daiya Jōhō Magazine》. 40권 322호 (Japan: Kōtsū Shimbun). February 2011. 80–83쪽.  사진[편집] E514-1 (10호차) E515-1 (9호차) E526-401 (8호차) E525-101 (7호차) E526-301 (6호차) E525-401 (5호차) E526-201 (4호차) E525-1 (3호차) E526-101 (2호차) E523-1 (1호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H5계 전동차 (일본어) 동일본 여객철도 E5계 공식 사이트 (일본어) 홋카이도 여객철도 보도 자료 (2014년 4월 16일) vdeh신칸센운행 노선규격 신칸센 도카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산요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큐슈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홋카이도 신칸센 미니 신칸센 아키타 신칸센 야마가타 신칸센 신칸센 재래선 갈라 유자와 선 하카타미나미 선 건설 및 계획 중인 노선건설 중인 노선 주오 신칸센 기본 계획 중인 노선 도카이도 화물 신칸센 미에 신칸센 산인 신칸센 시코쿠 신칸센 시코쿠 횡단 신칸센 오우 신칸센 우에쓰 신칸센 주고쿠 횡단 신칸센 큐슈 횡단 신칸센 호쿠리쿠 주쿄 신칸센 홋카이도 미나미마와리 신칸센 히가시큐슈 신칸센 계획 취소 노선 나리타 신칸센 제2 도카이도 신칸센 열차 종류도카이도 & 산요 & 큐슈 고다마 노조미 미즈호 사쿠라 쓰바메/츠바메 히카리 (레일스타) 도호쿠 & 홋카이도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아키타 & 야마가타 고마치/코마치 쓰바사/츠바사 조에쓰 다니가와/타니가와 도키/토키 호쿠리쿠 가가야키/카가야키 쓰루기/츠루기 아사마 하쿠타카 조이풀 트레인 겐비 신칸센 토레이유 쓰바사/토레이유 츠바사 없어진 열차 등급 그랜드 히카리 슈퍼 고마치 아사히 아오바 웨스트 히카리 차량현재 운행하는 차량 500계 700계 N700계 800계 E2계 E3계 E4계 E5계·H5계 E6계 E7계·W7계 도입 예정 차량 N700S계 L0계 퇴역 차량 0계 100계 200계 300계 400계 E1계 기술 개발 차량 & 사업용 차량 911계 912계 951계 961계 962계 1000계 닥터 옐로우 윈350 스타21 300X 파스텍 360S 파스텍 360Z 알파-X 궤간가변열차 MLX-01 해외 수출형 CRH2형 (중화인민공화국) 700T형 (중화민국) 계획 취소 차량 고시츠 히카리 운영회사현재 운영하는 회사 JR 홋카이도 JR 동일본 JR 도카이 JR 서일본 JR 큐슈 없어진 회사 일본국유철도 차량 센터종합 차량 센터 구마모토 센다이 (미야기 현) 하카타 하코다테 하쿠산 차량 센터 나가노 나고야 니가타 도리카이 도쿄 모리오카 미시마 센다이 (가고시마 현) 아오모리 아키타 야마가타 오야마 ‎ 오이 차량 제조 공장 하마마쓰 기타 나스시오바라 시즈오카 아오모리 오카야마 히로시마 기타 Max 그랜클래스 신데렐라 익스프레스 슈퍼 히카리 일본의 궤간 변경에 관한 논쟁 미니 신칸센 정비 신칸센 vdeh고속철도고속 차량시속 200km 이상 아셀라 익스프레스 아델란테 APT 101급 CRH6A ER200 GMB 71 (플라이투겟) 125 225 ICE T ICE TD ICE 4 재벌린 NSB 73 NSB 74 알파 펜둘라르 레일젯 레지나 브라이트선 0계 100계 400계 E1계 E4계 SBB RABDe 500 RABDe 502 IC 2000 SJ 2000 SJ X40 Z-TER (Z 21500) 소콜 슈퍼 익스프레스 800급 801급 802급 탈고 XXI 보이저 패밀리 X3 시속 250km 이상 CRH1A, 1B, 1E CRH2A, 2B, 2E CRH3A CRH5 펜돌리노 뉴펜돌리노 ICE 1 ICE 2 120급·121급, 130급 삽산 200계 300계 700계 800계 E2계 E3계 E7계 · W7계 TCDD HT65000 TGV 쉬드-에스트 라포스테 V250 피우라 시속 300km 이상 AGV(ETR 575) 아빌리아 리버티 렌페 100급 102급, 112급 103급 CRH2C CRH3C CRH380A CRH380B CRH380C CRH380D MTR 380A CR400AF·CR400BF ETR 500 유로스타 e300 유로스타 e320 ETR 1000 ICE 3 KTX-I KTX-산천(SRT) HEMU-430X 오아리스 TGV 쉬드-에스트 TGV 아틀랑티크 TGV 레조/탈리스 PBA TGV 듀플렉스 TGV 2N2 TCDD HT80000 탈리스 PBKA THSR 700T 500계 N700계 E5계 · H5계 E6계 JR 자기부상철도 (L0계) 아브릴 트란스라피드 (상하이 자기부상 시범운행선) 벨라로 봄바디어 제피로 국가아메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미국 캐나다 아시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일본 카자흐스탄 한국 필리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타이완 태국 터키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아프리카 모로코 유럽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체코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라트비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터키 영국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vdeh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철도 차량신칸센E2계 · E3계 · E4계 · E5계 · E6계 · E7계통근형 · 근교형107계 · 113계 · 115계 · E127계 · 209계 · 211계 · 215계 · E217계 · E231계 · E233계 · E235계 · E331계 · 415계 · E501계 · E531계 · 701계 · 719계 · E721계급행형 · 특급형183계 · 185계 · 189계 · 251계 · 253계 · 255계 · E257계 · E259계 · E353계 · 485계 · 489계 · 583계 · 651계 · E653계 · E655계 · E657계 · E751계기동차키하100계 · 키하110계 · 키하E130계 · 키하E200형객차24계 · E26계시험용 · 검측용키야E193계 · 209계(뮤트레인) · E491계 · 쿠모야743형 · 901계 · 키야E991형 · E993계 · 마야 50형 5001호전기 기관차ED75 · EF55 · EF58 · EF60 · EF64 · EF65 · EF81 · EF510디젤 기관차DD14 · DD15 · DD16 · DD51 · DE10 · DE11 · DE15증기 기관차C57 · C61 · D51퇴역 차량200계 · 400계 · E1계 · 101계 · 103계 · 105계 · 123계 · 165계 · 167계 · 169계 · 201계 · 203계 · 205계 · 207계 · 301계 · E351계 · 401계 · 403계 · 417계 · 451계 · 453계 · 455계 · 457계 · 483계 · 715계 · 717계 vdeh홋카이도 여객철도(JR 홋카이도)의 철도 차량신칸센H5계통근형 · 근교형711계 · 721계 · 731계 · 735계급행형 · 특급형785계 · 789계기동차키하40계 · 키하54형 · 키하141계 · 키하150형 · 키하160형 · 키하183계 · 키하201계 · 키하261계 · 키하281계 · 키하283계객차14계 · 24계 · 50계 ·51형 · 510형전기 기관차ED79형디젤 기관차DBR600형 · DD51형 · DE10형 · DE15형증기 기관차C11형시험용 · 검측용오야31형 · 마야34형 · 스유니50형퇴역 차량781계 · 키하130계 · C62형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칸센_E5계_전동차&oldid=24399071" 분류: 동일본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신칸센도호쿠 신칸센숨은 분류: CS1 - 일본어 인용 (ja)인용 오류 - 이름 없는 변수가 사용됨CS1 관리 - 추가 문구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RomânăРусский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21: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신칸센 E5계 전동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 신칸센 E5계 전동차 제작 및 운영 주 용도 비즈니스 및 장거리 여행객 수송용 제작사 가와사키 중공업히타치 제작소 제작 연도 2009년 ~ 현재 생산량 47편성 470량 사용량 47편성 470량 제원 차량 정원 선두차 29명중간차 59~100명그린차 55명그랜클래스 18명 편성 정원 731명 전장 25,000(선두차량은 26,500) mm 전폭 3,350 mm 전고 3,650 mm팬터그래프 상면고 : 4,490 mm 편성 중량 453.5 t 궤간 1,435 mm 성능 전기 방식 교류 25,000V, 50Hz 제어 방식 히타치 VVVF 인버터 제어 (IGBT) 기어비 2.645 기동가속도 1.71 km/h/s 영업 최고 속도 320 km/h 설계 최고 속도 360 km/h 전동기 출력 300 kW 편성 출력 9,960(1만 1천760 마력) kW 구동 장치 3상 유도전동기 MT207WN 평행카르단 구동방식 제동 방식 회생제동 병용 전기지령식 공기제동(응하중장치 포함) MT비 8M2T 보안 장치 DS-ATC 비고 제55회(2012년) 블루리본상 수상 E6계 중련 영업중인 신칸센 E5계 영업중인 신칸센 H5계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일본어: 新幹線E5系 ・ H5系電車)는 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신칸센 차량이다. 본 항에서는 홋카이도여객철도(JR홋카이도)가 신칸센 E5계 전동차와 동일한 사양으로 도입하는 신칸센 H5계 전동차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목차 1 개요 2 모델 3 운행 노선 3.1 현재 운행 노선 4 구조 4.1 차량 외관 4.2 주요 기기 4.2.1 대차 4.2.2 집전장치 4.2.3 전원·제어기기 5 성능 6 객차 구성[28] 6.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6.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7 현황 7.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7.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8 각주 9 사진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동일본여객철도는 2000년에 책정한 중기경영계획 뉴 프론티어 21에서 '세계 제일의 철도 시스템 구축'을 제시했다. 그 중에는 신칸센을 최고속도 360km/h로 영업운전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에 기초해 2002년에 사내에서 발족시킨 신칸센 고속화 추진 프로젝트에 의해, 신칸센 고속 시험차량 파스텍 360을 개발하여 2005년부터 지상설비를 포함한 각종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환경대책이나 비용대 효과를 고려하면 최고 영업 속도 320km/h이 타당한 것으로 재검토되어, 현재의 E5계가 개발·제조되었다. 1편성(10량)당 제조 비용은 약 45억엔이다.[1] 이 계열이 사용되는 열차의 애칭은 공모에 의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다. 또, 'MADE IN DREAM.' '21세기의 꿈의 초특급을 만들면, 이렇게 되었습니다'를 캐치 카피로 하였다. 2009년 5월에 도호쿠 신칸센 노선에 시범 운행을 위해 신칸센 종합 차량 센터에 인도되었다.[2] 1호차부터 5호차까지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히타치 제작소, 6호차부터 10호차까지 효고현에 위치한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제작했다.[3] 2009년 12월 9일에 최초로 도쿄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했다.[4] 2013년 2월에 U1편성으로 변경되었다.[5] 2010년 5월에 신칸센 E5계 전동차 이름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는데, 2009년 3월 폐지된 침대특급열차의 명칭이다. 같은 해 12월에 U2편성이 도입되었다.[6] 이후 2편성이 추가로 반입되면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에 배치되었다.[7][8] 2011년 3월 5일부터 영업운전을 개시하였으며, 2012년 5월, 제55회 일본철도클럽에서 매년 개최하는 블루리본상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9] 같은 해 11월 20일에 공식 발표가 열렸다.[10] 2013년 3월 16일, 다이야 개정으로 최고 우츠노미야 ~ 센다이 구간 최고 영업 속도가 320km/h를 증가했다.[11] 2014년 4월에 홋카이도 신칸센 개통에 따른 세부 열차 사항이 발표되었다.[12] H1편성이 고베 시 카와사키 중공업에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로 배치되었다.[13] 같은 해 10월에 H2편성이 반입되었고[14] 이후 홋카이도 신칸센에서 시범 운행을 시작하면서 최고 영업 속도 260km/h를 도달했고[15], 2015년 11월에 도호쿠 신칸센 구간에 시범 운행을 개시했다.[16] 2017년 3월 25일 도호쿠 신칸센 개업 35주년을 맞이해 조에쓰 신칸센을 운행했고 니가타 ~ 하치노헤간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17] 모델[편집] 이 열차는 E7계·W7계와 마찬가지로 E2계 모델을 기반으로 개발된 차량으로, E5계·H5계 열차 모델은 파스텍 360 모델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18][19] 열차 선두부에 옥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그 외에도 분홍색과 보라색을 적용했다. 로고 의 경우 파스텍을 의미하며 회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동일본여객철도와 홋카이도여객철도 회사 사명까지 포함되었다. E5계 차량 로고 H5계 차량 로고 그랜클레스 로고 운행 노선[편집] 현재 운행 노선[편집] 도호쿠 & 홋카이도 신칸센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구조[편집] 차량 외관[편집] 차체는 알루미늄 합금에 의한 중공 트러스 단면의 더블스킨 구조를 채용했다. 터널 미기압파를 감소시키기 위해 차체 높이를 E954형(FASTECH 360S)과 같은 3,650 mm로, 차체폭은 3,350 mm로 하였다. 차체 경사(틸팅)를 고려하여 차체 측면을 안쪽으로 기울게 설계했다.[20] 선두 형상은 E954형 8호차의 '애로우 라인'을 기본으로 한 '더블 카스프'형으로 하여, 터널 미기압파 저감을 도모하고 있다. 또, 노즈의 길이를 E954형의 16m에서, 약 15m로 단축하고 있다. 캐노피형으로 된 운전대 상부에 전조등(4개)과 미등을 설치했다. 양산 선행차인 U1편성에서는 N700계와 같이 양 선두차(1호차와 10호차)의 운전대 쪽 승객용 문에 플러그 도어가 설치되어 있고, 다른 승객용 문은 통상의 미닫이형으로 되어 있었지만, 양산차량인 U2편성 이후의 편성에서는 모두 미닫이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차체의 색은, 미래를 느끼게 하는 선진적 이미지와 스피드감을 표현하기 위해 E954형 'FASTECH 360S'를 기본으로 상부를 '토키와 그린', 하부를 '비운 화이트'으로 하여, 그 경계선이 되는 중앙에 '하야테 핑크'색 띠를 배치하며, 2014년에 도입하는 홋카이도 여객철도 소유의 H5계 전동차의 경우 '아야카(사이카) 퍼플'색 띠를 배치한다. 주요 기기[편집] 소음 대책으로서 차체 측면부에 점검 마개를 겸한 판을 설치하여 차체 하반부를 가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 차체 연결 부분에는 전주 덮개(全周幌)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어, 소음 저감과 차체간의 흔들림이 저감되었다. 전주 덮개는 캔틸레버 지지방식으로 되어 있어, 지붕 부분과 측면 부분으로 분할되어, 연결시에는 차량의 2위측에 고정되어, 옆 차량의 1위측에 링 기구로 눌러 붙이는 구조가 되어 있다.[21] 또 차체 측면의 대차 부근에는 대차 커버가 채용되어 있다. 대차 커버는 경량화를 위해 카본 파이버 제로 되어 있으며, 흡음재를 채용하는 것으로 소음 저감을 꾀했다[21]. 대차[편집] 차체 연결 부분. 전주 덮개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다. 대차는 E2계의 대차를 베이스로 하여 내구성·제동성을 강화한 볼스터리스 대차를 채용했다. 제동력 강화를 위해 이전에는 공압유압변환식이었던 캘리퍼 식 차륜 디스크 브레이크(동력대차에 장비)과 캘리퍼 식 차축 디스크 브레이크(부수대차에 장비)를 공압식으로 변경하였으며, 차륜의 휠 부분 양측과 차축에 장착된 브레이크 디스크의 체결 볼트를 내주체결식(内周締結式)에서 중앙체결식으로 변경하여 볼트의 부담과 디스크 면의 변형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대차 형식은 전동대차가 DT208, 부수대차가 TR7008이며, 선두차량 운전대 쪽은 레일과 차륜과의 점착력을 높이기 위한 세라믹 분사장치를 갖춘 TR7008A이다. 또, 차체와 대차 프레임을 토션 바로 연결하여, 대차의 사행동을 억제하는 토션바 식 안티 롤링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전 차량에 E2계의 공기식보다 개량된 전자식(電磁式) 액추에이터를 사용하여 회전력으로 좌우의 상위를 제어하는 롤러 나사식(ローラーネジ式) 풀 액티브 서스펜션과 공기 용수철에 의한 차체경사 제어 장치를 탑재하였다.[22][23] 공기식으로부터 전기식으로 변경하는 것에 의해, 공기배관이나 탱크가 필요없게 되어, 경량화를 이루었다.[24] 집전장치[편집] PS208형 팬터그래프 편성 안에서 사용하는 팬터그래프는 2기 중 1기 뿐(3, 7호차에 탑재된 것 중 진행방향에 대해 후방에 있는 것)이므로, 이선이 쉽게 발생하지 않는 12분할 접촉판이 붙은 저소음 팬터그래프를 장비하고 있다. 분할된 접촉판 안에는 스프링이 내장되어 있어, 가선에 부드럽게 추종한다. 양산선행차에서는 '<' 자형 메인 프레임(くの字主枠)과 일체형 메인 프레임의 두 타입을 장비하여, 비교 실험을 실시했다[25]. 그 결과, E954형에서 테스트된 PS9037을 베이스로 한, '<'자형 메인 프레임의 싱글암 팬터그래프(PS208)이 탑재되어 있다. 팬터그래프 측면의 대형 차음판 이외에도, 애자 측면부에 소형 차음판이 설치되어 있다.[26] 소음 저감을 위해, 특고압 인통선은 E2계 0번대와 같이 차내 천장부에 배치했다.[27] 전원·제어기기[편집] 주전동기(MT207)는 농형 3상 유도전동기다. 냉각방식은 자기(自己) 통풍으로, 정격출력은 300kW이다. 성능[편집] 영업운전의 최고속도는 320km/h로, 3‰의 상구배에서의 균형속도는 360km/h이다. 표준 편성은 10량으로, 전동차와 부수차의 구성(MT비)는 8:2이다. 기동가속도는 1.71km/h/s이지만, E3계와의 병결시에는 E3계의 성능에 맞추어 1.6km/h/s로 운행한다 곡선통과시의 승차감을 향상시켜 반경 4,000m의 커브에서도 320km/h로 주행할 수 있도록, 공기 용수철 스트로크식 틸팅 시스템을 이용하여 차체를 최대 1.5도 기울일 수 있다. 객차 구성[28][편집] 전 편성 3호차와 7호차에 팬터그래프가 존재한다.[6]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호차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E523 E526-100 E525 E526-200 E525-400 E526-300 E525-100 E526-400 E515 E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번호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H523 H526-100 H525 H526-200 H525-400 H526-300 H525-100 H526-400 H515 H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10호차 그랜클래스 9호차 그린차 3호차 지정석 E5계 콘텐츠 현황[편집] 총 47 편성이 도입되었으며, 전 차량 운행 중이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U1호 2009년 운행 중 도입 초기 S11호로 도입했다. U2호 2010년 운행 중 U3호 2011년 운행 중 U4호 운행 중 U5호 운행 중 U6호 운행 중 U7호 운행 중 U8호 운행 중 U9호 운행 중 U10호 2012년 운행 중 U11호 운행 중 U12호 운행 중 U13호 운행 중 U14호 운행 중 U15호 운행 중 U16호 운행 중 U17호 운행 중 U18호 운행 중 U19호 운행 중 U20호 운행 중 U21호 운행 중 U22호 2013년 운행 중 U23호 운행 중 U24호 운행 중 U25호 운행 중 U26호 운행 중 U27호 운행 중 U28호 운행 중 U29호 2015년 운행 중 U30호 운행 중 U31호 2016년 운행 중 U32호 2017년 운행 중 U33호 운행 중 U34호 운행 중 U35호 운행 중 U36호 운행 중 U37호 운행 중 U38호 2018년 운행 중 U39호 운행 중 U40호 운행 중 U41호 운행 중 U42호 2019년 운행 중 U43호 운행 중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H1호 2014년 운행 중 H2호 운행 중 H3호 2015년 운행 중 H4호 운행 중 각주[편집] ↑ 『東洋経済』2009년 7월 4일호「鉄道進化論」P45 ↑ E5系S11編成仙台港に陸揚げ [E5 series set S11 unloaded at Sendai Port].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Koyusha Co., Ltd. 2009년 5월 24일. 2009년 5월 25일에 확인함.  ↑ JR車両の動き  [JR Rolling Stock Changes]. 《Tetsudō Daiya Jōhō》 38 (Japan: Kōtsū Shim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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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13. 64쪽.  ↑ JR電車編成表 2016冬 [JR EMU Formations - Winter 2016] (일본어). Japan: Kotsu Shimbunsha. 2015년 11월 18일. 12쪽. ISBN 978-4-330-62315-3.  ↑ 北海道新幹線用車両について - 北海道旅客鉄道、2014年4月16日 ↑ “H5系が川崎重工から出場” [H5 series shipped from Kawasaki Heavy Industries].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Japan: Koyusha Co., Ltd. 2014년 10월 12일. 2014년 10월 13일에 확인함.  ↑ フル編成、堂々 北海道新幹線、線路に [A complete Hokkaido Shinkansen trainset proudly takes to the rails]. 《Doshin Web》 (일본어). Japan: The Hokkaido Shimbun Press. 2014년 11월 1일. 2014년 1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월 16일에 확인함.  ↑ Ito, Hisami (March 2015). 北海道新幹線H5系 雪中で順調に試運転中 [Hokkaido Shinkansen H5 series: Test-running proceeds in the snow]. 《Japan Railfan Magazine》 (일본어) 55 (Japan: Koyusha Co., Ltd.). 57쪽.  ↑ H5系が東北新幹線内で試運転 [H5 series test run on Tohoku Shinkansen].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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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4779608186.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鉄道ジャーナル2009年10月号》. 鉄道ジャーナル社. 2009. p.72쪽.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JR東日本 E5系新幹線電車(量産車) [JR East E5 series Shinkansen (full-production version)]. 《Tetsudō Daiya Jōhō Magazine》. 40권 322호 (Japan: Kōtsū Shimbun). February 2011. 80–83쪽.  사진[편집] E514-1 (10호차) E515-1 (9호차) E526-401 (8호차) E525-101 (7호차) E526-301 (6호차) E525-401 (5호차) E526-201 (4호차) E525-1 (3호차) E526-101 (2호차) E523-1 (1호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H5계 전동차 (일본어) 동일본 여객철도 E5계 공식 사이트 (일본어) 홋카이도 여객철도 보도 자료 (2014년 4월 16일) vdeh신칸센운행 노선규격 신칸센 도카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산요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큐슈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홋카이도 신칸센 미니 신칸센 아키타 신칸센 야마가타 신칸센 신칸센 재래선 갈라 유자와 선 하카타미나미 선 건설 및 계획 중인 노선건설 중인 노선 주오 신칸센 기본 계획 중인 노선 도카이도 화물 신칸센 미에 신칸센 산인 신칸센 시코쿠 신칸센 시코쿠 횡단 신칸센 오우 신칸센 우에쓰 신칸센 주고쿠 횡단 신칸센 큐슈 횡단 신칸센 호쿠리쿠 주쿄 신칸센 홋카이도 미나미마와리 신칸센 히가시큐슈 신칸센 계획 취소 노선 나리타 신칸센 제2 도카이도 신칸센 열차 종류도카이도 & 산요 & 큐슈 고다마 노조미 미즈호 사쿠라 쓰바메/츠바메 히카리 (레일스타) 도호쿠 & 홋카이도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아키타 & 야마가타 고마치/코마치 쓰바사/츠바사 조에쓰 다니가와/타니가와 도키/토키 호쿠리쿠 가가야키/카가야키 쓰루기/츠루기 아사마 하쿠타카 조이풀 트레인 겐비 신칸센 토레이유 쓰바사/토레이유 츠바사 없어진 열차 등급 그랜드 히카리 슈퍼 고마치 아사히 아오바 웨스트 히카리 차량현재 운행하는 차량 500계 700계 N700계 800계 E2계 E3계 E4계 E5계·H5계 E6계 E7계·W7계 도입 예정 차량 N700S계 L0계 퇴역 차량 0계 100계 200계 300계 400계 E1계 기술 개발 차량 & 사업용 차량 911계 912계 951계 961계 962계 1000계 닥터 옐로우 윈350 스타21 300X 파스텍 360S 파스텍 360Z 알파-X 궤간가변열차 MLX-01 해외 수출형 CRH2형 (중화인민공화국) 700T형 (중화민국) 계획 취소 차량 고시츠 히카리 운영회사현재 운영하는 회사 JR 홋카이도 JR 동일본 JR 도카이 JR 서일본 JR 큐슈 없어진 회사 일본국유철도 차량 센터종합 차량 센터 구마모토 센다이 (미야기 현) 하카타 하코다테 하쿠산 차량 센터 나가노 나고야 니가타 도리카이 도쿄 모리오카 미시마 센다이 (가고시마 현) 아오모리 아키타 야마가타 오야마 ‎ 오이 차량 제조 공장 하마마쓰 기타 나스시오바라 시즈오카 아오모리 오카야마 히로시마 기타 Max 그랜클래스 신데렐라 익스프레스 슈퍼 히카리 일본의 궤간 변경에 관한 논쟁 미니 신칸센 정비 신칸센 vdeh고속철도고속 차량시속 200km 이상 아셀라 익스프레스 아델란테 APT 101급 CRH6A ER200 GMB 71 (플라이투겟) 125 225 ICE T ICE TD ICE 4 재벌린 NSB 73 NSB 74 알파 펜둘라르 레일젯 레지나 브라이트선 0계 100계 400계 E1계 E4계 SBB RABDe 500 RABDe 502 IC 2000 SJ 2000 SJ X40 Z-TER (Z 21500) 소콜 슈퍼 익스프레스 800급 801급 802급 탈고 XXI 보이저 패밀리 X3 시속 250km 이상 CRH1A, 1B, 1E CRH2A, 2B, 2E CRH3A CRH5 펜돌리노 뉴펜돌리노 ICE 1 ICE 2 120급·121급, 130급 삽산 200계 300계 700계 800계 E2계 E3계 E7계 · W7계 TCDD HT65000 TGV 쉬드-에스트 라포스테 V250 피우라 시속 300km 이상 AGV(ETR 575) 아빌리아 리버티 렌페 100급 102급, 112급 103급 CRH2C CRH3C CRH380A CRH380B CRH380C CRH380D MTR 380A CR400AF·CR400BF ETR 500 유로스타 e300 유로스타 e320 ETR 1000 ICE 3 KTX-I KTX-산천(SRT) HEMU-430X 오아리스 TGV 쉬드-에스트 TGV 아틀랑티크 TGV 레조/탈리스 PBA TGV 듀플렉스 TGV 2N2 TCDD HT80000 탈리스 PBKA THSR 700T 500계 N700계 E5계 · H5계 E6계 JR 자기부상철도 (L0계) 아브릴 트란스라피드 (상하이 자기부상 시범운행선) 벨라로 봄바디어 제피로 국가아메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미국 캐나다 아시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일본 카자흐스탄 한국 필리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타이완 태국 터키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아프리카 모로코 유럽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체코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라트비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터키 영국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vdeh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철도 차량신칸센E2계 · E3계 · E4계 · E5계 · E6계 · E7계통근형 · 근교형107계 · 113계 · 115계 · E127계 · 209계 · 211계 · 215계 · E217계 · E231계 · E233계 · E235계 · E331계 · 415계 · E501계 · E531계 · 701계 · 719계 · E721계급행형 · 특급형183계 · 185계 · 189계 · 251계 · 253계 · 255계 · E257계 · E259계 · E353계 · 485계 · 489계 · 583계 · 651계 · E653계 · E655계 · E657계 · E751계기동차키하100계 · 키하110계 · 키하E130계 · 키하E200형객차24계 · E26계시험용 · 검측용키야E193계 · 209계(뮤트레인) · E491계 · 쿠모야743형 · 901계 · 키야E991형 · E993계 · 마야 50형 5001호전기 기관차ED75 · EF55 · EF58 · EF60 · EF64 · EF65 · EF81 · EF510디젤 기관차DD14 · DD15 · DD16 · DD51 · DE10 · DE11 · DE15증기 기관차C57 · C61 · D51퇴역 차량200계 · 400계 · E1계 · 101계 · 103계 · 105계 · 123계 · 165계 · 167계 · 169계 · 201계 · 203계 · 205계 · 207계 · 301계 · E351계 · 401계 · 403계 · 417계 · 451계 · 453계 · 455계 · 457계 · 483계 · 715계 · 717계 vdeh홋카이도 여객철도(JR 홋카이도)의 철도 차량신칸센H5계통근형 · 근교형711계 · 721계 · 731계 · 735계급행형 · 특급형785계 · 789계기동차키하40계 · 키하54형 · 키하141계 · 키하150형 · 키하160형 · 키하183계 · 키하201계 · 키하261계 · 키하281계 · 키하283계객차14계 · 24계 · 50계 ·51형 · 510형전기 기관차ED79형디젤 기관차DBR600형 · DD51형 · DE10형 · DE15형증기 기관차C11형시험용 · 검측용오야31형 · 마야34형 · 스유니50형퇴역 차량781계 · 키하130계 · C62형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칸센_E5계_전동차&oldid=24399071" 분류: 동일본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신칸센도호쿠 신칸센숨은 분류: CS1 - 일본어 인용 (ja)인용 오류 - 이름 없는 변수가 사용됨CS1 관리 - 추가 문구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RomânăРусский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21: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신칸센 E5계 전동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 신칸센 E5계 전동차 제작 및 운영 주 용도 비즈니스 및 장거리 여행객 수송용 제작사 가와사키 중공업히타치 제작소 제작 연도 2009년 ~ 현재 생산량 47편성 470량 사용량 47편성 470량 제원 차량 정원 선두차 29명중간차 59~100명그린차 55명그랜클래스 18명 편성 정원 731명 전장 25,000(선두차량은 26,500) mm 전폭 3,350 mm 전고 3,650 mm팬터그래프 상면고 : 4,490 mm 편성 중량 453.5 t 궤간 1,435 mm 성능 전기 방식 교류 25,000V, 50Hz 제어 방식 히타치 VVVF 인버터 제어 (IGBT) 기어비 2.645 기동가속도 1.71 km/h/s 영업 최고 속도 320 km/h 설계 최고 속도 360 km/h 전동기 출력 300 kW 편성 출력 9,960(1만 1천760 마력) kW 구동 장치 3상 유도전동기 MT207WN 평행카르단 구동방식 제동 방식 회생제동 병용 전기지령식 공기제동(응하중장치 포함) MT비 8M2T 보안 장치 DS-ATC 비고 제55회(2012년) 블루리본상 수상 E6계 중련 영업중인 신칸센 E5계 영업중인 신칸센 H5계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일본어: 新幹線E5系 ・ H5系電車)는 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신칸센 차량이다. 본 항에서는 홋카이도여객철도(JR홋카이도)가 신칸센 E5계 전동차와 동일한 사양으로 도입하는 신칸센 H5계 전동차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목차 1 개요 2 모델 3 운행 노선 3.1 현재 운행 노선 4 구조 4.1 차량 외관 4.2 주요 기기 4.2.1 대차 4.2.2 집전장치 4.2.3 전원·제어기기 5 성능 6 객차 구성[28] 6.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6.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7 현황 7.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7.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8 각주 9 사진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동일본여객철도는 2000년에 책정한 중기경영계획 뉴 프론티어 21에서 '세계 제일의 철도 시스템 구축'을 제시했다. 그 중에는 신칸센을 최고속도 360km/h로 영업운전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에 기초해 2002년에 사내에서 발족시킨 신칸센 고속화 추진 프로젝트에 의해, 신칸센 고속 시험차량 파스텍 360을 개발하여 2005년부터 지상설비를 포함한 각종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환경대책이나 비용대 효과를 고려하면 최고 영업 속도 320km/h이 타당한 것으로 재검토되어, 현재의 E5계가 개발·제조되었다. 1편성(10량)당 제조 비용은 약 45억엔이다.[1] 이 계열이 사용되는 열차의 애칭은 공모에 의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다. 또, 'MADE IN DREAM.' '21세기의 꿈의 초특급을 만들면, 이렇게 되었습니다'를 캐치 카피로 하였다. 2009년 5월에 도호쿠 신칸센 노선에 시범 운행을 위해 신칸센 종합 차량 센터에 인도되었다.[2] 1호차부터 5호차까지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히타치 제작소, 6호차부터 10호차까지 효고현에 위치한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제작했다.[3] 2009년 12월 9일에 최초로 도쿄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했다.[4] 2013년 2월에 U1편성으로 변경되었다.[5] 2010년 5월에 신칸센 E5계 전동차 이름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는데, 2009년 3월 폐지된 침대특급열차의 명칭이다. 같은 해 12월에 U2편성이 도입되었다.[6] 이후 2편성이 추가로 반입되면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에 배치되었다.[7][8] 2011년 3월 5일부터 영업운전을 개시하였으며, 2012년 5월, 제55회 일본철도클럽에서 매년 개최하는 블루리본상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9] 같은 해 11월 20일에 공식 발표가 열렸다.[10] 2013년 3월 16일, 다이야 개정으로 최고 우츠노미야 ~ 센다이 구간 최고 영업 속도가 320km/h를 증가했다.[11] 2014년 4월에 홋카이도 신칸센 개통에 따른 세부 열차 사항이 발표되었다.[12] H1편성이 고베 시 카와사키 중공업에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로 배치되었다.[13] 같은 해 10월에 H2편성이 반입되었고[14] 이후 홋카이도 신칸센에서 시범 운행을 시작하면서 최고 영업 속도 260km/h를 도달했고[15], 2015년 11월에 도호쿠 신칸센 구간에 시범 운행을 개시했다.[16] 2017년 3월 25일 도호쿠 신칸센 개업 35주년을 맞이해 조에쓰 신칸센을 운행했고 니가타 ~ 하치노헤간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17] 모델[편집] 이 열차는 E7계·W7계와 마찬가지로 E2계 모델을 기반으로 개발된 차량으로, E5계·H5계 열차 모델은 파스텍 360 모델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18][19] 열차 선두부에 옥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그 외에도 분홍색과 보라색을 적용했다. 로고 의 경우 파스텍을 의미하며 회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동일본여객철도와 홋카이도여객철도 회사 사명까지 포함되었다. E5계 차량 로고 H5계 차량 로고 그랜클레스 로고 운행 노선[편집] 현재 운행 노선[편집] 도호쿠 & 홋카이도 신칸센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구조[편집] 차량 외관[편집] 차체는 알루미늄 합금에 의한 중공 트러스 단면의 더블스킨 구조를 채용했다. 터널 미기압파를 감소시키기 위해 차체 높이를 E954형(FASTECH 360S)과 같은 3,650 mm로, 차체폭은 3,350 mm로 하였다. 차체 경사(틸팅)를 고려하여 차체 측면을 안쪽으로 기울게 설계했다.[20] 선두 형상은 E954형 8호차의 '애로우 라인'을 기본으로 한 '더블 카스프'형으로 하여, 터널 미기압파 저감을 도모하고 있다. 또, 노즈의 길이를 E954형의 16m에서, 약 15m로 단축하고 있다. 캐노피형으로 된 운전대 상부에 전조등(4개)과 미등을 설치했다. 양산 선행차인 U1편성에서는 N700계와 같이 양 선두차(1호차와 10호차)의 운전대 쪽 승객용 문에 플러그 도어가 설치되어 있고, 다른 승객용 문은 통상의 미닫이형으로 되어 있었지만, 양산차량인 U2편성 이후의 편성에서는 모두 미닫이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차체의 색은, 미래를 느끼게 하는 선진적 이미지와 스피드감을 표현하기 위해 E954형 'FASTECH 360S'를 기본으로 상부를 '토키와 그린', 하부를 '비운 화이트'으로 하여, 그 경계선이 되는 중앙에 '하야테 핑크'색 띠를 배치하며, 2014년에 도입하는 홋카이도 여객철도 소유의 H5계 전동차의 경우 '아야카(사이카) 퍼플'색 띠를 배치한다. 주요 기기[편집] 소음 대책으로서 차체 측면부에 점검 마개를 겸한 판을 설치하여 차체 하반부를 가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 차체 연결 부분에는 전주 덮개(全周幌)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어, 소음 저감과 차체간의 흔들림이 저감되었다. 전주 덮개는 캔틸레버 지지방식으로 되어 있어, 지붕 부분과 측면 부분으로 분할되어, 연결시에는 차량의 2위측에 고정되어, 옆 차량의 1위측에 링 기구로 눌러 붙이는 구조가 되어 있다.[21] 또 차체 측면의 대차 부근에는 대차 커버가 채용되어 있다. 대차 커버는 경량화를 위해 카본 파이버 제로 되어 있으며, 흡음재를 채용하는 것으로 소음 저감을 꾀했다[21]. 대차[편집] 차체 연결 부분. 전주 덮개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다. 대차는 E2계의 대차를 베이스로 하여 내구성·제동성을 강화한 볼스터리스 대차를 채용했다. 제동력 강화를 위해 이전에는 공압유압변환식이었던 캘리퍼 식 차륜 디스크 브레이크(동력대차에 장비)과 캘리퍼 식 차축 디스크 브레이크(부수대차에 장비)를 공압식으로 변경하였으며, 차륜의 휠 부분 양측과 차축에 장착된 브레이크 디스크의 체결 볼트를 내주체결식(内周締結式)에서 중앙체결식으로 변경하여 볼트의 부담과 디스크 면의 변형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대차 형식은 전동대차가 DT208, 부수대차가 TR7008이며, 선두차량 운전대 쪽은 레일과 차륜과의 점착력을 높이기 위한 세라믹 분사장치를 갖춘 TR7008A이다. 또, 차체와 대차 프레임을 토션 바로 연결하여, 대차의 사행동을 억제하는 토션바 식 안티 롤링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전 차량에 E2계의 공기식보다 개량된 전자식(電磁式) 액추에이터를 사용하여 회전력으로 좌우의 상위를 제어하는 롤러 나사식(ローラーネジ式) 풀 액티브 서스펜션과 공기 용수철에 의한 차체경사 제어 장치를 탑재하였다.[22][23] 공기식으로부터 전기식으로 변경하는 것에 의해, 공기배관이나 탱크가 필요없게 되어, 경량화를 이루었다.[24] 집전장치[편집] PS208형 팬터그래프 편성 안에서 사용하는 팬터그래프는 2기 중 1기 뿐(3, 7호차에 탑재된 것 중 진행방향에 대해 후방에 있는 것)이므로, 이선이 쉽게 발생하지 않는 12분할 접촉판이 붙은 저소음 팬터그래프를 장비하고 있다. 분할된 접촉판 안에는 스프링이 내장되어 있어, 가선에 부드럽게 추종한다. 양산선행차에서는 '<' 자형 메인 프레임(くの字主枠)과 일체형 메인 프레임의 두 타입을 장비하여, 비교 실험을 실시했다[25]. 그 결과, E954형에서 테스트된 PS9037을 베이스로 한, '<'자형 메인 프레임의 싱글암 팬터그래프(PS208)이 탑재되어 있다. 팬터그래프 측면의 대형 차음판 이외에도, 애자 측면부에 소형 차음판이 설치되어 있다.[26] 소음 저감을 위해, 특고압 인통선은 E2계 0번대와 같이 차내 천장부에 배치했다.[27] 전원·제어기기[편집] 주전동기(MT207)는 농형 3상 유도전동기다. 냉각방식은 자기(自己) 통풍으로, 정격출력은 300kW이다. 성능[편집] 영업운전의 최고속도는 320km/h로, 3‰의 상구배에서의 균형속도는 360km/h이다. 표준 편성은 10량으로, 전동차와 부수차의 구성(MT비)는 8:2이다. 기동가속도는 1.71km/h/s이지만, E3계와의 병결시에는 E3계의 성능에 맞추어 1.6km/h/s로 운행한다 곡선통과시의 승차감을 향상시켜 반경 4,000m의 커브에서도 320km/h로 주행할 수 있도록, 공기 용수철 스트로크식 틸팅 시스템을 이용하여 차체를 최대 1.5도 기울일 수 있다. 객차 구성[28][편집] 전 편성 3호차와 7호차에 팬터그래프가 존재한다.[6]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호차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E523 E526-100 E525 E526-200 E525-400 E526-300 E525-100 E526-400 E515 E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번호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H523 H526-100 H525 H526-200 H525-400 H526-300 H525-100 H526-400 H515 H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10호차 그랜클래스 9호차 그린차 3호차 지정석 E5계 콘텐츠 현황[편집] 총 47 편성이 도입되었으며, 전 차량 운행 중이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U1호 2009년 운행 중 도입 초기 S11호로 도입했다. U2호 2010년 운행 중 U3호 2011년 운행 중 U4호 운행 중 U5호 운행 중 U6호 운행 중 U7호 운행 중 U8호 운행 중 U9호 운행 중 U10호 2012년 운행 중 U11호 운행 중 U12호 운행 중 U13호 운행 중 U14호 운행 중 U15호 운행 중 U16호 운행 중 U17호 운행 중 U18호 운행 중 U19호 운행 중 U20호 운행 중 U21호 운행 중 U22호 2013년 운행 중 U23호 운행 중 U24호 운행 중 U25호 운행 중 U26호 운행 중 U27호 운행 중 U28호 운행 중 U29호 2015년 운행 중 U30호 운행 중 U31호 2016년 운행 중 U32호 2017년 운행 중 U33호 운행 중 U34호 운행 중 U35호 운행 중 U36호 운행 중 U37호 운행 중 U38호 2018년 운행 중 U39호 운행 중 U40호 운행 중 U41호 운행 중 U42호 2019년 운행 중 U43호 운행 중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H1호 2014년 운행 중 H2호 운행 중 H3호 2015년 운행 중 H4호 운행 중 각주[편집] ↑ 『東洋経済』2009년 7월 4일호「鉄道進化論」P45 ↑ E5系S11編成仙台港に陸揚げ [E5 series set S11 unloaded at Sendai Port].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Koyusha Co., Ltd. 2009년 5월 24일. 2009년 5월 25일에 확인함.  ↑ JR車両の動き  [JR Rolling Stock Changes]. 《Tetsudō Daiya Jōhō》 38 (Japan: Kōtsū Shim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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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13. 64쪽.  ↑ JR電車編成表 2016冬 [JR EMU Formations - Winter 2016] (일본어). Japan: Kotsu Shimbunsha. 2015년 11월 18일. 12쪽. ISBN 978-4-330-62315-3.  ↑ 北海道新幹線用車両について - 北海道旅客鉄道、2014年4月16日 ↑ “H5系が川崎重工から出場” [H5 series shipped from Kawasaki Heavy Industries].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Japan: Koyusha Co., Ltd. 2014년 10월 12일. 2014년 10월 13일에 확인함.  ↑ フル編成、堂々 北海道新幹線、線路に [A complete Hokkaido Shinkansen trainset proudly takes to the rails]. 《Doshin Web》 (일본어). Japan: The Hokkaido Shimbun Press. 2014년 11월 1일. 2014년 1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월 16일에 확인함.  ↑ Ito, Hisami (March 2015). 北海道新幹線H5系 雪中で順調に試運転中 [Hokkaido Shinkansen H5 series: Test-running proceeds in the snow]. 《Japan Railfan Magazine》 (일본어) 55 (Japan: Koyusha Co., Ltd.). 57쪽.  ↑ H5系が東北新幹線内で試運転 [H5 series test run on Tohoku Shinkansen].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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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4779608186.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鉄道ジャーナル2009年10月号》. 鉄道ジャーナル社. 2009. p.72쪽.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JR東日本 E5系新幹線電車(量産車) [JR East E5 series Shinkansen (full-production version)]. 《Tetsudō Daiya Jōhō Magazine》. 40권 322호 (Japan: Kōtsū Shimbun). February 2011. 80–83쪽.  사진[편집] E514-1 (10호차) E515-1 (9호차) E526-401 (8호차) E525-101 (7호차) E526-301 (6호차) E525-401 (5호차) E526-201 (4호차) E525-1 (3호차) E526-101 (2호차) E523-1 (1호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H5계 전동차 (일본어) 동일본 여객철도 E5계 공식 사이트 (일본어) 홋카이도 여객철도 보도 자료 (2014년 4월 16일) vdeh신칸센운행 노선규격 신칸센 도카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산요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큐슈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홋카이도 신칸센 미니 신칸센 아키타 신칸센 야마가타 신칸센 신칸센 재래선 갈라 유자와 선 하카타미나미 선 건설 및 계획 중인 노선건설 중인 노선 주오 신칸센 기본 계획 중인 노선 도카이도 화물 신칸센 미에 신칸센 산인 신칸센 시코쿠 신칸센 시코쿠 횡단 신칸센 오우 신칸센 우에쓰 신칸센 주고쿠 횡단 신칸센 큐슈 횡단 신칸센 호쿠리쿠 주쿄 신칸센 홋카이도 미나미마와리 신칸센 히가시큐슈 신칸센 계획 취소 노선 나리타 신칸센 제2 도카이도 신칸센 열차 종류도카이도 & 산요 & 큐슈 고다마 노조미 미즈호 사쿠라 쓰바메/츠바메 히카리 (레일스타) 도호쿠 & 홋카이도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아키타 & 야마가타 고마치/코마치 쓰바사/츠바사 조에쓰 다니가와/타니가와 도키/토키 호쿠리쿠 가가야키/카가야키 쓰루기/츠루기 아사마 하쿠타카 조이풀 트레인 겐비 신칸센 토레이유 쓰바사/토레이유 츠바사 없어진 열차 등급 그랜드 히카리 슈퍼 고마치 아사히 아오바 웨스트 히카리 차량현재 운행하는 차량 500계 700계 N700계 800계 E2계 E3계 E4계 E5계·H5계 E6계 E7계·W7계 도입 예정 차량 N700S계 L0계 퇴역 차량 0계 100계 200계 300계 400계 E1계 기술 개발 차량 & 사업용 차량 911계 912계 951계 961계 962계 1000계 닥터 옐로우 윈350 스타21 300X 파스텍 360S 파스텍 360Z 알파-X 궤간가변열차 MLX-01 해외 수출형 CRH2형 (중화인민공화국) 700T형 (중화민국) 계획 취소 차량 고시츠 히카리 운영회사현재 운영하는 회사 JR 홋카이도 JR 동일본 JR 도카이 JR 서일본 JR 큐슈 없어진 회사 일본국유철도 차량 센터종합 차량 센터 구마모토 센다이 (미야기 현) 하카타 하코다테 하쿠산 차량 센터 나가노 나고야 니가타 도리카이 도쿄 모리오카 미시마 센다이 (가고시마 현) 아오모리 아키타 야마가타 오야마 ‎ 오이 차량 제조 공장 하마마쓰 기타 나스시오바라 시즈오카 아오모리 오카야마 히로시마 기타 Max 그랜클래스 신데렐라 익스프레스 슈퍼 히카리 일본의 궤간 변경에 관한 논쟁 미니 신칸센 정비 신칸센 vdeh고속철도고속 차량시속 200km 이상 아셀라 익스프레스 아델란테 APT 101급 CRH6A ER200 GMB 71 (플라이투겟) 125 225 ICE T ICE TD ICE 4 재벌린 NSB 73 NSB 74 알파 펜둘라르 레일젯 레지나 브라이트선 0계 100계 400계 E1계 E4계 SBB RABDe 500 RABDe 502 IC 2000 SJ 2000 SJ X40 Z-TER (Z 21500) 소콜 슈퍼 익스프레스 800급 801급 802급 탈고 XXI 보이저 패밀리 X3 시속 250km 이상 CRH1A, 1B, 1E CRH2A, 2B, 2E CRH3A CRH5 펜돌리노 뉴펜돌리노 ICE 1 ICE 2 120급·121급, 130급 삽산 200계 300계 700계 800계 E2계 E3계 E7계 · W7계 TCDD HT65000 TGV 쉬드-에스트 라포스테 V250 피우라 시속 300km 이상 AGV(ETR 575) 아빌리아 리버티 렌페 100급 102급, 112급 103급 CRH2C CRH3C CRH380A CRH380B CRH380C CRH380D MTR 380A CR400AF·CR400BF ETR 500 유로스타 e300 유로스타 e320 ETR 1000 ICE 3 KTX-I KTX-산천(SRT) HEMU-430X 오아리스 TGV 쉬드-에스트 TGV 아틀랑티크 TGV 레조/탈리스 PBA TGV 듀플렉스 TGV 2N2 TCDD HT80000 탈리스 PBKA THSR 700T 500계 N700계 E5계 · H5계 E6계 JR 자기부상철도 (L0계) 아브릴 트란스라피드 (상하이 자기부상 시범운행선) 벨라로 봄바디어 제피로 국가아메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미국 캐나다 아시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일본 카자흐스탄 한국 필리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타이완 태국 터키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아프리카 모로코 유럽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체코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라트비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터키 영국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vdeh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철도 차량신칸센E2계 · E3계 · E4계 · E5계 · E6계 · E7계통근형 · 근교형107계 · 113계 · 115계 · E127계 · 209계 · 211계 · 215계 · E217계 · E231계 · E233계 · E235계 · E331계 · 415계 · E501계 · E531계 · 701계 · 719계 · E721계급행형 · 특급형183계 · 185계 · 189계 · 251계 · 253계 · 255계 · E257계 · E259계 · E353계 · 485계 · 489계 · 583계 · 651계 · E653계 · E655계 · E657계 · E751계기동차키하100계 · 키하110계 · 키하E130계 · 키하E200형객차24계 · E26계시험용 · 검측용키야E193계 · 209계(뮤트레인) · E491계 · 쿠모야743형 · 901계 · 키야E991형 · E993계 · 마야 50형 5001호전기 기관차ED75 · EF55 · EF58 · EF60 · EF64 · EF65 · EF81 · EF510디젤 기관차DD14 · DD15 · DD16 · DD51 · DE10 · DE11 · DE15증기 기관차C57 · C61 · D51퇴역 차량200계 · 400계 · E1계 · 101계 · 103계 · 105계 · 123계 · 165계 · 167계 · 169계 · 201계 · 203계 · 205계 · 207계 · 301계 · E351계 · 401계 · 403계 · 417계 · 451계 · 453계 · 455계 · 457계 · 483계 · 715계 · 717계 vdeh홋카이도 여객철도(JR 홋카이도)의 철도 차량신칸센H5계통근형 · 근교형711계 · 721계 · 731계 · 735계급행형 · 특급형785계 · 789계기동차키하40계 · 키하54형 · 키하141계 · 키하150형 · 키하160형 · 키하183계 · 키하201계 · 키하261계 · 키하281계 · 키하283계객차14계 · 24계 · 50계 ·51형 · 510형전기 기관차ED79형디젤 기관차DBR600형 · DD51형 · DE10형 · DE15형증기 기관차C11형시험용 · 검측용오야31형 · 마야34형 · 스유니50형퇴역 차량781계 · 키하130계 · C62형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칸센_E5계_전동차&oldid=24399071" 분류: 동일본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신칸센도호쿠 신칸센숨은 분류: CS1 - 일본어 인용 (ja)인용 오류 - 이름 없는 변수가 사용됨CS1 관리 - 추가 문구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RomânăРусский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21: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신칸센 E5계 전동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 신칸센 E5계 전동차 제작 및 운영 주 용도 비즈니스 및 장거리 여행객 수송용 제작사 가와사키 중공업히타치 제작소 제작 연도 2009년 ~ 현재 생산량 47편성 470량 사용량 47편성 470량 제원 차량 정원 선두차 29명중간차 59~100명그린차 55명그랜클래스 18명 편성 정원 731명 전장 25,000(선두차량은 26,500) mm 전폭 3,350 mm 전고 3,650 mm팬터그래프 상면고 : 4,490 mm 편성 중량 453.5 t 궤간 1,435 mm 성능 전기 방식 교류 25,000V, 50Hz 제어 방식 히타치 VVVF 인버터 제어 (IGBT) 기어비 2.645 기동가속도 1.71 km/h/s 영업 최고 속도 320 km/h 설계 최고 속도 360 km/h 전동기 출력 300 kW 편성 출력 9,960(1만 1천760 마력) kW 구동 장치 3상 유도전동기 MT207WN 평행카르단 구동방식 제동 방식 회생제동 병용 전기지령식 공기제동(응하중장치 포함) MT비 8M2T 보안 장치 DS-ATC 비고 제55회(2012년) 블루리본상 수상 E6계 중련 영업중인 신칸센 E5계 영업중인 신칸센 H5계 신칸센 E5계 ・ H5계 전동차(일본어: 新幹線E5系 ・ H5系電車)는 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신칸센 차량이다. 본 항에서는 홋카이도여객철도(JR홋카이도)가 신칸센 E5계 전동차와 동일한 사양으로 도입하는 신칸센 H5계 전동차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목차 1 개요 2 모델 3 운행 노선 3.1 현재 운행 노선 4 구조 4.1 차량 외관 4.2 주요 기기 4.2.1 대차 4.2.2 집전장치 4.2.3 전원·제어기기 5 성능 6 객차 구성[28] 6.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6.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7 현황 7.1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 7.2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 8 각주 9 사진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동일본여객철도는 2000년에 책정한 중기경영계획 뉴 프론티어 21에서 '세계 제일의 철도 시스템 구축'을 제시했다. 그 중에는 신칸센을 최고속도 360km/h로 영업운전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에 기초해 2002년에 사내에서 발족시킨 신칸센 고속화 추진 프로젝트에 의해, 신칸센 고속 시험차량 파스텍 360을 개발하여 2005년부터 지상설비를 포함한 각종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환경대책이나 비용대 효과를 고려하면 최고 영업 속도 320km/h이 타당한 것으로 재검토되어, 현재의 E5계가 개발·제조되었다. 1편성(10량)당 제조 비용은 약 45억엔이다.[1] 이 계열이 사용되는 열차의 애칭은 공모에 의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다. 또, 'MADE IN DREAM.' '21세기의 꿈의 초특급을 만들면, 이렇게 되었습니다'를 캐치 카피로 하였다. 2009년 5월에 도호쿠 신칸센 노선에 시범 운행을 위해 신칸센 종합 차량 센터에 인도되었다.[2] 1호차부터 5호차까지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히타치 제작소, 6호차부터 10호차까지 효고현에 위치한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제작했다.[3] 2009년 12월 9일에 최초로 도쿄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했다.[4] 2013년 2월에 U1편성으로 변경되었다.[5] 2010년 5월에 신칸센 E5계 전동차 이름이 하야부사로 결정되었는데, 2009년 3월 폐지된 침대특급열차의 명칭이다. 같은 해 12월에 U2편성이 도입되었다.[6] 이후 2편성이 추가로 반입되면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에 배치되었다.[7][8] 2011년 3월 5일부터 영업운전을 개시하였으며, 2012년 5월, 제55회 일본철도클럽에서 매년 개최하는 블루리본상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9] 같은 해 11월 20일에 공식 발표가 열렸다.[10] 2013년 3월 16일, 다이야 개정으로 최고 우츠노미야 ~ 센다이 구간 최고 영업 속도가 320km/h를 증가했다.[11] 2014년 4월에 홋카이도 신칸센 개통에 따른 세부 열차 사항이 발표되었다.[12] H1편성이 고베 시 카와사키 중공업에서 하코타테 신칸센 차량 센터로 배치되었다.[13] 같은 해 10월에 H2편성이 반입되었고[14] 이후 홋카이도 신칸센에서 시범 운행을 시작하면서 최고 영업 속도 260km/h를 도달했고[15], 2015년 11월에 도호쿠 신칸센 구간에 시범 운행을 개시했다.[16] 2017년 3월 25일 도호쿠 신칸센 개업 35주년을 맞이해 조에쓰 신칸센을 운행했고 니가타 ~ 하치노헤간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17] 모델[편집] 이 열차는 E7계·W7계와 마찬가지로 E2계 모델을 기반으로 개발된 차량으로, E5계·H5계 열차 모델은 파스텍 360 모델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18][19] 열차 선두부에 옥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그 외에도 분홍색과 보라색을 적용했다. 로고 의 경우 파스텍을 의미하며 회색 도장이 적용되었고 동일본여객철도와 홋카이도여객철도 회사 사명까지 포함되었다. E5계 차량 로고 H5계 차량 로고 그랜클레스 로고 운행 노선[편집] 현재 운행 노선[편집] 도호쿠 & 홋카이도 신칸센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구조[편집] 차량 외관[편집] 차체는 알루미늄 합금에 의한 중공 트러스 단면의 더블스킨 구조를 채용했다. 터널 미기압파를 감소시키기 위해 차체 높이를 E954형(FASTECH 360S)과 같은 3,650 mm로, 차체폭은 3,350 mm로 하였다. 차체 경사(틸팅)를 고려하여 차체 측면을 안쪽으로 기울게 설계했다.[20] 선두 형상은 E954형 8호차의 '애로우 라인'을 기본으로 한 '더블 카스프'형으로 하여, 터널 미기압파 저감을 도모하고 있다. 또, 노즈의 길이를 E954형의 16m에서, 약 15m로 단축하고 있다. 캐노피형으로 된 운전대 상부에 전조등(4개)과 미등을 설치했다. 양산 선행차인 U1편성에서는 N700계와 같이 양 선두차(1호차와 10호차)의 운전대 쪽 승객용 문에 플러그 도어가 설치되어 있고, 다른 승객용 문은 통상의 미닫이형으로 되어 있었지만, 양산차량인 U2편성 이후의 편성에서는 모두 미닫이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차체의 색은, 미래를 느끼게 하는 선진적 이미지와 스피드감을 표현하기 위해 E954형 'FASTECH 360S'를 기본으로 상부를 '토키와 그린', 하부를 '비운 화이트'으로 하여, 그 경계선이 되는 중앙에 '하야테 핑크'색 띠를 배치하며, 2014년에 도입하는 홋카이도 여객철도 소유의 H5계 전동차의 경우 '아야카(사이카) 퍼플'색 띠를 배치한다. 주요 기기[편집] 소음 대책으로서 차체 측면부에 점검 마개를 겸한 판을 설치하여 차체 하반부를 가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 차체 연결 부분에는 전주 덮개(全周幌)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어, 소음 저감과 차체간의 흔들림이 저감되었다. 전주 덮개는 캔틸레버 지지방식으로 되어 있어, 지붕 부분과 측면 부분으로 분할되어, 연결시에는 차량의 2위측에 고정되어, 옆 차량의 1위측에 링 기구로 눌러 붙이는 구조가 되어 있다.[21] 또 차체 측면의 대차 부근에는 대차 커버가 채용되어 있다. 대차 커버는 경량화를 위해 카본 파이버 제로 되어 있으며, 흡음재를 채용하는 것으로 소음 저감을 꾀했다[21]. 대차[편집] 차체 연결 부분. 전주 덮개와 차체간 댐퍼가 장비되어 있다. 대차는 E2계의 대차를 베이스로 하여 내구성·제동성을 강화한 볼스터리스 대차를 채용했다. 제동력 강화를 위해 이전에는 공압유압변환식이었던 캘리퍼 식 차륜 디스크 브레이크(동력대차에 장비)과 캘리퍼 식 차축 디스크 브레이크(부수대차에 장비)를 공압식으로 변경하였으며, 차륜의 휠 부분 양측과 차축에 장착된 브레이크 디스크의 체결 볼트를 내주체결식(内周締結式)에서 중앙체결식으로 변경하여 볼트의 부담과 디스크 면의 변형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대차 형식은 전동대차가 DT208, 부수대차가 TR7008이며, 선두차량 운전대 쪽은 레일과 차륜과의 점착력을 높이기 위한 세라믹 분사장치를 갖춘 TR7008A이다. 또, 차체와 대차 프레임을 토션 바로 연결하여, 대차의 사행동을 억제하는 토션바 식 안티 롤링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전 차량에 E2계의 공기식보다 개량된 전자식(電磁式) 액추에이터를 사용하여 회전력으로 좌우의 상위를 제어하는 롤러 나사식(ローラーネジ式) 풀 액티브 서스펜션과 공기 용수철에 의한 차체경사 제어 장치를 탑재하였다.[22][23] 공기식으로부터 전기식으로 변경하는 것에 의해, 공기배관이나 탱크가 필요없게 되어, 경량화를 이루었다.[24] 집전장치[편집] PS208형 팬터그래프 편성 안에서 사용하는 팬터그래프는 2기 중 1기 뿐(3, 7호차에 탑재된 것 중 진행방향에 대해 후방에 있는 것)이므로, 이선이 쉽게 발생하지 않는 12분할 접촉판이 붙은 저소음 팬터그래프를 장비하고 있다. 분할된 접촉판 안에는 스프링이 내장되어 있어, 가선에 부드럽게 추종한다. 양산선행차에서는 '<' 자형 메인 프레임(くの字主枠)과 일체형 메인 프레임의 두 타입을 장비하여, 비교 실험을 실시했다[25]. 그 결과, E954형에서 테스트된 PS9037을 베이스로 한, '<'자형 메인 프레임의 싱글암 팬터그래프(PS208)이 탑재되어 있다. 팬터그래프 측면의 대형 차음판 이외에도, 애자 측면부에 소형 차음판이 설치되어 있다.[26] 소음 저감을 위해, 특고압 인통선은 E2계 0번대와 같이 차내 천장부에 배치했다.[27] 전원·제어기기[편집] 주전동기(MT207)는 농형 3상 유도전동기다. 냉각방식은 자기(自己) 통풍으로, 정격출력은 300kW이다. 성능[편집] 영업운전의 최고속도는 320km/h로, 3‰의 상구배에서의 균형속도는 360km/h이다. 표준 편성은 10량으로, 전동차와 부수차의 구성(MT비)는 8:2이다. 기동가속도는 1.71km/h/s이지만, E3계와의 병결시에는 E3계의 성능에 맞추어 1.6km/h/s로 운행한다 곡선통과시의 승차감을 향상시켜 반경 4,000m의 커브에서도 320km/h로 주행할 수 있도록, 공기 용수철 스트로크식 틸팅 시스템을 이용하여 차체를 최대 1.5도 기울일 수 있다. 객차 구성[28][편집] 전 편성 3호차와 7호차에 팬터그래프가 존재한다.[6]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호차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E523 E526-100 E525 E526-200 E525-400 E526-300 E525-100 E526-400 E515 E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번호 1 2 3 4 5 6 7 8 9 10 명칭 T1c M2 M1 M2 M1k M2 M1 M2 M1s Tsc 번호 H523 H526-100 H525 H526-200 H525-400 H526-300 H525-100 H526-400 H515 H514 무게 (톤) 41.9 45.9 46.0 46.3 46.1 46.8 46.8 46.0 45.8 42.7 좌석 29 100 85 100 59 100 85 100 55 18 10호차 그랜클래스 9호차 그린차 3호차 지정석 E5계 콘텐츠 현황[편집] 총 47 편성이 도입되었으며, 전 차량 운행 중이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U 편성 (동일본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U1호 2009년 운행 중 도입 초기 S11호로 도입했다. U2호 2010년 운행 중 U3호 2011년 운행 중 U4호 운행 중 U5호 운행 중 U6호 운행 중 U7호 운행 중 U8호 운행 중 U9호 운행 중 U10호 2012년 운행 중 U11호 운행 중 U12호 운행 중 U13호 운행 중 U14호 운행 중 U15호 운행 중 U16호 운행 중 U17호 운행 중 U18호 운행 중 U19호 운행 중 U20호 운행 중 U21호 운행 중 U22호 2013년 운행 중 U23호 운행 중 U24호 운행 중 U25호 운행 중 U26호 운행 중 U27호 운행 중 U28호 운행 중 U29호 2015년 운행 중 U30호 운행 중 U31호 2016년 운행 중 U32호 2017년 운행 중 U33호 운행 중 U34호 운행 중 U35호 운행 중 U36호 운행 중 U37호 운행 중 U38호 2018년 운행 중 U39호 운행 중 U40호 운행 중 U41호 운행 중 U42호 2019년 운행 중 U43호 운행 중 H 편성 (홋카이도여객철도 소속)[편집] 차호 도입 시기 운행 중단 시기 비고 H1호 2014년 운행 중 H2호 운행 중 H3호 2015년 운행 중 H4호 운행 중 각주[편집] ↑ 『東洋経済』2009년 7월 4일호「鉄道進化論」P45 ↑ E5系S11編成仙台港に陸揚げ [E5 series set S11 unloaded at Sendai Port].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Koyusha Co., Ltd. 2009년 5월 24일. 2009년 5월 25일에 확인함.  ↑ JR車両の動き  [JR Rolling Stock Changes]. 《Tetsudō Daiya Jōhō》 38 (Japan: Kōtsū Shim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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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13. 64쪽.  ↑ JR電車編成表 2016冬 [JR EMU Formations - Winter 2016] (일본어). Japan: Kotsu Shimbunsha. 2015년 11월 18일. 12쪽. ISBN 978-4-330-62315-3.  ↑ 北海道新幹線用車両について - 北海道旅客鉄道、2014年4月16日 ↑ “H5系が川崎重工から出場” [H5 series shipped from Kawasaki Heavy Industries].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Japan: Koyusha Co., Ltd. 2014년 10월 12일. 2014년 10월 13일에 확인함.  ↑ フル編成、堂々 北海道新幹線、線路に [A complete Hokkaido Shinkansen trainset proudly takes to the rails]. 《Doshin Web》 (일본어). Japan: The Hokkaido Shimbun Press. 2014년 11월 1일. 2014년 1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월 16일에 확인함.  ↑ Ito, Hisami (March 2015). 北海道新幹線H5系 雪中で順調に試運転中 [Hokkaido Shinkansen H5 series: Test-running proceeds in the snow]. 《Japan Railfan Magazine》 (일본어) 55 (Japan: Koyusha Co., Ltd.). 57쪽.  ↑ H5系が東北新幹線内で試運転 [H5 series test run on Tohoku Shinkansen]. 《Japan Railfan Magazine Online》 (일본어). Japan: Koyusha Co., Ltd. 2015년 11월 4일. 2015년 11월 4일에 확인함.  ↑ “直通列車 乗り換えなしでラクラク E5系で行く「岩手・青森」の旅 ~東北新幹線の開業35周年記念!~” (PDF). 동일본여객철도. 2017년 5월 24일. 2017년 6월 13일에 확인함.  ↑ 新型高速新幹線車両(E5系)のデザインについて [Information on Design of New Shinkansen E5 Series Trains] (PDF) (일본어). JR East. 2009년 2월 3일. 2009년 2월 3일에 확인함.  ↑  北海道新幹線車両(H5系)の概要 [Outline of Hokkaido Shinkansen rolling stock (H5 series)] (일본어). Japan: Hokkaido Railway Company. 2014. 2014년 12월 9일에 확인함.  ↑ 『鉄道ジャーナル 2009년 10월호』 鉄道ジャーナル사, 2009년, p.71 ↑ 가 나 鉄道のテクノロジー 5 新幹線2011, 三栄書房,p.48 ↑ 『鉄道ダイヤ情報』2011年2月号、交通新聞社、2011年、p.80 ↑ 新幹線高速化について JR東日本プレスリリース 2007年7月27日付 ↑ 《鉄道のテクノロジー 5 新幹線2010》. 三栄書房. 2009. p.83쪽. ISBN 9784779608186.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JR東日本 新幹線高速化へ量産先行車を製作」交通新聞(交通新聞社)2008年7月31日付 ↑ 《鉄道のテクノロジー 5 新幹線2010》. 三栄書房. 2009. p.79쪽. ISBN 9784779608186.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鉄道ジャーナル2009年10月号》. 鉄道ジャーナル社. 2009. p.72쪽.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JR東日本 E5系新幹線電車(量産車) [JR East E5 series Shinkansen (full-production version)]. 《Tetsudō Daiya Jōhō Magazine》. 40권 322호 (Japan: Kōtsū Shimbun). February 2011. 80–83쪽.  사진[편집] E514-1 (10호차) E515-1 (9호차) E526-401 (8호차) E525-101 (7호차) E526-301 (6호차) E525-401 (5호차) E526-201 (4호차) E525-1 (3호차) E526-101 (2호차) E523-1 (1호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E5계 전동차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신칸센 H5계 전동차 (일본어) 동일본 여객철도 E5계 공식 사이트 (일본어) 홋카이도 여객철도 보도 자료 (2014년 4월 16일) vdeh신칸센운행 노선규격 신칸센 도카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산요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큐슈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홋카이도 신칸센 미니 신칸센 아키타 신칸센 야마가타 신칸센 신칸센 재래선 갈라 유자와 선 하카타미나미 선 건설 및 계획 중인 노선건설 중인 노선 주오 신칸센 기본 계획 중인 노선 도카이도 화물 신칸센 미에 신칸센 산인 신칸센 시코쿠 신칸센 시코쿠 횡단 신칸센 오우 신칸센 우에쓰 신칸센 주고쿠 횡단 신칸센 큐슈 횡단 신칸센 호쿠리쿠 주쿄 신칸센 홋카이도 미나미마와리 신칸센 히가시큐슈 신칸센 계획 취소 노선 나리타 신칸센 제2 도카이도 신칸센 열차 종류도카이도 & 산요 & 큐슈 고다마 노조미 미즈호 사쿠라 쓰바메/츠바메 히카리 (레일스타) 도호쿠 & 홋카이도 나스노 야마비코 하야부사 하야테 아키타 & 야마가타 고마치/코마치 쓰바사/츠바사 조에쓰 다니가와/타니가와 도키/토키 호쿠리쿠 가가야키/카가야키 쓰루기/츠루기 아사마 하쿠타카 조이풀 트레인 겐비 신칸센 토레이유 쓰바사/토레이유 츠바사 없어진 열차 등급 그랜드 히카리 슈퍼 고마치 아사히 아오바 웨스트 히카리 차량현재 운행하는 차량 500계 700계 N700계 800계 E2계 E3계 E4계 E5계·H5계 E6계 E7계·W7계 도입 예정 차량 N700S계 L0계 퇴역 차량 0계 100계 200계 300계 400계 E1계 기술 개발 차량 & 사업용 차량 911계 912계 951계 961계 962계 1000계 닥터 옐로우 윈350 스타21 300X 파스텍 360S 파스텍 360Z 알파-X 궤간가변열차 MLX-01 해외 수출형 CRH2형 (중화인민공화국) 700T형 (중화민국) 계획 취소 차량 고시츠 히카리 운영회사현재 운영하는 회사 JR 홋카이도 JR 동일본 JR 도카이 JR 서일본 JR 큐슈 없어진 회사 일본국유철도 차량 센터종합 차량 센터 구마모토 센다이 (미야기 현) 하카타 하코다테 하쿠산 차량 센터 나가노 나고야 니가타 도리카이 도쿄 모리오카 미시마 센다이 (가고시마 현) 아오모리 아키타 야마가타 오야마 ‎ 오이 차량 제조 공장 하마마쓰 기타 나스시오바라 시즈오카 아오모리 오카야마 히로시마 기타 Max 그랜클래스 신데렐라 익스프레스 슈퍼 히카리 일본의 궤간 변경에 관한 논쟁 미니 신칸센 정비 신칸센 vdeh고속철도고속 차량시속 200km 이상 아셀라 익스프레스 아델란테 APT 101급 CRH6A ER200 GMB 71 (플라이투겟) 125 225 ICE T ICE TD ICE 4 재벌린 NSB 73 NSB 74 알파 펜둘라르 레일젯 레지나 브라이트선 0계 100계 400계 E1계 E4계 SBB RABDe 500 RABDe 502 IC 2000 SJ 2000 SJ X40 Z-TER (Z 21500) 소콜 슈퍼 익스프레스 800급 801급 802급 탈고 XXI 보이저 패밀리 X3 시속 250km 이상 CRH1A, 1B, 1E CRH2A, 2B, 2E CRH3A CRH5 펜돌리노 뉴펜돌리노 ICE 1 ICE 2 120급·121급, 130급 삽산 200계 300계 700계 800계 E2계 E3계 E7계 · W7계 TCDD HT65000 TGV 쉬드-에스트 라포스테 V250 피우라 시속 300km 이상 AGV(ETR 575) 아빌리아 리버티 렌페 100급 102급, 112급 103급 CRH2C CRH3C CRH380A CRH380B CRH380C CRH380D MTR 380A CR400AF·CR400BF ETR 500 유로스타 e300 유로스타 e320 ETR 1000 ICE 3 KTX-I KTX-산천(SRT) HEMU-430X 오아리스 TGV 쉬드-에스트 TGV 아틀랑티크 TGV 레조/탈리스 PBA TGV 듀플렉스 TGV 2N2 TCDD HT80000 탈리스 PBKA THSR 700T 500계 N700계 E5계 · H5계 E6계 JR 자기부상철도 (L0계) 아브릴 트란스라피드 (상하이 자기부상 시범운행선) 벨라로 봄바디어 제피로 국가아메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미국 캐나다 아시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일본 카자흐스탄 한국 필리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타이완 태국 터키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아프리카 모로코 유럽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체코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라트비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터키 영국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vdeh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의 철도 차량신칸센E2계 · E3계 · E4계 · E5계 · E6계 · E7계통근형 · 근교형107계 · 113계 · 115계 · E127계 · 209계 · 211계 · 215계 · E217계 · E231계 · E233계 · E235계 · E331계 · 415계 · E501계 · E531계 · 701계 · 719계 · E721계급행형 · 특급형183계 · 185계 · 189계 · 251계 · 253계 · 255계 · E257계 · E259계 · E353계 · 485계 · 489계 · 583계 · 651계 · E653계 · E655계 · E657계 · E751계기동차키하100계 · 키하110계 · 키하E130계 · 키하E200형객차24계 · E26계시험용 · 검측용키야E193계 · 209계(뮤트레인) · E491계 · 쿠모야743형 · 901계 · 키야E991형 · E993계 · 마야 50형 5001호전기 기관차ED75 · EF55 · EF58 · EF60 · EF64 · EF65 · EF81 · EF510디젤 기관차DD14 · DD15 · DD16 · DD51 · DE10 · DE11 · DE15증기 기관차C57 · C61 · D51퇴역 차량200계 · 400계 · E1계 · 101계 · 103계 · 105계 · 123계 · 165계 · 167계 · 169계 · 201계 · 203계 · 205계 · 207계 · 301계 · E351계 · 401계 · 403계 · 417계 · 451계 · 453계 · 455계 · 457계 · 483계 · 715계 · 717계 vdeh홋카이도 여객철도(JR 홋카이도)의 철도 차량신칸센H5계통근형 · 근교형711계 · 721계 · 731계 · 735계급행형 · 특급형785계 · 789계기동차키하40계 · 키하54형 · 키하141계 · 키하150형 · 키하160형 · 키하183계 · 키하201계 · 키하261계 · 키하281계 · 키하283계객차14계 · 24계 · 50계 ·51형 · 510형전기 기관차ED79형디젤 기관차DBR600형 · DD51형 · DE10형 · DE15형증기 기관차C11형시험용 · 검측용오야31형 · 마야34형 · 스유니50형퇴역 차량781계 · 키하130계 · C62형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칸센_E5계_전동차&oldid=24399071" 분류: 동일본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여객철도의 신칸센 차량홋카이도 신칸센도호쿠 신칸센숨은 분류: CS1 - 일본어 인용 (ja)인용 오류 - 이름 없는 변수가 사용됨CS1 관리 - 추가 문구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다른 위키공용분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RomânăРусскийไทย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8일 (토) 21: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한재석 (1991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재석 (1991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재석출생 1991년 8월 20일(1991-08-20) (27세)직업 배우활동 기간 2014년 ~종교 개신교소속사 원앤원스타즈 웹사이트 한재석 - 인스타그램 한재석(1991년 8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탤런트이자 방송연예인이다. 2014년 《SNL 코리아 5》로 데뷔했다. 목차 1 학력 2 작품 활동 2.1 드라마 2.2 영화 2.3 방송 3 외부 링크 학력[편집] 서울예술대학교 연기학과 졸업 작품 활동[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역할 비고 2015 SBS 《너를 노린다》 박정우 2016 네이버TV 《나는 취준생이다》 나영규 2016 KBS2 《KBS 드라마 스페셜 - 전설의 셔틀》 성호 2016 MBC 《언제나 봄날》 주인태 2017 tvN 《내성적인 보스》 장세종 2017 MBC 《도둑놈, 도둑님》 이윤호 2017 OCN 《멜로홀릭》 이유식 2018 TV조선 《대군 - 사랑을 그리다》 성득식 영화[편집] 연도 제목 역할 감독 비고 2016 《굿바이 싱글》 방송국 연예인 역 김태곤 특별출연 방송[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비고 2014 tvN 《SNL 코리아 5》 2015 《SNL 코리아 6》 2016 《SNL 코리아 7》 외부 링크[편집] (영어) 한재석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재석_(1991년)&oldid=24008830" 분류: 대한민국의 개신교도199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서울예술대학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11일 (목) 07: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와이고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와이고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와이고수주소 공식사이트사이트 종류 인터넷 포럼사용 언어 한국어 제작자 박재완, 유창구시작일 1999년 9월 7일현재 상태 서비스 중 와이고수(YGOSU)는 온라인 종합커뮤니티 사이트다. 주로 유머, 연예인, 스포츠, 게임 등 다양한 주제별 게시판과 스포츠와 게임을 주제로 한 승자예상 게시판[1] 등을 운영하고 있다. 줄임말로 와고라고 칭하기도 한다. 목차 1 역사 2 이름 유래 3 게시판 3.1 일반 3.2 스포츠/IT 3.3 문화 3.4 게임 3.5 밤고수 3.6 승자예상 4 같이 보기 5 참고 6 외부 링크 역사[편집] 와이고수는 1999년 5월 ygclan.com 이라는 주소와 '엽기길드'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당시 엽기코드가 유행하였는데 스타코래프트 유닛간 실험 등이 그 엽기코드에 맞아 떨어져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었고 방문객이 급증하게 되어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는 유저들의 커뮤니티가 되었다.[2] 2007년 사이트를 클랜과 분리하여 사업자등록 후 '와이고수' 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서비스하게 되었다. 원래는 스타크래프트와 관련한 주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남성 유저가 주를 이루는 사이트 성격상 수 많은 야짤 관련 게시물들이 올라오게 되었고 지금의 대외적 이미지는 엉덩국의 만화[3]와 같게 되었다. 이후 2013년 초까지 서버 문제, 스타크래프트의 인기 하락 등의 이유로 방문자가 줄어들게 되었으나, 2013년 말 사이트를 종합 커뮤니티로 개편하면서 다시 방문자가 증가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메구리 팬 미팅까지 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와이고수 레드 라는 성인사이트를 개설하여 크게 질타를 받았으며 추 후에는 소극적인 운영으로 회원들에게 큰 질타를 받고있다. 이름 유래[편집] 와이고수라는 이름의 유래는 당시 엽기길드의 길드장이자 와이고수 제작자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2007년 사이트를 클랜과 분리하게 되면서 클랜명인 ygclan의 정통성은 유지하면서도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의 특성을 살리고자 'yg(엽기)'에 'gosu(고수)'라는 뜻을 붙이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의 사이트 이름이 되었다. 게시판[편집] 와이고수의 게시판은 크게 6가지로 분류된다. 일반[편집] 공지사항을 비롯하여 자유게시판, 엽기자랑, 유저뉴스 등 다양한 게시판이 포함되어 있다. 공지사항 - 와이고수 관리자가 이벤트, 서버 점검, 수정 사항 등을 전달하는 게시판이다. 보여주기 행정식 게시판 자유게시판 - 유저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게시판이다.주로 좆목을 위주로 커뮤니티가 형성된다. 엽기자랑 - 와이고수에서 가장 활성화된 게시판 중 하나로 엽기적인 내용 외에도 잡다한 게시글이 올라온다. 유저뉴스 - 와이고수 유저들이 직접 뉴스를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다. 공부 - 공부와 관련된 게시판이다. 근데 공부내용은 일절없다. 익명 - 닉네임을 노출하지 않고 질문 또는 글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다. 뒷담게시판 정치 - 정치와 관련된 게시판이다. 사실상 오유 2중대 게시판. 연애/고민 - 연애와 관련된 내용, 연애 고민상담게시판이지만 모쏠밖에 없으니 여기서 배우진말자. 공포/미스테리 -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꿀팁 -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는 게시판이다. 취업/알바 - 취업과 알바에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는 게시판이다. (2015.08 신설) 스포츠/IT[편집] 축구 - 축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승자예측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야구 -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농구 - 농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죽어가는 게시판 운동/헬스 - 헬스를 비롯한 운동에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는 게시판이다. 멸치들밖에 없다 자전거 - 자전거와 관련된 게시판이다. (2015.08 신설) 컴퓨터 - 컴퓨터 및 노트북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스마트폰 - 스마트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문화[편집] 만화/애니 - 만화 및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연예인 - 연예인 사진, 움짤, 직캠 등을 올리는 게시판이다. 영화/드라마 - 영화 및 드라마와 관련된 게시판이다. 음악 - 음악 추천 및 질문을 하는 게시판이다. 게시판 중 가장 클린한 게시판 음식/맛집 - 음식사진 인증 및 맛집 등을 소개하는 게시판이다. 군대/밀리터리 - 군대 및 밀리터리와 관련된 게시판이다. 패션/뷰티 - 패션 및 뷰티와 관련된 게시판이다. 힙합 - 힙합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동물/곤충 - 반려동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주식 - 주식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이다. 그림 - 직접 그린 그림을 올리고 공유하는 게시판이다. 여행 - 여행에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는 게시판이다. (2015.08 신설) 게임[편집] 스타크래프트를 필두로 리그 오브 레전드, 스타크래프트2, 던전앤파이터 등 다양한 게임별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밤고수[편집] 남성 유저 중심의 커뮤니티 특성상 운영되는 게시판이다. 19세 인증을 거쳐야 게시물을 읽을 수 있다. 승자예상[편집] 와이고수 유저들이 직접 승자예상과 관련된 게시물이나 자료를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다. 승자예상 분야는 축구, 야구, 농구, 배구, 게임, 기타 다. 같이 보기[편집] 포모스 참고[편집] ↑ “(스타리그) 투신의 부활이냐, 또 하나의 신화창조냐”. 2016년 3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11월 8일에 확인함.  ↑ YGClan,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우승 ↑ 엉덩국이 본 커뮤니티 사이트 외부 링크[편집] 와이고수 홈페이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와이고수&oldid=24202154" 분류: 대한민국의 웹사이트1999년 설립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9: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몽골 내셔널 프리미어리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몽골 내셔널 프리미어리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몽골프리미어리그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hurkhree Mongolian National Premier League몽골 내셔널 프리미어 리그대륙 AFC국가 몽골팀수 8 하위 리그 몽골 1st 리그대륙 대회 AFC컵역사설립 연도 1955년최근 우승 에르침 (2015-16)최다 우승 에르침 (10회) 몽골 프리미어리그(Mongolian National Premier League)는 1955년에 시작된 몽골의 최상위 축구 리그로, 8개 팀이 참가한다.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기 이전인 1996년 이전에는 내셔널 챔피언쉽(National Championship)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목차 1 2016 시즌 참가 팀 2 역대 우승 팀 3 각주 4 외부 링크 2016 시즌 참가 팀[편집] 바양골 FC (울란바토르) 콘티넨탈 FC (울란바토르) 데렌 FC (데렌) 에르침 (울란바토르) FC 울란바토르 (울란바토르) 칸가리드 FC (에르데네트) 울란바토르 시티 FC (울란바토르) 호로므혼 FC (울란바토르) 셀렝게 프레스 FC (울란바토르) FC UBU (울란바토르) 역대 우승 팀[편집] 1955: Soyol 1956–63: ? 1964: Khudulmur 1965: No tournament 1966: Khudulmur 1967: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68: Darkhan FC 1969: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70: Aldar (Army Sports Club) 1971: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72: Khudulmur 1973: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74: Aldar (Army Sports Club) 1975: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76: Aldar (Army Sports Club) 1977: ? 1978: Zamchin (Railwaymen) 1979: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80: Aldar (Army Sports Club) 1981: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82: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83: Hilchin 1984: Tengeriin Bugnuud (Bat Ulzii) 1985: Khuch (Police Sports Club) 1986: ? 1987: Sükhbaatar FC (Ulaanbataar) 1988: Sükhbaatar FC (Ulaanbataar) 1989: Khudulmur 1990: Khuch (Police Sports Club) 1991–93: ? 1994: Khuch (Police Sports Club) 1995: Idsskh (Mongolian All-University Team) 1996: Erchim (Ulaanbaatar) 1997: Delger FC 1998: Erchim (Ulaanbaatar) 1999: ITI Bank-Bars 2000: Erchim (Ulaanbaatar) 2001: Khangarid (Erdenet) 2002: Erchim (Ulaanbaatar) 2003: Khangarid (Erdenet) 2004: Khangarid (Erdenet) 2005: Khoromkhon (Ulaanbaatar) 2006: Khasiin Khulguud (Ulaanbaatar) (unofficial) 2007: Erchim (Ulaanbaatar) 2008: Erchim (Ulaanbaatar) 2009: Ulaanbaataryn Unaganuud (FC UBU) (Ulaanbaatar) 2010: Khangarid (Erdenet) 2011: FC Ulaanbaatar 2012: Erchim (Ulaanbaatar) 2013: Erchim (Ulaanbaatar) 2014: Khoromkhon (Ulaanbaatar) 2015: Erchim (Ulaanbaatar) 2016: Erchim (Ulaanbaatar) 출처:[1] 각주[편집] ↑ Andre Zlotkowski (2012년 10월 4일). “Mongolia - List of Champions”. RSSSF. 2012년 10월 1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몽골 리그 fifa.com vdeh아시아의 축구 1부 리그 (AFC) 괌 네팔 대한민국 동티모르 라오스 레바논 마카오 말레이시아 몰디브 몽골 미얀마 바레인 방글라데시 베트남 부탄 브루나이 사우디아라비아 스리랑카 시리아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아프가니스탄 예멘 오만 오스트레일리아 요르단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이란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중화민국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태국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가자 서안 필리핀 홍콩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이 글은 축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몽골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몽골_내셔널_프리미어리그&oldid=23588452" 분류: 1955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몽골의 축구 리그아시아의 축구 1부 리그숨은 분류: 축구에 관한 토막글몽골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zərbaycanc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Suomi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LietuviųМонголNederlands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30일 (수) 19: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기독교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독교 문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기독교 문화(Christian Culture)란 기독교에 일반화된 문화 활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학술적으로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기독교가 유럽을 시작으로 급속하게 확장되고 4세기 말에는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되었다. 로마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에 근거한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문화는 헬라 로마적 비잔틴, 서구 문화부터 많은 영향을 주고 또 토착화되었다. 특별히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스킬더 그리고 미국의 리차드 니버에 의해서 기독교 문화론의 연구가 정립되었다. 기독교 문화는 기독교 세계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목차 1 기독교 문화란 2 문화의 유형 3 문화와 종교개혁가들 4 건축 5 예술 6 문학과 시 7 철학 8 과학과 기술 9 교육 10 의학과 건강 11 사상과 윤리 12 신앙 생활 13 함께보기 14 각주 15 참고문헌 기독교 문화란[편집] 기독교 문화란 기독교인들이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면서 이 세상에서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삶의 문화적 형태와 결과를 말한다. 좀더 좁혀서 성경적 문화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과 같은 인물들의 견해를 모델로 삼아 모든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근거하여 기독교인들의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의 영역주권에 근거한 일반은총을 강조하고 스킬더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문화명령을 강조했다. 2가지는 적용의 범위가 차이가 있지만 서로가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는 유사점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보는 문화에 대한 관점에서 시작하여 그들이 그동안 축적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장 고전적 학자는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클라스 스킬더이며, 미국의 리차드 니버 그리고 헨리 미터와 헨리 반틸의 주장들이 도움이 된다. 또한 프랑스의 자크 엘룰, 영국의 C. S. 루이스(C. S. Lewis)가 있다. 그럼 기독교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먼저 살펴보자. 영역주권을 주장하는 아브라함 카이퍼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일반은총이 모든 사람들의 문화 영역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문화는 세상의 문화와 연결되어 크게 발전의 모습으로 전개되는 낙관주의 문화관이다. 어찌보면 카이퍼에 있어서 기독교인들만의 독특한 문화는 그 특징을 구별하기 힘든 양상이다. 세상의 문화와 기독교 문화는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하나님의 모든 통치 영역에서 활발하게 사용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하여 화란의 문화신학자 클라스 스킬더(Klass Schilder)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해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즉 문화의 열쇠로서 그리스도가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의 일반문화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볼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를 좀더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에서 아주 구속적이며 제한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의 피가 씻어주지 않는다면 죄로 물들 세상 문화는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된 문화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 문화관은 그리스도가 문화의 중심이요 주인이요 완성자임을 강하게 선포한다.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유명한 정의로 알려진 데로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이라고 한다. 그의 관점을 기독교 문화에 적용해 본다면 바로 기독교 문화란 기독교의 형식(form)이요 기독교는 기독교의 문화의 본질(substance)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기독교라는 본질은 현실세계로 표출되어 그 결과가 바로 문화로 형상화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와 기독교는 함께하는 묶여있는 문화의 기독교이며, 문화의 신학인 것이다. 문제는 그가 말하는 기독교의 정의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기독교의 문화의 모습도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문화이다. 세상의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성경의 주장이다. 어찌보면 근원적이며 본질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된 신학의 뿌리가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기독교 문화일 것이다. 폴 틸리히의 주장처럼 문화는 종교의 본질이며 종교의 형식이 곧 문화라는 것은 바로 신학과 문화의 연결로 당연히 이어진다. 그것은 근원적인 사상으로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문화는 세계관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기독교 문화는 기독교 세계관과 밀접한 상호관련성을 보여준다. 곧 문화는 세계관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참된 이해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로 기독교 문화의 모습일 것이다. 문화의 유형[편집] 리차드 니버는 그의 대표작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다섯 가지 유형의 문화관을 제시하였다.[1]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는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관습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리스도와 적대 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는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과 톨스토이에서 그 전형을 본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문화의 타락한 오락, 학문, 정치에서 탈출하도록 권면하였다. 한편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버에 의하면 이러한 반문화적인 유형의 삶은 그 자체 내에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유형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자요 문화의 영웅이시다. 토마스 제퍼슨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도덕 교육가로 보았고, 술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와 문화의 완성자로 보았다. 이 관점은 신학의 본질과 그 문화적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 위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 긍정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로고스와 주님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은 층에 두고 문화를 낮은 층에 둔다. 이러한 생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서 나타났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타났다.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양자간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요 문화는 문화다. 니버는 이런 유형의 대표자가 사도 바울과 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등이라고 말한다.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이 유형의 대표자는 어거스틴, 칼빈, 존 웨슬리 등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계는 구속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간 문화의 문제는 변혁의 문제이다. 세계는 배격되어서도 안되고 소홀히 여겨져도 안된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 주장된 그리스도는 죽음과 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사는 인간 생활을 계속적으로 성화시키고 변혁시키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문화와 종교개혁가들[편집] 신학자 김지훈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 문화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세상 문화는 교회를 세속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문화를 모순관계로 봤다. 교회 밖 세상은 전부 악(惡)의 세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들인 루터와 칼뱅은 세상 문화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해한다. 그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 문화에 참여하게 됐고, 그 결과 문화발전이 이뤄졌다고 본다. 교회는 성경의 법(특별은총)이 있교, 세상은 양심의 법(일반은총)이 역사한다. 이 두 세계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므로, 세상 문화를 배격하기 보단 그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교회와 세상을 갈등관계로 표현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이분론은 기독교인의 문화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한다. 교회는 선교 뿐 아니라 문화 활동에도 관심 가져야 한다. 교회의 문화 참여는 교회만의 교리를 내세우지 말고, 교회와 세속 사회의 공통분모인 일반은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2] 건축[편집]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교회에 있는 예수의 무덤 예술[편집]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문학과 시[편집] 구텐베르크 성경 철학[편집]  어거스틴의 고백록기독교 철학은 철학분야와 기독교의 신학적 교리를 결합한 용어이다. 이 분야와 기독교 문화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자크 엘륄이나 프란시스 쉐퍼, 아브라함 카이퍼, 그리고 클라우스 스킬더와 같은 인물들은 이 분야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과학과 기술[편집] 교육[편집] 의학과 건강[편집] 사상과 윤리[편집] 신앙 생활[편집] 함께보기[편집] 기독교 세계관 문화 그리스도인의 삶 문화의 해석 문화심리학 세계관 각주[편집] ↑ [1] ↑ 김지훈, 제2차 종교개혁을 준비하라, 미래한국 2016년 10월 18일 참고문헌[편집] 로버트 E. 웨버, 기독교 문화관, 토라, 2008. 서철원, 기독교문화관. 총신대학출판부 1993. 에디 깁스, Next Church. 교회성장연구소. 2003. 리챠드 미들튼, 브라이안 왈쉬,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젼. IVP 1986. F.N. 리. 문화의 성장과정. 한국개혁주의 신행협회. 1980. 리처드 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대한기독교서회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IVP. 1999 신국원, 포스트모던니즘.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한스 로크마커,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 IVP 1993.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 198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기독교_문화&oldid=24196680" 분류: 기독교 문화기독교와 사회중동의 문화서양 문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Lingua Franca Novaमराठी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2: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이정민 (1979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정민 (1979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정민 Lee Jeong-Min 롯데 자이언츠 No.90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79년 3월 2일(1979-03-02) (40세) 출신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신장 182 cm 체중 90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2002년 드래프트 순위 2002년 1차 지명(롯데 자이언츠) 첫 출장 KBO / 2002년 4월 5일 대전 대 한화전 마지막 경기 KBO / 2017년 8월 12일 대구 대 삼성전 구원 계약금 1억 8,000만원 경력 선수 경력 롯데 자이언츠 (2002년 ~ 2018년) 상무 야구단 (2007년 ~ 2008년) 코치 경력 롯데 자이언츠 잔류군 투수코치 (2019년 ~ 현재)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월드컵 2007년 대만 이정민(李貞旼[1], 1979년 3월 2일 ~ )은 전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이자, 현재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잔류군 투수코치이다. 목차 1 선수 시절 1.1 아마추어 시절 1.2 롯데 자이언츠 시절 1.3 상무 야구단 시절 1.4 롯데 자이언츠 복귀 2 야구선수 은퇴 후 3 에피소드 4 출신 학교 5 통산 기록 6 각주 7 외부 링크 선수 시절[편집] 아마추어 시절[편집] 경남고 시절 1~2학년 때 투수로 활동하다 3학년 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타자로 출전해 2점 홈런을 쳐 냈고, 1998년 동아대에서 우완 에이스로 활약해 2001년 4학년 때 제 56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14.2이닝동안 11탈삼진, 2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동국대를 꺾고 4강에 올랐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2002년에 입단하였다. 상무 야구단 시절[편집] 2006년 시즌 후 입대해 2008년 11월 10일 제대했다. 롯데 자이언츠 복귀[편집] 2008년에 복귀하였다. 2010년에는 ABL 윈터 리그에 참가했다.[2] 2012년 8월 29일 3254일만에 선발 승을 기록했다.[2], [3], [4] 야구선수 은퇴 후[편집] 2019년부터 롯데 자이언츠의 잔류군 투수코치로 활동한다. 에피소드[편집] 그는 2003년 10월 2일 삼성 라이온즈전에 선발 등판해 이승엽에게 아시아 단일 시즌 개인 최다 홈런 기록인 56호 홈런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뷔 첫 선발 승을 기록했다. 맞상대가 삼성 라이온즈가 아니었지만, 우연히도 2012년은 이승엽이 대한민국으로 복귀한 시즌이었다. 2003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는 SK 와이번스와 치른 준 플레이오프에서 우승 후보답지 않은 최악의 경기력을 보이며 2연패로 스윕당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는데, 선발 승을 따내고도 묻힌 그의 저주라는 설이 있다. 2011년 9월 14일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투수 최동원이 암으로 타계했고, 그 때 당시 그의 배번이었던 11번이 예전에 최동원이 썼던 번호여서 영구 결번을 위해 양보했다.[3] 출신 학교[편집] 동삼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 동아대학교 통산 기록[편집] 년도 팀 평균자책 경기수 승 패 세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2002 롯데 3.27 8 0 0 0 0 0 0 11 8 1 7 1 6 4 2003 6.00 2 1 0 0 0 0 0 9 10 3 3 1 6 6 2004 5.51 48 2 2 0 3 0 0 78 1/3 94 4 54 60 52 48 2005 3.82 56 6 7 7 4 0 0 94 1/3 86 6 52 63 41 40 2006 3.46 29 0 1 0 4 0 0 39 43 8 12 21 16 15 2009 3.74 31 1 2 1 5 0 0 43 1/3 52 3 14 26 19 18 2010 6.67 20 1 0 0 1 0 0 29 2/3 42 3 15 11 24 22 2011 3.72 9 0 0 0 1 0 0 9 2/3 12 3 4 6 4 4 2012 5.18 14 1 4 0 0 0 0 33 44 2 13 14 21 19 2014 2.43 25 1 1 0 8 0 0 33 1/3 42 1 15 25 14 9 2015 5.84 34 1 4 1 5 0 0 44 2/3 59 4 31 36 34 29 2016 3.27 48 3 2 2 3 0 0 55 59 5 14 45 22 20 통산 12시즌 4.38 324 17 22 11 34 0 0 480 1/3 551 43 219 309 259 234 각주[편집] ↑ KBO (2009년 3월 10일). 《한국 프로야구 기록대백과》 제4판. 434쪽.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1] - 하단에 경력 부분에 나와있음. ↑ 무쇠팔 최동원, 부산의 '영원한 11번'이 되다 - 오마이뉴스 외부 링크[편집] 이정민 - KBO 투수별 기록 vdeh롯데 자이언츠 - 현재 명단감독 79 양상문 코치 70 공필성 (수석) 72 윤재국 (외야수비) 73 김태룡 (내야수비) 74 최기문 (배터리) 76 주형광 (투수) 82 최만호 (작전) 83 이영준 (트레이닝) 84 김종훈 (컨디셔닝) 86 손인호 (타격보조) 87 장재영 (트레이닝) 91 임경완 (불펜) 95 김승관 (타격) 퓨처스 감독 97 강진규 퓨처스 코치 71 손용석 (내야수비) 75 이우민 (작전/외야수비) 80 정호진 (배터리) 81 프랑코 (타격) 88 김성진 (컨디셔닝) 93 류호진 (컨디셔닝) 98 홍민구 (투수) 99 이용훈 (불펜) 잔류군 코치 08 장경호 (컨디셔닝) 77 신민기 (수비) 78 강영식 (재활) 89 박재용 (타격) 90 이정민 (투수) 96 윤여훈 (컨디셔닝) 투수 05 송창현 1 손승락 14 정태승 15 오현택 18 윤성빈 19 홍성민 21 송승준 22 구승민 23 고효준 28 장시환 29 이승헌 32 박세웅 34 김원중 35 이인복 39 서준원 40 박진형 41 김대우 42 김건국 43 김현수 45 최영환 46 레일리 47 최하늘 48 진명호 49 배장호 50 다익손 51 윤길현 56 정성종 59 차재용 60 송주은 61 박근홍 62 박시영 64 정종진 67 조무근 85 강민성 94 박진 101 오영욱 109 김현 119 한승혁 포수 2 안중열 26 김사훈 27 나종덕 44 김준태 62 정보근 118 김현우 내야수 02 오윤석 4 오윤석 5 황진수 6 문규현 7 신본기 10 이대호 12 이찬건 13 배성근 17 채태인 25 한동희 36 전병우 52 김동한 54 강로한 57 고승민 66 김상호 68 신용수 69 윌슨 92 김동규 105 박정현 110 최승훈 외야수 0 나경민 3 민병헌 8 전준우 9 정훈 16 이병규 24 김문호 31 손아섭(주장) 33 허일 53 조홍석 58 정준혁 100 김민수 107 박영완 112 조준영 군입대 선수 강동관 강동호 김대륙 김도규 김동우 김민수 김유영 김재유 김종환 김훈호 나원탁 박종무 박한길 손준영 이예찬 이재욱 이준형 이지원 이호연 장두성 최민국 홍지훈 2020년 신인지명 선수 -- 최준용(1차지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정민_(1979년)&oldid=24233900" 분류: 197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부산광역시 출신KBO 리그 투수롯데 자이언츠 선수동삼초등학교 동문경남중학교 동문경남고등학교 동문동아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숨은 분류: CS1 관리 - 추가 문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7일 (금) 11: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나이저 모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이저 모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나이저 모건 Nyjer Morgan 페리코스 데 푸에블라 No.2 기본 정보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80년 7월 2일(1980-07-02) (39세) 신장 182.9 cm 체중 83.9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좌투좌타 수비 위치 중견수 프로 입단 연도 2002년 드래프트 순위 33라운드 973순위 (피츠버그 파이리츠) 첫 출장 MLB / 2006년 9월 1일NPB / 2013년 3월 29일KBO / 2015년 3월 28일 목동 대 넥센전 마지막 경기 MLB / 2014년 5월 14일NPB / 2013년 9월 19일KBO / 2015년 4월 10일 사직 대 롯데전 연봉 160만 달러 (2016년) 경력 피츠버그 파이리츠 (2002년 ~ 2009년) 워싱턴 내셔널스 (2009년 ~ 2010년) 밀워키 브루어스 (2011년 ~ 2012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3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4년) 한화 이글스 (2015년) 페리코스 데 푸에블라 (2016년 ~ 현재) 나이저 자미드 모건(Nyjer Jamid Morgan, 1980년 7월 2일 ~ ) 멕시칸 리그 페리코스 데 푸에블라의 선수이다. 목차 1 메이저 리그 시절 2 한화 이글스 시절 2.1 연도별 타격 성적 3 참조 메이저 리그 시절[편집] 2002년 신인 드래프트 33라운드 전체 973번째로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지명을 받아 입단하게 됐다. 수년 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뒤 마침내 2007년 9월 확장 로스터를 통해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데뷔 시즌 28게임 출장에 타율 0.299 32안타 1홈런 7도루를 기록했다. 커리어 하이는 피츠버그와 워싱턴에서 활약했던 2009년 시즌으로 120게임 출장에 타율 0.307 144안타 3홈런 39타점 42도루 기록했다.[1]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2014년 12월 12일 한화이글스는 재계약을 결렬한 펠릭스 피에의 대체 용병으로 전 메이져리거 출신 외야수를 총액 70만 달러(계약금 15만 달러, 연봉 55만 달러)에 영입하였다.[2] 2015년 5월 6일 웨이버 공시를 공식 발표했다. 지난 4일 두산 베어스 용병 타자 잭 루츠에 이어 시즌 2호 퇴출 용병이다. 공수주 삼박자를 두루 갖춘 실력과 뛰어난 쇼맨십으로 한화의 새로운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개성과 기대에 못 미친 실력, 허리 부상으로 결국 5월 6일 잭 러츠에 이어 외인 2호 퇴출의 비운을 맛봤다.[3] 그 후 한화 이글스는 그의 대체 선수로 제이크 폭스를 영입하였다.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루자 희생번 희생플 볼넷 고의사구 몸맞 삼진 병살타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2007년 PIT 28 118 107 15 32 3 4 1 46 7 7 3 1 0 9 0 1 19 0 .299 .359 .430 .789 2008년 58 175 160 26 47 13 0 0 60 7 9 5 1 1 10 0 3 32 0 .294 .345 .375 .720 2009년 PIT/WSH 120 533 469 74 144 15 7 3 182 39 42 17 10 5 40 2 9 74 9 .307 .369 .388 .757 2010년 WSH 136 577 509 60 129 17 7 0 160 24 34 17 15 3 40 1 10 88 2 .253 .319 .314 .633 2011년 MIL 119 429 378 61 115 20 6 4 159 37 13 4 15 3 19 0 14 70 6 .304 .357 .421 .778 2012년 122 322 289 44 69 5 3 3 89 16 12 5 7 0 20 0 6 63 4 .239 .302 .308 .610 MLB:6年 583 2154 1912 280 536 73 27 11 696 130 117 51 49 12 138 3 43 346 21 .280 .341 .364 .705 2012년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참조[편집] ↑ “Nyjer Morgan Statistics and History Baseball-Reference.com”. Baseball-Reference.com.  ↑ '한화맨' 모건, "두 번째 亞 진출 더 좋은 성적 낼 것" - (OSEN) 2014년 12월 12일 확인 ↑ 한화, 외인타자 나이저 모건 웨이버 공시 - (OSEN) 2015년 5월 6일 확인 vdeh한화 이글스 - 외국인 선수투수 호세 누녜스(2001, 퇴출) 데이비드 에번스(2001, 퇴출) 브라이언 워런(2001, 퇴출) 대런 윈스턴(2001, 퇴출) 카를로스 차베스(2001, 퇴출) 브랜든 리스(2001, 퇴출) 호세 파라(2002) 레닌 피코타(2003) 오라시오 에스트라다(2003, 퇴출) 세드릭 바워스(2007) 브래드 토머스(2008~2009) 에릭 영(2009) 호세 카페얀(2010) 훌리오 데폴라(2010~2011, 퇴출) 프랜시슬리 부에노(2010) 호세 카페얀(2010, 퇴출) 오넬리 페레즈(2011, 퇴출) 데니 바티스타(2011~2013) 브라이언 배스(2012, 퇴출) 숀 헨(2012, 퇴출) 대나 이브랜드(2013) 케일럽 클레이(2014, 퇴출) 앤드루 앨버스(2014) 라이언 타투스코(2014) 셰인 유먼(2015, 퇴출) 미치 탤벗(2015) 에스밀 로저스(2015~2016, 퇴출) 알렉산드로 마에스트리(2016, 퇴출) 파비오 카스티요(2016) 에릭 서캠프(2016) 알렉시 오간도(2017) 카를로스 비야누에바(2017) 키버스 샘슨(2018) 제이슨 휠러(2018, 퇴출) 데이비드 헤일(2018) 워릭 서폴드(2019~) 채드 벨(2019~) 타자 마이크 부시(1998) 호엘 치멜리스(1998) 댄 로마이어(1999~2000) 제이 데이비스(1999~2002, 2004~2006) 아모리 가르시아(2002, 퇴출) 로베르토 메히아(2003, 퇴출) 엔젤 페냐(2004, 퇴출) 에디 디아스(2004) 틸슨 브리토(2005) 마크 스미스(2005, 퇴출) 루 클리어(2006) 제이콥 크루즈(2007) 더그 클라크(2008) 빅토르 디아스(2009, 퇴출) 카림 가르시아(2011) 펠릭스 피에(2014) 나이저 모건(2015, 퇴출) 제이크 폭스(2015) 윌린 로사리오(2016~2017) 제러드 호잉(2018~) 한국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 제도는 1998년부터 시행, 굵은 글씨는 현재 한화 이글스 소속 선수, 퇴출은 시즌 중도에 퇴출된 경우 vdeh2015년 KBO 리그 외국인 선수삼성 라이온즈 알프레도 피가로(투수) 타일러 클로이드(투수) 야마이코 나바로(야수) 넥센 히어로즈 앤디 밴 헤켄(투수) 라이언 피어밴드(투수) 브래드 스나이더(야수) NC 다이노스 에릭 해커(투수) 에릭 테임즈(야수) 재크 스튜어트(투수) LG 트윈스 헨리 소사(투수) 루카스 하렐(투수) 루이스 히메네스(야수) SK 와이번스 메릴 켈리(투수) 크리스 세든(투수) 앤드루 브라운(야수) 두산 베어스 더스틴 니퍼트(투수) 앤서니 스와잭(투수) 데이빈슨 로메로(야수) 롯데 자이언츠 조쉬 린드블럼(투수) 브룩스 레일리(투수) 짐 아두치(야수) KIA 타이거즈 에반 믹(투수) 조쉬 스틴슨(투수) 브렛 필(야수) 한화 이글스 미치 탈보트(투수) 제이크 폭스(야수) 에스밀 로저스(투수) kt 위즈 크리스 옥스프링(투수) 저스틴 저마노(투수) 앤디 마르테(야수) 댄 블랙(야수) 방출 외국인 선수 잭 루츠(성적 부진 및 허리 부상, 두산) 나이저 모건(성적 부진 및 허리 부상, 한화) 앤드루 시스코(성적 부진, kt) 찰스 쉬렉(성적 부진, NC) 유네스키 마야(성적 부진, 두산) 잭 한나한(허리 부상, LG) 필 어윈(성적 부진, kt) 트래비스 밴와트(팔뼈 부상, SK) 필립 험버(성적 부진, KIA) 셰인 유먼(어깨 부상, 한화)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나이저_모건&oldid=23453167" 분류: 198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캘리포니아주 출신 야구 선수피츠버그 파이리츠 선수워싱턴 내셔널스 선수밀워키 브루어스 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선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외야수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KBO 리그 외국인 선수한화 이글스 선수아프리카계 미국인 야구 선수숨은 분류: 연도별 타격 성적을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11일 (금) 23: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병찬 (역도 선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병찬 (역도 선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병찬金棅儧 기본정보생년월일 1970년 12월 27일(1970-12-27)출생지 강원도 춘천시사망일 2015년 6월 25일 (44세)사망장소 강원도 춘천시키 176cm 스포츠국가 대한민국종목 역도체급 미들헤비급소속팀 홍천군청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역도 세계 선수권 대회 동 1990 부다페스트 -90kg 동 1991 도나우에싱겐 -90kg 아시안 게임 금 1990 베이징 -90kg 아시아 선수권 대회 금 1991 가미스 -100kg 금 1992 푸저우 -100kg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동 1989 포트로더데일 -82kg 김병찬(金棅儧, 1970년 12월 27일 ~ 2015년 6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전직 역도 선수로 미들급과 미들헤비급에서 대한민국 국가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목차 1 생애 2 국가대표 활약 3 각주 4 외부 링크 생애[편집] 강원도 춘천시에서 태어나 어머니인 김재순 밑에서 자랐다. 남춘천중학교 2학년 때 체육교사의 권유로 역도를 시작하여 홍천고등학교에서 선수로 활약, 1988년 하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었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에 진학하였고, 1990년 아시안 게임에서 이형근을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1991년과 1992년 아시아 역도 선수권 대회에 연이어 출전하여 각 3관왕을 차지했고, 1991년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용상에서 은메달, 합계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6년 소형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불의의 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선수 생활을 은퇴했고, 이후 일정한 직업이 없이 홀어머니와 단 둘이 생활하면서 대한체육회에서 매월 지급하는 메달리스트 연금 52만 5천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1] 2013년에는 자신을 돌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의한 수급자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는 메달리스트 연금이 보건복지부의 최저생계비 지급 기준인 49만 9천원보다 3만원 정도 많다는 이유로 메달리스트 연금 외에 월 10만원 정도의 의료급여 및 주거급여만을 추가로 수급받으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2015년 6월 26일,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이웃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위장출혈로 알려졌다.[2] 국가대표 활약[편집] 그는 1991년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 미들헤비급 부문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1988년 하계 올림픽과 1992년 하계 올림픽때 미들헤비급 부문에 참가했다. 그는 1990년 아시안 게임 미들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각주[편집] ↑ '불운의 역도 스타' 김병찬씨…춘천서 '쓸쓸한 죽음', 연합뉴스, 2015년 6월 30일 ↑ 역도스타의 '안타까운 마지막 길', 노컷뉴스, 2015년 6월 30일 외부 링크[편집] (영어) 김병찬 - IWRP - Weightlifting Database (영어) 김병찬 - Sports Reference.com 이 글은 스포츠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병찬_(역도_선수)&oldid=21500531" 분류: 1970년 태어남2015년 죽음대한민국의 남자 역도 선수대한민국의 올림픽 역도 참가 선수1988년 하계 올림픽 역도 참가 선수1992년 하계 올림픽 역도 참가 선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아시안 게임 역도 메달리스트199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1990년 아시안 게임 역도 참가 선수춘천시 출신남춘천중학교 동문홍천고등학교 (강원) 동문한국체육대학교 동문지체 장애인위장질환으로 죽은 사람숨은 분류: 한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스포츠인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6월 3일 (일) 06:5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