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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98%EA%B2%BD%20%EA%B8%B0%EC%A4%80
환경 기준
환경 기준()은 법률 및 행정 규정 또는 민법 규칙으로, 측정 가능한 양의 운영 및 표준화를 통해 아직 결정되지 않은 환경 보호의 법적 개념을 명확한 표준으로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환경 기준에 도달하는 것은 다양한 학문, 규범적 믿음과 가치,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과학적 통찰력을 고려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다양한 환경 활동은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표준을 가지고 있다. 환경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자연환경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의 환경이다. 인간 환경은 인간이 공기, 물, 토양과 같은 자연적 요소일 뿐만 아니라 문화, 통신, 협동 및 제도인 환경과 영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인류는 인류학적으로 뚜렷한 공동체에 함께 산다. 환경 기준을 정함으로써 자연은 인간의 생활방식에 의해 야기된 기존의 피해와 이미 존재하는 피해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환경 기준은 법률, 행정, 개인적인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다. 환경 기준의 발전 환경 기준이 논의되었을 때, 인간에 뿌리를 둔 두 가지 주요 추진 기준이 발전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첫번째 기준은 인간의 급진적인 생태주의, 다른 한 가지는 온건한 인류사회주의이다. 서로 반대되는 기준은 그것의 확립에 문제를 일으키지만, 세계를 형성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존하려는 생각은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환경 문제의 주제에 대한 사람들의 민감성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환경보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측정 시스템의 개선과 더불어 과학과 의학 지식의 발달에 기인한다. 이러한 개선과 함께 인간의 생활방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을 탐구한다. 과학에서의 발전은 지난 몇 년 내에 환경기준 설정을 위한 근본적인 것이다. 환경 표준은 원하는 상태를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예: 호수 pH는 6.5와 7.5 사이여야 한다). 표준을 정의해야 하는 특정 상태 또는 한도에 속하기 위해, 가장 가능성이 높은 통계 방법이 사용되었다. 환경 문제와 관련된 불확실성은 항상 고려되어야 한다. 기준을 정하는 첫 번째 단계는 특정 위험을 평가하는 것이다. 위험의 발생 예상가치를 계산해야 한다. 발생될 수 있는 피해는 분류되어야 한다. 피해의 유형으로는 세가지가 있다: 물리적 화학적 환경 피해로 인한 변화, 식물과 동물의 생태학적 피해, 그리고 인간의 건강에 미치는 피해가 있다. 예상 집합적 편익 관점에서 허용 가능한 위험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위험 유도 비용과 위험 회피 비용이 사회적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 비교는 통화 단위로 표현하기 어렵다. 더욱이 위험은 복수의 차원을 가지며, 이는 균형 과정의 끝에 상관관계에 도달해야 한다. 균형 조정 프로세스에서는 다음 단계를 고려해야 한다. 생명, 보건, 환경의 보호와 사회적 자원의 합리적인 배분을 모두 제공하는 목표를 수립한다. 이러한 목표 구현의 가능한 결과를 연구한다. 더 이상 옵션을 추구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기회 비용 및 편익을 포함하여 사회적 비용이나 피해를 고려한다. 균형 조정 과정에서는 환경의 생산성 유지와 관련된 위험과 탄력성(이득점)의 분포의 공정성 또한 지켜져야 한다. 표준에 더하여, 어떤 상황에서 표준이 위반된다고 간주되는지를 나타내는 실행 규칙은 일반적으로 규정의 일부다. 표준을 준수하지 않는 지역을 다루는 처벌 및 기타 절차가 이 법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설치, 설정 환경 표준 환경 기준은 다른 기관들에 의해 정해졌다. 대부분의 규격은 자발적인 자율화 원칙에 기초한다. 정부기관 UN 193개 회원국이 있는 가장 큰 정부간 조직으로, 유엔의 환경 정책은 국제 환경 기준에 큰 영향을 미친다.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의 지구정상회담에서 회원국들은 처음으로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인정했다. 이 기간과 다음 밀레니엄 선언문에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첫 번째 개발 목표가 설정되었다. 그 이후, 과도한 천연자원과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하나님의 극단적 행동에 의해 야기된 재앙의 위험성이 증대되었다. 2015년 파리 협정에서 유엔은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17개의 목표를 결정했다. 세계 빈곤과의 싸움 외에도, 목표의 주된 초점은 지구의 보존이다. 이 목표들은 지구 환경주의의 지하실을 만들었다. 물, 에너지, 해양, 생태계, 지속 가능한 생산과 소비 행태와 기후 보호의 환경 영역이 이 목표에 포함되었다. 목표에는 도달에 필요한 매체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회원국이 정해진 목표를 달성했는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후속조사와 점검이다. 왜냐하면 일부 회원들이 감사를 인식하거나 다른 어떤 통제가 그들의 내정에 개입하여 외부 당사자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해 야기된 이행과 후속 조치는 자발적인 국가 검토에 의해서만 통제된다. 주요 통제는 통계적인 값으로 수행하는데, 이를 지표라고 한다. 이러한 지표는 목표에 도달할 경우 정보를 제공한다. 유럽연합 유럽연합은 유럽연합의 기능에 관한 협약 내에서 환경에 대한 자율을 통합한다. 제31조 및 제31.1항에서, "환경에 대한 통일 정책은 다음과 같은 목표의 추구에 기여해야 한다: 환경의 질을 보존, 보호 및 개선하고, 인간 보건을 보호하며, 자연 자원의 신중하고 합리적인 활용을 촉진하며, 지역을 다루기 위한 국제적 차원의 조치를 촉진한다. 전 세계 환경, 문제, 특히 기후 변화와 싸우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모든 환경 행동은 이 기사를 토대로 하며 많은 환경법을 이끌어낸다. 유럽 연합은 공기, 생명공학, 화학, 시민 보호, 기후 변화, 환경 경제, 건강, 산업 및 기술, 국제, 토지 이용, 자연과 생물 다양성, 소음, 오존층 보호, 토양, 지속 가능한 개발, 폐기물 및 물을 다룬다. 또한 유럽 환경청은 회원들과 표준을 포함한 환경문제에 대해 협의한다. 미국 미국에서는 표준의 개발이 분산되어 있다. 그 기준은 100개가 넘는 다른 기관들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그 중 많은 기관들이 개인이다. 그것은 시장에 의해 주로 영향을 받고 부분적으로는 분할된 복수 시스템이다. 아래에 두 가지 구체적인 예가 있다. 미국의 주변 표 국가 대기 품질 표준(NAAQS)이라고도 하는 주변 표준은 환경보호청(EPA)에 의해 설정돼 대기 중 오염물질 수를 규제한다. 대기오염 방지법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주변기준은 사람들이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시도록 설정되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규정은 공공 복지를 잠재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는 알려진 오염물질로부터 보호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이러한 세트 표준의 시행은 추가적인 공기 품질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체약국들은 자체적인 환경 기준을 설정할 수 있지만, 시행하려면 국가적인 기준보다 낮아야 한다. [23] NAAQS는 이산화 황(SO2), 미세먼지(PM10), 일산화 탄소(CO), 오존(O3), 질소(NO2) 및 납(Pb)의 6가지 기준 공기 오염원을 규제한다. .[24] 주변 규격을 확실히 만족하기 위해 EPA는 연방 기준 방법(FRM)을 사용하고, 연방 등가 방법(FEM) 시스템은 대기 중 오염물질의 양을 제한치 이내로 측정한다. 미국의 배출량 기준 방출 기준은 대기 중으로 방출될 수 있는 오염물질의 양을 제어하는 EPA가 관리하는 국가 규제사항이다. 이 기준은 대기질과 인간의 건강을 유지하고 이산화 탄소(CO2), 질소 산화물 및 황 산화물과 같은 온실가스의 방출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 기준은 최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2단계로 수립되며, 미국인들의 연료비를 총 1조7천억 달러 절감하고 온실가스 배출량(GHG)을 60억 미터톤까지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최종 예측된다. 주변 표준과 마찬가지로 개별 주도 규제사항을 원하는 대로 강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는 캘리포니아 항공자원위원회(CARB)를 통해 자체 배출 기준을 설정했다. 또한, 방출 기준은 중공업에서 방출되는 오염물질의 양을 규제한다. EPA가 정한 기술 표준은 특정 기술의 사용을 반드시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산업에 대한 최소 성능 수준을 설정한다. 더욱이, 이러한 규정은 데이터 수집을 보다 정밀하게 할 수 있도록 하여, 그러한 정보에 기초하여 설정된 표준이 실현 가능하도록 한다.[29] EPA는 현재 기술로 달성할 수 없는 규격을 설정하여 기술적 개선을 권장한다. 이러한 표준은 항상 업계 전체의 전반적인 개선을 촉진하기 위해 업계 최고 실적을 기반으로 설정된다. 비정부조직의 영향 국제표준화기구 국제표준화기구는 많은 자발적 표준을 수립하는 기관이다. 163개 회원국들은 그들의 기준에 맞게 포괄적으로 의견을 수렴한다. ISO에 의해 설정된 표준은 종종 다른 국가들에 의해 국가 표준으로 전송되기도 한다. 전 세계 약 363.000개의 회사와 조직은 환경 관리 표준인 ISO 14001 인증서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인증서는 조직의 환경 성과와 법적 측면을 개선하고 환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ISO 14000 시리즈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 및 국제 환경 관리 표준이 이러한 것들이다. 그린피스 그린피스는 생물다양성과 환경을 다루는 가장 잘 알려진 비정부기구 중 하나이다. 그들의 활동은 환경 문제에 세계적 영향을 끼쳤다. 특별한 환경 문제를 기록하는 활동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일으키고, 정부나 기업이 환경 기준을 적용/설정하도록 한다. 그들의 주된 초점은 숲, 바다, 기후 변화, 독성 화학물질이다. 예를 들어, 섬유 부문과 함께 표준을 정립한 독성 화학물질을 보면; 그들은 2020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이 개념은 섬유 생산에서 모든 유독성 화학물질을 2020년까지 제거하는 것이다. WWF 세계야생생물기금은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면서 농업에서 최대의 수확량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목표로 하는 정책 변화와 인센티브를 교육하고, 보호하며,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경제 경제의 환경 기준은 외부 동기를 통해 정해진다. 기업들은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나라들의 환경법을 이행해야 한다. 환경기준은 자발적인 자기규약에 근거하는데, 이는 기업들이 정부규제의 요건을 초과하는 사업표준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들의 추가적인 기준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기준 설정 과정에서 3명의 이해관계자가 주요 영향을 받는다. 첫 번째 이해당사자인 정부는 가장 강력하게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고객의 영향력에 따라. 요즘 구매 결정의 환경적 요인을 고려해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기업들이 환경기준을 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세 번째 이해관계자는 산업 참여자들이다. 기업들이 산업 네트워크의 일부인 경우, 그들은 네트워크의 행동 강령을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 강령은 종종 산업의 집단적 평판을 향상시키기도 한다. 산업 참가자들의 또 다른 추진력은 경쟁자의 행동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기업 스스로 정한 환경기준은 2개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번째는 운영 환경 정책이다. 이는 환경 관리, 감사, 통제 또는 기술을 포함한다. 이 규칙은 다른 기능 영역(예: 생산 부족)과 밀접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다국적 기업들이 국가 간 조화 환경 정부 규정을 제정하여 더 높은 수준의 환경 표준에 도달하기도 한다는 것도 영향을 미친다. 두 번째 측면은 광고와 공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보내는 메시지다. 기업들은 이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해당사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업들은 환경 기준을 대중적 인상에만 초점을 맞추어 진짜 실행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많은 기업들의 저예산 부서가 환경 정책의 이행을 책임진다. 그 기준을 담당하는 부서들은 실제 실행을 보증하기 위한 시간과 재원이 부족하다. 또, 구현 목표 내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 기업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환경 보호의 효과보다 더 적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공공 위기 이후 환경 기준을 정하기도 한다. 기업이 사회적 문제로 비난 받은 이후, 그 이후에 환경 기준을 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참고 항목 환경성과지수 각주 환경
https://en.wikipedia.org/wiki/Environmental%20standard
Environmental standard
Environmental standards are administrative regulations or civil law rules implemented for the treatment and maintenance of the environment. Environmental standards are typically set by government and can include prohibition of specific activities, mandating the frequency and methods of monitoring, and requiring permits for the use of land or water. Standards differ depending on the type of environmental activity. Environmental standards may be used produce quantifiable and enforceable laws that promote environmental protection. The basis for the standards is determined by scientific opinions from varying disciplines, the views of the general population, and social context. As a result, the process of determining and implementing the standards is complex and is usually set within legal, administrative or private contexts. The human environment is distinct from the natural environment. The concept of the human environment considers that humans are permanently interlinked with their surroundings, which are not just the natural elements (air, water, and soil), but also culture, communication, co-operation, and institutions. Environmental standards should preserve nature and the environment, protect against damage, and repair past damage caused by human activity. Development of environmental standards Historically, the development of environmental standards was influenced by two competing ideologies: ecocentrism and anthropocentrism. Ecocentrism frames the environment as having an intrinsic value divorced from the human utility, while anthropocentrism frames the environment as only having value if it helps humanity survive. This has led to problems in establishing standards. In recent decades, the popularity and awareness of environmentalism has increased with the threat of global warming becoming more alarming than ever since the IPCC released their report in 2018. The report asserts that based on scientific evidence "if human activities continue to at this rate it is predicted to increase in-between 1.5-2 °C over pre industrial levels in-between 2030 and 2052". Busby argues that Climate change will define this century and that it is no longer a faraway threat. In turn, the demand for protecting the environment has risen. Developments in science have been fundamental for the setting of environmental standards. Improved measurements and techniques have allowed scientists to better understand the impact of human-caused environmental damage on human health and the biodiversity which composes the natural environment. Therefore, environmental standards in modern times are set with the view that humans do have obligations toward the environment, but they can be justified in terms of obligations toward other humans. This means it is possible to value the environment without discarding anthropocentrism. Sometimes called prudential or enlightened anthropocentrism. This is evident as environmental standards often characterize the desired state (e.g. the pH of a lake should be between 6.5 and 7.5) or limit alterations (e.g., no more than 50% of the natural forest may be damaged). Statistical methods are used to determine the specific states and limits the enforceable environmental standard. Penalties and other procedures for dealing with regions out of compliance with the standard may be part of the legislation. Governmental institutions setting environmental standards Environmental standards are set by many different institutions. United Nations (UN) The UN, with 193 member states, is the largest intergovernmental organization. The environmental policy of the UN has a huge impact on the setting of international environmental standards. At the Earth summit in 1992, held in Rio, the member states acknowledged their negative impact on the environment for the first time. During this and the following Millennium Declaration, the first development goals for environmental issues were set. Since then, the risk of the catastrophe caused by extreme weather has been enhanced by the overuse of natural resources and global warming. At the Paris Agreement in 2015, the UN determined 17 Goals for sustainable development. Besides the fight against global poverty, the main focus of the goals is the preservation of our planet. These goals set a baseline for global environmentalism. The environmental areas of water, energy, oceans, ecosystems, sustainable production, consumer behavior and climate protection were covered by the goals. The goals contained explanations on which mediums were required to reach them. Implementation and follow-up are controlled by non-enforceable voluntary national reviews. The main control is done by statistical values, which are called indicators. These indicators deliver information if the goals are reached. European Union (See also: Environmental policy of the European Union) Within the Treaty on the Functioning of the European Union, the Union integrates a self-commitment towards the environment. In Title XX, Article 191.1, it is settled: "Union policy on the environment shall contribute to the pursuit of the following objectives: — preserving, protecting and improving the quality of the environment, — protecting human health, — prudent and rational utilization of natural resources, — promoting measures at international level to deal with regional or worldwide environmental; problems, and in particular combating climate change." All environmental actions are based on this article and lead to a suite of environmental laws. European environmental regulation covers air, biotechnological, chemical, climate change, environmental economics, health, industry and technology, land use, nature and biodiversity, noise, protection of the ozone layer, soil, sustainable development, waste, and water. The European Environment Agency (EEA) consults the member states about environmental issues, including standards. The environmental standards set by European legislation include precise parametric concentrations of pollutants and also includes target environmental concentrations to be achieved by specific dates. United States In the United States, the development of standards is decentralized. These standards were developed by more than a hundred different institutions, many of which are private. The method of handling environmental standards is a partly fragmented plural system, which is mainly affected by the market. Under the Trump Administration, Climate standards have increasingly become a site of conflict in the politics of global warming. Ambient air quality standards The National Ambient Air Quality Standards (NAAQS) are set by the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 to regulate pollutants in the air. The enforcement of these standards is designed to prevent further degradation of air quality. States may set their own ambient standards, so long as they are lower than the national standard. The NAAQS regulates the six criteria for air pollutants: sulfur dioxide (SO2), particulate matter (PM10), carbon monoxide (CO), ozone (O3), nitrogen dioxide (NO2), and lead (Pb). To ensure that the ambient standards are met, the EPA uses the Federal Reference Method (FRM) and Federal Equivalent Method (FEM) systems to measure the number of pollutants in the air and check that they are within the legal limits. Air emission standards Emission standards are national regulations managed by the EPA that control the amount and concentration of pollutants that can be released into the atmosphere to maintain air quality, human health, and regulate the release of greenhouse gases such as carbon dioxide (CO2), oxides of nitrogen and oxides of sulfur. The standards are established in two phases to stay up-to-date, with final projections aiming to collectively save Americans $1.7 trillion in fuel costs and reduce the amount of greenhouse gas emissions (GHG) by 6 billion metric tons. Similar to the ambient standards, individuals states may also tighten regulations. For example, California set their own emissions standards through the California Air Resources Board (CARB), and these standards have been adopted by some other states. Emission standards also regulate the number of pollutants released by heavy industry and for electricity. The technological standards set by the EPA do not necessarily enforce the use of specific technologies, but set minimum performance levels for different industries. The EPA often encourages technological improvement by setting standards that are not achievable with current technologies. These standards are always set based on the industry's top performers to promote the overall improvement of the industry as a whole. Impact of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on environmental standards 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Standardization The 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Standardization (ISO) develops a large number of voluntary standards. With 163 member states, it has a comprehensive outreach. The standards set by the ISO were often transmitted into national standards by different nations. About 363,000 companies and organizations worldwide have the ISO 14001 certificate, a standard for environmental management created to improve the environmental performance of an organization and legal aspects as well as reaching environmental aims. Most of the national and international environmental management standards include the ISO 14000 series. In light of the UN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ISO has identified several families of standards which help meet SDG 13 which is focused on Climate Action for global warming. Greenpeace Greenpeace is a popular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that deals with biodiversity and the environment. Their activities have had a great global impact on environmental issues. Greenpeace encourages public attention and enforces governments or companies to adapt and set environmental standards through activities recording special environmental issues. Their main focus is on forests, the sea, climate change, and toxic chemicals. For example, the organization set a standard about toxic chemicals together with the textiles sector, creating the concept 2020, which plans to banish all toxic chemicals from textile production by 2020. World Wildlife Fund The World Wide Fund is an international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founded in 1961 that works in the field of wilderness preservation and the reduction of human impact on the environment. Economy Environmental standards in the economy are set through external motivation. First, companies need to fulfill the environmental law of the countries in which they operate. Moreover, environmental standards are based on voluntary self-commitment which means companies implement standards for their business. These standards should exceed the level of the requirements of governmental regulations. If companies set further-reaching standards, they try to fulfill the wishes of stakeholders. At the process of setting environmental standards, three different stakeholders have the main influence. The first stakeholder, the government, is the strongest determinate, followed by the influence of the customers. Nowadays, there is an increasing number of people, who consider environmental factors during their purchasing decision. The third stakeholder who forces companies to set environmental standards is industrial participants. If companies are part of industrial networks, they are forced to fulfill the codes of conduct of these networks. This code of conduct is often set to improve the collective reputation of an industry. Another driving force of industry participants could be a reaction to a competitors action. The environmental standards set by companies themselves can be divided into two dimensions: operational environmental policies and the message sent in advertising and public communications. Operational environmental policies This can be the environmental management, audits, controls, or technologies. In this dimension, the regulations tend to be closely connected with other function areas, e.g. lean production. Furthermore, it could be understood that multinational companies tend to set cross-country harmonized environmental government regulations and therefore reach a higher performance level of environmental standards. It is often argued that companies focus on the second dimension: the message sent in advertising and public communications. To satisfy the stakeholders' requirement, companies were focused on the public impression of their environmental self-commitment standards. Often the real implementation does not play an important role. A lot of companies settle the responsibility for the implementation of low-budget departments. The workers, who were in charge of the standards missing time and financial resources to guarantee a real implementation. Furthermore, within the implementation, goal conflicts arise. The biggest concern of companies is that environmental protection is more expansive compared to the gained beneficial effects. But, there are a lot of positive cost-benefit-calculation for environmental standards set by companies themselves. It is observed that companies often set environmental standards after a public crisis. Sometimes environmental standards were already set by companies to avoid public crises. As to whether environmental self-commitment standards are effective, is controversial. See also Environmental compliance Emission standard Fairtrade certification Environmental certification Environmental data Environmental monitoring Environmental performance Environmental law References External links European Environmental Citizens Organization for Standardisation ISO 14000 Environmental management
https://ko.wikipedia.org/wiki/%EA%B2%8C%EC%98%A4%EB%A5%B4%EA%B8%B0%20%ED%94%8C%EB%A1%9C%EB%A1%AD%EC%8A%A4%ED%82%A4
게오르기 플로롭스키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플로롭스키(, , 1893년 9월 9일 - 1979년 8월 11일)는 정교회의 기독교 사제, 신학자, 역사가 그리고 교회일치운동가였다. 러시아 제국 오데사 출생한 그는 파리 (1920-1949)와 뉴욕 (1949-1979)에서 생활했다. 세르게이 불가코프, 블라디미르 로스키, 유스틴 포포비치 그리고 두미트루 스터닐로아에와 함께 그는 20 세기 중반에 가장 영향력있는 정통 기독교 신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특히 근대의 기독교 신학이 스콜라 신학이나 종교 개혁의 사상범주보다는 분열이전의 교회에 있던 교부들의 전통속에서 좀더 생생한 지적 토론을 통하여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개요 게오르기 플로롭스키는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권위 있고 뛰어난 정교 신학자다. 플로롭스키는 오데사의 정교 사제이자 신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나 노보로시스크 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한 후, 1920년에 대학의 비상근 강사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프라하로 망명하게 되고, 그곳에서 게르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도, 그는 교부들에 대한 연구에 매진해 교부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점차적으로 형성된 그의 세계관은 당시 해외로 망명한 대다수의 종교적 인텔리겐치아들과는 달리 세속 철학이 아닌 신학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는 잠시 ‘유라시아주의’와 관련을 맺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서구와 서유럽 철학에 대한 유라시아주의의 조심스러운 부정적 태도가 그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쓰인 대표 작품으로는 ≪인간의 지혜와 신의 지혜(Человечечкая и Божественная мудрость)≫(1922)가 있다. 1926년에 그는 막 생겨난 파리 신학교의 교부학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1932년에는 서유럽을 총괄하는 대주교의 성직을 받게 되어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의 생애에서 파리에서 활동한 시기에 결실이 가장 풍부했다. 이때 교부들에 대한 두 권의 저서[≪4세기 동방의 교부들(Восточные Отцы Четвертого Века)≫과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비잔틴의 교부들(Визатийские Отцы от V до VIII столетия)≫]와 ≪러시아 신학의 여정≫(1937)을 출판했다. 그 외의 저서들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Смерть на кресте)≫(1930), ≪기독교적 연합의 문제들(Проблемы христианского объединения)≫(1933) 등이 있다. 1948년에 미국의 대주교 페오필(Феофил)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이주해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후에는 학장직을 맡았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브루클린에 있는 성 십자가 그리스정교 신학교에서도 강의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서 강의를 계속했다. 1979년 8월 11일 프린스턴에서 생을 마감했다. 같이 보기 존 지지울라스 작품 Eastern Fathers of the Fourth Century (1931. Paris) The Ways of Russian Theology (online) The Catholicity of the Church online The Lost Scriptural Mind online On Church and Tradition: An Eastern Orthodox View online St. John Chrysostom. The Prophet of Charity online The Ascetic Ideal and the New Testament. Reflections on the Critique of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online The Limits of the Church, Church Quarterly Review, 1933 (online) Following the Holy Fathers (Excerpt of The Collected Works of Georges Florovsky Vol. IV, "Patristic Theology and the Ethos of the Orthodox Church," Part II, p. 15-22) online St Gregory Palamas and the Tradition of the Fathers, 1961 online Revelation and Interpretation online Scripture and Tradition: an Orthodox View online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velation online Holy Icons online Collected works published 1972-1979 (vol. 1-5) in Belmont, Mass. by Nordland Pub., and 1987-1989 (vol. 6-14) in Vaduz, Europa by Büchervertriebsanstalt. Collected Works. Volume 1: Bible, Church, Tradition Collected Works. Volume 2: Christianity and Culture excerpts online Collected Works. Volume 3: Creation and Redemption [excerpts online] Collected Works. Volume 4: Aspects of Church History excerpts online Collected Works. Volume 5: Ways of Russian Theology, Part I Collected Works. Volume 6: Ways of Russian Theology, Part II Collected Works. Volume 7: Eastern Fathers of the Fourth Century Collected Works. Volume 8: Byzantine Fathers of the Fifth Century Collected Works. Volume 9: Byzantine Fathers of the Sixth to Eight Centuries Collected Works. Volume 10: Byzantine Ascetic and Spiritual Fathers Collected Works. Volume 11: Theology and Literature Collected Works. Volume 12: Philosophy Collected Works. Volume 13: Ecumenism I: A Doctrinal Approach Collected Works. Volume 14: Ecumenism II: An Historical Approach 같이 보기 List of Russian philosophers Orthodox Christian theology Philosophers' ship 각주 1893년 출생 1979년 사망 미국의 신학자 기독교 작가 소련의 강제이주 오데사 출신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s%20Florovsky
Georges Florovsky
Georges Vasilievich Florovsky (Russian: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Флоро́вский; – August 11, 1979) was a Russian Orthodox priest, theologian, and historian. Born in the Russian Empire, he spent his working life in Paris (1920–1949) and New York (1949–1979). With Sergei Bulgakov, Vladimir Lossky, Justin Popović and Dumitru Stăniloae he was one of the more influential Eastern Orthodox Christian theologians of the mid-20th century. He was particularly concerned that modern Christian theology might receive inspiration from the lively intellectual debates of the patristic traditions of the undivided Church rather than from later Scholastic or Reformation categories of thought. Life Georgiy Vasilievich Florovsky was born in Yelisavetgrad, Kherson Governorate, Russian Empire on 9 September 1893 as the fourth child of an Orthodox priest. He grew up in Odessa. Raised in an erudite environment, he learned English, German, French, Latin, Greek, and Hebrew while a schoolboy, and at eighteen he started to study philosophy and history. He graduated from the University of Odessa in 1916. After his first graduation, he taught for three years at high schools in Odessa, and then made his full graduation including the licentia docendi at all universities in the Russian empire. In 1919 Florovsky began to teach at the University of Odessa; but in 1920 his family was forced to leave Russia. Florovsky realized at that time that there would be no return for him, because Marxism did not accept the history and philosophy he taught. He was part of the emigration of Russian intelligentsia, which also included Nikolai Berdyaev, Sergei Bulgakov, Nicholas Lossky and his son Vladimir Lossky, Alexander Schmemann, and John Meyendorff (the last two of whom would follow him in the USA as Dean of Saint Vladimir's Orthodox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In the 1920s Florovsky had a personal and vocational friendship with the existentialist philosopher Nikolai Berdyaev, but the two became distanced later, through Berdyaev's not understanding Florovsky's ordination to the presbyterate (1932), and because of the critical attitude to Berdyaev's philosophy of religion expressed in Florovsky's Ways of Russian Theology (1937). In 1924 Florovsky received his M.A. in Prague. In 1925 he became professor of patristics at the St. Serge Institute of Orthodox Theology in Paris. In this subject he found his vocation. The lively debates of the thinkers of the early Church became for him a benchmark for Christian theology and exegesis, as well as a base for his critique of the ecumenical movement, and despite his not having earned an academic degree in theology (he was later awarded several honorary degrees) he would spend the rest of his life teaching at theological institutions. In 1932 Florovsky was ordained priest of the Eastern Orthodox Church. During the 1930s he undertook extensive research in European libraries and published in Russian valuable patristic studies, such as his book on 'Eastern fathers of the fourth century' (1931) and 'The Byzantine fathers fifth to eighth centuries' (1933). These were followed by his magnum opus, Ways of Russian Theology (1937). In this work he questioned the Western-European Christian influences of scholasticism, pietism, and idealism on Orthodox, and especially Russian, Christian theology, and called for its reformulation in the light of patristic writings. The work was received with enthusiasm or condemnation—there was no neutral attitude to it among Russian émigrés. One of his most prominent critics was Nikolai Berdyaev. Florovsky remained professor of patristics at the Institute until 1939, and from 1939 to 1948 taught there as professor of dogmatics. In 1949 Florovsky moved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o take a position as Dean of Saint Vladimir's Orthodox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 City. There his development of the curriculum led to the Board of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the State of New York granting the Seminary an Absolute Charter in 1953. In 1955 Florovsky was asked by his synod overseers to "lay down the deanship." He became a professor of divinity at Harvard University, and ended his academic years as a professor at Princeton University. He died on 11 August 1979 in Princeton. Works Eastern Fathers of the Fourth Century (1931. Paris) The Ways of Russian Theology (online) The Catholicity of the Church online The Lost Scriptural Mind online On Church and Tradition: An Eastern Orthodox View online St. John Chrysostom. The Prophet of Charity online The Ascetic Ideal and the New Testament. Reflections on the Critique of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online The Limits of the Church, Church Quarterly Review, 1933 (online) Following the Holy Fathers (Excerpt of The Collected Works of Georges Florovsky Vol. IV, "Patristic Theology and the Ethos of the Orthodox Church," Part II, p. 15-22) online St Gregory Palamas and the Tradition of the Fathers, 1961 online Revelation and Interpretation online Scripture and Tradition: an Orthodox View online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velation online Holy Icons online Collected works published 1972-1979 (vol. 1-5) in Belmont, Mass. by Nordland Pub., and 1987-1989 (vol. 6-14) in Vaduz, Europa by Büchervertriebsanstalt. Collected Works. Volume 1: Bible, Church, Tradition Collected Works. Volume 2: Christianity and Culture excerpts online Collected Works. Volume 3: Creation and Redemption [excerpts online] Collected Works. Volume 4: Aspects of Church History excerpts online Collected Works. Volume 5: Ways of Russian Theology, Part I Collected Works. Volume 6: Ways of Russian Theology, Part II Collected Works. Volume 7: Eastern Fathers of the Fourth Century Collected Works. Volume 8: Byzantine Fathers of the Fifth Century Collected Works. Volume 9: Byzantine Fathers of the Sixth to Eight Centuries Collected Works. Volume 10: Byzantine Ascetic and Spiritual Fathers Collected Works. Volume 11: Theology and Literature Collected Works. Volume 12: Philosophy Collected Works. Volume 13: Ecumenism I: A Doctrinal Approach Collected Works. Volume 14: Ecumenism II: An Historical Approach See also List of Russian philosophers Eastern Orthodox Christian theology Philosophers' ships References Further reading A. Blane, Georges Florovsky; Russian Intellectual and Orthodox Churchman (1993) . Peter A. Chamberas, "Georges Vasilievich Florovsky: Russian intellectual historian and orthodox theologian - 1893-1979 - Religious Historians, East and West", Modern Age, Winter 2003 (FindArticles online version). Steven Aguzzi, "Florovsky’s 'The Boundaries of the Church' in Dialogue with the Reformed Tradition: Toward a Catholic and Charismatic Ecumenical Ecclesiology," Ecumenical Trends; 39:3 (2010), 8–14. External links Collected Works of Fr Georges Florovsky, in part online John S. Romanides, F. Georges Florovsky, the theologian in service of the church in ecumenical dialogue Lecture at St. Vladimir's Seminary 23 May 1980 Harvard Divinity School Faculty Writings File: Georges Florovsky Princeton University Library: Georges Florovsky Papers St. Vladimir's Seminary Library: The Fr. Georges Florovsky Papers Nikolai Berdyaev, Ortodoksia and Humanness, 1937, Critique of Florovsky's "The Way of the Russian Church" Matthew Baker, 'The Eternal ‘Spirit of the Son’: Barth, Florovsky and Torrance on the Filioque', in International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12:4 (2010 October), p. 382–403. Matthew Baker and Nikolaos Asproulis, 'Secondary Bibliography of Scholarly Literature and Conferences on Florovsky', in ΘΕΟΛΟΓΙΑ: The Journal of the Holy Synod of the Church of Greece, 81/40, Vol. 4 (2010), pp. 557–396. Fr. Georges Florovsky Orthodox Christian Theological Society: A graduate student organization of Princeton University dedicated to promoting the study of the life and work of Fr. Georges Florovsky and of Orthodox theology. 1893 births 1979 deaths Writers from Kropyvnytskyi People from Yelisavetgradsky Uyezd Eastern Orthodox theologians American theologians Eastern Orthodox priests in the United States Eastern Orthodox writers Schoolteachers from the Russian Empire Emigrants from the Russian Empire to France 20th-century Eastern Orthodox priests Academic staff of Odesa University Corresponding Fellows of the British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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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각국사무아문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 약칭 총리아문(總理衙門), 총서(總署), 역서(訳署)로 간칭되기도 했다. 청나라 후기 외교와 양무(광산과 철도에 관한 정책 등)를 관할하기 위해 설립된 관청이다. 1861년 1월 20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존재했다. 시대적 상황에 의해 중국 외교의 영향력은 감소했지만, 이전까지의 역대 중국 왕조의 외교 방식을 바꿔놓는 기능을 했다. 배경 청나라 말기 이전 중국의 외교기구는 상대하는 지역에 따라 담당이 정해져 있었다. 즉 외교부와 같은 대외 관계를 일원적으로 취급하는 부서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책봉 이후 조공을 하기 위해 오는 나라와의 통상적인 사무는 예부가 담당했다. 또한 외몽골 · 청해 · 티베트 · 신장 등이나 러시아와의 통상 외교는 이번원에서 담당을 하였고, 유일한 외국과의 교역을 허용한 광저우에서 무역사무(광동 체제)는 양광(광동성, 광서성) 총독이 담당하고 있었다. 즉 당시 중국 외교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외교를 총괄하는 관청은 존재하지 않았고, 관할 지역마다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외교’ 자체가 조공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공을 하지 않는 외국 (프랑스 등)과의 교역을 별도로 담당하는 외교 부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서양 국가들을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외교 부서가 없다는 것은 서양 국가들의 불만을 샀다. 그래도 광동 근처에서만 분쟁을 벌였던 제1차 아편 전쟁 당시부터 1840년대 무렵까지 그 지역을 관할하는 양광 총독에게 흠차대신 (특명 전권 대신)의 권한을 위임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1857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양광 총독부가 함락되고, 이듬해에는 톈진까지 점령당하자 사태의 처리는 두 양광 총독의 손으로 넘어갔다. 1858년 6월에 영국 · 프랑스 · 미국 · 러시아와 톈진조약을 맺었지만, 청나라 정부가 조약을 전혀 비준하지 않자 분노한 영불 연합군은 1860년 10월에 베이징을 점령하고,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과 프랑스 대표는 청나라에 대해 외무부에 해당하는 기관을 설립하도록 요구했다. 〈톈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에서는 중국의 외교 제도로 아래의 사항을 과제로 남겼다. 양광총독 관할 외의 항구 개항 1858년, 톈진조약에서 10개의 항구를, 1860년, 베이징 조약에서는 하나의 항구를 추가로 더 개항하도록 했다. 톈진조약 시점의 10개 항구 중 8개의 항구가 화중, 화남 지역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1859년에 양강총독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이를 관할하게 했지만, 베이징 조약에서는 수도의 코 앞에 있는 톈진을 개항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전까지의 ‘흠차대신에 의한 외교’ 방침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각국 공사의 베이징 상주 톈진조약의 시점에서 “각국 외교관의 베이징 상주”였던 것이 베이징 조약에서는 “각국 공사의 베이징 상주”로 바뀌었다. 각국이 공사급 이상의 외교관을 파견한다면, 필연적으로 청나라도 국가를 상대할 부서가 마련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 중앙집중식 외교기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공친왕 혁흔은 내각대학사 계량(桂良), 호부좌시랑 문상(文祥) 등에게 1861년 1월 11일에 상주하게 하고 3월 11일에 정식으로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이 설립되었다. 이전까지 중국의 외교 정책을 대전환시킨 이 조직은 이후 변법자강 운동의 선구라고도 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활동 외교 수행 총리아문에는 외교정책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결정권자는 황제(사실상은 서태후) 또는 군기대신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공친왕이 수석 군기대신을 겸하고 있었고, 다른 군기대신들도 이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안은 그냥 넘어갔다. 1860년대, 공친왕이 주도하던 총리아문은 효과적으로 운영되었다. 베이징 조약의 대응을 소화하면서, 1868년에는 톈진 조약의 관세 문제를 다뤘다. 또 한편으로는 동문관 출신자를 서양에 파견하기도 했다. 1866년에는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의 귀국에 수반하는 형태로 무장(斌樁)을 대표로 하는 중국 최초의 유럽 사절단을 파견했다. 1867년에는 미국공사 앤슨 벌링게임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구미 제국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총리아문을 추진했던 공친왕이 서태후에 의해 밀려나고, 1870년에 이홍장이 북양통상대신으로 장관에 취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총리아문의 구성원이나 이홍장도 같은 양무파임에는 다를 바 없었었고, 중국 무역항 전체를 관할했지만, 전권을 가지지 못한 총리아문에 비해 톈진으로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홍장은 흠차대신으로서 전권을 가지고 있다. 광저우가 무역의 중심이었던 무렵이라면 몰라도, 이미 각국 공사는 베이징에 상주하고 있었으며, 무역의 중심도 베이징에서 가까운 톈진으로 이동하고 있다. 상황이 그렇게 변화되면서 각국 공사들은 톈진에서 실권을 가진 이홍장과 소통을 하는 것이 빠르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실질적인 외교의 중심이 총리아문이 있는 베이징에서 북양통상대신이 있는 톈진으로 무게 이동하였고, 청일전쟁 무렵에는 톈진의 이홍장이 사실상 중국 외교부의 중심이었다. 개설 당시에 비해 상당한 영향력을 상실한 총리아문은 1901년, 의화단 운동 이후 신축조약의 조항에 따라 폐지되었고, 외무부가 신설되었다. 양무운동의 추진 외교 이외에도 외국과 신속한 소통을 하던 총리아문은 양무화에 의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들은 로버트 하트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련 사업의 현대화도 추진했다. 따라서 동문관은 본래의 언어교육에 머물지 않고, 교통 · 산업 · 경제 (특히 무역) · 군사 등의 측면에서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여 ‘양무내각’으로 비유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 외국에서 보면 ‘개혁의 행보’가 느리게만 보였으며, 국내 보수파들은 이들을 ‘매국행위’로 보았다. 그리하여 외무뿐만 아니라 양무운동도 1870년대부터는 중심이 이홍장에게로 옮겨갔고, 총리아문은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조직 체계 총리아문은 최고의 외교기관이었지만 일반 정부기관이 아닌 잠정적으로 발족한 ‘군기처의 기반’과 같이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조직과 배정 인력의 관품 등의 규정도 없었다. 총리아문은 베이징 둥탕즈(東堂子) 후통(현재 둥청구)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의 총리아문은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동사문관으로 사용되었고, 서쪽은 외교 활동에 이용되고 있었다. 인력 구성 총리아문의 수뇌부는 친왕이나 군왕, 조륵과 같은 만주 귀족층과 몇 명의 장관으로 구성되어 각자가 협력하여 사안에 맞도록 배치되었다. 여러 명의 대신이라고는 하지만 각각 군기대신, 내각대학사와 육부상서(장관급), 시랑 등 국정의 중심에 있는 관료가 겸임하고 있었다. 대신 휘하에는 각종 문서를 다루는 장경(章京) 16명(만주인, 한인 각 8명씩) 배치되었다. 초대 책임자는 공친왕 혁흔이었으며, 대신으로는 상주를 했던 계량, 문상 등이 있었다. 조직기구 총리아문은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었다. (고(股)는 과(課) 또는 부서) 영국고(英國股) - 영국과의 협상 전반 서유럽 국가들과의 통상무역 · 해관의 세금을 취급. 법국고(法國股)-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브라질과의 협상 전반과 기독교 관련 해외 화교의 보호, 중월 국경에 관한 것을 다룸. 아국고(俄國股) - 러시아, 일본과의 협상 전반, 몽골 방면의 대러 무역, 중러 국경 유학생을 취급. 미국고(美國股) - 미국 · 독일 · 페루 · 이탈리아 · 스웨덴 · 노르웨이를 담당. 해방고(海防股) - 북양 해군 · 남해 해군, 연해에 부설된 포대 · 조선 공장 관리, 기선과 총 포탄의 구입, 전신 · 철도 · 광산 개발 · 운용을 취급. 그 외 부속 기관으로서 관세 관련 사안을 총괄하는 해관 총세무사서와 중국 최초의 외국어 학교인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 현재의 베이징 대학 외국어 학원의 전신)이 있었다. 청나라의 대외 관계 1861년 설립 1901년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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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gli Yamen
The Zongli Yamen (), short for Office for the General Management of Affairs Concerning the Various Countries (), also known as Prime Minister's Office, Office of General Management, was the government body in charge of foreign policy in imperial China during the late Qing dynasty. It was established by Prince Gong on 11 March 1861 after the Convention of Beijing. It was abolished by the Qing government in 1901 and replaced with a Foreign Office of ministry rank. The former site of the Zongli Yamen is now located in Dongtangzi Hutong, Dongcheng District, Beijing. Nearly all the buildings are preserved in good condition. Meaning of name Zongli Yamen is a traditional abbreviation of the official name (), literally meaning "Office in Charge of Affairs Concerning All Nations".The corresponding name in Manchu, the other official language of the Qing Empire, was Geren gurun i baita be uherileme icihiyara yamun. () A common misconception is that the Zongli Yamen's name means the "Premier's Office". This arose because the term zongli (总理) is now used in Chinese to refer to the Premier or Prime Minister of a country. In fact, the name Zongli Yamen is an abbreviation of its full name, which makes it the bona fide office of foreign affairs. In contemporary English sources, it was also called the "Board of Ministers for Foreign Affairs". Function in the Qing government Prior to the creation of the Zongli Yamen, Qing foreign relations were conducted by several different agencies, such as the Ministry of Rites and the Lifan Yuan. The Zongli Yamen was the first significant institutional innovation in the central Beijing bureaucracy that the Qing government had made since the Yongzheng Emperor created the nucleus of the Grand Council in 1729. The Zongli Yamen was supervised by a controlling board of five senior officials (initially all Manchus), among whom Prince Gong was the de facto leader. In their discussions on establishing the new agency, Qing officials reiterated that it was only to be a temporary institution, maintained until the current foreign and domestic crisis had passed. The Zongli Yamen had a relatively low formal status in the Qing administrative hierarchy and its members served concurrently in other government agencies, which further weakened its position. Furthermore, the Zongli Yamen was not the sole policy making body in foreign affairs, a prerogative which still rested in the hands of the emperor. While the Zongli Yamen remained an important body for a few decades after its foundation, its influence was soon overshadowed by influential officials such as Zeng Guofan and Li Hongzhang. Nevertheless, it became the means of communication between the Qing government and the foreign ministers to China in Beijing's legation quarter. The successor to the Bureau of Translators, the Tongwen Guan was set up by the Qing dynasty for translating western languages and subordinated to the Zongli Yamen instead of the Hanlin. In 1873, the Zongli Yamen got into a quarrel with the foreign ministers to China over the protocol that was to be followed at their audience with the Tongzhi Emperor, as the foreign ministers not surprisingly refused to perform the ritual kowtow to the emperor, with an impasse eventually being solved thanks in part to the Japanese ambassador to China, Soejima Taneomi. Similar protocol would be followed in 1891 with the ministers' audience with the Guangxu Emperor. In 1875, the Zongli Yamen began establishing consulates and legations in foreign countries staffed by Qing diplomats and assisted by both foreign staff and Qing interpreters trained at the Tongwen Guan. Through these permanent diplomatic missions, the Zongli Yamen gained a degree of autonomy in its self-representation and the ability to dispute the views of foreign diplomats in their home countries. Following the Boxer Rebellion, the Qing government was forced to change its foreign service. According to Article XII in the Boxer Protocol 1901, the Zongli Yamen was replaced with a Foreign Office, known at the time as the Waiwubu (), which ranked above the other six boards in the government; "as the course of subsequent events made clear, the Waiwubu was as ineffective in the establishment of good relations between China and the outside world as the Zongli Yamen had been." See also Foreign relations of Imperial China List of diplomatic missions of the Qing dynasty Dates of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Qing dynasty Peking Legation Quarter Notes References Immanuel C. Y. Hsü. China's Entrance into the Family of Nations: The Diplomatic Phase, 1858 -1880.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0. (坂野 正高 Banno Masataka). China and the West, 1858–1861: The Origins of the Tsungli Yamen.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Meng, S. M. The Tsungli Yamen: Its Organization and Functions. Cambridge, Massachusetts: East Asian Research Center, 1962. H B Mors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Chinese Empire. 3 volumes. London and New York: by Longman and Green, 1910–18. Spence, Jonathan D. The Search for Modern China. New York and London: W.W. Norton & Company, 1990. Maria Bugrova Tsungli Yamen on Bumali Project Foreign relations of the Qing dynasty Government of the Qing dynasty
https://ko.wikipedia.org/wiki/%EB%82%9C%EA%B0%95%EC%A0%84%EB%9E%8C%EA%B4%80%EC%97%AD
난강전람관역
난강전람관역()은 타이완 타이베이시 난강 구에 위치한 타이베이 첩운 원후선과 반난선의 환승역이다. 양 노선 모두 밀폐형 스크린도어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본역의 네이후선 승강장은 시후 역과 함께 원후선에서 둘뿐인 고가 섬식 승강장이다. 원후선의 나머지 고가역은 상대식 승강장이다. 1번 출구 중 하나가 타이베이 난강 전람관 1관과 연결되어있다. 난강전람관 역은 현재 타이베이 첩운의 가장 동쪽과 가장 가까운 역이며, 타이베이 첩운의 유일한 양노선의 공동 종착역이기도 하다. 이 역은 신베이시 시즈 구에 인접해 있으며, 네이후 차량기지(內湖機廠)는 네이후 선 역의 북동쪽에 있다. 2017년 3월에 발표된 새로운 "지룽 경전철(基隆輕軌)" 계획에서는, 트램 트레인 방식을 사용하며, 이 역을 노선의 종착역으로 사용하고, 새로운 평면역을 건설하고, 총 19 km로, 2022년에 운행할 예정이다. 개요 이 역은 난강 로(南港路) 양측, 우옌주위안 로(與研究院路)와 징마오 2로(經貿二路)의 교차로, 징마오 1로(經貿一路) 입구에 있다. 역번호는 BR24/BL23이다. 역명은 북쪽에 위치한 타이베이 세계 무역 센터(台北世界貿易中心)의 난강 전람관(南港展覽館)에서 따왔다. 난강전람관 역은 계획 기간 동안 징마오 남역(經貿南站)으로 불렀으며, 북쪽의 난강 소프트웨어 단지 역은 이전에는 징마오 북역(經貿北站)이라 불렀다. 이 역은 타이베이 첩운 원후선의 고가 종착역으로, 2009년 7월 4일에 개통되었으며, 타이베이 MRT 공사에서 운영한다. 이 역은 타이베이 첩운 반난선의 지하 종착역으로, 2011년 2월 27일에 개통되었으며, 타이베이 MRT 공사에서 운영한다. 이 역은 지룽 경전철(基隆輕軌)의 종착역으로 기획되었으며, 2022년에 개통될 예정이고, 운영 조직은 타이완 철로 관리국이 된다. 역 구조 이 역은 타이베이 첩운 네트워크의 동쪽에 있는 가장 중요한 환승역이므로, 이 역은 고가에는 중간 수송량, 지하에는 높은 수송량으로 설계되었으며, 웨난강 로(越南港路)를 지나는 지하 통로와 직접 연결된다. 일반철도와 고속철도 터널이 지하철역과 나란히 있으나, 해당하는 역은 없다. 네이후 선과 난강 선 통틀어 총 7개의 출구가 있다. : 고가 역, 1면 섬식 승강장 : 지하 역, 1면 섬식 승강장 층별 역 구조 ※본역의 원후 선 부분이 개통 된 후, 타이베이 MRT 공사는 "난강전람관-난강"까지 무료 셔틀 버스를 추가하여. 본역의 반난선이 개통되어 반난선과 원후선의 환승이 될때까지 운영되었다. 역 출구 1,2,2A번 출구는 종선 역의 서쪽 끝에, 3,4번 출구는 종선 역 동쪽 끝에, 5,6번 출구는 남선 역 북측, 7번 출구는 남선 역 남측에 있으며, 엘리베이터는 1,2,5번 출구에 있다. 출구1:난강전람관 연결통로 (징마오2로 동측, 난강전람관 외) 출구2:난강전람관(난강로 북측, 징마오2로구) 출구2A:난강전람관(난강로 북측, 징마오2로구) 출구3:난강로1단(난강로 북측, 징마오1로구) 출구4:징마오1로 (징마오1로 서측) 출구5:옌지우위안로 1단 출구6:난강로1단(난강로 남측, 버스 환승후 시즈,치두,지룽) 출구7:타이베이 시립 청정 중학교 (후캉 가1항 16롱) 공공 예술 「공중지하(空中之河)」는 이 역의 설치 작품으로 스테인레스 스틸과 도장된 아크릴 유리로 제작되었다. 채광창 아래의 승강장 중앙에 위치합니다. 제작자는 라이춘춘()이다. 「아문적사방공공예술(我們的私房公共藝術)」은 난강전람관 역의 대합실에 있다. 제작자는 황신젠()이다. 「쾌역만(快或慢)」은 원후선으로 연결되는 난강전람관 역의 가이드 포스트의 양쪽 벽에 있다. 제작자는 미우라 고이치로()이다. 「광극(光隙)」은 난강전람관 역 서쪽의 사각형 기둥에 있다. 제작자는 좡푸()이다. 「약영(掠影)」은 난강전람관 역 지면층 전면에 있다. 제작자는 첸후이자오()이다. 역 기념장 이 역은 난강 전람관을 주제로 하여, 첩운 출구의 전체 모양을 잘 어울리도록 하였다. 인근 역세권 타이베이 난강 전람관 1관(台北南港展覽館1館) 난강 연체원구(南港軟體園區) 네이후 공장(內湖機廠) 중국신탁 금융원구 난시 공원(南汐公園) 강자이커우더안 사당(港仔口德安廟) 타이베이 난강 전람관 2관(台北南港展覽館2館) 중난가(中南街) 난강 구농회(南港區農會) 타이베이 시립 청정 중학교(誠正國中) 푸캉 가(富康街) 헝커 로(橫科路) 리싱 교(力行橋) 난강 로(南港路) 1단 시도 제109호선 (현도 제109호선, 研究院路一段) 중샤오 동로(忠孝東路) 7단 시민 대로(市民大道) 8단 YouBike MRT 난강전람관 역 (5번 출구) 타이완 고속철로공사(台灣高速鐵路公司) 난강 카이사르 호텔(凱撒大飯店) (건설중, 2020년 완공 예정) 난강 한라이 호텔(漢來大飯店) (건설중, 2020년 완공 예정) 버스 정보 정류장명은 3가지로 《MRT 난강 전람관 역 (난강로)》, 《MRT 난강 전람관 역 (징마오2)》, 《MRT 난강 전람관 역 (징마오1로)》가 있다. 국도객운(國道客運) 역사 이 역의 건설 당시 역명은 징마오 남역(, )이라고 불렀다가, 이후에 현재 명칭으로 대체되었다. 2009년 2월 22일 : 네이후 선(內湖線) 난강 전람관 역 완공. 2009년 7월 4일 : 네이후 선의 개통과 동시에 중샤오푸싱 역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난강 선의 난강 역과 본 역 사이에 무료 셔틀버스(지난 객운(指南客運)의 주도)를 운영했다. 2011년 2월 27일 : 오후 2시경 난강 선"난강 전람관-난강" 구간이 공식 개통됨에 따라, 난강 선 승강장의 운영이 시작되고, 오후 3시에 두 역간의 무료 셔틀 버스 연결이 종료되었다. 2015년 8월 8일 : 반난 선 난강전람관 역에서 휴일에 자전거 승차가 가능해졌으나, 원후 선에는 여전히 승차할 수 없다. 인접 정차역 사진첩 각주 외부 링크 네이후선 난강전람관역 (타이베이시 MRT 동부지구 기술사무소) 난강전람관역 주변지도 (타이베이 MRT 공사) 타이베이 첩운의 철도역 2009년 개업한 철도역
https://en.wikipedia.org/wiki/Taipei%20Nangang%20Exhibition%20Center%20metro%20station
Taipei Nangang Exhibition Center metro station
Taipei Nangang Exhibition Center () is a metro station in Taipei, Taiwan served by Taipei Metro. It is a terminal station on both Wenhu line and Bannan line, and serves the Nangang, Neihu, and Xizhi districts. Station overview The station is a three-level, divided into an elevated and underground portion, each serving different lines. The elevated portion of the station serving the medium-capacity Wenhu line features an island platform and a platform elevator located on the west side of the concourse level. The station is long and wide, while the elevated platform is long. It is equipped with platform screen doors. The station is a two-level, underground station high-capacity, and is also equipped with platform screen doors. It has an island platform and is long and meters wide. The station (serving the Blue Line eastern extension) passes through tunnels belonging to the Taiwan Railways Administration and Taiwan High Speed Rail before terminating at this station. The station is expected to serve as a transfer station for around 200,000 commuters per month. Preliminary inspections began on 9 January 2011, and the extension opened on 27 February 2011. The opening of the station is responsible for increasing the system's ridership by over 16,000 passengers per day. Before Blue Line portion of the station was completed, the station already served as a transfer station via a free shuttle bus to Nangang Station. The shuttle bus service came to an end with the opening of Blue Line platform. Public art As one of the stations chosen for public art projects on the Neihu Line, the station design and artwork reflect the development of the adjacent business park. The design theme of the station is "Light and Shadow". The roof of the platform utilizes a large-span truss space and the sides of the platform use ripples to reflect sunlight. Public art consists of three pieces: "Fleeting Light", "Flying Shadow", and "River in the Sky". "Fleeting Light" uses images of flowing water to decorate the entrance columns, "Flying Shadow" is located outside the curtain wall, and "River in the Sky" (above the Neihu Line platform) shows the flickers of flowing water. The Nangang Line concourse features a piece called "Our Personal Public Art" featuring LCD screen displaying images of chronicling the development of human civilization. In the underground passageway, another piece titled "Fast and Slow" has anodized aluminum panels and light panels controlled by motion sensors. History The station was initially named Nangang Business Park South, but later changed to its current name. Construction of the Taipei Nangang Exhibition Center station begins on 16 June 2003; and completed on 28 February 2009 for the Neihu Line, before opening on 4 July 2009. Taipei Mayor Hau Lung-pin made a special inspection visit to the station to assess construction of the Bannan Line extension on 3 December 2010. Heat, ventilation, and air-conditioning (HVAC) systems had been completed, along with tunneling and trackwork. Stability testing of the electrical and mechanical systems were still ongoing. The station passed preliminary inspections on 9 January 2011 before opening on 27 February 2011. The second and third phase inspections occurred in the following weeks. Although the extension opened at 2 PM, by 6 PM over 1.1 million people had used the entire system, a 229,000 passenger increase from the same period the previous week. Station layout Around the station Taipei Nangang Exhibition Center Lingnan Fine Arts Museum References Wenhu line stations Bannan line stations Railway stations opened in 2009 Railway stations in Taiwan opened in the 20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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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세구라
진 카를로스 엔리케 세구라(Jean Carlos Enrique Segura, 1990년 3월 17일 ~ )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선수이다. 선수 시절 아마추어 시절 1990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 후안에서 태어난 세구라는 2007년에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아마추어 자유 계약을 체결했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시절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 입단한 후 2011년 11월 8일에 40인 로스터에 등록되었고, 2012년에는 더블A 레벨에서 첫 69경기에 출장하여 0.287의 타율과 25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2012년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로 콜업이 되었고 7월 24일에 진행된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에 출전하면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밀워키 브루어스 시절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서 1경기에 출전한 후 7월 27일에 잭 그레인키를 상대로 2명의 유망주와 함께 밀워키 브루어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트레이드 직후 마이너 리그로 이동하여 8경기를 출전한 후, 남은 시즌을 메이저리그에서 보냈고, 44경기에 출전하여 0.264의 타율과 14개의 타점과 7개의 도루를 기록하였다. 시즌 종료 후에는 도미니칸 윈터 리그에 참가하였고, 2013년에는 개막전 유격수로 낙점을 받게 된다. 이 시즌에는 146경기를 주전 유격수로 출전하면서 0.294의 타율과 12개의 홈런과 44개의 도루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그 해에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2시즌 동안 288경기에 출전하여 0.252의 타율과 11개의 홈런과 45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2016년 1월 30일에 타일러 와그너와 함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153경기에 출전하여 0.319의 타율과 20홈런과 203안타, 33도루를 기록하면서 팀의 1번 타자로 활약하였고, 시즌 종료 후에는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13위를 차지하였다.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2016년 시즌이 종료된 후 12월 23일에 미치 해니거, 잭 커티스와 함께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2017년 시즌 중 5년 7000만 달러의 연장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시즌에 0.300의 타율과 11홈런과 22도루를 기록하였다. 2018년 시즌에도 144경기에 출전하여 0.304의 타율과 10개의 홈런과 20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하였고, 이 시즌에는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시즌 종료 후 소속팀인 시애틀 매리너스가 리빌딩 단계에 돌입하면서 그 해 12월 3일에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2018년 12월 3일에 J.P. 크로포드와 카를로스 산타나를 상대로 후안 니카시오, 제임스 파조스와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한 후에는 기존 주전 유격수인 디디 그레고리우스의 존재로 인해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였고, 첫 시즌인 2019년에는 2번과 4번 타순에서 주로 출전하여 0.280의 타율과 12개의 홈런과 10개의 도루를 기록하였다. 2020년에 코로나19로 인해 진행된 단축 시즌에는 54경기에 출전하여 0.266의 타율과 7개의 타율과 25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2021년에는 131경기에 출전하여 0.290의 타율과 14개의 홈런과 9개의 도루, 그리고 58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계약의 마지막 해인 2022년에는 오른 검지 골절, 왼쪽 사타구니 염좌 등의 부상으로 인해 98경기에 출전하였고 0.277의 타율과 10개의 홈런과 13개의 도루를 기록하였다. 시즌 종료 후에 소속 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구단 옵션을 거부하면서 FA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마이애미 말린스 시절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취득하였고, 12월 28일에 마이애미 말린스와 2년 17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계약 첫해인 2023년 시즌에 85경기에 출전하여 0.219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부진했다. 그 결과 8월 1일에 조쉬 벨을 상대로 칼릴 왓슨과 함께 클리블랜드 가디언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트레이드 직후 가디언스에서 방출되었다. 연도별 타격 성적 수상 경력 2016년 내셔널 리그 최다 안타 1위 내셔널 리그 올스타 2회 (2013년, 2018년) 199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선수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선수 밀워키 브루어스 선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선수 시애틀 매리너스 선수 필라델피아 필리스 선수 마이애미 말린스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내야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유격수 2017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미국에 거주한 도미니카 공화국인
https://en.wikipedia.org/wiki/Jean%20Segura
Jean Segura
Jean Carlos Enrique Segura ( ; born March 17, 1990) is a Dominican professional baseball infielder who is a free agent. He has previously played in Major League Baseball (MLB) for the Los Angeles Angels of Anaheim, Milwaukee Brewers, Arizona Diamondbacks, Seattle Mariners, Philadelphia Phillies, and Miami Marlins. Segura was an All-Star in 2013 and 2018, and led the National League in hits in 2016. He played for the Dominican Republic national baseball team at the 2017 World Baseball Classic. Segura signed with the Angels as a free agent in 2007. He made his MLB debut with the Angels in 2012 and was traded to the Brewers as part of a package for Zack Greinke. He played for Milwaukee through 2015, when he was traded to the Diamondbacks. Arizona traded him to Seattle after the 2016 season, and he signed a five-year, $70 million contract with the Mariners in 2017. After the 2018 season, Seattle traded Segura to Philadelphia. Professional career Los Angeles Angels Segura was born in San Juan, Dominican Republic. He signed with the Los Angeles Angels of Anaheim as an international free agent in 2007. He made his professional debut with the Dominican Summer Angels of the Rookie-level Dominican Summer League in 2007. Segura batted .324/.392/.393 with 22 stolen bases and seven sacrifice hits (seventh in the league) in 219 at-bats, and was named a DSL postseason All-Star. He played 11 games for the Arizona Angels of the Rookie-level Arizona League in 2008, and fractured his left leg. In 2009 Segura played for the Orem Owlz of the Rookie-level Pioneer League, and also played in five games for the Salt Lake Bees of the Class AAA Pacific Coast League, batting .354/.395/.514 with 11 stolen bases in 181 at bats between the two teams. His season was limited by a broken finger on his right hand. He had a 22-game hitting streak with the Owlz, one short of the franchise record, and while playing for them was tied for 8th in the Pioneer League in triples (4), and 8th in batting average (.346). In 2010, Segura played for the Cedar Rapids Kernels of the Class A Midwest League, where he had a standout year, as he was the May 24 Midwest League Player of the Week and stole 50 bases (leading the league) with 161 hits (also leading the league) and hit 12 triples (2nd in the league), 10 home runs and 24 doubles, while recording 11 sacrifice hits (3rd), 89 runs (4th), 79 runs batted in (RBIs) (7th), and batting .313 (10th). He was named a Midwest League mid-season All-Star, and an MiLB.com Angels Organization All-Star. He was promoted to the Inland Empire 66ers of the Class A-Advanced California League in 2011, but missed a significant portion of the season after suffering a torn left hamstring and only played in 44 games for the team, batting .281/.337/.422 with 18 stolen bases in 185 at-bats. Segura was added to the Angels 40-man roster on November 18, 2011. He played for the Arkansas Travelers of the Class AA Texas League in 2012. After batting .287 with 25 stolen bases in his first 69 games of the season, he was named to appear in the 2012 All-Star Futures Game. For the season in AA, he batted .304/.358/.413 with 37 stolen bases in 404 at-bats. He was 4th in the Texas League in stolen bases (33), tied for 8th in sacrifice hits (6), and 9th in triples (5). He was named a mid-season Texas League All-Star, and was again named an MiLB.com Angels Organization All-Star. On July 24, 2012, he made his MLB debut at shortstop. Milwaukee Brewers After playing in only one game for the Angels, he was traded to the Milwaukee Brewers along with John Hellweg and Ariel Peña for Zack Greinke on July 27, 2012. The Brewers assigned him to the Huntsville Stars of the Class AA Southern League and promoted him on August 6 after he batted 13-for-30 in eight games with the club. He batted .264/.321/.331 with seven stolen bases and 14 RBIs in 148 at-bats with the Brewers. In the offseason, Segura played in the Dominican Winter League, and won the league's batting title with a .324 batting average, as he was also 2nd in the league with 11 stolen bases. He was named the Brewers' Opening Day shortstop in 2013. He was a National League reserve for the 2013 MLB All-Star Game. He won the Player of the Week Award on May 12 and finished the year hitting .294/.329/.423 with 10 triples and 44 stolen bases (each 2nd in the NL), 12 home runs, an 18.9 power–speed number (9th in the league), and 7.0 at bats per strikeout (10th-lowest) in 588 at-bats. At the same time, his walk percentage of 4.0% was tied for the 6th-lowest in major league baseball. In 2014 he batted .246/.289/.326 with 7.3 at-bats per strikeout (7th-lowest), and 10 sacrifice hits (10th in the league) in 513 at-bats. On defense. Segura led all NL fielders with 447 assists. In 2015 Segura batted .257/.281/.336 with 25 stolen bases (5th in the NL), and an 80.65% stolen base percentage (10th) in 560 at-bats. He walked in 2.2% of his at-bats, the lowest percentage in the major leagues, and had the lowest walks-per-strikeout ratio in the majors (0.14). "Stealing first base" In the eighth inning of a game on April 19, 2013, Segura stole second base, and then "stole" first base, then was thrown out trying to again steal second base. After Segura singled and stole second, and Ryan Braun walked, Segura and Braun attempted a double steal. However, Segura retreated to second after the pitcher Shawn Camp threw to third base instead of pitching. With both Segura and Braun standing on second base, both were tagged, and by baseball's rules, it was Braun who was out. However, Segura thought that he himself was out and began to head back to the Brewers' dugout (which happened to be on the first-base side of the field), until first base coach Garth Iorg instructed Segura to stand on first base, where he was ruled safe. Two pitches later, Segura was caught stealing second base. The play resulted in much confusion regarding whether Segura should have been allowed to retreat to first base after he had legitimately occupied second base. The umpires allowed it under a rule that specifies only that a player may not retreat if the intent is to "confuse the defense or make a travesty of the game," as Segura was doing no such thing but was simply confused. MLB later declared that the ruling on the field was wrong, as a rule forbidding a player from reaching a base after "abandoning the effort" at baserunning should have superseded the rule invoked when calling him safe, and that Segura should have been called out at first base. Because the usual methods of reporting baseball play-by-play do not allow for a runner on second to retreat to first base, some records of the game indicate that Segura remained on second and was thrown out trying to steal third base, though this is not what occurred. Arizona Diamondbacks On January 30, 2016, the Brewers traded Segura and Tyler Wagner to the Arizona Diamondbacks in exchange for Aaron Hill, Chase Anderson, Isan Diaz, and cash considerations. In 153 games in 2016, most of which he played at second base—for the first time in the majors—Segura batted .319 batting average (5th in the National League)/.368 (a career best)/.499, with an NL-leading 203 hits, 135 singles (2nd), a 24.9 power-speed # (4th), 41 doubles and 33 stolen bases (each, 5th), 102 runs (7th), 7 triples (8th), and 20 home runs, while on defense leading all NL players in assists with 428. He came in 13th in the voting for NL MVP. Seattle Mariners On November 23, 2016, the Diamondbacks traded Segura, Zac Curtis, and Mitch Haniger to the Seattle Mariners for Taijuan Walker and Ketel Marte. In June 2017, Segura signed a five-year contract extension with Seattle worth $70 million. The contract covers the years 2018 to 2022, and has a $17 million option for 2023, with a $1 million buyout. He returned to shortstop and ended the season batting .300/.349/.427 with 22 stolen bases in 125 games. In 2018, while batting .329 mid-season, he was named to the 2018 MLB All-Star Game, in which he hit a go-ahead 3-run home run off of Josh Hader in the 8th inning. For the season Segura batted .304 (7th in the AL)/.341/.415, with 136 singles (leading the majors), 178 hits (6th), and 20 stolen bases while striking out once every 8.5 at-bats (5th-fewest), as on defense he was 3rd in the AL in assists with 387. He had the 4th-lowest whiff rate (12.6%; missing on just 136 of his 1,080 swings) among all qualified hitters, and the 9th-best contact rate (48.8%; 527 of his 1,080 swings were put in play), and led all major league batters in 3-hit games (20) and tied for first in infield hits (36). He became one of only four MLB batters with a .300 or better batting average over the last three years, along with José Altuve, Freddie Freeman, and Mike Trout. He and Starling Marté were the only two MLB players to have stolen 20 or more bases each season since 2013. Over his two seasons with the Mariners he batted a combined .302/.345/.421 as Seattle's shortstop. Among regulars at shortstop in those two years, his 112 OPS+ ranked 4th behind Francisco Lindor, Xander Bogaerts, and Didi Gregorius. Philadelphia Phillies On December 3, 2018, the Mariners traded Segura, Juan Nicasio, and James Pazos to the Philadelphia Phillies for Carlos Santana and J. P. Crawford. Segura waived the no-trade clause in his contract to allow the trade to take place. In 2019, Segura batted .280/.323/.420 with 79 runs, 37 doubles (8th in the National League), 12 home runs, 60 RBIs, and 10 stolen bases in 576 at-bats. He made contact with the highest percentage of pitches he swung at in the strike zone (94.3%) of all NL batters. He had 1 strikeout per 7.9 at-bats, second-best in the National League, and on defense, his 20 errors were tops in the league and his 83 double plays were fourth-most among NL shortstops. In the pandemic-shortened 2020 season, Segura batted .266/.347/.422 with 7 home runs and 25 RBIs in 54 games. In 2021, Segura batted .290/.348/.436 with 14 home runs, 58 RBIs, and 9 stolen bases in 131 games. He led all NL second basemen with 85 double plays and a 4.66 range factor. On June 1, 2022, Segura was placed on the injured list after suffering a fractured right index finger, an injury that came with a recovery timetable of 10–12 weeks. He was activated on August 4, and assumed the vacant shortstop role that was opened when Didi Gregorius was released. In 2022 he batted .277/.336/.387 in 354 at-bats, with 10 home runs and 33 RBIs. He stole 13 bases and was sixth in the NL in caught stealing (6), and ninth in double plays grounded into (16). On November 7, 2022, the Phillies declined Segura's $17 million club option, making him a free agent for the first time in his career. Miami Marlins On January 4, 2023, Segura signed a two-year, $17 million contract with the Miami Marlins. On August 1, 2023, Segura and Kahlil Watson were traded to the Cleveland Guardians in exchange for first baseman Josh Bell; however, Segura was immediately released after the deal was made official. Personal life Segura is married to wife Kellen with three sons. He had a son from a previous relationship who died in 2014 aged nine months, which nearly caused Segura to quit baseball. References External links 1990 births Living people American League All-Stars Arizona Diamondbacks players Arizona League Angels players Arkansas Travelers players Cedar Rapids Kernels players Dominican Republic expatriate baseball players in the United States Dominican Summer Angels players Dominican Summer League Angels players Gigantes del Cibao players Huntsville Stars players Inland Empire 66ers players Lehigh Valley IronPigs players Los Angeles Angels players Major League Baseball shortstops Major League Baseball players from the Dominican Republic Miami Marlins players Milwaukee Brewers players National League All-Stars Orem Owlz players People from San Juan Province (Dominican Republic) Philadelphia Phillies players Salt Lake Bees players Scottsdale Scorpions players Seattle Mariners players Tacoma Rainiers players World Baseball Classic players of the Dominican Republic 2017 World Baseball Classic players
https://ko.wikipedia.org/wiki/2019-20%EB%85%84%20UEFA%20%EC%9C%A0%EB%A1%9C%ED%8C%8C%EB%A6%AC%EA%B7%B8
2019-20년 UEFA 유로파리그
2019-20년 UEFA 유로파리그(2019-20 UEFA Europa League)는 유럽 축구 연맹이 주관하는 유럽의 두 번째 권위를 가진 축구 대회의 49번째 시즌이자, UEFA컵에서 UEFA 유로파리그로 바뀐 뒤 11번째 시즌이다. 결승전은 독일, 쾰른에 위치한 묑게르스도퍼 슈타디온에서 개최되었다. 2020년 3월 13일, 유럽축구연맹은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범유행 때문에 유로파리그 16강전 2차전을 중단하였다. 2020년 6월 17일, UEFA 화상회의에서 유로파리그 8강전부터 독일, 쾰른에 위치한 묑게르스도퍼 슈타디온에서 중립단판경기로 변경시행하기로 의결되었다. 국가별 참가팀 수 배분 모든 55개 유럽축구연맹 소속 국가축구협회별 총 215팀들이 2018–19 UEFA 유로파리그에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리그 랭킹은 UEFA 계수를 기준으로 하였다. 리그 랭킹 1–51위 (리히텐슈타인 제외) 국가축구협회는 각 3팀씩 참가한다. 리그 랭킹 52-54위 국가축구협회는 각 2팀씩 참가한다. 리히텐슈타인 축구협회(리히텐슈타인 축구협회컵 우승팀만 참가)와 코소보 축구협회(리그 랭킹 55위)는 각 1팀씩만 참가한다. 2019-20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한 57개팀들은 유로파리그로 전환된다. 2018-19년 UEFA 유로파리그 우승팀은 2019-20년 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진출한다. 국가축구협회 랭킹 –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해서 전환된 추가 팀들 참가팀수 배분 The following is the default access list. Changes will be made to the access list above, if any of the teams that qualify for the Europa League via their domestic competitions also qualify for the Champions League as the Champions League or Europa League title holders, or if there are fewer teams transferred from the Champions League due to changes in the Champions League access list. In any case where a spot in the Europa League is vacated, cup winners of the highest-ranked associations in earlier rounds will be promoted accordingly. 재배분 규칙 유로파 리그 장소는 팀이 챔피언스 리그와 유로파 리그의 자격을 얻었거나 유로파 리그를 두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수료할 때 비워진다. 장소가 비워지면 다음 규칙에 따라 전국 협회에서 재배포된다.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획득한 국내 컵 우승자 (최우수 선수권 국가 대표팀의 최우수 선수)는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얻게되며, 유로파 리그 경기는 취소된다. 결과적으로 리그에서 아직까지 유럽 대회 출전 자격이없는 최상위 팀은 유로파 리그 출전권을 얻었고, 유로파 리그 출전 자격을 가진 선수들은 리그에서 1 위 자리를 마쳤다. 국내 컵 우승 팀이 리그 포지션을 통해 유로파 리그에 진출하게 되면, 리그 포지션을 통해 그들의 자리가 비워진다. 결과적으로 리그에서 아직까지 유럽 대회 출전 자격이 없는 최상위 팀은 유로파 리그 출전권을 얻었고, 리그에서 상위권에 올랐던 유로파 리그 예선은 가능한 한 "장소"를 옮겼다. 유로파 리그 장소가 리그 컵이나 시즌 종료 유럽 대회의 플레이 오프 우승자를 위해 예약된 협회의 경우, 그들은 항상 "가장 낮은 순위의" 예선인 유로파 리그의 자격을 얻는다. 리그 컵 우승자가 다른 방법으로 이미 유럽 대회에 출전 자격을 얻은 경우이 유보된 유로파 리그 경기는 유럽 대회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던 리그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팀이 맡는다. 참가팀 아래 라벨은 각국리그 최종 순위와 그에 따른 유로파리그 참가 시작 단계를 뜻한다.: CW: FA컵 우승팀 2위, 3위, 4위, 5위, 6위, 기타: 리그 순위 LC: 리그컵 우승팀 RW: 정규시즌 우승팀 PW: 시즌말 유로파리그 플레이오프 우승팀 UCL: 챔피언스리그로부터 전환 GS: 조별 리그 각조 3위팀 PO: 플레이오프 탈락팀 Q3: 3차예선 탈락팀 Q2: 2차예선 탈락팀 Q1: 1차예선 탈락팀 PR: 예비예선 탈락팀 Notes 예선 예비 예선 |} 각주 1차 예선 |} Notes 2차 예선 우승팀 루트 |+Champions Path |} 주요 루트 |+Main Path |} 3차 예선 우승팀 루트 |+Champions Path |} 주요 루트 |+Main Path |} 플레이오프 우승팀 루트 |+Champions Path |} 주요 루트 |+Main Path |} 조별 리그 A조 B조 C조 D조 E조 F조 G조 H조 I조 J조 K조 L조 결선 토너먼트 결선 토너먼트에서, 팀들은 결승전(중립지역에서 단판경기)을 제외하고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단계별로 2팀씩 총 2경기씩 치른다. 각 라운드 당 대진추첨 방식은 아래와 같다: 32강전에서, 12개 각조 1위팀들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밀려난 상위 각조 3위팀들 4팀이 시드 배정을 받고, 12개 각조 2위팀들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밀려난 하위 각조 3위팀들 4팀이 비시드 배정 받는다. 시드 팀들은 비시드 팀들과 맞대결하게 되고, 시드팀들은 2차전에서 홈경기를 개최할 것이다. 조별리그에서 같은 조였던 팀들이나 같은 국가리그 소속팀들은 맞대결하지 아니한다. 16강전부터 모든 팀들은 무작위 대진 추첨되었다. 토너먼트 대진 32강전 32강전 대진추첨은 2019년 12월 16일 13시 중앙유럽 표준시에 스위스 니옹 소재 UEFA 본부에서 시행되었다. 1차전은 2020년 2월 20일에, 2차전은 2월 27일에 개최되었다. |} 16강전 16강전 대진추첨은 2020년 2월 28일 중앙유럽 표준시에 스위스 니옹 소재 UEFA 본부에서 시행되었다. 1차전은 3월 12일에 치렀다. 2차전은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 때문에 2020년 8월 5일과 6일로 연기되었다. 인테르 대 헤타페, 세비야 대 AS 로마 2경기들은 1-2차전을 둘 다 시행되지 않아서 중립단판경기로 변경되었다. |} |} 8강전 8강전 대진추첨은 추후 스위스 니옹 소재 UEFA 본부에서 시행되었다. 당초 1차전은 4월 9일에, 2차전은 4월 16일에 치를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이 장기지속되어서 2020년 6월 17일 UEFA 화상회의에서 독일 쾰른에서 8월 10~11일에 단판경기로 변경시행 의결되었다. |} 4강전 4강전 대진추첨은 추후 스위스 니옹 소재 UEFA 본부에서 8강전 대진 추첨 직후 시행되었다. 당초 1차전은 4월 30일에, 2차전은 5월 7일에 치를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이 장기지속되어서 2020년 6월 17일 UEFA 화상회의에서 8월 16~17일에 독일 쾰른에서 단판경기로 변경시행 의결되었다. |} 결승전 결승전은 2020년 8월 21일, 독일 쾰른 소재 라인에네르기슈타디온에서 개최되었다. 홈팀(행정상 목적) 추첨은 8강과 준결승전 대진 추첨 후 결정되었다. |} 우승 같이 보기 2019-20년 UEFA 챔피언스리그 각주 UEFA 유로파리그 시즌 UEFA 유로파리그 UEFA 유로파리그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연기된 스포츠 행사
https://en.wikipedia.org/wiki/2019%E2%80%9320%20UEFA%20Europa%20League
2019–20 UEFA Europa League
The 2019–20 UEFA Europa League was the 49th season of Europe's secondary club football tournament organised by UEFA, and the 11th season since it was renamed from the UEFA Cup to the UEFA Europa League. Sevilla defeated Inter Milan in the final, played at the RheinEnergieStadion in Cologne, Germany, 3–2 for a record sixth title in the competition. As winners, Sevilla earned the right to play against Bayern Munich, the winners of the 2019–20 UEFA Champions League, in the 2020 UEFA Super Cup. Since they had already qualified for the 2020–21 UEFA Champions League group stage through their league performance, the berth originally reserved for the Europa League title holders was given to the third-placed team of the 2019–20 Ligue 1 (Rennes), the 5th-ranked association according to next season's access list. Due to the impact of the COVID-19 pandemic, the tournament was suspended in mid-March 2020 and resumed in August. The quarter-finals onwards were played as a single match knockout ties at neutral venues in Germany (RheinEnergieStadion, MSV-Arena, Merkur Spiel-Arena, Arena AufSchalke) behind closed doors from 10 to 21 August. The video assistant referee (VAR) system was used in the competition from the knockout stage onwards. As the title holders of the Europa League, Chelsea qualified for the 2019–20 UEFA Champions League, although they had already qualified before the final through their league performance. They were unable to defend their title as they advanced to the Champions League knockout stage, and were eliminated by the ultimate winners Bayern Munich in the round of 16. Association team allocation A total of 213 teams from all 55 UEFA member associations participated in the 2019–20 UEFA Europa League. The association ranking based on the UEFA country coefficients was used to determine the number of participating teams for each association: Associations 1–51 (except Liechtenstein) each had three teams qualify. Associations 52–54 each had two teams qualify. Liechtenstein and Kosovo (association 55) each had one team qualify (Liechtenstein organised only a domestic cup and no domestic league; Kosovo as per decision by the UEFA Executive Committee). Moreover, 55 teams eliminated from the 2019–20 UEFA Champions League were transferred to the Europa League (default number was 57, but 2 fewer teams competed in the 2019–20 UEFA Champions League). Association ranking For the 2019–20 UEFA Europa League, the associations were allocated places according to their 2018 UEFA country coefficients, which took into account their performance in European competitions from 2013–14 to 2017–18. Apart from the allocation based on the country coefficients, associations could have additional teams participating in the Champions League, as noted below: – Additional teams transferred from the UEFA Champions League Distribution The following is the access list for this season. Changes were made to the default access list, if any of the teams that qualified for the Europa League via their domestic competitions also qualified for the Champions League as the Champions League or Europa League title holders, or if there were fewer teams transferred from the Champions League due to changes in the Champions League access list. In any case where a spot in the Europa League was vacated, cup winners of the highest-ranked associations in earlier rounds were promoted accordingly. In the default access list, originally 17 losers from the Champions League first qualifying round were transferred to the Europa League second qualifying round (Champions Path). However, since the Champions League title holders (Liverpool) qualified for the Champions League group stage via their domestic league, only 16 losers from the Champions League first qualifying round were transferred to the Europa League second qualifying round (Champions Path). As a result, only 19 teams entered the Champions Path second qualifying round (one of the losers from the Champions League first qualifying round would be drawn to receive a bye to the third qualifying round). In the default access list, originally three losers from the Champions League second qualifying round (League Path) were transferred to the Europa League third qualifying round (Main Path). However, since the Europa League title holders (Chelsea) qualified for the Champions League group stage via their domestic league, only two losers from the Champions League second qualifying round (League Path) were transferred to the Europa League third qualifying round (Main Path). As a result, the following changes to the access list were made: The cup winners of association 18 (Israel) entered the third qualifying round instead of the second qualifying round. The cup winners of association 25 (Serbia) entered the second qualifying round instead of the first qualifying round. The cup winners of associations 50 (Wales) and 51 (Faroe Islands) entered the first qualifying round instead of the preliminary round. Redistribution rules A Europa League place was vacated when a team qualified for both the Champions League and the Europa League, or qualified for the Europa League by more than one method. When a place was vacated, it was redistributed within the national association by the following rules: When the domestic cup winners (considered as the "highest-placed" qualifier within the national association with the latest starting round) also qualified for the Champions League, their Europa League place was vacated. As a result, the highest-placed team in the league which had not yet qualified for European competitions qualified for the Europa League, with the Europa League qualifiers which finished above them in the league moving up one "place". When the domestic cup winners also qualified for the Europa League through league position, their place through the league position was vacated. As a result, the highest-placed team in the league which had not yet qualified for European competitions qualified for the Europa League, with the Europa League qualifiers which finished above them in the league moving up one "place" if possible. For associations where a Europa League place was reserved for either the League Cup or end-of-season European competition play-offs winners, they always qualified for the Europa League as the "lowest-placed" qualifier. If the League Cup winners had already qualified for European competitions through other methods, this reserved Europa League place was taken by the highest-placed team in the league which had not yet qualified for European competitions. Teams The labels in the parentheses show how each team qualified for the place of its starting round: CW: Cup winners 2nd, 3rd, 4th, 5th, 6th, etc.: League position LC: League Cup winners RW: Regular season winners PW: End-of-season Europa League play-offs winners UCL: Transferred from the Champions League GS: Third-placed teams from the group stage PO: Losers from the play-off round Q3: Losers from the third qualifying round Q2: Losers from the second qualifying round Q1: Losers from the first qualifying round PR: Losers from the preliminary round (F: final; SF: semi-finals) One team not playing a national top division took part in the competition; Vaduz (representing Liechtenstein) played in 2019–20 Swiss Challenge League, which is Switzerland's 2nd tier. Notes Round and draw dates The schedule of the competition was as follows (all draws were held at the UEFA headquarters in Nyon, Switzerland, unless stated otherwise). Matches could also be played on Tuesdays or Wednesdays instead of the regular Thursdays due to scheduling conflicts. The competition was suspended on 17 March 2020 due to the COVID-19 pandemic in Europe. A working group was set up by UEFA to decide the calendar of the remainder of the season. On 17 June 2020, UEFA announced the revised schedule for the quarter-finals, semi-finals and final of the competition, to be played in single-leg matches. The original schedule of the competition, as planned before the pandemic, was as follows. Effects of the COVID-19 pandemic Due to the varying rates of transmission of COVID-19 across European countries during the time of the Round of 16 first leg ties, different matches were affected in different ways. Because of this severity of the COVID-19 pandemic in Italy at the time, the games involving Inter Milan and A.S. Roma were postponed, whereas games hosted in Greece, Germany, and Austria went ahead but behind closed doors. Games hosted in Turkey and Scotland went ahead as normal. On 15 March, UEFA announced that none of the Round of 16 second leg ties would go ahead in the following week, postponing them indefinitely, with a taskforce convened to reschedule the rest of the season. On 23 March, it was announced that the Stadion Energa Gdańsk in Gdańsk, Poland would no longer host the competition Final, originally scheduled for 27 May, but would host the 2021 Final instead. On 17 June it was announced that the Europa League would return on 5 August and conclude on 21 August, with a last-eight tournament to be held across four venues in Germany. The remainder of the competition would be played in a mini-tournament style with remaining fixture to be played as single legged ties except for the Round of 16 fixtures where the first leg had already been played. All remaining ties of the competition were played behind closed doors due to the remaining presence of the COVID-19 pandemic in Europe. Final tournament venues Qualifying rounds In the qualifying rounds and the play-off round, teams were divided into seeded and unseeded teams based on their 2019 UEFA club coefficients, and then drawn into two-legged home-and-away ties. Teams from the same association could not be drawn against each other. Preliminary round In the preliminary round, teams were divided into seeded and unseeded teams based on their 2019 UEFA club coefficients, and then drawn into two-legged home-and-away ties. Teams from the same association could not be drawn against each other. First qualifying round Second qualifying round The second qualifying round was split into two separate sections: Champions Path (for league champions) and League Path (for cup winners and league non-champions). Third qualifying round The third qualifying round was split into two separate sections: Champions Path (for league champions) and League Path (for cup winners and league non-champions). Play-off round The play-off round was split into two separate sections: Champions Path (for league champions) and League Path (for cup winners and league non-champions). Group stage The draw for the group stage was held on 30 August 2019, 13:00 CEST, at the Grimaldi Forum in Monaco. The 48 teams were drawn into twelve groups of four, with the restriction that teams from the same association could not be drawn against each other. For the draw, the teams were seeded into four pots based on their 2019 UEFA club coefficients. In each group, teams played against each other home-and-away in a round-robin format. The group winners and runners-up advanced to the round of 32, where they were joined by the eight third-placed teams of the 2019–20 UEFA Champions League group stage. The matchdays were 19 September, 3 October, 24 October, 7 November, 28 November, and 12 December 2019. A total of 26 national associations were represented in the group stage. Espanyol, Ferencváros, LASK, Oleksandriya, Wolfsberger AC and Wolverhampton Wanderers made their debut appearances in the group stage (although Espanyol and Ferencváros had appeared in the UEFA Cup group stage). Group A Group B Group C Group D Group E Group F Group G Group H Group I Group J Group K Group L Knockout phase In the knockout phase, teams played against each other over two legs on a home-and-away basis, except for the one-match final. Bracket Round of 32 Round of 16 Quarter-finals Semi-finals Final Statistics Statistics exclude qualifying rounds and play-off round. Top goalscorers Notes Top assists Squad of the season The UEFA technical study group selected the following 23 players as the squad of the tournament. Notes Player of the season Votes were cast by coaches of the 48 teams in the group stage, together with 55 journalists selected by the European Sports Media (ESM) group, representing each of UEFA's member associations. The coaches were not allowed to vote for players from their own teams. Jury members selected their top three players, with the first receiving five points, the second three and the third one. The shortlist of the top three players was announced on 17 September 2020. The award winner was announced during the 2020–21 UEFA Europa League group stage draw in Switzerland on 2 October 2020. Notes See also 2019–20 UEFA Champions League 2020 UEFA Super Cup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2 2019-20 Association football events postponed due to the COVID-19 pandemic
https://ko.wikipedia.org/wiki/%EB%8B%A5%ED%84%B0%20%ED%94%84%EB%A6%AC%EC%A6%88%EB%84%88
닥터 프리즈너
《닥터 프리즈너》는 2019년 3월 20일부터 2019년 5월 15일까지 방영된 KBS 2TV 수목 미니시리즈이다. 줄거리 대형병원에서 의료 사고로 퇴출된 베테랑 외과 의사 나이제(남궁민)가 교도소 의료 과장으로 부임한 이후에, 죄수들을 진료하는 교도소 의무관들의 이야기를 극화한 서스펜스 메디컬 드라마이다. 등장 인물 주요 인물 남궁민 : 나이제 역 - 38세. 태강대학병원 응급의학센터의 에이스 권나라 : 한소금 역 - 33세. 여 재소자 부인과 담당 내과 의사 겸 정신건강의학과 복수 전공 의사 김병철 : 선민식 역 - 48세. 교도소 의료 과장 최원영 : 이재준 역 - 42세. 태강그룹 첫째 아들 박은석 : 이재환 역 - 35세. 태강그룹 둘째 아들 이다인 : 이재인 역 - 29세. 태강그룹 막내 딸 김정난 : 오정희 역 - 50세. 황제수용생활 중인 상류사회 큰 손 장현성 : 정의식 역 - 43세. 중앙지검 형사부장 태강그룹 김나무 : 이덕성 역 - 연령불명. 재준, 재환, 재인의 친부. 태강그룹 회장 진희경 : 모이라 역 - 50대. 재준의 계모. 재환과 재인의 친모. 태강병원 이사장 김대령 : 최정우 역 - 42세. 태강그룹 이재준 본부장의 비서, 총괄본부 기획실장 교도소 사람들 강신일 : 김상춘 역 - 58세. 상춘파 보스 무기징역수. 한성실업 고문 장준녕 : 태춘호 역 - 30대. 상춘파 넘버 투 강홍석 : 신현상 역 - 30대. 가리봉동파 보스 의료과 이준혁 : 고영철 역 - 42세. 교도소 의무관 이민영 : 복혜수 역 - 39세. 교도소 의료과 약제실 약사 배윤경 : 정세진 역 - 28세. 교도소 의료과 간호사 이용준 : 현재민 역 - 29세. 교도소 공보의 이현균 : 함길선 역 - 38세. 교도소 의료과 계장. 의료병동 간호조무사 교정 공무원 박수영 : 오철민 역 - 45세. 교도소 보안과장 박성근 : 김만철 역 - 53세. 교도소 보안소장 그 외 인물 미상 : 나석환 역 미상 : 오영주 역 하영 : 나이현 역 - 28세. 나이제의 여동생이자 간호사 려운 : 한빛 역 - 30세. 한소금의 동생 김미혜 : 모이라 비서 역 우미화 : 선민식 아내 김영선 역 오동민 : 문용성 역 - 의료사동 재소자. 마약 중독자 박태성 : 라일권 역 - 의료사동 사건 목격자 정인겸 : 선민중 역 - 55세.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자 선민재단 이사장. 선민식의 형 채동현 : 최동훈 역 - 37세. 태강 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 선민식의 심복이자 태강병원 라인 중 하나 강지후 : 강검사 역 - 중앙지검 형사부 검사 이남희 : 문회장 역 양대혁 : 강선우 역 백승익 : 홍남표 역 박세현 특별 출연 남경읍 : 정민제 의원 역 - 70세. 다선 국회의원이자 태강그룹 이덕성 회장의 오랜 친구 최덕문 : 장민석 역 - 나이제의 대학선배. 태강 병원 응급의료센터장 이주승 : 김석우 역 - JH철강 회장의 아들. 분노 조절 장애를 지닌 사이코패스. 데이트 폭력 가해자 김지은 : 오민정 역 - 김석우의 데이트 폭력 피해자 윤인조 : 여자 교도관 역 이재용 : 안진철 역- 특별사동 재소자. 전 국정원장 촬영지 베스티안병원 장흥교도소 - 서서울교도소 동작대교 올드문래 시청률 결방 사유 2019년 5월 2일 : <닥터 프리즈너 압축판> 특별 편성으로 인해 결방 수상 및 후보 참고 사항 본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 '닥터 프리즈너'의 어원은, 의사를 뜻하는 '닥터(Doctor)'와 교도소 재소자, 죄수, 포로를 뜻하는 '프리즈너(Prisoner)'의 합성어에서 비롯된 말이므로, 코마츠 이시카와의 동명 원작 만화책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KBS 드라마본부의 문준하 기획 팀장의 인터뷰에서, "젊은 층들을 겨냥한 로맨틱 코미디물에만 치중했던 기존 상업적 트렌디 드라마와는 달리, 죄수들을 진료하는 교도소 의무관들의 이야기를 극화하여, 감옥과 메디컬 등 두 가지 요소를 가미한 색다른 형태의 서스펜스 메디컬 드라마이기 때문에, 주인공 나이제(남궁민)가 교도소에 나타나 기존 의료과장보다 더 악랄한 수법으로 형집행정지(형사소송법 제471조에 근거)를 만들어내면서 순식간에 카르텔의 핵심부에 진입한다"는 내용에 대해 "가진 자들에게 가진 자들의 룰로 대항하고, 악한 놈은 더 악한 방법으로 무너뜨리는 나이제의 악행(惡行)을 그린 성공 스토리로, 수 많은 시청자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전달하기 위해, 모든 계층이 지켜볼 수 있는 드라마로 방향을 잡았다"라고 덧붙였다. 동시간대 드라마 MBC 수목 미니시리즈 《봄이 오나 봄》 (2019년 1월 23일 ~ 2019년 3월 21일) 《더 뱅커》 (2019년 3월 27일 ~ 2019년 5월 16일) SBS 드라마 스페셜 《빅이슈》 (2019년 3월 6일 ~ 2019년 5월 2일) 《절대 그이》 (2019년 5월 15일 ~ 2019년 7월 11일)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ㄷ) 2019년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각주 외부 링크 닥터 프리즈너 홈페이지 2019년 드라마 한국방송공사 수목드라마 한국방송공사의 의학 드라마 대한민국의 범죄 드라마 대한민국의 스릴러 드라마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정신 질환을 소재로 한 작품 박계옥 시나리오 작품 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19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2019년에 종료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https://en.wikipedia.org/wiki/Doctor%20Prisoner
Doctor Prisoner
Doctor Prisoner () is a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starring Namkoong Min, Kwon Nara, Choi Won-young and Kim Byung-chul. It aired on KBS2's Wednesdays and Thursdays at 22:00 (KST) from March 20 to May 15, 2019. Synopsis A skilled doctor is forced to quit working at a hospital after being accused of medical malpractice. He starts working in a prison with the goal of acquiring enough connections to take his revenge. Cast Main Namkoong Min as Na Yi-je A talented doctor who always cares about his patients but has to quit the hospital after an incident happens. Kwon Nara as Han So-geum A psychiatrist who works at Taegang Hospital and volunteers in prison. Kim Byung-chul as Seon Min-sik A medical director who works at the prison. Choi Won-young as Lee Jae-joon Primary successor to major conglomerate Taegang Group. Supporting Taegang Group's family Jin Hee-kyung as Mo Yi-ra A former actress who becomes the second wife of Lee Duk-sung. Lee Da-in as Lee Jae-in Youngest daughter of the Taegang family who has both looks and brains. In order to protect her family, she enters law school to become a lawyer. Park Eun-seok as Lee Jae-hwan Second son of the Taegang family. His insecurity as the son of the second wife makes him a troublemaker. People at West Seoul Prison Lee Min-young as Bok Hye-soo A medical pharmacist. Na Yi-je saved her brother when the latter was an inmate. Lee Jun-hyeok as Go Young-cheol A funny medical doctor who is secretly working for Lee Jae-joon. Kang Shin-il as Kim Sang-chun An inmate who was sentenced to life in prison. Jang Joon-nyoung as Tae Choon-Ho Friend of the inmate Kim Sang-Chun Lee Yong-joon as Hyun Jae-min Lee Hyun-jyun as Supervisor Ham Gil-Sun Park Soo-young as Supervisor Oh Cheol-Min Kang Hong-seok as Shin Hyun-Sang The Head of the Thug inmates group Others Jang Hyun-sung as Prosector Jung Wi-sik Bae Yoon-kyung as Jung Se-jin Shin Ha-young as Na Yi-hyeon Kim Jung-nan as Oh Jung-Hee Choi Deok-moon as Center Chief of Taegang Hospital Chae Dong-hyun as Choi Dong-Hoon Doctor at Taegang Hospital Kim Dae-ryeong as Choi Jung-Woo Secretary of Lee Jae-Joon Woo Mi-hwa as Kim Young-Sun Wife of Director Seon Min-sik Kang Ji-hoo as Prosector Kang Nam Kyoung-eub as Congressman Jung Min-Je Oh Dong-min as Moon Yong-Sung Jung In-gyeom as Seon Min-Joong Ryeoun as Han Bit Younger brother of Han So-geum. Song Duk-ho as Surgical intern Special appearances Park Ji-yeon as Ha-Eun's mother (ep.1-2) Lee Joo-seung as Kim Seok-woo (Ep. 3, 9-12) Kim Ji-eun as Oh Min-jeong (Ep. 10, 12) Park Se-hyun as Kim Hye-Jin Yang Dae-hyuk as Kang Sun-woo Bae Seung-ik as Hong Nam-Pyo Production The first script reading took place in January 2019 at KBS Broadcasting Station in Yeouido, South Korea. Original soundtrack Part 1 Part 2 Part 3 Part 4 Viewership In this table, represent the lowest ratings and represent the highest ratings. N/A denotes that the rating is not known. Awards and nomination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Korean Broadcasting System television dramas Korean-language television shows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debuts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endings South Korean medical television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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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시
타카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타카시 니카이도 타카시: , 일본의 가수, 배우이며, 남성 아이돌 그룹·Kis-My-Ft2의 멤버 소리마치 타카시: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이며, 본명은 노구치 타카시 (野口 隆史) 츠카모토 타카시: 일본의 배우 시무라 타카시: 일본의 남자 배우 마츠모토 타카시 (작사가): 일본의 작사가이자 전직 음악가 타케우치 타카시: 일본의 삽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오오하라 타카시: 일본의 성우 마츠모토 타카시 야마나카 타카시: 일본의 배우 히키다 타카시: 일본의 성우 코테가와 타카시: BNF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투자가 아오야기 타카시: 지바현 지바 시 출신의 일본의 문학자이며, 도쿄 세이도쿠대학 교수 겸 일본 더빙판 미키 마우스 전속 성우 이이즈카 타카시: 1970년 3월 16일 출생한 일본인 게임 디자이너, 프로듀서, 레벨 디자이너이자 현재 소닉 팀의 대표 다카시 니시모토 다카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 도리타니 다카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 하라 다카시 데즈카 다카시: 닌텐도의 비디오 게임 디자이너 야마구치 다카시 (야구인):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이누이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후쿠니시 다카시: 일본의 전직 축구 선수 미이케 다카시: 다작과 파격적인 묘사로 유명한 일본의 영화 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나가노현 마쓰모토 시 출신 일본의 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시각 효과 제작자 우사미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이모토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시모다 다카시: 일본의 은퇴한 축구 선수 사이토 다카시 (야구인):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 곤도 다카시 후카야 다카시: 일본의 정치인 히라노 다카시: 일본의 은퇴한 축구 선수 세키즈카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다카바야시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야나세 다카시: 일본의 만화가,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시인 아토다 다카시: 일본의 작가이자, 일본 펜 클럽 회장 다치바나 다카시: 일본의 언론인이자 논픽션 작가 겸 평론가 무라카미 다카시: 일본의 현대 미술가, 팝아티스트 아사히나 다카시: 일본의 지휘자 사이토 다카시: 일본의 전 해상자위관이자 오기노 다카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 히시카리 다카시: 일본 제국 육군 군인 히로세 다카시: 일본의 작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평화운동가이자 반핵반전운동가 기야마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야마구치 다카시: 일본의 사람 이름 네모토 다카시: 일본의 만화가, 가요연구가 시미즈 다카시 (영화 감독): 공포영화 주온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의 영화 감독 스즈키 다카시: 일본의 사람 이름 후지이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야마시타 다카시 에다 다카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시미즈 다카시 가모시다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사쿠라이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미즈누마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쇼지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우에스기 다카시: 일본의 보수 저널리스트 가게야마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다나카 다카시: 일본의 역사학자이다 가노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오니시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미키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고지마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가나이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가사하라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사와다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다쿠사가와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기타노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세키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미즈노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가와니시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산본스게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구와하라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감독 미쓰쿠리 다카시: 일본의 체조 선수이며 올림픽 2관왕 아마노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구라모토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야마하시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나가타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쓰카모토 다카시 (동음이의) 우메자와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소에다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오쿠하라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아이자와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우에무라 다카시 (축구인): 일본의 축구 선수 우에무라 다카시 (언론인): 일본의 언론인 쓰카모토 다카시 (1952년): 일본의 독도 문제 연구가 아키야마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곤도 다카시 (성우): 일본의 남자 성우 후루카와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우치노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히라지마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우메다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니시하라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곤도 다카시 (축구 선수): 일본의 축구 선수 라쿠야마 다카시: 일본의 축구 선수 사이토 다카시 (축구 선수): 일본의 축구 선수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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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ashi
is a masculine Japanese given name. Possible writings The name Takashi can have multiple different meanings depending on which kanji is used to write it. Some possible writings of the name include: 隆 - "prosperous noble" 喬士 - "high, boasting, samurai, gentleman" 崇史 - "adore, revere, chronicler, history" 孝 - "filial piety, serve parents" 貴志 敬 Takashi can also be written in hiragana and/or katakana: タカシ (katakana) たかし (hiragana) People with the name Takashi Abe (阿部 隆, born 1967), Japanese shogi player , Japanese rugby union player Takashi Amano (天野 尚, 1954–2015), Japanese photographer, aquarist and designer Takashi Aonishi (青西 高嗣), Japanese music artist Takashi Asahina (朝比奈 隆, 1908–2001), Japanese conductor , Japanese volleyball player Takashi Fujii (藤井 隆, born 1972), Japanese singer and comedian Takashi Hagino (萩野 崇, born 1973), Japanese actor Takashi Hara (原 敬, 1856–1921), Japanese politician and Prime Minister of Japan Takashi Hara (artist) (ハラタカシ, born 1983), Japanese contemporary artist Takashi Hasegawa, Japanese electrical engineer and programmer Takashi Hashiguchi (橋口 たかし, born 1967), Japanese manga artist Takashi Hikino (曳野 孝), Japanese economist and educator , Japanese poet and critic Takashi Hirose (広瀬 隆, born 1943), Japanese writer Takashi "Halo" Hirose (died 2002), American swimmer Takashi "Taka" Hirose (born 1967), Japanese musician and chef Takashi Iizuka (game designer) (飯塚 隆, born 1970), Japanese video game director and designer , Japanese shogi player , Japanese handball player , Japanese actor , Japanese public relations practitioner, scholar and theorist , Japanese literature academic Takashi Ishii (film director) (石井 隆, born 1946), Japanese film director, screenwriter and manga artist Takashi Ishii (baseball) (石井 貴, born 1971), Japanese baseball pitcher and coach Takashi Ishimoto (石本 隆, 1935–2009), a Japanese swimmer , Japanese kickboxer , Japanese basketball player , Japanese ice hockey player , Japanese shogi player , Japanese handball player Takashi Kawamura (politician) (河村 たかし, born 1948), Japanese politician , Japanese footballer Takashi Kimura (disambiguation), multiple people Takashi Koizumi (小泉 堯史, born 1955), Japanese film director , Japanese boxer , Japanese volleyball player , Japanese industrialist, investor, and art collector , Japanese computer scientist , Japanese basketball player , Japanese cross-country skier Takashi Matsumoto (disambiguation), multiple people Takashi Matsunaga (松永 貴志, born 1986), Japanese jazz pianist Takashi Matsuoka, Japanese-American writer Takashi Miike (三池 崇史, born 1960), Japanese filmmaker , Japanese footballer , Japanese footballer and manager Takashi Murakami (村上 隆, born 1962), Japanese contemporary artist , Japanese rower Takashi Nagai (永井 隆, 1908–1951), Japanese physician and survivor of the Nagasaki bombing Takashi Nagasaki (長崎 尚志, born 1954), Japanese author, manga writer and former editor of manga Takashi Nagasako (長嶝 高士, born 1964), Japanese voice actor Takashi Nagatsuka (長塚 節, 1879–1915), Japanese novelist and poet , Japanese politician , Japanese mixed martial artist Takashi Nakamura (中村 たかし, born 1995), Japanese animator, and anime director Takashi Narita (成田 貴志, born 1969), Japanese former volleyball player Takashi Niigaki (新垣 隆, born 1970), Japanese music teacher Takashi Okamura (disambiguation), multiple people Takashi Ono (小野 喬, born 1931), Japanese gymnast , Japanese voice actor Takashi Ozaki (尾崎 隆, 1952–2011), Japanese mountaineer Takashi Saito (斎藤 隆, born 1970), Japanese baseball player , Japanese footballer Takashi Saito (c. 1990 - 2007), sumo wrestler who died due to injuries sustained in the Tokitsukaze stable hazing scandal Takashi Sakai (酒井 隆, 1887–1946), Japanese general Takashi Shimizu (清水 崇, born 1972), Japanese filmmaker , Japanese footballer Takashi Shimura (志村 喬, 1905–1982), Japanese actor Takashi Sorimachi (反町 隆史, born 1973), Japanese singer and actor , Japanese sailor , Japanese ice hockey player , Japanese baseball player Takashi Umeda (梅田 高志, born 1976), Japanese footballer , Japanese footballer , Japanese anime director , Japanese architect , Japanese actor Takashi Yanase, author of the picture book series Anpanman , Japanese racing driver , Japanese swimmer , Japanese water polo player , better known as Cyber Kong, Japanese professional wrestler , Japanese comedian Takashi Yoshimatsu (吉松 隆, born 1953), Japanese composer Takashi Yuasa (湯浅 卓, born 1955), Japanese lawyer , Mongolian sumo wrestler Fictional characters a character from Pita Ten Takashi Hayase, a character from The Super Dimension Fortress Macross , a character from The Prince of Tennis , a character from Highschool of the Dead Takashi Kurosawa, a character from The Hitman's Bodyguard (Mori), a character from Ouran High School Host Club , the title character from Natsume's Book of Friends , a character from Cyber Team in Akihabara Takashi 'Shiro' Shirogane, a character from Voltron: Legendary Defender Takashi Sone, a character from Haru yo, Koi , a character from Yotsuba&! , a character from Cardcaptor Sakura Takashi Kovacs, a character from Altered Carbon Takashi Mitsuya, a character from Tokyo Revengers Takashi Todoroki, a character from Yu-Gi-Oh! Zexal Takashi, a supporting character who goes by the mutant name Tiger Claw in Teenage Mutant Ninja Turtles References Japanese masculine given names Masculine given n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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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분결핍성 빈혈
철분결핍성 빈혈(鐵分欠乏性貧血, iron-deficiency anemia)은 철분 부족으로 인한 빈혈이다. 빈혈은 적혈구 수 감소 또는 혈액 내 헤모글로빈의 양 감소로 정의된다. 천천히 발병하는 경우엔 피로감, 쇠약감, 호흡부족, 운동능력 저하 등의 증상이 종종 발생한다. 빠르게 발생하는 빈혈은 흔히 어지러움, 아찔함, 갈증 증가 등 더 심각한 증상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기 이전부터 심각한 빈혈이라고 간주한다. 철분결핍성 빈혈이 있는 아동은 성장과 발달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기저 원인에 따라 다른 추가적인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철분결핍성 빈혈은 혈액에서 철분의 손실, 음식을 통한 철분 섭취 부족, 철분의 흡수 장애로 인해 발생한다. 출혈의 원인에는 심한 월경, 출산, 자궁근종, 위궤양, 대장암, 요로 출혈 등이 있다. 염증성 장질환, 복강병, 위 우회술 등의 결과로 몸이 음식에서 철분을 잘 흡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기생충 감염, 말라리아, HIV/AIDS이 철분결핍성 빈혈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혈액검사를 통해 확진한다. 철분결핍성 빈혈은 충분한 양의 철분을 함유한 식단을 먹거나 철분을 보충하여 예방할 수 있다. 철분이 많은 음식에는 고기, 견과류, 시금치, 혹은 철분 강화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있다. 치료에는 식이요법 변경과 기생충 치료 또는 궤양 수술과 같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처치가 포함될 수 있다. 철분 보충제와 비타민 C가 권장되기도 한다. 중증 환자는 수혈 또는 철분주사로 치료할 수 있다. 철분결핍성 빈혈 환자는 2015년 14억 8000만 명에 달했다. 식이 철의 부족은 전 세계적으로 모든 빈혈의 약 절반을 유발한다고 추정된다.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 가장 흔히 영향을 받는다. 2015년 철분결핍으로 인한 빈혈로 약 54,000명이 사망했다. 이는 1990년의 213,000명보다 줄어든 것이다. 증상 철분결핍성 빈혈은 증상 없이 나타날 수도 있다. 느리게 발병하는 경향으로 인해 몸이 적응할 시간이 있기 때문에, 발병 이후 얼마간은 환자가 병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증상이 나타날 경우, 피부 또는 점막의 옥시헤모글로빈 감소로 인해 눈이 창백한 색을 띄는 소견을 보이거나 피로, 어지러움, 운동 능력 저하, 두통, 쇠약, 사지 말단의 온도 저하, 추위에 민감해지는 등의 증상과 함께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증상들은 특이적이거나 민감하지는 않다. 철분결핍성 빈혈의 가장 큰 증상은 창백해진 점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대규모 연구에서 아동의 빈혈(헤모글로빈 < 11.0g/dl)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 창백한 점막의 민감도는 28%, 특이도는 87%로 조사되었으며, 심각한 빈혈(헤모글로빈 < 7.0g/dl)을 구별하는 데 특이도는 49%로 나타났다. 심각한 경우 호흡곤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식증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얼음을 계속 먹으려 하는 빙식증의 경우 철분결핍성 빈혈의 가장 특이적인 소견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른 철분결핍성 빈혈에서 나타날 수 있는 증상과 징후는 다음과 같다. 아동 발달 철분결핍성 빈혈은 학습능력의 저하와 운동기능의 변화를 포함한 신경계의 빈약한 발달과 관련이 있다. 이는 철분 결핍이 뇌의 신경세포 발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체에 철분이 부족할 때 적혈구는 철분에 우선 결합하게 되어 뇌의 신경세포와 멀어지게 된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신경학적 문제로 인해 발달의 측면에서 장기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원인 철분결핍성 빈혈로 진단됐을 때는 그 원인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철의 수요량 증가, 철의 손실량 증가, 철의 섭취량 감소 등으로 인해 철분결핍성 빈혈이 발생할 수 있다. 철분 수요는 흔히 어린이 같은 성장기나 임신 시에 증가한다. 예를 들어, 급격한 성장기의 어린이나 청소년에서는 철분 요구량이 섭취량을 초과하여 질병도 없고 정상적인 식사를 하는 경우에도 철분 결핍이 일어날 수 있다. 철분 결핍은 일반적으로 혈액 손실로 인해 발생한다. 만성 위장관 출혈은 혈액을 손실시키는 한 가지 예이며, 이는 악성종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가임기 여성의 경우, 심한 월경은 혈액을 손실시켜 철분결핍성 빈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비건이나 채식주의자와 같이 식단에서 철분을 많이 섭취하지 않는 사람들도 철분결핍성 빈혈의 위험이 높다. 기생충 관련 질병 전 세계적으로 철분결핍성 빈혈의 주요 원인은 기생충 침입으로 인한 기생 질병인 연충증이다. 철분결핍성 빈혈을 일으키는 가장 흔한 원인 기생충은 두비니구충(Ancylostoma duodenale), 실론구충(Ancylostoma ceylanicum), 아메리카구충(Necator americanus)이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전 세계적으로 약 20억 명의 사람들이 이러한 토양매개연충에 감염된 상태라고 추정한다. 기생 충은 인간의 소장 점막과 결합함으로써 염증과 만성적인 혈액 손실을 유발하며, 혈액을 본인의 영양분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철분결핍성 빈혈을 일으킬 수 있다. 혈액 손실 적혈구는 철분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혈액 손실은 철분 손실로 이어진다. 혈액 손실에는 월경, 위장출혈, 위궤양, 출혈장애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출혈의 속도는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다. 소화성 궤양, 혈관형성이상, 염증성 장질환, 대장용종, 대장암과 같은 위장관의 암과 같이 체내에서 천천히 발생하는 만성 혈액 손실도 철분결핍성 빈혈을 일으킬 수 있다. 월경 월경으로 인한 출혈은 철분결핍성 빈혈의 흔한 원인이다. 월경과다를 앓고 있는 여성들은 식사로 섭취하는 것보다 월경 시 더 많은 양의 혈액을 잃을 위험이 높기 때문에 철분결핍성 빈혈이 생길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월경 주기당 약 40 mL의 피를 잃는다. 철분은 이때 혈액과 함께 소실된다. 피임약이나 자궁내 장치(IUD)와 같은 일부 피임법은 혈액의 양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월경주기 동안 철분이 손실된다. 철분 보충제를 간헐적으로 복용하여 철분결핍성 빈혈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철분 보충제를 매일 장기간 복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몇몇 부작용도 예방할 수 있다. 위장관 출혈 남성과 폐경기 여성에서 발생하는 철분결핍성 빈혈의 가장 흔한 원인은 위장관 출혈이다. 위, 식도, 소장, 대장 등에서 발생하는 위장관 출혈에는 많은 원인이 있다. 먼저 NSAIDs(예: 아스피린)나 와파린 같은 항응고제, 클로피도그렐 등의 항혈소판제를 정기적으로 복용하여 위장관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약물들은 일부 환자, 특히 혈액 응고 증상을 일으키는 환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대장암은 위장관 출혈, 즉 철분결핍성 빈혈의 또 다른 원인이다. 일반적으로 대장암은 고령의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 또한 폰 빌레브란트 병, 진성적혈구증가증 등 일부 출혈 질환도 위장관 출혈을 일으킬 수 있다. 음식 신체는 필요한 철분을 보통 음식에서 흡수한다. 만약 사람이 너무 적은 양의 철분을 섭취하거나, 흡수가 잘 되지 않는 비헴 철(non-heme iron)을 섭취하는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철분 결핍에 걸릴 수 있다. 철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음식에는 육류, 계란, 녹색의 잎채소, 철분 강화 음식 등이 있다. 올바른 발달과 성장을 위해서 신생아와 어린이는 식사를 통해 철분을 잘 섭취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에서 우유를 과량 섭취하는 것은 철분결핍성 빈혈의 발생과 관련되어 있다. 또 다른 철분결핍성 빈혈의 위험 인자로는 적은 육류 섭취, 적은 철분 강화 음식 섭취가 있다. 미국 국립의학아카데미는 2001년 철분의 평균필요량(estimated average requirements, EAR)과 일일권장량(recommended dietary allowances, RDA)을 2001년 업데이트했다. 14 ~ 18세 여성의 철분 평균필요량은 하루에 7.9mg, 19 ~ 50세 여성은 하루 8.1mg, 그보다 나이가 많은 폐경기 여성은 하루 5.0mg이다. 19세 이상 남성의 철분 평균필요량은 6.0mg이다. 한편 14 ~ 18세 여성의 철분 일일권장량은 15.0mg, 19 ~ 50세 여성은 18.0mg, 그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은 8.0mg이다. 19세 이상 남성의 철분 일일권장량은 8.0mg이다. 평균필요량보다 철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철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일일권장량은 평균필요량보다 높게 정해져 있다. 임신한 여성의 철분 일일권장량은 하루 27mg, 수유를 하는 여성은 하루 9mg이다. 1 ~ 3세의 아동인 경우 하루 7mg, 4 ~ 8세인 경우 하루 10mg, 9~ 13세인 경우 8mg이다. 철분 흡수 저하 음식에서 나온 철분은 소장의 혈류로 흡수되며, 주로 십이지장에서 흡수된다. 철분 흡수 장애는 철분결핍성 빈혈의 덜 흔한 원인이지만, 많은 위장 질환은 철분을 흡수하는 신체의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복강병에서 십이지장의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변화하면 철분 흡수가 감소할 수 있다. 위의 기형이 있거나 수술로 위를 절제한 경우 철분이 흡수 가능한 형태로 변환되기 위해 필요한 산성 환경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흡수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위나선균(H. pylori)의 만성 감염이나 장기간 양성자 펌프 억제제 치료를 받은 경우 위에서 염산의 생산이 불충분하여 위산저하증 또는 무위산증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3가 철 이온(ferric iron, Fe3+)이 흡수 가능한 형태인 2가 철 이온(ferrous iron, Fe2+)으로 전환되는 것이 억제된다. 비만대사수술은 철의 흡수 장애를 일으켜 철분결핍성 빈혈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체중 조절이나 당뇨병 조절을 위해 루앵Y 연결(Roux-en-Y anastomosis) 수술을 받은 경우, 위는 작은 주머니 모양으로 변형되며, 철분이 흡수되는 십이지장을 건너뛰어 바로 소장에 연결된다. 루앵Y 연결을 통한 위우회술을 받은 환자 중 17 ~ 45%에서 철분결핍성 빈혈이 발생한다. 임산부 철분을 보충하지 않으면 많은 임산부들에서 철분결핍성 빈혈이 발생한다. 이는 산모가 평소 저장하고 있던 철분으로 증가된 자기 자신의 혈액, 성장 중인 태아, 태반의 발생을 위한 헤모글로빈에 대하여 모두 철분을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혈관내 용혈과 혈색소뇨는 덜 흔한 철분결핍성 빈혈의 원인이다. 임신 중의 철분 결핍은 아기에게 장기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인지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철분 결핍은 산모의 감염이나 임신 중 합병증 위험을 높여 건강에 위해를 끼친다.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에는 자간전증, 출혈 장애, 주산기 감염이 있다. 철분 결핍이 있는 채로 임신한 경우 태아 조직의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임신 초기, 특히 임신의 첫 3분기에 경구로 철분 보충제를 복용하여 임신 중 철분결핍성 빈혈의 부작용과, 태아 성장에 철분 결핍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철분 보충제는 임신당뇨병 발생의 위험 인자이므로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인 임산부에서는 철분 보충제가 권장되지 않는다. 철분 결핍으로 인해 미숙아를 낳을 수 있으며 아기의 언어가 운동 발달이 지연되는 등 신경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몇몇 연구에서는 10대 여성의 경우 청소년기에 철분과 다른 영양소의 필요량이 이미 늘어나 있기 때문에 임신 시 철분결핍성 빈혈이 발생할 위험성이 더 크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어린이 아동기에는 성장이 빨라 철분결핍성 빈혈에 걸릴 위험이 높다. 아이들의 철 필요량은 식사로 섭취하는 양보다 많다. 태어날 때 아기는 몸에 철분을 저장한 채로 태어난다. 그러나 이 철 저장량은 대개 생후 4~6개월이 되면 전부 소진된다. 또한 우유를 너무 일찍 먹기 시작한 아이는 위장관 출혈로 인한 빈혈이 발생할 수 있다. 철분결핍성 빈혈 발생 위험이 있는 아이는 다음과 같다. 미숙아 저체중 출생아 생후 12개월 이전에 우유를 먹은 신생아 생후 6개월 이후 철분 보충 없이 모유 수유나 철분이 강화되지 않은 분유를 먹고 있는 신생아 하루에 700mL 이상의 우유를 마시고 있는 1 ~ 5세 아동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아동 특별한 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고 있는 아동 히스패닉 계통 인종인 아이 과체중인 아이 헌혈 헌혈을 자주 하는 경우에도 철분결핍성 빈혈 발생 위험이 있다. 전혈을 헌혈하는 경우 대략 200mg의 철이 몸에서 나가게 된다. 혈액은행에서는 헌혈하기 전에 헌혈자가 빈혈이 있는지를 검사한다. 빈혈이 있는 경우 헌혈을 시행하지 않는다. 혈소판이나 백혈구만을 헌혈하는 경우 철분 손실이 덜하다. 헵시딘 혈청과 소변의 헵시딘 농도 감소는 초기 철분 결핍을 나타내는 수치이다. 또한 헵시딘 농도는 말라리아와 철분 결핍 간의 복잡한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헵시딘은 말라리아 감염 시 상향조절되어 있으므로, 빈혈 발생에 관여할 가능성이 있다. 기전 철분결핍성 빈혈은 심각한 철분 결핍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다. 몸이 충분한 철(기능성 이온)을 가지고 있을 때 나머지는 나중에 세포, 주로 골수와 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저장된다. 철이 저장되는 물질을 페리틴 복합체라고 하며, 페리틴은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에서 철 대사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다. 남성은 약 3.5g, 여성은 약 2.5g의 철분을 저장하고 있다. 헵시딘은 간에서 만들어지는 펩타이드 호르몬으로 체내 철 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적혈구형성에 이용 가능한 철분의 양을 감소시킨다. 헵시딘은 페로포틴에 결합하여 분해되도록 유도하는데, 페로포틴은 세포에서 철이 나오게 하여 혈류로 운송하는 역할을 한다. 적혈구형성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와 같은 상황에서, 철분 결핍과 조직의 저산소증은 헵시딘 발현을 억제한다. 반면 전신 감염이나 염증(특히 사이토카인인 IL-6이 관련됨)이 있는 경우, 혈류 내 순환하는 철 농도가 올라간 경우에는 헵시딘 발현이 자극된다. 철은 특히 헤모글로빈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신체의 적혈구형성에 중요한 무기질이다. 체내에서 발견되는 철의 약 70%가 헤모글로빈에 결합되어 있다. 철은 주로 소장에서 흡수되는데, 특히 십이지장과 공장이 주된 흡수 부위이다. 어떤 요인들은 철의 흡수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킨다. 예를 들어 철분이 함유된 음식과 함께 비타민 C를 섭취하면 철분 흡수가 증가된다고 알려져 있다. 테트라사이클린이나 제산제 등의 일부 약물은 철분 흡수를 감소시킨다. 곡물의 피트산이나 차의 탄닌 역시 철의 흡수를 방해한다. 소장에서 흡수된 철분은 트랜스페린에 결합한 상태로 혈류를 통해 운반되어, 최종적으로는 골수에서 적혈구형성에 관여한다. 적혈구가 분해되면 철은 몸에서 재활용되고 저장된다. 인체가 필요로 하는 철분 양이 현재 이용 가능한 양을 넘게 되면 얼마간은 페리틴에 저장된 철을 사용하여 정상적으로 적혈구형성이 진행된다. 그러나 저장된 철을 모두 소모하게 되면 적혈구형성이 비정상적으로 진행된다. 궁극적으로 철이 부족하면 헤모글로빈 생산이 떨어지며 정상 수치 아래로 내려가게 되고, 그 결과 폐에서 산소와 결합하여 운반하는 역할을 할 헤모글로빈이 부족해져 빈혈이 발생한다. 진단 일반적으로 철분결핍성 빈혈의 최종 진단에서는 골수흡인 표본을 염색하여 철이 골수에서 고갈되었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철분결핍성 빈혈 진단을 위해 더 쉽고 신뢰성 있는 혈액 검사를 시행할 수 있기 때문에 골수흡인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또한 비경구적인 철분 보충 이후에 시행한 골수흡인 검사가 진단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철저한 과거력 확인이 철분결핍성 빈혈 진단에 중요하다. 과거력 확인은 혈변이나 여성의 월경과 같은 빈혈의 흔한 원인을 감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구충이나 편충 등이 풍토병인 지역의 여행력을 확인하면 기생충 충체나 충란을 확인하기 위한 특정 대변 검사를 시행할 수도 있다. 혈액 검사 빈혈은 흔히 루틴으로 시행하는 혈액 검사로 발견된다. 정의상 헤모글로빈(Hb) 수치가 충분히 낮다면 빈혈로 진단하며, 적혈구용적률(Hct) 값이 낮은 것도 빈혈의 특징이다. 이후 빈혈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추가 검사를 실시한다. 빈혈이 철분 결핍으로 인해 발생했다면, 신체의 철 저장량이 고갈되기 시작하면서 CBC에 최초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값 중 하나는 적혈구분포폭(RDW)이 된다. RDW는 적혈구 크기(RBC)의 변동성을 반영하는 수치이다. 또한 체내 철이 고갈되면서 평균적혈구용적(MCV)도 낮게 나타나는데, 이는 비정상적으로 크기가 작은 적혈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MCV, 평균적혈구혈색소량(MCH), 평균적혈구혈색소농도(MCHC) 수치가 혈액 검사에서 낮게 나오며 말초혈액도말(PBS) 검사에서 그에 맞게 적혈구가 작게 보인다면 소적혈구빈혈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철분결핍성 빈혈 환자의 말초혈액도말 검사 결과에서는 적혈구가 작아지며 저색소(색깔이 옅어진 적혈구) 양상을 보이며, 적혈구부동증(적혈구의 크기가 다양하게 나타남)과 변형적혈구증가증(적혈구 모양이 다양하게 나타남) 소견을 보이기도 한다. 더 심한 철분결핍성 빈혈 환자의 말초혈액도말 검사 결과에서는 저색소의 연필 모양 세포가 모이거나, 간혹 적은 수의 유핵적혈구를 볼 수도 있다. 철분결핍성 빈혈에서 혈소판 수치가 약간 올라가 경증의 혈소판증가증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중증의 경우 오히려 혈소판감소증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 후 혈청 페리틴, 혈청 철 농도, 혈청 트랜스페린, 총철결합능(TIBC) 등의 검사를 통해 철분결핍성 빈혈을 확진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결과는 혈청 페리틴 감소이다. 그러나 만성 염증 상태에서는 혈청 페리틴이 올라갈 수 있으므로 철분결핍성 빈혈에서 항상 페리틴이 감소하지는 않는다. 혈청 철 농도를 측정할 수도 있으나 혈청 철 농도와 총철결합능을 모두 측정하는 게 더 신뢰성이 높다. 트랜스페린 포화도(철분 포화도)는 혈청 철 농도를 총철결합능으로 나누어 구하며, 철분결핍성 빈혈 진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치이다. 그러나 이때는 다른 유형의 빈혈 등 다른 질환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적혈구분포폭(RDW) 역시 진단에 쓰일 수 있으며 주로 철분결핍성 빈혈에서는 증가한다. 지중해빈혈 등 다른 질환을 감별하기 위해 추가적인 검사가 필요할 수 있다. 지중해빈혈 환자에게 철분 보충제를 투여하면 혈색소증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철분 제제로 치료해서는 안된다. 철분 분석과 헤모글로빈 전기영동은 두 질환을 감별하는 데에 유용한 근거를 제공한다. 선별 검사 미국에서 임산부에 대하여 임신 중 철분결핍성 빈혈의 선별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내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이 불명확하다. 그러나 6 ~ 24개월 어린이를 대상으로는 선별 검사를 하는 게 좋다는 결론이 나와 있다. 미국 질병예방특별위원회(USPSTF)는 증상이 없는 임산부와 고위험군 신생아에 대하여 시행하는 선별 검사를 권고등급 B로 판정했다. 선별 검사는 헤모글로빈이나 적혈구용적율을 검사하여 이루어진다. 치료 치료는 철분결핍성 빈혈의 원인과 중증도를 따져서 결정해야 한다. 혈액 손실이나 다른 기저의 원인이 빈혈을 유발한 것이라면 그 원인을 치료해야 한다. 철분결핍성 빈혈은 대개 경구 철분 보충제로 치료한다. 중증의 급성 빈혈이 생긴 경우 우선 중간 치료로 즉시 수혈을 하거나 철분을 정맥 주사로 보충한다. 비교적 덜 심한 경우에는 철이 많은 음식을 먹도록 식단을 바꾸고 경구 철분 보충제를 복용하도록 한다. 비타민 C(아스코르브산)는 철 흡수가 잘되도록 하므로 비타민 C가 많은 음식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경구 철분 보충제는 여러 가지 제제가 이용 가능하다. 알약 제제인 보충제도 있고, 어린이가 복용하기 쉽도록 액체인 경우도 있다. 경구로 철분을 보충할 경우 대부분 소장을 통해 잘 흡수되지만, 소장에서 더 오랜 시간 동안 방출되도록 서방형 제제로 설계된 약물들도 있다. 음식이 있으면 소장에서 흡수되는 철분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러한 경구 보충제는 공복에 복용하여야 가장 체내에 잘 흡수된다. 경구 철분 보충 치료의 용량은 성인의 경우 하루 100 ~ 200mg, 어린이는 하루 3 ~ 6mg/kg이다. 보통 하루에 3 ~ 4알 정도 복용하여 이 용량을 채우게 된다. 이런 치료에는 부작용이 있다. 경구 철분 보충제로 인해 흔히 변비, 구역질, 구토, 불쾌한 금속 맛, 어두워진 대변 색깔 등 부정적인 위장관계 효과가 나타난다. 경구 철분 보충 치료를 받은 환자 중 15 ~ 20%가 변비를 호소한다. 소장에서 천천히 흡수되는 서방형 제제인 경우 변비를 일으킬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혈중 철 농도가 정상으로 회복되고 체내 철 저장량이 복구되는 데에는 6개월에서 1년 가량이 걸린다. 경구 철 보충은 복강병, 염증성 장질환, 위나선균 감염 등으로 인한 흡수 장애가 원인인 철분결핍성 빈혈 환자에게는 효과적이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경구나 정맥 주사로 흡수되는 철분 양을 늘리기 위해서 기저 질환을 먼저 치료할 필요가 있다. 철분결핍성 빈혈이 더 심해져 경구 치료가 듣지 않거나, 환자가 경구 보충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경우 다른 치료가 필요하다. 가능한 선택지는 철분 정맥 주사와 수혈이다. 경구 철분 보충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거나, 경구 요법이 듣지 않는 경우, 또는 장기간 철분 보충이 필요한 환자에게 정맥 주사로 철분을 보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투석 치료를 받으면서 동시에 에리트로포이에틴이나 다른 적혈구형성 자극제를 투여받고 있는 환자의 경우, 비경구 철분 보충 치료를 통해 몸이 에리트로포이에틴에 더 잘 반응하여 적혈구를 만들도록 할 수 있다. 철분 정맥 주사는 아나필락시스와 같은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지만, 여러 다른 약제가 나오면서 이런 부작용의 가능성을 낮추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맥을 통한 철분 투여가 경구 투여보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다. 혈액 손실 등으로 인한 중증 빈혈 환자거나, 심혈관계 질환과 같은 심각한 다른 증상이 있는 환자에서는 수혈을 고려할 수도 있다. 모노페릭은 미국에서 철분결핍성 빈혈 치료제로 2020년 1월 승인되었다. 역학 중등도의 철분결핍성 빈혈은 전 세계적으로 6억 1,000만 명, 또는 전 인구의 8.8%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성(7.8%)보다 여성(9.9%)에서 약간 더 많이 발병한다. 1 ~ 3세 아동 중에서는 15% 정도가 철분결핍성 빈혈에 걸려 있다. 경도의 철분결핍성 빈혈은 3억 7,500만 명이 걸린 상태이다. 임산부는 전체의 52%가 철분결핍성 빈혈의 영향을 받는다. 국가마다 철분결핍성 빈혈이 전체 빈혈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차이가 있다. 빈혈이 흔하게 생기는 인구집단인 어린이와 임신하지 않은 여성에서 철분결핍성 빈혈은 전체 빈혈의 각각 25%, 37%를 차지한다. 또한 임산부에서 철분결핍성 빈혈이 흔하게 발병한다. 미국의 경우 성인 남성의 2%, 백인 여성의 10.5%, 아프리카계나 멕시코계 여성의 20%가 철분결핍성 빈혈에 걸린다. 2010년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한 5차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철분결핍성 빈혈의 유병률은 남성에서 0.7%, 여성에서 8.0%였으며 가임기 여성의 경우 11.5%로 더 높았다. 60세 이상의 유병률은 남성이 10.2%, 여성이 14.1%로 더 높은 편이었다. 각주 외부 링크 The Importance of Iron – From IronTherapy.Org Interactive material on Iron Metabolism – From IronAtlas.com Approach to chronic anemia : https://ashpublications.org/hematology/article/2012/1/183/83845/How-to-approach-chronic-anemia Handout: Iron Deficiency Anemia – From the National Anemia Action Council NPS News 70: Iron deficiency anaemia: NPS – Better choices, Better health – From the National Prescribing Service 영양 결핍 빈혈 철 대사
https://en.wikipedia.org/wiki/Iron-deficiency%20anemia
Iron-deficiency anemia
Iron-deficiency anemia is anemia caused by a lack of iron. Anemia is defined as a decrease in the number of red blood cells or the amount of hemoglobin in the blood. When onset is slow, symptoms are often vague such as feeling tired, weak, short of breath, or having decreased ability to exercise. Anemia that comes on quickly often has more severe symptoms, including confusion, feeling like one is going to pass out or increased thirst. Anemia is typically significant before a person becomes noticeably pale. Children with iron deficiency anemia may have problems with growth and development. There may be additional symptoms depending on the underlying cause. Iron-deficiency anemia is caused by blood loss, insufficient dietary intake, or poor absorption of iron from food. Sources of blood loss can include heavy periods, childbirth, uterine fibroids, stomach ulcers, colon cancer, and urinary tract bleeding. Poor absorption of iron from food may occur as a result of an intestinal disorder such as inflammatory bowel disease or celiac disease, or surgery such as a gastric bypass. In the developing world, parasitic worms, malaria, and HIV/AIDS increase the risk of iron deficiency anemia. Diagnosis is confirmed by blood tests. Iron deficiency anemia can be prevented by eating a diet containing sufficient amounts of iron or by iron supplementation. Foods high in iron include meat, nuts, and foods made with iron-fortified flour. Treatment may include dietary changes and dealing with underlying causes, for example medical treatment for parasites or surgery for ulcers. Iron supplements and vitamin C may be recommended. Severe cases may be treated with blood transfusions or iron injections. Iron-deficiency anemia affected about 1.48 billion people in 2015. A lack of dietary iron is estimated to cause approximately half of all anemia cases globally. Women and young children are most commonly affected. In 2015, anemia due to iron deficiency resulted in about 54,000 deaths – down from 213,000 deaths in 1990. Signs and symptoms Iron-deficiency anemia may be present without a person experiencing symptoms, it tends to develop slowly; therefore the body has time to adapt, and the disease often goes unrecognized for some time. If symptoms present, patients may present with the sign of pallor (reduced oxyhemoglobin in skin or mucous membranes), and the symptoms of feeling tired, weak, dizziness, lightheadedness, poor physical exertion, headaches, decreased ability to concentrate, cold hands and feet, cold sensitivity, increased thirst and confusion. None of these symptoms (or any of the others below) are sensitive or specific. In severe cases, shortness of breath can occur. Pica may also develop; of which consumption of ice, known as pagophagia, has been suggested to be the most specific for iron deficiency anemia. Other possible symptoms and signs of iron-deficiency anemia include: Child development Iron-deficiency anemia is associated with poor neurological development, including decreased learning ability and altered motor functions. This is because iron deficiency impacts the development of the cells of the brain called neurons. When the body is low on iron, the red blood cells get priority on iron and it is shifted away from the neurons of the brain. Exact causation has not been established, but there is a possible long-term impact from these neurological issues. Cause A diagnosis of iron-deficiency anemia requires further investigation into its cause. It can be caused by increased iron demand, increased iron loss, or decreased iron intake. Increased iron demand often occurs during periods of growth, such as in children and pregnant women. For example, during stages of rapid growth, babies and adolescents may outpace their dietary intake of iron which can result in deficiency in the absence of disease or a grossly abnormal diet. Iron loss is typically from blood loss. One example of blood loss is by chronic gastrointestinal blood loss, which could be linked to a possible cancer. In women of childbearing age, heavy menstrual periods can be a source of blood loss causing iron-deficiency anemia. People who do not consume much iron in their diet, such as vegans or vegetarians, are also at increased risk of developing iron deficiency anemia. Parasitic disease The leading cause of iron-deficiency anemia worldwide is a parasitic disease known as a helminthiasis caused by infestation with parasitic worms (helminths); specifically, hookworms. The hookworms most commonly responsible for causing iron-deficiency anemia include Ancylostoma duodenale, Ancylostoma ceylanicum, and Necator americanus.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estimates that approximately two billion people are infected with soil-transmitted helminths worldwide. Parasitic worms cause both inflammation and chronic blood loss by binding to a human's small-intestinal mucosa, and through their means of feeding and degradation, they can ultimately cause iron-deficiency anemia. Blood loss Red blood cells contain iron, so blood loss also leads to a loss of iron. There are several causes of blood loss including menstrual bleeding, gastrointestinal bleeding, stomach ulcers, and bleeding disorders. The bleeding may occur quickly or slowly. Slow, chronic blood loss within the body — such as from a peptic ulcer, angiodysplasia, inflammatory bowel disease, a colon polyp or gastrointestinal cancer (e.g., colon cancer)— can cause iron-deficiency anemia. Menstrual bleeding Menstrual bleeding is a common cause of iron deficiency anemia in women of child-bearing age. Women with menorrhagia (heavy menstrual periods) are at risk of iron-deficiency anemia because they are at higher-than-normal risk of losing a larger amount blood during menstruation than is replaced in their diet. Most women lose about 40 mL of blood per cycle. Iron is lost with the blood. Some birth control methods, such as pills and IUDs, may decrease the amount of blood, therefore iron lost during a menstrual cycle. Intermittent iron supplementation may be as effective a treatment in these cases as daily supplements and reduce some of the adverse effects of long term daily supplements. Gastrointestinal bleeding The most common cause of iron deficiency anemia in men and post-menopausal women is gastrointestinal bleeding. There are many sources of gastrointestinal tract bleeding including the stomach, esophagus, small intestine, and the large intestine (colon). Gastrointestinal bleeding can result from regular use of some groups of medication, such as non-steroidal anti-inflammatory drugs (e.g. aspirin), as well as antiplatelets such as clopidogrel and anticoagulants such as warfarin; however, these are required in some patients, especially those with states causing a tendency to form blood clots. Colon cancer is another potential cause gastrointestinal bleeding, thus iron deficiency anemia. Typically colon cancer occurs in older individuals. In addition, some bleeding disorders can cause gastrointestinal bleeding. Two examples of bleeding disorders are von Willebrand disease and polycythemia vera. Diet The body normally gets the iron it requires from foods. If a person consumes too little iron, or iron that is poorly absorbed (non-heme iron), they can become iron deficient over time. Examples of iron-rich foods include meat, eggs, leafy green vegetables and iron-fortified foods. For proper growth and development, infants and children need iron from their diet. For children, a high intake of cow's milk is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iron-deficiency anemia. Other risk factors for iron-deficiency anemia include low meat intake and low intake of iron-fortified products. The National Academy of Medicine updated Estimated Average Requirements and Recommended Dietary Allowances in 2001. The current EAR for iron for women ages 14–18 is 7.9 mg/day, 8.1 for ages 19–50 and 5.0 thereafter (post menopause). For men the EAR is 6.0 mg/day for ages 19 and up. The Recommended Dietary Allowance is 15.0 mg/day for women ages 15–18, 18.0 for 19–50 and 8.0 thereafter. For men, 8.0 mg/day for ages 19 and up. (Recommended Dietary Allowances are higher than Estimated Average Requirements so as to identify amounts that will cover people with higher than average requirements.) The Recommended Dietary Allowance for pregnancy is 27 mg/day, and for lactation, 9 mg/day. For children ages 1–3 years it is 7 mg/day, 10 for ages 4–8 and 8 for ages 9–13. The European Food Safety Authority refers to the collective set of information as Dietary Reference Values, with Population Reference Intakes instead of Recommended Dietary Allowances, and Average Requirements instead of Estimated Average Requirements. For women the Population Reference Intake is 13 mg/day ages 15–17 years, 16 mg/day for women ages 18 and up who are premenopausal and 11 mg/day postmenopausal. For pregnancy and lactation, 16 mg/day. For men the Population Reference Intake is 11 mg/day ages 15 and older. For children ages 1 to 14 the Population Reference Intake increases from 7 to 11 mg/day. The Population Reference Intakes are higher than the US Recommended Dietary Allowances, with the exception of pregnancy. Iron malabsorption Iron from food is absorbed into the bloodstream in the small intestine, primarily in the duodenum. Iron malabsorption is a less common cause of iron-deficiency anemia, but many gastrointestinal disorders can reduce the body's ability to absorb iron. There are different mechanisms that may be present. In celiac disease, abnormal changes in the structure of the duodenum can decrease iron absorption. Abnormalities or surgical removal of the stomach can also lead to malabsorption by altering the acidic environment needed for iron to be converted into its absorbable form. If there is insufficient production of hydrochloric acid in the stomach, hypochlorhydria/achlorhydria can occur (often due to chronic H. pylori infections or long-term proton-pump inhibitor therapy), inhibiting the conversion of ferric iron to the absorbable ferrous iron. Bariatric surgery is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iron deficiency anemia due to malabsorption of iron. During a Roux-en-Y anastamosis, which is commonly performed for weight management and diabetes control, the stomach is made into a small pouch and this is connected directly to the small intestines further downstream (bypassing the duodenum as a site of digestion). About 17-45% of people develop iron deficiency after a Roux-en-Y gastric bypass. Pregnant women Without iron supplementation, iron-deficiency anemia occurs in many pregnant women because their iron stores need to serve their own increased blood volume, as well as be a source of hemoglobin for the growing baby and for placental development. Other less common causes are intravascular hemolysis and hemoglobinuria. Iron deficiency in pregnancy appears to cause long-term and irreversible cognitive problems in the baby. Iron deficiency affects maternal well-being by increasing risks for infections and complications during pregnancy. Some of these complications include pre-eclampsia, bleeding problems, and perinatal infections. Pregnancies where iron deficiency is present can lead to improper development of fetal tissues. Oral iron supplementation during the early stages of pregnancy, specifically the first trimester, is suggested to decrease the adverse effects of iron-deficiency anemia throughout pregnancy and to decrease the negative impact that iron deficiency has on fetal growth. Iron supplements may lead to a risk for gestational diabetes, pregnant women with adequate hemoglobin levels are recommended not to take iron supplements. Iron deficiency can lead to premature labor and to problems with neural functioning, including delays in language and motor development in the infant. Some studies show that women pregnant during their teenage years can be at greater risk of iron-deficiency anemia due to an already increased need for iron and other nutrients during adolescent growth spurts. Children Babies are at increased risk of developing iron deficiency anemia due to their rapid growth. Their need for iron is greater than they are getting in their diet. Babies are born with iron stores; however, these iron stores typically run out by 4–6 months of age. In addition, infants who are given cow's milk too early can develop anemia due to gastrointestinal blood loss. Children who are at risk for iron-deficiency anemia include: Preterm infants Low birth weight infants Infants fed with cow's milk under 12 months of age Breastfed infants who have not received iron supplementation after age 6 months, or those receiving non-iron-fortified formulas Children between the ages of 1 and 5 years old who receive more than 24 ounces (700 mL) of cow milk per day Children with low socioeconomic status Children with special health care needs Children of Hispanic ethnicity Children who are overweight Blood donation Frequent blood donors are also at risk for developing iron deficiency anemia. When whole blood is donated, approximately 200 mg of iron is also lost from the body. The blood bank screens people for anemia before drawing blood for donation. If the patient has anemia, blood is not drawn. Less iron is lost if the person is donating platelets or white blood cells. Hepcidin Decreased levels of serum and urine hepcidin are early indicators of iron deficiency. Hepcidin concentrations are also connected to the complex relationship between malaria and iron deficiency. Mechanism Anemia can result from significant iron deficiency. When the body has sufficient iron to meet its needs (functional iron), the remainder is stored for later use in cells, mostly in the bone marrow and liver. These stores are called ferritin complexes and are part of the human (and other animals) iron metabolism systems. Men store about 3.5 g of iron in their body, and women store about 2.5 g. Hepcidin is a peptide hormone produced in the liver that is responsible for regulating iron levels in the body. Hepcidin decreases the amount of iron available for erythropoesis (red blood cell production). Hepcidin binds to and induces the degradation of ferroportin, which is responsible for exporting iron from cells and mobilizing it to the bloodstream. Conditions such as high levels of erythropoesis, iron deficiency and tissue hypoxia inhibit hepcidin expression. Whereas systemic infection or inflammation (especially involving the cytokine IL-6) or increased circulating iron levels stimulate hepcidin expression. Iron is a mineral that is important in the formation of red blood cells in the body, particularly as a critical component of hemoglobin. About 70% of the iron found in the body is bound to hemoglobin. Iron is primarily absorbed in the small intestine, in particular the duodenum and jejunum. Certain factors increase or decrease absorption of iron. For example, taking Vitamin C with a source of iron is known to increase absorption. Some medications such as tetracyclines and antacids can decrease absorption of iron. After being absorbed in the small intestine, iron travels through blood, bound to transferrin, and eventually ends up in the bone marrow, where it is involved in red blood cell formation. When red blood cells are degraded, the iron is recycled by the body and stored. When the amount of iron needed by the body exceeds the amount of iron that is readily available, the body can use iron stores (ferritin) for a period of time, and red blood cell formation continues normally. However, as these stores continue to be used, iron is eventually depleted to the point that red blood cell formation is abnormal. Ultimately, anemia ensues, which by definition is a hemoglobin lab value below normal limits. Diagnosis Conventionally, a definitive diagnosis requires a demonstration of depleted body iron stores obtained by bone marrow aspiration, with the marrow stained for iron. However, with the availability of reliable blood tests that can be more readily collected for iron-deficiency anemia diagnosis, a bone marrow aspiration is usually not obtained. Furthermore, a study published April 2009 questions the value of stainable bone marrow iron following parenteral iron therapy. Once iron deficiency anemia is confirmed, gastrointestinal blood loss is presumed to be the cause until proven otherwise since it can be caused by an otherwise asymptomatic colon cancer. Initial evaluation must include esophagogastroduodenoscopy and colonoscopy to evaluate for cancer or bleeding of the gastrointestinal tract. A thorough medical history is important to the diagnosis of iron-deficiency anemia. The history can help to differentiate common causes of the condition such as a menstruation in woman or the presence of blood in the stool. A travel history to areas in which hookworms and whipworms are endemic may also be helpful in guiding certain stool tests for parasites or their eggs. Although symptoms can play a role in identifying iron-deficiency anemia, they are often vague, which may limit their contribution to determining the diagnosis. Blood tests Anemia is often discovered by routine blood tests. A sufficiently low hemoglobin by definition makes the diagnosis of anemia, and a low hematocrit value is also characteristic of anemia. Further studies will be undertaken to determine the anemia's cause. If the anemia is due to iron deficiency, one of the first abnormal values to be noted on a complete blood count, as the body's iron stores begin to be depleted, will be a high red blood cell distribution width, reflecting an increased variability in the size of red blood cells. A low mean corpuscular volume also appears during the course of body iron depletion. It indicates a high number of abnormally small red blood cells. A low mean corpuscular volume, a low mean corpuscular hemoglobin or mean corpuscular hemoglobin concentration, and the corresponding appearance of red blood cells on visual examination of a peripheral blood smear narrows the problem to a microcytic anemia (literally, a small red blood cell anemia). The blood smear of a person with iron-deficiency anemia shows many hypochromic (pale, relatively colorless) and small red blood cells, and may also show poikilocytosis (variation in shape) and anisocytosis (variation in size). With more severe iron-deficiency anemia, the peripheral blood smear may show hypochromic, pencil-shaped cells and, occasionally, small numbers of nucleated red blood cells. The platelet count may be slightly above the high limit of normal in iron-deficiency anemia (termed a mild thrombocytosis), but severe cases can present with thrombocytopenia (low platelet count). Iron-deficiency anemia is confirmed by tests that include serum ferritin, serum iron level, serum transferrin, and total iron binding capacity. A low serum ferritin is most commonly found. However, serum ferritin can be elevated by any type of chronic inflammation and thus is not consistently decreased in iron-deficiency anemia. Serum iron levels may be measured, but serum iron concentration is not as reliable as the measurement of both serum iron and serum iron-binding protein levels. The percentage of iron saturation (or transferrin saturation index or percent) can be measured by dividing the level of serum iron by total iron binding capacity and is a value that can help to confirm the diagnosis of iron-deficiency anemia; however, other conditions must also be considered, including other types of anemia. Another finding that can be used is the level of red blood cell distribution width. During haemoglobin synthesis, trace amounts of zinc will be incorporated into protoporphyrin in the place of iron which is lacking. Protoporphyrin can be separated from its zinc moiety and measured as free erythrocyte protoporphyrin, providing an indirect measurement of the zinc-protoporphyrin complex. The level of free erythrocyte protoporphyrin is expressed in either μg/dl of whole blood or μg/dl of red blood cells. An iron insufficiency in the bone marrow can be detected very early by a rise in free erythrocyte protoporphyrin. Further testing may be necessary to differentiate iron-deficiency anemia from other disorders, such as thalassemia minor. It is very important not to treat people with thalassemia with an iron supplement, as this can lead to hemochromatosis. A hemoglobin electrophoresis provides useful evidence for distinguishing these two conditions, along with iron studies. Screening It is unclear if screening pregnant women for iron-deficiency anemia during pregnancy improves outcomes in the United States. The same holds true for screening children who are 6 to 24 months old. Even so, screening is a Level B recommendation suggested by the US Preventative Services Task Force in pregnant women without symptoms and in infants considered high risk. Screening is done with either a hemoglobin or hematocrit lab test. Treatment Treatment should take into account the cause and severity of the condition. If the iron-deficiency anemia is a result of blood loss or another underlying cause, treatment is geared toward addressing the underlying cause. Most cases of iron deficiency anemia are treated with oral iron supplements. In severe acute cases, treatment measures are taken for immediate management in the interim, such as blood transfusions or intravenous iron. For less severe cases, treatment of iron-deficiency anemia includes dietary changes to incorporate iron-rich foods into regular oral intake and oral iron supplementation. Foods rich in ascorbic acid (vitamin C) can also be beneficial, since ascorbic acid enhances iron absorption. Oral iron supplements are available in multiple forms. Some are in the form of pills and some are drops for children. Most forms of oral iron replacement therapy are absorbed well by the small intestine; however, there are certain preparations of iron supplements that are designed for longer release in the small intestine than other preparations. Oral iron supplements are best taken up by the body on an empty stomach because food can decrease the amount of iron absorbed from the small intestine. The dosing of oral iron replacement therapy is as much as 100–200 mg per day in adults and 3–6 mg per kilogram in children. This is generally spread out as 3-4 pills taken throughout the day. The various forms of treatment are not without possible adverse side effects. Iron supplementation by mouth commonly causes negative gastrointestinal effects, including constipation, nausea, vomiting, metallic taste to the oral iron and dark colored stools. Constipation is reported by 15-20% of patients taking oral iron therapy. Preparations of iron therapy that take longer to be absorbed by the small intestine (extended release iron therapy) are less likely to cause constipation. It can take six months to one year to get blood levels of iron up to a normal range and provide the body with iron stores. Oral iron replacement may not be effective in cases of iron deficiency due to malabsorption, such as celiac disease, inflammatory bowel disease, or H. pylori infection; these cases would require treatment of the underlying disease to increase oral absorption or intravenous iron replacement. As iron-deficiency anemia becomes more severe, if the anemia does not respond to oral treatments, or if the treated person does not tolerate oral iron supplementation, then other measures may become necessary. Two options are intravenous iron injections and blood transfusion. Intravenous can be for people who do not tolerate oral iron, who are unlikely to respond to oral iron, or who require iron on a long-term basis. For example, people receiving dialysis treatment who are also getting erythropoietin or another erythropoiesis-stimulating agent are given parenteral iron, which helps the body respond to the erythropoietin agents to produce red blood cells. Intravenous iron can induce an allergic response that can be as serious as anaphylaxis, although different formulations have decreased the likelihood of this adverse effect. In certain cases intravenous iron is both safer and more effective than the oral route. For patients with severe anemia such as from blood loss, or who have severe symptoms such as cardiovascular instability, a blood transfusion may be considered. Low-certainty evidence suggests that IBD-related anemia treatment with Intravenous (IV) iron infusion may be more effective than oral iron therapy, with fewer people needing to stop treatment early due to adverse effects. The type of iron preparation may be an important determinant of clinical benefit. Moderate-certainty evidence suggests response to treatment may be higher when IV ferric carboxymaltose, rather than IV iron sucrose preparation is used, despite very-low certainty evidence of increased adverse effects, including bleeding, in those receiving ferric carboxymaltose treatment. Ferric maltol, marketed as Accrufer and Ferracru, is available in oral and IV preparations. When used as a treatment for IBD-related anemia, very low certainty evidence suggests a marked benefit with oral ferric maltol compared with placebo. However it was unclear whether the IV preparation was more effective than oral ferric maltol. A Cochrane review of controlled trials comparing intravenous (IV) iron therapy with oral iron supplements in people with chronic kidney disease, found low-certainty evidence that people receiving IV-iron treatment were 1.71 times as likely to reach their target hemoglobin levels. Overall, hemoglobin was 0.71g/dl higher than those treated with oral iron supplements. Iron stores in the liver, estimated by serum ferritin, were also 224.84 µg/L higher in those receiving IV-iron. However there was also low-certainty evidence that allergic reactions were more likely following IV-iron therapy. It was unclear whether type of iron therapy administration affects the risk of death from any cause, including cardiovascular, nor whether it may alter the number of people who may require a blood transfusion or dialysis. Ferric derisomaltose (Monoferric) was approved in the United States in January 2020, for the treatment of iron deficiency anemia. Epidemiology A moderate degree of iron-deficiency anemia affects approximately 610 million people worldwide or 8.8% of the population. It is slightly more common in females (9.9%) than males (7.8%). Up to 15% of children ages 1–3 years have iron deficiency anemia. Mild iron deficiency anemia affects another 375 million. Iron deficiency affects up to 52% of pregnant women worldwide. The prevalence of iron deficiency as a cause of anemia varies among countries; in the groups in which anemia is most common, including young children and a subset of non-pregnant women, iron deficiency accounts for a fraction of anemia cases in these groups (25% and 37%, respectively). Iron deficiency is common in pregnant women. Within the United States, iron-deficiency anemia affects about 2% of adult males, 10.5% of White women, and 20% of African-American and Mexican-American women. A map provides a country-by-country listing of what nutrients are fortified into specified foods. Some of the Sub-Saharan countries shown in the deaths from iron-deficiency anemia map from 2012 are as of 2018 fortifying foods with iron. References Zeglam A, Abugrara A, Kabuka M. Autosomal-recessive iron deficiency anemia, dystonia and hypermanganesemia caused by new variant mutation of the manganese transporter gene SLC39A14. Acta Neurol Belg. 2019 Sep;119(3):379-384. doi: 10.1007/s13760-018-1024-7. Epub 2018 Sep 19. PMID 30232769. External links The Importance of Iron – From IronTherapy.Org Interactive material on Iron Metabolism – From IronAtlas.com Approach to chronic anemia : https://ashpublications.org/hematology/article/2012/1/183/83845/How-to-approach-chronic-anemia Handout: Iron Deficiency Anemia – From the National Anemia Action Council NPS News 70: Iron deficiency anaemia: NPS – Better choices, Better health – From the National Prescribing Service Iron metabolism Mineral deficiencies Nutritional anemias Wikipedia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Wikipedia emergency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https://ko.wikipedia.org/wiki/%EB%84%A4%EC%9D%B4%EC%84%A0%20%EC%9D%B4%EB%B0%9C%EB%94%94
네이선 이발디
네이선 에드워드 이발디(Nathan Edward Eovaldi, 1990년 2월 13일 ~ )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로 현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텍사스 레인저스의 투수를 맡고 있다. 그는 이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마이애미 말린스, 뉴욕 양키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활약하였다. 초기 경력 이발디는 텍사스주 앨빈에서 태어나 앨빈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여 학교의 야구 팀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니어 해 동안 오른쪽 팔꿈치에 주관절 내측측부인대를 회복하는 데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2008년 자신의 시니어 해에 그는 텍사스주 전국 팀에 명예로운 언급이었다. 그는 대학 야구 장학금에 텍사스 A&M 대학교에 수학하는 데 약속하였다. 마이너 리그 경력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2008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의 11번째 라운드에서 이발디를 선발하였다. 그의 초안 재고는 그의 첫 존 토미 수술 때문에 망했다. 이발디는 다저스와 계약을 맺어 2십 5만 달러 계약 보너스를 받았고, 텍사스 A&M 대학교로 그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다저스의 팜팀을 통하여 자신의 길을 이루어 2008년 루키 수준 걸프 코스트 리그의 걸프코스트 다저스와 2009년 클래스 A 미드웨스트 리그의 그레이트레이크스 룬스를 위하여 투구하였다. 2010년 클래스 A 캘리포니아 리그의 샌버나디노군 인랜드 엠파이어 식스티식서스와 함께 이발디는 미드 시즌 캘리포니아 리그 올스타 팀으로 선발되었다. 이발디는 2011년 클래스 AA 서던 리그의 채터누가 룩아우츠로 승진되었고 미드 시즌 올스타 경기로 선발되었다. 그는 자신이 19개의 경기들을 시작한 룩아우츠를 위하여 2.62 평균자책점과 함께 6 승 5 패의 기록을 가졌다. 그는 또한 포스트 시즌 올스타 팀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1년 8월 6일 이발디는 처음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징집되었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그날 밤 출발 투수였다. 경기에서 그는 5개의 이닝을 투구하여 7명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킨 동안 2개 만의 득점을 허용하여 우승을 거두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첫 메이저 리그 타석에서 1루타를 쳐 득점을 매겼다. 그의 7개의 스트라이크아웃은 메이저 리그 데뷔를 위하여 다저스 역사상 4번째로 동점이 매겨졌고, 그는 1960년 이래 자신의 데뷔에 득점을 매기는 데 4번째 만의 다저스 투수였다. 이발디는 2개 혹은 적게 득점을 허용한 동안 5개 혹은 이상의 이닝의 4개의 경기들과 함께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는 데 1957년 시즌에서 대니 맥더빗 이래 첫 다저스 출발 선수가 되었다. 그는 다저스를 위하여 6개의 출발을 이루어 그러고나서 시즌을 위하여 자신의 이닝들을 낮추는 목적에 불펜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시즌 후순에 불펜의 외부로 4개의 경기에서 투구하였다. 그의 2011년 총계는 1 승 2 패의 기록과 3.63의 평균자책점을 포함하였다. 채터투가와 함께 2012년 시즌을 시작한 후, 이발디는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자신이 시작했을 때 5월 29일 다저스를 위하여 시즌의 첫 출연을 이루었다. 그는 4개의 스트라이크아웃을 가져 1 대 2의 패배에서 7개의 이닝들을 통하여 4개의 안타와 2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다저스와 10개의 출발 경기에서 그는 4.15 평균자책점과 1 승 6 패의 기록을 가졌다. 마이애미 말린스 2012년 7월 25일 이발디는 핸리 라미레스와 랜디 초트를 위하여 마이너 리그 투수 스콧 맥고프와 더불어 마이애미 말린스로 이적되었다. 말린스와 함께 자신의 첫 경기에서 7월 28일 샌디에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었다. 그는 3 승 7 패의 기록과 4.43의 평균자책점과 함께 2012년 말린스를 위하여 12개의 경기들을 시작하였다. 그는 4.30 평균자책점, 1.51 이닝당 안타 볼넷 허용률, 47개의 볼넷과 119와 3분의 1의 투구한 이닝에서 78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22개의 경기에서 4 승 13 패의 기록과 함께 시즌을 끝냈다. 2013년 이발디는 18개의 출발에서 3.39의 평균자책점과 78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4 승 6 패의 기록을 가졌다. 2014년 이발디는 4.37의 평균자책점과 함께 6 승 14 패의 기록을 가졌다. 그는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많은 223개의 안타를 허용하였다. 그는 시작한 33개의 경기와 199와 3분의 2의 투구한 이닝과 함께 경력 사상 신기록을 세웠다. 뉴욕 양키스 2014년 12월 19일 말린스는 마르틴 프라도와 데이비드 펠프스를 위하여 이발디, 개릿 존스와 도밍고 헤르만을 뉴욕 양키스로 이적시켰다. 이발디는 2015년 4월 10일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양키스를 위하여 자신의 첫 출발을 이루어 5와 3분의 1 이닝을 투구하여 8개의 안타에 2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19개의 이닝에서 양키스가 레드삭스에게 6 대 5로 패하면서 무결정과 인정을 받았다. 이발디는 향상된 결과들로 이끈 스플릿 핑거를 개발하였다. 6월 20일부터 8월 24일을 통하여 이발디는 2.93 평균자책점과 함께 8 승 0 패의 기록으로 투구하였다. 9월 이발디는 팔꿈치 염증을 경험하여 자신의 정규 시즌을 끝냈다. 2015년의 양키스를 위하여 이발디는 4.20 평균자책점과 함께 14 승 3 패로 가 27개의 출발 경기에서 154와 3분의 1을 투구하였다. 이발디는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투구하는 데 준비되었으나 양키스는 와일드 카드 경기에서 탈락되었다. 2016년 8월 16일 찢어진 굴곡근과 부분적으로 찢어진 자신의 오른쪽 투구 팔꿈치에 내측측부인대로 인하여 이발디가 2016년 시즌의 나머지를 놓칠 것이라고 공고되었다. 며칠 후에 영키스는 이발디가 그의 두번째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고 공고하였다. 2016년 양키스와 함께 이발디는 24개의 출연 (21개의 출발 경기)을 이루어 투구한 124와 3분의 2 이닝에서 4.76 평균자책점과 함께 9 승 8 패의 기록을 등록하였다. 그는 자유 계약 선수를 위하여 자격이 된 후에 2017년 시즌을 놓치는 데 기대되었다. 11월 23일 양키스는 이발디를 내보냈다. 탬파베이 레이스 2017년 2월 14일 이발디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함께 1년, 2백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으며 계약은 2018년 시즌을 위한 2백만 달러 팀의 선택권을 포함하였다. 이발디는 자신의 이전 팔꿈치 수술로부터 회복의 이유로 2017년 시즌의 전체를 놓쳤다. 레이스는 2018년 시즌을 들어가는 선택권을 연습하였다. 2018년 3월 28일 이발디가 그의 팔꿈치에 관절 내 유리체와 진단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그는 명백히 배제되었다. 5월 30일 자신의 마지막 출발 이래 거의 1년 반 동안 이발디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투구하여 투구 총수 숙고들의 이유로 꺼내지기 전에 6개의 무안타 이닝을 던졌다. 2018년 레이스와 함께 이발디는 57개의 투구한 이닝과 함께 53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8개의 볼넷을 기록한 동안 4.26 평균자책점과 3 승 4 패의 기록과 함께 10개 (전부 출발 경기)의 출연을 이루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그해 7월 25일 이발디는 제일런 비크스를 위한 교환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되었다. 2018년 이발디는 7월 29일 자신의 레드삭스 데뷔를 이루어 레드삭스가 미네소타 트윈스를 3 대 0으로 꺾으면서 득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7개의 이닝으로 갔다. 2018년 레드삭스와 함께 이발디는 3.33 평균자책점과 3 승 3 패의 기록과 함께 12개 (11개의 출발 경기)의 출연을 이루어 54개의 이닝에서 48명을 스트라이크아웃 시켰다. 2018년 플레이오프에서 이발디는 레드삭스가 16 대 1로 우승한 양키스를 상대로 디비전 시리즈의 3번째 경기에서 7개의 이닝을 투구하여 양키스에게 포스트시즌 역사상 그들의 가장 일방적 패배를 주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3번째 경기에서 이발디는 6개의 이닝을 투구하여 레드삭스가 8 대 2로 우승하면서 겨우 2개만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레드삭스가 시리즈 우승을 거두면서 그는 또한 5번째 경기에서 구원의 1과 3분의 1 이닝을 투구하기도 하였다. 다저스를 상대로 2018년 월드 시리즈에서 이발디는 1번째와 2번째 경기에서 완봉 8번째 이닝을 투구하였다. 그가 원래 4번째 경기를 시작하는 데 예정되었어도 이발디는 월드 시리즈 역사상 장기적 경기인 18개의 이닝 마라톤 3번째 경기에서 최종 구원 투수로 끝났고 말았다. 이발디는 자신을 패배한 투수로 만든 맥스 먼시에게 끝내기 홈런을 내주기 전에 구원의 6개 이닝에 97개의 투구를 던졌다. 출발 투수 릭 포셀로보다 36개나 더 많은 투구들을 던진 동안 이발디는 3개의 안타와 하나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이발디의 97개의 투구들은 구원 투수에 의한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가장 많은 수를 위한 기록을 세웠고, 1977년 릭 로덴이 그렇게 한 이래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6개 이상의 이닝을 던지는 데 첫 구원 투수가 되었다. 13번째 이닝에서 레드삭스는 주도권을 잡았으나 이언 킨슬러에 의한 실책이 다저스가 동점을 매기는 데 허용하였으며 후에 킨슬러가 이발디에게 사과하였다. 경기 후에 이발디는 레드삭스의 갱의실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레드삭스는 다음 2개의 경기를 이기러 가 5개의 경기에서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였다. 월드 시리즈 후에 이발디는 자유 계약을 신청하였다. 12월 6일 이도발디는 레드삭스로 돌아가는 데 4년, 6천 8백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다. 2019년 이발디는 자신의 투구 오른쪽 팔꿈치에 권절 내 유리체의 이유로 4월 20일 부상자 명단에 놓이기 전에 전부 무결정으로 4개의 출발 경기에서 6.00 평균자책점과 함께 2019년 시즌을 시작하였다. 레드삭스는 이어서 4월 23일 이발디가 수술을 할 것이라고 공고하였고, 그가 4주에서 6주로 나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6월 25일 이발디는 60일간 부상자 명단으로 옮겨졌다. 7월 초순에 레드삭스가 이발디의 복귀에 그를 더욱 가까운 역할에 이용할 것이라고 보고되었다. 그는 7월 18일 트리플 A 포터킷 레드삭스와 함께 재활 임무에 보내쪘고, 이틀 후에 활동적이었다. 이발디는 7월 후순에 보스턴과 함께 4개의 구원 출연을 이루어 투구한 3과 3분의 2 이닝에서 5개의 득점을 허용하였다. 레드삭스는 이어서 팀의 뎁스 차트에 더욱 가까운 역할로 브랜던 워크먼을 병단에 놓았다. 8월 중순에 이발디가 시즌의 나머지를 위하여 출발 선수로 돌아올 것이라고 공고되었다. 2019년 시즌을 위하여 전체로 이발디는 23개 (12개의 출발 경기)의 출연을 이루어 5.99 평균자책점과 67과 3분의 2 이닝에서 70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2 승 1 패를 기록하였다. 2020년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진행된 단축 시즌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낙점 받았다. 레드삭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13 대 2로 꺾으면서 4명의 타자들을 스트라이크아웃 시킨 동안 이발디는 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어 5개의 안타와 하나의 득점을 허용한 동안 6개의 이닝을 투구하였다. 8월 29일 이발디는 오른쪽 종아리 변형의 이유로 8월 26일로 소급된 10일간 부상자 명단에 놓였으며 9월 12일 활동 명단으로 돌아왔다. 2020년 레드삭스와 함께 전체로 이발디는 9개의 경기 (전부 출발 경기)에 나와 3.72 평균자책점과 투구한 28과 3분의 1 이닝에서 52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4 승 2 패의 기록을 수집하였다. 2021년 2020년 시즌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팀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선정되었다. 이 시즌에도 전반기에만 103.1이닝을 소화하는 등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소화하였고 그러한 공로를 인정 받으며 생애 첫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후반기에도 부상 없이 시즌을 소화하였고, 그 결과 3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82.1이닝을 소화하였고, 11승 9패에 195개의 탈삼진과 3.7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보스턴 레드삭스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으며,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이발디는 시즌 종료 후 아메리칸 리그 사이 영 상 4위에 선정되었다. 또한 2014년 이후 8시즌 만에 규정 이닝(162이닝)을 돌파하면서 그동안 이발디의 단점으로 꼽히던 건강 문제에서도 개선된 모습을 보여준 시즌이었다. 2022년 2022년 시즌에도 개막전 선발 투수로 선정되면서,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10번째로 3연속 개막전에 선발 등판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시즌에는 5월 17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전에서 한 이닝에 5개의 홈런을 허용한 선수로 기록되었고, 허리 염증, 우측 어깨 염증 등으로 인해 부상자 명단에 등재되는 등 불운한 시즌을 보냈다. 그 결과 20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09.1이닝을 소화하는 동안에 6승 3패에 103개의 탈삼진과 3.8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시즌 종료 후 원소속팀인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퀄리파잉 오퍼를 제시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였고, FA 자격을 취득하였다. 텍사스 레인저스 2022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취득하였고, 12월 27일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2년 34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외부 링크 199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텍사스주 출신 야구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선수 마이애미 말린스 선수 뉴욕 양키스 선수 탬파베이 레이스 선수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 텍사스 레인저스 선수 월드 시리즈 우승 선수 텍사스 A&M 대학교 동문
https://en.wikipedia.org/wiki/Nathan%20Eovaldi
Nathan Eovaldi
Nathan Edward Eovaldi ( ; born February 13, 1990) is an American professional baseball pitcher for the Texas Rangers of Major League Baseball (MLB). He has previously played in MLB for the Los Angeles Dodgers, Miami Marlins, New York Yankees, Tampa Bay Rays and Boston Red Sox. Eovaldi made his MLB debut in 2011. He was a World Series champion with the Red Sox in 2018 and has been selected as an All-Star in 2021 and 2023. Early life Nathan Edward Eovaldi was born on February 13, 1990, in Alvin, Texas. Eovaldi attended Alvin High School in Alvin, Texas, where he played for the school's baseball team. Eovaldi had Tommy John surgery to repair the ulnar collateral ligament in his right elbow during his junior year of high school. In 2008, Eovaldi's senior year, he was an honorable mention on Texas' All-State team. He committed to attend Texas A&M University on a college baseball scholarship. Professional career Draft and minor leagues The Los Angeles Dodgers selected Eovaldi in the 11th round of the 2008 MLB Draft. His draft stock had fallen because of his first Tommy John surgery. Eovaldi signed with the Dodgers, receiving a $250,000 signing bonus, forgoing his commitment to Texas A&M. He made his way through the Dodgers' farm system, pitching for the Gulf Coast Dodgers of the Rookie-level Gulf Coast League in 2008 and the Great Lakes Loons of the Class A Midwest League in 2009. In 2010, with the Inland Empire 66ers of San Bernardino of the Class A-Advanced California League, Eovaldi was selected to the mid-season California League all-star team. Eovaldi was promoted to the Chattanooga Lookouts of the Class AA Southern League in 2011 and was selected to the mid-season all-star game. He had a 6–5 win–loss record with a 2.62 earned run average (ERA) for the Lookouts, where he started 19 games. He was also selected to the post-season All-Star team. Los Angeles Dodgers (2011–2012) Eovaldi was called up to the majors for the first time on August 6, 2011, and was the starting pitcher that night against the Arizona Diamondbacks. In the game, he picked up the win, while pitching five innings, allowing only two runs while striking out seven. He also hit a single in his first major league at bat and scored a run. His seven strikeouts were tied for fourth in Dodgers' history for a major league debut and he was only the fourth Dodger pitcher to score a run in his debut since 1960. Eovaldi became the first Dodger starter since Danny McDevitt in the 1957 season to start his career with four games of five innings or more while allowing two runs or fewer. He made 6 starts for the Dodgers and was then moved to the bullpen in order to keep his innings down for the season. He pitched in four games out of the bullpen late in the season. His 2011 totals included a 1–2 record and 3.63 ERA. After beginning the 2012 season with Chattanooga, Eovaldi made his first appearance of the season for the Dodgers on May 29 when he started against the Milwaukee Brewers. He had four strikeouts, allowed 4 hits and 2 runs through 7 innings in a 1–2 loss. In 10 starts with the Dodgers, he had a 1–6 record with a 4.15 ERA. Miami Marlins (2012–2014) On July 25, 2012, Eovaldi was traded, along with minor league pitcher Scott McGough, to the Miami Marlins for Hanley Ramírez and Randy Choate. In his first game with the Marlins, he got the win vs the San Diego Padres on July 28. He started 12 games for the Marlins in 2012, with a 3–7 record and 4.43 ERA. He finished the season with a 4–13 record in 22 games with a 4.30 ERA, a 1.51 walks plus hits per inning pitched (WHIP) ratio, 47 walks, and 78 strikeouts in innings pitched. In 2013, Eovaldi had a 4–6 record with a 3.39 ERA and 78 strikeouts in 18 starts. In 2014, Eovaldi had a 6–14 record with a 4.37 ERA. He allowed 223 hits, the most in the National League. He set new career highs with 33 games started and innings pitched. New York Yankees (2015–2016) On December 19, 2014, the Marlins traded Eovaldi, Garrett Jones, and Domingo Germán to the New York Yankees for Martín Prado and David Phelps. Eovaldi made his first start for the Yankees on April 10, 2015, against the Boston Red Sox, where he pitched innings, allowing two runs on eight hits. He was credited with a no decision as the Yankees lost to the Red Sox, 6–5 in 19 innings. Eovaldi developed a split-finger fastball, which led to improved results. From June 20 through August 24, Eovaldi pitched to an 8–0 record with a 2.93 ERA. In September, Eovaldi experienced elbow inflammation, ending his regular season. For the 2015 Yankees, Eovaldi went 14–3 with a 4.20 ERA, pitching innings in 27 starts. Eovaldi was prepared to pitch in the ALDS, but the Yankees were eliminated in the Wild Card Game. On August 16, 2016, it was announced that Eovaldi would miss the remainder of the 2016 season due to a torn flexor tendon and partially-torn ulnar collateral ligament in his pitching (right) elbow. Several days later, the Yankees announced that Eovaldi had undergone his second Tommy John surgery. With the 2016 Yankees, Eovaldi made 24 appearances (21 starts), registering a 9–8 record with 4.76 ERA in innings pitched. He was expected to miss the 2017 season, after which he would have become eligible for free agency. On November 23, the Yankees released Eovaldi. Tampa Bay Rays (2018) On February 14, 2017, Eovaldi signed a one-year, $2 million contract with the Tampa Bay Rays; the contract included a $2 million club option for the 2018 season. Eovaldi missed the entire 2017 season due to recovery from his prior elbow surgery. The Rays exercised the option going into the 2018 season. On March 28, 2018, it was revealed that Eovaldi was diagnosed with "loose bodies" in his elbow, and was ruled out indefinitely. On May 30, almost a year and a half since his last start, Eovaldi pitched against the Oakland Athletics, throwing six no-hit innings before being taken out due to pitch count considerations. With the 2018 Rays, Eovaldi made 10 appearances (all starts) with a 4.26 ERA and 3–4 record, while recording 53 strikeouts and eight walks in 57 innings pitched. Boston Red Sox (2018–2022) 2018 On July 25, 2018, the Rays traded Eovaldi to the Boston Red Sox in exchange for Jalen Beeks. Eovaldi made his Red Sox debut on July 29, going seven innings without giving up a run, as the Red Sox defeated the Minnesota Twins 3–0. With the 2018 Red Sox, Eovaldi made 12 appearances (11 starts) with a 3.33 ERA and 3–3 record, striking out 48 in 54 innings. In the 2018 playoffs, Eovaldi pitched seven innings in Game 3 of the Division Series against the New York Yankees, which the Red Sox won 16–1, giving the Yankees their most lopsided loss in postseason history. In Game 3 of the League Championship Series against the Houston Astros, Eovaldi pitched six innings, allowing just two runs, as the Red Sox won 8–2. Eovaldi also pitched innings of relief in Game 5 as Boston clinched the series win. In the 2018 World Series against the Los Angeles Dodgers, Eovaldi pitched shutout 8th innings in Games 1 and 2. Although he was originally slated to start Game 4, Eovaldi ended up the final reliever in the 18-inning marathon Game 3, the longest game in World Series history. Eovaldi threw 97 pitches over six innings of relief before giving up a walk-off home run to Max Muncy, which made him the losing pitcher. Eovaldi allowed three hits and one earned run, while throwing 36 more pitches than starter Rick Porcello. Eovaldi's 97 pitches set the record for the most in a World Series game by a reliever, and he became the first reliever to throw 6+ innings in a World Series game since Rick Rhoden did so in 1977. In the 13th inning, Boston had taken the lead but an error by Ian Kinsler allowed Los Angeles to tie the score, for which Kinsler later apologized to Eovaldi. Eovaldi received a standing ovation in Boston's clubhouse after the game. The Red Sox went on to win the next two games, winning the World Series in five games. After the World Series, Eovaldi filed for free agency. On December 6, 2018, Eovaldi signed a four-year, $68 million contract to return to the Red Sox. 2019 Eovaldi started the 2019 season with a 6.00 ERA in four starts, all no decisions, before being placed on the injured list on April 20 due to a "loose body" (typically bone fragments) in his pitching (right) elbow. The Red Sox subsequently announced that Eovaldi would have surgery on April 23, and expected him to be out from four to six weeks. On June 25, Eovaldi was moved to the 60-day injured list. In early July, it was reported that the Red Sox would use Eovaldi in a closer role upon his return. He was sent on a rehabilitation assignment with the Triple-A Pawtucket Red Sox on July 18, and was activated two days later. Eovaldi made four relief appearances with Boston in late July, allowing five earned runs in innings pitched. The Red Sox subsequently listed Brandon Workman as the closer on the team's depth chart. In mid-August, it was announced that Eovaldi would return to being a starter for the remainder of the season. Overall for the 2019 season, Eovaldi made 23 appearances (12 starts), recording a 5.99 ERA and 2–1 record with 70 strikeouts in innings. 2020 For the 2020 season, Eovaldi was named Boston's Opening Day starter (delayed into July due to the COVID-19 pandemic) by manager Ron Roenicke. Eovaldi got the win in that game, pitching six innings while allowing five hits and one run, while striking out four batters, as the Red Sox defeated the Baltimore Orioles, 13–2. On August 29, Eovaldi was placed on the 10-day injured list, retroactive to August 26, due to a right calf strain; he returned to the active roster on September 12. Overall with the 2020 Red Sox, Eovaldi appeared in nine games (all starts), compiling a 4–2 record with 3.72 ERA and 52 strikeouts in innings pitched. 2021 Eovaldi was Boston's Opening Day starter for the second year in a row, taking the loss as the Red Sox fell to the Orioles, 3–0. On July 4, he was named to the American League roster for the MLB All-Star Game. He finished the 2021 season with an 11–9 record, a 3.75 ERA and 195 strikeouts in innings. He gave up the fewest walks per nine innings of any major league pitcher, at 1.73. His 54 doubles allowed also led the major leagues. Eovaldi was the winning pitcher in the AL Wild Card Game, striking out eight batters and giving up four hits and one run in innings over the Yankees. He made one start in the Division Series, a no decision against Tampa Bay, and three appearances (two starts) in the League Championship Series, going 1–2 against Houston as the Red Sox were defeated in six games. Eovaldi finished fourth in American League Cy Young Award voting after the season. 2022 Eovaldi was Boston's Opening Day starter for the third year in a row, becoming the 10th Red Sox pitcher to do so. Facing Gerrit Cole and the Yankees, he went five innings and allowed three runs on five hits, ending with a no decision after Boston lost in extra innings, 6–5. On May 17, he became the third MLB pitcher (after Chase Anderson and Michael Blazek) to ever allow five home runs in one inning, doing so against the Houston Astros; in total, he allowed eight hits and six earned runs in innings in the eventual 13–4 loss. On May 28, Eovaldi threw his first major-league complete game in a 5–3 win against the Baltimore Orioles—he allowed seven hits, two earned runs, struck out six batters, and only issued one walk while throwing 108 pitches. On June 12, he was placed on the injured list with lower-back inflammation. He was reactivated by the team on July 15. Eovaldi returned to the injured list on August 23, due to right shoulder inflammation; he rejoined the team on September 29. In 20 starts with Boston during 2022, Eovaldi compiled a 6–3 record with 3.87 ERA while striking out 103 batters in innings. In early November 2022, Eovaldi elected to become a free agent. Texas Rangers (2023–present) On December 27, 2022, Eovaldi signed a two-year contract, with a third year vesting player option, with the Texas Rangers worth $34 million guaranteed. Pitching style As a starting pitcher, Eovaldi is associated primarily with his electric four-seam fastball, which he regularly throws at 96-97 mph, occasionally topping out at 101 mph. Although a pitcher with his high-velocity fastball would traditionally be labeled as a power pitcher, Eovaldi has not, for most of his career, accumulated the high strikeout totals associated with fellow hard-throwing right-handers like Jacob DeGrom and Justin Verlander. This phenomenon is explained by Eovaldi's regular use of his wide secondary arsenal to complement his fastball. Eovaldi throws a slider in the mid to high 80s, a cut fastball in the low 90s, a curveball in the high 70s, and a split-finger fastball in the high 80s, giving him a total of five distinct pitches. In 2021, he was the only pitcher to throw five different pitches at a rate of 10% or higher. Rather than exclusively trying overwhelm his hitters with a combination of hard fastballs in the strike zone and sliders thrown out of the zone, Eovaldi throws all five of his pitches within the strike zone in an effort to generate weak swings that result in ground balls or popups. The amount of weak bat-to-ball contact that Eovaldi generates is due to the difficulty of predicting which of his five distinct pitches will be thrown at a given time, leading even the most accomplished hitters to guess incorrectly and swing at a slow curveball when expecting a splitter, for example. Personal life Eovaldi and his wife, Rebekah, have one son and one daughter and reside in Houston. References External links 1990 births Living people American League All-Stars Sportspeople from Brazoria County, Texas Baseball players from Texas Major League Baseball pitchers Los Angeles Dodgers players Miami Marlins players New York Yankees players Tampa Bay Rays players Boston Red Sox players Texas Rangers players Gulf Coast Dodgers players Ogden Raptors players Great Lakes Loons players Arizona League Dodgers players Inland Empire 66ers players Chattanooga Lookouts players Jupiter Hammerheads players Jacksonville Suns players Charlotte Stone Crabs players Durham Bulls players Pawtucket Red Sox players American people of Italian descent
https://ko.wikipedia.org/wiki/%EB%A8%B8%EB%A6%BF%EB%8B%88%20%EA%B0%90%EC%97%BC
머릿니 감염
증상 머릿니는 일반적으로 불편하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가장 흔한 증상은 머리 가려움증으로 초기 감염 후 3주에서 4주까지 악화된다. 물린 반응은 매우 약하고 머리카락 사이에는 거의 볼 수 없다. 머리카락을 옆으로 밀 때 머리카락을 길게 씹을 때 특히 많이 볼 수 있다. 국소 림프절과 열의 붓기는 드물다. 가려움증은 피부 붕괴를 일으킬 수 있으며 드물게 세균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머릿니는 전염병 인 티푸스(louse-born episemic typhus)와 바 토넬 라 퀸 타나(Bartonella quintana)를 전염시킬 수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머릿니가 이 감염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인 머릿니는 일반적으로 감염된 사람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퍼진다. 머리띠와 같은 침구류 또는 의복을 공유하여 전파되는 것은 훨씬 덜 일반적이다. 머릿니 감염의 원인은 청결과 관련이 없다. 모발의 길이 나 머리카락을 닦는 빈도는 감염의 위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의 체는 이미 이가 있는 사람의 신체, 의복 또는 기타 개인 용품과 직접 접촉하여 퍼진다. 감염된 사람과의 친밀한 접촉으로 가장 자주 전염된다. 머릿니는 머리카락, 이가 있는 옷, 음부 이빨은 주로 사타구니 근처의 머리카락에서 발생한다. 벼룩은 피부에 묻힐 수 없다. 인간에게 감염되는 다른 이가는 몸의 느슨 함과 게 느슨한 것이다. 이 3 종의 발톱은 특정한 모발 직경에 부착되도록 되어있다. 진단 이 상태는 머리카락에 있는 이를 발견함으로써 진단된다. 빈 알을 찾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돋보기를 사용하거나 아이의 머리카락에 빗을 달아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경우, 어린이를 보건 전문가에게 의뢰 할 수 있다. 그러나, 맹검 된 증세가 활발한 것으로 오인되고있는 상태는 과다 진단된다. 결과적으로,이 약을 죽이는 치료법은 감염되지 않은 어린이보다 더 자주 사용된다. louse comb의 사용은 살아있는 이의 검출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두 방법 모두 목 주변의 귀와 목 근처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빗의 치아 사이에 수집 된 물질을 검사하기 위해 돋보기를 사용하면 오진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새끼 만의 존재는 활동적인 두부 감염의 정확한 지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흰 새끼는 빈 계란 상자이며 갈색 새끼는 살아있는 새끼 유충을 포함 할 수 있다. 니트를 결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두 개의 손톱 사이에서 그것을 짠다는 것이다. 달걀이 터지면서 독특한 팝음을 낸다. 머리에 새끼를 낳은 아이들은 살아있는 이가나 계란에 감염 될 확률이 35-40 %이다. 이가 검출되면 가족 전체를 점검해야하며(특히 13 세 이하의 어린이)에는 빗을 사용해야하며 살아있는 이가있는 사람 만 치료해야한다. 살아있는 이가 검출되지 않는 한, 아이는 두부 감염에 대해 음성으로 간주되어야한다. 따라서 어린 아이는 머리에 살아있는 이가 발견되었을 때만 살생제로 치료해야한다.(두피가 가려워서가 아니기 때문에 머리카락에 새끼를 낳지 않아서가 아니다.) 예방 louse comb을 사용하여 정기적으로 아이의 머리를 검사하면 조기에 louse 감염을 진단 할 수 있다. 조기 진단은 치료를 쉽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 될 가능성을 줄인다. 미성년자의 출산이 흔한시기와 지역에서, 주간의 아동 검사, 특히 부모가 실시한 4 ~ 15세의 검사는 통제를 도울 것이다. 추가 검사는 아이가 감염된 개인과 접촉 한 경우, 아이가 자주 머리를 긁는 경우 또는 갑자기 아이의 머리카락에 나타나면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 긴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은 머릿니 감염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감염된 개체와 접촉 한 옷, 수건, 침구, 빗 및 브러시는 2일 이상 방치하거나 30분 동안 60°C (140° F)에서 씻어서 소독 할 수 있다. 성충은 혈액형없이 1 ~ 2일만 살아남을 수 있으며 인체의 온기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집과 가구에 대한 살충 처리는 필요하지 않다. 치료 머릿니에는 여러 가지 치료법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빗, 면도기, 의료용 크림 및 열기구가 있다. 의료용 크림은 대개 일주일에 두 번씩 치료해야한다. 머릿니는 퍼짐의 위험이 낮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서 집을 지키는 정당화가 아니다. 기계적 측정 머리를 면도 효과적으로 이가를 치료할 수 있다. 몇 주 동안 하루에 몇 차례 빗질하는 습관은 사람들의 절반에 감염을 제거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여분의 미세한 치아를 가진 특별한 머릿니를 사용해야한다. 이것은 임신 한 영유아에게 권장되는 방법이다. 또 다른 치료법은 헤어 드라이어로 가열된 공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약물 이 약을 죽일 수있는 약이 많이 있다. Dimethicone은 낮은 비율의 부작용으로 70 ~ 97 %의 효과를 나타내므로 선호하는 치료법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물리적 수단에 의해 작용하며 살충제 저항성의 증거는 없다. 이버 멕틴은 약 80 % 효과적이지만 국부적 인 피부 자극을 유발할 수 있다. 말라 티온은 약 90 %의 효과가 있지만 독성의 가능성이 있다. 퍼 메스 린(Permethrin)과 같은 피레스 로이드(pyrethroids)는 흔히 사용되는 반면, 이가 내성으로 인해 효능이 떨어진다. 유효성은 연구 된 인구에 따라 10에서 80 %까지 다양하다. 로션 내의 약제는 샴푸 내에서보다 효과가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벤질 알코올은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표준 치료법보다 나은지는 분명치 않다. 대체의학 티 트리 오일은 머릿니 치료제로 홍보되고 있다. 그러나 그 효과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금주의 치료에 대한 2012년 리뷰는 금기 때문에 피부 자극이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고 기름의 안전과 효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린이를위한 티 트리 오일의 사용을 권장했다. ] 식초, 이소 프로필 알콜, 올리브 오일, 마요네즈 또는 샤워 캡 밑에 녹은 버터와 같은 기타 가정 요법은 반증되었다. 질병 통제 예방 센터(CDC)는 수영이 이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일부 치료의 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환경 치료를 마친 후, 사람들은 종종 자동차 좌석, 코트 두건 및 소파와 같이 머리가 깔린 모든 부위를 씻으라는 지시를받는다.하지만 성인 이가 없으면 2일 이내에 피없이 죽을 것이므로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식사 및 새롭게 부화 한 이가 부화 한 지 몇 분 만에 죽는다. 빗이나 빗질은 5 ~ 10분 동안 끓는 물에 흘려 보낼 수 있다. 얼음 결정이 이의 세포 내에 형성되도록하기 위해 물의 빙점보다 훨씬 낮은 24시간 동안 항목을 동결시킬 수 있다. 역학 필요] 4 세에서 13 세 사이의 어린이가 가장 많이 감염된 그룹이다. 미국에서는 아프리카 계 미국인 어린이가 감염율이 낮다. 영국의 국민 건강 보험(National Health Service)과 미국의 여러 보건 당국은 이가 더 붙이기 쉽고 물가에 달라 붙기 쉽기 때문에 깨끗한 머리카락을 선호한다고보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된다. 머릿니(Pediculus humanus capitis)의 감염은 3-10 세 아동과 그 가족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한다. 암컷은 수컷 두 번이나 수컷을 두 번이나 낳고, Afro-Caribbean이나 다른 흑인의 출현은 모발의 일관성으로 인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이 아이들은 부화하는 새끼를 가질 수 있으며 살아있는 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머리 접촉으로 옮길 수 있다. 사회와 문화 Louse에게(숙녀의 모자에). 아마도 로버트 번즈(Robert Burns)의 유명한시에서 발생하는 소아 마비 포경염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화적 언급일 것이다. 다른 동물 일반적으로 벼룩 유행은 소아 병증(pediculosis)으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포유류 및 조류 종에서 발생한다. 다른 숙주 종에 감염된 벼룩은 인간의 머릿니 감염을 유발하는 것과 동일한 유기체가 아니며, 또한 인간을 감염시키는 3 종의 쥐 종은 다른 숙주 종에 감염되지 않는다. 각주 외부 링크 CDC: Head lice 질병
https://en.wikipedia.org/wiki/Head%20lice%20infestation
Head lice infestation
Head lice infestation, also known as pediculosis capitis, is the infection of the head hair and scalp by the head louse (Pediculus humanus capitis). Itching from lice bites is common. During a person's first infection, the itch may not develop for up to six weeks. If a person is infected again, symptoms may begin much more quickly. The itch may cause problems with sleeping. Generally, however, it is not a serious condition. While head lice appear to spread some other diseases in Africa, they do not appear to do so in Europe or North America. Head lice are spread by direct contact with the hair of someone who is infected. The cause of head lice infestations in children is not related to cleanliness. Other animals, such as cats and dogs, do not play a role in transmission. Head lice feed only on human blood and are only able to survive on human head hair. When adults, they are about 2 to 3 mm long. When not attached to a human, they are unable to live beyond three days. Humans can also become infected with two other lice – the body louse and the crab louse. To make the diagnosis, live lice must be found. Using a comb can help with detection. Empty eggshells (known as nits) are not sufficient for the diagnosis. Possible treatments include: combing the hair frequently with a fine tooth comb or shaving the head completely. A number of topical medications are also effective, including malathion, ivermectin, and dimethicone. Dimethicone, which is a silicone oil, is often preferred due to the low risk of side effects. Pyrethroids such as permethrin have been commonly used; however, they have become less effective due to increasing pesticide resistance. There is little evidence for alternative medicines. Head-lice infestations are common, especially in children. In Europe, they infect between 1 and 20% of different groups of people. In the United States, between 6 and 12 million children are infected a year. They occur more often in girls than boys. It has been suggested that historically, head lice infection were beneficial, as they protected against the more dangerous body louse. Infestations may cause stigmatization of the infected individual. Signs and symptoms Head lice are generally uncomfortable, but typically do not constitute a serious condition. The most common symptom is itching of the head, which normally worsens 3 to 4 weeks after the initial infestation. The bite reaction is very mild, and it can be rarely seen between the hairs. Bites can be seen, especially in the neck of long-haired individuals when the hair is pushed aside. Swelling of the local lymph nodes and fever are rare. Itching may cause skin breakdown and uncommonly result in a bacterial infection. Many individuals do not experience symptoms. Itching may take 2–6 weeks to develop upon first infestation, and sooner in subsequent infestations. In Ethiopia, head lice appear to be able to spread louse-born epidemic typhus and Bartonella quintana. In Europe, the head lice do not appear to carry these infections. Transmission Head lice spreads through direct contact of the head of an infested person with the head of a non-infested person. The presence of live lice indicates an active infestation while the presence of nits indicates a past or currently inactive infection with the potential to become active. Head lice do not leap or spring as a means to transfer to their hosts; instead, they move by crawling. Transmission by indirect contact (e.g. sharing bedding, clothing, headwear, the same comb) is much less common. The cause of head lice infestations is not related to cleanliness. Neither hair length nor how often the hair is brushed affects the risk of infection. Pets are not vectors for head lice. Other lice that infest humans are the body louse and the crab louse (aka pubic lice). The claws of these three species are adapted to attach to specific hair diameters. Pubic lice are most often spread by sexual contact with an infested person. Body lice can be found on clothing and they are not known to burrow into the skin. Diagnosis The condition is diagnosed by finding live lice and unhatched eggs in the hair. Finding empty eggs is not enough. Dandruff, lint, sand, hair casts, and dried hairspray, can be mistaken for eggs and nits. This is made easier by using a magnifying glass or running a comb through the child's wet hair, the latter of which is the most assured method of diagnosis and can be used to monitor treatment. In questionable cases, a child can be referred to a health professional. However, head lice infestation is commonly overdiagnosed, with extinct infestations being mistaken for active ones. Infestations are only considered extinct if nits are more than 0.25 inches away from the scalp and nymphs and adult lice are absent. As a result, lice-killing treatments are more often used on non-infested than infested children. The use of a louse comb is the most effective way to detect living lice. With both methods, special attention should be paid to the area near the ears and the nape of the neck. The use of a magnifying glass to examine the material collected between the teeth of the comb could prevent misdiagnosis. The presence of nits alone, however, is not an accurate indicator of an active head louse infestation. Generally, white nits are empty egg casings, while brown nits may still contain viable louse larva. One way of determining the nit is to squeeze it between two fingernails; it gives a characteristic snapping pop sound as the egg bursts. Children with nits on their hair have a 35–40% chance of also being infested with living lice and eggs. If lice are detected, the entire family needs to be checked (especially children up to the age of 13 years) with a louse comb, and only those who are infested with living lice should be treated. As long as no living lice are detected, the child should be considered negative for head louse infestation. Accordingly, a child should be treated with a pediculicide only when living lice are detected on their hair (not because he/she has louse eggs/nits on the hair and not because the scalp is itchy). Prevention Examination of the child's head at regular intervals using a louse comb allows the diagnosis of louse infestation at an early stage. Early diagnosis makes treatment easier and reduces the possibility of infesting others. In times and areas when louse infestations are common, weekly examinations of children, especially those 4–15 years old, carried out by their parents, will aid control. Additional examinations are necessary if the child came in contact with infested individuals, if the child frequently scratches their head, or if nits suddenly appear on the child's hair. Clothes, towels, bedding, combs, and brushes, which came in contact with the infested individual, can be disinfected either by leaving them outside for at least two days or by washing them at 60 °C (140 °F) for 30 minutes. This is because adult lice can survive only one to two days without a blood meal and are highly dependent on human body warmth. Treatment There are a number of treatments effective for head lice. These methods include combs, shaving, medical creams, and hot air. Medical creams usually require two treatments a week apart. Head lice are not justification to keep children home from school as the risk of spread is low. Mechanical measures Wet combing (mechanical removal of lice through combing wet hair) can be used as treatment measure for those who are too young for pediculicide treatment, which is intended for 6 years of age or older. Wet combing a few times a day for a few weeks may also get rid of the infestation in half of people. This requires the use of a special lice comb with extra fine teeth. This is the recommended method for infants and women who are pregnant. Shaving the head can also effectively treat lice. Another treatment is the use of heated air applied by a hair dryer. This can be of special use in the early stages of an infestation, since it has very high mortality for eggs. Medications There are many medications which can kill lice. Dimethicone is between 70 and 97% effective with a low rate of side effects, and thus is seen as the preferred treatment. It works by physical means and there is no evidence of pesticide resistance. Ivermectin is around 80% effective, but can cause local skin irritation. Malathion has an effectiveness around 90%, but there's the possibility of toxicity. Pyrethroids such as permethrin, while commonly used, have lower rates of effectiveness due to the resistance among lice. Effectiveness varies from 10 to 80%, depending on the population studied. Medications within a lotion appear to work better than those within a shampoo. Benzyl alcohol appears effective but it is unclear if it is better than standard treatments. Abametapir was approved for medical use in the United States in July 2020. Resistance to several commonly used treatments is increasing worldwide, with patterns of resistance varying by region. Head lice have demonstrated resistance to permethrin, malathion, phenothrin, and carbaryl in several countries around the world. A previous method used to delay resistance included utilizing a rotating list of recommended insecticides by health authorities. The mosaic model is the current recommendation, in which it is advised to use one product for a treatment course, followed by a different insecticide from another substance class if the first treatment fails. Home remedies Tea tree oil has been promoted as a treatment for head lice; however, there is no clear evidence of its effectiveness. A 2012 review of head lice treatment recommended against the use of tea tree oil for children because it could cause skin irritation or allergic reactions, because of contraindications, and because of a lack of knowledge about the oil's safety and effectiveness. Other home remedies, such as putting vinegar, isopropyl alcohol, olive oil, mayonnaise, or melted butter under a shower cap, have been disproven. The CDC states that swimming has no effect on drowning lice, and can decrease the effectiveness of some treatments. Environment After treatment, people are often instructed to wash all bedding and vacuum all areas the head may have been, such as car seats, coat hoods, and sofas, but this is not always necessary, since adult lice will die within 2 days without a blood meal, and newly hatched lice die within minutes of hatching. Combs and brushes may be deloused in boiling water for 5–10 minutes. Items may also be frozen for 24 hours well below the freezing point of water to ensure that ice crystals form within the cells of the lice. Outbreak management In addition to environmental management, an outbreak of head lice infestation requires synchronous treatment of all who are infested and evaluation of those who have been exposed or are suspected to have head lice. Synchronous ovoidal dimethicone treatment has been shown to successfully manage and terminate outbreaks, and a single treatment is likely sufficient. Other treatment methods can be repeated 8–10 days following initial treatment, and may sometimes require a third treatment. Outbreak status and treatment effectiveness can be monitored using the wet combing method. Epidemiology The number of cases of human louse infestations (or pediculosis) has increased worldwide since the mid-1960s, reaching hundreds of millions annually. It is estimated between 1 and 20% of specific groups in Europe are infected. Despite improvements in medical treatment and prevention of human diseases during the 20th century, head louse infestation remains stubbornly prevalent. In 1997, 80% of American elementary schools reported at least one outbreak of lice. Lice infestation during that same period was more prevalent than chickenpox. About 6–12 million children between the ages of 3 and 11 are treated annually for head lice in the United States alone. High levels of louse infestations have also been reported from all over the world, including Israel, Denmark, Sweden, U.K., France, and Australia. The United Kingdom's National Health Service report that lice have no preference for any type of hair be it clean, dirty, or short. The number of children per family, the sharing of beds and closets, hair washing habits, local customs and social contacts, healthcare in a particular area (e.g. school), and socioeconomic status were found to be factors in head louse infestation in Iran. Other studies found no relationship between frequency of brushing or shampooing. The California Department of Public Health indicates that chronic head lice infestation may be a sign of socioeconomic or family problems. Children between 4 and 13 years of age are the most frequently infested group. In the U.S., African-American children have lower rates of infestation. Head lice (Pediculus humanus capitis) infestation is most frequent on children aged 3–10 and their families. Females get head lice twice as often as males, and infestation in persons of Afro-Caribbean or other black descent could be rare due to difference in hair shape or width. But these children may have nits that hatch and the live lice could be transferred by head contact to other children. Stigma Head lice infestations are notably common, as is the stigma associated with those who experience infestations. Such stigma is even evidenced in the English language as the term "lousy", an adjective that describes something as very poor, bad, or disgusting. Misperceptions of those infected with head lice include that it is associated with low socioeconomic status, poor hygiene, unhealthiness, immigration status, and homelessness. Though these negative beliefs are unfounded, they can lead to consequences for both the caregivers and the affected individual, such as social exclusion and isolation from peers, victim-blaming, caregiver strain, inappropriate or unsafe treatment practices, and missed work or school. Public-health implications Over-treatment or mismanagement of head lice, which can be driven by stigma, has important implications at the level of the individual and community. Though evidence-based guidelines from the CDC, 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 (AAP) and National Association of School Nurses (NASN) all recommend discontinuing "no-nit" policies in schools (meaning that a child does not need to be free of nits before returning to school), 80 percent of schools in the United States still maintain stringent policies that prevent children with infestations from attending. Thus, to foster a return to school in a timely fashion, these policies can encourage unsafe or harsh treatment practices, including chemicals like bleach or kerosene. Similarly, over-treatment of head-lice using pesticide-based pediculicides has been linked to increased resistance and declining efficacy of these treatments. Society and culture To a Louse (on a lady's bonnet). Perhaps the most widely known cultural reference to pediculosis capitis, occurring in a noted poem by Robert Burns. Other animals Lice infestation in general is known as pediculosis, and occurs in many mammalian and bird species. Lice infesting other host species are not the same organism as that which causes head lice infestations in humans, nor do the three louse species which infest humans infest any other host species. References External links CDC: Head lice Parasitic infestations, stings, and bites of the skin Arthropod infestations Wikipedia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Wikipedia emergency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9E%98%ED%86%B3%ED%8E%98%EC%8A%A4%ED%8A%B8
가래톳페스트
가래톳페스트 또는 림프절페스트는 페스트균에 의해 야기되는 3가지 페스트중 하나이다.박테리아에 노출된 후 1~7일 후 독감같은 증상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열, 두통, 구토가 포함된다. 박테리아가 피부에 들어간 곳과 가장 가까운 부위에서 림프절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느껴진다. 때로는 부어오른 림프절이 끊어지기도 한다. 세 종류의 페스트는 감염 경로에 따른 구분인데, 선 페스트, 폐 페스트, 패혈 페스트가 있다. 선 페스트는 주로 작은 동물에 기생하는 감염된 벼룩에 의해 전염된다. 또한 죽은 전염병에 감염된 동물의 체액에 노출되어 생길 수도 있다. 페스트균인 벼룩이 문 피부를 통해 몸 속으로 침입하면, 박테리아는 림프관을 타고 림프절로 들어와 부어오르게 한다. 혈액과 가래, 림프액 등을 검사하여 박테리아를 찾아냄으로써 진단한다. 예방은 전염병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죽은 동물을 다루지 않는 것과 같은 공중 보건 조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백신은 예방에 효과가 거의 없으며, 스트렙토마이신, 젠타마이신, 독시 사이클린을 포함한 여러 항생제가 치료에 효과적이다. 치료를 받지 않으면 감염자의 30~90% 가량이 사망할 수 있다. 사망은 주로 발병 10일 이내로 일어나며, 치료시에도 10%가량의 사망률을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1년에 약 650건의 문서화된 사례가 발생하며, 120명 가량이 사망한다. 21세기에 이 병이 주로 발생하는 지역은 아프리카이다. 페스트는 14세기에 발생하여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휩쓴 흑사병의 원인으로 여겨지며, 이때 사망자는 5천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당시 유럽 인구의 약 25~60% 에 달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노동 인구가 사망했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수요의 증가로 임금이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일부 역사 학자들은 이를 유럽 경제 발전의 전환점으로 여기기도 한다. 징후와 증상 선 페스트의 가장 잘 알려진 증상으로 알려진 하나 이상의 감염과 서혜 임파선종이라는 림프절의 통증이 있다. 감염된 벼룩에 물려 전염된 후, 페스트균은 염증이 있는 림프절에 국한되어 식민지화되고 번식하기 시작한다. 서혜 임파선종은 겨드랑이, 대퇴부, 사타구니 및 목 부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지 말단의 괴저 (즉, 손가락, 발가락, 입술과 코)는 또 다른 흔한 증상이다. 물려서 전염되는 형태의 전염 때문에, 전염병은 병의 진행 중 첫 번째로 일어나기도 한다. 증상은 박테리아에 노출 며칠 후 갑자기 나타나며 증상은 다음과 같다. 오한 일반적인 아픈 느낌 (불쾌감) 높은 발열 > 39 ° C (102.2 ° F) 근육 경련 발작 부드럽고 통증이 있는 림프샘 부종으로 일반적으로 사타구니에서 발견되는 서혜 임파서종. 겨드랑이 또는 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가장 흔히 초기 감염 부위 (물린 상처 또는 긁힘)에서 발생한다. 붓기가 나타나기 전에 통증이 있을 수 있다. 발가락, 손가락, 입술, 코끝과 같은 말단의 괴저 . 다른 증상으로는 호흡 곤란, 혈액을 토하거나, 사지가 아프고, 기침, 극단적 통증 등이 있다. 추가 증상으로는 극심한 피로감, 위장 장애, 치근 (검은 점이 몸 전체에 흩어짐), 섬망, 혼수 상태 등이 있다. 참고 문헌 Alexander, John T. (2003) [First published 1980]. Bubonic Plague in Early Modern Russia: Public Health and Urban Disaster. Oxford, UK;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15818-2. OCLC 50253204. Carol, Benedict (1996). Bubonic Plague in Nineteenth-Century China.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8047-2661-0. OCLC 34191853. Biddle, Wayne (2002). A Field Guide to Germs (2nd Anchor Books ed.). New York: Anchor Books. ISBN 978-1-4000-3051-4. OCLC 50154403. Little, Lester K. (2007). Plague and the End of Antiquity: The Pandemic of 541–750. New York, 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84639-4. OCLC 65361042. Rosen, William (2007). Justinian's Flea: Plague, Empire and the Birth of Europe. London, England: Viking Penguin. ISBN 978-0-670-03855-8. Scott, Susan, and C. J. Duncan (2001). Biology of Plagues: Evidence from Historical Populations. Cambridge, UK; New York, 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80150-8. OCLC 44811929. Batten-Hill, David (2011). This Son of York. Kendal, England: David Batten-Hill. ISBN 978-1-78176-094-9.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 May 2013. Retrieved 27 August 2018. Kool, J. L. (2005). "Risk of Person-to-Person Transmission of Pneumonic Plague". Clinical Infectious Diseases. 40 (8): 1166&ndash, 1172. doi:10.1086/428617. PMID 15791518. 각주 페스트 설치류 매개 질병 세균성 인수공통감염병
https://en.wikipedia.org/wiki/Bubonic%20plague
Bubonic plague
Bubonic plague is one of three types of plague caused by the bacterium Yersinia pestis. One to seven days after exposure to the bacteria, flu-like symptoms develop. These symptoms include fever, headaches, and vomiting, as well as swollen and painful lymph nodes occurring in the area closest to where the bacteria entered the skin. Acral necrosis, the dark discoloration of skin, is another symptom. Occasionally, swollen lymph nodes, known as "buboes", may break open. The three types of plague are the result of the route of infection: bubonic plague, septicemic plague, and pneumonic plague. Bubonic plague is mainly spread by infected fleas from small animals. It may also result from exposure to the body fluids from a dead plague-infected animal. Mammals such as rabbits, hares, and some cat species are susceptible to bubonic plague, and typically die upon contraction. In the bubonic form of plague, the bacteria enter through the skin through a flea bite and travel via the lymphatic vessels to a lymph node, causing it to swell. Diagnosis is made by finding the bacteria in the blood, sputum, or fluid from lymph nodes. Prevention is through public health measures such as not handling dead animals in areas where plague is common. While vaccines against the plague have been developed,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recommends that only high-risk groups, such as certain laboratory personnel and health care workers, get inoculated. Several antibiotics are effective for treatment, including streptomycin, gentamicin, and doxycycline. Without treatment, plague results in the death of 30% to 90% of those infected. Death, if it occurs, is typically within 10 days. With treatment, the risk of death is around 10%. Globally between 2010 and 2015 there were 3,248 documented cases, which resulted in 584 deaths. The countries with the greatest number of cases are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Madagascar, and Peru. The plague is considered the likely cause of the Black Death that swept through Asia, Europe, and Africa in the 14th century and killed an estimated 50 million people, including about 25% to 60% of the European population. Because the plague killed so many of the working population, wages rose due to the demand for labor. Some historians see this as a turning point in European economic development. The disease is also considered to have been responsible for the Plague of Justinian, originating in the Eastern Roman Empire in the 6th century CE, as well as the third epidemic, affecting China, Mongolia, and India, originating in the Yunnan Province in 1855. The term bubonic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βουβών, meaning "groin." Cause The bubonic plague is an infection of the lymphatic system, usually resulting from the bite of an infected flea, Xenopsylla cheopis (the Oriental rat flea). Several flea species carried the bubonic plague, such as Pulex irritans (the human flea), Xenopsylla cheopis, and Ceratophyllus fasciatus. Xenopsylla cheopis was the most effective flea species for transmittal. In very rare circumstances, it can be transmitted through septicemic plague. Where the disease can be transmitted by direct contact with infected tissue or the respiratory droplets from an infected individual. The flea is parasitic on house and field rats and seeks out other prey when its rodent host dies. Rats were an amplifying factor to bubonic plague due to their common association with humans as well as the nature of their blood. The rat's blood allows the rat to withstand a major concentration of the plague. The bacteria form aggregates in the gut of infected fleas, and this results in the flea regurgitating ingested blood, which is now infected, into the bite site of a rodent or human host. Once established, the bacteria rapidly spread to the lymph nodes of the host and multiply. The fleas that transmit the disease only directly infect humans when the rat population in the area is wiped out from a mass infection. Furthermore, in areas with a large population of rats, the animals can harbor low levels of the plague infection without causing human outbreaks. With no new rat inputs being added to the population from other areas, the infection only spread to humans in very rare cases of overcrowding. Signs and symptoms After being transmitted via the bite of an infected flea, the Y. pestis bacteria become localized in an inflamed lymph node, where they begin to colonize and reproduce. Infected lymph nodes develop hemorrhages, which result in the death of tissue. Y. pestis bacilli can resist phagocytosis and even reproduce inside phagocytes and kill them. As the disease progresses, the lymph nodes can hemorrhage and become swollen and necrotic. Bubonic plague can progress to lethal septicemic plague in some cases. The plague is also known to spread to the lungs and become the disease known as the pneumonic plague. Symptoms appear 2–7 days after getting bitten and they include: Chills General ill feeling (malaise) High fever > Muscle cramps Seizures Smooth, painful lymph gland swelling called a bubo, commonly found in the groin, but may occur in the armpits or neck, most often near the site of the initial infection (bite or scratch) Pain may occur in the area before the swelling appears Gangrene of the extremities such as toes, fingers, lips, and tip of the nose. The best-known symptom of bubonic plague is one or more infected, enlarged, and painful lymph nodes, known as buboes. Buboes associated with the bubonic plague are commonly found in the armpits, upper femoral area, groin, and neck region. These buboes will grow and become more painful over time, often to the point of bursting. Symptoms include heavy breathing, continuous vomiting of blood (hematemesis), aching limbs, coughing, and extreme pain caused by the decay or decomposition of the skin while the person is still alive. Additional symptoms include extreme fatigue, gastrointestinal problems, spleen inflammation, lenticulae (black dots scattered throughout the body), delirium, coma, organ failure, and death. Organ failure is a result of the bacteria infecting organs through the bloodstream. Other forms of the disease include septicemic plague and pneumonic plague, in which the bacterium reproduces in the person's blood and lungs respectively. Diagnosis Laboratory testing is required in order to diagnose and confirm plague. Ideally, confirmation is through the identification of Y. pestis culture from a patient sample. Confirmation of infection can be done by examining serum taken during the early and late stages of infection. To quickly screen for the Y. pestis antigen in patients, rapid dipstick tests have been developed for field use. Samples taken for testing include: Buboes: Swollen lymph nodes (buboes) characteristic of bubonic plague, a fluid sample can be taken from them with a needle. Blood: blood cultures test blood samples for bacteria to find source of infection Lungs: Spirometry test are used to screen the lungs for diseases that effect the airways. Chest X-rays of the lungs are also used as an effective method of diagnosis. Prevention Bubonic plague outbreaks are controlled by pest control and modern sanitation techniques. This disease uses fleas commonly found on rats as a vector to jump from animals to humans. The mortality rate hits its peak during the hot and humid months of June, July, and August. The successful control of rat populations in dense urban areas is essential to outbreak prevention. One example is the use of a machine called the Sulfurozador, used to deliver sulphur dioxide to eradicate the pest that spread the bubonic plague, in Buenos Aires, Argentina during the early 18th century. Targeted chemoprophylaxis, sanitation, and vector control also played a role in controlling the 2003 Oran outbreak of the bubonic plague. Another means of prevention in large European cities was a city-wide quarantine to not only limit interaction with people who were infected, but also to limit the interaction with the infected rats. Treatment Several classes of antibiotic are effective in treating bubonic plague. These include aminoglycosides such as streptomycin and gentamicin, tetracyclines (especially doxycycline), and the fluoroquinolone ciprofloxacin. Mortality associated with treated cases of bubonic plague is about 1–15%, compared to a mortality of 40–60% in untreated cases. People potentially infected with the plague need immediate treatment and should be given antibiotics within 24 hours of the first symptoms to prevent death. Other treatments include oxygen, intravenous fluids, and respiratory support. People who have had contact with anyone infected by pneumonic plague are given prophylactic antibiotics. Using the broad-based antibiotic streptomycin has proven to be dramatically successful against the bubonic plague within 12 hours of infection. Epidemiology Globally between 2010 and 2015, there were 3,248 documented cases, which resulted in 584 deaths. The countries with the greatest number of cases are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Madagascar, and Peru. For over a decade since 2001, Zambia, India, Malawi, Algeria, China, Peru, and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had the most plague cases, with over 1,100 cases in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alone. From 1,000 to 2,000 cases are conservatively reported per year to the WHO. From 2012 to 2017, reflecting political unrest and poor hygienic conditions, Madagascar began to host regular epidemics. Between 1900 and 2015, the United States had 1,036 human plague cases, with an average of 9 cases per year. In 2015, 16 people in the western United States developed plague, including 2 cases in Yosemite National Park. These US cases usually occur in rural northern New Mexico, northern Arizona, southern Colorado, California, southern Oregon, and far western Nevada. In November 2017, the Madagascar Ministry of Health reported an outbreak to the WHO (World Health Organization) with more cases and deaths than any recent outbreak in the country. Unusually, most of the cases were pneumonic rather than bubonic. In June 2018, a child was confirmed to be the first person in Idaho to be infected by bubonic plague in nearly 30 years. A couple died in May 2019, in Mongolia, while hunting marmots. Another two people in the province of Inner Mongolia, China, were treated in November 2019 for the disease. In July 2020, in Bayannur, Inner Mongolia of China, a human case of bubonic plague was reported. Officials responded by activating a city-wide plague-prevention system for the remainder of the year. Also in July 2020, in Mongolia, a teenager died from bubonic plague after consuming infected marmot meat. History Yersinia pestis has been discovered in archaeological finds from the Late Bronze Age (~3800 BP). The bacteria is identified by ancient DNA in human teeth from Asia and Europe dating from 2,800 to 5,000 years ago. Some authors have suggested that the plague was responsible for the Neolithic decline. First pandemic The first recorded epidemic affected the Sasanian Empire and their arch-rivals, the Eastern Roman Empire (Byzantine Empire) and was named the Plague of Justinian (541–549 AD) after emperor Justinian I, who was infected but survived through extensive treatment. The pandemic resulted in the deaths of an estimated 25 million (6th century outbreak) to 50 million people (two centuries of recurrence). The historian Procopius wrote, in Volume II of History of the Wars, of his personal encounter with the plague and the effect it had on the rising empire. In the spring of 542, the plague arrived in Constantinople, working its way from port city to port city and spreading around the Mediterranean Sea, later migrating inland eastward into Asia Minor and west into Greece and Italy. The Plague of Justinian is said to have been "completed" in the middle of the 8th century. Because the infectious disease spread inland by the transferring of merchandise through Justinian's efforts in acquiring luxurious goods of the time and exporting supplies, his capital became the leading exporter of the bubonic plague. Procopius, in his work Secret History, declared that Justinian was a demon of an emperor who either created the plague himself or was being punished for his sinfulness. Second pandemic The Medieval Society’s increasing population was put to deadly halt when, In the Late Middle Ages, Europe experienced the deadliest disease outbreak in history. They called it the Great Dying or The Great Pestilence, later coined The Black Death. Lasting in potency for roughly 6 years, 1346-1352, the Black Death claimed one-third of the European human population. Having mortality rates as high as 70%-80%. Some historians believe that society subsequently became more violent as the mass mortality rate cheapened life and thus increased warfare, crime, popular revolt, waves of flagellants, and persecution. The Black Death originated in Central Asia and spread from Italy and then throughout other European countries. Arab historians Ibn Al-Wardni and Almaqrizi believed the Black Death originated in Mongolia. Chinese records also show a huge outbreak in Mongolia in the early 1330s. In 2022, researchers presented evidence that the plague originated near Lake Issyk-Kul in Kyrgyzstan. The Mongols had cut the trade route (the Silk Road) between China and Europe, which halted the spread of the Black Death from eastern Russia to Western Europe. The European epidemic may have begun with the siege of Caffa, an attack that Mongols launched on the Italian merchants' last trading station in the region, Caffa, in the Crimea. In late 1346, plague broke out among the besiegers and from them penetrated the town. The Mongol forces catapulted plague-infested corpses into Caffa as a form of attack, one of the first known instances of biological warfare. When spring arrived, the Italian merchants fled on their ships, unknowingly carrying the Black Death. Carried by the fleas on rats, the plague initially spread to humans near the Black Sea and then outwards to the rest of Europe as a result of people fleeing from one area to another. Rats migrated with humans, traveling among grain bags, clothing, ships, wagons, and grain husks. Continued research indicates that black rats, those that primarily transmitted the disease, prefer grain as a primary meal. Due to this, the major bulk grain fleets that transported major city's food shipments from Africa and Alexandria to heavily populated areas, and were then unloaded by hand, played a role in increasing the transmission effectiveness of the plague. Third pandemic The plague resurfaced for a third time in the mid-19th century; this is also known as "the modern pandemic". Like the two previous outbreaks, this one also originated in Eastern Asia, most likely in Yunnan, a province of China, where there are several natural plague foci. The initial outbreaks occurred in the second half of the 18th century. The disease remained localized in Southwest China for several years before spreading. In the city of Canton, beginning in January 1894, the disease had killed 80,000 people by June. Daily water traffic with the nearby city of Hong Kong rapidly spread the plague there, killing over 2,400 within two months during the 1894 Hong Kong plague. The third pandemic spread the disease to port cities throughout the world in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and the early 20th century via shipping routes. The plague infected people in Chinatown in San Francisco from 1900 to 1904, and in the nearby locales of Oakland and the East Bay again from 1907 to 1909. During the former outbreak, in 1902, authorities made permanent the Chinese Exclusion Act, a law originally signed into existence by President Chester A. Arthur in 1882. The Act was supposed to last for 10 years, but was renewed in 1892 with the Geary Act, then followed by the 1902 decision. The last major outbreak in the United States occurred in Los Angeles in 1924, though the disease is still present in wild rodents and can be passed to humans that come in contact with them. According to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the pandemic was considered active until 1959, when worldwide casualties dropped to 200 per year. In 1994, a plague outbreak in five Indian states caused an estimated 700 infections (including 52 deaths) and triggered a large migration of Indians within India as they tried to avoid the disease. It was during the 1894 Hong Kong plague outbreak that Alexandre Yersin isolated the bacterium responsible (Yersinia pestis), a few days after Japanese bacteriologist Kitasato Shibasaburō had isolated it. However, the latter's description was imprecise and also expressed doubts of its relation to the disease, and thus the bacterium is today only named after Yersin. Society and culture The scale of death and social upheaval associated with plague outbreaks has made the topic prominent in many historical and fictional accounts since the disease was first recognized. The Black Death in particular is described and referenced in numerous contemporary sources, some of which, including works by Chaucer, Boccaccio, and Petrarch, are considered part of the Western canon. The Decameron, by Boccaccio, is notable for its use of a frame story involving individuals who have fled Florence for a secluded villa to escape the Black Death. First-person, sometimes sensationalized or fictionalized, accounts of living through plague years have also been popular across centuries and cultures. For example, Samuel Pepys's diary makes several references to his first-hand experiences of the Great Plague of London in 1665–66. Later works, such as Albert Camus's novel The Plague or Ingmar Bergman's film The Seventh Seal have used bubonic plague in settings, such as quarantined cities in either medieval or modern times, as a backdrop to explore a variety of concepts. Common themes include the breakdown of society, institutions, and individuals during the plague, the cultural and psychological existential confrontation with mortality, and the allegorical use of the plague about contemporary moral or spiritual questions. Biological warfare Some of the earliest instances of biological warfare were said to have been products of the plague, as armies of the 14th century were recorded catapulting diseased corpses over the walls of towns and villages to spread the pestilence. This was done by Jani Beg when he attacked the city of Kaffa in 1343. Later, plague was used during the Second Sino-Japanese War as a bacteriological weapon by the Imperial Japanese Army. These weapons were provided by Shirō Ishii's units and used in experiments on humans before being used in the field. For example, in 1940, the Imperial Japanese Army Air Service bombed Ningbo with fleas carrying the bubonic plague. During the Khabarovsk War Crime Trials, the accused, such as Major General Kiyoshi Kawashima, testified that, in 1941, 40 members of Unit 731 air-dropped plague-contaminated fleas on Changde. These operations caused epidemic plague outbreaks. Continued research Substantial research has been done regarding the origin of the plague and how it traveled through the continent. Mitochondrial DNA of modern rats in Western Europe indicated that these rats came from two different areas, one being Africa and the other unclear. The research regarding this pandemic has greatly increased with technology. Through archaeo-molecular investigation, researchers have discovered the DNA of plague bacillus in the dental core of those that fell ill to the plague. Analysis of teeth of the deceased allows researchers to further understand both the demographics and mortuary patterns of the disease. For example, in 2013 in England, archeologists uncovered a burial mound to reveal 17 bodies, mainly children, who had died of the Bubonic plague. They analyzed these burial remains using radiocarbon dating to determine they were from the 1530s, and dental core analysis revealed the presence of Yersinia pestis. Other evidence for rats that are currently still being researched consists of gnaw marks on bones, predator pellets and rat remains that were preserved in situ. This research allows individuals to trace early rat remains to track the path traveled and in turn connect the impact of the Bubonic Plague to specific breeds of rats. Burial sites, known as plague pits, offer archaeologists an opportunity to study the remains of people who died from the plague. Another research study indicates that these separate pandemics were all interconnected. A current computer model indicates that the disease did not go away in between these pandemics. It rather lurked within the rat population for years without causing human epidemics. See also List of cutaneous conditions List of epidemics Miasma theory Plague (disease) Plague doctor Hidradenitis suppurativa References Further reading External links History of medieval medicine Plague (disease) Rodent-carried diseases Wikipedia emergency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Wikipedia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Zoonotic bacterial diseases
https://ko.wikipedia.org/wiki/%EC%95%9E%EB%BC%88%EC%82%AC%EC%9D%B4%EC%8B%A0%EA%B2%BD%20%EC%A6%9D%ED%9B%84%EA%B5%B0
앞뼈사이신경 증후군
앞뼈사이신경 증후군, 전방 골간 신경 증후군(前方骨間神經症候群, anterior Interosseous syndrome) 또는 킬로 네빈 증후군 I(Kiloh-Nevin Syndrome I)은 정중신경의 운동 가지인 앞뼈사이신경의 손상으로 아래팔에 통증을 유발하고 특징적으로 엄지와 검지로 집는 운동이 약화된다. AIN 증후군의 대부분의 경우는 일시적인 신경염으로 인한 것이지만 AIN의 압박에 의해 증후군이 발생될 수도 있다. 정중 신경에 대한 외상도 AIN 증후군의 원인 중 하나이다. 상지 외과 의사들 사이에 여전한 논란이 존재하나, AIN 증후군은 현재 대부분의 경우 신경염으로 간주된다. 정확한 병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면역 반응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증후군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한적이며, 앞뼈사이신경 증후군의 치료와 관련하여 무작위 대조 연구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앞뼈사이신경 증후군의 자연적인 경과가 완전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수술 없이 치료받은 환자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증상이 늦게까지는 발병 1년부터 완화 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른 후향적 연구에서 수술을 받은 환자와 수술을 받지 않은 환자의 결과에는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감압술은 AIN 증후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수술 시행을 위해서는 신경을 압박하며 공간을 차지하는 병변의 위치가 확정되어야하고 1년 이상 보존적 치료를 받았음에도 지속적인 증상이 유지되어야 한다. 증상 대부분의 환자들은 아래팔에서 국부적인 통증을 경험한다. 통증은 때때로 팔오금에서 느껴진다고 알려지며 팔꿈치 통증은 이에 대한 주요 질환으로 보고되었다. 엄지와 검지를 사용한 집기운동의 약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임상적 징후 앞뼈사이신경의 손상에 의해 긴엄지굽힘근 (Flexor pollicis longus), 검지와 중지의 깊은손가락굽힘근 (Flexor digitorum profundus I & II), 네모엎침근 (pronator quadratus)이 약화될 수 있다. 앞뼈사이신경에는 피부 가지(cutaneous branch)가 없으므로 감각의 결손이 거의 없다. 원인 아래팔의 부상에 의한 신경의 압박이 가장 흔한 발병 원인이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깊은 근육의 출혈과 동반되는 관절융기위 골절, 아래팔 개방전복술에 의한 2차적인 상해, 팔꿈치의 탈구가 있다. 찔린 상처와 같은 관통 손상으로 인한 직접적인 외상은 증후군의 일반적인 원인이다. 섬유성 띠 또는 활꼴 (곡선) 인대는 앞뼈사이신경뿐만 아니라 정중신경을 포착하여 환자가 마비와 통증을 경험할 수 있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및 통풍성 관절염에 의해 앞뼈사이신경 포착이 일어날 수 있다. 팔신경얼기 신경염 (brachial plexus neuritis)과 같은 몸쪽 병변으로 인해 매우 유사한 증후군이 발생할 수 있다. 앞뼈사이신경 포착이나 압박 손상은 종종 손가락 인대 손상으로 오인되는데 이는 신경 자체가 운동신경이여서 다른 감각적인 결손이 동반되지 않아 손가락 인대 손상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부학 앞뼈사이신경은 정중신경의 운동신경 가지로 팔꿈치 바로 아래에서 분지된다. 이 신경은 앞뼈사이막 (anterior interosseous membrane)의 먼쪽으로 주행하며 긴엄지굽힘근 (Flexor Pollicis Longus), 검지와 중지의 깊은손가락굽힘근 (Flexor Digitorum Profundus), 네모엎침근 (Pronator Quadratus)를 지배한다. 진단 전기생리학적 검사는 앞뼈사이신경 증후군의 진단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신경 전도 검사 결과는 정상이거나 네모엎침근의 반응을 유도가 관찰될 수 있다. 근전도(EMG)는 일반적으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되며 긴엄지굽힘근 (Flexor Pollicis Longus), 검지와 중지의 깊은손가락굽힘근 (Flexor Digitorum Profundus), 네모엎침근 (Pronator Quadratus)의 이상을 드러낸다.⁠⁠ 킬로-네빈 증후군의 진단에 MRI나 초음파 영상의 유용성은 아직 불분명하다.⁠ 환자에게 손으로 'OK'모양을 해보라고 하면 환자는 'OK' 대신 삼각형 모양을 만든다. 이 '핀치 테스트 (Pinch-Test)'는 긴엄지굽힘근 (Flexor Pollicis Longus)과 검지의 깊은손가락굽힘근 (Flexor Digitorum Profundus)의 쇠약에 의한 엄지와 검지의 끝마디뼈의 굽힘의 약화를 보여준다. 이로 인해 집기운동 (pincer movement)이 약화되고 환자는 평평한 표면에서 동전과 같은 작은 물건을 집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치료 임상적 징후와 EMG(근전도)가 압박 신경증을 시사하면 외과적 감압술을 통해 눈에 띄는 증상 완화를 볼 수 있다. 팔신경얼기 신경염에서는 보존치료가 더 적절할 수 있다. 순간적인 회복이 일어난다고 알려져있으나 완치가 일어난다고 보긴 어렵다. 물리치료 또한 치료에 사용될 수 있으며 이는 통증과 증상에 따라 구체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연조직 마사지, 스트레칭 및 운동을 통해 신경 조직을 직접 움직일 수 있다. 역사 이 증후군은 1948년 Parsonage와 Turner에 의해 처음 설명되었고 1952년 Leslie Gordon Kiloh와 Samuel Nevin에 의해 앞뼈사이신경의 독자적인 병변으로 정의되었다. 각주 증후군 신경 질환
https://en.wikipedia.org/wiki/Anterior%20interosseous%20syndrome
Anterior interosseous syndrome
Anterior interosseous syndrome is a medical condition in which damage to the anterior interosseous nerve (AIN), a distal motor and sensory branch of the median nerve, classically with severe weakness of the pincer movement of the thumb and index finger, and can cause transient pain in the wrist (the terminal, sensory branch of the AIN innervates the bones of the carpal tunnel). Most cases of AIN syndrome are now thought to be due to a transient neuritis, although compression of the AIN in the forearm is a risk, such as pressure on the forearm from immobilization after shoulder surgery. Trauma to the median nerve or around the proximal median nerve have also been reported as causes of AIN syndrome. Although there is still controversy among upper extremity surgeons, AIN syndrome is now regarded as a neuritis (inflammation of the nerve) in most cases; this is similar to Parsonage–Turner syndrome. Although the exact etiology is unknown, there is evidence that it is caused by an immune-mediated response that can follow other illnesses, such as pneumonia or severe viral illness. Studies are limited, and no randomized controlled trials have been performed regarding the treatment of AIN syndrome. While the natural history of AIN syndrome is not fully understood, studies following patients who have been treated without surgery show that symptoms can resolve starting as late as one year after onset. Other retrospective studies have concluded that there is no difference in outcome in surgically versus nonsurgically treated patients. The role of surgery in AIN syndrome remains controversial. Indications for considering surgery include a known space-occupying lesion that is compressing the nerve (a mass) or fascial compression, and persistent symptoms beyond 1 year of conservative treatment. Symptoms and signs Patients may experience poorly localised, transient pain in the wrist, i.e. where the sensory branch of the AIN is mapped in the brain. The pain is sometimes referred into the cubital fossa and elbow pain has been reported as being a primary complaint.⁠ The characteristic severe impairment of the pincer movement of the thumb and index finger is most striking. Clinical signs In a pure lesion of the anterior interosseous nerve there is weakness of the long flexor muscle of the thumb (Flexor pollicis longus), the deep flexor muscles of the index and middle fingers (Flexor digitorum profundus I & II), and the pronator quadratus muscle. There is no sensory deficit since the anterior interosseous nerve has no cutaneous branch to skin, but there is a large sensory branch to the volar carpus, and transient wrist pain may be experienced. Causes Injuries of the forearm with compression of the nerve from swelling is the most common cause: examples include supracondylar fractures, often associated with haemorrhage into the deep musculature; injury secondary to open reduction of a forearm fracture; or dislocation of the elbow.⁠⁠ Direct trauma from a penetrating injury such as a stab wound is a possible cause for the syndrome. Fibrous bands or Arcuate ligament~arcuate (curved) ligaments may entrap the median as well as the anterior interosseous nerve, in which case a patient may experience hand numbness as well as wrist pain.⁠⁠ Very similar syndromes can be caused by more proximal lesions, such as brachial plexus neuritis.⁠ Anterior interosseous nerve entrapment or compression injury remains a difficult clinical diagnosis because it is mainly a motor nerve problem, and the syndrome is often mistaken for index finger and/or thumb tendon injury.⁠ Anatomy The anterior interosseous nerve is a branch of the median nerve, with a large sensory branch to the wrist bones, which arises just below the elbow. It passes distally, anteriorly along the interosseous membrane and innervates flexor pollicis longus, flexor digitorum profundus to index and middle finger as well as pronator quadratus, and supplies sensory feedback from the wrist bones, i.e. the carpal tunnel, not skin. Diagnosis Electrophysiologic testing is an essential part of the evaluation of anterior interosseous nerve syndrome. Nerve conduction studies may be normal or show pronator quadratus latency.⁠⁠ Electromyography (EMG) is generally most useful and will reveal abnormalities in the flexor pollicis longus, flexor digitorum profundus I and II and pronator quadratus muscles.⁠⁠ The role or MRI and ultrasound imaging in the diagnosis of Kiloh-Nevin syndrome is unclear.⁠ If asked to make the "OK" sign, patients will make a triangle sign instead. This 'pinch-test' exposes the weakness of the flexor pollicis longus muscle and the flexor digitorum profundus I leading to weakness of the flexion of the distal phalanges of the thumb and index finger. This results in impairment of the pincer movement and the patient will have difficulty picking up a small item, such as a coin, from a flat surface. Ericson's Test Ericson's Test is a clinical maneuver for assessing the strength of the FDP and FPL muscles in anterior interosseous nerve syndrome, and other proximal entrapments of the median nerve. In contrast to the "OK sign," Ericson's test isolates the action of the FDP and FPL while eliminating the contribution of the tenodesis effect and other adaptations that patients may use, usually unconsciously, to augment distal pincer strength. Failing to control for compensatory wrist tenodesis can mask an underlying proximal median nerve weakness in a patient who can otherwise make a normal OK-sign. While facing the patient in what resembles an arm wrestling stance, with elbows planted firmly on a level surface and maintained touching the thorax, the examiner uses one hand to lock the patient's wrist in neutral, around which the patient curls his fingers. With the other hand, the examiner then attempts to "peel" back the tips of each individual finger against patient resistance. It is crucial that motion of the upper extremity be restricted to the distal IP joint, and that the MP and PIP joints are in full flexion and wrist neutral or slightly flexed. If the distal flexors of the index finger and thumb are weak, the patient will be unable to resist this motion, and Ericson's test is considered positive for proximal median nerve weakness. Ericson's test is frequently positive for proximal median nerve weakness (of which AIN syndrome is but one subtype) even in the context of normal imaging, EMG, and nerve conduction studies, which highlights the clinical nature of the diagnosis. Overreliance on electrical diagnostic workup unfairly excludes patients who would otherwise benefit from surgical decompression. Treatment Surgical decompression can give excellent results if the clinical picture and the EMG suggest a compression neuropathy. In brachial plexus neuritis, conservative management may be more appropriate. Spontaneous recovery has been reported, but is said to be delayed and incomplete. There may be a role for physiotherapy in some cases, and this should be directed specifically towards the pattern of pain and symptoms. Soft tissue massage, stretches and exercises to directly mobilise the nerve tissue may be used.⁠ History The syndrome was first described by Parsonage and Turner in 1948⁠ and further defined as isolated lesion of the anterior interosseous nerve by Leslie Gordon Kiloh and Samuel Nevin in 1952. References External links Neurological disorders Mononeuropathies of upper limb Syndromes
https://ko.wikipedia.org/wiki/%ED%8B%B1%ED%86%A1
틱톡
틱톡(, , 더우인)은 장위밍(Zhang Yiming)이 2012년에 설립한 IT 기업 바이트댄스(ByteDance)가 소유하고 있는 글로벌 숏폼 비디오 플랫폼이다. 3초에서 10분까지 동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짧은 음악, 립싱크, 댄스, 코미디, 탤런트, 챌린지와 같은 영상을 제작 및 공유할 수 있는 동영상 공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다. 바이트댄스는 틱톡을 2016년 9월 중국 시장에 ‘더우인’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하며 1년만에 이용자 1억명을 돌파했다. 나아가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해 틱톡을 만들었으며, 2017년, 중국 본토 외 150개 국가 및 지역에서 75개의 언어로 iOS와 안드로이드용 틱톡을 출시했다. 또한 미국 비디오 앱 ‘뮤지컬리 (Musical.ly)’를 인수하며 지금의 틱톡 생태계를 완성했다. 현재 틱톡은 월평균 이용자 8억명, 전 세계 누적 다운로드 수 20억회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11월부터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틱톡과 더우인의 인터페이스는 거의 동일하지만 각자 콘텐츠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들의 서버는 각각 해당 앱을 사용할 수 있는 시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틱톡은 베이징의 바이트댄스 본사 외에도 더블린, 로스앤젤레스, 뉴욕, 런던, 파리, 베를린, 두바이, 뭄바이, 싱가포르, 자카르타, 서울, 도쿄 등 글로벌 오피스도 보유하고 있다. 틱톡과 더우인은 2016년 출시 이후 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미국, 터키, 러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2020년 7월 현재 더우인을 제외한 틱톡은 4년이 채 되지 않아 전 세계 7억 명에 가까운 이용자를 기록했다. 더우인은 2020년 4월 현재 월 5억 명 안팎의 실사용자들을 기록했다. 2020년 6월 케빈 메이어는 바이트댄스 모기업의 COO와 틱톡의 CEO가 됐지만, 입사 4개월 만인 8월 27일 사임했다. 이전에, 그는 월트 디즈니 소비자 직거래 & 인터내셔널의 회장을 역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0년 8월 3일 마이크로소프트(MS)나 다른 미국 기업 인수 협상에 실패할 경우 9월 15일 틱톡을 미국에서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틱톡은 먹방, 춤, 밈 등 다양한 형태의 영상들이 있다. 틱톡은 미국 LA, 런던, 싱가포르, 파리, 도쿄, 뭄바이, 두바이, 자카르타, 베를린, 서울, 베이징, 상하이에 글로벌 오피스를 두고 있다. 2018년 초에 틱톡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 된 앱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틱톡은 18세에서 35세의 이용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연혁 2016년 9월 - 서비스 개시 2017년 9월 -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확대가 시작됨 2017년 11월 - Musical.ly 인수 2018년 1월 - 태국에서 아이폰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다운로드 한 앱 1위 선정 2018년 8월 - Musical.ly와 융합됨. 명칭은 ‘TikTok’으로 통일되며, 양방의 어플 사용자는 하나의 플랫폼에서 영상 게시를 계속할 수 있게 됨 2018년 10월 - 소프트 뱅크, 미국 투자 펀드 KKR, 미국의 제너럴 아틀란틱 등의 기업이 Bytedance에 대한 투자 의사 표명. 틱톡은 2018년 1분기 전세계 애플 앱스토어 다운로드 순위에서 YouTube를 제치고 1위에 올랐으며,Tik Tok의 미국 월간 다운로드 수가 2018년 9월에 처음으로 YouTube,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냅챗을 넘어섰다. 진화 더우인(Douyin)은 중국 베이징에서 2016년 9월 바이트댄스에 의해 원래 ‘A.me’라는 이름으로 론칭된 뒤 2016년 12월 더우인(Douynin)으로 리브랜딩되었다. 바이트댄스는 더우인의 해외 진출을 계획했다. 바이트댄스의 창시자인 장위밍은 "중국은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4/5에 해당하는 다른 이들에게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로벌화는 필수다.”라고 말했다. 더우인은 200일 만에 개발돼 1년 만에 이용자가 1억명에 달했고, 매일 10억건 이상의 동영상을 시청했다. 틱톡은 2017년 9월 국제시장에 출시됐으며, 2018년 1월 23일 해외 앱스토어 무료 앱 다운로드 1위에 틱톡 앱이 올랐다. 중국에서 안드로이드 사용자를 배제한 모바일 리서치 업체 센서타워의 자료에 따르면 틱톡은 미국에서 8000만 번 이상 다운로드됐으며 전 세계적으로 20억 건에 달하는 다운로드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18년부터 지미 팰런, 토니 호크를 포함한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니퍼 로페즈, 제시카 알바, 윌 스미스, 저스틴 비버 등 다른 유명인들도 틱톡에 가입했다. 2019년 9월 3일 틱톡과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는 다년제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이번 협약은 NFL 100회 시즌 개막을 불과 이틀 앞두고 솔져필드에서 이뤄졌는데, 그 곳에서 틱톡이 계약을 기념하기 위해 팬들을 위한 활동을 주최했다. 이번 제휴에는 공식 NFL 틱톡 계정 출범이 수반되는데, 계정은 후원 동영상, 해시태그 도전 등 새로운 마케팅 기회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타시장 확대 틱톡은 2018년 10월 미국 내 최다 다운로드 앱으로 또 한번 선정됐고, 2019년 2월 틱톡은 더우인과 함께 중국 안드로이드 설치를 제외한 전 세계 10억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2019년 미디어는 틱톡을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7번째로 다운로드가 많은 모바일 앱으로 꼽았으며, 2018년과 2019년 애플 앱스토어에서도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제치고 가장 다운로드가 많은 앱으로 꼽았으며, 최근에는 오라클, 월마트와 계약을 맺었다. 더우인 더우인은 틱톡과는 별도의 앱으로 공식 웹사이트(www.douyin.com), 안드로이드는 APK Mirror에서, iOS용은 중국 본토의 앱 스토어에서 이용가능하다. 이 앱은 주로 중국에서 다운로드되며 사용자 층이 어린이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틱톡보다 다소 나이가 많은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 앱은 틱톡과 유사한 인플루언서 개인 인증 그리고 라이센스와 연간 수수료가 필요한 비즈니스 인증의 두 가지 다른 유형의 인증이 있다. 비즈니스 검증 사용자는 특정 시청자에게 홍보할 수 있으며 특정 위치 등 자신의 비디오가 보여질 위치를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더우인은 사용자들이 그들의 제품을 태그하고 광고할 수 있는 스토어를 보유하고 있고 사용자들은 브랜드 거래를 위해 인플루언서와 협력을 요청할 수 있다. 이 앱은 팬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중국 유명 인사와 여러 활동을 시작한 마케팅 캠페인 덕분에 인기를 끌었다. 특징 및 동향 틱톡 모바일 앱은 배경음악이 나오는 짧은 영상을 만들 수 있으며 속도가 높이거나, 낮추거나 필터를 사용하여 편집할 수 있고, 배경 음악 위에 그들만의 소리를 추가할 수도 있다. 앱으로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위해서는 업로드 전에 다양한 장르의 배경 음악을 선택하고 필터로 편집하여 속도 조절된 15초짜리 영상을 녹화한다. 그리고 틱톡이나 다른 소셜 플랫폼에서 공유하면 된다. 또한, 사용자들은 인기 있는 노래에 짧은 립싱크 비디오를 찍을 수도 있다. ‘반응’ 기능은 사용자들이 화면 위에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창을 두고 특정 비디오에 대한 리액션을 촬영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듀엣’ 기능은 사용자들이 한 쪽에 다른 비디오를 두고 촬영할 수 있게 해준다. 듀엣 기능은 뮤지컬리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용자가 아직 게시하기를 원하지 않는 동영상은 ‘초안’에 저장할 수 있다. 사용자는 ‘초안’을 보고 그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할 때 게시할 수 있다. 이 앱을 처음 다운로드 받을 경우 사용자들의 계정은 기본적으로 공개되어 있지만 사용자들은 설정을 통해 자신의 계정을 ‘개인'으로 전환할 수 있다. 개인 콘텐츠는 틱톡에 계속 표시되지만 계정 소유자가 자신의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지 않은 틱톡 사용자는 접근할 수 없다. 사용자는 댓글, 메시지, 반응 또한 듀엣 동영상을 통해 오직 친구만 사용자와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다른 사용자들도 가능하게 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사용자들은 계정이 개인계정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동영상을 ‘공개’, ‘친구에게만 공개’, ‘비공개’로 설정할 수 있다. 사용자는 계정의 콘텐츠에 따라 스팸이거나 부적절한 계정을 신고할 수 있다. 틱톡 산하에 있는 ‘부모를 위한’ 지원센터는 자녀에게 부적절한 콘텐츠는 차단되거나 신고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부모들을 안심시킨다. 틱톡의 ‘추천’ 페이지는 사용자의 활동을 바탕으로 사용자에게 맞춤 동영상을 추천하는 피드이다. 이는 틱톡의 인공지능(AI)이 사용자가 어떤 종류의 콘텐츠를 좋아했는지, 누구와 상호작용했는지, 무엇을 검색했는지를 분석하여 콘텐츠가 생성된다. 사용자들은 ‘너를 위해’ 페이지에서 동영상을 즐겨찾기에 추가하거나 관심없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틱톡은 사용자가 즐겨찾는 콘텐츠를 결합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상을 제공한다. 사용자와 그들의 콘텐츠는 틱톡의 운영 정책에 따라 16세 이상일 경우에만 ‘너를 위해’ 페이지에 표시될 수 있다. 16세 미만의 사용자는 ‘당신을 위한’ 페이지, 사운드 페이지 또는 어떠한 해시태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를 팔로우하면, ‘너를 위해’ 페이지의 왼쪽에 팔로잉 페이지가 있다. 팔로잉 페이지는 사용자가 팔로우하는 계정의 동영상만 볼 수 있는 페이지이다. 사용자는 ‘저장’ 섹션에 비디오, 해시태그, 필터, 소리를 추가할 수 있다. 그들이 동영상을 만들 때 저장된 섹션을 참고하거나 그곳에서 바로 동영상을 만들 수도 있다. 사용자들은 친구에게 동영상, 이모티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틱톡에는 사용자의 댓글을 바탕으로 동영상을 만드는 기능도 있다. 인플루언서는 ‘라이브’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기능은 팔로워가 최소 1,000명 이상이고 16세 이상인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다. 만일 18세 이상이라면 사용자의 팔로워가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가상의 선물을 보낼 수 있다. 2020년 가장 최신 기능 중 하나는 ‘small gestures’ 기능의 ‘virtual items’이다. 이는 중국의 큰 사회적 선물 관행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 기능이 추가된 이후 많은 뷰티 회사와 브랜드들이 이 기능에 참여하고 광고하기 위해 계정을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격리로 인해 소셜 선물이 인기를 끌었다. 틱톡 관계자에 따르면 이 캠페인은 “이런 힘든 시기에 틱톡 커뮤니티와 함께 지지와 격려의 의미를 쌓기 위해” 락다운의 결과로 시작되었다. 한편, 틱톡은 2020년 2월 부모가 자녀의 디지털 웰빙을 제어할 수 있는 ‘가족 안전 모드’를 발표했다. 이 모드에는 시간 관리 옵션, 제한 모드, 다이렉트 메시지의 제한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인공지능(AI) 틱톡은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콘텐츠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용자의 관심과 선호도를 분석하고, 사용자별로 개인화된 콘텐츠 피드를 전시한다. 틱톡은 동영상의 ‘좋아요’와 댓글, 동영상 시청 시간 등을 기준으로 사용자의 선호도를 분석하는 알고리즘을 갖췄다. 추천 동영상 목록이 있는 유튜브, 넷플릭스 등 기존 소비자 알고리즘과 달리 틱톡은 사용자의 개별 선호도를 해석해 즐길 만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유행 틱톡 내에는 밈, 립싱크, 코미디 영상 등 다양한 유행이 존재한다. 듀엣 기능은 이런 유행의 대부분을 이끌었다. 트렌드는 틱톡의 탐색 페이지나 검색 로고가 있는 페이지에 표시된다. 이 페이지는 앱 내에서 유행하는 해시태그와 챌린지를 나열한다. 그 중에는 #포즈챌린지(posechallenge), #필터바꾸기(filterswitch), #dontjudgemechallenge, #홈데코(homedecor) 등이 있다. 2019년 6월에 370억 뷰를 기록한 해시태그 #EduTok을 선보였다. 그 후 회사는 플랫폼 내의 교육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edtech 스타트업과 제휴를 시작했다. 이 앱은 전세계에 수많은 바이럴 트렌드, 인터넷 유명인사, 음악 트렌드를 낳았다. 2018년 8월 2일 틱톡으로 알려진 글로벌 플랫폼으로 탈바꿈한 Musical.ly에서 많은 스타들이 시작되었다. 로렌 그레이, 베이비 아리엘, 그리스틴 핸처, 잭 킹, 리사와 레나, 제이콥 사토리우스 등 많은 다른 사용자들이 있다. 로렌 그레이는 2020년 3월 25일 찰리 다멜리오가 추월하기 전까지 틱톡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팔로우한 개인이었다. 로렌은 플랫폼에서 4천만 팔로워에 도달한 최초의 틱톡 계정이었다. 찰리는 사상 처음으로 7천만 명의 팔로워를 달성했다. 지금까지 찰리 다멜리오가 플랫폼에서 가장 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개인으로 남아있다. 다른 크리에이터들은 플랫폼이 2018년 8월 2일 틱톡을 전세계에 출시하기 위해 Musical.ly와 합병한 후 명성을 얻었다. 샤를리 다멜리오와 같은 인플루언서가 그 예다. 샤를리는 입소문이난 또 다른 틱톡 사용자를 듀엣한 후 유명해졌다. 그녀는 또한 K CAMP의 ‘Lottery’라는 노래에 맞춰 ‘The Renegade’라는 춤을 추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찰리 다멜리오는 한 때 다른 틱톡 스타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둔 틱톡 협력 콘텐츠 회사인 ‘Hype House’에 속해 있었으나 몇 달 뒤 떠났다. Hype House는 데이지 키치, 체이스 허드슨, 알렉스 워렌, 쿠브르 애논, 토마스 페트루 등이 2019년 설립했다. 이 앱에서 성공을 거두며 인기를 얻은 다른 곡으로는 Arizona Zervas의 Roxanne, bbno$의 Lalala, Ashnikko의 Stupid, Ant Saunders의 Yellow Hearts, Doja Cat의 Say So와 Like That, Lizzo의 Truth Hurts, Megan Thee Stallion의 Savage와 Captain Hook, Melanie Martinez의 Play Date, Saweetie의 Tap In, DaBaby and Roddy Rich의 Rockstar가 있다. 또한 틱톡은 Lil Nas X의 Old Town Road 가 2019년 빌보드 핫 100 역사상 가장 긴 1위 곡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틱톡은 밴드가 전 세계 곳곳에서 명성을 끼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밴드 Fitz and The Tantrums는 아시아 투어를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많은 팔로워를 얻었다. 하지만, 틱톡은 플랫폼에서 사용되는 음악의 예술가에게 걸맞은 저작권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 곡만 반짝 흥행하는 것으로 보여 이런 활동이 장기적으로 예술인들에게 유익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사회적 영향 챌린지 틱톡에는 다양한 핫 이슈가 있다. 틱톡의 검색 화면에는 다양한 핫 이슈 태그와 챌린지가 나열되어 있으며, #챌린지, #중요한순간기록, #베개싸움, #콜라보 등 유명한 챌린지 해시태그가 여기에 포함된다. 틱톡은 다양한 해시태그(#) 챌린지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의 소통의 장을 제공하며 사회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표적인 틱톡의 챌린지로는 #Ohnanadancechallenge 가 있다. ‘오나나’라는 음악과 함께 추는 춤이 대한민국 내 연예인 등을 통해 확산된 챌린지로, 사회문화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특이한 춤으로 인기를 끌었다. 나의성장과정 챌린지 또한 틱톡에서 진행하는 재미있는 챌린지 중 하나다. 본인의 어릴적부터 현재까지 사진을 하나의 영상으로 제작해 참여하는 챌린지로, 많은 틱톡커들의 참여와 관심을 유발했다. 즐거움으로 사회적 이슈를 견인하는 챌린지 외에도, #한강쓰레기는내손으로 챌린지와 같이 친환경적 운동을 확산시키는 역할도 한다. 이 챌린지는 한강공원의 쓰레기 투기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목표로, 틱톡의 주 이용자인 젊은 세대까지도 쓰레기 문제를 재밌게 인식하고 환경 보호에 관한 행동을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줍줍댄스'라는 춤과 결합하여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안무로 구현하는 등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재밌게 풀어내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2020년 지코의 #아무노래챌린지(anysongchallenge)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주목을 받았다. 글로벌 누적 조회수 7억뷰를 넘는 성과를 이룬 #아무노래챌린지는 Z세대는 물론 기성세대와 같은 다양한 연령층의 참여를 이끌어 내 '10대들의 앱'이라는 틱톡의 기존 인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통해 틱톡 챌린지를 다양한 마케팅 프로모션 기회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신인 걸그룹 '체리블렛'의 경우 #무릎탁챌린지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이달의 소녀'는 #쏘왓챌린지를 통해 신곡을 홍보하는 등 틱톡 챌린지가 음악을 매개로 한 새로운 놀이 문화로 떠오르자 가요계도 이를 마케팅에 적극 이용하는 모습이다. 사용자 특성 및 행동 사용자 틱톡은 2016년 9월 출시한 지 3년 만에 8억 명의 실사용자를 기록했다. 사용자들로는 잭 킹, 로렌 그레이, 베이비 아리엘, 리사, 레나, 윌 스미스, 드웨인 존슨, 브렌트 리베라, 애디슨 래, 제이슨 데룰로, 제니퍼 로페즈, 카밀라 카벨로, 릴리 싱, 셀레나 고메즈, 밀리 바비 브라운, 노아 슈나와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팔로우하는 개인 찰리 다멜리오등이 있다. 통계 미국에서는 틱톡 사용자의 52%가 아이폰 사용자다. 틱톡은 중립적인 젠더바이어스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틱톡 사용자의 44%가 여성인 반면 56%는 남성이다. 틱톡의 지리적 용도를 보면 신규 이용자 중 43%가 인도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틱톡은 이용자 중 41%가 16~24세 사이일 정도로 젊은 층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입증됐다. 틱톡 사용자들 중 90%가 매일 앱을 사용한다고 응답했으며 틱톡에 따르면 2020년 7월 현재 미국에만 월 9천만 명 이상의 활성 사용자가 있다고 한다. 국가별 금지 및 금지 시도 틱톡은 2020년 6월 29일 전자정보기술부로부터 223개의 다른 중국 앱과 함께 인도에서 "인도 주권과 청렴, 인도 방위, 국가질서 및 공공질서의 보안에 대한 사법적"이라는 성명서와 함께 완전히 금지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0년 8월 6일 틱톡을 바이트댄스에서 판매하지 않을 경우 45일 안에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중국 다국적기업 텐센트(Tencent)의 위챗(WeChat) 애플리케이션 또한 반대하며 비슷한 내용의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2020년 8월 14일 트럼프는 바이트댄스에 미국 틱톡 사업을 매각하거나 매각할 수 있는 90일을 주는 새로운 행정명령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명령에 대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틱톡은 2020년 9월 23일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앱이 금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 가처분 신청을 냈다. 예비 가처분 신청은 2020년 9월 27일 칼 J. 니콜스 재판관의 승인을 받았다. 틱톡은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 등 국가별로 간헐적으로 차단되어 왔다. 논란 중독 우려 일부 사용자들은 틱톡 사용을 중단하기 어려워할 수 있다. 2018년 4월 더우인(Douyin)에 중독성 감소 기능이 추가되어 사용자들은 90분마다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2018년에는 이 기능이 틱톡 앱에 출시되었다. TikTok은 Gabe Erwin, Alan Chickin Chow, James Henry, Cosette Rinab과 같은 일부 상위 인플루언서를 통해 시청자들이 앱 사용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또한 비디오에 대한 사용자들의 관심 범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용자들이 15초짜리 짧은 클립을 반복해서 보는 것이 주의력 감소를 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콘텐츠 관련 문제 많은 나라들이 음란물, 자극적인 내용 등의 틱톡 게시물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을 포함한 나라들이 콘텐츠 우려에 대해 일시적 차단 및 경고를 시행하고 있다. 2018년 더우인은 청소년 임신을 묘사한 영상 등 ‘용납할 수 없는’ 콘텐츠를 보여 중국 언론감시단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이집트는 2020년 7월 27일 틱톡 동영상 관련 여성 5명에게 공중도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또한 각 피고에게 30만 이집트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잘못된 정보 2020년 1월 미국 미디어매터스(Media Matters for America)는 틱톡이 최근 잘못된 정보에 대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COVID-19 대유행과 관련된 잘못된 정보를 표시했다고 밝혔다.인도 정부는 2020년 4월 틱톡에 COVID-19 대유행과 관련된 잘못된 정보를 게시하는 사용자들을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COVID-19 대유행의 확산에 정부가 관여하고 있다는 여러 음모론도 나오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틱톡은 잘못된 정보에 대한 콘텐츠를 보고하는 기능을 개시했다. 플랫폼 별 콘텐츠 검열 및 절제 중국 정부는 2019년 1월부터 더우인 등 앱을 통해 공유되는 사용자 콘텐츠를 바이트댄스 같은 앱 개발자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한다고 밝히고 중국 정부가 검열할 콘텐츠 100종을 나열했다. 중국 공산당에 불리한 특정 콘텐츠 2019~20년 홍콩 시위 관련 콘텐츠나 티베트 독립 관련 콘텐츠 등은 이미 중국 이외의 사용자들에게 제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틱톡은 특히 신장 재교육캠프와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과 종교계 소수민족의 학대를 언급하는 중국 인권 관련 동영상을 차단하고 이를 게시하는 이용자들의 계정을 정지시켰다. 틱톡의 정책은 블라디미르 푸틴, 도널드 트럼프, 버락 오바마, 마하트마 간디 등 외국 정상의 특정 명단과 관련된 내용도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 견해에 대한 논란과 공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틱톡은 또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에게 비판적인 내용과 친 쿠르드파로 간주되는 내용을 금지하며, 인도 시민권 개정법 시위에 찬성하는 사용자들과 힌두교-무슬림 단결을 조장하는 사용자들을 검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11월 27일 17세 아프간계 미국인 사용자 페로자 아지즈가 메이크업 튜토리얼로 위장한 영상을 틱톡에 올린 뒤 계정을 잠정 중단해 중국 신장 무슬림 위구르들의 수용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틱톡은 이후 사과하며 "개인의 실수로 계정이 정지됐고 이후 계정이 복구됐다"고 밝혔다. 틱톡은 2020년 7월 위구르인들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바이럴 동영상의 다른 이용자의 계정을 정지시켰다. 틱톡은 2019년 10월 이 앱에 IS 선전을 게시한 책임이 있는 계정 20여 개를 삭제했다. 성소수자 차별이 사회정치적 규범인 나라에서 틱톡 진행자들은 동성애가 불법이 된 적이 없는 국가를 비롯해 동성 커플이 손을 잡는 등 성소수자 또는 성소수자 권리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콘텐츠를 차단해왔다. 틱톡의 전직 미국 직원들은 베이징 모회사 직원들이 최종 삭제 결정을 내렸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보도했다. 검열 우려에 대해 틱톡의 모기업은 바트 고든 전 미국 하원의원과 제프 덴햄 전 하원의원 등 K&L 게이츠를 고용해 콘텐츠 절제 정책을 조언했다. TikTok은 또한 로비 회사인 Mrbital Depositive를 고용했다. 2020년 3월 인터셉트에 유출된 내부 문건에는 사회자가 플랫폼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게시물을 비롯해 '국가 명예'를 훼손하거나 '경찰 등 국가기관'에 대해 하천을 방송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리베스트림'의 정치 발언을 검열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인도 타임스는 2020년 6월 틱톡이 중-인도 국경 분쟁과 2020년 중-인도 분쟁과 관련된 동영상을 비밀스럽게 금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용자 개인 정보 보호 관련 문제 틱톡에 대한 사생활 문제 또한 제기되었다. 틱톡은 개인정보 보호정책에서 사용정보, IP주소, 사용자의 이동통신사, 고유장치 식별 ID, 키스트로크 패턴, 위치 데이터 등을 수집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웹 개발자 탈랄 하지 바크리마(Talal Haj Bakry)와 토미 마이스크(Tommy Mysk)는 HTTP를 통해 어플 사용자들이 비디오와 다른 콘텐츠를 공유하도록 허용하면 사용자의 데이터 프라이버시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말했다. Check Point는 2020년 1월 TikTok에서 해커들이 SMS를 사용하여 사용자 계정에 접속할 수 있도록 허용할 수 있는 보안 결함을 발견했다. 지난 2월 레딧의 CEO인 Steve Huffman은 그 어플을 “스파이웨어(spyware)”라며 “나는 그 어플을 근본적으로 기생하는 어플로 본다. 그것은 항상 듣고, 그들이 사용하는 지문 채취 기술은 너무 무섭다. 내 핸드폰에 그런 어플을 설치할 수 없었다.”며 비판했다. Huffman의 발언에 대해 틱톡은 "이것은 근거 없는 비난이며 증거도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웰스파고는 사생활과 보안상의 문제로 이 앱을 단말기에서 금지시켰다. 네덜란드 데이터보호청은 2020년 5월 아동 사생활 보호와 관련해 틱톡에 대한 조사를 발표했다. 6월, 유럽 데이터 보호 위원회는 틱톡의 사용자 사생활과 보안 관행을 심사하기 위한 대책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020년 8월 틱톡이 구글의 정책을 위반하는 전략으로 MAC 주소와 IMEI 등 안드로이드 사용자 데이터를 추적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고는 미 상원 연방 무역 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하도록 했다. 미국 COPPA 벌금 2019년 2월 27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 (FTC)가 바이트 댄스에 13세 미만 미성년자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아동 온라인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했다는 사유로 57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바이트댄스는 동영상 업로드, 사용자 프로필 구축, 다이렉트 메시지, 타인의 동영상 댓글 달기 등을 차단하는 틱톡에 아이들 전용 모드를 추가함으로써 콘텐츠의 시청과 녹화를 허용했다. 2020년 5월 한 옹호단체는 2019년 2월 동의안 조항을 위반했다며 틱톡을 미국 연방 거래 위원회에 고발했다. 이후 의회의 연방 거래 위원회 조사 재개 요구가 불거졌고, 2020년 7월 미국 연방 거래 위원회와 미국 법무부가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정보청 조사 2019년 2월, 영국 정보청장은 미국 연방무역위원회(FTC)로부터 벌금을 부과 받은 바이트댄스에 이어 틱톡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의회 위원회에 참석한 정보청장 엘리자베스 덴햄(Elizabeth Denham)은 이번 조사는 개인 데이터 수집 문제, 온라인에서 어린이들이 수집하고 공유하는 동영상의 종류, 그리고 성인이라면 누구나 어린이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플랫폼의 공개 메시지 시스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회사가 어린이들을 위해 다른 서비스와 다른 보호 장치를 제공하라는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s)의 요구를 잠재적으로 위반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사이버불링 다른 플랫폼과 마찬가지로, 몇몇 국가의 기자들은 이 앱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고 성범죄자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앱에 대한 사생활 우려를 제기해왔다. 몇몇 사용자들은 틱톡에서 인종 차별과 장애인 차별을 포함한 고질적인 사이버 폭력을 알려왔다. 2019년 12월, 독일 디지털권리단체인 Netzpolitik.org의 보도에 따르면 틱톡은 사이버불링을 제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장애 사용자는 물론 성소수자 사용자의 동영상을 억압했다고 인정했다. 틱톡의 조정자들은 '비정상적인 몸매', '못생긴 외모', '너무 많은 주름' 또는 '빈민가 또는 시골 지역’, '낙후된 주택' 사용자들을 억압하라는 지시도 받았다. 개인정보유출 논란 틱톡이 개인정보유출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틱톡을 접었다. 법적 이슈 텐센트(Tencent)소송 텐센트의 위챗 플랫폼이 더우인의 동영상을 차단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18년 4월, 더우인은 위챗 플랫폼의 허위·손해 정보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텐센트를 고소해 100만 달러의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다. 2018년 6월 텐센트는 베이징 법원에 투티아오(Toutiao)와 더우인을 상대로 부정적인 뉴스로 텐센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반복했다면서 손해배상 청구와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투티아오는 다음날 텐센트를 상대로 불공정한 경쟁 혐의로 고소했고, 경제적 손실에 대해 9000만 달러를 요구했다. 데이터 전송에 대한 집단소송 2019년 11월 캘리포니아에서는 틱톡이 텐센트와 알리바바가 보유하고 있는 중국에 위치한 서버에 미국인의 개인 신상정보를 전송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집단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소송은 또한 틱톡의 모회사인 바이트댄스가 사용자들의 허가 없이 사용자 콘텐츠를 가져갔다고 비난했다. 소송의 원고인 대학생 홍씨는 앱을 다운받았지만 계정을 만든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몇 달 후에 틱톡이 그녀의 정보(생체인식 등)를 이용하여 정보를 요약해 그녀의 계정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송은 또한 중국의 거대 기술기업인 바이두에게 정보가 전달되었다고 주장했다. 2020년 7월 미국 일리노이주 북부지방법원에서 틱톡을 상대로 한 20건의 소송이 집단소송으로 변경되었다. 심사 제도 인도네시아 사례 인도네시아는 2018년 7월 3일 TikTok 애플리케이션을 일시적으로 차단했으나 연령 제한 및 보안 매커니즘 등의 후속조치 이후 일주일 만에 차단 조치를 해제했다. 틱톡의 발자취 NBA와 머신 러닝 AI기반 맞춤형 모바일 콘텐츠 제작 글로벌 파트너십 체결 바이트댄스가 전미농구협회(NBA)와 다년간의 파트너십을 체결하여 틱톡을 포함한 바이트댄스 내 플랫폼 사용자들은 NBA 관련 맞춤형 쇼트폼 모바일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특히, 틱톡(TikTok) 사용자들은 NBA 하이라이트 콘텐츠를 고를 수 있으며, 현지 언어로 된 해당 국가 관련 NBA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 2018년 MAMA스폰서 CJ ENM이 주최하는 아시아 최대 음악 시상식 MAMA는 2018년 12월 10일부터 14일까지 한국, 일본, 홍콩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2018 MAMA의 공식 스폰서로 참여한 틱톡은 전 세계적으로 수 억 명의 사용자들이 활동하는 자사의 플랫폼에서 본 행사에 대한 공식 투표를 진행했으며, 5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원 밀리언 오디션 (1 Million Audition) 성료 TikTok 개최 "1 백만 오디션" 온라인에서 도전 이벤트.참가자들이 유명 크리에이터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이 오디션은 약 2천여명이 참가해 총 4,329개의 영상을 제작했으며, 140만 개의 좋아요와 3만 8천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는 등 유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제 34회 골든디스크 어워즈 공식 인기상 투표 플랫폼으로 발탁 한 해동안 대중에게 사랑받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선정 및 결산하는 골든디스크 어워즈의 제 34회 시상식의 인기상 투표가 틱톡 앱에서 진행됐다. 틱톡은 팬이 골든디스크 스타에게 질문을 남기면 추첨을 통해 스타가 직접 영상으로 답하는 60초 인터뷰 이벤트를 통해 아티스트와 팬 사이에 소통의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틱톡 스테이지 라이브 프롬 서울 개최 틱톡에서 개최되는 온라인 콘서트 ‘틱톡 스테이지 라이브 프롬 서울(TikTok Stage Live From Seoul)은 코로나19로 침체된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과 언택트(비대면, Untact) 시대를 맞아 최초 쇼 형식의 세로 라이브 콘서트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선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본 공연은 틱톡의 @tiktok_stage 계정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여 전 세계 시청자 누구나 기부에 동참할 수 있는 신개념 참여형 콘서트로 기획되며, 6월 25일, 6월 27일 양일간 진행된다. 이번 콘서트는 역대급 라인업으로 에이핑크, 악뮤, 오마이걸, 몬스타엑스, 아이콘, 카드, 강다니엘, CIX, 크래비티 등 유명 K팝 아티스트들과 5월 25일 오후 5시에 개최된다. 힙합아티스트는 에픽하이, 바비, 창모, 크러쉬, 딘, 이센스, 기리보이, 헤이즈, 제시, 키드밀리, J-PARK 등 5월 27일 오후 8시에 개최된다. 틱톡 스테이지 맨앤미션 개최 2020년 8월 14일, 다섯 명의 배우가 이끌었던 틱톡 스테이지 맨앤미션이 진행됐다. 틱톡 스테이지 맨앤미션은 스타쉽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송승헌, 이동욱, 유연석, 이광수, 김범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언택트 글로벌 팬미팅이다. 특히, 각자의 위치에서 활동하는 다섯 명의 배우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이례적인 자리인 만큼, 행사 이전부터 전 세계 팬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실제 라이브 방송에서 누적 시청자 수 129만 2867명을 기록하였다. 180분간 진행된 틱톡 스테이지 맨앤미션은 다섯 명의 배우를 만나기 위해 틱톡에 접속한 다국적 팬들을 위한 인사말로 시작하여 서로의 이미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인 ‘이미지 토크’, 팬들과 배우들의 화상채팅, 배우 5인 각자의 코너와 그 안에서의 다양한 미션 수행 등 팬들에게 풍성한 볼거리와 긴밀한 소통의 장을 제공했다. It Starts On TikTok 캠페인 틱톡은 2020년 하반기 영국, 미국, 독일, 태국, 한국 등 세계 각 국에서 글로벌 캠페인 <It Starts On TikTok>을 진행한다. 특히 한국 <It Starts On TikTok> 캠페인은 “트렌드, 숨겨진 끼, 기념할 만한 순간. 그 시작은, 틱톡”이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틱톡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트렌드, 숨겨진 끼를 발산하는 틱톡커, 친구들과 함께 기념할 만한 순간을 공유한 영상들을 소개한다. 특히, 사물로 음악을 만드는 남자 넵킨스(@napkinsmusic), 전세계 틱톡커 중 가장 힙한 틱톡커 광후아민부부(@amin_kwanghoo), 손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틱톡을 시작하게 된 79세 실버 크리에이터 그랜파찬(@grandpachan) 등 3인의 틱톡커 인터뷰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숨겨진 끼를 틱톡에서 발산하게 된 배경과 그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Year On TikTok 캠페인 틱톡은 2020년 연말 세계 각 국에서 글로벌 캠페인 <Year On TikTok>을 진행한다. 2020년 틱톡 트렌드 발표, 엔터테인먼트 발표와 더불어 'Year on TikTok' 인앱 기능을 출시하여 모든 사용자가 각자의 개인적인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Year On TikTok> 영상을 통해 사용자는 2020년 한 해 동안 가장 좋아한 음원, 편집 효과, 콘텐츠 장르 등을 종합한 자신들의 2020년 하이라이트를 돌아본다. 또한 글로벌 틱톡은 연말 리뷰와 함께 틱톡 자체의 Top 100을 선보인다. 특히, 틱톡 코리아의 경우 트렌드, 집콕생활, 크리에이터, CSR 네 분야의 Top10을 선정, 틱톡 유튜브 채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musical.ly 인수 및 통합 2017년 11월 9일, TikTok 모회사 베이징 바이트댄스과학기술유한회사는 10억 달러를 들여 musical.ly를 인수했다. musical.ly는 미국 청소년들한테 큰 인기를 끌었던 립싱크 어플로서 디지털 플랫폼을 최대한 활용하는 젊은 사용자층 사이에서 유행했다.2018년 8월 2일, TikTok은 musical.ly를 인수하고, 기존 계정과 데이터를 하나의 앱으로 병합시킨 후, 계속하여 TikTok란 이름을 적용해, 보다 큰 동영상 커뮤니티를 구축했다. TikTok의 개발사인 Bytedance는 2017년 11월에 중국 기업의 미국에서 인기있는 단편 영상 공유 커뮤니티 사이트 ‘musical.ly’를 매수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2018년 8월 3일에 Bytedance는 TikTok과 musical.ly의 어플을 통합한다고 발표했다고. 이에 따라서 서비스 제공 지역도 확대됐으며 북미, 중남미, 유럽, 중동, 미국, 아시아의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통합에 따라서 어플 이름은 ‘TikTok’으로 통일되는 것 외에 musical.ly, TikTok으로 각각 인기가 높아진 기능이 담긴 것 외에 새로운 기능도 추가되었다.. 사회 문제 주목을 모으기 위해서 공공의 장소에서 영상을 촬영하거나 촬영 목적으로 대음량의 음악을 울리거나 가게의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상을 촬영해서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존재한다. 또, 개인 정보가 되는 맨얼굴이나 집 근처의 영상 등에서 주소나 개인이 특정되거나 거기서 스토커로 발전되거나 자신의 얼굴이 찍힌 영상이 유튜브 등의 영상 배포 사이트에 무단 전재되는 등, 여러 사회 문제의 발생이 위구되고 있다. 실제로 과거에는 해외에서 TikTok의 촬영 목적으로 사고를 일으킨 적도 있다. 중국에서의 감전 사고 2018년 5월 6일, 중국의 충칭시에서 열차의 옥상에 타서 영상을 촬영하고 있던 남성이 고압선을 만져 감전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남성이 전차의 옥상에 타고 있던 이유에 대해서 ‘TikTok에 올리는 영상을 찍기 위해서’라고 보도했으며 물의를 빚었지만 그 후 남성의 애인은 TikTok 게시 목적으로의 영상 촬영을 거부했다. 하지만, 중국의 넷 상에서는 여성의 진술을 의문시하는 목소리나 조회수 목적의 과격 행위로의 비판적인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차단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8년 7월 3일부터 일반 시민으로의 포르노나 모독 등의 위법 컨텐츠의 확산을 우려해서 일반적으로 본 어플을 차단시켰다. 그 후, 운영이 부정적인 컨텐츠의 삭제, 정부의 연락 창구의 개설, 연령 제한과 세큐리티 메카니즘의 도입 등의 변경을 실시했기 때문에 1주일 후에는 차단이 해제되었다. 일본에서의 피해 행위 일본에서는 일부 사용자가 피해 행위를 문제시하고 있다. 트위터 상에는 공공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음악을 키거나 난동을 일으키는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사용자에 대해서 고언을 드리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 외에 인기 아티스트의 콘서트에서 무대 위의 모습을 촬영해서 올리는 도촬 행위에 대해서 문제시하는 의견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에서의 차단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7월 31일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기자들에게 "틱톡이 미국인들의 개인정보를 중국정부에 제공하는 등의 위법행위를 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는 미국에서 사용을 막을 것"이라며 비상경제권법이나 행정명령을 동원할 수 있다고 밝혀, 논란이 되고있다. 이에따라 틱톡은 미국 내 사업권을 기존에는 MS에게 매각 뒤에도 일부 보유하고 있으려 했으나, 이마저도 MS에게 모두 매각하는 방안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미국내 일자리 창출등의 효과를 강조했지만, 트럼프 측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의 차단 방글라데시 정부는 2018년 11월 틱톡이 포르노와 도박 등의 금지 사유와 관련이 없음에도 틱톡 앱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다. 같이 보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트위터 유튜브 유튜브 쇼츠 바이트댄스 각주 외부 링크 TikTok - TikTok 계정 抖音 TikTok 2016년 소프트웨어 안드로이드 소프트웨어 IOS 소프트웨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중국의 브랜드 청년문화 인터넷 문화 바이트댄스 2010년대 유행 2020년대 유행
https://en.wikipedia.org/wiki/TikTok
TikTok
TikTok, whose mainland Chinese counterpart is Douyin (), is a short-form video hosting service owned by ByteDance. It hosts user-submitted videos, which can range in duration from 3 seconds to 10 minutes. Since their launches, TikTok and Douyin have gained global popularity. In October 2020, TikTok surpassed 2 billion mobile downloads worldwide. Morning Consult named TikTok the third-fastest growing infotech brand of 2020, after Zoom and Peacock. Cloudflare ranked TikTok the most popular website of 2021, surpassing Google. Corporate structure ByteDance, based in Beijing, and its subsidiary TikTok Ltd, based in both Singapore and Los Angeles, were incorporated in the Cayman Islands. ByteDance is owned by its founders and Chinese investors (20%), other global investors (60%), and employees (20%). TikTok Ltd owns four entities that are based respectively in the United States, Australia (which also runs the New Zealand business), United Kingdom (also owns subsidiaries in the European Union), and Singapore (owns operations in Southeast Asia and India). In April 2021, a state-owned enterprise owned by the Cyberspace Administration of China and China Media Group, the China Internet Investment Fund, purchased a 1% stake in ByteDance's main Chinese entity. The Economist, Reuters, and Financial Times have described the Chinese government's stake as a golden share investment. Douyin Douyin was launched by ByteDance in September 2016, originally under the name A.me, before rebranding to Douyin () in December 2016. Douyin was developed in 200 days and within a year had 100 million users, with more than one billion videos viewed every day. While TikTok and Douyin share a similar user interface, the platforms operate separately. Douyin includes an in-video search feature that can search by people's faces for more videos of them, along with other features such as buying, booking hotels, and making geo-tagged reviews. History Evolution ByteDance planned on Douyin expanding overseas. The founder of ByteDance, Zhang Yiming, stated that "China is home to only one-fifth of Internet users globally. If we don't expand on a global scale, we are bound to lose to peers eyeing the four-fifths. So, going global is a must." The app was launched as TikTok in the international market in September 2017. On 23 January 2018, the TikTok app ranked first among free application downloads on app stores in Thailand and other countries. TikTok has been downloaded more than 130 million times in the United States and has reached 2 billion downloads worldwide, according to data from mobile research firm Sensor Tower (those numbers exclude Android users in China). In the United States, celebrities, including Jimmy Fallon and Tony Hawk, began using the app in 2018. Other celebrities, including Jennifer Lopez, Jessica Alba, Will Smith, and Justin Bieber joined TikTok as well as many others. In January 2019, TikTok allowed creators to embed merchandise sale links into their videos. On 3 September 2019, TikTok and the U.S. National Football League (NFL) announced a multi-year partnership. The agreement occurred just two days before the NFL's 100th season kick-off at Soldier Field, where TikTok hosted activities for fans in honor of the deal. The partnership entails the launch of an official NFL TikTok account, which is to bring about new marketing opportunities such as sponsored videos and hashtag challenges. In July 2020, TikTok, excluding Douyin, reported close to 800 million monthly active users worldwide after less than four years of existence. In May 2021, TikTok appointed Shou Zi Chew as their new CEO who assumed the position from interim CEO Vanessa Pappas, following the resignation of Kevin A. Mayer on 27 August 2020. In September 2021, TikTok reported that it had reached 1 billion users. In 2021, TikTok earned $4 billion in advertising revenue. In October 2022, TikTok was reported to be planning an expansion into the e-commerce market in the US, following the launch of TikTok Shop in the United Kingdom. The company posted job listings for staff for a series of order fulfillment centers in the US and is reportedly planning to start the new live shopping business before the end of the year. According to data from app analytics group Sensor Tower, advertising on TikTok in the US grew by 11% in March 2023, with companies including Pepsi, DoorDash, Amazon and Apple among the top spenders. According to estimates from research group Insider Intelligence, TikTok is projected to generate $14.15 billion in revenue in 2023, up from $9.89 billion in 2022. Musical.ly merger On 9 November 2017, TikTok's parent company, ByteDance, spent nearly $1 billion to purchase musical.ly, a startup headquartered in Shanghai with an overseas office in Santa Monica, California, U.S. Musical.ly was a social media video platform that allowed users to create short lip-sync and comedy videos, initially released in August 2014. TikTok merged with musical.ly on 2 August 2018 with existing accounts and data consolidated into one app, keeping the title TikTok. This ended musical.ly and made TikTok a worldwide app, excluding China, since China already had Douyin. Expansion in other markets TikTok was downloaded over 104 million times on Apple's App Store during the first half of 2018, according to data provided to CNBC by Sensor Tower. After merging with musical.ly in August, downloads increased and TikTok became the most downloaded app in the U.S. in October 2018, which musical.ly had done once before. In February 2019, TikTok, together with Douyin, hit one billion downloads globally, excluding Android installs in China. In 2019, media outlets cited TikTok as the 7th-most-downloaded mobile app of the decade, from 2010 to 2019. It was also the most-downloaded app on Apple's App Store in 2018 and 2019, surpassing Facebook, YouTube and Instagram. In September 2020, a deal was confirmed between ByteDance and Oracle in which the latter will serve as a partner to provide cloud hosting, as TikTok faces attempts to ban it in the United States. In November 2020, TikTok signed a licensing deal with Sony Music. In December 2020, Warner Music Group signed a licensing deal with TikTok. In April 2021, Abu Dhabi's Department of Culture and Tourism partnered with TikTok to promote tourism. It came following the January 2021 winter campaign, initiated through a partnership between the UAE Government Media Office partnered and TikTok to promote the country's tourism. Since 2014, the first non-gaming apps with more than 3 billion downloads were Facebook, WhatsApp, Instagram, and Messenger; all owned by Meta. TikTok was the first non-Facebook app to reach that figure. Sensor Tower reported that although TikTok had been banned in India, its largest market, in June 2020, downloads in the rest of the world continue to increase, reaching 3 billion downloads in 2021. The advertising revenue of short video clips is lower than other social media: while users spend more time, American audience is monetized at a rate of $0.31 per hour, a third the rate of Facebook and a fifth the rate of Instagram, $67 per year while Instagram will make more than $200. TikTok works with Tehran Chamber of Commerce. In 2023, several high-level executives transferred from ByteDance to TikTok to focus on moneymaking operations. Some moved from Beijing to the US. According to sources for the Wall Street Journal, the personnel move led to concerns from some TikTok employees and was reported to the office of US Senator Ted Cruz for further investigation. Relationship with other tech platforms Although the size of its user base falls short of that of Facebook, Instagram, or YouTube, TikTok reached 1 billion active monthly users faster than any of them. Competition from TikTok prompted Instagram, which is owned by Facebook, to spend $120 million as of 2022 to entice more content creators to its Reels service, although engagement level remained low. Snapchat had likewise paid out $250 million in 2021 to its creators. Many platforms and services, including YouTube Shorts, began to imitate TikTok's format and recommendation page. Those changes caused a backlash from users of Instagram, Spotify, and Twitter. In March 2022, The Washington Post reported that Facebook's owner Meta Platforms paid Targeted Victory—a consulting firm backed by supporters of the U.S. Republican Party—to coordinate lobbying and media campaigns against TikTok and portray it as "a danger to American children and society". Its efforts included asking local reporters to serve as "back channels" of anti-TikTok messages, writing opinion articles and letters to the editor, including one in the name of a concerned parent, amplifying stories about TikTok trends, such as "devious licks" and "Slap a Teacher", that actually originated on Facebook, and promoting Facebook's own corporate initiatives. Ties to Meta were not disclosed to the other parties involved. Targeted Victory said that it is "proud of the work". A Meta spokesperson said that all platforms, including TikTok, should face scrutiny. The Wall Street Journal reported that Silicon Valley executives met with US lawmakers to build an "anti-China alliance" before TikTok CEO's Congressional hearing in March 2023. Features The mobile app allows users to create short videos, which often feature music in the background and can be sped up, slowed down, or edited with a filter. They can also add their own sound on top of the background music. To create a music video with the app, users can choose background music from a wide variety of music genres, edit with a filter and record a 15-second video with speed adjustments before uploading it to share with others on TikTok or other social platforms. The "For You" page on TikTok is a feed of videos that are recommended to users based on their activity on the app. Content is curated by TikTok's artificial intelligence depending on the content a user liked, interacted with, or searched. This is in contrast to other social networks' algorithms basing such content off of the user's relationships with other users and what they liked or interacted with. The app's "react" feature allows users to film their reaction to a specific video, over which it is placed in a small window that is movable around the screen. Its "duet" feature allows users to film a video aside from another video. The "duet" feature was another trademark of musical.ly. The duet feature is also only able to be used if both parties adjust the privacy settings. Videos that users do not want to post yet can be stored in their "drafts". The user is allowed to see their "drafts" and post when they find it fitting. The app allows users to set their accounts as "private". When first downloading the app, the user's account is public by default. The user can change to private in their settings. Private content remains visible to TikTok but is blocked from TikTok users who the account holder has not authorized to view their content. Users can choose whether any other user, or only their "friends", may interact with them through the app via comments, messages, or "react" or "duet" videos. Users also can set specific videos to either "public", "friends only", or "private" regardless if the account is private or not. Users can also send their friends videos, emojis, and messages with direct messaging. TikTok has also included a feature to create a video based on the user's comments. Influencers often use the "live" feature. This feature is only available for those who have at least 1,000 followers and are over 16 years old. If over 18, the user's followers can send virtual "gifts" that can be later exchanged for money. TikTok announced a "family safety mode" in February 2020 for parents to be able to control their children's presence on the app. There is a screen time management option, restricted mode, and the option to put a limit on direct messages. The app expanded its parental controls feature called "Family Pairing" in September 2020 to provide parents and guardians with educational resources to understand what children on TikTok are exposed to. Content for the feature was created in partnership with online safety nonprofit, Internet Matters. In October 2021, TikTok launched a test feature that allows users to directly tip certain creators. Accounts of users that are of age, have at least 100,000 followers and agree to the terms can activate a "Tip" button on their profile, which allows followers to tip any amount, starting from $1. In December 2021, TikTok started beta-testing Live Studio, a streaming software that would let users broadcast applications open on their computers, including games. The software also launched with support for mobile and PC streaming. However, a few days later, users on Twitter discovered that the software uses code from the open-source OBS Studio. OBS made a statement saying that, under the GNU GPL version 2, TikTok has to make the code of Live Studio publicly available if it wants to use any code from OBS. In May 2022, TikTok announced TikTok Pulse, an ad revenue-sharing program. It covers the "top 4% of all videos on TikTok" and is only available to creators with more than 100,000 followers. If an eligible creator's video reaches the top 4%, they will receive a 50% share of the revenue from ads displayed with the video. In July 2023, TikTok launched a new streaming service called TikTok Music, currently available only in Brazil and Indonesia. This service allows users to listen to, download and share songs. It is reported that TikTok Music features songs from major record companies like Universal Music Group, Sony Music and Warner Music Group. On 19 July 2023, TikTok Music was expanded for select users in Australia, Mexico and Singapore. Content and usage Demographics TikTok tends to appeal to younger users, as 41% of its users are between the ages of 16 and 24. These individuals are considered Generation Z. Among these TikTok users, 90% said they used the app daily. TikTok's geographical use in 2019 has shown that 43% of new users were from India before the social platform was banned in the country. As of the first quarter of 2022, there were over 100 million monthly active users in the United States and 23 million in the UK. The average user, daily, was spending 1 hour and 25 minutes on the app and opening TikTok 17 times. By July 2023, TikTok has become the primary news source for British teenagers on social media, with 28% of 12 to 15-year-olds relying on the platform, while traditional sources like BBC One/Two are more trusted at 82%, according to a report by UK regulator Ofcom. Out of TikTok's top 100 male creators, a 2022 analysis reported 67% were white, with 54% having near-perfect facial symmetry. Popular TikTok users have lived collectively in collab houses, predominantly in the Los Angeles area. Teenage mode China heavily regulates how Douyin is used by minors in the country, especially after 2018. Under government pressure, ByteDance introduced parental controls and a "teenage mode" that shows only whitelisted content, such as knowledge sharing, and bans pranks, superstition, dance clubs, and pro-LGBT content. A mandatory screen time limit was put in place for users under the age of 14 and a requirement to link accounts to a real identity to prevent minors from lying about their age or using an adult's account. The differences between Douyin and TikTok have led some US politicians and commentators to accuse the company or the Chinese government of malicious intent. In March 2023, TikTok announced default screen time limits for users under the age of 18. Those under the age of 13 would need a passcode from their parents to extend their time. Cyberbullying Vox noted in 2018 that bullies and trolls were relatively rare on TikTok compared to other platforms. Nonetheless, several users have reported cyberbullying via features such as Duet or React, which is used to interact with followers. A trend making fun of autism eventually created a huge backlash, even on the platform itself, and the company ended up removing the hashtag altogether. Parents filming how their children reacted to people with disability, often in terror, led to criticisms of ableism. In December 2019, following a report by German digital rights group netzpolitik.org, TikTok admitted that it had suppressed videos by disabled users as well as LGBTQ+ users in a purported temporary effort to limit cyberbullying. Viral trends The app has spawned numerous viral trends, Internet celebrities, and music trends around the world. Duets, a feature that allows users to add their own video to an existing video with the original content's audio, have sparked many of these trends. Many stars got their start on musical.ly, which merged with TikTok on 2 August 2018. These include Loren Gray, Baby Ariel, Zach King, Lisa and Lena, Jacob Sartorius, and many others. Loren Gray remained the most-followed individual on TikTok until Charli D'Amelio surpassed her on 25 March 2020. Gray's was the first TikTok account to reach 40 million followers on the platform. She was surpassed with 41.3 million followers. D'Amelio was the first to ever reach 50, 60, and 70 million followers. Charli D'Amelio remained the most-followed individual on the platform until she was surpassed by Khaby Lame on 23 June 2022. Other creators rose to fame after the platform merged with musical.ly on 2 August 2018. TikTok also played a major part in making "Old Town Road" by Lil Nas X one of the biggest songs of 2019 and the longest-running number-one song in the history of the US Billboard Hot 100. TikTok has allowed many music artists to gain a wider audience, often including foreign fans. For example, despite never having toured in Asia, the band Fitz and the Tantrums developed a large following in South Korea following the widespread popularity of their 2016 song "HandClap" on the platform. "Any Song" by R&B and rap artist Zico became number one on the Korean music charts due to the popularity of the #anysongchallenge, where users dance to the choreography of the song. The platform has also launched many songs that failed to garner initial commercial success into sleeper hits, particularly since the outbreak of the COVID-19 pandemic. However, it has received criticism for not paying royalties to artists whose music is used on the platform. Classic stars are able to connect with younger audiences born decades after a musician's first debut and across traditional genres. In 2020 Fleetwood Mac's "Dreams" was used in a skating video and a recreation by Mick Fleetwood. The song re-entered Billboard Hot 100 after 43 years and topped Apple Music. In 2022, Kate Bush's "Running Up That Hill" went viral among fans of Stranger Things, topping the UK singles chart 37 years after its original release. In 2023 Kylie Minogue's "Padam Padam" entered the Radio 1 playlist after being shared by Gen Z, even though many youth radio stations had refused to play it. Other older artists with strong engagement on TikTok include Elton John and Rod Stewart. In June 2020, TikTok users and K-pop fans "claimed to have registered potentially hundreds of thousands of tickets" for President Trump's campaign rally in Tulsa through communication on TikTok, contributing to "rows of empty seats" at the event. Later, in October 2020, an organization called TikTok for Biden was created to support then-presidential candidate Joe Biden. After the election, the organization was renamed to Gen-Z for Change. On 10 August 2020, Emily Jacobssen wrote and sang "Ode to Remy", a song praising the protagonist from Pixar's 2007 computer-animated film Ratatouille. The song rose to popularity when musician Daniel Mertzlufft composed a backing track to the song. In response, began creating a "crowdsourced" project called Ratatouille the Musical. Since Mertzlufft's video, many new elements including costume design, additional songs, and a playbill have been created. On 1 January 2021, a full one-hour virtual presentation of Ratatouille the Musical premiered on TodayTix. It starred Titus Burgess as Remy, Wayne Brady as Django, Adam Lambert as Emile, Kevin Chamberlin as Gusteau, Andrew Barth Feldman as Linguini, Ashley Park as Colette, Priscilla Lopez as Mabel, Mary Testa as Skinner, and André De Shields as Ego. A viral TikTok trend known as "devious licks" involves students vandalizing or stealing school property and posting videos of the action on the platform. The trend has led to increasing school vandalism and subsequent measures taken by some schools to prevent damage. Some students have been arrested for participating in the trend. TikTok has taken measures to remove and prevent access to content displaying the trend. Another TikTok trend known as the Kia Challenge involves users stealing certain models of Kia and Hyundai cars manufactured without immobilizers, which was a standard feature at the time, between 2010 and 2021. As of February 2023, it had resulted in at least 14 crashes and eight deaths according to the National Highway Traffic Safety Administration. In May, Kia and Hyundai settled a $200-million class-action lawsuit by agreeing to provide software updates to affected vehicles and over 26,000 steering wheel locks. In 2023, a trend emerged where streamers acted as if they were video-game characters following prompts from their viewers. On Douyin, the Chinese version of TikTok, some celebrities who had garnered large followings as of August 2019 include Dilraba Dilmurat, Angelababy, Luo Zhixiang, Ouyang Nana, and Pan Changjiang. In the 2022 FIFA World Cup, a Qatari teenage royal became an Internet celebrity after his angry expressions were recorded in Qatar's opening match loss to Ecuador; he amassed more than 15 million followers in less than a week after creating a Douyin account. Food and recipes Fashion and body size "Midsize" fashion gained greater exposure on TikTok after many creators opened up about not able to find clothing sizes that fit them well. Women's apparel can roughly be divided into petite, straight, and plus sizes, leaving gaps in between. Realistic videos about how differently pieces of garment fit on a model compared to how they fit on a typical consumer resonated with many who had believed that they were alone in their struggle. Cosmetic surgery Content promoting cosmetic surgery is popular on TikTok and has spawned several viral trends on the platform. In December 2021, Plastic and Reconstructive Surgery, the journal of the American Society of Plastic Surgeons, published an article about the popularity of some plastic surgeons on TikTok. In the article, it was noted that plastic surgeons were some of the earliest adopters of social media in the medical field and many had been recognized as influencers on the platform. The article published stats about the most popular plastic surgeons on TikTok up to February 2021 and at the time, five different plastic surgeons had surpassed 1 million followers on the platform. In 2021, it was reported that a trend known as the #NoseJobCheck trend was going viral on TikTok. TikTok content creators used a specific audio on their videos while showing how their noses looked before and after having their rhinoplasty surgeries. By January 2021, the hashtag #nosejob had accumulated 1.6 billion views, #nosejobcheck had accumulated 1 billion views, and the audio used in the #NoseJobCheck trend had been used in 120,000 videos. In 2020, Charli D'Amelio, the most-followed person on TikTok at the time, also made a #NoseJobCheck video to show the results of her surgery to repair her previously broken nose. In April 2022, NBC News reported that surgeons were giving influencers on the platform discounted or free cosmetic surgeries in order to advertise the procedures to their audiences. They also reported that facilities that offered these surgeries were also posting about them on TikTok. TikTok has banned the advertising of cosmetic surgeries on the platform but cosmetic surgeons are still able to reach large audiences using unpaid photo and video posts. NBC reported that videos using the hashtags '#plasticsurgery' and '#lipfiller' had amassed a combined 26 billion views on the platform. In December 2022, it was reported that a cosmetic surgery procedure known as buccal fat removal was going viral on the platform. The procedure involves surgically removing fat from the cheeks in order to give the face a slimmer and more chiseled appearance. Videos using hashtags related to buccal fat removal had collectively amassed over 180 million views. Some TikTok users criticized the trend for promoting an unobtainable beauty standard. Medication shortage In November 2022, Australia's medical regulatory agency, the Therapeutic Goods Administration (TGA) reported that there was a global shortage of the diabetes medication Ozempic. According to the TGA, the rise in demand was caused by an increase in off-label prescription of the drug for weight loss purposes. In December 2022, with the United States experiencing a shortage as well, it was reported that the huge increase in demand for the medicine was caused by a weight loss trend on TikTok, where videos about the drug exceeded 360 million views. Wegovy, a drug that has been specifically approved for treating obesity, also became popular on the platform after Elon Musk credited it for helping him lose weight. Influencer marketing TikTok has provided a platform for users to create content not only for fun but also for money. As the platform has grown significantly over the past few years, it has allowed companies to advertise and rapidly reach their intended demographic through influencer marketing. The platform's AI algorithm also contributes to the influencer marketing potential, as it picks out content according to the user's preference. Sponsored content is not as prevalent on the platform as it is on other social media apps, but brands and influencers still can make as much as they would if not more in comparison to other platforms. Influencers on the platform who earn money through engagement, such as likes and comments, are referred to as "meme machines". In 2021, The New York Times reported that viral TikTok videos by young people relating the emotional impact of books on them, tagged with the label "BookTok", significantly drove sales of literature. Publishers were increasingly using the platform as a venue for influencer marketing. In December 2022, NBC News reported in a television segment that some TikTok and YouTube influencers were being given free and discounted cosmetic surgeries in order for them to advertise the surgeries to users of the platforms. In 2022, it was reported that a trend called "de-influencing" had become popular on the platform as a backlash to influencer marketing. TikTok creators participating in this trend made videos criticizing products promoted by influencers and asked their audiences not to buy products they did not need. However, some creators participating in the trend started promoting alternative products to their audiences and earning commission from sales made through their affiliate links in the same manner as the influencers they were originally criticizing. In June 2022, NBC News reported that some of the influencers paid by FeetFinder, a website that sells foot fetish content, did not disclose their videos were ads. FeetFinder said that it has suggested to influencers to be upfront about who was funding them. Existing sellers on FeetFinder said that the videos often misrepresented how "easy" it is to make money from posting feet pictures. Other TikTok creators have spoken out against accepting sponsorship deals indiscriminately and criticized those who posted undisclosed FeetFinder ads. Use by businesses In October 2020, the e-commerce platform Shopify added TikTok to its portfolio of social media platforms, allowing online merchants to sell their products directly to consumers on TikTok. Some small businesses have used TikTok to advertise and to reach an audience wider than the geographical region they would normally serve. The viral response to many small business TikTok videos has been attributed to TikTok's algorithm, which shows content that viewers at large are drawn to, but which they are unlikely to actively search for (such as videos on unconventional types of businesses, like beekeeping and logging). In 2020, digital media companies such as Group Nine Media and Global used TikTok increasingly, focusing on tactics such as brokering partnerships with TikTok influencers and developing branded content campaigns. Notable collaborations between larger brands and top TikTok influencers have included Chipotle's partnership with David Dobrik in May 2019 and Dunkin' Donuts' partnership with Charli D'Amelio in September 2020. Sex work TikTok is regularly used by sex workers to promote pornographic content sold on platforms such as OnlyFans. One porn actor posted a viral song referring to himself as an "accountant", starting a trend. In 2020 TikTok updated their terms of service to ban content that promotes "premium sexual content", impacting a large number of adult content creators. In response, they began substituting words in their captions and videos and using filters to censor explicit images. Evan Greer, director of Fight for the Future, believes that at some point, censorship becomes a fool's errand and we would never be "able to sanitize the Internet". Some adult content creators have found a way to game TikTok's recommendation algorithm by posting riddles, which attract a large number of viewers trying and failing to solve them. Some of them are redirected to the creators' OnlyFans accounts and end up as subscribers there. STEM feed In March 2023, TikTok introduced a dedicated feed for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STEM) content. It works with Common Sense Networks to check for safety and age appropriateness and with the Poynter Institute for reliability of information. Heating In January 2023, Forbes reported that a "heating" tool allows TikTok to manually promote certain videos, comprising 1-2% of daily views. The practice began as a way to grow and diversify content and influencers that were not automatically picked up by the recommendation algorithm. It was also used to promote brands, artists, and NGOs, such as the FIFA World Cup and Taylor Swift. However, some employees have abused it to promote their own accounts or those of their spouses, while others have felt that their guidelines leave too much room for discretion. TikTok said only a few individuals can approve heating in the U.S. and the promoted videos take up less than 0.002% of user feeds. To address concerns of Chinese influence, the company is negotiating with the 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 (CFIUS) such that future heating could only be performed by vetted security personnel in the U.S. and the process would be audited by third-parties such as Oracle. Censorship and moderation TikTok's and Douyin's censorship policies have been criticized as non-transparent. Internal guidelines against the promotion of violence, separatism, and "demonization of countries" could be used to prohibit content related to the Tiananmen Square crackdown, Falun Gong, Tibet, Taiwan, Chechnya, Northern Ireland, the Cambodian genocide, the 1998 Indonesian riots, Kurdish nationalism, ethnic conflicts between blacks and whites, or between different Islamic sects. A more specific list banned criticisms against world leaders, including past and present ones from Russia, the United States, Japan, North and South Korea, India, Indonesia, and Turkey. In 2019, TikTok took down a video about human rights abuses in the Xinjiang internment camps against Uyghurs but restored it after 50 minutes as well as the creator's account, saying that the action was a mistake and triggered by a brief "satirical" image of Osama bin Laden in another post. TikTok moderators were instructed to suppress posts from "For You" recommendations if the users shown were deemed "too ugly, poor, or disabled". The consumption of alcohol, full or partial nudity, LGBT and intersex contents were restricted even in places where they are legal. TikTok has since apologized and instituted a ban against anti-LGBTQ ideology, but censorship continues on Douyin due to regulations in China. Douyin guidelines also forbid live broadcasting by unregistered foreigners, "feudal superstition", "money worship", smoking and drinking, competitive eating by the "already obese", "toxic" slime, "pornographic" ASMR such as ear-licking, and female anchors wearing revealing clothes. ByteDance said its early guidelines were global and aimed at reducing online harassment and divisiveness when its platforms were still growing. They have been replaced by versions customized by local teams for users in different regions. A March 2021 study by the Citizen Lab found that TikTok did not censor searches politically but was inconclusive about whether posts are. A 2023 paper by the Internet Governance Project at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found no pro-China censorship on TikTok. Following increased scrutiny, TikTok said it is granting some outside experts access to the platform's anonymized data sets and protocols, including filters, keywords, criteria for heating, and source code. Extremism and hate Concerns have been voiced regarding content relating to, and the promotion and spreading of hate speech and far-right extremism, such as antisemitism, islamophobia, racism, and xenophobia. Some videos were shown to expressly promote Holocaust denial and told viewers to take up arms and fight in the name of white supremacy and the swastika. As TikTok has gained popularity among young children, and the popularity of extremist and hateful content is growing, calls for tighter restrictions on their flexible boundaries have been made. TikTok has since released tougher parental controls to filter out inappropriate content and to ensure they can provide sufficient protection and security. In Malaysia, TikTok is used by some users to engage in hate speech against race and religion especially mentioning the 13 May incident after the 2022 election. TikTok responded by taking down videos with content that violated their community guidelines. In March 2023, The Jewish Chronicle reported that TikTok still hosted videos that promoted the neo-Nazi propaganda film Europa: The Last Battle, despite having been alerted to the issue four months prior. TikTok said it removed and would continue to remove the content and associated accounts and has blocked the search term as well. ISIL propaganda In October 2019, TikTok removed about two dozen accounts that were responsible for posting ISIL propaganda and execution videos on the app. Misinformation TikTok has banned Holocaust denial, but other conspiracy theories have become popular on the platform, such as Pizzagate and QAnon (two conspiracy theories popular among the U.S. alt-right) whose hashtags reached almost 80 million views and 50 million views respectively by June 2020. The platform has also been used to spread misinformation about the COVID-19 pandemic, such as clips from Plandemic. TikTok removed some of these videos and has generally added links to accurate COVID-19 information on videos with tags related to the pandemic. In January 2020, left-leaning media watchdog Media Matters for America said that TikTok hosted misinformation related to the COVID-19 pandemic despite a recent policy against misinformation. In April 2020, the government of India asked TikTok to remove users posting misinformation related to the COVID-19 pandemic. There were also multiple conspiracy theories that the government is involved with the spread of the pandemic. As a response to this, TikTok launched a feature to report content for misinformation. It reported that in the second half of 2020, over 340,000 videos in the U.S. about election misinformation and 50,000 videos of COVID-19 misinformation were removed. To combat misinformation in the 2022 midterm election in the US, TikTok announced a midterms Elections Center available in-app to users in 40 different languages. TikTok partnered with the National Association of Secretaries of State to give accurate local information to users. In September 2022, NewsGuard Technologies reported that among the TikTok searches it had conducted and analyzed from the U.S., 19.4% surfaced misinformation such as questionable or harmful content about COVID-19 vaccines, homemade remedies, the 2020 US elections, the war in Ukraine, the Robb Elementary School shooting, and abortion. NewsGuard suggested that in contrast, results from Google were of higher quality. Mashable's own test from Australia found innocuous results after searching for "getting my COVID vaccine" but suggestions such as "climate change is a myth" after typing in "climate change". Russian invasion of Ukraine As of 2022, TikTok is the 10th most popular app in Russia. After a new set of Russian fake news laws was installed in March 2022, the company announced a series of restrictions on Russian and non-Russian posts and livestreams. Tracking Exposed, a user data rights group, learned of what was likely a technical glitch that became exploited by pro-Russia posters. It stated that although this and other loopholes were patched by TikTok before the end of March, the initial failure to correctly implement the restrictions, in addition to the effects from Kremlin's "fake news" laws,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a "splInternet ... dominated by pro-war content" in Russia. TikTok said that it had removed 204 accounts for swaying public opinion about the war while obscuring their origins and that its fact checkers had removed 41,191 videos for violating its misinformation policies. User privacy Privacy concerns have also been brought up regarding the app. In its privacy policy, TikTok lists that it collects usage information, IP addresses, a user's mobile carrier, unique device identifiers, keystroke patterns, and location data, among other data. In January 2020, Check Point Research discovered a vulnerability, later patched by TikTok, whereby a hacker could spoof TikTok's official SMS messages and replace them with malicious links to gain access to user accounts. In February, Reddit CEO Steve Huffman criticized the app, calling it "spyware". TikTok said the accusations were made without evidence. In July, Wells Fargo banned the app from company devices due to privacy and security concerns. In August 2020, The Wall Street Journal reported that TikTok tracked Android user data, including MAC addresses and IMEIs, with a tactic in violation of Google's policies. The report sparked calls in the U.S. Senate for the Federal Trade Commission (FTC) to launch an investigation. A March 2021 study by the Citizen Lab found that TikTok did not collect data beyond the industry norms, what its policy stated, or without additional user permission. In June 2021, TikTok updated its privacy policy to include potential collection of biometric data, including "faceprints and voiceprints", for special effects and other purposes. The terms said that user authorization would be requested if local law demands such. Experts considered the terms to be "vague" and their implications "problematic" in light of the general lack of robust data privacy laws in the United States. Also in June, CNBC reported that according to former TikTok employees, some staff members in China and employees at ByteDance had access to US user data. In October 2021, following the Facebook Files and controversies about social media ethics, a bipartisan group of lawmakers also pressed TikTok, YouTube, and Snapchat on questions of data privacy and moderation for age-appropriate content. Lawmakers also "hammered" TikTok about whether consumer data could be turned over to Beijing through ByteDance, its parent company in China. TikTok said it does not give information to China's government and "U.S. user data" is stored within the country with backups in Singapore. According to the company's representative, TikTok had "no affiliation" with the subsidiary Beijing ByteDance Technology, in which the Chinese government has a minority stake and board seat. In August 2022, software engineer and security researcher Felix Krause found that in-app browsers from TikTok and other platforms contained codes for keylogger functionality but did not have the means to further investigate whether any data was tracked or recorded. TikTok said that the code is disabled. In a November 2022 update to its European privacy policy, TikTok stated that its global corporate group employees from China and other countries could gain remote access to the user information of accounts from Europe based on "demonstrated need". In May 2023, The Wall Street Journal reported that former employees complained about TikTok tracking users who had viewed LGBT-related content, leading to fears of collected data potentially usable for blackmail. It also reported that a former employee from 2018 was suing TikTok's parent, ByteDance, for wrongful termination from his job. The suit alleges that Hong Kong users' device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were accessed by Chinese Communist Party members. ByteDance denied the claims and said the employee worked on a defunct project. The company pulled TikTok out of Hong Kong in 2020. In June 2023, TikTok confirmed that some financial information, such as tax forms and Social Security numbers, of American content creators are stored in China. This applies to those signing contracts with and receiving payment transactions from ByteDance. Whether similar information will remain exempt from being treated as "protected user data" is being negotiated with the 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 Underage users As with other platforms popular with children, underage users may inadvertently reveal their daily routine and whereabouts, raising concerns of potential misuse by sexual predators. At the time of reporting (2018), TikTok had only two privacy settings, either private or completely public, without any middle ground. Comment sections of "sexy" videos, such as young girls dancing in revealing clothes, were found to contain requests for nude pictures. TikTok itself forbids direct messaging of videos and photos, which meant follow-up interactions, if any, would have to take place in some other form. On 22 January 2021, the Italian Data Protection Authority demanded that TikTok temporarily suspend Italian users whose age could not be established. The order came after the death of a 10-year-old Sicilian girl involved in an Internet challenge. TikTok asked its users in Italy to confirm again that they were over 13 years old. By May, over 500,000 accounts had been removed for failing the age check. In July 2021, the Dutch Data Protection Authority fined TikTok €750,000 euros for offering privacy statements only in English but not in Dutch. It noted that TikTok had implemented positive measures, such as forbidding direct messaging for users younger than 16 and allowing their parents to manage privacy settings directly through a paired family account, but the risk of children pretending to be older when creating their account remains. TikTok raised the minimum age for livestreaming from 16 to 18 after a BBC News investigation found hundreds of accounts going live from Syrian refugee camps. 30 of them showed children begging for digital donation. TikTok reportedly took a 70% commission from some of them, a figure that the company disputed. Journalist spying scandal In June 2022, BuzzFeed News reported that leaked audio recordings of internal TikTok meetings reveal employees in China had access to overseas data, including a "master admin" who could see "everything". Some of the recordings were made during consultations with Booz Allen Hamilton, a US government contractor. A spokesperson of the contractor said some of the report's information was inaccurate but would neither confirm nor deny whether TikTok was one of its clients. Following the reports, TikTok confirmed that employees in China could have access to U.S. data. It also announced that US user traffic would now be routed through Oracle Cloud and that backup copies would be deleted from other servers. In October 2022, Forbes reported that a team at ByteDance planned to surveil certain US citizens for undisclosed reasons. TikTok said that the tracking method suggested by the report would not be feasible because precise GPS information is not collected by the platform. In December 2022, ByteDance confirmed after internal investigation that the data of two journalists and their close contacts had been accessed by its employees from China and the United States on an "audit" team. The audit was intended to uncover sources of leaks who might have met with the journalists from Forbes and the Financial Times. The data accessed included IP addresses, which can be used to approximate a user's location. Four employees have been terminated, including the audit team's lead Chris Lepitak and his superior, executive Song Ye. ByteDance and TikTok condemned the individuals' misuse of authority. The incident is being investigated by the US Department of Justice and FBI. The US Attorney for the Eastern District of Virginia reportedly subpoenaed information from ByteDance regarding efforts made to access US journalists' private user data using TikTok. European data privacy investigations In September 2021, the Ireland Data Protection Commission (DPC) launched investigations into TikTok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minors' data and transfers of personal data to China. The Irish DPC became the lead agency to handle such matters after TikTok established an office in the country, taking over investigations started by Dutch and Italian authorities. In September 2023, the DPC fined TikTok €345 million for violations of the 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GDPR) vis-à-vis the mishandling of children data. Project Clover TikTok has faced criticism for transferring European user data to servers in the United States. It is holding discussions with UK's National Cyber Security Centre about a "Project Clover" for storing European information locally. The company plans to build two data centers in Ireland and one more in Norway. A third party will oversee the cybersecurity policies, data flows, and personnel access independently of TikTok. UK Information Commissioner's Office investigation In February 2019, the United Kingdom's Information Commissioner's Office launched an investigation of TikTok following the fine ByteDance received from the United States Federal Trade Commission (FTC). Speaking to a parliamentary committee, Information Commissioner Elizabeth Denham said that the investigation focuses on the issues of private data collection, the kind of videos collected and shared by children online, as well as the platform's open messaging system which allows any adult to message any child. She noted that the company was potentially violating the GDPR which requires the company to provide different services and different protections for children. Privacy Commissioner of Canada investigation In February 2023, the Privacy Commissioner of Canada, along with its counterparts in Alberta, British Columbia, and Quebec, launched an investigation into TikTok's data collection practices. Texas Attorney General investigation In February 2022, the incumbent Texas Attorney General, Ken Paxton, initiated an investigation into TikTok for alleged violations of children's privacy and facilitation of human trafficking. Paxton claimed that the Texas Department of Public Safety gathered several pieces of content showing the attempted recruitment of teenagers to smuggle people or goods across the Mexico–United States border. He claimed the evidence may prove the company's involvement in "human smuggling, sex trafficking and drug trafficking". The company claimed that no illegal activity of any kind is supported on the platform. U.S. COPPA fines On 27 February 2019, the United States Federal Trade Commission (FTC) fined ByteDance U.S.$5.7 million for collecting information from minors under the age of 13 in violation of the Children's Online Privacy Protection Act. ByteDance responded by adding a kids-only mode to TikTok which blocks the upload of videos, the building of user profiles, direct messaging, and commenting on others' videos, while still allowing the viewing and recording of content. In May 2020, an advocacy group filed a complaint with the FTC saying that TikTok had violated the terms of the February 2019 consent decree, which sparked subsequent Congressional calls for a renewed FTC investigation. In July 2020, it was reported that the FTC and the United States Department of Justice had initiated investigations. Addiction and mental health concerns There are concerns that some users may find it hard to stop using TikTok. In April 2018, an addiction-reduction feature was added to Douyin. This encouraged users to take a break every 90 minutes. Later in 2018, the feature was rolled out to the TikTok app. TikTok uses some top influencers such as Gabe Erwin, Alan Chikin Chow, James Henry, and Cosette Rinab to encourage viewers to stop using the app and take a break. Many were also concerned with the app affecting users' attention spans due to the short-form nature of the content. This is a concern as many of TikTok's audience are younger children, whose brains are still developing. TikTok executives and representatives have noted and made aware to advertisers on the platform that users have poor attention spans. With a large amount of video content, nearly 50% of users find it stressful to watch a video longer than a minute and a third of users watch videos at double speed. TikTok has also received criticism for enabling children to purchase coins which they can send to other users. In February 2022, The Wall Street Journal reported that "Mental-health professionals around the country are growing increasingly concerned about the effects on teen girls of posting sexualized TikTok videos." In March 2022, a coalition of U.S. state attorneys general launched an investigation into TikTok's effect on children's mental health. In June 2022, TikTok introduced the ability to set a maximum uninterrupted screen time allowance, after which the app blocks off the ability to navigate the feed. The block only lifts after the app is exited and left unused for a set period of time. Additionally, the app features a dashboard with statistics on how often the app is opened, how much time is spent browsing it and when the browsing occurs. Since 2021, it has been reported that accounts engaging with contents related to suicide, self-harm, or eating disorder were fed more of similar videos. Some users were able to circumvent TikTok filters by writing in code or using unconventional spelling. The company has faced multiple lawsuits pertaining to wrongful deaths. TikTok said it is working to break up these "rabbit holes" of similar recommendations. US searches for eating disorder receive a prompt that offers mental health resources. In 2021, the platform revealed that it will be introducing a feature that will prevent teenagers from receiving notifications past their bedtime. The company will no longer send push notifications after 9 pm to users aged between 13 and 15. For 16 to 17 year olds, notifications will not be sent after 10 pm. In March 2023, TikTok announced default screen time limits for users under the age of 18. Those under the age of 13 would need a passcode from their parents to extend their time. The Wall Street Journal has reported that doctors experienced a surge in reported cases of tics, tied to an increasing number of TikTok videos from content creators with Tourette syndrome. Doctors suggested that the cause may be a social one as users who consumed content showcasing various tics would sometimes develop tics of their own, akin to mass psychogenic illness. Workplace conditions Several former employees of the company have claimed of poor workplace conditions, including the start of the workweek on Sunday to cooperate with Chinese timezones and excessive workload. Employees claimed they averaged 85 hours of meetings per week and would frequently stay up all night in order to complete tasks. Some employees claimed the workplace's schedule operated similarly to the 996 schedule. The company has a stated policy of working from 10 AM to 7 PM five days per week (63 hours per week), but employees noted that it was encouraged for employees to work after hours. One female worker complained that the company did not allow her adequate time to change her feminine hygiene product because of back-to-back meetings. Another employee noted that working at the company caused her to seek marriage therapy and lose an unhealthy amount of weight. In response to the allegations, the company noted that they were committed to allowing employees "support and flexibility". Bans and attempted bans Asia , TikTok is reportedly banned in several Asian countries including Afghanistan, Armenia, Azerbaijan, India, Iran, Kyrgyzstan, and Syria. The app was previously banned temporarily in Indonesia, but has been lifted. With reports that Palestinians resorted to TikTok for promoting their cause after platforms like Facebook and Twitter blocked their content, Israeli analyst Yoni Ben-Menachem told Arab News in 2022 that the Chinese app was a "tool of dangerous influence" inciting violence through videos glorifying attacks against Israelis. The Palestinian militant group Lion's Den gained much of their popularity through TikTok, according to Ynet. In February 2023, Otzma Yehudit politician Almog Cohen advocated blocking TikTok for all of East Jerusalem. Canada In February 2023, the Canadian government banned TikTok from all government-issued mobile devices. Europe In February 2023, the European Commission and European Council banned TikTok from official devices. Belgium In March 2023, Belgium banned TikTok from all federal government work devices over cybersecurity, privacy, and misinformation concerns. Denmark In March 2023, Denmark's Ministry of Defence banned TikTok on work devices. France In July 2023, members of the French parliament recommended a general ban of TikTok unless it were to "come clean". Concerns ranged from the company's ownership structure, the effectiveness of the app's content moderation and age limits. Government officials also blamed TikTok and other social media platforms for the riots that ensued after the police shooting of Nahel Merzouk. The recommendation was non-binding. United Kingdom In March 2023, the UK government announced that TikTok would be banned on work devices used by ministers and other employees, amid security concerns relating to the app's handling of user data. Downing Street and the Ministry of Defence can continue to use the app under some exempting circumstances. The same month, the BBC told all employees to delete TikTok off their devices unless the app was being used for work purposes. The network is also reportedly considering a ban on the app. United States In January 2020, the United States Army and Navy banned TikTok on government devices after the Defense Department labeled it a security risk. Recruitors had been using the app to help fill quotas, and some continue to maintain a level of engagement through their personal accounts. According to a 2020 article in The New York Times, CIA analysts determined that while it is possible the Chinese government could obtain user information from the app, there was no evidence it had done so. Several independent cybersecurity experts have also concluded that there is no determinable evidence that user information was being or had been obtained by the Chinese government, although they note that the amount of data that the app collects is of comparable volume to other social media apps, including U.S.-based platforms such as Facebook and Twitter. On 6 August 2020, then U.S. President Donald Trump signed an order which would ban TikTok transactions in 45 days if it was not sold by ByteDance. Trump also signed a similar order against the WeChat application owned by the Chinese multinational company Tencent. On 14 August 2020, Trump issued another order giving ByteDance 90 days to sell or spin off its U.S. TikTok business. In the order, Trump said that there is "credible evidence" that leads him to believe that ByteDance "might take action that threatens to impair the national security of the United States". Donald Trump was concerned about TikTok being a threat because TikTok's parent company was rumored to be taking United States user data and reporting it back to Chinese operations through the company ByteDance. In June 2021, new president Joe Biden signed an executive order revoking the Trump administration ban on TikTok, and instead ordered the Secretary of Commerce to investigate the app to determine if it poses a threat to U.S. national security. In June 2022, FCC Commissioner Brendan Carr called for Google and Apple to remove TikTok from their app stores, citing national security concerns, saying TikTok "harvests swaths of sensitive data that new reports show are being accessed in Beijing". In September 2022, during a testimony to the Senate Homeland Security Committee, TikTok's COO would not commit to stopping "all data and metadata flows" to China. The COO reacted to concerns of the company's handling of user data by stating that TikTok does not operate in China, though the company does have an office there. In November 2022, Christopher A. Wray, director of the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told U.S. lawmakers that "the Chinese government could use [TikTok] to control data collection on millions of users or control the recommendation algorithm, which could be used for influence operations". In December 2022, Senator Marco Rubio and representatives Mike Gallagher and Raja Krishnamoorthi introduced the Averting the National Threat of Internet Surveillance, Oppressive Censorship and Influence, and Algorithmic Learning by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ct (ANTI-SOCIAL CCP Act), which would prohibit Chinese- and Russian-owned social networks from doing business in the United States. That month, Senator Josh Hawley also introduced a separate measure, the No TikTok on Government Devices Act, to ban federal employees from using TikTok on all government devices. On 15 December, Hawley's measure was unanimously passed by the U.S. Senate. On 27 December, the Chief Administrative Officer of the 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banned TikTok from all devices managed by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As of February 2023, at least 32 (of 50) states have announced or enacted bans on state government agencies, employees, and contractors using TikTok on government-issued devices. State bans only affect government employees and do not prohibit civilians from having or using the app on their personal devices. In March 2023, Politico reported that TikTok hired SKDK to lobby amid a possible federal ban. This preceded TikTok's CEO appearance before Congress to address the concerns surrounding the app. He stated that TikTok's data collection practices did not differ from those of other US social media platforms. A researcher at the Citizen Lab believes that governments around the world should better protect user information in general from being exploited by Big Tech, not focus exclusively on one app. Montana became the first state to pass legislation banning TikTok on all personal devices from operating within state lines and barring app stores from offering TikTok for downloads. State governor Greg Gianforte signed the bill in May 2023 with the law going into effect in January 2024. TikTok is paying the attorney fees for a lawsuit from Montana content creators who had expressed concerns about the legislation. The company is filing a separate case on its own behalf to overturn the ban. Commentary Security officials have few details to offer about the move against TikTok. Attempts to ban TikTok by the United States have been regarded as hypocritical and politically motivated. The U.S. is headquarters to major global Internet companies, and its intelligence agencies such as the NSA can broadly interpret Section 702 of the Foreign Intelligence Surveillance Act (FISA) to search user communications even without a warrant. Non-US persons are more easily targeted, numbering 232,432 in 2021, but US citizens' communications can also be caught up. The types of data collected by TikTok are also collected by other social media platforms and available for purchase through brokers, often without oversight, by both private and state entities. A researcher at Georgia Tech's Internet Governance Project raised the question of whether protectionism of U.S. corporations, rather than privacy concerns, is the primary motivation of the US government. An analyst at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writes that it would make more sense to focus on the protection of data directly rather than on any particular platform. Project Texas Following Trump administration's attempt to ban the platform, TikTok has been working to silo privileged user data within the United States under oversight from the US government or a third party such as Oracle. Named Project Texas, the initiative focuses on unauthorized access, state influence, and software security. A new subsidiary, TikTok U.S. Data Security Inc. (USDS), was created to manage user data, software code, back-end systems, and content moderation. It would report to the 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 (CFIUS), not ByteDance or TikTok, even for hiring practices. Oracle would review and spot check the data flows through USDS. It would also digitally sign software code, approve updates, and oversee content moderation and recommendation. Physical locations would be established so that Oracle and the US government could conduct their own reviews. The company has been engaged in confidential negotiations over the project with CFIUS since 2021 and submitted its proposal but received little response from the panel afterward. In March 2023, a former employee of the company said Project Texas did not go far enough and that a complete "re-engineering" would be needed. TikTok responded by saying that Project Texas already is a re-engineering of the app and that the former employee left in 2022 before the project specifications were finalized. Oceania By 7 March 2023, 68 Australian federal agencies had banned TikTok on work-related mobile devices. Liberal Party Senator James Paterson called for a federal ban on all government-related devices. In April, West Australian Premier Mark McGowan banned TikTok from government phones. On 17 March 2023, the New Zealand Parliamentary Service banned TikTok on devices connected to Parliament, citing cybersecurity concerns. Other legal issues Some countries have shown concerns regarding the content on TikTok, as their cultures view it as obscene, immoral, vulgar, and encouraging pornography. There have been temporary blocks and warnings issued by countries including Indonesia, Bangladesh, India, and Pakistan over the content concerns. In 2018, Douyin was reprimanded by Chinese media watchdogs for showing "unacceptable" content. On 27 July 2020, Egypt sentenced five women to two years in prison over TikTok videos. One of the women had encouraged other women to try and earn money on the platform, another woman was sent to prison for dancing. The court also imposed a fine of 300,000 Egyptian pounds (UK£14,600) on each defendant. Indiana Attorney General Todd Rokita filed lawsuits against TikTok, alleging that the platform exposed inappropriate content to minors. The complaint also alleges that TikTok "intentionally falsely reports the frequency of sexual content, nudity, and mature/suggestive themes" on their platform which made the app's "12-plus" age ratings on the Apple and Google app stores deceptive. Tencent lawsuits Tencent's WeChat platform has been accused of blocking Douyin's videos. In April 2018, Douyin sued Tencent and accused it of spreading false and damaging information on its WeChat platform, demanding CN¥1 million in compensation and an apology. In June 2018, Tencent filed a lawsuit against Toutiao and Douyin in a Beijing court, alleging they had repeatedly defamed Tencent with negative news and damaged its reputation, seeking a nominal sum of CN¥1 in compensation and a public apology. In response, Toutiao filed a complaint the following day against Tencent for allegedly unfair competition and asking for CN¥90 million in economic losses. Data transfer class action lawsuit In November 2019, a class action lawsuit was filed in California that alleged that TikTok transferred personally identifiable information of U.S. persons to servers located in China owned by Tencent and Alibaba. The lawsuit also accused ByteDance, TikTok's parent company, of taking user content without their permission. The plaintiff of the lawsuit, college student Misty Hong, downloaded the app but said she never created an account. She realized a few months later that TikTok had created an account for her using her information (such as biometrics) and made a summary of her information. The lawsuit also alleged that information was sent to Chinese tech giant Baidu. In July 2020, twenty lawsuits against TikTok were merged into a single class action lawsuit in the United States District Court for the Northern District of Illinois. In February 2021, TikTok agreed to pay $92 million to settle the class action lawsuit. Voice actor lawsuit In May 2021, Canadian voice actor Bev Standing filed a lawsuit against TikTok over the use of her voice in the text-to-speech feature without her permission. The lawsuit was filed in the Southern District of New York. TikTok declined to comment. Standing believes that TikTok used recordings she made for the Chinese government-run Institute of Acoustics. The voice used in the feature was subsequently changed. Market Information Research Foundation lawsuit In June 2021, the Netherlands-based Market Information Research Foundation (SOMI) filed a €1.4 billion lawsuit on behalf of Dutch parents against TikTok, alleging that the app gathers data on children without adequate permission. Blackout Challenge lawsuits Multiple lawsuits have been filed against TikTok, accusing the platform of hosting content that led to the death of at least seven children. The lawsuits claim that children died after attempting the "Blackout challenge", a TikTok trend that involves strangling or asphyxiating someone or themselves until they black out (passing out). TikTok stated that search queries for the challenge do not show any results, linking instead to protective resources, while the parents of two of the deceased argued that the content showed up on their children's TikTok feeds, without them searching for it. Cooperation with law enforcement In June 2023 The New Zealand Herald reported that TikTok, working in cooperation with both New Zealand and Australian police, deleted 340 accounts and 2,000 videos associated with criminal gangs including the Mongrel Mob, Black Power, Killer Beez, the Comancheros, Mongols, and Rebels. TikTok had earlier drawn criticism for hosting content by organised crime groups promoting the gang lifestyle and fights. A TikTok spokesperon reiterated the platform's efforts to countering "violent" and "hateful" organisations' content and cooperating with police. New Zealand Police Commissioner Andrew Coster praised the platform for taking a "socially-responsible stance" against gangs. See also List of most-followed TikTok accounts Musical.ly Timeline of social media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Official website Douyin 2010s fads and trends 2016 establishments in China 2016 software 2020s fads and trends Android (operating system) software Articles containing video clips ByteDance Chinese brands Chinese companies established in 2016 Chinese social networking websites Delisted applications Freeware Internet culture Internet properties established in 2016 IOS software Mobile applications Music software Social media companies Social networking services Video hosting Video software Youth culture Vertical video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6%A0%EC%9A%B0%EB%B9%8C%EC%97%AD
스토우빌역
스토우빌역(Stouffville Station)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스토우빌의 메인 스트리트에 위치한 GO 트랜싯의 통근 열차인 스토우빌선 정차역이다. 이 역은 스토우빌선 열차가 2008년 9월 2일에 링컨빌역 (오늘날의 올드엠역)까지 연장되기 전까지 북부 종착역이었다. 요크-더럼 문화유산 철도 열차가 여름 기간 동안 주말에 이 역과 억스브릿지 구간을 운행한다. 위치 스토우빌역은 메트로링스가 소유하는 억스브릿지선 지점에 위치해있으며, 북쪽으로는 올드엠역이, 남쪽으로는 마운트조이역이 위치해있다. 마운트조이역에서 북쪽으로 억스브릿지선은 메이지매켄지 애비뉴를 지나 휘트처치 스토우빌에 다다른다. 메이저매켄지 북쪽으로는 그린벨트 농지로, 억스브릿지선은 9번 라인을 지나면서 스토우빌의 새로운 주택가를 지난다. 스토우빌역은 스토우빌 중심가에 위치해있다. 억스브릿지선은 북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며 GO 트랜싯 링컨빌 차량기지가 있는 올드엠역에 다다른다. 올드엠역에 다다르기 직전에 GO 트랜싯 열차는 본선에서 주박선으로 분기하며, 억스브릿지선은 북동쪽으로 억스브릿지역까지 계속 이어진다. 스토우빌에서 억스브릿지까지 현재 GO 트랜싯 열차가 운행하지는 않지만 관광열차인 요크-더럼 문화유산 철도가 이 구간을 운행한다. 역사 스토우빌역은 1869년에 토론토 & 니피싱 철도 (Toronto & Nipissing Railway)가 스카버러 분기점에서 북쪽으로 철도를 지으면서 동시에 완공하였다. 이 구조물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토론토 & 니피싱에서 건설한 다른 역과 유사한 디자인을 따랐다. 대합실, 수하물실, 역무실 등이 있던 직사각형의 목조 건물로, 역 건물 옆에는 또한 기관차를 보관하는 차량기지가 있었다. 1871년 7월 1일에 토론토에서 억스브릿지로 가는 노선이 개통한 후 스토우빌역에 첫 열차가 정차하였다. 서튼의 사업가들은 곧 심코호로 가는 협궤 지선을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고, 1873년 3월 29일에 심코호 정션 철도 (Lake Simcoe Junction Railway)가 인가를 받았다. 이 노선은 1875년에 측량되었고, 새로운 노선은 스토우빌역에서 북쪽으로 약 0.5km 떨어진 토론토 & 니피싱 철도 노선에서 분기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회사는 1876년에 토론토 & 니피싱이 25년 동안 새로운 노선을 관리하는 것에 합의하였고, 1877년 10월 1일에 잭슨포인트로 향하는 첫 열차가 스토우빌역을 출발하였다. 토론토 & 니피싱 철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고 중 하나는 1878년 2월 스토우빌 차량기지에서 증기 기관차가 폭발하여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 사건이었다. 이후 1883년에 다른 기지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었다. 표준궤 통일과 경쟁 노선의 확장으로 토론토 & 니피싱 철도와 심코호 정션 철도는 모두 수익성이 떨어졌고, 두 회사 모두 캐나다 미들랜드 철도 (Midland Railway of Canada)에 인수를 시도하였다. 1881년 협상이 진행되면서 미들랜드 철도는 토론토 & 니피싱 남부 선로를 따라 표준궤 열차를 지원하기 위해 세 번째 철도를 짓는 데 자금을 지원했다. 두 회사는 1884년 1월 1일부터 더 큰 그랜드트렁크가 미들랜드 철도를 인수하면서 미들랜드 철도는 아주 짧은 시기 동안 운행하였다. 2년 후인 1886년, 기존 토론토 & 니피싱 역 건물은 화재로 전소되었고, 같은 해에 더 큰 목조 건축물이 이 역에 자리잡았다. 새로운 역은 캐나다 태평양 철도가 10년 전에 채택한 밴혼 (Van Horne) 디자인과 비슷하였고, 역무원의 숙직실을 포함한 2층 건물이었다. 아래층에는 대합실과 역무실이 있었고, 긴 화물실은 건물 북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어 있었다. 이 시점에서 스토우빌역은 하루 총 8편의 열차가 운행했으며, 그 중 2편은 잭슨포인트를 오가는 열차였다. 1916년 철도를 통해 지역의 곡물 수송을 용이하기 하기 위해 역 건널목에 곡물 엘리베이터가 건설되었다. 잭슨포인트로 가는 노선은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토론토 & 요크 교외 철도가 완공된 이후로는 수익성이 떨어졌으며, 그랜드트렁크 철도 또한 동시에 재정난을 겪었고, 1923년 국유화로 캐나다 내셔널 철도에 흡수되었다. 잭슨포인트로 가던 승객들은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거의 증발하였고 기존 심코호 정션 철도는 1927년에 여객 취급을 중단하였다. 20세기 초에 자동차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지선 승객 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이 지역의 역마차 노선이 고속도로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따라 운행하였다. 스토우빌에 정차하는 열차 수는 1940년에는 하루 5회, 1958년에는 하루 3회로 감소하였다. CN 철도는 이 노선을 운행하는 열차에 사용되었던 기존 장비들을 운영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자주식 버드 레일 디젤 차량으로 점차 대체하였다. 스토우빌은 여전히 토론토의 교외 지역이었기 때문에 통근열차가 운행이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1974년에 유니언역으로 가는 열차는 하루에 단 한 대 뿐이었다. CN 철도는 1976년에 여객열차 운행을 VIA 철도에 이관하였고 1977년에는 VIA 철도가 별도의 연방 공기업이 되었다. 1982년에는 GO 트랜싯이 VIA 철도 대신 스토우빌선의 운행을 대신 맡았고, 이곳에는 오늘날의 역 건물이 들어서있다. 요크-더럼 문화유산 철도는 1996년에 스토우빌과 억스브릿지 구간을 기존 장비로 계속 운행하였고, 지금까지도 운행하고 있다. 곡물 엘리베이터는 스토우빌역에 추가 주차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2015년에 철거되었다. 시설 스토우빌역은 직원이 상주하지 않는 무인역으로, 통근열차 티켓 구매나 카드 충전은 역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할 수 있다. 프레스토 카드가 없는 경우에는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단말기에 태그해 요금을 정산할 수도 있고, 스마트폰에서 GO 트랜싯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티켓 (e-ticket)을 구매할 수도 있다. 이 역에는 대합실, 화장실, 와이파이, 공중전화가 있으며, 승강장에는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쉼터가 있으며 겨울에는 난방도 된다. 역 건물과 승강장, 열차 내부는 휠체어 승객도 이용할 수 있으며, 승강장 중앙에 있는 휠체어 경사로를 통해 휠체어 승객도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환승 주차장은 두 곳이 있는데, 중앙 주차장은 83대의 주차 공간이 있고, 서부 주차장에는 293대의 주차 공간이 있으며, 최대 48시간까지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 이 역을 자주 이용하는 승객은 주차장에 지정 주차 공간을 예약할 수 있으며, 카풀해서 오는 승객들도 카풀 전용 주차 공간에 주차할 수 있다. 이 역으로 마중 나오는 차량 또한 역 앞에 있는 정차 공간에서 대기할 수 있다. 이 역에는 또한 자전거 거치대가 있으며, GO 트랜싯과 YRT 버스는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정차한다. 운행 계통 2023년 6월 기준 스토우빌역에는 평일 아침 유니언 방면 통근열차가 6대 정차하며, 평일 오후에는 올드엠 방면 통근열차가 6대 정차한다. 나머지 시간대에는 유니언역 버스 터미널에서 억스브릿지까지 수시로 버스가 운행하며, 토론토에 있는 케네디, 에이진코트, 밀리켄역에는 정차하지 않는다. 요크-더럼 문화유산 철도는 비정기적으로 운행하는 관광열차로, 축제나 행사 등에 수시로 운행하며, 자세한 시각표는 홈페이지를 참고해야 한다. 버스 연결편 스토우빌역에는 통근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시간대에 부수적으로 운행하는 71번 버스가 정차하며, 시내버스로는 9번 라인을 따라 스토우빌과 복스그로브 플라자간을 운행하는 요크 지역 교통국의 9번 버스가 평일에 상시 정차한다. GO 트랜싯 통근열차 또는 광역버스에서 YRT 시내버스로 갈아탈 경우 무료 환승이 가능하다. GO 트랜싯 요크 지역 교통 (YRT) 이 외에도 스토우빌 지역에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 45분까지, 오후 7시부터 오후 10시 45분까지는 수요 응답형 차량이 스토우빌역에서 스토우빌의 원하는 주소로 데려다주며, 모빌리티 온 리퀘스트 (Mobility On-Request) 앱이나 YRT 고객센터인 1-844-667-5327을 통해 출발 15분 전까지 사전에 예약할 수 있다. 요금은 일반 YRT 요금이 부과된다. 요금은 프레스토 카드, YRT 페이 앱, 트랜싯 (Transit) 앱, 신용카드, 체크카드 또는 현금으로 지불할 수 있다. 각주 인접한 역 GO 트랜싯 1871년 개업한 철도역 온타리오주의 철도역
https://en.wikipedia.org/wiki/Stouffville%20GO%20Station
Stouffville GO Station
Stouffville GO Station is a railway station in the GO Transit network located in Stouffville, Ontario, Canada. It was the northern terminus of the Stouffville line train service until the line was extended to Lincolnville (now ) on September 2, 2008. Buses serve the station from stops on the street due to space limitations. York-Durham Heritage Railway runs historical trains between the station and Uxbridge on summer weekends. History The Toronto and Nipissing Railway was completed in 1871, connecting Stouffville and Uxbridge with Toronto. The line's northeastern terminus at Coboconk, Ontario, on Balsam Lake in the Kawarthas was completed in 1872. In 1877, a second track was built from Stouffville north to Jackson's Point on Lake Simcoe. These connections were created in large part to provide a reliable and efficient means of transporting timber harvested and milled in these regions. Soon Stouffville Junction serviced thirty trains per day. The railway became the Grand Trunk Railway in 1884, and Canadian National Railways took over the line in 1914. The original station, a converted Victorian home with annex, was demolished in the 1980s and not replaced until the current station was built for GO Transit in the 1990s. The water tower had been removed earlier but discussions continued about the fate of the 1916 Stouffville Co-op grain elevator, which needs to be relocated for GO Transit expansion. In May 2015, the grain elevator was demolished and replaced with 20 parking spaces after Metrolinx determined it was a fire hazard due to its deteriorated condition. Local preservationists were upset over the bulldozing of the 100-year-old structure. In July 2005, the station site was expanded to include more parking in the west lot. An additional 60 surface parking spaces was added to the station in June 2016. Connecting transit York Region Transit 9 9th Line eastbound to Parkview Village and westbound to Box Grove Plaza See also Nineteen on the Park (c 1896) References External links York-Durham Heritage Railway Stouffville Community Policing Centre GO Transit railway stations Railway stations in the Regional Municipality of York Railway stations in Canada opened in 1869 Canadian National Railway stations in Ontario Transport in Whitchurch-Stouffville Buildings and structures in Whitchurch-Stouffville 1869 establishments in Ontario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D%82%A4%EB%AA%AC%EC%8A%A4%ED%83%80
토키몬스타
토키몬스타(TOKiMONSTA)는 로스앤젤리스 출신의 디스크 자키 제니퍼 리(Jennifer Lee)의 예명이다. 얼터너티브 힙합 음악가 서스티 피쉬 래퍼 쿨 케이스 가수 MNDR, 프로듀서 Anderson Paak과 협업하였고, 안드레야 트리애너, 대델루스, Jodeci,,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리믹스 트렉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성장 제니퍼 리는 캘리포니아주 토런스에서 자랐으며. 한국계 미국인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비디오 게임 프로듀서로 일하였다. 제니퍼 리는 전통적인 피아노 교습을 받았고 대학교 재학중에는 로스앤젤리스 레이머트 파크에 있는 프로젝트 블로우드, 로우 엔드 데오리와 같은 클럽에서 비트를 담당하였다. 경력 제니퍼 리는 2010년 런던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에 초대되었다. 이후 로스앤젤리스의 음악가 플라잉 로터스가 창립한 레이블 브레인피더와 처음으로 계약한 여성 음악가가 되어 2010년 첫 음반 《Midnight Menu》를 발매하였다. 2010년 12월 주간지 《LA 위클리》는 급상승 중인 여성 DJ 1순위로 제니퍼 리를 올렸다. 2011년 브레인피더를 통해 EP 《Creature Dreams》를 발표하였다. 2012년 수지 아날로그와 협업으로 11 곡을 담은 《Analogue Monsta》를 발표하였다. 2013년 울트라 뮤직을 통해 두번째 앨범인 《Half Shadows》를 발표하였고, 2014년 스스로 세운 레이블 영아트 레코드를 통해 《Desiderium》을 발표하였다. 2014년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에 이전 시즌 졸업자로서 강사로 초청되었다. 2015년 영아트 레코드의 프로듀서로서 가빈 투렉의 《You're Invited》를 제작하였다. 같은 해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 4명의 일상을 담은 알파 걸스(Alpha Girls)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이름 토키몬스타는 한국어 토끼와 몬스터를 합성하여 지은 이름이다. 한국 동요 〈산토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모야모야 병 2015년 말 제니퍼 리는 모야모야병이 발병하였다. 2번에 걸친 뇌수술을 받고 몇 달간 음악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가 이를 경험으로 새 앨범 《Lune Rouge》를 발표하였다. 새 앨범은 음악인 토키몬스타와 자연인 제니퍼 리의 가치관을 함께 섞어 삶에 대한 의지를 담았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익스플레인:세계를 해설하다》의 첫회 〈소리와 음악 사이〉에 출연하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음악의 특성을 이야기하였다. 음악 앨범 Midnight Menu (2010) Half Shadows (2013) Desiderium (2014) Fovere (2016) Lune Rouge (2017) Oasis Nocturno (2020) 익스텐디드 플레이 Bedtime Lullabies (2008) Cosmic Intoxication (2010) Creature Dreams (2011) Los Angeles 8/10 (2011) (마이크 가오와 협업) Boom (2012) (수지 아날로그와 아날로그 몬스타로서 협업) You're Invited (2015) (가빈 투렉과 협업) 싱글 "USD / Free Dem" (2010) "Mileena's Theme" (2011) "Darkest (Dim)" (2012) "Go With It" (2013) "The Force" (2013) "The World Is Ours" (2014) "Realla" (2014) "Steal My Attention" (2014) "Drive" (2014) "Pinching" (2014) "Saw Sydney (Pharrell 'That Girl' Flip)" (2015) "Hemisphere" (2015) "Surrender" (2015) "Put It Down" (2015) "Don't Call Me" (2017) "We Love" (2017) "I Wish I Could" (2018) 프로덕션 서스티 피쉬 - 앨범 《Watergate》중 "Grind It Out"과 "Antique Blowed Show"(2011) 리믹스 Shlohmo - "Hot Boxing the Cockpit" (2010) Suzi Analogue - "NXT MSG" (2010) Eight and a Half - "Scissors" (2011) Take - "Horizontal Figuration" (2011) Andreya Triana - "Far Closer" (2011) Swede:Art - "I'm a R.O.B.O.T." (2011) Daedelus - "Tailor-Made" (2011) Kidkanevil - "Megajoy" (2011) Hundred Waters - "Thistle" (2012) Jodeci - "Freek'n You" (2012) Stan Getz & [[João Gilberto - "Corcovado" (2013) Felix Cartal - "New Scene" (2013) Justin Timberlake - "Suit & Tie" (2013) Tinashe - "2 On" (2014) Elizabeth Rose - "Sensibility" (2014) Kilo Kish]] - "IOU" (2014) Jessie Ware]] - "Keep On Lying" (2014) Mariah Carey - "Heartbreaker" (2014) Lupe Fiasco - "Superstar" (2014) Yacht - "Where Does This Disco?" (2015) The Drums - "There's Nothing Left" (2015) Gavin Turek - "Frontline" (2015) Lil Uzi Vert - "Team Rocket" (2016) Beck - "Wow" (2016) Maroon 5]] - "Girls Like You" (2018) George FitzGerald, Lil Silva - "Rollback" (2018)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TOLiMONSTA 지니앱: 토키몬스타 미국의 전자 음악가 미국의 힙합 DJ 미국의 힙합 프로듀서 한국계 미국인 음악가 클럽 DJ 살아있는 사람 로스앤젤레스 출신 음악가 리믹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동문
https://en.wikipedia.org/wiki/Tokimonsta
Tokimonsta
Jennifer Lee, known professionally as Tokimonsta (stylized as TOKiMONSTA), is a Korean American producer and DJ based in Los Angeles. She has collaborated with artists such as Anderson .Paak, Earthgang, Isaiah Rashad, Selah Sue, and ZHU. Additionally, she has done a number of official remixes, a few being Beck, Duran Duran, Olafur Arnalds, Disclosure, Sia, the Netflix show Squid Game and Odesza. In 2019, TOKiMONSTA was nominated for "Best Dance / Electronic Album" at the Grammy Awards for her album Lune Rouge. She was the first female Asian-American producer to receive a nomination in this category. Early life TOKiMONSTA grew up in Torrance, California. Her parents immigrated to the US from South Korea; thus, she is second generation Korean American. She was raised by her mother who ran a small business to support their family. As a young child, her mother tasked her with classical piano lessons. Lee has noted disliking lessons as a child, though she appreciates the structural foundation it created for her approach to composing and producing. She graduated from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While studying, she first began producing music, using the Fruity Loops Studio digital audio workstation (DAW). She later progressed to producing using the Ableton Suite as her primary DAW. She participated in beat cyphers and battles at Leimert Park's Project Blowed and Low End Theory. Upon graduating, she worked for a video game publisher while continuing to make music and perform as a hobby. She would later be laid off due the US economic recession, and would decide to pursue music full time. Career Lee was invited to attend the Red Bull Music Academy in London in 2010. She was the first woman to sign to Flying Lotus's Brainfeeder label and released her first album, Midnight Menu, in November 2010 on Brainfeeder. She was rated the number one Hottest Los Angeles Lady DJ by LA Weekly in December 2010. She released the EP Creature Dreams, also on Brainfeeder, in 2011. The next year, she released Boom, an 11-track collaborative project with Suzi Analogue as Analogue Monsta. In 2013, her second album, Half Shadows, was released on Ultra Records. In 2014, she released Desiderium on her own Young Art Records. She returned to the Red Bull Music Academy that same year as an alumni lecturer. She produced Gavin Turek's You're Invited in 2015 on Young Art Records. On September 9, 2015, she announced on Twitter the release of her solo album Fovere and she will be out on tour in support of her new album starting November 9, 2015. Lee was profiled in the 2020 documentary film Underplayed, in which she elaborated on the issue of diversity in the electronic dance music industry. In December 2022, Lee performed at the inaugural LA3C festival at the Hot Import Nights stage alongside EDM artists Freya Fox, DJ Peach, Meirlin, DJ Accia, Lucid Lolo, DJ Rose Gold, and many others. Name The name TOKiMONSTA originates from the Korean word for rabbit (tokki), which she took from a Korean's children's song, "San Toki". Personal life Lee was diagnosed with Moyamoya disease in late 2015. After undergoing two brain surgeries, she briefly lost language and comprehension skills. Once these were regained to a degree, Lee eventually began work on her 2017 album Lune Rouge, despite not being able to fully understand music while recovering. She has noted that this album was her most personal piece of work due to the difficulties she experienced prior to making it. She discusses surmounting these challenges in Vox's Netflix series, Explained (season 1, episode titled "Music") and the Great Big Story miniseries Soundwave. Discography Albums Midnight Menu (2010) Half Shadows (2013) Desiderium (2014) Fovere (2016) Lune Rouge (2017) Oasis Nocturno (2020) Extended plays Bedtime Lullabies (2008) Cosmic Intoxication (2010) Creature Dreams (2011) Los Angeles 8/10 (2011) (with Mike Gao) Boom (2012) (with Suzi Analogue, as Analogue Monsta) You're Invited (2015) (with Gavin Turek) Come And Go Remixed (2020) Get Me Some Remixed (2020) Singles "USD / Free Dem" (2010) (with Blue Daisy) "Mileena's Theme" (2011) (for Mortal Kombat) "Darkest (Dim)" (2012) (with Gavin Turek) "Go With It" (2013) (with MNDR) "The Force" (2013) (with Kool Keith) "The World Is Ours" (2014) "Realla" (2014) (with Anderson Paak) "Steal My Attention" (2014) "Drive" (2014) (with Arama) "Pinching" (2014) (with Iza Lach) "Saw Sydney (Pharrell 'That Girl' Flip)" (2015) "Hemisphere" (2015) (with Gavin Turek) "Surrender" (2015) (with Gavin Turek) "Put It Down" (2015) (with Anderson .Paak) "Don't Call Me" (2017) (feat. Yuna) "We Love" (2017) (featuring MNDR) "I Wish I Could" (2018) (featuring Selah Sue) "Strange Foot" (2019) (featuring Ambré) "Dream Chorus" (2019) "Love That Never" (2019) "Fried For the Night" (2020) (featuring EarthGang) "One Day" (2020) (featuring Bibi and Jean Deaux) Remixes Shlohmo - "Hot Boxing the Cockpit" (2010) Suzi Analogue - "NXT MSG" (2010) Eight and a Half - "Scissors" (2011) Take - "Horizontal Figuration" (2011) Andreya Triana - "Far Closer" (2011) Swede:Art - "I'm a R.O.B.O.T." (2011) Daedelus - "Tailor-Made" (2011) Kidkanevil - "Megajoy" (2011) Hundred Waters - "Thistle" (2012) Jodeci - "Freek'n You" (2012) Stan Getz & João Gilberto - "Corcovado" (2013) Felix Cartal - "New Scene" (2013) Justin Timberlake - "Suit & Tie" (2013) Tinashe - "2 On" (2014) Elizabeth Rose - "Sensibility" (2014) Kilo Kish - "IOU" (2014) Jessie Ware - "Keep On Lying" (2014) Mariah Carey - "Heartbreaker" (2014) (with Io Echo) Lupe Fiasco - "Superstar" (2014) Yacht - "Where Does This Disco?" (2015) The Drums - "There's Nothing Left" (2015) Gavin Turek - "Frontline" (2015) Lil Uzi Vert - "Team Rocket" (2016) Beck - "Wow" (2016) Maroon 5 & Cardi B – "Girls Like You" (2018) George FitzGerald and Lil Silva - "Rollback" (2018) Odesza - "Falls" (2018) Olafur Arnalds - "They Sink" (2019) References External links 21st-century American musicians 21st-century American women musicians Ableton Live users American electronic musicians American hip hop DJs American hip hop record producers American musicians of Korean descent Club DJs Living people Musicians from Los Angeles Musicians from Torrance, California Remixers Ultra Records artists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alumni American women in electronic music Record producers from California American women record producers Project Blowed American women hip hop musicians American women DJs Year of birth missing (living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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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 야스노리
기쿠치 야스노리(, 1989년 9월 18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다. 이바라키현 구지군 다이고정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인물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시절에는 피구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도키와 대학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벤치에 들어갔고 2006년 추계 이바라키현 대회에서 준우승하여 간토 대회에도 출전했다. 첫 경기에서 가라카와 유키가 소속된 나리타 고등학교와 상대하면서 나리타 고등학교 타선을 6피안타로 막아냈는데도 자신의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패한 바람에 선발 야구 대회 출전을 놓쳤다. 3학년 때는 에이스 겸 4번으로 활약을 했고 여름에 열린 이바라키현 대회에서는 준결승전 상대인 도요 대학 부속 우시쿠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16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여 완봉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는 기요하라 다이키가 소속된 조소가쿠인 고등학교에게 패하여 고시엔 대회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 2007년 10월 3일,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라쿠텐 시절 입단 초기 ~ 2012년 2008년에는 1군에서의 등판 기회는 없었지만 고졸 출신 3명의 투수 중 유일하게 1군에 등록됐다. 이듬해 2009년에는 2군에서 주로 중간 계투로 등판하여 프레시 올스타전이 열리기 전까지 13경기에 등판했다. 팀 동료인 이시다 다카시가 프레시 올스타전 출전을 포기하면서 이시다를 대신해서 출전했다. 경기에서는 중간부터 등판하여 웨스턴 리그의 주축 타선으로부터 2개의 삼진을 빼앗는 등 1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였다. 2010년 9월 23일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프로 데뷔 첫 등판·첫 선발 등판을 동시에 이루면서 5이닝 동안 2피안타 2실점의 호투로 프로 첫 승리 투수가 됐다. 2012년 시즌 종반에 1군으로 승격, 4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승 1패를 기록했고 2군에서는 7승 2패와 이스턴 리그 최고 승률(0.778)을 기록하여 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에 의해 ‘젋은 투수의 지정 강화 선수’ 5명으로 선정돼 스프링 캠프 마지막에 있은 코칭 스태프의 투표로 다음 시즌에 열릴 시범 경기에서 개막전 선발 투수의 권리를 부여했다. 2013년 ~ 2015년 2013년 시범 경기에서의 호투가 인정돼 개막 1군 엔트리에 올랐고 4월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지만 4경기 연속으로 강판됐다. 6월 2일 주니치 드래곤스전(K스타 미야기)에서 선발로 나와, 6이닝 중간까지 무실점으로 틀어 막아 시즌 첫 승리와 홈구장에서의 첫 승리를 올렸다. 2014년, 개막 1군 엔트리에 입성하지 못했고 그 후 1군과 2군을 오가는 중간 계투로 기용한 것에 불과했지만 8월 17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시즌 첫 선발 등판해 6이닝을 3피안타 무볼넷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등 전년도에 주니치전 이후 약 1년 2개월 만의 시즌 첫 승리를 올렸다. 이후 시즌 종료 때까지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개인 최다 성적인 4승을 거뒀다. 2015년 4월 30일 오릭스 버펄로스전에서는 시즌 첫 등판·첫 선발 등판을 하여 6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이는 등 이 시점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갔다. 시즌 두 번째 등판인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선 7이닝 도중까지 8탈삼진 2실점의 호투로 시즌 첫 승리를 따냈다. 이 해에는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4승에 그치긴 했지만 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시즌 100이닝을 던졌다. 2016년 ~ 2018년 2016년에는 작년 9월부터 발병하고 있던 오른쪽 어깨 통증의 재활로 인해 2군에서의 생활이 계속됐고 8월 23일에는 1군 첫 등판이 됐다. 이어진 8월 30일 등판에는 6이닝 2실점으로 첫 승리를 거뒀지만 2016 시즌에는 겨우 1승에 그쳤고 평균 자책점도 5.16에 그쳤다. 그해 5월에는 동향의 여성과 결혼했다고 발표했다. 2018년에는 겨우 3경기 등판에만 그쳤고 시즌 종료 후인 11월 29일, 후쿠이 유야와의 맞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이적하는 것으로 공식 발표됐다. 선수로서의 특징 최고 구속 149km/h의 직구와 고속 슬라이더의 콤비네이션을 무기로 투구 이닝에 육박할 정도의 탈삼진수를 기록했다. 특히 직구는 투수 코치였던 사토 요시노리로부터 ‘손가락에 걸렸을 때의 공의 강도는 다나카 마사히로 이상의 것이 있다’라고 평가할 정도다. 하지만 컨트롤에 문제가 있어서 제구가 일정해지지 않는 경우엔 사사구를 연발하여 자멸해 버리는 일이 있다. 또한 멘탈면에서도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상세 정보 출신 학교 도키와 대학 고등학교 선수 경력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08년 ~ 2018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2019년 ~ 2022년) 개인 기록 투수 기록 첫 등판·첫 선발 등판·첫 승리·첫 선발 승리 : 2010년 9월 23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2차전(세이부 돔), 5이닝 2실점 첫 탈삼진 : 상동, 1회말에 구리야마 다쿠미로부터 헛스윙 삼진 첫 홀드 : 2017년 8월 9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4차전(Kobo 파크 미야기), 7회초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3이닝 1실점 첫 세이브 : 2020년 7월 8일, 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4차전(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9회초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이닝 무실점 타격 기록 첫 타석 : 2015년 5월 28일, 대 한신 타이거스 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2회초에 마리오 산티아고로부터 투수앞 희생 번트 첫 안타 : 상동, 4회초에 마리오 산티아고로부터 중전 안타 기타 1구 승리 : 2021년 9월 26일, 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1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말 2사에 6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3이닝 무실점 ※역대 44명째(45번째) 등번호 59(2008년 ~ 2019년) 39(2020년 ~ 2022년)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별 수비 성적 각주 외부 링크 198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야구 선수 일본 프로 야구 투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선수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선수 이바라키현 출신 이바라키현의 야구 선수 21세기 일본 사람 20세기 일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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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sunori Kikuchi
Yasunori Kikuchi (菊池 保則, born September 18, 1989, in Kuji District, Ibaraki) is a Japanese professional baseball pitcher for the Hiroshima Toyo Carp in Japan's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External links NPB.com 1989 births Japanese baseball players Living people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pitchers Baseball people from Ibaraki Prefecture Tohoku Rakuten Golden Eagles players Hiroshima Toyo Carp players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B9%B4%EA%B3%A0%EC%9D%98%20%EB%A7%88%EC%B2%9C%EB%A3%A8%20%EB%AA%A9%EB%A1%9D
시카고의 마천루 목록
미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시카고에는 1315개의 고층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 중 44개는 보다 높다. 도시의 가장 높은 마천루는 시카고 루프에서 높이로 1974년에 완공된 110층짜리 윌리스 타워(이전의 시어즈 타워)다. 시어스 타워는 가장 높은 마천루이었다. 세계에서 완공에서, 그리고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가 추월할 때 2013년 5월 10일까지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뉴욕에 있다. 시카고의 2, 3, 4번째로 높은 마천루는 각각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앤드 타워, Aon 센터 및 존 핸콕 센터다. 미국의 10개의 가장 높은 마천루중 4개가 시카고에 있다. 현재, 전체 도시에서 적어도 높이 이상의 105개 건물이 있다. 시카고는 마천루의 발상지다. 홈 보험 빌딩은 1885년에 완공, 세계 최초의 마천루로 간주된다. 이 건물은 시카고에서 혁신된 강철 프레임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원래 10층으로 1800년대에 상당한 높이 높이로 지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가 되었다. 나중에 높이의 12층으로 확장되었다. 건물은 1931년에 폭파되었다. 뉴욕시는 시카고가 마쳤던 마천루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두 도시는 사실상 수십년 동안 거대한 스카이라인을 가진 세계 유일의 도시였다. 시카고는 항상 고층 건물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3개의 과거 건물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이었다. 시카고는 초고층 건물의 발명가이기 때문에 192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매우 초기의 고층 건설 붐을 거쳤으며 이 기간 동안 91개의 가장 높은 마천루중 11개가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1960년대 초부터 지속된 훨씬 더 큰 빌딩 붐을 거쳤다. 가장 높은 마천루는 시카고 루프, 스트리터빌, 라이버 노스, 사우스 루프 및 웨스트 루프와 같은 다양한 도심 지구에 집중되어 있다. 다른 고층 지역은 워터 프론트를 따라 북쪽으로 연장되어 골드 코스트, 링컨 파크, 레이크 뷰, 업 타운 및 엣지워터와 같은 북쪽 지구로 확장된다. 일부 고층 건물도 해안가를 따라 시내에서 남쪽으로 뻗어 시카고, 하이드 파크 및 사우스 쇼어와 같은 사우스 사이드 지역으로 이어진다.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앤드 타워를 비롯하여 2000년대에 걸쳐 도시에 몇 개의 새로운 마천루가 건설되었다. 2016년 8월 현재 시카고에 공사중인 67개의 마천루가 있다. 가장 높은 마천루 이 목록은 표준 높이 측정을 기준으로 높이가 이상인 시카고 마천루의 순위를 매긴다. 이 높이에는 첨탑 및 건축 세부사항이 포함되지만 안테나 첨탑은 포함되지 않는다. 순위 뒤에 오는 등호 (=)는 두 개 이상의 마천루 사이에서 동일한 높이를 나타낸다. "연도" 열은 완공 연도를 나타낸다. 피나클 높이의 가장 높은 마천루 이 목록은 라디오 마스트와 안테나가 포함된 피나클 높이를 기준으로 시카고 마천루의 순위를 매긴다. 비교를 위해 건물 높이에 안테나가 포함되지 않은 표준 건축높이 측정이 포함된다. "연도"열은 건물이 완료된 연도를 나타낸다. 공사중인 마천루 혹은 제안됨 공사중 시카고에서 공사중인 마천루 목록으로 최소 이상 상승할 계획이다. 공사가 보류중인 마천루도 포함된다. 개발자의 높이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마천루의 층계 수는 30층이다. "연도" 범주는 마천루가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를 나타낸다. 제안됨 여기에는 시카고에서 건설을 위해 제안되었으며 적어도 이상 상승할 계획인 마천루 목록이 있다. 개발자가 높이를 아직 공개하지 않은 마천루의 층수는 50층이다. "연도" 범주는 마천루의 건설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를 나타낸다. 취소됨 혹은 고민됨 * 대시 (—)가 있는 테이블 항목은 예상되는 마천루 높이, 층 수 또는 완공 날짜에 관한 정보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역대 최고층 건물 이것은 한 때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제목을 지은 건물 목록이다. 칭호를 딴 모든 건물 중에서 윌리스 타워 만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같이 보기 시카고의 건축 시카고의 랜드마크 목록 마천루가 가장 많은 도시 목록 미국의 마천루 목록 비고 A. 이 건물은 1871년에 시카고 대화재에 의해 파괴되었고, 1875년에 같은 이름의 현재 대성당으로 대체되었다. B. 이 건물의 시계탑은 1895년에 없어졌으며 도시에서 가장 짧은 건물이 될 수 있었다. C. 1892년에 세워진 프리메이슨 템플은 3년 후 무역위원회가 시계탑을 제거한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다. D. 이 건물은 현재 피라미드 상단과 조각을 제거한 다음 높이가 높이다. 각주 일반 특유 외부 링크 Diagram of Chicago skyscrapers - SkyscraperPage.com 마천루 시카고
https://en.wikipedia.org/wiki/List%20of%20tallest%20buildings%20in%20Chicago
List of tallest buildings in Chicago
Chicago, the third-largest city in the United States, is home to 1,397 completed high-rises, 56 of which stand taller than . The tallest building in the city is the 110-story Willis Tower (formerly the Sears Tower), which rises in the Chicago Loop and was completed in 1974. Sears Tower was the tallest building in the world upon its completion, and remained the tallest building in the United States until May 10, 2013. The second, third, and fourth-tallest buildings in Chicago are the Trump International Hotel & Tower, St Regis Chicago, and the Aon Center, respectively. Of the ten tallest buildings in the United States, two are located in Chicago. Of the fifteen tallest buildings in the United States, five are in Chicago. Chicago has the second-tallest skyline in the United States after New York City. Chicago leads the nation in the twenty tallest women-designed towers in the world, thanks to contributions by Jeanne Gang and Natalie de Blois. , Chicago had 125 buildings at least tall. Chicago is the birthplace of the skyscraper. The Home Insurance Building, completed in 1885, is regarded as the world's first skyscraper. This building used the steel-frame method, innovated in Chicago. It was originally built with 10 stories, an enormous height in the 1800s, to a height of . It was later expanded to 12 stories with a height of . The building was demolished in 1931. New York City then began building skyscrapers as Chicago had done, and the two cities were virtually the only cities in the world with huge skylines for many decades. Chicago has always played a prominent role in the development of skyscrapers and three past buildings have been the tallest building in the United States. Being the inventor of the skyscraper, Chicago went through a very early high-rise construction boom that lasted from the early 1920s to the late 1930s, during which 9 of the city's 100 tallest buildings were constructed. The city then went through an even larger building boom that has lasted from the early 1960s. The tallest buildings are concentrated in various downtown districts such as the Loop, Streeterville, River North, the South Loop, and the West Loop. Other high-rises extend north along the waterfront into North Side districts such as the Gold Coast, Lincoln Park, Lakeview, Uptown and Edgewater. Some high-rises also extend south from downtown along the waterfront to South Side districts such as Kenwood, Hyde Park, and South Shore. Several new skyscrapers were constructed in the city throughout the 2000s and 2010s, including the Trump International Hotel and Tower, St Regis Chicago, NEMA Chicago, and Aqua. As of January 2021, there were 19 skyscrapers proposed or under construction, including One Chicago Square, 1000M, and Bank of America Tower, as well as Tribune Tower East, an approved skyscraper set to become the city's second-tallest building. Tallest buildings This list ranks completed Chicago skyscrapers that stand at least tall, based on standard height measurement. There are no buildings in Illinois outside of downtown Chicago that exceed that height. This height includes spires and architectural details but does not include antenna masts. An equal sign (=) following a rank indicates the same height between two or more buildings. The "Year" column indicates the year of completion. Tallest buildings by pinnacle height This list ranks Chicago skyscrapers based on their pinnacle height, which includes radio masts and antennas. Standard architectural height measurement, which excludes antennas in building height, is included for comparative purposes. The "Year" column indicates the year in which a building was completed. Tallest under construction or proposed Under construction This lists buildings that are under construction in Chicago and are planned to rise at least . Buildings whose construction is on-hold are also included. A floor count of 30 stories is used as the cutoff for buildings whose heights have not yet been released by their developers. The "Year" category denotes when the building is expected to be completed. Approved and proposed This lists buildings that are proposed for construction in Chicago and that are planned to rise at least . A floor count of 50 stories is used as the cutoff for buildings whose heights have not yet been released by their developers. The "Year" category denotes when construction of the building is expected to begin. Cancelled This lists buildings designed to rise at least that were approved for construction in Chicago but were cancelled prior to completion. This list does not include vision projects such as Gateway Tower or the Miglin-Beitler Skyneedle, nor does it include projects that were not approved by the Chicago Plan Commission such as the Waldorf-Astoria Hotel and Residence Tower. Timeline of tallest buildings Honorable mentions Park Place Tower in Lakeview is the tallest building in Illinois outside of downtown Chicago. Park Tower in Edgewater is the second-tallest building in Illinois outside of downtown Chicago. Oakbrook Terrace Tower in Oakbrook Terrace is the tallest building in Illinois outside of Chicago. Two Pierce Place in Itasca is the second-tallest building in Illinois outside of Chicago. See also Architecture of Chicago List of Chicago Landmarks List of cities with most skyscrapers List of tallest buildings in the United States List of buildings with over 100 floors Notes A. This building was destroyed by the Great Chicago Fire in 1871, and replaced by the current cathedral of the same name in 1875. B. The clock tower on this building was removed in 1895, allowing a shorter building to become the tallest in the city. C. The Masonic Temple, built in 1892, became the tallest in Chicago three years later when the Board of Trade Building had its clock tower removed. D. This building is currently tall, following the removal of a pyramid top and sculpture. References General Specific External links Diagram of Chicago skyscrapers on SkyscraperPage.com Chicago Tallest Buildings in Chicago Tallest in Chicago
https://ko.wikipedia.org/wiki/%EC%9B%AC%EC%8A%A4%20%EC%B9%B4%EC%82%AC%EB%A0%88%EC%8A%A4
웬스 카사레스
웬세슬라오 카사레스(, 1974년 2월 26일 ~ )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며 웬스 카사레스()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테크놀로지 및 금융 벤처 기업에 특화된 글로벌 비즈니스 경험이 많은 테크놀로지 기업가이자 자선가이다. 그는 현재 비트코인 월렛 서비스 제공업체인 자포(Xapo)의 CEO이며, 인터넷 아르헨티나(Internet Argentina), 와나코 게임즈, 파타곤(Patagon), 레몬 월렛와 방코 레몬 (Banco Lemon)을 창립했다. 카사레스는 페이팔과 코인 센터(Coin Center)의 임원이며, 키바(Kiva)와 비바 트러스트(Viva Trust)의 이사직을 역임했다. 카사레스는 비트코인의 주창자로 향후 인터넷보다 비트코인의 규모와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라고 강조해 왔으며, 그는 앨런앤컴퍼니 선밸리 컨퍼런스에 강연자로 참여하여, 1 비트코인 당 가치가 100만 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어린 시절 카사레스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목장주 가정에서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고교 시절, 카사레스는 펜실베이니아주, 워싱턴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국제 로터리 장학금을 수여 받았다. 카사레스는 유에스에이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장학금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며, "미국인들에게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가 산안드레스대학교에서 3년간 경영학을 공부하였으나 중퇴 후, 아르헨티나 최초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사인 인터넷 아르헨티나 S.A (Internet Argentina S.A.)를 1994년에 창립했다. 1997년에 회사를 나온 카사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온라인 중개회사인 파타곤(Patagon)을 창립했으며 파타곤은 남미의 종합 인터넷 금융 포털 서비스의 선두 기업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며, 미국, 스페인과 독일에 이르기까지 온라인 뱅킹 서비스를 확장했다. 파타곤은 스페인 은행인 뱅코 산탄데르(Banco Santander)에 7.5억 달러에 인수 합병된 후 Santander Online Worldwide로 성장했다. 파타곤의 투자자 중에는 조지 소로스,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JP모간 체이스와 기업가 프레드 윌슨(Fred Wilson)이 있다. 프레드 윌슨은 특히 테크크런치 언론인 사라 레이시 (Sarah Lacy)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카사레스는 자신이 후원해 온 기업가 중 최고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카사레스는 하버드대학교에서 기업 소유주/경영자 경영과정을 마쳤다. 경력 2002년에 카사레스는 뉴욕에 본사를 둔 비디오게임 개발회사 와나코 게임스(Wanako Games)를 창립했으며, 후에 Behaviour Santiago로 기업명이 변경되었다. 와나코 게임스(Wanako Games)는 블록버스터 게임 어썰트 히어러즈(Assault Heroes)를 출시한 기업으로 유명했으며, 2007년에 액티비전에 인수되었다. 2002년에 카사레스는 브라질의 은행업무 서비스가 부족한 상황에서 파트너 사와 함께 방코 레몬(Banco Lemon)을 창립했으며, 2009년에 브라질 최대 규모의 은행인 방코 브라질로 인수 합병되었다. 카사레스는 디지털 월렛 플랫폼인 레몬 월렛(Lemon Wallet)을 창립하여, 2013년에 미국계 회사인 라이프락(LifeLock)이 약 4300만 달러에 레몬 월렛(Lemon Wallet)을 인수했다. 자포(Xapo) 카사레스는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 소재한 비트코인 월렛 스타트업 기업인 자포(Xapo)의 대표이사이다. 자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트코인 관리 기업이며, 과거 스위스 군용 벙커를 포함하여 5개의 대륙에 걸쳐 지하 금고에 100억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를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자포는 실리콘밸리에 위차한 선도 벤처 자본회사들로부터 4,000만 달러를 조달 받았다. 쿼츠(Quartz)에 따르면, 카사레스는 빌 게이츠, 레이드 호프만을 비롯하여 실리콘밸리의 기술분야 전문가들로부터 비트코인에 투자하게끔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선사업 2011년에 카사레스는 까르띠에 여성 창업 어워드(Cartier Women’s Initiative Awards)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아스펜 연구소의 아스펜 글로벌 리더쉽 네트워크(Aspen Global Leadership Network)에서 Henry Crown Fellows의 2017년도 클래스 멤버이며, 2011년도 세계 경제 포럼의 “차세대 글로벌 리더” 클래스의 선출 멤버로서 스위스에서 열리는 세계 경제 포럼의 연례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그는 젊은 경영인 협회의 멤버이기도 하며, 2010년에는 파블로 보쉬(Pablo Bosch)와의 공동사업으로 칠레 산티아고에 사회자본 및 혁신시설인 라스 마사다스 데 피르케(Las Majadas de Pirque)를 창립했다. 가족 관계 카사레스는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서 부인 및 세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카사레스와 그의 가족은 개인 소유의 쌍동선 심파티카(Simpatica)를 타고 전 세계를 일주했다. 참고 자료 외부 링크 "Son of Sheep Ranchers, Lemon Wallet Co-Founder Wences Casares is a Serial Entrepreneur", Melissa Aparicio(멜리사 아빠리시오) 저 "폭스 뉴스 라티노" "Will Wences Casares's Lemon.com Replace Your Wallet?", Bruce Rogers(브루스 로저스) 저 "포브스" "The Difference between $1 Billion-Plus in Exits and 'Success'", 사라 레이시 테크크런치 아르헨티나의 기업인 살아있는 사람 1974년 출생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
https://en.wikipedia.org/wiki/Wences%20Casares
Wences Casares
Wenceslao Casares, also known as Wences Casares (born 26 February 1974) is an Argentinian entrepreneur and businessman in Silicon Valley-based fintech. He is the CEO of Xapo Bank, and founded Internet Argentina, Wanako Games, Patagon, Lemon Wallet, and Banco Lemon. Casares sits on the boards of PayPal, Diem, and Endeavor. Early life Casares is the eldest of four from a family of sheep ranchers in Patagonia, Argentina. In high school, Casares earned a Rotary Club scholarship as an exchange student in Washington, Pennsylvania. He returned to Buenos Aires to study business administration for three years at the University of San Andrés and dropped out to launch Argentina's first Internet Service Provider, Internet Argentina S.A. in 1994. He exited the company and then founded Argentine online brokerage, Patagon, in 1997. Patagon established itself as Latin America's leading comprehensive Internet financial services portal and expanded its online banking services to the United States, Spain, and Germany. Patagon was acquired by the Spanish bank, Banco Santander for $750 million and became Santander Online worldwide. Investors in Patagon included George Soros, Intel, Microsoft, JPMorgan Chase, and entrepreneur Fred Wilson. Career In 2002, Casares founded Wanako Games, (later Behaviour Santiago), a videogame developer headquartered in New York City. Wanako Games was best known for the blockbuster game Assault Heroes and was acquired by Activision in 2007. In 2002, Casares founded Banco Lemon, a bank based in Brazil, which was acquired by Banco do Brasil in 2009. Casares was the founder and CEO of Lemon Wallet, a digital wallet platform. In 2013 the American firm LifeLock bought Lemon for about $43 million (US). Xapo Casares is the CEO of Xapo, a bitcoin wallet startup based in Palo Alto, California. Xapo is said to be the largest custodian of bitcoin in the world and is believed to hold as much as $10 billion of the cryptocurrency in underground vaults on five continents, including in a former Swiss military bunker. Xapo has raised $40 million from leading Silicon Valley venture capital firms. Widely known as, "Patient Zero", Quartz reported that Casares was the entrepreneur to convince Bill Gates, Reid Hoffman, and other tech veterans in Silicon Valley to invest in bitcoin. Philanthropy In 2011, Casares was on the jury of the Cartier Women’s Initiative awards. He is a member of the 2017 Class of Henry Crown Fellows in the Aspen Global Leadership Network at the Aspen Institute. He is an elected member of the World Economic Forum's “Young Global Leaders” Class of 2011 and regularly attends the World Economic Forum Annual Meeting in Davos, Switzerland. He is a member of the Young Presidents' Organization. In 2010 Casares partnered with Pablo Bosch to found Las Majadas de Pirque, a social capital and innovation facility owned by Casares in Santiago, Chile. He was formerly a board member at Kiva and Endeavor. References External links "Son of Sheep Ranchers, Lemon Wallet Co-Founder Wences Casares is a Serial Entrepreneur", by Melissa Aparicio "Fox News Latino" "The Difference between $1 Billion-Plus in Exits and 'Success'", by Sarah Lacy Techcrunch Argentine businesspeople Living people People associated with cryptocurrency 1974 births Harvard Business School alumni Henry Crown Fellows
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B%AC%B4%EA%B2%8C
테무게
테무게 옷치긴(Temüge Odčigin, 몽골어 표기: Тэмүгэ отчигин, 1168년 - 1246년)은 몽골 제국의 황족으로 초대 대칸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이다. 예수게이 바토르의 넷째 아들로 칭기즈칸과 동모(同母) 형제이며, 다른 동모형으로 주치 카사르, 카치운이 있다. 이복 형제로는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다. 1241년 오고타이 사후, 쿠릴타이 없이 대칸이 되려고 정변을 시도했으나 퇴레게네 카툰의 반대와 서방 원정 중이던 귀위크의 연이은 도착으로 실패했다. 그에게는 몽골 동부, 만주와 인접한 지역이 영토로 분봉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요양과 요동 등지에서 제후로 활동했다. 테무게의 후손들은 원나라가 망한 뒤에도 명나라에 귀순, 15세기 후반까지 요양 지역의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름 『원조비사』(元朝秘史)나 『원사』(元史), 《고려사》 등 한자 사료에는 첩목격 알척적근(帖木格斡惕赤斤)、철목가 알적근 국왕(鉄木哥斡赤斤国王), 첩목격 알적근(帖木格斡赤斤), 특목가 와진(忒木哥窩眞), 알진 나안(斡陳那顔), 와적흔(訛赤忻) 등으로 되어 있다. 다른 문헌에는 철목가 알적근(鐵木哥斡赤斤), 오제금(乌济锦) 등으로도 표기된다. 라시드웃딘의 『집사』(集史) 등 페르시아어 표기는 تموكه اوتچكين Tamūka Ūtchikīn 로 기록되어 있다. 『집사』에 나오는 웃치(긴) 뉴얀( اوتچی نويان Ūtchī Nūyā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하며, 주바이니의 『세계정복자의 역사』(تاريج جهانگشاء Ta'rīkh-i Jahān-gushā'/Ta'rīkh-i Jahān-gushā'ī)에도 웃킨 뉴얀( اوتكين نويان Ūtkīn Nūyān)으로 기록되어 있다. 옷치긴이란 「아궁이의 불씨를 지키는 자」라는 의미로 테무게가 그의 어머니 호엘룬의 가산을 상속받은 막내아들이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생애 생애 초반 테무게는 예수게이와 호엘룬의 넷째 아들이다. 동복 형 테무진(후일의 칭기즈 칸)과 주치 카사르, 카치운과 이복 형 벡테르, 벨구테이가 있었다. 테무게는 1168년생 혹은 1166년생으로 자세한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원조비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났다고 한다. 나이만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1217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서방 원정에서 어머니 호엘룬을 모시며 몽골 본토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원조비사》). 이는 그의 세력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대칸을 대신해 몽골과 요동, 고려 관련 업무를 맡게 된 테무게 옷치긴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흥안령 동쪽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칭기즈 칸은 다른 동생 카사르, 카치운의 일족보다 그를 대우하였다. 그에게는 요동 주변과 만주 서부 지역이 울루스로 배정되었다. 군사 활동 1220년 요동 지역에서 몽골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인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죽고 그의 처 요리씨(姚里氏)가 몽골에 와서 이를 아뢰었을 때 테무게 옷치긴은 스스로 황태제(皇太弟)의 신분으로 법도에 따라 요리씨에게 호부(虎符)를 달고 남편의 속민을 7년 동안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그보다 1년 전인 1219년 마찬가지로 황태제 국왕의 자격으로 그리고 원수 카신(合臣), 부원수 차라(劄剌) 및 선차대사(宣差大使) 경도홀사(慶都忽思)와 동진국(東眞國)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흘석렬(紇石烈) 등 10인을 통해 고려에 조공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227년의 제5차 서하(西夏) 공격에서 형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대와는 다른 별동 부대를 이끌고 서하의 신도부(信都府)를 쳤다. 이 해에 칭기즈 칸이 죽자 오고타이와 툴루이를 놓고 누구를 차기 대칸으로 앉힐 지 논란이 발생했다. 1229년에 열린 40일간의 쿠릴타이에서 테무게는 조카 차가타이와 함께 우구데이를 새로운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하였다. 1230년부터 전개된 제2차 금나라 공격에서는 좌익군(左翼軍)을 이끌고 금나라의 수도 중도(中都)에서 황하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그는 황하를 건너와서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공포에 질린 금나라 백성들이 개봉(開封)과 그 주변으로 도망쳐 오면서 급작스러운 인구 유입으로 금나라에 식량 위기와 사회불안을 가져왔다. 테무게 옷치긴 왕가는 1233년 금나라 유민들이 지린성 일대에 세운 동진국(東眞國)을 병합, 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금나라 멸망 뒤인 1236년 우구데이 칸이 시행한 분봉에서 익도로(益都路, 산둥성 칭저우 시), 평주(平州, 허베이성 루룽 현), 난주(灤州, 허베이 성 롼저우시)를 분여받았다. 정변기도 실패와 최후 1241년 말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테무게는 대칸의 유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황후들이 거처하는 오르두(행궁)로 향했다. 그러나 우구데이의 황후 퇴레게네 카툰은 "우리는 당신의 의붓딸이며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무장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 모든 백성과 군대를 불안하게 만드는가?"라 항의하며 거절하고, 앞서 서방 원정을 나갔던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대칸의 자리를 포기, 퇴레게네 카툰에게 우구데이에 대한 조의를 전하고 철군하였다. 이러한 옷치긴의 거병은 앞서 우구데이가 옷치긴에 대해 시행했던 중앙집권정책에 수반한 강한 견제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뒤 테무게는 몽골 왕후(王侯)들을 인솔하고 새로운 대칸을 추대하는 쿠릴타이나 구유크의 대칸 즉위식에도 참석하였는데, 우구데이에 이어 차가다이까지 갑자기 사망한 것에 테무게 옷치긴의 배후 관여를 의심하는 의견도 존재하고 있다. 1246년 테무게는 다시 쿠릴타이 없이 대칸 자리를 탈취하려 시도했다. 구유크가 대칸으로 즉위한 뒤, 앞서 그를 제치고 대칸의 지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것에 대해 툴루이 가문의 몽케와 주치 가문의 오르다(주치의 큰아들)에게 심문을 받았고, 그의 휘하 장교들을 전원 처형하는 것으로 재판을 매듭지었다. 귀위크는 테무게에게 부여된 옷치킨(화로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바투 칸의 형 오르다와, 몽케에게 나누어서 수여하려 시도하였다. 이 판결 직후에 테무게 옷치긴 자신도 사망하였다. 인물 형 칭기즈 칸에게 특별히 사랑받았으며, 라시드웃딘의 《집사》에는 칭기즈 칸이 테무게 옷치긴을 다를 형제들보다 특히 더 아껴서 그의 다른 두 친형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혔으며, 라시드웃딘이 살던 당시까지도 테무게 옷치긴의 자식들은 주치 카사르나 카치운의 자식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즉위한 뒤에는 다섯 천인대(밍간)을 받았고 나아가 어머니 호엘룬이 준 세 천인대를 이어받아 모두 여덟 천인대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다른 몽골 왕후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것이었고, 몽골의 전통적인 말자상속관행과도 관련이 있다. 몽골 동방의 좌익부인 만주에 접한 지역에 유목지를 받아 다른 동모형제 주치 카사르, 카치운의 자손 등 동방의 왕후들을 통솔해 몽골 귀족이나 한인(漢人) 세력에 영향력을 가지고 몽골 제국 좌익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칭기즈 칸 사후 조카 우구데이의 옹립에 협력하였으며 몽골 제국의 동방을 대표하는 인물로써 우구데이 칸, 서방 지역을 통할했던 조카 차가다이와 함께 몽골 제국의 신체제를 구축하였다. 테무게 옷치긴은 용기 있는 성격으로 오르두를 다스리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또한 매우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자신의 영지 안에 궁전이나 원림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사후 아들 타리추(脱里出)가 수왕(寿王)에 봉해졌다가 수왕 직위는 다른 아들 지부겐의 아들 혹은 손자인 나이만타이에게 이어졌다. 다른 증손 토크토아는 요왕에 봉해졌다. 토크토아의 후손들은 원나라 멸망 후에도 주원장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연명해나갔다. 토크토아의 후손들은 1470년대까지도 요왕으로 요동 주변 지역을 다스렸다. 귀위크는 테무게에게 부여된 옷치킨(화로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바투 칸의 형 오르다와, 툴루이 가문의 몽케에게 나누어서 수여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 귀족들이 전통을 이유로 반대하여 실패했다. 가족 테무게 옷치긴의 맏아들 지브겐의 아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 칸에게 중용되어 원(元) 왕조 설립에도 공헌하였다. 테무게 옷치긴의 자손은 칭기즈 칸의 다른 동모동생 주치 카사르나 카치운의 집안과 함께 동방3왕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타가차르의 손자 나얀이 카이두의 난에 연좌되어 쿠빌라이의 친정으로 처형되었다. 테무게 옷치긴(Temüge Odčigin,鉄木哥斡赤斤/تموگه اوتچگين Temūga Ūtchigīn) 지브겐 대왕(J̌ibügen, 只不干大王/جیبوJībū) 타가차르 국왕(Taγačar, 塔察児国王/طغاچار نویانTaghāchār Nūyān) 아주르 대왕(Aǰul,阿朮魯大王/اجولAjūl) 나얀 대왕(Nayan,乃顔大王/نایانNāyān) 요왕(遼王) 토크토(Toqto'a,遼王脱脱/توقتا کوونTūqtā Kūwn) 요왕 야나슈리(Yanaširi,遼王牙納失里) 요왕 아자시리(Aǰaširi,遼王阿札失里) 수왕(寿王) 나이만타이(Naimantai, 寿王乃蛮台/نایمتایNāīmatāī) 초기 옷치긴 울루스의 다섯 천인대장(밍간) 메르키트부의 쿠츄(Küčü >曲出,qūchū) 베스트부의 코코츄(Kököčü >闊闊出,kuòkuòchū) 자지라트부의 주스쿠(J̌usuγ >種索,zhŏngsuŏ) 출신 부족이 확실하지 않은 코르코순(Qorqosun >豁児豁孫,huōérhuōsūn) 오로나울 부의 천인대장(이름 불명) 각주 같이 보기 노얀 보르지긴 요양등처행중서성 1168년 출생 1246년 사망 몽골 제국의 황족 몽골 제국의 정치인 몽골의 군인 몽골의 군주 보르지긴 칭기즈 칸 카묵 몽골의 왕자 육군 군인 몽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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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üge
Temüge (1168–1246) was the youngest brother of Genghis Khan, second son of Yesugei. Early life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states that "when Temujin was 9 years of age, Temuge was three years old." As the youngest son, he received a prefix to the name "otchigin" (diminutive form of "отгон" or “otgon” meaning "junior", Also Ot (Fire) Tegin (Junior member of Khan family) as old turkic), who in the family is always a "guardian of the family and home", and therefore is often referred to as Temuge-otchigin or simply Otchigin. In childhood and adolescence was somewhat spoiled by his mother and older brothers, inclined to luxury, but was "courageous, powerful and quick in battle" that was recognized even by the family's enemies. When the shaman Kokochu (Teb-Tengri) started dragging the power over the Mongols to his own family, Genghis Khan sanctioned Temuge to kill Kokochu in a staged wrestling match. Interim ruler As the youngest male offspring, Temüge and his mother, by Mongol traditions, were allotted the most land and people by Genghis Khan during his coronation. He seems to have been the least warlike of the brothers, and was criticized by Genghis himself as lazy and shiftless. However, Temüge was a skilled politician and capable ruler, who, alongside his mother Hoelun, ruled the Mongol heartland in his elder brothers' absence while they engaged in military campaigns. He appears to have had intellectual leanings, first coming under the influence of the conquered Xia and Jin cultures and then taking an active interest in the other cultures encompassed in the Mongol empire. Temuge attempted to enter the main political arena after the death of Ögedei Khan, his nephew and son of Genghis Khan, in 1241. At that time, Ogedei's son Güyük Khan was engaged in the "Western campaign" in Russia and Europe. Temuge-otchigin tried to seize the throne, but was prevented by Töregene, Ogedei's widow and Güyük's mother. After the 1246 kurultai elected Güyük as great khan, Temüge was executed. Ancestry References Genghis Khan Mongol Empire people 1168 births 1246 deaths People executed by the Mongol Empire Borj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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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페르트 곡면
매듭 이론에서 자이페르트 곡면(Seifert曲面, )은 3차원 초구 속의 연결 2차원 유향 경계다양체이다. 그 경계는 연환을 정의하며, 모든 연환은 이러한 꼴로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주어진 연환의 자이페르트 곡면이란 이 연환을 경계로 삼은 자이페르트 곡면을 뜻한다. 정의 차분한() 유향 연환 의 자이페르트 곡면은 인 속의 2차원 유향 연결 경계다양체 이다. 성질 존재와 유일성 모든 연환은 자이페르트 곡면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유일하지 않다. 연환의 자이페르트 곡면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으로 구성된다. 우선, 연환 이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다고 하자. 의 임의의 그림(평면으로의 투영)이 주어졌다고 하자. 이 그림이 개의 교차점을 갖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 와 같이, 그림에서 교차점들을 해소할 수 있다. 교차점을 모두 해소하면 연환의 그림은 서로 교차하지 않는 원들로 구성되는데, 개의 원들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자이페르트 곡면을 구성할 수 있다. 연환면의 그림의 해소의 각 원 안에 원판을 붙인다. 즉, 개의 원판이 존재한다. 연환면에서, 해소된 각 교차점에 대응하는 띠를 이어붙인다. 이 경우, 아래 그림과 같이 띠를 뒤틀어 이어붙이며, 띠를 뒤트는 방향은 해소되기 이전의 교차점의 방향을 따른다. 이 경우, 교차점의 해소에서 방향을 보존해야 한다. (방향을 보존하지 않으면, 비가향 다양체를 얻을 수 있다.) 즉, 다음과 같은 꼴의 해소는 불가능하다. ⇒ ⩆ 종수 위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자이페르트 곡면은 개의 구멍을 가지며, 종수가 인 2차원 경계다양체이다. 물론, 어떤 연환 의 자이페르트 곡면 가 주어졌을 때, 임의의 원환면과의 연결합 역시 의 자이페르트 곡면이며, 그 종수는 원래 자이페르트 곡면의 종수 + 1이다. 주어진 연환의 자이페르트 곡면들의 최소 종수를 연환의 종수(種數, )라고 한다. 임의의 두 유향 매듭 , 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즉, 매듭의 연결합은 종수를 보존한다. 자이페르트 행렬 연환 의 자이페르트 곡면 가 주어졌다고 하고, 그 종수가 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1차 호몰로지 군은 다음과 같은 자유 아벨 군이다. 이 경우, 그 교차 형식이 가 되게 하는 기저 가 존재한다. 이 기저에 대한 자이페르트 행렬(Seifert行列, ) 은 정수 성분의 정사각 행렬이며, 그 번째 성분은 와 의 연환수이다. 이 경우 가 성립한다. (은 수반 행렬이다.) 반대로, 의 꼴인 임의의 정수 성분의 짝수 크기 정사각 행렬은 어떤 매듭의 자이페르트 곡면의 자이페르트 행렬로 표현될 수 있다. 자이페르트 행렬의 다음과 같은 행렬식 은 연환의 알렉산더 다항식이라고 한다. 이는 자이페르트 곡면의 선택이나 그 호몰로지의 기저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 유향 연환의 불변량이다. 이에 따라, 연환의 종수 은 다음과 같은 부등식을 따른다. 자이페르트 행렬의 대칭화 의 부호수 역시 연환의 불변량이며, 이를 연환의 부호수(符號數, )라고 한다. 예 자명한 원환 공집합은 0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연환이다. 그 자이페르트 곡면은 경계를 갖지 않는 임의의 유향 곡면이며, 이 연환의 종수는 물론 0이다. 자명한 매듭의 경우, 원판이 그 원환면이므로 그 종수는 0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자명한 연환의 자이페르트 곡면은 개의 구멍을 뚫은 구이며, 따라서 그 종수는 0이다. 종수가 0인 매듭은 자명한 매듭 밖에 없다. (그러나 종수가 0이지만 자명하지 않은 연환이 존재한다.) 원환면 매듭 -원환면 매듭의 종수는 이다. 예를 들어, (2,1)-원환면 매듭인 세잎매듭의 종수는 1이다. 세잎매듭의 그림 에서, 자이페르트 알고리즘을 가하면, 이므로 종수 을 얻는다. (이 경우, 해소된 그림은 밖의 큰 원과 속의 작은 원으로 구성된다. 세잎그림의 그림에서 방향을 무시하는 해소를 취하면, 이지만, 이 경우 얻게 되는 곡면은 세 번 뒤튼 뫼비우스 띠이므로 유향 다양체가 아니다.) 호프 연환 호프 연환의 한 자이페르트 곡면은 다음과 같다. 아이소토피를 무시하면, 이는 두 개의 구멍이 뚫린 구(즉, 두 개의 원판의 연결합와 미분 동형)이다. 따라서, 호프 연환의 종수는 0이다. 8자 매듭 8자 매듭(41번 매듭)의 종수는 1이다. 역사 헤르베르트 자이페르트가 1934년에 도입하였다. 참고 문헌 외부 링크 매듭 이론 곡면
https://en.wikipedia.org/wiki/Seifert%20surface
Seifert surface
In mathematics, a Seifert surface (named after German mathematician Herbert Seifert) is an orientable surface whose boundary is a given knot or link. Such surfaces can be used to study the properties of the associated knot or link. For example, many knot invariants are most easily calculated using a Seifert surface. Seifert surfaces are also interesting in their own right, and the subject of considerable research. Specifically, let L be a tame oriented knot or link in Euclidean 3-space (or in the 3-sphere). A Seifert surface is a compact, connected, oriented surface S embedded in 3-space whose boundary is L such that the orientation on L is just the induced orientation from S. Note that any compact, connected, oriented surface with nonempty boundary in Euclidean 3-space is the Seifert surface associated to its boundary link. A single knot or link can have many different inequivalent Seifert surfaces. A Seifert surface must be oriented. It is possible to associate surfaces to knots which are not oriented nor orientable, as well. Examples The standard Möbius strip has the unknot for a boundary but is not a Seifert surface for the unknot because it is not orientable. The "checkerboard" coloring of the usual minimal crossing projection of the trefoil knot gives a Mobius strip with three half twists. As with the previous example, this is not a Seifert surface as it is not orientable. Applying Seifert's algorithm to this diagram, as expected, does produce a Seifert surface; in this case, it is a punctured torus of genus g = 1, and the Seifert matrix is Existence and Seifert matrix It is a theorem that any link always has an associated Seifert surface. This theorem was first published by Frankl and Pontryagin in 1930. A different proof was published in 1934 by Herbert Seifert and relies on what is now called the Seifert algorithm. The algorithm produces a Seifert surface , given a projection of the knot or link in question. Suppose that link has m components ( for a knot), the diagram has d crossing points, and resolving the crossings (preserving the orientation of the knot) yields f circles. Then the surface is constructed from f disjoint disks by attaching d bands. The homology group is free abelian on 2g generators, where is the genus of . The intersection form Q on is skew-symmetric, and there is a basis of 2g cycles with equal to a direct sum of the g copies of the matrix The 2g × 2g integer Seifert matrix has the linking number in Euclidean 3-space (or in the 3-sphere) of ai and the "pushoff" of aj in the positive direction of . More precisely, recalling that Seifert surfaces are bicollared, meaning that we can extend the embedding of to an embedding of , given some representative loop which is homology generator in the interior of , the positive pushout is and the negative pushout is . With this, we have where V∗ = (v(j, i)) the transpose matrix. Every integer 2g × 2g matrix with arises as the Seifert matrix of a knot with genus g Seifert surface. The Alexander polynomial is computed from the Seifert matrix by which is a polynomial of degree at most 2g in the indeterminate The Alexander polynomial is independent of the choice of Seifert surface and is an invariant of the knot or link. The signature of a knot is the signature of the symmetric Seifert matrix It is again an invariant of the knot or link. Genus of a knot Seifert surfaces are not at all unique: a Seifert surface S of genus g and Seifert matrix V can be modified by a topological surgery, resulting in a Seifert surface S′ of genus g + 1 and Seifert matrix The genus of a knot K is the knot invariant defined by the minimal genus g of a Seifert surface for K. For instance: An unknot—which is, by definition, the boundary of a disc—has genus zero. Moreover, the unknot is the knot with genus zero. The trefoil knot has genus 1, as does the figure-eight knot. The genus of a (p,q)-torus knot is (p − 1)(q − 1)/2 The degree of a knot's Alexander polynomial is a lower bound on twice its genus. A fundamental property of the genus is that it is additive with respect to the knot sum: In general, the genus of a knot is difficult to compute, and the Seifert algorithm usually does not produce a Seifert surface of least genus. For this reason other related invariants are sometimes useful. The canonical genus of a knot is the least genus of all Seifert surfaces that can be constructed by the Seifert algorithm, and the free genus is the least genus of all Seifert surfaces whose complement in is a handlebody. (The complement of a Seifert surface generated by the Seifert algorithm is always a handlebody.) For any knot the inequality obviously holds, so in particular these invariants place upper bounds on the genus. The knot genus is NP-complete by work of Ian Agol, Joel Hass and William Thurston. It has been shown that there are Seifert surfaces of the same genus that do not become isotopic either topologically or smoothly in the 4-ball. See also Crosscap number Arf invariant of a knot Slice genus References External links The SeifertView programme of Jack van Wijk visualizes the Seifert surfaces of knots constructed using Seifert's algorithm. Geometric topology Knot theory Surfaces
https://ko.wikipedia.org/wiki/%EC%8B%AC%EB%B0%A9%EC%84%B8%EB%8F%99
심방세동
심방세동은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부정맥으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면, 두근거림, 호흡곤란 등으로 불편하기도 하지만, 심장 안에서 피가 굳는 혈전이 생길 위험이 있어 더욱 문제다. 심장에서 온몸으로 피가 전달되기 때문에, 심장 안에 혈전이 생기면 온몸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 온몸으로 간 혈전은 결국 혈관을 막게 되며, 머리에 있는 혈관이 막히면 뇌졸중이 되는 것이다. 심장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루 10 만 번을 수축하여 온몸 곳곳에 혈액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심장은 혈액을 내뿜는 펌프 같은 기관인데, 주된 펌프 역할을 하는 것을 심실이라고 하고, 보조펌프 역할을 하는 것을 심방이라고 한다. 심실과 심방이 좌우 각각 1개씩 있어 심장은 모두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좌심실, 좌심방, 우심실, 우심방]. 심장에 있는 4개의 방은 전깃줄로 연결되어있고, 심장을 뛰게 하는 전기 신호는 ‘동결절’에서 시작된다. 동결절은 심장 윗부분에 있고 이곳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중간에 변전소 역할을 하는 방실결절로 전달된다. 이후 전깃줄을 통해 좌, 우심실로 전달되어 심장을 뛰게 한다. 심방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 바로 심방세동인데, 전기 신호가 동결절에서 시작되지 않고, 심방 여기저기서 불꽃놀이 하듯 튀는 것이다. 이러한 심방세동은 시간상으로 보면, 발작성과 지속성으로 나눌 수 있다. 심방세동과 정상맥박을 반복하는 것이 ‘발작성’이고, 심방세동만이 계속 지속하는 것이 ‘지속성’이다. 대개 처음에는 발작성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흐르면 지속성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거친다. 지속성인 경우에는 언제든지 심전도만 찍어보면 심방세동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발작성인 경우에는 심방세동이 나타났을 때 심전도를 찍어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진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원인 및 증상 심방세동은 노화에 의한 퇴행성 변화와 관련이 많아 대부분 노년층에서 생기며, 나이가 많아질수록 발생률도 높아진다. 노화 이외에 가장 중요한 발생 원인은 갑상선 기능항진증과 음주이다. 그 외에도 고혈압, 심부전증, 심장 판막질환, 심근경색, 비만, 스트레스, 카페인 등이 원인이 될 수 있다. 맥박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대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기도 한다. 때로는 증상이 없는 경우도 있어 심방세동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내다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인한 마비가 오기도 한다. 진단 진단은 증상 발생 시 심전도로 진단할 수 있나 발작성 및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24시간 생활심전도(홀터)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심장초음파, 혈액검사 및 갑상선 검사 등도 필요하다. 합병증 가장 위중한 합병증으로는 뇌졸중을 비롯한 혈전증이다. 정상인보다 심방세동이 있으면 혈전이 생길 위험이 3~5배 높다. 심장에서 발생한 혈전이 온몸으로 이동해서 혈관이 막히게 되는 것을 색전증이라고 한다. 이 밖의 합병증으로는 심부전증, 서맥으로 인한 실신 및 협심증의 악화 등이 있다. 치료 치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혈전을 예방하기 위한 약물치료고, 다른 하나는 심방세동 자체에 대한 치료이다. 1) 혈전 예방을 위한 약물 혈전을 예방하기 위한 약물은 항응고제라고 부른다. 똑같은 심방세동이라도 혈전이 생길 위험도는 동반질환 여부에 따라 다르다. 즉, 승모판막 협착증, 비후성 심근증이 있거나 이미 뇌졸중을 앓았던 적이 있으면, 혈전이 생길 위험도가 높으므로 항응고제를 복용해야 한다. 또한, 65세 이상, 고혈압, 당뇨, 심부전, 혈관질환 등도 혈전이 생길 위험도를 높이므로 항응고제 복용을 고려한다. 최근에는 혈액검사가 필요 없는 새로운 항응고제들이 개발되어 많이 사용되고 있다. 2) 심방세동 자체에 대한 치료법 심방세동 자체에 대한 치료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심방세동을 정상 맥박으로 되돌리는 것이며, 두 번째는 심방세동은 그냥 놔두고 맥박 수만 빠르지 않게 조절하는 방법이다. 심방세동이 오래되지 않아서, 정상 맥박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많으면, 적극적으로 치료를 시도하게 된다. 심방세동을 모두 정상 맥박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상당수의 환자에서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맥박 수만 조절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맥박 수를 조절하는 것은 약물로써 가능하다. 앞서 말씀드린 심방세동을 정상 맥박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약물, 전극도자절제술, 수술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약물치료를 시도하게 되며, 지속성 심방세동인 경우에는 전기적 동율동 전환술이 필요할 수 있다. 수면 상태에서 외부에서 전기에너지를 순간적으로 가해서, 정상 맥박으로 되돌리는 방법인데, 심장이 정신을 차리도록 뺨을 때리는 것과 같아서, 일시적으로는 아주 효과적이지만, 되돌아온 정상 맥박을 유지하려면 약물치료가 필요하다. 약물로 오랫동안 정상 맥박으로 잘 유지가 될 확률은 대략 50% 정도이다. 약물로 조절되지 않으면 전극도자절제술을 고려하게 된다. 시술은 양쪽 사타구니 혈관을 통해 심장까지 긴 관을 넣은 후에, 비정상적인 맥박이 생기는 부위를 고주파로 없애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3~4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성공률은 환자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70~80% 정도이다. 수술은 원래 인공심폐기를 사용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다른 심장질환이 있는 특별한 경우에만 시행하였는데, 최근에는 흉강경을 이용한 비교적 간단한 수술법이 도입되고 있다. 외부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90116160627/http://xn--b02bz9dh8l.com/ 부정맥
https://en.wikipedia.org/wiki/Atrial%20fibrillation
Atrial fibrillation
Atrial fibrillation (AF, AFib or A-fib) is an abnormal heart rhythm (arrhythmia) characterized by rapid and irregular beating of the atrial chambers of the heart. It often begins as short periods of abnormal beating, which become longer or continuous over time. It may also start as other forms of arrhythmia such as atrial flutter that then transform into AF. Episodes can be asymptomatic. Symptomatic episodes may involve heart palpitations, fainting, lightheadedness, shortness of breath, or chest pain. Atrial fibrillation is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heart failure, dementia, and stroke. It is a type of supraventricular tachycardia. High blood pressure and valvular heart disease are the most common modifiable risk factors for AF. Other heart-related risk factors include heart failure, coronary artery disease, cardiomyopathy, and congenital heart disease. In low- and middle-income countries, valvular heart disease is often attributable to rheumatic fever. Lung-related risk factors include COPD, obesity, and sleep apnea. Cortisol and other stress biomarkers (including vasopressin, chromogranin A, and heat shock proteins), as well as emotional stress, may play a role in the pathogenesis of atrial fibrillation. Other risk factors include excess alcohol intake, tobacco smoking, diabetes mellitus, and thyrotoxicosis. However, about half of cases are not associated with any of these aforementioned risks. Healthcare professionals might suspect AF after feeling the pulse and confirm the diagnosis by interpreting an electrocardiogram (ECG). A typical ECG in AF shows irregularly spaced QRS complexes without P waves. Healthy lifestyle changes, such as weight loss in people with obesity, increased physical activity, and drinking less alcohol, can lower the risk for AF and reduce its burden if it occurs. AF is often treated with medications to slow the heart rate to a near-normal range (known as rate control) or to convert the rhythm to normal sinus rhythm (known as rhythm control). Electrical cardioversion can convert AF to normal heart rhythm and is often necessary for emergency use if the person is unstable. Ablation may prevent recurrence in some people. For those at low risk of stroke, AF does not necessarily require blood-thinning though some healthcare providers may prescribe aspirin or an anti-clotting medication. For those at more than low risk, experts generally recommend an anti-clotting medication. Anti-clotting medications include warfarin and direct oral anticoagulants. Most people are at higher risk of stroke. While these medications reduce stroke risk, they increase rates of major bleeding. Atrial fibrillation is the most common serious abnormal heart rhythm and, as of 2020, affects more than 33 million people worldwide. As of 2014, it affected about 2 to 3% of the population of Europe and North America. This was an increase from 0.4 to 1% of the population around 2005. In the developing world, about 0.6% of males and 0.4% of females are affected. The percentage of people with AF increases with age with 0.1% under 50 years old, 4% between 60 and 70 years old, and 14% over 80 years old being affected. A-fib and atrial flutter resulted in 193,300 deaths in 2015, up from 29,000 in 1990. The first known report of an irregular pulse was by Jean-Baptiste de Sénac in 1749. Thomas Lewis was the first doctor to document this by ECG in 1909. Signs and symptoms AF is usually accompanied by symptoms related to a rapid heart rate. Rapid and irregular heart rates may be perceived as the sensation of the heart beating too fast, irregularly, or skipping beats (palpitations) or exercise intolerance and occasionally may produce anginal chest pain (if the high heart rate causes the heart's demand for oxygen to increase beyond the supply of available oxygen). Other possible symptoms include congestive heart failure symptoms such as fatigue, shortness of breath, or swelling. The abnormal heart rhythm (arrhythmia) is sometimes only identified with the onset of a stroke or a transient ischemic attack (TIA). It is not uncommon for a person to first become aware of AF from a routine physical examination or electrocardiogram, as it often does not cause symptoms. Since most cases of AF are secondary to other medical problems, the presence of chest pain or angina, signs and symptoms of hyperthyroidism (an overactive thyroid gland) such as weight loss and diarrhea, and symptoms suggestive of lung disease can indicate an underlying cause. A history of stroke or TIA, as well as high blood pressure, diabetes, heart failure, or rheumatic fever, may indicate whether someone with AF is at a higher risk of complications. Rapid heart rate Presentation is similar to other forms of rapid heart rate and may be asymptomatic. Palpitations and chest discomfort are common complaints. The rapid uncoordinated heart rate may result in reduced output of blood pumped by the heart (cardiac output), resulting in inadequate blood flow, and therefore oxygen delivery to the rest of the body. Common symptoms of uncontrolled atrial fibrillation may include shortness of breath, shortness of breath when lying flat, dizziness, and sudden onset of shortness of breath during the night. This may progress to swelling of the lower extremities, a manifestation of congestive heart failure. Due to inadequate cardiac output, individuals with AF may also complain of lightheadedness. AF can cause respiratory distress due to congestion in the lungs. By definition, the heart rate will be greater than 100 beats per minute. Blood pressure may be variable, and often difficult to measure as the beat-by-beat variability causes problems for most digital (oscillometric) non-invasive blood pressure monitors. For this reason, when determining the heart rate in AF, direct cardiac auscultation is recommended. Low blood pressure is most concerning, and a sign that immediate treatment is required. Many of the symptoms associated with uncontrolled atrial fibrillation are a manifestation of congestive heart failure due to the reduced cardiac output. The affected person's respiratory rate often increases in the presence of respiratory distress. Pulse oximetry may confirm the presence of too little oxygen reaching the body's tissues, related to any precipitating factors such as pneumonia. Examination of the jugular veins may reveal elevated pressure (jugular venous distention). Examination of the lungs may reveal crackles, which are suggestive of pulmonary edema. Examination of the heart will reveal a rapid irregular rhythm. Causes AF is linked to several forms of cardiovascular disease but may occur in otherwise normal hearts. Cardiovascular factors known to be associated with the development of AF include high blood pressure, coronary artery disease, mitral valve stenosis (e.g., due to rheumatic heart disease or mitral valve prolapse), mitral regurgitation, left atrial enlargement, hypertrophic cardiomyopathy (HCM), pericarditis, congenital heart disease, and previous heart surgery. Congenital heart disease is a strong risk factor for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a 20-year-old adult with congenital heart disease has a comparable lifetime risk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when compared to a 55-year-old adult with no history of congenital heart disease. People with congenital heart disease tend to develop atrial fibrillation at a younger age, that is more likely to be of right atrial origin (atypical) than of left origin, and have a greater risk of progressing to permanent atrial fibrillation. Additionally, lung diseases (such as pneumonia, lung cancer, pulmonary embolism, and sarcoidosis) may play a role in certain people. Sepsis also increases the risk of developing new-onset atrial fibrillation. Disorders of breathing during sleep, such as obstructive sleep apnea (OSA), are also associated with AF. Obesity is a risk factor for AF. Hyperthyroidism and subclinical hyperthyroidism are associated with AF development. Caffeine consumption does not appear to be associated with AF; excessive alcohol consumption ("binge drinking" or "holiday heart syndrome") is linked to AF. Low-to-moderate alcohol consumption also appears to be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although the increase in risk associated with drinking less than two drinks daily appears to be small. Tobacco smoking and secondhand tobacco smoke exposure are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Long-term endurance exercise that far exceeds the recommended amount of exercise (e.g., long-distance cycling or marathon running) appears to be associated with a modest increase in the risk of atrial fibrillation in middle-aged and elderly people. There is some evidence that night shift working may be linked to a diagnosis of AF. Genetics A family history of AF may increase the risk of AF. A study of more than 2,200 people found an increased risk factor for AF of 1.85 for those that had at least one parent with AF. Various genetic mutations may be responsible. Four types of genetic disorder are associated with atrial fibrillation: Familial AF as a monogenic disease Familial AF presenting in the setting of another inherited cardiac disease (hypertrophic cardiomyopathy, dilated cardiomyopathy, familial amyloidosis) Inherited arrhythmic syndromes (congenital long QT syndrome, short QT syndrome, Brugada syndrome) Non-familial AF associated with genetic backgrounds (polymorphism in the ACE gene) that may predispose to atrial fibrillation Family history in a first degree relative is associated with a 40% increase in risk of AF. This finding led to the mapping of different loci such as 10q22-24, 6q14-16 and 11p15-5.3 and discover mutations associated with the loci. Fifteen mutations of gain and loss of function have been found in the genes of K+ channels, including mutations in KCNE1-5, KCNH2, KCNJ5 or ABCC9 among others. Six variations in genes of Na+ channels that include SCN1-4B, SCN5A and SCN10A have also been found. All of these mutations affect the processes of polarization-depolarization of the myocardium, cellular hyper-excitability, shortening of effective refractory period favoring re-entries. Other mutations in genes, such as GJA5, affect gap junctions, generating a cellular uncoupling that promotes re-entries and a slow conduction velocity. Using genome-wide association study, which screen the entire genome for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 (SNP), three susceptibility loci have been found for AF (4q25, 1q21 and 16q22). In these loci there are SNPs associated with a 30% increase in risk of recurrent atrial tachycardia after ablation. There are also SNPs associated with loss of function of the Pitx2c gene (involved in cellular development of pulmonary valves), responsible for re-entries. There are also SNPs close to ZFHX3 genes involved in the regulation of Ca2+. A GWAS meta-analysis study conducted in 2018 revealed the discovery of 70 new loci associated with AF. Different variants have been identified. They are associated with genes that encode transcription factors, such as TBX3 and TBX5, NKX2-5 or PITX2, involved in the regulation of cardiac conduction, modulation of ion channels and in cardiac development. Have been also identified new genes involved in tachycardia (CASQ2) or associated with an alteration in cardiomyocyte communication (PKP2). Rare mutations in the cardiomyopathy gene TTN may also increase the risk of AF, even in individuals without signs of heart failure. Small genetic deletions on the X chromosome around the STS (steroid sulfatase) gene are associated with increased rates of AF in males; common genetic risk variants around STS appear to be associated with AF Sedentary lifestyle A sedentary lifestyle increases the risk factors associated with AF, such as obesity, hypertension, or diabetes mellitus. This favors remodeling processes of the atrium due to inflammation or alterations in the depolarization of cardiomyocytes by elevation of sympathetic nervous system activity. A sedentary lifestyle is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AF compared to physical activity. In both men and women, the practice of moderate exercise reduces the risk of AF progressively; intense sports may increase the risk of developing AF, as seen in athletes. It is due to a remodeling of cardiac tissue, and an increase in vagal tone, which shortens the effective refractory period (ERP) favoring re-entries from the pulmonary veins. Tobacco The rate of AF in smokers is 1.4 times higher than in non-smokers. However, snus consumption, which delivers nicotine at a dose equivalent to that of cigarettes and is debated as a harm-reduction product, is not correlated with AF. Alcohol Acute alcohol consumption can directly trigger an episode of atrial fibrillation. Regular alcohol consumption also increases the risk of atrial fibrillation in several ways. The long-term use of alcohol alters the physical structure and electrical properties of the atria. Alcohol consumption does this by repeatedly stimulating the sympathetic nervous system, increasing inflammation in the atria, raising blood pressure, lowering the levels of potassium and magnesium in the blood, worsening obstructive sleep apnea, and by promoting harmful structural changes (remodeling) in the atria and ventricles of the heart. This remodeling leads to abnormally increased pressure in the left atrium, inappropriately dilates it, and increases scarring (fibrosis) in the left atrium. The aforementioned structural changes increase the risk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when paired with the harmful changes in how the left atrium conducts electricity. High blood pressure According to the CHARGE Consortium, both systolic and diastolic blood pressure are predictors of the risk of AF. Systolic blood pressure values close to normal limit the increase in the risk associated with AF. Diastolic dysfunction is also associated with AF, which increases left atrial pressure, left atrial volume, size, and left ventricular hypertrophy, characteristic of chronic hypertension. All atrial remodeling is related to heterogeneous conduction and the formation of re-entrant electric conduction from the pulmonary veins. Other diseases There is a relationship between risk factors such as obesity and hypertension, with the appearance of diseases such as diabetes mellitus and sleep apnea-hypopnea syndrome, specifically, obstructive sleep apnea (OSA). These diseases are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AF due to their remodeling effects on the left atrium. Medications Several medications are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Few studies have examined this phenomenon, and the exact incidence of medication-induced atrial fibrillation is unknown. Medications that are commonly associated with an increased risk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include dobutamine and the chemotherapy agent cisplatin. Agents associated with a moderately increased risk include nonsteroidal anti-inflammatory drugs (e.g., ibuprofen), bisphosphonates, and other chemotherapeutic agents such as melphalan, interleukin 2, and anthracyclines. Other medications that rarely increase the risk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include adenosine, aminophylline, corticosteroids, ivabradine, ondansetron, and antipsychotics. This form of atrial fibrillation occurs in people of all ages but is most common in the elderly, in those with other atrial fibrillation risk factors, and after heart surgery. Pathophysiology The normal electrical conduction system of the heart allows electrical impulses generated by the heart's own pacemaker (the sinoatrial node) to spread to and stimulate the muscular layer of the heart (myocardium) in both the atria and the ventricles. When the myocardium is stimulated it contracts, and if this occurs in an orderly manner allows blood to be pumped to the body. In AF, the normal regular electrical impulses generated by the sinoatrial node are overwhelmed by disorganized electrical waves, usually originating from the roots of the pulmonary veins. These disorganized waves conduct intermittently through the atrioventricular node, leading to irregular activation of the ventricles that generate the heartbeat. Pathology The primary pathologic change seen in atrial fibrillation is the progressive fibrosis of the atria. This fibrosis is due primarily to atrial dilation; however, genetic causes and inflammation may be factors in some individuals. Dilation of the atria can be due to almost any structural abnormality of the heart that can cause a rise in the pressure within the heart. This includes valvular heart disease (such as mitral stenosis, mitral regurgitation, and tricuspid regurgitation), hypertension, and congestive heart failure. Any inflammatory state that affects the heart can cause fibrosis of the atria. This is typically due to sarcoidosis but may also be due to autoimmune disorders that create autoantibodies against myosin heavy chains. Mutation of the lamin AC gene is also associated with fibrosis of the atria that can lead to atrial fibrillation. Once dilation of the atria has occurred, this begins a chain of events that leads to the activation of the renin–angiotensin–aldosterone system (RAAS) and subsequent increase in the matrix metalloproteinases and disintegrin, which leads to atrial remodeling and fibrosis, with loss of atrial muscle mass. This process occurs gradually, and experimental studies have revealed patchy atrial fibrosis may precede the occurrence of atrial fibrillation and may progress with prolonged durations of atrial fibrillation. Fibrosis is not limited to the muscle mass of the atria and may occur in the sinus node (SA node) and atrioventricular node (AV node), correlating with sick sinus syndrome. Prolonged episodes of atrial fibrillation have been shown to correlate with prolongation of the sinus node recovery time; this suggests that dysfunction of the SA node is progressive with prolonged episodes of atrial fibrillation. Along with fibrosis, alterations in the atria that predispose to atrial fibrillation affect their electrical properties, as well as their responsiveness to the autonomic nervous system. The atrial remodeling that includes the pathologic changes described above has been referred to as atrial myopathy. Electrophysiology There are multiple theories about the cause of atrial fibrillation. An important theory is that the regular impulses produced by the sinus node for a normal heartbeat are overwhelmed by rapid electrical discharges produced in the atria and adjacent parts of the pulmonary veins. Sources of these disturbances are either automatic foci, often localized at one of the pulmonary veins, or a small number of localized sources in the form of either a re-entrant leading circle or electrical spiral waves (rotors); these localized sources may be in the left atrium near the pulmonary veins or in a variety of other locations through both the left or right atrium. Three fundamental components favor the establishment of a leading circle or a rotor: slow conduction velocity of the cardiac action potential, a short refractory period, and a small wavelength. Meanwhile, the wavelength is the product of velocity and refractory period. If the action potential has fast conduction, with a long refractory period and/or conduction pathway shorter than the wavelength, an AF focus would not be established. In multiple wavelet theory, a wavefront will break into smaller daughter wavelets when encountering an obstacle, through a process called vortex shedding. But, under the proper conditions, such wavelets can reform and spin around a center, forming an AF focus. In a heart with AF, the increased calcium release from the sarcoplasmic reticulum and increased calcium sensitivity can lead to an accumulation of intracellular calcium and causes downregulation of L-type calcium channels. This reduces the duration of action potential and the refractory period, thus favoring the conduction of re-entrant waves. Increased expression of inward-rectifier potassium ion channels can cause a reduced atrial refractory period and wavelength. The abnormal distribution of gap junction proteins such as GJA1 (also known as Connexin 43), and GJA5 (Connexin 40) causes non-uniformity of electrical conduction, thus causing the arrhythmia. AF can be distinguished from atrial flutter (AFL), which appears as an organized electrical circuit usually in the right atrium. AFL produces characteristic saw-toothed F-waves of constant amplitude and frequency on an ECG, whereas AF does not. In AFL, the discharges circulate rapidly at a rate of 300 beats per minute (bpm) around the atrium. In AF, there is no such regularity, except at the sources where the local activation rate can exceed 500 bpm. Although AF and atrial flutter are distinct arrhythmias, atrial flutter may degenerate into AF, and an individual may experience both arrhythmias at different times. Although the electrical impulses of AF occur at a high rate, most of them do not result in a heartbeat. A heartbeat results when an electrical impulse from the atria passes through the atrioventricular (AV) node to the ventricles and causes them to contract. During AF, if all of the impulses from the atria passed through the AV node, there would be severe ventricular tachycardia, resulting in a severe reduction of cardiac output. This dangerous situation is prevented by the AV node since its limited conduction velocity reduces the rate at which impulses reach the ventricles during AF. Diagnosis The evaluation of atrial fibrillation involves a determination of the cause of the arrhythmia, and classification of the arrhythmia. Diagnostic investigation of AF typically includes a complete history and physical examination, ECG, transthoracic echocardiogram, complete blood count, serum thyroid stimulating hormone level and may include a functionnality of some smartwatches. Screening Numerous guidelines recommend opportunistic screening for atrial fibrillation in those 65 years and older. These organizations include the: European Society of Cardiology, National Heart Foundation of Australia and the Cardiac Society of Australia and New Zealand European Heart Rhythm Society, AF-SCREEN International Collaboration,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Edinburgh European Primary Care Cardiovascular Society, and Irish Health Information and Quality Authority. Single timepoint screening detects undiagnosed AF, which is often asymptomatic, in approximately 1.4% of people in this age group. A Scottish inquiry into atrial fibrillation estimated that as many as one-third of people with AF are undiagnosed. Despite this, in 2018, the United States Preventive Services Task Force found insufficient evidence to determine the usefulness of routine screening. Given the importance of having a pathway to treatment, general practice is potentially an ideal setting to conduct AF screening. General practice was identified as a 'preferred' setting for AF screening by the AF-SCREEN international collaboration report due to the availability of nursing support and the natural pathway to treatment. Screening in primary care has been trialled in a number of countries. These include: a recent Canadian study conducted in 184 general practices; a screening program conducted alongside influenza vaccinations in 10 Dutch practices; and several Australian studies showed that opportunistic screening in primary care by GPs and nurses using eHealth tools was feasible. Minimal evaluation In general, the minimal evaluation of atrial fibrillation should be performed in all individuals with AF. The goal of this evaluation is to determine the general treatment regimen for the individual. If the results of the general evaluation warrant it, further studies may then be performed. History and physical examination The history of the individual's atrial fibrillation episodes is probably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evaluation. Distinctions should be made between those who are entirely asymptomatic when they are in AF (in which case the AF is found as an incidental finding on an ECG or physical examination) and those who have gross and obvious symptoms due to AF and can pinpoint whenever they go into AF or revert to sinus rhythm. Routine bloodwork While many cases of AF have no definite cause, it may be the result of various other problems. Hence, kidney function and electrolytes are routinely determined, as well as thyroid-stimulating hormone (commonly suppressed in hyperthyroidism and of relevance if amiodarone is administered for treatment) and a blood count. In acute-onset AF associated with chest pain, cardiac troponins, or other markers of damage to the heart muscle may be ordered. Coagulation studies (INR/aPTT) are usually performed, as anticoagulant medication may be commenced. Electrocardiogram Atrial fibrillation is diagnosed on an electrocardiogram (ECG), an investigation performed routinely whenever an irregular heartbeat is suspected. Characteristic findings are the absence of P waves, with disorganized electrical activity in their place, and irregular R–R intervals due to irregular conduction of impulses to the ventricles. At very fast heart rates, atrial fibrillation may look more regular, which may make it more difficult to separate from other supraventricular tachycardias or ventricular tachycardia. QRS complexes should be narrow, signifying that they are initiated by normal conduction of atrial electrical activity through the intraventricular conduction system. Wide QRS complexes are worrisome for ventricular tachycardia, although, in cases where there is a disease of the conduction system, wide complexes may be present in A-fib with a rapid ventricular response. If paroxysmal AF is suspected, but an ECG during an office visit shows only a regular rhythm, AF episodes may be detected and documented with the use of ambulatory Holter monitoring (e.g., for a day). If the episodes are too infrequent to be detected by Holter monitoring with reasonable probability, then the person can be monitored for longer periods (e.g., a month) with an ambulatory event monitor. Echocardiography In general, a non-invasive transthoracic echocardiogram (TTE) is performed in newly diagnosed AF, as well as if there is a major change in the person's clinical state. This ultrasound-based scan of the heart may help identify valvular heart disease (which may greatly increase the risk of stroke and alter recommendations for the appropriate type of anticoagulation), left and right atrial size (which predicts the likelihood that AF may become permanent), left ventricular size and function, peak right ventricular pressure (pulmonary hypertension), presence of left atrial thrombus (low sensitivity), presence of left ventricular hypertrophy and pericardial disease. Significant enlargement of both the left and right atria is associated with long-standing atrial fibrillation and, if noted at the initial presentation of atrial fibrillation, suggests that the atrial fibrillation is likely to be of a longer duration than the individual's symptoms. Extended evaluation In general, an extended evaluation is not necessary for most individuals with atrial fibrillation and is performed only if abnormalities are noted in the limited evaluation, if a reversible cause of the atrial fibrillation is suggested, or if further evaluation may change the treatment course. Chest X-ray In general, a chest X-ray is performed only if a pulmonary cause of atrial fibrillation is suggested, or if other cardiac conditions are suspected (in particular congestive heart failure). This may reveal an underlying problem in the lungs or the blood vessels in the chest. In particular, if underlying pneumonia is suggested, then treatment of the pneumonia may cause the atrial fibrillation to terminate on its own. Transesophageal echocardiogram A regular echocardiogram (transthoracic echo/TTE) has a low sensitivity for identifying blood clots in the heart. If this is suspected (e.g., when planning urgent electrical cardioversion), a transesophageal echocardiogram/TEE (or TOE where British spelling is used) is preferred. The TEE has much better visualization of the left atrial appendage than transthoracic echocardiography. This structure, located in the left atrium, is the place where a blood clot forms in more than 90% of cases in non-valvular (or non-rheumatic) atrial fibrillation. TEE has a high sensitivity for locating thrombi in this area and can also detect sluggish blood flow in this area that is suggestive of blood clot formation. If a blood clot is seen on TEE, then cardioversion is contraindicated due to the risk of stroke, and anticoagulation is recommended. Ambulatory Holter monitoring A Holter monitor is a wearable ambulatory heart monitor that continuously monitors the heart rate and heart rhythm for a short duration, typically 24 hours. In individuals with symptoms of significant shortness of breath with exertion or palpitations regularly, a Holter monitor may be of benefit to determine whether rapid heart rates (or unusually slow heart rates) during atrial fibrillation are the cause of the symptoms. Exercise stress testing Some individuals with atrial fibrillation do well with normal activity but develop shortness of breath with exertion. It may be unclear whether the shortness of breath is due to a blunted heart rate response to exertion caused by excessive atrioventricular node-blocking agents, a very rapid heart rate during exertion, or other underlying conditions such as chronic lung disease or coronary ischemia. An exercise stress test will evaluate the individual's heart rate response to exertion and determine whether the AV node blocking agents are contributing to the symptoms. Classification The American College of Cardiology (ACC), American Heart Association (AHA), and the European Society of Cardiology (ESC) recommend in their guidelines the following classification system based on simplicity and clinical relevance. All people with AF are initially in the category called first detected AF. These people may or may not have had previous undetected episodes. If a first detected episode stops on its own in less than seven days and then another episode begins, later on, the category changes to paroxysmal AF. Although people in this category have episodes lasting up to seven days, in most cases of paroxysmal AF, the episodes will stop in less than 24 hours. If the episode lasts for more than seven days, it is unlikely to stop on its own and is then known as persistent AF. In this case, cardioversion can be attempted to restore a normal rhythm. If an episode continues for a year or more, the rhythm is then known as longstanding persistent AF. If a decision is made by the person and their medical team to accept persistent AF and not attempt restoration of a normal sinus rhythm but instead manage the AF by simply controlling the person's ventricular rate then the rhythm is referred to as permanent AF. As a further subtype, AF that is detected only by an implanted or wearable cardiac monitor is known as subclinical AF. Episodes that last less than 30 seconds are not considered in this classification system. Also, this system does not apply to cases where the AF is a secondary condition that occurs in the setting of a primary condition that may be the cause of the AF. About half of people with AF have permanent AF, while a quarter have paroxysmal AF, and a quarter have persistent AF. In addition to the above AF categories, which are mainly defined by episode timing and termination, the ACC/AHA/ESC guidelines describe additional AF categories in terms of other characteristics of the person. Valvular AF refers to AF attributable to moderate to severe mitral valve stenosis or atrial fibrillation in the presence of a mechanical artificial heart valve. This distinction may be useful as it has implications on appropriate treatment, including differing recommendations for anticoagulation, but the most recent guidelines discourage use of this term as it may be confusing. Other historically used definitions include lone AF – AF occurring in those aged under 60 in the absence of other cardiovascular or respiratory diseases. This description is also discouraged as it is recognised that AF always has an underlying cause. Secondary AF refers to AF that occurs in the setting of another condition that have caused the AF, such as acute myocardial infarction, cardiac surgery, pericarditis, myocarditis, hyperthyroidism, pulmonary embolism, pneumonia, or another acute pulmonary disease. Prevention Prevention of atrial fibrillation focuses primarily on preventing or controlling its risk factors. Many of its risk factors, such as obesity, smoking, lack of physical activity, and excessive alcohol consumption, are modifiable and preventable with lifestyle modification or can be managed by a healthcare professional. Lifestyle modification Several healthy lifestyle behaviors are associated with a lower likelihood of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Accordingly, consensus guidelines recommend abstaining from alcohol and recreational drugs, stopping tobacco use, maintaining a healthy weight, and regularly participating in moderate-intensity physical activities. Consistent moderate-intensity aerobic exercise, defined as achieving 3.0–5.9 METs of intensity, for at least 150 minutes per week may reduce the risk of developing new-onset atrial fibrillation. Few studies have examined the role of specific dietary changes and how it relates to the prevention of atrial fibrillation. Management The main goals of treatment are to prevent circulatory instability and stroke. Rate or rhythm control is used to achieve the former, whereas anticoagulation is used to decrease the risk of the latter. If cardiovascularly unstable due to uncontrolled tachycardia, immediate cardioversion is indicated. Many antiarrhythmics, when used long term, increase the risk of death without any meaningful benefit. An integrated management approach, which includes stroke prevention, symptoms control and management of associated comorbidities was associated with better outcomes in patients with atrial fibrillation. Lifestyle modification Regular aerobic exercise improves atrial fibrillation symptoms and AF-related quality of life. The effect of high-intensity interval training on reducing atrial fibrillation burden is unclear. Weight loss of at least 10% is associated with reduced atrial fibrillation burden in people who are overweight or obese. Comorbidity treatment For people who have both atrial fibrillation and obstructive sleep apnea, observational studies suggest that continuous positive airway pressure (CPAP) treatment appears to lower the risk of atrial fibrillation recurrence after undergoing ablation. Randomized controlled trials examining the role of obstructive sleep apnea treatment on atrial fibrillation incidence and burden are lacking. Guideline-recommended lifestyle and medical interventions are recommended for people with atrial fibrillation and coexisting conditions such as hyperlipidemia, diabetes mellitus, or hypertension without specific blood sugar or blood pressure targets for people with atrial fibrillation. Bariatric surgery may reduce the risk of new-onset atrial fibrillation in people with obesity without AF and may reduce the risk of a recurrence of AF after an ablation procedure in people with coexisting obesity and atrial fibrillation. It is important for all people with atrial fibrillation to optimize the control of all coexisting medical conditions that can worsen their atrial fibrillation, such as hyperthyroidism, diabetes, congestive heart failure, high blood pressure, chronic obstructive pulmonary disease, stimulant use (e.g., methamphetamine dependence), and excessive alcohol consumption. Anticoagulants Anticoagulation can be used to reduce the risk of stroke from AF. Anticoagulation is recommended in most people other than those at low risk of stroke or those at high risk of bleeding. The risk of falls and consequent bleeding in frail elderly people should not be considered a barrier to initiating or continuing anticoagulation since the risk of fall-related brain bleeding is low and the benefit of stroke prevention often outweighs the risk of bleeding. Similarly, the presence or absence of AF symptoms does not determine whether a person warrants anticoagulation and is not an indicator of stroke risk. Oral anticoagulation is underused in atrial fibrillation, while aspirin is overused in many who should be treated with a direct oral anticoagulant (DOAC) or warfarin. In 2019, DOACs were often recommended over warfarin by the American Heart Association. The risk of stroke from non-valvular AF can be estimated using the CHA2DS2-VASc score. In the 2019 AHA/ACC/HRS guidelines anticoagulation is recommended in non-valvular AF if there is a score of two or more in men and three or more in women and may be considered if there is a score of one in men or two in women; not using anticoagulation is reasonable if there is a score of zero in men or one in women. Guidelines from the American College of Chest Physicians, Asia-Pacific Heart Rhythm Society, Canadian Cardiovascular Society, European Society of Cardiology, Japanese Circulation Society, Korean Heart Rhythm Society, and the 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are Excellence recommend the use of novel oral anticoagulants or warfarin with a CHA2DS2-VASc score of one over aspirin and some directly recommend against aspirin. Experts generally advocate for most people with atrial fibrillation with CHA2DS2-VASc scores of one or more receiving anticoagulation though aspirin is sometimes used for people with a score of one (moderate risk for stroke). There is little evidence to support the idea that the use of aspirin significantly reduces the risk of stroke in people with atrial fibrillation. Furthermore, aspirin's major bleeding risk (including bleeding in the brain) is similar to that of warfarin and DOACs despite its inferior efficacy. Anticoagulation can be achieved through several means including warfarin, heparin, dabigatran, rivaroxaban, edoxaban, and apixaban. Many issues should be considered related to their comparative effectiveness, including the cost of DOACs, risk of stroke, risk of falls, comorbidities (such as chronic liver or kidney disease), the presence of significant mitral stenosis or mechanical heart valves, compliance, and speed of the desired onset of anticoagulation. The optimal approach to anticoagulation in people with AF and who simultaneously have other diseases (e.g., cirrhosis and end-stage kidney disease on dialysis) that predispose a person to both bleeding and clotting complications is unclear. For those with non-valvular atrial fibrillation, DOACs are at least as effective as warfarin for preventing strokes and blood clots embolizing to the systemic circulation (if not more so) and are generally preferred over warfarin. DOACs carry a lower risk of bleeding in the brain compared to warfarin, although dabigatran is associated with a higher risk of intestinal bleeding. Dual antiplatelet therapy with aspirin and clopidogrel is inferior to warfarin for preventing strokes or systemic embolism and has comparable bleeding risk in people with atrial fibrillation. In those who are also on aspirin, however, DOACs appear to be better than warfarin. Warfarin is the recommended anticoagulant choice for persons with valvular atrial fibrillation (atrial fibrillation in the presence of a mechanical heart valve and/or moderate-severe mitral valve stenosis). The exception to this recommendation is in people with valvular atrial fibrillation who are unable to maintain a therapeutic INR on warfarin therapy; in such cases, treatment with a DOAC is then recommended. Rate versus rhythm control There are two ways to approach atrial fibrillation using medications: rate control and rhythm control. Both methods have similar outcomes. Rate control lowers the heart rate closer to normal, usually 60 to 100 bpm, without trying to convert to a regular rhythm. Rhythm control tries to restore a normal heart rhythm in a process called cardioversion and maintains the normal rhythm with medications. Studies suggest that rhythm control is more important in the acute setting AF, whereas rate control is more important in the chronic phase. The risk of stroke appears to be lower with rate control versus attempted rhythm control, at least in those with heart failure. AF is associated with a reduced quality of life, and, while some studies indicate that rhythm control leads to a higher quality of life, some did not find a difference. Neither rate nor rhythm control is superior in people with heart failure when they are compared in various clinical trials. However, rate control is recommended as the first-line treatment regimen for people with heart failure. On the other hand, rhythm control is only recommended when people experience persistent symptoms despite adequate rate control therapy. In those with a fast ventricular response, intravenous magnesium significantly increases the chances of achieving successful rate and rhythm control in the urgent setting without major side-effects. A person with poor vital signs, mental status changes, preexcitation, or chest pain often will go to immediate treatment with synchronized DC cardioversion. Otherwise, the decision of rate control versus rhythm control using medications is made. This is based on several criteria that include whether or not symptoms persist with rate control. Rate control Rate control to a target heart rate of fewer than 110 beats per minute is recommended in most people. Lower heart rates may be recommended in those with left ventricular hypertrophy or reduced left ventricular function. Rate control is achieved with medications that work by increasing the degree of the block at the level of the AV node, decreasing the number of impulses that conduct into the ventricles. This can be done with: Beta blockers (preferably the "cardioselective" beta blockers such as metoprolol, bisoprolol, or nebivolol) Non-dihydropyridine calcium channel blockers (e.g., diltiazem or verapamil) Cardiac glycosides (e.g., digoxin) – have less use, apart from in older people who are sedentary. They are not as effective as either beta-blockers or calcium channel blockers. Patients with chronic AF are recommended to take either beta blockers or calcium channel blockers. In addition to these agents, amiodarone has some AV node blocking effects (in particular when administered intravenously) and can be used in individuals when other agents are contraindicated or ineffective (particularly due to hypotension). Cardioversion Cardioversion is the attempt to switch an irregular heartbeat to a normal heartbeat using electrical or chemical means. Electrical cardioversion involves the restoration of normal heart rhythm through the application of a DC electrical shock. The exact placement of the pads does not appear to be important. Chemical cardioversion is performed with medications, such as amiodarone, dronedarone, procainamide (especially in pre-excited atrial fibrillation), dofetilide, ibutilide, propafenone, or flecainide. After successful cardioversion, the heart may be stunned, which means that there is a normal rhythm, but the restoration of normal atrial contraction has not yet occurred. Surgery Ablation Catheter ablation (CA) is a procedure performed by an electrophysiologist, a cardiologist who specializes in heart rhythm problems, to restore the heart's normal rhythm by destroying, or electrically isolating, specific parts of the atria. A group of cardiologists led by Dr Haïssaguerre from Bordeaux University Hospital noted in 1998 that the pulmonary veins are an important source of ectopic beats, initiating frequent paroxysms of atrial fibrillation, with these foci responding to treatment with radio-frequency ablation. Most commonly, CA electrically isolates the left atrium from the pulmonary veins, where most of the abnormal electrical activity promoting atrial fibrillation originates. CA is a form of rhythm control that restores normal sinus rhythm and reduces AF-associated symptoms more reliably than antiarrhythmic medications. Electrophysiologists generally use two forms of catheter ablation—radiofrequency ablation, or cryoablation. In young people with little-to-no structural heart disease where rhythm control is desired and cannot be maintained by medication or cardioversion, radiofrequency catheter ablation or cryoablation may be attempted and may be preferred over several years of medical therapy. Although radiofrequency ablation has become an accepted intervention in selected younger people and may be more effective than medication at improving symptoms and quality of life, there is no evidence that ablation reduces all-cause mortality, stroke, or heart failure. Some evidence indicates CA may be particularly helpful for people with AF who also have heart failure. AF may recur in people who have undergone CA and nearly half of people who undergo it will require a repeat procedure to achieve long-term control of their AF. In general, CA is more successful at preventing AF recurrence if AF is paroxysmal as opposed to persistent . As CA does not reduce the risk of stroke, many are advised to continue their anticoagulation. Possible complications include common, minor complications such as the formation of a collection of blood at the site where the catheter goes into the vein (access site hematoma), but also more dangerous complications including bleeding around the heart (cardiac tamponade), stroke, damage to the esophagus (atrio-esophageal fistula), or even death. An alternative to catheter ablation is surgical ablation. The Maze procedure, first performed in 1987, is an effective invasive surgical treatment that is designed to create electrical blocks or barriers in the atria of the heart. The idea is to force abnormal electrical signals to move along one, uniform path to the lower chambers of the heart (ventricles), thus restoring the normal heart rhythm. People with AF often undergo cardiac surgery for other underlying reasons and are frequently offered concomitant AF surgery to reduce the frequency of short- and long-term AF. Concomitant AF surgery is more likely to lead to the person being free from atrial fibrillation and off medications long-term after surgery and Cox-Maze IV procedure is the gold standard treatment. There is a slightly increased risk of needing a pacemaker following the procedure. AF often occurs after cardiac surgery and is usually self-limiting. It is strongly associated with age, preoperative hypertension, and the number of vessels grafted. Measures should be taken to control hypertension preoperatively to reduce the risk of AF. Also, people with a higher risk of AF, e.g., people with pre-operative hypertension, more than three vessels grafted, or greater than 70 years of age, should be considered for prophylactic treatment. Postoperative pericardial effusion is also suspected to be the cause of atrial fibrillation. Prophylaxis may include prophylactic postoperative rate and rhythm management. Some authors perform posterior pericardiotomy to reduce the incidence of postoperative AF. When AF occurs, management should primarily be rate and rhythm control. However, cardioversion may be used if the patient is hemodynamically unstable, highly symptomatic, or AF persists for six weeks after discharge. In persistent cases, anticoagulation should be used. Left atrial appendage occlusion There is growing evidence that left atrial appendage occlusion therapy may reduce the risk of stroke in people with non-valvular AF as much as warfarin. After surgery After catheter ablation, people are moved to a cardiac recovery unit, intensive care unit, or cardiovascular intensive care unit where they are not allowed to move for 46 hours. Minimizing movement helps prevent bleeding from the site of the catheter insertion. The length of time people stay in the hospital varies from hours to days. This depends on the problem, the length of the operation, and whether or not general anesthetic was used. Additionally, people should not engage in strenuous physical activityto maintain a low heart rate and low blood pressurefor around six weeks. Prognosis Atrial fibrillation can progress from infrequent occurrences to more frequent occurrences, ultimately becoming permanent. But the majority of cases do not progress, especially among patients with a healthy lifestyle. Atrial fibrillation increases the risk of heart failure by 11 per 1000, kidney problems by 6 per 1000, death by 4 per 1000, stroke by 3 per 1000, and coronary heart disease by 1 per 1000. Women have a worse outcome overall than men. Evidence increasingly suggests that atrial fibrillation is independently associated with a higher risk of developing dementia. Blood clots Prediction of embolism Among Danish men aged 50, with no risk factors, the 5-year risk of stroke was 1.1% and with AF alone 2.5%. For women the risks were slightly less, 0.7% and 2.1%. For men aged 70, the 5-year risk of stroke was 4.8% and with AF alone 6.8%. For women aged 70 the risk was again lower than for men, 3.4% with no added risk factor and 8.2% with AF. Determining the risk of an embolism causing a stroke is important for guiding the use of anticoagulants. The most accurate clinical prediction rules are: CHADS2 CHA2DS2-VASc score Both the CHADS2 and the CHA2DS2-VASc score predict future stroke risk in people with A-fib with CHA2DS2-VASc score being more accurate. Some that had a CHADS2 score of zero had a CHA2DS2-VASc score of three, with a 3.2% annual risk of stroke. Thus, a CHA2DS2-VASc score of zero is considered very low risk. Mechanism of thrombus formation In atrial fibrillation, the lack of an organized atrial contraction can result in some stagnant blood in the left atrium (LA) or left atrial appendage (LAA). This lack of movement of blood can lead to thrombus formation (blood clotting). If the clot becomes mobile and is carried away by the blood circulation, it is called an embolus. An embolus proceeds through smaller and smaller arteries until it plugs one of them and prevents blood from flowing through the artery. This process results in end organ damage due to the loss of nutrients, oxygen, and the removal of cellular waste products. Emboli in the brain may result in an ischemic stroke or a transient ischemic attack (TIA). More than 90% of cases of thrombi associated with non-valvular atrial fibrillation evolve in the left atrial appendage. However, the LAA lies in close relation to the free wall of the left ventricle, and thus the LAA's emptying and filling, which determines its degree of blood stagnation, may be helped by the motion of the wall of the left ventricle if there is good ventricular function. Dementia Atrial fibrillation has been independently associated with a higher risk of developing cognitive impairment, vascular dementia, and Alzheimer disease and with elevated levels of neurofilament light chain in blood, a biomarker indicating neuroaxonal injury. Several mechanisms for this association have been proposed, including silent small blood clots (subclinical microthrombi) traveling to the brain resulting in small ischemic strokes without symptoms, altered blood flow to the brain, inflammation, clinically silent small bleeds in the brain, and genetic factors. Tentative evidence suggests that effective anticoagulation with direct oral anticoagulants or warfarin may be somewhat protective against AF-associated dementia and evidence of silent ischemic strokes on MRI but this remains an active area of investigation. Epidemiology Atrial fibrillation is the most common arrhythmia and affects more than 33 million people worldwide. In Europe and North America, , it affects about 2% to 3% of the population. This is an increase from 0.4 to 1% of the population around 2005. In the developing world, rates are about 0.6% for males and 0.4% for females. The number of people diagnosed with AF has increased due to better detection of silent AF and increasing age and conditions that predispose to it. It also accounts for one-third of hospital admissions for cardiac rhythm disturbances, and the rate of admissions for AF has risen in recent years. AF is the cause for 20% to 30% of all ischemic strokes. After a transient ischemic attack or stroke, about 11% are found to have a new diagnosis of atrial fibrillation. 3% to 11% of patients with AF have structurally normal hearts. Approximately 2.2 million individuals in the United States and 4.5 million in the European Union have AF. The number of new cases each year of AF increases with age. In people older than 80 years, it affects about 8%. In contrast, in younger people the prevalence is estimated to be 0.05% and is associated with congenital heart disease or structural heart disease in this demographic. As of 2001, it was anticipated that in developed countries, the number of people with atrial fibrillation was likely to increase during the following 50 years, due to the growing proportion of elderly people. Gender Atrial fibrillation is more common in men than in women when reviewed in European and North American populations. In developed and developing countries, there is also a higher rate in men than in women. The risk factors associated with AF are also distributed differently according to gender. In men, coronary disease is more frequent, while in women, high systolic blood pressure and valvular heart disease are more prevalent. Ethnicity Rates of AF are lower in populations of African descent than in populations of European descent. African descent is associated with a protective effect for AF, due to the lower presence of SNPs with guanine alleles. European ancestry has more frequent mutations. The variant rs4611994 for the gene PITX2 is associated with risk of AF in African and European populations. Hispanic and Asian populations have a lower risk of AF than European populations. The risk of AF in non-European populations is associated with characteristic risk factors of these populations, such as hypertension. Young people Atrial fibrillation is an uncommon condition in children but sometimes occurs in association with certain inherited and acquired conditions. Congenital heart disease and rheumatic fever are the most common causes of atrial fibrillation in children. Other inherited heart conditions associated with the development of atrial fibrillation in children include Brugada syndrome, short QT syndrome, Wolff Parkinson White syndrome, and other forms of supraventricular tachycardia (e.g., AV nodal reentrant tachycardia). Adults who survived congenital heart disease have an increased risk of developing AF. In particular, people who had atrial septal defects, Tetralogy of Fallot, or Ebstein's anomaly, and those who underwent the Fontan procedure, are at higher risk with prevalence rates of up to 30% depending on the heart's anatomy and the person's age. History Because the diagnosis of atrial fibrillation requires measurement of the electrical activity of the heart, atrial fibrillation was not truly described until 1874, when Edmé Félix Alfred Vulpian observed the irregular atrial electrical behavior that he termed "fremissement fibrillaire" in dog hearts. In the mid-18th century, Jean-Baptiste de Sénac made note of dilated, irritated atria in people with mitral stenosis. The irregular pulse associated with AF was first recorded in 1876 by Carl Wilhelm Hermann Nothnagel and termed "delirium cordis", stating that "[I]n this form of arrhythmia the heartbeats follow each other in complete irregularity. At the same time, the height and tension of the individual pulse waves are continuously changing". Correlation of delirium cordis with the loss of atrial contraction, as reflected in the loss of a waves in the jugular venous pulse, was made by Sir James MacKenzie in 1904. Willem Einthoven published the first ECG showing AF in 1906. The connection between the anatomic and electrical manifestations of AF and the irregular pulse of delirium cordis was made in 1909 by Carl Julius Rothberger, Heinrich Winterberg, and Sir Thomas Lewis. Other animals Atrial fibrillation occurs in other animals, including cats, dogs, and horses. Unlike humans, dogs rarely develop the complications that stem from blood clots breaking off from inside the heart and traveling through the arteries to distant sites (thromboembolic complications). Cats rarely develop atrial fibrillation but appear to have a higher risk of thromboembolic complications than dogs. Cats and dogs with atrial fibrillation often have underlying structural heart disease that predisposes them to the condition. The medications used in animals for atrial fibrillation are largely similar to those used in humans. Electrical cardioversion is occasionally performed in these animals, but the need for general anesthesia limits its use. Standardbred horses appear to be genetically susceptible to developing atrial fibrillation. Horses that develop atrial fibrillation often have minimal or no underlying heart disease, and the presence of atrial fibrillation in horses can adversely affect physical performance. References Further reading External links Cardiac arrhythmia Wikipedia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Wikipedia emergency medicine articles ready to translate
https://ko.wikipedia.org/wiki/%ED%82%A4%EB%A3%A8%EC%8A%A4%20%EC%9B%90%ED%86%B5
키루스 원통
키루스 실린더() 또는 키루스 헌장( )에 대한 설명. 성경에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키루스 2세의 업적을 기록한 실린더이다. BC 6세기 만들어져 1879년 메소포타미아(현대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현재는 키루스 실린더를 발견한 탐험대를 후원한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키루스 실린더는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키루스의 침략을 받아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었을 때, 키루스 왕의 명령을 바탕으로 제작, 공표되었다. 키루스 실린더는 키루스를 찬양하고, 그의 계보를 기록하고, 그를 왕중의 왕으로 표현한다. 키루스에 의해 패배하고 퇴위한 바빌로니아 왕 나보니두스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는 독재자로 비난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두크가 바빌로니아인들에게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키루스를 선택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글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키루스가 그들의 새로운 통치자로 환영 받았고, 평화롭게 입성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키루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를 보호하고 도와달라고 마르두크에게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키루스를 그들의 삶을 향상시킨 바빌로니아 시민들의 보호자로 추앙하고, 포로된 사람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그 밖의 지역에 걸쳐 각 지역의 종교 시설 등을 복원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키루스가 어떻게 바빌론의 성벽을 수리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끝을 맺는다. 실린더의 본문은 바빌로니아 포로가 되었던 유대인들의 송환에 대한 키루스의 정책의 증거라고 성서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다. 이 해석은 메소포타미아 부근 내용만 언급하고, 유대인이나 예루살렘 또는 유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실린더는 또한 이란의 마지막 샤(Shah)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 의해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고 언급되었다. 이는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거부된 내용이기도 하다. 전 영국박물관 관장인 닐 맥그리거(Neil MacGregor)는 키루스 실린더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한 다른 국적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한 새로운 종류의 국가 제도 운영에 대한 첫 번째 시도이다."라고 말했다. 키루스 실린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건국 2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테헤란에 전시한 제국주의 국가가 이란의 국가 상징으로 채택했다. 10월 14일 모하마드 레자 샤의 여동생 아샤프 파할비 공주는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에게 키루스 실린더를 복제해서 선물한 바 있다. 공주는 "키루스가 남긴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관용, 용기, 동정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라는 유산이었다"고 주장했다. 개요 키루스 실린더 (Cyrus Cylinder)는 최대 지름이 22.5 센티미터 (8.9 인치) × 10 센티미터 (3.9 인치) 인 구운 점토의 통 모양 실린더이다. 원뿔 모양의 찰흙 층 주변에 여러 단계로 만들어졌으며, 그 내부에는 큰 회색 돌이 포함되어 있다. 글을 새기기 위해서 마지막 점토의 미세한 층을 더했는데, 그 층을 잘 살리기 위해서 중간에는 여러 층의 점토를 덧대어 제작하였다. 발굴 당시에 키루스 실린더는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서 발굴되었다. 오늘날에는 1972년 두 개의 큰 조각을 합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879년 Hormuzd Rassam이 발견한 실린더의 본체는 "A"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1961년 다시 가마에서 구워 냈고, 석고를 추가로 충전하는 복원을 진행했다. 작은 조각 "B"는 8.6 센티미터 (3.4 인치) X 5.6 센티미터 (2.2 인치)의 크기이다. 조각 "B"는 예일 대학교의 J.B.Nies에 의해 골동품 상인으로부터 구입되었다. Nies는 1920년에 이 조각의 본문을 공표했다. 이 조각은 1879년에 원래 발굴 작업을하는 동안 실린더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고 발굴 작업에서 제외되어 Rassam의 쓰레기 더미에서 회수되었다. 뮌스터 대학 (University of Münster)의 폴 리차드 버거 (Paul-Richard Berger)가 1970년에 그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실린더의 일부로 확인되지 않았다. 예일 대학 (Yale University)은 영국 박물관 (British Museum) 소장품에서 "쐐기문자판(a cuneiform tablet)"과 교환하기 위해 영국 박물관에 무기한으로 조각을 빌려주었다. 기원전 539년에 실린더가 키루스 대왕의 바빌론 정복을 분명히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생성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539년 이후로 키루스가 바빌론을 통치하던 초기 시기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박물관 (British Museum)은 원통의 제작 시기를 기원전 539-530년으로 정했다. 키루스 실린더의 내용은 이러하다 1 ~ 19 행: 바빌론의 왕인 나보니두스를 부끄러워하면서 키루스를 신 마르두크와 연결시키는 서두; 20-22 행: 키루스의 왕의 칭호와 계보, 그리고 바빌론에 평화롭게 입성 함; 22 ~ 34 행: 키루스의 바빌론 치세 정책에 대한 찬사. 34-35 행: 키루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를 위해 마르둑에게 기원. 36-37 행: 키루스가 백성들을 평화롭게 살게하고 신들에게 바친 헌물을 증가 시켰다는 선언. 38-45 행: 바빌론에 있는 키루스에 의해 건설된 건물 건축 활동의 세부 사항. 최근 관련된 조각 발견 내용 2010 영국박물관은 1881년부터 박물관에 보관하던 두 개의 점토 조각을 해독했다고 발표했는데, 그 조각에는 키루스 실린더와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조각은 바빌론 근처 다일렘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출토되었고, Wilfred Lambert 교수와 Irving Finkel과 영국 박물관 중동 지역 전시 담당이 발굴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키루스 실린더가 더 작은 도시까지 전해진 확실한 전달 내용이라는 증거이다. 페르시아 작품인 키루스 실린더의 메소포타미아 유물들의 유사점 키루스 실린더는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왕의 비문과 뚜렷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주목할 두 가지 예는 기원전 722년 1월에 바빌론 왕좌를 장악 한 Marduk-apla-iddina 2세의 것과 12년 후 바빌론을 정복한 앗시리아의 사르곤 2 세의 것이다. Marduk-apla-iddina는 정복자로서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했을 때 당했던 것과 유사한 정통성 문제에 직면한다. 그는 마르둑(그들이 섬기는 신)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정복의 정당성 -정통성-을 부여한다. 그의 정통성에 지지를 얻었을 때, 그는 성스러운 의식을 수행하고 성지를 회복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초기 왕이 성전 기초에 둔 왕의 비문을 발견했다고 말하면서, 그 왕들은 자신의 정복을 만족하며 평온하고 명예롭게 떠났다고 선언한다. 이런 스타일의 주장은 키루스의 실린더에도 언급된다. 12년 후 앗시리아 왕 사곤 2 세는 Marduk-apla-iddina를 물리치고 추방하여 바빌로니아의 왕권을 차지했다. 사르곤의 연대기는 그가 바빌로니아 군주의 임무를 수행하고 신을 존중하며 사원을 유지하고 도시 엘리트의 특권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방법을 표현하고 있다. 키루스 실린더도 동일한 내용을 언급했다. 키루스가 폐위한 바빌론 왕 나보니두스는 동일한 스타일의 실린더를 제작하였고, 그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실린더의 내용은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바빌론 전통과 강한 연속성을 나타낸다. 정복자들의 강함과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된 것이다. Kuhrt가 말한 것처럼 : 실린더는 바빌론 시민들이 새로운 왕을 지지해야 하는 압제된 상황을 반영한다 … 이 맥락에서, 패배한 전임 왕의 치세는 자동적으로 나쁘게 묘사되었다 - 당연히 치세를 못하니 망하지 않겠습니까? 묵시적으로, 또 당연히 전임자의 모든 행위는 필연적으로 폄하되었다. 키루스 실린더가 바빌론에서 제작된 다른 실린더와 서술 방법이 유사한 것은, 이 실린더가 키루스의 명에 의해 마르둑을 숭배하는 바빌론 성직자에 의해 저술 되었음을 암시한다.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나보니두스의 것과 비교해 보자. 나보니두스의 것은 전임 바빌론 통치자는 마르둑의 성직자의 적이고, 키루스는 바빌론의 해방자로서 등장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두 작품은 나보니두스에 비해서 키루스가 왕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것을 잘 강조하고 있다. 키루스 실린더의 내용에 대한 논란 월튼과 힐 (Walton and Hill)이 말했듯이, 사람들에 의해 찬사를받은 평화로운 왕권 교체라는 주장에 대해 "일반적인 정복자의 표현 방법이며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링컨 (Bruce Lincoln) 신학 교수는 해방자로서 자신의 군대가 "위대한 제국의 환타지"중 하나라고 환영한다고 선전하면서, 한편 바빌로니아 군이 기원전 522년에 페르시아 통치에 반대하여 반복적으로 반기를 들고, 기원전 484년과 482년에 반란군이 국가 독립과 바빌론 왕의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실린더에 적힌 것처럼 페르시아인에게 우호적이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키루스 실린더의 노예 해방과 종교 자유에 대한 언급을 보면, 그 당시로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해당 내용이 이미 기록되어 있었고, 키루스 실린더에 그 내용이 증명된 것이라 주장하며, 성경이 사실이라는 입장을 증명하는데 키루스(성경명 고레스) 실린더를 주로 언급한다. 인권 선언문으로서 키루스 실린더 1960년대 후반에 이란의 마지막 샤 (Shah)가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고 선언했을 때 키루스 실린더는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키루스 실린더는 샤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핵심 상징이었고 일부 역사가들과 학자들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부 논평가들에 의해 여전히 인권 헌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팔 라비 이란 정부의 견해 키루스 실린더는 이란 혁명 이전 정부 (Shah Mohammed Reza Pahlavi)가 1967년에 발표 한 '이란의 백색 혁명 (The White Revolution of Iran)'에서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고 불렸다. Shah는 키루스를 정부 이데올로기에서 핵심 인물로 규명하고 그의 정부를 아케메네스 왕조와 관련시켰다. 그는 "우리 제국의 역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적인 원칙, 정의와 자유의 옹호가 가장 주목할만한 문서 중 하나로 간주되어야하는 키루스의 유명한 인권 선언으로 시작되었다"고 썼다. Shah는 키루스를 "사람들에게 인권과 정의와 자유"를 주기 위하여 실천한 역사상 첫번째 통치자로 설명한다. 1968년 Shah는 '키루스 실린더'가 현대 인권 선언의 선구자라고 말하면서 테헤란에서 처음으로 유엔 인권 회의를 열었다. 1971년 새해 연설에서 Shah는 페르시아 군주국 2,500년을 축하하기 위해 거행된 행사에서 1971년을 키루스의 해(Cyrus the Great Year)라고 선언했다. 키루스 선언은 이란이 세계 문명에 기여한 공헌이 인정될만한 현대 이란의 자랑거리 역할을 한 것이다. 기념의 주요 주제는 이란의 Shah와 페르시아 과거의 유명한 왕, 특히 키루스와 관련이 있는 이란의 정치 체제 시스템이었다. Shah는 아케메네스 제국시기를 "과거의 제국이 희망하는 사회의 모델이자 슬로건으로 가장 잘 완성된 모델"으로 보았다. 기념을 위한 상징으로 키루스 실린더가 채택되었으며, 이란의 잡지와 저널은 고대 페르시아 역사에 관한 수 많은 기사를 실었다. 대영 박물관은 축제 기간 동안 원래의 키루스 실린더를 이란 정부에 대여해 주었다. 그것은 테헤란에 있는 샤 히드 기념탑 (현재 보르제 아자디)에 전시되었다. 2,500년의 축하 행사는 1971년 10월 12일에 시작되어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의 무덤에서 화려한 퍼레이드로 진행되었고, 1 주일 후 최고점에 달했다. 10월 14일, Shah의 여동생, Ashraf Pahlavi 공주는 U Thant 유엔 사무 총장에게 키루스 실린더의 복제품을 선물했다. 공주는 "키루스의 유산은 인간 이해, 관용, 용기, 연민,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유엔 총회는 유엔 총회가 "무력 충돌에 관한 인권 존중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노력과 함께 연결하는 선물로 실린더를 받아들였다. 그 후 복제품 키루스 실린더는 뉴욕시의 유엔 본부 2층 복도에 보관되었다. 유엔은 이 실린더를 "고대 인권 선언"으로 계속 홍보하고있다. 이슬람 공화국에 전시된 키루스 실린더 2010년 9월 전직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Mormoud Ahmadinejad)는 공식적으로 이란 국립 박물관에서 키루스 실린더 전시회를 열었다. Pahlavi 시대 이후에, 실린더를 이란으로 가져온 것은 두 번째였다. 또한 이란 국내에서 가장 오래 진행되는 전시였다. Ahmadinejad는 키루스 실린더를 인간 가치의 화신이자 모든 인류를 위한 문화 유산으로 간주하고 이를 "첫번째 인권 헌장"이라고 부른다. 영국은 이 키루스 실린더를 이란 국립 박물관에 4 개월 동안 대여해 주었다. 실린더는 모든 사람이 생각과 선택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모든 개인은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 헌장은 또한 억압과 싸우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인권을 인정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키루스 실린더는 이란 국민이 항상 역사를 통해 공의와 헌신과 인간 가치의 깃발을 든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라고 이슬람은 이야기 한다. 학자들의 의견 "인권 헌장"으로서의 실린더의 해석은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다소 다른 의견이 있다고 기술되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인권 헌장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팔레비 정권이 고안한 정치 선전으로 이야기 한다. 독일 역사 학자 Josef Wiesehöfer는 키루스를 인권 부문 선구자로 묘사 한 것은 이란의 이미지메이킹 전략이라고 언급했다. D. Fairchild Ruggles와 Helaine Silverman은 Shah의 목적이 이란 국가와 그의 정권을 정당화하고 고대 페르시아의 과거에 뿌리를 둔 정권임을 강조하여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력 증가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Shah의 기념식 직후에 영국 박물관 (British Museum)의 C.B.F. 워커는 "키루스 실린더의 본질적인 성격은 인권이나 종교적 관용에 대한 일반적인 선언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전통에서 키루스가 바빌론 도시를 복원하고 마르두크 종교인들의 신앙을 보전하는 것"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과 인권 작가들은 키루스 실린더를 인권 헌장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지한다. 미국의 철학자 인 WJ 탈보트 (WJ Talbott)는 인권 개념은 20세기 개념이라고 믿지만 키루스를 "아마도 가장 초기의 종교적 관용 옹호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란의 변호사 히라드 압 타히 (Hirad Abtahi)는 실린더가 단순히"왕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고 주장한다. 키루스는 재임 중에 실린더를 발표하고 그 문서에 권위를 부여했다. 인기있는 야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시적인 외부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며, 아무도 그에게 그런 것을 작성하도록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 이란 총리 하산 피르니아 (Hassan Pirnia)는 20세기 초에 글을 쓰면서 실린더가 "시대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인권에 대해 토론하고 당시 이란의 통치하에 있던 나라들의 모든 사람의 명예와 명성, 종교적 신념을 보호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이라고 말했다. 각주 대영박물관 소장품 금석문 아카드어 점토 인권사 문화재 반환 키루스 2세 나보니두스 기원전 6세기 작품 1879년 발굴
https://en.wikipedia.org/wiki/Cyrus%20Cylinder
Cyrus Cylinder
The Cyrus Cylinder is an ancient clay cylinder, now broken into several pieces, on which is written a Achaemenid royal inscription in Akkadian cuneiform script in the name of Persian king Cyrus the Great. It dates from the 6th century BC and was discovered in the ruins of the ancient Mesopotamian city of Babylon (now in modern Iraq) in 1879. It is currently in the possession of the British Museum. It was created and used as a foundation deposit following the Persian conquest of Babylon in 539 BC, when the Neo-Babylonian Empire was invaded by Cyrus and incorporated into his Persian Empire. The text on the Cylinder praises Cyrus, sets out his genealogy and portrays him as a king from a line of kings. The Babylonian king Nabonidus, who was defeated and deposed by Cyrus, is denounced as an impious oppressor of the people of Babylonia and his low-born origins are implicitly contrasted to Cyrus' kingly heritage. The victorious Cyrus is portrayed as having been chosen by the chief Babylonian god Marduk to restore peace and order to the Babylonians. The text states that Cyrus was welcomed by the people of Babylon as their new ruler and entered the city in peace. It appeals to Marduk to protect and help Cyrus and his son Cambyses. It extols Cyrus as a benefactor of the citizens of Babylonia who improved their lives, repatriated displaced people and restored temples and cult sanctuaries across Mesopotamia and elsewhere in the region. It concludes with a description of how Cyrus repaired the city wall of Babylon and found a similar inscription placed there by an earlier king. The Cylinder's text has traditionally been seen by biblical scholars as corroborative evidence of Cyrus' policy of the repatriation of the Jewish people following their Babylonian captivity (an act that the Book of Ezra attributes to Cyrus), as the text refers to the restoration of cult sanctuaries and repatriation of deported peoples. This interpretation has been disputed, as the text identifies only Mesopotamian sanctuaries, and makes no mention of Jews, Jerusalem, or Judea. Nonetheless, it has been seen as a sign of Cyrus's relatively enlightened approach towards cultural and religious diversity. The former Director of the British Museum, Neil MacGregor, said that the cylinder was "the first attempt we know about running a society, a state with different nationalities and faithsa new kind of statecraft". In modern times, the Cylinder was adopted as a national symbol of Iran by the ruling Pahlavi dynasty, which put it on display in Tehran in 1971 to commemorate the 2,500-year celebration of the Persian Empire. Princess Ashraf Pahlavi presented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U Thant with a replica of the Cylinder. The princess asserted that "the heritage of Cyrus was the heritage of human understanding, tolerance, courage, compassion and, above all, human liberty". Her brother, Shah Mohammad Reza Pahlavi, promoted the Cylinder as a "charter of human rights", though this interpretation has been described by various historians as "rather anachronistic" and controversial. Discovery The Assyro-British archaeologist Hormuzd Rassam discovered the Cyrus Cylinder in March 1879 during a lengthy programme of excavations in Mesopotamia carried out for the British Museum. It had been placed as a foundation deposit in the foundations of the Ésagila, the city's main temple. Rassam's expedition followed on from an earlier dig carried out in 1850 by the British archaeologist Austen Henry Layard, who excavated three mounds in the same area but found little of importance. In 1877, Layard became Britain's ambassador to the Ottoman Empire, which ruled Mesopotamia at the time. He helped Rassam, who had been his assistant in the 1850 dig, to obtain a firman (decree) from the Ottoman Sultan Abdul Hamid II to continue the earlier excavations. The firman was only valid for a year but a second firman, with much more liberal terms, was issued in 1878. It was granted for two years (through to 15 October 1880) with the promise of an extension to 1882 if required. The Sultan's decree authorised Rassam to "pack and dispatch to England any antiquities [he] found ... provided, however, there were no duplicates". A representative of the Sultan was instructed to be present at the dig to examine the objects as they were uncovered. With permission secured, Rassam initiated a large-scale excavation at Babylon and other sites on behalf of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He undertook the excavations in four distinct phases. In between each phase, he returned to England to bring back his finds and raise more funds for further work. The Cyrus Cylinder was found on the second of his four expeditions to Mesopotamia, which began with his departure from London on 8 October 1878. He arrived in his home town of Mosul on 16 November and travelled down the Tigris to Baghdad, which he reached on 30 January 1879. During February and March, he supervised excavations on a number of Babylonian sites, including Babylon itself. He soon uncovered a number of important buildings including the Ésagila temple, a major shrine to the chief Babylonian god Marduk, although its identity was not fully confirmed until the German archaeologist Robert Koldewey's excavation of 1900. The excavators found a large number of business documents written on clay tablets buried in the temple's foundations where they discovered the Cyrus Cylinder. Rassam gave conflicting accounts of where his discoveries were made. He wrote in his memoirs, Asshur and the land of Nimrod, that the Cylinder had been found in a mound at the southern end of Babylon near the village of Jumjuma or Jimjima. However, in a letter sent on 20 November 1879 to Samuel Birch, the Keeper of Oriental Antiquities at the British Museum, he wrote, "The Cylinder of Cyrus was found at Omran [Tell Amran-ibn-Ali] with about six hundred pieces of inscribed terracottas before I left Baghdad." He left Baghdad on 2 April, returning to Mosul and departing from there on 2 May for a journey to London which lasted until 19 June. The discovery was announced to the public by Sir Henry Rawlinson, the President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at a meeting of the Society on 17 November 1879. He described it as "one of the most interesting historical records in the cuneiform character that has yet been brought to light", though he erroneously described it as coming from the ancient city of Borsippa rather than Babylon. Rawlinson's "Notes on a newly-discovered Clay Cylinder of Cyrus the Great" were published in the society's journal the following year, including the first partial translation of the text. Description The Cyrus Cylinder is a barrel-shaped cylinder of baked clay measuring by at its maximum diameter. It was created in several stages around a cone-shaped core of clay within which there are large grey stone inclusions. It was built up with extra layers of clay to give it a cylindrical shape before a fine surface slip of clay was added to the outer layer, on which the text is inscribed. It was excavated in several fragments, having apparently broken apart in antiquity. Today it exists in two main fragments, known as "A" and "B", which were reunited in 1972. The main body of the Cylinder, discovered by Rassam in 1879, is fragment "A". It underwent restoration in 1961, when it was re-fired and plaster filling was added. The smaller fragment, "B", is a section measuring by . The latter fragment was acquired by J.B. Nies of Yale University from an antiquities dealer. Nies published the text in 1920. The fragment was apparently broken off the main body of the Cylinder during the original excavations in 1879 and was either removed from the excavations or was retrieved from one of Rassam's waste dumps. It was not confirmed as part of the Cylinder until Paul-Richard Berger of the University of Münster definitively identified it in 1970. Yale University lent the fragment to the British Museum temporarily (but, in practice, indefinitely) in exchange for "a suitable cuneiform tablet" from the British Museum collection. Although the Cylinder clearly post-dates Cyrus the Great's conquest of Babylon in 539 BC, the date of its creation is unclear. It is commonly said to date to the early part of Cyrus's reign over Babylon, some time after 539 BC. The British Museum puts the Cylinder's date of origin at between 539 and 530 BC. Text The surviving inscription on the Cyrus Cylinder consists of 45 lines of text written in Akkadian cuneiform script. The first 35 lines are on fragment "A" and the remainder are on fragment "B". A number of lines at the start and end of the text are too badly damaged for more than a few words to be legible. The text is written in an extremely formulaic style that can be divided into six distinct parts: Lines 1–19: an introduction reviling Nabonidus, the previous king of Babylon, and associating Cyrus with the god Marduk; Lines 20–22: detailing Cyrus's royal titles and genealogy, and his peaceful entry to Babylon; Lines 22–34: a commendation of Cyrus's policy of restoring Babylon; Lines 34–35: a prayer to Marduk on behalf of Cyrus and his son Cambyses; Lines 36–37: a declaration that Cyrus has enabled the people to live in peace and has increased the offerings made to the gods; Lines 38–45: details of the building activities ordered by Cyrus in Babylon. The beginning of the text is partly broken; the surviving content reprimands the character of the deposed Babylonian king Nabonidus. It lists his alleged crimes, charging him with the desecration of the temples of the gods and the imposition of forced labor upon the populace. According to the proclamation, as a result of these offenses, the god Marduk abandoned Babylon and sought a more righteous king. Marduk called forth Cyrus to enter Babylon and become its new ruler. Midway through the text, the writer switches to a first-person narrative in the voice of Cyrus, addressing the reader directly. A list of his titles is given (in a Mesopotamian rather than Persian style): "I am Cyrus, king of the world, great king, powerful king, king of Babylon, king of Sumer and Akkad, king of the four quarters [of the earth], son of Cambyses, great king, king of Anshan, descendant of Teispes, great king, king of Anshan, the perpetual seed of kingship, whose reign Bel [Marduk] and Nebo love, and with whose kingship, to their joy, they concern themselves." He describes the pious deeds he performed after his conquest: he restored peace to Babylon and the other cities sacred to Marduk, freeing their inhabitants from their "yoke," and he "brought relief to their dilapidated housing (thus) putting an end to their (main) complaints". He repaired the ruined temples in the cities he conquered, restored their cults, and returned their sacred images as well as their former inhabitants which Nabonidus had taken to Babylon. Near the end of the inscription Cyrus highlights his restoration of Babylon's city wall, saying: "I saw within it an inscription of Ashurbanipal, a king who preceded me." The remainder is missing but presumably describes Cyrus's rededication of the gateway mentioned. A partial transcription by F. H. Weissbach in 1911 was supplanted by a much more complete transcription after the identification of the "B" fragment; this is now available in German and in English. Several editions of the full text of the Cyrus Cylinder are available online, incorporating both "A" and "B" fragments. A false translation of the textaffirming, among other things, the abolition of slavery and the right to self-determination, a minimum wage and asylumhas been promoted on the Internet and elsewhere. As well as making claims that are not found on the real cylinder, it refers to the Zoroastrian divinity Ahura Mazda rather than the Mesopotamian god Marduk. The false translation has been widely circulated; alluding to its claim that Cyrus supposedly has stated that "Every country shall decide for itself whether or not it wants my leadership." Iranian Nobel Peace Prize winner Shirin Ebadi in her acceptance speech described Cyrus as "the very emperor who proclaimed at the pinnacle of power 2,500 years ago that … he would not reign over the people if they did not wish it". Associated fragments The British Museum announced in January 2010 that two inscribed clay fragments, which had been in the museum's collection since 1881, had been identified as part of a cuneiform tablet that was inscribed with the same text as the Cyrus Cylinder. The fragments had come from the small site of Dailem near Babylon and the identification was made by Professor Wilfred Lambert, formerly of the University of Birmingham, and Irving Finkel, curator in charge of the museum's Department of the Middle East. Relation to a Chinese bone inscription In 1983 two fossilized horse bones inscribed with cuneiform signs surfaced in China which Professor Oliver Gurney at Oxford later identified as coming from the Cyrus Cylinder. The discovery of these objects aroused much discussion about possible connections between ancient Mesopotamia and China, although their authenticity was doubted by many scholars from the beginning and they are now generally regarded as forgeries. The history of the putative artifact goes back almost a century. The earliest record goes back to a Chinese doctor named Xue Shenwei, who sometime prior to 1928 was shown a photo of a rubbing of one of the bones by an antiquities dealer named Zhang Yi'an. Although not able to view the bones at that time, Xue Shenwei later acquired one of them from another antiquities dealer named Wang Dongting in 1935 and then the second via a personal connection named Ke Yanling around 1940. While Xue did not recognize the script on the bones he guessed at its antiquity and buried the bones for safekeeping during the Cultural Revolution. Then, in 1983 Xue presented the bones to the Palace Museum in Beijing where Liu Jiuan and Wang Nanfang of the State Administration of Cultural Heritage undertook their study. These officials identified the script as cuneiform and asked the Assyriologists Chi Yang and Wu Yuhong to work on the inscriptions. Identification of the source text proceeded slowly until 1985, when Wu Yuhong along with Oxford Assyriologist Stephanie Dalley and Oliver Gurney recognized the text in one bone as coming from the Cyrus Cylinder. One year later Wu Yuhong presented his findings at the 33rd Rencontre Assyriologique and published them in a journal article. After that the second bone inscription remained undeciphered until 2010, when Irving Finkel worked on it. In that same year the British Museum held a conference dedicated to the artifacts. Based on the serious textual errors in the inscription, including the omission of a large number of signs from the Cyrus Cylinder, Wu Yuhong argued the inscriptions were most likely copied from the cylinder while housed in the British Museum or from an early modern publication based upon it. However he acknowledged the remote possibility it was copied in late antiquity. Irving Finkel disputed this conclusion based on the relative obscurity of the Cyrus Cylinder until recent decades and the mismatch in paleography between the bone inscriptions and the hand copies found in early editions from the 1880s. Finally, after the workshop concluded, an 1884 edition of the Cyrus Cylinder by E. A. Wallis Budge came to Irving Finkel's attention. This publication used an idiosyncratic typeface and featured a handcopy for only a section of the whole cylinder. However the typeface in that edition matched the paleography on the bone inscriptions and the extract of the cylinder published in the book matched that of the bone as well. This convinced Finkel that the bone inscriptions were early modern forgeries and that has remained the majority opinion since then. Interpretations Mesopotamian and Persian tradition and propaganda According to the British Museum, the Cyrus Cylinder reflects a long tradition in Mesopotamia where, from as early as the third millennium BC, kings began their reigns with declarations of reforms. Cyrus's declaration stresses his legitimacy as the king, and is a conspicuous statement of his respect for the religious and political traditions of Babylon. The British Museum and scholars of the period describe it as an instrument of ancient Mesopotamian propaganda. The text is a royal building inscription, a genre which had no equivalent in Old Persian literature. It illustrates how Cyrus co-opted local traditions and symbols to legitimize his conquest and control of Babylon. Many elements of the text were drawn from long-standing Mesopotamian themes of legitimizing rule in Babylonia: the preceding king is reprimanded and he is proclaimed to have been abandoned by the gods for his wickedness; the new king has gained power through the divine will of the gods; the new king rights the wrongs of his predecessor, addressing the welfare of the people; the sanctuaries of the gods are rebuilt or restored, offerings to the gods are made or increased and the blessings of the gods are sought; and repairs are made to the whole city, in the manner of earlier rightful kings. Both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are emphasized in the text of the Cylinder. It asserts the virtue of Cyrus as a gods-fearing king of a traditional Mesopotamian type. On the other hand, it constantly discredits Nabonidus, reviling the deposed king's deeds and even his ancestry and portraying him as an impious destroyer of his own people. As Fowler and Hekster note, this "creates a problem for a monarch who chooses to buttress his claim to legitimacy by appropriating the 'symbolic capital' of his predecessors". The Cylinder's reprimand of Nabonidus also discredits Babylonian royal authority by association. It is perhaps for this reason that the Achaemenid rulers made greater use of Assyrian rather than Babylonian royal iconography and tradition in their declarations; the Cylinder refers to the Assyrian king Ashurbanipal as "my predecessor", rather than any native Babylonian ruler. The Cylinder itself is part of a continuous Mesopotamian tradition of depositing a wide variety of symbolic items, including animal sacrifices, stone tablets, terracotta cones, cylinders and figures. Newly crowned kings of Babylon would make public declarations of their own righteousness when beginning their reigns, often in the form of declarations that were deposited in the foundations of public buildings. Some contained messages, while others did not, and they had a number of purposes: elaboration of a building's value, commemoration of the ruler or builder and the magical sanctification of the building, through the invocation of divine protection. The cylinder was not intended to be seen again after its burial, but the text inscribed on it would have been used for public purposes. Archive copies were kept of important inscriptions and the Cylinder's text may likewise have been copied. In January 2010, the British Museum announced that two cuneiform tablets in its collection had been found to be inscribed with the same text as that on the Cyrus Cylinder, which, according to the museum, "show that the text of the Cylinder was probably a proclamation that was widely distributed across the Persian Empire". A statue of the cylinder is now on exhibit in Los Angeles on the Avenue of the Stars as a gift from the Persian people to the city of Los Angeles Similarities with other royal inscriptions The Cyrus Cylinder bears striking similarities to older Mesopotamian royal inscriptions. Two notable examples are the Cylinder of Marduk-apla-iddina II, who seized the Babylonian throne in 722/1 BC, and the annals of Sargon II of Assyria, who conquered Babylon twelve years later. As a conqueror, Marduk-apla-iddina faced many of the same problems of legitimacy that Cyrus did when he conquered Babylon. He declares himself to have been chosen personally by Marduk, who ensured his victory. When he took power, he performed the sacred rites and restored the sacred shrines. He states that he found a royal inscription placed in the temple foundations by an earlier Babylonian king, which he left undisturbed and honored. All of these claims also appear in Cyrus's Cylinder. Twelve years later, the Assyrian king Sargon II defeated and exiled Marduk-apla-iddina, taking up the kingship of Babylonia. Sargon's annals describe how he took on the duties of a Babylonian sovereign, honouring the gods, maintaining their temples and respecting and upholding the privileges of the urban elite. Again, Cyrus's Cylinder makes exactly the same points. Nabonidus, Cyrus's deposed predecessor as king of Babylon, commissioned foundation texts on clay cylinderssuch as the Cylinder of Nabonidus, also in the British Museumthat follows the same basic formula. The text of the Cylinder thus indicates a strong continuity with centuries of Babylonian tradition, as part of an established rhetoric advanced by conquerors. As Kuhrt puts it: The familiarity with long-established Babylonian tropes suggests that the Cylinder was authored by the Babylonian priests of Marduk, working at the behest of Cyrus. It can be compared with another work of around the same time, the Verse Account of Nabonidus, in which the former Babylonian ruler is excoriated as the enemy of the priests of Marduk and Cyrus is presented as the liberator of Babylon. Both works make a point of stressing Cyrus's qualifications as a king from a line of kings, in contrast to the non-royal ancestry of Nabonidus, who is described by the Cylinder as merely maţû, "insignificant". The Verse Account is so similar to the Cyrus Cylinder inscription that the two texts have been dubbed an example of "literary dependence"not the direct dependence of one upon the other, but mutual dependence upon a common source. This is characterised by the historian Morton Smith as "the propaganda put out in Babylonia by Cyrus's agents, shortly before Cyrus's conquest, to prepare the way of their lord". This viewpoint has been disputed; as Simon J. Sherwin of the University of Cambridge puts it, the Cyrus Cylinder and the Verse Account are "after the event" compositions which reuse existing Mesopotamian literary themes and do not need to be explained as the product of pre-conquest Persian propaganda. The German historian Hanspeter Schaudig has identified a line on the Cylinder ("He [i.e. Marduk] saved his city Babylon from its oppression") with a line from tablet VI of the Babylonian "Epic of Creation", Enûma Eliš, in which Marduk builds Babylon. Johannes Haubold suggests that reference represents Cyrus's takeover as a moment of ultimate restoration not just of political and religious institutions, but of the cosmic order underpinning the universe. Analysis of the Cyrus Cylinder's claims Vilification of Nabonidus The Cyrus Cylinder's vilification of Nabonidus is consistent with other Persian propaganda regarding the deposed king's rule. In contrast to the Cylinder's depiction of Nabonidus as an illegitimate ruler who ruined his country, the reign of Nabonidus was largely peaceful, he was recognised as a legitimate king and he undertook a variety of building projects and military campaigns commensurate with his claim to be "the king of Babylon, the universe, and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 Nabonidus as actually seen in Babylon The Assyriologist Paul-Alain Beaulieu has interpreted Nabonidus's exaltation of the moon god Sin as "an outright usurpation of Marduk's prerogatives by the moon god". Although the Babylonian king continued to make rich offerings to Marduk, his greater devotion to Sin was unacceptable to the Babylonian priestly elite. Nabonidus came from the unfashionable north of Babylonia, introduced foreign gods and went into a lengthy self-imposed exile which was said to have prevented the celebration of the vital New Year festival. Nabonidus as seen in the Harran Stela, contrasted with the Cyrus Cylinder The Harran Stela is generally acknowledged as a genuine document commissioned by Nabonidus. In it, Nabonidus seeks to glorify his own accomplishments, notably his restoration of the Elhulhul Temple, which was devoted to the moon-god Sin. In this regard, the Harran Stela verifies the picture that is dwelt on in the Cyrus Cylinder, that Nabonidus had largely abandoned the homage due to Marduk, chief god of Babylon, in favor of the worship of Sin. Since his mother Addagoppe was apparently a priestess of Sin, or at least a lifelong devotee, this helps explain the unwise political decision regarding Marduk on the part of Nabonidus, a decision that Cyrus takes great advantage of in the Cyrus Cylinder. His mother was also a resident of Harran, which affords another reason why Nabonidus moved there in the third year of his reign (553 BC), at which time he “entrusted the “Camp” to his oldest (son) [Belshazzar], the first-born . . . He let (everything) go, entrusted the kingship to him.” In at least one respect, however, the Harran Stela is incongruous with the portrayal of events in the Cyrus Cylinder. In the Stela, Nabonidus lists the enemies of Babylon as “the king of Egypt, the Medes and the land of the Arabs, all the hostile kings.” The significance of this lies in the date the Stela was composed: According to Paul-Alain Beaulieu, its composition dates to the latter part of the reign of Nabonidus, probably the fourteenth or fifteenth year, i.e. 542–540 BC. The problem with this is that, according to the current consensus view, based largely on the Cyrus Cylinder and later Persian documents that followed in its genre, the Persians should have been named here as a major enemy of Babylon at a time three years or less before the fall of the city to the forces under Cyrus. Nabonidus, however, names the Medes, not the Persians, as a main enemy; as king of the realm he would certainly know who his enemies were. By naming the Medes instead of the Persians, the Harran Stela is more in conformity with the narration of events in Xenophon's Cyropaedia, where Cyrus and the Persians were under the de jure suzerainty of the Medes until shortly after the fall of Babylon, at which time Cyrus, king of Persia, became king of the Medes as well. A further discussion of the relationship of the Harran Stela (=Babylonian propaganda) to the Cyrus Cylinder (=Persian propaganda) is found on the Harran Stela page, including a discussion of why the Cyrus Cylinder and later Persian texts never name Belshazzar, despite his close association with events associated with the fall of Babylon, as related both in the Bible (Daniel, chapter 5) and in Xenophon's Cyropaedia. Conquest and local support Cyrus's conquest of Babylonia was resisted by Nabonidus and his supporters, as the Battle of Opis demonstrated. Iranologist Pierre Briant comments that "it is doubtful that even before the fall of [Babylon] Cyrus was impatiently awaited by a population desperate for a 'liberator'." However, Cyrus's takeover as king does appear to have been welcomed by some of the Babylonian population. The Judaic historian Lisbeth S. Fried says that there is little evidence that the high-ranking priests of Babylonia during the Achaemenid period were Persians and characterises them as Babylonian collaborators. The text presents Cyrus as entering Babylon peacefully and being welcomed by the population as a liberator. This presents an implicit contrast with previous conquerors, notably the Assyrian rulers Tukulti-Ninurta I, who invaded and plundered Babylon in the 12th century BC, and Sennacherib, who did the same thing 150 years before Cyrus conquered the region. The massacre and enslavement of conquered people was common practice and was explicitly highlighted by conquerors in victory statements. The Cyrus Cylinder presents a very different message; Johannes Haubold notes that it portrays Cyrus's takeover as a harmonious moment of convergence between Babylonian and Persian history, not a natural disaster but the salvation of Babylonia. However, the Cylinder's account of Cyrus's conquest clearly does not tell the whole story, as it suppresses any mention of the earlier conflict between the Persians and the Babylonians; Max Mallowan describes it as a "skilled work of tendentious history". The text omits the Battle of Opis, in which Cyrus's forces defeated and apparently massacred Nabonidus's army. Nor does it explain a two-week gap reported by the Nabonidus Chronicle between the Persian entry into Babylon and the surrender of the Esagila temple. Lisbeth S. Fried suggests that there may have been a siege or stand-off between the Persians and the temple's defenders and priests, about whose fate the Cylinder and Chronicle makes no mention. She speculates that they were killed or expelled by the Persians and replaced by more pro-Persian members of the Babylonian priestly elite. As Walton and Hill put it, the claim of a wholly peaceful takeover acclaimed by the people is "standard conqueror's rhetoric and may obscure other facts". Describing the claim of one's own armies being welcomed as liberators as "one of the great imperial fantasies", Bruce Lincoln, Professor of Divinity at the University of Chicago, notes that the Babylonian population repeatedly revolted against Persian rule in 522 BC, 521 BC, 484 BC and 482 BC (though not against Cyrus or his son Cambeses). The rebels sought to restore national independence and the line of native Babylonian kingsperhaps an indication that they were not as favourably disposed towards the Persians as the Cylinder suggests. Restoration of temples The inscription goes on to describe Cyrus returning to their original sanctuaries the statues of the gods that Nabonidus had brought to the city before the Persian invasion. This restored the normal cultic order to the satisfaction of the priesthood. It alludes to temples being restored and deported groups being returned to their homelands but does not imply an empire-wide programme of restoration. Instead, it refers to specific areas in the border region between Babylonia and Persia, including sites that had been devastated by earlier Babylonian military campaigns. The Cylinder indicates that Cyrus sought to acquire the loyalty of the ravaged regions by funding reconstruction, the return of temple properties and the repatriation of the displaced populations. However, it is unclear how much actually changed on the ground; there is no archaeological evidence for any rebuilding or repairing of Mesopotamian temples during Cyrus's reign. Internal policy The Persians' policy towards their subject people, as described by the Cylinder, was traditionally viewed as an expression of tolerance, moderation and generosity "on a scale previously unknown". The policies of Cyrus toward subjugated nations have been contrasted to those of the Assyrians and Babylonians, who had treated subject peoples harshly; he permitted the resettling of those who had been previously deported and sponsored the reconstruction of religious buildings. Cyrus was often depicted positively in Western tradition by sources such as the Old Testament of the Bible and the Greek writers Herodotus and Xenophon. The Cyropaedia of Xenophon was particularly influential during the Renaissance when Cyrus was romanticised as an exemplary model of a virtuous and successful ruler. Modern historians argue that while Cyrus's behavior was indeed conciliatory, it was driven by the needs of the Persian Empire, and was not an expression of personal tolerance per se. The empire was too large to be centrally directed; Cyrus followed a policy of using existing territorial units to implement a decentralized system of government. The magnanimity shown by Cyrus won him praise and gratitude from those he spared. The policy of toleration described by the Cylinder was thus, as biblical historian Rainer Albertz puts it, "an expression of conservative support for local regions to serve the political interests of the whole [empire]". Another biblical historian, Alberto Soggin, comments that it was more "a matter of practicality and economy … [as] it was simpler, and indeed cost less, to obtain the spontaneous collaboration of their subjects at a local level than to have to impose their sovereignty by force". Differences between the Cyrus Cylinder and previous Babylonian and Assyrian cylinders There are scholars who agree that the Cyrus Cylinder demonstrates a break from past traditions, and the ushering in of a new era. A comparison of the Cyrus Cylinder with the inscriptions of previous conquerors of Babylon highlights this sharply. For instance, when Sennacherib, king of Assyria(705-681 BC) captured the city in 690 BC after a 15-month siege, Babylon endured a dreadful destruction and massacre. Sennacharib describes how, having captured the King of Babylon, he had him tied up in the middle of the city like a pig. Then he describes how he destroyed Babylon, and filled the city with corpses, looted its wealth, broke its gods, burned and destroyed its houses down to foundations, demolished its walls and temples and dumped them in the canals. This is in stark contrast to Cyrus the Great and the Cyrus Cylinder. The past Assyrian, and Babylonian tradition of victor's justice was a common treatment for a defeated people at this time. Sennacherib's tone for instance, reflected his relish of and pride in massacre and destruction, which is totally at odds with the message of the Cyrus Cylinder. Another difference between the previously mentioned texts and the Cyrus Cylinder is that no other king ever returned captives to their homes as Cyrus did. The Assyrians sometimes gave limited religious freedom to local cults and the people they conquered, but after a military conquest, the conquered people usually had to submit to the 'exalted might' of the Assyrian god Ashur; their own shrines and gods were demolished and people put under 'the yoke of Ashur.' Even Babylon itself did not show tolerance towards other beliefs and cults, for it had destroyed the temple of Jerusalem as well as the temple in Harran; furthermore, Nabonidus took other gods from their sacred shrines, and carried them to Babylon. This clearly shows that the Cyrus Cylinder was not a typical declaration that was keeping with the old traditions of the past. However, Sennacherib's destruction of Babylon can not be taken as the norm, and solely judging from Sennacherib’s own inscriptions, the destruction was already bad by Neo-Assyrian standards. The destruction of cult statues has precedence in the Ancient Near East, such as Lugalzagesi claiming to have plundered the shrines and destroyed the cult statues of his enemy state Lagash, but the destruction of cult statues was the more severe and extreme treatment. Nabonidus likely gathered cult statues to Babylon to prepare for an incoming Persian attack, and this tradition has precedence with Merodach-Baladan who also brought the statues to Dur-Yakin to keep them from the Assyrians, and some Babylonian cities also sent their statues to Babylon in 626 BCE in light of Sin-shar-ishkun's advance. Other scholars disagree with the view that Cyrus had a policy of religious tolerance, which stood in contrast to the Assyrians and Babylonians. This assumes a religious discourse that compelled the ancients to suppress the worship of other gods, but no such discourse existed. Reverence for the gods of Assyria did not prevent the existence of local cults, for example Sargon after his conquest of the Harhar region reconstructed the local temples and returned the statues of the gods. In treaties conducted with vassals, local gods were invoked alongside Assyrian gods in the oath treaties in the curse sections, indicating that the presence of the gods of both parties were required for the oath and the oath treaties never carried a stipulation on the worship of Assyrian gods or the hindrance of worship on local gods. Similar to Achaemenid ideology, the acceptance of the power of the Assyrian king was synonymous to the acceptance of the power of their god, particularly Assur, but worship of the Assyrian gods were not forcibly imposed and recognition of Assyrian power entails the recognition of the superior strength of their gods. The return of divine statues and people, commonly seen as a special Achaemenid policy, was also attested in Assyrian sources. Esarhaddon, after repairing the statues of the Arabian gods and engraving an inscription to serve as remembrance of Assyria's power, returned the statues on Hazail's request. accounts on returning statues are also found in the epithets of Esarhaddon. Adad-nirari III claims to have brought back abducted people, and Esarhaddon brought back Babylonians who had been displaced following Sennacherib’s destruction of the city to the reconstructed Babylon. Briant summarizes that this view that Cyrus was exceptional only arises if one only takes into account Jewish sources, and the idea disappears if placed in the context of the Ancient Near East. Biblical interpretations The Bible records that some Jews (who were exiled by the Babylonians), returned to their homeland from Babylon, where they had been settled by Nebuchadnezzar, to rebuild the temple following an edict from Cyrus. The Book of Ezra (1–4:5) provides a narrative account of the rebuilding project. Scholars have linked one particular passage from the Cylinder to the Old Testament account: This passage has often been interpreted as a reference to the benign policy instituted by Cyrus of allowing exiled peoples, such as the Jews, to return to their original homelands. The Cylinder's inscription has been linked with the reproduction in the Book of Ezra of two texts that are claimed to be edicts issued by Cyrus concerning the repatriation of the Jews and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in Jerusalem. The two edicts (one in Hebrew and one in Aramaic) are substantially different in content and tone, leading some historians to argue that one or both may be a post hoc fabrication. The question of their authenticity remains unresolved, though it is widely believed that they do reflect some sort of Persian royal policy, albeit perhaps not one that was couched in the terms given in the text of the biblical edicts. The dispute over the authenticity of the biblical edicts has prompted interest in this passage from the Cyrus Cylinder, specifically concerning the question of whether it indicates that Cyrus had a general policy of repatriating subject peoples and restoring their sanctuaries. The text of the Cylinder is very specific, listing places in Mesopotamia and the neighboring regions. It does not describe any general release or return of exiled communities but focuses on the return of Babylonian deities to their own home cities. It emphasises the re-establishment of local religious norms, reversing the alleged neglect of Nabonidus – a theme that Amélie Kuhrt describes as "a literary device used to underline the piety of Cyrus as opposed to the blasphemy of Nabonidus". She suggests that Cyrus had simply adopted a policy used by earlier Assyrian rulers of giving privileges to cities in key strategic or politically sensitive regions and that there was no general policy as such. Lester L. Grabbe, a historian of early Judaism, has written that "the religious policy of the Persians was not that different from the basic practice of the Assyrians and Babylonians before them" in tolerating – but not promoting – local cults, other than their own gods. Cyrus may have seen Jerusalem, situated in a strategic location between Mesopotamia and Egypt, as worth patronising for political reasons. His Achaemenid successors generally supported indigenous cults in subject territories and thereby curried favour with the cults' devotees. Conversely, Persian kings might destroy the shrines of peoples who had rebelled against them, as happened at Miletos in 494 BC following the Ionian Revolt. The Cylinder's text does not describe any general policy of a return of exiles or mention any sanctuary outside Babylonia therein supporting Peter Ross Bedford's argument that the Cylinder is "not a manifesto for a general policy regarding indigenous cults and their worshippers throughout the empire". Amélie Kuhrt notes that "the purely Babylonian context of the Cylinder provides no proof" that Cyrus gave attention to the Jewish exiles or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in Jerusalem and biblical historian Bob Becking concludes that "it has nothing to do with Judeans, Jews or Jerusalem". Becking also points to the lack of reference to the Jews in surviving Achaemenid texts as an indication that they were not considered of any particular importance. The German scholar Josef Wiesehöfer summarizes the widely held traditional view by noting that "Many scholars have read into [... the text of Cylinder] a confirmation of the Old Testament passages about the steps taken by Cyrus towards the erection of the Jerusalem temple and the repatriation of the Judaeans" and that this interpretation undergirded a belief "that the instructions to this effect were actually provided in these very formulations of the Cyrus Cylinder". Human rights The Cylinder gained new prominence in the late 1960s when the last Shah of Iran called it "the world's first charter of human rights". The cylinder was a key symbol of the Shah's political ideology and is still regarded by some commentators as a charter of human rights, despite the disagreement of some historians and scholars. Pahlavi Iranian government's view The Cyrus Cylinder was dubbed the "first declaration of human rights" by the pre-Revolution Iranian government, a reading prominently advanced by Shah Mohammed Reza Pahlavi, in a 1967 book, The White Revolution of Iran. The Shah identified Cyrus as a key figure in government ideology and associated his government with the Achaemenids. He wrote that "the history of our empire began with the famous declaration of Cyrus, which, for its advocacy of humane principles, justice and liberty, must be considered one of the most remarkable documents in the history of mankind." The Shah described Cyrus as the first ruler in history to give his subjects "freedom of opinion and other basic rights". In 1968, the Shah opened the first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Human Rights in Tehran by saying that the Cyrus Cylinder was the precursor to the modern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In his 1971 Nowruz (New Year) speech, the Shah declared that 1350 AP (1971–1972) would be Cyrus the Great Year, during which a grand commemoration would be held to celebrate 2,500 years of Persian monarchy. It would serve as a showcase for a modern Iran in which the contributions that Iran had made to world civilization would be recognized. The main theme of the commemoration was the centrality of the monarchy within Iran's political system, associating the Shah of Iran with the famous monarchs of Persia's past, and with Cyrus in particular. The Shah looked to the Achaemenid period as "a moment from the national past that could best serve as a model and a slogan for the imperial society he hoped to create". The Cyrus Cylinder was adopted as the symbol for the commemoration, and Iranian magazines and journals published numerous articles about ancient Persian history. The British Museum loaned the original Cylinder to the Iranian government for the duration of the festivities; it was put on display at the Shahyad Monument (now the Azadi Tower) in Tehran. The 2,500 year celebrations commenced on October 12, 1971, and culminated a week later with a spectacular parade at the tomb of Cyrus in Pasargadae. On October 14, the shah's sister, Princess Ashraf Pahlavi, presented the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U Thant with a replica of the Cylinder. The princess asserted that "the heritage of Cyrus was the heritage of human understanding, tolerance, courage, compassion and, above all, human liberty". The Secretary General accepted the gift, linking the Cylinder with the efforts of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to address "the question of Respect for Human Rights in Armed Conflict". Since then the replica Cylinder has been kept at the United Nations Headquarters in New York City on the second floor hallway. The United Nations continues to promote the cylinder as "an ancient declaration of human rights". Reception in the Islamic Republic In September 2010, former Iranian president Mahmoud Ahmadinejad officially opened the Cyrus Cylinder exhibition at the National Museum of Iran. After the Pahlavi era, it was the second time the cylinder was brought to Iran. It was also its longest-running exhibition inside the country. Ahmadinejad considers the Cyrus Cylinder as the incarnation of human values and a cultural heritage for all humanity, and called it the "First Charter of Human Rights". The British Museum had loaned the Cyrus Cylinder to the National Museum of Iran for four months. Some Iranian politicians such as MP Ali Motahari criticized Ahmadinejad for bringing the Cyrus Cylinder to Iran, although Tehran daily Kayhan, viewed as an ultra-conservative newspaper, had opined that the Islamic Republic should never have returned the Cyrus Cylinder to Britain (note that the cylinder was not discovered in Iran, but in present-day Iraq): At the time, the Curator of the National Museum of Iran, Azadeh Ardakani, reported approximately 48,000 visitors to the Cylinder exhibition, amongst whom over 2000 were foreigners, including foreign ambassadors. Scholarly views The interpretation of the Cylinder as a "charter of human rights" has been described by various historians as "rather anachronistic" and tendentious. It has been dismissed as a "misunderstanding" and characterized as political propaganda devised by the Pahlavi regime. The German historian Josef Wiesehöfer comments that the portrayal of Cyrus as a champion of human rights is as illusory as the image of the "humane and enlightened Shah of Persia". D. Fairchild Ruggles and Helaine Silverman describe the Shah's aim as being to legitimise the Iranian nation and his own regime, and to counter the growing influence of Islamic fundamentalism by creating an alternative narrative rooted in the ancient Persian past. Writing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Shah's anniversary commemorations, the British Museum's C.B.F. Walker comments that the "essential character of the Cyrus Cylinder [is not] a gener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or religious toleration but simply a building inscription, in the Babylonian and Assyrian tradition, commemorating Cyrus's restoration of the city of Babylon and the worship of Marduk previously neglected by Nabonidus". Two professors specialising in the history of the ancient Near East, Bill T. Arnold and Piotr Michalowski, comment: "Generically, it belongs with other foundation deposit inscriptions; it is not an edict of any kind, nor does it provide any unusual human rights declaration as is sometimes claimed." Lloyd Llewellyn-Jones of the University of Edinburgh notes that "there is nothing in the text" that suggests the concept of human rights. Neil MacGregor comments: He cautions that while the Cylinder is "clearly linked with the history of Iran," it is "in no real sense an Iranian document: it is part of a much larger history of the ancient Near East, of Mesopotamian kingship, and of the Jewish diaspora". In a similar vein, Qamar Adamjee of the Asian Art Museum describes it as a "very traditional kingship document" and cautions that "it's anachronistic to use 20th century terms to describe events that happened two thousand five hundred years ago." Non-specialist writers on human rights have supported the interpretation of the Cyrus Cylinder as a human rights charter. W.J. Talbott, an American philosopher, believes the concept of human rights is a 20th-century concept but describes Cyrus as "perhaps the earliest known advocate of religious tolerance" and suggests that "ideas that led to the development of human rights are not limited to one cultural tradition." The Iranian lawyer Hirad Abtahi argues that viewing the Cylinder as merely "an instrument of legitimizing royal rule" is unjustified, as Cyrus issued the document and granted those rights when he was at the height of his power, with neither popular opposition nor visible external threat to force his hand. Exhibition history The Cyrus Cylinder has been displayed in the British Museum since its formal acquisition in 1880. It has been loaned four timestwice to Iran, between 7–22 October 1971 in conjunction with the 2,500 year celebration of the Persian Empire and again from September–December 2010, once to Spain from March–June 2006, and once to the United States in a traveling exhibition from March–October 2013. Many replicas have been made. Some were distributed by the Shah following the 1971 commemorations, while the British Museum and National Museum of Iran have sold them commercially. The British Museum's ownership of the Cyrus Cylinder has been the cause of some controversy in Iran, although the artifact was obtained legally and was not excavated on Iranian soil but on former Ottoman territory (modern Iraq). When it was loaned in 1971, the Iranian press campaigned for its transfer to Iranian ownership. The Cylinder was brought back to London without difficulty, but the British Museum's Board of Trustees subsequently decided that it would be "undesirable to make a further loan of the Cylinder to Iran." In 2005–2006 the British Museum mounted a major exhibition on the Persian Empire, Forgotten Empire: the World of Ancient Persia. It was held in collaboration with the Iranian government, which loaned the British Museum a number of iconic artefacts in exchange for an undertaking that the Cyrus Cylinder would be loaned to the National Museum of Iran in return. The planned loan of the Cylinder was postponed in October 2009 following the June 2009 Iranian presidential election so that the British Museum could be "assured that the situation in the country was suitable". In response, the Iranian government threatened to end cooperation with the British Museum if the Cylinder was not loaned within the following two months. This deadline was postponed despite appeals by the Iranian government but the Cylinder did eventually go on display in Tehran in September 2010 for a four-month period. The exhibition was very popular, attracting 48,000 people within the first ten days and about 500,000 people by the time it closed in January 2011. However, at its opening, Iranian president Mahmoud Ahmadinejad mingled Islamic Republican and ancient Persian symbology, which commentators inside and outside Iran criticised as an overt appeal to religious nationalism. On November 28, 2012, the BBC announced the first United States tour of the Cylinder. Under the headline "British Museum lends ancient 'bill of rights' cylinder to US", Museum director Neil MacGregor declared that "The cylinder, often referred to as the first bill of human rights, 'must be shared as widely as possible'". The British Museum itself announced the news in its press release, saying "'First declaration of human rights' to tour five cities in the United States". According to the British Museum's website for the Cylinder's US exhibition "CyrusCylinder2013.com", the tour started in March 2013 and included Washington D.C.'s Smithsonian's Arthur M. Sackler Gallery, the Museum of Fine Arts in Housto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n New York, the Asian Art Museum in San Francisco and culminated at the J. Paul Getty Museum in Los Angeles, in October 2013. The cylinder, along with thirty two other associated objects from the British Museum collection, including a pair of gold armlets from the Oxus Treasure and the Darius Seal, were part of an exhibition titled 'The Cyrus Cylinder and Ancient Persia – A New Beginning' at the Prince of Wales Museum in Mumbai, India, from December 21, 2013, to February 25, 2014. It was organised by the British Museum and the Prince of Wales Museum in partnership with Sir Dorabji Tata Trust, Sir Ratan Tata Trust and Navajbai Ratan Tata Trust, all set up by luminaries from the Parsi community, who are descendants of Persian Zoroastrians, who hold Cyrus in great regard, as many scholars consider him as a follower of Zoroastrianism. The Freedom Sculpture The Freedom Sculpture or Freedom: A Shared Dream () is a 2017 stainless steel public art sculpture by artist and architect Cecil Balmond, located in Century City, California, and modeled on the Cyrus Cylinder. See also Behistun inscriptions Persepolis Fortification Archive Cyrus's edict Notes and references Further reading Books and journals Media articles Other sources Editions and translations Rawlinson, H.C., & Th. G. Pinches, A Selection from the Miscellaneous Inscriptions of Assyria and Babylonia (1884, 1909 London: fragment A only). Rogers, Robert William: Cuneiform Parallels to the Old Testament (1912), New York, Eaton & Mains (Online : fragment A only). Pritchard, James B.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ANET) (1950, 1955, 1969). Translation by A. L. Oppenheim. (fragment A and B). P.-R. Berger, "Der Kyros-Zylinder mit dem Zusatzfragment BIN II Nr.32 und die akkidischen Personennamen im Danielbuch" in Zeitschrift für Assyriologie 65 (1975) 192–234 Brosius, Maria (ed.): The Persian Empire from Cyrus II to Artaxerxes I (2000), London Association of Classical Teachers (LACT) 16, London. Text adapted from . English translation adapted from Cogan's translation in . Earlier version dated to 13 September 2010. External links British Museum description including translation by Irving Finkel Neil MacGregor, Director of the British Museum, traces 2600 years of Middle Eastern history through this single object. The Cyrus Cylinder at World History Encyclopedia High-resolution photographs from Livius.org 6th-century BC inscriptions 1879 archaeological discoveries Akkadian inscriptions Ancient Near and Middle East clay objects Archaeology of the Achaemenid Empire Art and cultural repatriation Cyrus the Great History of human rights Middle Eastern objects in the British Museum Nabonidus Return to Zion 1879 in the Ottoman Empire Archaeological discoveries in Iraq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D%82%A4%20%EB%B2%A0%EC%B8%A0
무키 베츠
마커스 린 "무키" 베츠(Markus Lynn "Mookie" Betts, 1992년 10월 7일 ~ )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위하여 우익수를 맡고 있다. 그는 이전에 보스턴 레드삭스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2018년 레드삭스와 활약 동안 그는 MVP, 실버 슬러거 상, 골드 글러브 상, 타구 타이틀과 월드 시리즈를 같은 시즌에 수상하는 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첫 선수가 되었다. 베츠는 2011년 레드삭스에 의하여 드래프트되었으며, 2014년 시즌에 자신의 메이저 리그 데뷔를 하여 2루수와 외야수 사이에 시간을 갈라놓았다. 그는 2016년 우익수로 옮기기 전에 2014년 레드삭스의 중견수가 되었다. 공을 풀히트 칠때 높은 접촉률과 높은 생산 수준과 함께 비교적 짧은 타고난 2루수로서 베츠는 전 레드삭스 동료 더스틴 페드로이아와 비교되어 왔다. 베츠는 또한 프로 볼링 협회의 프로 볼링 선수이다. 그는 볼링 월드 시리즈에서 퍼펙트 게임을 굴렸다. 그는 서식스 공작부인 메건의 먼 사촌이다. 고등학교 경력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태어난 베츠는 2010년 존 오버턴 고등학교에서 자신의 주니어 해에 24개의 도루와 함께 .548 점을 타구하였다. 그해 11월 베츠는 야구 장학금에 테네시 대학교에 수학하는 데 약정 서한을 서명하였고, 또한 밴더빌트 대학교,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와 앨라배마 대학교 버밍햄에 의하여 모집되었다. 오버턴에서 베츠는 또한 뛰어난 야구 선수였으며 한 경기에 14.1 점, 9개의 보살, 4개의 리바운드와 3개의 도루를 평균한 동안 자신의 시니어 시즌에 디스트릭트 12 - AAA 리그의 MVP로 임명되었고, 또한 내슈빌 메트로폴리탄 지역을 위하여 클래스 AAA "올해의 올시티 선수"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베츠는 또한 볼링에서도 우수하여 290의 높은 득점과 함께 2010년 "올해의 테네시주 소년 볼링 선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도널슨에 있는 도널슨 스트라이크 앤드 스퀘어에서 볼링을 하면서 자라왔다. 프로 경력 드래프트와 마이너 리그 경력 보스턴 레드삭스는 2루수로서 172번째의 전반적인 선택과 함께 201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의 5번째 라운드에서 베츠를 선발하였다. 오래 끌어진 협상들이 있던 후, 베츠는 그 후에 테네시 대학교로 그의 약속을 철회하여 레드삭스 조직과 함께 7십 5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그해 베츠는 루키 걸프 코스트 리그의 GCL 레드삭스를 위하여 한 경기를 활약하여 4개의 타수에 2개의 안타를 얻었다. 2012년 그는 짧은 시즌 뉴욕 펜 리그의 로웰 스피너스를 위하여 71개의 경기에서 .267 점을 타구하고 20개의 도루를 얻었다. 그는 정규적으로 유격수로 활약하였으나 2루수에서 더욱 편안해 보였다. 베츠는 로우 A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의 그린빌 드라이브와 함께 2013년 시즌을 시작하였다. 76개의 경기에서 베츠는 19개 경기의 연속 타격과 함께 .296 점을 타구하여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 올스타 경기로 선발되었다. 7월 9일 베츠는 하이 A 캐롤라이나 리그의 세일럼 레드삭스로 승진되어 15개의 홈런과 38개의 도루와 함께 그린빌과 세일럼 사이에 127개의 경기에서 합쳐진 .314 평균과 함께 2013년 시즌을 완료하는 데 51개의 경기에서 .341 점을 타구하였다. 베츠는 보스턴의 마이너 리그 시스템에서 "올해의 공격적 선수"와 "올해의 탈주 선수"로 임명되어 자신의 .314 타구 평균이 알렉스 하산 (.338)과 개린 치키니 (.322)의 뒤로 자신을 3위로 들어오게 한 동안 .506의 장타율과 함께 전체의 레드삭스 마이너 리그 선수들을 지도하였다. 베츠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위한 내야수 마커스 세미엔에게 간 2루수를 위한 퍼스트 팀 선발과 함께 2013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마이너 리그 올스타 팀에 세컨트 팀의 포함에 있었다. 그는 그 후에 애리조나 폴 리그의 서프라이즈 새과로스를 위하여 16개의 경기를 활약하여 .271 점을 타구하였다. 베츠는 더블 A 이스턴 리그의 포틀랜드 시독스와 함께 2014년 시즌을 열어 6월 2일을 통하여 이스턴 리그를 이끄는 데 54개의 경기에서 .355 점을 타구하였다. 6월 3일 베츠는 트리플 A 인터내셔널 리그의 포터킷 레드삭스로 승진되어 팀과 함께 전체의 23개 경기에서 .322 점을 타구하고 본루에 도달하였다. 2013년과 2014년 베츠는 66개의 연속적 정규 시즌 경기에 71개 경기의 합쳐진 연속을 위한 3개의 플레이오프 경기를 추가로 본루에 도달하였다. 공식적인 야구의 연속 기록이 플레이오프 경기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베츠의 연속은 66개의 경기에 나열되어 왔으며, 케빈 밀라와 케빈 유킬리스는 1997년에 대비하여 통계치에 마이너 리그 야구 데이터 부족과 함께 71개의 경기에 본루에 도달한 연속적 경기를 위하여 공식적 마이너 리그 기록을 보유한다. 2014년 5월 중순 이래 베츠는 2루수에 추가로 외야수를 활약하였다. 2013년 4회의 올스타 2루수 더스틴 페드로이아는 레드삭스와 함께 8년, 1억 1천만 달러 계약을 맺어 레드삭스가 새로운 위치를 위하여 베츠를 훈련시킬 사색으로 이끌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2014년 2014년 6월 28일 베츠는 보스턴 레드삭스로 승진되었다. 그는 이전에 올스타 퓨처스 게임을 위하여 선발되었으나 메이저 리그로 자신의 승진에 이어 대체되었다. 베츠는 6월 29일 자신의 메이저 리그 데뷔를 하여 4번째 이닝에서 뉴욕 양키스의 출발 선수 체이스 휘틀리에 자신의 첫 메이저 리그 안타를 기록하였다. 그는 7월 2일 시카고 컵스의 카를로스 비야누에바에 자신의 첫 홈런을 쳤다. 그러고나서 그는 셰인 빅토리노가 장애자 명단으로부터 활동적이 되었을 때 7월 19일 트리플 A 포터킷으로 선택되었고, 8월 1일 보스턴으로 재소집되었다. 그는 다시 포터킷으로 선택되었다가 8월 18일 다시 소집되었다. 8월 29일 베츠는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레드삭스의 승리에 탬파베이 레이스의 크리스 아처에 자신의 첫 경력 그랜드슬램을 쳤다. 21세의 나이에 베츠는 49년의 세월에 그랜드슬램을 치는 데 최연소 레드삭스 선수가 되었다. 베츠는 2014년 시즌의 대부분을 외야수에서 활약하면서 보냈으나 9월 1일 존 패럴 감독은 2루수들 페드로이아와 브록 홀트에게 부상들에 이어 베츠가 "상당히 규칙적으로" 2루수를 활약할 것을 공고하였다. 베츠는 2014년 시즌을 AA, AAA와 메이저 리그 사이에 균등하게 분할하여 52개의 메이저 리그 경기를 활약하였다. 그는 레드삭스를 위하여 잘 하여 5개의 홈런과 함께 .291 점을 타구하였고, 중견수에서 자신의 이닝의 절반에 활약하였다. 2015년 2015년 4월 6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레드삭스를 위한 오프닝 데이에서 그는 자신의 두번째 타석에 홈런을 쳐 레드삭스를 위한 오프닝 데이에 홈런을 치는 데 3번째로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4월 13일 워싱턴 내셔널스를 상대로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홈 오픈 경기에서 베츠는 틀림없이 자신 경력의 가장 신나는 상연을 가졌다. 그는 첫 3개의 이닝에 전부에서 브라이스 하퍼의 홈런을 훔치고, 하나의 활약에 2개의 도루를 가져 몬스터 의석들로 들어가는 홈런을 쳤다. 6월 21일 한주의 종말을 위하여 베츠는 "이번주의 아메리칸 리그 선수"로 임명되었다. 그 주안에 베츠는 2개의 홈런, 2개의 3루타, 3개의 2루타, 7개의 타점과 8개의 득점과 함께 .581 점 (18 루 31 타)을 타구하였다. 그는 그 주에 타구 평균, 안타, 출루율 (.594), 총루 (31)와 장타율 (1.000)에서 아메리칸 리그를 이끌었다. 시즌의 후반기에 그는 어쩌다 우익수에서 보내며 중견수에 차지하는 데 동료 선수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를 허용하는 데 자신이 거기로 영구적으로 옮길 사색으로 이끌었다. 베츠는 .291의 타구 평균, 92개의 매긴 득점, 77개의 타점, 18개의 홈런과 21개의 도루와 함께 2015녀 시즌을 끝냈다. 2016년 베츠는 자신 경력의 처음으로 2016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 게임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우익수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1루타와 타점과 함께 1 루 2 타였다. 베츠는 23개의 경기에서 5개의 홈런, 15개의 타점, 5개의 도루와 1.068의 OPS와 함께 .368 점 (35 루 95 타)를 타구했을 때 7월을 위하여 "이번달의 아메리칸 리그 선수"로 임명되었다. 9월 20일 그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동안 200개의 안타에 도달하는 데 첫 선수가 되었다. 활약한 158개의 경기에서 베츠는 .318의 타구 평균, 214개의 안타, 122개의 매긴 득점, 42개의 2루타, 31개의 홈런, 113개의 타점과 메이저 리그를 이그는 359개의 총루와 함께 시즌을 끝냈다. 그의 67개의 다수 안타 경기도 또한 메이저 리그를 이끌었다. 그는 또한 파워 스피드 넘버 (28.3)에서 리그에서 2위였다. 레드삭스와 함께 시즌을 93 승 69 패로 끝내면서 팀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 디비전에 결말을 지었으나 그해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의하여 휩쓸어진 3개의 경기로 압도를 당하였다. 윌슨 스포츠 용품은 베츠를 우익수와 전체로서 전체의 메이저 리그 필더들 중에 그 "올해의 방어적 선수"로 임명하였다. 시즌 후에 베츠는 마이크 트라우트와 호세 알투베의 곁으로 아메리칸 리그 MVP 시상식을 위하여 최종 결승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트라우트에 밀려 준우승으로 끝냈다. 11월 배츠는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았다. 2017년 2016년 9월 12일부터 2017년 4월 19일을 통하여 베츠는 스트라이크아웃 없이 129개의 연속적 본루 출연의 연속을 유지하였다. 연속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프란시스코 리리아노가 그를 스트라이크아웃 시켰을 때 끝났다. 토론토에서 열린 정규 시즌 경기에서 그는 7월 2일 블루제이스의 15 대 1의 패주에서 선두 슬롯으로부터 자신이 8개의 타점을 기록하였을 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기록을 동점매겼다. 같은 날 그는 자신의 두번째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 경기로 승인되었다. 원래 예비 선수로 선택되었던 베츠가 자신의 엄지손가락 수술을 받아야 했던 마이크 트라우트의 자리에 시작할 것이라는 것이 7월 3일 공고되었다. 시즌에 자신의 완고한 통계에 불구하고, 베츠는 안타로 들어가는 활약에 공을 돌릴 수 없는 것으로 비판을 받았다. 그의 BABIP는 그 2016년 수준으로부터 .268로 54 포인트 떨어졌다. 그는 이 시즌에 자신의 2연속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2018년 4월 17일 보스턴 글로브의 닉 카파도는 자신이 베츠를 당시 야구에서 최고 선수로 넓게 숙고된 2회의 MVP 마이크 트라우트에게 비교한 "무키 베츠 혹은 마이크 트라우트 : 누가 끄덕이나?"라는 타이틀의 난을 발간하였다. 카파로가 의문한 10명의 전문적 평가인들 중에 7명은 트라우트, 그리고 3명은 베츠를 선택하였다. 베츠는 "그런 위대한 선수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영광이다."라고 말하였다. 같은 날의 밤에 베츠는 트라우트의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에 레드삭스를 10 대 1의 우승으로 이끄는 데 3개의 홈런을 쳤다. 그 일은 그의 경력에 3번째의 3개 홈런 경기였으며 레드삭스 역사상 대부분을 위하여 테드 윌리엄스와 그를 동점을 매겼다. 베츠는 윌리엄스와 동점을 깨고 5월 2일 프랜차이즈 기록을 세워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5 대 4의 우승에서 3개의 홈런을 쳤다. 그는 26세의 나이 전에 4개의 3개 홈런 경기들을 생산하는 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첫 선수가 되었다. 5월 21일까지 베츠는 메이저 리그를 이끄는 15개의 홈런을 축적하였다. 그는 타구 평균, 장타율, OPS, 총루, 여분 안타, 2루타, 매긴 득점, 창조한 득점,과 OPS +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을 지도하였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3위를 위하여 좋은 11개의 도루와 함께 레드삭스를 이끌었다. 그 포인트에 그의 3.8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는 메이저 리그에서 트라우트 만으로 2위였다. 6월 1일 베츠는 복통과 함께 10일간 장애자 명단에 놓여 5월 29일로 소습하여 6월 11일 활동적 로스터로 돌아왔다. 7월 6일 베츠는 자신의 시즌의 22번째 홈런을 쳐 자신의 메이저 리그 경력의 100번째였다. 그는 토니 코니글리아로, 짐 라이스와 테드 윌리엄스가 다른 선수들로 지내면서 26세가 되기 전에 100개의 홈런을 치는 데 4번째 레드삭스 선수가 되었다. 7월 8일 22개의 홈런과 44개의 타점과 함께 .343 점을 타구한 동안 베츠는 아메리칸 리그의 출발 외야수로서 2018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게임으로 선정되었다. 8월 9일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경기에서 그는 사이클링 히트를 쳐 그 업적을 성취하는 데 레드삭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21번째 선수가 되었다. 9월 26일 베츠는 시즌의 자신의 30번째 도루를 이루어 30-30 클럽에 가입하는 데 레드삭스 역사상 두번째 만의 선수가 되었다. 베츠는 .346의 타구 평균, .640 장타율과 129개의 매긴 득점과 함께 메이저 리그를 이끈 2018년 시즌을 끝냈다. 시즌을 위하여 그는 전체의 메이저 리그 선수들의 가장 높은 BABIP (.373)를 가졌다. 그는 .996에 메이저 리그 우익수들 중에 높은 수비율을 가졌다. 레드삭스는 108 승 54 패와 함께 한해를 끝내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러 갔다. 포스트시즌 동안 베츠는 하나의 홈런과 4개의 타점과 함께 13 루 62 타 (.210)를 쳤다. 시즌 후에 베츠는 자신의 3연속 골드 글러브 상, 하트 앤드 허슬 상을 수상하였고, 11월 15일 아메리칸 리그 MVP로 선정되어 1위 투표 30개 중 28개를 받아 월드 시리즈, 골드 글러브 상, 실버 슬러거 상과 아메리칸 리그 MVP 상을 우승하는 데 자신을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단 한명의 선수로 만들었다. 2019년 2019년 시즌에 대비하여 알렉스 코라 감독은 베츠가 두번째로 타구하면서 자신이 앤드루 베닌텐디를 팀의 선두 타자로서 이용할 것을 언급하여 팀의 보통 2018년 타구 순서로부터 그들의 자리들을 바꾸었다. 6월의 시작에 코라는 선두 자리에서 베닌텐디가 겨우 3 루 37 타로 간 이래 베츠가 다시 팀의 선두 타자가 될 것이라고 공고하였다. 6월의 말기에 베츠는 13개의 홈런과 37개의 타점과 함께 .261의 평균을 가졌다. 그는 2019년 올스타 게임으로 예삐 외야수로서 선발되었다. 7월 26일 베츠는 자신의 경력의 53개의 홈런을 가져 양키스의 제임스 팩스턴을 상대로 자신의 첫 3개의 타수에 각각 홈런을 쳤다. 시즌을 위하여 베츠는 .915의 OPS, 메이저 리그를 이끄는 135개의 득점, 29개의 홈런, 80개의 타점, 40개의 2루타와 597개의 타수에서 16개의 도루와 함께 .295 점을 타구한 동안 150개의 경기에 나왔다. 2019년 방어에 그는 아메리만 리그의 우익수들에 최고인 15개의 수비 스탯을 가졌고, .997의 전체 메이저 리그 우익수의 최고 수비율을 가졌다. 시즌 후에 베츠는 자신의 4연속 골드 글러브 상과 3번째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2019년 MVP 투표에서 8위를 하였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20년 2020년 2월 10일 레드삭스는 알렉스 베르두고, 코너 웡과 지터 다운스를 위한 교환에서 베츠, 데이비드 프라이스와 현금 숙고들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시켰다. 7월 22일 다저스는 베츠를 2032년 시즌을 통한 12년 확장 계약으로 맺었다. 거래는 3억 6천 5백만 달러의 가치였고 또한 6천 5백만 달러의 사이닝 보너스를 포함하여 다저스 역사상 가장 부유한 계약이자 북아메리카 스포츠의 역사상 3번째로 가장 부유한 계약으로 만들었다. 2020년 시즌은 코로나19 범유행의 이유로 연기되었고, 162개의 경기에서 60개로 짧아졌다. 7월 23일 베츠는 출발 우익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오프닝 데이에 자신의 다저스 데뷔를 이루어 투수 타일러 로저스를 상대로 다저스의 선수로서 자신의 첫 안타이자 1루타를 얻었다. 7월 31일 베츠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투수 잭 게일런을 상대로 다저스의 선수로서 자신의 첫 홈런을 쳤다. 8월 14일 베츠는 샌디에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3개의 홈런을 쳐 자신의 경력의 6번째 3개 홈런 경기로 이 업적을 성취하는 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선수들 만으로서 새미 소사와 조니 마이즈에 동점을 매겼다. 그달 후반에 베츠는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2개의 홈런을 치고 2개의 도루를 이루어 다수의 홈런과 다수의 도루 경기를 가지는 데 19번째 만의 선수이자 첫 다저스 선수가 되었다. 8월 27일 그는 1,000개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안타들에 도달하였다. 베츠는 47개의 득점 (내셔널 리그에서 4위), 16개의 홈런, 39개의 타점, .928의 OPS와 10개의 도루와 함께 .292/.366/.562 점을 타구하면서 2020년 시즌을 끝냈다. 3개 시즌 기간에 자신의 두번째 월드 시리즈로 가는 길에 베츠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다저스를 위한 제거 경기에서 3연속 시리즈 세이브 방어 일품을 이루었다. 월드 시리즈 클린치 경기에서 베츠는 두번이나 득점을 매기고 하나의 홈런을 쳤다. 베츠는 레드삭스가 클린치하러 갔을 때 2018년 월드 시리즈의 5번째 경기에서도 홈런을 쳤다. 그는 다수의 월드 시리즈 클린치 경기에서 홈런을 치는 데 9번째 선수가 되었고, 다른 팀들과 함께 그렇게 하는 데 3번째가 되어 레지 잭슨에게 가입하였다. 포스트시즌에서 그의 8개의 2루타는 단 하나의 포스트시즌에서 가장 많은 2루타로 메이저 리그 기록을 동점매겼다. 시즌 후에 베츠는 자신의 5연속 골드 글러브 상 (내셔널 리그에서 처음)과 4번째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브레이브스의 프레디 프리먼에 밀려 2위를 하였다. 2022년 스프링캠프에서 트레이닝을 앞두고 식중독 증세를 보이며 좋지않은 몸상태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4월에는 그 여파로 타율 .230의 저조한 성적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5월 들어 채식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28경기에서 12홈런 27타점을 쓸어담는 맹타를 휘두르며 MVP 선수다운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0월 1일 2루타를 추가하며 다저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두 번째로 한 시즌 35홈런과 40개의 2루타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볼링 무키의 모친은 열성적인 볼링 선수며 그에게 어린 나이에 볼링을 가르쳤다고 한다. 베츠는 2010년 "올해의 테네시주 소년 볼링 선수"로 임명되어 290개의 경기와 827개의 3개 경기 시리즈와 함께 그 시즌에 테네시주 고등학교 기록을 세웠다. 베츠는 2015년과 2017년 네바다주 리노에서 열린 프로 볼링 협회 (PBA)의 월드 시리즈에 나갔다. 그는 공식적으로 2013년 1월 27일, 2016년 2월 2일과 2017년 11월 12일에 3개의 퍼펙트 게임을 굴렸다. PBA에서 그의 가장 높은 경기는 2017년 11월 12일 볼링 월드 시리즈가 열린 동안 300 경기이다. 2019년 2월 그는 그해 CP3 PBA 연예인 초청 대회를 이겨 프로 볼링 선수 토미 존스와 시합에 나갔다. 연도별 타격 성적 2019년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외부 링크 199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아프리카계 미국인 야구 선수 테네시주 출신 야구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우익수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선수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 올스타 퓨처스 게임 참가 선수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 월드 시리즈 우승 선수 내슈빌 출신 실버 슬러거 상 수상자 202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https://en.wikipedia.org/wiki/Mookie%20Betts
Mookie Betts
Markus Lynn "Mookie" Betts (born October 7, 1992) is an American professional baseball outfielder and second baseman for the Los Angeles Dodgers of Major League Baseball (MLB) and the United States national team. He previously played for the Boston Red Sox. In 2018, while with the Red Sox, he became the first player in MLB history to win the Most Valuable Player, Silver Slugger, Gold Glove, batting title, and World Series all in the same season. Betts was drafted by the Red Sox in 2011, and made his MLB debut in the 2014 season, splitting time between second base and the outfield. He became the Red Sox center fielder in 2014, before moving to right field in 2016. As a relatively short natural second baseman with a high contact rate and a high level of production when pulling the ball, Betts has been compared to former Red Sox teammate Dustin Pedroia. Outside of baseball, Betts is also a professional ten-pin bowler for the Professional Bowlers Association (PBA). He bowled a perfect game in the World Series of Bowling in 2017. Early life In 2010, Betts's junior year at John Overton High School in Nashville, Betts batted .548 with 24 steals. In November of that year, Betts signed a letter of commitment to attend the University of Tennessee on a baseball scholarship, also getting recruited by Vanderbilt University, Mississippi State University, and the University of Alabama at Birmingham. At Overton, Betts was also a standout basketball player, named MVP of the District 12-AAA league his senior season while averaging 14.1 points, nine assists, four rebounds, and three steals per game; and also named Class AAA All-City Player of the Year for the Nashville, Tennessee metropolitan area. His junior year, Betts was named MVP of the District 12-AAA tournament. Betts also excelled in bowling, named the Tennessee Boys Bowler of the Year in 2010 with a high score of 290. He grew up bowling at the Donelson Strike and Spare in Donelson, Tennessee. Professional career Draft and minor leagues The Boston Red Sox selected Betts in the fifth round of the 2011 Major League Baseball draft with the 172nd overall pick as a second baseman. After protracted negotiations, Betts subsequently rescinded his commitment to the University of Tennessee, signing a $750,000 contract with the Red Sox organization. Betts played one game in 2011 for the GCL Red Sox of the rookie Gulf Coast League, getting two hits in four at bats. In 2012, he batted .267 and stole 20 bases in 71 games for the short season Lowell Spinners of the New York–Penn League. He played shortstop regularly, but looked more comfortable at second base. Betts started the 2013 season with the Greenville Drive of the Low A South Atlantic League. In 76 games, Betts batted .296, with a 19-game hitting streak and was selected to the South Atlantic League All-Star Game. On July 9, Betts was promoted to the Salem Red Sox of the High A Carolina League, batting .341 in 51 games to complete the 2013 season, with a combined .314 average in 127 games between Greenville and Salem, with 15 home runs and 38 steals. Betts was named Offensive Player of the Year and Breakout Player of the Year in the Boston minor league system, leading all Sox minors players with a .506 slugging percentage, while his .314 batting average ranked him third behind Alex Hassan (.338) and Garin Cecchini (.322). Betts was a second-team inclusion on the Baseball America Minor League All-Star Team for 2013, with the first-team selection for second base going to Marcus Semien, an infielder for the Chicago White Sox. Betts subsequently played 16 games for the Surprise Saguaros of the Arizona Fall League, batting .271. Betts opened the 2014 season with the Portland Sea Dogs of the Double-A Eastern League, batting .355 in 54 games to lead the Eastern League through June 2. On June 3, Betts was promoted to the Pawtucket Red Sox of the Triple-A International League, batting .322 and reaching base in all 23 games with the PawSox. In 2013 and 2014, Betts reached base in 66 straight regular-season games plus five playoff games for a combined streak of 71 games. Because official baseball streak records do not include playoff games, Betts's streak has been listed at 66 games; Kevin Millar and Kevin Youkilis hold the official minor league record for consecutive games reaching base, at 71 games, with Minor League Baseball lacking data on the statistic before 1997. Since mid-May 2014, Betts has played outfield in addition to second base. In 2013, four-time All-Star second baseman Dustin Pedroia signed an eight-year, $110 million contract extension with the Red Sox, leading to speculation that the Red Sox would groom Betts for a new position. Boston Red Sox 2014 season: Rookie season Betts was promoted to the Red Sox on June 28, 2014. He had previously been selected for the All-Star Futures Game, but was replaced following his promotion to the Major Leagues. Betts made his debut on June 29, recording his first major league career hit against Yankees starter Chase Whitley in the fourth inning. He hit his first home run on July 2 off the Cubs' Carlos Villanueva. He then was optioned to Triple-A Pawtucket on July 19 when Shane Victorino was activated from the disabled list, and was recalled to Boston on August 1. Betts was optioned back to Pawtucket in August and recalled again on August 18. On August 29, Betts hit his first career grand slam against Rays pitcher Chris Archer in a Red Sox victory at Tropicana Field. At age 21, Betts became the youngest Sox player to hit a grand slam in 49 years. Betts spent most of the 2014 season playing in the outfield, but on September 11, manager John Farrell announced that Betts would play second base "fairly regularly" following injuries to regular second basemen Dustin Pedroia and Brock Holt. Betts split the 2014 season fairly evenly between AA, AAA and MLB, playing 52 major league games. He performed well for the Red Sox, hitting .291 with five home runs; and played over half his innings in center field. 2015 season: Shift to right field On April 6, 2015, Opening Day for the Boston Red Sox against the Philadelphia Phillies, he hit a home run in his second at-bat, becoming the third youngest player to hit a home run on Opening Day for the Red Sox. On April 13, 2015, in the home opener at Fenway Park against the Washington Nationals, Betts arguably had the most exciting performance of his career. He robbed Bryce Harper of a home run, stole two bases on one play, and hit a home run into the Monster seats, all in the first three innings. Betts was named the AL Player of the Week for the week ending on June 21, 2015. Within that week, Betts batted .581 (18 for 31) with two home runs, two triples, three doubles, seven RBI and eight runs. He led the AL in batting average, hits, on-base percentage (.594), total bases (31), and slugging percentage (1.000) that week. In the latter part of the season, he spent some time in right field, leading to speculation that he would move there permanently, to allow teammate Jackie Bradley Jr. to take over in center field. Betts ended the 2015 season with a .291 batting average, with 92 runs scored, 77 RBIs, 18 home runs and 21 stolen bases. 2016 season: First All-Star appearance Betts was selected to the 2016 MLB All-Star Game, the first of his career. He started in right field and was 1-for-2 with a single, and a RBI. Betts was named the AL Player of the Month for July, when he batted .368 (35-for-95) with five home runs, 15 RBIs, five stolen bases and a 1.068 OPS in 23 games. On September 20, Betts became the first player to reach 200 hits during the 2016 MLB season. In 158 games played, Betts finished the season with a .318 batting average, 214 hits, 122 runs scored, 42 doubles, 31 home runs, 113 RBI, and an MLB-leading 359 total bases. His 67 multi-hit games also led MLB. He also was 2nd in the league in power-speed number (28.3). With the Red Sox finishing the season 93–69, the team clinched the AL East Division, but succumbed to a three-game sweep by the Cleveland Indians in the 2016 ALDS. Wilson Sporting Goods named Betts it's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at right field and best overall among all major league fielders. After the season, Betts was named a finalist for the American League MVP Award, alongside Mike Trout and José Altuve. He finished as the runner-up to Trout. In November, Betts underwent right knee surgery. 2017 season: Second All-Star appearance From September 12, 2016, through to April 19, 2017, Betts maintained a streak of 129 consecutive plate appearances without a strikeout. The streak ended when Francisco Liriano of the Toronto Blue Jays struck him out. In a regular season game at Toronto, he tied an MLB record when he recorded eight RBIs from the leadoff slot in a 15–1 rout of the Blue Jays on July 2, 2017. He was granted his second American League All-Star Game selection on the same day. Originally chosen as a reserve, it was announced on July 3 that Betts will start in place of Mike Trout, who was out due to surgery on his thumb. Betts ended the season with a .264 batting average, 101 runs scored, 26 stolen bases, 24 home runs and 102 RBIs. Betts led the Red Sox in each of those categories except batting average, as he batted just .236 from the All-Star break through September 4. Despite his solid stats on the season, Betts was criticized for his inability to turn balls in play into hits. His batting average on balls in play fell 54 points from its 2016 level to .268. He also was 3rd in the league in power-speed number (25.0). He won his second consecutive Golden Glove Award this season. 2018 season: AL MVP and First World Series championship On April 17, 2018, Nick Cafardo of The Boston Globe published a column titled, "Mookie Betts or Mike Trout: Who gets the nod?" in which he compared Betts to Mike Trout, a then-two-time MVP widely considered the best player in baseball. Of the 10 professional evaluators Cafardo asked, seven chose Trout and three chose Betts. "To be in the same conversation as a great player like that is an honor," Betts said. That same night, Betts hit three home runs to lead the Red Sox to a 10–1 win over Trout's Los Angeles Angels. It was the third three-homer game of his career, tying him with Ted Williams for the most in Red Sox history. Betts broke the tie with Williams and set the franchise record on May 2, hitting three home runs in a 5–4 win over the Kansas City Royals. He became the first player in MLB history to produce four three-homer games before the age of 26. By May 21, Betts had amassed a major league-leading 15 home runs. He led MLB in batting average, slugging percentage, OPS, total bases, extra-base hits, doubles, runs scored, runs created, and OPS+. He led Boston with 11 stolen bases, good for third in MLB. His 3.8 WAR (as calculated by Baseball-Reference.com) at that point was second only to Trout in the majors. His offensive success was a major factor in the Red Sox’ 32–15 start. On June 1, Betts was placed on the 10-day disabled list, retroactive to May 29, with a left abdominal strain; he returned to the active roster on June 11. On July 6, Betts hit his 22nd home run of the season, the 100th of his MLB career. He became the fourth Red Sox player to hit 100 home runs before turning 26, the others being Tony Conigliaro, Jim Rice, and Ted Williams. On July 8, while batting .343 with 22 home runs and 44 RBIs, Betts was named to the 2018 MLB All-Star Game as an American League starting outfielder. In a game against the Toronto Blue Jays on August 9, he hit for the cycle, becoming the 21st player in Red Sox franchise history to accomplish the feat. On September 26, Betts stole his 30th base of the season, becoming just the second player in Red Sox history to join the 30–30 club (the first was Jacoby Ellsbury in 2011). Betts finished the 2018 season leading the major leagues with a .346 batting average, a .640 slugging percentage, and 129 runs scored. For the season, he had the highest batting average on balls in play (.373) of all major league players. He also was second in the league in power-speed number (31.0). He had the highest fielding percentage among major league right fielders, at .996. The Red Sox finished the year at 108–54, and went on to win the World Series over the Los Angeles Dodgers. During the postseason, Betts hit 13-for-62 (.210) with one home run and four RBIs. After the season, Betts won his third consecutive Gold Glove, the Heart & Hustle Award, and on November 15 was named the American League MVP, receiving 28 of 30 first place votes, making him the only player in American League history to win the World Series, a Gold Glove award, a Silver Slugger award and the AL MVP in the same season. 2019 season: Last year in Boston Before the 2019 season, manager Alex Cora stated he would use Andrew Benintendi as the team's leadoff hitter, with Betts batting second, swapping their positions from the team's usual 2018 batting order. At the beginning of June, Cora announced that Betts would again be the team's leadoff hitter since Benintendi went just three for 37 in the leadoff spot. At the end of June, Betts had a .261 average with 13 home runs and 37 RBIs. He was selected as a reserve outfielder to the 2019 All-Star Game. On July 26, Betts had the fifth three-homer game of his career, hitting a home run in each of his first three at bats against James Paxton of the Yankees. For the season, Betts appeared in 150 games while batting .295 with a .915 OPS, 135 runs (leading the major leagues), 29 home runs, 80 RBIs, 40 doubles, and 16 stolen bases in 597 at-bats. On defense in 2019, he had a 15 Defensive Runs Saved (DRS) rating, the best in the American League among right fielders, and had the best fielding percentage of all major right fielders (.997). After the season, Betts was awarded his fourth consecutive Gold Glove and his 3rd Silver Slugger. He finished eighth in 2019 AL MVP voting. Los Angeles Dodgers 2020 season: Second World Series championship On February 10, 2020, the Red Sox traded Betts, David Price and cash considerations to the Los Angeles Dodgers in exchange for Alex Verdugo, Connor Wong and Jeter Downs. On July 22, the Dodgers signed Betts to a 12-year contract extension, through the 2032 season. The deal was worth $365 million and also included a $65 million signing bonus, making it the richest contract in Dodgers history, and the third-richest contract in the history of North American sports. The 2020 season was delayed and shortened from 162 games to 60 due to the COVID-19 pandemic. On July 23, Betts was the starting right fielder, making his Dodgers debut on Opening Day against the San Francisco Giants, getting his first hit, a single, as a Dodger against pitcher Tyler Rogers. On July 31, Betts hit his first home run as a Dodger against Arizona Diamondback pitcher Zac Gallen. On August 13, Betts hit three home runs against the San Diego Padres, his sixth three-homer game of his career, tying Sammy Sosa and Johnny Mize as the only players in MLB history to accomplish this feat. Later that month, Betts hit two home runs and stole two bases against the Colorado Rockies, becoming only the 19th player—and first Dodger—to have a multi-homer, multi-steal game. On August 27, 2020, he reached 1,000 MLB career hits. Betts finished the 2020 season hitting .292/.366/.562 with 47 runs (4th in the NL), 16 home runs (3rd), 39 RBIs, a .928 OPS, and 10 stolen bases. On his way to his second World Series over a three-season span, Betts made three straight series saving defensive gems in elimination games for the Dodgers in the NLCS against the Atlanta Braves. In the World Series clincher, Betts scored twice and hit a home run. Betts also homered in Game 5 of the ‘18 World Series, when the Red Sox went on to clinch. He became the ninth player to homer in multiple World Series clinchers, and just the second to do it with different teams — joining Reggie Jackson. His eight doubles in the postseason tied a major league record for most doubles in a single postseason. After the season, Betts was awarded his fifth consecutive Gold Glove (first in the National League) and his fourth Silver Slugger. He finished second in NL MVP voting behind Freddie Freeman of the Atlanta Braves. 2021 season: Fifth All-Star appearance Betts was selected to the National League All-Star Team, his first appearance with the Dodgers. He did not play in the game due to injury, having battled back and left shoulder trouble this year. He played in 122 games for the Dodgers, with a .264 batting average, 23 home runs and 58 RBI. In the postseason, he had two hits in four at-bats in the Wild Card Game, nine hits in 20 at-bats (.450) with one home run in the 2021 NLDS and four hits in 23 at-bats (.174) in the 2021 NLCS. 2022 season: Sixth All-Star appearance In mid-June, Betts cracked his rib and went on the ten-day injured list. On July 23, Betts hit his 200th career home run off of Alex Wood of the San Francisco Giants. He was selected as a starting outfielder for the National League All-Star Team, making his sixth appearance at the MLB All-Star game, which was played at Dodger Stadium in 2022. He played in 142 games for the Dodgers in 2022, batting .269 with a career-high 35 home runs and recording 82 RBIs. He was tied for the league lead with 117 runs scored. Betts finished fifth in voting for the National League Most Valuable Player award. He won his fifth Silver Slugger award. 2023 season: Seventh All-Star appearance In 2023, as a result of injuries and under performance among the Dodgers infielders, Betts displayed his versatility by spending significant time at second base. and also made his first-ever career appearance as a shortstop in a game against the Chicago Cubs. Betts was elected by the fans as a National League starter in the 2023 Major League Baseball All-Star Game. On August 7, 2023 Betts hit his fifth career grand slam home run as a lead-off batter, tying a Major League record. Betts played in 107 games in the outfield, 70 games at second base and 16 games at shortstop. He had a .307 batting average with a career high 39 home runs and 107 RBI. Bowling Mookie's mother is an avid bowler and taught Mookie to bowl at an early age. Betts was named the Tennessee Boys Bowler of the Year in 2010, having set Tennessee high school records that season with 290 games and an 827 three-game series. Betts competed in the Professional Bowlers Association (PBA) World Series of Bowling in Reno, Nevada in 2015 and 2017. He has bowled three officially sanctioned perfect 300 games, on January 27, 2013; February 2, 2016; and November 12, 2017. The November 2017 perfect game was achieved in PBA competition, during the 2017 World Series of Bowling. In February 2019, he won the CP3 PBA Celebrity Invitational, competing with professional bowler Tommy Jones. Film production In January 2022, Betts signed a movie production agreement with Propagate Content. Betts participated in the production of a film focused on the life of Jackie Robinson. The film, Jackie Robinson: Get to the Bag, was shown in a preview event at a New York museum in August 2022. Personal life Although it has been reported that Betts is a nephew of Terry Shumpert, who played parts of 14 seasons with several MLB teams, they are actually first cousins once removed, as Shumpert is a first cousin to Betts' mother, Diana. In 2004, Shumpert spent his final season of professional baseball with the Triple-A Nashville Sounds and worked extensively with Betts. He is a distant cousin of Meghan, Duchess of Sussex. Betts's first Little League Baseball coach was his mother, Diana. Betts's parents chose his name in part to form the initials MLB, matching those of Major League Baseball. He has attributed his nickname Mookie to his parents watching former NBA guard Mookie Blaylock play basketball shortly after Betts was born. Betts has stated that he has never met Blaylock. In 2021, Betts said that he had "made the switch over to vegan". Betts and his longtime girlfriend, Brianna Hammonds, began dating in high school. The couple welcomed their first child, a daughter, in November 2018. Betts and Hammonds announced their engagement in January 2021 and married on December 1, 2021 in Palos Verdes, California. They have a home in Franklin, Tennessee. Betts also purchased a mansion for $7.6 million in Encino, Los Angeles, when he became a Dodger. As a member of the Red Sox, Betts became known for his necklaces. One was a gift from a 13-year-old fan, given to Betts during spring training in 2018 prior to his AL Batting Championship, MVP Award and World Series championship. Betts continued wearing the necklace after being traded to the Los Angeles Dodgers, a season which culminated in his second World Championship. References External links 1992 births Living people African-American baseball players American bowling players American League All-Stars American League batting champions American League Most Valuable Player Award winners Baseball players from Nashville, Tennessee Boston Red Sox players Gold Glove Award winners Greenville Drive players Los Angeles Dodgers players Lowell Spinners players Major League Baseball outfielders Major League Baseball second basemen National League All-Stars Pawtucket Red Sox players People from Brentwood, Tennessee Sportspeople from the Nashville metropolitan area Portland Sea Dogs players Salem Red Sox players Silver Slugger Award winners Surprise Saguaros players 21st-century African-American sportspeople 2023 World Baseball Classic pla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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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로드 FC 대회
2019 로드 FC 대회는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단체 로드 FC의 2019년도 대회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2019년은 로드 FC의 출범 9년째가 되는 해이다. 첫 대회는 2월 23일 로드 FC 052로 시작한다. 로드 FC 100만불 라이트급 토너먼트 (부제: Road To A-Sol) 대진표 로드 FC 100만불 라이트급 토너먼트(부제: Road To A-Sol)는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100만불이라는 상금 아래 시행한 라이트급 부문 토너먼트이다. 실제로는 1명이 결승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17강 대회'로, 본선 32강 토너먼트에서 16강은 세계 강자들로 채우고 나머지 16강 시드를 현 로드 FC 라이트급 챔피언 권아솔이 혼자 서게 되는 방식이다. 총 16명은 본선에서 녹아웃 스테이지 방식으로 경쟁하며 살아남은 한 명, 즉 16강 토너먼트 우승자는 최종 결승에서 상금 100만불과 라이트급 타이틀을 걸고 권아솔과 대결하게 된다. 본선에 앞서 지역 예선전이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진행됐으며, 총 16명의 본선 진출자는 아래와 같다. 중국 지역 예선 - 바오인창, 구켄쿠 아마르투브신 동남아 (필리핀 URCC) 지역 예선 - 레드 로메로 인터내셔널 A조 예선 - 사사키 신지, 레오 쿤츠, 박대성, 샤밀 자브로프, 토니뉴 퓨리아, 김창현, 호니스 토레스 동유럽 (러시아 MFP) 지역 예선 - 엘누르 아가에프 일본 (Deep) 지역 예선 - 시모이시 고타 인터내셔널 B조 예선 - 톰 산토스, 난딘에르덴, 만수르 바르나위 시드 배정 - 남의철 이벤트 목록 Road FC 057 XX: Park vs. Shim 굽네몰 로드 FC 057 XX (또는 로드 FC 057 x 로드 FC XX): 박정은 vs. 심유리는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2019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그랜드힐튼서울 컨벤션센터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여자부 리그 로드 FC XX(더블엑스)의 네 번째 대회가 로드 FC 057 본 정규 넘버 시리즈 대회 이후에 메인카드로서 펼쳐졌다. 배경 메인이벤트는 "몬스터 울프" 박정은과 "타격 지니어스" 심유리의 아톰급 매치가 선택되었다. 로드 FC 054 대회의 프릴리미너리 카드에서 두 선수의 대결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나 시합을 얼마 앞둔 상황에서 심유리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무산된 바 있다. 코메인이벤트는 "꽃미녀 파이터" 이수연과 중국 "국민 여동생' 스밍의 -50.0 kg 계약 매치가 선택되었다. 로드 FC 051 XX 대회에서 이예지와 대결을 펼친 바 있는 이수연은 언더독으로 평가받았지만, 그라운드에서 주짓수 블루벨트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타격에서도 앞서며 판정승으로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후 그녀는 무릎 수술을 받았고 1년 만에 이번 시합에서 복귀하게 되었다. 스밍은 로드 FC 데뷔전이 로드 FC 049 대회에서 일본의 하라다 시호를 꺾었고, 4개월 뒤에 "타격 지니어스" 심유리와 대결을 펼쳤지만 아쉽게 니킥을 허용하며 무너진 바 있다. "케이지의 악녀" 홍윤하는 딥 쥬얼스 챔피언 출신의 일본의 강호 토미 에미마츠와 대결하게 되었다. 2개월 전, 홍윤하는 일본 대회에서 태국의 강호 수와난 분손을 맞아 아쉬운 패배를 당한 바 있다. 3연승으로 상승세였던 그녀는 세컨드의 지시를 듣지 않고 평소 주특기인 그라운드 기술을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무릎을 꿇었다. 목표로 했던 4연승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 자책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대진 카드 라운드 걸 임지우, 신해리, 심소미, 한혜은, 배가희, 유다솜 Road FC 056: Kwon vs. Zavurov 굽네몰 로드 FC 056: 권아솔 vs. 샤밀 자브로프는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2019년 11월 9일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체육관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대진 카드 라운드 걸 임지우, 신해리, 심소미, 한혜은, 배가희. 김이슬 Road FC 055: Lee vs. Park 굽네몰 로드 FC 055: 이정영 vs. 박해진은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2019년 9월 8일 대구광역시 대구체육관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대진 카드 라운드 걸 임지우, 신해리, 심소미, 한혜은, 배가희, 김보람 Road FC 054: La vs. Yang 굽네몰 로드 FC 054: 라인재 vs. 양해준은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2019년 6월 15일 강원도 원주시 원주종합체육관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대진 카드 라운드 걸 임지우, 신해리 Road FC 053: Kwon vs. Barnaoui 굽네몰 로드 FC 053: 권아솔 vs. 만수르 바르나위는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2019년 5월 18일 제주도 한라체육관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대진 카드 라운드 걸 최슬기, 임지우, 신해리 Road FC 052: Zavurov vs. Barnaoui 굽네몰 로드 FC 052: 샤밀 자브로프 vs. 만수르 바르나위는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 FC가 2019년 2월 23일 서울특별시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대진 카드 라운드 걸 최슬기, 임지우, 신해리 관련 문서 로드 FC 챔피언 목록 로드 FC 대회 목록 현 로드 FC 선수 목록 로드 FC 어워즈 각주 2019년 종합격투기 로드 FC 대회
https://en.wikipedia.org/wiki/2019%20in%20Road%20FC
2019 in Road FC
The year 2019 is the 10th year in the history of the Road Fighting Championship, a mma promotion based in South Korea. 2019 starts with Road FC 052. Road FC $1 Million Dollar Lightweight Tournament 'Road To A-Sol' Bracket List of events Title fights Road FC 057 XX Goobne mall Road FC 057 XX is a mixed martial arts event scheduled to be held by Road FC on December 14, 2019, at the Convention Centre, Grand Hilton Seoul in Seoul, South Korea. Background Fight card Road FC 056 Goobne mall Road FC 056 was a mixed martial arts event held by Road Fighting Championship on November 9, 2019 at the Jinnam Gymnasium in Yeosu, South Jeolla Province, South Korea. Background Fight card Road FC 055 Goobne mall Road FC 056 was a mixed martial arts event held by Road Fighting Championship on September 8, 2019 at the Daegu Gymnasium in Daegu, South Korea. Background The event featured the first title defense for Road FC Featherweight Champion Jeong-Yeong Lee against fellow countryman Hae-Jin Park as the Road FC 55 headliner. Results Road FC 054 Goobne mall Road FC 054 was a mixed martial arts event scheduled to be held by Road FC on June 15, 2019, at the Wonju Gymnasium in Wonju, Gangwon-do, South Korea. Fight card Road FC 053 Goobne mall Road FC 053 was a mixed martial arts event scheduled to be held by Road FC on May 18, 2019, at the Halla Gymnasium in Jeju, South Korea. Fight card Road FC 052 Goobne mall Road FC 052 was a mixed martial arts MMA event held by Road FC on February 23, 2019, at the Jangchung Gymnasium in Seoul, South Korea. Background The event featured the ROAD FC $1 Million Lightweight Tournament finals between Shamil Zavurov and Mansour Barnaoui to earn a shot at reigning lightweight champion A-Sol Kwon and the US$1 million prize. Fight card See also List of Road FC events List of Road FC champions List of current Road FC fighters List of current mixed martial arts champions References Road Fighting Championship events Road FC Road FC Road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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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카스텔
마누엘 카스텔( 마누엘 카스텔스, 1942년 2월 9일~)은 스페인의 사회학자로 정보화 사회,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사회과학인용색인의 2000-2014년 조사에서 그는 사회과학 학자 중에서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이 인용되었고 커뮤니케이션 학자 중에서는 가장 많이 인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2년에는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도시와 세계경제의 정치적 역학에 대한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로"로 홀버그상을 수상하였다. 2013년에 그는 사회 분야에서 발찬상을 수상하였다. 생애 마누엘 카스텔은 본래 라만차에서 자랐지만 훗날 바르셀로나로 이주해 법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기억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고하였다.제 부모님은 매우 좋은 부모님이셨습니다. 보수적인 가정이었죠 — 매우 보수적이었어요. 그렇지만 그 분들 외에 내 성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파시스트 스페인에서 성장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젊은 세대가 이해하는 것은 스페인의 젊은 세대에게도 어려울 거예요. 당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 저항해야만 하고, 당신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열다서여섯 살부터 자신을 정치해야 하고 싸워야만 하니까요.반 프랑코 학생운동에서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그는 그로 인해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도망쳐야만 했다. 파리에서 그는 20세의 나이에 학사 학위를 얻은 뒤 파리 대학교에 진학해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4세에 강사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1967년부터 1979년까지 파리의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처음에 파리 제10대학교 낭테르에서 근무하였고 여기서 다니엘 콘 벤디트를 가르쳤으나, 1968년 학생 시위로 해고되었다. 그 뒤, 그는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1970년부터 1979년까지 근무하였다. 1979년 그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 및 도시 및 지역계획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2003년까지 재직하였다. 2001년에 그는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카탈루냐 개방대학교(UOC)에서 연구 정교수가 되었다. 2003년 남가주대 (USC) 아넨버그 커뮤니케이션 대학에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및 월리스 아넨버그 석좌교수로 합류하였다. 그는 USC공공외교센터의 창립멤버 중 한 명이었으며, 해당 센터의 교원자문위원회 고위 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아넨버그 국제커뮤니케이션 연구 네트워크의 일원이기도 하다.2008년부터 그는 유럽혁신기술연구소 집행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일 사회학에서 그의 저작들은 경험적 연구와 도시사회학, 조직학, 인터넷 연구, 사회 운동, 문화사회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을 결합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네트워크 사회의 기원에 대해 그는 전자 인터넷 기술 전에 나타나는 기업의 네트워크 형태의 변화는 (보통) 네트워크 조직 형태와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정이 변하는 네트워크 형태의 기업이 설립되기 전에 인터넷 기술은(보통)과 연결된 네트워크는 조직 형태(cf. 조직론). 또한 그는 세계화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부차적 집단을 의미하는 학술 용어 "제 4세계"를 제시하였다. 이 용어는 보통 현대 산업 사회 규범의 바깥에 속하는 유목, 농업, 그리고 수렵 및 채집 사회를 의미한다. 그는 정보화 시대가 "인간 정신의 힘을 발휘"하게 해 개인의 생산성을 극적으로 높여 궁극적으로는 보다 더 많은 여가 시간을 누리게 되어 개개인의 "정신적 깊이가 더욱 깊어지게 하고 또한 높은 주변 의식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자원의 소비를 줄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보화 시대, 소비의 시대, 그리고 네트워크 사회는 모두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대로 현대의 삶을 설명하고 또한 사회의 미래를 묘사코자 하는 관점이다. 카스텔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동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회구조 개념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사회에 대한 관점은 전통적으로 사회를 기구와 조직들로 이루어진 '기계'로 보는 '기계적 관점'과 사회를 각각의 특정한 기능을 가진 유기조직의 통합체로 보는 '유기주의 관점'이 있었으나, 분자생물학적 움직임을 보이는 상호작용적 네트워크로 보는 관점 또한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1970년대에 그는 지적 아버지 알랭 투렌의 길을 따라 탈공업 사회와 같이 논란이 많은 사회 변화 속에서의 사회 운동의 역할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도시사회학의 한 갈래의 핵심 발제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국가의 간섭 속에서 경제적 측면에서 정치적 측면에 반영되는 다양한 범위의 사회적 투쟁을 포함하는 "대중 소비"(대중교통, 공공주택 등등)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1980년대 초에 카스텔은 마르크스주의 구조를 넘어서 경제 재구성 과정에서의 새로운 기술의 역할에 집중하였다. 1989년 그는 세계 정보 네트워크에서 경제가 실시간으로 장거리에서 조정되는 과정의 물질 및 비물질적 구성요소인 "흐름의 공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1990년대에 그는 정보시대 경제,사회, 문화의 두 가지 연구 갈래를 결합해 정보시대 3부작인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1996), 정체성 권력(1997), 밀레니엄의 종언(1998)을 출판하였다. 이것이 대학 세미나에서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2년 뒤, 초판본(1996)으로부터 40% 정도의 차이가 생긴 두 번째 판본이 출판되었다(2000). 생산, 권력, 그리고 경험이라는 세 가지 사회적 차원을 포함하는 정보시대: 경제, 사회, 문화는 경제의 조직과 국가, 그리고 그것의 기관들과 사람들이 집단 행동을 통해 삶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들이 사회 역학에서 바꿀 수 없는 요인임을 강조하였다. 즉, 이것들이 서로 구별되어 있는 것과 동시에 상호간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터넷 발전 분석에서 각자의 (상충되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경제적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데에서의 국가의 역할(군사 및 학술 분야에서), 사회운동의 역할(해커와 사회 운동가), 그리고 비즈니스의 역할을 강조해 인정받는 인터넷 문화 이론가가 되었다. 정보시대 3부작은 그의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네트와 자아에 대한 양극구조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네트"는 사회적 조직에서 수직적으로 통합된 위계를 대신해 지배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네트워크 조직을 의미하고, "자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사회적 정체성을 재확인할 때 사용하는 방법과 의미를 뜻한다. 저작 마누엘 카스텔은 세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사회과학자이자 커뮤니케이션 학자이다. 그는 아래의 책들을 포함해 2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였다. The Urban Question. A Marxist Approach (Alan Sheridan, translator). London, Edward Arnold (1977) (Original publication in French, 1972) City, Class and Power. London; New York, MacMillan; St. Martins Press (1978) The Economic Crisis and American Society. Princeton, NJ, Princeton UP (1980) The City and the Grassroots: A Cross-cultural Theory of Urban Social Movement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Castells, Manuel (1989).《The Informational City: Information Technology, Economic Restructuring, and the Urban Regional Process》 [정보도시: 정보기술의 정치경제학] (영어). Oxford, UK; Cambridge, Massachusetts: Blackwell. 정보 사회 3부작: The Information Society and the Welfare State: The Finnish Model. Oxford UP, Oxford (2002) (공저자로 참여) Castells, Manuel & Himanen, Pekka (2004).《The Network Society: A Cross-Cultural Perspective》 [네트워크 사회: 비교문화 관점] (영어). Cheltenham, UK; Northampton, MA: Edward Elgar. ISBN 978-1-84542-435-0. (공저자이자 편집자로 참여) The Network Society: From Knowledge to Policy. Washington, DC, Center for Transatlantic Relations (2006) (co-editor) (공저자로 참여) (공저자이자 편집자로 참여) 학술지 논문 Social Uses of Wireless Communications: The Mobile Information Society, co-author of the paper for the International Workshop on Wireless Communication Policies and Prospects: A Global Perspective, USC, 8–9 October 2004. Castells, M (2007) Communication, power and counter-power in the network society.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1(1): 238-66. Arsenault, A, and Castells, M. 2008.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global multimedia business networks.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2707-48. Arsenault, A & Castells, M. (2008) Switching power: Rupert Murdoch and the global business of media politics: A sociological analysis. International Sociology 23(4): 488. 각주 추가 자료 Susser, Ida. The Castells Reader on Cities and Social Theory. Oxford, Blackwell (2002) Castells, Manuel; Ince, Martin. Conversations with Manuel Castells. Oxford, Polity Press (2003) Stalder, Felix. Manuel Castells and the Theory of the Network Society. Oxford, Polity Press (2006) Howard, Phillip: Castells and the Media. Cambridge, Polity Press (2011) 외부 링크 USC Annenberg에 있는 카스텔의 웹페이지 UC Berkeley에 있는 카스텔의 웹페이지 (Professor Emeritus listing) 카탈루냐 개방대학교에서 만든 그의 저작이 소개되어 있는 웹사이트 2001년 진행된 한 시간 짜리 인터뷰 Conference on his actual researches on massive social movements involved in the Arab Springs and the Occupy Movements.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Academic journal co-founded by Castells, established in 2007 Manuel Castells' World of Communication, a Manuel Castells exclusive monthly article in Media Coolhunting. Audio: Manuel Castells in conversation on the BBC World Service discussion programme The Forum Video Stream: Manuel Castells October 2009 keynote at University of Oxford Internet Institute for the release of his new book, "Communication Power" 1942년 출생 미국의 사회학자 영국 학사원 석학회원 살아있는 사람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 도시 이론가 캘리포니아주 출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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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uel Castells
Manuel Castells Oliván (; born 9 February 1942) is a Spanish sociologist. He is well known for his authorship of a trilogy of works, entitled The Information Age: Economy, Society and Culture. He is a scholar of the information society, communication and globalization. Castells is the Full Professor of Sociology, Universitat Oberta de Catalunya (UOC), in Barcelona. He is also the University Professor and the Wallis Annenberg Chair Professor of Communication Technology and Society at the Annenberg School of Communication,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Los Angeles. Additionally, he is the Professor Emeritus of Sociology and Professor Emeritus of City and Regional Planning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where he taught for 24 years. He is also a fellow of St. John's College at the University of Cambridge and holds the chair of Network Society at Collège d’Études Mondiales, Paris. The 2000–2014 research survey of the Social Sciences Citation Index ranks him as the world's fifth most-cited social science scholar, and the foremost-cited communication scholar. In 2012, Castells was awarded the Holberg Prize, for having "shaped our understanding of the political dynamics of urban and global economies in the network society." In 2013, he was awarded the Balzan Prize for Sociology for "his wide-ranging and imaginative thinking through of the implications of the great technological changes of our time." In January 2020, he was appointed Minister of Universities in the Sánchez II Government of Spain, position he held until his resignation in December 2021. Biography Early life Manuel Castells was born on February 9, 1942, in the city of Hellín, in La Mancha region, Spain. His parents, Fernando Castells Adriaensens and Josefina Olivan Escartin were both civil servants. He also has a younger sister named Irene. The family’s residence in La Mancha was short lived, as it was related to Castells’ parents’ work. In fact, due to the mobility of his father’s career as a finance inspector, Castells’ childhood was also mobile. He grew up in the cities of Madrid, Cartagena, and Valencia. Politics were a part of Castells’ life from an early age. He notes: My parents were very good parents. It was a conservative family — very strongly conservative family. But I would say that the main thing that shaped my character besides my parents was the fact that I grew up in fascist Spain. It's difficult for people of the younger generation to realize what that means, even for the Spanish younger generation. You had actually to resist the whole environment, and to be yourself, you had to fight and to politicize yourself from the age of fifteen or sixteen. Castells’ engagement is evident in his early opposition to Francisco Franco’s semi-fascist regime. His father initially fought in its favor as a member of the Falange Party. Castells’ father eventually abandoned this mentality, as he was no longer pleased with Franco’s rule. Early Education and Activism Castells completed his secondary education in Barcelona. He was a strong student, and in 1958, he completed his course of study two years early, at the age of sixteen. The same year, He continued his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Barcelona, where he studied both Law and Economics. Beyond these subjects, Castells was also interested in literature and the theatre. However, the oppressive Franco government cracked down on students’ self-expression. Theatre performances were censored and student journals were shut down. This motivated Castells to join the anti-Franco movement in 1960 at age 18. He was one of very few students to engage in this kind of activism, largely because it was highly illegal and dangerous. Secrecy was imperative. Castells joined an opposition group of diverse ideologies called the Workers Front of Catalonia. From there, he coupled his formal education with copious amounts of reading to supplement his activism. Among many other topics, Castells involved himself in the exploration of Marxist and anarchist theory. In May 1962, Castells’ activism led him to participate in a strike. Its goal was to protest the iron-fisted government and stand in solidarity with exploited miners in the Asturias region of Spain. This resulted in many of Castells’ friends being arrested and beaten. Fortunately, Castells was able to escape to France, but without the social support he had access to in Spain. As a result, he was not able to complete his degree at the University of Barcelona. Following his escape, a fellow resistance member assisted him in achieving political refugee status, and he travelled to Paris. In Paris, at the age of 20, he completed his degree, and then progressed to the University of Paris, where he earned a doctorate in Sociology. Castells graduated from the Sorbonne in 1964 and received his PhD from the University of Paris in 1967. Catalan Identity Castells identifies as Catalan largely because of his connection to Barcelona, which is recognized as the center of the Catalan movement for independence. He spent a large portion of his adolescence there, completing his secondary and beginning his college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Barcelona. Castells also traces his paternal lineage to the city. This aspect of Castells’ identity is related to his resistance to Franco’s oppressive regime. The Catalan language was not taught at school under Franco, and Castells’ family, being from a Spanish speaking region of Spain, therefore did not speak it. However, he took the initiative to teach the language to himself while at University, which he states has helped him feel more connected to his Catalan identity. Castells is a Catalan nationalist, but not a separatist. He has expressed support for the Catalan Socialist Party. Academic career At the age of twenty-four, Castells became an instructor in several Parisian universities, and would teach from 1967 to 1979. First, he taught at the Paris X University Nanterre (where he taught Daniel Cohn-Bendit). He was terminated from this position as a result of the 1968 student protests. He then taught at the 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from 1970 to 1979. In 1979,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ppointed him as Professor of Sociology, and Professor of City and Regional Planning. In 2001, he was a research professor at the UOC-Universitat Oberta de Catalunya (Open University of Catalonia), Barcelona. Then, in 2003, he joined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SC) Annenberg School for Communication, as a Professor of Communication and the first Wallis Annenberg-endowed Chair of Communication and Technology. Castells is a founding member of the USC Center on Public Diplomacy, and a senior member of the diplomacy center's Faculty Advisory Council and is a member of the Annenberg Research Network on International Communication. Castells divides his residence between Spain and the US. Since 2008, he has been a member of the governing board of the European Institute of Innovation and Technology. He has been the Minister of Universities in Spain since January 2020 until December 2021. Theoretical Contributions The sociological work of Manuel Castells synthesizes empirical research literature with combinations of urban sociology, organization studies, internet studies, social movements, sociology of culture, and political economy. About the origins of the network society, he posits that changes to the network form of enterprise predate the electronic internet technologies (usually) associated with network organization forms (cf. Organization theory (Castells)). Moreover, he coined the (academic) term "The Fourth World", denoting the sub-population(s) socially excluded from the global society; usual usage denotes the nomadic, pastoral, and hunter-gatherer ways of life beyond the contemporary industrial society norm. Information Age Castells’ most well-known work is a trilogy of books, entitled, The Information Age: Economy, Society and Culture. Overall, it comprehends three sociological dimensions—production, power, and experience—stressing that the organization of the economy, of the state and its institutions, and the ways that people create meaning in their lives through collective action, are irreducible sources of social dynamics—that must be understood as both discrete and inter-related entities. The Information Age trilogy is his précis: "Our societies are increasingly structured around the bipolar opposition of the Net (social network) and the Self"; the "Social network" denotes the network organizations replacing vertically integrated hierarchies as the dominant form of social organization, the Self denotes the practices a person uses in reaffirming social identity and meaning in a continually changing cultural landscape. In other words, Castells’ theory of the Information Age explores the dissonance between “universal, digital language,” and individual, even local identities. Our physical selves exist in different places and experience different cultures, but the mind has essentially migrated into the world of the internet and the television. They exist in a “global space of instant information". Castells maintains that the Information Age can "unleash the power of the mind", which would dramatically increase the productivity of individuals and lead to greater leisure, allowing individuals to achieve "greater spiritual depth and more environmental consciousness". Such change would be positive, he argues, in that it would cause resource consumption to decrease. Castells also became an established cybernetic culture theoretician with his Internet development analysis stressing the roles of the state (military and academic), social movements (computer hackers and social activists), and business, in shaping the economic infrastructure according to their (conflicting) interests. Informationalism Castells' concepts of The Information Age, The Age of Consumption, and The Network Society are all perspectives attempting to describe modern life as it is known in the present and to depict the future of society. As Castells suggests, contemporary society may be described as "replacing the antiquated metaphor of the machine with that of the network". Put simply, this quote exemplifies Castells’ concept of “Informationalism.” He asserts that from the 1970s to the present day, informational technology has allowed large businesses, organizations, and social structures in general to form global networks. The world is growing away from industrialism, which is focused on economic growth. Informationalism strives to develop knowledge and create massive networks. This theory is, of course, related to the growth of capitalism. As networks grow larger, the state gradually plays a smaller role in the capitalist system. Common systems of information have begun to replace it. They act as a connector between networks that may very likely be on opposite sides of the globe. It is important to note, however, that this development does not come without some level of exclusion. For certain areas of the globe that are not as connected with mainstream society and massive international networks, it is becoming increasingly difficult to keep pace with the expansion of capitalism. Excluded communities respond by developing their own systems, which are often based in illicit economic activity. These illicit economic activities illustrate another of Castells’ points, that resistance to globalization is a result of the development of the information age. He explains this using an example: Well, if I have no value for these global networks of power, finance, technology, then I build my own value, my own system. I build my family. I build my nation. I build my God. And, if I am not listened to, then I will become more and more enraged. Marxism In the 1970s, as a still-growing intellectual, Castells centered his research and intellectual processes around the works of Karl Marx because he, “felt the need to communicate to the world of political change through its language – Marxism." Castells developed his ideas by studying the works of several Marxists, including Louis Althusser. Althusser utilized a structuralist perspective in his works, which may also be seen in some of Castells’ earliest publications. For example, The Urban Question: A Marxist Approach was originally published (in French) in 1972, and is a major development in the field of urban sociology. This work emphasizes the role of social movements in the conflictive transformation of the city (cf. post-industrial society). Castells emphasizes that problems within cities do not exist in a social vacuum, and that they must be contextualized to be appropriately analyzed. Castells also introduced the concept of "collective consumption" (public transport, public housing, etc.) comprehending a wide range of social struggles—displaced from the economic stratum to the political stratum via state intervention. Castells no longer identifies as a Marxist. This shift in ideology occurred when he realized that the concepts he was interested in exploring could not be appropriately evaluated by Marxism. Marxism uses class as its major lens for examining social life, and Castells had become interested in ideas that could not be understood by considering class alone. By moving away from Marxism, Castells could explore the concepts of gender, urban social movements, and nationality in a more thoughtful way. He is still interested in ideas that are related to Marxism, such as social change, power relations, and technology, but has broadened his scope of how he approaches them as topics. Castells has said that he prefers to think of theory as a tool, and Marxism is simply a tool that he uses less now. He has not renounced Marx, but has chosen different tools to analyze the social world with. The following quote exemplifies the expansion of Castells’ theoretical paradigm. When I left Spain again to go to Berkeley, I was no longer interested in correct answers but in relevant questions. I became more political when I left Marxism. I left the Parisian salons with wonderful categories that had nothing to do with reality and started relying more on my own observations. Transcending Marxist structures in the early 1980s, he concentrated upon the role of new technologies in the restructuring of an economy. In 1989, he introduced the concept of the "space of flows", the material and immaterial components of global information networks used for the real-time, long-distance co-ordination of the economy. In the 1990s, he combined his two research strands in The Information Age: Economy, Society and Culture, published as a trilogy, The Rise of the Network Society (1996), The Power of Identity (1997), and End of Millennium (1998); two years later, its worldwide, favourable critical acceptance in university seminars, prompted publication of a second (2000) edition that is 40 per cent different from the first (1996) edition. Critical Responses to Castells Over the years, Castells’ work has been met with several noteworthy critiques. Some criticisms of Castells’ work compare his ideas to functionalism, in that they include some “abstract system-building.” In other words, there is a certain level of inattention to individuals, while sweeping generalizations are made about society. Additionally, Castells’ work includes observations about the intense global influence of informationalism. There is some discrepancy about how much of the globe is truly “dominated” by expansive informational networks. The global population is so diverse that there are many exceptions to the idea of complete global domination. These information networks have the potential to be useful “ideal types” for studying global relations, but one should exercise caution when using them to model the real world. Castells has also been criticized for the conservatism that appears within his theories. He has noted that there is “little chance of social change” within the network society. This reveals a thought process that supports the status quo, which can be a problem for social change and justice movements. Related to this criticism, some scholars have found it peculiar that while Castells’ theorizes quite a bit about global connection, he does not explore the potential of those global connections to establish an international system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cultural difference. Publications Manuel Castells is one of the world's most often-cited social science and communications scholars. Castells is a sole author of 23 books and editor or co-editor of fifteen more, as well as over one hundred articles in academic journals. The trilogy, The Information Age, has been compared to the work of Karl Marx and Max Weber. It took him fifteen years to conduct research for the trilogy. Books The Urban Question. A Marxist Approach (Alan Sheridan, translator). London, Edward Arnold (1977) (Original publication in French, 1972) City, Class and Power. London; New York, MacMillan; St. Martins Press (1978) The Economic Crisis and American Society. Princeton, NJ, Princeton UP (1980) The City and the Grassroots: A Cross-cultural Theory of Urban Social Movement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The Informational City: Information Technology, Economic Restructuring, and the Urban Regional Process. Oxford, UK; Cambridge, Massachusetts: Blackwell (1989) Technopoles of the World : The Making of 21st Century Industrial Complexes. London, New York: Routledge (1994) The Information Age trilogy: The Internet Galaxy, Reflections on the Internet, Business and Socie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The Information Society and the Welfare State: The Finnish Model. Oxford UP, Oxford (2002) (co-author, Pekka Himanen ) The Network Society: A Cross-Cultural Perspective. Cheltenham, UK; Northampton, MA, Edward Elgar (2004), (editor and co-author), . The Network Society: From Knowledge to Policy. Washington, DC, Center for Transatlantic Relations (2006) (co-editor) Mobile Communication and Society: A Global Perspective.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06) (co-author) Communication power.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Aftermath: the cultures of the economic crisis.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Networks of Outrage and Hope. Social Movements in the Internet Age. Cambridge, Massachusetts, Polity Press (2012) Reconceptualizing Development in the Global Information Age.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co-author, Pekka Himanen ) Rupture: the crisis of liberal democracy. Cambridge, UK, Polity Press (2018) Journal Articles Social Uses of Wireless Communications: The Mobile Information Society, co-author of the paper for the International Workshop on Wireless Communication Policies and Prospects: A Global Perspective, USC, 8–9 October 2004. Castells, M (2007) Communication, power and counter-power in the network society.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1(1): 238–66. Arsenault, A, and Castells, M. 2008.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global multimedia business networks.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2707–48. Arsenault, A & Castells, M. (2008) Switching power: Rupert Murdoch and the global business of media politics: A sociological analysis. International Sociology 23(4): 488. References Further reading Susser, Ida. The Castells Reader on Cities and Social Theory. Oxford, Blackwell (2002) Castells, Manuel; Ince, Martin. Conversations with Manuel Castells. Oxford, Polity Press (2003) Stalder, Felix. Manuel Castells and the Theory of the Network Society. Oxford, Polity Press (2006) Howard, Phillip: Castells and the Media. Cambridge, Polity Press (2011) External links Webpage of Castells at USC Annenberg Webpage of Castells at UC Berkeley (Professor Emeritus listing) Website devoted to his work, made by Open University of Catalonia Video stream of an hour long interview with Castells, conducted in 2001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Academic journal co-founded by Castells, established in 2007 Manuel Castells' World of Communication, a Manuel Castells exclusive monthly article in Media Coolhunting. Audio: Manuel Castells in conversation on the BBC World Service discussion programme The Forum Video Stream: Manuel Castells October 2009 keynote at University of Oxford Internet Institute for the release of his new book, "Communication Power" 1942 births Corresponding Fellows of the British Academy Living people Members of Academia Europaea Spanish sociologists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faculty Writers from California Urban theorists Writers about globalization UC Berkeley College of Environmental Design faculty American sociologists Holberg Prize laureates Urban sociologists Systems scientists Communication theorists Mass media theorists Fellow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 People from Hellín Philosophers of technology Government ministers of Spain Open University of Catalonia Academic staff of the Open University of Catalonia University of Paris alum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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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궈전
우궈전(오국정, 吳國楨, 1903년 10월 21일 ~ 1984년 6월 6일)은 중화민국의 전 정치인이자 역사가였다. 다른 직무들 중에 그는 상하이 시장과 타이완성 정부의 의장을 지냈다. 초기 생애 청나라 후베이성에서 태어나 자신의 부친이 군사 복무를 지낸 베이징에서 자라왔다. 그는 저우언라이가 급우였던 톈진 난카이 고등학교와 칭화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 그리넬 칼리지로부터 경제학에서 문학 석사, 그리고 1926년 프린스턴 대학교로부터 정치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초기 경력과 개인 생활 1926년 중국으로 귀국 후, 우궈전은 정부 서비스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처음에 지방 독군 샤터우윈을 위하여 한커우 (오늘날 우한의 일부)에서 세리로 일하였다. 1931년 그는 진 T. 황의 딸 에디스 황과 결혼하였다. 결국적으로 그들은 4명의 자녀 - 아일린 우, 에디스 우, H.K. 우와 셔먼 우를 두었다. 1932년 그는 한커우의 시장이 되었다. 1936년 양쯔강이 홍수로 준비된 것으로 나타났을 때 우궈전은 도시를 구한 큰 제방 시스템의 건설을 감시하였다. 제2차 중일 전쟁이 일어난 동안 1938년 10월 일본군에게 한커우의 함락과 함께 우궈전과 그의 가족은 충칭으로 달아났다. 그는 1943년 ~ 1945년부터 외교부의 부부장으로 지내며 일본군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의 일부로서 저우언라이와 상호 작용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말 후에 우궈전은 상하이 시장이 되어 1949년 중국공산당 군대가 도시를 점령했을 때까지 그 역할을 지냈다. 상하이 시장 재임 동안 우궈전은 시카고 트리뷴의 로버트 매코믹과 그의 부인 메릴랜드를 만났다. 상하이에서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우궈전은 그의 2명의 딸들을 일리노이주에서 매코믹 가족과 함께 살도록 보냈다. 중국 본토를 떠난 후의 활동들 타이페이로 중국국민당 정부의 재배치에 이어 우궈전은 1949년부터 1953년까지 타이완성의 장관을 지냈다. 우궈전은 타이완 국민들에게 더욱 큰 자치 정부를 가져오는 데 시도하여 일반 투표에 의한 특정 지방 공무원들의 선거를 위하여 허용하였다. 우궈전은 또한 천이가 정부로 들어오는 것에 관한 비평들을 가져왔으며 경찰의 만행을 줄이려고 하였다. 우궈전은 장징궈와 천청을 포함한 국민당 정부의 많은 보수적 당원들에 의하여 반대되었다. 그의 자유적 민주주의 아이디어들과 공산당원들의 침입의 중대한 순간은 손을 맞대지 않는다. 장징궈와 함께 우궈전의 충돌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장제스에게 그의 사임을 제출하였으나 거절되었다. 1952년 4월 우궈전을 표적으로 한 암살 혐의가 의심되었다. 1953년 4월 그는 성공적으로 타이완성 장관을로서 자신의 직위로부터 사임하였고, 5월 24일 그는 "강의 순회"에 황급히 타이완을 떠났다. 장제스 부자에 의하여 떠나는 데 허용되지 않은 한명의 아들을 제외한 우궈전의 가족이 미국을 위하여 떠났다. 1954년 우궈전의 부패를 단언한 타이완에서 비난의 파동이 나타났다. 동시에 장제스 부자는 정부로부터 우궈전의 동료들을 해고시키는 데 이동하였다. 그들은 또한 정식으로 우궈전을 국민당으로부터 제명하였다. 타이완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의 출발에 이어 우궈전은 국민당 정부와 함께 자신이 심각한 문제들로 본 것에 대항하는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년에 그는 "당신의 돈은 타이완에서 경찰 국가를 건설하고 있다."라는 제목이 붙은 "룩" 잡지에 기사를 썼다. 중화민국의 국회에 의하여 그에 대한 결의를 포함하여 우궈전과 장제스의 정권 사이에 대사의 투쟁은 더욱 올라갔다. 1954년 후순에 대사의 투쟁은 우궈전과 당시 또한 미국에 있었던 후스 사이에 대사의 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은 내포에 공산주의를 지키는 데 강한 군사 기지를 확보하는 목적으로 타이완 중앙 정부와 동맹을 맺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찰 국가를 싸우는 아이디어는 미국의 협의 사항에 낮았다. 그의 글에 미국의 응답 부족에 이어 우궈전은 조지아주 서배너에 있는 암스트롱 애틀랜틱 주립 대학교에서 중국사의 교수로 지낸 미국에서 살았다. 미국에서 자신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저서 〈중국의 세습 재산〉에서 초기 역사와 신화의 맥락에서 중국의 문화에 상세한 분석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들을 썼다. 우궈전은 주로 자유적 근대의 타이완의 형성에서 자신의 치명적인 역할과 국민당원의 전형적인 그의 반공주의 신념으로 기억되나 그는 또한 자신의 용감한 반국민당 수사학과 더욱 러시아식의 장징궈와 격렬한 불일치로 기억되기도 한다. 외부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060901195933/http://www.faculty.armstrong.edu/FDawardR.htm http://www.time.com/time/covers/0,16641,1101500807,00.html The Chinese Heritage by K. C. Wu; 1988, Random House Value Publishing, . "Your Money is Building a Police State in Taiwan" by K.C. Wu; Look, June 29, 1954. The Voice of Asia by James A. Michener; 1951, Random House, . Mechanics and Methods of Communism lecture by Dr K.C. Wu, 17 March 1955, Waelderhaus, Kohler, Wisconsin; The Sheboygan Press, March 17, 1955, p 13 Fires of the Dragon by David E. Kaplan; 2002, Scribner, . 1903년 출생 1984년 사망 중화민국의 정치인 대만의 정치인 미국에 거주한 대만인 미국의 대학 교수 칭화 대학 동문 프린스턴 대학교 동문 중국 대륙 본토계 대만인 후베이성 출신 20세기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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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C. Wu
K. C. Wu () (October 21, 1903 – June 6, 1984) was a Chinese political figure and historian. Among other offices, he served as Mayor of Shanghai and as Chairman of the Taiwan Provincial Government. Early life Wu was born in Central China and grew up in Beijing, where his father served in the military. He studied at both Tianjin Nankai High School, where Zhou Enlai was a classmate, and at Tsinghua University. In 1923, he earned a master's degree in economics from Grinnell College and, in 1926, a doctoral degree in political science from Princeton University. Early career and personal life After returning to China in 1926, Wu began a career in government service, first as a tax collector in Hankou (today part of Wuhan) for Xia Douyin, a local warlord. In 1931, he married Edith Huang, daughter of Gene T. Huang. They eventually had four children: Eileen Wu, Edith Wu, H.K. Wu and Sherman Wu. In 1932, he became mayor of Hankou. When the Yangtze River appeared ready to flood in 1936, Wu oversaw the construction of a huge dike system which saved the city. With the fall of Hankou to Japanese forces in October 1938 during the Second Sino-Japanese War, Wu and his family fled to Chongqing. In 1939, Chiang Kai-shek appointed him as mayor of Chongqing, a position he held until 1942. He served as vic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from 1943 to 1945, interacting with Zhou Enlai as part of the united front against the Japanese.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in 1945, K.C. Wu became mayor of Shanghai, serving in that role until the Chinese Communists conquered the city in 1949. While mayor of Shanghai, Wu met the Chicago Tribune's Robert McCormick and his wife Maryland. As the situation in Shanghai became less stable, Wu sent his two daughters to live with the McCormicks in Illinois. Activities after leaving mainland China Following the relocation of the Nationalist government to Taipei, Wu served as Governor of Taiwan from 1949 to 1953. Wu attempted to bring a greater degree of self-governance to the Taiwanese people, allowing for the election of certain local officials by popular vote. Wu also brought critics of Chen Yi into the government, and attempted to cut back on police brutality. Wu was opposed by many conservative members of the Nationalist government, including Chiang Ching-kuo and Chen Cheng. Wu's conflict with the younger Chiang worsened. Wu submitted his resignation to the elder Chiang but it was rejected. In April 1952, an alleged assassination targeting Wu was suspected. In April 1953, he (successfully) resigned from his position as governor and on 24 May 1953 he hastily left Taiwan on a "lecture tour". Wu's family left for the United States, except one son who was not permitted to leave by the Chiangs. In 1954, a wave of accusations appeared in Taiwan alleging Wu's corruption. At the same time, the Chiangs moved to dismiss Wu's associates from government. They also formally expelled Wu from the Kuomintang. Following his son's departure from Taiwan, Wu began to speak out against what he saw were serious problems with the Kuomintang government. That same year, Wu wrote an article in Look magazine entitled "Your Money is Building a Police State in Taiwan". The war of words between Wu and Chiang's regime escalated further, including a resolution against him by the ROC's National Assembly. Later in 1954, a war of words also erupted between Wu and Hu Shih, who was also in the United States at the time. At that time, the United States was attempting to forge an alliance with the Taiwan Central Government in order to secure a strong military chain to keep communism at bay. Thus, the idea of fighting the police state was low on the United States agenda. Following a lack of American response to his writings, K.C. Wu lived in the United States where he served as professor of Chinese history at Armstrong Atlantic State University in Savannah, Georgia. During his time in the United States, he wrote various works, including a detailed analysis on Chinese culture in the context of mythology and early history in his book The Chinese Heritage. Wu is remembered mainly for his vital role in the formation of a liberal modern Taiwan and his anti-communist beliefs typical of a member of Kuomintang, but he is also remembered for his outspoken anti-Kuomintang rhetoric and turbulent disagreements with the more Russian-styled Chiang Ching-kuo. Notes Further reading https://web.archive.org/web/20060901195933/http://www.faculty.armstrong.edu/FDawardR.htm http://www.time.com/time/covers/0,16641,1101500807,00.html The Chinese Heritage by K. C. Wu; 1988, Random House Value Publishing, . "Your Money is Building a Police State in Taiwan" by K.C. Wu; Look, June 29, 1954. The Voice of Asia by James A. Michener; 1951, Random House, . Mechanics and Methods of Communism lecture by Dr K.C. Wu, 17 March 1955, Waelderhaus, Kohler, Wisconsin; The Sheboygan Press, March 17, 1955, p 13 Fires of the Dragon by David E. Kaplan; 2002, Scribner, . 1903 births 1984 deaths 20th-century Chinese historians Mayors of Shanghai Republic of China politicians from Hubei People from Enshi Chairpersons of the Taiwan Provincial Government Historians from Hubei American writers of Chinese descent 20th-century American historians Chinese Civil War refugees Taiwanese people from Hubei Expelled members of the Kuomint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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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 베버
마리안 베버(Marianne Weber, 1870년 8월 2일 ~ 1954년 3월 12일)는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여성운동가다. 막스 베버의 아내다. 생애 아동기 마리안 슈니트거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데트몰트현에서 의사 에두아르드 슈니트거와 유명한 지역 사업가 칼 베버의 딸 안나 베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1873년 어머니 사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렘고로 이사가서 친척 어른들에 의해 키워졌다. 이때 아버지와 아버지의 두 형제들은 정신이상 때문에 보호 시설로 보내졌다. 마리안이 16세가 됐을 때 칼 베버는 렘고와 하노버에 있는 부유층들이 다니는 학교로 보내졌고 19세에 졸업했다. 1889년 이후 어머니의 자매인 알비네와 살았다. 1891년 마리안은 막스 베버 및 그의 모친 헬레네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헬레네와 가까워졌다. 1893년 결혼하고 베를린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결혼 생활 결혼 생활 첫 수년 간 막스 베버는 베를린에서 가르쳤고 1894년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했는데 이때 마리안 베버는 계속 공부했다. 1894년 프라이부르크로 이사간 후 그녀는 신칸트주의 철학을 주도하는 하인리히 리케르트와 공부했다. 그녀는 또한 1895년 정치모임에서 유명한 페미니스트의 연설을 듣고 여성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1896년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 사상 모임을 공동조직했고 또한 막스 베버와 같이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 수준을 고양하기 위해 활동했다. 1898년 막스 베버는 신경 쇠약을 앓았는데 헬레네를 못살게 굴던 부친의 사망 이후에 발병한 것으로 보인다. 1898년부터 1904년 공직 생활을 쉬고 정신과 시설을 들락날락하고 강박적으로 여행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 지위에서 퇴임했다. 이때 부부의 역할이 바뀌었다. 막스 베버가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회복할 때 마리안 베버는 이따금씩 밤늦게에도 정치적 모임에 참가했고 1900년 저서 '피히테의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자 독트린에의 연관'(Fichtes Sozialismus und sein Verhältnis zur Marxschen Doktrin)을 펴냈다. 1904년 베버 부부는 아메리카로 여행가서 제인 애덤스와 플로렌스 켈리를 만났는데 이들은 확고한 페미니스트들이자 활발한 정치적 개혁가들이었다. 또한 그 해에 막스 베버는 공적인 일들을 재개하고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의 저서를 펴냈다. 마리안도 1907년 '법 개발에서의 아내와 어머니' 등의 저서를 펴내는 등 활동을 계속 했다. 1907년 칼 베버가 죽었고 베버 부부가 편하게 살 재산을 남겨뒀다. 이때 마리안 베버는 처음으로 지식인 살롱을 세웠다. 1907년과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사이 마리안 베버는 지식인 및 학자로서의 지위 상승을 즐겼고 1909년 '이혼문제', 1912년 '결혼의 권위와 자율성', '가사 평가에 대하여', 1913년 '여성과 객관적 문화'를 펴냈다. 막스 베버가 마리안 베버를 그녀의 학문적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 등 베버 부부가 공적인 생활에서 서로의 편을 들어줬지만 막스 베버는 엘제 야페와 바람피웠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막스 베버가 강의, 군병원조직, 평화협상가 조언가,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 공직생활 등으로 바쁜 동안 마리안 베버는 1914년 '신여성', '결혼의 이상', 1916년 '윤리적 문제로서의 전쟁', 1917년 '대학 여성의 형태 바꾸기', 1919년 '성적 생활을 형성하는 힘', '여성의 특별한 문화적 일' 등의 저서를 펴냈다. 1918년 마리안 베버는 독일 민주당원이 됐고 바덴 연방주의회 대표로 뽑힌 첫 여성이 됐다. 1919년 독일여성협회연대(Bund Deutscher Frauenvereine)의 회장직을 맡았다. 1920년 막스 베버의 남매 릴리가 갑자기 자살했고 베버 부부는 그녀의 자녀 넷을 입양했다. 그 직후 막스 베버가 1920년 6월 14일에 갑자기 폐렴으로 죽었다. 과부 생활 막스 베버의 예상치 못한 죽음 이후 마리안은 공적, 사회적 생활을 관두고 남편의 저서를 정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1924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부터 남편의 저술을 정리하여 편찬한 것과 그녀 자기 자신의 학문적 업적으로 명예박사를 받았다. 1923년부터 1926년 '막스 베버:전기'(Ein Lebensbild)를 썼다. 1926년 주간 살랑을 재개했고 청중 최대 5천 명에게 연설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가까운 친구들의 도움으로 릴리의 자녀들을 키웠다. 나치 독일 기간 마리안 베버의 페미니스트 대중 연설가로서의 경력은 1935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여성협회연대를 해산할 때 갑자기 끝났고 1945년까지 주간 살롱을 열었다. 나치의 잔혹행위에 대한 비판이 이따금씩 미묘하게 풍겼다. 1945년 가진 인터뷰에서 호워드 베커에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철학적, 정치적, 미적 주제로 제한했고 가끔 나치 시스템을 비판했다. 우리 중 누구도 순교자가 될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녀가 7·20 음모에 얽힌 사람들을 알았다고 했다. 이 기간 중에도 1935년 '여성과 사랑'(Frauen und Liebe), 1942년 '보람있는 인생'(Erfülltes Leben) 등의 책을 냈다. 이후 1954년 3월 12일 당시 서독이었던 하이델베르크에서 죽었다. 활동 마리안 베버 사회학의 기초는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당대 독일 여성들의 경험들을 썼는데 그들은 처음으로 노동자가 됐다. 외부세계에의 이러한 여성들의 첫 노출은 가정 내에서의 성차별에 근거한 역학 관계를 전환했다.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되는 법, 종교, 역사, 경제는 여성의 삶에 대한 형태를 마련했는데 그들의 자율성은 그 결과로 침해받았다. 마리안 베버는 또한 결혼 형태와 구조는 결혼으로서의 더 큰 사회를 위한 시범 연구로서 이용될 수 있고 여성의 결혼할 운명은 여성의 삶에 핵심적이며 법, 종교, 역사, 경제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보일 수 있다고 느꼈다. 결혼이 여성의 삶을 제한하는 동안 여자들이 "계약으로서 남자의 핵심 권력"을 약화하는 것을 막는다고 인정했다. 마리안 베버의 저작은, 특별히 1907년 '법 개발에서의 아내와 어머니'는 결혼 제도 연구에 헌신했다. 그녀의 결론은 결혼은 '권력과 친밀감에 대한 복합적이고 현재진행형인 협상인데 이 속에서 돈, 여성의 일 그리고 성(性)이 핵심 사항"이다. 그녀의 활동의 또다른 핵심은 여성 활동이 사회적 개인과 사회적 세계의 건설과 재생산을 이끌고 지도하는데에 쓰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 활동은 위생, 정직같은 일상적 가치들로부터 철학과 언어같은 더 추상적인 현상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생산물들을 낳는다. 양극단 사이에 연구되지 않은 "즉각적 일상 생활의 타협안"이라고 불리는 중간 영역이 있는데 이곳에서 여성들은 아동 양육자, 가족의 매일매일의 경제적 행위자가 되어 더 큰 부분을 맡는다. 중간 영역은 본모습이 탄생하고 이 세상의 일상적 행위들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곳이다. 그녀는 또한 영혼과 동물성 사이의 지속적 투쟁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해결되어야 할 위기라기보다는 자연성과 도덕적 형태 사이의 갈등이 인간 존엄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느꼈다. 이러한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인간 의지의 지배 하에 본능적 인생의 예속된 인간의 수 천 년의 투쟁"은 여성이 크게 책임지는 생산물을 위한 문화적 생산이다. 결국 마리안 베버는 또한 계급, 교육, 나이, 그리고 기초적 이데올로기의 차이들이 여성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느꼈다. 게오르크 지멜과 마리안 베버 게오르크 지멜과 막스 베버의 학문적 연관에 대한 논의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영향과 관련해서 있어왔지만 마리안 베버 또한 지멜의 동료였다. 막스 베버와 지멜이 자주 서신을 교환했던 20년 이상의 우정에 덧붙여서 마리안 베버는 1911년 지멜의 에세이 '성문제에서 관련되어 있고 절대적인'을 비판했는데 이때 그녀는 그의 '젠더 관계' 개념을 비판했다. 두 사람 모두 '여성 문제'를 다뤘고 더 넓게는 '성별을 반영한 개인의 모드, 사회적 차별과 젠더 차이'에 대해 다뤘다. 막스 베버 여성주의사 독일의 사회학자 독일의 여성주의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출신 1870년 출생 1954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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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ne Weber
Marianne Weber (born Marianne Schnitger; 2 August 1870 – 12 March 1954) was a German sociologist, women's rights activist and the wife of Max Weber. Life Childhood, 1870–1893 Marianne Schnitger was born on 2 August 1870 in Oerlinghausen to medical doctor Eduard Schnitger and his wife, Anna Weber, daughter of a prominent Oerlinghausen businessman Karl Weber. After the death of her mother in 1873, she moved to Lemgo and was raised for the next fourteen years by her grandmother and aunt. During this time, both her father and his two brothers went mad and were institutionalized. When Marianne turned 16, Karl Weber sent her off to fashionable finishing schools in Lemgo and Hanover, from which she graduated when she was 19. After the death of her grandmother in 1889, she lived several years with her mother's sister, Alwine, in Oerlinghausen. In 1891, Marianne began to spend time with the Charlottenburg Webers, Max Jr. and his mother, Helene, in particular. She became very close to Helene, who she would refer to as being "unaware of her own inner beauty". In 1893, she and Max Weber married in Oerlinghausen and moved into their own apartment in Berlin. Marriage, 1893–1920 During the first few years of their marriage, Max taught in Berlin, then, in 1894, at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During this time, Marianne pursued her own studies. After moving to Freiburg in 1894, she studied with a leading neo-Kantian philosopher, Heinrich Rickert. She also began to engage herself in the women's movement after hearing prominent feminist speakers at a political congress in 1895. In 1896, in Heidelberg, she co-founded a society for the circulation of feminist thought. She also worked with Max to raise the level of women students attending the university. In 1898, Max suffered a psychological collapse, possibly brought on after his father's death, which happened shortly after Max confronted him regarding abuse of Helene. Between 1898 and 1904, Max withdrew from public life, moving in and out of mental institutions, traveling compulsively and resigning from his prominent position at University of Heidelberg. During this time, their roles reversed somewhat; as Max worked toward recovery and rested at home, Marianne attended political meetings, sometimes until late at night, and published her first book in 1900: Fichtes Sozialismus und sein Verhältnis zur Marxschen Doktrin ("Fichte's Socialism and its Relation to Marxist Doctrine"). In 1904, the Webers toured America. In America, Marianne met both Jane Addams and Florence Kelley, both staunch feminists and active political reformers Also during that year, Max re-entered the public sphere, publishing, among other things,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Marianne also continued her own scholarship, publishing in 1907 her landmark work Ehefrau und Mutter in der Rechtsentwicklung ("Wife and Mother in the Development of Law"). In 1907, Karl Weber died, and left enough money to his granddaughter Marianne for the Webers to live comfortably. During this time, Marianne first established her intellectual salon. Between 1907 and the start of World War I, Marianne enjoyed a rise in her status as an intellectual and a scholar as she published "The Question of Divorce" (1909), "Authority and Autonomy in Marriage" (1912) and "On the Valuation of Housework" (1912), and "Women and Objective Culture" (1913). While the Webers presented a united front in public life, as Max defended his wife from her scholarly detractors, Max carried on an affair with Else Jaffe, a mutual friend. In 1914, World War I broke out. While Max busied himself publishing his multi-volume study of religion, lecturing, organizing military hospitals, serving as an adviser in peace negotiations and running for office in the new Weimar Republic, Marianne published many works, among which were: "The New Woman" (1914), "The Ideal of Marriage" (1914), "War as an Ethical Problem" (1916), "Changing Types of University Women" (1917), "The Forces Shaping Sexual Life" (1919) and "Women's Special Cultural Tasks" (1919). In 1918, Marianne Weber became a member of the German Democratic Party and, shortly thereafter, the first woman elected as a delegate in the federal state parliament of Baden. In 1919, she assumed the role of chairwoman of the Bund Deutscher Frauenvereine (League of German Women's Associations), an office she would hold until 1923. In 1920, Max's sister Lili suddenly committed suicide, and Max and Marianne adopted her four children. Shortly thereafter, Max Weber contracted pneumonia and died suddenly on 14 June 1920, leaving Marianne a widow with four children to raise. Widowhood, 1920–1954 Following Max's unexpected death, Marianne withdrew from public and social life, funneling her physical and psychological resources into preparing ten volumes of her husband's writing for publication. In 1924, she received an honorary doctoral degree from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both for her work in editing and publishing Max's work as well as for her own scholarship. Between 1923 and 1926, Weber worked on Max Weber: Ein Lebensbild ("Max Weber: A Biography"), which was published in 1926. Also in 1926, she re-established her weekly salon, and entered into a phase of public speaking in which she spoke to audiences of up to 5,000. During this phase, she continued to raise Lili's children with the help of a close-knit circle of friends. Marianne Weber in Nazi Germany Weber's career as a feminist public speaker ended abruptly in 1935 when Hitler dissolved the League of German Women's Associations. During the time of the Nazi regime up until the Allied Occupation of Germany in 1945, she held a weekly salon. While criticisms of Nazi atrocities were sometimes subtly implied, she told interviewer Howard Becker in 1945 that "we restricted ourselves to philosophical, religious and aesthetic topics, making our criticism of the Nazi system between the lines, as it were. None of us were the stuff of which martyrs were made." Weber did claim, however, to know people who had been involved in the July Plot. Weber continued to write during this time, however, and published Frauen und Liebe ("Women and Love") in 1935 and Erfülltes Leben ("The Fulfilled Life") in 1942. Later life On 12 March 1954, Weber died in Heidelberg, in what was then West Germany. Work Themes The basis of Weber's sociology was that of a woman in a patriarchal society. She wrote about the experiences of German women of her time, many of whom were entering the workforce for the very first time. This new exposure of women to the outside world led to shifting gender-based power dynamics within the household. The male-created and male-dominated institutions of law, religion, history and the economy provide a framework for the lives of women, whose autonomy suffers as a result. Weber also felt that the framework and structures of marriage can be used as a case-study for the larger society, as marriage, and the destiny of women to be married, is central to the lives of women, and could be seen across the spectrum of law, religion, history and economy. She acknowledged that while marriage could restrict the lives of women, it could also serve as a form of protection for women, serving to undermine "the brutal power of men by contract". Weber's work, especially the 1907 Wife and Mother in the Development of Law, was devoted to the analysis of the institution of marriage. Her conclusion was that marriage is "a complex and ongoing negotiation over power and intimacy, in which money, women's work, and sexuality are key issues". Another theme in her work was that women's work could be used to "map and explain the construction and reproduction of the social person and the social world". Human work creates cultural products ranging from small, daily values such as cleanliness and honesty to larger, more abstract phenomena like philosophy and language. Between the two extremes lies a vast, unexplored middle territory called "the middle ground of immediate daily life", in which women, being the caretakers, child-rearers, and everyday economic actors of the family, have a large part. This middle ground is where the self is created, for the most part, Weber argued, and that self then affects other people in its daily actions in the world. She also felt that the continual struggle between the spiritual and the animal is what makes people human and that rather than being a crisis to be resolved, the conflict between the natural and the moral forms the basis of human dignity. This "millennial struggle of human beings for the subordination of instinctual life under the dominion of morally free human will" is a cultural product, for the production of which women are largely responsible. Finally, Weber also felt that differences such as class, education, age, and base ideologies, had an enormous effect on the day to day existences of women. She saw that there are profound differences not just between rural and urban women, but also among different types of rural women and different types of urban women. Urban women, of whom Weber was one, were distinguished not just by their husbands' occupations but also by their own. Within the class of working women, women's occupations (traditional women's work versus the elite: academics, artists, writers, etc) have an everyday effect upon patterns of daily life and lead to differences in needs, lifestyle and overall ideologies. Georg Simmel and Marianne Weber There has been discussion of Max Weber's scholarly connection to Georg Simmel, particularly in terms of their influence on the Frankfurt School, but Marianne Weber too was a colleague of Simmel. In addition to a more than 20 year friendship, in which Max and Simmel conversed and wrote letters often, Weber wrote a critical response to Simmel's 1911 essay "The Relative and the Absolute in the Problem of the Sexes", in which she criticized his concept of "gender relations". Both sociologists dealt with the "woman question" and, more broadly, "the interrelation between gendered modes of individuation, social differentiation and gender difference". Publications “Occupation and Marriage” (1906) “Wife and Mother in the Development of Law” (1907) “Authority and Autonomy” (1912) “On The Valuation of Housework” (1912) “Women and Objective Culture” (1913) “Women, Men and Human Nature: The Critique by Marianne Weber” “Women’s Special Cultural Tasks” (1919) Select publications Fichtes Sozialismus und sein Verhältnis zur Marschen Doktrin ("Fichte's Socialism and its Relation to Marxist Doctrine", 1900) Beruf und Ehe ("Occupation and Marriage", 1906) Ehefrau und Mutter in der Rechtsentwicklung ("Wife and Mother in the Development of Law", 1907) Die Frage nach der Scheidung ("The Question of Divorce", 1909) Autorität und Autonomie in der Ehe ("Authority and Autonomy in Marriage", 1912) Über die Bewertung der Hausarbeit ("On the Valuation of Housework", 1912) Frauen und Kultur ("Women and Objective Culture", 1913) Max Weber. Ein Lebensbild ("Max Weber: A Biography", 1926) Die Frauen und die Liebe ("Women and Love", 1935) Erfülltes Leben ("The Fulfilled Life", 1942 - republished in 1946) Lebenserinnerungen ("Memoirs", 1948) See also History of feminism Feminism in Germany Notes Works cited "Marianne Weber (1870- 1954): A Woman-Centered Sociology," Patricia M. Lengermann and Jill Niebrugge-Brantley. The Women Founders: Sociology and Social Theory, 1830-1930 : a Text/reader. Boston: McGraw-Hill, 1998. Weber, Marianne. 1975. Max Weber: a biography. New York: Wiley. Scaff, Lawrence A. 1998. "The `cool objectivity of sociation': Max Weber and Marianne Weber in America." History Of The Human Sciences 11, no. 2: 61. Academic Search Premier, EBSCOhost (accessed 11 November 2011) "History of the German Women's Movement". Translated by Robert Burkhardt, assisted by members of the Translation Workshop organized by the Goethe-Institut. Boston, January–March 1998. http://www.trip.net/~bobwb/gwmtext/index.htm Wobbe, Theresa, 2004. "Elective affinities: Georg Simmel and Marianne Weber on gender and modernity." Engendering the Social: Feminist Encounters with Sociological Theory. eds. Barbara L. Marshall and Anne Witz. Maidenhead, England: Open University Press. pp 54–68. Weber, Marianne, 1913. "Authority and Autonomy in Marriage." trans. Craig R. Bermingham. Sociological Theory, Vol. 21, No. 2 (Jun. 2003), pp. 85–102. Lundskow, G. N. (2008). "The Sociology of Religion: a Substantive and Transdisciplinary approach". Los Angeles: SAGE. External links (in German) (broken as of 27 November 2011) 1870 births 1954 deaths People from Lippe People from the Principality of Lippe Max Weber Feminism and history German women sociologists German sociologists German feminists German salon-hol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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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G. 제발트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보통 W. G. 제발트라고 표기. 1944년 5월 18일 독일 알고이 베르타흐 출생, 2001년 12월 14일 잉글랜드 노퍽에서 사망)는 독일의 작가이자 문예학자이다. 생애 W. G. 제발트는 독일 베르타흐에서 어머니 로자 제발트(결혼 전 이름 로자 에겔호퍼)와 아버지 게오르크 제발트의 세 자녀 중 둘째로 자라났다. 그에게는 누나 게르트루트(1941년생)와 여동생 베아테(1951년생)가 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이던 제발트의 아버지는 바이에른 숲 출신이었고, 그는 철물공기술을 배워서 1929년 독일 국방군에 입대해 국방군 대위까지 진급했다. 1947년까지 그는 프랑스의 전쟁포로 생활을 했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 1971년까지는 연방군에서 (최종적으로는 육군 중령으로)복무했다. 제발트의 유년기에 가장 중요한 남성 보호자는 마을 경찰관이었던 외할아버지였다. 1954년부터 제발트는 먼저 임멘슈타트의 마리아 슈테른 레알김나지움을 다녔고, 1955년부터는 오버스트도르프의 오버레알슐레를 다녀 1963년에 졸업 시험 과정(Abitur)을 졸업했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군복무를 면제받았으며 1963년에 프라이부르크 알베르트 루트비히 대학에서 독문학과 영문학 전공 공부를 시작했다. 1965년에 그는 프리부르 대학으로 옮겨 1966년에 문학사(Licence ès lettres)를 취득하며 졸업했다. 같은 해에 그는 잉글랜드로 이주하여 그 이듬해에는 학창시절 막바지에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1976년에 그는 딸과 아내를 데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목사관(The Old Rectory)으로 이사했다. 그는 거기서 덤불숲처럼 우거진 숲으로부터 넓게 펼쳐진 정원을 가꾸어 동영국풍의 화원을 만들었다. 1968년에 그는 카를 슈테른하임에 대한 석사논문을 제출했고, 곧이어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강사로 일했다. 그는 일 년 동안 생 갈렌의 로젠베르크에 있는 사립 기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70년부터 그는 노리치의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1973년에는 알프레드 되블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6년에 제발트는 함부르크 대학에서 '불행에 관한 묘사'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부여받았다. 1988년에는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근현대독일문학 교수가 되었다. 1996년부터 그는 독일 언어 및 문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제발트는 2001년 12월 14일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묘역은 노퍽 노리치의 포링랜드 근교 세인트 앤드류스 교회묘지(노퍽 NR14, 프레이밍햄 얼)에 있다. 제발트는 생전에 그의 이름 '빈프리트'와 '게오르크'를 거부했다. 빈프리트는 그에게 있어 '틀림없는 나치식 이름'이었으며,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자신을 '막스' 로 부르게 했다. 제발트는 작가 미하일 함부르거와 가까운 친분 관계였으며, 함부르거는 제발트의 몇몇 작업들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문학적 특징 제발트의 문학 작업은 실질적으로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독일 사람들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처음으로 그를 주목했지만 그는 영국과 미국(수잔 손탁이 특히 그를 지지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프랑스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오늘날 제발트는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는 독일어권 저자 중 한 사람이다. 제발트의 많은 텍스트들은 특유의 멜랑콜리한 톤을 갖는다. 그의 텍스트들에서는 기억과 회상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발트는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에게 몰두했는데, 제발트를 닮은 작중 화자와 같이 고향을 버리고 떠나 외국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는 이민자들이 그 사람들이다. 제발트에게 있어 독일과 유대인 사이의 문제적인 관계는 특히 중요했다. 청소년일 때부터 그는 전쟁 중 일어난 일들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아버지 세대의 침묵에 대해 분노했으며 나중에 그는 전쟁 중 연합군이 독일 도시들을 파괴한 것에 대한 문단과 사회의 침묵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로서 제발트의 논쟁한 방식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제발트는 그가 1993년 알프레드 안더쉬가 제3제국 시기 동안 (비)도덕적으로 융화되었던 것에 대해 쓴 에세이를 통해 촉발시킨 논쟁에서 가차없는(그리고 비판받을 만큼이나 편협한)태도를 취한 바 있다. 제발트는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국에서의 국외독문학 그리고 앵글로색슨 지역에서의 독일어 문학 소개를 위해 헌신했다. 저술들 <현기증, 감정들(1990)>에서 제발트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는 네 개의 여행 이야기들 안에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스탕달과 카프카의 멜랑콜리한 태도와 마주세운다. <이민자들(1992)>은 부분적으로는 실제 문서들에 기반한, 네 사람의 삶에 대한 회고록을 담고 있다. 파울 베라이터라는 인물을 통해서 제발트는 존트호펜에 살던 시절 그의 초등학교 선생님을 묘사한다. 베라이터의 실제 역사적 모델인 아르민 뮐러는 나치 집권 시기 동안 유대인으로서 독일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당했다. 또 제발트는 가상의 종조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라는 인물을 통해 제1차 세계 대전의 무서운 광경들에 시달려 정신착란으로 사망한 부유한 유대계 미국인을 위해 일하던 집사를 만들어낸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친구로 나오는 요하네스 내겔리는 제발트의 할아버지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부분의 루이자 란츠베르크 이야기는 1891년에 태어난 테아 프랭크-G의 기억을 문학적인 형태로 형성한다. <토성의 고리(1995)>는 여행기이다. 1인칭 화자는 멜랑콜리한 감정 상태로 잉글랜드 서퍽 구역을 도보 여행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실제 여행을 다룬 여행기는 아니다. <아우스터리츠(2001)>는 제발트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60세의 자크 아우스터리츠의 자신의 뿌리에 대한 추적이 기술된다. 이 작품에서는 H. G. 아들러와 그의 학술 연구 <테레지엔슈타트 1941-1945. 억압사회의 얼굴>이 언급된다. 이 작품은 제발트가 실제 자전적 자료를 점하고 사용한 태도와 방법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아우스터리츠>는 2015년에 BBC가 선정한 2000년부터 2014년까지의 최고 소설 20선에 포함되며 여태까지 가장 의미있는 21세기의 문학작품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국내에 출판된 제발트의 작품들 소설 <토성의 고리> 이재영 역, 창작과비평사 <이민자들> 이재영 역, 창작과비평사 <아우스터리츠> 안미현 역, 을유문화사 <현기증.감정들> 배수아 역, 문학동네 산문 <공중전과 문학> 이경진 역, 문학동네 <캄포 산토> 이경진 역, 문학동네 <자연을 따라. 기초시> 배수아 역, 문학동네 <기억의 유령: W. G. 제발트 인터뷰 & 에세이> 공진호 역, 아티초크 출판 1944년 출생 2001년 사망 프리부르 대학교 동문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 동문 20세기 독일 사람 21세기 독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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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G. Sebald
Winfried Georg Sebald (18 May 1944 – 14 December 2001), known as W. G. Sebald or (as he preferred) Max Sebald, was a German writer and academic. At the time of his death at the age of 57, he was being cited by literary critics as one of the greatest living authors. Life Sebald was born in Wertach, Bavaria, the second of the three children of Rosa and Georg Sebald, and his parents' only son. From 1948 to 1963, he lived in Sonthofen. His father had joined the Reichswehr in 1929 and served in the Wehrmacht under the Nazis. His father remained a detached figure, a prisoner of war until 1947; his maternal grandfather, the small-town police officer Josef Egelhofer (1872–1956), was the most important male presence during his early years. Sebald was shown images of The Holocaust while at school in Oberstdorf and recalled that no one knew how to explain what they had just seen. The Holocaust and European modernity, especially its modes of warfare and persecution, later became central themes in his work. Sebald studied German and English literature first at the University of Freiburg and then at the University of Fribourg in Switzerland, where he received a degree in 1965. He was a Lector at the University of Manchester from 1966 to 1969. He returned to St. Gallen in Switzerland for a year hoping to work as a teacher but could not settle. Sebald married his Austrian-born wife, Ute, in 1967. In 1970 he became a lecturer at the University of East Anglia (UEA). There, he completed his PhD in 1973 with a dissertation entitled The Revival of Myth: A Study of Alfred Döblin's Novels. Sebald acquired habilitation from the University of Hamburg in 1986. In 1987, he was appointed to a chair of European literature at UEA. In 1989 he became the founding director of the British Centre for Literary Translation. He lived at Wymondham and Poringland while at UEA. Final year The 2001 publication of Austerlitz (both in German and English) secured Sebald worldwide fame: "Austerlitz was received enthusiastically on an international scale; literary critics celebrated it frenetically; the book established Sebald as a modern classic." He was tipped as a possible future winner of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With grown and still growing reputation, he was now in high demand by literary institutions and radio programmes throughout Western Europe. Newspapers, magazines and journals from Germany, Austria, Belgium, the Netherlands, Britain and the U.S. urged him for interviews. "Condemned to unrest I am, I am afraid", he wrote to Andreas Dorschel in June 2001, returning from one trip and setting out for the next. For a considerable time, Sebald had been aware of a congenital cardiac insufficiency; to a visitor from the US, he described himself in August 2001 as "someone who knows he has to leave before too long". Sebald died while driving near Norwich in December 2001. The event threw the literary public into a state of shock. Sebald had been driving with his daughter Anna, who survived the crash. The coroner's report, released some six months after the accident, stated that Sebald had suffered a heart attack and had died of this condition before his car swerved across the road and collided with an oncoming lorry. W.G. Sebald is buried in St. Andrew's churchyard in Framingham Earl, close to where he lived. Themes and style Sebald's works are largely concerned with the themes of memory and loss of memory (both personal and collective) and decay (of civilizations, traditions or physical objects). They are, in particular, attempts to reconcile himself with, and deal in literary terms with, the trauma of the Second World War and its effect on the German people. In On the Natural History of Destruction (1999), he wrote an essay on the wartime bombing of German cities and the absence in German writing of any real response. His concern with The Holocaust is expressed in several books delicately tracing his own biographical connections with Jews. Contrary to Germany's political and intellectual establishment, Sebald denied the singularity of the Holocaust: "I see the catastrophe caused by the Germans, dreadful as it was, by no means as a singular event – it developed with a certain logic from European history and then, for the same reason, ate itself into European history." Consequently, Sebald, in his literary work, always tried to situate and contextualize the Holocaust within modern European history, even avoiding a focus on Germany. Sebald completely rejected the mainstream of Western German literature of the 1950s to 1970s, as represented by Heinrich Böll and Günter Grass: "I hate [...] the German postwar novel like pestilence." He took a deliberate counter-stance. Sebald's distinctive and innovative novels (which he mostly called simply: prose ("Prosa")) were written in an intentionally somewhat old-fashioned and elaborate German (one passage in Austerlitz famously contains a sentence that is 9 pages long). Sebald closely supervised the English translations (principally by Anthea Bell and Michael Hulse). They include Vertigo, The Emigrants, The Rings of Saturn and Austerlitz. They are notable for their curious and wide-ranging mixture of fact (or apparent fact), recollection and fiction, often punctuated by indistinct black-and-white photographs set in evocative counterpoint to the narrative rather than illustrating it directly. His novels are presented as observations and recollections made while travelling around Europe. They also have a dry and mischievous sense of humour. Sebald was also the author of three books of poetry: For Years Now with Tess Jaray (2001), After Nature (1988), and Unrecounted (2004). Works 1988 After Nature. London: Hamish Hamilton. (Nach der Natur. Ein Elementargedicht) English ed. 2002 1990 Vertigo. London: Harvill. (Schwindel. Gefühle) English ed. 1999 1992 The Emigrants. London: Harvill. (Die Ausgewanderten. Vier lange Erzählungen) English ed. 1996 1995 The Rings of Saturn. London: Harvill. (Die Ringe des Saturn. Eine englische Wallfahrt) English ed. 1998 1998 A Place in the Country. (Logis in einem Landhaus) English ed. 2013 1999 On the Natural History of Destruction. London: Hamish Hamilton. (Luftkrieg und Literatur: Mit einem Essay zu Alfred Andersch) English ed. 2003 2001 Austerlitz. London: Hamish Hamilton. (Austerlitz) English ed. 2001 2001 For Years Now. London: Short Books. 2003 Unrecounted London: Hamish Hamilton. (Unerzählt, 33 Texte) English ed. 2004 2003 Campo Santo London: Hamish Hamilton. (Campo Santo, Prosa, Essays) English ed. 2005 2008 Across the Land and the Water: Selected Poems, 1964–2001. (Über das Land und das Wasser. Ausgewählte Gedichte 1964–2001.) English ed. 2012 Influences The works of Jorge Luis Borges, especially "The Garden of Forking Paths" and "Tlön, Uqbar, Orbis Tertius", were a major influence on Sebald. (Tlön and Uqbar appear in The Rings of Saturn.) In a conversation during his final year, Sebald named Gottfried Keller, Adalbert Stifter, Heinrich von Kleist and Jean Paul as his literary models. He also credited the Austrian novelist Thomas Bernhard as a major influence on his work, and paid homage within his work to Kafka and Nabokov (the figure of Nabokov appears in every one of the four sections of The Emigrants). Memorials Sebaldweg ("Sebald Way") As a memorial to the writer, in 2005 the town of Wertach created an eleven kilometre long walkway called the It runs from the border post at Oberjoch (1,159m) to W. G. Sebald's birthplace on Grüntenseestrasse 3 in Wertach (915m). The route is that taken by the narrator in Il ritorno in patria, the final section of Vertigo ("Schwindel. Gefühle") by W. G. Sebald. Six steles have been erected along the way with texts from the book relating to the respective topographical place, and also with reference to fire and to people who died in the Second World War, two of Sebald's main themes. Sebald Copse In the grounds of the University of East Anglia in Norwich a round wooden bench encircles a copper beech tree, planted in 2003 by the family of W. G. Sebald in memory of the writer. Together with other trees donated by former students of the writer, the area is called the "Sebald Copse". The bench, whose form echoes The Rings of Saturn, carries an inscription from the penultimate poem of Unerzählt ("Unrecounted"): "Unerzählt bleibt die Geschichte der abgewandten Gesichter" ("Unrecounted always it will remain the story of the averted faces") Patience (After Sebald) In 2011, Grant Gee made the documentary Patience (After Sebald) about the author's trek through the East Anglian landscape. References Citations General and cited sources Arnold, Heinz Ludwig (ed.). W. G. Sebald. Munich, 2003 (Text+Kritik. Zeitschrift für Literatur. IV, 158). Includes bibliography. Bewes, Timothy. "What is a Literary Landscape? Immanence and the Ethics of Form". differences, vol. 16, no. 1 (Spring 2005), 63–102. Discusses the relation to landscape in the work of Sebald and Flannery O'Connor. Bigsby, Christopher. Remembering and Imagining the Holocaust: The Chain of Mem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Blackler, Deane. Reading W. G. Sebald: Adventure and Disobedience. Camden House, 2007. Breuer, Theo, "Einer der Besten. W. G. Sebald (1944–2001)" in T.B., Kiesel & Kastanie. Von neuen Gedichten und Geschichten, Edition YE 2008. Denham, Scott and Mark McCulloh (eds.). W. G. Sebald: History, Memory, Trauma. Berlin, Walter de Gruyter, 2005. Grumley, John, "Dialogue with the Dead: Sebald, Creatureliness, and the Philosophy of Mere Life", The European Legacy, 16,4 (2011), 505–518. Jacobs, Carol. Sebald's Vis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7. Long, J. J. W. G. Sebald: Image, Archive, Modern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8. Long, J. J. and Anne Whitehead (eds.). W. G. Sebald: A Critical Companio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6. McCulloh, Mark R. Understanding W. G. Sebald.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2003. Patt, Lise et al. (eds.). Searching for Sebald: Photography after W. G. Sebald. ICI Press, 2007. An anthology of essays on Sebald's use of images, with artist's projects inspired by Sebald. Wylie, John. "The Spectral Geographies of W. G. Sebald". Cultural Geographies, 14,2 (2007), 171–188. Zaslove, Jerry. "W. G. Sebald and Exilic Memory: His Photographic Images of the Cosmogony of Exile and Restitution". Journal of the Interdisciplinary Crossroads, Vol. 3 (No. 1) (April 2006). External links Complete bibliography of Sebald's works An essay by Ben Lerner on Sebald in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The last interview Audio interview with Sebald on KCRW's Bookworm Sebald-Forum BBC Radio4 Program: "A German Genius in Britain" 1944 births 2001 deaths 20th-century German male writers 20th-century German novelists 20th-century German poets Academics of the University of East Anglia Alumni of the University of East Anglia Emigrants from West Germany to the United Kingdom German male novelists German male poets People from Oberallgäu Road incident deaths in England University of Fribourg alumni Academic staff of the University of Hamburg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98%A4%EC%8A%9D%20%EC%B2%A9%EC%9A%B4%20%EC%86%8C%EB%85%80
가오슝 첩운 소녀
가오슝 첩운 소녀 또는 고첩소녀(, )는 중화민국 가오슝시의 지하철인 가오슝 첩운의 마스코트인 4명의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인물들을 지칭한다. 가오슝 첩운 소녀는 옌청푸 역의 역무원인 샤오충(小穹), 기관사인 아멜리아(艾米莉亞, Amelia), 정비사인 제얼(婕兒, Ann), 차내방송 아나운서인 나나(耐耐)로 이루어져 있다. 중화민국과 일본에서 유명한 "모에" 스타일으로 그려진 가오슝 첩운 소녀는 2014년 11월에 도입되었다. 음악, 포스터, 상품,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의 매체들을 통해 다양한 홍보 효과에 집중하고 있다. 가오슝 첩운 소녀가 등장하는 라이트 노벨과 비주얼 노벨 또한 제작되었다. 가오슝 첩운 승객들과 인터넷에서는 등장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많은 이들이 귀여움을 느꼈다. 애니메이션을 통한 상징적인 표현인 가오슝 첩운 소녀를 통해, 가오슝 첩운은 단 7개월 만에 약 2백만 신 대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등장인물 가오슝 첩운 소녀는 네 명의 마스코트로 이루어져 있다. 공개된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샤오충(小穹)은 가오슝 첩운 귤선에 위치한 옌청푸 역의 역무원이다. 2014년 10월 가오슝의 독립 만화 및 비디오 게임 제작 행사에서 공개되었다. 공식 설정에 따르면 키는 163센티미터, 몸무게는 45.625킬로그램이다. 샤오충은 메이리다오 역의 유명한 "광지궁정(光之穹頂)"에서 영감을 얻은 독특한 머리띠를 하고 있다. 샤오충은 가오슝 억양의 중화민국 국어로 말한다. 아멜리아(艾米莉亞, Amelia 또는 Emelia)는 금발의 타이완-독일 혼혈인으로, 가오슝 첩운의 기관사이다. 2014년 12월에 공개되었으며 중화민국의 인터넷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함대 컬렉션의 아타고(愛宕)와 디자인이 유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등신대 패널이 가오슝 첩운 홍선에 의치한 카이쉬안 역에 전시되었다. 제얼(婕兒, Ann)은 철도 정비사이자 기계공이다. 나나(耐耐)는 철도 아나운서이자 승무원이다. 구상과 탄생 가오슝 첩운 소녀 중 첫 번째인 샤오충은 2014년 10월 가오슝의 독립 만화 및 비디오 게임 제작 행사에서 공개되었다. 가오슝 첩운 소녀는 지하철을 홍보하고 수익을 늘리기 위해 가오슝 첩운 공사와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조직 간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승객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이어, 등장인물들이 각각 다른 일자에 공개되었다. 등장인물들은 중화민국과 일본에서 점차 유명해지고 있는 "모에" 스타일으로 그려졌다. 가오슝 첩운 소녀는 일본의 인터넷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2014년에 마스코트들이 공개되기 이전에도, 타이완 철로 관리국에서는 "타이완 철도 소녀(台灣鐵道少女)"라는 이름으로 5명의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을 통해, 홍보에 "모에" 마스코트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 실버라이트의 아이자와 히카루(藍澤光)와 같이, 동아시아에서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인물을 통해 상품을 홍보하는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가오슝 첩운 소녀의 구상을 담당한 Simon사는 가오슝 첩운 소녀 이전부터 핑둥현의 국립핑둥과기대학(國立屏東科技大學) 차량공학부 홍보를 위해 만든 에어(艾兒, Air) 등의 "모에" 인물 작업을 해왔다. "앞으로! 가오슝 첩운 소녀!(前進吧!高捷少女!)"라는 이름의 홍보는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중앙통신사에 따르면, 가오슝 첩운 소녀를 통해 단 7개월 만에 약 2백만 신 대만 달러의 매출을 냈으며, 지역의 비디오 게임 회사와 일본의 출판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가오슝 첩운은 가오슝 첩운 소녀를 통한 공식 매출을 2015년 말까지 약 4백만 신 대만 달러로 집계해 발표했다. 홍보와 인기 가오슝 첩운 소녀는 가오슝 첩운의 다양한 홍보와 공식 상품들에 등장해 왔다. 여기에는 지하철 에티켓을 내용으로 한 공익광고 포스터, 등신대 패널, 타이베이 타임스로부터 "이타샤 객차"라는 반응을 얻은 가오슝 첩운 귤선에서의 일시 도장 등이 있다. 특별 객차들의 시간표는 가오슝 첩운의 웹사이트에 공지되어 매일 갱신된다. 가오슝 첩운 소녀가 등장하는 다양한 상품들이 발매되어 왔다. 여기에는 가오슝 첩운 공사와 국립핑둥과기대학의 합작으로 판매된, 네 명의 등장인물이 그려진 쇼핑백, 배낭, 부채, 엽서, 책갈피, 배지 등이 있다. 가오슝 첩운 소녀가 등장하는 라이트 노벨이 일본의 GA문고(GA文庫)에서 2015년 9월에 온라인 출판되었고, 그해 말에 인쇄가 시작되었다. 가오슝 첩운 소녀의 공식 페이스북도 있다. 타이베이 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샤오충이 등장하는 온라인 영상이 하루 만에 10,000개의 좋아요를 받았고, 댓글은 길게 이어졌다. 가오슝 첩운 공사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온라인 토론과 반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다양한 의견과 시각은 팬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발표했다. 가오슝 첩운 소녀가 등장하는 비주얼 노벨인 앞으로! 가오슝 첩운 소녀 Initiating Station(前進吧!高捷少女 Initiating Station)은 2016년 1월 30일에 중화민국에서 발매되었다. 같이 보기 가오슝 첩운 모에화 각주 외부 링크 가오슝 첩운 소녀 가오슝 첩운 공사 공식 웹사이트 Simon사 공식 웹사이트 가오슝 첩운 철도 마스코트 대만의 문화 모에화 2014년 창조된 가공인물
https://en.wikipedia.org/wiki/K.R.T.%20Girls
K.R.T. Girls
The K.R.T. Girls () are four anime-styled characters that serve as mascots for the Kaohsiung Mass Rapid Transit, a rapid transit system which covers metropolitan Kaohsiung, Taiwan. The girls consist of Sora (), who is depicted as a station worker at Yanchengpu Station; Amelia (), a half-Taiwanese, half-German girl who works as a train driver; Ann (), a train mechanic; and Nana (), a Vocaloid-powered train announcer. Drawn in the "moe" art style popular throughout the region and Japan, the first of the girls was introduced in November 2014. They have since been the focus of various promotional efforts by the metro system, through the mediums of songs, posters, merchandise, as well as social media. A light novel and visual novel featuring the girls have also been produced. Riders of the system, as well as internet commentators, have reviewed the characters positively, with many finding them to be cute. Designed to be iconic representations of animated comics, the girls have brought in revenue of NT$2 million (US$61,576) in just seven months to the KMRT through merchandising. The girls The K.R.T. Girls are composed of four mascots. By order of their date of introduction, they are: Sora, also spelled Siao Chung (), who is depicted as a station attendant at Yanchengpu Station, located on the KMRT Orange Line. She was debuted at a two-day event for independent comic and video game creators in Kaohsiung in November 2014. Her official biography lists her as being tall, with a weight of . Sora also sports a unique hair accessory, which is inspired by the famous "Dome of Light" at Formosa Boulevard Station, a station ranked one of the most beautiful in the world by Metrobits.org. Sora has a native Kaohsiung Mandarin accent, with the KMRT wanting her voice to sound "approachable" and "down to earth". Emelia, also spelled Amelia(艾米莉亞), a blonde half-Taiwanese, half-German girl who works as a train driver for the KMRT. She was revealed in December 2014 and was received positively by Taiwanese netizens. Rocket News 24 pointed out similarities between Amelia's character design and that of Atago from Kantai Collection. A life-size cut-out of the character was shown on display at Kaisyuan Station on the KMRT Red Line. Ann, also spelled Jie'er (), a "young-looking but fully grown" girl who works as a train maintenance engineer and mechanic. Nana, also spelled Nainai (), a Vocaloid-powered girl who works as a train announcer and customer service employee. Conception and creation The first of the K.R.T. Girls, Sora, debuted in early November 2014 at two-day event for independent comic and video game creators hosted in Kaohsiung. They were created through a joint effort between the transport company and a team of animated artists to promote the subway and increase revenue. Following popular and positive reception from commuters, the other characters were later revealed independently at different dates. They were created to be "iconic representations of animated comics", and, according to the n chairperson of theKaohsiung Rapid Transit Corporation, Hao Chien-sheng (), this was as the company sought only to "transport passengers to their destinations, but also aspires to be mobile platforms of cultural creativity." The characters are drawn with a "moe" art style, which is becoming increasingly popular across Taiwan and Japan. The K.R.T. Girls have been positively reviewed by Japanese netizens as well. Even before the mascots debuted in 2014, the Taiwan Railways Administration had already been incorporating "moe" mascots into its promotional efforts, through five girl characters dubbed the "Miss Taiwan Railway". This is reflective of the phenomenon to use anime-styled characters to promote products in East Asia, such as Hikaru Aizawa for Microsoft Silverlight; Simon, the company which conceptualized the K.R.T. Girls, had worked on such "moe" characters before in the past, such as Xuanying () of Pingtung County, and Air (also spelled Ai'er)(), who was created for an advocacy campaign by the Vehicle Engineering Faculty of the National Pingtu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The promotional campaign, titled "Let's Go! K.R.T. Girls!" (), has been commercially very successful. According to Focus Taiwan, the girls have brought in additional revenue of NT$2 million (US$61,576) in just the first seven months of 2015, and have also drawn the interest of a local video game firm and Japanese publishers. The KMRT has also stated that revenue from official K.R.T. Girls merchandise could reach NT$4 million by the end of 2015. Promotion and popularity The girls have featured in various promotional efforts and official merchandise of the Kaohsiung Mass Rapid Transit. This includes PSA posters for subway etiquette, lifesize cardboard cutouts, as well as being temporarily plastered over trains on the Orange Line, which has been likened to "itasha carriages" by the Taipei Times. These special carriages feature three distinct art themes to allow travelers to "interact" with the girls, and have attracted several fans and cosplayers, including ones from Japan. The timetables for the carriages are posted on the company's website and updated daily. A song featuring Sora, titled Next Station. With You () has also been released. Containing a "vibrant" and "happy" vibe, the song talks about traveling together with a loved one on board the Kaohsiung's MRT, with the Formosa Boulevard, Sizihwan, Weiwuying, and Cingpu stations being featured. Various products featuring the K.R.T. Girls have been released. These include objects such as shopping bags, backpacks, fans, postcards, bookmarks and badges with images of the four fictional women, which have been sold in collaboration between the metro operator and the National Pingtu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A serial light novel featuring the K.R.T. Girls has been published online by GA Bunko in Japanese since September 2015, with printing beginning at the end of the year. There is also an official Facebook page for the girls. As reported by the Taipei Times, an online video featuring Sora had amassed more than 10,000 Facebook likes in one day, as well as generating a long discussion thread. The Kaohsiung Rapid Transit Corporation said that it considers online discourse and responses about the characters to be positive, as different opinions and perspectives allow them to better understand their fanbase. A visual novel featuring the K.R.T. Girls, titled Let's Go! K.R.T. Girls Initiating Station () was released on January 30 in Taiwan. A song album, titled K.R.T. Girls Character Image Songs Station.1 () has also been released. A sequel, Station.2, was released on January 27, 2018. References External links Official Facebook page of the K.R.T. Girls Official introduction page of the K.R.T. Girls Kaohsiung Metro Female characters in advertising Child characters in advertising Mascots introduced in 2014 Fictional quartets Moe anthropomorphism
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B%A6%AC%EC%8A%A4%ED%83%80%20%EB%B3%BC%ED%94%84
크리스타 볼프
크리스타 볼프(1929년 3월 18일 바르타 강의 란츠베르크에서 출생, 2011년 12월 1일 베를린에서 사망) 독일의 여성 작가이다. 그녀는 동독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에 속한다. 작품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삶 정치적인 삶과 문학 논쟁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는 1965년 12월 말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중앙위원회의 제 11차 총회 (혹은 칼슐락회의(Kahlschlagplenum))에서 새로운 제한적인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일한 연설가로 입장을 표명했다. 그 밖에도 그녀는 후에 금지된 베르너 브로이니히(Werner Bräunig)의 비스무트(동독의 광산 기업)-소설 『광장』(Rummelplatz)을 결연하게 옹호했다. 노이에 도이체 리터라투어(Neue Deutsche Literatur)에서 미리 이루어진 이 소설의 발췌본의 발표는 당 수뇌부 내부에 분개를 불러일으켰다: “나의 의견으로는 노이에 도이체 리터라투어에 실린 이러한 발췌본은 그가 비난 받은 것처럼 반사회주의적인 태도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를 나의 양심과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1968년 그녀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CSSR)이 소련 측에서 설 때에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 밝히지만, 다시 한 번 작가협회에 군사 진입에 대한 동의 선언을 거절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정치 권력 기구와의 심각한 갈등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크리스타 볼프는 1989년 11월 4일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에서의 동독의 정치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연설한 연설자 중 한 명이었다. 1989년 11월과 12월에 그녀는 그녀의 많은 작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동독의 해체 혹은 붕괴가 일어날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몇몇의 동독 지식인들처럼 다른 지도부 하에서 가능한 사회주의 개혁을 지지했다. 1989년 11월 26일, 그녀는 “우리 나라를 위하여”라는 성명에서 동독의 편에 서고 “우리의 물질적 및 도덕적 가치의 저가 판매”에 대해서 반대했다. 크리스타 볼프는 이 시기에 동독에서의 변화가 국가 존재의 안정화로 여겨져서는 안되고 “사회주의의 발전”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취임하며 도입한 “전환”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이는 유턴의 의미, 반동적 복구의 의미 혹은 서구로 가려는 전환의 의미의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타 볼프는 도리어 “시대적인 전환”을 말했다. 1993년 1월 21일, 크리스타 볼프는 독일 신문 아우스쿤프트(Auskunft)의 기사에서 그녀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동독의 국가 안전부(슈타지)에서 “비공식적 협력자 마르가레타(IM Margareta)”라는 명칭을 가졌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녀는 세 개의 보고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들은 물론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 오직 긍정적인 모습만을 묘사했다. 이에 상응하여 국가 안전부는 1962년 내부 기록에서 볼프의 “자제”에 대해 불평하고 그녀의 협업을 종료시켰다. 결과적으로 이 작가는 남편과 함께 – 또한 공식적 노선에서 이탈한 견해들을 밝혔다는 맥락에서도 – “표리부동한 사람”이라는 작전명으로서 상세하게 염탐되었다. 이는 1989년 동독의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왜 동독에 남아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그녀는 2010년에, 자신의 독자들이 거기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볼프에 대해 이러한 사실들이 발표되면서 그녀의 소설, 『남은 것』(Was bleibt)에 대한 비판은 소위 문학 논쟁을 촉발하였다. 많은 매체에서 그녀는 국가 안전부(슈타지) 참여를 이유로 가혹하게 비판 받았다. 부당하게도 그 당시의 사회적 맥락도 따지지 않고, 사소한 활동이었다는 점도 무시되고, 42개의 기록들로 문서화 된 오랜 자기 감시였다는 사실도 고려되지 않고 일어난 일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혼란을 일으켰던 것은, 뮌헨 기사련(CSU)이 시의회가 1987년 그녀의 책 『원전사고』 (Störfall) 에 수여되었던 게슈비스터-숄-상(Geschwister-Scholl-Preis)을 작가로부터 다시 박탈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었다. 이 수상 철회는 한스와 소피 숄(Hans und Sophie Scholl)의 손위 누이인 잉에 아이허-숄(Inge Aicher-Scholl)의 적극적 개입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마녀 사냥으로 여겼고,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열망했다는 사실과 그녀의 동독에서의 삶 때문에 부당하게 처분 당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동독에서의 억압과 비교했다. 1992년과 1993년에, 크리스타 볼프는 오랜 시간 동안 미국에 가 있었다. 그녀는 정치적 공론장으로부터 한 발 물러났고, 심한 병에 걸렸는데, 이는 그녀의 소설 『몸앓이』(Leibhaftig) 등에 기록되어 있다. 미디어의 비난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 1993년에 그녀는 그녀의 비공식적 협력자-문서(IM-Akte) 전부를 『크리스타 볼프 서류 열람, 요술 거울과 대화, 하나의 기록』(Akteneinsicht Christa Wolf. Zerrspiegel und Dialog. Eine Dokument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슈타지와 협력을 한 이후에 그녀는 그 잘 알려진 (비판적인) 문학 작품들을 썼다는 점이 밝혀진다. 그녀의 미국 체류 생활을 소재로 하여 볼프는 2010년에 작품 『천사의 도시 혹은 프로이트 박사의 외투』(Stadt der Engel oder The Overcoat of Dr. Freud)를 출판했다. 그녀는 그녀의 통일 이후 경험,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그녀의 원칙적 충실함, 흑인의 고통 혹은 이라크 전쟁과 같은 자본주의의 결과에 대한 그녀의 경악을 반영하였다. 이러한 격동적인 역사적, 개인적 경험을 배경으로 그녀의 작품의 중심이 되는 유토피아적 글쓰기에 철저한 천착이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그녀는 그녀의 슈타지 활동 기록 출판에 몰두하였다. 그녀는 『크리스타 테에 대한 추념』(Nachdenken über Christa T)을 계기로 치열한 비판을 밀고와 비교했는데, 나중에 태도를 바꾸었다. 볼프는 “자신의 고통도, 자신이 행한 염탐 행위의 무게도” 과대평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29년 출생 2011년 사망 동독의 작가 독일의 문학 평론가 독일의 수필가 예나 대학교 동문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게오르크 뷔히너상 수상자 20세기 수필가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a%20Wolf
Christa Wolf
Christa Wolf (; Ihlenfeld; 18 March 1929 – 1 December 2011) was a German novelist and essayist. She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mportant writers to emerge from the former East Germany. Biography Wolf was born the daughter of Otto and Herta Ihlenfeld, in Landsberg an der Warthe, then in the Province of Brandenburg. (The city is now Gorzów Wielkopolski, Poland.) After World War II, her family, being Germans, were expelled from their home on what had become Polish territory. They crossed the new Oder-Neisse border in 1945 and settled in Mecklenburg, in what would become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or East Germany. She studied literature at the University of Jena and the University of Leipzig. After her graduation, she worked for the German Writers' Union and became an editor for a publishing company. While working as an editor for publishing companies Verlag Neues Leben and Mitteldeutscher Verlag and as a literary critic for the journal Neue deutsche Literatur, Wolf was provided contact with antifascists and Communists, many of whom had either returned from exile or from imprisonment in concentration camps. Her writings discuss political, economic, and scientific power, making her an influential spokesperson in East and West Germany during post-World War II for the empowerment of individuals to be active within the industrialized and patriarchal society. She joined the Socialist Unity Party of Germany (SED) in 1949 and left it in June 1989, six months before the Communist regime collapsed. She was a candidate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SED from 1963 to 1967. Stasi records found in 1993 showed that she worked as an informant (Inoffizieller Mitarbeiter) during the years 1959–61. Stasi officers criticized what they called her "reticence", and they lost interest in her cooperation. She was herself then closely monitored for nearly 30 years. During the Cold War, Wolf was openly critical of the leadership of the GDR, but she maintained a loyalty to the values of socialism and opposed German reunification. In 1961, she published Moskauer Novelle (Moscow Novella). Wolf's breakthrough as a writer came in 1963 with the publication of Der geteilte Himmel (Divided Heaven, They Divided the Sky). Her subsequent works included Nachdenken über Christa T. (The Quest for Christa T., 1968), Kindheitsmuster (Patterns of Childhood, 1976), Kein Ort. Nirgends (No Place on Earth, 1979), Kassandra (Cassandra, 1983), Störfall (Accident, 1987), Auf dem Weg nach Tabou (On the Way to Taboo, 1994), Medea (1996), and Stadt der Engel oder The Overcoat of Dr. Freud (City of Angels or The Overcoat of Dr. Freud, 2010). Christa T was a work that — while briefly touching on a disconnection from one's family's ancestral home – was primarily concerned with the experiences of a woman feeling overwhelming societal pressure to conform. Kassandra is perhaps Wolf's most important book, re-interpreting the battle of Troy as a war for economic power and a shift from a matriarchal to a patriarchal society. Was bleibt (What Remains), described her life under Stasi surveillance, was written in 1979, but not published until 1990. Auf dem Weg nach Tabou (1995; translated as Parting from Phantoms) gathered essays, speeches, and letters written during the four years following the reunification of Germany. Leibhaftig (2002) describes a woman struggling with life and death in 1980s East-German hospital, while awaiting medicine from the West. Central themes in her work are German fascism, humanity, feminism, and self-discovery. In many of her works, Wolf uses illness as a metaphor. In a speech addressed to the Deutsche Krebsgesellschaft (German Cancer Society) she says, "How we choose to speak or not to speak about illnesses such as cancer mirrors our misgivings about society." In "Nachdenken über Christa T." (The Quest for Christa T), the protagonist dies of leukemia. This work demonstrates the dangers and consequences that happen to an individual when they internalize society's contradictions. In Accident, the narrator's brother is undergoing surgery to remove a brain tumor a few days after the Chernobyl nuclear disaster had occurred. In 2004, she edited and published her correspondence with her UK-based near namesake Charlotte Wolff over the years 1983–1986 (Wolf, Christa and Wolff, Charlotte (2004) Ja, unsere Kreise berühren sich: Briefe, Luchterhand Munich). Wolf died 1 December 2011, aged 82, in Berlin, where she had lived with her husband, . She was buried on 13 December 2011 in Berlin's Dorotheenstadt cemetery. In 2018, the city of Berlin designated her grave as an Ehrengrab. Reception Although Wolf's works were widely praised in both Germanys in the 1970s and 1980s, they have sometimes been seen as controversial since German reunification. William Dalrymple wrote that in East Germany "writers such as Christa Wolf became irrelevant overnight once the Berlin Wall was broached". Upon publication of Was bleibt, West German critics such as Frank Schirrmacher argued that Wolf failed to criticize the authoritarianism of the East German Communist regime, whilst others called her works "moralistic". Defenders have recognized Wolf's role in establishing a distinctly East German literary voice. Fausto Cercignani's study of Wolf's earlier novels and essays on her later works have helped promote awareness of her narrative gifts, irrespective of her political and personal ups and downs. The emphasis placed by Cercignani on Christa Wolf's heroism has opened the way to subsequent studies in this direction. Wolf received the Heinrich Mann Prize in 1963, the Georg Büchner Prize in 1980, and the Schiller Memorial Prize in 1983, the Geschwister-Scholl-Preis in 1987, as well as other national and international awards. After the German reunification, Wolf received further awards: in 1999 she was awarded the Elisabeth Langgässer Prize and the Nelly Sachs Literature Prize. Wolf became the first recipient of the Deutscher Bücherpreis (German Book Prize) in 2002 for her lifetime achievement. In 2010, Wolf was awarded the Großer Literaturpreis der Bayerischen Akademie der Schönen Künste. Bibliography Books Moskauer Novelle (1961) Der geteilte Himmel (1963). Translated as Divided Heaven by Joan Becker (1965); later as They Divided the Sky by Luise von Flotow (2013). Nachdenken über Christa T. (1968). The Quest for Christa T., trans. Christopher Middleton (1970). Till Eulenspiegel. Erzählung für den Film. (1972). With Gerhard Wolf. Kindheitsmuster (1976), translated as Patterns of Childhood (1980) by Ursule Molinaro and Hedwig Rappolt. Kein Ort. Nirgends. (1979). No Place on Earth, trans. Jan van Heurck (1982). Neue Lebensansichten eines Katers (1981) Kassandra. Vier Vorlesungen. Eine Erzählung. (1983). Cassandra: A Novel and Four Essays, trans. Jan van Heurck (1984). Störfall. Nachrichten eines Tages. (1987). Accident: A Day's News, trans. Heike Schwarzbauer and Rick Takvorian (1989). Sommerstück (1989) Was bleibt (1990). What Remains, trans. Martin Chalmers (1990); as well as What Remains and Other Stories, trans. Heike Schwarzbauer and Rick Takvorian (1993). Medea (1996). Trans. John Cullen (1998). Leibhaftig (2002). In the Flesh, trans. John Smith Barrett (2005). Stadt der Engel oder The Overcoat of Dr. Freud (2010). City of Angels or, The Overcoat of Dr. Freud, trans. Damion Searls (2013). August (2012). Trans. Katy Derbyshire (2014). Nachruf auf Lebende. Die Flucht. (2014) Anthologies Lesen und Schreiben. Aufsätze und Betrachtungen (1972). The Reader and the Writer, trans. Joan Becker (1977). The Fourth Dimension: Interviews with Christa Wolf (1988). Trans. Hilary Pilkington The Author's Dimension: Selected Essays (1993). Trans. Jan van Heurck. Auf dem Weg nach Tabou. Texte 1990–1994 (1994). Parting from Phantoms, trans. Jan van Heurck (1997). Ein Tag im Jahr. 1960–2000 (2003). One Day a Year, trans. Lowell A. Bangerter (2007) Further reading References External links Christa Wolf: Biography at FemBio – Notable Women International The quest for Christa Wolf an interview with Hanns-Bruno Kammertöns and Stephan Lebert about private chats with Honecker, a German society in check mate, the influence of Goethe, the shortcomings of Brecht, and the lasting effects of Utopia at signandsight.com. 1929 births 2011 deaths People from Gorzów Wielkopolski Writers from the Province of Brandenburg East German writers East German literature Candidate members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Socialist Unity Party of Germany German literary critics German women literary critics German essayists University of Jena alumni Leipzig University alumni Recipients of the National Prize of East Germany Heinrich Mann Prize winners Schiller Memorial Prize winners Georg Büchner Prize winners German women novelists German women essayists Communist women writers 20th-century German novelists 20th-century German women writers 20th-century essayists People of the Stasi East German women World War II refugees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A5%BC%EB%A6%AC%EB%84%88%20%EC%95%99%EC%83%81%EB%B8%94
베를리너 앙상블
베를리너 앙상블()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위치한 가장 유명한 극장 중 하나이다. 베를리너 앙상블은 설립자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작품들의 공연을 통해 유명해졌고, 독일어권 연극을 위한 중요한 극장 중 하나이다. 1954년부터 미테(Mitte 구)의 한 구역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슈타트(Friedrich-Wilhelm-Stadt)에 있는 쉬프바우어담 극장(Das Theater am Schiffbauerdamm)은 베를리너 앙상블의 공연 장소이다. 역사 베를리너 앙상블은 브레히트 자신과 아내인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이 독일에서 전후 새로운 활동을 위해 설립(1949년 11월)하였으며, 이의 설립은 구 소련의 점령 지대, 즉 훗날 동독에서의 공산주의 정치인들이 동베를린에서 일류 문화 활동 분야의 구축을 보기 위해 했던 노력과 관련이 있다. 브레히트는 미국에서의 아픈 경험들(1947년 10월 30일, 비미 활동 위원회 앞에서의 심문)과 스위스에서의 엄격한 개인 감시를 겪은 이후에 동베를린에서 매우 환영받았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서신들과 유고들에 따르면 앙상블의 설립은 지금까지 받아들여졌던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도이체스 테아터(Deutsches Theater)는 1949년부터 1954년까지의 베를리너 앙상블의 "객연"에 대해 까다롭게 굴면서 받아주었고, 당시의 도이체스 테아터의 극장장인 볼프강 랑호프(Wolfgang Langhoff)는 금방 퇴실을 촉구했다. 앙상블은 대체로 1949년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의 연극 초연에 참여했던 배우들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1954년 3월 19일부터 앙상블은 자신의 건물인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공연했다. 1953년에 나온 브레히트의 아이디어에 따라 1959년에 다양한 "작업반"들이 만들어졌는데, 이 작업반들은 베를리너 앙상블에서의 연극작업을 예술적이고 사회적으로 이끌어가야 했는데, 특히 "연극 이론을 위한 작업반", "스튜디오 작업반" 그리고 "청중과 함께하는 작업을 위한 작업반"이 그 주된 작업반들이었다. 앙상블의 작업에는 실제로 브레히트가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연출가이자 작가로서 극장을 그 자신의 극장으로 만들었다.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장막 위에 그려져 있었다. 브레히트의 탁월한 명성 덕분에 앙상블은 국내와 해외에서 종종 객연 요청을 받았고, 그래서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이탈리아에도 갔었다. 런던으로의 객연여행을 준비하던 중에 브레히트는 사망했다. 서사극과 공동작업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의 아내인 헬레네 바이겔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그녀는 설립에서부터 1971년 사망할 때까지 베를리너 앙상블의 극장장이었다. 만프레트 베크베르트(Manfred Wekwerth), 페터 팔리치(Peter Palitzsch), 이조트 킬리안(Isot Kilian) 그리고 요아힘 텐셔트(Joachim Tenschert) 와 같은 조연출들은 브레히트의 가르침을 받았었는데, 브레히트의 사후에는 공동으로 배우들과 함께 그 일을 이어나갔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 파울 데사우(Paul Dessau)를 남편으로 둔 루트 베르크하우스(Ruth Bergaus)가 극장장으로서 헬레네 바이겔의 뒤를 이었다. 실험적인 극도 무대에 올리기 위한 그녀의 시도는 앙상블과 공중에게 저항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마침내 그녀는 사퇴했다. 루트 베르크하우스는 1977년에 만프레트 베크베르트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그는 그 극장을 1991년까지 운영했다. 이 다음해부터는 조직적인 부분에서 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견의 여지가 있는 "공동체 극장주"에 의해서 관리되었는데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마티아스 랑호프(Matthias Langhoff), 프리츠 마르쿠바트(Fritz Marquardt), 페터 팔리취(Peter Palitzsch), 페터 차데크(Peter Zadek),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에 의해 관리되었고, 1993년부터 1994년까지는 마르쿠바트, 팔리치, 차데크, 뮐러, 1994년부터 1995년까지는 마르쿠바트, 팔리취, 뮐러, 1995년에는 뮐러, 1996년에는 마틴 부트케(Martin Wuttke), 그리고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슈테판 주슈케(Stephan Suschke)가 뒤를 이었다. 2000년 1월 8일에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브레히트 감시에 관한 작품인 《브레히트 문건》(Die Brecht-Akte)을 상연하며 극장장인 클라우스 페이만(Claus Peymann)의 감독하에서 개축 작업을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열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2017년까지 극장장이자 주 운영주였다. 2017년과 2018년도 공연 기간 이후부터 올리버 리세(Oliver Reese)가 베를리너 앙상블의 새로운 극장장이며, 그는 선도그룹과 함께 이 극장을 운영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미하엘 탈하이머(Michael Thalheimer)가 주 감독에 속한다. 올리버 리세의 첫 상영 기간 개시로 안투 호메루 누느스(Antú Romero Nunes)가 알베르 카뮈의 《칼리굴라》(Caligula)를 연출했다. 초연은 2017년 9월 21일이었다. 베를리너 앙상블이라는 배경으로 유명하고도 창조적인 많은 예술가들이 작업을 했었다. 사진사인 루트 베를라우(Ruth Berlau)는 무대장면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견본책들로서 출판되었다. 무대 장치가였던 카를 폰 압펜(Karl von Appen)은 오랜 기간 까다로운 무대장치와 연극 포스터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빌란트 헤르츠펠데(Wieland Herzfelde), 카를하인츠 드레셔(Karl-Heinz Drescher)도 또한 무대와 연극 포스터로 유명했었다. 베를리너 앙상블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한 관용적인 표현법을 만들어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이름은 배우들과 협력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연극극단을 의미했지만, 베를리너 앙상블은 사실 항상 그 극장 건물과 동일시된다. 베를리너 앙상블이 활동하는 극장은 쉬프바우어담 극장이다. 그 건물은 일제 홀차펠 재단(Ilse-Holzapfel-Stiftung)의 소유물인데, 이 재단은 롤프 호크후트(Rolf Hochhuth)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그 건물을 베를린 주에게 임대해준다. 연극 극단은 오늘날 유한책임회사의 법적 형태인 자본회사로서 운영되며, 주 운영주는 올리버 리세이다. 그는 토지의 전차인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에 대한 이용권을 갖는다. 베를린의 극장 베를린의 단체 미테구의 건축물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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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liner Ensemble
The Berliner Ensemble () is a German theatre company established by actress Helene Weigel and her husband, playwright Bertolt Brecht, in January 1949 in East Berlin. In the time after Brecht's exile, the company first worked at Wolfgang Langhoff's Deutsches Theater and in 1954 moved to the Theater am Schiffbauerdamm, built in 1892, that was open for the 1928 premiere of The Threepenny Opera (Die Dreigroschenoper). Bertolt Brecht's Berliner Ensemble Brecht's students Benno Besson, Egon Monk, Peter Palitzsch, and Manfred Wekwerth were given the opportunity to direct plays by Brecht that had not yet been staged. The stage designers Caspar Neher and Karl von Appen, the composers Paul Dessau and Hanns Eisler, as well as the dramaturge Elisabeth Hauptmann, were among Brecht's closest collaborators. After her husband died in 1956, Weigel continued managing the Berliner Ensemble until her death in 1971. The Berliner Ensemble achieved success through long and meticulous rehearsals, often spanning several months. Each production was documented with a Modellbuch, or preview album, containing 600 to 800 action photographs. The scenic designer Hainer Hill was among the photographers. Die Dreigroschenoper and Happy End premiered in Berlin in 1928 and 1929 respectively, both at the Schiffbauerdamm Theatre, but twenty years before the founding of the Berliner Ensemble. Brecht wrote no new plays for the Berliner Ensemble, but remounted previously staged plays, premiering with 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 in 1949. He also directed The Caucasian Chalk Circle, and with Erich Engel, Life of Galileo. After Brecht's death, 3 plays, The Resistible Rise of Arturo Ui, Schweik in the Second World War, and The Visions of Simone Machard, had their premieres with the Ensemble. Post- Brechtian Berliner Ensemble Under the management of Helene Weigel's successor Ruth Berghaus, the company expanded its selection to that of other European playwrights in the 1970s. Major German actors, including Therese Giehse, Lionel Steckel, and Ernst Busch, appeared in Berliner productions. After German reunification, major changes took place at the theatre: in 1992, the Berlin Senate appointed a collective of five stage directors to serve as Intendanten (General Administrators): Peter Zadek, Peter Palitzsch, Heiner Müller, Fritz Marquardt, and Matthias Langhoff. In that same year, the internationally renowned conductor Alexander Frey was appointed music director of the Berliner Ensemble. Frey was the first American to hold a position at the Berliner Ensemble, as well as being the theatre's first non-German music director; his historic predecessors in that position include the composers Kurt Weill, Hanns Eisler, and Paul Dessau. Under the new artistic management, the Berliner Ensemble changed from a state-owned theatre into a Gesellschaft mit beschränkter Haftung (limited liability company) subsidized by the city government. In 1993, the theatre company was privatized, but continued to receive $16 million in subsidy. Nevertheless, the idea of a joint administration proved a failure and the board of managers finally broke up in 1995, leaving only Heiner Müller. The quarrels, however, did not affect the artistic development of the ensemble: Young directors, including B.K. Tragelehn and Einar Schleef, and the stage designer Andreas Reinhardt, questioned the traditions of Brechtian theatre and introduced more contemporary theatre styles. Müller's production of Brecht's The Resistible Rise of Arturo Ui, with Martin Wuttke playing the title role, became one of the most successful in the history of the Berliner Ensemble. His program Brecht – Müller – Shakespeare remains their guiding legacy. The American director Robert Wilson premiered Brecht's The Flight across the Ocean in 1998 to honour the hundredth anniversary of Brecht's birth. On 30 April 1999, the curtain came down on the final production of Heiner Müller's Die Bauern, an early end to the theatre's season that also marked the preliminary end of the ensemble. After Müller had died in December 1995, the difficult decision about who would manage this highly symbolic cultural institution was now exacerbated by another problem: the theatre building itself was in the process of being bought by a nonprofit foundation in the hands of dramatist Rolf Hochhuth, who seemed to have his own plans for the theatre. After the City of Berlin negotiated a settlement to everyone's satisfaction, the search for a new administration began. Claus Peymann, the provocative and successful manager of the Burgtheater in Vienna, was finally appointed to the position and reopened the theatre in January 2000, after extensive renovations were completed. Peymann's efforts have stabilized the theatre's operations. He assumed his role with a commitment - like Brecht's - to producing political theatre for the public, but more broadly interpreted. In 2019, it was announced that an annex to Das Theater am Schiffbauerdamm would be built in autumn of that year, giving the theatre a second, fully equipped auditorium for the first time. Notable members Curt Bois Ernst Busch Angelica Domröse Erwin Geschonneck Therese Giehse Jürgen Holtz Gisela May Ingrid Pitt Ekkehard Schall Heinz Schubert Helene Weigel References External links Theatre companies in Germany Theatres in Berlin Buildings and structures in Mitte Organisations based in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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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리조
앤서니 빈센트 리조(Anthony Vincent Rizzo, 1989년 8월 8일 ~ )는 미국의 야구 선수이며, 현재 뉴욕 양키스의 주전 1루수를 맡고 있다. 아마추어 경력 앤서니 리조는 플로리다주의 마조리 스톤맨 더글라스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본인은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교를 진학하려고 했지만, 2007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6라운드로 보스턴 레드삭스에 지명을 받게 되었고, 32만 5천 달러의 사이닝 보너스를 받고 레드삭스에 입단하게 된다. 선수 경력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11년 2010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이너 리그에서 활약하던 리조는 그 해 12월 6일에 케이시 켈리, 레이몬드 푸엔테스와 함께 아드리안 곤살레스를 상대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후 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산하 트리플 A팀인 투손 파드리스에서 활약하였고, 93경기에 출장하여 0.332의 타율과 26개의 홈런, 그리고 101개의 타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6월 9일에 열린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경기를 포함해 49경기에 출장하여 0.141의 타율과 1개의 홈런, 그리고 9개의 타점을 기록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카고 컵스 2012년 2011년 시즌 종료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새로운 1루수인 욘데르 알론소를 영입하면서 리조의 자리가 애매해졌고, 결국 2012년 1월 6일에 잭 케이츠함께 앤드류 캐시너와 나경민을 상대로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후 리조는 시카고 컵스의 산하 트리플A 팀인 아이오와 컵스에서 시즌을 시작하였고, 6월 26일에 메이저리그로 콜업 되기 전까지 0.342의 타율과 23개의 홈런 그리고 62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메이저리그에 콜업된 그는 7월에만 7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내셔널 리그 이달의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이후에는 메이저리그에서 남은 시즌을 소화하였고, 87경기에 출장하여 0.285의 타율과 15개의 홈런, 그리고 48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2013년 2013년 시즌이 진행 중이었던 5월 16일에 리조는 소속팀인 시카고 컵스와 7년 4100만 달러의 연장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계약은 팀의 클럽 옵션 실행 여부에 따라 최대 9년 7300만 달러까지 규모가 확장될 수 있는 계약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 해에 160경기에 출장하여 0.233의 타율과 23개의 홈런 그리고 80 타점을 기록하였다. 2014년 2014년 시즌 개막 후 전반기에 93경기에 출장하여 0.275의 타율과 20개의 홈런, 그리고 49개의 타점을 기록하였고,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팀 동료인 스탈린 카스트로와 함께 내셔널 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또한 어린 선수들에게 강력한 롤모델이 되어준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 브랜치 리키상을 24살의 나이로 수상하면서,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을 경신하였다. 이 시즌에는 140경기에 출장하여 0.286의 타율과 32홈런 78개의 타점을 기록하였고, 그 결과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10위를 차지하였다. 2015년 2015년에도 전반기에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내셔널 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8일에 마이클 와카를 상대로 개인 통산 100홈런과 300타점을 돌파하였다. 이 시즌에는 160경기에 출장하여 0.278의 타율과 31개의 홈런, 그리고 101개의 타점을 기록하는 등 시카고 컵스의 타선을 이끌었고, 시즌 종료 후에는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4위에 선정되였다. 2016년 2016년 시즌에는 전반기에 84경기에 출장하는 동안 21개의 홈런과 63개의 타점을 기록하였고, 내셔널 리그 올스타 투표에서 팬 최다 득표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이 시즌에는 155경기에 출장하여 0.292의 타율과 32개의 홈런과 109개의 타점을 기록하는 등 작년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팀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0.067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부진하였지만, 이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월드 시리즈에서 3할 2푼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팀은 월드 시리즈에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우승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108년 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이며 내셔널 리그 골드글러브와 실버슬러거를 동시에 차지하였다. 또한 그해 리그에서 가장 뛰어났던 수비수에게 선정하는 플래티넘글러브를 수상하였다. 2017년 2017년 시즌 개막 후 팀 타선이 부진하면서 주로 배치되던 타순인 3번이나 4번 외에도 팀의 리드 오프로도 14경기에 출장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즌에 157경기에 출장하여 0.273의 타율과 32개의 홈런, 그리고 109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0.135의 타율과 1개의 홈런 만을 기록하는 등 전체적으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즌 종료 후에는 그가 자선 활동을 통해 소아암 치료 연구에 힘쓴 점을 인정 받아 메이저리그의 사회봉사 공로 상인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2018년 시즌 개막 후인 4월 10일에 등 부상을 당하면 개인 통산 첫 부상자 명단에 등록되었다. 또한 7월 23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조 매든이 9회 투 아웃 상황에 리조를 투수로 기용하면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 처음으로 투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상대 타자였던 A.J. 폴록을 중견수 뜬 공으로 잡아내면서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 시즌에는 153경기에 출장하여 0.283의 타율과 25홈런 그리고 101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또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프레디 프리먼과의 경쟁 끝에 개인 통산 두 번째 내셔널 리그 골드글러브를 수상하였다. 2019년 2019년 5월 6일에 열린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기록하면서 개인 통산 200홈런을 달성하였다. 이 시즌에 146경기에 출정하는 동안 0.293의 타율과 27개의 홈런과 94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또한 시즌 종료 후에는 통산 3번째 내셔널 리그 골드글러브를 수상하였다. 2020년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치러진 60경기 단축 시즌이 진행되었고, 그는 이 중 58경기에 출장하여 0.222의 타율과 11개의 홈런과 24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또한 시즌 종료 후에는 개인 통산 4번째 내셔널 리그 골드글러브 1루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2021년 2021년 개막 후 92경기에 출장하여 0.248의 타율과 14개의 홈런, 그리고 40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특히 4월 28일에 열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0:10으로 뒤진 7회 말 노아웃 상황에서 개인 통산 두 번째 투수 등판 기회를 가졌고,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를 볼넷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요한 카마르고와 프레디 프리먼을 각각 1루수 앞 땅볼과 삼진 아웃으로 잡아낸 후 맷 더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29일에 알렉산더 비즈카이노와 케빈 알칸타라를 상대로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뉴욕 양키스 2021년 트레이드 발표 후 바로 다음 날인 7월 30일에 열린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뉴욕 양키스 선수로서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를 포함한 2경기에서 5타수 4안타 2홈런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부상자 명단에 등재되기도 하였지만, 이후에는 큰 문제 없이 시즌을 소화하였다. 그 결과 양키스 이적 후 49경기에 출장하여 0.249의 타율과 8개의 홈런 그리고 21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정규시즌 종료 후 치러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에서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였지만 팀은 2:6으로 패배하고 만다. 시즌 종료 후 그는 FA 자격을 취득하였다. 2022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취득하였고, 2022년 3월 17일에 뉴욕 양키스와 2년 3200만 달러에 1년차 시즌 후 옵트 아웃 조항(잔여 연봉을 포기하고 다시 FA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조항)을 포함한 계약을 체결하면서 팀에 잔류하였다. 이 시즌에는 130경기에 출장하는 동안 0.224의 타율과 32개의 홈런 그리고 75개의 타점을 기록하였다. 또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후에도 0.276의 타율과 2홈런과 8개의 타점을 기록하는 등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팀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4연패를 당하며 탈락하게 된다. 시즌 종료 후 옵트 아웃 조항을 실행하면서 다시 FA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고, 2022년 12월 15일에 2년 3400만 달러에 팀 옵션(2년 차 시즌 종료 후 원소속팀이 팀 옵션 실행 시 계약이 1년 자동 연장, 또한 원소속팀이 이를 거부할 시 선수에게 600만 달러의 바이아웃 지급 후 방출)을 포함한 계약을 체결하면서 양키스에 잔류하게 되었다. 국제 대회 경력 앤서니 리조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으로, 이러한 혈통을 바탕으로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이탈리아 야구 국가대표팀 신분으로 대회에 참가하였다. 수상 경력 내셔널 리그 골드글러브 1루수 부문 4회 (2016년, 2018년, 2019년, 2020년) 내셔널 리그 실버슬러거 1루수 부문 1회 (2016년) 내셔널 리그 올스타 3회 (2014년, 2015년, 2016년) 내셔널 리그 플래티넘 글러브 1회 (2016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1회 (2017년) 연도별 성적 연도별 타격 성적 2022년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별 투구 성적 198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시카고 컵스 선수 플로리다주 출신 야구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내야수 내셔널 리그 올스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선수 뉴욕 양키스 선수 실버 슬러거 상 수상자 골드글러브 수상자 이탈리아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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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ny Rizzo
Anthony Vincent Rizzo (born August 8, 1989) is an American professional baseball first baseman for the New York Yankees of Major League Baseball (MLB). He has previously played in MLB for the San Diego Padres and Chicago Cubs. He is a three-time All-Star. Through his philanthropic ventures, he is a regular finalist for the Heart and Hustle award. Rizzo was selected by the Boston Red Sox in the sixth round of the 2007 MLB draft and became a top minor league prospect in the Red Sox organization. He was traded to the San Diego Padres after the 2010 season along with three other prospects in exchange for All-Star first baseman Adrián González. He made his MLB debut in 2011 with San Diego. After being traded to the Cubs in 2012, he developed into an All-Star player, appearing in the All-Star Game three consecutive times, from 2014 through 2016. Among Rizzo's other accolades include winning the Silver Slugger Award, Gold Glove Award, Roberto Clemente Award, and winning a World Series title with the Cubs in 2016. The Cubs traded him to the Yankees during the 2021 season, with whom he signed a two-year contract, with a club option for a third year, following the 2022 season as a free agent. Professional career Boston Red Sox Rizzo was a sixth-round draft choice out of Marjory Stoneman Douglas High School in Parkland, Florida in the 2007 Major League Baseball draft by the Red Sox. He was heading for Florida Atlantic University before he was drafted and signed, with a $325,000 signing bonus. Rizzo played in the Red Sox organization with the Gulf Coast League Red Sox, Greenville Drive, Salem Red Sox and the Portland Sea Dogs. Rizzo’s minor league career started at the age of 17 in 2007 in the rookie class with the Gulf Coast League Red Sox. In only 21 at bats he hit .286/.375/.429 with 1 home run and 3 RBIs. In 2008 at the age of 18 Rizzo played in class A with the Greenville Drive in the South Atlantic League. In 83 at bats he hit .373/.402/.446 with 0 home runs, and 11 RBIs. Rizzo hit 12 home runs in 2009. In 2010, he hit a combined .260 with an on-base percentage (OBP) of .334 and a slugging percentage (SLG) of .480 along with 42 doubles, 25 home runs and 100 RBIs between stops at High-A Salem and Double-A Portland. Rizzo credited the easing of his swing and making better use of his legs for his power surge. San Diego Padres On December 6, 2010, Rizzo was traded along with Casey Kelly, Reymond Fuentes, and Eric Patterson to the Padres for three-time All-Star first baseman Adrián González. Rizzo was considered the third best prospect (Kelly was #1) and the best power-hitting prospect in the Red Sox organization. Kevin Boles, Rizzo's manager at Salem, also previously managed González in the minors. Boles said, "Rizzo reminds me a lot of Adrián González ... Rizzo is a bigger kid and has a little more power, Adrian is a little more of a contact hitter, but they had very similar styles of play ... We thought very highly of Anthony Rizzo. He's going to be a heck of a player." Padres General Manager Jed Hoyer expected either Rizzo or Kyle Blanks to eventually be the Padres major league starting first baseman. The Padres invited Rizzo as a non-roster player to their major league camp for 2011 Spring training. He started the 2011 season in Triple-A with the Tucson Padres. In his first 15 games, Rizzo hit .452 with six home runs and 24 RBIs. In May 2011, The San Diego Union-Tribune wrote that Rizzo's debut in the Major Leagues might be delayed by the Padres despite the club's hitting deficiencies due to cost considerations created by the "Super Two" exception for salary arbitration eligibility. The team cited Rizzo's lack of experience above Double-A and his limited exposure to left-handed pitching as benefits of his continuing to play in Tucson. Rizzo was called up to the majors after hitting .365 with an OPS of 1.159 along with 16 home runs and 63 RBI in 200 at-bats over 52 games in Tucson. The San Diego Union-Tribune called Rizzo "the most celebrated Padres call-up" since Roberto Alomar debuted with the team in 1988. Rizzo's promotion was prompted by the Padres' inadequate offensive production and fielding play of veterans at first base. In his debut on June 9, 2011, against the Washington Nationals, Rizzo struck out in his first at-bat, but then proceeded to hit a triple and score a run, helping the Padres to a 7–3 victory. He hit his first home run on June 11 against John Lannan. After three games he was 3-for-7 with a double, triple and a home run, while he demonstrated patience in drawing four walks for a .667 on-base percentage (OBP). On July 21, 2011 Rizzo was demoted back to Triple-A, and Blanks was promoted. Rizzo had struggled with only a .143 batting average and 1 home run, striking out 36 times in 98 at-bats. Hoyer said Rizzo "worked hard, never made excuses, and endeared himself to his teammates" during his initial stint in the majors. Rizzo was recalled to the majors on September 4 after finishing the season at Tucson batting .331 with 26 homers and 101 RBI in 93 games. He finished his first season in San Diego hitting only .141 with 46 strikeouts in 128 at-bats. Hoyer believed Rizzo would be the starting first baseman for the Padres in 2012 with Jesús Guzmán as the second option. However, Yonder Alonso moved ahead of Rizzo on the team's depth chart after he was acquired by the Padres in December 2011 in a trade for Mat Latos. Chicago Cubs On January 6, 2012, the Padres traded Rizzo and right-handed starting pitcher Zach Cates to the Chicago Cubs in exchange for right-handed starting pitcher Andrew Cashner and outfielder Kyung-Min Na. The deal was negotiated by Jed Hoyer, the Cubs' general manager. Hoyer had also drafted Rizzo while working as an assistant general manager for the Red Sox, and later acquired Rizzo while he was the Padres' general manager. He blamed himself for calling up Rizzo to the majors too early in San Diego. 2012 Rizzo started the 2012 season with the Triple-A Iowa Cubs. He again excelled in the minor leagues, batting .342 with 23 home runs and 62 RBIs before being recalled by the Cubs on June 26. Similar to his call-up in San Diego, he was expected to help a struggling offense. He became the first player in Cubs history to have three game-winning RBIs in his first five games with the team. He hit seven homers in July, the most by a Cubs rookie in a calendar month since Mel Hall hit nine in August 1983. He also led National League (NL) rookies that month in homers, hits (32), RBIs (17), and total bases (55). He ranked second among NL rookies in runs scored (14), and he was third with a .330 batting average, .375 on-base percentage, and .567 slugging percentage. He was named the league's July Rookie of the Month. 2013 On May 12, 2013, Rizzo agreed to a seven-year, $41 million contract. The deal included two club options that could extend the contract to nine years and $73 million. He was named as the Cubs finalist for the national Heart and Hustle Award, and he was also named the Cubs finalist for the Roberto Clemente Award. Rizzo placed 2nd for the Gold Glove award for first basemen. Despite having an off year in 2013, Rizzo showed good power, belting 23 homers and 40 doubles in 606 at bats with a .233 batting average. 2014 Rizzo had his fifth multi-homer game on May 30, and his second career walk-off home run on June 6. Rizzo was voted into the All-Star game via the final vote by fans along with White Sox pitcher Chris Sale. Rizzo joined teammate Starlin Castro in Minneapolis for the All-Star game. In late July, Rizzo won his first Player of the Week award. In mid-September Rizzo became the youngest player to receive the Branch Rickey Award as "a strong role model for young people". Rizzo finished the season with a combined on-base and slugging percentage of .913 (3rd in the NL), 32 home runs (2nd in the NL) and an at-bats per HR percentage of 16.4 (2nd in the NL), led the majors in hit by pitch (15), and placed 10th in the National League MVP voting. 2015 Rizzo was elected on the player's ballot for the 2015 All-Star Team. 2015 was the second consecutive year that he played in the game. He also competed in the 2015 Major League Baseball Home Run Derby for the first time in his career, but lost in the first round to Josh Donaldson. Rizzo hit his 100th career home run and 300th RBI on September 8, 2015, against Cardinals pitcher Michael Wacha. Rizzo was hit by a pitch 30 times in 2015, leading the major leagues, and joined Don Baylor as the only other member of the 30HR/30HBP club. Rizzo finished the regular season with a .278 batting average, 31 home runs, 38 doubles, and 101 RBI in 701 plate appearances, and led the major leagues in hit by pitch, with 30. He placed 4th in National League MVP voting. Rizzo took home the MLBPAA Heart and Hustle Award which is awarded to a player that has a strong desire for the game, and has a belief, spirit, and traditions that symbolize the game of baseball. Rizzo also received the same award from the Cubs organization which was his second time. 2016 Rizzo started as the first baseman at the 2016 All-Star game, receiving the most fan votes in the National League. By the end of the year, Rizzo had become one of three players, and the first left-handed player, in Cubs history to hit over 40 doubles and 30 home runs in the same year. Rizzo played in 155 games with 583 at bats and scored 94 runs. He was hit by a pitch 16 times, had 170 hits with 43 doubles, 4 triples, 32 home runs and 109 RBIs. He finished the year with a batting average of .292 and was fourth in the voting for National League Most Valuable Player. Rizzo's fielding excellence was rewarded with a Gold Glove Award. Rizzo was one of six finalists for the Marvin Miller Man of the Year Award and was the Cubs nominee for the Roberto Clemente Award. After an extremely slow start in the postseason, Rizzo broke out of his slump in the NLCS. He was an integral part of the last three victories over the Los Angeles Dodgers and led the Cubs to their first World Series appearance since 1945. In the 2016 World Series, Rizzo scored 7 runs and had 5 RBIs, and helped the Cubs win their first World Series title since 1908. He also won the Esurance MLB Award for "Best Social Media Personality" and for "Best Play: Defense". Rizzo's defense saved 11 runs for the Cubs which led all MLB first basemen and he was recipient of his first Fielding Bible Award and the Wilson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Award. He also won the fan vote for the Platinum Glove Award. Rizzo took home two more awards for the year. One was the Silver Slugger; It's awarded to the best offensive producers at each position in the field in both the American and National Leagues. It was Rizzo's first time receiving the award. The last one was the MLBPAA Cubs Heart and Hustle Award. It was Rizzo's third time receiving the award from the Cubs organization. 2017 With the Cubs in a season-long slump and playing .500 baseball, Manager Joe Maddon inserted the power-hitting Rizzo into the lead-off spot in an away game against the New York Mets on June 13. In the next seven games, the Cubs went 5–2 and Rizzo hit 4 home runs (3 to lead off a game). By June 20, Rizzo had reached base in the first inning in his first seven games as a leadoff hitter and became the first player to reach safely to start the first inning in his first seven career leadoff appearances in over half a century of Major League baseball. He had 12 hits in 28 at-bats with 10 RBIs and hit .430 during the streak. Rizzo finished second behind the Nationals Ryan Zimmerman in a tight race for starting NL first baseman in the 2017 All-Star Game. On September 2, Rizzo became the fourth Cubs players to hit at least 30 home runs, 30 doubles, and 100 RBIs in three or more seasons; the others were Hack Wilson, Billy Williams, and Sammy Sosa. For the season, he batted .273/.392/.507 with 32 home runs and 109 RBIs. He led the majors in hit by pitch, with 24. Rizzo had a disappointing postseason. In 37 at-bats he had one home run in 5 hits, 6 RBIs and an anemic batting average of .135. On October 27 Rizzo was named as the 2017 recipient of the Roberto Clemente Award for his charity's work to find a cure for childhood cancer. Of winning the award, Rizzo said, "This is amazing. The greatest award you can win. It will go front and center in front of anything I've ever done." 2018 On April 10, 2018, Rizzo was placed on the disabled list for the first time in his MLB career, due to a back issue. Prior to a May 23 game against the Cleveland Indians, Rizzo ranked fourth in Cubs franchise history with 17 home runs during interleague play. On July 23, Rizzo convinced Cubs manager Joe Maddon to let him make his first career pitching appearance. It took him two pitches to retire A. J. Pollock of the Arizona Diamondbacks on a fly out to center field. Rizzo finished his 2018 campaign batting .283 with 25 home runs and 101 RBIs in 153 games, and was 3rd in the major leagues in hit by pitch, with 20. Tied for Gold Glove Award votes with Atlanta Braves first baseman Freddie Freeman, Rizzo received the award for the second time in his career. 2019 In 2019, Rizzo hit .293/.405/.520 with 27 home runs and 94 RBIs. He led the major leagues in times hit by a pitch with 27. He also received his third career Gold Glove Award. 2020 In the shortened 2020 season, Rizzo played in 58 games and finished with a .222/.342/.414 hit line, 11 home runs, 24 RBIs, and 3 stolen bases. Rizzo also received his fourth Gold Glove Award; his third in a row. After the season ended the Chicago Cubs picked up Rizzo's last year of his seven-year, $41 million contract which paid Rizzo $16.5 million for the 2021 season. Rizzo was one of the first players that the Cubs traded for under Theo Epstein to help kick off the rebuild. 2021 In 92 games for the Chicago Cubs, Rizzo batted .248/.346/.446 with 14 home runs, 40 RBIs, and 4 stolen bases. In an April 28 game against the Atlanta Braves, Rizzo moved from first base to pitcher in a 10-0 Atlanta rout. He recorded two outs against three batters faced, including a strikeout of Freddie Freeman on a 61-mph 2-2 curveball. New York Yankees 2021 On July 29, 2021, Rizzo was traded to the New York Yankees along with cash considerations for Alexander Vizcaíno and Kevin Alcántara. His first game with the Yankees was on July 30 against the Miami Marlins. In only two games, Rizzo made an immediate impact by going 4 for 5 with 2 plus hits, 2 solo home runs (in each of his two games), 3 walks, and 5 runs overall, becoming the first player in the franchise history to achieve this feat. He also became the first Yankees player of all-time to get on base eight times (including a hit-by-pitch), the seventh Yankee to homer in his first two games. On August 4, Rizzo hit a solo home run during a game against the Baltimore Orioles, making him the first player in team history to RBI in his first 6 games with the Yankees. He also became the fourth MLB player with RBIs in his first 6 games with a new team, joining Jim Spencer (1973), Jim Wynn (1974), and Bobby Murcer (1977). On September 30, Rizzo hit his 250th home run during a game against the Toronto Blue Jays. It was a solo shot in the sixth inning off of starting pitcher Robbie Ray. He became the first Yankees player since Derek Jeter to reach this milestone while playing for the team. 2022 On March 17, 2022, the Yankees signed Rizzo to a two-year $32 million contract. Rizzo hit a home run in each of the first two games of the season making him only the second player in the modern era to homer in his first two games with a new team, and again in that team's first two games the following season. On April 26, Rizzo hit three home runs in a game against the Baltimore Orioles. For the 2022 postseason, Rizzo finished with a .276 batting average with 8 hits, 2 home runs and 8 RBI's in 29 at bats. On November 7, 2022, he exercised an opt out clause in his contract and became a free agent. 2023 Rizzo signed a two-year contract with an option for the 2025 season on November 15, 2022. In a May 28, 2023 game against the San Diego Padres, Rizzo tagged Fernando Tatís Jr. out as the result of a pickoff attempt. In the play, Tatís knocked Rizzo to the ground, causing him to leave the game with what was described as a neck injury. Prior to the Padres game, Rizzo had batted .304/.376/.508 with 11 home runs. However, in the 46 games that followed, he hit just .172/.271/.225 with only one home run. On August 3, the Yankees placed Rizzo on the injured list with post-concussion syndrome, with the belief that the injury stemmed from the Tatís incident. On September 5, manager Aaron Boone announced that Rizzo would be shut down and would not play again in 2023. Rizzo was transferred to the 60–day injured list on September 12, officially ending his season. International career As his family originated in the Sicilian town of Ciminna, Rizzo chose to play for Italy in the 2013 World Baseball Classic before the MLB 2013 season. Personal life Rizzo has an older brother, John, who was a lineman for the Florida Atlantic University football team. Rizzo was diagnosed with limited state classical Hodgkin lymphoma in April 2008. He went through chemotherapy for six months. His grandmother was battling breast cancer at the same time. On September 2, 2008, Rizzo's doctor told him he was in remission, though he still had six weeks left of treatment and some follow-up testing. On November 18, Rizzo's doctor told him he "could live a normal life." Rizzo proposed to girlfriend Emily Vakos on June 1, 2017. They met when the Cubs were in Arizona for spring training 2016. The couple was married on December 29, 2018, with teammate Kris Bryant serving as one of the groomsmen. In 2020, he and his wife adopted a dog, which they named Kevin. They reside in Fort Lauderdale, Florida. They also resided in a Chicago apartment for seven years, but moved out in 2021 after Rizzo was traded. Charity work In 2012,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was founded. It is a non-profit 501(c)(3) organization, benefiting cancer research and families fighting the disease. The foundation is run entirely by Rizzo's family, his close friends and his management team. Rizzo provides oversight and leadership. In August 2017 the foundation announced a $3.5 million gift to the Lurie Children's Hospital in Chicago, bringing its total donations to the hospital to more than $4 million. On February 15, 2018, Rizzo delivered an emotional speech at the vigil for the school shooting victims in Parkland, Florida. Rizzo is a graduate of Marjory Stoneman Douglas High School and a longtime Parkland resident. "I grew up at Stoneman Douglas [High School]," an emotional Rizzo said. Rizzo met with survivors of the massacre before a game with the Marlins where he helped donate $305,000 to the National Compassion Fund, with all of the funds going directly to all victims and their families. On May 15, 2015,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hosted its 3rd Annual Cook-Off For Cancer and raised more than $270,000. On November 15, 2015,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hosted its 4th Annual Walk-Off for Cancer and raised more than $200,000 for pediatric cancer research and providing support to children and their families. On June 2, 2016,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hosted its 4th Annual Cook-Off For Cancer and raised more than $630,000. The 5th annual Walk-Off for Cancer was held on Sunday, December 11, 2016, and raised more than $500,000 by The Anthony Rizzo Foundation. Broward County Commissioner Michael Udine proclaimed Sunday to be Anthony Rizzo Day in Broward County. Rizzo's old high school officially retired his jersey, Number 7. Rizzo and his foundation hosted its 6th annual Walk-Off for Cancer on December 3, 2017, and raised $960,000 for families battling cancer. Net proceeds from the event will benefit Joe DiMaggio Children's Hospital, the University of Miami Sylvester Comprehensive Cancer Center, and provide grants to families battling cancer. The 7th Annual Walk-Off for Cancer hosted by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raised $1.1 million on December 2, 2018. The money went to the Joe DiMaggio Children's Hospital, the University of Miami Sylvester Comprehensive Cancer Center, and families battling cancer. On May 27, 2019,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hosted its 7th Annual Cook-Off For Cancer and raised $1.8 million for cancer patients and their families. On November 24, 2019,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hosted its 8th Annual Walk-Off for Cancer and raised more than $1.35 million. On January 16, 2020,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raised close to $500,000 to help families battling cancer during its 6th Annual Laugh-Off for Cancer. In February 2020, Rizzo donated $150,000 to Marjory Stoneman Douglas High School to help pay for the school's lights for its baseball and softball fields. His high school unveiled the new baseball field which will be known as Anthony Rizzo Field.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hosted its 9th Annual Walk-Off for Cancer on November 15, 2020, and raised more than $850,000. References External links Anthony Rizzo Stats, Bio, Photos, Highlights at minorleaguebaseball.com 1989 births Living people American people of Italian descent Baseball players from Fort Lauderdale, Florida Chicago Cubs players Gold Glove Award winners Greenville Drive players Gulf Coast Red Sox players Iowa Cubs players Major League Baseball first basemen National League All-Stars New York Yankees players Portland Sea Dogs players Salem Red Sox players San Diego Padres players Silver Slugger Award winners Toros del Este players American expatriate baseball players in the Dominican Republic Tucson Padres players 2013 World Baseball Classic players People of Sicilian descent
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B%A6%AC%EC%8A%A4%20%EB%B8%8C%EB%9D%BC%EC%9D%B4%EC%96%B8%ED%8A%B8
크리스 브라이언트
크리스토퍼 리 브라이언트(Kristopher Lee Bryant, 1992년 1월 4일 ~ )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콜로라도로키스를 위하여 3루수와 내야수를 맡고 있다. 프로적으로 활약하기 앞서 브라이언트는 샌디에이고 대학교에서 수학하여 샌디에이고 토레로스를 위하여 대학 야구를 활약하였다. 보난자 고등학교에서 야구에 출연한 브라이언트는 2012년과 2013년 올아메리 팀에 임명되었고, 2013년 딕 하우저 상과 골든 스파이크스 상을 수상하였다. 컵스는 201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두번째 전체 선발에서 그를 선발하였고 그는 야구에서 최고의 전망 선수들 중의 하나가 되어 2014년 USA 투데이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 상과 베이스볼 아메리카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 상을 수상하였다. 브라이언트는 2015년 자신의 메이저 리그 데뷔를 하였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로 임명되어 내셔널 리그 "올해의 신인 선수" 상을 수상하였다. 2016년 그는 다시 올스타로 임명되었고, 컵스와 함께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여 내셔널 리그 MVP로 임명되었다. 아마추어 경력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태어나 보난자 고등학교에서 수학한 브라이언트는 전체 4년간 학교 대표팀을 위하여 활약하여 .418의 타구 평균, .958의 장타율, 103개의 안타와 47개의 경력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 군대 야구를 활약하기도 하였다. 2010년 USA 투데이는 그를 자신들의 올USA 야구 퍼스티 팀으로 임명하였다.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201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의 18번째 라운드에서 브라이언트를 선발하였다. 그는 계약하지 않았고, 샌디에이고 토레로스 야구 팀을 위하여 대학 야구를 활약하는 데 샌디에이고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2011년 대학에서 신입생으로서 브라이언트는 9개의 홈런과 함께 .365의 타구 평균, .482의 출루율과 .599의 장타율을 가졌다. 그는 루이빌 슬러거에 의하여 신입생 올아메리칸과 "올해의 웨스트 코스트 컨퍼런스 (WCC) 합동 신입생"과 "올해의 합동 선수"로 임명되어 마르코 곤살레스와 둘다의 영예를 나누었다. 대학에서 자신의 신입생 시즌에 이어 브라이언트는 케이프 코드 야구 리그의 채텀 에인절스를 위하여 대학 하계 야구를 활약하여 3개의 홈런과 16개의 타점과 함께 29 루 130 타 (.223)를 타구하였다. 2012년 2학년생으로서 브라이언트는 .671의 장타율, 14개의 홈런과 57개의 타점과 함께 .366 점을 타구하였다. 그는 다시 올WCC 퍼스트 팀으로 임명되었고, 또한 베이스볼 아메리카에 의하여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해 여름에 브라이언트는 미국 대학 야구 국가대표팀을 위하여 활약하는 데 USA 베이스볼에 의하여 선발되었다. 주니어로서 2013년 시즌에 브라이언트는 국가를 이끄는 데 31개의 홈런을 쳤다. 브라이언트는 2011년 NCAA가 배트볼 반발 계수의 합성 배트로 바꾼 이래 대학 선수에 의하여 쳐진 가장 많은 홈런을 가졌다. 브라이언트는 2011년 조지아 서던의 빅터 로슈에 의하여 세워진 30개의 이전 기록을 깼고, 그 시즌에 쳐진 296개의 디비전 I 팀들의 223개보다 더 많은 홈런을 쌓았다. 브라이언트는 국가에서 최고의 대학 선수들에게 둘다 수여된 골든 스파이크스 상과 딕 하우저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또한 루이빌 실러거의 퍼스트 팀 올아메리칸, "올해의 대학 야구 선수"와 "올해의 미국 야구 코치 협회 선수"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프로 경력 드래프트와 마이너 리그 브라이언트는 201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가장 유용한 선수들 중의 하나로 숙고되었다. 전체 1위 선발을 가진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브라이언트를 스카우트 하였다. 브라이언트는 드래프트의 3위 선발을 가진 콜로라도 로키스에 의하여 자신이 선택될 것을 믿었다. 애스트로스가 전체 1위 선발과 함께 투수 마크 애펄을 선발한 후, 시카고 컵스가 2위 선발과 함께 브라이언트를 선택하였다. 이 선택은 컵스가 투수를 선발하는 데 기대가 되면서 놀라운 일이었다. 컵스는 후에 그들이 아직도 유용해 온 애펄을 선발할 것을 인정하였다. 많은 야구 행정가와 스카우트들은 브라이언트가 드래프트에서 가장 안전한 선발이었던 것을 동의하였다. 그는 또한 아래로 내려가는 커브 볼은 물론 패스트볼 안에서 강력 타구와 접촉을 위한 그의 능력 때문에 드래프트에서 최고의 타자로서 평가되었다. 브라이언트와 컵스는 계약 마감에 대비한 이틀에 6천 7백만 달러의 계약 보너스와 함께 계약에 대한 조건에 왔다. 브라이언트는 클래스 A 쇼트 시즌 노스웨스트 리그의 보이지 호크스와 함께 자신의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4개의 홈런과 함께 .354 점을 타구하였다. 그는 8월 12일 클래스 A 진출 플로리다 주립 리그의 데이토나 컵스로 승진되었다. 그는 데이토나를 위하여 5개의 홈런과 함께 .333 점을 쳤다. 시즌 후에 그는 애리조나 가을 리그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가을 리그 시즌의 첫주에 미치 해니거와 더불어 "이번 주의 공동 선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20개의 경기에서 6개의 홈런과 함께 .364/.457/.727 점을 타구한 후 애리조나 가을 리그의 MVP로 임명되었다. 브라이언트는 클래스 AA 서던 리그의 테네시 스모키스와 함께 2014년을 시작하였다. 6월 그는 홈런 더비를 우승하고 올스타 경기에 참가하였다. 테네시와 함께 68개의 경기에서 22개의 홈런과 58개의 타점과 함께 .355 점을 타구한 후, 6월 18일 컵스는 브라이언트를 클래스 AAA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아이오와 컵스로 승진시켰다. 그는 7월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서 활약하였다. 정규 시즌의 말기에 테네시와 아이오와 사이의 합쳐진 브라이언트의 43개의 홈런은 그에게 조 바우먼 홈런 상을 얻게 하였다. 브라이언트는 USA 투데이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와 베이스볼 아메리카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로 임명되었다. 2015년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그를 최고 전망 선수로 임명하였다. 2015년 브라이언트는 컵스에 의하여 스프링 트레이닝으로 초청되었다. 40개의 타수에서 그는 전체의 선수들을 이끈 9개의 홈런을 쳤다. 그는 .477의 출루율과 1.175의 장타율과 함께 .425 점을 타구하였다. 자신의 상연에 불구하고, 컵스는 브라이언트를 아이오와로 돌려보내는 데 선출하였다. 야구 분석가들은 야구에서 서비스 시간 규칙은 팀의 결정에 다수적 영향력이었다는 것을 가정하였으며 컵스는 팀 통제의 또다른 한해를 받으려고 하였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는 "오늘은 야구를 위하여 나쁜 하루이다."라고 말한 성명을 냈다. 아이오와와 함께 7개의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3개의 홈런을 치고 .321 점을 타구하였다. 시카고 컵스 2015년 시즌 2015년 4월 17일 브라이언트는 컵스에 의하여 메이저 리그로 소집되었다. 그는 그날 리글리 필드에서 자신의 데뷔를 하여 3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0 루 4 타로 갔다. 리글리 필드에서 다음날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첫 안타인 타점 1루타를 기록하였다. 브라이언트는 5월 9일 밀워키 브루어스의 카일 로우시에 자신의 첫 메이저 리그 홈런을 쳤다. 그의 두번째 홈런은 이틀 후에 리글리 필드에서 뉴욕 메츠의 제이컵 디그롬을 상대로 왔다. 브라이언트는 .265의 타구 평균, 67개의 홈런, 22개의 타점과 16개의 볼넷과 함께 5월을 끝냈고, 5월을 위하여 내셔널 리그 "이번 달의 신인 선수"로 임명되었다. 브라이언트의 첫 경력 그랜드슬램은 6월 1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17 대 0의 우승에서 데이비드 머피에 9번째 이닝에서 왔다. 마이애미 말린스를 상대로 7월 4일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재러드 코자트에 시즌의 2점 홈런과 자신의 두번째 그랜드슬램 둘다를 쳤다. 이 일은 그를 1961년 빌리 윌리엄스 이래 2개의 그랜드슬램을 치는 데 컵스의 두번째 신인 선수로 만들었다. 브라이언트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열린 메이저 리그 올스타 게임의 내셔널 리그 로스터에 지안카를로 스탠튼을 위한 부상 대체 선발로서 선발되었다. 그는 또한 홈런 더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7월 25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브라이언트는 콜 해멀스의 무안타의 외부로 마지막으로 워닝 트랙에 날아갔다. 7월 27일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콜로라도 로키스의 존 액스포드에 첫 경력 끝내기 홈런을 쳤다. 9월 6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브라이언트는 루비 데 라 로사에 2015년 메이저 리그 시즌의 가장 긴 495 피트 (151m) 홈런을 쳤다. 홈런과 함께 브라이언트는 86개와 신인 선수들을 위한 컵스의 프랜차이즈 싱글 시즌 타점 기록을 위하여 윌리엄스 (1961년)과 지오바니 소토 (2008년)의 기록을 동점매겼다. 9월 11일 그는 하나의 2루타와 함께 득점에서 몰아내면서 기록을 깼다. 9월 22일 브라이언트는 26개와 함께 컵스 신인 선수에 의한 가장 많은 홈런을 위하여 윌리엄스를 통과하였다. 메이저 리그에서 자신의 첫 시즌의 151개의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200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위한 앨버트 푸홀스의 130개 이래 신인 선수에 의한 가장 많았던 26개의 홈런, 31개의 2루타와 99개의 타점과 함께 .257 점을 타구하였다. 브라이언트는 내셔널 리그를 이끌고 신인 선수의 신기록을 세운 119번이나 스트라이크아웃 되었다. 그는 66.3%로 메이저 리그에서 자신의 스윙에 최저 접촉 퍼센티지를 가졌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공식 웹사이트에 판매에 의하면 브라이언트는 2015년 정규 시전 동안 야구의 전부에서 최고로 팔리는 저지를 가졌다고 한다. 컵스가 97 승 65 패와 시즌을 끝내면서 팀은 7년 만에 자신들의 첫 플레이오프 정박으로 메이저 리그 포스트시즌의 와일드 카드 자리를 움켜쥐었다. 2015년 내셔널 리그 와일드 카드 게임에서 브라이언트가 아무 안타를 가지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컵스는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4 대 0으로 완봉시키고 브라이언트가 3번째 경기에서 컵스를 8 대 6 우승으로 도움을 주는 데 라이벌 팀 카디널스를 상대로 2점 홈런을 친 2015년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로 진출하였다. 컵스는 3개의 경기에서 1개로 시리즈를 우승하였으나 4개의 경기에서 휩쓸어진 2015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메츠에게 패하였다. 브라이언트는 2015년 시즌을 위하여 베이스볼 아메리카 "올해의 신인 선수"로 임명되어 성공적인 시즌들에 올해의 베이스볼 아메리칸 대학 선수, 마이너 리그 선수와 메이저 리그 신인 선수 상을 수상하는 데 자신을 역사상 첫 선수로 만들었다. 그는 팬들, 매체, 전직 선수들과 팀의 프런트 오피스 직원들, 그리고 미국야구연구협회에 의하여 "이슈런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상" 최고의 신인 선수로 투표되었다. 더욱 나가서 그는 재키 로빈슨 내셔널 리그 "올해의 신인 선수" 상의 미국야구기자협회로부터 만장 일치의 수상자로 만장 일치의 투표에 의한 11번째이자 전체로서 20번째 내셔널 리그 선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의 "내셔널 리그 두드러진 신인 선수"로서 자신의 동료 선수들에 의하여 임명되기도 하였다. 2015년 시즌 후에 브라잉너트는 자신의 자유 선수 계약을 연기하는 목적으로 메이저 리그로 자신의 소집을 연기한 것으로 컵스에 불만을 제출하였다. 불만에 관하여 브라이언트는 "나를 위해서 그것은 거기에 나가 내가 할 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데 겨우 중요하여 오늘날 우리가 있었던 아무 가능한 방향에서 내가 팀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금년에 간 것의 거의로부터 그것이 가져가기 때문에 그것에 관하여 걱정마저 하지 않는 데 그것은 나에게 겨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작년의 소식이었다."고 추가하였다. 2017년 4월로 봐서 불만은 아직 청문회에 도달하지 않았다. 2016년 시즌 : 내셔널 리그 MVP 2016년 시즌을 위하여 컵스는 브라이언트에게 그의 신인 선수 봉급에 38% 증가한 6십 5만 2천 달러의 봉급을 주었다. 2016년 7월 27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브라이언트는 같은 경기에서 3개의 홈런과 2개의 2루타를 치는 데 근대 역사상 첫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가 되었으며 그는 11 대 8의 우승에서 16개의 총루와 함께 전체 5 루 5 타였다. 시즌의 전반기에 25개의 홈런과 함께 내셔널 리그를 이끈 후, 그는 자시의 2연속 올스타 게임으로 선발되었고, 출발 3루수로서 처음에 시작하였다. 그는 올스타 게임에서 자신의 첫 경력 홈런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크리스 세일에 첫 이닝 홈런을 쳤다. 내셔널 리그 서부 디비전을 이끄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8월 후순에 열린 오프닝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경기를 동점매기는 데 8번째 이닝 홈런과 6 대 4의 승리를 위한 10번째 이닝에서 2점 우승 홈런을 쳤다. 올스타 브레이크부터 9월의 시작으로 브라이언트는 .346의 타구 평균을 가졌다. 8월 18일 그는 한 시즌에 2개의 경기에서 5개의 안타와 5개의 타점을 기록하는 데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번째 선수가 되어 컵스의 1945년 MVP 필 캐버레타에 가입하였다. 8월에 컵스가 22 승 6 패로 가면서 브라이언트는 1.220의 OPS, 10개의 홈런, 22개의 타점과 29개의 매긴 득점과 함께 .383 점을 타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첫 "이번 달의 선수" 상으로 8월을 위하여 "이번달의 내셔널 리그 선수"로 임명되었다. 전체로서 그는 121개의 매긴 득점과 Baseball-Reference.com에 7.7의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와 함께 리그를 이끌었고, .544의 장타율과 .939 OPS와 함께 39개의 홈런과 334개의 총루와 3위를 하였다. 그는 .292 점을 타구하고 102개의 득점에 몰아냈다. 그 분야들의 각각에서 브라이언트의 통계는 그의 신인 선수 시즌 총수에 향상들을 대표하였다. 그는 154개의 스트라이크아웃과 함께 내셔널 리그에서 9위였다. 컵스는 내셔널 리그 중부 디비전 타이틀을 우승하였다. 브라이언트는 2016년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전체 4개의 경기에서 안타들을 기록하였다. 컵스가 3번째 경기의 9번째 이닝에서 5 대 3으로 추적하면서 브라이언트는 세르히오 로모를 상대로 2점 홈런을 쳐 자이언츠가 13개에서 우세할 것이었어도 여분의 이닝으로 경기를 보내는 도움을 주었다. 컵스가 5 대 2로 내려가면서 4번째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9번째 이닝의 정상에서 4점 반격을 시작하는 데 1루타를 쳐 컵스가 2016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으로 진출하면서 벤 조브리스트에 의한 2루타에 득점을 매겼다. 그러고나서 컵스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4개의 경기에서 2개로 꺾으면서 1945년 이래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하였다. 월드 시리즈에서 컵스는 3개의 경기에서 1개의 적자로부터 돌아와 108년간 장기적 결핍 후에 자신들의 첫 챔피언십으로 확보하는 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꺾었다. 2016년 포스트시즌 동안 브라이언트는 3개의 홈런과 8개의 타점과 함께 .308의 평균을 위하여 쳤다. 브라이언트는 메이저 리그에서 자신의 두번째 해에 내셔널 리그 MVP 상을 수상하면서 2016년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는 성공적인 시즌들에 골든 스파이크스 상, 베이스볼 아메리카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 상, 올해의 신인 선수 상과 MVP 상을 수상하는 데 첫 선수가 되었다. 추가로 그는 자신의 첫 2개의 시즌 안에서 올해의 신인 선수와 MVP 상을 수상하는 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6번째 선수가 되어 프레드 린 (둘다 1975년), 칼 립켄 주니어 (1982년 ~ 83년), 스즈키 이치로 (둘다 2001년), 라이언 하워드 (2005년 ~ 06년)과 더스틴 페드로이아 (2007년 ~ 08년)에 가입하였다. 브라이언트는 또한 내셔널 리그의 가장 두드러진 타자로서 행크 에런 상을 수상하였다. 2017년 시즌 2017년 시즌 전에 브라이언트와 컵스는 2014년 1백만 달러를 벌은 다저스의 마이크 트라우트에 의하여 이전에 보유된 중재 전의 선수를 위한 봉급의 신기록으로 1억 5백만 달러로 동의하였다. 2017년 브라이언트는 2017년 올스타 게임에서 출발 내셔널 리그 3루수로서 콜로라도 로키스의 놀런 아레나도에게 밀려 팬의 투표에서 2위를 하였다. 그는 저스틴 터너에 밀려 올스타 최종 투표에서 2위를 하여 올스타 팀으로 이루지 않았다. 올스타 브레이크에 이어 7월 25일 브라이언트는 3번째 스트라이크 부름에 말싸움을 한 후, 자신이 메이저 리그 경력에서 처음으로 퇴거되었다. 그해 8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는 처음으로 "선수들의 주말"을 소개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저지에 "KB"를 입는 데 선택하였다. .295의 평균, 29개의 홈런과 73개의 타점과 함께 정규 시즌을 끝낸 컵스는 자신들의 2연속 중부 디비전 타이틀을 우승하고, 포스트시즌에 자신들의 3연속 출연을 얻었다. 컵스는 2017년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브라이언트가 단 하나의 홈런 없이 시리즈에서 .200 점을 타구하면서 워싱턴 내셔널스를 꺾었다. 컵스는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다저스에게 패하였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브라이언트는 하나의 홈런과 함께 .200 점을 타구하였다. 2018년 시즌 봉급 중재의 자신의 첫 해에 브라이언트와 컵스는 2018년 시즌을 위하여 10억 8천 5백만 달러의 봉급으로 동의하여 라이언 하워드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2008년 1천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을 때 그에 의하여 이전에 보유된 봉급 중재의 자신의 첫 해에 선수를 위한 기록을 깼다. 2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브라이언트를 야구에서 전체 3번째로 최고 선수로 순위에 들게 하여 마이크 트라우트와 호세 알투베를 추적하였다. 말린스를 상대로 5월 9일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100번째 홈런을 쳐 그 마크에 도달하는 데 22번째 컵스의 선수이자 가장 빠른 선수가 되었다. 그는 어니 뱅크스에 의하여 세워진 500개 경기의 이전 마크를 가린 자신의 487번째 경기에 자신의 100번째 홈런을 쳤다. 6월 26일 브라이언트는 3일 전 소급으로 왼쪽 어깨 염증 때문에 자신의 메이저 리그 경력 사상 처음으로 장애자 명단에 놓였다. 7월 26일 브라이언트는 똑같은 어깨에 염증 때문에 장애자 명단에 돌아갔다. 2019년 브라이언트는 2019년으로 느린 출발을 가졌다.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첫 정규 시즌 경기에서 하나의 홈런을 친 후, 4월 25일을 통한 그의 타구 평균은 .730의 출루율과 함께 .232 점이었다. 브라이언트의 상연은 실질상 5월 중순으로 들어가 향상되었다. 그는 5월 7일 말린스를 상대로 하나의 끝내기와 3개의 3점 홈런을 포함하여 15개의 경기의 코스에 7개의 홈런을 쳤다. 5월 18일 브라이언트는 내셔널스를 상대로 경기에서 3연속 이닝에서 3개의 홈런을 쳤다. 그의 4 루 6 타의 밤은 26개의 경기로 경력 최고 출루 연속을 넓혔다. 브라이언트는 31개의 홈런, 77개의 타구한 득점과 108개의 매긴 득점과 함께 .282/.382/.521 점을 타구하며 2019년 시즌을 끝냈다. 방어에 그는 전체 메이저 리그 3루수의 최저 수비율 (.947)을 가졌다. 2020년 2020년 브라이언트는 131개의 타수에서 4개의 홈런과 11개의 타점과 함께 .206/.293/.351 점을 타구하였다. 방어에 그는 다른 메이저 리그 3루수보다 본루에 자신을 더욱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자선 행위 2017년 브라이언트는 58명의 사망자를 남긴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총기 난사 사건의 피해자 지원의 구호 노력에 자신들의 고향 라스베이거스를 돕는 데 브라이스 하퍼와 팀을 이루었다. 브라이언트와 하퍼는 총기 난사 사건의 구호와 함께 라스베이거스를 돕는 데 clarkcountynv.gov 로 기부하는 데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자신들의 강연을 이용하였따. 2017년 선수들의 주마레 브라이언트는 척수 연구에 전문적인 비영리 조직 Wings for Life Foundation을 흥행한 3개의 다른 클리트 화를 신는 데 선택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친구 코리 한이 애리조나 주립 리그에서 신입생으로서 야구를 한 동안 장애가 되었을 때 2011년 이래 이 조직에 거대하게 연루되어 왔다. 2015년 브라이언트는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로부터 2015년 내셔널 리그 두드러진 신인 선수 상이 수여되었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신용으로부터 상처 입은 베테랑 프로젝트로 2만 달러를 보내는 데 선택하였다. 수상 ABCA 올해의 대학 선수 (2013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올해의 대학 선수 상 (2013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메이저 리그 올해의 신인 선수 상 (2015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마이너 리그 올해의 신인 선수 상 (2014년) 대학 야구 올해의 선수 (2013년) 2회 대학 야구 올아메리카 팀 (2012년, 2013년) 딕 하우저 상 (2013년) 이슈런스 MLB 최고 신인 선수 상 (2015년) 골든 스파이크스 상 (2013년) 조 바우먼 홈런 상 (2014년) 3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2015년, 2016년, 201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이번 달의 선수 (2016년 8월) 3회 메이저 리그 올해의 신인 선수 (2015년 5월과 8월) 내셔널 리그 행크 에런 상 (2016년) 내셔널 리그 MVP (2016년) 내셔널 리그 올해의 신인 선수 (2015년)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 내셔널 리그 두드러진 신인 선수 (2015년) 스포팅 뉴스 올해의 내셔널 리그 신인 선수 (2015년) USA 투데이 올해의 마이너 리그 선수 상 (2014년) 월드 시리즈 우승 (2016년) 개인 생활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고등학교의 내빈에 대한 환영사를 말하는 졸업생이었으나 자신이 얼마난 그녀가 나쁘게 원했던 것을 찾았을 때 급우에게 대신 역할을 택하는 데 허용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재정학으로 바꾸기 전에 생리학에 전공하였다. 브라이언트의 부친 마이크는 보스턴 레드삭스 조직을 위하여 마이너 리그에서 활약하였다. 마이크는 안마당 가구점을 소유하였으나 자신의 아들을 코치를 맡는 데 자신을 허락한 직업을 얻는 목적에서 팔았다. 브라이언트와 동료 야구 선수들 브라이스 하퍼와 조이 갤로는 라스베이거스 지역에서 지인으로서 자라와 9세의 나이에 서로와 함께 야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브라이언트와 하퍼의 우호적인 경쟁은 그들이 메이저 리그에서 처음으로 서로 인사했을 때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내셔널스를 상대로 2015년 5월 시리즈에서 표시되었다. 브라이언트는 2015년 12월 자신의 장기적 애인 제시카 델프에게 제안하였다. 그들은 둘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자라와 자신들이 16세 이래 데이트를 하였다. 그들은 브라이언트의 동료 선수 앤서니 리조가 신랑 들러리들 중의 하나면서 2017년 1월 7일에 결혼하였다. 그들은 카일러 리 브라이언트로 불리는 2020년 4월 생의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라스베이거스와 다운타운 시카고에 거주한다. 연도별 타격 성적 2019년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외부 링크 San Diego Toreros bio 199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네바다주 출신 야구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내야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3루수 시카고 컵스 선수 내셔널 리그 올스타 올스타 퓨처스 게임 참가 선수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해의 신인상 수상자 샌디에이고 대학교 동문 라스베이거스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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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s Bryant
Kristopher Lee Bryant (born January 4, 1992), nicknamed "KB", is an American professional baseball third baseman and outfielder for the Colorado Rockies of Major League Baseball (MLB). He has previously played in MLB for the Chicago Cubs and San Francisco Giants. Prior to playing professionally, Bryant attended the University of San Diego, where he played college baseball for the Toreros. Bryant starred in baseball for Bonanza High School. In college, he was named an All-American in 2012 and 2013, and won the Dick Howser Trophy and Golden Spikes Award in 2013. The Cubs selected him with the second overall selection in the 2013 MLB draft, and he quickly became one of the top prospects in baseball, winning the USA Today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 Award and Baseball America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 Award in 2014. Bryant made his major league debut in 2015. He was named an MLB All-Star and won the National League's (NL) Rookie of the Year Award. He was again named an All-Star in 2016, won a World Series championship with the Cubs, and was named the NL's Most Valuable Player. The Cubs traded him to the Giants in 2021, and he then signed a seven-year contract with the Rockies prior to the 2022 season. Early life Bryant attended Bonanza High School in Las Vegas, Nevada. Playing for the school's varsity baseball team all four years, he recorded a .418 batting average, a .958 slugging percentage (SLG), 103 hits, and 47 career home runs. He also played American Legion Baseball. USA Today named him to their All-USA baseball first-team in 2010. The Toronto Blue Jays selected Bryant in the 18th round of the 2010 Major League Baseball draft. He did not sign, and enrolled at the University of San Diego, to play college baseball for the San Diego Toreros baseball team. College career As a freshman at the University of San Diego in 2011, Bryant had a .365 batting average, a .482 on-base percentage (OBP), and a .599 SLG, with nine home runs. He was named a freshman All-American by Louisville Slugger and the West Coast Conference (WCC) Co-Freshman of the Year and Co-Player of the Year, sharing both honors with Marco Gonzales. Following his freshman season at San Diego, Bryant played collegiate summer baseball for the Chatham Anglers of the Cape Cod Baseball League, where he batted 29-for-130 (.223) with three home runs and 16 runs batted in (RBIs). As a sophomore in 2012, Bryant batted .366 with a .671 SLG, 14 home runs, and 57 RBIs. He was again named first team All-WCC and he was also named a first-team All-American by Baseball America. That summer, Bryant was selected by USA Baseball to play for the United States collegiate national team. In the 2013 season as a junior, Bryant hit 31 home runs to lead the nation. Bryant had the most home runs hit by a college player since the NCAA switched to a BBCOR composite bat in 2011. Bryant broke the previous record of 30 set by Georgia Southern's Victor Roache in 2011 and amounted to more home runs than 223 of 296 Division I teams hit that season. Bryant won the Golden Spikes Award and the Dick Howser Trophy, which are both awarded to the top collegiate player in the nation. He was also named a Louisville Slugger First Team All-American, the Collegiate Baseball Player of the Year, and the American Baseball Coaches Association (ABCA) Player of the Year. Professional career Draft and minor leagues Bryant wa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best available players in the 2013 Major League Baseball draft. The Houston Astros, who had the first overall pick, scouted Bryant. Bryant believed he would be chosen by the Colorado Rockies, who had the third selection of the draft. After the Astros selected pitcher Mark Appel with the first overall selection, the Chicago Cubs chose Bryant with the second pick. This choice was surprising as the Cubs were expected to select a pitcher. The Cubs later acknowledged that they would have selected Appel had he still been available. Many baseball executives and scouts agreed that Bryant was the safest pick in the draft. He was also rated as the best hitter in the draft because of his abilities hitting for power and making contact on inside fastballs as well as down-and-away curveballs. Bryant and the Cubs came to terms on a contract with a $6.7 million signing bonus two days prior to the signing deadline. Bryant began his professional career with the Boise Hawks of the Class A-Short Season Northwest League, where he batted .354 with four home runs. He was promoted to the Daytona Cubs of the Class A-Advanced Florida State League on August 12. He hit .333 with five home runs for Daytona. After the season, he played in Arizona Fall League (AFL). He was named co-player of the week, along with Mitch Haniger, in the first week of the fall league season. He was named the MVP of the AFL after hitting .364/.457/.727 with six home runs in 20 games. Bryant started 2014 with the Tennessee Smokies of the Class AA Southern League. In June, he won the Home Run Derby and participated in the All-Star game. On June 18, the Cubs promoted Bryant to the Iowa Cubs of the Class AAA Pacific Coast League after batting .355 with 22 home runs and 58 RBIs in 68 games with Tennessee. He played in the All-Star Futures Game in July. At the end of the regular season, Bryant's 43 combined home runs between Tennessee and Iowa won him the Joe Bauman Home Run Award. Bryant was named the USA Today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 and Baseball America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 Baseball America named him the No. 1 prospect in 2015. Bryant was invited to spring training by the Cubs in 2015. In 40 at-bats, he hit nine home runs, which led all players. He had a .425 with a .477 on-base percentage and a 1.175 slugging percentage. Despite his performance, the Cubs elected to send Bryant back down to Iowa. Baseball analysts assumed that the service-time rules in baseball were the majority influence on the team's decision; if Bryant were to play 12 days in the minors before being promoted to the majors, the Cubs would receive another year of club control. The MLBPA issued a statement saying, "Today is a bad day for baseball". In seven games with the Iowa, Bryant hit three home runs and batted .321. Chicago Cubs (2015–2021) 2015 season On April 17, 2015, Bryant was called up to the majors by the Cubs. He made his debut that day at Wrigley Field, going 0-for-4 with three strikeouts. The next day at Wrigley, Bryant recorded his first hit, an RBI single. Bryant hit his first major league home run on May 9, off Milwaukee Brewers' Kyle Lohse. His second home run came two days later at Wrigley Field against the New York Mets off Jacob deGrom. Bryant finished the month of May with a .265 batting average, seven home runs, 22 RBIs, and 16 walks, and was named the NL Rookie of the Month for May. Bryant's first career grand slam came on June 17 in the ninth inning off David Murphy in a 17–0 win against the Cleveland Indians. In a July 4 game against the Miami Marlins, Bryant hit both a two-run home run and his second grand slam of the season off Jarred Cosart. This made him the second Cubs rookie to hit two grand slams since Billy Williams in 1961. Bryant was selected as an injury replacement selection for Giancarlo Stanton on the National League roster of the All-Star Game in Cincinnati, Ohio. He also participated in the Home Run Derby. On July 25, against the Philadelphia Phillies, Bryant flew out at the warning track for the last out of Cole Hamels' no-hitter. On July 27, Bryant hit his first career walk-off home run, a two-run shot, off John Axford in a 9–8 win over the Colorado Rockies. On September 6, against the Arizona Diamondbacks, Bryant hit a home run, the longest of the 2015 MLB season, off Rubby De La Rosa. With the home run, Bryant tied Williams (1961) and Geovany Soto (2008), for the Cubs' franchise single-season RBI record for rookies with 86. On September 11, he broke the record by driving in a run with a double. On September 22, Bryant passed Williams for the most home runs by a Cubs rookie, with 26. In 151 games of his first season in the Majors, Bryant batted .275 with 26 home runs, 31 doubles, and 99 RBIs, which were the most for a rookie since Albert Pujols's 130 for the St. Louis Cardinals in 2001. Bryant struck out 199 times, which led the National League and set a new rookie record. He had the lowest contact percentage on his swings in the major leagues (66.3%). According to sales on Major League Baseball's official website, Bryant had the best-selling jersey in all of baseball during the 2015 regular season. With the Cubs finishing the season, 97–65, the team clinched a Wild Card spot in the MLB postseason, their first playoff berth in seven years. Despite Bryant not having any hits in the 2015 National League Wild Card Game, the Cubs shut out the Pittsburgh Pirates, 4–0, and advanced to the 2015 National League Division Series (NLDS), wherein Game 3, Bryant hit a two-run home run against the rival St. Louis Cardinals to help the Cubs to an 8–6 win. The Cubs won the series-winning three-games-to-one, but lost to the New York Mets in the 2015 National League Championship Series (NLCS) in a four-game sweep. Bryant was named the Baseball America Rookie of the Year for the 2015 season, making him the first in history to win the Baseball America college player, minor league player, and major league rookie of the year awards in successive seasons. He was voted the "Esurance MLB Awards" Best Rookie – by fans, the media, former players, team front-office personnel, and the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SABR). Bryant won the Sporting News Rookie of the Year Award for the National League, becoming the first Cub to earn it since Soto in 2008. Further, he was the unanimous winner from the Baseball Writers' Association of America (BBWAA) of the Jackie Robinson National League Rookie of the Year Award, becoming the 11th National League player to win by a unanimous vote and the 20th player overall. He was also named by his fellow players as the "Players Choice Awards" National League Outstanding Rookie. After the 2015 season, Bryant filed a grievance against the Cubs for delaying his call-up to the majors for the purpose of delaying his free agency, accusing the team of service time manipulation. About the grievance Bryant said, "For me it’s just important to continue to go out there and do what I do, so that I can help the team in any way possible in where we’re at today," Bryant added, "It's just important for me to not even worry about it right now because it takes away from so much of what we have going this year. And that was last year’s news." , the grievance had yet to reach a hearing. The grievance was finally heard in January 2020, with the arbitrator ruling against Bryant. 2016 season: NL MVP The Cubs gave Bryant a $652,000 salary for the 2016 season, a 38% increase over his rookie salary. On June 27, 2016, against the Cincinnati Reds, Bryant became the first MLB player in modern history to hit three home runs and two doubles in the same game; he was 5-for-5 overall with 16 total bases in the 11–8 win. After leading the National League with 25 home runs in the first half of the season, he was selected to his second consecutive All-Star Game, and first as the starting third baseman. He hit a first-inning home run off Chris Sale of the Chicago White Sox, his first career home run in an All-Star Game. In the opening game of a late August series against the National League West-division-leading Los Angeles Dodgers, Bryant hit an eighth-inning home run to tie the game and the winning two-run home run in the 10th inning for a 6–4 victory. From the All-Star Break to the start of September, Bryant had a batting average of .346. On August 18, he became the second player in major league history to record five hits and five RBIs in two games in one season, joining 1945 MVP Phil Cavarretta of the Cubs. In August, as the Cubs went 22–6, Bryant batted .383, 1.220 OPS, 10 home runs, 22 RBI, and 29 runs scored. He was named the National League Player of the Month for August, his first Player of the Month award. Overall, he led the league with 121 runs scored and 7.7 Wins Above Replacement (WAR) per Baseball-Reference.com, and finished third with 39 home runs and 334 total bases and fourth with a .554 slugging percentage and .939 OPS. He also batted .292 and drove in 102 runs. In each of those categories, Bryant's statistics represented improvements over his rookie season totals. He was 9th in the NL with 154 strikeouts. The Cubs won the National League Central division title. Bryant recorded hits in all four games against the San Francisco Giants in the 2016 NLDS. With the Cubs trailing 5–3 in the ninth inning of Game 3, Bryant hit a two-run home run against Sergio Romo, helping send the game to extra innings, though the Giants would prevail in 13. In Game 4 with the Cubs down 5–2, Bryant singled to start a four-run rally in the top of the 9th, scoring on a double by Ben Zobrist, as the Cubs advanced to the 2016 NLCS. The Cubs then won the National League pennant—for the first time since 1945—by defeating the Los Angeles Dodgers, 4-games-to-2. In the World Series, the Cubs came back from a 3-games-to-1 deficit and defeated the Cleveland Indians, to secure their first championship after a 108-year-long drought. During the 2016 postseason, Bryant hit for a .308 average with three home runs and eight RBIs. Bryant concluded the 2016 season by winning the National League Most Valuable Player Award (MVP) in his second year in the major leagues. He became the first player to win a Golden Spikes Award, a Baseball America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 Award, a Rookie of the Year Award, and a Most Valuable Player Award in successive seasons. In addition, he became the sixth player in MLB history to win Rookie of the Year and MVP within his first two seasons, joining Fred Lynn (both in 1975), Cal Ripken Jr. (1982–83), Ichiro Suzuki (both in 2001), Ryan Howard (2005–06), and Dustin Pedroia (2007–08). Bryant also won the Hank Aaron Award as the National League's most outstanding hitter. 2017 season Bryant and the Cubs agreed to a $1.05 million contract before the 2017 season, a new record salary for a pre-arbitration player, previously held by Mike Trout of the Los Angeles Angels who earned $1 million in 2014. In 2017, Bryant finished second in fan voting to Nolan Arenado of the Colorado Rockies as the starting NL third baseman in the 2017 All-Star Game. He finished second in the All-Star Final Vote, behind Justin Turner, and did not make the All-Star team. Following the All Star Break, on July 25, Bryant was ejected for the first time in his major league career after arguing a third strike call. That August, MLB and the MLBPA introduced Players Weekend for the first time. Bryant chose to wear "KB" on his jersey. Finishing the regular season with a .295 average, 29 home runs, and 73 RBIs, the Cubs won their second consecutive Central Division title and earned their third consecutive appearance in the postseason. The Cubs defeated the Washington Nationals in the 2017 NLDS, with Bryant batting .200 in the series without a home run. The Cubs lost to the Los Angeles Dodgers in the 2017 NLCS. Bryant batted .200 with one home run in the NLCS. 2018 season In his first year of salary arbitration, Bryant and the Cubs agreed to a $10.85 million salary for the 2018 season, breaking the record for a player in his first year of salary arbitration, previously held by Ryan Howard when he signed a $10 million contract in 2008 with the Philadelphia Phillies. In February, Sports Illustrated ranked Bryant as the third-overall best player in baseball, trailing Mike Trout and José Altuve. In a May 9 game against the Miami Marlins, Bryant hit his 100th home run, becoming the 22nd Cubs player to reach the mark, and the quickest to reach the mark. He hit his 100th home run in his 487th game, barely eclipsing the previous mark of 500 games set by Ernie Banks. On June 26, Bryant was placed on the disabled list for the first time in his MLB career due to left shoulder inflammation, retroactive three days prior. On July 26, Bryant went back on the disabled list due to inflammation on the same shoulder. 2019 season Bryant had a slow start to 2019. After hitting a home run in the first regular season game against the Texas Rangers, his batting average through April 25 was .232, with a .730 on-base plus slugging percentage. Bryant's performance substantially improved heading into mid May. He hit seven home runs over the course of fifteen games, including a walk-off, three-run home run against the Miami Marlins on May 7. On May 18, Bryant hit three home runs in three consecutive innings in a game against the Washington Nationals. His 4-for-6 night extended his career-best on-base streak to 26 games. Bryant finished the 2019 season hitting .282/.382/.521 with 31 home runs, 77 runs batted in, and 108 runs scored. On defense, he had the lowest fielding percentage of all major league third basemen (.947). 2020 season In the 2020 COVID-19 pandemic-shortened season, Bryant batted .206/.293/.351 with four home runs and 11 RBIs in 131 at-bats in 34 games. 2021 season Bryant in the 2021 season for the Cubs played first base (12 games) and outfield (63 games), along with third (29 games), due to the rise of Patrick Wisdom at third base. He was selected as an All-Star as he hit .267/.358/.503 with 58 runs, 18 home runs, and 51 RBIs throughout 93 games and 326 at bats with the Cubs. San Francisco Giants (2021) On July 30, 2021, the Cubs traded Bryant to the San Francisco Giants in exchange for prospects Alexander Canario and Caleb Kilian. On August 1, Bryant made his Giants debut. He played third base and went 1-for-4 with a home run in the third inning. In the 2021 season, playing for the Giants Bryant batted .262/.344/.444 with 28 runs, seven home runs, and 22 RBIs in 187 at bats, as he stole six bases in six attempts. He played 26 games at third base, 19 games in left field, 11 games in right field, and 5 games in center field. Colorado Rockies (2022–present) On March 18, 2022, Bryant signed a seven-year contract worth $182 million with the Colorado Rockies. It was announced that he would be the club's starting left fielder. Bryant missed the last two months of the 2022 season due to plantar fasciitis and a bone bruise in his right foot. Charitable acts In 2017, Bryant teamed up with Bryce Harper to help their hometown of Las Vegas in relief efforts assisting victims of a shooting at a music concert that left 58 people dead. Bryant and Harper used their platform to encourage people to donate to help Las Vegas with relief of the shooting. On Players Weekend in 2017, Bryant chose to wear three different cleats which promoted the Wings for Life Foundation, a non-profit organization that specializes in spinal cord research. Bryant has been heavily involved in this organization ever since 2011 when a friend of his, Cory Hahn, was paralyzed while a freshman playing baseball at Arizona State. In 2015, Bryant was awarded 2015 NL Outstanding Rookie from the Player Choice Awards. He chose to send the $20,000 from the Major League Baseball Players Trust to the Wounded Warrior Project. Awards ABCA College Player of the Year (2013) Baseball America College Player of the Year Award (2013) Baseball America Major League Rookie of the Year (2015) Baseball America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 (2014) Collegiate Baseball Player of the Year (2013) 2× College Baseball All-America Team (2012, 2013) Dick Howser Trophy (2013) Esurance MLB Award for Best Rookie (2015) Golden Spikes Award (2013) Joe Bauman Home Run Award (2014) 3× MLB All-Star (2015, 2016, 2019) MLB Player of the Month (August 2016) 3× MLB Rookie of the Month (May & August 2015) National League Hank Aaron Award (2016) National League Most Valuable Player (2016) National League Rookie of the Year (2015) Players Choice Award for NL Outstanding Rookie (2015) The Sporting News National League Rookie of the Year (2015) USA Today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 Award (2014) World Series champion (2016) Personal life Bryant was named his high school's salutatorian, but allowed a classmate to take the role instead when he found out how badly she wanted it. In college, he majored in biology before switching to finance. Bryant's father, Mike, played in minor league baseball for the Boston Red Sox organization. Mike owned a patio furniture store but sold it in order to get a job that permitted him to coach his son. Bryant and fellow baseball players Bryce Harper and Joey Gallo grew up as acquaintances in the Las Vegas area and began playing baseball with each other at the age of 9. Bryant and Harper's friendly competition was displayed in the May 2015 series against the Washington Nationals at Wrigley Field, when they greeted each other for the first time in the Major Leagues. Bryant proposed to long-time girlfriend Jessica Delp in December 2015. They both grew up in Las Vegas and had dated since they were 14. They were married on January 7, 2017, with one of the groomsmen being Bryant's teammate, Anthony Rizzo. They have three children: a son who was born in April 2020; and twin boys who were born on July 11, 2022. They reside in the Denver area. See also 2013 College Baseball All-America Team Chicago Cubs award winners and league leaders List of Major League Baseball annual runs scored leaders List of people from Las Vegas List of University of San Diego people References External links San Diego Toreros bio 1992 births Albuquerque Isotopes players All-American college baseball players Arizona League Cubs players Baseball players from Nevada Boise Hawks players Chatham Anglers players Chicago Cubs players Colorado Rockies players Daytona Cubs players Golden Spikes Award winners Iowa Cubs players Living people Major League Baseball Rookie of the Year Award winners Major League Baseball third basemen Mesa Solar Sox players National League All-Stars National League Most Valuable Player Award winners San Diego Toreros baseball players San Francisco Giants players Sportspeople from the Las Vegas Valley Tennessee Smokies pla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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덱스터 파울러
윌리엄 덱스터 파울러(William Dexter Fowler, 1986년 3월 22일 ~ )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로 현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외야수이다. 그는 이전적으로 콜로라도 로키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시카고 컵스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그는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미국을 대표하였다. 아마추어 경력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파울러는 조지아주 밀턴에 있는 밀턴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밀턴에서 파울러는 105개의 타수에서 14개의 홈런과 함께 .457 점을 쳤다. 원래 마이애미로 헌신된 후에 그는 하버드 대학교와 마이애미 대학교로부터 제공들을 거부하였다. 로키스와 계약을 맺기 전에 파울러는 독점적으로 오른손 잡이 타자였다. 국제 경력 2008년 시즌 동안 마이너 리그의 선수로서 파울러는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미국을 대표하였다. 그와 미국 팀은 3위 쟁탈 경기에서 일본을 8 대 4로 꺾어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프로 경력 콜로라도 로키스 파울러는 200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의 14번째 라운드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에 의하여 드래프트되었다. 2008년 그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서 뛰는 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의하여 선발되었다. 2008년 올림픽에서 미국 팀을 위하여 뛰는 데 대비하여 파울러는 로키스의 더블 A 텍사스 리그 제휴 털사 드릴러스를 위하여 9개의 홈런, 6개의 타점과 20개의 도루와 함께 .337 점을 타구하였다. 9월 2일 파울러는 처음으로 메이저 리그로 소집되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6 대 5의 엑스트라 이닝 홈 승리에 그날에 데뷔를 하여 10번째 이닝의 말기에서 대주자로서 들어와 1루에서 이어서 견제구 되었다. 이어진 날 자이언츠를 상대로 9 대 2의 홈 패배의 3회 이닝의 말기에서 파울러의 첫 타수에 그는 우익수로 출원하였다. 9월 10일 파울러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9 대 5의 도로 패배의 7번째 이닝의 정상에서 윌 오먼에 자신의 첫 안타인 내야수 안타를 기록하였다. 2009년 4월 8일 파울러는 9 대 2의 도로 승리의 일부로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더그 데이비스에 자신의 첫 경력 홈런을 쳤다. 그는 경기의 첫 투구에 홈런을 쳐 그렇게 하는 데 로키스 역사상 첫 선수가 되었다. 4월 27일 파울러는 12 대 7의 승리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자신이 5개의 도루를 가질 때 현대의 루키 기록을 동점매겼다. 2010년 파울러는 3루타에서 메이저 리그를 이끌어 시즌에 14를 축적하였다. 그해에 439개의 타수에서 그는 6개의 홈런을 치고, 36개의 타점, 73개의 매긴 득점과 총 114개의 안타를 가졌다. 2011년 파울러는 3루타에서 내셔널 리그에서 3위를 하여 그 시즌에 15개를 쳤다. 그해에 481개의 타수에서 그는 5개의 홈런을 치고, 45개의 타점, 84개의 매긴 득점과 총 128개의 안타를 가졌다. 2012년 시즌은 파울러의 타격 통계가 경력 사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13개의 홈런을 치고, 454개의 타수에서 53개의 타점과 .300의 타구 평균을 가졌다. 하지만 홈구장 쿠어스 필드에서 타구하는 동안 그의 성공의 거의가 왔다. 그의 홈 OPS는 .880 이었으나 로드에서는 .694 밖에 안되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2013년 12월 3일 파울러는 외야수 브랜든 반스와 투수 조던 라일스를 위하여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후에 임명되는 데 한 선수와 더불어 이적되었다. 로키스는 결국적으로 후에 임명될 선수 대신 거래를 완료하는 데 애스트로스로 현금을 보냈다. 그는 2014년 시즌 동안 애스트로스를 위하여 116개의 경기에서 .276 점을 쳤다. 시카고 컵스 2015년 1월 19일 파울러는 루이스 발부에나와 댄 스트레일리를 위하여 시카고 컵스로 이적되었다. 그는 .250의 평균과 102개의 매긴 득점, 46개의 타점, 17개의 홈런과 20개의 도루와 함께 2015년 시즌을 끝냈다. 그해 내셔널 리그 와일드 카드 경기에서 파울러는 3개의 안타, 3개의 매긴 득점, 하나의 타점, 하나의 홈런과 하나의 도루와 함께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4 대 0의 승리로 컵스에 도움을 주었다. 97 승 65 패 기록과 함께 컵스가 2015년 시즌을 끝내면서 팀은 7년 만에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으로 들어갔다. 9개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파울러는 2개의 홈런과 3개의 타점과 함께 .396 점을 타구하였다. 뉴욕 메츠를 상대로 2015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4번째 경기에서 그는 컵스가 포스트시즌으로부터 탈락되는 것으로 보이면서 스트라이크아웃 되는 데 최종 타자였다. 파울러는 1주 일찍이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3년 계약으로 보고적으로 동의되었음에 불구하고, 2016년 2월 25일 2017년 시즌을 위하여 공동 선택권을 포함한 컵스와 함께 1년 계약을 맺었다. 오리올스는 탈퇴 조항에 파울러의 주장이 거래 보류였고, 그가 컵스와 함께 계약을 맺을 때 자신들이 약점이었다고 단언하였다. 다른 방면에 파울러는 오리올스와 거래로 자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았고, 비밀 따위가 새는 정확하지 않은 정부를 위하여 그와 그의 대리인이 팀과 대중매체를 핑계대었다고 주장하였다. 5월 5일 심판 빅 카라파자에 의하여 3번이나 스트라이크 부름을 논쟁으로 파울러는 자신의 첫 경력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퇴거를 얻었다. 파울러는 6명의 다른 동료 선수들과 더불어 컵스를 대표하는 2016년 자신의 첫 올스타 경기로 선발되었다. 파울러는 13개의 홈런을 치고, 48개의 타점과 84개의 매긴 득점과 함께 .276 점을 타구하면서 한해를 끝냈다. 그는 스트라이크 존 외부로 투구의 19.4% 만을 스윙하였다 (메이저 리그에서 최저 퍼센티지). 10월 25일 동료 선수들 제이슨 헤이워드, 에디슨 러셀과 칼 에드워즈 주니어와 더불어 파울러는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컵스를 위하여 활약하는 데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들이 되었다. 추가적으로 파울러는 월드 시리즈에서 컵스를 위하여 나오고 타구하는 데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였다. 파울러는 월드 시리즈에서 컵스를 위하여 출발하는 데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이다. 파울러는 홈런과 함께 월드 시리즈의 7번째 경기를 이끌어 홈런과 함께 월드 시리즈 7번째 경기를 이끄는 데 역사상 첫 선수가 되었다. 컵스는 10개의 이닝에서 8 대 7로 경기를 우승하여 108년 만에 팀에게 그들의 첫 챔피언십을 주었다. 11월 5일 파울러는 2017년 시즌을 위한 공동 선택권을 거절하였고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2016년 12월 9일 파울러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5년, 82.5 백만 달러 거래로 동의하였다. 2017년 4월 19일 그는 파이리츠의 투수 게릿 콜을 상대로 카디널스 선수로서 자신의 첫 홈런을 쳤다. 파울러는 118개의 경기에서 .264의 타구 평균, 18개의 홈런과 64개의 타점과 함께 카디널스에서 자신의 첫 시즌을 끝냈다. 2018년 시즌에 대비하여 그는 카디널스의 출발 우익수가 되는 데 수비 위치를 옮기는 데 동의하였으며 오프 시즌에 카디널스는 토미 팸을 중견수로 옮겼고 마르셀 오즈나를 획득하였다. 5월 6일 자신의 전 소속 팀 컵스를 상대로 14번째 이닝의 말기에서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끝내기 홈런을 쳤다. 그의 2개의 홈런은 카디널스를 4 대 3의 승리로 이끄는 도움을 주었다. 8월 21일 파울러는 60일간 장애자 명단에 놓여 자신이 90개의 경기에서 8개의 홈런과 31개의 타점과 함께 .180/.278/.298 점을 휘두른 실망스러운 2018년 시즌을 끝냈다. 파울러는 카디널스의 출발 우익수로서 2019년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 정규 시즌 동안 150개의 경기들에 그는 19개의 홈런과 67개의 타점과 함께 .238/.346/.409 점을 휘둘렀다. 개인 생활 파울러는 데리야 파울러에게 결혼하여 함께 2명의 딸 - 네이야와 아이비를 두었다. 그들은 오프 시즌 동안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사는 편이다. 파울러는 기독교 신자이다. 파울러는 또한 조지아주 출신의 전 동료 선수 크리스 넬슨과 좋은 친구이다. 외부 링크 198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조지아주 출신 야구 선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야구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외야수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 휴스턴 애스트로스 선수 시카고 컵스 선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수 내셔널 리그 올스타 올스타 퓨처스 게임 참가 선수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미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미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2008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미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애틀랜타 출신
https://en.wikipedia.org/wiki/Dexter%20Fowler
Dexter Fowler
William Dexter Fowler (born March 22, 1986) is an American former professional baseball center fielder. He played in Major League Baseball (MLB) for the Colorado Rockies, Houston Astros, Chicago Cubs, St. Louis Cardinals, and Los Angeles Angels. He participated in the 2008 Summer Olympics as a member of the United States national baseball team and won the World Series with the Cubs in 2016. Early life William Dexter Fowler was born in Atlanta, Georgia, and attended Milton High School in Milton, Georgia. At Milton, Fowler hit .457 with 14 home runs in 105 at-bats. Fowler rejected offers from Harvard and the University of Miami in order to play Major League Baseball, after having originally committed to Miami. Before signing with the Rockies, Fowler was exclusively a right-handed hitter. International career As a minor leaguer during the 2008 season, Fowler was selected to represent the United States in the 2008 Summer Olympics in Beijing, China. He and the U.S. team ended up winning the bronze medal in the Olympics by defeating Japan, 8–4, in the bronze medal game. Professional career Draft and minor leagues Fowler was drafted by the Colorado Rockies in the 14th round of the 2004 Major League Baseball draft. In 2008, he was selected by Major League Baseball to play in the All-Star Futures Game at Yankee Stadium. Fowler was batting .337 with nine home runs, 61 runs batted in (RBIs) and 20 stolen bases for the Rockies' Double-A Texas League affiliate, the Tulsa Drillers, prior to playing for Team USA in the 2008 Olympics. Colorado Rockies (2008–2013) Fowler was called up to the Major Leagues for the first time on September 2, 2008. He made his debut that same day in a 6–5 extra-inning home win over the San Francisco Giants, coming in as a pinch runner in the bottom of the 10th inning; he was subsequently picked off at first base. In Fowler's first at-bat in the bottom of the third inning of a 9–2 home loss against the Giants the following day, he flied out to right field. On September 10, 2008, Fowler recorded his first hit, an infield single, off of Will Ohman in the top of the seventh inning of a 9–5 road loss against the Atlanta Braves. On April 8, 2009, Fowler hit his first career home run off Doug Davis of the Arizona Diamondbacks, as part of a 9–2 road win. He hit the home run on the first pitch of the game, becoming the first player in Rockies history to do so. On April 27, 2009, Fowler tied a modern-day rookie record when he stole five bases against the San Diego Padres in a 12–7 victory. In 2010, Fowler led the Majors in triples, accumulating 14 on the season. In 439 at-bats on the year, he had six home runs, 36 RBIs, 73 runs scored, and 114 total base hits. In 2011, Fowler was third in the National League in triples, hitting 15 that season. In 481 at-bats on the year, he hit five home runs, 45 RBIs, 84 runs scored, and 128 total base hits. The 2012 season saw Fowler's batting stats increase to career-highs. He hit 13 home runs, 53 RBIs, and a batting average of .300 in 454 at-bats. However, much of his success came while hitting at home, Coors Field. His home OPS was .880, but only .694 on the road. Houston Astros (2014) On December 3, 2013, Fowler was traded, along with a player to be named later to the Houston Astros for outfielder Brandon Barnes and pitcher Jordan Lyles. The Rockies eventually sent cash to the Astros to complete the deal instead of the player to be named later. He hit .276 in 116 games for the Astros during the 2014 season. Chicago Cubs (2015–2016) On January 19, 2015, Fowler was traded to the Chicago Cubs for Luis Valbuena and Dan Straily. He ended the 2015 season with a .250 average, 102 runs scored, 46 RBIs, 17 home runs, and 20 stolen bases. In the 2015 National League wild card game, Fowler helped the Cubs to a 4–0 win over the Pittsburgh Pirates with three hits, three runs scored, one RBI, one home run, and a stolen base. With the Cubs finishing the 2015 season with a 97–65 record, the team entered the postseason for the first time in seven years. In nine postseason games, Fowler batted .396 with two home runs and three RBIs. In Game 4 of the 2015 NLCS against the New York Mets, he was the final batter to strike out looking as the Cubs were eliminated from the postseason. Fowler signed a one-year contract with the Cubs that included a mutual option for the 2017 season on February 25, 2016, despite reportedly agreeing to a three-year contract with the Baltimore Orioles earlier that week. The Orioles claimed that Fowler's insistence on an opt-out clause after one year was the holdup on the deal and that they were blindsided when he signed with the Cubs. Fowler on the other hand insisted he never had agreed to a deal with the Orioles and he and his agent blamed the team and the media for leaking incorrect information. Fowler earned his first career MLB ejection for arguing a strike three call by umpire Vic Carapazza on May 5, 2016. Fowler was selected to his first All-Star Game in 2016 representing the Cubs along with six other teammates. Fowler finished the year batting with a .276 average hitting 13 home runs and 48 RBIs and 84 runs scored. He swung at only 19.4% of pitches outside the strike zone (the lowest percentage in the majors). On October 25, 2016, Dexter Fowler along with teammates Jason Heyward, Addison Russell, and Carl Edwards Jr. became the first African-Americans to play for the Cubs in a World Series game. Additionally, Fowler was the first African-American to appear and to bat for the Cubs in a World Series. Fowler is the first African-American to start for the Cubs in a World Series. Fowler led off Game 7 of the World Series with a home run, becoming the first player in history to lead off a World Series Game 7 with a home run. The Cubs won the game 8–7 in 10 innings, giving the team their first championship in 108 years. On November 5, Fowler declined his mutual option for the 2017 season and became a free agent. St. Louis Cardinals (2017–2020) On December 9, 2016, Fowler and the St. Louis Cardinals agreed to a five-year, $82.5 million deal. He hit his first home run and RBI as a Cardinal against Pittsburgh Pirates pitcher Gerrit Cole on April 19, 2017. Fowler finished his first season in St. Louis with a .264 batting average, 18 home runs, and 64 RBIs in 118 games. Prior to the 2018 season, he agreed to shift positions to become the Cardinals' starting right fielder; the Cardinals moved Tommy Pham to center and had acquired Marcell Ozuna in the offseason. Fowler hit his first ever walk-off home run on May 6, 2018, in the bottom of the 14th inning against his former team, the Chicago Cubs. His two-run home run helped lead the Cardinals to a 4–3 victory. On August 21, 2018, Fowler was placed on the 60-day disabled list, ending a disappointing 2018 season in which he slashed .180/.278/.298 with eight home runs and 31 RBIs in 90 games. Fowler returned healthy in 2019 as St. Louis' starting right fielder. Over 150 games during the regular season, he slashed .238/.346/.409 with 19 home runs and 67 RBIs. In 2020 he batted .233/.317/.389 with 28 strikeouts in 90 at bats. Los Angeles Angels (2021) On February 4, 2021, the Cardinals traded Fowler and cash to the Los Angeles Angels for a player to be named later. In an April 9 game against the Toronto Blue Jays, Fowler was carted off of the field after suffering an apparent knee injury after awkwardly sliding into second base. It was later revealed that Fowler had suffered a torn left ACL and would undergo season-ending surgery. On April 13, Fowler was placed on the 60-day injured list. Toronto Blue Jays On March 31, 2022, Fowler signed a minor league contract with the Toronto Blue Jays. Fowler appeared in 3 games for the Triple-A Buffalo Bisons, going 5-for-12 with 3 RBI. On May 3, Fowler requested and was granted his release by the Blue Jays. On January 31, 2023, Fowler announced his retirement from professional baseball. Personal life Fowler is married to Aliya Fowler and together they have two daughters. They live in Las Vegas during the offseason. Fowler is a Christian. Fowler is good friends with former teammate Chris Nelson, who is also from Georgia. See also List of Colorado Rockies team records List of Major League Baseball annual triples leaders List of Olympic medalists in baseball List of people from Atlanta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1986 births Living people National League All-Stars Baseball players from Atlanta African-American baseball players Major League Baseball center fielders Baseball players at the 2008 Summer Olympics Medalists at the 2008 Summer Olympics Olympic bronze medalists for the United States in baseball Colorado Rockies players Houston Astros players Chicago Cubs players St. Louis Cardinals players Los Angeles Angels players Casper Rockies players Waikiki Beach Boys players Asheville Tourists players Modesto Nuts players Peoria Javelinas players Tulsa Drillers players Colorado Springs Sky Sox players Oklahoma City RedHawks players Buffalo Bisons (minor league) players 21st-century African-American sportspeople 20th-century African-American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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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드베이커 US6 6륜구동 2.5톤 트럭
스튜드베이커 US6 (G630) 시리즈의 6x6 구동 2.5톤과 6x4 구동 5톤 트럭은 스튜드베이커사와 REO 자동차 회사가 2차 세계 대전 중에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화물 를 전천후 운송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화물차이다. 대부분은 소련에 대여 조건으로 미국이 2차 세계 대전 동안 수출했는데 GMC 6x6 CCKW 트럭보다 앞서기 위해 서부 전선 기후에 견디게끔 개선한 이후의 일이었다. 역사 디자인 및 개발 1939~1940년에 미 육군 병기 보급 군단이 2.5톤(2,238 kg) 전술 6×6 구동 트럭을 개발하여 비포장 도로 혹은 어느 환경에서든지 작전을 펼칠 수 있다. 스튜드베이커와 옐로우 코치(GM 회사) 그리고 인터네셔널 하베스터 3사가 승인한 디자인을 모두 제출하여 1941년에 생산에 들어갔다. 2.5톤(2,268 kg) 6x6 구동 트럭과 비슷한 버전인 5톤(4,536 kg) 6x4 구동 트럭이 열세 번의 바리에이션을 걸쳤고 총 219,882대가 제작됐다. 스튜드베이커는 주요 생산업체로서 인디애나주 사우스밴드 공장에서 197,678대를 제작한 반면 REO는 하청을 받고 1944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22,204대를 생산하는데 그쳤다. REO의 트럭은 스튜드베이커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REO는 긴 휠베이스를 장착하고 전면 윈치를 제거한 화물차만 개발하였으며 정확한 모델명은 US6 U9로 불린다. 두 제조 업체의 모든 생산은 1945년에 끝났다. 활약 US6 모델은 주로 무기대여법 하에 수출용으로 제작됐다. 소련이 가장 큰 수입국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 스튜드베이커 US6 트럭은 1941년 가을 소련으로 수출됐다. 이 붉은 군대는 6x6 구동 "Studebekkers"(소련에서 불린 명칭) 열한 대를 1942년 7월부터 1943년 5월동안 테스트하였다. 테스트 결과가 나오자 화물 적재하중을 2.5톤(2,300 kg)에서 4톤(3,600 kg)으로 늘렸다. 1945년에는 3.5톤(3,200 kg)으로 줄었다(비포장도로 측정무게로 포장도로에서는 최대 5톤(4,500 kg) 수행 가능하다). 대량의 스튜드베이커 US6 트럭이 무기대여법을 조건으로 이란에 있는 페르시아 회랑지대를 통해 소련에 공급되었다. 이 트럭은 전시에 소련군에게 중요한 역할을 많이 수행했는데 견인포나 대전차포를 견인한다거나 장거리 인원 수송에 동원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뛰어난 견고성과 신뢰성을 포함하여 저품질 연료로도 달리는 능력으로 잘 알려졌다. 붉은 군대도 트럭의 적합한 플랫폼을 발견하여 카츄샤 다련장 로켓포로 일부 개조하기도 했다. 소련군은 애칭으로 스튜더(Studer )라 불렀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 전력에 중요함을 인지하여 스튜드베이커에 감사의 편지를 개인적으로 보내 US6의 뛰어난 능력을 치하하기도 했다. 스튜드베이커 US6 트럭은 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이 리도 공로 및 북미지역의 알레스카 고속도로를 개설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이 종전 직후 US6의 디자인은 소련의 자동차 ZiS/ZiL-151 트럭이 비슷한 후속버전인 ZiL-157으로 개선하는 등의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양 엔진과 동력 전달 장치 US6은 헤라클레스 JXD 엔진을 사용하여 사양은 플렛 헤드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이며 2800 rpm에는 을 1150 rpm에는 토크의 성능을 낸다. 압축비는 5.82:1으로 보수적이며 신뢰성 높은 엔진이라 할 수 있고 72-옥탄 휘발유를 사용한다. 이와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모델은 M3 하프 트랙과 이후에 M8 그레이하운드와 M20 장갑차가 나왔다(M20는 M8 그레이하운드의 바리에이션(기관총 포탑이 없다)). 보그워너 93년형 T 5 변속기는 처음에 4단에서 5단으로 바뀌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PTO가 윈치(라디에이터 전면부 바로 아래 장착됨)를 작동하도록 힘을 전달하고 덤프 트럭(U10/U11 및 U12/U13 덤프 트럭 모델)에 장착된 유압 호이스트를 작동하기도 한다. 팀켄 T-79 보조변속기는 기어를 올리거나 중립 혹은 낮은 단계로 내려 전면 차축에 동력을 전달하거나 끊기도 한다. 하나의 출력축이 전면 차축(6x4 구동 차축에는 장착되지 않았다)에 그리고 두 개는 후면 차축 양쪽에 장착되었다. 전면과 후면 차축은 팀켄의 6.6:1 분할형을 따른다. 전면 차축은 밸타입 등속조인트이며 후면의 두 개는 전부동식이다. 섀시 US6의 섀시는 세 개의 빔 액슬이 달린 래더 프레임과 전면에 반 타원형의 리프 스프링, 후면 암에 리프스프링이 받쳐주는 텐덤으로 이루어져있다. 휠베이스는 길고 짧은 두 가지 종류로 하나는 이며 보통 트럭 트랙터, 덤프트럭, 카고 트레일러에 달려있고 다른 하나는 이며 탱크로리, 컨테이너트럭, US6 U9 세시 모델에 달려있다(휠베이스 길이는 전면 차축의 중심에서 후면 대차의 중심 사이를 측정한다). 타이어 폭은 7.50인치에 지름은 20인치이며 타이어가 두 겹인 복륜이다. 6x4 구동 트럭은 포장 도로에서 적재량이 5 톤(4536 kg)으로 오프로드 6x6 구동 모델보다 두 배를 더 싣는다. 캡 군용 트럭인 US6은 스튜드베이커가 만드는 사제 트럭 캡 디자인의 조상격이다. 미군 2.5톤 6x6 구동 트럭과 비교해 스튜드베이커 트럭의 차별점은 문 양쪽에 삼각창이 달렸다는 것이다. 삼각창은 문짝에 달린 손잡이로 여는 창과 분리되어 트럭 캡의 공기를 빼는 도움을 했을 것이다. 스튜드베이커는 캡이 개방된 특징이 있는 GMC CCKW(후기 모델)을 디자인했지만 주요 고객인 소련은 대게 춥고 혹독한 기후 탓에 폐쇄된 캡을 선호했다. 한편 개방형 캡의 트럭은 미국의 표준이 되었으나 폐쇄형 캡 트럭은 이전에 10,000대가 팔리고서야 다시 생산을 시작했다. 모델 U1 및 U2 화물 트럭(전면 윈치가 적용)은 휠베이스가 짧고 스페어 타이어를 캡 뒤에 장착하여 적재함의 길이가 고작 에 불과하다. 이러한 트레일러 모습이 몸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US6가 주로 화물 운반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U3/U4와 6x4 구동 U7/U8 화물 트럭은 휠베이스가 더 길어서 의 적재함 밑에 스페어 타이어를 장착할 수 있다. 제조한 197,000대의 트럭의 적재함 길이가 이다. U5 탱크로리는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 탱크가 긴 휠베이스 위 적재함에 장착되었다. 탱크로리는 윈치를 장착하지 않았다. 전체 US6 트럭에서 트럭 트랙터는 6x4 구동 U6이 유일하다. 트럭 트랙터는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오프로드를 달릴 수 있고 포장 도로에서는 5톤이나 적재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전면 윈치가 없다. U9 화물 트럭은 휠베이스가 길고 전면 윈치를 거치했다. 소련 카츄샤 다련장 로켓 발사기가 적재함 위에 거치되었을 것이다(대부분의 소련군 US6 트럭은 U9 모델이다). U10/U11 (리어 덤프)및 U12/U13 (사이드 덤프)는 짧은 휠베이스를 달았다. 두 형식 모두 트럭 서스펜션 멤버에 적재함을 거치하여 리어 덤프는 유압 실린더가 섀시에 달려 레버로 조정하고 사이드 덤프는 유압 실린더가 트럭의 몸체에 달렸다. 치수 참조 각주 외부 링크 Australian Studebakers US6 US -ton at Engines of the Red Army Studebaker/Reo US6 at Olive-Drab.com Studebaker/Reo US6 at The-Bluprints.com 미국의 군용 차량
https://en.wikipedia.org/wiki/Studebaker%20US6%202%C2%BD-ton%206%C3%976%20truck
Studebaker US6 2½-ton 6×6 truck
The Studebaker US6 (G630) was a series of -ton 6×6 and 5-ton 6×4 trucks manufactured by the Studebaker Corporation and REO Motor Car Company during World War II. The basic cargo version was designed to transport a cargo load over any type of terrain in any weather. Most of these were exported to the Soviet Union under Lend-Lease by the USA during World War II, since the competing GMC 6×6 CCKW design proved to be more suitable for Western Front conditions. History Design and development In 1939–1940 the US Army Ordnance Corps was developing tactical 6×6 trucks that could operate off-road in all weather. Studebaker, Yellow Coach (a GM company) and International Harvester all submitted designs that were accepted and went into production in 1941. A total of 219,882 -ton 6×6 trucks and similar 6×4 versions in thirteen variations were built. Studebaker was the primary manufacturer, which built 197,678 of them at its South Bend IN plant, while Reo produced 22,204 more at its Lansing, Michigan plant from 1944 under a sub-contract. Reo trucks are identical to Studebakers, but Reo built only cargo-model trucks with the long wheelbase and without the front-mounted winch, more specifically referred to as the US6 U9. All production by both manufacturers ended in 1945. Service The US6 was manufactured primarily for export under Lend-Lease. The Soviet Union would become the largest foreign operator. The first Studebaker US6 trucks arrived in the USSR in the autumn of 1941. The Red Army organized a test of eleven 6×6 "Studebekkers" (as they become referred to in the USSR) which took place between July 1942 and May 1943. The results were used to direct the enlargement of the payload from . In 1945, it was lowered to tons (3,200 kg), although on improved roads they could carry up to a maximum of 5 tons (4,500 kg). Large numbers of Studebaker US6 trucks were supplied to the Soviet Union via the Persian Corridor in Iran under the USA's Lend-Lease program. The truck fulfilled many important roles in service with Soviet military forces during the war, such as towing artillery pieces and anti-tank guns and transporting troops over long distances. It was renowned for its overall ruggedness and reliability, including its ability to run on poor-quality fuel. The Soviet Red Army also found them to be a suitable platform for conversion into Katyusha rocket launchers, although this was not their main purpose. The truck became affectionately known as the Studer by Soviet troops and was even recognised of its importance (to the Soviet war effort) by Joseph Stalin, who sent a personal letter of appreciation to Studebaker, in which he thanked it for the superb quality of the US6 for Soviet service. Studebaker US6 trucks were also used by the US military in the construction of the Ledo Road in Burma, and the Alcan Highway in North America, during WWII. Specifications Engine and driveline The US6 used a Hercules JXD engine, with an L-head inline 6 cylinder gasoline engine developing at 2800 rpm and of torque at 1150 rpm. A conservative-type and highly-reliable engine with a compression ratio of only 5.82:1, it could use 68-octane gasoline. This same engine was also used in the M3 Scout Car and, later, M8 Greyhound and M20 armoured cars (the latter was a variant (lacking the gun turret) of the M8 Greyhound). The Warner T 93 5 speed transmission had a very low first, a direct fourth and an overdrive fifth gear. A power take-off could be fitted to operate a winch (mounted just below in front of the radiator) and/or the hydraulic hoist on dump trucks (the U10/U11 and U12/U13 dump truck models). The Timken T-79 transfer case had high and low ranges, a neutral position and could either engage or disengage the front axle. There was one output shaft mounted forward to the front axle (not used in 6×4 trucks) and two to the rear, with one for each rear axle. Both front and rear axles were of the Timken split-type with a ratio of 6.6:1. The front axle had ball-type constant-velocity joints while the two at the rear were full-floating. Chassis The US6 had a ladder frame with three beam axles, the front on semi elliptical leaf springs, the rear tandem on quarter elliptical leaf springs with locating arms. There were two wheelbases, the short , used in semi tractors, dump trucks, and short cargo models, and the long , used in tankers, long cargo models, and the U9 chassis cab (measurements are from the centerline of the front axle to the centerline of rear bogie). All models had 7.50-20" tires and dual rear tires. 6×4 models, intended for on road use only, were rated at , twice the 6×6's off-road rating. Cab The US6 carried the design of Studebaker's civilian truck cab, although it was modified for military use. Studebaker trucks were different from other 6×6 trucks built for the war effort of the USA because vent windows were included in each door. These vent windows were separate from the main window that rolled down into the door-frame and could be swung out to help with the truck cab's ventilation. Studebaker also designed the open-type military truck cab which was featured on the GMC CCKW (later models), but their major customer, the USSR, preferred the closed cab for their generally harsh (cold-weather) climate. While Studebaker's open-type truck cab became the American standard, production of the US6 with the closed-type truck cab was restarted after only 10,000 units of the former. Models The U1 and the U2 cargo trucks (which had a frontally-mounted winch) had a short wheelbase and the spare tire was mounted behind the cab, thus allowing a truck-bed measuring only long. These "prime mover"-style bodies were not a success as the US6 was to be mainly used for transporting cargo. The U3/U4 and the 6×4 U7/U8 cargo trucks had a longer wheelbase, which allowed the spare tire to be mounted under the truck-bed. 197,000 trucks with the truck-bed were built. The U5 tank truck had a long wheelbase and a two-compartment tank mounted on the truck-bed. Tanker trucks were not equipped with winches. The 6×4 U6 semi-tractor was the only semi-tractor version in the entire US6 truck series. Semi-tractors have limited off-road performance and, therefore, the U6 was rated for a 5-ton load on improved roads. For this same reason, they had no frontally-mounted winch. The U9 cargo truck had a long wheelbase and lacked a frontally-mounted winch. The Soviet Katyusha multiple rocket launcher could be mounted on their truck-beds (most of the US6 trucks in Red Army service were of the U9 model). The U10/U11 (end-type) and the U12/U13 (side-type) dump trucks had a short wheelbase. Both types had the dump-body mounted on a sub-frame at the rear of the truck, with the end-type dump having a hydraulic cylinder attached to the chassis with a lever arrangement while the side-type dump had the hydraulic cylinder mounted directly to the truck body. Dimensions Legacy Some Studebaker US6 trucks that were shipped to the Soviet Union during WWII and decommissioned from service after 1945 had their cabs and plumage taken off and used in the prototypes of the GAZ-51 truck, which eventually underwent mass production in 1946. The construction of the Studebaker US6 strongly influenced the construction of the postwar ZIS-151 truck, which then evolved into the ZIL-157 truck which remained in production up until 1994. The Studebaker US6 truck became a legendary vehicle with its Soviet operators at the time and was called the "King of Roads" by soldiers due to their reliability and dependability, and is still popular in Russian vehicle-collector circles and clubs. In the United States, these trucks are seen as the symbol for the Lend-Lease program to the USSR. It is estimated that an unrestored US6 truck would cost around $11,000, while a restored one would cost around $24,000. The most sought-after US6 trucks are the ones that were produced by REO Motors (U9 version), since only slightly over 20,000 units were built by them. See also List of the United States military vehicles by supply catalog designation List of the United States military vehicles by model number GMC CCKW -ton 6×6 truck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Australian Studebakers US6 US -ton at Engines of the Red Army Studebaker/Reo US6 at Olive-Drab.com Studebaker/Reo US6 at The-Bluprints.com US6 Military trucks of the United States World War II vehicles of the United States World War II vehicles of the Soviet Union World War II vehicles Military vehicles introduced from 1940 to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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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보뇌르
로자 보뇌르(Rosa Bonheur, 1822년 3월 16일 ~ 1899년 5월 25일)는 마리 로잘리 보뇌르(Marie-Rosalie Bonheur)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프랑스 예술가로 동물 화가이자 조각가로 사실주의적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그림으로 1848년 살롱 파리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Ploughing in the Nivernais과 1853년 살롱에 전시되고(1855년 종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말 시장 (프랑스: Le marche aux chevaux)이 있다.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유년기 발달과 예술 훈련 1822년 3월 16일 지롱드주 보르도에서 예술가 가족의 첫째로 태어났다. 피아노 교사였던 소피 보뇌르(née Marquis)는 로자가 열 한 살 때 사망했다. 풍경화와 초상화 화가였던 아버지 오스카-레이몬드 보뇌르는 딸의 예술적 재능을 격려했다 남성과 함께 여성의 교육을 장려하는 생시몽주의를 따르는 기독교-사회주의 종파 가풍에 따라 교육받았다. 로자 보뇌르의 형제 자매로 동물화가 오귀스트 보뇌르와 줄리엣 보뇌르, 동물 조각가 이시도로스 쥘 보뇌르가 있다. 프랜시스 골턴은 1896년 에세이 Hereditary Genius에서 보뇌르 가족을 천재성 유전의 예시로 들었다. 로자 보뢰르는 6세이던 1828년에 어머니와 형제 자매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는데, 아버지는 주거지와 수입원을 마련하기 위해 앞서 이주했다. 로자는 다루기 어려운 아이로 읽기를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말하기도 전에 몇시간씩 종이와 연필로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알파벳마다 다른 동물을 선택해서 그리게 하는 방식으로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로자는 자신의 동물 그리기에 대한 애정이 어머니와 읽기 수업 덕분이라고 말했다. 로자는 학교에서 종종 갈등을 빚어 여러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열 두 살에 재봉사 도제가 되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 아버지가 화가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로자의 아버지는 살아있는 동물을 가족 스튜디오에 데려와서, 동물 그리기에 대한 흥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전통적인 예술학교 교육과정을 거친 후에는, 드로잉 책의 이미지를 모방하거나 석고 모델을 스케치하는 방식으로 훈련하기 시작했다. 말, 양, 소, 염소, 토끼를 포함한 가축 외에 파리 근교 목초지, 르발루아페레 근처의 오픈 필드와 당시 야생 상태였던 불로뉴 숲의 다른 동물의 습작을 그렸다. 열네살부터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작을 시작했다. 가장 좋아한 화가인 니콜라스 푸생과 페테르 파울 루벤스 외에도 파울루스 포테르, Frans Pourbus the Younger, 루이 레오폴 로베르, 살바토르 로사, 카렐 뒤자르댕의 작품도 모사했다. 파리의 도살장과 알포르 국립 수의 학교에서 동물을 해부하며 동물의 해부학 및 골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준비한 세밀한 습작은 이후 회화와 조각 작품에 참조로 사용했다. 이 기간 동안 부자지간인 비교 해부학자 및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Isidore Geoffroy Saint-Hilaire와 친분을 맺었다. 초기 성공 프랑스 정부가 의뢰한 Ploughing in the Nivernais는 로자의 첫번째 성공작으로 1849년에 전시되었고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소장되어있다. 가장 유명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인 말 시장은 높이 8피트에 6피트 너비로 1855년에 완성되었다. 말 시장은 살페트리에르 병원 근처의 로피탈 대로에서 열린 파리의 말 시장을 묘사하고 있다. 축소된 버전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이 작품의 성공은 국제적 명성과 인정으로 이어져 같은 해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때 로자의 작품에 감탄한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서 1859년 완성한 Highland Shepherd와 1890년에 완성한 A Scottish Raid을 포함한 후속 작품들의 스케치를 완성하기도 했다. 조국인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1865년 외제니 드 몽티조가 수여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로자 보뇌르는 여성 예술가로서 최초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후원과 작품 시장 미술상인 Ernest Gambart(1814-1902)가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1855년에 보뇌르를 영국으로 불러왔고 작품의 복제권을 구매했다. 보뇌르 작품의 많은 판화가 당시 최고의 판화가 중 하나였던 Charles George Lewis(1808-1880)의 복제작업으로 만들어졌다. 1859년에 상업적 성공 덕분에 파리에서 멀지 않은 퐁텐블로 숲 근처 비by라는 마을로 이사해서 여생을 살았다. 상당 수준의 재건축을 거쳤고 동물 모델을 위한 우리도 있었다. 현재는 보노르에 헌정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생활과 레거시 여성은 마지 못해 예술가로 교육받던 시대에 상당 수준의 성공을 거둔 예술가가 되면서 그녀의 뒤를 따르는 여성 예술가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보뇌르는 19세기의 "신여성"으로 볼 수 있다. 남성의 옷을 입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보뇌르는 상당히 공개적인 레즈비언으로 첫 번째 파트너 나탈리 미카와 미카가 죽기전까지 40년 이상 함께 살았다. 이후에는 미국의 화가 안나 엘리자베스 클럼크와 연인 관계를 맺었다. 레즈비언 섹스가 정신이상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솔직함은 획기적이었다. 일생동안 두 명의 여성 파트너가 있었는데, 첫 번째 파트너와는 함께 성장해서 40년 이상 함께 살았으며, 두 번째 파트너는 첫 번째 파트너의 사망 후에 받아들였다. 보뇌르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사냥이나 흡연에서 즐거움을 얻었으나 여성성을 남성이 제공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고 여겼다. 남성을 어리석은 존재로 여겼고 자신이 관심을 갖는 남성은 자신이 그리는 황소 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회화에 있어 절대 남성의 보조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경영자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여성 파트너에게 의지했다. 파트너들이 가정 생활에 집중하는동안 경제적 가장으로 그림에 집중했다. 보뇌르의 선례는 사회가 제안하는 생활 방식을 원치 않는 다른 레즈비언 예술가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보뇌르는 1899년 5월 25일 77세의 나이에 퐁텐플로에서 사망했다. 평생의 동반자 나탈리 미카(1824년–1889년 6월 24일)와 함께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 묻혔고 클럼크도 나중에 함께 묻혔다. 공개되지 않았던 다수의 회화 작품이 1900년 프랑스 경매에서 판매되었다. 작품 중 하나인 Monarchs of the Forest는 2008년 미화 200,000달러를 조금 넘는 금액에 판매되었다. 작품 연대 니베르네의 쟁기질Ploughing in the Nivernais, 1849 말 시장The Horse Fair, 1852–55 고원의 양치기The Highland Shepherd, 1859 A Family of Deer, 1865 Changing meadows (Changement de pâturages), 1868 Spanish muleteers crossing the Pyrenees (Muletiers espagnols traversent les Pyrénées), 1875 Weaning the Calves, 1879 Relay Hunting, 1887 버팔로 빌 코디의 초상 Portrait of William F. Cody, 1889 The Monarch of the herd, 1868 선별된 작품 다른 이미지 참조 로자 브뢰르 기념 공원 여성 예술가 각주 외부 링크 두산백과 로자 보뇌르 네이버 미술 검색 다음백과 보뇌르 1822년 출생 1899년 사망 프랑스의 화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 수훈자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 수훈자 레즈비언 예술가 여자 화가 보르도 출신 프랑스의 성소수자 미술가 19세기 성소수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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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a Bonheur
Rosa Bonheur (born Marie-Rosalie Bonheur; 16 March 1822 – 25 May 1899) was a French artist known best as a painter of animals (animalière). She also made sculptures in a realist style. Her paintings include Ploughing in the Nivernais, first exhibited at the Paris Salon of 1848, and now in the Musée d'Orsay in Paris, and The Horse Fair (in French: Le marché aux chevaux), which was exhibited at the Salon of 1853 (finished in 1855) and is now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n New York City. Bonheur was widely considered to be the most famous female painter of the nineteenth century. It has been claimed that Bonheur was openly lesbian, as she lived with her partner Nathalie Micas for over 40 years until Micas's death, after which she lived with American painter Anna Elizabeth Klumpke. However, others remark that nothing supports this claim. Early development and artistic training Bonheur was born on 16 March 1822 in Bordeaux, Gironde, the oldest child in a family of artists. Her mother was Sophie Bonheur (née Marquis), a piano teacher; she died when Rosa was eleven. Her father was Oscar-Raymond Bonheur, a landscape and portrait painter who encouraged his daughter's artistic talents. Though of Jewish origin, the Bonheur family adhered to Saint-Simonianism, a Christian socialist sect that promoted the education of women alongside men. Bonheur's siblings included the animal painters Auguste Bonheur and Juliette Bonheur, as well as the animal sculptor Isidore Jules Bonheur. Francis Galton used the Bonheurs as an example of the eponymous "Hereditary Genius" in his 1869 essay. Bonheur moved to Paris in 1828 at the age of six with her mother and siblings, after her father had gone ahead of them to establish a residence and income there. By family accounts, she had been an unruly child and had a difficult time learning to read, though she would sketch for hours at a time with pencil and paper before she learned to talk. Her mother taught her to read and write by asking her to choose and draw a different animal for each letter of the alphabet. The artist credited her love of drawing animals to these reading lessons with her mother. At school she was often disruptive, and was expelled numerous times. After a failed apprenticeship with a seamstress at the age of twelve, her father undertook her training as a painter. Her father allowed her to pursue her interest in painting animals by bringing live animals to the family's studio for studying. Following the traditional art school curriculum of the period, Bonheur began her training by copying images from drawing books and by sketching plaster models. As her training progressed, she made studies of domesticated animals, including horses, sheep, cows, goats, rabbits and other animals in the pastures around the perimeter of Paris, the open fields of Villiers near Levallois-Perret, and the still-wild Bois de Boulogne. At fourteen, she began to copy paintings at the Louvre. Among her favorite painters were Nicolas Poussin and Peter Paul Rubens, though she also copied the paintings of Paulus Potter, Frans Pourbus the Younger, Louis Léopold Robert, Salvatore Rosa and Karel Dujardin. She studied animal anatomy and osteology in the abattoirs of Paris and dissected animals at the École nationale vétérinaire d'Alfort, the National Veterinary Institute in Paris. There she prepared detailed studies that she later used as references for her paintings and sculptures. During this period, she befriended the father-and-son comparative anatomists and zoologists, Étienne Geoffroy Saint-Hilaire and Isidore Geoffroy Saint-Hilaire. Early success A French government commission led to Bonheur's first great success, Ploughing in the Nivernais, exhibited in 1849 and now in the Musée d'Orsay in Paris. Her most famous work, the monumental The Horse Fair, was completed in 1855 and measured .<ref>, sketch for the London version; the sketch for the New York version is in the Ludwig Nissen Foundation, see: C. Steckner, in: Bilder aus der Neuen und Alten Welt. Die Sammlung des Diamantenhändlers Ludwig Nissen, 1993, p. 142 and spaeth.net </ref> It depicts the horse market held in Paris, on the tree-lined boulevard de l'Hôpital, near the Pitié-Salpêtrière Hospital, which is visible in the painting's background. There is a reduced version in the National Gallery in London. This work led to international fame and recognition; that same year she traveled to Scotland and met Queen Victoria, who admired Bonheur's work. In Scotland, she completed sketches for later works including Highland Shepherd, completed in 1859, and The Highland Raid, completed in 1860. These pieces depicted a way of life in the Scottish highlands that had disappeared a century earlier, and they had enormous appeal to Victorian sensibilities. Bonheur exhibited her work at the Palace of Fine Arts and The Woman's Building at the 1893 World's Columbian Exposition in Chicago, Illinois. In 1889 and 1890 she developed a friendship with American sculptor Cyrus Dallin who was studying in Paris. Together they sketched the animals and cast of Buffalo Bill Cody's Wild West Show. In 1890 Bonheur painted Cody on horseback. Dallin's work from this period "A Signal of Peace" would also be displayed in Chicago in 1893 and be the first major step in his career. Though she was more popular in England than in her native France, she was decorated with the French Legion of Honour by Empress Eugénie in 1865, and was promoted to Officer of the Order in 1894. She was the first female artist to be given this award. Patronage and the market for her work Bonheur was represented by the art dealer Ernest Gambart (1814–1902). In 1855 he brought Bonheur to the United Kingdom, and he purchased the reproduction rights to her work. Many engravings of Bonheur's work were created from reproductions by Charles George Lewis (1808–1880), one of the finest engravers of the day. In 1859 her success enabled her to move to the Château de By near Fontainebleau, not far from Paris, where she lived for the rest of her life. The house is now a museum dedicated to her. Personal life and legacy Women were often only reluctantly educated as artists in Bonheur's day, and by becoming such a successful artist she helped to open doors to the women artists who followed her. Bonheur was known for wearing men's clothing; she attributed her choice of trousers to their practicality for working with animals (see Rational dress). She lived with her first partner, Nathalie Micas, for over 40 years until Micas' death, and later began a relationship with the American painter Anna Elizabeth Klumpke. At a time when lesbianism was regarded as animalistic and deranged by most French officials, Bonheur's outspokenness about her personal life was groundbreaking. In a world where gender expression was policed, Bonheur broke boundaries by deciding to wear trousers, shirts and ties, although not in her painted portraits or posed photographs. She did not do this because she wanted to be a man, though she occasionally referred to herself as a grandson or brother when talking about her family; rather, she identified with the power and freedom reserved for men. It also broadcast her sexuality at a time where the lesbian stereotype consisted of women who cut their hair short, wore trousers, and chain-smoked. Rosa Bonheur did all three. Bonheur never explicitly said she was a lesbian, but her lifestyle and the way she talked about her female partners suggest this. Until 2013 women in France were technically forbidden from wearing trousers by the “Decree concerning the cross-dressing of women” which was implemented on 17 November 1800. By at least World War II this was largely ignored, but in Bonheur's time was still an issue. In 1852, Bonheur had to ask permission from the police to wear trousers, as this was her preferred attire to go to the sheep and cattle markets to study the animals she painted. Bonheur, while taking pleasure in activities usually reserved for men (such as hunting and smoking), viewed her womanhood as something far superior to anything a man could offer or experience. She viewed men as stupid and mentioned that the only males she had time or attention for were the bulls she painted. Having chosen to never become an adjunct or appendage to a man in terms of painting, she decided she would be her own boss and that she would lean on herself and her female partners instead. She had her partners focus on the home life while she took on the role of breadwinner by concentrating on her painting. Bonheur's legacy paved the way for other lesbian artists who didn't favour the life society had laid out for them. Bonheur died on 25 May 1899, at the age of 77, at Thomery (By), France. She was buried together with Nathalie Micas (1824 – 24 June 1889), her lifelong companion, at Père Lachaise Cemetery, Paris. Klumpke was Bonheur's sole heir after her death, and later joined Micas and Bonheur in the same cemetery upon her death. Bonheur, Micas, and Klumpke's collective tombstone reads, "Friendship is divine affection". Many of her paintings, which had not previously been shown publicly, were sold at auction in Paris in 1900.Galerie Georges Petit. 1er. Tome, Catalogue des tableaux par Rosa Bonheur, May 30-June 2, 1900. 2eme Tome, Aquarelles, dessins, gravures par Rosa Bonheur, June 5-8, 1900. Along with other realist painters of the 19th century, for much of the 20th century Bonheur fell from fashion, and in 1978 a critic described Ploughing in the Nivernais as "entirely forgotten and rarely dragged out from oblivion"; however, that same year it was part of a series of paintings sent to China by the French government for an exhibition titled "The French Landscape and Peasant, 1820–1905". Since then her reputation has been somewhat revived. Art historian Linda Nochlin’s 1971 essay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considered a pioneering essay for both feminist art history and feminist art theory, contains a section about and titled "Rosa Bonheur." One of Bonheur's works, Monarchs of the Forest, sold at auction in 2008 for just over $200,000. On 16 March 2022, Google honoured Bonheur with a Doodle to mark the bicentennial of her birth. The Doodle reached five countries: the United States, Ireland, France, Iceland and India. Biographical works The first biography of Bonheur was published during her lifetime: a pamphlet written by Eugène de Mirecourt, Les Contemporains: Rosa Bonheur, which appeared just after her Salon success with The Horse Fair in 1856. Bonheur later corrected and annotated this document. The second account was written by Anna Klumpke, Bonheur's companion in the last year of her life. Klumpke's biography, published in 1909 as Rosa Bonheur: sa vie, son oeuvre, was translated in 1997 by Gretchen Van Slyke and published as Rosa Bonheur: The Artist's (Auto)biography, so-named because Klumpke had used Bonheur's first-person voice.Reminiscences of Rosa Bonheur, edited by Theodore Stanton (the son of Elizabeth Cady Stanton), was published in London and New York in 1910. It includes numerous correspondences between Bonheur and her family and friends, in which she describes her art-making practices. The 1905 book Women Painters of the World (assembled and edited by Walter Shaw Sparrow) was subtitled "from the time of Caterina Vigri, 1413–1463, to Rosa Bonheur and the present day". List of works Ploughing in the Nivernais, 1849 The Horse Fair, 1852–55 Haymaking in the Auvergne, 1853-55 The Highland Shepherd, 1859 A Family of Deer, 1865 Changing meadows (Changement de pâturages), 1868 Spanish muleteers crossing the Pyrenees (Muletiers espagnols traversent les Pyrénées), 1875 Weaning the Calves, 1879 Relay Hunting, 1887 Portrait of William F. Cody, 1889 The Monarch of the herd, 1868 Gallery See also Rosa Bonheur Memorial Park (Rosa Bonheur Prize) Women artists References Resources NMWA.org Collection Profile - Bonheur article and artwork at NMWA. Further reading Dore Ashton, Rosa Bonheur: A Life and a Legend. Illustrations and Captions by Denise Browne Harethe. New York: A Studio Book/The Viking Press, 1981 NYT Review Catherine Hewitt, Art is a Tyrant: The Unconventional Life of Rosa Bonheur. UK Published by Icon Books Ltd in 2020. Isabella Zuralski-Yeager, "Tedesco Frères Selling Rosa Bonheur: An Inquiry into Dealers’ Stock Books." The Getty Research Journal, vol. 16, 2022, https://www.journals.uchicago.edu/doi/10.1086/721990. External links Joseph J. Rishel, “Barbaro after the Hunt by Marie-Rosalie Bonheur (W1900-1-2),” in The John G. Johnson Collection: A History and Selected Works, a Philadelphia Museum of Art free digital publication. How France is leveraging a lottery to finance historic preservation, 2020 PBS Newshour report with interior scenes of Bonheur's atelier Rosa Bonheur - Artcyclopedia search Rosa Bonheur - Rehs Galleries' biographical information and an image of her painting Couching Lion'', 1872 Rosa Bonheur Plowing in the Nivernais (1849). A video discussion about the painting from smarthistory.khanacademy.org A life without Compromise — Rosa Bonheur biography, artworks and writings on Trivium Art History Art and the empire city: New York, 1825-1861, an exhibition catalog fro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fully available online as PDF), which contains material on Bonheur (see index) "Bonheur, Rosa,--1822-1899." Library of Congress 1822 births 1899 deaths Artists from Bordeaux 19th-century French painters French women painters Lesbian painters French lesbian artists French LGBT painters Female-to-male cross-dressers French Realist painters French people of Jewish descent Burials at Père Lachaise Cemetery Equine artists Knights of the Legion of Honour Officers of the Legion of Honour Recipients of the Legion of Honour 19th-century French sculptors 19th-century French women artists Sibling artists Society of Women Artists members
https://ko.wikipedia.org/wiki/2018%20%ED%83%80%EC%9D%B4%EC%A4%91%20%EC%84%B8%EA%B3%84%20%EA%BD%83%EB%B0%95%EB%9E%8C%ED%9A%8C
2018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영문:,약칭타이중 엑스포、타이중 꽃박람회)는 2018년 11월 3일부터 2019년 4월 24일까지 대만 타이중시에서 열리는 국제적 규모의 꽃박람회이다.타이중 꽃박람회는 국제원예가생산자협회(AIPH)로부터 A2/B1등급의 국제 원예 박람회 승인을 취득하였다.。 신청 및 승인 과정 2012년 7월 19일부터 26일까지 쉬중슝(徐中雄) 당시 타이중시 부시장은 대표단을 인솔하여 네덜란드 「2012 Floriade 네덜란드 세계원예박람회 타이중시 마케팅 IN 네덜란드 펜로」 행사에 참가, 2018년 국제원예박람회 신청 및 승인과 관련한 교섭 절차를 진행하였다. 같은 해 9월 11일 대표단은 재차 네덜란드로 건너가 「2012 AIPH 연차총회」에 참여하며 AIPH(국제원예생산자협회)로부터 「2018년 타이중 국제 꽃박람회」 승인 신청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이념 및 상징 로고 디자인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의 로고는 타이완의 지형을 기반으로 디자인되었다. 파란색 청정 에너지, 녹색 나뭇잎, (주황) 꽃송이를 통해 「GNP(녹색, 자연, 사람)의 3가지 방향성을 발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속에 앞으로 비상해 오르는 인간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본 로고는 또한 「지도의 반전」이라는 창조적 방식을 활용해 인간과 자연 간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중에게 자연과의 지속적인 공생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3개의 토템으로 3대 전시구역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파란색은 펑위안 파크의 후루둔전(葫蘆墩圳)을, 오렌지색은 와이푸 파크의 풍성한 꽃과 과일 제품을, 녹색은 허우리 파크의 유서 깊은 나무와 백년 말목장을 상징하고 있다. 슬로건 「꽃이 피는 소리에 귀기울여요」 「GNP의 발견- 자연과 함께 행복한 꽃의 도시」 「파괴 없는 최적화」 주제 생산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땅과 모든 생물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보다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만듦으로써 따뜻한 감성을 지닌 GNP로 이들을 새롭게 재해석한다. 지속성, 포용성과 다양성, 감수성을 추구하여 행복한 꽃의 도시를 구축한다. 마스코트 마스코트: 삵, 말(2017년 6월 13일 공표) 예술감독 린정이林正儀(2016년 4월 20일 미디어 확인) 홍보대사 본 회차 홍보대사(꽃박람회 온라인 캠퍼스 홍보대사): 타이베이대학 순즈한(孫子涵), 쉬광고등학교 린웨이핑(林葦萍), 타이중과기대학 황위원(黃郁雯). (2016년 11월 23일 공표) 주제가 2018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 만들기《請聽》,吳青峰노래 부르기、동사、작곡,吳青峰、鍾承洋정렬。 히스토리 2013년 2월 19일부터 22일까지 국제원예생산자협회 위원이 타이중시 꽃 박람회 개최 예정지를 방문하여 현장조사 실시. 환바오공원 및 허우리 국군 을형 연합정비부대 예정지의 적합성 여부에 관해 고려해 볼 것을 시정부에 제안. 같은 해 4월 9일, 타이중 시정부 국제꽃 박람회추진위원회 설립, 7월 2일 꽃박람회 예정지를 허우리 말목장, 허우리 대만제당 부지, 허우리 기지 및 중부과학단지 허우리 부지 그린벨트 지역의 총 97ha로 수정. 국제원예생산자협회(AIPH) 10월 28일부터 31일 재차 대만을 방문하여 실지탐사 및 개최 관련 심포지엄을 실시, 동시에 2018 타이중 국제 꽃박람회 국제 심포지엄 및 원탁회의 개최. 2014년 1월, 타이중시 농업국 국립중싱대학에 꽃박람회 개최 예정지 기초자원 환경조사를 위탁 의뢰. 6월 17일, 2018년 꽃박람회 예정지 개발과 민감한 동물 보호 대책에 관한 연구회의 개최 결과, 조사 과정 중 촬영한 영상 및 결과물에서 1급 보호종 삵이 출몰함을 현장 전문가를 통해 확인. 7월 11일 타이중 꽃박람회의 공식 영문명을 「 」(약칭)로 확정. 10월 22일부터 24 일까지 AIPH 타이완 방문, 타이중시정부 각 기관의 꽃박람회 사업 홍보를 위한 미팅을 진행하고 2018 타이중 국제 꽃박람회 도시 포럼 개최. 11월 27일 행정원 「타이중시 페이추이(翡翠) 지역 농업 부가가치 발전 계획 요강」에 동의, 국가 주요 건설 계획으로 편입. 2015년 1월 15일 타이중 시정부 야생동물보호종 삵의 서식지를 예정지 범위에서 제외하기로 의결, 와이푸(外埔) 융펑(永豐)구간 및 펑위안(豐原)의 후루둔(葫蘆墩)공원을 꽃박람회 예정지로 추가. 7월 20일부터 21일까지 2018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 국내외 전문가 및 학자 교류 포럼 개최. 9월 11일, AIPH가 타이중시정부에 타이중 꽃박람회를 「2018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로 변경(영문명 로 변경, 약칭)하는 사항에 관한 공식 승인 서한 발송. 타이중 국제 꽃박람회 사무소 또한 「타이중 국제 꽃박람회 사무소」로 명칭 변경. 10월 타이중시는 전시 구역을 「말목장 랜드」, 「숲의 정원」, 「꽃과 과일의 고향」, 「물이 있는 꽃의 도시」의 4대 테마존 및 엑스포돔, 마장마술 장애물 승마 경기장, 화향관, 그린에너지관, 자연관, 발견관, 탐험관(여행자 센터) 등의 전시관으로 기획. 2016년 2월 27일 2018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 개최 계약 체결. 9월 19일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 로고 공표.2016년 11월 8일 캠퍼스 홍보대사 온라인 선정 투표 진행, 11월 23 꽃박람회 홍보대사 선정 결과 기자회견 개최. 최종 고득표자 3인 타이베이대학 순즈한(孫子涵), 쉬광고등학교 린웨이핑(林葦萍), 타이중과기대학 황위원(黃郁雯)을 본 회차 2018 타이중 세계 꽃박람회 홍보대사로 위촉. 11월 20일, 와이푸 파크 착공. 12월 10일, 펑위안 후루둔 파크 착공. 2017년 4월 19일,허우리 말목장 숲의 정원 착공.6月13日,6월 13일, 타이중 꽃박람회 마스코트 삵과 말의 대외 공표로 언론 매체의 시리즈 보도 촉발. 공원 개요 타이중 꽃박람회 엑스포 공원은 허우리, 와이푸, 펑위안 세 곳의 메인 파크로 구성되어 있다. 세 곳의 메인 파크는 각각 생태 보호, 선진 농업, 환경 건설의 개발을 통해 녹색 공유, 자연과의 공생 및 인문과의 공존이라는 「3 공생」의 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공원의 총면적은60.88ha이며;허우리 말목장 숲의 정원(30.04ha)、와이푸 파크(14.32ha), 펑위안 후루둔 파크(16.52ha)의 세 곳의 전시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호우리 말목장과 숲 전시장(Houli Horse Ranch & Forest Park Area) 테마: 말목장 랜드, 숲의 정원 특색: 생태─태장다2대학협자연과의 공생 전시관: 화무관, 마장마술 경기장, 발견관, 여행자 센터 면적: 30.04ha 와이푸전시장(Waipu Park Area) 테마: 꽃과 과일의 고향 특색: 생산─산의04대학녹색 공유 전시관: 지농관, 낙농관 면적:14.32ha 펑위안 후루둔공원 (Fengyuan Huludun Park) 테마: 물이 있는 꽃의 도시 특색: 생활─활.32대학협인문과의 공존 전시관: 희향봉관 면적:16.52ha 주변 인프라 확충 계획 타이중 시정부는 기존의 도로 시설을 재검토 후 수목길 7곳, 공원 7곳 및 총 길이 17km에 이르는 보행도로와 자전거 도로망 전체를 연결하여 보행 공간을 개선하고 도로 녹지대 면적을 확충할 계획에 있다. 또한 허우리역 등 기초 인프라 시설에 예산을 투입, 꽃박람회 인파 수용력 확보를 기대하고 있다.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각주 전시회 타이중시의 역사
https://en.wikipedia.org/wiki/Taichung%20World%20Flora%20Exposition
Taichung World Flora Exposition
The Taichung World Flora Exposition is an AIPH (category A2|B1) horticultural exposition held between 3 November 2018 and 24 April 2019 in Houli District, Taiwan. There were 33 participating countries. Theme and locations The festival had three themes and three locations. Green held at Waipu Park Area, Nature at Houli Horse Ranch and People at Fengyuan's Ruanpizai Creek. After the expo the Waipu park Area will be transformed into an international agriculture centre, and will host the 2020 World Orchid Conference. Participating countries In addition to the hosts Taiwan, the following countries participated: Bhutan, Canada, Chile, China Hong Kong, France, Germany, Japan, Kazakhstan, Korea, Madagascar, Malaysia, Mongolia, Myanmar, Nepal, the Netherlands, Oman, Pakistan, Singapore, Somalia, Turkey, UK and USA. With the Marshall Islands, Palau and the Solomon Islands banding together to present the Asia-Pacific Diplomatic Joint Garden. Pavilions The Myanmar pavilion was designed by Levi Sap Nei Thang. She used her logo ”I Love Myanmar” a heart-shaped in the national flag of Myanmar. Myanmar participated in both indoor flower show and world garden. The Netherlands pavilion was designed by MAYU architects. The tallest bamboo building in Taiwan was designed by ZUO studio and used as the Bamboo pavilion, and was made of Taiwan native bamboo species (including Moso and Makino Bamboo). Mascots The fair's mascots were a family of anthropomorphised leopard cats and their bee-keeping horse neighbour called Horsiver. References Notes 2018 in Taiwan 2019 in Taiwan Horticultural exhibitions Taichung World's fairs in Taiwan Garden festivals in Taiwan
https://ko.wikipedia.org/wiki/%EB%BA%91%EB%B0%98
뺑반
"뺑반"은 2019년 1월 30일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캐스팅 공효진 : 은시연 경위 역 류준열 : 서민재/김민재 역 조정석 : 정재철 역 염정아 : 윤지현 과장 역 전혜진 : 우선영 계장 역 이성민 : 서정채 역 유연수 : 박의철 청장 역 손석구 : 기태호 역 Key : 한동수 역 이성욱 : 형관 역 박예영 : 여정 역 박형수 : 최경준 역 이학주 : 가르마 역 배유람 : 배 형사 역 신주환 : 신 형사 역 임선우 : 재철 비서 역 권혁 : 검찰수사관 1 역 나철 : 검찰수사관 2 역 박윤희 : 차장 역 김태겸 : 사복형사 3 역 양한슬 : 사복형사 4 역 류경수 : 교통과 의경 역 김진옥 : 마티즈 운전자 역 하성민 : 아반떼 운전자 역 권혁전 : 수산트럭 운전자 역 송요셉 : 고속도로 순찰대 1 역 이도국 : 고속도로 순찰대 2 역 공찬호 : 고속도로 순찰대 3 역 정용주 : 고속도로 순찰대 막내 역 강태영 : 트레이닝 수하 역 공성하 : 파티장 직원녀 역 한이진 : 스포츠카남 역 이소진 : 스포츠카 옆자리녀 역 김주영 : 청장 수하 1 역 박준희 : 청장 수하 2 역 김대한 : 재철 수하 역 한우열 : 정장 1 역 황보정일 : 정장 2 역 안성봉 : 정장 3 역 박재광 : 정장 4 역 오태근 : 가르마 수하 1 역 박주한 : 가르마 수하 2 역 이남경 : 여동창 1 역 이일현 : 여동창 2 역 차래형 : 밀실남 1 역 정수교 : 밀실남 2 역 이해운 : 국도남 역 전호용 : 오토바이 순경 역 조유진 : 공도 팔찌녀 역 김윤배 : 공도남 1 역 황규인 : 배팅남 1 역 박현 : DJ 역 이창선 : 공도 레이싱모델 1 역 정규연 : 공도 레이싱모델 2 역 김지수 : 공도 레이싱모델 3 역 오혜금 : 공도 레이싱모델 4 역 임정인 : 공도 레이싱모델 5 역 이세진 : 공도 레이싱모델 6 역 최윤민 : 공도 레이싱모델 7 역 노도현 : 공도 레이싱모델 8 역 김태현 : 징계위원 1 역 하민 : 징계위원 2 역 선학 : 징계위원 3 역 고은민 : 기자 1 역 조나단 : 기자 2 역 전광진 : 기자 3 역 김영 : 재철 동문 1 역 안해성 : 재철 동문 2 역 이종재 : 재철 동문 3 역 황윤성 : 재철 동문 4 역 김양수 : 재철 동문 5 역 장준현 : 재철 동문 6 역 양지일 : 재철 동문 7 역 김한석 : 재철 동문 8 역 정원형 : 호송차 드라이버 역 배우진 : 상황실 경찰 1 역 최세용 : 상황실 경찰 2 역 이가경 : 상황실 경찰 3 역 김대근 : 재철 덩치가드 1 역 조홍수 : 재철 덩치가드 2 역 안대웅 : 재철 덩치가드 3 역 승형배 : 재철 덩치가드 4 역 김재원 : 재철 덩치가드 5 역 이대광 : 재철 덩치가드 6 역 최성환 : 재철 덩치가드 7 역 김흥태 : 덩치 경호원 1 역 이성교 : 덩치 경호원 2 역 박경근 : 서장 역 장현동 : 저격수 역 임준혁 : 베르나운전자 역 천샘 : 베르나 딸 역 김지환 : 베르나 아들 역 정수지 : 에필로그 여경 역 서성금 : 여자간수 역 박성하 : 여교도관 역 이순자 : 동네할머니 1 역 이명자 : 동네할머니 2 역 신재영 : 동네할머니 3 역 박경현 : 동네할머니 4 역 장근영 : 렉카기사 1 역 정원형 : 렉카기사 2 역 박인규 : 렉카기사 3 역 황준호 : 침대남 역 김진욱 : 마티즈 시체 역 김여진 : YTN 앵커 역 유민상 : KBS개그콘서트 역 송준근 : KBS개그콘서트 역 정해철 : KBS개그콘서트 역 홍현호 : KBS개그콘서트 역 김회경 : KBS개그콘서트 역 김고은 : 생머리 역 (특별출연) 같이 보기 2019년 대한민국의 영화 목록 외부 링크 2019년 영화 한국어 영화 작품 대한민국의 영화 작품 대한민국의 범죄 영화 대한민국의 액션 영화 쇼박스 영화
https://en.wikipedia.org/wiki/Hit-and-Run%20Squad
Hit-and-Run Squad
Hit-and-Run Squad is a South Korean action police procedural film. It is directed by Han Jun-hee and stars Gong Hyo-jin, Ryu Jun-yeol and Jo Jung-suk. The film was released on January 30, 2019. Premise Eun Si Yeon was demoted to the hit-and-run task force at a police station from the regional investigation unit at the National Police Agency and will work alongside Seo Min Jae, who is the ace officer of the hit-and-run task force. The two will be working to chase down Jung Jae Chul, who is a former Formula One racer now committing crimes with his madness for speed and cars. Cast Main Gong Hyo-jin as Eun Si-yeon An elite police officer who is fierce when hunting for criminals. Due to an unforeseen event, Si-yeon who was once a part of an internal investigations unit alongside the brightest of the force, is relegated to a hit-and-run task force, where she takes to running down criminals with the same passion. Ryu Jun-yeol as Seo Min-jae The youngest of the task force, but also the ace, with a natural instinct when it comes to cars. Sporting unruly hair, glasses, and a flip phone, he is easy to underestimate, but a persistent investigator. Jo Jung-suk as Jung Jae-cheol A rich businessman living it up at parties and having a boyishly good time playing with cars on the race track. Supporting Yum Jung-ah as Yoo Ji-hyun She is Eun Si-yeon's superior at the regional investigation unit. Jeon Hye-jin as Woo Sun-young The reliable chief of the hit-and-run task force Son Suk-ku as Ki Tae-ho Key as Dong Soo The driver of a tow truck always arrives on the scene immediately after a hit-and-run. Park Hyung-soo as Choi Kyung-joon Lee Sung-min as Min-jae's adoptive father Kim Go-eun as Seo Min-jae's acquaintance (cameo appearance) Lee Hak-joo as Ga Reu-ma Ryu Kyung-soo as a traffic policeman. Production Lee Je-hoon was initially offered a lead role but had declined the offer. The first script reading took place on the March 5 and filming began on March 11, 2018. Awards and nominations References External links 2010s Korean-language films 2019 action films South Korean action films 2019 films 2010s police films 2010s South Korean films
https://ko.wikipedia.org/wiki/%EC%97%AD%EC%82%AC%EC%A0%81%20%EC%84%B1%EA%B2%BD%ED%95%B4%EC%84%9D
역사적 성경해석
역사적 성경해석(歷史的 聖經 解釋, )은 4세기 기독교 공인 이후 보편 교회의 성경해석의 기본이었고, 여기에 알레고리 성경해석이 보조적으로 활용되었다. 사도 바울로도 현대의 성경해석 기법의 수준은 아니지만, 알레고리 성경해석 성향을 경계하고 역사적 성경해석의 성향을 지지하였다. 현재 기독교에서 개신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성경해석 기준이고, 천주교는 일부 역사적 해석을 수용하나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기준으로 한다. 기독교의 성경 해석 역사에서 알레고리 성경해석과 함께 2세기부터 발전한 양대 성경해석 방법 중 하나이다. 2세기 기독교 신학의 3대 주요 지역의 신학 계열에서 안디옥과 카르타고 신학계열의 주류 성경해석 방법이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이었고, 알렉산드리아 신학계열의 주류 성경해석 방법이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이었다. 역사적 성경해석은 성경 본문의 의미와 의도, 역사적인 정보, 본문의 구성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안디옥 신학 사조가 주류 신학이 되었으며,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 신학사조는 보조적 신학이 되었다. 역사적 성경해석은 4세기 초, 기독교 공인 이후 보편 교회의 성경해석의 기본이었고, 여기에 알레고리 성경해석이 보조적으로 활용되었다. 11세기 교회 대분열 이후 동방교회는 지속적으로 본문을 강조하는 역사적 성경해석을 토대로 한 알레고리 해석의 부분적 활용을 강조하였으나, 서방교회는 교황제도의 도입으로 해석자에 권한이 주어지는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중요시하였다. 16세기 서방교회 종교개혁으로 개혁 찬성파인 개신교회에서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을 재조명하고 연구하여 역사적 방법론을 근간으로 현재의 성경신학이 형성되었다. 역사적 성경해석 용어 의미 역사적 성경해석은 기독교 초기부터 등장한 성경 해석 방법으로 성경 본문의 배경과 관련된 역사적 정보, 본문 자체의 구성 의도와 의미를 해석하는 성경해석 방법이다. 문학비평이론의 역사주의 해석이나 문학비평가인 상트 뢰브가 주장한 전기비평 즉 문학작품의 역사배경, 작가의 전기정보로써 문학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과 같다. 또 다른 방식인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은 은유적인 사항과 흔히 영적이라는 숨겨진 의도를 찾고자 하는 해석으로 특정 주제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흔히 사용되어 성경 본문을 우화처럼 본문에서 숨겨진 윤리 또는 숨겨진 종말 등의 의미를 밝히는 성경해석 방법이다. 역사적 성경해석은 본문의 의미와 기록자의 의도, 역사적인 정보, 본문의 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경해석으로 초대교회와 보편교회 시기부터도 중시했던 성경해석의 주요한 연구, 주석 방식이다. 초대 교회의 역사적 성경 해석 초대교회의 주요 문헌인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울로가 알레고리 해석 방법에 대해 공격한 비평이 있다. 기독교 공인 이전인 2세기부터 역사적 성경해석을 중요한 성경해석으로 활용하였고, 기독교 신학의 중심지였던 세 지역 카르타고와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중에서 카르타고 신학과 안디옥 신학은 역사적 성경 해석을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강조하였다. 각 지역 신학자들은 해석방법 강조의 차이가 있었고, 두 방식을 모두 활용하였다. 역사적 성경해석을 강조하는 지역인 안디옥의 신학자인 이레니우스도 세부 설명에는 알레고리 방식을 일부 활용하기도 했으며, 알레고리 방식을 강조하는 지역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인 오리게네스도 역사적 방식을 일부 적용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신학은 점차 안디옥 신학이 중심적 신학 사상이 되었으며, 기독교 초기 문헌에서도 역사적 해석방법을 따르는 성경 이해가 주요 경향이었다. 초대교회 시기인 1세기 또는 2세기 문헌으로 알려진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신약성경 인용은 역사적 성경해석을 통해 특히 마태복음을 따라 기록했다고 본다. 3세기 문헌인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에서도 성경의 인용은 역사적 해석방법을 통해서 성경본문을 인용한다. 기독교 초대교회에서는 대체로 성경을 역사적 해석방법을 근간으로 이해하였으며, 알레고리 해석방법은 보충적으로 사용하였다. 공교회 시기 이후의 성경해석 분열 11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5개 지역의 공교회(보편교회)로서 기독교는 존재했다. 4세기 기독교의 공인 이후에도 성경이해는 초대 교회의 방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역사적 성경해석을 기본으로 하는 알레고리 성경해석의 부분적 적용이었다. 하지만 11세기 이후 공교회가 대분열로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가 분열한 이후에 동방교회는 기존의 성경해석 방법인 역사적 성경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해석방식을 유지하였고, 분리된 서방교회는 공교회와 다른 교종의 강조와 새로운 교리 형성 등 이를 위한 성경해석이 새롭게 필요했다. 서방교회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추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교종, 즉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왕권구조 조직과 국가로서 교황령을 다스리는 교회로 그 형태를 강화하였고, 교황의 해석을 중시하는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을 강화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성경 이해를 강조하여 오리게네스의 성경 이해 방식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역사적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적용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 방식에서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식만을 추출하여 교리 형성에 활용하였다. 서방교회는 점차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의 성경 이해가 점차 옅어지고, 교황과 교회학자들이 기준이 되어 형성한 알레고리 성경 해석과 교리를 수용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성경해석 16세기 서방교회의 문제로 인해 종교개혁 즉 서방교회 개혁 운동이 형성되었고, 종교개혁 찬성파는 개혁 반대파가 지지하는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극복하기 하기 위해서 역사적 성경해석을 지지하였고, 특히 에라스뮈스가 강화한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인 역사 문법적 방법을 활용하여 종교개혁 사상을 형성하고, 개혁 반대파의 알레고리 성경해석과 그를 바탕으로 하는 교황주의 교리와 주장을 논박하였다. 종교개혁 찬성파, 즉 개신교회의 성경해석은 역사적 성경해석의 발전 방식에 인문주의의 역사 문법적 방법을 수용하였다. 역사 문법적 방법 역사 문법적 방법(historical-grammatical method)은 성경 본문에서 성경 저자의 원래의 의도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기독교 해석학 방법이다. 종교개혁 시대부터 개신교회의 전통 성경해석 방법의 일환으로 수용되었고, 현재까지도 주요한 성경 해석 방법이다. 현대의 성서신학 방법론인 역사비평학(historical-critical method)을 수용하지 않는 보수 개신교 학자들도 사용하는 주요 성경 해석 방법이다. 역사적 문법적 방법은 독자의 이해를 강조하는 독자 반응 해석과도 다르지만 본문의 역사적 상황과 본문의 문법적 구조와 특성을 이해하는데 강조점을 가진다. 역사 문법적 방법의 등장 르네상스는 헬라와 로마의 고전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고전 해석에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 즉 단절되었던 고대 그리스 문명과 동방교회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였다. 성경해석 역시 서방교회에서는 잊혀진 초대교회 안디옥 신학의 성격해석 방법인 역사적 성경해석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런 영향을 받은 인문주의자들은 원전을 해석하는 학문적 방법까지 발전시켰다. 특히 헬라어 신약 성경 해석에 사용했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신약 성경의 첫판을 출판함으로써 서방교회에서 잠자던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인 역사적이며 문법적 해석 방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 해석원리를 신약성경 ()의 서문에서 말했는데, 그가 제안한 것은 해석자가 원어와 그 시대의 역사적, 지리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과 함께 문법적인 사용에 의해서 본문의 참된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가들의 사용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의 찬성파인 루터와 칼뱅과 같은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하여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에 인문주의자들의 언어적-역사적 방법을 수용하였다. 그들은 이 방법을 통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오리게네스에서 유래한 서방교회의 중세기 해석가들의 4중적 의미의 해석을 반대하고 역사적이며 문법 즉 문장 구조의 의미를 강조했다. 개혁 반대파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주요 교부들만의 전통과 교황의 권위에 의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고, 성경이 성경을 통해 해석되는 원리인 역사적 성경해석을 주장했다. 영향 서방교회의 개신교회를 통한 역사적 성경해석의 재발견과 역사적 문접적 해석은 현대의 성경 해석학의 시초로 성경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전달하며, 독자들에게 학문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역사적 성경 해석의 발전 형태인 성경신학과 근대적 성경 주석 방법론인 성경 비평 방법론의 토대가 되었다. 계몽주의 이후의 역사적 성경해석 16세기 종교개혁 사상에서 기독교 전통의 역사적 성경해석을 위해 인문주의자들의 역사 문법적 방법을 수용한 개신교회의 성경 이해는 역사적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종교개혁가들이 고전 문헌을 분석하는 다양한 역사 문법적 방법을 수용하였으므로 성경을 다른 고대 문헌과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종교개혁 시기가 지난 17세기 개신교회 정통주의 시대에서도 널리 이해되었다. 역사적 성경해석의 심화 17세기에 등장하여 18세기에 서유럽의 강력한 사상으로 등장한 계몽주의 하에서 개신교회 신학의 발전과 함께 성경 해석 역시 성경 본문의 구조와 배경을 다루던 역사적 성경해석에서 더 세부적으로 성경 본문에 접근하여 연구하고 주석하도록 하였다. 18세기 이후 성경 기록자 당시의 역사적 정황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론이 등장하였다. 성경은 단순히 복음의 담보와 교리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역사 시대적 배경과 목적을 위해 해석하고 주석할 수 있는 방법론들이 등장하였다. 성경신학의 배경인 역사적 성경해석 이 방법론들은 여전히 초대교회의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과 종교개혁 시대의 역사문법적 방법을 수용한 역사적 성경해석을 전승한 것으로 역사적 비평학으로 불리며 근대적 성경신학의 기틀을 형성한다. 근대의 성경 연구 방법론 근대의 성경 연구 방법론은 기독교 신학의 초기 역사적 성경해석과 종교개혁 시대의 발전된 역사 문법적 방법을 수용한 역사적 성경해석을 통해 발전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성경신학은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을 따른 성경 분석 방법론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근대적 성경 연구방법은 기독교 신학의 성경해석 방법론인 역사적 성경해석의 발전형태로 종교개혁 시대에 수용한 역사문법적 방법에서 발전한 방법론이다. 역사적 성경해석의 근대적 방법론 성경 연구 방법론은 성경 기록자의 초기 의도와 저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 다루는 본문 비평 방법론, 성경 본문의 시간 공간적인 지리와 문화적 배경을 다루는 역사적 비평 방법론, 단어나 구, 문장의 단락과 구문의 직접적 의미를 연구하는 문법적 비평 방법론, 문장의 문맥과 단락의 수사학적 구성, 문장 구조를 연구하는 문학적 비평 방법론, 비유의 본문과 예언 본문, 찬송 본문, 설명 본문 등의 본문의 양식을 다루고 분석하는 양식 비평 방법론, 모음 형식의 성경 본문이 모이기 전 전승되던 시절의 역사를 연구하는 전승 비평 방법론, 현재 성경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과 구성에서 최종 성경 본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연구하는 편집 비평 방법론 등으로 발전하였다. 근대 방법론의 의미 이런 방법론은 근대적 성경신학을 형성하게 하였고, 종교개혁 사상의 성경 이해인 역사적 성경 해석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현대 교회에 올바른 성경 주석을 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였다. 현대의 역사적 성경해석 현대의 역사적 성경해석은 서방교회의 개신교회에서 발전하였다. 현재 성경신학과 신학 이해의 주요한 신학적 지침이 되었고, 성경을 더욱 풍부하게 연구하고,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역사적 성경해석을 따르는 개신교회의 성경 신학은 19세기 천주교회의 바티칸 회의 이후 일부 수용되었으며, 역사적 성경해석을 지닌 정교회에서도 적극 수용하였다. 역사적 성경해석은 현대에 와서도 성경을 이해하는 주요 신학적 지침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같이 보기 역사문법적 방법 알레고리 성경해석 4중적 의미의 해석 신학적 해석학 해석학 (철학) 석의 역사비평학 각주 성서학 해석학 (철학) 성서해석학 성서비평학 기독교 신학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icity%20of%20the%20Bible
Historicity of the Bible
The historicity of the Bible is the question of the Bible's relationship to history—covering not just the Bible's acceptability as history but also the ability to understand the literary forms of biblical narrative. One can extend biblical historicity to the evaluation of whether or not the Christian New Testament is an accurate record of the historical Jesus and of the Apostolic Age. This tends to vary depending upon the opinion of the scholar. When studying the books of the Bible, scholars examine the historical context of passages, the importance ascribed to events by the authors, and the contrast between the descriptions of these events and other historical evidence. Being a collaborative work composed and redacted over the course of several centuries, the historicity of the Bible is not consistent throughout the entirety of its contents. According to theologian Thomas L. Thompson, a representative of the Copenhagen School, also known as "biblical minimalism", the archaeological record lends sparse and indirect evidence for the Old Testament's narratives as history. Others, like archeologist William G. Dever, feel that biblical archaeology has both confirmed and challenged the Old Testament stories. While Dever has criticized the Copenhagen School for its more radical approach, he is far from being a biblical literalist, and thinks that the purpose of biblical archaeology is not to simply support or discredit the biblical narrative, but to be a field of study in its own right. Materials and methods Manuscripts and canons The Bible exists in multiple manuscripts, none of them an autograph, and multiple biblical canons, which do not completely agree on which books have sufficient authority to be included or their order. The early discussions about the exclusion or integration of various apocrypha involve an early idea about the historicity of the core. The Ionian Enlightenment influenced early patrons like Justin Martyr and Tertullian—both saw the biblical texts as being different from (and having more historicity than) the myths of other religions. Augustine was aware of the difference between science and scripture and defended the historicity of the biblical texts, e.g., against claims of Faustus of Mileve. Historians hold that the Bible should not be treated differently from other historical (or literary) sources from the ancient world. One may compare doubts about the historicity of, for example, Herodotus; the consequence of these discussions is not that historians shall have to stop using ancient sources for historical reconstruction, but need to be aware of the problems involved when doing so. Very few texts survive directly from antiquity: most have been copied—some, many times. To determine the accuracy of a copied manuscript, textual critics examine the way the transcripts have passed through history to their extant forms. The higher the consistency of the earliest texts, the greater their textual reliability, and the less chance that the content has been changed over the years. Multiple copies may also be grouped into text types, with some types judged closer to the hypothetical original than others. Writing and reading history The meaning of the term "history" is itself dependent on social and historical context. Paula McNutt, for instance, notes that the Old Testament narratives Even from the earliest times, students of religious texts had an awareness that parts of the scriptures could not be interpreted as a strictly consistent sequence of events. The Talmud cites a dictum ascribed to the third-century teacher Abba Arika that "there is no chronological order in the Torah". Examples were often presented and discussed in later Jewish exegesis with, according to 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 an ongoing discourse between those who would follow the views of Rabbi Ishmael (born 90 CE) that "the Torah speaks in human language", compared to the more mystical approach of Rabbi Akiva ( 50–135) that any such deviations should signpost some deeper order or purpose, to be divined. During the modern era, the focus of biblical history has also diversified. The project of biblical archaeology associated with W.F. Albright (1891–1971), which sought to validate the historicity of the events narrated in the Bible through the ancient texts and material remains of the Near East, has a more specific focus compared to the more expansive view of history described by archaeologist William Dever (b. 1933). In discussing the role of his discipline in interpreting the biblical record, Dever has pointed to multiple histories within the Bible, including the history of theology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believers), political history (usually the account of "Great Men"), narrative history (the chronology of events), intellectual history (treating ideas and their development, context and evolution), socio-cultural history (institutions, including their social underpinnings in family, clan, tribe and social class and the state), cultural history (overall cultural evolution, demography, socio-economic and political structure and ethnicity), technological history (the techniques by which humans adapt to, exploit and make use of the resources of their environment), natural history (how humans discover and adapt to the ecological facts of their natural environment), and material history (artifacts as correlates of changes in human behaviour). Sharply differing perspectiv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narrative history and theological meaning present a special challenge for assessing the historicity of the Bible. Supporters of biblical literalism "deny that Biblical infallibility and inerrancy are limited to spiritual, religious, or redemptive themes, exclusive of assertions in the fields of history and science. We further deny that scientific hypotheses about earth history may properly be used to overturn the teaching of Scripture on creation and the flood." "History", or specifically biblical history, in this context appears to mean a definitive and finalized framework of events and actions—comfortingly familiar shared facts—like an omniscient medieval chronicle, shorn of alternative accounts, psychological interpretations, or literary pretensions. But prominent scholars have expressed diametrically opposing views: [T]he stories about the promise given to the patriarchs in Genesis are not historical, nor do they intend to be historical; they are rather historically determined expressions about Israel and Israel's relationship to its God, given in forms legitimate to their time, and their truth lies not in their facticity, nor in the historicity, but their ability to express the reality that Israel experienced. Modern professional historians, familiar with the phenomenon of on-going historical revisionism, allow new findings and ideas into their interpretations of "what happened", and scholars versed in the study of texts (however sacred) see all narrators as potentially unreliable and all accounts—especially edited accounts—as potentially historically incomplete, biased by times and circumstances. Hebrew Bible/Old Testament Authorship A central pillar of the Bible's historical authority was the tradition that it had been composed by the principal actors or eyewitnesses to the events described—the Pentateuch was the work of Moses, the Book of Joshua was by Joshua, and so on. However, the Protestant Reformation had brought the actual texts to a much wider audience, which combined with the growing climate of intellectual ferment in the 17th century that was the start of the Age of Enlightenment. This threw a harsh, skeptical spotlight on these traditional claims. In Protestant England, the philosopher Thomas Hobbes in his major work Leviathan (1651) denied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 and identified Joshua, Judges, Samuel, Kings, and Chronicles as having been written long after the events they purported to describe. His conclusions rested on internal textual evidence, but in an argument that resonates with modern debates, he noted: "Who were the original writers of the several Books of Holy Scripture, has not been made evident by any sufficient testimony of other History, which is the only proof of matter of fact." The Jewish philosopher and pantheist Baruch Spinoza echoed Hobbes's doubts about the provenance of the historical books in his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published in 1670), and elaborated on the suggestion that the final redaction of these texts was post-exilic under the auspices of Ezra (Chapter IX). He had earlier been effectively excommunicated by the rabbinical council of Amsterdam for his perceived heresies. The French priest Richard Simon brought these critical perspectives to the Catholic tradition in 1678, observing "the most part of the Holy Scriptures that are come to us, are but Abridgments and as Summaries of ancient Acts which were kept in the Registries of the Hebrews," in what was probably the first work of biblical textual criticism in the modern sense. In response Jean Astruc, applying to the Pentateuch source criticism methods common in the analysis of classical secular texts, believed he could detect four different manuscript traditions, which he claimed Moses himself had redacted (p. 62–64). His 1753 book initiated the school known as higher criticism that culminated in Julius Wellhausen formalising the documentary hypothesis in the 1870s, which identifies these narratives as the Jahwist, Elohist, Deuteronomist, and the Priestly source. While versions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vary in the order in which they were composed, the circumstances of their composition, and the date of their redaction(s), their shared terminology continues to provide the framework for modern theories on the composite nature and origins of the Torah. By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scholarly consensus was that the Pentateuch was the work of many authors writing from 1000 BCE (the time of David) to 500 BCE (the time of Ezra) and redacted , and as a consequence whatever history it contained was more often polemical than strictly factual—a conclusion reinforced by the then fresh scientific refutations of what were at the time widely classed as biblical mythologies. Torah (Pentateuch) Genesis creation narrative There is a Christian tradition of criticism of the creation narratives in Genesis dating back to at least St Augustine of Hippo (354–430), and Jewish tradition has also maintained a critical thread in its approach to biblical primeval history. The influential medieval philosopher Maimonides maintained a skeptical ambiguity toward creation ex nihilo and considered the stories about Adam more as "philosophical anthropology, rather than as historical stories whose protagonist is the 'first man'." Greek philosophers Aristotle, Critolaus and Proclus held that the world was eternal. Such interpretations are inconsistent with what was after the Protestant Reformation to be "commonly perceived in evangelicalism as traditional views of Genesis". The publication of James Hutton's Theory of the Earth in 1788 was an important development in the scientific revolution that would dethrone Genesis as the ultimate authority on primeval earth and prehistory. The first casualty was the Creation story itself, and by the early 19th century "no responsible scientist contended for the literal credibility of the Mosaic account of creation." The battle between uniformitarianism and catastrophism kept the flood alive in the emerging discipline, until Adam Sedgwick, the president of the Geological Society, publicly recanted his previous support in his 1831 presidential address: We ought indeed to have paused before we first adopted the diluvian theory, and referred all our old superficial gravel to the action of the Mosaic Flood. For of man, and the works of his hands, we have not yet found a single trace among the remnants of the former world entombed in those deposits. All of which left the "first man" and his putative descendants in the awkward position of being stripped of all historical context, until Charles Darwin naturalized the Garden of Eden with the publication of On the Origin of Species in 1859. Public acceptance of this scientific revolution was, at the time, uneven, but has since grown significantly. The mainstream scholarly community soon arrived at a consensus, which holds today, that Genesis 1–11 is a highly schematic literary work representing theology/symbolic mythology rather than actual history or science. The Patriarchs In the following decades Hermann Gunkel drew attention to the mythic aspects of the Pentateuch, and Albrecht Alt, Martin Noth and the tradition history school argued that although its core traditions had genuinely ancient roots, the narratives were fictional framing devices and were not intended as history in the modern sense. Though doubts have been cast on the historiographic reconstructions of this school (particularly the notion of oral traditions as a primary ancient source), much of its critique of biblical historicity found wide acceptance. Gunkel's position is that This has in various forms become a commonplace of contemporary criticism. In the United States the biblical archaeology movement, under the influence of Albright, counterattacked, arguing that the broad outline within the framing narratives was also true, so that while scholars could not realistically expect to prove or disprove individual episodes from the life of Abraham and the other patriarchs, these were real individuals who could be placed in a context proven from the archaeological record. But as more discoveries were made, and anticipated finds failed to materialise, it became apparent that archaeology did not in fact support the claims made by Albright and his followers. Following Albright's death, his interpretation of the patriarchal age came under increasing criticism: such dissatisfaction marked its culmination with the publication of The Historicity of the Patriarchal Narratives by Thomas L. Thompson and Abraham in History and Tradition by John Van Seters. Thompson, a literary scholar, argued on the lack of compelling evidence that the patriarchs lived in the 2nd millennium BCE, and noted how certain biblical texts reflected first millennium conditions and concerns, while Van Seters examined the patriarchal stories and argued that their names, social milieu, and messages strongly suggested that they were Iron Age creations. Van Seter and Thompson's works were a paradigm shift in biblical scholarship and archaeology, which gradually led scholars to no longer consider the patriarchal narratives as historical. Some conservative scholars attempted to defend the patriarchal narratives in the following years, but this position has not found acceptance among scholars. Today, although there continues to be some debate on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narratives, many scholars (possibly most) reject the existence of the Patriarchal age. William Dever stated in 1993 that The Exodus Most mainstream scholars do not accept the biblical Exodus account as history for a number of reasons. It is generally agreed that the Exodus stories reached the current form centuries after the apparent setting of the stories. The Book of Exodus itself attempts to ground the event firmly in history, dating the exodus to the 2666th year after creation (Exodus 12:40-41),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to year 2667 (Exodus 40:1-2, 17), stating that the Israelites dwelled in Egypt for 430 years (Exodus 12:40-41), and including place names such as Goshen (Gen. 46:28), Pithom and Ramesses (Exod. 1:11), as well as stating that 600,000 Israelite men were involved (Exodus 12:37). The Book of Numbers further states that the number of Israelites in the desert during the wandering were 603,550, including 22,273 first-borns, which modern estimates put at 2.5-3 million total Israelites, a clearly fanciful number that could never have been supported by the Sinai Desert. The geography is vague with regions such as Goshen unidentified, and there are internal problems with dating in the Pentateuch. No modern attempt to identify a historical Egyptian prototype for Moses has found wide acceptance, and no period in Egyptian history matches the biblical accounts of the Exodus. Some elements of the story are miraculous and defy rational explanation, such as the Plagues of Egypt and the Crossing of the Red Sea. The Bible also fails to mention the names of any of the pharaohs involved in the Exodus narrative. While ancient Egyptian texts from the New Kingdom mention "Asiatics" living in Egypt as slaves and workers, these people cannot be securely connected to the Israelites, and no contemporary Egyptian text mentions a large-scale exodus of slaves like that described in the Bible. The earliest surviving historical mention of the Israelites, the Egyptian Merneptah Stele (), appears to place them in or around Canaan and gives no indication of any exodus. Despite the absence of any archaeological evidence, a majority of scholars agree that the Exodus probably has some historical basis, with Kenton Sparks referring to it as "mythologized history." Scholars posit that small groups of people of Egyptian origin may have joined the early Israelites, and then contributed their own Egyptian Exodus story to all of Israel. William G. Dever cautiously identifies this group with the Tribe of Joseph, while Richard Elliott Friedman identifies it with the Tribe of Levi. Most scholars who accept a historical core of the exodus date this possible exodus group to the thirteenth century BCE at the time of Ramses II, with some instead dating it to the twelfth century BCE at the time of Ramses III. Evidence in favor of historical traditions forming a background to the Exodus narrative include the documented movements of small groups of Ancient Semitic-speaking peoples into and out of Egypt during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Dynasties, some elements of Egyptian folklore and culture in the Exodus narrative, and the names Moses, Aaron and Phinehas, which seem to have an Egyptian origin. Scholarly estimates for how many people could have been involved in such an exodus range from a few hundred to a few thousand people. Deuteronomistic history Many scholars believe that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reserved elements of ancient texts and oral tradition, including geo-political and socio-economic realities and certain information about historical figures and events. However, large portions of it are legendary and it contains many anachronisms. The "conquest narrative" in Joshua and Judges A major issue in the historicity debate was the narrative of the Israelite conquest of Canaan, described in Joshua and Judges. The American Albright school asserted that the biblical narrative of conquest would be affirmed by archaeological record; and indeed for much of the 20th century archaeology appeared to support the biblical narrative, including excavations at Beitin (identified as Bethel), Tel ed-Duweir, (identified as Lachish), Hazor, and Jericho. However, flaws in the conquest narrative appeared. The most high-profile example was the "fall of Jericho", excavated by John Garstang in the 1930s. Garstang originally announced that he had found fallen walls dating to the time of the biblical Battle of Jericho, but later revised the destruction to a much earlier period. Kathleen Kenyon dated the destruction of the walled city to the middle of the 16th century ( 1550 BCE), too early to match the usual dating of the Exodus to Pharaoh Ramses, on the basis of her excavations in the early 1950s. The same conclusion, based on an analysis of all the excavation findings, was reached by Piotr Bienkowski. By the 1960s it had become clear that the archaeological record did not, in fact, support the account of the conquest given in Joshua: the cities which the Bible records as having been destroyed by the Israelites were either uninhabited at the time, or, if destroyed, were destroyed at widely different times, not in one brief period. The consensus for the conquest narrative was eventually abandoned in the late 20th century. Peake's Commentary on the Bible argues that the Book of Joshua conflates several independent battles between disparate groups over the centuries, and artificially attributes them to a single leader, Joshua. However, there are a few cases where the biblical record is not contradicted by the archaeological record. For example, stratum in Tel Hazor, found in a destruction layer from around 1200 BCE, shows signs of catastrophic fire, and cuneiform tablets found at the site refer to monarchs named Ibni Addi, where Ibni may be the etymological origin of Yavin (Jabin), the Canaanite leader referred to in the Hebrew Bible. The city also shows signs of having been a magnificent Canaanite city prior to its destruction, with great temples and opulent palaces, split into an upper acropolis and lower city; the town evidently had been a major Canaanite city. Israel Finkelstein theorized that the destruction of Hazor was the result of civil strife, attacks by the Sea Peoples, and/or a result of the general collapse of civilization across the whole eastern Mediterranean in the Late Bronze Age, rather than being caused by the Israelites. Amnon Ben-Tor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believes that recently unearthed evidence of violent destruction by burning verifies the biblical account. In 2012, a team led by Ben-Tor and Sharon Zuckerman discovered a scorched palace from the 13th century BC in whose storerooms they found 3,400-year-old ewers holding burned crops; however, Sharon Zuckerman did not agree with Ben-Tor's theory, and claimed that the burning was the result of the city's numerous factions opposing each other with excessive force. Biblical scholar Richard Elliot Friedman (University of Georgia) argues that the Israelites did destroy Hazor, but that such destruction fits better with the account of the Book of Judges, in which the prophetess Deborah defeats the king of Hazor. Books of Samuel The Books of Samuel are considered to be based on both historical and legendary sources, primarily serving to fill the gap in Israelite history after the events described in Deuteronomy. According to Donald Redford, the Books of Samuel exhibit too many anachronisms to have been compiled in the 11th century BCE. For example, there is mention of later armor (), use of camels (), and cavalry (as distinct from chariotry; , ), iron picks and axes (as though they were common; ), and sophisticated siege techniques (). There is a gargantuan troop called up (), a battle with 20,000 casualties (), and a reference to Kushite paramilitary and servants, clearly giving evidence of a date in which Kushites were common, after the 26th Dynasty of Egypt, the period of the last quarter of the 8th century BCE. Alan Millard argues that those elements of the Biblical narrative are not anachronistic. United Monarchy Much of the focus of modern criticism has been the historicity of the United Monarchy of Israel, which according to the Hebrew Bible ruled over both Judea and Samaria around the 10th century BCE. Thomas L. Thompson, a minimalist scholar, for example, has written: In Iron Age IIa (corresponding to the Monarchal period) Judah seems to have been limited to small, mostly rural and unfortified settlements in the Judean hills. This contrasts to the upper Samaria which was becoming urbanized. This archaeological evidence as well as textual criticism has led many modern historians to treat Israel/Samaria and Judah as arising separately as distinct albeit related entities centered at Shechem and Jerusalem, respectively, and not as a united kingdom with a capital in Jerusalem. Excavations at Khirbet Qeiyafa, an Iron Age site located in Judah, support the biblical account of a United Monarchy. The Israel Antiquities Authority stated: "The excavations at Khirbat Qeiyafa clearly reveal an urban society that existed in Judah already in the late eleventh century BCE. It can no longer be argued that the Kingdom of Judah developed only in the late eighth century BCE or at some other later date." The status of Jerusalem in the 10th century BCE is a major subject of debate. The oldest part of Jerusalem and its original urban core is the City of David, which does show evidence of significant Judean residential activity around the 10th century. Some unique administrative structures such as the Stepped Stone Structure and the Large Stone Structure, which originally formed one structure, contain material culture dated to Iron I. On account of the alleged lack of settlement activity in the 10th century BCE, Israel Finkelstein argues that Jerusalem in the century was a small country village in the Judean hills, not a national capital, and Ussishkin argues that the city was entirely uninhabited. Amihai Mazar contends that if the Iron I/Iron IIa dating of administrative structures in the City of David are correct (as he believes), "Jerusalem was a rather small town with a mighty citadel, which could have been a center of a substantial regional polity." It has been argued that recent archaeological discoveries at the City of David and the Ophel seem to indicate that Jerusalem was sufficiently developed as a city to be the capital of the United Monarchy in the 10th century BCE. Since the discovery of the Tel Dan Stele dated to the 9th or 8th century BCE containing bytdwd, interpreted by many as a reference to the "House of David" as a monarchic dynasty in Judah (another possible reference occurs in the Mesha Stele), the majority of scholars accept the existence of a polity ruled by David and Solomon, albeit on a more modest scale than described in the Bible. Most scholars believe that David and Solomon reigned over large sections of Cisjordan and probably parts of Transjordan. William G. Dever argues that David only reigned over the current territories of Israel and West Bank and that he did defeat the invading Philistines, but that the other conquests are fictitious. New Testament Historicity of Jesus The majority of modern scholars of antiquity agree that Jesus existed historically, that he was baptized by John the Baptist and crucified by order of Roman prefect Pontius Pilate.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began as early as the 18th century, and has continued to this day. The most notable recent scholarship came in the 1980s and 1990s, with the work of J. D. Crossan, James D. G. Dunn, John P. Meier, E. P. Sanders and N. T. Wright being the most widely read and discussed. Other works on the matter were published by Dale Allison, Bart D. Ehrman, Richard Bauckham and Maurice Casey. The earliest New Testament texts which refer to Jesus, the Pauline epistles, are usually dated in the 50s CE. Since Paul records very little of Jesus' life and activities, these are of little help in determining facts about the life of Jesus, although they may contain references to information given to Paul from the eyewitnesses of Jesus. The discovery of the Dead Sea Scrolls has shed light into the context of 1st century Judea, noting the diversity of Jewish belief as well as shared expectations and teachings. For example, the expectation of the coming messiah, the beatitudes of the Sermon on the Mount and much else of the early Christian movement are found to have existed within apocalyptic Judaism of the period. This has had the effect of centering Early Christianity much more within its Jewish roots than was previously the case. It is now recognised that Rabbinic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are only two of the many strands which survived until the Jewish revolt of 66 to 70 CE. Most historical critics agree that a historical figure named Jesus taught throughout the Galilean countryside , was believed by his followers to have performed supernatural acts, and was sentenced to death by the Romans, possibly for insurrection. Historicity of the Gospels Most modern scholars hold that the canonical gospel accounts were written between 70 and 100, four to eight decades after the crucifixion, although based on earlier traditions and texts, such as "Q", Logia or sayings gospels, the passion account or other earlier literature (See List of Gospels). Some scholars argue that these accounts were compiled by witnesses although this view is disputed by other scholars. Some scholars believe that the Gospel of Mark shows signs of a lack of knowledge of geographical, political and religious matters in Judea in the time of Jesus. Thus, today the most common opinion is that the author is unknown and both geographically and historically at a distance from the narrated events; however, opinion varies, and scholars such as Craig Blomberg accept the more traditional view. The use of expressions that may be described as awkward and rustic cause the Gospel of Mark to appear somewhat unlettered or even crude. This may be attributed to the influence that Saint Peter, a fisherman, is suggested to have on the writing of Mark. It is commonly thought that the writers of the Gospel of Matthew and Gospel of Luke used Mark as a source, with changes and improvement to peculiarities and crudities in Mark. Historicity of Acts Archaeological inscriptions and other independent sources show that Acts contains some accurate details of 1st century society with regard to titles of officials, administrative divisions, town assemblies, and rules of the Jewish temple in Jerusalem. However, the historicity of the depiction of Paul the Apostle in Acts is contested. Acts describes Paul differently from how Paul describes himself, both factually and theologically. Acts differs from Paul's letters on important issues, such as the Law, Paul's own apostleship, and his relation to the Jerusalem church. Scholars generally prefer Paul's account over that in Acts. Schools of archaeological and historical thought Overview of academic views According to Spencer Mizen of BBC History Magazine, "The origins of the Bible are still cloaked in mystery. When was it written? Who wrote it? And how reliable is it as an historical record?" An educated reading of the biblical text requires knowledge of when it was written, by whom, and for what purpose. For example, many academics would agree that the Pentateuch was in existence some time shortly after the 6th century BCE, but they disagree about when it was written. Proposed dates vary from the 15th century BCE to the 6th century BCE. One popular hypothesis points to the reign of Josiah (7th century BCE). In this hypothesis, the events of, for example, Exodus would have happened centuries before they were finally edited. The documentary hypothesis claims, using the biblical evidence itself, to demonstrate that the current version of the Bible is based on older written sources that are lost. It has been modified heavily over the years, and some scholars accept some form of this hypothesis. There have also been and are a number of scholars who reject it, for example Egyptologist Kenneth Kitchen and Old Testament scholar Walter Kaiser, Jr., as well as R. N. Whybray, Umberto Cassuto, O. T. Allis, Gleason Archer, John Sailhamer, Bruce Waltke, and Joshua Berman. Maximalist–minimalist dichotomy There is great scholarly controversy on the historicity of events recounted in the biblical narratives prior to the Babylonian captivity in the 6th century BCE. There is a split between scholars who reject the biblical account of Ancient Israel as fundamentally ahistorical, and those who accept it as a largely reliable source of history—termed biblical minimalists and biblical maximalists, respectively. The major split of biblical scholarship into two opposing schools is strongly disapproved by non-fundamentalist biblical scholars, as being an attempt by conservative Christians to portray the field as a bipolar argument, of which only one side is correct. Recently the difference between the Maximalist and Minimalist has reduced, and a new school started with a work,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Israel: Debating Archaeology and the History of Early Israel by Israel Finkelstein, Amihai Mazar, and Brian B. Schmidt. This school argues that post-processual archaeology enables us to recognize the existence of a middle ground between minimalism and maximalism, and that both these extremes need to be rejected. Archaeology offers both confirmation of parts of the biblical record and also poses challenges to the interpretations made by some. The careful examination of the evidence demonstrates that the historical accuracy of the first part of the Old Testament is greatest during the reign of Josiah. Some feel that the accuracy diminishes the further backwards one proceeds from this date. This, they claim, would confirm that a major redaction of the texts seems to have occurred at about that date. Biblical minimalism The viewpoint sometimes called biblical minimalism generally holds that the Bible is principally a theological and apologetic work, and all stories within it are of an aetiological character. The early stories are held to have a historical basis that was reconstructed centuries later, and the stories possess at most only a few tiny fragments of genuine historical memory, which by their definition are only those points which are supported by archaeological discoveries. In this view, all of the stories about the biblical patriarchs are fictional, and the patriarchs mere legendary eponyms to describe later historical realities. Further, biblical minimalists hold that the twelve tribes of Israel were a later construction, the stories of King David and King Saul were modeled upon later Irano-Hellenistic examples, and that there is no archaeological evidence that the united Kingdom of Israel—where the Bible says that David and Solomon ruled over an empire from the Euphrates to Eilath—ever existed. Archaeological evidence suggesting otherwise, such as the Mesha Stele, is often rejected as allegorical. It is hard to pinpoint when the movement started but 1968 seems to be a reasonable date. During this year, two prize-winning essays were written in Copenhagen; one by Niels Peter Lemche, the other by Heike Friis, which advocated a complete rethinking of the way we approach the Bible and attempt to draw historical conclusions from it. In published books, one of the early advocates of the current school of thought known as biblical minimalism is Giovanni Garbini, (1986), translated into English as History and Ideology in Ancient Israel (1988). In his footsteps followed Thomas L. Thompson with his lengthy Early History of the Israelite People: From the Written & Archaeological Sources (1992) and, building explicitly on Thompson's book, P. R. Davies' shorter work, In Search of 'Ancient Israel''' (1992). In the latter, Davies finds historical Israel only in archaeological remains, biblical Israel only in scripture, and recent reconstructions of "ancient Israel" to be an unacceptable amalgam of the two. Thompson and Davies see the entire Hebrew Bible (Old Testament) as the imaginative creation of a small community of Jews at Jerusalem during the period which the Bible assigns to after the return from the Babylonian exile, from 539 BCE onward. Niels Peter Lemche, Thompson's fellow faculty member at the University of Copenhagen, also followed with several titles that show Thompson's influence, including The Israelites in history and tradition (1998). The presence of both Thompson and Lemche at the same institution has led to the use of the term "Copenhagen school". The effect of biblical minimalism from 1992 onward was debate with more than two points of view. Biblical maximalism There is great scholarly controversy on the historicity particularly of those events recounted in the biblical narratives prior to the Babylonian captivity in the 6th century BCE. Regarding the debate over the historicity of ancient Israel, the maximalist position holds that the accounts of the United Monarchy and the early kings of Israel, David and Saul, are to be taken as largely historical. Decreasing conflict In 2001,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published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which advocated a view midway toward biblical minimalism and caused an uproar among many conservatives. In the 25th anniversary issue of Biblical Archaeology Review (March/April 2001 edition), editor Hershel Shanks quoted several biblical scholars who insisted that minimalism was dying, although leading minimalists deny this and a claim has been made "We are all minimalists now" (an allusion to "We are all Keynesians now"). However, other more mainstream scholars have rejected these claims: In 2003, Kenneth Kitchen, a scholar who adopts a more maximalist point of view, authored the book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 Kitchen advocated the reliability of many (although not all) parts of the Torah and in no uncertain terms criticizes the work of Finkelstein and Silberman. Jennifer Wallace describes archaeologist Israel Finkelstein's view in her article "Shifting Ground in the Holy Land", appearing in Smithsonian Magazine, May 2006: However, despite problems with the archaeological record, some maximalists place Joshua in the mid-second millennium, at about the time the Egyptian Empire came to rule over Canaan, and not the 13th century as Finkelstein or Kitchen claim, and view the destruction layers of the period as corroboration of the biblical account. The destruction of Hazor in the mid-13th century is seen as corroboration of the biblical account of the later destruction carried out by Deborah and Barak as recorded in the Book of Judges. The location that Finkelstein refers to as "Ai" is generally dismissed as the location of the biblical Ai, since it was destroyed and buried in the 3rd millennium. The prominent site has been known by that name since at least Hellenistic times, if not before. Minimalists all hold that dating these events as contemporary are etiological explanations written centuries after the events they claim to report. Both Finkelstein and Silberman do accept that David and Solomon were really existing persons (not kings but bandit leaders or hill country chieftains)Richard N. Ostling Was King David legend or fiction? The Associated Press from Judah about the 10th century BCE, but they do not assume that there was such a thing as United Monarchy with a capital in Jerusalem. Others, such as David Ussishkin, argue that those who follow the biblical depiction of a United Monarchy do so on the basis of limited evidence while hoping to uncover real archaeological proof in the future. Gunnar Lehmann suggests that there is still a possibility that David and Solomon were able to become local chieftains of some importance and claims that Jerusalem at the time was at best a small town in a sparsely populated area in which alliances of tribal kinship groups formed the basis of society. He goes on further to claim that it was at best a small regional centre, one of three to four in the territory of Judah and neither David nor Solomon had the manpower or the requisite social/political/administrative structure to rule the kind of empire described in the Bible. These views are strongly criticized by William G. Dever, Helga Weippert, Amihai Mazar and Amnon Ben-Tor. André Lemaire states in Ancient Israel: From Abraham to the Roman Destruction of the Temple that the principal points of the biblical tradition with Solomon are generally trustworthy. Kenneth Kitchen shares this view, arguing that Solomon ruled over a comparatively wealthy "mini-empire", rather than a small city-state. Recently, Finkelstein has joined with the more conservative Amihai Mazar to explore the areas of agreement and disagreement and there are signs the intensity of the debate between the so-called minimalist and maximalist scholars is diminishing. This view is also taken by Richard S. Hess, which shows there is in fact a plurality of views between maximalists and minimalists. Jack Cargill has shown that popular textbooks not only fail to give readers up-to-date archaeological evidence, but that they also fail to correctly represent the diversity of views present on the subject. Megan Bishop Moore and Brad E. Kelle provide an overview of the respective evolving approaches and attendant controversies, especially during the period from the mid-1980s through 2011, in their book Biblical History and Israel's Past''. See also Academic view of Ezra Biblical archaeology school Biblical criticism Biblical inerrancy Rudolf Bultmann Census of Quirinius Chronology of Jesus Composition of the Book of Daniel Crucifixion darkness Development of the New Testament canon Flood geology Historical Jesus Historicity of Abraham Historicity of Esther Historicity of Joshua Historicity of King David Historicity of Moses Historicity of the Exodus Historicity of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 Historicity of the United Monarchy Sanhedrin trial of Jesus Theudas Notes References Citations Sources — a translation of the original Italian publication. — In which the relevant section is "Toward a Balanced View of Minimalism: A Summary of Published Critiques", the Official version of record is available at Strengthening Biblical Historicity vis-à-vis Minimalism, 1992–2008 and Beyond, Part 2.1: The Literature of Perspective, Critique, and Methodology, First Half . Author's Accepted Draft if freely available at Strengthening Biblical Historicity vis-à-vis Minimalism, 1992-2008 and Beyond, Part 2.1: The Literature of Perspective, Critique, and Methodology, First Half. Further reading — also "The Chronicler's History", Sheffield, 1987. — a critique of the Copenhagen School of Thought - with responses in the same journal by Davies (above) and Thompson (1995 see below) — This article presents a debate between a Biblical minimalist and a Biblical maximalist. — a response to the article by Iain W. Provan(1995– above) External links 'Minimalism' – The Copenhagen School of Thought in Biblical Studies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examines discoveries and controversies about historical veracity of the Bible Livius.org: Maximalism and minimalism Ancient Jewish history Biblical criticism
https://ko.wikipedia.org/wiki/2021%EB%85%84%20UEFA%20U-21%20%EC%B6%95%EA%B5%AC%20%EC%84%A0%EC%88%98%EA%B6%8C%20%EB%8C%80%ED%9A%8C
2021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2021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2021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는 헝가리와 슬로베니아에서 공동 개최된 23번째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는 원래 2021년 6월 13일부터 6월 27일까지 열릴 예정이었으나 UEFA 유로 2020의 개최 시기가 코로나19 범유행의 여파로 인하여 2021년으로 연기되면서 해당 대회의 개최 시기 또한 변경되었다. 유럽 축구 연맹(UEFA)은 2020년 6월 17일에 공개된 공식 성명을 통해 2021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의 조별 예선과 결선 토너먼트를 따로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조별 예선은 2021년 3월 24일부터 3월 31일까지, 결선 토너먼트는 2021년 5월 31일부터 6월 6일까지 열리게 되었다. 독일이 결승전에서 포르투갈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개최국 선정 유럽 축구 연맹(UEFA) 집행위원회는 2018년 12월 3일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회의에서 헝가리와 슬로베니아를 2021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공동 개최국으로 선정했다. 예선 이 대회에서는 원래 12개국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럽 축구 연맹(UEFA) 집행위원회가 2019년 2월 6일에 열린 회의를 통해 2021년 대회부터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참가국을 12개국에서 16개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16개국이 본선에 진출했다. 2021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은 공동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자동 진출한 헝가리, 슬로베니아를 제외한 53개 팀을 9개 조(8개 조는 6개 팀, 1개 조는 5개 팀으로 구성됨)로 나눈 다음에 홈 앤 어웨이 방식을 띤 조별 리그가 진행되었다. 각 조 1위 팀은 본선에 직행하고 각 조 2위 팀 가운데 성적이 높은 5개 팀(공정성을 위해 각 조 6위 팀과의 전적을 제외하고 비교함)이 추가로 본선에 진출했다. 원래는 각 조 2위 팀 가운데 성적이 가장 높은 팀(공정성을 위해 각 조 6위 팀과의 전적을 제외하고 비교함)이 본선에 직행하고 나머지 8개 팀이 홈 앤 어웨이 방식의 플레이오프를 치른 다음에 여기서 승리한 팀이 본선에 진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의 여파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공동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진출) (공동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진출) (1조 1위) (2조 1위) (3조 1위) (4조 1위) (5조 1위) (6조 1위) (7조 1위) (8조 1위) (9조 1위) (7조 2위, 각 조 2위 팀들 가운데 1번째로 성적이 높은 팀) (2조 2위, 각 조 2위 팀들 가운데 2번째로 성적이 높은 팀) (1조 2위, 각 조 2위 팀들 가운데 3번째로 성적이 높은 팀) (4조 2위, 각 조 2위 팀들 가운데 4번째로 성적이 높은 팀) (8조 2위, 각 조 2위 팀들 가운데 5번째로 성적이 높은 팀) 개최 도시 및 경기장 세케슈페헤르바르 - MOL 아레나 쇼슈토 솜버트헤이 - 헐러다시 슈포르트콤플렉숨 부다페스트 - 보지크 아레나 죄르 - 멘푀이 우티 슈터디온 첼레 - 스타디온 즈 데젤레 류블랴나 - 스타디온 스토지체 마리보르 - 류드스키 브르트 코페르 - 스타디온 보니피카 시드 배정 2021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 진출한 팀들의 시드는 UEFA 계수를 기준으로 하여 배정되었다. 참가국의 계수는 2017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과 본선 경기 결과의 20%, 2019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과 본선 경기 결과의 40%, 2021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 경기 결과의 40%를 반영하여 결정되었다. 본선 조 추첨식은 2020년 12월 10일에 스위스 니옹에서 열렸다. 조별 리그 모든 시간은 현지 시간(2021년 3월 24일부터 3월 27일까지의 경기: CET/UTC+1, 2021년 3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의 경기: CEST/UTC+2)을 따름. A조 네덜란드, 독일, 루마니아는 승점이 같아 각 팀 간의 전적으로 순위가 결정되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가 조 1위로 8강전에 진출했다. 독일과 루마니아는 전체 골 득실로 순위가 결정되었다. 그 결과 독일이 조 2위로 8강전에 진출했다. B조 C조 D조 크로아티아, 스위스, 잉글랜드는 승점이 같아 각 팀 간의 전적으로 순위가 결정되었다. 그 결과 크로아티아가 조 2위로 8강전에 진출했다. 결선 토너먼트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 각주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헝가리에서 개최된 국제 축구 대회 슬로베니아에서 개최된 국제 축구 대회 2021년 헝가리 2021년 슬로베니아 2021년 청소년 축구
https://en.wikipedia.org/wiki/2021%20UEFA%20European%20Under-21%20Championship
2021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
The 2021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 (also known as UEFA Under-21 Euro 2021) was the 23rd edition of the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 (26th edition if the Under-23 era is also included), the biennial international youth football championship organised by UEFA for the men's under-21 national teams of Europe. Initially, 12 teams were to play in the tournament, however on 6 February 2019, UEFA's executive committee increased this number to 16. Only players born on or after 1 January 1998 were eligible to participate. The tournament was co-hosted by Hungary and Slovenia. It was originally scheduled to take place from 9 to 26 June 2021. However, the tournament was rescheduled following the postponement of UEFA Euro 2020 to June/July 2021 due to the COVID-19 pandemic. The new dates were to be decided initially on 27 May 2020, but then postponed to 17 June 2020, where the UEFA Executive Committee meeting discussed the calendar and format of the tournament. On 17 June 2020, UEFA announced the tournament would be played in two stages; the group stage, which took place from 24 to 31 March 2021, and the knockout stage, which took place from 31 May to 6 June 2021. Due to COVID-19 Pandemic the VAR system wasn't used. Spain were the defending champions, but were eliminated in the knockout phase by Portugal. Host selection The following associations indicated their interests to bid for the tournament: / (joint bid) Hungary and Slovenia were appointed as co-hosts at the UEFA Executive Committee meeting in Dublin, Republic of Ireland on 3 December 2018. Qualification All 55 UEFA nations entered the competition, and, unlike the last competition, co-hosts Hungary and Slovenia qualified automatically, and the other 53 teams competed in the qualifying competition to determine the remaining 14 spots in the final tournament. The draw for the qualifying group stage was held on 11 December 2018. The qualifying group stage took place from March 2019 to October 2020, while the play-offs were set to take place in November 2020. The qualifying competition would originally consist of two rounds: Qualifying group stage: The 53 teams were drawn into nine groups: eight groups of six teams and one group of five teams. Each group was played in home-and-away round-robin format. The nine group winners and the best runner-up (not counting results against the sixth-placed team) qualified directly for the final tournament, while the remaining eight runners-up advance to the play-offs. Play-offs: The eight teams were drawn into four ties to play home-and-away two-legged matches to determine the last four qualified teams. However, due to the COVID-19 pandemic in Europe which caused the postponement of matches in the qualifying group stage, UEFA announced on 17 June 2020 that the play-offs would be cancelled. Instead, the nine group winners and the five best runners-up (not counting results against the sixth-placed team) qualified for the final tournament. Qualified teams The following teams qualified for the final tournament. Note: All appearance statistics include only U-21 era (since 1978). Notes Final draw The final draw was held on 10 December 2020, 15:00 CET, at the UEFA headquarters in Nyon, Switzerland. The sixteen teams were drawn into four groups of four teams. The teams were seeded according to their coefficient ranking following the end of the qualifying stage, calculated based on the following: 2017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 final tournament and qualifying competition (20%) 2019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 final tournament and qualifying competition (40%) 2021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 qualifying competition (group stage only) (40%) The hosts Hungary and Slovenia were assigned to position A1 and B1 respectively in the draw, while the other fourteen teams were drawn to the other available positions in their group. Venues The following were the venues where the competition was played: The provisional schedule was announced in November 2019, with the above eight venues hosting matches. Hungary (Groups A and C) and Slovenia (Groups B and D) would both host two groups, two quarter-finals and one semi-final each, while the final would be played in Slovenia at the Stožice Stadium, Ljubljana. Match officials Fourth officials Jérôme Brisard Irakli Kvirikashvili Ádám Farkas Daniele Doveri Espen Eskås Horațiu Feșnic Rade Obrenović Juan Martínez Munuera Squads Each national team had to submit a squad of 23 players, three of whom had to be goalkeepers. If a player was injured or ill severely enough to prevent his participation in the tournament before his team's first match, he could be replaced by another player. Group stage The group winners and runners-up advanced to the quarter-finals. Tiebreakers In the group stage, teams were ranked according to points (3 points for a win, 1 point for a draw, 0 points for a loss), and if tied on points, the following tiebreaking criteria were applied, in the order given, to determine the rankings (Regulations Articles 18.01 and 18.02): Points in head-to-head matches among tied teams; Goal difference in head-to-head matches among tied teams; Goals scored in head-to-head matches among tied teams; If more than two teams were tied, and after applying all head-to-head criteria above, a subset of teams were still tied, all head-to-head criteria above were reapplied exclusively to this subset of teams; Goal difference in all group matches; Goals scored in all group matches; Penalty shoot-out if only two teams had the same number of points, and they met in the last round of the group and were tied after applying all criteria above (not used if more than two teams had the same number of points, or if their rankings were not relevant for qualification for the next stage); Disciplinary points (red card = 3 points, yellow card = 1 point, expulsion for two yellow cards in one match = 3 points); UEFA coefficient ranking for the final draw. All times are local, CET (UTC+1) for matches between 24 and 27 March 2021, CEST (UTC+2) for matches between 28 and 31 March 2021. Group A Group B Group C Group D Knockout stage In the knockout stage, extra time and a penalty shoot-out were used to decide the winners if necessary. Bracket Quarter-finals Semi-finals Final Goalscorers Awards The following awards were given at the conclusion of the tournament: Player of the Tournament: Fábio Vieira Golden Boot: Lukas Nmecha Team of the tournament After the tournament the Under-21 Team of the Tournament was selected by the UEFA Technical Observers. Broadcasting Europe Outside Europe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Under-21 Matches: 2021, UEFA.com 2021 Under-21 Championship 2021 in youth association football International association football competitions hosted by Hungary International association football competitions hosted by Slovenia March 2021 sports events in Europe June 2021 sports events in Hungary June 2021 sports events in Slovenia
https://ko.wikipedia.org/wiki/2019%EB%85%84%20AFC%20%EC%95%84%EC%8B%9C%EC%95%88%EC%BB%B5%20%EC%84%A0%EC%88%98%20%EB%AA%85%EB%8B%A8
2019년 AFC 아시안컵 선수 명단
다음은 2019년 AFC 아시안컵에 출전한 선수들의 명단이다. A조 감독: 알베르토 자케로니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3일에 발표되었다. 12월 25일에 마흐무드 하미스는 알하산 살레로 교체되었다. 12월 31일에 라얀 야슬람은 모함메드 칼판로 교체되었다. 감독: 밀로반 라예바츠 → 시리삭 요디야드타이 (대행) 27인 예비 명단이 2018년 12월 14일에 발표되었다. 까윈 탐삿차난이 부상으로 제외되어서 12월 26일 26인으로 줄었다. 최종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스티븐 콘스탄틴 34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2일에 발표되었다. 명단은 12월 19일에 28인으로 줄었다. 최종명단은 12월 26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미로슬라프 수쿠프 28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7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B조 감독: 그레이엄 아널드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0일에 발표되었다. 2018년 12월 24일에는 제임스 제고가 부상당한 에런 무이를 대신하여 명단에 포함되었다. 감독: 베른트 슈탕에 → 파히르 이브라힘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3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누레딘 울드 알리 28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5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명단은 2018년 12월 26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비탈 보르컬만스 29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3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6일에 발표되었다. 야잔 탈지는 2019년 1월 5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에산 하다드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C조 감독: 파울루 벤투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0일에 발표되었다. 나상호는 2019년 1월 6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이승우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감독: 마르첼로 리피 25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7일에 발표되었다. 리쉐펑이 부상으로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대표팀이 24인으로 줄었다. 최종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구오콴보는 2019년 1월 5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장루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감독: 알렉산드르 크레스티닌 35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3일에 발표되었다. 최종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빅토르 마이예르는 2019년 1월 2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파벨 시도렌코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감독: 스벤예란 에릭손 최종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파울 물데르스의 자리는 2019년 1월 6일 아말니 아기날도가 대체하였다. D조 감독: 카를로스 케이로스 35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0일에 발표되었다. 12월 25일 사에이드 에자톨라히가 부상으로 제외되면서, 예비명단은 34인으로 감소되었다. 최종 명단은 2018년 12월 26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스레치코 카타네츠 27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4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마흐디 카멜의 자리는 12월 30일 모하메드 다우드 야신이 대체하였다. 감독: 박항서 27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8일에 발표되었다. 12월 25일, 룩쑤언흥의 부상으로 인해 호떤따이로 교체되었다. 최종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얀 코치안 35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4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 E조 감독: 후안 안토니오 피시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0일에 발표되었다. 살만 알파라지는 2019년 1월 6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누 알무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이후 압둘라 알카이바리가 1월 7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술탄 알가남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감독: 펠릭스 산체스 27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2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아흐메드 모에인은 2019년 1월 3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칼레드 모하메드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감독: 미오드라그 라둘로비치 27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8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6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김영준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 F조 감독: 모리야스 하지메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13일에 발표되었다. 아사노 다쿠마는 12월 19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무토 요시노리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이후 2019년 1월 5일 모리타 히데마사와 나카지마 쇼야는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이누이 타카시, 시오타니 쓰카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감독: 엑토르 쿠페르 27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5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4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핌 베어벡 26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18일에 발표되었다. 알리 알합시는 12월 25일 부상으로 인해 제외되었으며, 암마르 알루셰이디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6일에 발표되었다. 감독: 야즈굴리 호자겔디예프 29인 예비명단이 2018년 12월 20일에 발표되었다. 최종 선수 명단은 2018년 12월 27일에 발표되었다. 선수 대표 소속팀별 프로축구팀별 5인 이상 소속된 팀만 표시. 축구팀 소속 국적별 대륙 축구팀별 자국리그 대표별 각주 선수 명단 2019
https://en.wikipedia.org/wiki/2019%20AFC%20Asian%20Cup%20squads
2019 AFC Asian Cup squads
The 2019 AFC Asian Cup was an international football tournament that was held in the United Arab Emirates from 5 January to 1 February 2019. The 24 national teams involved in the tournament were required to register a squad with a minimum of 18 players and a maximum of 23 players, at least three of whom must be goalkeepers. Only players in these squads were eligible to take part in the tournament. Before announcing their final squads, several teams named a provisional squad of 18 to 50 players; each country's final squad had to be submitted at least ten days prior to the first match of the tournament. Replacement of players was permitted until six hours before the team's first Asian Cup game. The AFC published the final lists with squad numbers on 27 December 2018. The position listed for each player is per the official squad list published by AFC. The age listed for each player is as of 5 January 2019, the first day of the tournament. The numbers of caps and goals listed for each player do not include any matches played after the start of tournament. The nationality for each club reflects the national association (not the league) to which the club is affiliated. A flag is included for coaches that are of a different nationality than their own national team. Group A United Arab Emirates Coach: Alberto Zaccheroni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3 December 2018. Mahmoud Khamees was replaced by Al Hassan Saleh on 25 December. Rayan Yaslam was replaced by Mohammed Khalfan on 31 December due to injury. Thailand Coach: Milovan Rajevac (6 January 2019) / Sirisak Yodyardthai (from 10 January 2019) The 27-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4 December 2018. The squad was reduced to 26 players on 26 December as Kawin Thamsatchanan was ruled out due to injury.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Following the opening match, coach Milovan Rajevac was sacked and replaced by Sirisak Yodyardthai on 7 January 2019. India Coach: Stephen Constantine The 34-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2 December 2018. The squad was reduced to 28 players on 19 December.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6 December 2018. Bahrain Coach: Miroslav Soukup The 28-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7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Group B Australia Coach: Graham Arnold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0 December 2018. On 24 December 2018, James Jeggo was called up instead of the injured Aaron Mooy. On 2 January 2019, Martin Boyle was replaced by Apostolos Giannou due to injury. Syria Coach: Bernd Stange (6–10 January 2019) / Fajr Ibrahim (from 15 January 2019)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3 December 2018. Bernd Stange was sacked and replaced by Fajr Ibrahim, following the team's loss to Jordan. Palestine Coach: Noureddine Ould Ali The 28-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5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6 December 2018. Jordan Coach: Vital Borkelmans The 29-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3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6 December 2018. Yazan Thalji was replaced by Ihsan Haddad on 5 January 2019 due to injury. Group C South Korea Coach: Paulo Bento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0 December 2018. Na Sang-ho was replaced by Lee Seung-woo on 6 January 2019 due to injury. China Coach: Marcello Lippi The 25-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7 December 2018. The squad was reduced to 24 players on 26 December as Li Xuepeng was ruled out due to injury.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Guo Quanbo was replaced by Zhang Lu on 5 January 2019 due to Zhang's recover from his injury. Kyrgyzstan Coach: Aleksandr Krestinin The 35-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3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Viktor Maier was replaced by Pavel Sidorenko on 2 January 2019 due to injury. Philippines Coach: Sven-Göran Eriksson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Paul Mulders was replaced by Amani Aguinaldo on 6 January 2019. Group D Iran Coach: Carlos Queiroz The 35-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0 December 2018. The squad was reduced to 34 players on 25 December as Saeid Ezatolahi was ruled out due to injury.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6 December 2018. Iraq Coach: Srečko Katanec The 27-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4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On 30 December 2018, Mahdi Kamel was replaced by Mohammed Dawood. Vietnam Coach: Park Hang-seo The 27-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8 December 2018. On 25 December 2018, Lục Xuân Hưng was replaced by Hồ Tấn Tài due to injury. On 26 December 2018, the squad was reduced to 24 players.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Yemen Coach: Ján Kocian The 35-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4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Group E Saudi Arabia Coach: Juan Antonio Pizzi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0 December 2018. Salman Al-Faraj was replaced by Nooh Al-Mousa on 6 January 2019 due to injury. Abdullah Al-Khaibari was replaced by Sultan Al-Ghanam on 7 January 2019 due to injury. Qatar Coach: Félix Sánchez The 27-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2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Ahmed Moein was replaced by Khaled Mohammed on 3 January 2019 due to injury. Lebanon Coach: Miodrag Radulović The 27-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8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6 December 2018. North Korea Coach: Kim Yong-jun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Group F Japan Coach: Hajime Moriyasu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13 December 2018. Takuma Asano was replaced by Yoshinori Muto on 19 December 2018 due to injury. Shoya Nakajima was replaced by Takashi Inui and Hidemasa Morita was replaced by Tsukasa Shiotani on 5 January 2019 due to injury. Uzbekistan Coach: Héctor Cúper The 27-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5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4 December 2018. Oman Coach: Pim Verbeek The 26-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18 December 2018. Ali Al-Habsi was replaced by Ammar Al-Rushaidi due to an injury on 25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6 December 2018. Turkmenistan Coach: Ýazguly Hojageldyýew The 29-man provisional squad was announced on 20 December 2018. The final squad was announced on 27 December 2018. Player representation By age Players Oldest: Zheng Zhi () Youngest: Khaled Mohammed () Goalkeepers Oldest: Amer Shafi () Youngest: Yusuf Habib () Captains Oldest: Zheng Zhi () Youngest: Altymyrat Annadurdyýew () By club Clubs with 5 or more players represented are listed. By club nationality By club federation By representatives of domestic league References External links AFC Asian Cup UAE 2019 – List of Players Squads AFC Asian Cup squads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83%9D%ED%96%88%EB%8D%94%EB%8B%88%20%EC%8A%AC%EB%9D%BC%EC%9E%84%EC%9D%B4%EC%97%88%EB%8D%98%20%EA%B1%B4%EC%97%90%20%EB%8C%80%ED%95%98%EC%97%AC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는 후세 원작의 일본의 라이트 노벨 작품이다. '소설가가 되자'에서 2013년 2월 20일부터 웹 소설로 발간되었고, 2014년 5월부터 마이크로 매거진의 GC노벨에서 간행됐다. 등장인물 쥬라 대삼림 연방국(템페스트) 지배자 카오스 크리에이터 리무루 템페스트 종족은 슬라임이며 전생자이다. 본명은 미카미 사토루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중이던 괴한의 칼에 맞아 사망. 슬라임으로 전생하여 '폭풍룡' 베루도라와 친구가 되었다. 전생할 당시 유니크 스킬 대현자와 포식자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자와 시즈에의 유언에 따라 시즈에의 육체를 흡수, 어린 시즈에의 몸으로 의태할 수 있게 된다. 고블린, 아랑족, 오거족, 리자드맨족, 오크족 등등 수많은 마물들을 받아들여 쥬라 대삼림의 맹주가 되었다. 성장해 나가던 템페스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파르무스 제국의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성마점성물체가 되어 죽은 마인들을 다시 되살려낸다. 하베스트 페스티벌이 성공하여 얼티밋 스킬인 라파엘과 벨제뷔트를 소유하게 된다. 이후 라파엘에게 시엘 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자아를 가진 스킬을 소유한다. 그리하여 리무루의 얼티밋 스킬은 라파엘, 벨제뷔트, 베루도라, 우리엘로 4개이다. 폭풍룡 베루도라 템페스트 전설의 4대용왕중 한명이며 4용왕 형제중 넷째이다. 실수로 마을을 불태웠다가 한 용사에게 무한뇌옥에 봉인당했다고 한다. 리무루의 포식자에 의해 리무루의 위에서 혼자 만화를 보며 살다가 리무루에 의해 흡수된 이플리트와 장기를 두기도 한다. 리무루가 성마점성물체가 되어 무한뇌옥을 빠르게 해석한 뒤 봉인을 해제하는데 성공하여 베루도라는 리무루가 만든 육체에 의태한다. 자신이 만화에서 본 스킬들을 모두 사용 가능하다. 어렸을 적 베루자드에게 대들었다가 한번 죽고 다시 살아나서 베루자드를 어렵게 대한다. 리무루의 위장 속에서 라파엘이 등장해 베루도라에게 즉시 수련해서 얼티밋 스킬을 습득하라는 말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니크 스킬 인내자를 얼티밋 스킬 파우스트로 진화시켰다. 성마12수호왕 데몬 로드 디아블로 상위악마(아크데몬)중 최상위의 랭크에 위치한 원초의 7악마중 한명인 원초의 흑(느와르)이다. 원초의 7악마중 특히나 강력한 인물로 마왕 기이 크림존이 명계에 있을 때엔 둘이 호각으로 싸웠다고 한다. 첫등장은 시즈에의 회상속에서 등장하는데 시즈에의 항마의 가면만 아니었으면 시즈에가 죽었을 거라고 할 정도로 첫등장부터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리무루가 하베스트 페스티벌을 개시해 슬립 모드가 되기 직전 악마를 소환하는 마법진을 전개했는데 이상하리만큼 상위악마(아크데몬) 수백명이 아닌 상위악마 두명과 디아블로가 소환되었다. 템페스트에서 리무루와 베루도라 다음으로 가장 강한 존재이며 제기온과 3~4위를 다툰다. 능력치는 666만 6666으로 조작된 수치일 것이라고 리무루가 언급했다. 이로써 디아블로의 능력치는 666만6666보다 더 이상일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리무루에 의해 얼티밋 스킬(궁극능력) 유혹지왕(아자젤)을 획득한다. 주로 사용하는 능력은 '엔드 오브 월드'. 참고로 이름은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미스트 로드 제기온 악마들의 천적인 인섹트 종족 중 최강이다. 원래 모습은 코카서스 장수풍뎅이처럼 생겼으며 리무루에게 이름을 하사받고 베루도라에게 단련받으면서 템페스트 내에서 강한 순으로 리무루와 베루도라를 제외하고 1~2위를 다툰다. 완전각성의식을 통해 인간형상의 모습을 띌 수 있으며, 라미리스의 미궁 70층을 담당하고 있다. 악마아가씨 3인방이 전력을 다해서 제기온과 싸웠지만 결과는 제기온의 완승. 디아블로와도 겨뤄본 적이 있으며 디아블로에게도 이겼지만 리무루의 독백에 의하면 디아블로는 아직도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 리무루교 3인방 중 한명으로서 제국군과의 전투 중 한 제국군이 제기온의 강함을 보고 '너가 리무루 템페스트냐'고 묻자 제기온은 '나 따위를 감히 그분과 착각하지 마라'며 그 자리에 있던 제국군들은 몰살당했다. 리무루의 각성마왕의식을 통해 얼티밋 스킬 환상지왕(메피스토)를 획득하였다. 플레임 로드 베니마루 오거족의 왕자이며 리무루에 의해 이름을 하사받아 오거에서 키진으로 진화한다. 흑염을 다루며 템페스트에서 강자5위로 손꼽힌다. 파르무스 왕국에 파병된 서방성교회 군대 100명을 혼자서 해치웠다. 후에 리무루의 각성마왕의식을 통해 오니로 진화하여 얼티밋 스킬(궁극능력) 양염지왕(아마테라스)을 휙득한다. 킬러 로드 테스타로사 디아블로와 같은 원초의 7악마 중 한명인 원초의 흰색(블랑)으로 마계에서도 악명이 자자하다. 디아블로가 자신의 업무를 대신할 악마를 데려왔는데 그 악마들이 남은 원초의 7악마중 3명. 디아블로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해 템페스트에 끌려왔고 자신들이 상위악마를 넘어선 원초의 7악마인것을 모르고 상위악마 취급을 하는 리무루가 디아블로보다 강한 존재인줄 알고 템페스트에 들어오게 되었다. 템페스트 내에선 울티마, 카레라를 포함해 악마아가씨 3인방이라고 불리며 과거 제국군을 학살한 붉게 물든 호반사건의 장본인이다. 핵격마법 데스 스트릭(죽음의 축복)을 사용하며 흑염으로 생명의 유전자를 재배열해 사멸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이름은 페라리 테스타로사에서 따왔다. 원초의 노란색 카레라 원초의 7악마 중 한명인 원초의 노란색(존느)이며 템페스트 내에서 능력치가 가장 높다. 핵격마법 중 최상위 마법인 그래비티 컬랩스(중력붕괴)를 사용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옥타그램 중 한명인 레온이 카레라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힘을 다 회복하지 못해 전성기 시절 레온에게 패배한 뒤 봉인되지만 다시 마계로 돌아가 살다가 용병을 데리러 온 디아블로에게 말 그대로 처맞고 템페스트로 끌려간다. 페인 로드 울티마 원초의 7악마 중 한명인 원초의 보라색(비올레)이며 자신의 업무를 대신할 악마를 찾으러 온 디아블로에게 말 그대로 처맞고 템페스트로 끌려간다. 리무루에게 '울티마'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데빌로드로 진화. 핵격마법 뉴클리어 플레임을 쓰며 이후 리무루에게 각성마왕의식을 받고 '잔학왕'이라는 칭호를 하사받는다. 테스타로사, 카레라와 함께 제기온에게 덤볐지만 처참히 패배하지만 전력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1기 2018년 10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방영. 전 25화. 2기 1부 2021년 1월부터 3월까지 방영. 전 13화. 2기 2부 2021년 7월부터 9월까지 방영. 전 13화. 3기 2022년 11월, 제작이 발표, 2024년 봄에 방영예정. 각주 외부 링크 웹 소설판 공식 서적 소설판 공식 만화판 공식 스핀오브 공식 TV 애니메이션 공식 사이트 일본의 소설 소설가가 되자 일본의 만화 월간 소년 시리우스의 만화 하이 판타지 소설 환생을 소재로 한 소설 판타지 만화 환생을 소재로 한 만화 일본의 애니메이션 2018년 애니메이션 2019년 애니메이션 2021년 애니메이션 2024년 애니메이션 UHF 애니메이션 에이트 비트 란티스 애니메이션 판타지 애니메이션 환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애니플러스 투니버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2022년 애니메이션 영화 개봉 예정 영화 2018년 시작한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https://en.wikipedia.org/wiki/That%20Time%20I%20Got%20Reincarnated%20as%20a%20Slime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 also known as Regarding Reincarnated to Slime and by the contraction , is a Japanese fantasy light novel series written by , and illustrated by Mitz Vah. The story follows Satoru Mikami, a salaryman who is murdered and then reincarnated in a sword and sorcery world as a titular slime, who goes on to gather allies to build his own nation of monsters. It was serialized online from 2013 to 2016 on the user-generated novel publishing website Shōsetsuka ni Narō. It was later acquired by Micro Magazine, which published the first light novel volume in 2014. Twenty-one volumes have been released as of October 2023. The light novel has been licensed in North America by Yen Press, who published the first volume in December 2017. It has received a manga adaptation published by Kodansha along with five manga spin-offs published, respectively, by Micro Magazine and Kodansha, and an anime television series adaptation produced by Eight Bit, which aired from October 2018 to March 2019. A second season of the anime series aired from January to September 2021, and an anime adaptation of the second spin-off manga aired from April to June 2021. An anime film was released in November 2022. A three-episode original net animation spin-off titled Coleus no Yume is set to premiere in November 2023. A third television season is set to premiere on April 2024. Plot Satoru Mikami is an ordinary 37-year-old corporate worker living in Tokyo. He is almost content with his monotonous life, despite the fact that he doesn't have a girlfriend. During a casual encounter with his colleague, an assailant pops out of nowhere and stabs him. While succumbing to his injuries, a mysterious voice echoes in his mind and recites a series of commands of which he could not make sense. After regaining consciousness, Satoru discovers that he has been reincarnated as a Slime in an unfamiliar world. At the same time, he also acquires new-found skills, particularly the ability called "Predator," which allows him to devour anything and mimic its appearance and skills. He stumbles upon Veldora, a powerful 'Storm Dragon', who has been sealed for the last 300 years for reducing a town to ashes. Feeling sorry for him, Satoru befriends the dragon, promising to help him in destroying the seal. They decide to exchange names, Veldora bestows upon him name Rimuru, and receives name Tempest in return. Rimuru then consumes the dragon together with his prison in order to analyze the spell inside itself and eventually free Veldora. The disappearance of Veldora's aura creates a power vacuum which eventually makes Rimuru the leader of all beings inhabiting the Great Forest of Jura, who accept him as a ruler and together they found the nation of Tempest. With Rimuru's strength, wisdom and idealistic vision the new nation quickly grows in strength and influence. Soon Rimuru and his subjects draw the attention of the nearby foreign powers, from monarchs and legendary heroes to demon lords, some seeking to become their allies, while others intending to take advantage of or destroy them completely. Media Light novels Fuse originally serialized the series as a web novel on the user-generated content site Shōsetsuka ni Narō between February 20, 2013, and January 1, 2016. The series was acquired for print publication by Micro Magazine, who published the first light novel, with illustrations by Mitz Vah, under their GC Novels in May 2014. On April 15, 2017, English publisher Yen Press announced during their panel at Sakura-Con that they had licensed the series for release in North America. A spin-off web novel series set between the ninth and tenth volumes of the light novel, titled Toaru Kyūka no Sigoshi-kata, began serialization on Shōsetsuka ni Narō on February 20, 2023. Manga Taiki Kawakami launched a manga adaptation in Kodansha's shōnen manga magazine Monthly Shōnen Sirius on March 26, 2015. Kodansha USA announced their license to the manga during their panel at New York Comic Con on October 6, 2016. A spin-off manga, titled , with art by Shō Okagiri, has been serialized on Micro Magazine's Comic Ride website since July 28, 2016. A second spin-off manga, titled , with art by Shiba, has been serialized in Kodansha's shōnen manga magazine Monthly Shōnen Sirius since March 2018, compiled into five volumes as of March 2021, and licensed in English by Kodansha USA. A third spin-off manga, titled and illustrated by Shizuku Akechi began serialization in Kodansha's Niconico-based Suiyōbi no Sirius manga web platform on September 26, 2018, and has been compiled into one volume as of July 9, 2019. On June 3, 2020, Kodansha USA announced that it has licensed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gain!) as a Workaholic Slime. A fourth spin-off manga, titled , with art by Tae Tono began serialization in Suiyōbi no Sirius on March 14, 2019. On March 18, 2020, Kodansha USA announced their license to the manga for a print release under the title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Trinity in Tempest. A fifth spin-off, a yonkoma titled , with art by Chacha, began serialization in Monthly Shōnen Sirius on February 26, 2019. This story differs from the main one after Rimuru's encounter with Shizu, when he learns how to mimic a human body. However, the body he creates is that of a three-year-old. A sixth spin-off manga centered around Demon Lord Clayman, titled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Clayman's Revenge), with art by Wataru Kajika began serialization in Monthly Shōnen Sirius on April 26, 2022. A seventh spin-off manga, titled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Gourmet Legend: Peko and Rimuru's Cooking Notebook, with art by Chika Nakatani will begin serialization in Monthly Shōnen Sirius on April 26, 2023. A manga adaptation of the Toaru Kyūka no Sigoshi-kata web novel illustrated by Yuzo Takada began serialization in Monthly Shōnen Sirius on July 26, 2023. Anime An anime television series adaptation aired from October 2, 2018, to March 19, 2019, on Tokyo MX and other channels. The series is animated by Eight Bit and directed by Yasuhito Kikuchi, with Atsushi Nakayama as assistant director, Kazuyuki Fudeyasu handling series composition, Ryouma Ebata designing the characters, and Takahiro Kishida providing monster designs. Elements Garden is composing the series' music. The first opening theme is "Nameless story" performed by Takuma Terashima, while the first ending theme is "Another colony" performed by True. The second opening theme is performed by Terashima, while the second ending theme is performed by Azusa Tadokoro. The series is simulcast by Crunchyroll with Funimation streaming an English dub as it airs. The first season ran for 24 episodes. An original animation DVD was originally scheduled to be released on March 29, 2019, bundled with the 11th manga volume, but it was delayed to December 4, 2019, bundled with the 13th manga volume. A second original animation DVD was released on July 9, 2019, bundled with the 12th manga volume. Three more original animation DVDs have been announced, with the third OAD being released on March 27, 2020, bundled with the 14th manga volume. The fourth OAD is being bundled with the 15th manga volume, which released on July 9, 2020. The fifth OAD was to be bundled with 16th manga volume, which released on November 9, 2020. A second season was announced to be a split-season anime, but the first half was delayed from October 2020 to January 2021, and the second half was delayed from April to July 2021 due to the effects of the COVID-19 pandemic in Japan. The first half aired from January 12 to March 30, 2021, and the second half aired from July 6 to September 21, 2021. Eight Bit animated the series, with the staff and cast members reprising their roles. The opening theme is "Storyteller" performed by True, while the ending theme is "STORYSEEKER" performed by STEREO DIVE FOUNDATION. The second opening theme is "Like Flames" performed by MindaRyn, while the second ending theme is "Reincarnate" performed by Takuma Terashima. A spin-off anime series based on the Slime Diaries: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manga was scheduled to premiere in January 2021 but had been delayed to April 2021 due to COVID-19. The series aired from April 6 to June 22, 2021. Eight Bit also animated the series, with Yuji Haibara directing the series, Kotatsumikan writing the script, Risa Takai and Atsushi Irie as character designers, and R.O.N composing the music. The opening theme is "Brand new diary" performed by Akane Kumada. After the airing of the second season's final episode, it was announced that the series was receiving an anime film, titled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The Movie – Scarlet Bond. The film premiered in Japan on November 25, 2022. Crunchyroll screened the film outside of Asia in early 2023. A third season was announced on November 9, 2022. It is set to premiere on April 2024. A three-episode original net animation (ONA) series, titled Coleus no Yume, was announced on February 19, 2023, and will premiere on November 1, 2023. The staff from the second season will reprise their roles along with Toshizo Nemoto handling series composition. The opening theme song, "Hikaru Hanatsu", is performed by Takuma Terashima, while the ending theme song is performed by Miho Okasaki. Video game At the AnimeJapan 2021 special stage for the franchise, a free-to-play role-playing game app, titled Tensei Shitara Slime Datta Ken: Maō to Ryū no Kenkoku-tan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The Saga of How the Demon Lord and Dragon Founded a Nation), was announced. It is developed by Bandai Namco Entertainment and was released in 2021. The game was releas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ISEKAI Memories. The mobile game The Seven Deadly Sins: Grand Cross had a crossover event where some of the characters of the series could be obtained for a limited time. Reception The light novel series has over 4.5 million volumes in print. It was the fifth best-selling title of 2018 with 539,277 and its manga adaptation was the ninth best-selling title of 2018 with 3,460,066 copies. It also became the first manga series based on a light novel with at least 20 million total copies in print. By March 2021, it had over 24 million copies in circulation. In May 2021 it reached 25 million. In January 2022, it had over 30 million copies in circulation. In February 2023, it had 40 million copies in circulation, with 35 million copies in Japan and 5 million copies overseas. In May 2021, That Time I Got Reincarnated as a Slime was one of five isekai-oriented anime titles (along with KonoSuba, Zombie Land Saga, Princess Lover!, and Nekopara) that were given a limited ban by the Russian government for their depiction of reincarnation. Awards The light novel ranked eighth in 2017 in Takarajimasha's annual light novel guide book Kono Light Novel ga Sugoi!, in the tankōbon category. It ranked sixth in 2018 and fifth in 2019. In 2017, the manga adaptation was ranked fifth at the third Next Manga Awards in the print category. The manga adaptation also won the 2018 BookWalker Award. The manga adaptation was nominated for the 45th Kodansha Manga Award in the shōnen category in 2021; it won the 46th edition in the same category in 2022. In 2019, Rimuru Tempest won Best Protagonist on the Crunchyroll Anime Awards. In 2022, the second season won the "Best Fantasy Award" at Crunchyroll Anime Awards 2022. See also Alderamin on the Sky - Another light novel series whose manga adaptation was illustrated by Taiki Kawakami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at Shōsetsuka ni Narō 2014 Japanese novels 2018 anime television series debuts 2021 anime television series debuts 2023 anime ONAs 2024 anime television series debuts Anime and manga based on light novels Book series introduced in 2013 Crunchyroll Anime Awards winners Eight Bit (studio) Fiction about reincarnation Funimation Isekai anime and manga Isekai novels and light novels Japanese webcomics Kodansha manga Light novels Light novels first published online Muse Communication Anime and manga about parallel universes Novels about reincarnation Seinen manga Shōnen manga Shōsetsuka ni Narō Upcoming anime television series Vertical (publisher) titles Webcomics in print Winner of Kodansha Manga Award (Shōnen) Works banned in Russia Yen Press titles
https://ko.wikipedia.org/wiki/2020%EB%85%84%20%ED%95%98%EA%B3%84%20%EC%98%AC%EB%A6%BC%ED%94%BD%20%EB%86%8D%EA%B5%AC
2020년 하계 올림픽 농구
제32회 하계 올림픽 농구 경기는 일본 도쿄와 사이타마에서 2021년 7월24일부터 8월8일까지 열린다. 남녀 농구 24개 팀 선수 288명과 남녀 3x3 농구 16개 팀의 선수 64명 등 총 352명이 대회에 참가한다. 농구는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7월25일부터 8월8일까지 진행되며, 3x3 농구는 아오미 어반 스포츠 경기장에서 7월24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다. 3x3 농구는 이번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세부 종목 아래 종목에서 각각 메달이 수여된다. 남자 농구 (12팀, 144명) 여자 농구 (12팀, 144명) 남자 3x3 농구 (8팀, 32명) 여자 3x3 농구 (8팀, 32명) 경기 일정 올림픽 종목별 일정표 출전 팀 올림픽 농구 본선 진출 팀을 결정하는 예선 방식은 농구의 경우 2017년, 3x3 농구의 경우 2018년 7월 4일 국제 농구 연맹이 확정했다. 남자 농구 출전 팀 주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출선하는 일본을 제외한 팀 가운데 2019년 FIBA 농구 월드컵의 대륙별 상위 7개팀(아프리카 1, 남·북아메리카 2, 아시아 1, 유럽 2, 오세아니아 1팀)이 본선 진출권을 얻었다. 나머지 농구 월드컵 참가팀 가운데 상위 16개 팀은 최종 예선 진출권을 얻었다. 이외에 지역별로 2개 팀씩 총 8개 팀도 최종 예선에 합류한다. 최종 예선전은 2020년 6월 4개조로 나눠서 진행하며, 각조 1위팀에게 올림픽 진출권이 마지막으로 부여된다. 여자 농구 출전 팀 주최국 일본과 올림픽 직전 여자 농구 월드컵 우승팀은 예선 결과와 상관 없이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었다. 다만 두 팀 모두 올림픽 대륙별 예선과 최종 예선 토너먼트에 출전했다. 최종 예선에는 주최국과 직전 여자 농구 월드컵 우승팀을 포함해 총 16개 팀(아프리카 2팀, 남북아메리카 4팀, 아시아/오세아니아 4팀, 유럽 6팀)이 참가했다.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아시아/오세아니아의 경우, 올림픽 직전 여자 농구 월드컵 상위 22개 팀(아프리카 6팀, 남북아메리카 8팀, 아시아/오세아니아 8팀)이 대륙별 예선을 치러 최종 예선 참가팀을 결정했다. 유럽의 경우 2019년 FIBA 유로배스킷 대회 상위 6개팀이 최종 예선 출전 자격을 얻었다. 올림픽 최종 예선은 4개 조로 나눠 진행하되, 주최국과 직전 농구 월드컵 우승팀이 속한 2개 조는 상위 2팀, 나머지 2개 조는 상위 3팀이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최종 예선 개최지는 애초 벨기에 오스텐더, 중국 포산, 프랑스 부르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결정됐으나, 2020년 1월 2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여파 탓에 중국 포산 대회가 취소됐고 대체지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가 선정됐다. 모든 본선 진출팀은 2020년 2월 9일 최종 확정됐다. 남자 3x3 농구 출전 팀 올림픽 본선은 각 국에서 1팀만 출전할 수 있으며, 올림픽 주최국 일본에 대한 출전권 부여 여부는 2019년 11월 1일 기준 FIBA 3x3 농구 세계 순위 결과에 따라 결정됐다. 결정 기준은, 일본의 순위가 남녀 모두 세계 4위 이내에 들지 못하면 남자 또는 여자 중 순위가 높은 쪽에 주최국 자격으로 출전권을 주되, 남녀의 세계 순위가 같으면 여자 팀에게 출전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상위 3개국 또는 4개국에 세계 순위에 따른 출전권을 주되 5개 대륙(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별로 최대 2팀에게만 출전권을 주기로 기준이 정해졌다. 2019년 11월 1일 기준 세계 순위가 일본 남자는 9위였고 여자는 11위여서 남자팀에 주최국 자격 출전권이 부여됐다. 이와 함께 세계 순위 1-3위 국가인 세르비아, 러시아, 중국이 출전권을 확보했다. 세계 순위에 따라 출전권을 얻지 못한 나라들은 2020년 3월 인도가 주최할 2020년 FIBA 3x3 농구 올림픽 예선 토너먼트에서 올림픽 출전권 3장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이 토너먼트에는 20개 팀이 참여한다. 참가 팀은, 대회 주최국, 2019년 FIBA 3x3 농구 월드컵 상위 3개팀, 2019년 세계 순위 상위 16팀(예선 토너먼트 주최국이 이미 출전권을 확보한 경우 17팀)이다. 단, 세계 순위 상위 16개 팀 가운데 순위가 낮은 10개 팀은 남여를 불문하고 단 1팀도 이 때까지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한 나라에 배정된다. 또 5개 대륙별로 최대 10팀만 출전권을 배정받는다. 이 기준에 따라 확정된 참가 국가는 몽골, 폴란드, 브라질, 터키, 체코(이상 예선 A조), 미국, 리투아니아, 벨기에, 대한민국, 뉴질랜드(이상 예선 B조), 슬로베니아, 프랑스, 카타르, 필리핀, 도미니카 공화국(이상 예선 C조), 네덜란드, 라트비아, 캐나다, 크로아티아, 인도(이상 예선 D조)이다. 올림픽 예선 토너먼트에서도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한 나라들은 2020년 4월 24-26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는 참여 확대 지향(Universality-driven) 예선 토너먼트에서 마지막 1장의 출전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이 대회 출전팀은 대회 개최국인 헝가리와 2019년 세계 순위 상위 국가인 동시에 2012년과 2016년 올림픽 농구 본선에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는 나라들인 몽골, 슬로베니아, 네덜란드, 라트비아, 폴란드다. 이 팀들 가운데 3월 인도 올림픽 예선 토너먼트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얻는 팀이 나올 경우, 벨기에, 우크라이나, 루마니아가 대신 출전하게 된다. 여자 3x3 농구 출전 팀 본선 진출팀 결정 방식은 남자 경기와 똑같다. 올림픽 주최국인 일본에 대한 주최국 자격 출전권이 남자팀에게 주여됨에 따라, 세계 순위 상위 여자팀에게 부여되는 출전권은 2019년 11월 1일 기준 1-4위인 러시아, 중국, 몽골, 루마니아에게 돌아갔다. 2020년 3월 인도에서 열리는 올림픽 예선 토너먼트 참가 국가는 프랑스, 미국, 독일, 우루과이, 인도네시아(이상 예선 A조), 이란, 일본, 우크라이나, 투르크메니스탄, 오스트레일리아(이상 예선 B조),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벨라루시, 헝가리, 스리랑카(이상 예선 C조), 이탈리아, 타이완, 스위스, 스페인, 인도(이상 예선 D조)이다. 2020년 4월 24-26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는 참여 확대 지향(Universality-driven) 예선 토너먼트 참가 자격을 확보한 국가는 대회 주최국인 헝가리, 올림픽 개최국인 일본 외에 이란, 네덜란드, 이탈리아, 타이완이다. 이들 가운데 3월 인도 예선 대회에서 먼저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하는 팀이 나올 경우, 에스토니아 독일 우크라이나가 대신 참여 확대 지향 예선 토너먼트 경기에 나가게 된다. 본선 경기장 남자 농구 본선 경기는 조별 예선 리그와 8강 이후 토너먼트로 진행된다. 조별 리그는 4개팀씩 3개조로 나눠 진행되며, 각조 상위 2팀이 8강에 진출한다. 나머지 2자리는 각조 3위 가운데 성적이 좋은 2팀에게 돌아간다. 조별 예선 A조 순위표 B조 순위표 C조 순위표 8강 토너먼트 여자 농구 본선 경기는 조별 예선 리그와 8강 이후 토너먼트로 진행된다. 조별 리그는 4개팀씩 3개조로 나눠 진행되며, 각조 상위 2팀이 8강에 진출한다. 나머지 2자리는 각조 3위 가운데 성적이 좋은 2팀에게 돌아간다. 조 추첨은 2020년 3월 21일에 실시된다. 조별 예선 A조 순위표 B조 순위표 C조 순위표 8강 토너먼트 3x3 농구 3x3 농구는 8개 참가팀이 모두 한번씩 겨루는 예선 라운드와 6강 토너먼트로 진행된다. 예선 라운드 1, 2위 팀은 곧바로 4강에 진출하고, 3위와 6위 경기의 승자와 4위와 5위 경기의 승자가 4강에서 예선 1, 2위 팀과 결승 진출을 다투게 된다. 남자 3x3 농구 예선 라운드 6강 토너먼트 여자 3x3 농구 예선 라운드 6강 토너먼트 메달 집계 최종 순위 메달리스트 각주 외부 링크 국제농구연맹 공식 웹 사이트 국제농구연맹 3x3 농구 공식 웹 사이트 국제농구연맹 남자 농구 올림픽 공식 웹 사이트 남자 농구 올림픽 최종 예선-캐나다 공식 웹 사이트 남자 농구 올림픽 최종 예선-크로아티아 공식 웹 사이트 남자 농구 올림픽 최종 예선-리투아니아 공식 웹 사이트 남자 농구 올림픽 최종 예선-세르비아 공식 웹 사이트 국제농구연맹 여자 농구 올림픽 공식 웹 사이트 여자 농구 올림픽 최종 예선-벨기에 공식 웹 사이트 여자 농구 올림픽 최종 예선-프랑스 공식 웹 사이트 여자 농구 올림픽 최종 예선-세르비아 공식 웹 사이트 국제농구연맹 3x3 농구 올림픽 예선 공식 웹 사이트 농구 일본에서 개최된 농구 대회
https://en.wikipedia.org/wiki/Basketball%20at%20the%202020%20Summer%20Olympics
Basketball at the 2020 Summer Olympics
Basketball at the 2020 Summer Olympics in Tokyo, Japan was held from 24 July to 8 August 2021. The basketball competitions were held at the Saitama Super Arena in Saitama, while the debuting 3x3 competitions were held at the temporary Aomi Urban Sports Park in Tokyo. Medal summary Medal table Events Qualification summary 5-on-5 basketball Qualification The National Olympic Committees may enter only one 12-player men's team and only one 12-player women's team. The men's qualification was impacted by the COVID-19 pandemic whereas the women's qualification ended on time and unaffected. Men's qualification Women's qualification Twelve teams qualified for the women's tournament. The host nation and the 2018 World Cup winners qualified. Those two teams, however, had to play in the pre-qualifying and qualifying tournaments and each took up one of the qualifying spots from those tournaments. Thus, while two of the World Qualifying Tournaments provided quota spots to their three top teams, the other two tournaments provided quota spots only to the top two teams plus either the host nation or the World Cup winners. Teams had to qualify for the World Olympic Qualifying Tournaments through Women's EuroBasket or Pre-Olympic Qualifying Tournaments (which themselves had to be qualified for through Continental Cups). Competition schedule Men's tournament Preliminary round Group A Group B Group C Third-placed team rankings Knockout stage Final standings Women's tournament Preliminary round Group A Group B Group C Third-placed team rankings Knockout stage Final standings 3x3 basketball On June 9, 2017,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announced that 3x3 basketball would be contested at the Summer Olympics for the first time in 2020. Qualification Qualification for 3x3 determined the eight teams in each of the men's and women's tournaments. The host country, Japan, was guaranteed only one place, not one per gender. Four teams per gender (reduced to three if Japan uses its guaranteed place) were determined via world ranking. Three teams per gender were selected through an Olympic Qualifying Tournament. The final team per gender were determined in a Universality Olympic Qualifying Tournament. Men Women Men's tournament Pool Knockout stage Final standings Women's tournament Pool Knockout stage Final standings See also Wheelchair basketball at the 2020 Summer Paralympics References External links Basketball at the Tokyo Olympics official website 3x3 basketball at the Tokyo Olympics official website Results book – 3x3 Basketball Results book – Basketball 2020 2020 Summer Olympics events Olympics International basketball competitions hosted by Japan
https://ko.wikipedia.org/wiki/%EC%9E%89%EC%B9%B4%20%EA%B7%B8%EB%A7%81%EC%8A%A4
잉카 그링스
잉카 그링스(, 1978년 10월 31일 ~ )는 독일의 은퇴한 여자 축구 선수이자 현 여자 축구 지도자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으며 현재 스위스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을 맡고 있다. 클럽 경력 어린 시절에는 테니스 선수가 되기를 원했지만 자신을 받아줄 테니스 클럽이 없었기 때문에 축구 선수로 전향하게 된다. 1984년에 TSV 엘러 04에 입단하면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90년에 가라터 SV로 이적하게 된다. 1995년부터 2011년까지 FCR 2001 뒤스부르크 소속으로 뛰면서 팀의 프라우엔-분데스리가 1회 우승(1999-2000), 여자 DFB-포칼 3회 우승(1997-98, 2008-09, 2009-10),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2008-09)에 공헌했다. 프라우엔-분데스리가 시즌에서 최다 득점자에 6번(1998-99, 1999-2000, 2002-03, 2007-08, 2008-09, 2009-10) 올랐고 2011년 1월 29일에는 프라우엔-분데스리가 통산 350골을 달성하면서 프라우엔-분데스리가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을 수립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스위스의 여자 축구 클럽인 FC 취리히 프라우엔에서 활약했으며 2013년에는 미국의 내셔널 위민스 사커 리그 소속 여자 축구 클럽인 시카고 레드 스타스로 이적했다. 2013년 8월 27일에 독일의 1. FC 쾰른으로 이적했고 2014년 5월 30일에 축구 선수 생활에서 은퇴하게 된다. 국가대표 경력 1996년 5월 5일에 열린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독일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출전했다.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독일은 미국과의 8강전에서 패배하면서 탈락하고 만다.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에서는 독일의 여자 축구 동메달에 공헌했다. UEFA 여자 유로 2001, 2003년 FIFA 여자 월드컵은 부상으로 인해 참가하지 못했고 2004년 아테네 하계 올림픽에서는 무릎 앞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참가하지 못했다. 부상의 여파로 인해 은퇴를 선언했지만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복귀하게 된다. UEFA 여자 유로 2005에서는 4골을 기록하면서 대회 최다 득점자에 올랐고 독일의 6번째 UEFA 유럽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2007년 FIFA 여자 월드컵,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은 당시 독일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질비아 나이트와의 불화로 인해 참가하지 못했다. UEFA 여자 유로 2009에서는 5골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번 대회 최다 득점자에 올랐고 독일의 7번째 UEFA 유럽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독일은 일본과의 8강전에서 패배하면서 탈락하고 만다. 2012년 7월에 국가대표팀 은퇴 의사를 표명했고 2012년 9월 19일에 열린 터키와의 UEFA 여자 유로 2013 예선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잉카 그링스는 국가대표팀에서 94경기에 출전하여 64골을 기록했다. 사생활 잉카 그링스는 양성애자로서 자신의 여자 축구 팀 동료였던 린다 브레조니크, 남자 축구 클럽 VfL 볼프스부르크의 감독을 역임한 홀거 파흐와의 관계를 맺었다. 수상 클럽 FCR 2001 뒤스부르크 프라우엔-분데스리가 1회 우승 (1999-2000), 7회 준우승 (1996-97, 1998-99,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9-10) 여자 DFB-포칼 3회 우승 (1997-98, 2008-09, 2009-10), 3회 준우승 (1998-99, 2002-03, 2006-07)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 (2008-09) FC 취리히 프라우엔 나티오날리가 A 2회 우승 (2012, 2013) 스위스 여자컵 2회 우승 (2012, 2013) 국가대표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 여자 축구 동메달 UEFA 여자 유로 2005 우승 UEFA 여자 유로 2009 우승 개인 1999년 독일 올해의 여자 축구 선수 선정 2009년 독일 올해의 여자 축구 선수 선정 2010년 독일 올해의 여자 축구 선수 선정 프라우엔-분데스리가 최다 득점자 6회 수상 (1998-99, 1999-2000, 2002-03, 2007-08, 2008-09, 2009-10) UEFA 유럽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 최다 득점자 2회 수상 (2005, 2009)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최다 득점자 1회 수상 (2010-11) 외부 링크 잉카 그링스 프로필 - 독일 축구 연맹 197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독일의 여자 축구 선수 여자 축구 공격수 독일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2000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독일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독일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200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UEFA 여자 유로 2005 참가 선수 UEFA 여자 유로 2009 참가 선수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스위스에 거주한 독일인 미국에 거주한 독일인 독일의 성소수자 스포츠 선수 양성애자 독일의 축구 감독 여자 축구 감독 20세기 성소수자 사람 21세기 성소수자 사람 내셔널 위민스 사커 리그의 축구 선수 양성애자 스포츠인 스위스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카고 레드 스타스의 축구 선수 2023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감독 스위스의 외국인 여자 축구 선수 미국의 외국인 여자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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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a Grings
Inka Grings (born 31 October 1978) is a German former international footballer who played as a striker. She played sixteen years for FCR 2001 Duisburg before joining FC Zürich Frauen. She also played for the Germany national team. Grings is the second all-time leading goalscorer in Germany's top division, the Frauen-Bundesliga, with 195 goals and claimed the league's top-scorer award for a record six seasons. Playing for Germany, she was the top-scorer at two UEFA European Championships. Grings was named Women's Footballer of the Year (Germany) in 1999, 2009 and 2010. She is the manager of Switzerland national team after previously coaching FC Zürich Frauen in the Swiss national league. Early life As a child, Grings wanted to be a tennis player. However, after no tennis club had accepted her, she instead started playing football at TSV Eller 04 in 1984. She later played for Garather SV. Club career Duisburg, 1995–2011 Grings signed with FCR 2001 Duisburg in 1995. She quickly became an important player for the club and in the following years one of the most successful goalscorers in Germany. In 1998, Grings won the German Cup, her first major title. She scored three goals in the final against FSV Frankfurt. The following year in the 1998–99 season she became the Bundesliga's top-scorer for the first time. Grings was named Women's Footballer of the Year (Germany) in 1999 by the country's sports journalists. Over the next decade, Grings became the Bundesliga all-time leading goalscorer, hitting the mark of 350 goals in January 2011. She won the Bundesliga title with Duisburg in the 1999–00 season; that year she also set the all-time record for goals in a Bundesliga season by scoring 38 goals. She won the German Cup on two more occasions in 2009 and 2010, and lifted the UEFA Women's Cup in the 2008–09 season. Grings was the Bundesliga top-scorer for three years in a row from 2008 to 2010 and was again voted Women's Footballer of the Year (Germany) in 2009 and 2010. FC Zürich, 2011–13 She ended her contract at Duisburg one year early in an agreement with the club and announced transferring to an international club. On 1 September 2011 she joined Swiss side FC Zürich Frauen. In the first season she won the championship as well as the cup. Chicago Red Stars, 2013 In May 2013, Grings signed with the Chicago Red Stars for the inaugural season of the National Women's Soccer League in the United States alongside Sonja Fuss. On 4 August 2013, she scored a brace against Seattle Reign FC helping the Red Stars win 3–1. Grings was on the starting lineup in 14 of the 16 games in which she played for the Red Stars and scored three goals on the season. The Red Stars finished the 2013 season sixth in the standings with an 8–6–8 record. She was waived by the Red Stars in September 2013. International career Grings made her debut for the Germany national team in May 1996 against Finland. She appeared for Germany at the 1999 FIFA Women's World Cup, scoring three goals. However, Germany was eliminated in the quarter-final. At the 2000 Summer Olympics, she won the bronze medal with the German team, scoring once against Australia in the group stage. Grings' career, particularly at international level, has repeatedly been affected by injuries. She missed the 2001 European Championship on home soil and the 2003 FIFA Women's World Cup due to injury. When she tore the anterior cruciate ligament in her knee shortly before the 2004 Summer Olympics, Grings initially announce to end her career. However, she changed her mind during physical therapy. With four goals, Grings was the top-scorer at the 2005 European Championship, when Germany claimed its sixth European title. At the 2007 FIFA Women's World Cup and the 2008 Summer Olympics, Grings was not part of the German squad, because of disagreements with head coach Silvia Neid. She returned for Germany at the 2009 European Championship, claiming her second European title. With six goals Grings again was the tournament's top-scorer. She has been called up for the 2011 FIFA Women's World Cup. Grings has scored 64 international goals and is ranked third behind Birgit Prinz (128) and Heidi Mohr (83) for Germany's all-time top goalscorers. During 93 appearances, she has averaged 0.69 goals per games, which makes her the team's second most prolific scorer. Personal life Grings is openly bisexual, she had a well publicized relationship with women's team colleague Linda Bresonik, and also dated male Holger Fach, former head coach of VfL Wolfsburg. Career statistics International Scores and results list Germany's goal tally first, score column indicates score after each Grings goal. Goals by competition Matches and goals scored at World Cup and Olympic tournaments Inka Grings competed in two FIFA Women's World Cup: USA 1999, and Germany 2011; one Olympics: Sydney 2000; played in 13 matches and scored 6 goals. Along with her Germany team, Grings is a bronze medalist from Sydney 2000. Honours FCR 2001 Duisburg Bundesliga: 1999–00; runner-up (7) 1996–97, 1998–99,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9–10 German Cup: 1997–98, 2008–09, 2009–10; runner-up 1998–99, 2002–03, 2006–07 UEFA Women's Cup: 2008–09 FC Zürich Frauen Nationalliga A: 2012, 2013 Swiss Women's Cup: 2012, 2013 Germany UEFA European Championship: 2005, 2009 Summer Olympic Games: Bronze medal 2000 Individual Women's Footballer of the Year (Germany): 1999, 2009, 2010 Top-scorer Bundesliga (6): 1998–99, 1999–00, 2002–03, 2007–08, 2008–09, 2009–10 Top-scorer UEFA Women's Championship: 2005, 2009 Top-scorer UEFA Women's Champions League: 2010–11 See also List of 2000 Summer Olympics medal winners List of UEFA Women's Championship goalscorers List of German women's football champions List of LGBT sportspeople References Match reports External links Profile at the German Football Association 1978 births Living people Footballers from Düsseldorf Bisexual sportswomen German bisexual people German women's footballers German expatriate women's footballers Germany wo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Women's association football forwards German women's football managers 1. FC Köln (women) players FCR 2001 Duisburg players Chicago Red Stars players National Women's Soccer League players Germ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the United States Germ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Switzerland Expatriate women's soccer players in the United States Expatriate women's footballers in Switzerland Olympic bronze medalists for Germany Footballers at the 2000 Summer Olympics Olympic medalists in football 1999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2011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German LGBT sportspeople LGBT association football players Medalists at the 2000 Summer Olympics MSV Duisburg managers Switzerland women's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Olympic footballers for Germany UEFA Women's Championship-winning players FC Zürich Frauen players Swiss Women's Super League players 2023 FIFA Women's World Cup managers Female association football mana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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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푹미엔딘
응우옌푹미엔딘(, 1810년 8월 5일 ~ 1886년 11월 5일)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족이다. 민망 황제의 3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가비(嘉妃) 팜티뚜옛(范氏雪)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푹옌()이었으나 개명했다. 자는 민띤(), 호는 동찌()이다. 생애 1810년 8월 5일에 태어났고, 할아버지 자롱 황제가 이름을 응우옌푹옌이라고 지어주었다. 3살 때 어머니 가비가 죽자 할머니인 순천고황후(順天高皇后) 쩐티당(陳氏璫)에게 맡겨져 자랐다. 민망 황제 재위 초에 큰형인 응우옌푹미엔똥과 함께 출각(出閣)하여 독서(讀書)를 했다. 이때 여러 책을 두루 보았으며, 시를 짓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1823년, 봉시(奉侍)하는데 편하도록 후에 왼편에 부저(府邸)를 설치하였다. 1830년, 수춘공()에 봉해졌고, 그해 가을에 종인부(宗人府)가 설치되자 명명제는 그를 종인부우종정(宗人府右宗正)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명명제는 재위 동안 자주 순행을 나갔는데, 매번 그에게 남아서 후에를 지키도록 하였다. 1842년 봄, 응우옌푹미엔딘은 티에우찌 황제를 따라 하노이로 가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 이때 청나라 사신 보청(寶靑)이 교자에 앉아서 주작문(朱雀門)으로 바로 들어오려고 하였는데 관리들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고 이때 응우옌푹미엔딘이 정색을 하고 보청을 꾸짖어 멈추게 하였다. 이후에 티에우찌 황제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특이권휴(特異眷庥) 네 글자가 새겨진 백옥패(白玉佩)를 하사하였다. 1845년 여름, 티에우찌 황제가 분방자부(分房字部)를 만들게 하고 이를 여러 공들에게 나눠주어 사윤(嗣胤)을 밝혔는데, 이때 응우옌푹미엔딘이 수(水) 자부(字部)를 받았다. 1865년, 뜨득 황제가 응우옌푹미엔딘이 나이가 많고 또한 덕이 아름답다고 여겨 평상시의 추배(趨拜)를 면하게 하였고, 조회 시엔 연교(軟轎)에 앉아 일정문(日精門) 밖에 이를 수 있게 해 우대하였다. 그해 응우옌푹미엔딘은 섭존인부좌존정(攝尊人府左尊正)에 임명되었다. 1874년, 수춘군왕()으로 진봉되었다. 그러자 그는 함께 군왕으로 진봉된 영순공(寧順公) 응우옌푹미엔응이와 함께 상소하여 군왕의 작위를 사양하였으나 뜨득 황제는 연로한 지친을 공경하는 의미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8년 봄, 뜨득 황제는 그의 오순대수(五旬大壽)를 맞이하여 응우옌푹미엔딘을 수춘왕()에 봉했다. 1880년, 일곱째 아들인 수춘군공 응우옌푹홍깍이 죽자 이 때문에 상심하여 병을 얻었다. 1883년, 뜨득 황제가 죽었는데, 유명을 남겨 응우옌푹미엔딘과 수리군왕(綏理郡王) 응우옌푹미엔찐(阮福綿寊)으로 하여금 보정(輔政)하게 하였다. 1885년, 함응이 황제가 궁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저항하는 근왕 운동을 펼치자 응우옌푹미엔딘은 양궁(兩宮)의 의지(懿旨)를 받들어 국정을 권섭(權攝)하였다. 아울러 수리(綏理), 해녕(海寧), 홍화(弘化)의 여러 공을 복작시키고 수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청하였다. 그해 가을에 동카인 황제가 즉위하자 응우옌푹미엔딘은 상소하여 정권을 반납할 수 있도록 청했고, 동카인 황제는 그에게 상을 내렸다. 1886년 겨울, 응우옌푹미엔딘은 사망하였다. 동카인 황제는 3일 동안 도조(悼朝)하였고, 시호를 단각()으로 하고 사당을 건립하였다. 저서로는 《명명궁사(明命宮詞)》와 《정명애방시집(靜明愛芳詩集)》 등이 있다. 가족 응우옌푹미엔딘은 144명의 자식(아들 78명, 딸 66명)을 두었는데, 이는 부친인 민망 황제보다 많은 수이다. 아들 첫째 응우옌푹홍뚜언(, 1827년 2월 24일 ~ 1863년 7월 3일) - 몽은정후(蒙恩亭侯)에 봉해졌다. 아내는 쩐티꺼(陳氏姬)로, 아들 한 명과 딸 세 명을 두었다. 손자 응우옌푹응타인() 둘째 응우옌푹홍우옌(, ? ~ ?) - 아들 4명과 딸 5명을 두었다. 셋째 응우옌푹홍티엠(, 1831년 8월 30일 ~ 1879년 9월 27일) - 아내는 쩐티짱(陳氏莊)이고, 아들 6명과 딸 2명을 두었다. 넷째 응우옌푹홍끼엣(, 1833년 6월 4일 ~ 1834년 7월 18일) 다섯째 응우옌푹홍비(, 1833년 12월 2일 ~ 1843년 2월 12일) 여섯째 응우옌푹홍칵(, 1834년 3월 23일 ~ 1863년 4월 17일) - 아들 2명을 두었다. 일곱째 응우옌푹홍깍(, 1834년 8월 18일 ~ 1880년 6월 13일) - 아내 레티럽(黎氏立)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을 두었다. 처음엔 정후(亭侯)를 세습하였고, 뜨득 24년(1871년)에 수춘현공(壽春縣公)에 습봉되었다. 뜨득 31년(1878년)에는 수춘군공(壽春郡公)을 습봉하였고, 뜨득 33년(1880년)에 사망하였다. 손자 응우옌푹응하오(, 1864년 7월 5일 ~ 1922년 12월 4일) - 수춘향공(壽春鄕公)에 습봉되었고, 6명의 아들과 11명의 딸을 두었다. 여덟째 응우옌푹홍니응(, 1834년 8월 21일 ~ 1837년 3월 17일) 아홉째 응우옌푹홍담(, 1835년 1월 24일 ~ 1885년 5월 26일) -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 열째 응우옌푹홍루엇(, 1835년 11월 4일 ~ 1836년 5월 3일) 열한째 응우옌푹홍방(, 1836년 7월 27일 ~ 1836년 12월 23일) 열두째 응우옌푹홍찌엠(, 1837년 8월 5일 ~ 1903년 3월 27일) - 조국경(助國卿)에 봉해졌다. 열셋째 응우옌푹홍찌(, 1837년 1월 15일 ~ 1837년 11월 23일) 열넷째 응우옌푹홍탕(, 1838년 4월 14일 ~ 1838년 6월 17일) 열다섯째 응우옌푹홍함(, 1839년 1월 25일 ~ 1891년 2월 18일) - 봉국경(奉國卿)에 봉해졌다. 응우옌푹홍자(, 1839년 2월 25일 ~ 1839년 5월 1일) 응우옌푹홍뚜이(, 1839년 2월 27일 ~ 1910년 4월 5일) - 아들 3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뉴언() 응우옌푹홍수엇(, 1839년 5월 29일 ~ 1843년 4월 25일) 응우옌푹홍당(, 1840년 4월 2일 ~ 1902년 3월 22일) - 아들 6명과 딸 1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프엉(, 1840년 5월 15일 ~ 1890년 2월 5일) - 딸 3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더우(, 1840년 11월 21일 ~ 1883년 11월 16일) - 아들 2명과 딸 3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쯕(, 1841년 1월 21일 ~ 1842년 11월 18일) 응우옌푹홍한(, 1841년 5월 14일 ~ 1842년 11월 18일) 응우옌푹홍종(, 1841년 8월 3일 ~ 1889년) - 아들 4명과 딸 3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똔(, 1842년 3월 8일 ~ 1845년 3월 12일) 응우옌푹홍뜨엉(, 1842년 8월 4일 ~ 1845년 5월 9일) 응우옌푹홍토아이(, 1842년 8월 19일 ~ 1843년 7월 8일) 응우옌푹홍띠엔(, 1844년 4월 9일 ~ 1853년 5월 22일) 응우옌푹홍띤(, 1844년 4월 18일 ~ 1887년 1월 8일) 응우옌푹홍당(, 1844년 4월 18일 ~ 1869년 2월 19일) 응우옌푹홍짱(, 1845년 1월 7일 ~ 1887년 3월 11일) - 아들 1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서른넷째 응우옌푹홍껀(, 1845년 3월 6일 ~ 1922년 11월 23일) - 조국위(助國尉)에 봉해졌고, 아들 4명과 딸 7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떤(, 1845년 7월 16일 ~ 1916년 6월 8일) - 아들 5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한(, 1846년 9월 12일 ~ 1853년 6월 14일) 응우옌푹홍뜨엉(, 1847년 2월 18일 ~ 1911년 6월 8일) - 아들 5명과 딸 4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지엔(, 1847년 10월 4일 ~ 1853년 4월 3일) 응우옌푹홍쭈언(, 1847년 10월 27일 ~ 1853년 6월 30일) 응우옌푹홍루옌(, 1847년 10월 30일 ~ 1849년 7월 11일) 응우옌푹홍뚜언(, 1847년 12월 3일 ~ 1849년 2월 27일) 응우옌푹홍주(, 1848년 4월 17일 ~ ?년 8월 24일) - 타인타이 원년(1889년), 홍화군왕(弘化郡王) 응우옌푹미엔찌엔의 양자로 보내져 후사가 되었고, 응우옌푹홍허우(阮福洪厚)로 개명하였다. 응우옌푹홍한(, 1848년 5월 25일 ~ 1856년 8월 12일) 응우옌푹홍런(, 1849년 8월 1일 ~ ?) - 아들 1명과 딸 5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쯕(, 1849년 8월 28일 ~ 1856년 8월 3일) 응우옌푹홍오아인(, 1850년 2월 22일 ~ 1853년 5월 19일) 응우옌푹홍찌엔(, 1850년 4월 4일 ~ 1853년 6월 11일) 응우옌푹홍팝(, 1850년 11월 7일 ~ 1912년 3월 1일) - 아들 1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꾸옌(, 1851년 6월 21일 ~ 1884년 11월 8일) - 아들 3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트(, 1854년 7월 27일 ~ 1854년 8월 29일) 응우옌푹홍히엔(, 1855년 11월 25일 ~ 1924년 10월 30일) - 아들 1명과 딸 1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떰(, 1855년 12월 12일 ~ 1885년 8월 21일) 응우옌푹홍꾸이(, 1856년 5월 19일 ~ 1901년 4월 2일) 응우옌푹홍도(, 1856년 10월 14일 ~ 1859년 4월 9일) 응우옌푹홍자오(, 1858년 5월 26일 ~ 1858년 8월 3일) 응우옌푹홍룩(, 1859년 4월 24일 ~ 1865년 4월 24일) 응우옌푹홍꽝(, 1859년 7월 17일 ~ 1864년 11월 19일) 응우옌푹홍끄(, 1859년 12월 13일 ~ 1884년 12월 19일) - 아들 3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업(, 1860년 6월 20일 ~ 1863년 7월 1일) 응우옌푹홍꾹(, 1860년 10월 19일 ~ 1914년 8월 4일) - 아들 2명과 딸 6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농(, 1860년 12월 12일 ~ ?년 11월 6일) - 아들 6명과 딸 4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비엔(, 1862년 2월 13일 ~ 1862년 7월 5일) 응우옌푹홍툭() 응우옌푹홍봉(, 1864년 2월 13일 ~ 1905년 8월 14일) - 딸 1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낀(, 1864년 8월 2일 ~ 1865년 8월 3일) 응우옌푹홍담() 응우옌푹홍돈(, 1867년 2월 23일 ~ 1867년 5월 29일) 응우옌푹홍번(, 1869년 3월 19일 ~ 1914년 8월 16일) - 아들 2명과 딸 3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끼(, 1869년 8월 29일 ~ 1921년 6월 4일) - 아들 5명과 딸 3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뚜옌(, 1873년 3월 3일 ~ ?년 2월 12일) - 아들 3명과 딸 1명을 두었다. 응우옌푹홍응오안(, 1876년 2월 29일 ~ 1922년 - 아들 2명과 딸 5명을 두었다. 딸 응우옌티응옥장(, 1828년 2월 6일 ~ 1922년) 응우옌티조안꿍(, 1829년 11월 6일 ~ 1922년) 응우옌티응옥토아이(, 1830년 3월 30일 ~ 1922년) 응우옌티빅지에우(, 1830년 8월 12일 ~ ?) 응우옌티쯕뚜이(, 1833년 6월 3일 ~ 1883년 11월 10일) 응우옌티지엠쩟(, 1833년 8월 18일 ~ 1833년 11월 1일) 응우옌티찐뜨(, 1834년 9월 27일 ~ 1837년 8월 13일) 응우옌티미찌에우(, 1835년 1월 16일 ~ 1835년 3월 5일) 응우옌티디엠디엠(, 1835년 8월 1일 ~ 1835년 11월 10일) 응우옌티타인번(, 1835년 8월 28일 ~ 1836년 1월 12일) 응우옌티펀흐엇(, 1837년 11월 12일 ~ 1902년 7월 7일) 응우옌티껌떰(, 1838년 4월 18일 ~ 1900년 5월 30일) 응우옌티띠엠후이(, 1838년 5월 22일 ~ 1870년 12월 3일) 응우옌티투이(, 1838년 7월 12일 ~ 1869년 9월 1일) 응우옌티티에우뚜(, 1838년 10월 6일 ~ 1895년 8월 21일) 응우옌티띤꾸옌(, 1839년 1월 17일 ~ 1839년 3월 23일) 응우옌티미합(, 1839년 1월 19일 ~ 1842년 3월 14일) 응우옌티지엠짱(, 1839년 5월 18일 ~ 1839년 8월 14일) 응우옌티우옌주(, 1841년 1월 20일 ~ 1843년 6월 23일) 응우옌티지엠주(, 1841년 8월 3일 ~ 1842년 3월 22일) 응우옌티투번(, 1842년 1월 10일 ~ 1842년 4월 2일) 응우옌티지띤(, 1842년 7월 24일 ~ 1901년 7월 8일) 응우옌티토아이꾸에(, 1842년 7월 30일 ~ 1842년 10월 3일) 응우옌티뚜이띠에우(, 1842년 9월 1일 ~ 1864년 9월27일) 응우옌티지엠레(, 1843년 1월 6일 ~ 1843년 4월 3일) 응우옌티또프엉(, 1843년 1월 21일 ~ 1845년 7월 27일) 응우옌티주옌쭈언(, 1843년 2월 8일 ~ 1843년 5월 12일) 응우옌티리에우미(, 1843년 2월 16일 ~ 1902년 4월 19일) 응우옌티레꾸옌(, 1843년 2월 28일 ~ 1845년 4월 11일) 응우옌티뚜언미(, 1844년 4월 28일 ~ 1888년 2월 22일) 응우옌티하번(, 1844년 5월 5일 ~ ?) 응우옌티자엄(, 1846년 8월 13일 ~ 1875년 10월 21일) 응우옌티마이짱(, 1846년 12월 3일 ~ 1931년 10월 18일) 응우옌티응우옛꾸옌(, 1847년 2월 18일 ~ 1849년 1월 28일) 응우옌티응우옛도안(, 1847년 6월 3일 ~ 1885년 8월 1일) 응우옌티꾹뉴이(, 1847년 8월 4일 ~ 1895년 9월 26일) 응우옌티응엄쩜(, 1847년 11월 23일 ~ 1855년 9월 1일) 응우옌티쯕껌(, 1848년 11월 21일 ~ 1898년 3월 13일) 응우옌티쑤언티에우(, 1849년 1월 14일 ~ 1869년 6월 15일) 응우옌티투후이(, 1850년 9월 21일 ~ 1853년 6월 13일) 응우옌티투다오(, 1851년 8월 22일 ~ 1874년 2월 16일) 응우옌티떰지(, 1853년 10월 15일 ~ 1857년 10월 16일) 응우옌티풍띠에우(, 1855년 1월 12일 ~ 1855년 5월 28일) 응우옌티테룩(, 1857년 5월 18일 ~ 1860년 9월 3일) 응우옌티테껌() 응우옌티담니으(, 1857년 10월 19일 ~ 1909년 10월 8일) 응우옌티쑤언히(, 1859년 12월 14일 ~ 1889년 1월 12일) 응우옌티지에우다오(, 1864년 10월 25일 ~ ?) 응우옌티번미(, 1865년 3월 24일 ~ 1890년 6월 25일) 응우옌티띠에우꾸에(, 1865년 4월 5일 ~ 1913년 4월 25일) 응우옌티뜨엉비(, 1866년 1월 8일 ~ 1866년 7월 7일) 응우옌티지에우아인(, 1867년 6월 23일 ~ 1868년 1월 29일) 응우옌티뜨혹(, 1869년 2월 11일 ~ 1922년 11월 25일) 응우옌티프엉지(, 1876년 8월 12일 ~ ?) 예순여섯째 응우옌티뚜언주(, 1880년 2월 19일 ~ 1904년 7월 3일) 참고 문헌 《대남실록(大南實錄)》정편열전2집(正編列傳二集) 《완복족세보(阮福族世譜)》 수춘왕복수필호(壽春王福壽弼壹) 완조세계(阮朝世系) 수춘왕면정세계(壽春王綿定世系) 1810년 출생 1886년 사망 응우옌 왕조의 황자 트어티엔후에성 출신
https://en.wikipedia.org/wiki/Nguy%E1%BB%85n%20Ph%C3%BAc%20Mi%C3%AAn%20%C4%90%E1%BB%8Bnh
Nguyễn Phúc Miên Định
Nguyễn Phúc Miên Định (阮福綿定, 5 August 1810 – 5 November 1886), born Nguyễn Phúc Yến (阮福宴), was a prince of Nguyễn dynasty, Vietnam. Life He was the third son of Minh Mạng, and his mother was Phạm Thị Tuyết. He was granted the title Thọ Xuân Công (壽春公 "Duke of Thọ Xuân") and appointed Right Director of Imperial Clan Court ( 尊人府右尊正) in 1830. He was elevated to Left Director ( 左尊正) in 1865. In 1880, he was elevated to Thọ Xuân Vương (壽春王 "Prince of Thọ Xuân"). After Tự Đức's death, he was named as regent together with Nguyễn Phúc Miên Trinh (Prince of Tuy Lý) to assist the new emperor Dục Đức, but they wielded little power. In 1885, Tôn Thất Thuyết launched a failure ambush against French colonists, and escaped from Huế together with Emperor Hàm Nghi. During the emperor's absence, Miên Định was appointed as puppet "Prince Regent" () by French general Henri Roussel de Courcy. Nguyễn Hữu Độ, Phan Đình Bình and Nguyễn Văn Tường were appointed as Grand Secretaries in the same time. He allowed his two brothers, Nguyễn Phúc Miên Trinh (Prince of Tuy Lý) and Nguyễn Phúc Miên Triện (Prince of Hoằng Hóa) to come back to Huế. In September, de Courcy exiled Tường to Poulo Condore, and installed Đồng Khánh as new emperor. Miên Định retired. He died in the next year, and received the posthumous name Đoan Khác (端恪). Miên Định fathered 144 children, including 78 sons and 66 daughters. As a poet Miên Định was also a poet. He was a member of Mạc Vân thi xã ("Mạc Vân Poetry Society"). Nguyễn Phúc Miên Thủ (Prince of Hàm Thuận), Nguyễn Phúc Miên Thẩm (Prince of Tùng Thiện), Nguyễn Phúc Miên Trinh (Prince of Tuy Lý), Nguyễn Phúc Miên Bửu (Prince of Tương An), Nguyễn Phúc Miên Triện (Prince of Hoằng Hóa), Nguyễn Văn Siêu, Cao Bá Quát, Hà Tôn Quyền, Phan Thanh Giản and Nguyễn Đăng Giai were also members of this poetry society. References 1810 births 1886 deaths 19th-century Vietnamese poets Nguyen dynasty princes People from Thừa Thiên-Huế province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94%94%EC%B9%98
체르디치
체르디치(, )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언급되는 색슨인 지도자다. 앵글로색슨의 브리튼 정착 당시 웨식스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웨식스 국왕이 되어 519년에서 534년까지 통치했다고 한다. 이후 웨식스의 왕들은 자신이 멀든 가깝든 자기 혈통에 체르디치의 피가 어느 정도는 흐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재 밝혀진 사료가 거의 없어서 체르디치의 출신과 민족, 심지어는 체르디치란 인물의 실존 여부 자체까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이름의 어원 많은 학자들이 체르디치라는 이 이름이 게르만어가 아닌 Ceretic이라는 예전 브리튼어(켈트나 로만 등)의 이름 중 하나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 가설에 따르면 Cerdic이라는 이름은 예전의 켈트쪽의 이름이었던 Caratīcos나 Corotīc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웨식스를 건국한 것이 게르만족이지만, 체르디치는 게르만족의 언어가 아닌 다른 쪽의 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이는 체르디치가 원래 영국에서 살았고, 체르디치의 왕조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장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체르디치의 손자로 추정되는 체울린과 그 아래의 후손 몇 명은 게르만족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켈트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름을 차용했던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출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체르디치의 조상을 확인할 수 있는 족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체르디치의 혈통은 오딘과 족장설화의 시대까지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케네스 시삼은 체르디치의 혈통이 버니시아의 왕의 혈통에서 새로 나온 것으로, 체르디치 자신의 전에는 직접적인 혈통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보들리언 도서관의 사서이기도 했던 존 노웰 린튼 마이어스는 체르디치와 킨리치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처음 등장하는 495년에 그들은 올더먼(Ealdorman, 왕이 임명한 영토를 다스리는 관리)으로 묘사된다고 언급하였다. 올더먼(Ealdorman)은 당시에는 그리 좋은 직급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마이어스는 덧붙여 "기원이나 어떤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데다가 침입자였던 체르디치의 흔적, 혈통, 칭호등을 찾기 위해 연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도 했다. 또한 519년이 되어서야 체르디치와 킨리치가 왕을 "재위하기 시작한다"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는 이들이 519년이 되어서야 신하나 올더먼을 그만하게 되고, 자신의 권리에 따라서 독립적인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암시한다고 마이어스는 언급하였다. 마이어스는 이렇게 믿었다....따라서 체르디치를 색슨 쇼어의 서쪽 끝에 영토를 가지고 있는 귀족 가문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체르디치는 로마가 망해갈 즈음에 위임이 되었거나, 로마의 국방을 책임지는 자로 위탁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후에 앵글로색슨의 올더먼으로 묘사될 수 있는 사람이다. ... 만약 체르디치 같이 어떤 종족이 이미 색슨 쇼어의 끝에 있는 원주민인 색슨족, 주트족과 혈연관계를 발전시켰다면 로마의 권위가 희미해질 즈음에 당시보다 더 빨리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을지도 모르고, 나탄레오드 같은 서로 경쟁하는 영국 내의 타국들로부터 살아남기 시작해 508년부터 재위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일부 학자들은 체르디치의 아버지인 엘레사(Elesa)가 게르마누스의 아들을 치료해주었던 켈트족인 엘라시우스라 주장하기도 했다. 생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의하면, 체르디치는 495년 아들 킨리치와 다섯 척의 배와 함께 오늘날의 햄프셔 지역에 도착했다. 그는 Natanleaga라는 나라의 왕이었던 나탄레오드라는 왕과 싸워 508년에 그를 죽였고, 519년에는 Cerdiceleag에서 싸웠다고 한다. Natanleaga는 햄프셔에서 현재의 네틀리 마시, Cerdiceleag는 차르포드(Cerdic's Ford. 체르디치의 여울)라는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어떤 사료에 따르면 체르디치가 와이트섬을 정복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훗날 체르디치의 친족인 스터프와 위흐트가르(514년 서색슨인과 함께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에게 주어지게 된다. 체르디치는 534년에 사망하게 되며, 체르디치의 아들인 킨리치가 물려 받게 된다. 연대기에서 웨식스의 초기 역사는 수많은 중복과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정보가 많아서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데이비드 덤빌은 체르디치의 진정한 재위 연도가 538년부터 554년까지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체르디치가 490년(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아서 490년에서 518년까지는 추측이 가능)에 벌어졌던 바돈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에게 패한 앵글로색슨족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만약 덤빌이 주장한 것이 맞으면, 이는 거짓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이 전투의 지도자가 앨라(Ælle)이거나 다른 색슨족의 지도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웨식스의 기원은 현재 발견되거나 전해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체르디치는 순전히 전설적인 인물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소수의 학자들만 주장하는 바로, 체르디치의 가장 초기 출처인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9세기에 만들어졌다. 비록 이 연대기가 웨식스 창조의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 담겨있는 것이지만, 체르디치가 활동한 500년대와 연대기가 기록된 900대 사이의 400년 간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이 불가능하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연보는 체르디치의 후기 왕들에 대한 설명과 혈통과 함께 체르디치의 아들인 킨리치의 왕위계승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연대기의 서문에는 체르디치와 킨리치 사이에 크레오다가 끼어서, 체르디치가 크레오다의 아버지, 킨리치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준다. 체르디치의 혈통은 후의 웨식스 왕들에게 필요하게 되었고, 체르디치는 후에 잉글랜드와 브리튼의 후속 통지자인 에그버트의 조상이라고 주장이 되고 있다. 각주 외부 링크 Cerdic 1 The Anglo-Saxon Chronicle which says he and his son arrived in Hampshire, at Cerdices Ore (Cerdic's Point) 534년 사망 6세기 사람 잉글랜드의 영웅전설 앵글로색슨인 전사 창업군주 서색슨인의 왕 웨식스가 후로마 브리튼의 군주 6세기 잉글랜드의 군주
https://en.wikipedia.org/wiki/Cerdic%20of%20Wessex
Cerdic of Wessex
Cerdic ( ; ) is described in the Anglo-Saxon Chronicle as a leader of the Anglo-Saxon settlement of Britain, being the founder and first king of Wessex, reigning from around 519 to 534 AD. Subsequent kings of Wessex were each claimed by the Chronicle to descend in some manner from Cerdic. His origin, ethnicity, and even his very existence have been extensively disputed. However, though claimed as the founder of Wessex by later West Saxon kings, he would have been known to contemporaries as king of the Gewissae, a folk or tribal group. The first king of the Gewissae to call himself 'King of the West Saxons', was Cædwalla, in a charter of 686. Etymology The name Ċerdiċ is thought by most scholars to be Brittonic – a form of the name Ceretic – rather than Germanic in origin. According to the Brittonic origin hypothesis, Ċerdiċ is derived from the British name *Caratīcos or Corotīcos. This may indicate that Cerdic was a native Briton, and that his dynasty became Anglicised over time. This view is supported by the potentially non-Germanic names of some of his descendants including Ceawlin, Cedda and Cædwalla. Background The Anglo-Saxon Chronicle provides a pedigree tracing Cerdic's ancestry back to Wōden and the antediluvian patriarchs. Kenneth Sisam has shown that this pedigree was constructed by borrowing and subsequently modifying a pedigree tracing the ancestry of the kings of Bernicia, and hence before the generation of Cerdic himself the Wessex pedigree has no historical basis. The pedigree gives Cerdic's father as Elesa, who has been identified by some scholars with the Romano-Briton Elasius, the "chief of the region", met by Germanus of Auxerre. J. N. L. Myres noted that when Cerdic and Cynric first appear in the Anglo-Saxon Chronicle in s.a. 495 they are described as ealdormen, which at that point in time was a fairly junior rank. Myres remarks that: Furthermore, it is not until s.a. 519 that Cerdic and Cynric are recorded as "beginning to reign", suggesting that they ceased being dependent vassals or ealdormen and became independent kings in their own right. Summing up, Myres believed that: King of Wessex According to the Anglo-Saxon Chronicle, Cerdic landed in Britain at a place called Cerdic's-ore, presumably in what is present-day Hampshire, in 495 with his son Cynric in five ships. He is said to have fought a Brittonic king named Natanleod at Natanleaga and killed him 13 years later (in 508) and to have fought at Cerdicesleag in 519. Natanleaga is commonly identified as Netley Marsh in Hampshire and Cerdicesleag as Charford (Cerdic's Ford). The conquest of the Isle of Wight is mentioned among his campaigns, and it later was given to his kinsmen Stuf and Wihtgar (who supposedly arrived with the West Saxons in 514). Cerdic is said by the Anglo-Saxon Chronicle to have died in 534, succeeded by his son Cynric. The early history of Wessex in the Chronicle has been considered unreliable, with duplicate reports of events and seemingly contradictory information. David Dumville has suggested that Cerdic's true regnal dates are 538–554. Because Geoffrey of Monmouth mentions certain Cheldric as a Saxon war leader who fought at Bath in the same period, some scholars suggest that (due to similarities of names) Cerdic was the Saxon leader defeated by the Britons at the Battle of Mount Badon, probably fought in 490 (and possibly later, but not later than 518). This cannot be the case if Dumville is correct, and others assign this battle to Ælle or another Saxon leader, so it appears likely that the origins of the kingdom of Wessex are more complex than the version provided by the surviving traditions. Some scholars have gone so far as to suggest that Cerdic is purely a legendary figure, but this is a minority view. The Anglo-Saxon Chronicle, the earliest source for Cerdic, was put together in the late ninth century; though it probably does record the extant tradition of the founding of Wessex, the intervening 400 years mean that the account cannot be assumed to be accurate. The annals of the Anglo-Saxon Chronicle, along with the genealogical descents embedded in that source's accounts of later kings, describe Cerdic's succession by his son Cynric. However, the Genealogical Regnal List that served as preface to the Chronicle manuscripts instead interposes a generation between them, indicating that Cerdic was father of Creoda and grandfather of Cynric. Descent from Cerdic became a necessary qualification for later kings of Wessex, and he was claimed ancestor of Ecgberht, King of Wessex, progenitor of the English royal house and subsequent rulers of England and Britain. See also House of Wessex family tree References External links The Anglo-Saxon Chronicle which says he and his son arrived in Hampshire, at Cerdices Ore (Cerdic's Point) 5th-century births 534 deaths Year of birth unknown 6th-century English people 6th-century English monarchs Arthurian legend English heroic legends Anglo-Saxon warriors Founding monarchs Sub-Roman monarchs West Saxon monarchs House of Wessex People whose existence is disputed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A7%88%EC%8A%A4%20%ED%82%A4%ED%8C%85
토마스 키팅
토마스 키팅, O.C.S.O. (1923년 3월 7일 ~ 2018년 10월 25일)은 미국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로 트라피스트회(Trappist)로도 알려져 있는 엄률 시토회의 수사이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 스펜서의 성 요셉 성당에서 시작된 현대적 명상 기도법인 중심적 기도법(Centering Prayer)을 창안한 자 중의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토마스 키팅은 192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나  디어필드 아카데미, 예일 대학교, 포덤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44년 1월, 로드아일랜드, 밸리 폴스에 소재한 엄률 시토회에 입교하였다. 1958년에는 콜로라도 스노매스, 성 베네닉토 수도원의 수도원장(Superior)으로 임명되고, 1961년 메사추세츠, 스펜서의 성 요셉 성당의 수도원장(abbot)으로 선출되었다. 1981년 스펜서의 수도원장(abbot)에서 은퇴하여 스노매스(Snowmass)로 귀향하여, 현대적 기독교 명상법의 현대적 형태의 하나인 중심적 기도법의 한 실천방안으로 10일간의 집중 피정(retreat) 프로그램을 창설하였다. 그는 1975년 성 요셉 성당에서 트라피스트 수도사인 윌리엄 메닝거(William Meninger)와 베이실 페닝턴(Basil Pennington)과 함께 현대적 기도방법인 중심적 기도법을 개발하였다. 중심적 기도법을 토마스 키팅이 최초로 제안한 후, 메닝거는 이 방법을 14세기의 영적 고전인 "미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에 기초한 방법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메닝거는 "구름의 기도(Prayer of the Cloud)"로 부르면서 피정소(retreat house)에서 수도사들에게 교육하였다. 페닝턴은 첫번째 피정기를 커네티컷의 평신도등을 상대로 하였는데 이곳에서 참석자들이 중심적 기도(Centering Payer)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 이 용어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에 의하여 이전에도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84년, 키팅은 구스타브 라이닝거(Gustave Reininger), 에드워드 베드너(Edward Bednar)와 함께 중심적 기도법과 기독교 명상 전통에서 이끌어낸 기도법인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가르치는 국제적 교회적 영적 네트워크인 컨템플레이티브 아웃리치(Contemplative Outreach)사를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여기서는 명상법을 수련하는 이들을 위하여 다양한 자료, 워크샵, 및 휴양지 등을 제공하고 있다. 키팅은 종교간 활동의 하나로 1982년 스노매스 종교간 회의(Snowmass Interreligious Conference)를 창립하는데도 기여하고, 템플 오브 언더스탠팅, 모나스틱 인터릴리져스 다이알로그의 회장도 역임하였다. 2018년 10월 25일 메사추세츠, 스펜서의 성 요셉 성당에서 95세로 선종하였다. 참고 문헌 저서 Crisis of Faith (1979) ISBN0-932506-05-4 Finding Grace at the Center (1979) ISBN0-932506-00-3 Heart of the World (1981) ISBN0-8245-0014-8 And the Word Was Made Flesh (1982) ISBN0-8245-0505-0 Open Mind, Open Heart: The Contemplative Dimension of the Gospel (1986) ISBN0-8264-0696-3 The Mystery of Christ: The Liturgy as Spiritual Experience (1987) ISBN0-8264-0697-1 Heart of the World: Spiritual Catechism (1988) ISBN0-8245-0903-X Mystery of Christ (1988) ISBN0-916349-41-1 Awakenings (1990) ISBN0-8245-1044-5 Kundalini Energy and Christian Spirituality: A Pathway to Growth and Healing, by Philip St Romain, illus. Intro. by Thomas Keating (1991) ISBN0-8245-1062-3 Reawakenings (1991) ISBN0-8245-1149-2 Invitation to Love: The Way of Christian Contemplation (1992) ISBN0-8264-0698-X Intimacy with God (1994) ISBN0-8245-1588-9 Loving Search for God: Contemplative Prayer and "The Cloud of Unknowing,", with William A. Meninger (1994) ISBN0-8264-0682-3 Crisis of Faith, Crisis of Love (1995) ISBN0-8264-0805-2 Active Meditations for Contemplative Prayer (1997) ISBN0-8264-1061-8 The Kingdom of God is Like... (1997) ISBN0-8245-1659-1 Centering Prayer in Daily Life and Ministry, co-edited with Gustave Reininger (1998) ISBN0-8264-1041-3 The Diversity of Centering Prayer (1998) ISBN0-8264-1115-0 The Human Condition: Contemplation and Transformation (Wit Lectures) (1999) ISBN0-8091-3882-4 Journey to the Center: A Lenten Passage (1999) ISBN0-8245-1895-0 The Better Part: Stages of Contemplative Living (2000) ISBN0-8264-1229-7 Fruits and Gifts of the Spirit (2000) ISBN1-930051-21-2 St. Therese of Lisieux: A Transformation in Christ (2000) ISBN1-930051-20-4 Divine Indwelling: Centering Prayer and Its Development, with George F. Cairns, Thomas R. Ward, Sarah A. Butler, Fitzpatrick-Hopler (2001) ISBN1-930051-79-4 Sundays at the Magic Monastery: Homilies from the Trappists of St. Benedict's Monastery with William Meninger, Joseph Boyle, and Theophane Boyd (2002) ISBN1-59056-033-7 Transformation of Suffering: Reflections on September 11 and the Wedding Feast at Cana in Galilee (2002) ISBN1-59056-036-1 The Daily Reader for Contemplative Living: Excerpts from the Works of Father Thomas Keating, O.C.S.O. : Sacred Scripture, and Other Spiritual Writings (2003) ISBN0-8264-1515-6 Foundations for Centering Prayer and the Christian Contemplative Life: Open Mind, Open Heart, Invitation to Love, Mystery of Christ (2003) ISBN0-8264-1397-8 Manifesting God (2005) ISBN1-59056-085-X Active Prayer: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ISBN0-8264-1783-3 Centering Prayer: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ISBN0-8264-1780-9 Lectio Divina: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ISBN0-8264-1782-5 Welcoming Prayer: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ISBN0-8264-1781-7 Divine Therapy and Addiction: Centering Prayer and the Twelve Steps (2009) ISBN978-1-59056-144-7 Reflections on the Unknowable (2014) ISBN978-1590564370 오디오 및 비디오 Contemplative Prayer (Audio, 1995) 1-56455-324-8 The Contemplative Journey (Audio, 1997) 1-56455-537-2 The Contemplative Journey, Vol. 2 (Audio, 1997) 1-56455-538-0 Searching for God in America (Video, 1997) The Contemplative Journey (Audio CD) (2005) 1-59179-335-1 Contemplative Prayer: Traditional Christian Meditations for Opening to Divine Union (Audio CD) (2005) 1-59179-306-8 각주 외부 링크 Contemplative Outreach website Summary of Invitation to Love ONE: The Movie Participation in ONE: The Movie Thomas Keatings' books St. Benedict's Monastery Interview with Thomas Keating on his life and Centering Prayer by ReadTheSpirit.com 1923년 출생 2018년 사망 미국의 로마 가톨릭 신부 트라피스트회 뉴욕 출신 작가 20세기 로마 가톨릭 신부 21세기 로마 가톨릭 신부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20Keating
Thomas Keating
Thomas Keating, O.C.S.O. (March 7, 1923 – October 25, 2018) was an American Catholic monk and priest of the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 (also known as Trappists). Keating was known as one of the principal developers of Centering Prayer, a contemporary method of contemplative prayer that emerged from St. Joseph's Abbey in Spencer, Massachusetts. Life Keating was born in New York City in March 1923 and attended Deerfield Academy, Yale University, and Fordham University. In 1984 Keating, along with Gustave Reininger and Edward Bednar, co-founded Contemplative Outreach, Ltd., an international and ecumenical spiritual network that teaches the practice of Centering Prayer and Lectio Divina, a method of prayer drawn from the Christian contemplative tradition. Contemplative Outreach provides a support system for those on the contemplative path through a wide variety of resources, workshops, and retreats. Keating died at St. Joseph's Abbey, Spencer, Massachusetts on 25 October 2018, aged 95 years old. Centering prayer Keating was one of three principal developers of centering prayer, a contemporary method of contemplative prayer that emerged from St. Joseph's Abbey in 1975. William Meninger and Basil Pennington, also Trappist monks, were the method's other principal developers. When the concept was first proposed by Keating, Meninger started teaching a method based on the 14th-century spiritual classic The Cloud of Unknowing. Meninger referred to this as the "Prayer of the Cloud" and taught it to priests at the retreat house. Pennington gave the first retreat to a lay audience in Connecticut where the participants suggested the term "centering prayer". Since Thomas Merton had been known to use the term prior to this, it has been suggested the phrase may have originated from him. Panentheist views In his 1993 article, Clarifications Regarding Centering Prayer, Keating suggests that Jesus describes a panentheistic rather than pantheistic view of God: Bibliography Books Crisis of Faith (1979) Finding Grace at the Center (1979) Heart of the World (1981) And the Word Was Made Flesh (1982) Open Mind, Open Heart: The Contemplative Dimension of the Gospel (1986) The Mystery of Christ: The Liturgy as Spiritual Experience (1987) Heart of the World: Spiritual Catechism (1988) Mystery of Christ (1988) Awakenings (1990) Kundalini Energy and Christian Spirituality: A Pathway to Growth and Healing, by Philip St Romain, illus. Intro. by Thomas Keating (1991) Reawakenings (1991) Invitation to Love: The Way of Christian Contemplation (1992) Intimacy with God (1994) Loving Search for God: Contemplative Prayer and "The Cloud of Unknowing,", with William A. Meninger (1994) Crisis of Faith, Crisis of Love (1995) Active Meditations for Contemplative Prayer (1997) The Kingdom of God is Like... (1997) Centering Prayer in Daily Life and Ministry, co-edited with Gustave Reininger (1998) The Diversity of Centering Prayer (1998) The Human Condition: Contemplation and Transformation (Wit Lectures) (1999) Journey to the Center: A Lenten Passage (1999) The Better Part: Stages of Contemplative Living (2000) Fruits and Gifts of the Spirit (2000) St. Therese of Lisieux: A Transformation in Christ (2000) Divine Indwelling: Centering Prayer and Its Development, with George F. Cairns, Thomas R. Ward, Sarah A. Butler, Fitzpatrick-Hopler (2001) Sundays at the Magic Monastery: Homilies from the Trappists of St. Benedict's Monastery with William Meninger, Joseph Boyle, and Theophane Boyd (2002) Transformation of Suffering: Reflections on September 11 and the Wedding Feast at Cana in Galilee (2002) The Daily Reader for Contemplative Living: Excerpts from the Works of Father Thomas Keating, O.C.S.O. : Sacred Scripture, and Other Spiritual Writings (2003) Foundations for Centering Prayer and the Christian Contemplative Life: Open Mind, Open Heart, Invitation to Love, Mystery of Christ (2003) Manifesting God (2005) Active Prayer: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Centering Prayer: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Lectio Divina: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Welcoming Prayer: On Retreat with Father Thomas Keating (2005) Divine Therapy and Addiction: Centering Prayer and the Twelve Steps (2009) Reflections on the Unknowable (2014) Audio and video Contemplative Prayer (Audio, 1995) The Contemplative Journey (Audio, 1997) The Contemplative Journey, Vol. 2 (Audio, 1997) Searching for God in America (Video, 1997) The Contemplative Journey (Audio CD) (2005) Contemplative Prayer: Traditional Christian Meditations for Opening to Divine Union (Audio CD) (2005) References External links Contemplative Outreach website Father Thomas Keating Collection at Pitts Theology Library Summary of Invitation to Love ONE: The Movie Participation in ONE: The Movie Thomas Keatings' books St. Benedict's Monastery Interview with Thomas Keating on his life and Centering Prayer by ReadTheSpirit.com 1923 births 2018 deaths Writers from New York City Clergy from New York City Deerfield Academy alumni Trappists American abbots American Roman Catholic religious writers 20th-century American Roman Catholic priests 21st-century American Roman Catholic priests American spiritual writers Centering prayer Yale University alumni Fordham University alumni
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D%85%94740
인텔740
인텔740(Intel740) 또는 i740(코드명: 오번/Auburn)은 1998년 인텔이 출시한, AGP를 사용하는 350 nm 공정 그래픽 처리 장치이다. 인텔은 AGP 포트를 대중화하기 위해 i740 사용을 희망하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그래픽스 업체들은 여전히 PCI를 사용하고 있었다. 상당한 팡파르와 함께 출시되었으나 i740은 실망스러운 실성능을 보여주었으며 시장에 내놓은지 겨우 수개월 후 모습을 감추었다.(단, 한국에서는 상당수 판매되었음) 기술 중 일부는 인텔 GMA 형태로 남아있었으며 인텔이 제조한 그래픽스 프로세서의 개념은 인텔 HD 및 아이리스 그래픽스, 인텔 HD 및 아이리스 그래픽스의 형태로 남아있다. 역사 i740은 자신들의 비행 시뮬레이션 시스템의 일부인 GE 에어로스페이스에서 시작한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의 사령선과 달 착륙선 도킹 훈련을 위해 사용된 아폴로 계획 비주얼 도킹 시뮬레이터(Visual Docking Simulator)를 제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GE는 1992년 항공우주 부문을 마틴 매리에타(Martin Marietta)에 판매했으며 이는 잭 웰치가 GE의 규모를 과감히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1995년, 마틴 매리에타는 록히드에 병합되어 록히드 마틴이 탄생하였다. 1995년 1월, 록히드 마틴은 자신들의 부서를 재조정한 다음 일반 시장에 3차원 경험을 도입하기 위해 Real3D를 설립하였다. Real3D는 수많은 아케이드 게임 보드(모델 2, 모델 3)를 사용한 세가 게임스에 칩셋과 디자인 전반을 제공하면서 초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PC 시장용 3차원 가속기 개발을 위해 오번(Auburn)이라는 코드명으로 인텔, 칩스 앤드 테크놀로지스(나중에 인텔이 인수함)과 함께 조인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오번은 주로 AGP 인터페이스 이용의 장점을 활용하도록 설계되었으며, 당시 수많은 경재 3D 가속기(특히 3dfx)들은 여전히 PCI 연결을 사용하고 있었다. 시장의 다른 유사 장치와의 구별되는 AGP 버전의 카드라는 독특한 특징은 컴퓨터 시스템의 메인 RAM에 모든 텍스처를 유지하면서 디스플레이 프레임 버퍼를 위해 예외적으로 온보드 메모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가속기들은 트라이앵글 셋업과 지오메트리 연산을 위해 중앙 처리 장치를 사용했고 그 다음 데이터를 카드로 가져와 텍스처 매핑과 바이리니어 필터링을 적용하였다. 이 데이터를 기억 장치에 남겨둠으로써, 또 데이터에 대해 그래픽 카드에 고성능 채널을 제공함으로써, 시스템의 전체 메모리 양을 줄이는 동시에 성능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이다. i740가 선보이기 전에 언론은 더 작은 업체들 모두가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도입일이 다가오자 낮은 성능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자들은 이 제품이 출시되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 지속적으로 동의하였다. 피터 글라스코스키는 "제조업체들 가운데 극소수가 인텔과 같은 [제조공장]에 대한 권한이 있으며 S3는 여기서 크게 패할 수 있다--그 제품은 퍼포먼스 시장에 판매되지 않는다. 인텔은 이 부분에서 S3와 겨룰 자원이 있으며 퍼포먼스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i740은 대량 단위로 1998년 2월 $34.50로 출시되었다. AGP 텍스처 개념은 곧 설계상 큰 오류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그 이유는 카드가 그래픽 카드 자체에 배치된 RAM보다 속도가 많게는 8배나 느린 채널을 통해 텍스처에 지속적으로 접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AGP가 실제로 지오메트리 이동 성능을 개선하긴 했지만, 이보다 훨씬 큰 텍스처 사용의 증가에 의해 상쇄되었다. 실제 사용 시에는 부두2와 같은 기존 솔루션보다 훨씬 속도가 더 느린 것으로 입증되었고 엔비디아 리바128과 같은 더 느린 2D/3D 카드와 겨우 겨룰 수 있는 정도였다. 엔비디아 리바 TNT의 출시로 이러한 장점조차 사라져버렸다. 그 해 말까지 더 새로운 3차원 제품에 대한 벤치마크에서 그다지 언급되지 않다가 잊혀지게 되었다. 1999년 8월, 시장 출시 18개월이 되지 않아 인텔은 시장에서 i740을 철퇴시켰다. 9월 록히드는 "고객에 초점을 둔 조직 개편"을 발표하면서 자사의 수많은 부서를 정리했고 1999년 10월 1일 Real3D를 폐쇄하였다. (이는 1998년 말 Calcomp에 이은 것이다) 인텔은 진행 중인 일련의 법정 소송의 일부로 회사의 지식 재산권을 사들였으나 남아있던 최소한의 직원들을 해고하였다. 일부 직원은 인텔 안에서 계약자로 고용되었으나 대부분은 ATI에 고용되어 새 오피스로 이주하였다. 인텔은 i740을 타 기업에 판매했으며 일부 PCI 버전의 가속기도 제조했다. 이들은 AGP-to-PCI 브리지 칩을 사용했고 카드에 로컬로 텍스처를 저장하기 위해 더 많은 온보드 메모리를 갖추었으며 일부 성능 테스트에서는 AGP쪽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이후 1999년 4월, 인텔은 i740의 뒤를 잇는 2개의 제품을 발표했다: i752 (코드명 Portola), i754 (코드명 Coloma). 개선점으로는 텍스처 매핑, 비등방성 필터링, MPEG-2 움직임 보상, DVI 지원이 포함되었다. 이 두 칩 모두 동일한 코어를 사용하며 유일한 차이점으로는 i752는 2× AGP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i754는 4× AGP 인터페이스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i754는 출시 전 취소되었으며 i752는 소량으로 출시되었다가 머지 않아 바로 단종되었는데 이 제품은 전작에 비해 약간의 성능 개선만 보였다. i752, i754의 코어는 나중에 각각 인텔 810과 815 칩셋의 내장 그래픽스에 사용되었다. 인텔은 더 이상 i752 드라이버를 호스팅하지 않으며 i752 기반 카드 소유자에게 810 드라이버를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2000년 9월 최종 취소된 다른 이후 제품은 비슷하게 좋지 않은 운명을 맞은 Timna 프로세서와 결합하여 사용될 GPU(코드명 Capitola)였다. 같이 보기 인텔 i750 인텔 그래픽 처리 장치 목록 인텔 칩셋 목록 각주 외부 링크 Newsroom page 그래픽 처리 장치 인텔 그래픽스
https://en.wikipedia.org/wiki/Intel740
Intel740
The Intel740, or i740 (codenamed Auburn), is a 350 nm graphics processing unit using an AGP interface released by Intel on February 12, 1998. Intel was hoping to use the i740 to popularize the Accelerated Graphics Port, while most graphics vendors were still using PCI. Released to enormous fanfare, the i740 proved to have disappointing real-world performance, and sank from view after only a few months on the market. Some of its technology lived on in the form of Intel Extreme Graphics, and the concept of an Intel produced graphics processor lives on in the form of Intel HD Graphics and Intel Iris Pro. History The i740 has a long and storied history that starts at GE Aerospace as part of their flight simulation systems, notable for their construction of the Project Apollo "Visual Docking Simulator" that was used to train Apollo Astronauts to dock the Command Module and Lunar Module. GE sold their aerospace interests to Martin Marietta in 1992, as a part of Jack Welch's aggressive downsizing of GE. In 1995, Martin Marietta merged with Lockheed to form Lockheed Martin. In January 1995, Lockheed Martin re-organized their divisions and formed Real3D in order to bring their 3D experience to the civilian market. Real3D had an early brush with success, providing chipsets and overall design to Sega, who used it in a number of arcade game boards, the Model 2 and Model 3. They also formed a joint project with Intel and Chips and Technologies (later purchased by Intel) to produce 3D accelerators for the PC market, under the code name "Auburn". Auburn was designed specifically to take advantage of (and promote) the use of AGP interface, during the time when many competing 3D accelerators (notably, 3dfx Voodoo Graphics) still used the PCI connection. A unique characteristic, which set the AGP version of the card apart from other similar devices on the market, was the use of on-board memory exclusively for the display frame buffer, with all textures being kept in the computer system's main RAM. At the time, most accelerators used the CPU for triangle setup and geometry calculations, then handed the data off to the card to apply texture mapping and bilinear filtering. By leaving this data in main memory, and giving the graphics card a high-speed channel to the data, performance could be improved while also reducing the total amount of memory in the system. In the lead-up to the i740's introduction, the press widely commented that it would drive all of the smaller vendors from the market. As the introduction approached, rumors of poor performance started circulating. In spite of this, pundits continued to agree that its release would have enormous effects on the market. Peter Glaskowsky noted that "Very few of the manufacturers have the access to the [manufacturing plants] that Intel does, S3 could be the big loser here--it doesn't sell to the performance market. Intel has the resources to beat S3 on those terms and they have the performance". The i740 was released in February 1998, at $34.50 in large quantities. A number of companies had cards to introduce on that day. The i740 was clocked at 66Mhz and had 2-8MB of VRAM; significantly less than its competitors which had 8-32MB of VRAM, allowing the card to be sold at a low price. The small amount of VRAM meant that it was only used as a frame buffer, hence it used the AGP interface to access the system's main memory to store textures; this was a fatal flaw that took away memory bandwidth and capacity from the CPU, reducing its performance, while also making the card slower since it had to go through the AGP interface to access the main memory which was slower than its VRAM. The AGP Texture concept soon proved to be a tremendous error in design, because the card had to constantly access the textures over a channel that was upwards of eight times slower than RAM placed on the graphics card itself. Although AGP did indeed improve performance of moving geometry, this was wiped away by the growing use of textures, which were much larger. In real-world use it proved to be much slower than existing solutions like the Voodoo2, and was only able to hold its own with slower 2D/3D cards like the Nvidia RIVA 128. The release of the Nvidia RIVA TNT removed even that advantage. By the end of the year it went largely unmentioned in benchmarks against newer 3D products, already forgotten. In August 1999, after less than 18 months on the market, Intel withdrew the i740 from the market. In September Lockheed announced a "customer-focused organizational realignment" that shed many of its divisions, and then closed Real3D on 1 October 1999 (following Calcomp in late 1998). Intel purchased the company's intellectual property, part of a series on ongoing lawsuits, but laid off the remaining skeleton staff. Some staff were picked up as contractors within Intel, while a majority were hired by ATI and moved to a new office. Intel also sold the i740 to 3rd party companies, and some PCI versions of the accelerator also were made. They used an AGP-to-PCI bridge chip and had more on-board memory for storing textures locally on the card, and were actually faster than their AGP counterparts in some performance tests. Successor In April 1999, Intel announced two successors to the i740: the i752 (code-named Portola) and the i754 (code-named Coloma). Improvements included support for multitexturing, anisotropic filtering, MPEG-2 motion compensation and DVI displays. Both chips would use the same core, the only difference being that the i752 would use a 2× AGP interface and the i754 a 4× AGP interface. However, the i754 was cancelled before release, and the i752 was released in limited quantities before it too was withdrawn, having shown only a marginal performance increase over its predecessor. The i752 and i754 cores were later used for the integrated graphics in the Intel 810 and 815 chipsets, respectively. Intel no longer hosts i752 drivers, and advises users of i752-based cards to use the 810 drivers. Another successor that was ultimately cancelled in September 2000 was the GPU (code-named Capitola) to be used in conjunction with the similarly ill-fated Timna processor. Intel would later re-enter the discrete GPU market with the release of their Intel Arc cards in 2022, over 20 years after the failure of the i740. See also Intel i750 Comparison of Intel graphics processing units List of Intel chipsets References External links Newsroom page Graphics processing units Graphics hardware Intel grap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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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푹홍바오
응우옌푹홍바오(, 1825년 4월 29일 ~ 1854년)는 응우옌 왕조의 황족이다. 티에우찌 황제의 첫째 아들로, 생모는 귀빈(貴嬪) 딘티하인(丁氏幸)이다. 생애 민망 21년(1840년), 민망 황제의 장손 신분으로서 안풍정후()에 봉해졌다. 티에우찌 3년(1843년), 안풍공()으로 진봉되었다. 응우옌 왕조의 관찬 정사(正史)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황장자(皇長子)였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이 방탕하고 배우지 않으며 재주도 없었으므로 티에우찌는 그를 매우 싫어하였다. 반면 홍바오의 이복동생인 황차자(皇次子) 응우옌푹홍념(이후의 뜨득 황제)은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므로 티에우찌는 임종 전에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하였다. 티에우찌는 쯔엉당꾸에, 부반자이, 응우옌찌프엉, 럼주이히엡 4인을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하여 홍념을 보좌하게 하였다. 그런데 티에우찌가 무엇 때문에 장자 계승의 제도를 따르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역사학자 팜반선은 당시 서양의 선교사들이 주장한 쯔엉당꾸에가 홍바오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반면 홍념과는 친밀하였으므로 음모를 꾸며 홍념으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게 했다는 설을 제시하였다. 심지어는 뜨득이 사실 쯔엉당꾸에와 가유태후(慈裕太后)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를 증명할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홍바오는 황위를 잃게 되자 항상 분노하고 불평하였다. 그는 스스로가 적법한 황위 계승자라고 여겼으며, 줄곧 황위를 탈환하려고 하였다. 후에에 있던 펠르랭(Pellerin) 주교는 1848년 11월 26일에 작성한 서신 중에서 홍바오가 계속 황위를 탈환하려고 하고 있으며, 선교사들에게 만약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천주교를 자유롭게 표교할 권리를 줄 것이며, 심지어는 베트남을 천주교 국가로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펠르랭 주교는 선교사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문제에도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서양 선교사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자 홍바오는 즉시 방향을 바꾸어 외국 세력의 지지를 구하였다. 1851년 정월, 홍바오는 싱가포르로 도망쳐서 영국인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으나 체포되었다. 홍바오는 자살을 기도하였지만 부하들이 그만두게 말렸다. 이에 홍바오는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뒤 두 아들을 데리고 궁전 가운데로 가서 통곡하며 뜨득에게 관용과 용서를 구했다. L. 카디에르(L. Cadière)의 설명에 따르면 홍바오는 자신이 외국인들과 결탁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으며,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빈궁하고 사람들에게 경시를 받았으므로 프랑스로 가서 평민의 신분으로 생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변호하였다. 뜨득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그가 용서를 빌자 마음이 움직여 그를 용서하였고, 많은 금과 은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홍바오는 황위 탈환의 음모를 포기하지 않았다. 1854년, 그는 무리를 모아 삽혈(歃血)로 맹세하였고, 그들을 국외로 파견해 사람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중 한 사람이 타이와 캄보디아의 변경 지역에서 한 승려를 모집하였고, 그를 후에로 보내 홍바오와 대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홍바오가 승려를 존중하지 않자 승려는 마침내 조정에다 그의 역모를 고발하였다. 홍바오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혹형을 받고 죄행을 자백하여 율에 따라 능지형이 선고되었다. 자유태후는 뜨득에게 그를 능지형 대신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도록 하게 했다. 그해 음력 2월, 홍바오가 미소(縻所)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니, 향년 29세였다. 그의 시신은 장례 절차도 없이 간략하게 매장되었다. 뜨득은 홍바오의 자식들을 모두 사형에서 사면하는 대신 홍바오와 함께 종적(宗籍)에서 삭제하고, 홍바오의 모친의 성인 딘(丁)으로 성씨를 바꾸고 카인호아성으로 유배하였다. 1866년, 홍바오의 첫째 아들 딘다오(丁導)가 도안흐우쯩, 도안흐우아이(段有愛), 도안뜨쯕(段司直), 쯔엉쫑호아(張仲和), 팜르엉 등과 함께 만년기(萬年基)를 건설하는 공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4일, 뜨득이 홍바오의 모든 자손들을 교살하였다. 타인타이 10년(1898년), 타인타이 황제가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의 봉작인 안풍공을 회복시켰으며, 진성군왕(泰盛郡王) 응우옌푹홍포의 8번째 아들인 응우옌푹응떤()을 봉국랑(奉國郞)으로 삼아 홍바오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타인타이 11년(1899년), 시호를 공숙(恭肅)이라고 하였다. 카이딘 연간에 조정에서 그를 안풍군왕()에 추봉하였고, 시호를 고쳐 단장(端莊)이라고 하였다. 이후 응우옌푹응떤을 홍바오의 후사로 입양보냈고, 이름을 고쳐 응톤()이라고 한 뒤 안풍현공(安豐縣公)에 봉하였다. 자녀 아들 9명과 딸 8명을 두었다. 안풍공방(安豐公房)의 자손들은 뜨득이 하사한 촌(寸) 자부(字部)를 따라 이름의 둘째 글자를 지었다. 아들 첫째 딘다오() - 본명은 응우옌푹응푹()이다. 후에 촌 자부를 따라 응우옌푹응다오()로 개명하였다. 생모는 쩐티투이(陳氏瑞)이다. 뜨득 20년(1866년), 모반하여 모친, 동생 3명, 전처 및 자녀 2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둘째 딘뜨() - 본명은 응우옌푹응뜨()이다. 1866년에 살해되었다. 셋째 딘쭈옌() - 본명은 응우옌푹응쭈옌()이다. 1866년에 살해되었다. 넷째 딘뜨엉() - 본명은 응우옌푹응뜨엉()이다. 1866년에 살해되었다. 양자 응우옌푹응톤(阮福膺村) - 주이떤 4년(1910년)에 안풍현공에 봉해졌다. 각주 1825년 출생 1854년 사망 자살한 사람
https://en.wikipedia.org/wiki/Nguy%E1%BB%85n%20Ph%C3%BAc%20H%E1%BB%93ng%20B%E1%BA%A3o
Nguyễn Phúc Hồng Bảo
Nguyễn Phúc Hồng Bảo (, 19 April 1825 – January 1854) was a prince of the Nguyễn dynasty, Vietnam. Early life He was the eldest son of the Emperor Thiệu Trị, and Đinh Thị Hạnh. In 1843 he was granted the title An Phong Công (安豐公, "Duke of An Phong"). Prince Nguyễn Phúc Miên Bửu was appointed as the teacher of Hồng Bảo and his younger brother Hồng Nhậm (later Emperor Tự Đức). According to Việt Nam sử lược, historian Trần Trọng Kim described Hồng Bảo as "an ignorant man and disliked studying". Thiệu Trị did not like him. Conflict with Tự Đức Thiệu Trị died in 1847, and Hồng Nhậm became the new emperor. Four high ministers, Trương Đăng Quế, Võ Văn Giải, Nguyễn Tri Phương and Lâm Duy Hiệp, were appointed as regents. Why Thiệu Trị changed the primogeniture rule of succession is unknown; Western missionaries claimed that Trương Đăng Quế conducted a plot to depose Hồng Bảo, and crowned Hồng Nhậm as the new emperor. Rumors held that Hồng Nhậm was the illegitimate child of Trương Đăng Quế. Hồng Bảo was deeply resentful; he always regarded himself as the heir presumptive of the former emperor, and hoped to seize the throne. Hồng Bảo tried to seek support from Roman Catholic missionaries; he promised that if he ascended the throne, he would convert to Catholicism, and make Vietnam a Catholic country. In 1851, Hồng Bảo tried to escape to Singapore, but was arrested. He asked for forgiveness, and was pardoned by Tự Đức. In 1854, he plotted a rebellion against Tự Đức. He was arrested and forced to commit suicide by hanging. He was buried simply without a funeral. Legacy Hồng Bảo's four sons, Nguyễn Phúc Ưng Đạo (阮福膺導), Nguyễn Phúc Ưng Tự (阮福膺寺), Nguyễn Phúc Ưng Chuyên (阮福膺傳) and Nguyễn Phúc Ưng Tương (阮福膺將), were banished from the royal court, and renamed Đinh Đạo (丁導), Đinh Tự (丁寺), Đinh Chuyên (丁傳) and Đinh Tương (丁將) respectively, then exiled to Khánh Hòa. In 1866, Đinh Đạo launched a rebellion against Tự Đức together with Đoàn Hữu Trưng (段有徵), Đoàn Hữu Ái (段有愛), Đoàn Tư Trực (段司直), Trương Trọng Hòa (張仲和) and Phạm Lương (范梁). The rebellion was quickly put down. As a result, Hồng Bảo's four sons were put to death together with their mother Trần Thị Thụy (陳氏瑞). In 1898, Hồng Bảo was rehabilitated by Thành Thái posthumously. References 1854 deaths People from Thừa Thiên-Huế province 1825 births Nguyen dynasty princes Suicides by hanging in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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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생장기
식물생장기는 크기에 상관 없이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밀봉된 내부 체계를 만들어내어 통제된 환경 아래 식물을 키우는 기구를 말한다. 크기와 형태에 따라 생장상자(grow box, grow cabinet), 생장텐트(grow tent), 생장방(grow room) 등으로 불린다. 식물생장기를 이용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생장상자는 식물을 기르기 위한 외부 공간이 모자라거나, 추운 계절에 채소, 허브, 꽃을 기르기 위해서, 해충이 창궐하거나 질병의 발병을 막기 위해서 등의 다양한 이유로 사용된다. 어떤 사람들은 불법적인 품종을 기르는 범죄에 대한 단속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실내 재배를 제외하면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생장방을 이용한다. 식물은 생장등, 햇빛, 혹은 둘 다를 통해 빛을 쬐인다. 생장방에 설치한 고전력 등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뜨거워질 수 있어서, 이를 막기 위해 환기팬을 설치한다. 재배 방식으로는 토양재배, 수경재배 방식을 이용할 수 있다. 제일 세련된 종류는 완전히 밀봉되며, 생장등을 내장하고, 환기를 위해 흡기/배기 팬 체계를 설치하고, 수경재배 체계를 이용해 영양분이 풍부한 용액을 공급하고, 악취 조절 필터를 설치한 것이다. 어떤 고급 생장상자는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거나,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이산화탄소를 투입하기도 한다. 이러한 발전된 요소를 통해 특정 식물에게 있어 최적의 온도, 빛 스펙트럼, 영양 수준 등의 조건을 맞춰줄 수 있다. 생장등의 종류에는 크게 상대적으로 광량이 제한되는 형광등, 소듐 증기등과 금속 할로겐화물 등과 같은 고강도 방전등, 에너지 효율이 뛰어난 발광다이오드 등이 있다. 주요 기본 요소 식물생장기는 식물의 생장과 수확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상자 안의 내부 체계는 식물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조절된다. 아래의 표는 대부분의 상업적인 생장상자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의 목록이다. 생장방법 식물생장기 안의 식물은 토양에서 키우거나 수경재배, 공중재배 등의 토양이 없는 방식을 사용한다. 토양이 없는 방식은 비용 대비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높은 생산량과 과일의 빠른 성숙을 기대할 수 있다. 자연 토양이 포함되지 않은 인공 토양은 대개 함유한 영양분이 전무하기 때문에 영양분 함유량을 완벽하게 조정할 수 있다. 자연 토양을 사용하지 않고 실내 정원에 사용할 인공 토양을 만들기 위해 질석, 진주암, 코코넛껍질, 광물면을 흔히 사용한다. 조광 실내 재배용 인공 조명에 제일 흔하게 사용되는 세 종류는 고강도 방전등 (생장등으로 제일 일반적으로 사용됨: 개화용으로 나트륨증기등, 생장용으로 금속할로겐화물등), 소형형광등, 전통적인 형태의 형광등이다. 풀 스펙트럼 실내 LED 생장등은 열의 형태로 낭비하는 에너지가 없고 발광 효율이 높기 때문에 점점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빛의 효능 빛은 식물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식물을 재배할 때 공급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식물이 빛을 흡수하고 사용하는 것을 도울 따름이다. 식물이 커질수록 더 많은 양의 빛을 필요로 한다. 빛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식물이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하면 식물의 줄기가 웃자라고/또는 성장이 느려지다가 멈추게 된다. 실내정원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식물 표면에 충분한 양의 빛이 내리쬐는가이며, 이는 럭스 (평방미터당 내리쬐는 빛의 양)로 측정할 수 있다. 발광효율이 더 높은 조명은 더 적은 에너지, 더 적은 발열로 면적당 더 많은 빛을 비출 수 있다. LED 생장등은 굉장히 적은 양의 에너지를 사용하며 대개 단일한 파장의 빛을 내뿜도록 설계되어서 식물이 광합성 과정에서 큰 효율을 낼 수 있는 파장만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설계는 적은 에너지로 광합성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적절한 파장대의 일부만을 제공하는 형광등이나 마찬가지로 최적의 파장대의 일부만을 제공하는데다가 열기의 형태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백열등, 가스방전등에 비해 확실한 장점이 있다. 발광다이오드 (LED) 등은 발광효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고강도 방전등 (HID) 을 대체해왔지만, 아직 널리 사용되지는 않는다. LED는 루멘 당 수명 비용, 긴 수명, banked or multi-LED fixtures 방면에 대한 계속되는 발전을 소형 형광등은 LED 나 HID 등보다 효율성이 낮지만, 열을 적게 발산하며 간단하게 고정하여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다. 종래의 형광등은 일반적으로 대개의 실내 재배 형태에 주요 조광 수단으로 사용하기에 알맞을 정도로 충분한 집중광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형광등과 소형 형광등은 어린 식물, 즉 묘목에게 적합한 광원이며, HID 등을 보조하기도 한다. 환기 생장방의 내부는 통제된 환경이기 때문에 실외에 비해 많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적절한 환기가 없이는 식물들이 산소, 이산화탄소 등의 자원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다. 적절한 환기는 식물의 생장을 최적화하기 위해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 환기는 식물 생장에 최적화된 온도를 유지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방식이다. 세련된 생장방은 내부 온도를 적정 수준으로 맞추기 위한 냉방, 식물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한 이산화탄소 공급 같은 방식도 사용한다. 불법적인 사용 마리화나 재배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법이기 때문에, 이를 숨기기 위해 실내에서 재배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법집행기관 당국은 마약을 재배하는 생장방을 찾아내기 위해 전력 공급 회사의 기록을 뒤져 전기를 비정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징후를 찾아내고 비행기나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열화상 카메라/FLIR/적외선카메라를 사용해 건물에서 비정상적인 수준의 열기가 새어나오는지 측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재배자들은 생장방의 벽과 건물의 벽 사이에 간격을 두고, 환기구를 굴뚝으로 연결하여 열화상 카메라에 대응한다. 참고문서 안개재배 수냉각기 Water chiller 공중재배 aeroponic Growbag 생장방 초음파 수경분무기 Ultrasonic Hydroponic Fogger 수경급수기 Hydroponic dosers 수경재배 화분농업 pot farming 각주 2. "10 Steps To Building The Perfect Indoor Grow Room" Gardeners Yards 2018-06-21 외부 링크 Barak, P. 2002. Essential Elements for Plant Growth: Hydroponics. Hershey, D.R. 1994. Solution culture hydroponics: history and inexpensive equipment. American Biology Teacher 56:111-118. Jensen, M.H. 1997. Hydroponics. HortScience 32 Hydroponics as a Hobby: Growing Plants Without Soil. University of Illinois Circular 844 Utah State University Hydroponics Hydroponics at McMurdo Station Antarctica Cornell University Commercial Hydroponic Lettuce, Spinach and Pak Choi Grower's Handbooks Hydroponics and Soilless Cultures on Artificial Substrates as an Alternative to Methyl Bromide Soil Fumigation 도시 농업 수경 재배
https://en.wikipedia.org/wiki/Grow%20box
Grow box
A grow box is a partially or completely enclosed system for raising plants indoors or in small areas. Grow boxes are used for a number of reasons, including the lack of available outdoor space or the desire to grow vegetables, herbs or flowers during cold weather months. They can also help protect plants against pests or diseases. Grow boxes may be soil-based or hydroponic. The most sophisticated examples are totally enclosed, and contain a built-in grow light, intake and exhaust fan system for ventilation, a hydroponics system that waters the plants with nutrient-rich solution, and an odor control filter. Some advanced grow box units even include air conditioning to keep running temperatures down, as well as to boost the plant's growth rate. These advanced elements allow the gardener to maintain optimal temperature, light patterns, nutrition levels, and other conditions for the chosen plants. Key growlight options include fluorescent bulbs, which offer relatively limited light output; high-intensity discharge lamps such as sodium-vapor lamps and metal-halide lamps; and light-emitting diodes bulbs, which are becoming more energy-efficient. In different sizes and degrees of complexity, grow boxes are also referred to as grow cabinets and lightproof cabinets. A full-room version of a grow box is a growroom. Components Grow cabinets have many different pieces of equipment that improve plant growth and yields. The system usually allows its owner to control all conditions inside the cabinet to make them perfect for growth. Below is a chart of different pieces of equipment on many commercially-built cabinets. See also Aeroponics Growbag Growroom Ultrasonic Hydroponic Fogger Hydroponic dosers Hydroponics Pot farming References External links Barak, P. 2002. Essential Elements for Plant Growth: Hydroponics. Hershey, D.R. 1994. Solution culture hydroponics: history and inexpensive equipment. American Biology Teacher 56:111-118. Jensen, M.H. 1997. Hydroponics. HortScience 32 Hydroponics as a Hobby: Growing Plants Without Soil. University of Illinois Circular 844 Utah State University Hydroponics Hydroponics at McMurdo Station Antarctica Cornell University Commercial Hydroponic Lettuce, Spinach and Pak Choi Grower's Handbooks Hydroponics and Soilless Cultures on Artificial Substrates as an Alternative to Methyl Bromide Soil Fumigation Hydroponics Gardening Urban agri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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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는 인간의 가치관과 경험면에서 세상을 해석하거나 존중한다. 이는 인간 우월주의 또는 인간 예외주의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인류에는 많은 현대 인간 문화와 의식적인 행동에 깊이 뿌리박힌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환경윤리와 환경철학 분야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종종 하엄보 내에서 인간행동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의 근본원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류애의 많은 지지자들은 이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건전한 장기적 관점이 인간에게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진정한 문제는 얕은 인류애라고 주장한다. 환경철학 동질 중심주의 또는 인간 우월주의라고도 알려진 인류사상주의는 일부 환경론자들에 의해, 왜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고 "개발"해야 하는지를 근본적인 이유로서, Dave Foreman과 Christopher Manes의 녹색 전쟁의 고백(Confessions of an Eco-Warrior)과 같은 책에서, 일부 환경론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다. 일부 사람들은 인간중심주의가 비인간 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적 태도에서 체계적 편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되는 환경 철학에서 중심적인 문제 개념이라고 믿고 있다. Val Plumwood는 인류학이 녹색 이론에서 페미니스트 이론의 안드로센트리즘과 반인종주의 이론의 민족 중심주의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플럼우드는 이것을 병렬로 강조하기 위해 인간 중심주의를 "반중심주의"라고 부른다. 환경윤리를 다루는 최초의 확장된 철학적 에세이 중 하나인 존 패스모어의 자연에 대한 인간책임은 종종 전통적인 서구 도덕 사상의 구성이라고 주장되는 그것의 인류주의 때문에 깊은 생태학의 옹호자들에 의해 비판 받아왔다. 실제로, 생태적 위기에 관련된 인류사회주의 옹호자들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의 유지가 인간의 복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제비' 관점의 문제는 그것이 인간 중심이라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 그레이'에 따르면, "천박한 관점의 문제는 그들이 인간의 행복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웰빙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지배적인 단기적, 부분적, 자기 지배적 개념을 대체할 풍부하고 강화된 인간중심적인 인간관리의 개념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차례로, 환경문화의 플럼우드: 이성의 생태적 위기는 그레이의 인류애주의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많은 헌신적인 환경운동가들이 인간인구를 위해 환경을 보존하는 것에 찬성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지하는 다소 인간중심적인 철학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레이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풍부하고 다양하며 활기찬 생물권을 홍보하는 것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 인간의 번영은 분명 그러한 번영의 합법적인 부분으로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 전체의 번영 속에서 인간의 번영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인류애주의 반대론자로 제시되어 온 깊은 생태학과 생물중심주의와 구별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인류애의 일반적인 형태로서. 주도-크리스도 전통 AD 12세기에 살았던 토라의 학자인 마이모네데스(Maimonides)는 분명히 반인류 중심주의로 유명했다. 마임오니데스는 사람을 "양동이의 단순한 물방울"과 "세계의 축"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인류 중심적 사고는 인간이 자연에 나쁜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먼 램에 따르면, 마임오니데스는 "그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인간의 사치스러운 개념을 축소시키고 우리에게 이러한 환상을 버리라"고 촉구한다. 데이비드 스즈키 박사는 1985년 CBC 시리즈 "먹는 행성"에서 인류애의 구약성서 뿌리와 그것이 어떻게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형성했는지 탐구했다. 일부 기독교의 인류애 지지자들은 창세기 1시 26절과 같은 성경에 근거한다. 제네시스에서 "영구"라는 단어의 사용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성서 학자들, 특히 로마 가톨릭과 다른 비종교적인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인류가 지구와 그 다양한 형태의 삶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보존"을 의미하는 단어의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권리 인간 중심주의는 인권에 대한 몇몇 자연주의적 개념의 토대다. 인류애주의 옹호자들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이 보편적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전제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철학자인 모티머 J. 애들러(Mortimer J. Adler)는 "인간에 평등한 모든 인간은, 그들의 공통 인류에 관련된 모든 측면에서, 사실상 그들의 규범적 원칙을 뒷받침할 확고한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썼다. 애들러는 지금 인간의 예외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폭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 독특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 자유의 지적 토대가 무너진다: "왜, 그러면, 우월한 사람들의 집단이 그들의 노예화, 착취, 또는 심지어 그들의 노예화를 정당화할 수 없게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적이고 도덕적인 근거에 대한 열등한 인간 집단의 집단 학살은 우리가 짐의 짐승으로 여기는 동물, 음식이나 옷을 찾아 정육하는 것, 또는 질병을 억제하는 해충이나 위험한 포식자로 파괴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대우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 의지하고 있다." 디스커버리 연구소의 작가 겸 인류학 옹호자인 웨슬리 J. 스미스(Wesley J. Smith)는 인간의 예외주의는 서로, 자연 세계에 인간의 의무를 발생시키고 동물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이라고 썼다. 작가가 쓴 책 'A Rat is a Pig is a Dog is a Boy'에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윤리적 문제를 고려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유일한 종이기 때문에, 우리는 유일하게 옳고 그름과 선과 악, 적절하고 부적절한 행동 사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동물 또는 인간이 동물을 인도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지 심리학 인지 심리학에서, 인류 중심적 사고는 "인간에 유추하여 생소한 생물 종이나 과정을 추론하는 경향"으로 정의될 수 있다. 유추로 추론하는 것은 매력적인 사고 전략이며, 인간이라는 우리의 경험을 다른 생물학적 시스템에 적용하는 것은 유혹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죽음은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세포 수준이나 다른 자연에서 죽음은 유사하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오해하는 것이 유혹적일 수 있다(실제로 프로그래밍된 세포 죽음은 필수적인 생리적 현상이고 생태계도 죽음에 의존한다). 반대로, 인류 중심적인 사고는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유기체에 대한 인간의 특성 부족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곤충처럼 인간과 매우 다른 동물이 생식이나 혈액 순환과 같은 특정한 생물학적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잘못 추정하는 것은 유혹적일 수 있다. 인간중심적 사고는 주로 생물학 교육의 타당성에 관심이 있는 발달 심리학자들에 의해 어린 아이들(대부분 10세까지)에게서 연구되어 왔다. 비록 후년에 그것의 끈기에 대해 상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이러한 인간의 예외적인 생각의 패턴이 생물학에서 점점 더 교육을 받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어린 성인기에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인간중심적 사고가 선천적인 인간의 특성이라는 개념은 도시 환경에서 자란 미국 아이들에 대한 연구로 인해 도전을 받아왔는데, 그 중 3세에서 5세 사이에 습득된 관점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이 인간 중심적 사고에 의지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경험과 문화적 가정에 따라 달라지는 듯 하다. 시골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른 종류의 동물과 식물에 더 친숙하기 때문에 도시 환경보다 그것을 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아이들과 관련된 연구(indigenous peoples of the Americas)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아메리카의 위치 족의 아이들에 대한 연구는 생물체들을 분류학적으로나 인식된 유사성, 생태학적 고려사항, 그리고 애니메이션적 전통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서구 사회의 많은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것보다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훨씬 덜 초래했다. 각주 동물권 인문주의 철학 이론 환경철학 예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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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ropocentrism
Anthropocentrism (; ) is the belief that human beings are the central or most important entity in the universe. The term can be used interchangeably with humanocentrism, and some refer to the concept as human supremacy or human exceptionalism. From an anthropocentric perspective, humankind is seen as separate from nature and superior to it, and other entities (animals, plants, minerals, etc.) are viewed as resources for humans to use. Eating Animals, a novel written by Jonathan Foer, describes anthropocentrism as "The conviction that humans are the pinnacle of evolution, the appropriate yardstick by which to measure the lives of other animals, and the rightful owners of everything that lives." This quote exemplifies the deeper meaning behind his novel: how human beings are overtaking the animal industry, which is being overshadowed by financial and personal gain. Human instincts, such as anthropocentrism, have refined the meat industry to many inhumane and unethical practices. Human projection onto animals tend to be unethical. This is because humans see themselves as superior over animals, which can be used as an example of anthropocentrism. Anthropocentrism interprets or regards the world in terms of human values and experiences. It is considered to be profoundly embedded in many modern human cultures and conscious acts. It is a major concept in the field of environmental ethics and environmental philosophy, where it is often considered to be the root cause of problems created by human action within the ecosphere. However, many proponents of anthropocentrism state that this is not necessarily the case: they argue that a sound long-term view acknowledges that the global environment must be made continually suitable for humans and that the real issue is shallow anthropocentrism. Environmental philosophy Anthropocentrism, also known as homocentricism or human supremacism, has been posited by some environmentalists, in such books as Confessions of an Eco-Warrior by Dave Foreman and Green Rage by Christopher Manes, as the underlying (if unstated) reason why humanity dominates and sees the need to "develop" most of the Earth. Anthropocentrism is believed by some to be the central problematic concept in environmental philosophy, where it is used to draw attention to claims of a systematic bias in traditional Western attitudes to the non-human world that shapes humans' sense of self and identities. Val Plumwood argued that anthropocentrism plays an analogous role in green theory to androcentrism in feminist theory and ethnocentrism in anti-racist theory. Plumwood called human-centredness "anthrocentrism" to emphasise this parallel. One of the first extended philosophical essays addressing environmental ethics, John Passmore's Man's Responsibility for Nature has been criticised by defenders of deep ecology because of its anthropocentrism, often claimed to be constitutive of traditional Western moral thought. Indeed, defenders of anthropocentrism concerned with the ecological crisis contend that the maintenance of a healthy, sustainable environment is necessary for human well-being as opposed to for its own sake. According to William Grey, the problem with a "shallow" viewpoint is not that it is human-centred: "What's wrong with shallow views is not their concern about the well-being of humans, but that they do not really consider enough in what that well-being consists. According to this view, we need to develop an enriched, fortified anthropocentric notion of human interest to replace the dominant short-term, sectional and self-regarding conception." In turn, Plumwood in Environmental Culture: The Ecological Crisis of Reason argued that Grey's anthropocentrism is inadequate. Many devoted environmentalists encompass a somewhat anthropocentric-based philosophical view supporting the fact that they will argue in favor of saving the environment for the sake of human populations. Grey writes: "We should be concerned to promote a rich, diverse, and vibrant biosphere. Human flourishing may certainly be included as a legitimate part of such a flourishing." Such a concern for human flourishing amidst the flourishing of life as a whole, however, is said to be indistinguishable from that of deep ecology and biocentrism, which has been proposed as both an antithesis of anthropocentrism and as a generalised form of anthropocentrism. Christian traditions In the 1985 CBC series "A Planet For the Taking", Dr. David Suzuki explored the Old Testament roots of anthropocentrism and how it shaped human views of non-human animals. Some Christian proponents of anthropocentrism base their belief on the Bible, such as the verse 1:26 in the Book of Genesis: The use of the word "dominion" in the Genesis has been used to justify an anthropocentric worldview, but recently some have found it controversial, viewing it as possibly a mistranslation from the Hebrew. However an argument can be made that the Bible actually places all the importance on God as creator, and humans as merely another part of creation. Moses Maimonides, a Torah scholar who lived in the twelfth century AD, was renowned for his staunch opposition to anthropocentrism. He referred to humans as "just a drop in the bucket" and asserted that "humans are not the axis of the world." He also claimed that anthropocentric thinking is what leads humans to believe in the existence of evil things in nature. According to Rabbi Norman Lamm, Moses Maimonides "refuted the exaggerated ideas about the importance of man and urged us to abandon these fantasies. Human rights Anthropocentrism is the grounding for some naturalistic concepts of human rights. Defenders of anthropocentrism argue that it is the necessary fundamental premise to defend universal human rights, since what matters morally is simply being human. For example, noted philosopher Mortimer J. Adler wrote, "Those who oppose injurious discrimination on the moral ground that all human beings, being equal in their humanity, should be treated equally in all those respects that concern their common humanity, would have no solid basis in fact to support their normative principle." Adler is stating here that denying what is now called human exceptionalism could lead to tyranny, writing that if humans ever came to believe that they do not possess a unique moral status, the intellectual foundation of their liberties collapses: "Why, then, should not groups of superior men be able to justify their enslavement, exploitation, or even genocide of inferior human groups on factual and moral grounds akin to those we now rely on to justify our treatment of the animals we harness as beasts of burden, that we butcher for food and clothing, or that we destroy as disease-bearing pests or as dangerous predators?". Author and anthropocentrism defender Wesley J. Smith from the Discovery Institute has written that human exceptionalism is what gives rise to human duties to each other, the natural world, and to treat animals humanely. Writing in A Rat is a Pig is a Dog is a Boy, a critique of animal rights ideology, "Because we are unquestionably a unique species—the only species capable of even contemplating ethical issues and assuming responsibilities—we uniquely are capable of apprehending the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wrong, good and evil, proper and improper conduct toward animals. Or to put it more succinctly, if being human isn't what requires us to treat animals humanely, what in the world does?". Animal rights Anthropocentrism has been criticised by animal rights and welfare advocates, who contend that the belief that humans are more important than other animals is false and that like humans, non-human animals have intrinsic value. One of the earliest of these critics was the zoologist and philosopher J. Howard Moore, who in The Universal Kinship (1906) argued that Charles Darwin's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sealed the doom of anthropocentricism" and that:Philosophers such as Peter Singer and David Pearce have argued against anthropocentric ethics, instead advocating for antispeciesist or sentientist ethics, which rather than giving more value to humans based on their species membership, assert that "other things being equal, equally strong interests should count equally." This utilitarian principle is based on the dictum "everybody to count for one, nobody for more than one" attributed to Jeremy Bentham by John Stuart Mill in Utilitarianism (1876). Cognitive psychology In cognitive psychology, the term anthropocentric thinking has been defined as "the tendency to reason about unfamiliar biological species or processes by analogy to humans." Reasoning by analogy is an attractive thinking strategy, and it can be tempting to apply one's own experience of being human to other biological systems. For example, because death is commonly felt to be undesirable, it may be tempting to form the misconception that death at a cellular level or elsewhere in nature is similarly undesirable (whereas in reality programmed cell death is an essential physiological phenomenon, and ecosystems also rely on death). Conversely, anthropocentric thinking can also lead people to underattribute human characteristics to other organisms. For instance, it may be tempting to wrongly assume that an animal that is very different from humans, such as an insect, will not share particular biological characteristics, such as reproduction or blood circulation. Anthropocentric thinking has predominantly been studied in young children (mostly up to the age of 10) by developmental psychologists interested in its relevance to biology education. Children as young as 6 have been found to attribute human characteristics to species unfamiliar to them (in Japan), such as rabbits, grasshoppers or tulips. Although relatively little is known about its persistence at a later age, evidence exists that this pattern of human exceptionalist thinking can continue through young adulthood at least, even among students who have been increasingly educated in biology. The notion that anthropocentric thinking is an innate human characteristic has been challenged by study of American children raised in urban environments, among whom it appears to emerge between the ages of 3 and 5 years as an acquired perspective. Children's recourse to anthropocentric thinking seems to vary with their experience of nature, and cultural assumptions about the place of humans in the natural world. For example, whereas young children who kept goldfish were found to think of frogs as being more goldfish-like, other children tended to think of frogs in terms of humans. More generally, children raised in rural environments appear to use anthropocentric thinking less than their urban counterparts because of their greater familiarity with different species of animals and plants. Studies involving children from some of the indigenous peoples of the Americas have found little use of anthropocentric thinking. Study of children among the Wichí people in South America showed a tendency to think of living organisms in terms of their perceived taxonomic similarities, ecological considerations, and animistic traditions, resulting in a much less anthropocentric view of the natural world than is experienced by many children in Western societies. In popular culture In fiction from all eras and societies, there is fiction depicting the actions of humans to ride, eat, milk, and otherwise treat (non-human) animals as inferior. There are occasional fictional exceptions, such as talking animals as aberrations to the rule distinguishing people from animals. In science fiction, humanocentrism is the idea that humans, as both beings and as a species, are the superior sentients. Essentially the equivalent of racial supremacy on a galactic scale, it entails intolerant discrimination against sentient non-humans, much like race supremacists discriminate against those not of their race. A prime example of this concept is utilized as a story element for the Mass Effect series. After humanity's first contact results in a brief war, many humans in the series develop suspicious or even hostile attitudes towards the game's various alien races. By the time of the first game, which takes place several decades after the war, many humans still retain such sentiments in addition to forming 'pro-human' organizations. This idea is countered by anti-humanism. At times, this ideal also includes fear of and superiority over strong AIs and cyborgs, downplaying the ideas of integration, cybernetic revolts, machine rule and Tilden's Laws of Robotics. Mark Twain mocked the belief in human supremacy in Letters from the Earth (written c. 1909, published 1962). The Planet of the Apes franchise focuses on the analogy of apes becoming the dominant species in society and the fall of humans (see also human extinction). In the 1968 film, Taylor, a human states "take your stinking paws off me, you damn dirty ape!". In the 2001 film, this is contrasted with Attar (a gorilla)'s quote "take your stinking hands off me, you damn dirty human!". This links in with allusions that in becoming the dominant species apes are becoming more like humans (anthropomorphism). In the film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 Virgil, an orangutan states "ape has never killed ape, let alone an ape child. Aldo has killed an ape child. The branch did not break. It was cut with a sword." in reference to planned murder; a stereotypical human concept. Additionally, in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 Caesar states "I always think...ape better than human. I see now...how much like them we are". In George Orwell's novel Animal Farm, this theme of anthropocentrism is also present. Whereas originally the animals planned for liberation from humans and animal equality, as evident from the "seven commandments" such as "whatever goes upon two legs is an enemy.", "Whatever goes upon four legs, or has wings, is a friend", "All animals are equal."; the pigs would later abridge the commandments with statements such as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and "Four legs good, two legs better." The 2012 documentary The Superior Human? systematically analyzes anthropocentrism and concludes that value is fundamentally an opinion, and since life forms naturally value their own traits, most humans are misled to believe that they are actually more valuable than other species. This natural bias, according to the film, combined with a received sense of comfort and an excuse for exploitation of non-humans cause anthropocentrism to remain in society. See also References Further reading Bertalanffy, Ludwig Von (1993) General System Theory: Foundations, Development, Applications pp. 239–48 Boddice, Rob (ed.) (2011) Anthropocentrism: Humans, Animals, Environments Leiden and Boston: Brill White, Lynn Townsend,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Science, Vol 155 (Number 3767), 10 March 1967, pp 1203–1207 Human supremacism: why are animal rights activists still the "orphans of the left"?. New Statesman America. April 30, 2019. Human Supremacy: The Source of All Environmental Crises? Psychology Today December 25, 2021 Animal ethics Environmental ethics Humanism Philosophical the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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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는 2019년 공개된 일본의 로맨스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코믹스 웨이브 필름이 제작하였고 도호가 배급하였다. 이 영화는 시골에서 가출한 고등학생 소년이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소녀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2018년에 영화 제작을 수주받았고, 신카이 마코토가 감독 및 각본을 맡았다. 다이고 코타로와 모리 나나가 성우를 맡았고. 타무라 아츠시가 작화 감독, 캐릭터 디자인은 타나카 마사요시, 그리고 오케스타라 및 OST 제작은 RADWIMPS가 맡았다. 그중 타나카 마사요시와 래드윔프스는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 제작에 참여하였다. 신카이 마코토는 동명의 소설을 영화 개봉 하루 전 출판하였고, 만화판은 2019년 7월 25일 공개되었다. 《날씨의 아이》는 2019년 7월 19일 일본에서 일반, IMAX. 4DX 상영관에서 공개되었고 미국에서는 2020년 1월에 공개되었다. 《날씨의 아이》는 애니메이션, 음악, 감정 전달 및 각본에서 호응을 받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너의 이름은.》과의 유사점 때문에 의견이 나뉘었다. 국제 박스 오피스에서 $1.93억의 흥행 수익을 벌어들였다. 《날씨의 아이》는 몇몇 영화제 수상에 성공하였다.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영화상의 일본 후보에 올랐고, 애니상에서 4개의 상에 입후보하였다. 이는 애니상의 애니메이션 영화의 입후보 기록 중 공동 1위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천년여우》와 같은 기록이다. 줄거리 2021년 6월, 고등학교 1학년 모리시마 호다카는 고즈시마에 있는 혼란스러운 집에서 탈출하여 도쿄로 떠난다. 그가 탄 페리가 폭풍을 만나자, 케이스케 스가가 호다카를 구해준 다음 명함을 건넨다. 호다카는 일자리를 못 찾고 가난에 시달리는 동안 맥도날드 알바인 아마노 히나를 만나게 된다. 히나는 호다카를 불쌍하게 여기고 음식을 제공한다. 다음에, 호다카는 쓰레기통에서 마카로프 권총을 찾게 된다. 호다카는 스가의 회사에 도착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스가의 조카인 나츠미를 만난다. 스가는 호다카를 그의 작은 오컬트 잡지 화사의 어시스턴트로 고용하는데, 이동안 그들은 도쿄의 이상 날씨에 대한 도시 전설을 조사한다. 그들은 무당을 통해 날씨를 조정할 수 있는 "맑음 소녀"가 있다고 듣는다. 호다카는 히나가 클럽일에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짧은 추격 끝에, 장난감인 줄 알았던 총을 발사하여 클럽 주인들을 쫓아낸다. 호다카와 히나는 도망간다: 히나는 호다카를 천장에 신사가 있는 '요요기 카이칸'이란 폐건물로 데려간다. 호다카는 여기서 총을 버린다. 히나는 날씨를 조정하는 능력을 보여주며 호다카를 놀라게 한다. 호다카는 히나가 동생 나기와 함께 보호자 없이 혼자 산다는 것을 알아낸다. 호다카는 히나의 생활고를 알아채고 히나한테 날씨를 조종할 능력을 사업에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웨딩 파티 등에서 행사의 날씨를 맑게 해주는 일). 그들은 웹사이트를 만들어 주문을 받기 시작하고 빠르게 성공을 이루어낸다. 하지만 진구 폭죽 축제의 날씨를 맑게 하는 모습이 생중계된 다음, 주문이 폭주하게 되어 사업을 폐지하기로 결정한다. 호다카의 가족이 호다카를 실종 신고하자 한 형사는 호다카를 찾기 시작한다. 그 도중 그들은 호다카가 총을 사용하는 것을 CCTV 영상에서 확인한다. 히나의 아파트에서 경찰관들이 도착하고, 호다카는 숨어 있는 도중 히나에게 호다카를 본 적 없냐고 물어본다. 히나는 최근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 법적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복지 시설이 그들을 데려가 동생이랑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동시에 스가도 경찰이 찾아온 상태였다. 경찰이 떠나자마자 스가는 호다카를 만나서, 자신이 (호다카의) 납치 혐의로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호다카를 해고하고 퇴직금을 준다. 호다카, 히나, 나기는 가출을 시도하지만, 기상 악화 때문에 멈추게 된다. 그들은 호텔에 멈춘 뒤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밤을 보낸다. 자정이 지나자, 히나는 호다카한테 능력을 사용할수록 자신의 몸이 물로 변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히나는 호다카에게 이상기후는 인간 재물을 위한 것이라 알려주며, 그녀가 사라지면 날씨가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알려준다. 호다카는 히나에게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 히나는 하늘로 사라지고 비가 멈춘 상태였다. 아침에 경찰은 호다카를 호텔에서 찾는다. 나기는 아동 보호시설로 보내지고 호다카는 경찰서로 보내진다. 히나랑 벌써 사랑에 빠진 호다카는 히나를 지구로 다시 보내기로 결정하고 나츠미는 호다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경찰서에서 도망간다. 나츠미의 오토바이가 고장 난 후, 호다카는 요요기 카이칸의 신사에 도착하기 위해 뛰어간다. 그 안에서 호다카는 그를 말리려 온 스가를 만난다. 경찰이 호다카를 포위하는데. 스가는 호다카의 절박함에 이끌려 호다카가 도망가는 것을 도와준다. 호다카는 옥상의 신사를 통과하고 하늘로 이동한다. 하늘에서 히나를 찾은 호다카는 히나를 보고 같이 떠나자고 제안하고, 날씨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히나 자신을 위해 살라고 말한다. 옥상 신사에 다시 도착하자, 히나, 호다카, 나츠미, 나기, 스가는 전부 체포되고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호다카는 3년의 보호관찰을 선고받고 코즈시마로 돌아간다. 3년 후, 도쿄는 멈춤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대부분이 수몰된다. 2024년 봄, 보호관찰이 끝난 호다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을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그는 사업이 확장된 스가를 만난다. 스가는 히나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곧 호다카는 수몰된 도쿄가 보이는 길가에서 기도하는 히나를 찾게 된다. 둘은 다시 만나고, 호다카는 괜찮을 거라고 히나에게 약속한다. 성우진 스태프 원작·각본·감독·그림 콘티·편집·이미지보드 - 신카이 마코토 캐릭터 디자인 - 타나카 마사요시(田中将賀), 타무라 아츠시(田村篤) 제작 - 이치카와 미나미(市川南), 카와구치 노리타카(川口典孝) 기획·프로듀스 - 카와무라 겐키(川村元気)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 후루사와 요시히로(古澤佳寛) 프로듀서 - 오카무라 와카나(岡村和佳菜), 이토 키누에(伊藤絹恵) 음악 프로듀서 - 나루카와 사요코(成川沙世子) 작화 감독 - 타무라 아츠시(田村篤) 미술 감독 - 타키구치 히로시(滝口比呂志) 연출 - 토쿠노 유가(徳野悠我), 이무라 켄지(居村健治) CG 치프 - 타케우치 요시타카(竹内良貴) 음악 - RADWIMPS 음향 감독 - 야마다 하루(山田 陽) 음향 효과 - 모리카와 에이코(森川永子) 촬영 감독 - 츠다 료스케(津田涼介) 색채 설계·조감독 - 미키 요코(三木陽子) 어시스턴트 프로듀서 - 카세 미라이(加瀬未来), 호리 유타(堀雄太) 제작(制作) - 코믹스 웨이브 필름 제작(制作) 프로듀스 - STORY inc. 제작(製作) - 날씨의 아이 제작위원회(도호, 코믹스 웨이브 필름, STORY, KADOKAWA, JR 동일본 기획, voque ting, 로손 엔터테인먼트) 배급 - 도호 제작 2018년 8월 2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다음 해에 공개될 영화를 제작 중이라고 발표하였다. 제작진은 캐릭터 디자이너 타나카 마사요시, 작화 감독 타무라 아츠시, 그리고 미술 감독으로 타키구치 히로시가 포함되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트위터에서 스가 시카오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케이스케 스가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말하였다. 2017년 2월, 《날씨의 아이》의 각본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4월까지 캐릭터 디자인과 개발이 시작되었다. 신카이 마코토는 7월부터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8월에는 영화 세트와 위치 선정 및 자료 조사가 시작되었다. 스토리보드 제작은 10월에 시작됐다. 2018년 5월에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작하였고, 비와 날씨에 관한 제작은 7월에 시작하였다. 8월에 캐스팅 및 오디션이 시작되었고, 9월에 백그라운드 작업이 시작되었다. 10월에는 주인공 두 명의 성우진이 결정되었다. 2018년 12월 13일 기자회견에서 첫 번째 비주얼이 공개되었고 개봉 날자를 2019년 7월 19일이라고 발표하였다. 2019년 1월 영화의 포토 슈팅이 시작되었다. 개봉 100일 전, 첫 번째 예고편이 4월 10일 공개되었다. 추가적인 포스터와 2차 예고편은 5월 28일 공개되었다. 7월 7일, 모든 준비는 마쳐졌으며, 영화는 개봉 준비가 완료되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인터뷰에서 "나는 생각했다, '다음에는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영화를 만들을까, 아니면 심기를 더욱더 건드리는 영화를 만들을까? 결국 나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그는 기후변화가 일본에 끼치는 영향, 특별히 여름철 심해지는 장마가 영화에 모티브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영화에서 비를 그릴 때 그림과 컴퓨터 그래픽을 둘 다 사용했다고 공개하였다. 각본 과정은 제작진 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며, 전작인 《너의 이름은.》은 6개월이 걸렸고 《날씨의 아이》는 6개월 정도 걸렸다고 말하였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의 공상과학 테마와 달리 이 영화에서 더 "초자연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너의 이름은.》 캐릭터들의 추가의 이유를 묻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개인적으로 타키와 미츠하가 다시 만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캐스팅 다이고 코타로와 모리 나나의 발탁 전 약 2000명이 이 영화의 주인공 오디션에 참가하였다. 핵심 멤버들은 《너의 이름은.》의 제작진들이 합류하였다. 코타로 다이고와 모리 나나는 2019년 4월 27일 녹음을 시작하였다. 2019년 5월 29일, 추가 출연진이 발표되었다: 오구리 슌 (케이스케), 혼다 츠바사 (나츠미), 바이쇼 치에코 (후미), 키류 사쿠라 (아마노 나기사), 히라이즈미 세이 (야스이), 카지 유우키 (타카이). 사운드트랙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과 같이, 일본의 록밴드인 RADWIMPS가 영화의 OST를 작사 작곡하였다. 2019년 7월 19일, 영화 개봉과 함께 공개되었다. 〈〉가 《날씨의 아이》의 메인 테마곡이다. 7월 15일-21일 사이 주간 디지털 판매 1위를 달성하였다. 영화의 다른 노래인 〈그랜드 이스케이프 (Movie edit) feat. 미루아 토코〉는 41000건의 다운로드로 2위를 달성하였다. 날씨의 아이 사운드트랙 앨범은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과 43회 일본 아카데미상을 포함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마케팅 카와무라 겐키 프로듀서는 2019년 6월 14일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재공품을 발표하였다. 6월 30일, 아사히 방송은 《너의 이름은.》 재방송 중 《날씨의 아이》의 오프닝을 상영하였다. 일본 상영 전, 유니클로는 《날씨의 아이》 및 신카이 마코토 전작의 영감을 받은 특별 T셔츠를 발표하였다. 《날씨의 아이》는 소프트뱅크 그룹, 산토리, 바이토루 등의 기업 광고를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하였다. 《날씨의 아이》 일본 상영 중 로손 등 많은 편의점에서 《날씨의 아이》 관련 식품을 팔았다. 로슨은 허브와 파란 꽃잎이 들어간 "아메이로 젤리 티"라는 새로운 음료를 만들기도 했다. 공개 《날씨의 아이》는 2019년 7월 19일 오전 9시 (일본 표준시) 도호를 통해 일본의 전국 359개 극장 448개 상영관에서 개봉하였다. 하지만, 도쿄의 신주쿠와 오사카의 우메다 구의 영화관에선 7월 18일 자정 첫 상영하였다. 9월 20일, 《날씨의 아이》 공식 웹사이트는 일본에서 9월 27일부터 4DX와 M4DX 상영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날씨의 아이》는 카와무라 겐키와 코믹스 웨이브 필름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7월 16일, 《날씨의 아이》가 국제 개봉하겠다고 발표되었다만, 이미 북아메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유럽 140개국에서 상영이 확정되었다. 이는 《너의 이름은.》의 135개국 기록을 돌파한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EKDO 필름 8월 8일 홍콩에서 개봉하였고, 엔코어 필름은 말레이어, 중국어, 영어 자막이 있는 예고편을 발표하고 동남아시아 몇 개국에서 개봉하였다: 인도네시아는 8월 21일, 베트남은 8월 30일, 말레이시아와 부르나이는 9월 5일, 싱가포르는 9월 12일 개봉하였다. 파이오니어 필름은 필리핀 SM 메가몰에서 8월 17일 개봉 후, 8월 28일 전체 개봉하였다. 카와무라 겐키 프로듀서는 인도에서 53000명이 개봉 서명 운동을 보고 인도 개봉 희망 의향을 보여주었다. 8월 10일,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날씨의 아이 공식 트위터 페이지에서 뭄바이, 델리 등 인도 20개 도시에서 2019년 10월 11일부터 개봉한다고 발표하였다. PVR 픽처스와 Vkaao에서 영화가 배급되었다 인도에서 극장 상영한 첫 번째 일본 어덜트 애니메이션이었다. 볼가 영화사는 10월 31일 러시아 개봉을 확정하였다. 태국 메이저 그룹 영화사는 11월 7일 개봉하겠다고 발표하였지만, 2019년 9월 5일로 앞당겨졌다. 《날씨의 아이》는 중국 공산당의 검열을 통과하고 11월 1일 중국 개봉하였다. 10월 30일, CJ CGV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첫 상영되었다. 2020년 5월 21일, 더빙판이 개봉하였다. 한국 외화 기준 최장 연속 상영을 기록하였다. 《날씨의 아이》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의 영향으로 당초 10월 초 개봉 계획에서 10월 30일 늦게 개봉하였다. 개봉 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대해 그는 "3년 뒤에 오겠다"는 방한 '약속'을 지킬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하였다. 북아메리카에서는 GKIDS가 판권을 받았다고 발표하였고, 일본어 및 영어 옵션이 추가된 영화를 2020년 1월 17일 개봉하였다 9월 5일에서 15일 사이에 열린 44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북미 첫 상영하였다. "특별 상영" 카테고리로 관객상 출전이 가능하다. 보도에 따르면 패덤 이벤트는 1월 15일과 1월 16일 특별 콘텐츠가 포함된 "특별 팬 조기 상영"을 가졌다. 10월 18일 2019년, GKIDS는 미국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참석한 애니메이션 이즈 필름 축제에서 《날씨의 아이》를 상영하였고, 1주일간 IMAX 상영을 가졌다. 유럽에서는 67회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서 2019년 9월 20일에서 28일 사이 첫 상영하였다. 아니메 리미티드는 영국과 아일랜드 판권을 받은 뒤 2019년 10월 12일 스코틀랜드 러브 애니에서 첫 상영하였고 1월 17일 2020년 일본어와 영어 옵션이 추가된 극장 상영이 진행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다이닛과 Nexo 디지털이 2019년 10월 14일 발표하였다. Selecta Visión는 2019년 11월 29일 스페인 판권을 받아낸 뒤 2019년 11월 29일 상영하였다. 프랑스에서는 2020년 1월 8일 아니메 리미티드와 BAC 필름을 통해 공개되었다. 독일에서는 1월 16일 2020년 Universum Film을 통해 개봉하였다. 2020년 2월 20일 포르투갈은 빅 픽처 필름을 통하여 개봉하였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매드맨 엔터테인먼트가 판권을 사들여 2019년 8월 22일부터 상영을 시작하였고, 영어 더빙이 포함된 앙코르 상영이 2020년 2월 13일부터 시작되었다. 중동에서는 프런트 로우 필름 엔터테인먼트가 9월 10일 2020년부터 개봉한다고 발표하였다. 홈 미디어 2020년 5월 27일 일본에서 블루레이 디스크 판매가 시작되었다. 한 컬렉터즈 판은 중국어와 영어 자막이 있는 4K UHD 디스크가 포함되었다. 2020년 8월 24일 북아메리카에서 디지털 개봉하였고, 이후 2020년 9월 15일 블루레이와 DVD 공개되었고, 2020년 11월 17일 4K UHD 특별판이 공개되었다. 현재 AT&T의 HBO Max에서 스트리밍 중이다. 흥행 박스 오피스 일본의 359개 극장 448개 상영관에서의 첫 상영 당시 3일 동안 티켓 115만 9020장 판매, 16억 4400만엔을 벌었다. 《날씨의 아이》는 개봉 후 첫 3일 동안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의 개봉 후 첫 3일의 12억 8000만엔에 비교하면 28.6% 높았다고 보도되었다. 2019년 8월 25일까지, 티켓 8백만 장 판매, 107억 3천만 엔을 벌었다. 2019년 9월 9일, 120억 엔을 벌었으며, 2019년 일본 영화 중 최고 수익작이 되었다. 2019년 10월 2일, 개봉 후 72일까지, 일본에서 티켓 1000만 장 이상 팔렸다. 2019년 10월 20일, 티켓 1027만 장과 총 139억 엔의 흥행 수익을 벌었다. , 총수익 140.6억 엔의 흥행 수익을 벌어들이면서, 일본 영화 흥행 순위 13위를 달성하였다. 중국에서는 티켓 898만 5208장을 팔았고, 2019년 11월 19일, 개봉 17일 만에 424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벌었다. 2019년 11월 말까지, 중국에서 2억 8800만 위안의 흥행 수익을 벌었다. 싱가포르에서는, 104만 싱가포르 달러를 벌어들이며 싱가포르 역대 애니메이션 영화 1위를 달성하였다. 2020년 3월 15일 기준,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약 78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벌었다. 2021년 7월 기준, 전 세계적으로 1억 934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하였다 반응 평론가들은 전체적으로 《날씨의 아이》에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 로튼 토마토에서는 95명의 평론가들이 평균 7.40/10 점을 주었고, 로튼 토마토 지수 92%를 기록하였다. 웹사이트의 평론가 전체 평론은 "《날씨의 아이》는 아름다운 작화와 매력적인 서사를 보여주며 신카이 마코토가 뛰어난 영화감독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라고 서술되었다. 메타크리틱에서는 30명의 평론가 평가 중 평균 72/100을 받으면서 "전체적으로 준수한 평가"를 보여주었다. 코타쿠의 브라이언 애쉬크래프트는 "영화의 이곳저곳에서 맑은 날씨를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모습은 현대 일본인을 삶과 신도 신앙을 잘 엮어 풀어냈고 감동적이었다"라며 극찬하였지만, 나중에는 "《날씨의 아이》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너의 이름은.》의 후속작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크런치롤 뉴스의 대릴 하딩은 《날씨의 아이》에 대해 "신카이는 현대 도쿄의 분위기를 완벽히 잡아냈다"라며 세계관 형성을 찬양하였지만, 《날씨의 아이》와 《너의 이름은.》과의 연관성을 비판하였다. 애니메 뉴스 네트워크의 김 모리씨도 《날씨의 아이》의 작화와 날씨를 사용한 은유법을 칭찬하며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신카이는 짤막한 틀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모조리 담아내러는 강박관념이 확실히 있었는데, 이번은 줄거리랑 맞지 않았다"라고 비판하였다. 비니스 더 탱글스의 Twwk도 "이 영화는 중요한 부분과 맞지 않는 너무 모호하고 (게으른) 스크린플레이 때문에 《너의 이름은.》처럼 감정적인 면에서 강력하지 못했지만, 아직도 심장에 와닿았다"라고 적으면서 영화를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포브스의 올리 바더는 《날씨의 아이》의 애니메이션을 "엄청나다"라고 설명하였고 "(《날씨의 아이》가) 도쿄를 분명하고 개성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나중에 신카이 감독이 "야생과 자연경관"을 표현하는 방법을 찬양하였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제임스 마쉬는 애니메이션을 찬양하였지만, "《너의 이름은.》에서 보여준 선명성"이 부족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날씨의 아이》의 내용이 《너의 이름은.》 보다는 직접적이었지만 아직도 확실한 답이 없는 "매달리는" 부분들이 있다고 말하였다. 오타퀘스트의 알리시아 하딕은 전작과의 차이를 보이려는 영화의 노력, 애니메이션, 음악, 내용을 찬양하였지만, 전작 영화의 구조의 의존성이 영화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면서 "어깨에 《너의 이름은.》의 유령 없이 《날씨의 아이》를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였다. ANC X의 앤드류 패레데스는 영화의 캐릭터, 내용, 신카이의 감독 능력을 찬양하면서 "넘치는 감정과 신토 신화가 실제 세계 문제들과 잘 맞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도 있다: 신카이는 이번의 후속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능가하였다: 도쿄를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빛에서 무성한 내면을 보여주었다." 더 스타의 테렌스 토는, "《날씨의 아이》는 아름다운 작화와 공감 가능한 캐릭터를 자랑한다. 영화의 이야기도 비와 같이 참하다"라며 영화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찬양하였다. 수상과 입후보 이 영화는 일본의 제92회 아카데미상의 일본 후보로 선정되었지만, 최종 후보에 드는 것에 실패하였다. 《날씨의 아이》는 장편 독립 애니메이션 상등 애니상 4개 부문에 후보 선정되었다. 이는 애니상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와 《천년여우》 다음으로 4개 부문 입후보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열린 13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였다. 로스앤젤레스의 "애니메이션 이즈 필름 페스티벌"에서 자부 브레이트만과 엘리아 고브메빌렉의 The Swallows of Kabul과 함께 관객상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 《날씨의 아이》는 개봉 첫주 《너의 이름은.》에 비해 관객수 -70%라는 성적표를 기록하였다. 이에 배급사인 미디어캐슬은 "일본 영화를 향한 편견을 거둬달라"며 일본 영화에 대한 편견 때문에 흥행과 홍보에 어려움을 격고 있다고 말하였다. 미디어캐슬의 반응은 비판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날씨의 아이》 영화의 문제점이나 홍보 실패등 많은 요인이 있었지만 단순히 불매운동을 하는 관객 탓으로만 돌린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됐다. 2020년 4월 20일 기준, 불매운동의 여파속에도 《날씨의 아이》는 괜객수 68만명을 동원 대한민국 전체 일본 영화 흥행 순위 10위에 등극하였고, 일본 애니 영화 흥행 순위는 6위를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영화 《기생충》에 대해서 《날씨의 아이》와 《기생충》의 반지하는 닮았다고 말하였다. 미디어 믹스 《날씨의 아이》의 동명 소설판은 신카이 마코토가 영화 제작과 동시에 작성하였다. 2019년 4월 30일, 그는 트위터에서 저서를 완료하였다고 트위터에 발표하였다. 2019년 7월 18일 카도카와 스니커 문고에서 디지털과 종이로 출판되었다. 첫 주에 9만 9천 장 이상 팔렸고 7월 29일 오리콘 도서관 순위 1위를 기록하였다. 8월 16일까지 31만 8천 부가 팔렸고, 이는 2019년 최초로 30만 장 이상 팔린 책이었다. 9월 10일까지 성공적으로 65만 장 이상 팔렸다. 2019년 10월 24일 엔 일보에서 12월 17일 디지털 종이 둘 다 북미 출판권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추가적으로, 초중학교 어린이를 위한 소설판이 2019년 8월 9일 공개되었다. 첫 주 1만 3천부가 팔렸고 오리콘 주간 도서관 순위에서 "어린이 소설" 장르 1위를 달성하였다. 코단샤의 《월간 애프터눈》에서 코토바 와타리가 그린 만화판은 2019년 7월 25일 연재가 시작되었다. 만화판이 컬러로 된 커버가 있다고 발표되었다. 2020년 8월 25일 연재가 완료되었다. 사진 다른 매체 소설: 첫 발간은 대원씨아이에서 2019년에, 재 장판은 하빌리스에서 2020년에 나왔다. 만화: 대원씨아이에서 전 3권으로 나왔다. 그 밖의 비주얼 안내서, 직소 퍼즐, 클리어 파일, 일러스트 달력 등은 대원씨아이에서 나왔다. 각주 외부 링크 2019년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맥스 영화 일본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영화 일본의 판타지 영화 일본의 청춘 영화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 도쿄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가출을 소재로 한 영화 기상 재해를 소재로 한 영화 비를 소재로 한 작품 2021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2024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 신카이 마코토 각본 영화 도호 제작의 애니메이션 영화 코믹스 웨이브 필름 미디어캐슬 애니메이션 영화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작 4DX 영화
https://en.wikipedia.org/wiki/Weathering%20with%20You
Weathering with You
is a 2019 Japanese animated romantic fantasy film written and directed by Makoto Shinkai, produced by CoMix Wave Films and distributed by Toho. It follows a 16-year-old high school boy, Hodaka Morishima, who runs away from his troubled rural home to Tokyo, and later befriends Hina Amano, an orphaned girl who has the ability to control the weather. It features the voices of Kotaro Daigo and Nana Mori, with animation direction by Atsushi Tamura, character design by Masayoshi Tanaka, and its orchestral score and soundtrack composed by Radwimps; the latter two previously collaborated with Shinkai on Your Name (2016). A light novel of the same name, also written by Shinkai, was published a day prior to the film's premiere, while a manga adaptation was serialized in Afternoon on July 25, 2019. Weathering with You was theatrically released in conventional, IMAX, and 4DX theaters in Japan on July 19, 2019, and was released in the United States on January 20, 2020. It received positive reviews from critics, with praise for the animation, screenplay, music, visuals, and emotional weight. The film grossed US$193.8 million worldwide, becoming the highest grossing Japanese film of 2019 and the seventh highest-grossing anime film of all time, unadjusted for inflation. The film won a number of awards, including being selected as the Japanese entry for Best International Feature Film at the 92nd Academy Awards. It received four Annie Award nominations, including for Best Independent Animated Feature, tying Spirited Away, Millennium Actress, (both 2001) and Ghost in the Shell 2: Innocence (2005) for the second-joint most nominations for an anime film at the Annies, behind Ghost in the Shell (1995) and then Belle (2021) with five. Plot In June 2021, first year high schooler Hodaka Morishima escapes Kōzu-shima in order to get away from his troubled home life to Tokyo. When his ferry to the city is hit by a torrential rainstorm, he subsequently meets Keisuke Suga, after he saved his life. As Hodaka begins to struggle financially due to a lack of job opportunities, he later finds a Makarov PM handgun that was abandoned in a trash can. He meets Hina Amano, an employee of a McDonald's restaurant, who takes pity on him and gives him food. Suga hires him as his assistant at a small occult magazine publishing company where they investigate urban legends related to the unusually rainy weather in Tokyo. They hear the legend of "sunshine girls" who can control the weather. Hodaka sees Hina being intimidated into working at a club. He attempts to intervene, but is attacked by the club owner. He draws the gun, and out of panic, fires it, barely missing him. Hina grabs him and takes him to Yoyogi Kaikan, an abandoned building with a shrine on the roof, where he throws the gun away after realizing his mistake. Hina shocks him by demonstrating her ability to clear the sky by praying. He later discovers that Hina lives alone with her brother Nagi, and they have no adult guardian. Seeing how they are also in financial trouble, Hodaka proposes to start a business together: a job to clear the weather for large social gatherings, such as weddings and parties. Their business becomes a success, however, Hina was filmed and broadcast on television after being hired to clear the sky for a fireworks display, leading to their site getting flooded with requests. They decide to temporarily suspend business to give them some time to rest. Meanwhile, the police are searching for Hodaka, as his family had filed a missing person report. They later trace Hodaka using a security camera, where he was captured using the gun. Officers arrive at Hina's apartment and interrogate her; Hina realizes that because they have no legal guardians, social services are going to separate her and Nagi. Suga, having also been visited by the police, fires Hodaka, explaining that police suspect him of kidnapping him. Hodaka, Hina, and Nagi try to run away but are halted by the weather, which is worsening, subsequently causing delays on public transport. Two police officers find them walking in the street, and tackle Hodaka to the ground, however, he is set free by Hina, who unintentionally uses her powers to send a bolt of lightning to a nearby truck, causing it to explode, distracting the officers. They eventually take shelter in a hotel. Hina reveals that her body is slowly turning transparent the more she uses her power, and reveals that her sacrifice will allow the weather to return to normal. The next day, Hina has vanished and the rain has stopped. The police track Hodaka to the hotel and take him into custody. Nagi is sent to the children's counseling center. Hodaka, realizing that he has fallen in love with Hina, wants to bring her back, and escapes from custody with the help of Suga's niece Natsumi. The police surround Hodaka in the abandoned building, but Suga, inspired by Hodaka's desperation to see Hina, helps him escape. At the rooftop shrine, Hodaka jumps through the shrine gate and is transported into the sky, where he finds Hina and asks her to leave with him, insisting that Hina let go of her worries about the weather and start living for herself. As soon as they come back to the rooftop shrine, Hina, Hodaka, Natsumi, Nagi, and Suga are all arrested, and the heavy rains resume. Hodaka is sentenced to a three-year probation and sent back to his home in Kōzu-shima. Three years later, the rain has been falling without end in Tokyo, submerging much of the city. In the spring of 2024, having finished his probation, Hodaka graduates from high school and returns to Tokyo to start college. He meets with Suga, who has expanded his business. After Suga encourages him to find Hina, Hodaka finds her praying on a street overlooking the drowned city. They reunite, with Hodaka promising her that they will be all right. Voice cast Production On August 2, 2018, Makoto Shinkai announced that he was making a new feature film that would be released the following year. The film staff included Masayoshi Tanaka as the character designer, Atsushi Tamura as the animation director and Hiroshi Takiguchi as the art director. Shinkai tweeted about his admiration for Shikao Suga, and that he "borrowed" the last name for the character Keisuke Suga. In February 2017, plot development of Weathering with You began, and in April, character design and development started. In July, Shinkai began writing the script of the film. In August, development setting, location scouting and information collecting started. Storyboarding began two months later in October. In May 2018, animation work commenced, while the development of the rain material in the film started in July. In August, the cast audition was held, and art background work started in September. In October, the cast of Hina and Hodaka had been chosen. On December 13, 2018, a press conference was held to reveal the film's first key visual and it was announced that it would be released on July 19, 2019. Photoshooting for the film started in January 2019. The first trailer debuted on April 10, exactly 100 days before the premiere. Additional posters of the film and the second trailer was released on May 28. All work was completed by July 7, and the film was ready to be released. In an interview, Shinkai said, "I thought, 'Should I make my next film so that I don't anger more people, or should I make a movie that angers them further?' And I chose the latter." He also added that he was influenced by the impact of climate change on Japan, particularly the increase in rainfall during the summer months. He revealed that he used both CG and traditional hand drawn animation to depict the rain in the film. The writing process of the story includes getting feedback from the production team, he revealed that he took around six months to write his previous film, Your Name, and another six months for Weathering With You. Shinkai chose a more "supernatural" approach on this film, as opposed to the science-fiction angle he used for Your Name. When asked for the reason of including the characters from Your Name, Shinkai said, "Personally, I wanted to see Taki and Mitsuha again before they met." Casting Around 2,000 people auditioned for the roles of the film's two protagonists with Kotaro Daigo and Nana Mori being chosen. Other key roles were filled with returning crew members of Your Name. Daigo and Mori began recording their parts on April 27, 2019. On May 29, 2019, additional cast was announced: Shun Oguri (Keisuke Suga), Tsubasa Honda (Natsumi), Chieko Baisho (Tomi), Sakura Kiryuu (Nagi Amano), Sei Hiraizumi (Yasui), and Yuki Kaji (Takai). Music Like Shinkai's Your Name, Japanese rock band Radwimps wrote and composed the soundtrack and score for the film. It was released worldwide on July 19, 2019, the day of the film's release. is the film's theme song. It become the top-selling song in the weekly digital single chart of July 15–21. Another song, "Grand Escape (Movie edit) feat. Tōko Miura" from the film ranked second with over 41,000 downloads. The film's soundtrack album won multiple awards, including the Japan Gold Disc Award and the 43rd Japan Academy Film Prize. Marketing Producer Genki Kawamura presented a work in process screening on June 14, 2019, at the Annecy International Animation Film Festival in France that was open to industry professionals and students but not the general public. TV Asahi aired footage from the film's opening scene during a reshowing of Shinkai's previous film Your Name on June 30. Before its screening in Japan, Uniqlo launched special t-shirts with designs inspired by Weathering with You and Shinkai's previous anime films. Weathering With You reportedly promoted multiple products and companies including SoftBank Group, Suntory and Baitoru, in television advertisements. During its screening in Japan, many convenience stores such as Lawson, launched food products inspired by the film. Lawson also created a new beverage called Ameiro Jelly Tea, a herbal tea infused with blue flower petals. Release Weathering with You was released in Japan on July 19, 2019, at 9 a.m. (JST) by its distributor Toho on 448 screens in 359 theaters across the country. Theaters in Tokyo's Shinjuku and Osaka's Umeda districts, however, premiered the film at midnight on July 18. The official Weathering With You announced on September 20 that the film would be shown in the popular 4DX and MX4D formats throughout Japan from September 27. The film was produced by Genki Kawamura with CoMix Wave Films and Story Inc. revealed as the film's producers. On July 16, it was announced that the film would be released worldwide; releases had already been decided for 140 countries in North America, Europe, Asia, and South America, exceeding the 135 for Your Name. In Asia, EDKO Films released the film in Hong Kong on August 8, Encore Films streamed a Malay, Chinese, and English-subtitled trailer and announced and released the film in few Southeast Asia countries including; Indonesia on August 21, Vietnam on August 30, Malaysia & Brunei on September 5 and Singapore on September 12. Pioneer Films announced and released the movie in the Philippines on August 17 for an advanced screening in SM Megamall and August 28 for general release. Producer Genki Kawamura said they want to release it in India because 53,000 people signed a petition requesting its release there. On August 10, director Makoto Shinkai and the official page of Weathering with You announced through Twitter the film would be screened in 20 Indian cities including Mumbai and Delhi from October 11, 2019. PVR Pictures and Bookmyshow-backed theater-on-demand platform Vkaao distributed the film. It was the first mature Japanese animated film to be screened theatrically in India. CJ CGV premiered in South Korea on October 30. Volga Film Company has confirmed it would release the film in Russia on October 31. Thai film distributor Major Group announced the film would open in Thailand on November 7, 2019, but was changed to September 5, 2019. The film has been approved by Beijing's censors and hit Chinese theaters on November 1. In North America, GKIDS announced that it had acquired the rights of the film and screened an awards-qualifying run in 2019, followed by a theatrical release with Japanese and English-language options on January 17, 2020. The 44th Toront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hich was held from September 5 to 15 in 2019, hosted the North American premiere of the film. As part of the "Special Presentation" category, it is eligible to compete for the People's Choice award. Reportedly Fathom Events released the film in theaters in the United States on January 15 and 16 as a "Special Fan Preview" with special bonus content. GKIDS screened the film in the US at Animation Is Film Festival on October 18, 2019, with Makoto Shinkai in attendance. GKIDS also screened it at Anime NYC 2019 on November 17, 2019 as the east coast premiere. It additionally received a one-week IMAX and 4DX showing. In Europe, the 67th San Sebastiá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in Spain hosted the European premiere of the film from September 20 to 28 2019. Anime Limited acquired the UK and Ireland rights of the film, premiering the film at Scotland Loves Anime on October 12, 2019, with a theatrical run in Japanese and English-language options from January 17, 2020. In Italy, Dynit and Nexo Digital released the film theatrically on October 14, 2019. Selecta Visión has licensed it in Spain and screened the film on November 29, 2019. In France, the film was released on January 8, 2020 by Anime Limited and BAC Films. In Germany, the film was released on January 16, 2020 by Universum Film. In Portugal, the film was released on February 20, 2020 by Big Picture Films. In Australia and New Zealand, Madman Entertainment acquired the rights of the film and began screening it theatrically from August 22, 2019, with encore screenings of the English dub from February 13, 2020. In the Middle East, Front Row Filmed Entertainment announced that the film will be released on September 10, 2020. Home media The film was released on Blu-ray in Japan on May 27, 2020. A collectors edition included a 4K UHD Disc with English and Chinese subtitles. The film was released digitally in North America on August 4, 2020, with a subsequent release on Blu-ray and DVD on September 15, 2020, and a limited edition 4K UHD following on November 17, 2020. This film is currently streaming on HBO Max, a streaming service by AT&T's WarnerMedia. In Japan, the film sold physical home video units in twelve days by 7 June 2020, including 111,403 Blu-ray units and 46,347 DVD units. In the United States, the film grossed from Blu-ray and DVD sales, . In the United Kingdom, where it was the first anime to receive a 4K home video release, it was 2020's second best-selling foreign language film on physical home video formats (just below Parasite). Reception Box office During its initial screening in 359 theaters and 448 screens in Japan, Weathering with You sold 1,159,020 tickets to earn 1,643,809,400 (approx $15.22 million) in its first three days. It was reported that Weathering with You surpassed Shinkai's previous film, Your Name, which earned 1,277,960,000 (about $12.51 million at the time) in its first three days of screening, earning 28.6% more. By August 25, 2019, it had sold eight million tickets and earned 10.73 billion (about $101 million). By September 9, 2019, it had earned 12 billion and became the highest-grossing film of 2019 in Japan. By October 2, 2019, the film had sold over tickets in Japan, after 75 days on the market. By October 20, 2019, it had sold tickets and grossed in Japan. , the film has grossed () in Japan, and became the thirteenth highest-grossing film of all time in Japan. In China, the film had sold 8,985,208 tickets and grossed in its first 17 days on the market, by November 19, 2019. By the end of November 2019, the film had grossed () in China. In Singapore, it grossed () and became the highest-grossing anime film in Singapore.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the film has grossed $7,798,743, . As of July 2021, the film grossed over worldwide. Critical response On Rotten Tomatoes the film has an approval rating of based on reviews from critics, with an average rating of . The site's critics consensus reads, "Beautifully animated and narratively engaging, Weathering with You further establishes writer-director Makoto Shinkai as a singularly talented filmmaker." On Metacritic, the film has a weighted average score of 72 out of 100 based on reviews from 30 critic reviews, indicating "generally favorable reviews." Brian Ashcraft of Kotaku praised the film, saying; "in Weathering with You, the connection to real-world weather seems muted and like a missed opportunity. Weather in Japan has long been predictable. But in the past few years, Japanese weather, like weather all over the world, has gotten increasingly strange, relentless and dangerous. In the movie, it’s mentioned how the weather has been changing, but it’s in relation to how spring and summer have become less enjoyable for kids in Japan. There’s nothing about how dangerous this weather has become. And even with the movie shows the power of weather, the impact is underplayed. but later wrote "the biggest problem that Weathering with You has is this: it’s the follow up to Your Name". Daryl Harding, writing for Crunchyroll News, praised the world-building aspect of the film, stating that Shinkai has his finger on the pulse of modern Tokyo's atmosphere, but criticized the similarity between Weathering with You and Your Name. Kim Morrissy of Anime News Network also gave the film a generally positive review, praising its visuals and use of weather to convey the story's metaphor, but criticizing the execution in the second half of the film; she wrote that "Shinkai was evidently constrained by the need to fit his story into a particular template, one that didn't seem to fit the plot this time around". Twwk, reviewing the film for Beneath the Tangles, was mostly positive as well, writing; "The movie isn’t as emotionally powerful as Your Name due to a screenplay that plays too loose (and lazy) to earn its huge moments, but it’s still heartfelt." James Marsh from South China Morning Post praised the film for its animation, but criticized it for its lack of "clarity of vision seen in Your Name". He described the plot as more straightforward than that of Your Name, but said it has some unanswered and "dangling" plot threads. A review by Alicia Haddick for Otaquest praised the film's attempts to differentiate itself from Makoto Shinkai's past work and praised its animation, story and music, but said that its reliance on the structure of his last film hurt the movie overall, stating that "it's impossible to discuss this film without the specter of Your Name hanging over your shoulder". Andrew Paredes, writing for ABS-CBN News, praised the film's characters, story, themes, and Makoto Shinkai's directing, saying; "The effusive emotion and Shinto mysticism rubbing up nicely against real-world concerns. And then there’s the animation: Shinkai has outdone himself with this follow-up, presenting Tokyo not just with detailed fidelity, but also with a glow that suggests a lush, lambert inner life." Terence Toh, writing for The Star, praised the film's characters and story, saying; "Weathering With You boasts of wonderful visual and likeable characters. The story is also right as rain." Awards and nominations The film was selected Japan's entry for Best International Feature Film at the 92nd Academy Awards, but it failed to make the shortlist. It also received four Annie Award nominations including Best Independent Animated Feature, which makes it the fourth anime film tying with Spirited Away, Millennium Actress, and Ghost in the Shell 2: Innocence to have four nominations; the second-joint highest for an anime film at the Annies, behind Ghost in the Shell (1995) and then Belle (2021) with five. The film won the Best Animated Feature Film award at the 13th Asia Pacific Screen Awards (ASPA) in Brisbane, Australia. It received the Audience Award along with Zabou Breitman and Elea Gobbe-Mevellec's The Swallows of Kabul film at the Animation Is Film Festival in Los Angeles. It was screened at the 2022 Japanese Film Festival (JFF) hosted by the Japan Foundation in India to promote cultural exchange. Adaptations A novel adaption, with the same name, was written concurrently with production of the film by the director, Makoto Shinkai. On April 30, 2019, he announced through Twitter that he had finished writing it. It was released in print and in digital format by Kadokawa Sneaker Bunko on July 18, 2019. More than 99,000 copies were sold in the first week and it took first place in the Oricon weekly library ranking on July 29. By August 16, 318,000 copies were sold, making it the first novel in the library this year to exceed 300,000 sales. By September 10, it sold over 650,000 copies in successive editions. On October 24, 2019, Yen Press announced that they had licensed the novel for North American release, in print and in digital format, on December 17. In addition, a children's book adaptation for children, elementary school and junior high school students, was released on August 9, 2019. It sold 13,000 copies in the first week and took first place in the "Children's Books" genre in Oricon weekly library ranking. A manga adaptation drawn by Watari Kubota began serialization on July 25, 2019, in Kodansha's Monthly Afternoon magazine. It was announced that the manga would have a colored opening page. The manga finished on August 25, 2020. Gallery See also List of highest-grossing animated films List of highest-grossing anime films List of highest-grossing films in Japan References External links at CoMix Wave Films 2019 animated films 2019 films Japanese animated feature films 2019 anime films Animated teen films Anime with original screenplays CoMix Wave Films films Films about orphans Films about runaways Films about weather hazards Films directed by Makoto Shinkai Films with screenplays by Makoto Shinkai Films set in 2021 Films set in 2024 Animated films set in Tokyo IMAX films Japan Academy Prize for Animation of the Year winners Japanese animated fantasy films Japanese teen films Novels set in Tokyo Toho animated films 4DX films Animated films set in the 20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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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우 코치 제조회사
옐로우 코치 제조회사(대개 옐로우 코치라 불림)는 시내 버스를 만드는 미국의 초기 제조사이다. 1923년부터 1943년까지 옐로우 코치는 시내버스와 전기 구동 트롤리버스, 고속버스를 제조했다. 1923년 시카고에서 존 다니엘 허츠(John D. Hertz) 가 설립하였고 옐로우 택시 회사의 자회사로서모회사는 1925년 제너럴 모터스가 대주주가 되면서 옐로우 트럭 및 버스 제조 회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GM이 1943년 회사를 모두 사들이자 GM의 트럭 계열사와 합병하여 GM 트럭 앤 코치 계열사가 되었다. 차량 렌탈 자회사(허츠 드라이버셀프 코퍼레이션과 옐로우 드라이버잇유어셀프로 알려진)를 존 허츠가 1953년 옴니버스 코퍼레이션으로 합병하여 이듬해 허츠 코퍼레이션으로 상장한다. 역사 존 D. 허츠와 동업자는 1922년 시카고 지역의 작은 회사와 버스 공장을 같이 사들이며 시작하여 제조 공장을 4단지 건설한다. 옐로우 코치 제조 회사는 이미 1923년 존 허츠가 옐로우캡 회사의 자회사로 설립하여 설립 첫해에 207대의 버스를 판매한다. 조지 J. 래컴(George J. Rackham)은 런던 대중 옴니버스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계속됐던 1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로 옐로우 회사에 고용되었을 때 낮게 제작한 버스의 섀시 프레임의 이점을 발견한다. 존 허츠는 버스 제작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래컴을 고용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기관장으로 레이랜드 모터스에 입사하여 타이탄과 티거 모델을 개발하는 책임을 맡는다. 제너럴 모터스는 1925년에 회사의 주식을 사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명을 옐로우 트럭 앤 코치 제조 회사로 바꾸었으며 미시간주 폰티액에 있는 폰티액 웨스트 제조 공장에서 시설을 옮긴다. 버스업계에서 옐로우 트럭 앤 코치 제조 회사는 줄여서 옐로우 코치로 불렸다. 시내 버스와 고속 버스 사업이 급속하게 확장되던 1930년대에 옐로우 코치는 가장 많이 팔리는 버스를 만들게 된다(1935년 미국에서 고속 버스 승객수는 50% 증가한 651,999,000명으로 클래스 1 철도가 수송하는 승객 수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옐로우 코치는 전기 전차(노면 레일을 달리고 전차선으로 동력을 받는)에서 버스(가솔린 또는 디젤 엔진으로 구동하고 고체 바퀴에서 공기 타이어로 바뀜)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 고속 버스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그레이하운드에게 옐로우 코치는 독특한 유선형 버스를 개발했는데 차바닥은 높고 바닥 아래에는 짐칸이 있으며 차 앞면은 평평하고 에어컨과 디젤 엔진을 달아 그레이하운드의 성장이 가장 컸던 해에 1,250대 공급을 돌파한다. GM은 1943년에 회사를 완전 인수하여 GM 트럭 계열사와 합병하여 GM 트럭 앤 코치 계열사를 만든다. GM이 옐로우 코치의 T 시리즈와 P 시리즈 생산 라인을 멈추지 않았지만 1944년 옐로우 코치의 엠블럼은 GM 코치 또는 그냥 GM이라고 쓰인 엠블럼으로 바뀐다. 옐로우 코치 디자인은 소련에서 생산된 특정 ZIS 버스를 포함해 1959년까지 매우 다양하게 바뀌었다. 오직 두 모델(3101/3102 및 3501/3502)만이 "옛 모습"을 일부 닮아 1969년까지 계속 생산되었다. GMC 엠블럼은 1968년이 넘어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렌탈 회사 - 허츠 드라이버셀프 코퍼레이션/옐로우 드라이버잇유어셀프 옐로우 코치의 자회사로 알려진 허츠의 드라이버셀프 코퍼레이션 혹은 옐로우 드라이버잇유어셀프는 제너럴 모터스에 팔렸다가 결국에는 허츠가 1953년에 다시 사들였고 옴니버스 코퍼레이션에 합병하여 이듬해 허츠 코퍼레이션이라고 사명을 다시 짓는다. 생산된 모델 XYZ 시리즈(1923-1936) 옐로우 코치는 생산한 차량의 모델 작명을 알파벳 역순으로 차례차례 지어나갔다. 처음에는 네 가지 모델을 제공했다. Z 타입 버스 또는 코치 Z 타입 2층 버스 Y 타입 코치 X 타입 버스 또는 코치 모든 차량이 기존 전면 엔진 방식이며 옐로우 나이트 직렬 4기통 슬리브 밸브 가솔린 엔진을 달거나 표시가 없다면 GE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다. 나이트 엔진은 뒷바퀴 쪽에 달려 등속 조인트에 의해 구동된다. 하이브리드 차량은 뒤 차축 대형 전기모터가 가솔린 엔진에 동력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700 시리즈 (1931-1939) 1931년에 옐로우 코치는 700 시리즈를 도입하였는데 처음 디자인은 후면에 엔진을 장착한 모습이 특징 중의 하나였다. 후면 장착 엔진은 혁신에 해당되었는데 기계적인 손실이나 소음을 줄이고 등속 조인트 길이를 줄여 중량을 줄이는 데다가 기존에 주행하던 전면 엔진과 배기관 사이를 통과하는 배기가스를 줄였다. 독일과 영국에 위치한 버스 제조 업체는 1950년대가 되어서야 완전한 후면 엔진 모델을 생산했다. 고객은 항상 후면 엔진을 선호하지는 않았는데 전면 엔진이 익숙하고 엔진의 소음과 진동을 승객이 직접 받지 않는 등의 이유를 주목해서였고 때때로 미관상의 이유로 전면 엔진을 선택했다. 결국 700 시리즈는 전면 엔진과 후면 엔진 모델을 모두 포함했다. 1934년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킨 후륜 구동 방식의 특허를 보유한 드와이트 오스틴이 옐로우 코치에 고용되어 FR방식의 700 시리즈를 개발하는데 V자 모습의 드라이버가 특징이다. V 드라이브를 포함한 에어컨, 디젤 엔진, 평평한 전면, 높은 버스 바닥(밑에 위치한 짐칸), 통으로 찍은 버스 몸체는 혁신이자 꽤나 오랫동안 표준이 된다. V 드라이브는 GM이 생산하는 표준으로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베스트셀러 대중 교통 버스 : 모델 718 및 728 주목할만한 700 시리즈 버전은 모델 718 및 728으로 도시에서 수송용으로 개발되었다. 모델 718은 뉴욕과 로스 앤젤레스의 대형 운송 사업자에게 426대를 판매하여 1930년대 초 가장 대중적인 대중 교통 버스가 되었다. 후기 모델 728은 1930년대 후반에 생산된 9가지 변형을 통해 운송 사업자에게 1,189대를 판매했다. 두 모델 모두 예외적으로 엔진이 후면에 장착됐다. 그레이 하운드 (시외 버스): 모델 719 및 743 시외 버스 서비스 운영 업체인 그레이하운드 라인의 경우 옐로우 코치가 1936년 모델 719를 개발하여 높은 차바닥과 그 아래에 짐칸 그리고 평평한 전면과 유선형 외관을 도입했다. 1937년에 모델 719가 모델 743으로 변경되고 에어컨과 디젤 엔진을 도입했다. 모델 719와 743은 그레이하운드의 슈퍼코치라는 브랜드로 판매되었으며 판매가 그레이하운드와 그 계열사에 사실상 제한되었다. 그레이하운드 라인은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생산된 1,256개의 모델 743을 전량 구매했다. 700 시리즈 생산 세부 정보 모든 모델은 너비의 싱글 데크 버스이다. 1200 시리즈 (1938-1940) 모델 1200 시리즈는 퍼블릭 서비스 코퍼레이션(에너지 운송 수단등을 제공하는 공기업이다)에 모델 739의 디자인을 바꾼 모델 1203과 함께 1938년에 출시되었다. 6으로 이름이 끝나는 모델중 3 개는 새로운 P 시리즈 이름을 부여 받았고 나머지는 T 시리즈 이름이 부여받았다. 1940년에는 모델 1200 시리즈의 이름이 T- 또는 P- 시리즈로 변경되었다. 새로운 모델 명칭은 유형, 연료, 추진력 (수송시) 또는 승객, 좌석 수 및 버전 번호를 나타낸다. (첫 번째는 -01, 두 번째는 -02 등이었다.) T-시리즈 (1940-1942) 모든 "T"시리즈 모델은 도시 대중 교통 버스였다. 모델명은 두 개 또는 세 개의 글자와 네 개의 숫자로 구성된다. 이는 버스의 종류를 기본적으로 설명한다. P 시리즈 (1939-1944) "P"는 팔러 코치(시외 버스의 종류)로서 P 시리즈가 주로 도시 간 버스 승객의 편안함을 위해 설계되었음을 나타낸다. 모든 모델은 너비의 후면 엔진 팔러 코치이다. GM과 GMC 1944년 제너럴 모터스는 옐로우 코치의 인수 및 합병을 완료했다. GM 및 GMC 버스 브랜드 및 B 시리즈 스쿨 버스 및 S 시리즈 교외 버스와 같은 다른 변형 제품과 함께 꾸준히 T 시리즈와 P 시리즈를 생산하고 모델 번호를 매겼다. 옐로우 코치 디자인은 1959년까지 계속해서 널리 생산되었는데 그 해 GM이 뉴룩 모델을 발표했다. 마지막 옐로우 코치 디자인은 1969년에 생산을 중단했다. 그 외 GM 트럭 및 코치 사업부 GM "구형"대중 교통 버스 참고 문헌 서지 Luke, William A. (2001). Yellow Coach Buses - 1923–1943 Photo Archive, Hudson, WI: Iconografix. Luke, William A. & Metler, Linda L. (2004). Highway Buses of the 20th Century, Hudson, WI: Iconografix. Luke, William A. & Metler, Linda L. (2005). City Transit Buses of the 20th Century, Hudson, WI: Iconografix. McKane, John H. & Squier, Gerald L. (2006). Welcome Aboard the GM New Look Bus, Hudson, WI: Iconografix. Plachno, Larry (2002). Greyhound Buses Through the Years - Part I, Polo, Il: National Bus Trader Magazine, November, 2002 Stauss, Ed (1988). The Bus World Encyclopedia of Buses, Woodland Hills, CA: Stauss Publications. 외부 링크 Yellow Coach - 1923–1943- GMC Truck & Coach Division, General Motors Corp. - 1943-present - Detroit, Michigan List of production figures for Yellow/GM "old-look" buses Ohio Museum of Transportation, omot.org, retrieved on 2006-12-22 Coachbuilt.com - Yellow Coach, coachbuilt.com, retrieved on 2006-12-23 New York Public Library - General Motors Truck Company. Pontiac, Michigan, nypl.org, retrieved on 2018-03-28 New York Public Library - GM Coach Company 1936. Photographs - Specifications, nypl.org, retrieved on 2018-03-28 Coach Information Network, coachinfo.com, retrieved on 2006-12-23 제너럴 모터스
https://en.wikipedia.org/wiki/Yellow%20Coach%20Manufacturing%20Company
Yellow Coach Manufacturing Company
The Yellow Coach Manufacturing Company (informally Yellow Coach) was an early manufacturer of passenger buses in the United States. Between 1923 and 1943, Yellow Coach built transit buses, electric-powered trolley buses, and parlor coaches. Founded in Chicago in 1923 by John D. Hertz as a subsidiary of his Yellow Cab Company, the company was renamed "Yellow Truck and Coach Manufacturing Company" in 1925 when General Motors (GM) purchased a majority stake. After GM completely acquired the company in 1943, it was merged with GM's truck division to form the GM Truck & Coach Division. The car rental subsidiary (known both as Hertz Drivurself Corp and Yellow Drive-It-Yourself) was purchased back by John Hertz in 1953 through The Omnibus Corporation and floated the following year as The Hertz Corporation. History John D. Hertz and associates began acquiring smaller Chicago-area companies involved in bus-building in 1922, and soon assembled a manufacturing site covering four square blocks. Yellow Coach Manufacturing Co was formally established in 1923 as a subsidiary of Hertz's Yellow Cab Company, and sold 207 buses in its first year. George J. Rackham, whose career had commenced with the London General Omnibus Company after the First World War, spent the years 1922–1926 in the U.S., and recognised the advantage of low swept chassis frame for bus development while employed by Yellow. It is likely that he was recruited by Hertz to help start up the bus building business. In 1926, he returned to England to join Leyland Motors as Chief Engineer and was responsible for the groundbreaking Titan and Tiger models. General Motors purchased a controlling stake in the company in 1925 and changed the name to the Yellow Truck & Coach Manufacturing Company, and relocated production to Pontiac West Assembly in Pontiac, Michigan. Within the transit industry, the company continued to be called simply Yellow Coach. In the 1930s, Yellow Coach produced best-selling models for the rapidly expanding urban transit and intercity bus businesses. (In 1935, national intercity bus ridership climbed 50% to 651,999,000 passengers, surpassing the volume of passengers carried by the Class I railroads for the first time. ) Yellow Coach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transition from electric streetcars (operating on rails, powered by overhead wires) to transit companys' use of gasoline- or diesel-powered buses operating on rubber wheels (changing from solid wheels to pneumatic tires). For Greyhound Lines, the largest operator of intercity bus service, Yellow Coach developed distinctive streamlined models which introduced a high floor, underfloor luggage storage, a flat front, air conditioning, and a diesel engine, supplying more than 1,250 buses during Greyhounds' years of fastest growth. GM purchased the company outright in 1943, merging it into their GM Truck Division to form GM Truck & Coach Division. Although GM continued with the Yellow Coach T-series and P-series product lines, the Yellow Coach badge gave way to the GM Coach or just GM nameplate in 1944. Widespread production of Yellow Coach designs—including certain ZIS buses produced in the Soviet Union—continued until 1959. Limited production of the two remaining small-capacity "Old Look" models (3101/3102 and 3501/3502) would continue until 1969. GMC badges did not appear until 1968. Car rental - Hertz Drivurself Corp/Yellow Drive-It-Yourself The company owned a subsidiary, known as either Hertz 'Drivurself Corp' or 'Yellow Drive-It-Yourself' which was sold with Yellow Coach to General Motors and eventually purchased back by Hertz in 1953 with The Omnibus Corporation which was then renamed The Hertz Corporation the following year. Models produced Letter series (1923–1936) Yellow started its model designation at the end of the alphabet and worked forward. Initially four types were offered: Z type single-deck bus or coach Z type double-deck bus Y type coach X type bus or coach. All were conventional front-engine design vehicles powered by Yellow Knight I4 sleeve-valve gasoline engines, or a General Electric gas-electric hybrid unless noted otherwise. The Knight engine was connected to the rear wheels by a mechanical drive shaft. In gas-electric models, a gasoline engine in front supplied electric power to two large electric motors mounted on the rear axle. 700-series (1931–1939) In 1931, Yellow Coach introduced its 700 series buses, featuring one of the first bus designs to mount the engine in the rear. Mounting the engine in the rear represented a significant innovation, reducing mechanical losses, noise, and weight of a long drive shaft and exhaust running between a front engine and the rear drive and tailpipe. Bus manufacturers in Germany and the United Kingdom would not perfect rear-engine models until the 1950s. Customers did not always prefer rear-engined designs, noting that front engines were easier to access, and placed engine noise and vibration away from passengers and sometimes outside the coach body. Eventually, the 700 series included both front- and rear-engined models. In 1934, Dwight Austin, patent-holder on an innovative rear-drive system, was hired by Yellow Coach and soon developed new models in the 700-series with transverse engines and a “V” angle drive. The V-drive and other innovations introduced in the 700 series would become long-lasting standards: air conditioning, diesel engines, a flat front, a high passenger floor (with luggage beneath), and unibody construction. The V-drive would be GM's standard configuration until the 1980s. Best-selling transit buses: Models 718 and 728 Notable 700-series versions include models 718 and 728 which were developed for use as urban transit. Model 718 sold 426 units to large transit operators in New York and Los Angeles, becoming the most popular transit bus of the early 1930s. Later model 728 sold 1,189 units to transit operators across 9 variants produced in the late 1930s. Both were exclusively rear-engined. Greyhound (intercity) buses: Models 719 and 743 For Greyhound Lines, an operator of intercity bus service, Yellow Coach developed model 719 in 1936 which introduced the high floor, underfloor luggage storage, a flat front and streamlined styling. In 1937, model 719 was revised to become model 743 and introduced air conditioning and a diesel engine. Models 719 and 743 were both branded as the Super Coach by Greyhound, and sales were effectively limited to Greyhound and its affiliates. Greyhound Lines purchased all 1,256 units of model 743 produced between 1937 and 1939. 700 Series production details All models are wide single-deck buses, except as noted. 1200-series (1938–1940) The Model 1200 series was launched in 1938 with the re-designation of Model 739 as Model 1203 for Public Service Corporation. The 6-model series name ended when three were given new P-series names, and another was given a T-series name. By 1940, Model 1200 series designs were renamed into either the T- or P-series. The new model designations indicated type, fuel, propulsion (for transit) or customer (for parlor), seating capacity, and version number. (The first was -01, the second, -02, and so on.) T-series (1940–1942) All "T"-series models were urban transit buses. The model designation consisted of two or three letters followed by four numbers. These gave a basic description of the type of bus: All models were rear-engined except the 21xx and 24xx series. P-series (1939–1944) The "P" indicated that, as parlor coaches, the P-series was primarily designed for the seated comfort of intercity bus passengers. All models are wide rear-engine parlor coaches. GM and GMC In 1944, General Motors completed its acquisition and merger of Yellow Coach. The T-Series and P-Series production and series numbering continued under the GM and GMC bus brands, along with other variants such as B-Series school buses and S-Series suburban buses. Yellow Coach designs would continue to be widely produced until 1959, when GM introduced its New Look models. The last Yellow Coach design ceased production in 1969. See also GM Truck & Coach Division GM "old-look" transit bus General Motors streetcar conspiracy References Bibliography Luke, William A. (2001). Yellow Coach Buses - 1923–1943 Photo Archive, Hudson, WI: Iconografix. Luke, William A. & Metler, Linda L. (2004). Highway Buses of the 20th Century, Hudson, WI: Iconografix. Luke, William A. & Metler, Linda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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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s - Specifications, nypl.org, retrieved on 2018-03-28 Coach Information Network, coachinfo.com, retrieved on 2006-12-23 Vehicle manufacturing companies established in 1923 Vehicle manufacturing companies disestablished in 1943 Defunct bus manufacturers of the United States General Motors marques 1923 establishments in Illinois 1943 disestablishments in Michigan Trolleybus manufacturers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D%BC%EB%9E%9C%EB%93%9C%20%EB%8C%80%20%ED%94%84%EB%9E%91%EC%8A%A4%20%282010%EB%85%84%20FIFA%20%EC%9B%94%EB%93%9C%EC%BB%B5%20%EC%98%88%EC%84%A0%29
아일랜드 대 프랑스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아일랜드 대 프랑스(, )는 2009년 11월 14일과 11월 18일에 열린 아일랜드와 프랑스 간의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플레이오프 경기이다. 프랑스는 아일랜드에 1, 2차전 합계 2-1 승리(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1차전 경기에서는 프랑스의 1-0 승리를, 프랑스 생드니에서 열린 2차전 경기에서는 1-1 무승부를 기록함)를 기록하면서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프랑스의 티에리 앙리 선수가 2차전 경기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핸드볼 반칙을 저지르면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아일랜드 축구 협회와 아일랜드 정부는 국제 축구 연맹(FIFA)에 해당 경기의 재경기를 요청하는 한편 아일랜드가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33번째 팀으로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국제 축구 연맹(FIFA)은 이러한 요청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제 축구계에서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축구에도 비디오 판독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배경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개최된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유럽에는 13개 팀이 본선 진출 티켓을 배정받았다.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은 53개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원국 가운데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유럽 대표로 참가할 13개 팀을 결정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조별 예선은 53개 팀을 9개 조로 나누어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된다. 조별 예선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9개 팀은 본선에 직행한다. 조별 예선에서 각 조 2위를 차지한 9개 팀은 공정성을 위해 각 조 6위 팀과의 전적을 제외하고 비교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낮은 성적을 기록한 1개 팀은 예선에서 탈락하고 나머지 8개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는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된다.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한 4개 팀은 본선에 진출한다. 프랑스는 7조에서 세르비아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했으며 아일랜드는 8조에서 이탈리아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했다. 프랑스와 아일랜드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 자격을 획득했다. 국제 축구 연맹(FIFA)은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8개 팀들이 2009년 10월 FIFA 랭킹을 기준으로 하여 시드를 배정받는다고 밝혔다. 프랑스(당시 9위)는 포르투갈(당시 10위), 러시아(당시 12위), 그리스(당시 16위)와 함께 시드 팀으로 분류되었으며 아일랜드(당시 34위)는 우크라이나(당시 22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당시 42위), 슬로베니아(당시 49위)와 함께 비시드 팀으로 분류되었다.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플레이오프 대진 추첨은 2009년 10월 19일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진행되었다. 추첨 결과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플레이오프에서 서로 맞붙게 되었다. 1차전은 2009년 11월 14일에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크로크 파크에서, 2차전은 2009년 11월 18일에 프랑스 생드니에 위치한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리게 되었다. 플레이오프는 다음과 같은 방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플레이오프는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되며 1, 2차전 득점 합계가 가장 높은 팀이 본선에 진출한다. 양 팀의 1, 2차전 합계가 동점인 경우에는 원정 다득점이 높은 팀이 본선에 진출하지만 정규 시간 90분 동안에 원정 다득점 원칙을 통해 승자를 결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연장전 30분을 실시한다. 연장전에서도 승자가 결정되지 않으면 승부차기를 통해 승자를 결정하게 된다. 경기 1차전 1차전은 2009년 11월 14일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크로크 파크에서 열렸다. 프랑스는 후반 27분에 기록한 니콜라 아넬카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승리했다. 2차전 2차전은 2009년 11월 18일 프랑스 생드니에 위치한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렸다. 전반전은 아일랜드가 전반 32분에 기록한 로비 킨의 골에 힘입어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끝났다. 후반전은 양 팀이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일랜드가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종료되었다. 프랑스와 아일랜드는 1, 2차전 정규 시간이 끝난 상황에서 합계 1-1 동점을 기록했기 때문에 연장전에서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프랑스의 반칙 행위는 연장전 전반 13분에 벌어졌다. 프랑스의 플로랑 말루다는 아일랜드 진영의 센터 서클 바로 옆에서 올린 프리킥을 올렸고 프랑스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티에리 앙리는 말루다가 올린 볼을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받았다. 티에리 앙리는 자신의 왼손에 맞았던 볼을 윌리암 갈라스에게 올려주었고 갈라스는 곧바로 자신의 머리로 골을 기록하면서 1-1 동점을 만들었다. 이 상황을 지켜본 몇몇 아일랜드 대표팀 선수들은 페널티 박스 안에서 팔을 뻗으면서 심판들에게 프랑스의 명백한 반칙 행위라며 항의했지만 심판들은 프랑스의 골을 인정했다. 아일랜드의 셰이 기븐 골키퍼는 프랑스의 핸드볼 반칙이라며 대기심에게 항의했고 아일랜드의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도 이에 동조했다. 반응 영국,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영어권 언론 매체들은 이 사건을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간의 1986년 FIFA 월드컵 8강전 경기에서 일어난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Hand of God) 사건에 빗대어 "앙리의 손"(Hand of Henry), "개구리의 손"(Hand of Frog), "갈리아인의 손"(Hand of Gaul)으로 명명했다. 브라이언 카우언 아일랜드 총리는 "페어 플레이는 경기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아일랜드 체육부와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는 국제 축구 연맹(FIFA)에 해당 경기의 판정에 대한 항의와 재경기를 공식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라고 밝혔다. 카우언 총리는 2009년 11월 19일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 연합 정상회의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사르코지 대통령은 브라이언 카우언 아일랜드 총리에게 "나는 축구 심판이나 프랑스 축구 연맹, 유럽 축구 연맹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얼마나 미안한가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FIFA는 "축구 경기 결과는 변경될 수 없으며 경기는 다시 열릴 수 없다. 이러한 규칙은 축구 경기 규칙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축구 경기는 심판의 최종적인 결정에 따른다."라면서 재경기 실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피용 총리는 "아일랜드 정부가 축구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하면서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일랜드 대표팀의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이러한 오심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축구에도 비디오 판독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프랑스 대표팀의 티에리 앙리 선수는 몇몇 언론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문제의 장면이 일어난 순간에 자신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을 뿐 일부러 반칙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또한 "가장 공정한 해결 방법은 재경기이겠지만 불행히도 이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 선수들에게 정말로 미안하다."라면서 아일랜드의 축구 팬들에게 사과 입장을 밝혔다. 아일랜드 축구 협회는 티에리 앙리의 사과를 계기로 FIFA 집행위원회에 재경기를 요구했다. 프랑스 축구 연맹(FFF) 또한 아일랜드 축구 협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FIFA는 다시 한번 재경기 요청을 기각했다. 아일랜드 축구 협회는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에게 아일랜드가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33번째 팀으로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은 아일랜드의 요청은 명백히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FIFA 징계위원회는 티에리 앙리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티에리 앙리는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편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은 문제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을 거절하는 등 아일랜드 축구 협회로부터 경솔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고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은 아일랜드 축구 협회에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프랑스는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우루과이, 멕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A조에 편성되었지만 1무 2패를 기록하면서 조 4위로 탈락하고 만다. 이에 아일랜드의 몇몇 축구 팬들은 프랑스가 조별 예선에서 탈락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같이 보기 스위스 대 대한민국 (2006년 FIFA 월드컵) 각주 2009년 축구 경기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FIFA 월드컵 예선 경기 2009년 11월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아일랜드-프랑스 관계 FIFA 월드컵 논쟁 2009년 논쟁
https://en.wikipedia.org/wiki/2009%20Republic%20of%20Ireland%20v%20France%20football%20matches
2009 Republic of Ireland v France football matches
Republic of Ireland vs France was a two-legged football play-off held on 14 and 18 November 2009 between the national teams of the Republic of Ireland and France as part of the UEFA second round of qualification for the 2010 FIFA World Cup. The first match was held on 14 November in Croke Park, Dublin, Ireland, and ended in a 1–0 victory for France with Nicolas Anelka scoring. The second leg, played on 18 November in the Stade de France outside Paris, France, finished 1–0 to the Republic of Ireland (with Robbie Keane scoring). The tie went to extra time and a controversial William Gallas goal enabled by captain Thierry Henry handling the ball twice made the score 2–1 on aggregate and France progressed to the World Cup at the Irish's expense. After the second leg, Henry admitted to Irish defender Richard Dunne that he had illegally handled the ball in the build-up to Gallas' match-winning goal, which had been scored in extra time with 17 minutes remaining. The incident led to calls from the Football Association of Ireland and Government of Ireland to the world governing body FIFA for the result to be set aside and for the game to be replayed, and later for Ireland to be allowed to enter the World Cup as an unprecedented supernumerary 33rd team. Henry, previously seen by many in the sport as a fair footballer, was characterised as cheating, with the incident being compared to Diego Maradona's "Hand of God" goal, and TIME magazine comparing Henry's goal (sometimes called "Le Hand of God" or "Le Hand of Frog") to a top ten list of sporting cheats. Henry considered retiring from international football due to the reactions to the game, while Swedish match referee Martin Hansson considered quitting as a referee. The result sparked debate on the issue of fair play in football, and fuelled the ongoing debate on the introduction of video refereeing and Additional Assistant Referees into the sport. At an emergency meeting of the FIFA Executive Committee called in part as a result of the handball controversy, FIFA announced it was setting up an inquiry into the options for technology or extra officials in football, but ruled out any changes being introduced in time for the 2010 World Cup. Henry's case was passed to the FIFA Disciplinary Committee for investigation, which ruled that it could not sanction Henry under the text of the FIFA Disciplinary Code. Route to the matches The qualification process for the 2010 FIFA World Cup in South Africa began in 2007, and as Europe-affiliated teams (both being members of UEFA) France and the Republic of Ireland became two of 53 teams competing for 13 places in the finals. Under the rules for the 2010 tournament, UEFA qualification was a two-stage process, as had previously been the case for qualification in 2006. Teams were able to qualify automatically by winning one of nine qualifying groups (the first round), and a second chance to qualify was given to eight of the nine second-place finishers via a knock-out phase (the second round) of four games between those eight second-placed teams, contested over two legs, home and away, with the winners of each pairing being awarded one of the four remaining UEFA qualifying places. Both France and the Republic of Ireland failed to qualify as winners of their first-round groups (France in Group 7, the Republic in Group 8), but both teams finished in second place with enough points to allow them to advance to the second round. FIFA announced on 29 September 2009 that it would modify the draw system used to select second-round pairings by introducing a seeding system. In the draw, held in Zürich on 19 October, the eight teams were divided into two pots of four; France were seeded along with Greece, Portugal and Russia, while Ireland was unseeded, alongside Bosnia and Herzegovina, Slovenia and Ukraine. Ireland was drawn to play France, with the first of their two games to be played in Ireland on 14 November 2009. The way the seeding process was handled led some to claim at the time that UEFA had changed the rules halfway through to favour to the higher profile teams like France and Portugal, preferring them to qualify over "smaller" nations. The 18 November date of the second leg of the France vs Republic of Ireland play-off in Saint-Denis coincided with the date of a number of other World Cup qualification matches around the world, marking the completion of the entire qualification process for 2010. With their win, France ultimately joined Algeria, Greece, Slovenia, Portugal and Uruguay as the last of the 32 competitors in South Africa. Under the agreed tie-break criteria, the team scoring more goals on aggregate wins the play-off. If scores are level on aggregate, the team with the higher number of away goals advances. If teams are level on away goals, 30 minutes of extra time is played. If the score is level after extra time, the match goes to penalties. Pre-match Venue selection The Dublin leg of the tie was held at Croke Park instead of the Republic of Ireland's traditional home venue of Lansdowne Road, owing to ongoing redevelopment of that venue as the Aviva Stadium. The French leg was held at Stade de France, the French team's national stadium near Paris. Analysis Before 1990, the Republic of Ireland had never qualified for the FIFA World Cup finals, while France's best record was two third-place finishes, in 1958 and 1986. Between 1990 and 2006 (the year in which the most recent FIFA World Cup had been held), the Republic of Ireland and France had each qualified for three finals tournaments. The two teams' records for the tournament were as follows: Matches Dublin leg Summary The Republic of Ireland team chose a balanced 4-4-2 formation, while the French team opted for their customary 4-2-3-1 formation, favouring offensive play over defence. Details Saint-Denis leg Summary A controversial instance of misconduct occurred during extra time in the second leg of the two-legged tie, when the overall score was standing at 1–1 on aggregate. French player Florent Malouda took a free kick just outside the centre circle in the Irish half of the field. He lofted it toward French captain Thierry Henry, who was making a run in the penalty area to Irish goalkeeper Shay Given's right-hand side. The ball bounced once to Henry, now inside the goal area to the left of the goal. As it bounced upwards, Henry handled the ball twice with his left hand, stopping it going out of play and bringing the ball under control, before tapping the ball with the outside of his right foot past Given standing at the near goal post. The ball travelled the short distance to William Gallas arriving in the middle of the goal, who headed the ball into the Irish net to confirm France's place at the 2010 FIFA World Cup. The referee immediately signalled the goal as being valid. Irish players inside the penalty box appealed the decision by raising their arms, and as Henry wheeled away in celebration around the back of the Irish goal, Given ran to the referee gesticulating that a handball offence had occurred, while Irish manager Giovanni Trapattoni did the same to the fourth official. The handball offence was not seen by the referee or his two assistants, according to the BBC. The match officials also missed an offside during the same phase of play. Details Post-match View of match participants Thierry Henry Henry told a reporter after the incident, "Yes, there was hand, but I'm not the referee. Toto was going for the front, I was behind two Irishmen, the ball ricocheted and hit my hand. Of course, I continued to play... The referee did not whistle 'hand' but I can't say there wasn't hand." Henry later defended himself against criticism, stating, "Obviously I would have preferred that things panned out differently but I am not the official. I do not think we have stolen qualification". After FIFA denied the Football Association of Ireland (FAI) request for a replay, Henry released a statement. The fairest solution would be to replay the game but it is not in my control...Naturally I feel embarrassed at the way that we won and feel extremely sorry for the Irish who definitely deserve to be in South Africa...I have said at the time and I will say again that 'yes' I handled the ball. I am not a cheat and never have been. It was an instinctive reaction to a ball that was coming extremely fast in a crowded penalty area....As a footballer you do not have the luxury of the television to slow the pace of the ball down 100 times to be able to make a conscious decision...People are viewing a slow motion version of what happened and not what I or any other footballer faces in the game. If people look at it in full speed you will see that it was an instinctive reaction. Henry said that he had considered quitting international football after the reactions to the incident, but was persuaded not to by friends and family. He criticised the French Football Federation (FFF) for their lack of support in the aftermath of the controversy. He regretted the immediate celebration of the goal but put it down to the emotion of the moment, and reflected that not informing the referee had been a mistake. On the issue of lasting impact of the incident, Henry said "I don't think that all I have achieved in my career up until now will be spoiled by this". Henry later called FIFA President Sepp Blatter over the incident. Blatter stated Henry had told him his family had been threatened over the incident by fans. Match referee The match was officiated by a Swedish team. Martin Hansson was the match referee, assisted by his two assistant referees, Fredrik Nilsson and Stefan Wittberg. Referee Hansson told Sveriges Radio Blekinge "I cannot comment on the game itself but life must go on. I will ride this storm as well". In his first substantial comment on the incident, Hansson spoke to the regional Swedish newspaper Sydöstran on 24 November. While repeating the fact that FIFA rules prevented him commenting on the game until the investigation concluded, he said the incident was neither his or his referee team's fault. Referring to a graphic illustration printed earlier in The Times and reproduced in some Swedish newspapers, he said "[the graphic] clears the whole refereeing team in this incident". The picture, titled 'Why the referee missed it', purported to show how neither the referee or the assistant referee could have seen the handball incident, due to the presence of three Irish players blocking Hansson's view from his position on the edge of the penalty area, and Irish goalkeeper Shay Given's position obscuring the sightline of the assistant referee, Nilsson, who was standing on the right hand touchline. He also stated that the reaction to the game had made him consider quitting his job as a referee. On 21 June, during the World Cup finals, Hansson said, "After the game, we were sitting in the dressing room and I cried. I realized what a mistake it was." Team managers Ireland manager Giovanni Trapattoni stated he did not blame Henry, nor did he expect a replay would occur, but he did believe the incident would bring further pressure on FIFA to introduce goal-line technology, stating "There is a 30-second stop and we clarify the situation...I'm sure in the future they will have to do something about it. It wasn't up to Henry to say 'I touched it with my hand'". Trapattoni also questioned the selection of the match referee, stating "For this important game we needed a stronger referee – an important referee", and went on to also question the format of the qualifying round matches. French team manager Raymond Domenech said of the game, "I don't see what we could have done better...We needed to qualify and we did that, even if it was painful. Victories like this one, at the end of a difficult campaign, give this side heart and soul", although criticism in France of his team, which had existed before the game, continued. Domenech later criticised the condemnation of Henry and France, and questioned the right of former French players like Cantona and Lizarazu to criticise his record as the French coach. Other players Ireland captain and scorer of Ireland's goal in the controversial match Robbie Keane criticised the presidents of FIFA and UEFA following the result, claiming they would be 'delighted' that France had gone through. He told BBC Radio Five Live, "They're all probably clapping hands, Platini sitting up there on the phone to Sepp Blatter, probably texting each other, delighted with the result." After Henry's statement, Keane concurred with his call for a replay in the interest of fair play, stating "On behalf of the Republic of Ireland players, I would like to thank Thierry Henry... As captain of the French team, to make such a statement took courage and honour, and all of us recognise that". In general, the Irish players blamed the officials rather than Henry. Damien Duff admitted he would have done the same had it been to Ireland's advantage, and said: "If it was down the other end and it was going out of play, I would have chanced my arm. You can't blame him (Henry). He's a clever player – but you expect the ref to see it, it was so blatant." Many players, including Duff, supported call for the introduction of video technology. Sean St Ledger hoped France would be put in a 'group of death' in the World Cup draw, but feared they might go on to win the tournament. Defender Richard Dunne later spoke of how he was unaware of the extent of Henry's involvement when he sat down with him on the pitch at the end of the match and admitted the handball. Dunne properly viewed the incident for the first time on a computer in his team's dressing room. He also described how "heartbreaking" the whole experience was, his lack of interest in the draw or who France's opponents might be in the finals and how "disappointing" it would be when the tournament eventually took place. Given was critical of Sepp Blatter's later actions, stating his various announcements "rubbed salt in the wounds" and his contradictory comments about Henry were "beyond a joke". He expressed doubt he would get over the incident in his lifetime. Of Henry, he said "I'm not saying he's a cheat but what he's done is illegal". Dunne was later critical of Blatter's offer of moral compensation, describing it as "taking the mickey". He doubted Robbie Keane would be going to FIFA to collect any such award. He reiterated the belief that ever since the earlier seedings controversy, FIFA had been showing France unfair favour. Action taken FAI appeal The FAI filed a formal complaint with FIFA and the FFF, stating, "The handball was recognised by the FIFA commissioner, the referee observer and the match officials, as well as by the player himself." The FAI cited precedent for the invalidation of the result, using the example of a previous World Cup qualification match between Uzbekistan and Bahrain, overturned by FIFA due to a 'technical error by the referee of the match'. In that game, the referee had failed to have a penalty kick re-taken after an attacker encroached on the penalty area. FAI chief executive John Delaney said "It is up to the people who govern the game now, if they really believe in the principles of fair play then step forward....If we had qualified in this manner, I wouldn't be happy" The president of the (FFF) Jean-Pierre Escalettes said "You have to take a philosophical approach to this match." On 20 November, FIFA rejected the request for a replay, stating to the FAI: The result of the match cannot be changed and the match cannot be replayed. As is clearly mentioned in the Laws of the Game, during matches, decisions are taken by the referee and these decisions are final. After FIFA and Thierry Henry's statement, the FAI urged the FFF to respect their views and those of the captains of both teams, to replay the game to "protect the integrity of the game worldwide". The FFF, while sympathetic, endorsed the FIFA ruling. Following the FFF's refusal to support a replay, the FAI expressed "deep disappointment". FAI proposals and 33rd team place At the request of the FAI, Sepp Blatter met an Irish delegation in Zürich for 90 minutes on Friday 27 November. The FAI proposed a number of ways the incident could be prevented in future and, agreeing that the match could not be replayed, they instead also officially requested to be allowed to enter the World Cup as an unprecedented extra 33rd entrant. Blatter stated that he would raise the Irish request at an extraordinary general meeting (EGM) of the FIFA executive committee. RTÉ Sport speculated that the request would be "politely turned down". The request drew 'laughter' when he relayed it to the Soccerex conference the following Monday. Blatter was of the opinion that if the Republic of Ireland were admitted as an extra entrant, Costa Rica would also have to be considered as well, having also been unfairly eliminated by an offside goal in a play-off against Uruguay. FIFA secretary-general Jerome Valcke had ruled it out on 1 December, one day before the meeting, clarifying that Blatter's comments regarding other teams had already shown the request was "impossible" and had "no hope" of being granted. According to The Guardian on 30 November, the Irish had not expected the request to be successful, but they had also "asked FIFA to consider compensating them in some other way, perhaps by seeding them in the draw for the 2014 World Cup". The FAI's proposals included: no changes to competition formats mid-tournament (referring to the play off group seeding change), introduce video technology at the highest level, implement additional assistant referees behind the goal line for all international matches, introduce stronger sanctions for players who breach the Laws of the Game in a "match defining way", and issuing a statement that "FIFA does not condone breaches" of those Laws, referring to Sepp Blatter's previous statements of empathy with Henry. The FAI stated they did not ask for any action to be taken against Henry. Delaney reacted angrily to Blatter's public disclosure of what was intended to be a confidential submission to the FIFA executive committee, complaining to the FIFA general secretary and calling it "disrespectful to our country", and stating the 33rd team proposal had been "very much peripheral" to their suggestions, and was only discussed "for a minute or two" in the meeting. The FAI asserted that the 33rd place request had not even been included in any of the written submissions to FIFA. Sepp Blatter Blatter had initially faced criticism for refusing to comment on the incident. His first comments came with a report in L'Équipe, and during his opening address at the Soccerex football conference in Johannesburg, South Africa, both on Sunday 29 November. Blatter said that it had not been Henry's responsibility to tell the referee of the misdemeanour, comparing a similar incident in his own playing career, when he did not tell the referee about an advantage gained by shirt-pulling. Blatter said that referee Hansson "should have taken the time to reflect rather than immediately awarding the goal". On the issue of fair play, Blatter said "There is a lack of discipline and respect in the game by the players because they are cheating" and "How can it happen that all over the world, through TV cameras, we have seen through a cheating handball that a pass was given for a goal? Everyone is asking what is and what isn't fair play. The highest crime in football is touching the ball with the hands". Referring to the possibility of using assistant referees or goal line technology, Blatter stated, "match control is now is on the agenda. How shall we avoid such situations as we have seen in this very specific match?" Blatter repeated his stated opposition to video refereeing, saying, "With technology, you have to stop a match. You have a look at cameras... We have to maintain the human face of football and not go into technology." On the issue of fair play at the World Cup, Blatter commented after the FIFA executive committee's EGM: I appeal to all the players and coaches to observe this fair play. In 2010 we want to prove that football is more than just kicking a ball but has social and cultural value... So we ask the players 'please observe fair play' so they will be an example to the rest of the world Blatter apologised to the FAI on 2 December for the public disclosure of the FAI's submission to FIFA and for the media's perception of his comments at Soccerex, saying, "I have nothing against the Irish, they were very sporting people when they came to FIFA and it is a pity that it has been now communicated in this way." After the EGM, John Delaney described FIFA as the "biggest losers" in the controversy for having "made one mistake after another", referring to the mid-competition change in seeding rules for the play-off, the negative imagery of football as a whole generated by FIFA's actions and Henry's goal, and Sepp Blatter's subsequent dealings with the FAI. FIFA executive committee On 23 November FIFA announced that the FIFA executive committee would hold an extraordinary general meeting (EGM) on 2 December in Cape Town, where members were already due to meet to discuss the seedings for the World Cup, in order to discuss various recent incidents affecting the world game. According to BBC Radio 5 Live sports news correspondent Gordon Farquhar, the Henry incident would be "high on the agenda". Gordon Smith, the chief executive of the Scottish Football Association and a member of the 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 believed that introduction of AARs in time for the World Cup would be pressed for at the EGM by UEFA president Michel Platini, who had been a long-time supporter of the concept; Smith said of the proposal, "I feel that it has its advantages at the highest levels of the games. When there's massive TV coverage the problems are highlighted all over the world so this is something we may have to look at." The FAI was to be given the chance to present their views at the EGM, with Delaney hoping it would not be a "token" gesture, criticising the lack of direct contact from FIFA. FIFA President Sepp Blatter confirmed on 30 November that the EGM would consider the use of AARs and goal-line technology in the 2010 World Cup, and changing the two-legged play-off qualification format, possibly in favour of a single game played at a neutral venue. The EGM was held on 2 December at the Cape Town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re. The executive committee at the time consisted of FIFA president Sepp Blatter, eight vice-presidents and 15 members, and the FIFA general secretary Jérôme Valcke. The membership included representatives of various confederations and associations around the world. In response to Blatter's comments at Soccerex and before the EGM, the FAI formally notified FIFA in writing that they were withdrawing their request to enter the World Cup as a 33rd team, and accordingly this matter was not considered. The FAI's other suggestions were, however, discussed. According to FIFA, the EGM discussion resulted in "concrete proposals" to ensure that improvements were made on the issues raised. According to Blatter, the committee recognised the game was at a "crossroads" and that, at the highest levels, where 32 cameras were to be used to film the 2010 World Cup, it was now "impossible" for just the referee and his two assistants to "see everything". The EGM announced that FIFA would be setting up an inquiry into future use of extra assistants and technology. The new inquiry would, according to Blatter, "have a look at technology or additional persons". Described as a "full inquiry" or "working party" by media commentators, it was to comprise a new FIFA committee with input drawn in part from the existing FIFA referees', football, technical and medical committees. The expected introduction of AARs for the 2010 World Cup was ruled out. The committee "stressed that it would be too soon to implement this new system at the 2010 FIFA World Cup South Africa." Blatter explained that, as AARs had not yet been trialled outside of Europe, the committee was of the opinion that any experiment must be carried out "globally" before it could be used in a World Cup. Blatter confirmed that the experiment with AAR's in the Europa League would continue into the 2010 knock-out stages. The meeting also ruled out the use of video refereeing systems similar to those seen in rugby, cricket and tennis. Blatter stated that two companies investigating goal-line technology were due to report their results to 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 (IFAB) in March 2010. FIFA also called on the general secretaries of the Continental Federations to propose improvements to the format of the qualification and play-off phase of the World Cup competition, for submission by March 2010. Henry disciplinary investigation On the issue of possible disciplinary sanctions against Henry individually, a FIFA spokesperson stated "The [independent] disciplinary commission...will decide if the case is of interest [when they meet sometime in the next two weeks]. The possibility exists of sanctioning a player for unsporting behaviour on the basis of video evidence". Examples of FIFA disciplinary action taken against players for incidents missed by the referee based on video evidence include banning Mauro Tassotti for eight games for use of an elbow during the 1994 World Cup quarter-final, and banning Marco Materazzi for two games for his verbal provocation of Zinedine Zidane in the 2006 FIFA World Cup Final, resulting in the infamous headbutting incident. On 2 December after the FIFA EGM it was announced that FIFA's disciplinary committee would open an investigation into Henry's handball. No timetable was given for when the investigation, chaired by Swiss lawyer Marcel Mathier, would rule on the case. Blatter said of the decision to single out Henry for investigation of a handball: I have not said that Thierry Henry will be punished, I have said that Thierry Henry will be examined [by the committee]...it's not a question of this player or another – it was blatant unfair play and was seen all around the world...let [the committee] make the decision. Fair play must be maintained in our game According to the Associated Press, the committee had the "authority to impose a one-match suspension on Henry, which would take effect at the start of the World Cup in June". According to the BBC, FIFA said "there was no certainty Henry would be banned if found guilty". On 18 January 2010 it was announced that Henry would face no sanctions in relation to the incident, after the committee found it had "no legal foundation" to deal with the case, as the relevant rules only covered sanctions for preventing a goal by illegally handling the ball. FIFA rules reportedly forbade any other action as the referee had not seen the original incident. FIFA released the following statement: the Disciplinary Committee reached the conclusion that there was no legal foundation for the committee to consider the case because handling the ball cannot be regarded as a serious infringement as stipulated in article 77a of the FIFA Disciplinary Code. There is no other legal text that would allow the committee to impose sanctions for any incidents missed by match officials. The FFF president Jean-Pierre Escalettes hoped the announcement would mark the end of the incident, stating of the decision that is "not astonishing, it is logical". France national team FIFA secretary general Jérôme Valcke later denied that France's absence from the top 8 seeded teams for the 2010 World Cup draw had been a result of the controversy, stating that the change to the seeding system (using the world rankings as they stood at October 2009) was fairer than past systems. The FFF president described the decision as logical, although former French coach Michel Hidalgo disagreed. In a quirk of the resulting draw, the lack of seeding ultimately did not have a detrimental effect on France, as they were drawn into Group A; since the seeding place in Group A had already been allocated to the host nation South Africa, a Group A draw was the only possible outcome where France would not have been placed into a group with one of the top seven seeded teams. South Africa were ranked 86th in the world at the time, making them the lowest-ranked team competing in the tournament; The Irish Times commented that this turn of events in France's favour would cause the Irish to feel particularly aggrieved. At the finals, France ultimately failed to qualify from their group, failing to win a game and managing only a solitary point in their first match against Uruguay; following a major disruption at the team's camp by the French players. France and the Republic of Ireland did not meet in the qualifying matches for the 2012 European Championships. France were drawn in Group D while Ireland were drawn in Group B, although they were drawn together in the practice run for the draw held the day before. FAI compensation After the FIFA EGM, John Delaney said, "In terms of the football side, this is the end of the matter", but that "the incident will linger long in the memory like Diego Maradona's handball." Delaney hoped the promise of an inquiry into refereeing and technology was "not a fudge." The FAI and FIFA were however due to meet again after the EGM according to Blatter, to discuss some form of non-financial compensation for the controversy. On 4 June 2015 it emerged during an RTÉ interview that FIFA had bought the FAI's silence with a €5 million payment which would prevent any legal action against them. Match officials In January 2010, match referee Hansson and his assistant Stefan Wittberg were both selected as one of the thirty officiating teams to be used at the 2010 World Cup; however, Hansson's other assistant on the day of the incident, Fredrik Nilsson who missed the handball, was not selected, being replaced by Henrik Andrén. FIFA had insisted at the time of the incident that, since selection of referees for the World Cup referee was based on long-term assessments, Hansson would probably make it to the finals. UEFA president Michel Platini called it a good decision, defending Hansson as having not been responsible for the incident as he had not seen the handball. Reaction The incident has been compared to Maradona's infamous "Hand of God" goal in the 1986 World Cup, which led to the incident being labelled as the "Hand of Frog" the "Hand of Gaul" and the "Hand of Henry" affair. Governments and politicians Irish Taoiseach Brian Cowen called on FIFA for a replay, stating that "fair play is a fundamental part of the game". Cowen raised the issue with French President Nicolas Sarkozy while both were at the European Union summit in Brussels on 19 November 2009. After the summit, Sarkozy stated, "I told Brian Cowen how sorry I was for them...But don't ask me to substitute myself for the referee, or the French football authorities, or the European football authorities." The incident was criticised in Dáil Éireann, the lower house of the Irish Parliament. The Irish Minister for Justice Dermot Ahern called on FIFA to act in the interests of fair play. The French Prime Minister François Fillon stated that the 'Irish government should not interfere in footballing decisions'. Rama Yade, French Secretary of State for Sports, and FFF vice-president Noël Le Graët both defended Henry from accusations of intentional cheating, pointing to his playing record, and stating that he should be presumed innocent unless he stated he deliberately set out to cheat. The French Sports Minister Roselyne Bachelot and Christine Lagarde Minister of Economic Affairs were sympathetic to the Irish viewpoint. Sports administrators On the eve of Henry's possible punishment being discussed at the FIFA EGM, FFF technical director Gérard Houllier defended Henry, stating the handball was instinctive and that the blame lay with the referee, pointing out that had the goal not been scored, the match would still have gone to penalties. Houllier also called for the introduction of video refereeing. According to The Independent, the organiser of the 2010 World Cup Danny Jordaan resisted calls for video refereeing and believed that 'disputed decisions should be considered part of football'. Leslie Irvine, the Northern Irish former referee and FIFA instructor on the referee selection panel for the 2010 World Cup, was of the opinion that referee Hansson was not to blame for the incident, as by simply not seeing the incident he had not committed a 'technical infringement', and said Thierry Henry bore "moral responsibility" for the controversy. Jacques Rogge,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 praised Henry's decision to express his regrets over the affair, but declined to comment further, having not seen the incident. On the eve of the FIFA EGM, FIFA Secretary General Jérôme Valcke, while lamenting the fact that after 853 matches in the qualifying process, only one was being talked about, he said "It's important to make sure what happened will not happen again". Football personalities While in Dublin on 26 November for a charity event, Pelé said "maybe the linesman could help, but even the linesman doesn't see the game. We say fair play, but you know I don't think it was unfair, something that goes in one second... The result was unfair, but unfortunately you can't change that" Football pundits Johnny Giles, Eamon Dunphy and Graeme Souness, analysing the video replays on RTÉ Two, disputed whether Shay Given or anybody else was obscuring the view of the assistant referee from seeing the incident, although they were not certain the assistant could have flagged with certainty for handball even if he had a clear line of sight, due to the speed of the incident and flight of the ball. Former Irish international and football pundit Mark Lawrenson said "The man cheated. He controlled the ball with the second handball. It is a Maradona moment". Another former Irish international Tony Cascarino wrote in The Times that Henry "speaks so eloquently, but to me now he'll always be insincere, a faker, someone who cares only about himself". Former French international David Ginola said "I'm very embarrassed by the situation...I don’t feel very proud to be French this morning. The Irish played very well and they deserved to go through as much as France, maybe more. I'm very surprised FIFA haven't mentioned anything about it – the whole world saw the handball. This is a pure injustice. Everyone in France, the press and everyone, says there should be a replay". Former Ireland captain Roy Keane said the attempt by the FAI to get a replay was "rubbish", telling them to "get over it", that France were there for the taking and Ireland should not have allowed Henry to be in such a good position in the first place. Keane later apologised to any Irish fans offended by his "over the top" comments. Henry's former France teammate Bixente Lizarazu stated "It was not something to be proud of. I'm not going to party." Henry's former Arsenal and France teammate Emmanuel Petit wrote that "The feeling among the French public on Thursday morning was one of embarrassment – we didn't want to qualify in controversial circumstances, we wanted to beat Ireland by playing within the rules" and "Thierry's handball will not send out a good message", but he was of the opinion that this "very rare indiscretion" would not damage his reputation, explaining that "There is a referee on the pitch and if he didn't see that's not France's problem." Petit later criticised FIFA and UEFA for their lack of support for Henry, and believed that Henry had saved Raymond Domenech's job. French player Patrice Evra questioned the patriotism of those French people attacking Henry, and was of the opinion that those same people would have criticised Henry had he informed the referee he had committed handball. Former French captain Patrick Vieira blamed the referee for the controversy, and supported the idea of video refereeing or having a fifth referee to assist in games. Former French international Eric Cantona was critical of Domenech, and referring to Henry's immediate post-match act of consoling an Irish player, said "If I'd been Irish, he wouldn't have lasted three seconds." Another former Arsenal teammate Lee Dixon wrote that Henry had gone down in a lot of Arsenal fans' estimations, and Henry "has been a truly great footballer – one of the best players we've ever seen in the Premier League – but now people will remember him for that goal against Ireland. It's really sad". England footballer David Beckham defended Henry, stating "I honestly didn't think Thierry meant it...I know him as a player and a person. He's a good person and a great player... these things happen in football" Henry's former Arsenal manager and Frenchman Arsène Wenger said of the incident that "This isn't the French way and football should learn from this", although he theorised that Henry did not inform the referee due to "the pressure and what's at stake". Wenger later added, "For the sense of justice it is quite embarrassing to see...I think even France is embarrassed...we won the game and won the qualification with a goal that was not a goal". Wenger believed Henry, who was one of the "fairest [players] I've managed", was being unfairly left to face criticism by France, and that the real issue was the lack of technology being in place. Manchester United manager Sir Alex Ferguson was of the opinion that "every player and manager in the world" thinks that "technology can play a part" to help referees, but recognised that it was FIFA who had to be convinced. Henry's club manager of Barcelona, Pep Guardiola said as Henry returned to training in Spain that he "is not proud to have done that, but it wasn't premeditated", and gave guarded support for use of video refereeing. German Robert Huth expressed sympathy with the Irish, but on the merits of a replay, contrasted the lack of a replay after the controversial goal in the 1966 World Cup final. Danish goalkeeper Brian Jensen said "He didn't do it on purpose? Blah blah blah. My 'beep'. I won't say the word cheats – but ... I said it". Thierry Roland, described by the Times as the "doyen of French TV football commentators", said of the game "It's a scandal, a shame with a capital S." Media According to the BBC, the game "attracted mass news coverage across Europe". Agence France-Presse (AFP) described how the result of the game sparked an "international outcry" and how as a result of the handball, Henry had been "pilloried as a cheat around the globe". Time magazine immediately named Henry as number 1 in a List of Sporting Cheats, ahead of Crashgate (listed as number 2), Black Sox Scandal, Ben Johnson, Tonya Harding, Doping in East Germany, Rivaldo at the 2002 World Cup, Boris Onishchenko, Basketboo, Hansie Cronje and the original Hand of God goal (listed as number 11). Sky Sports estimated qualification for the 2010 World Cup was worth £26.7m to Irish football, and was worth a similar amount to the French. FAI chief executive John Delaney denied the issue was about money, rather a matter of "fair play and integrity". The 2010 tournament prize money was later confirmed by FIFA as being $9m for participating, a further $9m for exiting the group stage, with potential prize totals rising to $30m for the eventual winners. Spanish media, where Henry had played his club football since leaving England in 2007, took great interest in the event. The Spanish daily sports newspaper Diario Marca carried the headline "Football rails against 'cheating' Henry". French newspaper L'Équipe greeted the incident with the headline 'Hand of God', while Le Parisien had "Henry Saves France With His Hand.", and Le Figaro led with "Henry: 'I Am Not the Referee'." L'Equipe also wrote, "France have qualified for the 2010 World Cup, that's for sure, but the result, the most essential thing in sport after all, is not enough to erase the uneasy feeling we had last night". Le Parisien also wrote "The handball of Henry has brought a decisive contribution to the theme 'being French is being ashamed of one's national team'". Le Monde noted the lack of any calls for a replay following the controversial penalty for handball that went in Ireland's favour, during their previous Group 8 qualifying game against Georgia on 11 February 2009. Australia's Daily Telegraph said Henry would "earn a place in infamy as one of the biggest cheats in world sport". Swedish newspapers advocated that the Swedish referee used for the match Martin Hansson be removed from further major international assignments. Aftonbladet declared of the officials "that Team Hansson has also forfeited its right to continue to take charge of major international matches. Anything else would be a further insult to the Irish nation". Mark Ogden of The Telegraph criticised Henry for not informing referee Hansson during the game, and speculated the incident would 'ruin his career', comparing the cases of referees Anders Frisk and Tom Henning Øvrebø. In Britain, where Henry had spent much of his club career, The Sun'''s headline was "Le Hand of God: Cheat Theirry Does A Maradona.", while The Daily Mirror was "French Nickers.", with The Independent using "Hand Gaul!". The Los Angeles Times speculated the incident had the potential to ruin his reputation with a moment of "eternal notoriety". The Guardian's chief sportswriter Richard Williams wrote that the incident was worse than Maradona's foul, describing his handball as "a street kid's instinct", while Henry's was "a sophisticated man, and a much-decorated one." Williams also critiqued Henry's decision not to inform the referee, citing previous club football examples of players not taking advantage of a referee's mistake: Robbie Fowler in 1997 unsuccessfully pleading for the referee not to give a penalty in his favour, Paolo Di Canio in 2000 catching the ball rather than scoring past an incapacitated goalkeeper, and Costin Lazăr in 2009 successfully insisting he would not take the penalty awarded to him for what he saw as a fair challenge. Henri Astier wrote for BBC News that the reaction in France, a "nation not particularly known for its moral qualms", had ranged from "embarrassment to outrage". Dominic Lawson wrote in The Sunday Times that "[Ireland] has taken on the role of unjustly oppressed victim – something the Irish do well, having had several centuries of practice". Patrick Barclay, Chief Football Correspondent for The Times, declared that the Henry incident "ended the argument" over the issue of video refereeing. The Times also speculated that the incident might lead to a fast-tracked global deployment of the Additional Assistant Referee (AAR) system already under trial by FIFA, pointing out that under the trial configuration, the extra goal-line assistant would have been standing directly in front of Henry as he touched the ball with his hand. FIFA confirmed the AAR plan was to be discussed at the March 2010 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 meeting. On the issue of football introducing AAR's, The Wall Street Journal compared and contrasted the demands on referees in the World Cup compared to those in National Football League, National Hockey League and boxing, and relayed the negative experience of U.S. Soccer a decade previously, who took part in an international trial using two referees, one in each half, which 'led to poor game management'. The Times also questioned Henry's record on fair play, recalling his comments and actions during controversial incidents in a 2001/2 Champions League game against Panathinaikos, in the 2001 FA Cup Final, in the 2006 World Cup games against Spain and Portugal, in the 2006 Champions League Final and 2006–07 Champions League game against CSKA Moscow. Tim Rich of The Independent urged for video refereeing, asserting that the Europa League trial of AAR's had "not been an unqualified success", citing a failure of intervention by the goal line official in a game between Fulham, in which the players had to intervene themselves to ensure the main referee, Belgian Paul Allaerts, identified the correct man to send off after a foul on Roma player John Arne Riise, after mistakenly identifying the offender as Brede Hangeland. The player sent off was Stephen Kelly, ironically an unused Irish substitute in the controversial France game. Jonathan Clegg debated in The Wall Street Journal the effect of the incident on Henry's lucrative sponsorship deals, comparing it to incidents such as ING Group's withdrawal from the Renault F1 after the Crashgate controversy, the retention of sponsors by Harlequin F.C. after their Bloodgate fake injury scandal, and the enhanced fortunes of Zinedine Zidane in spite of his head-butting of Marco Materazzi in the 2006 FIFA World Cup Final. Gillette, who Henry represents in advertisements, were threatened with a boycott and an email campaign. A brand spokesman said that it would not affect their relationship with Henry. Susie Mesure of The Independent later speculated that there was now a 'Curse of Gillette' befalling its three major sporting representatives, with the Henry controversy being followed in quick succession by Tiger Woods' car accident on 27 November, and a rare defeat of Roger Federer by Nikolay Davydenko in the 2009 ATP Tour on 28 November. A Gillette spokesperson had earlier denied allegations made by The Sun that a version of the Gillette Champions poster showing the three men with a tennis racket, golf club and football, had been doctored to remove a ball from Henry's hand in the French version of their website. American radio host Jim Rome commented: "I'm glad the guy did it; it led to a goal...How 'bout that guy. The guy was just trying to make a play. I thought it was smart; I liked it. It led to a goal; what's not to like?" Speaking on Football Focus on 21 November, Philippe Auclair of France Football magazine said that, unlike Eric Cantona's "moment of madness", he could not see Thierry Henry earning a similar redemption in England for this "calculated moment of cheating". On 22 November, the Irish Independent claimed that the FFF had been willing to stage a replay and that FIFA would not have prevented it, but the offer had been blocked by the French manager Raymond Domenech. A The Wall Street Journal editorial supported FIFA's decision not to replay the match and distinguished the refereeing error from the one in the replayed Uzbekistan-Bahrain match. Henry Winter of The Telegraph wrote that FIFA had "gained some credibility" by deciding to investigate Henry after the EGM, whose presence at the World Cup would otherwise overshadow the Fair Play campaign, and that the Henry controversy made the case for having a panel of experts examine every major game after the event for infractions missed by the referee. Winter contrasted any possible punishment of Henry with the two-month ban issued to Diego Maradona for simply 'insulting reporters'. Diana Worman on Aljazeera.net criticised FIFA's decision to investigate Henry for an act that happens all the time, and would have only warranted a yellow card, writing "Henry should never have been expected to make a 'sportsmanlike' decision after the goal and it's unfair for Fifa to make an example of him". The Canadian Press criticised FIFA's "cowardly" decision to investigate Henry and do nothing to change the situation for the 2010 World Cup. The Irish Times stated that the FAI's recommendations to FIFA in the wake of the controversy had been "effectively disregarded" at the EGM. After the announcement that Henry would face no sanctions, Simon Rice of The Independent declared Henry had "got away with it", and compared his lack of punishment to nine other notable sporting incidents: Michael Schumacher (1994 Australian Grand Prix), Sir Alex Ferguson (against The Football Association generally), Graeme Smith (4th test, South Africa v England, 2010), Eduardo (diving against Celtic, 26 August 2009), Toni Schumacher (1982 World Cup semi-final), Trevor Chappell (the 1981 Underarm bowling incident), Andy Haden (Wales v New Zealand, 1978), Diego Maradona (1986 Hand of God goal) and Fred Lorz (1904 Olympics Men's Marathon). After the announcement, Agence France-Presse speculated that any discipliniary action for Henry would have presented an "unwelcome precedent" for FIFA, and any punishment would have been merely symbolic, given the lack of prior cases of such retrospective player sanctions. FIFA's subsequent decision to select referee Hansson as one of the 2010 World Cup officials was criticised by the Irish media, as well as UEFA president Michel Platini's comments that it would have been "great" if France and the Republic of Ireland had been drawn together for the 2012 European Championships. Other 'A few hundred' Irish fans marched from Lansdowne Road Stadium to the French embassy on Ailesbury Road in Dublin, to demand a replay. An online poll run by French newspaper Le Monde revealed 88% of the 97,000 respondents said "no" to the question "Does France deserve to be in South Africa?". A Facebook petition demanding a replay was signed by over 500,000. The French teachers' union SNEP-FSU condemned Henry's irresponsible example of "indisputable cheating". Henry's official Twitter page was reportedly suspended due to "strange activity". When the World Cup pool games began Pizza Hut Delivery Ireland began a promotion offering a free pizza to every goal scored against France. The Irish band, The Mighty Stef, wrote "Protest Song with No Name", which ends with the lyrics "you might cheat us, you might beat us, but you'll never lay a hand on our soul". The Corrigan Brothers wrote "The Hand of Henry", which includes the line "Sepp Blatter was happy". French company Le Coq Sportif were parodied over the incident, with an agency printing T-shirts with the words Le Coq un-Sportif. Irish bookmakers Paddy Power launched a two-week advertising campaign in the baggage claim area of Dublin Airport poking fun at Henry, with posters stating "Paddy Power welcomes you to Ireland... unless you're called Thierry". Cleaners in Ireland also reportedly vandalised the unrelated Henry brand of vacuum cleaner. Irish rockstar Bono called on FIFA to do the noble thing, not act bureaucratically, and grant Ireland's request to be added to the World Cup as a 33rd entrant. French philosopher Alain Finkielkraut said on Europe 1 radio that "We are faced with a real matter of conscience...We certainly have nothing to be proud of." British author Roger Scruton said "one of the major justifications of sport in all its forms is that it teaches the virtues of fair play...Victory achieved by cheating leaves a foul taste in the mouth...and makes the whole thing as pointless to [the defeated team and its supporters] as it is to someone like me who has never quite experienced the allure of the game". The founder of the British Philosophy of Sport Association called for "restorative justice", and said that players had an obligation to honesty that "over-rides their self-serving commitments". French economist Jacques Attali wrote "Nous sommes tous Irlandais", in reference to the Le Monde headline "Nous sommes tous Americains" (We are all Americans) in the aftermath of the 11 September attacks. Bookmakers William Hill stated they would refund any bets placed backing Ireland to qualify, to be "as fair as possible to everyone." Thierry Henry was "booed relentlessly" by fans of Athletic Bilbao in his first competitive match after playing Ireland. On 4 December 2009, Charlize Theron co-presented the draw for the 2010 FIFA World Cup in Cape Town, South Africa, accompanied by several other celebrities of South African origin. During rehearsals she drew an Ireland ball instead of France as a joke at the expense of FIFA, referring to the Thierry Henry handball controversy and France's controversial qualification. The stunt alarmed FIFA enough for it to fear she might do it again in front of a live global audience. Irish fans donned sombreros and cheered as Mexico beat France 2–0 in their second group stage match on 17 June 2010. France was subsequently eliminated from the World Cup following a 2–1 loss to host nation South Africa in their final group stage match, and finished at the bottom of Group A. During the World Cup, English comedian James Corden refused to acknowledge France on his "human wallchart" during his post-World Cup match TV show James Corden's World Cup Live, replacing France with Ireland, and when chatting with the Irish member of the wallchart, referred to players such as "Terry Henry" and "Paddy Evra", Irish variants of the names of France players Theirry Henry and Patrice Evra. The Irish playwright and novelist Dermot Bolger's stage play, The Parting Glass, is based around this game in Paris, with most of the second half of the play occurring during the actual match in the Stade de France, as an Irish father and son watch their final Ireland game together before the son emigrates to find work in Canada. Comparison to other events The 2010 Leinster Senior Football Championship Final between Louth and Meath held at Croke Park on 11 July 2010 drew comparisons with Thierry Henry's cheating due to its controversial ending in which Louth were wrongfully defeated by a last minute Meath goal which was thrown into the net and therefore should not have stood. Louth were in the lead at the time and would have won their first Leinster Senior Football Championship in 53 years if Meath had not been given the goal. Louth fans burst onto the pitch as the final whistle blew, chasing and physically assaulting the referee around the field, while a steward was knocked unconscious with a bottle during ugly scenes played out on live television. The referee was struck on at least three different points as he scrambled away from the baying mob. Meath chairman Barney Allen compared calls for the game to be replayed with Henry's moment of shame, saying "Ireland didn't get a replay when France got a lucky goal". As the controversy continued to erupt, RTÉ analyst Pat Spillane called it a "disgrace". Setanta Sports said the "goal" would "now go down in infamy as the GAA's Thierry Henry incident". During the 2010 World Cup, in extra time of a quarter-final match against Ghana, Uruguayan striker Luis Suárez handled the ball in the penalty area to prevent a last-minute game-winning Ghana goal. The act drew comparaisons with Thierry Henry's handball TV In 2011, "L'Affair Henry the, ahem, touchiest sporting controversy in living memory" received its own episode of Scannal, the TV series dedicated to scandalous events. The Evening Herald reviewer called it an "entertaining, tightly-packaged edition" of the show but also opined, "Where Scannal stumbled, however, was in its failure to go in with both feet on the cringe-inducing elephant in the room: John Delaney's embarrassing plea to Fifa boss, the odious Sepp Blatter, to let Ireland be "the 33rd team" at the World Cup". Early June 2010, Swedish film director Mattias Löw released the documentary film The Referee'', produced for SVT - Sveriges Television, where he follows the referee, Martin Hansson, of the infamous playoff match in Paris, for a year leading up to FIFA World Cup 2010. The film portrays the Thierry Henry handball incident in Paris in detail from the referee's point of view. References 2009 controversies 2009 in Republic of Ireland association football 2009–10 in French football 2010 FIFA World Cup qualification (UEFA) FIFA World Cup qualification matches FIFA World Cup controversies 2009 Republic of Ireland national football team matches France–Ireland relations France at the 2010 FIFA World Cup 2009 in Paris November 2009 sports events in Europe Football 2000s in Dublin (city) International association football competitions hosted by Paris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A%A4%ED%8A%B8%EB%9F%B0%EB%8D%98%EC%84%A0
이스트런던선
이스트 런던 선(East London Line)은 런던의 이스트엔드, 도클랜즈 및 사우스 지역을 통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행되는 런던 오버그라운드의 일부를 담당하는 철도 노선이다. 이전에는 런던 지하철의 노선 중 하나였다. 1869년 이스트 런던 철도 회사(East London Railway Company)에 의해 지어졌으며, 마차용으로 사용된 탬스 터널을 재사용하였다. 이 노선은 1933년 런던 지하철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었다. 지하철(Underground) 네트워크의 일부로 거의 75년이 지난 후, 2007년 12월에 대규모 재개발 및 확장을 위해 일시 폐쇄되었고, 2010년 4월에 오버그라운드(Overground) 네트워크의 일부로 재개통되었다. 클래펌 정션의 종착역과 함께 사우스 런던 선과 연결되는 2구간은, 2012년 12월 9일에 개통하여 런던 내부의 순환 궤도가 만들어졌다. 역사 이스트 런던 철도의 설립 이스트 런던 철도는 이스트 런던 철도 회사(East London Railway Company)에 의해 개통되었으며, 이 회사는 6개의 철도 회사의 컨소시엄으로 창안되었다.(각각 그레이트 이스턴 철도(Great Eastern Railway, GER), 런던, 브라이턴 & 사우스 코스트 철도(London, Brighton and South Coast Railway, LB&SCR), 런던, 체셤 & 도버 철도(London, Chatham and Dover Railway, LCDR), 사우스 이스턴 철도(South Eastern Railway, SER), 메트로폴리탄 철도(Metropolitan Railway), 디스트릭트 철도(District Railway)이다.) 후자의 두 운영자는 현재 런던 지하철의 메트로폴리탄, 서클, 디스트릭트 및 해머스미스 & 시티 선을 운영했다. ELR은 1865년 5월 26일에 LB&SCR, GER 및 SER 노선 사이에 연결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마크(Marc)와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이 1825년에서 1843년 사이에 마차용 객차를 위해 지은 탬스 터널을 재사용했다. 터널은 보행자만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량과 지붕 사이의 공간이 넓고 아치형으로 구분된 2개의 차도가 있으며, 탬스의 노스 뱅크의 와핑(Wapping)과 사우스 뱅크의 로더하이즈(Rotherhithe)를 이어준다. 토목공학의 개선은, 상업적으로 실패함과 함께 1860년대까지 불쾌하고 평판이 좋지 않은 장소가 되었다. 터널은 템스 강의 노스 및 사우스 뱅크 사이에 가장 동쪽의 땅 연결 지점이었고, 강 유역의 부두에 가깝고 양쪽 끝의 메인 라인 철도와 멀지 않았다. 터널을 철도로 전환하는 것은 새로운 터널을 뚫어서 만들지 않고도 크로스 탬스 철도(cross-Thames rail) 연결을 제공하는 이상적인 방법을 제공했다. 1865년 9월 25일, 이스트 런던 철도 회사는 터널의 소유권을 £800,000에 사들였다. 이후 4년 동안 회사에서는 기존 철도 노선과 연결하기 위해 터널을 통해 철도를 건설했다. 이 회사의 기술자는 존 호크쇼 경 (Sir John Hawkshaw)이었다. 그는 또한 브리스톨에서 I K 브루넬의 오랫동안 버려진 클리프톤 서스펜션 교(Clifton Suspension Bridge)의 주요 재설계 및 완성을 담당했다. 융자가 가능해짐으로 단계적으로 개통된 노선은 아래와 같다.: 1869년 12월 7일: 뉴크로스 게이트(또는 뉴크로스)에서 왑핑 간 개통, 런던,브라이턴 & 사우스코스트 철도(LB&SCR)에서 운영되었고, 뎁트퍼드 로드 역 (현재 서리 키스 역) 및 로더히스 역에 중간역이 있다. 1871년 3월 13일: 지금의 서리 키스 역의 남쪽에서 사우스 런던 선의 올드켄트 로드 역 간이 개통했다. 여객 수송은 1911년 6월 1일 이후 중단되었으며, 화물은 1964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이후 폐선되었다. 2012년 하반기 이 구간의 복원 및 직선화가 이루어져 런던 오버그라운드의 여객 서비스로 이용되고 있다. (아래 참조) 1876년 4월 10일: 와핑에서 쇼디치 간이, 채워진 도크의 바닥을 따라 부분적으로 구성된 개착식 터널을 통해 개통했다. 쇼디치에서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The Great Eastern Railway)와 리버풀 스트리트가 연결되었다. 중간 역은 새드웰 역과 화이트채플 역에 있었다. 1880년 4월 1일: 뉴크로스 역 (사우스 이스턴 철도) 개업에 박차가 가해졌다. 1884년 3월 3일: 세인트 메리스 커브 (St Mary's Curve)를 사용하여 화이트채플 역 남쪽으로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및 메트로폴리탄 디스트릭트 철도(Metropolitan District Railway) 개통에 박차를 가했다. 이를 통해 메트로폴리탄 철도 및 메트로폴리탄 디스트릭트 철도(디스트릭트) 열차는 그 해 말에 이스트 런던 철도에 대한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박차를 통한 여객 수송은 1941년에 중단되었지만, 빈 열차는 나머지 저심도 지하철 네트워크로 이전하기 위해 유지되었다. 조기 사용 이스트 런던 철도 회사 (East London Railway Company)는 인프라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통제하는 철도로 운영되었다. 증기 열차는 처음에는 GER, LB&SCR 및 SER에서 운영되었다. LB&SCR은 LBSCR A1형 테리어 기관차를 사용했는데 William Stroudley가 부분적으로 이 노선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했다. 이 차량은 승객과 화물 모두를 운송했으며, 1880년 4월부터 1884년 3월까지 LB&SCR은 리버풀 스트리트와 크로이던 간을, SER은 애디스콤과 리버풀 스트리트 간을 운행했다. 1884년 3월부터 9월까지 애디스콤에서 세인트 메리스 (MR & MDR 조인트 역)까지 SER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세인트 메리스에서 뉴크로스 (SER)까지의 메트로폴리탄 철도 서비스와 세인트 메리스에서 뉴크로스 게이트 (LB & SCR)까지의 메트로폴리탄 디스트릭트 철도 서비스가 1884년 10월 1일에 시작되었다. 10월 6일 해머스미스에서 뉴크로스 (SER)로, 해머스미스 (MDR)에서 뉴크로스(LB & SCR)로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켄트 지방의 탄전이 개발되기 전에, 북쪽의 석탄을 남부 런던에 공급하기 위해 메이드스톤과 브라이턴과 같은 멀리 떨어진 곳에 석탄을 저장하는 것이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노선의 북쪽 끝에 있는 접근은 어려웠다.: 열차는 26대의 화차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레이트 이스턴(Great Eastern)의 리버풀 스트리트 역으로 가야했고 ELR에 앞으로 나아갔다. 1900년 10월부터 스피타필즈(Spitalfields)의 그레이트 이스턴 석탄 창고에서 화이트채플 인근의 ELR siding까지의 추가 용량이 2톤의 화차를 운반하는 화차 리프트를 제공했다. 평면 교차는 1966년에 끝나고 리프트는 스피타필즈 창고에서 화재 발생 후 1967년에 폐쇄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디스트릭트 철도가 1905년에 전철화 되면서, 1905년 7월 31일을 마지막으로 ELR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1906년 12월 2일 이후에 서비스를 일시 중단했다. LB&SCR 와 GER 서비스는 계속되었으며, SER 서비스는 1906년 12월 3일에 재개되었다. 노선이 전철화 되면서, 관리 철도에서 업그레이드 자금을 제공하고 메트로폴리탄 철도에서 차량을 제공했다. 전철 서비스는 1913년 3월 31일에 시작되어 두개의 남부 종착지에서 에지웨어 로드 역와 하이 스트리트 켄징턴 역을 경유하여 쇼디치 및 사우스 켄징턴 역으로 연결되었다. 1914년에는 사우스 켄징턴 행 서비스가 해머스미스 & 시티 선의 해머스미스 행으로 전환되었다. 1923년 그룹화 이후 런던 및 노스이스턴 철도(London and North Eastern Railway, GER의 후신)에서 상품 서비스를 운영했으며,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승객 서비스를 계속 제공했다. 런던 지하철 시대 1933년 이스트 런던 철도는 런던 여객 수송위원회(London Passenger Transport Board)의 통제하에 있었다. 인프라는 여전히 민영 소유이지만, 여객 서비스는 메트로폴리탄 선의 "이스트 런던 지선(East London Branch)"으로 운영되었다. 1948년에 철도는 국유화되었으며 지하철과 함께 영국 교통 위원회(British Transport Commission)의 일부가 되었다. 서비스는 1962년까지 노선을 계속 사용했으며, 1966년까지 리버풀 스트리트에서 가끔 여객 열차를 이용했다. 쇼디치를 리버풀 스트리트에 연결하는 짧은 길이의 선로는 1966년에 제거되었다. 쇼디치에 대한 서비스는 감소되었으며 화이트채플 역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북부 종착역이 되었다; 쇼디치 역이 2006년에 폐역할 무렵까지, 평일에는 피크 시간에, 그리고 대부분의 일요일에(브릭 레인 마켓을 위해) 열렸다. 서부 행/발 서비스는 지하철 초기 시기 동안 축소되었다. 해머스미스의 서비스는 1936년에 혼잡 시간 전용으로 단축되었으며 1941년에 철회됨에 따라, 이스트 런던 지선은 고립된 선으로 남게되었다. 지하철로 가는 유일한 환승역은 화이트채플에 있었고, 두 개의 뉴크로스 역에서 메인 라인 열차와 환승이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두 개의 중요한 새로운 연결점이 생겼다.: 새드웰 역은 1987년 도클랜즈 경전철와의 환승역이 되었고, 1999년 캐나다 워터 역에서 주빌리 선과의 환승을 위한 역이 추가되었다. 이스트 런던 선의 정체성은 런던 지하철 시대에 상당히 변화되었다. 1933년과 1968년 사이의 지하철 노선도에는 메트로폴리탄 선과 같은 색으로 묘사되었다. 1970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선 - 이스트런던 구간(Metropolitan line - East London Section)"으로 바뀌었고, 중간에 흰색 선이 추가된가있 보라색 메트로폴리탄 선으로 표시되었다. 1980년대에는 그 자체로 노선이 되었고,(여전히 메트로폴리탄 선과 함께 운영 그룹으로 분류되었지만) 1990년부터 노선도에서의 색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관리는 런던교통공사(TfL)가 책임을 가지고 있으나, 열차 운행은 계속하는 대신 공공-민간 파트너십을 통해 2003년에 메트로넷 컨소시엄으로 통과되었다. TfL에 따르면 이 노선은 2007년 임시 폐쇄 이전에 연간 1070만명의 승객을 수송했다. 물리적 특성 이 노선은 트래블카드 Zone 1을 관통하지 않는 유일한 지하철 노선이었다. 워털루 & 시티 선 다음으로 두 번째로 짧은 노선이었으며, 14분의 운행 소요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9개의 역과 더불어 의 길이를 가졌다. 화이트채플에서 서리 키스까지 지하 터널에서 진행되었고, 나머지는 지상이나 반지하에 있었다. 노선의 대부분은 개착식으로 지어졌다. 가장 깊은 곳은 탬스 터널의 원래 입구 축에서 표면 아래로 떨어진 와피 역에 있다. 뉴크로스 게이트의 뉴크로스 및 브라이튼 메인 라인 서비스에서 사우스이스턴 메인 라인 서비스와 연결되었다. 지하철 환승역은 캐나다 워터 역(주빌리 선)과 화이트채플 역(디스트릭트 선, 해머스미스 & 시티 선)이었다. 도클랜드 경전철과의 간접환승역은 새드웰 역으로, DLR 역은 약 떨어져있었다. 환승로가 거리를 경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권이 허용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및 디스트릭트 선과 연결되는 링크는 세인트 메리스 커브를 통해 화이트채플 역 바로 남쪽에 있다. 이것은 1941년부터 차량을 이용하지 못했지만 니스덴 역의 메트로폴리탄 선 차량기지로 차량을 옮기는데 여전히 사용되었다. 이 곡선은 화이트채플 역에 대한 북쪽 및 동쪽 방향 접근 방법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2008년 1월 임시 선로가 디스트릭트 선과의 교차점에 가깝게 지어졌다.. 선의 대부분은 복선이지만, 쇼디치 (Shoreditch) 역과 마지막 구간의 남부 종착지는 단선인데 이는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 구간은 열차가 두 개의 남쪽 종착지 사이를 번갈아 가도록 요구했다. 철도 차량 이 노선은 1960년에서 1962년 사이 셰필드의 크레이빈스(Cravens)에서 제조한 메트로폴리탄 선의 A60 및 A62 저심도 차량을 두 번에 걸쳐 사용했다. 향상된 서스펜션, 조명, 난방 및 환기를 통해 1994년에 업그레이드 되었다. 철도 차량은 주 메트로폴리탄 선에서 사용되는 차량과 정기적으로 교체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이스트 런던 선과 메트로폴리탄 선 노선도에 모두 탑재했지만, ELL 열차는 메트로폴리탄 선 열차와 달리 양단에 운전실이 있는 4량 편성 차량이었다. 체셤 셔틀(Chesham shuttle)은 8량 편성으로 운행했다. 메트로폴리탄 선 열차는 대부분 두 개의 단일 종단 장비였으며 각 종단에는 완전히 작동하는 운전실이 결합되어 있다. Met는 모든 ELL 열차를 사용할 수 있지만, ELL은 양 끝의 장치만 사용할 수 있다. 7대의 4량 차량이 선로를 운영했다. 이 노선은 짧은 승강장으로 인해 네트워크에서 가장 짧은 열차 중 일부로 운영했다. 소수의 기차로 인해 기물 파손으로 인한 붕괴, 열차 결함 또는 직원 부족으로 인한 파손에 특히 민감하다. 때로는 2000년대 초반에 두 대의 기차만 운행 중이었다. 열차는 단지 운전자에 의해 조작되었다. 경비원을 철회하기로 한 결정은 1985년 5월 전국 철도국 연합(National Union of Railwaymen)의 파업 실패를 유발했다. 니스덴(Neasden)의 메인 메트로폴리탄 선 차량기지에서 대규모 작업을 하면서, 뉴크로스(New Cross)근처의 작은 차량기지에서 소규모 유지 보수 및 설치 작업이 이루어졌다. 1985년에서 1987년 사이 D78형 차량은 A60 및 A62형 차량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노선을 운영했다. 1970년대 동안에는 노선이 1938년식 튜브 차량에 의해 운영되었다. 역 목록 런던 지하철의 대부분 기간 동안 운영된 역을 북쪽에서 남쪽순으로 나열하였다.: 오버그라운드로 전환 이스트 런던 선 확장 공사는 2005년에 시작되었으며 지하철 서비스는 2007년 12월에 중단했다. 2007년 런던 버스 루트 ELW 화이트채플 - 새드웰 - 와핑 노선이 도입되었다. 매 10분마다, 저녁과 주말에는 매 15분마다 운영되었다. 이 버스는 노선 표시가 붙은 1층 버스로 운영했다. 2007년 12월 23일부터 운행을 시작했고 2008년 7월 19일부터 화이트채플에서 쇼디치(월요일-금요일 07:00-10:30 & 15:30-20:30, 일요일 07:00-15:30)까지 연장되었다. 노선의 빈도는 2009년 9월에 시간당 4대의 버스로 줄였다. 2010년 4월 28일부터 주말 전용으로 축소되었으며 2010년 5월 9일에 폐지되었다. 2006년과 2008년 5월 사이에 다른 철도 대체 버스가 제공되었다. 루트 ELS(Route ELS) 화이트채플 - 쇼디치 (월-금 07:00-10:30 & 15:30-20:30, 일요일 07:00-15:30) 2006년 6월 10일에 시작되어 2008년 7월 19일 폐지되었다. ELW의 피크 시간 연장으로 대체되었다. 런던 버스 루트 ELC(London Buses route ELC) 뉴크로스 게이트 - 뉴크로스 - 서리 키스 - 캐나다 워터 (월요일-금요일마다 매5-10분, 주말은 매15분)는 2007년 12월 23일에 시작되었다. 2009년 9월 25일 승객 수 40% 감소에 따라 폐지되었다. 런던교통국은 2010년 6월까지 1백만 파운드를 절약했다고 추정했다. 런던 버스 루트 ELP(London Buses route ELP) 캐나다 워터 - 로더히스 (매 15분마다)는 2007년 12월 23일에 시작되어 2008년 2월 24일에 이용객이 적어 폐지되었다. 표는 일반 노선 381번에서 버몬드세이(Bermondsey)와 캐나다 워터 구간에 유효한다. 이전 이스트 런던 선 폐쇄와 달리, 로더히스 터널을 통해 탬스 강을 가로 지르는 대체 버스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런던 교통국은 수요가 매우 높을 것이고 버스 배차 간격이 30초마다 한 대가 되어야 할 정도로 짧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로더히스 터널은 이전의 경우에 사용된 너비가 가 넘지 않는 차량에만 국한된다는 문제가있었다. 그러나 2007년까지 상업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저상 차량은 없었다. 이 넓이를 가진 유일한 것들은 이전에 사용된 것처럼 고상 형태의 미니 버스였다. 이 시간까지의 버스 정책은 100% 저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서비스가 제공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제한된 열차 서비스(limited train service)가 2010년 4월 27일에 도입되었으며, 전체 서비스가 2010년 5월 23일에 시행되었다. 연장구간의 역사 대부분 고가에 위치한 하이버리(Highbury) 및 이슬링턴(Islington)에서 쇼디치(Shoreditch)에 이르는 노선은 1865년에 개통했다. 이것은 노스 런던 철도에 의해 여객 열차가 시티오브런던로 갈 수 있도록 시티 지선(city branch)으로 건설되었다. 원래 지어 졌던 노선은 달스턴 정션(Dalston Junction), 헤겔스턴(Haggerston), 쇼디치(Shoreditch), 그리고 브로드 스트리트(Broad Street)의 큰 종착역으로 총 4개를 가지고 있었다. 달스턴 정션에서 노스 런던 선 동쪽 방면으로 분기되어 스트랫포드(Stratford)와 포플러(Poplar)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경로는 1944년 여객 운행을 종료하였다. 그 절정기에, 브로드 스트리트 역은 리버풀 스트리트 역과 런던 빅토리아 역 다음으로 런던에서 세 번째로 분주한 역이었다. 20세기 초, 1902년에 열차는 분(分)당 2700 만명이 넘는 승객들과 함께 러시아워에 브로드 스트리트 역에 도착하거나 출발했다. 버스와 전차의 경쟁으로 인해 역의 교통량이 정체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탄 피해로 1940년에 헤겔스턴 역과 쇼디치 역이 폐쇄되었다. 노선은 1950년대까지도 여전히 바삐 운행되었으며, 이스트 코스트 본선, 웨스트 코스트 본선 및 기타 노선에서 통행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전후의 이용 감소로 1986년에 닫혔다. 브로드 스트리트 역 부지가 즉시 공사에 판매되어 브로드게이트 개발이 이루어졌으나, 북쪽 구간은 보류되었다. 현재 헤겔스턴 역과 달스턴 정션 역은 원래의 위치와 그 옆에 건설되었지만, 쇼디치 하이 스트리트 역은 두 경로를 연결하는 새 위치에 정렬되었다. 연장 구간 1차 이전 노선의 화이트채플 역(Whitechapel) 북쪽으로 로 뻗는 새 연장 노선은 새로운 역 쇼디치 하이 스트리트 역, 혹스턴 역, 헤겔스턴 역, 달스턴 정션 역으로 구성되며, 화이트채플과 브로드 스트리트(Broad Street) 고가교 사이의 새로운 궤도 및 거리의 사용되지 않는 대부분의 궤도로 되어 있다. 2011년 2월에는 하이베리&이슬링턴 역까지의 구간이 연장되었다. 브라이튼 메인 라인(Brighton Main Line)의 런던 브리지 역(London Bridge) 암(arm)에 연결하기 위해 남쪽으로 연장되었으며 뉴크로스 게이트(New Cross Gate)의 북쪽으로 고가 횡단도를 통해 연결되었다. 뉴크로스 게이트 주변의 새로운 고가 횡단로 및 관련 작업물 이외에, 거의 대부분의 구간이 기존의 선로를 사용하며, 브로클리 역, 오너 오크 파크 역, 포리스트힐 역, 시드넘 역, 펜지 웨스트 역, 크리스탈 플레이스 역(지선 경유), 아넬리 역, 노우드 정션 역을 경유하여 웨스트 크로이던 역까지 남쪽으로 달린다. 이스트 런던 선 연장의 1단계 대부분의 공식 개통은 2010년 5월 23일에 있었다. 노선 이용은 전년 1040만 명의 승객 수에서 3,540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며, 2단계가 완공되면 5천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런던 교통 공사는 20대의 새로운 4량 378형 봄바디어 캐피탈스타(Capitalstar) 전기 동력분산식 열차을 인수하여 노선에 운행했다. 이스트 런던 선은 노스 및 웨스트 런던 선의 이중 전압 378과 달리 모든 전동차와 마찬가지로 제3궤조 전기 공급 장치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지만 역전 설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 궤도 및 북부 연장은 TfL 소유권하에 있으며, 달스턴 정션에서 서리 키스까지의 역들은 런던 오버그라운드 네트워크의 일부이다. 연장은 화이트채플에서 달스턴 정션으로 북쪽으로 가며 남쪽은 크리스탈 플레이스와 웨스트 크로이던 역까지 이어진다. 하이베리&이슬링턴 연장 노선은 2011년 2월 28일 하이베리&이슬링턴 발 북쪽으로 이전에 발표 된 것보다 2개월 더 일찍 연장되었고, 대부분의 시간대에 시간당 열차 8대가되었다. headcode 9A20의 첫차는 09:55 하이베리&이슬링턴 - 크리스탈 플레이스이었는데, 플랫폼 2에서 정시에 출발하여 4량 378기의 차량으로 구성되었다. 이스트 런던 선 2차 연장 서리 키스 남쪽에서 네트워크 레일 사우스 런던 선을 경유하여 퀸스 로드 페컴, 페컴 라이, 덴마크 힐, 클래펌 하이 스트리트, 원즈워스 로드를 거쳐 클래펌 정션으로 연결되는 의 연결 노선이 2012년에 추가로 개통한다. 서리 카날 로드의 새로운 정거장도 계획되었지만, 2009년에는 보류 상태에 놓였는데, 나중에 완성하기 쉽도록 적절한 '박스(box)'가 작업의 일부로 제공된다. 하이베리&이슬링턴 과 클래펌 정션 간을 운행하는 서비스는 2012년 12월 9일에 시작되었다. Wandsworth Road에서 Battersea Park까지 하루에 한 두 개의 서비스가 있으며, 그 경로를 따라 의회 열차(parliamentary train)로 운행된다. 이 연장은 1913년 이후 서비스를 보지 못했던 서리 키스와 퀸스 로드 페컴 역 구간을 직선화 시킨다. "새로운" 단면도는 서리 키스 역의 남쪽에 이스트 런던 선에서 분기하고 폐역된 올드 켄트 로드 역(Old Kent Road station)의 북쪽에 있는 사우스 런던 선에 합류한다. 이 루트는 브리지하우스 미도우스(Bridgehouse Meadows) 공용 광장을 둘러싼다. 이는 건설 현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공사가 끝나면 일반인에게 사용하도록 복원되었다. 서리 카날 로드의 기존 보행자용 다리와 보조 교각은 철도 교량을 건설하기 위해 철거된다. 서리 카날 로드의 이용 감소에 대한 해당 작업 계획은 철도가 적당한 높이에서 교차 할 수 있게 하는 30°(3.3 %)의 경사로 1인치의 고가로가 채택되면서 시행되지 않았다. 향후 계획 증가하는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노선에서 운용하는 378형 차량이 5량까지 연장되었다. 신규 노선은 적어도 5 량 차량에 대응하는 승강장을 갖거나 승강장 확장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지만 일부 역은 확장할 수 없으므로 문의 일부만 계폐하는 SDO(selective door opening) 방식을 쓰고 있다. 그림 각주 아래의 외부 링크, ELL 프로젝트 팀과의 전자 메일 대화및 ELL 프로젝트 팀 업데이트 뉴스레터의 전자 메일을 비롯한 다양한 소스가 이 항목 작성에 사용되었다. 참고 문헌 Wayne Asher. 2015. A Very Political Railway - the rescue of the North London Line. ISBN 978-1-85414-378-5 John Glover. 2013. London's Overground. ISBN 978-0-7110-3524-9 외부 링크 East London line - 런던 지하철 웹사이트 East London line Project (공식 웹사이트) East London line extensions map Official suspension notice Video Flyover of Phase 1 Photos of the East London Line and Thames Tunnel while still London Underground 런던의 철도 노선 1869년 개통한 철도 노선 런던 오버그라운드 램버스구의 교통 루이셤구의 교통 브롬리구의 교통 서더크구의 교통 원즈워스구의 교통 이즐링턴구의 교통 크로이던구의 교통 타워햄리츠구의 교통 해크니구의 교통
https://en.wikipedia.org/wiki/East%20London%20line
East London line
The East London line is part of the London Overground, running north to south through the East, Docklands and South areas of London. It was previously a line of the London Underground. Built in 1869 by the East London Railway Company, which reused the Thames Tunnel intended for horse-drawn carriages, the line became part of the London Underground network in 1933. After nearly 75 years as part of that network, it closed on 22 December 2007 for an extensive refurbishment and expansion, reopening as part of the Overground network in April 2010. Phase 2, which links the line to the South London line with a terminus at , opened on 9 December 2012, creating an orbital railway around inner London. History Establishment of the East London Railway The East London Railway was created by the East London Railway Company, a consortium of six railway companies: the Great Eastern Railway (GER), the London, Brighton and South Coast Railway (LB&SCR), the London, Chatham and Dover Railway (LCDR), the South Eastern Railway (SER), the Metropolitan Railway, and the District Railway. The latter two operated what are now the Metropolitan, Circle, District and Hammersmith & City lines of the London Underground. The incorporation of the ELR took place on 26 May 1865 with the aim of providing a link between the LB&SCR, GER and SER lines. The companies reused the Thames Tunnel, built by Marc and Isambard Kingdom Brunel between 1825 and 1843 for horse-drawn carriages. The tunnel, with generous headroom and two carriageways separated by arches, connected Wapping on the north bank of the Thames with Rotherhithe on the south bank. A triumph of civil engineering, it was a commercial failure and by the 1860s it had become an unpleasant and disreputable place. The tunnel was the most easterly land connection between the north and south banks of the Thames, close to the docks on both banks of the river, and was not far from mainline railways at either end. Converting the tunnel for railway use thus offered a means of providing a cross-Thames rail link. On 25 September 1865 the East London Railway Company took ownership of the tunnel at a cost of £800,000. Over the next four years the company built a railway through the tunnel to connect with the existing lines. The company's engineer was Sir John Hawkshaw, who was also responsible for the major re-design and completion of I K Brunel's long-abandoned Clifton Suspension Bridge at Bristol. The line opened in stages as financing became available: 7 December 1869: (then New Cross) to opened, operated by the London, Brighton & South Coast Railway (LB&SCR), with intermediate stations at Deptford Road (now Surrey Quays) and . 13 March 1871: A spur opened from just south of what is now Surrey Quays station to the South London line's Old Kent Road station. Passenger services were withdrawn from 1 June 1911 and freight last used the line in 1964; the track was subsequently removed. This alignment was relaid and restored to passenger service by London Overground in late 2012. 10 April 1876: Wapping to , through a cut-and-cover tunnel constructed in part along the bottom of an infilled dock. At Shoreditch a connection was made with the Great Eastern Railway to . Intermediate stations were at and Whitechapel. 1 April 1880: A spur to (South Eastern Railway) opened. 3 March 1884: A spur to the Metropolitan and Metropolitan District Railways opened south of Whitechapel using St Mary's Curve. This enabled Metropolitan Railway and Metropolitan District Railway (District) trains to commence through services to the East London Railway later that year. Although passenger services via this spur ceased in 1939, it was retained to transfer empty trains to the rest of the sub-surface network. Early use The East London Railway Company owned the infrastructure but it was operated by its controlling railways. Steam trains were initially operated by the GER, LB&SCR and the SER. The LB&SCR used its LBSCR A1 Class Terrier locomotives, which William Stroudley designed partly with this line in mind. It carried both passenger and goods trains; the LB&SCR operated between Liverpool Street and Croydon, the SER running between and Liverpool Street from April 1880 until March 1884. From March to September 1884 the SER service ran from Addiscombe to St Mary's (MR & MDR Joint Station). Metropolitan Railway services from St Mary's to (SER) and Metropolitan District Railway services from St Mary's to (LB&SCR) commenced on 1 October 1884. On 6 October through services started from Hammersmith (Hammersmith & City) to New Cross (SER) and from (MDR) to New Cross (LB&SCR). Before the development of the Kent coalfields in the early part of the 20th century, house coal from the north for distribution in south London and as far afield as Maidstone and Brighton was an important source of revenue. Access at the north end of the line was difficult: trains were limited to 26 wagons and had to be shunted into the Great Eastern's Liverpool Street station and drawn forward onto the ELR. To avoid this reversal, a line was planned from the ELR north of Whitechapel to the GER at Bethnal Green. Acts for this were passed in 1866 and 1868. When the GER route to Hackney Downs Junction, now Hackney Downs, was constructed in 1872, the route was altered to connect at Cambridge Heath, with an abandonment Act for the previous route in 1871 and two new Acts in 1876 and 1877. A short length of the latter tunnel was built, and from October 1900 additional capacity was offered by a wagon lift, carrying two ten-ton wagons, from the Great Eastern coal depot at Spitalfields to a siding laid in the tunnel stub. The surface junction was taken up in 1966 and the lift closed in 1967, after a fire at the Spitalfields depot. When the Metropolitan District Railway was electrified in 1905 it ceased using the ELR, the last trains running on 31 July 1905; the Metropolitan Railway suspended its service after 2 December 1906. LB&SCR and GER services continued, and SER services recommenced on 3 December 1906. The line was electrified, with the controlling railways funding the upgrade and the Metropolitan Railway providing the rolling stock. Electric services began on 31 March 1913 and ran from the two southern termini to Shoreditch and via and . In 1914 the service to South Kensington was diverted to , on what is now the Hammersmith & City line. After the 1923 grouping the goods service was operated by London and North Eastern Railway (as successors to the GER), with the Metropolitan Railway continuing to provide passenger services. London Underground era In 1933, the East London Railway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London Passenger Transport Board. Although the infrastructure was still privately owned, passenger services were operated as the "East London Branch" of the Metropolitan line. The railways were nationalised in 1948, and became part of the British Transport Commission along with the Underground. Goods services continued to use the line until 1962, with occasional passenger trains from Liverpool Street until 1966. The short length of track connecting Shoreditch to Liverpool St was removed in 1966. The service to Shoreditch was reduced, with becoming the northern terminus for much of the time; by the time station closed in 2006, it was only open at peak times on weekdays and most of Sundays (for Brick Lane Market). Services to and from stations further west were curtailed during the early part of the Underground era. The service to Hammersmith was reduced to peak hours only in 1936 and withdrawn in 1939, leaving the East London branch as an isolated line. Until 1999, its only passenger interchange to the rest of the Underground was at Whitechapel, with interchanges to main line trains at the two New Cross stations. In the 1980s and 1990s, the line gained two important new connections: became an interchange with the Docklands Light Railway in 1987, and a station was added at in 1999 for interchange with the Jubilee line. The line was closed entirely between March 1995 and March 1998 for major maintenance and refurbishment works, during which time a rail-replacement bus service operated. The identity of the East London line changed considerably during the London Underground era. On Tube maps between 1933 and 1968 it was depicted in the same colour as the Metropolitan line. In 1970, it was renamed the "Metropolitan line — East London Section", in Metropolitan line purple with a white stripe down the middle. In the 1980s it became a line in its own right (though it was still grouped operationally with the Metropolitan line) and from 1990 its colour on the map changed to orange. In 1995, London Underground threatened to close the line if it did not receive listed building consent from the London Docklands Development Corporation for the shotcreting of four arches of Thames Tunnel. Maintenance passed to the Metronet consortium in 2003 under a public-private partnership, although the operation of trains continued to be the responsibility of Transport for London (TfL). According to TfL, the line carried 10.7 million passengers per year before its temporary closure in 2007. Physical characteristics The line was the only Underground line not to penetrate Travelcard Zone 1 and (apart from the Moorgate to Finsbury Park service, transferred to British Rail in 1976) the only line designed and constructed for mainline trains. At in length it was the second-shortest line (after the Waterloo & City line), with nine stations and an end-to-end journey time of 14 minutes. It ran in tunnel from Whitechapel to Surrey Quays, with the remainder on the surface or in cutting. Whilst much of the line was built as cut-and-cover, it also contained overground and tube construction features. The deepest point is at Wapping station, constructed in the Thames Tunnel's original entrance shaft below the surface. It connected with South Eastern Main Line services at New Cross and Brighton Main Line services at New Cross Gate. Underground connections were at Canada Water (Jubilee line) and Whitechapel (District and Hammersmith & City Lines). A non-contiguous connection with the Docklands Light Railway was at , with the DLR station some away on a viaduct. Although the interchange was via the street, through ticketing was permitted. A link with the Metropolitan and District lines was made just south of Whitechapel via St Mary's Curve. This has been out of passenger use since 1939 but was still used to transfer rolling stock to and from the Metropolitan line's main depot at Neasden. The curve can easily be seen on the northbound and eastbound approaches to Whitechapel station, although a temporary wall was built across the line in January 2008, close to the junction with the District line.. Most of the line was double track, with Shoreditch station and the final sections into the southern termini single track, the latter because of lack of space. This required trains to alternate between the two southern termini. Rolling stock The line used Metropolitan line A60 and A62 sub-surface rolling stock built by Cravens of Sheffield in two batches between 1960 and 1962. It was upgraded between 1995 and 1998 with improved suspension, lighting, heating and ventilation. The rolling stock was regularly interchanged with that used on the main Metropolitan line and usually carried both East London and Metropolitan line maps, but ELL trains were four-car units with a driving cab at each end, unlike Metropolitan line trains, which, aside from the Chesham shuttle, ran as eight-car trains. Metropolitan line trains were mostly two single-ended units coupled together with fully operational driving cabs at each end: the Met could use any ELL trains, but the ELL could use only double-ended units. Seven four-car trains operated the line (six off-peak, seven during peak hours when Shoreditch was open). Off peak, train seven became the spare. The line operated some of the shortest trains on the network, necessitated by short platforms. The small number of trains made the line particularly sensitive to disruption caused by vandalism, train faults or staff shortages. Sometimes in the early 2000s only two trains were running. Trains were operated by just a driver: the decision to withdraw the guards prompted an unsuccessful strike by the National Union of Railwaymen in May 1985. Light maintenance and stabling took place at a small depot near New Cross, with heavier work at the main Metropolitan line depot at Neasden. Between 1985 and 1987, D78 stock operated the line before being replaced by A60 and A62 stock. During the 1970s the line was operated by 1938 Tube stock. Stations The stations in operation during most of the London Underground era, in order from north to south, were as follows: Conversion to Overground Engineering work on the East London line extension started in 2005 and the underground service ended in December 2007. In 2007 London Buses route ELW Whitechapel – Shadwell – Wapping was introduced, operating every 10 minutes, every 15 minutes at evenings and weekends. It was operated with route-branded single-deck buses. Starting on 23 December 2007 it was extended from Whitechapel to Shoreditch (Monday-Friday 07:00-10:30 & 15:30–20:30, Sunday 07:00-15:30) from 19 July 2008. The frequency of the route was cut to four buses per hour in September 2009. It was reduced to weekends-only from 28 April 2010, and withdrawn on 9 May 2010. Between 2006 and May 2008 other rail replacement buses were provided. Route ELS Whitechapel – Shoreditch (Monday-Friday 07:00-10:30 & 15:30–20:30, Sunday 07:00-15:30) commenced 10 June 2006 and was withdrawn on 19 July 2008. It was replaced by a peak-hour extension of route ELW. London Buses route ELC New Cross Gate – New Cross – Surrey Quays – Canada Water (Monday-Friday every 5–10 minutes, weekends every 15 minutes) started on 23 December 2007. It was withdrawn on 25 September 2009 following a 40% drop in passenger numbers. Transport for London estimated that this saved around £1 million over the period to June 2010. London Buses route ELP Canada Water – Rotherhithe (every 15 minutes) began on 23 December 2007 and was withdrawn on 24 February 2008 due to lack of use: tickets were valid between Bermondsey and Canada Water on standard route 381. Unlike the previous East London line closure, no replacement bus service was provided across the River Thames through the Rotherhithe Tunnel. London Transport was concerned that demand would be so high and buses would be so small that the frequency could have to be one bus every 30 seconds. There was also an issue that the Rotherhithe Tunnel is restricted to vehicles with a width no more than , which had been employed on previous occasions. However, by 2007 no such vehicles were commercially available that were low-floor compliant: the only ones with this width, as previously used, were minibuses with higher floors. As bus policy by this time was 100% low floor, it meant that no such service could be provided. A limited train service was introduced on 27 April 2010 and full service began on 23 May 2010. History of the extended route Mostly on viaduct, the route from Highbury and Islington to Shoreditch was opened in 1865. It was constructed by the North London Railway as its city branch to allow its passenger trains to reach the City of London. As originally built the line had four stations, at Dalston Junction, Haggerston, Shoreditch and a large terminus at Broad Street. At Dalston Junction, a line branched to the North London line eastwards, allowing services to Hackney, Bow and Poplar (East India Road). This route closed to passengers in 1944 and goods on 4 July 1966. At its peak, Broad Street was the third-busiest station in London (after Liverpool Street and Victoria). At the start of the 20th century, more than one train per minute arrived or departed Broad Street during rush hour, with over 27 million passengers in 1902. Intermediate station traffic stagnated due to bus and tram competition, and Haggerston and Shoreditch stations were closed in 1940 following bomb damage in World War II. The line remained busy up to the 1950s, receiving traffic from the East Coast Main Line, West Coast Main Line and other routes. However, it declined following the war and was closed on 30 June 1986. While Broad Street station's site was immediately sold for office use, becoming the Broadgate development, the route north was mothballed. The present Haggerston and Dalston Junction stations have been built next to and on the original sites, but Shoreditch High Street station is on a new alignment connecting the two routes. Extension Phase 1 The former line was extended northwards from Whitechapel, with new stations at , , and using of new trackbed between Whitechapel and the Broad Street viaduct, and disused trackbed for most of rest of the distance. A further extension to was opened in February 2011. It was extended south to connect to the arm of the Brighton Main Line, linked via a northbound flyover north of New Cross Gate. Other than the new flyover and some associated works around New Cross Gate, it uses almost entirely existing track, running south to West Croydon via , , , Sydenham, , (by way of a branch), and . The official opening of most of phase 1 of the East London line extension took place on 23 May 2010. Use of the line was forecast to increase from the previous 10.4 million passengers per year to 35.4 million, and to 50 million when phase 2 is finished. Transport for London acquired 20 new four-car Bombardier Capitalstar electric multiple units to operate on the line. Unlike the dual-voltage 378s on the North London and West London lines, the East London line units can only receive power from the third rail electrification, although, like all modern EMUs, they have the potential to be retro-fitted. The track and the northern extension remain under TfL ownership, and the stations from Dalston Junction to Surrey Quays are part of the London Overground network. The extension runs northwards from Whitechapel to , and south to and West Croydon. Highbury & Islington extension The line was extended northwards to on 28 February 2011, two months earlier than previously announced, with eight trains per hour during most of the day. The first train, with headcode 9A20, was the 09:55 Highbury & Islington – Crystal Palace, which departed on time from platform 2 and was formed of a four-car class 378 unit. East London line extension phase 2 A further link opened in 2012 from south of via the Network Rail South London line to via , , , and . A new station at was also planned, but this was put on hold in 2009, though a suitable 'box' is being provided as part of the works to facilitate later implementation. The service from Highbury & Islington to Clapham Junction commenced on 9 December 2012. There are three services per day that run from Wandsworth Road to Battersea Park to maintain a service along that route as a parliamentary train. The extension uses an alignment between Surrey Quays and Queens Road Peckham stations that had not seen services since 1913. The "new" section diverges from the East London line south of Surrey Quays station and joins the South London line just north of the closed Old Kent Road station. The route skirts the Bridgehouse Meadows public open space; this was used as the construction site, then restored to public use after completion. The former pedestrian bridge and support piers over Surrey Canal Road were demolished as a precursor to building the railway bridge. The planned lowering of Surrey Canal Road and associated work to the services were not carried out as a higher elevation was adopted, with a 1 in 30 (3.3 per cent) incline allowing the railway to cross at a suitable height. Future To cope with increased demand, the class 378 units which operate on the line have been extended to five cars. Although the new stations on the line have platforms which are either at least five cars long or provide space for platform extensions, some stations cannot be extended and so selective door opening is required. Service The current London Overground service is 16 trains per hour in each direction. Northbound trains terminate at Highbury & Islington or Dalston Junction (8tph each). Southbound trains terminate at West Croydon, Crystal Palace, New Cross and Clapham Junction (4tph each). A Friday and Saturday night service was introduced between Dalston Junction and New Cross Gate (not stopping at Whitechapel) from December 2017. References Various sources have been used in the creation of this article, including the external links below, email conversations with the ELL Project Team and emails from the ELL Project Team update newsletter. Further reading Wayne Asher. 2015. A Very Political Railway – the rescue of the North London Line. John Glover. 2013. London's Overground. External links East London line Project (official home page) Video Flyover of Phase 1 Photos of the East London Line and Thames Tunnel while still London Underground Closed London Underground lines Railway lines in London London Overground Croydon 2020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Croydon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Tower Hamlets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Southwark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Lewisham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Lambeth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Wandsworth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Hackney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Bromley Transport in the London Borough of Islington Proposed rail infrastructure in London 750 V DC railway electrification Railway lines opened in 1869 Standard gauge railways in London 1869 establishments in England British joint railway companies
https://ko.wikipedia.org/wiki/%ED%93%8C%EB%8B%88%ED%80%BC%EB%A0%88%EB%A5%B4%20%EB%93%9C%20%EB%AA%BD%EB%A7%88%EB%A5%B4%ED%8A%B8%EB%A5%B4
퓌니퀼레르 드 몽마르트르
퓌니퀼레르 드 몽마르트르(, )는 파리 18구에 있는 몽마르트르 (Montmartre)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자동 강삭철도이다. 파리 교통 당국인 RATP에 의해 운영된다. 이 노선은 1900년 7월 13일에 개통했으며, 1935년과 1991년에 완전히 재건되었다. 케이블카는 몽마르트르의 (바깥쪽)에서 사크레쾨르 대성당 기슭의 정상 간을 운행한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맨 위로 이어지는 300개가 넘는 계단의 대안을 제공한다. 길이가 108 m 일 때, 케이블카는 36 m 간을 올라가서 1분 30초로 단축시킨다. 일년에 2백만 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 특성 케이블카는 매일 오전 6시부터 오전 0시 45분까지 운행하며, 하루 6000명, 일년에 약 2백만명을 수송하며, 대부분 이용객이 관광객이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찾는 순례객들, 또한 파리 사람들 및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저상역은 생피에르 광장()과 수잔발라동 광장()과 카르디날 듀부와 가()의 상단 구역 사이에 건설되었다. 케이블카는 넓은 220계단인 푸아이아티에 가(Rue Foyatier)와 함께 운행된다. 현재의 강삭철도 쉰들러 그룹(Schindler Group)에서 건설한 전기 견인력을 갖춘 새로운 케이블카는 1991년 6월 1일에 운행을 시작했다. 이 노선은 각각 의 국제 표준궤를 사용하여 두 개의 분리된 평행 궤도를 따라 이동하는 60개의 장소가 있는 2개의 캐빈을 가지고 있다. 이 노선은 각 방향에서 시간당 명의 승객의 수송력을 가지고 있다. 트랙 거리가 108 m 이상인 36 m 의 수직 거리를 포함하는 어느 방향으로의 이동이라도 90초 미만이 소요되며 35.2%의 높은 경사도를 오르거나 내려간다 (약간 가파른 경우 1:3 이상). 몽마르트르 노선의 기술은 기존의 케이블형 철도와는 다른 표준 균형 승강기에서 파생된다는 점에서, 각 차가 균형을 잡기 위해 다른 차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체 카운터웨이트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설계의 이점은 각 차량이 자체 승강장치 및 케이블과 함께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하면 다른 차량을 유지 보수를 위해 서비스를 중단해야 하는 경우 한 대의 차량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출퇴근 시간에 두 개의 캐빈이 동시에 상승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승객은 하강 노선보다 상승 노선 케이블카를 사용한다.) 내부가 비치는 해당 역은 건축가 프랑수아 데슬로지에(François Deslaugiers)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독특한 유리 외벽을 갖춘 새로운 객차는 산업 디자이너 로저 탈롱(Roger Tallon)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는 또한 TGV 아틀랑티크의 객차를 설계했다. 차내 천장은 부분적으로 유리로 되어있어 몽마르트르의 대성당 또는 파리의 파노라마를 통과하는 동안 볼 수 있다. 운영 강삭철도는 파리 메트로 네트워크의 일부로 간주되며, 이와 비슷하게 가격 책정을 한다. 두 역에는 각각 마그네틱 승차권과 나비고를 읽을 수 있는 개집표기가 있다. 따라서 단일 이용 티켓 "t", Paris Visite 조합 교통/박물관 정기권 및 기타 RATP 주•월 정기권 등을 포함한 모든 RATP 지불 방법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몽마르트로버스(Montmartrobus)"라는 고상역 앞의 카르디날 듀부와 가에 정차하는 무료 환승을 제공하며, 이외의 직접적인 교통 환승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개의 지하철역이 저상역에서 도보 거리에 있다: 남쪽으로 도보 200 m 에 2호선 앙베르 역이 있고, 서쪽으로 도보 350 m 에 12호선 아베스 역이 있다. 케이블카는 티켓 T+의 환승 요금 규정에 포함되지 않는 특별한 노선으로 간주된다. 이미 사용된 티켓 T+로 메트로에서 오는 승객은 케이블카에서 새 승차권을 사용해야하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저상역과 고상역의 ( "코드 할당")은 각각 31-02 및 31-03이다. 코드 31은 피갈 지구(Quartier Pigalle) 또는 FUNB 및 FUNH에 해당한다. 계획 상대적으로 짧고 극단적으로 가파른 경로를 통과하는 공공 여객 운송용 강삭철도가 제공하는 기술적 해결책에 대한 관심을 고려할 때, 연구 결과에 따르면 RATP는 Fort d'Issy 분기의 개조 계획에서 이시레몰리노와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파리 트램 2호선의 뫼동쉬르센(Meudon-sur-Seine) 역과 1934년 철거된 뫼동의 퓌니퀼레르 드 벨르뷰를 재현할 벨르뷰 역을 연결할 수 있다. 같이 보기 강삭철도 몽마르트르 파리 메트로 RATP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Virtual tour in 360 degrees 마우스로 회전 가능 강삭철도 파리의 철도 교통 1900년 개통한 철도 노선 파리 18구의 건축물
https://en.wikipedia.org/wiki/Montmartre%20Funicular
Montmartre Funicular
The Montmartre Funicular () is an inclined transport system serving the Montmartre neighbourhood of Paris, France, in the 18th arrondissement. Operated by the RATP, the Paris transport authority, the system opened in 1900; it was entirely rebuilt in 1935 and again in 1991. The system is a funicular in name only. Its formal title, the Montmartre Funicular, is a vestige of its earlier configuration, where its cars operated in a counterbalanced, interconnected pair, always moving in opposite directions in concert, thus meeting the definition of a funicular. The system now uses two independently operating cars that can each ascend or descend on demand, qualifying as a double inclined elevator, retaining the term funicular in its title as a historical reference. The system carries passengers between the base of Montmartre and its summit, accessing the nearby Sacré-Cœur basilica and paralleling the adjacent staircases of Rue Foyatier. The cars climbs in under a minute and a half and carry two million passengers a year. Current design Constructed by the Schindler Group, the system with electrical traction entered service on 1 June 1991. It has two cabins with sixty places each which travel on two separate, parallel tracks using the international standard gauge of . It has a capacity of passengers per hour in each direction. A trip in either direction, which covers a vertical distance of over a track distance of , takes less than 90 seconds and climbs or descends a gradient as high as 35.2% (a little steeper than 1:3). The technology of the Montmartre line differs from a funicular in that it uses independently operating cars more related to standard up-down elevators, each equipped with its own counterweight. Again, a funicular's cars are by definition arranged in counterbalanced, interconnected pairs, moving in concert. The Montmartre system now allows each car to function independently, with its own hoist and cables. Advantages of this arrangement include the ability of one car to remain in service during maintenance of the other. Also, both cabins can ascend simultaneously (usually, more passengers use the system to ascend than to descend), where cars of a funicular always travel in opposite directions. The see-through stations were designed by architect François Deslaugiers and the cabins were designed by Roger Tallon, who also designed the carriages of the TGV Atlantique. The cabin roofs are partly glazed, allowing a view during transit. The system operates daily from 6 am until 12.45 am, transporting people a day, or around 2 million annually. The lower station (Gare Basse) is located between the and the , and the upper one (Gare Haute) on the . History The Paris city government voted to construct the Montmartre transport system in 1891. Initially, operation was subcontracted to Decauville through a concession that ended in 1931. Thereafter, the Société des transports en commun de la région parisienne (STCRP) took control, and this was nationalized together with the (CMP) to form the (RATP), which continues to operate the funicular today. The original system in contrast to the current system was, in fact, a funicular with twin counterbalanced and interconnected cars. In the case of the Montmartre design, a system of onboard water bladders of could be filled or emptied to move the cars and to compensate for passenger load. In 1935, the system was converted to electricity. The system was completely rebuilt by the RATP in 1990–1991, as dual independently operating inclined elevators. The system was shut down after a minor accident during tests by the RATP in December 2006. It reopened in July 2007. Chronology 5 June 1891: Decision to create a funicular at Montmartre 12 or 13 July 1900: Inauguration of the first water-driven funicular 1 November 1931: Closure of the water-driven funicular 2 February 1935: Opening of the electric funicular 1 October 1990: Closure of the funicular for the second renovation 5 October 1991: Opening of the modern inclined elevator, retaining the name funicular 7 December 2006: Accident during a brake load test, without passengers Origins Construction of the Montmartre transport system was authorized by the Paris municipal council in 1891. It was built to serve the Sacré-Cœur Basilica at the summit of the outlier of Montmartre and was inaugurated on 5 June 1891. Original plans specified electrical traction and six stations between two termini. As built, the system used only two terminal stations and water-filled bladders as counterweights for motion. The funicular entered service on 12 or 13 July (sources vary), and its operation was ceded to the Decauville company with a contract lasting until 1931. However, lacking the necessary authorisation from the Paris Prefecture of Police to run the service, the company had to close the funicular from 24 November 1900 until 22 May 1901. The funicular was of double track at standard gauge, using the Strub rack system for braking. The rails were supported by sleepers made of structural steel, supported on concrete pedestals. The system was powered by two sealed water tanks/bladders with a capacity of located under the floor of each cabin. The tanks of one cabin were refilled at the upper station, allowing its descent under gravity with the combined weight of the passengers and water, enabling the other carriage to ascend. A steam engine situated at the lower station worked the filling pumps at the upper station. The cabins held forty-eight passengers in four closed compartments arranged like a staircase; the two end platforms were reserved for the driver and brakeman. These were retained for a brake system established on the rack railway. This system transported a million passengers a year for some thirty years. First renovation, 1931 When the contract expired, the Mayor of Paris and the Seine Department charged the (STCRP) with running the service and modernising the infrastructure. The rack system was deemed too dangerous and so the initial system was shut down; operations ceased on 1 November 1931. The water-driven system was replaced by two electrically driven cabins and reopened on 2 February 1935 after an interruption of more than three years. Traction was provided by a winch driven by a electric motor, allowing a cabin holding fifty people to make the journey in 70 seconds at a speed of . The cabins were no longer arranged like a staircase but composed of a single compartment with a horizontal floor. By 1955, the line was in service from 7 am until 9 pm in winter and until 11 pm in summer, entry to the station being made by cancelling a bus ticket. In 1962, the funicular transported passengers and operations were suspended for some weeks for a new renovation. The line was opened in the presence of "" (Parisian illustrators) and Émile Kérembrun, the President of the , a philanthropic society. Second renovation, 1991 After fifty-five years of operation, transporting two million passengers annually, the system was in need of renovation. An idea was proposed by the RATP and the Mairie de Paris, to lengthen the line with a tunnel to the Anvers métro station. The idea was abandoned due to high cost. The RATP entirely rebuilt the funicular in 1990–1991. Operations ceased on 1 October 1990, being substituted with a minibus service, the "Montmartrobus", between the Place Pigalle and the top of the , until the new system entered service on 5 October 1991. The old stations were demolished and rebuilt as designed by architect François Deslaugiers. The works were undertaken by Schindler Group, a lift manufacturer, and cost 43.1 million francs. Since its latest renovation, the system uses angled lift technology with electrical traction. It is no longer a funicular but retains the term in reflection of its history. The system no longer functions with the requisite interconnected and counterbalanced arrangement of a funicular (where cabins always move in opposite directions, the descending cabin counterweighing the ascending one). The machinery is located in the higher station; it is composed of two totally independent winches powered by motors. The cabins each weigh unladen, when full. They have a service brake and an emergency brake. The carriages and chassis were made by Skirail, and the electrics by Poma. Operation is entirely automatic: The presence and number of passengers are detected by a system combining electronic balance scales mounted in the cabin floor, and radar in the stations. A computer determines the cabin's departure, indicated with a display board in the cabin. According to the amount of passenger traffic, it chooses between the two possible operating speeds, and . For safety, the platform edge doors open only when a cabin is present, as on the Paris Métro Line 14 and some stations on London's Jubilee line. On 7 December 2006 at 5.50 pm, a cabin crashed down the slope during a brake system test by RATP. The terminal of the lifting cable broke. The service was suspended, adding to the problems of the residents and traders on the , the first having to make do with a less-frequent replacement bus service, the second seeing their trading levels fall (20–30% lower than for December 2006) from having fewer tourists. One of the two cabins was put back in service on 30 June 2007, the other on 2 August 2008. Operation The funicular has a similar tarification as the Paris Métro network. The two stations each have turnstiles which can read magnetic paper tickets and Navigo passes. A Ticket t+ can be used for a single trip. (The Ticket t+ does not allow for a free interchange between the Métro or bus network and the furnicular.) Daily, weekly, or monthly passes on a Navigo card, as well as the Paris Visite ticket, are also valid for the funicular. Two métro stations are within easy walking distance of the lower station: Anvers on Line 2 about to the south and Abbesses on Line 12 about to the west. Bus line 40 has a stop Rue du Cardinal-Dubois in front of the upper station. The ("Allocation codes") of the lower and upper stations are respectively 31-02 and 31-03. Code 31 corresponds to the Quartier Pigalle, or FUNB and FUNH. Finance The RATP finances the line's operation (maintenance, infrastructure and cost of personnel). Fares are set by political decisions which do not cover the true cost of transportation. The loss is made good by the controlling authority, the (STIF), which since 2005 has been under the control of the ("Île-de-France Regional Council") and composed of local representatives. It defines the general conditions of operation and the duration and frequency of services. Losses are made good by an annual block grant to regional transport operators funded by the ("Transport payment"), a tax raised on companies with more than nine employees. Public bodies also contribute. Projects Given the interest in the technical solution provided by the funicular for public passenger transport over relatively short and extremely steep routes, studies have called for the RATP to build similar systems, notably at Issy-les-Moulineaux, in the renovation project of the Fort d'Issy quarter, and to link the Meudon-sur-Seine station on Paris Tramway Line 2 with the Gare de Bellevue, which would recreate the old Bellevue funicular at Meudon, demolished in 1934. Popular culture The funicular is an essential element in Paris life, and thus appears in many films and television series having Montmartre as a theme. One of the most famous is (1990), starring Thierry Lhermitte and Philippe Noiret, and it also appears in (1997), (2006) and Louise (Take 2) (1998). In the first pilot episode of the police series , a chase takes place on the Rue Foyatier steps alongside the funicular, just like in the classic film Céline et Julie vont en bateau (1974, Jacques Rivette); in the pilot, the character played by Jean-Pierre Castaldi runs up it to catch the crooks. Similarly in the film (2009), Michel Fernandez (Thierry Frémont) flees by the stairs, chased by Nora Chahyd (Rachida Brakni) who takes the funicular. Jean-Pierre Melville opened his film (1956) with a tracking shot around the Montmartre quarter where the film is set, and voiceover then says " [shot over the Basilique du Sacré-Coeur] [bird's eye view of the funicular descending, with music ] [Shot of the Place Pigalle]" ("It is at one and the same time heaven ... and ... hell"). The funicular figures in an eponymous work by Jean Marchand (1883–1940), on view at the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It appears in literature in a short story by Boileau-Narcejac titled ("The enigma of the funicular"), published in 1971 in the review , and also in the works of Jacques Charpentreau who, in a poem entitled , compares the cabins to two contrary brothers: ("When one flies into the air, the other falls to the ground/ And la, la la"). In October 2006, at the request of the website for its "" ("concerts to download"), the singer Cali made an appearance in one of the funicular's cabins surrounded by passengers, singing her song ("The end of the world in ten minutes") from the album as it ascended. The funicular also appears in the 2011 3D computer generated animated film, A Monster in Paris. See also Funicular Inclined railway List of funicular railways List of Paris metro stations Montmartre RATP References Sources External links Virtual tour in 360 degrees Use the mouse to turn around. Funicular railways in France Rail transport in Paris Buildings and structures in the 18th arrondissement of Paris Railway lines opened in 1900 RATP Group Montmartre Former water-powered funicular railways converted to electricity Standard gauge railways in France Inclined elevators
https://ko.wikipedia.org/wiki/%EB%84%A4%EC%9D%BC%EA%B1%B4
네일건
네일건()은 못을 판 등의 재료에 고정할 때 사용하는 도구의 일종이다. 못을 박는 도구는 못을 나무 또는 기타 재료에 박는 데 사용되는 망치의 한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압축 공기(공압), 전기, 부탄가스 또는 프로판가스과 같은 고인화성 가스 또는 분말 작동식 도구의 경우 작은 폭발물에 의해 구동된다. 네일건은 건축업자들이 선택하는 도구로 여러 면에서 망치를 대체했다. 네일 건은 하워드 휴즈의 휴스 H-4 허큘리스(스프루스 구스로 알려짐)에 대한 그의 작업을 위해 교육을 받은 토목 기사인 모리스 피누스에 의해 설계되었다. 나무 동체를 함께 못을 박고 붙인 다음 못을 제거했다. 최초의 네일건은 공기 압력을 사용했으며, 1950년에 시장에 출시되어 주택 바닥 덮개 및 하위 바닥의 건설을 가속화했다. 원래의 네일건으로 작업자는 서서 사용했으며, 분당 40-60개의 못을 박을 수 있었다. 네일건에는 400-600개의 못을 한번에 수납할 수 있다. 사용 네일건은 디자인에 따라 긴 클립(스테이플 스틱과 유사)에 장착되거나 종이 또는 플라스틱 캐리어에 정렬된 패스너를 사용한다. 일부 풀 헤드 네일건, 특히 팔레트 제작 및 루핑에 사용되는 네일건은 긴 플라스틱 또는 와이어 배열 코일을 사용한다. 일부 스트립 못을 박는 도구는 잘린 머리를 사용하여 못을 더 가까이 붙일 수 있어 재장전 빈도가 줄어든다. 클립 헤드 못은 때때로 주 또는 지역 건축법에 의해 금지된다. 풀 라운드 헤드 못과 링 생크 못은 잡아당기는 데 더 큰 저항력을 제공한다. 네일러는 또한 패스너가 와이어 또는 플라스틱 조합으로 제공되는 '코일' 유형일 수 있으며, 드럼 매거진 이 있는 네일건과 함께 사용된다. 장점은 하중당 더 많은 패스너가 있지만 추가 중량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철 또는 콘크리트에 사용하도록 설계된 산업용 못은 폭발성 캡에 대한 자동 장전 작동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손으로 못을 박아야 한다. 네일건은 박을 수 있는 못의 길이와 게이지(두께)가 다르다. 패스너의 가장 작은 크기는 일반적으로 "핀 네일러"라고 하는 23 게이지(직경 0.025인치 또는 0.64mm)이며, 일반적으로 최소 헤드만 있다. 그들은 비즈, 몰딩 등부터 가구에 이르기까지 중간 크기의 7~8인치(18~20cm) 베이스보드, 크라운 몰딩 및 케이싱까지 모든 것을 부착하는 데 사용된다. 길이는 일반적으로 3/8에서 1/4인치(10 ~ 32mm) 사이이다. 일부 산업용 도구 제조업체는 최대 2인치(51mm)까지 공급한다. 23 게이지 마이크로핀은 사용자가 브래드 네일보다 훨씬 작은 구멍을 남김으로써 구멍을 메우는 데 일반적으로 걸리는 시간을 없애고, 훨씬 더 좋아 보이는 완제품을 보여주면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다음 사이즈 업은 종종 " 브래드 " 라고 불리는 18 게이지(직경 1.02mm) 고정이다. 이 고정 장치는 몰딩을 고정하는 데에도 사용되지만 더 작은 22~24 게이지 고정 장치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더 큰 강도로 인해 일부 구멍 채우기가 허용되는 활엽수의 트림 목공에 사용된다. 대부분의 18 게이지 브래드는 헤드가 있지만 일부 제조업체는 헤드가 없는 고정 장치를 제공한다. 길이는 5 ⁄ 8 ~ 2인치(16 ~ 51mm)이다. 다음 크기는 16 및 15 게이지(1.63 및 1.83 mm 직경)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마무리 손톱"이라고 한다. 길이는 5⁄8에서 2 1/2 인치(16 및 64mm) 사이이며, 구멍이 메워지고 이후에 작업이 칠해지는 많은 침엽수 및 MDF 트림 작업(예: 베이스보드 / 스커팅 , 건축 등)의 일반적인 고정에 사용된다. 기존의 결합 고정 장치의 가장 큰 크기는 골조, 울타리 및 기타 형태의 구조 및 외부 작업에 사용되는 잘린 머리와 전체 머리 못이다. 이 못은 일반적으로 생크 직경이 0.11 ~ 0.13인치(2.8 ~ 3.3mm)이지만 일부 제조업체에서는 더 작은 직경의 못도 제공한다. 일반적인 길이는 2에서 3+1/3(51 ~ 85mm) 사이이다. 샹크 스타일에는 단순형, 링 환형, 트위스트 등이 포함되며, 해당 용도에 필요한 인발 저항성, 부식 저항성 등에 따라 평강, 아연도금강, 셰라르화강, 스테인리스강 등을 포함한 다양한 재료와 마감재가 제공된다. 이러한 크기의 고정 장치는 응용 프로그램에 따라 스틱 조합 형태(종종 전체 헤드의 경우 20° ~ 21°, 클립 헤드의 경우 28° ~ 34°) 또는 코일 형태(팔레트/루핑 네일러에 사용)로 제공된다. 머리 전체가 있는 못은 잘린 머리못보다 인발 저항이 더 크며, 많은 허리케인 지역에서 구조적 프레임을 위한 코드로 의무화되어 있다. 건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유형의 고정은 큰 머리의 못 과 거의 유사한 스트랩 고정이다. 이들은 조이스트 행거, 코너 플레이트, 강화 스트랩 등과 같은 금속 제품을 목재 구조물에 고정하기 위해 스트랩 샷 네일러(또는 포지티브 배치 네일러 UK)와 함께 사용된다. 고정 지점이 외피가 아니어서 네일건을 발사하기 전에 정확한 위치를 지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네일러와 다르다. 최대 6개의 스파이크를 구동할 수 있는 다른 전문 못을 박는 도구도 사용할 수 있다. 16cm 길이로 나무를 강철 등에 고정한다. 손바닥 못을 박는 도구는 일반적으로 공압식으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고 가벼운 도구이다. 좁은 공간에서의 작업에 편리하며, 짧은 손톱과 긴 손톱을 모두 박을 수 있다. 한 번의 타격이 아니라 반복적인 해머 타격(초당 약 40회)이 패스너를 구동한다. 안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매년 약 42,000명이 네일건으로 인한 부상으로 응급실을 찾는다. 이러한 부상의 40%는 소비자에게 발생한다. 네일건 부상은 1991년과 2005년 사이에 세 배로 증가했다. 발과 손 부상은 가장 흔한 부상 중 하나이다. 미국 소비자 제품 안전 위원회 (US Consumer Product Safety Commission)는 네일건 상처를 치료하는 데 전국적으로 응급 의료, 재활 및 산재 보상 비용으로 연간 최소 3억 3,800만 달러가 소요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종종 도구를 판매하는 직원은 부상을 방지할 수 있는 안전 기능이나 사용과 관련된 위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손가락, 손, 발의 부상은 가장 흔한 3가지 부상 중 하나이지만 팔, 다리 및 내장과 같은 다른 신체 부위를 침범하는 부상도 있다. 이러한 부상 중 일부는 심각하고 일부는 사망에 이르렀다. 모든 종류의 네일건은 위험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총기와 유사한 안전 예방 조치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안전을 위해 네일건은 총구가 목표물에 닿도록 설계되었다. 특별히 목적을 위해 개조하지 않는 한, 발사체 무기로 효과적이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발사 메커니즘은 이중 작동 접촉식 트립 트리거로, 못이 배출되려면 수동 트리거와 코 접촉 요소를 모두 눌러야 한다. 더 안전한 순차 트립 방아쇠는 방아쇠와 동시에가 아니라 수동 방아쇠 전에 노즈 접촉을 눌러야한다. CDC에 따르면 접촉 트립 도구로 인한 부상의 약 65%에서 69%는 순차 트립 트리거를 사용하여 예방할 수 있다. 네일건에서 손톱이 방출되는 것과 관련된 반동이 있다. 접촉 방아쇠를 사용하면 노즈가 나무 표면이나 반동 후 이전에 배치된 못에 부딪힐 경우 총이 의도하지 않은 못을 발사할 수 있다. 터치 팁(접촉) 트리거가 있는 네일러는 이 이중 발사에 취약하다. CPSC(소비자 제품 안전 위원회)의 2002년 엔지니어링 보고서에 따르면 두 번째 못의 반동과 발사는 방아쇠를 풀기 훨씬 전에 발생한다. 접촉 방아쇠가 있는 도구 사용자의 급성 부상 비율은 두 배나 높다. 2011년 9월, 산업안전보건청 (OSHA)과 국립산업안전보건 연구소(NIOSH)는 순차 방아쇠가 있는 도구의 사용, 사용 전 교육, 눈 보호와 같은 적절한 보호 장비의 사용. 2013년 6월 NIOSH는 네일건의 위험과 장치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교육용 만화를 발표했다. 네일건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레임 목수 들의 네일건 사고를 줄이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종류 공압식 네일건 압축 공기를 사용하여 패스너를 구동하는 가장 인기 있는 유형의 네일건이다. 따라서 압축기(직류 또는 현장 발전기)를 작동하는 것은 압축기와 전원 모두에 의존하며, , 성가신 고압 공기 호스(추운 날씨에 극도로 뻣뻣할 수 있음)에 의해 사용에 지장을 받는다. 날씨, 그리고 언제든지 감겨 있었던 성가신 "기억"을 유지). 공압식 네일건은 또한 연속적으로 구동할 수 있는 패스너의 수에서 압축기의 크기와 반발률에 의해 제한을 받다. 역사적으로 공압식 공기총은 매일 오일을 발라야 했지만(최소한) "오일 프리" 버전도 생산된다. 화약 동력 네일건 폭발 동력("화약 작동") 네일건은 두 가지 광범위한 범주로 나뉜다. 직접 구동 또는 고속 장치. 이것은 손톱에 직접 작용하는 가스 압력을 사용하여 손톱을 구동한다. 간접 구동 또는 저속 장치. 이것은 못을 구동하는 무거운 피스톤에 작용하는 가스 압력을 사용한다. 간접 구동 못을 박는 도구는 조작되거나 오용되더라도 자유로이 날아가는 발사체를 발사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안전하고 못의 속도가 낮을수록 작업 기판의 폭발적인 산산조각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 두 유형 모두 적절한 카트리지 부하로 매우 강력하여 못이나 기타 패스너를 단단한 콘크리트, 석재, 압연 철골 등에 쉽게 박을 수 있다. 연소 동력 네일건 작은 실린더에서 가스(예: 프로판 )와 공기 폭발로 구동됨. 피스톤이 못을 직접 밀고 회전부가 없다. 전동 네일건 전동 네일건의 한 유형에서는 회전하는 전기 모터가 강력한 스프링을 점진적으로 압축했다가 갑자기 해제한다. 솔레노이드 구동식 네일건 여기에서 솔레노이드는 못을 추진하는 긴 앞 막대가 있는 금속 피스톤을 추진한다. 솔레노이드는 피스톤이나 발사체를 솔레노이드의 중앙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 일련의 솔레노이드를 사용하는 경우(네일건을 일종의 코일건으로 만든다) 더 많은 전력을 얻으려면 피스톤이 솔레노이드의 중앙에 도달할 때 각 솔레노이드를 꺼야 한다. 다중 솔레노이드 코일건에서 큰 커패시터(각 솔레노이드에 하나씩 부착됨)에서 짧은 전력 버스트가 피스톤이나 발사체를 추진하기 위해 적시에 온다. 자세한 내용은 강자성 발사체용 코일건을 참조. 핀 네일러 핀네일러는 마감 못 대신 간단한 핀 모양의 패스너를 구동하는 네일건 유형이다. 핀네일러는 가구, 캐비닛 및 인테리어 목공용 몰딩에 자주 사용된다. 또한 클램프로 단단히 고정할 수 없는 불규칙한 모양의 조각에 대한 임시 패스너로도 사용할 수 있다. 갤러리 같이 보기 공기압축기 스테이플건 각주 공구 20세기 발명품
https://en.wikipedia.org/wiki/Nail%20gun
Nail gun
A nail gun, nailgun or nailer is a form of hammer used to drive nails into wood or other materials. It is usually driven by compressed air (pneumatic), electromagnetism, highly flammable gases such as butane or propane, or, for powder-actuated tools, a small explosive charge. Nail guns have in many ways replaced hammers as tools of choice among builders. The nail gun was designed by Morris Pynoos, a civil engineer by training, for his work on Howard Hughes' Hughes H-4 Hercules (known as the Spruce Goose). The wooden fuselage was nailed together and glued, and then the nails were removed. The first nail gun used air pressure and was introduced to the market in 1950 to speed the construction of housing floor sheathing and sub-floors. With the original nail gun, the operator used it while standing and could nail 40 to 60 nails a minute. It had a capacity of 400 to 600 nails. Use Nail guns use fasteners mounted in long clips (similar to a stick of staples) or collated in a paper or plastic carrier, depending on the design of the nail gun. Some full head nail guns, especially those used for pallet making and roofing, use long plastic or wire collated coils. Some strip nailers use a clipped head so the nails can be closer together, which allows less frequent reloading. Clip head nails are sometimes banned by state or local building codes. Full Round Head nails and ring shank nails provide greater resistance to pull out. Nailers may also be of the 'coil' type where the fasteners come in wire or plastic collation, to be used with nail guns with a drum magazine; the advantage is many more fasteners per load, but at the expense of extra weight. Industrial nailers designed for use against steel or concrete may have a self-loading action for the explosive caps, but most need nails to be loaded by hand. Nail guns vary in the length and gauge (thickness) of nails they can drive. The smallest size of fasteners are normally 23 gauge ( in diameter), commonly called "pin nailers" and generally have only a minimal head. They are used for attaching everything from beadings, mouldings and so forth to furniture all the way up to medium-sized baseboard, crown molding and casing. Lengths are normally in the range , although some industrial tool manufacturers supply up to . The 23 gauge micro pin is rapidly gaining ground as users find that it leaves a much smaller hole than brad nails, thereby eliminating the time normally taken to fill holes and presenting a far better looking finished product. The next size up is the 18 gauge (1.02 mm diameter) fixing, often referred to as a "brad". These fastenings are also used to fix mouldings but can be used in the same way as the smaller 22 to 24 gauge fastenings. Their greater strength leads to their use in trim carpentry on hardwoods where some hole filling is acceptable. Most 18 gauge brads have heads, but some manufacturers offer headless fastenings. Lengths range from . The next sizes are 16 and 15 gauge (1.63 and 1.83 mm diameter). These are generally referred to as "finish nails". They come in lengths between and are used in the general fixing of much softwood and MDF trim work (such as baseboard/skirtings, architraves, etc.) where the holes will be filled and the work painted afterwards. The largest sizes of conventional collated fastenings are the clipped head and full head nails which are used in framing, fencing and other forms of structural and exterior work. These nails generally have a shank diameter of although some manufacturers offer smaller diameter nails as well. General lengths are in the range . Shank styles include plain, ring annular, twisted, etc. and a variety of materials and finishes are offered including plain steel, galvanized steel, sherardised steel, stainless steel, etc. depending on the pull-out resistance, corrosion resistance, etc. required for the given application. These sizes of fastenings are available in stick collated form (often 20° to 21° for full head, 28° to 34° for clipped head) or coil form (for use in pallet/roofing nailers) depending on the application. Full-head nails have greater pull-out resistance than clipped head nails and are mandated by code in many hurricane zones for structural framing. Another type of fastening commonly found in construction is the strap fastening which is roughly analogous to the large head clout nail. These are used in conjunction with a strap shot nailer (or positive placement nailer UK) to fix metalwork such as joist hangers, corner plates, strengthening straps, etc. to timber structures. They differ from conventional nailers in that the point of the fastening is not sheathed so it can be exactly positioned before firing the nail gun. Other specialist nailers are also available which can drive spikes up to long, fix wood to steel, etc. A palm nailer is a small, lightweight tool, typically pneumatic, which fits into the palm of one hand. It is convenient for working in tight spaces and can drive both short and long nails. Repeated hammer blows (of around 40 hits per second) rather than a single strike drive the fastener. Safety In the United States, about 42,000 people every year go to emergency rooms with injuries from nail guns, according to the 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CDC). 40% of those injuries occur to consumers. Nail gun injuries tripled between 1991 and 2005. Foot and hand injuries are among the most common. The U.S. Consumer Product Safety Commission estimates that treating nail gun wounds costs at least $338 million per year nationally in emergency medical care, rehabilitation, and workers' compensation. Often personnel selling the tools know little about the dangers associated with their use or safety features that can prevent injuries. Injuries to the fingers, hands, and feet are among the three most common, but there are also injuries that involve other body areas such as arms and legs as well as internal organs. Some of these injuries are serious and some have resulted in death. All kinds of nail guns can be dangerous, so safety precautions similar to those for a firearm are usually recommended for their use. For safety, nail guns are designed to be used with the muzzle contacting the target. Unless specifically modified for the purpose, they are not effective as a projectile weapon. The most common firing mechanism is the dual-action contact-trip trigger, which requires that the manual trigger and nose contact element both be depressed for a nail to be discharged. The sequential-trip trigger, which is safer, requires the nose contact to be depressed before the manual trigger, rather than simultaneously with the trigger. Approximately 65% to 69% of injuries from contact-trip tools could be prevented through the use of a sequential-trip trigger, according to the CDC. There is recoil associated with the discharge of a nail from a nail gun. Contact triggers allow the gun to fire unintended nails if the nose hits the wood surface or a previously placed nail following recoil. Nailers with touch tip (contact) triggers are susceptible to this double firing. According to a 2002 engineering report from the Consumer Products Safety Commission (CPSC), the recoil and firing of the second nail occurs well before the trigger can be released. Acute injury rates are twice as high among users of tools with contact triggers. In September 2011 The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 (OSHA) and the National Institute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NIOSH) issued a nail gun safety guide that details practical steps to prevent injuries including use of tools with sequential triggers, training prior to use, and use of appropriate protective equipment such as eye protection. In June 2013, NIOSH released an instructional comic providing information on nail gun hazards and ways to use the device properly. Research aimed at reducing nail gun accidents among frame carpenters, among the heaviest users of nail guns, is ongoing. Types Pneumatic The most popular type of nail gun, which uses compressed air to drive its fasteners. Thus, it is dependent on both a compressor and a power source to operate the compressor (either direct electrical current or an on-site generator), and encumbered in use by a cumbersome high-pressure air hose (which may be extremely stiff in cold weather, and retain an annoying "memory" of having been coiled at any time). A pneumatic nail gun is also limited by the size and rebound rate of its compressor in the number of fasteners it can drive consecutively. Historically pneumatic air guns required daily oiling (at a minimum), though "oil-free" versions are also produced. Powder-actuated Propellant-powered ("powder-actuated") nail guns fall into two broad categories: Direct drive or high velocity devices. This uses gas pressure acting directly on the nail to drive it. Indirect drive or low velocity devices. This uses gas pressure acting on a heavy piston which drives the nail. Indirect drive nailers are safer because they cannot launch a free-flying projectile even if tampered with or misused, and the lower velocity of the nails is less likely to cause explosive shattering of the work substrate. Either type can, with the right cartridge loads, be very powerful, driving a nail or other fastener into hard concrete, stone, rolled steelwork, etc., with ease. Combustion powered Powered by a gas (e.g. propane) and air explosion in a small cylinder; the piston pushes the nail directly and there are no rotating parts. Electric In one type of electric nail gun, a rotating electric motor gradually compresses a powerful spring and suddenly releases it. Solenoid-powered Here a solenoid propels a metal piston, which has a long front rod which propels the nail. The solenoid tends to attract the piston or projectile towards the middle of the solenoid. If a series of solenoids is used (which makes the nail gun into a type of coilgun), to get more power, each solenoid must be switched off when the piston has reached the middle of the solenoid. In multi-solenoid coilguns a short burst of power from a big capacitor (one attached to each solenoid) comes at the right time to propel the piston or projectile. For more information see Coilguns for ferromagnetic projectiles. Pin nailer A pin nailer is a type of nail gun that drives simple pin-like fasteners as substitutes for finish nails. Pin nailers are often used on molding for furniture, cabinets, and interior millwork. They can also work as temporary fasteners for pieces with irregular shapes that are impossible to hold down with a clamp securely. Gallery See also Air compressor Needlegun Needlegun scaler Paslode Impulse, a trademarked name for a cordless nail gun powered by a small flammable gas explosion Screw gun Staple gun References External links How nailguns work Nail Gun Safety: A Guide for Construction Contractors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 Nail Gun Safety: The Facts Original nail gun idea started in Winsted Woodworking hand-held power tools Pneumatic tools Nail (fastener) 20th-century inventions Products introduced in 1950 American inventions
https://ko.wikipedia.org/wiki/SEPTA%2015%ED%98%B8%EC%84%A0
SEPTA 15호선
SEPTA 15호선 또는 지라드 애비뉴 선(Girard Avenue Line)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북부 및 서부 필라델피아를 통과하는 지라드 애비뉴(Girard Avenue)에서 운용되는 트롤리 노선으로, 펜실베이니아 남동 교통국(SEPTA)에서 운영하고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지하철-지상 트롤리 노선의 일부가 아닌 유일한 도시 교통 부문의 지상 트롤리 선이다. (SEPTA의 철도 노선도에서 지정되었지만) SEPTA PCC II 차량이 노선에 사용된다. 이 선로는 1859년 리치먼드 & 스쿨킬 강 여객 철도(Richmond and Schuylkill River Passenger Railway)가 운영하는 마차철도 노선으로 처음 열렸으며 1895년에 전철화되어 1902년과 1903년에 확장되었다. 1992년 23번(Route 23, 저먼타운 애비뉴~11,12번가)및 56번(Route 56, 토레스데일 애비뉴-에리 애비뉴) 노선과 함께 서비스가 일시 중지(버스로 대체)되었다. 2005년 9월 4일, 트롤리 서비스가 복원되었다. 2012년 4월 29일, 프랭크포드 애비뉴 동쪽 구간의 주요 재건축으로 인해 버스가 운행되며, 프랭크포드 서쪽은 PCC II가 운영한다. 트롤리는 현재 프랭크포드와 델라웨어 애비뉴(Northern Liberties Loop)에서 종착하고, 버스는 마켓-프랭크포드 선의 지라드 역에서 종착한다. 경로 지라드 애비뉴 선은 의 길이로 지라드 애비뉴와 리치먼드 가 간을 운행한다. 15번 노선의 서부 종착지는 지라드 애비뉴와 63번가 교차로에 위치한 해딩턴 루프(Haddington Loop)로, 여기서부터 바로 캐럴 파크를 지나간다. 다음 랜드마크는 캐시드럴 묘지(Cathedral Cemetery)로, 30번 국도(랭커스터 애비뉴) 구석에, 지라드 애비뉴와 15번이 10번 트롤리 노선과 함께 겹치는 곳에 있다. 노선은 랭커스터 애비뉴를 떠나 지라드 애비뉴의 경로를 따라 진행한다. 이후 벨몬트 애비뉴 교차로에서 파올리/손데일 선(Paoli/Thorndale Line)을 건너면 스쿨킬 고속도로의 342번 출구 근처에 있는 필라델피아 동물원을 지나 지라드 애비뉴 교를 건너 스쿨킬 강을 건넌다. 브루어리타운에 진입 한 후, 15번은 지라드 칼리지의 남쪽 부분에서 일부 루프 구간을 지나고, 지라드 애비뉴에서 다시 합류하여 세인트조세프 병원(St. Joseph's Hospital) 을 지난다. 처음으로 교차하는 도시 철도 노선은 브로드 스트리트 선의 지라드 역인데, 두 블록은 원래 복원된 트롤리 선인 23번 버스 노선이 횡단하였으나, SEPTA는 2014년 23번의 모든 연결 선로 및 북부 필라델피아 트롤리 네트워크에 대한 모든 연결을 완전히 종료할 계획이다. 15번 노선은 9번가에서 SEPTA 메인 라인의 동부 구간이 교차하고, 지라드 매디컬 센터(Girard Medical Center)을 지난다. 프론트 스트리트(Front Street)의 15번 구간 아래로 마켓-프랭크포드 선의 지라드 역이 위치한다. 2011년에 SEPTA는 프랭크포드와 델라웨어 애비뉴 교차로에서 15번 노선을 위한 새로운 루프를 완공했으며, 지라드(Girard)에서 프랭크포드를 따라 새로운 경로를 통해 도달한다. 2012년 4월 29일에 SEPTA는 이 루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 루프는 2010년 9월에 개장한 슈거하우스 카지노(SugarHouse Casino) 건너편에 있으며, 마켓-프랭크포드 선의 프론트 스트리트 및 지라드에서 높은 승객 이동률로 인한 자연스러운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 루프는 SEPTA가 리치먼드 스트리트(Richmond Street)를 따라 주간고속도로 제95호선 재건축으로 인해(아래 섹션 참조) 2012년 봄과 2012년 말 사이에 지라드 애비뉴(Girard Ave)와 앤 스트리트(Ann Street) 사이의 리치먼드에서 트랙을 대체가 완료될 때까지 15번 노선의 임시 동부 터미널이 될 것이다. 지라드 애비뉴는 I-95의 23번 출구에서 끝난다. 15번 노선은 고속도로 아래로 리치먼드 스트리트로 I-95와 평행을 이루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25번 출구 건너편 앨리게니 애비뉴(Allegheny Avenue)와 교차한다. 이곳에서 이전 트롤리 라인인 SEPTA 60호선 버스에 연결된다. 리치먼드 스트리트와 웨스트모어랜드 스트리트(Westmoreland Street) 교차로의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웨스트모어랜드 루프(Westmoreland Loop)의 15번 노선 동쪽 종점 앞의 리치먼드 운동장(Richmond Playground)을 따라 도로가 이어진다. 프랭크포드와 델라웨어 루프 외에도 두 개의 다른 급선회 루프(필라델피아 동물원 서쪽의 41번가 & 파크사이드 / 26번가 & 지라드, 26번가 및 포플러 스트리트(Poplar Street)와 지라드 및 칼리지 애비뉴(College Avenues)를 활용한 양방향 "인라인"컷백)가 있다. 어떠한 일정표에서도 이 루프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리치먼드 스트리트(Richmond Street) & 컴버랜드 애비뉴(Cumberland Avenues)에 위치한 또 다른 루프는 콘레일(Conrail Shared Assets Operations)의 구 리딩 포트 리치먼드 야드 밑의 낮은 교량에서 경고 표지판과 깜박이는 불빛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트럭으로 리치먼드 스트리트가 차단되었을 때 자주 사용되었다. 이 루프는 곧 제거될 예정이다. 차량은 60번가와 지라드 교차점에 있는 캘로힐 차량기지(Callowhill Depot)으로 되돌아온다. 역사 리치먼드 & 스쿨킬 리버 여객 철도(Richmond and Schuylkill River Passenger Railway)는 1859년 3월 26일 펜실베니아 총회에서 페어마운트 파크의 스쿨킬 강을 건너는 지라드 애비뉴 교와 리치먼드의 노리스 스트리트(Norris Street) 사이의 지라드 애비뉴에서 랭커스터 애비뉴의 교량 서부 방면까지의 구간을 승인 받았다. 이 노선은 1859년 7월에 2번가에서 31번가에 이르는 구간으로 개통하였다. 회사는 강제집행 처분을 받아 1864년 6월 14일에 페어마운트 파크 & 델라웨어 리버 여객 철도(Fairmount Park and Delaware River Passenger Railway)로 재편되었으며, 1866년 2월 15일에 저먼타운 여객 철도(23호선, 저먼타운 애비뉴)로 합병되었다. 1866년에는 파머 스트리트(Palmer Street)의 동쪽 구간이 확장 개통되었다.(파머,비치,샤카막슨 스트리트에 걸쳐서) 그리고 1875년 노리스 스트리트까지 확장되었다. 피플스 여객 철도([People's Passenger Railway)는 1881년 10월 1일에 노선을 임대했으며, 지라드 애비뉴 철도(Girard Avenue Railway)를 1896년 6월 22일에 임대했다.(1894년 5월 17일 공인) 1900년에 서쪽으로 60번가까지 연장했다. 유니언 견인 회사(Union Traction Company)는 1896년 7월 1일 피플스 여객 철도를 임대하여 필라델피아의 거의 모든 노면 철도를 관리하게 되었다. 지라드 애비뉴 차량은 1903년에 서쪽으로 63번가, 동쪽으로 앨리게니 애비뉴(Allegheny Avenue) - 전기 견인 회사(Electric Traction Company)의 브라이즈버그 선(Bridesburg Line)을 따라 리치먼드 스트리트 후방의 확장 - 로 확장되었고, 브라이즈버그 선을 브라이즈버그 행으로 대체하였다. 1992년, SEPTA는 15번, 23번, 56번의 트롤리 서비스를 버스로 대체했다. PCC 카는 주말에 캘로힐 차량기지에서 전후 차를 사용하여 1948년 일요일(그리고 토요일은 물론 나중에) 15번 노선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1955년 6월 세인트루이스와 캔자스시티에서 PCC 카를 구입했을 때 다른 선로에서 온 전후 차가 쏟아져왔고, 이후 15일에 모든 서비스를 제공했다. PCC는 1992년 SEPTA가 버스로 교체할 때까지 모든 트롤리 서비스를 제공했다. 트롤리 서비스는 10번 노선의 가와사키 차량을 사용하여, 1990년에 15번 노선에 잠시 반환되었는데, 이후 10번 노선의 노선 부분을 따라 수도 본관 교체에 의해 일시적으로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5년 복원 15번 노선은 13년 동안 버스로 운행된 이후 2005년 9월에 트롤리 서비스로 복원되었다. 트롤리 서비스의 재개를 준비하기 위해 SEPTA는 가공전차 선로의 수리를 포함하여 총 1억 달러를 들였다. 15번 노선의 차량은 PCC II 차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브룩빌 설비 회사(Brookville Equipment Company)에서 트롤리 당 130 만 달러의 비용으로 완전히 복원한 세인트루이스 카 제 PCC 전차이다. 복원된 트롤리는 ADA 준수를 위한 휠체어 리프트가 있는 넓어진 중앙 도어 뿐만 아니라 에어컨 및 회생 제동 장치가 추가되었다. 트롤리 서비스의 복원은 59번가에 있는 지역 주민들과 오랜 논쟁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트롤리는 거리에 정차할 때 캘로힐 차량기지에 주박하기 위해 내려야했다. 노선을 재건하는 동안, 주변 동네들은 주민 참여 연합을 통해 정화 및 마케팅 프로젝트를 통해 지라드 애비뉴의 거리 풍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5년에 서비스가 반환된 이래로 15번 노선은 도로를 따라 새로 개발된 투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SEPTA는 일시중단된 트롤리 노선 복구에 전념했지만, 교외 지역 사회는 15번 노선의 불완전한 운영과 트롤리 인프라 유지 비용을 이유로, 도시 트롤리 노선을 통한 시외 철도 노선 확장을 위해 사용 가능한 기금을 대신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로, 도로 공사 및 기타 유지 보수 작업으로 인해 셔틀 버스가 때때로 노선 일부 구간에서 트롤리 서비스를 대체한다. 포트 리치먼드 재건축과 I-95 15번 노선 동부 구간인 새로운 노던 리버티스 루프(Northern Liberties loop)는 주간고속도로 제95호선(이하 I-95)의 재건 프로젝트의 일부로 재건되고 있다. 15번 노선 관련 I-95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는 아라밍고(Aramingo) 애비뉴를 통해 지라드 애비뉴의 교량 재건 및 확대 및 리치먼드 스트리트의 부분 개편을 포함한다. 이 영역의 모든 선로는 제거될 리치먼드 & 컴버랜드 루프를 제외하고 대체된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일부는 장애물로 구 포트 리치먼드 야드에서 남겨진 저지대의 교량을 대체하기 위해 리치먼드 스트리트(Richmond Street)의 CSAO 선로를 위한 4개의 별도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다. 현재의 콘레일 선로에서 폭을 합리화한 새로운 교량은 I-95 고가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이전됨으로써 훨씬 더 큰 도로 정리를 제공하게 된다. 프랭크포드 애비뉴에서 동쪽으로 프랭크포드와 델라웨어 애비뉴 역과 슈거하우스 카지노(SugarHouse Casino) 간의 15번 노선이 2018년까지 지속될 예정인 프로젝트 기간 동안 셔틀 버스가 운행된다. 차량 18대의 PCC II : 1947년 세인트루이스 카 컴퍼니제 복원. 같이 보기 SEPTA 서브웨이-서페이스 트롤리 선 각주 외부 링크   &   Photos of SEPTA Route 15 trolleys 1859년 개통한 철도 노선 1992년 폐지된 철도 노선 2005년 개통한 철도 노선 펜실베이니아주의 철도 교통 필라델피아의 교통 미국의 노면전차
https://en.wikipedia.org/wiki/SEPTA%20Route%2015
SEPTA Route 15
Route 15, the Girard Avenue Line, is a trolley line operated by the Southeastern Pennsylvania Transportation Authority (SEPTA) along Girard Avenue through North and West Philadelphia, Pennsylvania, United States. , it is the only surface trolley line in the City Transit Division that is not part of the Subway–Surface Trolley Lines (although it is designated as such on SEPTA's rail maps). SEPTA PCC II vehicles are used on the line. The line was first opened in 1859 as a horse car line operated by the Richmond and Schuylkill River Passenger Railway, and electrified in 1895, with extensions in 1902 and 1903. Service was "bustituted" in 1992, along with Route 23 (Germantown Avenue-11th and 12th Streets) and Route 56 (Torresdale-Erie Avenues). On September 4, 2005, trolley service was restored. On April 29, 2012, the east of Frankford Ave the line started being operated by buses due to major reconstruction; west of Frankford is still run by PCC II. Trolleys terminated at Frankford and Delaware Avenues (Northern Liberties Loop) while buses terminated at Girard Station under the Market-Frankford Line. , the full line is being substituted by a bus bridge to allow for rolling stock maintenance, track repairs, and a nearby highway expansion. Trolley service was originally anticipated to return in late 2021. As of August 2023, six of the 18 cars have been restored, and SEPTA expects that trolleys will be in service in the fall of 2023. Route The Girard Avenue Line's route runs along Girard Avenue and Richmond Street. The western terminus of Route 15 is at the intersection of Girard Avenue and 63rd Street, at the Haddington Loop, and instantly passes by Carroll Park. The next landmark is Cathedral Cemetery, which is on the corner of US 30 (Lancaster Avenue), where both Girard Avenue and Route 15 briefly overlap, along with the SEPTA Route 10 trolley. The line leaves Lancaster Avenue and resumes its way along Girard Avenue. After crossing over the Philadelphia–Harrisburg line at the intersection with Belmont Avenue, the line passes by the Philadelphia Zoo near Exit 342 on the Schuylkill Expressway before crossing the Schuylkill River over the Girard Avenue Bridge. After entering Brewerytown, Route 15 loops partially around the south side of Girard College, but rejoins Girard Avenue again, and passes by St. Joseph's Hospital. The first mass transit crossing the line encounters is the Broad Street Line's Girard Station, and two blocks from there crosses the SEPTA Route 23 bus line which was originally a trolley line that may be restored in the future, however SEPTA has removed all connecting track & overhead wires for Route 23 at this location in 2014 completely ending any connection to the North Philadelphia Trolley Network. Directly east of the SEPTA Main Line at 9th Street, Route 15 passes by the Girard Medical Center. At Front Street Route 15 runs beneath the Market–Frankford Line's Girard Station, and then crosses Frankford Avenue, one of the two streets the line is named after. In 2011, SEPTA completed a new loop for Route 15 at the intersection of Frankford and Delaware Avenues, reached via new trackage down Frankford from Girard. On April 29, 2012, SEPTA began using this loop. This loop is across from the Rivers Casino which opened in September 2010, and is also a natural turnback point due to high ridership turnover at Front Street and Girard for the Market-Frankford Line. The loop will be the temporary eastern terminus of Route 15 when SEPTA finishes replacing track on Richmond between Girard Ave and Ann Street between spring and late 2012, due to Interstate 95-related reconstruction along Richmond Street (see section below). Girard Avenue ends at Exit 23 on I-95, so Route 15 moves beneath the highway onto Richmond Street, parallel to I-95 until it crosses over the street from the north side to the south side before Exit 25, the interchange with Allegheny Avenue, where it connects to the SEPTA Route 60 bus, another former trolley line. The road runs along the Richmond Playground before Route 15's eastern terminus at the Westmoreland Loop, on the southwest corner of the intersection of Richmond Street and Westmoreland Street. In addition to the Frankford and Delaware loop, two other short-turn loops exist: at 41st & Parkside, just west of the Philadelphia Zoo, and at 26th & Girard (a bidirectional "in-line" cutback utilizing 26th and Poplar Streets and Girard and College Avenues). No scheduled runs use these loops. Another such loop, located at Richmond Street & Cumberland Avenues, was frequently used when Richmond Street was blocked by trucks which failed to heed warning signs and flashing lights for a low bridge underneath the former Reading Port Richmond Yard of Conrail Shared Assets Operations. This loop has since been removed. Cars returning to Callowhill Depot turn off Girard at 60th Street. History The Richmond and Schuylkill River Passenger Railway was chartered by the Pennsylvania General Assembly on March 26, 1859 to operate along Girard Avenue between the Girard Avenue Bridge over the Schuylkill River in Fairmount Park and Norris Street in Richmond, with an extension authorized west over the bridge to Lancaster Avenue. The line opened from Second Street to 31st Street in July 1859. The company was sold at foreclosure and reorganized as the Fairmount Park and Delaware River Passenger Railway on June 14, 1864, and was merged into the Germantown Passenger Railway (Route 23 Germantown Avenue) on February 15, 1866. Extensions were opened east to Palmer Street in 1866 (looping via Palmer, Beach, and Shackamaxon Streets) and to Norris Street in 1875. The People's Passenger Railway leased the line on October 1, 1881, and leased the Girard Avenue Railway (chartered May 17, 1894) on June 22, 1896, extending the line west to 60th Street in 1900. The Union Traction Company leased the People's Passenger Railway on July 1, 1896, giving it control over almost all the street railways in Philadelphia. Girard Avenue cars were extended west to 63rd Street and east to Allegheny Avenue – the latter extension along the ex-Electric Traction Company Bridesburg Line on Richmond Street – in 1903, and eventually replaced the Bridesburg Line entirely to Bridesburg. In 1992, SEPTA replaced trolley service along Routes 15, 23, and 56 with buses. PCC cars were first introduced to Route 15 on Sundays (and later on Saturdays as well) in 1948 using postwar cars at Callowhill Depot that would have been otherwise idle on the weekend. They provided all service on the 15 in June 1955 after a cascade of postwar cars from other lines occurred when used PCC cars were purchased from St. Louis and Kansas City, Missouri. Service was cut back to Richmond & Westmoreland on February 24, 1956. PCCs provided all trolley service until SEPTA replaced the trolleys with buses on September 13, 1992. Trolley service returned briefly to Route 15 later in the 1990s using Kawasaki cars from Route 10 temporarily made surplus by water main replacement along the surface portion of Route 10. 2005 trolley restoration The 15 line returned to trolley service on September 4, 2005 after having been served by buses for thirteen years. To prepare for the resumption of trolley service, SEPTA spent a total of $100 million, including rehabilitating the tracks and repairs to the overhead wires. The rolling stock for Route 15 consists of PCC II cars, which are 1947 St. Louis Car-built PCC streetcars that had been completely rebuilt by the Brookville Equipment Company at a cost of $1.3 million per trolley in 2003-2004. The rebuilt trolley includes the addition of air conditioning and regenerative braking, as well as a widened center door with a wheelchair lift for ADA compliance. The restoration of trolley service was delayed because of a long fight with local residents on 59th Street, which the trolleys needed to travel down in order to access the Callowhill Depot, over parking on the street. During the reconstruction of the line the surrounding neighborhoods, through grassroots coalitions, worked to improve the Girard Avenue streetscape through beautification and marketing projects. Since service returned in 2005, the 15 line has spurred various development projects as well as renewed investment along the corridor. In 2018 a comprehensive analysis of SEPTA's surface operations called for abandonment of trolley operations citing the rail car's inability to get around double-parked cars and other obstacles. Port Richmond reconstruction and I-95 Route 15 east of the new Northern Liberties loop is being rebuilt as part of a reconstruction project for Interstate 95. The components of the I-95 project related to Route 15 include reconstruction of Girard Avenue's bridge over Aramingo Avenue, and widening and partial realignment of Richmond Street. All the tracks in these areas will be replaced, except for the Richmond & Cumberland loop which will be removed. Also part of the project is the construction of four separate bridges for Conrail tracks over a realigned Richmond Street to replace the low-clearance nuisance bridge left over from the former Port Richmond Yard. The new bridges, rationalized in width to current Conrail trackage, will provide much greater road clearance by virtue of being relocated away from underneath the I-95 viaduct. Route 15 east of Frankford Avenue to the Frankford and Delaware Avenue station and the SugarHouse Casino will be served by a shuttle bus for the duration of the project, which is expected to last through 2018. On January 21, 2020, SEPTA officials announced that buses would be replacing the streetcars along the whole route for a period of at least 18 months. 2020 redesign plans In 2021, SEPTA proposed rebranding their rail transit service as "SEPTA Metro", in order to make the system easier to navigate. Under this proposal, services along the Girard Avenue Line will be rebranded as the "G" lines with a yellow color, with each service receiving a numeric suffix. Local service would become the G1 Girard Avenue Local. In addition, there are plans to extend the 15 from 63rd Street and Girard Avenue further west to 69th Street Transportation Center. This route would follow the 30 route along Haverford Avenue and Cardington Road between 63rd-Girard and 69th Street Transportation Center. Following a period of public comment, Route 15's proposed name was simplified to "G Line." Future rolling stock In 2023, SEPTA awarded Alstom Transportation the contract to furbish 130 new low-floor trolleys, with an option for 30 more. The trolleys will be of Alstom's Citadis family and will be 80 feet in length and fully ADA-compliant, which the current PCC-II trolleys from their rebulid in early 2000's are. The trolleys will be distributed among SEPTA's Route 15 and its subway-surface lines in Philadelphia, and its Routes 101 and 102 in neighboring Delaware County. The first trolley is expected to be delivered from Alstom in the Spring of 2027, with the last trolley to be delivered some time in 2030. 2023 trolley restoration As of July 7, 2023 the I-95 reroute work had been substantially completed, but trolley service not yet restored. The Billy Penn at WHYY Newsletter reported that SEPTA officials had stated that several of the now twice refurbished PCC-II cars were in testing on the route and "at least" eight would be ready by "the end of the summer [2023]." [...] "The plan is to use trolleys and buses to serve Route 15, which allows us to deploy the restored trolleys while maintaining frequency on the route,” a SEPTA spokesperson told Billy Penn. As of August 2023, six of the cars has been restored, and SEPTA had announced a partial restoration of trolley service starting September 10, 2023. However, citing the need for more operator training, the agency has delayed the restoration, though still expects to resume trolley service sometime in the fall of 2023. Stations All stations are in the City of Philadelphia. References External links   and   Photos of SEPTA Route 15 trolleys Railway lines opened in 1859 Railway lines closed in 1992 Railway lines opened in 2005 Railway lines closed in 2020 15 Streetcars in Pennsylvania Heritage streetcar systems 5 ft 2¼ in gauge railways in the United States Tram routes in Philadelphia 1859 establishments in Pennsylvania 600 V DC railway electrification Heritage railroads in Pennsylv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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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섬
찐섬(, 1739년 3월 18일(음력 2월 9일) ~ 1782년 10월 19일(음력 9월 13일))은 대월 후 레 왕조의 정치인, 찐 주의 제10대 군주(재위: 1767년 ~ 1782년)이다. 봉호는 정도왕()이다. 생애 빈흐우 5년 2월 9일(1739년 3월 18일), 찐조아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까인흥 14년(1753년) 12월, 왕세자(王世子)로 세워졌다. 까인흥 19년(1758년) 10월, 흠차절제각처수보제영(欽差節制各處水步諸營) 겸 장정기(掌政機) 겸 태위(太尉) 겸 정국공(Tĩnh Quốc Công/靖國公)으로 봉해졌고, 양국부(諒國府)를 설치하였다. 《대월사기전서속편(大越史記全書續編)》에 따르면 찐섬은 왕세자 시절에 문학(文學)을 애호하였고, 유학가의 교양이 있었다. 당시 황태자 레주이비 또한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찐조아인은 레주이비를 중시하여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태자비로 세웠다. 찐조아인은 군신 관계를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었으므로 자신은 신하이며 후 레 왕조의 황제가 군주라고 여겼다. 한번은 레주이비와 찐섬이 함께 찐조아인을 알현하였는데, 찐조아인은 주연을 배설하고 레주이비를 초대하였다. 찐조아인의 정비(正妃) 응우옌씨(阮氏)가 왕세자와 황태자의 사이 군신 관계가 애매해진다고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다고 여겼고, 찐섬을 다그쳐 나가도록 하였다. 이후로 찐섬은 레주이비와 틈이 벌어졌다. 까인흥 28년 1월 17일(1767년 2월 15일), 찐조아인이 병사하자 찐섬이 뒤를 이었다. 그해 5월 4일(1767년 5월 31일), 원수총국정(元帥總國政) 겸 정도왕(Tĩnh Đô Vương/靖都王)으로 진봉되었다. 까인흥 30년(1769년) 3월, 찐섬은 레주이비와 찐조아인의 첩이 간통하였다고 무함하여, 현종을 압박해 레주이비를 폐출하고 둘째 아들 레주이껀을 황태자로 세우도록 하였다. 그해 8월 11일(1769년 9월 10일), 대원수총국정(大元帥總國政) 겸 상사(上師) 겸 정왕(Tĩnh Vương/靖王)으로 진봉되었다. 까인흥 31년 10월 10일(1770년 11월 26일), 다시 대원수총국정(大元帥總國政) 겸 상사(上師) 겸 상부(尙父) 겸 예단문공무덕정왕(睿斷文功武德靖王)으로 진봉되었다. 까인흥 32년(1771년) 12월, 레주이비와 그의 당우들을 죽였고, 레주이비의 자녀들을 모두 감금하였다. 이해에 베트남 남방에서 떠이선 세력이 봉기를 일으키자 응우옌 주의 통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찐섬은 응우옌 주가 날로 쇠락하는 것을 보고 떠이선의 응우옌후에와 연합하였다. 까인흥 35년 10월 12일(1774년 11월 15일) , 호앙응우푹을 장수로 하여 파견해 응우옌 주의 군주 응우옌푹투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까인흥 36년(1775년) 2월, 찐 주의 군사가 일거에 응우옌 주의 수도 푸쑤언을 공격해 깨뜨렸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군중에 온역(瘟疫)이 돌자 군사의 주력이 광남(廣南) 지역에서 철군하였고, 해당 지역이 떠이선 군에게 넘어갔다. 까인흥 38년(1777년), 응우옌 주의 응우옌푹투언과 응우옌푹즈엉이 자딘(嘉定), 빈롱(永隆) 일대에서 응우옌후에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응우옌 주는 이로써 무너졌다. 찐섬은 떠이선 왕조가 찐 주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임을 인지하고 응우옌푹아인을 지원하여 그로 하여금 응우옌 주를 회복하도록 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떠이선 조정은 응우옌 주와 교전하고 있었으므로 찐 주를 공격할 겨를이 없었다. 찐섬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적자인 첫째 아들 찐똥이었고, 하나는 서자인 둘째 아들 찐깐이었다. 찐똥은 무(武)를 좋아하고 문(文)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찐섬은 그를 대단히 싫어하였고, 이로 인해 까인흥 41년(1780년)에 찐똥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출하고 찐깐을 대신 세자로 세웠다. 태비(太妃) 응우옌씨(阮氏)는 찐섬 등에게 찐똥이 성년이 된 후 그의 행실을 보고 폐립의 일을 결정하라고 권하였지만 찐섬은 듣지 않았고, 차라리 찐씨의 가업을 조카인 찐봉에게 전하고 싶고 나라를 백부 찐장의 후대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또한 찐똥같은 '불초자(不肖子)'를 세우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하였다. 까인흥 43년 9월 13일(1782년 10월 19일), 찐섬이 병사하니 향년 44세(만 세)이다. 유명을 남겨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인 찐깐으로 하여금 뒤를 잇도록 하고 호앙딘바오(黃廷寶) 등 7인으로 하여금 보정(輔政)하도록 하였다. 묘호를 성조()로 하였고, 성왕()으로 존봉하였다. 해당 존호는 찐섬이 생전에 지정한 것이었다. 찐 주의 역대 군주들이 미자(美字)를 보태어 소천흥운제치개강홍량영유정성인효성왕(紹天興運制治開疆洪量英猷正誠仁孝盛王)으로 하였다. 찐섬이 죽고 오래지 않아 삼부군(三府軍)이 수도 탕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찐깐은 찐똥에게 축출되었다. 베트남의 소설 《황려일통지(皇黎一統志)》에는 찐섬이 응우옌 주를 공격해 무너뜨린 공적을 긍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찐섬이 장자를 폐하고 둘째를 세운 것,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운 행실을 가지고 찐씨 정권이 멸망하게 되는 시작으로 보기도 하였다. 가족 조부모와 부모 조부 : 희조() 인왕() 찐끄엉() 조모 : 자덕태비() 부 티 응옥응우옌() 부친 : 의조() 은왕() 찐조아인() 모친 : 자택태비() 응우옌 티 응옥지엠() 후비 왕자 왕녀 각주 참고 문헌 《월남사략》 《대월사기전서》 1739년 출생 1782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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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ịnh Sâm
Trịnh Sâm (, 9 February 1739 – 13 September 1782) ruled northern Vietnam from 1767 to 1782 AD. He ruled with the title "Tĩnh Đô Vương" () and was one of the last of the powerful Trịnh lords. Trịnh Sâm defeated the ancient enemy of the northern state, the Nguyễn lords in the south. The Trịnh line was separate from the royal Lê dynasty, and the officially recognized emperor was Lê Hiển Tông (1740–1786), who continued to occupy the royal throne in Thăng Long (modern-day Hanoi), but without real power. Early reign Trịnh Sam was given rule over northern Vietnam by his father Trịnh Doanh in 1767. Five years after he took power, the Tây Sơn rebellion started in the south. During his lifetime, the Tây Sơn rebels focused all their efforts against the Nguyễn lords, specifically against Nguyễn Phuc Thuan who had gained the throne as a young boy. As the Tây Sơn rebellion gained strength, the Trịnh saw the Nguyễn weakening month by month. Trịnh–Nguyễn War Trịnh Sâm mobilized the royal (Trịnh) army, and on November 15, 1774, it crossed the river into Nguyễn territory, re-igniting the Trịnh–Nguyễn War. With the Nguyễn army divided and weak, the Trịnh army captured Phú Xuân (modern-day Huế) in February 1775. The army continued south capturing more Nguyễn lands and defeating some of the forces of the Tây Sơn. In the summer of 1775, one of the leaders of the Tây Sơn, Nguyễn Nhac, made a formal alliance with Trịnh Sam against the Nguyễn. Trịnh Sam agreed and gave Nguyễn Nhac a formal title as well as "regalia". The Trịnh army then withdrew back to Tonkin, left a small army in Phú Xuân. Later life For the remainder of Trịnh Sâm's life, the Trịnh allowed emperor Gia Long (Nguyễn Ánh), the last surviving member of the Nguyễn lords, to make repeated attempts to re-take the south. The Tây Sơn brothers were too busy fighting the Nguyễn loyalists to worry about the Trịnh in the north. In 1782 as Trịnh Sâm was dying, he tried to leave control over Vietnam to his son (from his favorite consort or wife, Đặng Thị Huệ, who led the harem when he died — her position was only inferior to that of his deceased primary consort Hoàng Thị Ngọc Khoan), Trịnh Cán, but his older son, Trịnh Khải (whose mother was the high-born unloved Dương Thị Ngọc Hoan, who was only able to share the bed of Trịnh Sâm through treachery) organized an army and fought against his half-brother. Although he was successful, this civil war fatally divided the Trịnh at a critical time when the Tây Sơn (under Nguyễn Huệ) were gaining control over the south. In popular culture Đêm hội Long Trì, a 1989 Vietnamese movie produced by Vietnam Feature film Studio and starring by Thế Anh as Trịnh Sâm. See also List of Vietnamese monarchs Lê dynasty References Sources Encyclopedia of Asian History, Volume 4. 1988.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Tay Son Rebelion - Chronology Annam and it Minor Currency Chapter 16 (downloaded May 2006) 1739 births 1782 deaths Trịnh l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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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T 캐나시선
캐나시 선(Canarsie Line, 또는 14번가-캐나시 선/14th Street–Canarsie Line)은 뉴욕 지하철 체계의 BMT 부분 철도 노선이다. 노선명은 브루클린의 캐나시 인근에 있는 종착지 이름을 따왔다. 뉴욕 지하철 노선도 및 역 표지판에 있는 밝은 슬레이트 회색으로 표시된 L 열차를 상시 운행한다. 이 노선은 BMT 이스턴 디비전(BMT Eastern Division)의 일부이며 때때로 이스턴 디스트릭트 선(Eastern District Line)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윌리엄스버그를 가리키며, 윌리엄스버그 시가 이전 브루클린 시에 의해 병합되었을 때 브루클린의 "동부 지구(Eastern District)"로 묘사되었다. 이는 원래 브루클린 지하철 부분의 노선에 배치 된 위치였다. 이후 캐나시에 이르는 선로와 연결되는 유일한 노선이었다. 이스턴 디스트릭트 하이스쿨(Eastern District High School)은 그랜드 스트리트 역 근처에 있었는데, 1996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이 지명학을 보존했으며, 후에 그랜드 스트리트 교육 캠퍼스(Grand Street Educational Campus)로 재개되었다. 범위 및 운행계통 캐나시 선을 사용하는 운행 계통은 중간 회색으로 표시된다. 다음 운행 계통은 캐나시 선 전구간을 사용한다. 캐나시 선은 맨해튼의 8번로(Eighth Avenue)와 14번가(14th Street)에서 캐나시의 락어웨이 파크웨이(Rockaway Parkway)까지 운행한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의 짧게 뻗은 보존 선로를 제외하고는 전체에 걸쳐 복선으로 되어있다. 현재 노선은 맨해튼 종착지에서 브루클린의 이스트뉴욕 구간에 있는 브로드웨이 정션(Broadway Junction)까지는 복선 지하철이며, 윌슨 애비뉴(Wilson Avenue)의 짧게 늘어진 구간을 제외하고는 남행 선로가 실내, 바로 위 실외에 지면층의 북행 선로가 있는 2층 구조이다. 북행 궤도가 지하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모팻 스트리트(Moffat Street)의 남동쪽 윌슨 애비뉴의 선로 끝자락에서 북행 승강장에서 역 입구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지상 바깥에 있다. 이는 트리니티 공동묘지(Trinity Cemetery) 경계에 직접 밀착된 뉴욕 연결철도(New York Connecting Railroad)에 대해 직결되는 선로 때문이다. 캐나시 선에는 급행 선로가 없다. 따라서 모든 열차는 해당 경로를 통해 완행 운행을 제공한다. 브로드웨이 정션(Broadway Junction) 직전에 BMT 자메이카 선을 지나는 고가 구조물로 나온다. 브로드웨이 정션과 애틀랜틱 애비뉴 사이에는 캐나시 선을 자메이카 선 및 이스트뉴욕 야드(East New York Yard) (그리고 1956년까지 풀튼 스트리트 고가철도(Fulton Street Elevated))에 연결하는 입체교차를 통하여 캐나시 선의 유일한 선로 연결부가 있다. 캐나시 선은 브로드웨이와 풀튼 스트리트 고가 노선에서 리버티 애비뉴 고가철도(Liberty Avenue Elevated, 여전히 IND 풀튼 스트리트 선의 동쪽 일부로 있음)까지의 연결로 애틀랜틱 애비뉴(Atlantic Avenue)에서 구조를 공유했다. 피츠킨 애비뉴의 동쪽, 캐나시 선은 1906년 서터 애비뉴(Sutter Avenue) 역으로 진입한 원래 선로에서 분리된 복선 고가 구조물로 들어간다. 다음 역인 리보니아 애비뉴(Livonia Avenue), IRT 뉴 로츠 선의 리보니아 애비뉴 고가물 위를 지나거나, 바로 이 지점을 넘으면 트랙과 구조물 시설인 Linden Shops에 대한 단선 연결이 된다. 브로드웨이 정션에서의 연결 외에도,이 비전철화 야드 연결은 지하철 시스템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유일한 다른 연결이며, 간접적으로 뉴 로츠 선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B 디비전 크기의 차량은 A 디비전의 폭 제한으로 인해 이 노선에 들어올 수 없다. 다음 역 너머, 뉴 로츠 선의 고가 구간이 끝나고 경사면이 캐나시 아래의 원래 1865년 지상 구간 우선 통행권으로 가게되는데, 이는 뉴욕 교통국 시스템에서 2번째로 오래된 우선 통행권이다. 이 노선은 락어웨이 파크웨이(Rockaway Parkway)의 노선의 끝까지 지상으로 운행된다. 운행 패턴 이 노선의 운행 패턴은 수년 동안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차가 윌리엄스버그의 페리(나중에 맨해튼으로 확장됨)에서 맨해튼 정션(Manhattan Junction)을지나 브로드웨이를 통해 캐나시까지 운행되었다. 지하철이 개통했을 때, 캐나시에서 맨해튼까지 두 가지 서비스(브로드웨이 고가철도(Broadway Elevated)의 원래 경로와 14번가-캐나시 선에서의 14번가 행 경로.)가 제공되었다. 1936년, 새로운 경량 지하철-고가 장비의 설립으로 인해, 새로운 러시아워 전용 서비스가 8번로와 14번가에서 리버티 애비뉴 고가철도의 동쪽 끝에 있는 레퍼츠 블러바드 역로 출범했다.(풀튼 스트리트 고가철도에서 이어짐). 8번로-캐나시 노선에는 BMT 16으로 표시되었고, 루퍼츠 블러바드로 운행되는 열차는 대개 13으로 표시되었다. 풀턴 스트리트 엘(Fulton Street El)의 철거가 끝나자 브로드웨이 정션에서 flyover를 통해 브로드웨이 고가철도(자메이카 선)의 캐나시까지 러시아워 브로드웨이 행 열차가 운행되었다.; 1967년 모든 BMT 서비스가 노선문자를 받았을 때 전체 캐나시 선을 사용하는 16 LL로 지정되었다. 러시아워 브로드 웨이 서비스(14번)는 JJ로 지정되었고, 브로드웨이 정션의 캐나시 선으로 전환하는 대신 자메이카 선에 있던 KK로 교체된 1968년까지 운영되었다. Flyover 연결은 그 이후로 수익 서비스를 위해 산발적으로만 사용되었다. 체인 정보 전체 라인은 BMT Q로 체인(chain,연결)되어있다. 이는 L로 지정된 노선에서 운용하는 문자 체계와 관계가 없다. 노선상의 트랙은 캐나시 행으로 Q1, 맨해튼 행으로 Q2이다. 체이닝 제로(chaining zero)는 맨해튼의 8번가와 14번가의 나침반 방향 서쪽 끝에 위치한 BMT Q이다. 전체 캐나시 선은 체인 문자 BMT Q와 동일한 시간을 차지하며, 이 체인 문자는 다른 노선에 사용되지 않는다.이 선로의 북쪽 철도는 맨해튼을 향하고 있으며, 나침반 방향으로 북서쪽에서 서쪽 사이에 해당한다. 2004 체인 수정 2004년 이전에, 캐나시 선 간의 체인은 그것의 역사적인 근원을 반영했다. 1906년 피킨(Pitkin)과 반신데렌 (Sinderen) 노선이 고가의 낡은 풀튼 스트리트에서 쪼개진 지점에서 최초로 상승한 통행 우선권은 BRT 체인 P, 1906년 피킨 및 반신데렌 애비뉴가 구식의 풀튼 스트리트 고가철도에서 분리된 지점에서 최초의 고가 통행 우선권(right-of-way)은 BRT 체인 선 P로 지정되었으며, 그 부분에 대한 체이닝 제로(chaining zero)는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1924년과 1928년에 개장한 14번가-캐나시 선은 듀얼 컨트렉트(Dual Contracts)로 건설되었거나 재건되었으며 BMT Q는 맨해튼의 6번로(Sixth Avenue)와 14번가(14th Street)에서 시작하여 피킨 애비뉴(Pitkin Avenue)에서 연결되는 BMT P 시점까지로 확장되었다. BMT Q 체인 노선의 체이닝 제로(Chaining zero)도 6번로에 있었다. 노선이 1931년 8번로로 확장되었을 때, BMT Q 체인 노선의 체이닝 제로는 옮겨지지 않았다. 노선의 모든 신호 지정 및 체인 역을 변경하는 대신 새 구간을 동일한 체이닝 제로에서 서쪽으로 확장하고 지정된 체인 선 BMT QW를 사용했다. 열차 운행의 자동화 설치가 신호 시스템의 완전교체를 필요로 했을 때, MTA는 전체 노선 BMT Q를 만들고 이 노선의 서쪽 끝에 체이닝 제로를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노선 상의 모든 위치의 체인 역을 변경해야하며, 1920년경의 기존 BRT에서 듀얼 컨트렉트가 변경된 이후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역 목록 각주 외부 링크 Railroad History Database NYCsubway.org – BMT 14th Street-Canarsie Line (text used with permission) 뉴욕 지하철의 철도 노선 1865년 개통한 철도 노선
https://en.wikipedia.org/wiki/BMT%20Canarsie%20Line
BMT Canarsie Line
The BMT Canarsie Line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14th Street–Eastern Line) is a rapid transit line of the B Division of the New York City Subway system, named after its terminus in the Canarsie neighborhood of Brooklyn. It is served by the L train at all times, which is shown in on the New York City Subway map and on station signs. The line is part of the BMT Eastern Division, and is occasionally referred to as the Eastern District Line. This refers to Williamsburg, which was described as Brooklyn's "Eastern District" when the City of Williamsburg was annexed by the former City of Brooklyn. This was the location where the original Brooklyn subway portions of the line were laid out. Only later was the line connected to the tracks leading to Canarsie. Eastern District High School, near the line's Grand Street station, had preserved this toponym until it was closed in 1996, later reopened as Grand Street Educational Campus. The Canarsie Line was first a steam railroad, then a Brooklyn Rapid Transit Company (BRT), later Brooklyn–Manhattan Transit Corporation (BMT), elevated line. It was extended into Manhattan via subway in 1924–1928. Since the early 2000s, the line's signal system has been converted to an automated system. The Manhattan section of the line was partially closed during off-peak hours from early 2019 to April 2020 to allow for a renovation of the 14th Street Tunnel, which the line uses to cross the East River. Extent and service Services that use the Canarsie Line are colored . The following service uses all of the Canarsie Line: The Canarsie Line runs from Eighth Avenue and 14th Street in Manhattan to Rockaway Parkway in Canarsie, Brooklyn. It is double-tracked along its entire length, except for short stretches of layup track in Manhattan and Brooklyn. The current line is a two-track subway from its Manhattan terminal to Broadway Junction in the East New York section of Brooklyn, with the exception of a short stretch at Wilson Avenue where it is a double-decked structure with the southbound track outdoors directly above the indoor, ground-level northbound track. Although the northbound track appears to be underground, it is in fact outdoors at ground-level for there are no stairs leading from the northbound platform to the station entrance at the dead-end of Wilson Avenue, southeast of Moffat Street. This is due to the line being pressed directly against the New York Connecting Railroad, which is pressed directly against the border of Trinity Cemetery. There are no express tracks on the Canarsie line; thus, all trains run local service throughout their route. However, in the past, express service has been run between Lorimer Street and Myrtle Avenue by skipping stops via the local tracks. This last operated in August 1956. Just before Broadway Junction, the line emerges onto an elevated structure, passing over the BMT Jamaica Line. Between Broadway Junction and Atlantic Avenue are the Canarsie Line's only track connections to the rest of the system, via flyover ramps connecting the Canarsie line to the Jamaica Line and East New York Yard (and, until 1956, the Fulton Street Elevated). The Canarsie Line used to share the structure at Atlantic Avenue with the connection from the Broadway and Fulton Street elevated lines to the Liberty Avenue Elevated (still extant further east as part of the IND Fulton Street Line). East of Pitkin Avenue, the Canarsie Line enters the two-track elevated structure on which the line was originally grade-separated in 1906, entering Sutter Avenue station. At the next station, Livonia Avenue, the Livonia Avenue Elevated of the IRT New Lots Line passes overhead, and just beyond this point is a single track connection to the Linden Shops, which is now a track and structures facility. Besides the connection at Broadway Junction, this non-electrified yard connection is the only other connection to the rest of the subway system, as it is indirectly a connection to the New Lots Line. B Division-sized equipment cannot access this line, however, because of A Division width restrictions. Beyond the next station, New Lots Avenue, the elevated structure ends, and an incline brings the Canarsie down to the original 1865 surface right-of-way, the second-oldest such right-of-way on the New York City Transit Authority system. The line operates on this ground-level route to the end of the line at Rockaway Parkway. As with other BMT Eastern Division lines, the Canarsie Line can accommodate trains with eight or eight cars. Due to the narrow turning radiuses of the lines, cars (R44, R46, R68, R68A) could not be used on the Eastern Division. All platforms on the Canarsie Line are at least long, but only one station, Sixth Avenue, can accommodate trains without the need for extensions. Additionally, about half of stations on the Canarsie Line can fit trains with nine 60-foot-long cars, though the front and back ends of the trains would overshoot the platform at many of these stations. History Steam and elevated era Before becoming a BRT elevated line in 1906, the Canarsie Line operated as a steam dummy line. It was first owned by the Brooklyn and Rockaway Beach Railroad, chartered December 24, 1863, and opened October 21, 1865, from the Long Island Rail Road in East New York to a pier at Canarsie Landing, very close to the current junction of Rockaway Parkway and the Belt Parkway, where ferries continued on to Rockaway. The line was single-tracked until 1894. The Canarsie Railroad was chartered on May 8, 1906, as a BRT subsidiary (leased to the Brooklyn Union Elevated Railroad) and acquired the line on May 31, 1906. The line was partly elevated, and electrified with third rail on the elevated part and trolley wire on the rest, south of New Lots Avenue. The Long Island Rail Road, which had used the line north of New Lots to access their Bay Ridge Branch, built a new line just to the west. The East New York terminus was extended several blocks along a section of line formerly used for "East New York Loop" service to the Fulton Street Elevated and the Broadway Elevated (now the BMT Jamaica Line), at a point known as Manhattan Junction (now Broadway Junction). Service first ran on July 28, 1906, from Canarsie Landing to the Broadway Ferry at the foot of Broadway in Williamsburg, at the East River. This route still exists as the BMT Jamaica Line, except for the last piece to the East River, where the Jamaica Line runs over the Williamsburg Bridge. The route was later extended over the bridge and along the BMT Nassau Street Line to Canal Street and then Chambers Street. Dual Contracts rebuilding The Dual Contracts subway expansion scheme was formalized in early 1913, specifying new lines or expansions to be built by the Interborough Rapid Transit Company and the BRT. It saw the rebuilding of the complex train junction at Manhattan Junction into an even more complex flyover junction now known as Broadway Junction. The expansion extended south to the point at which the Canarsie and Fulton Street Elevateds diverged, including a six-track, three-platform station at Atlantic Avenue. The complex was rebuilt under traffic and opened in stages, reaching completion in 1919. At the same time, the BRT moved to eliminate remaining operations that required elevated trains to operate under overhead wire. In most cases this meant using third rail on fully grade-separated lines. When third rail was extended on the Canarsie Line it was decided to extend this power mode only as far as the important station at Rockaway Parkway and Glenwood Road. Beyond that point, frequent grade crossings made third rail impractical. This portion of the line was converted to the Canarsie Shuttle using elevated cars in October 1917 and converted to trolley cars on October 18, 1920. One grade crossing was retained at East 105th Street despite the third rail, and was the last public rapid transit grade crossing in New York City. It was closed by 1973 as part of the Flatlands Industrial Park project, which was built on either side of the ground-level Canarsie Line. A pedestrian overpass above the tracks was built to replace the grade crossing. 14th Street–Eastern Line Initial subway The Dual Contracts also called for a subway line initially known as the 14th Street–Eastern District Line, usually shortened to 14th Street–Eastern Line. The line would run beneath 14th Street in Manhattan, from Sixth Avenue under the East River and through Williamsburg to Montrose and Bushwick Avenues in Brooklyn. In late 1915, the Public Service Commission began receiving bids for the construction of the 14th Street Line. Booth and Flinn was awarded the first contract for the line—section 3, comprising the tunnel under the East River—on January 13, 1916. At the time, the Public Service Commission was completing plans for the rest of the line. A groundbreaking ceremony was held on April 8, 1916. The commission began accepting bids for the next two sections of the line, sections 1 and 2 in Manhattan, in April 1916. The next month, the commission reviewed bids for section 4, running from Bedford Avenue to Manhattan Avenue in Brooklyn; Mason and Hanger submitted a low bid of $1.847 for this section. The commission also reviewed bids for section 1, awarding a contract for that section to Booth and Flinn. That June, the Degnon Construction Company received a $1.972 million contract to construct section 2 of the line, from Irving Place to Avenue B in Manhattan. MacArthur Brothers Co. received a $1.336 million contract for the construction of section 5 in Brooklyn. The 14th Street Tunnel under the East River had been fully excavated by August 1919. The line's opening was delayed by several years. In 1922, Mayor John Francis Hylan blocked some construction contracts, claiming that the costs were excessively high. The Station Finish Corporation was contracted to build the stations in Brooklyn and the Charles H. Brown & Son Corporation was contracted to build the stations in Manhattan. Track-laying in the tunnels between Sixth and Montrose Avenues started in the last week of October 1922. Due to the city's failure to approve the section of the line between Montrose Avenue and East New York, the 14th Street/Eastern Line was initially isolated from the rest of the system. In 1924, a temporary connection was built from the Long Island Rail Road (LIRR)'s Bushwick Yard that ran via Montrose Avenue and then connected to the 14th Street/Eastern Line under Bushwick Avenue just near the Montrose Avenue station. This was done to allow the delivery of BMT Standard subway cars. The first of the cars were delivered by this ramp on June 20, 1924. On June 30, 1924, the section between Sixth Avenue in Manhattan and Montrose Avenue in Brooklyn opened. The terminal in Brooklyn was close to the Bushwick station of the Long Island Rail Road's Bushwick Branch. Initial service was provided by three-car trains running every seven and a half minutes. The line collected 9,196 fares in its first day of operation, which constituted its entire ridership for the fiscal year ending June 30, 1924. Ridership rose from 15 million in fiscal 1925 to 23 million in fiscal 1928. Extensions For the extension of the 14th Street/Eastern Line from Montrose Avenue to East New York, the New York City Board of Estimate had initially given its consent to an elevated line over the Evergreen Branch of the LIRR. The Board of Estimate subsequently refused to allow a construction contract for the elevated line, while the BRT did not want to build an underground line. The extension was changed to an underground alignment following opposition from industries on the Evergreen Branch. In July 1924, the New York City Board of Transportation (BOT) approved a modified route for recommendation to the Board of Estimate. The route would be wholly underground and consist of three tracks. From Montrose Avenue, it would curve east under McKibbin Street, private property, and Harrison Place. Past Varick Avenue, it would turn southeast to Wyckoff Avenue, underneath which it would run to Eldert Street. This plan was to cost $8 million. In September 1924, the BOT approved the remaining section of the route between Eldert Street and Broadway Junction in East New York. East of Eldert Street, the route would turn south to a ground-level alignment parallel to the LIRR's Bay Ridge Branch, then run southeast in a tunnel underneath private property to the intersection of Eastern Parkway and Bushwick Avenue, where it would emerge onto a ramp leading to the existing Canarsie elevated. An ornamental viaduct over Bushwick Avenue and Eastern Parkway was removed from the original plans due to opposition from property owners who called it a "Chinese wall". The BOT also dropped a plan to have a connection from the new subway extension to the Jamaica Line to and from 168th Street, since adding such a connection would slow the movement of trains. This route was adopted by the Board of Estimate the following month. Three contracts for the construction of the extension were awarded in December at a total cost of $9,531,204. The section from Montrose Avenue to Varick Avenue was awarded to the Underpinning and Foundation Company, while the section from Varick Avenue to Bleecker Street and from Bleecker Street to Halsey Street went to the Oakdale Contracting Company. Another delay occurred in November 1925 regarding the alignment of the 14th Street/Eastern Line along a three-block section from Cooper Street to Central Avenue, which was to parallel the Bay Ridge Branch. This section, near what is now the Wilson Avenue station, was to run between the LIRR tracks to the west and the Cemetery of the Evergreens and the Most Holy Trinity Cemetery to the east. This section would contain portals for the subway to rise to ground level on either side of the Wilson Avenue station, with space separating the LIRR and subway tracks. However, the LIRR said it needed the space for overhead electrification poles as a result of the Kaufman Act and that these poles would prevent the construction of the subway portals. In January 1926, the Oakdale Contracting Company submitted a low bid of $1,345,778 for the section from Halsey Street to Cooper Street. On July 14, 1928, the line was extended further east beneath Wyckoff Avenue and then south paralleling the Bay Ridge Branch to a new station at Broadway Junction, above the existing station on the Broadway Elevated (Jamaica Line). At this time, it was connected to the Canarsie Line. At noon on May 30, 1931, a two-block extension to Eighth Avenue in Manhattan was opened, allowing passengers to transfer to the new IND Eighth Avenue Line. This station was built to look like the other Independent Subway stations. At this point, the Canarsie Line's route took the shape that it still has to this day. Mid- to late 20th century Express service operated along the line along the local track, skipping all stops between Myrtle Avenue and Lorimer Street. This service pattern stopped in August 1956. On November 23, 1942, the Canarsie Shuttle trolley line to Canarsie Landing was replaced by the B42 bus; the -long right-of-way was abandoned. Parts were built over, and other parts can still be seen as broad alleys or narrow parking lots. This right-of-way ran between East 95th and East 96th Streets as far south as Seaview Avenue. Some trolley poles from the line still exist, but the line's right-of-way was destroyed by developments in the area. Early 21st century upgrades Automation and post-automation The Canarsie Line is one of only two New York City non-shuttle subway lines that hosts only a single service and does not share operating trackage with any other line or service; the other is the IRT Flushing Line, carrying the . Because of this, it was chosen as the location of the first fully automated line of the New York City Subway. The automation project was among the first in the world to use a radio frequency-based system. The plans for installation were laid out between 1999 and 2002. Communications-based train control (CBTC) was installed in pieces between 2003 and January 2006: the elevated section of the line south of Broadway Junction was completed first, followed by the underground section north of Broadway Junction. The project cost $340 million, with $78 million of it used to upgrade track interlockings on the line. In spring 2005, the current CBTC-enabled R143-class equipment was expected to run under full automation with a single operator (known as OPTO, or One Person Train Operation) acting as an attendant to monitor the train's operation and take over manual operation if necessary. However, technical mishaps including the test train rolling away by itself delayed the start of automatic train operation. The project caused numerous service disruptions on the L at night and on weekends. Frequently, service was shut down in separate sections of the line, usually from Eighth Avenue to Lorimer Street, Lorimer to Broadway Junction, or Broadway Junction to Rockaway Parkway. During this time, shuttle buses served suspended areas. This project also required the temporary closing of some stations, either in one direction or both directions, and for the line to be operated in two sections. In June 2005, the Canarsie Line ran full-length trains with a single operator on weekends. However, as this was a violation of union contracts – which stipulated that there must be one operator per of train – the MTA was ordered to resume two-person operation at all times. The system became operational . Automation was achieved with the R143s assigned exclusively to the L, but since the R160As were not CBTC-compatible until August 2010, some trains were manually operated alongside automatically driven trains. The L fully began automatic train operation in early 2012. The CBTC installation increased the train capacity on the line from 20 trains per hour (tph) to 24 tph, as well as permitted the installation of countdown clocks, which show the amount of time until the next train arrives. 14th Street Tunnel shutdown In January 2016, the BMT Canarsie Line between Bedford and Eighth Avenues was proposed for a partial or full shutdown so that the MTA could repair tunnels damaged by Hurricane Sandy in 2012. The repairs are slated to start in April 2019 and would replace damaged communications, power and signal wires, third rails and tracks, duct banks, pump rooms, circuit breaker houses, tunnel lighting, concrete lining, and fire protection systems. The renovations would cost between $800 million and $1 billion. There were two options: a partial closure for three years or a full closure for 18 months. It was later announced that the MTA had chosen the 18-month full closure option. To provide alternate service, the MTA devised preliminary mitigation plans in which it proposed adding shuttle bus, ferry, and subway service; adding bus and high-occupancy vehicle lanes; extending train routes; and providing free or improved transfers. The MTA named Judlau Contracting and TC Electric as the project's contractors on April 3, 2017. At this time, the duration of the shutdown was shortened to 15 months, so the shutdown would begin in April instead of in January. In June 2018, as part of a lawsuit settlement, additional changes were made to the shutdown mitigation plans. The shutdown was expected to begin on April 27, 2019. In January 2019, the shutdown was changed to limited closures between Third Avenue and Bedford Avenue on late nights and weekends. It was expected to last about 15 to 20 months. On April 26, 2020, New York governor Andrew Cuomo announced the completion of the project, months ahead of schedule. Service patterns Service patterns over this line have varied little through the years; initially, trains ran over the Broadway Elevated from the ferry in Williamsburg (later extended into Manhattan), through Manhattan Junction and on to Canarsie. Then when the subway opened, two services ran from Canarsie to Manhattan: the original route on the Broadway Elevated and the route to 14th Street as the 14th Street-Canarsie Line. In 1936, due to the institution of new lightweight subway-elevated equipment, a new rush-hour-only service was inaugurated from Eighth Avenue and 14th Street to Lefferts Boulevard at the east end of the Liberty Avenue Elevated (the continuation of the Fulton Street Elevated). The Eighth Avenue–Canarsie route was given BMT marker 16, and trains running to Lefferts Boulevard usually were marked as 13. When the Fulton Street El was torn down, some rush-hour Broadway trains ran through from the Broadway Elevated (Jamaica Line) to Canarsie via the flyover at Broadway Junction; these were marked as 14. By 1967, when all BMT services had been given letters, the 16, which used the full Canarsie Line, was designated as LL. The rush-hour Broadway service (14) was designated JJ. The JJ ran until 1968 when it was replaced by the KK which stayed on the Jamaica Line instead of switching to the Canarsie Line at Broadway Junction. The flyover connection has not been used by any regular revenue service since then. Skip-stop service proposal In 1991, skip-stop service was proposed in order to speed service during the height of rush hours in the peak direction which would have reduced the running time from 41 minutes to 37 minutes. Under this plan, the K designation, which was previously used as the Broadway Brooklyn Local from 1967 to 1976, and as the Eighth Avenue Local from 1985 to 1988, would be repurposed and would appear in a gray bullet similar to the color the L uses. Both services would have common stops at Rockaway Parkway, Broadway Junction (then called Eastern Parkway), Myrtle Avenue, Lorimer Street, First Avenue, Union Square, Sixth Avenue and Eighth Avenue. L trains would stop at East 105th Street, Livonia Avenue, Atlantic Avenue, Wilson Avenue, DeKalb Avenue, Morgan Avenue, Grand Street, and Bedford Avenue; K trains would stop at New Lots Avenue, Sutter Avenue, Bushwick Avenue–Aberdeen Street, Halsey Street, Jefferson Street, Montrose Avenue, Graham Avenue and Third Avenue. This change was proposed as a service improvement alongside other changes that would have either reduced or eliminated service in order to balance the MTA's operational budget, but was never implemented. Station listing References External links Railroad History Database NYCsubway.org – BMT 14th Street-Canarsie Line (text used with permission) Brooklyn–Manhattan Transit Corporation New York City Subway lines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9D%B4%EC%88%98%EC%9E%85%EB%B2%95
대이수입법
대이수입법()은 타이완의 왕짠제(王贊傑)가 7년간 연구 끝에 발명한 중국어 입력법으로, 창힐수입법과 같이 글자를 조합해 입력하는 방식이다. 대이입력법은 창힐이 입력하는 방식과는 다른 40개의 문자 코드를 사용하는 것으로, 각 문자 집합에는 여러 개의 자근(字根)으로 파자할 수 있다. 많은 운영체제에서 기본으로 갖춰진 중국어 입력 방법이 되었으며, 대다수의 정체자 중국어 키보드에는 대이 코드가 포함되어 있다. 대이는 전통적인 조자 원칙과 필순에 따라, 한 단어와 많은 어휘 개발을 기반으로 개발된 입력 방법으로, 1987년 12월에 처음 발표었을 때, 동시에 단어의 혼합 입력 판본이 소개되었고, 즉시 타이완 언론, 사법부, 직업 교육 부문에서 신속하게 채택되었다. 대이입력법 역시 어휘 입력 모드(대역어고판(大易詞庫版)과 같이)를 제공하여, 글을 쓸 때 어휘적 사고방법으로 입력하기 편하다. 윈도우 중국어판에는 대이수입법이 내장되어 사용자가 학습 및 사용에 용이하다. 윈도우 XP 이전의 IMM(Input Method Manager) 아키텍처 시절에는 대이입력법의 보급이 원활했던 시기였다, 2016년 1분기에, 개발사인 대이자신(太易資訊)에서 KSF 아키텍처의 8.0판을 내놓았는데, 단일 문자 3코드 버전과, 30만개의 라이브러리 버전, 완전한 홍콩 보조 문자집 지원이 포함되어 있고, Windows 7/8/10의 32비트와 64비트의 운영 체제에 원활히 사용할 수 있는 것 외에, 휴대용 업계의 유명한 LIME이 안드로이드 플랫폼에서 단일 문자 3코드 버전과 어휘판을, iAccess에서 iOS 단일 문자 3코드 버전을 개발하도록 허가했다. 이 시점에서, 대이수입법의 장기적인 발전이 해결되었다. 개념 대이수입법 공식 웹사이트에 의하면, 대이수입법의 개념에는 다음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용이(容易): 배우고 조작하기 쉽다. 불역(不易): 중국어의 전통적 글씨 방식에서 변형하지 않는다. 변역(變易): 느린 타자 속도로도 빨리 입력할 수 있고, 이체자 입력에 정체자 출력 대응 기능이 있다. 그리고 설계 개념은 아래와 같다.: 중국 문자의 전통과 표현의 원칙에 따라: 대이수입법의 자근(字根, 자형 입력 방식의 중국어 입력기에서 문자의 최소 구성요소)은 전통적인 한자 창제 원리에서 많이 차용되었다. 자근에는 많은 수의 부수가 포함되어 있으며,(예: 女,山,人,金,气,水 등등) 한자 작성에 익숙한 사용자가 한 문자를 다른 자근으로 분리하는 것이 쉽다. 중국어 글쓰기 습관과 호환 가능: 대이수입법의 파자 원리는 한자의 획을 쓰는 순서와 거의 일치하다. 쉬운 학습: 파자 원리는 전통적인 조자 원칙에 부합하므로, 한자에 익숙한 사용자는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다. 자근과 키보드 사이의 대응 관계는 쉬운 연관 관계를 가지며 지시되며,메모리 자근표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입력 속도가 빠르고 효율성이 높다: 대이수입법 중, 한 글자는 최소 1코드에서 최대 4코드를 가지며, 코드가 중복되어 반드시 코드를 선택해야 할 경우에도 주음수입법 등 보다 훨씬 적다. 단자(單字, 한글자)와 어휘(詞彙)를 혼합하여 입력: 대이수입법은 보통 한글자 단위로 입력하지만, 일부 버전의 대이수입법에서는 공통 어휘의 혼합 입력, 즉 어휘를 입력 단위로 한다. 버전 연혁 1987년 DOS판 Big5 단어 4코드 및 어휘판 발표 1993년 윈도우 Big5 단어 4코드 및 어휘판 발표 1994년 약 5만자가 포함된 유닉스판 EUC코드(타이완 정부용) 출시 1996년 단어 3코드판 발표 1997년 UNI-CODE 단어 4호판 발표 1999년 대이 2코드-인공지능판 발표 2016년 윈도 TSF 아키텍처(Windows 7/8/10, 32/64비트 시스템)에 부합하는 8.0 버전 발표, 단어 3코드/4코드 판에 25,000자 수록, 어휘판에 별도로 30만개 어휘 수록. 입력 원리 대이수입법의 코드는 모든 영문자 키 26개와 숫자키 10개, 그리고 " "의 기호키 4개를 포함하여, 모두 40개의 키에 분포되어 있다. 대이수입법의 입력 규칙은 간략하게 "필순에 따라(依筆順), 머리3·꼬리1 추출(取首三尾一), 큰 코드 추출(取大碼)"로 요약할 수 있다. 코드 입력 대이수입법은 최다 4개의 코드까지 입력할 수 있으며, 만약 4개 코드를 초과하는 글자는 처음 3개 코드를 입력하고 마지막 코드를 입력한다.예를 들어,「壓」자를 대이 코드로 파자시 「厂曰月大丶土」(키보드 hdjv.f)의 6개 코드로, 4개 코드를 초과하기 때문에, 처음 3개의 코드와 마지막 코드를 가져와 최종적으로 4코드인 「厂曰月土」(키보드hdjf)가 된다. 코드 수 줄이기 만약 연속적이지 않은 필획이 단일 자근을 구성할시, 필획을 초과하여 코드를 가져온다.예를 들어「東」자는 획순으로「一日丨丿乀」이지만, 「木」과「日」의 두 자근으로 파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자의 코드는「木日」이다.(키보드id) 획순에 맞추기 코드 순서의 원칙은 글자가 쓰여진 획 순서에 따른다. 예를 들어 「磐」자는 「舟几又石」의 순서로 쓰여지므로, 이 순서대로 파자를 한다. 이 원리는 이해하기 쉬우나, 일부 예외가 있다. 한글자와 그 일부분에, 중간 분리가 되며 좌우대칭 경우, 먼저 중간부분의 자근부터 입력한다.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變:「言糹糹攵」(키보드1ttx) 率:「亠ㄠ火十」(키보드ktys) 그러나 대칭의 측면이「木」,「辛」,「王」,「弓」인 경우 획의 순서대로 파자하며,아래 그림과 같다.: 攀:「木乂乂手」(키보드ixxg) 辦:「立力十」(키보드ks,s) 班:「王丶丿王」(키보드5./5) 粥:「匚㇉米㇉」(키보드rb8b) 자근 하나가 다른 자근을 둘러싼 경우, 먼저 주변 자근을 가져오고, 이후 내부 자근을 가져온다.예 「圓」문자는 먼저 주변의「囗」문자를 가져오고, 내부의「口目八」를 가져옴으로, 파자된 문자는「囗口目八」의 4개 코드이다. (키보드7o38) 「用」문자는 먼저 주변의「冂」문자를 가져오고, 내부의「丰」를 가져옴으로, 파자된 문자는「冂丰」의 2개 코드이다. (키보드mf) 그러나 3면으로 둘러싸고 위가 뚫린 형태인 경우, 먼저 내부 자근을 가져오도록 한다.예: 「凶」문자는 먼저 주변의「乂」문자를 가져오고, 내부의「凵」를 가져옴으로, 파자된 문자는「乂凵」의 2개 코드이다. (키보드xw) 「幽」문자는 먼저 주변의「幺幺」문자를 가져오고, 내부의「山」를 가져옴으로, 파자된 문자는「幺幺山」의 3개 코드이다. (키보드ttw) 자근 코드 확인하기 Windows 95, 98, 2000, XP 운영체제에서, ㄅ(b)반음이 있어, 주음 입력후 대이식 자근을 확인할 수 있다. 중복 코드 선택 방식 동일한 문자 코드에 두 개 이상의 문자가 일치하면 중복 코드이다. 대이수입법에도 중복코드가 존재하며, 예를 들어 「鹿鹿」(키보드 cc)를 입력하면, 「比」,「庀」,「麀」,「廘」등의 문자를 얻을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사용자는 원하는 글자를 선택해서 입력해야 한다. 대이수입법은 원래 「 」 등의 키나 키패드(또는 키패드식 배열의) 숫자키를 선택키로 사용했다. 다른 인 숫자키를 사용하여 문자를 선택하는 다른 입력기와 달리 영문자 「 」를 사용하여 중복코드의 한자를 선택한다. 대이 8.0(Windows 7/8/10 적용)에서 중국어 구두점 및 전각 기호 입력법 중국어 구두점 입력을 위한 3가지 방법 대이 7.02 버전에서 두 키 입력 모드를 지원하며, 먼저 기호 키를 누른 다음 키를 누른다. 한개 키로 6개의 중국어 구두점(「,」,「。」,「?」,「、」,「;」,「:」)을 입력할 수 있다. (중국 주소 키 「號 路 街 鄉 鎮 巷」를 눌러서 입력할 수 있다.) 기존대로 (전각) 키를 먼저 누른후, 상대 구두점 키를 누른다. 전각 기호 입력법 지원되는 전각 기호 유형은 매우 다양하며, 입력할때는 먼저 =키를 누른 다음 기호 키를 누른다. 보다 일반적인 전각 기호는 다음과 같다. 모바일 운영체제 지원 모바일 운영체제에는 다른 해결 방안이 있다.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는 LIME 입력법(萊姆輸入法)을 사용할 수 있다. iOS 아이폰은 iAccess 및 자류 키보드(字流鍵盤)를 사용하여 대이수입법에 대한 입력을 제공할 수 있다. 윈도우 모바일 윈도우 모바일 6.5 버전 68000 이전에는 바닐라 입력기를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다.,소스 코드 파생 성흥수입법(盛興輸入法): 1995년에 발행되었으며, 대이에서 「 」키의 자근인, 「言,牛,目,四,王,車,田,八,足,金,力,舟,竹,虫」및 보조 자근을, 순서대로「 」키와 병합하여, 26개의 자근 키만 사용하는 입력법이다. 사용 현황 2011년 보스터(波仕特)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타이완에서 대이수입법을 사용하는 비율은 2.6%이다. 관련 링크 학습 대이 정보 주식회사(대이수입법) 대이수이법 구역 양신궈(楊心國) 소학교 대이수입법 교육 웹사이트 대이수입법 교육 웹사이트(천상빈(陳尚斌) 저) 대이수입법 교육 및 공유(쑤한중(陳尚斌) 저) 입력 엔진용 코드 테이블 gcin에 수록된 대이3코드 CIN 표 OpenVanilla에 수록된 대이4코드 CIN표(단, 대부분의 상용자는 3코드로 입력이 됨) OpenVanilla(0.8및 이전버전)에 첨부된 대이4코드 CIN표(단, 대부분의 상용자는 3코드로 입력이 됨) 각주 참고 문헌 《大易輸入法:附PE II操作手冊》,작자:王贊傑,출판사:安立資訊股份有限公司,출판일:1988/10 《大易輸入法》,작자:王贊傑,출판사:松橋數位,출판일:1995/11/1,ISBN:9789579977517 《大易輸入法快速通》,작자:廖榮貴、李幸珍,출판사:文魁,출판일:2005/4/4,ISBN:9789574667598 《簡單易學‧快速上手:大易輸入法》,작자:李德茂,출판사:碁峰資訊,출판일:2003/8/20,ISBN:9789864214006 《快速學會活用大易輸入法》,작자:頻秀蓮,출판사:科博館,출판일:2002/9/1,ISBN:9789574597093 중국어 입력기
https://en.wikipedia.org/wiki/Dayi%20method
Dayi method
Dayi (, literally "big easy") is a system for entering Chinese characters on a standard QWERTY keyboard using a set of 46 character components. A character is built by combining up to four of the 46 characters (the other six are provided for typing Taiwanese addresses), using a system similar to that of Cangjie, but is decomposed in stroke order instead of in geometric shape in Cangjie. On most keyboards in Taiwan, most keys show four symbols. On the keys, the Latin letters are in the upper left, Bopomofo symbols on the upper right, Cangjie symbols on the lower left, and Dayi symbols on the lower right. Layout Like Cangjie, every radical has some auxiliary shapes; but some of the auxiliary shapes of one radical originate from the mnemonic word of the radical. For example, key 6 is mapped to 車(car) in the keyboard, its mnemonic word is "6片車門"(six pieces of car door), and its auxiliary shapes include "片"(piece), "爿"(old character for "wall", its shape is the reflection of "片"), "甫"(its shape is like "車"), "門"(door), "鬥"(to battle or to fight, its shape is like "門"). Methodology The following are rules of the Dayi input method: Input is with accordance to Chinese writing stroke order: "top first, then bottom", "left first, then right". For characters made of more than 4 symbols, enter the first three and the last symbol.For instance, "壽" (士乛工口手舟) is represented by just 4 symbols: 士乛工舟 (FBR.). For symmetrical characters, enter the center followed by either side.For instance, "巫" is represented by 工人人 (RAA). "臼" (W) is the wildcard key for the top part of words regardless of the contents:Examples:兒 = 臼儿 (WQ)與 = 臼一八 (WE8)覺 = 臼冖目儿 (WM3Q) Sample Learning Technique One common frustration of learning any Chinese input method is not knowing the correct sequence of keys to enter. This problem can be alleviated with the help of an answer table. The following technique can be used to familiarize oneself with the Dayi keyboard layout. Speed and proficiency will develop with additional practice. This technique can be used with other input methods as well using similar lookup tables as answers. Find a source of commonly used Chinese vocabulary to type. This can may be found on the Internet by usage frequency or HSK level. For Dayi, use the list of Chinese Traditional words.(Also see List of Commonly Used Characters in Modern Chinese) Navigate to a lookup table to use as an answer key.For Dayi [with 4 keystrokes or less], dayin4.cin is publicly available on the Internet at various open-source repositories (see external links). Using the annotated image of the Dayi keyboard layout, look for the radicals that make up the character.Enter them according to the methodology. If the character is not successfully entered, search the answer table for the desired sequence of keystrokes.Try to understand why those keystrokes are used.Note that there may be more than one answer for conciseness.醫 = 匚牛大酉 (R2V8),It can be condensed into 匚酉 (R8) since it does not conflict with other words in the dictionary. Repeat with roughly 150 words in the word list. Repeat with roughly the next 150 word in the word list.If possible, this time avoid turning to the annotated layout of the Dayi keyboard. After successful practice, about 300 items have been entered.The locations of many common radicals (such as 日一言木土) would be quite familiar. Comparison with other Chinese input methods The keyboard layout for the Dayi input method contains keys for many of the Kangxi radicals in its entirety. This means that a single keystroke accounts for the left half or right half of many Chinese characters. For instance, "車" in "輸" (6AJN) is represented by "6". This allows for characters to be represented by 4 keys or less. In comparison, in Cangjie, "車" in "輸" (JJOMN) is represented by "JJ" for "十十", thus requiring up to 5 keys per Chinese character. A user of Cangjie would require experience and attention to decomposition rules to notice that the "田" segments of the Kangxi radical are omitted. Unlike other input methods, Dayi's use of 46 character components instead of 26 happens to be its greatest impediment, because it makes typing digits and punctuation marks very inconvenient. Some supported operating systems Some operating systems that support the Dayi input method are: Microsoft Windows 8/10 Microsoft Windows 95/XP Linux (via ibus-tables or similar) Apple Macintosh (via openvanilla or similar) See also Chinese input methods for computers Keyboard layout List of Commonly Used Characters in Modern Chinese Cangjie input method References External links dayi4.cin lookup table from the chinese-opendesktop project, https://github.com/chinese-opendesktop/cin-tables/blob/master/dayi4.cin Han character input
https://ko.wikipedia.org/wiki/2019%EB%85%84%20%ED%83%9C%ED%92%8D
2019년 태풍
이 문서에서는 2019년에 발생하는 태풍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다. 2019년 1월 1일 발생한 태풍 파북을 시작으로 29개의 태풍이 발생하였다. 이는 1971~2000년의 1년 태풍 발생 평균 기록인 26.7개보다 높은 수치이다. 태풍 이름 뒤에 (제명)이 붙은 이름은 인명 및 재산피해가 극심하거나, 또는 허리케인 및 사이클론의 이름과 중복되거나, 타 자연재해를 연상시킨다는 다양한 이유로 인해 아시아태풍위원회에서 최종 심사를 거쳐 태풍 이름 140개에서 제거가 된 것으로 더 이상 사용할 일이 없는 태풍 이름입니다.라는 뜻이다. 통계 월별 태풍 발생 개수 타임라인 SHSS 특징 2019년 태풍 중에는 제 8호 태풍 프란시스코와 제 9호 태풍 레끼마, 제 10호 태풍 크로사가 동시에 활동하였다. 그리고 더 신기한 점은 이 세 태풍 모두가 대한민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때 프란시스코는 많이 약화된 상태였고, 8월 6일 중부 지방은 폭염이 계속되었다. 8월 7일 한반도가 영향에 들고 태평양으로 진출해 소멸하였다. 이후 레끼마는 중국을 거쳐 서부 지방의, 크로사는 일본 규슈를 거쳐 동부 지방의 폭염을 식혀 폭염특보가 모두 해제되었다. 그런데 일부 지역은 대기의 불안정으로 약한 비가 내렸는데 이 비가 그 지역의 폭염을 식혔고 열이 남은 부분은 레끼마와 크로사가 식혔다. 제 9호 태풍 레끼마와 제 10호 태풍 크로사(사진)가 거의 동시에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다. 레끼마는 중국 동해안을 따라서, 크로사는 일본 혼슈섬을 통과했는데도 말이다. 그로 인해 레끼마는 서부 지방, 크로사는 동부 지방의 폭염을 식혀서 그때 발효되었던 폭염 특보가 대부분 해제되었다. 2019년에는 3월부터 5월까진 태풍 활동이 없다. 왜냐면 건조한 공기와 높은 연직시어의 영향으로 인해 그렇다. 2월 최강 태풍 제 2호 태풍 우딥도 이로 인해 소멸하였다. 반면에 8월부터 11월까진 21개나 발생하였다. 북서태평양의 상층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월 발생 개수는 9월과 11월이 6개로 가장 많고, 8월과 5개, 10월과 7월은 4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또한 대부분 2개가 동시에 활동하였다. (위 타임라인 참조) 제 14호 태풍 가지키와 제 24호 태풍 나크리, 제 26호 태풍 갈매기는 태풍 진로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제 22호 태풍 마트모는 북인도양에 넘어가서 사이클론으로 재발달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북서태평양(SSHS 기준 열대폭풍)보다 북인도양(SSHS 기준 2등급)의 세력이 더 강한 것이 특징이고 북인도양에서 불불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제 1호 태풍 파북은 1월 1일에 발생한 공식 관측 사상 유일한 태풍으로 기록되었고, 열대폭풍의 세력으로 1월에 동경 100도를 통과하였다. 제 2호 태풍 우딥은 2015년 태풍 히고스를 뛰어넘는 2월 최강 태풍이자 유일하게 2월에 5등급 최성기를 맞은 태풍이다. 제 3호 태풍 스팟은 JTWC에서 아열대폭풍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JTWC의 지정번호를 부여받지 못했으나, 일본 기상청은 이를 태풍 스팟으로 명명했고, 이 태풍은 역대 태풍 기상 관측상 가장 고위도에 발생한 태풍이 되었다. 이번 2019년에는 1950년 태풍 관측 아래 1957년과 함께 사상 최다로 태풍이 대한민국에 가장 많이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개수는 무려 7개이다.(그 태풍은 5호 다나스, 8호 프란시스코, 9호 레끼마, 10호 크로사, 13호 링링, 17호 타파, 18호 미탁이다.(물론 19호 하기비스가 워낙 태풍의 크기가 커서 그 간접 영향으로 동해안에 강한 바람이 불었으나 거리가 멀어 영향 태풍에 들지는 못했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영향을 주는 태풍은 연 평균 약 3.1개이다. 제 1호 태풍 파북은 JTWC 기준으로 2018년 12월 31일에,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2019년 1월 1일에 TS급(열대폭풍급)으로 상향했다. 이렇게 일본 기상청과 JTWC 기준 열대폭풍급 격상 연도가 서로 다른 사례는 2019년이 유일하다. 태풍 이름 활동한 태풍 제1호 태풍 파북 2019년 제1호 태풍 파북(PABUK)은 1월 1일 15시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기상 관측 사상 한 해에 가장 이르게 발생한 태풍이 되었고, 1월에 발생이 드문 북인도양 사이클론 구역에서 발생한 사이클론이 되었다. 파북은 라오스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메콩강에 서식하는 민물고기 중 한 종류를 의미한다. 제2호 태풍 우딥 2019년 제2호 태풍 우딥(WUTIP)은 2월 20일 3시에 중심기압 1000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80 km(북쪽 반경),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남동쪽 약 1,4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서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2월 23일 21시에 미국 괌 남서쪽 약 27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20 hPa, 최대풍속 51 m/s, 강풍 반경 440 km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중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1차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1차 최성기 이후에 계속 서~서북서진하면서 조금 약화되었다가 연직시어가 많이 낮은 상층 환경이 좋은 곳을 지나며 우딥이 낮은 연직시어와 높은 수온과 같은 좋은 해양 환경에서 다시 급발달해서, 2월 25일 15시에 미국 괌 서쪽 약 50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15 hPa, 최대풍속 54 m/s, 강풍 반경 500 km(북쪽 반경)의 세력 '맹렬한', 크기 '중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태풍으로 2차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2차 최성기 이후에는 느리게 북진 및 서진하면서 수온 하강, 건조역의 영향과 높은 연직시어과 같은 악조건에서 급약화되어서 2월 28일 15시에 미국 괌 서북서쪽 약 1,09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2019년 제2호 태풍 우딥(WUTIP)은 2002년 제2호 태풍 미탁(MITAG)과 2015년 제2호 태풍 히고스(HIGOS)의 최성기 세력을 넘어서는 2월 역대 최강 태풍이며, 2019년 최초의 카테고리 5등급 슈퍼태풍이었다. 제3호 태풍 스팟 2019년 제3호 태풍 스팟(SEPAT)은 6월 27일 9시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80 km(남동쪽 반경),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일본 가고시마 동쪽 약 30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빠르게 북동~동북동진하며 미미하게 발달해서 6월 28일 9시에 일본 도쿄 동남동쪽 약 18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21 m/s, 강풍 반경 280 km(남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소형'의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세력을 유지하면서 빠르게 동북동진하며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6월 28일 15시에 일본 센다이 동남동쪽 약 61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2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996 hPa) 2019년 제3호 태풍 스팟(SEPAT)은 역대 6월 태풍 가운데 가장 높은 위도(북위 31.8도)에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스팟은 2019년 태풍 가운데 1번째로 일본을 강타한 태풍이다. JTWC는 태풍 스팟을 아열대폭풍으로 분류하였다. 스팟은 말레이시아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농어과의 민물고기를 의미한다. 제4호 태풍 문 2019년 제4호 태풍 문(MUN)은 7월 2일 21시에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750 km(남동쪽 반경),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중국 잔장 남남동쪽 약 2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서북서진하며 하이난섬을 관통하면서 미미하게 발달해서 7월 3일 15시에 베트남 하노이 동남동쪽 약 320 km 부근 해상(통킹만)에서 중심기압 992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650 km(남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이후 계속 북서~서북서진하면서 7월 4일 새벽에 베트남 하노이 부근 해안에 상륙한 이후 급약화되어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7월 4일 12시에 베트남 하노이 남동쪽 약 17 km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8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7월 4일 15시에 베트남 하노이 북서쪽 약 100 km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8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문은 미크로네시아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야프어로 6월을 의미한다. 제5호 태풍 다나스 2019년 제5호 태풍 다나스(DANAS)는 7월 16일 15시에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60 km(남동쪽 반경),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북동쪽 약 54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북서진과 북진을 하면서 서서히 발달해서 7월 19일 3시에 중화민국 타이베이 북동쪽 약 36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5 hPa, 최대풍속 23 m/s, 강풍 반경 560 km(남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최성기 이후 계속 북~북북동진하면서 7월 20일 새벽에 대한민국 제주도 서귀포시 남서쪽 해상에 도달한 이후 급약화되어서, 7월 20일 12시에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서쪽 약 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2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최성기 이후 계속 북진하며 서해상에서까지 최성기 세력을 유지하다가, 7월 20일 15시에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남서쪽 약 63 km 부근 해상(대한민국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 서쪽 해상)에서 중심기압 990 hPa, 최대풍속 21 m/s, 강풍 반경 65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조금 약화되었고, 7월 20일 21시에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 남서쪽 약 37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65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추가로 약화되었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7월 20일 21시에서 22시 사이에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 부근 해안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 부근 해안에 상륙한 이후 북북동진하면서 육지와의 마찰로 인해 계속 약화되어서, 7월 21일 0시에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6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6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약화되었고, 한반도 관통중에도 세력을 유지하면서 7월 21일 3시에 대한민국 충청남도 연기군 부근 육상을 통과하였다. 7월 21일 6시에 대한민국 강원도 횡성군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6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추가 약화되었고, 빠른 속도로 북북동진하면서 7월 21일 9시에 대한민국 강원도 양양군 부근 육상까지 진출한 뒤, 빠른 속도로 동북동진해서 7월 21일 12시에 대한민국 강원도 속초시 북동쪽 약 75 km 부근 해상(동해상)에 진출하였다. 동해상 진출 뒤에 북~북동진하면서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7월 21일 21시에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동쪽 약 203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8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다나스는 대한민국에 2019년 최초로 영향을 준 태풍이다. 그리고 일본 기상청의 사후해석에 따르면 세종특별자치시 부근에서 열대저압부로 약화되었다고 한다. 다나스는 필리핀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경험을 의미한다. 제6호 태풍 나리 2019년 제6호 태풍 나리(NARI)는 7월 26일 9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440 km(동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일본 오사카 남남동쪽 약 5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 (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북북서진하면서 미미하게 발달하였고, 일본 나고야 부근 해안에 상륙하기 직전인, 7월 27일 3시에 일본 나고야 남남서쪽 약 23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39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중형'의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그러나 크게는 발달하진 못하고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7월 27일 오전에 일본 나고야 부근 해안에 상륙한 직후인 7월 27일 9시에 일본 나고야 남서쪽 약 80 km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1000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7월 27일 오전에 일본 나고야 부근 해안에 상륙한 이후 계속 북북동진하면서 약화되었고, 7월 27일 15시에 일본 나고야 북동쪽 약 89 km 부근 육상(일본 기후현 다카야마시 쇼카와초 데라카와도 일본 알프스 지역)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나리는 대한민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백합속의 꽃을 의미한다. 제7호 태풍 위파 2019년 제7호 태풍 위파(WIPHA)는 7월 31일 9시에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00 km(동쪽 반경),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남남서쪽 약 38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북서~서북서진하면서 하이난섬을 스친 뒤 레이저우반도를 관통하며 약하게 발달하였고, 8월 2일 15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잔장 서쪽 약 170 km 부근 해상(통킹만)에서 중심기압 985 hPa, 최대풍속 23 m/s, 강풍 반경 50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이후 통킹만에서 느리게 서~남서진하며 베트남에 상륙하면서 약화되었고, 8월 3일 21시에 베트남 하노이 서쪽 약 80 km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위파는 태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숙녀의 이름이다. 제8호 태풍 프란시스코 2019년 제8호 태풍 프란시스코(FRANCISCO)는 8월 2일 9시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330km,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북동쪽 약 1,12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서북서진하며 천천히 발달하다가 일본 규슈 상륙 직전에 급발달해서 8월 5일 21시에 일본 가고시마 동쪽 약 2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36 m/s, 강풍 반경 330 km(북쪽 반경)의 세력 '강', 크기 '중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세력으로 8월 6일 새벽에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 미야자키시에 상륙한 이후 급약화된 상태로 북북서진하면서 대마도와 대한해협을 통과한 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6일 20시 20분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의 세력으로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 상륙한 뒤, 8월 6일 21시에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북북서쪽 약 10 km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1000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6일 22시에서 23시 사이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170km의 세력 '약', 크기 '소형'의 열대 폭풍으로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부근 육상에 상륙한 뒤, 8월 7일 0시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부근 육상을 지나서, 8월 7일 3시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봉화군 부근 육상을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170 km의 세력 '약', 크기 '소형'의 열대 폭풍으로 통과하였고, 8월 7일 6시에 대한민국 강원도 정선군 부근 육상을 통과하였다. 대한민국 강원도 정선군 부근 육상을 통과한 뒤에 동해상으로 진출한 이후 약화되어서 8월 7일 9시에 대한민국 강원도 양양군 남동쪽 약 31 km 부근 해상(동해)에서 중심기압 1000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2019년 10월 2일에 발표된 일본 기상청의 사후해석에 따르면 동해안(울산광역시)에 태풍이 상륙한 것으로 인정되어서 2019년 제8호 태풍 프란시스코(FRANCISCO)는 일본을 거쳐 동해안으로 상륙한 첫 번째 태풍이 되었다. 최성기 시기에 카테고리 1등급 태풍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조금 뚜렷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남자의 이름이다. 제9호 태풍 레끼마(제명) 2019년 제9호 태풍 레끼마(LEKIMA)는 8월 4일 15시에 중심기압 996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650 km(남쪽 반경),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북동쪽 약 1,13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태풍 크로사 후보 열대저압부와 후지와라 효과로 인해 남남서진 및 거의 정체하다가 일본 오키나와에 근접하면서 서북서~북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8월 8일 21시에 중화민국 타이베이 동남동쪽 약 3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25 hPa, 최대풍속 54 m/s, 강풍 반경 560 km의 세력 '맹렬한', 크기 '대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이후 북서진하면서 8월 10일 1시에서 2시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타이저우 시에 중심기압 940 hPa, 최대풍속 46 m/s(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세력으로 상륙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상륙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산둥반도와 보하이 만을 지나며 서서히 약화되었고,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12일 21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칭다오 북서쪽 약 180 km 부근 해상(보하이 만)에서 중심기압 990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13일 3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칭다오 북서쪽 약 101 km 부근 육상(산둥반도)에서 중심기압 992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레끼마는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강풍 반경이 한 때 700km에 달하기도 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넓은 강풍 반경으로 인해 대한민국 서쪽 지방을 중심으로 폭염을 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레끼마는 중국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되어 제명되었다. 레끼마는 베트남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과일 나무의 한 종류이다. 제10호 태풍 크로사 2019년 제10호 태풍 크로사(KROSA)는 8월 6일 15시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60 km,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북북서쪽 약 59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북서진 및 거의 정체하며 급발달해서 8월 8일 15시에 미국 괌 북북서쪽 약 1,0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50 hPa, 최대풍속 44 m/s, 강풍 반경 650 km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초대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이후 일본 이오섬 부근 해상에서 거의 정체하면서 해수 뒤섞임 현상으로 인해 급약화되었고, 약화된 상태로 북서~북북서진하면서 일본을 향해 북상하였다. 일본 통과시에는 세토 내해를 가로질러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크로사는 8월 15일 14시에서 15시 사이에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 중심기압 975 hPa, 최대풍속 28 m/s(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세력으로 상륙하였다. 일본 상륙 이후 8월 15일 20시경에 중심기압 978 hPa, 최대풍속 25 m/s(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세력으로 동해상에 진출하였고, 동해상에 진출한 뒤, 빠르게 북~북북동진하며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8월 16일 21시에 일본 삿포로 서쪽 약 31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4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985 hPa) 8월 15일 9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크로사의 강풍 직경이 1,100 km(동쪽 반경 600 km, 서쪽 반경 500 km)였던지라 일본 기상청 기준 대형으로 직경이 줄었어도, 일본 혼슈섬을 가로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동쪽 지방은 사실상 직접 영향을 받아서 대한민국 동쪽 지방을 중심으로 폭염을 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는 태풍 크로사로 인한 동풍으로 인해 호우가 내리기도 하였다. 크로사는 캄보디아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학을 의미한다. 제11호 태풍 바이루 2019년 제11호 태풍 바이루(BAILU)는 8월 21일 15시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800 km(남서쪽 반경),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쪽 약 1,22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서북서진하면서 서서히 발달해서 8월 23일 3시에 필리핀 마닐라 동북동쪽 약 73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5 hPa, 최대풍속 25 m/s, 강풍 반경 750 km(북동쪽 반경)의 세력 '중', 크기 '대형'의 강한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세력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북서~서북서진해서, 8월 24일 15시에 중화민국 가오슝 남동쪽 약 48 km 부근 육상(중화민국 핑둥현 춘르 향)에 중심기압 985 hPa, 최대풍속 25 m/s, 강풍 반경 440 km의 세력 '중', 크기 '대형'의 강한 열대 폭풍으로 상륙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타이완섬 관통 이후 대만해협에 진출한 뒤 북서~서진하며 약화되는 와중에 8월 25일 9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산터우 시 북동쪽 약 90 km 부근 육상에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21 m/s, 강풍 반경 50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대형'의 열대 폭풍으로 상륙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산터우 시 부근 육상에 상륙한 이후 급약화되어서,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25일 15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산터우 북서쪽 약 170 km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6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26일 3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산터우 시 북서쪽 약 416 km 부근 육상(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사오관 시 러창 시)에서 중심기압 998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바이루는 중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하얀 사슴을 의미한다. 제12호 태풍 버들 2019년 제12호 태풍 버들(PODUL)은 8월 27일 9시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00 km,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쪽 약 64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빠르게 필리핀 루손섬을 관통한 이후 남중국해에서 서~서북서진하며 서서히 발달해서 8월 28일 15시에 필리핀 마닐라 서북서쪽 약 59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2 hPa, 최대풍속 23 m/s, 강풍 반경 390 km의 세력 '약', 크기 '중형'의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남중국해에서 최성기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며 계속 빠르게 서진해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8월 30일 3시에 베트남 다낭 북서쪽 약 242 km 부근 육상(베트남 꽝빈성 동허이 육상)에 최성기 세력에서 다소 약화된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21 m/s, 강풍 반경 440 km(북서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중형'의 열대 폭풍으로 상륙하였다. 베트남 꽝빈성 상륙 이후 육상 마찰로 급약화되어서,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30일 9시에 베트남 다낭 서쪽 약 380 km 부근 육상(라오스 사반나케트 주 카이손폼비한 (도시) 육상)에서 중심기압 99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8월 30일 15시에 베트남 다낭 북서쪽 약 564 km 부근 육상(태국 우돈타니 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6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버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버드나무를 의미한다. 제13호 태풍 링링 2019년 제13호 태풍 링링(LINGLING)은 9월 2일 9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80 km(북동쪽 반경),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쪽 약 56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북서~북동진하며 서서히 발달하다가 일본 사키시마 제도에 근접하면서 북진하며 급발달하는 도중인 9월 5일 13시 10분에 일본 미야코지마시에 중심기압 945 hPa, 최대풍속 46 m/s(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세력으로 상륙하였다. 일본 미야코지마시를 관통한 뒤 동중국해에 진출한 9월 5일 15시에 일본 오키나와 서남서쪽 약 32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40 hPa, 최대풍속 46 m/s, 강풍 반경 390 km(동쪽 반경)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중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세력을 유지하면서 동중국해에서 북진하면서 북위 30도를 지나면서 서서히 약화되어가며 이동 속도가 빨라졌고, 동경 125도를 따라가면서 계속 북진하다가 서서히 북북동진을 하였다. 9월 7일 6시에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서쪽 약 140 km 부근 해상을 최성기 세력에서 어느 정도 약화된 중심기압 965 hPa, 최대풍속 39 m/s, 강풍 반경 560 km(남동쪽 반경)의 세력 '강', 크기 '대형'의 태풍으로 통과하였다. 서해상을 빠른 속도로 북~북북동진하며 서서히 약화되어가면서,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9월 7일 14시 30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해주시 남서쪽 약 30km 부근 육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옹진군)에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35 m/s의 세력으로 상륙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9월 7일 15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옹진군에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36 m/s(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세력으로 상륙하였다.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상륙 뒤 빠른 속도로 북~북북동진하며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9월 8일 9시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서쪽 약 160 km 부근 육상(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 시 둥닝 현)에서 중심기압 985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9월 8일 오전 9시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북서쪽 약 437 km 부근 육상(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자무쓰 시 화촨 현)에서 중심기압 984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태풍 링링으로 인해 일본 미야코지마시 미야코 공항에서 9월 5일 12시 22분에 순간최대풍속 61.2 m/s를 기록하였고, 일본 미야코지마시 공식 관측소에서 9월 5일 12시 15분에 순간최대풍속 59.6 m/s를 기록하였다. 또한 14시에 최저해면기압 940.5 hPa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미야코지마시 시모지섬에서 9월 5일 12시 49분에 순간최대풍속 58.1 m/s를 기록하였고, 13시에 최대풍속도 46.5 m/s를 기록하였다. 또한 9월 7일 6시 28분에 대한민국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에서 순간최대풍속 54.4 m/s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풍 링링은 태풍 볼라벤을 뛰어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일 강한 태풍으로 올라왔다. 태풍 링링은 홍콩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소녀의 애칭이다. 제14호 태풍 가지키 2019년 제14호 태풍 가지키(KAJIKI)는 9월 3일 3시에 중심기압 996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440 km(북동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베트남 다낭 북서쪽 약 10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추가 발달 없이 남남서진하면서 9월 3일 6시에 베트남의 다낭 북쪽에 있는 트어티엔후에 지역에 상륙하였고, 9월 3일 9시에는 라오스까지 진출하였다가, 동북동진하며 다시 남중국해로 진출하였으나 급약화되어서, 추가 발달 없이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9월 3일 21시에 베트남 다낭 북동쪽 약 135 km 부근 해상(남중국해)에서 중심기압 998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가지키는 하룻동안 활동했다. 가지키는 일본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별자리 중 황새치자리를 의미한다. 제15호 태풍 파사이(제명) 2019년 제15호 태풍 파사이(FAXAI)는 9월 5일 15시에 중심기압 1002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80 km(북동쪽 반경),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동북동쪽 약 1,36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서북서진하며 건조역으로 인해 천천히 발달하다가 일본 혼슈 상륙 직전에 북동진으로 전향하며 급발달해서 9월 8일 21시에 일본 도쿄 남남서쪽 약 19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55 hPa, 최대풍속 44 m/s, 강풍 반경 280 km(동쪽 반경)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소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이후 빠르게 북동진하며 도쿄 만을 가로질러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9월 9일 5시에 최성기 세력에서 다소 약화된 중심기압 960 hPa, 최대풍속 41 m/s, 강풍 반경 220 km(남동쪽 반경)의 세력 '강', 크기 '소형'의 태풍으로 일본 지바현 지바시에 상륙하였다. 일본 지바현 관통 이후 빠르게 북동~동북동진하면서 일본 동쪽 해상에 진출하였고,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9월 10일 15시에 일본 삿포로 동남동쪽 약 94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2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중심기압 994 hPa) 태풍 파사이로 인해 일본 지바현 지바시 공식 관측소에서 9월 9일 4시 28분에 순간최대풍속 57.5 m/s를 기록하였다. 결국 파사이는 일본 기상청에 의해 제명되었다. 이 태풍은 지바현을 중심으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그래서 일본 기상청은 이 태풍을 "레이와 원년 보소반도 태풍 (令和元年房総半島台風)" 라고 명명했다. 파사이는 라오스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숙녀의 이름이다. 제16호 태풍 페이파 2019년 제16호 태풍 페이파(PEIPAH)는 9월 15일 21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80 km(동쪽 반경),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북동쪽 약 5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추가 발달 없이 북서~북북서진하다가 높은 연직 시어로 인해 약화되어서, 9월 16일 21시에 일본 도쿄 남남동쪽 약 1,22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1002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2018년의 제23호 태풍 바리자트처럼 얼마 못 가 소멸했다. 페이파는 마카오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애완용 물고기의 한 종류이다. 제17호 태풍 타파 2019년 제17호 태풍 타파(TAPAH)는 9월 19일 15시에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00 km, 크기 '대형'의 열대폭풍으로 일본 오키나와 남쪽 약 4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북서~북북서진하며 천천히 발달해서 9월 21일 9시에 일본 오키나와 서쪽 약 22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33 m/s, 강풍 반경 650 km의 세력 '강', 크기 '대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세력을 유지하며 일본 오키나와 부근 해상을 통과하고, 동중국해에 진출한 뒤 북위 29도에서 북동진으로 전향하였다. 전향한 뒤 북북동진하면서 9월 22일 6시에 대한민국 제주도 서귀포 남쪽 약 330 km 부근 해상에 위치하였고,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33 m/s, 강풍 반경 560 km의 세력 '강', 크기 '대형'의 태풍의 세력(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기상청에 따르면 제주 일부에는 시간당 30 mm의 강한 비가 내리는 곳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9월 22일 18시에 중심기압 975 hPa, 최대풍속 31 m/s, 강풍 반경 650 km(남동쪽 반경)의 세력 '중', 크기 '대형'의 강한 열대 폭풍(세력은 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으로 대한민국 제주도 서귀포 동쪽 약 150 km 부근 해상에서 제주도에 최근접했고, 9월 22일 22시에 중심기압 980 hPa, 최대풍속 31 m/s, 강풍 반경 650 km(남동쪽 반경)의 세력 '중', 크기 '대형'의 강한 열대 폭풍(세력은 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으로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동쪽 약 95 km 부근 해상(대한해협)에서 부산광역시에 최근접하였다. 대한해협을 통과한 이후 동해상에서 빠른 속도로 북동진하며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었고, 9월 23일 9시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 동북동쪽 약 27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2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제18호 태풍 미탁 2019년 제18호 태풍 미탁(MITAG)은 9월 28일 9시에 중심기압 1002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390 km,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쪽 약 1,21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북서~북서진하며 서서히 발달하며 9월 30일 20시 35분에 일본 요나구니섬을 통과한 뒤 9월 30일 21시에 중화민국 타이베이 동남동쪽 약 1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65 hPa, 최대풍속 39 m/s, 강풍 반경 500 km의 세력 '강', 크기 '대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이후 계속 북진하면서 동중국해에 진출 한 뒤 진로가 많이 서편한 상태로 10월 1일 15시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타이저우 시 동쪽 해상을 상당히 근접해서 지났고, 10월 1일 21시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저우산 시 동쪽 해상을 상당히 근접해서 지나가면서 중국 육지와의 마찰로 인해 중심기압 980 hPa, 최대풍속 31 m/s의 세력(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으로 급약화되었다. 그리고 급약화 된 이후 북위 29도에서 서서히 북동진으로 전향하기 시작하였다. 북위 30도를 넘어가며 빠른 속도로 북동진하면서 10월 2일 15시에 중심기압 985 hPa, 최대풍속 25 m/s, 강풍 반경 440 km(동쪽 반경)의 세력 '중', 크기 '중형'의 강한 열대 폭풍(세력은 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으로 대한민국 제주도 서귀포 서쪽 약 170km 부근 해상에서 제주도에 최근접하였다. 제주도 최근접 이후 빠르게 북북동진하며, 10월 2일 21시 40분에 중심기압 990 hPa, 최대풍속 23 m/s(한국 기상청 해석은 중심기압 985 hPa, 최대풍속 24 m/s), 강풍 반경 44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중형'의 열대 폭풍(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으로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남쪽 약 30 km 부근 육상(북위 34.5도, 동경 126.5도, 전라남도 해남군 육상)에 상륙하였다.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에 상륙한 이후 10월 3일 0시에 대한민국 전라남도 보성군 부근 육상을 중심기압 990 hPa, 최대풍속 23 m/s, 강풍 반경 44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중형'의 열대 폭풍의 세력(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으로 통과하였고, 10월 3일 3시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고령군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21 m/s, 강풍 반경 44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중형'의 열대 폭풍으로 더 약화되었다. 계속 북동진해서 10월 3일 6시에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을 통과하였다.(진로와 세력 모두 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을 통과한 뒤 북동진하며 10월 3일 9시에 중심기압 992 hPa, 최대풍속 21 m/s, 강풍 반경 390 km(동쪽 반경)의 세력 '약', 크기 '중형'의 열대 폭풍의 세력으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북서쪽 약 57 km 부근 해상(동해)에 진출한 뒤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3일 12시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북북서쪽 약 60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0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3일 15시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북동쪽 약 58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8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태풍 미탁의 중심이 통과한 일본 요나구니섬에서는 9월 30일 18시 39분에 순간최대풍속 42.2m/s를 기록하였고, 9월 30일 20시 31분에 최저해면기압 965.2 hPa을 기록하였다. 태풍 미탁의 중심 부근에 들어간 일본 이시가키섬에서는 9월 30일 19시 23분에 순간최대풍속 43.2 m/s를 기록했다.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2019년 10월 2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의 일강수량이 332.9 mm를 기록하며 10월 역대 최다 일강수량 기록을 경신하였다. 타파와 달리 미탁은 한반도에 상륙해 내륙을 관통했다. 미탁은 미크로네시아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여자의 이름이다. 제19호 태풍 하기비스(제명) 2019년 제19호 태풍 하기비스(HAGIBIS)는 10월 6일 3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330 km,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동쪽 약 1,45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서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10월 7일 21시에 미국 괌 북북동쪽 약 3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15 hPa, 최대풍속 54 m/s, 강풍 반경 650 km(동쪽 반경)의 세력 '맹렬한', 크기 '대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최성기 세력을 무려 3일 가까이 유지하다가 높은 연직시어와 한기 남하로 인해 10월 10일 21시경부터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0월 12일 새벽에 북위 30도에서 북동진으로 전향한 뒤 빠른 속도로 북~북북동진하며 급약화되어서 10월 12일 19시에 중심기압 955 hPa, 최대풍속 41 m/s(한국 기상청 해석은 중심기압 950 hPa, 최대풍속 43 m/s), 강풍 반경 650 km(동쪽 반경)의 세력 '강', 크기 '대형'의 태풍(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으로 일본 시즈오카현 이즈시에 상륙하였다. 일본 시즈오카현 이즈시에 상륙한 이후로는 빠르게 북동~북북동진하며 일본 간토 지방을 관통했고, 10월 13일 1시에는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33 m/s, 강풍 반경 600km의 세력 '강', 크기 '대형'의 태풍(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으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남서쪽 약 11 km 부근 육상(일본 후쿠시마현 후타바군, 북위 37.3도, 동경 140.9도)을 통과하였다. 후쿠시마현 통과 뒤 10월 13일 2시에 북서태평양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빠르게 북동~북북동진하며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13일 9시에 일본 삿포로 남동쪽 약 44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0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13일 12시에 일본 삿포로 남동쪽 약 519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0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태풍 하기비스로 인해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공식 관측소에서 10월 12일 20시 32분에 순간최대풍속 43.8 m/s를 기록했고, 일본 도쿄 공식 관측소에서 10월 12일 21시 14분에 순간최대풍속 41.5 m/s를 기록했다. 일본 가나가와현 하코네에서는 2019년 10월 12일 일강수량이 922.5 mm가 기록되었다. 하기비스는 필리핀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빠름을 의미한다. 하기비스는 일본에 피해총액이 무려 150억 달러(한화 약 2,000억원 이상), 사망자 수 98명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쳐 제명되었다. 제20호 태풍 너구리 2019년 제20호 태풍 너구리(NEOGURI)는 10월 18일 3시에 중심기압 1004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20 km,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북동쪽 약 1,0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서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10월 20일 3시에 일본 오키나와 남쪽 약 46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39 m/s, 강풍 반경 330 km(북서쪽 반경)의 세력 '강', 크기 '중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때부터 북동진으로 전향하면서 높은 연직시어와 한기 남하로 인해 급약화 및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었고,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21일 18시에 일본 가고시마 북동쪽 약 424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2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21일 18시에 일본 가고시마 동쪽 약 38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0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너구리는 대한민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너구리를 의미한다. 제21호 태풍 부알로이 2019년 제21호 태풍 부알로이(BUALOI)는 10월 19일 21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150 km,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동남동쪽 약 1,05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북서~북서진하며 서서히 발달하며, 10월 22일 새벽에 사이판에 근접해서 통과한 뒤 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10월 22일 21시에 미국 괌 북북서쪽 약 6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35 hPa, 최대풍속 51 m/s, 강풍 반경 330 km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중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이후에는 높은 연직시어로 인해 서서히 약화되었고, 북위 27도에서 북동진으로 전향하는 과정에서 10월 24일 10시에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한 일본 도쿄도 오가사와라촌 지치지마섬 남서쪽 약 21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50 hPa, 최대풍속 46 m/s, 강풍 반경 280 km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소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의 세력으로 일본 도쿄도 오가사와라촌 지치지마섬에 최근접하였다.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를 통과한 이후에는 빠르게 북동진하면서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었고,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25일 21시에 일본 도쿄 남동쪽 약 93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4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25일 21시에 일본 도쿄 동쪽 약 94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85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태풍 부알로이로 인해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한 일본 도쿄도 오가사와라촌 지치지마섬의 공식 관측소에서 10월 24일 9시 20분에 순간최대풍속 52.7 m/s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2020년 사후해석으로 부알로이의 세력이 4등급에서 5등급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부알로이는 태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태국의 디저트의 한 종류이다. 67168 36609 제22호 태풍 마트모 2019년 제22호 태풍 마트모(MATMO)는 10월 30일 3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330 km(북서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베트남 다낭 동남동쪽 약 57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서진하며 급발달해서 10월 30일 15시에 베트남 다낭 남동쪽 약 38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2 hPa, 최대풍속 26 m/s, 강풍 반경 480 km(북쪽 반경)의 세력 '중', 크기 '중형'의 강한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세력을 유지하며 계속 서진해서 10월 31일 3시에 최성기나 다름 없는 세력인 중심기압 994 hPa, 최대풍속 26 m/s, 강풍 반경 480 km(북쪽 반경)의 세력 '중', 크기 '중형'의 강한 열대폭풍(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의 세력으로 베트남 푸옌성에 상륙하였다. 베트남 푸옌성 상륙 이후 육상 마찰로 급약화되어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10월 31일 12시에 베트남 다낭 남서쪽 약 414 km(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약 370 km) 부근 육상(캄보디아)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마트모는 미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호우를 의미한다. 마트모는 미얀마 남부에 상륙하고 소멸해 태풍에서 사이클론 불불으로 전환된 열대저기압이다. 제23호 태풍 할롱 2019년 제23호 태풍 할롱(HALONG)은 11월 3일 0시에 중심기압 1000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330 km(북동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동쪽 약 1,312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북진하며 급발달해서 11월 5일 21시에 미국 괌 북동쪽 약 96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05 hPa, 최대풍속 59 m/s, 강풍 반경 440 km(북동쪽 반경)의 세력 '맹렬한', 크기 '중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이후 세력을 유지하다가 북위 21도에서 북동진으로 전향한 뒤 북~북동진하면서 높은 연직시어와 한기 남하로 인해 급약화 및 온대저기압화가 진행되어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11월 9일 9시에 일본 도쿄 남동쪽 약 2,00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1월 9일 12시에 일본 도쿄 동남동쪽 약 2,09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할롱은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우딥, 레끼마, 하기비스, 부알로이를 넘어서는 2019년 최강 태풍으로 기록되었다. 할롱은 베트남에서 제출한 태풍의 이름으로, 베트남의 관광 명소인 하롱베이를 의미한다. 제24호 태풍 나크리 2019년 제24호 태풍 나크리(NAKRI)는 11월 5일 21시에 중심기압 998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330 km(북서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서쪽 약 56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지향류가 없어서 동진 및 거의 정체하며 더디게 발달하다가 11월 8일 새벽부터 서남서~서진으로 전향하였고, 11월 8일 15시에 필리핀 마닐라 서남서쪽 약 5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75 hPa, 최대풍속 33 m/s, 강풍 반경 330 km의 세력 '중', 크기 '중형'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이후 계속 서진해서 베트남에 접근하며 급약화되었고, 11월 11일 3시경 베트남 푸옌성에 중심기압 996 hPa, 최대풍속 21 m/s, 강풍 반경 110 km의 열대폭풍의 세력(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으로 상륙하였고, 베트남 푸옌성 상륙 이후 육상 마찰로 더욱 급약화되어서,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11월 11일 9시에 베트남 다낭 남동쪽 약 350 km 부근 육상(베트남 푸옌성)에서 중심기압 1002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1월 11일 오전 9시에 베트남 다낭 남쪽 약 320 km 부근 육상(베트남 닥락성)에서 중심기압 1000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캄보디아에서 제출한 태풍의 이름으로, 캄보디아에서 서식하는 꽃의 한 종류인 '나크리'를 의미한다. 복잡하게 얽혀진 진로로 베트남 중부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제25호 태풍 펑선 2019년 제25호 태풍 펑선(FENGSHEN)은 11월 12일 15시에 중심기압 1002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220 km,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동쪽 약 1,71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북서~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11월 15일 15시에 미국 괌 북북서쪽 약 760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65 hPa, 최대풍속 44 m/s, 강풍 반경 220 km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소형'(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기준)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최성기 이후에는 동북동~동~동남동진하면서 상층 환경이 안 좋은 곳으로 가면서 서서히 약화되었고,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 11월 18일 3시에 일본 도쿄 남동쪽 약 2,108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1월 17일 15시에 일본 도쿄 동남동쪽 약 1,77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1000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펑선은 중국에서 제출한 태풍의 이름으로 바람의 신을 의미한다. 제26호 태풍 갈매기 2019년 제26호 태풍 갈매기(KALMAEGI)는 11월 13일 9시에 중심기압 1002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60 km(북서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남동쪽 약 88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지향류가 없어서 북북서~북서진 및 거의 정체하며 더디게 발달하였고, 북서진하면서 루손 해협에 진출한 뒤 거의 정체하면서 11월 19일 21시에 필리핀 마닐라 북북동쪽 약 560 km 부근 해상(루손 해협)에서 중심기압 980 hPa, 최대풍속 33 m/s, 강풍 반경 170 km의 세력 '중', 크기 '소형'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이후 남서~남남서진해서 11월 20일 새벽에 필리핀 루손섬에 상륙하며 육상 마찰로 급약화되었고, 11월 20일 9시에 필리핀 마닐라 북북동쪽 약 320 km 부근 육상에서 중심기압 1006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중심기압 1002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갈매기는 북한에서 제출한 태풍의 이름으로 갈매기를 의미한다. 제27호 태풍 풍웡 2019년 제27호 태풍 풍웡(FUNG-WONG)은 11월 20일 9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190 km, 크기 '소형'의 열대폭풍으로 필리핀 마닐라 동북동쪽 약 81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진하며 급발달해서 11월 21일 9시에 중화민국 타이베이 남동쪽 약 64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90 hPa, 최대풍속 28 m/s, 강풍 반경 280 km의 세력 '중', 크기 '소형'의 강한 열대 폭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이후 바로 북동진으로 전향한 뒤 상층 환경 악화로 인해 급약화되어서, 11월 23일 3시에 일본 오키나와 서남서쪽 약 30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1008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중심기압 1004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풍웡은 홍콩에서 제출한 태풍의 이름으로 봉황을 의미한다. 제28호 태풍 간무리(제명) 2019년 제28호 태풍 간무리(KAMMURI)는 11월 26일 9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560 km(북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미국 괌 동남동쪽 약 66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서북서~서진 및 거의 정체하며 굉장히 더디게 발달하다가, 필리핀 상륙 직전에서야 급발달해서, 12월 3일 0시에 필리핀 마닐라 남동쪽 약 375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50 hPa, 최대풍속 46 m/s, 강풍 반경 500 km(북서쪽 반경)의 세력 '매우 강', 크기 '중형'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12월 3일 0시 30분경에 최성기의 세력을 그대로 가진 상태로 필리핀 중부 레가스피 지역에 상륙하였다. 필리핀을 관통하고나서 남중국해에 진출한 이후로는 서북서~서남서진하며 상층 환경 악화로 인해 급약화되었고, 일본 기상청 기준으로는 12월 6일 0시에 베트남 다낭 남동쪽 약 686 km 부근 해상(남중국해)에서 중심기압 1008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한국 기상청 기준으로는 12월 6일 3시에 베트남 다낭 남동쪽 약 690 km 부근 해상(남중국해)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간무리는 일본에서 제출한 태풍의 이름으로 별자리 중 왕관자리를 의미한다. 제29호 태풍 판폰(제명) 2019년 제29호 태풍 판폰(PHANFONE)은 12월 22일 9시에 중심기압 1000 hPa, 최대풍속 18 m/s, 강풍 반경 440 km(북쪽 반경), 크기 '중형'의 열대폭풍으로 팔라우 동쪽 약 420 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발생 이후 북서~서진하며 더디게 발달하다가, 필리핀을 관통하면서 급발달해서, 12월 25일 9시에 필리핀 마닐라 남남동쪽 약 350 km 부근 해상에서 중심기압 970 hPa, 최대풍속 41 m/s, 강풍 반경 330 km(북서쪽 반경)의 세력 '강', 크기 '중형'의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일본 기상청 태풍정보 속보치 기준) 최성기 이후 서북서~서진하며 남중국해에 진출한 뒤에는 상층 환경 악화로 인해 급약화되었고, 12월 28일 15시에 필리핀 마닐라 서쪽 약 750 km 부근 해상(남중국해)에서 중심기압 1004 hPa의 열대저압부로 소멸하였다. 판폰은 라오스에서 제출한 태풍의 이름으로 동물을 의미한다. 같이 보기 2019년 북인도양 사이클론 2019년 동태평양 허리케인 2019년 북서태평양 열대저압부 2019년 북대서양 허리케인 2019~2020년 남태평양 사이클론 2019~2020년 남서인도양 사이클론 2019~2020년 오스트레일리아 근해 사이클론 각주 외부 링크 국가태풍센터 날씨누리 태풍 정보 일본 기상청 태풍 정보 2019년 자연재해
https://en.wikipedia.org/wiki/2019%20Pacific%20typhoon%20season
2019 Pacific typhoon season
The 2019 Pacific typhoon season was the costliest Pacific typhoon season on record, just ahead of the previous year. The season featured fairly above-average tropical cyclone activity for the second consecutive year, producing 29 named storms, 17 typhoons, and five super typhoons. The season's first named storm, Pabuk, reached tropical storm status on January 1, becoming the earliest-forming tropical storm of the western Pacific Ocean on record, breaking the previous record that was held by Typhoon Alice in 1979. The season's first typhoon, Wutip, reached typhoon status on February 20. Wutip further intensified into a super typhoon on February 23, becoming the strongest February typhoon on record, and the strongest tropical cyclone recorded in February in the Northern Hemisphere. The season's last named storm, Phanfone, dissipated on December 29 after it made landfall in the Philippines. The scope of this article is limited to the Pacific Ocean to the north of the equator between 100°E and 180th meridian. Within the northwestern Pacific Ocean, two separate agencies assign names to tropical cyclones which can often result in a cyclone having two names. The Japan Meteorological Agency (JMA) will name a tropical cyclone should it be judged to have 10-minute sustained wind speeds of at least anywhere in the basin, while the Philippine Atmospheric, Geophysical and Astronomical Services Administration (PAGASA) assigns names to tropical cyclones which move into or form as a tropical depression in their area of responsibility located between 135°E–115°E and between 5°N–25°N regardless of whether or not a tropical cyclone has already been given a name by the JMA. Tropical depressions that are monitored by the United States' Joint Typhoon Warning Center (JTWC) are given a number with a "W" suffix. Seasonal forecasts During the year, several national meteorological services and scientific agencies forecast how many tropical cyclones, tropical storms, and typhoons will form during a season and/or how many tropical cyclones will affect a particular country. These agencies included the Tropical Storm Risk (TSR) Consortium of University College London, PAGASA and Taiwan's Central Weather Bureau. The first forecast of the year was released by PAGASA on February 7, within its seasonal climate outlook for the period January–June. The outlook noted that one to two tropical cyclones were expected between January and March, while two to four were expected to develop or enter the Philippine Area of Responsibility between April and June. Moreover, PAGASA predicts an 80% chance of a weak El Niño presence during February–March–April period. On May 7, the TSR issued their first forecast for the season, predicting that the 2019 season would be a slightly above average season, producing 27 named storms, 17 typhoons, and ten intense typhoons. One of the factors behind this is due to the possible development of a moderate El Niño anticipated within the third quarter of the year. On July 5, the TSR released their second forecast for the season, now lowering their numbers and predicting that the season would be a below-average season with 25 named storms, 15 typhoons, and eight intense typhoons. The PAGASA issued their second forecast for the season on July 15, predicting six to nine tropical cyclones expected to develop or enter their area between July and September and about three to five tropical cyclones by September to December. The agency also predicted that the weak El Niño was expected to weaken towards neutral conditions by August and September 2019. On August 7, the TSR released their final forecast for the season, predicting a near-normal season with 26 named storms, 16 typhoons and eight intense typhoons. Season summary 2019 was a fairly-above average season. It featured 50 tropical cyclones, 29 named storms, 17 that became typhoons and five became super typhoons. Throughout the year, there were at least 389 deaths from several storms, making the season the least deadly since 2015. A record of $34.14 billion in damages were recorded, making 2019 the costliest Pacific typhoon season on record, only surpassing with the previous season. The first half of the season was considerably inactive, despite opening up with a developing area of low pressure which absorbed the remnants of Tropical Depression Usman from the 2018 season just to the south of Vietnam. The system, shortly thereafter, strengthened into Tropical Storm Pabuk, which became the first named storm of the season. Four days later, Pabuk make landfall in Thailand and exited the basin and into the Bay of Bengal. In that same month, Tropical Depression 01W (Amang) affected eastern Philippines bringing torrential rainfall. The next named storm, Typhoon Wutip, strengthened into a Category 5-equivalent super typhoon and became the most powerful February typhoon on record, surpassing Typhoon Higos in 2015. Several tropical depressions developed during the months of March and May, however none strengthened into named storms. The month of June was unusually quiet with two storms forming in total. June did include Tropical Storm Sepat, which affected mainland Japan bringing gusty winds and a tornado. Tropical Storm Sepat was only classified as a subtropical storm by the JTWC. In July, four named storms developed and affected land: Mun, which affected South China, Danas and Nari, which affected mainland Japan, and Wipha which also affected South China. None of the storms, however, reached typhoon intensity, which is very rare for the month of July. By August, tropical activity began to increase with the development of three simultaneous typhoons. Typhoon Francisco affected Japan and the Korean Peninsula. Typhoon Lekima reached Category 4-equivalent super typhoon intensity east of Taiwan and made landfall in Zhejiang of eastern China. Lekima brought total damages of $9.28 billion, making it the fifth costliest typhoon and the costliest typhoon in China. Typhoon Krosa formed as a Category 3 typhoon and made landfall in Japan as a severe tropical storm. Tropical Storms Bailu and Podul impacted Taiwan and the Philippines respectively as well as southern China but caused minimal damage. In September, five tropical cyclones formed, including Typhoon Faxai, which made landfall in Japan as a Category 4-equivalent typhoon on September 8 causing landslides and damage that left a total of $10 billion in damages and three fatalities. Typhoon Tapah killed three people in Japan, and damage left behind in South Korea reached a total of ₩2.96 billion (US$2.48 million) and Japan's agricultural damage was amounted to be ¥583 million (US$5.42 million). Typhoon Mitag caused havoc in Western China and Taiwan, claiming three lives. Mitag also caused fourteen fatalities as it impacted the Korean Peninsula. The typhoon caused a total of $816 million in damages. During October, four cyclones formed, including the fourth-strongest tropical cyclone worldwide in 2019, Typhoon Hagibis, formed on October 4 near the Marshall Islands, and soon became the second-strongest tropical cyclone of the season when it explosively intensified into a Category 5-equivalent super typhoon. Hagibis made landfall in Japan as a Category 2 typhoon, causing major damage in the country, killing 98 people and causing a total $18 billion in damage, becoming the costliest Pacific typhoon on record. In the month of November, six named storms were recorded, including the most intense tropical cyclone of the season, Halong, formed on November 1 and became a Category 5 super typhoon four days later with 10-minute sustained winds of and with a minimum pressure of 905 millibars. In late-November, Kammuri formed and became a Category 4 typhoon on the Saffir-Simpson Wind Scale, and made landfall in the Philippines on November 30 causing 17 fatalities and dealing $130 million in damages. The month of December was quiet, however, another typhoon, Phanfone, formed on December 19. Phanfone made landfall in the Philippines on December 25 on Christmas Day as a Category 2 typhoon, the first storm to do so since Typhoon Nock-ten in 2016. Phanfone dissipated on December 29 after striking the Philippines, leaving a total of 50 people dead and causing $67.2 million in damages. The Accumulated Cyclone Energy (ACE) index for the 2019 Pacific typhoon season as calculated by Colorado State University using data from the Joint Typhoon Warning Center was 276.8 units. Broadly speaking, ACE is a measure of the power of a tropical or subtropical storm multiplied by the length of time it existed. It is only calculated for full advisories on specific tropical and subtropical systems reaching or exceeding wind speeds of . Systems Tropical Storm Pabuk A tropical disturbance formed over the southern portion of the South China Sea on December 28, 2018, which absorbed the remnants of Tropical Depression 35W (Usman) on December 30. Under high vertical wind shear, the low-pressure area remained disorganized until December 31 when it was upgraded to a tropical depression by both the JMA and the JTWC. As it was designated 36W by the JTWC, it was unofficially the last system of the 2018 typhoon season. At around 06:00 UTC on January 1, 2019, the system was upgraded to the first tropical storm of the 2019 typhoon season and named Pabuk by the JMA, surpassing Typhoon Alice in 1979 to become the earliest-forming tropical storm in the northwest Pacific Ocean on record. At that time, Pabuk was about southeast of Ho Chi Minh City, Vietnam and drifted westward slowly with a partially exposed low-level circulation center. Under marginal conditions including warm sea surface temperatures, excellent poleward outflow but strong vertical wind shear, Pabuk struggled to intensify further for over two days until it accelerated west-northwestward and entered the Gulf of Thailand on January 3, where vertical wind shear was slightly weaker. It became the first tropical storm over the gulf since Muifa in 2004. Moreover, it tried to form an eye revealed by microwave imagery. On January 4, the Thai Meteorological Department reported that Pabuk had made landfall over Pak Phanang, Nakhon Si Thammarat at 12:45 ICT (05:45 UTC), although other agencies indicated a landfall at peak intensity between 06:00 and 12:00 UTC. Pabuk became the first tropical storm to make landfall over southern Thailand since Linda in 1997. Shortly after 12:00 UTC, the JMA issued the last full advisory for Pabuk as it exited the basin into the North Indian Ocean. In Vietnam, Pabuk caused one death, and the losses were estimated at ₫27.87 billion (US$1.2 million). Eight people in Thailand were killed, and the losses in the country were estimated to be 5 billion bahts (US$157.2 million). Pabuk also killed one person in Malaysia. Tropical Depression 01W (Amang) The JTWC upgraded a disturbance north of Bairiki to a tropical depression with the designation 01W late on January 4 and expected some intensification, but it failed to develop and the JTWC downgraded it back to a disturbance on January 6. The system continued drifting westwards for two weeks without development. On January 19, the JMA upgraded the low-pressure area to a tropical depression when it was already located about west of Palau. The tropical depression entered the Philippine Area of Responsibility, being given the name Amang by PAGASA. Amang moved west-northwestward until it made landfall over Siargao at 11:00 Philippine Standard Time (PST), January 20. Amang changed course after the landfall, turning northward the next day until weakening over Samar the same day. Amang then weakened into a low pressure area before dissipating shortly afterwards, which then PAGASA issued their final advisories. The depression indirectly triggered landslides and flash floods in Davao Oriental and Agusan del Norte, killing 10 people. Damage in Davao were at ₱318.99 million (US$6.04 million). Typhoon Wutip (Betty) A low-pressure area south of the 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intensified into Tropical Depression 02W on February 18. The system was later upgraded to a tropical storm the following day after improving its deep rainbands, earning the name Wutip. On February 20, its convection rapidly deepened, attaining severe tropical storm status from the JMA, before strengthening further into a typhoon the next day. It formed a central dense overcast, resulting in an eye becoming visible on satellite imagery on February 22. By the next day, Wutip ensued rapid intensification, reaching 1-minute winds of 270 km/h (165 mph), becoming the most powerful February typhoon on record, surpassing Typhoon Higos of 2015. Shortly afterward, an eyewall replacement cycle was instated, weakening the storm. Upon completion on February 24, Wutip again rapidly intensified into an annular Category 5-equivalent super typhoon on February 25. Wutip entered a hostile environment with increased wind shear and began to weaken, concurrently making another turn westward. On February 28, Wutip weakened into a tropical depression and lost most of its convection, and was given the name "Betty" by the PAGASA as the storm entered the Philippine Sea. The storm rapidly weakened until it dissipated on March 2. In Chuuk and Yap States, Wutip produced inundation and powerful winds that destroyed crops and damaged around 160 houses, leaving 165 people homeless. On February 23, as Wutip was approaching Guam, power outages were reported across the island, and by February 25, Wutip had caused heavy damage in infrastructure, adding to the total of at least $3.3 million (2019 USD) in damages. There were no casualties reported in the affected areas nonetheless. Tropical Depression 03W (Chedeng) On March 14, Tropical Depression 03W formed over the 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Over the next couple of days, the system drifted westward, while gradually organizing. Early on March 17, the tropical depression entered the PAGASA's area of responsibility in the Philippine Sea, and consequently, the agency assigned the name Chedeng to the storm, shortly before it made landfall on Palau. A few hours after the landfall in Palau, Chedeng intensified into a tropical storm; operationally, Chedeng maintained only tropical depression status by the JTWC. It then weakened due to unfavorable conditions and at 5:30 PST on March 19, Chedeng made landfall on Malita, Davao Occidental. Chedeng rapidly weakened after making landfall in the Philippines, degenerating into a remnant low on March 19. Chedeng's remnants continued weakening while moving westward, dissipating over the southern Sulu Sea on March 20. Infrastructural damage in Davao Region were at Php1.2 million (US$23,000). Tropical Storm Sepat (Dodong) On June 24, the JMA began monitoring on a tropical depression that had formed well to the east of Luzon from the remnants of a separate system. On June 25, the system began curving towards the northeast; the PAGASA also began to issue warnings on the formative disturbance. Rounding the periphery of a subtropical ridge of high pressure, the depression tracked towards the east-northeast through the East China Sea, intensifying some as it encountered an area of high sea surface temperatures and low wind shear. On June 26, the cyclone left the PAGASA's area of responsibility. Curved banding developed later that day as the center passed east of Okinawa. Tracing the northwestern periphery of the ridge, the system curved towards the east-northeast, paralleling the southern coast of the main Japanese islands. Supported by favorable sea surface temperatures and outflow, the system was upgraded to a tropical storm at 09:00 UTC on June 27, gaining the name Sepat. A peak intensity with 10-minute sustained winds was attained later that day while Sepat began to acquire extratropical characteristics. The next day, the storm fully transitioned into an extratropical system while accelerating eastward east of Hitachinaka, Japan. This system was not tracked by the JTWC; however, the agency classified the system as a subtropical storm, with 1-minute sustained winds at . Some ferry routes and bullet trains were suspended as the storm passed near Tokyo on June 28, dropping heavy rainfall. Evacuations were advised for most districts in Kagoshima due to an increased risk of landslides. In Hioki, Kagoshima, of rain fell in a six-hour period on the morning of June 28; fell in Kamikatsu, Tokushima, in a 24-hour period. An EF0 tornado damaged 17 structures in Gifu and Ginan. Tropical Depression 04W (Egay) Tropical Storm Mun Between 4:30–5:00 a.m. ICT on July 4 (21:30–22:00 UTC on July 3), Mun made landfall in Thái Bình Province in northern Vietnam. A bridge in Tĩnh Gia District was damaged by the storm, which killed 2 people and left 3 injured. Damage of an electric pole in Trấn Yên District were at ₫5.6 billion (US$240,000). Tropical Storm Danas (Falcon) At 12:30 a.m. on July 17 (PST), PAGASA reported that Danas (Falcon) had made landfall at Gattaran, Cagayan and looped over the landmass. However, after post-analysis, Danas's center of circulation didn't made landfall. Northeasterly wind shear had displaced much of Danas' convection to the west, and an area of low pressure had formed to the east of Luzon. This led to the formation of another area of low pressure over the western Philippines. This low would later develop into Tropical Depression Goring. On July 19, the JMA reported that Danas has reached its peak intensity with winds of . Later that day, Danas began to weaken. On July 20, around 13:00 UTC, Danas made landfall on North Jeolla Province, South Korea, before weakening into a tropical depression soon afterward. At 12:45 UTC on July 21, Danas transitioned into an extratropical low in the Sea of Japan, and the JMA issued their final advisory on the storm. In Philippines, four people were killed after Danas triggered flooding in the country. Agricultural damage in Negros Occidental were calculated at ₱19 million (US$372,000), while agricultural damage in Lanao Norte reached ₱277.8 million (US$5.44 million). Danas caused stormy weather across South Korea; however, its effects were relatively minor. Heavy rains amounted to in Geomun-do. A man died after being swept away by strong waves in Geochang County. Damage in South Jeolla Province were at W395 million (US$336,000), while damage in Jeju Island up to W322 million (US$274,000). Additionally, Danas also triggered flash flooding in Kyushu. An 11-year-old boy was killed. Tropical Depression Goring However, the storm made landfall on Taiwan soon afterward and weakened; as a result, the JTWC cancelled the TCFA and has lowered Goring's chance for development to 'medium'. Tropical Storm Nari Tropical Storm Wipha In Vietnam, at least 27 people were killed. Thanh Hóa Province was the worst hit province within the nation, with 16 deaths alone, and the losses were amounted to 1 trillion đồng (US$43.1 million). Damage in Sơn La Province reached 28 billion đồng (US$1.21 million). Damage in Hainan and Guangxi valued at ¥83.6 million (US$12 million). Typhoon Francisco In anticipation of coastal flooding, 20,020 people were evacuated from Kokuraminami-ku and Moji-ku. Transportation in the affected region was disrupted, with 130 flights cancelled and the Kyushu Railway Company suspending train service. Striking Kyushu as a typhoon, Francisco brought heavy rain and strong winds to much of the island. Rainfall accumulations exceeded in Nobeoka and in Saiki. Nobeoka observed a local hourly rainfall record of . A maximum wind gust of was observed at Miyazaki Airport, the highest August wind gust on record for the city. One person drowned in a flooded river in Kokonoe. Two people suffered injury after being knocked over by strong winds. Typhoon Lekima (Hanna) Soon afterward, Lekima started to undergo an extratropical transition, with the JTWC discontinuing advisories on the storm. The remnants of Lekima made their way to the Korean Peninsula as an extratropical storm. Though Lekima, known as Hanna in the Philippines, did not directly affect the Philippines, the storm enhanced the southwest monsoon, which caused heavy rain in the nation. Three boats sank in Guimaras Strait; 31 people died and three were missing. Typhoon Krosa The typhoon brought torrential rain to parts of Shikoku and Honshu, with accumulations peaking at at Yanase in Kochi Prefecture. Wind gusts reached in Muroto. Rough seas produced by the storm killed two people while flooding killed one other. Fifty-five people were injured in various incidents. Damage in Japan amounted to be ¥2.177 billion (US$20.5 million). Severe Tropical Storm Bailu (Ineng) At 13:00 TST (05:00 UTC) on August 24, Bailu made landfall over Manzhou Township, Pingtung County, Taiwan. Though Bailu did not made landfall in the Philippines, two people were killed and state of calamity was declared in Ilocos Norte due to flooding, and left Php1.1 billion (US$21 million) damage in the province. Bailu also killed one person, and injured nine others in Taiwan. Institutional damage were calculated to be TWD 2.31 million (US$74,000), while agricultural damage reached TWD 175 million (US$5.63 million). Damage in Fujian reached ¥10.49 million (US$1.5 million). Tropical Storm Podul (Jenny) Podul made landfall in Casiguran, Aurora at 10:40 p.m. PST (14:40 UTC). In the Philippines, Podul left 2 dead and a damage of ₱240 million (US$4.59 million). Podul triggered tornado in Hainan, which killed eight people and left two others injured. Damage of this tornado reached ¥16.22 million (US$2.27 million). In Vietnam, the storm left six dead and two missing. Losses in Sơn La Province exceeds 1.8 billion đồng (US$77,000). Tropical Storm Kajiki (Kabayan) It passed through the Batanes Islands, and PAGASA upgraded the system to a tropical depression, naming it Kabayan; however, the system exited their area of responsibility shortly thereafter. In the same time the Joint Typhoon Warning Center issued a Tropical Cyclone Formation Alert (TCFA) for Kabayan. Because of the slow movement over Vietnam, Kajiki brought heavy rains and triggered flooding. Rainfall were recorded to as high as 530 mm within the regions. The storm killed ten people and nine others remained missing. Agricultural losses were estimated to be ₫300 billion (US$76.2 million). Typhoon Lingling (Liwayway) On August 31, three tropical depressions formed, one of which was east of Mindanao. The Joint Typhoon Warning Center then issued a Tropical Cyclone Formation Alert for the system. On September 1, the Philippines agency PAGASA upgraded the system and named it Liwayway. At 2:30 p.m. KST (05:30 UTC), Lingling made landfall in South Hwanghae Province, North Korea with winds of , becoming the first typhoon and the strongest storm to strike the country. Passing east of the Philippines, Lingling caused flooding in Luzon. Agricultural damage in Pampanga were amounted to ₱5.65 million (US$108,000). Economic loss in Okinawa Prefecture were at JP¥533 million (US$4.98 million). Passing west of South Korea, Lingling killed three people and injured ten others. Wind gusts reached in Heuksando, the strongest wind observed in the country since Maemi in 2003. About 161,000 households had experienced power outages. Damage nationwide were amounted to ₩28.76 billion (US$24.1 million). In North Korea, five people were dead with three others injured. The typhoon damaged 475 houses and buildings, as well as of farmland. Lingling also passed through the Northeast China, damage were calculated at CN¥930 million (US$131 million). Moreover, Lingling's extratropical remnants caused flooding in the Russian Far East, with damage in the Jewish Autonomous Oblast amounting to ₽2 billion (US$30.4 million). Typhoon Faxai Faxai weakened slightly before making landfall in Chiba City shortly before 5:00 a.m. JST September 9. Trains service in JR East were cancelled due to the storm. Two people died from heatstroke because of the power outage. Damage in Japan reached US$10 billion. The name Faxai was retired and was replaced with Nongfa. Tropical Depression Marilyn Later that day, JMA cancelled the gale warning. By the next day, the JTWC issued a Tropical Cyclone Formation Alert on the system, which will later cancel the next day. High surf from Tropical Depression Marilyn in Puerto Princesa capsized 6 boats at sea. Tropical Storm Peipah Typhoon Tapah (Nimfa) PAGASA later named the tropical cyclone as "Nimfa", as the JTWC issued a medium warning for Nimfa. A non-warning tropical depression in the South China Sea merged with the circulation of Tapah on Thursday, September 19. During the passage of Tapah, three people were killed in Japan, and the agricultural damage were amounted to be ¥583 million (US$5.42 million). Damage in South Korea were at ₩2.96 billion (US$2.48 million). Though three deaths were reported during the storm, officials said that they were not related to Tapah. Typhoon Mitag (Onyok) The PAGASA named the system "Onyok" as it entered the Philippine Area of Responsibility, In Taiwan, 12 people were injured during the typhoon. The Nanfang'ao Bridge collapsed following the passage of Mitag, leaving six dead and 12 injured; the specific cause of the collapse is still being investigated. Agricultural damage in Yaeyama Islands were at JP¥84.41 million (US$781,000). In Zhoushan, three people were killed, and the economic loss reached CN¥1.856 billion (US$260 million). Mitag also killed 13 people and left 2 missing in South Korea. Damage nationwide were amounted to be ₩181.9 billion (US$151 million). Typhoon Hagibis The National Weather Service also began issuing advisories for its areas of responsibility, with a typhoon warning issued for Saipan and Tinian, and tropical storm advisories issued for Sinapalo and Hagåtña. Hagibis passed over the Mariana Islands at 15:30 UTC on October 7 at peak intensity, with 10-minute sustained winds of and a central pressure of 915 hPa (27.02 inHg). After passing the Mariana Islands, Hagibis began an eyewall replacement cycle, which caused the rapid intensification phase to end. As the primary eyewall began to erode, the typhoon weakened to a high-end Category 4-equivalent super typhoon at 00:00 UTC on October 8. Several hours later, Hagibis re-intensified into a Category 5-equivalent system upon completing the eyewall replacement cycle. Hagibis began to weaken on October 10. Hagibis made landfall on the Izu Peninsula of southeastern Honshu just after 09:00 UTC on October 12. Upon crossing the coast, the system had 10-minute sustained winds of and one-minute sustained winds of , equivalent to a Category 2 hurricane. By 13:30 UTC on October 10, the expected impacts in parts of Japan were such that the organisers of the 2019 Rugby World Cup decided to cancel at least two matches scheduled to be played over the weekend. On October 12 a third match was cancelled Japan Rail, Japan Airlines, and All Nippon Airways all announced suspended services. On October 11, Formula One announced that they are cancelling all Saturday planned events that were initially scheduled as part of the 2019 Japanese Grand Prix. This includes the third practice session and qualifying, the latter of which was rescheduled to take place on Sunday morning, a few hours before the race. The F4 Japanese Championship had previously announced the previous day that they will be cancelling the double header round at Suzuka that was initially scheduled to take place as a supporting event for the Japanese Grand Prix. The name Hagibis was retired and was replaced with Ragasa. Typhoon Neoguri (Perla) On October 15, a tropical depression formed in the West Pacific. The depression slowly intensified and was eventually given the name Perla by PAGASA. The depression strengthened into Tropical Storm Neoguri, late on October 17. By 12:00 UTC on October 19, Neoguri became a typhoon as it neared the Ryukyu Islands of Japan. Just 5 hours later, Neoguri reached its peak intensity as it began to pull to the northeast. Neoguri began to quickly weaken and made a transition into an extratropical cyclone to the south of Japan on October 21. As Neoguri strengthened, it brought light rainstorms to the Batanes and Cagayan in the Philippines. As Neoguri brushed Japan, it dumped up to 9 inches of rainfall in the Tokyo Metro Area, which had already been drenched by Typhoon Hagibis earlier that month and Typhoon Faxai the month before. Typhoon Bualoi On October 17, the Joint Typhoon Warning Center began monitoring a disturbance situated a couple hundred miles east of the Marshall Islands, and on October 19, the disturbance quickly organised into Tropical Depression 22W. Advisories began to be issued on the system as a conducive environment with very warm sea surface temperatures and low wind shear allowed 22W to strengthen. By October 19, it became Tropical Storm Bualoi and on the next day, it entered a period of rapid intensification. Bualoi quickly became a severe tropical storm and then a typhoon soon afterwards. The rate of strengthening slowed until October 21, at which point Bualoi became a Category 2-equivalent typhoon on the Saffir-Simpson hurricane wind scale. The system then recommenced its rapid intensification, strengthening to Category 3 six hours later, and proceeded to steadily intensify further to Category 4 later the same day. Bualoi reached its peak intensity on October 22, with 10-minute sustained winds of and one-minute sustained winds of , equivalent to a Category 5 major hurricane. The system began to rapidly weaken the following day, dropping to a category 3-equivalent typhoon. Severe Tropical Storm Matmo A tropical depression formed near Palau on October 28 and made landfall in Vietnam on October 30 as it intensified to a tropical storm and was named "Matmo". The storm brought rainfall to Cambodia and Thailand, while the heaviest rainfall occurred in Vietnam, causing flooding and road closures. The storm quickly weakened to tropical depression status and dissipated, with its remnants later emerging into the North Indian Ocean on November 2. The remnants soon redeveloped into a depression on November 5, which later became Cyclone Bulbul. Matmo destroyed 2,700 houses and 35 schools, causing 3.8 billion VND (US$165 million) in damage in Vietnam, with majority of losses in two provinces: Quảng Ngãi and Bình Định. The storm also killed two people in the country. Typhoon Halong On November 2, a well-organized low pressure system rapidly organized into a tropical depression several hundred miles east of the Northern Mariana Islands. The depression strengthened quickly and was upgraded to Tropical Storm Halong the same day. The storm continued strengthening over the open waters, reaching typhoon status. As Halong cleared out its eye, explosive intensification ensued on November 4, and Halong became a Category 5-equivalent super typhoon on November 5. Halong reached its peak intensity as the strongest storm of the 2019 season, with the JTWC estimating 1-minute sustained winds of , the highest globally in 2019 and a minimum pressure of 888 hPa (mbar). On November 6, Halong began to undergo an eyewall replacement cycle and decreasing sea surface temperatures coupled with dry air intrusion began to take its toll on the system, and its circulation was heavily affected and it weakened to a Category 4-equivalent typhoon on 18:00 UTC. Typhoon Nakri (Quiel) In Luzon, the combined effects of Nakri and a cold front produced widespread heavy rain. The resulting floods and landslides killed 24 people and left 13 others missing. Cagayan Province alone suffered ₱1.8 billion (US$49.4 million) in damage. Typhoon Fengshen Typhoon Kalmaegi (Ramon) On November 11, the Joint Typhoon Warning Center began monitoring a disturbance situated only a couple hundred miles off the coast of the Philippines. Despite initial models suggesting it would be short lived and move towards land, it quickly organized as sea surface temperatures became very conducive for development, and the JTWC issued a tropical cyclone formation alert late on November 11. Later, it developed into Tropical Depression 27W, and subsequently issued the name Ramon.Ramon intensified into a tropical storm by November 13, and was given the name Kalmaegi by the JMA. Up until November 16, Ramon appeared very disorganised as its low-level circulation center was exposed to high amounts of wind shear and dry air intrusion restricted any strengthening. On November 17, Kalmaegi entered favorable waters and then intensified into a severe tropical storm. By the next day, Kalmaegi intensified into a Category 1 typhoon, forecasted to hit the Ilocos region. On November 20, it hit Santa Ana, Cagayan instead of the Ilocos Region, and rapidly dissipated inland. Across Cagayan Province, the storm caused ₱618.7 million (US$12.4 million) in damage. Severe Tropical Storm Fung-wong (Sarah) A short-lived tropical cyclone was started as a tropical depression formed in November 18 from the Pacific waters off the 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as the Joint Typhoon Warning Center issued a TCFA for the system, designated as 28W. By the next day, it entered the Philippine Area of Responsibility, assigned the PAGASA to name the storm as Sarah. On November 19, Sarah intensified into a tropical storm, and was given the international name of Fung-wong (1927). Fung-wong then strengthened into a severe tropical storm east of Luzon the following day. The JTWC upgraded Fung-wong into a minimal Category 1 typhoon at 08:00 UTC. Soon, Fung-wong was hindered by northeasterly wind shear, and began to weaken rapidly while moving northeast, and dissipated into a remnant Low Pressure Area (LPA) west of Okinawa, Japan Typhoon Kammuri (Tisoy) On November 23, a low pressure system developed to the southeast of Guam. It then began to show signs of development and earned a defined circulation, developing into a tropical depression on 25 November, with the JTWC assigning it as 29W. The depression then began to develop banding features to the northeast of its center. The storm then intensified slightly, earning the name Kammuri, which is the Japanese word for the constellation Corona Borealis. Kammuri then passed south of Guam, and further intensified into a severe tropical storm on November 27, and then into a typhoon the next day. Upwelling of itself due to its quasi-stationary movement combined with moderate wind shear hindered significant intensification of Kammuri over the next three days as it moved into the Philippine Area of Responsibility, with PAGASA subsequently assigning the typhoon the name Tisoy. Kammuri began to show signs of rapid intensification again on December 1, ultimately intensifying to a Category 4 typhoon the next day. It made landfall at peak intensity on that day in the Bicol Region and began to weaken, weakening to a Category 3 typhoon that evening. On November 30, Kammuri produced possibly the record lowest known cloud top temperature at . As of January 22, 2020, 17 people have been found dead while 318 were injured. Estimated damages across the central Philippines have been at Php6.65 billion (US$130 million), according from the NDRRMC. Both International and local names are retired. Kammuri was retired and replaced with Koto. The name Tisoy was also retired and replaced with Tamaraw for the 2023 season. Typhoon Phanfone (Ursula) The system proceeded to move into the Philippine Area of Responsibility on December 23, 5:00 am PST, and was named Ursula by the PAGASA. On the same day, the JTWC finally upgraded the system to a tropical storm. Owing to favorable conditions, Phanfone intensified into a severe tropical storm on December 23, and further intensified into a Category 2 typhoon shortly before making landfall near Salcedo in Eastern Samar, causing drastic flooding and mudslides in the region weeks after Typhoon Kammuri. The total reported damages of the typhoon is at (or ) and the total fatalities is 50 deaths (with 55 missing). The names Phanfone and Ursula were both retired, it was replaced by Nokaen and Ugong. Other systems Many of the tropical depressions of the season failed to intensify into tropical storms, or even be numbered. During May 7, the JMA reported that two tropical depressions had developed over the basin. The first was located to the south of Palau and remained near stationary, before it was last noted during the next day. The second system developed near the Federal States of Micronesia and slowly moved westwards over the next few days before it was last noted as tropical depression during May 11. During May 10, a third tropical depression developed to the south of Palau. Storm names Within the Northwest Pacific Ocean, both the Japan Meteorological Agency (JMA) and the Philippine Atmospheric, Geophysical and Astronomical Services Administration (PAGASA) assign names to tropical cyclones that develop in the Western Pacific, which can result in a tropical cyclone having two names. The Japan Meteorological Agency's RSMC Tokyo — Typhoon Center assigns international names to tropical cyclones on behalf of the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s Typhoon Committee, should they be judged to have 10-minute sustained windspeeds of . PAGASA names to tropical cyclones which move into or form as a tropical depression in their area of responsibility located between 135°E and 115°E and between 5°N and 25°N even if the cyclone has had an international name assigned to it. The names of significant tropical cyclones are retired, by both PAGASA and the Typhoon Committee. Should the list of names for the Philippine region be exhausted then names will be taken from an auxiliary list of which the first ten are published each season. Unused names are marked in . International names During the season 29 tropical storms developed in the Western Pacific and each one was named by the JMA, when the system was judged to have 10-minute sustained windspeeds of . The JMA selected the names from a list of 140 names, that had been developed by the 14 members nations and territories of the ESCAP/WMO Typhoon Committee. During the season, the names Mun, Bailu and Bualoi were used for the first time, after they replaced the names Fitow, Haiyan and Rammasun which were retired after the 2013 and 2014 seasons, respectively. Retirement After the season, the Typhoon Committee announced that the names Lekima, Faxai, Hagibis, Kammuri, and Phanfone would be removed from the naming lists due to the damages and deaths it caused in their respective onslaughts, and they will never be used again for another typhoon name. In 2021, they were replaced by Co-may, Nongfa, Ragasa, Koto, and Nokaen, respectively. With five retired names, this season was tied with the 2006 and 2020 seasons for the highest number of retired storm names after a single typhoon season, a record it jointly held until it was surpassed by the 2022 season which had six retired names. Philippines During the season PAGASA used its own naming scheme for the 21 tropical cyclones, that either developed within or moved into their self-defined area of responsibility. The names were taken from a list of names, that had been last used during 2015 and are scheduled to be used again during 2023. The names Liwayway, Nimfa, Perla and Sarah were used for the first time after the names Lando, Nona, Pedring and Sendong were retired. Retirement After the season, PAGASA had announced that the names Tisoy and Ursula would be eliminated from their naming lists after these typhoons caused a combined total of damages both in Infrastructure and Agriculture on their respective onslaught in the country. In January 2020, the PAGASA chose the names Tamaraw and Ugong to replace Tisoy and Ursula for the 2023 season. Season effects This table summarizes all the systems that developed within or moved into the North Pacific Ocean, to the west of the International Date Line during 2019. The tables also provide an overview of a systems intensity, duration, land areas affected and any deaths or damages associated with the system. |- | Pabuk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Natuna Islands, Vietnam, Malaysia, Thailand, Myanmar || || || |- | 01W (Amang)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Kiribati, Marshall Islands, Caroline Islands, Philippines || || || |- | Wutip (Betty)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Mariana Islands || || None || |- | 03W (Chedeng)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Philippines ||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Yap, Palau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None || None || None || |- | Sepat (Dodong)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Japan, Aleutian Islands, Russian Far East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Japan, Korean Peninsula || None || None || |- | 04W (Egay)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Yap, Philippines, Taiwan, East China || None || None || |- | Mun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South China, Vietnam, Laos || || || |- | Danas (Falcon)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Yap, Philippines, Taiwan, East China, Japan, Korean Peninsula, Russian Far East || || || |- | Goring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Taiwan, Ryukyu Islands || None || None || |- | Nari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Japan || None || None || |- | Wipha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South China, Vietnam, Laos || || || |- | Francisco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Japan, Korean Peninsula || Unknown || || |- | Lekima (Hanna)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Philippines, Ryukyu Islands, Taiwan, South Korea, China || || || |- | Krosa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Mariana Islands, Japan, Korean Peninsula, Russian Far East || ||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None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Ryukyu Islands, Taiwan, East China || None || None || |- | Bailu (Ineng)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Taiwan, South China || || || |- | Podul (Jenny)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Yap, Philippines, Vietnam, Laos, Thailand, Cambodia || || || |- | Kajiki (Kabayan)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South China, Vietnam, Laos || || || |- | Lingling (Liwayway)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Ryukyu Islands, Korean Peninsula, Northeast China, Russian Far East || ||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 None || None || |- | Faxai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Japan || ||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Ryukyu Islands, Korean Peninsula || None || None || |- | Marilyn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None || None || None || |- | Peipah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Mariana Islands, Bonin Islands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Japan || None || None || |- | Tapah (Nimfa)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Taiwan, East China, Japan, South Korea || ||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 None || None || |- | Mitag (Onyok)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Mariana Islands, Taiwan, Japan, East China, South Korea || > ||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None || None || None || |- | Hagibis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Mariana Islands, Japan, South Korea, Russian Far East, Aleutian Islands, Alaska || > || || |- | Neoguri (Perla)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Japan || None || None || |- | Bualoi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Mariana Islands || None ||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None || None || None || |- | Matmo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Vietnam, Cambodia, Laos, Thailand || || 2 || |- | Halong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None || None || None || |- | Nakri (Quiel)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Vietnam || || || |- | Fengshen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Marshall Islands, Marianas Islands || None || None || |- | Kalmaegi (Ramon)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Taiwan || || None || |- | Fung-wong (Sarah)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Philippines, Taiwan, Ryukyu Islands || None || None || |- | Kammuri (Tisoy)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Mariana Islands, Philippines || ||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Mariana Islands || None || None || |- | TD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 None || None || |- | Phanfone (Ursula) || || bgcolor=#| || bgcolor=#| || bgcolor=#| || Caroline Islands, Philippines || || 50 || |- See also Weather of 2019 Tropical cyclones in 2019 Pacific typhoon season 2019 Atlantic hurricane season 2019 Pacific hurricane season 2019 North Indian Ocean cyclone season South-West Indian Ocean cyclone seasons: 2018–19, 2019–20 Australian region cyclone seasons: 2018–19, 2019–20 South Pacific cyclone seasons: 2018–19, 2019–20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2019 Pacific Typhoon Season Animation Pacific typhoon seasons 2019 WPac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C%8B%9C%EB%8B%A4%20%EB%A7%88%EC%82%AC%ED%83%80%EC%B9%B4
요시다 마사타카
요시다 마사타카(, 1993년 7월 15일 ~ )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며, 현재 메이저 리그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소속 선수(외야수)이다. 후쿠이현 후쿠이시 출신이다. 인물 프로 입단 전 6세 때 야구를 시작하여 후쿠이 시립 아소즈 초등학교, 후쿠이시 아스와 중학교에 재학 중 보이즈 리그팀 ‘사바에 보이즈’ 소속이었다. 본인 말로는 “‘멀리 날고 싶다’는 의식이 강했다(어린 시절이었다)”고 밝혔다. 쓰루가 게히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1학년 여름에 4번 타자로서 제91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첫 상대인 데이쿄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1안타를 날렸으나 팀은 패했다. 1학년 가을에 열린 후쿠이현 대회 우승과 호쿠신에쓰 대회 준우승을 잇달아 경험했고 2학년 봄에 열린 제82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개막전이기도 한 1차전에서는 나카무라 쇼고가 소속된 덴리 고등학교를 상대로 3안타를 기록하는 등 팀 승리에 기여했다. 그 후에도 팀 승리가 계속됐지만 야마사키 사치야가 소속된 니혼 대학 제3 고등학교와의 준준결승에서 3타수 무안타에 그쳤고 팀도 탈락했다. 2학년 여름 이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전국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춘·하계 대회 내내 4경기에서 타율 0.313에 16타수 5안타 2타점의 성적을 남겼다. 고등학교 2년 선배로는 야마다 노부요시, 1년 아래인 니시카와 료마가 있었다.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 진학 후 도토 대학 1부 리그에서는 1학년 춘계 리그전에서 4번 타자로 발탁됐는데 타율 0.311, 1홈런, 7타점을 기록하여 지명 타자로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추계 리그전부터는 3번 타자로 고정돼 2년 선배이자 4번 타자인 스기모토 유타로와 클린업 타선을 구축했다. 또한 지명 타자 부문에서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다. 2학년 때 춘계 리그전에선 지명 타자에서 외야수로 전향하여 4홈런을 기록했고 외야수 부문에서는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다. 3학년 때 추계 리그전에서는 타율 0.352, 3홈런의 성적으로 외야수로선 두 번째의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하지만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됐다. 스기모토가 재학 중에는 리그전에서 스기모토와의 연속 홈런을 세 차례나 달성했다. 4학년 가을에는 2부 리그에서 타율 0.400, 5홈런을 기록했지만 팀은 1부 리그로 승격되지 못했다. 재학 중 도토 리그의 1부에서 통산 72경기에 출전했고 타율 0.277(278타수 77안타), 9홈런, 38타점, 12도루 등의 성적을 남겼다. 대학 2학년 때인 2013년 7월에는 제39회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 3학년 때는 제27회 하를럼 베이스볼 위크의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됐다. 4학년 때인 2015년 6월에는 하계 유니버시아드 일본 대표팀에 발탁됐다. 하계 유니버시아드 개막을 앞두고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대학 일본 대표 대 NPB 선발’전에서는 상대 투수 다카하시 고나로부터 홈런을 날렸다. 같은 해 대한민국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된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주로 4번 타자로 출전하여 일본 대표팀 우승에 기여했다. 대회 종료 후에 열린 U-18 야구 월드컵 일본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는 우에노 쇼타로와 다카하시 미키야를 상대로 2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대학 2년 선배로는 스기모토 외에 도조 다이키와 와타나베 유타, 1년 선배로는 가토 다쿠마, 1년 후배로는 오카노 유이치로가 있었다. 2015년 NPB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오릭스 버펄로스로부터 1순위에 지명돼 계약금 1억 엔, 연봉 1,500만 엔(금액은 추정치)으로 입단했고 등번호는 34번으로 결정했다. 구단 내에 요시다 가즈마사, 요시다 료 등이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언론 보도 및 전광판 상에는 ‘’(요시다 마사)로 표기된다. 오릭스는 이 회의에서 JR 서일본으로부터 스기모토를 10순위로 지명했다. 두 사람 다 입단함으로써 대학 시절과 마찬가지로 팀 동료가 됐다. 더 나아가 구단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일본식 대포를 차지하고 싶었다’라는 이유로 1순위를 지명했지만 정작 자신은 “(팀에는)이토이 요시오, T-오카다, 고토 슌타 등 왼쪽의 훌륭한 외야수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서 오릭스로부터의 1순위 지명은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릭스 시절 2016년 춘계 스프링 캠프를 앞둔 신인 합동 자율 훈련 중에 전신 구단(오릭스 블루웨이브)의 OB인 이치로(당시 MLB 플로리다 말린스 소속)와 홋토못토 필드 고베에서 처음으로 대면했다. 이치로에게서 직접 ‘아오가쿠(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걸어왔지만 훈련 이틀 째에 갑작스런 왼쪽 종아리 근막염 발병으로 춘계 스프링 캠프를 2군에서 맞이했다. 캠프 초반인 2월 6일에는 1군에 승격했지만 당일에 있은 타격 연습에서 오른쪽 옆구리 통증을 호소하여 이틀 후인 2군에 내려갔다. 3월 16일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웨스턴 리그 공식전에 지명 타자로 출전했는데 실전 2경기 만에 프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시범 경기 마지막 상대인 한신 타이거스와의 3연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다시 1군에 합류하자 3경기 모두 선발로 기용됐고 3월 19일 경기에서는 3회말 두 번째 타석에서 상대 투수 후지카와 규지로부터 교세라 돔 3층석 앞부분의 벽을 직격하는 홈런을 날렸다. 시범 경기 통산 13타수 4안타를 기록하자 개막 1군 엔트리에 오르면서 당시 후쿠라 준이치 감독은 ‘지명 타자로서의 개막전 선발 기용’이라고 공언했다. 3월 25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개막전(세이부 프린스 돔)에서는 ‘1번 타자 겸 지명 타자’로서 프로 데뷔 첫 선발 출전했다. 본인 말로는 ‘중학생(시대) 이래’의 1번 타자 기용이라는 것이었는데 7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 데뷔 첫 안타를 날리는 등 풀타임을 뛰며 5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또한 개막전부터 6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했다. 하지만 선발 기용이 계속되는 와중에 요추 부분에서 추간판증을 일으켰다. 외야 수비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기 때문에 4월 24일에 1군 등록이 말소됐다. 그 후 8월 12일 1군에 복귀했고 8월 18일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삿포로 돔)에서 데뷔 첫 홈런을 쳤다. 8월 26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라쿠텐 Kobo 스타디움 미야기) 이후 30경기에서 3번 타자로 나섰고 다음 날인 27일 역시 라쿠텐전에서 1회초 첫 타석부터 2연타석 홈런을 때려냈다. 팀의 시즌 최종전인 10월 1일 라쿠텐전(코보스타 미야기)에서 오릭스의 신인 선수로서는 1969년의 가토 히데지 이래 47년 만에 1군 공식전의 4번 타자로 기용됐다. 시즌 전체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부상의 영향으로 1군 출장은 63경기에 그쳤고 타석수(258)도 퍼시픽 리그 규정 타석(443)보다 밑돌았지만 타율 0.290(리그 9위에 해당), 10홈런, 34타점을 기록했다. OPS는 0.854(리그 4위에 해당), RC27은 6.09(리그 8위에 해당)에 달했다. 수비면에서는 좌익수로서 44경기에 선발 기용됐고 우익수로서 9경기, 지명 타자로서 8경기에 출전했다. 시즌 후 중화민국에서 열린 아시아 윈터 리그에서는 웨스턴 리그 선발의 주축 타자로서 총 18경기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타율(0.556), 홈런(6개), 안타(30), 루타(57), 타점(29) 등 5개 부문에서 모두 최고 성적을 거두며 최우수 타자로 선정됐다. 귀국 후인 12월 20일에 연봉 2,100만 엔(전년도보다 600만 엔 인상)의 조건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2017년 ‘시즌 143경기 전체 출장’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시범 경기 종반에 허리 통증이 재발했다. 후의 검진에서 허리 통증에 의한 재발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개막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5월 10일, 웨스턴 리그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마이시마 베이스볼 스타디움)에서 2번 타자 겸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여 실전에 복귀했다. 1회말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지만 경기 종료 후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다시 전력에서 이탈했다. 7월 9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3번 타자 겸 지명 타자로서 이 해에 처음으로 1군 공식전에 출전했다. 다음날 10일의 닛폰햄전(모두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는 1회말 첫 타석에서 우익 관중석 5층석을 향해 추정 비거리 130m의 홈런을 날렸다. 같은 달 하순 이후로는 구단 수뇌진이 공격 중시의 타선을 짠 것에 의해 8경기에서 1번 타자, 9경기에서 2번 타자로 기용됐다. 8월 8일 세이부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는 2년 연속으로 한 경기에서의 2개 홈런을 2타석 연속으로 기록했다. 8월 16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후쿠오카 야후오쿠! 돔) 이후에는 시즌 종료 때까지 다시 3번 타자로 기용됐다. 9월 3일 세이부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2년 연속으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다. 시즌 종반인 10월 4일에는 수술을 받았지만 등록을 말소하진 않았고 수술 후에도 1군에서의 2경기에 출장했다. 위에서 말한 허리 통증과 수술의 영향으로 1군에서의 출장은 64경기(268타석)에 그쳤지만 타율 0.311(리그 2위에 해당), 12홈런, 38타점을 기록했다. 모두 전년도를 웃도는 성적을 남겼고 OPS는 0.928(리그 3위에 해당), RC27은 7.41(리그 3위에 해당)에 달했다. 타순에서는 1번이나 2번으로 기용된 적도 있었지만 주로 3번 타자(46경기)로 기용됐다. 수비면에서는 주로 우익수(36경기)로 출전했지만 좌익수로서 16경기, 중견수로서 1경기, 지명 타자로서는 10경기에 각각 선발 출장했다. 시즌이 끝난 후에 개최되는 추계 스프링 캠프 참가도 고사하여 11월 하순에는 허리 수술을 받았다. 12월 6일에는 추정 연봉 3,100만 엔(전년도보다 1,000만 엔 상승)이라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2018년 전년도에 허리 수술을 받은 것을 고려해서 춘계 스프링 캠프를 2군에서 맞이했다. ‘부상 당하지 않는 몸을 만들기’, ‘주공수 모든 면에서의 레벨 업’을 테마로 내걸고 체간 트레이닝 등에 전념했다. 스프링 캠프 초반인 2월 4일에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이나바 아쓰노리로부터 2020년 도쿄 올림픽 일본 야구 대표팀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스프링 캠프 종반부터 1군에 합류하면서 3월 30일에는 소프트뱅크와의 정규 시즌 개막전(후쿠오카 야후오쿠! 돔)에서 3번 타자 겸 좌익수로 선발 출전했다. 5월 22일 라쿠텐전(라쿠텐 세이메이 파크 미야기)에서는 3회초 두 번째 타석에서 시즌 6호 홈런, 4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 2점 적시타(단타), 6회초 네 번째 타석에서 2루타를 기록했다. 8회초 다섯 번째 타석에서도 장타를 날려 3루로 출루했지만 2루에서 3루로 가는 것이 ‘송구간 진루’(공식 기록상에는 2루타)로 간주돼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지 못했다.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출전한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는 6월 7일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프로 데뷔 후 첫 3루타를 쳤고 6월 13일 히로시마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는 3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교류전 기간 동안 전체 18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97, 3홈런, 10타점, 출루율 0.477, 득점권 타율 0.500 등의 좋은 성적을 남긴 것과 동시에 팀을 퍼시픽 리그 구단 최고 순위(2위)에 올린 공로로 교류전 MVP에 선정됐다. 교류전 최종전에서 경기 도중 오른발 관절 부분이 삐면서 자력으로 걷지 못한 채로 대주자를 내보냈지만 이튿날인 22일부터 재개된 퍼시픽 리그 공식전에서는 대타 출전을 거쳐 주전 자리에 다시 복귀했다. 올스타전에서는 팬 투표와 선수간 투표 모두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3위에 올라 첫 출전했다. 7월 13일 올스타전 1차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는 퍼시픽 리그 팀의 5번 타자 겸 지명 타자로 선발 출전했는데 1회말 첫 번째 타석에서 올스타전 첫 안타·첫 타점을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적시타를 기록했다. 정규 시즌에서는 전체 143경기에 출전하여 규정 타석에 처음으로 도달함과 동시에 타율 0.321, 26홈런, 86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남겼다. 오프에는 5,400만 엔이 증가된 추정 연봉 8,5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2019년 시범 경기 기간 중인 3월 상순에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대표팀 평가전(멕시코 대표팀과의 2연전)에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일본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출됐다. 평가전에서는 두 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여 클린업 타선의 일원을 맡았고 2차전에서는 1회말 첫 번째 타석에서 만루 홈런을 날렸다. 정규 시즌에는 개막 이후부터 4번 타자로 기용했는데 개막 초에는 타율이 1할 대에 머물 정도로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시즌 첫 홈런을 날린 것은 개막 11경기(통산 49타석)째인 4월 11일 지바 롯데전(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의 세 번째 타석이었다. 5월 21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지바 롯데전에서 오릭스 선수로는 처음으로 입단 1년차부터 4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자신의 최고 페이스(출장 43경기째)로 달성했다. 전년도에 MVP를 획득한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 다시 주춤했지만 올스타전에서는 팬 투표와 선수간 투표(모두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2위)를 거쳐 2년 연속 출전했다. 7월 13일 올스타전 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3번 타자 겸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 이 경기에서 첫 홈런을 날리는 등의 활약으로 퍼시픽 리그 선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감투 선수로 선정됐다. 정규 시즌 종반에는 모리 도모야(세이부)와의 리그 수위 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을 벌였는데 타율 0.329로 먼저 시즌을 끝낸 모리에게는 근소한 차이로 미치지 못했지만 리그 2위에 해당되는 타율 0.322를 기록했다. 더욱이 2년 연속 시즌 143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자신의 최다 기록인 29홈런을 남겼고, 7월과 9·10월 월간 MVP에도 선정됐다. 팀으로서는 다니 요시토모(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인 2001년 ~ 2004년) 이래 2년 연속 베스트 나인(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에도 선정됐다. 프리미어 12 종료 후인 11월 29일에 추정 연봉 2억 엔(전년도부터 1억 1,500만 엔 상승)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오릭스 토박이 선수가 입단 5년 만에 1억 엔 이상의 연봉을 받은 사례는 이치로가 블루웨이브 시절이던 1996년에 추정 연봉 1억 8,000만 엔(전년도부터 1억 엔 상승)에 재계약을 맺은 데 이어 두 번째다. 2020년 8월에는 타율 0.430으로 월간 MVP를 수상하는 등 정규 시즌을 통해서 높은 타율을 유지했다. 1군 공식전에서 3년 연속으로 전 경기(같은 해엔 120경기) 출장을 이룬 것과 동시에 시즌 타율 0.350을 기록하며 팀내 토박이 선수로는 2000년(블루웨이브 시절)에 이치로 이후 20년 만에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NPB의 1군 공식전에서 헤이세이 시대에 태어난 선수가 정규 시즌의 규정 타석을 채운 후 0.350 이상의 타율로 시즌을 끝낸 사례는 요시다가 처음이다. 개막 이후부터 한 달 남짓 사이에 7개의 홈런을 치면서도 통산 홈런 수는 14개에 그쳤지만 3년 연속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에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다. 1군 공식전에서는 리그에서 10번째로 가장 많은 492타석에 들어서면서 전체 삼진 개수는 29개에 불과하여 리그 규정 타석에 도달한 선수 중에서는 가장 적었다(자세한 내용은 관련 항목). 시즌 종료 후 구단과의 재계약 협상을 처음으로 대리인에게 맡기면서 이듬해 1월 4일부터 니시카와 하루키 등과 함께 오키나와현에서 자주 트레이닝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계약 협상을 춘계 스프링 캠프인 직전(같은 달 22일)까지 미루었다. 재계약 맺은 후의 연봉은 2억 8,000만 엔으로 인센티브를 제외한 추정 액수이지만 일본 프로 야구 재적 6년차에 일본인 야수로서는 역대 최고액이다. 재계약 후에 있은 기자 회견에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메이저 리그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2021년 팀의 선수회장으로 취임했고 정규 시즌 개막 초에는 전년도 시즌 중반부터 1군을 지휘하는 나카지마 사토시(이 해부터 감독으로 정식 취임)의 방침에 의해서 2번 타자로 수시 기용했다. 팀 전체의 득점력을 높이기 위한 기용이었지만 스기모토가 4번 타자로 고정된 5월부터는 대학 시절에 경험했던 3번 타자를 맡았다. 5월 15일 라쿠텐전(홋토못토 필드 고베)에서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다가 8년 만에 친정팀 라쿠텐에 복귀한 다나카 마사히로와 첫 맞대결을 펼쳤다. 6회말 세 번째 타석에서 왼쪽 담장을 살짝 넘기는 타구를 쳤는데 라쿠텐측의 리퀘스트 요청에 의한 비디오 판정 끝에 개인 통산 99번째 홈런으로 인정받았다. 5월 23일 소프트뱅크전(후쿠오카 PayPay 돔)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301번째의 개인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다. 올스타전에서는 팬 투표로 센트럴 ·퍼시픽 양대 리그 통틀어 최다 득표 선수로 출전했고 팬 투표로 선출된 홈런 더비에서는 첫 우승을 이뤘다. 도쿄 올림픽에 의한 정규 시즌 일시적 중단을 거쳐 재개된 후에도 팀과 함께 호조를 보이며 9월 3일 소프트뱅크전(후쿠오카 PayPay 돔)의 9회초 타석에서 유격수 땅볼을 쳤지만, 1루를 향해 달려 나가다가 왼발 부상을 입었다(기록은 내야 안타). 이튿날 4일에 열린 소프트뱅크전에서는 8회초에 대타로 출전했지만 5일자로 등록이 말소됐기 때문에 2018년부터 계속된 정규 시즌 연속 출장 기록이 512경기로 끊겼다. 같은 달 26일 라쿠텐전에서 복귀했지만 10월 2일의 소프트뱅크전 4회말에 오제키 도모히사로부터 사구를 받아 경기 도중에 교체됐고 오른쪽 척골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아 다시 전력에서 이탈하게 됐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는 타율 0.339로 2위 모리 도모야(세이부, 0.309)에게 3푼 차이를 벌려 퍼시픽 리그에서는 2002년, 2003년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닛폰햄) 이래, 오릭스 구단에서는 이치로 다음으로 두 번째인 2년 연속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출루율도 0.429로 자신의 첫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더욱이 타율과 출루율 외에도 장타율은 0.563, OPS는 0.992, 득점권 타율 0.400도 리그 1위였다. 11월 10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1차전에서는 부상에서 불과 39일 만에 복귀를 이뤘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우승을 놓쳤지만 1차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쳤고, 3차전 이후에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와중에 수비에도 오르는 등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였다. 12월 8일에는 수술을 받았다. 12월 22일에는 1억 2,000만 엔이 상승한 추정 연봉 4억 엔+성과급 지급으로 재계약을 맺었고 구단측은 요시다의 등번호를 7번으로 변경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프로 7년째에서의 4억 엔 도달은 전체 12구단의 야수 중에서는 이치로에 이어 2번째로 가장 빠른 기록이다. 2022년 4월 10일, 지바 롯데전에서 상대 투수 사사키 로키와 맞대결했을 때 헛스윙 삼진(첫 번째 타석), 헛스윙 삼진(두 번째 타석), 루킹 삼진(세 번째 타석)으로 한 경기에서 세 번의 삼진을 당하는 부진을 겪어 팀도 퍼펙트 게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5월 8일에 실시된 선별 PCR 검사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등록이 말소됐다. 5월 17일에 재등록됐지만, 같은 날 경기 전 연습에서 환부를 다쳤고, 왼쪽 대퇴부 부분의 손상으로 5월 21일에 또다시 등록이 말소됐다. 6월 3일에는 1군에 복귀하여 6월 17일 세이부전(베루나 돔)전에서는 3번 타자 겸 지명 타자로 선발 복귀를 이뤘다. 7월에는 24경기에서 타율 0.322, 4홈런, 20타점을 기록하여 자신의 통산 5번째인 월간 MVP를 수상했다. 우승 경쟁이 치열해진 9월에는 더욱 기세를 올려 9월 13일 라쿠텐전(라쿠텐 세이메이 파크 미야기)에서는 전날 12일의 마지막 타석에서부터 3타석 연속 홈런을 터뜨렸고 9월 19일 소프트뱅크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는 선제 2점 홈런을 포함한 3안타 4타점, 9월 24일 라쿠텐전(라쿠텐 세이메이 파크 미야기)에서 2점 홈런을 포함한 자신의 최다 타이 기록인 6타점을 기록하는 등 타율 0.416, 7홈런, 23타점의 활약으로 월간 MVP를 수상하며 리그 2연패 달성에 큰 기여을 했다. 이 해의 타율은 0.335를 기록했는데 6년 연속 타율 3할 대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대활약을 보였던 마쓰모토 고(닛폰햄)와의 수위 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한 끝에 타율 0.347을 기록한 마쓰모토에게 1푼 2리차로 뒤져 3년 연속 수위 타자 타이틀을 놓쳤다. 또한 퍼시픽 리그에서 타율 3할 대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마쓰모토와 요시다 2명뿐이었다. 그리고 출루율은 0.447을 기록하여 2년 연속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타점 부문에서는 그 해에 타점왕을 차지한 야마카와 호타카(세이부)의 90타점에 이어 개인 최다 기록인 88타점을 기록했고 OPS는 역시 개인 최고 기록인 1.008을 기록했다. 그런 한편으로 5월에 왼쪽 허벅지 부상의 영향으로 수비로서의 출전은 39경기에 그쳤고 시즌 대부분을 지명 타자로 출전하는 일이 많아졌다. 포스트 시즌인 소프트뱅크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4차전에서 홈런을 날리는 등 타율 0.462(13타수 6안타), 3타점의 활약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야쿠르트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상대 배터리에게서 경계를 받아 4차전까지 볼넷 7개로 철저하게 승부를 피할 수 있었고 4경기에서 2안타에 그쳤지만 5차전에서는 5회에 팀내 1호가 되는 솔로 홈런을 날렸고 동점이던 9회에도 끝내기 2점 홈런을 쳤다. 일본 시리즈에서의 끝내기 홈런은 구단 최초이며 2년 연속 끝내기 홈런은 사상 최초이다. 이 끝내기 승리에 힘입어 상대 전적은 2승 1무 2패를 기록하여 승부는 원점으로 되돌렸고 이어진 6차전과 7차전에서 연승하며 오릭스는 26년 만에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면서 자신은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시즌 종료 후인 11월 17일에 포스팅 시스템을 이용한 MLB 진출이 승인됐고 같은 달 24일에는 베스트 나인(지명 타자 부문)에도 선정됐다. 12월 7일에 MLB 사무국으로부터 포스팅 신청이 접수됐다.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2022년 12월 16일에 보스턴 레드삭스와 5년 계약을 맺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한 보스턴은 원소속팀 오릭스에게 이적료로 1,537만 5,000달러를 지불했다. 이 날에는 입단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등번호는 2022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7번으로 정했다. 기자회견에서 “보스턴은 30개 구단 중에 최고이다. 그래서 이 팀을 선택했다”라고 밝혔다. 팀에서는 리드오프로 출전할 가능성이 높지만 요시다 본인은 “리드오프를 쳐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있게 리드오프에서 잘 칠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면서도 “팀에서 원한다면 어떤 역할이든 잘 해내겠다”라고 말했다. 국가대표 경력 2017년 시즌 종료 후 제1회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의 일본 대표팀에 선택될 것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자신의 수술 조치로 인해 대표팀 최종 명단을 공식 발표하기 전에 출전을 포기했다. 2019년 11월 개최된 제2회 WBSC 프리미어 12에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서 출전했다. 2021년 7월, 정규 시즌이 중단된 기간 중에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야구 경기에 일본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출전했다. 전체 5경기에 3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여 올림픽 통산 타율 0.350을 기록하는 등 팀의 금메달 획득에 큰 기여를 했다. 2023년 3월에 개최될 예정인 제5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본 대회 1차 라운드에서는 4경기 모두 5번 타자 겸 좌익수로 출전해 타율 0.417, 8타점의 활약을 보였다. 준준결승전인 이탈리아전에서는 WBC에서의 첫 홈런을 때려냈고 준결승전인 멕시코전에서는 동점 3점 홈런을 때려내며 대회 최다 기록인 13타점을 기록했다. 준준결승전 이후의 3경기는 4번 타자로서 활약하여 일본 대표팀을 14년 만의 WBC 우승을 이끌어냈고 올 WBC 팀(외야수 부문)에도 선정됐다. 선수로서의 특징 신장 173cm로 야구 선수로서는 작지만 오릭스 OB 가도타 히로미쓰를 연상케 하는 왼쪽 장거리 타자이다. 강한 스윙의 대명사로도 불릴 정도였다. 대학 시절 50m 달리기에서는 6초 2, 멀리 던지기에서는 100m를 측정했다. 그런 한편으로 2021년 시즌에 부상을 당하고 나서는 어깨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이를 과제로 삼았다. 2023년 WBC 멕시코전에서 8회에 2사 주자 2·3루 상황에서 좌전 안타를 때려내 2루 주자를 홈으로 파고드는 활약을 보여주며 요시다의 어깨를 경계하는 팀도 있을 정도였다. 홈런 타자에 대한 동경이 강하다 보니 인터뷰에서 “나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홈런 타자를 동경했기 때문에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지금 야구계 전체를 둘러봐도 야구를 하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나의 홈런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계기가 되어 야구 인구도 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여 “(힘 있는 스윙은)변하지 않고, 바뀌지도 않는다”며 장거리 타자로서의 고집을 보이는 한편 “공에 대한 접촉을 의식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윙은 상황에 따라 ‘투구 라인에 맞춰 방망이를 넣는다’, ‘위에서부터 때린다’, ‘밑에서부터 방망이를 넣는다’ 등의 세 가지 스타일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한 탐구심을 갖고 자신의 타격을 마주보고 하는 것을 즐기면서 “최상의 스윙 형태를 타석 안에서 재현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그 연장선상에 홈런이 있다”, “‘칠 수 있다고 느낀 공을 치는 것’이 자신만의 타격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고교 시절에는 ‘힘없이 방망이를 휘두르고 헤드 스피드가 빠른데다 방망이 중심으로 공을 잡는 기술이 뛰어난 교타자’, 오릭스 입단 초기에는 ‘여러 방향으로 강한 타구를 가르는 장거리 타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릭스 입단 후의 2시즌에는 위의 평가에서 변화가 나타났는데 장타력을 나타내는 IsoP가 ‘0.203→0.206’이라는 높은 수치를 드러냈다. 이 시기에는 이른바 ‘풀 히터’다운 경향이 두드러졌다. 실제로 전체 타구에서 우익 방향으로 뻗는 타구의 비율이 2년 연속 40%를 웃돌았고 홈런도 통산 22개 가운데 20개가 (우중간 포함) 우익 방향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 배트 컨트롤과 선구안의 균형도 매우 좋아 삼진률 ‘13.2%→11.9%(리그 4위에 해당)’(리그 평균은 ‘18.0%→19.5%’), 볼넷율 ‘9.7%→14.2%(리그 2위에 해당)’ 모두 높은 수준의 추이를 보였다. 좌완 투수와 상대했을 경우의 OPS도 ‘0.822(대 우완 투수 0.870)→0.946(대 우완 투수 0.922)’으로 추이를 나타내는 등 좌완 투수를 껄끄럽게 상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홈구장인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와다 쓰요시로부터 데뷔 첫 홈런을 쳤을 때는 위에서 말한 경향과는 반대로 타구가 좌익 방향으로 날아간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없었던 감각으로 좌완 투수로부터 왼쪽 방향으로 칠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라고 말했다. 오릭스 입단 3년차인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 연속 전 경기 출장과 최종 규정 타석에 도달하면서 어느 시즌에서도 0.320 이상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NPB에서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한 타자는 블루웨이브 시절(1994~1998년)이던 이치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타율 0.350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처음으로 획득한 2020년에는 통산 492타석에서 72개의 볼넷을 고른 반면 삼진에서는 퍼시픽 리그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가운데서도 가장 적은 29개에 그쳤고, 시즌 종료 후 닛칸 스포츠로부터 ‘가장 이상적인 타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가 출범한 후(1950년)의 NPB 1군 공식전에서 ‘시즌 통산 70개 이상의 볼넷’과 ‘시즌 통산 30개 이하의 삼진’이라는 조건을 모두 갖춘 수위 타자는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인 1960년·1963년)와 하리모토 이사오(닛폰햄 파이터스 시절인 1974년)에 이어 세 번째이다. 퍼시픽 리그에서는 하리모토 이후 46년 만이다. 참고로 2020년 공식전 PA/K(삼진 한 개를 당하기까지 필요한 평균 타석수)에서도 퍼시픽 리그 1위에 해당되는 16.95를 기록했다. 이 해에 센트럴 리그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중에서 삼진이 가장 적었던 미야자키 도시로(DeNA)의 15.86도 능가했지만 요시다가 한 개라도 삼진을 당한 경기(25경기)에서 팀의 승률(0.273)은 공식전 전체 120경기의 통산 승률(0.398)을 크게 밑돌고 있었다. 연식 야구를 시작한 초등학생 시절부터 방망이를 향한 까다로운 기준이 강해서 그런지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재학 당시엔 나무 방망이를 채택하고 있는 도토 대학 야구 리그전 등에서 단풍나무로 만든 방망이를 즐겨 사용했다. 오릭스 입단 1년차인 2016년에는 아오다모제, 미국물푸레나무제의 방망이를 더듬어서 구분하여 사용했다. 프로 1년차 비시즌에 들어섰을 때부터는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하나’를 찾아 방망이 제조 공장을 방문하고선 제조 공정을 둘러보았다. 2년차 이후에는 자작나무 방망이로 통일하면서도 제조 기술자와의 소통과 대략적인 조정을 통해 ‘최고의 하나’의 실현에 보다 가까워졌다. 또한 ‘습기에 따른 방망이의 무게가 달라지기만 해도 (타격의) 결과도 미묘하게 달라진다’라는 이유로 방망이 케이스에는 제습제를 반드시 넣고 다니는 편이다. 이바타 히로카즈가 2021년 9월에 공개한 동영상에서는 파워 랭킹 일본인 현역 부문 3위를 차지했다. 이바타는 자신과 같은 체격 및 체형의 요시다가 장거리 타자로 활약하는 것에 대해선 “170cm(대) 전반 중 동경의 대상”이라고 평가했다. 에피소드 어린 시절 메이저 리그 TV 중계를 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우투좌타격인 브라이스 하퍼를 ‘동경의 대상이자 목표인 선수’로 꼽았다. 오릭스에 입단할 당시에는 자신의 강력한 희망으로 등번호를 ‘34’(하퍼가 워싱턴 내셔널스 시절인 2018년까지 착용했던 등번호)번으로 정했다.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시절 감독이었던 젠바 아쓰시는 “수비도 발도 어깨도 평범하지만 야구에 임하는 자세가 입학 때부터 뛰어나서 ‘강하게 휘두르는 것’이 가능한 강한 타자였다”, “역시 무언가가 다르다. 다른 ‘프로에 가고 싶다’는 선수들과는 사고력과 행동력이 달랐다. 매력적인 스윙을 주무기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프로에서도 어느 정도는 활약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므로 부상당하지 않을 정도의 몸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NPB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된 결정적인 이유로는 대학 4학년 때인 2015년에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된 유니버시아드 야구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한 것을 꼽았다. 같은 학년이자 팀 동료였던 다카야마 슌(메이지 대학)이나 모기 에이고로(와세다 대학)가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던 반면 자신은 도토 대학 야구 2부 리그에서 활약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기량 향상에 큰 원동력이 됐다고 한다. ‘(고교 시절까지 보냈던)후쿠이가 야구 인생의 원점’이라는 것을 인터뷰 등에서 종종 언급한 바 있다. 오릭스 2년째인 2017년에는 춘계 스프링 캠프 직전에 자신이 소속돼 있던 소년 야구팀(사바에 보이즈)의 후배인 기시모토 준키, 다마무라 유스케와 함께 자율 훈련에 임한 적도 있다. ‘향상심, 탐구심, 반골심이 왕성한 것’을 본인 성격의 특징으로 꼽았다. 2016년 오프 시즌에 해머던지기 선수인 무로후시 고지에게 친필 편지를 보낸 인연으로부터 2017년 이후에는 춘계 스프링 캠프 전에 무로후시로부터 트레이닝 지도를 받고 있다. 2018년 1월에는 ‘자기 자신에게 이기는 것’, ‘1월 1일을 소중히 보내는 것’, ‘규정 타석 도달’을 목표로 이토이나 야나기타 유키와 함께 괌에서 자주 트레이닝을 감행했다. 오릭스에 입단 후 특유의 강한 타격 스타일을 살린 동영상(일명 ‘마초 동영상’)을 프로듀싱했다. 2018년 이후 교세라 돔에서 개최되는 홈 경기에서 요시다가 득점 기회인 상황에서 타석에 섰을 때 ‘마초 동영상’을 전광판의 대형 스크린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이 영상과 연계한 아령 형태의 응원 상품을 구단이 공식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열혈 성격 때문에 오릭스 입단 초기에는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 2017년 시즌 중반까지는 스윙의 마지막까지 방망이를 양손으로 계속 쥐고 있었지만 양말도 직접 신을 수 없을 정도로 허리의 상태가 나빠졌다. 이를 계기로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가급적 줄이고 타구의 비거리 향상을 동시에 가져가기 위해 스윙의 팔로 스루에서 방망이로부터 한 손을 놓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더욱이 2017년 시즌 종료 후 허리 수술을 받은 것이 차츰 회복되면서 2018년 이후에는 1군에서의 정규 시즌 전 경기 출전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 공헌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 2018년 퍼시픽 리그 공식전 규정 타석에 처음 도달한 것을 계기로 홈런 1개당 10만 엔을 ‘국경 없는 아이들’을 통해 기부하고 있다. 부인은 패션모델·관리영양사·기업가인 유리카이며 자신은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이다. 도쿄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사무라이 재팬)로서 금메달을 획득한 영예를 기리기 위해 2021년 12월 13일, 후쿠이현 후쿠이시의 JR 후쿠이역 서쪽 출구에 기념 골드 포스트(제25호)가 설치됐다(골드 포스트 프로젝트). 별명은 여러 개가 있는데 ‘마초맨’(), 이를 줄인 ‘마초’(), 그 외에 ‘마사’()가 있다. 그의 대리인 스콧 보러스도 ‘마사’라고 불렀다. 상세 정보 출신 학교 쓰루가케히 고등학교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선수 경력 NPB 오릭스 버펄로스(2016년 ~ 2022년) MLB 보스턴 레드삭스(2023년 ~ ) 국가 대표 경력 2019년 WBSC 프리미어 12 일본 국가대표 2020년 하계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 202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 수상·타이틀 경력 타이틀 수위 타자 : 2회(2020년, 2021년) ※2년 연속은 퍼시픽 리그 역대 공동 4위 타이 최고 출루율 : 2회(2021년, 2022년) 수상 NPB 베스트 나인 : 5회(2018년 ~ 2022년)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1회(2022년)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MVP : 1회(201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MVP : 1회(2022년) 올스타전 감투상 : 1회(2019년) 월간 MVP : 6회(2019년 7월, 2019년 9월, 2020년 8월, 2021년 5월, 2022년 7월, 2022년 9·10월) ※야수 부문 골든 스피릿상 : 1회(2022년) 국제 대회 올 WBC팀 : 1회(2023년) ※외야수 부문 그 외 후쿠이현 영예상(2021년) 개인 기록 NPB 첫 기록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2016년 3월 25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세이부 프린스 돔), 1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 첫 타석 : 상동, 1회초에 기쿠치 유세이로부터 우익 뜬공 첫 안타 : 상동, 7회초에 궈쥔린으로부터 좌전 안타 첫 타점 : 2016년 3월 29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차전(삿포로 돔), 6회초에 요시카와 미쓰오로부터 중월 적시 2루타 첫 홈런 : 2016년 8월 18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8차전(삿포로 돔), 3회초에 마스이 히로토시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첫 도루 : 2017년 9월 8일, 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차전(라쿠텐 Kobo 스타디움 미야기), 3회초에 2루 안착(투수: 기시 다카유키, 포수: 시마 모토히로) 기록 달성 경력 통산 100홈런 : 2021년 5월 23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1차전(후쿠오카 PayPay 돔), 9회초에 이와사키 쇼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301번째 기타 70볼넷 이상·30삼진 이하에서 수위 타자 : 2020년(72볼넷·29삼진) ※양대 리그제 이후로는 나가시마 시게오(1960년·1963년), 하리모토 이사오(1974년) 이후 역대 3번째 올스타전 출장 : 4회(2018년, 2019년, 2021년, 2022년) MLB 첫 기록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2023년 3월 30일, 대 볼티모어 오리올스 1차전(펜웨이 파크), 4번·좌익수로 선발 출장 ※일본인 선수가 개막 4번으로 첫 출전하는 것은 처음 첫 안타·첫 타점 : 상동, 6회말에 키건 에이킨으로부터 중전 적시타 첫 도루 : 2023년 4월 2일, 대 볼티모어 오리올스 3차전(펜웨이 파크), 8회말 2루 안착(투수: 마이크 바우만, 포수: 애들리 러치맨) 첫 홈런 : 2023년 4월 3일, 대 피츠버그 파이리츠 1차전(펜웨이 파크), 1회말에 요한 오비에도로부터 좌월 2점 홈런 등번호 34(2016년 ~ 2021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착용 7(2022년 ~ ) 연도별 타격 성적 2022년 시즌 종료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별 타격 성적 소속 리그내에서의 순위 ‘-’는 10위 미만(타율, OPS는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않은 경우에도 ‘-’로 표기) WBSC 프리미어 12에서의 타격 성적 올림픽에서의 타격 성적 WBC에서의 타격 성적 굵은 글씨는 대회 최고 성적 연도별 수비 성적 2022년 시즌 종료 기준. 각주 주해 출전 외부 링크 2015년 일본 프로 야구 신인 선수 선택 회의 - 오릭스 버펄로스 드래프트 지명 선수 목록 - 일본 야구 기구 공식 홈페이지 199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야구 선수 일본 프로 야구 외야수 오릭스 버펄로스 선수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 일본의 유니버시아드 금메달리스트 유니버시아드 야구 메달리스트 201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메달리스트 일본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외야수 201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야구 참가 선수 2019년 WBSC 프리미어 12 참가 선수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동문 후쿠이시 출신 2020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일본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202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일본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후쿠이현의 야구 선수 20세기 일본 사람 21세기 일본 사람 쓰루가 게히 고등학교 동문 202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https://en.wikipedia.org/wiki/Masataka%20Yoshida
Masataka Yoshida
Masataka Yoshida (吉田 正尚 Yoshida Masataka, born July 15, 1993) is a Japanese professional baseball outfielder for the Boston Red Sox of Major League Baseball (MLB). He started his professional career with Orix Buffaloes of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NPB). Professional career Japanese career Yoshida played college baseball for Aoyama Gakuin University and was selected by the Orix Buffaloes in the first round of the 2015 NPB draft. Yoshida first played in NPB for Orix during the 2016 season, when he had a .290 batting average with 10 home runs and 34 runs batted in (RBIs) in 63 games. In 2017, he played 64 games with Orix, batting .311 with 12 home runs and 38 RBIs. In 2018 and 2019, he played 143 games each season, batting .321 and .322, respectively, with an aggregate 55 home runs and 171 RBIs for the two seasons. For 2020 through 2022, he had batting averages of .350, .339, and .335, with a total of 56 home runs and 224 RBIs in 349 games played across the three seasons. Yoshida hit two home runs in Game 5 of the 2022 Japan Series, including a walk-off; Orix won the series in seven games (one game ended in a tie) over the Tokyo Yakult Swallows. In seven seasons with Orix—2016 through 2022—Yoshida compiled a .327 batting average along with 467 RBIs and 133 home runs in 762 games. MLB career On December 7, 2022, Yoshida was posted by Orix and made available to all 30 Major League Baseball (MLB) teams, opening a 30-day period to negotiate a contract. On December 15, Yoshida signed a five-year contract with the Boston Red Sox, reportedly worth $90 million. In January 2023, he was ranked 87th in the Baseball America list of baseball's top 100 prospects, as the publication includes NPB players joining MLB in their rankings. That ranking was considered "alarmingly low" by Peter Abraham, the Red Sox beat writer for The Boston Globe. On April 23, 2023, Yoshida hit two home runs in the same inning, including a grand slam, in a game against the Milwaukee Brewers. Yoshida was named AL Player of the Week for the week of May 1–7, having gone 12-for-25 with a 1.319 OPS and not a single swing and a miss in this period. International career Yoshida represented the Japan national baseball team in the 2014 Haarlem Baseball Week, 2015 Summer Universiade, 2019 exhibition games against Mexico, and 2019 WBSC Premier12. On February 27, 2019, he was selected to the 2019 exhibition games against Mexico. On October 1, 2019, he was selected to the 2019 WBSC Premier12. In 2023, Yoshida represented Japan in the World Baseball Classic. He set a tournament record for RBIs with 13. At the end of the tournament, he was named to the All-Classic Team. References External links , or NPB.jp 1993 births Living people Aoyama Gakuin University alumni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outfielders Major League Baseball outfielders Orix Buffaloes players Boston Red Sox players Baseball people from Fukui Prefecture People from Fukui (city) 2019 WBSC Premier12 players 2023 World Baseball Classic players Baseball players at the 2020 Summer Olympics Olympic baseball players for Japan Olympic medalists in baseball Olympic gold medalists for Japan Medalists at the 2020 Summer Olympics Major League Baseball players from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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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후이
우즈후이(吳稚暉, 1865년 3월 25일 ~ 1953년 10월 30일), 우징헝(Wu Jingheng/Woo Tsin-hang, Wu Shi-Fee)는 주음부호(장빙린의 노고에 기반)와 표준화된 국어 발음을 만든 1912~13년 독음통일회의 의장인 중국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였다. 우즈후이는 20세기 중 첫 10년을 프랑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리스정, 장런지에,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이들과 함께 1920년대에 중국 국민당의 상당히 반공산주의의 "네 명의 원로"들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경력 장쑤성 우진구의 가난한 가족에게서 우티아오(吳朓)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우즈후이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1891년 거인 시험을 통과했다. 상하이 난양 모범 중학에서 일했다. 1903년 수바오 신문에서 우즈후이는 청나라 정부를 비판했고 통치 중인 서태후를 "말라빠진 노파", "매춘부"로 묘사하며 조롱했다. 이 사건 이후 우즈후이는 홍콩을 거쳐 런던으로 달아났다. 그의 공식적인 지위 덕에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여행하고 생활할 수 있었다. 에딘버러에서 대학교 강의에 참석했다. 1903년,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베이징에서 만났던 고위 관리의 아들 리스정, 그리고 번창했던 상인의 아들 장런지에와 우애를 다졌다. 우즈후이가 10년 더 선배였던 점, 또 이 세 학자들이 중국 사상을 지배한 유학에 정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프랑스에 만연해 있던 아나키즘주의에 감명을 받았다. 리스정과 장런지에와 함께 그는 세계사를 설립했고 이는 수십년 간 아나키즘주의자의 사상과 회원 모집의 중심지가 되었다. 함께 1905년 중국 국민당(GMD)의 선구자격인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우즈후이는 이듬해에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선언했다. 나중에 그는 영향력 있는 혁명 단체들(진덕회 등. 하기 문단 참고)을 설립했으며 1907년 중국 최초의 신디칼리즘 신봉자 잡지 신세기(新世紀)와 같은 잡지들을 감독했다. 과학, 이성주의, 언어 개혁, 혼인 철폐를 선전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혁명적이었으나 자신의 유토피아 사회 관점을 성취시키기에는 3,000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았다. 우즈후이는 프랑스의 유법근공검학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으로의 복귀, 그리고 국민당에 대한 충성 1912년 복귀 직후 우즈후이, 리스정, 장계(張繼), 왕징웨이는 팔불회(八不會)라고도 불렸던 진덕회(進德會)를 조직하였다. 우즈후이는 새 공화국은 마작과 남성들만의 모임이 두 번째 아내를 취하던 일이 만연했던 후기 청나라의 사회적인 부패에 의해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아나키스트 원칙에 충실한 대통령이나 장교, 또 이를 강제할 규제나 수단이 없었고 회비나 벌금이 없었다. 그러나 단계별 회원에게는 점차 엄격한 요건이 생겨났다. 가장 낮은 단계의 지지 구성원들은 매춘에 참가하지 않는 것, 도박하지 않는 것에 동의하였다. 일반 구성원들은 그에 더해 첩을 두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더 윗 단계는 더 나아가 정부 고위직이 되지 않으며(누군가는 고위직을 감시해야 함) 의회의 구성원이 되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 데에 동의했다. 끝으로, 가장 높은 단계는 술과 고기를 삼가는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정권을 차지하는 것을 거절한 우즈후이는 차이 위안페이의 언어 개혁 위원회 참여 제안을 받아들여 지역 방언을 대체할 문자주음체계에 대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국어주음부호가 탄생했으며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13년 6월, 우즈후이는 공론(公论)이라는 잡지의 창립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1913년, 쑨이셴의 2차 혁명이 실패하자 우즈후이와 리스정은 안전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리스정과 우즈후이는 리옹-프랑스 대학교(University of Lyon-France)를 설립하고 체험 학습 운동을 개시했다. 1920년대에, 리스정, 장런지에,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중국 국민당의 네 명의 원로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반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여 좌파와 공산주의자들은 당에서 몰아내고 장제스를 지원하였다. 아나키스트 원칙에 따라 우즈후이는 어떠한 관공서에서 일하는 것도 거절하였다. 1943년, 국민당 정부의 의장 린썬이 충칭에서 사망하였고 장개석은 우즈후이를 새 의장으로 초대했으나 우즈후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거절하였다: 난 격식을 차리지 않는 옷을 보통 입으나 나라의 우두머리들은 턱시도를 입는다. 난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내 얼굴은 큰 충격을 받을만큼 못 생겼다. 내 사람들은 웃는 것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재밌게 보는 것은 나를 웃게 만든다. 외교관이 기밀 정보를 전달하면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품위가 있지 않게 비칠 것이다. 1946년, 우즈후이는 새 헌법을 만든 국회에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그는 정부가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자리를 옮기기 직전 장개석에 취임 선서를 부여했다. 그는 중화민국으로 이주한 뒤 장개석의 아들 장징궈의 교사가 되었다. 그는 88세의 나이로 타이베이시에서 사망했다. 장칭궈는 화장 후 진먼 바다에 재를 뿌려달라는 우즈후이의 지시를 수행했다. 유산 우즈후이는 다양한 스타일의 캘리그래피로 존경을 받았으며 이는 주음 설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작품 우즈후이선생집(吳稚暉先生集, Collected Works of Mr. Wu Chih-hui) 각주 참고 문헌 , chapter 4: "Mockery". "Wu Chih-hui," in , pp. 416–419. Available at The Anarchist Library. . "Mr. Wu Chih-hui," in , pp. 185-186. 1865년 출생 1953년 사망 중국의 언어학자 중국의 아나키스트 중국의 반공주의자 신해혁명 관련자 중국 대륙 본토계 대만인 대만의 철학자 중국국민당 당원 중국동맹회원 프랑스에 거주한 대만인 에든버러 대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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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 Zhihui
Wu Jingheng (), commonly known by his courtesy name Wu Zhihui (Woo Chih-hui, ; 1865–1953), also known as Wu Shi-Fee, was a Chinese linguist and philosopher who was the chairman of the 1912–13 Commission on the Unification of Pronunciation that created Zhuyin (based on Zhang Binglin's work) and standardized Guoyu pronunciation. Wu became an anarchist during his stay in France in the first decade of the 20th century, along with Li Shizeng, Zhang Renjie, and Cai Yuanpei. With them, he was known as one of the strongly anti-communist "Four Elders" of the Nationalist Party in the 1920s. Career Born into a poor family in Wujin, Jiangsu province as Wu Tiao (), Wu Zhihui was an outstanding student, passing the challenging Juren examination in 1891. He served at the Nanyang College Preparatory School Hall (now the Shanghai Nanyang Model High School). In 1903 in the Subao newspaper, Wu criticized the Qing government and derided then ruling Empress Dowager Cixi as a "withered old hag" and a "whore." After this incident, Wu fled by way of Hong Kong to London. His official status enabled him to travel and live in Scotland and France. He attended university lectures in Edinburgh. In 1903, he went to Paris, where he renewed his friendship with Li Shizeng, the son of a high official he had met in Beijing, and with Zhang Renjie, well-connected son of a prosperous merchant. Although Wu was their elder by more than a decade, the three young scholars, although well-versed in the Confucian philosophy which dominated Chinese thought, were impressed by the doctrines of anarchism which flourished in France. Together with Li and Zhang, he formed the Shijie She (World Society), which became a center of anarchist thought and recruitment for several decades. Together they joined the Tongmenghui, the precursor to the Chinese Nationalist Party (GMD), in 1905. Wu declared himself an anarchist the next year. He later founded influential revolutionary organizations like the Society to Advance Morality and supervised radical journals like New Era and Labor, China's first syndicalist magazine. He promoted science, rationalism, language reform, and the abolition of marriage. His ideas were revolutionary, but he estimated that it would take 3,000 years to achieve his vision of a utopian society. Wu was instrumental in the Diligent Work-Frugal Study Movement in France. Among his students were a large group of anarchists – and future communists. Return to China and allegiance to Kuomintang Soon after their return in 1912, Wu, Li, Zhang Ji, and Wang Jingwei organized The Society to Advance Morality (Jinde hui, ), also known as the "Eight Nots," or "Eight Prohibitions Society (八不會 Babu hui). Wu felt that the new Republic must not be menaced by the social decadence of the late Qing, evils which ranged from mah-jong and stag parties to taking second wives. True to its anarchist principles, there was no president or officers, no regulations or means to enforce them, and no dues or fines. Each level of membership, however, had increasingly rigorous requirements. "Supporting members," the lowest level, agreed not to visit prostitutes and not to gamble. "General members" agreed in addition not to take concubines. The next higher level further agreed not to become government officials — "Someone has to watch over officials" — not to become members of parliament, and not to smoke. Finally, the highest level also promised to abstain from alcohol and meat. While declining to hold office, Wu did accept Cai Yuanpei's offer join the commission on language reform, beginning work on a phonetic system for writing which would replace regional dialects. This work eventually resulted in the Guoyu Zhuyin fuhao system which is widely used today. In June 1913, Wu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journal Public Opinion () When in 1913 Sun Yat-sen's Second Revolution failed, Wu and Li Shizeng for safety returned to France. Li and Wu founded the University of Lyon-France and launched the Work-Study movement. In the 1920s, along with Li Shizeng, Zhan Renjie, and Cai Yuanpei, was one of the so-called "Four Elders" of the GMD and led the anti-communist campaign which drove leftists and communists from the party and supported Chiang Kai-shek. In accordance with his anarchist principles, Wu Zhihui declined any government office. In 1943, National Government Chairman Lin Sen died in provisional wartime capital of Chongqing, Chiang Kai-shek inviting Wu to be the new president, but Wu declined, citing "three no's": I usually wear very casual clothes, but the heads of state wear tuxedos. I would feel uncomfortable. My ugly face, like a big shock. My people love to laugh. To see something funny makes me laugh, When foreign diplomats deliver credentials, I could not help but laugh. This would not be decent. In 1946, Wu was elected to the National Assembly, which drew up a new constitution. He administered the oath of office to Chiang Kai-shek in May 1948, shortly before the government left the mainland for Taiwan. He moved to Taiwan and was the teacher of Chiang Kai-shek's son, Chiang Ching-kuo. He died in Taipei at the age of 88. Chiang Ching-kuo carried out Wu's directive that his ashes be lowered into the sea off the island of Quemoy. Works 吳稚暉先生集(Collected Works of Mr. Wu Chih-hui) Footnotes References and further reading , chapter 4: "Mockery". "Wu Chih-hui," in , pp. 416–419. Available at The Anarchist Library. . "Mr. Wu Chih-hui," in , pp. 185–186. 1865 births 1953 deaths Alumni of the University of Edinburgh Artists from Changzhou Chinese anarchists Chinese anti-communists Chinese expatriates in France Chinese Nationalists Linguists from China Members of Academia Sinica Members of the Kuomintang People of the 1911 Revolution Philosophers from Jiangsu Politicians from Changzhou Qing dynasty philosophers 20th-century Chinese calligraphers 20th-century Chinese philosophers Republic of China politicians from Jiangsu Scientists from Changzhou Taiwanese people from Jiangsu Tongmenghui members Writers from Changz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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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국가 지도자 목록
이 문서는 2019년 기준 국가 지도자 목록을 정리한 것이다. 아시아 대통령 – 비디아 데이 반다리 (2015 ~ ) 총리 – 푸슈파 카말 다할 (2016 ~ ) 대통령 – 문재인 (2017 ~ ) 국무총리 - 이낙연 (2017 ~ ) 대통령 – 프란시스쿠 구테흐스 (2017 ~ ) 총리 - 타우르 마탄 루악 (2018 ~ ) 대통령 - 분냥 보라치트 (2016 ~ ) 총리 - 통룬 시술릿 (2016 ~ ) 대통령 – 미셸 아운 (2016 ~ ) 총리 ― 사드 하리리 (2016 ~ ) 국왕 - 무하맛 5세 (2016 ~ ) 총리 - 마하티르 빈 모하맛 (2018 ~ ) 대통령 - 이브라힘 모하메드 솔리 (2018 ~ ) 부통령 - 파이살 나심 (2018 ~ ) 대통령 – 할트마긴 바트툴가 (2017 ~ ) 총리 - 오흐나긴 후렐수흐 (2017 ~ ) 대통령 ― 윈 민트 (2018 ~ ) 총리 - 아웅 산 수 찌 (2016 ~ ) 국왕 ― 하마든 이븐 이사 알할리파 (1999년 ~ ) 총리 ― 할리파 이븐 술만 알할리파 (1970년 ~ ) 대통령 ― 압둘 하미드 (2013 ~ ) 총리 ― 셰이크 하시나 (2009 ~ ) 당 서기장 ― 응우옌푸쫑 (2011 ~ ) 국가주석 ― 응우옌푸쫑 (2018 ~ ) 총리 ― 응우옌쑤언푹 (2016 ~ ) 국왕 ―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2006 ~ ) 총리 ― 로타이 체링 (2018 ~ ) 체링 톱게 (2013 ~ 2018) 술탄 ― 하사날 볼키아 (1967 ~ ) 총리 ― 하사날 볼키아 (1984 ~ ) 국왕 –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2015 ~ ) 총리 –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2015 ~ ) 대통령 ― 고타바야 라자팍사 (2019 ~ ) 총리 - 마힌다 라자팍사 (2019 ~ ) 대통령 ― 바샤르 알아사드 (2000 ~ ) 총리 ― 이마드 카미스 (2016 ~ ) 시리아 반군 대통령 - 리아드 세이프 (2017 ~ ) 총리 - 자와드 아부 하타브 (2016 ~ ) 대통령 – 할리마 야콥 (2017 ~ ) 총리 – 리셴룽 (2004 ~ ) 대통령 ―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하얀 (2004 ~ ) 총리 ―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 (2006 ~ ) 대통령 ― 아르멘 사르키샨 (2018 ~ ) 총리 ― 니콜 파시냔 (2018 ~ ) 대통령 ― 일함 알리예프 (2003 ~ ) 총리 ― 아르투르 라시자데 (2003 ~ 2018) 노브루즈 맘마도프 (2018 ~ ) 대통령 ― 아슈라프 가니 (2014 ~ ) 총리 ― 압둘라 압둘라 (2014 ~ ) 후티 지도자 - 압둘말리크 알후티 (2015 ~ ) 최고정치회의 의장 - 살레 알리 알사마드 (2016 ~ ) 술탄 ―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 (1970 ~ ) 국왕 ― 압둘라 2세 (1999 ~ ) 총리 ― 하니 알물키 (2016 ~ ) 대통령 ―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2016 ~ ) 총리 ― 압둘라 아리포프 (2016 ~ ) 대통령 ― 푸아드 마아숨 (2014 ~ ) 총리 ― 하이다르 압바디 (2014 ~ ) 이맘 ― 알리 하메네이 (1989 ~ ) 대통령 ― 하산 로하니 (2013 ~ ) 대통령 ― 레우벤 리블린 (2014 ~ ) 총리 ― 베냐민 네타냐후 (2009 ~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국가 수반 ― 마흐무드 압바스 (2005 ~ ) 총리 ― 라미 함달라 (2014 ~ ) 대통령 ― 람 나트 코빈드 (2017 ~ ) 총리 ― 나렌드라 모디 (2014 ~ ) 대통령 ― 조코 위도도 (2014 ~ ) 천황 ― 아키히토 (1989 ~ ) 내각총리대신 ― 아베 신조 (2012 ~ ) 국무위원회 위원장 ― 김정은 (2011 ~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김영남 (2011 ~ ) 내각총리 ― 박봉주 (2013 ~ ) 총통 ― 차이잉원 (2016 ~ ) 부총통 ― 천젠런 (2016 ~ ) 총서기 ― 시진핑 (2012 ~) 주석 ― 시진핑 (2013 ~) 국무원총리 ― 리커창 (2013 ~) 대통령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1990 ~) 총리 – 바키트잔 사긴타예프 (2016 ~ ) 에미르 ―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2013 ~ ) 총리 ― 압둘라 빈 나세르 빈 칼리파 알사니 (2013 ~ ) 국왕 ― 노로돔 시하모니 (2004 ~ ) 총리 ― 훈 센 (1985 ~ ) 에미르 ― 사바 알 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2006 ~ ) 총리 ― 자베르 알무바라크 알하마드 알사바 (2011 ~ ) 대통령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2011 ~ ) 총리 - 소론바이 젠베코프 (2016 ~ ) 대통령 ― 에모말리 라흐몬 (1992 ~ ) 총리 ― 코히르 라술조다 (2013 ~ ) 국왕 ― 라마 10세 (2016 ~ ) 총리 ― 쁘라윳 짠오차 (2014 ~ ) 대통령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2014 ~ ) 총리 ― 비날리 일디림 (2016 ~ ) 대통령 ―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 (2006 ~ ) 대통령 ― 맘눈 후세인 (2013 ~ ) 총리 ― 나와즈 샤리프 (2013 ~ ) 대통령 ― 로드리고 두테르테 (2016 ~ ) 오세아니아 대통령 ― 바론 와카 (2013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52 ~ ) 총독 ― 패치 레디 (2016 ~ ) 총리 ― 빌 잉글리시 (2016 ~ ) 대통령 ― 힐다 하이네 (2016 ~ ) 대통령 ― 피터 M. 크리스천 (2015 ~ ) 최고 지도자 ― 투푸가 에피 (2007 ~ ) 총리 ― 투일라에파 사일렐레 말리엘레가오이 (1998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78 ~ ) 총독 ― 프랭크 카부이 (2009 ~ ) 총리 ― 머내시 소가바레 (2014 ~ ) (호주)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52 ~ ) 총독 ― 피터 코스그로브 (2014 ~ ) 총리 ― 맬컴 턴불 (2015 ~ ) 대통령 ― 타네티 마마우 (2016 ~ ) 국왕 ― 투포우 6세 (2012 ~ ) 총리 ― 아킬리시 포히바 (2014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78 ~ ) 총독 ― 라코바 이탈레이 (2010 ~ ) 총리 ― 에넬레 소포아가 (2013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52 ~ ) 총독 ― 밥 다대 (2017 ~ ) 총리 ― 피터 오닐 (2011 ~ ) 대통령 ― 토마스 레멩게사우 주니어 (2013 ~ ) 대통령 ― 조지 콘로테 (2015 ~ ) 총리 ― 프랭크 베이니마라마 (2007 ~ ) 북아메리카 대통령 - 지미 모랄레스 (2016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74 ~ ) 총독 - 세실 라 그레나다 (2013 ~ ) 총리 - 키스 미첼 (2013 ~ ) 대통령 - 다니엘 오테가 (2007 ~ ) 대통령 - 다닐로 메디나 (2012 ~ ) 대통령 - 찰스 사바린 (2013 ~ ) 총리 - 루스벨트 스케릿 (2004 ~ ) 대통령 ― 엔리케 페냐 니에토 (2012 ~ ) 대통령 ― 도널드 트럼프 (2017 ~ ) 부통령 ― 마이크 펜스 (2017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52 ~ ) 총독 ― 데이비드 로이드 존스턴 (2010 ~ ) 총리 ― 쥐스탱 트뤼도 (2015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66 ~ ) 총독 ― 엘리엇 벨그레이브 (2012 ~ ) 총리 ― 프룬델 스튜어트 (2010 ~ ) 쿠바 공산당 제1비서 ―라울 카스트로 (2011 ~ ) 국가평의회 의장 ― 라울 카스트로 (2008 ~ ) 남아메리카 대통령 ― 데이비드 그랜저 (2015 ~ ) 총리 ― 모세스 나가무투 (2015 ~ ) 대통령 – 다니엘 오르테가 (2007 ~ ) 대통령 – 니콜라스 마두로 (2013 ~) 대통령 – 니콜라스 마두로 (2013 ~) 대통령 - 자이르 보우소나루 (2019 ~ ) 대통령 ― 데시 보우테르세 (2010 ~ ) 대통령 – 마우리시오 마크리 (2015 ~ ) 대통령 ― 라파엘 코레아 (2007 ~ ) 대통령 ― 마우리시오 마크리 (2015 ~ ) 대통령 ― 미첼 바첼레트 (2014 ~ ) 대통령 ― 오라시오 카르테스 (2013 ~ ) 대통령 ―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2016 ~ ) 총리 ― 페르난도 사발라 (2016 ~ ) 유럽 대통령 – 프로코피스 파블로풀로스 (2015 ~ ) 총리 - 알렉시스 치프라스 (2015 ~ ) 여왕 - 빌럼알렉산더르 데르 네덜란덴 (2013 ~ ) 총리 - 마르크 뤼터 (2010 ~ ) 국왕 - 하랄 5세 (1991 ~ ) 총리 - 옌스 스톨텐베르그 (2005 ~ ) 국왕 ― 마르그레테 2세 (1972 ~ ) 총리 ―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2009 ~ ) 대통령 ―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2017 ~ ) 총리 ― 앙겔라 메르켈 (2005 ~ ) 대통령 ― 안드리스 베르진슈 (2012 ~ ) 총리 ― 발디스 돔브롭스키스 (2009 ~ ) 대통령 ― 블라디미르 푸틴 (2012 ~ ) 총리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2012 ~ ) 대통령 ― 트라이안 버세스쿠 (2004 ~ ) 총리 ― 에밀 보크 (2008 ~ ) 대공 ― 앙리 (2000 ~ ) 총리 ― 장클로드 융커 (1995 ~ ) 대통령 ―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2009 ~ ) 총리 ― 안드류스 쿠빌류스 (2008 ~ ) 공 ― 한스아담 2세 (1989 ~ ) 총리 ― 클라우스 취처 (2009 ~ ) 대통령 ― 기오르게 이바노프 (2009 ~ ) 총리 ― 니콜라 그루에프스키 (2006 ~ ) 공 ― 알베르 2세 (2005 ~ ) 총리 ― 미셸 로제 (2010 ~ ) 대통령 ― 조지 아벨라 (2009 ~ ) 총리 ― 조지프 무스카트 (2013 ~ ) 교황 ― 프란치스코 (2013 ~ ) 국왕 ― 알베르 2세 (1993 ~ ) 총리 ― 이브 르테름 (2009 ~ ) 대통령 ― 게오르기 퍼르바노프 (2002 ~ ) 총리 ― 보이코 보리소프 (2009 ~ ) 대통령 ― 보리스 타디치 (2004 ~ ) 총리 ― 미르코 츠벳코비치 (2008 ~ ) 국왕 ― 칼 16세 구스타프 (1973 ~ ) 총리 ―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2006 ~ ) 연방회의 ― 도리스 로이타르트 (2006 ~ ), 모리츠 로이엔베르거 (1995 ~ 2010), 미슐린 칼미 레이 (2002 ~ ), 한스 루돌프 메르츠 (2003 ~ 2010), 에블린 비트머 슐룸프 (2008 ~ ), 우엘리 마우러 (2009 ~ ), 디디에 부르칼터 (2009 ~ ), 요한 슈나이더 암만 (2010 ~ ), 시모네타 솜마루가 (2010 ~ ) 국왕 ― 후안 카를로스 1세 (1975 ~ ) 총리 ―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2004 ~ ) 대통령 ― 이반 가슈파로비치 (2004 ~ ) 총리 ― 이베타 라디초바 (2010 ~ ) 대통령 ― 다닐로 튀르크 (2007 ~ ) 총리 ― 보루트 파호르 (2008 ~ ) 대통령 ― 올라퓌르 라그나르 그림손 (1996 ~ ) 총리 ―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2009 ~ ) 대통령 ― 메리 매컬리스 (1997 ~ ) 총리 ― 엔다 케니 (2011 ~ ) 대통령 ― 토마스 헨드리크 일베스 (2006 ~ ) 총리 ― 안드루스 안시프 (2005 ~ ) 여왕 - 엘리자베스 2세 (1952 ~ ) 총리 - 테리사 메이 (2016 ~ ) 총리 - 피터 로빈슨 (2008 ~ ) 대통령 ― 하인츠 피셔 (2004 ~ ) 총리 ― 베르너 파이만 (2008 ~ ) 대통령 ― 빅토르 야누코비치 (2010 ~ ) 총리 ― 빅토르 야누코비치 (2010 ~ ) 대통령 ― 조르조 나폴리타노 (2006 ~ ) 총리 ― 마리오 몬티 (2011 ~ ) 대통령 ― 기오르기 마르그벨라슈빌리 (2013 ~ ) 총리 ―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 (2013 ~ ) 대통령 ― 세르게이 바갑시 (2005 ~ 2011) 대통령 ― 에두아르드 코코이티 (2001 ~ ) 대통령 ― 바츨라프 클라우스 (2003 ~ ) 총리 ― 페트르 네차스 (2010 ~ ) 대통령 ― 이보 요시포비치 (2010 ~ ) 총리 ― 야드란카 코소르 (2009 ~ ) 대통령 ― 디미트리스 흐리스토피아스 (2008 ~ ) 대통령 ― 아니발 카바쿠 실바 (2006 ~ ) 총리 ― 조제 소크라트스 (2006 ~ 2011) 총리 - 페드루 파수스 코엘류 (2011 ~ ) 대통령 ― 안제이 두다 (2015 ~ ) 총리 ― 베아타 시드워 (2015 ~ ) 대통령 - 에마뉘엘 마크롱 (2017 ~ ) 총리 - 베르나르 카즈뇌브 (2017 ~ ) 대통령 ― 타르야 할로넨 (2000 ~ ) 총리 ― 마리 키비니에미 (2010 ~ ) 대통령 ― 슈미트 팔 (2010 ~ ) 총리 ― 오르반 빅토르 (2010 ~ ) 아프리카 대통령 ― 존 드라마니 마하마 (2012 ~ ) 대통령 ― 알리 봉고 온딤바 (2009 ~ ) 총리 ― 레몽 인동 시마 (2009 ~ ) 대통령 ― 야히아 자메 (1994 ~ ) 대통령 ― 알파 콩데 (2011 ~ ) 총리 ― 모하메드 사이드 포파나 (2011 ~ ) 대통령 ― 마누엘 세리푸 나마주 총리 ― 후이 두아르테 드 바호스 대통령 ― 히피케푸니에 포함바 (2005 ~ ) 총리 ― 나하스 앵굴라 (2005 ~ ) 대통령 ― 굿럭 조너선 (2010 ~ ) 대통령 –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2005 ~ ) 대통령 – 제이콥 주마 (2009 ~ ) 대통령 ― 마하마두 이수푸 (2011 ~ ) 총리 ― 브리지 라피니 (2011 ~ ) 대통령 ― 엘런 존슨설리프 (2006 ~ ) 국왕 ― 레트시에 3세 (1996 ~ ) 총리 ― 톰 타바네 (2012 ~ ) 대통령 ― 폴 카가메 (2000 ~ ) 총리 ― 피에르 하부무레미 (2012 ~ ) 국가원수 – 모함메드 알 메가리프 (2012 ~ ) 대통령 ― 조이스 반다 (2004 ~ ) 대통령 ― 디온쿤다 트라오레 (2012 ~ ) 총리 ― 장고 시소코 (2012 ~ ) 국왕 ― 무함마드 6세 (1999 ~ ) 총리 ― 압델릴라 벤키란 (2012 ~ ) 대통령 ― 카일라시 푸리약 총리 ― 나빈 람굴람 대통령 ― 무함마드 울드 압델 아지즈 (2008 ~ ) 총리 ― 물라이 울드 모하메드 라그다프 (2008 ~ ) 대통령 ― 아르만두 게부자 (2005 ~ ) 총리 ― 아이레스 알리 (2010 ~ ) 대통령 ― 야이 보니 총리 ― 카스팔 쿠파키 대통령 ― 이언 카마 (2008 ~ ) 대통령 - 피에르 은쿠룬지자 (2005 ~ ) 대통령 ― 마키 살 (2012 ~ ) 총리 ― 압둘 음바예 (2012 ~ ) 대통령 ― 제임스 미셸 (2004 ~ ) 대통령 ― 압디웰리 모하메드 알리 (2012 ~) 대통령 ― 오마르 알바시르 (1989 ~ ) 국왕 ― 음스와티 3세 (1986 ~ ) 총리 ― 바르나바스 시부시소 들라미니 (2008 ~ ) 대통령 ― 어니스트 바이 코로마 (2007 ~ ) 대통령 ―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1999 ~ ) 총리 ― 압둘말리크 살랄 (2012 ~ ) 대통령 ―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1979 ~ ) 대통령 ― 기르마 월데기오르기스 (2001 ~ ) 총리 ― 하일레 마리암 데살레 (2012 ~ ) 대통령 ― 요웨리 무세베니 (1986 ~ ) 총리 ― 아마마 음바바지 (2012 ~ ) 대통령 – 무함마드 모르시 - (2012 ~ ) 총리 ― 히샴 칸딜 (2012 ~ ) 대통령 ― 마이클 사타 (2012 ~ ) 대통령 ― 프랑수아 보지제 (2003 ~ ) 총리 ― 포스탱아르샹주 투아데라 (2008 ~ ) 대통령 ― 에머슨 음낭가과 (2017 ~ ) 대통령 ― 폴 비야 (1982 ~ ) 총리 ― 필레몬 양 (2009 ~ ) 대통령 – 음와이 키바키 (2002 ~ ) 총리 ― 라일라 오딩가 (2008 ~ ) 대통령 ― 드니 사수 응게소 (1997 ~ ) 대통령 조제프 카빌라 (2001 ~ ) 총리 오귀스탱 마타타 포뇨 (2012 ~ ) 대통령 ― 자카야 키크웨테 (2005 ~ ) 총리 ― 미젠고 핀다 (2008 ~ ) 대통령 ― 포르 냐싱베 (2005 ~ ) 총리 ― 퀘시 아후메이주누 (2012 ~ ) 대통령 ― 베지 카이드 에셉시 (2014 ~ ) 총리 ― 하마디 제발리 (2012 ~ ) 2019년 국제 관계 연도별 국가 지도자 목록
https://en.wikipedia.org/wiki/List%20of%20state%20leaders%20in%202019
List of state leaders in 2019
Africa President – Abdelaziz Bouteflika, President of Algeria (1999–2019) Abdelkader Bensalah, Acting President of Algeria (2019) Abdelmadjid Tebboune, President of Alger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Ahmed Ouyahia, Prime Minister of Algeria (2017–2019) Noureddine Bedoum, Prime Minister of Algeria (2019) Sabri Boukadoumi, Acting Prime Minister of Algeria (2019) Abdelaziz Djerrad, Prime Minister of Algeria (2019–2021) President – João Lourenço, President of Angola (2017–present) President – Patrice Talon, President of Benin (2016–present) President – Mokgweetsi Masisi, President of Botswana (2018–present) President – Roch Marc Christian Kaboré, President of Burkina Faso (2015–2022) Prime Minister – Paul Kaba Thieba, Prime Minister of Burkina Faso (2016–2019) Christophe Joseph Marie Dabiré, Prime Minister of Burkina Faso (2019–2021) President – Pierre Nkurunziza, President of Burundi (2005–2020) Evariste Ndayishimiye, President of Burundi (2020–present) President – Paul Biya, President of Cameroon (1982–present) Prime Minister – Philémon Yang, Prime Minister of Cameroon (2009–2019) Joseph Ngute, Prime Minister of Cameroon (2019–present) President – Jorge Carlos Fonseca, President of Cape Verde (2011–2021) Prime Minister – Ulisses Correia e Silva, Prime Minister of Cape Verde (2016–present) President  – Faustin-Archange Touadéra, President of the Central African Republic (2016–present) Prime Minister – Simplice Sarandji, Prime Minister of the Central African Republic (2016–2019) Firmin Ngrébada, Prime Minister of the Central African Republic (2019–2021) President – Idriss Déby, President of Chad (1990–2021) President – Azali Assoumani, President of the Comoros (2016–present) Moustadroine Abdou, Acting President of the Comoros (2019) President – Denis Sassou Nguesso,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the Congo (1997–present) Prime Minister – Clément Mouamba, Prime Minister of the Republic of the Congo (2016–2021) President – Joseph Kabila, President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2001–2019) Félix Tshisekedi, President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2019–present) Prime Minister – Bruno Tshibala, Prime Minister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2017–2019) Sylvestre Ilunga, Prime Minister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2019–2021) President – Ismaïl Omar Guelleh, President of Djibouti (1999–present) Prime Minister – Abdoulkader Kamil Mohamed, Prime Minister of Djibouti (2013–present) President – Abdel Fattah el-Sisi, President of Egypt (2014–present) Prime Minister – Moustafa Madbouly, Prime Minister of Egypt (2018–present) President – 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President of Equatorial Guinea (1979–present) Prime Minister – Francisco Pascual Obama Asue, Prime Minister of Equatorial Guinea (2016–2023) President – Isaias Afwerki, President of Eritrea (1991–present) Monarch – Mswati III, King of Eswatini (1986–present) Prime Minister – Mandvulo Ambrose Dlamini, Prime Minister of Eswatini (2018–2020) President – Sahle-Work Zewde, President of Ethiopia (2018–present) Prime Minister – Abiy Ahmed, Prime Minister of Ethiopia (2018–present) President – Ali Bongo Ondimba, President of Gabon (2009–present) Prime Minister – Emmanuel Issoze-Ngondet, Prime Minister of Gabon (2016–2019) Julien Nkoghe Bekale, Prime Minister of Gabon (2019–2020) President – Adama Barrow, President of the Gambia (2017–present) President – Nana Akufo-Addo, President of Ghana (2017–present) President – Alpha Condé, President of Guinea (2010–2021) Prime Minister – Ibrahima Kassory Fofana, Prime Minister of Guinea (2018–2021) President – José Mário Vaz, President of Guinea-Bissau (2014–2019) José Mário Vaz, Acting President of Guinea-Bissau (2019–2020) Cipriano Cassamá, Acting President of Guinea-Bissau (2019) Prime Minister – Aristides Gomes, Prime Minister of Guinea-Bissau (2018–2020) Faustino Imbali, Prime Minister of Guinea-Bissau (2019) President – Alassane Ouattara, President of the Ivory Coast (2010–present) Prime Minister – Amadou Gon Coulibaly, Prime Minister of the Ivory Coast (2017–2020) President – Uhuru Kenyatta, President of Kenya (2013–2022) Monarch – Letsie III, King of Lesotho (1996–present) Prime Minister – Tom Thabane, Prime Minister of Lesotho (2017–2020) President – George Weah, President of Liberia (2018–present) Libya Government of House of Representatives of Libya (Government of Libya internationally recognised to 12 March 2016) Head of State – Aguila Saleh Issa, Chairman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of Libya (co-claimant, 2014–2021) Prime Minister – Abdullah al-Thani, Prime Minister of Libya (co-claimant, 2014–2021) Government of National Accord of Libya (Interim government internationally recognised as the sole legitimate government of Libya from 12 March 2016) Head of State – Fayez al-Sarraj, Chairman of the Presidential Council of Libya (co-claimant, 2016–2021) Prime Minister – Fayez al-Sarraj, Prime Minister of Libya (co-claimant, 2016–2021) President – Rivo Rakotovao, Acting President of Madagascar (2018–2019) Andry Rajoelina, President of Madagascar (2019–present) Prime Minister – Christian Ntsay, Prime Minister of Madagascar (2018–present) President – Peter Mutharika, President of Malawi (2014–2020) President – Ibrahim Boubacar Keïta, President of Mali (2013-2020) Prime Minister – Soumeylou Boubèye Maïga, Prime Minister of Mali (2017–2019) Boubou Cisse, Prime Minister of Mali (2019–2020) President – Mohamed Ould Abdel Aziz, President of Mauritania (2009–2019) Mohamed Ould Ghazouani, President of Mauritan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Mohamed Salem Ould Béchir, Prime Minister of Mauritania (2018–2019) Ismail Ould Bedde Ould Cheikh Sidiya, Prime Minister of Mauritania (2019–2020) President – Barlen Vyapoory, Acting President of Mauritius (2018–2019) Eddy Balancy, Acting President of Mauritius (2019) Pritvirajsing Roopun, President of Mauritius (2019–present) Prime Minister – Pravind Jugnauth, Prime Minister of Mauritius (2017–present) Monarch – Mohammed VI, King of Morocco (1999–present) Prime Minister – Saadeddine Othmani, Head of Government of Morocco (2017–2021) President – Filipe Nyusi, President of Mozambique (2015–present) Prime Minister – Carlos Agostinho do Rosário, Prime Minister of Mozambique (2015–2022) President – Hage Geingob, President of Namibia (2015–present) Prime Minister – Saara Kuugongelwa, Prime Minister of Namibia (2015–present) President – Mahamadou Issoufou, President of Niger (2011–2021) Prime Minister – Brigi Rafini, Prime Minister of Niger (2011–2021) President – Muhammadu Buhari, President of Nigeria (2015–present) (self-declared autonomous state) President – Abdiweli Mohamed Ali, President of Puntland (2014–2019) Said Abdullahi Deni, President of Puntland (2019–present) President – Paul Kagame, President of Rwanda (2000–present) Prime Minister – Édouard Ngirente, Prime Minister of Rwanda (2017–present)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Lisa Honan, Governor of Saint Helena (2016–2019) Louise MacMorran, Acting Governor of Saint Helena (2019) Philip Rushbrook, Governor of Saint Helena (2019–present) President – Evaristo Carvalho, President of São Tomé and Príncipe (2016–2021) Prime Minister – Jorge Bom Jesus, Prime Minister of São Tomé and Príncipe (2018–present) President – Macky Sall, President of Senegal (2012–present) Prime Minister – Mohammed Dionne, Prime Minister of Senegal (2014–2019) President – Danny Faure, President of Seychelles (2016–2020) President – Julius Maada Bio, President of Sierra Leone (2018–present) Chief Minister – David J. Francis, Chief Minister of Sierra Leone (2018–2021) President – Mohamed Abdullahi Mohamed, President of Somali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Hassan Ali Khaire, Prime Minister of Somalia (2017–2020) (un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Muse Bihi Abdi, President of Somaliland (2017–present) President – Cyril Ramaphosa, President of South Africa (2018–present) President – Salva Kiir Mayardit, President of South Sudan (2011–present) President – Omar al-Bashir, President of Sudan (1989–2019) Ahmed Awad Ibn Auf, Chairman of the Transitional Military Council (2019) Abdel Fattah al-Burhan, Leader of the Sovereignty Council (2019–present) Prime Minister – Motazz Moussa, Prime Minister of Sudan (2018–2019) Mohamed Tahir Ayala, Prime Minister of Sudan (2019) Abdalla Hamdok, Prime Minister of Sudan (2019–2021) President – John Magufuli, President of Tanzania (2015–2021) Prime Minister – Kassim Majaliwa, Prime Minister of Tanzania (2015–present) President – Faure Gnassingbé, President of Togo (2005–present) Prime Minister – Komi Sélom Klassou, Prime Minister of Togo (2015–2020) President – Beji Caid Essebsi, President of Tunisia (2014–2019) Mohamed Ennaceur, Acting President of Tunisia (2019) Kais Saied, President of Tunis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Youssef Chahed, Head of Government of Tunisia (2016–2020) Kamel Morjane, Acting Head of Government of Tunisia (2019) President – Yoweri Museveni, President of Uganda (1986–present) Prime Minister – Ruhakana Rugunda, Prime Minister of Uganda (2014–2021) (self-declared, partially recognised state) President – Brahim Ghali, President of Western Sahara (2016–present) Prime Minister – Mohamed Wali Akeik, Prime Minister of Western Sahara (2018–2020) President – Edgar Lungu, President of Zambia (2015–2021) President – Emmerson Mnangagwa, President of Zimbabwe (2017–present) Asia President – Ashraf Ghani, President of Afghanistan (2014–2021) Prime Minister – Abdullah Abdullah, Chief Executive Officer of Afghanistan (2014–2020) Monarch – Sheikh Hamad bin Isa Al Khalifa, King of Bahrain (1999–present) Prime Minister – Prince Khalifa bin Salman Al Khalifa, Prime Minister of Bahrain (1970–2020) President –Abdul Hamid, President of Bangladesh (2013–present) Prime Minister – Sheikh Hasina, Prime Minister of Bangladesh (2009–present) Monarch – Jigme Khesar Namgyel Wangchuck, King of Bhutan (2006–present) Prime Minister – Lotay Tshering, Prime Minister of Bhutan (2018–present) Monarch – Hassanal Bolkiah, Sultan of Brunei (1967–present) Prime Minister – Hassanal Bolkiah, Prime Minister of Brunei (1984–present) Monarch – Norodom Sihamoni, King of Cambodia (2004–present) Prime Minister – Hun Sen, Prime Minister of Cambodia (1985–present) Communist Party Leader – Xi Jinping, General Secretary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2012–present) President – Xi Jinping, President of China (2013–present) Premier – Li Keqiang, Premier of the State Council of China (2013–present) President – Francisco Guterres, President of East Timor (2017–present) Prime Minister – Taur Matan Ruak, Prime Minister of East Timor (2018–present) President – Ram Nath Kovind, President of Indi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Narendra Modi, Prime Minister of India (2014–present) President – Joko Widodo, President of Indonesia (2014–present) Supreme Leader – Ayatollah Ali Khamenei, Supreme Leader of Iran (1989–present) President – Hassan Rouhani, President of Iran (2013–2021) President – Barham Salih, President of Iraq (2018–present) Prime Minister – Adil Abdul-Mahdi, Prime Minister of Iraq (2018–2020) President – Reuven Rivlin, President of Israel (2014–2021) Prime Minister – Benjamin Netanyahu, Prime Minister of Israel (2009–2021) Monarch – Akihito, Emperor of Japan (1989–2019) Naruhito, Emperor of Japan (2019–present) Prime Minister – Shinzō Abe, Prime Minister of Japan (2012–2020) Monarch – Abdullah II, King of Jordan (1999–present) Prime Minister – Omar Razzaz, Prime Minister of Jordan (2018–2020) President – Nursultan Nazarbayev, President of Kazakhstan (1990–2019) Kassym-Jomart Tokayev, President of Kazakhstan (2019–present) Prime Minister – Bakhytzhan Sagintayev, Prime Minister of Kazakhstan (2016–2019) Askar Mamin, Prime Minister of Kazakhstan (2019–2021) Communist Party Leader – Kim Jong-un, Chairman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2012–present) De facto Head of State – Kim Jong-un, Chairman of the State Affairs Commission of North Korea (2011–present) De jure Head of State – Kim Yong-nam, Chairman of the Presidium of the Supreme People's Assembly of North Korea (1998–2019) Choe Ryong-hae, Chairman of the Presidium of the Supreme People's Assembly of North Korea (2019–present) Premier – Pak Pong-ju, Premier of the Cabinet of North Korea (2013–2019) Kim Jae-ryong, Premier of the Cabinet of North Korea (2019–2020) President – Moon Jae-in, President of South Kore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Lee Nak-yeon, Prime Minister of South Korea (2017–2020) Monarch – Sheikh Sabah Al-Ahmad Al-Jaber Al-Sabah, Emir of Kuwait (2006–2020) Prime Minister – Sheikh Jaber Al-Mubarak Al-Hamad Al-Sabah, Prime Minister of Kuwait (2011–2019) Sheikh Sabah Al-Khalid Al-Sabah, Prime Minister of Kuwait (2019–present) President – Sooronbay Jeenbekov, President of Kyrgyzstan (2017–2020) Prime Minister – Muhammetkaliy Abulgaziyev, Prime Minister of Kyrgyzstan (2018–2020) Communist Party Leader – Bounnhang Vorachith, General Secretary of the 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2016–2021) President – Bounnhang Vorachith, President of Laos (2016–2021) Prime Minister – Thongloun Sisoulith, Prime Minister of Laos (2016–2021) President – Michel Aoun, President of Lebanon (2016–2022) Prime Minister – Saad Hariri, 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2016–2020) Monarch – Muhammad V, Yang di-Pertuan Agong of Malaysia (2016–2019) Nazrin Shah, Acting Yang di-Pertuan Agong of Malaysia (2019) Abdullah, Yang di-Pertuan Agong of Malays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Mahathir Mohamad, Prime Minister of Malaysia (2018–2020) President – Ibrahim Mohamed Solih, Aalap Raju, President of the Maldives (2018–present) President – Khaltmaagiin Battulga, President of Mongolia (2017–2021) Prime Minister – Ukhnaagiin Khürelsükh, Prime Minister of Mongolia (2017–2021) President – Win Myint, President of Myanmar (2018–2021) Prime Minister – Aung San Suu Kyi, State Counsellor of Myanmar (2016–2021) President – Bidhya Devi Bhandari, President of Nepal (2015–2023) Prime Minister – KP Sharma Oli, Prime Minister of Nepal (2018–2021) Monarch – Qaboos bin Said al Said, Sultan of Oman (1970–2020) Prime Minister – Qaboos bin Said al Said, Prime Minister of Oman (1972–2020) President – Arif Alvi, President of Pakistan (2018–present) Prime Minister – Imran Khan, Prime Minister of Pakistan (2018–present) President – Mahmoud Abbas, President of Palestine (2005–present) Prime Minister – Rami Hamdallah, Prime Minister of Palestine (2013–2019) Mohammad Shtayyeh, Prime Minister of Palestine (2019–present) President – Rodrigo Dutert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2016–present) Monarch – Sheikh Tamim bin Hamad Al Thani, Emir of Qatar (2013–present) Prime Minister – Sheikh Abdullah bin Nasser bin Khalifa Al Thani, Prime Minister of Qatar (2013–2020) Monarch – Salman, King of Saudi Arabia (2015–present) Prime Minister – Salman, Prime Minister of Saudi Arabia (2015–present) President – Halimah Yacob, President of Singapore (2017–present) Prime Minister – Lee Hsien Loong, Prime Minister of Singapore (2004–present) President – Maithripala Sirisena, President of Sri Lanka (2015–2019) Gotabaya Rajapaksa, President of Sri Lanka (2019–2022) Prime Minister – Ranil Wickremesinghe, Prime Minister of Sri Lanka (2018–2019) Mahinda Rajapaksa, Prime Minister of Sri Lanka (2019–2022) Syria President – Bashar al-Assad, President of Syria (2000–present) Prime Minister – Imad Khamis, Prime Minister of Syria (2016–2020) (partially recognised, rival government) President – Abdurrahman Mustafa, President of the Syrian National Coalition (2018–2019) Anas al-Abdah, President of the Syrian National Coalition (2019–2020) Prime Minister – Jawad Abu Hatab, Prime Minister of the Syrian National Coalition (2016–2019) Abdurrahman Mustafa, Prime Minister of the Syrian National Coalition (2019–present) President – Tsai Ing-wen, President of Taiwan (2016–present) Premier – William Lai, President of the Executive Yuan of Taiwan (2017–2019) Su Tseng-chang, President of the Executive Yuan of Taiwan (2019–2023) President – Emomali Rahmon, President of Tajikistan (1992–present) Prime Minister – Kokhir Rasulzoda, Prime Minister of Tajikistan (2013–present) Monarch – Vajiralongkorn, King of Thailand (2016–present) Prime Minister – Prayut Chan-o-cha, Prime Minister of Thailand (2014–present) President – Recep Tayyip Erdoğan, President of Turkey (2014–present) President – Gurbanguly Berdimuhamedow, President of Turkmenistan (2006–2022) President – Sheikh Khalifa bin Zayed Al Nahyan, President of the United Arab Emirates (2004–present) Prime Minister – Sheikh 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Arab Emirates (2006–present) President – Shavkat Mirziyoyev, President of Uzbekistan (2016–present) Prime Minister – Abdulla Aripov, Prime Minister of Uzbekistan (2016–present) Communist Party Leader – Nguyễn Phú Trọng,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Vietnam (2011–present) President – Nguyễn Phú Trọng, President of Vietnam (2018–2021) Prime Minister – Nguyễn Xuân Phúc, Prime Minister of Vietnam (2016–2021) Yemen President – Abdrabbuh Mansur Hadi, President of Yemen (2012–2022) Prime Minister – Maeen Abdulmalik Saeed, Prime Minister of Yemen (2018–present)   Supreme Political Council (unrecognised, rival government) Head of State – Mahdi al-Mashat, Head of the Supreme Political Council of Yemen (2018–present) Prime Minister – Abdel-Aziz bin Habtour, Prime Minister of Yemen (2016–present) Europe President – Ilir Meta, President of Albania (2017–2022) Prime Minister – Edi Rama, Prime Minister of Albania (2013–present) Monarchs – French Co-Prince – Emmanuel Macron, French Co-prince of Andorra (2017–present) Co-Prince's Representative – Patrick Strzoda (2017–present) Episcopal Co-Prince – Archbishop Joan Enric Vives Sicília, Episcopal Co-prince of Andorra (2003–present) Co-Prince's Representative – Josep Maria Mauri (2012–present) Prime Minister – Antoni Martí, Head of Government of Andorra (2015–2019) Xavier Espot Zamora, Head of Government of Andorra (2019–present) President – Armen Sarkissian, President of Armenia (2018–2022) Prime Minister – Nikol Pashinyan, Prime Minister of Armenia (2018–present) President – Alexander Van der Bellen, Federal President of Austria (2017–present) Chancellor – Sebastian Kurz, Federal Chancellor of Austria (2017–2019) Hartwig Löger, Acting Federal Chancellor of Austria (2019) Brigitte Bierlein, Federal Chancellor of Austria (2019–2020) President – Ilham Aliyev, President of Azerbaijan (2003–present) Prime Minister – Novruz Mammadov, Prime Minister of Azerbaijan (2018–2019) Ali Asadov, Prime Minister of Azerbaijan (2019–present) (un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Bako Sahakyan, President of Artsakh (2007–2020) President – Alexander Lukashenko, President of Belarus (1994–present) Prime Minister – Syarhey Rumas, Prime Minister of Belarus (2018–2020) Monarch – Philippe, King of the Belgians (2013–present) Prime Minister – Charles Michel, Prime Minister of Belgium (2014–2019) Sophie Wilmès, Prime Minister of Belgium (2019–2020) Head of State – Presidency of Bosnia and Herzegovina Bosniak Member – Šefik Džaferović (2018–2022) Croat Member – Željko Komšić (2018–present; Chairman of the Presidency of Bosnia and Herzegovina, 2019–2020) Serb Member – Milorad Dodik (2018–2022; Chairman of the Presidency of Bosnia and Herzegovina, 2018–2019) Prime Minister – Denis Zvizdić, Chairman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Bosnia and Herzegovina (2015–2019) Zoran Tegeltija, Chairman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Bosnia and Herzegovina (2019–2023) High Representative – Valentin Inzko, High Representative for Bosnia and Herzegovina (2009–2021) President – Rumen Radev, President of Bulgari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Boyko Borisov, Prime Minister of Bulgaria (2017–2021) President – Kolinda Grabar-Kitarović, President of Croatia (2015–2020) Prime Minister – Andrej Plenković, Prime Minister of Croatia (2016–present) President – Nicos Anastasiades, President of Cyprus (2013–present) (un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Mustafa Akıncı, President of Northern Cyprus (2015–2020) Prime Minister – Tufan Erhürman, Prime Minister of Northern Cyprus (2018–2019) Ersin Tatar, Prime Minister of Northern Cyprus (2019–2020) President – Miloš Zeman, President of the Czech Republic (2013–present) Prime Minister – Andrej Babiš, Prime Minister of the Czech Republic (2017–2021) Monarch – Margrethe II, Queen of Denmark (1972–present) Prime Minister – Lars Løkke Rasmussen, Prime Minister of Denmark (2015–2019) Mette Frederiksen, Prime Minister of Denmark (2019–present) President – Kersti Kaljulaid, President of Estonia (2016–2021) Prime Minister – Jüri Ratas, Prime Minister of Estonia (2016–2021) President – Sauli Niinistö, President of Finland (2012–present) Prime Minister – Juha Sipilä, Prime Minister of Finland (2015–2019) Antti Rinne, Prime Minister of Finland (2019) Sanna Marin, Prime Minister of Finland (2019–present) President – Emmanuel Macron, President of France (2017–present) Prime Minister – Édouard Philippe, Prime Minister of France (2017–2020) President – Salome Zurabishvili, President of Georgia (2018–present) Prime Minister – Mamuka Bakhtadze, Prime Minister of Georgia (2018–2019) Giorgi Gakharia, Prime Minister of Georgia (2019–2021) (partially 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Raul Khajimba, President of Abkhazia (2014–2020) Prime Minister – Valeri Bganba, Prime Minister of Abkhazia (2018–2020) (partially 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Anatoliy Bibilov, President of South Osseti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Erik Pukhayev, Prime Minister of South Ossetia (2017–2020) President – Frank-Walter Steinmeier, Federal President of Germany (2017–present) Chancellor – Angela Merkel, Federal Chancellor of Germany (2005–2021)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Ed Davis, Governor of Gibraltar (2016–2020) Chief Minister – Fabian Picardo, Chief Minister of Gibraltar (2011–present) President – Prokopis Pavlopoulos, President of Greece (2015–2020) Prime Minister – Alexis Tsipras, Prime Minister of Greece (2015–2019) Kyriakos Mitsotakis, Prime Minister of Greece (2019–present) (Crown dependency) Lieutenant-Governor – Sir Ian Corder, Lieutenant Governor of Guernsey (2016–present) President of the Policy and Resources Committee – Gavin St Pier, President of the Policy and Resources Committee (2016–2020) President – János Áder, President of Hungary (2012–present) Prime Minister – Viktor Orbán, Prime Minister of Hungary (2010–present) President – Guðni Th. Jóhannesson, President of Iceland (2016–present) Prime Minister – Katrín Jakobsdóttir, Prime Minister of Iceland (2017–present) President – Michael D. Higgins, President of Ireland (2011–present) Prime Minister – Leo Varadkar, Taoiseach of Ireland (2017–2020) (Crown dependency) Lieutenant-Governor – Sir Richard Gozney, Lieutenant Governor of the Isle of Man (2016–present) Chief Minister – Howard Quayle, Chief Minister of the Isle of Man (2016–present) President – Sergio Mattarella, President of Italy (2015–present) Prime Minister – Giuseppe Conte, 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Italy (2018–2021) (Crown dependency) Lieutenant-Governor – Sir Stephen Dalton, Lieutenant Governor of Jersey (2017–present) Chief Minister – John Le Fondré, Chief Minister of Jersey (2018–present) (partially 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under nominal international administration) President – Hashim Thaçi, President of Kosovo (2016–2020) Prime Minister – Ramush Haradinaj, Prime Minister of Kosovo (2017–2020) UN Special Representative – Zahir Tanin, Special Representative of the UN Secretary-General for Kosovo (2015–present) President – Raimonds Vējonis, President of Latvia (2015–2019) Egils Levits, President of Latv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Māris Kučinskis, Prime Minister of Latvia (2016–2019) Krišjānis Kariņš, Prime Minister of Latvia (2019–present) Monarch – Hans-Adam II, Prince Regnant of Liechtenstein (1989–present) Regent – Hereditary Prince Alois, Regent of Liechtenstein (2004–present) Prime Minister – Adrian Hasler, Head of Government of Liechtenstein (2013–2021) President – Dalia Grybauskaitė, President of Lithuania (2009–2019) Gitanas Nausėda, President of Lithuan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Saulius Skvernelis, Prime Minister of Lithuania (2016–2020) Monarch – Henri, Grand Duke of Luxembourg (2000–present) Prime Minister – Xavier Bettel, Prime Minister of Luxembourg (2013–present) see under North Macedonia President – Marie Louise Coleiro Preca, President of Malta (2014–2019) George Vella, President of Malt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Joseph Muscat, Prime Minister of Malta (2013–2020) President – Igor Dodon, President of Moldova (2016–2020) Pavel Filip, Acting President of Moldova (2019) Prime Minister – Pavel Filip, Prime Minister of Moldova (2016–2019) Maia Sandu, Prime Minister of Moldova (2019) Ion Chicu, Prime Minister of Moldova (2019–2020) (unrecogniz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Vadim Krasnoselsky, President of Transnistria (2016–present) Prime Minister – Aleksandr Martynov, Prime Minister of Transnistria (2016–present) Monarch – Albert II, Sovereign Prince of Monaco (2005–present) Prime Minister – Serge Telle, Minister of State of Monaco (2016–2020) President – Milo Đukanović, President of Montenegro (2018–present) Prime Minister – Duško Marković, Prime Minister of Montenegro (2016–2020) (un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see under Artsakh Monarch – Willem-Alexander, King of the Netherlands (2013–present) (constituent country) Prime Minister – Mark Rutte, Prime Minister of the Netherlands (2010–present) (constituent country) see under North America (constituent country) see under North America (constituent country) see under North America the country changed name from Macedonia to North Macedonia on 12 February 2019 President – Gjorge Ivanov, President of North Macedonia (2009–2019) Stevo Pendarovski, President of North Macedon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Zoran Zaev, President of the Government of North Macedonia (2017–2020) Monarch – Harald V, King of Norway (1991–present) Prime Minister – Erna Solberg, Prime Minister of Norway (2013–2021) President – Andrzej Duda, President of Poland (2015–present) Prime Minister – Mateusz Morawiecki, Chairman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Poland (2017–present) President – Marcelo Rebelo de Sousa, President of Portugal (2016–present) Prime Minister – António Costa, Prime Minister of Portugal (2015–present) President – Klaus Iohannis, President of Romania (2014–present) Prime Minister – Viorica Dăncilă, Prime Minister of Romania (2018–2019) Ludovic Orban, Prime Minister of Romania (2019–2020) President – Vladimir Putin, President of Russia (2012–present) Prime Minister – Dmitry Medvedev, Chairman of the Government of Russia (2012–2020) Captains-Regent – Mirko Tomassoni and Luca Santolini, Captains Regent of San Marino (2018–2019) Nicola Selva and Michele Muratori, Captains Regent of San Marino (2019) Luca Boschi and Mariella Mularoni, Captains Regent of San Marino (2019–2020) President – Aleksandar Vučić, President of Serbi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Ana Brnabić, Prime Minister of Serbia (2017–present) President – Andrej Kiska, President of Slovakia (2014–2019) Zuzana Čaputová, President of Slovak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Peter Pellegrini, Prime Minister of Slovakia (2018–2020) President – Borut Pahor, President of Slovenia (2012–present) Prime Minister – Marjan Šarec, Prime Minister of Slovenia (2018–2020) Monarch – Felipe VI, King of Spain (2014–present) Prime Minister – Pedro Sánchez, President of the Government of Spain (2018–present) Monarch – Carl XVI Gustaf, King of Sweden (1973–present) Prime Minister – Stefan Löfven, Prime Minister of Sweden (2014–2021) Council – Federal Council of Switzerland Members – Ueli Maurer (2009–2022; President of Switzerland, 2019), Simonetta Sommaruga (2010–2022), Alain Berset (2012–present), Guy Parmelin (2016–present), Ignazio Cassis (2017–present), Karin Keller-Sutter (2019–present) and Viola Amherd (2019–present) President – Petro Poroshenko, President of Ukraine (2014–2019) Volodymyr Zelenskyy, President of Ukraine (2019–present) Prime Minister – Volodymyr Groysman, Prime Minister of Ukraine (2016–2019) Oleksiy Honcharuk, Prime Minister of Ukraine (2019–2020) (un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Denis Pushilin, President of Donetsk People's Republic (2018–present) Prime Minister – Alexander Ananchenko, Prime Minister of Donetsk People's Republic (2018–present) Luhansk People's Republic (unrecognised, secessionist state) President – Leonid Pasechnik, Head of state of Luhansk People's Republic (2017–present) Prime Minister – Sergey Kozlov, Prime Minister of Luhansk People's Republic (2015–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the United Kingdom (1952–2022) Prime Minister – Theresa May,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2016–2019) Boris Johnson,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2019–2022) Monarch – Pope Francis, Sovereign of Vatican City (2013–present) Head of Government – Cardinal Giuseppe Bertello, President of the Governorate of Vatican City (2011–2021) Holy See (sui generis subject of public international law) Secretary of State – Cardinal Pietro Parolin, Cardinal Secretary of State (2013–present) North and Central America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Tim Foy, Governor of Anguilla (2017–present) Chief Minister – Victor Banks, Chief Minister of Anguilla (2015–2019) Premier – Victor Banks, Premier of Anguilla (2019–2020)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Antigua and Barbuda (1981–2022) Governor-General – Sir Rodney Williams, Governor-General of Antigua and Barbuda (2014–present) Prime Minister – Gaston Browne, Prime Minister of Antigua and Barbuda (2014–present) (constituent country of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Governor – Alfonso Boekhoudt, Governor of Arub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Evelyn Wever-Croes, Prime Minister of Aruba (2017–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the Bahamas (1973–2022) Governor-General – Dame Marguerite Pindling, Governor-General of the Bahamas (2014–2019) Sir Cornelius A. Smith, Governor-General of the Bahamas (2019–present) Prime Minister – Hubert Minnis, Prime Minister of the Bahamas (2017–2021)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Barbados (1966–2021) Governor-General – Dame Sandra Mason, Governor-General of Barbados (2018–2021) Prime Minister – Mia Mottley, Prime Minister of Barbados (2018–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Belize (1981–2022) Governor-General – Sir Colville Young, Governor-General of Belize (1993–2021) Prime Minister – Dean Barrow, Prime Minister of Belize (2008–2020)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John Rankin, Governor of Bermuda (2016–present) Premier – Edward David Burt, Premier of Bermuda (2017–present)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Augustus Jaspert, Governor of the British Virgin Islands (2017–2021) Premier – Orlando Smith, Premier of the British Virgin Islands (2011–2019) Andrew Fahie, Premier of the British Virgin Islands (2019–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Canada (1952–2022) Governor General – Julie Payette, Governor General of Canada (2017–2021) Prime Minister – Justin Trudeau, Prime Minister of Canada (2015–present)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Martyn Roper, Governor of the Cayman Islands (2018–present) Premier – Alden McLaughlin, Premier of the Cayman Islands (2013–present) President – Carlos Alvarado Quesada, President of Costa Rica (2018–present) Communist Party Leader – Raúl Castro, First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Cuba (2011–2021) President – Miguel Díaz-Canel, President of Cuba (2018–present) Prime Minister – Miguel Díaz-Canel, 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Cuba (2018–2019) Manuel Marrero Cruz, Prime Minister (2019–present) (constituent country of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Governor – Lucille George-Wout, Governor of Curaçao (2013–present) Prime Minister – Eugene Rhuggenaath, Prime Minister of Curaçao (2017–present) President – Charles Savarin, President of Dominica (2013–present) Prime Minister – Roosevelt Skerrit, Prime Minister of Dominica (2004–present) President – Danilo Medina, President of the Dominican Republic (2012–present) President – Salvador Sánchez Cerén, President of El Salvador (2014–2019) Nayib Bukele, President of El Salvador (2019–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Grenada (1974–2022) Governor-General – Dame Cécile La Grenade, Governor-General of Grenada (2013–present) Prime Minister – Keith Mitchell, Prime Minister of Grenada (2013–2022) President – Jimmy Morales, President of Guatemala (2016–2020) President – Jovenel Moïse, President of Haiti (2017–2021) Prime Minister – Jean-Henry Céant, Prime Minister of Haiti (2018–2019) Jean-Michel Lapin, Acting Prime Minister of Haiti (2019–2020) President – Juan Orlando Hernández, President of Honduras (2014–2022)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Jamaica (1962–2022) Governor-General – Sir Patrick Allen, Governor-General of Jamaica (2009–present) Prime Minister – Andrew Holness, Prime Minister of Jamaica (2016–present) President – Andrés Manuel López Obrador, President of Mexico (2018–present)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Andrew Pearce, Governor of Montserrat (2018–present) Premier – Donaldson Romeo, Premier of Montserrat (2014–2019) Easton Taylor-Farrell, Premier of Montserrat (2019–present) President – Daniel Ortega, President of Nicaragua (2007–present) President – Juan Carlos Varela, President of Panama (2014–2019) Laurentino Cortizo, President of Panama (2019–present) (Commonwealth of the United States) Governor – Ricardo Rosselló, Governor of Puerto Rico (2017–2019) Pedro Pierluisi, Governor of Puerto Rico (2019) Wanda Vázquez Garced, Governor of Puerto Rico (2019–2021)   (overseas collectivity of France) Prefect – Sylvie Daniélo-Feucher, Prefect of Saint Barthélemy (2018–2020) Head of Government – Bruno Magras, President of the Territorial Council of Saint Barthélemy (2007–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Saint Kitts and Nevis (1983–2022) Governor-General – Sir Tapley Seaton, Governor-General of Saint Kitts and Nevis (2015–2023) Prime Minister – Timothy Harris, Prime Minister of Saint Kitts and Nevis (2015–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Saint Lucia (1979–2022) Governor-General – Sir Neville Cenac, Governor-General of Saint Lucia (2018–2021) Prime Minister – Allen Chastanet, Prime Minister of Saint Lucia (2016–2021) (overseas collectivity of France) Prefect – Sylvie Daniélo-Feucher, Prefect of Saint Barthélemy (2018–2020) Head of Government – Daniel Gibbs, President of the Territorial Council of Saint Martin (2017–present)   (overseas collectivity of France) Prefect – Thierry Devimeux, Prefect of Saint Pierre and Miquelon (2018–2021) Head of Government – Stéphane Lenormand, President of the Territorial Council of Saint Pierre and Miquelon (2017–2020)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1979–2022) Governor-General – Sir Frederick Ballantyne, Governor-General of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2002–2019) Susan Dougan, Governor-General of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2019–present) Prime Minister – Ralph Gonsalves, Prime Minister of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2001–present) (constituent country of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Governor – Eugene Holiday, Governor of Sint Maarten (2010–present) Prime Minister – Leona Marlin-Romeo, Prime Minister of Sint Maarten (2018–2019) Wycliffe Smith, Prime Minister of Sint Maarten (2019) Silveria Jacobs, Prime Minister of Sint Maarten (2019–present) President – Paula-Mae Weekes, President of Trinidad and Tobago (2018–present) Prime Minister – Keith Rowley, Prime Minister of Trinidad and Tobago (2015–present)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John Freeman, Governor of the Turks and Caicos Islands (2016–2019) Anya Williams, Acting Governor of the Turks and Caicos Islands (2019) Nigel Dakin, Governor of the Turks and Caicos Islands (2019–present) Premier – Sharlene Cartwright-Robinson, Premier of the Turks and Caicos Islands (2016–present) President – Donald Trump,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2017–2021) (insular area of the United States) Governor – Kenneth Mapp, Governor of the United States Virgin Islands (2015–2019) Albert Bryan, Governor of the United States Virgin Islands (2019–present) Oceania (unorganised, unincorporated territory of the United States) Governor – Lolo Matalasi Moliga, Governor of American Samoa (2013–2021)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Australia (1952–2022) Governor-General – Sir Peter Cosgrove, Governor-General of Australia (2014–2019) David Hurley, Governor-General of Australia (2019–present) Prime Minister – Scott Morrison, Prime Minister of Australia (2018–2022) (external territory of Australia) Administrator – Natasha Griggs, Administrator of Christmas Island (2017–present) Shire-President – Gordon Thomson, Shire president of Christmas Island (2013–present) (external territory of Australia) Administrator – Natasha Griggs, Administrator of the Cocos (Keeling) Islands (2017–present) Shire-President – Seri Wati Iku, Shire president of the Cocos (Keeling) Islands (2017–2019) Aindil Minkom, Shire president of the Cocos (Keeling) Islands (2019–present) (associated state of New Zealand) Queen's Representative – Sir Tom Marsters, Queen's Representative of the Cook Islands (2013–present) Prime Minister – Henry Puna, Prime Minister of the Cook Islands (2010–2020) President – Jioji Konrote, President of Fiji (2015–2021) Prime Minister – Frank Bainimarama, Prime Minister of Fiji (2007–present)   (overseas collectivity of France) High Commissioner – René Bidal, High Commissioner of the Republic in French Polynesia (2016–2019) Éric Requet, Acting High Commissioner of the Republic in French Polynesia (2019) Dominique Sorain, High Commissioner of the Republic in French Polynesia (2019–present) President – Édouard Fritch, President of French Polynesia (2014–present) (insular area of the United States) Governor – Eddie Baza Calvo, Governor of Guam (2011–2019) Lou Leon Guerrero, Governor of Guam (2019–present) President – Taneti Mamau, President of Kiribati (2016–present) President – Hilda Heine, President of the Marshall Islands (2016-2020) President – Peter M. Christian, President of Micronesia (2015–2019) David W. Panuelo, President of Micronesia (2019–present) President – Baron Waqa, President of Nauru (2013–2019) Lionel Aingimea, President of Nauru (2019–present)   (sui generis collectivity of France) High Commissioner – Thierry Lataste, High Commissioner of New Caledonia (2016–2019) Laurent Cabrera, Acting High Commissioner of New Caledonia (2019) Laurent Prévost, High Commissioner of New Caledonia (2019–present) Head of Government – Philippe Germain, President of the Government of New Caledonia (2015–2019) Thierry Santa, President of the Government of New Caledonia (2019–present)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New Zealand (1952–2022) Governor-General – Dame Patsy Reddy, Governor-General of New Zealand (2016–2021) Prime Minister – Jacinda Ardern, Prime Minister of New Zealand (2017–2023) (associated state of New Zealand) Premier – Sir Toke Talagi, Premier of Niue (2008–present) (Commonwealth of the United States) Governor – Ralph Torres, Governor of the Northern Mariana Islands (2015–present) President – Tommy Remengesau, President of Palau (2013–2021)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Papua New Guinea (1975–2022) Governor-General – Sir Bob Dadae, Governor-General of Papua New Guine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Peter O'Neill, Prime Minister of Papua New Guinea (2011–2019) James Marape, Prime Minister of Papua New Guinea (2019–present)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Laura Clarke, Governor of Pitcairn (2018–present) Mayor – Shawn Christian, Mayor of the Pitcairn Islands (2014–2019) Head of State – Tuimalealiʻifano Vaʻaletoʻa Sualauvi II, O le Ao o le Malo of Samoa (2017–present) Prime Minister – Tuila'epa Sa'ilele Malielegaoi, Prime Minister of Samoa (1998–2021)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the Solomon Islands (1978–2022) Governor-General – Sir Frank Kabui, Governor-General of the Solomon Islands (2009–2019) Sir David Vunagi, Governor-General of the Solomon Islands (2019–present) Prime Minister – Rick Houenipwela, Prime Minister of the Solomon Islands (2017–2019) Manasseh Sogavare, Prime Minister of the Solomon Islands (2019–present) (dependent territory of New Zealand) Administrator – Ross Ardern, Administrator of Tokelau (2018–present) Head of Government – Afega Gaualofa, Head of Government of Tokelau (2018–2019) Kerisiano Kalolo, Head of Government of Tokelau (2019–present) Monarch – Tupou VI, King of Tonga (2012–present) Prime Minister – ʻAkilisi Pōhiva, Prime Minister of Tonga (2014–2019) Semisi Sika, Acting Prime Minister of Tonga (2019) Pohiva Tu'i'onetoa, Prime Minister of Tonga (2019–2021) Monarch – Elizabeth II, Queen of Tuvalu (1978–2022) Governor-General – Sir Iakoba Italeli, Governor-General of Tuvalu (2010–2019) Teniku Talesi Honolulu, Acting Governor-General of Tuvalu (2019–2021) Prime Minister – Enele Sopoaga, Prime Minister of Tuvalu (2018–2019) Kausea Natano, Prime Minister of Tuvalu (2019–2020) President – Tallis Obed Moses, President of Vanuatu (2017–present) Prime Minister – Charlot Salwai, Prime Minister of Vanuatu (2016–2020)   (overseas collectivity of France) Administrator – Christophe Lotigie, Acting Administrator Superior of Wallis and Futuna (2018–2019) Thierry Queffelec, Administrator Superior of Wallis and Futuna (2019–2020) Head of Government –* David Vergé, President of the Territorial Assembly of Wallis and Futuna (2017–2019) Atoloto Kolokilagi, President of the Territorial Assembly of Wallis and Futuna (2019–2020) South America President – Mauricio Macri, President of Argentina (2015–2019) Alberto Fernández, President of Argentina (2019–present) President – Evo Morales, President of Bolivia (2006–2019) Jeanine Áñez, Acting President of Bolivia (2019–present) President – Jair Bolsonaro, President of Brazil (2019–2022) President – Sebastián Piñera, President of Chile (2018–2022) President – Iván Duque Márquez, President of Colombia (2018–present) President – Lenín Moreno, President of Ecuador (2017–2021) (Overseas Territory of the United Kingdom) Governor – Nigel Phillips, Governor of the Falkland Islands (2017–present) President – David A. Granger, President of Guyana (2015–2020) Prime Minister – Moses Nagamootoo, Prime Minister of Guyana (2015–2020) President – Mario Abdo Benítez, President of Paraguay (2018–present) President – Martín Vizcarra, President of Peru (2018–2020) Prime Minister – César Villanueva, 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Peru (2018–2019) Salvador del Solar, 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Peru (2019) Vicente Zeballos, 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Peru (2019–2020) President – Dési Bouterse, President of Suriname (2010–2020) President – Tabaré Vázquez, President of Uruguay (2015–2020) Venezuela President – Nicolás Maduro, President of Venezuela (2013–present)  Venezuelan opposition (partially recognised, rival government) President – Juan Guaidó, President of the National Assembly (2019–2023) See also List of current heads of state and government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CIDOB Foundation contextualised biographies of world political leaders Portale Storia a list of current rulers by country Rulersa list of rulers throughout time and places WorldStatesmenan online encyclopedia of the leaders of nations and territories State leaders State leaders State leaders 2019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D%B4%EC%98%A4%EB%A6%AC%ED%8F%AC%ED%84%B0
바이오리포터
바이오리포터(Bioreporters)는 환경에서 특정 화학, 물리적 물질 자극에 반응하는 신호를 측정가능하도록 유전적으로 조작된 손상되지 않은 살아있는 미생물 세포이다. 바이오리포터는 필수적으로 두가지 유전적인 요소를 가지는데, 프로모터(촉진자, promoter) 유전자와 리포터 유전자(보고 유전자, reporter gene)가 그것이다.  프로모터 유전자는 세포 환경에 목표 물질이 있을 때 켜진다(전사된다). 정상적인 세균 세포에서 프로모터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또한 마찬가지로 전사되고 단백질로 번역되어 노출된 물질에 경쟁적으로 혹은 적응하는 방향으로 세포를 돕는다. 바이오리포터의 경우에 이런 유전자들 혹은 그것으로부터 나온 물질이 제거되고 리포터 유전자로 교체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프로모터 유전자는 이제 리포터 유전자가 켜지도록 한다. 리포터 유전자가 활성화되면 리포터 단백질의 생산이 일어나고 마침내는 특정 형태로 탐지 가능한 신호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신호가 있다는 것은 바이오리포터가 환경에서 특정 목표 물질을 감지했음을 의미한다. 바이오 리포터는 환경에 오염물질을 감지 할 목적으로 적용되어 왔으며, 원래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알아보는 분석을 위해 개발되었다. 그 이후 계속 발전하여 의학적 진단, 정밀한 농업, 식품 안전성 확보, 처리과정 모니터링, 통제, 그리고 생물-마이크로 전자 공학 컴퓨팅 등 다양한 분야로 적용이 발전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리포터 유전자 시스템이 다양한 신호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덧붙여, 리포터 유전자는 유전적으로 세균, 효모, 식물, 그리고 포유류 세포에 삽입할 수 있으며, 이에따라 다양한 호스트 벡터에 상당한 기능성을 제공한다. 리포터 유전자 시스템 다양한 형태의 리포터 유전자가 바이오 리포터 개체의 제작에 사용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신호는 색도, 형광, 냉광, 화학 발광 또는 전기 화학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각자 기능은 다르게 하지만, 그들의 최종 산물은 항상 측정가능한 신호로서 동일하다. 이 신호는 특정 화학 혹은 물리 시료 노출 정도에 따라 농도에 비례하여 나타난다. 예로, 부차적인 기질이 바이오에세이(luxAB, Luc, and aequorin)에 더해졌을 때만 신호가 나타난다. 다른 바이오리포터에서는, 다른 외부 광원(GFP, UMT)에 의해서만 신호가 활성화된다. 그리고 몇몇 바이오리포터는 신호가 완전히 자기-유도성으로, 다른 외부 기질이나 외부 활성화가 필요하지 않다(LuxCDABE). 세균성 루시퍼레이즈(luciferase(Lux)) 루시퍼레이즈(Luciferase)는 발광(light-emitting)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를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루시퍼레이즈는 세균, 조류, 진균류, 해파리, 곤충, 새우, 오징어 등에서 발견되며 이런 생물이 만들어 내는 빛을 생물 발광(bioluminescence)라고 한다. 세균에서 분리된 이러한 발광 반응을 담당하는 유전자는 490 nm에서 최대 강도를 보이는 푸른(blue-green) 빛을 내는 바이오리포터를 만드는데 널리 사용된다. 3가지 lux 변종이 사용가능하며, 각각 30°C 이하, 37°C 이하, 45°C 이하에서 기능한다. lux 유전자 시스템은 luxA, luxB, luxC, luxD, 그리고 luxE의 다섯가지 유전자 부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전자의 조합에 따라서, 몇가지 다른 형태의 바이오 리포터가 사용될 수 있다. 반딧불이 루시퍼레이즈 (Luc) 반딧불이 루시퍼레이즈는 550 - 575nm범위의 가시광선을 만들어 내는 반응을 촉진시킨다. 대유동방아벌레(click-beetle) 루시퍼레이즈도 이용가능한데 이는 595nm에서 가장 많은 빛을 만들어낸다. 모든 루시퍼레이즈는 추가적인 외부 물질인 루시페린(luciferin)이 있어야 발광 반응이 가능하다. 수 많은 luc-기반의 바이오 리포터가 만들어져서 다양한 유기물과 무기물의 감지를 위해 사용된다. 가장 유망한 적용분야는 반딧불이 루시퍼레이즈 유전자를 진핵 세포나 조직에 도입하는 것일 것이다. 의학적 진단 헬라(HeLa; human cervical carcinoma cell line)셀에 luc 유전자를 삽입하는 것은 종양세포 제거가 시각화 될 수 있음을 보였다. 이는 살아있는 쥐에서 CCD 카메라로 스캔 하는 것으로, 실시간, 온라인으로 빠른 화학치료가 가능하도록 했다. 다른 예로는, luc 유전자가 인간 유방암 세포에 삽입되어 잠재적 에스트로겐성, 반에스트로겐성 활동을 하는 물질의 검출과 측정을 하는 생물학적 정량법이 개발되었다. 유전자 조절에 대한 연구 특정 프로모터가 luc 유전자 상류에 놓일 수 있는데, 이 luc 시퀀스는 프로모터 시퀀스에 DNA 수준에서 합쳐질 수 있다. 이런 구조물이 너무 크지않다면, 이는 플라스미드(plasmids)를 이용해서 간단히 진핵세포로 도입할 수 있다. 이런 접근법은 주어진 세포나 조직에서 주어진 프로모터의 활동을 연구하는데 널리 이용된다. 이는 루시퍼레이즈에 의한 발광의 정도는 곧 프로모터 활성에 직접 비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프로모터의 연구에 덧붙여, 반딧불이 에쿼린(Aequorin) 에쿼린(aequorin)은 생물발광성 해파리 애쿼리아 빅토리아(Aequorea victoria)에서 분리된 발광 단백질이다. 칼슘 이온과 coelenterazine을 첨가하면 반응이 일어나는데, 그 결과로 460 - 470 nm 범위의 푸른 빛이 발생한다. 에쿼린은 B세포에 통합되어 병원성 세포와 바이러스를 감지하는데 이용되는데, 이를 셀 캐너리(Cell CANARY; Cellular Analysis and Notification of Antigen Risks and Yields) 분석법이라고 한다. B 세포는 유적적으로 조작되어 에쿼린을 생산한다. 다양한 병원체들의 항원 노출에 따라, 재조합 B세포는 세포안에서 칼슘 이온을 배출하는 세포내 신호 전달체계 활성화를 통해 빛을 방출한다. 녹색 형광 단백질(GFP) 녹색 형광 단백질(Green Fluorescent protein(GFP)) 또한 발광단백질의 하나이며, 이는 해파리 종류인 애쿼리아 빅토리아(Aequorea victoria)에서 분리되어 클론됐다. 바다 팬지(pansy, Renilla reniformis)에서 변종들도 분리되었다. GFP는 에쿼린(aequorin)과 마찬가지로, 파란색 형광 신호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GFP는 다른 외부의 기질을 요구하지는 않으며, 발광단백질의 형광 특성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자외선 자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기-형광의 능력은 GFP를 생물감지 시험에  사용함에 있어 매우 유리하게 만드는데, 이런 특징은 살아있는 세포를 손대지 않고 관찰 할 수 있게 해준다. 덧붙여, GFP를 파란색 이외의 색(청록색, 적색, 황색)을 방출하도록 바꿔줌으로써, 다양한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GFP는 세균류, 효모, 선충, 식물류, 포유류 숙주에서 바이오리포터를 구축하는데 광범위 하게 이용된다. 내용주 환경과학 유전공학
https://en.wikipedia.org/wiki/Bioreporter
Bioreporter
Bioreporters are intact, living microbial cells that have been genetically engineered to produce a measurable signal in response to a specific chemical or physical agent in their environment. Bioreporters contain two essential genetic elements, a promoter gene and a reporter gene. The promoter gene is turned on (transcribed) when the target agent is present in the cell’s environment. The promoter gene in a normal bacterial cell is linked to other genes that are then likewise transcribed and then translated into proteins that help the cell in either combating or adapting to the agent to which it has been exposed. In the case of a bioreporter, these genes, or portions thereof, have been removed and replaced with a reporter gene. Consequently, turning on the promoter gene now causes the reporter gene to be turned on. Activation of the reporter gene leads to production of reporter proteins that ultimately generate some type of a detectable signal. Therefore, the presence of a signal indicates that the bioreporter has sensed a particular target agent in its environment. Originally developed for fundament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gene expression, bioreporters were early on applied for the detection of environmental contaminants and have since evolved into fields as diverse as medical diagnostics, precision agriculture, food safety assurance, process monitoring and control, and bio-microelectronic computing. Their versatility stems from the fact that there exist a large number of reporter gene systems that are capable of generating a variety of signals. Additionally, reporter genes can be genetically inserted into bacterial, yeast, plant, and mammalian cells, thereby providing considerable functionality over a wide range of host vectors. Reporter gene systems Several types of reporter genes are available for use in the construction of bioreporter organisms, and the signals they generate can usually be categorized as either colorimetric, fluorescent, luminescent, chemiluminescent or electrochemical. Although each functions differently, their end product always remains the same – a measurable signal that is proportional to the concentration of the unique chemical or physical agent to which they have been exposed. In some instances, the signal only occurs when a secondary substrate is added to the bioassay (luxAB, Luc, and aequorin). For other bioreporters, the signal must be activated by an external light source (GFP and UMT), and for a select few bioreporters, the signal is completely self-induced, with no exogenous substrate or external activation being required (luxCDABE). The following sections outline in brief some of the reporter gene systems available and their existing applications. Bacterial luciferase (Lux) Luciferase is a generic name for an enzyme that catalyzes a light-emitting reaction. Luciferases can be found in bacteria, algae, fungi, jellyfish, insects, shrimp, and squid, and the resulting light that these organisms produce is termed bioluminescence. In bacteria, the genes responsible for the light-emitting reaction (the lux genes) have been isolated and used extensively in the construction of bioreporters that emit a blue-green light with a maximum intensity at 490 nm. Three variants of lux are available, one that functions at < 30°C, another at < 37°C, and a third at < 45°C. The lux genetic system consists of five genes, luxA, luxB, luxC, luxD, and luxE. Depending on the combination of these genes used, several different types of bioluminescent bioreporters can be constructed. luxAB Bioreporters luxAB bioreporters contain only the luxA and luxB genes, which together are responsible for generating the light signal. However, to fully complete the light-emitting reaction, a substrate must be supplied to the cell. Typically, this occurs through the addition of the chemical decanal at some point during the bioassay procedure. Numerous luxAB bioreporters have been constructed within bacterial, yeast, insect, nematode, plant, and mammalian cell systems. luxCDABE Bioreporters Instead of containing only the luxA and luxB genes, bioreporters can contain all five genes of the lux cassette, thereby allowing for a completely independent light generating system that requires no extraneous additions of substrate nor any excitation by an external light source. So in this bioassay, the bioreporter is simply exposed to a target analyte and a quantitative increase in bioluminescence results, often within less than one hour. Due to their rapidity and ease of use, along with the ability to perform the bioassay repetitively in real time and on-line, makes luxCDABE bioreporters extremely attractive. Consequently, they have been incorporated into a diverse array of detection methodologies ranging from the sensing of environmental contaminants to the real-time monitoring of pathogen infections in living mice. Nonspecific lux Bioreporters Nonspecific lux bioreporters are typically used for the detection of chemical toxins. They are usually designed to continuously bioluminesce. Upon exposure to a chemical toxin, either the cell dies or its metabolic activity is retarded, leading to a decrease in bioluminescent light levels. Their most familiar application is in the Microtox assay where, following a short exposure to several concentrations of the sample, the decreased bioluminescence can be correlated to relative levels of toxicity. Firefly luciferase (Luc) Firefly luciferase catalyzes a reaction that produces visible light in the 550 – 575 nm range. A click-beetle luciferase is also available that produces light at a peak closer to 595 nm. Both luciferases require the addition of an exogenous substrate (luciferin) for the light reaction to occur. Numerous luc-based bioreporters have been constructed for the detection of a wide array of inorganic and organic compounds of environmental concern. The most promising applications, however, probably rely on introducing the genetic code of the firefly luciferase into other eukaryotic cells and tissues. Medical diagnostics Insertion of the luc genes into a human cervical carcinoma cell line (HeLa) illustrated that tumor-cell clearance could be visualized within a living mouse by simply scanning with a charge-coupled device camera, allowing for chemotherapy treatment to rapidly be monitored on-line and in real-time. In another example, the luc genes were inserted into human breast cancer cell lines to develop a bioassay for the detection and measurement of substances with potential estrogenic and antiestrogenic activity. Research on gene regulation Particular promoters can be placed upstream of the luc gene, that is, the luc sequence can be fused to the promoter sequence at DNA level. If such construct is not too large in size, it can simply be introduced into eukaryotic cells using plasmids. This approach is widely used to study the activity of a given promoter in a given cell/tissue type, since the amount of light produced by the luciferase is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promoter activity. In addition to studying the promoters, firefly luciferase assays offer the option of studying transcriptional activators: in these experiments typically the GAL4/UAS_system is used and its Gal4 upstream activating DNA sequence (UAS) is placed upstream the luc gene while the different activators or the different variants/fragments of the same activator are fused to the GAL4 DNA binding module at protein level. This way the transcriptional activity of the different GAL4 fusion proteins can be directly compared using light as a readout. Aequorin Aequorin is a photoprotein isolated from the bioluminescent jellyfish Aequorea victoria. Upon addition of calcium ions (Ca2+) and coelenterazine, a reaction occurs whose end result is the generation of blue light in the 460 - 470 nm range. Aequorin has been incorporated into human B cell lines for the detection of pathogenic bacteria and viruses in what is referred to as the Cell CANARY assay (Cellular Analysis and Notification of Antigen Risks and Yields). The B cells are genetically engineered to produce aequorin. Upon exposure to antigens of different pathogens, the recombinant B cells emit light as a result of activation of an intracellular signaling cascade that releases calcium ions inside the cell. Green fluorescent protein (GFP) Green fluorescent protein (GFP) is also a photoprotein isolated and cloned from the jellyfish Aequorea victoria. Variants have also been isolated from the sea pansy Renilla reniformis. GFP, like aequorin, produces a blue fluorescent signal, but without the required addition of an exogenous substrate. All that is required is an ultraviolet light source to activate the fluorescent properties of the photoprotein. This ability to autofluoresce makes GFP highly desirable in biosensing assays since it can be used on-line and in to monitor intact, living cells. Additionally, the ability to alter GFP to produce light emissions besides blue (i.e., cyan, red, and yellow) allows it to be used as a multianalyte detector. Consequently, GFP has been used extensively in bioreporter constructs within bacterial, yeast, nematode, plant, and mammalian hosts. Uroporphyrinogen (urogen) III methyltransferase (UMT) Uroporphyrinogen (urogen) III methyltransferase (UMT) catalyzes a reaction that yields two fluorescent products which produce a red-orange fluorescence in the 590 - 770 nm range when illuminated with ultraviolet light. So as with GFP, no addition of exogenous substrates is required. UMT has been used as a bioreporter for the selection of recombinant plasmids, as a marker for gene transcription in bacterial, yeast, and mammalian cells, and for the detection of toxic salts such as arsenite and antimonite. Notes Environmental science Genetic engineering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B%8F%99%EC%9D%98%20%EA%B8%B0%EB%8F%85%EA%B5%90
중동의 기독교
중동지역의 기독교(Middle Eastern Christians)는 1세기 중동지역에 시작된 기독교이며, 그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소수 종교이다. 중동지역에서 기독교는 다양한 신앙과 전통을 가지며 구세계의 것들과 달리하고 있다. 기독교는 20세기 초에는 20%에서 현재 대략 5%로 내려갔다. 키프로스은 유일하게 다수가 기독교 국가이다. 76%-78%가 동방 정교회이다. 두번째는 레바논으로 약 39%-41%가 마로니 기독교인( Maronite Christians)들이며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가 150만에서 200만명 정도이다. 역사 분열 오늘날 기독교인 바레인 이집트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요르단 터키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민 교회 콥트어 그리스도인 콥트 정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콥트어 가톨릭 교회 복음 교회의 이집트(총회의 나일) 아시리아 기독교인 토착 아랍과 그리스와 멜키트 그리스도인 그리스 정교회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정교회 예루살렘 그리스 정교회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 아랍에 정교 그리스 카톨릭 교회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복음 교회 쿠르드어 그리스도인 쿠르드만 그리스도 교회(Kurdzman Church of Christ)는 주로 쿠르드족이 믿는 복음주의 교회이다. 성공회 터키인 Autocephalous 키 정교회 대주교 터키 Alliance 의 개신교 교회 추방된 기독교인 아버지의 집은 교회 AG 주목할 만한 중동 그리스도인 안드레 애거시 – 이란-미국인 전 테니스 선수 (Assyrian-Armenian descent) Alees Samaan, the Bahraini ambassador to the United Kingdom. Vera Baboun, first female Mayor of Bethlehem (Palestinian Roman Catholic Christian) 파이루즈, 레바논의 가수. (Orthodox Christian, originally Maronite)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이집트-미국인 6대 국제연합의 사무총장 (Coptic Orthodox Christian) Elias Chacour Archbishop, prominent reconciliation and peace activist in Israel (Melkite Greek Catholic Christian) 미셸 아플라크, 시리아의 범아랍주의 바트당의 창설자, (Greek Orthodox Christian).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의 (Baath party) 전 외무부장관이자 전 국무총리 대리 (Chaldean Catholic Christian, an ethnic Assyrian) Suleiman Mousa, prominent Jordanian historian and author of T.E. Lawrence: An Arab View, (Catholic Christian). George Wassouf, Syrian singer (an ethnic Syriac). 에드워드 사이드, 유명한 팔레스타인의 지식인이자 작가 (Greek Orthodox Christian background). Constantin Zureiq, prominent Syrian intellectual and academic (Greek Orthodox Christian). 주르지 하바시, 팔레스타인의 PFLP 창설자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Nayef Hawatmeh, Jordanian founder of DFLP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Said Khoury, Palestinian entrepreneur, co-founder of the Consolidated Contractors International Company,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Yousef Beidas, prominent Palestinian Financier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John Sununu, US political leader of Palestinian-Lebanese background (Melkite Greek Catholic Christian). Hanan Ashrawi, Palestinian scholar and politic activist (Anglican Arab Christian). Kamal Salibi, Lebanese historian and scholar (Protestant Christian). Steve Bracks (from the Barakat Lebanese family) Australian State MP, Premier of Victoria, Australia, (Catholic Arab Christian). René Angélil, Canadian producer and husband of Céline Dion of Lebanese-Syrian background (Greek Catholic Christian). 카를로스 메넴, 시리아 출신의 1988년부터 1999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ethnically Arab converted to Roman Catholic from Sunni Islam) Emile Habibi, Arab Israeli writer (Anglican Christian). Azmi Bishara, former Arab Israeli Knesset member, now residing in Qatar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Azmi Nassar, Arab Israeli manager of the Palestinian national football team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Salim Tuama, Hapoel Tel Aviv middlefielder, (Arab citizen of Israel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Simon Shaheen, Israeli oud and violin virtuoso and composer (Greek Catholic Arab Christian) Salim Jubran, member of the Israeli Supreme Court (Maronite Christian) 랠프 네이더, 레바논 출신의 미국 대통령 후보이자 소비자 권리 운동가 (Greek Orthodox background, but declines to comment on personal religion). Hani Naser, musician, producer (son of Jordanian Christian immigrants). Shakira, international superstar from Colombia, daughter of Lebanese father from Zahle and Colombian mother of Spanish descent (Greek Orthodox Christian). Tony Shalhoub, three-time Emmy Award and Golden Globe-winning American television and film actor of Lebanese background (Maronite Christian). Marie Keyrouz, chanter of Eastern Church music, Melkite Greek Catholic nun. Founder of L'Ensemble de la Paix (Ensemble of Peace) and Founder-President of L'Instituit International de Chant Sacré (International Institute of Sacred Chant) in Paris. 훌리오 세사르 투르바이, 레바논 출신의 1978년부터 1982까지 콜롬비아의 대통령 (Maronite Christian). 카를로스 슬림 엘루, 레바논 출신의 맥시코의 사업가 (Maronite Christian). Bruno Bichir and Demián Bichir, Mexican actors of Lebanese background (Maronite Christians). Amin al-Rihani, Lebanese writer and intellectual (Maronite Christian). Afif Safieh, Palestinian diplomat (Greek Catholic Arab Christian). Bobby Rahal, race car driver, team owner, and businessman of Lebanese background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Doug Flutie, Heisman Trophy winner, NFL quarterback of Lebanese origin (Maronite Christian). Jacques Nasser, past CEO Ford Motor Company, French-American of Lebanese descent (Greek Orthodox Christian). 헬렌 토머스, 레바논계 출신의 미국인 백악관 저널리스트,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조지 J. 미첼, 레바논 출신의 전 미합중국 상원의원이자 정치가 (Maronite Christian). John Mack, former chairman & CEO of Morgan Stanley - an American of Lebanese descent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Mosab Hassan Yousef, author of Son of Hamas, American of Palestinian descent (Protestant Arab Christian, converted from Islam). Vartan Gregorian, American academic and president of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Iranian-Armenian descent). Alex Agase, American – Top level American Football (gridiron) player (Assyrian). Lou Agase, American – Top level American Football (gridiron) player (Assyrian). Mitch Daniels – Governor of Indiana and potential Republican presidential candidate (Syrian, Greek Orthodox). 로지 말레크요난, 미국의 여배우, 저자, 극장감독, 유명인사이자 활동가. (Assyrian descent). Adam Benjamin, Jr., Indiana Congressman (Assyrian). Anna Eshoo, California Congressman (Assyrian). John Nimrod, Illinois Senator (Assyrian). Aril Brikha, techno/nouse music artist (Assyrian). Linda George, singer (Assyrian). Sargon Gabriel, singer (Assyrian). Klodia Hanna, Miss Iraq 2006 (Assyrian). Christian Demirtaş, German footballer (Assyrian). Daniel Unal, Turkish Footballer – playing for FC Basle in Switzerland (Assyrian Christian). 피터 메더워, 그는 레바논계 출신으로, 1960년 생리약과 의학 노벨상을 받았다. (Maronite Christian). 일라이어스 제임스 코리, He won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he is from Lebanese descent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토니 퍼델, Lebanese American inventor and is known as "one of the fathers of the iPod" (Greek Orthodox ). Michael E. DeBakey, World-renowned American cardiac surgeon of Lebanese origin (Maronite Christian). 마이클 아티야, British mathematician specialising in geometry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미셰우 테메르, Brazilian President. 참고 문헌 추가 자료 Holland, Tom. "Persecution of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is a crime against humanity." The Guardian. Sunday 2013년 12월 22일. Pacini, Andrea (2005). "Christianity: Christianity in the Middle East." In Jones, Lindsay.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3. 2nd ed.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ity%20in%20the%20Middle%20East
Christianity in the Middle East
Christianity, which originated in the Middle East during the 1st century AD, is a significant minority religion within the region, characterized by the diversity of its beliefs and traditions, compared to Christianity in other parts of the Old World. Christians now make up approximately 5% of the Middle Eastern population, down from 20% in the early 20th century. Cyprus is the only Christian majority country in the Middle East, with Christians forming between 76% and 78% of the country's total population, most of them adhering to Eastern Orthodox Christianity. Lebanon has the second highest proportion of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around 40%, predominantly Maronites. Egypt has the next largest proportion of Christians (predominantly Copts), at around 10% of its total population. Copts, numbering around 10 million, constitute the single largest Christian community in the Middle East. The Eastern Aramaic speaking Assyrians of northern Iraq, northeastern Syria, southeastern Turkey, and parts of Iran have suffered both ethnic and religious persecution for many centuries, such as the 1915 Genocide that was committed against them by the Ottoman Turks and their allies, leading many to flee and congregate in areas in the north of Iraq and northeast of Syria. The great majority of Aramaic speaking Christians are followers of the Assyrian Church of the East, Chaldean Catholic Church, Syriac Orthodox Church, Ancient Church of the East, Assyrian Pentecostal Church and Assyrian Evangelical Church. In Iraq, the numbers of Christians has declined to between 300,000 and 500,000 (from 0.8 to 1.4 million before 2003 US invasion). Assyrian Christians were between 800,000 and 1.2 million before 2003. In 2014, the Chaldean and Syriac population of the Nineveh Plains in northern Iraq was scattered to Dohuk, Erbil and Jordan due to ISIS forcing the Assyrian and Syriac Christian community out of their historical homeland, but since the defeat of the Islamic State in 2017, Christians began to slowly return. The next largest Christian group in the Middle East are the once Aramaic speaking and now Arabic-speaking Maronites who are Catholics and number some 1.1–1.2 million across the Middle East, mainly concentrated within Lebanon. In Israel, Maronites together with smaller Aramaic-speaking Christian populations of Syriac Orthodox and Greek Catholic adherence are legally and ethnically classified as either Arameans or Arabs, per their choice. Arab Christians are descended from Arab Christian tribes, Arabized Greeks or recent converts to Protestantism. Most Arab Christians are adherents of the Melkite Catholic Church and Eastern Orthodox Church. They numbered over 1 million before the Syrian Civil War: some 700,000 in Syria, 400,000 in Lebanon, 200,000 in Israel, Palestine and Jordan, with small numbers in Iraq and Egypt. Most Arab Catholic Christians are originally non-Arab, with Melkites and Rum Christians who are descended from Arabized Greek-speaking Byzantine populations. They are members of the Melkite Greek Catholic Church, an Eastern Catholic Church. They number over 1 million in the Middle East. They came into existence as a result of a schism within the Greek Orthodox Church of Antioch due to the election of a Patriarch in 1724. Armenians are present in the Middle East, and their largest community, estimated to have 200,000 members, is located in Iran. The number of Armenians in Turkey is disputed and a wide range of estimates is given as a result. More Armenian communities reside in Lebanon, Jordan and to a lesser degree in other Middle Eastern countries such as Iraq, Israel, Egypt and formerly also Syria (until Syrian Civil War). The Armenian genocide which was committed by the Ottoman government both during and after World War I, drastically reduced the once sizeable Armenian population. Greeks, who had once inhabited large parts of the western Middle East and Asia Minor, declined in number after the Arab conquests, then suffered another decline after the Turkish conquests, and all but vanished from Turkey as a result of the Greek genocide and the expulsions which followed World War I. Today, the largest Middle Eastern Greek community resides in Cyprus and numbers around 793,000. Cypriot Greeks constitute the only Christian majority state in the Middle East, although Lebanon was founded with a Christian majority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Smaller Christian groups in the Middle East include Georgians, Ossetians and Russians. There are also several million foreign Christian workers in the Gulf states, mostly from the Philippines, India, Sri Lanka and Indonesia: Bahrain has 1,000 Christian citizens, and Kuwait has 400 native Christian citizens, in addition to 450,000 Christian foreign residents in Kuwait. Although the vast majority of Middle Eastern populations descend from Pre-Arab and Non-Arab peoples extant long before the 7th century AD Arab Islamic conquest, a 2015 study estimates there are also 483,500 Christian believers from a previously Muslim background in the Middle East, most of them being adherents of various Protestant churches. Converts to Christianity from other religions such as Islam, Yezidism, Mandeanism, Yarsan, Zoroastrianism, Baháʼísm, Druze, and Judaism exist in relatively small numbers amongst the Kurdish, Turks, Turcoman, Iranian, Azeri, Circassian, Israelis, Kawliya, Yezidis, Mandeans and Shabaks. Christians are persecuted widely across the Arab and Islamic world. Christian communities have played a vital role in the Middle East. Middle Eastern Christians are relatively wealthy, well educated, and politically moderate, as they have today an active role in social, economic, sporting and political spheres in their societies in the Middle East. Scholars and intellectuals agree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have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Arab and Islamic civilization since the introduction of Islam, and they have had a significant impact contributing the culture of the Mashriq, Turkey, and Iran. History Evangelization and early history Christianity spread rapidly from Jerusalem along major trade routes to major settlements, finding its strongest growth among Hellenized Jews in places like Antioch and Alexandria. The Greek-speaking Mediterranean region was a powerhouse for the Early Church, producing many revered Church Fathers as well as those who became labelled as heresiarchs, such as Nestorius. From Antioch, where Christians were first so called, came Ignatius, Diodore of Tarsus, John Chrysostom, Theodore of Mopsuestia, Nestorius, Theodoret, John of Antioch, Severus of Antioch and Peter the Fuller, many of whom are associated with the School of Antioch. In like manner, Alexandria boasted many prominent theologians, including Athenagoras, Pantaenus, Clement, Origen, Dionysius, Gregory Thaumaturgus, Arius, Athanasius, Didymus the Blind, Cyril and Dioscorus, associated with School of Alexandria. The two schools dominated the theological controversies of the first centuries of Christian theology. Whereas Antioch traditionally focused on the grammatical and histor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and developed a dyophysite christology, Alexandria was much influenced by neoplatonism, using an allegorical interpretation and developing miaphysitism. Other prominent centres of Christian learning developed in Asia Minor (most remarkably among the Cappadocian Fathers) and the Levantine coast (Gaza, Caesarea and Beirut). Politically, the Middle East of the first four Christian centuries was divided between the Roman Empire and the Parthian Empire (later Sasanian Persia). Christians experienced sporadic persecutions in both political spheres. Within the Parthian Empire, most Christians lived in the region of Mesopotamia/Asuristan (Assyria) and were ethnic Assyrian Mesopotamians who spoke eastern Aramaic dialects loosely related to those Western Aramaic dialects spoken by their co-religionists just across the Roman border, but with Akkadian influences. Legendary accounts are of the evangelization of the East by Thomas (Mar Toma), Addai/Thaddaeus and Mari. Syriac (Syrian//Syriac are etymologically derived from Assyrian) emerged as the standard Aramaic dialect of the three Assyrian border cities of Edessa, Nisibis and Arbela. Translation of the scriptures into Syriac began early in this region, with a Jewish group (probably non-rabbinic) producing a translation of the Hebrew Bible becoming the basis of the Church of the Easts Christian Peshitta. Syriac Christianity is most famous for its poet-theologians, Aphrahat, Ephrem, Narsai and Jacob of Serugh. Eusebius credits Mark the Evangelist as the bringer of Christianity to Egypt, and manuscript evidence shows that the faith was firmly established there by the middle of the 2nd century. Although the Greek-speaking community of Alexandria dominated the Egyptian church, speakers of native Coptic and many bilingual Christians were the majority. From the early 4th century, at the latest, the monastic movement emerged in the Egyptian desert, led by Anthony and Pachomius (see Desert Fathers). Eusebius (EH 6:20) also mentions the appointment of a bishop and the holding of a synod in Bostra around 240, which is the earliest reference to church organisation in an Arabic-speaking area. Later that decade, Eusebius (6:37) describes another synod in Arabia Petraea. Some scholars have followed hints in Eusebius and Jerome that Philip the Arab, the son of an Arab sheikh, may have been the first Christian Roman Emperor. However, evidence to support this theory is thin. The Ghassanid tribe were important Christian foederati of Rome, while the Lakhmids were an Arab Christian tribe that fought for the Persians. Although the Hejaz was never a stronghold of Arab Christianity, there are reports of Christians around Mecca and Yathrib before the advent of Islam. Christianity came to Armenia both from the south, Mesopotamia/Assyria, and the west, Asia Minor, as demonstrated by the Greek and Assyrian-Syriac origin of Christian terms in early Armenian texts. Eusebius (EH 6:46, 2) mentions Meruzanes as the bishop of the Armenians around 260. Following the conversion of King Trdat III to Christianity (circa 301), Gregory the Illuminator was consecrated Bishop of Armenia in 314. Armenians continue to celebrate their church as the oldest national church. Gregory was consecrated at Caesarea in Cappadocia. The Georgian kingdom of Iberia (Kartli) was probably evangelized first in the 2nd or 3rd century. However, the church was only established there in 330s. A number of sources, both in Georgian and other languages, associate Nino of Cappadocia with bringing Christianity to the Georgians and converting King Mirian III of Iberia. Georgian Christian literature emphasizes her connection with Jerusalem and the role played by the Georgian Jewish community in the growth of Christianity. Certainly, early Georgian liturgy does share a number of conspicuous features with that of Jerusalem. The Black Sea coastal kingdom of Lazica (Egrisi) had closer ties to Constantinople, and its bishops were by imperial appointment. Although the Lazican church originated around the same time as its Iberian neighbour, it was not until 523 when its king, Tzath, accepted the faith. The Iberian church was under the authority of the Patriarch of Antioch, until the reforming king Vakhtang Gorgasali set up an independent catholicos in 467. In 314, the Edict of Milan proclaimed religious toleration in the Roman Empire, and Christianity rapidly rose to prominence. The church's dioceses and bishoprics came to be modelled on state administration: partly the motive for the Council of Nicaea in 325. However, Christians in the Zoroastrian Sasanian Empire (speaking variously Syriac, Armenian or Greek) are often found distancing themselves politically from their Roman co-religionists to appease the shah. Thus, around 387, when the Armenian Highland came under Sasanian control, a separate leadership from that in Caesarea developed and eventually settled in Echmiadzin, a division that still, to some extent, exists to this day. Likewise, in the 4th century, the bishop of Seleucia-Ctesiphon, the Sasanian capital, was recognised as leader of the Syriac and Greek-speaking Christians in the Persian empire, assuming the title catholicos, later patriarch. Christianity in Ethiopia and Nubia is traditionally linked to the biblical tale of the conversion of the Ethiopian eunuch in the Acts of the Apostles (8. 26–30). The Kebra Nagast also connects the Yemenite Queen of Sheba with the royal line of Axum. Evidence from coinage and other historical references point to the early 4th-century conversion of King Ezana of Axum as the establishment of Christianity, whence Nubia and other surrounding areas were evangelized, all under the oversight of the Patriarch of Alexandria. In the 6th century, Ethiopian military might conquered a large portion of Yemen, strengthening Christian concentration in southern Arabia. Schisms The first major disagreement that led to a fracturing of the church was the so-called Nestorian Schism of the 5th century. This argument revolved around claims by Alexandrians over alleged theological extremism by Antiochians, and its battleground was the Roman capital, Constantinople, originating from its bishop's, Nestorius's, teaching on the nature of Christ. He was condemned for splitting Christ's person into separate divine and human natures; the extremes of this view, however, were not preached by Nestorius. Cyril of Alexandria succeeded in the deposition of Nestorius at the First Council of Ephesus in 431. The result led to a crisis among the Antiochians, some of whom, including Nestorius himself, found protection in Persia, which continued to espouse traditional Antiochian theology. The schism led to the total isolation of the Persian-sphere Church of the East, and the adoption of much Alexandrian theology in the Antiochian sphere of influence. Some of the Alexandrian victors at Ephesus, however, began to push their anti-Nestorian agenda too far, of whom Eutyches was the most prominent. Much back and forth led to the Council of Chalcedon of 451, which found a compromise that returned to a theology closer to that of Antioch, refereed by Rome, and condemned the monophysite theology of Eutyches. However, the outcome was rejected by many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especially by non-Greek-speaking Christians on the fringe of the Roman Empire – Copts, Syriacs, Assyrians and Armenians. In 482, Emperor Zeno attempted to reconcile his church with his Henotikon. However, reunion was never achieved, and the non-Chalcedonians adopted miaphysitism based on traditional Alexandrian doctrine, in revolt against the Byzantine Church. These so-called Oriental Orthodox Churches include the majority of Egyptian Christians – the Coptic Orthodox Church of Alexandria – majority of Ethiopian and Eritrean Christians – the Ethiopian and Eritrean Orthodox Tewahedo Churches – many Syriacs – the Syriac Orthodox Church – and the majority of Armenians – the Armenian Apostolic Church. The name Melkite (meaning 'of the king' in Aramaic), originally intended as a slur applied to those who adhered to Chalcedon (it is no longer used to describe them), who continued to be organised into the historic and autocephalous patriarchates of Constantinople, Antioch, Alexandria and Jerusalem. Collectively they form the traditional basis for the Greek Orthodox Church, known as Rūm Orthodox () in Arabic, which is their language of worship throughout Lebanon, Egypt, the Palestinian Authority, Israel, Jordan, Syria and Christian diaspora. The Georgian Orthodox and Apostolic Church held to a moderate Antiochian doctrine through these schisms and began aligning itself with Byzantium from the early 7th century, and finally broke off ties with their Armenian non-Chalcedonian neighbours in the 720s. The term Melkite refers to the adherents of the Antiochene Greek Orthodox Patriarchy who switched allegiance to the Papacy in 1729 after a disputed election to the Patriarchal See in 1724 because the See of Constantinople which objected to the canonically-elected Patriarch Cyril who was considered to be too pro-Roman consecrated another candidate (until then the See was technically still in union with the Constantinople and Rome despite the split of 1054). Muslim conquests The Arab Muslim conquests of the 7th century brought to end the hegemony of Byzantium and Persia over the Middle East. The conquest came at the end of a particularly gruelling period of the Roman-Persian Wars, from the beginning of the 7th century, in which the Sasanid Shah Khosrau II had captured much of the Syria, Egypt, Anatolia and the Caucasus, and the Byzantines under Heraclius only managed a decisive counter-attack in the 620s. The Greek-Orthodox Patriarch Sophronius negotiated with Caliph Umar in 637 for the peaceful transfer of Jerusalem into Arab control (including the Umariyya Covenant). Likewise, resistance to the Arab onslaught in Egypt was minimal. This seems to be more due to the war fatigue throughout the region rather than entirely due to religious differences. After the conquests, Muslims initially remained a ruling minority within the conquered territories in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By the 12th century the non-Muslim population had become a minority. The factors and processes that led to the progressive Islamization of these regions during this period, as well as the speed at which conversions happened, is a complex subject that is not fully understood by historians. Among other new rules, the Muslim rulers imposed a special poll tax, the jizya, on non-Muslims, which acted as an economic pressure to convert alongside other social advantages converts could gain in Muslim society. In Egypt, Islamization was likely slower than in other Muslim-controlled regions, with Christians likely constituting a majority of the population until the Fatimid period (10th to 12th centuries), though scholarly estimates on this issue are tentative and vary between authors. In the period prior to the establishment of Abbasid rule in AD 750, many pastoral Kurds moved into upper Mesopotamia, taking advantage of an unstable situation. Cities in northern and northeastern ancient Assyria were raided and attacked by the Kurds of Persian Azerbaijan, "who killed, looted, and enslaved the indigenous population", and the Kurds were moving into various regions in east of ancient Assyria. When the Seljuks invaded Mesopotamia, they recruited the Kurds for their campaigns. The invading Seljuks and Kurds "destroyed whatever they encountered" and enslaved women. The Seljuks rewarded the Kurds for their support with land, and the Seljuk leader Sinjur renamed the region called Kirmanshah in Persia as Kurdistan. Mosul, historically a Christian city, was repeatedly attacked. The historian Ibn Khaldun wrote that 'the Kurds spoiled and spread horror everywhere'. The historian Al Makrezi, referring to the situation that emerged after the Kurdish settlement in al Jazirah, wrote that "they were able to establish Kurdish centres as their shares for helping the Turkish race in their conquest". In time, Armenia and Assyria became "Kurdistan". Afterwards happened the raids of Timur Lang, "whom the Kurds loyally followed and who enabled them to occupy the land of the Armenians, who were forcibly expelled". Timur Lang rewarded the Kurds by "settling them in the devastated regions, which until then had been inhabited by the followers of the Church of the East." Ottoman Empire The Ottoman Turks carried out a series of violent massacres of ethnic Assyrian and Armenian Christians in the 1870s; these killings, which resulted in over ten thousand deaths, were known as the Hamidian massacres. The settlement of the Persian Kurds along the eastern border was the first powerful action in changing the demographics of the Assyrian homeland. The Muslim Kurds remained loyal to the Ottomans as long as they were enjoying power and greatness. The Ottoman Turks conducted a large-scale genocide and ethnic cleansing of the ancient and indigenous Greek, Armenian, Assyrian, and Maronite Christian inhabitants of Anatolia, northwestern Iran, the fringes of northern Iraq and northern Syria, and Mount Lebanon during and immediately after World War I, resulting in well over 3 million deaths among the 6 million Christians who were living in the Ottoman Empire in 1914 of 26 million inhabitants and large-scale deportations in the Armenian genocide, Assyrian genocide, Greek genocide, the Dersim Massacre, and the Great Famine of Mount Lebanon. The Ottomans reinforced their eastern frontier with what they "considered a loyal Sunni Kurd element". They settled the Kurds in these regions in return for their support in their campaigns against the Persians. In 1583 Sultan Murad IV "gave huge provinces to the Kurdish tribe of Mokri", whose leader claimed to descend from Saladin. The French traveler Monsieur Tavernier noted that in 1662, Van and Urmia were purely Armenian; however, only a century later, another European traveler, Carsten Niebuhr, noted that both Turkomans and Kurds were involved in spreading disturbances. In 1840, Hortio Southgate visited these same regions, he was surprised by the "dramatic changes" and by "the decline in the number of the Armenians compared with the number of the new Kurdish settlers who then were still in the process of moving in". Southgate ascribed these changes to "the Kurdish persecution of the indigenous people". The inhabitants of Salamis, for instance, had been forced to leave. The Russian historian Minorsky at about the same time also stated that "the Kurds had occupied parts of Armenia permanently and were no longer living on their original land." According to Aboona, "the majorities, in particular the Kurds, rejected any form of coexistence" with Assyrians, and "in the eyes of the Kurds", the presence of Assyrian tribes in the midst of their own "settlements represented a serious challenge to their dominance of the region. The remaining Assyrian settlements prevented Kurdish settlements from forming a cohesive, homogenous ethnic block" and the "Kurds' aspirations remained unfulfilled". But when Nadir Shah invaded the territory of ancient Assyria in 1743 he got the full backing and support of the Kurds. This was a further step to "strengthening both the older Kurdish settlements, including those made after Çaldıran, and the newer ones that followed Nadir Shah's İnvasİon." Hence the Assyrians lost both land and numbers. After Nadir Shah's invasion, the "Assyrian tribes also faced further tightening of the Kurdish circle around their country". According to Adoona, "in the end, the independence of the Assyrian tribes was destroyed not directly by the Turks but by their Kurdish neighbours under Turkish auspices." Under European colonial rule Persecution of Christians in Middle East In spite of the fact that every country in the Middle East has at least a small number of worshippers of Christ from a Muslim background, and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vast majority of native Christians are Arabic speakers themselves,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face persecution –in various grades, depending on the residence country– and are often isolated. The defeat and dissolution of the Ottoman Empire (1908–1922) and World War I (1914–1918) ushered in the greatest period of violence against Christians in the region. The Ottoman Turks conducted a large-scale genocide and ethnic cleansing of the ancient and indigenous Greek, Armenian, Assyrian, and Maronite Christian inhabitants of Anatolia, north-western Iran, the fringes of northern Iraq and northern Syria, and Mount Lebanon during and immediately after the First World War, resulting in well over 3 million deaths and large-scale deportations in the Armenian genocide, Assyrian genocide, Greek genocide, the Dersim Massacre, and Great Famine of Mount Lebanon. More recently, the fall of Saddam Hussein's regime in Iraq, the Syrian Civil War and the concomitant rise of ISIS have greatly increased violence against Christians in those countries. Some, including Hillary Clinton or the European Parliament referred to the ISIS campaign against Christians and other religious minorities in the region as a genocide. Later on, in March 2016 the United States officially joined this view, with U.S. Secretary of State John Kerry declaring during a news conference at the State Department that ISIS "is responsible for genocide against groups in areas under its control including Yazidis, Assyrian Christians, Armenians and Shia Muslims"; it was the first time since Darfur (2004) that the United States declared a genocide. Kurdish tribes in Turkey, Syria, and Iran have conducted regular raids against their Christian neighbors and even paramilitary assaults during World War I. Kurds were responsible for most of the atrocities committed against the Assyrian Christians due also to a long tradition of perceived Kurdish rights to pillage Christians. A Kurdish chieftain assassinated the patriarch of the church of the East at the negotiation dinner in 1918, and the aftermath led to further decimation of the Christian population. Christians today Bahrain Bahrain's second largest religion is Christianity forming a minority of 14.5% of Bahrain. Christians in Bahrain number 205,000 people. In the 5th century, Bahrain was a center of Nestorian Christianity, including two of its bishoprics. The ecclesiastical province covering Bahrain was known as Bet Qatraye. Samahij was the seat of bishops. Bahrain was a center of Nestorian Christianity until al-Bahrain adopted Islam in 629 AD. As a sect, the Nestorians were often persecuted as heretics by the Byzantine Empire, but Bahrain was outside the Empire's control offering some safety. The names of several of Muharraq Island's villages today reflect this Christian legacy, with Al Dair meaning "the monastery" or "the parish." In 410 AD, according to the Oriental Syriac Church synodal records, a bishop named Batai was excommunicated from the church in Bahrain. Alees Samaan, the former Bahraini ambassador to the United Kingdom is a native Christian. Egypt Most Christians in Egypt are Copts, who are mainly members of the Coptic Orthodox Church. The Coptic language – a derivative of the Ancient Egyptian language, written mainly in the Greek alphabet, is used as the liturgical language of all Coptic churches inside and outside of Egypt. Although ethnic Copts in Egypt now speak Egyptian Arabic (the Coptic language having ceased to be a working language by the 18th century), they believe in an Ancient Egyptian Coptic identity rather than an Arab identity (also referred to as Pharaonism). Copts reside mainly in Egypt, but also in Sudan and Libya, with tiny communities in Israel, Cyprus, Jordan, Lebanon, and Tunisia. Copts presently constitute the largest Christian population in the Middle East, generally estimated at 10–15% by officials, or in the 20 million range. However, as Egyptian censuses since 2006 have not reported religious affiliation due to being optional, along with the government acknowledging the census is not a proper representation of Christians, various Coptic groups and churches claim a higher number in the range of 15 to 23 million. Many Copts are internationally renowned. Some of the most well known Copts include Boutros Boutros-Ghali, the sixth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Sir Magdi Yacoub, the cardiothoracic surgeon; Hani Azer, the civil engineer; billionaire Fayez Sarofim, one of the richest men in the world; and Naguib Sawiris, the CEO of Orascom. Iraq Christianity has a long history in Iraq, with the early conversions of the indigenous Assyrian inhabitants of Assyria (Parthian controlled Assuristan) dating from the 1st to 3rd centuries AD. This region was the birthplace of Eastern Rite (Assyrian Church of the East) Christianity, a flourishing Syriac literary tradition, and the centre of a missionary expansion that stretched as far as India, Central Asia and China. By one estimate, there was about 1.5 million largely Assyrian Christians in Iraq by 2003, or 7% of the population, but with the fall of Saddam Hussein Christians began to leave Iraq in large numbers, and the population shrank to less than 500,000 today. Assyrian Christians still made up the majority population in northern Iraq until the massacres conducted by Tamurlane in the 14th century, which also saw their ancient city of Assur finally abandoned after 4,000 years. In modern times, Assyrian Christians numbered about 636,000 to 800,000 in 2005, representing 3% to 5% of the population of the country, mostly in Iraqi Kurdistan. The vast majority are Neo-Aramaic speaking ethnic Assyrians (also known as Chaldo-Assyrians), descendant from the ancient Mesopotamians in general and the ancient Assyrians more specifically, who are concentrated in the north, particularly the Nineveh Plains, Dohuk and Sinjar regions, border regions with south east Turkey, north west Iran and northern Syria, and in and around cities such as Mosul, Erbil, Kirkuk, and also in Baghdad. There are also a very small proportion of Arab Christians and small numbers of Armenian, Kurdish, Iranian and Turcoman Christians. The Iraqi Christian population is also declining due to lower birth rates and higher death rates than their Muslim compatriots. Since the 2003 invasion, Iraqi Christians suffer from lack of security. Many lived in the capital Baghdad and in Mosul prior to the Iraq War, but most have since fled to northern Iraq, where Assyrian Christians form a majority in some districts. Assyrian Christians belong to Syriac churches such as the Chaldean Catholic Church, the Assyrian Church of the East, the Ancient Church of the East, the Syriac Catholic Church and the Syriac Orthodox Church, with a small number of Protestant converts following the Assyrian Pentecostal Church and Assyrian Evangelical Church. The Iraqi former foreign minister and deputy prime minister Tariq Aziz (real name Michael Youkhanna) is probably the most famous Assyrian Iraqi Christian, along with the footballer Ammo Baba. Assyrians in Iraq have traditionally excelled in business, sports, the arts, music, and the military. Assyrians are distinct from other Semitic Christian groups in the Middle East in that they have retained their original Neo-Aramaic language and Syriac written script, and have maintained an Assyrian continuity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resisting the adoption of Arabic language and Arabization. In his recent PhD thesis and in his recent book the Israeli scholar Mordechai Zaken discussed the history of the Assyrian Christians of Turkey and Iraq (in the Kurdish vicinity) during the last 180 years, from 1843 onwards. In his studies Zaken outlines three major eruptions that took place between 1843 and 1933 during which the Assyrian Christians lost their land and hegemony in their habitat in the Hakkārī (or Julamerk) region in southeastern Turkey and became refugees in other lands, notably Iran and Iraq, and ultimately in exiled communities in Western countries (the US, Canada, Australia, New Zealand, the United Kingdom, Russia and within many of the 27 EU member states like Sweden, France, Germany, Austria and the Netherlands). Mordechai Zaken wrote this important study from an analytical and comparative point of view, comparing the Assyrian Christians experience with the experience of the Kurdish Jews who had been dwelling in Kurdistan for two thousands years or so, but were forced to migrate the land to Israel in the early 1950s. The Jews of Kurdistan were forced to leave and migrate as a result of the Arab-Israeli war, as a result of the increasing hostility and acts of violence against Jews in Iraq and Kurdish towns and villages, and as a result of a new situation that had been built up during the 1940s in Iraq and Kurdistan in which the ability of Jews to live in relative comfort and relative tolerance (that was erupted from time to time prior to that period) with their Arab and Muslim neighbors, as they did for many years, practically came to an end. At the end, the Jews of Kurdistan had to leave their Kurdish habitat en masse and migrate into Israel. The Assyrian Christians on the other hand, came to similar conclusion but migrated in stages following each and every eruption of a political crisis with the regime in which boundaries they lived or following each conflict with their Muslim, Turkish, Arabs or Kurdish neighbors, or following the departure or expulsion of their patriarch Mar Shimon in 1933, first to Cyprus and then to the United States. Consequently, indeed there is still a small and fragile community of Assyrians in Iraq, however, millions of Assyrian Christians live today in exile in many communities in the West. Iran Iran's Christian minority numbers some 300,000–370,000. Most are ethnic Armenians (up to 250,000–300,000) and Assyrians (up to 40,000), who follow Armenian Orthodox and Assyrian Church of the East Christianity respectively. There are at least 600 churches serving the nation's Christian adherents. Christianity has a long history in Iran, dating back to Parthian times, in the early years of the Christian faith, although the major religion among the Iranian peoples themselves was Zoroastrianism. The Sasanian Empire was the centre of the Nestorian Church. Many of the early followers were Armenians, and transplanted Assyrians living in the Urmia region, and along the north western border with Mesopotamia. These were added to by other Semites, followers of the Nestorian church, some of whom were Assyrians from Mesopotamia, others being from Syria. Furthermore, there has been a thriving native Christian Armenian community since ancient times in northwestern Iran, nowadays Iranian Azerbaijan. The many Armenian churches and monasteries in the region, such as the notable St. Thaddeus Monastery, are extant remainders of this. Other significantly Christian populated areas in Parthian and Sassanid Iran included the provinces of Persian Armenia, Caucasian Albania, and Caucasian Iberia, amongst others. In the course of the 20th century, Iran's large Christian minority, mainly the native Armenians and Assyrians who have a presence in Iran for millennia, took a heavy blow due to the Assyrian genocide (by Ottoman troops crossing the border), Armenian genocide (by Ottoman troops crossing the border), the Iranian Revolution and the Iran–Iraq War. Especially due to the two Ottoman-conducted genocides, regions where Christians even made up majorities or had a significant native historical presence for millennia, never became the same again. However, due to the same genocides, Iran's Christian community was boosted as well at the same time as many migrated to Iran from the Ottoman regions. The most famous contemporary Christian of Iranian origin is probably the American tennis player Andre Agassi, who is ethnically Armenian-Assyrian. The "Armenian Monastic Ensemble", which includes several of the nation's most ancient Christian Armenian churches and monasteries, are inscribed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Israel Some 80% of Christians residing permanently in Israel are Arabs, numbering at least 180,400 as of 2019. Of all Christians, around 60% belong to the Melkite Greek Catholic Church, 32% of all Christians belong to the Eastern Orthodox Church, mainly the Jerusalem Patriarchate though some recent immigrants are Russian Orthodox. Smaller numbers are Roman Catholics, Maronites, Assyrians, Armenians, Georgians and Messianic Jews. During the 1990s, the Christian community had been increased due to the immigration of Jewish-Christian mixed marriages, who had predominantly arrived from the countries of the former Soviet Union. This added another 20–30 thousands of mostly Greek Orthodox Christians with Russian and Ukrainian ancestry. Many Christian towns or neighborhoods were totally or partially destroyed during the creation of the State in the 1940s and 1950s such as Iqrith, Al bassa, kufur birim, Ma’loul, West Jerusalem neighborhoods, all residents of Safed, Beisan, Tiberias (including Christians), a big part of the Christians in Haifa, Jaffa, Lydda, Ramleh and other places. In recent years, the Christian population in Israel has increased significantly by presence of foreign workers from a number of countries (predominantly the Philippines and Romania). Numerous churches have opened in Tel Aviv, in particular. Nine churches are officially recognized under Israel's confessional system, for the self-regulation of status issues, such as marriage and divorce. These are the Eastern Orthodox, Roman Catholic (Latin rite), Gregorian-Armenian, Armenian Catholic, Syriac Catholic, Chaldean (Uniate), Melkite (Greek Catholic), Assyrian Church of the East, Ethiopian Orthodox, Maronite and Syriac Orthodox churches. There are more informal arrangements with other churches such as the Anglican Church and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Arab Christians are one of the most educated groups in Israel. Maariv have describe the Arab Christians sectors as "the most successful in education system", since Arab Christians fared the best in terms of education in comparison to any other group receiving an education in Israel. Arab Christians have one of the highest rates of success in the matriculation examinations, (64%) both in comparison to the Muslims and the Druze and in comparison to all students in the Jewish education system as a group. The rate of students studying in the field of medicine was also higher among the Arab Christian students, compared with all the students from other sectors. The percentage of Arab Christian women who are higher education students is higher than other sectors. Jordan In Jordan, Christians constitute 6% of the population as of 2017 according to the Jordanian government. This percentage represents a sharp decrease from a figure of 18% in the early 20th century. This drop is largely due to an influx of Muslim Arabs from the Hijaz after the First World War. Almost 50% of Jordanian Christians belong to the Eastern Orthodox Church, 45% are Catholics, with a small minority adhering to Protestantism. A part of Jordanian Christians have Palestinian roots since 1948. Christians are well integrated in the Jordanian society and have a high level of freedom. Nearly all Christians belong to the middle or upper classes. Moreover, Christians enjoy more economic and social opportunity in 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 than elsewhere in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They have a disproportionately large representation in the Jordanian parliament (10% of the Parliament) and hold important government portfolios, ambassadorial appointments abroad, and positions of high military rank. A survey by a Western embassy found that half of Jordan's prominent business families were Christians. Christians run about a third of Jordan's economy. Jordanian Christians are allowed by the public and private sectors to leave work to attend Divine Liturgy or Mass on Sundays. All Christian religious ceremonies are publicly celebrated. Christians have established good relations with the royal family and the various Jordanian government officials and they have their own ecclesiastic courts for matters of personal status. Most native Christians in Jordan identify themselves as Arab, though there are also non-Arab Assyrian/Syriac, Armenian and Maronite groups in the country. Lebanon Lebanon holds the largest proportion of Christians in the Arab world proportionally and falls behind only Egypt and Syria in absolute numbers. Christians were half of Lebanon's population before the Lebanese Civil War (1975–1990), but in 2012 they are believed to form a large minority of 40.5% of the country's population (according to the last official Lebanese Census of 1932, the Lebanese Christian population was 51% of the country's population). However, if one counts the estimated 8–14-million-strong Lebanese diaspora, they form far more than the majority of the population. The exact number of Christians is uncertain because no official census has been made in Lebanon since 1932. Lebanese Christians belong mostly to the Maronite Catholic Church and Greek Orthodox, with sizable minorities belonging to the Melkite Greek Catholics. Lebanese Christians are the only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with a sizable political role in the country. As a result of the National Pact the Lebanese president, half of the cabinet, and half of the parliament follow one of the various Lebanese Christian rites. Maronite tradition can be traced back to Saint Maron in the 4th century, the founder of national and ecclesiastical Maronitism. Saint Maron adopted an ascetic, reclusive life on the banks of the Orontes river near Homs–Syria and founded a community of monks who preached the Gospel in the surrounding area. The Saint Maron Monastery was too close to Antioch, making the monks vulnerable to emperor Justinian II's persecution. To escape persecution, Saint John Maron, the first Maronite patriarch-elect, led his monks into the Lebanese mountains; the Maronite monks finally settled in the Qadisha valley. During the Muslim conquest, Muslims persecuted the Christians, particularly the Maronites, with the persecution reaching a peak during the Umayyad caliphate. Nevertheless, the influence of the Maronite establishment spread throughout the Lebanese mountains and became a considerable feudal force. After the Muslim Conquest, the Maronite Church became isolated and did not reestablish contact with the Church of Rome until the 12th century. According to Kamal Salibi, a Lebanese Protestant Christian, some Maronites may have been descended from an Arabian tribe, who immigrated thousands of years ago from the Southern Arabian Peninsula. Salibi maintains "It is very possible that the Maronites, as a community of Arabian origin, were among the last Arabian Christian tribes to arrive in Syria before Islam". As a matter of fact, Salibi bases his conclusions, not on scientific evidences or irrefutable historical facts, but rather on his pan Arabic ideology. Hence, the majority of Lebanese Maronite Christians rejects his ideas, and points out that they are of pre-Arab origin. As a further matter, recent studies confirmed the Lebanese (the Maronites especially) lineage to the Phoenicians/Canaanites by DNA genome study. The study published in the 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 shows that present-day Lebanese derive most of their ancestry from a Canaanite-related population, which therefore implies substantial genetic continuity in the Levant since at least the Bronze Age. Many Lebanese Maronite Christians consider themselves of indigenous Phoenician ancestry, arguing that their presence predates the arrival of Arabs in the region. Though they originate from the Orontes river near Homs, Syria and founded a community of monks who left the Syriac Orthodox church. The Lebanese town of Bsharri is the largest predominantly Christian town in Lebanon and the Middle East (with Maronite Christians greater than 99.5% of the town and District's total population) and the one with the largest number of Catholics. While several Middle Eastern cities (Damascus, Cairo, Jerusalem) have larger Christian communities, yet these do not constitute a majority. The capital Beirut also has a larger Christian population than Bsharri (in the city proper), though most belong to the Orthodox confession. Turkey Christianity has a long history in Anatolia (now part of the Republic of Turkey), which is the birthplace of numerous Christian Apostles and Saints, such as Paul of Tarsus, Timothy, Nicholas of Myra, Polycarp of Smyrna and many others. Two out of the five centers (Patriarchates) of the ancient Pentarchy are in Turkey: Constantinople (Istanbul) and Antioch (Antakya). The Greek Orthodox Ecumenical Patriarch of Constantinople still today has his residence in Istanbul. Antioch was also the place where the followers of Jesus were called "Christians"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as well as being the site of one of the earliest and oldest surviving churches, established by Saint Peter himself. For a thousand years, the Hagia Sophia was the largest church in the world. The Greeks of western Anatolia and Georgians of the Black Sea region have histories dating from the 20th and 10th centuries BC respectively, and were also Christianized during the first few centuries AD. Similarly the Assyrian and Armenian peoples have an ancient history in southeastern Anatolia, dating back to 2000 BC and 600 BC respectively; both of these peoples were Christianized between the 1st and 3rd centuries AD. These ancient Christian ethnic groups were drastically reduced by genocide during and after World War I (see Armenian genocide, Assyrian genocide and Greek genocide) at the hands of the Ottoman Turkish army and their Kurdish allies. Population exchange between Greece and Turkey is another reason. The percentage of Christians in Turkey fell from 19 percent in 1914 or 3 million (thought to be an undercount by one-third omitting 600,000 Armenians, 500,000 Greeks and 400,000 Assyrians) to 2.5 percent in 1927 in a population of 14 million, due to events which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country's demographic structure, such as the Armenian genocide, the population exchange between Greece and Turkey, and the emigration of Christians (such as Levantines, Greeks, Armenians etc.) to foreign countries (mostly in Europe and the Americas) that actually began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gained pace in the first quarter of the 20th century, especially during World War I and after the Turkish War of Independence. Today there are more than 160,000 people of different Christian denominations, representing less than 0.2 percent of Turkey's population, including an estimated 80,000 Oriental Orthodox, 35,000 Roman Catholics, 18,000 Antiochian Greeks, 5,000 Greek Orthodox and smaller numbers of Protestants (mostly ethnic Turkish). Currently there are 236 churches open for worship in Turkey. The Eastern Orthodox Church has been headquartered in Istanbul since the 4th century. Palestine About 173,000 Arab Palestinian Christians lived in the Palestinian Authority (including the West Bank and Gaza Strip) in the 1990s. Both the founder of 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George Habash, and the founder if its offshoot the DFLP, Nayif Hawatmeh, were Christians, as is prominent Palestinian activist and former Palestinian Authority minister Hanan Ashrawi. Nowadays, 50% of all Palestinian Christians are Catholics. Over the last years, unlike the increase trend in the Christian population of Israel, the number of Christians in the Palestinian Authority has declined severely. The decline of Christianity in the Palestinian Authority is largely attributed to poor birth rates, compared with the dominant Muslim population. The updated number of Arab Christians in the Palestinian Authority is under 75,000. Gaza Strip Since the Hamas takeover of the Gaza Strip in 2007, anti-Christian attitudes have been on the increase. Unlike in the 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the Hamas administration does not include Christians. From about 2,000–3,000 Christians before Hamas takeover, as few as one thousand remain in the Gaza Strip under Hamas Administration. Syria In Syria, Christians formed just under 15% of the population (about 1.2 million people) according to the 1960 census, but no newer census has been taken. Current estimates suggest that they now comprise about 3% of the population, due to higher emigration rates than their Muslim compatriots. The largest Churches are the Greek Orthodox and Greek Catholic. There are also Syriac Orthodox, Syriac Catholic, Armenian Orthodox, Armenian Catholic, Assyrian Church of the East and Chaldean Catholic Church Christians. As of 2018, more than half of the nation's Christians left the country due to the Syrian Civil War. Syrian Christians are largely Arab Christians in the bulk of the country, though some may identify as Arabized Greeks (Melkites and Orthodox Church of Antioch) and ethnic Arameans (among Jacobites). In the big cities there are many ethnic Armenians and in the northeastern Al-Hasakah Governorate the majority of the Christians are ethnic Assyrians. Emigration Many millions of Middle Eastern Christians currently live in the diaspora, elsewhere in the world. These include such countries as Argentina, Australia, Brazil, Canada, Chile, Colombia, Cuba, the Dominican Republic, Mexico, the United States and Venezuela among them. There are also many Middle Eastern Christians in Europe, especially in the United Kingdom, France (due to its historical connections with Lebanon, Egypt, Syria), and to a lesser extent, Ireland, Germany, Spain, Italy, Greece, Bulgaria, Russia, and the Netherlands. The largest number of Middle Eastern Christians residing in the diaspora is that of Lebanese Christians, who have migrated out of Lebanon for security and economic reasons since WWI. Many fled Lebanon during the Lebanese Civil War. The countries with significant Lebanese Christians include such countries as Argentina, Australia, Brazil, Canada, Chile, Colombia, Cuba, Cyprus, Dominican Republic, Germany, Greece, France, Mexico, New Zealand, Sweden, United Kingdom, United States and Venezuela among them. Assyrian Christians currently reside in diaspora with large communities in the US, Canada, Australia and Europe, reaching more than a million outside of the Middle East. Much of these is attributed to the massive Assyrian Christian exodus from northern Iraq following the 2003 invasion and the consequent Iraq War, and from north-eastern Syria following the 2011 Arab Spring and the consequent Syrian Civil War. Among the Arab Christians, about a million Palestinian Christians reside in the diaspora, largely in the Americas, where their communities have been established since the late 19th century and peaked following the 1948 Arab–Israeli War. More emigrated from Lebanon during the Lebanese Civil War. The majority of self-identifying Arab Americans are Eastern Rite Catholic or Orthodox Christian, according to the Arab American Institute. On the other hand, most American Muslims are black (African Americans or Sub-Saharan Africans) or of South Asian (Indian, Pakistani or Bangladeshi) origin. Churches Coptic Christians Coptic churches are mainly divided into: Coptic Orthodox Church of Alexandria Coptic Catholic Church Evangelical Church of Egypt (Synod of the Nile) Assyrian/Chaldean and Syriac/Aramean Christians Many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are Semitic followers of Syriac Christianity, are ethnically and linguistically distinct from Arabs, and divided into: Chaldean Catholic Church pro-Catholic faction of the Church of the East since 1552 AD – ethnically the same as Assyrians, made up of Assyrian Catholics. Mainly found in Iraq, Iran, south east Turkey and north east Syria. Sometimes called Chaldo-Assyrians to avoid division on theological lines. Assyrian Church of the East, (the traditionalist faction of the Church of the East and somewhat inaccurately as the Nestorian Church) 1st century AD – Mainly found among the ethnic Assyrians of Iraq, Iran, south east Turkey and north east Syria. Ancient Church of the East since the 20th century – An offshoot of the Assyrian Church of the East. Mainly found in Iraq, Iran, south east Turkey and north east Syria Assyrian Evangelical Church – Made up of ethnic Assyrian converts to Protestantism, since the 20th century. Mainly found in Iraq, Iran, south east Turkey and north east Syria Assyrian Pentecostal Church – Made up of ethnic Assyrian converts to Protestantism, since the 20th century. Mainly found in Iraq, Iran, south east Turkey and north east Syria Syriac Orthodox Church (also known as the Jacobite Church and sometimes Assyrian Orthodox Church) 1st century AD. Mainly found in Syria, south central Turkey and to a small degree in Iraq and even a smaller degree in Kerala, India by the Syrian Malabar Nasranis. Syriac Catholic Church since the 18th century. Mainly in Syria and Iraq. Maronite Church, in union with Rome, since the 5th century AD (mainly living in Lebanon and with large diaspora) Melkite/Greek Christians Christians, belonging mostly to Greek Orthodox and Melkite churches: Eastern Orthodox Church Church of Antioch Church of Jerusalem Church of Alexandria Catholic Church Melkite Greek Catholic Church All of them are mainly found in countries like Lebanon, Syria, Israel, Palestine, Jordan, Egypt and to a lesser degree in Turkey, Iraq, Libya, and Sudan. Armenian Christians There is also the Armenian Church with its divisions: Armenian Apostolic Church Armenian Catholic Church Armenian Evangelical Church Armenia, historically, was the first state to accept Christianity. There are small numbers of Russian Orthodox and Assyrian Christians in Armenia also. Armenian Christians are also to be found in Lebanon, Syria, Iran, Turkey, Iraq, Israel, Palestine, Jordan, Egypt and the Gulf states as expats. Kurdish Christians The Kurdish-Speaking Church of Christ (The Kurdzman Church of Christ) is an Evangelical church with mainly Kurdish adherents. Anglicans The Episcopal Church in Jerusalem and the Middle East is the Anglican church responsible for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It is quite small, with only some 35,000 members throughout the area. The Diocese of Cyprus and the Gulf looks after 30,000-40,000 Anglicans in the area and ministers to Protestants and others. Turkish Christians Autocephalous Turkish Orthodox Patriarchate Expatriate Christians The Father's House AG Church Notable Middle Eastern Christians Notable Christians of Middle Eastern ancestry in Middle East and Diaspora: Andre Agassi – former Iranian-American tennis player (Assyrian-Armenian descent) Alees Samaan, the Bahraini ambassador to the United Kingdom. Vera Baboun, first female Mayor of Bethlehem (Palestinian Roman Catholic Christian) Fairuz, Lebanese singer. (Orthodox Christian, originally Maronite) Boutros Boutros-Ghali, Egyptian-American 6th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Coptic Orthodox Christian) Elias Chacour Archbishop, prominent reconciliation and peace activist in Israel (Melkite Greek Catholic Christian) Michel Aflaq, Syrian founder of pan-Arabist Baath party, (Greek Orthodox Christian). Tariq Aziz, former Iraqi (Baath party) foreign minister and deputy prime minister (Chaldean Catholic Christian, an ethnic Assyrian) Suleiman Mousa, prominent Jordanian historian and author of T.E. Lawrence: An Arab View, (Catholic Christian). George Wassouf, Syrian singer (an ethnic Syriac). Edward Said, prominent Palestinian intellectual and writer (Greek Orthodox Christian background). Constantin Zureiq, prominent Syrian intellectual and academic (Greek Orthodox Christian). George Habash, Palestinian founder of PFLP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Nayef Hawatmeh, Jordanian founder of DFLP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Said Khoury, Palestinian entrepreneur, co-founder of the Consolidated Contractors International Company,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Yousef Beidas, prominent Palestinian Financier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John Sununu, US political leader of Palestinian-Lebanese background (Melkite Greek Catholic Christian). Hanan Ashrawi, Palestinian scholar and politic activist (Anglican Arab Christian). Kamal Salibi, Lebanese historian and scholar (Protestant Christian). Steve Bracks (from the Barakat Lebanese family) Australian State MP, Premier of Victoria, Australia (Catholic Arab Christian). René Angélil, Canadian producer and husband of Céline Dion of Lebanese-Syrian background (Greek Catholic Christian). Carlos Menem, president of Argentina from 1988 to 1999 of Syrian background (ethnically Arab converted to Roman Catholic from Sunni Islam) Emile Habibi, Arab Israeli writer (Anglican Christian). Azmi Bishara, former Arab Israeli Knesset member, now residing in Qatar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Azmi Nassar, Arab Israeli manager of the Palestinian national football team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Salim Tuama, Hapoel Tel Aviv midfielder, (Arab citizen of Israel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Simon Shaheen, Israeli oud and violin virtuoso and composer (Greek Catholic Arab Christian) Salim Jubran, member of the Israeli Supreme Court (Maronite Christian) Ralph Nader, US Presidential candidate and consumers' rights activist of Lebanese background (Greek Orthodox background, but declines to comment on personal religion). Hani Naser, musician, producer (son of Jordanian Christian immigrants). Shakira, international superstar from Colombia, daughter of Lebanese father from Zahle and Colombian mother of Spanish descent (Greek Orthodox Christian). Tony Shalhoub, three-time Emmy Award and Golden Globe-winning American television and film actor of Lebanese background (Maronite Christian). Marie Keyrouz, chanter of Eastern Church music, Melkite Greek Catholic nun. Founder of L'Ensemble de la Paix (Ensemble of Peace) and Founder-President of L'Instituit International de Chant Sacré (International Institute of Sacred Chant) in Paris. Julio César Turbay, president of Colombia from 1978 to 1982 from Lebanese background (Maronite Christian). Carlos Slim Helú, Mexican businessman of Lebanese background (Maronite Christian). Bruno Bichir and Demián Bichir, Mexican actors of Lebanese background (Maronite Christians). Amin al-Rihani, Lebanese writer and intellectual (Maronite Christian). Afif Safieh, Palestinian diplomat (Greek Catholic Arab Christian). Bobby Rahal, race car driver, team owner, and businessman of Lebanese background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Doug Flutie, Heisman Trophy winner, NFL quarterback of Lebanese origin (Maronite Christian). Jacques Nasser, past CEO Ford Motor Company, French-American of Lebanese descent (Greek Orthodox Christian). Helen Thomas, Whitehouse Journalist, American of Lebanese descent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George Mitchell, former US Senator and Politician of Lebanese background (Maronite Christian). John Mack, former chairman & CEO of Morgan Stanley – an American of Lebanese descent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Mosab Hassan Yousef, author of Son of Hamas, American of Palestinian descent (Protestant Arab Christian, converted from Islam). Vartan Gregorian, American academic and president of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Iranian-Armenian descent). Alex Agase, American – Top level American Football (gridiron) player (Assyrian). Lou Agase, American – Top level American Football (gridiron) player (Assyrian). Mitch Daniels – Governor of Indiana and potential Republican presidential candidate (Syrian, Greek Orthodox). Rosie Malek-Yonan, American actress, author, director, public figure and activist. (Assyrian descent). Adam Benjamin, Jr., Indiana Congressman (Assyrian). Anna Eshoo, California Congressman (Assyrian). John Nimrod, Illinois Senator (Assyrian). Aril Brikha, techno/nouse music artist (Assyrian). Linda George, singer (Assyrian). Sargon Gabriel, singer (Assyrian). Klodia Hanna, Miss Iraq 2006 (Assyrian). Christian Demirtaş, German footballer (Assyrian). Daniel Unal, Turkish footballer – playing for FC Basle in Switzerland (Assyrian Christian). Peter Medawar, of Lebanese descent (Maronite Christian); was awarded the 1960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Elias James Corey, of Lebanese descent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won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Tony Fadell, Lebanese American inventor known as "one of the fathers of the iPod" (Greek Orthodox ). Michael E. DeBakey, World-renowned American cardiac surgeon of Lebanese origin (Maronite Christian). Michael Atiyah, British mathematician specialising in geometry (Greek Orthodox Arab Christian). Ardem Patapoutian, Armenian Lebanese winner of the Nobel Prize in Medicine. Michel Temer, former president of Brazil. Julia Sawalha, British actress. Nadia Sawalha, British actress. Nabil Sawalha, Jordanian actor. Daoud Kuttab, Palestinian journalist with American citizenship. See also Persecution of Christians by ISIL Arab Christians Syriac Christianity Christian Rūm or Rum Millet Antiochian Greek Christians Tantur Ecumenical Institute Middle East Council of Churches References Further reading Holland, Tom. "Persecution of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is a crime against humanity." The Guardian. Sunday 22 December 2013. Pacini, Andrea (2005). "Christianity: Christianity in the Middle East." In Jones, Lindsay.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3. 2nd ed.
https://ko.wikipedia.org/wiki/%EA%B3%BC%EB%91%90%EC%A0%9C%EC%9D%98%20%EC%B2%A0%EC%B9%99
과두제의 철칙
과두제의 철칙은 독일의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1911년 저서 《정당사회학》에서 제시한 정치이론으로, 아무리 민주적인 조직이라도 조직운영의 "전략적, 기술적 필요상"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과두 지배가 필연적인 철칙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소수자 지배 이론 중 하나이다. 미헬스의 이론은 모든 복잡한 조직은 처음에 얼마나 민주적이었나와 관계없이 결국 과두제의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 예측한다. 미헬스는 충분히 크고 복잡한 조직은 순수한 직접 민주주의 원리로만 운영될 수 없으므로, 선거든 기타 방법을 통해서든 조직의 권력이 항상 그 집단 내 몇몇 개인에게 위임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1911년 저서에서 미헬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위시한 좌파정당이나 무역 조합 등 민주적 운영을 지향하는 집단의 사례를 분석하며, 조직이 비대화될수록 오히려 소수자 지배가 강해지는 법칙을 대의 민주주의에 적용하고, "조직이 있는 곳엔 과두제가 있다."고 썼다. 더 나아가 "역사적 진보는 과두제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예방적 조치를 조롱한다."고까지 표현했다. 미헬스에 따르면 모든 조직은 결국 "지도 계층"에 의해 운영되며,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조직을 위해 활동하고 대가를 받는 관리자, 행정가나 대변인, 정치전략가 등 관료제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 "지도 계층"은 대중을 위한 봉사자와는 거리가 멀고, 필연적으로 점차 조직의 일반 구성원을 대신해 조직의 권력 구조를 지배하는 주체로 성장한다. 정보에 대한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권력층은 성공적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며, 보통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일반 조직원들의 무관심과 무심함, 미참여 때문에 책임성이 거의 없다. 미헬스는 지도자 직위를 책임성 있게 유지하려는 민주적 시도들은 실패하기 쉽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권력을 가지면 충성을 보상할 능력, 조직에 대한 정보를 통제할 능력, 의사결정절차를 통제할 능력 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상의 권력기제들은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산출하는 어떠한 의사결정이라도 그 결과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데 사용될 수 있다. 미헬스는 엘리트 지배를 소멸시키려는 대의 민주주의의 공식적 목표는 성취 불가능하고, 대의 민주주의란 특정 엘리트 집단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외피이며 엘리트 지배(과두제)는 필연적이라 주장한다. 이는 막스 베버의 지도자 민주주의(Führerdemokratie)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미헬스는 이탈리아로 이민가 무솔리니의 파쇼당에 가입하는데, 그는 그것이 근대 사회의 정당한 다음 단계라 믿었다. 미헬스의 논문은 전후 미국에서 조합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메카시즘으로 인한 적색공포가 확산되면서 다시 유명해졌다. 역사 1911년 미헬스는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민주주의 이념과 대중의 참여라는 이념적 전제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보수 정당들처럼 그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미헬스의 결론은 그 문제가 조직이라는 집단의 본질에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에 비해 민주적인 현대일수록 혁신적인 목표를 가진 조직을 만들 수 있지만, 이러한 조직들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해당 조직들은 덜 민주적이고 덜 혁신적인 조직이 되었다. 미헬스는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조직과 과두제의 철칙"을 공식화했다. 과두제의 철칙을 공식화했을 당시, 그는 아나르코생디칼리즘의 추종자였다. 그의 이론은 이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론 미헬스는 과두제의 철칙에 있어 기본적인 몇 가지 요소들을 강조했는데, 한 학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관료제가 발생한다. 관료제가 발생하면 권력이 강해진다. 그리고, 권력은 부패한다." 미헬스는 대규모 조직은 그 크기가 점점 커질수록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관료체제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형태가 되어야 하며, 결국 이렇게 집중된 권력은 소수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권력을 잡은 소수, 즉 과두들은 그들의 권력을 보존하고, 또한 증가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미헬스에 따르면, 수천, 혹은 수십만이 참가하는 대규모 조직에서 이들 회원은 참여 민주주의를 통해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의 해결을 위해 조직은 위임자를 만들게 되고, 이 위임자들로 인해 위의 과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이러한 문제들은 미헬스가 "사람들은 이끌려갈 필요성을 느낀다"라고 말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토론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의 부족 등에 의해 발생했다. 그러나 위임은 리더십 중에서도 기술 및 자원 개발 등을 골자로 하는 전문화로 이어지며, 이로 인해 리더십은 사석에서의 리더십과는 격리되고 공직에서의 리더십이 강화된다. 미헬스는 또한 조직 내 리더들에게 "지배하려는 욕망은 보편적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심리적 요소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리더들은 권력과 조직의 지배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관료화와 전문화는 철칙의 원동력이다. 이것들은 계층제로 된 조직에서 전문적인 관리자 그룹의 부상을 이끄는 원인이 되며, 이는 결국 권위와 의사결정의 합리화 및 일상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론은 막스 베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피터의 법칙 등에 의해 정의되었다. 관료제는 리더들을 향한 권력의 집중으로 이어진다. 리더들은 제재와 보상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의사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밀어주는 경향이 있어, 결국 필연적으로 과두제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결국 평균 이상의 정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리더가 된다. 그들이 경력을 쌓을수록 그들의 권력과 권한은 강해진다. 리더들은 일반 대중이 알지 않았으면 정보를 검열하면서 채널을 통해 흘러가는 정보를 통제한다. 리더들은 또한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는 일반 대중들의 평가을 얻기 위해 상당한 양의 자원을 투입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회와 양립한다. 사람들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따라서 일반 대중은 낮은 자주성을 가지며, 그저 리더들의 판단과 지시를 기다린다. 시사점 과두제의 철칙은 그들이 얼마나 민주적인지에 상관없이 모든 형태의 조직은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 과두 정치의 성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특히 대규모 집단과 복잡한 조직에서는 실질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불가능할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과두제의 철칙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대규모 조직은 양립할 수 없다. 예시와 예외 미셸이 자신의 책에서 사용한 예시는 독일의 사회민주당이다. 기타 과두제의 철칙은 조제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 나오는 "과두적인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나오는 개념과 비슷하다.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추가 자료 Celine's Second Law Elite theory Iron triangle (US politics) Iron law of bureaucracy (Jerry Pournelle) O'Sullivan's first law Plato's five regimes Post-democracy Public choice Sortition The World Is Flat 각주 참조 Michels, Robert. 1915. Political Parties: A Sociological Study of the Oligarchical Tendencies of Modern Democracy. Translated into English by Eden Paul and Cedar Paul. New York: The Free Press. From the 1911 German source. Robert Michels und das eherne Gesetz der Oligarchie by Gustav Wagner in "Wer wählt, hat seine Stimme abgegeben" Graswurzel Revolution pp. 28. Nodia, Ghia. “Democracy’s Inevitable Elites.” Journal of Democracy 31, no. 1 (2020): 75–87. 외부 링크 Political Parties by Robert Michels in PDF Verstehen: Max Weber's Home Page By Frank W. Elwell. 'Oligarchy' section describes the Law. Last accessed on 27 May 2006. 조직론 1911년 도입 과두제 사회학 이론 정치학 이론
https://en.wikipedia.org/wiki/Iron%20law%20of%20oligarchy
Iron law of oligarchy
The iron law of oligarchy is a political theory first developed by the German-born Italian sociologist Robert Michels in his 1911 book Political Parties. It asserts that rule by an elite, or oligarchy, is inevitable as an "iron law" within any democratic organization as part of the "tactical and technical necessities" of the organization. Michels' theory states that all socialist organizations, regardless of how democratic they are when started, eventually develop into oligarchies. Michels observed that since no sufficiently large and complex organization can function purely as a direct democracy, power within an organization will always get delegated to individuals within that group, elected or otherwise. As he put it in Political Parties, "It is organization which gives dominion of the elected over the electors. [...] Who says organization, says oligarchy." Using anecdotes from political parties and trade unions struggling to operate democratically to build his argument in 1911, Michels addressed the application of this law to representative democracy. He went on to state that "Historical evolution mocks all the prophylactic measures that have been adopted for the prevention of oligarchy." According to Michels, all organizations eventually come to be run by a leadership class who often function as paid administrators, executives, spokespersons or political strategists for the organization. Far from being servants of the masses, Michels argues this leadership class, rather than the organization's membership, will inevitably grow to dominate the organization's power structures. By controlling who has access to information, those in power can centralize their power successfully, often with little accountability, due to the apathy, indifference and non-participation most rank-and-file members have in relation to their organization's decision-making processes. Michels argues that democratic attempts to hold leadership positions accountable are prone to fail, since with power comes the ability to reward loyalty, the ability to control information about the organization, and the ability to control what procedures the organization follows when making decisions. All of these mechanisms can be used to strongly influence the outcome of any decisions made 'democratically' by members. Michels stated that the official goal of representative democracy of eliminating elite rule was impossible, that representative democracy is a façade legitimizing the rule of a particular elite, and that elite rule, which he refers to as oligarchy, is inevitable. Later Michels migrated to Italy and joined Benito Mussolini Fascist Party, as he believed this was the next legitimate step of modern societies. The thesis became popular once more in post-war America with the publication of Union Democracy: The Internal Politics of the International Typographical Union (1956). History In 1911, Robert Michels argued that, paradoxically, the socialist parties of Europe, despite their democratic ideology and provisions for mass participation, seemed to be dominated by their leaders just like traditional conservative parties. Michels' conclusion was that the problem lay in the very nature of organizations. The more liberal and democratic modern era allowed the formation of organizations with innovative and revolutionary goals, but as such organizations become more complex, they became less and less democratic and revolutionary. Michels formulated the "iron law of oligarchy": "Who says organization, says oligarchy." He later became an important ideologue of Benito Mussolini's fascist regime in Italy, teaching economics at the University of Perugia. Reasons Michels stressed several factors that underlie the iron law of oligarchy. Darcy K. Leach summarized them briefly as: "Bureaucracy happens. If bureaucracy happens, power rises. Power corrupts." Any large organization, Michels pointed out, has to create a bureaucracy in order to maintain its efficiency as it becomes larger—many decisions have to be made daily that cannot be made by large numbers of disorganized people. For the organization to function effectively, centralization has to occur and power will end up in the hands of a few. Those few—the oligarchy—will use all means necessary to preserve and further increase their power. According to Michels, this process is further compounded as delegation is necessary in any large organization, as thousands—sometimes hundreds of thousands—of members cannot make decisions via participatory democracy. This has to date been dictated by the lack of technological means for large numbers of people to meet and debate, and also by matters related to crowd psychology, as Michels argued that people feel a need to be led. Delegation, however, leads to specialization—to the development of knowledge bases, skills and resources among a leadership—which further alienates the leadership from the rank and file and entrenches the leadership in office. Michels also argued that for leaders in organizations, "The desire to dominate ... is universal. These are elementary psychological facts." Thus, they were prone to seek power and dominance. Bureaucratization and specialization are the driving processes behind the iron law. They result in the rise of a group of professional administrators in a hierarchical organization, which in turn leads to the rationalization and routinization of authority and decision-making, a process described first and perhaps best by Max Weber, later by John Kenneth Galbraith, and to a lesser and more cynical extent by the Peter principle. Bureaucracy by design leads to centralization of power by the leaders. Leaders also have control over sanctions and rewards. They tend to promote those who share their opinions, which inevitably leads to self-perpetuating oligarchy. People achieve leadership positions because they have above-average political skill (see Charismatic authority). As they advance in their careers, their power and prestige increases. Leaders control the information that flows down the channels of communication, censoring what they do not want the rank-and-file to know. Leaders will also dedicate significant resources to persuade the rank-and-file of the rightness of their views. This is compatible with most societies: people are taught to obey those in positions of authority. Therefore, the rank and file show little initiative, and wait for the leaders to exercise their judgment and issue directives to follow. Implications The "iron law of oligarchy" states that all forms of organization, regardless of how democratic they may be at the start, will eventually and inevitably develop oligarchic tendencies, thus making true democracy practically and theoretically impossible, especially in large groups and complex organizations. The relative structural fluidity in a small-scale democracy succumbs to "social viscosity" in a large-scale organization. According to the "iron law", democracy and large-scale organization are incompatible. Examples and exceptions An example that Michels used in his book was Germany's Social Democratic Party. Labour unions and Lipset's Union Democracy One of the best known exceptions to the iron law of oligarchy is the now defunct International Typographical Union, described by Seymour Martin Lipset in his 1956 book, Union Democracy. Lipset suggests a number of factors that existed in the ITU that are supposedly responsible for countering this tendency toward bureaucratic oligarchy. The first and perhaps most important has to do with the way the union was founded. Unlike many other unions (e.g., the CIO's United Steel Workers of America (USWA), and numerous other craft unions) which were organized from the top down, the ITU had a number of large, strong, local unions who valued their autonomy, which existed long before the international was formed. This local autonomy was strengthened by the economy of the printing industry which operated in largely local and regional markets, with little competition from other geographical areas. Large locals continued to jealously guard this autonomy against encroachments by international officers. Second, the existence of factions helped place a check on the oligarchic tendencies that existed at the national headquarters. Leaders that are unchecked tend to develop larger salaries and more sumptuous lifestyles, making them unwilling to go back to their previous jobs. But with a powerful out faction ready to expose profligacy, no leaders dared take overly generous personal remuneration. These two factors were compelling in the ITU case. Lipset and his collaborators also cite a number of other factors which are specific to craft unions in general and the printing crafts in particular, including the homogeneity of the membership, with respect to their work and lifestyles, their identification with their craft, their more middle class lifestyle and pay. For this latter point he draws upon Aristotle who argued that a democratic polity was most likely where there was a large, stable middle class, and the extremes of wealth and poverty were not great. Finally, the authors note the irregular work hours which led shopmates to spend more of their leisure time together. These latter factors are less persuasive, since they do not apply to many industrial forms of organization, where the greatest amount of trade union democracy has developed in recent times. University student unions Titus Gregory uses Michels "iron law" to describe how the democratic centralist structure of the Canadian Federation of Students, consisting of individual student unions, encourages oligarchy. Titus Gregory argues that university students' unions today "exhibit both oligarchical and democratic tendencies". Unlike trade unions they have an ideologically diverse membership, and frequently have competitive democratic elections covered by independent campus media who guard their independence. These factors are strongly democratizing influences, creating conditions similar to those described by Lipset about the ITU. However, Gregory argues student unions can also be highly undemocratic and oligarchical as a result of the transient membership of the students involved. Every year between one quarter and one half of the membership turns over, and Gregory argues this creates a situation where elected student leaders become dependent on student union staff for institutional memory and guidance. Since many students' unions extract compulsory fees from their transient membership, and many smaller colleges and/or commuter campus can extract this money with little accountability, oligarchical behaviour becomes encouraged. For example, Gregory points out how often student union election rules "operate under tyrannical rules and regulations" that are used frequently by those in power to disqualify or exclude would-be election challengers. Gregory concludes that students' unions can "resist the iron law of oligarchy" if they have "an engaged student community", an "independent student media", a "strong tradition of freedom of information", and an "unbiased elections authority" capable of administrating elections fairly. Participatory subgroups and countervailing power Jonathan Fox's 1992 study focuses on how participatory subgroups within a membership organization can generate a degree of countervailing power that can at least temporarily mitigate the "iron law of oligarchy." Wikipedia Research by Bradi Heaberlin and Simon DeDeo has found that the evolution of Wikipedia's network of norms over time is consistent with the iron law of oligarchy. Their quantitative analysis is based on data-mining over a decade of article and user information. It shows the emergence of an oligarchy derived from competencies in five significant "clusters": administration, article quality, collaboration, formatting, and content policy. Heaberlin and DeDeo note, "The encyclopedia's core norms address universal principles, such as neutrality, verifiability, civility, and consensus. The ambiguity and interpretability of these abstract concepts may drive them to decouple from each other over time." Adolf Gasser's proposed solution for Michels' iron law of oligarchy In his book , published in 1943 (first edition in German) with a second edition in 1947 (in German), Adolf Gasser stated the following requirements for a representative democracy in order to remain stable, unaffected by Michels' iron law of oligarchy: Society has to be built up from bottom to top. As a consequence, society is built up by people, who are free and have the power to defend themselves with weapons. These free people join or form local communities. These local communities are independent, which includes financial independence, and they are free to determine their own rules. Local communities join together into a higher unit e.g. a canton. There is no hierarchical bureaucracy. There is competition between these local communities e.g. on services delivered or on taxes. Reception In 1954, Maurice Duverger expressed general agreement with Michels's thesis. In a 1953 study, C. W. Cassinelli argued that Michels's main thesis has "a high degree of general credibility", but argued that the statement of the theory was "inadequate" and that Michels's evidence for the theory was "inconclusive". In a 1966 article, political scientist Dankwart Rustow described Michels's thesis as "a brilliantly fallacious argument a fortiori". Rustow stated that the experience of the social democratic parties of Europe could not be generalized for other political parties. Josiah Ober argues in Democracy and Knowledge that the experience of ancient Athens shows Michels's argument does not hold true; Athens was a large participatory democracy, yet it outperformed its hierarchical rivals. According to a 2000 article, "To the extent that contemporary scholars ask at all about social movement organizations, they tend to reinforce Michels’s claim that bureaucratized, established organizations are more conservative in goals and tactics, though usually without explicitly engaging the iron law debate." The study however found that the iron law was malleable, and that established labor unions could under certain circumstances revitalize and experience radical change in line with its members' desires. According to a 2005 study, "Despite almost a century of scholarly debate on this question ... there is still no consensus about whether and under what conditions Michels’s claim holds true." One criticism is that power does not necessarily corrupt the leadership of organizations, and that the structure of organizations can check leaders. Another criticism is that Michels does not outline the conditions under which his thesis could be falsified nor a clear definition of what constitutes oligarchy. The method that Michels uses has sometimes been characterized as a "crucial" or "least likely" case study, because he chose a case (the German Social Democratic Party) that is least likely to support his theory (because the German Social Democratic Party was an institution that had a democratic process and ideology). Other The iron law of oligarchy is similar to the concept in The Theory and Practice of Oligarchical Collectivism, a fictional book in the dystopian novel Nineteen Eighty-Four (1984) by George Orwell, who had written a review of James Burnham's book The Managerial Revolution several years earlier. That fictional book begins: See also Elite theory Iron triangle (US politics) Parkinson's law Plato's five regimes Post-democracy Public choice Sortition The World Is Flat Notes References Michels, Robert. 1915. Political Parties: A Sociological Study of the Oligarchical Tendencies of Modern Democracy. Translated into English by Eden Paul and Cedar Paul. New York: The Free Press. From the 1911 German source. Wagner, Gustav. "Robert Michels und das eherne Gesetz der Oligarchie". In "Wer wählt, hat seine Stimme abgegeben". Graswurzel Revolution pp. 28. Nodia, Ghia. "Democracy's Inevitable Elites". Journal of Democracy 31, no. 1 (2020): 75–87. External links Political Parties by Robert Michels in PDF Verstehen: Max Weber's Home Page By Frank W. Elwell. 'Oligarchy' section describes the Law. Last accessed on 27 May 2006. Political science theories Sociological theories Oligarchy Elite theory 1911 introductions Organizational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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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서버
홈 서버()는 홈 네트워킹이나 인터넷을 통해 가정 안팎의 기타 장치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정에 위치한 컴퓨팅 서버를 의미한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파일 및 프린터 서비스, 미디어 센터 서비스, 웹 서비스(네트워크 또는 인터넷 상에서), 웹 캐시, 파일 공유 및 동기화, 캘린더 및 연락처 공유 / 동기화, 계정 인증 및 백업 서비스를 포함한다. 일반적인 홈 네트워크 상에서 상대적으로 컴퓨터 수가 적은 까닭에 홈 서버는 보통 상당한 연산 능력을 요하지 않는다. 홈 서버는 오래된 컴퓨터나 플러그 컴퓨터를 가지고 DIY(do-it-yourself) 스타일로 구현이 가능하다. 즉, 미리 구성된 상용 홈 서버 어플라이언스도 이용할 수 있다. 데이터 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정전의 경우에 대비하여 무정전 전원 장치가 사용되기도 한다. 홈 서버가 제공하는 서비스 관리 및 구성 홈 서버는 헤드리스(headless)로 구동되기도 하며 셸을 통해 원격으로 관리되거나 RDP, VNC, Webmin, 애플 리모트 데스크톱 등의 원격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통해 그래픽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 일부 홈 서버 운영 체제(예: 윈도우 홈 서버)들은 홈 네트워크(그리고 원격 접속을 통한 인터넷을 경유하여) 상의 홈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설정과 구성을 위한 소비자 지향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포함하고 있다. 그 밖의 운영 체제들은 구성을 위해 단순히 사용자들이 네이티브 운영 체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중앙식 스토리지 홈 서버는 네트워크 결합 스토리지(NAS)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므로 모든 사용자의 파일을 한 곳에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이점과 더불어 이 파일들에 유연한 권한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파일들은 유효한 자격 정보가 제공되면 네트워크 상의 다른 시스템으로부터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는 공유 프린터에도 해당한다. 이러한 파일들은 원격 접속을 사용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인터넷을 경유하여 접근함으로써 공유가 가능하다. 삼바 제품군(또는 특정한 윈도우 서버 제품군 - 윈도우 홈 서버 제외)이 설치된 유닉스나 리눅스를 구동하는 서버들은 특정 버전의 윈도우 사용자들에게 도메인 제어, 사용자 지정 로그온 스크립트, 로밍 프로파일을 제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용자가 도메인에 속한 임의의 장치에 로그온하여 자신의 "내 문서"와 개인화된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 환경 설정에 접근할 수 있으며 - 가정 내 각 컴퓨터마다 여러 개의 계정이 필요하지 않다. 미디어 서비스 홈 서버들은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서비스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며, 여기에는 가정 내 다른 장치들에 대한 사진, 음악, 동영상이 포함된다.(심지어는 인터넷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스페이스 시프팅, Tonido, Orb 참고). 아이튠즈 등의 사유 시스템이나 DLNA 등의 표준 프로토콜을 사용하여 사용자들은 가정 내의 어느 방으로부터 홈 서버에 저장된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다. 윈도우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7은 홈 서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엑스박스 360을 포함한 미디어 센터 익스텐더에 상호작용 사용자 경험을 스트리밍하는 특정한 유형의 미디어 서비스를 지원한다. 윈도우 홈 서버는 내장된 윈도우 미디어 커넥트 기술을 통해 엑스박스 360과 기타 DNLA 기반 미디어 수신기에 미디어 스티리밍을 지원한다. HP와 같은 일부 윈도우 홈 서버 장치 제조업체들은 패킷비디오 TwonkyMedia 서버와 같은 완전한 DLNA 구현체를 통해 이 기능을 확장한다. 리눅스용으로 사용 가능한 미디어 서비스용 오픈 소스 및 프로그램이 다수 존재한다. LinuxMCE가 한 예로서, 다른 장치들이 서버 상의 하드 드라이브 이미지의 부팅을 시작할 수 있게 하고 셋톱박스와 같은 어플라이언스가 될 수 있게 한다. Asterisk, Xine, MythTV(다른 미디어 서비스 솔루션), VideoLAN, 슬림서버, DLNA 및 기타 수많은 오픈 소스 프로젝트들이 심리스한 홈 시어터/자동화/통화 경험을 위해 완전히 연동된다. 애플 매킨토시 서버에서는 아이튠즈, PS3 미디어 서버, Elgato 등의 옵션이 있다. 게다가 TV에 직접 연결되는 맥의 경우 Boxee가 완전한 기능의 미디어 센터 인터페이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서버들은 일반적으로 항상 켜져 있으므로 TV나 라디오 튜너를 추가하면 언제든지 녹화/녹음을 스케줄링할 수 있다. 일부 홈 서버들은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 대해 원격 접속을 제공한다. 원격 접속 홈 서버는 인터넷 상의 장치로부터 가정 안으로 원격 접근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으며, 이는 원격 데스크톱 소프트웨어와 기타 원격 관리 소프트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윈도우 홈 서버는 가정 내 PC의 웹 인터페이스 및 원격 데스크톱 세션에 대한 원격 접근을 통해 홈 서버에 저장된 파일로의 원격 접근을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Tonido는 포트 포워딩이나 기타 설정 없이 인터넷으로부터 웹 브라우저를 통해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일부 열정가들은 VPN 기술들을 활용하기도 한다. 리눅스 서버에서 VNC와 Webmin, 이렇게 2가지가 유명한 도구이다. VNC는 클라이언트들이 서버 GUI 데스크톱을 원격으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마치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서버 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만들어준다. 이를 위해 서버 콘솔에 GUI가 구동될 필요가 없다. 즉, 여러 개의 '가상' 데스크톱 환경을 한 번에 개방할 수 있다. Webmin은 사용자들이 단순 웹 인터페이스로부터 여러 측면의 서버 구성과 유지보수를 제어할 수 있게 한다. 이 둘 다 인터넷 어느 곳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이 가능하다. 서버들은 명령 줄 기반 텔넷과 SSH 프로토콜을 사용하여 원격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웹 서비스 일부 사용자들은 파일을 쉽고 공개적으로(또는 홈 네트워크 상에서 개인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웹 서버를 구동하기도 한다. 다른 사용자들은 웹 페이지를 설정하여 가정으로부터 직접 이들을 서비스하지만 이는 일부 ISP 서비스 조항에 위배된다. ISP의 포트 차단을 막기 위해 이러한 웹 서버들은 비표준 포트를 통해 구동되기도 한다. 홈 서버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웹 서버로는 아파치와 IIS가 있다. 기타 수많은 웹 서버들을 이용할 수 있다. 경량 웹 서버 비교, 웹 서버 비교 문서를 참고할 것. 웹 프록시 일부 네트워크들은 여러 사용자들이 동일한 웹사이트에 방문할 때 웹 접속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사용되거나 소유자가 특정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는 일부 기관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동안 차단 소프트웨어를 우회하기 위해 사용되는 프록시 서버를 갖추고 있다. 공개 프록시는 느리고 신뢰성이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자신만의 사설 프록시를 구축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일부 프록시들은 프록시 서버로 구축할 경우 로컬 네트워크의 웹사이트를 차단하도록 구성할 수 있다. 이메일 수많은 홈 서버들은 소유자의 도메인 이름을 위해 이메일을 관리하는 이메일 서버를 구동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용 이메일 서비스 대비 매우 큰 편지 사서함과 최대 메시지 크기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외부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보다 로컬 네트워크의 서버에 접근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르다. 이는 또한 이메일이 외부 사이트 서버에 상주하지 않으므로 보안이 강화되기도 한다. 비트토렌트 홈 서버는 일부 토렌트가 완료까지 수일 소요되거나 심지어 수주가 소요될 수 있고 방해받지 않은 연결에서 더 나은 성능을 수행하는 까닭에 파일의 다운로드, 시드 제공을 위해 비트토렌트 프로토콜을 활용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rTorrent 등의 수많은 텍스트 기반 클라이언트, 또 동일 목적을 위해 사용 가능한 TorrentFlux, Tonido 등의 웹 기반 클라이언트가 있다. 고퍼 흔히 쓰이지 않는 서비스로 고퍼가 있으며 이는 1990년대 초에 대중적이었고 월드 와이드 웹을 앞섰던 하이퍼텍스트 문서 검색 프로토콜이었다. 현재도 남아있는 고퍼 서버의 다수가 PyGopherd 및 Bucktooth 고퍼 서버를 사용하는 홈 서버에서 구동된다. 가정 자동화 가정 자동화는 일주일 24시간 내내 사용 가능한 가정의 장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가정 자동화 컨트롤러는 홈 서버에서 구동되기도 한다. 방범 감시 상대적으로 저비용인 CCTV DVR 솔루션들은 보안 목적을 위해 홈 서버에 비디오 카메라의 녹화를 허용할 수 있다. 동영상은 이때 가정 내 PC나 기타 장치를 통해 볼 수 있다. 일련의 저렴한 USB 기반의 웹캠을 홈 서버에 연결할 수 있다. 선택적으로 이러한 이미지들과 비디오 스트림들은 표준 프로토콜을 사용하여 인터넷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가족을 위한 애플리케이션 홈 서버는 가족 지향 애플리케이션에 호스팅할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가족 캘린더, 할 일 목록, 게시판 등이 포함된다. IRC 및 인스턴트 메신저 서버가 언제나 켜져 있기 때문에 서버 위에 구동되는 IRC 클라이언트나 IM 클라이언트는 인터넷에 고가용적으로 연결된다. 이렇듯 채팅 클라이언트는 사용자가 컴퓨터에 머물지 않는 동안(잠을 자거나 일을 하거나 학교에 있는 등) 발생되는 활동을 기록할 수 있다. 이를테면 Irssi와 tmsnc 등의 텍스트 기반 클라이언트들의 분리(detach)가 가능하며 xmove를 사용하여 피진 등의 그래픽 클라이언트의 분리가 가능하다. Quassel은 이러한 종류의 이용을 위해 특정한 버전을 제공한다. 홈 서버는 또한 개인용 XMPP 서버와 IRC 서버 구동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프로토콜들은 매우 적은 대역으로 많은 수의 사용자들을 지원할 수 있다. 온라인 게이밍 컨티늄, Tremulous, 마인크래프트, 둠 등의 일부 멀티플레이어 게임들은 서버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사용자들이 이를 다운로드하여 자신만의 사설 게임 서버를 구동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서버들 중 일부는 비밀번호로 보호되어 있으므로 클랜 멤버나 화이트리스트에 등재된 플레이어 등 선별된 그룹의 인원들만 서버에 대한 접근 권한이 있다. 그 밖의 경우에는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연합형 소셜 네트워크 홈 서버는 디아스포라*, GNU 소셜과 같은 분산 연합형 소셜 네트워크를 호스팅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액티비티펍과 같은 연합형 프로토콜들은 수많은 소형 홈 서버들이 의미있는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하며 전통적인 대형 네트워크의 느낌을 제공한다. 연합 형태는 단지 소셜 네트워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수의 획기적이고 새로운 자유 소프트웨어 웹 서비스들이 개발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자신만의 동영상, 사진, 블로그 등을 호스팅하고 더 큰 연합형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다. 서드 파티 플랫폼 홈 서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드 파티 제품을 빌드, 추가할 수 있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윈도우 홈 서버는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를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Tonido는 자신들의 SDK를 사용하여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작성함으로써 확장 가능한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을 제공한다. 운영 체제 홈 서버들은 각기 다른 수많은 운영 체제를 실행할 수 있다. 자신만의 홈 서버를 빌드하는 열정가들은 자신들에게 친숙하거나 편리한 운영 체제라면 뭐든지 사용할 수 있으며, 이를테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macOS, 리눅스, 솔라리스, BSD, 플랜 9 등이 있다. 하드웨어 단일 보드 컴퓨터가 점차 홈 서버 지원에 사용되고 있으며 그 중 다수는 ARM 장치들이다. 오래된 데스크톱과 노트북 컴퓨터들 또한 홈 서버로 목적을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휴대 전화들은 일반적으로 ARM 기반 단일 보드 컴퓨터로서 강력하다. 휴대 전화가 리눅스 운영 체제를 실행할 경우 셀프 호스팅을 휴대 전화로 옮김으로써 각 사용자의 데이터와 장치들은 자신들의 휴대전화로부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같이 보기 서버의 정의 서버 NAS (네트워크 결합 스토리지) 파일 서버 프린트 서버 미디어 서버 운영 체제 BSD 다양한 리눅스 배포판 - 다음 배포판들은 홈 서버용으로 특화되어 개발되었다: FreedomBox, UBOS Linux MacOS 서버 솔라리스 윈도우 홈 서버 및 기타 종류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플랜 9 (운영 체제) 제품 HP 미디어스마트 서버 기술 클라이언트 서버 모델 DDNS 파일 서버 홈 네트워킹 네트워크 결합 스토리지 (NAS) 상주형 게이트웨이(Residential gateway) 미디어 서비스 소프트웨어 프런트로 - Mac OS X LinuxMCE MythTV 플렉스 미디어 서버 코디 서버 소프트웨어 웹 서버 비교 메일 서버 목록 FTP 서버 소프트웨어 목록 삼바 (소프트웨어) RealVNC Tonido 아파치(Apache) 홈 네트워킹 DOCSIS G.hn HomePNA 전력선 통신, 홈플러그 파워라인 얼라이언스 VDSL, VDSL2 무선랜, IEEE 802.11 각주 서버 서버
https://en.wikipedia.org/wiki/Home%20server
Home server
A home server is a computing server located in a private computing residence providing services to other devices inside or outside the household through a home network or the Internet. Such services may include file and printer serving, media center serving, home automation control, web serving (on the network or Internet), web caching, file sharing and synchronization, video surveillance and digital video recorder, calendar and contact sharing and synchronization, account authentication, and backup services. Because of the relatively low number of computers on a typical home network, a home server commonly does not require significant computing power. Home servers can be implemented do-it-yourself style with a re-purposed, older computer, or a plug computer; pre-configured commercial home server appliances are also available. An uninterruptible power supply is sometimes used in case of power outages that can possibly corrupt data. Services provided by home servers Administration and configuration Home servers often run headless, and can be administered remotely through a command shell, or graphically through a remote desktop system such as RDP, VNC, Webmin, Apple Remote Desktop, or many others. Some home server operating systems (such as Windows Home Server) include a consumer-focused graphical user interface (GUI) for setup and configuration that is available on home computers on the home network (and remotely over the Internet via remote access). Others simply enable users to use native operating system tools for configuration. Centralized storage Home servers often act as network-attached storage (NAS) providing the major benefit that all users' files can be centrally and securely stored, with flexible permissions applied to them. Such files can be easily accessed from any other system on the network, provided the correct credentials are supplied. This also applies to shared printers. Such files can also be shared over the Internet to be accessible from anywhere in the world using remote access. Servers running Unix or Linux with the free Samba suite (or certain Windows Server products - Windows Home Server excluded) can provide domain control, custom logon scripts, and roaming profiles to users of certain versions of Windows. This allows a user to log on from any machine in the domain and have access to their "Documents" folder and personalized Windows and application preferences - multiple accounts on each computer in the home are not needed. Media serving Home servers are often used to serve multi-media content, including photos, music, and video to other devices in the household (and even to the Internet; see Space shifting, Tonido and Orb). Using standard protocols such as DLNA or proprietary systems such as iTunes, users can access their media stored on the home server from any room in the house. Windows XP Media Center Edition, Windows Vista, and Windows 7 can act as a home server, supporting a particular type of media serving that streams the interactive user experience to Media Center Extenders including the Xbox 360. Windows Home Server supports media streaming to Xbox 360 and other DLNA-based media receivers via the built-in Windows Media Connect technology. Some Windows Home Server device manufacturers, such as HP, extend this functionality with a full DLNA implementation such as PacketVideo TwonkyMedia server. There are many open-source and fully functional programs for media serving available for Linux. LinuxMCE is one example, which allows other devices to boot off a hard drive image on the server, allowing them to become appliances such as set-top boxes. Asterisk, Xine, MythTV (another media serving solution), VideoLAN, SlimServer, DLNA, and many other open-source projects are fully integrated for a seamless home theater/automation/telephony experience. On an Apple Macintosh server, options include iTunes, PS3 Media Server, and Elgato. Additionally, for Macs directly connected to TVs, Boxee can act as a full-featured media center interface. Servers are typically always on so the addition of a TV or radio tuner allows recording to be scheduled at any time. Some home servers provide remote access to media and entertainment content. Remote access A home server can be used to provide remote access into the home from devices on the Internet, using remote desktop software and other remote administration software. For example, Windows Home Server provides remote access to files stored on the home server via a web interface as well as remote access to Remote Desktop sessions on PCs in the house. Similarly, Tonido provides direct access via a web browser from the Internet without requiring any port forwarding or other setup. Some enthusiasts often use VPN technologies as well. On a Linux server, two popular tools are (among many) VNC and Webmin. VNC allows clients to remotely view a server GUI desktop as if the user was physically sitting in front of the server. A GUI need not be running on the server console for this to occur; there can be multiple 'virtual' desktop environments open at the same time. Webmin allows users to control many aspects of server configuration and maintenance all from a simple web interface. Both can be configured to be accessed from anywhere on the Internet. Servers can also be accessed remotely using the command line-based Telnet and SSH protocols. Web serving Some users choose to run a web server in order to share files easily and publicly (or privately, on the home network). Others set up web pages and serve them straight from their home, although this may be in violation of some ISPs terms of service. Sometimes these web servers are run on a nonstandard port in order to avoid the ISP's port blocking. Example web servers used on home servers include Apache and IIS. Web proxy Some networks have an HTTP proxy which can be used to speed up web access when multiple users visit the same websites, and to get past blocking software while the owner is using the network of some institution that might block certain sites. Public proxies are often slow and unreliable and so it is worth the trouble of setting up one's own private proxy. Some proxies can be configured to block websites on the local network if it is set up as a transparent proxy. E-mail Many home servers also run e-mail servers that handle e-mail for the owner's domain name. The advantages are having much bigger mailboxes and maximum message size than most commercial e-mail services. Access to the server, since it is on the local network is much faster than using an external service. This also increases security as e-mails do not reside on an off-site server. BitTorrent Home servers are ideal for utilizing the BitTorrent protocol for downloading and seeding files as some torrents can take days, or even weeks to complete and perform better on an uninterrupted connection. There are many text based clients such as rTorrent and web-based ones such as TorrentFlux and Tonido available for this purpose. BitTorrent also makes it easier for those with limited bandwidth to distribute large files over the Internet. Gopher An unusual service is the Gopher protocol, a hypertext document retrieval protocol which pre-dated the World Wide Web and was popular in the early 1990s. Many of the remaining gopher servers are run off home servers utilizing PyGopherd and the Bucktooth gopher server. Home automation Home automation requires a device in the home that is available 24/7. Often such home automation controllers are run on a home server. Security monitoring Relatively low cost CCTV DVR solutions are available that allow recording of video cameras to a home server for security purposes. The video can then be viewed on PCs or other devices in the house. A series of cheap USB-based webcams can be connected to a home server as a makeshift CCTV system. Optionally these images and video streams can be made available over the Internet using standard protocols. Family applications Home servers can act as a host to family-oriented applications such as a family calendar, to-do lists, and message boards. IRC and instant messaging Because a server is always on, an IRC client or IM client running on it will be highly available to the Internet. This way, the chat client will be able to record activity that occurs even while the user is not at the computer, e.g. asleep or at work or school. Textual clients such as Irssi and tmsnc can be detached using GNU Screen for example, and graphical clients such as Pidgin can be detached using xmove. Quassel provides a specific version for this kind of use. Home servers can also be used to run personal XMPP servers and IRC servers as these protocols can support a large number of users on very little bandwidth. Online gaming Some multiplayer games such as Continuum, Tremulous, Minecraft, and Doom have server software available which users may download and use to run their own private game server. Some of these servers are password protected, so only a selected group of people such as clan members or whitelisted players can gain access to the server. Others are open for public use and may move to colocation or other forms of paid hosting if they gain a large number of players. Federated social networks Home servers can be used to host distributed federated social networks like Diaspora and GNU Social. Federation protocols like ActivityPub allow many small home servers to interact in a meaningful way and give the perception of being on a large traditional social network. Federation is not just limited to social networks. Many innovative new free software web services are being developed that can allow people to host their own videos, photos, blogs etc. and still participate in the larger federated networks. Third-party platform Home servers often are platforms that enable third-party products to be built and added over time. For example, Windows Home Server provides a Software Development Kit. Similarly, Tonido provides an application platform that can be extended by writing new applications using their SDK. Operating systems Home servers run many different operating systems. Enthusiasts who build their own home servers can use whatever OS is conveniently available or familiar to them, such as Linux, Microsoft Windows, BSD, Solaris or Plan 9 from Bell Labs. Hardware Single-board computers are increasingly being used to power home servers, with many of them being ARM devices. Old desktop and laptop computers can also be re-purposed to be used as home servers. Mobile phones are typically just as powerful as ARM-based single board computers. Once mobile phones can run the Linux operating system, self-hosting might move to mobile devices with each person's data and services being served from their own mobile phone. See also Server definitions Server (computing) Network-attached storage (NAS) File server Print server Media server Operating systems BSD UNIX Various Linux distributions macOS Server Solaris Windows Home Server Windows Server Essentials Plan 9 from Bell Labs - The successor to Unix Products HP MediaSmart Server Technologies Client–server model Dynamic DNS Home network Residential gateway Media serving software Front Row - for Mac OS X LinuxMCE MythTV Plex Media Server Kodi Jellyfin Server software Comparison of web servers List of mail server software List of FTP server software Samba (software) RealVNC Tonido Home networking DOCSIS G.hn HomePNA Power line communication, HomePlug Powerline Alliance VDSL, VDSL2 Wireless LAN, IEEE 802.11 References Server Servers (computing)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B%B0%EB%B8%8C%20%EC%BB%A4
스티브 커
스티븐 더글러스 ("스티브") 커(Stephen Douglas ("Steve") Kerr, 1965년 9월 27일 ~ )는 미국의 전 프로 농구 선수이자 현 감독이다. 그는 현재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총감독이다. 커는 8회의 NBA 챔피언이며, 선수로서 5회의 타이틀(시카고 불스와 3회,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2회)은 물론, 워리어스의 총감독으로서 3회의 타이틀을 우승하였다. 커는 최소한 250명의 3 득점 선수들을 위하여 NBA 역사상 최고 경력 3 득점 퍼센티지(45.4%)를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2010년 카일 코버에 의하여 기록이 깨질 때까지 52.4%에 시즌에서 최고 3 득점 퍼센티지를 위한 NBA 기록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2007년 6월 2일 피닉스 선스는 커를 팀의 운영 회장과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2004년 경영 파트너 로버트 사버가 선스를 매입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사버의 가장 신임한 농구 조언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커는 2010년 6월 선스로부터 은퇴를 공고하였다. 후에 커는 2014년 감독직에 경력을 추구할 때까지 TNT에서 NBA를 위한 시사해설자로 돌아왔다. 2014년 5월 14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커를 팀의 총감독으로 임명하였다. 2015년 4월 4일 댈러스 매버릭스에 승리와 함께 커는 신인 감독을 위한 가장 많은 정규 시즌 우승을 위한 NBA 기록을 깼다. 워리어스는 그해 NBA 결승전을 우승하러 가 1982년 NBA 결승전에서 팻 라일리 이래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데 커를 첫 신인 감독으로 만들었다. 2016년 4월 13일 워리어스는 NBA 시즌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위한 기록을 깼으며 커의 1995년 ~ 96년 시카고 불스에 의하여 이전에 보유된 기록을 깼다. 워리어스는 3연속 해를 위하여 결승전에 돌아왔으며 2016년에 패하고, 2017년과 2018년 다시 우승하였다. 초기 생애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중동에 전문적이었던 미국인 학회원 맬컴 H. 커와 앤 즈위커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3명의 형제, 자매를 두었다. 그의 조부 스탠리 커는 결국적으로 베이루트에 정착하기 전에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후 근동 구조와 함께 후원하고, 알레포와 카흐라만마라슈에서 여성과 고아들을 구출하였다. 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레바논과 다른 중동의 나라들에서 보냈다. 그는 이집트에서 카이로 아메리칸 칼리지, 베이루트에서 아메리칸 커뮤니티 스쿨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팰리새디스 고등학교(현재의 팰리새디스 차터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부친 맬컴은 베이루트에서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총장을 지내는 동안 1984년 1월 18일 52세의 나이로 레바논의 시아파 시민군 지하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커는 당시 18세이며 칼리지의 신입생이었다. 1988년 커는 역사학, 사회학과 영어에 중요성과 함께 정통 학습 학사와 함께 애리조나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경력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커는 애리조나 대학교를 위하여 농구를 하였다. 1986년 여름 스페인에서 열린 FIBA을 위하여 국가대표 남자 농구팀에 임명되었다. 팀은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아마추어 선수들로 이루어진 미국 남자 마지막 시니어 팀이었다. 그는 무릎 부상을 당하여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전체 시즌(1986 ~87)을 놓치고 말았다. 팀으로 복귀한 후, 커는 자신의 지도력, 역경에서 승리로 이끄는 자신의 능력과 장거리 슛으로 인하여 팬의 총아가 되었다. 그는 올아메리칸 동료 선수 숀 엘리엇과 함께 와일드캐츠가 1988년 NCAA 디비전 1 농구 토너먼트의 결승전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커는 그 시즌에 3 득점 퍼센티지(114 승 199패, 57.3%)를 위한 NCAA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프로 경력 경력의 시작 1988년 NBA 드래트의 2라운드에서 커는 피닉스 선스에 의하여 선발되었다. 1989년 그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되었다. 그는 거기서 3번의 시즌(1989 ~ 92)을 보내고, 그러고나서 올랜도 매직과 함께 1992년 ~ 93년의 일부를 보냈다. 시카고 불스 1993년 그는 시카고 불스와 계약을 맺었다. 불스는 1993년 ~ 94년과 1994년 ~ 95년 시즌들에서 플레이오프로 이루었으나 1994년의 전체와 1995년의 거의를 위하여 마이클 조던 없이 팀은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95년 ~ 96년 시즌을 위하여 조던의 완전 복귀와 함께 불스는 72 승 10 패의 당시 NBA 기록을 세우고 1996년 NBA 결승전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꺾었다. 커는 유타 재즈를 상대로 1997년 NBA 결승전에서 불스의 챔피언십 승리의 주요 일부를 활약하였다. 86의 동점과 함께 6번째 경기의 마지막 초에 그는 조던으로부터 패스를 받아 타이틀 우승을 쳤다. 불스는 우승하여 프랜차이즈의 5번째 타이틀을 얻었다. 커는 또한 1997년 올스타 경기에서 3점슛을 우승하기도 하였다. 재즈를 상대로 1998년 NBA 결승전의 2번째 경기의 마지막 분에서 커는 3점슛을 놓쳐 자신의 리바운드를 잡아 결정적인 3 득점 활약을 이룬 조던에게 패스하여 팀을 지도력에 놓았다. 불스는 6개의 경기에서 시리즈를 우승하였다. 샌안토니오 스퍼스 1999년 1월 불스와 함께 계약과 이적 거래에서 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의하여 취득되었다. 스퍼스는 그해 NBA 결승전에 도달하여 뉴욕 닉스에 4 대 1로 승리와 함께 자신들의 첫 NBA 챔피언십을 우승하였다. 커는 프랭크 솔(로체스터와 미니애폴리스와 함께 4연승 (1951 ~ 54))과 더불어 4연속 NBA 타이틀을 우승하는 데 2명의 선수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커와 솔은 연속적 시즌에서 2개의 다른 팀과 함께 2개의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데 NBA 역사상 단 둘의 선수들이기도 하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2001년 7월 24일 커는 스티브 스미스를 스퍼스로 데려오는 처리에서 데릭 앤더슨과 더불어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이적되었다. 그는 2001년 ~ 02년 시즌을 위하여 트레일블레이저스에 남아 65개의 경기에서 활약하였다. 스퍼스로 복귀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잠시의 복무 후, 그는 2002년 8월 2일 찰스 스미스, 애멀 매캐스킬과 안토니오 대니얼스를 위한 교환에서 에릭 바클리와 더불어 스퍼스로 다시 이적되었다. 리그에서 자신의 마지막 시즌일 것인 이듬해 그는 거의 모든 경기(75)에서 벤치로부터 스퍼스를 성원하였다. 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2003년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의 6번째 경기에서 커는 배버릭스를 탈락시키는 도움을 준 4개의 후반전 3 득점을 이루었다. 스퍼스는 결국적으로 그해 결승전에서 뉴저지 네츠를 4 대 2로 꺾어 NBA 챔피언십을 우승하였다. 2003년 NBA 결승전 후, 커는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는 910개의 정규 시즌 경기들을 활약하였으나 그중 30개 만을 시작하여 1991년 ~ 92년 시즌에 다가오는 그 경기들에 20개에 활약하였다. 그의 경력 총계는 5437개의 득점, 1060개의 리바운드와 1658개의 보조이다. 총감독 경력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14년 ~ 현재) 2014년 5월 14일 커는 마크 잭슨의 뒤를 이으는 데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위하여 총감독이 되는 데 동의서에 도달하였다. 커는 워리어스를 위하여 그해 여름 리그에서 감독을 맡았다. 2014년 ~ 15년 시즌 동안 팀의 공격은 필 잭슨 아래 불스에서 자신의 활약 시절로부터 삼각 공격의 구성을 고용하였다. 워리어스가 자신들의 14번째 연속적 경기를 우승하는 데 휴스턴 로키츠를 꺾은 후, 커는 19 승 2 패의 기록과 함께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는 데 첫 감독이 되었다. 이 일은 시러큐스 내셔널스와 함께 알 서비와 그의 18 승 2 패 시작 기록을 깼다. 12월 10일 커는 자신의 첫 23개의 경기들에서 21개를 우승하는 데 NBA의 첫 신인 총감독이 되었다. 그는 워리어스가 컨퍼런스에서 최고의 라운드를 가진 후, 2015년 NBA 올스타 경기를 위하여 서부 컨퍼런스 팀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4월 4일 워리어스는 플레이오프들을 통하여 홈코트 우월에 결말을 짖는 데 매버릭스를 123 대 110으로 꺾고, 커는 NBA 역사상 최고의 신인 총감독이 되는 데 시즌의 63번째 우승을 얻어 2010년 ~ 11년 시즌에서 불스와 함께 톰 티보도와 그의 62개의 우승을 통과하였다. "올해의 NBA 감독" 투표에서 커는 마이크 부덴홀저에 밀려 2위를 하였다. 워리어스는 최후적으로 NBA 역사상 최고의 정규 시즌들의 하나와 함께 끝마치고 팀의 69년 역사에서 거대하였다. 워리어스는 67 승 15 패의 전체 기록과 함께 끝마치며, 싱글 시즌에서 67개 혹은 그 이상을 우승하는 데 10번째 팀이 되었다. 그 일은 워리어스가 한 시즌에서 60개의 경기 만큼 많이 우승하는 데 처음이었으며, 그들의 이전 최고 기록은 1975년 ~ 76년 시즌에서 59개의 경기들이었다. 워리어스는 또한 NBA 역사상 2번째로 최고의 홈기록을 위하여 동점을 매긴 39 승 2패의 홈기록과 함께 끝내기도 하였다. 워리어스는 시즌을 위하여 방어적인 노력에서 1위였고, 공격적 노력에서 2위였으며 방어와 공격적 양쪽의 노력에서 줄리어스 어빙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가 이룬 특정을 간신히 놓쳤다. 그들은 2개의 홈구장에서 15개 이상의 2연속 우승을 하는 데 NBA 역사상 첫 팀이 되었다.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의 오프닝 라운드에서 커는 워리어스는 1975년 NBA 결승전 이래 자신들의 첫 4개의 경기 플레이오프를 휩쓰는 데 이끌었다. 후에, 팀은 멤피스 그리즐리스(2번째 라운드에서 4 대 2)를 앞섰다. 시리즈에서 2 대 1로 내려간 커는 그리즐리스의 토니 앨린을 열고 자신의 방어 선수이자 센터 토니 보거트를 가지는 데 4번째 경기에서 자유로운 조정을 이루었다. 그의 전략은 앨린이 벤치에 앉히게 되고 넓게 열어진 슛을 놓친 후 16분으로 제한된 후 칭송을 얻었다. 워리어스는 그러고나서 로키츠를 꺾고, 40년 만에 처음으로 NBA 결승전으로 이루었다. 결승전에서 워리어스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향하였다. 커와 그의 라이벌 감독 데이비드 블랫은 둘다 NBA 총감독으로서 자신들의 첫 시즌들이었으며, 이 일은 1947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에디 고틸리엡과 시카고 스택스의 해럴드 올슨이 붙은 NBA 역사상 존재의 첫 해 이래 처음이었다. 워리어스가 캐벌리어스에게 2 대 1로 내려간 후, 커는 보거트의 자리에 안드레 이궈달라를 출발시켜 시리즈를 동등하게 하는 데 103 대 82의 우승을 위하여 자신들의 활기없는 공격을 밀어넣었다. 그 일은 이궈달라의 시즌의 첫 출발이었고, 작은 구성은 죽음의 정렬로 알려지게 되었다. 워리어스는 6개의 경기들에서 챔피언십을 우승하러 가 캐벌리어스는 시리즈에서 4 대 2로 꺾어 커에게 그의 6번째 챔피언십(총감독으로서 첫 챔피언십)을 주었다. 전직 챔피언 워리스의 훈련 캠프의 첫 이틀 후, 커는 2015년 NBA 결승전 이래 문제들을 일으킨 자신의 등을 회복하는 데 명확한 결석을 택하였다. 이 시기에 수석 코치 루크 월턴이 커의 감독직을 취하였다. NBA가 기술적으로 월턴의 승패 기록을 커에게 돌렸어도 커는 2015년의 전부와 2016년 1월의 대부분을 놓쳤다. 2016년 1월 22일 커는 43개의 경기들을 놓친 후, 감독직에 돌아왔으나 만약 자신을 출장 못하게 한 척골의 유동 누출에 관련된 두통과 고통이 다시 일어나면 자신이 때때로 경기를 놓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임시 감독 루크 월턴과 함께 워리어스는 39 승 4 패로 갔다. 커가 감독직으로 복귀한 후, 워리어스는 34 승 5 패로 갔다. 워리어스는 73개의 경기들을 우승하며 시카고 불스의 1995년 ~ 96년 72 승 10 패의 기록을 깼다. 그는 2015년 ~ 16년 "올해의 NBA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커는 다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향한 2016년 결승전에 워리어스를 지도하였으나 이번에는 7개의 경기들에서 패하였다. 11월 20일 NBA는 11월 17일 KNBR 680과 함께 라디오 인터뷰가 열리는 동안 공공적 비판을 사회함으로 2만 5천 달러의 벌금이 물었다고 공고하였다. 커는 다시 일어난 등의 문제로 2017년의 플레이오프를 놓쳤다. 제휴 코치 마이크 브라운이 커의 결석 기간 동안 직무 대행의 총감독을 맡고, 공식적 이후 시즌에서 워리어스를 12 승 0 패의 기록으로 워리어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커는 워리어스가 캐벌리어스를 5개의 경기들에 승리하는 데 이끈 그해의 NBA 결승전을 위하여 복귀하였다. 워리어스는 16 승 1 패의 기록과 함께 플레이오프들을 끝내면서 NBA 역사상 공식 이후 시즌의 최고 우승률이었다. 커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첫 3개의 시즌에서 2개의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데 NBA 역사상 4번째 감독이 되었다. 2018년 NBA 결승전에서 워리어스가 캐벌리어스를 꺾을 때 커는 총감독으로서 자신의 3번째 챔피언십을 우승하여 자신 경력의 8번째 챔피언십을 주었다. 외부 링크 196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남자 농구 선수 미국의 농구 감독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선수 올랜도 매직 선수 시카고 불스 선수 샌안토니오 스퍼스 선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선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 애리조나 대학교 동문 베이루트 출신 슈팅 가드 포인트 가드
https://en.wikipedia.org/wiki/Steve%20Kerr
Steve Kerr
Stephen Douglas Kerr (born September 27, 1965) is an American professional basketball coach and former player who is the head coach for the Golden State Warriors of the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NBA). He is known as one of the most accurate three-point shooters of all time and one of the greatest coaches in NBA history. Kerr is a nine-time NBA champion, having won five titles as a player and four as head coach of the Warriors. Kerr played college basketball for the Arizona Wildcats. He was a two-time first-team all-conference player in the Pac-10 (now known as the Pac-12) and earned All-American honors as a senior in 1988. In the 1987-88 season, Kerr set the NCAA single-season three-point field goal percentage record (57.3%). Selected by the Phoenix Suns in the second round of the 1988 NBA draft, Kerr played 15 seasons in the NBA. He won five NBA championships as a player--three with the Chicago Bulls and two with the San Antonio Spurs--and retired as the all-time NBA leader in single-season three-point shooting percentage and career three-point shooting percentage. Following his retirement as a player, Kerr became a minority owner of the Phoenix Suns as part of a group led by Robert Sarver that purchased the team in 2004. In June 2007, Phoenix named Kerr the team's president of basketball operations and general manager. Kerr announced he was leaving the position in June 2010. After stepping down from his post with the Suns, Kerr worked as a color commentator for NBA on TNT until 2014. In May 2014, Kerr was named head coach of the Golden State Warriors. Under his leadership, the franchise entered the most successful period in its history, reaching the NBA Finals six times and winning four championships (in 2015, 2017, 2018, and 2022). The 2015–16 Warriors won an unprecedented 73 games, breaking the record for the most wins in an NBA season. Early life and international play Kerr was born in Beirut, Lebanon, to Malcolm H. Kerr, a Lebanese-born American academic who specialized in the Middle East, and his wife, Ann (Zwicker). He has three siblings. His grandfather, Stanley Kerr, volunteered with the Near East Relief after the Armenian genocide and rescued women and orphans in Aleppo and Marash before eventually settling in Beirut. Kerr spent much of his childhood in Lebanon and other Middle Eastern countries. While in Beirut in the summer of 1983, he met a number of US Marines who were later killed in the Beirut barracks bombings. Kerr attended Cairo American College in Egypt, the American Community School in Beirut, Lebanon, and Palisades High School (now Palisades Charter High School) in Los Angeles, graduating in 1983. Malcolm Kerr was killed by members of the Islamic Jihad on January 18, 1984 at the age of 52 while he was serving as president of the American University of Beirut. Malcolm Kerr was shot twice in the back of his head by gunmen using suppressed handguns in the hallway outside his office. Steve was only 18 years old at the time, and a college freshman; regarding his father's death, Kerr has said: "Before my father was killed, my life was impenetrable. Bad things happened to other people." In the summer of 1986, Kerr was named to the U.S. national team that competed in the FIBA World Championship in Spain. The team was the last American men's senior squad composed strictly of amateur players to capture a gold medal. Kerr suffered a knee injury during the tournament. College career Minimally recruited out of high school, Kerr played basketball at the University of Arizona from 1983 to 1988. Kerr injured his knee playing in the 1986 FIBA World Championship, forcing him to miss the Wildcats' entire 1986–87 season. During pre-game warmups at arch-rival Arizona State University in 1988, Kerr was taunted by Sun Devils fans with chants that included "PLO" and "Where’s your father?" Though tearful, Kerr led the Wildcats to victory, scoring 20 points in the first half, making all six of his three-point attempts. Arizona State athletic director Charles Harris sent a letter of apology to him a few days later. Along with fellow All-American teammate Sean Elliott, Kerr helped the Wildcats reach the Final Four of the 1988 NCAA tournament. A two-time first-team All-Pac-10 selection, Kerr also set an NCAA single-season record for 3-point percentage (57.3%, 114–199) in 1987–88. The NCAA introduced the three-point shot while he was redshirting. In his only collegiate season with the three-point shot, he established standards that formerly stood as Pac-12 records for nearly 2 decades: single-season three-point shots made (114; stood until Salim Stoudamire posted 120 in 2005), Pac-12 tournament run three-point field goal percentage (.750, min 5 made; Marcus Williams, .833, 2006). He led the Pac-10 in free throw shooting in 1985–86 (89.9%). Kerr graduated from the University of Arizona in 1988 with a Bachelor of General Studies, with an emphasis on history, sociology and English. Professional career Phoenix Suns (1988–1989) Kerr was selected by the Phoenix Suns in the second round of the 1988 NBA draft. He was chosen as the 50th overall pick. Kerr averaged 2.6 points per game for the Suns in his rookie season. Cleveland Cavaliers (1989–1992) In 1989, Kerr was traded to the Cleveland Cavaliers for draft consideration. In more than three seasons with the Cavs, Kerr set the team's franchise single-season (.507, 1989–90) and career three-point field goal percentage (.472) records. Orlando Magic (1992–1993) In December 1992, Kerr was traded to the Orlando Magic for draft considerations. Kerr averaged 2.6 points per game during his tenure with Orlando. Chicago Bulls (1993–1998) In 1993, Kerr signed with the Chicago Bulls. He played five seasons for the Bulls and typically came off of the bench, playing the role of three-point shooting specialist. The Bulls made the playoffs in the 1993–94 and 1994–95 seasons, but without Michael Jordan's presence for all of 1994 and much of 1995, the team was unable to advance to the Finals. However, with Jordan back full-time for the 1995–96 season, the Bulls set a then-NBA record of 72–10 and defeated the Seattle SuperSonics in the 1996 NBA Finals in six games. In 1997, the Bulls logged a 69–13 regular-season record and reached the 1997 NBA Finals, where they faced the Utah Jazz. At the end of Game Six, with the score tied at 86, Kerr took a pass from Jordan and made a 17-foot jump shot to win the game and the series for the Bulls. Kerr also won the Three-Point Contest at the 1997 NBA All-Star Weekend. In the last minute of Game Two of the 1998 NBA Finals against Utah, Kerr missed a three-pointer, grabbed his own rebound, and made a pass to Jordan. Jordan made a crucial three-point play, putting the Bulls in the lead for good and helping the team tie the series at one game apiece. The Bulls went on to win the series in six games. Kerr set the Bulls' franchise single-season (.524, 1994–95) and career three-point field goal percentage (.479) records. During his tenure with the Bulls, Kerr averaged 8.2 points per game on 50.7% shooting. San Antonio Spurs (1999–2001) In January 1999, Kerr was acquired by the San Antonio Spurs in a sign-and-trade deal with the Bulls, whereby Chuck Person and a first-round pick in the 2000 NBA draft was sent to Chicago. The Spurs reached 1999 NBA Finals and won their first NBA Championship with a 4–1 series victory over the New York Knicks. Kerr and Frank Saul were the only two players in NBA history to have won two championships with two different teams in consecutive seasons, until Patrick McCaw, whom Kerr later coached with the Warriors, achieved the same feat in 2019. Portland Trail Blazers (2001–2002) On July 24, 2001, Kerr was traded to the Portland Trail Blazers alongside Derek Anderson in a deal that brought Steve Smith to the Spurs. Kerr would remain in Portland for the 2001–02 season, playing in 65 games and averaging 4.1 points per game. Return to San Antonio (2002–2003) On August 2, 2002, Kerr was traded back to San Antonio along with Erick Barkley and a 2003 second-round pick. In return, the Trail Blazers received Charles Smith, Amal McCaskill, and Antonio Daniels. Kerr played in nearly every game (75) the following year, which was his final season in the league. In Game Six of the 2003 Western Conference Finals against the Dallas Mavericks, Kerr made four second-half three-pointers that helped the Spurs win the game and eliminate Dallas from the playoffs. The Spurs eventually won the NBA championship by beating the New Jersey Nets in the 2003 NBA Finals, 4–2. Retirement Kerr announced his retirement after the 2003 NBA Finals. During his NBA career, he won five NBA championships. Kerr retired as the league's all-time leader in single-season three-point shooting percentage (.524 in 1994–95) and career three-point shooting percentage (.454). As of 2023, he is the only NBA player to win four straight NBA titles after 1969. Broadcaster and commentator In 2003, Kerr became a broadcast analyst for Turner Network Television (TNT), offering commentary alongside analyst Marv Albert. During his tenure, Kerr performed a segment sponsored by Coors Light called Steve's Refreshing Thoughts in which he brought up interesting facts in NBA history. This segment continued through sponsorship and became known as Steve Wonders, sponsored by Sprint. In the same time period, Kerr also contributed to Yahoo! as an NBA commentator. Kerr has provided his voice for the in-game commentary of EA Sports video games NBA Live 06, NBA Live 07, NBA Live 08, NBA Live 09 and NBA Live 10 with Albert. He has also provided his voice as a color analyst for NBA 2K12, NBA 2K13, NBA 2K14 and NBA 2K15. Kerr remained a commentator in NBA 2K15 despite becoming the Golden State Warriors coach for the 2014–15 season several months prior to the game's release. His commentary also appears during All-Star play in the seventh gen port of NBA 2K16. Kerr left broadcasting in 2007 to become general manager for the Phoenix Suns, but it was confirmed on June 28, 2010, that he would return as an NBA analyst for TNT starting with the 2010–11 NBA season. In 2011, he also called the NCAA Men's Division I Basketball Championship on Turner Sports and CBS, teaming up with lead broadcasters Jim Nantz and Clark Kellogg for the First Four and Final Four games, and with Albert in other rounds. Kerr was also a regular contributor to the website Grantland from 2011 until it closed in 2015. In 2023 he portrayed a cartoon version of himself on the animated series Clone High where he was the judge of a fictitious reality show called Tropical Hospital. Executive career Phoenix Suns (2004–2010) On April 15, 2004, Kerr was announced as a member of a potential group of buyers that would acquire his old team, the Phoenix Suns, from Jerry Colangelo for $300 million. He became part of Suns management, acting as a consultant. During the 2006 NBA All-Star Weekend, he was a member of the San Antonio team that won the Shooting Stars Competition. On June 2, 2007, Kerr announced that he would become the general manager of the Phoenix Suns beginning with the 2007–08 season. In 2008, the Suns traded forward Shawn Marion and guard Marcus Banks to the Miami Heat in exchange for Shaquille O'Neal. The Suns were eliminated by the San Antonio Spurs in five games in the first round of the playoffs. On December 10, 2008, Kerr continued to remake the Suns roster by trading Boris Diaw, Raja Bell, and Sean Singletary to the Charlotte Bobcats in exchange for Jason Richardson, Jared Dudley, and the Bobcats' 2010 second-round draft pick, which was used to draft Gani Lawal of Georgia Tech. On June 25, 2009, he traded O'Neal to the Cleveland Cavaliers for Ben Wallace, Sasha Pavlovic, a future second-round draft pick and cash. On May 5, 2010, the Suns wore their "Noche Latina" Los Suns jerseys in Game 2 against the Spurs to be united against the controversial Arizona immigration law. Kerr himself compared the law to Nazi Germany. In 2010, Kerr left the Suns as president of basketball operations and general manager. He continued to own less than one percent of the Suns' organization until 2014, when he decided to coach the Golden State Warriors. Coaching career Golden State Warriors (2014–present) On May 14, 2014, Kerr reached an agreement to become the head coach for the Golden State Warriors, succeeding Mark Jackson in a five year $25 million deal. Kerr coached in the 2014 Summer League for the Warriors. During the 2014–15 season, the team's offense employed elements of the triangle offense from his playing days in Chicago under Phil Jackson, the spacing and pace of Gregg Popovich in San Antonio, and the uptempo principles Mike D'Antoni and later Alvin Gentry used in Phoenix when Kerr was the general manager. After the Warriors beat the Houston Rockets to win their 14th consecutive game, Kerr became the first coach to start his career with a 19–2 record. This beat out Al Cervi and his 18–2 start with the Syracuse Nationals. On December 10, 2014, Kerr became the first NBA rookie head coach to win 21 of his first 23 games. He was named the head coach of the Western Conference team for the 2015 NBA All-Star Game after the Warriors had the best record in the conference. On April 4, the Warriors beat the Dallas Mavericks 123–110 to clinch home-court advantage throughout the playoffs, and Kerr got his 63rd win of the season to become the highest winning rookie head coach in NBA history, passing Tom Thibodeau and his 62 wins with the Chicago Bulls in the 2010–11 season. In the NBA Coach of the Year voting, Kerr was the runner-up to Mike Budenholzer. The Warriors ultimately finished with one of the best regular seasons in NBA history, and the greatest in the team's 69-year history. Golden State ended with an overall record of 67–15, becoming the 10th team to win 67 or more games in a single season. It was the first time the Warriors had ever won as many as 60 games in a season; their previous high was 59 in the 1975–76 season. The Warriors also ended with a 39–2 home record, which is tied for the second-best home record in NBA history. The Warriors were first in defensive efficiency for the season and second in offensive efficiency, barely missing the mark that the Julius Erving–led Sixers achieved by being first in both offensive and defensive efficiency. They became the first team in NBA history to have two win streaks over 15 at home (18 and 19). In the opening round of the playoffs against the New Orleans Pelicans, Kerr led the Warriors to their first four-game playoff sweep since the 1975 NBA Finals. Afterwards, the team beat the Memphis Grizzlies (4–2, in the second round). Down 2–1 in the series, Kerr made an unconventional adjustment in Game 4 to leave the Grizzlies' Tony Allen open and have his defender, center Andrew Bogut, guard the interior. Kerr's strategy was lauded after Allen, Memphis' best wing defender but a poor jump-shooter, was benched and limited to 16 minutes after missing wide open shots. The Warriors then defeated the Houston Rockets (4–1, in the Western Conference finals), making the NBA Finals for the first time in 40 years. The Warriors faced the Cleveland Cavaliers in the Finals. Kerr and coach David Blatt were both in their first season as NBA head coaches, and this was the first time a pair of rookie head coaches faced each other in the NBA Finals since the NBA's first year of existence, in 1947 with Eddie Gottlieb of the Philadelphia Warriors and Harold Olsen of the Chicago Stags competing. After the Warriors went down 2–1 to Cleveland, Kerr started swingman Andre Iguodala in place of Bogut, jump-starting their stagnant offense for a 103–82 road win that evened the series. It was Iguodala's first start of the season, and the small unit came to be known as the Death Lineup. After the game, Kerr admitted to lying to the press in response to pregame questions about potential changes to his starting lineup. The Warriors went on to win the championship in six games, defeating the Cavaliers, 4–2, in the series, to give Kerr his sixth championship and his first as a head coach. After the first two days of the defending champion Warriors' training camp, Kerr took an indefinite leave of absence to rehabilitate his back, which had caused problems since the 2015 NBA Finals. Around this time, assistant coach Luke Walton assumed Kerr's coaching duties. Kerr missed all of 2015 and most of January 2016, although technically the NBA credited Walton's win–loss record to Kerr. Kerr said "I think it's ridiculous", when asked about getting all of Walton's wins. On January 22, 2016, he returned to coaching after missing 43 games, but warned he might need to miss games occasionally if there was a recurrence of the headaches and pain related to the spinal fluid leak that sidelined him. The Warriors went 39–4 with interim coach Luke Walton. The Warriors went 34-5 after Kerr returned to coaching, and the team broke the 1995–96 Chicago Bulls 72–10 record by winning 73 games. Kerr became the first person in NBA history to be a part of 70-win teams as a player and head coach and was named 2015–16 NBA Coach of the Year. Kerr led the Warriors to the 2016 NBA Finals, where they would again face the Cleveland Cavaliers, but the Warriors lost in seven games. On November 20, 2016, the NBA announced that Kerr had been fined $25,000 for public criticism of officiating during a radio interview with KNBR 680 three days prior. Kerr missed time during the 2017 playoffs due to recurring back issues. Associate head coach Mike Brown acted as acting head coach during periods of Kerr's absence, and Brown continued head coaching into the playoffs leading the Warriors to a 13–0 record in the postseason. He returned in Game 2 of the 2017 NBA Finals, where the Warriors defeated the Cleveland Cavaliers in five games. The Warriors finished the playoffs with a 16–1 record, the best postseason winning percentage in NBA history. Kerr is the fourth coach in NBA history to win two championships in his first three seasons of coaching. He won his third championship as a head coach when the Warriors defeated the Cleveland Cavaliers in the 2018 NBA Finals in four games to give Kerr his eighth championship of his career. The Warriors reached their fifth straight Finals under Kerr in 2019, but were defeated by the Toronto Raptors in six games. During Game 5, starting power forward Kevin Durant tore his Achilles, and in Game 6, starting shooting guard Klay Thompson tore his ACL. During the 2019–20 season, with Thompson out for the year and franchise point guard Stephen Curry only playing five games due to a hand injury, the Warriors finished with the worst record (15–50) in the league. It marked the first time in Kerr's coaching career that he had missed the playoffs. In 2020–21, with Thompson still out due to an Achilles tear but Curry healthy, the Warriors qualified for the newly implemented play-in tournament, but ultimately did not qualify for the playoffs for the second straight season. The Warriors returned to the playoffs in 2021–22 and reached the 2022 NBA Finals. They defeated the Boston Celtics in six games, giving Kerr his fourth championship as a head coach and his ninth championship overall. In the 2022-2023 season, Kerr and the Warriors reached the Western Conference Semifinals, where they were defeated 4-2 by the Los Angeles Lakers. United States national team Kerr was an assistant coach on the gold medal-winning 2020 United States men's Olympic basketball team. In December 2021, he was named head coach of the U.S. men's basketball team. In 2023, Kerr led the United States team to a disappointing fourth place finish at the FIBA World Cup and the U.S. failed to win a medal for the second consecutive tournament after an overtime loss to Canada in the bronze medal game, 127–118. Despite finishing fourth at the 2023 FIBA World Cup, it was the first U.S. men's basketball team to lose three games at the World Cup or Olympics since 2004. Legacy Kerr is the first head coach in NBA history to lead his team to 67 or more wins in three consecutive seasons. Kerr was named one of the Top 15 Coaches in NBA History in 2022, when the league commemorated its 75th anniversary. Personal life Kerr married Margot Brennan, his college sweetheart, in 1990. They have three children: Nick, Maddy, and Matthew. He is a keen soccer fan and an avid supporter of Liverpool F.C. In 2023, Kerr bought a minority stake in club RCD Mallorca. Political views and activism Prior to and following the 201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Kerr has been publicly critical of Donald Trump. In an interview following that election, he voiced the opinion that Trump's rise to power was based on insults against women and minorities. He compared Trump's campaign performances and the crude responses of his supporters to the sensationalism of The Jerry Springer Show. Kerr made clear his "disgust" with Trump's disrespectful public discourse and disappointment with Trump's leadership of the country. On October 27, 2020, an ad created by the anti-Trump Republican Lincoln Project Super PAC was first broadcast. In it, along with Philadelphia 76ers coach Doc Rivers, Kerr endorsed Joe Biden for President in the November presidential election. In the advertisement, he said, "I stand for truth over lies", "categorically reject white supremacy", and "believe a presidency should be transparent." Kerr has been a strong supporter of gun control, expressing criticism with the government's response to school shootings. On May 24, 2022, during a press conference for Game 4 of the NBA's 2022 Western Conference finals after that day's Robb Elementary School shooting in Texas where 19 children and two teachers were murdered by a gunman wielding semi-automatic weapons, Kerr reiterated these points emotionally. He said, regarding the filibuster, that Republicans in the U.S. Senate were "holding us hostage", by using it to prevent a vote on gun control legislation. Kerr has voiced support for the Black Lives Matter movements across the United States, praising the efforts of peaceful protests and hopes that more people will take action to stand up to systemic racial injustice to black people. Career statistics NBA Regular season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Phoenix | 26 || 0 || 6.0 || .435 || .471 || .667 || .7 || .9 || .3 || .0 || 2.1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Cleveland | 78 || 5 || 21.3 || .444 || style="background:#CFECEC;"|.507* || .863 || 1.3 || 3.2 || .6 || .1 || 6.7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Cleveland | 57 || 4 || 15.9 || .444 || .452 || .849 || .6 || 2.3 || .5 || .1 || 4.8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Cleveland | 48 || 20 || 17.6 || .511 || .432 || .833 || 1.6 || 2.3 || .6 || .2 || 6.6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Cleveland | 5 || 0 || 8.2 || .500 || .000 || 1.000 || 1.4 || 2.2 || .4 || .0 || 2.4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Orlando | 47 || 0 || 9.4 || .429 || .250 || .909 || .8 || 1.3 || .2 || .0 || 2.6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Chicago | 82 || 0 || 24.8 || .497 || .419 || .856 || 1.6 || 2.6 || .9 || .0 || 8.6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Chicago | style="background:#cfecec;"| 82* || 0 || 22.4 || .527 || style="background:#CFECEC;"|.524* || .778 || 1.5 || 1.8 || .5 || .0 || 8.2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 | style="text-align:left;"|Chicago | 82 || 0 || 23.4 || .506 || .515 || .929 || 1.3 || 2.3 || .8 || .0 || 8.4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 | style="text-align:left;"|Chicago | 82 || 0 || 22.7 || .533 || .464 || .806 || 1.6 || 2.1 || .8 || .0 || 8.1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 | style="text-align:left;"|Chicago | 50 || 0 || 22.4 || .454 || .438 || .918 || 1.5 || 1.9 || .5 || .1 || 7.5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 | style="text-align:left;"|San Antonio | 44 || 0 || 16.7 || .391 || .313 || .886 || 1.0 || 1.1 || .5 || .1 || 4.4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San Antonio | 32 || 0 || 8.4 || .432 || .516 || .818 || .6 || .4 || .1 || .0 || 2.8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San Antonio | 55 || 1 || 11.8 || .421 || .429 || .933 || .6 || 1.0 || .3 || .0 || 3.3 |- | style="text-align:left;"| | style="text-align:left;"|Portland | 65 || 0 || 11.9 || .470 || .394 || .975 || .9 || 1.0 || .2 || .0 || 4.1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 | style="text-align:left;"| San Antonio | 75 || 0 || 12.7 || .430 || .395 || .882 || .8 || .9 || .4 || .0 || 4.0 |- class="sortbottom" | style="text-align:center;" colspan="2"|Career | 910 || 30 || 17.8 || .479 || style="background:#E0CEF2;"|.454 || .864 || 1.2 || 1.8 || .5 || .1 || 6.0 Playoffs |- | style="text-align:left;"|1990 | style="text-align:left;"|Cleveland | 5 || 0 || 14.6 || .286 || .000 || || 1.2 || 2.0 || .8 || .0 || 1.6 |- | style="text-align:left;"|1992 | style="text-align:left;"|Cleveland | 12 || 3 || 12.4 || .439 || .273 || 1.000 || .5 || .8 || .4 || .0 || 3.7 |- | style="text-align:left;"|1994 | style="text-align:left;"|Chicago | 10 || 0 || 18.6 || .361 || .375 || 1.000 || 1.4 || 1.0 || .7 || .0 || 3.5 |- | style="text-align:left;"|1995 | style="text-align:left;"|Chicago | 10 || 0 || 19.3 || .475 || .421 || 1.000 || .6 || 1.5 || .1 || .0 || 5.1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1996 | style="text-align:left;"|Chicago | 18 || 0 || 19.8 || .448 || .321 || .871 || 1.0 || 1.7 || .8 || .0 || 6.1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1997 | style="text-align:left;"|Chicago | 19 || 0 || 17.9 || .429 || .381 || .929 || .9 || 1.1 || .9 || .1 || 5.1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1998 | style="text-align:left;"|Chicago | 21 || 0 || 19.8 || .434 || .463 || .818 || .8 || 1.7 || .3 || .0 || 4.9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1999 | style="text-align:left;"|San Antonio | 11 || 0 || 8.8 || .267 || .231 || .833 || .8 || .7 || .2 || .0 || 2.2 |- | style="text-align:left;"|2001 | style="text-align:left;"|San Antonio | 9 || 0 || 11.2 || .480 || .333 || .500 || 1.0 || .7 || .4 || .1 || 3.3 |- | style="text-align:left;"|2002 | style="text-align:left;"|Portland | 3 || 0 || 13.0 || .429 || .250 || 1.000 || 1.3 || 1.7 || .3 || .0 || 6.3 |- | style="text-align:left; background:#afe6ba;"|2003 | style="text-align:left;"|San Antonio | 10 || 0 || 4.6 || .636 || .833 || .750 || .3 || .6 || .1 || .0 || 2.2 |- class="sortbottom" | style="text-align:center;" colspan="2"|Career | 128 || 3 || 15.6 || .426 || .370 || .876 || .9 || 1.2 || .5 || .0 || 4.3 College |- | style="text-align:left;"|1983–84 | style="text-align:left;"|Arizona | 28 || || 22.6 || .516 || || .692 || 1.2 || 1.3 || 0.3 || 0.0 || 7.1 |- | style="text-align:left;"|1984–85 | style="text-align:left;"|Arizona | 31 || || 33.4 || .568 || || .803 || 2.4 || 4.0 || 0.6 || 0.1 || 10.0 |- | style="text-align:left;"|1985–86 | style="text-align:left;"|Arizona | 32 || || 38.4 || .540 || || .899 || 3.2 || 4.2 || 1.6 || 0.0 || 14.4 |- | style="text-align:left;"|1986–87 | style="text-align:left;"|Arizona | align="center" colspan=11|Redshirted—Did not play |- | style="text-align:left;"|1987–88 | style="text-align:left;"|Arizona | 38 || || 32.6 || .559 || .573 || .824 || 2.0 || 3.9 || 1.2 || 0.1 || 12.6 |- class="sortbottom" | style="text-align:center;" colspan="2"|Career | 129 || || 32.1 || .548 || .573 || .815 || 2.2 || 3.4 || 1.0 || 0.1 || 11.2 Head coaching record |- style="background:#fde910;"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82 || 67 || 15 || || 1st in Pacific || 21 || 16 || 5 || | style="text-align:center;"|Won NBA Championship |-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82 || style="background:#e0cef2;|73 || 9 || style="background:#e0cef2;| || 1st in Pacific || 24 || 15 || 9 || | style="text-align:center;"|Lost in NBA Finals |- style="background:#fde910;"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82 || 67 || 15 || || 1st in Pacific || 17 || 16 || 1 || style="background:#e0cef2;| | style="text-align:center;"|Won NBA Championship |- style="background:#fde910;"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82 || 58 || 24 || || 1st in Pacific || 21 || 16 || 5 || | style="text-align:center;"|Won NBA Championship |-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82 || 57 || 25 || || 1st in Pacific || 22 || 14 || 8 || | style="text-align:center;"|Lost in NBA Finals |-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65 || 15 || 50 || || 5th in Pacific || — || — || — || — | style="text-align:center;"|Missed playoffs |-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72 || 39 || 33 || || 4th in Pacific || — || — || — || — | style="text-align:center;"|Missed playoffs |- style="background:#fde910;"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82 || 53 || 29 || || 2nd in Pacific || 22 || 16 || 6 || | style="text-align:center;"|Won NBA Championship |- | style="text-align:left;"|Golden State | style="text-align:left;"| | 82 || 44 || 38 || || 4th in Pacific || 13 || 6 || 7 || | style="text-align:center;"|Lost in Conference semifinals |- class="sortbottom" | style="text-align:center;" colspan="2"|Career || 711 || 473 || 238 || ||   || 140 || 99 || 41 || || Awards and honors NBA Nine-time NBA champion Five as a player (1996, 1997, 1998, 1999, 2003) Four as a head coach (2015, 2017, 2018, 2022) 2016 NBA Coach of the Year Two-time NBA All-Star Game head coach 1997 NBA Three-Point Contest winner USA Basketball 1986 FIBA World Championship (as a player) 2020 Olympic Gold Medal winner (as an assistant coach) NCAA No. 25 retired by the Arizona Wildcats Media Three-time ESPY Award winner 2015 Best Coach/Manager 2017 and 2022 Outstanding Team (as coach of the Warriors) Records NBA Career 3-point field goal percentage (.454) Chicago Bulls Single-season 3-point field goal percentage (.524, 1994–95) Career 3-point field goal percentage (.479) Cleveland Cavaliers Single-season 3-point field goal percentage (.507, 1989–90) Career 3-point field goal percentage (.472) NCAA Single-season 3-point field goal percentage (57.3%, 1987–88, min 100 made) See also List of NBA players with most championship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Basketballreference as coach 1965 births Living people 1986 FIBA World Championship players Goodwill Games medalists in basketball Goodwill Games gold medalists All-American college men's basketball players American men's basketball coaches American men's basketball players Arizona Wildcats men's basketball players Basketball coaches from California Basketball players from Los Angeles Chicago Bulls players Cleveland Cavaliers players College basketball announcers in the United States Competitors at the 1986 Goodwill Games FIBA World Championship-winning players Golden State Warriors head coaches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broadcasters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championship-winning head coaches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general managers Orlando Magic players Sportspeople from Beirut Phoenix Suns draft picks Phoenix Suns executives Phoenix Suns players Point guards Portland Trail Blazers players San Antonio Spurs players Shooting guards United States men's national basketball team players People of the Lebanese Civil War
https://ko.wikipedia.org/wiki/Bitches%20Brew
Bitches Brew
《Bitches Brew》는 1970년 3월 30일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발매된 미국의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스튜디오 더블 음반이다. 이 음반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그의 음반 《In a Silent Way》에 이전에 등장했던 전기 악기들로 그의 실험을 계속했다. 전기 피아노와 기타와 같은 이러한 악기들의 사용으로, 데이비스는 더 느슨하고 록에 의해 영향을 받는 즉흥적인 스타일을 선호하여 전통적인 재즈 리듬을 거부했다. 이 음반은 파격적인 스타일과 실험적인 사운드로 인해 엇갈린 반응을 보였지만, 50만 장 이상이 팔리면서 데이비스의 첫 번째 골드 레코드가 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Bitches Brew》는 재즈 최고의 음반 중 하나이자 재즈 록 장르의 창시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록과 펑크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음반은 1971년에 베스트 라지 재즈 앙상블 음반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했다. 1998년 컬럼비아 레코드는 1970년 2월까지 스튜디오 세션뿐만 아니라 오리지널 음반도 포함한 4개의 디스크 박스 세트인 《The Complete Bitches Brew Sessions》를 발매했다. 배경 및 녹음 1969년까지 데이비스의 핵심 작업 밴드는 테너 색소폰의 웨인 쇼터, 베이스의 데이브 홀랜드, 일렉트릭 피아노의 칙 코리아, 드럼의 잭 디조넷으로 구성되었다. 디조넷을 뺀 이 그룹은 조 자비눌, 존 맥러플린, 토니 윌리엄스, 허비 행콕도 참여한 《In a Silent Way》 (1969년)를 녹음했다. 이 음반은 일렉트릭 피아노, 기타, 재즈 퓨전 스타일과 같은 전자 악기를 통합한 데이비스의 "일렉트릭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다음 스튜디오 음반을 위해 데이비스는 그의 전자와 퓨전 스타일을 더 깊이 탐구하기를 원했다. 1969년 봄부터 8월까지 그의 5곡과 함께 투어를 하면서, 그는 그의 밴드가 연주할 새로운 곡들을 소개했는데, 그 중에는 〈Miles Runs the Voodoo Down〉, 〈Sanctuary〉, 〈Spanish Key〉 등이 있다. 그의 경력의 이 시점에서 데이비스는 컨템포러리 록과 펑크 음악, 캐넌볼 애덜리와 함께 연주한 자비눌의 연주, 그리고 영국의 작곡가 폴 벅마스터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1969년 8월, 데이비스는 그의 밴드를 모아 리허설을 했다, 예약한 녹음 세션 1주일 전에. 그의 다섯 작품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비눌, 맥러플린, 래리 영, 레니 화이트, 돈 앨리어스, 주마 산토스, 그리고 베니 모핀과 함께 했다. 데이비스는 처음에는 세 대의 피아노에 대해 간단한 화음을 썼고, 더 큰 규모의 작곡의 스케치로 확장했다. 그는 그 그룹에게 "음악 스케치"를 보여주었고 그들이 그가 선택한 화음을 연주하기만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데이비스는 이 음반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고, 제작된 것이 "일부 미리 짜놓은 게 아니라" 즉흥적인 과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각각의 곡을 편곡하지 않았다. 음반 제목 음반 제목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 수 없고,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60년대의 문화적 변화를 그에게 소개시켜준 마일스의 삶의 여성들에 대한 언급이었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빗치(bitches)"는 때때로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지칭하는 은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빗치"가 음악가 그 자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설명이 제시되었다. 발매 《Bitchs Brew》는 1970년 3월에 발매되었다. 이후 4개월 동안 상업적인 탄력을 받아 1970년 7월 4일 일주일 동안 미국 빌보드 200에서 35위로 정점을 찍었다. 이 음반은 데이비스의 차트에서 최고의 성과로 남아있다. 2003년 9월 22일, 이 음반은 미국에서 100만 장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미국 음반 산업 협회로부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곡 목록 인증 각주 외부 링크 Salon Entertainment: a Master at dangerous play A history of jazz fusion Miles Davis – The Electric Period Article by Paul Tingen: Complete Bitches Brew Sessions boxed set at the Miles Beyond site Article by Paul Tingen: In a Silent Way and Bitches Brew The Sorcerer of Jazz 1970년 음반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 컬럼비아 레코드 음반
https://en.wikipedia.org/wiki/Bitches%20Brew
Bitches Brew
Bitches Brew is a studio album by American jazz trumpeter, composer, and bandleader Miles Davis. It was recorded from August 19 to 21, 1969, at Columbia's Studio B in New York City and released on March 30, 1970 by Columbia Records. It marked his continuing experimentation with electric instruments that he had featured on his previous record, the critically acclaimed In a Silent Way (1969). With these instruments, such as the electric piano and guitar, Davis departed from traditional jazz rhythms in favor of loose, rock-influenced arrangements based on improvisation. The final tracks were edited and pieced together by producer Teo Macero. The album initially received a mixed critical and commercial response, but it gained momentum and became Davis' highest-charting album on the U.S. Billboard 200, peaking at No. 35. In 1971, it won a Grammy Award for Best Large Jazz Ensemble Album. In 1976, it became Davis' first gold album to be certified by the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In subsequent years, Bitches Brew gained recognition as one of jazz's greatest albums and a progenitor of the jazz rock genre, as well as a major influence on rock and '70s crossover musicians. In 1998, Columbia released The Complete Bitches Brew Sessions, a four-disc box set that includes the original album and previously unreleased material. In 2003, the album was certified platinum, reflecting shipments of one million copies. Background and recording By 1969, Davis' core working band consisted of Wayne Shorter on soprano saxophone, Dave Holland on bass, Chick Corea on electric piano, and Jack DeJohnette on drums. The group, minus DeJohnette, recorded In a Silent Way (1969), which also featured Joe Zawinul, John McLaughlin, Tony Williams, and Herbie Hancock. The album marked the beginning of Davis' "electric period", incorporating instruments such as the electric piano and guitar and jazz fusion styles. For his next studio album, Davis wished to explore his electronic and fusion style even further. While touring with his five-piece from the spring to August 1969, he introduced new pieces for his band to play, including early versions of what became "Miles Runs the Voodoo Down", "Sanctuary", and "Spanish Key". At this point in his career Davis was influenced by contemporary rock and funk music, Zawinul's playing with Cannonball Adderley, and the work of English composer Paul Buckmaster. In August 1969, Davis gathered his band for a rehearsal, one week prior to the booked recording sessions. As well as his five-piece, they were joined by Zawinul, McLaughlin, Larry Young, Lenny White, Don Alias, Juma Santos, and Bennie Maupin. Davis had written simple chord lines, at first for three pianos, which he expanded into a sketch of a larger scale composition. He presented the group with some "musical sketches" and told them they could play anything that came to mind as long as they played off of his chosen chords. Davis had not arranged each piece because he was unsure of the direction the album was to take; he wanted whatever was produced to come from an improvisational process, "not some prearranged shit." Davis booked Columbia's Studio B in New York City from August 19–21, 1969. The session on August 19 began at 10 a.m., the band playing "Bitches Brew" first. Everyone was set up in a half-circle with Davis and Shorter in the middle. In Lenny White’s words: As usual with Davis' recording sessions during this period, tracks were recorded in sections. Davis gave a few instructions: a tempo count, a few chords or a hint of melody, and suggestions as to mood or tone. Davis liked to work this way; he thought it forced musicians to pay close attention to one another, to their own performances, or to Davis's cues, which could change from moment to moment. On the quieter passages of "Bitches Brew", for example, Davis's voice is audible giving instructions to the musicians, snapping his fingers to indicate tempo, telling the musicians to "Keep it tight" in his distinctive voice, or instructing individuals when to solo — e.g., saying "John" during the title track. "John McLaughlin" and "Sanctuary" were also recorded during the August 19 session. Towards the end the group rehearsed "Pharaoh's Dance". Despite his reputation as a "cool," melodic improviser, much of Davis' playing on this album is aggressive and explosive, often playing fast runs and venturing into the upper register of the trumpet. His closing solo on "Miles Runs the Voodoo Down" is particularly noteworthy in this regard. Davis did not perform on the short piece "John McLaughlin". Album title It is not known where the album title came from, and there are various theories as to where it originates. Some believe it was a reference to women in Davis' life who were introducing him to cultural changes in the '60s. Other explanations have been given. Post-production Significant editing was made to the recorded music. Short sections were spliced together to create longer pieces, and various effects were applied to the recordings. Paul Tingen reports: Though Bitches Brew was in many ways revolutionary, perhaps its most important innovation was rhythmic. The rhythm section for this recording consists of two bassists (one playing bass guitar, the other double bass), two to three drummers, two to three electric piano players, and a percussionist, all playing at the same time. As Paul Tanner, Maurice Gerow, and David Megill explain, "like rock groups, Davis gives the rhythm section a central role in the ensemble's activities. His use of such a large rhythm section offers the soloists wide but active expanses for their solos." Tanner, Gerow and Megill further explain that "the harmonies used in this recording move very slowly and function modally rather than in a more tonal fashion typical of mainstream jazz.... The static harmonies and rhythm section's collective embellishment create a very open arena for improvisation. The musical result flows from basic rock patterns to hard bop textures, and at times, even passages that are more characteristic of free jazz." The solo voices heard most prominently on this album are the trumpet and the soprano saxophone, respectively of Miles and Wayne Shorter. Notable also is Bennie Maupin's bass clarinet present on four tracks. The technology of recording, analog tape, disc mastering, and inherent recording time constraints had, by the late sixties, expanded beyond previous limitations and sonic range for the stereo vinyl album, and Bitches Brew reflects this. Its long-form performances include improvised suites with rubato sections, tempo changes or the long, slow crescendo more common to a symphonic orchestral piece or Indian raga form than the three-minute rock song. Starting in 1969, Davis' concerts included some of the material that would become Bitches Brew. Release Bitches Brew was released in March 1970. It gained commercial momentum for the next four months and peaked at No. 35 on the U.S. Billboard 200 for the week of July 4, 1970. This remains Davis' 2nd best performance on the chart behind "Kind of Blue" which has peaked at #3 on Vinyl and #12 in 2020. On September 22, 2003, the album was certified platinum by the RIAA for selling one million copies in the U.S. In addition to the standard stereo version, the album was also mixed for quadraphonic sound. Columbia released a quad LP version, using the SQ matrix system, in 1971. Sony reissued the album in Japan in 2018 on the Super Audio CD format containing both the complete stereo and quadraphonic mixes. Reception and legacy Reviewing for Rolling Stone in 1970, Langdon Winner said Bitches Brew shows Davis' music expanding in "beauty, subtlety and sheer magnificence", finding it "so rich in its form and substance that it permits and even encourages soaring flights of imagination by anyone who listens". He concluded that the album would "reward in direct proportion to the depth of your own involvement". Village Voice critic Robert Christgau deemed it "good music that's very much like jazz and something like rock", naming it the year's best jazz album and Davis "jazzman of the year" in his ballot for Jazz & Pop magazine. Years later, he had lost some enthusiasm about the album; in Christgau's Record Guide: Rock Albums of the Seventies (1981), he called Bitches Brew "a brilliant wash of ideas, so many ideas that it leaves an unfocused impression", with Tony Williams' steadier rock rhythms from In a Silent Way replaced by "subtle shades of Latin and funk polyrhythm that never gather the requisite fervor". He concluded that the music sounded "enormously suggestive, and never less than enjoyable, but not quite compelling. Which is what rock is supposed to be." Selling more than one million copies since it was released, Bitches Brew was viewed by some writers in the 1970s as the album that spurred jazz's renewed popularity with mainstream audiences that decade. As Michael Segell wrote in 1978, jazz was "considered commercially dead" by the 1960s until the album's success "opened the eyes of music-industry executives to the sales potential of jazz-oriented music". This led to other fusion records that "refined" Davis' new style of jazz and sold millions of copies, including Head Hunters (1973) by Herbie Hancock and George Benson's 1976 album Breezin'. Tom Hull, who would later become a jazz critic, has said, "Back in the early '70s we used to listen to Bitches Brew as late night chill-out music – about the only jazz I ran into at the time." According to independent scholar Jane Garry, Bitches Brew defined and popularized the jazz fusion genre, also known as jazz-rock, but it was hated by a number of purists. Jazz critic and producer Bob Rusch recalled, "This to me was not great Black music, but I cynically saw it as part and parcel of the commercial crap that was beginning to choke and bastardize the catalogs of such dependable companies as Blue Note and Prestige.... I hear it 'better' today because there is now so much music that is worse." Despite the controversy the album stirred among the jazz community, it nonetheless topped DownBeat's annual critics' poll in 1970. The Penguin Guide to Jazz called Bitches Brew "one of the most remarkable creative statements of the last half-century, in any artistic form. It is also profoundly flawed, a gigantic torso of burstingly noisy music that absolutely refuses to resolve itself under any recognized guise." In 2003, the album was ranked number 94 on Rolling Stone magazine's list of the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Nine years later, it went down one spot. In the 2020 list, it climbed to number 87. Along with this accolade, the album has been ranked at or near the top of several other magazines' "best albums" lists in disparate genres. The album was also included in the book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 Experimental jazz drummer Bobby Previte considered Bitches Brew to be "groundbreaking": "How much groundbreaking music do you hear now? It was music that you had that feeling you never heard quite before. It came from another place. How much music do you hear now like that?" Thom Yorke, singer of the English rock band Radiohead, cited it as an influence on their 1997 album OK Computer: "It was building something up and watching it fall apart, that's the beauty of it. It was at the core of what we were trying to do." The singer Bilal names it among his 25 favorite albums, citing Davis' stylistic reinvention. Rock and jazz musician Donald Fagen criticized the album as "essentially just a big trash-out for Miles ... To me it was just silly, and out of tune, and bad. I couldn't listen to it. It sounded like [Davis] was trying for a funk record, and just picked the wrong guys. They didn't understand how to play funk. They weren't steady enough." Track listing Personnel Musicians "Bitches Brew" "John McLaughlin" (omit Brooks, Shorter and Davis) "Sanctuary" (omit McLaughlin, Maupin, Brooks and White) Miles Davis – trumpet Wayne Shorter – soprano saxophone Bennie Maupin – bass clarinet Joe Zawinul – electric piano (left) Chick Corea – electric piano (right) John McLaughlin – electric guitar Dave Holland – bass Harvey Brooks – electric bass Lenny White – drum set (left) Jack DeJohnette – drum set (right) Don Alias – congas Juma Santos (credited as "Jim Riley") – shaker, congas "Miles Runs the Voodoo Down" Miles Davis – trumpet Wayne Shorter – soprano saxophone Bennie Maupin – bass clarinet Joe Zawinul – electric piano (left) Chick Corea – electric piano(right) John McLaughlin – electric guitar Dave Holland – electric bass Harvey Brooks – electric bass Don Alias – drum set (left) Jack DeJohnette – drum set (right) Juma Santos (credited as "Jim Riley") – congas "Spanish Key" "Pharaoh's Dance" Miles Davis – trumpet Wayne Shorter – soprano saxophone Bennie Maupin – bass clarinet Joe Zawinul – electric piano (left) Larry Young – electric piano (center) Chick Corea – electric piano (right) John McLaughlin – electric guitar Dave Holland – bass Harvey Brooks – electric bass Lenny White – drum set (left) Jack DeJohnette – drum set (right) Don Alias – congas Juma Santos (credited as "Jim Riley") – shaker "Feio" Miles Davis – trumpet Wayne Shorter – soprano saxophone Bennie Maupin – bass clarinet Joe Zawinul – electric piano (left) Chick Corea – electric piano (right) John McLaughlin – electric guitar Dave Holland – electric bass Billy Cobham – drum set (left) Jack DeJohnette – drum set (right) Airto Moreira – percussion and cuica Production Teo Macero – producer Frank Laico – engineer (August 19, 1969 session) Stan Tonkel – engineer (all other sessions) Mark Wilder – mastering Mati Klarwein – cover painting Bob Belden – reissue producer Michael Cuscuna – reissue producer Charts Certifications See also Bitches Brew Live (Sony/Legacy, 2011) Memo from producer asking for advice about the title. References Sources External links Salon Entertainment: a Master at dangerous play A history of jazz fusion Miles Davis – The Electric Period Article by Paul Tingen: Complete Bitches Brew Sessions boxed set at the Miles Beyond site Article by Paul Tingen: In a Silent Way and Bitches Brew The Sorcerer of Jazz by Adam Shatz, NY Review of Books, September 29, 2016 issue Miles Davis albums Grammy Hall of Fame Award recipients 1970 albums Columbia Records albums Legacy Recordings albums Jazz fusion albums by American artists Avant-garde jazz albums Albums produced by Teo Macero Albums recorded at CBS 30th Street Studio Albums with cover art by Mati Klarwein Grammy Award for Best Large Jazz Ensemble Album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B%9D%BC%EB%B3%84%20%EC%97%AC%EA%B5%B0
나라별 여군
나라별 여군의 목록이다. 여성의 지위 변화는 많은 국가들에서 여군의 지위 또한 변화시켜왔다. 아시아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육군은 2013년부터 여군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방글라데시 해군 최초의 여성 수병대는 2016년 5월에 첫 훈련을 완료했다. 사우디아라비아 2018년 2월에 비전투 병과의 특정 분야에 한해 여군 모집이 시작되었다. 싱가포르 싱가포르에서는 여성을 징병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전투원 복무를 허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과 1956년 제2차 중동 전쟁 기간 이스라엘 방위군에서 여군들이 보병, 통신병, 수송기 조종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복무했으나, 이후 공군은 여군 조종사 모집을 중단하고, 여성 전투원도 제한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비전투 임무를 담당하며, 2년 동안 의무 복무를 한다. 1994년의 대법원 판결은 공군이 여군 조종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1999년에 카라칼 중대가 창설되었다. 2000년에 카라칼 대대로 확대되었으며, 이후 포병, 정보, 수색, 화생방, 국경수비, 대공 등 분야의 전투원에의 여성의 지원이 가능해졌다. 인도 인도 군 의무대는 1888년에 창설되었으며 양차 세계 대전에서 350명의 인도 간호사들이 전사, 실종되거나 전쟁포로가 되었다. 인도 육군에서는 1992년에 의무 이외의 분야에서 여군 장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2007년 1월 19일, 인도의 여성 경찰관 105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전원 여성인 유엔 평화유지군이 라이베리아에 배치되었다. 2014년에, 인도 육군의 3%, 해군의 2.8%, 공군의 8.5%가 여군이었다. 2015년에 인도에서는 여성이 헬리콥터 조종사에 이어 전투기 조종사 복무도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 자위대가 창설되었을 때, 여성들은 의무대에만 모집되었다. 이후 기회가 확대되어 여성들은 1967년에는 육상자위대의 통신부대, 1974년에는 해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의 통신부대에 지원이 가능해졌다. 1991년까지 자위대에는 6,000명의 여성들이 있었으며, 비전투 분야의 80%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991년 3월에는 방위의과대학교(防衛医科大学校) 최초로 여성 졸업생이 나왔으며, 1992년에는 방위대학교(防衛大学校)에서 여성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여군의 비율은 약 7.5%이다. 카자흐스탄 카자흐군은 여성의 전투원 복무를 허용하고 있다. 태국 태국은 최근 반란 진압 작전을 위해 여군을 모집해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필리핀 1993년까지, 필리핀군에서 여군은 여성 육군 지원 군단(Women's Army Auxiliary Corps)에서만 복무했다. 1993년, 공화국 법률 제7192호(Republic Act No. 7192)의 통과로 여성 전투원의 권리가 인정되고 그 해 4월부터 필리핀 사관학교(Philippine Military Academy)에서 여군 부대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감비아 감비아군은 징병제를 시행하지 않으나 여성의 군 지원을 허용하고 있다. 2011년에 감비아 최초로 여성에게 장군 계급이 수여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여군은 남아프리카 국방군(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여성들은 지원 임무를 담당했으며 1970년 이후 비전투 임무에 배치되었다. 1914년에 육군에서 자원 의무대가 설립되었으며 328명의 간호사들이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유럽과 동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 부대들에서 근무했다. 육군 여성 지원대는 1916년에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여성 자원자들은 행정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12,000명의 남성 군인들을 간호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남아프리카에는 남아프리카 군 의무대(South African Military Nursing Service)와 육군, 해군, 공군, 헌병대 소속 지원대의 총 5개 여성 지원 조직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여성들은 민방위대에서 활동하며 테러 공격에 대비한 동원 계획의 일부로써 훈련을 받았다. 일례로, 1989년에 요하네스버그 민방위대는 자원한 대원 800명을 훈련시켰는데, 그 중 반 가량이 여성이었다. 훈련에는 호신용 무기 훈련, 폭동 진압 절차, 교통 및 군중 통제, 응급처치, 소방 등이 있었다. 또한 확닝되지 않은 수의 여성들이 반란 진압과 특수작전 훈련을 받았다. 여성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여러 민병대에서도 복무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 기간 아프리카국민회의의 군사 조직에서 활동했다. 1990년대의 여론은 여성 전투원에 반대하지만, 관료들은 군의 지도 체계에서 공평하게 여성을 임명할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2011년에는 남아프리카 국방군 전군의 약 26.6%가 여군이었다. 리비아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친위대로 200명으로 구성된 여군 특수부대인 혁명수녀대(الراهبات الثوريات), 일명 "아마존 친위대(The Amazonian Guard)"가 있었다. 알제리 알제리군에서의 여군의 존재는 프랑스에 대항한 알제리 전쟁 당시 매우 중요했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가장 뛰어나고 상징적인 인물들 중에는 여성 전투원들이 있었다. 알제리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여성 경찰을 양성하고 있다. 여군의 지위 또한 2006년 2월 28일 이후 법률에 의해 남성 군인과 법적으로 평등해졌으며, 2009년부터 2015년까지의 여군 홍보는 군에서의 금기를 무너뜨렸다. 군은 이후 공정한 기회를 위해 공식적인 정책과 노력을 계속해왔다.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정부는 2005년 이후 여성 인권에 맞추어 변화를 추진하라는 압력을 받아왔다.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의 여군은 에리트레아군의 30% 이상을 차지하며, 에리트레아 내전과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에서 큰 역할을 했다. 여성은 전투원으로도 복무한다. 튀니지 2003년 3월 이후 모든 튀니지 여성에게 의무 복무가 시행되고 있다. 튀니지는 최초로 여성을 징병하는 아랍권 국가이다. 같이 보기 여군 각주 외부 링크 젠더학 군인 주제별 군사사 나라별 여군
https://en.wikipedia.org/wiki/Women%20in%20the%20military%20by%20country
Women in the military by country
The recent history of changes in women's roles includes having women in the military. Every country in the world permits the participation of women in the military, in one form or another. In 2018, only two countries conscripted women and men on the same formal conditions: Norway and Sweden. A few other countries have laws conscripting women into their armed forces, however with some difference such as service exemptions, length of service, and more. Some countries do not have conscription, but men and women may serve on a voluntary basis under equal conditions. Alenka Ermenc was the first female head of armed forces in any of the NATO member states, having served as the Chief of the General Staff of the Slovenian Armed Forces between 2018 and 2020. Africa Algeria The presence of female soldiers in the Algerian army was of crucial importance during the Algerian revolution against colonial France; some of the most prominent figures and symbols of 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were female combatants. Fatima Zohra Ardjoune, director general of the Ain Naâdja military hospital, was promoted to general, the first woman in the Algerian People's National Army (PNA)—and in the Arab world—to reach this rank. Three years later, Fatima Boudouani became the second woman to be promoted to the rank of general in the PNA, and she was followed by three more women in 2015, therefore making Algeria the Arab country with the biggest number of high-ranking female army commanders. Four generals were also promoted to the rank of major-general. Aardjoun's promotion reflects a growing trend of Algerian women taking more prominent positions in the workforce, most notably in the police and military. Algeria boasts the largest number of female police officers in the Muslim world. The status of women in the military had been made legally equal to that of men in an ordinance on February 28, 2006, and the military's promotions of women from 2009 to 2015 broke an apparent taboo. The army has since put in place a formal policy framework for equal opportunities, and efforts have been made to apply it. Since 2005, Bouteflika has been under pressure to enact more changes in favor of women's rights. Eritrea Female soldiers in Eritrea played a major role in both the war, the Eritrean independence and the border dispute with Ethiopia. during the Eritrean war of independence more than 30% of the Eritrean military were women. They served in direct combat operations. Eritrea is one of the few nations in the world where women fight side by side with men. Both men and women are required to participate in national service, which includes six months of military training. Living side by side in military camps, men and women learn to handle weapons and study military tactics and survival techniques. The Gambia The Gambia Armed Forces have no gender conscription and women are free to volunteer for the armed forces. In 2011 the first female army general was decorated in the Gambia. Libya Libya has female soldiers serving in the armed forces. Female conscription is also followed. A 200-strong unit was Muammar al-Gaddafi's personal bodyguard and is called variously the "Green Nuns" and the "Amazonian Guard", or more commonly in Libya, "The Revolutionary Nuns" (). Mali Women participate in the military in Mali. Mauritania Women have served in the military in Mauritania since July 11, 2007. Somalia Women have served in the military in Somalia since at least 2014. South Africa South African women have a long history of service in the South African Defence Force (SADF) and in the modern 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 (SANDF). In World War I and World War II women served in auxiliary roles in the South African Defence Force and were assigned to non-combat active roles after 1970. In 1914 a volunteer nursing service was established by the army and 328 nurses to serve with South African troops in Europe and East Africa in World War I. The Women's Auxiliary Army Service began accepting women recruits in 1916. Officials estimated that women volunteers relieved 12,000 men for combat in World War I by assuming clerical and other duties. During World War II, South Africa had five service organizations for women—the South African Military Nursing Service, and women's auxiliaries attached to the army, the navy, the air force, and the military police. During the late 1970s and 1980s, women were active in civil defence organizations and were being trained as part of the country's general mobilization against possible attacks. In 1989, for example, the Johannesburg Civil Defence Program provided training for 800 civil defense volunteers, about one-half of whom were women. These classes included such subjects as weapons training for self-defense, antiriot procedures, traffic and crowd control, first aid, and fire-fighting. An unreported number of women also received instruction in counterinsurgency techniques and commando operations. Women also served in military elements of liberation militias in the 1970s and the 1980s, and women were accepted into the ANC's military wing, Umkhonto we Sizwe (Spear of the Nation, also known as Umkhonto—MK), throughout the anti-apartheid struggle. In 1995 women of all races were being incorporated into the 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 (SANDF), and a woman officer, Brigadier Jackie Sedibe, was appointed to oversee the implementation of new SANDF policies concerning the treatment of women. Women had been promoted as high as warrant officers and brigadiers in the Permanent Force by the early 1990s, but only ten women were SADF colonels in 1994. In 1996 Brigadier Sedibe became the first woman in the military to be promoted to the rank of major general. Widespread cultural attitudes in the 1990s still oppose the idea of women in combat, but officials are debating ways to assign women an equitable share of the leadership positions in the military. In 2011 almost 26.6% of the uniformed servicemembers, or a bit over a quarter of the 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 was female. South Sudan Women participate in the military in South Sudan. Some women in the South Sudanese military have risen to the rank of Colonel, and have served 25 years or more. Asia and Oceania Australia All roles in the Australian Defence Force are open to women. The first women became involved with the Australian armed forces with the creation of the Army Nursing Service in 1899. On the 30th of June 2017, women were found to make up 16.5% of the Australian Defence Force (with 20.6% in the Royal Australian Air Force, 20.4% in the Royal Australian Navy and 13.2% in the Australian Army). However, up until 2016, only 74% of the total number of available roles in the Australian armed forces were available to women. Despite this, using 1998-99 figures, the ADF had the highest percentage of women in its employ in the world. In 1998, Australia became the fourth nation in the world to allow women to serve on its submarines. Australia was the fourth country to permit female crew on submarines, doing so in June 1998 on board Collins class submarines. Australia's first deployment of female sailors in a combat zone was aboard HMAS Westralia in the Persian Gulf during the 1991 Gulf War. On 27 September 2011, Defence Minister Stephen Smith announced that women will be allowed to serve in frontline combat roles by 2016. In 1992, allegations of sexual harassment on board HMAS Swan were investigated, and in 1998 similar allegations arose in the Australian Defence Force Academy. Bangladesh Bangladesh Army started recruiting female officers in non-medical roles in 2001. Female soldiers were inducted for the first time in 2015. Bangladesh Navy enrolled 44 women sailors for the first time in 2016. China Women comprise 4.5%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 India The Indian Military Nursing Service was formed in 1888 when India was a part of Britain. Many nurses served in World War I and II where 350 Indian Army nurses either died or were taken prisoner of war or declared missing in action, this includes nurses who died when SS Kuala was sunk by Japanese bombers in 1942. In 1992, the Indian Army began inducting women officers in non-medical roles. On 19 January 2007, the United Nations first all female peacekeeping force made up of 105 Indian policewomen was deployed to Liberia. In 2014, India's army had 3% women, the Navy 2.8% and the Air Force performed best with 8.5% women. In 2015 India opened new combat air force roles for women as fighter pilots, adding to their role as helicopter pilots in the Indian Air Force. In 2020 The Supreme Court delivered the judgment in favor of the women officers. Similar opportunities to the women officers who fulfill the identical criteria as their male counterparts do in Indian Army. The judgment came on a nearly 10-year-old appeal, to grant SSC Indonesia Iran During and before the Iranian revolution, females were used in service. After 79 revolution women were used in Islamic republic military for different wars for example Women in the Iran–Iraq War . armed forces also used women in quelling 2023 protests deployed as female special forces . Basij of IRGC recruit female. In March 2023, Iran is in the process of allowing women to fully enlist in the military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White Revolution. Iraq The Iraqi constitution stipulates that a quarter of the government should be made up of women. Iraq has long been a leader in women's rights. In the 1950s it became the first Arab country to have a female minister and a law that gave women the ability to seek divorce. In 1980, women gained the right to vote and run for public office. Under Saddam Hussein, women in government received one year of maternity leave. Israel Some women served in various positions in the IDF, including infantry, radio operators and transport pilots in the 1948 war of independence and the Suez Crisis in 1956, but later the Air Force closed its ranks to female pilots, and women were restricted from combat positions. There is a draft of both men and women. Most women serve in non-combat positions, and are conscripted for two years (instead of three years for men). A landmark high court appeal in 1994 forced the Air Force to accept women air cadets. In 2001, Israel's first female combat pilot received her wings. In 1999 the Caracal company was formed, as a non segregated infantry company. In 2000 it was expanded into a Battalion (called The 33rd, for the 33 women killed in combat during the War of Independence) since then, further combat positions have opened to women, including Artillery, Field Intelligence, Search and Rescue, NBC, Border Patrol, K-9 Unit and anti-aircraft warfare. On May 26, 2011, IDF Chief of Staff Benny Gantz announced Brigadier General Orna Barbivay's appointment as the next Head of the IDF Personnel Directorate. Barbivay was promoted to major general, thus becoming the most senior female officer in the history of the IDF. Japan When the Japan Self-Defense Forces (JSDF), postwar armed forces of Japan, was originally formed, women were recruited exclusively for the nursing services. Opportunities were expanded somewhat when women were permitted to join the Japan Ground Self-Defense Force (JGSDF; army) communication service in 1967, the Japan Maritime Self-Defense Force (JMSDF; navy) and Japan Air Self-Defense Force (JASDF; air force) communication services in 1974. By 1991, more than 6,000 women were in the JSDF, about 80% of service areas, except those requiring direct exposure to combat, were open to them. The National Defense Medical College graduated its first class with women in March 1991, and the National Defense Academy of Japan began admitting women in 1992. The first female in the JSDF to achieve star ranks (admiral and general) is Hikaru Saeki, who became JMSDF Rear Admiral on 27 March 2001. She was followed by Michiko Kajita and Keiko Kashihara, who were promoted to JASDF Major Generals in 2007 and 2011 respectively. JMSDF Captain Ryoko Azuma became the first woman to command a warship division in March 2018. JASDF First Lieutenant Misa Matsushima became the first woman to qualify as a fighter pilot in August 2018. At that time, the total number of military women in Japan was 13.707, only a little less than 6% of the total force. Kazakhstan Females are allowed to take combat roles in the Kazakh Armed Forces. Nepal Policy and practice for women's participation in the Nepali Army is based on the national policy of gender equality and women empowerment. The Nepali Army has opened recruitment process for women since 1961. Even though the concept of women soldiers is not new in the Nepali Army, it has never before reached the proportions of today. Women's participation in technical service in the Nepali Army also expanded continually as follows: Nurses (1961), Para folders (1965), Medical doctors (1969), Legal (1998), Engineering (2004) and Aviation (2011). Among the officers of the Nepali Army, female officers in the general service is 173 while the technical officers counts to 203. Junior Commission, Non- Commission Female Officers and other ranks include 3217 in general service and 937 in technical service. Existing highest rank for women officers have been T/Brigadier General (3) in the technical service and Major (61) in the general service. New Zealand There are no restrictions on roles for women in the New Zealand Defence Force. They are able to serve in the Special Air Service infantry, armour and artillery. (So far no woman has yet made it into the Special Air Service.) This came into effect in 2001 by subordinate legislation, with a report in 2005 finding that the move helped drive a societal shift that "values women as well as men" but that integration of women into combat roles "needed a deliberate and concerted effort". Pakistan Women in the Pakistan Armed Forces are the female officers who serve in the Pakistan Armed Forces. Pakistan is the only country in the Islamic world to have women appointed in the high ranking assignments and the general officer ranks, as well as performing their military duties in the hostile and combat military operations. Women have been taking part in Pakistan military since 1947 after the establishment of Pakistan, currently a strong sizable unit of women officers who are serving in the Pakistan Armed Forces. In 2006, the first women fighter pilots batch joined the combat aerial mission command of Pakistan Air Force and women in Pakistan Army have been trained in combat missions, particularly in sniper, airborne and infantry warfare. The Pakistan Navy is currently the only uniform service branch where women are restricted to serve in the combat missions especially in the submarine force command, rather they are appointed and served in the operation involving the military logistics, operational planning, staff development and the senior administrative offices, particularly in the regional and central headquarters. Philippines From 1993 onward, women served only in Women's Army Auxiliary Corps of Philippine military. In 1993, women were granted the right to serve as combat soldiers with the passage of Republic Act No. 7192 and the first batch started the training in the Philippine Military Academy in April that year. Saudi Arabia Applications for certain non-combat roles were opened to women in February, 2018. Singapore Singapore allows women to serve in combat roles, although females are not conscripted. Sri Lanka Sri Lanka Air Force (SLAF) was the first service of the Sri Lankan military to allow women to serve, accepting female recruits to the Sri Lanka Volunteer Air Force in 1972. The Sri Lanka Army followed in 1979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Sri Lanka Army Women's Corps (SLAWC). Since then, each service has for both administrative and practical reasons maintained separate units for women. These are the SLAWC and the SLAF Women's Wing; the Sri Lanka Navy does not have a specific name for women's units. In order to maintain discipline, all three services have women MPs attached to their respective military police/provost corps. Currently, female personnel of all three services play an active part in ongoing operations. However, there are certain limitations in 'direct combat' duties such as special forces, pilot branch, naval fast attack squadrons. These are only a few restrictions; female personnel have been tasked with many front line duties and attached to combat units such as paratroops, SLAF Regiment, as well as undertaken support services such as control tower operators, electronic warfare technicians, radio material teletypewriters, automotive mechanics, aviation supply personnel, cryptographers, doctors, combat medics, lawyers, engineers and aerial photographers. In the Sri Lanka Navy female personnel were at first limited to the medical branch, however currently both lady officers and female rates are able to join any branch of service including the executive branch. With the escalation of the Sri Lankan civil war, many female personnel have come under enemy fire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thus taking many casualties including fatalities. As of 2008 there were three female officers of the rank of major general and one Commodore. The Sri Lanka Civil Defence Force, formerly the Sri Lanka Home Guard, has been open to women recruits since 1988. In 1993, these guardswomen were issued firearms and deployed to protect their home towns and villages against attacks by LTTE. As a result, there have been many casualties (including fatalities) from attacks. Taiwan (Republic of China) The Republic of China began recruiting women in 1932 as intelligence officers and recruitment of military nurses and political warfare officers began in 1947 and 1951 respectively. In 1991, careers in other technical fields were opened to women while military academies started enrolling women in 1994. By 2006, women could volunteer for most enlisted and non-commissioned ranks and the quota has been increasing annually. Overall, women comprises around 15% of Taiwan(ROC)'s military similar to female participation in the United States military services. In early 2023, in light of increased military pressure from China, the Taiwanese Defense Ministry announced that it would allow women to volunteer for reserve force training for the first time in its history. Thailand Thailand has recently begun recruiting and training women to conduct counter-insurgency operations (c. 2007). A ranger commander said that when women are protesting, "It is better for women to do the talking. Male soldiers look tough and aggressive. When women go and talk, people tend to be more relaxed". United Arab Emirates The UAE hosts the Gulf region's first military college for women, Khawla Bint Al Azwar Military School and it has been open since 1991 under the late Zayed bin Sultan Al Nahyan. Females were granted the same training and responsibilities as their male counterparts, and also play a major role in humanitarian assistance and peacekeeping operations. Emirati women have reached senior ranks within the UAE Armed Forces, especially in the Air Force combat units. A great example of the achievements of Emirati women is Major Mariam al-Mansouri, The first female fighter pilot in the United Arab Emirates and the Arab World. She made international headlines for leading the UAE's mission to fight ISIS. In 2014, women were had the choice to be conscripted provided they have their parents’ consent. Military service is for 9 months and is optional for women aged 18 to 30 and is mandatory for men aged between 18 and 30 and is for 1 year. Europe Bulgaria The number of women in the Bulgarian military has increased from 12% in 2010 to 20% in 2019. Most women apply to join special forces units. The law on Voluntary Military Service, for both sexes, was passed in 2020; the law allows every fit Bulgarian citizen under 40 to join the voluntary reserve military service for a 6-month period. Denmark Women were employed in the Danish armed forces as early as 1934 with the Ground Observer Corps, Danish Women's Army Corps and Naval Corps in 1946 and the Women's Air Force since 1953. In 1962, the Danish parliament passed laws allowing women to volunteer in the regular Danish armed forces as long as they did not serve in units experiencing direct combat. 1971 saw the enlistment of women as non-commissioned officers, with military academies allowing women in 1974. In 1978, based on the reports of studies on the topic, women were allowed to enlist in an all areas of the Danish armed forces, with combat trials in the eighties exploring the capabilities of women in combat. In 1998, laws were passed allowing women to sample military life in the same way as conscripted men, however without being completely open to conscription. Since then females have served in infantry units in both Iraq and in combat in Afghanistan. Women in the Danish military come under the command of the Chief of Defense. As of January 2010, women make up 5% of the army, 6.9% of the navy, and 8.6% of air force personnel. Finland The Finnish Defense Forces does not conscript women. However, since 1995, women between 18 and 30 years of age have the possibility of voluntarily undertaking military service in the Defence Forces or in the Border Guard. Women generally serve under the same conditions as men. The history of women in the Finnish military is, however, far longer than just since 1995. During the Finnish Civil War, the Reds had several Naiskaarti (Women's Guard) units made of voluntary 16- to 35-year-old women, who were given rudimentary military training. The reactions on women in military were ambivalent during the Civil War. The non-combat duties in Finnish Defence Forces peace-keeping operations opened to women in 1991. Since 1995 the women are allowed to serve in all combat arms including front-line infantry and special forces both in Finland and in operations outside Finland. France In the 1800s, women in the French military were responsible for preparing meals for soldiers, and were called cantinières. They sold food to soldiers beyond that which was given to them as rations. Cantinières had commissions from the administrators of the regiments, and they were required to be married to a soldier of the regiment. They served near the front lines on active campaigns, and some served for as long as 30 years. During the Wars of the French Revolution, some women enlisted in the army, mainly in support roles. Marie-Angélique Duchemin is the first woman with a recorded rank in the French Army, being promoted Corporal and Acting Sergeant in 1794. She was promoted 2nd Lieutenant on the retired list in 1815. Duchemin is the first woman decorated with the Legion of Honor, in 1851. The role of women in the French military grew in 1914 with the recruitment of women as medical personnel (Service de Santé des Armées). In 1939, they were authorized to enlist with the armed service branches, and in 1972 their status evolved to share the same ranks as those of men. Valérie André, a neurosurgeon, became the first woman in France to attain the rank of three-star general as Médecin Général Inspecteur. A veteran of the French Resistance, she served overseas in Indochina. During that period, she learned how to pilot a helicopter so that she could reach wounded soldiers who were trapped in the jungle. André is the first woman to have flown a helicopter in combat. She received many decorations for her achievements, including the highest rank of the Legion of Honour. She retired from active service in 1981. Today women can serve in every position in the French military, including submarines and combat infantry. make up around 15% of all service personnel in the combined branches of the French military. They are 11% of the Army forces, 16% for the Navy, 28% of the Air Force and 58% of the Medical Corps. Currently, women are not allowed to serve in the French Foreign Legion. Germany Since the creation of the Bundeswehr in 1955, Germany had employed one of the most conservative gender-policies of any NATO country. That was generally regarded as a reaction to the deployment of young women at the end of World War II. Though women were exempt from direct combat functions in accordance with Nazi-ideology, several hundred thousand German women, along with young boys and sometimes girls (as Flakhelfer), served in Luftwaffe artillery units; their flak shot down thousands of Allied warplanes. In the year 1975 the first female medical officers were appointed in the Sanitätsdienst of the Bundeswehr. But it was not until January 2001 that women first joined German combat units, following a court ruling by the European Court of Justice. There are no restrictions regarding the branch of service, and there are women serving in the "Fallschirmjäger" and as Tornado fighter pilots. Ireland In the Irish 1916 Rising, Cumann na mBan, the women's wing of the Irish Volunteers, fought alongside them in the streets of Dublin and in the General Post Office, the Irish Volunteers' HQ. Constance Markievicz, an Irish Revolutionary and suffragette, commanded male and female troops during the Rising. The Defence (Amendment) (No. 2) Act, 1979, allowed women to join the Irish Defence Forces for the first time and was passed by the Oireachtas in 1979, making them the first European Armed Forces to allow women all roles in the military including combat roles, and even join the Irish Army Ranger Wing (Fianoglach), the Irish Special Forces, similar to the British SAS. There are no restrictions for women to the "full range of operational and administrative duties." As of January 2010 the number of women in the Permanent Defence Forces is 565, 5.7 percent of the total. Italy During the short life of the fascist Italian Social Republic (World War II), the Female Volunteer Unit was introduced as an auxiliary service and they were known as Female Auxiliary Service (). The law that introduced this unit provided that its existence be limited to war periods. Its equivalent in Southern Italy during World War II, was the CAF, , that was on the side of the Allies. This unit was also dismissed at the end of the war. Those who belonged to this unit were equivalent to sub-lieutenants and wore military uniforms made in Great Britain. In 1959, the Female Police unit () was established. In 1981, Diadora Bussani was the first woman who asked to be admitted into the Naval Academy of Livorno (). She was born in 1962 in Trieste and started her struggle to join the academy in 1981. After being excluded from the application, Italy's regional administrative court upheld the appeal. However, Italy's State Council overturned the judgment. The enlisting of a woman seemed to be legally feasible because of Italian law: Legge 1963 n. 66, which allowed the enrollment of women in public positions. However, the State Council excluded the military, because of biological differences between male and female human bodies. When she became famous and the case was well-known, the United States Navy symbolically granted her enlistment on 2 November 1982. Voluntary female military service was introduced in 1999 with the Italian law: Legge 20 ottobre 1999 n. 380, which introduced the possibility of being admitted to the army for women. Italy was the last country among NATO members to allow women to join the army. Nowadays, women are present in all branches of Italian armed forces, including the police, Carabinieri and Guardia di Finanza. They are also employed for military missions abroad. Before the year 2000, women were employed in war only as voluntary nurses inside organizations Croce Rossa Italiana and Corpo delle infermiere volontarie dell'ACISMOM. 235º Reggimento fanteria "Piceno", which is the training center for women inside the Italian army. Norway Women in Norway have been able to fill military roles since 1938, and during World War II, both enlisted women and female officers served in all branches of the military. However, in 1947 political changes commanded that women only serve in civilian posts, with reservists allowing women to join them in 1959. Female personnel currently make up around 12% of the armed forces (2017). Between 1977 and 1984, the Norwegian Parliament passed laws expanding the role of women in the Norwegian Armed Forces. In 1985 equal opportunities legislation was applied to the military. In 1995, Norway allowed women to serve in its military submarines. To this date, there has been at least one female commander of a Norwegian submarine. The first was Solveig Krey in 1995. In 2015, conscription was extended to women making Norway the first NATO member and first European country to make national service compulsory for both men and women. In 2014, Norway formed the Jegertroppen, an all-female special forces unit. Poland Women have taken part in the battles for independence against occupiers and invaders since at least the time of the Napoleonic Wars. During the occupation by the Nazis, 1939–1945, several thousand women took part in the resistance movement as members of the Home Army and the People's Army. The Germans were forced to establish special prisoner-of-war camps after the Warsaw Rising in 1944 to accommodate over a thousand women prisoners. In April 1938 the law requiring compulsory military service for men included provisions for voluntary service of women in auxiliary roles, in the medical services, in the anti-aircraft artillery and in communications. In 1939 a Women's Military Training Organization was established under the command of Maria Wittek. In present Poland a law passed April 6, 2004 requires all women with college nursing or veterinary degrees to register for compulsory service. In addition it allows women to volunteer and serve as professional personnel in all services of the army. As of January 2020, there are 7465 female soldiers in active service. Two active duty Polish women have achieved the rank of Colonel. Maria Wittek was the 1st Polish woman to reach the rank of General. Russia During the First World War, heavy defeats led to the loss of millions of Russian Imperial soldiers. To psychologically energize morale Alexander Kerensky (leader of the Russian Provisional Government) ordered the creation of the Woman's Death Battalion in May 1917. After three months of fighting, the size of this all-female unit fell from 2,000 to 250. In November 1917, the Bolsheviks dissolved the unit. The current tally of women in the Russian Army stands at around 115,000 to 160,000, representing 10% of Russia's military strength. Serbia Although the Serbian armed forces were traditionally exclusively male (with exception of nurses and some other non-combat roles) there were some exceptions. Several women are known to have fought in the ranks in the Balkan Wars and the First World War, often by initially hiding their gender to work around the draft regulations. The most notable of them was Milunka Savić, the most decorated female combatant in history. In the Second World War Yugoslav partisan units accepted female volunteers as combatants as well as medical personnel. After the war the practice was abandoned, but was reintroduced recently with professionalisation of the army. Sweden In the Military Articles of 1621, which organized the Swedish army, military men on all levels were explicitly allowed to bring their wives with them to war, as the wives were regarded to fill an important role as sutlers in the house hold organisation of the army. Prostitutes, however, were banned. This regulation was kept until the Military Article of 1798, though the presence of women diminished after the end of the Great Northern War. In the Military Article of 1798, the only women allowed to accompany the army was the professional unmarried female sutlers, in Sweden named marketenterska. Unofficially, however, there were females who served in the army posing as male the entire period, the most famous being Ulrika Eleonora Stålhammar. In 1924, the Swedish Women's Voluntary Defence Organization ("Lottorna") was founded: it is an auxiliary defense organization of the Home Guard, a part of the Swedish Armed Forces. Since 1989 there are no gender restrictions in the Swedish military on access to military training or positions. They are allowed to serve in all parts of the military and in all positions, including combat. In 2010, Sweden abolished male-only conscription and replaced it with a gender-neutral system. Simultaneously, the conscription system was however deactivated, only to be reactivated in 2017. Hence, beginning in 2018 both women and men are obliged to do military service. In 2018, female personnel made up 15% of the soldiers in training and less than 7% of the professional military officers. Turkey When Turkish history is examined, it is apparent that Turkish women have voluntarily taken tasks in the defence of their country, showing the same power and courage as men. Nene Hatun, whose monument has been erected in the city of Erzurum (Eastern Turkey) because of her gallant bravery during the Ottoman-Russian War, constitutes a very good example of this fact. Besides providing nursery services, women also took main roles in combat in WWI. Furthermore, the Independence War has taken its place in history with the unsurpassed heroism of Turkish women. Sabiha Gökçen was the first female combat pilot in the world, as well as the first Turkish female aviator. She was one of the eight adoptive children of Mustafa Kemal Atatürk. Throughout her career in the Turkish Air Force, Gökçen flew 22 different types of aircraft for more than 8,000 hours, 32 hours of which were active combat and bombardment missions. She was selected as the only female pilot for the poster of "20 Greatest Aviators in History" published by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1996. Women personnel are being employed as officers in the Turkish Armed Forces today. The women officers serve together with the men under the same respective chains of command. The personnel policy regarding women in the Turkish Armed Forces is based on the principle of "needing qualified women officers in suitable branches and ranks" to keep pace with technological advancements in the 21st century. Women civilian personnel have been assigned to the headquarters staff, technical fields, and social services without sexual discrimination. Women officers serve in all branches except armor, infantry, and submarines. Assignments, promotions and training are considered on an equal basis with no gender bias. As of the year 2005, the number of the female officers and NCOs in the Turkish Armed Forces is 1245. Ukraine Women (on active duty) make almost 15,6% of the Armed Forces of Ukraine (31,757 persons); 7% of those are officers. This number is close to NATO armies' statistics. Ukraine shows better results in military gender equality than countries like Norway (7%) or United Kingdom (9%). There are few female high officers, 2.9% (1,202 women), with a dozen female colonels as of 2010 and the first female general appointed in October 2018. Also in 2018, Ukraine adopted a law that gives military women equal rights with men. Contractual military service counts for almost 44% of women. However, this is closely linked to the low salary of such positions: men refuse to serve in these conditions when women accept them. In total about 25 percent of Ukraine's 200,000 military personnel are women. Servicewomen live in woman-only apartments near the military bases. A female officer can take three years’ maternity leave without losing her position. United Kingdom Women were first employed by the Royal Navy in 1696 when a handful were employed as nurses and laundresses on hospital ships. They received pay equal to an able seaman. The practice was always controversial and over the next two centuries, first the nurses and then the laundresses were removed from service. By the start of the 19th century both roles had been eliminated. Female service in the Royal Navy restarted 1884 when the Naval Nursing Service was formed. It became the Queen Alexandra's Royal Naval Nursing Service in 1902 and is still in operation. Women have had active roles in the British Army since 1902, when the Queen Alexandra's Royal Army Nursing Corps was founded. The Princess Mary's Royal Air Force Nursing Service was formed in 1918.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bout 600,000 women served in the three British women's auxiliary services: the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 the Women's Auxiliary Air Force, and the Women's Royal Naval Service, as well as the nursing corps. In 1917, the Queen Mary's Army Auxiliary Corps was formed; 47,000 women served until it was disbanded in 1921. The Women's Royal Naval Service (WRNS) was formed in 1917 as well. Before it disbanded in 1919, it provided catering and administrative support, communications and electrician personnel. In 1938, the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 (ATS) was created, with 20,000 women serving in non-combat roles during World War II, including as military police. They also performed a combat role on British soil, as anti-aircraft gunners against the Luftwaffe. In 1949, women were officially recognized as a permanent part of the British Armed Forces, although full combat roles were still restricted to men. In this year, the Women's Royal Army Corps was created to replace the ATS, and in 1950 the ranks were normalised with the ranks of men serving in the British Army. From 1949 to 1992, thousands of women served in the WRAC and sister institutions. Women first became eligible to pilot Royal Air Force combat aircraft in 1989. The following year, they were permitted to serve on Royal Navy warships. Since 1990, women have successfully served as Royal Navy clearance divers. The 1991 Gulf War marked the first deployment of British women in combat operations since 1945. As of 2010, female personnel made up around 9% of the British armed forces. The seizure of Royal Navy sailor Faye Turney in 2007 by the naval forces of the Iranian Revolutionary Guard led to some media comment on the role of women and mothers in the armed forces. In December 2015, it was announced that women would be permitted to begin training in autumn 2016 in order to enter all roles by the end of that year. In 2016 a ban on women serving in close combat roles was lifted by Prime Minister David Cameron. In 2017 the Royal Air Force's ground-fighting force became open to women for the first time, making the RAF the first branch of the forces to open every role to female service personnel. In 2018, women became eligible to apply for all roles in the British forces. , the most senior serving woman is the three-star Lieutenant General Sharon Nesmith, currently serving as Deputy Chief of the General Staff. North America Canada During the First World War, over 2,300 women served overseas in the Canadian Army Medical Corp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5,000 women of the Royal Canadian Army Medical Corps again served overseas, however they were not permitted to serve on combat warships or in combat teams. The Canadian Army Women's Corps was create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s was the Royal Canadian Air Force (Women's Division). As well, 45,000 women served as support staff in every theatre of the conflict, driving heavy equipment, rigging parachutes, and performing clerical work, telephone operation, laundry duties and cooking. Some 5,000 women performed similar occupations during Canada's part in the Korean War of 1950–1953. In 1965 the Canadian government decided to allow a maximum of 1,500 women to serve directly in all three branches of its armed forces, and the former "women's services" were disbanded. In 1970 the government created a set of rules for the armed forces designed to encourage equal opportunities. In 1974 the first woman, Major Wendy Clay, earned her pilot's wings in the newly integrated Canadian Forces. Between 1979 and 1985 the role of women expanded further, with military colleges allowing women to enroll in 1980. In 1982 laws were passed ending all discrimination in employment, and ships, aircraft (pilots) and field units in the Canadian Armed Forces were opened for women, with the exception of the submarine service. In 1986 Canada saw its first female Brigadier-General. In 1989, a tribunal appointed under the Canadian Human Rights Act ordered full integration of women in the Canadian Armed Forces "with all due speed", at least within the next ten years. This opened all further trades (combat roles) to women. Only submarines were to remain closed to women. In 1989, Heather Erxleben became the first woman in Canada to serve in the regular force infantry and Sandra Perron became Canada's first female infantry officer in 1991. Women were permitted to serve on board Canadian submarines in 2002 with the acquisition of the Victoria-class submarine. Master Seaman Colleen Beattie became the first female submariner in 2003. Canadian women have also commanded infantry, artillery and combat engineer units and divisions; as well as Canadian warships and squadrons and wings. Commander Josée Kurtz was the first woman appointed to command a major warship – . She then went on to command a NATO task force, the Royal Military College and was promoted to Rear-Admiral in 2023 to command Maritime Command-Atlantic. The first woman to command a regular force combat brigade was Colonel Marie-Christine Harvey (an artillery officer) in 2021. Lieutenant-General Jennie Carignan was the first woman to command a combat arms unit, then a division in Canada. She was the first combat arms officer to make it to the rank of general in the world. She commanded the NATO Mission in Iraq and was promoted to her current rank of lieutenant-general in 2021, making her the highest ranking woman combat arms officer in the world, at the time. By 2023, Canada's highest ranking pilot was Lieutenant-General Lise Bourgoin and the vice Chief of Defence (2nd in command of the Canadian Armed Forces) was Lieutenant-General Francis Allen. On May 17, 2006 Captain Nichola Goddard became the first Canadian Combat arms woman (artillery) killed in combat during operations in Afghanistan. As of July 2023, women comprise 16.5% of the Canadian Armed Forces as officers and non-commissioned members in the Regular Force and Primary Reserve (with 20.7% in the Royal Canadian Navy, 13.9% in the Canadian Army and 20.3% in the Royal Canadian Air Force). United States A few women fought in the American Army in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while disguised as men. Deborah Sampson fought until her sex was discovered and she was discharged, and Sally St. Clare died in the war. Anna Maria Lane joined her husband in the Army, and by the time of the Battle of Germantown, she was wearing men's clothes. According to the Virginia General Assembly, "in the revolutionary war, in the garb, and with the courage of a soldier, [Lane] performed extraordinary military services, and received a severe wound at the battle of Germantown." The number of women soldiers in the American Civil War is estimated at between 400 and 750, although an accurate count is impossible because the women again had to disguise themselves as men. The United States established the Army Nurse Corps as a permanent part of the Army in 1901; the Corps was all-female until 1955. During World War I, 21,498 U.S. Army nurses (American military nurses were all women then) served in military hospitals in the United States and overseas. Many of these women were positioned near to battlefields, and they tended to over a million soldiers who had been wounded or were unwell. 272 U.S. Army nurses died of disease (mainly tuberculosis, influenza, and pneumonia). Eighteen African-American Army nurses served stateside caring for German prisoners of war (POWs) and African-American soldiers. They were assigned to Camp Grant, IL, and Camp Sherman, OH, and lived in segregated quarters. Hello Girls was the colloquial name for American female switchboard operators in World War I, formally known as the Signal Corps Female Telephone Operators Unit. During World War I, these switchboard operators were sworn into the Army Signal Corps. This corps was formed in 1917 from a call by General John J. Pershing to improve the worsening state of communications on the Western front. Applicants for the Signal Corps Female Telephone Operators Unit had to be bilingual in English and French to ensure that orders would be heard by anyone. Over 7,000 women applied, but only 450 women were accepted. Many of these women were former switchboard operators or employees at telecommunications companies. Despite the fact that they wore Army Uniforms and were subject to Army Regulations (and Chief Operator Grace Banker received the Distinguished Service Medal), they were not given honorable discharges but were considered "civilians" employed by the military, because Army Regulations specified the male gender. Not until 1978, the 6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World War I, did Congress approve veteran status and honorable discharges for the remaining women who had served in the Signal Corps Female Telephone Operators Unit. The first American women enlisted into the regular armed forces were 13,000 women admitted into active duty in the U.S. Navy during the war. They served stateside in jobs and received the same benefits and responsibilities as men, including identical pay (US$28.75 per month), and were treated as veterans after the war. The U.S. Marine Corps enlisted 305 female Marine Reservists (F) to "free men to fight" by filling positions such as clerks and telephone operators on the home front. In January 1918, Myrtle Hazard enlisted in the Coast Guard, served as a telegraph operator, and was discharged as an Electrician 1st Class. She was the only woman to serve in the Coast Guard during the war and she is the namesake of USCGC Myrtle Hazard. Wartime newspapers erroneously reported that twin sisters Genevieve and Lucille Baker were the first women to serve in the Coast Guard. While they tried to enlist, they were not accepted. These women were demobilized when hostilities ceased, and aside from the Nurse Corps the uniformed military became once again exclusively male. In 1942, women were brought into the military again, largely following the British model. The Woman's Army Auxiliary Corps, the women's branch of the United States Army, was established in the United States on 15 May 1942 by Public Law 554, and converted to full status as the WAC on 1 July 1943. The Woman's Naval Reserve was also created during World War II. In 1944 women from the Women's Army Corps (WACs) arrived in the Pacific and landed in Normandy on D-Day. During the war, 67 Army nurses and 16 Navy nurses were captured and spent three years as Japanese prisoners of war. There were 350,000 American women who served during World War II and 16 were killed in action; in total, they gained over 1,500 medals, citations, and commendations. Additionally, by the end of WW II, Women Ordnance Workers (WOWs) accounted for approximately 85,000 of all civilian employees, working for the Ordnance Corps. Ordnance soldiers and civilians worked across the globe, ranging from Iceland, Iran, the Pacific Islands, Africa, and Europe, to the Middle East. Virginia Hall, serving with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received the second-highest US combat award, the Distinguished Service Cross, for action behind enemy lines in France. Hall, who had one artificial leg, landed clandestinely in occupied territory aboard a British Motor Torpedo Boat. Law 625, The Women's Armed Services Act of 1948, was signed by President Truman, allowing women to serve in the armed forces in fully integrated units during peacetime, with only the WAC remaining a separate female unit. The WAC as a branch was disbanded in 1978. Women serving as WACs at that time converted in branch to whichever Military Occupational Specialty they worked in. U.S. servicewomen who had joined the Reserves following World War II were involuntarily recalled to active duty during the Korean War. More than 500 Army nurses served in the combat zone and many more were assigned to large hospitals in Japan during the war. One Army nurse (Major Genevieve Smith) died in a plane crash en route to Korea on July 27, 1950, shortly after hostilities begin. Navy nurses served on hospital ships in the Korean theater of war as well as at Navy hospitals stateside. Eleven Navy nurses died en route to Korea when their plane crashed in the Marshall Islands. Air Force nurses served stateside, in Japan, and as flight nurses in the Korean theater during the conflict. Three Air Force nurses were killed in plane crashes while on duty. Many other servicewomen were assigned to duty in the theater of operations in Japan and Okinawa. Records regarding American women serving in the Vietnam War are vague. However, it is recorded that 600 women served in the country as part of the Air Force, along with 500 members of the WAC, and over 6,000 medical personnel and support staff. Frontiero v. Richardson, , was a landmark United States Supreme Court case which decided that benefits given by the United States military to the family of service members cannot be given out differently because of sex. In 1974, the first six women aviators earned their wings as Navy pilots. The Congressionally mandated prohibition on women in combat places limitations on the pilots' advancement, but at least two retired as captains. In 1976 the United States Air Force Academy, United States Coast Guard Academy,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and the United States Naval Academy became coeducationa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then eliminated the Women in the Air Force program; with women more fully integrated with men in the service it was considered unnecessary. On December 20, 1989, Captain Linda L. Bray, 29, became the first woman to command American soldiers in battle, during the invasion of Panama. She was assigned to lead a force of 30 men and women military police officers to capture a kennel holding guard dogs that was defended by elements of the Panamanian Defense Forces. The 1991 Persian Gulf War proved to be the pivotal time for the role of women in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to come to the attention of the world media. Over 40,000 women served in almost every role the armed forces had to offer. However, while many came under fire, they were not permitted to participate in deliberate ground engagements. Despite this, there are many reports of women engaging enemy forces during the conflict. The 1996 case United States v. Virginia, in which the Supreme Court ordered that the Virginia Military Institute allow women to register as cadets, gave women soldiers a weapon against laws which (quoting Judge Ruth Bader Ginsburg) “[deny] to women, simply because they are women, full citizenship stature—equal opportunity to aspire, achieve, participate in and contribute to society”. Women in the U. S. military served in the Iraq War from 2003 until 2011. During this war, U.S. Army reservists Lynndie England, Megan Ambuhl, and Sabrina Harman were convicted by court martial of cruelty and maltreatment of prisoners at Abu Ghraib prison. Also, Leigh Ann Hester received the Silver Star for her heroic actions on 20 March 2005 during an enemy ambush on a supply convoy near the town of Salman Pak, Iraq. This made her the first female U.S. Army soldier to receive the Silver Star since World War II and the first ever to be cited for valor in close quarters combat. In 2008, Ann Dunwoody became a four-star general in the Army, making her the first woman in U.S. military and uniformed service history to achieve a four-star officer rank. As of 2010, the majority of women in the U.S. army served in administrative roles. In 2011, Major General Margaret H. Woodward commanded Operation Odyssey Dawn's air component in Libya, making her the first woman to command a U.S. combat air campaign. The Ike Skelton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 for Fiscal Year 2011 directed the Department of Defense (DoD) to review the laws, policies and regulations restricting the service of female service members. As a result, DoD submitted the Review of Laws, Policies and Regulations Restricting the Service of Female members in the U.S. Armed Forces, popularly known as the "Women in Service Review", to Congress in February 2012. According to the review, DoD intended to eliminate co-location exclusion (opening over 13,000 Army positions to women); grant exceptions to policy to assign women in open occupations to direct ground combat units at the battalion level; assess the suitability and relevance of direct ground combat unit assignment prohibition to inform future policy based on the results of these exceptions to policy; and further develop gender-neutral physical standards for closed specialties. In 2012, Janet C. Wolfenbarger became the first female four-star general in the Air Force. Michelle J. Howard began her assignment as the U.S. Navy's first female (and first African-American female) four-star admiral on July 1, 2014. In December 2015, Defense Secretary Ash Carter stated that starting in 2016 all combat jobs would open to women. In March 2016, Ash Carter approved final plans from military service branches and the U.S. Special Operations Command to open all combat jobs to women, and authorized the military to begin integrating female combat soldiers "right away." In 2017, the first woman graduated from the infantry officer course of the Marine Corps; her name was not made public. In 2019 the United States Space Force was established as the sixth armed service branch of the United States, and Nina M. Armagno became the first female general in the United States Space Force in 2020. Women in the U. S. military currently serve in the Afghanistan War that began in 2001, and the American-led intervention in Iraq that began in 2014. During the Afghanistan War, American soldier Monica Lin Brown, was presented the Silver Star for shielding wounded soldiers with her body, and then treating life-threatening injuries. South America Argentina During Independence wars, Bolivian Juana Azurduy was the first woman to receive rank, uniforme and wage and to fully participate in combate around 1816. The Argentine Army first authorized women in their ranks in 1997, the Air Force in 2001 and the Argentine Navy in 2002. Since then, they were deployed in peacekeeping missions to Cyprus and Haiti. The first female Argentine Air Force combat pilot graduated in 2005. Bolivia The Bolivian Air Force's first female military pilot completed her solo-flight in August 2015. On 9 March 2015 Gina Reque Teran became the first female army general in Bolivia and the first female general in South America to command combat troops. Brazil The first participation of a woman in combat occurred in 1823. Maria Quitéria de Jesus fought for the maintenance of the independence of Brazil, and is considered the first woman to enlist in a military unit. However, only in 1943, during World War II, women officially entered the Brazilian Army. They were sent 73 nurses, 67 of them registered nurses and six air transport specialists. They served in four different hospitals in the US Army, all volunteered for the mission and were the first women to join the active service of the Brazilian armed forces. After the war, as well as the rest of the FEB, the nurses, most have been awarded, they won the official patent and licensed the active military service. In 2012, Dalva Maria Carvalho Mendes (born 1956) is a Brazilian doctor and soldier and the first woman to be made a rear admiral in the Brazilian Navy. Colombia Joanna Herrera Cortez became the first female Colombian fighter pilot in 2004. She also became a lieutenant and put in charge of 99 men. See also Women in combat Women in the military in the Americas Women in the military in Europe References External links Military history by to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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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골
싱골(Thingol)은 《실마릴리온》의 등장인물이다. 본명은 엘웨. 가운데땅에서 군림한 신다르 대왕으로 널리 알려졌다. 개요 본명은 엘웨(Elwë, 별의 사람)이다. 넬랴르(텔레리)의 첫 요정인 에넬과 에넬예 사이에서 태어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요정의 아들로, 동생으로 올웨와 엘모가 있다. 발리노르에 사절로 초대되어 영생목의 빛을 목도한 뒤 요정무리들을 설득해 텔레리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으나, 멜리안과 사랑에 빠져 가운데땅에 정착해 요정왕국 도리아스를 세운 뒤 강력한 요정왕으로서 벨레리안드에서 군림했다. 생애 요정들의 대여정과 도리아스의 건국 잉궤, 핀웨와 함께 발라들의 초대를 받은 엘웨는 텔페리온과 라우렐린의 광휘를 목격한 뒤 다시금 그 빛을 보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넬랴르를 설득해 서쪽을 향한 대여정을 시작한다. 넬랴르는 노래를 잘하는 분파였기에 린다르로 불리게 되었고, 나중에 발리노르에 가장 늦게 도착하였기에 텔레리로 불리게 되며, 긴 여정을 거치며 분파가 갈라지게 됐다. 어느 날, 엘웨가 친구 핀웨를 만나기 위해 난 엘모스 숲을 지나던 중에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이끌린 그는 그 노랫소리를 따라가게 되었고, 노래를 부르고 있던 멜리안을 보게 된다. 엘웨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는 마법에 빠져 수백년간 서로를 말 없이 응시하고만 있었다. 결국 친동생인 올웨는 기다림에 지쳐 발리노르로 향하길 원하는 텔레리들과 함께 먼저 떠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엘웨는 멜리안과 함께 그들의 백성에게로 돌아왔다. 돌아온 엘웨에게는 마치 마이아 군주와도 같은 위엄이 서려있었다. 백성들은 그들을 환영하였고, 곧 이어 흩어져 있던 백성들을 모아 요정왕국 도리아스를 세웠다. 비록 엘웨는 발리노르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멜리안의 얼굴에 비친 발리노르의 빛을 보고 만족했다고 한다. 엘웨를 기다리며 가운데 땅에 남은 텔레리들은 신다르라고 불리며, 엘웨는 이름을 회색망토라는 뜻의 싱골로라는 별명(epessë)이 붙었으며, 엘웨 싱골로라는 이름을 신다린으로 읽으면 엘루 싱골(Elu Thingol)이 되어, 이후로는 주로 싱골로 불린다. 태양의 제1시대에 모르고스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싱골은 멜리안과 자신의 허락 없이 진입할 수 없는 마법의 장벽, 멜리안의 장막을 도리아스에 둘렀다. 이 안개장막에 의해 도리아스는 다른 요정왕국들에 비해 안전할 수 있었으며, 마이아 멜리안의 지식과 예지능력에 의해 크게 번성하였다. 한편 싱골은 놀도르의 망명에 대해서 기쁨보다는 불편함을 느꼈는데, 모르고스의 위협이 놀도르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알쿠알론데의 동족살해에 대해 알기 된 싱골은 크게 분노하여 놀도르의 언어인 퀘냐 사용을 금지했고, 신다린을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핀웨의 막내 피나르핀의 가문 사람만을 도리아스에 들이는 것을 허락했으며, 망명 놀도르에게 벨레리안드 변방의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땅을 차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베렌과 루시엔 싱골과 멜리안 사이에는 루시엔이라는 외동딸 하나가 있다. 그녀는 일루바타르의 자손 중 가장 아름다웠으며, 가장 고귀한 혈통을 가졌는데, 이유는 마이아의 혈통을 직접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싱골은 귀중한 외동딸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어느 날 루시엔이 자신이 천하게 여기던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싱골은 당장 그 인간을 잡아오도록 시킨다. 이를 눈치 챈 루시엔이 인간을 환영하며 이를 막았고, 싱골은 인간을 비하하게 된다. 이에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바라히르의 아들 베렌이라 밝히며 루시엔과의 결혼에 대해 허락을 구한다. 이에 싱골은 베렌에게 모르고스의 철왕관에 박힌 실마릴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베렌은 호기 넘치게 받아들이며 떠났다. 후에 베렌이 돌아오자 싱골은 실마릴을 보이라고 명했고, 베렌은 거대 늑대 카르카로스에 의해 잘린 손목을 보여주며 험난한 여정을 이야기했다. 이를 보자 싱골의 분노가 누그러졌고, 루시엔과의 결혼을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카르카로스가 도리아스를 침략한다. 카르카로스는 이미 거대한 운명의 일부가 된 상태여서 멜리안의 장막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카르카로스가 싱골을 습격하려 하자 베렌이 이를 막으려다 치명상을 입었고, 카르카로스 또한 후안과 싸우다 사망한다. 카르카로스의 배를 가르자 실마릴을 쥐고 있던 베렌의 손이 있었고, 싱골은 실마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만다. 하지만 머지 않아 베렌이 죽자, 슬픔에 빠진 루시엔 또한 죽어버린다. 싱골은 크게 상심하여 급격하게 노쇠함을 겪게 되며, 이후 루시엔이 돌아와 그의 노쇠함을 치유해주었다. 베렌이 가져온 실마릴은 도리아스의 몰락을 불러왔다. 최후 베렌과 루시엔이 결혼한 이후에 싱골은 투린을 거두어서 보살폈다. 어느날 모르고스에게서 풀려난 후린이 나우글라미르를 싱골에게 주었고, 싱골은 그 목걸이를 실마릴과 결합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졌다. 그는 노그로드의 난쟁이에게 실마릴에 세공 작업을 맡겼으나 난쟁이들 또한 실마릴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진다. 실마릴이 박힌 나우글라미르는 몹시 아름다워서 싱골이 이를 걸치려고 했을 때 난쟁이들은 갑자기 나우글라미르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싱골은 이에 난쟁이들을 비난했다. 결국 싱골은 분노한 난쟁이에게 살해당한다. 멜리안 또한 싱골의 죽음에 상심하여 루시엔을 호출하고 도리아스를 마블룽에게 맡긴 뒤 발리노르로 떠났다. 멜리안이 떠나자 멜리안의 장막을 비롯해서 그녀가 걸어둔 마법이 사라졌고, 도리아스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텔레리 지도자 신다르 요정의 대왕이며 동시에 텔레리를 이끄는 올웨의 친형이며 갈라드리엘의 남편 켈레보른의 부친 엘모의 친형이기도 하다. 싱골이라는 이명은 자신을 따르는 신다르와 함께 가운데땅에 남은 후 본명보다 싱골이라는 이명이 그를 언급할 주로 사용된다. 2시대 인간 왕국 누메노르 왕족의 시조이기도 하다. 족보 실마릴리온의 등장인물 1977년 창조된 가공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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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gol
Elu Thingol or Elwë Singollo is a fictional character in J.R.R. Tolkien's Middle-earth legendarium. He appears in The Silmarillion, The Lays of Beleriand and The Children of Húrin and in numerous stories in The History of Middle-earth. The King of Doriath, King of the Sindar Elves, High-king and Lord of Beleriand, he is a major character in the First Age of Middle-earth and an essential part of the ancestral backgrounding of the romance between Aragorn and Arwen in The Lord of the Rings. Alone among the Elves, he married an angelic Maia, Melian. Scholars have written that Thingol turns away from the light, so that when he receives a Silmaril, he is unable to appreciate it. They have stated, too, that he fails to take advantage of his marriage to Melian, instead ignoring her advice about the Silmaril, leading to the downfall of his kingdom. Fictional history In The Silmarillion, Thingol is introduced as Elwë, one of the three chieftains (with Finwë and Ingwë) of the Elves who depart from Cuiviénen, the place where the Elves awaken, with the Vala Oromë as ambassadors to Valinor, and who later become Kings. Upon his return, he persuades many of his people to follow him west to Valinor. This host becomes known as the Teleri. Some of the Teleri go to Valinor. Thingol meanwhile meets Melian the Maia, an angelic immortal, and falls in love with her; they create an enchantment which keeps his people from finding him. Others of the Teleri reach the northwestern region of Beleriand, but choose to remain there to look for Thingol, who had disappeared there. They later inhabit the forest realm of Doriath, when Thingol reappears and sets up his Kingdom of Doriath and his city of Menegroth; they are among the Sindar or Grey Elves of Beleriand. Alone of his people, he is an Elf of the Light as he has seen the light of the Two Trees of Valinor. Thingol and Melian have a daughter, Lúthien, who in turn falls in love with the mortal Man Beren. Disapproving of their relationship, Thingol sets numerous quests that he thinks impossible for Beren, so as to prevent him from marrying Lúthien. One of these quests is to recover one of the priceless star-jewels, the Silmarils which Fëanor had created, and the Dark Lord Morgoth had stolen and set in his crown; but even that quest succeeds. Thingol fights several wars with Morgoth. He is suspicious of the Noldor Elves when they arrive in Beleriand, and refuses to assist them when they fight Morgoth. The hero of Men, Húrin, comes to Menegroth in his old age, lamenting the death of his son Túrin. In bitter rage he hurls the treasured necklace of the fallen Noldor city of Nargothrond, the Nauglamír, at Thingol's feet. Melian sees Húrin's thought, and deals with him gently; Húrin is sorry, and gives Thingol the Nauglamír. Thingol gets some Dwarves to set his Silmaril in the necklace. The Dwarves do so, but come to covet the unequalled work, and ask Thingol if they may keep it as payment. Thingol angrily refuses; offended, the Dwarves kill him and sack Menegroth. The Sons of Fëanor, who had sworn a terrible oath to recover the Silmarils on behalf of their father, later destroy Doriath to recover the Silmaril; they kill Dior, Thingol's grandson, the second and last King of Doriath. Analysis In Tolkien's constructed languages, Thingol is Sindarin for "grey cloak", "greymantle", while the Quenya form of his name, Singollo, has the same meaning. The medievalist and Tolkien scholar Verlyn Flieger writes that while the name Elwë ("the star") indicates light, this is dimmed by the character's second name, the light being "cloaked or mantled over". Further, Flieger comments that the softening of "Singollo" to "Thingol" can also be taken as a diminishment, reflecting the "sound shifts that occur as light-infused Quenya modifies to twilight Sindarin". Flieger states that Thingol's actions may seem unjustified thematically, but they make sense in terms of his politics and dynastic needs. She contrasts him with Beren, who though a Man is constantly drawn towards the light. With the return of the Noldor to Middle-earth, perhaps threatening his kingdom, Thingol's mood darkens. After he learns of the Elf-on-Elf Kinslaying at Alqualondë perpetrated by the Noldor on the Teleri, Thingol (Teleri himself) bans the use of their language Quenya in his lands, and Sindarin becomes the most prevalent Elven tongue in Middle-earth. He takes successively darker actions, moving further and further from the light, so that even when he receives the Silmaril from Beren, he knows neither how to appreciate it nor how to use it. Robley Evans, writing in Mythlore, draws a parallel between Thingol and Fëanor: like him, he turns away from the Light, and chooses to remain in Middle-earth with Melian, who could stop time and its changes. Evans states that Thingol's marriage with Melian seems to "promise a model union of diverse created beings" on first impression. He comments that Thingol is however the "complementary opposite of Fëanor in Tolkien's structural counterpoint" in that he is ultimately destroyed by his own version of Fëanor's oath; the act of claiming the Silmaril recovered by Beren places his kingdom under the Doom of Mandos. This warned that the Elves would come to harm if they continued their rebellion against the Valar. The Tolkien scholar Tom Shippey writes that Thingol forms part of the tightly-woven plot of The Silmarillion, each part leading ultimately to tragedy. There are three Hidden Elvish Kingdoms, including Doriath, founded by Thingol and his relatives, and they are each betrayed and destroyed. The Kingdoms are each penetrated by a mortal Man, in Doriath's case Beren; and the sense of Doom, which Shippey glosses as "future disaster", hangs heavy over all of them in the tale. The medievalist Marjorie Burns states that Thingol gains "great power" through his marriage to Melian, writing that she resembles Rider Haggard's infinitely desirable Arthurian muse, Ayesha of his 1887 novel She: A History of Adventure. The scholar of religion Lisa Coutras compares Melanie Rawls's account of Thingol and Melian to Lisa Hopkins's analysis of Tuor and Idril. Rawls presents Thingol as a prideful king who rarely listens to his wife's counsel, even though she has immense foresight and wisdom; this helps to bring about the downfall of his kingdom. Hopkins discusses the hero Tuor, who is all the wiser for listening to his wife Idril. The House of Thingol References Primary Secondary Sources Grey Elves High Elves (Middle-earth) Teleri Middle-earth rulers Fictional kings Fiction about regicide Characters in The Silmarillion Characters in The Children of Húrin Literary characters introduced in 1977 de:Figuren in Tolkiens Welt#Thingol pl:Lista Calaquendich#Elw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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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노르
발리노르(Valinor)는《실마릴리온》, 《반지의 제왕》, 《호빗》에서 등장하는 지명이다. 개요 발리노르는 벨레가에르 해 서쪽에 있는 아만 대륙에 세워진 국가이다. 불멸의 땅이라는 이명이 있다. 거주하는 이들이 아이누와 요정과 같은 불멸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존재가 오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투오르, 에아렌딜, 난쟁이 김리 그리고 절대반지를 소유했던 호빗 빌보와 프로도 등이 있다. 거의 모든 아이누와 엘다르에게 소중한 곳으로 축복받은 땅, 서녘으로 불린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서술되지만, 영생목의 죽음, 핀웨의 죽음을 비롯한 놀도르의 만행 같은 비극도 서려있다. 근본적으로 이 불길함은 모두 모르고스로부터 유래되었다. 본래 가운데땅에서 항해를 통해 물리적으로 닿을 수 있는 곳이었으나, 아칼라베스 이후에 다른 차원으로 분리돼서 직항로를 통해서만 갈 수 있게 되었다. 발리노르의 기원 아르다가 창조된 이후에 세상을 밝히는 최초의 광원은 일루인과 오르말이라는 두 등불이었다. 일루인과 오르말이 아르다의 남쪽과 북쪽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을 때 아르다는 대칭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발라들은 두 등불의 빛이 교차하는 알마렌에 국가를 세우고 아름답게 가꾸었다. 하지만 멜코르에 의해 두 등불이 붕괴되었다. 거대한 등불의 붕괴는 아르다의 구조에 되돌릴 수 없는 변동을 불러왔고, 대륙은 여러갈래로 쪼개지게 된다. 아르다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던 발라는 쪼개진 대륙 중 서쪽의 아만으로 건너가 발리노르를 세웠다. 역사 등불이 파괴된 뒤 아이누들은 아만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악한 세력들을 막기 위해 아르다에서 가장 높은 펠로리 산맥을 대륙 동편에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에젤로하이르 언덕에 야반나가 노래로 두싹을 틔웠고, 이것이 자라나 아만대륙 전체를 밝게 비추는 텔페리온과 라우렐린이 되었다. 그리고 발리노르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는 알마렌에 있던 도시보다 아름다웠다. 시간이 흘러 나무의 시대 1050년 경에 쿠이비에넨 근처에서 요정들이 깨어난다. 그러나 발리노르에 있던 발라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멜코르가 이를 먼저 알아채고 요정들을 납치, 고문한다. 어느 날 가운데땅을 지나던 발라 오로메가 요정들을 발견했다. 오로메는 이 사실을 다른 발라들에게 알렸고, 요정들을 구하기 위해 권능들의 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에서 멜코르는 패배해 3세기 동안 구금된다. 발라들은 일루바타르의 첫번째 자손인 요정들을 본인들 곁에 두고 가르치고 싶어했다. 그래서 잉궤, 핀웨, 엘웨를 발리노르에 사절로 불러 나무의 빛을 목도하게 한 후에 이주를 결정하게 했다. 많은 요정들이 서녘으로 이동하는 것에 참여했지만, 여정이 길어지면서 바냐르, 놀도르, 팔마리만이 발리노르에 도착했다. 요정들이 도착한 이후에 발리노르는 더더욱 발전하여, 어느 하나도 의미 없는 게 없는 신성한 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멜코르가 반성한 척을 하고 풀려나자 발리노르에는 어두운 사건들이 벌어진다. 멜코르는 기술전파를 하며 뒤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었다. 이 유언비어를 믿은 페아노르는 동생들에게 칼을 겨누고, 결국 추방된다. 멜코르는 추방당한 페아노르를 찾아가 그를 회유하려 들었지만, 오히려 본 속셈을 간파당해 모욕만 당한다. 이에 분노한 멜코르는 발리노르의 축제기간을 노려 핀웨를 살해하고 실마릴을 훔친다. 그 후 거대거미 웅골리안트와 함께 두 영생목을 살해한다. 목적을 달성한 멜코르는 가운데땅의 앙그반드로 돌아간다. 핀웨가 살해당하고, 실마릴까지 사라진 걸 알게 된 페아노르는 매우 분노하여, 멜코르를 모르고스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일루바타르의 이름에 대고 페아노르의 맹세를 선포하며 놀도르들을 설득한다. 이후 페아노르가 이끄는 놀도르는 알쿠알론데로 가 팔마리들에게 배를 빌려달라고 한다. 그들이 이를 거절하자 죽이고 배를 탈취한다. 이때문에 동족살상을 한 놀도르에게는 만도스의 저주가 내려진다. 이후에 태양의 시대에는 주요배경이 가운데땅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등장이 많지 않다. 에아렌딜이 제1시대 말에 발리노르로 찾아간 발라들의 용서를 구한 일, 제2시대에 타락한 누메노르인들이 발리노르를 정복하려 한 일, 제3시대 말과 제4시대 초에 빌보, 프로도, 김리가 건너간 일 정도가 언급된다. 속한 구역 펠로리 산맥(Pelóri, 방벽, defensive heights) : 아만 대륙 동쪽에 세워진 아르다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다. 타니퀘틸(Taniquetil, 눈 쌓인 고봉, High-Snow-Peak) : 펠로리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칼라키랴 남쪽에 위치해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오이올로세(Oiolossë, 영원한 순백, Everlasting whiteness), 엘레르리나(Elerrína, 별의 왕관, Crowned with Stars), 아몬 우일로스(Amon Uilos, 만년설산, Mount Everwhite)가 있다. 일마린(Ilmarin, 천공의 저택, Mansion of the High Airs) : 타니퀘틸에 위치한 저택으로 발라의 수장인 바람의 만웨와 빛의 바르다가 거주하는 궁전이다. 칼라키랴(calacirya, 빛의 틈, Pass of Light) : 아만의 동쪽에 방벽처럼 서 있는 펠로리 산맥의 유일하게 갈라진 틈이다. 에젤로하르(Ezellohar, 녹색 언덕, the green mound) : 아만 대륙 중앙, 발리마르의 앞에 있는 언덕으로 이곳에서 텔페리온과 라우렐린이 자라나 빛을 발했다. 엘다마르(Eldamar, 요정들의 집, Elvenhome) : 아만 동부에 세워진 요정들의 왕국으로 그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티리온을 수도로 두고 있었으며, 톨 에렛세아와 알쿠알론데도 엘다마르의 일부였다. 투나(Túna) : 놀도르의 도시 티리온이 위치한 언덕이다. 티리온(Tirion, 감시탑, Watch-tower) : 바냐르와 놀도르가 살던 도시이지만 바냐르가 아이누와 더 가까이 살기 위해 타니퀘틸로 이주하며, 놀도르의 도시가 되었다. 가운데땅에 세워진 곤돌린 왕국은 티리온을 본따 만든 도시였다. 엘다마르 만(Bay of Eldamar) : 칼라키랴 동쪽에 위치한 만으로 항구도시 알쿠알론데가 이곳에 있었다. 알쿠알론데(Alqualondë, 백조의 항구, Haven of the Swan)) : 아만 동쪽에 위치한 팔마리들의 도시이다. 싱골의 동생 올웨가 왕으로 있었으며, 요정의 동족살해가 벌어졌을 때 많은 팔마리들이 죽임을 당했다. 톨 에렛세아(Tol Eressëa, 외로운 섬, Lonely Isle) : 엘다마르 만 앞에 위치한 섬이다. 울모가 이 섬으로 엘다르를 발리노르로 이주시켰다. 누메노르인들은 이 섬을 발리노르 본토로 착각했다. 아발론(Avallonë, 엘다르의 항구, Haven of the Eldar) : 톨 에렛세아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텔레리 요정들이 살고 있다. 발마르(Valmar, 발라들의 집, Valar-home) : 발리마르(Valimar)라고도 불리는 발리노르의 도시이다. 에젤로하르 언덕의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발라와 마이아 같은 아이누들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포르메노스(Formenos, 북쪽 요새, Northern fortress) : 페아노르가 티리온에서 추방된 뒤 아만 북부에 건설한 요새형 도시이다. 핀웨가 이곳에서 모르고스에게 살해당했다. 로리엔(Lórien) : 발라 이르모가 가꾸는 정원으로, 온 아르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한다. 만도스의 전당(Hall of Mandos) : 만도스로 알려진 발라 나모가 거주하는 곳으로 죽은 요정들의 영혼이 모이는 곳이다. 실마릴리온 반지의 제왕 가운데땅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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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inor
Valinor (Quenya: Land of the Valar) or the Blessed Realms is a fictional location in J. R. R. Tolkien's legendarium, the home of the immortal Valar on the continent of Aman, far to the west of Middle-earth; he used the name Aman mainly to mean Valinor. It included Eldamar, the land of the Elves, who as immortals were permitted to live in Valinor. Aman was known somewhat misleadingly as "the Undying Lands", but the land itself does not cause mortals to live forever. However, only immortal beings were generally allowed to reside there. Exceptions were made for the surviving bearers of the One Ring: Bilbo and Frodo Baggins and Sam Gamgee, who dwelt there for a time, and the dwarf Gimli. Scholars have described the similarity of Tolkien's myth of the attempt of Númenor to capture Aman to the biblical Tower of Babel and the ancient Greek Atlantis, and the resulting destruction in both cases. They note, too, that a mortal's stay in Valinor is only temporary, not conferring immortality, just as in Dante's Paradiso, the Earthly Paradise is only a preparation for the Celestial Paradise that is above. Others have compared the account of the beautiful Elvish part of the Undying Lands to the Middle English poem Pearl, stating that the closest literary equivalents of Tolkien's descriptions of these lands are the imrama Celtic tales such as those about Saint Brendan from the early Middle Ages. The Christian theme of good and light (from Valinor) opposing evil and dark (from Mordor) has also been discussed. Geography Physical Valinor lies in Aman, a continent on the west of Belegaer, the ocean to the west of Middle-earth. Ekkaia, the encircling sea, surrounds both Aman and Middle-earth. Tolkien wrote that the name "Aman" was "chiefly used as the name of the land in which the Valar dwelt" [i.e. Valinor]. The land has a warm climate generally, though snow falls on the peaks of the Pelóri mountains, the highest being Taniquetil. Tolkien created no detailed maps of Aman; those drawn by Karen Wynn Fonstad, based on Tolkien's rough sketch of Arda's landmasses and seas, show Valinor about 800 miles wide, west to east (from the Great Sea to the Outer Sea), and about 3000 miles long north to south – similar in size to the United States. The entire continent of Aman runs from the Arctic latitudes of the Helcaraxë to the subarctic southern region of Middle-earth – about 7000 miles. Eldamar is "Elvenhome", the "coastal region of Aman, settled by the Elves", wrote Tolkien. Eldamar was the true Eldarin name of Aman. In The Hobbit it is referred to as "Faerie". The land was well-wooded, as Finrod "walk[ed] with his father under the trees in Eldamar" and the Teleri had timber to build their ships. The city of the Teleri, on the north shore of the Bay is Alqualondë, the Haven of the Swans, whose halls and mansions are made of pearl. The harbour is entered through a natural arch of rock, and the beaches are strewn with gems given by the Noldor. In the bay is the island of Tol Eressëa. Calacirya (Quenya: "Light Cleft", for the light of the Two Trees that streamed through the pass into the world beyond) is the pass in the Pelóri mountains where the Elven city Tirion was set. After the hiding of Valinor, this was the only gap through the mountains of Aman. The Valar would have closed the mountains entirely but, realizing that the Elves needed to be able to breathe the outside air, they kept Calacirya open. They also did not want to wholly separate the Vanyar and Noldor from the Teleri on the coast. The city of the Noldor (and for a time the Vanyar also) is Tirion, which was built on the hill of Túna, raised inside the Calacirya mountain pass, just north of Taniquetil, facing both the Two Trees and the starlit seas. The city had a central square at the top of the hill and a tower called the Mindon Eldaliéva, a beacon visible from the seashore miles to the east. In the extreme north-east, beyond the Pelóri, was the Helcaraxë, a vast ice sheet that joined the two continents of Aman and Middle-earth before the War of Wrath. To prevent anyone from reaching the main part of Valinor's east coast by sea, the Valar created the Shadowy Seas, and within these seas they set a long chain of islands called the Enchanted Isles. Political Valinor is the home of the Valar (singular Vala), spirits that often take humanoid form, sometimes called "gods" by the Men of Middle-earth. Other residents of Valinor include the related but less powerful spirits, the Maiar, and most of the Eldar. Each Vala has his or her own region of the land. The Mansions of Manwë and Varda, two of the most powerful spirits, stood upon Taniquetil, the highest mountain of the Pelóri. Yavanna, the Vala of Earth, Growth, and Harvest, resided in the Pastures of Yavanna in the south of the land, west of the Pelóri. Near-by were the mansions of Yavanna's spouse, Aulë the Smith, who made the Dwarves. Oromë, the Vala of the Hunt, lived in the Woods of Oromë to the north-east of the pastures. Nienna, the lonely Vala of Sorrow and Endurance, lived in the far west of the island where she spent her days crying about all the evil of the world, looking out to sea. Just south of Nienna's home, and to the north of the pastures, were the Halls of Mandos. Mandos was the Vala of the After-life. Also living in the Halls of Mandos was his spouse Vairë the weaver, who weaves the threads of time. To the east of the Halls of Mandos is the Isle of Estë, which is situated in the middle of the lake of Lórellin, which in turn lies to the north of the Gardens of Lórien. In east-central Valinor at the Girdle of Arda (the Equator of Tolkien's world) is Valmar, the capital of Valinor (also called Valimar or the City of Bells), the residence of the Valar and the Maiar in Valinor. The first house of the Elves, the Vanyar, settled there as well. The mound of Ezellohar, on which stood the Two Trees, and Máhanaxar, the Ring of Doom, are outside Valmar. Farther east is the Calacirya, the only easy pass through the Pelóri, a huge mountain range fencing Valinor on three sides, created to keep Morgoth's forces out. In the pass is the city Tirion, built on a hill, the city of the Noldor Elves. In the northern inner foothills of the Pelóri, hundreds of miles north of Valmar, was Fëanor's city of Formenos, built upon his banishment from Tirion. History Years of the Trees Valinor was established on the western continent Aman when Melkor (a Vala later named Morgoth, "the black foe", by the Elves) destroyed the Valar's original home on the island Almaren in primeval Middle-earth, ending the Years of the Lamps. To defend their new home from attack, they raised the Pelóri Mountains. They also established Valimar, the radiant Two Trees, and their dwelling-places. Valinor was said to have surpassed Almaren in beauty. Later, the Valar heard of the awakening of the Elves in Middle-earth, where Melkor was unopposed. They proposed to bring the Elves to the safety of Valinor, but to do that, they needed to get Melkor out of the way. A war was fought, and Melkor's stronghold Utumno was destroyed. Then, many Elves came to Valinor, and established their cities Tirion and Alqualondë, beginning Valinor's age of glory. But Melkor had come back to Valinor as a prisoner, and after three Ages was brought before the Valar and he sued for pardon, vowing to assist the Valar and make amends for the hurts he had done. Manwë granted him pardon, but confined him within Valmar to remain under watch. After his release, Melkor started planting seeds of dissent in the minds of the Elves, including between Fëanor and his brothers Fingolfin and Finarfin. Fëanor used some of the light of the Two Trees to forge the three Silmarils, beautiful and irreplaceable jewels. The Darkening of Valinor Belatedly, the Valar learned what Melkor had done. Knowing that he was discovered, Melkor went to the home of the Noldorin elves' High King Finwë, killed him and stole the prized jewels, the Silmarils. He then destroyed the Two Trees with the help of Ungoliant, plunging Valinor into darkness, the Long Night, relieved only by stars. Melkor and Ungoliant fled to Middle-earth. The Hiding of Valinor The Valar managed to save one last luminous flower from Telperion, and one last luminous fruit from Laurelin. These became the Moon and the Sun. The Valar carried out further titanic labours to improve the defences of Valinor. They raised the Pelóri mountains to even greater and sheerer heights. Off the coast, eastwards of Tol Eressëa, they created the Shadowy Seas and their Enchanted Isles; both the Seas and the Isles presented numerous perils to anyone attempting to get to Valinor by sea. Later history For centuries Valinor took no part in the struggles between the Noldor and Morgoth in Middle-earth. But near the end of the First Age, when the Noldor were in total defeat, the mariner Eärendil convinced the Valar to make a last attack on Morgoth. A mighty host of Maiar, Vanyar and the remaining Noldor in Valinor destroyed Morgoth's gigantic army and his stronghold Angband, and cast Morgoth into the void. During the Second Age, the Valar created the island of Númenor as a reward to the Edain, Men who had fought alongside the Noldor. Centuries later the kingdom of Númenor grew so powerful and so arrogant that Ar-Pharazôn, the twenty-fifth and last king, dared to attempt an invasion of Valinor. When Eru Ilúvatar responded to the call of the Valar, Númenor sank into the sea, and Aman was removed beyond the reach of the Men of Arda. Arda itself became spherical, and was left for Men to govern. The Elves could go there only by the Straight Road and in ships capable of passing out of the spheres of the earth. Analysis Paradise Keith Kelly and Michael Livingston, writing in Mythlore, note that Frodo's final destination is Aman, the Undying Lands. In Tolkien's mythology, they write, the islands of Aman were initially just the dwelling-places of the Valar (in the Ages of the Trees, while the rest of the world lay in darkness) who helped The One, Eru Iluvatar, to create the world, but gradually some of the immortal and ageless Elves were allowed to live there as well, sailing across the ocean to the West. After the fall of Númenor and the reshaping of the world, Aman becomes the place "between (sic) Over-heaven and Middle-earth", accessible only in special circumstances like Frodo's, allowed to come to Aman through the offices of the Valar and of Gandalf, one of the Valar's emissaries, the Maiar. However, Aman is not, they write, exactly paradise: firstly, being there does not confer immortality, contrary to what the Númenóreans supposed; and secondly, those mortals like Frodo who are allowed to go there will eventually choose to die. They note that in another of Tolkien's writings, Leaf by Niggle, understood to be a journey through Purgatory (the Catholic precursor stage to paradise), Tolkien avoids describing paradise at all; they suggest that to the Catholic Tolkien,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Heaven, and it might be sacrilege to make the attempt. The Tolkien scholar Michael D. C. Drout comments that Tolkien's accounts of Eldamar "give us a good idea of his conceptions of absolute beauty," and notes that these resemble the paradise described in the Middle English poem Pearl. The Tolkien scholar Tom Shippey adds that in 1927 Tolkien wrote a poem, The Nameless Land, in the complex stanza-form of Pearl which spoke of a land further away than paradise, and more beautiful than the Irish Tir nan Og, the deathless otherworld. Kelly and Livingston similarly draw on Pearl, noting that it states that "fair as was the hither shore, far lovelier was the further land" where the Dreamer could not pass. So, they write, each stage looks like paradise, until the traveller realises that beyond it lies something even more paradisiacal, glimpsed and beyond description. The Earthly Paradise can be described; Aman, the Undying Lands, can thus be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the paradise that the Bible says once existed upon Earth before the Fall of Man, while the Celestial Paradise lies "beyond (or above)", as it does, they note, in Dante's Paradiso. Good against evil The scholar of English literature Marjorie Burns writes that one of the female Vala, Varda (Elbereth to the Elves) is sung to by the Elf-queen of Middle-earth Galadriel. Burns notes that Varda "sits far off in Valinor on Oiolossë", looking from her mountain-peak tower in Aman towards Middle-earth and the Dark Tower of Sauron in Mordor: in her view, the white benevolent feminine symbol opposing the evil masculine symbol. Further, Burns suggests, Galadriel is an Elf from Valinor "in the Blessed Realm", bringing Varda's influence with her to Middle-earth. This is seen in the phial of light that she gives to Frodo, and that Sam uses to defeat the evil giant spider Shelob: Sam invokes Elbereth when he uses the phial. Burns comments that Sam's request to the "Lady" sounds distinctly Catholic, and that the "female principle, embodied in Varda of Valinor and Galadriel of Middle-earth, most clearly represents the charitable Christian heart." Original sin The scholar of literature Richard Z. Gallant comments that while Tolkien made use of pagan Germanic heroism in his legendarium, and admired its Northern courage, he disliked its emphasis on "overmastering pride", which he saw as a sin in Christian terms. This created a conflict in his writing. Further, the prideful sin of the Elves in Valinor, which to his mind was analogous to the original sin of Adam and Eve in the Book of Genesis, inevitably resulted in a fall analogous to the biblical fall of man. Tolkien described this by saying "The first fruit of their fall was in Paradise [Valinor], the slaying of Elves by Elves"; Gallant interprets this as an allusion to the fruit of the biblical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and the resulting exit from the Garden of Eden, starting with Fëanor. His actions, Gallant writes, set off the whole dark narrative of strife among the Elves described in The Silmarillion; the Elves fight and leave Valinor for Middle-earth. Lost home Phillip Joe Fitzsimmons compares The Silmarillion's faraway Valinor, forbidden to Men and lost to the Elves, though it constantly calls to them to return, to Tolkien's fellow-Inkling, Owen Barfield's "lost home". Barfield writes of the loss of "an Edenic relationship with nature", part of his theory that man's purpose is to serve as " the Earth’s self-consciousness". Barfield argued that rationalism creates individualism, "unhappy isolation ... [and] the loss of a mutual relationship with nature." Further, Barfield believed that ancient civilisations, as recorded in their languages, had a connection to and inner experience of nature, so that the modern situation represents a loss of that state of grace. Fitzsimmons states that the lost home motif recurs throughout Tolkien's writings. He does not suggest that Barfield influenced Tolkien, but that the ideas of the two men grew from "the same time, place, and even social circle". Atlantis, Babel Kelly and Livingston state that while Aman could be home to Elves as well as Valar, the same was not true of mortal Men. The "prideful" Men of Númenor, imagining they could acquire immortality by capturing the physical lands of Aman, were punished by the destruction of their own island, which is engulfed by the sea, and the permanent removal of Aman "from the circles of the world". Kelly and Livingston note the similarity to the ancient Greek myth of Atlantis, the greatest human civilisation lost beneath the sea; and the resemblance to the biblical tale of the Tower of Babel, the hubristic and "sacrilegious" attempt by mortal men to climb up into God's realm. Celtic influence The scholar of English literature Paul H. Kocher writes that the Undying Lands of the Uttermost West including Eldamar and Valinor, is "so far outside our experience that Tolkien can only ask us to take it completely on faith." Kocher comments that these lands have an integral place both geographically and spiritually in Middle-earth, and that their closest literary equivalents are the imrama Celtic tales from the early Middle Ages. The imrama tales describe how Irish adventurers such as Saint Brendan sailed the seas looking for the "Land of Promise". He notes that it is certain that Tolkien knew these stories, since in 1955 he wrote a poem, entitled Imram, about Brendan's voyage. See also Asgard and Álfheimr in Norse mythology Elysium and Mount Olympus in Greek mythology Notes References Primary Secondary Sources Middle-earth realms Fictional continents Fiction about the afterlife pl:Aman (Śródziemie)#Vali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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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리안드
《실마릴리온》 등장 지역 중 하나. 태양의 1시대에 일어난 사건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이다. 모르고스와 그의 세력, 요정의 여러 분파, 곧 이어 나우그림이라 불리는 난쟁이의 등장과 인간의 도래로 각양각색의 종족과 그 안의 인물 간의 사건이 이 땅을 중심적으로 일어난다. 분노의 전쟁이 끝난 뒤 악의 소멸을 위해 정화 불가능한 벨레리안드 대부분의 땅을 가라앉게 만들어 2시대부터는 에레드 루민과 옷시리안드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 활동한 종족 아이누 유일신 일루바타르가 에아 창조를 명령하자 대부분의 창조, 관리를 맡은 권능 모르고스: 악한 존재. 세상의 훼손을 일으켰다. 울모: 물을 관장하는 권능. 옷세: 파도를 일으키는 권능. 사우론: 모르고스의 수하로 다양한 재주의 권능. 멜리안: 발라 바나와 에스테를 따르는 권능 에온웨: 만웨를 따르는 강력한 권능. 만웨: 발라의 왕. 하늘의 권능. 오로메: 사냥의 권능. 요정을 아만으로 이끈다. 요정 수많은 분파에서 이름을 남긴 존재가 많았다. 놀도르  페아노르: 실마릴 세공자. 가장 위대한 요정으로 알려졌다. 핑골핀: 놀도르 대왕. 사후 그의 아들들 핑곤과 투르곤이 대왕직을 이어갔다. 핀로드: 가운데땅의 피나르핀 가의 리더. 베렌과 함께 떠났으나, 도중에 포박되어 베렌 대신 희생하여 죽었다. 마이드로스: 페아노르 가의 리더. 분노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핑곤: 핑골핀의 사후 놀도르 대왕. 투르곤: 핑곤의 사후 놀도르 대왕. 길 갈라드: 투르곤 사후 놀도르 대왕. 신다르 싱골: 도리아스 왕. 멜리안과 함께 다스렸다. 요정 중 가장 고귀한 혈통의 루시엔을 낳았으며, 먼 훗날 인간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엘론드, 아르웬, 아라고른 2세 등이 있다. 켈레보른: 갈라드리엘의 배우자. 2시대부터 갈라드리엘과 함께 임라드리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태양의 4시대까지 살아남아 가운데땅의 땅을 다스렸으나 권태감을 느끼게 되자 외손자 엘라단, 엘로히르와 함께 서녘으로 향했다. 키르단: 팔라스림 군주. 발리노르로 향하는 여정을 보류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벨레리안드 남부를 다스렸고 놀도르, 신다르 모두에게 우호적이었다. 2시대부터 회색항구를 거점으로 삼아 태양의 4시대까지 살아남아 서녘으로 향했다. 마블룽: 도리아스 장군. 싱골 사후 난쟁이의 침략에 전사했다. 벨레그: 도리아스 장군. 후린의 아들 투린에게 살해당했다. 인간 태양의 제 1시대에 벨레리안드에 도래한 존재이기에 그 이전 시대에 존재한 인물은 없다. 베오르 가문 베오르: 베오르 가문의 시조. 브레고르: 바라히르의 부친. 보레골라스: 바라히르의 아우. 벨레군드: 후오르의 아내 리안의 부친 바라군드: 후린의 아내 모르웬의 부친 바라히르: 도르소니온 저항군 대장. 베렌: 실마릴 회수의 주역. 누메노르와 아르노르 곤도르 국왕들의 시조. 하도르 가문 마라크: 벨레리안드로 진입할 당시의 족장. 하도르: 하도르 가 족장. 마라크의 후손. 갈도르: 후린과 후오르의 부친 후린: 문서 참조 후오르: 문서 참조 투린 투람바르:후린의 아들. 싱골의 양아들이자 글라우룽 살해자. 니에노르: 후린의 딸이자 투린의 아내. 투오르: 후오르의 아들. 문서 참조 할레스 가문 할다드: 할레스의 부친. 할레스: 할다드의 딸. 할레스 가의 족장. 할다르: 할다르의 아들. 난쟁이 이들의 역사는 비교적 덜 알려졌다. 또한 가운데땅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도 적다. 아자그할 가밀 자락 텔카르 혼혈 혼혈 자체가 종족인 것은 아니며 위의 종족 간에 결합으로 일어난 특이한 출생만 서술한다. 아래 인물은 모두 친인척 관계다. 루시엔: 마이아의 자식. 가장 고귀한 혈통의 여성. 에아렌딜: 1시대의 요정, 인간 혼혈의 영웅 엘론드: 길 갈라드의 측근. 주요 사건  다고르 브라골라크: 모르고스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 핑골핀이 죽고 장남 핑곤이 대왕으로 등극한다. 니르나에스 아르노에디아드: 요정, 인간, 난쟁이 연합이 모르고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 모르고스의 대승으로 벨레리안드의 패권을 잡았다. 분노의 전쟁: 에아렌딜의 구원 요청에 응답한 서쪽의 군대가 모르고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 요정의 동족살해: 3번의 동족 간의 학살. 처음을 제외한 두 번 모두 벨레리안드에서 이뤄진다. 벨레리안드의 침수: 모르고스의 손길에 회생이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땅 모든 부분이 침수되고 몇 구역은 작은 섬이 되어 1시대 이후에도 있는 벨레리안드 일부는 옷시리안드 너머 청색산맥 근역의 땅만 남는다. 실마릴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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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eriand
In J. R. R. Tolkien's fictional legendarium, Beleriand was a region in northwestern Middle-earth during the First Age. Events in Beleriand are described chiefly in his work The Silmarillion, which tells the story of the early ages of Middle-earth in a style similar to the epic hero tales of Nordic literature, with a pervasive sense of doom over the character's actions. Beleriand also appears in the works The Book of Lost Tales, The Children of Húrin, and in the epic poems of The Lays of Beleriand. Tolkien tried many names for the region in his early writings, among them Broceliand, the name of an enchanted forest in medieval romance, and Ingolondë, a play on "England" when he hoped to create a mythology for England rooted in the region. The scholar Gergely Nagy has found possible signs of the structure and style of Beleriand's poetry in the prose of The Silmarillion. Fictional history Events in Beleriand are described chiefly in the second half of the Quenta Silmarillion, which tells the story of the early ages of Middle-earth in a style similar to the epic hero tales of Norse mythology. Beleriand also appears in the works The Book of Lost Tales, The Children of Húrin, and in the epic poems of The Lays of Beleriand. The land is occupied by Teleri Elves of King Thingol from the east, who founded the city of Menegroth in the forest realm of Doriath. Other Elves, the Vanyar and Noldor, cross the Belegaer sea to Valinor. However, some of the Noldor return to Beleriand to retrieve the Silmarils from the satanic Vala Morgoth, but they are generally resented by the Teleri. Later, Men arrive from the east. Morgoth gathers a great army of Orcs, Balrogs and other monsters in his fortress of Angband beneath the Thangorodrim mountains in the north of Beleriand, and attacks the Elves repeatedly. Despite the threat, Thingol refuses to fight alongside the Noldor. One by one, the realm of Doriath as well as the Noldor kingdoms Nargothrond and Gondolin all fall to assaults, assisted by betrayals and disputes among Elves, Men, and Dwarves. Finally, the Valar of Valinor ask the creator, Eru Ilúvatar, to stop Morgoth. Ilúvatar ends the War of Wrath and the First Age of Middle-earth by destroying Angband and banishing Morgoth. Beleriand's inhabitants flee, and much of Beleriand sinks into the sea. Only a small section of the eastern edge of Beleriand survives, including part of the Ered Luin (Blue Mountain) range and the land of Lindon, which became part of the far northwestern shore of Middle-earth. Fictional geography Beleriand is a region in the far northwest of Middle-earth, bordering the great sea, Belegaer. It is bounded to the north by the Ered Engrin, the Iron Mountains, and to the east by the Ered Luin, the Blue Mountains. Analysis Naming Beleriand had many different names in Tolkien's early writings, including Broceliand, the name of an enchanted forest in medieval romance, Golodhinand, Noldórinan ("valley of the Noldor"), Geleriand, Bladorinand, Belaurien, Arsiriand, Lassiriand, and Ossiriand (later used for the easternmost part of Beleriand). One of Beleriand's early names was Ingolondë, a play on "England", part of Tolkien's long-held but ultimately unsuccessful aim to create what Shippey calls "a mighty patron for his country, a foundation-myth more far-reaching than Hengest and Horsa, one to which he could graft his own stories." Tolkien's aim had been to root his mythology for England in the scraps of names and myths that had survived, and to situate it in a land in the northwest of the continent, by the sea. A sense of doom Shippey writes that the Quenta Silmarillion has a tightly-woven plot, each part leading ultimately to tragedy. There are three Hidden Elvish Kingdoms in Beleriand, founded by relatives, and they are each betrayed and destroyed. The Kingdoms are each penetrated by a mortal Man, again all related to each other; and the sense of doom, which Shippey glosses as "future disaster", hangs heavy over all of the characters in the tale. Shippey writes that the human race seen in Beleriand in the First Age did not "originate 'on stage' in Beleriand, but drifts into it, already sundered in speech, from the East [the main part of Middle-earth]. There something terrible has happened to them of which they will not speak: 'A darkness lies behind us... and we have turned our backs upon it'". He comments that the reader is free to assume that the Satanic Morgoth has carried out the Biblical serpent's temptation of Adam and Eve, and that "the incoming Edain and Easterlings are all descendants of Adam flying from Eden and subject to the curse of Babel." "Lost" poetry The Tolkien scholar Gergely Nagy writes that Tolkien did not explicitly embed samples of Beleriand's poetry in his prose, as he had done with his many poems in The Lord of the Rings. Instead, he wrote the prose of The Silmarillion in such a way as to hint repeatedly at the style of its "lost" poetry. Nagy notes David Bratman's description of the book as containing prose styles that he classifies as "the Annalistic, [the] Antique, and the Appendical". The implication of the range of styles is that The Silmarillion is meant to represent, in Christopher Tolkien's words, "a compilation, a compendious narrative, made long afterwards from sources of great diversity (poems, and annals, and oral tales)". Nagy infers from verse-like fragments of text in The Silmarillion that the poetry of Beleriand used alliteration, rhyme, and rhythm including possibly iambics. This applies to the Ainulindalë, Tolkien's account of the godlike Ainur: It applies, too, to the narrative of Elves and Men in the Beleriand landscape, in the Quenta Silmarillion: In a few places, it is possible to relate the adapted verse in the prose to actual verse in Tolkien's legendarium. This can be done, for instance, in parts of the story of Túrin. Here, he realizes he has just killed his friend Beleg: References Primary Secondary Bibliography External links Parma Endorion: Essays on Middle-earth (3rd edition) by Michael Martinez Fictional elements introduced in 1977 Middle-earth realms de:Regionen und Orte in Tolkiens Welt#Beleriand simple:Middle-earth locations#Beleri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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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 마아그
카린 마아그(Karin Maag)는 미국 캘빈 신학교에 있는 헨리미터 센터 (H. Henry Meeter Center for Calvin Studies)에서 1997년부터 연구소 소장이며 그 대학의 역사학 교수이다. 그녀는 장 칼뱅의 작품과 관련된 작품들에 대한 수집으로 유명하다. 취미로는 자전거타기와 역사적 픽션 독서와 합창이다. 모든일에 리더십이 강한 학자이다. 2019년부터 세계칼빈학회(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에 새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학력 B.A., Western Society and Culture/Religion, Concordia University, 몬트리올 M.Phil., Renaissance and Reformation History, University of Saint Andrews, 스콧트랜드 Ph.D., Reformation History, University of Saint Andrews, 스코트랜드 외부 링크 Dr. Karin Maag, Calvin College 출판물 도서 Does the Reformation Still Matter? in Calvin Shorts by Karin Maag Published: December 15, 2016 ISBN: 978-1-937555-23-8 eBook ISBN: 978-1-937555-24-5 Lifting Hearts to the Lord: Worship with John Calvin in Sixteenth-Century Geneva in The Church at Worship (CAW) by Karin Maag Published: January 9, 2016 ISBN: 978-0-8028-7147-3 Seminary or University? The Genevan Academy and Reformed Higher Education. St Andrews Studies in Reformation History, Aldershot, 1995. 편저 Politics, Gender, and Belief: The Long-Term Impact of the Reformation. Edited by Amy Nelson Burnett, Kathleen Comerford, and Karin Maag. Geneva: Droz, 2013 Worship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Europe: Change and Continuity in Religious Practic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4. Melanchthon in Europe: His Work and Influence beyond Wittenberg. Baker Bookhouse, 1999. The Reformation in Eastern and Central Europe. St Andrews Studies in Reformation History, Aldershot, 1996. 번역서 On Time, Punctuality, and Discipline in Early Modern Calvinism by Max Engammar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John Calvin and the Printed Book by Jean-François Gilmont (Translation). Sixteenth Century Essays and Studies, 2005. Translation and English Edition. The Reformation and the Book. St Andrews Studies in Reformation History. Aldershot, 1998. 논문 “A Debated Office: Deacons in the Huguenot Church, 1560-1660” in Emancipating Calvin: Culture and Confessional Identity in Francophone Reformed Communitiesedited by Karen Spierling, Erik de Boer and Ward Holder. Leiden: Brill, 2018 Permeable Borders: Cross-Confessional Encounters and Traditions in Reformation Geneva” in Semper Reformanda: John Calvin, Worship and Reformed Traditionsedited by Barbara Pitkin. Goe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8. Impact amid absence: the Synod of Dordt and the French Huguenots” In die Skriflig52/2 (2018) https://doi.org/10.4102/ids.v52i2.2340 The Place and Image of Luther in Calvinist/Reformed Historiography” in Luther and Calvinism: Image and Reception of Martin Luther in the History and Theology of Calvinism edited by Herman Selderhuis and J. Marius J. Lange van Ravenswaay (Vandenhoeck & Ruprecht, 2017) No Better Songs”: John Calvin and the Genevan Psalter in the Sixteenth Century and Today” The Hymn: A Journal of Congregational Song 68/4 (2017): 28-33 Schools and Education, 1500-1600” in A Companion to the Swiss Reformation edited by Amy Nelson Burnett and Emidio Campi (Brill, 2016) Calvin’s Impact in Elizabethan England” in Calvinus Pastor Ecclesiae: Papers of the Eleventh 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 (Vandenhoeck & Ruprecht, 2016) Pulpit and Pen: Pastors and Professors as Shapers of the Huguenot Tradition” in A Companion to the Huguenots edited by Raymond Mentzer and Bertrand van Ruymbeke (Brill, 2016) The Reformation and Higher Education” in Protestantism after 500 Years edited by T. A. Howard and Mark Noll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Geneva and the Myth of the Escalade” Archiv für Reformationsgeschichte 106 (2015): 273-89 "Theodore Beza.” The Expository Times (November 2014): 1-9 “From Professors to Pastors: the Convoluted Careers of Jean Diodati and Théodore Tronchin.” In Church and School in Early Modern Protestantism: Studies in Honor of Richard A. Muller on the Matur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edited by Jordan Ballor, David Sytsma, and Jason Zuidema. Leiden: Brill, 2013. “Getting Engaged: The Joys of Studying History.”In Practically Human: College Professors Speak from the Heart of Humanities Education, (edited by Gary Schmidt and Matthew Walhout. Grand Rapids: Calvin Press, 2012. “Catechisms and Confessions of Faith.” In T&T Clark Companion to Reformation Theology, edited by David Whit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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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Karin%20Maag
Karin Maag
Karin Maag (born 13 June 1962) is a German politician of the Christian Democratic Union (CDU) who served as a member of the Bundestag from the state of Baden-Württemberg from 2009 to 2021. Early career From 2004 until 2007, Maag served as chief of staff to Wolfgang Schuster in his role as Lord Mayor of Stuttgart. She later headed the administration of the State Parliament of Baden-Württemberg from 2007 until 2009. Political career Maag first became a member of the Bundestag after the 2009 German federal election. She is a member of the Health Committee. Since 2018, she has been serving as her parliamentary group's spokeswoman on health policy. In addition to her committee assignments, Maag is part of the German-Egyptian Parliamentary Friendship Group, the German-Indian Parliamentary Friendship Group and the German-Russian Parliamentary Friendship Group. In the negotiations to form a coalition government under the leadership of Chancellor Angela Merkel following the 2017 federal elections, Maag was part of the working group on health policy, led by Hermann Gröhe, Georg Nüßlein and Malu Dreyer. In April 2021, Maag announced that she would not stand in that year's federal elections but instead resign from active politics by the end of the parliamentary term. Other activities Corporate boards Barmenia, Member of the Advisory Board Non-profit organizations Foundation "Remembrance, Responsibility and Future", Member of the Board of Trustees Federal Agency for Civic Education (BPB), Alternate Member of the Board of Trustees (–2021) Humanitarian Aid Foundation for Persons infected with HIV through blood products (HIV Foundation), Chairwoman of the Board ZNS – Hannelore Kohl Stiftung, Member of the Advisory Board Political positions In June 2017, Maag voted against Germany's introduction of same-sex marriage. Ahead of the 2021 national elections, Maag endorsed Markus Söder as the Christian Democrats' joint candidate to succeed Chancellor Angela Merkel. References External links Bundestag biography 1962 births Living people Members of the Bundestag for Baden-Württemberg Female members of the Bundestag 21st-century German women politicians Members of the Bundestag 2017–2021 Members of the Bundestag 2013–2017 Members of the Bundestag 2009–2013 Members of the Bundestag for the Christian Democratic Union of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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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폐지 운동
감옥폐지운동은 감옥 제도를 줄이거나 없애고 처벌과 정부 제도화 대신, 재활 시스템으로 대체하고자하는 단체와 활동가들의 느슨한 네크워크이다. 이것은 구금시절 내부 상태를 개선하고자하는 구금시설 개혁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교소도에 덜 의존한다면 과밀을 줄임으로서 재소자들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다. 감옥폐지론의 지지자들은 독방 감금과 사형제를 반대하며 새로운 감옥 건설을 반대하는 등의 비개혁주의적 노선을 취한다. 아나키스트 블랙 크로스 같은 일부 조직의 경우 정부가 통제하는 또다른 체제로 대체하길 원하지 않으며, 감옥의 완전한 폐지를 추구한다. 많은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최선의 정의가 사회계약과 회복적 정의로부터 자연스럽게 탄생한다고 믿는다. 감옥 폐지에 대한 옹호 저명한 사회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감옥산업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비판하며, 폐지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규모 구금은 실업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며, 급속도로 늘어나는 감옥과 감옥 네트워크 뒤에 숨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이 구금 시설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감옥이 효력이 있다는 믿음에 의해 기만당해왔다.” 이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감옥 산업폐지 운동 단체들과의 긴밀함에 의해 입증된다. Critical Resistance는 안젤라 데이비스와 루스 윌슨 길모어(Ruth Wilson Gilmore)가 공동 설립한 단체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감금하고 통제하는 것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도전함으로써, 감옥 산업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국제 운동”이라고 자신을 묘사한다. 비슷한 동기를 가진 단체로는 Prison Activist Resource Center (PARC)이 있는데 이들은 “특히 감옥산업 내에서의 제도화된 모든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인차별,이성애중심주의 계급차별등에 반대하는 것에 헌신한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Black & Pink같은 단체는 LGBTQ와 HIV 보균 수감자의 권익에 중점을 두는 폐지론 조직이다. 또한 Human Rights Coalition은 2001년 감옥 폐지를 그들의 목표로 삼았으며, California Coalition for Women Prisoners는 감옥산업을 폐지하고자 하는 풀뿌리 조직이다. 이 외에도 다른 형태의 사법체계를 원하는 여러 조직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루스 모리스(Ruth Morris)가 1983년에 토론토에서 첫번째 행사를 조직한 이후, International Conference on Penal Abolition(ICOPA)는 투옥과 형벌 구금에 반대하는 활동가, 학자 그리고 저널리스트들을 전세계에 걸쳐 이끌어들였고, 감옥 폐지운동의 현실을 둘러싼 세가지 중요한 현실을 논의 했다. 이들은 미국의 Critical Resistance와 유사했지만, 명시적으로 국제적인 범위의 의제를 택했다. 아나키스트는 모든 형태의 국가 통제를 폐지하길 원하며 투옥은 이중 극명한 사례로 파악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대부분의 재소자들이 비폭력 범죄자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 중 상당 수는 주로 빈곤층과 소수민족이며, 감옥은 이들을 재활시키지 않으며 그들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감옥폐지운동은 대체로 인도적 사회주의, 아나키즘 그리고 반권위주의 정치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2015년 8월 전국변호사 협회(National Lawyers Guild)는 감옥폐지에 호의적인 결의안을 채택했다. 제안된 개혁과 대안들 감옥 개혁과 구금 시설에 대한 대안은 그들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크게 다르게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예로들 수 있다. 형벌제도 개혁 징역을 가석방, 집행유예 또는 피해자와 공동체에 대한 배상으로 대체 강제적인 최소형량 선고의 폐지로 형기 축소 감옥 인구의 민족 차이 축소 감옥 조건 개혁 처벌보다 예방에 중점을 둠 수감자의 수를 늘리는 특정한 프로그램(피해자 없는 범죄)의 폐지, 예를 들면, 약물금지(미국의 경우 마약과의 전쟁), 총기 규제, 성노동 금지법, 음주제한 등이 있다. 감옥제도의 문제점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오심 사례에 대하여 맞서는 것 유엔 마약범죄 사무소는 사법정의에 대한 소책자물들을 만들었다. 그중 Alternatives to Imprisonment라는 글은 투옥의 남용, 특히 사소한 범죄로 투옥된 이들에 대하여 어떻게 근본적인 인권문제에 영향을 주는지 지적한다. 샌디에고 캘리포니아 대학의 SAMI (Massive Incident Against Mass Incarceration)와 같은 사회정의 옹호 단체들은 스칸디나비아 국가인 스웨덴과 노르웨이등이 징벌보다는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감옥 개혁사례라고 언급한다. 스웨덴의 Prison and Probation Service 국장 Nils Öberg에 따르면 투옥자체가 충분한 처벌로 간주되기 때문에 스웨덴인 사이에 호응을 얻는다고 한다. 이런 재활에 대한 강조는 경험이 풍부한 범죄학자와 심리학자에 의해 주도되며 재소자의 정상적인 활동의 촉진에 중점을 둔다. 이런 정책은 노르웨이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재범률인 20%를 기록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가장 높은 수치의 재범률인 미국의 76.6%와는 대조를 이룬다. 스칸디나비아의 수감 방법은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2011년과 2012년 사이 수감률이 6%감소했다. 같이 보기 형벌노동 징용 형벌부대 엠마 골드만 각주 형사사법 사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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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on abolition movement
The prison abolition movement is a network of groups and activists that seek to reduce or eliminate prisons and the prison system, and replace them with systems of rehabilitation and education that do not place a focus on punishment and government institutionalization. The prison abolitionist movement is distinct from conventional prison reform, which is the attempt to improve conditions inside prisons. Some supporters of decarceration and prison abolition also work to end solitary confinement, the death penalty, and the construction of new prisons through non-reformist reform. Others support books-to-prisoner projects and defend the rights of prisoners to have access to information and library services. Some organizations, such as the Anarchist Black Cross, seek total abolishment of the prison system, without any intention to replace it with other government-controlled systems. Many anarchist organizations believe that the best form of justice arises naturally out of social contracts, restorative justice, or transformative justice. Definition Scholar Dorothy Roberts takes the prison aboli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to endorse three basic theses: "[T]oday’s carceral punishment system can be traced back to slavery and the racial capitalist regime it relied on and sustained." "[T]he expanding criminal punishment system functions to oppress black people and other politically marginalized groups in order to maintain a racial capitalist regime." "[W]e can imagine and build a more humane and democratic society that no longer relies on caging people to meet human needs and solve social problems." Thus, Roberts situates the theory of prison abolition within an intellectual tradition including scholars such as Cedric Robinson, who developed the concept of racial capitalism, and characterizes the movement as a response to a long history of oppressive treatment of black people in the United States. In Canada, many abolitionists have called Canada's prisons the "new residential schools", which were designed as a cultural genocide of Indigenous people. Legal scholar Allegra McLeod notes that prison abolition is not merely a negative project of "opening … prison doors", but rather "may be understood instead as a gradual project of decarceration, in which radically different legal and institutional regulatory forms supplant criminal law enforcement." Prison abolition, in McLeod's view, involves a positive agenda that reimagines how societies might deal with social problems in the absence of prisons, using techniques such as decriminalization and improved welfare provision. Like Roberts, McLeod sees the contemporary theory of prison abolition as linked to theories regarding the abolition of slavery. McLeod notes that W. E. B. Du Bois—particularly in his Black Reconstruction in America—saw abolitionism not only as a movement to end the legal institution of property in human beings, but also as a means of bringing about a "different future" wherein former slaves could enjoy full participation in society. (Angela Davis explicitly took inspiration from Du Bois's concept of "abolition democracy" in her book Abolition Democracy: Beyond Empire, Prisons, and Torture.) Similarly, on McLeod's view, prison abolition implies broad changes to social institutions: "[a]n abolitionist framework", she writes, "requires positive forms of social integration and collective security that are not organized around criminal law enforcement, confinement, criminal surveillance, punitive policing, or punishment." The abolition of prisons is not only about the closure of prisons. Abolitionist views is also a way to counter the hegemonic discourse, and gives an alternative ways of thinking. It is a way to reconceptualize basic notions like crime, innocence, punishment etc. Historical development Anarchism and Prison Abolition Anarchist opposition to incarceration can be found in articles written as early as 1851, and is elucidated by major anarchist thinkers such as Proudhon, Bakunin, Berkman, Goldman, Malatesta, Bonano, and Kropotkin. Personal experiences in prison because of revolutionary activity prompted many anarchists who were “deeply affected by their experiences” to publish their criticisms. In 1886, the trial of eight anarchists following the Haymarket riots brought state repression to public attention. Lucy Parsons, an anarchist and wife of one of the Haymarket eight, embarked on a speaking tour through 17 different states speaking to a total of almost 200,000 people. A single rally in Cuba, Havana, to support the families of the eight accused anarchists raised nearly $1000. Speaking at his trial, in a widely disseminated speech, one of the co-accused, August Spies, stated:It is not likely that the honorable Bonfield and Grinnell can conceive of a social order not held intact by the policeman's club and pistol, nor of a free society without prisons, gallows, and State's attorneys. In such a society they probably fail to find a place for themselves. And is this the reason why Anarchism is such a "pernicious and damnable doctrine?"The Anarchist Red Cross, a prisoner support group and the precursor to the Anarchist Black Cross, was founded roughly in 1906. By that year, groups existed in Kiev, Odessa, Bialystok, and trials of its members, led to its spread across Europe and North America. A 2018 guide to starting an Anarchist Black Cross group states that "we need to destroy all the prisons, and free all the prisoners. Our position is an abolitionist stance against the state and it’s prisons." In 1917, the Anarchist Red Cross would disband and members joined the revolution in Russia. Following the February revolution, political prisoners were released from Russian jails, in a massive wave of amnesties. The Anarchist Red Cross reorganised in 1919 as the Anarchist Black Cross, with some members joining the anarchist insurgent, Nestor Makhno. Makhno, a Ukrainian anarchist who was freed in 1917 from a life sentence in prison, organised a revolutionary insurgent army along anarchist principles that would come to control a territory of seven-and-a-half million people. Upon taking control of a town, Makhnovists would destroy “all remnants and symbols of slavery: prisons, police and gendarmerie posts were blown up with dynamite or put to the torch.” Prisoners in battle who were not officers were typically welcomed into the ranks of Makhnovists or freed. The Makhnovist revolutionary insurgent army adopted a declaration in 1919, stating we are against all rigid judicial and police machinery, against any legislative code prescribed once and for all time, for these involve gross violations of genuine justice and of the real protections of the population. These ought not to be organized but should be instead the living, free and creative act of the community. Which is why all obsolete forms of justice — court administration, revolutionary tribunals, repressive laws, police or militia, Cheka, prisons and all other sterile and useless anachronisms — must disappear of themselves or be abolished from the very first breath of the free life, right from the very first steps of the free and living organization of society and the economy.The Anarchist Black Cross was reconstituted in the aftermath of the Spanish Civil War and Anarchist Revolution. The pressure from the number of anarchist prisoners in need of aid, led to the closing of “most of the chapters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Alternative groups, such as the Alexander Berkman Aid Fund and the Society to Aid Anarchist Prisoners in Russia would take their place. Another resurgence was felt in 1967, and, again, in 1979 owing to the efforts of Lorenzo Kom’boa Ervin whose writings on prison and anarchism are credited as having spread and been foundational to Black anarchism. Anarchists agitation against prisons in Canada has included Bulldozer, an anti-prison anarchist project founded in Toronto in 1980. Bulldozer was closed after being raided and charged with sedition. The End the Prison Industrial Complex (Epic) was formed in 2009, and Anarchist Black Cross projects emerged throughout the 2000s. Anarchists and abolitionists within Québec organise yearly noise demonstrations outside of prison facilities on New Year's Eve. A campaign to stop the construction of a migrant prison involved anarchists unloading thousands of crickets into the offices of an architectural firm in 2018. Campaigns to free anarchist prisoners have served as the basis for calling for freedom for all prisoners. June 11, 2011, international solidarity actions for anarchist prisoners Marie Mason and Eric McDavid triggered the start of an international day and week of solidarity with all anarchist prisoners in 2015. 2022's week of solidarity included actions in Poland, Russia, Ukraine, Uruguay, Greece, the UK, and other countries. The 2022-2023 hunger strike of anarchist prisoner Alfredo Cospito led to police skirmishes with protesters in Rome, a Turin cell tower being lit on fire, and a letter with bullets was sent to a newspaper stating "if Alfredo Cospito dies judges will all be targets, two months without food, burn down the prisons." International actions to free Cospito, included the burning of a Strabag excavator in Germany. The Italian placed their embassies on "alert" in response to mobilizations. The Rojavan Revolution, which many have considered illustrative of, and rooted in, anarchist theory, involved the mass liquidation of prisons and freeing of political prisoners and nonviolent offenders. Neighbourhood based "peace committees," composed of elected community members with, largely, no formal legal education, were created to resolve conflicts using a model of consensus and restorative justice. Prison Abolition and the New Left Angela Davis traces the roots of contemporary prison abolition theory at least to Thomas Mathiesen's 1974 book The Politics of Abolition, which had been published in the wake of the Attica Prison uprising and unrest in European prisons around the same time. She also cites activist Fay Honey Knopp's 1976 work Instead of Prisons: A Handbook for Abolitionists as significant in the movement. Eduardo Bautista Duran and Jonathan Simon point out that George Jackson's 1970 text Soledad Brother drew global attention to the conditions of prisons in the United States and made prison abolition a tenet of the New Left. Liz Samuels observes that, following the Attica Prison uprising, activists began to coalesce around a vision of abolition, whereas previously they had endorsed a program of reform. 1973 Walpole Prison uprising In 1973, two years after the Attica Prison uprising, the inmates of Walpole prison, in Massachusetts, formed a prisoners' union to protect themselves from guards, end behavioral modification programs, advocate for the prisoner's right for education and healthcare, gain more visitation rights, work assignments, and to be able to send money to their families. The union also created a general truce within the prison and race-related violence sharply declined. During the Kwanzaa celebration, black prisoners were placed under lockdown, angering the whole facility and leading to a general strike. Prisoners refused to work or leave their cells for three months, to which the guards responded by beating prisoners, putting prisoners in solitary confinement, and denying prisoners medical care and food. The strike ended in the prisoners' favour as the superintendent of the prison resigned. The prisoners were granted more visitation rights and work programs. Angered by this, the prison guards went on strike and abandoned the prison, hoping that this would create chaos and violence throughout the prison. But the prisoners were able to create an anarchist community where recidivism dropped dramatically and murders and rapes fell to zero. Prisoners volunteered to cook meals. Vietnam veterans who had been trained as medics took charge of the pharmacy and distribution of medication. Decisions were made in community assemblies. Guards retook the prison after two months, leading to many prison administrators and bureaucrats quitting their jobs and embracing the prison abolition movement. Advocates of prison abolition Angela Davis writes: "Mass incarceration is not a solution to unemployment, nor is it a solution to the vast array of social problems that are hidden away in a rapidly growing network of prisons and jails. However, the great majority of people have been tricked into believing in the efficacy of imprisonment, even though the historical record clearly demonstrates that prisons do not work." Angela Davis and Ruth Wilson Gilmore co-founded Critical Resistance, which is an organization working to "build an international movement to end the Prison Industrial Complex by challenging the belief that caging and controlling people makes us safe." Other similarly motivated groups such as the Prison Activist Resource Center (PARC), a group "committed to exposing and challenging all forms of institutionalized racism, sexism, able-ism, heterosexism, and classism, specifically within the Prison Industrial Complex," and Black & Pink, an abolitionist organization that focuses around LGBTQ rights, all broadly advocate for prison abolition. Furthermore, the Human Rights Coalition, a 2001 group that aims to abolish prisons, and the California Coalition for Women Prisoners, a grassroots organization dedicated to dismantling the PIC, can all be added to the long list of organizations that desire a different form of justice system. Since 1983,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Penal Abolition (ICOPA) gathers activists, academics, journalists, and "others from across the world who are working towards the abolition of imprisonment, the penal system, carceral controls and the prison industrial complex (PIC)," to discuss three important questions surrounding the reality of prison abolition ICOPA was one of the first penal abolitionist conference movements, similar to Critical Resistance in America, but "with an explicitly international scope and agenda-setting ambition." Anarchists wish to eliminate all forms of state control, of which imprisonment is seen as one of the more obvious examples. Anarchists also oppose prisons given that statistics show incarceration rates affect mainly poor people and ethnic minorities, and do not generally rehabilitate criminals, in many cases making them worse. As a result, the prison abolition movement often is associated with humanistic socialism, anarchism and anti-authoritarianism. In October 2015, members at a plenary session of the National Lawyers Guild (NLG) released and adopted a resolution in favor of prison abolition. In Canada, a number of organizations support prison abolition, which includes the Saskatchewan Manitoba Alberta Abolition Organization (SMAAC) or the Toronto Prisoners’ Rights Project. These organizations collaborate and organize on issues of prison abolition and work towards prison abolition. Disability, mental illness and prison Prison abolitionists such as Amanda Pustilnik take issue with the fact that prisons are used as a "default asylum" for many individuals with mental illness: Why do governmental units choose to spend billions of dollars a year to concentrate people with serious illnesses in a system designed to punish intentional lawbreaking, when doing so matches neither the putative purposes of that system nor most effectively addresses the issues posed by that population? In the United States, there are more people with mental illness in prisons than in psychiatric hospitals. In Canada, mental health issues are 2 to 3 time more prevalent in Canadian prisons than in the general population. This statistic is one of the major pieces of evidence that prison abolitionists claim highlights the depravity of the penal system. Prison abolitionists contend that prisons violate the Constitutional rights (5th and 6th Amendment rights) of mentally ill prisoners on the grounds that these individuals will not be receiving the same potential for rehabilitation as the non-mentally ill prison population. This injustice is sufficient grounds to argue for the abolishment of prisons. Prisons were not designed to be used to house the mentally ill, and prison practices like solitary confinement are damaging to mental health. Additionally, individuals with mental illnesses have a much higher chance of committing suicide while in prison. In response to the fear that prisons are needed for the most serious cases of mentally ill, Liat Ben-Mosh describe prison abolitionist's' view on the issue: "Many prison abolitionists advocate for transformative justice and healing practices in which no one will be restrained or segregated, while some, like PREAP, believe that there will always be a small percentage of those whose behavior is so unacceptable or harmful that they will need to be incapacitated, socially exiled, or restrained and that this should be done humanely, temporarily, and not in a carceral or punitive manner." Another point raised is that the current focus in criminal justice reform on nonviolent, nonserious and nonsexual offences shrinks the borders and understandings of innocence and guilt. Aging in prison The prison abolition movement and prison abolitionists, like Liat Ben-Moshe have taken issue with the treatment of the aging population in prisons. Prolonged sentencing policies have resulted in an increased aging population in prisons as well as the harsh conditions of imprisonment. A number of reasons can contribute to older adult's risk for illness while in prison. Prisons are not intended to be used as nursing homes, hospice or long-term care facilities for the aging prison population. In Canada, individuals 50 years of age and older in federal custody account for 25% of the federal prison population. Investigations into the Canadian federal penitentiary have found that there is a general failure of the Correctional Service of Canada to meet safe and humane custody and assisting in the rehabilitation and reintegration of offenders into the community. The conditions of confinement of older individuals jeopardize the protection of their human rights. The conditions of the aging population in Canada has been denounced by persons who are incarcerated. Proposed reforms and alternatives Proposals for prison reform and alternatives to prisons differ significantly depending on the political beliefs behind them. Often they fall in one of three categories from the "Attrition Model", a model proposed by the Prison Research Education Action Project in 1976: moratorium, decarceration, and excarceration. Proposals and tactics often include: Penal system reforms: Substituting, for incarceration, supervised release, probation, restitution to victims, and/or community work. Decreasing terms of imprisonment by abolishing mandatory minimum sentencing Decreasing ethnic disparity in prison populations Prison condition reforms Crime prevention rather than punishment Abolition of specific programs which increase prison population, such as the prohibition of drugs (e.g., the American War on Drugs) and prohibition of sex work. Education programs to inform people who have never been in prison about the problems Fighting individual cases of wrongful conviction The 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published a series of handbooks on criminal justice. Among them is Alternatives to Imprisonment which identifies how the overuse of imprisonment impacts fundamental human rights, especially those convicted for lesser crimes. Social justice and advocacy organizations such as Students Against Mass Incarceration (SAMI)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often look to Scandinavian countries Sweden and Norway for guidance in regard to successful prison reform because both countries have an emphasis on rehabilitation rather than punishment. According to Sweden's former Prison and Probation Service Director-General, Nils Öberg, this emphasis is popular among the Swedish because the act of imprisonment is considered punishment enough. This focus on rehabilitation includes an emphasis on promoting normalcy for inmates, a charge lead by experienced criminologists and psychologists. In Norway a focus on preparation for societal re-entry has yielded "one of the lowest recidivism rates in the world at 20%, [while] the US has one of the highest: 76.6% of [American] prisoners are re-arrested within five years". The Scandinavian method of incarceration seems to be successful: the Swedish incarceration rate decreased by 6% between 2011 and 2012. Abolitionist views Many prison reform organizations and abolitionists in the United States advocate community accountability practices, such as community-controlled courts, councils, or assemblies as an alternative to the criminal justice system. Abolitionists like Angela Davis recommend four measures as a way to deal with violent and other serious crimes: (1) make mental health care available to all (2) everyone should have access to affordable treatment for substance use disorders (3) make a stronger effort to rehabilitate those who commit criminal offences and (4) employ reparative or restorative justice measures as an accountability tool to reconcile offenders with their victims and undo or compensate the harm done. Organizations such as INCITE! and Sista II Sista that support women of color who are survivors of interpersonal violence argue that the criminal justice system does not protect marginalized people who are victims in relationships. Instead, victims, especially those who are poor, minorities, transgender or gender non-conforming can experience additional violence at the hands of the state. Instead of relying on the criminal justice system, these organizations work to implement community accountability practices, which often involve collectively-run processes of intervention initiated by a survivor of violence to try to hold the person who committed violence accountable by working to meet a set of demands. For organizations outside the United States see, e.g. Justice Action, Australia. Some anarchists and socialists contend that a large part of the problem is the way the judicial system deals with prisoners, people, and capital. According to Marxists, in capitalist economies incentives are in place to expand the prison system and increase the prison population. This is evidenced by the creation of private prisons in America and corporations like CoreCivic, formerly known as Correction Corporation of America (CCA). Its shareholders benefit from the expansion of prisons and tougher laws on crime. More prisoners is seen as beneficial for business. Some anarchists contend that with the destruction of capitalism, and the development of social structures that would allow for the self-management of communities, property crimes would largely vanish. There would be fewer prisoners, they assert, if society treated people more fairly, regardless of gender, color, ethnic background, sexual orientation, education, etc. The demand for prison abolition is a feature of anarchist criminology, which argues that prisons encourage recidivism and should be replaced by efforts to rehabilitate offenders and reintegrate them into communities. “Nine perspectives for prison abolitionists” Instead of prisons: a handbook for abolitionists, republished by Critical Resistance in 2005, outlines what they identify as the nine main perspectives for prison abolitionists: Perspective 1 The imprisonment of a human being is inherently immoral, and while total abolition of the current prison system is not an easy task, it is possible. The first step towards abolition is admitting that prisons cannot be reformed, as a carceral system is founded on brutality and contempt for those imprisoned. Additionally, the current system works to disproportionally imprison poor and working-class people, so its abolition would ensure progress towards equality. Abolitionists see many similarities between today's carceral system and the slavery establishment of the past, and would in fact say that the current system is simply reformed enslavement which perpetuates the same oppressive and discriminatory patterns. But just as superficial reforms could not alter the brutality of the slave system, reforms cannot change a system rooted in racism. Perspective 2 The abolitionist message requires changing our language and definitions of punishment “treatment” and “inmates”. In order to break away from the prison system, we must use honest language and take back the power of our vocabulary. Perspective 3 Imprisonment is not a proper response to deviance. Abolitionists promote reconciliation rather than punishment, a perspective seeking to restore both the criminal and the victim while limiting the disruption of their lives in the process. Perspective 4 Abolitionists advocate for changes beneficial to the prisoner but do so while remaining a non-member of the system. In a similar fashion, abolitionists respect the personhood of system managers but oppose their role in the perpetuation of an oppressive system. Perspective 5 The abolitionist message extends farther than the traditional helping relationship; Abolitionists identify themselves as allies of the imprisoned, respecting their perspectives as well as the requirements for abolition. Perspective 6 The empowerment of prisoners and ex-prisoners is crucial to the abolitionist movement. Programs and resources dedicated to reinstating that which has been stripped from them by the prison system are fundamental in putting power back in their own hands. Perspective 7 Abolitionists believe that citizens are the true source of institutional power which can lead to the abolition of the prison system. Giving or limiting support from certain policies and practices will enable the progression of the abolitionist movement. Perspective 8 Abolitionists believe that crime is a consequence of a broken society, and recourses must be used towards social programs instead of the funding of prisons. They advocate for public solutions to public problems, producing effects which will benefit everyone in society. Perspective 9 An emphasis is placed on the correction of society rather than the correction of an individual. It is only in a corrected or caring community that individual redemption and rehabilitation can be achieved. Thus, abolitionists see that the only adequate alternative to the prison system is building a kind of society which has no need for prisons. See also Convict lease system, abolished by Presidential order in 1942 Criminal justice reform Emma Goldman Exile Frankie Boyle Louk Hulsman Nils Christie Penal labor Prison-industrial complex Pacifism Police abolition movement References Further reading Sources Notes Criminal justice reform Penal imprisonment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D%94%84%EB%85%B8%EB%A5%B4
로프노르
로프 노르(Lop Nur / Lop Nor) 또는 로브 노르(Lob Nor, , )는 타림 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 북동부에 과거 존재했으나 20세기 이래로 거의 말라버린 염호로서, 오늘날 해당 지역은 분지가 되어 있다. 타림 강과 슈러 강(Shule, 疏勒河)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호수 체계는 과거 빙하기 이후 있던 타림호의 마지막 잔재이다. 1928년까지만 해도 면적이 3,100km2에 달했지만 사막화로 인해 면적이 점차 줄어들었다. 1964년 10월 16일에는 중국 최초의 핵실험이 실시되었고 1967년 6월 17일에는 중국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진행되었다. 1964년부터 1996년까지 중국에서 실시된 45차례의 핵실험 장소로 사용되었다. 위치는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바인 골린 몽골 자치주 차르클리크 현에 해당하며, 인접한 위리 현은 아니다. 개요 타림 분지는 히말라야 조산 운동에 따라 형성된 지형이며, 지금부터 약 2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부터 현재 간빙기로 변화할 무렵에는 분지의 거의 전역이 카스피해처럼 매우 광대한 호수가 되었지만, 이후 기후가 온난화되면서 점차 물이 손실되고 대부분이 사막화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 이 이론에 따른다면 로프노르 등 타림 분지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호수는 당시 호수의 마지막 잔재라는 것이다. 로프노르에는 타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의 눈 녹은 물이 모여드는 타림 강(정확하게는 타림 강의 지류)이 흐르고 있지만, 호수에서 흘러 나오는 강은 아니다. 즉 로프노르는 내륙 하천인 타림 강 말단 호수 가운데 하나이며, 호수는 강한 햇빛에 의해 물이 증발하거나 땅 속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바람에 점차 염분이 축적되어 염호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그래도 꽤 큰 호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4세기 전후에는 말라버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1901년에 중앙 아시아의 탐험가에 의해 "로프노르의 지역은 해발 차이가 별로 없고, 퇴적과 침식 작용 등에 의해 타림 강의 흐름이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호수의 위치가 남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로프노르는 언젠가 반드시 원래 위치로 돌아올 것이다"라는 이른바 '떠도는 호수'(Wandering Lake)설이 제시되고 그로부터 불과 20년 후인 1921년에 실제로 타림 강의 흐름이 바뀌어 호수가 부활한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부활 후에는 상류의 톈산산맥 등의 강설, 강우에 의해 유입 수량이 변하기 때문에 줄어들고 불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20세기 중반까지 물이 가득했다. 그러나 타림 강에 댐이 건설되는 등의 이유도 있어 현재는 다시 완전히 말라 있다. 위성 사진에서 마른 호수의 모습이 인간의 귀 모양을 닮은 모습으로 호수 심장부를 가로지르듯 성도(省道) 235호선이 관통하고 있다. 역사 「떠도는 호수」 고대 중국에서는 서역이라 불리는 지역에 위치한 로프노르는 「염택」(塩澤) 또는 「포창해」(蒲昌海)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기원전 1세기경 한대(漢代)에는 「가로세로 모두 300리의 함호(鹹湖)로 겨울이나 여름에도 그 수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서》 서역전 서문에 기록된 광대한 호수였다. 호수 서안에는 도시 국가 누란이 번성하여,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3세기 경부터 이 지역 일대의 건조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풍부한 물을 잃은 누란은 4세기 이후 급속히 쇠퇴해 갔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이른바 「오아시스의 길」도 누란을 경유하는 왕래가 어려워지게 되어, 당대(唐代)까지 둔황 또는 조금 앞의 안서에서 북상 · 서진하여 투루판을 지나 톈산 산맥 남쪽 기슭의 쿠얼러로 나오는 루트가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누란과 로프노르는 어느덧 사막의 모래 속에 사라져갔고 마침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전설상의 존재가 되었다. 13세기에 원(元)의 대도를 방문한 베니스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카슈가르에서 서역 남도를 따라 호수의 남쪽 가장자리를 스치는 루트를 통해 둔황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로프노르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1876년부터 1877년까지 내륙 아시아의 모험 여행을 감행한 러시아 군 대령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는 타림 강의 하류가 남동 내지 남쪽으로 흘러 사막 남부에 카라블랑과 카라코슌 두 개의 호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호수는 중국의 고문서 등으로 추정된 로프노르의 위치보다 위도상으로 약 1도 남쪽에 있었지만, 프르제발스키는 이것이 로프노르라고 주장했다. 이 발견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있는 반면, '실크로드'라는 호칭을 처음 제창한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이들이 담수호이기 때문에 아직 생성된지 얼마되지 않은 새로운 호수에 지나지 않으며, 염호라고 하는 로프노르는 타림 강 동쪽으로 향하는 분지의 끝에 있는 것이니 어디선가 지류를 간과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것은 항상 장애였으므로, 만약 그런 지류가 있었다면 기록자들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며 프르제발스키의 주장을 반박하였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리히트호벤의 제자로, 스웨덴의 지리학자, 중앙 아시아 탐험가였던 스벤 헤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이 일대를 답사하고 1900년에 카라코슌의 훨씬 북쪽에서 누란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 북쪽으로는 쿠르크 다리야 (마른 강)라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마른 강바닥이 존재하는 것도 알려져 있던 것으로부터, 헤딘은 타림 강이 예전에는 이 강바닥을 동쪽으로 흘러서, 누란 동쪽에서 남쪽에 걸쳐 퍼져 있는 저지대로 흐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로프노르임을 확신했다. 심층 조사 결과 카라코슌은 유입되는 진흙과 무성 식물 파편 등의 침적에 의해 점차 얕아졌고, 한편 말라 있는 로프노르는 강한 북동풍에 의한 풍식으로 표토가 깎이고 표고가 내려가 결국 고저차가 역전하면 타림 강은 다시 흐름을 바꿀 것이고, 과거의 로프노르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헤딘은 생각했다. 약 1600년 전에 그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로프노르는 마르고 사막의 남쪽에 새로운 호수가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즉, 이 일대는 표고차가 조금 밖에 없기 때문에 말단 호수나 강바닥에 퇴적과 침식 작용에 의해 타림 강의 물길이 있는 기간을 거쳐 크게 변화하고 그에 따라 호수의 위치가 이동하는 것이라는 학설을 세우고 로프노르를 '떠도는 호수'라고 부른 것이다. 1928년, 투루판에 머물고 있던 헤딘은 이 지역의 상인에게서 1921년에 타림 강이 동쪽으로 흐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중국의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곧장 현지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1934년에 헤딘은 말라 있던 쿠르크 다리야, 물이 돌아오고부터는 쿰 다리야(모래 강)라고 불리게 된 강을 카누를 타고 내려와, 물이 가득찬 로프노르에 도달하게 되었고, 자신의 예언이 맞았다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헤딘 자신의 저서를 통해 「방황하는 호수」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다. 로프노르에 대해서는 헤딘 외에도 많은 학자가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호수의 이동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설도 존재한다. 「1600년 주기」라는 오해 헤딘이 주창한 「방황하는 호수」설이라는 것은 「1600년 또는 1500년 등 일정한 주기로 호수가 철새처럼 남북으로 이동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도 1958년에 발표한 소설 『누란』에서 「1,500년의 주기로 남북으로 이동하는 호수라는 추정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이 되었다」(千五百年の周期をもって、南北に移動する湖であるという推定が行なわれ、それが一つの動かすべからざる定説となった)고 했으며, 1980년에 방송된 『NHK 특집 실크로드 -비단의 길(絲綢之路)-』의 「제5집 누란 왕국을 발굴하다」에서도 같은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헤딘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흔적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1901년에 헤딘이 예언한 것은 「타림 강 물은 언젠가 반드시 로프노르로 돌아올 것이고. 그때가 오면 호수가 이동하는 주기의 길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기 때문에, 헤딘이 이 주장을 했던 시점에서 주기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이동이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헤딘이 상정하고 있던 퇴적 및 침식 등의 원동력으로 그런 큰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는 「수천 년이 아니라 수만 년이 걸린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 『방황하는 호수』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먼 장래에 정말 헤딘의 예언대로 되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예언한 당사자도 그 저작도 벌써 잊혀져 있을 수 있다」고까지 쓰고 있다. 그런데 헤딘도 그의 예언으로부터 20년, 로프노르가 마르고 '겨우' 1600년 정도로 호수가 제자리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번에는 우연히 대략 1600년만에 일어났겠지만 과거의 일은 모르고 미래도 반드시 같은 주기로 그렇게 된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 다음에 또 어디로 이동할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은 없다고 생각이 변해 갔다는 것이 이 책 속에 명확하게 적혀 있다. 본문 중에 「1600년 주기」등의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즉, 헤딘 자신이 상정한 원동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짧은 기간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았던 헤딘이, 저서의 집필 시점에서 최종 도달했던 「방황하는 호수」설이란 로프노르는 꼭 철새와 같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이동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방황하는 호수」라는 것이며, 「... 지금 그 시작 주기의 길이에 대해서는 일체의 예단을 삼가하는 것이 최선이다. 서기 330년에 강과 호수가 강바닥을 버리기 전 수백 년 동안 누란 근처에 있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음의 큰 주기 역시 1600년으로 지속될 것인가. ... (중략)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다 ...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본문 중에 매우 솔직하고 명료하게 기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600년 주기로 이동을 반복」한다는 하는 오해가 만연하게 된 원인은 헤딘의 저서가 널리 소개되는 과정에서 어느새 예언에서 '주기'라는 말과 (그 주기가) 이번에는 (우연히) '1600년'이었다는 사실이 서로 합쳐져 「1600년 주기」라는 말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장되어 버린 데에 있다. 실제로 이와나미 문고판 『방황하는 호수』의 번역자 후쿠다 히로토시(福田宏年)가 번역 후기에서 본문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1600년 주기」라는 말을 사용하여 헤딘의 학설에 대한 잘못된 내용을 해설을 하고있는 데다 책 표지의 광고 문구까지도 「1600년 주기」라고 인쇄되어 있다. 이런 일이 많은 독자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주고 잘못된 설이 유포되는 결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와나미 문고판이 저술된 것은 1990년이고 이노우에 야스시가 『누란』을 발표한 것은 1958년이므로 1950년대에 이미 「1600년 주기」설이 이노우에 야스시의 말처럼 이른바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통하고 있던 것으로, 이와나미 문고판보다 훨씬 이전에 그러한 오해가 퍼져 있었던 것이 된다. 언제 어디서 처음 이런 오해가 발생했는지, 지금까지 확실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덧붙여서 헤딘의 『방황하는 호수』는 이와나미 문고판에 앞서 치쿠마 서방, 백수사, 가도카와 문고 ,주고 문고 등에서 출판되어 있지만, 이들 가운데서 백수사판만 그 감수자의 하나인 후카다 규야(深田久弥)가 권말의 설명에서 「로프노르는 1,600년을 주기로 그 위치를 바꾸는 것이 입증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1964년에 발행된 것으로 오해의 '진원지'는 아니다. 다른 번역판에서는 잘못된 내용의 해설은 보이지 않는다. 헤딘의 기행문에는 그 밖에도 잘 알려져있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본 항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적어도 앞에서 열거된 책들의 본문에서 「1600년 주기로 이동을 반복한다」라는 등의 설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헤딘의 전기와 자서전에도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핵 실험 로프노르 지역은 1964년부터 중국의 핵 실험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군사상의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지만, 로프노르 호수 바닥이 실험장이 된 적은 없다 . 1980년대에 출입 금지가 해제된 뒤에는 다시 탐험가와 학자, 미디어,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현재 로프노르는 부활 후 20세기 중반까지 물이 가득했지만, 2010년 시점에서는 말라버렸며, 호수로써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역의 건조화가 진행된 것이나, 타림 강 상류에 댐이 건설된 것 등이 소멸의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과학원에 따르면, 1959년에는 존재가 확인되었으나 1972년에 이미 소멸했다. 중국과학원은 로프노르가 완전히 마른 시기를 196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 2004년에는 중국과학원의 현지 조사에 의해 로프노르가 부활했다고 보도되었지만 그것은 1km2 정도의 작은 호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이듬해에는 다시 소멸했다. 현재는 마른 호수 자리를 가로지르는 성도 235호선이 부설되어 있으며,호수 자리를 방문하는 투어 등도 짜여지고있다. 호수의 중심에는 많은 여행자나 탐험가에 의해 호수 중심부 도달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Google의 지도(항공 사진)를 통해서도 그 모습을 거의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무렵부터 호수 자리 동북단의 성도 235호선에 연한 위치에 「염전」이라 알려진 매우 거대한 구조물이 세워진 것이 위성 사진에 의해 밝혀져 있다. 황산칼륨 등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Google의 지도(항공 사진)로는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 보인다. 비료를 운반하고 로프노르와 하미 (쿠무루)를 연결하는 철도도 건설되었다. 2010년 11월 청두 상업보(成都商業報)에 따르면 중국과학원은 로프노르 지역의 사막화 방지 계획 「신 로랑 계획」의 일환으로 로프노르에 인공 호수를 건설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타림 분지의 지하에 거대한 수원이 존재한다는 정보도 있다. 각주 내용주 출처주 외부 링크 아틀라스 뉴스 - 움직인다던 중국 로프노르 호수는 말라 버렸다 (新 실크로드 열전) ⑨ 최초로 실크로드 조사한 러시아 탐험가 프르제발스키 - 조선일보 없어진 호수 바인골린 몽골 자치주 신장의 호수 핵 실험장 비단길 전설 염호 내륙호 중국의 핵 실험장
https://en.wikipedia.org/wiki/Lop%20Nur
Lop Nur
Lop Nur or Lop Nor (from a Mongolian name meaning "Lop Lake", where "Lop" is a toponym of unknown origin) is a now largely dried-up salt lake formerly located in the eastern fringe of the Tarim Basin in the southeastern portion of the Xinjiang Autonomous Region, northwestern China, between the Taklamakan and Kumtag deserts. Administratively, the lake is in Lop Nur town (), also known as Luozhong () of Ruoqiang County, which in its turn is part of the Bayingolin Mongol Autonomous Prefecture. The lake system, into which the Tarim River and Shule River drain from the west and east respectively, is the last remnant of the historical post-glacial Tarim Lake, which once covered more than in the Tarim Basin but had progressive shrunk throughout the Holocene due to rain shadowing by the Tibetan Plateau. Lop Nur is hydrologically endorheic — it is completely landbound and has no outlet, and has relied largely on meltwater runoffs from the Tianshan, Kunlun and the western Qilian Mountains. The lake measured in 1928, but has dried up due to construction of reservoirs which dammed the flow of water feeding into the lake, and only small seasonal lakes and salt marshes may form. The dried-up Lop Nur Basin is covered with a salt crust ranging from in thickness. An area to the northwest of Lop Nur has been used as a nuclear testing site. Since the discovery of potash at the site in the mid-1990s, it is also the location of a large-scale mining operation. There are some restricted areas under military management and cultural relics protection points in the region, which are not open to the public. History From around 1800 BC until the 9th century the lake supported a thriving Tocharian culture. Archaeologists have discovered the buried remains of settlements, as well as several of the Tarim mummies, along its ancient shoreline. Former water resources of the Tarim River and Lop Nur nurtured the kingdom of Loulan since the second century BC, an ancient civilisation along the Silk Road, which skirted the lake-filled basin. Loulan became a client state of the Chinese empire in 55 BC, renamed Shanshan. Faxian went by the Lop Desert on his way to the Indus valley (395–414), followed by later Chinese pilgrims. Marco Polo in his travels passed through the Lop Desert. In the 19th century and early 20th century, the explorers Ferdinand von Richthofen, Nikolai Przhevalsky, Sven Hedin and Aurel Stein visited and studied the area. It is also likely that Swedish soldier Johan Gustaf Renat had visited the area when he was helping the Zunghars to produce maps over the area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 lake was given various names in ancient Chinese texts. In Shiji it was called Yan Ze (鹽澤, literally Salt Marsh), indicating its saline nature, near which was located the ancient Loulan Kingdom. In Hanshu it was called Puchang Hai (蒲昌海, literally Sea of Abundant Reed) and was given a dimension of 300 to 400 li (roughly 120–160 km) in length and breadth, indicating it was once a lake of great size. These early texts also mentioned the belief, mistaken as it turns out, that the lake joins the Yellow River at Jishi through an underground channel as the source of the river. The lake was referred to as the "Wandering Lake" in the early 20th century due to the Tarim River changing its course, causing its terminal lake to alter its location between the Lop Nur dried basin, the Kara-Koshun dried basin and the Taitema Lake basin. This shift of the terminal lake caused some confusion amongst the early explorers as to the exact location of Lop Nur. Imperial maps from the Qing dynasty showed Lop Nur to be located in similar position to the present Lop Nur dried basin, but the Russian geographer Nikolay Przhevalsky instead found the terminal lake at Kara-Koshun in 1867. Sven Hedin visited the area in 1900–1901 and suggested that the Tarim river periodically changed its course to and from between its southbound and northbound direction, resulting in a shift in the position of the terminal lake. The change in the course of the river, which resulted in Lop Nur drying up, was also suggested by Hedin as the reason why ancient settlements such as Loulan had perished. In 1921, due to human intervention, the terminal lake shifted its position back to Lop Nur. The lake measured 2400 km2 in area in 1930–1931. In 1934, Sven Hedin went down the new Kuruk Darya ("Dry River") in a canoe. He found the delta to be a maze of channels and the new lake so shallow that it was difficult to navigate even in a canoe. He had previously walked the dry Kuruk Darya in a caravan in 1900. In 1952 the terminal lake then shifted to Taitema Lake when the Tarim River and Konque River were separated through human intervention, and Lop Nur dried out again by 1964. In 1972, the Daxihaizi Reservoir was built at Tikanlik, water supply to the lake was cut off, and all the lakes for the most part then dried out, with only small seasonal lakes forming in local depressions in Taitema. The loss of water to the lower Tarim River Valley also led to the deterioration and loss of poplar forests and tamarix shrubs that used to be extensively distributed along the lower Tarim River Valley forming the so-called "Green Corridor". In 2000, in an effort to prevent further deterioration of the ecosystem, water was diverted from Lake Bosten in an attempt to fill the Taitema Lake. The Taitema Lake however had shifted westwards during the past 40 years due in part to the spread of the desert. Another cause of the destabilization of the desert has been the cutting of poplars and willows for firewood; in response, a restoration project to reclaim the poplar forests was initiated. The Kara-Koshun dried basin may be considered part of the greater Lop Nur. On 17 June 1980, Chinese scientist Peng Jiamu disappeared while walking into Lop Nur in search of water. His body was never found, and his disappearance remains a mystery. On 3 June 1996, the Chinese explorer Yu Chunshun died while trying to walk across Lop Nur. Nuclear weapons test base China established the Lop Nur Nuclear Test Base on 16 October 1959 with Soviet assistance in selection of the site, with its headquarters at Malan (, Mǎlán), about northwest of Qinggir. The first Chinese nuclear bomb test, codenamed "Project 596", occurred at Lop Nur on 16 October 1964. China detonated its first hydrogen bomb on 17 June 1967. Until 1996, 45 nuclear tests were conducted. These nuclear tests were conducted by dropping bombs from aircraft and towers, launching missiles, detonating weapons underground and in the atmosphere. In 2009, Jun Takada, a Japanese scientist known for prominently opposing the tests as "the Devil's conduct", published the results of his computer simulation which suggests – based on deaths from Soviet tests – that 190,000 people could have died in China from nuclear-related illnesses. Enver Tohti, an exiled pro-Uyghur independence activist, claimed that cancer rates in the province of Xinjiang were 30 to 35% higher than the national average. On 29 July 1996, China conducted its 45th and final nuclear test at Lop Nor, and issued a formal moratorium on nuclear testing the following day, although further subcritical tests were suspected. In 2012, China announced plans to spend US$1 million to clean up the Malan nuclear base in Lop Nor to create a red tourism site. Lop Nur is home to the wild Bactrian camel, which is a separate species from the Bactrian camel. The camels have continued to breed naturally despite the nuclear testing. China signed the Comprehensive Nuclear-Test-Ban Treaty in 1996 but did not ratify it. Subsequently, the camels were classified as an endangered species on the IUCN Red List. Since the cessation of nuclear testing at Lop Nur, human incursions into the area have caused a decline in the camel population. Wild Bactrian camels have been classified as critically endangered since 2002 and approximately half of the 1400 remaining wild Bactrian camels live on the former Lop Nur test base, which has been designated the Lop Nur Wild Camel National Nature Reserve. Transportation A highway from Hami to Lop Nur (Xinjiang Provincial Highway 235) was completed in 2006. The Hami–Lop Nur Railway, which runs north to Hami, along the same route, opened to freight operations in November 2012. The railway is used to transport potassium-rich salt mined at the lake to the Lanzhou–Xinjiang railway. It is also served by the Hotan–Ruoqiang railway, which loops around the south and west side of the Tarim Basin, part of the Taklimakan Desert railway loop, joined together with sections of the Golmud–Korla railway, Kashgar–Hotan railway, and Southern Xinjiang railway. Archaeological sites Given the extreme dryness and resulting thin population, remains of some buildings survived for a significant period of time. When ancient graves, some a few thousand years old, were opened the bodies were often found to be mummified and grave goods well preserved. The earliest sites are associated with an ancient people of Indo European origin. Loulan Loulan or Kroran was an ancient kingdom based around an important oasis city already known in the 2nd century BCE on the north-eastern edge of the Lop Desert. It was renamed Shanshan after Chinese took control of the kingdom in 1st century BCE. It was abandoned some time in the seventh century. Its location was discovered by Sven Hedin in 1899, who excavated some houses and found a wooden Kharosthi tablet and many Chinese manuscripts from the Jin dynasty (266–420). Aurel Stein also excavated at the site in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while Chinese archaeologists explored the area in the latter part of the 20th century. A mummy called the Beauty of Loulan was found at a cemetery site on the bank of Töwän River. Xiaohe Cemetery The Xiaohe Cemetery is located to the west of Lop Nur. This Bronze Age burial site is an oblong sand dune, from which more than thirty well preserved mummies have been excavated. The entire Xiaohe Cemetery contains about 330 tombs, about 160 of which have been violated by grave robbers. A local hunter guided the Swedish explorer and archeologist Folke Bergman to the site in 1934. An excavation project by the Xinjiang Cultural Relics and Archaeology Institute began in October 2003. A total of 167 tombs have been dug up since the end of 2002 and excavations have revealed hundreds of smaller tombs built in layers, as well as other precious artifacts. In 2006, a valuable archeological finding was uncovered: a boat-shaped coffin wrapped in ox hide, containing the mummified body of a young woman. Qäwrighul In 1979, some of the earliest of the Tarim mummies were discovered in burial sites at Qäwrighul (Gumugou), which is located to the west of Lop Nur, on the Könchi (Kongque) river. Forty-two graves, most of which dated from 2100 to 1500 BC, were found. There were two types of tomb at the site, belonging to two different time periods. The first type of burial featured shaft pit graves, some of which had poles at either end to mark east and west. Bodies were found extended, usually facing east, and sometimes were wrapped in wool weavings and wearing felt hats. Artifacts found included basketry, wheat grains, cattle and sheep/goat horns, bird bone necklaces and bracelets, nephrite beads, and fragments of copper (or bronze), although no pottery was discovered. The second type of burial, from a later period, also consisted of shaft pit graves, surrounded by seven concentric circles of poles. Six male graves were found, in which the bodies were extended on their backs, and facing towards the east. Few artifacts were found, except for some traces of copper, or bronze. Miran Miran is located to the south-west of Lop Nur. Buddhist monasteries were excavated here, and murals and sculptures showed artistic influences from India and Central Asia, with some showing influences from as far as Rome. See also Lop Desert Tarim Basin Tarim mummies Silk Road transmission of Buddhism Aral Sea Ruoqiang Town Charklik List of nuclear weapons tests of China References External links Map of the Lop Nur nuclear test facility Lop Nor Nuclear Weapons Test Base DF-31 Tested on 10 June 1994 Lop Desert Surveying the Lop Nor Salt Fields in Former “Wandering” Lake Lop Nur, China – May 13, 2009 – Earth Snapshot Downloadable article: "Evidence that a West-East admixed population lived in the Tarim Basin as early as the early Bronze Age" Li et al. BMC Biology 2010, 8:15. Endorheic lakes of Asia Chinese nuclear test sites Sites along the Silk Road Shrunken lakes Lakes of Xinjiang Bayingolin Mongol Autonomous Prefecture Tarim mummies Former lakes of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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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롤리딘 마샤리포프
잘롤리딘 마샤리포프(, 1993년 9월 1일 ~ )는 우즈베키스탄의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며 현재 그리스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판세라이코스에서 활동 중이다. 클럽 경력 2013년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의 강호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하여 2020 시즌까지 공식전 170경기 32골(컵대회 31경기 5골 포함)을 터뜨리며 리그 4회 우승, 우즈벡컵 2회 우승, 2019년 우즈벡 리그컵 우승, 2020년 AFC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 등에 공헌했고 이 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 2020 어시스트상, 옵타 스포츠가 선정한 AFC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11, 우즈베키스탄 축구 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쓰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에 앞서 2017 시즌에는 같은 지역 연고팀인 로코모티프 타슈켄트로 임대 이적하여 33경기 8골(컵대회 6경기 2골 포함)을 기록하며 로코모티브의 더블 달성(리그 우승, 컵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2021 시즌을 앞둔 2020년 12월 26일 사우디 프로페셔널리그의 알나스르 FC와 입단 계약을 체결한 뒤 1개월 후 UAE 프로리그의 샤바브 알아흘리 클럽으로 임대 이적하여 2020-21년 UAE 리그컵 우승을 이끌었고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UAE 리그컵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국가대표팀 경력 우즈벡 U-20 대표팀 소속으로 튀르키예에서 열린 2013년 FIFA U-20 월드컵 본선 5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2011년 FIFA U-17 월드컵 이후 2년만의 우즈베키스탄 축구 역사상 FIFA 주관 대회 통산 2번째 8강 진출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우즈벡 U-23 대표팀의 일원으로 2015년 킹스컵에 출전하여 2월 1일 대한민국과의 1차전에서 강상우와 경합하는 과정에서 강상우의 얼굴을 걷어차며 퇴장 조치를 받았고 이후 같은 팀 동료인 토히르욘 샴시디노프도 심상민과의 경합 중 충돌 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심상민의 얼굴을 3차례 가격하는 비신사적인 행위를 자행하며 샴시디노프와 함께 대한민국 축구팬들은 물론 영국, 아일랜드 등 전 세계의 외신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결국 이 사태로 우즈베키스탄 축구 협회가 대한축구협회에 직접 사과 공문을 보냈고 결국 샴시디노프와 함께 잔여 경기 출장 금지라는 처분을 받은 건 물론 슈흐라트 막수도프 우즈벡 U-23 대표팀 감독도 협회로부터 선수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는 징계를 피해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16년 10월 6일 이란과의 201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A조 3차전에서 우즈벡 A대표팀 소속으로 후반 16분 사르도르 라시도프와의 교체 투입을 통해 국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2019년 1월 13일 같은 중앙아시아팀인 투르크메니스탄과의 2019년 AFC 아시안컵 F조 2차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신고하며 팀의 4-0 대승에 일조했다. 하지만 U-23 대표팀 와일드카드로 출전한 2018년 아시안 게임 8강전에서 대한민국과 연장 접전 끝에 패하며 4강 진출이 좌절되자 심판에게 거세게 항의하다가 결국 경기 종료 후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하는 수모와 굴욕을 맛보았다. 수상 클럽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 : 우승 (2014, 2015, 2019, 2020), 준우승 (2018) 우즈베키스탄컵 : 우승 (2019, 2020), 준우승 (2018) 우즈베키스탄 리그컵 : 우승 (2019) 우즈베키스탄 슈퍼컵 : 준우승 (2015, 2016)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 : 우승 (2017) 우즈베키스탄컵 : 우승 (2017) 샤바브 알아흘리 클럽 UAE 프로리그 : 3위 (2020-21) UAE 리그컵 : 우승 (2020-21) 개인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 어시스트상 : 2020 옵타 스포츠 선정 AFC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11 : 2020 우즈베키스탄 축구 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 : 2020 UAE 리그컵 최우수선수상 : 2020-21 199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우즈베키스탄의 남자 축구 선수 우즈베키스탄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FK의 축구 선수 로코모티프 타슈켄트의 축구 선수 201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 2019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 샤바브 알아흘리 클럽의 축구 선수 알나스르 FC의 축구 선수 우즈베키스탄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한 우즈베키스탄인 아랍에미리트에 거주한 우즈베키스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아랍에미리트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사우디 프로리그의 축구 선수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 UAE 프로리그의 축구 선수 판세라이코스 FC의 축구 선수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축구 선수 그리스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그리스에 거주한 우즈베키스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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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oliddin Masharipov
Jaloliddin Masharipov (; born 1 September 1993) is an Uzbek professional footballer who plays as a winger for Super League Greece club Panserraikos and the Uzbekistan national team. Club career In July 2020, it was reported that he was linked to Süper Lig team Trabzonspor. Masharipov played a key role in Pakhtakor's 2020 season, scoring nine goals and had 22 assists in 35 appearances in all competitions. However, his early exit after receiving a red card had a major role in his team's loss against Persepolis in the 2020 AFC Champions League quarter-finals. On 26 December 2020, he signed for Saudi club Al Nassr. Next month, Masharipov was sent on loan to Emirati club Shabab Al-Ahli. After returning from his loan spell, he wore the number 7 jersey for Al Nassr. On January 2023, when Cristiano Ronaldo signed for the Saudi club, Masharipov changed to number 77, allowing the Portuguese star to wear his iconic number 7. On 17 August 2023, Al Nassr announced that Masharipov's contract had been terminated by mutual agreement. On 27 September 2023, Masharipov signed a one-year deal with Super League Greece club Panserraikos. International career Masharipov played for Uzbekistan U-20 since 2013. He was also called up in 2015 for the King's Cup in Thailand, but he received a red card in the first half after launching a flying, studs-up kick into the chest of South Korea's Kang Sang-woo. Later he was also called up for senior team and Masharipov made his first appearance in national team on 6 October 2016, replacing Sardor Rashidov as substitute in the 61st minute, in a 0–1 loss 2018 World Cup qualifier game against Iran. Career statistics Club International As of match played 16 October 2023. International goals Scores and results list Uzbekistan's goal tally first. Honours Pakhtakor Uzbekistan Super League: 2014, 2015, 2019, 2020 Uzbekistan Cup: 2019, 2020 Uzbekistan League Cup: 2019 Lokomotiv Tashkent Uzbekistan Super League: 2017 Uzbekistan Cup: 2017 Shabab Al-Ahli UAE League Cup: 2020–21 UAE President's Cup: 2020–21 Individual Uzbekistan Super League Top Assists: 2020 AFC Champions League OPTA Best Midfielder (west) XI: 2020 Uzbek FA Player of the Year: 2020 UAE League Cup Man of Match: 2020–21 References External links 1993 births Living people Uzbekista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Uzbekistani men's footballers Men's association football wingers Pakhtakor Tashkent FK players PFC Lokomotiv Tashkent players Al Nassr FC players Shabab Al Ahli Club players Panserraikos F.C. players Uzbekistan Super League players Saudi Pro League players UAE Pro League players Super League Greece players Footballers at the 2018 Asian Games 2019 AFC Asian Cup players Asian Games competitors for Uzbekistan Uzbekistani expatriate men's footballers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Saudi Arabia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the United Arab Emirates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Greece Uzbekistani expatriate sportspeople in Saudi Arabia Uzbekistani expatriate sportspeople in the United Arab Emirates Uzbekistani expatriate sportspeople in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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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린
곤돌린(Gondolin)은 J. R. R. 톨킨의 소설 <실마릴리온>에 등장하는 국가이다. 핑곤이 전사한 후 놀도르 대왕이 된 투르곤이 다스렸다. 모르고스를 상대하는 놀도르의 나라로 오랜 세월 존속했으나 결국 마이글린의 배신과 모르고스의 집중적인 공격이 원인이 되어 멸망했다. 이후 사위였던 인간 투오르와 자신의 딸 이드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떠났다. 개요 투르곤은 대부분의 놀도르가 그러한 것처럼 발리노르에서 모르고스에 의해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가운데땅에 도착한다. 핑골핀 대왕의 차남으로 부친과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헬카락세를 거쳐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와 정착한 그는 네브라스트에 자신의 거점을 마련한 투르곤은 모르고스와의 몇 번의 대전쟁을 경험했고 그 외에도 발리노르에서부터 네브라스트에 정착한 이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건을 겪는다. 그러던 중 투르곤은 자신의 사촌 피나르핀의 아들 핀로드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발라 울모에 의해 꿈으로 계시를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놀도르가 다가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미리 대비할 장소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사촌 핀로드와 헤어진 투르곤은 이후로 계속 울모가 말한 땅을 찾기 위한 부하들을 내보내어 탐색하게 하였으나, 그의 뜻대로 선뜻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울모의 인도를 받아 에워두른 산맥의 가운데에 위치한 섬과 비슷한 모양의 큰 돌로 이뤄진 언덕, 넓은 들판을 찾아낸다. 이때 역시도 아직까지 모르고스와 요정 간의 전쟁은 계속되던 중이었으며, 땅을 찾아낸 이후 벌어진 다고르 아글라레브가 끝난 뒤에 투르곤은 자기가 선발한 사람들을 통해 땅에 도시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 도시의 이름은 온돌린데였고, 곧 바뀐 이름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곤돌린이 되었다. 투르곤은 자신을 보좌하는 12가문의 수장을 비롯한 능력있는 자들을 다스렸고 놀도르가 발리노르에 있을 적 살아가던 도시 티리온을 본따서 여러 건축물을 세웠다. 울모가 명령한 것과 같이 이 땅의 목적은 다가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므로 곤돌린은 적들에게 위치를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지리를 아는 백성들이 바깥으로 떠나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게 된다. 이는 나르고스론드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오랜 시간 모르고스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시간이 지나면서 모르고스는 더욱 매섭고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용을 창조하고 대대적인 침공을 통해 요정과 대립했다. 일찍이 발록과 싸우다 죽은 핀웨의 장남 페아노르와 다고르 브라골라크에서 모르고스와 사투를 벌이다 전사한 핑골핀을 비롯해 여러 놀도르 요정 군주와 백성들이 쓰러져갔다.기어코 다섯 번째 대전쟁 니르나에스 아르노에디아드가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요정은 전황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패배를 겪고 말았다. 중요한 전쟁이었던 만큼 직접 성문을 열고 곤돌린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투르곤마저도 후퇴해야 했고 인간 용사들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오게 된다. 후오르는 투르곤에게 자신과 투르곤 간의 관계에서 희망이 생길 것임을 예언하고 분전하다 전쟁 도중 눈에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 전쟁의 패배로 핑골핀의 뒤를 이은 투르곤의 친형 핑곤 대왕 역시 생을 마감하게 되면서 투르곤이 대왕직을 잇게 되었고 후오르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어 나타났는데, 바로 후오르의 아들인 투오르가 울모의 또다른 계시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투르곤은 투오르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고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자신의 외동딸 이드릴을 그에게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투르곤의 조카 마이글린은 이번 일로 인하여 반항심을 품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이드릴을 사랑하였으나, 이드릴이 그에게서 보이는 마음속의 어둠을 찾아내어 그를 꺼린 탓에 투오르를 증오하게 된 것이었다. 때문에 모르고스가 요정 왕국을 하나씩 멸망시키고 그때까지도 존속하고 있던 곤돌린을 매섭게 찾던 중 귀금속 채광을 이유로 곤돌린 밖을 이동하던 마이글린을 모르고스가 포박하고 고문하여 정보를 캐내게 되었다. 모르고스는 마이글린을 회유하기 위해 이드릴을 소유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베풀었고 마이글린은 죽지 않고 곤돌린으로 돌아갔다. 결국 모든 정보를 얻고 군대를 소집한 모르고스는 일시불란하게 곤돌린을 기습 공격했고 놀도르 대왕이자 곤돌린의 왕 투르곤은 항전 중에 죽게 된다. 기타 울모가 꿈에 나타나 곤돌린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사촌 형제 핀로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나르고스론드를 세웠다고 한다. 니르나에스 아르노에디아드에 투르곤과 그의 군대가 핑곤을 도와 참전한 전력이 있다. 가운데땅의 장소 가운데땅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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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dolin
In J.R.R. Tolkien's legendarium, Gondolin is a secret city of Elves in the First Age of Middle-earth, and the greatest of their cities in Beleriand. The story of the Fall of Gondolin tells of the arrival there of Tuor, a prince of Men; of the betrayal of the city to the dark Lord Morgoth by the king's nephew, Maeglin; and of its subsequent siege and catastrophic destruction by Morgoth's armies. It also relates the flight of the fugitives to the Havens of Sirion, the wedding of Tuor and the Elf Idril, and the childhood of their son Eärendil. Scholars have noted the presence of tank-like iron fighting machines in Morgoth's army in early versions of the story, written soon after Tolkien returned from the Battle of the Somme. They have likened the story of the Fall of Gondolin to the sack of Troy in ancient Greek literature, or to Virgil's Aeneid; the role of Tuor's wife Idril has similarly been compared to that of Cassandra or Helen of Troy in accounts of the Trojan War. City Founding The city of Gondolin in Beleriand, in the extreme northwest of Middle-earth, is founded with divine inspiration. The mightiest of the Elvish cities, it is hidden by mountains and endures for centuries before being betrayed and destroyed. Gondolin is founded by King Turgon in the First Age. According to The Silmarillion, the Vala Ulmo, the Lord of Waters, shows Turgon the Vale of Tumladen in a dream. Thus guided, Turgon travels from his kingdom in Nevrast and finds it. Within the Encircling Mountains is a round level plain surrounded by sheer walls; a ravine and tunnel, the Hidden Way, lead out to the southwest. In the middle of the vale is the steep Amon Gwareth, the "Hill of Watch". There Turgon decides to found a city, designed like the Noldor Elves' former city of Tirion in Valinor. Gondolin is built in secret. The Hidden Way is protected by seven gates, all constantly guarded; the first of wood, then stone, bronze, iron, silver, gold, and steel. After it is completed, he brings all his people from Nevrast to dwell in the hidden city—almost a third of the Noldor of Fingolfin's House—and nearly three quarters of the northern Sindar. Customs Gondolin develops its own Sindarin dialect, containing regional elements and words adapted from another Elvish language, Quenya. The Elven smiths of Gondolin make powerful weapons. In The Hobbit, the Gondolin-made swords Orcrist, Glamdring and the dagger later named Sting are found in a Troll-hoard. Each of these weapons has the ability to reveal nearby Orcs by glowing; they terrify Orcs in battle. According to The Book of Lost Tales, the city has seven names: "’Tis said and ’tis sung: Gondobar am I called and Gondothlimbar, City of Stone and City of the Dwellers in Stone; Gondolin the Stone of Song and Gwarestrin am I named, the Tower of the Guard, Gar Thurion or the Secret Place, for I am hidden from the eyes of Melko; but they who love me most greatly call me Loth, for like a flower am I, even Lothengriol the flower that blooms on the plain." Houses and heraldry The Book of Lost Tales states that the active male Elves of Gondolin belong to one of the 11 "Houses" or Thlim, plus the bodyguard of Tuor, accounted as the twelfth. Each house has a distinct symbol: a mole, a swallow, the heavens, a pillar, a tower of snow, a tree, a golden flower, a fountain, a harp, a hammer and anvil, and finally the triple symbol of the King, namely the moon, sun, and scarlet heart worn by the Royal Guard. Fall The city stands for nearly 400 years until Maeglin, Turgon's nephew, betrays it to Morgoth. Maeglin is captured while mining outside the Encircling Mountains, against Turgon's orders. Maeglin is promised Lordship as well as Turgon's daughter Idril, whom he had long coveted. The dark lord Morgoth sends an army over the Encircling Mountains during Gondolin's festival of The Gates of Summer, and sacks the city with relative ease. Morgoth's army consists of orcs, Balrogs, dragons and in early versions of the story iron machines powered by "internal fires". These are used to carry soldiers, to surmount difficult obstacles, and to defeat fortifications. Idril, noted for her intuition, had prepared a secret route out of Gondolin prior to the siege. While her father Turgon perishes as his tower is destroyed, Idril flees the city, defended by her husband Tuor, a prince of Men. Analysis Classical Tolkien scholars have compared the fall of Gondolin to the sack of Troy, noting that both cities were famed for their walls, and likening Tolkien's tale to Virgil's Aeneid. Both have frame stories, situated long after the events they narrate; both have "gods" (Tolkien's Valar) in the action; and both involve an escape. David Greenman compares the actions of Tolkien's quest-heroes to those of Aeneas and Odysseus. Greenman compares and contrasts Idril's part in the story to Cassandra and Helen of Troy, two prominent female figures in accounts of the Trojan War: like the prophetess, Idril had a premonition of impending danger and like Helen, her beauty played a major role in instigating Maeglin's betrayal of Gondolin, which ultimately led to its downfall and ruin. Conversely, Greenman notes that Idril's advice to enact a contingency plan for a secret escape route out of Gondolin was heeded by her people, unlike the warning of Cassandra; and that Idril had always rejected Maeglin's advances and remained faithful to Tuor, unlike Helen who left her husband King Menelaus of Sparta for Prince Paris of Troy. Alexander Bruce writes that Tolkien's tale parallels Virgil's account, but varies the story. Thus, Morgoth attacks while Gondolin's guard is lowered during a great feast, whereas the Trojans were celebrating the Greeks' apparent retreat, with the additional note of treachery. The Trojan Horse carried the Greeks into Troy, where they set fire to it, paralleled by the fire-serpents which carried "Balrogs in hundreds" into Gondolin. Tolkien's serpents are matched by the great serpents with "burning eyes, fiery and suffused with blood, their tongues a-flicker out of hissing maws" which kill the high priest Laocoön and his sons. Aeneas and his wife Creusa become separated during their escape; her ghost pleads with him to leave when he searches for her, and he travels to Italy; in contrast, Tuor and Idril escape to Sirion together, eventually sailing from there to Valinor. Marco Cristini adds that both cities are fatally attacked during a feast; their heroes both leave their wives to fight, and both see their kings die. Cristini comments further that "The most evident analogy is perhaps the behaviour of Creusa and Idril, who clasp the knees of their husbands to prevent them from joining again the battle when all hope is lost." Scholars have noted that Tolkien himself drew classical parallels for the assault, writing that "Nor Bablon, nor Ninwi, nor the towers of Trui, nor all the many takings of Rûm that is greatest among Men, saw such terror as fell that day upon Amon Gwareth". Tolkien appears to have based one scene on another classical source, Euripides' play The Trojan Women. Maeglin tries to throw Idril's son Eärendil from the city wall, just as Hector's son Astyanax is thrown down from Troy's walls. Tolkien changes the outcome: Eärendil resists, and Tuor appears just in time to rescue him by throwing Maeglin from the walls instead. British heraldry The scholar of heraldry Cătălin Hriban writes that the emblems of the houses of Gondolin are simple and figurative, depicting familiar real-world objects. He notes that standard British texts on heraldry describe similar devices. He comments that Maeglin the traitor, of the House of Moles, fittingly has the colour black; like the animal, his people are miners, used to living underground in the dark. Tolkien's wartime experience In his book Tolkien and the Great War, John Garth states that Tolkien wrote his 1917 story "The Fall of Gondolin" in hospital after returning to England from the Battle of the Somme. In his view, the tale's first half seems to reflect Tolkien's "slow acceptance of duty" at the start of the war, while the second half "surely reverberates to his collision with war itself." To defeat Gondolin, Melkor (at first called Melko) uses monsters, Orcs and Balrogs, supported by "beasts like snakes and dragons of irresistible might that should overcreep the Encircling Hills and lap that plain and its fair city in flame and death". The monstrous beasts are not of flesh and blood, but are made by "smiths and sorcerers". There are three kinds, Garth explains: heavy, slow, bronze dragons that can break gaps in Gondolin's walls; fiery monsters, unable to climb the steep smooth hill on which the city sits; and iron dragons in which Orc-soldiers can ride, and which travel on "iron so cunningly linked that they might flow ... around and above all obstacles", and are armoured so that they clang hollowly when bombarded or attacked with fire. Garth comments that these are not so much like mythical dragons as "the tanks of the Somme", and that to the story's Elf-narrator, a combustion engine would look like "a metal heart filled with flame". Anthony Appleyard similarly likens the mechanical dragons to vehicles driven by internal combustion engines. Notes References Primary Secondary Sources Fictional populated places Middle-earth lo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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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필 (당나라)
이광필(李光弼, 708년 ~ 764년)은 당나라 중기의 명장이다. 생애 이광필은 영주(營州) 유성(柳城)에서 거란 출신 당나라의 장수인 이해락(李楷落)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해락은 당 현종 개원 원년에 큰 활약을 기록하면서 영주 도독에 올랐고 충렬(忠烈)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광필의 어머니는 거란 출신인 이해고(李楷固)의 딸이다. 이광필은 엄격하고 의연하며 큰 계획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한서》(漢書)를 읽고 말을 자주 탔다고 한다. 아들로는 이의충(李義忠), 이상(李象), 이휘(李彙), 손자로는 이암(李黯)이 있다. 안·사의 난 755년 겨울 범양절도사 안록산이 간신 양국충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으로 사사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며 낙양으로 남진하였다. 현종은 안록산의 사촌 형인 안사순을 장안으로 불러들여 대신 곽자의를 삭방절도사로 삼았다. 현종이 하동절도사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묻자, 곽자의는 이광필을 추천하였다. 756년 봄, 이광필은 하동절도사가 되어 곽자의와 함께 삭방 동쪽의 안록산 영토를 공격하였다. 이광필은 곧 상산을 함락시켰다. 사사명이 반격하자 곽자의와 합류하여 쫓아내고, 안록산이 제연의 황제로 즉위한 낙양과 범양과의 통신을 끊었다. 안록산은 낙양에서 달려오는 것을 고려했다. 이때 최건우에게 이끌려온 연군이 가시고한이 지키는 동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서한, 이광필, 곽자의는 이를 공격하지 않고 지키고 싶어 했지만 재상 양국충은 곽자의가 자신의 지위를 노릴까봐 현종에게 최건우를 공격하도록 권유하였다. 가서한은 최건우에게 패하여 동관마다 잡았다. 최건우가 장안으로 진행되자 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청두로 피신했다. 태자였던 이형(당 숙종)은 영무로 피난해 즉위했다. 이광필과 곽자의는 연군의 장안 점거를 모른 채 태행산으로 퇴각했다. 숙종은 이광필을 동중서문하평장사로 하여 병사 5천으로 태원으로 향하게 했다. 이광필이 태원에 이르자 사소한 일에서 적당한 이유를 대어 부장의 최중을 처형함으로써 두려워했다. 757년 봄, 시사명은 숙종이 장안 탈환을 위해 이광필의 병력 대부분이 영무에 머물렀던 것을 틈타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태원을 포위했다. 그러나 이광필은 종종 사사명의 공격을 퍼부었다. 마침내 안경서가 안록산을 죽이고 사사명(史明)이 범양으로 불러들였고, 태원에는 채희덕이 임명되었다. 이광필은 채희덕을 대파했고 채희덕은 패주했다. 이 공적에서 이광필은 위공(후에 조공으로 바뀜)이 되었다. 758년 초, 숙종이 장안을 탈환하면서 사공으로 임명되었다. 당(唐)은 위구르 카간국의 협력을 받아 낙양을 탈환하고, 안경서는 횡성에 주력하였으나, 연군 대부분이 당(唐)에 투항하여 그 지배는 덕성 주변에만 국한되었다. 사사명도 투항하였으나, 이광필은 다시 반란을 두려워하여 숙종에게 오승은에게 암살시킬 것을 설득하였다. 숙종이 묵살하자 사사명은 다시 조반했다. 758년 가을, 이광필은 숙종을 만나 시중을 들었다. 요즘 이광필, 곽자의, 노경, 이환, 허숙기, 계광침, 최광원, 왕사례 등의 부장이 안경서 토벌을 위해 덕성에 합류했다. 이광필은 이때 총공격을 제의했다가 총감을 맡은 환관 어조은에 기각됐다. 안경서가 구원을 요구하면서 사사명은 범양에서 남진하였고, 759년 봄에 당군과 싸웠으나 혼전되었고, 이광필과 왕사례만이 병사를 일괄 퇴각할 수 있었다. 가을, 어조은이 곽자의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자 숙종은 삭방의 군권을 이광필에게 맡겼다. 그 혹독한 군율을 견디지 못한 장용제는 이광필을 배제하고 곽자의를 되살리려 했으나 이광필은 장용제를 잡고 처형했다. 이즈음에는 이광필은 명예직의 이계 아래에서 실질적인 당(唐)의 군권을 쥐고 있었다. 사사명의 즉위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제연의 황제가 되어 낙양으로 남진하였다. 이광필은 낙양에서 하양으로 피난하였기에 사사명은 간단하게 낙양에 들어갔으나, 하양을 억누르고 이광필의 반격을 자주 받아 장안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760년 봄, 숙종은 이광필을 중서령과 태위로 했다. 761년 봄, 어조은과 복고회은이 삭방의 군권을 잡자 낙양의 탈환에 나섰다. 이광필은 반대했지만 숙종의 명을 받아 위백옥과 함께 낙양을 공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작전의 불일치로 옥신각신하다 그 틈에 연군에게 공격당했고 당군은 모두 패주했다. 이광필이 하양에 머문 이포옥도 떠난 탓에 하양은 연군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제비에서는 사명(史明)이 자식의 사조의(史朝義)에게 죽임을 당하자 진격도 여기서 멈췄다. 이광필은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한때 개부의동삼사와 하중절도사가 됐다가 다시 복임됐다. 또한 사조의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 임회(임회)에 진을 쳤다. 이광필은 연군 송주의 포위를 풀어 연군을 막았다. 전신공, 상형, 은중경 등의 제비에 대해 대처하지 않았던 당 부장도 이광필을 두려워하며 토벌에 나섰다.이광필은 임회왕이 되어 서주에 진을 쳤고, 타이저우 주변 원조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762년 겨울, 당 대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당군은 낙양을 사조의로부터 탈환할 계획이었다. 이광필은 낙양으로 향했고 위구르 카간국이나 복고회은은 동쪽에서 곽영욱과 이포옥과 합류해 사조의를 낙양에서 패주시켰다. 사조의는 763년 봄에 자살하면서, 안사의 난은 종식되었다. 반란 진압 안사의 난이 진압되자 이광필은 어조은과 정원진이라는 환관에게 누명을 뒤집어쓸까봐 대종이 있는 장안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정원진이 부장의 내방에게 자살을 명령한 데 대해 두려웠고 763년 가을 토번이 장안을 공격했을 때만 해도 구원하지 않았다. 대종은 이광필의 친족을 우대하는 것으로 비위를 맞추었지만, 이광필은 응하지 않았다. 764년 여름, 대종에게 낙양을 맡겨도 서주를 나가지 않았다. 이광필은 명성을 얻었지만, 칙명을 여러 번 무시한 탓에 평판이 떨어져 인망을 잃었다. 764년 가을, 서주(徐州)에서 56세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무목(武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동절도사 (당) 764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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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Guangbi
Li Guangbi (李光弼) (708 – August 15, 764), formally Prince Wumu of Linhuai (臨淮武穆王), was a Chinese military general, monarch, and politician during the Tang dynasty. He was of ethnic Khitan ancestry, who was instrumental in Tang's suppression of the Anshi Rebellion. Background Li Guangbi was born in 708, during the second reign of Emperor Zhongzong. His father, Li Kailuo (李楷洛), was a general of Khitan ancestry, whose achievements during the Kaiyuan era (713–741) of Emperor Zhongzong's nephew Emperor Xuanzong eventually led to his creation as the Duke of Ji Commandery. Li Guangbi's mother was Lady Li, a daughter of Li Kaigu. Li Guangbi was said to be careful in his behavior when young. He was capable in horsemanship and archery, and also studied the Book of Han. He started his army service when young, and was said to be decisive, strict, and full of strategies. After his father died, he inherited the title of the Duke of Ji, and was praised for not entering his wife's room (i.e., abstaining from sexual relations) during the observation of the mourning period. At the start of Emperor Xuanzong's Tianbao era (742-756), Li Guangbi became the discipline officer at Shuofang Circuit (朔方, headquartered in modern Yinchuan, Ningxia). In 746, the military governor (jiedushi) of Shuofang and Hexi (河西, headquartered in modern Wuwei, Gansu) Circuits, Wang Zhongsi, made him a commanding general for Hexi Circuit, as well as the commander of Chishui Base (赤水軍, in modern Wuwei). Li and Geshu Han became the two key generals under Wang, while he was in command of Shuofang and Hexi. Wang often commented, "One day, Li Guangbi will have my command," and Li gained a reputation for being a good general. In 747, Li unsuccessfully tried to stop Wang from interfering with a campaign against the Tibetan Empire commanded by the general Dong Yanguang (董延光), and when Dong failed, Wang was removed from his post. In 749, he was made the deputy military governor of Hexi, serving under Geshu, and was created the title of Duke of Su Commandery in his own right. In 752, was made the deputy protectorate general at Chanyu (單于, in modern Hohhot, Inner Mongolia). In 755, An Sishun, then the military governor of Shuofang, requested him as deputy. An was impressed by him and wanted to give a daughter to him in marriage, but Li declined and feigned an illness in order to resign and return to the capital Chang'an under Geshu's assistance. During Anshi Rebellion In winter 755, An Lushan, the military governor of Fanyang Circuit (范陽, headquartered in modern Beijing), rebelled, and quickly proceeded south toward the Tang eastern capital Luoyang. Emperor Xuanzong recalled An Sishun, who was An Lushan's cousin, to Chang'an, and gave the military governorship of Shuofang to Guo Ziyi. He also asked Guo's recommendation on whom to entrust Hedong Circuit (河東, headquartered in modern Taiyuan, Shanxi), and Guo recommended Li Guangbi. In spring 756, Emperor Xuanzong made Li the military governor of Hedong and had him and Guo advance from Shuofang east, intending to capture An Lushan's territory north of the Yellow River. Li quickly advanced and captured most of Changshan Commandery (常山, roughly modern Shijiazhuang, Hebei). When An's general Shi Siming counterattacked, Guo rendezvoused with him and together, they fought Shi off, and subsequently, they cut off the communications between Luoyang (which An had captured and where he had declared himself emperor of a new state of Yan) and Fanyang. An, fearing that his army's morale would be destroyed, considered leaving Luoyang and returning north to battle Li and Guo himself. Meanwhile, though, another Yan army, commanded by his general Cui Qianyou (崔乾祐), approached Tong Pass, defended by Geshu Han, and was pretending to be weak in order to draw an attack from Geshu. Geshu, Li, and Guo all recommended to Emperor Xuanzong that the forces under him continue to hold at Tong Pass and not attack Cui, while waiting for Li and Guo to capture Fanyang first to destroy Yan forces' morale. However, the chancellor Yang Guozhong, fearing that Geshu's intentions were actually to start a coup and overthrow him, recommended that Emperor Xuanzong order Geshu to attack Cui. Emperor Xuanzong did so over Geshu's objections, and Geshu was defeated by Cui, who captured Geshu and then Tong Pass. He then approached Chang'an, forcing Emperor Xuanzong to abandon it and flee to Chengdu and Emperor Xuanzong's crown prince Li Heng to flee to Lingwu (the headquarters of Shuofang), where he was declared emperor (as Emperor Suzong). Meanwhile, Li and Guo heard only of the news that Tong Pass had fallen, but did not know what had happened afterwards, and they decided to withdraw back west of the Taihang Mountains. Later, when Emperor Suzong sent emissaries to call them to Lingwu, they went to Lingwu. Emperor Suzong gave him the additional honorary chancellor title of Tong Zhongshu Menxia Pingzhangshi (同中書門下平章事) and had him return to Taiyuan (the headquarters of Hedong) with 5,000 soldiers, leaving the rest of his soldiers at Lingwu in anticipation of a campaign to recapture Chang'an. When Li arrived at Taiyuan, he, who was angry that the official Cui Zhong (崔眾) had disrespected the prior military governor Wang Chengye (王承業) when relieving Wang, found an excuse to kill Cui, and this shocked the army, causing the entire army to be fearful of him. In spring 757, Shi, knowing that Li had left most of his troops at Lingwu and believing that Taiyuan's defenses were weak, took 100,000 men to Taiyuan and put it under siege. Li, however, defended the city capably and repeatedly repelled assaults on the city's defenses. Around the same time, An Lushan was assassinated and succeeded by his son An Qingxu, who ordered Shi to return to Fanyang and leave Cai Xide (蔡希德) to continue to siege Taiyuan, although Li was then able to defeat Cai, forcing Cai to lift the siege and retreat. After this victory, Emperor Suzong created him the Duke of Wei, and later changed the title to Duke of Zheng. Around the new year 758, after Emperor Suzong recaptured Chang'an from Yan forces, he gave Li the title of Sikong (司空), one of the Three Excellencies. Meanwhile, Tang and Huige forces had also captured Luoyang, forcing An Qingxu to flee to Yecheng, but most of his generals submitted to Tang, leaving him only with control of the region around Yecheng. Shi, in control of Fanyang and surrounding regions, also submitted to Tang, and was made a Tang general. However, Li believed that Shi would eventually rebel again anyway, and persuaded Emperor Suzong to have Shi's associate Wu Cheng'en (烏承恩) assassinate him and take over the region himself. When Shi realized this, he killed Wu and submitted a petition demanding that Emperor Suzong kill Li. Emperor Suzong disavowed any knowledge on his part or Li's and tried to placate Shi, but Shi then rebelled again. In fall 758, Li went to Chang'an to visit Emperor Suzong and was given the additional title of Shizhong (侍中) as honorary chancellor. Soon thereafter, he and several other key commanders, including Guo, Lu Jiong (魯炅), Li Huan (李奐), Xu Shuji (許叔冀), Li Siye, Ji Guangchen (季廣琛), Cui Guangyuan (崔光遠), Dong Qin, and Wang Sili (王思禮), rendezvoused at Yecheng to put An Qingxu under siege. Because both Li Guangbi and Guo had great contributions, Emperor Suzong did not make either of them the overall commander of the forces, but commissioned the eunuch Yu Chao'en to serve as the surveyor of the troops. During the siege, Li Guangbi suggested launching an all-out assault on Yecheng's defenses, but Yu opposed, and such an assault was not carried out. Faced with a siege that he could not fight out of, An Qingxu sought aid from Shi Siming, who led an army south from Fanyang and engaged Tang forces in spring 759, and during the middle of the battle, both Tang forces and Shi's forces panicked and scattered—with most of Tang forces completely scattering and pillaging the surrounding areas before fleeing back to their own circuits, with the exception of Li Guangbi and Wang, who were able to gather their forces and withdraw. In fall 759, with Yu blaming Guo for the collapse, Emperor Suzong transferred the command of the Shuofang troops that Guo commanded to Li Guangbi. With Guo's command style being far more relaxed than Li Guangbi's strict style, the Shuofang army was initially displeased, and the general Zhang Yongji (張用濟) considered forcibly ejecting Li Guangbi and demanding Guo's restoration; when Li Guangbi found out, he arrested and executed Zhang. Li Guangbi was also made the deputy supreme commander of the armed forces and in effect in command of the entire Tang army command structure, as the supreme commander was Emperor Suzong's son Li Xi (李係) the Prince of Zhao, whose title was honorary. Soon thereafter, Shi, who had killed An Qingxu and declared himself the new emperor of Yan, advanced south. Li Guangbi, judging that Luoyang was not defendable, ordered that Luoyang be evacuated, instead taking position in the Heyang (河陽) area, near Luoyang. Shi entered Luoyang, but subsequently with Li Guangbi defending Heyang, was unable to advance for some time toward Chang'an, as Li Guangbi repeatedly defeated his attacking forces, and was continuing to bog Li Guangbi's forces down in the Heyang region. In spring 760, Emperor Suzong gave Li Guangbi the honorary chancellor title of Zhongshu Ling (中書令) and the title of Taiwei (太尉), also one of the Three Excellencies. By spring 761, however, Yu and Pugu Huai'en, now in command of the Shuofang forces, were advocating that a campaign be launched to recapture Luoyang, and despite Li Guangbi's opposition, Emperor Suzong ordered Li Guangbi to attack Luoyang. Li Guangbi, despite his reluctance, thus advanced toward Chang'an with Pugu, Yu, and Wei Boyu (衛伯玉). He and Pugu, however, disagreed in regards to camp formation, with him wanting to put the camp in the hills and Pugu wanting to do so in the plains. Yan forces thus took advantage and launched a major attack on them, thoroughly routing Tang forces. All of the Tang generals, including Li Guangbi, Pugu, Yu, and Wei all fled. Li Baoyu (李抱玉), whom Li Guangbi had left at Heyang, also abandoned Heyang, and Heyang fell into Yan hands. (Soon after the Yan victory, however, Shi was assassinated and succeeded by his own son Shi Chaoyi, and Yan forces were unable to take advantage of the victory over Tang forces.) Li Guangbi requested a demotion, and he was demoted to the honorary title of Kaifu Yitong Sansi (開府儀同三司) and the honorary chancellor of title of Shizhong, and was made the military governor of Hezhong Circuit (河中, headquartered in modern Yuncheng, Shanxi), but almost immediately again made Taiwei again and made the deputy supreme commander, but only of the Henan region (i.e., area south of the Yellow River). Emperor Suzong also had him take over the commands of the expeditionary forces from the Huai River and Yangtze River region, taking up position at Linhuai (臨淮, in modern Huai'an, Jiangsu), with Shi Chaoyi seeking to expand toward the southeast. Once he arrived at his post, Li Guangbi was able to lift the siege that Yan forces were putting on Songzhou, stopping Yan advances in the region. Moreover, several Tang generals who had been staying in the region and not reporting to their proper posts—Tian Shengong (田神功), Shang Heng (尚衡), and Yin Zhongqing (殷仲卿), fearing LI Guangbi, soon reported to their posts. Emperor Suzong created Li Guangbi the Prince of Linhuai. Li Guangbi himself took up position at Xu Prefecture (徐州, roughly modern Xuzhou, Jiangsu) and made it his headquarters. He also sent an army to defeat the rebellion of Yuan Chao (袁晁), who had captured Tai Prefecture (臺州, roughly modern Taizhou, Zhejiang) and surrounding prefectures. In winter 762, by which time Emperor Suzong had died and had been succeeded by his son Emperor Daizong, with Tang forces converging on Luoyang to try to recapture it from Shi Chaoyi, Li Guangbi headed toward Luoyang, with Pugu and Huige forces heading east as well, joined by the generals Guo Ying'ai (郭英乂) and Li Baoyu. The joint Tang and Huige forces defeated Shi Chaoyi, forcing him to abandon Luoyang and flee north. Shi Chaoyi committed suicide in flight in spring 763, ending the Anshi Rebellion. After Anshi Rebellion Meanwhile, though, because Li Guangbi feared false accusations from Yu Chao'en and another eunuch, Cheng Yuanzhen, he was refusing to visit Chang'an to pay homage to Emperor Daizong. His fears grew after another general, Lai Tian (來瑱), was ordered to commit suicide due to Cheng's accusations. Even when Tibetan forces attacked Chang'an in fall 763, causing Emperor Daizong to briefly abandon Chang'an, Li Guangbi refused to come to the aid of the emperor. In order to try to please Li Guangbi, Emperor Daizong had Li Guangbi's stepmother, to whom he was very devoted, brought to Chang'an and treated with great respect, while giving Li Guangbi's brother Li Guangjin (李光進) partial command of the imperial guards and creating Li Guangjin the Duke of Liang, but these actions did not affect Li Guangbi. When Emperor Daizong put him in charge of Luoyang in summer 764, he declined to go to Luoyang, but continued to stay in Xu Prefecture. Li Guangbi had been well known for his military discipline, but after he repeatedly declined to follow imperial directives, his reputation fell, and many subordinate generals in the region began to disobey Li Guangbi as well, causing him to be embarrassed. He grew ill and died in fall 764. His casket was returned to Chang'an and buried with great honors. The Song dynasty historian Ouyang Xiu, in his New Book of Tang, commented about Li Guangbi: Notes References Old Book of Tang, vol. 110. New Book of Tang, vol. 136. Zizhi Tongjian, vols. 215, 217, 218, 219, 220, 221, 222, 223. 708 births 764 deaths 8th-century Khitan people People of An Lushan Rebellion Tang dynasty generals Tang dynasty jiedushi of Hedong Circuit Tang dynasty jiedushi of Shuofang Circuit Tang dynasty nonimperial princes Khitan people in Tang dynasty People from Chaoyang, Liaoning
https://ko.wikipedia.org/wiki/%EC%A6%9D%EC%9D%B8%20%282019%EB%85%84%20%EC%98%81%ED%99%94%29
증인 (2019년 영화)
"증인"은 2019년 2월 13일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이한 감독의 연출 작품으로 정우성이 주인공 변호사 양순호 역을, 김향기가 자폐 증세가 있는 증인 임지우 역을 맡았다. 이 밖에 이규형, 염혜란, 장영남, 정원중 등이 출연하였다. 롯데 엔터테인먼트의 배급 작품이다. 줄거리 이야기는 변호사와 자폐 학생의 관계를 따른다.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하는 변호사 순호. 어느 날 그는 고용주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가정부 미란이라는 살인 사건을 다루기 위해 약혼한다. 미란은 고용주가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자폐증이 있는 고등학생 지우. 순호는 지우가 증인으로 출석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녀를 만나기로 하고 그녀의 증언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와 친구가 된다. 등장인물 양순호(정우성) 주인공 변호사. 과거 민권운동 전문 변호사였으나 현재는 광화문 소재 대형 로펌 '리앤유'에서 권력지향적 변호인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자신의 달라진 위치에 회의감을 계속 느끼고 있다. 그를 로펌 이미지 쇄신의 카드로 쓰기 위한 상사의 권유로 가정부 살인 사건 변호를 맡게 되고, 유일한 목격 증인 임지우와 만난다. 임지우(김향기) 맞은편 집에서 일어난 가정부의 집주인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 자폐증을 가지고있으며 그녀와의 소통은 어렵지만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사진 같은 기억력과 지능을 갖고 있다. 이희중(이규형) 가정부 살인 사건의 담당 검사. 베테랑인 양순호 변호사에 비해 경력이 짧은 신인이지만, 동생이 자폐증을 앓고 있어 자폐증 환자에 대한 이해도이 높고 그 덕분에 증인 임지우와 원만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오미란(염혜란) 가정부 살인 사건의 피고인인 피해자 김은태 집의 가정부. 비닐 봉투를 뒤집어 쓰고 죽은 김은태 노인을 죽인 살인범으로 몰렸다. 양순호 변호사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다. 이병우(정원중) 캐스팅 정우성 : 양순호 역 김향기 : 임지우 역 이규형 : 이희중 역 염혜란 : 오미란 역 장영남 : 장현정 역 정원중 : 이병우 역 김종수 : 김만호 역 김학선 : 1심 재판장 역 박찬영 : 2심 재판장 역 이채은 : 정연 역 김승윤 : 신혜 역 최종률 : 김은택 역 박근형 : 순호 부 역 (특별출연) 송윤아 : 김수인 역 (특별출연) 이준혁 : 이윤재 역 (특별출연) 이레 : 경희 역 (특별출연) 김형묵 : 유재홍 역 김범석 : 문신남 역 이서환 : 중개업자 역 추귀정 : 여자의사 역 염지영 :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역 서광재 : 어린이병원 이사장 역 문승배 : 스위트룸 변호사 역 안성봉 : 법정경위 역 김규인 : 속기사 역 조한나 : 간호사 역 오창경 : 지우 부 역 김호연 : 포장마차 주인 역 정도원 : 만호 비서 이은샘 역 지우 : 괴롭히는 여고생 1 역 김정연 : 지우 괴롭히는 여고생 2 역 박은우 : 지우 괴롭히는 여고생 3 역 박주은 : 축구소년 대장 역 남상지 : 웃는 여자 변호사 역 이서준 : 로펌 직원 1 역 신혜정 : 로펌 직원 2 역 정승욱 : 화장실 놀라는 남자 역 권혁준 : 지우 생일파티 아이 1 역 한윤지 : 지우 생일파티 아이 2 역 송우용 : 카메라맨 역 이민정 : 스위트룸 파티녀 1 역 권정은 : 스위트룸 파티녀 2 역 고민지 : 스위트룸 파티녀 3 역 이영아 : 스위트룸 파티녀 4 역 이준형 : 스위트룸 파티 문지기 1 역 장효석 : 스위트룸 파티 문지기 2 역 박세정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1 역 김바비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2 역 김인규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3 역 신치영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4 역 김승욱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5 역 김태현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6 역 박준호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7 역 이승헌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8 역 조성재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9 역 강은수 : 스위트룸 파티 변호사 10 역 박재환 : 1심 배심원 1 역 채치웅 : 1심 배심원 2 역 최문익 : 1심 배심원 3 역 박윤근 : 1심 배심원 4 역 김소연 : 1심 배심원 5 역 장선아 : 1심 배심원 6 역 강민지 : 1심 배심원 7 역 최은영 : 1심 배심원 8 역 이석환 : 2심 배심원 1 역 이동훈 : 2심 배심원 2 역 박창화 : 2심 배심원 3 역 손제형 : 2심 배심원 4 역 남혜진 : 2심 배심원 5 역 심은정 : 2심 배심원 6 역 김미진 : 2심 배심원 7 역 김수경 : 2심 배심원 8 역 윤정환 : 1심 배석판사 1 역 표예리 : 1심 배석판사 2 역 김홍식 : 2심 배석판사 1 역 곽나현 : 2심 배석판사 2 역 장부익 : 1심 법정경위 역 정영록 : 2심 법정경위 역 정명훈 : 1심 동료검사 역 김준원 : 2심 검사 1 역 김경훈 : 2심 검사 2 역 이슬이 : 여자기자 역 김난영 : 뉴스앵커 역 엄주원 : 뉴스 박진성 기자 역 박미정 : 뉴스 이진영 기자 역 이종익 : 야구 캐스터 역 정경현 : 야구 해설 역 도현 : 이병우 비서 역 배내희 : 순호 모 역 조복휘 : 은택아내 역 오재세 : 구치소 시위남 역 한재경 : 남자의사 역 강지현 : 순호 소개팅 사진녀 역 흥행 정보 최종 관객수는 253만명에 그쳤다. 그러나 손익분기점은 넘겼다. 수상 경력 2019년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 정우성 2019년 제39회 황금촬영상 감독상 - 이한 2019년 제39회 황금촬영상 연기대상 - 정우성 2019년 제39회 황금촬영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 김향기 2019년 제3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 김향기 2019년 제40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 정우성 2019년 제27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김향기 2019년 제6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남우주연상 - 정우성 같이 보기 2019년 대한민국의 영화 목록 외부 링크 한국어 영화 작품 2019년 영화 대한민국의 영화 작품 대한민국의 드라마 영화 이한 감독 영화 자폐증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사를 소재로 한 영화 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 201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서울특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롯데 엔터테인먼트 영화
https://en.wikipedia.org/wiki/Innocent%20Witness
Innocent Witness
Innocent Witness () is a 2019 South Korean drama film directed by Lee Han, starring Jung Woo-sung and Kim Hyang-gi. The film was released in South Korea on February 13, 2019. Synopsis The story follows the relationship between a lawyer and an autistic student. Soon-ho is an attorney who needs to pay his father's debt. One day, he is engaged to deal with a murder case: Mi-ran, a housekeeper accused of murdering her employer. Mi-ran claimed that she found her employer dead in his own room. The only witness in this case is an autistic high school student named Ji-woo. To convince Ji-woo to attend the trial as a witness, Soon-ho decides to meet her, and befriends her in order to prove her testimony was false. Cast Main Jung Woo-sung as Soon-ho Kim Hyang-gi as Ji-woo Supporting Lee Kyu-hyung as Hee-joong Yum Hye-ran as Mi-ran Jang Young-nam as Hyun-jung Jung Won-joong as Byung-woo Kim Jong-soo as Man-ho Kim Seung-yoon as Shin-hye Lee Eun-saem as High school student Nam Sang-ji as smiling lawyer Special appearance Park Geun-hyung as Kil-jae Song Yoon-ah as Soo-in Lee Jun-hyeok as Yoon-jae Lee Re as Kyung-hee Production Principal photography began on July 7, 2018, and wrapped on October 10, 2018. Awards and nominations References External links 2019 films South Korean drama films Lotte Entertainment films 2019 drama films 2010s South Korean films 2010s Korean-language films
https://ko.wikipedia.org/wiki/%ED%88%AC%EB%AA%A8%EB%A1%9C%EC%9A%B0%EB%B0%94%EC%9D%B4%ED%88%AC%EA%B2%8C%EB%8D%94
투모로우바이투게더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2019년 3월 4일에 데뷔한 대한민국 빅히트 뮤직 소속의 5인조 보이 그룹이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라는 그룹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너와 내가 하나의 꿈으로 모여 함께 내일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지칭하는 'TXT'(투바투)는 본래 이름 'TOMORROW X TOGETHER'의 준말이다. 2019년, TXT는 《꿈의 장: STAR》를 발매하며 데뷔하였고, 이어 《꿈의 장: MAGIC》을 발매하여 여러 신인상을 수상했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팬덤은 2019년 8월 22일 모스부호 모아로 확정되었다. 모아는 Moments Of Alwaysness의 준말이자 서로의 꿈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꿈을 완성하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팬이라는 의미와 언제나 항상 영원히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팬이 함께 하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활동 데뷔 이전 2019년 1월 10일,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소속사 공식 SNS를 통해 "What Do You Do?" · "What Do You See?" 문구를 올리며 티저 홈페이지를 공개했다. 다음날인 1월 11일,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그룹명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공개하였으며, 멤버 연준의 소개 영상과 티저 이미지도 공개하였다. 공개 직후, TOMORROW X TOGETHER 는 주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및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가 기사를 통해 집중 조명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1월 14일에는 멤버 수빈의 소개 영상과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으며, 수빈은 TOMORROW X TOGETHER 의 리더로 확정되었다. 이틀 뒤인 1월 16일, 멤버 휴닝카이의 소개 영상과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다. 이어서 1월 18일에는 멤버 태현의 소개 영상과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다. 1월 21일, 멤버 범규의 소개 영상과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다. 사흘 뒤인 1월 24일에는 TOMORROW X TOGETHER 가 5인조 그룹임을 확정하고, 그룹 소개 영상과 단체 사진을 공개하였다. 또한, 공식 트위터를 개설하여 다섯 멤버가 첫 인사글을 올렸다. 그리고 1월 28일, 멤버 수빈의 질문 영상이 공개되었다. 이어서 1월 29일, 멤버 휴닝카이의 질문 영상이 공개되었다. 1월 30일에는 멤버 범규의 질문 영상이 공개되었고, 다음 날인 1월 31일에는 멤버 연준의 질문 영상이 공개되었다. 이어서 2월 1일, 멤버 태현의 질문 영상이 공개되었고, TOMORROW X TOGETHER 가 포털사이트 인물 정보에 등록되었다. 또한, TOMORROW X TOGETHER 의 공식 팬 커뮤니티와 V LIVE 채널이 개설되었다. 2월 7일,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TOMORROW X TOGETHER 의 데뷔 날짜를 2019년 3월 4일로 확정하고, 데뷔 음반과 데뷔 기념 특집 방송 및 데뷔 쇼케이스 안내를 발표하였다. 2월 18일에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데뷔 음반의 로고를 공개하며 데뷔 음반 티저 영상을 공개하였고, 엠넷은 TOMORROW X TOGETHER 멤버들의 목소리 티저 영상을 공개하였다. 다음 날인 2월 19일, 데뷔 음반의 첫 번째 컨셉 사진이 공개되었고, 2월 21일에는 두 번째 컨셉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어서 2월 22일에는 데뷔 음반의 트랙 리스트가 공개되었으며, 2월 26일에는 데뷔 곡의 첫 번째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다. 다음 날인 2월 27일, 두 번째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다. 3월 2일에는 데뷔 음반의 프리뷰 영상이 공개되었다. 2019년 2019년 3월 4일, TXT는 데뷔 음반 《꿈의 장: STAR》를 발매하고, 엠넷에서 방송하는 데뷔 기념 특집 방송 〈TOMORROW X TOGETHER Debut Celebration Show presented by Mnet〉에 출연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하였다. 다음 날인 3월 5일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데뷔 쇼케이스 〈TOMORROW X TOGETHER DEBUT SHOWCASE 'STAR'〉를 개최하였다. 3월 12일, 《꿈의 장: STAR》가 빌보드 200에 140위로 진입하면서 TXT는 대한민국의 보이 그룹 데뷔 음반 중 빌보드 200 최고 순위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또한, TXT는 타이틀곡 〈어느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 (CROWN)〉를 통해 데뷔 일주일 만에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하였으며, 음악 방송에서 3관왕을 차지하였다. 이 음반은 2019년 현재까지 18만장 넘게 판매되었다. 4월 7일, TXT는 데뷔 음반 수록곡 〈Blue Orangeade〉의 가사 비디오를 공개하였고, 4월 15일에는 후속곡으로 〈Cat & Dog〉를 확정하며 스케칭 영상을 공개하였다. 4월 18일, 멤버 범규의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으며, 4월 19일에는 연준의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다. 다음 날인 4월 20일, 휴닝카이의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고, 4월 21일에는 태현의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다. 마지막으로 4월 22일, 수빈의 티저 이미지가 공개되었다. 4월 23일에는 후속곡의 첫 번째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고, 4월 24일에는 두 번째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다. 4월 25일에는 후속곡 〈Cat & Dog〉 뮤직 비디오를 공개하였다. 5월 1일에는 〈Cat & Dog〉 영어 버전의 첫 번째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고, 이틀 뒤인 5월 3일, 〈Cat & Dog〉 영어 버전이 발매되었다. 그리고 5월 6일부터 5월 12일까지 팬덤명을 공모하였다. 이후 5월 9일부터 5월 24일까지 미국의 6개 도시에서 데뷔 쇼케이스 투어 〈TOMORROW X TOGETHER DEBUT SHOWCASE 'STAR'〉를 개최하였으며, 이 쇼케이스 투어는 전석 매진을 기록하였다. 5월 31일에는 〈Our Summer (Acoustic Mix)〉가 발매되었으며, 6월 5일에는 데뷔 음반 수록곡 〈별의 낮잠〉의 뮤직 비디오를 공개하였다. 6월 11일, TXT는 기존 커뮤니티를 폐쇄하고, 새로운 플랫폼 위버스(Weverse)로 TXT 공식 팬 커뮤니티를 개설하였다. 한편, 6월 27일부터 8월 15일까지 엠넷에서 TXT의 첫 단독 리얼리티 프로그램 《ONE DREAM.TXT》가 방영되었다. 10월 21일, TXT는 첫 정규 음반 《꿈의 장: MAGIC》을 발매하였다. 2020년 2020년 1월 15일 첫 번째 싱글 앨범 《MAGIC HOUR》 발매와 함께 일본에서 데뷔하였다. 3월 8일 코로나19 문제로 V앱을 통해 첫 팬미팅을 개최하였다. 5월 18일 두 번째 미니 앨범 《꿈의 장: ETERNITY》로 컴백하였다. 컴백 후, 5월 26일 《더 쇼》에서 첫 1위를 하였고, 그 다음 날인 5월 27일, 《쇼 챔피언》에서 또 1위를 하며 2관왕을 달성하였다. 6월 4일, 수록곡 〈동물원을 빠져나온 퓨마〉의 뮤직 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와 함께 《엠카운트다운》에서부터 6월 14일 《인기가요》까지 이 후속곡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6월 29일, 수록곡 〈Eternally〉의 뮤직 비디오가 공개되었다. 8월 19일, 두 번째 싱글 앨범 《Drama》 발매와 함께 일본에서 컴백하였다. 10월 26일 세 번째 미니 앨범 《minisode1: Blue Hour》으로 컴백하였으며, 컴백 후 11월 3일, 《더 쇼》에서 첫 1위를 하였다. 11월 13일, 수록곡 〈날씨를 잃어버렸어〉의 뮤직 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후 《뮤직뱅크》에서부터 11월 15일 《인기가요》까지 이 후속곡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11월 24일 드라마 라이브온의 ost <Your light>를 발표하였다. 2021년 2021년 1월 20일, 첫 번째 정규 앨범 《STILL DREAMING》으로 일본에서 컴백했다. 5월 24일 tvN 드라마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OST Part.2》 음원을 발표하였다. 5월 31일, 두 번째 정규 앨범 《혼돈의 장: FREEZE》으로 국내 컴백을 하였으며, 컴백 후 6월 8일, 《더 쇼》에서 첫 1위를 하였다. 데뷔 후 6월 11일, 영어곡 수록곡 〈Magic〉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그날 《뮤직뱅크》에서 첫 지상파 1위를 하였다. 6월 13일, 《인기가요》까지 타이틀곡으로 활동을 하였다. 6월 17일, 《엠카운트다운》에서부터 영어곡 수록곡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6월 20일, 《인기가요》까지 이 후속곡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8월 17일, 두 번째 정규 앨범 리패키지 《혼돈의 장: FIGHT OF ESCAPE》으로 컴백했다. 11월 10일, 일본에서 첫 번째 미니 앨범 《Chaotic Wonderland》으로 컴백하였다. 2022년 2022년 5월 9일, 네 번째 미니 앨범 《minisode 2: Thursday's Child》으로 국내 컴백했다. 7월, 첫 번째 월드 투어 ‘TOMORROW X TOGETHER WORLD TOUR <ACT : LOVE SICK>’가 개최되었다. 2023년 2023년 1월 27일, 다섯 번째 미니 앨범 《이름의 장: TEMPTATION》으로 국내 컴백 했다. 2월 5일, 빌보드 핫 200 1위에 올라갔다. 3월, 두 번째 월드 투어 'TOMORROW X TOGETHER WORLD TOUR 〈ACT : SWEET MIRAGE〉'가 개최되었다. 7월 5일, 두 번째 정규 앨범 《SWEET》을 발매하며 일본 컴백하였다. 7월 7일, 조나스 브라더스와 협력하여 디지털 싱글 앨범 《Do It Like That》음원을 공개하였다. 9월 15일, 세 번째 정규 앨범 선공개 곡 《Back for More (with Anitta)》 발매한다. 10월 13일, 세 번째 정규 앨범 《이름의 장: FREEFALL》으로 국내 컴백하였다. 12월 2일, 3일 'TOMORROW X TOGETHER WORLD TOUR 〈ACT : SWEET MIRAGE〉 FINALE' 앙코르 콘서트 개최한다. 구성원 음반 음반 외 활동 수상 및 후보 콘서트 투어 각주 같이 보기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HYBE 방시혁 외부 링크 K-pop 음악 그룹 한국어 음악 그룹 다국적 음악 그룹 대한민국의 보이 밴드 대한민국의 힙합 그룹 대한민국의 팝 음악 그룹 대한민국의 댄스 음악 그룹 2010년대 음악 그룹 2020년대 음악 그룹 2019년 결성된 음악 그룹 5인조 음악 그룹 빅히트 뮤직 소속 SBS M 더 쇼 초이스 수상자 MBC M 쇼 챔피언 챔피언송 수상자 엠넷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 KBS 뮤직뱅크 1위 수상자 SBS 인기가요 1위 수상자
https://en.wikipedia.org/wiki/Tomorrow%20X%20Together
Tomorrow X Together
Tomorrow X Together (, ; Tomorrow by Together, stylized in all caps), commonly known as TXT ( ), is a South Korean boy band formed by Big Hit Entertainment, now known as Big Hit Music. The group consists of five members: Yeonjun, Soobin, Beomgyu, Taehyun, and HueningKai. They debuted on March 4, 2019, with the extended play (EP) The Dream Chapter: Star. The EP debuted and peaked at number one on the Gaon Album Chart and Billboard World Albums Chart and entered the US Billboard 200 at number 140, the highest-charting debut album by any male K-pop group at the time. Its lead single "Crown"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Billboard World Digital Songs chart. The group also topped the Billboard Emerging Artists chart. TXT was the first Korean act to perform and headline at Lollapalooza, one of the biggest music festivals in the US. The group's early commercial success earned them several new artist awards, including Rookie of the Year at the 34th Golden Disc Awards and the 2019 Melon Music Awards, New Artist of the Year at the 9th Gaon Chart Music Awards and Best New Male Artist at the 2019 Mnet Asian Music Awards. Name TXT is an acronym for Tomorrow X Together. In Korean, the group's name is , read as "Tomorrow by Together" and transliterated into Hangul; they do not have a separate Korean version of their name. According to their website, their name refers to five individuals who "come together under one dream in hopes of building a better tomorrow". In their first interview with MBC's Section TV, the group stated that they prefer to be called "Tomorrow X Together" over "TXT". History Pre-debut activities Plans for a second boy group from Big Hit Entertainment were announced by founder Bang Si-hyuk as early as 2017, and a debut date for early 2019 was set in November 2018. TXT was officially revealed on January 10, 2019. Over the next ten days, videos depicting each member, dubbed "introduction films," were released on YouTube. 2019: Debut and The Dream Chapter: Magic In 2019, six years after BTS made their debut, TXT was the first boy band since BTS to be introduced by Big Hit Entertainment. The group's debut broadcast aired on its YouTube page, announced alongside the band's debut extended play (EP), The Dream Chapter: Star, which was released on March 4, 2019. Their debut showcase was held at the Yes24 Live Hall on March 5. Following the release of the EP, the music video of the album's lead single, "Crown" garnered 14.5 million views on YouTube, breaking the record for the most viewed K-pop debut music video within 24 hours for a boy group and the most liked K-pop debut music video, with 2.3 million likes in 24 hours. The album debuted atop the Gaon Album Chart and Billboard World Albums Chart, while "Crown"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Billboard World Digital Songs chart. The group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Billboard Emerging Artists and at number 140 on the Billboard 200 chart, making them the fastest to appear in these charts (they were the second fastest K-pop group to appear in the Billboard Emerging Artists) and highest-charting debut album by any male K-pop group. The album also ranked at number three on Oricon's Weekly Album Chart. Additionally, it went on to top the Gaon Monthly Album Chart for the month of March. TXT's first music show performance aired on March 7, 2019, on Mnet's M Countdown. They earned their first music show win on SBS MTV's The Show with "Crown", just after one week after their debut, followed by wins on M Countdown and Show Champion. "Crown" featured on GQs Decade-end list of "game-changers from a decade of K-pop" for the year 2019, with GQ writing, "The bright, effervescent pop of TXT who,are in their own element as they playfully explore teenage growing pains." On April 9, 2019, TXT announced their first-ever overseas tour, a six-show debut showcase in six American cities—New York City, Chicago, Los Angeles, Dallas, Orlando, and Atlanta—over the course of two weeks, from May 9 to 24. Tickets to all shows sold out in less than 24 hours. Following their showcase in May, TXT performed at the 2019 iHeartRadio Wango Tango music concert at Dignity Health Sports Park in Los Angeles on June 1. On June 11, it was announced that TXT would be the first artist to join the new platform Weverse. On June 20, the group announced that they would be performing in two of Japan's largest fashion festivals, Kansai Collection's Autumn/Winter 2019 runway show on August 27, followed by the Tokyo Girls Collection's Autumn/Winter 2019 show on September 7, making TXT the first Korean artist to perform at both shows in the same season. On July 6, TXT performed at the KCON 2019 NY music festival at Madison Square Garden, New York, in front of 55,000 spectators. Later that month, TXT received their first MTV Video Music Award nomination in the category of "Best K-pop". On August 8, 2019, Big Hit Entertainment announced that plans to release a new album in August would be postponed to September due to Soobin's infectious conjunctivitis diagnosis and Yeonjun's back pain. On August 20, Big Hit Entertainment revealed members Taehyun and HueningKai had also been diagnosed with conjunctivitis, thus pushing the release date for the new album back from September to October. On October 21, 2019, TXT finally released their first studio album, The Dream Chapter: Magic, with "9 and Three Quarters (Run Away)" as lead single. Musically, the album incorporated a variety of music genres, including R&B, tropical house, acoustic pop and hip hop. The album debuted atop the Gaon Album Chart, surpassing 124,000 sales in its first week. This marked the group's second chart-topping album following their debut EP. The album debuted at number three on Billboards World Albums Chart and at number six on the Billboard Heatseekers Album chart. A total of four tracks from the album entered the Billboard World Digital Songs chart, with the lead single debuting at number two. Billboard and Dazed both later named "9 and Three Quarters (Run Away)" one of the best K-pop songs of the year. TXT's commercial success in their early months earned them several rookie awards at major Korean year-end music award shows, including the Asia Artist Awards, Melon Music Awards, Mnet Asian Music Awards, Golden Disc Awards, Gaon Chart Music Awards and Seoul Music Awards. 2020: Japanese debut, The Dream Chapter: Eternity, and Minisode1: Blue Hour On January 15, 2020, TXT made their Japanese debut with the single "Magic Hour", which includes the Japanese versions of their songs "Run Away", "Crown", and "Angel or Devil". The single album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Oricon Daily Chart and at number two on the Oricon Weekly Singles Chart. On January 19, the group's Japanese television debut was announced with their first appearance on TV Asahi's Music Station. They performed the Japanese version of "Run Away" on January 24, the first Korean artist to perform on the show in 2020. "Magic Hour" was certified gold by the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Japan (RIAJ) for selling 100,000 units. On April 28, Big Hit Entertainment set the release date of TXT's second EP, The Dream Chapter: Eternity, for May 18, to be led by the single "Can't You See Me?". The album sold over 181,000 units in its first week and entered the Gaon Album Chart at number two. It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Oricon Albums Chart, becoming the band's first chart-topper in Japan. In July 2020, the album received a platinum certification from the Korea Music Content Association (KMCA) for 250,000 album shipments, giving TXT their first certification in the country since their debut. Two months later, The Dream Chapter: Star and The Dream Chapter: Magic were also certified platinum by the KMCA. On July 20, 2020, it was announced that Soobin would be the new MC of KBS2's Music Bank for one year, along with Oh My Girl's Arin. His first broadcast as MC was on July 24, 2020, and his final on October 1, 2021. On August 19, 2020, TXT released their second Japanese single "Drama". The single album included Japanese versions of "Drama" and "Can't You See Me?", as well as their first original Japanese song, "Everlasting Shine". "Everlasting Shine" served as the twelfth opening theme of the anime Black Clover, which began airing on September 1. "Drama" debuted and peaked at number three on the Japanese Oricon Singles Chart and was certified gold by the RIAJ. TXT released their third EP Minisode1: Blue Hour with the lead single "Blue Hour" on October 26. The album debuted at number three on the Gaon Album Chart, selling over 300,000 copies in its first week. In the United States, the EP debuted at number 25 on the Billboard 200, the top-selling album of the week. It also claimed the top spot on the Billboard World Albums chart, with TXT again topping the Emerging Artists chart. The EP also entered the Oricon Albums Chart at number one, becoming their second chart-topper in Japan. It was certified platinum by the KMCA. TXT released an original soundtrack titled "Your Light" for the JTBC teen-drama Live On on November 24, and member Yeonjun also made a cameo in the last episode. 2021: Still Dreaming, The Chaos Chapter, and Chaotic Wonderland Their debut Japanese studio album Still Dreaming was released on January 20, 2021. The album included the original Japanese song "Force", which served as the opening theme for the second season of anime World Trigger. Still Dreaming debuted and peaked at number one on the Japanese Oricon Albums Chart and was certified gold by the RIAJ. The album charted at number 173 on the Billboard 200, making TXT the second Korean band in history to chart an album in Japanese on the US albums chart. In April 2021, Minisode1: Blue Hour was certified double platinum by the KMCA, indicating 500,000 shipments. On April 22, 2021, Big Hit Music announced that TXT would make a comeback at the end of May. The group released their second studio album, The Chaos Chapter: Freeze on May 31 with lead single "0X1=Lovesong (I Know I Love You)", featuring Seori. On May 7, it was announced that the album pre-orders had surpassed 520,000 copies in six days. On May 31, before the official release of the album, pre-orders increased to over 700,000 copies, doubling from their last release. The Chaos Chapter: Freeze debuted at number five on the Billboard 200, becoming the band's highest-charting album in the United States and the top-selling album that week. The album peaked at number one on the Oricon Albums Chart, becoming TXT's fourth consecutive chart-topper in Japan. On May 24, the band released the original soundtrack "Love Sight" for the tvN drama Doom At Your Service. On June 25, TXT released a remix of "0X1=Lovesong (I Know I Love You)" featuring pH-1, Woodie Gochild and Seori. In July, The Chaos Chapter: Freeze was certified Gold by the RIAJ, TXT's first Korean release to be certified in Japan. In August, the album was certified triple platinum by the KMCA, indicating 750,000 shipments. The band released The Chaos Chapter: Fight or Escape, a repackaged version of The Chaos Chapter: Freeze, with lead single "Loser=Lover" on August 17, 2021. On October 3, the group held their first full-length concert, entitled ACT:BOY. The concert ran for 150 minutes, featured 25 songs, and was streamed through online platform VenewLive to fans in 126 countries. On October 5, it was announced that each member would serve as guest DJs on KBS Cool FM's Kiss the Radio from October 25 to 31, hosting "Tomorrow x Together week" to "showcase their unique charms" following previous DJ Young K's military enlistment. TXT released their first Japanese EP, Chaotic Wonderland, on November 10, 2021. It contained Japanese versions of "0X1=Lovesong (I Know I Love You)" featuring Ikuta Lilas, vocalist of Japanese musical duo Yoasobi, and "MOA Diary (Dubaddu Wari Wari)", along with original Japanese song "Ito" and the group's first original English song "Magic". "Ito", composed by Japanese rock band Greeeen, served as the theme song for Japanese drama Spiral Labyrinth – DNA Forensic Investigation[ja], adapted from the manga of the same name. On November 24, 2021, TXT was awarded the 2021 Men of the Year Pop Icon Award by GQ Japan. The group also featured on the cover of Euphoria magazine, where they spoke to Aedan Juvet about being named the "IT group" of K-pop's fourth generation. 2022: Minisode 2: Thursday's Child and first world tour On March 14, 2022, it was announced that Yeonjun would be the new MC of SBS's Inkigayo alongside Roh Jeong-eui and Seo Bum-june. On March 23, 2022, TXT became the first male K-pop artist to enter Billboards Song Breaker Chart. They released their fourth EP, Minisode 2: Thursday's Child, and its lead single "Good Boy Gone Bad" on May 9, 2022. On April 20, 2022, pre-orders surpassed 810,000 copies, six days after the announcement. To support the EP, the group embarked on their first world tour, Act: Lovesick, beginning on July 2. On July 22, 2022, the group released an English single "Valley of Lies" featuring Puerto Rican rapper Iann Dior. On July 30, 2022, TXT became the first K-pop act to perform at Lollapalooza. On August 31, TXT's third Japanese single, "Good Boy Gone Bad" was released. It contained the Japanese version of "Good Boy Gone Bad" and two original Japanese song, "Hitori no Yoru" and "Kimi janai dareka no (Ring)". "Ring" was used as the theme song for Abema's show Heart Signal Japan, a remake of the Korean reality show Heart Signal. 2023–present: The Name Chapter: Temptation, second world tour, Sweet, Do It Like That and The Name Chapter: Freefall The band released their fifth EP, The Name Chapter: Temptation, on January 27, 2023. On February 22, the group made available "Goodbye now" which served as the original soundtrack for the Webtoon Love Revolution. On March 22, 2023, TXT became the first K-pop group to headline at Lollapalooza. In March, the group embarked on their second world, Act: Sweet Mirage. On July 5, TXT released their second Japanese album, Sweet. The album included the original Japanese song "Ajisai no yōna koi (Hydrangea Love)" which served as the opening theme for the drama Saiko No Seito: Yomei Ichinen No Last Dance. On July 7, the group released the single "Do It Like That" with the Jonas Brothers. In August, The Name Chapter: Temptation was certified Gold by the RIAA. It is TXT's first release to be certified in the United States. On September 15, TXT released the single "Back For More" with Anitta, the song was performed for the first time at the MTV VMA. On October 13, the band released their third Korean studio album, The Name Chapter: Freefall. The band collaborated with Japanese composer Hiroyuki Sawano on a song titled "LEveL", which will be used as the opening theme for the 2024 anime television series Solo Leveling. Members Soobin () – leader Yeonjun () Beomgyu () Taehyun () HueningKai () Artistry Musical style and lyrical themes According to Rolling Stone, Tomorrow X Together's music "dabbles in disco, shoegaze, indie rock, and pop" and discusses "personal stories about the growing pains that come along with being a teenager". NME described the group's discography as mostly "bright, breezy and blissfully free from life’s worries" and "focusing more on fantasy and fun". The members have expressed their desire to be more involved in songwriting. Endorsements In May 2019, TXT was announced as the new ambassadors for Korean skincare brand It's Skin. In December 2019, TXT was announced as exclusive models for Korean student uniform brand Skoolooks' 2020 collections. In February 2021, TXT was selected as "main characters" in TikTok's #BeMyValentine global campaign to celebrate Valentine's Day. In March 2021, the group was announced as models for the Japanese audio brand GLIDiC. In July 2021, the group was revealed to be the newest brand ambassadors of Philippine telecommunications giant Smart Communications for its "Build Your Own Giga" campaign. In August 2021, TXT was selected as models for Korean beauty brand 4OIN. In May 2022, the group was announced as the global ambassadors for Korean skin care brand Ma:nyo factory. In February 2023, TXT was appointed as the first global ambassador for the personal care brand KUNDAL. They were selected as the new global ambassadors for Korean beauty brand Clio in the same month. In August 2023, the group was announced as the new brand ambassadors for Dior. Discography Korean-language studio albums The Dream Chapter: Magic (2019) The Chaos Chapter: Freeze (2021) The Name Chapter: Freefall (2023) Japanese-language studio albums Still Dreaming (2021) Sweet (2023) Filmography Television Online shows Radio shows Concerts and tours Headlining tours Act: Lovesick (2022) Act: Sweet Mirage (2023) Concerts Concert participation 2021 New Year's Eve Live presented by Weverse 2022 Weverse Con [New Era] 2022 Lollapalooza 2022 Summer Sonic Festival 2023 Dick Clark's New Year's Rockin' Eve 2023 Weverse Con Festival 2023 Lollapalooza Awards and nominations References External links 2019 establishments in South Korea Musical groups established in 2019 K-pop music groups South Korean boy bands South Korean pop music groups South Korean dance music groups South Korean musical quintets Musical groups from Seoul Hybe Corporation artists Republic Records artists Universal Music Japan artists Universal Music Group artists MAMA Award winners Melon Music Award winners MTV Video Music Award winners Japanese-language singers of South Korea English-language singers from South Korea Teen pop groups Electropop gro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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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
미연(, 1997년 1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배우이며, 대한민국의 걸 그룹 (여자)아이들의 메인보컬과 비주얼을 담당하고 있으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가상 걸그룹 K/DA의 아리 담당 가수로도 유명하다. 2022년 4월 27일에 첫 솔로 앨범 《MY》를 발매하고, 솔로가수로 데뷔하였다. 학력 인천왕길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국제사이버대학교 엔터테인먼트학과 (학사) 생애 1997년 1월 31일 인천 서구 마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였고,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여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2010년,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YG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참가하였고 최종 합격하여 YG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다. YG 엔터테인먼트의 새 걸그룹 데뷔조 핑크펑크의 멤버가 되었으나, 데뷔조가 4인조로 변경되며 미연이 빠지게 되면서 결국 YG 엔터테인먼트를 나가게 된다. 이후 보컬을 강화하고 작곡과 음악 제작을 공부하기 위해 음악학원에 다녔다. 이후 큐브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준비를 거쳐 2018년 5월 2일 (여자)아이들의 메인보컬로서 데뷔에 성공하였다. 2021년 2월 18일부터 엠카운트다운의 MC로 활동 중이고, 네이버 나우에서 소문의 아이들 오디오쇼 호스트를 맡고 있다. 2016년 ~ 2018년 : 데뷔 전 활동 2017년 초, 미연은 큐브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다. 큐브에 들어가기 전에, 2016년 어반자카파의 캐나다 투어에 임슬옹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2018년 ~ 2021년: (여자)아이들로 데뷔, 배우 데뷔 2018년 5월 2일, (여자)아이들의 미니 앨범 《[I Am (G)I-dle EP)|》로 데뷔했다. 타이틀 곡은 "라타타". 2018년 10월 26일, 미연은 소연과 함께 2018년 월드 파이널 개막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명의 가수들은 가상의 K-pop 걸 그룹 K/DA의 보컬을 맡았고, 미연은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챔피언 중 한 명인 아리의 목소리를 맡았다. 에블린과 함께 보컬을 맡고 있는 비어는 이 그룹의 메인보컬을 맡고 있다. 그들의 노래 "[팝/스타즈]"는 유튜브에서 입소문을 타며 빌보드 월드 디지털 송 차트 1위를 차지했다. 2019년, 미연 아메바 컬쳐 X 디바인 채널 코드쉐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행주와 함께 곡 〈Cart〉를 작업했다. 2020년 MBC 《복면가왕》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녀는 1라운드에서 64점으로 우승했다. 2라운드에서는 윤미래의 〈슬픔과 안녕 행복〉을 선보였으나 임강성에게 패했다. 그녀의 목소리 연기는 청중과 패널 모두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미연의 목소리는 연기가 자욱했지만 영혼이 깃든 것으로 묘사됐다. 같은 해 K/DA의 EP 《[All Out (EP)|All Out]》에서 아리 역으로 다시 노래를 불렀다.〈The Baddest〉는 〈Bea Miller〉와 〈Wolftyla〉가 비어와 번즈를 대체한 곡으로, 두 번째 싱글 〈More (K/DA)>"는 오리지널 라인업과 렉시 리우를 포함한다. 2021년 1월에는 웹드라마 《리플레이》의 여주인공으로 데뷔하였다. 인기 있는 유튜버이자 밴드 보컬리스트 그녀는 냉담하고 시크한 성격이지만, 마음은 너그럽고 착한 사람이다. 이 드라마는 어설프고 불안한, 그러나 현재의 열여덟 청춘의 과거 감정을 되살리는 꿈과 사랑에 공감하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의 음악적 특성으로, 조승우는 "Dreaming About You"와 "How To Love (with 네온 파프리카)"라는 여러 OST를 발표했다. 이 드라마는 계속해서 6백만 건 이상의 누적 조회 수를 기록했다. 2020년 10월, 미연은 민니와 함께 "우리는 이미 사랑에 빠졌어요"를 불렀다. 민니는 도도솔솔라라솔 사운드트랙의 일부로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그녀는 첫 솔로 OST 〈My Destiny〉를 발매했다. 2020년 11월 30일 MBC와 서울관광공사가 공동 기획하고 제작한 버라이어티 여행 프로그램 '서울 커넥츠 유'에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은 스타들과 팬들의 사진을 통해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실시간으로 연결함으로써 글로벌 팬들에게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에 타임슬립을 보여준다. 현재: DJ 진행자, MC와 솔로 활동 2021년 2월 9일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진행하는 네이버 나우 라디오 프로그램 '소문의 아이들'의 메인 진행자로 선정되었다.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1월에 (여자)아이들의 4번째 미니 앨범 《I Burn》의 컴백을 기념하여 3부작으로 방송되었으나, 팬들의 반응으로 인해 공식 라이브 프로그램으로 복귀하였다. 2월 18일부터 배우 남윤수와 함께 Mnet의 음악 프로그램 《엠카운트다운》을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9년 만의 첫 여성 MC가 되었다. 첫 방송 당일 두 사람은 듀엣 곡 'Dream'(원곡: 배수지와 백현)을 불렀다. 미연은 이달 말 한국경제연구원 월간 '걸그룹 멤버 개인 브랜드 파워 순위'에서 3위에 올랐다. 2021년 5월, 미연은 《킹덤: 레전더리 워》에 출연했다. 무대는 영화 '라라랜드'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콘셉트로 뮤지컬 같은 무대로 선보였고, 조미연의 역할은 이민혁(1990년생)의 러브 스토리라인에 잡혔다. 5월 28일, 미연은 CS 해피 엔터테인먼트의 CS 넘버 앨범에 Joseph K를 포함한 60명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감성 발라드 #Pop and R&B 발라드 곡인 "You Were My Breath"에 참여했다. 이 곡은 2017년 히트곡 "첫눈처럼 너에게 갈 거야"를 프로듀싱한 로코베리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번 앨범은 CS행복엔터테인먼트 전창식 대표가 조승희의 저력을 인정하고 아직 (여자)아이들에서 드러나지 않은 독보적인 가창력으로 그의 기대에 부응하며 제작했다. 가온 뮤직 차트에서 96위로 데뷔하였다. 2021년 8월, 매일경제신문은 미연이 웹드라마 《딜리버리》에 출연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무술에 조예가 깊은 배달 소녀 곽두식 역을 맡을 예정이다. 이 가수는 한국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어려운 시기에 국내 중소기업을 돕기 위해 이 웹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한다. 경기도와 제작진은 "조미연의 유선 조치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2021년 10월 11일에 발매된 싱글 〈Side Effect〉를 통해 레이든과의 콜라보레이션 앨범 《Love Right Back》을 발표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부작용으로 표현한 재치 있는 가사의 미디엄 템포 신스팝 곡으로 표현했다. 10월 13일에 발매된 동해의 B-사이드 트랙 〈Blue Moon〉에 함께 출연했다. 같은 날, 그녀는 다가오는 핑크 코미디 웹 시리즈 《어른 연습생》에서 류의현과 함께 방예경 역으로 출연을 확정지었다. 2021년 11월 17일에는 키드밀리의 《Kitty》에 출연했다. 2022년 4월 27일, 솔로 가수로서 첫 미니 앨범을 발표했고, 5월 3일 방영된 SBS MTV 《더 쇼》에서 음악방송 첫 1위를 차지했다. 음반 목록 미니 앨범 디지털 싱글 2021년 - 너는 나의 숨이였다 OST 2020년 - We Already Fell In Love (With 민니((여자)아이들) [도도솔솔라라솔 OST Part.4] 2020년 - My Destiny [구미호뎐 OST Part.8] 2021년 - Dreaming About You [리플레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 OST Part.6] 2021년 - 마음이 닿는 법 (With 네온파프리카) (Special Track) [리플레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 OST] 2021년 - Imagine Love 이매진 러브 [어른연습생 OST Part.2] 2022년 - Someday [꽃 피면 달 생각하고 OST Part.8] 2023년 - 무덤덤(Numb) [에버소울 OST (Cover)] 2023년 - Sweet Dream (With 우기((여자)아이들) [연애대전 OST Part.1] 2023년 - 달빛에 그려지는 [연인 OST Part.4] 참여 음반 2018년 - 한걸음 (2018 UNITED CUBE ONE) 2018년 - POP/STARS - K/DA (With 소연, 매디슨 비어, 자이라 번스) 2019년 - Cart (With 행주Hangzoo) 2020년 - THE BADDEST - K/DA (With 소연, 비 밀러, 울프타일라) 2020년 - MORE - K/DA (With 소연, 매디슨 비어, 자이라 번스) 2021년 - Side Effect 사이드 이펙트 (DJ Raiden레이든 첫 미니앨범 ‘Love Right Back 러브 라이트 백') 2021년 - Blue Moon 블루문 (동해DONGHAE 디지털 싱글 'California Love') 2021년 - Kitty 키티 (With Kid Milli키드밀리) 2023년 - 봄노래 (With LAS라스) 2023년 - 트월ㅋ(Prod. Czaer) [Street Woman Fighter2 (SWF2)] (With 우기((여자)아이들) 출연 작품 텔레비전 프로그램 예능 커버 무대 진행(MC) 웹드라마 라디오 뮤직 비디오 기타 뮤직 비디오(커버 곡) 비긴어게인 오픈마이크 브이로그(미연&우기의 VLOG) 수상 목록 가요 프로그램 1위 광고 MUSE 영상(광고) 각주 외부 링크 199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여자 가수 대한민국의 여자 배우 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 (여자)아이들의 일원 큐브 엔터테인먼트 소속 YG 엔터테인먼트 소속 인천광역시 출신 가수 인천광역시 출신 배우 인천광역시 출신 음악가 창녕 조씨 인천왕길초등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 국제사이버대학교 동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https://en.wikipedia.org/wiki/Cho%20Mi-yeon
Cho Mi-yeon
Cho Mi-yeon (; born January 31, 1997), better known mononymously as Miyeon, is a South Korean singer and actress. She is the vocalist of the South Korean girl group (G)I-dle under Cube Entertainment, and voiced Ahri in the virtual K-pop girl group K/DA. Early life Cho was born on January 31, 1997. She is an only child. Cho showed a strong interest in singing since she was a child. Her love for music was inspired by her father. Cho's parents soon recognized her passion and sent her to music schools to learn various skills, such as violin, guitar, and piano. She eventually auditioned for YG Entertainment in middle school and went on to spend the next five years as a trainee. However, her debut was thwarted and she left the company. Cho continued to pursue music as she signed up for a music academy to strengthen her vocal skills, as well as learning to compose and produce music. Cho spent about eight years as a trainee before debuting with (G)I-dle. Career 2016–2018: Pre-debut activities In early 2017, Cho became a trainee at Cube Entertainment. Before joining Cube, she was a freelance singer and appeared as an associate singer with Lim Seul-ong in Urban Zakapa's Canada Tour in September 2016. In 2017, she appeared in a small part in Lim Seul-ong's "You" music video. 2018–2020: Debut with (G)I-dle, collaborations and acting debut Cho debuted with (G)I-dle on May 2, 2018, with their mini-album I Am and the title song "Latata". On October 26, 2018, it was confirmed that Cho would perform at the League of Legends World Finals Opening Ceremony 2018, along with Soyeon, Madison Beer and Jaira Burns. The four singers provided vocals for the virtual K-pop girl group K/DA, with Miyeon voicing Ahri, one of the most well known champions in the League of Legends. Together with Evelynn voiced by Beer, Ahri is the main vocalist of the group. Their song "Pop/Stars" went viral on YouTube and topped Billboard'''s World Digital Songs chart. In 2019, Cho collaborated with Hangzoo with the song "Cart" as part of Amoeba Culture X Devine Channel Code Share Project. In 2020, Cho appeared on MBC's music competition program King of Mask Singer. She went on to win the first round with 64 points. In the second round, she performed Yoon Mi-rae's "Goodbye Sadness and Hello Happiness" but lost to Im Kang-sung. Her vocal performance received a warm reception from both audience and panels. Cho's voice was described as smokey, but soulful. Also that year, Cho sang again as Ahri on two songs from K/DA's EP, All Out; lead single "The Baddest" with Bea Miller and Wolftyla replacing Beer and Burns, and the second single "More" with the original line-up and Lexie Liu. In September 2020, it was revealed that Cho would make her acting debut as the female lead in web-drama Replay: The Moment as Yoo Hayoung, a popular YouTuber and band vocalist. She has a cold and chic personality, but a generous and kind-hearted person. The drama depicts an empathetic romance in a clumsy and anxious, but dreams and love of reliving past emotions in the present eighteen youth. With the drama's musical nature, Cho released several OSTs for it: "Dreaming About You" and "How To Love (with Neon Paprika)". The drama went on and recorded more than 6 million cumulative views. In October 2020, Cho sung "We Already Fell In Love" together with Minnie as part of Do Do Sol Sol La La Sol soundtrack, and in November, Cho released her first solo OST "My Destiny" as part of Tale of the Nine Tailed soundtrack. On November 30, 2020, Cho appeared in Seoul Connects U, a variety travel show jointly planned and produced by MBC and Seoul Tourism Foundation. The program shows a time slip trip in the same space and at different times to global fans by linking the past and present of Seoul through photos of stars and fans in real-time. 2021–present: DJ host, M.C and solo endeavors In February 2021, it was announced that Cho was chosen to be the main host of Naver Now radio program Gossip Idle (), hosting the radio weekly every Tuesday at 8 pm from February 9. The radio show was initially aired as a trilogy to commemorate the comeback of (G)I-dle's fourth mini album I Burn in January, due to the response from fans, it has returned to the official live show. In the same month, Cho was appointed as one of the new hosts of Mnet's music program M Countdown, a position which she held from February 18 with actor Nam Yoon-su. She became the first female MC on the program in 9 years. On the day of their first broadcast, the pair prepared a special stage as they sang a duet song "Dream" by Suzy and Baekhyun. At the end of the month, Cho succeeded in making the list of Korean Business Research Institute's monthly "Individual Girl Group Members Brand Power Ranking" at number 3 with an increase of 96.20% behind Blackpink's Jennie and Rosé. In May 2021, Cho appeared on Kingdom: Legendary War as a hidden card to help BtoB's "Blue Moon (Cinema Ver)" No Limit stage. The stage was presented as a musical-like stage with the concept of the movie La La Land and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with Cho's role caught in a love storyline between Minhyuk and Changsub. On May 28, Korean media news shared that Cho participated in CS Happy Entertainment's cs numbers album with "You Were My Breath" (), a pop-ballad song played by a 60-member orchestra including Joseph K, who created Paul Kim's "Me After You" and guitarist Park Shin-won. The song is produced by Rocoberry who produce the 2017 hit song "I Will Go to You Like the First Snow". The album is produced by Jeon Chang-sik, the CEO of CS Happy Entertainment recognized Cho's potential and lived up to his expectations with her unrivalled singing skills that have not been revealed yet in (G)I-dle. With one day of tracking, it debuted at number 96 on Gaon Download Chart and number 20 on the component BGM Chart. In August 2021, Maeil Business Newspaper reported that Cho would be acting alongside The Penthouse: War in Life actor Lee Tae-vin in the action comedy web series Delivery, which was released in November 2021. She is to play the role of Kwak Doo-sik, a delivery girl who is well versed in martial arts. The singer is said to appear in this web drama to help local small and medium-sized enterprises during difficult times due to COVID-19 in the Gyeonggi Province and the production staff stated, "to look forward to wire action from Cho Mi-yeon". In October 2021, Cho released a collaboration with Raiden on his first EP, Love Right Back, with the lead single "Side Effect" released on October 11. It was described as a medium-tempo synth-pop song with witty lyrics that expresses the emotions felt by the person in love as a side effect. She also co-featured on Lee Donghae's B-side track, "Blue Moon", which was released on October 13. The same day, she was confirmed to star in the upcoming pink comedy web series Adult Trainee as Bang Ye-kyung alongside Ryu Ui-hyun. On November 17, 2021, Cho was featured in rapper Kid Milli's "Kitty". On April 6, 2022, it was announced that Cho would make her solo debut at the end of April. On April 8, 2022, Cube Entertainment announced that her first EP, My, would be released on April 27, including the lead single "Drive". Cho won her first music program trophy at SBS MTV's The Show'' on May 3. Discography Extended plays Singles Other charted songs Songwriting credits All song credits are adapted from the Korea Music Copyright Association's database unless stated otherwise. Videography Music videos Filmography Film Web series Television shows Web shows Hosting Radio shows Awards and nomination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1997 births Living people (G)I-dle members Cube Entertainment artists K/DA members Musicians from Incheon Actresses from Incheon English-language singers from South Korea Japanese-language singers of South Korea Mandarin-language singers of South Korea South Korean female idols South Korean pop singers South Korean women pop singers South Korean web series actresses K-pop singers 21st-century South Korean women singers 21st-century South Korean singers 21st-century South Korean actresses South Korean contemporary R&B singers Dance-pop music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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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 키장
토요타 키장(Toyota Kijang)은 "Kerja Sama Indonesia-Jepang" (영어 : Indonesia-Japan Cooperation)의 약자로 토요타 자동차가 동남 아시아에서 주로 판매하는 일련의 픽업 트럭 및 MPV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슴, 문착을 의미하는 "키장"은 1977년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도입되었으며 현재 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자동차가 되었다. 같은 차량은 필리핀에서 토요타 타마라우로 생산되었으며 1976년 12월에 발매되었다. 필리핀의 4 세대 모델은 토요타 레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 차는 다른 국가에서 판매 및 아프리카에서 대만 인도와 네팔 (3세대), 토요타 제이스와 토요타 커리스(세 번째와 네 번째 세대), 말레이시아 토요타 안서(4세대), 토요타 종마로 알려져있다 토요타 벤처(3세대)와 남아공 (4세대)의 토요타 콘도르라는 더 높은 사양을 가진 기본 모델 (2세대, 3세대 및 4세대)이다. 4륜 구동 차량 (키장은 후륜 구동 차량)과 비교할 때 판매되는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높은 좌석 용량, 높은 지면 간극 및 견고한 서스펜션을 자랑하며 일반적으로 가난한 도로 상황 및 대규모의 확대 가족이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CKD (완전한 녹다운) 단위로 제조되며, 각 시장에서 판매된다. 기장은 쉽게 제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986년 키장 조립은 코롤라 1300을 조립하는 데 드는 비용의 약 42%정도 된다. 1세대 (F10; 1976년 - 1981년) 이 프로토타입은 1975년 자카르타 박람회에 전시되었으며, 1977년에 생산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키장은 4단 수동 변속기에 적합한 1.2 리터 3K 엔진으로 구동되는 소형, 경량 픽업 트럭이었다. 뒤 몸과 지붕을 가진 픽업 변형도 제작되었다. 소형 버스 키장은 (밴/왜건 버전)는 현지 회사에서 제작했다. 키장은 1976년 12월 2일 이후 필리핀에서 판매되었지만 1977년 6월 9일 인도네시아 시장에 처음 진입했다 그것은 외부 경첩이 달린 반문과 플라스틱 / 캔버스 창문이 달린 박스 픽업 트럭이었다. "KF10"이라고 불리며 3단 엔진과 1972년 코롤라를 4 단 수동 변속기에 연결했다. 한때 열렸던 엔진 후드가 악어 입과 닮았 기 때문에 "Kijang Buaya" (Crocodile Kijang) 라고 별명을 붙였다. KF10 키장 자동차는 1981년까지 2만 6천 6백 6십만 대를 판매하여 2대 기장으로 교체되었다. 타마러우 필리핀에서 기장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생산 된 타마러우 (국가의 동물 중 하나 인 타마러우)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년 12 월 1976년 도입, 그것은 1.2L "4K"가솔린 엔진과 작은 톤의 하이 사이드 픽업 (HSPU) (56 마력을 생산)로 시작하고 지금 소멸에 의해 제작되었다 델타 모터 , 필리핀에서 도요타 차량을 조립했다. BUV 또는 "기본 유틸리티 차량"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4 단 변속기를 가지고 있었고, 일부 모델에는 운전석 또는 조수석 측면 도어가 없었다. 견고성과 유지 보수 용이성, 심지어 업그레이드 가능성 (일부는 4K 엔진을보다 강력한 엔진, 일반적으로 디젤 엔진 또는 트라카의 "K"엔진 시리즈), 몇몇의 차량은 오늘 살아난다. 그것의 디자인은 현지 조립 자에 의해 때때로 복사되거나 변경된다. 제너럴 모터스 (프란시스코 모터스를 통해), 포드, 크라이슬러 (미쓰비시와 함께)는 피너이 와 포드 피에라 및 시마론의 두 가지 버전을 포함하여 자체 버전을 만들었다. 타마러우 FK-10은 번즈 필 그룹의 부서 인 엘라 모터스에 의해 1980년 파푸아 뉴기니에서 수입 및 유통되었다. 차량은 토요타 트라카로 이름이 바뀌었고 "인기있는 토요타 코롤라와 동일한 엔진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명되었지만 트라카는 750kg을 실어 나를 수 있고 60hp 이상을 개발할 수 있는 기본적인 다용도 차량이다." 2세대 (F20 / F30; 1981년 - 1986년) 신체 패널이 다르더라도 20 시리즈 키장은 boxy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것의 호리 호리한 두건의 밑에 1.3 리터 4K 엔진 은 1985년 12월에서 대체되었다 1.5 리터 5K. 유일한 변속기는 4 속도 설명서였다. 5K로, 힘은 에서 증가했다. , 둘 다 5600 rpm. 1986년 모델은 직사각형 헤드 라이트와 새로운 그릴로 바깥에서 말할 수 있다. 기장은 1983년과 1984년에 스즈키 수퍼 캐리와 다이 하츠 히제와 같은 과거의 시장 리더들을 따라 잡기 시작했다. 더 강력한 키장은 더 많은 운반 능력을 제공했지만 엔진 배치는 더 저렴한 Kei 트럭 기반 경쟁 업체보다 안전하다. 1985년 2월에 100,000번째 키장이 생산 라인을 떠났다. 필리핀에서는 타마러우도 긴 휠베이스 30 시리즈로 판매되었다. 지방의 필리핀의 자동차 상표 (용)는 긴 휠베이스 타마러우의 디자인을 나중에 잡았고, 그것을 시장에 내놓았다. 니산은 현지 조립 업체 유니버설 모터스를 통해 나중에 AUV의 테마 인 비다 (타갈로그어의 "주인공")라는 자체 휠체어를 조립하여 출시했다. 긴 휠베이스의 타마러우와 흡사하다. 3세대 (F40 / F50; 1986년 - 1996년) 1986년 11월에 출시 된 키장은 짧은 휠베이스 (KF40 시리즈)와 긴 휠베이스 (KF50 시리즈)로 제공되었다. 기장은 더 크고 무거워졌으며 더 이상 픽업으로 우선 순위가 부여되지 않았다. 표준 변속기 수준에는 4 단 수동 변속기가 장착되었지만 수퍼 변속기에는 5 단 수동 변속기와 더 잘 장착 된 내부 변속기가 있다. 이 세대에는 토요타가 임명 한 회사에서 제작한 풀 바디 MPV가 도입되었다. 이 기술은 퍼티 사용량을 2-5kg 개까지 줄이기 위해 적용되었다. 안면 성형은 1992년에 발생했다. 미니 버스는 이제 오른 쪽 뒷문을 받고 풀 바디 대신 Toyota Original Body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했다. 창작 과정에서 완전히 눌러졌으며 뾰족한 용접으로 사용되었다. 지금까지이 모델은 유일한 퍼티 프리 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니 버스의 깔끔한 수준은 다음과 같았다 : 표준(SX / KF42 & LX / KF52) : 4 단 수동, 표준 대시 보드 및 전원 기능이없는 기본 모델 키장. 디럭스(SSX / KF42 & LSX / KF52) : 새로운 정교한 계기판, 고급 인테리어 자재, 센터 캡이 달린 스틸 림, 싱글 AC, 라디오 수신기가있는 기본 오디오 시스템 등을 갖춘베이스 기장의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다. (합금 휠은 옵션으로 제공되었다. ) 그랜드 엑스트라(SGX / KF42 & LGX / KF52) : 더블 블로어 AC, 합금 바퀴, 스웨이드 커버 도어 트림 및 시트, 파워 스티어링, 파워 미러, 파워 윈도우, 타키 미터, 테이프 데크가있는 업그레이드 된 오디오 시스템 라디오 수신기 (CD 플레이어는 옵션으로 제공됨), 알람 및 전원 잠금 장치가 포함된다. 키장 로버(GRX 스페셜 에디션, KF42) : 더 넓은 실내, 4 개의 도어 모두를위한 파워 윈도우, 센터 콘솔, 4 개의 스피커와 2 개의 트위터가있는 세련된 오디오 시스템, 목재 트림, 특수 도어 트림, 새로운 합금 휠 및 새로운 후방. 키장 잔탄(LGX 기반 모델, KF52) : 더 큰 트렁크 용량을 갖춘 코치 빌더 모델, 뒤 defogger가있는 에어컨 시스템, 가죽 좌석 및 기장 탐사차와 같은 사치. 로버와 잔탄 모델은 서로 다른 바퀴와 후방 스타일링을 가지고 있다. 키장 켄카나(KF42 / KF52)는 키장 로버 / 잔탄에 기반한 코치 빌더 모델로 지붕이 높고지면이 높다. 1994년 키장은 새로운 그릴과 새로운 엔케이 14 인치 레이싱 알루미늄 휠, 새로운 스티어링 휠, 디럭스 트림을 위한 타코미터 및 더 큰 기화기를 포함한 두 번째 안면 성형품을 받았다. 7K-C OHV 엔진. 7K 엔진이 도입됨에 따라 5K 엔진의 생산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1995년 8월 17일, 키 자앙 (키장)에서 처음으로 SGX 및 LGX 모델의 선택 사양으로 4 단 자동 변속기가 도입되었다. 이 1995-1996 버전은 기념일이었고 비교적 비쌌다. Rp 1 억 당시. 커리스 (인도) 키장은 토요타 커리스라는 이름으로 인도에서 판매되었다. 커리스는 3 세대 글로벌 모델을 기반으로했지만 전면 및 후면 스타일링 및 외관 변화 및 일부 4 세대 드라이브 트레인 구성 요소 공유로 업데이트되었다. 비평가들은 차량이 어색한 디자인 (비 공기 역학)으로 뒤늦게 팔려 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커리스는 타타의 스모와 마힌드라의 볼레로와 같은 다른 차량보다 택시, 함대 운전자 및 대형 인도 가정에서 차량을 환영 받음에 따라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커리스는 2.4 리터 디젤 엔진 또는 2.0 리터 가솔린 엔진에 의해 구동된다. 최고급 모델에는 합금 바퀴, 디스크 브레이크 및 비상업적 인 구매자에게 애정을 싣기 위해 고안된 기타 편안 항목이 제공된다. 벤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벤처라는 픽업 변형이있는 버전이 제작되어 판매되었다. 종마의 광고 캠페인에는 현지 아프리칸스 코미디언 톨라 판 데르 머웨 가 출연했으며, 그의 인기로 인해 일반적으로 "톨라 픽업"라고 불린다. 타마러우 FX 필리핀에서는 기장의 버전이 1990년 초에 선보였 때 타마러우 FX로 판매되었다. 타마러우 FX는 1.8 리터 7K-C 가솔린 엔진 또는 2.0 리터 2C 디젤 엔진과 함께 제공되며 모두 5 단 수동 변속기와 연결된다. 힘은 이었다 및 로 최고 속도는 130 또는 125 킬로미터 매 시 (81 또는 78 시간 당 마일). 표준, 디럭스 및 GL은 제공되는 장비 수준이다. FX는 승용 마차로 사용하기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직도 오래되었던 타마러우의 울퉁불퉁 함을 유지했고, 거친 길과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에 이상적이다. 그것은 도요타 자동차 필리핀에 의해 조립되었다. 또한이 시간, 니산 비다와 함께, 지방의 차 조립 자 Carter Motors는 자기 자신의 버전 ( 대중이 Tagalog ( 대중의 범위에 있는 차가 있음을 의미하면서, 대중을 위해 Tagalog)을 생각해 내었다)을 생각해 내었다. 4세대 (F60 / F70 / F80; 1997년 - 2007년) 1997년 1월 키장은 완전히 둥글고 공기 역학적 인 모양을 갖도록 재 설계를 받았으며 전임자보다 더 강력하고 세련되었다. "Kijang Kapsul" ( Capsule Kijang )으로 잘 알려진 미니 버스는 70 시리즈 (짧은 휠베이스) 또는 80 시리즈 (긴 휠베이스) 중 하나였다. 픽업 모델은 60 시리즈였다. 키장을 장착 한 7K 또는 7K-E (1.8L)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선호되는 모델이었다.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분했지만 1RZ -E (2L) 장치에 비해서 매우 약함. 그것은 동일한 플랫폼 6 세대 히러. 4 세대 키장 차량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트림 시리즈로 출시되었다. 긴 시리즈 (F80 / F81 / F82) LSX : 표준 플러스 (표준 에어컨,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및 타코미터 장착) LGX : 디럭스 (더블 블로어 에어컨, 카세트 테이프 / CD 플레이어, 파워 윈도우 및 장식물 장착. 또한 처음으로 4 단 자동 변속기가 변형이 아닌 표준 옵션 장비로 제공되었다. Krista (긴 시리즈 용) : 럭셔리 에디션 (LGX와 동일하지만 청색, 적색, 검은색, 은색 또는 녹색 색상으로 제공되며 스포츠 키트와 세련된 인테리어가 포함되어 있음) Krista 에디션에는 특수 도어 트림 및 센터 콘솔도 포함된다. 1997년-2000년 Krista에는 자동 변속 장치 선택권이 없었다) 한정판 Krista (긴 시리즈 전용) : LGX 바퀴가 달린 Krista Kijang, Rangga의 자동 변속기와 후방 테일 게이트, 스페어 타이어와 휠 장착으로 완성. 쇼트 시리즈 (F70 / F71 / F72) SX : 표준 (에어컨,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파워 윈도우, 타코미터 또는 기타 사치품 없음) SSX : 표준 플러스 (표준 AC 및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장착) SGX : 디럭스 (더블 블로어 AC, 카세트 테이프 / CD 플레이어, 파워 윈도우 및 고니 어 장착) Rangga (쇼트 시리즈 만, 1997년-2000년) : 스포츠 에디션 (SGX와 동일하지만 새로운 프런트 근막, SUV와 같은 바디 키트, 높은지면 간극, 부츠에 부착 된 스페어 타이어, 스웨이드 시트 커버 및 도어 트림이있는 세련된 인테리어) 픽업 변형은 표준 갑판과 플랫 데크 (그리고 키장 픽업이 2007년에 중단되었을 때 히러 싱글 캐빈으로 대체 됨)으로 제공되었다. 미니 버스의 트림 레벨에는 SX, SSX, SGX (짧은), LX, LSX, LGX 및 Krista(긴)가 포함된다. 짧은 휠베이스와 스포티 한 랑가도 단기간에 제공되었지만이 모델은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으며 판매된 단위는 극소수이다. 현지 회사가 만든 "RoverAce"및 "Jantan Raider"라는 버전도 판매되었다. 2000년 2월, 기장은 새로운 프론트 엔드를 얻었다. 2.0 리터 엔진은 2000년 9월 이후 LGX 및 Krista 모델에서 제공되었다. 또 다른 사소한 변화는 2002년 8월에 새로운 그릴과 후방 장식, 그리고 그 기능에 대한 작은 변화로 주어졌다. 인도네시아의 4 대 기장은 3 번 바뀌었다. 초판 (1997년 1월 -2002년 2월) : 신체의 강철은 제 2 판보다 두꺼웠다. 창문에는 여전히 고무 도장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1.8 리터 탄화 가솔린과 2.4 디젤 엔진을 사용했다. 제 2 판 (2000년 2월 - 2002년 8월) : 얇은 몸체 - 강철이 생산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따라서 새 모델은 첫 번째 모델과 동일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그것은 앞 유리가 여전히 고무 도장을 사용하는 동안, 뒤쪽 창문에 복합 실란트를 사용했다. 전면 패널의 디자인은 약간 변경되었다 (주로 운전자 측에서). 이 모델의 경우 고객은 사용하고자하는 엔진을 선택할 수 있다. 2.0 리터 EFI 가솔린 엔진, 2.4 리터 디젤 엔진 또는 신형 1.8 리터 EFI 엔진. LSX와 SSX 손질은 옵션으로 Enkei 14 "경주 합금 바퀴를 얻었다. 제 3 판 (2002년 8월 - 2004년 9월) : LSX 및 LGX 시리즈 및 SSX 및 SGX는 이제 스웨이드 도트 트림 (구형 모델 천 피복 트림)을 갖추고 있다. 내부는 완전한 베이지 색으로 바뀌었다 (더 오래되었던 모델의 색은 대부분 회색이다). 말레이시아 4 세대 키장은 1998년 중반 ~ 2005년 5월에 이노바 로 대체되어 말레이시아에서 안서로 판매되었다. 2000년 7월부터는 1.8 7K-E 엔진으로 자동 변종을 사용할 수 있었다. 2001년 4월에 개질 수술이 도입되었다. 변경 사항에는 새로운 멀티 리플렉터 헤드 램프, 전면 범퍼에 통합 스포트라이트, 테일 라이트 용 컬러 전구가있는 맑은 렌즈 및 새로운 스티어링 휠 디자인이 포함되었다. 2003년에는 안서가 1.8 7K-E 엔진에서만 다시 업데이트되었지만 GLi와 LGX. 앞 후방 필리핀 (레보) 1998년 - 2000년 (F80) 4 세대 키장은 타마러우 FX 레보 명찰 아래 필리핀에서 판매되었다. 이 모델은 타마러우 FX를 대체하기 위해 1998년에 출시되었다 (잠시 동안 함께 판매되었지만). 플랫폼과 디젤 엔진은 비슷한 시대 히러를 기반으로 했다. 엔진 선택은 휘발유 엔진과 2.4 리터 OHC 디젤 엔진을 위한 1.8 리터 OHV EFI를 포함한다. 트림 라인은 DLX (GL), GL, GL (SR), 하이 엔드 LXV, VX200 및 SR-J 및 VX200-J (토요타의 J 시리즈 또는 Japan-spec, 히러와 RAV4까지 확장 된 차량). LXV 손질은 GSX가 완전히 새로운 이체 인 그러나 VX200에 찬성하여 2000년 모형에서, 중단되었다. 안면 홍학 버전은 2002년에 도입되었다. 2 개의 J-spec 트림 라인 (SR-J와 VX200-J)은 라인에서 은퇴했고 하이 엔드 트림 버전은 업그레이드 된 가죽 시트,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및 약속을 받았다. DLX는 비닐 인테리어, 2 개의 스포크 스티어링 휠, 2 개의 스피커 라디오 / 테이프 셋업 및 중앙 장식품이 달린 스틸 휠을 갖추고 있다. GL 그레이드는 허브 캡이 달린 스틸 휠, 4 개의 스피커 라디오 / 테이프 셋업 및 패브릭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GLX, SR 및 LXV에는 6 개의 스피커 라디오 / 테이프 셋업, 안개등, 합금 바퀴, 후방 와이퍼 및 모든 전력 설비가 있다. 본문 그래픽은 SR 및 LXV에만 적용된다. LXV에는 금 장식 용지가 붙어 있다. SR에는 수프라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글꼴 세트로 작성된 "Sport Runner"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매우 잘 팔렸고, 1998년에는 7,700 대가 판매되었다. 안전 벨트는 안전 벨트, 하중 감지 비례 밸브, 어린이 보호 도어 잠금 장치 및 도어 충격 받침과 같은 기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처음 출시 된 디젤 엔진 인 레보는 그 당시 다른 디젤 엔진 중 연기 도난 기인 것으로 유명했으며 소유주로부터 불만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쓰다, 포드 및 이스즈는 경쟁 모델, 특히 Isuzu Hi-Lander와 인기있는 변형 인 Crosswind를 출시했다. 2000년 - 2002년 (F80 / F81) 2000년, 토요타는 레보를 개정하여 배지를 변경하고 라인을 개조했다. 엔진 선택은 1.8 리터의 OHV EFI와 새로운 2.0 리터의 SOHC EFI 가솔린 엔진과 2.4 리터의 OHC 직접 분사 디젤 엔진을 포함한다. 2 리터 디젤 엔진은 연기가 나는 불평을 해결하기 위해 개정되었다. 레보는 명확한 할로겐 헤드 램프, 새로운 바퀴, 새로운 실내와 새로운 색의 유용성을 특징으로하고있는 안면 성형을 받았다. 트림 라인에는 DLX (초보자 용), GL, GSX, GLX, SR (스포츠 러너), VX200 및 SR-J 및 VX200-J (토요타의 일본 또는 일본 사양의 차량, 히러와 RAV4로 확장되었다. VX 라인은 결국 LXV를 대체했다. GSX는 완전히 새로운 변형이다. 엔트리 레벨 인 DLX에는 파워 스티어링 만 있고 다른 파워 기능은 없다. 이 변종은 타코미터 가없고 테이프 데크 / 라디오 리시버, 앞줄에만 2 개의 스피커, 비닐 인테리어가 장착되어 있으며 센터 장식이있는 14 인치 스틸 휠이 있다. GL은 라디오 CD 셋업, 패브릭 인테리어, 타코미터 및 허브 캡이 달린 스틸 휠을 갖춘 "하이 엔드 엔트리 레벨"이다. 나머지 라인은 전 파워 기능, CD 플레이어 / 라디오 리시버 및 6 스피커 셋업 (DVD 플레이어 셋업으로 업그레이드 가능) 및 리어 윈도우 지연기를 갖추고 있다. VX와 SR-J 선은 가죽의 좌석과 TV 스크린을 진흙 받이와 머리 받침에 붙였다. 유일한 SR (특별의 바퀴, 유일한 제복), GSX와 VX200와 VX200J의 특별한 판인 SR-J는 2.0 리터의 가솔린 엔진과 힘 펜더에 설치된 라디오 안테나를 가지고 있었다. 정면으로 향하는 제 3의 줄 좌석은 3 점의 안전 벨트없이 옵션으로 만들어졌다, 필리핀의 그 시간에 차량 타입을 위한 희귀 품. 2002년 - 2005년 (F82) VX240D (2L 디젤)는 2004년 중반에 새로운 라인업에 도입되었다. 레보는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상쾌하게 되었다. 도요타 차량의 J 시리즈는 단종되어 2 개의 J- 스펙 트림 라인 (SR-J 및 VX200-J)이 중단되었다. 그것은 크롬 토요타 로고와 함께 3 개의 스포크 스티어링 휠, 더 큰 헤드 라이트, 땅 크루저 스타일 미등 (4 세대 키장에 존재하는), 개량되었던 음성을 포함하여 새로운 색과 외부와 실내 세부의 배지 교정, 유용성을 받았다 시스템 및 기타 추가 기능을 제공한다. 탑 트림 (VX200 및 VX240D)은 업그레이드 된 가죽 시트, 업그레이드 된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크롬 약속, 사이드 스텝 (SR 변형과 함께) 및 업그레이드 된 듀얼 DVD 모니터를 받았다. SR을 위해, 새로운 유인물뿐만 아니라 "SPORT RUNNER"라는 단어가 일반 텍스트로 실행되어 수프라에 사용된 글꼴의 사용이 중단되었다. GLX와 GSX 등급은 GSX를위한 새로운 바퀴와 다른 용기를 받았다 판매 실적이 좋았지 만 토요타의 IMV 프로젝트로 인해 2005년에 중단 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 레보는 대여 함대, 경찰 부서 또는 2005년 2월까지 마지막 몇 가지 예제를 작성하려는 사람들에게 판매되었다. 제이스 서프 (F60 / F84 / F85) / 콘도르 (F80 / F81 / F85) / 종마 (F60 / F61) 제이스 서프, 콘도르 및 종마은 긴 휠베이스 기장 미니 버스를 기반으로 한 높은 지붕 스테이션 왜건이다. 오른손 운전을 위해 아프리카 시장 콘도르는 2.0L, 2.4L 휘발유 엔진 및 3.0L 디젤 엔진을 선택했다. 콘도르에게 독특한 것은 2 열 개별 좌석, 내부 도어 핸들에 통합 된 도어 잠금 장치, 도어 핸들 바깥 쪽의 코롤라 스타일 및 후면 냉각기 옵션이없는 7 개의 시트 구성이다. 나중에 8 개의 좌석 구성이 가능 해졌고 3 번째 벤치 의자 좌석은 50/50 측면 접이식 장치로 교환되었다. 풀 타임 4WD, 안티 록 브레이크 및 운전자 측 에어백은 TX 트림에서 사용할 수 있다. 콘도르는 가나에서도 판매되며, 좌석 구성이 10L 인 1.8L 및 3.0D 엔진이 장착되어 있다. 종마 패널 반은 키장 / 제이스 픽업과 함께 F60 지정을 공유하는 1.8 리터 2Y 엔진으로 처음 도입되었으며 2003년 남 아프리카 시장 콘도르 및 종마 모델의 기본 엔진으로 2.0L 장치로 대체되었다. 3.0D 엔진은 모두 콘도르의 가장 바깥 쪽 좌석에 있는 표준 3-pt 안전 벨트 대신에 무릎 벨트가있는 2 열 좌석이있는 5 개의 좌석 구성에서 F61의 섀시 코드를 지정했다. 대만 시장을 겨냥한 왼손잡이 제이스 서프는 1.8 석 또는 2.4 석의 가솔린 엔진을 선택할 수 있는 5 인승 및 8 인승 구성이 가능했다. 안티 록 브레이크는 GL 제한 및 DX 트림의 1.8 L 가솔린 변형 제품과 함께 옵션으로 제공되었지만 2.4 L 변형을 갖춘 4 륜구동 차량의 에어백과 함께 표준으로 포함되었다. 2.4 리터 변형을 위한 8 시트 구성은 후에 중단되었으며 3 열 시트는 50/50 분할 사이드 접이식 유닛으로 교체되었으며 최 외측 3 열 시트에는 3 피트 시트 벨트가 추가되었다. 제이스 서프의 유일한 특징은 더 높은 엔드 트림에서 인쇄 된 창 안테나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대만 시장 차량 모두 2.4L 2RZ는 자동 변속기의 옵션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2WD 제이스 서프의 표준 사양이다. 제이스의 단일 캡 변형에는 평평한 또는 표준 갑판 구성의 1.8 7K 엔진이 제공되었다. 바꿔 놓음 각각의 시장에서의 다양한 역할로 인해 키장은 아반자 및 토요타 IMV 플랫폼 차량에 의해 승계되었다. 토요타는 2003년 동남아시아 전역의 키장 스테이션 왜건을 작은 아반자로 대체했으며, 2004년에는 더 큰 이노바를 대체했다 후자는 원래 모델과의 연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키장 이노바"로서 인도네시아의 Toyota-Astra Motor에 의해 판매되었다. 토요타는 이노바를 5세대와 6세대 키장으로 분류한다. 키장 픽업은 유로 2 배출 가스 규제를 준수하기 위해 히러 픽업 트럭으로 교체 될 때 2007년 초에 판매되었다 . 인도 시장 커리스는 이노바로 대체되어 4 세대 모델을 완전히 뛰어 넘었다. 안서는 아반자 함께 판매된 말레이시아 시장은 2004년 말에 도입 2005년 중간까지 그것이 이노바 찬성 중단되었을 때 도입된다. 이노바는 필리핀 시장에서 레보의 후속으로 2005년에 판매되었다 마케팅 자료는 "아름다운 혁명" (A Beautiful [R]evolution)로 이노바 참조와 레보 명판을 참조. 이전에 엔트리 레벨 DLX 및 GL 레보 트림이가 제공 한 이노바 택시 및 상업용 비즈니스의 가족 중심 특성을 감안할 때 현재 고급 SUV 및 VX 트림이 포추너 SUV에 의해 처리되는 동안 아반자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만의 제이스 서프는 4륜구동 변속기 및 픽업 트럭을 대체 할 2.7 리터 2TR-FE 가솔린 엔진을 장착 한 이노바 대체되었다. 그 다음 코드 명 IMV4 인 포추너는 제이스 서프의 당시 라인업을 토요타의 전략적 고려로 반영하기 위해 현지 유통 업체 인 핫 타이 자동차에서 수입 할 예정이었으며 이노바는 배출 규제를 충족하기 위해 2TR-FE 대신 2007년에 출시되었다 더 작은 1TR-FE는 나중에 더 큰 엔진을 대체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2016년에 이노바는 대만 시장에서 생산이 중단되었으며 2세대 이노바는 수입 예정이 없었다. 아프리카 / 가나 시장 콘도르는 2006년 포추너로 대체되었다 2007년 아반자와 이노 늦은 2011년에 도입 아프리카 시장 종마에서 제공하는 패널 밴 의무 패널의 밴 버전에 통과하는 동안 아반자는 2013년 말에 도입되었다. 2 세대 이노바는 MPV 시장의 위축과 판매 부진으로 남아공 시장에 도입될 예정이 아니다.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인도네시아어) Toyota Kijang의 역사 2000년대 자동차 1990년대 자동차 1980년대 자동차 미니밴 픽업 4륜구동 후륜구동 1977년 도입된 자동차 토요타 자동차의 차종 4기통 종치엔진 자동차
https://en.wikipedia.org/wiki/Toyota%20Kijang
Toyota Kijang
The Toyota Kijang is a series of pickup trucks, station wagons and light commercial vehicles produced and marketed mainly in Southeast Asia, Taiwan, India and South Africa by Toyota between 1976 and 2007 under various other names. The vehicle first entered production in the Philippines as the Toyota Tamaraw in December 1976. It was then introduced in Indonesia in June 1977 as the Kijang, after its unnamed prototype model was showcased in Jakarta in mid-1975. The first two generations were produced from factory as pickup trucks, conversions to other body styles were conducted by local third-party companies. Availability of the model was expanded to more markets since the third-generation model, such as Africa and Taiwan. The Kijang was relatively affordable in the markets where it was sold when compared to the four-wheel drive vehicles (it is predominantly rear-wheel drive) and had high seating capacity, high ground clearance and rugged suspension, popular features in an area with generally poor road conditions and large extended families. It was also designed with ease of manufacture in mind; in 1986, the assembly of the Kijang only cost 42 percent of the cost of assembling the smaller EE80 Corolla. It was manufactured as a CKD (complete knock-down) unit in almost every country it was sold in and many of the parts come from each of the markets in which it was sold. The name Kijang means muntjac or deer in Indonesian. Due to the varying names used in different countries, the vehicle is internally known as the "TUV", short for "Toyota Utility Vehicle". Fourth-generation models in the Philippines were sold under the Toyota Revo nameplate. The Kijang was also sold in other countries, and is known as the Toyota Qualis in India and Nepal (third generation), Toyota Zace in Vietnam and Taiwan (third and fourth generation), Toyota Unser in Malaysia (fourth generation) and Toyota Stallion in Africa for the basic models (third and fourth generation), with higher specifications labelled Toyota Venture (third generation) and Toyota Condor in South Africa (fourth generation). First generation (F10; 1976) The Kijang prototype was first displayed at the 1975 Jakarta Fair and then entered production in 1977. Its development was led by Osamu Ohta with Ohyama as the chief engineer in 1972. The first-generation Kijang is a compact, light pickup truck powered by a carburetted 1.2-litre 3K four-cylinder OHV petrol engine matched to a 4-speed manual transmission. A pickup variant with rear body and roof was also produced. The Kijang Minibus (van/wagon version) was built by local companies. The Kijang first entered the Indonesian market on 9 June 1977, although it had been on sale in the Philippines since 2 December 1976. It has a boxy design with externally hinged half doors and plastic/canvas windows. Designated KF10, it shared the 3K engine with the 1972 Corolla, coupled to a 4-speed manual transmission. It was colloquially nicknamed 'Kijang Buaya' (meaning "Crocodile Kijang") as the engine bonnet resembled a crocodile's mouth once opened. The KF10 Kijang sold 26,806 units in its 4 years of production when it would be replaced by the second-generation model. Tamaraw (Philippines) In the Philippines, the Kijang was sold as the Tamaraw (named for one of the country's national animals, the Tamaraw), produced in the 1970s up to early 1980s. Introduced in December 1976, it started as a small ton high-side pick-up (HSPU) with a 1.2-litre 3K engine producing , and was produced by the now-defunct Delta Motors, which assembled Toyota vehicles in the Philippines. It was considered as a "BUV", or "Basic Utility Vehicle". It had a 4-speed manual transmission, and some models had no driver- or front passenger-side doors. Because of its ruggedness and ease of maintenance, even its upgradability (some swap the 3K engine with a more powerful engine, usually a diesel engine or any in Toyota's K series of engines), some of these vehicles survive today, and its designs are sometimes copied or modified by local assemblers to this day. It was proven success that General Motors (through Francisco Motors), Ford and Chrysler (with Mitsubishi) created their own versions of the BUV, including the two versions of the Pinoy and the Ford Fiera and Chrysler-Mitsubishi Cimarron. The KF10 Tamaraw was also imported and distributed in Papua New Guinea in 1980 by Ela Motors, a division of the Burns Philip Group. The vehicle was renamed to Toyota Traka and was described as "using the same engine as the popular Toyota Corolla, the Traka is a basic utility vehicle capable of carrying a payload of and developing more than 60 hp". Second generation (F20/F30; 1981) The second-generation Kijang (designated KF20), launched in June 1981, retained its boxy style although the body panels were different. It is colloquially called the 'Kijang Doyok' in Indonesia. Under its slimmer bonnet was a 1.3-litre 4K engine, which was replaced in December 1985 by a 1.5-litre 5K engine. The only transmission option was a 4-speed manual. With the 5K engine, the power increased from to , both at 5,600 rpm. The 1986 model can be seen from the outside by rectangular headlamps and a redesigned grille. The Kijang started selling very strongly in 1983 and 1984, catching up to erstwhile market leaders such as the Suzuki Super Carry and the Daihatsu Hijet. The more powerful Kijang offered more carrying capacity, while the engine placement made it safer than its cheaper, kei truck-based competitors. In February 1985, the 100,000th Kijang left the production line. In the Philippines, the Tamaraw was also sold as the long-wheelbase F30 series, which was also promoted as an alternative to the jeepney. A local Philippine auto brand, Dragon, later took the designs of the long-wheelbase Tamaraw and marketed it. Pilipinas Nissan bought the designs from Ford (after their exit in 1984) for what would have been the Fiera IV and marketed it as the "Bida" ("protagonist" in Tagalog), which resembles the long-wheelbase Tamaraw. Third generation (F40/F50; 1986) Introduced in November 1986, the third-generation Kijang was offered in short-wheelbase (F40 series) and long-wheelbase (F50 series) versions. The Kijang was redesigned to be larger and heavier, and no longer prioritised as a pickup truck-based model. The Standard trim level had a 4-speed manual transmission, while the Super variant had a 5-speed manual transmission and a better-equipped interior. Introduced in this generation was "Full Pressed Body" wagon built by companies appointed by Toyota. This technique were applied to reduce usage of putties up to for each car. The Kijang received its first facelift in August 1992. The steering mechanism was changed from recirculating ball to rack and pinion. The wagon model received a right-side rear door and adopted a new name, "Toyota Original Body", instead of "Full Pressed Body". In its creation process, it was fully pressed and used pointed welding. Up to this time, this model can be said as the one and only putty-free Kijang. The trim levels for the wagon model were: Standard (SX and LX; KF42 and KF52): a base model with 4-speed manual transmission, 13-inch steel wheels, standard dashboard, and no power features. Deluxe (SSX and LSX; KF42 and KF52): an upgraded version of the base Kijang with a refined dashboard, better quality interior materials, 13-inch steel wheels with covers, single air conditioning, basic audio system with a radio receiver. Super G or G-series Kijang (SSX-G and LSX-G; KF42 and KF52): similar to the Deluxe trim, adds power steering and seat belts as standard equipment. Grand Extra (SGX and LGX; KF42 and KF52): the top-of-the-range model with double blower air conditioning, Enkei 14-inch alloy wheels, overfenders, suede-covered door trim and seats, power steering, front power windows, digital clock, tachometer, 4 speaker audio system with a tape deck and radio receiver (CD player available as optional), alarm and central door locks. Rover: Coach-built model with a restyled body resembling the 70-series Land Cruiser available either as a 4-door (Rover) or 5-door (Grand Rover) wagon in either short or long wheelbase. Front Reclining seats and folding middle seats are standard on all trims while super variants include headrests, Console Box, and footsteps as standard equipment. Air conditioning and a radio/cassette are available as options. Power steering was later added with the 1992 refresh with the 4-door Rover model subsequently being discontinued and the model name was later changed to "RoverAce" after receiving objections from the British automobile manufacturer Rover. Jantan: Higher-end trim variant to the Kijang Rover that was first introduced in executive trim which added wood trim, power windows to all four seats, front and rear air conditioning, 4 speaker audio system, central locking, and alloy wheels. An entry-level G variant and a 4x2 (short only) sporty variant was introduced alongside the original executive variant. The 4x2 adds a larger rear door that covers the full width of the vehicle and a door-mounted spare wheel, however it does not have rear air conditioning. Kencana (KF42 and KF52): a coach-built model based on Kijang Rover/Jantan with higher roof and higher ground clearance. This model retains the side-opening rear door of low roof models instead of the liftgate received by international high roof models. Perkasa : 2-door, coach-built model with a removable fiberglass canopy In April 1995, the Kijang received a second facelift, including a redesigned grille with vertical bars, usage of Enkei 14-inch alloy wheels on the G-series Kijang and the Supra A70/A80-styled five spoke, 14-inch alloy wheels on the Grand Extra Kijang, redesigned steering wheel, addition of tachometers, central door lock and power windows for Deluxe trim, and larger 1.8-litre 7K engine. With the introduction of the 7K engine, the production of the 5K engine was completely stopped. On 17 August 1995, 4-speed automatic transmission was introduced as an optional modification for the SGX and LGX models for the first time in the Kijang. This 1995–1996 version was a special model to commemorate the 50th anniversary of Indonesian independence. Tamaraw FX (Philippines) In the Philippines, versions of the Kijang were sold as the Tamaraw FX when it was introduced in 1991 as a high side pickup and in 1993 as a wagon. The Tamaraw FX was available either with a 1.8-litre 7K petrol engine or a 2.0-litre 2C diesel engine, all coupled with a 5-speed manual transmission. Power was and respectively, allowing for top speeds of . The Tamaraw FX was offered in 5 door long wheelbase wagon in either Standard, Deluxe and GL trim levels. The GL trim included power steering, cloth interior, cloth seats, a digital clock, door pocket, a 4 speaker cassette radio, body cladding and 14 inch alloy wheels. Deluxe and standard models had steel wheels, 2 speaker cassette decks, and vinyl interiors, however deluxe models received full width side steps and bucket front seats. Dual AC was standard on all wagon models. The pickup variant was available in 11-seater high side pickup form and later in chassis cab configuration. In 2000, Deluxe, GL, and diesel wagon variants were discontinued leaving only the 1.8 standard wagon and pickup variants to be sold alongside the Revo until 2002 when the Tamaraw was finally discontinued. The Tamaraw FX was meant for use as a passenger wagon. It still retained the ruggedness of the old Tamaraw and is ideal for rough roads and carrying heavy loads. It was assembled by Toyota Motor Philippines in its Parañaque plant that was formerly operated by Delta Motors with the pickup version rolled-out off the assembly line in October 1991 and the wagon version in December 1993. Also around that time, after Ford left the Philippines in 1984, Pilipinas Nissan bought the rights to produce the Fiera IV under the name Nissan Bida; and local car assembler Carter Motors came up with their own version, the Masa (Tagalog for "masses", implying that the car is within reach of the masses). Zace (Vietnam and Taiwan) The Kijang was sold in Vietnam and Taiwan under the Zace name. Introduced in Taiwan in 1988 the station wagon model was offered in either low roof long-wheelbase wagon with regular side-opening rear door and a high roof version lift gate variant while a pickup variant was also offered with a choice of either a 1.5L (5K) or 1.8 (7K)engine. The Taiwanese market Zace wagons was offered in either 5/8 seater configurations. The Vietnamese market Zace only had an 8-seater configuration. Venture/Stallion (South Africa) The Kijang was built and sold in South Africa in three body styles as the High roof station wagon Venture, or as a commercial vehicle under the Stallion nameplate available either as a panel van or pickup truck. The advertising campaign for the Stallion had local Afrikaans comedian Tolla Van Der Merwe, and because of his popularity it is commonly called the "Tolla bakkie". The Venture was available with three engine choices: a 1.8(2Y) petrol, 2.2(4Y) petrol, and a 2.4(2L) diesel. Standard equipment includes Gear lock, Rear wiper and Washer, Power steering (unavailable on 1.8 Engined Ventures), Air conditioning (available for 2.2 Engined models only), and a ten-seat configuration.2.2 Engine models also include an immobiliser alarm as standard(optional on 1.8 and 2.4D models) while the range-topping 2.2 GLE adds a 9-seater configuration, central locking, and makes a cassette radio standard equipment (optional on other variants). A Rear Differential Lock is an available option for 2.4D and 2.2GLE models. The Stallion was available in either Panel van or as a Single Cab Truck with a 1.8(2Y) petrol engine mated to a 4-Speed Manual while the 2.4(2L) diesel was available for the pickup body style with a 5-speed Manual Transmission as an option. An immobiliser alarm was offered as an option as well as a bush bar, tow bar, and extra driving lights.The Pickup Variants van also be optioned to be delivered as a chassis cab while the 1.8 pickup is also offered with optional 14" alloy wheels. Qualis (India) The third-generation Kijang was launched in India in January 2000 as Toyota's first entry into India's automobile market following a joint venture with the Kirloskar Group in 1997. The Kijang was sold in India under the Qualis name. The Qualis was based on the third-generation global model, but updated with front and rear styling, an updated interior making use of the switch gear, instrument cluster and rear air conditioning blower unit from the fourth-generation Kijang. Critics said the vehicle was outdated that came with an outdated design and did not expect it to sell well. However, Qualis was a hit as the vehicle was welcomed by taxi, fleet operators and large Indian families over others like Tata's Sumo and Mahindra's Bolero. The Qualis was initially sold only with a 2.4-litre 2L-II SOHC diesel upon its introduction in 2000 in FS/GS/GST trims while the fuel-injected 2.0-litre 1RZ-E SOHC petrol engine was later made available in the range topping GST Super. The FS model (10-seater) is the base trim with a vinyl interior, power steering and front air conditioning (later included in refreshed models as standard) as options. The middle grade GS trim (10 seater/8 seater) gets better cloth interior with better sound deadening, power steering, front air conditioning (rear AC available as an option), and body cladding as standard with power windows and central locking offered as options. The top-end 8 seater GST and the petrol GST Super included front fog lamps, rear wiper and washer, wood trim, rear spoiler, alloy wheels, and all GS options as standard. The model range would get revamped in 2002 that brought roll down windows to the second-row doors with power windows for all four doors and central locking being standard to the now 8 seater only GS variant with rear AC and rear wiper and washer offered as options while the range topping GST/GST Super was replaced by a new 7-seater RS variant with captain seats. Fourth generation (F60/F70/F80; 1997) Indonesia On 15 January 1997, the fourth-generation Kijang was launched in Indonesia with a more rounded, aerodynamic shape. It was originally planned to be introduced in 2000, but since Mitsubishi planned to introduce the Kuda in 1998, the Kijang was instead launched three years in advance. It was more powerful and more refined than its predecessors. The wagon model, often colloquially known as "Kijang Kapsul" (Indonesian for "Capsule Kijang"), was designated either the F70 series (short wheelbase) or the F80 series (long wheelbase), and features a rear liftgate rather than a side-opening rear door, with some coachbuild versions still retain the latter. The pickup model was designated as the F60 series. For the first time, the 2L diesel-powered Kijang was offered. Either the carburetted 7K or the fuel-injected 7K-E-powered Kijang was the most popular model due to its low maintenance cost, despite being underpowered compared to the 2.0-litre 1RZ-E unit. It was built on the same platform as the sixth-generation Hilux. The Kijang received facelifts on 28 November 1999 and 23 August 2002, respectively. The fourth-generation wagon model Kijangs were generally released in four different trim levels, depending on wheelbase options: SX (F70/71/72) and LX (F80/81/82): Standard model without air conditioning, cassette tape player, power windows, tachometer, sun visor and other amenities. The 1997-2000 model have a fixed front passenger seat and a 4-speed manual transmission as opposed to 5-speed in other trim levels. The facelifted SX and LX retains the carbureted engine. Equivalent to the "Standard" trim of previous generation. SSX (F70/71/72) and LSX (F80/81/82): Deluxe model, equipped with air conditioning, power windows as an optional, cassette tape player and tachometer. Both also have distinctive 14-inch alloy wheels from Enkei as an optional since 1998 (6-spoke on SSX and 5-spoke on LSX). Equivalent to the "Deluxe" and "Super G" trim of previous generation. SGX (F70/71/72) and LGX (F80/81/82): Grand model, equipped with double-blower air conditioning, cassette tape/CD player, power windows, 14-inch alloy wheels with distinctive design on both variants (3-spoke on SGX and 6-spoke on LGX), rear window wiper, exterior garnish and diesel engine option (LGX model only). A 4-speed automatic transmission option is also offered in the LGX model, being the first Kijang to have an automatic transmission. Equivalent to the "Grand Extra" trim of previous generation. Rangga (F70): Sports edition for the short wheelbase model, similar to SGX trim but equipped with SUV-inspired body kit, higher ground clearance, rear-mounted spare tyre and refined interior with suede seat cover and door trim. This trim is only offered in the 1997–2000 model. Equivalent to the "Rover" trim of previous generation. Krista (F80/81/82): Sports edition for the long wheelbase model, similar to LGX trim but only available in blue, red, black, silver or green colour option, equipped with body kit and refined interior; the trim also included specially-made door trim and center console. Unlike the LGX, the 1997–2000 Krista trim had no automatic transmission option. Equivalent to the "Kencana" and "Jantan" trim of previous generation. The pickup model was offered in Standard Deck and Flat Deck variants. Some versions called Grand Rover Ace and Jantan Raider, which were made by local coachbuilders, was also sold only in a few units. The Grand Rover Ace is based on the LSX trim and has an SUV-like body, resembling the J80 series Land Cruiser in a similar fashion to the facelifted EP81 Starlet which resembles the Japanese market Starlet GT Turbo. The short wheelbase wagon has a 7-seat capacity using jumpseats in the rear while the 8-seater long wheelbase wagon uses a bench-type front facing third row seats albeit without seatbelts. The fourth-generation Kijang has undergone several changes: Pre-facelift (January 1997 – January 2000): The bumpers and side skirts are still made of steel. The window was still equipped with a rubber seal. It used either a 1.8-litre 7K petrol engine or a 2.4-litre 2L diesel engine option. The lowest trim, SX and LX, is offered with a 4-speed manual transmission as opposed to 5-speed seen in higher trims. Automatic transmission option was only available in the LGX trim. The Krista trim is the only one to offer an electric mirror. All trims have two-spoke steering wheel. First facelift (February 2000 – August 2002): Thinner body-steel was used to decrease production cost; therefore, this model was sold as the same price as the pre-facelift model. The front and rear fascias got some redesigns. It used compound sealant for the rear window, while the front windscreen was still using rubber seals. The design of the front panel was slightly changed (mostly on the driver's side). For this model (and upwards) customers could choose which engine option they wanted to use – a 1.8-litre 7K-E petrol engine, a 2.0-litre 1RZ-E petrol engine or a 2.4-litre 2L diesel engine. The 2.0-litre engine option was offered in the LGX and Krista trims from 6 September 2000 (introduced at the 10th Gaikindo Auto Expo). SGX/LGX and Krista trims received three-spoke steering wheel while SX/LX and SSX/LSX trims retained two-spoke steering wheel from the pre-facelift model. The SSX/LSX trim received Enkei 14-inch alloy as an option and electric mirrors came standard on SGX/LGX and Krista trims. The SX/LX trim received a 5-speed manual transmission, and automatic transmission is made available on the Krista trim. Second facelift (August 2002 – August 2004): The grille received a redesign with vertical slats and the rear fascia is equipped with rear garnish in some variants. The SGX/LGX and Krista trims are equipped with suede door trim (the older model ones used cloth trim) and the rear power window buttons are integrated to the door armrests. The interior changed into full beige colour (as opposed to grey in previous versions) and the three-spoke steering wheel for the SGX/LGX and Krista trims were redesigned to resemble the one seen in Toyota Vios. Engine choices remained the same, except that the Krista trim is no longer offered with the 1.8L 7K-E engine. This facelift also received newly redesigned alloy wheels for SSX/LSX, SGX/LGX, and Krista trims. The production of fourth-generation Kijang wagon ended on 19 June 2004 with a total production of 452,017 units. The pickup truck variant continued to sold until February 2007. Pre-facelift First facelift Second facelift Unser (F80/F82 - Malaysia) The fourth-generation Kijang was sold in Malaysia as the Unser between mid-1998 to May 2005. The Unser name was derived from the German word unser. It is only offered in an 8 seater configuration with seatbelts for all three rows available as standard. Initially offered with either a 2.4 2L diesel engine or a 1.8 7K-E petrol engine and a 5-speed manual transmission, beginning in July 2000, an automatic variant was available with the 1.8 7K-E engine. In April 2001, a facelift was introduced. Changes included new multi-reflector headlamps, integrated spotlights into the front bumper, clear lenses with coloured bulbs for the tail lights and a new steering wheel design available in either petrol (GLi) or diesel trims (GLD). For 2003, the Unser was updated again and now only available with the 1.8 7K-E engine in two trim levels: GLi and LGX incorporating new exterior design, suede interior trim, 50/50 front facing third row seats (instead of a removable bench in previous models) with the new LGX trim adding power mirrors, chrome trim and body cladding. Revo (F80/F81/F82 - Philippines) 1998–2000 (F80) The fourth-generation Kijang was sold in the Philippines under the Tamaraw FX Revo nameplate. The model was introduced in 1998 to replace the Tamaraw FX (though it was sold alongside it for a while). The platform and diesel engine were based from the similar era Hilux. Engine choices include a 1.8-litre EFI for the petrol engine and 2.4-litre diesel engine. Trim levels available are the DLX (entry level), GL, GLX, SR (Sport Runner), the high-end LXV, VX200 and the limited edition SR-J and VX200-J (part of Toyota's series of J, or Japan-spec, vehicles, which extended to the Hilux, the HiAce, and the RAV4). The LXV trim was discontinued in the 2000 model year in favor of the VX200, while the GSX is a whole new variant. Facelifted versions were introduced in 2002; two J-spec trim lines (SR-J and VX200-J) were retired from the line, and higher-end trim versions received upgraded leather seating, entertainment systems and appointments. The DLX has a vinyl interior, a two spoke steering wheel, a two-speaker radio/tape set-up and steel wheels with center ornaments. The GL trim has steel wheels with hubcaps, a four speaker radio/tape set-up and a fabric interior. The GLX, SR and LXV has a six speaker radio/tape set-up, fog lamps, alloy wheels, a rear wiper and all power amenities. Body graphics are exclusive to the SR and LXV only. The LXV had gold-trimmed badges. The SR has the word "Sport Runner" written in a font set similar to the one used for the Supra. It sold very well, in 1998 it accumulated a total sales of 7,700 units. Safety features were basic such as safety belts, load sensing proportioning valve, child-proof door locks and door impact beams. The first released diesel powered Revo was notorious for being a smoke belcher, even among other diesels at that time, with some complaints from owners. Despite this, Mazda, Ford and Isuzu released competing models, most notably the Isuzu Hi-Lander and its popular variant the Crosswind. 2000–2002 (F80/F81) For 2000, Toyota revised the Revo, with badge changes and trim line revamp. Engine choices include the newly introduced 2.0-litre SOHC EFI and 1.8-litre EFI petrol engines as well as a 2.4-litre OHC direct-injection diesel engine. The 2.4-litre diesel engine has been revised to address smoke-belching complaints. The Revo received a facelift, featuring clear halogen headlamps, new wheels, new interiors and availability of new colours. Trim levels include the DLX (entry level), GL, GSX, GLX, SR (Sport Runner), VX200 and the limited edition SR-J and VX200-J (part of Toyota's series of J, or Japan-spec, vehicles, which extended to the Hilux and the RAV4). The VX line eventually replaced the LXV; and the GSX is a whole new variant. The DLX, the entry level, has only power steering, and no other power features. This variant lacks a tachometer, and is equipped only with a tape deck/radio receiver, 2 speakers in the front row only, vinyl interior and it has 14-inch steel wheels with center ornament. The GL is the "higher-end entry level" with radio-CD setup, fabric interior, tachometer, and steel wheels with hubcaps. The remaining lines has all-power features, CD player/radio receiver and six-speaker setup (but upgradable to a DVD player setup), as well as rear-window defoggers. The VX and SR-J lines have leather seats and TV screens mounted on the dashboard and on the headrests. Only the SR-J, a special version of the SR (distinct wheels, unique livery), the GSX and the VX200 and VX200J had 2.0-litre petrol engines and automatic power wing-mounted radio antennas. Front-facing third-row seats were made as an option albeit without three-point seatbelts, a rarity for the vehicle type at that time in the Philippines. 2003–2005 (F82) DLX, GL were the bottom trims to choose from while GLX, GSX and SR variants were considered the mid-range players. The VX240D (2L 2.4diesel) was introduced to the new lineup in mid-2004. The Revo received its third and last refreshing. The J series of Toyota vehicles were discontinued, hence the discontinuation of its two J-spec trim lines (SR-J and VX200-J). It received a badge revision, availability of new colours and exterior and interior details, including a 3 spoke steering wheel with a chrome Toyota logo, larger headlamps and fog lamps, J100 Land Cruiser style tail lamps (which are present in the fourth-generation Kijang), upgraded audio systems and other additional features. The top trim (VX200 and VX240D) received upgraded and reengineered adjustable leather seats, 2-tone leather door sidings, upgraded entertainment systems (motorised 2-DIN head unit with AVG input for the middle row seat's armrest - also in wood accent), wood panel appointments, side-steps (together with the SR trim) and upgraded dual DVD headrest monitors. Only VX200 variants were given a 12-volt auxiliary power outlet with cover in the left side of last row. The VX200 and SR variants were offered in fabric or leather options for the interior. For the SR, chrome appointments on the dashboard, a new livery was introduced, as well as the words "SPORT RUNNER" executed in plain text, discontinuing the use of the font used for the Supra. GLX and GSX trims received new wheels and different livery for the GSX. It was discontinued in 2005 due to Toyota's IMV project. The last Revos were either sold to rental fleets, police departments, or people who want to snap the last few examples, until February 2005, where some are up for auction from government agencies and some for dropping from rental fleets and taxis. Condor (F80/F81/F85 - African Markets)/Stallion (F60 - South Africa only; Panel Van) The Zace Surf, Condor and Stallion are high-roof station wagon based on the long-wheelbase Kijang wagon. For the right hand drive South African market Condor and was initially offered with a choice of the 1.8-litre 2Y engine in the base Estate and Estate TE (later replaced by the 2.0-litre 1RZ-E in the second refresh), 2.4-litre 2RZ-E petrol engine and a 3.0-litre 5L diesel engine in either Estate TE and 4x4 RV trims. Unique to the Condor is the 7-seat configuration with second row individual seating, locks integrated to the inner door handles, Corolla-style outer door handles, and a lack of a rear cooler option. Available options are air conditioning for the base estate, leather seats for the RV (and later TX) or PVC seats (all trims). An 8-seat configuration later replaced the 7-seater with the second row seats being exchanged for a split 60/40 unit in the first refresh with the 4x4 RV trim being replaced by the new TX and TX 4x4 trims. The third row bench would get replaced by a 50/50 side folding unit in the second and final refresh model which also included the front end design as well as the rear taillights from the second facelift Kijang while still retaining cloth interior from the first Kijang facelift and the use of rubber seals in the rear window. The 2.4-litre petrol engine was also now made available to the base Estate trim alongside the new 2.0-litre engine while a driver airbag was added to the TX trim. The Condor was sold as well in Left hand drive Ghana and Nigerian markets with 1.8-litre 2Y and 3.0-litre 5L engines with a 10-seat configuration with a 4x4 option being available to the diesel models. The Stallion Panel Van was introduced initially with a 1.8-litre 2Y engine sharing the F60 designation with the Kijang/Zace pickup (later replaced by a 2.0-litre 1RZ-E unit as a base engine in 2003 for both the South African market Condor and Stallion models) in a 3-seat configuration with no second row seats. Immobilisers were standard equipment throughout the entire South African Condor/Stallion (non 2Y SA models use a transponder key immobiliser) range while included as part of the 4x4 model in Ghana markets. Racing The Team Castrol Toyota Condor 2.4 RV 4x4 was prepared by Toyota South Africa's Research and Development Team in Prospecton, Durban for the South Africa National Off-Road Championship. Introduced in the 2001 season it was driven by Kassie Coetzee and co-driver Ockie Fourie until the 2003 season where it was replaced by a Hilux 3.0TD 4x4. Competing in the 4-cylinder production class category (Class E) modifications include an uprated engine (initially to , later increased to ), Addition of a rear limited slip differential, a 260-litre fuel tank, strengthened suspension, as well a roll cage and associated safety equipment. A heavy-duty clutch and high-temperature brake compound were fitted to aid endurance and a limiting valve was fitted to adjust brake bias however the rest of the brakes, gearbox, and transfer case remains standard. The vehicle was competitive even in its debut season, but found limited success throughout its racing career with only a single class win (7th overall) from the opening race of the 2002 season (Barberspan 500) before suffering multiple mishaps in the 2002 season that included a rock-throwing incident. Zace (F80 - Vietnam/F60 - Taiwan only; Pickup)/Zace Surf (F80/F84/F85 - Taiwan) Taiwan The left-hand drive Zace Surf for the Taiwanese market was available in both 5 and 8-seater configurations with a choice of either a 1.8-litre or 2.4-litre petrol engine. Anti-lock brakes were available with the 1.8-litre petrol engine as standard in Urban Wagon and pre-facelift GL models while available as an option in GL Limited, DX-Limited and DX trims with all 2.4-litre models receiving anti lock brakes as standard. A driver airbag was also standard equipment for Urban Wagon and pre-facelift GL models as well as in 4WD trims. The 8-seat configuration using a 50/50 split side folding unit with third row seatbelts as used in the Unser and late model Condors was initially offered as a trim level to both 1.8-litre and 2.4-litre 4WD models with the latter being discontinued in 2002. Both models are uncommon as owners opted to install aftermarket bench seats to 5-seater models instead. Refreshed models more closely mimic the changes made in the Kijang's second refresh that included the suede interior as well the use of compound sealant for the rear glass. Unique to the Zace Surf is the use of a printed window antenna, the option of a roof mounted VCD player and a car phone in later, higher end trims like the VX-surf or VX Prerunner. All Zace Surfs with the 2.4-litre engine use the 4x4's taller suspension unlike the Condor. 4x4 models uses a full-time 4WD system with a lockable centre differential and high/low range transfer case. Vietnam The Toyota Zace was introduced to Vietnam in 1999 as the GL and DX equipped with 1.8 litre EFI petrol engine with at 4,800 rpm. The DX version has a lower comfort profile than the GL version with a manual external rearview mirror, no front fog lights and no tachometer. In 2000, the Zace got a redesigned front and the 1.8-litre engine was increased to 2.0-litres. The second upgrade was introduced in 2003 with an improved front and rear. In 2004, Toyota introduced the GL limited with 200 units produced, a revised exterior, wood-panelled interior, and upholstered seats. In 2005, Toyota introduced the Zace Surf with an improved exterior that included larger wings and front bumper, chrome exterior door handles and windshield surrounds, and 15-inch wheels. The interior was equipped with a wood-panelled console, CD player, 6-speaker audio and leather seats. The Zace was a successful model and also the best-selling model of Toyota Motor Vietnam in 2005 with 5,634 units. The total number of cars sold from launch to the end of production was 17,268 units. Replacement Due to its diversified roles in its respective markets, the Kijang was succeeded by the Avanza and IMV platform vehicles. Toyota replaced the Kijang station wagon across Southeast Asia with the smaller Avanza in 2003, and the larger Innova in 2004. The latter has been retailed by Toyota Astra Motor in Indonesia as the "Kijang Innova" to retain its linkage with the original model. Therefore, Toyota categorise the three generations of the Innova as the fifth, sixth and seventh-generation Kijang. The Kijang pickup was sold until early 2007, when it was replaced by the Hilux pickup truck to comply with the Euro 2 emission standards. The Indian market Qualis was replaced by the Innova, skipping the fourth-generation model entirely. The Malaysian market Unser was sold alongside the Avanza introduced in late 2004 until the middle of 2005, when it was discontinued in favor of the Innova being introduced. The Innova was marketed in 2005 as the successor to the Revo in the Philippine market with marketing material referring to the Innova as "A Beautiful [R]evolution" referencing the Revo nameplate. Given the family oriented nature of the Innova, taxi and commercial businesses served previously by the entry-level DLX and GL Revo trims were now served by the Avanza, while the upmarket SR and VX trims now being catered to by the Fortuner SUV. Commercial variants of the Tamaraw FX were succeeded by the Hilux FX and LiteAce FX utility vans, both carrying over the "FX" nameplate, and the Hilux Cargo closed van, along with the panel van, dropside pick-up, and aluminium van variants of the LiteAce, released in 2022. Local interest in the Toyota Tamaraw however, has been rekindled with a preview of what appears to be a modernized version of the vehicle, reportedly still being in diesel, and possibly having an electric variant; a possible release in 2024 has been estimated. The Taiwanese Zace Surf was replaced with the Innova equipped with the 2.7 L 2TR-FE petrol engine with no replacement for the four-wheel-drive variant and pickup truck. The Fortuner, then codenamed IMV4, was slated to be imported by local distributor Hotai Motors as to reflect the Zace Surf's then current lineup however due to strategic consideration by Toyota, the Innova was launched in 2007 instead with the 2TR-FE to meet emission regulations with the smaller 1TR-FE being introduced later to replace the larger engine. In 2016, the Innova was discontinued from the Taiwanese market with the second-generation Innova not slated to be introduced. The Africa/Ghana market Condor was replaced by the Fortuner in 2006, Avanza in 2007 and Innova introduced in late 2011, while panel van duties served by the African market Stallion were passed onto a panel van version of the Avanza introduced in late 2013. The second-generation Innova is not introduced to the South African market due to shrinking MPV market and poor sales. Production and sales Production Sales References External links History of Toyota Kijang Kijang Cars introduced in 1977 1980s cars 1990s cars 2000s cars Pickup trucks Compact MPVs Rear-wheel-drive vehicles All-wheel-drive vehicles Cars powered by longitudinal 4-cylinder engines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C%82%AC%EB%A5%B4%ED%8A%B8%20%EB%B2%A0%EB%A6%AC%EC%83%A4
베사르트 베리샤
베사르트 베리샤(, 1985년 7월 29일 ~ )은 알바니아계인 코소보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알바니아 국적 또한 가지고 있으며, 코소보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알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A리그에서 6시즌 동안 116골을 기록하였으며, A리그 통산 최다득점자로 기록되었다. 유스팀 경력 베사르트 베리샤는 독일에서 축구를 시작하였고, 17세가 되던 해 오버리가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에서 유소년리그 득점왕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 클럽 경력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2004-05 시즌을 앞두고, 함부르크 SV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첫 시즌 전반기에 단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하였고, 겨울이적시장을 통해 덴마크 수페르리가 올보르 BK로 임대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기회를 받지 못하였다. 2005-06 시즌에는 곧바로 또다른 덴마크 수페르리가 팀인 AC 호르센스로 임대를 떠났고, 이 곳에서 32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기록하였다. 분데스리가 2006-07 시즌이 되면서, 베사르트 베리샤는 함부르크에서의 기회를 받기 시작하였다. 2006년 8월 12일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를 상대로 78분에 나이젤 더 용과 교체 투입되면서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2006년 12월 6일 베리샤는 CSKA 모스크바를 상대로 한 UEFA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리며, UEFA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최초로 조별 예선에서 득점한 알바니아 축구 선수로 기록되었다. 열흘 뒤, 알레마니아 아헨을 상대로 선제골을 터뜨리며, 본인의 분데스리가 데뷔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토마스 돌 감독이 경질되고, 휘프 스테번스가 새로운 사령탑으로 선임되면서 선수단 계획에서 제외되고, 남은 시즌을 벤치 멤버로 보냈다. 번리 FC 2007년 7월 3일 잉글랜드 챔피언십리그 번리 FC가 34만 파운드를 지불하면서 베리샤와 3년 계약을 맺고 영입했다. 베리샤는 시즌이 시작하기 전, 알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으로써 몰타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하였는데, 이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심각한 부상으로 보지 않았으나, 검사를 통해서 6~7주의 회복 기간을 가지기로 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십자인대가 끊어졌음이 확인이 되며, 약 1년 간 재활을 하게 되었다. 10개월 간 재활을 하고 돌아 온 베리샤는 미국의 캐롤라이나 레일호크스와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 출전하면서 그라운드에 복귀하였다. 로센보르그 BK로의 임대 2008년 가을 베리샤는 노르웨이 티펠리겐의 로센보르그 BK로 임대를 떠났다. AC 호르센스로의 임대 2009년 1월 8일 베리샤는 덴마크 수페르리가의 AC 호르센스로 6개월 간 임대를 떠났다. 베리샤는 AC 호르센스에서 준수한 활약을 이어나갔으나, 케네스 에밀 페테르센과 훈련장에서 마찰을 일으키다 임대 계약이 해지되었다. 아르미니아 빌레펠트 2009년 8월 5일 베리샤는 2. 분데스리가의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로 7만 5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적하였다. 그러나 베리샤는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서 교체 선수로만 활용되었다. 브리즈번 로어 2011년 8월 16일 A리그 디펜딩 챔피언 브리즈번 로어 FC의 감독 엔제 포스테코글루는 베사르트 베리샤와 1년 계약을 맺고 영입했음을 밝혔다. 베리샤는 2라운드 시드니 FC와의 경기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첫 득점에 성공하였다. 4라운드에는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4골을 몰아치며 팀의 7:1 대승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 경기는 브리즈번 로어 역사상 최대의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1경기 3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A리그 2011-12 시즌에 베리샤는 정규리그 19득점을 기록하면서 호주축구미디어협회상, 선수들이 뽑은 선수상 등을 수상하였다. 모든 대회 통틀어 베리샤는 35경기 출전 23골을 기록하였고, 이는 브리즈번 로어 역사상 한 시즌 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였다. 2012-13 시즌에는 28경기에 출전하여 14골을 기록하였으며, 2013-14 시즌에는 20경기 출전 13골을 기록하였다. 멜버른 빅토리 2014년 1월 22일 브리즈번 로어와 계약이 만료된 베사르트 베리샤는 연봉을 2배로 인상받으며 멜버른 빅토리 FC로 이적하였다. 베리샤는 이적하자마자 1라운드에서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를 상대로 2골을 기록하며, 멜버른 빅토리에서의 첫 승리와 첫 득점, 두번째 득점을 기록하였다. 2015년 12월 2일 베리샤는 멜버른 빅토리와 2년 계약을 연장하였다. 2017년 1월 2일 뉴캐슬 제츠를 상대로 페널티킥 득점에 성공하면서, A리그 역사상 최다득점자로 등극하였다. 같은 해 4월 14일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를 상대로 득점에 성공하면서, A리그 역사상 최초로 통산 100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산프레체 히로시마 2018년 6월 1일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1년 반 계약을 맺으며 완전 이적하였다. 국가대표팀 경력 알바니아 2006년 10월 11일 베사르트 베리샤는 UEFA 유로 2008 예선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79분에 교체 투입되며 첫 국가대표 경기를 치렀다. 2007년 5월 25일 번리에서 펼쳐진 잉글랜드 B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알바니아 대표팀으로서의 첫 득점에 성공하였다. 베사르트 베리샤는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 들어서는 정기적으로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다. 2009년 10월 14일 베사르트 베리샤는 알바니아 대표로써 마지막 경기를 치렀으며, 알바니아 대표팀으로 통산 17경기 1골을 기록하였다. 코소보 2016년 5월 코소보 축구 협회가 UEFA와 FIFA로부터 가입을 승인받았다. 8월 16일 코소보 축구 협회로부터 초청을 받은 베리샤는 코소보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하기에 합의를 이루었다. 11월 4일 FIFA로부터 베사르트 베리샤가 코소보 축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뛸 수 있음을 공식 승인하였다.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아이슬란드와의 경기에서 선발 투입되면서, 코소보 대표로써의 데뷔전을 치렀다. 2017년 6월 11일 알베르트 분자키 감독과의 불화로 진통을 겪은 베사르트 베리샤는, 분자키가 코소보 대표팀을 떠날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분자키가 코소보 감독직을 내려놓고 떠났으나, 현재까지 베리샤는 코소보 대표팀에 돌아가지 않고 있다. 경력 통계 클럽 기록 2018년 10월 7일 기준 국가대표팀 기록 2017년 6월 11일 기준 수상 내역 구단 브리즈번 로어 A리그 정규리그 : 2013-14 A리그 그랜드파이널 : 2011-12, 2013-14 멜버른 빅토리 A리그 정규리그 : 2014-15 A리그 그랜드파이널 : 2014-15, 2017-18 FFA컵 : 2015 개인 A리그 득점왕 : 2011-12, 2016-17 각주 외부 링크 198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남자 축구 공격수 코소보의 남자 축구 선수 코소보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코소보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알바니아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두 개 이상의 대표팀에서 뛴 축구 선수 함부르크 SV의 축구 선수 올보르 BK의 축구 선수 AC 호르센스의 축구 선수 로센보르그 BK의 축구 선수 브리즈번 로어 FC의 축구 선수 멜버른 빅토리 FC의 축구 선수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축구 선수 번리 FC의 축구 선수 분데스리가의 축구 선수 2. 분데스리가의 축구 선수 덴마크 수페르리가의 축구 선수 엘리테세리엔의 축구 선수 A리그 멘의 축구 선수 J1리그의 축구 선수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의 축구 선수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의 축구 선수 독일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일본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잉글랜드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덴마크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노르웨이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웨스턴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 일본에 거주한 코소보인 잉글랜드에 거주한 알바니아인 잉글랜드에 거주한 코소보인
https://en.wikipedia.org/wiki/Besart%20Berisha
Besart Berisha
Besart Selim Berisha (born 29 July 1985) is a Kosovo Albanian retired professional footballer who played as a striker. Club career Youth and Hamburger SV Berisha began his youth career at German side Berliner VB 49 academies aged nine. He then moved to various German teams, such as Berliner FC Dynamo, TSV Lichtenberg, SV Lichtenberg 47 until 2003, when he moved to NOFV-Oberliga club Tennis Borussia Berlin, where a 17-year-old Berisha won the national youth league's golden boot, outclassing future Germany strikers, Mario Gomez and Lukas Podolski. He stayed for just a year before being spotted by Bundesliga club Hamburger SV. For the first half of the 2004–05 season, Berisha wasn't included in Hamburg's starting lineup for any of the matches, and for the second half he was loaned to Danish Superliga team Aalborg Boldspilklub where he spent a rather unsuccessful spell, playing only three games and scoring no goals. The following season 2005–06 he was loaned to fellow Superliga side AC Horsens, where he scored 11 goals in 32 appearances, becoming the team's top scorer that season. For the 2006–07 football season, he remained at Hamburg and was given his chances in the first team making his German Bundesliga debut on 12 August 2006 against Arminia Bielefeld, coming on as a substitute in the 78th minute in place of Nigel de Jong, as the match finished in a 1–1 draw. On 6 December 2006, Berisha became the first Albanian ever to score a goal in the group stages of the UEFA Champions League by scoring his first goal for Hamburg in the match against CSKA Moscow at home in Hamburg. Exactly 10 days later, on 16 December 2006, Berisha managed to score his first Bundesliga goal against Alemannia Aachen, as the starting striker and scoring the opening goal in the 32nd minute in the match as it finished in an away draw 3–3. He went on to make a total 14 appearances for Hamburg in the 2006–07 season, including one in the German cup and two in the UEFA Champions League, and eleven of them as a substitute. After the sacking of Thomas Doll and the arrival of Huub Stevens as Hamburg's new manager, Berisha was not seen as part of his plan for the team and remained on the bench for the rest of the season. Burnley On 3 July 2007, Burnley purchased Berisha from Hamburg for £340,000, this followed his impressive performance for Albania against England B on Burnley's home ground Turf Moor. After his performance many European clubs were interested in signing the player but Berisha was eventually signed to Burnley on a three-year deal, subject to the player being granted a work permit. The permit was eventually granted on 3 July 2007 and the deal was completed. Berisha was ruled out for the 2007–08 season when he picked up an injury while playing for his country in an International friendly against Malta. It was originally believed to be a minor knock to the knee but it was later discovered that the injury was more serious and was likely to keep the player out for 5–6 weeks. After seeing a surgeon it was further revealed that the player had in fact snapped his cruciate ligament in his knee and would not return to football for a year. The reason that doctors had originally failed to discover the damaged ligament was due to a buildup of fluid in the knee which distorted the scans image. Ten months after suffering his serious knee injury, Berisha made his return to football in a pre-season friendly match in the USA against Carolina Railhawks when he came on in the 71st minute for Joey Guðjónsson. Berisha did not exert an influence in the 20 minutes that he spent on the field having just flown to America 24 hours earlier from Albania. The American side defeated Burnley 2–1. Loan to Rosenborg He was loaned to Rosenborg in the autumn of 2008, scoring twice in his debut on 10 August 2008 against rivals Molde FK at Lerkendal Stadion in a 3–1 victory for Rosenborg. On 21 September 2008, Berisha scored in a 4–0 victory against HamKam. Berisha started for Rosenborg on 14 August 2008 in the first leg of the 2008–09 UEFA Cup qualifying rounds, a 2:1 loss to Djurgården, coming off in the 76th minute. He played only the first half in the second-leg, a 5–0 home victory, as Rosenborg won 6–2 on aggregate to advance to the next round against Brøndby. He played only in the second leg on 2 October 2008 which Rosenborg won 3–2. Rosenborg won 5–3 on aggregate, advancing to the Group stage where they faced Saint-Étienne, Valencia, Copenhagen and Club Brugge. Berisha played only once, against Club Brugge on 23 October 2008, coming on as a substitute in the 90th minute. The match finished in a goalless draw. Loan to Horsens Berisha joined AC Horsens on loan on 8 January 2009 but returned prematurely to Burnley F.C. on 26 May 2009 despite having scored some important goals for AC Horsens. The Danish club dissolved the loan contract after an incident in training involving Berisha and Kenneth Emil Petersen. His contract with Burnley ran until 2010, but having failed to make a single competitive start for Burnley after his return, the club announced on 31 July 2009 that Berisha would be transferred to German Bundesliga 2 team Arminia Bielefeld. The transfer fee was believed to be £75,000. Arminia Bielefeld Berisha officially joined Bielefeld on 5 August 2009. In the 2009–10 season, Berisha finished scoreless, having made just 11 appearances, only two as a starter, since his debut on 10 August 2009 against Hansa Rostock. The match was a 3–1 victory with Berisha coming on as a substitute in the 80th minute. He started the 2010–11 season on 22 September 2010 as a substitute in a 3–1 loss to Bochum and scored his first goal of the season on 29 September 2010 in a 1–2 loss to Union Berlin. He finished the season with a total of 19 appearances, 12 as a starter. In 15 matches Berisha was an unused substitute. Brisbane Roar 2011–12 season On 16 August 2011, Brisbane Roar manager Ange Postecoglou announced that Berisha had agreed to a one-year deal with the 2010–11 A-League champions. Berisha scored his first goal for Brisbane in round two against Sydney FC. Berisha scored four goals in a 7–1 thrashing against Adelaide United in round four, Brisbane's biggest ever victory and making him the first player to score more than three goals in a single game for the club. On 14 January 2012, Berisha was involved in an on-field melee with Sydney FC defender Pascal Bosschaart. Despite being cleared by the referee's post-match report and the Match Review Panel, Berisha was found to have breached the FFA Code of Conduct and was banned for one match. On 14 February 2012, it was announced that Berisha had signed a two-year contract extension, taking him to the end of the 2013–14 season. Berisha's "volatile" personality led to occasional clashes with teammates, both at training and on-field, as well as with opposition players. However, he was largely praised for his passionate approach to the game. In the 2012 A-League Grand Final against Perth Glory, Berisha scored a brace, one in the final seconds from a controversial penalty kick, to help the Roar win 2–1 and become the first team to win back-to-back A-League championships. Berisha became the first Albanian to score in two different Champions Leagues when he scored against F.C. Tokyo in the Asian Champions League. In the 2011–12 A-League season, Berisha won the Golden Boot with 19 goals, the Football Media Association Player of the Year, the Players' Player of the Year, and Members' Player of the Year awards. Berisha finished the season with 23 goals from 35 games, a record for a player in a season for Brisbane. His season tally included 19 goals in the regular season of the A-League; a joint all-time record. 2012–13 season Berisha's 2012–13 season was less notable than his debut season for the club. However, he still managed to finish what was a disappointing season for Brisbane with 14 goals from 28 appearances in all competitions. Berisha scored a number of important goals for Brisbane as they struggled to find the form that won them two consecutive championships; he scored the sole goal in Round 9 as ten man Brisbane saw off Newcastle Jets at home. However, arguably none were as important as the opening goal of the final round victory over Sydney FC which confirmed Brisbane's place in the post-season finals series. 2013–14 season The 2013–14 season started poorly for Berisha, despite scoring in the opening round win over Wellington Phoenix, he injured his hamstring in Round 2 which kept him on the sidelines for four weeks. Upon his return, he scored four goals in his next five appearances including a second half winner against Perth Glory and a brace in a 2–1 defeat of Adelaide United, however a hip injury then sidelined him for a further two weeks. Despite Berisha again scoring on his return from injury, on this occasion he could not prevent defeat to Adelaide at home. In the following match away to Perth Glory he received his first red card in the A-League. He was unfortunate to be booked in the first 30 seconds of the game while contesting a header with Michael Thwaite; he was then given his marching orders in the 32nd minute after receiving a second yellow card for a reckless tackle on the same player. Berisha scored on his return from suspension, netting a 90th-minute winner against Central Coast Mariners. On 27 April 2014, Berisha scored and gave his team the victory 1–0 against Melbourne Victory, valid for semi-finals of the A-League. With this victory, Brisbane Roar advanced to the final match and played on 4 May 2014 against Western Sydney Wanderers winning the match 2–1 after extra-time, Berisha scoring the match equalising goal after the Wanderers scored the opening goal. With the score 1-1 after 90 minutes the match went into 30 minutes of extra-time, when Brisbane scored the winning goal in the 108th minute by Henrique Silva and were declared the champions of the 2013–14 season. Berisha finished the 2013–14 season with a total of 20 appearances and scoring 13 goals, ranked second top-scorer of the A-League. Melbourne Victory On 22 January 2014, it was announced that A-League club Melbourne Victory had agreed to sign Berisha as the club's International Marquee player when his contract with Brisbane expires at the conclusion of the 2013–14 season. The contract is for two seasons commencing in the 2014–15 season and is worth $1.5 million, more than double his wage at Brisbane. Berisha had his competitive debut for Victory on 20 August 2014 in a 2014 FFA Cup Round of 32 match against Bayswater City SC away in Perth winning praise for his impact, assisting Archie Thompson's 77th-minute goal, followed by a hat-trick in the next round of the same competition in a 0–6 win away to Tuggeranong United in Canberra on 16 September. Berisha made his A-League debut for the Victory in their first round clash with the Western Sydney Wanderers. In the same match, Berisha scored his first A-League goal for the Victory, and the 2nd goal of the new A-League season, from a penalty kick in the 19th minute of the match, putting the Victory 2–0 up, in an eventual 4–1 win for the Victory. In his third appearance & start for his new club, Berisha made his debut in the newly re-established Melbourne Derby against Melbourne City FC in round 3 on 25 October 2014. In this match, Berisha scored his first hat-trick for the club, scoring Victory's second, third and fourth goals in an eventual 5–2 win in front of an attendance of 43,729 at Docklands Stadium, with the first and last goals coming from veteran teammate Archie Thompson. At this point of his Melbourne Victory career, Berisha had played a combined total of five games for the club, scoring seven goals and giving one assist. His goal scoring tally went up to 13 goals in the regular part of season, thus helping Melbourne Victory to win Premiership. In the final, Berisha scored the opener against arch rivals F.C. Sydney which Victory went to win 3–0. On 2 December 2015, Berisha extended his contract with Victory for two further seasons, with his new deal set to end at the completion of the 2017–18 A-League season. In November 2016, Berisha was announced as seeking Australian citizenship, after spending the required five years in the country, to be naturalised. He will be eligible for citizenship in October 2017. Once this has been achieved, Victory will be able to sign an additional visa player. On 17 December 2016, Berisha scored the winning goal in the 22nd Melbourne Derby. In doing so, he equalled Archie Thompson's tally of 90 goals in the A-League, the most ever scored by an individual in the league. On 2 January 2017, Berisha became the A-League's all-time leading goalscorer, after scoring a penalty in an eventual 4–2 win over Newcastle. On 14 April 2017, Berisha became the A-league's first ever player to score 100 goals in the competition after scoring a goal in a 1–0 win over the Central Coast Mariners. This goal also brought his regular season tally to 19, earning him a tie with Jamie Maclaren for the 2016–17 Golden Boot. With 68 A-League goals, Berisha is Melbourne Victory's second-highest goalscorer behind Archie Thompson. Sanfrecce Hiroshima In June 2018, Melbourne Victory confirmed Berisha left the club to join J1 League side Sanfrecce Hiroshima. On 2 July 2018. Berisha is officially presented after signing a year and a half contract. On 28 July 2018, he made his debut in a 1–4 home defeat against Urawa Red Diamonds after coming on as a substitute at 68th minute in place of Teerasil Dangda. Western United On 27 September 2019, Berisha returned to the A-League, joining expansion club Western United, who are also a rival of his old club Melbourne Victory. In July 2021, following two years at the club, Berisha left at the end of his contract. Prishtina On 15 September 2021, Berisha joined Football Superleague of Kosovo side Prishtina. Seven days later, the club confirmed that Berisha's transfer was permanent and received squad number 33. On 3 October 2021, he made his debut in a 0–0 away draw against Drita after coming on as a substitute at 77th minute in place of Gauthier Mankenda. Retirement On 27 January 2022, Berisha announced through his Instagram account that he has retired from football. International career Albania Berisha started applying for Albanian citizenship in September 2006 along with Mërgim Mavraj, Genc Mehmeti and Alban Dragusha, this following the recommendations of Hans-Peter Briegel before he resigned from his role as the manager of the Albania national team. Berisha received the Albanian citizenship on 7 September 2006 along with Mavraj. Despite these four players were tested and selected by Hans-Peter Briegel, but only three of them were in plans of the next upcoming coach of Albania, Otto Barić, where the Croatian coach meet Berisha in Germany and coach Thomas Doll and had only required his services, Mërgim Mavraj's and Genc Mehmeti's, as for Alban Dragusha he has not given any concrete statement. UEFA Euro 2008 qualifying Berisha received his first call up and played his first game for Albania under the coach Otto Barić, on 11 October 2006 against the Netherlands valid for the UEFA Euro 2008 qualifying Group G and where Berisha came on as a substitute in the 79th minute for Erjon Bogdani, as the match finished in the 2–1 loss. In another four following matches he was called up and played in all four matches including two in the starting line up. First he played as a substitute in a goalless draw on 24 March 2007 against Slovenia replacing Devi Muka in the 86th minute and playing for the first time as attacking midfielder behind the back of Alban Bushi and Erjon Bogdani. Then four days later in another goalless draw in a row, against Bulgaria, Berisha played as a starter along Erjon Bogdani in the forward line forming the duo-strikers partnership, Then Berisha was substituted off in the second half 79th minute by Alban Bushi. In the next upcoming matches both against Luxembourg on 2 and 6 June 2007, Berisha returned to play as a starter in the midfield in the first match, but got substituted off by Devi Muka at half-time as the match finished in 2–0 with both goals scored by Edmond Kapllani in the first half when Berisha played. For the second match, Berisha came in as a substitute in the 67th minute for Alban Bushi and five minutes later Edmond Kapllani scored for Albania to secure the clean 3–0 win. He scored his first goal for Albania on 25 May 2007, during a friendly match with England B played at Turf Moor, in Burnley, England, where he showed impressive form and was the Albanian man of the match. This goal was not recognized because the match was not between two fully senior teams. The first fully senior international goal was scored by Berisha on 22 August 2007 in a friendly match against Malta which Albania won 3–0. Berisha was in the starting line up and managed to score in the 46th minute of the second half. On 19 November 2008, Berisha assisted the equalizing goal scored by Ervin Skela in the friendly match against Azerbaijan which ended exactly as a 1–1 draw. 2010 FIFA World Cup qualification During the World Cup 2010 qualifiers, he was called up regularly in the national team for all 10 group matches, playing on eight of them. For the two matches against Hungary on 28 March 2009 and Denmark on 1 April 2009, coach Arie Haan left out Erjon Bogdani, a regular starter during the tournament, because the striker of Chievo Verona did not play for some time in the Italian Serie A. In those two matches Berisha gained a chance to play as a starter and in the 0–1 loss against Hungary on 28 March 2009, he completed the entire 90-minutes match forming a striker partnership with Hamdi Salihi. And four days later in a 0–3 loss against Denmark on 1 April 2009, he played once again in the starting line up as a single striker, then substituted off by Migen Memelli in the 85th minute. After the end of the tournament, he refused permanently to be called up for the national team's fixtures, one reason being that he lived a long distance away from Albania. As of 14 October 2009, his last game with the national team, Berisha had made 17 appearances and scored one goal for Albania. On 9 December 2013, he declared that after the opening of the winter transfer period he will sign for a football-club in Europe to be more close Albania and to play again for the national team, but suddenly on 22 January 2014 it was announced that fellow A-League club Melbourne Victory had agreed to sign Berisha for next season 2014–15. On 5 April 2014, he was asked by Albania national team coach Gianni De Biasi to play again for Albania only for the official matches valid for UEFA Euro 2016 qualifiers and Berisha asked just ten days for final response. His late response was definitive to not accept latest invitation, as he declared that as long as he was playing in Australia he couldn't come to Albania due to the long distance. In January 2016, Berisha declared that he was interested in representing Albania in UEFA Euro 2016. Kosovo On 16 August 2016, it was announced that Berisha had accepted an invitation to represent Kosovo, after it was officially recognized by UEFA and FIFA in May 2016. On 4 November 2016, FIFA accepted Berisha's request to play for Kosovo. On 20 March 2017, he received a call-up from Kosovo for a 2018 FIFA World Cup qualifying match against Iceland, making his debut after being named in the starting line-up. Early departure On 11 June 2017, Berisha after the 2018 FIFA World Cup qualifying match against Turkey decided to step down from international duty because he felt Albert Bunjaki, the Kosovo coach was the worst coach he had ever worked with and accused Bunjaki of not giving him any reason as to why he was not being selected. Berisha said he would be available for selection again should Bunjaki leave his role as coach of the Kosovo national team. Personal life Besart Berisha was born in Pristina and raised in Germany and he is the brother-in-law of Kosovan footballers Enis Fetahu and Kosovo international Samir Ujkani. Berisha became an Australian citizen in 2019. Career statistics Club 1 – includes A-League final series statistics 2 – includes FIFA Club World Cup statistics; AFC Champions League statistics are included in group stages commencing during domestic season (i.e. ACL and A-League seasons etc.) International Scores and results list Albania's goal tally first. Honours Brisbane Roar A-League Premiership: 2013–14 A-League Championship: 2011–12, 2013–14 Melbourne Victory A-League Premiership: 2014–15 A-League Championship: 2014–15, 2017–18 FFA Cup: 2015 Individual A-League Golden Boot: 2011–12, 2016–17 A-League Team of The Week: 2011–12 (Rounds 3, 8 and 13) Gary Wilkins Medal: 2011–12 A-League PFA Team of the Season: 2011–12, 2013–14, 2014–15, 2016–17, 2019–20 A-League All Star: 2013, 2014 A-League PFA A-League Team of the Decade: 2005–2015 Melbourne Victory Golden Boot: 2015–16 See also List of association footballers who have been capped for two senior national teams References External links Brisbane Roar profile Besart Berisha at kicker.de Besart Berisha at UEFA.com 1985 births Living people Kosovo Albanians Australian people of Albanian descent Footballers from Pristina Kosovan men's footballers Kosovo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Kosovan expatriate men's footballers Kosov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Australia Kosov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Japan Kosov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England Kosov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Germany Albanian men's footballers Albania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Dual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Albanian expatriate men's footballers Albani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Australia Albani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Denmark Albani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England Albani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Germany Albani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Norway Men's association football forwards Berliner FC Dynamo players SV Lichtenberg 47 players Tennis Borussia Berlin players Bundesliga players Hamburger SV players Hamburger SV II players Danish Superliga players AaB Fodbold players AC Horsens players Burnley F.C. players Eliteserien players Rosenborg BK players 2. Bundesliga players Arminia Bielefeld players A-League Men players Brisbane Roar FC players Melbourne Victory FC players J1 League players Sanfrecce Hiroshima players Western United FC players Naturalised soccer players of Australia Marquee players (A-League Men)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Denmark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Norway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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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리네 세게르
사라 카롤리네 세게르(, 1985년 3월 19일 ~ )는 스웨덴의 여자 축구 선수이다.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며, 현재 스웨덴 다말스벤스칸의 FC 로셍오르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클럽 경력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린셰핑 FC에서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팀의 다말스벤스칸 1회 우승, 여자 스벤스카 쿠펜 3회 우승에 공헌했다. 2009년 12월에는 미국의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2010년 12월에는 웨스턴 뉴욕 플래시 소속으로 뛰었고 2011년 8월에 LdB FC 말뫼로 이적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튀레쇠 FF 소속으로 뛰었으며 2014년부터 2016년까지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 소속으로 뛰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프랑스의 올랭피크 리옹 소속으로 뛰면서 팀의 디비지옹 1 페미닌 우승, 쿠프 드 프랑스 페미닌 우승,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2017년에 FC 로셍오르드로 이적했다. 국가대표 경력 2005년 3월에 열린 독일과의 알가르브컵 경기에 처음 출전하면서 스웨덴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데뷔했으며 4차례의 UEFA 유럽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2005년, 2009년, 2013년, 2017년), 4차례의 FIFA 여자 월드컵(2007년, 2011년, 2015년, 2019년), 3차례의 하계 올림픽(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 2012년 런던 하계 올림픽,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독일에서 개최된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에서 스웨덴이 3위를 달성하는 데에 공헌했으며 2012년 10월에는 피아 순드하게 감독으로부터 로타 셸린과 함께 스웨덴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공동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2013년 3월 6일에 열린 중국과의 알가르브컵 경기에서 사라 투네브로와 함께 A매치 100경기 출전 기록을 수립했으며 스웨덴은 중국과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스웨덴에서 개최된 UEFA 여자 유로 2013에서는 스웨덴의 준결승전 진출에 기여했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에서는 본선 6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스웨덴의 여자 축구 은메달에 공헌했다. 로타 셸린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스웨덴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역임했다. 프랑스에서 개최된 2019년 FIFA 여자 월드컵에서는 스웨덴이 3위를 달성하는 데에 공헌했으며 특히 잉글랜드와의 3·4위전 경기에서는 자신의 국가대표팀 200경기 출전 기록을 수립했다. 사생활 카롤리네 세게르는 2013년 12월에 발행된 스웨덴의 성소수자 잡지인 《QX》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수상 클럽 린셰핑 FC 다말스벤스칸 1회 우승 (2009) 여자 스벤스카 쿠펜 3회 우승 (2006, 2008, 2009) 여자 스벤스카 수페르쿠펜 1회 우승 (2009) 웨스턴 뉴욕 플래시 미국 여자 프로 축구 1회 우승 (2011) LdB FC 말뫼 다말스벤스칸 1회 우승 (2011) 여자 스벤스카 수페르쿠펜 1회 우승 (2011) 튀레쇠 FF 다말스벤스칸 1회 우승 (2012) 올랭피크 리옹 디비지옹 1 페미닌 1회 우승 (2016-17) 쿠프 드 프랑스 페미닌 1회 우승 (2017)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 (2016-17) 국가대표 UEFA 여자 유로 2005 4강 2009년 알가르브컵 우승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3위 UEFA 여자 유로 2013 4강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 여자 축구 은메달 2019년 FIFA 여자 월드컵 3위 개인 2005년 스웨덴 올해의 약진하는 축구 선수상 수상 디아만트볼렌(Diamantbollen, 스웨덴 올해의 여자 축구 선수) 1회 수상 (2009년)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올스타 팀 선정 UEFA 여자 유로 2013 올스타 팀 선정 외부 링크 카롤리네 세게르 프로필 - 스웨덴 축구 협회 공식 홈페이지 카롤리네 세게르 - 트위터 카롤리네 세게르 - 인스타그램 198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스웨덴의 여자 축구 선수 여자 축구 미드필더 스웨덴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UEFA 여자 유로 2005 참가 선수 2007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여자 유로 2009 참가 선수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여자 유로 2013 참가 선수 2015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여자 유로 2017 참가 선수 2019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스웨덴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2008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201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2016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FIFA 센추리 클럽 여자 선수 스웨덴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FC 로셍오르드의 축구 선수 린셰핑 FC의 축구 선수 스웨덴의 성소수자 스포츠 선수 레즈비언 스포츠인 2020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202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20세기 성소수자 사람 21세기 성소수자 사람 미국에 거주한 스웨덴인 UEFA 여자 유로 2022 참가 선수 웨스턴 뉴욕 플래시의 축구 선수 올랭피크 리옹 페미닌의 축구 선수 파리 생제르맹 FC 페미닌의 축구 선수 2023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프랑스의 외국인 여자 축구 선수 디비지옹 1 페미닌의 축구 선수 다말스벤스칸의 축구 선수
https://en.wikipedia.org/wiki/Caroline%20Seger
Caroline Seger
Sara Caroline Seger (born 19 March 1985) is a Swedish footballer who plays as a midfielder and club captain for FC Rosengård in the Damallsvenskan league. She is the current captain of the Swedish national football team. Club career Linköping An industrious central midfielder, Seger played for Linköpings FC from 2005 to 2009 and served as the club's captain. Linköping finished in the top four of the Damallsvenskan in four of Seger's five seasons with the team. Their highest finishes were second place in 2008 and first place in 2009. The team also captured the Svenska Cupen on three occasions in 2006, 2008 and 2009. While playing for Linköping, Seger was honoured as the Damallsvenskan's Rookie of the Year in 2005 and Midfielder of the Year in 2006 and 2009. After the team finished second and qualified for the UEFA Women's Champions League, Seger signed a new one-year contract with Linköping in the autumn of 2008. She was proud to lead the club to a league and cup "double" in her final campaign with the team. Seger also won the 2009 Diamantbollen, awarded to the year's best Swedish women's soccer player. Seger's last game for Linköping was a 2–0 defeat by Duisburg in the 2009–10 UEFA Women's Champions League. United States In September 2009, the expansion team Philadelphia Independence of Women's Professional Soccer (WPS) announced their intention to draft Seger with their first pick in the 2009 international draft. In December 2009, she signed a three-year contract with Philadelphia. Her first season with the Independence began in April 2010 and culminated in a 4–0 defeat to FC Gold Pride in the WPS Championship game. Seger scored one goal and posted five assists in her 18 appearances. She underwent surgery on a heel injury after the season. Seger was traded to Western New York Flash in December 2010 in exchange for draft picks. She joined the franchise in their first season in the WPS and wore the captain's armband. On 14 August 2011 the Seger-led Flash secured the best record in the league, a bye in the playoffs, and played at home for the league championship on 27 August. They beat Seger's former club Philadelphia Independence in the Championship game, 5–4 in PKs after a 1–1 draw. Seger played just 12 matches for the Flash, as the FIFA Women's World Cup took place during the season. She scored five goals and served one assist. Coach Aaran Lines was very happy with Seger's contribution, but her contract contained a release clause which allowed her to leave for a team outside the United States after one year. Tyresö FF In August 2011 Seger announced that she would join LdB FC Malmö on a short-term contract to cover the remainder of the 2011 Damallsvenskan season, although she remained undecided about her subsequent destination. Later that same month it was confirmed that Seger would join Tyresö FF on a two-year deal to start in the 2012 Damallsvenskan season. Her three goals in seven league games helped Malmö secure the 2011 Damallsvenskan title. Seger collected her third Damallsvenskan title in 2012, after Tyresö's dramatic last day win over Malmö. Madelaine Edlund scored the winning goal after Seger's shot had hit the post. Seger and Tyresö were upset in the final of the Svenska Cupen, by Kopparbergs/Göteborg FC who won 2–1 after extra time. In early 2014 it became clear that Tyresö were in financial difficulty and could not afford to keep Seger and their other leading players. In May 2014 Seger had been approached by Seattle Reign FC, who had obtained her rights for the National Women's Soccer League (NWSL), and two other American teams had expressed interest. She was also in transfer negotiations with Paris Saint-Germain Féminines. Paris Saint-Germain Seger sealed her move to Paris Saint-Germain in June 2014, signing a two-year contract. She left as Tyresö withdrew from the league and released all their players. Olympique Lyon On 2 July 2016, Lyon announced the signing of Seger. In the 2016/17 season Seger helped Lyon win the Division 1 Feminine, the Coupe de France Feminine and the UEFA Women’s Champions League. FC Rosengård In 2017 Seger returned to Sweden by joining FC Rosengård in the Damallsvenskan league. She helped Rosengård win the Svenska Cupen Damer and finish second in the league. International career Seger made her first appearance for the senior Swedish national team in March 2005; a 2–1 defeat by Germany at that year's Algarve Cup. She intended to score the winning goal at UEFA Women's Euro 2005 in North West England. Although Seger was part of the team, she failed to score as Sweden lost to rivals Norway in extra time of the semi-final. Seger continued to be selected under new coach Thomas Dennerby and was part of the Sweden team surprisingly eliminated in the first round of the 2007 FIFA Women's World Cup. After that failure some experienced players retired and Seger was given a prominent role in the team. In July 2008 she overcame a thigh injury to take her place in the squad for the 2008 Beijing Olympics. In China she participated in the Swedes' 2–0 quarter-final defeat by Germany. Impressed by Seger's work rate and positive attitude, Dennerby had appointed her as national team captain for a qualifying match with Italy in May 2008, when regular captain Victoria Sandell Svensson was injured. Sandell Svensson retired after Sweden's 3–1 defeat by Norway in the quarter-final of UEFA Women's Euro 2009 and Seger took over as full-time captain. Seger led Sweden to third place at the 2011 FIFA Women's World Cup in Germany. She featured in Sweden's 3–1 semi-final defeat to eventual winners Japan in Frankfurt. Sweden secured third place by beating France 2–1 in Sinsheim, although Seger missed the game with a calf injury. Third place also ensured Sweden's qualification for the 2012 Olympic football tournament in London. Dennerby kept Seger in Sweden's Olympic squad for London, where they lost to France in the quarter-finals. In October 2012, new national team coach Pia Sundhage decided that Seger and Lotta Schelin would share the captaincy. Sundhage named Seger in the squad for UEFA Women's Euro 2013, which Sweden hosted. Seger was disappointed when Sweden lost 1–0 to Germany in the semi-final. Seger appeared in all 6 matches for Sweden at the 2016 Summer Olympics and won the Silver Medal after a 2–1 loss to Germany. Seger became the sole captain of the National team after Lotta Schelin’s retirement from international football. Seger led Sweden to the 2019 FIFA Women's World Cup hosted in France. On 6 July 2019, Seger played her 200th match with Sweden, facing England. The match was a 2–1 victory for Sweden, giving them third place in the World Cup. On 13 June 2023, she was included in the 23-player squad for the FIFA Women's World Cup 2023. International goals Matches and goals scored at World Cup and Olympic tournaments Matches and goals scored at European Championship tournaments Personal life Seger is an out lesbian, telling QX magazine in December 2013 that she was proud of her girlfriend. In previous years Seger had concealed her orientation, but decided to speak out to be a role model for others. She used to be in a relationship with fellow professional football player Malin Levenstad. She is currently in a relationship with her Rosengård-teammate Olivia Schough. Honours , Linköpings FC Damallsvenskan: 2009 Svenska Cupen: 2006, 2008, 2009 Svenska Supercupen: 2009 Western New York Flash Women's Professional Soccer: 2011 LdB FC Malmö Damallsvenskan: 2011 Svenska Supercupen: 2011 Tyresö FF Damallsvenskan: 2012 Olympique Lyon Division 1 Féminine: 2016–17 Coupe de France Féminine: 2017 UEFA Women's Champions League: 2016–17 Sweden FIFA Women's World Cup Third place: 2011, 2019 Summer Olympics Silver Medal: 2016, 2020 Algarve Cup: 2009, 2018 Sweden U19 Nordic Cup: runner-up 2004 Sweden U17 Nordic Cup: runner-up 2001, 2002 Individual Sweden Breakthrough Player of the Year; 2005 Best Swedish Midfielder: 2006, 2009, 2010, 2014, 2015 Diamantbollen: 2009 FIFA Women's World Cup All-Star Team: 2011 UEFA Squad of the Tournament: UEFA Women's Euro 2013 References Match reports External links (archive) (archive) (archive) Caroline Seger at statsfootofeminin.fr Caroline Seger at Paris Saint-Germain Caroline Seger at Linköpings FC Swedish women's footballers 1985 births Olympic footballers for Sweden Footballers at the 2008 Summer Olympics Footballers at the 2012 Summer Olympics Footballers at the 2016 Summer Olympics Footballers from Helsingborg Living people Sweden wo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2007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2011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2015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Swed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the United States Philadelphia Independence players Western New York Flash players FIFA Women's Century Club Tyresö FF players Damallsvenskan players Linköpings FC players FC Rosengård players Swedish lesbians Swedish LGBT footballers Lesbian sportswomen Expatriate women's footballers in France Paris Saint-Germain Féminine players Olympique Lyonnais Féminin players Medalists at the 2016 Summer Olympics Olympic silver medalists for Sweden Olympic medalists in football Women's association football midfielders Division 1 Féminine players 2019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Footballers at the 2020 Summer Olympics Medalists at the 2020 Summer Olympics 21st-century Swedish LGBT people Women's Professional Soccer players UEFA Women's Euro 2022 players UEFA Women's Euro 2017 players 2023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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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바르 전투
부코바르 전투(, )는 1991년 8월에서 11월 사이 크로아티아 동부 부코바르에서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및 기타 여러 세르비아인계 준군사와 크로아티아 간에 87일간 이뤄진 포위전이다.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전에는 바로크 건축 시절의 구도심에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기타 민족이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해체가 점차 대두되면서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사이의 민족감정을 이용한 정치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세르비아 정부와 준군사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지역에서 세르비아계의 무력 준동이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반란에 호응하여 크로아티아에 개입하기 시작해 1991년 5월에는 크로아티아 동부 지역인 슬라보니아에서 군사 분쟁이 시작되었다. 8월이 되면 인민군이 부코바르를 포함한 슬라보니아 전역의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1991년 당시 부코바르엔 제대로 무장되지 않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 및 자원군 1,800명이 있었으며, 이에 반해 공세를 펼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전차와 포병을 동원한 병력 36,000명이 있었다. 부코바르 전투 기간 동안 시내에 하루 평균 박격포 12,000개가량이 떨어졌다. 이 시기 일어난 전투는 1945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오래 가고 치열한 전투였으며 부코바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완전히 파괴된 유럽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11월 18일 부코바르가 세르비아에게 함락되며 크로아티아군 포로와 민간인 300명 이상이 학살당했으며 부코바르 주민 20,000명 이상이 강제 추방당했다. 이후에도 부코바르 대부분 지역에서 비세르비아계 민족에 대한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고 세르비아계가 독립해 세운 국가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계 준군사 및 정치 관료들은 전투 기간과 그 후에 일어난 전쟁 범죄의 피의자로 기소되었다. 부코바르 전투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이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부코바르 전투가 끝난 지 수 주 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8년까진 부코바르가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크로아티아로 평화롭게 돌어갔다. 전쟁 이후 부코바르는 재건되었으나 전후 인구는 전쟁 전 인구의 절반도 채 되지 않으며, 많은 건물이 전투의 포화에 피해를 입은 채 방치되어 있다. 부코바르는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 2개 공동체로 분할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배경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 동부 국경인 다뉴브강 서안 동부 슬라보니아에서 제일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엔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테니아인 등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으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전까진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던 동네였다. 또한 전쟁 이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다. 부코바르의 오랜 번영은 크로아티아 최고의 바로크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모여 있다는 것에도 드러났다. 이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인이 추방당하고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곳에서 살던 민족들이 들어오면서 극심한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마지막으로 이뤄진 인구 조사에서는 부코바르 주변 지역을 포함한 부코바르 지역 주민은 84,189명이 있었으며 이 중 43.8%가 크로아티아계, 37.5%가 세르비아계였으며 기타 민족들도 섞여 있었다. 부코바르 도시 내에서는 47%가 크로아티아계였으며 32.3%가 세르비아계였다. 1945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통치 하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6개 공화국이 한대 뭉친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현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은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 내 위원회가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을 세르비아 공화국으로, 크로아티아계 다수를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편입하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계가 살고 있는 많은 지역이 다른 공화국에 남겨 있었다.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하면서 오랜 기간 억압되어 있던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고 각 공화국은 연방 정부의 권위가 무너지며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당제 민주주의 및 경제 개혁을 단행했으나 세르비아 내 권위주의 공산당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개혁에 반대하며 유고슬라비아 정부를 강력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선거를 열어 공산당 통치가 끝났으며 두 공화국에선 독립을 옹호하는 민족주의 정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크로아티아에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의 프라뇨 투지만이 정권을 잡아 투지만이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투지만 정부가 들어서자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민족들은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민주당(SDS)는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며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세르비아인 수천명을 학살한 민족주의 파시즘 우스타샤 운동의 환생이라고 비난했다. 1990년 중반 이후 세르비아 민주당은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 무장 반란을 일으키며 세르비아 정부 및 세르비아 준군사의 지원을 바탕으로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SAO 크라이나)의 독립을 선포했다. 크로아티아는 공화국 내에서 급속하게 대부분 지역에서 영토 통제를 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1991년 2월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가 크로아티아에서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세르비아와 통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지역도 분리 독립을 발표하고 민병대를 차리기 시작했다. 전투 서곡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분쟁은 1991년 초가 되면 동슬라보니아로 확대되었다. 4월 1일엔 세르비아계가 부코바르 및 동슬라보니아의 여러 마을을 장악하고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놓기 시작했다.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인 흰 독수리는 부코바르 바로 북쪽에 있는 세르비아계 마을인 보로보셀로로 이동했다. 1991년 4월 중순 보로보 셀로 외곽에서 세르비아계 병사를 향해 암브러스트(Armbrust) 대전차유도탄 3기를 발사하여 기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고이코 슈샤크가 공격을 지시한 것이었다. 이 공격으로 사상자는 없었으나 민족 사이 긴장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5월 2일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보로보 셀로 중심에 있던 크로아티아 경찰 버스 2대를 공격하여 경찰관 12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세르비아인 3명도 사망하였다. 보로보셀로 전투는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사이 충돌 중 가장 폭력적인 사태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로 동부 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인이 대폭발하여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인종간 폭력 사태가 심화되었다. 직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보로보 셀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의 개입은 크로아티아 지도자에게 환영받았으나, 크로아티아 내무부 차관인 밀란 브레자크는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경찰이 민병대를 진압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민병대 사이의 총격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 주민들을 위협했으며 때때로는 폭력 사태로 빚어지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부코바르'를 강제로 점거하여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뜨리던 세르비아계 직원을 쫓아내고 크로아티아계로 채웠다.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변 세르비아계 다수의 시골 동네에서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를 막기 시작하였고,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는 크로아티아계 마을을 지나는 비포장 도로 몇 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부코바르의 상황은 "살인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열었다.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 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경파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이 세르비아계에게 독립투표 보이콧을 촉구하는 한편 중도주의자들은 독립 국민투표를 독립 반대로 이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부추겼다. 많은 세르비아인이 투표에 불참했으나 국민투표 결과 94%의 찬성으로 독립이 가결되었다. 독립 투표 이후 부코바르 및 주변 지역의 폭력사태는 심각해졌다. 총격 및 폭탄 테러가 일상화되어 마을 및 근방 지역을 위협했다. 6월부터 시작된 도시 내로의 산발적인 포격은 여름 들어서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부코바르 북쪽 교외 지역의 크로아티아계 다수 마을인 보로보 나셀레에선 7월 4일 엄청난 포격을 받았다.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비세르비아인이 살고 있는 여러 마을에 포격을 가했다. 토미슬라브 메르체프가 이쓰는 크로아티아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위의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공격했다. 이 충돌로 세르비아인 30~86명가량이 실종되거나 사망했으며, 수쳔명이 집을 떠나 피난하였다.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 도시는 테러, 무장 투쟁, 도발적인 총격 사건의 희생양이 될 것이며 결국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금까지 추진된 정책으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 공포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했다. 양 측의 무장 세력은 교외 지역의 농장과 가옥 수천 곳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이 갈등은 민족적 배경이 약했다. 스타로세디오치(starosedioci, old settlers라는 뜻)라 불리는 부코바르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많은 세르비아인은 크닌과 베오그라드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선전을 믿지 않고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살아가길 원하며 수세기간 내려왔다. 하지만 1945년 추방당한 독일인 대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지에서 들어온 도실라치(došljaci, newcomers라는 뜻)는 민족주의적 선전에 쉽게 반응했다. 기자 파올로 루미츠는 "애국심을 동원해서까지 민족감정을 끌어내러 했으며 실패할 경우에는 그들을 죽이고 재산과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쫓아냈다. 오랫동안 있었던 스타로세디오치들은 그런 선전엔 잘 반응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크로아티아인이 전투가 벌어져 피난을 갈 때 종종 크로아티아 경찰보다도 신뢰할 수 있다 믿은 세르비아계 이웃에게 자신의 집 열쇠를 맡기기도 하였다. 정치과학자 사브리나 P. 라멧은 동슬라보니아의 전쟁은 "도시의 다문화주의에 대항하여 도시의 다문화 생활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들을 동원"한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베오그라드의 전 시장인 보그단 보그단비치는 부코바르의 공격은 도시주의에 대한 고의적 공격인 우비사이드의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각 군의 병력 1991년 7월 말이 되면 부코바르 내엔 창설하지 얼마 되지 않은 크로아티아 국방군 병력을 세르비아계 준군사가 주변 마을에서 포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세르비아계 민병대, 유고 인민군, 세르비아 영토방위군은 세르비아계 마을에 모여 있었다. 부코바르의 사이미슈테 지역엔 유고군 막사가 있었고 크로아티아 장악 지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양 측은 서로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또는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외에도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민족이 전투에 동참했다. 부코바르를 처음으로 공격한 사령관은 마케도니아인이었다. 반면 크로아티아 방어군 내에서도 일부는 세르비아인 및 기타 민족이 있었다. 크로아티아 병력 부코바르 내의 크로아티아 병력은 새로 수립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이 대부분이었는데, 400명으로 구성된 제3방위여단과 제1방위여단을 포함한 총 1,800명의 병력이 있었다. 제3방위여단 제4대대는 처음엔 도시 내에 주둔해 있었지만, 제1방위여단은 서부 시르미아에 있다가 부코바르로 이동하였다. 방위여단 외에도 경찰관 300명과 부코바르 및 기타 지역에서 건너 온 자원군 1,100명이 있었다. 병력 대부분은 처음에 즉흥적으로 모여 창설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다. 1991년 9월 말에는 제124여단으로 알려진 제204 부코바르 여단이 창설되었다. 자원군은 대부분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이 중에는 극단적 민족주의자 도브로슬라브 파라가의 크로아티아 우익당(HSP)의 지원을 받는 극우 민병대 크로아티아 국방군(HOS) 병력 58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비대는 부코바르 사회 각양각층이 모였다. 이 중 3분의 1는 크로아티아인이 아닌 세르비아계, 루테니아계, 헝가리계 및 기타 민족이었다. 수비군 중 대략 100여명이 세르비아인이었다. 한 크로아티아인 참전용사는 나중에 "이들에 대해선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다"며 "우리와 함께 부코바르를 지켰다"고 회고했다. 부코바르 방위군 사령관은 전 유고 인민군 사령관이었다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으로 넘어가 도시 방어에 합류한 밀레 데다코비치가 맡았다. 전투 기간 동안에는 야스트레브(Jastreb)라는 가명을 썼다. 크로아티아의 새로운 국방부 장관이 된 고이코 슈샤크는 데다코비치를 부코바르 방어에 세르비아인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주장은 여러 독립된 출처에서 언급되었으나 거짓으로 밝혀졌다. 데다코비치 아래의 부사령관인 브란코 보르코비치 역시 유고 인민군 사령관이었다가 부코바르 방어에 합류하였다. 두 사람은 통일된 지휘 체계를 수립하고 수비군을 하나의 여단으로 편성하여 통합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방어 지역을 6개 지구로 나눠 각각 204 여단의 1개 대대씩 맡게 하였다. 또한 수비군은 망처럼 이어진 도시의 지하실, 운하, 도랑을 이용하여 필요할 때마다 병력을 빠르게 재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될 당시엔 수비군 대부분이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절대 다수는 사냥용 엽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병력 대부분은 경보병 무기만 지니고 있었으나 대포와 대공포를 노획하고 지뢰를 즉석에서 만드는 등 무장을 강화하였다. 이 외에도 M79, M80 로켓 발사기 등 대전차 무기 수백 대를 얻었으나 전투 중에는 탄약 부족으로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부코바르의 무장 상황은 유고 인민군 막사 여러 곳을 기습, 무기를 노획하며 그나마 나아졌다. 부코바르에서만 당시 크로아티아군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탄약의 55-60%를 소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 병력 부코바르 공격군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징집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각 공화국 영토방위군, 체트니크(세르비아계 민족주의 민병대), 세르비아 지역 민병대, 유고슬라비아 공군, 유고슬라비아 해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절정기에는 부코바르에 유고슬라비아군 및 세르비아군 병력이 약 36,000명가량 있었다. 이 병력은 중포병, 로켓, 전차 등을 가지고 있었고 항공 지원 및 다뉴브 강에서의 해상 지원을 받았다. 전투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군사가 직접 참여했으나 여기엔 세르비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세르비아의 비밀경찰국인 SDB가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일부 경찰 장교는 부코바르에서 세르비아 영토방위군 병력을 지휘했다. 세르비아 내무부는 민병대 활동을 지시했다. 민병대의 무장과 장비를 책임지기도 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이후 직접적인 전쟁범죄 참여로 기소되었다. 부코바르에서 전쟁 범죄를 행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베셀린 슐리반차닌은 나중에 부코바르를 포격하라는 명령은 밀로셰비치가 살았던 엘리트 베오그라드 지역의 "데디녜"에서 나왔다고 증언했다. 슬로베니아에서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는 유고군은 스스로를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도구가 아닌,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를 수호하는 연방의 방어자라고 인식했다. 유고슬라비아 국방부 장관이자 충성적인 공산주의자인 장군 벨리코 카디예비치는 처음에 유고슬라비아를 강제로 유지시키기 위해 여러 대책을 모색했으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 전쟁에선 유고군이 중립을 선언했다. 유고 인민군 지도부는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 즉 달마티아 해안 거의 대부분과 중부, 동부 크로아티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크로아티아를 이분하고자 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크로아티아 정부가 유고슬라비아 회원국들에게 항복하고 재협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까진 유고 인민군 지도부가 세르비아계에게 지배당하지 않았으며 초기 목표에선 '다민족 지도 하의 유고슬라비아' 유지를 반영했다. 카디예비치는 크로아티아계-세르비아계 각각 절반씩인 혼혈인이었으며, 부관은 슬로베니아인이었고 처음으로 전투가 일어났을 때 유고 공격군 지휘관은 마케도니아인이었으며 전투 중 부코바르를 반복적으로 폭격한 공군 지휘관은 크로아티아인이었다. 열흘 전쟁으로 슬로베니아가 독립해버리면서 온전한 유고슬라비아 유지라는 목표는 달성이 불가능해졌다. 군부 내 많은 세르비아인은 더 이상 다민족 유고슬라비아를 위해 싸우고 싶지 않았다. 유고 군부는 점점 비세르비아계 인이 버려지거나 초안을 거부하면서 세르비아인 성향을 띠게 된다. 일부 유고 인민군 지휘관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반군을 명백히 지원했으며 무기도 제공하기도 했다. 카디예비치 및 기타 고위 인민군 지휘관은 처음에 "유고 인민군은 모든 국가를 방어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결국 이들은 원래 목표를 달성할 기회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자들이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불법적으로 장악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어났던 세르비아인 학살을 재현하며 세르비아인을 위협한다는 프로파간다를 이용했다. 카디예비치는 나중에 부코바르의 방위군이 "크로아티아군의 중추"이며 "해방"시켰다고 말하며 유고 인민군의 공세를 정당화했다. 유고 인민군의 정기간행물인 나로드나 아르미야(Narodna Armija)는 전투 이후 부코바르가 "다뉴브 강 아래로 독일군이 침투를 지원할 준비를 해 왔다"고 주장하는 글을 싣었다. 셰셸은 "우리는 모두 하나의 군대이다. 이 전쟁은 세르비아인에게 크나 큰 시험이다.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승리자가 될 것이며, 이에 빠져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처벌받을 것이다. 우스타샤 놈들이 한 명도 부코바르를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했다. 1차 공세: 1991년 8-9월 부코바르 전투는 90일간 두 단계로 나눠져 있었는데, 1차 시기는 도시가 완전히 포위되기 전인 1991년 8-9월이며 2차 시기는 도시가 완전히 포위되어 유고 인민군이 장악할 때까지의 단계인 1991년 10월 초순-11월 사이 기간이다. 6월이 시작할 즈음에는 부코바르 및 인근 도시는 거의 매일에 가깝게 포병 및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7월에는 유고 인민군과 영토방위군이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에 대규모로 배치되어 부코바르를 3면에서 포위했다. 8월 말이 되면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 23일엔 보로보 나셀례 마을은 대규모 포격을 받았으며 크로아티아군은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이용하여 소코 G-2 갈레브 전투기 2기를 격추했다. 그 다음 날엔 유고 인민군 , 유고 공군, 유고 해군 등이 전투기, 다뉴브 강의 함선, 포병, 전차 등을 동원한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국경 양쪽에서 시작한 이 공세로 광범위한 피해를 입고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 9월 14일, 크로아티아 정부가 모든 유고 인민군 진지 및 무기고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막사 전투라 부르는 일련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부코바르의 인민군 막사도 이 날 공격받았으나 인민군은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이 부코바르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 네고슬라브치를 공격하여 약 2,000명의 민간인이 피난을 떠났다. 대량 학살 및 민간인 사망자가 있었다는 보고서도 있었다. 부코바르 교두보 외곽에 있는 크로아티아군은 인민군 무기고를 급습하여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고, 이는 차후 전투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유고 인민군은 동부 슬라보니아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쳐 빈코브치, 오시예크를 거쳐 자그레브를 향해 서쪽으로 진격했다. 유고 인민군은 지도부에서 포위된 막사를 구원하고 보급선에 가해지는 위협을 없애기 위해 부코바르를 지나치지 않고 정면 공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인민군은 부코바르를 공세의 주요 목표로 둘 의도는 없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스탈린그라드처럼 처음엔 하찮았던 전투가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9월 19일, 유고 인민군은 T-55, M-84 100여대 이상, 장갑차, 중포병을 동원한 채 베오그라드에서 진격하기 시작한다. 9월 20일엔 시드 마을에서 국경을 넘어 크로아티아 내로 진입했다. 크로아티아는 신속히 길을 따라 부코바르로 집결해 모였다. 유고 인민군의 제1기계화방위여단은 부코바르 막사에 도착하여 막사를 포위한 크로아티아군을 깨뜨렸다. 또한 유고 인민군이 부코바르를 포위했다. 9월 30일이 되면 도시가 사실상 완전히 포위되었다. 도시를 향하는 거의 모든 도로가 막혔으며, 막히지 않은 유일한 길은 옥수수밭에 있는 노출된 농장 도랑을 따라 이어진 길 하나 뿐이었다.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를 향해 계속 공격을 가했으나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넓게 펼쳐진 시골에서의 전투를 위해 설계된 장갑차량 등의 무기는 부코바르 도시 내의 좁은 골목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정규 보병의 지원은 부족했으며, 국경방위군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징병된 병력으로 별다른 전투 효율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인민군은 시가전을 수행하는 방법을 거의 알고 있지 못했으며 장교들은 느리고 수동적인 의사 결정을 내렸다. 크로아티아군은 진입할 수 있는 도로에서 대전차 무기를 가진 이동형 분대를 파견해 인민군을 공격했으며, 수많은 저격병을 배치하고 잘 요새화된 곳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유고 인민군은 처음에는 길을 따라 한대 모인 기갑부대가 진격하고 그 주변을 보병 중대가 호위하는 형태로 따라갔다. 크로아티아군은 20m도 안되는 거리에서 대전차 무기를 이용하여 선두 및 후미 차량을 무력화 하고 나머지 대열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크로아티아는 무력화한 차량을 중요한 보급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유고 인민군의 모든 차량을 파괴하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유고 인민군과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히트 앤 런 전략을 이용한 "능동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대전차 지뢰 및 대인지뢰를 이용하여 인민군의 기동을 방해했다. 또한 기상 측량 로켓과 밤에 인민군 전차가 주차되어 있을 때 몰래 그 아래에 지뢰를 심어 놔 아침에 승무원이 기동을 시작했을 때 폭발하게 만드는 사보타주 등을 통하여 비전통적인 독특한 전술로 유고 인민군의 사기를 낮췄다. 인민군의 사상자는 매우 심했다. 한 도로는 "전차의 묘지"로 불렸는데 인민군 전차 약 100대가 한 자리에서 파괴되었으며 그 중 15대는 대령 마르코 비비치 혼자서 파괴한 것이었다. 사상자가 많아지면서 지휘 계통을 따른 병력 대부분의 사기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유고 인민군은 도시를 향해 포병 포격 및 로켓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가 끝날 때 즈음이면 부코바르엔 최대 포탄 및 미사일 70만개가 하루에 17,000개 꼴로 떨어졌다. 부코바르 및 인근 지역은 20mm 이상 구경의 포탄이 총 250만 탄 이상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진 포격은 스탈린그라드보다 더욱 높은 밀도였다. 부코바르에 남아 있던 수천명의 민간인은 지하실 및 냉전 시기 지어진 포격 대피소에서 몸을 피했다. 인민군의 약점과 새 전술 도입 유고 인민군의 보병 지원 부족은 재앙적인 병력 동원률 부족으로 인해 일어났다.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모든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에서 추방된 예비군 병력은 인민군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였으며 징병된 병력은 싸우기를 거부하고 도망가는 일이 잦았다.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진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내리는 동원령도 내리지 않았다. 세르비아계 사람 15만명 이상이 징병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떠났으며 해외로 떠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도망가거나 숨었다. 징집 대상 병사 중 13%만 실제로 징병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세르비아 전역엔 대략 4만명에 달하는 반군이 있었으며 세르비아 신문 브레메는 1991년 7월 이러한 상황을 "군사의 총체적 붕괴"라고 표현했다. 인민군은 전장에서의 사기도 낮았다. 인민군 지휘관은 총을 쏴서 부하들에게 싸우게 할 정도였다. 부코바르의 유고 인민군 지휘관은 누가 기꺼이 싸울 지, 집에 가고 싶은 지를 알기 위해 두개 무리로 나눴는데, 어느 쪽을 갈 지 결정할 수 없었던 징집병 한 명은 총을 쏴 자살했다. 부코바르에 있었던 인민군 장교 한 명은 나중에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이 "전투 차량과 무기를 버리고 평지에 모여 앉아 존 레논의 Give Peace a Chance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10월 말이 되면 세르비아의 노비사드에서 온 보병 대대 전원이 보로보 나셀레 공격을 포기하고 탈영했다. 또 다른 예비군 병력 무리는 무기를 버리고 가까운 다리를 건너 세르비아로 도망갔다. 전차 운전병이었던 블라디미르 지브코비치는 자신이 몰던 전차를 부코바르 최전선에서 베오그라드의 유고슬라비아 의회 건물까지 몰아 건물 한켠에 주차했다. 그는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정신 이상자로 낙인찍혔다. 그의 처우에 격분한 동료들은 총기를 난사하여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고 "우리는 반역자가 아니지만, 침략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며 항의했다. 9월 말부터는 부코바르 작전 지휘관으로 지보타 파니치가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인민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조직을 해결하기 위해 새 본부와 지휘 통제 체계를 수립하는 개편을 단행했다. 파니치는 인민군 병력을 남부와 북부 2개의 책임구역으로 분할했다. 북부 구역은 믈라덴 브라니치 소장이, 남부 구역은 밀레 므르크시치 대령이 지휘를 맡았다. 막 증원된 부대에 더해 세르비아에서 온 자원군 민병대 병력도 합류했다. 민병대는 무장 수준이 좋았고 사기가 높았으나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잔인했다. 민병대 병력은 누락된 징집병을 대신하여 중대와 대대 규모로 편입되어 지휘를 받았다. 노비사드 군단의 지휘관은 전투 이후 녹화한 영상에서 나중에 "아르칸"이라 알려진 젤코 라주나토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였다. 파니치는 사기가 높은 민병대 보병에 훈련받은 공병대가 지뢰와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중장갑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혼성 공세를 진행했다. 민병대 조직은 9월 30일부터 시작되는 새 공격의 주공을 맡았다. 부코바르로 향하는 크로아티아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마린치 마을을 공격하였고 10월 1일 점령에 성공한다. 직후 크로아티아 제204여단의 지휘관인 밀레 데다코비치는 소규모 호위대로 세르비아 전선을 돌파하여 탈출, 근처의 작은 크로아티아 마을인 빈코브치 마을에 도착했다. 데다코비치의 부관인 브란코 보르코비치가 부코바르 방어전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부코바르 교두보 외곽의 크로아티아군을 이끄는 장군 안톤 투스는 데다코비치를 도시 포위를 풀기 위한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3일 반격을 시작했다. 아침 일찍 포병 작전을 시작으로 병력 800명과 전차 10대를 동원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특수경찰은 정오가 되기 전에 마린치 마을에 닿았으나, 전선을 유지할 만한 병력이 없어 결국 퇴각하였다. 크로아티아군 전차와 병력은 유고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누스타르 마을에서 포격으로 진격이 중지되었다. 유고 인민군 제252기갑여단이 크로아티아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고 13시경 크로아티아군은 모든 공세를 중지했다. 이후 적십자사의 인도주의적 호송대가 부코바르 마을로 향했다. 2차 공세: 1991년 10-11월 전투가 끝나가는 동안, 세르비아인 수천 명을 포함한 부코바르 내에 남은 주민들은 최대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실 및 공동피난소로 들어가 피난했다. 부코바르 시립 병원 지하의 핵벙커에는 위기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마을 행정을 통제하고 식량, 물, 의약품 보급을 총괄했다. 거리에 있는 민간인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보호받는 각각의 피난처 내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의사와 간호사가 배치되어 있도록 하였다. 부코바르 병원에선 수백 명의 부상자를 치료해야 했다. 9월 둘째 주가 되면 부상자는 하루에 16-80명 꼴로 나왔으며 이 중의 3/4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부코바르 병원은 적십자 표식을 그렸으나 정작 전투 중 800발 이상의 포격을 맞았다. 건물 대부분은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직원과 환자는 지하 관리용 회랑을 통해 이동해야 했다. 중환자실은 병원 내의 핵벙커로 옮겼다. 10월 4일,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병원을 폭격하여 수술실을 파괴했다. 하나의 폭탄이 여러 층을 뚫고 지나가면서 폭발하지 않고 한 사람 발 밑에 떨어지는 일도 있었으나 부상을 입진 않았다. 크로아티아군은 안토노프 An-2 수 기를 동원하여 부코바르 내로 보급품을 낙하 보급시켰다. 또한 보급품 외에도 화약 및 금속 막대로 가득 찬 폭발물과 보일러로 만든 즉석폭탄도 투하하여 폭격을 시도했다. 승무원들은 GPS를 이용하여 표적의 위치를 찾은 후 측면에 있는 문을 열어 떨어뜨렸다. 유럽 공동체는 교두보 안에 갇혀 있는 민간인 12,000명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하러 시도했으나 겨우 하나의 호송대만 원조할 수 있었다. 10월 12일엔 크로아티아가 호송대 이동을 위해 군사 행동을 중단했으나, 유고 인민군은 이 전투 중단 시기를 차후 군사 작전을 위한 보충 기간으로 이용했다. 일단 호송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인민군은 대인 지뢰 살포를 통해 이틀을 지연시켰고 그 동안 병력을 보강하고 인민군이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호송대가 부코바르로 도착하고 나선 부코바르 병원으로 의약품을 전달하였고 부상자 114명을 싣어 대피시켰다. 10월 16일, 유고 인민군은 보로보 나셀레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일부 진전이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크로아티아군의 강한 저항으로 수렁에 빠졌다. 10월 30일엔 유고 인민군이 준군사 조직이 주공을 맡고 보병 및 공병대가 체계적으로 크로아티아군의 전선을 비껴가도록 하는 체계적 공세를 시작했다. 북부 및 남부 작전 구역으로 나눈 인민군은 여러 차례 동시에 공세를 가해 크로아티아군을 후퇴시켰다. 또한 인민군은 집 안에다가 사격을 하며 최루탄과 발연통을 쏴서 내부에 있던 사람을 쫓아낸 후 전차를 기동하는 등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 또한 건물도 대전차포 및 대공포를 동원하여 장악했다. 11월 2일, 유고 인민군은 보로보 나셀레와 부코바르 사이에 있는 전략적 교외 지역인 루자치에 도착하며 마을 중심과 북부 교외로 향하는 2개 도로 중 하나를 끊었다. 한편,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나중에 크로아티아 육군으로 개칭)은 마린치와 세리치 마을을 되찾아 부코바르로 향하는 보급로를 개척하기 위해 공세를 시도했다. 유고 인민군의 부코바르로 향하는 가용 도로에 강렬한 포격을 했으며 인민군 보급로를 전차로 공격했다. 11월 4일엔 인민군 장군인 믈라덴 브라니치가 전투 중 포탄이 탑승해 있던 전차에 직격하여 사망했다. 하지만 강력한 유고 인민군의 포격 및 로켓 공격으로 크로아티아군의 공세가 돈좌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부코바르 함락 유고 인민군 부대는 11월 3일 루자치 북쪽의 다뉴브 강을 건너 아르칸이 이끄는 준군사 조직 "타이거"와 연결하기 위해 수륙 양용 작전을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크로아티아군의 교두보가 반으로 갈라졌고 보로보 나살레의 작은 거점과 부코바르 시내의 큰 거점 2개로 쪼개졌다. 인민군의 남부작전군은 도시 중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며 남아있는 크로아티아 병사를 분쇄했다. 이 군은 11월 9일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주요 고지인 밀로바 브르다를 점령하여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공격은 준군사 조직이 주공을 맡았으나 유고 인민군과 영토방위군이 군사적 지원을 해줬으며 특히 해체 작업 및 근거리 포격 지원을 전폭적으로 제공했다. 부코바르 서쪽의 크로아티아군이 장악하고 있단 보그다노브치는 11월 10일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민간인 87명이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11월 13일엔 인민군이 보로보 나셀레와 부코바르를 잇는 마지막 거점을 장악, 차단했다. 부코바르 교두보 외곽의 크로아티아군은 누시타르 마을에서 부코바르의 포위를 깨뜨릴 마지막 공격을 가했으나 유고 인민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이 즈음 크로아티아군은 탄약이 바닥났고 구호의 전망 없이 24시간 내내 계속된 전투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부코바르 포위망은 3개의 작은 포위망으로 줄어들었다. 패배가 눈앞에 보임에 따라 유고 인민군이 최후의 공세를 감행하면서 크로아티아군 및 민간인 수백 명이 며칠간 부코바르 탈출을 감행했다. 보로보 나셀레에 갇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탈출을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이 살해당했다. 11월 18일, 부코바르 마을 중앙에 있던 마지막 크로아티아 병사가 항복했다. 11월 18일까지 부코바르에 있던 많은 민간인이 악조건에서 살고 있었으며 식량 부족으로 기아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한 여성은 유엔 특사로 파견된 사이러스 밴스에게 지난 두 달간 대피소에서 5명의 자식과 함께 화장실 및 씻는 물을 이용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하루 2조각의 빵과 파테 한조각으로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 병사 한 명은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 몇 주 동안 피난처에서 떠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은 파괴된 마을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크로아티아 라디오의 기자이자 부코바르 출생으로 전투 기간 동안 계속 남아있었던 기자 시니샤 글라바셰비치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부코바르 중앙의 전투는 11월 18일 끝났지만, 마을 곳곳에선 산발적 전투가 계속되었다. 일부 크로아티아 병사는 11월 20일까지 저항했고, 그 중 일부는 11월 23일 보로보 나셀레에서 탈출했다. 해외 언론인과 국제 감시단은 도시의 항복 후 안으로 들어와 본 것을 기록하였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블레인 하든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뉴욕 타임스의 처크 수데틱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라우라 실버와 BBC의 앨런 리틀은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길거리에 어지럽게 널러 있었다. 건물의 거대한 골격은 불타고 있었으며 성한 곳은 거의 없었다. 세르비아 자원군은 야생의 눈으로 거리를 질주하고 주머니는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마구 약탈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고 인민군은 승리를 자축하며 마크 챔피언은 인디펜던트 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사상자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는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가 심각했다. 크로아티아측은 처음엔 포위전으로 군인과 민간인 합쳐 1,79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크로아티아 장군 안톤 투스는 나중에 크로아티아 군인 1,100명이 사망하고 군인 및 민간인 2,600명이 실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투스는 빈코브치 및 오시예크 지역에서 크로아티아군 1,100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투가 너무 격렬하여 1991년 9월부터 11월 사이 동슬라보니아에서 일어난 인명 손실이 그 해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2006년 크로아티아 국방부가 발표한 통계에서는 부코바르에선 군인 879명이 사망하고 77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는 슬라보니아 동부 전역에서 크로아티아인 사상자가 대략 4-5천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제204 부코바르 여단은 부코바르 전투로 전력의 60% 이상이 손실되었다. CIA 보고서에서는 전투 기간 동안 민간인 사망자가 1,131명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크로아티아 정부에서는 1991년 말까지 슬라보니아 동부에서 크로아티아인 2천명이 사망, 800명이 실종, 3천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난민 42,852명이 나왔다고 보고했다. 세르비아 및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손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컸으나 정확한 수치는 공식 자료의 부족으로 불분명하다. 유고 인민군은 공식적으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전체 기간 동안 장교 177명을 포함 총 1,279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사역사학자 노먼 시가는 전쟁 중 사상자가 지속적으로 과소보고되었으며 실제 사상자는 매우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톤 투스는 유고 인민군의 노비사드 군단이 동슬라보니아에서 1,300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부 슬라보니아에서 정규군 및 자원군을 합쳐 6천명에서 8천명이 사망했으며, 중무기 및 장갑차 600대가 손실되었고 항공기 20기가 격추되었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 측은 이 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전쟁 후 대령 밀리슬라브 세쿨리치는 전투로 유고 인민군 및 영토방위군 1,18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노비사드 군단의 전 지휘관이었던 장군 안드리야 비오르세비치는 "우리 편은 대략 1,500명 정도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 수치는 역시 같은 인민군 장군이었던 지토바 파니치도 같이 주장했다. 1997년, 세르비아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기자 미로슬라브 라잔스키는 베오그라드의 신문 베체르녜 노보스티에서 "유고 인민군 및 영토방위군, 자원군을 합쳐 1,103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장갑차 110대가 손실되었고 항공기 2기가 격추되었으며 또 다른 한 기는 기술적 문제로 추락했다고 말했다. 당시 라잔스키의 수치는 은퇴한 인민군 장군 3명이 지지했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의 소식통에서는 전투 중 영토방위군 병사 203명과 민간인 147명을 포함한 부코바르 내 세르비아인 35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전쟁 범죄 전투 이후 많은 크로아티아 군인과 민간인이 약식처형을 당했다. 기자들은 부코바르 대로에서 한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 이 외에도 민간인 복장을 한 시체가 도로 여기저기에 흩어저 있는 것도 목격했다. BBC 텔레비전 기자들은 세르비아계 민병대 병사가 "Slobodane, Slobodane, šalji nam salate, biće mesa, biće mesa, klaćemo Hrvate!"(슬로보단, 슬로보단,우리에게 고기가 (될 사람을 위한) 셀러드를 보내시오. 그들은 고기가 되어, 고기가 되어 크로아티아인은 도살당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유고 인민군 예비군에 있던 세르비아인 기자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부코바르 병원 안에 있던 비세르비아계 환자, 의료진, 지역 정치인 및 피난처를 찾아 대피해 있던 사람들 400명이 유고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일부는 풀러났으나 약 200명은 인근의 오브차라 수용소라 불린 오브차라 농장으로 끌려가 이송당했으며 나중에 부코바르 학살이라 불리게 되는 학살을 당한다. 또한 최소 50명이 다른 곳으로 끌려갔으며 이들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수천 명이 세르비아 및 세르비아계 준군사가 통제하는 크로아티아 내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부코바르 학살 이후에도 대량 살해는 계속되어 이전에 학살당한 경험이 있던 부코바르 북부의 달 마을에선 부코바르 출신의 수많은 포로들이 가혹한 심문과 구타, 고문을 당했으며 이들 중 최소 35명 이상이 사망했다.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에 있는 베레프로메트 수용소라 불린 산업시설에 2천명을 투옥했으며 이 중 인민군이 800명은 전쟁 포로로 분류했다.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심문을 당했으며 몇몇은 영토방위군 및 준군사 조직이 즉결총살하였으며, 또 다른 몇몇 사람들은 오브차라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나머지 포로는 스렘스카미트로비차에 있는 유고 인민군이 운용하는 감옥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포로는 도착 직후 모든 옷이 벗겨지고 심문을 당했으며 몇 주 동안 벌거벗겨진 채 나무 바닥에서 자도록 강요당했다. 포로 대부분은 1992년 1월 유엔 특사인 사이러스 밴스가 중재한 협약에 따라 풀러났다. 나머지는 1992년 중반까지 포로로 수용되어 있었다. 특히 크로아티아측에 붙어 싸운 세르비아인은 '배신자'로 간주되어 체포될 시 더욱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군사 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수감자들은 부코바르에서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으로 탈출했다. 부코바르 도시 및 인근 지역의 비세르비아계 사람들은 체계적인 인종 청소를 당해 부코바르 내 주민들 2만명은 강제 추방당했고 동부 슬라보니아 전역에선 수만 명이 추가로 추방당했다. 전투 결과 대략 2,600명이 실종되었다. 2017년 11월 기준 현재 44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소재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전시 강간 사건도 발생했는데, 전후 이에 가담한 군인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세르비아군은 여러 유명인사를 선별했다. 그 중에서는 크로아티아에서 위인으로 여겨졌으나 세르비아계 언론에서 악의적으로 묘사된 부코바르 병원장 의사 베스나 보사나츠도 있었다. 그녀와 남편은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교도소로 끌려가 몇 주간 60명의 다른 여성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남편은 반복적인 구타를 당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항소 이후 부부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기자 시니샤 글라바셰비치는 오브차라 수용소로 끌려가 심각한 구타를 당한 후 다른 학살 피해자처럼 총살당해 사망했다. 부코바르는 함락 이후 체계적으로 약탈당했다. 부코바르에 있었던 한 유고 인민군 병사는 세르비아 신문 '드네브니 텔레그라프'에서 "체트니크 [준군사]는 전문적인 약탈가처럼 행동했으며 약탈할 집에서 무엇을 약탈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유고 인민군이 약탈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는데, 세르비아 국방부 관계자는 "한 예비군 병사에게조차도 말해 주며, 특히 전선에 한달 넘게 있었던 장교의 경우에는 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가득히 마음 껏 가져갈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전투 기간 동안 미술품 8천 점이 약탈되었는데 이 중에선 포위 기간 동안 포격으로 파괴된 엘츠 마노르 부코바르 시립 박물관의 작품도 포함되었다. 이후 세르비아는 2001년 12월 약탈했던 미술품 중 2천점을 반환했다. 전범 기소 및 재판 유고 인민군 장교인 밀레 므르크시치, 베셀린 슐리반차닌, 미로슬라브 라디치 3명은 2002년-2003년에 항복하거나 체포된 사람에 대한 인도에 반한 죄 및 여러 전시국제법 위반죄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기소되었다. 2007년 9월 27일, 므르크시치는 살인 및 고문 혐의로 20년형을 받았고, 슐리반차닌은 고문으로 5년형을, 라디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항소판결에서 슐리반차닌은 17년형으로 늘어났다. 2차 항소 후에는 10년형으로 줄어들었으며 2011년 7월 조기 석방되었다. 부코바르의 세르비아계 시장인 슬라브코 도크마노비치도 학살에 참여한 혐의로 기소되어 체포되었지만 1998년 6월 판결 직전 자살하였다.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인 보이슬라브 셰셸은 그가 지휘한 "흰 독수리" 민병대의 부코바르 병원 학살 및 여러 건의 학살을 주동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6년 3월 셰셸은 모든 보류된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8년 4월 11일, 국제형사재판기구의 항소기구인 국제형사재판 항소재판소에서 1992년 5월 보이도디나의 크로아티아인 절멸 발언 연설로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부코바르 등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일으킨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ICTY는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동슬라보니아를 포함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에서 비세르비아계인을 제거하기 위한 공동범죄집단(JCE)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및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직접적으로 지휘, 공세를 펼쳐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지목했다. 밀로셰비치는 전후 수많은 인도에 반한 죄, 국시 국제전쟁법 위반, 제네바 협약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밀로셰비치는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06년 3월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내에서 활동했던 세르비아군 지휘관 고란 하지치는 "주택, 종교 및 문화적 사적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동슬라보니아에서 "군사적 필요성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황폐화 작전" 및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인 강제 추방 혐의로 기소되었다. 하지치는 수 년간 잠적하다 7년만인 2011년 7월 체포되었고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 등 14건의 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치는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16년 7월 사망했다. 2005년 12월, 세르비아 법원은 부코바르 병원 학살에 연루된 전 민병대 조직원 1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2011년엔 세르비아 법원이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크로아티아인 40명을 기소했다. 크로아티아 병사에 대한 초기 기소는 불규칙한 수사 내용으로 중단되었다. 크로아티아 법원도 전 유고 인민군 장군인 벨코 카디예비치와 블라고예 아지치를 포함하여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세르비아인을 다수 기소했다. 아지치는 재판에 참여하지 않다가 2012년 3월 베오그라드에서 자연재해로 사망했다. 카디예비치는 밀로셰비치 정권이 무너진 후 유고슬라비아에서 탈출, 러시아로 망명을 요청했다. 그는 2008년 러시아 시민권을 얻고 2014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99년엔 크로아티아가 부코바르에서 대량학살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유고슬라비아를 고소했다.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해체되면서 피고소자가 세르비아로 넘어갔다. 2015년 2월, 전투와 계속되는 학살 자체가 "제노사이드" 범죄는 아니지만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및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이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은 인정했다. 정치적 측면 선전 활동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 언론은 전투 진행 및 그 배경에 대해 선전 투쟁을 벌였다. 양 측의 선전 기구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을 목표로 객관성이나 자기비판적 분석 없이 상대편을 경멸하였다. 크로아티아 언론은 세르비아군을 "세르비아족 테러리스트"나 "세르비아 공산당 점령군"으로 천년만에 독립의 꿈을 이룬 크로아티아를 분쇄하러 한다고 말했다. 선전 활동은 부코바르 함락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크로아티아의 일간지인 노비 리스트는 세르비아를 "식인종"이나 "잔인한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반대로 세르비아 언론은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군을 세르비아 국민의 "해방자"이자 "수비군"으로 칭하며, 크로아티아군을 "우스타샤같은 군단", "블랙셔츠", "무장 세력", "술에 취한 괴물들"이라고 비난했다. 이 외에도 크로아티아군이 마을을 탈출하기 위해 "여성복을 입어 여장하여 탈출"했다거나 "흑인"을 전투대원으로 썼다는 등 근거 없는 인종차별 및 젠더 편견도 있었다. 희생자의 상태는 양 측 선전 기구의 핵심 주장으로 쓰여졌으며, 양 측이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하였다. 익명의 희생자가 크로아티아 언론에선 크로아티아인으로, 세르비아 언론에선 세르비아인으로 밝혀지며 서로가 이용하였다. 세르비아계 반정부 성향 신문 '레푸블리카'는 국영 방송국 TV 노비사드는 기자들에게 "세르비아인 시체"로 확인된 것을 촬영하라 내보래나는 압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전투 후엔 베오그라드 TV가 부코바르 병원 앞에 줄지어 있는 수백 구의 시체를 보여주며 이들은 크로아티아인에게 학살당한 세르비아인이라고 주장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에서는 이 시신들은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들로, 세르비아의 포격으로 땅에 묻어 매장하지 못하고 눕혀둔 채 방치된 시체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세르비아에서는 부코바르 함락 후 얼마 안 가서 "부코바르에서 학살당한 세르비아인"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위와 같은 희생자 중심의 선전 활동은 강력한 동기 부여 효과를 주었다. 한 세르비아인 자원군은 한 인터뷰에서 전쟁 전에 마을을 가 본 적이 없었으나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를 고문하고 학살하는 도시 내 학살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로이터 지는 크로아티아 병사가 부코바르에서 어린이 41명을 학살했다고 오보를 하였다. 이 오보는 하루 후 정정되었으나 세르비아 언론에서는 크로아티아에 대한 군사 활동을 정당하기 위해 이 보도를 활용했다. 부코바르 공세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은 적대적인 점령군에게서 도시를 해방시키는 투쟁을 해온 것이라고 믿었다. 국제적 반응 국제 사회는 전투 종식을 위해 수 차례 휴전 중개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양 측은 휴전 선포 몇 시간도 안되어 이를 위반하였다. 일부 유럽 공동체 회원국이 서유럽 연합에게 군사 개입을 요구했으나 영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무산되었다. 대신 피터 캐링턴 경을 의장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회담이 수립되어 분쟁 종식 협상을 시작하였다. 유엔은 1991년 9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13호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무기 금수 조치를 가했으나 유고 인민군은 무기 수입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분쟁 제한 시도는 실패하였다. 유럽 강대국들은 통일 유고슬라비아를 유지시키는 데 실패하자 이를 포기하고 1992년 1월 1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국제 감시단은 전투 중 일어난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마렉 골딩과 사이러스 밴스 유엔 사절단은 유고 인민군의 체계적 방해를 받았다. 부상을 입은 환자가 살해당했던 병원을 보여달란 밴스의 요구에 학살의 전두지휘자 중 한 명인 베셀린 슐리반차닌이 적극적으로 이를 막았다. 또한 베셀린은 적십자 대표를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세우며 TV 카메라에 녹화된 기록에서 "이곳은 내 국가고, 우리는 이곳을 점령했소! 여긴 유고슬라비아고, 나는 이곳을 지휘하오."라고 말했다. 부코바르에선 국제적 언론의 취재가 없었기 때문에 이후 비슷하게 일어난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이나 이후 일어난 사라예보 포위전과 달리 부코바르 포위전은 외국인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미샤 글레니는 유고 인민군, 크로아티아 영토 내의 세르비아계 정부, 기타 세르비아인들은 해외 언론에 적대적이었던 반면 크로아티아인들은 이보다는 더 개방되고 환영받는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의 반응 크로아티아 언론은 전투 초기부터 부코바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저널리스트 시니샤 글라바셰비치는 포위된 마을 내에서 계속해서 부코바르의 상황을 중계하였다. 또한 "VukoWAR"라고 부르는 전쟁 포스터와 같은 전시 예술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부코바르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부코바르는 포격받지만 함락되지 않을 것", "부코바르는 결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전 슬로건을 내놓았지만 글라바셰비치의 방송을 막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의 주요 양대 일간지인 베체르니 리스트, 노비 리스트는 부코바르 함락과 같은 내용이 검열되었으며 함락 이틀 후인 11월 20일에도 부코바르에선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를 내놓았다. 부코바르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세르비아의 선전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곧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서구 외신 위성방송을 통해 유고 인민군 군인과 세르비아 준군사 병력이 마을을 자유롭게 다니며 주민들을 억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항복했다는 소식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양대 일간지는 부코바르 함락은 크로아티아의 용기와 저항을 보여준 것이며, 크로아티아를 돕지 않고 개입하지 않은 국제 사회를 비난하였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전투 과정에서 여러 비판을 받았다. 살아남은 수비군과 우파 정치인들은 크로아티아 정부가 국제적 인지도를 확보하기 위해 부코바르를 고의로 희생하고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람들은 부코바르 함락이 음모론의 일부로 희생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군 지휘관인 밀레 데다코비치, 브란코 보르코비치는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며 정부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비판하고 다녔다. 정부는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해 크로아티아 헌병에게 잠시 억류되기도 하였다. 또한, 크로아티아 정부는 일간지 슬로보드니 체드니크가 부코바르에서 데다코비치가 군 증원을 간청했으나 대통령 투지만이 이를 회피하는 듯한 전화 녹취록을 싣은 것을 검열하였다. 이 녹취록이 폭로되면서 대중이 분노하였고 수비군이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군사적 관점에서는 부코바르 함락이 크로아티아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크나 큰 재앙은 아니였다. 전투로 유고 인민군의 후방이 깨지며 유고 인민군은 완전히 소진되어 더 이상의 진격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부코바르는 3면이 세르비아가 장악한 영토로 둘러싸여 이미 방어가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며 부코바르에서 자그레브보다는 베오그라드가 더 가까웠다. 부코바르 전투의 패배는 전략적 측면에선 크로아티아군의 사기를 낮췄지만 도시 함락에 비해 유고 인민군이 입은 손실과 시간적 지연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컸다. 전투 이후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의 저항과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전투 생존자, 참전용사, 언론인들은 전투와 그 상징에 대해 수많은 회고록, 노래, 비망록을 작성하며 부코바르를 "경의로움", "자존심", "지옥", "크로아티아의 기사" 등 다양하게 불렀다. 작가들은 "부코바르 원리", "부코바르 영성", "부코바르 윤리" 등을 외치며 수비군 및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자질을 강조하였다. 크로아티아의 참전 용사들은 부코바르라는 이름의 메달을 수여받았다. 1994년, 크로아티아가 자국 화폐인 크로아티아 디나르를 새 화폐인 크로아티아 쿠나를 발행하면서 새 20쿠나 지폐에 부코바르에서 파괴된 엘츠 성과 부코바르 근처에 있는, 동슬라보니아의 고대 신석기 유물인 부체돌 도베의 그림을 넣었다. 이 그림은 발행 당시 세르비아 통제 하에 있던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 문화를 강조하였다. 1993년과 1994년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영토로 돌아올 때에 어떻게 재건할 지에 대해 국가적 논쟁이 있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마을을 전쟁추모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권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은 부코바르 지역이 크로아티아로 돌아오기 전 수 년간 부코바르와 관련된 대중 문화를 선전에 이용했다. 1997년,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Sve hrvatske pobjede za Vukovar'(부코바르를 위한 전크로아티아의 승리)라는 이름의 음악 캠패인을 개최하고 동슬라보니아 전역을 순방하였다. 이 캠패인은 크로아티아 레코드의 애국 음악 편집본 발매와 함께 이루어졌다. 1998년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영토로 돌아오면서, 이 회복은 크로아티아 국민의 정체성의 회복을 위한 오랜 투쟁을 이뤄낸 것으로 축하받았다. 투지만 대통령은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영토로 돌아오면서 재통합 기념 연설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르비아의 반응 부코바르 전투에서 세르비아는 방어와 단합이라는 명분으로 진행했지만 세르비아 내 여론은 크게 두개로 갈려졌다. 유고 인민군, 국영 세르비아 언론, 세르비아 내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부코바르에서 승리를 거둔 것에 환호했다. 유고 인민군은 베오그라드에서 부코바르에 승리한 승전 기념 행진식을 벌였고, 장교들은 "가장 치열하고 힘들었던 우스타샤 요새 함락전"에 승리한 것에 축하를 보냈다. 세르비아의 일간지 폴리티카는 11월 20일자 신문에서 1면 맨 위에 "부코바르 해방되다"라는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넣었다. 1992년 1월, 부코바르의 폐허에서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화가 밀리치 스탄코비치는 세르비아의 정기 간행물 잡지인 포글레디에서 "유럽은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나치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중부유럽 쓰래기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교황관 아래서 비대해진 크라우트에서 뱀의 화살처럼 튀어나와 유럽 공동체의 뒷구멍을 해집었다"라고 기고했다. 세르비아의 지리학자 요반 일리치는 이 지역의 미래 계획을 세웠는데, 세르비아에 병합됨과 동시에 이 지역의 크로아티아인을 모조리 추방한 후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에 있던 세르비아인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세르비아인을 단일 국가로 통일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국경을 다시 그린 후 일리치가 "민족적 정신장애자"라 규정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크로아티아인'을 치료하기로 계획했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새 국경은 기본적으로 크로아티아인 전부를 포함하는 "민족적 정신장애자"를 치료할 수 있는 치료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작가는 역사적 증거 상 동슬라보니아는 오랫동안 크로아티아인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이 지역 대다수의 "카톨릭교로 개종하고, 통일화되어 크로아티아화 되버린" 크로아티아인들은 "인종청소와 같은 대파괴"라고 비난했다. 대부분의 민족통일주의 선전은 세르비아와의 거리 및 세르비아 다수 인구 지역을 강조하였다.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지도부도 전투 결과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1991-1995년동안 부코바르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부코바르 함락일은 '해방의 날'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었다. 부코바르 전투는 크로아티아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의 삶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세르비아인의 투쟁이 성공한 것으로 묘사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3개월 가까이 지하실이나 방공호에서 피난처를 제공하며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인들과 함께 어려움을 겪었던 세르비아인 수천명은 '지하실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포드루마시(podrumaši)라고 모욕하였다. 세르비아인 민간인 사망자는 인정받지 못했으며 부코바르의 세르비아 기념 묘지에 매장된 사람들은 유고 인민군과 함께 또는 그곳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지역민들만 포함되었다. 이와 반대로 세르비아 내 많은 사람들은 전투 및 광범위해지는 전쟁을 강력히 반대했으며 국가가 분쟁에 개입하러는 것에 저항하였다. 유고 인민군이 예비군을 소집할 때 부모와 친척들은 막사에 모여 자녀들이 작전에 참여하러는 것을 막았다. 징병 저항 운동은 세르비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 개별적인 저항 행동에서부터 한번에 수백 명의 예비군이 단체로 저항하는 등 그 양상도 다양했다. 다수의 세르비아 야당 정치인도 전쟁에 반대했다. 민주당의 데시미르 토시치는 밀로셰비치를 "분쟁을 정권 장악에 이용한다"고 비난했으며 세르비아 부흥 운동의 지도자인 부크 드라슈코비치는 인민군 병사에게 "총을 놓고 도망가라"고 말했다. 부코바르 함락 이후에는 신문 보르바에 유고슬라비아의 이름으로 행해진 여러 행위를 비판하는 논설을 기고했다. 부코바르가 함락된 지 1달도 안된 1991년 12월 말 열린 여론조사에서는 67%가 전쟁이 즉각적으로 끝나야 하며 27%만 전쟁을 계속하는 데 찬성했다. 밀로셰비치 대통령 및 세르비아 지도부는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으나 크로아티아에서 싸울 징집병을 더 동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힘든 것으로 보였다. 유고 인민군 병력의 이탈이 계속되며 크로아티아군은 장비가 좋아지며 사기도 높아져서 공격하기 점점 힘들어졌다. 1991년 말 세르비아 정치 및 군 지도부는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보스니아에서 어렴풋이 계속되는 분쟁으로 크로아티아에 묶여 있는 군사 자원을 풀어야 했기도 했다. 공개적으로는 전투를 승리했다고는 발표했지만, 유고 인민군의 성격과 지휘엔 큰 영향을 미쳤다. 육군 지휘부는 유고 인민군이 "제 2의 부코바르"라고 평가했던 중앙 크로아티아의 전략적 지역인 고스피치와 같은 강력한 방어를 갖춘 도시에 대한 작전 수행 능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육군의 "세르비아인화"가 가속화되어 1991년 말이 되면 군 내 90%가 세르비아인으로 채워졌다. 예전에 내세웠던 공산주의 범유고슬라비아 정체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장교들은 이제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대, 군, 또한 조국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사랑하도록 교육받았다. 유고 인민군의 패배로 세르비아 정부는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군 지도부는 친밀로셰비치 민족주의자로 교체되었다. 전투 이후 장군 벨리코 카디예비치는 "건강상의 이유로" 강제로 퇴역하였고 1992년엔 장성 및 기타 장교 38명이 무능력함과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전투에 참여했던 유고 인민군 병사 개개인 중 다수는 자신들이 보았던 것에 대해 반발하였고 민병대의 행동에 대해 상관에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대령 밀로라드 부치치는 나중에 "그들은 단지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병사들이 목격한 잔학 행위로 일부는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겪기도 했다. 한 유고 인민군 참전용사는 아랍 신문 아샤르크 알아우사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타 유고슬라비아 내 반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보스니아 국민에게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는 근거로 초안을 반대하는 텔레비전 방송에 나왔다. 그는 크로아티아에서 행해지는 "악의적인 행위"에 저항하는 것을 "권리이자 의무"라고 하며 "원하는 사람은 받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이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유고 인민군이 보스니아 동북부의 비셰그라드 지역을 경유해 전선으로 향할 때 이 지역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 무슬림은 바리케이드와 기관총을 설치했다. 이들은 전차 60대의 전진을 멈춰세웠으나 다음 날 강제로 해산당했다. 이 지역에서 천여 명 이상이 피난을 떠났다. 보스니아 전쟁이 시작되기 약 7개월 전의 이 사건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첫 사상자였다. 마케도니아 의회는 1991년 1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으나 1991년 9월 국민투표를 열때까지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유고 인민군 장교진은 마케도니아 출신 군인이 크로아티아로 파견되는 것을 은밀히 막았고 마케도니아 정부가 자금을 조달하여 병사 가족을 버스로 태워 몬테네그로에서 아들을 찾아 집으로 보내주도록 하였다. 한편 마케도니아인은 계속 유고 인민군에게 징집되어 크로아티아의 전쟁에 참전했다. 전투 초기에 유고 인민군을 지휘하였던 알렉산다르 스피르코브스키는 마케도니아 출신이었다. 그의 인종 문제는 지휘관이 세르비아계인 지보타 파비치로 교체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2005년, 마케도니아 육군 참모총장인 미로슬라브 스토야노브스키는 부코바르 전투 후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일어나 국제적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다. 점령, 복원 및 재건 부코바르는 전투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크로아티아는 공식적으로 부코바르의 주택 90%가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으며, 그 수는 총 15,000채에 달한다고 집계했다. 정부는 재건 비용을 25억 달러로 책정했다. 도시는 세르비아가 통제하는 7년간 간신히 복구하였다. 인디펜던트 지의 마르쿠스 타너는 전투 후 부코바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92년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부코바르를 방문하여 쓰래기 더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정부는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다른 지역에서 온 세르비아인 난민을 정착시켜 부코바르의 인구는 2만명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파괴된 건물에 플라스틱 판이나 나무 보드로 땜질하며 물과 전기 없이 살아야 했다. 주민들은 폐허를 청소하고 유리조각들을 모아 창문을 다시 만들어 살았다. 주민 대부분은 전쟁 부당이득이나 밀수를 통해 살았으나 일부 주민들은 동슬라보니아의 부활한 석유 산업 시설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 제재와 국제 원조의 부족으로 재건은 계속 지연되었다. 1995년 에르두트 협정 체결 후 크로아티아 난민의 귀환과 크로아티아로의 재통합을 위해 동슬라보니아 지역에 유엔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서시르미움 잠정통치기구(UNTAES)를 수립하였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과도기동안 지역 안보를 맡기로 하였다. 하지만 1999년이 되어서야 크로아티아인들이 부코바르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전쟁 전에 살았던 주민 대다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2001년 3월 기준, 부코바르 지역의 거주민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낮은 31,670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중 57.46%인 18,199명이 크로아티아인이고 32.88%인 10,412명이 세르비아인이다. 마을 공동체는 전쟁 이전 민족혼합적인 성격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서로 분리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상점, 카페, 레스토랑, 스포츠 클럽, 학교, 비정부 기구, 라디오 방송국과 같은 공공시설은 각 공동체마다 별도의 시설로 서로 분리되어 생성, 재설정되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부코바르 및 인근 지역의 부흥 운동을 지원했으나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은 2003년까지도 대부분이 폐허였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양 측 모두 세르비아인 지역을 '처벌'하기 위해 정부가 고의적으로 재건을 지연했다고 믿었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부코바르 지역에서 4천 채가 재건되었으나 이 중 세르비아인이 거주한 집은 하나도 없다고 발표했다. 또한 도시의 주요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실업률도 높았으며 주민들은 집을 팔 수가 없었다. 부코바르 내 대부분의 주택과 역사적인 건축물은 2011년 들어서면서 거의 다 재건되었다. 기념관 및 추모 부코바르 여러 곳에선 아직까지도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코바르의 많은 건물엔 벽에 총알 자국과 파편이 박힌 것을 볼 수 있다. 강변의 부코바르 급수탑은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추모 목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마을 내의 부코바르 병원은 전투 중 상태를 보존한 상태로 재건되었다. 부코바르 학살이 일어났던 오브차라에서는 대량 학살 및 잔학 행위가 있었음을 전시하고 있다. 일부는 전쟁 기간 동안 생존했던 사람이 현지 가이드가 되어 도보 및 자전거 여행 형태로 부코바르 전투의 여러 기념지를 방문할 수 있는 관광을 제공하고 있다. 매년 11월마다 부코바르 시정부가 마을 함락을 추모하며 4일간 축제를 여는데, 11월 18일 열리는 '기억의 행진'에 최고조에 달한다. 이 행진은 도시의 크로아티아인 추방을 추모하는 목적으로 부코바르 병원에서 5km 떨어진 크로아티아 조국전쟁 피해추모비까지 걷는 행사이다. 이 행진은 크로아티아 전역의 수만 명이 참여한다. 부코바르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의 기념 행사에 참여하지 않거나 피했으며, 11월 18일에는 대부분 도시를 떠나거나 실내에만 있었다. 2003년까지는 세르비아인은 11월 17일 세르비아군 묘비 앞에서 별도의 간단한 추모식을 가졌다. 이러한 기념 행사는 전부 11월 18일 열렸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시기의 "해방의 날"은 지워졌으나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의 용어를 피하고 단순히 "11월 18일"이라고만 언급한다. 하지만 더 큰 갈등은 세르비아인 사망자를 추모하는 문제였다. 유고 인민군과 같이 싸웠다가 사망한 지역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의 집이 있었던 곳에다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국가 정부가 매장하였다. 원래 묘비는 V자 모양의 세르비아 군모나 샤카차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을 해놓았다. 하지만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로 돌아온 후에는 묘비들이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세르비아인 공동체는 이후 묘비를 군사적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중립적인 일반 묘비로 바꾸었다. 부코바르의 세르비아인은 전쟁기념비와 같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와 관련된 장소에서 소외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크로아티아인 사회학자 크루노 카르도브는 부카강이 다뉴브강으로 흘러들어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거대 석재 십자가상을 예로 들었다. 카르도브는 세르비아인이 이곳에 거의 없으며, 간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큰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밝혔다. 한 세르비아인 소년은 십자가에 무엇이 써져 있는지 알고 싶지만 너무 무서워서 비문을 읽지 못했다고 밝혔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용기를 가지고 기념물에 달려가서 비문을 읽고는 즉시 "안전한 장소"로 달려가 도망쳤다고 했다. 카르도브는 "부코바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세워져 있으며 ... 이 선은 한 특정 그룹에게만 지적 지도에 새겨진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 부코바르 전투는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추모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내 거의 모든 도시에는 '부코바르 거리'가 있다. 2009년엔 크로아티아 해군이 헬싱키급 미사일 고속정 2척을 새로 수입할 때 최함선에게 부코바르 마을을 지어 붙여주었다. 또한 크로아티아 의회는 11월 18일을 크로아티아 자유의 상징인 부코바르를 지키는 데 참여한 모든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 기념으로 "1991년 부코바르 희생 현충일"로 지정하였다. 크로아티아의 민족 정체성으로까지 불리는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 전역의 사람들에게 카르도브가 "독립전쟁 동안 겪은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한 '대담함'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순례지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새해 전날 부코바르의 주요 기념 십자가 앞에 모여 한 해가 지나감을 기념하기도 하고, 일부 거주민들은 이에 "기뻐할 감정을 느낄만한 장소가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카르도브는 부코바르 마을이 "순수한 크로아티아 정체성이 구체화"된 곳이며 "크로아티아 국가의 근본 신화"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의 민족감정과 상징주의가 모인 진정한 진짜 장소인 "상상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르도브는 부코바르가 결국엔 "모든 국민을 위한 단 한 곳"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고 끝낸다. 2010년 11월, 세르비아의 대통령인 보리스 타디치가 오브차라의 학살지를 방문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있었던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학살에 "사죄와 반성" 연설을 하면서 부코바르를 방문한 최초의 세르비아 대통령이 되었다. 각주 참고 문헌 뉴스 리포트 기타 문헌 외부 링크 1991년 크로아티아 1991년 유고슬라비아 시가전 포위전 유고슬라비아가 참가한 전투 크로아티아가 참가한 전투 세르비아가 참가한 전투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전투 부코바르 1991년 8월 1991년 9월 1991년 10월 1991년 11월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20of%20Vukovar
Battle of Vukovar
The Battle of Vukovar was an 87-day siege of Vukovar in eastern Croatia by the Yugoslav People's Army (JNA), supported by various paramilitary forces from Serbia, between August and November 1991. Before the Croatian War of Independence the Baroque town was a prosperous, mixed community of Croats, Serbs and other ethnic groups. As Yugoslavia began to break up, Serbia's President Slobodan Milošević and Croatia's President Franjo Tuđman began pursuing nationalist politics. In 1990, an armed insurrection was started by Croatian Serb militias, supported by the Serbian government and paramilitary groups, who seized control of Serb-populated areas of Croatia. The JNA began to intervene in favour of the rebellion, and conflict broke out in the eastern Croatian region of Slavonia in May 1991. In August, the JNA launched a full-scale attack against Croatian-held territory in eastern Slavonia, including Vukovar. Vukovar was defended by around 1,800 lightly armed soldiers of the Croatian National Guard (ZNG) and civilian volunteers, against as many as 36,000 JNA soldiers and Serb paramilitaries equipped with heavy armour and artillery. During the battle, shells and rockets were fired into the town at a rate of up to 12,000 a day. At the time, it was the fiercest and most protracted battle seen in Europe since 1945, and Vukovar was the first major European town to be entirely destroyed since the Second World War. When Vukovar fell on 18 November 1991, several hundred soldiers and civilians were massacred by Serb forces and at least 20,000 inhabitants were expelled. Overall, around 3,000 people died during the battle. Most of Vukovar was ethnically cleansed of its non-Serb population and became part of the self-declared proto-state known as the Republic of Serbian Krajina. Several Serb military and political officials, including Milošević, were later indicted and in some cases jailed for war crimes committed during and after the battle. The battle exhausted the JNA and proved a turning point in the Croatian War of Independence. A cease-fire was declared a few weeks later. Vukovar remained in Serb hands until 1998, when it was peacefully reintegrated into Croatia with the signing of the Erdut Agreement. It has since been rebuilt but has less than half of its pre-war population and many buildings are still scarred by the battle. Its two principal ethnic communities remain deeply divided and it has not regained its former prosperity. Background Vukovar is an important regional centre on Croatia's eastern border, situated in eastern Slavonia on the west bank of the Danube river. The area has a diverse population of Croats, Serbs, Hungarians, Slovaks, Ruthenians and many other nationalities, who had lived together for centuries in relative harmony before the Croatian War of Independence. It was also one of the wealthiest areas of Yugoslavia before the conflict. Vukovar's long-standing prosperity was reflected in one of Croatia's finest ensembles of Baroque architecture. The region underwent major demographic changes following the Second World War, when its ethnic German inhabitants were expelled and replaced with settlers from elsewhere in Yugoslavia. In 1991, the last Yugoslav census recorded the Vukovar municipality, which included the town and surrounding villages, as having 84,189 inhabitants, of whom 44 percent were Croats, 38 percent were Serbs and the remainder were members of other ethnic groups. The town's population was 47 percent Croat and 33 percent Serb. From 1945, Yugoslavia was governed as a federal socialist state comprising six newly created republics – Slovenia, Croatia, Bosnia and Herzegovina, Serbia, Montenegro and Macedonia. The current border between Serbia and Croatia was defined in 1945 by a Yugoslav federal government commission which assigned areas with a Serb majority to the Socialist Republic of Serbia and those with a Croat majority to the Socialist Republic of Croatia. Nevertheless, a sizable Serb minority remained within the latter. Following the death of Yugoslav leader Josip Broz Tito in 1980, long-suppressed ethnic nationalism revived and the individual republics began to assert their authority more strongly as the federal government weakened. Slovenia and Croatia moved towards multi-party democracy and economic reform, but Serbia's authoritarian communist President Slobodan Milošević opposed reform and sought to increase the power of the Yugoslav government. In 1990, Slovenia and Croatia held elections that ended communist rule and brought pro-independence nationalist parties to power in both republics. In Croatia, the Croatian Democratic Union (HDZ) of Franjo Tuđman took power, with Tuđman as president. Tuđman's programme was opposed by many members of Croatia's Serb minority, towards whom he was overtly antagonistic. Croatia's Serb Democratic Party (SDS), supported by Milošević, denounced the HDZ as a reincarnation of the nationalist-fascist Ustaše movement, which had massacred hundreds of thousands of Serb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From mid-1990, the SDS mounted an armed rebellion in Serb-inhabited areas of Croatia and set up the self-declared Serbian Autonomous Oblast of Krajina, with covert support from the Serbian government and Serbian paramilitary groups. The Croatian government rapidly lost control of large swathes of the republic. In February 1991, the Krajina Serbs declared independence from Croatia and announced that they would unite with Serbia. Other Serb communities in Croatia also announced that they would secede and established their own militias. Prelude to the battle The conflict between Serbs and Croats spread to eastern Slavonia in early 1991. On 1 April, Serb villagers around Vukovar and other towns in eastern Slavonia began to erect barricades across main roads. The White Eagles, a Serbian paramilitary group led by Vojislav Šešelj, moved into the Serb-populated village of Borovo Selo just north of Vukovar. In mid-April 1991, an incident occurred in the outskirts of Borovo Selo when three Armbrust man-portable recoilless guns were fired on Serb positions. There were allegations that Gojko Šušak, at the time the Deputy Minister of Defence, led the attack. There were no casualties, but the attack aggravated and deepened ethnic tensions. On 2 May, Serb paramilitaries ambushed two Croatian police buses in the centre of Borovo Selo, killing 12 policemen and injuring 22 more. One Serb paramilitary was also killed. The Battle of Borovo Selo represented the worst act of violence between the country's Serbs and Croats since the Second World War. It enraged many Croatians and led to a surge of ethnic violence across Slavonia. Shortly after, Yugoslav People's Army (JNA) units moved into Borovo Selo. The army's intervention was welcomed by local Croatian leaders, but Croatia's Deputy Interior Minister, Milan Brezak, accused the JNA of preventing the Croatian police from dealing with the paramilitaries. Gun battles broke out across the region between rival militias. In Vukovar, Croatians harassed Serb residents, sometimes violently. Croatian police forcibly took over the local radio station, Radio Vukovar, and Serb members of the station's ethnically mixed staff were fired and replaced with Croats. Serb militias systematically blocked transport routes in the predominantly Serb-inhabited countryside around Vukovar, and within days the town could only be reached by an unpaved track running through Croat-inhabited villages. The atmosphere in Vukovar was said to be "murderous". On 19 May 1991, the Croatian government held a nationwide referendum on a declaration of sovereignty. In Vukovar, as elsewhere in Croatia, hardline Serb nationalists urged Serbs to boycott the referendum, while moderates advocated using the poll to register opposition to independence. Many local Serbs did vote. The referendum passed with 94 percent nationally voting in favour. Violence in and around Vukovar worsened after the independence referendum. Repeated gun and bomb attacks were reported in the town and surrounding villages. Sporadic shelling of the city started in June, and increased in intensity throughout the summer. Borovo Naselje, the Croatian-held northern suburb of Vukovar, sustained a significant shelling on 4 July. Serb paramilitaries expelled thousands of non-Serbs from their homes in the municipality. Croatian paramilitaries, led by Tomislav Merčep, attacked Serbs in and around Vukovar (in what was later investigated as the 1991 killings of Serbs in Vukovar). Between 30 and 86 Serbs disappeared or were killed, and thousands of others fled their homes. A Croatian government representative in Vukovar told the Zagreb authorities that "the city is again [the] victim of terror, armed strife and provocative shoot-outs with potentially unfathomable consequences. The policy pursued so far has created an atmosphere of terror among the Croatian and Serbian population." Gunmen from both sides burned and looted hundreds of houses and farms in the area. The conflict blurred ethnic lines. Many Serbs who had lived in Vukovar for generations – known as the starosedioci or "old settlers" – resisted the propaganda coming from Belgrade and Knin and continued to live peacefully with their Croatian neighbours. The došljaci, or "newcomers", whose families had relocated from southern Serbia and Montenegro to replace the deported Germans after 1945, were the most responsive to nationalist appeals. The journalist Paolo Rumiz describes how they "tried to win their coethnics over to the patriotic mobilization, and when they had no success with that, they killed them, plundered their property and goods, or drove them away. The old settlers would not let themselves be stirred up against other nationalities." When Croats fled the fighting they often gave their house keys for safekeeping to their Serb neighbours, whom they trusted, rather than to the Croatian police. The political scientist Sabrina P. Ramet notes that a distinctive feature of the war in eastern Slavonia was "the mobilization of those who were not integrated into the multi-cultural life of the cities against urban multi-culturalism." Former Belgrade mayor Bogdan Bogdanović characterised the attack on Vukovar as an act of urbicide, a deliberate assault on urbanism. Opposing forces By the end of July 1991, an improvised Croatian defence force in Vukovar was almost surrounded by Serbian militias in the neighbouring villages. Paramilitaries, JNA soldiers and Serbian Territorial Defence (TO) conscripts were present in Serb-inhabited areas. There was a small JNA barracks in Vukovar's Sajmište district, surrounded by Croatian-controlled territory. Although the two sides were commonly referred to as "Croatian" and "Serbian" or "Yugoslav", Serbs and Croats as well as many other of Yugoslavia's national groups fought on both sides. The first commander of the attacking force was Macedonian. Serbs and members of other ethnicities made up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Croatian defenders. Croatian forces The Croatian force in Vukovar comprised 1,800 men assembled from units of the newly created Croatian National Guard, including 400 members of the 3rd Guards Brigade and the 1st Guards Brigade. The 4th Battalion of the 3rd Guards Brigade was stationed in the city from the beginning, while elements of the 1st Guards Brigade arrived retreating from elsewhere in western Syrmia. In addition to the guardsmen there were 300 police officers and 1,100 civilian volunteers from Vukovar and nearby communities. The bulk of the force had initially been organised in an improvised manner. In late September 1991, it was formally reorganised as the 204th Vukovar Brigade, also known as the 124th Brigade. Volunteers arrived from other parts of Croatia, including 58 members of the far-right paramilitary Croatian Defence Forces (HOS), backed by Dobroslav Paraga's extreme nationalist Croatian Party of Rights (HSP). The defenders were a cross-section of Vukovar society. As many as one-third were non-Croats, including Serbs, Ruthenians, Hungarians and members of other ethnicities. About 100 of the defenders were Serbs. "We had complete confidence in them", one Croatian veteran later said. "They defended Vukovar alongside us." Croatian forces in Vukovar were commanded by Mile Dedaković, a former JNA officer who had joined the ZNG and volunteered to take charge of the town's defences. During the battle, he went by the nom de guerre Jastreb ("Hawk"). Gojko Šušak, by now Croatia's Minister of Defence, used Dedaković as an example of how Serbs were also taking part in Vukovar's defence. The claim was later reprinted by independent sources, but was false. Dedaković's second-in-command, Branko Borković, was another former JNA officer who had volunteered for service in Vukovar. The two men established a unified command structure, organised the defenders into a single brigade and implemented an integrated defence system. A defensive ring of six sectors was established, each assigned to one unit within the 204th Brigade. The defenders used a network of cellars, canals, ditches and trenches to redeploy around the sectors as needed. At the start of the battle, they were poorly armed and many were equipped only with hunting rifles. They relied mostly on light infantry weapons, but obtained a few artillery pieces and anti-aircraft guns and improvised their own land mines. They also obtained several hundred anti-tank weapons such as M79 and M80 rocket launchers, but were critically short of ammunition throughout the battle. The capture of JNA barracks somewhat improved the situation as Vukovar had the priority in the supply of arms. It is estimated that the Vukovar battlefield consumed around 55–60 percent of all ammunition available to the Croatian forces. Yugoslav and Serb forces The attacking force included JNA soldiers conscripted from across Yugoslavia, members of the TO, Chetniks (Serbian nationalist paramilitaries), local Serb militiamen and units of the Yugoslav Navy and the Yugoslav Air Force. At their peak, the Yugoslav and Serb forces in the vicinity of Vukovar numbered about 36,000. They were equipped with heavy artillery, rockets and tanks and supported by aircraft and naval vessels on the Danube. Although the battle was fought primarily by the federal Yugoslav military, the government of Serbia was directly involved. The Serbian secret police agency, the SDB, took part in military operations, and some of its officers commanded Serbian TO units fighting in Vukovar. Serbia's Ministry of Internal Affairs directed the activities of the paramilitaries. It was also responsible for arming and equipping them. Slobodan Milošević was later accused of direct involvement. According to Veselin Šljivančanin, who was later convicted of war crimes committed at Vukovar, the order to shell Vukovar came "from Dedinje" – the elite Belgrade quarter where Milošević lived. At the start of the war in Slovenia, the army still saw itself as the defender of a federal, communist Yugoslavia, rather than an instrument of Serbian nationalism. Its head, General Veljko Kadijević, the Yugoslav Minister of Defence and a committed communist, initially sought to forcibly keep Yugoslavia together and proclaimed the army's neutrality in the Serb-Croat conflict. The JNA leadership aimed to cut Croatia in two by seizing the Serb-inhabited inland regions, almost all of the Dalmatian coast and much of central and eastern Croatia. It aimed to force Croatia's political leadership to capitulate and renegotiate its membership of Yugoslavia. The JNA's leadership was not yet dominated by ethnic Serbs, and these early goals reflected the Yugoslav outlook of its multiethnic leadership. Kadijević was half-Croat and half-Serb, his deputy was a Slovene, the commander of the JNA forces in the first phase of the battle was a Macedonian, and the head of the Yugoslav Air Force, which repeatedly bombed Vukovar during the battle, was a Croat. The loss of Slovenia in the Ten-Day War made it impossible to fulfil the original objective of keeping Yugoslavia intact. Many of the Serb members of the army no longer wanted to fight for a multiethnic Yugoslavia. The army developed an increasingly Serbian character as non-Serbs deserted or refused to be drafted. Some JNA commanders overtly supported the Serb rebels in Croatia and provided them with weapons. Although Kadijević and other senior JNA commanders initially argued that "the JNA must defend all the nations of Yugoslavia", they eventually recognised that they had no chance of achieving their original goals, and threw their support behind the rebel Serbs of Croatia. Yugoslav and Serb propaganda portrayed Croatian separatists as genocidal Ustaše, who had illegally taken over Yugoslav territory and were threatening Serb civilians in a reprise of the anti-Serb pogroms of the Second World War. Kadijević later justified the JNA's offensive against Vukovar on the grounds that it was part of the "backbone of the Croatian army" and had to be "liberated". The JNA's periodical Narodna Armija claimed after the battle that Vukovar "had for decades been prepared to support German military penetration down the Danube." Šešelj declared: "We're all one army. This war is a great test for Serbs. Those who pass the test will become winners. Deserters cannot go unpunished. Not a single Ustaša must leave Vukovar alive." Phase I, August to September 1991 The Battle of Vukovar took place in two phases over about 90 days: from August to September 1991, before the town was fully surrounded, and from early October to mid-November, when the town was encircled then taken by the JNA. Starting in June, Vukovar and neighbouring villages were subjected to daily or near-daily artillery and mortar fire. In July, the JNA and TO began deploying in large numbers across eastern Slavonia, surrounding Vukovar from three sides. Heavy fighting began at the end of August. On 23 August, Borovo Naselje came under heavy shellfire, and Croatian forces shot down two Yugoslav G-2 Galeb ground-attack aircraft using shoulder-launched anti-aircraft missiles. The following day, the JNA, the Yugoslav Air Force and the Yugoslav Navy launched a major attack using aircraft, naval vessels on the Danube, tanks and artillery. The attack, which was mounted from both sides of the border, caused extensive damage and resulted in many civilian casualties. On 14 September, the Croatian government ordered an attack against all JNA garrisons and arms depots in the country, an offensive dubbed the Battle of the Barracks. Vukovar's JNA barracks was among those attacked that day, but the JNA managed to defend it. In retaliation, Serb paramilitaries attacked areas to the southwest of Vukovar from the direction of Negoslavci, forcing about 2,000 people to flee. There were reports of mass killings and scores of civilian deaths. Croatian forces outside the Vukovar perimeter received large quantities of arms and ammunition from depots captured elsewhere, enabling them to hold the line. The JNA responded by launching a major offensive in eastern Slavonia, from where it intended to progress west via Vinkovci and Osijek to Zagreb. The JNA did not bypass Vukovar because its leadership wished to relieve the besieged barracks and to eliminate a possible threat to their supply lines. The JNA did not intend to make Vukovar the main focus of the offensive, but as happened with Stalingrad in the Second World War, an initially inconsequential engagement became an essential political symbol for both sides. On 19 September, a JNA force consisting of at least 100 T-55 and M-84 tanks with armoured personnel carriers and heavy artillery pieces left Belgrade. It crossed into Croatia near the Serbian town of Šid on 20 September. The Croatians were quickly routed and fell back to Vukovar. The JNA's 1st Guards Mechanised Brigade soon reached the Vukovar barracks and lifted the Croatian siege of the facility. They also moved to encircle Vukovar. By 30 September, the town was almost completely surrounded. All roads in and out were blocked, and the only route in was via a farm track through a perilously exposed cornfield. The JNA launched repeated assaults on Vukovar but failed to make any progress. Its armour, designed for combat in open country, was barely able to enter Vukovar's narrow streets. Support from regular infantry was lacking, and the TO's poorly trained and motivated troops were inadequate substitutes. The JNA's soldiers appeared to have little understanding of how to conduct urban operations and its officers displayed slow and reactive decision-making on the ground. Croatian forces countered the JNA's attacks by mining approach roads, sending out mobile teams equipped with anti-tank weapons, deploying many snipers, and fighting back from heavily fortified positions. The JNA initially relied on massing armoured spearheads which would advance along a street in a column followed by a few companies of infantry. The Croatians responded by opening fire with anti-tank weapons at very close range – often as short as  – to disable the lead and rear vehicles, trapping the rest of the column, where it could be systematically disabled. They tried to avoid completely destroying the JNA's armour, as the materiel they retrieved from disabled vehicles was an important source of resupply. The Croatians employed a strategy of "active defence", carrying out hit-and-run attacks to keep the JNA off balance. Anti-tank and anti-personnel mines hindered JNA manoeuvres. Unconventional tactics were used to undermine the JNA's morale, such as firing weather rockets and sabotaging JNA tanks by planting mines underneath them while they were parked at night, causing them to explode when their crews started them in the morning. JNA casualties were heavy. On one road, dubbed the "tank graveyard", about a hundred JNA armoured vehicles were destroyed, fifteen of them by Colonel Marko Babić. The high casualties had a debilitating effect on morale all the way up the chain of command. The JNA began launching artillery and rocket barrages against the town. By the end of the battle, over 700,000 shells and other missiles had been fired at Vukovar at a rate of up to 12,000 a day. It is estimated that Vukovar as well as its surroundings were bombarded with more than 2.5 million shells over . Metre for metre, the bombardment was more intense than at Stalingrad. The thousands of civilians remaining in Vukovar took shelter in cellars and bomb shelters that had been built during the Cold War. JNA weaknesses and adoption of new tactics The JNA's lack of infantry support was due to a disastrously low level of mobilisation in the preceding months. Many reservists – who were drawn from all the Yugoslav republics, including Croatia – refused to report for duty, and many serving soldiers deserted rather than fight. Serbia was never formally at war and no general mobilisation was carried out. An estimated 150,000 Serbs went abroad to avoid conscription, and many others deserted or went into hiding. Only 13 percent of conscripts reported for duty. Another 40,000 staged rebellions in towns across Serbia; the Serbian newspaper Vreme commented in July 1991 that the situation was one of "total military disintegration". Morale on the battlefield was poor. JNA commanders resorted to firing on their own positions to motivate their men to fight. When the commander of a JNA unit at Vukovar demanded to know who was willing to fight and who wanted to go home, the unit split in two. One conscript, unable to decide which side to take, shot himself on the spot. A JNA officer who served at Vukovar later described how his men refused to obey orders on several occasions, "abandoning combat vehicles, discarding weapons, gathering on some flat ground, sitting and singing Give Peace a Chance by John Lennon." In late October, an entire infantry battalion from Novi Sad in Serbia abandoned an attack on Borovo Naselje and fled. Another group of reservists threw away their weapons and went back to Serbia on foot across a nearby bridge. A tank driver, Vladimir Živković, drove his vehicle from the front line at Vukovar to the Yugoslav parliament in Belgrade, where he parked on the steps in front of the building. He was arrested and declared insane by the authorities. His treatment enraged his colleagues, who protested by taking over a local radio station at gunpoint and issuing a declaration that "we are not traitors, but we do not want to be aggressors." In late September, Lieutenant Colonel General Života Panić was put in charge of the operation against Vukovar. He established new headquarters and command-and-control arrangements to resolve the disorganisation that had hindered the JNA's operations. Panić divided the JNA forces into Northern and Southern Areas of Responsibility (AORs). The northern AOR was assigned to Major General Mladen Bratić, while Colonel Mile Mrkšić was given charge of the south. As well as fresh troops, paramilitary volunteers from Serbia were brought in. They were well armed and highly motivated but often undisciplined and brutal. They were formed into units of company and battalion size as substitutes for the missing reservists. The commander of the Novi Sad corps was videotaped after the battle praising the Serb Volunteer Guard ("Tigers") of Željko Ražnatović, known as "Arkan": Panić combined well-motivated paramilitary infantry with trained engineering units to clear mines and defensive positions, supported by heavy armour and artillery. The paramilitaries spearheaded a fresh offensive that began on 30 September. The assault succeeded in cutting the Croatian supply route to Vukovar when the village of Marinci, on the route out of the town, was captured on 1 October. Shortly afterwards, the Croatian 204th Brigade's commander, Mile Dedaković, broke out with a small escort, slipping through the Serbian lines to reach the Croatian-held town of Vinkovci. His deputy, Branko Borković, took over command of Vukovar's defences. General Anton Tus, commander of the Croatian forces outside the Vukovar perimeter, put Dedaković in charge of a breakthrough operation to relieve the town and launched a counter-offensive on 13 October. Around 800 soldiers and 10 tanks were engaged in the attack, which began in the early morning with artillery preparation. Special police forces entered Marinci before noon, but had to retreat as they did not have enough strength to hold their positions. Croatian tanks and infantry encountered heavy resistance from the JNA and were halted at Nuštar by artillery fire. The JNA's 252nd Armoured Brigade inflicted heavy losses on the Croatian side. The elite Lučko Anti-Terrorist Unit alone suffered 12 fatalities. Around 13:00 the attack was stopped by the HV General Staff. A humanitarian convoy of the Red Cross was let through to Vukovar. Phase II, October to November 1991 During the battle's final phase, Vukovar's remaining inhabitants, including several thousand Serbs, took refuge in cellars and communal bomb shelters, which housed up to 700 people each. A crisis committee was established, operating from a nuclear bunker beneath the municipal hospital. The committee assumed control of the town's management and organised the delivery of food, water and medical supplies. It kept the number of civilians on the streets to a minimum and ensured that each shelter was guarded and had at least one doctor and nurse assigned to it. Vukovar's hospital had to deal with hundreds of injuries. In the second half of September, the number of wounded reached between 16 and 80 per day, three-quarters of them civilians. Even though it was marked with the Red Cross symbol, the hospital was struck by over 800 shells during the battle. Much of the building was wrecked, and the staff and patients had to relocate to underground service corridors. The intensive care unit was moved into the building's nuclear bomb shelter. On 4 October, the Yugoslav Air Force attacked the hospital, destroying its operating theatre. One bomb fell through several floors, failed to explode and landed on the foot of a wounded man, without injuring him. Croatian forces adapted several Antonov An-2 biplanes to parachute supplies to Vukovar. The aircraft also dropped improvised bombs made of fuel cans and boilers filled with explosive and metal bars. The crews used GPS to locate their targets, then pushed the ordnance through the side door. The European Community attempted to provide humanitarian aid to the 12,000 civilians trapped within the perimeter, but only one aid convoy made it through. On 12 October, the Croatians suspended military action to allow the convoy to pass, but the JNA used the pause as cover to make further military gains. Once the convoy set off, the JNA delayed it for two days and used the time to lay mines, bring in reinforcements and consolidate JNA control of the road out of Vukovar. When the convoy arrived, it delivered medical supplies to Vukovar's hospital and evacuated 114 wounded civilians. On 16 October, the JNA mounted a major attack against Borovo Naselje. It made some progress, but became bogged down in the face of determined Croatian resistance. On 30 October, the JNA launched a fully coordinated assault, spearheaded by paramilitary forces, with infantry and engineering troops systematically forcing their way past the Croatian lines. The JNA's forces, divided into northern and southern operations sectors, attacked several points simultaneously and pushed the Croatians back. The JNA also adopted new tactics, such as firing directly into houses and then driving tanks through them, as well as using tear gas and smoke bombs to drive out those inside. Buildings were also captured with the use of anti-tank and anti-aircraft guns. On 2 November, the JNA reached the strategic suburb of Lužac, between Borovo Naselje and Vukovar, cutting one of the two roads linking the town centre with its northern suburb. After capturing Lužac, 69 local civilians were killed by Arkan's "Tigers" paramilitaries. Meanwhile, the ZNG (which had been renamed the Croatian Army) attempted to retake the villages of Marinci and Cerić to reopen the supply route to Vukovar. It mounted a heavy bombardment of the JNA's access routes to Vukovar and launched a tank attack on the JNA's lines. On 4 November, JNA General Mladen Bratić was killed when his tank was hit by a shell. The JNA's advantage in artillery and rockets enabled it to halt the Croatian advance and inflict heavy casualties. Fall of Vukovar JNA troops launched an amphibious assault across the Danube north of Lužac on 3 November to link up with Arkan's "Tigers". This attack split the Croatian perimeter in half and divided the main group of defenders in the town centre from a smaller stronghold in Borovo Naselje. The JNA's Operational Group South began systematically clearing the town centre, cutting off the remaining Croatian soldiers. On 5 November, Croatian forces shelled the Serbian town of Šid, killing three civilians and wounding several others. The JNA and paramilitaries captured a key hilltop, Milova Brda, on 9 November, giving them a clear view of Vukovar. The assault was spearheaded by paramilitaries, with JNA soldiers and TO fighters playing a supporting role, especially in demining operations and close artillery support. The Croatian-held village of Bogdanovci, just west of Vukovar, fell on 10 November. As many as 87 civilians were killed after its capture. On 13 November, the JNA cut the last link between Borovo Naselje and Vukovar. Croatian forces outside the Vukovar perimeter mounted a last-ditch attempt to break the siege by attacking from the village of Nuštar, but were repelled by the JNA once again. By now, the Croatians were running out of ammunition and were exhausted from fighting around the clock without any prospect of relief. They had been reduced to three separate pockets. With defeat now inevitable, several hundred Croatian soldiers and civilians attempted to break out over the course of several days, as the JNA mounted its final offensive. Most of those in Borovo Naselje were unable to do so and were killed. On 18 November, the last Croatian soldiers in Vukovar's town centre surrendered. By 18 November, many of Vukovar's civilian inhabitants were living in squalid conditions and nearing starvation. One woman told UN Special Envoy Cyrus Vance that she had spent the two previous months in a bomb shelter with her five children without toilets or water for washing. They lived on two slices of bread and a piece of pâté per day. One of the Croatian soldiers described conditions as the battle reached its peak: When the battle ended, the scale of the town's destruction shocked many who had not left their shelters in weeks. Siniša Glavašević, a reporter for Croatian Radio and a native of Vukovar, who had stayed in the town throughout the battle, described the scene as the survivors emerged: Although active combat had ended in central Vukovar by 18 November, sporadic fighting continued for several days elsewhere in the town. Some Croatian soldiers continued to resist until 20 November and a few managed to slip away from Borovo Naselje as late as 23 November. Foreign journalists and international monitors entered the town soon after the surrender and recorded what they saw. Blaine Harden of The Washington Post wrote: Chuck Sudetic of The New York Times reported: Laura Silber and the BBC's Allan Little described how "corpses of people and animals littered the streets. Grisly skeletons of buildings still burned, barely a square inch had escaped damage. Serbian volunteers, wild-eyed, roared down the streets, their pockets full of looted treasures." The JNA celebrated its victory, as Marc Champion of The Independent described: Casualties Overall, around 3,000 people died during the battle. Croatia suffered heavy military and civilian casualties. The Croatian side initially reported 1,798 killed in the siege, both soldiers and civilians. Croatian general Anton Tus later stated that about 1,100 Croatian soldiers were killed, and 2,600 soldiers and civilians were listed as missing. Another 1,000 Croatian soldiers were killed on the approaches to Vinkovci and Osijek, according to Tus. He noted that the fighting was so intense that losses in eastern Slavonia between September and November 1991 constituted half of all Croatian war casualties from that year. According to figures published in 2006 by the Croatian Ministry of Defence, 879 Croatian soldiers were killed and 770 wounded in Vukovar.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estimates Croatian casualties at around 4,000–5,000 dead across eastern Slavonia as a whole. The 204th Vukovar Brigade lost over 60 percent of its strength in the battle. The CIA reports that 1,131 civilians were killed over the course of the fighting. Among the dead were 86 children. Kardov estimated that 550 civilians went missing during the battle. According to Croatian officials, in eastern Slavonia, 2,000 Croatians were killed, 800 went missing, 3,000 were taken prisoner and 42,852 were made refugees by the end of 1991. Although JNA losses were undoubtedly substantial, the exact numbers are unclear because of a lack of official data. The JNA officially acknowledged 1,279 killed in action, including 177 officers, during the entire war in Croatia. The military historian Norman Cigar contends that the actual number may have been considerably greater as casualties were consistently under-reported during the war. According to Tus, the JNA's Novi Sad corps alone lost 1,300 soldiers during the campaign in eastern Slavonia. He extrapolates from this to estimate that between 6,000 and 8,000 soldiers and volunteers died in eastern Slavonia, with the loss of 600 armoured vehicles and heavy weapons, as well as over 20 aircraft. Serbian sources disagree with this assessment. Following the war, Colonel Milisav Sekulić said that the battle resulted in the deaths of 1,180 JNA soldiers and TO personnel. General Andrija Biorčević, the former commander of the Novi Sad corps, remarked that there were "[not] more than 1,500 killed on our side." This sentiment was echoed by JNA General Života Panić, who shared a similar figure. In 1997, the journalist Miroslav Lazanski, who has close ties to the Serbian military, wrote in the Belgrade newspaper Večernje novosti that "on the side of the JNA, Territorial Defence and volunteer units, exactly 1,103 members were killed." He cited losses of 110 armoured vehicles and two combat aircraft shot down, plus another destroyed due to technical failure. At the time, Lazanski's assessment was endorsed by three retired JNA generals. According to Croatian Serb sources, 350 Vukovar Serbs perished in the battle, including 203 TO fighters and 147 civilians. War crimes Many captured Croatian soldiers and civilians were summarily executed after the battle. Journalists witnessed one such killing in Vukovar's main street. They also reported seeing the streets strewn with bodies in civilian attire. BBC television reporters recorded Serbian paramilitaries chanting: "Slobodane, Slobodane, šalji nam salate, biće mesa, biće mesa, klaćemo Hrvate!" ("Slobodan [Milošević], Slobodan, send us some salad, [for] there will be meat, there will be meat, we will slaughter Croats"). A Serbian journalist embedded with the JNA reserve forces in Vukovar later reported: Around 400 people from Vukovar's hospital – non-Serb patients, medical personnel, local political figures and others who had taken refuge there – were taken by the JNA. Although some were subsequently released, around 200 were transported to the nearby Ovčara farm and executed in what became known as the Vukovar massacre. At least 50 others were taken elsewhere and never seen again. Thousands more were transferred to prison camps in Serbia and rebel-controlled Croatia. Further mass killings followed. At Dalj, north of Vukovar, where many inhabitants were previously massacred, numerous prisoners from Vukovar were subjected to harsh interrogations, beatings and torture, and at least 35 were killed. The JNA imprisoned 2,000 people at the Velepromet industrial facility in Vukovar, 800 of whom were classified by the JNA as prisoners of war. Many were brutally interrogated, several were shot on the spot by TO members and paramilitaries, and others were sent to Ovčara, where they were killed in the massacre. The remaining prisoners were transferred to a JNA-run prison camp in Sremska Mitrovica. They were stripped naked on arrival, beaten and interrogated, and forced to sleep for weeks on bare wooden floors. Most were released in January 1992 under an agreement brokered by UN envoy Cyrus Vance. Others were kept prisoner until mid-1992. Serbs who fought on the Croatian side were regarded as traitors by their captors and treated particularly harshly, enduring savage beatings. Detainees who were not suspected of involvement in military activities were evacuated from Vukovar to other locations in Serbia and Croatia. The non-Serb population of the town and the surrounding region was systematically ethnically cleansed, and at least 20,000 of Vukovar's inhabitants were forced to leave, adding to the tens of thousands already expelled from across eastern Slavonia. About 2,600 people went missing as a result of the battle. , the whereabouts of more than 440 of these individuals are unknown. There were also incidents of war rape, for which two soldiers were later convicted. Serb forces singled out a number of prominent individuals. Among them was Dr. Vesna Bosanac, the director of the town's hospital, who was regarded as a heroine in Croatia but demonised by the Serbian media. She and her husband were taken to Sremska Mitrovica prison, where she was locked up in a single room with more than 60 other women for several weeks. Her husband was subjected to repeated beatings. After appeals from 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the couple were eventually released in a prisoner exchange. The journalist Siniša Glavašević was taken to Ovčara, severely beaten and shot along with the other victims of the massacre. Vukovar was systematically looted after its capture. A JNA soldier who fought at Vukovar told the Serbian newspaper Dnevni Telegraf that "the Chetnik [paramilitaries] behaved like professional plunderers, they knew what to look for in the houses they looted." The JNA also participated in the looting; an official in the Serbian Ministry of Defence commented: "Tell me of even one reservist, especially if he is an officer, who has spent more than a month at the front and has not brought back a fine car filled with everything that would fit inside the car." More than 8,000 works of art were looted during the battle, including the contents of the municipal museum, Eltz Castle, which was bombed and destroyed during the siege. Serbia returned 2,000 pieces of looted art in December 2001. Indictments and trials Three JNA officers – Mile Mrkšić, Veselin Šljivančanin and Miroslav Radić – were indicted by the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 on multiple counts of crimes against humanity and violations of the laws of war, having surrendered or been captured in 2002 and 2003. On 27 September 2007, Mrkšić was sentenced to 20 years' imprisonment on charges of murder and torture, Šljivančanin was sentenced to five years' imprisonment for torture and Radić was acquitted. Šljivančanin's sentence was increased to 17 years on appeal. It was reduced to ten years after a second appeal and he was granted early release in July 2011. Slavko Dokmanović, the Serb mayor of Vukovar, was also indicted and arrested for his role in the massacre, but committed suicide in June 1998, shortly before judgement was to be passed. Serbian paramilitary leader Vojislav Šešelj was indicted on war crimes charges, including several counts of extermination, for the Vukovar hospital massacre, in which his "White Eagles" were allegedly involved. In March 2016, Šešelj was acquitted on all counts pending appeal. On 11 April 2018, the Appeals Chamber of the follow-up Mechanism for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s convicted him of crimes against humanity and sentenced him to 10 years' imprisonment for a speech delivered in May 1992 in which he called for the expulsion of Croats from Vojvodina. He was acquitted of the war crimes and crimes against humanity that he was alleged to have committed elsewhere, including in Vukovar. The ICTY's indictment of Slobodan Milošević characterised the overall JNA and Serb offensive in Croatia – including the fighting in eastern Slavonia – as a "joint criminal enterprise" to remove non-Serb populations from Serb-inhabited areas of Croatia. Milošević was charged with numerous crimes against humanity, violations of the laws of war, and breaches of the Geneva Conventions in relation to the battle and its aftermath. He died in March 2006, before his trial could be completed. The Croatian Serb leader Goran Hadžić was indicted for "wanton destruction of homes, religious and cultural buildings" and "devastation not justified by military necessity" across eastern Slavonia, and for deporting Vukovar's non-Serb population. He was arrested in July 2011, after seven years on the run, and pleaded not guilty to 14 counts of war crimes and crimes against humanity. He died in July 2016, before his trial could be completed. In December 2005, a Serbian court convicted 14 former paramilitaries for their involvement in the hospital massacre. In 2011, a Serbian court indicted more than 40 Croatians for alleged war crimes committed in Vukovar. An earlier indictment against a Croatian soldier was dropped because of irregularities in the investigation. Croatia also indicted a number of Serbs for war crimes committed in Vukovar, including former JNA generals Veljko Kadijević and Blagoje Adžić. Adžić died of natural causes in Belgrade in March 2012 and never faced trial. Kadijević fled Yugoslavia following Milošević's overthrow and sought asylum in Russia. He was granted Russian citizenship in 2008 and died in Moscow in November 2014. In 1999, Croatia sued Yugoslavia before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 claiming that genocide had been committed in Vukovar. Following Serbia and Montenegro's dissolution in 2006, this suit was passed on to Serbia. In February 2015, the ICJ ruled that the battle and ensuing massacre did not constitute genocide, but affirmed that serious crimes had been committed by the JNA and Serb paramilitaries. Political aspects Propaganda The Serbian and Croatian media waged a fierce propaganda struggle over the progress of the battle and the reasons behind it. Both sides' propaganda machines aimed to promote ultra-nationalist sentiments and denigrate the other side with no pretence of objectivity or self-criticism. The Croatian media described the Serbian forces as "Serb terrorists" and a "Serbo-Communist army of occupation" intent on crushing the thousand-year dream of an independent Croatia. The propaganda reached peak intensity in the wake of Vukovar's fall. The Croatian newspaper Novi list denounced the Serbs as "cannibals" and "brutal Serb extremists". The Serbian media depicted the JNA and Serbian forces as "liberators" and "defenders" of the Serbian people, and the Croatian forces as "Ustashoid hordes", "blackshirts", "militants" and "drunk and stoned monsters". There were overt appeals to racial and gender prejudice, including claims that Croatian combatants had "put on female dress to escape from the town" and had recruited "black men". Victim status became a central aim for the propaganda machines of both sides, and the battle was used to support claims of atrocities. Victims became interchangeable as anonymous victims were identified as Croats by the Croatian media and as Serbs by the Serbian media. According to the Serbian opposition periodical Republika, the state-owned station TV Novi Sad was under orders to identify any bodies its reporters filmed as being "Serbian corpses". After the battle, Belgrade television showed pictures of hundreds of corpses lined up outside Vukovar's hospital and claimed that they were Serbs who had been "massacred" by the Croats. According to Human Rights Watch, the bodies belonged to those who had died of their injuries at the hospital, whose staff had been prevented from burying them by the intense Serbian bombardment, and had been forced to leave them lying in the open. Serbian television continued to broadcast claims of "massacred Serbs in Vukovar" for some time after the town's fall. Such victim-centred propaganda had a powerful motivating effect. One Serbian volunteer said that he had never seen the town before the war, but had come to fight because "the Croats had a network of catacombs under the city where they killed and tortured children just because they were Serbs." Reuters erroneously reported that 41 children had been massacred in Vukovar by Croatian soldiers. Although the claim was retracted a day later, it was used by the Serbian media to justify military action in Croatia. Many of those fighting at Vukovar believed that they were engaged in a struggle to liberate the town from a hostile occupier. International reactio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made repeated unsuccessful attempts to end the fighting. Both sides violated cease-fires, often within hours. Calls by some European Community members for the Western European Union to intervene militarily were vetoed by the British government. Instead, a Conference for Yugoslavia was established under the chairmanship of Lord Carrington to find a way to end the conflict. The United Nations (UN) imposed an arms embargo on all of the Yugoslav republics in September 1991 under Security Council Resolution 713, but this was ineffective, in part because the JNA had no need to import weapons. The European powers abandoned attempts to keep Yugoslavia united and agreed to recognise the independence of Croatia and Slovenia on 15 January 1992. International observers tried unsuccessfully to prevent the human rights abuses that followed the battle. A visit by UN envoys Marrack Goulding and Cyrus Vance was systematically obstructed by the JNA. Vance's demands to see the hospital, from which wounded patients were being dragged out to be killed, were rebuffed by one of the massacre's chief architects, Major Veselin Šljivančanin. The major also blocked Red Cross representatives in an angry confrontation recorded by TV cameras: "This is my country, we have conquered this. This is Yugoslavia, and I am in command here!" There was no international media presence in Vukovar, as there was in the simultaneous Siege of Dubrovnik and the subsequent Siege of Sarajevo, and relatively little of the fighting in Vukovar was broadcast to foreign audiences. The British journalist Misha Glenny commented that the JNA, the Croatian Serb government and many ordinary Serbs were often hostile to the foreign media, while the Croatians were more open and friendly. Croatian reaction The Croatian media gave heavy coverage to the battle, repeatedly airing broadcasts from the besieged town by the journalist Siniša Glavašević. Much popular war art focused on the "VukoWAR", as posters dubbed it. The Croatian government began suppressing Glavašević's broadcasts when it became clear that defeat was inevitable, despite the confident slogans of "Vukovar shall not fall" and "Vukovar must not fall." Two of the main daily newspapers, Večernji list and Novi list, failed to report the loss of Vukovar and, on 20 November, two days after it had fallen, repeated the official line that the fight was still continuing. News of the surrender was dismissed as Serbian propaganda. Many Croatians soon saw Western satellite broadcasts of JNA soldiers and Serb paramilitaries walking freely through the town and detaining its inhabitants. When the surrender could no longer be denied, the two newspapers interpreted the loss as a demonstration of Croatian bravery and resistance, blaming the international community for not intervening to help Croatia. The Croatian government was criticised for its approach to the battle. Surviving defenders and right-wing politicians accused the government of betraying and deliberately sacrificing Vukovar to secure Croatia's international recognition. The only explanation that many were willing to accept for the town's fall was that it had been given up as part of a conspiracy. The Croatian commanders in Vukovar, Mile Dedaković and Branko Borković, both survived the battle and spoke out publicly against the government's actions. In an apparent attempt to silence them, both men were briefly detained by the Croatian military police. The Croatian government also suppressed an issue of the newspaper Slobodni tjednik that published a transcript of a telephone call from Vukovar, in which Dedaković had pleaded with an evasive Tuđman for military assistance. The revelations caused public outrage and reinforced perceptions that the defenders had been betrayed. From a military point of view, the outcome at Vukovar was not a disaster for Croatia's overall war effort. The battle broke the back of the JNA, leaving it exhausted and unable to press deeper into the country. Vukovar was probably indefensible, being almost completely surrounded by Serb-held territory and located closer to Belgrade than to Zagreb. Although the defeat was damaging to Croatian morale, in a strategic context, the damage and delays inflicted on the JNA more than made up for the loss of the town. Following the battle, Vukovar became a symbol of Croatian resistance and suffering. The survivors, veterans and journalists wrote numerous memoirs, songs and testimonies about the battle and its symbolism, calling it variously "the phenomenon", "the pride", "the hell" and "the Croatian knight". Writers appealed to the "Vukovar principle", the "spirituality of Vukovar" and "Vukovar ethics", the qualities said to have been exhibited by the defenders and townspeople. Croatian war veterans were presented with medals bearing the name of Vukovar. In 1994, when Croatia replaced the Croatian dinar with its new currency, the kuna, it used the destroyed Eltz Castle in Vukovar and the Vučedol Dove – an artefact from an ancient Neolithic culture centred on eastern Slavonia, which was discovered near Vukovar – on the new twenty-kuna note. The imagery emphasised the Croatian nature of Vukovar, which at the time was under Serb control. In 1993 and 1994, there was a national debate on how Vukovar should be rebuilt following its reintegration into Croatia, with some Croatians suggesting that it should be preserved as a monument. The ruling HDZ made extensive use of popular culture relating to Vukovar as propaganda in the years before the region was reintegrated into Croatia. In 1997, President Tuđman mounted a tour of eastern Slavonia, accompanied by a musical campaign called Sve hrvatske pobjede za Vukovar ("All Croatian victories for Vukovar"). The campaign was commemorated by the release of a compilation of patriotic music from Croatia Records. When Vukovar was returned to Croatian control in 1998, its recovery was hailed as the completion of a long struggle for freedom and Croatian national identity. Tuđman alluded to such sentiments when he gave a speech in Vukovar to mark its reintegration into Croatia: Serbian reaction Although the battle had been fought in the name of Serbian defence and unity, reactions in Serbia were deeply divided. The JNA, the state-controlled Serbian media and Serbian ultra-nationalists hailed the victory as a triumph. The JNA even erected a triumphal arch in Belgrade through which its returning soldiers could march, and officers were congratulated for taking "the toughest and fiercest Ustaša fortress". The Serbian newspaper Politika ran a front-page headline on 20 November announcing: "Vukovar Finally Free". In January 1992, from the ruins of Vukovar, the ultranationalist painter Milić Stanković wrote an article for the Serbian periodical Pogledi ("Viewpoints"), in which he declared: "Europe must know Vukovar was liberated from the Croat Nazis. They were helped by Central European scum. They crawled from under the papal tiara, as a dart of the serpent's tongue that protruded from the bloated Kraut and overstretched Eurocommunal anus." The Serbian geographer Jovan Ilić set out a vision for the future of the region, envisaging it being annexed to Serbia and its expelled Croatian population being replaced with Serbs from elsewhere in Croatia. The redrawing of Serbia's borders would unite all Serbs in a single state, and would cure Croats of opposition to Serbian nationalism, which Ilić termed an "ethno-psychic disorder". Thus, Ilić argued, "the new borders should primarily be a therapy for the treatment of ethno-psychic disorders, primarily among the Croatian population." Other Serbian nationalist writers acknowledged that the historical record showed that eastern Slavonia had been inhabited by Croats for centuries, but accused the region's Croat majority of "conversion to Catholicism, Uniating and Croatisation", as well as "genocidal destruction". Most irredentist propaganda focused on the region's proximity to Serbia and its sizeable Serb population. The Croatian Serb leadership also took a positive view of the battle's outcome. Between 1991 and 1995, while Vukovar was under the control of the Republic of Serbian Krajina (RSK), the city's fall was officially commemorated as "Liberation Day". The battle was portrayed as a successful struggle by local Serbs to defend their lives and property from the aggression of the Croatian state. Thousands of Vukovar Serbs that had suffered alongside their Croatian neighbours, sheltering in basements or bomb shelters for three months in appalling conditions, were now denigrated as podrumaši, the "people from the basement". Serb civilian dead were denied recognition, and the only people buried in the Serbian memorial cemetery at Vukovar were local Serbs who had fought with or alongside the JNA. In contrast, many in Serbia were strongly opposed to the battle and the wider war, and resisted efforts by the state to involve them in the conflict. Multiple anti-war movements appeared in Serbia as Yugoslavia began to disintegrate. In Belgrade, sizeable anti-war protests were organized in opposition to the battle. The protesters demanded that a referendum be held on a formal declaration of war, as well as an end to conscription. When the JNA tried to call up reservists, parents and relatives gathered around barracks to prevent their children taking part in the operation. Resistance to conscription became widespread across Serbia, ranging from individual acts of defiance to collective mutinies by hundreds of reservists at a time. A number of Serbian opposition politicians condemned the war. Desimir Tošić of the Democratic Party accused Milošević of "using the conflict to cling to power", and Vuk Drašković, the leader of the Serbian Renewal Movement, appealed to JNA soldiers to "pick up their guns and run". After the fall of Vukovar, he condemned what had been done in the name of Yugoslavia, writing in the daily newspaper Borba: By late December 1991, just over a month after victory had been proclaimed in Vukovar, opinion polls found that 64 percent wanted to end the war immediately and only 27 percent were willing for it to continue. Milošević and other senior Serbian leaders decided against continuing the fighting, as they saw it as politically impossible to mobilise more conscripts to fight in Croatia. Desertions from the JNA continued as the well-motivated and increasingly well-equipped Croatian Army became more difficult to counter. By the end of 1991, Serbia's political and military leadership concluded that it would be counter-productive to continue the war. The looming conflict in Bosnia also required that the military resources tied up in Croatia be freed for future use. Although the battle was publicly portrayed as a triumph, it profoundly affected the JNA's character and leadership behind the scenes. The army's leaders realised that they had overestimated their ability to pursue operations against heavily defended urban targets, such as the strategic central Croatian town of Gospić, which the JNA assessed as potentially a "second Vukovar". The "Serbianisation" of the army was greatly accelerated, and, by the end of 1991, it was estimated to be 90 percent Serb. Its formerly pro-communist, pan-Yugoslav identity was abandoned, and new officers were now advised to "love, above all else, their unit, their army and their homeland – Serbia and Montenegro". The JNA's failure enabled the Serbian government to tighten its control over the military, whose leadership was purged and replaced with pro-Milošević nationalists. After the battle, General Veljko Kadijević, commander of the JNA, was forced into retirement for "health reasons", and in early 1992, another 38 generals and other officers were forced to retire, with several put on trial for incompetence and treason. Many individual JNA soldiers who took part in the battle were revolted by what they had seen and protested to their superiors about the behaviour of the paramilitaries. Colonel Milorad Vučić later commented that "they simply do not want to die for such things". The atrocities that they witnessed led some to experience subsequent feelings of trauma and guilt. A JNA veteran told a journalist from the Arabic-language newspaper Asharq Al-Awsat: Other Yugoslav reaction In Bosnia and Herzegovina, President Alija Izetbegović made a televised appeal to Bosnian citizens to refuse the draft on the grounds that "this is not our war". He called it their "right and duty" to resist the "evil deeds" being committed in Croatia and said: "Let those who want it, wage it. We do not want this war." When JNA troops transferred to the front via the Višegrad region of north-eastern Bosnia, local Bosnian Croats and Muslims set up barricades and machine-gun posts. They halted a column of 60 JNA tanks but were dispersed by force the following day. More than 1,000 people had to flee the area. This action, nearly seven months before the start of the Bosnian War, caused the first casualties of the Yugoslav Wars in Bosnia. Macedonia's parliament adopted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rom Yugoslavia in January 1991, but it did not take effect until a referendum in September 1991 confirmed it. A group of Macedonian JNA officers secretly sought to prevent soldiers from Macedonia being sent to Croatia, and busloads of soldiers' parents, funded by the Macedonian government, travelled to Montenegro to find their sons and bring them home. Meanwhile, Macedonians continued to be conscripted into the JNA and serve in the war in Croatia. The commander of JNA forces in the first phase of the battle, General Aleksandar Spirkovski, was a Macedonian. His ethnicity was probably a significant factor in the decision to replace him with Života Panić, a Serb. In 2005, the Macedonian Army's Chief of Staff, General Miroslav Stojanovski, became the focus of international controversy after it was alleged that he had been involved in possible war crimes following the battle. Occupation, restoration and reconstruction Vukovar suffered catastrophic damage in the battle. Croatian officials estimated that 90 percent of its housing stock was damaged or destroyed, accounting for 15,000 housing units in total. The authorities placed the cost of reconstruction at $2.5 billion. The town barely recovered during its seven years under Serb control. Marcus Tanner of The Independent described post-battle Vukovar as: When Michael Ignatieff visited Vukovar in 1992, he found the inhabitants living in squalor: The population increased to about 20,000 as Serb refugees from other parts of Croatia and Bosnia were relocated by RSK authorities. They initially lived without water or electricity, in damaged buildings patched up with plastic sheeting and wooden boards. Residents scavenged the ruins for fragments of glass that they could stick back together to make windows for themselves. The main sources of income were war profiteering and smuggling, though some were able to find jobs in eastern Slavonia's revived oil industry. Reconstruction was greatly delayed by economic sanctions and lack of international aid. After the Erdut Agreement was signed in 1995, the 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 for Eastern Slavonia, Baranja and Western Sirmium (UNTAES) was established to enable the return of Croatian refugees and to prepare the region for reintegration into Croatia. This UN peacekeeping force provided security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between 1996 and 1998. It was only in 1999 that Croats began returning to Vukovar in significant numbers, and many of the pre-war inhabitants never returned. By March 2001, the municipality was recorded as having 31,670 inhabitants – less than half the pre-war total – of whom 18,199 (57.46 percent) were Croats and 10,412 (32.88 percent) were Serbs. The community did not recover its mixed character: Croats and Serbs now lived separate social lives. Public facilities such as shops, cafés, restaurants, sports clubs, schools, non-governmental organisations and radio stations were re-established on segregated lines, with separate facilities for each community. Although the Croatian government sponsored reconstruction efforts in and around Vukovar, the Serb-populated town centre remained in ruins until 2003. Both Croat and Serb residents believed the government had neglected it deliberately, in order to punish the Serb community. Human Rights Watch noted that, of 4,000 homes that had been rebuilt, none of them were inhabited by Serbs. Unemployment was high because of the destruction of the town's major industries, and many of the inhabitants could not sell their houses. Most houses and many of Vukovar's historic buildings had been restored by 2011. Commemorations and memorials Signs of the battle are still widely apparent in Vukovar, where many buildings remain visibly scarred by bullets and shrapnel. The town hospital presents an exhibition and reconstruction of the conditions in the building during the battle. At Ovčara, the site of the massacre is marked by a mass grave and exhibition about the atrocity. Local guides, some of whom lived through the battle, offer tourists the opportunity to visit these and other sites on walking and bicycle tours. The riverside water tower was long preserved in its badly damaged state as a war memorial. In 2016, a campaign was launched to restore the water tower to its pre-war state. The reconstructed water tower was opened to the public in October 2020. Every November, Vukovar's authorities hold four days of festivities to commemorate the town's fall, culminating in a "Procession of Memory" held on 18 November. This represents the expulsion of the town's Croat inhabitants and involves a five-kilometre (3.1 mile) walk from the city's hospital to the Croatian Memorial Cemetery of Homeland War Victims. It is attended by tens of thousands of people from across Croatia. Local Serbs have avoided participating in the Croatian commemorations, often preferring either to leave the town or stay indoors on 18 November. Until 2003, they held a separate, low-key commemoration at the Serbian military cemetery on 17 November. Such commemorations have been held on 18 November since then. The RSK-era term "Liberation Day" has been dropped, but Serbs also avoid using the Croatian terminology, instead calling it simply "18 November". The issue of how to remember the Serb dead has posed particular difficulties. Local Serbs who died fighting alongside the JNA were buried by the Croatian Serb authorities on a plot of land where Croatian houses had once stood. The gravestones were originally topped with a sculptural evocation of the V-shaped Serbian military cap, or šajkača. After Vukovar's reintegration into Croatia, the gravestones were repeatedly vandalised. The Serb community replaced them with more neutral gravestones without overt military connotations. Vukovar Serbs report feeling marginalised and excluded from places associated with Croatian nationalist sentiment, such as war monuments. The Croatian sociologist Kruno Kardov gives the example of a prominent memorial, a large cross made from white stone, where the Vuka flows into the Danube. According to Kardov, Serbs rarely if ever go there, and they feel great stress if they do. A Serb boy spoke of how he wanted to know what was written on the monument but was too frightened to go and read the inscription; one day he got up the courage, ran to the monument, read it and immediately ran back to "safety". As Kardov puts it, Vukovar remains divided by an "invisible boundary line ... inscribed only on the cognitive map of the members of one particular group." The battle is widely commemorated in Croatia. Almost every town has streets named after Vukovar. In 2009, the lead vessel of the Croatian Navy's two newly launched Helsinki-class missile boats was named after the town. The Croatian Parliament has declared 18 November to be the "Remembrance Day of the Sacrifice of Vukovar in 1991", when "all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defence of the city of Vukovar – the symbol of Croatian freedom – are appropriately honoured with dignity." As a symbol of Croatia's national identity, Vukovar has become a place of pilgrimage for people from across Croatia who seek to evoke feelings of "vicarious insideness", as Kardov describes them, in the suffering endured during the country's war of independence. Some gather in front of the town's main memorial cross on New Year's Eve to pray as the year ends, though such sentiments have attracted criticism from local Croats for not allowing them to "rejoice for even a single night", as one put it. The town has thus become, in Kardov's words, "the embodiment of a pure Croatian identity" and the battle "the foundational myth of the Croatian state". This has led to it becoming as much an "imagined place", a receptacle for Croatian national sentiment and symbolism, as a real place. Kardov concludes that it is questionable whether Vukovar can ever once again be "one place for all its citizens". In November 2010, Boris Tadić became the first President of Serbia to travel to Vukovar, when he visited the massacre site at Ovčara and expressed his "apology and regret". Films and books The battle was portrayed in the Serbian films Dezerter ("The Deserter") (1992), Kaži zašto me ostavi ("Why Have You Left Me?") (1993) and Vukovar, jedna priča ("Vukovar: A Story") (1994); in the Croatian films Vukovar se vraća kući ("Vukovar: The Way Home") (1994), Zapamtite Vukovar ("Remember Vukovar") (2008); and in the French film Harrison's Flowers (2000). A 2006 Serbian documentary film about the battle, Vukovar – Final Cut, won the Human Rights Award at the 2006 Sarajevo Film Festival. The battle is also at the centre of Serbian writer Vladimir Arsenijević's 1995 novel U potpalublju ("In the Hold").Also, the Croatian film Sixth Bus (2022) ("Šesti autobus"), which opened the Pula Film Festival 2022 has the Battle for Vukovar as its theme. Notes References Books News reports Other sources External links Vukovar – Final Cut – Producer's announcement of the 2006 documentary film Images from Vukovar after the fall by Ron Haviv 1991 in Croatia August 1991 events in Europe September 1991 events in Europe October 1991 events in Europe November 1991 events in Europe Vukovar 1991 Battles involving Yugoslavia Battles of the Croatian War of Independence Battle of Vukovar 1991 Republic of Serbian Krajina 20th-century sieges Serbian war crimes in the Croatian War of Independence Sieges Sieges involving Croatia Urban warfare Vukovar Battles in 1991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20%ED%98%81%EB%AA%85%EC%97%90%20%EA%B4%80%ED%95%9C%20%EC%84%B1%EC%B0%B0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은 아일랜드계 영국정치가 에드먼드 버크가 저술해 1790년 11월 출간한 정치 팜플렛이다. 지성사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 중 하나이며, 근대 보수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하고 국제정치 이론에도 기여한 소책자로 평가된다. 특히 "전통주의를 보수주의라는 각성되고 완전한 정치 철학으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버크 사상의 최고봉으로 평가된다. 이 논고의 성격은 복합적으로 분류된다.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팜플렛이라 볼 수도 있으나 편지의 형태로 쓰여져 의미의 층위에 개방성과 특정성이 더해진다. 내용적으로는 학자에 따라 "현실주의자로도 이상주의자로도 분류되며, 합리주의자로도 혁명주의자로도 분류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 통찰력과 수사적 표현, 문학적 영향 때문에 버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정치 이론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버크의 사상은 20세기 보수주의와 고전 자유주의 지식인들에 큰 영향을 미쳐 공산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논거로서 활용되기도 하였다. 배경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 따라 이성을 불신하며 인간의 행동은 이성뿐만이 아니라 정념에 의해서도 추동된다고 본다. 1757년에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발표하여 숭고라는 감정에 대하여 고찰하기도 하였다. 버크는 사회를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없는 복잡계로 인식하였고, 이성에 의한 '진보'를 추구하는 모든 정책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버크는 영국 하원에서 야당이었던 휘그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자유주의 정치가였던 로킹엄(Rockingham) 경과 협력하는데, 정치인으로서 버크는 이성을 과신하여 사회의 전통과 제도를 파괴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버크는 고향 아일랜드의 카톨릭교도에 대한 종교적 탄압을 비난하였고,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하며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하였으며,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부패와 권력남용을 이유로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의 탄핵을 추진하기도 한다. 한편 영국 헌정의 전통에 따라 왕권에 대한 입헌적 제약은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비주류인 아일랜드계 야당 정치인으로서 버크의 초기행보는 주로 "자유주의적 명분을 숭상했고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하기도 했기에, 버크가 프랑스 혁명은 재앙이고 혁명가들을 '추잡한 무리들'이라 표현하는 강한 신념을 보였을 때 정적과 동료정치인 구분없이 놀랐다." 이 책의 발표 후 버크는 찰스 폭스 등 같은 휘그당원 동지들과 등을 지기도 한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직후, 프랑스 귀족 샤를-장-프랑수아 뒤퐁은 자유주의자들의 존경을 받던 버크에게 프랑스 혁명에 대한 견해를 밝혀달라고 요청한다. 버크는 두 통의 편지로 답신하는데, 두 번째 쓰여진 더 장문의 편지는 리처드 프라이스의 1790년 1월 연설문 〈조국애에 대한 담론〉(A Discourse on the Love of Our Country)을 읽고 쓴 것이며 이것이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으로 출간된다. 1790년 11월 출판된 후, 이 책은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영국에서 1년간 1만 9천부, 프랑스에서 1만 3천부가 팔렸으며 루이 16세도 이 책을 읽었다. 자유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맹비난하는데, 그는 프랑스 혁명이 그가 옹호했던 미국 독립 혁명이나 명예혁명과는 달리 전통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며, 이성에 대한 맹신으로 자기확신에 젖어 모든 것을 적폐로 몰고 청산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은 완벽하지 않으며, 항상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고 완벽하게 통제될 수 없기 때문에 버크는 이성이 제시하는 급진적 변화의 청사진을 거부한다. 버크는 인간이 이성을 절대화할 때 나타나는 일에 대하여 "인간이 신을 가장한다면, 머지않아 악마처럼 행동한다."고 표현하며, 프랑스 혁명의 이후 경과가 폭력과 파괴, 살육과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자의 출현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측하였다. 내용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버크는 영국 진보지식인들이 대혁명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경계하며, 프랑스 혁명을 영국 명예혁명과 동일선상에서 평가한 프라이스 목사의 연설을 반박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성격이 명예혁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프라이스 목사는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의 대혁명 모두 폭군에 대한 저항권이라는 자연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버크는 명예혁명은 저항권이라는 추상적 원칙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영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전통에 따른 결과이며, 이와 달리 프랑스 혁명은 천부인권 등 추상적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과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버크는 이성적인 것이라 포장된 혁명의 추상적 토대가 인간과 사회 본질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재앙적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 본다. 영향 혁명에 관한 버크의 견해는 즉각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반론서를 출간했고, 이른바 "팜플렛 전쟁"이 일어났다. 추상적 인권을 환상이라 비난하며 실제 역사, 제도, 문화, 습속 등을 중시하는 버크의 주장에 대하여, 최초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인간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Men, 1790)를 저술해 반박했으며 곧 이어 토머스 페인도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 1791)를 출간하여 논쟁이 격해졌다. 이 책의 출간은 근대 보수주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제시했던 이성의 불완전성과 급진개혁의 위험성, 전통의 중요성 등은 보수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영어 원문,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제공.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보수주의란 무엇일까? , 박종선 칼럼, 주간조선 2472호. 아일랜드의 책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책 철학 책 1790년 책 보수주의 반계몽주의
https://en.wikipedia.org/wiki/Reflections%20on%20the%20Revolution%20in%20France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is a political pamphlet written by the British statesman Edmund Burke and published in November 1790. It is fundamentally a contras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at time with the unwritten British Constitution and, to a significant degree, an argument with British supporters and interpreters of the events in France. One of the best-known intellectual attacks against the French Revolution, Reflections is a defining tract of modern conservatism as well as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international theory.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 describes Reflections as becoming the "most eloquent statement of British conservatism favoring monarchy, aristocracy, property, hereditary succession, and the wisdom of the ages." Above all else, it has been one of the defining efforts of Edmund Burke's transformation of "traditionalism into a self-conscious and fully conceived political philosophy of conservatism". The pamphlet has not been easy to classify. Before seeing this work as a pamphlet, Burke wrote in the mode of a letter, invoking expectations of openness and selectivity that added a layer of meaning. Academics have had trouble identifying whether Burke, or his tract, can best be understood as "a realist or an idealist, Rationalist or a Revolutionist". Thanks to its thoroughness, rhetorical skill and literary power, it has become one of the most widely known of Burke's writings and a classic text in political theory. In the 20th century, it influenced a number of conservative intellectuals, who recast Burke's Whiggish arguments as a critique of Bolshevik programmes. Background Burke served in the House of Commons of Great Britain, representing the Whig party, in close alliance with liberal politician Lord Rockingham. In Burke's political career, he vigorously defended constitutional limitation of the Crown's authority, denounced the religious persecution of Catholics in his native Ireland, voiced the grievances of Britain's American colonies, supported American Independence and vigorously pursued impeachment of Warren Hastings, the Governor-General of British India, for corruption and abuse of power. For these actions, Burke was widely respected by liberals in Great Britain, the United States and the European continent. Earlier in his career, Burke had championed many liberal causes and sided with the Americans in their war for independence. Thus, opponents and allies alike were surprised at the strength of his conviction that the French Revolution was "a disaster" and the revolutionists "a swinish multitude". Soon after the fall of the Bastille in 1789, the French aristocrat Charles-Jean-François Depont asked his impressions of the Revolution and Burke replied with two letters. The longer, second letter, drafted after he read Richard Price's speech A Discourse on the Love of Our Country in January 1790, became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Published in November 1790, the work was an instant bestseller as thirteen thousand copies were purchased in the first five weeks and by the following September had gone through eleven editions. According to Stephen Greenblatt in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 "part of its appeal to contemporary readers lay in the highly wrought accounts of the mob's violent treatment of the French king and queen (who at the time Burke was writing were imprisoned in Paris...)." The French king and queen were executed three years later, in January and October 1793 respectively. Burke wrote that he did not like abstract thinking, that freedom and equality were different, that genuine equality must be judged by God and that liberty was a construct of the law and no excuse to do whatever one would like. He was not comfortable with radical change and believed that the revolutionaries would find themselves further in trouble as their actions would cause more problems. In his opinions, the revolutionaries did not understand that "there are no rights without corresponding duties, or without some strict qualifications". With his view of what he believed would happen to the revolutionaries, one can see why Burke did not like change. Burke believed that people such as the revolutionaries cannot handle large amounts of power. "When men play God", Burke said, "presently they behave like devils". Arguments In the Reflections, Burke argued that the French Revolution would end disastrously because its abstract foundations, purportedly rational, ignored the complexities of human nature and society. Further, he focused on the practicality of solutions instead of the metaphysics, writing: "What is the use of discussing a man's abstract right to food or to medicine? The question is upon the method of procuring and administering them. In this deliberation I shall always advise to call in the aid of the farmer and the physician, rather than the professor of metaphysics". Following St. Augustine and Cicero, he believed in "human heart"-based government. Nevertheless, he was contemptuous and afraid of the Enlightenment, inspired by the writings of such intellectuals such as David Hume, Edward Gibbon, Jean-Jacques Rousseau, Voltaire and Anne Robert Jacques Turgot, who disbelieved in divine moral order and original sin. Burke said that society should be handled like a living organism and that people and society are limitlessly complicated, leading him to conflict with Thomas Hobbes' assertion that politics might be reducible to a deductive system akin to mathematics. As a Whig, Burke expressly repudiated the belief in divinely appointed monarchic authority and the idea that a people have no right to depose an oppressive government. However, he advocated central roles for private property, tradition and prejudice (i.e. adherence to values regardless of their rational basis) to give citizens a stake in their nation's social order. He argued for gradual, constitutional reform, not revolution (in every case, except the most qualified case), emphasizing that a political doctrine founded upon abstractions such as liberty and the rights of man could be easily abused to justify tyranny. He saw inherited rights, restated in England from the Magna Carta to the Declaration of Right, as firm and concrete providing continuity (like tradition, prejudice and inheritable private property). By contrast, enforcement of speculative abstract rights might waver and be subject to change based on currents of politics. Instead, he called for the constitutional enactment of specific, concrete rights and liberties as protection against governmental oppression. In the phrase, "[prejudice] renders a man's virtue his habit", Burke defends people's cherished, but untaught, irrational prejudices (the greater it behooved them, the more they cherished it). Because a person's moral estimation is limited, people are better off drawing from the "general bank and capital of nations and of ages" than from their own intellects. Burke predicted that the Revolution's concomitant disorder would make the army "mutinous and full of faction" and then a "popular general", commanding the soldiery's allegiance, would become "master of your assembly, the master of your whole republic". Although he may have been thinking of 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fayette, Napoleon fulfilled this prophecy on the 18th Brumaire, two years after Burke's death. Most of the House of Commons disagreed with Burke and his popularity declined. As the French Revolution broke into factions, the Whig Party broke in two, namely the New Whig party and the Old Whig party. As founder of the Old Whigs, Burke always took the opportunity to engage in debate with the New Whigs about French Jacobinism. After trying to loosen the Protestant minority's control of Irish government, he was voted out of the House of Commons with a great pension. He later adopted French and Irish children, believing himself correct in rescuing them from government oppression. Before dying, he ordered his family to bury him secretly, believing his cadaver would be a political target for desecration should the Jacobins prevail in England. Intellectual influence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was read widely when it was published in 1790, although not every Briton approved of Burke's kind treatment of their historic enemy or its royal family. His English enemies speculated he either had become mentally unbalanced or was a secret Catholic, outraged by the democratic French government's anti-clerical policies and expropriation of Church land. The publication of this work drew a swift response, first with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Men (1790) by Mary Wollstonecraft and then with Rights of Man (1791) by Thomas Paine. Nonetheless, Burke's work became popular with King George III and the Savoyard philosopher Joseph de Maistre. Historically,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became the founding philosophic opus of conservatism when some of Burke's predictions occurred, namely when the Reign of Terror under the new French Republic executed thousands (including many nuns and clergy) from 1793 to 1794 to purge so-called counter-revolutionary elements of society. In turn, that led to the political reaction of General Napoleon Bonaparte's government which appeared to some to be a military dictatorship. Burke had predicted the rise of a military dictatorship and that the revolutionary government instead of protecting the rights of the people would be corrupt and violent. In the 19th century, positivist French historian Hippolyte Taine repeated Burke's arguments in Origins of Contemporary France (1876–1885), namely that centralisation of power is the essential fault of the Revolutionary French government system; that it does not promote democratic control; and that the Revolution transferred power from the divinely chosen aristocracy to an "enlightened" heartless elite more incompetent and tyrannical than the aristocrats. In the 20th century, Western conservatives applied Burke's anti-revolutionary Reflections to popular revolutions, thus establishing Burke's iconic political value to conservatives. For example, Friedrich Hayek, a noted Austrian economist, acknowledged an intellectual debt to Burke. Christopher Hitchens wrote that the "tremendous power of the Reflections lies" in being "the first serious argument that revolutions devour their own children and turn into their own opposites". However, historians have regarded Burke's arguments as inconsistent with the actual history of the events. Despite being the most respected conservative historian of the events, Alfred Cobban acknowledged that Burke's pamphlet in so far as it "deals with the causes of the Revolution [...] they are not merely inadequate, but misleading" and that its main success is as a "violent parti pris". Cobban notes that Burke was extremely well informed on America, Ireland and India, but in the case of the French Revolution relied on weak information and poor sources and as a result his thesis does not cohere to the ground reality of France at the onset of the Revolution, where the situation was indeed dire enough to sweep existing institutions. Cobban concludes: "As literature, as political theory, as anything but history, his Reflections is magnificent". In 2020,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was banned in China. Quotes from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All circumstances taken together, the French revolution is the most astonishing that has hitherto happened in the world. The most wonderful things are brought about in many instances by means the most absurd and ridiculous; in the most ridiculous modes; and apparently, by the most contemptible instruments. Every thing seems out of nature in this strange chaos of levity and ferocity, and of all sorts of crimes jumbled together with all sorts of follies. In viewing this tragi-comic scene, the most opposite passions necessarily succeed, and sometimes mix with each other in the mind; alternate contempt and indignation; alternate laughter and tears; alternate scorn and horror. A spirit of innovation is generally the result of a selfish temper and confined views. People will not look forward to posterity, who never look backward to their ancestors. They are surrounded by an army not raised either by the authority of their crown or by their command, and which, if they should order to dissolve itself, would instantly dissolve them. Our political system is placed in a just correspondence and symmetry with the order of the world, and with the mode of existence decreed to a permanent body composed of transitory parts; wherein, by the disposition of a stupendous wisdom, moulding together the great mysterious incorporation of the human race, the whole, at one time, is never old, or middle-aged, or young, but in a condition of unchangeable constancy, moves on through the varied tenour of perpetual decay, fall, renovation, and progression. Thus, by preserving the method of nature in the conduct of the state, in what we improve we are never wholly new; in what we retain we are never wholly obsolete. If civil society be made for the advantage of man, all the advantages for which it is made become his right. [...] Men have a right to [...] justice; as between their fellows, whether their fellows are in politic function or in ordinary occupation. They have a right to the fruits of their industry; and to the means of making their industry fruitful. They have a right to the acquisitions of their parents; to the nourishment and improvement of their offspring; to instruction in life, and to consolation in death. All the pleasing illusions, which made power gentle, and obedience liberal, which harmonized the different shades of life, and which, by a bland assimilation, incorporated into politics the sentiments which beautify and soften private society, are to be dissolved by this new conquering empire of light and reason. All the decent drapery of life is to be rudely torn off. Where trade and manufactures are wanting to a people, an the spirit of nobility and religion remains, sentiment supplies, and not always ill supplies their place; but if commerce and the arts should be lost in an experiment to try how well a state may stand without these old fundamental principles, what sort of a thing must be a nation of gross, stupid, ferocious, and at the same time, poor and sordid barbarians, destitute of religion, honor, or manly pride, possessing nothing at present, and hoping for nothing hereafter? I wish you may not be going fast, and by the shortest cut, to that horrible and disgustful situation. Already there appears a poverty of conception, a coarseness and vulgarity in all the proceedings of the assembly and of all their instructors. Their liberty is not liberal. Their science is presumptuous ignorance. Their humanity is savage and brutal. Society is indeed a contract. Subordinate contracts for objects of mere occasional interest may be dissolved at pleasure – but the state ought not to be considered as nothing better than a partnership agreement in a trade of pepper and coffee, calico or tobacco, or some other such low concern, to be taken up for a little temporary interest, and to be dissolved by the fancy of the parties. It is to be looked on with other reverence; because it is not a partnership in things subservient only to the gross animal existence of a temporary and perishable nature. It is a partnership in all science; a partnership in all art; a partnership in every virtue, and in all perfection. As the ends of such a partnership cannot be obtained in many generations, it becomes a partnership not only between those who are living, but between those who are living, those who are dead, and those who are to be born. See also Considerations on France (1796) by Joseph de Maistre Notes References Bibliography External links An online facsimile of the first edition from the Internet Archive A brief excerpt from the text, from the Internet History Sourcebooks Project A complete online edition of the text, from Project Gutenberg "Reactionary Prophet: Edmund Burke understood before anyone else that revolutions devour their young—and turn into their opposites" by Christopher Hitchens, The Atlantic Monthly, April 2004. 1790 events of the French Revolution Works by Edmund Burke Philosophy essays Political philosophy literature 1790 non-fiction books Books about the French Revolution Counter-Enlightenment Pamphlets Pamphlets of the French Revolution Books about politics of France Works banned i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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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부티크
《시크릿 부티크》는 2019년 9월 18일부터 2019년 11월 28일까지 방송되었던 SBS 수목 드라마로 재벌가의 권력 다툼과 복수에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프로그램 소개 국제 도시 개발 게이트를 둘러싸고 권력, 복수, 생존을 위한 파워 게임을 벌이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출연진 주요 인물 김선아 : 제니 장 / 장도영 역 (아역 : 박서경, 정다은) - 39세. J부티크의 대표. 장미희 : 김여옥 역 - 66세. ㈜데오그룹의 총수. ㈜데오재단의 회장 박희본 : 위예남 역 (아역 : 조민아) - 39세. 데오가의 장녀. ㈜데오재단 전무. ㈜데오코스메틱 대표 고민시 : 이현지 역 - 25세. 프로보다 뛰어난 아마추어 바둑기사. 주현의 딸 김재영 : 윤선우 역 (아역 : 이시우) - 33세. J부티크 측근 변호사 김태훈 : 위정혁 역 (아역 : 박준혁,유정우) - 41세. 데오가의 장남. 데오호텔 대표 데오그룹 류원 : 위예은 역 - 32세. 데오가의 차녀. J부티크 직원으로 로스쿨 재학 중 류승수 : 차승재 역 - 41세. 예남의 남편, 여옥의 맏사위로 융천검찰청 특수부 부장 한정수 : 황 집사 역 - 54세. 데오가의 집사 김영아 : 미세스 왕 역 - 50세. 데오가의 총괄 메이드 여무영 : 위동섭 역 - 여옥의 시아버지이자 ㈜데오그룹 초대 회장 박병호 : 운산스님 역 - 71세. 위동섭의 동생. 스님 김소영 : 차수빈 역 - 예남의 딸 융천시청 및 시의회 김법래 : 도준섭 역 - 53세. 욕심이 많고 변덕이 들끓는 사람으로, 자잘한 사고도 많이 치는 약점 많은 사람이지만 뻔뻔하기로 일등인 인물 주석태 : 오태석 역 - 44세. 융천경찰청 정보과장. 융천시청으로 파견근무를 하게 되는 인물. 요트 위에서 주현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가격한 뒤 도망침 장률 : 이주호 역 - 48세. 융천시 시의회 도시계획의원 현지네 가족들 장영남 : 박주현 역 - 50세. 현지의 어머니. 서울 선능지구대 경위. 태석에 의해 쇠파이프로 머리를 맞아 사망할 뻔 윤지인 : 김미진 역 - 38세. 현지의 부양가족 No'1 최동화 : 예준 역 - 11세. 현지의 부양가족 No'2, 미진의 아들 그 외 인물 임철형 : 조양오 역 - ㈜양오유통 사장. 조폭두목. 융천 토박이 정욱진 : 이상훈 역 -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는 의사 송지우 : 윤혜라 역 - 가출소녀. 아르바이트 도우미 박재준 : 장도윤 역 - 11세. 도영(제니 장)의 동생.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박정학 : 최석훈 역 - ㈜조광그룹 부회장 김성현 : 20세 정혁 역 아역들 박서경 : 10살 시절의 장도영(훗날 제니 장이 되는 인물) 정다은 : 19살 시절의 장도영(훗날 제니 장이 되는 인물) 조민아 : 19살 시절의 위예남 유정우 : 21세 시절의 위정혁 박준혁: 12세 시절의 위정혁 촬영지 바람의 언덕 장승포항 거붕백병원 - 세진종합병원 삼각백빈건널목 고령산 보광사 시우식당 구 성동구치소 장사도 해상공원 빌라드베일리(J부티크) 에이와이라운지 재능문화센터 옥련시장 그레이스케일커피 쿠키프렌즈카페 반포대교 하영호 신촌 설농탕 대룡시장 테리토리 인천항크루즈터미널 시청률 결방 사유 2019년 10월 10일 : SBS 스포츠 《2019 KBO리그 준플레이오프 4차전 키움 히어로즈 VS LG 트윈스》 편성으로 인한 결방. 2019년 10월 17일 : SBS 스포츠 《2019 KBO리그 플레이오프 3차전 SK 와이번스 VS 키움 히어로즈》 편성으로 인한 결방. 2019년 10월 23일 : SBS 스포츠 《2019 KBO리그 한국 시리즈 2차전 키움 히어로즈 VS 두산 베어스》 편성으로 인한 결방. 2019년 11월 6일 : WBSC 프리미어 12 한국 VS 호주 편성으로 인한 결방. 2019년 11월 7일 : WBSC 프리미어 12 한국 VS 캐나다 편성으로 인한 결방. 2019년 11월 21일 : 제40회 청룡영화상 편성으로 인한 결방. 수상 2019년 2019 SBS 연기 대상 미니 시리즈 부문 여자 신인상 - 고민시 경쟁 프로그램 KBS 2TV 수목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tvN 수목 드라마 《싸이코패스 다이어리》 참고 사항 김여옥 역에는 당초 이미숙이 낙점됐으나 하차하였고 장미희가 대신 캐스팅되었다. 스포츠와 시상식 중계 관계로 6회나 결방되어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샀다. 강약 조절 없이 강강강강으로만 이어진 스토리는 피로도를 낳았으며 출연진들이 치고 빠지는 호흡보다는 각자의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데 주력했다는 혹평이 있었다.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ㅅ) 2019년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각주 외부 링크 SBS 시크릿 부티크 공식 홈페이지 시크릿 부티크 전회차 무료보기 SBS 드라마 스페셜 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19년 드라마 허선희 시나리오 작품 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 2019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2019년에 종료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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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Boutique
Secret Boutique () is a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starring Kim Sun-a, Chang Mi-hee, Park Hee-von, Go Min-si, Kim Jae-young and Kim Tae-hoon. It aired on SBS TV from September 18 to November 28, 2019. The series is the last Wednesday-Thursday Drama Special project () of SBS. Synopsis Secret Boutique is a female-centric drama about money, power, revenge and survival. It follows the story of Jenny Jang (Kim Sun-a), the owner of J-Boutique that looks like a normal clothing and accessories store from the outside, but is actually a secret network connecting the political and business circles to a small law firm that secretly solves problems of the upper class. Cast Main Kim Sun-a as Jenny Jang / Jang Do-young, an orphan who goes from working at a bathhouse to becoming an influential lobbyist. Jung Da-eun as young Jenny Jang Chang Mi-hee as Kim Yeo-ok Park Hee-von as Wi Ye-nam Go Min-si as Lee Hyeon-ji Kim Jae-young as Yoon Seon-woo Kim Tae-hoon as Wi Jung-hyuk Yoo Jung-woo as Wi Jung-hyuk (20 years old) Supporting Ryu Seung-soo as Cha Seung-jae Ryu Won as Wi Ye-eun Han Jung-soo as Mr. Hwang Joo Suk-tae as Oh Tae Suk, Intelligence Chief of Yoong Chun PD. Production Actress Lee Mi-sook was cast for the series but withdrew due to personal reasons. The first script reading was held on March 14, 2019 at SBS Ilsan Production Center. The series was planned to be the succeeding drama to My Absolute Boyfriend, but was pushed back from its July premiere to September due to the suspension of the Monday-Tuesday drama timeslot. Filming was wrapped up on October 6, 2019. Rating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Seoul Broadcasting System television dramas Korean-language television shows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debuts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endings South Korean thriller television series South Korean revenge television series Television series by Studio S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6%AC%EB%B2%A8%20%EB%8F%84%EB%B0%8D%EA%B2%8C%EC%8A%A4
마리벨 도밍게스
마리벨 과달루페 도밍게스 카스텔란(, 1978년 11월 18일 ~ )은 멕시코의 전직 여자 축구 선수이자 현 지도자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으며 2011년 팬아메리칸 게임 동메달리스트이다. 클럽 경력 마리벨 도밍게스는 1978년 11월 18일에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나서 찰코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소년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축구를 즐겼지만 그의 아버지와 3형제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사진 기자로부터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게 된다. 마리벨 도밍게스가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던 당시에 멕시코에서는 여자 축구 리그가 없었기 때문에 2002년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USL W리그에 참여하고 있던 캔자스시티 미스틱스에 입단하게 된다. 2002 USL W리그 시즌에서 17골, 도움 12개를 기록하면서 팀의 미드웨스트 디비전 우승에 기여했고 해당 시즌에서 MVP를 수상하게 된다. 2003년에는 미국 여자 축구 리그에 참여하고 있던 애틀랜타 비트로 이적했고 2003 미국 여자 축구 리그 시즌에서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2004년 12월에는 멕시코의 남자 2부 축구 리그에 참여하고 있던 아틀렌티코 셀라야와 2년 계약을 체결했지만 국제 축구 연맹(FIFA)은 "남자 축구와 여자 축구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면서 마리벨 도밍게스의 계약을 무효 처리했다. 2005년 초반에는 스페인 프리메라 디비시온 페메니나 소속 클럽인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특히 2005년 1월 30일에 열린 토레혼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팀의 5-3 승리에 기여했고 2004-05 시즌에서 팀의 프리메라 디비시온 페메니나 잔류에 기여하게 된다. 2007년에는 스페인의 여자 2부 축구 리그인 프리메라 나시오날 페메니나에 참여하고 있던 UE 레스타르티트로 이적했다. 2006-07 프리메라 나시오날 데 풋볼 시즌에서 22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프리메라 나시오날 페메니나 우승과 프리메라 디비시온 페메니나 승격에 기여했다. 2007년 여름에는 USL W리그에 참여하고 있던 샌디에고 선웨이브스로 이적했고 2007 USL W리그 시즌에서 3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다. 2007-08 프리메라 디비시온 페메니나 시즌에서 UE 레스타르티트로 복귀했고 2011-12 프리메라 디비시온 페메니나 시즌까지 활동했다. 2013년에는 미국 내셔널 위민스 사커 리그 소속 클럽인 시카고 레드 스타스로 이적했는데 시카고 레드 스타스는 2013 내셔널 위민스 사커 리그 시즌에서 6위를 기록했다. 마리벨 도밍게스는 2013 내셔널 위민스 사커 리그 시즌이 종료된 이후에 멕시코로 귀국했고 이달고주 자치 대학교 산하 리가 멕시카나 데 풋볼 페메닐 소속 여자 축구단인 UEAR 판테라스에서 활동한 것을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국가대표 경력 마리벨 도밍게스는 20세 시절이던 1998년에 멕시코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데뷔했으며 멕시코의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미국에서 개최된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 본선에서는 브라질과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멕시코의 유일한 골을 기록했는데 멕시코는 브라질에 1-7로 패배했다. 2004년에 열린 올림픽 여자 축구 북중미카리브 지역 예선에서 9골을 기록하여 멕시코의 사상 첫 올림픽 여자 축구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2004년 아테네 하계 올림픽에서는 중국과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멕시코의 유일한 골을 기록하여 멕시코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2010년 CONCACAF 여자 골드컵에서는 미국과의 준결승전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여 멕시코의 2-1 승리에 기여했다. 자국에서 개최된 2011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는 멕시코의 여자 축구 동메달에 기여했고 독일에서 개최된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에서는 뉴질랜드와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지만 멕시코는 이 대회의 조별 예선에서 2무 1패를 기록하여 탈락하고 만다. 197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멕시코의 여자 축구 선수 여자 축구 공격수 멕시코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FIFA 센추리 클럽 여자 선수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멕시코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2004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참가 선수 2011년 팬아메리칸 게임 축구 참가 선수 멕시코의 팬아메리칸 게임 동메달리스트 팬아메리칸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 2011년 팬아메리칸 게임 메달리스트 내셔널 위민스 사커 리그의 축구 선수 시카고 레드 스타스의 축구 선수 FC 바르셀로나 페메니의 축구 선수 스페인의 외국인 여자 축구 선수 미국의 외국인 여자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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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bel Domínguez
Maribel Domínguez Castelán (born 18 November 1978) is a Mexican former footballer who played for the Chicago Red Stars during 2013 season of the National Women's Soccer League, and was captain and leading scorer of the Mexico women's national football team. She is known internationally as Marigol for her record of 46 goals scored in 49 matches for the Mexico women's national team. Domínguez has played professionally in the United States, Spain, and Mexico. In 2003, she was the first Mexico-born player to sign for a team in the Women's United Soccer Association (WUSA), the top division in the United States at the time. As a forward for the Atlanta Beat, she was a leading scorer in the league during its final year of operation. In 2004, she made international headlines when she signed for a men's team in Mexico but was denied by FIFA. From 2005 to 2013, she played professionally for several teams around the world including FC Barcelona, UE L'Estartit, San Diego Sunwaves, Chicago Red Stars, and UAEH Panteras. Domínguez has played the most games (116) in the history of the women's national team. She has also scored the most goals (82) out of any single Mexico national player, including among those in the men's squad. In 2004, she was ranked in FIFA's top 25 women players in the world. She is the only Mexico player to have appeared in and scored for the Mexico squad in Olympic Games, World Cup, CONCACAF Gold Cup and Pan American Games. Early life The youngest of ten children, Domínguez was born in Mexico City, Mexico, and grew up in the rural suburb of Chalco. Despite the perception of sport by her father, she played when young football with her three brothers, though her father did not approve: "My father was very old-fashioned, and he didn't like soccer. He didn't even like that my brothers played soccer. When he went to work, I would sneak out of the house to go and practice in the street." Domínguez did not find a girls' team to play on until she was a teenager. Domínguez fooled the boys in the neighborhood she grew up in into playing with her by keeping her hair short like a boy. They called her Mario and only found out that she was a girl when her picture appeared in the newspaper after she made it on the sub-national women's team. In 1997, Domínguez joined a women's team called Inter and was forced to have a full body inspection by a female Mexico league official to validate her sex due to her short hair and ability to "play like a man." Domínguez told the inspector, "All right, but only if you do the same." She was not questioned again. Playing career Club Kansas City Mystics, 2002 With the absence of a women's professional league in Mexico, Domínguez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to play with the Kansas City Mystics in 2002 and further her development as a footballer. During her first and only season with the Mystics, she led the league with 17 goals and 12 assists while helping the team clinch the Midwest Division title. She subsequently earned the Most Valuable Player award from the W-League. Atlanta Beat, 2003 The following year, Domínguez signed with the Atlanta Beat in the Women's United Soccer Association (WUSA), the top division of professional soccer in the United States at the time. She was the first Mexico-born player to sign with the league since its inception in 2001. During her first month with the team, she was named the league's Player of the Month after scoring five goals and two assists in three games. She scored seven goals during the 2003 season and was a leading scorer in the league. Of her experience, she said, "It's very special for me to be in the top scoring position in this league. It's the best thing that has happened to me in my career, right up there with scoring in the 1999 Women's World Cup." The Beat finished second in the standings with a 9–4–8 record. Denied by FIFA and playing professionally in Spain, 2004–12 In December 2004, Domínguez made international headlines when she signed a two-year contract for second division men's team, Atlético Celaya, in Guanajuato, Mexico. Domínguez said of the signing, "The thing is, that in Mexico we don't have even a decent amateur league for women, so you have to look for other options... I knew that the decision could go either way, but were expecting a yes. The hard thing is going to be equaling the physical force of the men, but the technique, the desire, the willpower, those are things that I already have." While the Mexican Football Association did not object, they deferred to FIFA headquarters in Zurich for an official ruling. FIFA ruled against mixed-sex football teams stating, "There must be a clear separation between men's and women's football." Furthermore, a ban was placed on Domínguez for playing in an exhibition game outside the league but still alongside men. "I just wanted to be given the chance to try," Domínguez said. "If I failed I would have been the first to say I can't do it, the first to admit it doesn't work. But at least I would have tried." Beginning in early 2005, Domínguez played for FC Barcelona in Spain's top division league, Superliga Femenina. The team was struggling to avoid relegation. Her debut for FC Barcelona occurred on 30 January 2005 during a match against Torrejón where she scored a hat-trick and helped the squad win 5–3. Barcelona remained in the Superliga and renewed Domínguez's contract for another year. She was one of the first foreign women's footballers to be given a license to play in Spain. In January 2007, Domínguez signed with UE L'Estartit in Spain's second division. Despite playing only half the season, she scored 22 goals and helped the club win the championship title and ascend to the first division Superliga for the following season – a first-ever for the team. In the 2007 summer season, Domínguez fulfilled a prior obligation to play for San Diego Sunwaves in the American W-League. She scored on her debut against Vancouver Whitecaps and finished with three goals in three games. During the 2007–08 season, Domínguez scored 15 goals for UE L'Estartit in the Superliga Femenina. During the 2008–09 Superliga Femenina season Domínguez was still enjoying playing for L'Estartit. She revealed it was her ultimate dream to coach the Mexico women's national team. She had started coaching L'Estartit's youth teams the previous season. Difficulties with her visa and commitments with the Mexico national team eventually reduced Domínguez's playing time with UE L'Estartit. In the first half of the 2011–12 Superliga Femenina season she appeared four times. In April 2012 UE L'Estartit admitted defeat in their attempts to bring her back to Spain. Chicago Red Stars and UAEH Panteras, 2013 In 2013, Domínguez joined the Chicago Red Stars for the inaugural season of the National Women's Soccer League (NWSL), the top division professional soccer league in the United States. Along with Mexico national teammate, Dinora Garza, she was allocated to the Red Stars as part of the NWSL Player Allocation. Domínguez started in 9 of her 16 appearances for the Red Stars, playing a total of 705 minutes. She scored two goals during the season: one game-opener goal during a 3–3 draw against FC Kansas City on 14 July and another game-opener during a 3–3 draw against Sky Blue FC on 11 August. Chicago finished the 2013 season sixth in the standings with an 8–6–8 record. After the American season Domínguez returned to Mexico to play for UAEH Panteras, a Super Liga Femenil de Fútbol team affiliated to Universidad Autónoma del Estado de Hidalgo. She scored a debut hat-trick in the Panthers' 6–2 win over Laguna FC in August 2013. International As of 2013, Domínguez has played the most games (109) and scored the most goals (75) in the history of the women's national team. She is the only Mexico player to have appeared and scored for the Mexico team in Olympic Games, World Cup, CONCACAF Gold Cup and Pan American Games. Domínguez received her first call-up to the Mexico women's national football team in 1998 at the age of 20, and helped the team qualify for the 1999 FIFA Women's World Cup. She scored Mexico's only goal in the tournament during a 7–1 loss to Brazil at Giants Stadium in East Rutherford, New Jersey. In 2002, she was part of the Mexico squad that earned a bronze medal in the CONCACAF Women's Gold Cup. With nine goals, she was the top scorer during the CONCACAF Women's Olympic Qualifying Tournament for the 2004 Athens Olympics, a first in the history of the Mexico national team. During the 2004 Olympics in Athens, Greece, Domínguez led the Mexico national team to the quarter-finals and scored the team's only goal during the tournament. The following year, she was ranked in FIFA's top 25 women players in the world and was nominated for the FIFA Player of the Year award. On 5 November 2010, Domínguez scored the opening goal in Mexico's 2–1 upset victory over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semifinals of the CONCACAF Women's World Cup Qualifying Tournament. She ran under a looping pass to sneak behind the United States' defensive line just past two minutes into the game and tapped her shot past the American goalkeeper to give Mexico the early lead. In 2011, Domínguez captained the Mexico squad to a bronze medal win at the 2011 Pan American Games in Guadalajara, Mexico. During the team's second group stage match against Trinidad and Tobago, she scored Mexico's only goal on a penalty kick in the 42nd second. Her equalizer resulted in a 1–1 draw. After Mexico won their third group stage match 1–0 against Colombia, the team advanced to the semi-finals where they were defeated 1–0 by Brazil. The same year, Domínguez led CONCACAF's second-place team to play in the 2011 FIFA Women's World Cup in Germany. The squad's opening group stage match resulted in a 1–1 draw against England at Volkswagen-Arena in Wolfsburg in front of 18,702 spectators. During its second group stage match on 1 July, Mexico was defeated 4–0 by the eventual gold medal-winning team, Japan. During its third and final group stage match against New Zealand, Domínguez scored Mexico's second goal in the 29th minute lifting the score to 2–0 after her teammate Stephany Mayor scored in the second minute of the game. New Zealand scored in the 90th and during stoppage time to level the final score to 2–2. Mexico did not advance to the quarter-finals. In 2012, Domínguez scored 3 goals during the qualifying round of the 2012 CONCACAF Women's Olympic Qualifying Tournament held in Vancouver, British Columbia, Canada; however, the team was eliminated en route to the 2012 London Olympics. Appearances and goals at international tournaments FIFA World Cup Olympic Games CONCACAF Gold Cup Pan American Games International goals Managerial career Mexico U-15 girls' national football team On August 8, 2018. Mexico U-15 girls' national football team finished as runners up at the 2018 CONCACAF Girls' Under-15 Championship Mexico U-20 Women’s national football team Domínguez was named manager of the Mexico women's national under-20 football team on January 19, 2021. She led the team to qualify for the upcoming 2022 FIFA U-20 Women's World Cup as well as reaching the final of the 2022 CONCACAF Women's U-20 Championship. On July 21, 2022, Dominguez and her coaching staff were suspended and separated from the team by the FMF due to a matter that required an internal investigation to be open. Honors and awards Player 2002 W-League Most Valuable Player 2002 W-League Team of the Week (3 times) 2003 WUSA Player of the Month 2005 FIFA Player of the Year nominee Manager Mexico U-15 girl's national football team CONCACAF Girls' Under-15 Championship: Runners Up: 2018 See also List of footballers with 100 or more caps List of Mexico wo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List of 2011 Pan American Games medal winners List of foreign NWSL players References Further reading Friedman, Ian C. (2007), Latino Athletes, Infobase Publishing, External links Chicago Red Stars player profile Atlanta Beat (WUSA) player profile 1978 births Living people Mexican women's footballers Mexico wo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Footballers at the 2004 Summer Olympics Footballers at the 2011 Pan American Games Olympic footballers for Mexico Footballers from Mexico City Women's United Soccer Association players Atlanta Beat (WUSA) players Mexican expatriate women's footballers Expatriate women's soccer players in the United States Expatriate women's footballers in Spain 2011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FIFA Women's Century Club National Women's Soccer League players Chicago Red Stars players 1999 FIFA Women's World Cup players FC Barcelona Femení players UE L'Estartit players San Diego Sunwaves players Women's association football forwards Mexic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Spain Pan American Games bronze medalists for Mexico Pan American Games medalists in football Medalists at the 2011 Pan American 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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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라 모더존베커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년 2월 8일–1907년 11월 30일) 독일의 화가로 초기 표현주의의 주요 대표자이다. 31세의 나이로 산후 색전증으로 사망하면서 짧은 경력이 끝났다. 화가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그린 첫번째 여성 화가이다. 20세기 초반 모더니즘 예술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생애 베커는 드레스덴 프리드리히슈타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일곱 자녀 중 셋째로 아버지 칼 볼데마르 베커(1841년 1월 31일 오데사–1901년 11월 30일 브레멘)는 러시아 대학교 프랑스어 교수의 아들로, 독일 철도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녀의 어머니 마틸데(1852년 11월 3일 뤼베크 – 1926년 1월 22일 브레멘)는 귀족 가문 "von Bültzingslöwen" 출신으로 베커의 부모는 자녀에게 문화적, 지적 가정 환경을 제공했다. 1888년에 가족이 드레스덴에서 브레멘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 모계 친척 아주머니를 방문하는 동안 세인트 존스 우드 예술 학교에서 처음으로 회화 교습을 받았다. 1893년 보르프스베데 예술가 공동체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오토 모더존, 프리츠 마켄젠, 프리츠 오버벡 및 하인리히 포겔러의 작품이 브레멘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1893-1895년 기간에 교사 수업을 받으면서, 회화 개인 수업도 받았다. 1896년 베를린 여성 예술가 조합(Verein der Berliner Künstlerinnen)이 후원하는 회화와 드로잉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베커의 친구인 클라라 베스토프는 1899년 초 파리에서 공부하기 위해 브레멘을 떠났다. 그해 12월 베커가 따라갔고, 1900년 카르티에 라탱의 아카데미 콜라로시(Académie Colarossi)에서 공부했다. 1900년 4월 만국 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프리츠 오버벡 부부와 오토 모더존이 파리에 도착했다. 병상에 있던 모더존의 아내 헬렌은 보르프스베데에 남았고 그의 파리 여행 중에 사망했다. 모더존과 오버벡 부부는 급히 독일로 돌아갔다. 1901년 파울라는 오토 모더존과 결혼해 오토가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살 된 딸 엘스베트 모더존의 의붓어머니가 되었다. 두 해 동안 부모 역할을 수행하다 1903년 다시 파리로 이주했다. 파울라와 오토는 그때부터 파울라가 자신의 아이를 갖기 위해 독일로 완전히 돌아온 1907년까지 대부분 떨어져 지냈다. 1906년 베커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꾸었고 유명한 바람둥이와 교제하기도 했다. 1907년 초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고 11월에 딸 마틸데를 낳았다. 임신 후 심한 다리 통증을 호소하여 의사가 침대에서 휴식을 권고했다. 의사가 움직여도 된다고 한지 18일만에 다리에 색전증이 발병해서 몇 시간만에 죽음에 이른 원인이 되었다. 경력 1898년 22세의 나이로, 프리츠 마켄젠(1866-1953)과 하인리히 포겔러(1872-1942) 같은 예술가가 대도시의 지배적인 아카데미 스타일과 삶에 저항하며 이주한 보르프스베데 예술 공동체에 진입했다. 마켄젠에게서 배우며 주변 농부들과 독일 북부 풍경을 그렸다. 이 시기에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1875-1954)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베커가 작업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여성 화가들이 여성의 누드를 주제로 삼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목할 만한 예외로 3세기 전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유일했다. 예술사가들은 젠틸레스키가 자신의 작품 수산나와 장로들 을 그릴 때 자신의 몸을 모델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성의 누드를 다루는 작품은 보편적이지 않으면서 대상과 묘사 방식에 대한 양가감정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 베커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기법으로 훈련받았다. 마르지 않은 그림을 긁는 기법으로 작품에 독특한 질감을 부여했다. 후에 야수파로 옮겨가며 과거의 기법들은 버렸다. 피카소의 그림 중 적어도 하나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파리 여행 1907년까지 파울라는 예술적인 목적으로 여섯 번의 파리 여행을 떠났고 때로는 남편 오토와 떨어져 살았다. 그 중에 한번은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현대 미술 전시를 자주 관람했는데 특히 폴 세잔의 작품에 끌렸고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을 포함한다른 후기인상주의에 특히 영향을 받았다. 구빈원 여자와 유리병 같은 작품에서는 야수파 영향도 나타난다. 프랑스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의 영향은 1900년 Peat Cutters 같은 작품에서 나타난다. 1906년 마지막 파리 여행에서 스스로 큰 기쁨과 만족을 느낀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이 시기의 그림으로 여성 예술가로서는 전례가 없던 누드 자화상을 제작했고, 자신의 친구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베르너 좀바르트의 초상화를 그렸다. 예술사가들은 이 시기를 예술적 전성기로 보고 있다. 말년과 죽음 1907년에 파울라는 당시 편지에서 드러나는 독립에 대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보르프스베데의 남편에게 돌아갔다. 남편을 향한 사랑에 대해서도 썼지만,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출산을 미루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썼다. 아이를 양육하는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를 걱정하면서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한 갈등을 드러냈다. 일기에 따르면 서른이 될 때까지 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고나서 아이를 가질 계획이었다. 1907년 11월 2일 딸 마틸다 모더존이 태어났을 때 파울라와 오토는 기뻐했지만, 19일 후 파울라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비극이 되었다. 출산 후 다리 통증을 호소했고 침대에서 휴식하도록 처방받았다. 11월 21일 재검한 의사가 일어나도록 조언해서, 몇 걸음 걸은 후 앉아서 아기를 팔에 안겨달라하며 다리 통증을 호소했고 "안타깝다"는 말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사후 보르프스베데 묘지에 묻혔고 무덤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회화 기법 모더존-베커는 화가로서의 짧은 경력동안 일관된 기법을 구사했다. 템페라와 유화로 작업했고 징크 화이트, 카드뮴 옐로, 비리디언, 울트라마린 같은 절제된 배색을 사용했다. 업적 1899년 친구인 클라라 베스토프가 클라라의 흉상을 만들며, 그들의 우정과 예술을 향한 공동의 열정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1908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유명한 시 "친구를 위한 장송곡"은 파울라 모더존-베커를 기리는 작품이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 미술관의 예술품과 건축은 1935년 지역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지목되었다. 미술관 건립을 의뢰한 루트비히 로셀리우스는 히틀러가 1936년 9월 뵈트허 거리(Böttcherstrase)를 지목할 때까지 무시했고 자살을 고려했지만 Barbara Götte이 대신해서 개입했다. 1978년 마틸데 모더존(1907-1998)이 파울라 모더존 베커 재단 (Paula Modersohn-Becker-Stiftung)을 설립했다. 파울라 모더존-베커는 사망 시점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잊혀질 뻔했으나 방대한 저작으로 흔적을 남겼다. 꾸준히 일기를 쓰고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수집된 편지는 독일어로 1920년대 널리 출판되어, 업적을 보존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편지의 3분의 2는 16세에서 결혼 초기까지 시기에 쓰여 낙관과 생명력이 넘친다. 2018년 2월 8일 베커의 생일을 축하하는 구글 두들이 공개되었다. 파울라 베커의 집 파울라가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브레멘 모더존-베커의 집이 2007년 10월 사설 미술관으로 공개되었다. 그녀의 가족이 1888년 드레스덴에서 브레멘으로 이주한 후 이 집에서 살았다. 파울라는 23살이 되던 1899년까지 이 집에서 살았고 첫 작업실을 만들었다. 브레멘의 활발한 예술가 커뮤니티와 어머니의 예술 세계에 대한 애정에 힘입어 예술가 커뮤니티의 일부로 성장했다. 1893-1895년 사이 교사 교육 외에 개인적인 회화 교습을 받았다. 여기에서 10년동안 살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2003년 낡은 집을 구매해서 예술가 사후 100주년에 맞추어 복원했다. 2007년 11월 100주년 시점에 공공 미술관으로 전환되었다. 갤러리 각주 같이 보기 청기사파 브뤼케 외부 링크 1907년 사망 1876년 출생 출산 중 사망자 색전증으로 죽은 사람 독일의 화가 표현주의 화가 드레스덴 출신 러시아계 독일인 여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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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a Modersohn-Becker
Paula Modersohn-Becker (8 February 1876 – 20 November 1907) was a German Expressionist painter of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She is noted for the many self-portraits the artist produced, including nude self-portraits. She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mportant representatives of early expressionism, producing more than 700 paintings and over 1000 drawings during her active painting life. She is recognized both as the first known woman painter to paint nude self-portraits, and the first woman to have a museum devoted exclusively to her art (the Paula Modersohn-Becker Museum, founded 1927). Additionally, she is considered to be the first woman artist to depict herself both pregnant and nude and pregnant. Her career was cut short when she died from postpartum embolism at the age of 31. Biography Early life Becker was born and grew up in Dresden-Friedrichstadt. She was the third of seven children in her family. Her father, Carl Woldemar Becker (1841–1901), the Odessa born son of a Russian university professor of French, was employed as an engineer with the German railway. Her mother, Mathilde (1852–1926), was from the aristocratic von Bültzingslöwen family, and her parents provided their children a cultured and intellectual household environment. Despite these advantages of family, the Beckers found themselves in socially constrained circumstances. In 1861, Oskar Becker, Carl's brother, in an unsuccessful assassination attempt, had shot King Wilhelm of Prussia in the neck. The King was not severely injured, and Oskar was pardoned five years later for the crime (on conditon that he permanently leave the country), but the constraints of opportunity for Carl Becker's family would linger. In 1888 the family moved from Dresden to Bremen, where Carl Becker had obtained a position on the building board of the Prussian Railway Administration. The family interacted with Bremen's local artistic and intellectual circles, and Paula began to learn to draw. In the summer of 1892, her parents sent her to relatives in England to learn English. While living with a maternal aunt in London, Becker received her first instruction in drawing at St John's Wood Art School. After returning to Bremen, she studied at a teacher's seminary from 1893 to 1895, as her father wished (two sisters also attended this program). Concurrently she received private painting lessons from local German painter Bernhard Wiegandt. She worked as a painter from ~1893, at age 16, and was allowed to set up her first studio in the extension of her parents' house in Bremen (now Haus Paula Becker, with Becker's early studio intact). From this period comes a series of portraits of her siblings and also the first self-portrait (1893). She completed her teacher's course "with flying colors," but it was clear that she had little intention of pursuing a career in that profession. In the spring of 1896, Paula was able to travel to Berlin to take part in a six-week drawing and painting course organized by the Berlin Artists' Association (Verein der Berliner Künstlerinnen), again, staying with members of her mother's family while completing her course. After graduating, she stayed on in Berlin, and in February 1897 was admitted to the first class of painting at the Women's Academy. Paula additionally used her Berlin time to visit its art museums, studying the works of German and Italian artists. An encounter with an important proponent for German feminism, Natalie von Milde, made a deep impression, although swift intervention from her family cut that connection short. After these years of study, Becker returned to Bremen. She convinced her family to allow her to attend a further course of study at the nearby artists’ colony in the northern German town of Worpswede. Worpswede Becker had become familiar with the Worpswede colony as early as 1895, when Fritz Mackensen, Otto Modersohn, Fritz Overbeck and Heinrich Vogeler presented their paintings in Bremen's Art Museum, Kunsthalle Bremen. The colony had begun when Mackensen and Heinrich Vogeler had retreated to the countryside, partly as a protest against the domination of the art academy style and life in the big city, and also to save on expenses. In 1898, as a pupil of Mackensen, Becker joined the Worpswede group. She created "sentimental" landscapes and scenes of peasant life, painting, in the Worpswede manner, the local farmers and northern German landscape. At this time she began close friendships with the sculptor Clara Westhoff (1875–1954), the painter Ottilie Reylaender (1882-1965), and the poet Rainer Maria Rilke (1875–1926). It was quickly evident, however, that Worpswede was not suited to Becker's rapidly developing artistic style. In her journal, Becker wrote: "the way Mackensen portrays people is not broad enough, too genre-like for me." Two paintings she exhibited at the Bremen Kunsthalle in December 1899 were sharply criticized and had to be removed during the exhibition, subject to a "hysterical" attack by the art critic Arthur Fitger (now regarded as having been more outraged by the inclusion of female artists in the show than in anything particular portrayed by the actual artworks). While the community at Worpswede "remained rooted in romanticized traditions of landscape, her own artistic interests were shifting noticeably toward Paris and leaving her feeling increasingly alienated. Paris Paris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was the acknowledged epicenter of artistic exploration, and many artists of the time felt its pull. Westhoff, Becker's close friend, left Bremen in early 1899 to study in Paris with Auguste Rodin (Rilke went with her, serving for a time as Rodin's secretary). By December of that year, Becker, having come into a small inheritance, followed her friend there, and in 1900 she began study anatomy at the Académie Colarossi in the Latin Quarter. She also visited museums or exhibitions and galleries alone or with Westhoff to get to know modern French painters. She was particularly impressed by the paintings of Paul Cézanne and other members Les Nabis, who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colored areas in paintings following the example of Paul Gauguin. "In her painting, she followed the inspiration of the contemporary artists she had encountered in Paris, moving increasingly far from the conventional painting her colleagues at Worpswede were producing." They inspired her to use simplified forms and symbolic, rather than naturalistic, colour. In April 1900 the great World's Fair Centennial Exhibition opened in Paris. Otto Modersohn, a Worpswede painter who had been an on-and-off resident of the colony since 1897, arrived in town with mutual friends to attend. His sick wife Helene had remained behind in Worpswede, and she died during Modersohn's short time in Paris. Modersohn hurried back to Germany. Shortly thereafter, Becker returned to in Worpswede herself. It was clear to Becker's parents that the two had become personally involved, but their disapproval was of little impact. Marriage with Otto Modersohn In May 1901, Becker and Modersohn married. Modersohn was 11 years older than Becker, with an infant daughter, Elsbeth. In the two years that followed, Becker tried to combine her responsibilities as wife, housewife and stepmother with her artistic ambitions. She set up a small studio on a nearby farm, where she went to paint for several hours a day. A series of paintings of children was created, among them Girl in the Garden Next to a Glass Sphere (1901–2), Portrait of a Girl (1901), Head of a Little Girl (1902). She functioned in this uneasy balance for two years, then returned again to Paris, accompanied by Otto, for two months in 1903. She spent most of her time drawing in the Louvre from ancient and Egyptian models. With Otto, she visited Auguste Rodin, also taking time to study the newly popular Japanese style and visit with painters Pierre Bonnard and Edouard Vuillard. In February 1905 Becker again returned to Paris. Otto briefly came to see her, and together they saw Paul Gauguin's paintings. After this visit, Becker "accepted the fact that modern artists such as Matisse, whose works fascinated her, had no appeal for Otto." She took drawing courses at the Julian Academy, but became increasingly aware that she had already developed her own painting style. After returning to Worpswede, her interest focused on still life. While before 1905 only ten still lifes can be traced in her work, from 1905 to 1907 there are almost 50. She and Modersohn lived mostly apart for the next two years, with 1906 marking an artistically productive year, spent mostly in Paris. During her stays in Paris in 1905 and 1906, she lived in her studio on Avenue du Maine, where she created, among other things, portraits of Clara (Rilke-)Westhoff and Clara's husband Rainer Maria Rilke. 1906: "I am becoming somebody" In a letter to Rilke written from Worpswede on 17 February 1906, Becker wrote: "And now, I don't even know how I should sign my name, I'm not Modersohn and I'm not Paula Becker anymore either"." Less than a month later she wrote from Paris to her husband, "try to get used to the possibility of the thought that our lives can go separate ways". In 1906, Modersohn-Becker left Worpswede, as well as her husband, Otto, to pursue an artistic career in Paris. In a journal entry dated 24 February 1906, a sanguine Modersohn-Becker wrote, "Now I have left Otto Modersohn and am standing between my old life and my new life. I wonder what the new one will be like. And I wonder what will become of me in my new life? Now whatever must be, will be." Despite her sister's and mother's general disapproval of Paula's decision to leave Otto for Paris, her relocation there proved to be quite prosperous. It was during this time frame that she accomplished her most intensive, and now most highly regarded, work. From this body of work she produced a series of paintings about which she felt great excitement and satisfaction. During this period of painting, she produced her initial nude self-portraits (including Self-Portrait at 6th Wedding Anniversary), works that were unprecedented for female artists, as well as portraits of friends. During her final trip to Paris in May of 1906, she wrote a letter to her elder sister, Milly Rohland-Becker, in which she stated, "I am becoming somebody – I'm living the most intensively happy period of my life." Final year and death In 1907, Becker returned to her husband in Worpswede, despite periodic correspondence that indicated her desire for independence. She had written in detail about her love for her husband but also of her need to delay motherhood in her pursuit of artistic freedom. She continued to express ambivalence regarding motherhood as she was concerned about her ability to paint while raising a child; her diary entries indicate that she had planned on achieving a painting career by age thirty, then having children. When her daughter Mathilde (Tillie) Modersohn was born on 2 November 1907, Paula and Otto were joyous. She had complained of pain in her legs after the delivery, and was advised to remain in bed. When the physician returned on 20 November, he advised her to rise. She walked a few steps, then sat down, called for the infant to be placed in her arms, complained of leg pain, and died, saying only "What a pity". Paula's death was likely due to deep venous thrombosis (DVT), a complication of pregnancy that is relatively common when women are set to bed for a long time after delivery, as was customary practice at that time. Apparently, a thrombus had formed in her leg, and with her mobility, broke off and then caused her death within hours. She was buried in the Worpswede Cemetery. Self-portraits Until the years when Becker began the practice, women painters had not widely used nude females as subjects for their work. Notable exceptions are the works by Artemisia Gentileschi, three centuries earlier; however, art historians have asserted that Gentileschi made use of her own body as a reference for her work out of necessity and lack of access to any other models (in, for example, Gentileschi's 1610 Susannah and the Elders), as opposed to creating an intentional, purposeful, self portrait (an assertion that continues to be actively debated). These arguments aside, Becker is generally accepted as the first known woman painter to paint nude self-portraits, and the first woman painter known to have painted herself pregnant, and pregnant and nude. Becker's work on the female nude is unconventional and expresses an ambivalence to both her subject matter and the method of its representation. Painting technique Becker was trained in the methods of realism and naturalism, along with a recognizable simplicity of form. She was able to achieve a distinct texture to her work by scratching into the wet paint. Modersohn-Becker employed the same technique throughout her short career as a painter. She worked in tempera and oil with a limited palette range of pigments such as zinc white, cadmium yellow, viridian, and synthetic ultramarine. She later abandoned those techniques to move into Fauvism. Fauvist influences appear in her works such as Poorhouse Woman with a Glass Bottle. Influences There is evidence to suggest that a number of Paula Modersohn-Becker's self-portraits were influenced by the Pre-Raphaelite painter Dante Rossetti, including Self-portrait with a bowl and a glass (c.1904; Sander Collection), Self-portrait nude with amber necklace (1906; Private collection), and Self-Portrait on 6th Wedding Anniversary (1906; Museen Böttcherstrasse, Paula Modersohn- Becker Museum, Bremen). She visited contemporary exhibitions often, and was particularly intrigued with the work of Paul Cézanne. Other Post-Impressionists were especially influential, including Vincent van Gogh and Paul Gauguin. Influence Becker may have influenced one or more of Picasso's paintings, as Diane Radycki posits in her 2013 monograph on the artist. Legacy By 1899 Clara Westhoff had made a bust of Modersohn-Becker, saying that it was a symbol of their friendship and shared passion for art. In 1908, on the first anniversary of her death, Rainer Maria Rilke wrote the renowned poem "Requiem for a Friend" in Modersohn-Becker's memory. Becker was not widely known at the time of her untimely death, and had sold few paintings during her lifetime. It was only thanks to exhibitions organized in the first years after her death that some collectors learned about her and began to acquire her paintings. Correspondence and journals On the tenth anniversary of her death, in 1917, the Kestnergesellschaft in Hanover organized a large exhibition of Becker's works and published a selection of her letters and diaries, which told her life, feelings and friendships, as well as the thoughts that shaped her art. Becker had maintained a voluminous correspondence with friends in her artistic circle, as well as a diary. Two-thirds of the correspondence occurred from age 16 to the early years of her marriage, and it is full of youthful optimism and energy. As with the Journal of Marie Bashkirtseff, published a generation before (and an important influence on Becker herself), this Collection proved highly popular, and was published abroad several times after World War. It was in a good part through her writings that her reputation was first maintained. First woman to have a museum devoted exclusively to her art In 1927 businessman Ludwig Roselius opened the Paula Modersohn-Becker Museum in Bremen. It was designed by Bernhard Hoetger, who had known Becker from Worpswede. "Degenerate Art" Local Nazis denounced the museum's art and architecture in 1935, but Roselius ignored this until Hitler denounced his entire Böttcherstraße in September 1936. After Roselius's secretary Barbara Goette intervened on his behalf with Hitler, the street's buildings were allowed to remain as a monument of "degenerate art". But despite the survival of the architectural fabric of her museum, Becker's work did not escape the Nazis attention undamaged. In 1937, "70 of her paintings were purged from German museums, either destroyed or exhibited as 'degenerate art.'” The Nazi critique derided the lack of "femininity" in Becker's paintings: "A revolting mixture of colours, of idiotic figures, of sick children, degenerates, the dregs of humanity.” The Paula Modersohn-Becker Foundation Mathilde Modersohn (1907–1998) founded the Paula Modersohn-Becker Foundation (Paula Modersohn-Becker-Stiftung) in 1978. To form the core of the foundation, Mathilde Modersohn donated more than 50 paintings and 500 drawings from her personal collection, which she had inherited through her mother's estate. The purpose of the foundation is to "enhance the knowledge of the artist by researching and cataloguing her complete works," and to protect the integrity of her corpus. Paula Becker House Modersohn-Becker's house in Bremen, where she spent much of her life, opened in October 2007 as a private art museum and gallery. The Becker family had moved from Dresden to Bremen in 1888 and lived in this house. Becker lived in the house until 1899 when she was 23 years old and set up her first studio here. There was an active artist community in Bremen and via Becker's mother's friendships in the art world, Paula grew to be part of this community. In 2003, Heinz and Betty Thies bought the then-rundown house and had it restored in time for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artist's death. At that time (November 2007), it was turned into a public museum. In popular culture In 1988 a stamp with the portrait of Paula Modersohn-Becker was issued in the series Women in German history by the German post-office authority Deutsche Bundespost. On 8 February 2018, Becker's birthday was celebrated in a Google Doodle. The life of Paula Modersohn-Becker is fictionalized in Sue Hubbard's 2012 novel, Girl in White. She was also the subject of a 2016 German bio-pic film, Paula. Recent exhibitions Making Modernism: Paula Modersohn-Becker, Käthe Kollwitz, Gabriele Münter and Marianne Werefkin (12 November 2022 — 12 February 2023)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These are my modern women: Trading Monet for Modersohn-Becker (20 February 2022 — 04 September 2022) Arp Museum Bahnhof Rolandseck Paula Modersohn-Becker (8 October 2021 — 6 February 2022) Schirn Kunsthalle, Frankfurt Paula Modersohn-Becker: An Intensely Artistic Eye (8 April 2016 — 21 August 2016) Musée d’Art moderne, Paris Paula Modersohn-Becker: Art and Life (February 2016 — 12 March 2016) Galerie St. Etienne, New York, NY Rebels and Martyrs: the image of the artist in the 19th century (opened 28 June 2006) National Gallery, London (first UK exhibition of Self-Portrait at 6th Wedding Anniversary) From a little-known artist with a complaining husband, the increasing exposure and popularity of Modersohn-Becker's work has kept some of her most popular paintings in constant international circulation during the 21st century. Gallery Landscapes Self-portraits Still lifes Portraits See also Der Blaue Reiter Die Brücke List of German women artists Paula Modersohn-Becker Museum Self-Portrait at 6th Wedding Anniversary Self-Portrait with Hat and Veil References Sources Marina Bohlmann-Modersohn: Paula Modersohn-Becker. Eine Biographie mit Briefen. 3. Auflage. Knaus, Berlin 1997, Janet M.C. Burns: "Looking as Women: The Paintings of Suzanne Valadon, Paula Modersohn-Becker and Frida Kahlo". Atlantis, vol. 18, no 1&2 (1993):25-46. Günther Busch, Liselotte von Reinken, Arthur S. Wensinger, Carole Clew Hoey: Paula Modersohn-Becker, The Letters and Journal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0 Anne Higonnet: "Making Babies, Painting Bodies: Women, Art, and Paula Modersohn-Becker's Productivity." Woman's Art Journal, vol. 30, no. 2 (2009):15-21, illus. Averil King, Paula Modersohn-Becker, Antique Collectors Club, 2006 Paula Modersohn-Becker: The Letters and Journals of Paula Modersohn-Becker. Translated & annotated by J. Diane Radycki. Introduction by Alessandra Comini Epilogue of poetry by Rainer Maria Rilke (Requiem, 1908, translated by Adrienne Rich & Lilly Engler) and by Adrienne Rich ("Paula Becker to Clara Westhoff", 1975–76). Metuchen, N.J., & London: The Scarecrow Press, Inc., 1980. Paula Modersohn-Becker, Sophie Dorothee Gallwitz: Eine Künstlerin: Paula Becker-Modersohn. Briefe und Tagebuchblätter. Kestner-Gesellschaft, Hanover 1917 Gillian Perry: Paula Modersohn-Becker: Her Life and Work. Harper & Row 1979 Diane Radycki: "American Women Artists in Munich, or Die Frauen ohne Schatten." In: American Artists in Munich: Artistic Migration and Cultural Exchange Processes, eds. Christian Fuhrmeister, Hubertus Kohle and Veerle Thielemans, pp. 109–24, illus. Modersohn-Becker & O'Keeffe. Berlin, München: Deutscher Kunstverlag, 2009. Diane Radycki: "Paula Modersohn-Becker: The Gendered Discourse in Moder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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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inna Beltz Otto Modersohn Museum in Fischerhude "Pictures of Flesh: Modersohn-Becker and the Nude" Article by Dr. Diane Radycki Paula Modersohn-Becker, Portrait of an Old Lady in the Garden, illustrated pigment analysis at ColourLex. 1876 births 1907 deaths Deaths in childbirth German Expressionist painters 19th-century German painters 20th-century German painters Artists from Dresden Académie Julian alumni Académie Colarossi alumni Deaths from embolism 20th-century German women artists 19th-century German women artists German people of Russian descent German women painters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D%86%A0%20%EC%95%84%EC%82%AC%EB%AF%B8
세토 아사미
세토 아사미(, 1993년 4월 2일 ~ )는 일본의 여성 성우이다. 2011년 방랑소년을 통해서 성우로 데뷔하였다. 주요 출연작 애니메이션 2011년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 마츠유키 아츠무(어린시절) 로큐브! - 하카마다 카게츠 방랑소년 - 타카츠키 요시노(데뷔작) 치하야후루 - 아야세 치하야 DOG DAYS - 아메리타 트란베 Fate/Zero - 코토네 2012년 마기 The labyrinth of magic - 이청순 아이카츠! - 호시미야 라이치, 카미야 시온 윤회의 라그랑제 - 핀 에 루드 쉬 라핀티 윤회의 라그랑제 season2 - 핀 에 루드 쉬 라핀티 전희절창 심포기어 - 토모사토 아오이 DOG DAYS' - 아메리타 트란베 TARI TARI - 미야모토 코나츠 2013년 로큐브!SS - 하카마다 카게츠 스트라이크 더 블러드 - 아이바 아사기 전희절창 심포기어 G - 토모사토 아오이 치하야후루2 - 아야세 치하야 특례조치단체 스텔라 여학원 고등과 C3부 - 하루나 린 큐티클 탐정 이나바 - 나츠키 혁명기 발브레이브 - 사시나미 쇼코 2014년 마법전쟁 - 이소시마 쿠루미 베이비 스텝 - 사사키 히메코 에스카와 로지의 아틀리에 - 윌벨 폴 에르스리트 위치 크래프트 워크스 - 카가리 아야카 캡틴 어스 - 아사노다 쿠미코 하이큐!! - 미치미야 유이 selector infected WIXOSS - 우라조에 이오나 selector spread WIXOSS - 이오나[4] 2015년 데스 퍼레이드 - 흑발의 여자(치유키) 도쿄 구울 - 마도 아키라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ViVid - 파비아 크로젤그 몬스터 아가씨가 있는 일상 - 키 발키리 드라이브 머메이드 - 샤를로트 샤르젠 식극의 소마 - 호조 미요코 오버로드 - 시즈 델타 우라와의 우사기짱 - 타카사고 우사기 음악소녀 - 쿠마가이 에리 전희절창 심포기어 GX - 토모사토 아오이 Charlotte - 메도키 DOG DAYS'' - 아메리타 트란베 2016년 레갈리아 The Three Sacred Stars - 잉그리드 티에스트 마크로스 Δ - 미라쥬 파리나 지너스 문호 스트레이 독스 - 히구치 이치요 판타시 스타 온라인 2 - 마스터 네즈미 하루치카~하루타와 치카는 청춘한다~ - 세리자와 나오코 하이큐!! - 미치미야 유이 NORN9 - 시라누이 나나미 ViVid Strike! - 파비아 크로젤그 2017년 포켓몬스터 썬&문 - 여경 그랑블루 판타지 - 제시카 센토루의 고민 - 키미하라 리노 전희절창 심포기어 AXZ - 토모사토 아오이 식극의 소마 세번째 접시 - 호조 미요코 2018년 도사의 무녀 - 오리가미 유카리 도쿄 구울:re - 마도 아키라 스노하라장의 관리인씨 - 야마나시 스미레 오버로드 2기, 3기 - 시즈 델타 일곱 개의 미덕 - 우리엘 째깍째깍 - 마지마 쇼코 B: The Beginning - 호시나 리리 중신기 판도라 - 에밀리아 바리 LOST SONG - 알뤼 룩스 레이튼 미스터리 탐정사 카트리의 수수께끼 파일 - 메리나 트라이튼 청춘 돼지 시리즈 - 사쿠라지마 마이 [5] 음악소녀 - 쿠마가이 에리 2019년 방패 용사 성공담 - 라프타리아 황야의 코토부키 비행대 - 레오나 B-PROJECT ~절정*이모션~ - 스미소라 츠바사 2021년 트로피컬 루즈! 프리큐어 - 타키자와 아스카/큐어 플라밍고 극장판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 마츠유키 아츠무(어린시절) 극장판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엔디미온의 기적 - 메어리 스피어헤드 코드 기아스 망국의 아키토 - 페릴리 발트로우 걸즈 앤 판처 극장판 GIRLS und PANZER der FILM - 니시 키누요 팝핀Q - 코미나토 이스미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 - 판 리 극장판 마크로스 Δ 격정의 왈큐레 - 미라쥬 파리나 지너스 우주의 법: 여명편 청춘 돼지는 꿈꾸는 소녀의 꿈을 꾸지 않는다 (영화) - 사쿠라지마 마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 게임 그랑블루 판타지 - 제시카 그리모어 ~사립 그리모와르 마법학원~ - 유사 나루코 누구를 위한 알케미스트 - 펜서 데스티니 차일드 - 미리나 도사의 무녀 새겨진 일섬의 등화 - 오리카미 유카리 레이싱 무스메 - 소우다 베르노, 오지 엘리자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 - 타츠키 아스카 샤리의 아틀리에 - 윌벨 폴 에르스리트 샤이닝 레조넌스 - 소니아 브랑슈 세계수의 미궁 5 - 보이스 21(왈가닥), 26(야생적) 소녀전선 - IWS-2000, 컨텐더 슈퍼로봇대전 X-Ω - 샤테 쥬드베스틴 스쿨걸 스트라이커즈 - 우라바 아오이 액시즈 전희 - F-14A 톰캣, 나스호른, 진츠 아샤의 아틀리에 - 윌벨 폴 에르스리트 에스카와 로지의 아틀리에 - 윌벨 폴 에르스리트 벽람항로 - 생 루이 파이어 엠블렘 무쌍 - 린다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 - 린다 하얀고양이 프로젝트 - 카렌 갈란드 함대 컬렉션 - 강구트, 카모이 NORN9 - 시라누이 나나미 スターリー ガールズ -星娘- - 안드로메다, 소마젤란 은하 어떤 마술의 전뇌전기 - 오티누스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환상수속(이매지너리 페스트) - 오티누스 원신 - 쿠죠 사라''' 일본의 여자 성우 1993년 출생 사이타마현 출신 살아있는 사람
https://en.wikipedia.org/wiki/Asami%20Seto
Asami Seto
is a Japanese voice actress currently affiliated with StarCrew. Her debut role was as Yoshino Takatsuki in Wandering Son, with major roles including Raphtalia in The Rising of the Shield Hero, Mai Sakurajima in Rascal Does Not Dream of Bunny Girl Senpai, Asuka Takizawa/Cure Flamingo in Tropical-Rouge! Pretty Cure, Chihaya Ayase in Chihayafuru, Shoko Sashinami in Valvrave the Liberator, Asagi Aiba in Strike the Blood, Mirage Farina Jenius in Macross Delta, Nobara Kugisaki in Jujutsu Kaisen and Konatsu Miyamoto in Tari Tari. Filmography Anime 2011 Anohana: The Flower We Saw That Day as young Atsumu Matsuyuki Chihayafuru as Chihaya Ayase Dog Days as Amelita Tremper Ro-Kyu-Bu! as Kagetsu Hakamada Wandering Son as Yoshino Takatsuki 2012 Lagrange: The Flower of Rin-ne as Lan Magi: The Labyrinth of Magic as Ri Seishun Senki Zesshō Symphogear as Aoi Tomosato Tari Tari as Konatsu Miyamoto 2013 Aikatsu! as Raichi Hoshimiya, Shion Kamiya, and Mako Miyamoto C3-Bu as Rin Haruna Chihayafuru 2 as Chihaya Ayase Cuticle Detective Inaba as Natsuki Ro-Kyu-Bu! SS as Kagetsu Hakamada Senki Zesshō Symphogear G as Aoi Tomosato Strike the Blood as Asagi Aiba Valvrave the Liberator as Shōko Sashinami 2014 Atelier Escha & Logy: Alchemists of the Dusk Sky as Wilbell voll Erslied Baby Steps as Himeko Sasami Haikyū!! as Yui Michimiya Magical Warfare as Kurumi Isoshima Selector Infected WIXOSS as Iona "Yuki" Urasoe Selector Spread WIXOSS as Iona "Yuki" Urasoe Witch Craft Works as Ayaka Kagari 2015 Baby Steps Season 2 as Himeko Sasami Charlotte as Medoki Death Parade as Chiyuki Food Wars: Shokugeki no Soma as Miyoko Hōjō Monster Musume as Kii Overlord as CZ2128 Delta Senki Zesshō Symphogear GX as Aoi Tomosato Tokyo Ghoul √A as Akira Mado Urawa no Usagi-chan as Usagi Takasago Valkyrie Drive: Mermaid as Charlotte Scherzen 2016 Bungo Stray Dogs as Ichiyō Higuchi Food Wars: The Second Plate as Miyoko Hōjō Haruchika as Naoko Serizawa Honobono Log as various characters Kuromukuro as Mika Ogino Macross Delta as Mirage Farina Jenius Norn9 as Nanami Shiranui Regalia: The Three Sacred Stars as Ingrid Tiesto 2017 A Centaur's Life as Rino Kimihara Food Wars: The Third Plate as Miyoko Hōjō Granblue Fantasy The Animation as Jessica Hitorijime My Hero as Kaide-sensei Natsume Yuujinchou Roku as Takuma Tsukiko Pokémon Sun and Moon as Junsar (Officer Jenny) Senki Zesshō Symphogear AXZ as Aoi Tomosato 2018 Katana Maidens as Yukari Origami Kokkoku: Moment by Moment as Shoko Majima Lost Song as Allu Lux Miss Caretaker of Sunohara-sou as Sumire Yamanashi Ongaku Shōjo as Eri Kumagai Overlord III as CZ2128 Delta Rascal Does Not Dream of Bunny Girl Senpai as Mai Sakurajima The Seven Heavenly Virtues, Uriel Tokyo Ghoul:re as Akira Mado 2019 Assassins Pride as Shinhua Tsvetok B-Project: Zecchō Emotion as Tsubasa Sumisora Bungo Stray Dogs 3 as Ichiyō Higuchi Chihayafuru 3 as Chihaya Ayase Isekai Quartet as CZ2128 Delta Senki Zesshō Symphogear XV as Aoi Tomosato The Magnificent Kotobuki as Leona The Rising of the Shield Hero as Raphtalia 2020 Isekai Quartet 2 as CZ2128 Delta, Raphtalia Jujutsu Kaisen as Nobara Kugisaki My Next Life as a Villainess: All Routes Lead to Doom! as Gerald Stuart (childhood) 2021 Combatants Will Be Dispatched! as Heine Fena: Pirate Princess as Fena Houtman Scarlet Nexus as Kasane Randall The Idaten Deities Know Only Peace as Pisara Tropical-Rouge! Pretty Cure as Asuka Takizawa/Cure Flamingo 2022 Birdie Wing: Golf Girls' Story as Aoi Amawashi Bleach: Thousand-Year Blood War as Shino Madarame Extreme Hearts as Ashley Vancroft Musasino! as Usagi Takasago The Eminence in Shadow as Alpha The Rising of the Shield Hero 2 as Raphtalia Mobile Suit Gundam: The Witch From Mercury as Sabina Fardin 2023 A Returner's Magic Should Be Special as Azest Kingscrown Birdie Wing: Golf Girls' Story Season 2 as Aoi Amawashi Bullbuster as Arumi Nikaidō Giant Beasts of Ars as Tsurugi Oshi no Ko as Frill Shiranui Technoroid Overmind as Eliza The 100 Girlfriends Who Really, Really, Really, Really, Really Love You as Nano Eiai The Café Terrace and Its Goddesses as Akane Hōōji The Rising of the Shield Hero 3 as Raphtalia Yuri Is My Job! as Nene Saionji 2024 Kaiju No. 8 as Mina Ashiro Whisper Me a Love Song as Yori Asanagi TBA New Saga as Urza Anime films Death Billiards (2013) as Chiyuki Girls und Panzer der Film (2015) as Kinuyo Nishi Ongaku Shōjo (2015) as Eri Kumagai The Laws of The Universe Part 0 (2015) as Anna Pop In Q (2016) as Isumi Kominato Selector Destructed WIXOSS (2016) as Iona "Yuki" Urasoe Haikara-san ga Tōru (2017, 2018) as Tamaki Kitakōji Macross Delta the Movie: Passionate Walküre (2018) as Mirage Farina Jenius Rascal Does Not Dream of a Dreaming Girl (2019) as Mai Sakurajima Date A Live Fragment: Date A Bullet (2020) as Yui Sagakure Eureka - Eureka Seven: Hi-Evolution (2021) as Ex Tora Macross Delta the Movie: Absolute Live!!!!!! (2021) as Mirage Farina Jenius Drifting Home (2022) as Natsume Tonai The First Slam Dunk (2022) as Ayako Rascal Does Not Dream of a Sister Venturing Out (2023) as Mai Sakurajima Original video animation (OVA) Code Geass: Akito the Exiled (2012) as Ferirri Baltrow Hori-san to Miyamura-kun (2012–21) as Kyoko Hori Under the Dog (2016) as Anthea Kallenberg Strike the Blood II (2016–17) as Asagi Aiba Mobile Suit Gundam: The Origin (2017) as Fan Li Strike the Blood III (2018–19) as Asagi Aiba Strike the Blood IV (2020–21) as Asagi Aiba Strike the Blood V (2022) as Asagi Aiba Original net animation (ONA) Double Circle (2013) as Akane B: The Beginning (2018) as Lily Hoshina B: The Beginning Succession (2021) as Lily Hoshina Ganbare Dōki-chan (2021) as Senpai-san Star Wars: Visions - The Village Bride (2021) as F Thermae Romae Novae (2022) as Mami Yamaguchi Yakitori: Soldiers of Misfortune (2023) as Zi Han Yan Bastard!! Season 2 (2023) as Shella E. Lee Video games 2010 Chaos Rings as Alto 2012 Atelier Ayesha: The Alchemist of Dusk as Wilbell voll Erslied E.X. Troopers as Suage Street Fighter X Tekken as Lili 2013 Atelier Escha & Logy: Alchemists of the Dusk Sky as Wilbell voll Erslied NORN9 as Shiranui Nanami Corpse Party 2: DEAD PATIENT as Ayame Itou 2014 Atelier Shallie: Alchemists of the Dusk Sea as Wilbell voll Erslied Tales of Link as Kana Shining Resonance as Sonia Blanche 2015 Granblue Fantasy as Jessica Grand Sphere as Princess Stella 7th Dragon III Code: VFD as Rika 2017 Kantai Collection as Gangut/Oktyabrskaya Revolyutsiya and Kamoi Fire Emblem Heroes as Linde Magia Record: Puella Magi Madoka Magica Side Story as Asuka Tatsuki Azur Lane as FNFF Saint Louis and SN Sovetskaya Belorussiya 2018 Toaru Majutsu no Virtual On as Othinus Girls' Frontline as Contender and IWS 2000 Schoolgirl Strikers 2 as Aoi Uraba 2019Another Eden as HisumenaA Certain Magical Index: Imaginary Fest as Othinus 2020Arknights as CeobeTOUHOU Spell Bubble as Alice Margatroid 2021Scarlet Nexus as Kasane RandallGranblue Fantasy as AzusaGenshin Impact as Kujou SaraDead or Alive Xtreme Venus Vacation as EliseBlue Archive as Hasumi Hanekawa 2022Eve: Ghost Enemies as Lisa Ghostwire: Tokyo as Mari 2023Fate/Grand Order as Kashin KojiPath to Nowhere as Corso Snowbreak Containment Zone as Lyfe Dubbing Live-actionAnnabelle Comes Home as Mary Ellen (Madison Iseman)Bad Times at the El Royale as Emily Summerspring (Dakota Johnson)The Conjuring: The Devil Made Me Do It as Debbie Glatzel (Sarah Catherine Hook)Dolittle as Queen Victoria (Jessie Buckley)El Camino Christmas as Kate Daniels (Michelle Mylett)Going in Style as Brooklyn Harding (Joey King)Goosebumps as Hannah (Odeya Rush)Gossip Girl as Luna La (Zión Moreno)Knights of the Zodiac as Marin the Eagle Knight (Caitlin Hutson)The Lost Daughter as Young Leda Caruso (Jessie Buckley)Paper Towns as Lacey Pemberton (Halston Sage)The 100 as Clarke Griffin (Eliza Taylor) AnimationCarmen Sandiego'' as Carmen Sandiego References External links 1993 births Living people Japanese voice actresses Japanese video game actresses Voice actresses from Saitama Prefecture 21st-century Japanese actresses
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20%EA%B0%9C%EC%9A%94
일본 개요
일본 소개를 위해 정리한 개요이다. 일본은 태평양에 위치한 동아시아의 섬나라이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접한 동해 동쪽에 위치해 있다. 일본의 국호는 한자로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일본 열도는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은 혼슈, 큐슈, 홋카이도, 시코쿠라는 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있다. 기본 정보 통상 자칭 지명: 공식 국호: 일본의 국호 ISO 국가 표준: JP, JPN, 392 ISO 지역 표준: ISO 3166-2:JP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jp 일본의 지리 일본은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에 위치한 섬나라로, J자 형태를 하고 있다. 위치: 북반구, 동반구 아시아 동아시아 시간대: 일본 표준시(UTC+09) 일본의 극점 최고점: 후지산 3,776m 최저점: 하치로호 -4m 지상 국경: 없음 해안선: 29,751km 일본의 인구: 127,433,494명 - 세계 10위 일본의 영토: 377,873km2 - 세계 62위 일본의 국립공원 일본의 지형 일본백명산 일본 삼경 일본의 세계유산 일본의 지역 일본의 4대 섬: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일본의 주요 지역들: 홋카이도 지방 - 홋카이도와 주변 도서, 최대 도시 삿포로시 도호쿠 지방 - 혼슈 북부, 최대 도시 센다이시 간토 지방 - 혼슈 동부, 최대 도시 도쿄도 주부 지방 - 혼슈 중부 호쿠리쿠 지방 - 주부 북서부 고신에쓰 지방 - 주부 북동부 도카이 지방 - 주부 남부 긴키 지방 또는 간사이 지방 - 혼슈 중서부 , 최대 도시 오사카부 주고쿠 지방 - 혼슈 서부, 최대 도시 히로시마시 시코쿠 지방 - 시코쿠, 최대 도시 마쓰야마시 규슈 지방 - 규슈, 최대 도시 후쿠오카시 류큐 제도와 오키나와현 도도부현 도도부현 지청 시정촌 북쪽에서 남쪽으로, ISO 3166-2:JP 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도시 일본의 도시 목록 일본의 수도: 도쿄도 정령지정도시 일본의 도시권 일본의 정치 정부 형태: 간접 민주주의 다수 정당 의원내각제 입헌군주국 일본의 수도: 도쿄도 일본의 선거 일본 황실 황실전범 일본 궁내청 독립행정법인 일본의 정당 일본의 정치극단주의 행정부 국가의 상징: 아키히토 천황 역대 일본 천황 정부 수반: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대신 총리대신 관저 일본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일본 내각 일본의 행정기관 일본 국가공안위원회 일본 총무성 일본 법무성 일본 외무성 일본 재무성 일본 문부과학성 일본 후생노동성 일본 농림수산성 일본 경제산업성 일본 국토교통성 일본 환경성 일본 방위성 입법부 참의원 중의원 국회의사당 사법부 최고재판소 일본의 대외 관계 일본의 재외공관 목록 비핵 3원칙 일본의 포경 일본이 가입한 국제 기구 일본은 다음 국제 기구들의 회원국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국제 개발 협회 국제결제은행 국제 금융 공사 국제 노동 기구 국제노동조합연합 국제 농업 개발 기금 국제 민간 항공 기구 국제부흥개발은행 국제 상업 회의소 국제 수로 기구 국제 에너지 기구 국제 올림픽 위원회 국제 원자력 기구 국제 의회 연맹 국제이주기구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 국제전기통신연합 국제 통화 기금 국제 표준화 기구 국제해사기구 국제형사경찰기구 국제형사재판소 남아시아 지역 협력 연합 (참관국) 다자간 투자 보증 기구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 라틴 아메리카 통합 연합 만국 우편 연합 미주 기구 (참관국) 미주개발은행 상설중재재판소 세계 관광 기구 세계 관세 기구 세계 기상 기구 세계노동연합 세계노동조합연맹 세계무역기구 세계보건기구 세계 지식 재산권 기구 식량 농업 기구 아시아 개발 은행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아프리카 개발 은행 오스트레일리아 그룹 유럽 부흥 개발 은행 유럽 안보 협력 기구 (협력국)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참관국) 유럽 평의회 (참관국) 유네스코 유엔 유엔 난민 기구 유엔 무역 개발 회의 유엔 산업 개발 기구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사업 기구 G7 G8 G10 G20 콜롬보 계획 태평양 제도 포럼 (협력국) 파리 클럽 화학 무기 금지 기구 일본의 법률과 제도 일본국 헌법 일본의 사형제 일본의 범죄와 치안 야쿠자 일본의 경찰 일본의 국방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 비핵 3원칙 일본의 군사사 일본의 역사 일본의 내셔널리즘 일본의 군사사 사무라이 막부 닌자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격 가미카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일본의 항복 일본의 군정기 일본사 시대 구분 일본의 구석기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시대 원나라의 일본 원정 겐무 신정 무로마치 시대 난보쿠초 시대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남만무역 에도 시대 막말 메이지 시대 메이지 유신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 태평양 전쟁 일본의 군정기 전후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 일본의 문화 다도 일본의 휴대전화 문화 일본 철학 삼종신기 일본의 국기 국화문장 일본의 국가 일본의 국보 일본의 세계유산 일본의 온천 센토 가와이 일본의 성매매 일본의 흡연 일본의 문화적 상징 게이샤 가라테 기모노 닌자 벚꽃 분재 스모 욱일기 일본 정원 초밥 일본의 건축 일본의 성 히메지성 마쓰모토성 오사카성 신사 이세 신궁 이즈모 대사 우사 신궁 일본의 예술 가가미모치 • 야마토에 • 우키요에 • 이마리야키 • 일본 만화 • 자포니즘 • 종이접기 일본의 영화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지브리 고레에다 히로카즈 • 구로사와 아키라 • 나루세 미키오 • 미야자키 하야오 • 미이케 다카시 • 미조구치 겐지 • 오시마 나기사 • 오즈 야스지로 • 이마무라 쇼헤이 • 키타노 타케시 • 타카하타 이사오 감각의 제국 • 고지라 • 라쇼몽 • 링 • 7인의 사무라이 • 카게무샤 일본 문학 고사기 일본서기 겐지모노가타리 모노가타리 하이쿠 와카 일본 음악 샤미센 태고 엔카 J-pop 가라오케 일본 연극 가부키 분라쿠 노 교겐 일본 요리 고추냉이 • 덴푸라 • 라멘 • 모찌 • 벤토 • 사시미 • 사케 • 초밥 일본 의상 게타 기모노 다비 유카타 후리소데 오코보 와라지 일본 교복 조리 하카마 일본의 공휴일과 축제 골든위크 쇼와의 날 헌법기념일 녹색의 날 어린이날 다나바타 오본 히나마쓰리 하나미 세쓰분 일본의 주거 가미다나 부쓰단 와시쓰 다다미 도코노마 후스마 이케바나 코타츠 일본의 언어 일본어 일본어 문법 일본어 로마자 표기법 역사적 가나 표기법 긴키 방언 류큐어 오키나와어 미야코어 야에야마어 일본어식 영어 잉그리시 일본어의 한자 히라가나 가타카나 후리가나 일본인 일본 이름 일본계 외국인 일본의 민족 문제 야마토 민족 류큐 민족 아이누 부라쿠민 일본의 집단 게이샤 부라쿠민 야쿠자 오타쿠 프리터 히키코모리 일본의 종교 신토 일본 신화 일본의 불교 일련종 진언종 일본의 기독교 일본의 개신교 일본의 로마 가톨릭교회 일본 정교회 일본의 유대교 일본 주자학 일본의 스포츠와 오락 검도 • 스모 • 아이키도 • 일본의 야구 • 푸로레스 마작 • 쇼기 • 화투 일본의 경제와 산업 통화: 일본 엔 ISO 4217: JPY 일본은행 일본의 경제사 일본의 농업 일본의 자동차 산업 일본의 건축물 및 구조물 목록 일본의 인터넷 일본의 백화점 일본의 원자력 발전 일본의 국립공원 일본의 비자 정책 일본의 교통 도쿄 지하철 신칸센 일본의 고속도로 일본의 공항 목록 일본의 일반 국도 일본의 철도 교통 일본의 교육 유토리 교육 일본 교복 일본의 대학 목록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학습숙 일본의 과학과 기술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주대한민국 일본국 대사관 일본 수상 관저 일본 궁내청 일본 외무성 일본 내각부 총무성 통계국 정부 홍보 온라인 국립국회도서관 언론 NHK 월드 한국어판 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재팬 타임스 그 외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론리플래닛의 정보 (일본편) CIA의 세계정보 (일본편) 일본국제관광진흥기구 일본 일본에 관한 목록
https://en.wikipedia.org/wiki/Outline%20of%20Japan
Outline of Japan
The following outline is provided as an overview of and topical guide to Japan: Japan – an island nation in East Asia, located in the Pacific Ocean. It lies to the east of the Sea of Japan, China, North Korea, South Korea and Russia, stretching from the Sea of Okhotsk in the north to the East China Sea and Taiwan in the south. The characters that make up Japan's name mean "sun-origin" (because it lies to the east of nearby countries), which is why Japan is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Land of the Rising Sun". Japan is an archipelago of 14,125 islands. The four largest islands are Honshu, Hokkaido, Kyushu, and Shikoku, which together comprise about ninety-seven percent of Japan's land area. General reference Pronunciation: or Common endonyms: Official endonym: Adjectival: Japanese Etymology: Name of Japan International rankings of Japan ISO country codes: JP, JPN, 392 ISO region codes: ISO 3166-2:JP Internet country code top-level domain: .jp Geography of Japan Japan is: an island country and archipelago of 6,852 islands, shaped like the lowercase letter J. Location: Pacific Ocean Northern Hemisphere and Eastern Hemisphere Asia East Asia Time zone: Japan Standard Time (UTC+09) Extreme points of Japan High: Mount Fuji Low: Hachirōgata Land boundaries: none Coastline: Population of Japan: 125,950,000 people - 11th most populous country Area of Japan: - 62nd largest country Atlas of Japan Addressing system in Japan Historic provinces of Japan Japan Standard Time Environment of Japan Climate of Japan Climate change in Japan Environmental issues in Japan Ecoregions in Japan Energy in Japan Geology of Japan National parks of Japan Tsunami Wildlife of Japan Flora of Japan Fauna of Japan Birds of Japan Mammals of Japan Geographic features of Japan Glaciers of Japan Islands of Japan Lakes of Japan Mountains of Japan Volcanoes in Japan Rivers of Japan Waterfalls of Japan Three Views of Japan List of World Heritage Sites in Japan Regions of Japan The four main islands of Japan are: Hokkaido Honshu Kyushu Shikoku Major regions of Japan include: Hokkaido (the island of Hokkaido and nearby islands, largest city Sapporo) Tōhoku region (northern Honshu, largest city Sendai) Kantō region (eastern Honshu, largest cities Tokyo and Yokohama) Nanpō Islands: part of Tokyo Metropolis Chūbu region (central Honshu, including Mount Fuji), sometimes divided into: Hokuriku region (northwestern Chūbu) Kōshin'etsu region (northeastern Chūbu, largest city Nagano) Tōkai region (southern Chūbu, largest city Nagoya, Hamamatsu, and Shizuoka) Kansai or Kinki region (west-central Honshu, largest cities Osaka, Kobe, and Kyoto) Chūgoku region (western Honshu, largest city Hiroshima, and Okayama) Shikoku (island, largest city Matsuyama, and Takamatsu) Kyushu (island, largest city Fukuoka) which includes: Ryukyu Islands, including Okinawa Ecoregions of Japan Administrative divisions of Japan Administrative division types Regions of Japan (unofficial) Prefectures of Japan Subprefectures of Japan Districts of Japan Municipalities of Japan Wards of Japan Prefectures of Japan From north to south (numbering in ISO 3166-2:JP order), the prefectures of Japan and their commonly associated regions are: Karafuto, a portion of the island of Sakhalin north of Hokkaido (not shown on the map), was part of Japan from 1907 until World War II. The entire island is now governed by Russia. Municipalities of Japan Cities of Japan Capital of Japan: Tokyo Cities designated by government ordinance Cities, by population Towns of Japan Villages of Japan Demography of Japan Aging of Japan Government and politics of Japan Form of government: parliamentary multi-party representative democratic constitutional monarchy Capital of Japan: Tokyo Elections in Japan Imperial House of Japan (Imperial family) Imperial Guard of Japan Imperial Household Law Imperial Household Agency Civil service of Japan Japanese public corporations Independent administrative institutions of Japan Political parties in Japan Government-business relations in Japan Human rights in Japan Mass media and politics in Japan Monetary and fiscal policy of Japan Political funding in Japan Political extremism in Japan Taxation in Japan Health care system in Japan Social welfare in Japan Branches of the government of Japan Executive branch of the government of Japan Symbol of state: Naruhito, Emperor of Japan Controversies regarding the role of the Emperor of Japan Emperors of the past Head of state: de facto head of state of Japan is the head of government, the Prime Minister (see below) Head of government: Fumio Kishida, Prime Minister of Japan (Office and residence of the Prime Minister) Prime Ministers of the past Cabinet of Japan Ministries of Japan National Public Safety Commission Ministry of Internal Affairs and Communications Ministry of Justic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Ministry of Finance (Japan) Ministry of Education, Culture, Sports, Science and Technology Ministry of Health, Labour and Welfare Ministry of Agriculture, Forestry and Fisheries Ministry of Economy, Trade and Industry Ministry of Land, Infrastructure and Transport Ministry of the Environment Ministry of Defence Legislative branch of the government of Japan Diet of Japan (bicameral legislature of Japan) House of Councillors House of Representatives of Japan National Diet Building Judicial branch of the government of Japan Judicial system of Japan Supreme Court of Japan Foreign relations of Japan Diplomatic missions of Japan Foreign aid institutions of Japan Foreign policy of Japan Japan's non-nuclear weapons policy Whaling in Japan International organization membership of Japan Japan is a member of: African Development Bank (AfDB) (non-regional member) Asian Development Bank (ADB)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Asia-Pacific Telecommunity (APT)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 (dialogue partner)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Regional Forum (ARF) Australia Group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BIS) Colombo Plan (CP) Council of Europe (CE) (observer) East Asia Summit (EAS) European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EBRD) Energy Charter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CERN) (observer)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FAO) Group of Five (G5) Group of Seven (G7) Group of Eight (G8) Group of Ten (G10) Group of Twenty Finance Ministers and Central Bank Governors (G20) 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 (IADB)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t) International Criminal Police Organization (Interpol) International Development Association (IDA) 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 International Energy Charter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 (IFRCS) 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 (IFC) International Fund for Agricultural Development (IFAD) 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IH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 (IMO) International Mobile Satellite Organization (IMSO)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ISO) International Red Cross and Red Crescent Movement (ICRM)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ITU)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Satellite Organization (ITSO) International Trade Union Confederation (ITUC) Inter-Parliamentary Union (IPU) Latin American Integration Association (LAIA) Multilateral Investment Guarantee Agency (MIGA) Nuclear Energy Agency (NEA) Nuclear Suppliers Group (NSG) 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OSCE) (partner) 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OPCW)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 (observer) Pacific Islands Forum (PIF) (partner) Paris Club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PCA) South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SAARC) (observer) Southeast European Cooperative Initiative (SECI) (observer) United Nations (UN)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United Nations Disengagement Observer Force (UNDOF)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UNESCO)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HCR) United Nations Industrial Development Organization (UNIDO) United Nations Institute for Training and Research (UNITAR) 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in the Near East (UNRWA) Universal Postal Union (UPU) World Confederation of Labour (WCL) World Customs Organization (WCO) World Federation of Trade Unions (WFTU)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WIPO)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WMO) World Tourism Organization (UNWTO) World Trade Organization (WTO) World Veterans Federation Zangger Committee (ZC) Law and order of Japan Attorneys in Japan Capital punishment in Japan Civil Code of Japan Constitution of Japan Criminal justice system of Japan Crime in Japan Cannabis in Japan Juries in Japan Organized crime in Japan Human rights in Japan Freedom of the press in Japan Freedom of religion in Japan LGBT rights in Japan Law enforcement in Japan Penal system of Japan Public order and internal security in Japan Military of Japan Japan's non-nuclear policy Japan Self-Defense Forces Army of Japan: Japan Ground Self-Defense Force Navy of Japan: Japan Maritime Self-Defense Force Air force Japan: Japan Air Self-Defense Force Military history of Japan National security of Japan History of Japan History of Japan by year History of Tokyo Japanese nationalism Military history of Japan Samurai Ninja Japanese militarism Pacific Ocean theater of World War II Attack on Pearl Harbor Kamikaze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Surrender of Japan Aftermath of World War II: Occupation of Japan Naval history History of Japan by period Paleolithic Jōmon period Yayoi period Yamato period Kofun period Asuka period Nara period Heian period Kamakura period Mongol invasions of Japan Kenmu Restoration Muromachi period Nanboku-chō period Sengoku period Azuchi–Momoyama period Nanban trade Edo period Genroku period Genroku culture Meiji period Meiji Restoration Empire of Japan Taishō period Japanese expansion (1941–42) Japan during World War I Shōwa period Japanese militarism Occupation of Japan Post-occupation Japan Heisei period Culture of Japan Cultural Properties of Japan Japanese aesthetics Japanese calendar Etiquette in Japan Japanese tea ceremony Funerals in Japan Gambling in Japan Japanese martial arts Media of Japan Japanese museums List of museums in Japan Television in Japan Pornography in Japan Japanese mobile phone culture Japanese philosophy National symbols of Japan Imperial Regalia of Japan Imperial Seal of Japan Flag of Japan (National anthem of Japan) National Treasures of Japan Public bathing Popular culture in Japan Cuteness in Japanese culture Prostitution in Japan Records of Japan Japanese values Westernization Americanization World Heritage Sites in Japan Architecture of Japan Japanese Buddhist architecture Buddhist temples in Japan Hōryū-ji Tōdai-ji Enryaku-ji Mount Kōya Castles in Japan Hime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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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Bonsai Japanese dragon Japanese gardens Geisha Maiko Karate Black belt Kimono Ninja Rising Sun Flag Sakura Sumo Sushi Fashion in Japan Traditional clothing Kimono Traditional footwear: Geta Zōri Hakama School uniforms in Japan Japanese street fashion Aristocrat Holidays and festivals of Japan Golden Week Shōwa Day Constitution Memorial Day Greenery Day Homes in Japan Furnishings Butsudan Byōbu Chabudai Furo Futon Kamidana Kotatsu Ikebana Sudare Tansu Toilets in Japan Zabuton Minka Rooms Japanese kitchen Washitsu Fusuma Shōji Tatami (flooring) Tokonoma Language in Japan Japanese language Historical kana usage Japanese grammar Japanese phonology Romanization of Japanese Japanese dialects Kansai dialect Saga-ben Wasei-eigo (Japanese English) Ryukyuan languages Amami Kikai Okinawan Kunigami Yoron Miyako Yaeyama Yonaguni Foreign Variations Franponais Engrish Writing systems of Japan Kanji Hiragana Katakana Furigana People of Japan Japanese celebrities Japanese diaspora Elderly people in Japan Japanese family Homosexuality in Japan Japanese names Women in Japan Ethnicity in Japan Ethnic issues in Japan Ainu people Burakumin Dekasegi Ryukyuan people Yamato people Stereotypes in Japan Geisha Freeter Hikikomori Kogaru Otaku Yakuza Burakumin Religion in Japan Buddhism in Japan Nichiren Buddhism Shingon Tendai Pure Land Buddhism Zen Shinto Christianity in Japan Protestantism in Japan Roman Catholicism in Japan Japanese Orthodox Church Judaism in Japan Islam in Japan Ahmadiyya in Japan Neo-Confucianism in Japan Japanese new religions Hinduism in Japan Japanese mythology Sports and gaming in Japan Sports Aikido Baseball in Japan Association football in Japan Kendo Puroresu (professional wrestling) Sumo Traditional games Go Shogi Mahjong Hanafuda Economy and infrastructure of Japan Economy of Japan Economic rank, by nominal GDP (2007): 2nd (second) Agriculture, forestry, and fishing in Japan Automotive industry in Japan Bank of Japan Buildings and structures in Japan Tallest buildings and structures in Japan Companies of Japan Communications in Japan Internet in Japan Construction industry of Japan Consumer electronics industry of Japan Currency of Japan: Yen ISO 4217: JPY Department stores in Japan Defense industry of Japan Economic history of Japan Economic relations of Japan Energy in Japan Nuclear power in Japan Financial system of Japan Health care in Japan Labor market of Japan Manufacturing industries of Japan Monetary and fiscal policy of Japan Mining in Japan National parks of Japan Private enterprise in Japan Research and development in Japan Standard of living in Japan Trade policy of Japan Trade and services in Japan Tourism in Japan Visa policy of Japan Transport in Japan Airports in Japan Expressways of Japan National highways of Japan Shinkansen Tokyo Metro Rail transport in Japan Water supply and sanitation in Japan Education in Japan History of education in Japan Japanese history textbook controversies Juku (Cram School) Language minority students in Japanese classrooms Romanization of Japanese School uniforms in Japan Yutori education Structure of education in Japan Elementary schools in Japan Secondary education in Japan Higher education in Japan Health in Japan Smoking in Japan Science and technology of Japan Japan Aerospace Exploration Agency Research and development in Japan Japanese robotics See also List of international rankings List of Japan-related topics Member state of the Group of Twenty Finance Ministers and Central Bank Governors Member states of the United Nations Migration in Japan Outline of Asia Outline of geography Tourism in Japan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Official Kantei.go.jp—Official prime ministerial and cabinet site Kunaicho.go.jp—Official site of the Imperial family. Ministry of Foreign Affairs—Detailed papers on Japan's foreign policy, education programs, culture and life. Shugi-in.go.jp—Official site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National Diet Library (English) Media NHK Online Kyodo News Yomiuri Shimbun (English) Asahi Shimbun (English) The Japan Times Tourism Japan National Tourist Organization Other CIA World Factbook—Japan Encyclopædia Britannica's Japan portal site Guardian Unlimited—Special Report: Japan containing the 1889 and 1946 Constitutions Japan Japan Outlines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B%9C%ED%95%98%EB%9D%BC%20%EC%B9%B4%EC%98%A4%EB%A6%AC
이시하라 카오리
이시하라 카오리(, 1993년 8월 6일 ~ )는 일본의 여성 성우이자 가수이다. 2008년에 가수로 데뷔하였고 2010년에 성우로 데뷔하였다. 주요 출연작 애니메이션 2008년 Kiss×sis OVA - 지나가던 여고생 2010년 회장님은 메이드 사마! - 아유자와 스즈나 2011년 더블 J - 토바 유타카 마요치키! - 밀크(10화) 비탄의 아리아 - 레키 2012년 그 여름에서 기다릴게 - 타니가와 칸나 그래서 나는 H를 할 수 없다 - 오오쿠라 미나 마기 ~The labyrinth of magic~ - 알라딘 마브러브 얼터너티브 토탈 이클립스 - 츠이 이페이 사키 아치가편 - 시미즈다니 류카 윤회의 라그랑제 - 쿄우노 마도카 이 중에 1명, 여동생이 있다! - 츠루마 코노에 캄피오네! - 메티스 하이스쿨 DxD - 무라야마 2013년 마기 ~The kingdom of magic~ - 알라딘 변태왕자와 웃지 않는 고양이 - 아즈키 아즈사 스트라이크 더 블러드 - 아브로라 프로레스티나 아이카츠! - 오토시로 세이라 잔잔한 내일로부터 - 히사누마 사유 초차원게임 넵튠 THE ANIMATION - 람(화이트 시스터) 테-큐! 2기 - 콘도 코드 기아스 망국의 아키토 - 앨리스 샤잉 하이스쿨 DxD NEW - 무라야마 2014년 걸 프렌드(베타) - 하즈키 유즈코 크로스 앙쥬 천사와 용의 윤무 - 로자리 Z/X IGNITION - 유즈하라 미사키 2015년 베이비 스텝 2 - 시미즈 아키 비탄의 아리아 AA - 레키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 사쿠라다 카나데 우사의 하루살이 몽환편 - 스피카, 미녀B 울트라 슈퍼 애니메이션 타임 - 스피카 종말의 세라프 나고야결전편 - 이노우에 리카 테-큐! 4기, 5기 6기 - 콘도 우동코 하이스쿨 DxD BorN - 무라야마 GATCHAMAN CROWDS insight - 미스다치 츠바사 2016년 견습신 비밀의 코코타마 - 사쿠라이 노조미 카드파이트!! 뱅가드 G 스트라이드 게이트 - 리사 페리스 [11] 테-큐! 7기 - 콘도 우동코 팝핀Q - 루치아 2017년 고바야시네 메이드래곤 - 마가츠치 쇼타, 사사키베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 아리시아 스쿨걸 스트라이커즈 Animation Channel - 미야마 츠바메 AKIBA'S TRIP The Animation - 1화의 버그리모노 테-큐! 9기 - 콘도 우동코 2018년 괴수 걸즈 (블랙) ~울트라 괴수 의인화 계획~ - 노바 물드는 세계의 내일로부터 - 츠키시로 히토미 소드 아트 온라인 앨리시제이션 - 티제 슈트리넨 스트라이크 더 블러드Ⅲ - 아브로라 프로레스티나 2019년 미니 도사 - 세토우치 치에 게임 가전소녀 - 미호 外 걸 프렌드(베타) - 하즈키 유즈코 그라나도 에스파다 - 로즈 스피릿 그랑블루 판타지 - 줄리엣 그리모어 ~사립 그리모와르 마법학원~ - 미나미 토모카 던전 트래블러즈 2: 왕립도서관과 마물의 봉인 - 리리안 크레이퍼 도사의 무녀 새겨진 일섬의 등화 - 세토우치 치에 디스가이아 D2 - 시실리 디지몬 스토리 사이버 슬루스 해커스 메모리 - 추추몬, 시스터몬 블랑 드리프트 걸즈 - 아미 라라마지 - 시라이시 히나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 - 미나미 레나 마기 시리즈 - 알라딘 몬스터 스트라이크 - 시온 벽람항로 - 이26 사키 시리즈 - 시미즈다니 류카 섬란 카구라 시리즈 - 요자쿠라 성마도이야기 - 푸니 슈퍼로봇대전 V - 로자리 스쿨걸 스트라이커즈 - 미야마 츠바메 스쿨걸 스트라이커즈 트윙클 멜로디즈 - 미야마 츠바메 신차원게임 넵튠 V - 람 신차원게임 넵튠 V II - 람 압도적유희 무겐소울즈 Z - 웰시 이스 셀세타의 수해 - 카나 제노블레이드 2 - 호타루 종말의 세라프 운명의 시작 - 이노우에 리카 초차원게임 넵튠 MK2 - 람(화이트 시스터) 킹스레이드 - 영원의 서기관 레오 편대소녀 -포메이션 걸스- - 카제하야 야요이 페르소나 4 댄싱 올 나이트 - 나카하라 노조미 페어리 펜서 F - 티아라 페어리 펜서 F ADVENT DARK FORCE - 티아라 하얀고양이 프로젝트 - 시즈쿠 엔쥬 확산성 밀리언 아서 - 딘드라인 일본의 가수 일본의 여자 성우 199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https://en.wikipedia.org/wiki/Kaori%20Ishihara
Kaori Ishihara
is a Japanese voice actress and singer managed by Style Cube. She was formerly part of Up-Front Agency in which she was involved with Happy! Style and Team Dekaris. She was affiliated with Sigma Seven from 2013 to 2017. She was a member of StylipS until April 2013, alongside YuiKaori and Yui Ogura. As a solo singer, she recorded several character songs for one of each characters. A couple of singles have charted on Oricon. Career She made her first single, "Blooming Flower", at Pony Canyon. It peaked at 12th place on the Oricon Weekly Singles Chart and stayed on the chart for three weeks. She released her second single, "Ray Rule" and peaked at 13th place on Oricon on July 11, 2018. In the same year, she released her first solo album titled "Sunny Spot" on November 14. It peaked at 13th place on Oricon Albums Chart. She held her first solo live titled "Sunny Spot Story" on December 29, 2018. A Blu-ray and DVD version of the concert was released on April 17, 2019. She released her third single titled "TEMPEST" on July 17, 2019. It was used as the opening theme song for the anime, Demon Lord, Retry!. Filmography Television animation Film Pop in Q (2016) as Ruchia Digimon Adventure tri. (2017) as Bakumon Happy-Go-Lucky Days (2020) as Mika-chan My Tyrano: Together, Forever (2020) OVA Code Geass: Akito the Exiled as Alice Shaing Senran Kagura Estival Versus OVA as Yozakura Kaijuu Girls (Black) as Nova Video games 2011 Hyperdimension Neptunia Mk2, Ram Food Fantasy, Candy Cane, Margarita, White Truffle 2012 Mugen Souls, Welsh Hyperdimension Neptunia Victory, Ram 2013 Super Danganronpa Another 2, Hibiki Otonokoji Disgaea D2: A Brighter Darkness, Sicily Exstetra, Shiho Fairy Fencer F, Tiara Mugen Souls Z, Welsh Hyperdimension Neptunia Re;Birth1, Ram Senran Kagura Shinovi Versus, Yozakura Sorcery Saga: Curse of the Great Curry God, Punī Hyperdimension Neptunia: Producing Perfection, Ram Ys: Memories of Celceta, Carna 2014 Hyperdevotion Noire: Goddess Black Heart, Tiara Hyperdimension Neptunia Re;Birth2: Sisters Generation, Ram Dekamori Senran Kagura, Yozakura Super Heroine Chronicle, Reki 2015 Senran Kagura: Estival Versus – Yozakura Shironeko Project, Shizuku Enju Megadimension Neptunia VII, Ram Fairy Fencer F Advent Dark Force, Tiara 2016 Granblue Fantasy, Juliet 2017 Digimon Story: Cyber Sleuth – Hacker's Memory - Wormmon/Sistermon Noir Magia Record: Puella Magi Madoka Magica Side Story - Rena Minami Xenoblade Chronicles 2 - Floren (Japanese: ホタル, Hotaru) School Girl/Zombie Hunter, Rei Kanazaki 2019 Arknights, Heavyrain 2020 Moe! Ninja Girls RPG, Oka Kazamatsuri 2022 Fairy Fencer F: Refrain Chord, Tiara Goddess of Victory: Nikke, Frima Return to Shironagasu Island, Akira Edgworth Neptunia: Sisters vs Sisters, Ram Dubbing Planzet (2010) as Koyomi Akejima Long Way North as Nadya Discography Singles Albums Video Releases Concerts Personal concerts Other concerts References External links 1993 births Living people Japanese female idols Japanese video game actresses Japanese voice actresses Japanese women pop singers Singers from Chiba Prefecture Sigma Seven voice actors StylipS members Voice actresses from Chiba Prefecture YuiKaori members 21st-century Japanese actresses 21st-century Japanese women singers 21st-century Japanese singers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D%99%94%EB%AF%BC%EA%B5%AD%20%EA%B0%9C%EC%9A%94
중화민국 개요
중화민국 소개를 위해 정리한 개요이다. 중화민국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본래 중국 대륙을 통치했으나, 현재는 대만섬과 펑후 제도, 마쭈 열도 등의 부속 도서만을 통치하고 있다. 정부는 타이베이시에 위치한다. 국공 내전 이후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은 대만 지구만을 실효지배하고 있다.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하게 되었다. 중화민국은 이후 반세기 동안 빠르게 산업화되었다. 중화민국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다당제 선거를 통해 민주화되었다. 중화민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이자 세계무역기구,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의 회원국이다. 중화민국의 하이 테크 산업은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기본 정보 통상 자칭 지명: 공식 국호: ISO 국가 표준: TW, TWN, 158 ISO 지역 표준: ISO 3166-2:TW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tw 중화민국의 지리 대만 위치: 북반구, 동반구 아시아 동아시아 태평양 동중국해 필리핀해 바시 해협 남중국해 대만 해협 시간대: UTC+08:00 중화민국의 극점: 최고점: 위산 3,952m 최저점: 태평양 0m 지상 국경: 없음 해안선: 1,566km 중화민국의 인구: 23,503,349명 - 세계 53위 중화민국의 영토: 36,193km2 - 세계 134위 중화민국의 국립공원 목록 중화민국의 지형 대만 대만 해협 중화민국의 세계유산: 없음 중화민국의 행정 구역 행정 구역 분류: 6개 직할시와 3개 성할시 170개 구 13개 현 14개 현할시와 184개 향 6개 직할시: 가오슝시, 신베이시, 타오위안시, 타이난시, 타이베이시, 타이중시 3개 성할시: 신주시, 자이시, 지룽시 13개 현: 난터우현, 롄장현, 먀오리현, 신주현, 윈린현, 이란현, 자이현, 장화현, 진먼현, 타이둥현, 펑후현, 핑둥현, 화롄현 중화민국의 정치 정부 형태: 간접 민주주의 이원집정부제 공화국 중화민국의 수도: 타이베이시 중화민국의 선거 중화민국의 총통 선거 1996년 - 2000년 - 2004년 - 2008년 - 2012년 - 2016년 중화민국 입법원 선거 1995년 - 1998년 - 2001년 - 2004년 - 2008년 - 2012년 - 2016년 중화민국의 정책과 사상 탈중국화 대만 독립운동 중국화 삼민주의 중국의 재통일 중화민국의 정당 민주진보당 중국 국민당 시대역량 친민당 무당단결연맹 중화민국의 정부 국가원수: 차이잉원 총통 부총통: 천젠런 오권분립 중화민국 행정원 중화민국의 행정원장 중화민국 내정부 중화민국 외교부 중화민국 국방부 중화민국 재정부 중화민국 교육부 중화민국 법무부 중화민국 경제부 중화민국 교통부 중화민국 위생복리부 중화민국 입법원 중화민국 사법원 중화민국 고시원 중화민국 감찰원 중화민국의 대외 관계 양안 관계 일변일국 중국의 재통일 중화 타이베이 중화민국의 재외기구 목록 사불일몰유 타이완 지구 ISO 3166-2:TW 타이완 독립운동 중화민국 여권 미국-중화민국 관계 미국재대만협회 타이완관계법 중화민국이 가입한 국제 기구 중화민국은 다음 국제 기구들의 회원국이다: 국제노동조합연합 (중화 타이베이) 국제 상업 회의소 (중화 타이베이) 국제 올림픽 위원회 (중화 타이베이) 세계노동연합 세계노동조합연맹 세계무역기구 (대만, 펑후, 진먼, 마쭈 개별 관세 영역) 아시아 개발 은행 (중화 타이베이)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중화 타이베이) 중화민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다: 중화민국은 유엔 창설 당시 회원국이었으나, 197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한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로 유엔을 탈퇴했다. 중화민국의 유엔 가입 요청은 거부되고 있다. 중화민국의 법률과 제도 중화민국 헌법 중화민국 내정부 경정서 중화민국의 정치적 및 법적 지위 타이완 문제 중국의 재통일 타이완 독립운동 중화민국의 지위에 관한 조약 시모노세키 조약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선언 유엔 헌장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중일화평조약 상하이 코뮈니케 중화민국의 군사 통수권자: 차이잉원 중화민국 국방부 중화민국 육군 중화민국 해군 중화민국 공군 중화민국의 정치인 롄잔 뤼슈롄 리덩후이 마잉주 셰창팅 쑹메이링 쑹추위 옌자간 장샤오옌 장제스 장징궈 천수이볜 중화민국의 역사 2·28 사건 메이리다오 사건 시대 구분 대만의 선사 시대 미다그 왕국 네덜란드령 포르모사 정씨왕국 대만청치시기 대만민주국 대만일치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 중화민국의 군사사 구닝터우 전투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진먼 포격전 중화민국의 문화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의 국장 중화민국의 국가 타이완의 로마 가톨릭교회 대만의 성매매 중화민국의 세계유산: 없음 중화민국의 건축 국립국부기념관 타이베이 101 중화민국의 예술 가자희 장공기념가 타이완의 영화 타이완의 텔레비전 드라마 중화민국의 언론 공공전시문화사업기금회 타이베이 타임스 TVBS 중화민국의 박물관 국군역사문물관 국립고궁박물원 국립 타이완 박물관 순이타이완 원주민 박물관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대만 요리 대만맥주 타이양빙 중화민국의 언어 중화민국 국어 대만어 대만인 한족 타이완 원주민 타이완계 미국인 중화민국의 스포츠 중화 직업봉구 대연맹 중화민국의 경제와 산업 통화: 신 대만 달러 ISO 4217: TWD 중화민국 중앙은행 타이완 증권거래소 가권지수 타이완의 기업 목록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화민국의 일반 국도 중화항공 타이완 고속철도 타이완 철로 관리국 중화민국의 과학과 기술 국립 타이완 대학 대만의 대학 목록 중산과학연구원 대만 중앙연구원 각주 외부 링크 주 타이페이 대한민국 대표부 홈페이지 중화민국 전자정부 중화민국 총통부 중화민국 감찰원 중화민국 사법원 중화민국 입법원 중화민국 외교부 CIA의 세계정보 (대만편) 중화민국 대만 대만에 관한 목록
https://en.wikipedia.org/wiki/Outline%20of%20Taiwan
Outline of Taiwan
The following outline is provided as an overview of and topical guide to Taiwan: Taiwan – a country in East Asia, officially named the Republic of China (ROC). Originally based in mainland China, the ROC now governs the island of Taiwan, which makes up over 99% of its territory, as well as Penghu, Kinmen, Matsu, and other minor islands. Taipei is the seat of the central government. Following the Chinese civil war,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ook full control of mainland China and founde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PRC) in 1949. The ROC relocated its government to Taiwan, and its jurisdiction became limited to Taiwan and its surrounding islands. In 1971, the PRC assumed China's seat at the United Nations, which the ROC originally occupie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20th century, Taiwan experienced rapid economic growth and industrialization and is now an advanced industrial economy. In the 1980s and early 1990s, Taiwan evolved into a multi-party democracy with universal suffrage. Taiwan is one of the Four Asian Tigers and a member of the WTO and APEC. The 19th-largest economy in the world, its high-tech industry plays a key role in the global economy. General reference Pronunciation: Common English state names: Taiwan; archaic Formosa Official English state names: Republic of China Common endonym(s): 臺灣 / 台灣 (Táiwān; Tâi-oân) Official endonym(s): 臺灣 / 台灣 – 中華民國 (Zhōnghuá Mínguó; Tiong-hôa Bîn-kok) Adjectival(s): Taiwanese (disambiguation) Demonym(s): Taiwanese Etymology: Taiwan#Name International rankings of Taiwan ISO country codes: TW, TWN, 158 ISO region codes: See ISO 3166-2:TW Internet country code top-level domain: .tw Geography of Taiwan Taiwan is: a common name used for the Republic of China since the 1970s, to avoid confusion with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commonly known as China) also the name of the Island of Taiwan (Formosa) Location: Northern Hemisphere and Eastern Hemisphere Eurasia (but not on the mainland) Asia East Asia Pacific Ocean East China Sea Philippine Sea Bashi Channel South China Sea Taiwan Strait Time zone: National Standard Time (UTC+08:00) Extreme points of Taiwan High: Yushan Low: Pacific Ocean 0 m Land boundaries: none Coastline: 1,566 km Population of Taiwan: 23,503,349 people (May 2016 estimate) - 53rd most populous country Area of Taiwan: - 134th largest country Atlas of Taiwan Environment of Taiwan Climate of Taiwan Geology of Taiwan National parks of Taiwan Wildlife of Taiwan Endemic species of Taiwan Fauna of Taiwan Birds of Taiwan Mammals of Taiwan Formosan rock macaque Flora of Taiwan Geographic features of Taiwan Hot springs in Taiwan - Taiwan has one of the highest concentrations of hot springs in the World. Islands of Taiwan Taiwan Mountains in Taiwan Volcanoes in Taiwan Rivers in Taiwan Taiwan Strait World Heritage Sites in Taiwan: None Regions of Taiwan Alishan National Scenic Area Metropolitan areas in Taiwan Ecoregions of Taiwan South Taiwan monsoon rain forests Taiwan subtropical evergreen forests Administrative divisions of Taiwan Administrative division types Special municipalities (6) and Provincial cities (3) Districts (170) Counties (13) County-administered cities (14) and Townships (184) Six special municipalities: Kaohsiung, New Taipei, Taichung, Tainan, Taipei, and Taoyuan. Three provincial cities: Chiayi, Hsinchu, Keelung. 13 counties: Changhua, Chiayi, Hsinchu, Hualien, Kinmen, Lienchiang, Miaoli, Nantou, Penghu, Pingtung, Taitung, Yilan and Yunlin. List of cities in Taiwan Demography of Taiwan Government and politics of Taiwan Form of government: semi-presidential representative democratic republic Capital of the Republic of China: Taipei Elections in Taiwan Presidential elections in Taiwan 1996 - 2000 - 2004 - 2008 - 2012 - 2016 - 2020 Legislative elections in Taiwan Legislative Yuan: 1969 - 1972 - 1975 - 1980 - 1983 - 1986 - 1989 - 1992 - 1995 - 1998 - 2001 - 2004 - 2008 - 2012 - 2016 - 2020 National Assembly: 1969 - 1972 - 1980 - 1986 - 1991 - 1996 - 2005 (defunct) Referendums in Taiwan Taiwan policy and ideology Taiwanization and Desinicization Taiwanese nationalism Tangwai Taiwan independence movement Formosan League for Reemancipation Sinicization Chinese nationalism Three Principles of the People Chinese unification Iron rice bowl Iron vote Irredentism 228 Hand-in-Hand Rally Political parties Nationally represented parties Democratic Progressive Party Kuomintang New Power Party People First Party (Taiwan) Non-Partisan Solidarity Union Other parties Civil Party (Taiwan) Green Party Taiwan Minkuotang Natural Law Party New Party (Taiwan) Peasant Party (Taiwan) Taiwan Independence Party Taiwan Solidarity Union Trees Party Branches of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China has five branches, called "yuan". Leadership Head of state: President, Tsai Ing-wen Vice President: Chen Chien-jen Executive Yuan Head of government: Premier of the Republic of China, Lin Chuan The Cabinet (Executive Yuan) Ministry of the Interior Ministry of Foreign Affairs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Ministry of Finance Ministry of Education Ministry of Justice Ministry of Economic Affairs Ministry of Transportation and Communications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Ministry of Culture Ministry of Labor Ministry of Science and Technology Legislative Yuan Legislative Yuan is a unicameral parliament Judicial Yuan Supreme Court of the Republic of China Examination Yuan Control Yuan Foreign relations of Taiwan Cross-Strait relations Chinese unification Chinese Taipei One Country on Each Side Diplomatic missions of Taiwan Four Noes and One Without Four-Stage Theory of the Republic of China Free Area of the Republic of China ISO 3166-2:TW List of Chinese Taipei Representatives to APEC Political status of Taiwan Sino-Pacific relations Taiwan independence movement Taiwan passport Taiwan-United States relations American Institute in Taiwan Six Assurances Taiwan Relations Act Visa policy of Taiwan International organization membership The Republic of China is a member of: Asian Development Bank (ADB) (as Chinese Taipei)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as Chinese Taipei) Central American Bank for Economic Integration (BCIE)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 (as Chinese Taipei)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 (as Chinese Taipei) International Trade Union Confederation (ITUC) (as Chinese Taipei) World Confederation of Labour (WCL) World Federation of Trade Unions (WFTU) World Trade Organization (WTO) (as Separate Customs Territory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 "Chinese Taipei") The Republic of China is excluded from: United Nations The Republic of China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UN, but withdrew in 1971 after the UNGA Resolution 2758 was proposed which was in favor of representation for the PRC. On 23 July 2007, the Republic of China's (15th) request to join the UN was rejected. Law and order Capital punishment in Taiwan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China Corporal punishment in Taiwan Human rights in Taiwan LGBT rights in Taiwan Intersex rights in Taiwan Freedom of religion in Taiwan Identification in Taiwan Law enforcement in Taiwan Coast Guard Administration National Police Agency Political/legal status of Taiwan Chinese unification Political status of Taiwan Taiwan cession Taiwan independence Legal documentation of Taiwan status Treaty of Shimonoseki Cairo Conference Potsdam Declaration Treaty of Peace with Japan Treaty of Taipei General Order No. 1 Japanese Instrument of Surrender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Yalta Conference Shanghai Communique Military Command Commander-in-chief: Tsai Ing-wen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Conscription in Taiwan Forces Republic of China Army Republic of China Navy Republic of China Marine Corps Republic of China Air Force Republic of China Military Police Military ranks of the Republic of China Politicians Annette Lu John Chang Morris Chang Chen Shui-bian Chiang Ching-kuo Chiang Kai-shek Chu Mei-feng Frank Hsieh Evonne Hsu Katsura Taro Lee Teng-hui Lee Yuan-tseh Li Ao Lien Chan Ma Ying-jeou Pai Hsien-yung Peng Ming-min James Soong Sisy Chen Soong Mei-ling Su Tseng-chang Wang Jin-pyng Wang Yung-ching Yen Chia-kan Yu Shyi-kun History of Taiwan Archaeological sites February 28 Incident 32 Demands Kaohsiung Incident Koxinga Timeline of Taiwanese history Timeline of diplomatic relations of Taiwan By period Mainland before 1949 Economic history of China Military history of China (pre-1911) List of earthquakes in China Taiwan Prehistory    50000 BCE – 1540 CE Dapenkeng culture    4000 BCE – 2500 BCE Kingdom of Middag    1540–1732 Dutch Formosa    1624–1662 Spanish Formosa    1626–1642 Kingdom of Tungning    1661–1683 Qing Taiwan    1683–1895 Republic of Taiwan    1895 Japanese Taiwan    1895–1945 Taiwanese Communist Party Post-War Taiwan    1945–present 19 March 2004 assassination attempt in Taiwan By region History of Kaohsiung History of Taipei By subject Cultural history Economic history Educational history Military history of Taiwan Quemoy Battles First Taiwan Strait Crisis Second Taiwan Strait Crisis Third Taiwan Strait Crisis Civil Air Transport Political history Historical figures Rulers of Taiwan Thomas Barclay (missionary) George Leslie Mackay James Laidlaw Maxwell Culture of Taiwan Architecture of Taiwan Taipei 101 Sun Yat-sen Memorial Hall Chung-Shan Building Festivals in Taiwan Public holidays in Taiwan Languages of Taiwan Taiwanese Mandarin Taiwanese Hokkien Taiwanese Hakka Formosan languages Media in Taiwan Museums in Taiwan National symbols of the Republic of China Coat of arms of the Republic of China Flag of the Republic of China National anthem of the Republic of China Night markets in Taiwan People of Taiwan Han Taiwanese Ethnic minorities in Taiwan Taiwanese aborigines Taiwanese American Notable Taiwanese individuals Alec Su Jay Chou Jolin Tsai Show Lo S.H.E Wang Hsing-ching A-mei Teresa Teng Takeshi Kaneshiro Mainland Chinese Prostitution in Taiwan Scenic areas in Taiwan Jiufen Cihu Mausoleum Wuzhi Mountain Military Cemetery Yangmingshan Chinese cuisine Taiwanese cuisine Bubble Tea Suncake Taiwan Beer Taiwanese identity Tea culture of Taiwan Arts in Taiwan Art in Taiwan Cinema of Taiwan Crystal Boys Cape No. 7 Seediq Bale Dance in Taiwan Cloud Gate Dance Theater Literature of Taiwan Taiwanese literature movement Formosa Magazine Music of Taiwan Chiang Kai-shek Memorial Song Opera of Taiwan Photography in Taiwan Television in Taiwan Taiwanese drama Mass media of Taiwan Media of Taiwan International Community Radio Taipei The China Post Taipei Times Taiwan News Public Television Service TVBS Museums in Taiwan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Fine Arts Museum National Museum of History Museum of World Religions Fo Guang Shan Buddha Museum New Taipei City Yingge Ceramics Museum Tamkang University Maritime Museum Taiwan Nougat Museum Shung Ye Museum of Formosan Aborigines Pinglin Tea Industry Museum National Taiwan Museum Republic of China Armed Forces Museum Miniatures Museum of Taiwan Religion in Taiwan Religion in Taiwan Buddhism in Taiwan Four Great Mountains (Taiwan) Chung Tai Shan Dharma Drum Mountain Fo Guang Shan Tzu Chi Christianity in Taiwan Catholic Church in Taiwan Presbyterian Church in Taiwan Islam in Taiwan Judaism in Taiwan Taiwanese folk beliefs Baishatun Mazu Pilgrimage Dajia Mazu Pilgrimage Qing Shan King Sacrificial Ceremony Sports in Taiwan Professional baseball in Taiwan - Baseball is the most popular sport in Taiwan. Chinese Professional Baseball League P. League+ Super Basketball League Women's Super Basketball League Economy and infrastructure of Taiwan Economic rank, by nominal GDP (2021): 21st (twenty-first) Agriculture in Taiwan Banking in Taiwan Central Bank of the Republic of China (Taiwan) Communications in Taiwan Internet in Taiwan Companies of Taiwan Currency of Taiwan: dollar ISO 4217: TWD Economic history of Taiwan Energy in Taiwan Energy policy of Taiwan Nuclear power in Taiwan Four Asian Tigers Health care in Taiwan Iron rice bowl Taiwan Miracle Taiwan Stock Exchange Taiwan Capitalization Weighted Stock Index Tourism in Taiwan Transportation in Taiwan Air transport in Taiwan Airports in Taiwan China Airlines EVA Air Starlux Airlines Rail transport in Taiwan Taiwan High Speed Rail Taiwan Railway Administration Taipei Metro, New Taipei Metro, Taichung Metro, Taoyuan Metro, Kaohsiung Rapid Transit Highway system in Taiwan Education and research in Taiwan History of education in Taiwan National Taiwan University List of Taiwanese inventions and discoveries List of universities in Taiwan Intercollegiate Taiwanese American Students Association Taiwan studies Research institutes Academia Sinica Chungshan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National Health Research Institutes National Space Organization Nobel laureates Yuan T. Lee See also Hong Kong–Taiwan relations Index of Taiwan-related articles List of international rankings Outline of Asia Outline of geography References External links Central Weather Bureau – local weather and earthquake reports Satellite view of Taiwan at WikiMapia Statistics of Taiwan Office of the President Control Yuan Examination Yuan Executive Yuan Government Information Office Judicial Yuan Legislative Yu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National Assembly Taipei Economic & Cultural Representative Office in the U.S. Taiwan e-Government Taiwan Taiwan Outlines
https://ko.wikipedia.org/wiki/2023%EB%85%84%20AFC%20%EC%95%84%EC%8B%9C%EC%95%88%EC%BB%B5%20%EC%98%88%EC%84%A0
2023년 AFC 아시안컵 예선
2023년 AFC 아시안컵 예선은 2019년 6월 6일부터 2022년 11월까지 진행된다. 1차 예선부터 2차 예선까지는 2022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과 통합하여 치르며, 플레이오프와 3차 예선은 별도로 치러진다. 1차 예선에는 아시아 축구 연맹(AFC) 가맹국 가운데 하위 12개국이 참가한다. AFC에는 46개 가맹국이 있다. 2019년 5월 FIFA 랭킹을 기준으로 AFC 내 35위 ~ 46위의 나라들이 대상이다. 승리한 6개국은 자동 진출한 34개 국가와 함께 2차 예선을 펼친다. 2차 예선은 40개국이 8개 조로 나뉘어 진행된다. 2022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을 겸한 2023년 AFC 아시안컵 2차 예선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8개 팀, 각 조 2위 팀 가운데 성적이 좋은 5개 팀은 AFC 아시안컵 본선에 직행하며 2022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에도 진출한다. 참가국 FIFA에 가맹한 아시아 축구 연맹 가입국 46개국 모두가 참여한다. AFC 준회원국인 북마리아나 제도는 FIFA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AFC 아시안컵에는 참가할 수 있지만 FIFA 월드컵에는 참가할 수 없다. 2019년 4월 기준으로 FIFA 랭킹 상위 34개국이 2차 예선에 직행하고, 하위 12개국이 1차 예선부터 참여한다. 월드컵 지역 예선과 아시안컵 지역 예선이 병행하여 진행되기 때문에,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국인 카타르와 2023년 AFC 아시안컵 이전 개최국이었던 중국은 둘 다 아시아 지역 2차 예선부터 참가한다. 카타르와 중국은 지역 예선 결과에 상관 없이 각각 FIFA 월드컵과 아시안컵에서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자동 진출한다. 즉, 카타르는 아시안컵에 진출하기 위해, 중국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에 출전하는 것이다. 동티모르는 201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과 일부 겸했던 2019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부적격 선수 12명을 참가시킨 것이 적발되어서 2023년 AFC 아시안컵 참가가 금지되었지만, 2022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는 정상 참가할 예정이다. 아래 랭킹은 2019년 4월 4일 발표된 FIFA 랭킹을 따른다. {| class="wikitable" |- !colspan=2|2차 예선에 직행하는 국가 (1위부터 34위) !1차 예선부터 참여하는 국가 (35위부터 46위) |-valign=top |width=33%| (21위) (26위) (37위) (41위) (55위) (67위) (72위) (74위) (76위) (83위) (85위) (86위) (86위) (95위) (97위) (98위) (99위) |width=33%| (101위) (111위) (114위) (120위) (121위) (124위) (125위) (136위) (140위) (141위) (146위) (149위) (151위) (156위) (159위) (160위) (161위) |width=33%| (168위) (173위) (183위) (184위) (186위) (187위) (188위) (193위) (194위) (195위) (200위) (202위) |} 일정 국제 축구 연맹(FIFA)과 아시아 축구 연맹(AFC)은 2020년 3월 9일에 코로나19 범유행의 여파로 인하여 2020년 3월과 6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경기 일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1차 예선 1차 예선에는 AFC 소속 FIFA 회원국 중 FIFA 랭킹이 낮은 12개 팀이 참가한다. 1차 예선에서 승리한 6개 팀은 2차 예선에 진출한다. |} 2차 예선 2차 예선에는 8개 조에 5팀씩 나뉘어 치른다. 각 조에서 1위를 차지한 8개 팀과 2위를 차지한 팀 중 성적이 좋은 4개 팀에게는 FIFA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진출과 함께 AFC 아시안컵 본선 출전권이 주어진다. 그리고 2위를 하고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에서 탈락한 나머지 4개 팀과 각 조 3위 팀은 2023년 AFC 아시안컵 3차 예선에 진출한다. 각 조 4위 팀 중 성적이 좋은 4개 팀은 2023년 AFC 아시안컵 3차 예선에, 나머지 4개 팀과 각 조 5위 팀은 플레이오프를 통해 3차 예선 진출 혹은 2020년 AFC 솔리대리티컵 출전 팀을 결정하며 2차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3개 팀에게는 2020년 AFC 솔리대리티컵 출전 티켓이 주어진다. A조 B조 C조 D조 E조 F조 G조 H조 각 조 2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2위 팀 중 AFC 아시안컵 자동 출전권을 얻는 4개 팀은 다음의 규칙을 따라 결정된다. 승점 득실차 득점 페어플레이 점수가 가장 낮은 팀 (1점 : 경고, 3점 : 경고 누적 퇴장 및 직접 퇴장, 4점 : 경고 받은 후 직접 퇴장) 중립 지역에서의 플레이오프 각 조 5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5위 팀 중 AFC 아시안컵 3차 예선에 올라갈 상위 3개 팀과 AFC 아시안컵 예선 플레이오프에 올라갈 하위 4개 팀은 다음의 규칙을 따라 결정된다. 승점 득실차 득점 페어플레이 점수가 가장 낮은 팀 (1점 : 경고, 3점 : 경고 누적 퇴장 및 직접 퇴장, 4점 : 경고 받은 후 직접 퇴장) 중립 지역에서의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2차 예선 플레이오프에는 최종 예선 진출에 실패한 각 조 최하위 7팀 중 하위권 4팀들이 2023년 AFC 아시안컵 3차 예선 진출권을 놓고 2번의 플레이오프 라운드를 진행한다.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둔 2팀은 아시안컵 3차 예선으로 직행하고 나머지 패한 2팀은 탈락이 확정된다. |} 3차 예선 A조 B조 C조 D조 E조 F조 각 조 2위 팀끼리의 순위 결정 2위 팀 중 AFC 아시안컵 본선 출전권을 얻는 상위 5개 팀은 다음의 규칙을 따라 결정된다. 승점 승자승 승점 승자승 다득점 전경기 득실차 전경기 다득점 페어플레이 점수가 가장 낮은 팀 (1점 : 경고, 3점 : 경고 누적 퇴장 및 직접 퇴장, 4점 : 경고 받은 후 직접 퇴장) 마지막 경기 후 플레이오프 본선 진출 국가 2022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을 통해 진출한 국가 2023년 AFC 아시안컵 3차 예선을 통해 진출한 국가 같이 보기 2022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각주 예선 AFC 아시안컵 예선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연기된 스포츠 행사
https://en.wikipedia.org/wiki/2023%20AFC%20Asian%20Cup%20qualification
2023 AFC Asian Cup qualification
The 2023 AFC Asian Cup qualification was the qualification process organized by the Asian Football Confederation (AFC) to determine the participating teams for the 2023 AFC Asian Cup, the 18th edition of the international men's football championship of Asia. Since 2019, the Asian Cup final tournament is contested by 24 teams, having been expanded from the 16-team format that was used from 2004 to 2015. The qualification process involved four rounds, where the first two rounds doubled as the 2022 FIFA World Cup qualification for Asian teams. Only the first round acted as qualifiers for the cancelled 2020 AFC Solidarity Cup as the six teams which were eliminated from the first round of the 2022 World Cup and 2023 Asian Cup joint qualifiers. The two teams that were eliminated from the play-off round of the Asian Cup qualifiers were among the four teams that would have qualified for the Solidarity Cup. Format The qualification structure was as follows: First round: 12 teams (ranked 35–46) played home-and-away over two legs. The six winners advanced to the second round. Second round: 40 teams (ranked 1–34 and six first round winners) were divided into eight groups of five teams to play home-and-away round-robin matches. The eight group winners and the five best group runners-up qualified for the AFC Asian Cup and advance to the third round of 2022 FIFA World Cup qualifiers. The next 22 highest ranked teams (the remaining three group runners-up, the eight third-placed teams, the eight fourth-placed teams and the three best groups fifth-placed teams) advanced directly to the third round of Asian Cup qualification. The remaining 4 teams entered the play-off round to contest the remaining two spots in the third round of Asian Cup qualification. Play-off round: There was one round of home-and-away two-legged play-off matches that determined the final two qualifiers for the third round. Third round: The 24 teams were divided into six groups of four to play single round-robin matches in six centralised venues, and they competed for the remaining slots of the Asian Cup. Entrants The 46 FIFA-affiliated nations from the AFC entered qualification, with the April 2019 FIFA Men's World Rankings used to determine which nations would compete in the first round and which nations would receive a bye through to the second round. For seeding in the second round and third round draws, the most recent FIFA Rankings prior to those draws have been expected to be used. Due to the joint format of the World Cup and Asian Cup qualifiers, both Qatar (as the host nation of the 2022 FIFA World Cup) also entered the second round of Asian Cup qualifiers. The following restrictions were applied: Northern Mariana Islands, which is not a FIFA member, could not enter. Timor-Leste was banned from participating in the Asian Cup qualification after being found to have fielded a total of 12 ineligible players in 2019 AFC Asian Cup qualification matches, among other competitions. However, as FIFA did not ban Timor-Leste from the World Cup qualifiers, the country was allowed to enter the competition, but was ineligible to qualify for the Asian Cup. Schedule The schedule of the competition is expected to be as follows in the tables below. On 9 March 2020, FIFA and AFC announced that the second round matches on matchdays 7–10 due to take place in March and June 2020 were postponed to later dates due to the COVID-19 pandemic, with the new dates to be confirmed. However, subject to approval by FIFA and AFC, and agreement of both member associations, the matches may be played as scheduled provided that the safety of all individuals involved meets the required standards. On 5 June, AFC confirmed that matchdays 7 and 8 were scheduled to take place on 8 and 13 October respectively while matchdays 9 and 10 were also scheduled to kick off on 12 and 17 November. On 12 August, AFC announced that the upcoming qualifying matches for the 2022 World Cup and 2023 Asian Cup, originally scheduled to take place during the international match windows in October and November 2020, were rescheduled to 2021. On 11 November 2020, the AFC Competitions Committee agreed at its meeting that all remaining second round matches were to be completed by 15 June 2021 with matchdays 7 and 8 in March, and matchdays 9 and 10 in June. However, on the same day, FIFA, along with the Bangladeshi and Qatari member associations, gave approval to the only second round match originally scheduled for 2020, Qatar v. Bangladesh, which was played on 4 December. On 19 February 2021, FIFA and AFC postponed the majority of the upcoming matches to June. On 20 October, the AFC reported that the third round will begin in June 2022 with the final round draw to be held earlier in February. First round The draw for the first round took place on 17 April 2019 at 11:00 MST (UTC+8), at the AFC House in Kuala Lumpur, Malaysia. The six teams eliminated from this round progressed to the cancelled 2020 AFC Solidarity Cup. Second round The draw for the second round was held on 17 July 2019 at 17:00 MST (UTC+8), at AFC House in Kuala Lumpur, Malaysia. Groups Group A Group B Group C Group D Group E Group F Group G Group H North Korea withdrew from the qualifying round due to safety concerns related to the COVID-19 pandemic, therefore the results of their matches were excluded from the group standings. Ranking of runner-up teams Group H contained only four teams compared to five teams in all other groups after North Korea withdrew from the competition. Therefore, the results against the fifth-placed team were not counted when determining the ranking of the runner-up teams. Ranking of fifth-placed teams Play-off round Four teams competed in a single round for two slots to the third round. It was planned to have a total of eight slots for the third round be available from this round (four from round 1, four from round 2) and the four teams that were to be eliminated from this stage would have progressed to the later cancelled 2020 AFC Solidarity Cup. Third round A total of 24 teams competed in the third round of AFC Asian Cup qualifiers. Since the then-2023 hosts China advanced to the 2022 FIFA World Cup qualifying third round, the automatic slot for the hosts was no longer necessary, and a total of 11 slots for the Asian Cup were available from this round. Groups Group A Group B Group C Group D Group E Group F Ranking of runner-up teams Qualified teams 24 teams that have qualified for the 2023 AFC Asian Cup Finals in Qatar. Notes Top goalscorers Below is full goalscorers lists for all rounds: First round Second round Play-off round Third round See also 2022 FIFA World Cup qualification (AFC)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 the-AFC.com Preliminary Joint Qualification 2022, stats.the-AFC.com Qualification 2023 2019 in Asian football 2020 in Asian football 2021 in Asian football 2022 in Asian football AFC Asian Cup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B%8F%85%20%ED%95%99%EC%83%9D%EC%9A%B4%EB%8F%99
서독 학생운동
1960년대 서독학생운동(, ) 또는 서독의 68운동()은 1960년대에 권위주의의 타파와 나치 청산을 목적으로 일어난 서독의 학생운동이다. 기존의 목표는 억압적 교육제도, 가부장적 기성질서, 소비사회, 권위주의의 타파가 목표였으나 기민련과 사민당의 연립 정부 구성과 반공주의를 반대파 제거의 이데올로기로 악용했던 서독 정부에 대해 재야와 학생들은 나치 협력자들이 전체 공무원의 60%까지 차지한 상황을 비판하였고 이에 따라 서베를린 쇠네베르크에서 친미 반공 집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고조되는 와중에 팔레비 2세의 독일 방문과 그 과정에서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고 요제프 바흐만에 의해 루디 두치케가 저격당하는 등 좌우 갈등은 폭발했다. 이후 폭력과 테러를 통한 지하노선과 녹색당과 정계 진출로 제도권 내에서 개혁을 시도하려 했던 노선으로 갈리며 각각 사회 전복과 개혁으로 목표가 수정되기도 했다. 프랑스 68운동의 경우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 샤를 드골의 퇴진과 의회의 해산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지지를 얻지 못한 독일의 학생운동은 《긴급조치법》으로 지하세력화되었고 폭력과 테러로 체제 전복을 꾀했던 독일 적군파로 나타나게 된다. 독일학생운동은 노동자들의 소극적 참여와 체제 전복이라는 목적 부재로 프랑스와 같은 목표는 이뤄내지 못했으나 이후 68세대들이 녹색당을 통해 환경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각종 개혁을 진행해 기존 학생운동이 요구했던 목표들을 이뤄내면서 많은 영향을 줬다. 배경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은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유럽의 정치 질서를 재편하려 시도했다. 전후 세계 질서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 체제로 굳어지자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부흥을 위한 전 유럽적 통합을 시도한다.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 1967년 유럽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군사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샤를 드골의 주장이 수용되면서 유럽공동체가 출범한다. 패전국이던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며 서독의 국시는 반공주의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권과 대립하여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면서 냉전이 고착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14년간 총리로 재임했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에 의해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뤄내면서 물질적으로 풍부해졌다. 미국의 마셜 플랜으로 1951년에는 산업 생산과 수출량이 독일의 경제 상황은 갈수록 호전되었다. 반면 유럽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장기 독재와 싸우고 북아일랜드는 반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탄압에 저항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선 프라하의 봄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에서도 베트남 전쟁과 강압적인 교육 체제에 반발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잇따랐다. 또한 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유럽은 경기 침체기를 경험한다. 경공업은 개발도상국의 추격을 받아 더 이상 경쟁이 불가능했고 석탄 산업과 철강 산업도 몰락했다. 직물, 광업, 제철업, 조선업 부문의 일자리가 줄어든 1967년부터 실업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지역간의 불균형과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도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전후의 베이비 붐으로 인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독일의 대학생 수는 1950년 11만 명에서 1965년 25만 7천 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고등교육 분야의 양적인 팽창과 더불어 질적 수준이 재고되어야 했으나 교육 시설은 낙후되었고 주입식 교수법, 불리한 유급제도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전개 대연정 1954년부터 1965년까지 알제리, 쿠바, 콩고에서 전쟁이 연이어 발발하고 매스컴이 이들의 투쟁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 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 지역에서 네이팜탄 폭격을 행한 미국에 대한 매스컴 보도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안겼고 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회 경험이 없는 많은 학생들은 보다 이상적으로 현실을 비판했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기성주의 만연한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일상 생활에서는 물론 제도적 영역에서도 민주적 평등 관계를 요구했다.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전쟁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거나 패전 후 태어난 세대는 기성세대들이 죄의 역사를 망각하고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좇는 것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졌다. 비판적 전후 세대와 보수적 기성세대의 갈등은 1966년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독일 사회민주당 사이의 연정을 계기로 악화되었다. 프랑크푸르트 백화점 방화 사건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우익적인 분위기와 학생 대표에 대한 암살 기도로 독일학생운동은 쟁점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이 조직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이란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이란의 경제 발전을 위해 선진국들이 지원한 20억 달러를 착복한 팔레비 2세의 독일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가 서베를린에서 일어났다. 독일 정부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려놓은 상황에서 베를린 대학교에서 로망스어문학과 독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면서 이에 대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고 이때부터 학생 대표 루디 두치케가 등장하게 된다. 1967년 6월 서독 정부는 경기 침체에 대해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경제안정법》을 제정하려 하였다. 하지만 여당만으로는 의결정족수에 미치지 못해 야당을 끌어들여 대연정을 했고 야당의 모습에 실망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이에 저항했다. 1968년 2월 17일과 2월 18일에 서베를린에서 국제 베트남 회의가 개최되면서 이러한 저항은 보다 구체화되었다. 2월 18일에 루디 두치케의 선전 아래 2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호치민, 체 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 집결했다. 슈프링어의 《빌트 차이퉁》을 비롯한 우익 언론들의 악의적인 왜곡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1968년 2월 21일 쇠네베르크 구청 앞에서 친미관제 집회가 열려 많은 주민들이 친미 반공시위에 나섰다. 1968년 4월 2일 저널리스트였던 안드레아스 바더, 독문학도 군드룬 엔슬린, 영화배우 오르스트 죈라인과 대학생 토발드 프롤은 프랑크푸르트의 슈나이더 백화점과 카우프호프 백화점에 불을 질렀고 자본주의 체제 내의 선량한 소비자들이 광고나 선전에 오도된 맹목적 소비 사회의 피해자이며 그 책임이 소비 사히의 상징물인 백화점에 불을 지름으로써 소비 중심적 자본주의의 전복을 시도했다. 루디 두치케의 피습 1968년 4월 11일 뮌헨 출신의 도장공이던 요제프 바흐만은 학생운동을 이끌던 두치케를 저격하여 뺨과 머리, 가슴에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총상을 입히게 된다. 암살 기도 후 체포된 바흐만은 사건 전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우익 신문인 《독일 민족신문》, 《빌트 차이퉁》을 주로 읽어왔던 바흐만은 두치케를 제거해야 할 공공의 적으로 확신했고 우익 언론이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독일의 학생운동이 시작되었다. 두치케가 피습을 당한 다음 날인 4월 12일 학생 시위대는 서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뮌헨, 에센, 하노버, 에스링엔의 슈프링어 사무실을 공격하여 슈프링어의 신문 공급을 차단했다. 서베를린에서는 철조망과 경찰 차단선으로 둘러싸인 슈프링어 본사의 빌딩을 향해 행진했고 경찰이 물대포를 발사하자 50여 명의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슈프링어 본사로 진입했다. 부활절 기간의 시위 중에 2명이 살해되었으며 4백 명이 부상당했고 1천 명이 체포되었다. 1968년 5월에는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사건에 대해 국가가 비상대권을 가진다는 《긴급조치법》이 사회민주당의 협조 아래 제정되면서 이를 확인한 6만여 명의 학생들과 진보 세력이 이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했다. 긴급조치법 독일의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여했지만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의 제의를 노동계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 운동에 대대적으로 동참하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5월 초에 시작되어 5월 말 또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종료된 6월 10일에 완료된 운동이었던 반면 독일에서는 노동계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변화나 시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5월 이후에는 간헐적인 시위가 잇달았다. 11월 4일에는 서베를린의 테겔 거리에서 슈프링어 출판사에 대한 시위가, 12월 3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는 프랑크푸르트 대학 학생들의 강의 거부 사태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긴급조치법에 반대하기 위해 모였던 대학생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이상적인 대학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제안했다. 이들은 강의 거부, 수업 방해, 회의 방해, 시위 등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아헨 공과대학교, 보훔 루르 대학교, 본 대학교, 도르트문트 대학교, 에센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등 거의 모든 대학교들도 행동을 통일했다. 대학생들은 기초 학문에 대한 지원 확대, 교수의 동등한 지위 보장, 권위적인 교수법의 철폐, 새로운 해방 이론 연구의 확대, 실습 과목의 폐지 등을 요구했다. 지하 조직화와 적군파의 출현 하지만 결국 5월 30일 긴급조치법이 발효되면서 정부가 조직적인 시위를 금지하자 극좌 계열은 점차 지하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서독 정부가 1968년 9월 22일 독일 공산당의 창당을 허락하였으나 학생 운동 참가자들이 함께 살던 코뮌을 수색하는 등 재야 세력과 극좌파의 움직임에 대해서 감시했다. 한편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을 방화하여 3년의 징역형에 처해진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가 1970년 출옥하여 무기, 자동차, 집, 자금을 조달하여 또 다른 폭력 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바더-마인호프를 결성한다. 안드레아스 바더는 다시 체포되어 모아비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황달로 인해 테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던 중 울리케 마인호프는 《콘크레트》(konkret)라는 좌파 잡지의 편집장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해 안드레아스 바더와의 공동 저술을 위해 사회문제연구소로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틈을 타 안드레아스 바더를 탈옥시켰다. 학생이나 재야의 운동에서는 한계가 있으며 투장투쟁만이 사회 전복의 꿈을 실현해줄 것이라는 취지의 선언서를 작성함으로써 독일 적군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다. 1972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로 서독 내의 미국 군사시설을,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슈프링어 출판사를 공격했고 1975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독일 대사관을 점거했다 1977년 가을에는 나치 친위대 출신의 전국경영인협회 회장이던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했으며 법원이나 법조인에게도 테러를 가하며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폭력 투쟁을 감행했던 것이다. 한편 적군파가 활발히 활동하던 1975년 독일 정부가 학생운동 전력자를 공직 채용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6월에 반테러법을 연방 의회가 제정함으로써 극단주의자들의 행동 반경은 더욱 좁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70년대 말들어 독일학생운동에 참가했던 거의 대부분들이 이탈하고 소수만이 남은 조직으로 전락한 적군파는, 오른쪽과 같은 결론을 내리며 1998년 4월 21일 자진 해산했다. 영향 좌파 정당의 집권과 녹색당의 탄생 독일은 냉전체제 아래에서 반공주의를 악용하여 비판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고 독일 사회는 공산주의 이념이나 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좌파 계열의 사민당은 1959년 바트고메스베르크 전당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버리고 노동자의 정당에서 국민의 정당이 되기로 의견을 모으면서 보수화되었고 이런 사민당은 1966년 보수 정당과 연정을 구성하게 된다.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민련과 긴급조치법을 제정하고 1969년 자민당과 연정을 만들어 집권 정당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한 뒤 구속된 요슈카 피셔, 환경부 장관을 지냈던 위르겐 트리틴, 보건부 장관을 지낸 안드레아 피셔와 같은 독일학생운동 세대가 주축이 되어 1980년 독일 녹색당을 창당했고 보수 성향의 자연보호주의자들에서 반자본주의적 급진혁명세력으로 이뤄진 다양한 이념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녹색당을 구성했던 많은 인물들이 정계로 진출하여 제도권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나치 청산 사민당의 연정으로 국가 비상사태에 연방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긴급조치법이 통과되자 이를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반대 세력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 좌파는 주요 인사의 나치 독일 시절 전력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60년 5월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 기관 모사드에게 납치되어 1962년 6월 1일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사건을 보고 독일인들은 이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치욕의 역사와 윗세대가 저지른 만행을 반성했다. 잡지 《슈테른》은 1968년 2월 25일 나치 독일의 포로수용소 건설 계획에 서명했던 설계자가 기민련의 당대표인 하인리히 뤼브케라고 고발했고 학생들은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텔레비전에 출연했지만 결국 자신이 서명자임을 인정하고 1969년 6월 30일 당대표직에서 사임했다. 재야 및 대학생들은 나치 청산을 위한 투쟁을 계속해서 전개했고, 1969년 집권에 성공한 사민당은 독일학생운동이 요구했던 나치 청산에 들어갔다. 아데나워 당시부터 나치 협력자들 중 남아 있던 인물들을 강제 퇴직시키고 나치 전범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독일학생운동이 제기했던 나치 청산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교육 개혁 국민학교를 뜻했던 폴크스슐레를 초등학교라는 뜻의 그룬트슐레로 바뀌었고 직업학교인 하우프트슐레나 통합학교인 게잠트슐레가 만들어지는 등 교육 개혁이 시행되었다. 9학년이나 10학년제가 도입되었고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금지했으며 강의 형식에도 그룹별 강의, 대화 동아리, 조별 공동학습 등이 등장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에는 인문계 학교인 김나지움과 하우프트슐레, 실업학교인 레알슐레를 묶은 대안적인 통합학교도 설립했다. 기존의 교육 제도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 학생들의 진로를 확정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들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한 것이다.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이 제안한 일반 또는 공과, 사범대학의 구분이 없는 통합대학이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던 헤센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나타났다. 통합대학은 대학 입학시험인 아비투어의 응시권이 없는 실업계 고등학생들에게도 입학을 허용했고 적절한 학습 과정과 교수법을 개발했으며 학자와 교수자, 연구자가 유기적으로 교육과 연구를 수행한다는 기본 목표를 설정했다. 또한 비판대학을 베를린 자유 대학교 안에 설립하여 기존 대학이 추구해온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학문 기초가 해체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성권 신장 독일의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명시된 것과는 다르게 서독 노동자의 30%를 차지하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기술직이나 고위직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훈련 및 실무 교육에서 배제되어 있던 여성들은 보수적이던 사회적 인식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성들이 기피하는 직종에서 일을 했으나 남성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고 《민법》은 주부가 직업을 갖기 위해선 남편의 동의를 규정하는 등 남녀 불평등이 존재했다. 이는 1977년 민법 1356조가 부부가 각자 가계를 꾸릴 수 있고 주부도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개정된 이후로 고쳐졌다. 독일학생운동은 주부와 직장인에서 벗어난 새로운 여성상을 추구하는 여성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권 신장 독일의 노동자들은 1956년부터 주 5일 근무를 비롯해 40시간 근무라는 근로시간의 단축을 위해 독일노동조합연맹의 <토요일에 아빠는 내 것>이라는 캠페인으로 투쟁했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학생운동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독일의 노동자들은 주 6일 동안 근무하고 주당 48.8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 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독일학생운동 이후 사민당 정부에 의해 근로시간이 꾸준히 감소했고 열악한 노동조건은 개선되어갔다. 또한 노동조합 평의회와 근로자 문제를 위한 노동단체의 조직을 허용했고 1969년 9월 파업부터 이 조직들이 노동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정부는 1972년 공동결정법을 노동자들의 반대로 1976년 3월 18일 새로운 《공동결정법》으로 보완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을 확대해가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1960년대 반문화 프랑스의 68운동 독일의 항의행동 독일의 학생 운동 68혁명 독일의 극좌 정치
https://en.wikipedia.org/wiki/West%20German%20student%20movement
West German student movement
The West German student movement, sometimes called the 1968 movement in West Germany, was a social movement that consisted of mass student protests in West Germany in 1968. Participants in the movement later came to be known as 68ers. The movement was characterized by the protesting students' rejection of traditionalism and of German political authority which included many former Nazi officials. Student unrest had started in 1967 when student Benno Ohnesorg was shot by a policeman during a protest against the visit of Mohammad Reza Pahlavi, the Shah of Iran. The movement is considered to have formally started after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student activist leader Rudi Dutschke, which sparked various protests across West Germany and gave rise to the public opposition. The movement would create lasting changes in German culture. Background Political atmosphere The Spiegel affair of 1962, in which journalists were arrested and detained for reporting on the strength of the West German military, worried some in West Germany that there was a return of authoritarian government. In the fallout of the affair, the suddenly-unpopular Christian Democratic Union formed a political coalition with the Social Democratic Party (SPD), known as the grand coalition. Critics were disappointed with the parliament's appointment of Kurt Georg Kiesinger as chancellor of West Germany, as he had participated in the Nazi Party during the Nazi regime. New political movements Social movements grew as younger people became disillusioned with the political establishment, worrying it was reminiscent of Germany's Nazi past. West Berlin became a center for these movements since many left leaning people would take residence in West Berlin to avoid the military draft that was in effect in the rest of West Germany. These social movements were also becoming popular among the youth of West Germany. The movements included the opposition to the United States' involvement in the Vietnam War, opposition to consumer culture, liberation for the third world, and criticisms of middle class moral values. Some were embracing communal lifestyles and sexual liberation. All these various social movements and the non-parliamentary organizations that hoped to spearhead them, grouped together as the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The more leftist wing of the SDP in the 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 (Socialist German Students Union - SDS) split from the party line and joined the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In 1965, Rudi Dutschke was elected to the political council of the West Berlin SDS. With Michael Vester, SDS vice-president and international secretary, Dutschke imported ideas from the American SDS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and New Left, such as direct action and civil disobedience. Drawing inspiration from Herbert Marcuse, Dutschke sought to build a coalition of marginalized identity groups to be a vanguard for socialism in Europe. Finding that Germany had no population group with revolutionary potential comparable to America's Black Power movement, Dutschke sought to mold Germany's student movements into seeing themselves as an oppressed minority. His plan for accomplishing this was to provoke violent confrontations with government authorities. He wrote in 1965, "Authorized demonstrations must be guided into illegality. Confrontation with state power is essential and must be sought out." Protests 1966–1968 The West German parliament had proposed to expand government powers in the Emergency Laws, as well as to reform universities. On 22 June 1966, 3,000 students from the Free University of Berlin staged a sit-in to demand involvement in the reform process of universities, included democratic management of colleges. Echoing Marcuse, Rudi Dutschke considered the politically complacent working classes to be a lost cause when it came to revolutionary agitation. Instead, he hoped to build a coalition between Western intelligentsia and third world communist revolutionaries. To that end, Dutschke organized the event "Vietnam – Analysis of an Example" () at the University of Frankfurt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with Marcuse as the headline speaker. SDS president Walmot Falkenburg privately requested that Marcuse emphasize solidarity with the Vietnamese on the basis of traditional Marxist concerns with labor and material interests, which would have been a rebuke of Dutschke and his associates in the West Berlin SDS chapter. Unsurprisingly, Marcuse did the opposite in a speech emphasizing "solidarity of sentiment". The event was followed by street demonstrations which led to the arrests of Dutschke, his wife, and 84 others. In June 1967, during a state visit by the Shah of Iran Mohammad Reza Pahlavi, the SDS organized a protest of his visit, criticizing him as a brutal dictator that should not have been welcome in West Germany. The protest was repressed by police and Iranian agents who beat protesters and resulted in the fatal shooting of Benno Ohnesorg. The police officer involved, Karl-Heinz Kurras, was acquitted on the grounds of self-defense. Protests against police brutality erupted across the country and led the mayor of Berlin and the police chief to resign. In the fall of 1967 students established "Critical Universities"; students occupied classrooms and gave critiques of university structure as well as educating other students in New Left thought. It was revealed in 2009 that Kurras had been a Stasi informant. Prosecutors revisiting the evidence concluded Ohnesorg had been murdered as a premeditated act, but not enough evidence survived to evaluate whether Kurras was acting under official orders. On the occasion of Ohnesorg's funeral, a conference was held which is most remembered for a debate between Rudi Dutschke and Jürgen Habermas. Dutschke argued that the time was ripe for students to engage in direct action. Habermas, although generally sympathetic to the student movements, criticized Dutschke's plan as action for its own sake without regard for consequences. When Dutschke would not clarify his stance on employing violence, Habermas accused him of Linksfaschismus ("Left fascism"). Later, during the German Autumn of 1977, Habermas said the charge of fascism had been an overreaction. At a conference in September 1967, Dutschke and Hans-Jürgen Krahl called for the creation of "action centers" at universities to organize "urban guerrillas". The International Vietnam Congress () was an event that took place in West Berlin on 17 and 18 February 1968 to oppose the Vietnam War. It was organized by Rudi Dutschke and Karl Dietrich Wolff, with an estimated 3,000-4,000 people attending the conference and a total of 12,000–15,000 people involved in the following demonstration. At the congress, Dutschke and his Chilean friend Gaston Salvatore presented their translation of Che Guevara's letter to the Tricontinental Conference, which called for bloody guerrilla warfare against the United States. Holger Meins presented an instructional film on making Molotov cocktails. Attempted assassination of Rudi Dutschke On 11 April 1968, Rudi Dutschke was shot by the far-right Josef Bachmann. Dutschke was injured but survived the shooting.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Dutschke would be later regarded as the formal beginning of the West German student movement. Dutschke had previously been labeled an "enemy of the people" in the Axel Springer-owned tabloid newspaper Bild-Zeitung. Student activists believed the shooting was inspired by critics of the student movement such as Springer's tabloids. Demonstrations and clashes later occurred outside Springer offices in reaction to the shooting. In the aftermath of the shooting, student leaders became more willing to embrace violent tactics in their movements. With Dutschke incapacitated, many in the SDS looked to Hans-Jürgen Krahl for leadership. Krahl however favored theory to direct action. Emergency Acts protests In May the West German government considered using the Emergency Acts in response, allowing the Cabinet to suspend parliamentary rule and enact laws in times of crisis. On May 11 protesters gathered in the West German capital Bonn to demand that the laws not be used. The government agreed with protesting labor unions to only use limited concessions, passing the laws on May 30. This agreement dealt a blow to the growing student movement and signaled its demise. The SDS formally dissolved on March 21, 1970. Aftermath Terrorism On 22 May 1967, a fire at the L'Innovation department store in Brussels killed hundreds of people. Kommune 1 issued a leaflet celebrating the fire and calling for more such occurrences to bring parity between Western countries and Vietnam. The leaflet was widely condemened and caused a split between Kommune 1 and the SDS. On 2 April 1968, members of the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Andreas Baader and Gudrun Ensslin committed arson at a department store in Frankfurt to protest the Vietnam war. Although convicted, they were released while pursuing an appeal and went underground when it was denied. They were joined by Ulrike Meinhof in forming the Red Army Faction, which continued to engage in arson and other terrorist acts for more than a decade. Dutschke, Enzenberger, and Nirumand wrote an apologia for terrorism based on Walter Benjamin's Critique of Violence and Herbert Marcuse's Repressive Tolerance. Political consciousness Despite the failure of the student movement a change in political consciousness lasted throughout the country. Criticisms of West German officials' ties to the old Nazi Party brought the concept of Vergangenheitsbewältigung (coming to terms with the past) to the forefront of political discussion. Other various left-wing causes also gained popularity and helped solidify a protest culture in Germany. Those who were involved in the protests of 1968 in West Germany would come to be known as the "1968 generation". Some would develop unique political paths, with some finding roles in government, while others embraced terrorist activities of the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See also Anarchism Daniel Cohn-Bendit Elmar Altvater Ernest Mandel Joschka Fischer Marxist Group (Germany) Peter-Ernst Eiffe Peter Schneider (writer) Spaßguerilla References Sources Peter Dohms, Johann Paul. Die Studentenbewegung von 1968 in Nordrhein-Westfalen. Siegburg: Rheinlandia, 2008 Martin Klimke, Joachim Scharloth (eds.). 2007. 1968. Ein Handbuch zur Kultur- und Mediengeschichte der Studentenbewegung. Stuttgart: Metzler. Tony Judt. 2005. 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 New York: Penguin Group External links Sources on 1968 in West Germany, from 1968 in Europe – Online Teaching and Research Guide. Dossier: 1968 – A Critical Turning-Point by Goethe-Institut (Archive.org's WayBack Machine) Left-wing politics Protests in Germany New Left Student protests in Germany Far-left politics in Germany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Rebellions in Germany 1968 protests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D%99%94%EC%9D%B8%EB%AF%BC%EA%B3%B5%ED%99%94%EA%B5%AD%20%EA%B0%9C%EC%9A%94
중화인민공화국 개요
중화인민공화국 소개를 위해 정리한 개요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국가이자 세계에서 네 번째로 넓은 국가이다. 13억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로 중국공산당 일당제 통치가 이어져 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 문제로 분쟁을 겪고 있다. 국공 내전 당시 패배한 중국 국민당은 타이완 섬으로 도피해 중화민국에서 집권했다. '중국 대륙'이라는 용어는 보통 중화인민공화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영토를 의미하며, 여기에서 홍콩과 마카오 두 특별행정구를 제외하기도 한다. 많은 인구, 빠른 경제 성장, 많은 연구개발 예산 덕분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잠재적 초강대국'으로 여겨지고 있다. 세계 제2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자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의 회원국이다. 1978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빈곤율을 1981년의 53%에서 2001년의 8%로 낮췄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현재 고령화, 지역 격차, 환경 문제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철강의 3분의 1과 콘크리트의 반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전 산업 부문을 통틀어,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자 세계 제2의 수입국이다. 기본 정보 통상 자칭 지명: 공식 국호: ISO 국가 표준: CN, CHN, 156 ISO 지역 표준: ISO 3166-2:CN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cn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리 위치: 북반구, 동반구 유라시아 아시아 동아시아 시간대: 중국 표준시(UTC+08) 중화인민공화국의 극점: 최고점: 에베레스트산 8,848m – 세계 최고점 최저점: 투루판 분지 −154m 지상 국경: 22,117km 4,677km 3,645km (분쟁 지역 제외) 3,380km 2,185km 1,533km 1,416km 1,281km 1,236km 858km 523km 470km 423km 414km 76km 해안선: 14,500km 중화인민공화국의 인구: 1,321,851,888명 - 세계 1위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 9,640,821km² - 세계 4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형 중국의 호수 목록 국가중점풍경명승구 중화인민공화국의 세계유산 싼장빙류 주자이거우 풍경구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정부 형태: 일당제 사회주의 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부 집권 정당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 행정부 주석: 시진핑 총리: 리커창 입법부 사법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중화인민공화국의 재외공관 목록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외국공관 목록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입한 국제 기구 중화인민공화국은 다음 국제 기구들의 회원국이다: 국제 개발 협회 국제결제은행 국제 금융 공사 국제 노동 기구 국제 농업 개발 기금 국제 민간 항공 기구 국제부흥개발은행 국제 상업 회의소 국제 수로 기구 국제 올림픽 위원회 국제 원자력 기구 국제 의회 연맹 국제이주기구 (참관국)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 국제전기통신연합 국제 통화 기금 국제 표준화 기구 국제해사기구 국제형사경찰기구 남아시아 지역 협력 연합 (참관국) 다자간 투자 보증 기구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 라틴 아메리카 통합 연합 (참관국) 만국 우편 연합 미주개발은행 미주 기구 (참관국) 북극 이사회 (참관국) 비동맹 운동 (참관국) 상설중재재판소 상하이 협력 기구 세계 관광 기구 세계 관세 기구 세계 기상 기구 세계노동조합연맹 세계무역기구 세계보건기구 식량 농업 기구 아시아 개발 은행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아프리카 개발 은행 유네스코 유엔 유엔 난민 기구 유엔 무역 개발 회의 유엔 산업 개발 기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 유엔 수단 임무단 중미 통합 체제 (참관국) G20 77 그룹 태평양 제도 포럼 (참관국) 화학 무기 금지 기구 중화인민공화국의 법률과 제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중화인민공화국의 인권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 통수권자: 시진핑 중국 인민해방군 육군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중국 인민해방군 로켓군 중국 인민해방군 전략지원부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휴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세계유산 중화인민공화국의 예술 중국 문학 중국 음악 중국 연극 중국의 영화 중국 요리 중국어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종교 중국의 불교 중국의 기독교 중화인민공화국의 스포츠 아시안 게임 중국 선수단 올림픽 중국 선수단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와 산업 통화: 런민비 ISO 4217: CNY 중국인민은행 상하이 증권거래소 선전 증권거래소 중국의 관광 중국의 교통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속도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항 목록 중화인민공화국의 철도 중화인민공화국의 교육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주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 주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 주 부산 중화인민공화국 총영사관 주 광주 중화인민공화국 영사사무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공식 홈페이지 그 외 중국망 CIA의 세계정보 (중국편) 중국 중국에 관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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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ine of China
The following outline is provided as an overview of and topical guide to China: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s the most extensive country in East Asia and the third most extensive country in the world. With a population of over 1,400,000,000, it is the most populous country in the worl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CCP) has led the PRC under a one-party system since the state's establishment in 1949. The PRC is involved in a dispute over the political status of Taiwan. The CCP's rival during the Chinese Civil War, the Kuomintang (KMT), fled to Taiwan and surrounding islands after its defeat in 1949, claiming legitimacy over China, Mongolia, and Tuva while it was the ruling power of the Republic of China (ROC). The term "Mainland China" is often used to denote the areas under PRC rule, but sometimes excludes its two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s: Hong Kong and Macau. Because of its vast population, rapidly growing economy, and large research and development investments, China is considered an "emerging superpower". It has the world's second largest economy (largest in terms of purchasing power parity.) China is also a permanent member of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and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Since 1978, China's market-based economic reforms have brought the poverty rate down from 53% in 1981 to 8% by 2001. However, China is now faced with a number of other socioeconomic problems, including an aging population, an increasing rural-urban income gap, and rapid environmental degradation. China plays a major role in international trade. The country is the world's largest consumer of steel and concrete, using, respectively, a third and over a half of the world's supply of each. Counting all products, China is the largest exporter and the second largest importer in the world. General reference Pronunciation: Common English country name: China Official English country name: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Common endonym: 中国 (Zhōngguó) (The Middle Kingdom or Central Realm) Official endonym: 中华人民共和国 (Zhōnghuá Rénmín Gònghéguó) Adjectivals: China, Chinese Demonym: Chinese Etymology: Name of China International ranking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SO country codes: CN, CHN, 156 ISO region codes: See ISO 3166-2:CN Internet country code top-level domain: .cn Geography of China China is a megadiverse country Location: Northern Hemisphere and Eastern Hemisphere Eurasia Asia East Asia Time zone: China Standard Time (UTC+08) Extreme points of China High: Mount Everest – highest point on Earth Low: Turpan Depression Land boundaries: 22,117 km 4,677 km 3,645 km (excluding the territorial border disputes; McMahon Line) 3,380 km 2,185 km 1,533 km 1,416 km 1,281 km 1,236 km 858 km 523 km 470 km 423 km 414 km 76 km Coastline: 14,500 km Population of China: 1,321,851,888(2007) - 1st most populous country Area of China: - 3rd largest country Atlas of China Environment of China Climate of China Climate change in China Environmental issues in China Pollution in China Air pollution in China Water pollution in China Ecoregions in China Renewable energy in China Geology of China Earthquakes in China Protected areas of China Biosphere reserves in China National parks of China Wildlife of China Flora of China Fauna of China Birds of China Mammals of China Natural geographic features of China Glaciers of China Islands of China Lakes of China Mountains of China Rivers of China Volcanoes in China Waterfalls of China Regions of China Administrative divisions of China Provinces of China Cities of China Direct-administered municipalities of China Districts of China Counties of China Villages of China (list) Demography of China Government and politics of China Form of government: one-party socialist republic. Capital of China: Beijing Elections in China Political parties in China Taxation in China United front United Front Ruling party Chinese Communist Party General Secretary (paramount leader): Xi Jinping Politburo (Standing Committee) Secretariat First Secretary: Cai Qi Branches of government Ultimate authority and Legislative branch National People's Congress (unicameral) Standing Committee Chairman: Zhao Leji Head of state (nominal): President, Xi Jinping Administrative branch Head of government: Premier, Li Qiang State Council, Li's Government Judicial branch Supreme People's Court President and Chief Justice: Zhang Jun Procuratorial branch Supreme People's Procuratorate Prosecutor-General: Ying Yong Supervisory branch Central Commission for Discipline Inspection (National Supervisory Commission) Secretary: Li Xi Director: Liu Jinguo Military branch Central Military Commission Chairman: Xi Jinping Foreign relations of China Diplomatic missions in China Diplomatic missions of China International organization membership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s a member of: African Development Bank Group (AfDB) (nonregional member) African Union/United Nations Hybrid operation in Darfur (UNAMID) Arctic Council (observer) Asian Development Bank (ADB)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Asia-Pacific Telecommunity (APT)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 (dialogue partner)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Regional Forum (ARF)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BIS) Caribbean Development Bank (CDB) Central American Integration System (SICA) (observer) East Asia Summit (EAS)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FAO) Group of 24 (G24) (observer) Group of 77 (G77) Group of Twenty Finance Ministers and Central Bank Governors (G20) 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 (IADB)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International Criminal Police Organization (Interpol) International Development Association (IDA)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 (IFRCS) 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 (IFC) International Fund for Agricultural Development (IFAD) 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IH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 (IMO) International Mobile Satellite Organization (IMSO)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ISO) International Red Cross and Red Crescent Movement (ICRM)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ITU)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Satellite Organization (ITSO) 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 (IVI) Inter-Parliamentary Union (IPU) Latin American Integration Association (LAIA) (observer) Multilateral Investment Guarantee Agency (MIGA) Nonaligned Movement (NAM) (observer) Nuclear Suppliers Group (NSG) 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OPCW)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 (observer) Pacific Islands Forum (PIF) (partner)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PCA) Shanghai Cooperation Organisation (SCO) South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SAARC) (observer) United Nations (UN)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UNESCO)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HCR) United Nations Industrial Development Organization (UNIDO) United Nations Institute for Training and Research (UNITAR) United Nations Integrated Mission in Timor-Leste (UNMIT) United Nations Interim Force in Lebanon (UNIFIL) United Nations Mission for the Referendum in Western Sahara (MINURSO) United Nations Mission in Liberia (UNMIL) United Nations Mission in the Sudan (UNMIS) United Nations Operation in Cote d'Ivoire (UNOCI) United Nations Organization Mission in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MONUC)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permanent member, since 1971) United Nations Truce Supervision Organization (UNTSO) Universal Postal Union (UPU) World Customs Organization (WCO) World Federation of Trade Unions (WFTU)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WIPO)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WMO) World Tourism Organization (UNWTO) World Trade Organization (WTO) Zangger Committee (ZC) Law and order in China Capital punishment in China Constitut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Crime in China Human rights in China Freedom of religion in China Percecution of Christians in China Law enforcement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Military of China Command Commander-in-chief: Chairman of the Central Military Commission Central Military Commission People's Liberation Army Ground Force Ranks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 Ground Force Navy Ranks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 Navy Air Force Ranks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 Air Force Rocket Force Strategic Support Force People's Armed Police Militia Military history of China (pre-1911) Local government in China Local government in China History of China Economic history of China Military history of China (pre-1911) List of earthquakes in China Culture of China Architecture of China Art in China Cinema of China Chinese clothing Cuisine of China Ethnic minorities in China Festivals in China Languages of China Media in China National symbols of China National Emblem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National anthem of China People of China Prostitution in China Public holidays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Religion in China Buddhism in China Chinese folk religion Christianity in China Hinduism in China Islam in China Judaism in China Taoism in China List of World Heritage Sites in China Literature of China Music of China Television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eatre in China Sports in China Football in China China at the Olympics China at the Asian Games Economy and infrastructure of China Economic rank, by nominal GDP (2011): 2nd (second) Agriculture in China Banking in China People's Bank of China Communications in China Internet in China Asia-Pacific Network Information Centre Currency of China: Renminbi Yuan ISO 4217: CNY Economic history of China Energy in China Energy policy of China Oil industry in China Health care in China Abortion in China Chinese stock exchanges Tourism in China Transport in China Airports in China Rail transport in China Roads in China Water supply and sanitation in China Education in China Higher education in China List of universities in China See also International rankings of China List of China-related topics Member state of the Group of Twenty Finance Ministers and Central Bank Governors Member state of the United Nations Outline of Asia Outline of geography Outline of Hong Kong Outline of Macau Outline of Taiwan Outline of Tibet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China.org.cn China news, weather, business, travel, language courses, archives U.S. Department of State, Background Note on China Interactive China map with province and city guides. China Digital Times Online China news portal, run by the Graduate School of Journalism of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China Worker China Map China Flights NY Inquirer: China's 21st Century The Chinese Superpower-Historical Background, Dr Rivka Shpak-Lissak China Map Quest The 200 best books on China China Outl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