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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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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사월
32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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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43
연서면
연서면(燕西面)은 세종특별자치시의 면이다. 인구는 약 7천500 명이며, 이 중 3분의 1 정도가 면의 남동부에 위치한 봉암리에 거주한다. 교육. 연서면에는 1개의 중학교, 4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교통. 연서면에 인접한 조치원읍에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며, 연서면 방향 버스 노선은 7권역으로 거의 조치원역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제법 인구가 밀집한 봉암리에는 시외버스가 정차한다.
32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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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항공 472편
32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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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51
소정면
소정면(小井面)은 세종특별자치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면이다. 면사무소는 소정리 48번지이다. 소정면은 행정구역과는 달리 천안시 생활권에 속하고, 과거 연기군 시절에는 연기군의 다른 지역(041-8**-****)과 달리 전화번호도 천안·아산과 같은 041-5**-****를 사용했으며, 학군도 천안시에 속한다. 산업. 2021년 12월 예정 교육. 소정면에는 1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교통. 경부선 철도가 면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소정리역이 면 중심부인 소정리에 있으나 여객 취급은 하지 않는다. 세종 시내버스는 고등리까지 운행하는 지선 노선 830번, 831번, 850번 3개 밖에 없었고, 운행 횟수가 적어 세종특별자치시로 접근성이 떨어졌으나, 2016년 1월 11일부로 991번 버스가 소정면 대곡리까지 연장운행하여 행정중심복합도시까지의 대폭 향상된 접근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천안 시내버스는 수시로 운행하여 천안시 및 공주시 정안면으로 이동하기 용이하다.
320053
619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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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동오)
주연(朱然, 182년 ~ 249년 음력 3월)은 중국 후한 말기 ~ 동오의 군인으로, 자는 의봉(義封)이며 단양군 고장현(故鄣縣) 사람이다. 원래의 성은 시(施)씨였지만, 13세 때 손책의 중개로 어머니의 친동생인 주치의 양자가 되어 성을 주씨로 바꾼다. 주적(朱績)의 아버지이다. 인물. 손권(孫權)과는 함께 면학에 힘쓴 학우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신뢰는 돈독했다. 손책 사후 손권을 섬겨 19세 때에 여요현의 장이 되었다. 손권에게 재능을 높게 평가받아 머지 않아 산음현령, 임천태수가 되었고, 병사 2000명을 맡았다.그 무렵, 산적의 반란이 있었으나 1개월쯤 지나서 평정했다. 조조(曹操)가 유수구를 침공했을 때도 그곳의 방비를 맡았고 그 공으로 편장군으로 임명되었다. 219년 관우(關羽) 토벌전에서는 여몽(呂蒙)을 따라가 반장(潘璋)과 함께 관우를 생포하는 활약을 했고 그 공으로 소무장군으로 승진과 동시에 서안향후로 책봉된다. 여몽의 병세가 위독해질 때 여몽은 손권에게「주연은 대담함과 지조가 뛰어나다」 면서 주연을 자신의 후계자로 추천했다. 여몽이 죽고 난 뒤 손권은 주연에게 부절을 줘 강릉을 지키게했다. 222년 유비(劉備)가 침공해오자 육손(陸遜)과 함께 유비에게 대항했다. 주연은 별동대를 인솔해 유비의 퇴로를 차단시켜 유비를 격파하는데 성공, 그 공으로 정북장군으로 승진하고 영안후로 책봉된다. 같은 해, 위나라의 조비(曹丕)가 세 방면으로 침공해올 때 주연은 강릉을 수비하게 되어 조진(曹眞), 하후상(夏侯尙), 장합(張郃),과 대결했다. 원군으로 온 제갈근(諸葛瑾)이 하후상에게, 손성이 장합에게 격파당하고 강릉은 위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심지어 성 안에는 유행병이 퍼져 군사들 중에서 싸울 수 있는 병사는 겨우 5천 명뿐이었다. 그러나 주연은 군사들을 격려했고, 적군의 약점을 찾아 진영 두 곳을 공격해 물리쳤으며 틈을 타서 위군과 내통하려던 강릉현령 요태의 음모를 발각하고 그를 처단하였다. 적군의 포위는 반년동안 계속되었지만 위군은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군하고 말았다. 이 공방전으로 인해 주연의 이름은 위나라에 알려지게 되었고, 당양후로 책봉되었다. 241년 번성을 포위했지만, 형주자사 호질(胡質)의 원군이 오자 퇴각했다. 242년 조중(柤中) 정벌에 나섰는데 형주자사 호질과 위나라 장수 포충이 저항하였다. 포충이 요충지를 차단해 퇴로를 끊으려했고, 호질은 포충을 계속 지원했다. 그러나 주연은 정예병 800명으로 역습을 가했고 포충은 불리함을 알고 호질과 함께 물러났다. 246년 또 다시 조중을 침공에서는, 퇴로를 끊은 위나라 장수 이흥 등을 역습으로 물리쳤다. 이 공으로 좌대사마, 우군사로 승진하였다. 245년 육손이 사망하자 주연은 손권으로부터 대도독으로 임명되어 오의 군권을 맡았다. 그러나 조중 침공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249년,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손권은 눈물을 흘려 주연의 죽음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스스로 상복을 입고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주연은 신장이 작았지만,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태도가 분명했고 검소하였으며, 전장에서도 나라를 걱정했고, 엄격한 면과 상냥한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오의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의 묘사. 제 76회에 처음 등장하며, 이릉 전투에도 참전하여 손환(孫桓)과 함께 요격을 맡아 수로를 지켰다. 육손에게 져 달아나는 유비를 여러 장수들과 함께 추격하는 도중에, 성도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온 조운(趙雲)과 만나 싸우다 죽임을 당한다. 묘. 1984년 6월에 안휘성 마안산시 방적 공장 확장 공사 건설 예정지에서 주연의 무덤이 발견되어 명함 등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부장품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 삼국시대에서는 오나라 군사기지였던 우저(牛渚)라 불리던 곳이다. 이 무덤은 동오의 문화를 아는데 있어서 귀중한 발견물로 여겨지고있다. 1986년, 주연의 무덤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주연로」라고 하는 도로가 생기는 등 그 주변이 보호·정비되고 있다. 관련항목. 명함: 무덤의 부장품에 그의 명함이 있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명함으로 여겨진다. 가계. 관련 인물. 주치 시적
3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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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시내버스
320055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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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가설
《놀라운 가설》(The Astonishing Hypothesis)은 의식에 관한 프랜시스 크릭의 1994년 책이다. 이 책은 의식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지만, 크릭은 의식 연구를 넓은 사회적 맥락 위에 자리잡는다. 인간의 의식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므로 과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과 종교에 머물러 있던 문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과학자들이 탐구하려는 문제들은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크릭은 이전의 책 〈얼마나 미친 추구인가〉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거론했다. 이에 관한 크릭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는 과학 문제를 그르칠 수 있고, 과학이 하는 일의 일부는 종교적 전통 안에 존재하는 잘못과 맞서는 것이다. 예컨대, 자연도태에 의한 생물의 진화라는 관념은 신의 개입에 의한 생물의 창조라는 관점과 충돌한다. 〈놀라운 가설〉의 부제는 〈영혼의 과학적 탐구〉이다.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은 뇌가 마음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하는 유물론적 이해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크릭은 주장한다. 자연도태 같은 과학적 개념에 대한 반대나 영혼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널리 알려짐에 따라 그런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확산되고 있다. 프랜시스 크릭은 유전자(DNA)의 분자 구조를 공동발견한 한 사람이었다. 크릭은 분자생물학의 발전을 촉진하도록 도와준 중요한 이론가였다. 크릭은 만년에 신경생물학과 뇌 연구의 이론가가 되었다. 책에서 크릭은 폭넓은 공개 토론과 반대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많은 쟁점을 제시한다. 과학연구 관리자들은 1990년대를 '뇌의 90년대'로 선포했다. 비교적 소규모의 뇌 과학계 안에서 연구자들은 뇌 기능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크릭은 이것이 인간의 영혼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릭의 책에 대한 서평(1994년 2월 4일자 〈사이언스〉지)에서, J. J. 홉필드는 "과학자들은 우리가 인간의 본질과 거의 다름없다고 여기는 의식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그 야심찬 목표를 위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크릭의 놀라운 가설은 사람의 정신활동은 신경세포, 신경아교질세포, 그리고 이것들을 구성하고 영향을 미치는 원자와 이온과 분자의 행태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20세기의 과학적 뇌 연구는 의식과 자유의지와 영혼이 과학적 탐구 대상임을 인정하게 만든다고 크릭은 말한다. "그대, 그대의 기쁨과 그대의 슬픔, 그대의 기억과 그대의 야망, 그대의 주체성과 자유의지는 사실 신경세포와 그 관련 분자들의 거대한 집합체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크릭의 메시지는 생리학적 접근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320057
75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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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왕 GX
유희왕 GX(듀얼몬스터즈 GX, 통칭 ‘유희왕 제넥스’)는 일본 내에 카드 게임 붐을 일으키며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온 유희왕 시리즈로, 224화로 종영된 <듀얼몬스터즈>의 뒤를 이어 새로 제작되었다(GX는 Generation neXt의 약자). 이번 시리즈는 듀얼리스트 양성 학원을 무대로 한 이번 시리즈는 학원의 열등생 반이라 할 수 있는 오시리스 레드에 들어간 주인공 유우키 쥬다이와 학원 내 친구들의 우정 및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이번 시리즈는 역시나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며 무리 없이 방영 3년 6개월 만에 종영하였으며, 후속작으로 유희왕 5D's(일본 기준, 총 154화 방영)가 방영되었다. 일본에서 2004년 10월 6일부터 2008년 3월 26일까지 TV 도쿄를 통해 총 180화가 방영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케이블 TV의 만화 전문 채널인 챔프 TV와 스카이라이프의 만화 전문 채널인 애니원을 통해 2006년 5월 1일부터 방영되기 시작했으며, 또한 지속적으로 방영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참고로 이 작품의 작화 제작에는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인 동우 애니메이션이 참여하였다. 2005년 5월 10일부터 방영된다. 주요 내용. 듀얼을 통해 듀얼 아카데미아에 입학하게 된 쥬다이와 학생 대표 그리고 교수진 대표를 불러 모은 사메지마 교장이 7조각의 열쇠를 각자에게 1벌씩 주고 세븐 스타즈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이후, 실제로 세븐 스타즈가 나타나 7개 중 6개의 열쇠를 획득하게 되어 잠들어 있던 삼환마가 깨어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그것을 막기 위해 쥬다이 일행은 세븐 스타즈와의 결전을 시작한다. 삼환마는 듀얼 아카데미아의 전 이사장 카게마루에게 빼앗겨 쥬다이가 그와 듀얼을 하게 되고, 다이도쿠지 선생이 남겼던 현자의 돌을 사용한 쥬다이가 그를 이기게 되고, 삼환마는 사메지마 교장이 다시 봉인하게 된다. 듀얼 아카데미아의 졸업생 마루후지 료를 굴복시킨 에드 피닉스와 그의 친구인 사이오가 듀얼 아카데미아에 입학한 후 사이오를 중심으로 빛의 결사가 결성이 되어 세력을 넓히게 된다. 이후 사메지마 교장이 진행한 계획인 제넥스의 향배를 두고 빛의 결사가 분투하는 가운데 빛의 결사가 세계 파괴를 목표로 함을 알게 되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주다이 일행의 운명적인 듀얼이 시작되지만 사이오는 쥬다이에게 지면서 빛의 결사는 해산되었다. 빛의 결사와의 대결 후, 코브라 교수가 듀얼 아카데미아에 부임하게 되어 아카데미아는 듀얼 배틀 필드가 되고, 이후 요한과 주다이 일행은 코브라 교수의 배후에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그 존재인 [유벨]이 요한의 몸을 빼앗고 요한을 찾으러 아카데미아에서 나온 쥬다이와 이미 요한과 몸과 일체화된 [유벨]의 듀얼 아카데미아의 운명을 건 최후 듀얼이 시작된다. 듀얼 중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된 쥬다이는 [유벨]이 12차원을 융합하기 위해 발동한 [초융합]을 자신과 [유벨]의 영혼을 융합하게 한다. [유벨]과 영혼 융합을 한 쥬다이가 듀얼 아카데미아에 복귀한 후, 갑자기 어둠에 봉인되는 카드들이 속출하고 봉인되는 카드들을 소각하기 위해 온 힘을 모으던 일행 앞에 돌연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트루맨이라 칭하는 자객이 쥬다이 일행에게 도전한다. 이후 세계 여러 도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게 됨을 알게 된다. 결국 그 배후에 있는 다크니스를 없애기 위해 쥬다이가 직접 나서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새로운 히어로 [네오스 와이즈맨]과 [엘리멘틀 히어로 갓 네오스]를 소환하면서 쥬다이는 다크니스를 이기게 된다. 그 이후 졸업식을 하게 된다. 졸업식 직후 유우기와 만나게 되고 유우기는 쥬다이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라며 듀얼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쥬다이가 졌다는 말도 있고 유우기가 졌다는 말도 있다.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게 없으므로 누가 승리했는지는 모른다.) 쥬다이는 3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렸던 듀얼을 즐기는 마음을 되찾게되고, 여행을 떠난다.(유우기와 쥬다이는 나중에 유희왕 극장판 '시공을 초월한 우정'에서 유성(유희왕 5D'S의 주인공)과 만나서 듀얼을 한다.)
320059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59
보리스 베커
보리스 베커(Boris Franz Becker, 1967년 11월 22일 ~ )는 전 세계 랭킹 1위의 독일 출신 프로 테니스 선수이다. 그는 그랜드 슬램에서 6회 우승했고 올림픽 금메달을 1회 획득했다. 1985년 17세의 나이로 윔블던에서 우승하여 현재까지 최연소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포커스타스의 일원으로 포커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단식 결승 기록 (77). 우승 (49). - 연말 대회 공식 명칭: "1989년 이전: 마스터즈", "1990 - 1999년: ATP 월드 챔피언십"
320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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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어 위키백과
2002년 2월 1일에 시작된 덴마크어 버전의 위키백과이다. 2013년 3월 3일 문서 수가 175,683건이다. 기호는 da이다.
320061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61
헝가리어 위키백과
헝가리어 위키백과()는 헝가리어로 된 위키백과이다. 2003년 7월 8일에 시작되었으며, 기호는 hu이다. 2013년 1월 14일에 위키데이터와 최초로 연결되었다.
32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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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62
드라간 차디코프스키
드라간 차디코프스키(, , 1982년 1월 13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 출신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축구 선수이다.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K리그에서 뛸 당시 등록명은 챠디이다. 선수 생활. 인천 유나이티드. 제난 라돈치치가 떠난 자리를 메꿀 용병으로 평가받으며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챠디는 2009년 3월 21일 K-리그 2라운드 전남 드래곤즈와의 원정경기와 3월 25일 피스컵 코리아 2009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연속골을 득점하며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득점을 올리지 못하더니 4월 19일 리그 6라운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홈경기에서 유병수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실축해 팀 무승부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5월 2일 8라운드 대구 FC와 경기에서 전반전 초반에 골을 기록하여 팀 승리를 이끌어내었다. 이후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였으나 득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부진한 활약을 했고 월드컵 최종예선 기간이후 2군으로 강등되었다. 2010 시즌 여름 이적 시장에서, 인천 유나이티드는 챠디와의 계약 해지를 발표했다. 등록명과 관련된 해프닝. 현재 지금 그가 달고 있는 챠디라는 예명은 사실 처음부터 챠디 이진 않았는데, 애당초 등록명은 카디 혹은 쟈디 로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본토 발음에선 그의 이름의 일부인 Čadi를 '카' 혹은 '쟈' 보단 챠라는 악센트가 강하고 또한 그가 원하던 것은 챠디라는 발음이 었으므로 결국 챠디로 결정하게 된다.
320063
82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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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간 카디코프스키
3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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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웅인
정웅인( 鄭雄仁, 1971년 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생애. 충청북도 제천군 제천읍(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출생이며 서울과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과 경기도 안양시에서 성장하였고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4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년 후 1995년 영화 《리허설》의 단역 출연을 통하여 영화배우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96년 뮤지컬 배우 데뷔하였고 1년 후 1997년 SBS 서울방송《천일야화》의 단역 출연으로 정식 연기자 데뷔하였다. 대한민국 육군 사병으로 복무한 그의 신장은 180cm이고 체중은 74kg이며 영화 감상과 음악 감상에 취미가 있고 운동에 특기가 있다. 약력. 젊은 시절. 정웅인은 1971년 1월 20일에 충청북도 제천군 제천읍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경기도 안양 양명고등학교 재학 시절 우연히 연극반에 들어가 연기를 접한 그는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학과(89학번)에 입학했고, '프라나'라는 동아리의 회장을 맡았다. 또한 신입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 악마선배로도 유명했다. 대학 졸업후에는 오랫동안 연극무대에서 활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 방송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고, 이후 탤런트 공채시험에 줄곧 낙방을 하다 1995년 강정수 감독의 영화《리허설》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1996년에 드라마《천일야화》로 정식 데뷔했다. 연기 경력. 정웅인은 데뷔 이후 여러편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무명 시절을 거쳐 SBS 예능 《좋은 친구들》의 인기 코너인 "심리학개론 흑과 백"에 박수홍과 함께 출연했고, 극중 "감 잡았어"의 대사를 유행시켰다. 이후, 정웅인이 본격 두각을 나타내며 주목을 받았던 작품으로 1998년 38.5%의 시청률을 기록한 《은실이》에 의리 있는 깡패 춘식 역할에 이어, 1999년 53.1%의 시청률을 기록한 《국희》에서 강하고 신념있는 자본가 김상훈 역할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해 신인상을 수상했다. 정웅인은 이후, 2000년에는 밤11시대의 다소 늦은 방송시간대에도 불구하고 30%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MBC 성인 시트콤 《세 친구》에서 윤다훈, 박상면과 함께 코믹한 캐릭터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후 영화 《반칙왕》(2000년), 《두사부일체》(2001년), 《돈 텔 파파》(2004년), 《투사부일체》, 《마법사들》(2006년), 《유감스러운 도시》(2009년) 등과 드라마 《홍국영》(2001년), 《발칙한 여자들》(2005년),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7년), 《선덕여왕》(2008년), 《커피하우스》(2010년), 《오작교 형제들》(2011년) 등에 사극과 여러 장르의 현대극을 넘나들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갔다. 2013년에는 정웅인이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며 연기 전환점이 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외에도 《기황후》와 영화 《전설의 주먹》를 통해 그동안 갇혀있던 코믹한 이미지를 벗고 섬뜩한 악역으로 열연을 펼쳐 대중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고, 신 스틸러의 대표적인 배우로 불리며 악역 전문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특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극중 정웅인의 "얘기하면 죽일 거야", "네 말을 들은 사람도 죽일 거야" "말하면 죽일 거다." 등의 대사는 인터넷과 예능 방송에서 패러디 되며 그를 떠오르게 하는 대표적인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2014년에는 MBC 가족 예능 《아빠! 어디가? 시즌2》에 합류해 장녀 정세윤과 함께 출연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영화 《베테랑》에 출연하였다. 결혼과 가족. 정웅인은 2005년 3월 대학 동기 결혼식에 참석해 현재의 아내이자 12살 연하의 당시 대학생이던 이지인씨와 첫 만남을 가졌고, 연인관계로 발전하여 1년간의 열애 끝에 2006년 6월 3일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에게는 현재 장녀 정세윤(2007년 출생), 차녀 정소윤(2009년 출생), 삼녀 정다윤(2012년 출생) 세 딸이 있다. 논란. 정웅인은 대학 재학 당시 후배들에게 강압적으로 군기를 잡아서 악명 높았다. 주 피해자들인 한 학번 아래 후배들인 안재욱, 신동엽 등이었다. 그외 출연. 홍보대사. 경기 국제보트쇼ㆍ세계요트대회
320065
3332328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65
정영숙
정영숙(鄭永淑, 1947년 4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여성 배우이다. 주요 이력. 소련 군정 조선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기도 양주를 거쳐 서울에서 성장한 그녀는 1966년 연극배우 첫 데뷔한 그녀는 이듬해 1967년 TBC 동양방송 공채 6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였다. 특히 동방유량(현 사조해표)의 해표 식용유 전속모델로 출연하여 '해표 식용유 정말 고소해요'라는 광고 카피를 히트시켜 해표 아줌마로 잘 알려졌다.
320066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66
핀란드어 위키백과
핀란드어 위키백과는 핀란드어로 된 위키백과이며, 2002년 2월 21일에 시작되었다. 현재 위키백과 중 24번째로 규모가 크며 2009년 4월 12일 20만 문서를 넘겼다. 2019년 9월 1일 기준 문서의 개수는 467,568개이며, 기호는 fi이다.
320067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20067
우성용
우성용(禹成用, 1973년 8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축구 선수출신 축구 지도자이다. 강원도 고성군 출생으로 속초초등학교, 속초중학교, 강릉농공고등학교, 아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cm의 큰 키로 인하여 '꺽다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큰 키를 활용한 헤딩 득점력이 좋아 '고공 폭격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클럽 경력. 1996년 부산 대우 로얄즈에서 데뷔하여, 1997년 K리그 우승, 1999년 K리그 준우승 등에 공헌하였다. 2003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여 2004년 K-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는데 럭키금성 황소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1989년 6골 4도움으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지만 연봉조정 때문에 1990년 그라운드를 떠나 19개월 동안 무적선수로 남아 있었다가 1991년 3월 5일 대우 로얄즈로 이적했으나 후보 신세를 면치 못하여 1992년 4월 17일 현금 트레이드된 뒤 1993년 정규시즌 최다골(10골)을 기록하여 재기에 성공한 차상해 이후 외부에서 이적한 포항 공격수 중 성공한 케이스가 됐다. 2003년 7월 27일 안양 LG 치타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K-리그 통산 39번째로 20-20클럽에 가입하였다. 2005년 성남 일화 천마에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 한 그는 2006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 성남의 K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고, 2006년 K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2006년 5월 5일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K리그 통산 17번째로 30-30클럽에 가입하였다. 2007년 울산 현대로 이적하여 2007년 하우젠 컵 우승 등에 공헌하였다. 2007년 10월 21일 대전 시티즌과의 홈 경기에서 K-리그 통산 8번째로 40-40클럽에 가입하였고, 2008년 5월 5일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8라운드 경기에서 K-리그 사상 4번째로 프로 통산 4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2008년 8월 29일 대구 FC와의 K-리그 홈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114골로 개인 통산 최다 득점 타이를 기록하였고, 9월 24일 대전 시티즌과의 하우젠 컵 홈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115골로 개인 통산 최다 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울산과의 계약이 만료된 후 2009년 1월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그 해 14경기에 출전한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인천의 2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국가대표팀 경력. 1995년 2월 19일, 다이너스티컵에서 중국과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06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어 월드컵 본선행이 좌절된 이동국을 대신하여 우성용 발탁이 논의되었지만, 결국 선발되지 못하였다. 이후, 2007년 AFC 아시안컵 엔트리에 발탁되었으나, 음주 파동에 휘말리게 되어 국가대표 1년 자격정지 및 대한축구협회 주관 대회 2년 출전정지의 중징계를 받았다. 플레이 스타일. 191cm의 장신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공중전과 노련한 플레이가 강점이다. 몸싸움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성남 일화 천마 시절 김도훈 코치의 도움으로 스크린 플레이하는 방법 등의 원톱 전술에 맞는 공격 방법을 익혀 극복하였다. 지도자 경력. 2010시즌부터 인천 유나이티드의 코치로 부임했다. 2012년부터 인천의 U-15팀인 광성중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019시즌을 앞두고 서울 이랜드 FC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19 시즌의 성적부진에 따라 김현수 감독이 자진사퇴함에 따라 서울 이랜드의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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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이바니셰비치
고란 이바니셰비치(, , 1971년 9월 13일 ~ )는 크로아티아의 은퇴한 프로 테니스 선수이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서브가 주무기였던 그는, 윔블던에서 와일드 카드로 출전하여 우승(2001년)한 대회 역사상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992년 하계 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 및 복식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생애 최고 랭킹은 1994년 7월에 기록한 세계 랭킹 2위이다. 2022년 현재는 테니스 빅3중 한명인 노박 조코비치의 테니스 코치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랜드슬램 대회의 최고 성적으로는, - 호주오픈 : 8강 (1989, 1994, 1997) - 프랑스오픈 : 8강 (1990, 1992, 1994) - 윔블던 : 우승1회 (2001) , 준우승 3회 (1992, 1994, 1998) - US오픈 : 4강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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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준
도재준(都在俊, 1980년 5월 6일)은 대한민국 출신의 프로축구 선수이다.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2008년에 성남 일화의 2군으로 R-리그에서의 괜찮은 실력과 상당한 득점을 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문제점이라 여겨지던 얇은 스쿼드의 중원 증강을 꾀하며, 또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수비수 이정열과 일대일 트레이드 되었지만, 많은 출전기회를 갖지 못하고 팀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 후 용인시청으로 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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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록 (축구인)
김상록(金相綠, 1979년 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 출신 축구 지도자이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현재 울산 현대 축구단의 코치를 맡고 있다. 개요. 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자신에게 찾아온 슈팅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전에서 흘러나오는 볼을 골로 마무리하는 킬러 기질로 인하여 '만능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축구인 생활. 선수 생활. 2001년 드래프트 1순위로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첫 해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는 등 걸출한 활약을 보였으나, 팀은 2002년과 2003년 연이어 부진하여 큰 조명을 받지 못했고, 전술적으로 재정비를 하면서 주전 대열에서 밀려났다. 2004년 상무에 입대해 2006년 군 복무를 마치고 포항 스틸러스에 복귀하였고, 고기구와의 맞트레이드로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2007년 이요한과의 맞트레이드로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여, 데얀 다먀노비치, 방승환과 수준급의 테크니션 커넥션을 구축하며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였지만, 2008년 데얀 다먀노비치가 FC 서울로 이적하고 2009년 방승환이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이후에는 많은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며 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2007년 4월 18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K리그 통산 52번째로 20-20클럽에 가입하였다. 결국 2010년 1월,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였으며, 2011년에는 내셔널리그의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로 이적하였다. 2013년, K리그 챌린지의 신생팀인 부천 FC 1995에 입단했다. 2013년 6월 2일 충주 험멜과의 경기에서 시즌 첫 득점을 올렸다. 2013시즌이 끝난 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지도자 생활. 2016년, 상주 상무의 코치로 취임하여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2017년, K리그2의 부산 아이파크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2018시즌을 앞두고 FC 안양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9시즌을 앞두고 전북 현대의 스카우터로 선임되었다. 2021시즌을 앞두고 울산 현대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플레이 스타일. 체구는 작지만 수준급의 드리블과 패싱력, 시야 등 공격 전개에 필요한 운영 능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른발과 왼발 모두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왼발을 이용한 짧게 치면서도 탄력 넘치는 마술 같은 드리블이 주무기이다. 왜소한 체구라는 약점을 상대의 수를 미리 읽는 영리한 플레이로 극복하였다. 그 외. 2006년 12월 김미정과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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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흡연
간접 흡연은 담배를 입에 물지 않고 담배 연기를 마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흡연자가 담배를 필 경우 비흡연자가 담배연기를 마시는데, 이를 간접흡연이라 한다.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아도 담배 연기를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 또 간접흡연이 직접흡연보다 폐암 발병률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는 만큼 조심해야 한다. 수동흡연(受動吸煙, passive smoking)이라고도 한다. 간접흡연 피해방지조례. 대한민국에서는 2015년부터 실내흡연을 할 수 없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서울특별시 간접흡연 피해방지조례를 2017년부터 시행하여 간접흡연을 규제하고 있다. JTBC보도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금연법을 제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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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간 믈라데노비치
드라간 믈라데노비치(, , 1976년 2월 16일 ~ )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현재 세르비아) 크랄레보 출신의 축구 선수이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K리그의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였으며, K리그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드라간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축구인 경력. 클럽 경력. 1993년 FK 라드니크 크랄레보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고, 1995년 FK 슬로가 크랄레보로 이적하여 1998년까지 뛰었다. 1998년 FK 제문으로 이적하여 활약하였으며, 2000년 FK 루다르로 임대 이적하였다. FK 루다르에서 그는 27경기에 출전하였고, 시즌이 끝난 뒤 복귀하였다. 2002년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팀을 옮긴 뒤 활약하였으며, 2003-04 시즌 팀의 메리디안 수페르리가와 세르비아 컵 우승에 기여하였다. 2004년 8월 100만 파운드에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레인저스 FC로 이적하였고, 8월 25일 PFC CSKA 모스크바와의 2004-05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2차전에서 팀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2번의 큰 부상을 당하며 7경기 출전에 그쳤고, 2005년 1월 레알 소시에다드로 임대 이적하였다.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그는 12경기에 출전하였고, 시즌이 끝난 뒤 스코틀랜드로 복귀하였다. 그는 팀과의 계약 기간이 3년 남았지만, 팀은 계약을 파기하였다. 계약 기간이 끝난 2005년 8월 30일 메리디안 수페르리가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하여 세르비아 무대로 복귀하였고, 2005-06 시즌 팀의 메리디안 수페르리가와 세르비아 컵 우승에 기여하였다. 2006년 K리그의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고,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주전 선수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2009년에 들어 체력 저하로 인하여 부진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 국가대표 경력. 2003년 8월 20일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UEFA 유로 2004 예선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고, 그 경기에서 A매치 첫 득점을 올렸다. 그 뒤 2003년 9월 10일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UEFA 유로 2004 예선 및 2006년 FIFA 월드컵 예선과 기린컵 등 각종 친선경기에서 출전하여 활약하였고, 2005년 11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친선경기에 선발되어, 2006년 FIFA 월드컵을 앞둔 대한민국과 경기를 갖기도 하였다. 플레이 스타일. 190cm의 좋은 신체조건을 갖고 있으며, 큰 키에서 나오는 제공권 장악 능력이 뛰어나 헤딩 슛을 통한 득점에 능하다. 볼 컨트롤과 개인기가 뛰어나며, 날카로운 스루 패스 또한 드라간의 장점 중 하나이다. 그 외. 2009년 인천 유나이티드로 드라간 차디코프스키가 이적하자, 구단에서는 드라간과 이름이 겹쳐 같은 이름으로 등록하지 못하였고, 상의 끝에 '챠디코프스키'를 줄인 챠디로 등록하였다. 드라간은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2006년 8월 21일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얻었다. 2006년 9월 16일 FC 서울과의 홈 경기에서 경기 시작 30초만에 골을 터뜨렸고, 그 골이 2006년 가장 빠른 시간에 넣은 골로 기록되어 '올해의 스피드골'을 수상하였다. 기록. 클럽 경력 기록. 마지막 업데이트: 2010년 1월 1일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마지막 업데이트: 2010년 1월 1일 득점과 결과 리스트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국가대표팀의 득점을 먼저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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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넨
뤼넨()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도시이다. 뤼넨은 리페 강 (Lippe River)을 따라 도르트문트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우나 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그린 뮌스터 지역(green Münster area)의 일부이다.
320077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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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연합대학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은 한국전쟁 당시 발족한 대학으로, 서울 지역에서는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이 설립되었고, 지방에서는 부산, 광주, 대전, 전주에 설립되었다. 전시연합대학설립의 영향으로 1952년부터 각 지방국립대학(경북대학교,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에 이어 1953년에는 부산대학교, 충남대학교)이 설립되었다.
3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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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잔치는 기쁜 일이 있을 때 여러 사람이 모여 즐기는 일이다. 흔히 연회(宴會) 혹은 파티(party)라고 가리킨다. 옛날에는 황제나 왕제의 생신과 같은 때에 황궁 및 왕궁에서 하는 잔치를 궁중 연회라고 불렀다. 대부분은 황궁 및 왕궁이나 가정에서 잔치를 많이 하지만, 현대 사회에 접어든 최근에는 시간상 문제로 많이 바쁜 경우가 많아 호텔이나 식당 등 다른 시설에서 잔치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분류. 생일 잔치. 생일 잔치는 사람이 태어난 날을 기리기 위한 축하 잔치이다. 이 전통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으나 20세기 중반이 넘어서야 대중화되었다. 생일 잔치는 현재 수많은 문화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여담. 잔치는 모임의 한 부류로, 코로나19 집단 감염원이 될 수 있는 근거 역시 있다. 코로나19 범유행 이슈가 될 근원이기도 한다.
32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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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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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축제(祝祭)는 지역 사회, 학교, 교회 등에서 여는 행사이다. 주로 음악, 춤, 음식, 스포츠 등이 함께 한다. 축제의 종류는 학교 축제, 영화제, 음악 축제, 지역 문화제, 종교 축제, 록 페스티벌 등 유형에 따라 다양하다. 축제의 정의. 축제는 개인 또는 집단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을 기념하는 일종의 의식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 축제가 지역 기반 문화 산업으로 인식되어 경제적 가치, 놀이 문화의 관점에서 주목 받는다. 축제를 의미하는 단어인 Festival 은 성일을 뜻하는 라틴어 Festivals에 유래해 그 뿌리가 종교의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학에서는 축제를 뒤르켐적 모델, 프로이트적 모델로 구분하고 있다. 뒤르켐 모델은 축제를 "사회적 통합을 위해 기능하는 종교적 형태"로 규정한다. 반면 프로이트 모델은 축제의 성격을 전도적, 비일상적 성격으로 보고있다. 이는 축제가 통합과 질서의 유지보다는 '금기의 위반, 과도함과 난장트기'로 보는 것이다. 축제의 기능. 놀이로서의 축제. 놀이는 보통 비생산적인 것, 시간 낭비에 해당하는 행위로 생각된다.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사회에서는 생산성 만을 강조하다 보니 놀이는 이를 높이기 위한 필요한 '휴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어느정도 경제적 성장을 이뤘을 때 놀이는 이제 삶의 질을 측정해주는 요소로 생각 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선 무작정 앞만 보고 살기보단 이제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을 인간의 새로운 덕목으로 만드는 셈이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축제는 인간의 유희적 본성을 충족 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놀이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축제는 그들의 기쁨, 즐거움 등의 욕구를 충족 할 뿐만 아니라 평소에 느꼈던 긴장, 불안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일소에 해소시킴으로써 그들의 삶의 질을 더욱 높이는 놀이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미래 공동체를 위한 문화 전승의 통로. 현대 사회처럼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는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전통이 전승되기 쉽지 않다. 과거의 전통 문화는 날로 쇠퇴하고 있고 그저 기성세대, 노인들의 향수에 그치기 쉽다. 그러나 축제는 이미 생활에서 유리된 전통과 민속 문화를 자연스럽게 전승 할 수 있도록 만드는 통로가 된다. 특히 축제는 어려서부터 관습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지식을 무의식속에 습득하고 정서적으로 동화할 수 있다. 이러한 축제는 청소년들에게 체험활동과 참여를 통해 직접 몸으로 전승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축제는 전통을 체험하게 해 과거의 시간을 살아보게 함으로써 조상의 지식을 엿 볼 수 있고 단절된 전통을 이어가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종교적 기능. 축제를 뜻하는 Festival은 성일을 의미하는 라틴어 Festivals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축제는 그 뿌리가 종교 의례에 있다. 종교학자들에 의하면 의례는 성스러운 존재나 힘과 접촉, 의사를 소통하는 수단이다. 또한 의례를 놀이의 한 형태로 규정 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의례를 성스러운 놀이로 보기도 한다. 의례는 주기성과 기능에 맞추어 통과의례, 주기적 순환 의례, 위기 의례 등으로 구분된다. 통과의례는 출생,죽음 등과 같은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이전 단계에서 새로운 단계로 이동을 위해 행하는 의례이다. 이러한 의례는 새로운 나의 탄생, 새로운 역할과 지위 부여 등의 기능을 한다. 또한 위기 의례는 질병, 자연재해등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행하는 의례이며 주기성을 띠지 않는다. 이에 비해 주기적 순환 의례는 종교력에 따라 주기적으로 행해지며 이러한 의례를 종교축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축제들은 흔히 신화적 사건들과 관련을 갖는다. 이러한 신화적 이야기들의 효능을 지속시키고 극화 하기 위해서이다. 사회 문화적 기능. 축제는 앞에서 다뤘듯이 놀이, 전통문화의 전승, 종교적 기능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통합기능 또한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은 공동체적 측면에서 사회의 기존 질서, 체계를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기능 중 첫번째는 축제를 통해 사람들의 내재되어있던 일탈성을 난장적 의례로 표출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중심적 가치와 구조를 재강화하고 창조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난장적 의례란 카오스를 상징하는데 축제가 행해지는 기간엔 평소에 금지되었던 금기사항들이 허용, 역할 전도를 통한 평등주의, 성적인 농담 등 기존에는 할 수 없던 일탈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축제의 난장적 의례는 기존 사회 질서체계의 억압적 요소들을 축제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어 주기적으로 해소시켜준다. 그러나 이 의례를 하고 난 후에는 사회 질서가 이전보다 더 엄격해지며 이를 통해 기존의 낡은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 질서를 구축하며 집단의 특정 정서를 갱신하고 집단 의식을 고취시켜 사회적 유대를 강화시킨다. 두번째 기능은 축제가 집단의 가치와 이념을 표출, 강화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다. 축제는 흔히 집단적으로 행해지는데 이를 통해 집단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 이념, 그리고 가치 등을 표출해 집단의식을 강화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축제는 집단 의식을 고취하여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축제의 종류. 종교적 축제. 대한민국 - 강릉 단오제. 강릉단오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한다. 강릉 단오제의 기원은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한민족의 제천 의례이다. 삼국 시대의 문서에 기반하면 5월 단옷날 시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단오제를 하는 단옷날은 연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로 인식되어 24절기 중 손꼽히는 중요한 날이다. 우리나라 단오의 특성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풍년을 기원하는 파종제로서의 단오, 두번째는 세시풍속, 셋째는 조상숭배이다. 강릉 단오제의 제의 대상은 대관령 산신, 대관령 국사성황, 국사 여성황 같은 신적인 존재이다. 제례 방법은 유교식 제사를 지낸다. 제례 의식 이외에도 단오제에는 씨름, 그네뛰기 같은 여러 가지 대한민국 전통 민속놀이에 참여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대표 축제인 강릉단오제는 1967년 중요 무형 문화재 13호로 등록 되었고 2005년 11월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록 되어있다. 일본 - 텐진 마츠리. 텐진 마츠리는 일본 오사카에서 7월 24일, 25일에 개최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여름 축제이다. 이 축제는 역모죄로 억울하게 죽었던 스가와라 미치자네라는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을 기리기 위해 시행한 데서 비롯됐다. 텐진 마츠리는 주로 나무로 만든 창을 강에 떠내려 보내는 '호코나가시신지'를 시작으로 마츠리가 시작 된다. 이는 마츠리의 무사와 안전, 번영을 기원하는 개막식이다. 그 이후 오후 4시경 모요오시 다이코를 선두로 신의 행차인 '리쿠토교'가 시작된다. 이어서 신령을 태운 가마, 고호오렝이 등장하여 육로로 운반하는 '후나토교'가 오후 6시가 지나 시작된다. 그 이후 불꽃놀이인 하나비가 시작되며 마츠리는 마무리를 하게 된다. 음식, 지역의 특산물 축제. 스페인 - 토마토 축제(La Tomatina). 토마토 축제(La Tomatina)는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에스파냐 남동쪽 발렌시아 주의 부뇰 마을에서 개최된다. 토마토 축제는 1940년에 시작되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참가자가 3만 여명이 넘는 축제로 발전했다. 토마토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번째 행사는 긴 기둥에 햄을 매다는 것이다. 광장 중앙에 기둥이 설치되면 사람들이 햄을 잡아채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햄이 장대에서 떨어지는 순간 토마토 축제는 시작 된다. 신나게 던지며 1시간 정도가 지나면 종료를 알리는 대포가 울린다. 이때는 소방차들이 동원되어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축제상 과격해 질 수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안전, 위생 수칙을 따라야 한다. 1) 잘 익은 토마토라도 손으로 꽉 쥐어 으깬 뒤에 던질 것. 2) 고글과 장갑, 쉽게 벗겨지지 않는 신발을 착용 할 것 3) 특히 토마토가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 할 것 4) 유리병 등 사고 가능성이 있는 물건을 소지 하지 않을 것 5) 다른 사람의 옷을 잡아당기거나 찢지 않을 것 6) 토마토를 싣고 광장으로 들어오는 대형 트럭과 축제가 끝난 뒤 들어오는 소방차에 길을 내줄 것. 독일 - 맥주 축제. 독일 뮌헨의 대표적인 맥주 축제는 옥토버페스트라고 불리며 9월 말에서 10월까지 약 2주동안 개최한다. 옥토버 페스트는 18세기 바이에른의 황태자와 테레사 공주의 결혼 축하연에서 시초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졌다. 축제의 대회장인 '테레즈이엔 비제'의 광장에는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텐트가 구비되어있다. 축제의 첫날은 반드시 토요일로 결정되며 시작은 맥주단지를 가득 채운 마차가 들어오며 축포가 터지는 신호와 함께 시작된다. 둘째 날은 축제의 퍼레이드가 열린다. 계절적 축제. 중국 - 하얼빈 빙등제 축제. 하얼빈의 빙등제는 매년 1월 5일에 열린다. 전시 작품도 1,500여점 이상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얼음 축제이다. 축제의 역사는 1963년에 열려 다른 축제에 비해 역사가 긴편은 아니지만 거대한 조각상, 만리장성, 파르테논 신전, 피사의 사탑,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한 강남스타일의 말춤추는 모습등이 눈 조각상으로 만들어져 그 아름다움은 탄성을 자아낸다. 미국 - 할로윈 축제. 할로윈은 미국 10월 말 밤에 행하여진다. 이는 고대 켈트인의 삼하인 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할로윈의 어원은 Hallow 로써 이는 애글로 색슨어로 성도를 의미한다.또한 All Hallows Even(만성절 전야제) 을 줄여서 Halloween이 되었다. 고대 앵글로색슨족과 켈트족은 이날 온갖 귀신과 악령들이 세상을 떠돌아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현대 그러한 의미는 거의 사라지고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로 발전되었다. 이 날 어린 아이들은 귀신과 같은 독특한 분장을 하고 과자, 사탕을 얻으로 다니는 행사로 변하게 되었다. 예술적 축제. 프랑스 - 칸느 영화제. 프랑스 남부 도시 칸에서 매년 5월에 열리는 영화제이다. 이탈리아의 베니스 국제 영화제, 독일의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이다. 칸 영화제에선 영화의 역사를 추인한 거장들을 기린다. 1960년부터 현재까지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하여 전 세계에서 온 영화 전문가들의 비즈니스 장소 역할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 작품으로는 2002년 55회 영화제에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2004년 57회에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었다. 독일 -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음악제. 독일에는 현재 120개가 넘는 음악축제가 있으며 이 중에서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는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독일의 대표적 음악축제이다. 입장권의 수요는 증가 추세에 있어 지금 예매하더라도 8년 후에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바그너라는 사람이 자신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의 공연을 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건축하며 1876년 '니벨룽겐의 반지'를 초연, 1882년 필생의 대작 '파르지팔'을 초연 한 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제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페스티벌의 주요 레퍼토리는 <니베룽의 반지> 전곡을 비롯해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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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경
서희경(徐希炅, 1986년 7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이다. 2005년 한국 LPGA인 KLPGA에 입회하였으며 통산 11승을 기록하였으며 2008년 한해 동안에만 6승, 607,312,239원의 상금을 획득하였다. 또한 유럽골프투어 LET와 KLPGA가 공동개최하는 제주 세인트 포 마스터스에서 우승하여, LET시드권을 따냈다. 2009년에는 미국골프투어 LPGA 대회인 SBS오픈과 크라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 초청되어 공동15위, 컷오프의 성적을 냈다. 또, KLPGA에서 5승, 663,759,286원의 상금을 획득하는 등, 그 해 다승왕, 상금왕, 대상 등을 휩쓸며 유소연과의 라이벌 경쟁이 지금의 KLPGA 투어 흥행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LPGA투어 기아클래식에서 우승하며, 국외무대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LPGA투어 첫 해인 2011년, 신인왕을 획득하며 성공적인 투어 적응을 이루었다. 2013년 11월 국정훈과 결혼하여 현재 서울시 용산구에 거주하고 있다. 대회 전 아침식사를 한다는 그녀는 런닝 어프러치 샷이 자신있다고 한다. 줄리 잉스터를 존경하고.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냈으며, 평균 드라이버 거리는 245야드이다. 우승 기록. 진한색은 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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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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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동음이의)
연회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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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CK HORN
THE BACK HORN(더 백 혼, )은 일본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이다. 1998년 결성되었으며 1999년에 앨범 《어디로 가나()》로 인디즈 데뷔하고 2001년에 싱글 《써니()》로 메이저 데뷔하였다. 약칭은 ‘바쿠혼()’, ‘바쿠호()’ 등. ‘KYO-MEI’라는 단어를 테마로써 ‘듣는 이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음악을 전해간다’라는 뜻을 내세우고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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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중학교
보은중학교(報恩中學校)는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이평리에 있는 공립 중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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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ck H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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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
동양 철학(東洋哲學)은 인도, 이슬람,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의 철학이다. 동양이란 범주 자체가 하나의 범주 안에 묶기는 너무 다양한, 즉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이 강하다고 현대에 와서 비판받고 있기 때문에(중동과 동북아시아를 한 범주로 묶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른 범주로 나눠야 할 필요성이 오래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동양철학 이란 말은 대체로 중국과 인도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유학, 노장철학, 불교 등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약 BC 5세기 전후로부터 여러 학파를 통해 계승되어 왔다. 주로 다루게 되는 주제로는 윤리학, 우주론, 인식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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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웰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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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한국 철학은 신라와 고려의 불교 사상, 조선의 성리학, 실학 등 유교 사상을 포함한다. 그러나 현대 한국의 법이나 정치 사상 등은 조선 이전의 불교, 유교 사상과는 관련이 없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철학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역사. 삼국 시대. 고조선(古朝鮮) 시대부터 보전되어 오던 원시 종교와 원시 사상의 고유성이 이 때에 이르면 중국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유교·불교·도교의 충격을 받아 크게 위축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은 다투어서 이러한 외래사상을 수용하고, 사회 체제를 개혁하였다. 불교.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백제의 침류왕(枕流王) 원년, 신라의 법흥왕(法興王) 14년에 각각 시작된 개화 운동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3대조까지 된 고구려의 승랑(僧朗), 인도에까지 가서 경률(經律)을 가져와 번역한 백제의 겸익(謙益),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불교 이론을 배워와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특징으로 하는 신라 불교를 일으킨 원광(圓光), 자장(慈藏) 등이 한국 불교의 조사(祖師)들이다. 이들에 의하여 삼론학(三論學)·성실론(成實論)·천태학(天台學)·율학(律學)·열반학(涅槃學)·화엄학(華嚴學) 등이 개창되니 한편으로는 불교사상의 황금시대가 준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에서는 개화를 촉진시켰다. 유교. 유교는 좀더 일찍 한문의 전래와 함께 도입되어 고대 국가의 정치 이념과 사회 윤리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유교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과 경당의 설치(고구려), 유교박사 고흥(高興)과 왕인(王仁)의 활약(백제) 등이 한국 유학의 첫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하나의 사상이론으로 발전하는 데는 좀더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도교. 도교(道敎)는 4∼6세기 경에 이미 고구려에 보급되어 왕실과 귀족의 숭신(崇信)을 받았다. 양원왕(陽原王) 이후로 중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이 들어오고, 나라에서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하니 혜량(惠惠), 보덕(普德) 등의 고승이 이를 탄식하여 신라로 넘어가는 일까지 생겼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불교 배척의 중심 인물이었다. 한편 백제에서도 4세기에 이미 《도덕경(道德經)》이 전해진 기록이 있으나, 신라는 통일 이후에야 도교를 수용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화랑도.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통일 신라의 중추 사상인 화랑도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자료인데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고 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은 풍류(風流)를 '부루'란 한국어 고유어(固有語)의 한음역(漢音譯)이라고 보고 화랑사상을 그가 주장하는 '태양 숭배(太陽崇拜)'란 고유 신앙(固有信仰)에 결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현상윤(玄相允)은 《삼국유사》의 화랑 창설 기록에 나오는 "왕은 또 천성이 풍미로워 신선을 몹시 숭상한다 (王又天性風味多尙神仙)"라는 문구에 근거하여 최남선의 순어음적(純語音的) 해석에 찬동하지 않았다. 최치원의 서문(序文)에는 풍류교(風流敎), 풍월도(風月道)로 호칭(呼稱)되는 화랑도(徒)의 현묘지도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적혀 있다 하고 그것은 유(儒)·도(道)·불(佛) 3교(敎)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화랑의 근본 사상을 이룬 현묘한 도(道)는 유·도·불 3교의 사상을 다 포함했다는 것이다. 만약 3교를 포괄한 고유사상이 있었다면  모두 단군 신화(檀君神話)를 토대로 하여, 샤머니즘(巫)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보편적이요, 최남선과 같이 '밝', '불'의 태양 숭배 종교로 보는 견해가 그 다음이요, 샤머니즘이란 용어 대신 신도(神道)란 용어(用語)를 사용하여 원시 다신교(原始多神敎)적 신앙(信仰)과 토템 사상까지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다. 3교 중 어느 한 교가 주가 되어 기타 3교를 포섭하여 3교 합일을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도 가능한데 지금까지의 문헌으로 보아 도교(혹은 仙敎)가 주가 되어 유·불의 2교를 포섭했다고 보는 견해(이능화의 《조선도교사》)가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화랑들의 기록 ― 김유신(金庾信)의 산중기도(山中祈禱) 같은 ― 을 보든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때 당(唐)에서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와 도법(道法)을 강(講)했다는 기록을 보든지 그 당시 당에서의 도교의 형세로 미루어 보면, 신라 통일 무렵의 도교란 것은 한국의 무속(巫俗) 신앙과 중국의 오두미교(五斗米敎)적 요소가 혼합하여 그 바탕을 이루고, 그 위에 노장(老莊)의 '허무자연(虛無自然)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사상, 연·제 방사(燕齊方士)들의 신선 사상(神仙思想), 추연(鄒衍)의 음양5행설(陰陽五行說), 한대(漢代)의 참위 사상(讖緯思想) 등을 유합해서 구성된 혼합체로서의 도교로 생각된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서 말한 '무위지사(無爲之事)'와 '불언지교(不言之敎)'라 함은 이 복합적 요소중의 신선(神仙), 선교적(仙敎的) 요소를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풍월이다 풍류다 하는 것도 이 선교적 요소를 지칭하는 말이며 화랑이 반드시 젊은 소년, 소녀로 풍월주(風月主)를 삼는 것은 동남(童男), 동녀(童女)를 이상화(理想化)하는 선교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산수(山水)를 오유(娛遊)하며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긴다는 것도 유선 사상(遊仙思想)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도교의 토대 위에서 유·불 2교를 포섭했다 하면 유·불 2교는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소화하였는가에 관해서도 문헌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최치원의 말과 같이 유교는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임금께 충성한다(入則孝於家 出則忠於君)'는 정도로, 불교는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선한 일은 받들어서 행하라(諸惡莫作 諸善奉行)'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유교나 불교는 일반 화랑도들-그때의 엘리트라고 볼 수 있는 계층-에 있어서는 다만 실천적인 일상생활의 윤리로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교. 유교는 통일 이전의 신라에 있어서 이미 국가의 제도를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변전(變轉)시키는 주요 이념으로 받아들여졌고 신문왕(神文王) 이후는 국학(國學)이 세워지고 《5경(五經)》, 《논어(論語)》, 《효경》, 《문선(文選)》 등이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유교의 저술로서는 전해진 것이 없다. 불교. 불교는 법흥왕(法興王) 이후 국가의 숭불 정책(崇佛政策)으로 인하여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배출되고 많은 유당(留唐) 학승(學僧)들이 돌아와서 심오한 철리를 말하고 불교 저술도 나오고 여러 산문(山門)이 종파(宗派)도 창설하였지만, 원광(圓光)이 귀산·추항 두 청년에게 보살계(菩薩戒) 대신 유교화한 세속5계(世俗五戒)를 가르친 것이나 원효(元曉)·의상(義湘)이 대승불학(大乘佛學)의 대사(大師)이면서 《청구비결(靑丘秘訣)》 같은 도참서(圖讖書)를 저술했다는 것(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을 보아, 일반 국민에 있어서는 역시 호국 사상이나 유교와 혼합된 세속 윤리나 무속(巫俗)과 혼합되기 쉬운 소승 불교(小乘佛敎)적 요소가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불교. 신라의 불교사상을 계승한 고려의 불교는 여전히 봉건적인 근왕 사상과 결합하여 이른바 호국 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건국 초부터 계속된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 등의 국가적인 행사는 불교 의식(儀式)의 토착화인 것이며 국사(國師)·왕사(王師)제를 통한 왕권과의 연결, 국난 극복을 위하여 2차례나 이루어진 대장경 판각, 그리고 묘청, 신돈 등 승려의 정치 활동은 모두 이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전래된 선종(禪宗) 불교의 융성과, 태고(太古), 지눌(知訥), 혜심(慧諶) 등 고승이 배출되었고, 의천(義天)은 천태종(天台宗)을 다시 일으켜 선·교 양종의 화합을 모색하였다. 유교. 이미 신라 중, 말기(中末期)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한문학과 유학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신 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고 후기에 새로이 정주학이 도입되어 전통적인 종교와 문학에 충격을 주더니 마침내 진보적인 사상 집단을 형성시켜 조선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즉 유학은 이미 봉건사회를 배경으로 한 정치·사회·철학·문학 전반에 걸친 이념체계로서 과거제(科擧制), 충효 사상(忠孝思想), 명분론(名分論)으로 봉건 사회 정비에 기여했고, 중기에는 교육·문학 등에 크게 활용되어 사학(私學)의 융성, 사장(詞章) 문학의 발달 등을 가져 왔으며, 정주학의 전래와 함께 정치·교육상의 혁신사상으로 발전하여 척불론(斥佛論) 또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이 전개되었다. 음양 도참 사상. 신라 말기 도선이 도입하였다고 하는 풍수지리설이 합리적 사고에 눈뜨지 못한 민중 속에 널리 퍼져 각종 미신적인 비기(秘記)와 도참(圖讖)을 낳았고 이에 중국 전래의 음양5행(陰陽五行) 사상이 서로 어울려서 마침내는 왕도(王都)의 지덕성쇠설(地德盛衰說), 산천압승술(山川壓勝術), 연기설(延基說) 등이 나타나서 마침내는 귀족들의 정권 싸움에까지 이용되었다. 조선 시대. 조선 초기에 정도전, 권근 등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으나 이때의 유학은 아직 정치, 경제, 법률, 문장에 관련된 이념에 머물렀다. 수 차례의 사화 이후에 유학자들은 인간의 심성에 주로 관심을 가지며 성리학을 연구하게 된다. 16세기부터 정주계 성리학(주자학)만이 정통을 자처했다. 정주계 성리학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사칠론과 이기론이다. 사단칠기와 이기의 해석을 둘러싸고 주리파, 주기파로 대립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18세기에 호락 논쟁으로 이어진다. 낙론은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했고, 호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한편 18세기에 왕양명 계통의 성리학인 양명학(심학)이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됐다. 16세기부터 양명학이 논의되긴 했지만 정주계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이단시 되어 철저히 배척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8세기에 정제두가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정제두는 퇴계의 양명학 변박에 대해 반론을 펴며 양명학을 옹호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현실 문제에 관한 주자학의 한계를 절감해 주자학을 넘어선 실용 학문인 실학이 연구되었다. 경세치용은 토지제도 등을 강조하며, 이용후생은 상공업에 역점을 둔다. 19세기에는 고증학의 영향으로 실사구시가 강조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정약용의 경학 사상과 최한기의 유기론(唯論)적 경험 철학에서 총괄적으로 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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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운수 (충북)
신흥운수(新興運輸)는 충청북도 보은군내버스 회사이며, 본사는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남부로 4427 (죽전리 52-2번지)에 위치해 있다. 역사 및 현황. 1978년 10월부터 충북교통(현 충북리무진) 보은군내버스를 대동물산이 인수해서 운행해오던 보은교통 이 2000년 모회사 대동물산의 부도 여파로 최종 부도처리되자 같은해 10월 1일 구 보은교통의 차량과 노선권을 양수받아 신규 보은군내버스 사업자로 출범하였다. 현재 전 차량에 노선 LED 전광판을 장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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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워크 리눅스
젠워크 리눅스(Zenwalk Linux)는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로 만든 이는 Hyperion, JP 등의 별명으로 알려진 장-필립 기유망(Jean-Philippe Guillemin)이다. 슬랙웨어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인터넷,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개발 등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운영체제 및 i686 기종에의 최적화를 통해 실행의 빠르기를 높이고 포괄적 의존구조 및 꾸러미 관리체제를 갖는 가벼운 운영체제를 목표로 한다. 원래는 미니슬랙(MiniSlack)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2005년 8월 12일에 나온 1.2부터 오늘날 쓰이는 이름인 젠워크 리눅스로 바뀌었다. 기본 GUI는 Xfce이지만 그놈을 GUI로 탑재한 판이 따로 존재한다. 자체 제작한 netpkg를 통해 꾸러미들을 관리하며 2011년 8월 현재 최신판은 7.0(2011년 3월 25일에 나옴)이다. 꾸러미 창고. 또, 공식 소프트웨어 창고는 커뮤니티의 몇몇 사용자들에게만 공개되어 있다. netpkg. 젠워크 리눅스의 꾸러미 관리기 netpkg는 apt-get의 기능들과 비슷한 기능들을 제공한다. 꾸러미 형식은 슬랙웨어에서 사용하는 tgz이지만 젠워크 리눅스의 tgz에는 의존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이는 netpkg의 설정 파일인 netpkg.conf에 적혀 있는 젠워크 리눅스 공식 미러에 있는 꾸러미들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또한 netpkg는 기본 CLI와 더불어 GUI 프론트엔드도 존재한다. 판 종류. 젠워크 리눅스는 현재 4개의 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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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주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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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미역
이타미 역()은 일본 효고 현 이타미 시에 있는 철도역이다. 두 역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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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협주곡
첼로 협주곡은 첼로 독주와 오케스트라 등의 협주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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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 3
인터시티익스프레스 3호() 또는 독일철도 403급, 406급, 407급()은 독일철도의 동력 분산식 고속 열차이다. 설계 최고 속도는 시속 330km이며, 독일 국내에서는 영업 최고 속도 300 km/h, 프랑스에서는 320 km/h까지 낼 수 있다. 파생형을 합쳐서 총 67편성 생산되었다. ICE 3 50편성(403호대)은 단일 전기 방식이며, 독일 국내 및 스위스 바젤로 운행한다. 네덜란드 소유 4편성을 포함하여, ICE 3M 11편성(406호대)은 암스테르담 및 브뤼셀로 운행할 수 있다. ICE 3MF 6편성(406F호대)은 과거 ICE 3M에서 개조되었으며, 프랑스로도 운행할 수 있다. 1996년 중반에 계획되었을 때에는 ICE 2.2/ICE W(와전류제동; )라는 임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복전압 차량으로 405호대를 계획하였으나 실제 제작되지는 않았다. 제작사 중 지멘스는 ICE 3 프로젝트가 끝나고, 이를 기반으로 지멘스 벨라로를 개발하였다. 2008년 지멘스는 독일 전용 지멘스 벨라로 D를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생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멘스는 ICE 3M/F를 기반으로 해외에 수출하기 위해 스페인,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영국, 터키 모델을 갖춘 지멘스 벨라로를 개발하였다. 세부 모델. 독일철도 403급. 독일철도 403급() 또는 인터시티익스프레스 3호()는 기존 모델인 ICE 1, ICE 2 모델보다 내구성이 더 강한 고속열차를 제작하는 것을 목적으로 견인 전동기를 분산하는 모델을 채택하면서 달성되었다. 영업 최고 속도로 330km 운행을 허가했고 첫 운행 당시 최고 속도가 368km를 도달했다. 인터시티익스프레스의 최고 영업 속도가 300km에 해당된다. 1997년에 쾰른-프랑크푸르트 고속철도 노선에 투입하기 위해 50편성을 지멘스와 ADtranz에 주문했다. 한편 독일철도는 2017년 4월에 공식 보도를 통해 오는 2020년까지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추운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화 작업을 시행한 것에 대해 승객들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독일철도 406급. 독일철도 406급() 또는 인터시티익스프레스 3M호()는 이전 차량보다 더 높은 출력, 더 가벼운 열차를 제작한다는 목표로 설계되었다. 이를 위하여 기존 차량과는 달리 16개의 전동기를 열차 하부에 배치하는 동력 분산식으로 설계하였다. 시험 운행에서는 영업 최고 속도 시속 368km를 경신했고, 허용된 영업 최고 속도는 시속 330 km이다. 일반 ICE 서비스에서는 선로 한계 때문에 시속 300km지만 내며, 프랑스 LGV 에스트에서는 시속 320km까지 낼 수 있다. 별도의 기관차가 없기 때문에 선두차에도 좌석을 설치할 수 있으며, 운전실 바로 뒤에 유리벽으로 분리된 전망석이 설치되어 있다. ICE 3M은 유럽에서 사용되는 4종류의 서로 다른 전력 시스템을 지원하며, 다양한 국가의 신호 시스템을 지원한다. 도이체 반에서 13편성, NS에서 4편성을 주문하여 총 17편성 제작되었고, 이 중 6편성은 프랑스에서도 운행할 수 있는 ICE 3MF로 개조되었다. NS 소유 차량은 NS 로고를 부착하고 있지만, 도이체 반과 공동으로 배차되기 때문에 독일 국내 서비스에 사용되기도 한다. 2002년 벨기에 직류 3kV 노선의 영업을 허가받았고, 최고 영업 속도는 160km까지 운행한다. 2004년에는 고속선 영업을 허가받았으며, 고속 운행 시 노반의 자갈이 튀는 문제와 와전류제동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시속 250km까지 낼 수 있었다. 토네이도가 만들어져서 자갈이 딸려 올라와 열차를 파손시키는 문제를 막기 위해서 대차 부근에 스포일러가 추가되었다. 와전류제동 사용 시 자기를 사용하는 궤도상 장치가 파손되기 때문에 벨기에에서는 와전류제동을 사용할 수 없다. 유럽 연합의 상호 운행성 기술 표준에 의하여 자기를 사용하지 않는 장비로 교체해야 한다. 2005년 말부터 프랑스 운행을 위한 시운전을 시작했다. 벨기에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LGV 에스트에서 2007년 6월 20일부터 영업 운행을 시작하였다. 2007년 12월부터 독일철도는 프랑크푸르트 ~ 파리 ICE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초기에는 1일 5회 왕복 운행하였다. 프랑스 운행을 위해서 수정된 편성은 ICE 3MF라고 불리며 봄바디어 헤닝스도르프 공장에서 개조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운행 허가를 빨리 받았으나, 2006년 프랑스 TVM과 KVB와 간섭하는 ZUB와 Integra-Signum 시스템을 철거해서 운행 허가를 잃었다. 독일철도 407급. 독일철도 407급() 또는 인터시티익스프레스 벨라로 D호()는 2008년 11월에 독일철도가 5억 유로를 들여 주문했다. 2010년 4월에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크레펠트 지멘스 공장에서 최초로 지멘스 벨라로 D를 공개했다. 영업 최고 속도의 경우 시속 320km로 설계되었고, 기존의 모델보다 더 넓어졌고 소음이 감소되었다. 또한 이전 모델과 달리 결함을 줄였고 사고와 화재에 대비해 안전 장치가 장착되었다. 한편 새롭게 도입된 열차는 독일 노선에 국한되지 않고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를 잇는 국제 노선에 도입하기 위해 발주했다. 또한 채널 터널 운행을 목적으로 독일철도가 2015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암스테르담, 런던을 잇는 국제 고속열차 노선에 도입하기 위해 발주를 검토했으나 도입 지연으로 발주가 모두 취소되었다. 당초 2011년부터 운행할 예정이였으나 운행이 계속 연기되었다. 2013년 12월부터 4편성이 최초로 인도되었고 모두 독일 노선에 운행하고 있다. 2014년에 4편성의 열차가 추가로 인도되었고 8편성의 경우 향후 프랑스, 벨기에를 잇는 노선에 도입하기 위해 시험 운행을 하고 있으며 당국에 승인을 받으면 운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2011년 6월, 독일철도는 2010년 8월에 사고로 대파된 ICE3MF편성을 대체하기 위해 지멘스 벨라로 D를 추가로 주문했다. 기타. 독일철도는 하노버에서 열리는 2000년 세계 박람회를 대비해 120편의 열차를 투입해 운행했다. 특별 열차 중에서 인터시티익스프레스가 운행하고 있는데 이 열차는 엑스포 익스프레스()를 표기하고 있다. 이 열차는 다양한 노선에 투입하고 있으며 독일 노선 외에 국제 고속열차에 운행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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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슨발데즈 원유 유출 사고
엑슨발데즈 원유 유출 사고(Exxon Valdez oil spill)는 1989년 유조선 엑슨발데즈가 미국 알래스카주 프린스 윌리엄 만에서 좌초되면서 적하돼있던 원유 1,100만 갤런(24만 배럴)이 유출된 사고이다. 이 사고는 지금까지 해상에서 발생한 인위적 환경 파괴 중 최악의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사고는 헬기와 비행기, 보트로만 접근할 수 있는 프린스 윌리엄 만의 원격지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정부도 기업 측도 대응이 어려웠으며 기존 재해 복구 대책의 대폭적인 재검토 필요성을 느끼게 해줬다. 해당 지역은 연어·해달·물개·바다새의 서식지이다. 사고 경위. 엑슨발데즈호는 알래스카주의 을 1989년 3월 23일 오후 9시 12분에 출발해 5,300만 갤런의 원유를 싣고 캘리포니아주로 향했다. 당시 도선사는 발데즈 해협을 유도한 후 조종을 발데즈호 선장 조셉 헤이즐우드와 교대하고 하선했다. 배는 항로의 빙산을 피하면서 나아갔다. 오후 11시 넘어서 선장 헤이즐우드는 조타실을 떠나면서 3등 항해사에게 사전에 협의한 지점에서 항로에 돌아가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사고 당시 집무실에 있었다. 그러나 엑슨 발데즈는 항로에 돌아가지 못해 1989년 3월 24일 오전 0시 4분 경에 블라이 암초에 부딪혀 좌초했다. 이 사고로 총 적재량의 20%인 1,100만 갤런(24만 배럴)의 기름이 프린스 윌리엄 만에 유출됐다.. 사고 원인을 조사한 미국 교통안전위원회는 유조선 좌초를 일으킨 요인을 다음의 4개로 좁혔다. 유출된 원유의 양. 사고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유조선은 사고 당시 5,309만 4,510 갤런의 원유를 싣고 있었는데 그 중 1,080만 갤런이 유출된 최악의 환경재앙 사건이라고 한다. 이 숫자는 알래스카주 엑슨 발데즈 원유 유출 신탁 협회, 미국 해양 대기청과 그린 피스와 시에라 클럽 등의 환경 단체가 사용하고 있으며 널리 인정되고 있는 추정치이다. 한편, 야생의 수호자() 등 여러 단체들은 이 공식 발표는 유출량이 너무 적게 발표되었다며 이의를 제기했으며, 그 이유는 해수 중에서 미립자화되어 버린 원유는 계산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유 제거 방법. 우선 미생물에 의한 원유 분해 방법을 시도했지만 별 소용이 없자, 다음에는 내화성의 붐을 사용해 가장자리에서 시험적으로 원유를 소각해 보니 비교적 양호한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아 제거 작업 기간 중에 다시 소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붐과 오일 스키머를 사용한 제거 작업이 곧 시작되었지만, 사고 후 24시간 동안은 오일 스키머를 조달할 수 없었으며, 두꺼운 유층과 켈프(대형 해초의 일종)가 장치를 자주 막히게 했다. 한 민간 회사는 3월 24일에 화학적 분산제를 헬리콥터로 살포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파도가 작아 바다 속의 원유와 분산제가 섞이지 않아 소용이 없었고 분산제는 이후 사용되지 않았다. 그 후 분산제는 원유보다 악영향을 끼친다는 견해가 제기됐다. 10만 분의 1의 농도의 세제가 바다 포유류나 식물의 체내에서 농축되면 급성의 독성을 발휘하지만, 실제로 살포 지역의 조간대에 붙은 대량의 따개비나 삿갓 조개 등이 폐사하여 생태계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엑슨 사는 원유 제거 대응이 더딘 것이 각 방면에서 비난을 받았으며, 발데즈 시장 존 데븐스(John Devens)는 동사의 위기 대응이 형편없다며 실망했다고 말했다. 정부도 연안 경비대를 출동시켜 대응했으나 엑슨 사 앞에는 과거의 유출 사고보다 비용도 계획도 인내도 필요한 원유 제거 작업이 산적해 있었다. 1만 1000명 이상의 알래스카 주민이 엑슨 사의 직원과 함께 오염 지역 전역에서 환경 회복을 위한 작업에 참여했다. 유출된 원유의 문제는 아직도 이 지역이 안고 있는 문제이며 계속되고 있다. 원유가 쌓인 프린스 윌리엄 만은 바위가 많고 후미가 많아서 기름으로 오염된 바위를 고압의 열수를 이용하여 세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바위에 서식하는 미생물도 날려 버리게 되어 생물의 먹이 사슬의 일부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 일대는 불모의 땅으로 변했다. 오늘날, 석유 회사와의 이해 관계가 없는 미국인 전문가 사이에서는 원유는 서서히 분해되는 것을 기다리고 방치했어야 한다는 견해가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과학적 조언도 일반 사회로부터의 압력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뿐이었다. 엑슨 사는 후에 '학생용 비디오 테이프'라는 라벨을 붙인 '과학자와 알래스카의 원유 유출 사고"라는 비디오 테이프를 각 학교에 배포했는데 그 내용 중에 제거 작업 보고가 왜곡됐다고 한다. 알래스카주 자금 원조에 의한 몇 가지 조사에 따르면 유출 사고는 장단기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그 중에는 여가나 스포츠로서의 낚시이 보류되고, 관광객이 감소하였으며, 이코노미스트 지가 "존재가치"라고 부르는 태고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프린스 윌리엄 만의 사회적 가치의 손실을 입었다. 동물들은 아직도 재난에서의 회복 과정 중에 있다. 소송. 이 베이커 대 엑슨 사건의 사례에서 1994년에 앵커리지의 지방 법원 판사는 물적 손해배상에 대해 2억 8700만 달러,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해 50억 달러의 판결을 내렸다. 징벌적 손해배상 금액은 당시의 엑슨 사의 단 년도의 이익 금액을 기준으로 하여 산출한 것이다. 엑슨 사는 이 판결에 불복해 제9 순회구 연방 항소 법원에 항소하면서 1심 러셀 홀란드(Russel Holland) 판사에게 징벌적 손해배상의 감액을 요구했다. 2002년 12월 6일, 이 판사는 40억 달러에 감액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그는 이를 사건의 실태에 비추어 판단했을 때 총체적으로 과도한 액수는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엑슨 사는 또 판례에 의한 최근의 대법원의 판례를 기초로 하여 심리하도록 요구했지만, 이에 대해 홀란드 판사는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45억 달러에 금리에 더하여 인상했다. 2006년 1월 27일에 제9 순회구 연방 항소 법원에서 의견 진술과 구두 심문이 있었고 같은 해 12월 22일에게 징벌적 손해배상액은 25억 달러로 인하됐다. 법정은 그 이유에 대해 최근 대법원 판결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액에 상한을 마련 중이라고 설명했다. 엑슨 사는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2007년 5월 23일 제9 순회구 연방 항소 법원은 엑슨 사의 요구를 기각하고 동사가 25억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수락해야 한다는 판결을 지지했다. 동사는 대법원에 항소했으며, 2007년 10월 26일에 판결이 나왔다. 엑슨 사의 공식 견해는 원유 유출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사고이며, 동사는 원유 제거 작업에 이미 추정 20억 달러를 지불했고, 더욱이 관련된 민사·형사 재판의 재정에 10억 달러를 필요로 한다고 보여 2500만 달러를 넘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원고 측 변호사는 사고의 책임은 동사에 있고 그 이유는 프린스 윌리엄 만을 통과하는 유조선의 책임자에 술에 취한 선장을 배치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엑슨 사는 원유 제거 작업과 재판에 든 비용의 대부분에 보험금 지급을 맞추었다. 발데즈호의 손실에는 세액 공제를 했다. 또 1991년에는 이 회사는 알래스카 수산업의 피해를 둘러싼사와 합의금에 합의했다. 합의 내용 중에서 엑슨 사는 7개 사에 대해 6,375만 달러의 지불을 보증했지만, 수산가공업자는 엑슨에 생기는 어떤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에 대해서도 지불 의무를 부과함을 명기시켰다. 선박. 엑슨 발데즈 사고 후의 혼란 속에서 미국 의회는 1990년에 유류오염법을 통과시켰으며, 100만 갤런(3,800 m³)을 넘는 양의 원유를 유출한 선박의 사용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됐다. 1998년 4월에 엑슨 사는 정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으며, 발데즈호는 알래스카로 돌아와야 하고 이 규제는 부당하게 엑슨 사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는 엑슨 발데즈 외에 해당하는 선박이 없기 때문이다). 유류오염법은 다시 원유 탱크와 바닷물 사이의 격벽을 이중으로 하는 더블 헐(이중 선체) 설계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계획을 설정했다. 더블 헐 구조가 엑슨 발데즈의 재해를 막지는 못했지만 연안 경비대는 조사 결과 유출량을 60% 정도까지 억제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엑슨발데즈는 예인되어 1989년 7월 10일에 샌디에고에 도착했으며, 7월 30일부터 선체 수리가 시작되어 약 1600 t의 강재가 교환됐다. 1990년 6월에 이 유조선은 씨 리버 메디터레이니언(Sea River Meditteranean)호로 개명됐으며, 수리에 소요된 3000만 달러의 청구서를 남겨 출항했다. 이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영화 워터월드의 촬영 세트로 대여되었다. 이 유조선은 명칭을 변경한 것은 2007년 8월 시점이며, 아직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이 선박을 엑슨 모빌(엑슨과 모빌은1999년에 합병)의 100% 자회사인 씨 리버 매리타임(Sea River Maritime) 사가 보유하고 있다. 영향. 환경에 대한 타격. 원유 유출의 장단기적 영향에 대해서는 포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추계에 따르면 사고 직후 사망한 야생 동물의 개체 수는 다음과 같다. 기타 연어나 청어 알의 피해가 극심했다. 철저한 원유 제거 작업에 의해 1년 후에는 현지를 찾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피해의 흔적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 영향을 탐지할 수 없는 장기적 영향에는 각종 해양 동물의 개체 수 감소가 있다. 예를 들어, 곱사연어의 개체 수는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엑슨 모빌은 최근 보고서에서 "프린스 윌리엄 만의 환경은 건전하며, (생물 사회도) 번영하고 있다. 현지를 방문했던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분명하게……."라고 말하고 있다. 수달과 오리는 사고 후 몇 년 간 사망률이 상승했지만 이는 원유 오염된 생물을 먹이로 했기 때문이다. 동물의 대부분이 오염된 토양 속에 파묻힌 먹이를 파내면서 원유에 노출됐다. 조사자의 보고에 따르면 해안선에 서식하는 진주담치 등이 오염의 영향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30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엑슨 모빌은 2003년의 기자회견에서 '알래스카나 기타 각지에서 얻어진 과학적 지식에 의하면 원유 유출은 단기적으로는 심각한 영향을 주지만, 환경에는 놀라운 회복력이 있다'는 정반대의 코멘트를 남겼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심각한 영향이 있다고 보는 환경 운동가는 많다. 그 외의 타격. 미국 전역에서 약 4만 명의 석유·화학·원자력 산업 노조원은 의회가 포괄적인 국가 에너지 정책을 입법화할 때까지 북극 야생 생물 보호 구역(ANWR)의 시추 조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출 사고 후의 혼란 속에서 알래스카주 지사 스티브 코퍼(Steve Cowper)는 발데즈호를 비롯한 원유를 실은 유조선 모두에 대해 프린스 윌리엄 만에서 힌친브룩 입구까지의 구간에서 2척의 예인선에 의한 호송을 의무화하는 정령을 내렸다. 이 계획은 1990년대가 되면 한층 더 진전했으며, 상시 출동했던 예인선 2척 중 1척을 64m(210피트)의 호송 대응선에 옮겼다. 발데즈에 기항하는 유조선의 과반수는 아직 싱글 헐이지만, 의회는 이미 2015년을 기한으로 하는 전 유조선의 더블 헐 구조 의무화를 입법화했다. 현장 일대의 해양 생물(특히 조개류·대구·물개)의 괴멸적 타격이 원인으로 1991년에는 알래스카 원주민인 추가치(Chugachi) 족의 경제가 파탄났다. 부동산 사정에 사용되는 각종 방법으로 오염된 자산의 가치가 산정되었으며, 얄궂게도 발데즈호 원유 유출 사고의 결과로서 브라운필드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가상평가법(CVM)과 컨조인트 분석이 환경 파괴에 따른 복잡한 문제 평가 수단으로서 폭넓게 도입됐다. 그 후 엑슨 모빌의 내부 관계자가 사태의 심각성을 경시해서 기름 유출에 관한 보고서의 내용을 조작한 것이 드러났다.
3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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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훈
김경훈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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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손 발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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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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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더
더더(THETHE)는 199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이다. 더더는 "내게 다시, DELIGHT, IT`S YOU, I NEVER, 작은 새" 같은 굵직한 히트곡들을 남기며 1990년대 모던록의 열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그룹이며 2004년에는 네 번째 정규 음반 The The Band가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현재 보컬 이현영, 기타, 프로듀서 김영준, 드럼 임한국, 베이스 정명성으로 라인업을 갖추고 활동 중이며 25주년 기념 앨범이자 정규 10집 앨범을 준비 중에 앞서 공개되었던 '슬픔', 'BLACK HOROES', 'COLORS', '백일몽' 등, 발매했던 4곡에 밴드의 문화의 역사가 함께 녹여져있는 IN HALF THE TIME을 추가하여 EP 음반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더더의 영역 속으로 다가가고 있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힙합과 아이돌 음악에 익숙한 이들에게 록과의 접점을 마련할 가능성을 제공하고 마니아층에게는 과거를 향한 향수를 자극한다. 유행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더더만의 색채로 채색된 색다른 작품들을 들을 수 있는 우리는 이번 더더의 신보로 얼마나 기쁘며 행복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밴드 더더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모던록 밴드의 자존심을 지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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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상업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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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책)
《시크릿》("The Secret")은 전직 호주의 TV 프로듀서인 론다 번이 쓴 책의 제목이며 론다 번이 오래전부터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연구하여 발견한 비밀을 공유하고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다. 내용. 비밀을 이용하여 건강, 부, 행복을 성취한 성공한 현대인의 지혜로움과 비밀의 이해, 활용방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비밀이란 끌어당김의 법칙을 의미하며, 끌어당김의 법칙은 생각이 현실이 된다 라는 단 세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책의 원리를 건강하게 사는 법, 부자가 되는 법, 불가능한 일을 성공으로 일구어 내는 방법 등에서 구체적인 활용 방법을 제시한다. 시크릿의 원리를 물리학의 개념을 이용하여 해석해 내고 있는데, 다분히 의사과학적 요소들이 내재해 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런 노력에는 어떤 정신병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물리학의 공리를 인간의 삶에 적용하려는 현재의 유행은 잘못되었고, 얼마간 비난받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또한 시크릿에서 양자물리학자로 나왔으며, 동시에 자연법당의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던 존 해길린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빈민을 퇴치할 방법으로 명상을 제시했다. 그는 명상이 빈민 퇴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근거로 '100번째 원숭이 현상'을 들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원숭이의 수는 20마리였고, 10년 뒤에는 59마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59마리 중에서도 물에 고구마를 씻어 먹는 원숭이는 36마리에 불과 했고, 10년이라는 기간은 그 방법이 확산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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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1973년 애니메이션)의 에피소드 목록
이 문서는 도라에몽의 TV 애니메이션 첫 번째 시리즈인 제1작의 방영 목록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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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호호
타호 호(Lake Tahoe)는 미국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위치한 대형 담수호이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의 경계선, 즉 네바다 주도인 카슨시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최대수심은 501미터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깊은 호수이다. 주변지역에는 스키장을 비롯한 관광시설이 있어 이 지역의 주요 수입원이다. 물이 맑기로도 유명한데, 한때 31미터까지 내려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수질오염으로 21미터가량 까지로 가시범위가 줄었다.
3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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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호
타호()는 필리핀의 연두부 요리이다.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 가운데 하나이며, 아침밥 대용으로도 먹는다. 이름과 역사. 거슬러 올라가면 타호는 중국식 더우화에 그 기원을 둔다. 타갈로그어 "타호()"의 어원은 중국어 "더우화()"의 민난어식 발음인 "따우후에()"이다. 만들기. 따뜻한 연두부에 시럽을 붓고 사고 펄을 올려 낸다.
3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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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손 반데즈 오일 유출사건
3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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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존 발데즈 오일 유출사건
3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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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시크릿
320133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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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시크릿(Secret)은 영어로 비밀을 의미하며, 다른 뜻으로는 다음이 있다.
3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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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의 농어촌버스
청주시의 농어촌버스는 현재 30개의 청주시내버스가 관할하는 청원공영 권역별 순환버스와 1개의 면 단위 농협이 관할하는 마을순환버스로 구성되어 운행 중이다. 다만 청원공영 권역별 순환버스는 청주시내버스의 일부로 취급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마을순환버스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개요. 2008년 청남농협을 시작으로, 2009년 오송농협, 남청주농협 순으로 마을순환버스가 신설 운행되었고, 2011년 4월 청남농협에 한 대가 증차되어 다섯 대로 운행하고 있다가 2012년에 오송농협이, 2014년에 청남농협이 운행을 철수하고 시내버스 업체에 노선을 양도하여 2015년 현재 남청주농협의 차량 한 대와 노선 하나만이 운행 중이다. 별도의 노선번호는 없으나 운행차량의 차량번호를 노선번호화 하여 운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32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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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항공의 운항 노선
2020년 11월 기준으로, 중화항공은 다음의 노선을 취항 중이다. 참고: * 된 표시는 여객과 화물이 동시에 취항하는 노선이다.
320136
3301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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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대학
야마가타 대학(, )은 일본의 국립 대학이다. 대학 본부는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에 있다. 연혁. 야마가타 대학은 1949년에 야마가타 고등학교(山形高等學校), 야마가타 사범학교(山形師範學校), 야마가타 청년 사범학교(山形靑年師範學校), 요네자와 공업 전문학교(米澤工業專門學校), 야마가타 현립 농림 전문학교(山形縣立農林專門學校)를 통합하여 설립되었다. 이하, 야마가타 대학에 통합된 구 학교들의 연혁이다.
320143
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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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브카
3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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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늄
320145
5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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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onium
3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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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목숀
320149
14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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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늑
32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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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척
홍척(洪陟, ? ~ ?)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다. 일명 남한조사이다. 헌덕왕 때 당나라에 가서 지장에게 마음을 수련하는 법을 배운 후 826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남악(지리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폈다. 후에 흥덕왕과 선광태자에게 불교의 교리를 믿도록 하였고, 실상사로 들어가 지장의 설법을 이어받아 선종 구산의 하나인 실상산파를 이룩하였다. 실상사에 그를 기리는 탑과 비가 남아 있다.
32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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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식
홍만식(洪萬植, 1842년 ~ 1905년)은 조선 말기의 애국 지사이다. 자는 백헌, 호는 호운, 본관은 남양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 목사까지 지냈다. 1884년 동생 홍영식이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게 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하고 그는 자수하여 복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분한 나머지 음독 자살하였다. 죽은 후 숭정대부 참정 대신에 추증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3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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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구
홍사구(洪思九, 1878년~1896년)는 조선의 항일 운동가이다. 자는 우용이고 본관은 남양이며, 경상북도 순흥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 황후가 시해되었을 때 안승우를 중심으로 해서 의병이 일어나자 그도 이에 가담하여 제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32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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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박
홍언박(洪彦博, 1309년 ~ 1363년)은 고려의 문신이다. 자는 중용, 호는 양파, 본관은 남양이다. 할아버지는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이고, 아버지는 삼사사(三司使) 홍융(洪戎)이며, 외할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라유(羅裕)이다. 장인은 찬성사(贊成事) 권준(權準)이며,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조카이다. 생애.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목왕 때 밀직제학을 거쳐 지신사가 되었다. 1361년 공민왕 때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피란하는 왕을 모셨으며, 왕에게 절제생활을 하도록 권하였다. 1363년 김용이 흥왕사에서 난을 일으키자, 피하라는 아들의 권고를 물리치고는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적을 피할 수 있겠느냐"며 최후까지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죽은 후 정승에 추증되었다.
32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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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순
홍여순(洪汝諄, 1547년 ~ 1609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사신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의 후궁 정빈 홍씨가 그의 조카이다. 생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장령, 청평현령 등을 거쳐서 황해도사가 되었으며, 성절사 하정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591년 음력 6월 23일 대사간을 사임하였다. 이후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북도 순찰사를 지냈으며, 우참찬으로 승진했으나 당쟁에 미친 광해군이 볼 때 성품이 나쁘게 조작해 대간의 탄핵을 받고 순천에 유배되었다. 북인으로서 지중추부사, 함경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끝나자 류성룡을 몰아내고 정권을 쥐었다. 이후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우참찬, 호조판서, 선공감제조, 좌참찬 등을 지냈다. 그리고 북인들은 둘로 갈라졌는데, 그는 대북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소북파와 싸움을 벌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320157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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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
황영(黃瑩, ? ~ ?)은 고려 숙종 때의 학자이다. 1103년 숙종 때 중서시랑 등을 지냈으며 사학을 세워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제자들을 '정경공도'라 불렀는데 고려 12공도 중의 하나였다.
3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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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헌
황여헌(黃汝獻, 1486년 ~ ?)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는 헌지, 호는 유촌, 본관은 장수이다. 황희의 5세손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울산군수 등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소세양·정사룡 등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당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지은 <죽지사>는 명나라 사람들에게까지 격찬을 받았다. 저서로 <유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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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눌
학눌(學訥, (1888년 음력 5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다. 이름과 본관. 속명은 이찬형(李燦亨). 본관은 수안(遂安). 법명은 원명(元明). 법호는 효봉(曉峰), 학눌(學訥). 생애. 청년 시절. 평안도 양덕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평안도 대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후 평안도 평양에서 성장하였으며 1901년 대한제국 조선 황조 백일장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 후 평안남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한 이후 1907년 일본 졸업을 거쳐 1909년 평남 평양고보 입학하였으며 1912년 평양고보 졸업을 한 그는 같은 해(1912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를 입학하였으나 8개월만에 중퇴하였다. 법관 생활 단념과 불교 승려 입문. 1912년 11월, 그렇게 일본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한 그는 이듬해 1913년 3월에 판사가 되어 10년 6개월간의 법관 생활을 하였다. 이때 한 죄수에게 1923년 3월,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같은 해 6월, 잘못으로 밝혀지자, 과오의 심각성과 양심의 가책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같은 해(1923년) 9월, 판사 직책까지 사직(판사 사퇴)하면서 2년 남짓 전국을 방랑하다가, 1925년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29년 순천 송광사에서 불교 최고의 과정인 대교과를 공부하였다. 그 후 상원사 등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편 후, 1941년 송광사에서 대종사의 직위를 받았다. 광복 이후와 만년.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를 전후한 시절에 그는 1947년부터 2년 후 1949년까지 동국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역임하므로써 잠시 대학 교수(불교 교육자)로 활약을 하기도 하였고 1954년 불교 종단 정화 준비위원이 되어 불교 정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1956년 네팔에서 개최된 불교도 대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불교계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여러 파로 갈라져 있는 불교계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망. 1966년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서 입적(사망)하였는데, 입적 당시 32개의 사리가 나왔다. 영결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조계종단장으로 치러졌고 사리와 정골은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사후 팩트체크 관련 논란. 최종 학력과 주요 경력에 대한 반론. 서울대학교 로스쿨 한인섭 교수가 제기한 팩트체크에 따르면, 와세다 대학교 중퇴하였다는 것과 판사 경력은 모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에 관하여 한인섭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와세다 대학교를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던 중에 끝내 자퇴? 와세다 대학교 명부를 보면 그런 인물이 없다. 당시 일본에서는 타 국가 유학생이 아직 극소수였던지라, 한국인 유학생 출신의 입학 및 퇴학 명단을 보면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2) 일본에서 대학 중퇴 후 귀국하여 판사? 1913년 무렵에는, 조선인으로서 시험을 통해 신규 판사(법조인)가 되는 길이 아직 봉쇄되어 있었다. (3) 최초의 판사? 물론 "최초"라는 글자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취향을 잡아당기는 이야기지만, 1910년 아직 일제 지배의 첫 단계에서, 조선인으로 판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차라리 그대로 판사를 하게라도 해주었다. 따라서 "최초"라는 타이틀은, 누구에게도 쓰기 부적합하다. 하물며, 판사도 아닌데 최초 판사는 될 수가 없다. (4) 1923년 즈음, 평양복심법원에 이찬형이란 이름의 판사가 없다. 그 시절 아직도 조선인 출신의 판사는 극소했고, 대부분이 일본인 판사였다. (5) 《친일인명사전》, 《조선총독부관보》에도 이찬형이란 이름의 판사는 없다. 《한국유학생운동사(조도전대학 우리동창회 70년사)》, 《한국법관사》를 모두 다 뒤져봐도 이찬형이라는 이름은 없고, 그런 이름의 판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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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
김돈(金墩, 1385년 ~1440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 천문학자이다. 본관은 (구)안동(安東)로, 고려 김방경의 후손이다. 생애. 1417년(태종17)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428년(세종10) 왕명으로 《서한이하 역대보계도(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撰進)하였다. 1434년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재임할 때 동활자(銅活字)인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에 참여하였으며, 세종의 명을 받아 김조(金)와 함께 천체의 현상을 관측하는 간의대(簡儀臺), 보루각(報漏閣)을 만들었다. 승지로 7년간 재임하였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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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
김훤(金晅, 1234년 7월 27일(음력 6월 30일) ~ 1305년 2월 8일(음력 1월 14일))은 고려의 문신이다. 자는 용회,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생애. 1260년(원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원에 갔을 때,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우자, 원 황제는 세자 담(후에 충렬왕)을 동안공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어 임연 일당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김훤은 원의 황제에게 세자가 공으로 책봉되면 국내 민심이 임연에게 기울어진다고 주장하여 중지케 하였다. 그가 금주 방어사로 있을 때 방보가 난을 일으켜 진도에 있는 삼별초와 합세하려는 것을 경주 판관 엄수안 등과 함께 이를 토벌하였으며, 삼별초의 남은 무리가 경상도에 쳐들어온 것을 막은 공으로 예부 낭중·도호부사에 올랐다. 1275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전라도 부부사가 되어 부임하던 도중, 청호역에서 전라도 관찰사인 노경륜이 서울로 보내는 뇌물을 빼앗아서 나라에 바친 일로 양주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충선왕이 세자로 원에 있을 때 그를 받들다가 귀국하여 찬성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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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형 (1884년)
김기형(金基瀅, 1884년 ~ 1943년)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해악, 별명은 현구이며,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1914년, 만주로 건너가 문화 운동에 종사하였다.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다. 그 후 김구·여운형과 “노병회”를 조직하였고,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약하다가 충칭에서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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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봉
김말봉(金末鳳, 본명은 金末峰, 1901년 5월 20일 (1901년 음력 4월 3일) - 1961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생애. 경상남도 밀양 외가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부산 본가에서 성장하였다. 중외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8년 전상범(全尙範)과 결혼을 한 후 1933년 중앙일보에 첫작품으로 단편소설 《망명녀》를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6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찔레꽃》을 발표함으로써 대중소설 작가의 지위를 얻었다. 해방 후에는 사회 개선 운동에 앞장서서 박애원을 경영하는 한편, 많은 장편소설을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문학가협회 대표위원을 역임했고, 작품으로는 《화려한 지옥》 《푸른 날개》 《생명》 《화관의 계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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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
김백봉(金白峰, 1927년 2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무용가이다. 백봉은 예명이며, 본명은 김충실(金忠實)이다. 생애.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고등 여학교에서 배운 후, 4년 동안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웠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 무용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54년 한국예술무용 연구소를 세웠다. 1958년 동남아 친선 예술 사절단으로 순회 공연을 했고, 서울예술고등학교 강사·한국무용협회 이사·국제 극예술협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4년 경희대학교 무용과의 부교수, 1966년 학과장을 지냈으며, 서울시 문화상과 캄보디아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창작품으로는 무용극《우리 마을의 이야기》, 그랜드 발레 《비련》, 창작 무용 《지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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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문
김범문(金梵文, ?~825년)은 신라의 왕족이다.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주원(周元), 아버지는 김헌창(憲昌)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헌덕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 825년 고달산(高達山)에서 초적의 괴수 수신(壽神) 등 100여 인과 더불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평양(平壤)에 정하려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였으나, 북한산주도독 총명(聰明)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고 죽었다. 김범문 반란의 의미. 신라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 신라 하대는 귀족연립적 경향을 걷게 된다. 이에 대한 반동이 822년 일어난, 김헌창의 난이다. 이 난은 무진주, 완산주, 청주(菁州), 사벌주 등의 넓은 지역에서 호응을 받았으나,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김범문이 또다시 귀족연립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서 한산(漢山)에 도읍을 정하고 반란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을 왕권을 잃어버린 무열왕계 후손의 저항으로 묶어 보기도 한다. 김헌창의 난이 진압되고 그의 종족과 도당이 처형당했는데, 어떻게 김범문이 그 화를 면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다만, 별다른 지역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옛 고구려 지역으로 달아나 여주 지역으로 추측되는 고달산의 도적 수신에게 의탁한 것이 사실이다. 거기서 3년을 지내면서 신라 정부에 대한 옛 고구려 지역 주민의 불만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해 반란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의 김범문 관련 기사 중 ‘수도를 세우고자’ 한 부분을 주목하면, 새로운 국가 건설 기도라는 점에서 반란의 성격이 김헌창의 난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김범문의 난은 김헌창의 난과 더불어 호족의 지방할거적 경향을 촉진시켰으며, 왕위계승전을 가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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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
김범우(金範禹, 1751년 5월 22일 ~ 1787년 9월 14일)는 조선 후기의 역관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이다. 세례명이 '토마스'인 천주교도이다. 1785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이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고 교리공부를 하다가 발각된 명례방 사건으로 형벌을 받고 밀양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생전에 그가 자신의 집을 정기모임의 장소로 제공하였는데, 그의 집이 있던 곳에는 훗날 1898년에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서울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초기생애. 역관 김의서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1773년(영조 39년) 역관 증광시에 합격하여 종6품 한학우어별주부가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이벽과 친하게 지냈고, 그런 인연에서 이벽이 1784년 처음으로 천주교를 설교할 때 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두 동생을 입교시키고,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자주 가지는 등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중인과 양반은 물론 같은 역관 집안에서 여러 사람을 개종시켰다. 명례방 사건. 명례방 공동체.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중국 천주교회에서 사목하던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고 1784년 4월에 돌아왔다. 귀국한 후 북경의 선교사들로부터 증여받은 여러 종류의 천주교 교리서들을 그와 교제하던 성호학파 학인들과 함께 수개월간 정독하고 토론하였다. 이후 세례식을 통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전례공동체를 조직하여 그 공동체의 구성원(신자)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게 됨으로 한반도 땅에 천주교회가 세워졌다. 김범우는 천주교회 창립에 참여하여 그해 가을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곧 연이어 최인길 등 수십 명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여 신도수가 점차 늘어나자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김범우는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래서 모임장소를 수표교에서 멀지 않은 장악원 앞 진고개 근처에 있는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다. 이곳이 행정구역상 한성부 명례방(현 명동)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공동체를 오늘날 연구자들이 ‘명례방공동체’라고 부르고 있다. 구속과 유배. 1785년 3월 이승훈, 정약용 등 10여명과 함께 서울 명례방(명동)의 자기 집에서 신앙 집회를 개최하던 중 주위의 고발로 도박 단속 겸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조(추조)로 끌려갔다. 이것이 바로 일명 을사 추조 적발 사건으로 그와 함께 끌려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은 모두 양반들이어서 방면되었다. 참고로 사건 직후 양반 출신들은 배교했으나 이후 몇은 다시 복교한다. 허나 김범우는 교회 집회 장소를 제공한 집주인에다 중인(中人) 신분이었기 때문에 투옥되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김범우에게 형벌을 가하며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학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한편, 석방된 권일신, 이윤하, 이총억, 이정섭 등은 형조에 가서 압수당한 성상과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항의하며 물의를 일으켰다.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이용서, 정숙 등 일부 유생들은 척사위정의 통문을 돌리며 천주교를 배격하고 이들도 처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정조는 김범우만을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 보내며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형조에서는 김범우가 소장했던 책자들을 모두 형조의 뜰에서 불사르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는데, 이것은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고 금한 최초의 공문서가 되었다. 사망. 김범우는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배교하지 않았기에 귀양지에서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 달레는 그의 저서 《조선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결국 김범우는 고문 후유증인지 어쨌는지 병이 악화되어 1787년 귀양지 밀양에서 병사하였고 이로써 조선에서 천주교 사건 관련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지에 살면서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다. 훗날 신유박해(1801) 때 김범우의 여섯째 서제 이우는 문초를 받고 장형을 당하던 중 죽었고, 일곱째 서제 현우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의 집이 최초의 천주교 예배 장소라는 역사적 의의에 따라 오늘날 그곳에 서울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중턱에 있다. 1985년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과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바친 마백락 씨 등은 1989년 극적으로 후손의 외손 중 한 명을 만나 김범우의 묘로 지적해 준 묘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김범우의 묘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김범우의 묘소는 이 곳 만어산 중턱에서 발견하게 됐고 그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순교자 김범우를 기리기 위한 토마스 기념 성모동굴성당은 김범우 묘역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1번지에 99평 200석 규모로 2011년 9월 20일 봉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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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金炳翼, 1938년 ~ )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생애.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정치과 졸업. 1967년 《사상계》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60년대 문학의 위치》 《정치와 소설》 《시작의 의미》 등으로서 본격적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C. R.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배경으로 정치와 사회를 문학 속에 수용한다는 기본 입장에서 지성적인 사회비판과 문학성을 균형있게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에 김주연(金柱演) 등과 공저인 《현대한국문학》을 비롯하여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주목을 끌었던 《한국문단사》와 《지성과 문학》 등이 있다. 1983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과지성사 대표,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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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1919년)
김성한(金聲翰, 1919년 1월 17일 ~ 2010년 9월 6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號)는 하남(霞南)이다. 그는 일본 도쿄 대학교 영문과를 나온 뒤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해방 후 서울문리사범대학·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를 역임했고, 월간〈사상계〉주간을 거쳐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주간을 지냈다. 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문학 세계. 1943년 수필가 첫 등단을 한 그는 7년 후 1950년 서울신문에 단편 〈무명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후 손창섭과 장용학 등과 함께 1950년대 문단을 주도했다. 영국 역사, 그리스 신화 등 동서고금의 사회상을 무대로 삼아 종래의 서정적, 토속적인 소재공간을 벗어났으며 특유의 지적이고 간단명료한 소설 기법을 선보여 한국 소설의 체질적 현대화에 기여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역사의 소설화에 몰입하여 삼국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 작업을 거친 간결한 문체의 작품들은 한국 역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작품. 단편집 《암야행(暗夜行)》(1951), 〈오분간(五分間)〉, 장편 《이성계》 3부작이 있다. 〈오분간(五分間)〉. 1955년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신(神)과 프로메테우스와의 대립을 통하여 현대인과 신의 문제를 상징화시킨 작품으로, 프로메테우스가 2천년 만에 코카서스에서 스스로 신으로부터 자유를 전취(戰取)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신과의 회담에서 신에 대항하여 신의 자리를 차지해 보려는 그의 거만을 그린 후, 결국 신은 신대로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대로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한 채 헤어진다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작자는 이 5분간에 일어났던 인간세계의 무질서와 혼란을 통해 현대인의 신앙 상실과 그 거부로부터 온 혼돈과 혼란을 그리고 있으며, 그 비극을 구할 자는 신도 인간도 아닌 제3의 존재라고 하면서 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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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준
김연준(金連俊, 1914년 2월 20일 ~ 2008년 1월 7일)은 대한민국의 작곡가·언론인·교육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백남(白南)이다. 종교는 개신교(침례회)이다. 생애. 191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1939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뒤 기술보국(技術保國)을 위해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한양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이후 2007년까지 한양대 학교법인인 한양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2008년 타계하였다. 명천 부상(富商)의 아들로 태어나 여덟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만지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됐고, 경성고보(鏡城高普)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음악부의 피아니스트 김영환(金永煥)의 뒤를 이은 현제명(玄濟明)의 지도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덕분에 연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에서 활동했다. 1936년 제15회 연전추기음악회에서 제2 바이올린으로 출연하였다. 한양대학교 총장과 이사장, 대한체육연맹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일보와 기독교신문을 창간하였으며,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회장, 북한인권개선운동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37년 국내 최초의 바리톤 독주회를 개최한 이래 수 많은 가곡을 작곡하고 24차례의 작곡발표회를 개최하는 등 음악가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저서에 『백남문집』, 『사랑의 실천』, 작곡집에 『김연준 가곡 1,500곡집』, 『성가곡집』 등이 있다. 저서로 《백남문집》과 《사랑의 실천》, 작곡집으로 《김연준 가곡 1,500곡집》과 《성가곡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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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1920년)
김상옥(金相沃, 1920년 5월 3일(음력 3월 15일) ~ 2004년 10월 31일)은 대한민국의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이다. 1920년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하였다.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80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제1회 노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시조 외에 동시·시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였다.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 구사가 특징이다.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 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 2004년 10월 30일에 26일 사망한 부인의 유택을 보고온 후 쓰러져 10월 31일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슬하에 2녀 1남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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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바이올린 연주자)
김영욱(金永旭, 1948년 ~ )은 대한민국의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서울 출생. 4세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9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1960년 연주회를 위해 대한민국을 찾았던 피아노 연주자 루돌프 제르킨은 그를 미국에 있는 커티스 음악 학교에 입학하게 했다. 1965년 메리 위던 국제 콩쿠르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레너드 번스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의 지휘자가 이끄는 관현악단과 협연을 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독주자로서의 활동 외에도 독일의 데트몰트 국립 음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요요 마, 엠마누엘 엑스와 더불어 실내악 연주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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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섭
김요섭(金耀燮, 1927년 4월 6일 ~ 1997년 11월 3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아동문학가이다. 본관은 (구)안동(安東)이고 호는 묵산(墨山)이다. 생애. 함경북도 청진(淸津) 나남구역(羅南區域)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19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개 너머 선생》이 당선 되었으며, 이어 《연》 《은행잎 편지》를 발표하였다. 한국의 안데르센이라고 불릴 만큼 동화창작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1945년 8.15 광복 후 이듬해 1946년 월남하였고 1947년 시 《수풀에서》가 동인지 《죽순(竹筍)》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57년 마해송(馬海松)·강소천(姜小泉) 등과 의기상투하여 한국동화작가협회를 발족하고 1961년 자매학교 결연운동을 벌였으며 1965년 소천(小泉)문학상, 1987년 대한민국국문학상 등을 받았다. 1970년 계간지 《아동문학사상》을 발행하였다. 동화집으로 《오, 멀고 먼 나라여》 《깊은 밤 별들이 울리는 종》 《날아다니는 코끼리》 등 30여 권이 있다. 시집으로 《체중(體重)》 《빛과의 관계》 《달을 몰고 다니는 진흙의 거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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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겸
김인겸(金仁謙, 1707년 ~ 1772년)은 조선의 문인이다. 자는 사안(士安), 호는 퇴석(退石), 본관은 안동(安東). 영조 때에 진사로 사신 조엄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1764년) 후, 그 기행을 율문시로 쓴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이 기행 가사는 한국 문학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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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 (농촌 운동가)
김용기(金容基, 1909년 9월 5일 ~ 1988년 8월 1일)는 대한민국의 개신교 농촌 운동가이다. 호는 '일가 (一家)'. 경기도 양주군 초부면 봉안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 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 경기도 양주군에 봉안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하고, 1943년에 일제의 감시를 받았던 여운형의 신변을 도와주곤 했었다. 1955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하였다. 1962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농촌 일꾼을 길러 내는 요람으로 만들었다. 1962년 농림부 장관상·향토문화 공로상을 수상했고, 1964년 공군 참모총장 감사장과 협조 상패를, 1966년 막사이사이상 복지 부문상을, 1973년 초대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그의 철학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처럼 노동과 삶의 연관성을 기독교 적으로 해석하여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바탕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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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경
김자경(金慈璟, 1917년 ~ 1999년 11월 9일)은 대한민국의 여성 성악가이다. 경기 개성 출생. 1935년 원산 누씨고등여학교를 거쳐 194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서울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고, 한국 최초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상연하였다.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던 중 미국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1950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귀국하여 다시 이화여대 음악과 교수가 되었고, 수차례 독창회를 열었다. 한·이 협회 부회장 겸 감사·이화여대 성악과장·음악협회 감사를 역임하고, 한국 첫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립, 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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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찬
김재찬(金載瓚, 1746년 ~ 1827년)은 조선의 정치가이다. 자는 국보(國寶), 호는 해석(海石),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연안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정조 때에 예문관검열, 한림, 규장각직각, 정랑, 교리, 의정부검상, 해조낭관, 부사과, 겸보덕을 지냈으며, 이후 당상관으로 승진해서 이조참의, 대사성, 검교직각, 원춘도관찰사, 대사헌, 규장각직제학, 도승지를 하고 이후 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예조판서, 수어사, 직제학, 평안도관찰사, 좌참찬, 강화유수, 지돈녕부사, 판의금부사, 우빈객, 규장각제학, 빈전제조, 병조판서, 공조판서, 실록당상, 수원유수, 우참찬, 광주유수, 혼전당상, 애책문제술관 등을 지내고, 순조 때 정승이 되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순조 때 영의정에 이르렀다. 홍경래의 난 때는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 이를 평정하여 기근과 병란으로 인한 혼란된 세태를 안정시켰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저서에 《해석일록》 《해석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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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국 (1485년)
김정국(金正國, 1485년 ~ 1541년)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철학자, 성리학자, 서예가, 작가이다.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와 팔여사가,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의성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50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으나 그 뒤 복직하여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생애. 150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당해 고향에 칩거하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1537년 복관되어 전라감사가 되고 이후 병조참의, 공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일찍히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해 시문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에도 조예가 깊었고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문집에는 《사재집》, 저서에 《성리대전절요》, 《촌가구급방》, 《역대수수승통지도》, 《경민편》, 《기묘당적》 등이 있다. 후에 문목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묘소 《사제김정국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에 있다. 2003년 4월 21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기타. 남곤, 김전, 김안국, 이언적 등과 함께 비교적 온건한 온건 사림파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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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남 (1562년)
김제남(金悌男, 1562년 ~ 1613년 6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외척이다. 자는 공언(恭彦),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선조의 장인으로,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는 그의 둘째딸이다. 1585년(선조 18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연천 현감을 거쳐 1601년 사간원 정언․헌납․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로 간택되자 돈녕부도정으로 특진했다가 보국숭록대부 (領敦寧府事)로 승자되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이후 정승판서의 후보에 수차례 올랐으나 사양을 했다. 1613년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16년 인목대비가 폐모되면서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복권되고 뒤에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전의 증손자이며 김안로의 종손이다. 시호는 의민공(懿愍公)이다. 생애. 생애 초반.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을 지내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김오(金祦)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권상(權常)의 딸이다. 종조부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희락당 김안로이고,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김전이다. 또한 김전의 아들로 윤원형의 장인인 김안수 또한 그의 종조부였다. 조부 김안도(安道)는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3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강씨(姜氏)에게 양육되었다. 관료 생활. 1585년(선조 18) 식년과 사마시를 거쳐 159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으며,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다시 연천현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0년에야 연천현감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1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헌납,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생애 후반. 1597년(선조 31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면서 특별 승진하여 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가 그 해 가을에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품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후 승지, 대사간, 참의, 부제학, 도승지, 대사헌, 참판, 제학, 부총관, 훈련대장, 도총관, 지의금부사, 한성부판윤, 대제학, 판서, 좌우참찬, 판의금부사, 좌우찬성, 정승의 후보에 여러번 오르기도 했으나 사양을 했다. 사사와 부관참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1613년 손자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서소문(西小門)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의 아들 셋도 화를 입었고, 부인과 며느리 정씨, 어린 손자 천석(天錫) 등만이 화를 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대두되어 딸 인목왕후가 폐비되자 그도 이이첨 등의 주도로 부관참시되었으며 부인 노씨에게는 위리안치형이 내려지기도 했다. 사후. 1623년 인조 반정 직후 관작이 복구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배되었던 부인 노씨,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며느리 정씨(鄭氏)와 손자 김천석(金天錫) 등은 극적으로 생존, 한성으로 돌아왔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에 안장되었다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67-1 능촌마을)로 이장되었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묘소 입구 좌측에 김제남의 사당 의민사와 그의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사당은 그 후 두 차례 소실되었고, 현재의 사우는 1964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그의 신도비는 인조 때인 1624년에 세워졌으며, 글은 신흠이 지었다. 현재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 67-3 흥법사지 근처에 있으며, 신도비는 후일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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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 (고려)
황상(黃裳)은 고려 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의창(義昌). 아버지는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군(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檜山君) 황석기(黃石奇)이다. 충혜왕 때 호군이 되었다. 1362년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왕을 모시고 피란하였다. 이어 강원도 도만호가 되어 안우 등과 함께 서울을 다시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친 후, 1377년 우왕 때 서강 도원수로서 왜구를 막는 데 공을 세웠다.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스러워 여러 왕의 사랑을 받았다. 원나라 순제도 그의 무술에 찬탄하였다고 한다. 황제가 황상을 불러 "팔이 어떻게 생겼길래 활을 잘 쏘냐?"며 황상의 팔을 직접 만져보기도 하였다. 노년이 되어 젊은 이성계와 활쏘기 대결을 하였는데, 50발까지는 팽팽했으나 50발이 넘어가니 황상이 체력이 떨어져 화살이 빗나가 버렸다. 나이를 고려하면 무승부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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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석 (법조인)
황윤석(黃允石, 1929년 3월 25일~1961년 4월 21일)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판사이다. 호(號)는 국림(菊淋). 어린 시절부터 철학·문학에 관심이 컸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을 지망하여 195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해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1954년 서울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되었다. 1960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서 선구 여성으로 표창을 받고, 이해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 여성 법률가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듬해 여성문제연구회 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해 4월 자택에서 변사하여 그 원인을 둘러싸고 사회적인 논란이 일었다. 사망 전날 부부가 함께 감기약만을 복용했다고 남편이 진술했으나, 평소 황윤석이 시어머니와 불화가 있었다는 점 등이 독살을 의심케 했다. 3차에 걸친 시신 감정에도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고, 그해 12월 남편은 유기치사 혐의로 구속되었다. 남편은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 황윤석의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후. 여성 단체에서 고인의 뜻을 추모하여 사법고시 준비생을 위한 '윤석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한편 고인의 유족이 기금을 마련해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을 통해 운영 중이다. 기금은 총 1억원 규모이고, 태화복지재단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아시아 국가의 여성 교육과 복지를 지원하는 데 쓸 예정이다.
32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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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천 나들목
동서천 나들목(E.Seochoen IC)은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옥포리에 설치된 서천공주고속도로의 1번 교차로이자 서천공주고속도로의 기점이다. 접속 도로와 평면 교차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장항 나들목이라는 가칭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지역 주민의 요구로 인해 명칭을 동서천 나들목으로 변경하여 개통하였다. 화양면, 기산면, 한산면, 마서면, 장항읍 등지로 진출할 수 있다. 동서천 요금소. 동서천 요금소(東舒川料金所, E.Seocheon TG)는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서천공주고속도로 1에 위치한 서천공주고속도로 본선 상의 요금소이다. 2009년 5월 28일에 서천공주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영업을 개시하였다. 교통량 정보. 동서천 요금소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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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회 (로마 교황청)
심의회(審議會, ) 또는 성(省)는 로마 교황청의 행정 조직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중앙 행정기구이다. 각 심의회를 이끄는 장관은 통상적으로 추기경이 맡는다. 지금까지 추기경이 아닌 성직품으로서 심의회의 우두머리 자리를 제수받은 이는 추기경회의에서 추기경으로 임명될 때까지 장관 서리로 명명한다. 최근 들어 이런 관행은 사라지고 있다. 역사와 역할. 초세기 이래 기독교에서는 교구 사제단이 교구장 주교의 전례 행사를 보필하였고, 뒤이어 사목 분야도 보필하는 자문단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황도 로마 교구 성직자들의 보필을 받았다. 교황은 로마 교구뿐 아니라 보편 교회 전체도 사목하는 직무를 수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로마 교구 사제단뿐만 아니라 로마 시에 머무는 주교들의 조언도 받았다. 로마 근교의 교구들도 로마 교구와 특수한 관계로 결합하여 있으므로 로마 근교 교구장 주교들도 교황의 장엄 전례를 보필하는 경우에는 로마 사제단에 포함되었다. 교황은 로마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로 구성되는 사제단과 더불어 교회를 다스렸으며, 좀 더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때에는 로마 근교의 주교들과 로마 교구의 사제단을 불러 모아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이 회합을 시노드라고 일컬었다. 또한, 교황은 중대한 사건을 처리하고자 로마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고, 때에 따라서는 이탈리아 전체 주교들을 전국 공의회로 소집하였으며,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에는 서방 교회의 주교들을 소집하는 총공의회와, 전 세계의 주교들을 소집하는 보편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중세기에 교회가 발전하여 교황이 관여하여야 할 업무가 폭주하고 로마 사제단도 방대해져, 로마 시노드만으로 대처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로마 사제단에 기원을 둔 추기경단이 구성되었다. 각 교구의 주교좌 참의회처럼 12세기에 추기경단이 교황의 자문 기관으로서 법인체로 설립되었다. 교황은 추기경이라 불리던 로마 사제단의 원로들을 새로이 구성하여 이들의 보필을 받게 되었다. 이 추기경들은 처음에는 교황의 전례 집전을 보좌하였으나, 차차 교황의 위임으로 교회 행정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추기경이란 명칭은 로마 교회의 원로에게만 배타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의 추기경단을 이루게 되었다. 교황이 임석하는 추기경단 회의에서 보편 교회의 주요 업무를 다루었으며, 이를 추기경단이라 일컬었다. 12세기 이후에는 로마 관구 공의회나 이탈리아 전국 공의회가 드물게 열렸으며, 그 대신에 추기경들이 교황의 자문에 응하는 추기경회의가 자주 개최되었다. 16세기에 교황의 업무량이 폭주하면서 모든 추기경이 매주 두세 번 총회를 개최하여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매우 비능률적인 일이 되었다. 추기경들은 교황에게 상신되는 다양하고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사안들에 관하여 교황을 신속하게 또 올바로 보필하기 위하여 추기경단 전체 회의 전에 분과 위원회별로 사안들을 나누어 연구하고 검토하게 되었다. 추기경단의 이러한 분과 위원회들이 16세기에 이르러 심의회(Congregatio)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추기경이 모든 심의회에 다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기 분담한 심의회에만 참석하면 되었다. 따라서 업무 결재가 신속하게 이루어졌으며, 소관 업무는 전문화되었다. 필연적으로 이들을 보좌하는 전문 위원들이 요구되었으며 이들을 수용할 기구가 필요해졌다. 이처럼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교황 식스토 5세가 1588년에 교황청 기구들을 체계화하였다.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년)는 현대적 의미의 본격적인 관료 제도를 도입하여 교황청을 설치하였다. 그는 1588년 1월 22일 사도적 헌장 《Immensa aeterni Dei》를 반포하여 교황청의 편제를 확립하였다. 곧 보편 교회의 종교적 업무를 맡은 9개의 심의회와 교황령 통치라는 행정적 업무를 맡은 6개 심의회로 교황청을 구성한 것이다. 각각의 심의회에서는 해당 추기경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회의를 갖았다. 그 후 교황 성 비오 10세가 교황청을 개편하여 심의회들을 현실에 맞도록 재조정하고 그 업무 수행 방법을 개선하였다. 교황청 심의회는 재판 형식으로 안건을 다루어 왔는데, 여기에 업무 성격에 따라 행정적인 방법을 도입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1917년 공포된 교회법전에 실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까지 교회 행정의 바탕을 이루어 왔다. 1967년 8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헌장 《보편 교회의 통치("Regimini Ecclesiae Universae")》를 반포하여 교황청(국무원과 외무평의회, 9개 심의회, 3개 사무국, 평신도평의회, 3개 법원, 6개 사무처, 부속 기관)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급격한 변혁을 겪게 된 교회는 발전한 국가의 행정 조직에도 눈을 돌리게 되고,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황청 기구의 개혁을 단행한다. 교황청 각 부서의 책임 추기경들을 5년 임기제로 임명하여 각 부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통상적으로 교회의 일상 행정 업무를 맡아 왔던 심의회는 9개 부서가 그대로 남았으나, 그 이름에 걸맞게 중복되는 업무를 조정하였으며, 교황이 직접 관장하던 부서도 책임 추기경을 두도록 하였다. 또한, 세계 교회의 업무를 담당하는 교황청의 성격을 살려 각 지역 교회의 주교들이 직접 각 부서에 참여하여, 그들 교회의 소망과 필요성을 교황에게 직접 알릴 수 있도록 하였으며, 유럽권 탈피를 이룩하여 명실 공히 세계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의 교황청 기구 개편은 과거와는 달리 교회법전에 확정하여 수록하지 않고, 국가 행정법처럼 시대와 환경에 따라 교회가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특별법으로 남아 유연성을 줄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교회는 그때그때의 필요성에 알맞게 교황청 기구들을 신설, 개편하게 되었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8년 6월 28일에 사도적 헌장 《착한 목자("Pastor Bonus")》를 발표하고 교황청을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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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포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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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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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이
이가이(, 1968년 7월 19일 ~ )는 대한민국의 여성 3인조 그룹 세또래와 세또래에서 파생된 2인조 댄스 듀오 탐탐, 5인조 댄스 그룹 베이비복스의 구성원이었다. 1987년에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3개의 그룹활동 이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멤버다. 음반. 세또래. 1988년에 있었던 한국의 3인조 여성가수. 이희정, 우윤아, 김정임이 멤버였다. 탐탐. 멤버 김정임의 이민으로 인해 세또래에서 탈퇴, 남은 두 멤버가 이지수, 강현지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활동했다. 소속사를 가수 김창남이 소속된 시티뮤직으로 옮겼다. 솔로. 가요계에 데뷔하기 전, 영화 '우뢰매' 시리즈로 인기를 날렸던 우윤아가 개인사정으로 탐탐에서 탈퇴하며, 탐탐이 해체되었고 이희정은 베이비복스 소속사였던 DR뮤직에 픽업되어 2장의 솔로앨범을 냈다. 2집의 타이틀곡 '너를 보내며'는 동료가수 강수지가 가사를 썼다. 베이비복스. 베이비복스 2집 PR영상에 따르면, 이가이는 키보드와 피아노를 맡았으며 실제로 PR영상에서 피아노를 열심히 쳤다고 한다. 탈퇴 사유는 팬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으며 나머지 멤버들과 상당한 괴리감이 생길 정도의 노안임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로 이를 가리려고 했던 점과 굉장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은 탓에 팬들이 이가이의 탈퇴를 요구했다. 이가이가 탈퇴한 그 자리에는 윤은혜가 새로 영입되었다. 기타. 베이비복스 기준으로 보면 이가이는 여타의 멤버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고령자인데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이 차가 심하다고 해서 아이돌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가이가 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척을 한 것이 팬들에게 밉보인 이유였다. 다른 아이돌의 경우 G.O.D의 경우 박준형은 이가이와 고작 1살 밖에 차이가 안 나며 여타의 멤버들과 최대 12살의 큰 나이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박준형도 다른 멤버들과 동일하게 좋아했으며 애프터스쿨 역시 가희와 다른 멤버들이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팬들이 가희 역시 다른 멤버들과 동일하게 좋아했는데 박준형은 본인의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줘 인기를 얻었으며 가희는 그 많은 나이가 전부 백 댄서 경력이라는 것을 팬들이 알기 때문에 팬들은 가희를 밉보긴 커녕 되려 존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