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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 1928년 11월 3일 ~ 1989년 2월 9일)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오사카 대학을 졸업한 의사이기도 하다. 본명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다. 《우주소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의 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다작 성향, 선구적 테크닉, 장르의 혁신적인 정립으로 "일본 만화의 아버지", "일본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선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가신 데즈카 미쓰모리이며, 고조, 증조 할아버지도 대대로 에도 시대의 난학자였다.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 부속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 재학 중이던 1946년 1월 1일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 『소국민신문』(少国民新聞)에 연재)으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1947년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가 원안을 그린 만화 단행본 『신보물섬』(新寶島)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오사카에서 아카혼(赤本) 붐을 일으켰다. 1950년부터 만화잡지에 등장,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등 히트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1963년、자신의 작품을 토대로 일본 최초의 30분짜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 이후의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0년대에는 『블랙잭』(ブラック・ジャック), 『삼목동자』(三つ目がとおる), 『붓다』(ブッダ) 등의 히트작을 발표하였다. 또한 만년에도 『양지의 나무』(陽だまりの樹), 『아돌프에게 고한다』(アドルフに告ぐ) 등 청년만화에 있어서도 걸작을 남겼다. 데뷔 때부터 사망(1989년)할때까지 일선에서 작품을 발표해 나갔고, 생전부터 일본 만화계에서 「만화의 신」(マンガの神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藤子・F・不二雄、藤子不二雄A)、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야시로 마사코(矢代まさこ)、하기오 모토(萩尾望都)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데즈카 오사무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접촉이 있었던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생애 어린 시절 데즈카 오사무(본명 오사무治)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도요노 군(豊能郡) 도요나카 정(豊中町, 지금의 도요나카시豊中市)에서 데즈카 유타카(手塚粲, 1900년 - 1986년 5월 14일)와 어머니 후미코(文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마침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明治節)이었기에 「메이지」(明治)에서 한 글자를 따서 「治」를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1933년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에 그의 집안은 1년 전에 타계한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효고 현(兵庫県) 가와베 군(川辺郡)의 오하마 촌(小浜村, 지금의 다카라즈카시宝塚市) 가와모(川面)로 이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다카라즈카에는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가 미노오아리마 전기궤도(箕面有馬電気軌道)의 승객 증가를 노리고 전원 풍경 가운데 개발한 신흥 주택지가 산재해 있었고,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宝塚少女歌劇団, 훗날의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의 전신)의 본거지였던 다카라즈카 대극장(宝塚大劇場)、다카라즈카 패밀리 랜드(宝塚ファミリーランド)의 전신인 다카라즈카 신온천(宝塚新温泉)이나 다카라즈카 루나파크(宝塚ルナパーク) 등 행락시설이 차례로 세워져 일종의 별천지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다카라즈카의 인공적인 근대도시 풍경은 데즈카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오사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宝塚ホテル) 안에서 세워진 다카라즈카 구락부(宝塚倶楽部)의 회원이었고 때때로 오사무는 아버지를 따라 다카라즈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또 데즈카 집안의 옆집에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남자배역 톱스타였던 아마쓰 오토메(天津乙女, 본명 도리이 에이코鳥居榮子)와 구모노 가요코(雲野かよ子, 본명 도리이 카코鳥居華子)와 이케노베 쓰루코(池邊鶴子, 본명 도리이 히사요鳥居久代) 세 자매가 살고 있어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이 그 보호자와 함께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등,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여성들과 접할 기회도 많았다. 훗날 데즈카는 자신의 첫사랑 상대도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생도였다는 것, 다카라즈카 생도를 보려고 다카라즈카 대극장에 다녔다는 것, 쓰키오카 유메지(月丘夢路)나 아와시마 지카게(淡島千景) 같은 당찬 여성을 좋아했었다는 것, 1942년작 쓰키오카 주연의 영화 『신설』(新雪)을 스무 번이나 보았다는 것 등을 회고하고 있다. 1935년,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池田師範附属小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교육대학부속 이케다 소학교大阪教育大学附属池田小学校)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도쿄 출신이었던 탓에 긴키 방언을 잘 하지 못했던 그는 학교에서 맴도는 존재였고 2학년때에는 「안경잽이 꼬마」(ガヂャボイ)라는 별명까지 붙어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본 것을 그린 만화 그림이 오사무를 구원해 주게 되는데, 소학교 3학년 때 최초의 만화 「핑핑 세이쨩」(ピンピン生チャン)을 완성했고, 그 뒤 만화 연습을 이어나갔으며 소학교 5학년 때에는 장편만화 「지나의 밤」(支那の夜)을 완성하였다. 그 작품은 급우들 뿐 아니라 학교 교사들 사이에도 화제가 되는 등 이후 교사들로부터도 만화를 그리는 것을 묵인받았다고 한다.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학급 내에서 일약 주목받으며 만화가 계기가 되어 처음에는 그를 괴롭히던 급우가 데즈카의 집에 놀러올 정도가 되는 등 차츰 따돌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데즈카의 생일에는 그의 집에 스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친구들이 집에 올 때는 당시에는 진기한 것이었던 홍차와 과자도 가져왔고 오사무의 생일에는 모둠초밥(五目寿司, 이전 문서에는 모듬초밥이라고 했는데, 여러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모둠이라고 해야 한다. 모듬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숙제 등 학교 공부를 하는 모습을 뜻함.)이며 계란찜 요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린 만화의 일부는 이후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소장 보존되어 있다. 이 시기에 오사무의 동급생 이시하라 마코토(石原実, 오사카 요도야바시淀屋橋 이시하라 시계점石原時計店 사장)와 친해졌고, 그의 영향으로 곤충이나 과학,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데즈카 집안의 넓은 정원에는 곤충 창고가 있었고、또 주위의 전원지대에서도 많은 곤충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곤충 채집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으며, 곤충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해 주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빌린 히라야마 슈지로(平山修次郎)의 『원색천종곤충도보』(原色千種昆蟲図譜)를 읽으며 딱정벌레목 딱정벌레류(オサムシ)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무렵까지는 「治虫」는 그대로 「오사무시」로 읽었다. 청년 데즈카 오사무와 태평양 전쟁 1941년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부립 기타노 중학교(大阪府立北野中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부립 기타노 고등학교大阪府立北野高等学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 전국은 전쟁 중으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학교에까지 물들어 있었고 소학교 시절과는 달리 만화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학교의 교련 교관에게 그가 만화를 그리는 것이 눈에 띄어서 교관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이 시기 그는 급우들 사이에서 제작한 동호회 회지(会誌) 등을 통해 만화를 집필하는 한편으로 데즈카판(手塚版) 「원색 딱정벌레 도보」(原色甲蟲圖譜) 등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도감을 자체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44년 여름에는 체력이 약한 자가 들어 가는 강제수련소에 보내졌다. 9월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군수공장에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데즈카는 격납고 지붕을 덮는 슬레이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전쟁에 따른 수업 연한 단축에 따라 기타노 중학을 4년만에 졸업하고 6월에 근로봉사로 감시초를 서고 있을 때 오사카 대공습이 벌어졌는데, 오사무의 머리 바로 위로 소이탄이 투하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 공습은 데즈카 자신의 체험담으로써 훗날 그가 1974년에 그린 만화 『종이상자』(紙の砦)나 1979년부터 1년 간 그린 『세게 때리기』(どついたれ) 등 자전적 작품 속에서 묘사된다. 이 체험 이후 데즈카는 공장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1945년 3월에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舊制浪速高等学校)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패전 한 달 전인 7월에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의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에 응시해 입학을 허가받았다. 의학전문부는 전쟁의 장기화로 군의관을 속성으로 길러내기 위해 임시로 오사카 제국대학 내에 부설된 것으로 학제상으로는 구제 의학전문학교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구제중학교에서 입학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사카 대학(大阪大学, 옛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는 1951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한창 《정글대제》와 《우주소년 아톰》을 연재하던 와중이었다. 데뷔, 책의 세계로 종전 후, 학생인 데즈카 오사무는 전시에 그린 장편 중에서 "유령남(幽霊男)"("메트로폴리스"의 원형)이라는 장편을 마이니치 신문 학예부에 보냈다. 이는 소식 없이 끝났지만, 그 후, 이웃집에 살던 마이니치 신문의 인쇄국에 다니는 여성의 소개로 어린이의 소국민신문(현 매일소학생신문) 학예부의 호도노(程野)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의뢰를 받아 소국민신문의 오사카 판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ァチャンの日記帳)"을 연재(1946년 1월 1일~3월 31일), 이 작품이 데즈카의 데뷔작이 됐다. 이 "마아짱"은 로컬이면서 인기가 있고 인형과 바리 막과자의 캐릭터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마아짱에 이어서 4월부터 교툐일일신문에 4컷 만화 "진념과 쿄짱(珍念と京ちゃん)"을 연재했으며 이들과 함께 4컷 형식의 연재 장편 작품 "A짱 B짱 탐험기(AチャンB子チャン探検記)", "화성에서 온 남자(火星から来た男)", "로스트 월드(ロストワールド)" (후술 하는 것과는 별개) 등도 각지에 그려지고 있지만 4컷 연재 형식에 한계가 있어, 후 2자 어느쪽도 중단에 가까운 형태로 끝났다. 만화가로서 데뷔 전의 1945년경, 2대째 카츠라하루단지가 지방에서 자주 흥행을 할 때의 포스터화를 제공했다(현물은 다카라즈카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2대 하루단지가 다카라즈카시 청황신 거주라는 것도 있어, 친분을 먹으면서, 데즈카의 만화가를 지망하는 진로를 걱정하고, 만담가가 되라고 권했다고 한다. 1946년 동인지 "망가만"의 정례회를 통해서 후원자인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와 알게 되어 사카이에서 장편 스토리 만화의 합작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는 전후 최초의 호화본의 기획이며, 그것까지 장편 만화를 그리다 모으고 있던 테즈카로서는 바라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략적인 구성을 사카이가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테즈카가 자유롭게 그리려고 하는 형태로 200쪽의 그림 장편 "신보물섬"이 제작된다. 1947년 1월에 출판되자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었다. 영화적 구성과 빠른 이야기 전개를 가진 "신보물섬"은 일반적으로 전후 스토리 만화의 원점으로서 포착된다 베스트 셀러가 된 "신보물섬"은 오사카에 적본붐을 일으키면서 데즈카는 이에 타서 그린 단행본 형태로 장편 작품을 발표하게 된 . 데즈카는 바빠지고, 그동안에 그리고 쌓아 온 장편을 바탕으로 학업과 아울러 한달에 1,2권은 작품을 그리 올려야 했다. 1947년에 발표된 "화성박사"(火星博士), "유령 코롱코 박사(怪人コロンコ博士)", "킹콩(キングコング)" 등은 어린이를 의식한 B급 영화적인 작품이었지만 1948년 "지저국의 괴인(地底国の怪人)"에서는 비극적인 전개도 도입하게 되고 SF 모험 등을 소재로 작품 중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그 해 말에 그려진 "로스트 월드"에서는 다양한 입장의 인물이 얽혀 지구 규모의 장대한 이야기가 그려지져, "메트로폴리스"(1949년) "와야할 세계(1951년)와 함께 데즈카의 초기를 대표하는 SF 3부작를 이룬다. 1949년 서부 영화 "권총 천사"에서는 아동 만화에서 최초의 키스 장면을 그렸다. 1950년에는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를 만화화한 것 외에 '영화 제작의 무대 뒤를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도입으로 시작되는 '신비 여행기', 자신의 만화 수법을 체계화하여 보여준 만화 입문 책의 선구적 작품 '만화대학' 등을 발표하고 있다. 만화 집필이 바쁘게 되면 대학의 단위을 얻기가 힘들어지는데, 데즈카는 의업과 만화와 겸직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교수에서 의사가 되기보다는, 만화가가 되라고 충고하고 또 어머니의 뒷받침도 있고, 데즈카는 전업 만화가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1951년 3월에 의학 전문부를 졸업(5년제, 1년 유급. 이 해에 전문부가 폐지되면서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하고 오사카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1년간 인턴을 맡아 1952년 3월에 제십이회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 1953년 9월 18일에 의적이 등록된다. 이 때문에 나중에 데즈카는 자서전 "나는 만화가"에서 "거기에서 지금도 본업은 의사이시고 부업은 만화인데, 누구도 묘한 얼굴을 하고 이 사실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잡지 연재 개시 데즈카는 오사카에서 아카모토 만화를 그리는 옆, 도쿄에 반입도 하고 있다. 당초에는 코단샤에서는 거절당했지만, 신생각이라는 출판사에서 반입이 성공해, 여기에서 몇 개를 읽은 뒤, 신창간된 잡지 '소년 소녀 만화와 독서'에 1950년 4월부터 '타이거 박사의 진여행'을 연재, 이것이 데즈카의 최초의 잡지 연재 작품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부터 잡지 '만화 소년'(학동사)에서 '정글 대제'의 연재를 개시, 1951년에는 '철완 아톰'(1952년-)의 전신이 되는 '아톰 대사'를 '소년'(코분샤)에 연재하는 등 다수의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했고, 이 해에는 소년 만화지의 대부분에서 데즈카의 만화의 연재가 개시되었다. 1953년에는 "소녀 클럽"(코단샤)에서 『리본의 기사』의 연재를 개시했다. 다카라즈카 가극이나 디즈니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이후의 소녀 잡지에 있어서의 이야기 만화의 선구가 되었다. 1954년에는 '정글 대제' 연재 완결 후에 '만화 소년'에 '불새'의 연재를 시작했다. '불새' 시리즈는 그 후도 휴간 등에 의해 COM, 만화 소년, 야성 시대와 게재지를 바꾸면서 오랜 세월로 그려져, 데즈카의 라이프 워크가 되었다. 월간의 잡지 연재라는 형태는, 데즈카가 그간 단행본으로 다녀온 복잡한 이야기 구성의 재검토를 강요시키고,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나 단순한 이야기 구성 등의 작극 방법에 데즈카를 향하게 되었다 . 한편, 신작 단행본은 1952년의 '밤비' '죄와 벌'의 2권으로 끝을 말하지만, 대신 우편법 개정에 의해 이 시기에 잡지 부록이 급격히 증가해 데즈카는 연재 작품과 평행하여 부록 책자의 형태로 신작 장편 작품을 다수 다루고, 이 형태로 단행본 시대의 작품도 잇달아 리메이크 되었다. 사생활의 면에서는, 1952년에 다카라즈카에서 도쿄로 이주해, 또 다음 1953년에 「만화 소년」편집부로부터의 소개로 도시마구의 도키와 장에 입주 했다. 그 후 도키와 장에는 데즈카에 이어 테라다 히로오 , 후지코 후지오가 입주. 데즈카는 자신이 살고 있던 14호실을 후지코 후지오의 두 사람에게 양도해 도키와 장에서 에서 이동했지만, 그 후에도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후에 유명한 만화가가 되는 사람들이 잇달아 입주해 도키와 장은 만화가의 양산장이 되었다. 이 시기, 데즈카는 도키와 장의 만화가에게 영화를 많이 보도록 추천하고 있어, 데즈카 자신도 십수년간은 해에 365개를 반드시 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53년 데즈카는 간사이의 부호 순위의 화가의 부에서 톱이 되었지만, 직장이 목조2층 건물의 도키와 장이어서 취재하러 온 신문 기자한테 질렸기 때문에, 이후는 의식하고 고가품을 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철완 아톰", "나의 손오공" 등 아동 만화의 인기 작품의 연재를 하면서 데즈카는 1955년에 성인향 만화 잡지 "만화 독본"( 분게이 슌주 신사)에 "제3제국 붕괴", "곤충 소녀의 방랑기"를 발표했으며, 여기에서는 어린이용의 둥그란 그림과 다른 성인향의 터치를 시도하고 있다. 1955년부터 1958년에 데즈카는 지적 흥미를 앞세운 작품을 많이 냈으며,1956년에 SF단편 시리즈 "라이언 북스"를 시작했고, 학습지 "만화 생물학", " 만화 천문학" 등 학습 만화를 발표, 후자는 제3회 쇼가쿠칸 만화상(1957년)의 대상 작품이 되었다. 이 밖에도 유년용 작품이나 그림 이야기, 소설와 에세이 등 만화가의 테두리를 넘은 활동을 하게 되어 있으며,1958년에는 토에이 동화(현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연출가 시라카와 다이사쿠에게 부탁 받고 이 회사의 촉탁이 된 극장용 장편 만화 영화 "서유기"("나의 서유기"가 원작)원안 구성을 맡고 있다. 극화와의 싸움 1958년경부터 각 만화 잡지에 쿠와타 지로, 타케우치 츠나요시, 요코야마 미츠테루 등의 인기 만화가가 다수 출현하고 있으며, 이 시기의 데즈카는 인기 면에서 그 같은 만화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어 데즈카를 위협했던 것은 이 시기에 새로 생겨난 극화의 존재였다. 사회의 어둠을 솔직하게 스트레이트로 그려 극화의 인기는 당시의 데즈카를 크게 앓고 계단에서 떨어진다던가, 오사카의 극화 작가의 거점으로 몰려가는 집회에 참석했다. 당초는 극화 잡지에서도 연재를 갖는 등 했으나, 데즈카의 어시스턴트까지 대본 극화를 수십권이나 그려면 테즈카는 노이로제에 빠지고 정신 감정도 받았다. 또 이미 1957년에는 "황금의 트렁크"("서일본 신문" 연재)에서 극화 풍의 터치를 시도하면서 서서히 극화의 방법론을 자작에 거두어 가게 된다. 1959년 주간지 붐을 타고 주간 만화 잡지 "소년 매거진(코단샤)및 소년 선데이(쇼가쿠칸)가 창간되며 이후 월간 소년지는 점차 사라지고 나가게 되었다. 이때 데즈카는 권유를 받고 쇼가쿠칸의 전속 작가가 되었는데 코단샤에서도 권유를 받고 곤혹스러워했는데 결국 소년 선데이 창간호에는 자신의 손에 의해 "스릴 박사"을 연재, 소년 매거진쪽에는 연재 13회분의 밑칠만을 하는 이시모리 쇼타로에 "쾌걸 하리마오"의 연재를 시키고 있다. 그 해, 다카라즈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이르기까지 전술대로, 유년기부터 디즈니 영화을 애호했던 데즈카는 원래 애니메이션(주:1960년대쯤까지는 일반 세간에서 만화 영화라 불렸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의 제작은 염원의 일이었다. 특히 영향을 받은 작품은 디즈니의 "밤비"(1942년 미국공개)이지만, 이것은 일본에서는 전후의 1951년에서야 공개되었다(디즈니의 "백설공주"(미국 공개 1937년)과 "피노키오"(미국 공개 1940년)도 일본에서 공개는 전후가 된 것이다). 일본은 전시 중은 디즈니와 플라이셔 브라더스 등 미국의 애니메이션의 공개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1942년(쇼와 17년)에 전시 중의 일본에서 처음 공개된 애니메이션 작품인 아시아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 "철선공주"(중국,1941년 73분, 흑백)을 보고 감동했다. 전후 상당히 지난 1980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상하이 미술 영화 제작소에서 감독의 완라이밍과 대면을 하고 손오공와 아톰이 악수하는 일러스트를 제작했다. 프로 만화가가 되기 전의 패전의 년인 1945년 데즈카는 불 타버린 오사카의 쇼치쿠좌에 관해서 해군성 제작의 장편 만화 영화 "모모타로 바다 신병"을 보고감격의 눈물, 이 때 장래에 반드시 자기 손으로 만화영화를 만드는 것을 결의했다. 전후 1946년(쇼와 21년)에 상경했을 때 애니메이터 모집의 벽보를 보고 만화영화 제작 회사"아시다 만화 제작소"(아시다 켄)에 가서 채용을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만화는 데즈카의 애니메이션 제작의 자금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평론가의 오오야 소이치로부터(화교처럼 출신지인 오사카를 떠나서 도쿄에서 번다는 의미의 야유로)"판교"와 비웃음 평가될 정도로 만화를 그리며 벌어 댔다. 또 스스로를 "디즈니광"이라고 말했다. 또 전술대로, 토에이 동화에서 부탁 받고 촉탁 업무를 받고 있다. 무시 프로덕션 설립 1961년, 테즈카는 자신의 프로덕션인 데즈카 프로덕션에 동화부를 설립했다. 당초는 6명의 스태프에서 시작했다. 처음 제작한 작품 "어떤 거리의 이야기"는 스태프의 급료에서 제작비까지 모두 데즈카가 그린 만화의 원고료로 충당했고, 1년 동안 40분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블루 리본상이나 문부성 예술제 장려상 등 여러 가지 상을 받는다. 그 후 1962년에 동화부는 "무시 프로덕션"으로 개명했다. 무시 프로덕션은 전성기에는 400명을 넘어선 수의 정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철완 아톰 무시 프로덕션에 개명 후, 일본 최초가 되는 30분 범위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당시는 텔레비전 만화라고 말했음) 철완 아톰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초에는 총 10명에도 못 미치는 스태프로 매주 텔레비전 방송용으로 디즈니 같은 그림의 장수를 요구하는 풀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작업량 면에서 전혀 불가능하며, 매주 방송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림의 장수를 대폭 삭감하기 위한 다양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수법을 이용하여 짜내기에 이르렀다. 매주 방송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미 미국의 해나 바베라 등에서도 작업 수를 줄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제작은 이루어졌지만 그것들도 참고해서) 시행 착오와 창의력을 쌓아 만든 다양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과 양식은 이후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전반에 큰 영향을 주게 된되었다. 무시 프로덕션의 아톰은 당시 일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대인기 작품이 되었다. 정글 대제 1967년에는 자신의 만화가 원작인 '정글대제(한국명: 밀림의 왕자 레오)'가 제28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산마르코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1969년부터 '아니메 라마 3부작'(두번째 작품 '클레오파트라'를 감독)이 제작된다(주: 아니메 라마의 첫번째 작품 '천일야화'와 2번째 작품의 클레오파트라의 기획과 제작에는 데즈카는 강하게 관여하고 있지만, 세 번째 애니메이션 라마 "슬픔의 벨라돈나"는 데즈카가 무시 프로덕션을 그만둔 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데즈카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종래의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영화와는 반대의 위치에 있어, 성인용으로 만들어진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또한, 무시 프로덕션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는 스기이 기사부로, 린 타로, 야마모토 에이이치, 데자키 오사무, 타카하시 료스케, 토미노 요시유키, 요시카와 소지 등, 애니메이터로서는 나카무라 카즈코, 츠키오카 사다오, 카와지리 요시아키, 아시다 토요오, 야스히코 요시카즈, 스기노 아키오, 아라키 신고, 키타노 히데아키, 무라노 모리비, 카나야마 아키히로 등, 제작자로서는 마루야마 마사오, 스즈키 요시타케, 키시모토 요시나리, 타시로 아츠미, 시미즈 타츠마사, 와카오 히로시, 핫타 요코, 아케타가와 스스무, 사카이 아키오, 메노가와 유지 등 후에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되는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저액의 애니메이션의 공죄 비록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방법을 이용해도 텔레비전 방송의 30분용으로(최저 레벨로) 1개당 2,000장분의 동화을 동화가(애니메이터) 5명으로 담당해, 한사람이 하루 66장 마무리 라는 가혹한 노동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 작품을 1개당 55만엔 이라는 파격적인 제작비로 팔린 것이 제작부의 머리을 조리게 되었다. 데즈카가 애니메이션의 가격을 싸게 팔았던 것은, 당시의 보통의 TV 프로그램의 제작비가 50만 정도였던 것과, 싸게 하면 스폰서에 받아들이기 쉬워지는 것이나, 타인의 경쟁 참가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데즈카 자신이 「대실패였다」 라고 인정한 것처럼, 결과적으로 대오산이었다. '아톰'의 대성공을 보고 타인이 이 분야에 차례차례 진입을 시작해 저예산으로 많은 프로그램이 제작되어 방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초는 경영이 어려웠던 무시 프로도 『아톰』이 대히트하면 판권(머천다이징) 수입으로 막대한 이익이 오르게 되어, 또 해외를 향해 작품의 방영권+파생 상품을 전개할 권리를 판매할 수 있었던 것 등에 의해, 급속하게 규모가 확대해가(최성기에는 사원 총수가 일시는 400명으로부터 최대 550명의 규모가 됨), 「아톰」은 무시 프로덕션을 흑자로 만들었다. 방송이 4년간 계속된 「철완 아톰」은 방영 개시로부터 1년 반으로 데즈카의 만화 원작을 거의 다 사용해 버리고, 그 후에 무시 프로 문예부의 스태프가 독자적으로 만든 에피소드는 인기를 얻기 위한 전투가 그려지는 경향이 강해져, 「철완 아톰」으로부터 데즈카가 좋아한 애니메이션인 것 같은 유머가 없어져 갔다. 또, 데즈카의 존명중에서 “애니메이터의 급료가 싼 것은 데즈카의 탓이다”라고 잡지에서 비난되는 일이 있었지만, 데즈카는 이렇게 반론하고 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이런 목소리가 있어. 데즈카가 그 아톰을 팔 때, 터무니없이 저렴하게 되어버렸으니까, 현재까지 TV 애니메이션은 제작비가 싸고 고생한다고.농담이 아니야." "그 시점에서의 제작비는 저것이 상식이니까, 그 배로 뿌리려고 한다면, 잘못해도 스폰서는 아톰을 사지 않았다. 그러니까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대는 꿈같은 이야기일까?" "분명히 사십 몇만이 제작비였고, 내 반출액은 20만 정도였을까요? 런데 아톰이 맞아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은 당첨된다고 해서, 그로부터 반년 정도 후에는 애니메이션이 금세 탁 터졌어.그 제작비는 무려 백만이에요! 그러니까 그것만 내도 모토가 잡히고 거스름돈이 오면 기업은 밟힌 거야. 그리고 앞은 보시는 것처럼 현재 제작비는 오백만엔이 하한선이고 육,칠백만엔정도는 스폰서가 낼거에요.」. 또한 스기이 기사부로는, 데즈카 오사무가 독자적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수법을 일본에 정착시키지 않으면 일본은 세계 제일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생산국이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아트・애니메이션의 공적 한편, 아트·애니메이션(데즈카 자신은 상업 애니메이션에 대비해 「실험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했다)의 분야에도 공적을 남기고 있다. 무시 프로로 '어떤 거리 이야기'(1962년, 38분), '오스'(1962년), '메모리'(1964년), '인어'(1964년), '담배와 재'(1965년), '시즈쿠'(1965년), '전시회의 그림'(1966년, 33분), '창세기'(1968년), 그 후 데즈카 프로에서 '점핑'(1984년), '낡은 필름' (1985년), 「푸시」(1987년), 「무라마사」(1987년), 「숲의 전설」(1987년, 29분 20초), 「자화상」(1988년)과 장편, 단편의 비상업작품을 제작했다. 제 1회 히로시마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랑프리에 '낡은 필름'이 선정되고 있다(명예 회장 폴 그리모, 심사 위원장은 라울 세르베 , 선고위원장 앙투아네트 모제스). 무시 프로 사내에는 사장이었던 데즈카의 발안에 의해, 실험 작품의 제작 자금에 대해서 20만엔의 조성 제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데즈카에 따르면, 무시 프로를 설립한 것은 본래는 실험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침체와 부활 애니메이션 제작에 나선 이후에도 데즈카는 만화 작품을 정력적으로 발표하고 있었다. 무시 프로의 성립 시기는 만화 작품도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기획이 많아지고 있어 애니메이션과 평행해 "철완 아톰" 원작판의 연재나, 일본 최초의 칼라 TV 애니메이션 "정글 대제'"에 연동해의 동 작품 리메이크판의 연재, 당초 애니메이션화의 기획도 있었던 「마그마 대사」의 연재 등이 1963년 - 1965년에 걸쳐 행해지고 있다.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과 관련하여 'W3' 연재 잡지에서의 다툼이 일어난 W3 사건도 1965년의 사건이다. 1966년, 데즈카는 실험 만화 잡지 'COM'을 창간한다. 선행한 시라토 산페이의 극화 작품 "카무이전"을 간판 작품으로 하는 "갈로"에 대항한 것으로 데즈카의 "불새"를 주목적으로 이시노모리 쇼타로, 나가시마 신지 등의 의욕적인 작품이 게재되었다. 1967년에는 괴기 만화 '뱀파이어'에 이어 '도로로'를 '소년 선데이'에 연재. 이들은 당시 미즈키 시게루에 의해 야기된 요괴 붐을 의식한 작품이었다. 1968년에는 청년지 '빅 코믹'(쇼가쿠칸), ' 플레이 코믹'(아키타 쇼텐) 등이 잇따라 창간해, 청년 만화가 본격적으로 스타트하고 있어, 데즈카도 '빅 코믹'에 '지구를 삼키다, '아야코', '키리히토 찬가', '플레이 코믹'에 '공기의 바닥' 시리즈 등 청년을 위한 작품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의 데즈카의 청년용 작품은 안보 투쟁 등의 사회적인 배경도 있어, 어둡고 음참한 내용의 것이 많았다. 한편 소년지에서는 '파우스트'를 일본을 무대로 번안한 '햐쿠모노가타리', 나가이 고'파렴치 학원'의 히트를 받아, ' 성교육 만화'라고 명명된 ' 야켓파치의 마리아 '(주간 소년 챔피언), 「아폴로의 노래」(주간 소년 킹) 등을 발표하고 있지만, 이 시기에는 소년지에서 데즈카는 이미 낡은 타입의 만화가로 간주되게 되어 있어 인기도 생각만큼 잡히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애니메이션 사업도 경영 부진이 계속되고 있어, 1973년에 스스로가 경영자로 있던 무시 프로 상사, 그 다음에 무시 프로덕션이 파산해, 데즈카도 개인적으로 추정 1억 5000만 엔의 부채 를 짊어지게 되었다. 작가로서의 궁지에 세워져 있던 1968년부터 1973년을, 데즈카는 스스로 "겨울의 시대"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1973년에 "주간 소년 챔피언"(아키타 쇼텐)에서 연재 개시된 "블랙 잭"도, 원래는 소년지·유년지에서 인기가 침체하고 있던 데즈카의 최후를 간취하자는, 카베무라 타이조 편집장의 후의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간 계속되는 싸움으로 독자를 유치하려고 하는 작품 뿐이었던 당시의 소년만화지에 있어서, "블랙 잭"의 매회 읽어낸 형식에서의 연재는 신선하고, 후기의 데즈카를 대표하는 히트작으로 성장해 가게 되었다. 게다가 1974년, "주간 소년 매거진"(코단샤) 연재의 "세번째가 온다"도 계속되어, 데즈카는 본격적 부활을 이루었다. 1976년, 중단된 채로 있던 "불새"가 「만화 소년」(아사히 소노라마)의 창간에 의해 재개. 1977년 시점에서, 데즈카는 '블랙 잭', '세번째가 온다', '붓다', '불새', '유니코', 'MW'와 6개의 연재를 안고 있었다. 또, 동시기의 만화 문고본 붐에 수반해 데즈카의 과거의 작품도 잇달아 재간되고, 또한 같은 해 6월부터의 코단샤 「데즈카 오사무 만화 전집」간행에 의해, 데즈카는 '만화의 일인자', '만화의 신'이라는 평가를 확실히 했다. 말년 1980년대가 되면 에도막부 말기 부터 메이지까지의 시대에 자신의 뿌리를 따랐던 '양지의 나무'(빅 코믹)와 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일반 주간지에서 연재된 '아돌프에게 고한다'(주간문춘) 등 청년만화의 새로운 대표작을 다루게 된다. '양지의 나무'는 제29회 쇼가쿠칸 만화상,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제10회 코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을 수상했다. 1985년, NHK로부터 취재를 받은 시점에는 하루에 불과 1~2시간의 수면으로 만화의 집필이나 애니메이션 제작을 해내고 있었다. "동그라미를 잘 그릴 수 없다"라고 신체 능력의 쇠퇴를 인정하면서도, 취재진에 대해 "(몸의 노화를 극복할 수 있으면) 앞으로 40년(100세)은 그릴게요, 나는, 아이디어만은, 이미 바겐 세일해도 좋을 정도 있어"라고 창작 활동에의 강한 의욕을 보였다. 사망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988년 3월 15일, 갑자기 복부의 격통에 휩쓸려 구급 반송된다. 검사 결과 진행성의 스킬스 위암으로 판명되어 한조몬 병원에 입원, 위의 4분의 3을 절제한다. 5월에 퇴원해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다작을 보였지만 입원전에 비해 점차 신체는 마르고 가늘고, 가끔 휴식을 끼지 않으면 계속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같은 해 10월에 재입원. 11월, 만전의 상태라고는 할 수 없는 가운데 '참가하지 않으면 국제 문제입니다'와 주위의 제지를 뿌리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에서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참석하지만, 귀국과 동시에 상태가 악화. 12월에 다시 수술을 받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말기 상태이며, 간으로까지 암이 전이하고 있었다. 다음 1989년 1월 21일에 데즈카 프로 사장의 마츠타니 타카유키가 병문안 왔을 때에는, 「내 병상은 무엇이야, 너 들어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위암이라는 것은 엎드린 뒤 의사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자면 "그런가…"라고 한마디만 말했다고 한다. 데즈카는 병원 침대에서도 의사와 아내의 제지를 뿌려 만화의 연재를 계속하고 있었다. 같은 해 1월 25일 이후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의식이 회복되면 '연필을 줘'라고 말했다. 아들 마코토는 "(이 무렵의 아버지는) 혼수가 깨면 연필을 쥐게 하지만 곧 의식이 없어지는 반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죽을 때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부탁이니까 일을 시켜줘」라고 일어나려고 하고, 아내는 「이제 괜찮아」라고 잠들려고 하는 등 끝까지 일에의 집착심을 없애지 않았다. 1989년 2월 9일 오전 10시 50분, 한조몬 병원의 병실에서 사망. 60세몰. 데즈카 오사무의 죽음을 만난 마츠타니에 의하면, 데즈카 오사무의 마지막 말은, 「부탁이니까, 일을 해 줘」. 이 말에서도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쳐나고 있다. 통야는 2월 11일, 히가시쿠루메시의 자택에서, 장례는 3월 2일,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오야마 장례식소에서 데즈카 프로덕션의 사장으로서 각각 영업되었다. 데즈카의 죽음에 의해, "그린고", "루드 비히 B", "네오 파우스트" 등의 작품이 미완인 채 남겨졌다. 또, 우메하라 타케시의 소설 "길가메시"의 애니메이션화에 의욕적이었지만, 구상중 그대로 끝났다. 죽기 3주 전(1989년 1월 15일)까지 쓰여진 자신의 일기에는, 그 때의 상태나 신작의 아이디어 등이 적혀 있었다. 주위의 인간은 아무도 데즈카에게 위암임을 전하지 않고, 데즈카 자신은 계속 살아가는 것에 아무것도 의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데즈카가 병원에서 그린 유작 중 하나인 "네오 파우스트"에서는 주요 인물이 위암에 걸려 의사와 주위가 걱정하고 위암임을 전하지 않지만 본인은 위암임을 알고 있고 사망한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연표 1928년 - 11월 3일 오사카부 도요노군 (현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서 출생. 1933년 - 5세 때, 효고현 다카라즈카시로 이사 1946년 - 《마아짱의 일기장》으로 데뷔 1947년 - 사카이 시치마 원작의 장편 만화 《신보물섬》 간행. 회를 거듭해 40만부 판매고 기록. 1955년 - 4월 4일 라디오 도쿄에서 연속극 《리본의 기사》 방송 개시(~ 9. 26.) 1963년 -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후지 테레비에서 방송 1975년 - 《블랙잭》으로 제4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특별상 수상 1989년 - 2월 9일, 위암이 악화되어 도쿄 자택에서 향년 61세의 나이로 타계함. 1990년 - 일생의 업적으로 제19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장관상 수상 1994년 -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이 개관 스타일 데즈카는 서양에서 수입된 영화와 소설에서 서양 문학을 일본적인 양식으로 도입한 것과 창의적인 스토리로 유명하며, 초기 작품은 《밤비》와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을 포함하고 있다. 데즈카가 어린 시절에 읽은 밀트 그로스의 초기 그래픽 노블인 《히 던 허 롱》(He Done Her Wrong)의 영향을 받은 데즈카의 영화적인 컷 배치는 후에 데즈카의 족적을 따르는 만화가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작품 목록 한국어판 발행 작품 목록 평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하자, 만화가로서 데즈카가 세운 업적을 전면 긍정하였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애니메이션 작가로서의 데즈카가 일본의 애니메이션사에서 차지한 역할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TV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데즈카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무시 프로덕션) 제작 프로그램을 원가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가격에 팔아치운 것이, 현재까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극도로 낮게 책정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발언은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같이 보기 도키와 장 미야자키 하야오 무시 프로덕션 일본 애니메이션 디즈니 각주 외부 링크 Tezuka Osamu @World 宝塚市立手塚治虫記念館 데츠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박윤의 데츠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 ②) <사파이어 왕자>, 소녀만화의 중심에 서다, 오마이뉴스, 2006.11.26. 즐거운 책읽기 -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 매일신문, 2010.02.25.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유고 산문집 ‘아톰의 슬픔, 국민일보,2009.01.31 1928년 출생 1989년 사망 일본의 만화가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일본의 프로듀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일본의 불가지론자 도요나카시 출신 오사카 대학 동문 훈3등 서보장 수훈자 데즈카가 일본의 텔레비전 각본가 위암으로 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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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A3%BC%EC%86%8C%EB%85%84%20%EC%95%84%ED%86%B0
우주소년 아톰
《우주소년 아톰》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쇼넨》(少年)지에 연재한 SF만화이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21세기의 미래를 무대로 소년 로봇 아톰의 활약상을 그렸다. 원제는 철완 아톰()이다. 고단샤에서 2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여러 차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개요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만화계의 대표적 작가로, "일본의 만화는 오사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오사무는 1951년 발표한 〈아톰대사〉(アトム大使)에서 아톰 캐릭터를 선보였고 이 캐릭터를 살려 1952년 《쇼넨》에 철완 아톰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등장인물 아톰 1982년 판: 텐마 박사가 죽어가는 아들의 부탁으로 만든 로봇. 그러나 아톰을 폭파하기 위한 과학청 직원의 장갑차 조절 실수로 장갑차가 도쿄 전체를 헤집고 다니자 총리 몰래 아톰을 완성시켰다는 것이 드러난다. 결국 텐마 박사와 함께 미국으로 가던 도중 아틀라스와 싸우게 되고 에너지가 떨어진 아톰은 패한 후 햄에그에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아톰을 알아본 오차노미즈 박사에 의해 구출되어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후 도쿄를 위협하는 악당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2003년 판: 고명한 박사가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만든 로봇. 그러나 고명한 박사에게 작동 정지 당하고 봉인된다. 그러나 유식한 박사가 아톰을 부활시키고, 되살아난 아톰은 도시의 악당과 싸우면서 로봇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다. 아톰의 능력 1982년 판 60개국의 언어 소통 가능(2003년 판과 공통) 인간 청력의 1000배(2003년 판과 공통) 팔과 발에서 제트 분사(2003년 판과 공통) 파워 10만 마력(2003년 판과 공통) 엉덩이에서 기관총 손가락에서 레이저(2003년 판과 공통) 눈에서 서치라이트가 나옴(2003년 판과 공통) 2003년 판 눈에서 물체를 분석할 수 있음 왼쪽 팔에서 레이저포 아롱(우란) 아톰의 동생으로 전투능력과 비행능력은 없으나 동물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고 힘이 5만 마력이다. 아직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몰라서 사고를 자주 친다. 유식한 박사(오차노미즈 박사) 1982년 판: 서커스단에 팔린 아톰을 입양하여 일본으로 데려간다. 또한 아톰의 부모도 만들어 주고 아톰을 수리해 주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을 준다. 2003년 판: 고명한 박사에 의해 작동 정지된 아톰을 부활시키고 아톰을 입양한다. 아톰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한다. 고명한 박사(텐마 박사) 1982년 판: 아톰을 만든 제작자. 2003년 판: 아톰을 만든 제작자. 그러나 아톰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아톰을 봉인한다. 이후 자신이 연구하던 A.I로봇과 아톰 관련 자료를 말소하고 행방불명됐다. 그러나 유식한 박사가 되살린 아톰의 힘을 보고 로봇은 진화하여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 확신하고 아틀라스나 플루토 등 강력한 로봇을 보내 아톰을 진화시킨다. 청기사가 등장하는 25화부터는 아톰이 인간을 공격하여 로봇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각종 사건을 일으킨다. 이후 47화에서 로보타니아를 찾아와 섀도우에게 자신을 로봇으로 개조할 것을 부탁하며 로봇의 신이 되려고 하지만 섀도우가 거절하자 좌절한다. 48화에서 램프가 쏜 미사일을 맞고 고장난 아톰을 고치기로 유식한 박사와 약속하나, 고명한 박사는 아톰의 기억을 봉인하고 철이의 기억을 이식한다. 하지만 램프의 공격으로 자신이 로봇임을 깨달고 아톰의 기억이 봉인 해제되자 절망한 고명한 박사는 자신의 로봇견을 이끌고 과학청을 습격, 아톰과 대면한다. 그러나 아톰이 자신의 제안에 따르지 않자, 로봇폐기공장을 폭파하고 자살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톰이 구하고 감옥에 수감된다. 아틀라스 1982년 판: 아톰의 설계도를 훔친 와루프로기스 남작 이 만든 로봇. 세계정복의 야망을 가지고아톰과 8차례에 걸쳐 결투를 벌인다. 이후 침략당하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외계인과 같이 소멸된다. 2003년 판: 청해(도쿠가와) 그룹 사장의 아들. 화가가 되고 싶어한 자신의 꿈을 박살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깊다. 아톰을 능가하는 공격력과 방어력을 지녔으며 나중에는 특수칩에 의해 조종당하기도 하고 로보타니아에서 활약하기도 한다. 플루토 1982년 판: 술탄이 만든 지상 최강의 로봇,세상에서 가장 강한 7대의 로봇(엡실론, 몽블랑, 노스 2호, 게지하트, 헤라클레스, 브란도, 아톰) 중 6대를 파괴하나 아톰에게 밀리고 200만 마력의 보라에게 참패를당한다. 2003년 판: 고명한 박사가 만든 로봇, 지상에서 강한 4대의 로봇(델타, 엡실론, 헤라클레스, 아톰)중 3대를 파괴한다. 초반에 아톰을 압도하였으나 아톰에게 패하고 다크 플루토에 의해 화구 속으로 빠졌다가 다시 올라와서 다크플루토를 잡고 다시 용암 속으로 빠져 최후를 맞이하는 듯했으나 섀도우에 의해 되살아나 로보타니아에서 인간들과 싸운다. 청기사 고명한 박사를 본뜬 로봇 과학자 섀도우가 만든 로봇, 원래는 로봇 수리용 로봇 부르봉이었으나 격투 로봇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할 때 햄에그에 발각되어 우주에 버려지고 섀도우에 의해 발견, 기억이 봉인되고 청기사로 다시 태어난다. 로봇의 자유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방해가 되는 인간, 로봇을 학대하는 인간, 그리고 아톰까지 해친다. 로보타니아를 건설하고 인간과 전쟁을 벌였으나 아톰의 호소로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을 향해 떠났다. 햄에그 1982년 판: 에너지가 빠진 아톰을 서커스단에 데려가 학대한다. 아톰을 버리려고 하지만 아톰이 전기 프랑크를 성공하자 아톰에게 눈독을 들이고 유식한 박사의 아톰 입양을 반대하나 캐시가 가짜 아톰을 부순 것에 속아 아톰 노예 계약을 파기한다. 2003년 판: 어둠의 로봇 크래쉬를 지휘하는 남자. 17화에 처음 등장한다. 플루토와 자신의 격투로봇을 대결시켜 큰 돈을 벌려고 했으나 플루토가 10초만에 격투로봇을 모조리 박살내서 실패한다. 거기에다가 플루토의 돌진으로 자신의 우주선이 모두 박살나고 자신도 죽을 뻔 한다. 32화에서 다시 등장. 화성에서 어둠의 로봇 크래쉬를 지휘하고 있다. 아톰과 청기사VS자신의 격투로봇으로 돈을 벌려고 했으나 아톰의 손에 로봇 조종장치가 박살나고 분노한 청기사가 자신의 비상탈출셔틀을 두 동강 내버려 추락하나 아톰이 구해준 후 경찰에게 넘겨진다. 램프 의원(남) 1982년: 로봇 노예화를 주장하는 남자. 부하인 킬러 로봇 제우스를 이용하여 고위급 로봇들을 부수고 다니다가 체포된다. 2003년: 연방의회의 대표적인 반로봇 의원. 스폰서로부터 자금을 받고 TV에 출연하거나 과학청 앞에서 시위, 각종 흉계로 세상의 반로봇 감정을 부채질한다. 46화에서 연방의회의 실력자 레드 장군의 딸 애나가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이를 기회로 레드 장군을 이용하여 세상의 반로봇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하지만 그의 집에 수배중인 니트로 박사가 있다는 사실이 수세미 경감에게 발각되고, 의원직 상실+니트로 박사의 체포로 인해 권력을 잃게 된다. 48화에서 대형 미사일을 발사해서 로보타니아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아톰이 저지한다. 그러나 미사일의 폭발로 아톰이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환호한다. 하지만 스폰서들이 일제히 자금 지원을 거부하고, 절망한 그는 마운트 아머를 이용해 고명한 박사의 집을 파괴하지만 아톰에게 저지당하고 수세미 경감에게 체포된다. 과거: 42화의 독백에서 그의 과거가 밝혀진다. 원래는 로봇 메이커 사의 신임 사장으로, 낙하산 인사로 인해 사내에 입지가 좁은 인물이었다. 그러던 도중 로봇 박람회에 신형 로봇을 발표하러 가게 되고, 중간에 폭풍우를 만나 비행기가 추락하고 만다. 아포이나 산에 추락한 그는 비행기에 실려 있었던 신형 로봇과 같이 지내게 되고, 점차 그를 친구로 인식하며 '프렌드'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러나 아포이나 산이 분화 할 때 구조대가 그를 발견하게 되고, 램프는 '프렌드'는 두고 가면 안 된다고 했으나 구조대가 강제로 비행기에 태우고 탈출한다. 탈출할 때 램프는 산 위에서 자신을 보는 '프렌드'를 보았고, 나중에 신형 로봇이 대량생산 된 것을 보고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신형 로봇을 모조리 폐기한 후 반로봇주의자로 거듭나게 된다. 스컹크 1982년 판: 아틀라스를 만든 장본인 2.(아톰의 설계도를 찍어 와루프로기스 남작에게 전해 줬다.) 이후 아틀라스에게 도둑질을 교육시키다가 아틀라스가 폭주하자 도주했다. 이후 조직의 보스가 되어 도둑질을 하다가 개조된 아틀라스를 만나고, 아틀라스에 의해 죽을 위기를 넘긴다. 이후 프랑켄을 이용하여 거액을 훔치고 국회의원 후보에게 접근하여 돈을 뜯어내는 등 악행을 일삼는다. 2003년 판: 4화에 처음 등장. 투명로봇인 시엘을 이용하여 보석상에서 보석을 훔쳐오게 한다. 그러나 시엘이 솔로몬의 왕관을 훔쳐오자 시엘을 버린다. 12화에서 거액을 훔치다 경찰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구형로봇 점보를 되살려 크로이첼 형무소를 습격, 스컹크를 탈옥시키는데 성공한다. 15화에서는 연방의원에게 접근하여 A.I로봇을 말살하는 로봇 사카보트를 만들어 로봇들의 인공지능을 약탈, 고가에 되판다. 그러나 사카보트의 오작동으로 자신 역시 사카보트에 흡수당한다. 아톰이 구해준 이후 16화에서 사냥꾼로봇 레드를 만들어 로봇의 인공지능을 탈취, 무기로 개조해서 판다.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아톰과 아스, 레드까지 다 날려버리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나중에는 자기로봇인 가뎀으로 금괴를 훔치려하지만 수염영감에게 붙잡힌다. 엡실론 1982년 판: 고아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로봇, 빛에너지로 상대방을 공격하나 흐린 날에 플루토와 싸워 졌다. 2003년 판: 로봇 환경관측원이다. 플루토와 싸웠으나 해저화산지대에서 광자포를 쏘지 못해 플루토에게 졌다. 나중에 아포이나 산 분화 사건에서 활약하고 로보타니아 사건에서 애나와 함께 남극으로 간다. 델타 로봇경찰이다. 부하로봇 4대와 함께 '아스'에 소속되어 있으며 로봇사냥꾼을 잡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플루토와 결전을 벌여 이길 뻔 했으나 플루토에게 자신의 위치가 들켜 기관포 맞고 쓰러졌다. 수염영감(반 슌사쿠) 1982년 판: 아톰의 반 선생님으로 무술도 할 줄 안다. 아톰의 조력자 역할을 한다. 2003년 판: 탐정으로 유식한 박사의 비서인 서연의 숙부이다. 주로 실종된 동물을 찾는 일을 한다. 섀도우 고명한 박사가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삽입해 만든 로봇. 고명한 박사와 마찬가지로 아톰을 진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청기사를 만들고 자유로봇들의 은신처인 강철섬을 만들어 주며, 나중에는 로보타니아를 건국하여 인간들과 대결한다. 그러나 아톰의 연설로 청기사의 계획이 실패하자, 섀도우는 로보타니아를 발사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다. 수세미 경감(타와시 경부) 1982년 판: 동경의 경찰. 로봇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2003년 판: 메트로 시티의 경찰. 로봇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지만 때때로 아톰에게 의지한다. 프러더(카타리) 반로봇 단체의 리더, 메트로 시티에서 로봇을 몰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다른 반로봇 단체와 다른 점은 다른 반로봇 단체는 A.I.로봇을 반대하지만 프러더는 로봇 자체를 반대한다. 니트로 박사(폭탄마 카토) 반A.I.로봇주의자, 과학청 시절 살상무기를 개발한 것이 들통나 유식한 박사에 의해 해임됐다. 이에 앙심을 품고 유식한 박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램프의 집으로 도망간다. 이후 램프와 함께 반로봇 감정을 부채질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위치가 들통나 수세미 경감에게 체포된다. 파괴이야말로 예술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 파괴를 위해 폭탄을 많이 사용한다. 로봇견 고명한 박사가 만든 개로봇, 고명한 박사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다. 서연(유코) 유식한 박사의 비서, 매우 깐깐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메르키아데스(플라즈마 웨이브 망원경)으로 외계 생명체를 조사하다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할리(하레) 로봇볼 선수다. 전 세계 최고의 사령탑이나 아톰과 플루토에게 처절하게 패했다. 실사판 1959년 3월 7일부터 1960년 5월 28일까지 마이니치 방송(舊 NET 계열)에서 제작·방송된 드라마이다. 출연진 세가와 마사이리 네기시 가즈마사 나카가와 미쓰오 모리노고로 네기시 히로코 미키 히로시 라쇼몬 쓰나고로 기타가와 요네히코 다나카 아키오 도미나가 이치로 시미즈 긴이치 와카하라 하루에 기야마 히로시 구라타 지조 나카에 류스케 제작진 프로듀서: 마쓰자키 게이지, 요네야마 쓰요시 각본: 이와타 시게토시, 고오로기 하루오 원작: 데즈카 오사무 음악: 오가와 히로오키, 마스다 가쓰유키 촬영: 요시다 유타카 연출: 시바 세이카, 요시카와 히로시 애니메이션 1957년에는 KRTV(현:TBS)에서 '모험만화인형극 철완 아톰'을 방영하였고 실사판은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마이니치 방송제작, 후지 TV계열로 방영하였지만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후지 TV에서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방영되었다. 흑백 화면으로 총 193화가 제작되어 평균 3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컬러로 총 52화가 제작되면서 니혼 TV에서 방영하였고,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는 후지 TV, 한국에서는 SBS에서 1995년 2월 27일부터 1995년 6월 7일까지 총 50화로 방영했고, 이후 2003년 11월 19일부터 2004년 6월 9일까지 재방영되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며 높은 시청률을 과시했다. 또한 2010년 1월에는 아스트로 보이: 아톰의 귀환이 헐리우드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애니메이션 (1963년) 애니메이션 (1980년) 1980년대 TV 시리즈로 제작된 내용과 관련성은 확신할 수 없으나, 일본 국내 영화 방송이었던 "수요 로드쇼"에서 극장판의 형식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아톰에서 보기 드문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주제로한 내용이었으며 배경은 하와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행이 과거로 갔을 때 유적에 직접 새겨둔 문양을 현대에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유식한 박사의 시간 여행이 사실임을 확인하며 웃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애니메이션 (2003년) 2003년 4월 6일부터 2004년 3월 28일까지 후지 TV에서 제작·방송된 애니메이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SBS를 통해 2003년 11월 19일부터 2004년 6월 9일까지 방영되었다. 출연진 아톰 (성우: 쓰무라 마코토, 정미숙) 아룡(아롱), 서연 (성우: 마루야마 미키, (성우: 카와세 아키코, 지미애) 고명한 박사 (성우: 오오와다 신야, 유민석) 로비타 (성우: 타츠타 나오키, 오인성) 봉구 (성우: 쿠마이 모토코, 구 (성우: 구마이 모토코) 켄이치 (성우: 사토 유코) 황보 (성우: 치바 스스무) 봉구 (성우: 구마이 모토코, 이연희) 켄이치 (성우: 사토 유코) 황보 (성우: 치바 스스무, 엄상현) 유식한 박사 (성우: 카츠타 히사시, 황원) 스컹크 (성우: 야오 가즈키, 김환진) 아틀라스 (성우: 히야마 노부유키, 故 김일) 김명준 소년연기 플루토 (성우: 오오쓰카 아키오) 수세미 경감 (성우: 긴가 반죠, 박규웅) 콧수염 아저씨 (성우: 토미타 코세이) 사라 (성우: 코야마 마미) 크리스 (성우: 츠다 쇼코) 가라 (성우: 토요구치 메구미) 청기사 (성우: 다나카 히데유키, 김민석) 입실론 (성우: 히라마츠 아키코) 제작진 기획: 시미즈 요시히로, 시미즈 겐지 원작: 데즈카 오사무 촬영: 다카하시 히로카타, 노구치 하지메 음향효과: 미마 마사후미 미술: 가토 히로시 캐릭터 디자인: 세야 신지 메카닉 디자인: 아라마키 신지, 다카쿠라 다케시 작화 감독: 세야 신지 세계관 메트로 시티 아톰이 살고 있는 도시, 허구한 날 괴물로봇, 악당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도시는 의외로 멀쩡하다(?). 연방정부에 속해있는 자치권이 있는 도시이며, 아마도 연방의 중심도시인걸로 추측된다.(실제로 연방의회도 메트로 시티에서 열린다.)지금까지 나온 도시들 중에 가장 최신식인 도시. 위치는 해안 도시이며 중심부는 고층빌딩이 많지만 교외로 갈수록 건물이 낮아지며 중간중간에 고가도로가 있다. 교외에는 G-O-OM(메트로 시티 발전로봇)과 우주공항이 있고, 근처의 작은 섬에는 크로이첼 형무소가 있다. 도시 중심에 과학청이 있다. 20년전 로봇혁명이 진행되면서 반로봇 감정이 일고 있는 도시이다. 경찰은 상당히 무능(?)하다. 연방정부 메트로 시티를 포함하여 여러 국가들이 모여 만든 정부, 아직까지 메트로 시티 외의 가입국은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진 기관으로는 연방의회와 연방의 정규군인 율리시스가 있다. 연방정부 인물 램프 의원 유식한 박사 레드 장군(율리시스 지휘관) 리온 연방의회 의장 마유라 낙후된 왕국이었지만 로봇을 받아들인 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나라. 메트로 시티와 다르게 동양적이다. 화성 20년 전과 달리 테라포밍이 상당히 진행됐으나 그에 따라 범죄율도 급상승, 로봇 밀매장이 되고 말았다. 미국 서부를 많이 닮았다. 플루토에게 진 후 햄에그가 활동중인 곳이다. 아직 완벽하게 테라포밍이 되지 않아 화성 거주민은 외출할 때 산소가 나오는 막이 쳐지는 모자를 따로 써야 한다. 로보타니아 청기사가 해체처분하러 가는 로봇들을 탈취하여 남극에 세운 나라. 국토는 중앙의 성과 그 주변 영토이다. 로보타니아의 건국을 용납 못한 연방의회의 결정으로 율리시스가 로보타니아를 치러 가나, 로보타니아의 반격으로 인해 기갑 사단과 공중 편대가 전멸한다. 이에 격분한 레드 장군이 로보타니아에 셔틀라이트 빔포를 조준하나 아톰과 청기사의 공격으로 빔이 빗나가 실패한다. 그러자 레드 장군이 본대의 전력으로 로보타니아를 섬멸하기로 결심하나 유식한 박사와 아톰의 중재로 마지막 대화를 시작한다. 아톰의 연설에 자신이 따르던 로봇이 이탈하자 로보타니아는 남은 로봇들을 데리고 우주로 날아간다. 로봇 아톰 (2014년) 데즈카 프로덕션 및 요미우리 TV 방송에서 나이지리아의 방송국 Channels TV와 제휴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며, 총 8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 내에서는 방영되지 않았다. 아톰 더 비기닝 (2017년) GO! GO! 아톰 (2019년) 2019년 10월 3일부터 2020년 10월 1일까지 TV 도쿄 계열에서 방송되었던 애니메이션이다. 그 후로 대한민국에서도 VOD보기 가능하며, 2021년 7월부터 재능TV에서 고 아스트로보이 고!란 타이틀로 방영 중이다. 영화 2010년 1월 13일 개봉된 아스트로 보이: 아톰의 귀환. 출연진 아톰 (성우: 유승호) 덴마 박사 (성우: 조민기) 고라 (성우: 남지현) 스톤총리 (성우: 유세윤) 제작진 감독: 데이빗 보워스 원작: 데즈카 오사무 줄거리 가까운 미래,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사람들은 큰 산을 떼어내어 구름의 윗부분으로 올려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메트로시티는 로봇과함께 번성한다. 메트로 시티의 로봇문명을 탄생시킨 텐마 박사는 정부의 압력으로 전투로봇인 '피스키퍼'를 만들게 되고, 이것을 보고 싶어한 텐마 박사의 아들 '토비'는 실험을 보다가 호기심에 실험현장에 너무 가까이 가서 폭주한 '피스키퍼'에 흡수당해 죽는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텐마 박사는 아들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게 되고, '토비'의 DNA와 블루 코어를 넣어 로봇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로봇이 '토비'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텐마 박사는 로봇을 버린다. 가출한 로봇은 블루 코어 에너지를 노린 '스톤 총리'의 추격 때문에 '서페이스'로 떨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대부인 헴에그와 코라를 만나게 된다. 코라 일행과 함께 살던 '아스트로' 로봇 혁명단을 만나고, 토목공사용 로봇인 '조그'를 되살리게 된다. 그러나 '조그'를 끌고오는 과정에서 아스트로가 로봇임을 안 '헴에그'는 로봇 격투장에서 아스트로를 계략에 빠뜨린 후 격투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러나 '아스트로'는 나오는 로봇을 족족 부숴버리고, 화가 난 '헴에그'는 '아스트로'를 공격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메트로 시티 전함이 나와 아스트로를 끌고 간다. 다시 '텐마 박사'와 대면한 아스토로는 블루 코어가 빠져 작동 정지 되고, 블루 코어는 '스톤 총리'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총리가 '아스트로'를 장난감이라고 한 것에 대해 화가 난 '텐마 박사'는 블루 코어를 빼돌려 '아스트로'를 부활시킨다. 부활한 아스트로는 과학청을 탈출하고, 분노한 스톤 총리는 레드코어를 '피스키퍼'에 장착, '아스트로'를 잡고 블루 코어를 되찾아 오게 한다. 그러나 폭주한 '피스키퍼'는 오히려 '스톤 총리'를 흡수하고, 도시를 공격한다. 한편 도시를 탈출한 '아스트로'는'피스키퍼'가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유리 청소 로봇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돌아가 '피스키퍼'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한편 '서페이스'에서는 아이들이 헴에그를 붙잡아 에어카를 탈취하고 메트로 시티로 향한 후 위기에 빠진 '아스트로'를 구하지만 쫓아온 '피스키퍼'가 발전소를 파괴해 메트로 시티가 추락할 위기에 놓인다. '아스트로'는 코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트로 시티를 위기에서 구한 후 다시 '피스키퍼'와 대결하지만 '피스키퍼'의 로봇팔에 잡히고 중심부로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블루 코어와 레드 코어의 충돌로 둘은 튕겨진다. 이후 텐마 박사한테서 레드 코어와 블루 코어가 충돌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낸 아스트로는 '피스키퍼'의 중심부로 돌진하여 동반자살한다. 이후 살아난 스톤 총리는 경찰에 체포되고 아스트로는 에너지를 '조그'한테서 받아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이때 외계인이(?) 메트로 시티를 공격하고 아스트로는 '외계인'에게 펀치를 날린다. 같이 보기 철인 28호 뮤지오 각주 참고 문헌 및 링크 국내공식 에이전시 (주)지앤지엔터테인먼트 02-2108-7066 / yungpali@naver.com 사이토 지로 지음, 손상익 옮김, 《아톰의 철학》 -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세계, 개마고원, 1996 (리뷰) <플루토>, '우라사와 나오키X데즈카 오사무' 그 장대한 출발 - 오마이뉴스, 2006.11.27. astroboy.jp TezukaOsamu@World 베스트 애니메 1 2 Read first chapter online 데즈카 오사무 1963년 애니메이션 1964년 애니메이션 1965년 애니메이션 1966년 애니메이션 1980년 애니메이션 1981년 애니메이션 2003년 애니메이션 2004년 애니메이션 1963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로봇 애니메이션 후지 TV 계열 애니메이션 닛폰 TV 계열 애니메이션 사이보그를 소재로 한 만화 동양방송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SBS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투니버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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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거법
소거법(消去法, )은 연립방정식(특히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간단한 기법이다. 미지수의 개수를 줄여나가는 것은 소거법의 관건이며, 아래와 같은 서로 비슷한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 특정 미지수를 포함한 항의 계수가 0이 되도록, 곱셈이나 나눗셈을 써서 미지수 하나의 계수를 같게 만든 후 더하거나 뺌(가감법, 加減法; ) 특정 미지수의 남은 미지수로의 표현을 방정식에 대입(대입법, 代入法, ) 특정 미지수의 남은 미지수로의 두 가지 표현을 등호로 연결(등치법, 等値法) 소거법을 통해 연립방정식의 해가 만족해야 할 일련의 필요조건들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들 중 어떤 조건이, 연립방정식의 해가 될 충분조건이기도 하면, 그 조건이 곧 연립방정식의 정확한 해이다. 만약 필요조건들이 모순이라면, 연립방정식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의의 연립일차방정식은 소거법만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 불능 여부 등에 대한 판단 없이는 다소 맹목적이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의 실질을 추상화하여 얻어진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법이다. 소거법은 일반적인 연립방정식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소거법만으로 풀이되는 특별한 연립방정식은 연립일차방정식 이외에도 존재한다. 연립일차방정식의 예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을 가감법으로 풀이할 것이다. 두 방정식을 더해서(즉 ) 를 소거하면 즉 이를 첫번째 방정식에 대입하면 즉 따라서 이다. 당연히 이므로, 튜플 이 바로 (유일한) 해이다. 다르게는, 만약 대입법과 등치법에 의해 를 소거한다면, 그 과정은 각각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에 의해 를 로 표현한 식을 에 대입) (에 의해 를 로 표현한 두 식을 등호로 연결) 삼원일차 연립방정식 은, 그리고 을 통해 얻은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에서 를 구해서 에 대입하면 해 를 구할 수 있다. 다음 예시는 앞선 것들과 조금 다르다. 반대로 따라서 정확한 해는, 임의의 꼴의 튜플이다. 해일 수 있는 튜플에 대한 반대 방향으로의 검증은, 해의 구조를 미리 알면 어느 정도 생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지수와 방정식의 개수가 같은 연립일차방정식에 대해서는, 만약 계수행렬의 행렬식이 0이 아니면, 해가 유일하다는 결론이 있다. 다른 예 자유낙하 시의 속도-시간, 변위-시간 관계식 으로부터, 를 소거하여, 속도-변위 관계식 를 얻을 수 있다. 가우스 소거법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을 구체화, 정형화하여 얻는, 연립일차방정식의 해법이다. 소거법은 엄밀히는 연립일차방정식이 성립할 필요조건만을 제시하므로, 정확한 해집합을 구하기 위해선 해의 후보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하지만, 가우스 소거법은 원래와 동일한 해집합을 갖는 연립일차방정식으로 전환시키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 각주 초등대수학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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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스 소거법
선형대수학에서 가우스 소거법(Gauß消去法, )이란,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알고리즘이다. 풀이 과정에서, 일부 미지수가 차츰 소거되어 결국 남은 미지수에 대한 선형 결합으로 표현되면서 풀이가 완성된다. 가우스 소거법은 보통 행렬을 사용하며, 첨가 행렬을 그와 풀이가 같은 더 간단한 행렬로 변환하여 풀이를 완성한다. 가우스 소거법은 행렬식과 역행렬의 계산에도 응용된다. 정의 체 에 대하여, 개의 미지수에 대한 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연립일차방정식 이 주어졌다고 하자. 여기서 은 주어진 행렬이고, 은 개의 미지수를 포함하는 열벡터이다. 즉, 이는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기본 행 연산 이 경우, 이 연립방정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산을 가할 수 있다. 이들을 기본 행 연산(基本行演算, )이라고 한다. (행의 치환) 의 번째 행과 번째 행을 서로 바꾼다. (행의 상수곱) 번째 행을 0이 아닌 임의의 상수 으로 곱한다. (행의 합) 임의의 상수 에 대하여, 번째 행의 배를 번째 행에 더한다. 행사다리꼴행렬 일반적으로 사다리꼴행렬(Echelon matrix,에쉴론 메트릭스, 또는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 에 대하여, 이라고 하면, 를 번째 행의 선행 계수(先行係數, )라고 한다. 선행 계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행렬 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을 행사다리꼴행렬(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만약 이라면, 모든 에 대하여 이다. 만약 이며 와 가 존재한다면, 이다. 행렬 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을 기약행사다리꼴행렬(旣約行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은 행사다리꼴행렬이다. 가 존재한다면, 이며, 모든 에 대하여 이다. 즉,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의 항들이 대략 위에는 사다리꼴, 밑에는 0인 형태의 행렬이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 조건은 행사다리꼴행렬 조건보다 더 강한 조건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행렬은 행사다리꼴행렬이다. 다음과 같은 행렬은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이다. 가우스 소거법 가우스 소거법은 행렬 을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행사다리꼴행렬로 만드는 알고리즘이며, 다음과 같다. 먼저 첫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선행 계수가 위치하는 가장 작은 열수 을 찾는다. 이라면, 첫번째 행을 인 어떤 번째 행과 치환한다. 모든 번째 행에 첫번째 행의 배를 더해, 밑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그 뒤, 두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어떤 번째 행의 선행 계수가 위치하는 가장 작은 열수 을 찾는다. 이라면, 두번째 행을 인 어떤 번째 행과 치환한다. 모든 번째 행에 두번째 행의 배를 더해, 밑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뒤에 오는 다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한다. 일반적으로, 번째 행은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어떤 번째 행의 선행 계수가 위치하는 가장 작은 열수 을 찾는다. 이라면, 번째 행을 인 어떤 번째 행과 치환한다. 모든 번째 행에 번째 행의 배를 더해, 밑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만약 어떤 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째 행에서 멈춘다. 만약 항상 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번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하며, 으로 둔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을 원한다면, 찾았던 모든 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추가로 거친다. 번째 행에 를 곱해, 를 1로 만든다. 모든 번째 행에 번째 행의 배를 더해, 위의 항들을 0으로 만든다. 여기서 이며 인 데 주의하자. 사실, 이는 행렬의 계수이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의 과정을 특히 조단이 제시한 "가우스 조단 소거법"으로 부른다. 성질 기본행연산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모두 가역 연산이다. 행의 치환의 역연산은, 자기 자신이다. 행의 상수곱의 역연산은, 그 행에 그 상수 대신 역수를 곱하는 것이다. 어떤 행에 다른 행의 배수를 더하는 것의 역연산은, 더하는 대신 빼는 것이다. 두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이 하나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행동치라고 한다. 첨가 행렬이 행동치라면, 연립방정식의 풀이는 서로 같다. 기본 행렬은 단위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한 번 가하여 얻는 행렬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기본 행렬 곱셈과 같다. 행사다리꼴행렬 가우스 소거법 알고리즘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은 그와 같은 해를 갖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행렬로 변환할 수 있다. 따라서,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에 대한 풀이로 귀결된다. 행사다리꼴행렬 에 대한 연립일차방정식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존재한다. 상수항이 0이 아닌 행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수항은 번째 열의 항, 0행은 선행 계수가 없는 행을 뜻한다.) 해가 존재하는 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유일하다. . 즉, 0행이 아닌 행의 개수는 미지수의 개수와 같다. 즉, 선행 계수가 없는 열이 계수 행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해가 존재하는 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유일하지 않다. (체의 표수가 0이라면, 이는 해가 무한히 많은 것과 동치이다.) . 즉, 0행이 아닌 행의 개수는 미지수의 개수보다 적다. 즉, 선행 계수가 없는 열이 계수 행렬에 존재한다. 행렬식의 계산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을 계산할 수 있다. 이는 정사각행렬에 대하여 다음 사실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기본행연산을 가하면, 행렬식은 "상수배" 변화하며, 주어진 기본행연산이 행렬식을 변화시키는 배수는 자명하다. 즉, 행을 치환하면, 행렬식은 -1배가 된다. 행에 상수곱을 하면, 행렬식은 그 상수의 역수배가 된다. 어떤 행에 다른 어떤 행의 상수배를 더하면, 행렬식은 변하지 않는다. 가우스 소거법을 통해 행렬을 행사다리꼴행렬로 변환할 수 있다. 특히 정사각행렬이므로, 이는 0행(즉 모든 항이 0인 행)을 갖거나, 상삼각행렬이다. 0행을 갖는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은 0이다. 상삼각행렬의 행렬식은 모든 대각항의 곱이다. 역행렬의 계산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역행렬을 계산할 수 있다. 행렬 의 역행렬은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에 단위행렬을 추가하여 행렬로 만든다. 이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로 만든다면, 행렬 은 과 같다. 계수 계산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행렬의 계수를 계산할 수 있다. 행렬 의 계수는 가우스 소거법을 가하여 얻는 행사다리꼴행렬에서 0이 아닌 행의 계수(즉, 선행 계수의 개수) 이다. 예 해가 유일한 연립 선형 방정식 다음과 같은 선형 방정식이 주어졌다고 하자. 첫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첫째 식의 -2배를 둘째 식에 더한다 첫째 식의 1배를 셋째 식에 더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둘째 식의 1배를 셋째 식에 더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다. 이제 행렬이 사다리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미지수들을 가장 밑의 행으로부터 순서대로 대입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을 후방대입(back substitution)이라 한다. 해가 유일하지 않거나 없는 연립 선형 방정식 정칙(Nonsingular) 행렬일 경우의 예 (식 2와 3을 바꾸어 해결한다) 비정칙(Singular) 행렬일 경우의 예 (해가 없는 경우도 있다.) 역행렬의 계산 다음과 같은 행렬 의 역행렬을 계산한다고 하자. 기본행연산을 가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은 다음과 같다. 같이 보기 사다리꼴행렬 크래머 공식 외부 링크 각주 참고 문헌 수치선형대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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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A%B0%EA%B5%AC%EC%8A%A4%ED%8A%B8%20%ED%8E%98%EB%A5%B4%EB%94%94%EB%82%9C%ED%8A%B8%20%EB%AB%BC%EB%B9%84%EC%9A%B0%EC%8A%A4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1790년 11월 17일 ~ 1868년 9월 26일)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리고, 생애 오늘날 작센안할트주 나움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하인리히 뫼비우스()였으며, 아버지는 춤 강습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이었다. 1820년 도로테아 크리스티안 율리안 로테와 결혼했으며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13년 괴팅겐 대학교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만나서 공부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철학학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 1816년 1월 22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천문대 관찰사가 되며 천문학과 특별교수가 되었다. 1844년 엔 고등 역학, 고등 천문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플라이센부르크에서 고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업적 일반에게 가장 유명한 업적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이며, 그는 주로 기하학과 역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저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Der barycentrische Calcul (1827년) Lehrbuch der Statik (1837년) Die Elemente der Mechanik des Himmels (1843년) 이 외에도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짧은 논문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외부 링크 1790년 출생 1868년 사망 독일의 수학자 독일의 천문학자 19세기 수학자 기하학자 19세기 천문학자 괴팅겐 대학교 동문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할레 대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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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이승엽(1976년 10월 11일 (음력 8월 18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이자, 현 KBO 홍보대사, 이승엽야구재단 이사장, SBS와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다. 선수 시절 아마추어 시절 중앙초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해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5년 KBO 리그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이 나와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는데 당시 삼성 1루수 요원 중에서는 김성래가 시범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해 전열에서 이탈한 데다 부상에서 회복한 1993년부터 본격적인 주전 우익수로 나선 이종두가 어깨와 허리통증을 호소해 전년도인 1994년부터 완전히 지명타자로 바꾼 양준혁이 우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바람에 같은 해(1994년)부터 포지션을 바꾼 이만수 외엔 쓸만한 1루수 자원이 없어 그가 1루수로 전향했다.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1995년에 2할대 타율, 13홈런, 73타점을 기록해 장거리 타자로서 자질을 보였고,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백인천에게‘외다리 타법’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인 홈런 타자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1997년에 장타력에 돋보여 홈런 1위(32개), 타점 1위(114개), 최다 안타 1위(170개)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MVP와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차지했다. 1998년에 38개 홈런과 102타점을 기록하여 당시 타이론 우즈와 시즌 최다 홈런 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2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팀의 주축 타자로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1999년에 홈런(54), 타점(123), 득점(128), 출루율(0.458), 장타율(0.733)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고, 한국 프로야] 최초로 50홈런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2002년에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와 홈런 경쟁을 벌여 47개를 기록해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LG 투수 이상훈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 3점 홈런을 쳐 내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는 곧 마해영의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이어져 삼성 라이온즈가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 2003년 6월 22일 SK 투수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의 오 사다하루(27세 3개월 11일)와 MLB 알렉스 로드리게스(27세 8개월 6일)를 제치고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고지(26세 10개월 4일)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롯데전에서 투수 이정민을 상대로 56번째 홈런을 쳐내며 한국 프로야구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자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2004년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5년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0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해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때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됐다. 시즌 최종 타율은 2할대 타율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현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했다. 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됐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을 쳐 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이 재팬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밀려 제팬 시리즈 MVP 수상에 실패했다. 2005년 시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3번과 6번 타자로 출전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6년 2005년 시즌 후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며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지바 롯데 마린스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2006년 1월 19일에 이적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했는데, 이에 부응해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팀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2007년 2006년 시즌 후 MLB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팀의 우승 후로 연기했다.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000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엔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2007년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2할대 타율,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인 일본전에서 2점 홈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2점 홈런을 쳐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 45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OPS 0.755,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진행했는데 여기에서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 12삼진이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2009년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 16홈런, 2할대 타율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에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2010년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팀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됐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시즌후 2010년 11월 16일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2011년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한국 프로야구 복귀 삼성 라이온즈 복귀 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2012년 3할대 타율,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상대적으로 1루수로 출장한 경기가 적어 처음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2013년 시즌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의 대결에서 6-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을 기록했다. 2013년 8월 28일 NC와의 경기에서 3,000루타를 달성했으며, 이는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이다. 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2할대 타율, 13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됐다.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돼 7경기에서 타율 0.148(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11월 1일 7차전까지 단 1타점도 기록하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의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해 그 해 골든 글러브(지명타자)를 타격왕을 차지한 이병규에게 내 줬다. =2014년 타격 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30홈런-세 자릿수 타점을 달성하며 국민 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했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쳐 내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해 총 9번을 수상하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 2015년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구승민을 상대로 장외 홈런이자 시즌 10호 홈런,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한일 통산 559호 홈런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15타수 6안타, 타율 4할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후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2월 8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KBO 리그 최초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시즌 후 FA 선언을 해 2년 36억원에 잔류했다. 2016년 8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KBO 리그 통산 1390타점을 기록했고, KBO 리그 통산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웠다. 그 후 9월 14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재우를 상대로 한일 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했다. 2017년 시즌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5월 21일 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했고,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 4000루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경기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경기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 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18년부터 KBO 홍보대사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SBS와 SBS 스포츠의 야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에 지도자 연수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응원가 별명 ‘국민타자’,'국민 영웅'‘라이언 킹’ 등으로 불린다.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이다.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 WBC와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해“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이 추가됐다. 또한, 국제 대회나 중요한 경기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특히 8회에 결정적 역할을 해 '8회의 사나이'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제 2구장인 포항야구장의 성적도 뛰어나 '포항의 사나이'라고도 불린다. 트리비아 2016년 2월 25일에 팀의 새로운 홈 구장인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준공돼 그 기념으로 대구광역시 도시철도공사 홍보대사로 뽑혀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의 특별 안내방송을 맡게 됐다. 국가대표 경력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2006년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3년 제 3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등번호 KBO '36' (1995년 ~ 2003년, 2012년 ~ 2017년, 삼성 라이온즈) NPB '36' (2004년 ~ 2005년, 지바 롯데 마린스) '33'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5' (2007년 ~ 201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3' (2011년, 오릭스 버펄로스) 배우자 이송정 (2002년 ~ 현재) 수상 고교 야구 고교 청룡기 대회 - 우수 투수상 (1993년) 국제 대회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최다 홈런상, 최다 타점상 (1994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0년)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2년) WBC 우수 선수 (2006년, 1루수 부문) & 초대 홈런왕 및 타점왕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8년) KBO 리그 MVP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골든글러브 10회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12년, 2014년, 2015년) 한국시리즈 MVP 1회 (2012년) 홈런왕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점왕 4회 (1997년, 1999년, 2002년, 2003년) 득점왕 5회 (1998년, 1999년, 2000년, 2002년, 2003년) 최고 출루율 1회 (1999년) 최고 장타율 3회 (1998년, 1999년, 2002년) 최다 안타 1회 (1997년) NPB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2005년) 월간 MVP 1회 (2006년 6월) 도쿄 돔 MVP 1회 (2006년) 기타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7년)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7년)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8년)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9년) 한국스포츠연맹 선정 올해의 남자프로선수상 (1999년) 일간스포츠001 최고타자상 (1999년) 스포츠투데이 매일우유상 대상 (1999년) 제37회 백상체육대상 (2000년) 서울외신기자클럽 외신홍보상 (2003년)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대상 (2003년) 한국언론인연합회 선정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2003년) 자황컵 체육대상 프로선수상 (2003년)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특별상 (2006년) 제55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대상 (2009년)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최고타자상 (2012년)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타자상 (2012년) 제2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2년) 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2013년)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재기상 (2014년) 제6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6년) 휘슬러코리아 일구상 일구대상 (2016년)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공로상 (2016년)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2017 최고의 레전드 특별상 (2017년) 2021년 SBS 연예대상 쇼•스포츠부문 남자 신인상 방송 출연 MBC 성공시대 - 홈런왕 이승엽 (1999년 10월 23일) PD수첩 - 이승엽 신드롬 (1999년 8월 24일) 밀레니엄특집 아듀 20세기 웰컴 21세기 - 스포츠 100년 손기정에서 이승엽까지 (1999년 12월 31일) 일밤 - 불가능은 없다 (2007년 12월 30일) 대구MBC The Lion - 이승엽 삼성 복귀 내레이션 참여 (2012년 3월 25일) 대구MBC 덕아웃 -프로야구 삼성 우승특집 방송 출연 (2012년 11월 16일) KBS 가족오락관 (1998년 1월 7일) 체험 삶의 현장 -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1998년 11월 16일) 서세원쇼 (1999년 8월 17일) 작전타임 스포츠쇼 - 집중탐구 (1999년 9월 29일) 개그콘서트 - 걸인의 추억 (2003년 8월 26일)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 (2003년 12월, 게스트 윤도현, 장나라와 동반출연) 파워 인터뷰 (2005년 11월 27일) 단박 인터뷰 - 야구 선수 이승엽 (2007년 6월 26일) 여유만만 - 역대 연봉 스포츠 스타로 키운 사연 (2009년 7월 31일) SBS 줌인 내인생의 특종 (1999년 8월 17일)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국민타자 이승엽 (2012년 11월 19일, 2012년 12월 3일), 신년의 밤 (2015년 1월 19일) SBS 스페셜 - 승엽의 시대 편 492회 (2017년 10월 15일) 집사부일체 편먹고 공치리 JTBC 최강야구 (2022년 6월 6일 ~ 현재) 아는형님 (2022년 7월 23일) 광고 출연 2000년 삼성그룹 삼성증권 2004년 신세계 신세계상품권 (부인 이송정과 출연) 2006년 해태제과 홈런볼 2006년 삼성전자 파브 full hd 모젤 2007년 CJ헬스케어 컨디션파워 (2편에선 김제동과 출연) 2007년 KB국민은행 2007년 AIA생명 꼭하나의로보험 (부인 이송정, 손범수와 출연) 2008년 나이키 2009년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2018년 SK브로드밴드 옥수수 (김제동과 출연) 2018년 스크린야구 다함께야구왕 2018년 IWC 포르토피노 크로노그래프 이승엽 에디션 2020년 정직한삼 라디오 광고 1998년 삼성투자신탁 1999년 삼성투자신탁증권 2003년 삼성전자 애니콜 홍보대사 2000년 대구지방경찰청 대구경북 청소년선도위원 2009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명예홍보대사 2012년 대구경북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장학지원 홍보대사 통산 기록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는 아시아 최고 기록(한 시즌 56홈런),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 주요 기록 KBO 1999년 5월 5일 : 대구 현대전, 최연소 통산 100홈런(만 22세 8개월 17일, 상대 투수 3회 정명원) 2001년 6월 21일 : 대구 한화전, 최연소 통산 200홈런(만 24세 10개월 3일, 상대 투수 8회 김정수) 2003년 6월 22일 : 대구 SK전, 세계 최연소/최단 경기 통산 300홈런(만 26세 10개월 4일/1075경기, 상대 투수 8회 김원형) 2003년 10월 2일 :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최고 기록 경신 (56개), 대구 롯데전 상대 투수 2회 이정민 2012년 7월 29일 : 한·일 통산 500 홈런, 목동 넥센전 상대 투수 4회 앤디 밴 헤켄 2013년 6월 20일 :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 경신 종전 양준혁 (351개),(352개), 인천 SK전 상대 투수 3회 윤희상 2015년 6월 3일 : KBO 리그 최초 통산 400 런, 포항 롯데전 상대 투수 3회 구승민 2016년 9월 14일 : 한·일 통산 600 홈런, 대구 한화전 상대 투수 2회 이재우 2017년 10월 3일 : KBO리그 은퇴경기 최초 연타석 홈런 기록 넥센전 상대 투수 2회 한현희 NPB 일본 진출 첫 출장 · 첫 안타 : 2004년 3월 27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세이부 돔, 상대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 일본 진출 첫 홈런 : 2004년 4월 4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3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상대 투수 아라가키 나기사) 한·일 통산 400호 홈런 달성 : 2006년 8월 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도쿄 돔, 만 29세 11개월 13일, 상대 투수 1회 이가와 게이) 일본 통산 100호 홈런 달성 : 2007년 7월 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상대 투수 아오키 디카히로) 일본 양대 리그 우승 외국인 선수 : 지바 롯데 마린스(200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09년) 각주 외부 링크 이승엽 - 스탯티즈 이승엽 - NPB 기록 197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대구광역시 출신 KBO 리그 내야수 KBO 리그 1루수 KBO 리그 지명 타자 삼성 라이온즈 선수 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 대한민국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오릭스 버펄로스 선수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지바 롯데 마린스 선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2000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200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2008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2002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 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200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 선수 한국 프로 야구 1000타점 클럽 한국 프로 야구 300홈런 클럽 한국 프로 야구 400홈런 클럽 한국시리즈 MVP 수상자 KBO 골든글러브 수상자 KBO MVP 수상자 KBO 장타율상 수상자 KBO 출루율상 수상자 KBO 득점상 수상자 KBO 안타상 수상자 KBO 타점상 수상자 KBO 홈런상 수상자 광주 이씨 대구중앙초등학교 동문 경상중학교 동문 경북고등학교 동문 대구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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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
사단법인 한국야구위원회 또는 KBO(Korea Baseball Organization), 또는 KBO 사무국(Office of the Commissioner, KBO)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 연혁 1981년 12월 11일 창립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으로 리그 시작 2011년 1월 1일 기준으로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에서 2012년에 2군 퓨처스리그 참가 및 2013년에 1군리그 참가를 목표로 통합 창원시에 제9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선언했다.2011년 2월 8일자로 KBO로부터 창단승인을 받아 2013년 NC 다이노스라는 팀명으로 9번째 구단으로 프로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2013년 통신회사인 KT가 경기도 수원시에 제10구단 창단을 선언하고 KBO가 창단을 승인하여 팀명 kt 위즈로 정식창단하였다. 2014년까지 2군 리그 참가 후 2015년부터 1군 리그에 정식 참여하고 있다. 2020년 5월 5일에 개막한 2020년 KBO 리그는 미국 ESPN과 일본 SPOZONE를 통해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지역에 생중계되었다. 조직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 총재 KBO 총재는 KBO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역대 총재 사무총장 역대 사무총장 주요 활동 KBO 리그 관리, 통괄 페넌트레이스, 올스타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주최 야구 경기 기록, 관련 자료의 수집과 조사 및 분석 연구 국제 야구 활동 교류 추진 아마추어 야구의 발전을 위한 제반 지원 활동 TV 및 라디오 방송중계권 계약 활동 야구 기술의 개발 및 지도 보급 야구 관계자의 상벌 및 복지 사업 회원 간의 연락 및 친선 야구 박물관, 도서관 및 회관의 설치 운영 한국 프로 야구 연감 및 간행물 발간 한국야구위원회 재산/회계 관리 기타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관련 문서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KBO 리그 KBO 퓨처스리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각주 외부 링크 1981년 설립 1981년 설립된 스포츠 단체 대한민국의 스포츠 단체 대한민국의 스포츠 행정 기구 대한민국의 야구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야구 단체 사단법인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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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언어학(言語學, )은 인간의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과 본질을 과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법과 같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지식을 체계화, 규칙화하는 것에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인지 및 사회적인 부분도 다루기 때문에 인문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지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언어 체계의 분석은 크게 문장의 구조와 규칙에 대한 통사론, 의미론, 단어의 구조에 대한 형태론, 음성학, 음운론, 화용론으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진화 등 생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생물언어학, 심리학적 요소를 고려한 심리언어학 등의 분과도 존재한다. 언어학은 이론적인 연구와 실용적인 연구를 모두 포괄한다. 이론언어학은 언어철학 등 인간 언어의 이론적인 부분을 다룬다. 응용언어학은 언어교육이나 문해와 같이 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한다. 언어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연구할지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을 기준으로 어떤 한 순간의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으로 구분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언어의 개수에 따라 다중언어와 단일언어로 그 대상을 구분할 수도 있고, 아이와 어른으로 구분할 수도 있으며, 학습한 것과 습득한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분야 언어학의 연구 분야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 중의 하나는 어떤 한 순간의 언어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공시언어학 통시언어학 다음은 언어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분야이다. 이러한 구분은 언어가 낮은 단계의 소리에서 높은 단계의 뜻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음성학은 음성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학문 음운론은 화자가 말할 때 심리적으로 구분하는 소리(음운)에 대한 학문 문자론은 문자에 대한 학문 형태론은 단어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통사론은 문장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의미론은 단어의 의미와 단어의 조합에 따른 의미 변화에 대한 학문 화용론은 대화에서 화자의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학문 텍스트언어학 또는 담화론은 가장 큰 언어단위인 텍스트 또는 담화에 대한 학문 위에서 형태론과 통사론을 문법론으로 묶기도 한다. 다음 분야들은 그 연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분야들로 전통언어학의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휘론은 단어들의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에 해당하고 어원론은 언어의 시간적인 변화, 방언학은 언어의 공간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어휘론 어원론 (어원학) 방언학 어떠한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분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에 제시된 대상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음운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역사음운론, 전산적인 차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전산의미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통사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이론통사론 등으로 불린다.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등의 방법론을 이용한 접근법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순수한 언어학이 아니라 학제간 연구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로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해 응용언어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비교언어학 (또는 역사언어학, 역사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 (언어유형론, 또는 짧게 유형론) 전산언어학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 법언어학 또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존재한다. 언어학의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를 하는 메타언어학과 언어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사가 있다. 메타언어학 언어학사 이외에도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문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는 문체론과 수사학,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기호학 등이 있다. 문체론 수사학 기호학 응용 분야 언어와 관련된 실질적인 분야를 다루는 응용언어학에는 언어 관련 교재 개발, 교수법, 번역과 통역, 사전 편찬, 언어치료, 언어정책, 전산처리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담화분석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 맞춤법, 정서법 대조언어학 번역학 사전학 (사전편찬학) 언어교육학 언어정책 자연언어처리 :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 인접 분야와 학제적 연구 언어학은 연구 주제에서 문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특정 학문 분야의 하위 분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야들은 흔히 학제적연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일부 분야는 언어에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호학 사회언어학 언어 되살리기 수리언어학 신경언어학 심리언어학 언어병리학 - 언어장애, 언어치료 언어습득 응용언어학 인류언어학 (참조 언어인류학) 인지언어학 자연언어처리 :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 전산언어학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 언어지리학 언어철학 커리큘럼 대한민국에서는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대학교, 충남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과 같이 주요 언어학에 대한 커리큘럼을 가진 언어학과들은 전공 학위에서 문학사로 분류하고 있다. 같이 보기 비교 재구 참고 도서 김방한 (2001), 언어학의 이해, 민음사. () 김선미 (2003), 언어와 언어학 이론, 한국문화사. () 김진우 (2007), 언어 - 이론과 그 응용, 탑출판사. () 김진호 (2004), 언어학의 이해, 역락. () 배주채 (2015), 언어학개론, 태학사. () 송완용 (1999), 언어학 기초이론, 신아사. () 이건수 (2000), 언어학 개론, 신아사. () 이석규 (2001), 텍스트 언어학의 이론과 실제, 박이정. () 이철수, 문무영, 박덕유 (2004), 언어와 언어학, 역락. () 각주 외부 링크 AI Study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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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A0%95%EB%B3%B4%EC%98%AC%EB%A6%BC%ED%94%BC%EC%95%84%EB%93%9C
한국정보올림피아드
한국정보올림피아드(, KOI)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한민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이다. 알고리즘 설계 능력을 평가하는 경시 부문과 학생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공모 부문으로 나뉜다. 부문별 우승자는 각각 국제정보올림피아드와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14개 교육청에서 주관하며, 한국정보과학회에서 후원한다. 역사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했다. 국가적으로 정보산업을 육성하자는 의도였다. 대통령 산하에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출범하여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는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4월 22일,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지금과 같이 전국에서 선발된 초·중·고 학생들이 300명이 참가하여, 3시간 동안 문제를 풀었다. 개회식은 오전 9시에 열렸고 실제 대회는 9시 20분에 시작되었다. 참가 대상이 국민학생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교사부가 있었다. 공모부문도 1회부터 있었는데, 참가 대상에 제한이 없어서 단체도 참가할 수 있었다. 사용기종은 8비트 컴퓨터, 사용언어는 베이직과 어셈블리어였다. 역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같은 날 개최되었다. 전두환 방문으로 강제 정전 이 첫 대회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전 10시 20분에 체육관 전체가 정전되어 참가자와 관계자를 비롯해 모든 컴퓨터가 꺼진 것이다. 항의가 쏟아지자 대회 마감 시각이 12시 20분에서 2시간 연장되어 14시 20분으로 미루어졌다. 정전 원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었다. 전두환이 예정에 없이 대회장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자 대통령 경호실이 경비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회장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응시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처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일개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갈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정부의 정보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경진대회 입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도 함께 먹었다. 초등학생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다 정전만큼이나 놀라운 일은, 컴퓨터를 고작 10개월밖에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 하형진(대구 계성국민학교 6학년)이 기라성 같은 중, 고등학생들을 다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하형진은 여러 차례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게임회사 KOG에서 프로그래머로 재직 중이다.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13회까지 열린 후 1996년부터 현재와 같이 정보올림피아드로 이름을 바꿔 개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시 부문 경시 부문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부문이다. 지역 예선 필기를 통과하면 전국 본선에 진출한다. 2016년 이전에는 시 단위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또 시 도별 지역 본선도 통과해야 했다. 경시부문 우수자(통상 금상 이상)에게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지역 예선 예선은 필기 시험으로 치른다. 수학적 규칙을 찾는 능력과 작성된 코드를 파악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지역 본선 컴퓨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기로 치른다. 2016년에 예선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전국 본선 실기로 치른다. 문제는 대체로 네 개가 출제되고, 시험시간은 3시간 가량이다. 구체적인 시상 규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장려상은 0점자와 미참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시상된다. 항상 위 표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매년 세부 시행계획에서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다. 공모 부문 공모 부분은 학생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도별 추천작품이 본선에 올라간다. 지역 예선 대회 개최 여부는 시·도마다 다르다. 공모부문 우수 시상자에게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의 컴퓨터 공학 부문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다음은 그 시상 규모와 내용이다. 경시부문과 마찬가지로,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회의 심사에 따라 수상인원은 변경될 수 있다. 논란 메모리 제한 2014년에는 이전과 달리 배열 크기가 제한되었으며 각 교육청은 이를 학생들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지역 본선(대구시정보올림피아드)이 치러질 당시 대구시교육청 산하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수험생에게 이를 안내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잘못을 인정하고 재채점을 진행하였다. 이 채점에서 5명이 구제되면서 대구시에서 전국 본선에 진출하는 고등부 수험생은 기존 7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났다. 표준 입출력 2015년에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문제풀이 형식을 파일 입출력에서 표준 입출력으로 변경하였다. 몇몇 학생과 학부모는 시험 방식이 변경된 사실이 제대로 공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대회에 응시한 일부 학생은 파일 입출력을 사용한 코드를 작성하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응시자 주의사항과 감독관을 통하여 충분히 강조했을 뿐더러 기존 방식대로 푼 학생을 구제하면 문제를 제대로 읽고 풀이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면서, 구제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파일 입출력에 맞춘 코드를 작성한 학생들은 결국 0점 처리가 되었다. 지역 예선 문제 오류 2018년 4월에 개최된 지역대회에서는 총 일곱 문항이 '정답없음', '복수정답' 처리되었다. 보기로 제시된 코드에 오타나 정의되지 않은 행동(Undefined behavior)이 포함된 데다가 컴파일러가 비주얼 스튜디오임을 전제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등, 상당히 많은 문제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에 학생과 학부모가 거세게 반발하자,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과 한국정보과학회 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출제 오류로 피해를 본 전원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기존에 합격점을 받은 600명에 구제된 147명을 더해 도합 747명이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정보올림피아드 발전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그 해 6월 정보올림피아드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공청회를 주최하였다. 공청회에서 대책위는 영재교육 위주 대회에 공교육 취지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문제 난이도 등 기준이 명확히 세워지지 않은 것, 출제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뽑지 못한 것, 기존 영재교육 전문가와 새로 들어온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 전문가가 제대로 협업하지 못한 것을 출제 오류 사태의 원인으로 꼽았다. 채점 지연 2018년 7월 개최된 전국대회에서는 고등부 채점이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보올림피아드 본선에서는 답안을 서버에 제출하면 프로그램이 채점하여 즉시 결과를 돌려주는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도 채점 결과가 나오지 않아 참가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주관 측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은 국제정보올림피아드의 채점 지연 시 대응 규정을 준용하여 경시 시간을 30분 연장하였고, 대회가 종료된 뒤 채점 결과를 참가자들에게 따로 통보하였다. 이후 진흥원은 예비소집 때 실시한 채점 환경 점검과 대회를 마친 후 진행한 원인 분석에서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데이터가 대량으로 몰리는 경시 시간 동안에만 일어나는 문제로 판단된다고 해명했다. 채점위원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지연되었으므로 기존 채점 기준대로 채점하였다고 밝혔다. 역대 수상자 경시 부문 공모 부문 같이 보기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IOI)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 외부 링크 한국정보올림피아드 공식 웹사이트 한국정보올림피아드 공식 웹사이트 (구) 주해 각주 대한민국의 문화 대한민국의 과학경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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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직
초심자용 다목적 기호명령부호(初心者用 多目的 記號命令符號,) 또는 단순히 베이직(BASIC, )은 사용하기 쉽도록 설계된 범용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다. 1964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존 케메니(John Kemeny)와 토머스 커츠(Thomas Kurtz)가 개발했다. 그들은 비과학 분야의 학생들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거의 모든 컴퓨터들은 과학자들과 수학자들만이 배우는 경향이 있는 맞춤 소프트웨어를 쓰는 것을 필요로 했다. 1970년대 중반에 마이크로컴퓨터가 등장하면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Microsoft BASIC)을 비롯한 여러 베이직 방언이 개발되었다. 이 기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주 메모리(흔히 4KB)로 인해 다양한 타이니 베이직 방언도 만들어졌다. 베이직은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고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정용 컴퓨터 시스템을 위한 사실상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되었다. 이러한 PC에는 거의 항상 기본 인터프리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종종 펌웨어나 때로는 ROM 카트리지에 설치되어 있었다. 베이직은 1990년대에 더 강력한 마이크로컴퓨터가 시장에 나왔고 파스칼과 C와 같은 고급 기능을 가진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1991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시각적 폼 빌더를 결합한 업데이트된 버전의 베이직인 비주얼 베이직을 출시했다. 교육용으로 개발되어 언어의 문법이 쉬우며, 다트머스의 최초 제품 이래로 인터프리터 방식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컴파일러 방식도 많다. 현재는 다양한 종류의 베이직이 존재하며 서로 문법도 많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소스 코드는 호환되지 않는다. 기원 소프트웨어 목록 문법 일반적인 베이직 키워드 데이터 조작 LET DATA 프로그램 제어 흐름 IF ... THEN ... {ELSE} FOR ... TO ... {STEP} ... NEXT WHILE ... WEND 및 REPEAT ... UNTIL DO ... LOOP {WHILE} 또는 {UNTIL} GOTO GOSUB ON ... GOTO/GOSUB DEF FN 입출력 LIST PRINT INPUT TAB 또는 AT 함수 목록 ABS ATN COS EXP INT LOG RND SIN SQR TAN 기타 REM USR TRON TROFF ASM 예제 Hello World 아래 예는 모든 ANSI/ISO 호환 베이직과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마이크로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베이직에서 동작한다. 10 PRINT "Hello, world!" 20 END 이러한 기종에 설치된 베이직은 줄번호가 생략된 즉각 모드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음 예를 실행할 때에는 RUN 명령어가 필요없다. PRINT "Hello, world!" ? "Hello, world!" 이후의 베이직은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며 코드에서 줄번호가 사라졌다. 다음 예는 현대적인 베이직의 거의 대부분에서 RUN 명령으로 실행할 수 있다. PRINT "Hello, world!" END 많은 베이직에서 End 선언문은 빼도 된다. 사용자 입력 개수 만큼 별 출력 Visual Basic .NET Class stars Sub Main() Dim UserName, Answer, stars As String ' UserName$, Answer$, stars$ may be used as well. Dim NumStars, I As Integer Console.Write("What is your name: ") UserName = Console.ReadLine() Console.WriteLine("Hello {0}", UserName) Do Console.Write("How many stars do you want: ") NumStars = CInt(Console.ReadLine()) stars = New String("*", NumStars) Console.WriteLine(stars) Do Console.Write("Do you want more stars? ") Answer = Console.ReadLine() Loop Until Answer <> "" Answer = Answer.Substring(0, 1) Loop While Answer.ToUpper() = "Y" Console.WriteLine("Goodbye {0}", UserName) End Sub End Class 외부 링크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다트머스 대학교 미국의 발명품 1964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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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D%84%B0%ED%94%84%EB%A6%AC%ED%84%B0
인터프리터
인터프리터(, )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소스 코드를 바로 실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환경을 말한다. 원시 코드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와 대비된다. 인터프리터는 다음의 과정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소스 코드를 직접 실행한다. 소스 코드를 효율적인 다른 중간 코드로 변환하고, 변환한 것을 바로 실행한다 인터프리터 시스템의 일부인 컴파일러가 만든, 미리 컴파일된 저장 코드의 실행을 호출한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언어로 작성된 원시코드 명령어들을 한번에 한 줄씩 읽어들여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고급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인터프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명령어들을 중간 형태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실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컴파일러는 고급 명령어들을 직접 기계어로 번역한다. 컴파일된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인터프리터를 이용해 실행시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행된다. 그러나 인터프리터의 장점은 기계어 명령어들이 만들어지는 컴파일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컴파일 과정은 만약 원시 프로그램의 크기가 크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터프리터는 고급 프로그램을 즉시 실행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터프리터는 종종 프로그램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한번에 적은 양의 내용을 추가하고 그것을 빠르게 테스트 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터프리터를 이용하면 프로그래밍을 대화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는 둘 다 대부분의 고급언어에 적용이 가능하지만 BASIC 이나 LISP과 같은 일부 언어들은 개발 당시에는 특별히 인터프리터에 의해서만 실행되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포스트스크립트와 같은 페이지 기술 언어 들도 인터프리터를 사용한다. 모든 포스트스크립트 프린터는 포스트스크립트 명령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다. 역사 최초의 인터프리트 방식의 고급 언어는 리스프였다. 리스프는 1958년 스티브 러셀이 IBM 704 컴퓨터에 최초로 구현하였다. 러셀은 존 매카시의 논문을 읽고 리스프의 eval 함수가 기계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맥캐시를 놀라게 했다. 작업 중인 리스프 인터프리터가 그 결과 만들어졌으며 리스프 프로그램의 실행, 더 정확히 말해, "리스프 식의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 종류 바이트코드 인터프리터 스레드 코드 인터프리터 추상 구문 트리 인터프리터 JIT 컴파일 자체 해석기 각주 외부 링크 IBM Card Interpreters page at Columbia University Theoretical Foundations For Practical 'Totally Functional Programming' (Chapter 7 especially) Doctoral dissertation tackling the problem of formalising what is an interpreter Short animation explaining the key conceptual difference between interpreters and compilers 프로그래밍 언어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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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게임
라이프 게임() 또는 생명 게임은 영국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가 고안해낸 세포 자동자의 일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세포 자동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 1970년 10월호 중 마틴 가드너의 칼럼 〈Mathematical Games(수학 게임)〉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단순한 규칙 몇가지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 게임은 컴퓨터 과학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프 게임이 범용 튜링 기계와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진 세포 자동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설명 이 ‘게임’은 사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게임의 진행을 결정하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약간 많이 다르다. 라이프 게임의 진행은 처음 입력된 초기값만으로 완전히 결정된다. 라이프 게임은 무한히 많은 사각형(혹은 ‘세포’)으로 이루어진 격자 위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세포 주위에는 인접해 있는 여덟 개의 ‘이웃 세포’가 있으며, 또 각 세포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가지 상태 중 한가지 상태를 갖는다(‘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격자를 이루는 세포의 상태는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으로 변화한다. 즉, 현재 세대의 세포들 전체의 상태가 다음 세대의 세포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각각의 세포가 다음 세대에서 갖는 상태는 현재 자신의 상태와 이웃하는 여덟 개의 세포들 중 몇 개가 살아있는 상태인지만을 따져서 결정된다. 존 호턴 콘웨이의 규칙들이다. 죽은 세포의 이웃 중 정확히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살아난다(‘태어난다’). 살아 있는 세포의 이웃 중에 두 개나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계속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이외에는 ‘외로워서’, 또는 ‘숨이 막혀서’ 죽어버린다. 존 호턴 콘웨이는 규칙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 설정하였다. 폭발적인 성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래의 라이프 게임의 변종 중 대부분은 이를 만족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고 혼돈스러운 패턴. 규칙은 최대한 간단해야 한다. 존 폰 노이만의 세포 자동자을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 패턴의 예 라이프 게임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고정된 패턴(정물 靜物, still life), 일정한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진동자, oscillator — 정물은 주기가 한 세대인 진동자라고 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 패턴(우주선, spaceship) 등 여러 패턴이 존재한다. 아래에 간단한 예가 있다. 살아 있는 셀은 검은 색으로, 죽어 있는 셀은 흰색으로 표현했다. ‘block’과 ‘boat’는 정물이고, ‘blinker’와 ‘toad’는 진동자, 그리고 ‘글라이더(glider)’와 ‘경량급 우주선(lightweight spaceship — LWSS)’은 우주선에 속한다. 그리고 무한히 이을 수 있는 패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배(boat)는 무한정 이을 수 있다.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많은 세대가 필요한 패턴도 있는데, ‘methuselah(므두셀라)’라고 불린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펜토미노 퍼즐의 모양 중 R-펜토미노(R-Pentomino)는 세포는 5개이지만 1130세대가 지나서야 안정화된다. (이는 6개 미만 세포 패턴 중 가장 활동적인 패턴이다.) ‘다이하드(diehard)’는 130세대가 지나서야 사라진다. ‘도토리(acorn)’는 5206세대가 지나서야 13개의 글라이더(glider)와 수많은 진동자 또는 정물을 남기고 안정화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패턴 중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가장 많은 세대를 거친 패턴은 리드카(Lidka)로, 무려 29,055 세대가 지나야 안정화된다. 라이프 게임이 처음 소개된 〈Mathematical Games〉에서, 콘웨이는 세포 수가 무한히 많아지는 패턴을 찾은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 해커 빌 가스퍼(Bill Gosper)가 1970년 11월에 처음 그러한 패턴들을 찾아 상금을 탔다. 패턴들 가운데에는 ‘글라이더’나 ‘우주선’을 발사하는 ‘총’과 안정화한 패턴들을 꼬리에 남기며 전진하는 ‘기관차’, 그리고 양쪽을 다 행하는 ‘갈퀴’ 패턴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제곱 비례로 성장하는 패턴인 ‘사육사’ 패턴도 찾아냈는데, 이것은 ‘총’ 패턴을 꼬리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한다. 이 후로 글라이더를 이용한 논리 게이트, 가산기, 소수 발생기와 라이프 게임을 더 큰 스케일과 느린 속도로 모방하는 단위 세포 등 다양한 패턴들이 만들어졌다. 맨 처음 발견된 ‘총’이 여전히 알려진 가장 작은 총이다: 가스퍼의 글라이더 건 무한히 성장하는 더 단순한 패턴들이 그 후에도 발견되었다. 아래의 세 패턴은 모두 무한히 성장한다. 처음 것은 10개의 살아있는 세포만을 가지며 이보다 적은 세포를 가진 무한 성장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5x5의 정사각형 안에 포함되는 패턴이고, 세 번째는 두께가 1인 패턴이다. 여러 개의 글라이더가 합성되어 재미있는 결과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두 개의 글라이더를 적당한 방법으로 블록에 충돌시키면, 블록은 글라이더가 발사된 곳을 향해 한 칸 다가간다. 세 개의 글라이더를 다른 방법으로 충돌시키면 블록은 발사된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한 칸 다가간다. 이것은 ‘움직이는 블록 메모리’라고 불리며 카운터를 모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더를 이용해 AND, OR, NOT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개의 카운터와 연결된 유한 상태 오토마타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능 튜링 기계와 똑같은 계산능력을 가지며, 이는 라이프 게임이 무한한 메모리를 가진 어떤 컴퓨터와도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글라이더 건의 패턴을 이용하여 새로운 개체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며, 원본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만능 건축사’ 패턴은 튜링 머신과 동등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라이프 게임의 변종들 라이프 게임을 시작으로,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을 가진 변종들이 존재한다. 원래의 라이프 게임은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며, 2개 또는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생존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사망한다. 이 규칙은 ‘23/3’으로 표시할 수 있다. 앞쪽 숫자들은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하며, 뒤쪽 숫자들은 세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6/6’은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세포가 새로 태어나고, 1개나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생존하며 나머지 경우 사망하는 규칙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라이프(HighLife) 규칙은 원래 규칙에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새로 태어난다는 규칙이 추가되며, 이는 ‘23/36’으로 표시된다. HighLife는 ‘복제자’ 패턴들로 유명하지만, 이 규칙의 대부분의 패턴들이 너무 복잡하거나 황폐한 패턴들을 생성한다. Diamoeba 5678/35678 (혼돈스럽다) 다이아몬드 모양 패턴들. 종종 파국적으로 멸망함 Seeds /2 (폭발적) 불사조(몇 개의 남은 세포들로부터 폭발적으로 부활함), 간결한 패턴들 Serviettes/234 (폭발적) 불사조, 레이스 무늬 패턴들 Maze 12345/3 (폭발적) 미로같은 패턴 Mazectric 1234/3 (폭발적) Maze와 아주 비슷함. Maze보다 덜 막혀있음 2x2 125/36 (혼돈스럽다) 2x2 블록 패턴이 출몰함 Replicator 1357/1357 (폭발적) 모든 패턴이 복제자 패턴이다. Replicator은 복제자 패턴이란 뜻이다 Amoeba 1358/357 (혼돈스럽다) 아메바형 패턴 Conway's game of life 23/3 (혼돈스럽다) ‘라이프 게임’ Highlife 23/36 (혼돈스럽다) ‘하이라이프’ (복제자 패턴이 등장한다) Stains 235678/3678 (안정적) 잉크 방울이 마르는 것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 Coagulations 235678/378 (폭발적) 혼돈스러운 패턴과 응고하는듯한 정착 패턴들 Pseudo life 238/357 (혼돈스럽다) Move 245/368 (안정적) 기관차와 우주선 패턴들 34/34 (폭발적) ‘34 Life’ 34678/3678 (폭발적) ‘낮과 밤(Day & Night)’ Coral 45678/3 (폭발적) 산호초 모양으로 성장한다 5/346 (안정적) ‘Long life’ Assimilation 4567/345 (혼돈스럽다) Life without death 012345678/3 (폭발적) Gnarl 1/1 (폭발적) Walled cities 2345/45678 (안정적) Pylamid /12345678 피라미드 형태 Sponge cells 01234567/456 (안정적) 스폰지 모양 wired life 23/3678 (혼돈스러움) 약간 오래 가는 life 1 life 13/3 작은 막대 패턴과 진동자들 drill 245678/3 막대가 나오는 듯한 패턴 h tree 012345678/1 결정 또는 나무 모양으로 성장함 rats in maze 1234/37 미로 안쪽에서 움직이는 세포들 repilcater2 02468/1357 (폭발적) 복제자 패턴과 비슷함 wired life 37 23/37 () 일반 라이프보다 이상한 희귀 패턴이나 펄사가 매우 자주 나옴 Life32/game of life 프로그램에 따름. 외부 링크 Life Lexicon Conway's Game of Life applet software home page Eric Weisstein's Treasure Trove of the Life C.A. - Dr. Eric Weisstein의 홈페이지. 여러 가지 라이프게임의 패턴들과 설명이 실려 있다. Conway's Game of Life simulator for Microsoft Windows Winlife32 Conway's Game of Life simulator Game of Life on JavaScript 세포 자동자 인공 생명 자기조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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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 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쇼와 황제 재위기에 활동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쟁범죄자이다. 1941년 10월 18일에 군인의 신분으로 행정수반인 총리대신을 되었으며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육군대신, 내무대신, 참모총장을 겸임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여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공포정치의 일종인 ‘헌병정치’를 실시하여 군부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이 점차 미국의 반격에 밀려 전세가 기울자 1944년 7월 18일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패전 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군인가문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후 군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일국의 총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미국을 이길수 없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전진훈(戰陣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 훈령을 내려 많은 젊은군인들에게 목숨바쳐 전투에 임할 것을 독려했으나 정작 자신은 패전후 비굴한 처신으로 일관했다. 고의성 짙은 자살미수사건을 벌인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책임을 회피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함으로 사무라이 후예로서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생애와 경력 1884년 도쿄부 고지정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토세(千歳)이며 본적지는 이와테현으로, 그의 두 형은 도조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는 1909년에 이토 가쓰코(伊藤勝子)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육군 보병 대위가 되어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19년 스위스에 주재 무관으로 급파되었고, 1920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소좌로 승진되었다. 1921년에는 다시 해외로 파견돼 독일에서 주재하였다. 도조는 1922년 육군대학교의 교관을 맡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1929년 중좌로 승진되었다. 1920년대, 그는 군 파벌에 연루되어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그리고 나가타 데쓰잔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를 표방했던 파벌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인 파벌 황도파를 이끄는 아라키 사다오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조는 후에 나가타 데쓰잔 사망 이후 통제파의 1인자로서 일본 육군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붙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는데, 이는 그의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의 확대를 유도하였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 일본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돼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연임하였다. 도조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해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참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허용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준비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던 와중에는 도조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어 자살공격을 통한 옥쇄(玉碎)를 부추였다. 도조는 이로써 내각을 장악해 군사 국가 체제로 일본 제국 전역을 군사강국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의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해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처형 도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48년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아 그 해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지 않았으며 요코하마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유회와 함께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를 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고,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옮겨져 숨겨졌다. 사후 1958년 무덤을 새로 만들자는 계획이 부상해 1960년 아이치현의 산가네 산(三ヶ根山) 꼭대기에 이장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순국 칠사묘가 축조되어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고, 1978년 합사되었다. 평가 우지 도시히코는 자신의 책에서 도조는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해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의 전쟁으로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장성훈은 그의 저서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를 통하여 도조 히데키를 비겁한 사무라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도조 히데키는 전통적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의 정예 엘리트로서 군내 요직을 두루 거친 핵심요원이다.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다는 강경파의 선봉으로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총리에 임명된후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직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다. 특히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사무라이의 후예답게 명예롭게 죽으라는 '전진훈(戰陣訓)'과 하찮은 기와로 온전하게 남기보다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죽으라는 '와전옥쇄(瓦全玉碎)'의 영을 내린 장본인이다. 이 훈령에 의해 일본의 무수한 젊은이들은 조국을 위해 하나뿐인 자신을 목숨을 던지며 전장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이 항복한후 고의성이 짙은 '자살미수 소동'을 일으켰으며, 전범으로 체포된후 벌어진 재판에서 전임자의 결정을 단순히 집행한것 뿐이라고 책임을 회피한채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할복 등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독려할 수는 없으나 사무라이 정신이 넘치는 일본군인의 대표로서 모범이 되어야 할 자가 지극히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사무라이 후예로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며, 도조 히데키을 비롯한 A급전범들의 예에서 보듯이 일본이 지나치게 사무라이 정신을 미화하고 있다고 장성훈은 주장하였다. 가계 장남 도조 히데타카(東條英隆) 손녀 도조 유코(東條由布子) 차남 도조 데루오(東條輝雄) 삼남 도조 도시오(東條敏夫) 장녀 도조 고즈에(東條光枝) 차녀 도조 마키에(東條満喜枝) 삼녀 도조 유키에(東條幸枝) 사녀 도조 기미에(東條君枝) 도조 히데키를 그린 작품 소설 《왼손잡이 독재자 - 도조 히데키의 비극》(左利きの独裁者―東条英機の悲劇) 《도조 히데키 - 대일본제국에 순직한 남자》 (東条英機―大日本帝国に殉じた男) 영화 대동아전쟁과 국제 재판 (大東亜戦争と国際裁判, 1959년) 격동의 쇼와사 군벌 (激動の昭和史 軍閥, 1970년) 전쟁과 인간 (戦争と人間, 1973년) 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1982년) 프라이드·운명의 순간 (プライド・運命の瞬間, 1998년) 스파이·조르게 (スパイ・ゾルゲ, 2003년) 난징의 진실 제1부 칠인의 사형수 (南京の真実 第一部「七人の死刑囚」, 2008년) 다큐멘터리 드라마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 개전과 도조 히데키 (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 2008년) 각주 외부 링크 도조 히데키의 생애 제2차 세계 대전 데이터베이스: 도조 히데키 역대 총리의 사진과 경력 - 도조 히데키(수상관저 홈페이지) 1884년 출생 1948년 사망 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수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일본 육군 대장 일본의 반공주의자 교수형된 사람 관동군 관련자 대량 살인자 A급 전범 통제파 일본의 외무대신 일본의 상공대신 일본의 내무대신 일본의 문부대신 일본의 육군대신 순국칠사 공2급 금치훈장 수훈자 인도에 반한 죄 사형수 일본의 인도에 반한 죄 기결수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훈1등 서보장 수훈자 도쿄도 구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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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 , 약칭 한국철도 또는 철도공사 또는 코레일())는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본사는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소제동 철도기관 공동사옥)에 있으며 한국철도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 연혁 2003년 7월 29일: 철도산업발전기본법 제정 2003년 12월 31일: 한국철도공사법 제정 2005년 1월 1일: 한국철도공사 설립 2005년 8월 1일: KTX특송서비스 본격 시행 2006년 7월 1일: 철도공사 조직개편(기능통합형 17개 지사체제, 3개 철도차량관리단) 2006년 12월 22일: 철도교통관제센터 개통(5개 지역관제실을 관제센터로 통합) 2009년 3월 26일: 간선형 전기동차(EMU, 150km/h) 최초 도입 2010년 3월 2일: 한국형고속철도 KTX-산천 상업운행 개시 2012년 2월 28일: 경춘선 준고속열차 ITX-청춘 운행개시 2014년 10월 25일: 전국호환교통카드 레일플러스 출시 2015년 3월 24일: KTX, 대한민국 브랜드스타 4년 연속 1위 달성 2015년 9월 24일: KTX 이용객 5억명 돌파 2017년 1월 11일: 광명역~사당역간 KTX 셔틀버스(8507번) 운행 개시 2018년 1월 17일: 광명역 도심공항터미널 영업 개시 2019년 1월 15일: 도심공항터미널 개장 1년 만에 이용객 8만 명 돌파 2020년 8월 18일: 코레일톡 승무원 호출서비스 제공 개시 조직 본사: 7본부 10실 7단 62처 소속기관(현업): 8지역본부 및 4지역관리단 20부속기관 정원: 32,286명 (2020) 본사 비서실 안전경영본부 안전계획처 산업안전처 안전관리처 환경경영처 비상계획처 관제실 안전분석실 홍보문화실 언론홍보처 문화홍보처 감사실 감사기획처 종합감사처 경영감사처 청렴조사처 경영기획본부 기획조정실 인재경영실 재무경영실 법무실 여객사업본부 여객계획처 역운영처 열차영업처 고객마케팅단 열차운영단 물류사업본부 물류계획처 물류마케팅처 물류수송처 광역철도본부 광역계획처 광역마케팅처 광역신사업처 광역운영처 사업개발본부 사업기획처 자산운영처 사업개발처 기술본부 차량기술단 시설기술단 전기기술단 미래전략실 IT전략처 미래기술처 윤리경영처 사회가치처 ESG경영 정보보안센터 해외남북철도사업단 남북대륙사업처 해외사업처 국제협력처 지역본부 및 지역관리단(2020년 9월 21일 부터) 서울본부: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 수도권동부지역관리단: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한천로 472 수도권광역본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영로 115 강원본부: 강원도 동해시 동해역길 69 대전충청본부: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15 충북지역관리단: 충청북도 제천시 의림대로 1 전북본부: 전라북도 익산시 익산대로 153 광주전남본부: 전라남도 순천시 팔마로 119 광주지역관리단: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 대구경북본부: 경상북도 영주시 시청로2번길 30 대구지역관리단: 대구광역시 동구 동대구로 550 부산경남본부: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06 소속기관 연구원: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인재개발원: 경기도 의왕시 철도박물관로 157 IT운영센터: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 철도빌딩 회계통합센터: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한국철도공사 9층 철도교통관제센터: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일로8길 150 시설장비사무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평촌2길 59 서울정보통신사무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21나길 7 철도회관 8층 경주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경주고속철도전기사무소: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신경주역로 80 오송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오송고속철도전기사무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정중연제로 384 차량정비단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08-1 대전철도차량정비단: 대전광역시 대덕구 벚꽃길 150 부산철도차량정비단: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신천대로 215 호남철도차량정비단: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봉로258번길 계열사 코레일로지스: 철도물류수송 담당 코레일유통: 철도기반 전문유통기업 코레일관광개발: 철도관광, 승무사업 등 담당 코레일네트웍스: 철도역무, 회원관리, 주차장 등 담당 코레일테크: 철도차량, 시설 유지보수 담당 스포츠단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 한국철도 유도단 한국철도 사이클단 사업 분야 여객열차: KTX, ITX-청춘, ITX-새마을,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통근열차 운행. 관광열차: 정선아리랑열차, 백두대간협곡열차, 남도해양열차, 동해산타열차, 서해금빛열차, 평화열차, 바다열차, 레일크루즈 해랑 운행. 광역철도 수도권 전철: 1호선, 3호선, 4호선, 경의·중앙선, 경춘선, 수인·분당선, 경강선, 서해선 광역전철 운행. 부산 도시철도: 동해선 광역전철 운행. 물류 자산 개발 시설 유지·보수 버스: 광명역 - 인천국제공항 셔틀버스 6770번을 직영으로 운행. 시설 역 현황: 679개 (2018년 2월 3일 기준) 보통역: 344개 배치간이역: 3개 무배치간이역: 292개 조차장: 2개 신호장: 33개 신호소: 6개 열차 운행 현황: 3,227회 (2014년 11월 1일 기준) 간선여객열차: 586회 (KTX 250회, 일반열차 342회, 토요일 기준) 광역철도: 2,315회 (ITX-청춘 60회 포함, 주중 기준) 화물열차: 245회 (주중, 화 ~ 목 기준) 철도수송분담율 여객: 19% (인 Km 기준, 2008년) 화물: 7.5% (톤 Km 기준, 2007년) 영업거리: 3,918.5km (96개 노선) (2016년 9월 24일 기준) 고속선: 596.3km 일반선: 3,322.2km 복선거리: 2,330.9km (59.4%) 전철거리: 2,727.1km (69.5%) 보유 차량 여객객차 및 발전차는 2017년 기준 나머지는 2022년 기준이다. 고속열차: 136개 편성 KTX 46편성 920량 KTX-산천: 24편성 240량 KTX-산천: 15편성 150량 SRT: 22편성 220량 KTX-이음: 19편성 114칸 ITX-새마을: 23편성 138량 ITX-청춘: 8편성 64량 누리로: 7편성 28량 (사고로 1개 편성 폐차) RDC: 동력차 29량, 객차 23량 CDC: 동력차 14량, 객차 10량 통근형 전동차: 304편성 2486량 기관차 : 402량 디젤 기관차: 227량 (4400호대: 59량, 7300호대~7500호대: 143량, 7600호대: 25량) 전기 기관차: 175량 (8000호대: 4량, 8100호대~8200호대: 84량, 8500호대: 87량) 여객객차: 920량 발전차: 116량 철도 문화재 한국철도공사에서는 2011년 2월 7일 "철도문화재 관리 지침"을 제정하여 사(社) 소유의 철도 유물을 철도기념물과 준철도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철도기념물 철도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철도유물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다만, 문화재청장이 이미 등록한 문화재는 제외한다. 준철도기념물 향후 역사적, 기술적, 교육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운행 차량 현재 운행 중인 차량만을 기술하였다. 기관차 4400호대 디젤 기관차 (중형) 73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74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75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76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8000호대 전기 기관차 8100호대 전기 기관차 8200호대 전기 기관차 8500호대 전기 기관차 일반 여객 영업 동차 KTX: 대한민국에 최초로 도입된 여객 영업용 고속철도 차량이다. KTX-산천(110000호대): 기술 시험 차량인 HSR-350x를 토대로 국산화한 차량이다. KTX-산천(140000호대): 강릉선(원주~강릉 구간) 개통에 대비하여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이다. KTX-이음(150000호대): 중앙선 서원주-봉양 구간과 도담-단양간 복선화, 안동역까지 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운행을 시작한 고속철도 차량이다. KTX-산천이 다녔던 강릉선도 운행중이다. 200000호대 전동차: 누리로 등급이다. 210000호대 전동차: 기존 새마을호를 대체하는 ITX-새마을 등급으로 2014년 5월 12일부터 운행되고 있다. 368000호대 전동차: ITX-청춘 등급으로 경원선·경춘선에서만 운행하는 고상홈 대응 차량이다. 2012년 2월 28일 운행을 개시하였다. 도시통근형 디젤 액압 동차 · 무궁화호 개조형 디젤 동차: 통근열차 등급으로 운행하며, 일부 차량이 무궁화호 등급으로 개조되었다. 통근형 전동차 수도권 전철 3000호대 전동차: 3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11000호대·312000호대 전동차: 1호선 금천구청 - 광명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19000호대 전동차: 1호선 (영등포 - 광명셔틀)구간에만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2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문산 - 도라산구간과 서울역 - 가좌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3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41000호대 전동차: 4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5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6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춘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71000호대 전동차: 경강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391000호대 전동차: 서해선 광역전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부산 도시철도(부산·경남권) 381000호대 전동차: 동해선 광역전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새마을호 무궁화호 발전차 화차 우편차 열차 내 안내방송 철도청 시절이었던 1990년대까지는 종착역을 제외하면 별도의 음악 없이 육성으로만 녹음된 자동안내방송이 나왔으며 카세트테이프 방식으로 송출되었다. 2002년 이윤정, 브랜든 성우의 투입과 함께 1호선에 정차역, 환승역 음악이 처음 적용되었고 2003년 남은 국철, 3호선, 4호선, 분당선 전 구간에 성우 변경과 정차역, 환승역, 출발역 음악이 적용되었다. 철도청은 2002년 이후 카세트테이프 방식의 자동안내방송을 중단하였고, 2003년 전 구간 안내방송을 CD로 재녹음한 이래 CD 안내방송만을 사용했다. 2010년 이후에는 자동안내방송 시스템으로 방송한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는 김수희 성우가 정미나 성우가 광역전철과 통일호에서 각각 한국어와 영어 안내방송을 맡았다. 2002년 1호선 한정으로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의 안내방송으로 시험 변경되었고, 다음 해인 2003년 국철, 분당선, 3호선, 4호선 등 철도청 관할 광역전철 전 노선이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의 안내방송으로 변경되었다. 철도청은 KTX가 개통한 2004년에는 무궁화호, 새마을호의 안내방송까지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로 바꾸었는데 이는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외국인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영어 방송을 기존 한국인 성우에서 원어민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의 교체였다. 통일호 종운 이후 남은 통근열차에는 김수희, 유미나 성우의 안내방송이 2009년까지 적용되었다. 출발역, 정차역, 환승역, 종착역 시그널 음악 출발역 광역철도, ITX-청춘: 한국철도공사 ID송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봄소나기 KTX: 몽금포타령(대기음악), Jesus bleibet meine fleude(출발 후 방송음악) 정차역 KTX: California Vibes 광역철도, ITX-청춘: 미적용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누리로: 어린달 환승역 광역철도: 얼씨구야 KTX,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미적용 종착역 KTX 방송 전: Same road same reason 방송 후: 한국철도공사 로고송+Happiness 광역철도, ITX-청춘: 한국철도공사 로고송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누리로: 날자꾸나 과거 출발역 광역철도: 4음징글(~2002년), Last Mattinata (2003년~2010년) KTX: Peaceful Rain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 꽃의 동화 (2006년~2008년), Let it be (2008년~2010년) 무궁화호: What will I do (2002년~2004년), Dreamers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2001년~2004년), Outlook (2004년~2008년), Dreamers (2008년~2011년)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 방송, 4음징글 정차역 광역철도: 미적용 KTX: 4음 징글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2007년), 캐논변주곡 (2008년~2010년) 무궁화호: 육성방송 (~2007년), 회전목마 (2008년~2010년),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1악장 (2012년~2014년) 새마을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1악장 (2012년~2014년)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 방송, 자동안내방송 환승역 광역철도: 육성방송, 뻐꾸기 효과음 (1993년~2003년) 모차르트 미뉴에트 (2002년~2010년) KTX, 무궁화호, 새마을호, 통일호, 통근열차: 미적용 종착역 광역철도: 터키행진곡 (1993년~2003년) 모차르트 교향곡 17번곡 (2002~2010), 사랑을 전하세요 코레일(2008~2010) KTX: Peaceful Rain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2007년), 캐논 변주곡 / Dreamers (2008년~2010년) 무궁화호: What will I do (2002년~2004년), Let it be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2001년~2007년), Let it be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방송, 자동안내방송 성우 한국어 광역철도: TTS ITX 청춘: 조영미, 강희선 (승차권 공지사항) 무궁화호, ITX-새마을: 조예신 KTX: 고구인 누리로: 조예신(2016년 12월부터) 영어 광역철도: TTS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KTX: 리사 켈리, 제니퍼 클라이드(ITX 청춘 승차권 공지사항) 누리로: 리사 켈리(2016년 12월부터) 과거 한국어 광역철도: 김수희 (1993년~2003년), 이윤정 (2002년~2010년) 한수림 (2008년~2010년) 무궁화호: 이선 (2000년~2004년), 이윤정 (2004년~2012년) 새마을호: 이선 (2000년~2004년), 이윤정 (2004년~2007년) 누리로: 이윤정(2009년~2016년 11월) 통일호 / 통근열차: 김수희 (1990년대~ 2009년) 영어 광역철도: 조미나 (1993년~2003년), 브랜든 (2002년~2010년) 무궁화호: 브랜든 (2000년~2014년) 새마을호: 브랜든 (2000년~2014년) 누리로: 브랜든 (2009년~ 2016년 11월) 통일호 / 통근열차: 조미나 (1990년대~2009년) 열차 접근음 상행선 광역/도시철도: 실로폰 ITX 청춘: 실로폰 수도권 전철 : 실로폰 멜로디 무궁화호, 새마을호, 누리로, ITX-새마을, KTX: 역마다 다름 하행선 광역/도시철도: 트럼펫 ITX 청춘: 트럼펫 수도권 전철 : 트럼펫 멜로디 무궁화호, 새마을호, 누리로, ITX-새마을, KTX: 역마다 다름 사옥 2006년 12월 착공한 한국철도공사 대전 본사는 2009년 8월 완공되었으며, 쌍둥이 빌딩 형식으로 서관에 한국철도공사, 동관에 한국철도시설공단(現 국가철도공단)이 입주하였다. 본사는 연면적 23,507m2이며,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이다. 역대 사장 임기는 3년이다.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철도 대한민국 철도청 국가철도공단 한국철도대학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 국유 철도 김행균 KTX 여승무원 고용 분쟁 내일로 코레일 멤버십 카드 코레일체 레일플러스 각주 외부 링크 레츠코레일 웹사이트 한국철도TV - 유튜브 대한민국의 준시장형 공기업 대전광역시의 기업 2005년 설립된 기업 공공기관 (국토교통부 소관) 대한민국의 철도 기업 1963년 설립된 기업 대한민국의 브랜드 국영 철도 기업 대한민국의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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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교통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교통에 대해 서술한다. 도로 교통 한국의 도로 교통은 삼국시대의 역원제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경흥, 평해(지금의 울진), 동래, 제주, 강화 등 6개 방면으로 발달되었다. 1900년대 초에 옛길이 신작로(새길, 포장로)로 바뀌고 1911년에 관용 자동차가 도입되며 1912년 택시와 버스가, 1928년부터는 화물자동차가 등장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 버스가 등장하고, 이후로 전국 각지에 고속 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 거의 모든 도시 내부 및 도시간의 주요한 대중 교통 수단으로 각종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소비패턴이 변화함에 따라 자동차의 보유대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도로화율은 점차 둔화되고 있어 심각한 적체·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율 또한 해마다 질·양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총 1,449만 6,844대로 1998년 1,046만 9,599대에 비해 약 1.4배, 2000년 대비 1.2배 증가를 나타냈다. 업종별로는 영업용이 74만 5,912대로 전체 차량의 5.1%를, 비영업용이 1,375만 932대로 94.9%를 차지하고 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020만 2,813대, 버스 125만 6,728대, 화물자동차 299만 3,280대, 특수차량 4만 4,023대로 나타났다. 동년기준으로 운수업체 수는 총 29만 8,148사이며, 종별로는 시내버스 390사, 시외버스 159사, 고속버스 21사, 전세버스 462사, 택시 1,832사, 노선화물 23사, 구역화물 등화물 1,305사, 용달 605사, 장의자동차 404사 등이다. 운수업체 종사자수는 총 54만 6,214명이며, 이 중 운전자는 버스업종 7만8,823명, 택시업종 25만3,370명, 화물업종 16만명이고 정비원은 1만2,477명, 기타 3만8,898명이다. 도로 대한민국에서는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 등의 7종의 종류로 도로를 구분하며, 나열한 순서대로 등급을 설정하고 있다. 도로의 정의에 관해서는 《도로법》을, 도로에서의 안전 수칙 등과 관련해서는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버스 교통 대한민국의 버스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를 일컫는다. 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운송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시내 버스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현재 각급 버스의 인킬로는 48003105384.3725명킬로미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 기업체는 경기고속으로, 577개의 일반 시내버스, 15개의 광역버스, 340개의 시외버스, 56개의 고속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택시 교통 대한민국의 경우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하면, 택시는 정식적으로는 택시여객 자동차운송사업이라 말하며, 1개의 계약으로 승차 정원 6명 이하의 자동차를 이용, 승객을 운송하는 사업이라고 하며 특정한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택시를 운행할 수 없다. 운수회사에 속한 회사택시와 개인이 영업하는 개인택시가 있는데, 개인택시의 경우 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에 맞아야 한다. 지역별로 택시 색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2009년 12월4일 하이브리드택시가 서울에 도입되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모든 택시를 하이브리드카로 바꿀 예정이다. 철도 교통 전통적인 장거리 대량운송 수단인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화, 서비스의 부재, 경영의 진부화 등으로 한때 심각한 재정악화와 퇴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지속적인 노후시설대체, 서비스개선, 경영합리화 작업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궤도 총연장 6,819km로 영업노선이 45개 노선에 3,101.2km고, 이 중 복선화율은 28.4%, 전철화율은 18%이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철도수송장비는 동력차가 총 2,851량으로 디젤기관차 482량, 전기기관차 96량, 디젤동차 610량, 전기동차 1,662량, 증기기관차 1량이며, 객차는 총 1,678량, 화차는 1만 4,113량으로 역(驛)은 총 631개이다.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은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거나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현재 9개의 광역전철과 지하철 노선이 있으며, 1개 노선이 건설 중, 여러 개의 경전철을 추가로 계획 중이다. 이 노선은 현재 한국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세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도권 지역의 것까지 합치면 현재 운영되고만 있는 것만 해도 11개, 지선과 건설되고 있는 것을 합치면 26개나 된다. 또한 수도권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지하철들이 건설되어 인천광역시 (2개 노선), 대구광역시 (3개 노선), 대전광역시 (1개 노선), 부산광역시 (6개 노선), 광주광역시 (1개 노선) 등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각각의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단 부산에 있는 부산김해경전철은 민간기업이 운영한다 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코레일이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증기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몇몇 지방도시에서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다만 협궤 철도는 수인선이 공식적으로는 영업 정지 상태여서 철도 통계에는 존재한다. (현재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표준궤로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전차 과거에는 서울전차, 부산전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선되었다. 해상 교통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항공 교통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공항이 국내외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6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3월에 민영화 정책으로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1970년대 여객·수출입화물의 증가로 본궤도에 올라 고속성장을 지속해온 업종이었다. 1988년 대한항공의 독점을 마무리하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 항공이 국내선에 취역함으로써(국제선취역은 1990년 1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였다. 2002년 말 현재 항공기보유대수는 총 295대로 수송기 183대, 경비행기 28대, 헬리콥터 60대이었다. 국제항공노선은 26개국 63개 도시에 79개(16개 중복노선)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이 중 여객노선은 69개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진에어,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등 많은 저가항공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의 항공 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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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스웰 쿳시
존 맥스웰 쿳시(, 1940년 2월 9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경력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이며, 아프리칸스어도 사용했으나, 영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작품도 영어로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영어식인 존 맥스웰 쿳시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대 초 영국으로 이주하여 IBM을 거쳐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인 IC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이 때의 경험은 《Youth》(2002)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 1971년 뉴욕주 버펄로의 뉴욕 주립 대학교 버펄로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버펄로에서 첫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을 착수하였다. 그 사이 그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허락되지 않자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2001년까지 재직했다. 1974년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등단한 이후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야만스러운 서구 문명에 그 근본 원인을 찾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83년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로 영어권 작가에게 수여하는 영국의 유명 문학상인 맨 부커 상을 받았다. 1999년 《추락(Disgrace)》으로 다시 부커상을 받아,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부커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문학 활동을 한 이래 거의 은둔하며 지냈기 때문에 두 차례 모두 수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커먼웰스상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상, 프랑스의 페미나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부커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외자의 놀라운 관여를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였으며,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네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는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정년퇴임 후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영문학부 명예 연구원이 되었고, 2003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교환교수를 겸임했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도 취득했다. 작품 1974 《어둠의 땅(Dusklands)》 1977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 1980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 1983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 1986 《포(Foe)》 1990 《철의 시대(Age of Iron)》 1994 《페테르부르크의 대가(The Master of Petersburg)》 1999 《추락(Disgrace)》 1999 《동물로 산다는 것(The Lives of Animals)》 1997 《소년시절(Boyhood: Scenes from Provincial Life)》 2002 《Youth: Scenes from Provincial Life II》 2003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 200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Diary of a Bad Year)》 2009 《슬로우 맨(Slow Man)》 각주 194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설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노벨상 수상자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벨상 수상자 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동문 케이프타운 대학교 동문 하버드 대학교 교수 맨부커상 수상자 뉴욕 주립 대학교 교수 시카고 대학교 교수 네덜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독일계 오스트레일리아인 폴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독일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폴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미국에 거주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무신론자 오스트레일리아의 무신론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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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수도권(首都圈, ) 또는 수도 지역(首都 地域), 수도 지구(首都 地區)란 수도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주변 도시권 지역을 하나로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각국의 주요 기능(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다. 또한 수도권은 어느 한 나라의 수도와 함께 가까운 지역이 수도권에 포함된다. 그리고 수도권이나 수도에는 법정구역이 대부분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은 비수도권으로 부른다. 세계의 수도권 수도권: 도쿄도 등 간토 지방(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지바현, 사이타마현 포함) 수도권: 베이징, 톈진 및 허베이성 일원 수도권: 타이베이시 및 신베이시 일원 수도권: 메트로 마닐라 및 라구나 주, 카비테 주, 리살 주, 불라칸 주 일원 수도권: 자와섬 일원 수도권: 쿠알라룸푸르 및 푸트라자야, 슬랑오르주 일원 수도권: 델리 국가수도직할구 경제권 (뉴델리와 델리 일원) 수도권: 이슬라마바드 수도권 수도권: 모스크바와 모스크바주 일원(모스콥스카야 지역 포함) 수도권: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 수도권: 브라질리아 시 일원 수도권: 멕시코 시티 및 멕시코주, 모렐로스주 일원 수도권: 국가 지구 수도권: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수도권: 워싱턴 D.C,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웨스트버지니아주 일원 수도권: 오타와 및 가티노 일원 수도권: 그레이터 런던 수도권: 일드프랑스 수도권: 베를린 및 브란덴부르크주 일원 수도권: 베른주 북서부 일원 수도권: 브뤼셀 수도 지역 수도권: 덴마크 수도 지역 대한민국의 수도권 대한민국의 경우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지방의 전역을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순천시, 평성시, 황해북도 중화군, 상원군 일대를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같이 보기 수도권대기환경청 각주 수도 대도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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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
특별시(特別市)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이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특별시는 서울특별시가 유일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켜 경기도에서 분리하였으며, 대한민국 출범 후 1949년에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개칭하였다. 광역시 및 특별자치시 및 도와 동급인 광역지방자치단체이지만, 특별시장은 차관급인 광역시장 및 도지사보다 더 높은 장관급이다. 사건 및 논란 세종특별시 승격 추진 2017년 4월 27일 오전 이경희 한국국민당 대선후보가 세종특별자치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종시를 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와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을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대전특별시 승격 추진 2017년 4월 17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거리에서 대전을 특별시로 승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충청의 중심 대전이 충청의 중심으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며 반드시 대통령이 돼서 충청의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전주특별시 승격 추진 2017년 3월 22일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전라북도의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안희정 후보는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하고 전주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문화전통의 도시로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하겠다며,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새만금특별시 신설 추진 2017년 5월 1일 오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전주시 전동성당 인근에서 거점유세를 열고 "전국의 모든 첨단산업을 새만금으로 모아보자"며 "새만금특별법을 통과시켜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홍준표 후보는 새만금 개발 추진에 조건이 있다며 "전북에서 20% 이상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해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새만금을 홍콩 식으로 개발을 해보겠다"며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난 뒤에 1국2체제 형식으로 운영했다. 홍콩의 자본주의를 손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서 모든 규제를 싹 없애버리고 환경, 경찰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1국 2체제로 개발하자는 것"이라며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끌어내서 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특별시 승격 추진 부산의 특별시 승격 주장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수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서도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공회의소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 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공회의소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1949년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부산시는 한국 전쟁 중에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의 시세(市勢)가 강해졌고 부산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부산시를 특별시로 지정해야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후에 서울특별시와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4.19 이후 다시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주장되었으나 장면 내각은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경부축을 발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박정희의 의지로 부산시는 특별시보다 한 단계 낮은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2003년 2월 17일 부산의 6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옛 부산경제가꾸기 시민연대)´가 올해 ´부산의 특별시 승격´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2003년 전개할 시민경제운동 10대 사업을 발표하면서 ´특별시 승격운동을 신규사업으로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새 정부가 주요 국정지표로 내세운 분권적 차원에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세계경쟁력을 강화하는 국가전략 투자도시로서 부산을 특별시로 승격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부산발전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또 ´부산특별시´승격을 전제로 한 경상남도 양산시 및 진해시 웅동지역의 발전적 통합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2003년 6월 23일 홍성철 진해문화원 이사는 창원대학교 국제홀에서 지방분권운동경남본부(상임대표 안홍준) 주최로 열린 ‘부산광역시의 대도시 패권주의 대응 토론회’에서 ‘진해신항 건설에 따른 경제적 효과 분석’을 주제 발표하고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진해는 물론 김해·양산까지 부산에 편입시켜 서울에 버금가는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은 진해 용원동 일대에 건설되는 진해신항의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독식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또 경남과 부산이 함께 발전하려면 경남 땅의 부산 편입 논리에 벗어나 양산·김해를 지켜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진해시민과 전체 경상남도민이 힘을 모아 부산의 진해 신항 편입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 이사는 “현재 부산항은 컨테이너 선석 21개만으로도 항만관련 매출액이 연간 20조원을 웃돈다”며 “신항만은 부산항의 1.5배인 30선석으로 어느 자치단체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이익의 향배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산항의 20조원 매출은 부산 부가가치의 40%며 항만의 고용효과도 전체의 27%”라며 “신항의 30선석 가운데 18선석만 소속돼도 개당 1만5000원인 컨테이너세가 도세 수입으로 연간 724억원”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산은 이처럼 항만의 가치를 잘 알고 신항만을 한 손에 틀어쥐려고 끈질기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양산·김해·진해를 부산에 집어넣어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도 핵심은 진해 땅에 있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앞서 토론한 박동철 경남신문 편집국장도 “부산의 목적은 신항만 독자 운영을 위한 진해권역 편입”이라며 “부산은 진해 웅동·용원동 일대만 손에 넣어도 크게 만족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26일 YTN은 부산광역시청이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양 관련 산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중앙정부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양특별시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해양특별시가 되면 항만시설을 비롯해 해양자원개발사업 시행자와 관련기업에 대한 조세감면은 물론 정부의 예산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독자적으로 해양개발에 나설 수 있고 해양부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부산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최우용 동아대학교 교수는 "해양특별시 법률안의 제정방안은 국가균형발전과 해양도시의 국가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추진에 난항이 예상된다. 2004년 12월 3일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은 "해양수도로서 부산특별시를 설치하며 국가가 부산시를 국제해양수도로 개발하기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추진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특히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국가나 특별시로 승격되는 부산시가 항만시설과 해양자원, 해양산업의 개발사업자 등에 대해 조세와 각종 부담금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또 부산 여행객이 지정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할 경우 면세와 환급특례를 부여하고 카지노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관광진흥법에 특례를 두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유 의원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차등적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유수한 경쟁 항만들의 독주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부산이 살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2009년 7월 16일 민주당 조경태 의원이 부산 국제신문사 대강당에서 ‘부산해양특별시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 김인세 부산대학교 총장,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박경문 전 경성대학교 총장, 신정택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오거돈 한국해양대학교 총장, 범어사 주지 정여스님, 정홍섭 신라대학교 총장, 조규향 동아대학교 총장 등 지역 내 유력인사들이 추진위 상임고문을 맡고, 조 의원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조 의원은 국회에서 <폴리뉴스>와 만나 “정치권의 이념적, 정략적 접근을 떠나 해양특별시를 바라는 부산시민들의 염원을 이뤄내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실천적 행동”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해양특별시로 부산의 차세대 성장 동력인 해양물류와 해양관광을 적극 육성하고, 장기적으론 우리나라의 경제수도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이라며 “미국, 호주,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정치수도와 경제수도로 이원화돼 있는데,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각 전문가 150여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에서 부산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동시에 구체적 실무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약 1년6개월 후엔 특별법 발의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2012년 7월 27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부산을 해양거점도시로 만들고, 부산특별시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이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산·울산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이 같이 밝히며 "세종시도 특별시, 제주도도 특별자치도다. 가능하냐고 물어보겠지만 확실히 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부산의 그린벨트도 지금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것을 시가 직접 관리하도록 바꾸고, 도시계획과 여러 규제도 시로 위임하겠다"며 "부산을 좀 더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부산·울산 통합 특별시 승격 추진 2007년 2월 13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가칭 동북아 부산포럼(대표 조관홍 동아대학교 교수) 초청특강에서 "국토 동남지역 광역경제권을 수도권에 상응하는 규모로 활성화하고 해양물류도시로서 상해, 천진 등 인근 항만 도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산·울산·거제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해 특별시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손학규 측 관계자도 "100만과 400만의 도시 규모로는 국제적인 경제에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해양특별시를 염원하는 부산과 산업특별시를 추구하는 울산을 통합하여 광역경제권을 형성하고 수도권 중심의 1극체제가 아닌 양극체제로 우리나라 경제권을 편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산과 울산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보완적 성격으로 통합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이며, 수도권·중부권·호남권·동남권의 4대 경제권과 강원도와 제주도의 2개 경제권을 부르짖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4+2체제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울산광역시청은 '정치인의 주장으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울산 상공계에서도 "부산과 울산을 통합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부산을 염두에 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정치적인 면은 제쳐두고라도 인구만 봐도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울산이 부산과 대등한 통합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에 하나 양도시가 통합된다면 울산은 부산을 먹여 살리는 생산기지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해운대관광특별시 승격 추진 2011년 6월 28일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창조도시 전략세미나에서 배덕광 해운대구청장은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을 민선 5기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청장은 "지난 7년 동안 3선 구청장으로서 구정을 운영해오면서 지방재정에서부터 인사 등 모든 권한이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어 지방분권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해운대의 무궁무진한 인프라와 역량을 이용해 관광 특별시를 조성한다면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해운대구청은 내부적으로 T/F팀을 구성하고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지난 2006년 제주도청이 제주특별자치도청으로 지정된 것처럼 해운대를 영상과 컨벤션, 관광산업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해운대구청은 해운대특별자치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 2012년도에 계획된 지방행정체제 개편 방안에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해운대구청은 한발 나아가 관광특별시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인근 구군과의 통합을 제안할 계획이지만 해당 지역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련 지방자치단체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해운대구청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는 기장군의 오규석 군수는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묻고 싶다"며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지자체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현욱 수영구청장 또한 "주변 지방자치단체와의 통합을 논하기 하기 전에 해운대구 안에서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의 독단적인 관광특별시 발표에 불쾌함을 나타냈다. 더욱이 최근 수년 동안 논란이 되어온 부산지역의 동서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서부산시민협의회 김영주 공동대표는 "부산지역 내 동서 간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운대구가 관광특별시 조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며 "이같은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부산에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주특별시 승격 추진 2002년 8월 15일 경주신문은 문화재보호에 따른 경주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주발전 전략의 한 방안으로 거론되던 '경주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키자'는 운동이 지역의 한 민간단체에 의해 본격 추진된다고 보도하였다.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 전 국회의원)는 최근 경주 특별시 승격추진 계획 건의서를 한나라당을 비롯한 각 정당과 경주시청 등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문화특별시 승격 추진 논의는 1990년대 후반 지역내 일부 교수들에 의해 처음제기됐으나 그동안 경주시청과 경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주지역출신 국회의원 등이 주로 고도보존특별법 제정운동에 주력하는 바람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2002년 11월 2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시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대선후보에게 요구하기로 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중앙정부 주도로 경주의 문화재를 종합정비하고 예산의 집중배정 등으로 외국인 유치에 노력하고 시민들의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11월 4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의 국무총리 산하 문화특별시 지정을 골자로 성타(性陀) 불국사 회주스님, 백상승 경주시장, 이진구 경주시의회 의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을 비롯해 경주시의원 18명 등이 연대서명한 ‘경주 문화특별시 승격 건의서’를 각 정당 16대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불국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개 지구를 비롯 2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도시인 경주가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도굴과 훼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라며 “이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시 지정과 함께 이미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고도보존법의 조속한 통과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특히, “세계각국은 문화재 관리로 인해 시민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법률을 제정해 문화재 보호와 사유재산권 행사를 조화롭게 해결해 오고 있는 추세”라며 “지금까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시민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지금 시민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경주발전협의회는 밝혔다. 경주발전협의회 황윤기 회장은 “경주 특별시 지정이 대선공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각 정당을 순회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8년 11월 1일 경주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2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의 특별강연에서 경북대학교 문경현 명예교수는 ‘경주시의 문화특별시 지정 당위성’이라는 주제로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경주가 세계적 유물과 유적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에 이같은 고적보존과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개발을 해야됨에도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으로는 재정감당이 안돼 수많은 유적지가 훼손일로에 있으므로 하루빨리 특별시로 승격시켜 국가가 특별예산지원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남해안해양특별시 신설 추진 2013년 1월 10일 미디어워치에 따르면 일각에서 망국적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신설되는 해양수산부 주도로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남해안해양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남해안해양특별시’는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계획으로 단순히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공동대표 한나라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의원)은 지난 2011년 12월 27일 ‘남해안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도시들 묶어 인구 130여만명의 ‘섬진광역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가칭 ‘섬진광역시’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및 경상남도 남해군, 하동군, 사천시가 포함되며, 교육과 관광, 미래 첨단기술과 성장동력 산업을 결합시킨 미래 친환경 복지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 '남해안해양특별시'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권 이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선산업 관리기능 이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및 해양수산부)의 도서 및 해양과 이어진 육지부분 개발권 이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행정구역개편 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라선특별시와 남포특별시, 개성특별시가 특별시로 설치되어 있다. 라선시는 2010년 1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특급시'에서 특별시로 승격시킴으로써 생겨났다. 중화민국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인구 백만명이 넘는 난징, 상하이, 베이징, 톈진, 칭다오, 충칭, 시안, 광저우, 한커우(현재 우한시의 일부), 선양, 하얼빈시의 11개 도시를 특별시로 지정했다. 이후 "원할시"로 개칭하면서 특별시라는 이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같이 보기 광역시 특별자치시 도 특별자치도 특례시 자치구 특할시 각주 외부 링크 서울특별시행정에 관한 특별법 - 국가기록원 1946년 설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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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94%EB%8F%84
팔도
팔도의 위치 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 구역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시행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눈 13도제가 시행되었다. '팔도'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며, 여러 지방의 아리랑이 '팔도 아리랑'으로, 여러 지방의 김치가 '팔도 김치'로도 불린다. 그러므로 '팔도'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각 도의 이름은, 그 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도시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들었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수도(京) 사방 500리 이내로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땅'이란 뜻으로 '기(畿)'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래의 표는 도청 소재지와 지방 이름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및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따라서 정리한 것이다. 행정구역 목록 같이 보기 이십삼부 (1895) 십삼도 (1896) 한국의 지방 구분 한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각주 조선의 행정 구역 1413년 설치 1895년 폐지 명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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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D%96%89%EC%A0%95%20%EA%B5%AC%EC%97%AD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大韓民國의 行政 區域)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자치도, 1개의 특별자치시로 구성된다. 이상 총 17개의 행정구역은 광역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시는 자치구로, 광역시는 자치구와 자치군으로, 도는 자치시와 자치군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이상의 행정구역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자치도와 특별자치시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으며, 특별자치도에는 자치시가 아닌 행정시를 둔다. 행정시는 특별자치도지사 직속으로 그 역할을 하며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 8개 도와 6개 광역시에는 총 75개의 자치시와 82개의 자치군이 설치되어 있으며, 특별시와 6개 광역시에는 총 69개의 자치구가 설치되어 있다.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명 이상의 자치시에는 일반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어, 특별·광역시에 설치된 자치구와 구별된다. 일반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보(補)하고 시장이 임명한다. 구청장은 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 및 지방자치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 시(자치시, 행정시)와 구(자치구, 일반구)는 읍·면·동으로, 군은 읍·면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다시 읍·면은 리로, 동은 통으로 나뉜다. 통 및 행정리는 말단 행정 구역인 반으로 나뉜다. 행정구역 단위 구분 행정 구역 별 인구 및 면적 자료: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주민등록 인구 (2019년 2월 기준) 행정 구역 현황 서울특별시 자치구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광진구 동대문구 중랑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은평구 서대문구 마포구 양천구 강서구 구로구 금천구 영등포구 동작구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부산광역시 자치구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 부산진구 동래구 남구 북구 강서구 해운대구 사하구 금정구 연제구 수영구 사상구 군 기장군 대구광역시 자치구 중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 수성구 달서구 군 달성군 인천광역시 자치구 중구 동구 미추홀구 연수구 남동구 부평구 계양구 서구 군 강화군 옹진군 광주광역시 자치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 광산구 대전광역시 자치구 동구 중구 서구 유성구 대덕구 울산광역시 자치구 중구 남구 동구 북구 군 울주군 세종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는 하위 행정구역으로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자치단체이다. 경기도 경기도는 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8시 3군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남부는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 경기북부는 의정부시에 소재한 경기도청북부청사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자치시 수원시 장안구 권선구 팔달구 영통구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 의정부시 안양시 만안구 동안구 부천시 광명시 동두천시 평택시 안산시 상록구 단원구 고양시 덕양구 일산동구 일산서구 과천시 구리시 남양주시 오산시 시흥시 군포시 의왕시 하남시 용인시 처인구 기흥구 수지구 파주시 이천시 안성시 김포시 화성시 광주시 양주시 포천시 여주시 군 연천군 가평군 양평군 강원도 자치시 춘천시 원주시 강릉시 동해시 태백시 속초시 삼척시 군 홍천군 횡성군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양양군 충청북도 자치시 청주시 상당구 흥덕구 서원구 청원구 충주시 제천시 군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증평군 진천군 괴산군 음성군 단양군 충청남도 자치시 천안시 동남구 서북구 공주시 보령시 아산시 서산시 논산시 계룡시 당진시 군 금산군 부여군 서천군 청양군 홍성군 예산군 태안군 전라북도 자치시 전주시 완산구 덕진구 군산시 익산시 정읍시 남원시 김제시 군 완주군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 임실군 순창군 고창군 부안군 전라남도 자치시 목포시 여수시 순천시 나주시 광양시 군 담양군 곡성군 구례군 고흥군 보성군 화순군 장흥군 강진군 해남군 영암군 무안군 함평군 영광군 장성군 완도군 진도군 신안군 경상북도 자치시 포항시 남구 북구 경주시 김천시 안동시 구미시 영주시 영천시 상주시 문경시 경산시 군 군위군 의성군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예천군 봉화군 울진군 울릉군 경상남도 자치시 창원시 의창구 성산구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진해구 진주시 통영시 사천시 김해시 밀양시 거제시 양산시 군 의령군 함안군 창녕군 고성군 남해군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거창군 합천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는 하위 행정구역으로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지방자치단체이다. 행정시는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아니다. 행정시 제주시 서귀포시 역사 미군정기 1945년 11월 2일 :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의 8도로 구성 (군정법령 21호) 1946년 8월 1일 : 제주도 신설 (군정법령 제94호) 1946년 9월 28일 : 서울특별자유시 설치 (군정법령 제106호)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8월 15일 : 서울특별자유시의 명칭을 서울특별시로 개명 (지방자치법, 법률 제32호) 1963년 1월 1일 : 부산시 설치 (부산시정부직할에관한법률, 법률 제1173호) 1981년 4월 4일 : 부산시의 명칭을 부산직할시로 개명 (지방자치에관한임시조치법, 법률 제3412호) 1981년 7월 1일 : 대구직할시, 인천직할시 설치 (대구직할시및인천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 3424호) 1986년 11월 1일 : 광주직할시 설치 (광주직할시및송정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3808호) 1989년 1월 1일 : 대전직할시 설치 (대전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4049호) 1995년 1월 1일 : 직할시의 명칭을 광역시로 변경 (지방자치법, 법률 제4789호) 1997년 7월 15일 : 울산광역시 설치 (울산광역시설치등에관한법률, 법률 제5243호) 2006년 7월 1일 : 제주도를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 남제주군, 북제주군을 각각 서귀포시, 제주시에 통합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법률 제7849호) 2012년 7월 1일 :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법률 제10419호)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산하에 이북5도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도지사 및 시장·군수, 읍·면장을 임명하고 있다.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주소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 대한민국의 지방 관청 한국의 행정 구역 일제강점기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목록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목록 대한민국의 도청 소재지 특별시 광역시 대한민국의 도 대한민국의 구 특별자치도 특별자치시 특례시 대도시 행정동 법정동 ISO 3166-2:KR 도농복합시 출장소 광역지방자치단체 기초지방자치단체 각주 외부 링크 1948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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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노벨 문학상( - 文學賞, , )은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중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 때때로 작가 개인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특정 작품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에서 "기여"란 한 작가가 쓴 작품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특정 년도에 상을 받을 사람을 결정하며 수상자의 이름을 10월 초에 발표한다. 이 상은 다섯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895년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었다. 다른 노벨상은 노벨 화학상, 노벨 물리학상, 노벨 평화상, 노벨 생리학·의학상 그리고 노벨 경제학상이 있다. 역대 수상자 기타 노벨 문학상은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수여한다. '문학'상이라는 번역에서 따라나오는 일반적인 오해로서, 역사가나 철학자에게 수여한 경우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Literature가 문학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닌, 어원이 라틴어 Litera(문자, 글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쓰는 행위' 일반에 대한 것이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베르그송과 몸젠 같은 철학자나 역사가가 그들의 유려한 문체와 사상으로써 이 상을 수여받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는 대개 문학가에 국한하여 수여하고 있다. 초기에는 노벨이 명시한 이상적라는 기준을 문학적 이상주의라는 협의로서 해석하여 수상 여부를 결정하였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광의의 '이상'으로서의 기준을 적용하게 되었다. 1914년, 1918년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고, 1935년은 기타 사유로 인해 수상자가 없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다.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수상을 거절했으며 1989년에 그의 아들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의 노벨 문학상 메달을 대신 받았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폴 사르트르는 수상을 거부했다. 2018년에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 스캔들의 여파로 인해 수상자 선정이 보류되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 한림원 측은 2019년에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동시에 발표하였다. 각주 외부 링크 http://www.nobel.se/literature/laureates/index.html 1901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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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잠든 미녀()』, 『고도()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생애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군(西成郡)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 「석일(원제: )」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 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신조()』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 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연보 작품 목록 이즈의 무희() 설국() 고도() 단포포() 산소리() 여자라는 것() 명인() 이즈의 여로() 무희() 이 외 다수. 수상 경력 1937년 - 「설국」으로 문예간담회상 수상 1944년 - 「고향」, 「석양」 등으로 기쿠치간상 수상 1952년 -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芸術院賞) 수상 1954년 -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野間文芸賞) 수상 1958년 - 도쿄 국제 펜클럽에서 활약한 데에 대한 노고 치하로서 제6회 기쿠치간상 수상 1962년 -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 수상 1968년 - 노벨 문학상 수상 일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부립 이바라키 중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다만 수필 등에서 나오듯이 가와바타의 관심은 입학한 뒤에 곧장 예술이나 어른들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고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졸업 성적표에 보면 가와바타의 작문 성적은 53점으로 전학생 88명 가운데 86등이었다. 교토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양조장 사사키 주조(佐々木酒造)에서 만든 일본술을 맛보고 "이 술의 풍미야말로 교토의 맛이다"라며 작품 이름을 「고도」라 지었다. 만년에 가와바타는 숙박지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 교토대 명예교수)와 면회했을 때에 "고도라는 술을 알고 계신가?" 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대답한 구와바라에게 그 술을 맛보여 주고자 추운 밤에 직접 30분 걸리는 길을 걸어서 사러 갔다고, 구와바라는 회상하고 있다. 일본 기원(日本棋院) 내에 있는 대국용 방에는 가와바타가 쓴 「심오유현(深奥幽玄)」이란 족자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여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김소운(金素雲)이 가와바타의 집에 갔다가 바둑판을 발견하고 "바둑을 얼마나 두십니까?" 라고 묻자 가와바타는 "그저 조금 두지요."라고 대답했고, 당시 8, 9급 수준도 되지 못했던 김소운은 자신 정도의 실력이려니 짐작하고 "언제 한 수 배울까요?" 하고 그에게 대국을 제안했고 가와바타는 "네, 연락 드리지요." 하고 승락했다. 하지만 돌아와서야 가와바타가 명인전(名人戰)의 기보(棋譜)까지 쓸 정도의 아마추어 최상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수했음을 깨달았고, 마침 가와바타가 전화를 걸어 지난 번 약속대로 바둑을 두자고 하는 것에 다른 핑계를 대고 빠져버린 뒤, 『분게이슌주』에 수필을 실어서 가와바타에게 답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가노야 해군항공대(鹿屋海軍航空隊)에 첩보반으로서 부임하고 있었을 무렵, 부대 소속의 소위 스기야마 유키테루(杉山幸照)는 그에게 예전 연료 보급을 위해서 착륙한 스즈카에서 오랜 비행으로 지쳐 얼굴이 창백한 와중에도 사관 식당에서 나온 카레라이스를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에서 깨끗이 비웠던 경험을 말하며 '특공의 비인간성'에 대해 가와바타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당시 스기야마는 원래 특공대 쇼와대 소속으로, 전속 명령이 나와 가와바타와 함께 야타베의 해군 기지로 가는 중이었다). 스기야마는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가와바타가 끝까지 특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이었다고 적고 있다. 가와바타는 부임전에 일본군 본영의 보도부 소속 다카도(高戸) 대위로부터 "특공을 잘 봐 두십시오. 다만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으셔도 좋다. 언젠가는 이 전쟁의 실상을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통고를 받았던 것이다. 후에 다카도는 "섬세한 신경이었기에 (특공에 관해서) 붓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사망에 대하여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자살설 교제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때 가와바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미시마의 장례식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민주당 후보 하타노 아키라(秦野章)의 지원 활동에 떠밀려 나간 것에 대한 수치(하타노는 낙선했다. 다만 가와바타가 본래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형적은 없다) 늙음(창작 의욕의 감소)에 대한 공포 등으로 인한 강한 정신적 동요 가와바타가 좋아했던 가정부의 퇴직(이는 1977년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도 각색되었으나 유족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합의 조건으로 절판). 이상이 가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사고사설 이전부터 가와바타는 줄곧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심야에 집필하는 일이 많은 작가들에게서 수면제 복용은 드문 것이 아니다). 유서가 없었다. 보통 스스로 조작한적 없는 난방 기구의 사용 착오(가스 스토브의 미연소 가스가 방에 가득했다고 여겨진다). 가와바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있을 때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고지로(芹沢光治良)는 추도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川端康成の死)」에서 자살은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의 증언에서 가와바타가 자살했음을 암시해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는 것이다(가와바타 자신도 그 해 가을에 개최된 국제 펜클럽 대회의 준비에서 책임자로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이 보기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외부 링크 Hanami Web - Kawabata Yasunari 1899년 출생 1972년 사망 일본의 소설가 일본의 작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오사카시 출신 도쿄 대학 동문 자살한 작가 일본의 자살한 사람 기쿠치 간상 수상자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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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C%82%AC%EB%85%B8%EB%B0%94
보사노바
보사노바(, 새로운 성향)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한 형식으로 1960년대에 브라질의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보사 노바의 신이라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가 발전시켰다. 삼바(Samba)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1960년대에 미국,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다.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Negro)》(수록곡 카니발의 아침(Manhã de Carnaval))가 1960년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스탠 겟츠(Stan Getz)와 조아웅 지우베르뚜가 함께 녹음한 앨범 Getz/Gilberto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며 아스트루지 지우베르뚜(Astrud Gilberto)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1965년 미국 빌보드,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보사 노바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독일 재즈 평론가 요아힘 E 베렌트는 저서 '재즈북'에서 "보사 노바는 삼바와 쿨 재즈가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유명 뮤지션 브라질 뮤지션 이름의 발음에 관하여: 포루투갈어의 R은 단어의 앞에 쓰일 경우 ㅎ발음을 한다, AL로 끝나는 이름은 아우로 발음한다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통 조빙(Tom Jobim)이라고도 부른다.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 호베르투 메네스카우(Roberto Menescal) 카를루스 리라(Carlos Lyra) 도리바우 카이미(Dorival Caymmi) 호자 파수스(Rosa Passos) 아스트루지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오노 리사(小野リサ) 마르쿠스 발리(Marcos Valle) 가우 코스타(Gal Costa) 루이스 봉파(Luiz Bonfa) 스탠 게츠(Stan Getz)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세르지우 멘지스(Sergio Mendes) 각주 외부 링크 Aderbal Duarte Bossa Nova 재즈 장르 포르투갈어계 외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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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1927년 1월 25일 ~ 1994년 12월 8일)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와 엘리스 헤지나, 세르지우 멘데스,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스탠 게츠,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 조빙이 브라질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시인이자 외교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1956년 연극 《Orfeu de Conceição》의 음악을 맡았을 때였다.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은 〈Se todos fossem iguais a você〉(내 삶을 밝혀줄 누구)였다. 이후 이 연극을 원작으로 프랑스 제작자인 Sacha Gordine가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de Negro)를 만들 때 Gordine은 새로운 곡으로만 영화를 채우고 싶어 했고, 모라이스와 조빙에게 새로운 곡을 써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모라이스는 제작당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머물고 있었고, 둘은 전화를 통해서 단지 3개의 곡만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A Felicidade〉, 〈Frevo〉, 〈O Nosso Amor〉이다. 이 둘의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모라이스는 조빙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의 가사를 써 주었다. 편곡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클라우스 오거만(Claus Ogerman)은 조빙의 많은 곡들을 편곡해 주었다. 조빙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1963년 《게츠/질베르투》(GETZ/GILBERTO) 앨범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앨범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투가 부른 대히트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빙은 수많은 아름다운 앨범을 작곡한다. 조빙과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재즈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와 프랑크 시나트라는 각각 《Ella Abraça Jobim》 (1981) 와《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1967)란 앨범에서 조빙의 곡들을 불렀다. 조빙의 앨범인 《Wave: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1996)은 오스카 피터슨,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투츠 틸레망 등의 연주를 수록하고 있다. 조빙은 세계적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4년 12월 8일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계속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앨범인 《Antonio Brasileiro》은 사후 발매되었다. 조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조앙 바치스타(São João Batista) 묘지에 묻혔으며,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의 이름은 1999년 그를 기념하여 갈레앙-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공항(Galeão - Antônio Carlos Jobim)으로 바꾸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패럴림픽 마스코트인 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대표적 작품 "Chega de Saudade" (1957) 보사노바의 대표적인 곡 "Água de Beber" "Desafinado" (1959), 그래미상 3개 수상 "Samba de Uma Nota Só" (1959) "A Felicidade" e "O Nosso Amor", 영화 "흑인 오르페"" Orfeu Negro (1959) "Insensatez" (How Insensitive)(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0) "Garota de Ipanema" (The Girl from Ipanema)(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3) "Fotografia" (1965) "Triste" (1967) "Wave" (1967) "Águas de Março" (1970) "Luiza" "Corcovado" "Dindi" "Retrato em Branco e Preto" (시꾸 부아르끼 Chico Buarque와 공동작곡) "Samba do Avião" "Anos Dourados" "Meditação" "Só Tinha de Ser com Você" (1974) "Sabiá" "Eu sei que vou te amar" "Falando de amor" "Ela é carioca" "Bebel" "O Grande Amor" "Voce Vai Ver" (You'll See) "O Morro Não Tem Vez" (일명 "Favela") "Inútil Paisagem" (Useless Landscape) "Vivo Sonhando" (Dreamer) "Se Todos Fossem Iguais A Voce" "Só danço samba " "Amor em paz" (Once i loved) 앨범 솔로 앨범 The Composer of Desafinado, Plays (Verve, 1963) Antonio Carlos Jobim (Elenco, 1964) The Wonderful World of Antonio Carlos Jobim (Warner, 1964) A Certain Mr. Jobim (Warner, 1965) Wave (A&M/CTI, 1967) Stone Flower (CTI, 1970) Tide (A&M/CTI, 1970) Matita Perê (Philips, 1973) Jobim (MCA, 1973) Urubu (Warner, 1975) Terra Brasilis (Warner, 1980) Passarim (PolyGram, 1987) Antonio Brasileiro (Columbia, 1994) Inédito (BMG, 1995) 참여 앨범 O Pequeno Príncipe (Festa, 1957) Sinfonia do Rio de Janeiro (Continental, 1954), (Billy Blanco 공동) Orfeu da Conceição (Odeon, 1956) Canção do Amor Demais - Elizete Cardoso (Festa, 1958) Amor de gente moça - Silvia Telles (Odeon, 1959) Chega de Saudade - João Gilberto (Odeon, 1959) Por tôda a minha vida - Lenita Bruno (Festa, 1959) Brasília - Sinfonia da Alvorada (Columbia, 1960) O Amor, o Sorriso e a Flor - João Gilberto (Odeon, 1960) João Gilberto - João Gilberto (Odeon, 1961) Getz/Gilberto - Stan Getz, João Gilberto (Verve, 1963) Jazz Samba Encore! (MGM/Verve, 1963) Caymmi Visita Tom (Elenco, 1965) (Dorival Caymmi , Danilo Caymmi, Dori Caymmi, Nana Caymmi 공동) Garota de Ipanema - vários intérpretes (Philips, 1967) 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67) The Adventurers (Paramount, 1970) Sinatra & Company - Frank Sinatra e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71) Elis & Tom (PolyGram, 1974) ( Elis Regina 공동) Miucha & Antonio Carlos Jobim - vol. I (RCA, 1977) ( Miúcha 공동) Miucha & Tom Jobim - vol. II (RCA, 1979) (Miúcha 공동) Edu & Tom (PolyGram, 1981) ( Edu Lobo 공동) Gabriela (RCA, 1983), 영화 " Gabriela, Cravo & Canela " 사운드 트랙 O Tempo e o Vento (Som Livre, 1985) 미니 앨범 Disco de bolso - O Tom de Tom Jobim e o tal de João Bosco (Zen Editora, 1972) 라이브 앨범 Tom, Vinicius, Toquinho, Miucha - 리우의 Canecão 극장 라이브 (Som Livre, 1977) Rio Revisited - Tom Jobim & Gal Costa (Verve/Polygram, 1989) Tom Canta Vinícius (Universal, 2000) Em Minas ao Vivo: Piano e Voz (Biscoito Fino, 2004) Ao Vivo em Montreal (Biscoito Fino, 2007) Um encontro no Au bon gourmet (Doxy, 2015) 컴필레이션 앨범 Antonio Carlos Jobim: Composer (Warner, 1995) Sinatra-Jobim Sessions (WEA, 1979) Meus Primeiros Passos e Compassos (Revivendo, 1997) Raros Compassos (Revivendo, 2000) 트리뷰트 앨범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 (Verve, 1994) - Ella Fitzgerald, Oscar Peterson ,Dizzy Gillespie 와 Getz/Gilberto에 참여한 음악가들의 레코딩 1927년 출생 1994년 사망 브라질의 작곡가 브라질의 음악 프로듀서 브라질의 재즈 기타 연주자 브라질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프로듀서 보사노바 음악가 리우데자네이루 출신 포르투갈계 브라질인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미국에 거주한 브라질인 20세기 작곡가 포르투갈어 가수 브라질의 재즈 가수 그래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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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A
A
A, a(에이)는 로마자의 1번째 글자이다. 이름 라틴어·독일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베트남어·에스페란토: 아 [aː]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아 [a] 영어: 에이 [eɪ]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아이 [aɪ] 역사 A는 소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에서부터 왔다. 컴퓨터 부호 쓰임 자리의 밑가 십를 초과하는 위치 기수법법은 십을 A로 표기한다. 예 : AB(12) = 131(10), AB(16) = 171(10), AB(20) = 211(10). a는 국제음성기호에서 전설 비원순 저모음을 나타낸다. a는 면적의 단위인 아르의 기호이다. A는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의 기호이다. 기타 상표 등에서는 A에서 가운데의 가로줄을 빼서 'Λ'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러면 그리스 문자 Λ나 키릴 문자 Л와 모양이 같아진다. 예를 들면 SΛMSUNG이나 KIΛ. 국제음성기호에서는 A와 비슷하되 다른 발음으로 Λ를 쓰기도 한다. 외부 링크 History of the Alphabet 로마자 낱자 모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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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
F
F, f는 로마자의 6번째 글자이다. 이름 라틴어·독일어·프랑스어·영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 에프 [ɛf] 스페인어: 에페 ['efe] 이탈리아어: 에페 [effe] 웨일스어: 에브 [ev] 에스페란토: 포 [fo] 쓰임 f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순치 마찰음을 나타낸다. f는 수학 약자 중 함수(function)의 약자로 쓰인다. F는 플루오린을 나타내는 원소 기호이다. F는 연필의 흑연 등급이다. F는 아파트나 빌딩에 4층을 쓰지 않을 때 쓰는 four의 약자이다. 역사 F는 갈고리를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왔다. 컴퓨터 부호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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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K
K
K, k( )는 로마 문자의 11번째 글자이다. 역사 K는 손바닥을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유래했다. 컴퓨터 부호 쓰임 k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연구개 파열음을 나타낸다. 야구에서 삼진 아웃을 나타낸다. K는 칼륨을 나타내는 원소 기호이다. 관련 글자 카프 Κ, κ(그리스 문자) К, к(키릴 문자) 같이 보기 기아 K 시리즈 각주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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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8%94%EB%A1%9C%EA%B7%B8
블로그
블로그()는 정보 공유나 의견 교환을 목적으로 올리는 글을 모아 월드 와이드 웹상에 게시하는 웹사이트의 일종이다. 블로그라는 말은 웹(web)과 로그(log, 기록)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일기처럼 차곡차곡 적어 올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 다른 사람도 보고 읽을 수 있으며, 보통 시간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글부터 보인다. 그러나 글 쓴 시간을 수정할 수 있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시간을 고쳐 글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게시판(BBS)과는 달리 한 사람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올릴 수 있다. 블로그를 소유해 관리하는 사람은 블로거(blogger)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저작한 내용을 허가 없이 무단으로 복사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하는 사용자는 스플로거(splogger)로 부른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어떤 대형 미디어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1인 미디어'라 부른다. 순화어는 누리사랑방이라고 지정되어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줄여 부르면 누사가 된다. 개요 블로그의 시초는 원래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던 것이며,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서비스와 환경이 제공됨으로써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처음에 나왔던 블로그에는 단순히 텍스트인 글을 올리고 읽는 기능만 있었으나, 사진,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또한, 블로그에 댓글(Reply)과 트랙백(Trackback)을 달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와 블로거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었다. RSS나 Atom으로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텍스트 중심에서 분화되어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도 발전하고 있다. 역사 1994년 미국의 저스틴 홀이 시작한 온라인 일기가 가장 초기의 블로그중 하나로 뉴욕 타임즈 등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웹페이지에는 새글(What's new)과 차례표(Index) 페이지가 있었으며 이때 차례표는 보통 가장 최신의 글이 위에서부터 게시되거나 순서대로 제목이 나열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자게시판 동호회의 것과 같다. 개인 블로그는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대체로 다른 뉴스를 베껴 온다. 그러나 매트 드러지가 만든 드러지 리포트 사이트는 전문 뉴스 채널 못지 않는 속보와 특종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초기의 블로그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이나 HTML 편집만으로도 가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 워드프레스, 무버블 타입, 블로거 나 라이브 저널 같은 블로그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웹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에서도 이러한 블로그 기능이 추가되어 개인화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03년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폭격에 한 이라크인이 블로그를 통하여 평화를 주장하여 블로그는 대중화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2년 11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blog.co.kr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음에서 블로거뉴스라는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포털 첫화면에 신문 기사와 함께 개인 블로그 포스트를 노출시키면서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졌다. 종류 국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접속은 국가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블로그 분류에 국적을 고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티스토리 등 블로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회원가입 또는 웹호스팅이 필요한지 여부로 블로그를 분류한다. 가입형 블로그 가입형 블로그는 회원 가입만 하면 손쉽게 블로그를 생성할 수 있다. 포털, 신문사, 인터넷 서점,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 등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한다. 커뮤니티(관심, 즐겨찾기, 이웃 등) 형성, 콘텐츠(뉴스 기사, 책 정보 등) 퍼가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HTML, CSS를 고칠 수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포털: 네이버, 싸이월드, 다음, 야후 등 신문사: 오마이뉴스, 조인스닷컴, 한국경제, 조선닷컴, 한겨레 등 인터넷 서점: 알라딘, YES24 등 블로그 전문: 티스토리, 토트, 블로거닷컴, 워드프레스닷컴, 타이프패드, 라이브저널, 이글루스 등 설치형 블로그 설치형 블로그는 서버에 블로그 저작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다. 서버의 다른 공간에 위키나 게시판을 운영할 수도 있고 플러그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거나 웹호스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도의 비용이 생기며, 컴퓨터, 네트워크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형 블로그 소프트웨어로 텍스트큐브, 워드프레스, 텍스타일, 무버블 타입 등이 있다. 다른 유사 서비스와 비교 블로그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들로 카페, 개인 홈페이지, SNS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 유형들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온라인 동호회 인터넷 이전 시대인 1980년대부터 유즈넷이나 상업적인 전자게시판 서비스를 통해 동호회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유료 PC 통신에서 여러 가지 동호회 기능을 서비스하고 이들 동호회에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보는 것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게시판에 글이 자주 올라왔고, 회원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자연스레 생김으로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회나 카페 등 커뮤니티는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블로그와 다르다. 개인 홈페이지 PC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서부터 시작해 다음의 카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기반 서비스’만이 평정해왔던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개인으로 처음 옮겨온 것은 네띠앙이다. 네띠앙은 개인 홈페이지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개인 홈페이지 사이의 관계 맺기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단점으로 인해 네띠앙은 점차 몰락한다. 블로그는 댓글, 트랙백, RSS 등 교류 기능을 기본적으로 제공해주고, 편리하게 내용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홈페이지는 편집이 어렵고 다른 사용자와 의견을 나누기도 까다롭다. SNS 네띠앙이 쇠락하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홈피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을 통틀어 SNS라고 한다. SNS는 주로 오프라인 인맥에 기반하고 사생활들이 다뤄지기 때문에 대체로 블로그보다 폐쇄적이다. SNS도 댓글 기능이 있지만, 트랙백, RSS 기능은 없다. SNS 중에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yozm) 등과 같이 마이크로 블로그로 불리는 것들은 글자 수 제한이 있는 대신 RSS 기능이 제공된다. 미투데이와 요즘(yozm)은 각각 2014년, 2013년 서비스를 종료했다. 수익 블로그에 광고를 포함시켜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한다. 같이 보기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각주 외부 링크 인터넷에 ‘나’만의 집을 짓는다, 한겨레21, 제622호, 2006년 8월 9일 한국 블로그 문화의 현주소 (특집/기획회의 250호), capcold.net (블로그) 웹 2.0 1990년대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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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력
구심력(求心力, )은 원운동에서 운동의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여 물체의 경로를 바꾸는 힘이다. 힘의 방향은 물체의 순간의 운동방향과 늘 직교하며, 방향은 곡면의 중심이다. 원운동은 운동방향이 늘 바뀌므로 등속도 운동이 아니다. 원운동 하는 물체의 경우 운동의 방향이 늘 바뀌므로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뉴턴의 운동 제1법칙에 따라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힘을 구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은 물체의 속도 벡터에 수직으로 작용하므로, 물체의 속도의 방향만을 변화시키고 속도의 크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구심력은 물체와 물체의 운동의 중심을 잇는 선과 그 작용선이 항상 평행하므로, 구심력에 의한 돌림힘은 0이 된다. 따라서 구심력 외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등속 원운동의 경우,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구심력과 정반대 방향의 힘이 자신에게 구심력과 같이 작용하여 힘의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심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된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의 크기 질량이 m 인 물체가 v 의 속도로 반지름 r 의 원운동을 할 때 받는 구심력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는 구심 가속도이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받는 힘의 방향은 원의 중심이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속도가 2배가 되면 힘은 4배가 된다. 반지름이 힘에 반비례 하므로 반지름이 절반이 되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힘이 두배가 되어야 한다. 구심력은 각속도 ω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각속도와 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공전주기 T를 이용하여 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공전주기와 각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입자가속기에선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관성이 커지므로 똑같이 가속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γ는 이며 로런츠 인자라 불린다. 구심력의 발생 줄 끝에 묶여있는 물체가 수평면을 따라서 원운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물체에 가해지는 구심력은 밧줄의 장력에 의해 가해진다. 이때 밧줄의 경우 끌어당기는 힘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벽의 수직항력에 의한 미는힘도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뉴턴이 생각했던 구심력은 현대의 중심력에 해당한다. 어떤 인공위성이 행성의 주변에서 궤도운동을 할 때, 중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편심성 궤도의 경우 중력의 방향은 초점으로 향하지만, 구심력은 곡률중심을 향하지 않는다. 구심력의 다른 예로는 자기장 내에서 나선운동하는 하전입자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자기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같이 보기 원심력 역학 힘 가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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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력
원심력(遠心力)은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관찰되는 관성력으로, 회전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된다. 하지만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실제 존재하는 힘은 아니다. 가속하는 계(비관성좌표계) 안의 물체들은 관성에 따라 운동하려하기 때문에, 계를 기준으로 하여 계가 받는 가속도의 반대방향 가속도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힘이 관성력이다. 원심력은 관성력 중에서도 회전하고 있는 계 안의 관찰자가 느끼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물체는 관성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원운동하는 좌표계는 가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원운동하는 계 안의 관찰자는 물체가 마치 바깥쪽으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이를 원심력이라 한다. 관성좌표계에서 이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 이 물체에 대해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은 없으며, 물체는 단지 관성에 따라 등속도로 운동하려는 것뿐이다. 원심력과 구심력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되는 원심력’은, ‘비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하기 위한 가상적인 힘이고, 실존하는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지만,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는 아니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원심력만 관찰될 뿐, 구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구심력과 이에 대한 반작용만 존재할 뿐,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즉, 좌표계에 따라 구심력과 원심력 중 하나만 관찰된다. 따라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 하나의 좌표계에서 (혹은 좌표계를 명시하지 않고)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와 원심력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고, 구심력과 그 반작용만 존재한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이란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을 줄에 매달아 손으로 회전시키는 경우를 보자. 관성좌표계에서 관찰시, 회전하는 공에는 줄을 통하여 구심력이 작용되고 이로 인해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반작용력은 손에 전달된다. 이 반작용력은 공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원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쉽게말해 원심력은 나가려는 힘, 구심력은 당기는 힘이다. 원심력과 관련된 잘못된 설명들 ‘원심력과 구심력은 서로 대응되는 힘이다’ 실제로 원심력은 가상의 힘이므로 대응된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운동 좌표계에서 관측할 때 작용/반작용처럼 보일 뿐이다. ‘원심력은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이다’ 실제로는 이렇지 않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어서 끈에 매달린 공이 안정적으로 회전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틀린 설명이다. 원심력은 애초에 가상의 힘으로써 운동 좌표계에서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된 것에 불과하다. 많은 경우 물체의 운동은 관성좌표계(정지좌표계)에서 설명하는 것이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관성좌표계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끈에 매달린 공은 관성 때문에 직선 운동을 하려 하나, 구심력이 작용하여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또한, ‘평형을 이루며 회전운동을 한다’는 것도 잘못된 개념이다. 만약 실제 존재하는 힘이 구심력과 평형을 이룬다면, 알짜힘은 0이 되어 물체는 직선운동하게 된다.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원심력이 작용하여 물체가 직선으로 운동하게 된다’ 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할 때,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설명은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한다’이다. 같이 보기 관성력 코리올리 힘 구심력 고전역학 가속도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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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B%88%EC%BD%94%EB%93%9C
유니코드
유니코드()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다. 유니코드는 유니코드 협회()가 제정한다. 또한 이 표준에는 ISO 10646 문자 집합, 문자 인코딩, 문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문자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유니코드의 목적은 현존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들을 모두 유니코드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인코딩들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한정되어 있고, 다국어 환경에서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유니코드가 다양한 문자 집합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니코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와 지역화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의 기술인 XML, 자바, 그리고 최신 운영 체제 등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유니코드에서 한국어 발음을 나타날 때는 예일 로마자 표기법의 변형인 ISO/TR 11941을 사용하고 있다. 기원 및 개발 유니코드의 기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제록스의 조 베커와 애플의 리 콜린스, 마크 데이비스가 통일된 문자 집합을 만드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조 베커는 유니코드라는 이름의 국제/다언어 문자 인코딩 시스템(international/multilingual text character encoding system, tentatively called Unicode)를 위한 초안을 출판하였다. 버전 유니코드 목록 <p id="Upluslink"> 유니코드 변환 형식과 국제 문자 세트 유니코드는 2가지 매핑 방식이 있다: 유니코드 변환 형식(Unicode Transformation Format, UTF) 인코딩, 국제 문자 세트(Universal Coded Character Set, UCS) 인코딩. UTF 인코딩은 다음을 포함한다: UTF-1 UTF-7 UTF-8 UTF-EBCDIC UTF-16 UTF-32 각주 외부 링크 유니코드 협회 유닉스/리눅스 사용자를 위한 UTF-8 유니코드 FAQ 디코드유니코드(DecodeUnicode) - 유니코드 위키 graphemica : 문자 상세정보 문자 인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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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언어(言語)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예의 일부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체계. 사물, 행동, 생각, 그리고 상태를 나타내는 체계.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의미들의 체계. 문법적으로 맞는 말의 집합. 언어 공동체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의 집합. 언어학은 이러한 언어가 발현되는 부분, 즉 음성, 의미, 문법, 형태 등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언어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며 연구하는 학문, 즉 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유형론) 등까지를 포괄한다. 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컴퓨터나 수학 등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상호 효과적인 의사교환을 위해 고안된 것을 인공어라고 한다. 기원 세계의 언어 자연어 중에 세계적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괄호 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나타낸다. 관화(官話)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 모어 인구 : 844,850,000명 스페인어(Español) (스페인, 멕시코, 쿠바, 코스타리카,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등) 모어 인구 : 450,600,000명 영어(English)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자메이카, 싱가포르, 인도 등) 모어 인구 : 344,500,000명 힌디어(हिन्दी)/우르두어(اُردوُ) (인도, 파키스탄) 모어 인구 : 315,445,000명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모어 인구 : 280,000,000명 아랍어(العربية)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모로코 등) 모어 인구 : 231,500,000명 포르투갈어(Português) (포르투갈, 브라질 등) 모어 인구 : 181,000,000명 프랑스어(Français) (프랑스, 캐나다 퀘벡주, 벨기에, 스위스, 세네갈 등) 모어 인구 : 175,900,000명 러시아어(Русский язык) (러시아 등) 모어 인구 : 152,500,000명 벵골어(বাংলা) (방글라데시, 인도 등) 모어 인구 : 151,400,000명 일본어(日本語) (일본, 팔라우 앙가우르 주) 모어 인구 : 127,500,000명 베트남어(Tiếng Việt) (베트남, 미국, 캄보디아, 중화인민공화국, 프랑스 등) 모어 인구 : 97,000,000명 독일어(Deutsch)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나미비아 등) 모어 인구(제1언어 사용 인구) : 95,200,000명 우어(吳語) (중화인민공화국) 모어 인구 : 77,200,000명 한국어(한국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등) 모어 인구 : 76,500,000명 자와어(Basa Jaw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프랑스, 수리남) 모어 인구 : 75,550,000명 펀자브어(ਪੰਜਾਬੀ, پنجابی) (파키스탄, 인도) 모어 인구 : 75,250,000명 텔루구어(తెలుగు) (인도) 모어 인구 : 69,750,000명 마라티어(मराठी) (인도) 모어 인구 : 68,050,000명 타밀어(தமிழ்)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모리셔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모어 인구 : 65,850,000명 이탈리아어(Italiano) (이탈리아, 스위스) 모어 인구 : 61,850,000명 튀르키예어(Türkçe)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북키프로스) 모어 인구 : 54,500,000명 히브리어(עברית)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모어 인구 : 7,400,000명 어족과 분류 자연어는 어족 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은 고립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현재 고립어로 분류돼 있으며, 일본어 및 알타이어와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다. 유전적 분류 인도유럽어족 데네캅카스어족 중국티베트어족 (우랄알타이어족) 우랄어족 (알타이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아프로아시아어족 니제르콩고어족 나일사하라어족 코이산어족 유형론적 분류 어순에 따른 분류 SVO형(주어-서술어-목적어) 언어 SOV형(주어-목적어-서술어) 언어 VSO형(서술어-주어-목적어) 언어 형태론적 분류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 포합어 형태통사적 결합에 따른 분류 대격 언어 능격 언어 삼분법언어 오스트로네시아형 결합 활격 언어 언어의 종류 표현하는 방식에 따른 언어의 종류 음성언어 : 음성으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문자언어 : 문자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백과사전"이라는 문자로 표현하는 식이다. 현존여부에 따른 언어의 종류 활어(活語) : 현재 통용되는 언어이다. 한국어, 영어 등이 있다. 사어(死語) : 현재 통용되지 않는 언어이다. 라틴어, 만주어 등이 있다. 수화 손의 모양으로 의사 소통하는 수화도 언어의 일종이며 음성언어와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인공어 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인공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실제 커뮤니케이션, 혹은 그 유사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 : 에스페란토 같은 국제어, 소설 등의 매체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어 등의 가공언어. 특히 인공어라는 단어가 요즈음에는 이 경우에 쓰이고 있다. 형식 언어 : 수학에서 사용하는 언어 프로그래밍 언어 :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언어 기타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목록 언어 목록 (분류) 언어 목록 (문서) 에스놀로그 - 언어, 위치, 인구, 기원의 목록 공용어 목록 같이 보기 언어의 기원 언어별 기초 회화 소리 언어 행위 각주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동물들은 왜 말을 못하나 언어:사람이 하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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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심리학(心理學, )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목으로서, 인문과학에서부터 자연과학, 공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연구인 심리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정보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된 문제들이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에는 감각, 지각, 사고, 성격, 지능, 적성 등의 인간 특징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기저 원리를 밝히는 심리학은 미래 사회에서 그 중요성을 점점 더해갈 것이다. 심리학은 연구 분야에 따라 크게 심리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다루는 '기초심리학'과 이러한 원리와 이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용심리학'으로 나뉘며,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우에는 14개 분과, 미국의 경우 본과 제외 56개 분과가 있다. 정의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과정, 영혼에 대한 학문” 이라고 정의되는 심리학은 다양한 접근방법 만큼이나 조금씩 그 정의의 폭을 달리할 수 있겠으나 과학적인 절차를 수용하기 시작한 근대의 심리학 이후에서는 적어도 '행동에 대한 과학'이라는 협의의 정의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역사 철학 및 과학적인 바탕 기원전부터 '심리학'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심리학에 대한 생각은 쭉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은 1010년 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라틴어 이름: 루돌프 고클레니우스)는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릭은 조건을 사용한 그의 작업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Psychologia empirica and Psychologia rationalis, 1732년-1734년)》을 출간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랑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의사 윌리스(1621년 - 1675년)는 정신과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심리학은 철학에서 완전히 분화되어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심리학의 성립 1879년, 흔히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분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첫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실험실을 개설하였다. 그는 심리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 내성법'을 주장하였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는 1890년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을 출간하였다. 그는 당시 심리학에서 다루는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저술하였다. 에빙하우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기억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수행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다. 형태주의 심리학 형태주의 심리학(또는 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 Wertheimer)가 자신의 논문 <운동지각에 관한 실험연구>(Experimental studies on the perception of movement)을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 에렌펠스, 칼 슈툼프(Carl Stumpf)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흐는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주장하여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슈툼프(Stumpf)는 분트(Wundt)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apparent motion)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phi)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코프카(Koffka)와 콜러(Kohler)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슈툼프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코프카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콜러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라 이름붙여 발표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빈(Lewin)은 여러 가지 이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이다. 레빈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차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심리학 189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과 의식,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이 중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의식'의 발견, 그리고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후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유명한 학자로는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 등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곧 과학적 엄밀성의 결여, 경험적 증거의 부족, 이론체계의 반증불가능성 등으로 인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과학철학자 포퍼에 의해 유사과학의 세 가지 사례들 중 하나로 지적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칼포퍼가 주장한 반증 가능성과 경험적 증거가 과학의 주요한 속성이라는 주장이 속속히 반박당하고 오류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지적은 상당부분 수그러들었다.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들과 문제점,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발감 등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어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지 않으며, 그들은 미국 심리학회 단체들 중 가장 큰 단체인 APA의 10% 미만,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단체인 APS의 5% 미만을 차지한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기초심리학자들) 중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학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정신분석은 문학비평 등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라 할 수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 20세기 초 1920년대를 전후해서 왓슨, 손다이크, 헐(C. Hull), 톨먼(E. Tolman), 스키너 등에 의해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창되었다. 이들은 쥐, 비둘기 등의 동물을 이용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학습이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주장하였다. 이 자극 반응 이론(S-R 이론)으로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 여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특히 심리학의 과학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검증 가능한 것'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검증 가능한 것'들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 이전의 큰 심리학적 흐름이었던 정신분석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행동주의자들은 그러나 '검증가능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정작 심리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심적, 내적 과정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한 결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인지혁명 이후 주된 패러다임의 자리를 인지심리학 등 다른 분야에 내주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과장된 비유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원래 뜻은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 본능이 행동으로 직결되며 이 외의 요소나 우연 등의 예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이나 언어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로 얻은 정보와 연관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성격을 확신하여 규명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뜻이다. 인본주의 심리학 1950년대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가 주창한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인본주의 심리학이 파급되었다. 주요 심리학자로는 욕구이론을 주창한 매슬로, 인간중심 심리치료를 주창한 로저스, 직관적이며 전체적 인지를 중시한 장 이론인 게슈탈트 심리학을 주창한 펄스(F. Perls) 등이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과 인본주의 심리학은 같다.) 인지주의 심리학 인지심리학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으로 거슬러올라갈수있겠으나 20세기 후반(196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지혁명'은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보았는데, 이로 인해 행동주의 심리학은 '블랙박스 심리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 측정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의 심적, 내적 과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러한 자극-반응이 어떠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거의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엄 촘스키 등 언어학자들과 앨런 튜링,폰 노이만 등의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지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촘스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내적 심리과정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당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인지주의 심리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지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달리 내적인 심리과정을 중시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 특히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접 학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로 인해 인지심리학은 흔히 인간정보처리론(human information processing)이라고도 불린다. 인지심리학은 현재 인접 학문들-철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언어학 등-과 협력하여 인간 인지과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크게 간학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지주의 심리학의 거장으로는 알버트 엘리스, 아론 벡등이 거론된다. 심리학의 연구방법론 심리학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질적 연구방법과 양적 연구방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전자는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후자는 주로 기초 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나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도 많다. 양적 연구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성을 수치화, 계량화하기 용이한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연구방법이 적합한 사례로는 반응시간(response time)연구, 지능 연구와 같은 것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은 통계학의 지식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의 특성을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적 연구방법론에는 IRT(문항반응이론), 다층 모형(Multilevel model), 구조방정식모형(Structural equation model), 경로분석(path analysis), 요인분석(Factor analysis)등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론의 가장 큰 강점은 일반화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질적 연구방법은 이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례를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임상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상담, 질문지 작성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내담자나 연구대상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있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은 심리학을 경험과학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심리학의 분야 기초 심리학 과학자형 모델로 대표되는 기초 심리학은 심리학의 학문적 바탕의 확립을 목표로 기초적 지식과 심리적 기제를 실험을 통해서 연구한다. 주로 인지 심리학, 학습 심리학, 발달심리학, 사회심리학, 생리심리학, 신경심리학 등이 포함되며 이는 귀납적 사고를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연역적 사고도 이용한다. 한편 이러한 주요한 과학자형 모델에는 구성개념을 전제로 하는 심리통계, 심리측정 및 검사 등의 수학적 접근이 포함된다. 응용 심리학 전문가형 모델로 대표되는 응용 심리학은 심리학의 실재 현장 장면의 적용을 목표로 적용 방법과 원리를 연구한다. 심리학의 방법과 결과를 실제 생활이나 실제 문제에 응용하려는 학문으로 심리학의 한 분야이다. 산업 심리학, 임상 심리학, 교육 심리학, 범죄 심리학, 건강 심리학, 여성심리학등이 이에 속한다. 임상 심리학 임상 심리학은 정신건강에관한 정신적 이슈가 다루질 필요성에서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이다.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취약성-스트레스 모델등 통합적으로 의학적 조건(medical conditions)과 임상 과정(clinical process) 및 인지주의 또는 행동주의심리학등 여러 심리학적 접근을 다룬다. 상담 심리학 상담 심리학(Counseling Psychology)은 정신적 이슈를 가진 사람들을 진단하거나 심리적 부담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가진 심리학 분야이다. 상담 심리학 교육과정에는 검증된 상담이론을 비롯한 성격심리학•발달 심리학 등 다양한 이론 교육과 개인•집단상담 기법, 심리진단•평가, 사례 분석 등 다양한 실습 교육이 있다. 약물 처방권을 가진 정신과 의사와 비교해서 상담심리사는 생리심리학이나 약물심리학 또는 건강심리학 등을 고려해 다양한 치료기법과 기술을 통해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특정상황을 고려한 정신건강의 이슈에따라 이의 개선을 위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가 병행되거나 약물치료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 또한 다른 심리학처럼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현재 상담 심리학은 기업, 학교, 기관 등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주요 이론 무의식 초자아 트라우마 방어기제 정신분석 게슈탈트 붕괴 고전적 조건형성 조작적 조건형성 인지부조화 바넘 효과 심리 검사 성격 검사 초두효과 설단 현상 칵테일 파티 효과 전경-배경 이론 깨진 유리창 이론 정보처리이론 루시퍼 이펙트 스탠퍼드 감옥 실험 편안한 복제인간 증후군 원인론 목적론 주요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 심리학의 아버지 헤르만 에빙하우스 망각곡선 연구 찰스 다윈 진화심리학의 시조. 감정표현 연구의 선구자 프랜시스 골턴 심리측정의 선구자 제임스 카텔 미국 심리측정학의 대가 비네 지능검사 고안자 손다이크 교육심리학, 심리측정의 대가 르윈 게슈탈트 심리학자, 인지심리학자, 사회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창시자,의식-무의식 개념 카를 융 집단무의식 장 피아제 발달 이론의 대부, 지능을 수식으로 표현 벌루스 스키너 보상 처벌 이론, 처벌 금지 법안 데이비드 로젠한 논문 "제 정신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On Being Sane in Insane Places)" 스탠리 밀그램 밀그램 실험, 권위에의 복종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감옥 실험, 루시퍼 이펙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욕구 제단계 이론 칼 로저스 인본주의 심리학의 아버지 에드워드 톨먼 잠재학습 연구 노엄 촘스키 언어 심리학자 네이서 인지심리학의 초창기 공헌자 레프 세메노비치 비고츠키 언어로 사회-문화적 맥락에 관련지어 설명 대니얼 카네만, 에이모스 트버스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편향과 추단법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 수상 라몬 이 카할, 골지 뉴런 연구의 선구자 폴 브로카, 베르니케 브로카 영역, 베르니케 영역의 발견 도널드 헵 헵의 법칙 발견 콘라드 로렌츠 각인 현상의 발견자 에릭 에릭슨 같이 보기 심리치료 재난심리학(disaster psychology) 군사심리학(:en:Military psychology) 군중심리학 자살 예방(:en:Suicide prevention) 환경심리학(:en:Environmental psychology) 깨진 유리창 이론 범죄예방 환경설계 심리역사학(:en:Psychohistory) 로이드 드마우스(:en:Lloyd deMause) 의상심리학(clothing psychology) 의사소통(휴먼 커뮤니케이션) 대인간 커뮤니케이션(:en:Interpersonal communication) 잔소리 (심리)(:en:Nagging) 편집성 인격 장애 폭력 / 가정폭력 아동학대 / 동물학대 힐가드와 애트킨슨의 심리학 원론(Atkinson & Hilgard's Introduction to Psychology) 볼더 모델 찰스 다윈 각주 외부 링크 대한민국의 심리학회 한국 심리학회 한국 임상심리학회 한국 상담심리학회 한국 산업 및 조직심리학회 한국 사회 및 성격심리학회 한국 발달심리학회 한국 인지 및 생물심리학회 한국 사회문제심리학회 한국 건강심리학회 한국 소비자광고심리학회 한국 학교심리학회 한국 중독심리학회 미국의 심리학회 미국 심리학회 행동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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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또는 수면(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 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 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 사람의 잠 단계와 주기 NREM 수면(비-렘수면)의 4단계 제1단계: 뇌파가 베타파(β波)에서 알파파(α波)로 바뀌어 간다. 제2단계: 세타(θ)파 및 방추형과 K 복합 뇌파가 나타난다. 제3, 4단계: 델타(δ)파가 나오기 시작하며, 두 단계는 델타파의 양으로 구분한다. REM 수면의 기능 렘(REM, 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고 있는 역설수면이다. 역설수면(逆說睡眠)은 몸은 잠을 자고 있으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波)를 보이는 수면 상태이다. 자율신경성 활동이 불규칙적인 수면의 시기로, 보통 안구가 신속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기에 렘수면으로 언급된다. 한편 영아기에는 렘수면이 수면의 50%를 차지하다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면 시간 사람은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잔다. 성인은 하루에 대략 5시간~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한다.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6시간 15분 정도, 미국은 7시간 정도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를 느끼고 감정이 날카로워져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쉬워진다. 또한, 잠이 부족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 등 여러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건강에 유익하고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 7시간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은데, 5시간~6시간 30분을 잘 때 수명이 가장 길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적절한 수면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다. 연령대별로 얼마만큼 자야 적당한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수면재단에 따르면 26-64세 성인은 7-9시간을 권장하며, 6-10시간이면 적당하고, 6시간 이하 또는 10시간 이상이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취침 시간, 수면 시간이 매일 달라지면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같이 보기 꿈 겨울잠 불면증 기면증 졸림 수면 부채 잠꼬대 벼락치기 공부 각주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잠, 창의성의 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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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마약(痲藥, )은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출시된 제품이다. 좁은 의미로는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만을, 즉 "아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약이다."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향정신성 약품 및 중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 모두를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관례적으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것으로서 이를 사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물질로 분류되지 않은 민간제조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 등을 말하며. 거의 대부분 진정쌍떡잎식물군에 속한 식물이기도 하다. 일부 국내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물질 중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등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쓰인다.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할 경우 먀약중독과 신체에 손상을 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사망을 유발하게 된다. 마약을 복용하면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환자가 아닌 이상 전혀 효과가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대외적으로 마약 청정국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실상은 마약 청정국하고는 다르다. 역사 마약은 그리스의 의사 갈렌이 만든 마비와 감각 상실을 일으키는 약이다. 갈렌은 맨드레이크 뿌리, 알테쿠스(에클라타), 씨앗, 양귀비차를 마약의 재료로 사용했다. 마약은 원래 고통을 줄이고, 감각을 둔하게 하거나, 수면제 같은 역할을 하는 모든 약품을 말했다. 지금의 마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약은 아토피오이드 수용체와 결합하는 물질로 정의할 수 있지만 불법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마약은 아편, 아편 유도체를 가리킨다. 마약의 첫 사용은 1600년이지만 마약은 1926년에 기록되었다. 마약은 많은 종류가있는데 마약의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형태는 모르핀과 코데인이다. 통증을 줄이기 위해 아편의 염기로 만들어진 합성 마약은 펜타닐, 옥시코돈, 트라마돌, 페티딘, 하이드로코돈, 메타돈, 하이드로모르폰이렇게 7개다. 종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면서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약물이라도 약물에 따라 작용부위 및 작용기전이 달라 다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여 여러 분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 CNS(중추 신경계) 흥분제 흥분제로 중추 신경계(이하 CNS)를 흥분시켜 감각 및 운동기능을 항진시키는 약물이다. 소량 투여시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분이 약간 고양되며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올라간다. 과량 투여시 환각 및 다행감 또는 신경이 예민해져 불안감을 유발하여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기분 고조로 인해 주관적으로는 강해진 것 같고 우월감을 느끼게되며 객관적으로는 말이 많아지고 초조해하며 불안해지고 과민상태가 된다. 코카인 : 코카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 한 때 코카콜라에 들어간 적이 있으며 진통제로 쓰인 적이 있다. 암페타민 : 대표적인 메스암페타민제제인 필로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치료 약물로 쓰이는 덱스트로암페타민 등이 있다. 니코틴 : 담배에 들어있어 의존성을 유발한다. 카페인 : 커피에 들어있으며 청량음료, 이온음료 및 피로회복제에 들어간다. 잔틴 : 초콜릿에 들어있다. 중추신경억제제 진정제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며, 진통 효과가 있다. 헤로인 : 모르핀을 아세틸화하여 만든 합성 물질이다. 라벤더 : 진정제의 특징이 있다. 모르핀 : 아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 바비트레이트산염 : 진정 및 항 경련 효과가 있다. 벤조다이아제핀 : 신경안정의 효과가 있다. 술 : 행동을 억제하는 신 피질을 억제, 판단력의 저하(탈 억제)를 가져온다. 덱스트로메토르판 : 대표적으로 러미라로 알려진 진해거담제에 들어있는 아편계열 알칼로이드이다. 펜타닐 : 헤로인보다 몇 배나 더 강한 합성 물질이다. 환각제 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의 감각을 왜곡하여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상태로 느끼는 반면 불쾌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LSD : 플래시백 현상이 나타난다. 펜시클리딘 :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며,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다. 뷰테인, 본드, 벤젠, 폴리페놀, 타닌, 톨루엔 : 몸을 녹이게 하는 느낌에 빠지게 한다. 본드의 경우 뇌세포를 파괴하며, 질식사할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한 환각제이다. 엑스터시 : 정신착란과 사망에 이르게 한다. 유칼립투스 : 유칼립투스오일에 중독성은 상복부 작열감, 오심, 구토, 현기증, 무기력, 피부창백, 맥박이 가늘고 빨리 뛰며 의식몽롱기면증이 있으며 심할 때는 일시적으로 정신착란과 경련을 일으킨다. 또한 유칼립투스잎에는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코알라가 유칼립투스 잎을 먹고 무려 18시간에서 많으면 24시간 잠에 취해 있다고 한다. (바니 스테리오 포시스 카피) (야혜) : 아와야스카라는 강력한 환각물질을 가지고 있다. 나라별 법률 대한민국 법률상 마약 현재 대한민국 법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마약류는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를 뜻한다. 마약은 양귀비, 아편, 코카잎 및 그의 알칼로이드와 화학적 합성품을, 향정신성의약품은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오남용시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질을 뜻하며 대마는 대마초{칸나비스 사티바 엘(Cannabis sativa L.)}와 그 수지(수지) 및 대마초 또는 그 수지를 원료로 하여 제조된 모든 제품을 말하나, 대마초의 종자(종자)·뿌리 및 성숙한 대마초의 줄기와 그 제품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편을 제외한 마약은 마약류관리법에서 다루나 아편은 형법에서 규정 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형법상 마약 처벌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형법 조항은 형법 347조인데, 50g 이상의 마약을 제조 판매했을 때 15년 이상의 징역, 최고 사형까지 선고된다. 특히 1kg 이상의 마약을 유통하다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한다. 독일의 마약 규제 독일의 경우 스스로 마약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침해에 대해서는 형법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를 위해 무허가로 마약을 소지하는 것은 마약법 제29조 제1항에 의해 처벌 대상 -미국- 1)미국정부는 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을 5가지 항목으로 분류하여 관리한다. 1.스케줄1:남용가능성이 높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되지 않은 약물이다. 아편의 일부 유도체(헤로인), 마리화나, 합성 아편제, 환각제 등이다. 2.스케줄2:남용가능성이 높으나 의학적 사용이 허가된 약물이다. 일부 아편제제, 암페타민, (ADHD 치료제의 성분이다.)합성마약류, 코카인 등이다. 응급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로는 모르핀과 메페리딘이 있다. 3.스케줄3:남용가능성이 낮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된 약물이다.(일부 마약 성분 함유) 코데인은 다른 진통제의 진통 효과를 상승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약이다. 이 혼합물을 사용한 예는 코데인 함유 아세트나미노펜이다. 4.스케줄4:남용가능성은 낮으나 신체적, 정신적 의존성을 일으킬 수 있는 약품이다. 바륨이 들어간 항우울제, 흥분제 및 진정제가 이에 속한다. 5.스케줄5:남용가능성이 가장 낮은 약품이다. 코데인을 함유한 진해제, 아편을 함유한 지사제 등이 이에 속한다. 각주 외부 링크 공익광고협의회, https://www.kobaco.co.kr/websquare/websquare.jsp?w2xPath=/kobaco/businessintro/about/about_tv_detail.xml&nowPage=1&Subject=%b0%f8%c1%df%ba%b8%b0%c7%2f%ba%b9%c1%f6&Matter=&searchG=&searchT=&seqNo=41 오피오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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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조건형성
고전적 조건형성(古典的條件形成, Classical Conditioning)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으로, 특정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자극(중성자극)이 그 반응을 무조건적으로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반복적으로 연합되면서 그 반응을 유발하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이에 관하여 잘 알려져 있다. 이론 고전적 조건형성이론(古典的條件形成理論)은 특정한 자극에 따라 생기는 반응은 그와 다른 성질의 자극으로도 똑같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습 이론으로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가 주장하였다. 개요 생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반응을 〈무조건 반응〉(UR; UnConditioned Response)이라고 한다. (예) 개가 침을 흘린다.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을 〈무조건 자극〉 (US; UnConditioned Stimulus)이라고 한다. (예) 개에게 주는 음식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자극을 〈중성 자극〉 (NS; Neutral Stimulus)이라고 한다. (예) 종소리를 들려준다. (학습 성립 전) 중성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반응을 〈비상관 반응〉이라고 한다. (예) 개가 귀를 기울인다. 중성 자극 직후에 무조건 자극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자극을 〈조건 자극〉 (CS; Conditioned Stimulus)이라고 하며,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반응을 〈조건 반응〉 (CR; Conditioned Respons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조건형성이 학습된 개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조건 자극이며, 이 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는 것은 조건 반응이다. 조건 형성 이반 파블로프는 조건 형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건 형성이란 평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자극(중성자극, Neutral Stimulus : NS)이 무조건적인 반응(무조건반응, UnConditioned Response : UR)을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 UnConditioned Stimulus : US)과 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 자극(Conditioned Stimulus : CS)이 되어 조건 반응(Conditioned Response:CR)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을 이반 파블로프의 조건 형성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건 형성 이전 개는 음식을 보면 무조건 침을 흘린다. 여기서 음식은 무조건자극(US)이 되고, 침을 흘리는 반응은 무조건반응(UR)이 된다. 또한 종소리를 들려주면 개는 반응이 없다. 여기서 종소리는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NS)이 된다. 조건 형성 과정 개에게 음식을 줄 때마다(US) 반복적으로 종소리를 같이 들려준다(NS). 이 과정을 무조건자극과 중성자극의 연합, 혹은 조건 형성이라고 표현한다. 조건 형성 이후 조건 형성이 된 후에는 중성자극인 종소리(NS)만 들려주어도 침을 흘리게 된다. 여기서 조건 형성이 된 후의 종소리는 조건자극(CS)이 되고, 조건 형성이 된 후에 침을 흘리는 반사는 조건반응(CR)이 된다. 이런 고전적 조건 형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유기체가 조건자극(CS)을 제공받으면 곧이어 무조건자극(US)도 함께 제공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이 제공된다는 신호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조건 형성을 실험한 예는 위의 예 말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Watson&Rayner(1920)는 알버트라는 아이가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도록 하였다. 이 아이는 본래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던 아이였다. 하지만 알버트가 흰쥐에게 다가가거나 만질 때마다 갑작스런 큰 소리를 들려주었고, 결국 알버트는 흰 쥐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사람은 원래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는 반응을 한다. 여기서 큰 소리는 무조건자극이 되고, 놀라는 반응은 무조건반응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흰쥐(중성자극)와 큰소리(무조건자극)를 지속적으로 연합하면 흰 쥐(조건자극)만 보아도 놀라는 반응(조건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고전적 조건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차적 조건 형성 조건자극은 본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이었다. 그러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무조건자극과 같이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렇게 조건 형성이 된 자극은 다른 중성자극도 조건 형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위의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 형성이 된 종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을 보여주면 파란 불빛만 봐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차적 조건 형성(Second-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하며 그 이상의 조건 형성을 삼차적 조건 형성, 사차적 조건 형성 등등 고차적 조건 형성(Higher-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삼차적 조건 형성 이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런 고차적 조건 형성에서는 조건자극들이 연달아 제공되고,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소거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거 소거(Extinction)는 조건 형성이 풀어져 조건자극이 다시 중성자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자극인 종소리만 들려주고 계속해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개는 조건자극인 종소리를 듣고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건자극과 함께 무조건자극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수반성을 제거한다면 조건반응은 잘 형성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수반성은 일관성과 관계있다. 그러나 소거가 되었다고 해서 조건반응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종소리(조건자극)를 갑자기 제시하면 침(조건반응)을 흘린다. 이런 과정을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고 한다. 이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 영속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배운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두뇌에서 아예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다시 함께 종소리와 음식을 제공한다면 종소리는 중성자극에서 다시 조건자극으로 회복되며 종소리(조건자극)와 음식(무조건자극)의 연결은 더욱 단단해지게 될수도 있다. 한편 수반성은 자극 제시의 시간간격과 횟수에서 일관성이 없는 경우에서도 약화될 수 있지만 여러 자극의 강도 차에서도 수반성을 약화시킬수있는 확률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자발적 회복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 소거절차가 이루어진 후에도 음식물과 연합시키지 않은 채 다시 종소리만 반복적으로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소거되었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반응이 재훈련 없이 다시 나타난다. 이를 조건반응의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 한다. 이때 반응의 강도는 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자극일반화 자극일반화(Stimulus Generalization)란, 조건자극과 유사한 다른 자극에 동일한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우리 속담이 가지는 의미와 같다. 갈치구이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적이 있는 아이가 식사 때마다 생선을 피하려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시가 많지 않거나 씹어 먹으면 되는 생선통조림을 우연히 먹은 아이는 다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변별(Discrimination)이라고 한다. 변별 변별(Discrimination) 자극을 구분하여 반응하는 것을 변별이라 한다. 즉, 자극일반화는 자극 변별에 실패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미각혐오학습 이렇게 고전적 조건 형성은 보통 수차례 반복이 되어야 자극 간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르시아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쥐에게 먹이를 주고 어느 정도 후에 열을 가해 매스꺼움과 구토등을 유발시켰더니 그 후에도 그러한 종류의 먹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차례 반복을 통한 연합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바로 조건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출처 정보화시대의 신세대를 위한 실기교육방법론 <이병석•박완성 공저> p 81 (자발적 회복, 변별) 같이 보기 조작적 조건화 관찰학습 행동주의 이반 파블로프 고전적 조건화의 행동적 연구 행동준비성 존 브로더스 왓슨 각주 학습 행동주의 교육심리학 실험심리학 러시아의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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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학습(學習) 또는 배움은 본능적인 변화인 성숙과는 달리, 직간접적 경험이나 훈련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인지하며, 변화시키는 행동 변화이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생체의 일반적 적응과 신체적인 피로, 손상 등 일시적인 동기 부여 등에서 초래된 행동의 변화와는 구별된다. 학습과 공부가 대비되는 점은 학습이 외부적인 교육이나 현상에 대해 영향을 받는 데 비해 공부는 자발적인 면이 강하다. 미리 학습하는 것은 예습(豫習)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과 도구적 조건형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학습의 종류 습관화 각인 공간학습 연합 학습 자습 조작적 조건화 고전적 조건형성 사회학습 놀이 문화화(문화전통) 도구사용 주요한 인간의 학습 일화적 학습: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발생하는 행동의 변화 멀티미디어 학습: 청각적, 시각적 자극을 둘 다 이용하여 정보를 학습하는 과정 (Mayer 2001) 전자 학습 및 증강 학습: 컴퓨터 강화 학습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포괄적인 용어 암기 학습 유의미 학습: 학습된 지식이 다른 지식과 관계되는 정도로까지 완전히 이해되었다는 개념 비정형 학습 정형 학습 비형식 학습 대화적 학습: 대화에 기반한 학습 우발 학습(우연 학습): 선생이나 학생에 의해 계획되지 않고, 경험, 관찰, 자기고찰, 상호작용, 특별한 사건, 일반적인 일과 같은 다른 활동의 분산물로서 발생 능동 학습: 자신의 학습 경험을 통제할 때 발생 기계 학습:인공지능의 한 갈래로서 데이터로부터 학습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구성과 연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기계 학습 시스템은 이메일 메시지가 스팸인지 스팸이 아닌지를 구별하기 위해 훈련을 받을 수 있다. 같이 보기 추론 학습 영역 학습지도 교육학 벼락치기 공부 성적 탐구학습 참고 문헌 각주 외부 링크 교육학 발달심리학 교육심리학 시스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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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심리학
발달 심리학(發達 心理學, )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 동안 연령 및 환경에 따른 정신과정과 행동상의 변화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개인의 지적·정서적·사회적 과정의 전개에 관심을 둔다. 발달 원리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행동 유형이 형성되는 생후 20세까지의 시기에 적용되는 것과 함께 이러한 발달의 향상적인 기간뿐만 아니라 이후 발달의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면까지도 발달과정으로 보는 전생애적인 발달과정을 다루는 것이 발달심리학의 관심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체성, 인간관계, 창의력 등을 삶의 중요한 세 영역으로 본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별로 형성되는 특성을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접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연구 영역은 신체적·지적·정의적(情意的)·사회적 발달로 나누기도 하고, 태아기·영아기·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중년기·노년기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어떤 특수 영역, 예를 들어 뇌의 발달, 양심의 발달, 성격의 발달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운동능력의 발달, 인지발달, 성격 발달 등 심리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방법과 주제를 포괄하기도 한다. 변화는 크게 질적 변화(구조적 변화, 단계적 변화)와 양적 변화(연속적 변화, 비단계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발달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반응의 범위 모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적응 장 피아제는 그의 인지발달론에서 동화와 조절의 개념으로 적응을 설명하면서 발달의 중요한 면을 언급한바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신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있어서 동화는 자신에게 맞추어 환경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라면 조절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으로 기술된다.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 에릭슨의 성격 발달 이론은 전생애에 걸친 발달을 강조한다. 1)신뢰감 대 불신감(영아기, 0-1세) 2)자율성 대 수치와 회의 (1-3세) 3)주도성 대 죄책감(유치기, 3-6세) 4)근면성 대 열등감(아동기, 6-11세) 5)정체감 대 정체감 혼란(청소년기, 11-18세) 6)친밀성 대 고립감(청년기, 18-40) 7)생산성 대 침체감(중년기, 40-65) 8)통합성 대 절망(노년기, 65세 이상) 이론 행동주의 인지주의 정신분석이론 사회문화이론 정신물리학 동물행동학 이론 정보처리이론 같이 보기 하워드 가드너 다중지능이론 자존감 유아심리학 발달(development) 각주 외부 링크 한국발달심리학회 심리학의 분과 행동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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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의 범위 모형
반응의 범위 모형(reaction range concept)은 사람의 발달은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선천적으로 발달이 가능한 범위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환경 풍요도에 따라 발달의 수준이 변한다. 이 모형은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발달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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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C%95%84%EC%A0%9C%EC%9D%98%20%EC%9D%B8%EC%A7%80%20%EB%B0%9C%EB%8B%AC%EB%A1%A0
피아제의 인지 발달론
인지 발달론(認知發達理論, 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은 인간의 인지 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한 피아제의 이론이며, 심리학의 인지이론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피아제는 심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인식론은 인간이 발생학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론 또한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피아제는 한 사람의 아동기가 사람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지 발달은 신체적 성숙과 환경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과정의 점진적 재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지 발달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으며 언어는 인지 발달을 통해 습득된 지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알프레드 비네의 실험실에서 아동지능검사와 관련하여 일한바 있다고 알려져있다. 인지 발달론의 주요 개념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은 파란 신호일 때 길을 건너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되, 그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제는 도식과 적응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도식(Schema) : 도식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말한다. 쉽게 말해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유사한 환경 안에서, 반복에 의해 변화되고 일반화된 행동의 구조 또는 조직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5세 유아가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라고 배웠다고 생각해 보자. 이를 통해 이 아이는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와 같다"는 도식을 보유하게 된다. 몇 가지의 도식은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빨기 도식이나 잡기 도식과 같은 것인데, 빨기 도식의 경우 그러나 그 기능면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서 적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발전하게 된다. 적응 : 적응은 환경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도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두 가지의 상호보완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바로 동화와 조절이라는 수단이다. 적응은 우리에게도, 또 동식물에게도 흔히 찾을 수 있다. 홍관조의 수컷은 선명한 붉은색인 반면에 암컷은 눈에 띄지 않게 엷은 갈색을 띠면서 종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줄인다.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지적으로는 도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새로운 도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도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동화와 조절: 동화는 기존의 도식에 맞추어서 새로운 경험을 일반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쉽게 말해 새로운 경험을 기존에 가지고 있는 도식에 맞추어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의 도식에 맞는다면 유기체는 인지적으로 평형 상태가 된다. 위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물체를 새라고 배운 아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것이 털도 없고, 날개도 펄럭이지 않는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새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되면서 불평형의 상태가 된다. 피아제에게 동화는 외부적 요소를 생활 또는 환경,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의 구조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 도식에 맞추는 과정이다. 새로운 경험에서의 동화는 기존의 개념에 맞추거나 조절하기 위해 재해석되며 동화는 사람들이 새롭거나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직면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학습한 정보를 언급하는 것이다. 조절은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에 맞지 않을 때, 유기체는 불평형의 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을 변경하거나 새롭게 만들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불평형의 상태가 되었던 아이는 이제 새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을 조절이라고 한다. 혹은 누군가가 그것은 새가 아니라 비행기라고 일러 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조절이라고 하는데, 조절의 과정에서는 도식의 형태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조절은 특정 환경에서 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고 기존의 도식을 새 정보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식(지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새 대상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변화되길 요구한다. 피아제는 사람의 두뇌는 평형화를 위한 진화를 통해 짜여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화와 조절을 통한 내/외부적 과정에 의한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기존의 정신 도식에 동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대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조절해야 한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알게 되기(동화시키기) 위하여 그 대상의 외양에 집중(조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대상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발달은 두 기능 사이의 평형화를 증대시킨다. 조직화 : 조직화는 유기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도식을 새롭고, 더욱 복잡한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도식을 어떤 새롭고 복잡한 구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아까 새와 비행기를 구분하게 되었던 아이는 이제 날아다니는 대상의 하위 범주로 새와 비행기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직화를 거듭함으로써 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화는 인지적 발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인지 발달의 단계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은 네 단계를 통하게 되며, 질적으로 다른 이 단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된다고 한다(Piaget,1954). (감각운동기(0-2세) 감각적 동작(Sensorimotor Stage)의 시기 : 출생 직후 ~ 2세 감각운동기에는 신생아의 단순한 반사들이 나타나는 출생에서 초기의 유아적 언어가 나타나고,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2세 경에 끝난다. 이 단계에서 아동의 행동은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과 운동기술을 사용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대상영속성(Object permanence)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아동은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8개월 무렵부터). 또 이 시기가 지나면 모방이나 기억이 가능한,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게 되며 초기의 단순한 반사행동은 사라지고 점차 자신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목적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전조작기(2 - 6,7세) 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의 시기 : 2세 ~ 6, 7세 조작이란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전조작기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전의 단계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는 대략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표상을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전조작기 사고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상징적 사고 : 감각운동기까지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나 감각에 의존하여 생활한다. 그러나 감각운동기의 말기가 되면 점점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정신적 표상은 언어의 발달이 가속화하는 특징이 있다. 전조작기 아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표상들을 그림이나 언어 등의 형태로 표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가상놀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꿉놀이나 병원놀이와 같은 것으로 가상적인 사물과 상황을 실제 사물이나 상황처럼 상징하곤 한다. 자기중심적 사고(Egocentrism):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 피아제는 그 원인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찾는다. 전조작기의 아이들은 타인의 생각, 감정, 지각, 관점 등이 자신과 동일하리라고 생각하는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유명한 세 산 실험(three mountain problem)의 결과에서 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아동들에게 비대칭적인 산 모양을 보여준 후, 아동이 앉아 있는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서 관찰자가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무엇을 볼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일반적으로 3, 4세의 아동은 타인도 자기가 보았던 것을 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 타인의 시각에서 보는 조망을 추론할 수 있는 조망수용능력(Perspective Taking)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관적 사고(Intuitive Thinking) : 크기, 모양, 색깔과 같은 한 가지 두드러진 속성에 근거하여 대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를 말한다. 즉, 지각적인 특성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의 특성으로 전조작기 아동은 보존개념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A, B의 두 비커에 같은 양의 물을 담았다고 생각해 보자. A비커와 B비커는 모두 넓고 낮은 모양이므로 두 비커에 든 물의 양은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B비커의 물을 좁고 높은 모양의 C비커에 담는다면 물이 늘어났다고 여기게 된다. 즉, 눈에 보이는 모양만을 보고 물의 양을 판단하게 되는 직관적 사고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활론적 사고 : 모든 사물에 모두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사고를 말한다. 인공론적 사고 : 모든 것을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말한다. 구체적 조작기(7~11세) concrete operational stage 보존 개념 보존 개념(conservation)이란, 모양이 넓은 같은 모양의 컵에 같은 양의 우유를 보여준 뒤, 한 컵의 우유를 모양이 다른 긴 컵에 부어도 긴 컵과 넓은 컵의 우유의 양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동일성, 보상, 역조작의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수의 개념에서도 달걀과 컵을 나란히 놓은 뒤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면 컵과 달걀의 수가 같다고 대답하지만 달걀이나 컵을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달걀과 컵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전조작기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조작기 아동은 같은 양의 진흙으로 만든 두 개의 공을 보여준 뒤 아동 앞에서 하나를 핫도그처럼 길게 만들면 어느새 양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보존개념을 획득한 구체적 조작기에는 모양이 달라져도 그 양이나 수는 보존된다는 개념을 획득한다. 유목화 (classification process) 같은 모양의 구슬을 보고 쇠구슬과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 있게 됨 서열화 연역적 사고가 가능하게 됨 관계화 분류,서열 등 집합적 관계에서뿐만아니라 공간적이거나 인과적인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형식적 조작기(11, 12세 이후) 또는 추상적 조작기 Formal operational stage 가설적 사고 새로운 상황에 직면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가설적 상황을 설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과학적 사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시험하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추상적 사고 현실 상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는 없는 개념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체계적 사고 자신과 다른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명제적 사고 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언어적 진술에 의한 명제의 논리를 평가할 수 있다. 연역적 사고 결합적 분석 추상적 추론 사회문화적 발달 한편 이러한 맥락의 연대기적인 개인 연령수준에서의 인지 발달론 유형과는 대조적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 상호간의 섬세하고 협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 전달 측면에서 인지 발달을 다루는 레프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이론이 언급되고있다. 같이 보기 근접 발달 영역(ZPD) 에릭 에릭슨 성심리 발전단계 참고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피아제(Jean Piaget)와 비고츠키(Lev S. Vygotsky)의 인지발달이론을 중심으로,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제18권 제3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542663 (송지성, 이성애. (2012).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8(3), 215-227.) (Piaget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른 유아체육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한국체육교육학회지 제20권 제4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644983 (김현우, 오광수, 양웅비. (2016). Piaget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른 유아체육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 한국체육교육학회지, 20(4), 85-99.) 인지심리학 단계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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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생태계(生態系, )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생태학(ecology)이라고 한다.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루면 이를 '생태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곧 상호의존성과 완결성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 사는 유기체들은 먹이사슬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물질이 여러 유기체에 걸쳐 순환하고 에너지도 같이 이동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생겨난다. 개관 '생태계'라는 용어가 서구 사회에 정립된 것은 1930년 로이 클라팸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환경 전반의 유기체와 생물들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탄스리가 앞서 정리한 로이의 연구 결과를 정제하여 발표한 것이 현재의 생태계(Ecosystem)이다. 생태계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든 자연환경 상에 있어 모든 생물이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의 생태학적 개념이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거대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이 서로 밀접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한다. 생태계의 예로는 크게 육상 생태계, 연안 생태계, 육지 생태계로 나뉜다. 기능 인류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계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자 상품과 용역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재나 유제품과 같은 제품들이다. 야생동물에서 얻은 육류는 생태학적 관념을 적용하면 훨씬 더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 수초를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케냐와 남아프리카 일대의 연구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야생 생태계의 구조를 이용한 상업구조는 이렇다 할 성과가 많이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생태 관광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산업이 가장 성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생태 관광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자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이라고 여겨진다. 생태계의 예 농생태계 수생 생태계 산호초 사막 숲 인간 생태계 해양 생태계 연못 생태계 프레리 우림 사바나 스텝 타이가 툰드라 도시 생태계 아마존 같이 보기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각주 외부 링크 생태계 공생 초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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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유전자(遺傳子, 영어: gene)는 유전의 기본단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현대 유전학에서 유전자는 "게놈 서열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구간으로서 유전형질의 단위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게놈 서열 안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의 일부분을 이루며 조절 구간, 전사 구간, 기타 기능이 부여된 구간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대립형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형질은 유전자 서열에 의해 나타나는 유전형질의 한 종류이다. 유전자의 개념은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히 특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멘델의 특질은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50년대 DNA가 발견되면서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해명되었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에 의한 다양한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난다. 눈 색깔, 혈액형과 같은 것을 비롯하여 특정한 유전적 질환과 같은 것도 유전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수 천 가지의 생화학 작용도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소수의 경우, 유전자가 세포주기의 간기때 유전정보가 잘못복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인해 기존의 형질과 다른 새로운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세포 내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 가운데 정보를 갖는 부분을 뜻한다. DNA의 대부분은 정보가 없는 무작위 서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비부호화 DNA 서열이라 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99%가 비부호화 DNA 서열에 해당한다. 한편, 생쥐의 비부호화 DNA 가운데 80%가 인간의 것과 상동성을 보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두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유전자는 "부호화된 DNA 서열"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의해 진행되는 전사 (생물학) 등의 과정을 통해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유전자 발현이라 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개체의 발생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개체와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에 발현된 특징을 발현형질이라 한다. 발현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역사 1850년대 그레고어 멘델이 완두콩 실험을 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였다. 완두콩 시험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하나의 유전형질이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하지 않는 개체를 순종으로, 이 순종들의 교배를 통해 형질변화가 일어나는 개체를 잡종으로 불렀다. 잡종의 1세대에는 두 부모 개체의 대립형질 가운데 한 가지만이 발현되었는데 이를 우성, 1세대에 발현되지 않는 특성은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잡종 교배 시험을 통해 1세대에 열성이 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며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다시 발현한다는 것과 발현의 빈도가 통계적으로 분명한 법칙에 의한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의 발견으로서 멘델은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초창기 멘델의 발견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 휘호 더프리스가 《세포간 범생설》(Intracellular Pangenesis)을 출간하면서 멘델의 이론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프리스는 멘델이 제시한 유전학 개념의 용어를 정리하여 유전형질, 발현형질과 같은 용어를 고안하였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1900년대에 이르러 멘델의 법칙은 다시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유전자가 염색체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건은 특정한 유전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1928년 모건은 초파리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지도를 제작하였다. 1928년 영국의 의사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페렴쌍구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피스 실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시험을 통해 그리피스는 유전형질이 세균 사이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매끈한 균주를 형성하는 S형과 거친 균주를 형성하는 R형 두 종류의 폐렴쌍구균을 이용하여 실험하였다. S형을 생쥐에 주사하면 쥐는 하루 만에 죽지만 R형은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피스는 폐렴 백신을 만들기 위해 S형 균을 열처리하여 죽인다음 생쥐에 주사하였다. 죽은 S형 균은 병을 유발하지 않아 생쥐는 생존하였다. 그다음 그는 죽은 S형 균과 살아있는 R형 균을 혼합하여 주사하였는데 생쥐는 폐렴으로 죽었다. 죽은 생쥐의 혈액을 관찰한 결과 모든 균이 S형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S형 균의 무엇인가가 R형 균을 S형 균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피스는 이 현상을 형질변환이라 불렀다. 1941년 조지 웰스 비들과 에드워드 로리 테이툼은 돌연변이가 대사회로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를 연구하여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여 생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 콜린 먼로 매클라우드, 매클라인 매카시는 DNA에 유전자 정보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피스가 관찰한 형질변환은 바로 이 DNA의 이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었다. 이로써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는 하나의 유전자는 사실상 DNA의 염기서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DNA의 염기서열이 RNA에 의해 전사되고 리보솜에 전달되면 그로부터 지정된 아미노산 서열의 결합이 이루어져 효소와 같은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1972년 월터 피어스의 연구팀은 박테리오파지 MS2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서열을 판독하였다. 유전자 전체의 서열을 게놈이라 한다. 2007년 8월 햅맵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 지도를 판독하였다. 개체차를 반영한 인간의 게놈 판독 결과는 2008년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같이 읽기 유전학 유전 유전학 유전형질 대립형질 유전자 부동 유전자 이동 수평적 유전자 이동 멘델의 유전법칙 집단유전학 진화 이론 진화 슈도진 중립 진화 이론 인물 그레고어 멘델 휘호 더프리스 오스왈드 에이버리 제임스 D. 왓슨 프랜시스 크릭 각주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유전자 재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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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DNA
DNA
DNA(, 데옥시리보핵산, 디옥시리보 핵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인 두 개의 긴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이다. 세포 핵에서 발견되어 핵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이 핵 이외의 세포소기관도 독립된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DNA는 4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중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닥은 사이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은 독특한 핵염기(nucleobase)로 구분되기 때문에 흔히 DNA 염기서열이라고 부른다. DNA 염기서열은 유전정보를 나타내는 유전자 구간과 그렇지 않은 비부호화 DNA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기능을 가진 유전자였더라도 돌연변이를 통해 기능을 상실한 슈도진이 되면 비부호화 DNA가 된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정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게 한다. 유전자는 DNA 사슬의 특정 구간으로 실제 단백질 형성과 같은 발현에 관여하는 엑손 구간과 그렇지 않은 인트론을 포함한다. DNA가 직접 유전자 발현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발현 과정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mRNA)가 지닌 코돈에 의해 진행된다. 코돈은 세 개의 염기서열이 묶인 유전단위로 시작 코돈과 종결 코돈 그리고 그 사이에 실제 아미노산 결합을 지시하는 코돈들로 이루어져 있다. mRNA는 리보솜에서 효소와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한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DNA는 유전의 원인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어 왔으며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이 확인되었고 1952년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의 허시-체이스 실험으로 확정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네이처지에 실은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그러나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DNA의 X선 회절 사진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것이었으며, 그녀와 앙숙이었던 동료 과학자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하고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연구가 가능했기에 이후 그들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프랭클린은 암으로 1958년에 사망하여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였다. 구조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중합체 두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인산염이 결합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4 종류의 핵염기 가운데 하나가 결합되어 있다. 디옥시리보스와 인산기가 중합 과정을 통해 사슬 한 가닥의 뼈대를 이루고 핵염기들이 서로 상보적인 수소 결합을 통해 염기쌍을 이루며 이중나선을 만든다. 한편 이러한 DNA의 상보성은 한쪽만으로 상대편을 예측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중나선 구조는 DNA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이다.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유전정보를 저장하는데 수소 결합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쉽게 풀렸다 닫힐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을 위해 일부분이 풀렸다가 닫힐 수도 있고 세포 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풀리면서 복제될 수도 있다. 일부 또는 전체가 풀린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이 종료되거나 복제가 끝나면 다시 닫히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인이 된다. 뉴클레오타이드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은 인산염이 다른 한 쪽은 핵염기(nucleobase)가 결합되어 있는 DNA의 단위체이다. 생체에는 여러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으며 저마다 독자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아데노신은 결합된 인산염의 수에 따라 아데노신일인산, 아데노신이인산, 아데노신삼인산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아데노신삼인산은 인체의 모든 세포에 화학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세포의 에너지 동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데노신삼인산에서 인산염 하나가 분리되어 아데노신이인산이 되면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DNA를 이루는 것은 이것보다 인산염 하나가 더 적은 아데노신일인산이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시토신(C), 구아닌(G), 아데닌(A), 티민(타이민)(T)의 네 종류이다. 이들 핵염기와 연결된 뉴클레오타이드는 마치 레고 블럭처럼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아데닌은 티민과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염기쌍을 이룬다. 염기의 모양과 화학구조 때문에 상보적인 두 핵염기만이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DNA 가닥의 한쪽 염기서열만 알면 다른쪽은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쪽 가닥의 염기서열이 -A-C-G-T- 라면 다른 쪽 가닥의 염기서열은 -T-G-C-A- 가 된다. 아데닌(A)과 티민(T)은 두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 수소결합의 개수 때문에 A-T 결합은 G-C 결합보다 결합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쉽다. 생명체가 죽으면 DNA 역시 여러 이유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A-T 쪽이 먼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티민은 계속적인 손상을 입어 우라실로 대체되며 이렇게 손상을 입은 DNA는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 대부분의 생물은 위 네 핵염기만이 DNA의 단위체이지만 바이러스의 일종인 일부 박테리오파지는 우라실도 단위체로 사용된다. 박실루스 슈브틸리스(Bacillus subtilis) 종에 속하는 박테리오파지 PBS1과 PBS2 그리고 예르시니아(Yersinia) 박테리오파지 piR1-37의 DNA는 티민이 우라실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생물에서 우라실은 RNA의 단위체로서만 관여한다. 이중나선 DNA가 나선 모양으로 꼬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의 중합 형성으로 생기는 구조 때문이다. 리보스와 디옥시리보스는 모두 탄소 5개로 이루어진 오탄당으로 단원자 산소를 매개로 오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단원자 산소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탄소마다 1번에서 5번까지 번호를 붙여 위치를 나타낸다. 뉴클레오타이드에서 디옥시리보스의 1번 탄소는 핵염기와 결합하고, 2번과 3번은 하이드록시기(-OH)와 결합하며 4번 탄소와 연결된 5번 탄소가 인산염과 결합한다. 그리고 다른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하는 것은 5번 탄소에 연결된 인산염이다. 따라서 DNA 염기서열 사슬은 언제나 인산염을 사이에 두고 5번 탄소와 3번 탄소가 연결되게 된다. 이를 5' → 3' 연결 방향성이라고 부른다. 인산염의 결합 위치때문에 DNA 가닥은 3차원에서 나선 구조를 지니며 꼬이게 된다. 한편, 두 가닥의 염기서열 뼈대에 연결된 핵염기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한 쪽 가닥 말단이 3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5번 탄소이게 되고 그 반대로 한 쪽의 말단이 5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3번이게 된다. 그 결과 A-T 및 G-C 두 염기서열 뼈대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란한 역평행성과 상보성을 보인다. 이와 같이 하여 DNA는 두 개의 염기서열 뼈대가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가 되고 두 사슬의 핵염기가 마치 사다리처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이중나선의 종류 DNA 이중나선은 대개 오른 나사 방향으로 꼬이는 B형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널리 알려진 유형으로는 A-DNA, B-DNA, Z-DNA가 있다. DNA 이중나선은 나선 사이에 홈이 패이게 되는데 넓게 패이는 주홈과 좁게 패이는 부홈을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B-DNA의 경우 한 번 감긴 나선 마다 10개의 염기쌍이 놓인다. 그런데 A-DNA는 나선의 기울기가 수직축을 기준으로 30°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더 큰 폭으로 회전한다. 이 경우 나선 사이의 홈도 비슷하게 패여서 주홈과 부홈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며 나선 하나에 놓이는 염기쌍도 11개로 B형 보다 1개 더 많다. 한편 Z-DNA는 나사의 회전 방향이 B-DNA와 거울상 대칭을 보이고 나선 하나에 12개의 염기쌍이 놓이게 된다. 그 결과 Z-DNA는 B-DNA보다 길고 홀쭉하게 보이게 된다. DNA는 대부분 B형을 보이지만 매우 긴 DNA 사슬은 여러 형태의 DNA 사슬구조가 섞여 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반복하여 염기서열을 이룰 때 Z형 나선을 이루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자와 인접한 Z형 나선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환형 DNA와 초나선 DNA 오랫동안 DNA 이중나선은 기다란 끈 모양으로 여겨져 왔지만, 전자현미경 관찰을 통해 많은 경우 양 끝이 공유결합을 통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환형 DNA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DNA 이중나선 역시 다시 한 번 꼬여서 초나선을 이룰 수 있다. DNA가 이렇게 고리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슬의 방향성 때문에 한쪽 끝의 3' 말단이 반대편 끝의 5'말단과 공유결합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려면 DNA 사슬 자체가 1 회 이상 더 회전하여야 한다.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나선을 더 단단히 조이는 효과가 일어나고 이를 양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반대로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함으로 인해서 고리를 만든다면 DNA 나선을 풀어주는 효과가 나타나고 이를 음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실제 DNA는 그것의 나선 1회전 당 염기쌍 수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변형하여 초나선에 의한 영향에 맞선다. 예를 들어 B-DNA는 나선축이 휘어져 나선 1회 당 10개의 염기쌍 주기를 유지한다. DNA의 위상적 구조가 갖는 생물학적 기능은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DNA 구조는 늘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풀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변한다. DNA 회전효소는 초나선 현상을 완화하는 효소로, 공유결합된 말단을 풀어 고리를 끊고 너무 꼬여버린 줄을 풀어준다음 다시 연결한다. 기능 DNA에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담겨있다. 그러나 DNA의 염기서열 모두가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염기서열을 유전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비부호화 DNA라고 한다. 비부호화 DNA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유전자로 기능하였으나 돌연변이 등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슈도진이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가 직접 생물을 이루는 물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전자에는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한 정보만이 담겨있다. 따라서 DNA는 생물의 설계도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요리책처럼 해야할 작업을 순서대로 적은 레시피에 가깝다. DNA의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고 처리되어 최종 결과물 생성에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DNA의 기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DNA는 유전정보를 보관한다. 유전자 발현 유전자는 DNA의 일정 구간에 걸쳐 있는 염기 서열이다. 유전자에는 실제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엑손 구간과 발현에 관여하지 않는 인트론 구간이 있다. 엑손 구간의 시작은 촉진유전자(Promoter, 프로모터)에서 시작한다. 촉진유전자는 DNA 나선 두 가닥 중 어느쪽이든 있을 수 있다. DNA에 있는 유전자는 정보만을 지정하고 실제 단백질의 형성과 같은 일은 리보솜과 같이 세포 핵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 이 정보 전달은 전령 RNA(messenger RNA, mRNA)라고 불리는 "전령"이 담당한다. 촉진유전자는 바로 이 전령이 생성되는 시작점으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DNA의 두 가닥 가운데 어느 쪽을 이용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읽어야 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지정한다. 촉진유전자의 염기 서열 자체가 한 방향으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거꾸로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인 mRNA는 RNA 중합효소에 의해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위치인 촉진유전자에 결합하는데 촉진유전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RNA 중합효소가 정확히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단의 염기서열이 있다. RNA 중합효소는 이 유도 표지를 따라 접근하여 정확한 시작위치에 결합한 다음 DNA 사슬을 풀고 DNA와 상보적으로 형성되는 RNA 사슬을 엮는다. DNA와 달리 RNA는 아데닌의 상보적 핵염기로 우라실(U)이 사용된다. RNA 중합효소가 지나가면 DNA는 스스로 다시 감긴다. RNA 중합효소는 계속하여 mRNA를 결합하다가 종결 위치를 만나면 전사를 멈춘다. 종결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한 종류 이상이다. 유전자가 전사된 mRNA는 염기서열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데 실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코돈이다. 코돈은 시작 코돈, 아미노산 지정 코돈, 종결코돈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라실 셋이 모인 코돈 UUU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네개의 염기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 경우의 수는 이므로 모두 64가지의 코돈이 있지만, 코돈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아미노산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지정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이다. 또한 코돈에는 한 개의 시작 코돈과 세 개의 종결 코돈이 있다. 진핵생물의 경우 전사는 두 단계를 거친다. DNA에서 곧바로 전사된 1차 전사체는 엑손 부분과 인트론 부분이 함께 전사되며 있다. 최종 형성되는 mRNA는 이 가운데 인트론 부분을 잘라내 버린다. 대개의 경우 인트론 전사체 RNA의 절단은 전사가 종결된 뒤 핵 안에서 이루어지고, 핵 안에는 잘려진 다양한 크기의 RNA 분자가 남게 된다. RNA 절단에 관여하는 소자는 스프라이소좀으로 유전자 서열 자체에 어느 부분이 절단될 것인지를 지정하는 염기서열이 따로 있어서 매우 정교하게 잘라내어 접합한다. 잘려나가는 부위는 때로 전체 전사체의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형성된 mRNA는 리보솜으로 옮겨가 번역된다. 리보솜은 세포내의 "공장"으로 실제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한 조립공처럼 일한다. mRNA에는 리보솜 결합 부위라는 번역 개시 신호가 있어 어디서부터 아미노산 결합을 시작할 지 지시한다. 리보솜은 mRNA를 "읽어"들이고 그에 맞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는 운반 RNA(transfer RNA, tRNA)를 받아들인 후 아미노산은 펩티드 결합에 사용하고 tRNA는 방출한 다음 다음 코돈을 읽는다. 이런 과정을 종결 코돈이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비유하자면 mRNA는 작업지시서, tRNA는 운반도구, tRNA에 결합한 아미노산은 재료가 되는 셈이다. tRNA는 독특한 접합이 있는 RNA로 한쪽 끝엔 mRNA와 상보적인 안티코돈이 있고 다른 한쪽엔 특정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구간을 지니고 있다. DNA에는 tRNA를 만들 수 있는 전사 구간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역시 유전자의 하나이다. tRNA는 세포 내에서 자신과 짝을 이루는 아미노산과 결합해 있다가 근처의 리보솜에 끌려들어가 아미노산 합성에 참여하고 방출된 뒤에는 다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 이 과정은 세포 내 물질의 밀도에 의존한다. 유전자 발현에서 단백질 합성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은 대부분 체내에서 합성되어 있다가 mRNA가 전달한 정보에 따라 단백질로 결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전체를 모두 체내에서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있다. 사람의 경우 20개의 아미노산 가운데 트립토판, 메티오닌, 발린, 트레오닌, 페닐알라닌, 류신, 이소류신, 리신의 8 개는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한다. 이들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우유, 계란, 고기 등에 풍부하므로 육식을 할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의 경우엔 콩이나 두부, 기타 여러 곡물 등을 혼합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 지지 않도록 식단에 주의하여야 한다. 결국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 mRNA와 DNA의 다른 구간에서 형성된 tRNA가 재료인 아미노산을 이용하여 리보솜에서 아미노산 사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전자 발현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 사슬은 단백질 접힘과정을 거쳐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이 된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효소가 있다. 효소는 체내의 생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로서 3차원 구조가 기능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소가 작용하는 부위를 효소의 활성자리라고 하는데 효소의 구조가 변하면 이 활성 자리 역시 바뀌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돌연변이 유전자의 염기서열 어느 한 곳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돌연변이의 결과 코돈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최종 형성되는 아미노산 역시 바뀌게 된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개의 아미노산 변형은 자식에게 유전된다. 돌연변이는 자연적으로 계속하여 생성되며 방사선을 쬐거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생물은 DNA 수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돌연변이를 계속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돌연변이를 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유전정보의 변이가 발생한다. DNA에는 유난히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나는 구간이 있으며 메틸화된 핵염기를 치환하면서 오류를 보인다. 유전 정보를 담지 않는 비부호 염기서열도 동일하게 이러한 돌연변이를 겪을 수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절 부위는 별다른 유전자 발현을 하지 않으면서 돌연변이가 빈번하여 집단의 친연관계를 추적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전자의 동일한 위치를 놓고 원래의 유전정보 A와 변형된 유전정보 A'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즉 어느 유전자가 후손에게서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 가 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이렇게 발생한 대립형질에 우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환경이 어느 한 쪽 형질에 유리할 경우 점차 유리한 형질만이 살아남게 되어 생물 집단 전체의 유전형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진화의 기본 조건은 계속하여 발생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복제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생물은 생장과 발달을 포함한 생애 전 단계에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필요로 한다. 세포가 분열될 때에는 그 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 정보 역시 빠짐 없이 나누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DNA 복제가 일어난다. DNA 사슬이 어떻게 풀리고 복제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1957년 메튜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의 실험을 통해 두 가닥이 풀린 후 각 가닥마다 새로운 상보적 염기서열이 형성되어 두 개의 DNA가 형성되는 반보존적 복제가 이루어짐을 확인하였다. 즉, 복제된 DNA 두 개는 각자 원래의 DNA 가닥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게 된다. DNA 회전효소가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생기는 과도한 꼬임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나선에 결합한다. 그 후 헬리카아제가 실제 이중나선의 결합을 푼다. 이중나선이 풀리면 DNA 중합효소가 복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DNA 복제에는 RNA로 이루어진 프라이머가 필요하다. DNA 복제를 진행하는 DNA 중합효소가 DNA의 시작점부터 직접 복제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소의 하나인 프리마아제가 열려진 DNA의 한쪽 가닥에 프라이머를 결합시킨 뒤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DNA 중합효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이중나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운 DNA 이중나선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성된다. 원래의 DNA 나선에 DNA 회전효소가 지나가며 지퍼를 열듯이 나선을 분리하면 이렇게 열리는 방향과 같이 진행되는 선도 사슬(Leading strand)는 진행 방향을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사슬(Lagging strand)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의 DNA 이중나선이 풀리고 충분한 길이의 새로운 염기서열이 확보 되어야 계속해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리마아제가 헬리카아제의 뒤에 연결되어 임시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프리미어 RNA를 만들고 뒤에 거꾸로 향하는 DNA 중합효소가 절편을 만들며 잇는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 오카자키 절편이라 한다. 이러한 복제 과정을 거치면 지연 사슬의 끝은 더 이상 프리미어를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그 결과 DNA 사슬의 말단 일부는 복제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때문에 복제가 거듭되면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은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편,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자식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감수분열을 한다. 정자와 난자같은 생식세포는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는 감수분열을 통해 성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 정보의 절반을 갖게 된다. 진핵생물의 세포에는 DNA와 핵 이외에도 여러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대개의 세포소기관은 난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관행적으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n, 수정 이후의 유전 정보를 2n으로 표기하여 동수의 유전정보가 암수에게서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포유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2n이 되도록 하거나 난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발생을 유도한 실험 모두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정자를 통해 와야하고 또 다른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난자를 통해 유전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게놈과 염색체 DNA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사슬은 염색체를 형성한다. 게놈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하여 명명한 낱말로 1920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 한스 빙클러가 제안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어로는 유전체(遺傳體)가 쓰인다. 게놈의 길이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먼저 게놈이 해독된 예쁜꼬마선충의 경우 게놈의 크기는 1억 쌍의 염기서열 정도이지만,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완료된 인간 게놈의 경우 DNA 한 가닥당 3,234.83 Mb(메가베이스)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어 두 가닥을 합친 총 염기서열 양은 6,469.66 Mb이 된다. 각각의 세포마다 들어있는 게놈의 길이는 약 1.8 m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의 세포 핵의 크기는 5 μm에 불과하기 때문에 DNA는 매우 가늘고 긴 사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의 경우 매우 거대한 게놈을 갖기도 한다. 백합의 게놈은 인간보다 18배나 더 크다. 게놈이 해독되었다고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염색체 DNA는 평소 세포 핵 내부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색질을 이룬다. 염색질은 매우 가늘고 긴 실과 같으므로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포분열 과정에선 염색체 단위로 뭉치게 되어 광학현미경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생물 종마다 수와 크기가 다르다. 인간의 경우 22 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가 있다. 상염색체는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와 같이 번호로 불리고 성염색체는 x 염색체와 y 염색체 등으로 불린다. 성염색체는 동물마다 달라 어류는 ZO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결정은 XX인 경우가 암, XY인 경우가 수로 수컷이형을 보이지만, ZO 성결정 체계는 Z 유전자 하나만 있을 경우 암, ZZ인 경우 수로 암컷이형을 보인다. XY 성결정 체계와 달리 ZO 성결정 체계는 암수의 유전적 구별이 보다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류의 경우 400여 종에서 생애 주기에 따라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감성돔은 모두 수컷으로 태어나지만 2~3년이 지나면 암컷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5~6년생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된다. 한편 조류의 경우엔 ZW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염색체는 DNA 사슬이 염색질을 단위로 뭉친 것이다. DNA 사슬은 단백질의 일종인 히스톤을 실패삼아 감긴다. 히스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히스톤 H2A, H2B, H3, H4 가 각 한 쌍씩 8개가 팔량체를 이뤄 실제 실패와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히스톤 실패에 감긴 DNA를 뉴클레오좀이라 하는데 이것이 DNA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146개의 염기쌍이 히스톤 실패를 1.65번 감는다. 한편 실패를 이루지 않는 히스톤 H1은 실패 밖에서 DNA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좀은 다시 꼬여서 더 두꺼운 코일을 형성하는데 나선 1회전에 6 개의 뉴클레오좀이 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일은 또다시 접혀져 루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차례 겹쳐 만들어진 루프가 염색체를 이룬다. 염색체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 개의 염색분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된다. 이 염색분체들은 세포분열 말기에 각자 다른 딸 세포의 극으로 끌려가 새로운 세포 핵을 형성하게 된다. 염색체는 동원체를 중심으로 긴 팔과 짧은 팔이 구분되데 긴 쪽을 q 팔, 짧은 쪽을 p 팔이라고 한다. q와 p는 염색체 위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정할 때 기준이 된다. 동원체에서 가까운 쪽에서부터 q1 또는 p1과 같이 번호를 붙이며 멀수록 p20 또는 q40과 같이 큰 번호가 부여된다. 1p1은 1번 염색체의 짧은 팔에서 동심원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ABL2 효소 합성을 지시하는 ABL2 유전자는 1번 염색체의 1q25.2 에 위치해 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염색체 위의 유전자 위치를 밝혀내는 지도 작성은 매우 길고 복잡한 DNA 염기서열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거대한 염기서열 전체를 한 번에 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지도 작성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 DNA 절편을 이용한다. 자잘하게 잘린 절편들은 겔 전기 영동법과 같은 방법으로 분리되어 염기서열이 해독된다. 동일한 정보를 갖는 여러 가닥의 DNA를 사용하면 직소 퍼즐을 맞추듯이 서도 들어 맞는 절편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나의 절편은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대량으로 복제하여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해독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1983년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 고안되어 소량의 시료로부터 라이브러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삽입한 핵염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광자를 직접 검출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더욱 빠른 해독이 가능해졌다. 세포소기관의 독립적 DNA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DNA를 갖는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에는 2 개의 RNA 유전자, 22 개의 tRNA 유전자, 13 개의 단백질 합성 유전자가 있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별개의 생물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진핵 생물의 조상과 공생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엽록체 DNA는 보통 120~150여개의 유전자가 배열되어 있으며 염기서열은 약 150 kb 내외이다. 발견의 역사 핵산과 염색체의 발견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미셔가 핵산을 발견한 직후 세포 핵에서 막대모양의 구조를 매우 진하게 염색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염색질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세포 분열 과정에서 뭉쳐저 염색체가 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셔의 뉴클레인과 플레밍의 염색질은 동일한 물질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염색질이 유전에 관여한다고 추측하였고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유전자의 발견 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염색체와 유전의 관계를 입증하였다. 그는 애초에 초파리의 짧은 세대 주기를 이용해 진화를 재현할 생각으로 2년간 실험했지만 실패하였다. 초파리를 빛이 들지 않는 암실에서 70세대 이상 사육하였으나 초파리의 눈이 퇴화한다거나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초파리의 눈이 하얗게 변하는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그는 정상인 붉은눈 초파리와 돌연변이 흰눈 초파리를 교배하여 2세대에서 모두 붉은눈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한 다음 3세대에서는 붉은눈과 흰눈이 섞여 나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른 우성/열성 유전형질 발현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흰눈 초파리가 모두 수컷이었다. 그는 초파리의 눈을 희게 만든 열성인자가 초파리의 성염색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실험을 계속하여 여러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였다. 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를 놓고 가설을 세웠다. 영국의 아치볼드 게로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효소를 지정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하였고, 1941년 조지 비들과 E. L. 테이텀이 붉은빵곰팡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였다. 이들은 곰팡이에 엑스선을 쬐어 특정한 아미노산을 형성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점돌연변이 때문에 돌연변이 곰팡이는 다른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합성하지 못하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효소를 만들지 못했다. DNA의 역할 확인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1928년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폐렴쌍구균은 면역반응에 걸려 병을 유발하지 못하는 R형과 폐렴을 유발하는 S형이 있는데, S형이라 할지라도 열을 가해 균을 죽이면 폐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S형 균을 R형 균에 섞어 넣었더니 R형이 모두 S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S형의 어떤 요소가 R형에게 전달되어 형질변환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 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에이버리의 실험 이후에도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DNA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강력한 후보였으나 단백질 역시 만만찮은 후보였다. DNA와 단백질 가운데 어떤것이 유전 요인인지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알프레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더욱 정교한 통제 조건으로 허시-체이스 실험를 실시하였다.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과 DNA에 방사성 동위원소 표식을 달아 대장균에 주입한 후 무엇이 유전에 관여하는 지를 관찰하고 그것이 DNA임을 확정하였다. DNA의 구조 발견 DNA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DNA의 구조 역시 오랫동안 여러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었다. 1935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피버스 레빈은 뉴클레오타이드가 인산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분자 화합물인 DNA의 크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실제로는 핵염기의 구성비 역시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레빈은 DNA를 이루는 핵염기 4종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짝을 이루는 사각형 구조를 가설로 제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DNA의 핵염기 비율은 4종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레빈의 가설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의 핵염기가 모두 동일한 양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은 언제나 동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샤가프 스스로는 이 발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DNA 핵염기의 상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이끄는 캐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는 1948년부터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구조를 직접 관찰하고자 하였다. X선도 일종의 빛이기 때문에 굴절, 반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회절은 작은 물질을 지나가는 빛이 물질의 그림자 영역까지 애돌아 나가는 현상이다. 결정의 모양에 따라 회절 모양도 달라지게 되므로 역으로 이용하면 물질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X선을 결정에 조사하면 브래그 법칙을 만족하는 방향으로만 X선이 회절되어 결정구조가 반영된 패턴을 남긴다. 195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이후 DNA의 구조 파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진 51을 촬영하였다. 프랭클린의 사진 51은 프랜시스 크릭을 거쳐 제임스 왓슨에게 전달되었고 둘은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사진 51은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데이터로서 1953년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지에 사진 51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둘이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핵염기들이 A-T, G-C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며 두 가닥의 사슬이 서로 꼬여 이중나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복제 메커니즘의 발견 DNA는 구조가 규명되자 마자 그것이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임을 암시하였다. 핵염기는 오직 하나의 상보적 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NA 사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닥이 분리되면 곧바로 새로운 이중나선을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 콘버그는 이러한 DNA의 복제가 효소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1953년 DNA 중합효소를 발견하였다. DNA 사슬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제된다. DNA 이중나선이 풀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선도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진행이 있다. 선도 진행이 연속적인 복제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지연진행은 DNA 이중나선의 물리적 특징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1968년 부부였던 오카자키 레이지, 오카자키 츠네코를 비롯한 일본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지연 진행되는 DNA 사슬이 일정한 크기의 절편 단위로 복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카자키 절편은 DNA 복제 과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이다. 관련 주제 유전자 가위 1970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해밀턴 O. 스미스는 DNA의 특정 부위를 절단하는 제한 효소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제한 효소는 훗날 HindII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DNA 염기서열에서 GTYRAC 구간을 찾아내 절단한다. Y는 T또는 C, R은 A또는 G가 될 수 있다. 이 효소는 1세대 유전자 가위가 되어 분자생물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유전자 가위로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효소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크리스퍼가 유전자 가위로 쓰인다. 유전자 가위로 DNA의 원하는 부분을 절단하면 그것을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DNA에 주입하여 대량으로 복제시킬 수 있다. 이렇게 원하는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클로닝이라고 한다. 클로닝은 DNA 감식,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용도에 두루 활용된다. 유전자 편집 유전자 가위와 클로닝 기술은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곡물이나 구근 식물은 농업의 주요 품종으로 여러 이유에서 유전자 변형이 연구되었으며 2002년 말 16개국에서 유채, 옥수수, 감자 등 15작물 68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생물의 안전성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유전자 편집은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도 적용 가능하다. 실험 동물에 특정한 유전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2018년 중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줄기 세포 DNA 염기서열에 있는 수 많은 유전자들이 발생의 어느 시점에서 발현하고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고정되는 가 하는 주제는 발생유전학의 중요 관심사이다. 다세포 생물은 발생과 발달 과정에서 일정 시기를 지나면 세포 마다 발현될 특징이 결정된다. 피부에선 피부 세포만이 발현되고 간에선 간 세포만이 발현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분화가 결정된 세포는 때어내어 다른 곳에 이식하여도 결정된 대로 발달한다. 줄기 세포는 아직 그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 무엇으로든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이다. 배아의 발생단계에서 미분화한 배아줄기세포와 성체가 되었지만 일부 계속해서 남아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한 배아의 세포에서, 성체줄기세포는 혈액, 골수 등에서 얻는다. 줄기세포는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분화한 줄기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황우석 사건으로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황우석은 복제된 배반포에서 배아줄기세포를 획득하였다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실험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어 논문이 철회되었다. DNA 감식 DNA는 매우 큰 정보량을 갖고 있으며 개인 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DNA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다. DNA 감식에는 보통 STR 분석이 쓰이는데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반복구간이 개인마다 다른 점을 이용한다. 유전자 감식은 각종 사건 사고의 신원확인, 실종자 확인과 같은 수사에 이용되며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의 유해 감식에도 쓰인다. DNA 감식은 범죄의 증거로도 채택된다. 감식의 결과 동일인으로 판정되면 충분히 해당 개인을 특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죄 확정된 범죄자의 DNA 시료를 채취하여 등록하고 있다. 유전성 질환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질병을 유전성 질환이라고 한다. 유전성 질환은 자식 세대에 유전되는데 우성/열성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고 유전 인자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유전성 질환으로는 백색증, 혈우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같이 보기 핵산 RNA 뉴클레오타이드 DNA 수선 PCR 참고 문헌 각주 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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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RNA
RNA
리보핵산(RNA)은 유전자의 코딩, 디코딩, 조절 및 발현에서 다양한 생물학적 역할에 필수적인 고분자 분자이다. RNA와 디옥시리보핵산(DNA)은 핵산이다. 지질, 단백질 및 탄수화물과 함께 핵산은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필수적인 4가지 주요 거대분자 중 하나를 구성한다. DNA와 마찬가지로 RNA는 뉴클레오타이드 사슬로 조립되지만 DNA와 달리 RNA는 한 쌍의 이중 가닥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접힌 단일 가닥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세포 유기체는 유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메신저 RNA(mRNA)를 사용한다(G, U, A로 표시되는 구아닌, 우라실, 아데닌 및 사이토신의 질소 염기를 사용). 및 C) 특정 단백질의 합성을 지시한다. 많은 바이러스는 RNA 게놈을 사용하여 유전 정보를 암호화한다. DNA와의비교 RNA의 화학 구조는 DNA의 화학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세 가지 주요 방식에서 다르다. 이중 가닥 DNA와 달리 RNA는 많은 생물학적 역할에서 단일 가닥 분자이며 훨씬 더 짧은 뉴클레오타이드 사슬로 구성된다. 그러나 단일 RNA 분자는 상보적인 염기쌍에 의해 tRNA에서와 같이 가닥 내 이중 나선을 형성할 수 있다. DNA의 당-인산염 등뼈에는 디옥시리보스가 포함되어 있지만 RNA에는 대신 리보스가 포함되어 있다. 리보스는 2' 위치에서 오탄당 고리에 부착된 하이드록실 그룹을 가지고 있지만 디옥시리보스는 그렇지 않다. 리보스 골격의 하이드록실 그룹은 가수분해의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어 RNA를 DNA보다 화학적으로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 구조 RNA는 오탄당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사슬구조를 이룬다. 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리보스에 있는 다섯개의 탄소에 번호를 붙였을 때 1번 탄소가 핵염기와 연결되며(이 그림의 경우 구아닌) 3번과 5번은 인산에 연결된다. 1번 탄소에 연결되는 핵염기는 구아닌 이외에도 아데닌, 우라실, 시토신이 있다. 인산은 당과 당 사이를 연결하여 사슬을 이룬다. 핵염기는 보통 다음과 같은 약자로 쓰인다. A - 아데닌 G - 구아닌 U - 우라실 C - 시토신 (사이토신) 핵염기는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을 이루어 결합할 수 있다. 아데닌은 우라실(DNA의 경우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 RNA는 DNA와 달리 1개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단일 가닥이며, 자체적으로 상보적 염기쌍을 형성해 접힘으로써 고유의 입체 구조를 가질 수 있다. RNA에 존재하는 리보스의 2번 탄소에 결합된 하이드록시기는 당-인산 골격의 인산이에스터 결합을 분해하는데 관여한다. 따라서 RNA는 DNA보다 빠르게 가수 분해되어 덜 안정하다. 종류 RNA는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기능에 따라 9가지로 나뉜다. rRNA(리보솜 RNA ribosomal RNA): 리보솜을 구성하는 RNA이다. mRNA(전령 RNA messenger RNA): DNA의 유전 정보를 옮겨적은 일종의 청사진 역할을 한다. 이를 기본으로 하여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합성하게 된다. tRNA(운반 RNA transfer RNA): mRNA의 코돈에 대응하는 안티코돈을 가지고 있다. 꼬리쪽에는 tRNA의 안티코돈과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연결해 주는 효소가 있다. 따라서, tRNA의 안티코돈에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다. miRNA(마이크로 RNA micro RNA): 생물의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작은 RNA로, mRNA와 상보적으로 결합해 세포 내 유전자 발현과정에서 중추적인 조절인자로 작용한다. snRNA(소형 핵 RNA small nuclear RNA): 핵 안에서 RNA를 스플라이싱 하는 기능이 있다. snoRNA(소형 인 RNA small nucleolar RNA): 핵 안에서 RNA의 변형을 일으킨다. aRNA(안티센스 RNA antisense RNA): RNA에서 리보솜으로의 번역을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siRNA(소형 방해 RNA small interfering RNA): RNA 방해를 유발한다. 특정 단백질의 생산을 억제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방해한다. piRNA 이외에도 형태에 따라 단일 가닥은 ssRNA, 이중 가닥은 dsRNA라는 약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역할 바이러스와 같은 일부 미생물에서 RNA는 유전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핵생물과 다세포생물은 DNA가 유전자의 역할을 하고 RNA는 세포에서 단백질 형성 과정에서 DNA와 리보솜 사이의 통신을 맡는 역할을 한다. 단백질 형성과정 세포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의 형성에는 RNA, DNA, 리보솜, 효소 등이 관여한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DNA에서 mRNA가 전사된다. 동시에 세포 내에서는 아미노산 활성화 효소에 의해 tRNA에 아미노산(amino acid)이 부착된다. mRNA의 뉴클레오타이드는 3개씩 짝을 이뤄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예를 들어 UUU(우라실-우라실-우라실)는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전사된 mRNA가 리보솜의 소단위체(small subunit)에 부착된다. 1번에서 아미노산이 부착된 tRNA가 mRNA의 지정된 염기서열의 뉴클레오타이드에 부착된다.(오른쪽 그림의 첫 단계) 리보솜의 큰 단위체(large subunit)가 소단위체(small subunit)와 결합한다. mRNA의 다음 염기서열과 짝을 이루는 tRNA가 리보솜에 들어오고 여기에 부착된 아미노산은 앞의 tRNA에 부착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오른쪽 그림의 두 번째 단계) mRNA의 염기서열이 끝날 때까지 위 과정이 반복되면 긴 아미노산 사슬이 형성된다. 이것이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효소에 의해 접혀 적절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오른쪽 그림의 끝 단계) 세포 내에는 수많은 리보솜이 있어 하나의 mRNA를 이용하여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 전사와 mRNA 생성 DNA의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상보적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순서대로 연결하여 RNA 사슬을 형성하는 중합반응을 전사라 한다. 전사의 과정에는 RNA 중합 효소가 관여한다. RNA 중합효소는 DNA 염기서열 중 전사를 시작할 곳을 찾아 DNA의 이중나선을 열고 두 가닥 중 한쪽을 사용하여 상보적인 염기서열대로 mRNA를 전사한다. 전사의 종료를 알리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전사를 마치고 DNA 이중나선을 닫는다. 전사의 시작 지점을 알리는 DNA의 위치는 프로모터()라 하는데 전사 시작을 알리는 특정 염기서열과 첫 번째로 전사될 염기 및 전사를 조절하는 염기서열로 구성되어 있다. 코돈 코돈은 mRNA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세개의 뉴클리오드 염기 순열이다. 생물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으로 이를 지정하는 mRNA의 코돈은 아래의 표와 같다. mRNA 순열중 UAA, UAG, UGA는 아미노산 연결 종료를 지시한다. tRNA tRNA는 75 - 95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작은 RNA 분자이다. 비교적 짧은 RNA 사슬이 접혀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tRNA의 주요 역할은 리보솜에 들어온 mRNA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20종 이므로 세포 속에 있는 tRNA의 종류도 20종이다. tRNA의 말단은 아미노산과 연결되어 있고 접혀있는 특정 부분은 안티코돈이 된다. 예를 들어 왼쪽 그림의 페닐알라닌 tRNA의 안티코돈은 AAG로 리보솜에서 mRNA의 UUC코돈과 연결된다. (RNA 핵염기의 상보성은 A(아데닌)-U(우라실), G(구아닌)-C(사이토신)이다.) 각주 David P. Clark 저 이명석 역,알기쉽고재미있는분자생물학, (주)라이프사이언스, 서울, PP427–436 RNA 스플라이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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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솜
리보솜() 또는 리보좀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리보솜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리보솜은 대단위체와 소단위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두 단위체가 결합하여 단백질 합성을 수행한다. 개요 리보솜은 지름이 약 20nm(200Å)이고 65%의 리보솜 RNA와 35%의 리보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고균, 진정세균 및 진핵생물의 리보솜은 서로 다른 다양한 단백질과 RNA로 구성되어 있다. 리보솜은 전령 RNA(mRNA)의 코돈을 번역하여 운반 RNA(tRNA)에 연결된 아미노산을 배열하여 단백질을 형성한다. 리보솜은 별도의 막이 없는 세포소기관이다. 단백질과 RNA로 이루어진 리보솜과 조금 다른 리보자임은 효소처럼 작용하는 RNA분자이다. 이것에 의해 RNA 세계 기원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단백질을 형성하지 않는 동안 RNA는 내부 원형질인(세포기질 cytosol) 때에는 RNA로부터 구성되는데, 이는 RNA 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리보솜은 1950년대 중반 루마니아 생물학자인 게오르그 에밀 팔라데에 의해 최초로 관찰되었다. 팔라데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를 관찰하던 중 리보솜을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보솜이라는 이름은 1958년 리처드 B. 로버트가 명명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리보솜의 분자 구조와 기능이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아다 요나트(이스라엘),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미국)과 토머스 A. 스타이츠(미국)는 리보솜의 기능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20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분류 리보솜은 크게 단백질을 합성하는 자유 리보솜(free-ribosome)과, 소포체(endoplasmic reticulum, ER) 표면에 붙어서 막단백질이나 분비단백질을 등을 합성하는 ER-리보솜, 두가지로 나뉜다. 이 둘은 상호전환이 가능하며, ER-리보솜이 자유 리보솜이 될 수도, 자유 리보솜이 거친면 소포체로 들어가 ER-리보솜이 되는 경우도 있다. 생성 세균의 리보솜은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인 오페론을 전사하여 생성된다. 진핵생물의 경우 세포핵 안에 있는 핵소체에서 4 종류의 리보솜 RNA가 만들어지며 리보솜 단백질과 결합되어 리보솜이 생성된다. 구조 리보솜은 크게 2개의 소단위체(subunit)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대 리보솜 소단위체 (large subunit, LSU)와 소 리보솜 소단위체 (small subunit, SSU)이다. 리보솜은 스베드버그(Svedberg) 침강 계수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원핵세포의 리보솜과 진핵세포의 리보솜이 다르다. 이때 리보솜의 크기를 스베드버그의 이름 약자를 따서 S라는 단위로 센다. 원핵세포의 경우 전체가 70S 리보솜이고 각각 50S 및 3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 진핵세포의 리보솜은 전체가 80S 리보솜이고 각각 60S 및 4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 단백질 생성과정 리보솜이 mRNA의 코돈을 인식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이라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생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준비 리보솜의 소단위체와 대단위체가 결합한다. 리보솜에는 운반 RNA가 들어설 수 있는 부위가 두 곳이 있는데 운반 RNA가 들어오는 쪽을 A 자리, 나가는 쪽을 P 자리라 한다. 초기화 소단위체에 전령 RNA가 결합하고, 시작 코돈이 확인되면 대단위체의 A 자리에 메티오닌과 결합한 운반 RNA가 도입되면서 단백질 생성이 시작된다. 연장 과정 코돈 인식 : 폴리펩타이드를 달고 있는 P 자리의 운반 RNA가 코돈에 붙어있다. A 자리에 있는 전령 RNA의 코돈과 상보성을 갖는 안티코돈을 가진 운반 RNA가 아미노산을 가져와 결합한다. 펩타이드 결합 형성 : P 자리에 있는 기존의 폴리펩타이드와 A 자리에 있는 새로운 운반 RNA의 아미노산 사이에 펩타이드 결합이 형성된다. 이때 아미노아실 결합이 P 자리의 운반 RNA에서 새로운 폴리펩타이드 쪽으로 옮겨간다. 변환 : P 자리에서 자유로워진 운반 RNA가 빠져나간다. 이제 전령 RNA가 한칸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코돈이 바뀐다. 반복 : A 자리의 폴리펩타이드-운반 RNA 중합분자가 P 자리로 옮겨가면서 A 자리가 비워진다. 비워진 A 자리에는 바뀐 코돈과 상보적인 운반 RNA가 새롭게 결합된다. 위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폴리펩타이드 사슬이 길어진다. 종료 종료 코돈에 종결 운반 RNA가 결합되면 합성되던 폴리펩타이드가 떨어져 나가면서 단백질 합성이 끝난다. 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의 에너지원은 GTP의 가수분해이다. 같이 보기 ARDRA 각주 세포소기관 리보자임 단백질 생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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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바이러스(, , ) 또는 여과성 미생물(濾過性微生物), 병독(病毒)은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전염성 감염원이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비세포성 반생물)이다. 초현미경적, 여과성 병원체이기도 하다. 기생과 증식을 위해서는 숙주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동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러시아의 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노프스키(Dmitri Iosifovich Ivanovsky)의 1892년 연구가 다루었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 이래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 안에 있지 않거나 세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 있는 동안 독립적인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온이라고도 하는 이 바이러스 입자들은 DNA나 RNA로 만들어진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 외피와 단백질 외피를 둘러싸는 긴 분자인 이 바이러스 입자들의 모양은 몇몇 바이러스 종들을 위한 단순한 나선형과 타원형 형태에서부터 다른 종들을 위한 더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종들은 너무 작아서 광학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 평균적인 비리온은 평균적인 박테리아 크기의 약 100분의 1이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서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고, 세포들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DNA의 플라스미드 조각들로부터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진화 과정에서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을 운반하고, 생식하고,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체로 분류하는데 필요한 주요 특성(예를 들어 세포 구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체" 및 복제 물질로 묘사되어 왔다. 바이러스의 발견과 연구의 역사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병원체를 찾을 수 없어서 현미경을 이용하여 매우 작은 병원균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1884년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찰스 챔버랜드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구멍을 지닌 필터를 발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필터를 통해 박테리아를 포함한 용액을 통과시켜 이 용액으로부터 이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Ivanovskii, D. I.)는 이 필터를 이용하여 현재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감염된 담배잎으로부터 으깬 잎 추출물이 필터 과정을 거쳤더라도 감염성이 유지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바놉스키는 이 감염이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독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생각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당시, 모든 감염체들은 필터를 통해 존속되어 영양배지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는 질병의 배종설(매균설)의 일부가 되었다. 1898년에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 마루티누스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는 이 실험을 되풀이하였고 필터 처리된 용액에 새로운 형태의 감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 감염체가, 분리된 세포에서만 증식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contagium vivum fluidum로 불렀으며 이 낱말을 바이러스(virus)라 하였다. 베이젠리크는 바이러스가 자연 상에서는 액체 상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은 나중에 웬들 스탠리가 바이러스가 미립자성을 띠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뢰플러와 프로시는 최초의 동물성 바이러스(구제역을 일으키는 아프타바이러스)를 비슷한 필터를 통해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바이러스의 기원 19세기 후반 바이러스 발견 직후 생물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세포로 진화하지 못한 원형질체의 일부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바이러스와 숙주세포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정되었다. 두 번째 가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핵산을 필요로 하는 세포내 기생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내로 들어가면 핵산을 비롯하여 바이러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숙주세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가설은 바이러스가 세포로부터 방출되었기 때문에 복제를 위해 숙주세포로 되돌아가야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분류 바이러스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서 식물 바이러스·동물 바이러스 및 세균 바이러스(파지)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 증식의 근원이 핵산에 있으므로 핵산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게 되었다. 즉, 2종류의 핵산 중에서 어느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DNA바이러스 아문과 RNA바이러스 아문으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강·목·과로 세분화된다.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면서 숙주가 가진 것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천연두나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대장균에 기생하는 T파지는 DNA바이러스이다. 이에 대해, 유행성 이하선염(항아리손님)·홍역·광견병·소아마비·일본뇌염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RNA바이러스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는 바이러스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I: dsDNA 바이러스(겹가닥 DNA 바이러스) - 아데노바이러스, 헤르페스바이러스, 마마바이러스 등 II: ssDNA 바이러스(외가닥 DNA 바이러스) - 파르보바이러스 등 III: dsRNA 바이러스(겹가닥 RNA 바이러스) - 레오바이러스 등 IV: (+)ssRNA 바이러스(양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코로나바이러스, 피코르나바이러스, 토가바이러스등 V: (−)ssRNA 바이러스(음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오르토믹소바이러스, 라브도바이러스 등 VI: ssRNA-RT 바이러스(외가닥 RNA-RT 바이러스) - 레트로바이러스 등 VII: dsDNA-RT 바이러스(겹가닥 DNA-RT 바이러스) - 헤파드나바이러스 등 구조 바이러스는 RNA나 DNA의 유전물질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캡시드)로 구성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진다. 단백질 껍질(캡시드)은 구슬 모양의 단백질(capsomere, 캡소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이외에 지질로 이루어진 막을 가지기도 한다. 위의 그림에서 하단의 바이러스가 지질로 이루어진 층을 가지는 Enveloped Virus(외피로 둘러싸인 바이러스)이다. 이 지질층은 숙주세포의 세포막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징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영양 배지에서는 배양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증 ·증식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기 위해서, 미생물학자들은 1900년대 초, 페트리 접시에서 자라는 세포층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세포배양)을 개발하였다. 발견 초기에는 누구나 바이러스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바이러스가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인 생물학 차원에서 무생물(비생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생물적 특성 (숙주 세포의 효소를 이용한) 물질 대사가 가능하다. 증식, 유전, 적응 등의 생명 현상을 나타낸다. 자기복제가 가능해 돌연변이가 나타날 수 있다. 무생물적 특성 핵이 없고 세포막 등의 세포 기관도 없다. 독립적인 효소가 없어 독립적 물질대사가 불가능하다. 생물체 밖에서는 결정체로 존재한다. 바이러스 복제 바이러스 감염주기는 용균성(lytic) 또는 용원성(lysogenic)으로 분류된다. 용균주기: 새로운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서 터져나와 숙주를 죽이게 된다. 용원주기: 바이러스 DNA가 숙주 유전체에 통합되어 잠복해 있다가 숙주 세포가 복제될 때 같이 복제된다. 바이러스 복제 방법은 크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부착(Attachment): 바이러스의 표면단백질이 숙주 세포의 특이 수용체에 부착된다. 특정 숙주 세포의 수용체에 대한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의 친화성이 바이러스에 감수성이 있는 숙주의 범위와 숙주 내에서 감염이 일어나는 특정부위를 결정한다. 투과(Penetration): 외피보유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의 외피와 세포의 외막 융합(fusion)을 통해 세포내로 침투한다. 탈외각(Uncoating): 바이러스의 단백질이 제거되고 핵산이 유리되는 과정이다. 복제(Replication): 바이러스의 mRNA가 합성된 후 바이러스 단백질이 합성된다. 핵산의 복제 전에 바이러스의 핵산 복제 과정에 필요한 효소가 합성되고(초기 단백질), 이후 핵산 복제 후에 후기 단백질인 구조에 관여하는 단백질이 합성된다. 조립(Assembly): 바이러스의 핵산과 캡시드 단백질로 자손 바이러스가 조립된다. 방출(Release): 일반적으로 바이러스 입자는 2가지 방법(용원, 용균)으로 방출된다. 바이러스가 원인인 주요 질병 독감 :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 감기 : 리노 바이러스 또는 아데노 바이러스가 원인 에이즈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가 원인 담배 모자이크 병 :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MV)가 원인 천연두 : 천연두 바이러스가 원인 소아마비 구제역 에볼라 출혈열 : 에볼라 바이러스가 원인 상추 모자이크 병: 상추 모자이크 바이러스가 원인 메르스 지카 바이러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COVID-19) 바이러스의 이로운 사용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숙주 세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항생제의 급격한 사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면(파지 요법)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파지 요법 연구가 중단되었지만,항생제 때문에 요즘 다시 파지 요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같이 보기 바이러스학 바이러스 분류 각주 참고 자료 Ricki Lewis 외,《LIFE》,6th Ed.,Mc Graw Hill(2009) 외부 링크 ViralZone A Swiss Institute of Bioinformatics resource for all viral families, providing general molecular and epidemiological information "A Gazillion Tiny Avatars", article on viruses by Olivia Judson, NY Times, Dec 15, 2009 Viruses – an Open Access journal 바이러스학 독일어 낱말 감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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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4%B1%EC%88%98%20%28%EC%96%B8%EB%A1%A0%EC%9D%B8%29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전라도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도 부안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 화순군수, 진안군수, 군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협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유년기 조부 김요협은 전북 고창 부안면에 집을 짓고 거주하였고, 김기중과 김경중 형제는 줄곧 그 곳에서 거주하였으며 김성수 역시 조부가 세운 집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김성수는 조부 김요협 내외와 부모 김기중 내외, 생부모 김경중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양가와 생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하나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에 가세를 일으켰지만 할아버지 김요협은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였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맏손자인 인촌에게만큼은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유년기의 김성수는 장난기가 심한 소년이었다 한다. 엽전을 삼켰다며 병이 나으려면 호두를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집안 일가가 호두를 가져오자 엽전을 먹은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머니였노라고 하기도 하였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7세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선행가언을 배우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7세 때 훈장을 모셔와 사설 서당을 차려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리 아이들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소년 판석은 어린아이임에도 동네 아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이 어려워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리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비하, 모욕을 주지 않았다. 그는 유년기때 부모로부터 양반이 갖춰야할 예의범절과 한문 등을 배웠다. 9세 무렵 생부 김경중 내외에게 다섯째 아들이자 친동생인 김연수가 태어났다. 한편 백부 김기중의 소실인 공주김씨에게서도 서자이자 그의 서제인 김재수가 태어난다.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 청소년기 5살 연상과 결혼 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는 장흥 고씨로 전라도 창평군(현 담양)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규장각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그는 장학재단인 호남학회(湖南學會)의 발기인에 참여하여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정주는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 장인 고정주는 특별히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영학숙을 열고 자신의 아들 고광준(高光駿, 고재욱의 부)과 사위 김성수 등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 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는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고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송진우와의 만남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 후일 김성수는 송진우의 첫인상을 두고 이르기를, 쉽게 속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나 심지가 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였다.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수학과 서구 문물 수용 1906년 겨울 다시 전북 고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친구인 송진우와 친분을 쌓은 뒤 김성수는 이를 부모에게 보고하였다. 담양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양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송진우라는 친구를 얻었다고 했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가 모두 고창군 인촌리에서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주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한편 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 1907년 봄 김성수의 가족은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했다. 1907년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의 청련암(淸蓮庵)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했다.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가 다시 찾아왔다. 내소사 청련암에서는 백관수도 함께 수학했다. 백관수는 내소사 남쪽 20리쯤에 위치한 부안군 덕흥 출신으로 집안 어른들끼리 교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송진우, 백관수와 더욱 우의를 두텁게 했고 이러한 우정은 평생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촌은 백관수에게서는 한문의 힘을 빌었고, 송진우에게서는 식견(識見)의 힘을 빌렸지만, 김성수 역시도 백관수에게는 신학문의 영향을 주었고, 송진우에게도 실천하는 힘의 영향을 깨우쳐 주었다.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일본이라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 학창시절과 교육활동 도일 유학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동경유학을 결심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는 정치강연회가 있으면 먼길이라도 찾아서 참석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교육·계몽 활동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이때 경영난에 빠졌던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의 생부모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양아버지 김기중만이 그의 의견에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 일제 강점기 활동 기업 경영과 독립운동 기업 활동과 민족자본 육성 활동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 독립운동 준비와 만세운동 계획 수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상하이에서 한인청년단이 1919년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측 대표자를 파견한다는 것을 접하고, 범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계의 참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김규식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호응하여 사건을 벌여야 된다고 하자 이를 입수한 그는 송진우와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의 포섭과 협력을 주선했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승만 밀서를 되돌려보냈다. 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3·1 운동 전후 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측 대표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속을 뒤적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1919년 10월 3.1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한 이아주(李娥珠)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이아주의 문병을 갔다. 이 인연으로 후일 이아주와 재혼하게 되었다. 이아주는 용인이씨 이봉섭(李鳳涉)과 김해김씨의 딸로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아주는 후에 2005년 3월 7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의류사업 확장과 경성방직회사 창업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한편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미쓰이>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 언론 활동 및 교육활동 민족개량주의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언론과 계몽운동 송진우 출감 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3년 5월 송진우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920년 10월초 유근이 출옥하자, 출옥한 유근을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추진한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을 주도하며 일경의 눈총을 샀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 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물산장려운동과 국산품 애용 운동 1920년초부터 그는 강연 활동을 다니며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병로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경성방직 50년>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실력 양성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었다. 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 자치, 실력양성 운동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5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활란 등과 자주 만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논의하곤 했다. 11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 아들의 활동에 짐이 될 것과 손자들의 건강을 우려해 귀국하였다. 인천까지의 배삯은 마련하였으나, 의지할 데가 없던 곽낙원은 차비 마련이 어려웠다. 곽낙원은 고심하다가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서울에 갈 차표와 차비를 구하였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송진우가 곽낙원과 손자의 차비를 지불해주었다. 곽낙원의 동아일보 인천지국 및 본사 방문 소식을 접한 김성수는 직접 찾아가 곽 여사에게 생활에 쓰시라며 봉투를 건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1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간디의 영향, 세계 일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 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신간회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브나로드 운동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 인수와 사업 경영난 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부친 상중에도 그는 친히 현장을 와서 현장감독들을 독려하곤 했다. 1934년 4월 길에서 문일평을 만났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한 집에 하숙하였고, 함께 하숙집 주인의 딸을 연모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문일평의 손을 잡고 "어찌하여 세상 일이 여기에 이르렀소,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끝내 보기 어려운 것이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문일평 등에게도 따로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안창호 등에게도 자금을 보냈다. 1934년 동생 김연수와 함께 해동은행의 대주주였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일장기 말소 사건과 교육활동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통치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미술품과 작품의 외국 반출을 막아야 된다며 거금을 치르고서라도 미술품, 서예 작품을 매입해들였고, 전형필, 송진우, 장택상 등도 그의 견해애 동조하여 거액을 들여서라도 미술품 입찰에 가서 그림, 서화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 보고 귀국했다. 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 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 1930년대 후반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쟁 전후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은 모면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김선기 등이 김성수를 찾아갔더니 그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며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며 이극로의 안부를 걱정했다. 잡혀간 이극로는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책임자로 있던 김성수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 술 한 잔 사겠다는 이유로 김성수를 술집 청향원으로 불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는 이극로의 자백을 들려주며 추궁하였는데 김성수는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했고 일본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 직전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국내 각지를 순찰하던 그는 경기도 전곡(全谷)의 농장을 거쳐서 경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친일 행적 논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통치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그러나 김성수의 성명으로 발표된 것이 자의에 의한 발표인지, 단순 명의 도용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 1993년 7월 8일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인물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김성수를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 해방 이후 광복과 군정기 한민당 창당 조직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10월초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미 군정을 세우자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한 뒤,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반탁독립투쟁위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였다. 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6년 2월 민주의원이 창립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기금을 냈다. 46년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지명되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위 반대 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 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1947년 1월 18일 김구,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성수는 김구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광복 초기 정치활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 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끝내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 1947년 우익정당의 통합 논의에서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1947년 12월 한국독립당 김석황계열에 의한 장덕수의 암살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조소앙 등은 방북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 암살 미수와 김구와의 결별 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강점기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 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났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김규식이 일방적으로 김구가 송진우도 암살하고 김성수도 암살하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영어 못하는 점을 악용해서 보고 했으나, 김구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그는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한민당측은 김성수 암살 기도의 실패 이후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총리 인준 부결과 야당화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 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월 29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김성수는 한민당 당원으로 민족청년단의 간부 훈련을 받은 조영규(曺泳珪)를 통해 방문 연락을 제의했고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7월 29일 저녁 만찬에서 김성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각의 각료배석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내각 책임제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승만을 찾아 내각 책임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 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부통령 취임 이후 정치 활동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1948년 8월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농지개혁 조항인 헌법 제86조가 대규모의 농토를 갖고 있던 인촌의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의 호남 지역에 소유한 농지가 무려 3,247 정보로 최대의 지주여서 농지개혁법 제86조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 당시 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 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 제2대 부통령 민국당 조직과 전란 1949년까지 그는 한국민주당을 이끌어 오다가 2월 10일 한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제2공화국 집권여당 민주당의 전신)을 창당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이었다. 그해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다. 8월 20일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자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였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피난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쟁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9.28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에 친 자식처럼 보살피던 이인수를 잃고 고통스러워했다. 이인수는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중앙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쳤고 고려대 교수로 유능한 교육자였는데, 6.25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밀려들어와서 강압적으로 반미 선전에 동원하여 마지못해 가담한 이력을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인촌은 이인수를 구명하려고 이승만을 찾아갔는데 얼른 재빨리 처형한 북한 앞잡이 신성모 국방 장관이 늦었다고 하여 항의를 하기도 했다. 제2대 부통령 5.10 총선을 적극 동조했는데,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의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민족이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하여 여러번 출마를 사양하였다. 5월 17일 국회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65표, 이갑성은 53표, 함태영은 17표로 과반수가 넘지 못하여 결선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김성수 78표, 이갑성 75표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갑성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공화구락부가 민국당에 합세하여 민국당의 부통령후보였던 그를 밀어준 결과였다. 5월 17일 제2대 부통령(副統領)에 취임하였다. 김성수는 처음에 부통령직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통령 사퇴 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를 혐오하였다. 자신을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한민당, 민국당원들에게도 자제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 사건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여 그는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내용을 준비하여 연설을 하려 하였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다. 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 8월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자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했다. 이때 조봉암이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 김성수는 김창숙·이동하·신익희·장면 등 8명이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성명을 낼 때 참여하였다. 1953년초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친구인 최두선의 회갑연에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문하였다. 야당 결성 운동 1954년부터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년의 김성수는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중풍과 여러 질병으로 김성수는 신당 창당 활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성수는 병상에서 혁신계의 조봉암을 신당 운동에 참가시키는 민주세력의 대동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기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60명과 기타 자유당 탈당파 장면 등이 호헌동지회를 구성할 때 김성수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하는 서상일, 박기출, 장택상과 반대하는 장면, 김준연, 김도연, 조병옥 등으로 나뉘었을 때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논쟁이 벌어졌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사망 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 그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초 병세에 호전을 보이던 그는 보행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었다. 치료 끝에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2월 15일 밤 11시경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 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던 그는 2월 18일 오전 11시경에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혼수상태에서 의사의 지시로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전 11시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라 하였다 허정은 김성수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조국이 그를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꼭 있어야 할 인물인 그가 이 나라를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원망과 질책이 어린 슬픔이요 아쉬움이었다. 65세라는 원숙한 나이를 생각할 때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룩했을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133번지 자택에서 심근염(心筋炎) 등이 악화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김성수의 나이 만 65세였다. 곧 범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례위원으로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변영만,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다.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치러졌다. 사후 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소와 고려대 경내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91년 6월 29일 각계 인사 840여 명이 모여 '인촌선생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은 발간되었고,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에서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기타 이력 1914년 귀국 직후 고향과 경성을 오가며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최두선, 안재홍 등과 교류하며 정치담론을 토론하였다. 1917년 3월 30일~1918년 3월 중앙중학교 교장 1924년 양어머니 전주 이씨 사망 1926년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논문 필화사건으로 서무부장 김철중(金鐵中)과 함께 총독부 경무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하였다. 1926년 6월 6.10 만세운동 직후 송진우와 함께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려다가 실패했다. 1928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직 사퇴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 192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범태평양회의에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9년 39세에 늑막염으로 한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1930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모략이라 생각, 중국 영사관에 5천원의 위문금을 보냈다. 광복 후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친인선린'(親仁善隣)이라는 글자가 각자된 은패(銀牌)를 선물로 받았다. 193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네숀의 주필이 보내온 축사를 게재하였다가 총독부에서 이것을 트집잡아 5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를 정간시켰다. 1930년~1931년 출국, 세계 일주를 다녀왔다. 1931년 9월 1일 중앙고등보통학교장(~1932년 5월 9일) 1932년 3월 26일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동학교 주무이사에 취임. 1932년 6월 4일 제10대 보성전문학교장(~1935년 5월) 1932년 7월 대전 감옥에 수감된 여운형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3년 도산 안창호가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면담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김성수는 그 치료비를 부담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신사불참배사건을 옹호하였다가 총독부 경찰에 소환되었다. 1935년 3월 15일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초대 관장에 취임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기자가 손기정 일장기 말소 게재, 김성수는 두 번째 일장기 말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송진우, 장덕수 등이 총독부 기자실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정간처분을 취소시키지는 못하였다. 1936년 일제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이사직에서 사임. 1937년 5월 26일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1946년)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 사퇴 1942년 창씨개명 요구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태평양 전쟁 권고 협조가 들어왔으나 그는 병으로 거절하고 피신해 다녔다. 1950년 7월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다. 1952년 이화여전 이사에서 사퇴 평가와 비판 평가 일제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평하였다. 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는 것이다. 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김성수론>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도 평가하였다.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 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 ·사업을 자신속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김성곤은 인촌을 본받아 자신도 금성방직,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고, 고향의 현풍학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한다. 비판 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 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 상훈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018년 박탈 저서 《인촌문집》(열락당, 1999) 사상과 신념 실력 양성론 김성수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부르짖었다.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은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는 교육, 물산 장려, 언론 육성을 제시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문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일본이나 주변국보다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길러내 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육성을 위해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사립 전문학교 설립을 여러 번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스스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데 있다. 이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산 장려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원료와 자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생산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장려하여 국가의 산업자본과 경제력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면과 마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 면직물과 마직물을 생산하는 회사 설립을 추진하여 경성직뉴를 인수한 뒤, 경성방직회사로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국산품을 애용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올바른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보의 전달과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었다. 종교적 측면 임종 직전에 장면의 권고로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그는 별다른 종교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가훈을 이어 유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나 유학 이후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시적으로 전도 권고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세례명: 바오로) 각하 명칭 삭제 그는 제2대 부통령 재임 중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각하 라는 호칭은 다시 부활했고, 1960년 제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각하 라는 경칭은 5.16 군사 정변 이후 다시 부활, 198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공약, 당선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할 때까지 항상 각하 라는 경칭이 계속 통용되었다. 소탈함 그는 억지로 꾸밈이 없었고, 부유함을 내세워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겉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였다. 화려한 것 보다는 내실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외양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속이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 허정은 후일 회고담에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고 평하였다. 신념 공선사후(公先私後) 또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주장하였다. 개인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였다. 또한 신의일관(信義一貫)도 그의 좌우명이었다. 또한 쓸 곳에 쓴다, 돈은 잃어도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좌우명도 있었다. 성격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다. 또한 그는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억지로 겉치레를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우, 장덕수가 연이어 암살당하면서 정계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 조건을 제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였다. 허정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사람의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호남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검소하였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뒤에서 돕기를 좋아했다. 허정은 이것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과 이타심(利他心)이 없으면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도 어려운 인촌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주저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뒤에 숨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인촌은 이해로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도를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를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허정은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했다. 술이 건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던 인촌 김성수 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사심이 없었는데, 허정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는 실제로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독립운동과 보성전문학교, 중앙학교, 동아일보 등에 대부분 투자했다. 일화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 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 부통령 재임 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며 응대하였다. 조선 총독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철승의 징병 거부 면담을 하면서 이철승의 스승을 물어보며 "김성수 군은 물샐틈 없는 인물이지.." 하며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익 정당 통합 운동 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 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 다. 김구의 김성수 암살 기도 사건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동상 수난 사태 1989년 3월 부정입학과 학내 등록금 인상 문제로 본관을 점거한 1천명의 고대생들이 인촌 김성수 동상을 검은 천으로 싸서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 며칠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재단측의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1989년 4월 고려대학교 경내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에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이 올라가 하얗고 굵은 광목 끈으로 칭칭 동여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상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계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었고, 교내 운동권을 탄압하는 재단과의 물리적인 갈등의 성격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성수의 동상은 친일파라 하여 민족고대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이 쓰러뜨리려 시도했으나 재단과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선배들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때마다 재단측이 창립자의 동상을 훼손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여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89년 4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교사 내외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김성수의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졸업생이 나타나 김성수를 변호했고, 일부 학생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상 수난 사태는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해에 고대 사상 처음으로 <인촌동상철거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2005년 3월 9일에는 한승조 사태와 관련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한승조 교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성수의 동상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다. 유병문 총학생회장은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동상이 학교 정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립 1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대로 고대의 친일 문제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김요협(金堯莢, 호는 낙재, 1833년~1909년, 조선 고종때 선공감 감역 역임) 할머니: 증 정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1831년~1911년) 생부: 김경중(1863년~1945년 4월 27일) - 통정대부 비서원승 역임 외할아버지: 고제방(高濟邦) 생모: 장흥 고씨 양부: 김기중(金祺中, 1859년~1933년) - 가선대부 동복군수 역임 양모: 전주 이씨(全州李氏) 형: 요절 형: 요절 형: 요절 남동생: 김연수(金秊洙, 1896년 8월 25일~1979년 12월 4일) - 삼양그룹 창업자 제수: 박하진 누나: 김수남(金壽男, 1885년~1915년 8월 21일) 매형: 정익원(鄭翼源, 1884년~?) 여동생: 김영수(金榮洙, 1900년 4월 9일~1984년 10월 15일) 매제: 김오진(金吾鎭, 1902년 7월 9일~1922년 8월 13일) 여동생: 김점효(金点効, 1901년 6월 1일~1995년 6월 26일) 매제: 김용완(金容完, 1904년 4월 9일~1996년 1월 17일), 경방 일가 서모: 공주김씨 김영희(金永熙, 1875년~1963년) 서제: 김재수(金在洙, 1899년~1954년)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년~1943년, 호는 춘강(春崗), 첫 부인 고광석의 친정아버지) 처: 고광석(高光錫, 1886년~1919년) 아들: 김상만(金相万, 1910년 1월 19일~1994년 1월 26일, 전 동아일보 회장·명예회장) 손자: 김병관(金炳琯, 1934년 7월 24일~2008년 2월 25일, 전 동아일보 회장) 둘째 처남: 고광준 장인: 이봉섭(李鳳涉, 본관은 용인, 둘째 부인 이아주의 친정아버지) 처: 이아주(李娥珠, 1899년 음력 7월 19일~1968년 9월 11일) 아들: 김남(金楠),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 아들: 김상석(金相晳) 며느리: 윤성선(尹成善, 1924년 8월 11일~,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내무장관 윤치영과 정치인 이은혜의 딸 손자: 김병기(金炳基, 교육자·고려대학교 교수) 아들: 김상기(金相琪, 1918년 4월 14일~2011년 7월 3일) 아들: 김상흠(金相欽, 1919년 10월 27일~1991년 11월 2일, 국회의원) 딸: 김상현(金相玹, 1926년 9월~) 손자: 이상교(1961년 3월~) 아들: 김상종(金相淙, 1929년 1월~, 우진토건 회장) 셋째 딸 셋째 사위: 이병린(李秉麟), 이활(李活)의 장남 사돈: 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1945년 12월 30일) 사돈: 이한동, 전 국무총리, 증손주며느리 이정원(李晶媛)의 친정아버지 기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고창의 어른, 전북의 어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 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 하였다. 김성수를 연기한 배우들 정욱 - 1981년(제1공화국), MBC 드라마 김동훈 - 1982년(그 여름의 이틀), KBS1 드라마 신구 - 1982년(종로부루스), 영화 맹호림 - 1985년(새벽), KBS1 드라마 허기호 - 2002년(야인시대), SBS 드라마 관련 항목 김인후 김요협 김경중 김기중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물산장려운동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기성회 보성전문학교 김병로 송진우 경방 김연수 장덕수 백관수 백남훈 안재홍 원세훈 국민대회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민주당 김구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실력 양성론 외교 독립론 이아주 장면 신익희 조봉암 김상만 김상협 김준연 김도연 유진오 이순탁 이활 조만식 김활란 정인보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반탁국민회의 박순천 조병옥 안창호 윤보선 윤치영 윤치소 윤치호 임영신 장택상 주요한 함태영 이시영 김규식 이광수 정일형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중앙학회 최두선 현상윤 흥사단 김용완 간디이즘 한국전쟁 한국독립당 제1공화국 마하트마 간디 김도연 이윤영 이범석 김병기 김대중 김영삼 박헌영 여운홍 조소앙 주요섭 한근조 한기악 한만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 관련 서적 동아일보사 최시중, 《인촌 김성수:겨레의 길잡이 시대의 선각자》(동아일보사, 1986)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88)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신일철 외, 《평전 인촌 김성수》(신일철 외 지음, 동아일보사, 1991) 동아일보사 편집부, 《한국의 선택(2천년대를향한)》(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91) 김성주,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 (동아일보사, 1991) 백남주, 高敞의 빛: 仁村金性洙先生, 芹村白寬洙先生銅像除幕 (동아, 1983)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평전》(인촌기념회, 동아일보사, 1991) 인촌 기념 관련 단체 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 인촌기념회, 《인촌기념회사 1956-1991》(인촌기념회, 1992)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 인촌을 생각한다》(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2005) 고려대학교 및 그 외 대학 인촌기념회, 《인촌기념강좌》(고려대학교, 2002) 유진오, 양호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7) 홍일식, 《고려대학의사람들》 1~3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6) 이희승, 《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한승옥, 《이광수(문학의 이해와감상31)》(한승옥, 건국대학교출판부, 2008) 기타 김성수, 《인촌선생문집》(열락당, 1999) 김중순,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김중순, 류석춘 역, 일조각, 1998)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생각의나무, 2002) 황명수, 《한국기업경영의 역사적 성격》(황명수, 신양사, 1993) 배병휴, 《한국의 기업인은 누구인가》(배병휴, 좋은이웃집, 2000) 박태균, 《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43~44쪽. 임종국,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민족문제연구소 편, 2007)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김지하, 《흰 그늘의 길 1》(김지하 회고록) (김지하, 학고재, 200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류일석, 《미답의 세계》(류일석, 시사랑음악사랑, 2008) 정운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정운현, 삼인, 2008) 주익종, 《대군의 척후: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김연수》(푸른역사, 2008) 이현희,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연구-나남신서(나남신서)(1429)》(이현희, 나남 펴냄, 2009) 서울신문사 사업부, 재벌가 맥(상) (서울신문사 사업부, 무한 펴냄, 2006)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이영훈, 에디터, 2006) 김교식, 한국의 인물:김성수 (계성출판사, 1984)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풀빛, 1982) 송남헌, 해방30년사 1(한국사료연구소, 1976)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카터 J. 에커트, 《제국의 후예: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 식민지 기원 1876-1945》(주익종 역, 푸른역사, 2008) Choong Soon Kim, Sŏng-su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SUNY Press, 1998) 관련 문화재 인촌선생 생가 -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 부안 김상만 가옥 - 국가민속문화재 제150호 신문 기사 역대 선거 결과 주해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1891년 출생 1955년 사망 울산 김씨 고창군 출신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동아일보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대학 설립자 일제강점기의 기업인 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 대한민국의 부통령 반공주의자 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호헌동지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한국민주당 당원 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 개신교를 이탈한 사람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와세다 대학 동문 암살 미수 생존자 병사한 사람 19세기 한국 사람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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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근 경색
심근 경색(心筋梗塞, , ) 또는 대중적으로 심장 마비(心臟痲痺, )는 허혈성 심질환의 하나이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하나, 이는 심근 경색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원인 심장 근육은 관상동맥이라 부르는 3가닥의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일생 동안 혈액을 전신으로 펌프질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따라서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심장 근육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상동맥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가장 안쪽 층을 내피세포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피세포가 건강한 경우에는 혈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흡연 등에 의해서 내피세포가 손상을 받게 되어 죽상경화증이 진행되고, 관상동맥 안을 흐르던 혈액 내의 혈소판이 활성화되면서 급성으로 혈전이 잘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혈전이 혈관의 70% 이상을 막아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파괴(괴사)되는 경우가 심근경색증이고, 괴사되지는 않지만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것이 협심증이다. 이 같은 상황을 잘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들은 다음과 같다. 고령 흡연 음주 고혈압 : 혈압 ≥ 140/90mmHg 이거나 항고혈압제를 복용하고 있는 경우 당뇨병 가족력 : 부모형제 중 남자 55세 이하, 여자 65세 이하의 연령에서 허혈성 심질환을 앓은 경우 그 외 비만, 운동부족 등 증상 환자는 대부분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대개 '가슴을 쥐어짠다', '가슴이 쎄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하며 주로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없이도 '명치가 아프다' 또는 '턱끝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흉통 없이 구역, 구토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화가 안 된다', '속이 쓰리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흉통은 호흡곤란과 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왼쪽 어깨 또는 왼쪽 팔의 안쪽으로 통증이 퍼지는(방사) 경우도 있다. 흉통은 대개 30분 이상 지속되며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혀 밑에 투여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흉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급성으로 심근경색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치료 심근경색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태로 구별할 수 있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 관동맥이 100% 막혀서 응급으로 혈관 재개통이 필요한 심근경색증 비(非)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 관동맥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심근경색증 심근경색증의 치료는 크게 막힌 혈관을 넓히는 관혈적 치료와 이후 약물치료로 나뉜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넓히는 시술 또는 약물이 요구된다. 비 ST절 상승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 쇼크가 동반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약물 치료 후 안정화된 상태에서 시술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대형 병원에서 응급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 혈전용해술을 시행하여 경과 및 예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은 노동맥 또는 넙다리동맥을 통하여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여 막힌 혈관을 찾아낸 후, 혈관 안으로 도관을 삽입하여 풍선으로 넓히고 스텐트라는 철망을 삽입하여 혈관을 수리하는 시술이다.심근경색증에 의한 합병증이 없다면 대부분 병원에서 1주일 이내에 퇴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술 직후 흔히 재관류에 의해 심장 근육에 2단계 충격이 오기 때문에 시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경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을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다혈관 질환일 경우에는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향후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실의 변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스텐트를 삽입한 경우에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겨서 혈관이 다시 막히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약물 치료 목적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스텐트 혈전증의 치사율이 5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혈전 억제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포함하여 심장 보호 효과가 부가적으로 있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며, 고지혈증 약물 그리고 당뇨가 있는 경우에는 경구 혈당 강하제, 인슐린을 처방받게 된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혈관 확장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심근경색증 치료 중에 죽은 심장 근육을 획기적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의 연구팀들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 근육을 재생시키는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현재도 대규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개선된 프로토콜로 임상시험에 환자를 등록하고 있어서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에서 시행하는 매직셀(MAGIC-CELL)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골수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이토카인을 이용해서 골수 줄기세포를 말초혈액으로 동원한 후 이를 말초혈액에서 쉽게 채취하는 방법으로서, 환자 부담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심기능 호전 효과가 뚜렷하여, 2004년도 Lancet, 2005년도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2006년도 Circulation, 2007년도 American Heart Journal, 2008년도 Heart와 같이 심혈관계의 세계 최고 권위지에 매직셀 프로그램의 장기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점점 그 추이가 늘고있다. 개의 심근경색 개도 물론 심근경색에 걸릴 수도 있다. 강아지 심근 경색의 원인은 가족력, 면역력, 스트레스, 과로, 운동 후유증, 지속되는 분리불안증 등이다. 같이 보기 심정지 심장학 심장대사(cardio metabolism) 대사 증후군(메터볼릭 증후군) 인슐린 저항성(IR) 각주 외부 링크 사인별 죽음 심장혈관 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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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는 대한민국 동남부 내륙에 있는 광역시이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청송군, 군위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한다. 팔공산과 비슬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편에 속하는 도시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면서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달성군,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 고산면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1일에 달성군을 편입하였다.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 1가 이고, 별관은 산격동의 옛 경상북도청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7구 1군이다. 상징 시조 독수리(시조): 대구의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자적 시민정신을 나타낸다. 시목 전나무(시목): 많은 나무들 가운데 전나무는 대구 시민의 강직성과 영원성, 그리고 곧게 뻗어가는 기상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시화 목련(시화): 목련은 순박하고 순결하며 희생정신의 시민기질을 나타낸다. 로고 대구시의 로고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친환경적인 도시를 표현한다. 브랜드 슬로건 색채가 “다양한, 다채로움”을 의미하여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제공하여 다양한 모습의 발전적인 대구를 나타낸다. 역사 선사시대 대구 달서구 월성동에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 석기가 포함된 유적의 발굴로 미루어 대략 2만~1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의 옛 이름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 이름인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며, 이 가운데 물론 달구벌과 대구(大丘)가 가장 유명하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신라의 계림사상에서 기원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하였다는 연구자료가 있다. 그래서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선사시대 달구화(達句火), 달구벌(達句伐), 달불(達弗), 달성(達城)으로 성읍이 형성되었다. 청동기시대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신라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61년(신라 첨해이사금 15년) 달벌성이 축조되었다. (244년 축성 시작) 5세기말 - 6세기초 달구벌을 달구화현(達句火縣, 達弗城)이라 칭하였다. 689년(신라 신문왕 9년)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위화군(喟火郡)을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達句伐)이라 칭하던 것을 대구현으로 개칭하였다. 양주 관하에 두었다.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사이의 공산 전투가 현재의 팔공산 일대에서 있었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년) 수창군을 수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년) 수성군·장산군·해안현(解顔縣)과 대구현·화원현(花園縣)·팔리현(八里縣)·하빈현(河濱縣)으로 행정 계통이 양분되었다. 대구현 등은 성주군 관하에 두었다. 1143년(고려 인종 21년) 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하여 하빈현, 화원현을 영속하였다. 1203년(고려 신종 6년) 무신정권기에 부인사 승려의 반무신란이 있었다. 1232년(고려 고종 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팔공산 부인사의 대장경을 소실하였다. 1255년(고려 고종 42년) 공산성에서 항몽 투쟁하였다. 조선 조선 시대에는 대구도호부의 영역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서구, 동구(안심동 제외), 북구(옛 칠곡동 지역 제외), 수성구(고산동 제외), 달서구, 달성군(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제외),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1394년(조선 태조 3년) 대구현이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을 영속하였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5월 대구현·수성현·해안현·하빈현 이상 4개 현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 1466년(조선 세조 12년) 대구군을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590년(조선 선조 23년) 대구읍성이 토성으로 축성되었다.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중 대구읍성은 파괴되었다. 1601년(조선 선조 34년) 경상도 감영을 대구부로 이전, 설치하였다. 화원현·경산현·하양현을 편입하였다. 1607년(조선 선조 40년) 경산현·하양현은 대구도호부 관할에서 분리되었다. 1684년(조선 숙종 10년) 풍각현의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이 대구도호부에 편입되었다. 1658년(조선 효종 9년) 약령시가 경상감영 안의 객사 주변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하였다. 1736년(조선 영조 12년) 대구읍성이 석성으로 4월에 축조에 들어가 이듬해 6월 완공하고, 11월 선화당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1750년(조선 영조 26년) 유생 이양채가 '구(丘)'자가 대성 공자의 휘자에 저촉되므로 피해야 한다(피휘)며,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개칭할 것을 상소하였다. 정조·헌종 때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로 혼용하다가 철종 이후에는 대구(大邱)만 사용하였다. 1895년 6월 23일(조선 고종 32년 음력 윤5월 1일) 8도(道)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대구도호부가 대구부 대구군으로 강등되었다.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13도제가 실시되어, 경상북도 대구군이 되었다. 대한제국 1899년(광무 3년) 2월 대구제일교회가 대구 최초 서양식 병원 제중원(동산병원의 전신)을 설립했다. 1899년(광무 3년) 7월 대구 최초 근대 중등교육기관 달성학교(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승, 1950년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로 분리, 1970년 경북중학교 폐교, 현 경운중학교 계승)가 설립되었다. 1902년(광무 6년) 애덤스 선교사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가 여성교육기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1905년(광무 9년) 달성공원이 조성되었다. 1906년(광무 10년) 9월 24일 대구군 소속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은 청도군으로 이속하였다. 1906년(광무 10년) 10월 대구읍성 성벽이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에 의해 황제의 윤허없이 철거되었다. 또한, 경상감영의 선화당 정남쪽에 위치했던 포정문(布政門)의 문루인 관풍루를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1906년(광무 10년) 일제 통감부 이사청이 설치되었다. 1907년(광무 11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1907년(광무 11년) 대구 첫 영화관 금좌(錦座)가 현재 태평로2가에 문을 열어 12년 동안 번창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애덤스 선교사의 부인 부르엔(Marda Bruen)에 의해 여자중등학교로 신명여학교가 문을 열였다. 1908년(융희 2년) 경상감영의 객사와 주요 건물이 파괴되었고, 약령시를 현재 남성로로 이전하였다. 1909년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은 이른바 십자도로(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불렀다.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1910년 10월 1일 대구군을 대구부로 개칭하였다. 1911년 11월 14일 일본 제국은 동상면과 서상면을 통합해 대구면을 설치하였다. 1913년 대구역이 건립되었다. 322호에 전기가 들어왔다. 1914년 4월 1일 대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대구면만 대구부로 남기고, 대구면을 제외한 대구부의 나머지 면과 현풍군이 달성군으로 개편되었다. 1915년 1월 15일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 인사들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7년 4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과 봉덕동의 각일부를 대구부에 편입해 대봉정을 신설하였다. 1919년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7월 1일 시내버스가 운행되었다. 대구역을 기점으로 시내 각 방향으로 물론이고 팔달교 및 동촌까지 운행하였다. 1923년 서문시장이 현재의 자리로 이동하였다. 1923년 대구자혜의원은 경북도립 대구의원이 되었다. 이것이 경북대병원의 전신이다.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었다. 1932년 대구 최초의 백화점 이비시야 백화점이 등장하였다. 현재의 동성로 성내1동 LG패션자리이다. 1938년 10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달서면 일부(감삼동 제외), 성북면 일부(동변동·서변동·연경동 제외)을 대구부에 편입하였다. 1938년 11월 2일 옛 수성면, 옛 달서면, 옛 성북면 지역에 대구부 동부출장소·서부출장소·북부출장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3출장소) 1941년 대구 약령시가 폐쇄되었다. 1942년 대구공립상업고등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미군정기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9월 29일 대구역에서 열차끼리 충돌하여 73명이 사망하고 120여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났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10월인민항쟁)이 일어났다. 1947년 4월 1일 일본식 동명이 한국식 동명으로 개정되었다.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95%;" | colspan=2 | 동의명칭변경에관한규정 |- ! width="50%"| 구 행정구역 (법정동) !! 신 행정구역 |- | 대구부 명치정1·2정목, 본정1·2정목, 서성정1·2정목, 경정1·2정목, 원정1·2정목, 금정1·2정목, 동성정1~3정목 || 대구부 계산동1·2가, 서문로1·2가, 서성로1·2가·종로1·2가·북성로1·2가·태평로2·3가·동성로1~3가 |- | 대구부 팔운정, 수정(壽), 시장정, 북내정, 횡정, 시장북통, 서내정, 남성정, 수정(竪), 달성정, 팔중원정, 덕산정, 대화정, 동천대전정, 서천대전정, 동운정, 행정, 궁정, 삼립정, 남용강정, 북용강정, 남정, 동본정, 남욱정, 북욱정, 전정(田), 전정(前), 영정, 봉산정, 촌상정, 칠성정, 상정, 동문정, 상서정, 하서정, 신정, 남산정, 대봉정 || 대구부 수창동, 수동, 동산동, 북내동, 서야동, 시장북로, 서내동, 남성로, 인교동, 달성동, 도원동, 덕산동, 대안동, 동일동, 장관동, 동인동, 태평로1가, 사일동, 삼덕동, 공평동, 완전동, 남일동, 교동, 문화동, 상덕동, 화전동, 전동, 용덕동, 봉산동, 향촌동, 칠성동, 포정동, 동문동, 상서동, 하서동, 대신동, 남산동, 대봉동 |} 대한민국 1949년 8월 15일 대구부에서 대구시로 개칭하였다. 1950년 7월 16일 6.25전쟁으로 인해 8월 17일까지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본부 주한 미8군 사령부가 이전 설치되었다. 1951년 6월 9일 대구시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4출장소) 1952년 1월 16일 동인동, 삼덕동, 칠성동이 분동하였다. (87법정동) 1953년 4월 1일 대구시 중부출장소·종로출장소를 설치하였다. (6출장소) 1958년 1월 1일 달성군 동촌면, 월배면, 성서면, 가창면, 공산면을 편입하였다. 동촌출장소 등을 설치하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는 4.19의거로 연결되었다. 1963년 1월 1일 대구시 공산출장소(서변동·동변동 제외)가 달성군 공산면으로, 가창출장소(파동 제외)가 가창면으로, 성서출장소가 성서면으로, 월배출장소가 월배면으로 환원되었다.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부출장소 등이 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로 승격하였다. ※ 이후의 행정구역 변경에 대한 내용은 각 구별 문서로 대신한다. 1965년 2월 1일 동 행정구역 개편으로 행정동의 수가 89개로 줄었다. (5구 89행정동 106법정동) 1976년 8월 1일 동구 동촌출장소가 대구시 동촌출장소로 승격하였다. 1980년 4월 1일 수성구가 동구에서 분리·신설되었고, 동촌출장소를 폐지하였다. (6구) 1981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및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 일원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가 설치되었다. 1983년 11월 15일 어린이회관을 개관하였다. 1984년 6월 27일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84년 7월 중순 대구 인구 200만명 돌파 1988년 1월 1일 서구 및 남구의 일부를 관할로 달서구가 설치되었다. (7구) 1991년 3월 26일 성서 초등학생 5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91년 7월 8일 지방자치제도의 부활로 대구직할시의회가 개원하였다. 1991년 12월 7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기공 1992년 11월 27일 동화사 남북통일발원 약사여래 석조대불이 완공되었다. 1995년 1월 1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대구광역시로 개칭하였다.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였다. 시역은 885.6 km2로 확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7구 1군)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 101명이 사망하였다. 1996년 9월 1일 달성군 논공면이 논공읍으로 승격 1996년 12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기공 1996년 12월 대구 인구 250만명 돌파 1997년 11월 1일 달성군 다사면이 다사읍으로 승격 1997년 11월 26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진천~중앙로) 개통 - 대구의 지하철 시대 개막 1998년 5월 2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중앙로~안심)이 완전 개통되었다. 2002년 5월 10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진천)이 연장 개통되었다. 2002년 6월 10일 한일월드컵 미국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 2002년 6월 29일 한일월드컵 터키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 (한일월드컵 3, 4위 전)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발생으로 192명의 사망자와 14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2003년 8월 21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개막하여, 8월 31일 폐막하였다. 2005년 10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문양~사월)이 개통되었다. 2008년 4월 25일 동구 등 6개 지구의 대구광역시, 구미시 등 5개 지구의 경상북도에 경제자유구역을 지정받았다. 2009년 7월 24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기공 2011년 8월 27일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개막하여, 9월 4일 폐막하였다. 이는 1991년 일본 도쿄, 2007년 일본 오사카에 이어 아시아 국가로서는 2번째로 개최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일본, 독일에 이어 FIFA 월드컵, 하계 올림픽,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국제 스포츠 3대 이벤트를 모두 개최하는 7번째 국가가 됨으로써 세계적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12년 9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이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영남대학교까지의 연장구간이 개통하였다. (사월 ~ 영남대) 2012년 10월 11일부터 10월 17일까지 제93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2012년 11월 6일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이 종료되었다. 2013년 10월 13일 ~ 10월 17일 세계에너지총회가 열렸다. 2015년 4월 12일 ~ 4월 17일 제7차 세계 물 포럼이 열렸다. 2015년 4월 23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칠곡경대병원~용지)이 개통되었다. 2016년 9월 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설화명곡)이 연장 개통되었다. 2018년 3월 1일 : 유가면이 유가읍으로 승격 2018년 11월 1일 달성군 옥포면, 현풍면이 옥포읍, 현풍읍으로 승격 2023년 1월 1일 군위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였다. (7구 2군) 2025년 : 시청이전예정{중구 공평로88(동인동) → 달서구 당산로176(두류3동)} 지리 위치 대구광역시는 한반도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구는 영남 지방 내륙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군위군, 칠곡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계를 접한다. 지형 대구는 높고 규모가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북쪽에는 팔공산(1,193m)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비슬산(1,084m)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금호강과 합쳐진다. 대구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기후 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이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이다. 1942년에 기록한 40도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에 속한다. 이러한 여름 기온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언론, 방송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대구의 기후는 온대하우기후, 또는 온대동계건조기후(Cwa)를 띄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행정 구역 대구광역시는 7개 구와 1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2018년 12월 31일 주민등록 인구는 1,021,266세대 2,489,802명이다. 경북권 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1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구미시, 영천시, 경산시, 군위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의 창녕군이 경북권으로 규정되어 있다. 주거 지구 택지개발사업은 대구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공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주택 시민에게 양질의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도로·수도·전기·통신·도시가스·난방 등 생활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고, 공원·학교·녹지·운동장 등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행정 대구광역시의 일반행정은 대구광역시청이, 유·초·중등교육행정은 대구광역시교육청이 담당한다. 두드리소 두드리소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감이 느껴지면서, 민원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대구광역시의 민원 서비스이다. 두드리소((http://dudeuriso.daegu.go.kr ) 인터넷, 모바일, 콜센터, SNS로 신청한 모든 민원과 제안의 처리과정을 신청방법과 상관없이 한 곳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120달구벌콜센터 120달구벌콜센터는 대구시에 관한 민원이나 궁금한 사항을 상담해주는 콜센터이다. 전화, 문자상담, 온라인상담, 예약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외국어상담(영어, 중국어, 일본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외국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뚜봇 ‘스마트시티 아시태평양 어워드 2018’에서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 된 뚜봇은 자가학습을 통해 자동 답변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공지능 자동상담시스템이다. 24시간 여권, 차량등록, 지역축제, 시정 등 다양한 분야의 민원을 채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미래비전 2030 인구 대구광역시의 연도별 인구 추이 교육 대학교(국공립, 사립) 경북대학교 - 북구, 중구 계명대학교 - 달서구, 남구 대구교육대학교 - 남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 달성군 전문대학(국공립, 사립) 계명문화대학교 - 달서구 대구공업대학교 - 달서구 대구과학대학교 - 북구 대구보건대학교 - 북구 수성대학교- 수성구 영남이공대학교 - 남구 영진전문대학교 - 북구 한국폴리텍Ⅵ대학 대구캠퍼스 - 서구 한국폴리텍대학 섬유패션캠퍼스 - 동구 직업훈련기관 한국폴리텍Ⅵ대학 달성캠퍼스 - 달성군 고등학교 대구국제학교 교육청 대구광역시교육청 남부교육지원청 달성교육지원청 동부교육지원청 서부교육지원청 문화·관광 2020년 4월, 한국관광공사는 야간관광 100선으로 대구의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 ‘아양기찻길’, ‘앞산공원’, ‘수성못’, ‘서문시장 야시장’을 선정하였다. 대구시는 대한민국 관광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선정된 5개 장소를 비롯하여 숨겨진 야간 관광 자원들을 적극 발굴해 육성하기로 했다. 축제 대구광역시 대표 축제에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오페라축제, 치맥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의 축제 목록 문화재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 대구광역시의 무형문화재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대구광역시의 민속문화재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관광코스 대구광역시의 테마별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팔공산 힐링 코스'이 4가지 권역별 관광코스가 있다.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서문시장 → 삼성상회 옛터(이병철 고택) → 대구 근대골목 → 약령시 → 동성로 →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방천시장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 앞산 전망대 케이블카 → 수성못 → 들안길 → 스파밸리 → 힐크레스트 → 대구 미술관 → 대구 스타디움 → 녹동서원/달성한일우호관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 디아크/강정보고령보 → 낙동강 자전거길 → 대구수목원 → 마비정 벽화마을 → 비슬산 암괴류 → 국립 대구과학관 → 도동서원 팔공산 힐링 코스 : 갓바위 - 동화사 - 대구방짜유기 박물관 - 팔공산 벚꽃길 - 대구시민 안전테마파크 시티투어 대구시의 관광자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00년 12월 2일 시작된 시티투어는 각종 문화유적, 관광지, 시정현장 등을 순회하며 대구의 문화와 역사, 관광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체험 프로그램이다. 순환코스 동대구역 →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구암 팜스테이 → 갓바위 → 방짜유기박물관 → 동화사 → 팔공산동화집단시설기구 →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 팔공산온천관광호텔 정기코스 1코스(팔공산권) :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동화사 → 방짜유기박물관 → 신숭겸 장군 유적지 2코스(비슬산권) : 현풍곽씨12정려각 → 도동서원 → 비슬산자연휴양림 →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 → 현풍 석빙고 3코스(화원권) : 월곡역사박물관 → 대구수목원 → 화원동산 → 남평문씨리세거지 → 용연사 4코스(시지·가창권) : 녹동서원 → 힐크레스트(구 허브힐즈) → 대구스타디움 → 대구 스포츠기념관 → 둔산동경주 최씨종가 5코스(다사권) : 환경시설공단 →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 계명한학촌 → 매곡정수장 → 육선사 6코스(도심권) : 약령시한의약문화권 → 달성공원 → 대구향교 → 국립대구박물관 → 구암서원 공원 대구 12경 대구광역시가 선정한 대구 12경으로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 있다. 음식 납작만두, 야끼우동, 중화비빔밥, 석쇠불고기(북성로), 닭똥집튀김(평화시장), 뭉티기, 막창구이, 곱창구이(안지랑) 등이 대구광역시에서 유명한 음식이다. 대구 10미 대구광역시 10미에는 육개장, 막창 구이, 뭉티기(소 생고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가 있다. 교통 대구는 버스와 도시철도가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외부 지역 및 국가와는 철도, 버스, 항공 등으로 연결된다. 도로 경부고속도로가 대구를 관통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 등 7개 고속도로 노선 및 5개 국도 노선이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천대로, 앞산순환로, 신천동로 등 도시고속도로로 확충되어 있다. 분기점 : 금호 분기점, 도동 분기점, 동대구 분기점, 옥포 분기점, 현풍 분기점 나들목 : 남대구 나들목, 동대구 나들목, 북대구 나들목, 서대구 나들목, 성서 나들목, 수성 나들목, 칠곡 나들목, 유천 나들목, 화원옥포 나들목, 달성 나들목, 북현풍 나들목, 현풍 나들목, 팔공산 나들목 버스 시외버스 : 두 개의 고속버스 터미널과 다섯 개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전국 각지로 가는 버스가 운행된다. 버스 등급은 급행•순환•간선•지선•출근 등급이다. 시내버스 : 수입금의 분배는 대구광역시에서 맡아 하고, 버스의 운행은 개별 회사가 맡아 하는 준공영제로 운영된다. 도시 규모에 비해 도시철도망이 부족한 대구의 대중교통에서 시내버스의 역할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버스 운임은 다음과 같다. 일반/좌석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4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250원, 청소년 850원, 어린이 400원이다. 급행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800원, 청소년 1,300원, 어린이 8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650원, 청소년 1,100원, 어린이 650원이다. 교통카드를 이용하여 버스와 도시철도 모두 최초 교통 수단의 하차부터 30분 이내에 다음 교통 수단으로 갈아탈 경우 무료/할인 환승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대구광역시 버스노선 안내 시스템) 도시철도 대구 도시철도 : 도시철도는 대구교통공사가 관리하고 운행한다. 대구광역시 북동~남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과 동서로 관통하는 과 남동~북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모노레일 노선인 이 운행되고 있다. 택시 중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3,3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10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1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소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8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5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경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2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2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2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나드리콜 : 대구시에서 중증장애인, 만65세이상의 사람으로서 대중교통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는 콜택시이다. 기본요금이 1,000원이고 거리당 요금이 책정되며, 시내는 최대 3,300원 시외는 최대 6,600원이 한도이다. 철도 대구역과 동대구역에서 경부선, 경북선, 대구선, 동해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KTX와 SRT는 동대구역과 서대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다. 대구권 광역철도 : 2018년 4월 구미 ~ 경산 구간 공사에 들어가고 2023년에 개통한다. 2, 3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밀양과 김천까지 공사를 할 계획이고 서대구역을 복합환승센터로 건설해 KTX와 SRT가 개통된다. 공항 동구 지저동에 대구국제공항이 있다. 대구국제공항은 제주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등 국내외 도시와 연결되어있다. 대구국제공항의 항공편은 매년 동계항공기간이 끝나면 대폭 늘어난다. 대구공항에서는 국내선 제주․김포 2개 노선이 매주 215편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베이징, 싼야) 24편, 일본(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오키나와, 구마모토, 사가) 177편, 동남아(홍콩, 세부, 방콕, 타이베이, 다낭, 마카오, 하노이) 148편, 대양주(괌) 14편,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14편이 운항되고 있다. (대구국제공항) 경제 2012년 대구의 지역내 총생산(GRDP)은 38조 7,00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4%이다. 2013년 대구광역시의 1인당 개인소득은 16개 시도 중 6번째로 상위권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지역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1인당 개인소득은 1,538만원으로 울산 1,916만원, 서울 1,869만원, 부산 1,618만원, 대전 1,576만원, 제주 1,564만원에 이어 16개 시ㆍ도중 6번째로 높았다. 시ㆍ도 전체 명목 개인소득은 796조원으로 1년 전보다 30조원(3.9%)이 늘었다. 실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경제성장률)도 3.8%로 전국 5위를 나타냈다. 이밖에 대구의 지역 총소득은 52조 6,000억원으로 전국의 3.7%를 차지했으며 지역 내 총생산 대비 지역 총소득 비율은 117.3 수준이었다. 2018년 대구의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는 50조 8,000억원으로 전국의 2.9%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개인소득은 2천60만원으로 증가했다. 산업 농업 대구의 농업은 1995년 달성군과의 도농 통합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2015년 기준 농가호수는 16,571호, 농가인구는 44,542명, 농경지면적은 8.291ha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상업 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미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이름을 떨쳤다. 2017년 기준 대구에는 9개의 백화점과 21개의 대형마트, 7개의 쇼핑센터, 151개소의 등록시장, 1개의 종합유통단지가 있다. 공업 대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을 통해 지속 성장해 왔다. 과거 섬유업체 수가 전채 사업체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였으나. 2017년 대구시 전체 산업단지 내 업체 수는 기계·금속공장이 3,882개소로 섬유공장 1,736개소보다 비중이 크다. 산업 단지 미래 신성장 산업 대구는 미래첨단의료 선도도시, 미래형 자동차 선도도시, ICT․IoT 기반의 스마트시티 조성,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통한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첨단 의료 의료산업 분야는 2018년까지 국책연구기관 15개, 의료기업 130개, 양질의 일자리 창출 4,300개, 의료관광객 유치 25,000명을 목표로 「메디시티 대구」 조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첨단의료복합단지의 글로벌 수준 발전과 의료관광의 확대 등을 통해 대구를 세계적인 메디시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미래형 자동차 미래형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전기상용차 생산공장 건립 투자협약, 대동공업-르노삼성 컨소시엄을 통한 1톤급 전기상용차 개발 및 생산 확정,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단지 지정(국토부),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인프라 구축 등 미래형자동차 선도도시로서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스마트시티 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혁신플랫폼인 ‘대구형 스마트시티’ 조성하기 위하여 ICT·IoT(사물인터넷) 융합기술 경쟁력확보, SW융합 산업육성, ICT융복합스포츠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시는 스마트시티 조성을 위한 인프라 건설과 운영체계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2020년 1월 22일 영국 왕립 표준협회(BSI)로부터 스마트시티국제표준 인증서 ISO 37106 인증을 받았다. 스마트시티국제표준은 2018년 ‘ 국제표준화기구 (ISO)’가 마련한 기준으로, BSI가 비전, 시민중심, 디지털, 개방 및 협력 등 4개 기준에 맞는 도시에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 한국 내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대구가 처음으로 ISO인증을 받았다. 신재생 에너지 대구광역시는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203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보급률 20% 이상, 에너지 소비 15% 절감 목표로 에너지 신사업 Test-bed 구축. 분산전원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지역에너지 관련 산업 육성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생활 코로나 극복 2020년 대구는 코로나19 범유행 시국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철저한 방역과 치료를 통해 코로나19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세계 부부의 날 위원회는 ‘2020 세계 부부의 날 국가 기념행사’에서 대구시민 일동과 대구시 의료진(대구시의사회, 대구시간호사회)에게 ‘2020 올해의 특별 가족상’을 수상하였으며, “대구시민과 의료진 등 모든 구성원들이 선진 시민의식을 발휘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코로나19를 극복해 전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적을 창출했기에 특별 가족상의 취지와 부합한다”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수도관 세척 2020년 6월 11일 대구상수도사업본부는 시민들이 믿고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수돗물을 가정집 수도꼭지까지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해 대구 시내 수도관 전체를 세척할 계획을 발표했다. 언론·통신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전역을 방송권역으로 하는 민영 방송사인 TBC, 공영 방송사인 KBS대구방송총국, 대구문화방송이 주요 방송사이다. 그 밖에 라디오 방송사는 대구교통방송, CBS 대구방송, 대구극동방송, 대구가톨릭평화방송, 대구불교방송, 대구원음방송, 대구국악방송 등이 있다. 케이블 방송사는 CMB 대구방송, HCN 금호방송, TCN 대구방송, 한국케이블TV푸른방송 등이 있다. 주요 신문사로는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대구신문, 대구일보 등이 있다. 스포츠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와 2002년에 창단된 K리그1 대구 FC와 1994년에 창단된 KBL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이 있다. 군사 한강 이남에서는 대전권(대전, 계룡, 논산, 세종)과 함께 주요 국방 도시이기도 하다. 제2작전사령부, 제50보병사단, 제5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육군 부대와 공군 1방공유도탄여단, K2 공군비행장에 공군공중전투사령부, 중앙방공통제소, 공군군수사령부, 제11전투비행단 등과 주한 미군 부대 캠프 워커, 캠프 헨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역대 시장 출신 인물 교류 대구광역시는 다음 도시와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었다. 자매결연도시 자매우호도시 달빛 동맹 ‘달구벌’(대구)과 ‘빛고을’(광주)에서 이름을 딴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를 놓고 지자체 간 갈등이 심해지자 소모적인 경쟁 대신 어느 곳이 선정돼도 연구개발 사업을 공동으로 하기로 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대구-광주 내륙철도사업, 대구에 광주시민의 숲을, 광주에 대구 시민의 숲을 조성하는 등 문화·예술·민간까지 교류·협력이 확산됐다. 두 지역 통기타 뮤지션들의 모임인 ‘달빛통맹’도 있고, 양 지자체가 두 지역 미혼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달빛오작교’ 행사도 매년 열리고 있다. 2020년에는 광주광역시에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병상 부족이 현실화하자 대구가 광주에 병상나눔을 제안하였다. 같이 보기 대구광역시의 마천루 목록 각주 내용주 참조주 외부 링크 대구광역시청 대구광역시의회 대구광역시교육청 대구교통공사 대구지방검찰청 대구지방경찰청 대구지방법원 대구경북연구원 대국광역시 버스정보시스템 대구광역시 공식 블로그 대구통계 대한민국의 특별시와 광역시 대한민국의 옛 임시 수도 1995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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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4%80%EC%83%81%EB%8F%99%EB%A7%A5
관상동맥
관상동맥(冠狀動脈, )은 심장의 근육(심근)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들을 말한다. 심장 동맥이라고도 한다. 심장은 온몸에 피를 보내는 펌프로 인체에서 심장에 의해 피를 공급받지 않는 기관이나 조직은 없으며, 심장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관상동맥은 심장이 필요로 하는 피를 공급하는 동맥과 그 가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상동맥은 대동맥의 기시부에서 좌우 두갈래로 분지하며 심장 전체를 둘러싸는데, 둘러싸는 모양이 관(冠)과 같다 하여 관상동맥이라 불린다. 관상동맥은 대동맥, 오른관상동맥(RCA)과 왼관상동맥(LCA) 총 3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왼관상동맥은 왼앞내림동맥(LAD)과 휘돌이가지(LCx)로 나누어진다. 관상동맥의 동맥경화는 관상동맥질환이라 불리며 협심증과 심근경색의 원인이 된다. 심장해부학 동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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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A0%EC%A0%80%EC%9A%B0%205%ED%98%B8
선저우 5호
선저우 5호 (神舟五号)는 2003년 10월 15일,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된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다. 선저우 5호는 현지 시각 9시(UTC +8) 정각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어, 9시 10분에 궤도로 진입했다. 이 우주선에는 전 전투기 조종사 양리웨이(楊利偉) 중령이 탑승했다. 이 발사로 중국은 소련, 미국에 이어 사람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킨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 발사 장면은 생중계되지는 않았고, 발사 직후 CCTV를 통해 짧게 소개되었다. 우주선은 지구 궤도를 14회 선회한 다음 발사된 지 21시간 만에 귀환했다. 외부 링크 http://space.com/missionlaunches/shenzhou5_launch_031014.html 유인 우주선 선저우 계획 중국국가항천국 중국의 우주 개발 2003년 우주 개발 2003년 10월 2003년 중국 2003년 발사된 우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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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미터
나노미터(, , 단위: nm)는 미터의 십억분의 일에 해당하는 길이의 단위다. 1나노미터는 10-9m다. 역사 나노미터의 과거 명칭은 밀리마이크로미터(millimicrometre), 더 간단히 말하면 밀리마이크론(millimicron)인데 이는 이것이 마이크론(마이크로미터)의 이었기 때문이다. 나노미터 단위의 길이 DNA 1가닥의 지름: 약 2,500 피코미터(pm) 마이크로미터: (1,000,000pm) 옹스트롬 원자의 크기나 분자의 크기를 다루는 단위인 옹스트롬(Å)은 1Å = 약 0.1nm(나노미터)이다. 물(H2O)분자는 약 0.2nm , 염분(NaCl,소금) 분자는 약 3.7nm로 알려져 있다. 한편 염소 원자의 크기는 79 pm(피코미터) 이고 나트륨 원자의 크기는 190 pm이다. 같이 보기 밀리미터 PPM 각주 길이의 단위 크기 정도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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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터
미터(, , , 기호: m)는 길이나 거리의 SI 단위이다. 이 단위는 현재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에 측정 기술이 길이와 단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제안된 것으로, 시간의 경우에는 1013의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다. 유래 및 역사 미터(m)라는 단어는 ‘’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단위’를 뜻하는 ‘’가 그 기원이다. 1790년, 프랑스 정부에서 전 세계적인 단위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터법을 제정할 당시, 거리의 기준을 지구로 삼았다. 이에 따라 지구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10,000km, 이 거리의 4배인 지구 전체 자오선 길이인 40,000km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법이 제정되었다. 참고로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인 10,000km를 십진법상의 표준이 된 이유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리적으로 1m는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1797년 처음 영어에서의 활용이 보고되었다. 초기의 1m의 표준 원기는 금속 물질로 제작했으나,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의 환경에 따른 미세한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1793년: 남북극과 적도 사이의 거리의 1/10,000,000. 1795년: 황동으로 된 임시 미터 원기의 길이. 1799년: 백금으로 된 표준 미터 원기의 길이. 1889년: 단면이 X자이며,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된 국제 미터 원기 원형의 길이. 1960년: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의 2p10과 5d5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 파장의 1650763.73배. 1983년: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 (빛의 속력 참고) 미터에 적용된 SI 접두어 SI 접두어를 갖는 미터는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같이 보기 프랑스원정대의 자오선 측정보고서(French Geodesic Mission) 참고 문헌 A Dictionary of Scientific Units - including dimensionless numbers and scales. 5th Edition 1986. H.G. Jerrard and D.B. McNeill. 관련 문서 SI 단위계 욕토미터(10-24m) 젭토미터(10-21m) 아토미터(10-18m) 펨토미터(10-15m) 피코미터(10-12m) 나노미터(10-9m) 마이크로미터(10-6m) 밀리미터(10-3m) 센티미터(10-2m) 데시미터(10-1m) 데카미터(101m) 헥토미터(102m) 킬로미터(103m) 메가미터(106m) 기가미터(109m) 테라미터(1012m) 페타미터(1015m) 엑사미터(1018m) 제타미터(1021m) 요타미터(1024m) 외부 링크 History of the meter at the U.S.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NIST) History of the meter at the International Bureau of Weights and Measures (BIPM) Timeline of history of the metre at the NIST Bureau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asures - Lengths 길이의 단위 SI 기본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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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 , )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1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으로 시작하여 후작, 공작으로 승작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하였다. 전공은 화학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하였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 번 스오 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소년기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청년기 요시다의 문하생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막부 타도와 존왕양이 운동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영국 유학과 귀국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등 이른바 장주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 되었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인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 정책을 수행하였다. 막부 타도 운동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정치 활동 정계 입문 초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권력 장악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 총리대신 1차 총리 취임과 퇴임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 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다카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 2번째 총리직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 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3번째 총리직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4번째 총리직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외교 활동 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생애 후반 한국 고종 양위 주도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한국 고종 양위 사건의 여파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퇴직과 사망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 사망에 이르는 과정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역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 및 콴청쯔()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 및 (다음 역인)하얼빈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장례식 시신 운구 작업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제국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 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국장 거행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렀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조선의 반응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사후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 《일본 헌법 정의 해제》 (1882년) 가족 관계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는 공작에 올랐다. (증조부) 이토 야에몬() (조부) 이토 스구에몬() (조모) 모리타 미치타네()의 딸 (부) 이토 주조(, 1816년 ~ 1896년) (모) 이토 고토코() - 아키야마 조자에몬()의 딸 (부인) 이토 스미코() (부인) 이토 우메코(, 1848년 ~ 1924년) (양자) 이토 히로쿠니(, 1870년 ~ 1931년) - 친부는 조슈번사 이노우에 미쓰토(, 이노우에 가오루 후작의 형) (양자부) 이토 다마코() - 다카시마 가에몬(, 역술가)의 장녀 (양손) 이토 히로요시(, 공작) (양손부) 이토 후쿠코() - 내각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손녀, 축구 선수 다카하시 도요지의 사촌 (양증손녀) 센게 후미코() - 히로요시의 셋째 딸, 센게 다쓰히코(, 이즈모 국조가())의 부인 (서장남) 이토 분키치(, 남작) - 본디 히로부미의 서자이나 기다 이쿠자부로()의 장남으로 길러졌고 후에 히로부미의 양자로서 호적에 올려졌다. (서장자부) 가쓰라 다로()의 다섯째 딸 (서차남) 이토 신이치(, 1890년 ~ 1980년) - 어머니는 신바시의 게이샤 (장녀) 이토 사다코() - 요절, 어머니는 우메코 (차녀) 스에마쓰 이쿠코() - 어머니는 우메코, 스에마쓰 겐초(, 내무대신)의 부인 (삼녀) 니시 아사코() - 어머니는 히로부미의 하녀(女中, 다마 지역 출신), 니시 겐시로(, 루마니아 공사)의 부인 (외손녀) 후지이 세이코() - 니시 겐시로 부부의 딸, 후지이 게이노스케(, 체코슬로바키아 공사)의 부인 (외증손녀) 다쓰케 미요코() - 후지이 게이노스케 부부의 장녀, 다쓰케 가게이치(, 덴마크 공사)의 부인 (외증손녀) 후지사키 후사코() - 후지이 부부의 차녀, 후지사키 마사토(, 일본 최고재판소 판사)의 부인 (외고손) 후지사키 이치로() - 후지사키 마사토 부부의 아들, 외무심의관 (외증손녀) 쓰루미 쓰다코() - 후지이 부부의 셋째 딸, 쓰루미 기요히코(, 스위스 대사)의 부인 (외증손녀) 마쓰모토 에쓰코() - 후지이 부부의 넷째 딸, 마쓰모토 주로(, 방위청 장관)의 부인 (외고손) 마쓰모토 다케아키(, 1959년 ~ ) - 마쓰모토 주로 부부의 아들, 중의원 4선 의원 (사녀, 서녀) 오타케 사와코() - 스에마쓰 겐초 부부의 양녀로 입적, 오다케 도라오(, 오다케 다케(, 기계공학자)의 아들)의 부인 인간 관계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수양딸이자 제자로 삼았고 역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朴重陽)을 제자로 삼았다. 학력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명예 박사 학위 예일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사상과 신념 개화론자로 전환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여성 교육에 대한 입장 1886년 그는 한참 개항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토는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것은 인식하지 않고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이토는 우연히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86년 여자 교육 장려 회의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887년 이 단체를 한층 발전시켜 정식으로 일본 여성교육 장려 협회를 출범한다. 이후 그는 위원회를 주도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일본 각지에 홍보하고 다닌다. 이후 그의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와 에이치, 이와사키 등이 참가, 도쿄 여자 대학관(도쿄 여자 대학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여성 교육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이토는 일본 여자 대학의 창시자인 진조 나루세()로부터 여대 설립 계획에 협력을 요청을 받자,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 참고 문헌 정일성, 《이토 히로부미: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지식산업사, 2002) 이종각, 《이토 히로부미: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동아일보사, 2010) 윤덕한,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중심, 1999) 일화 이토는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궁들에게 시계, 목걸이 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또 이때 선물한 초콜릿이 한국 최초의 초콜릿이란 설도 있다. 이토를 사살한 대한제국의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평화의 파괴 원흉으로 규정하고, 근거로 총 15개 조를 제시했다. 재판, 신문 조서에서 밝혔던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 관련 작품 다큐멘터리 한국 《역사스페셜 이토 저격 영상을 찾아라》 (2009년10월 24일) - KBS 다시보기 영화 한국 《로스트 메모리즈》 (2002년) - 황영일 《도마 안중근》 (2004년) - 윤주상, 정주환 일본 《바람의 검심: 전설의 최후편》 (2014년) - 오자와 유키요시 드라마 한국 대원군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 이묵원 안중근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 박근형 찬란한 여명 (1995년 - 1996년, KBS1) - 김성원 명성황후 (2001년, KBS) - 윤주상 중국 주향공화 (2003년, CCTV) - 히라타 야스유키 일본 대하드라마 (NHK) 세 자매 (1967년) - 후쿠다 요시유키 료마가 간다 (1968년) - 나카무라 아츠오 화신 (1977년) - 비토 이사오 사자의 시대 (1980년) - 네즈 진파치 봄의 물마루 (1985년) - 이타미 주조 나는 듯이 (1990년) - 오구라 히사히로 료마전 (2010년) - 오노에 히로유키 야에의 벚꽃 (2013년) - 카토 토라노스케 꽃 타오르다 (2015년) - 게키단 히토리 뮤지컬 한국 영웅 (2009년) - 조승룡, 이희정 영웅 (2010년) - 조승룡 영웅 (2011년) - 조승룡, 이희정 영웅 (2012년) - 김도형, 이희정 영웅 (2014년) - 김도형, 이희정 영웅 (2015년) - 김도형, 조승룡 영웅 (2017년) - 김도형, 이정열, 윤승욱 같이 보기 박중양 규장각 - 이토가 규장각에서 빼돌린 상당수의 고서들이 현재까지도 일본 궁내청 서릉부(일본왕실 도서관)에 있다 각주 외부 링크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 일본 근대의 초상(일본 국립 도서관) 일본은행권 1,000엔 일본의 묘소 :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기념자료관 이토 히로부미 가택 역대 일본제국 총리 1841년 출생 1909년 사망 화기에 죽은 사람 이토 공작가 메이지 유신 원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일본의 외무대신 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일본의 암살자 일본의 인물신 (일본 제국) 일본 귀족원 의원 일본의 외교관 일본의 공작 일본의 후작 을미사변 관련자 일본의 백작 효고현지사 이와쿠라 사절단 관련자 청일 전쟁 관련자 시모노세키 전쟁 관련자 일본의 러일 전쟁 관련자 동양척식주식회사 관련자 안중근 제국주의 지폐의 인물 금척대훈장 수훈자 일본의 사법대신 일본의 내무대신 양자 일본의 인물신 (막말) 바스 훈장 적수리 훈장 수훈자 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 스뱌토고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수훈자 산마우리치오이라자로 훈장 수훈자 러시아 제국 백수리 훈장 수훈자 시나가와구의 역사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훈장 수훈자 영국에 거주한 일본인 히카리시의 역사 메이지 시대의 내각총리대신 일본의 원로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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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太極旗)로 흰 바탕의 기 위에 짙은 적색과 남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싼 모양이다. 태극기의 최초 도안자는 대한제국의 박건영이다. 태극기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대한민국의 정식 국기로서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태극기 조선 조선은 현대적인 의미의 국기가 없었으나,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조선 임금의 어기가 있었다. 태극기는 조선군주의 어기인 '태극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고종이 직접 도안하여 제작하였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된다.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1882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지만 국기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탓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제작법고시」를 통해 국기 제작 방법을 확정·발표했다. 1882년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하였고,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였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다. 대한제국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제강점기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자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사용하다가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군정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고, 태극기는 광복 해방된 한국의 당연한 국기로 인식되어 1946년 1월 14일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정권 수립 선포를 앞둔 1948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폐지하고 인공기로 교체하였다. 현대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공식 제정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통용되어 통일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를 위해 정부가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안이 수렴되었으며, 여러 토론 끝에 '우리국기보양회'의 안이 채택되었다. 최종적으로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로서 현행과 같은 태극기 규격이 정해졌다. 1984년 2월 21일 대통령령으로 기존의 '국기제작법'과 '국기게양방법에 관한 건'으로 이원화된 것을 통합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고, 2007년 7월 27일부터 새로운 '대한민국 국기법'이 시행되어 태극기의 제작, 게양,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아주 자랑스러운 국기로 불리고 있다. 도안과 상징 태극기는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 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문양과 네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건괘(乾卦) - 3개, 하늘 이괘(離卦) - 4개, 불 감괘(坎卦) - 5개, 물 곤괘(坤卦) - 6개, 땅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낸다.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해낸 것이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다. 사괘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건곤감리 건곤감리는 태극기 네 모서리에 그려진 4괘(四卦)로, 각각 하늘(건·乾)과 땅(곤·坤), 물(감·坎), 불(리·離)을 상징한다. 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이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데,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태극기의 바탕인 흰색은 백의 민족으로 불리던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한다.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태극기는 1882년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은 이후 점차 공식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건곤감리는 나누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나누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의 조합으로 구성된다(Lim, 1998). 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태극기 안에서 건곤감리는 양효나 음효가 셋을 이루거나 1대2 또는 2대1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고 있으며, 태극문양과 함께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곤감리는‘주역’의 기본 괘이자,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의 모서리에 표현되어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는 4개의 괘(卦)이다. ‘乾 건괘 건, 坤 곤괘 곤, 坎 감괘 감, 離 이괘 리’가 합쳐진 말로 태극기는 흰색 바탕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로 돼 있다. 태극기를 달 때는 건곤감리의 위치를 기억하면 된다. 왼쪽 위 괘가 '건', 오른쪽 아래가 '곤', 오른쪽 위가 '감', 왼쪽 아래가 '리'이다. ‘주역’에서는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팔괘를 기본으로 하여, 천지만물을 상징하는 육십사괘를 설정했다. 건괘(乾卦)는 하늘을 상징하며, 오행(五行)의 금(金)을 뜻한다. 곤괘(坤卦)는 땅을 의미하며, 오행의 토(土)를 뜻한다. 기본 괘 가운데서도 건괘와 곤괘는 모든 괘의 중심이며,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감괘(坎卦)는 달과 물을 상징하며, 오행의 수(水)를 뜻한다. 이괘(離卦)는 해와 불을 상징하며, 오행의 화(火)를 뜻한다. 각각의 괘의 형상은 효(爻)로 표현되는데, 효는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끊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로 나뉜다. 괘의 형상은 이 양효와 음효가 홀로 셋을 이루거나 1 대 2 또는 2 대 1 등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는 것이다. 건괘는 양효만 세 줄로 표현되고,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표현되며,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표현된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에서 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한다. 네 모서리에 그려진 건곤감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양효와 음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4괘는 각각 하늘·땅·물·불을 상징하며,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룬다. 건괘는 기면(旗面)의 왼쪽 윗부분에, 곤괘는 오른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무궁한 정신을 나타낸다. 감괘는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이괘는 왼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광명의 정신을 나타낸다. 규격 태극기의 규격은 다음과 같다. 색상 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공식 색상은 1997년 10월 25일에 정해졌다. 올리는 날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한다. 3월 1일: 3·1절 6월 6일: 현충일 (조기 게양) 7월 17일: 제헌절 8월 15일: 광복절 10월 1일: 국군의 날 10월 3일: 개천절 10월 9일: 한글날 국가장(國家葬) 기간 (조기 게양) 정부가 따로 지정하는 날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로 정하는 날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한함)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국기 게양 시간 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 해야한다. 국기 게양과 강하시각 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 국기의 변화 공식 국기 기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태극기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1호 데니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2호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3호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4호 남상락 자수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6호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7호 김구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8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9호 유관종 부대원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0호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1호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2호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3호 불원복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4호 명신여학교 태극기·현판·완문 - 등록문화재 제468호 강릉 선교장 소장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648호 같이 보기 한국의 기 목록 김구 서명문 태극기 태극 데니 태극기 한반도기 국기에 대한 맹세 팔괘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태극이 포함된 국가 혹은 지역의 깃발 몽골의 국기 티베트의 기 북한의 국기 각주 인용 외부 링크 국기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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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A%B3%A0%EB%A6%AC%EC%A6%98
알고리즘
알고리즘(), 셈법은 수학과 컴퓨터과학, 언어학 또는 엮인 분야에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이다. 계산을 실행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문제 풀이에 필요한 계산절차 또는 처리과정의 순서를 뜻한다. 프로그램명령어의 집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연산, 데이터 마이닝(기계 학습) 또는 자동화된 추론을 수행한다. 이름 산법(算法), 셈법, 계산절차(計算節次)라고도 한다. 알고리즘은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인 무함마드 알콰리즈미의 이름을 라틴어화한 알고리스무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영어로 의 발음 기호는 또는 이며 을 '알고리즘'으로 표기하는 것은 를 '지스'로, 을 '리즘'으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알고리즘이라는 표기가 알고리듬이라는 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정의 멈춤문제의 결과로 알고리즘멈추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단순한 직관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알고리즘의 공식적인 정의는 없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유한한 수의 규칙에 따라 구별 가능한 기호들을 조작하여 입력 정수에서 출력 정수를 생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작업을 정의한다. 다음은 좋은 알고리즘의 특징이다. 정밀성 : 변하지 않는 명확한 작업 단계를 가져야 한다. 유일성 : 각 단계마다 명확한 다음 단계를 가져야 한다. 타당성 : 구현할 수 있고 실용적이어야 한다. 입력 : 정의된 입력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출력 : 답으로 출력을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 유한성 : 특정 수의 작업 이후에 정지해야 한다. 일반성 : 정의된 입력들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구현 알고리즘은 자연어, 의사코드, 순서도, 프로그래밍언어, 인터프리터가 작업하는 제어테이블, 유한상태기계의 상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음은 알고리즘 개발의 정형적인 단계이다. 문제 정의 → 모델 고안 → 명세 작성 → 설계 → 검증 → 분석 (복잡도 등) → 구현 → 테스트 → 문서화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기술에는 운용과학의 방법, 설계짜임새를 써먹는 방법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지만, 전기 회로나 생물학적 신경회로를 사용하기도 한다. 분류 구현 : 재귀적 알고리즘, 연역적 알고리즘, 결정론적 알고리즘, 근사 알고리즘, 양자 알고리즘 등. 설계 : 무차별 대입 공격, 분할 정복 알고리즘, 그래프 순회, 분기 한정법, 확률적 알고리즘, 리덕션, 백트래킹 등. 최적화 문제 : 선형 계획법, 동적 계획법, 탐욕 알고리즘, 휴리스틱 함수 등. 이론적 분야 : 검색 알고리즘, 정렬 알고리즘, 수치 알고리즘, 그래프 알고리즘, 문자열 알고리즘, 암호학적 알고리즘, 기계 학습, 데이터 압축 등. 복잡성 입력의 크기가 일 경우, 점근 표기법 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 에 관계없이 일정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파일의 첫 번째 바이트가 널(null)인지 검사하는 것.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이진 탐색.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기수 정렬. : 에 대략 비례할 수 있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정렬 알고리즘.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최장 공통 부분 수열 문제.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행렬 곱셈. :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충족 가능성 문제. : 즉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배열의 모든 순열을 검사하는 것. 대문자 O 표기법의 정의상 아래의 복잡도는 그 위의 복잡도를 포함하므로,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의 수행 시간을 가진다. 예 알고리즘의 예시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는 임의로 나열된 숫자들 가운데 가장 큰 수를 찾는 것이다. 다음은 목록 안에 있는 모든 수를 살펴보는 알고리즘이다. Input: A list of numbers L. Output: The largest number in the list L. if L.size = 0 return null largest ← L[0] for each item in L, do if item > largest, then largest ← item return largest 같이 보기 Garbage in, garbage out Introduction to Algorithms 계산 이론 고속 푸리에 변환 라메의 정리 람다 대수 순서도 알고리즘 트레이딩 처치-튜링 명제 추상 기계 휴리스틱 이론 기사의 여행 스테인하우스-존슨-트로터 알고리즘 각주 외부 링크 이론 컴퓨터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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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D%82%A4%EC%B1%85
위키책
위키책(Wikibooks)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2003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는 공동으로 집필한 책 형태의 공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이트는 미디어위키 기반이며, 따라서 누구나 편집단추를 눌러 위키책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 프로젝트는 영어 위키백과 사용자인 Karl Wick가 고급교육의 기회를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비용과 제한이 없는 열린 콘텐츠의 생화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의 범위(교과서만 할 것인가,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와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이름, URL)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생들은 위키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재를 직접 편집, 교재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교과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위키주니어 위키주니어(Wikijunior)는 위키책의 서브프로젝트(subproject)로서, 어린이용 책을 다루는 위키이다. 이 프로젝트는 잡지와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네덜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카탈루냐어, 튀르키예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핀란드어판 위키책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위키주니어는 벡 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위키책 대문 한국어 위키책 위키미디어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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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QL
MySQL(마이에스큐엘, )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오픈 소스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이다. 다중 스레드, 다중 사용자 형식의 구조질의어 형식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서 오라클이 관리 및 지원하고 있으며, Qt처럼 이중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하나의 옵션은 GPL이며, GPL 이외의 라이선스로 적용시키려는 경우 전통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선스의 적용을 받는다. 위와 같은 지원 방식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프로젝트에 저작권을 적용하는 방법과 비슷한 JBoss의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반코드가 개인의 소유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는 아파치 프로젝트와는 다르다. MySQL AB는 또한 MaxDB라고 불리는 MySQL AB와는 기반코드가 다른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을 판매했으나 2007년 이래로 MaxDB는 SAP AG가 소유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0억 달러에 인수되었으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며 같이 넘어갔다. 인터페이스 MySQL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거나 자료를 관리하기 위한 GUI 관리툴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용자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하고, 데이터를 백업하는데, 상태를 검사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생성하는데, 또는 데이터 레코더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MySQL 프론트엔드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나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한다. 공식적인 MySQL 프론트엔드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오라클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픽 공식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사용자에게 MySQL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그래픽적으로 지원하게 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조의 설계도 시각적으로 하게 해주는 MySQL AB에 의해 개발된 자유로운 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패키지 소프트웨어였던 MySQL GUI 툴즈를 대체하였다. 여타의 제3자 패키지와 유사하지만, MySQL 현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이용자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모델링, SQL 관리(MySQL 쿼리 브라우저 대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관리(MySQL Administrator 대체)까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MySQL 워크벤치는 2가지 판이 존재하는데, MySQL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보통의 자유, 공개 소스인 ‘커뮤니티 판’(Community Edition)과 커뮤니티 판을 확장하여 개선시킨 유료의 ‘스탠더드 판’(Standard Edition)이 존재한다. 프로그래밍 언어 응용 프로그램에서 MySQL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API를 사용할 수 있다. 이들 API는 언어에 종속적이다. MySQL은 공식적으로 아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C/C++ C#/F# 볼랜드 델파이 (dbExpress를 통한) 자바 (네이티브 자바 드라이버를 통한) 파이썬 루비 REALbasic (매킨토시 계열) 프리베이직 스몰토크 Eiffel 리스프 펄 Tcl PHP PHP4 PHP5 PHP6 델파이1 델파이2 델파이3 델파이4 델파이5델파이6델파이7델파이8 델파이2007델파이2008델파이2009 파파라치 MySQL은 MyODBC라고 불리는 ODBC 인터페이스를 지원해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그 예로 ASP와 콜드퓨전을 들 수 있다. MySQL은 대부분 ANSI C로 구현되었다. 사용 MySQL은 미디어위키와 드루팔과 같은 인기있는 웹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된다. 그리고 LAMP, MAMP, WAMP (리눅스/매킨토시/윈도-아파치-MySQL-PHP/펄/파이썬)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구성체로서 작동하며 버그질라와 같은 오픈소스 버그 추적 도구에도 사용된다. 웹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MySQL의 인기는 PHP의 인기도와 맞물려 있다. PHP는 종종 MySQL과 결합되며,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터넷 상의 여러 웹사이트, 혹은 서적을 통해서 MySQL과 PHP의 연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의 플랫폼에서는 이들의 연동을 자동으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SUN 인수 이후, 중소기업이나 개인용 사이트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키백과, 구글(검색 엔진은 제외), 페이스북, 트위터, 플리커, 노키아닷컴, 유튜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버전 역사 버전 별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994년 MySQL의 원 개발(마이클 위데니우스와 데이빗 액스마크에 의한) 1995년 5월 최초의 국제화판 3.19 판: 1996년 말, www.tcx.se에서 3.20 판: 1997년 1월 1998년 1월 8일 윈도 판(Windows 95와 NT) 출시 3.21 판: 제품 출시 1998년 www.mysql.com 에서 3.22 판: 1998년부터 알파, 베타판 3.23 판: 2000년 7월 베타판으로부터, 2001년 1월 22일 제품 출시 4.0 판: 2002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2003년 3월 제품 출시(unions) 4.01 판: 2003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Jyoti 데이터베이스 트래킹용으로 MySQL 채택 4.1 판: 2004년 6월 베타판으로부터, 2004년 10월 제품 출시 (R 트리와 B 트리, 서브쿼리, prepared statements 지원) 5.0 판: 2005년 3월 베타판, 2005년 10월 제품 출시(커서, 저장 프로시저, 트리거, 뷰, XA 트랜잭션 지원) 페더레이티드 스토리지 엔진의 개발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Federated 스토리지 엔진은 proof-of-concept 스토리지 엔진이지만", 주요 MySQL 5.0 판에 포함되어 기본값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MySQL Federated 테이블에 일부 단점들을 정리한 문서 : The Missing Manual".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2008년 MySQL AB를 인수했다. 5.1 판: 2008년 11월 27일 출시(이벤트 스케줄러, 파티셔닝, 플러그인 API, 열 기반의 복제, 서버 로그 테이블) 5.1 판에는 5.0에 있던 35개의 현재의 버그 외에 20개의 알려진 크래싱, 그리고 잘못된 결과 버그를 포함하고 있다. (5.1.51판에는 거의 모두 픽스함). MySQL 5.1과 6.0은 데이터 웨어하우징으로 사용할 때는 빈약한 성능을 보인다.  — 부분적으로 단일 쿼리를 진행할 때 다중 CPU 코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오라클이 2010년 1월 27일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했다. MySQL 서버 5.5는 현재 널리 사용가능하다(). 다음과 같은 성능 향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본 스토리지 엔진이 InnoDB이며, 이것은 트랜잭션과 참조 무결성 제한을 지원한다. 개선된 InnoDB I/O 서브시스템 향상된 SMP 지원 Semisynchronous 복제. SQL 표준에 대응한 SIGNAL 과 RESIGNAL 구문. 유니코드 문자셋 utf16, utf32, 그리고 utf8mb4 지원. 사용자 정의 파티셔닝에 대한 새로운 옵션. MySQL 서버 6.0.11-알파가 6.0 라인의 최신 판으로 2009년 5월 22일 발표되었다. 이후의 MySQL 서버 개발은 새로운 릴리스 모델을 사용할 것이다. 6.0은 미리 출시판으로 통합될 것이다. MySQL 5.6은 새로운 출시판의 시금석이 될 예정으로 2011년 MySQL 이용자 컨퍼런스에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으로 쿼리 옵티마이저에 대한 성능 향상과 InnoDB의 고성능 트랜잰션 결과, 새로운 NoSQL-스타일 메모리 캐시된 API, 대용량 테이블의 조작과 퀘리를 위한 파티셔닝의 성능 향상, 복제와 성능 모니터링 개선을 PERFORMANCE_SCHEMA를 통해 데이터 확장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같이 보기 마리아 DB 각주 외부 링크 MySQL 5.5 Reference Manual 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1995년 소프트웨어 오라클 소프트웨어 GPL 라이선스 소프트웨어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자유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워드프레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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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베이직
비주얼 베이직(, )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의 하나이다. 비주얼 베이직은 사건 기반 프로그래밍의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에 따른 풍부한 구성 요소를 가진 통합 개발 환경 및 RAD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주얼 베이직은 초보자가 접근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각적인 개발 환경과 더불어 베이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비주얼 베이직은 베이직의 영향을 받았으며, GUI 응용 프로그램의 RAD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며,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을 데이터 액세스 오브젝트, 원격 데이터 오브젝트, 또는 ActiveX 데이터 오브젝트들, 그리고 Active X컨트롤과 개체의 생성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이나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와 같은 스크립트 언어들은 문법적으로 비주얼 베이직과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다르다.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제공하는 구성 요소를 응용 프로그램에 삽입할 수 있다. 또한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윈도우 API를 사용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외부 함수 선언이 필요하다. 비주얼 베이직의 마지막 버전은 1998년에 출시된 비주얼 베이직 6.0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장 지원 기간은 2008년 3월에 끝났으며, 공식적인 후계 제품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이다. 특징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비주얼 베이직은 쉽게 배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비주얼 베이직은 간단한 GUI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그램의 개발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에서의 프로그래밍은 폼(Form)위에 놓인, 시적으로 정렬된 GUI 위젯(비주얼 베이직에서는 컨트롤이라고 한다)들의 조합이다. 이 컨트롤들은 특별한 속성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능의 확장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의 입력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속성과 역할이 이들 컨트롤에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많은 코딩 없이 만들 수 있다. 성능상의 문제가 이전 버전에서 많이 보고되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컴퓨터 성능 향상과 원시 코드(Native Code) 컴파일을 통해 이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비주얼 베이직 5.0부터 원시 코드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 작성이 가능해졌지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된 실행 파일은 여전히 1메가바이트 정도 크기의 라이브러리 파일을 필요로 한다. 이 파일은 윈도우 2000과 이후 윈도 버전에서 기본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의 윈도우 95, 윈도우 98, 윈도우 NT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실행 파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라이브러리 파일 또한 함께 배포하여야 했다. 폼은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커서를 통해 텍스트 상자, 단추 등과 같은 컨트롤들을 폼 위에 놓는다. 컨트롤들은 속성을 가지며, 이벤트 처리자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기본값들은 컨트롤이 만들어질 때 함께 제공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많은 속성값들은 프로그램이 실행 중일 때, 응용 프로그램의 사용자의 조작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으며, 이것은 동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의 'Resize(크기 변경)' 이벤트 처리자에 컨트롤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컨트롤이 계속해서 창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거나, 창 전체를 다 채우는 등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 상자의 'KeyPress(키 눌림)' 이벤트 처리자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해당 응용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입력된 문자의 대소문자를 변환하거나, 특정 문자의 삽입을 막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실행 파일, ActiveX 컨트롤, DLL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주얼 베이직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 용도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용 응용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 조작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 덜 기능적인 대화 상자들은 팝업 능력에 사용된다.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코드를 적당한 이벤트 처리자에 삽입해야 하긴 하지만, 컨트롤들은 응용 프로그램에 기본적인 기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문자열의 입력이 가능한 드롭 다운 리스트 컨트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가진 목록을 보여주며, 사용자가 항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사용자에 의해 항목이 선택될 때, 이벤트 처리자가 호출되며, 이 이벤트 처리자는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으로 코딩한 코드를 처리하는데, 이때 사용자가 선택한 항목의 관련 항목의 출력과 같은, 사용자의 컨트롤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에 따른 처리를 할 수 있다. 한편, 비주얼 베이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을 통한 Active X 개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서버 측면에서의 처리나 추가 모듈을 가능하게 해 준다. 비주얼 베이직은 레퍼런스 카운팅을 통한 쓰레기 수집을 수행하며, 방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들과, 기본적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위젯들이 초기 프로젝트 구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대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달리, 비주얼 베이직은 일반적으로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으며, 대신에 키워드를 표준 대소문자 설정으로 변환한 뒤, 강제로 변수명의 대소문자를 기호 테이블의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문자열 비교에 관해서는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원한다면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의 컴파일러는 다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C, C++)과 호환성이 있지만, IDE상의 제한으로 인해 윈도 모델 DLL이나 스레드의 사용 등은 불가능하다. 다른 언어와의 비교 비주얼 베이직은 C 언어 계열의 언어들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C 언어에서 가능한 다중 할당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에서 코드 A = B = C는 변수 A, B, C의 값을 같게 하지 않는다. "Is B = C?" 불린 결과값이 A에 들어간다. 결국 A에 들어가는 결과치는 거짓(0) 또는 참(-1)이 될 것이다. 불린 상수 True는 숫자값 -1을 갖는다. 이렇게 처리하는 이유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불린 자료형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 형태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1은 16진수 1로 계산되고(불린 값은 True이다), 0은 16진수 0으로 계산된다.(불린 값은 False이다.) 이것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값 0인 Not 연산을 할 때 정수값 -1을 반환하는 것을 통해 명백하게 설명되는데, 다시 말해 True = Not False이다. 이러한 비주얼 베이직의 고유한 처리 방식은 And, Or, Xor, Not과 같은 정수 비트의 논리 연산에 유용하다. 이러한 True의 정의는 1970년대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들었던 베이직 제품에서의 처리와 일치하며, 이것은 당시의 CPU 명령어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논리 및 비트 연산자가 통합되어 있다. 이것은 논리 연산자와 비트 연산자가 구분되어 있는 펄과 같은 C 언어 계열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 요소는 베이직언어의 전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가변 배열 기반이다. 배열의 정의는 파스칼이나 포트란과 같이, 유사한 최대 인덱스(Upper Bound)와 최소 인덱스(Lower Bound)의 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Option Base 구문을 통해 최소 인덱스의 지정을 할 수 있다. Option Base 문의 사용은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볼 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데, 이것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제나 명시적으로 배열의 최소 인덱스를 지정하는 것이다. 이 최소 인덱스는 0 또는 1뿐만 아니라, 선언에 따라서는 다른 값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최소 인덱스와 최대 인덱스 모두 프로그래머의 제어가 가능하다. 대조적으로, 서브스크립트 제한적 언어(Subscript-Limited Language)들에서, 배열의 최소 인덱스는 가변적이지 않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에서도 나타나지만,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에는 없다. OPTION BASE는 1970년대 후반 ANSI Minimal BASIC을 통해 표준으로 지정되었다. 상대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및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과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다. 실수를 정수로 바꿀 때, 기본적으로 Round함수를 통해 반올림을 한다. 반올림 방법으로는 Round-to-even 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나누기 연산자인 /를 통해 자동적으로 정수가 실수로 변환되므로, 짝수 정수부에 의한 홀수 정수부는 직관적으로 올바른 연산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자동으로 반올림을 하는 정수 나누기 연산자인 \도 있다. 기본값으로, 만약 변수가 선언되지 않았거나 자료형이 선언되지 않을 경우, 변수는 Variant형으로 선언 된다. 그러나 이것은 DefInt, DefBool, DefVar, DefObj, DefStr와 같은 DefType 구문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6.0의 경우 12개의 DefType 구문이 지원된다. 기본 형은 특별한 접두어인 #를 통한 선언을 통해 Double형으로, !를 통해 Single형으로, &를 통해 Long 형으로, %형으로 Integer형으로, $를 통해 String형으로, @를 통해 Currency 형으로 오버라이드되거나, 예약어 As (type)를 통해 오버라이드 될 수 있다. 또한 무조건 명시적인 변수 선언만 허용하도록 할 수도 있는데, 이 때는 Option Explicit 명령을 사용한다. 발전 비주얼 베이직 1.0은 1991년 5월 발표되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있어서의 끌어다 놓기 방법은 앨런 쿠퍼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폼 제작기에서 온 것이며, 쿠퍼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트라이포드라고 불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3.0용 프로그래밍 가능 폼 제작 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쿠퍼의 개발팀과 계약 한 후,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을 루비라고 명명하였다. (루비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관계 없다.) 트라이포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주얼 베이직을 만들기 위해 루비와 베이직 언어를 합치기로 결정했다. 루비 인터페이스 개발기는 비주얼 베이직의 "시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소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오메가"용으로 설계된 "EB"(임베디드 베이직 엔진)와 합쳐졌다. 루비는 또한 훗날 비주얼 베이직 확장(VBX)이라고 명명될 추가적인 컨트롤들을 포함하기 위한 DLL 로드 기능을 지원하였다. 버전 5.0에서 Win16 코드와의 호환성을 버리고 전반적인 기능을 강화했다. 버전 6.0에서는 인터넷 관련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기존 버전과 다르게, 닷넷의 일부분으로 동작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강화되었다. 또한 기존 버전과의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기존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닷넷 코드로 옮겨 주는 마법사가 있다. 그러나 네이티브 비주얼 베이직은 버전 6.0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완전히 포기하여 사라진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11년 기준으로, 프로그래밍 입문 언어로서 시스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변수, 메모리 등)이 없이도 프로그래밍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액셀 등 오피스에서 사용되는 VBA의 문법이 비주얼 베이직 6.0 버전과 호환됨에 따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문용으로도 또 실무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개발 및 발전 과정 '선더(Thunder)'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991년 5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컴덱스에서 윈도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매되었다. 1992년 3월,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스 기반 베이직 컴파일러인 퀵베이직과 베이직 전문 개발 체계(BASIC Professional Development System)의 차기 버전으로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적인 특성 자체는 윈도우용 비주얼 베이직과 전혀 호환되지 않았다.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은 문자 기반 윈도(Character Oriented Windows)를 사용했으며, 확장 아스키문자를 통해 GUI를 구현해 내었다. 1992년 11월, 비주얼 베이직 2.0이 발매되었다. 프로그래밍 환경이 더욱 쉽게 개선되었으며, 속도 또한 향상되었다. 특히, 폼이 인스턴스적인 개체가되었으며, 이러한 기본적인 클래스 모듈의 개념은 후에 비주얼 베이직 4.0에서 적용된다. 1993년 7월, 비주얼 베이직 3.0이 발매되었다. 이 때는 스탠다드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구분되어 발매되었다. 이 비주얼 베이직 3.0은 제트(또는 액세스)1.x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제트 데이터베이스 엔진 1.1을 포함하고 있었다. 1995년 8월, 비주얼 베이직 4.0이 발매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은 32비트와 16비트 윈도 프로그램 둘 다 개발할 수 있는 첫 번째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이었다. 또한 GUI가 없는 클래스를 비주얼 베이직에서 개발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 제품들간의 비호환성은 설치와 운영상의 문제를 낳았다. 이전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은 VBX 컨트롤을 써 왔었지만, 비주얼 베이직 4.0은 OLE 컨트롤(확장자가 .OCX인 파일)을 썼다. 이 OLE 컨트롤은 훗날 ActiveX 컨트롤이라고 이름지어진다. 1997년 2월 발매된 비주얼 베이직 5.0은 32비트 버전으로만 발매되었다. 16비트 프로그램의 개발을 계속 했던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 4.0의 소스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5.0으로 옮길 수 있었으며, 비주얼 베이직 5.0 프로그램이 비주얼 베이직 4.0으로 옮겨 가기도 쉬웠다. 비주얼 베이직 5.0은 또한 사용자 정의 컨트롤을 만들 수 있는 기능, 또한 원시 코드로 윈도용 실행 파일을 컴파일 할 수 있는 기능, 대량의 계산에서의 속도 향상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Active X 컨트롤의 개발을 위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무료 버전 또한 배포되었는데, 이 버전은 일종의 시험판으로, 일반적인 .exe 프로젝트가 IDE에서는 실행되었지만 컴파일되지는 않았다. 1998년 6월, 많은 영역에서 개선을 이룬 비주얼 베이직 6.0이 발매되었다. 특히 비주얼 베이직 6.0은 웹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6.0은 2008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 안함" 단계에 해당 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처럼 비주얼 베이직 6.0의 개발 환경은 더 이상 지원되지 않기는 하지만, 실행에 필요한 라이브러리는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그리고 윈도우 7에 계속 지원되고 있다. 2005년 3월 31일,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 6.0의 주요 지원이 종료되었다. 확장 지원은 2008년 3월 종료되었다. 이에 대하여, 비주얼 베이직 유저 커뮤니티는 우려를 표현하고 제품의 계속적인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흐름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2005년)에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인 마이크로소프트 앤티스파이웨어는 비주얼 베이직 6.0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대체품인 윈도우 디펜더는 C++ 코드로 재작성되어 개발되었다.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스크립트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자체는 베이직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다음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에서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VBA)는 많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응용 프로그램들(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및 솔리드웍스, 오토캐드, 워드퍼펙트 오피스, 아크GIS, 그리고 ACCPAC와 같은 서드 파티 제품들에 포함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간에 약간의 불일치는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전체적으로 비주얼 베이직 6.0과 같은 언어이며, 같은 런타임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의 기본 언어이다.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스크립팅과 클라이언트측 웹 페이지 스크립팅에도 사용된다. 비주얼 베이직과 문법적으로 닮아 있지만, 이 언어는 비주얼 베이직 런타임 라이브러리와 대립되는 vbscript.dll을 통해 실행된다는 점에서 두 언어는 구분 된다. ASP와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컴파일된 웹 페이지용 닷넷 프레임워크를 사용하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 닷넷과 혼동하지 말것.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비주얼 베이직 6.0의 후속작으로 설계된 제품이며, 마이크로소프트의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의 일부분이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닷넷 프레임워크를 통해 실행되며, 실행 파일을 컴파일한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비주얼 베이직 6.0과 하위 호환성이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NET Upgrade Assessment Tool를 이용하여 변환시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스타 베이직은 선 마이크로시스템즈가 개발한 스타 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있는 인터프리터 언어이며, 비주얼 베이직과 호환성이 있다.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GNU/리눅스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감바스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리눅스, 매킨토시, 윈도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K베이직으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 지원 중단 MS는 무료 지원과 중요 업데이트 제공을 끝으로 2005년 3월 말 VB6에 대한 표준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서비스 모두 앞으로 3년 동안은 유료 서비스로 남아있게 된다. MS는 2000년 VB.NET을 내놓았으며 그 후 VB6 이하 버전을 사용하는 개발자들은 끊임없이 감소해왔다. 비주얼 베이직을 등지고 떠난 많은 개발자들은 VB.NET으로 옮겨가지 않고, MS의 언어가 아닌 자바로 옮겨갔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다. 2005년 현재, 북미 전체 개발자 중 비주얼 베이직 닷넷 개발자가 34%인데 비해 비주얼 베이직 개발자들은 45%다. 기존 VB6 응용 프로그램을 VB 닷넷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2008년 VB6 SP6에 대한 일부 취약한 보안 문제와 관련된 패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추후 공개할 윈도우 8부터 비주얼 베이직 및 기반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예제 코드 다음은 이 언어의 예제 코드이다. 창이 호출되면 "Hello, World!" 메시지 상자를 표시한다: Private Sub Form_Load() ' Hello, World라는 내용의 메시지 상자를 띄웁니다. MsgBox ("Hello, World!") End Sub 아래 코드는 Count 변수가 1초에 1씩 올라가도록 한다.(작동을 위해서는 타이머 컨트롤이 필요하다) Option Explicit Dim Count As Integer Private Sub Form_Load() Count = 0 Timer1.Interval = 1000 ' 밀리초 단위 End Sub Private Sub Timer1_Timer() Count = Count + 1 lblCount.Caption = Count End Sub 같이 보기 비주얼 베이직 닷넷 프로그래밍 언어의 비교 FreeBASIC – a programming language rooting from QBasic. Gambas - Open source competitor to Visual Basic IIf – a function in several editions of Visual Basic roughly equivalent to the ?: ternary operator of C and related languages.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익스프레스 - a free scaled down version of Visual Basic .NET for independent developers. 창 (컴퓨팅) Power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 Pure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 REALbasic – Competitor to Visual Basic DarkBASIC – harness DirectX from BASIC applications 각주 외부 링크 VB 6.0 at MSDN VB 6.0 at MSDN UK Migrating from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2008 (MSDN UK)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베이직 1991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 인터프리터 베이직 컴파일러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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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4%94%EB%B2%84%EA%B7%B8
디버그
디버깅() 또는 디버그()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단계 중에 발생하는 시스템의 논리적인 오류나 비정상적 연산(버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밝히고 수정하는 작업 과정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디버깅을 하는 방법으로 테스트 상의 체크, 기계를 사용하는 테스트,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테스트하는 법이 있다. 용어의 기원 버그(bug)와 디버깅(debugging)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그레이스 호퍼가 기원이다. 그러나 "기술적 오류"라는 문맥에서의 "버그"는 적어도 1878년과 토머스 에디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프트웨어 버그 문서 참고) 도구 디버거()는 디버그를 돕는 도구이다. 디버거는 주로 원하는 코드에 중단점을 지정하여 프로그램 실행을 정지하고,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살펴보며, 실행을 재개하거나, 코드를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등의 동작을 한다. 고급 디버거들은 메모리 충돌 감지, 메모리 누수 감지, 다중 스레드 관리 등의 기능도 지원한다. 안티 디버깅 안티 디버깅(Anti-Debugging)이란 디버깅을 방해하고 분석을 방해하는 기술이다. 디버깅을 당한다면 해당 디버거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거나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방해한다. 안티 디버깅 기술에는 수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를 우회하는 기술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같이 보기 표명 충돌 (컴퓨팅) 디버거 오류 정정 컴퓨터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 테스트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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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6%98%EC%B2%9C%EC%8B%9C
춘천시
춘천시(春川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서부에 있는 시이자 강원도청 소재지이다. 태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영서 지방의 거점 도시이다. 경춘선 철도의 시·종점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교차한다.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태백산맥 정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봉의산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충적지에 도심을 이룬다.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 등 호수가 많아 하류의 홍수 조절과 관광지 및 내륙수로 역할을 한다. 시청은 옥천동에 있고, 행정 구역은 1읍 9면 15동이다. 역사 춘천 지역은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로서 후일 고구려, 신라에 차례로 정복되었으며, 637년(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라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춘주(春州)라 칭하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안양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5번째 유수부로 춘천유수부(留守府)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 1895년 6월 23일 : 춘천부 춘천군 1896년 8월 4일 : 강원도 춘천군 1914년 4월 1일 : 면·리를 통폐합하였다. 12면 - 부내면, 신북면, 사북면, 서하면, 신남면, 남산외일작면, 남산외이작면, 동산외일작면, 동산외이작면, 서상면, 사내면, 북산외면 1917년 : 부내면을 춘천면, 동내면으로 분면하고, 남산외일작면은 남면으로, 남산외이작면은 남산면으로, 동산외일작면은 동면으로, 동산외이작면은 동산면으로, 북산외면을 북산면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13면) 1931년 4월 1일 : 춘천면을 춘천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2면) 1934년 : 서상면, 서하면을 서면으로, 남산면, 남면을 남면으로 합면하고, 남면 의암리를 신동면에 편입하였다. (1읍 10면) 1939년 10월 1일 : 신북면 일부 등을 춘천읍에 편입하고, 신남면과 동내면을 신동면으로 합면하였다. (1읍 9면) 1945년 9월 2일 :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군역(郡域)의 대부분이 미군정 관할이 되었고, 38선 이북인 사내면 전부과 북산면·사북면의 일부는 소련군정 관할 아래 들어갔다. (1읍 9면 → 1읍 8면) 11월 : 소련군정이 38선 이북의 사내면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다. 1946년 6월 1일 : 춘천읍을 춘천부로 승격하였다. 춘천군은 춘성군(春城郡)으로 개칭하였다. (8면) 1949년 8월 15일 : 춘천부를 춘천시로 개칭하였다. 1953년 7월 27일 : 한국 전쟁의 결과, 춘천군의 전 지역을 수복하였다. (9면) 1954년 11월 17일 : 수복지구에 대한 행정권이 회복되었고, 사내면을 화천군으로 이관하였다. (8면) 1964년 2월 1일 :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67년 12월 5일 : 남면 발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1일 : 신북면 신동리와 신동면 삼천리, 칠전리, 송암리, 서면 현암리 일부와 금산리 일부가 춘천시로 편입, 동산면 북방리가 홍천군 북방면으로, 풍천리가 홍천군 화촌면으로 편입되었다. 1989년 4월 1일 :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동내면으로, 남면 발산출장소를 남면으로 각각 승격 분리하고 기존 남면은 남산면으로 개칭하였다. (10면) 1992년 2월 1일 : 춘성군의 명칭을 춘천군(春川郡)으로 환원하였다. 1995년 1월 1일 : 춘천군 일원과 춘천시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춘천시가 설치되었다. 1995년 3월 2일 : 신북면을 신북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9면) 1998년 10월 12일 : 5천미만의 동사무소를 통폐합했다. 이에 따라 중앙동, 소낙동, 소양동이 소양동으로, 근화동, 호반동이 근화동으로, 약사동, 죽림동이 약사명동으로, 온의동, 삼천동, 칠송동이 강남동으로, 사우동, 우두동, 사농동, 신동이 신사우동으로 통합되었으며, 동조례에 의거 서면 덕두원출장소, 사북면 용산출장소, 북산면 조교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읍 9면 15행정동) 1999년 : 춘천시 조례 제338호로 신동면 정족리 일부와 온의동 일부를 칠전동에 편입하였다. 2016년: 본래 춘천시청을 철거하고 옛 춘천여자고등학교 부지를 2018년 4월까지 임시청사로 활용했다. 2018년 5월 14일: 본래 춘천시청 자리에 춘천시청 신청사를 개청했다. 지리 춘천시는 강원도의 서북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인제군, 양구군, 서쪽으로 경기도 가평군, 북쪽으로 화천군, 남쪽으로 홍천군과 접한다. 춘천시가 포함된 춘천 분지는 전형적인 차별 침식 분지로, 시가는 호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水鄕) 도시를 이루며, 호반의 도시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 기후 춘천시의 기후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a)이다. 행정 구역 춘천시의 행정 구역은 15동 1읍 9면이다. 면적은 1,116.35 km2이고, 이 중 시내 동 면적은 52.66 km2이다. 인구는 2017년 3월 31일 기준으로 116,273세대, 282,43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139,427명, 여성 144,092명이다. 극점 최동단 : 강원 춘천시 북산면 대곡리 산 144-30 최서단 : 강원 춘천시 남면 관천리 최남단 : 강원 춘천시 남면 한덕리 산 130 최북단 : 강원 춘천시 사북면 오탄리 산 61-32 춘천권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춘천시, 홍천군, 화천군, 철원군, 양구군 등을 춘천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구 춘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정치 국회의원 제21대 국회의원은 허영(갑)과 한기호(을)(철원, 화천, 양구 포함)이다. 대통령 선거 춘천시·군(춘성군)의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은 여타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41,774표를 얻었고 박정희가 28,984표를 얻었다. 다만 춘성군 지역에서는 박정희에 투표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성향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 후보가 약 2천여표 차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다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48,607표를 얻고 김대중이 38,802표를 얻는 등 강원도의 일반적인 성향과 유사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1987년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65,431표를 얻었고 김영삼이 34,751표를 얻었으며 김대중이 12,220표를 얻어 전국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비등했던 과는 달리 노태우 후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46,580표를 얻었고 김대중이 18,716표를 얻었으며 정주영이 44,675표를 얻어 전국 개표 결과와는 달리 김영삼과 정주영이 거의 유사한 득표율을 보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33,598표를 얻었고 이회창이 57,576표를 얻었으며 이인제가 38,011표를 얻어 이인제가 오히려 당선되었던 김대중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 64,221표를 얻었고 노무현 54,187표를 얻었으며 권영길이 6,523표를 얻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66,113표를 얻었고 정동영이 22,632표를 얻었으며 문국현이 9,591표를 얻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가 93,414표를 얻었으며 민주통합당 문재인은 69,365표를 획득하였다. 행정 춘천시장 현재 춘천 시장은 민선 7대로 당선된 제36대 이재수 시장이다. 춘천시의회 현재 시의원 선거구는 총 8개 선거구로 되어 있으며 한 선거구당 1~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되어있다. 2019년 기준으로 춘천시의회는 제10대 시의회이다. 1991년 초대 춘천시 · 춘성군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통합 시의회가 출범하였고 제2대 의회가 개원하였다. 춘천시의회 정당별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 경제 농업 경지 면적 7,015ha 중 논 2,222ha, 밭 ,793ha이며, 농가 가구 5,878, 농가 인구 15,272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다. 공업 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군사구역 등 각종 규제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2008년에 거두리 농공단지, 2013년 수동 농공단지가 준공하였다. 광업 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상업 중앙시장·풍물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중 약사명동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며 최근 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약사천 복원사업으로 인해 약사동에 위치하였던 풍물시장이 온의동 경춘선 하부 공간으로 이전하였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하며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사농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퇴계동에 수산물 유통센터가 있어 신선한 농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 백화점 M백화점 (조양동) 대형마트 이마트 춘천점 (온의동) 롯데마트 춘천점 (온의동) 롯데마트 석사점 (석사동) 홈플러스 춘천점 (퇴계동) 문화·관광 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 영화관 CGV 춘천 롯데시네마 춘천 메가박스 남춘천 공연장 강원대학교 백령아트센터 봄내극장 상상마당 춘천 춘천문화예술회관 춘천인형극장 축제극장 몸짓 한림대학교 일송아트홀 관광지 춘천은 의암호·춘천호·소양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0만여 명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조성 중인 관광지 애견체험박물관 : 남산면에 조성 중으로 2017년 개장 예정 영어 테마파크 : 서면에 조성 예정으로 2017년 개장할 예정 레고랜드 코리아 : 중도에 건설 중으로 2020년 상반기 개장 예정이었지만, 화재 및 코로나19 범유행 이슈 등을 이유로 개장 시기가 늦어질 수도 있음 그리고 선사시대와 고조선시대 유물들이 발굴되어 2022년에 예정됨 헬로키티 아일랜드 : 삼천동에 건설 중으로 2018년 개장 예정 숲체험 교육장 : 신북읍 삼한골에 어린이 글램핑장, 작은 천문대, 에코 어드벤처, 서바이벌장 등 다양한 체험시설을 조성할 예정으로 2018년 준공 예정 삼악산 로프웨이 : 삼천동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삼악산과 연결되는 관광 삭도시설로 2019년 상반기 준공 예정 교통 과거,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노선인 경춘선이 있어 수도권에 접근하는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으며,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개량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수도권 전철 노선으로 개편되면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2012년 2월 25일에는 ITX-청춘이 경춘선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춘천에서 출발하여 대구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까지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고, 2009년, 서울특별시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양양군으로 이어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타 지역과의 도로 연결망도 잘 갖추어진 편이다. 2016년 7월 8일 서울∼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사업이 최종 확정되어 기존 경춘선 복선전철 연장되어 속초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철도 고속도로 국도 고속·시외버스 시내버스 마을버스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와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를 잇는 조교마을버스가 2013년 4월 29일 개통하였다. 4륜구동인 쌍용 코란도 투리스모 1대로 운영한다. 스포츠 강원 FC : 1부리그인 K리그1 소속으로 강릉종합운동장, 원주종합운동장, 속초종합운동장과 함께 춘천종합운동장을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강원 FC는 2016년 12월 성남 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2017년부터는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후 스플릿 라운드부터 다시 송암레포츠타운을 홈구장으로 사용중이다. 한화 이글스 : 1986년에 창단해 2015년부터 춘천 의암야구장을 제3경기장으로 사용한다. 하이원 아이스하키단 : 프로 아이스하키팀으로 아시아리그에 참가하며 춘천 의암실내빙상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춘천 FC : 4부리그 격인 K3 리그에 속한 축구단으로 홈 구장은 춘천송암레포츠타운 내에 위치한 송암주경기장이다. 체육 시설 강원대학교 백령스포츠센터 춘천봄내체육관 춘천호반체육관 한림대학교 한림스포츠센터 춘천송암레포츠타운 교육 기관 중학교 초등학교 특수학교 방송 KBS춘천방송총국 춘천문화방송 G1 강원민방 강원일보 CJ헬로 강원방송 CBS 강원방송 BBS 춘천불교방송 국방 대한민국 육군 2군단 본부 및 그 예하 부대가 위치한다. 출신 인물 자매 도시 자매결연 도시 우호 도시 각주 외부 링크 춘천시청 (공식) 춘천관광포털 사이트 춘천-홍천축 광역 버스정보시스템 춘천생활정보-춘천사랑 춘천관광포털 강원도 (남)의 도시 1949년 설치 1995년 폐지 1995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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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소프트웨어
협업 소프트웨어, 혹은 그룹웨어(groupware)는 여러 사용자가 각기 별개의 작업 환경에서 통합된 하나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이다. 로터스 소프트웨어의 로터스 노츠 (Lotus Notes)가 그 효시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일정을 기록함으로 인해 일정 기록이 매우 유용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룹웨어의 확장으로 협업 미디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웹사이트 내의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협업 미디어의 예로는 위키와 슬래시닷 (slashdot)을 들 수 있다. 협업의 수준 그룹웨어는 협업의 수준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나뉘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커뮤니케이션 도구, 회의 도구, 그리고 협업 관리도구이다. 전자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는 메시지나 파일, 데이터, 혹은 문서를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전자 메일 팩스 보내기 음성 메일 웹 전자적인 회의 도구는 좀 더 상호 대화적인 방식으로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데이터 회의 - 네트워크로 연결된 PC 상에서의 “화이트 보드”를 통한 회의 음성 회의 - 전화를 활용한 상호 대화 화상 회의 및 음성 회의 대화방 전자 회의 시스템 (EMS) 협업 관리 도구들은 그룹 내의 활동을 관리하고 증진시킨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전자 캘린더 (일정관리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 업무흐름관리 시스템 지식 관리 협업 소프트웨어들은 웹 기반일 수도 있고, 데스크톱 PC 상의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모바일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모바일에서의 업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있다. 구분 방법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웹 기반 협업 도구 소프트웨어 협업 도구 영역 별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지식 관리 도구 지식 생성 도구 정보 공유 도구 적용 협업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유도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고용자들이 협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여하는 데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그 대가는 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인 형태로 주어진다. 많은 경우 협동작업은 회사의 사내문화와 잘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오히려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쟁적인 것에서 협동적인 것으로 사내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조직의 모든 단계의 변화가 요구된다 협업 소프트웨어의 예 그룹웨어는 클라우드 기반 협업 서비스 개념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해외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Office 365와 구글의 G.Suite등이 서비스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페이스북도 Worksplace라는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차세대 그룹웨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국내의 경우 통신사형 그룹웨어, 호스팅형 그룹웨어, 개발형 그룹웨어가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그룹웨어 웹 기반 솔루션 phpGroupWare 분산 솔루션 Lucane Groupware 협업 미디어 웹 기반 솔루션 위키 기반 솔루션들 usemod scoop SlashCode everything engine 협업을 위한 개발 도구 소프트웨어 CVS RCS Subversion Git 상용 소프트웨어 플로우(flow) 웅진 워크쓰루 잔디(JANDI) 네이버 클라우드 플랫폼 워크플레이스 마이크로소프트 셰어포인트 워크스페이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기반의 P2P 플랫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서버 기반 마이크로소프트 Office 365 협업툴 콜라비 구축형/Hybrid형 그룹웨어 가온아이 ezEKP Google G. Suite Facebook Workplace 나눔기술 그룹웨어 더존 Bizbox Alpha 다우오피스 핸디 그룹웨어 나온소프트 그룹웨어 티그리스(TIGRIS) 마이오피스 코비젼 비즈웰 읽을거리 메트컬프의 법칙 정보 기술 관리 전자 비즈니스 지식 관리 프로젝트 관리 경영학 마케팅 외부 링크 협업 미디어에 대한 Perl 개발자들의 토론 사무용 소프트웨어 컴퓨터 매개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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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인류학(人類學, )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으로서 체계화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학은 보다 전문적인 여러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다. 하위 학문으로는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형질인류학의 연구분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분야와 현대 인류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은 선사시대와 같은 오래된 인류의 유적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문화 등을 규명하는 것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있다. 문화인류학은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밖에도 민족학(ethnology), 민속학(folklore) 등을 인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하면 사회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류학과 연관된 사회나 문화를 중심으로한 연구분야는 많은 현대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핵심적 기초과학 학문이다. 관점 인류학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비교문화론·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그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며 특정한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반대되는 용어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다. 비교문화론(또는 비교문화론적 접근)이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를 다른 문화와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라는 추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방법은 없다. 오직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 뿌리나 원리(the root and the nature)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접근이란 근대의 다른 학문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한하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기계적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자들은 복잡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문화인류학은 총체론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치·종교·역사·경제·법·제도·예술 등등이 기계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총체"로서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이며 경제가 역사라는 안목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전체와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분류 보통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언어인류학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들에 관한 자연 그대로의 설명과 해석이 인류학의 특징이지만 그 주제나 연구방법이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역사와는 다르다. 이는 인류학이 민족·제도·종교 또는 관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자료를 통한 설명보다 인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생산물에 대해 가능한 한 직접 관찰을 중요시 한다. 또한 이런 모든 연구 결과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기록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적·문화적인 발전과 관련된 복합적인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정신의 다양성과 집단적인 차이를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접근방법은 생리학 또는 심리학과도 다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전역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특정 집단과 활동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 형질인류학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진화학적 틀에서 연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 넓게 퍼져 살게 되었는가가 관심분야이며 어떻게 지역적으로 인류가 다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등 종족으로서 인류를 연구한다. 문화인류학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족지같은 현장에서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고고학은 물질적 인간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을 통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다. 언어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음성이나 비음성적인 다양한 언어를 시간과 공간, 사회적 언어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련을 연구한다. 역사에 따른 구분 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료인류학 등이 있다. 1600년대 루소와 로크의 인식론적 접근법 1800년대 진화론의 발상과 인종적 분류법 - 스펜서, 타일러 1900년대 초기 보아스 보아스는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미국 인류학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조사기록을 축적했으며 미대륙 인디언의 문화 보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1920년대에 영국에서는 식민지에 대한 통제가 문제시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연구하는 구조주의와 기능주의 인류학이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에 의해 대두되었다. 영국 구조주의 기능주의 구조기능주의 상징주의 탈근대론 신근대 역사 19세기 이전 현대 인류학은 대륙발견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던 유럽 문화는 다양한 토착문화와 폭넓게 접촉하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이 문화들을 일괄적으로 '야만' 또는 '원시' 문화로 규정했다. 19세기 19세기 중반에 학문에 대한 종교적인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인간의 기원, 인종 분류, 비교해부학, 언어와 같은 주제가 유행했고,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 출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 개념을 언급함에 따라 인류발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문화 발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당대 유행하던 주제와 비교의 관점, 진화론·우생학 등 학문의 지적 유산에 영향을 받은 인류학은, 친족형태의 진화, 문명의 진화, 종교의 진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의 발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때 (19세기 후반) 주류였던 인류학은 단선적인 역사개념을 토대로, 모든 인간집단은 문화적인 진화의 특정 단계들, 즉 '야만' 또는 '미개' 상태를 거쳐 '문명인'(예를 들면 서구 유럽인)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와는 다른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일련의 지배원리를 결정한다. 이 지배원리는 생산양식이 변한 후에도 한동안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며, 그결과 지배원리와 생산양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긴다. 이러한 통일된 이론들은 여행가·상인·선교사 들이 수집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 같은 대중적인 저서와 달리 몇 년 안 되어 학문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성숙한 사회과학 분과로 발전하는 동안 형질인류학은 자연현상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양한 인종의 신체적인 차이를 분류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가운데, 형질인류학자들은 고대인류를 추적하는 데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유럽과 북아메리카 초기 인류학자들이 갖고 있던 강한 문화적인 편견이 점점 사라지고, 사회와 문화의 폭넓은 다양성에 대한 다원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바탕을 둔 이 입장은 모든 문화를 물리적인 환경, 문화적인 접촉,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의 독특한 산물로 파악했다. 이러한 견해에 뒤이어 경험적인 자료, 현지조사, 일정한 문화적·자연적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행한 가장 주요한 본보기가 된 사람은 문화사학파의 시조로 알려진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보아스였다. 1900년 초기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고전적 인류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접근법 (언어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체질인류학)의 기초를 닦았다. 보아스와 베네딕트, 미드, 사피어 등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을 통해 미국 인류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화사학파는 문화적인 자료에 기능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한 문화에 속한 여러 다양한 양식·특징·관습을 조화시켜 표현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파리대학교의 민족학연구소 설립자인 모스는 인간사회를 자기조절 할 뿐 아니라, 문화통합체계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총체적인 체계로 보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시켰다. 모스는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 영국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과 같이 이질적인 접근방법을 꾀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말리노프스키는 계속 엄격한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했으며,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두 학파는 사회사를 사회이론의 토대로 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그 현상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이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폭넓은 현상의 구조적 성격 및 대상을 알아내려 했다. 1930년대에 베네딕트가 행한 미국 남서부 인디언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문화심리학이라는 문화인류학의 파생분야가 생겨났다. 베네딕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천천히 발전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심리적인 성향'을 갖게 하는데, 구성원들은 환경적인 요소에 상관없이 문화를 통해 정해진 방향을 따라 현실을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통사회는 물론,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통합' 또는 가치체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와 인성(人性)의 상호관계는 폭넓은 연구주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형질인류학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인종이 분류되었으며, 고등 영장류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개괄이 이루어졌다. 1900년 멘델의 일반유전법칙이 재발견되고, ABO식 혈액형계가 처음 발견되면서 종(種)의 진화적인 변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형질인류학자들은 두개골 화석에서 나타난 증거를 바탕으로 약 50만 년 동안의 인류진화과정을 도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현대인류학의 관심과 기법은 물리학·생물학·행동과학·사회과학 등 폭넓은 전문분야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 덕분에 고고학적인 발굴물의 상대적인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과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여러 민족의 지리적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유럽 집시들이 원래 인도 태생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기술을 응용해 혈액형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 민족들의 가족관계,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종교적·법적인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신분석이론에 주로 바탕을 둔 심리학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다. 연구방법 인류학자는 현지조사(fieldwork, 현지연구, 현장연구, 현장조사 등으로 번역됨)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헌연구의 허구성을 통렬히 반박하며 "발로 뛰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실천적 성격을 형성하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문자사회를 연구하는 경우 1년 이상 현장 연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1년이란 기간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의 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인류학자는 먼저 해당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고 라포르(rapport), 즉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를 몇 개 월을 걸쳐서 먼저 확립하고, 실질적인 조사는 그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면 무문자사회 또는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그러나 이때 무문자사회라는 것도 반드시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있더라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사회'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자가 있는 사회나 심지어는 예컨대 서구와 같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조사는 내실적으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 등이 포함되는데,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민족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 사회 기여 모든 학문은 당대의 관념을 반영하며, 특히 인류학처럼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회와 각종 영향관계가 폭넓고도 깊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학은 인종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우월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인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의 특성이며, 국민국가 형성기에 벌어진 타자화의 과정 속에서 다른 학문들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과오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여느 학문과 달리 상대론적 세계관을 재빨리 확립하였고, 이어서 연구대상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즉 진화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문화를 현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각종 논리와 사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에는 지구촌 차원에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등함을 인식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소수민족 연구는 현대 도시 내에서의 타자로 전락한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인류학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앞장서서 각종 의제를 던지고 기존의 거대담론이 갖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각주 참고 인류학 용어집 History of Anthropological Theory, McGee and Warms 2004 Mapping Transdisciplinarity in Human Sciences Fundamental Theory of Anthropology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같이 보기 분자인류학(:en:Molecular anthropology) 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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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 커닝햄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 1949년 5월 26일 ~ )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위키의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1995년에 Portland Pattern Repository라는 최초의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전히 운영중인 그 사이트는 "사람, 프로젝트, 패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아이디어들의 비공식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패턴 언어에 대한 정보라든지, extreme programming의 방법론 등을 담고 있는 사이트이다. 커닝햄 자신은 위키의 개념을 착안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그 개념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은 하이퍼 카드(HyperCard) 스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카드를 사용해서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위키의 전신인 패턴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는 (Bo Leuf와 함께) The Wiki Way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커닝햄&커닝햄 사의 설립자이다. 그는 또한 Wyatt Software 사의 개발 책임자로서 근무했었고, Tektronix Computer Research Laboratory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워드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방법론의 일종인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공헌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힐사이드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현재 인디애나주 미시간 시티 (인디애나주)에 살고 있다. 같이 보기 위키위키웹 참고 자료 및 외부 링크 Bo Leuf, Ward Cunningham, The Wiki Way: Quick collaboration on the Web, Addison-Wesley Longmann (April, 2001) The Portland Pattern Repository의 위키 http://c2.com/cgi/wiki?WelcomeVisitors 워드의 위키 방명록 http://www.c2.com/cgi/wiki?WardCunningham 연락처 https://web.archive.org/web/20031001092602/http://www.c2.com/profile.html#contact 194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프로그래머 위키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퍼듀 대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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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저작물
자유 저작물()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 복사, 수정 및 재배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제한이 없는 작품이나 창작물, 정보를 말한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개념을 모든 저작물로 확장한 개념이다. 반의어로는 비자유 저작물로 부른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은 물론, 저작권이 있지만 위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허락된 저작물도 포함한다. 자유 저작물 라이선스 자유 저작물은 저작물의 내용을 수정한 후에도 역시 같은 제한을 가진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하는 카피레프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정한 버전은 다른 조건으로 (때로는 자유 저작물이 아닌 조건으로) 배포할 수도 있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의 대표적인 예이고, BSD 허가서는 카피레프트가 아닌 라이선스의 예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배포된 작품의 경우, "비영리"나 "변경금지" 제한이 없는 경우는 자유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비영리 혹은 변경금지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자유 저작물에 속하지 않는다. 같이 보기 퍼블릭 도메인 카피레프트 오픈 소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자유 소프트웨어 오픈 콘텐츠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외부 링크 "free cultural work"의 정의 - 공개 저작물의 정의로 널리 쓰인다. 위 문서를 번역한 "자유로운 문화적 저작물"의 정의 저작권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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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
쑹메이링(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 여사는 전부 근대 중국의 출현 동안 눈에 띈 세 명의 쑹 자매중에 막내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상하이 출신으로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진 그녀는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중국의 부유한 감리교도인 쑹 자매의 부친 찰스 존스 쑹은 미국에서 수학하였고, 쑹메이링을 조지아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어 그녀는 석사와 함께 1917년 졸업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그녀에게 청혼하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의 첫 부인과 이혼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활동적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신생활 운동을 일으키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에 오르면서 쑹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를 유능한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그녀는 넓게 여행을 다녀 중국의 곤경을 알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성원을 유도하였다. 1943년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두번째 여성이었다. 1948년 쑹 여사는 국민당의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러 미국에 갔다. 1949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설립 후, 그녀는 장제스 총통의 부인으로서 중화민국의 정치에서 현저한 역할을 하였다. 25년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고, 2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한번은 남편과 함께, 한번은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혼자였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그녀는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사망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받았다. 어린 시절 본적은 하이난섬 원창으로 상하이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하카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쑹자수는 영어로 된 이름 "찰스 존스 쑹"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성경을 출판한 목사였으며 쑨원의 친구이자 재정적 성원자였다. 쑹메이링은 6명의 자식들 중에 셋째로 그녀의 첫째 언니는 쑹아이링, 자신 위의 언니는 쑹칭링이었고, 3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쑹칭링은 후에 쑨원과 결혼하였다. 메이링의 첫째 언니 쑹아이링은 조지아주 메이컨에 있는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수학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쑹메이링은 8세의 나이에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사립 학교인 모타이어 스쿨에 입학하였다. 1913년 그녀는 자신의 언니들의 모교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대학을 시작하였으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자신의 남동생 쑹타에원에게 가까워지기 위하여 웰즐리 칼리지로 옮겼다. 1917년 6월 19일 쑹메이링은 영문학에서 주요 전공과 철학에서 소수 전공과 영예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그녀는 33명의 듀랜트 장학생들 중의 하나로서 인정을 얻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로서 그녀는 후에 미국의 관중들과 자신의 연결에 도움을 준 조지아주 말투와 함께 상당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였다. 장제스의 부인 1920년 쑹메이링은 쑨원과 결혼한 자신의 언니 쑹칭링의 저택에서 당시 쑨원을 섬긴 군사 장교 장제스를 만났다. 그녀보다 11세 연상인 장제스가 결혼하여 2명의 아들을 두고 불교 신자였던 이래 쑹메이링의 모친은 둘 사이에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장제스가 자신의 이혼에 관하여 증명을 보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약속한 후 결국 동의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의 훗날 장모에게 종교는 알약처럼 삼키지 않고 점차 흡수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에 즉시 개종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장제스가 잠시 망명에 있는 동안 그들은 1927년 12월 1일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실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따랐어도 감리교로 세례를 받았다. 부부는 아무 자식을 두지 않았다. 1925년 형부 쑨원이 서거한 후, 장제스는 중국 북부를 통치한 군벌들에 대항하는 데 북벌을 지도하였다. 쑨원의 지도 아래 중국국민당 (KMT)은 새로운 중국공산당과 협력하였다. 하지만 1927년 장제스는 중국공산당에 반대하여 공산당원들을 학살하는 데 국민당에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원들은 도시로부터 시골 지역들로 달아나 국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조직하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중국 본토를 침입하기 위하여 기초로 사용하는 데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을 설립하였다. 1936년 시안 사건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군사 지도자들은 공산당원들에 싸움을 멈추는 데 장제스를 강요하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데 국공합작을 형성하는 운동에서 시안의 외부 화청지에서 그를 납치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그들의 요구들로 동의하는 데 자신의 남편을 납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신생활 운동을 일으켜 중국 정치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 그리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이었다. 1945년 그녀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데 상승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상, 그의 전망, 그의 청각이며 특히 그의 가장 충성적인 옹호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의 대의를 촉진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과 동등하게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유산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과 서양 양쪽의 문화에서 정통한 그녀는 중국과 해외 양쪽에서 인기있게 되었다. 그녀의 두드러짐은 자신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돼야 할 기행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이끌었다. 쑹메이링은 중국을 위한 재료와 군사 성원을 위하여 수도 없이 미국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30,000명의 사람들 만큼 큰 관중들을 끌었고, 두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처음에 "올해의 남성과 아내"로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그리고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홀로였다. 남편과 부인은 둘다 국민당을 위하여 미국의 대중으로부터 돈과 성원을 모으는 데 자주 노력한 타임 잡지의 상급 편집자이자 공동 창립자 헨리 루스와 함께 좋은 조건들에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2번째 여성이 되었다. 쑹메이링 여사는 11월 장제스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는 데 카이로 회담에서 남편을 동행하였다. 3명의 정상들은 일본이 침입한 영토들의 통치를 포기하고, 타이완과 만주가 중국으로 반환되고 한국이 완전한 독립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였다. 그녀는 또한 일본에 대항하는 데 중국을 성원하고 있던 스틸웰 중장과 장제스 사이에 의사 소통을 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말과 일본의 항복 후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에서 내전으로 돌아왔다. 1948년 쑹메이링 여사는 국민당을 위한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데 미국으로 갔으나 미국은 중국의 정세에 그 비참여 정책을 변경하는 데 거부하였다. 그녀는 1949년 국공내전에서 남편의 정부의 패배까지 미국에 남아있었고 1950년 타이완에서 남편에게 가입하였다. 그녀의 언니 쑹칭링은 공산당과 편에 있으면서 중국 본토에 머물렀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설립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지속적으로 국제적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중화민국과 그 이익들을 대표하러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장려자, 영국 중국 기금 원조 연합의 명예 의장과 권리 기념 사회의 첫 명예 회원이었다. 장제스가 노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통역"의 역할을 취하여 권력을 말하였다. 25년의 세월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후의 생애 1975년 자신의 남편의 사후 쑹메이링 여사는 대중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쑹메이링 여사가 어려운 관계를 가지면서 이전의 결혼 생활로부터 태어난 자신의 장남 장징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계승되었다. 1975년 그녀는 타이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자신의 거실에 완전한 군사 예복 차림의 남편의 초상화를 간직한 롱아일랜드 래팅타운에 자신의 가족의 36 에이커 (14.6 헥타르)의 사유지에서 살았다.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오랜 동맹들 중에 성원을 강화하는 데 1988년 장징궈의 사망에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총통으로서 장징궈의 후임자 리덩후이는 그녀보다 정치에서 더욱 능숙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안, 쿠데타〉 (1937), 〈이것이 우리의 중국이다〉 (1940), 〈중국은 다시 상승해야 한다〉 (1942)와 〈확실한 승리〉 (1955)를 포함한 다수의 기사와 몇몇의 책들을 썼다. 1995년 제2차 세계 대전 50 주년의 축제와 함께 연결에서 자신의 명예에 캐피톨 힐에서 열린 축하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드문 공개적 출연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해 타이완으로 자신의 마지막 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2000년 타이완에서 열린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은 그녀가 의미있게 무소속 후보 쑹추위 (그녀와 관련 없음)에 국민당 후보 롄잔을 성원한 것에서 그녀로부터 편지를 제시하였다. 편지의 확실성은 타이완에서 위대한 토론의 주제였다. 쑹추위는 자신이 리덩후이를 성원했을 때 자신의 일찍이 그녀에 대한 가려진 비판을 위하여 앙갚음으로서 쓰여졌을 것 같은 편지의 확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해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롱아일랜드 사유지를 팔았고,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그레이시 스퀘어 아파트에서 나머지 일생을 보냈으며 자신이 지나가면서 로비를 청소한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에 의하여 둘러싸였다. 2003년 10월 23일 쑹메이링은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맨해튼 아파트 저택에서 평화롭게 사망하였다. 그녀의 시체는 뉴욕주 하츠데일에 있는 펀클리프 묘지에 일시적으로 안치되었고, 타이완 치후 대영묘에 묻힌 자신의 고인된 남편과 함께 결국적인 매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시된 의도는 한번 정치적 상태가 가능하게 만들 때 둘다 중국 본토에 묻히는 것이다. 쑹메이링에 관한 인용들 "그녀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 엘리노어 루스벨트 "직접적이고, 강력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권력을 사랑하며 홍보와 아첨을 먹는다 ... 마음대로 매력을 켤 수 있고 그것을 안다." - 조지프 스틸웰 "쑹메이링 여사는 그녀의 인생을 통하여, 그리고 특히 마지막 세기의 정의적인 투쟁 중에 미국과 가까운 친구였다. 미국인들의 세대들은 항상 그녀의 지능과 성격의 힘을 기억하고 존중할 것이다. 미국 국민들을 대표하여 나는 쑹메이링 여사의 가족 일원들과 전 세계의 많은 찬사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 조지 W. 부시 상훈 1966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 같이 보기 쑹칭링 쑹아이링 장제스 쑨원 중화민국 김구 각주 외부 링크 1943년 미 의회연설 웰슬리 대학의 전기 추도문 타임지: 올해의 남편과 부인 (1937년) 1897년 출생 2003년 사망 타이완의 여자 정치인 쑨원가 장제스가 중국의 반공주의자 중국의 감리교도 타이완의 개신교도 중국의 저술가 타임 올해의 인물 중화민국 총통 배우자 장제스의 배우자 중국국민당 당원 중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중화민국 대륙 국민정부 초기 시대 인물 중국 대륙 본토계 타이완인 하카인 국공 내전 관련자 웰즐리 대학교 동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중국계 미국인 상하이시 출신 중국의 백세인 타이완의 백세인 훈정시대 제1계 입법원 입법위원 훈정시대 제2계 입법원 입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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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찰스 존 허펌 디킨스(, , 1812년 2월 7일 - 1870년 6월 9일)는 영국인 작가이자 사회 비평가이다. 그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 속의 인물을 만들어냈고,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소설가이다. 화가 시모어(Robert Seymour)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곡 소설 《The Pickwick Papers(원제: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픽윅 보고서)를 분책(分冊)으로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으로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을 비롯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 생애 어린시절 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존 디킨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배로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1812년 2월 7일 태어났다. 찰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갇히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디킨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디킨스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글을 쓰다 디킨스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아침 신문》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보즈’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중에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된다. 세상을 떠나다 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6월 9일 58세의 나이로 개즈 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소설 작품 사회비판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몇 작품 든다면,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Little Dorrit》은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명작이다. 디킨스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기록을 작품으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였다. 연극 디킨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한 수단으로 연극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에 녹아 있다. 디킨즈 자신도 자신의 작품의 장면들을 대중들 앞에서 매우 자주 낭독하여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공연 투어를 통해 영국 전역과 미국을 널리 여행했다. 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 —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 — 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 중의 몇몇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그의 작품중에는 유령이 등장하거나, 유령 이야기가 나열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탄절 벨]에는 일곱 명의 유령이 등장하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스크루지가 묘사된다. 비판 그와 동시대 작가 중 몇몇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반유대주의로 비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의 패긴이라는 인물은 메부리코와 탐욕스러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디킨즈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에 살았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그러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악역인 스크루지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혼혈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연민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실업자, 성 노예자 등의 인물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볼 수 있다. 성찰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 찰스 디킨스는 가난에 대한 경험, 부의 경험도 누려본 작가로서 둘에 대한 비판을 수월하게 해내었다. 하지만 요즘에 화두에 오르는 매체에 의하면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할 때에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루머일 뿐, 찰스 디킨스의 디킨지안(dickensian) 소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문체 디킨스는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 멜로드라마, 감상 소설 등에서 다양한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영국 전기 작가 피터 애크로이드는 디킨스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아리비안 나이트’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중심은 풍자와 아이러니다. 코미디도 피카레스크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로렌스 스턴, 헨리 필딩, 토비아스 스몰렛이 주축이 된 영국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을 이끌었다. 필딩의 ‘기아 톰 존스의 이야기(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는 디킨스를 포함한 19세기 후반 소설가들에게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디킨스는 필딩의 책을 유년시절에 읽고 그의 아들에게 ‘헨리 필딩 디킨스’ 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디킨스의 문체는 언어적 창의성이 풍부하다. 캐리커처에 재능이 있는 디킨스는 풍자를 실감나게 잘한다. 초기 평론가들은 디킨스가 예리하고 실용적인 감각으로 유쾌한 삶을 포착해내는 점이 로코코 시대의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가스와 다르게 디킨스는 동시대의 인기 있는 극장의 관습을 반영하여 내용을 다양한 계층 언어로 표현하였고 이에 극찬을 받았다. 디킨스는 독자들을 사로잡을 등장인물의 이름을 창작해는 것에 집중하였는데 독자들이 연관성을 느끼고, “우화적 자극”으로 소설의 의미를 주제에 담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예시들 중 하나를 가져오자면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에서의 등장인물 ‘에드워드 머드스톤(Edward Murdstone)’은 쌍둥이가 암시한 살인(murder)과 돌(stone)처럼 차가운 냉기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디킨스의 문체는 환상과 현실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디킨스가 영국의 귀족적 속물 근성을 풍자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 로 불렀다) 환상의 비행이라고 극찬 받은 비유에는 고아를 주식/배당금에, 사람들을 줄다리기에, 저녁 만찬 손님을 가구에 비유한 것이 있다. 디킨스는 삽화가들에게 전체적 스토리를 먼저 제공하여 등장인물 및 설정을 그가 생각한대로 정확히 그려 낼 수 있게 했다. 삽화가에게 1달분의 삽화 계획을 미리 준 후 디킨스는 글을 썼다. 책 “Our Mutual Friend”의 삽화가인 마커스 스톤은 디킨스를 회상하며 그가 “한 등장인물의 아주 작은 특징과 내가 창작해 낸 인물의 생애를 세세하게 묘사할 준비”를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주요 작품 목록 《Sketches by Boz》(1836) 《픽윅 보고서》(1836)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 《니콜라스 니클비》(1838-1839)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 《Barnaby Rudge》(1841) 《크리스마스 캐럴》(1843) 《Martin Chuzzlewit》(1843-1844) 《Dombey and Son》 (1846-1848)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 《A Child's History of England》(1851-1853) 《황폐한 집》(1852-1853) 《어려운 시절》(1854) 《Little Dorrit》(1855-1857) 《두 도시 이야기》(1859) 《위대한 유산》(1860-1861) 《Our Mutual Friend》(1864-1865)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1870) 각주 외부 링크 디킨즈에 대한 페이지 작품 원문과 다른 관련 페이지들로의 링크가 실려 있다. 디킨즈에게 바쳐진 또다른 페이지 디킨즈 가문의 가계도 디킨즈의 문학 1812년 출생 1870년 사망 영국의 소설가 포츠머스 지폐의 인물 잉글랜드의 성공회교도 19세기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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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오피스
오픈오피스(, OpenOffice.org)는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피스 제품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2003 포맷을 비롯한 다양한 포맷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교환을 위한 고유 파일 포맷으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을 지원한다. 오픈오피스는 스타디비전이 개발하고 1999년 8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지금의 오라클)가 인수한 스타오피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높은 품질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2000년 7월에 스타오피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다. 이후 오픈오피스 커뮤니티(OpenOffice.org)에서 오픈오피스 개발 및 관련 활동을 책임지고 있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오피스 커뮤니티에 소스 기여/자금 기여/인력 기여 등을 통해 오픈오피스 개발과 활동을 지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그리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그렇게 개발되는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전용 구성 요소를 추가한 스타오피스를 판매하였다. 그 뒤 현재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관리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아파치 라이선스 2.0을 따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역사 원래 독일 회사인 스타디비전이 스타오피스라는 독점 소프트웨어로 개발했으나 1999년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코드를 인수했다. 1999년 8월에는 스타오피스 버전 5.2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2000년 7월 19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스타오피스에 대한 오픈 소스 개발 커뮤니티를 형성할 의도로 LGPL과 SISSL에 따라 소스 코드를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이름은 OpenOffice.org이며, 2000년 10월 13일에 공식 웹 사이트가 열렸다. 2003년 초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목표로 버전 2.0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 확대, 성능 개선, 속도 향상과 메모리 사용량 감소, 폭넓은 스크립팅 지원, 그놈과의 향상된 통합, 보고서, 양식, 쿼리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론트엔드, 새로운 내장 SQL 데이터베이스, 향상된 사용성. 베타 버전은 2005년 4월에 출시되었다. 2005년 9월 2일, 썬은 SISSL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오픈오피스 커뮤니티 협의회는 다시는 오픈오피스를 이중 라이선스로 제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올 버전은 LGPL만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2005년 10월 20일, 오픈오피스 2.0이 공식적으로 출시되었다. 버전 2.0이 출시된 지 8주 후에 업데이트 버전인 오픈오피스 2.0.1이 출시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버그 수정과 새로운 기능이 포함되었다. 오픈오피스는 2.0.3 버전부터 업데이트, 기능 향상, 버그 수정을 배포하기 위한 배포 주기를 종전의 18개월에서 3개월로 변경했다. 현재, 새로운 기능을 포함한 버전(feature release)은 그 사이에 나오는 버그 수정 버전(bug fix release)과 번갈아 가며 6개월마다 배포된다. 스타오피스 썬은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한 상용 독점 소프트웨어 스타오피스를 위해 오픈오피스 개발을 보조하고 있다. 스타오피스는 버전 6.0 이후로 오픈오피스 소스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추가 독점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추가 글꼴. Adabas D 데이터베이스. 추가 문서 템플릿. 클립 아트. 아시아 버전을 위한 정렬 기능. 추가 파일 필터. 마이그레이션 평가 도구 (기업 버전). 매크로 마이그레이션 도구 (기업 버전). 구성 관리 도구 (기업 버전). 오픈오피스는 OpenOffice.org XML 파일 포맷을 포함하여 스타오피스의 많은 기능을 물려받았는데, 이 포맷은 버전 2에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 기능 선언문을 보면, 오픈오피스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동작하고, 오픈 컴포넌트에 기반을 둔 API와 XML에 기반을 둔 파일 형식을 통해서 모든 기능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하는 오피스 제품군을 만드는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경쟁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비슷한 외관과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이 사용하는 파일 형식 중 대부분을 읽고 쓸 수 있다. 이는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이전 버전 파일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열지 못하는 손상된 새 버전의 파일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 매킨토시 워드 파일(MCW)은 열 수가 없다. 플랫폼 오픈오피스는 리눅스, 윈도우, OS X, 솔라리스, FreeBSD, OpenVMS, IRIX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은 윈도우, 리눅스, 솔라리스이다. 오에스 텐용 버전의 경우 2.x버전의 경우 X11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제한적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3 버전부터는 OS X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에서 네이티브로 작동하는 향상된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로 OS X 전용으로 개발된 네오오피스도 있다. 네오오피스는 오픈오피스에서 떨어져 나간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오피스 2.X 시절부터 아쿠아 버전의 오픈오피스를 제공하였다. 구성 프로그램 오픈오피스는 최신 오피스 제품군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공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각 프로그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 요소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구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퀵스타터 윈도와 리눅스에서 컴퓨터 시작 시 구동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시작될 때 오픈오피스를 위한 핵심 파일들과 라이브러리들을 로드하여 나중에 제품군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빨리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픈오피스 응용 프로그램들의 시작 시간은 1.0 버전의 제품군에서 공통된 불만이었으며, 퀵스타트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버전 2.2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매크로 기록기 사용자의 동작을 기록하여 이를 OOoBasic(오픈 오피스 오브젝트 베이직)을 이용하여 재생함으로써 작업의 자동화에 도움을 주는 다이알로그 프로그램으로 매크로 기록기는 다이알로그 인터페이스외에도 오픈오피스베이직의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제공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프로그래밍언어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매크로 기록기는 오픈오피스베이직으로 소스코드에의한 직접적인 사용방법도 가능하다. 내장된 오픈오피스(오브젝트)베이직(OpenOfficeBasic)이 기본으로 구동되지만 파이썬, 빈 쉘(Bena Shell), 자바 스크립트등도 연동시킬수있다. 윈도에서는 이들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설치할 수는 있어도 별개로 다운로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리눅스 배포판에서는 이 구성 요소들을 패키지로 쪼개서 배포하며 따로따로 다운로드하고 설치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스타오피스 베이직에 기초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응용 프로그램용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BA)과 비슷하다. 오픈오피스 2.0 노벨 에디션은 추가로 마이크로소프트 VBA 매크로를 지원하며, 이 기능은 주 버전에서도 곧 통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라이터(Writer)와 칼크(Calc) 응용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다. 이는 서브루틴이나 매크로를 부르는 함수로 쓰이며, 각 매크로는 한 문단에서 단어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특히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지 않은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유용하다. 오픈오피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 베이스는 라이터를 이용해 리포트와 폼을 만들기 때문에, 베이스 또한 오픈오피스 베이직으로 프로그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그래밍작업은 같이 제공되는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이용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 예 다음은 라이터(Text Document)에서 다수의 매쓰(Fomula)오브젝트들을 삽입한후 "글자크기,폰트,가운데정렬"을 위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이다. REM ***** BASIC ***** Sub Main embeddedObjects = ThisComponent.getEmbeddedObjects() elementNames = embeddedObjects.getElementNames() for i=0 to UBOUND(elementNames) element = embeddedObjects.getByName(elementNames(i)).Model if (element.supportsService("com.sun.star.formula.FormulaProperties")) then element.BaseFontHeight = 11 element.FontNameVariables= "Noto Serif CJK KR,Italic" element.FontNameFunctions = "나눔명조" element.FontNameNumbers= "Noto Serif CJK KR" element.Alignment =com.sun.star.style.TabAlign.CENTER endif next i ThisComponent.reformat() End Sub API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퍼티를 구성하는 API는 사용자가 거의 대부분의 오픈오피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픈오피스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버전의 스타오피스의 전통을 유지하므로 여전히 API 참조에서도 스타오피스의 프레임을 찾아볼 수 있다. 탁상출판 탁상출판(DTP)용도를 완전히 지원한다. 다양한 출판물의 사이즈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며, 이미지 뿐만아니라 그래픽SVG등과 수학등의 수식을 삽입하는 출판물에 활용도가 높다. 파일 형식 오픈오피스는 ISO/IEC 표준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을 만들었고, 이를 기본 고유 형식으로 사용한다. 또한, 많은 예전 전용 형식들(예: 워드 퍼펙트, 로터스 소프트웨어, MS 웍스, 리치 텍스트 형식)을 읽을 수 있으며, 일부는 쓰기도 가능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형식으로 일부 버전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보다 오히려 더 잘 읽어들인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피스 오픈 XML을 쓰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응하여, 노벨은 오픈오피스를 위한 오피스 오픈 XML을 플러그인을 자유로운 BSD 라이선스 조건으로 내놓았는데(GNU GPL 그리고 LGPL 라이선스 라이브러리들과 병행하여), 이는 OpenOffice.org 프로젝트 안으로 포함되도록 제공될 것이다. 이는 오픈오피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만들어진 .docx 파일을 읽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개발 개요 오픈오피스 API는 유니버설 네트워크 오브젝트(UNO)로 알려진 컴포넌트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CORBA와 같은 인터페이스 서술 언어에서 정의된 광범위한 인터페이스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용되는 문서 파일 형식은 XML 형식과 여러 가지 내보내기/가져오기 필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픈오피스가 읽어들이는 모든 외부 형식들은 내부 XML 표현을 통해 서로 변환된다. XML을 디스크에 저장할 때에는 압축을 사용하여 똑같은 이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문서들보다 더 작다. 버전 1.0에서 문서 저장을 위해 쓰던 고유 파일 형식은 OASIS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 표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는 버전 2.0에서는 기본 파일 형식이 되었다. 제품군 개발 버전은 OpenOffice.org 웹 사이트의 개발자 존에서 몇 주마다 한 번씩 나오고 있다. 이 배포 버전들은 새로운 특징을 테스트해보고 싶거나 단순히 앞으로 있을 변경들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 이들은 실무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고유 데스크톱 통합 오픈오피스 1.0은 운영되는 플랫폼을 위해서 고유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의 룩 앤드 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버전 2.0을 시작하면서, 오픈오피스는 고유 응용 프로그램들과 더 잘 어울리고 사용자들에게 더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플랫폼에 걸쳐 있는 고유 위젯 툴키트, 아이콘, 그리고 폰트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적용했다. 특히 GNOME과 KDE 양쪽과 통합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나 맥 OS X에서 뚜렷한데, 표준 유저 인터페이스가 윈도나 X-11 기반 데스크톱 환경 어느 쪽과는 눈에 보이게 많이 다르며, 대부분 오픈오피스 개발자와는 친숙하지 않은 프로그래밍 툴킷을 쓰라고 요구한다. 오에스 텐에서 오픈오피스를 쓸 수 있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오픈오피스 Mac OS X (X11) 공식 버전은 X11.app 또는 XDarwin을 설치하여 달라고 요구하며, 잘 테스트된 유닉스 버전에 딱 들어맞는 포팅이다. 이는 기능으로는 유닉스 버전과는 동등하며, 유저 인터페이스는 그 버전의 룩 앤드 필과 닮았다. 예를 들어 응용 프로그램은 화면 상단의 오에스 텐 메뉴 대신에 자체 메뉴를 사용한다. 이는 또한 오픈오피스를 위한 X11 형식의 시스템 글꼴이 필요한다(이는 응용 프로그램 설치 도중에 할 수 있다.). (X11 오픈오피스는 2.X 버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다.) 오픈오피스 아쿠아 오픈오피스 아쿠아는 X11 오픈오피스를 대체하여 현재에는 정식 버전의 맥용 오픈오피스 지칭한다. 그러므로 오픈오피스 아쿠아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다른 프로젝트들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프로젝트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오피스와 네오오피스가 있고, 그룹웨어 솔루션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보완 프로그램도 있다. 네오오피스 이는 독자적인 포팅으로 OS X의 아쿠아 유저 인터페이스를 자바, 카본, 그리고 점점 더 비중이 높아지는 코코아 툴킷을 써서 통합을 구현하였다. 네오오피스는 OS X UI 표준에 꽤 가까우며, OS X에 설치된 글꼴과 프린터들을 직접 사용한다. 이는 공식 오픈오피스 X11 릴리즈보다는 뒤처져서 발표되는데, 개발팀이 규모가 작고 유저 인터페이스를 포팅하는 데에 쓰는 기술 개발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OpenGroupware.org OpenGroupware.org는 OpenOffice.org 문서, 캘렌더, 주소록,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그리고 블랙 보드를 공유할 수 있고 다른 그룹웨어 응용 프로그램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OOExtras에서는 문서 템플릿과 쓸모 있는 추가물들을 만들고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 외부 프로그램에서 OpenOffice.org 문서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펄 확장기능들을 CPAN에서 구할 수 있다. 이들 라이브러리는 OpenOffice.org API를 쓰지 않는다. 이들은 펄 표준 압축/압축 풀기, XML 접근, 그리고 UTF-8 인코딩 모듈을 이용해서 OpenOffice.org 파일을 직접 읽고 쓴다. 휴대용 프로그램 “휴대용 OpenOffice.org”라고 부르는 OpenOffice.org 배포판은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서 제품군을 돌리고자 설계되었다. OxygenOffice 프로페셔널 OpenOffice.org보다 향상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칼크에서 응용 프로그램용 비주얼 베이직(VBA)매크로를 돌릴 가능성(테스트용) 임프레스를 위한 다중 모니터 지원 향상된 칼크 HTML 내보내기 베이스를 위한 향상된 액세스 지원 보안 수정 향상된 성능 향상된 컬러 팰릿 향상된 도움말 메뉴, 추가 사용자 매뉴얼, 그리고 초심자를 위한 확장된 팁들 옵션으로 다음이 제공되며, 개인과 업무용으로 무료로 쓸 수 있다. 클립아트와 사진으로 이루어진 3,200개가 넘는 그래픽. 다양한 템플릿과 보기 문서 90개가 넘는 공짜 글꼴 OOoWikipedia와 같은 추가 도구 확장 기능 버전 2.0.4부터, OpenOffice.org는 모질라 파이어폭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기능을 지원한다. OpenOffice.org 서지 프로젝트는 강력한 참고 문헌 관리 소프트웨어를 이 제품군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주요 추가물들은 2007년 후반이나 2008년 중반에 나올 표준 OpenOffice.org 릴리즈에 포함되기 위한 후보로 정해져 있으나, 프로그래머들의 선호도에 따라서 더 늦어질 수도 있다. 보안 오픈오피스는 보안 팀을 따로 가동하고 있으며, 보안 사이트인 Secunia는 2007년 9월 현재까지 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패치 되지 않은 보안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카스퍼스키 연구소에서는 오픈오피스에 존재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는 오픈오피스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는 없다. 프랑스 국방성의 비공개회의에서, 매크로에 관련된 보안 문제가 제기되었다. 오픈오피스 개발자들은 이 폭로에 가깝게 발표된 취약점이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서 발표되지 않았으며, 국방부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추측되는 취약점에 대해서는 개발자들과 연구원들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시장 반응 시장 점유율 오픈오피스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 미러 사이트, 피어투피어 네트워크, CD, 리눅스 배포판 등 다양한 경로로 배포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픈오피스 측에서는 표본 조사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전체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픈오피스와 스타오피스는 2004년에는 대형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14%를, 중소규모 비즈니스 시장에서는 2005년에 19%를 확보했다. 오픈오피스 웹 사이트는 2009년 10월 28일에 다운로드 수 1억 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오픈오피스를 대규모로 쓰는 사용자는 싱가포르 국방부, 그리고 영국의 브리스톨 시청 등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픈오피스가 소프트웨어 조달을 합리화시키면서도 안정되고, 기록 보관을 위한 표준 파일 형식을 원하는 지역과 국가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리눅스를 쓰는 인도 대법원과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은 완전히 오픈오피스에 의존하고 있다. 2005년 10월 4일, 선과 구글은 전략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합의 일부로써, 선은 구글 검색 바를 오픈오피스에 추가하고, 선과 구글은 공동 마케팅 활동은 물론 공동 연구 개발을 약속했으며, 구글은 오픈오피스 배포를 도울 것이다. 스타오피스 말고도,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업 제품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SISSL 라이선스로 개발되었다(오픈오피스 2.0 베타 2까지 유효하다.). 대체로 이들은 지역 특화 또는 틈새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음성 인식 모듈, 자동 데이터베이스 연결, 또는 더 나은 CJK 지원과 같은 전용 애드-온이 들어 있다. 자바 논란 예전에 오픈오피스는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바 런타임 환경에 의존성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이 자바 창시자이자 오픈오피스의 선도 후원자라는 사실은 이 기술 채택에 숨은 뜻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버전 1은 몇몇 보조 기능을 위하여 현재 사용자 컴퓨터에 있는 자바 런타임 환경(JRE)에 의존하지만, 버전 2에서는 자바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 제품군은 JRE를 요구한다. 그에 대응하여, 레드햇은 자유 자바 구현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늘렸다. 레드햇의 페도라 코어 4(2005년 6월 13일 출시)는 GCJ와 GNU Classpath에서 동작하는 오픈오피스 버전 2를 포함하고 있다. 기능 개선 1.1: 문서를 PDF 형식과 SWF 형식으로 출력할 수 있다. 2.0: 공개 표준안인 OpenDocument 형식을 기본 포맷으로 사용한다. 한글 97의 hwp 형식을 읽을 수 있다. 한국어화 오픈오피스의 한국어화 작업은 처음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의뢰로 미지리서치가 스타오피스를 한국어화하고 그 결과물을 오픈오피스에 반영하였다. 이후 한국어판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지역화 팀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2008년 4월 배포된 2.4판 이후부터는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어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리눅스, OS X에서 사용할 수 있다. 빌드 넘버 635: 한글을 입력할 수 있고, 메뉴가 조금 한국어화되었다. 도움말은 아직 영문이다. 1.0: 대부분의 도움말이 한국어화되었으며 모든 메뉴가 한글이다. 1.1: 아이콘까지 한국어화되었고, 번역된 문장이 더 자연스럽다. 2.0: 한/글 3.0 및 97 파일 포맷 지원. 워디안 계열의 신형 파일 포맷은 지원되지 않는다. 2.1: 한자 키를 눌러서 입력기를 통한 한자 변환이 가능하다. 2.4.0: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3.0.0: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도움말의 한국어화가 100% 완료되었다. 3.1.0: 안티 앨리어싱을 비롯한 몇 가지 기능개선이 이루어졌다. 3.2.0: 라이터의 OOXML 불러오기 호환성 개선 등의 몇 가지 추가적인 기능 개선이 이루어졌다. 4.1.2: 오픈 소스 라이선스의 나눔글꼴이나 본고딕, 본명조 등의 한글 사용이 문서작성 프로그램에서 뿐만아니라 오브젝트 삽입내부에서도 안정적이다. 같이 보기 리브레 오피스 티맥스오피스 각주 외부 링크 오픈오피스 홈페이지 한글 오픈오피스 프로젝트 오픈오피스 한국어 커뮤니티 오픈오피스 문서 프로젝트 OpenOffice.org Portable — 무설치 자유 소프트웨어 사무용 소프트웨어 2002년 소프트웨어 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자바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크로스 플랫폼 자유 소프트웨어
751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D%94%BC%EC%8A%A4%20%EC%A0%9C%ED%92%88%EA%B5%B0
오피스 제품군
업무용 응용 소프트웨어 제품군()은 워드 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 스프레드시트 등의 응용 소프트웨어의 모음이다. PC/Mac용 오피스 소프트웨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한컴 오피스 리브레 오피스 (우분투 리눅스 기본 오피스) 오픈오피스 스타 오피스 IBM 로터스 심포니 아이워크 폴라리스 오피스 모바일/온라인 오피스 소프트웨어 씽크프리 오피스 폴라리스 오피스(:en:Polaris Office) 네이버 오피스 네이버 워드 네이버 슬라이드 네이버 셀 같이 보기 오픈도큐먼트 소프트웨어 외부 링크 개인 정보 관리자 사무용 소프트웨어
753
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B%88%85%EC%8A%A4
리눅스
리눅스()는 1991년 9월 17일 리누스 토르발스가 처음 출시한 운영 체제 커널인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둔 오픈 소스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 계열이다. 리눅스는 일반적으로 리눅스 배포판 안에 패키지 처리된다. 배포판에는 리눅스 커널과 지원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라이브러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다수가 GNU 프로젝트에 의해 제공된다.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은 배포판 이름에 "리눅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GNU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에 일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GNU/리눅스(GNU/Linux)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저명한 리눅스 배포판에는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가 포함된다. 상용 배포판에는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RHEL), 수세 리눅스 엔터프라이즈 서버가 포함된다. 데스크톱 리눅스 배포판에는 X11이나 웨이랜드 등의 윈도잉 시스템, 그리고 그놈, KDE 플라스마 등의 데스크톱 환경이 포함된다. 서버용 배포판은 그래픽스 기능이 제되어 있거나 LAMP 등의 솔루션 스택이 포함될 수 있다. 리눅스는 자유로이 재배포가 가능하므로 누구든지 어떠한 목적으로든 배포판을 만들 수 있다. 리눅스는 처음에는 인텔 x86 아키텍처에 기반한 개인용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나 그 뒤로 기타 운영 체제 외에 더 많은 플랫폼으로 이식되었다. 스마트폰에 안드로이드(리눅스 기반임)가 우세해지면서 리눅스는 또한 모든 범용 운영 체제 가운데 가장 많은 설치 기반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데스크톱 컴퓨터 중 대략 2.3%만이 리눅스를 사용하지만, 리눅스 커널 기반 크롬 OS를 구동하는 크롬북은 미국 K-12 교육 시장을 지배하며 미국 내 300달러 미만 노트북 컴퓨터 가운데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리눅스는 서버 시장에서 주도적인 운영 체제이며(상위 100만 대 웹 서버 운영 체제 중 96.4% 이상이 리눅스이다), 메인프레임 컴퓨터 등의 기타 빅 아이언 시스템을 주도하며 TOP500 슈퍼컴퓨터에 쓰이는 유일한 운영 체제이다.(2017년 11월 이후로 모든 경쟁자를 점차적으로 제거하였다). 리눅스는 또한 일반적으로 운영 체제가 펌웨어로 빌드되면서 시스템에 높은 수준으로 맞추어진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도 동작한다. 여기에는 라우터, 자동화 컨트롤, 스마트 홈 기술(예: 구글 네스트), 텔레비전(삼성전자, LG전자의 스마트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자동차(예: 테슬라,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현대자동차, 도요타는 모두 리눅스에 의존함),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비디오 게임기, 스마트워치가 포함된다. 팰컨 9와 드래곤 2의 항공 전자기기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버전을 사용한다. 리눅스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협업의 매우 저명한 예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스 코드는 누구든지 GNU GPL 등 개별 라이선스에 따라 상업적으로나 비상업적으로 이용, 수정, 배포가 가능하다. 턱스 턱스는 리눅스의 공식 마스코트이다. 통통한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96년 래리 유잉이 만들었다.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펭귄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는 리눅스 커널의 작성자 리누스 토르발스에게서 나왔다. 역사 선구자 유닉스 운영 체제는 1969년 미국 AT&T의 벨 연구소에서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러스 매클로이, 조 오사나(Joe Ossanna)에 의해 착안되어 구현되었다. 1971년 처음 출시된 유닉스는 온전히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어셈블리어로 작성하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1973년 주된 선구자적 접근으로 데니스 리치가 일부 하드웨어 및 입출력 루틴을 제외하고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재작성하였다. 유닉스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구현체의 이용이 가능하게 되면서 다른 컴퓨터 플랫폼으로 이식이 더 용이해졌다. 유닉스의 컴퓨터 사업 진입을 금지하던 초기 미국의 독점금지법으로 인해 AT&T는 운영 체제의 소스 코드를 모든 요청자에게 라이선스할 필요가 있었다. 1984년, AT&T는 벨 연구소와 분리되어 자유 라이선스를 요구하는 법적 책무를 면제하였고 벨 연구소는 유닉스를 사유 제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사용자는 유닉스 수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1983년 리처드 스톨먼이 시작한 GNU 프로젝트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구성된 "완전한 유닉스 호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드는 목표를 두었다. 작업은 1984년 시작되었다. 나중에 1985년, 스톨먼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시작하였고 1989년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PL)를 작성하였다. 1990년대 초, 운영 체제에 필요한 프로그램들 다수(예: 라이브러리, 컴파일러, 문서 편집기, 유닉스 셸, 윈도 시스템)가 완성되었으나 장치 드라이버, 데몬, GNU/허드라는 이름의 커널 등 저급(low-level) 요소들이 정체되거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1991년 당시 GNU 커널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자기 스스로 개발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법적 문제로 인해 1992년까지 출시되지 못했음에도 NetBSD, OpenBSD, FreeBSD의 기원이 된 386BSD의 개발이 리눅스의 개발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또, 토르발스는 386BSD가 당시 이용 가능했더라면 아마 리눅스를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언급하였다. 미닉스는 컴퓨터 과학 교수 앤드루 타넨바움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운영 체제의 원리를 학습하고자 한 학생들과 다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소형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로서 1987년 출시되었다. 미닉스의 소스 코드 전체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음에도 라이선스 조항으로 인해 2000년 4월 라이선스 변경이 될 때까지 자유 소프트웨어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개발 1991년, 헬싱키 대학교의 재학생이었던 토르발스는 운영 체제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교육용으로만 국한되었던 미닉스 라이선스에 실망한 토르발스는 궁극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되었던 자신만의 운영 체제 커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토르발스는 미닉스에서 리눅스 커널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미닉스용으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 또한 리눅스에서 사용되었다. 나중에 리눅스는 성숙하여 더 나아가 리눅스 커널 개발이 리눅스 시스템에서 이루어졌다. GNU의 응용 프로그램들 또한 모든 미닉스 구성 요소를 대체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숙한 운영 체제에 GNU 프로젝트에 자유로이 이용 가능한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GNU GPL로 라이선스된 코드는 동일하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로 출시하는 한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재사용이 가능하였다. 토르발스는 상용 재배포를 금지하였던 자신의 오리지널 라이선스로부터 GNU GPL로의 전환을 시작하였다. 개발자들은 GNU 구성 요소들을 리눅스 커널로 통합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온전히 기능하는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명칭 리누스 토르발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Freax로 호칭하길 원했는데 이는 free, freak, x(Unix의 암시)의 혼성어였다. 그가 시스템에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동안 프로젝트의 makefile 중 일부에 약 6개월 동안 Freax라는 이름이 포함되었다. 토르발스는 이미 이 이름을 "리눅스"(Linux)로 고려하였으나 처음에는 이 이름이 너무 독선적인 단어로 일축하였었다. 개발을 용이케 하기 위해 파일은 1991년 9월 FUNET의 FTP 서버(ftp.funet.fi) 에 업로드되었다. 헬싱키 공과 대학교(Helsinki University of Technology, HUT)의 토르발스의 동업자 아리 렘케(Ari Lemmke)는 당시 자발적인 FTP 서버 관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Freax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토르발스와 상의 없이 서버상에서 Linux로 명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토르발스는 리눅스의 명칭 사용에 동의하였다. 토르발스가 쓴 뉴스그룹 게시물에 따르면, "Linux"라는 용어는 ( -리눅스-로 발음하는 것이 좋겠다고 언급되었다. 어떻게 리눅스가 발음되는 것이 좋을지를 추가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커널 소스 코드에 오디오 가이드()를 포함하였다. 상업적, 대중적 활용 호비스트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지 않고 운영 환경에 리눅스를 채택하는 일은 1990년대 중반 슈퍼컴퓨팅 커뮤니티에서 처음 불붙기 시작했는데, NASA(미국 항공 우주국) 등의 단체들이 점차 비용이 많이 드는 자신들의 기계들을 리눅스 구동의 저렴한 일상 컴퓨터 클러스터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델과 IBM, 이후 휴렛 팩커드가 데스크톱 운영 체제를 독점하던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해방되고자 리눅스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리눅스 시스템은 임베디드 시스템에서 사실상 모든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컴퓨팅 전반에 사용되며, 대중적인 LAMP 애플리케이션 스택 등 서버 설치본에 자리잡았다. 가정과 기업 내 리눅스 이용은 증가되고 있다. 리눅스 배포판은 넷북 시장에서 대중화되기도 했으며 수많은 장치들에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미리 설치되었고 구글은 넷북용으로 설계된 자신들의 크롬 OS를 출시하였다. 소비자 시장에서 리눅스의 가장 위대한 성공은 모바일 장치 시장으로 볼 수 있는데,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가장 지배적인 운영 체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태블릿, 그리고 최근에는 웨어러블에서도 매우 대중화되었다. 리눅스 게이밍은 리눅스 지지를 표방하고 자체 게이밍 지향 리눅스 배포판인 스팀OS를 출시한 밸브의 성장과 함께하고 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또한 다양한 지역, 그리고 브라질 연방 정부 등 국가 정부들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의 개발 그레그 크로하트맨(Greg Kroah-Hartman)은 리눅스 커널의 주도적인 유지보수자로서 개발을 가이드하고 있다. 윌리엄 존 설리반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이사로서 GNU 구성 요소들을 지원하고 있다. 개인과 기업들은 GNU가 아닌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을 개발한다. 이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은 커널 모듈과 사용자 애플리케이션, 라이브러리를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리눅스 벤더들과 커뮤니티들은 커널, GNU 구성 요소, GNU가 아닌 구성 요소를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형태로 추가적인 패키지 관리자와 결합하여 배포한다. 설계 수많은 오픈 소스 개발자들은 리눅스 커널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된 것임에 동의한다. 토르발스는 유닉스의 설계가 발판 역할을 하였음에도 리눅스는 수많은 돌연변이와 함께 성장했으며 돌연변이는 무작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DNA의 알파 입자보다 더 빠르고 더 자발적인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이먼드는 리눅스의 혁명적인 면모를 기술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 리눅스 이전에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소규모 단체들에 의해 주의깊게 설계되었으나 리눅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거의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해서만 조직화되는 상당한 수의 자발적 이용자들에 의해 무심코 해킹되었다. 품질은 엄격한 기준이나 독재적으로 관리되지 않았고 수일 동안 사용자 수백 명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매주 릴리스하는 단순한 전략을 취함으로써 개발자들이 도입한 돌연변이의 빠른 다윈 선별 정렬 방식을 만들어냈다. 리눅스 기반 시스템은 모듈 방식의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며 1970년대와 1980년대 중 유닉스 안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기초적 설계 대부분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스템은 프로세스 제어, 네트워킹, 주변기기 접근, 파일 시스템을 관리하는 모놀리식 커널을 사용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커널에 직접 통합되어 있거나 시스템 실행 중에 로드되는 모듈로 추가된다. GNU 유저랜드는 리눅스 커널에 기반한 대부분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안드로이드가 바로 주목할만한 예외이다. 프로젝트의 C 라이브러리의 구현체는 커널 사용자 공간 인터페이스에 필수적인 리눅스 커널의 시스템 호출의 래퍼로서 동작하며 툴체인은 리눅스 커널을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컴파일러 모음집이며 코어유틸리티는 수많은 기초적 유닉스 도구들을 구현한다. 이 프로젝트는 또한 저명한 CLI 셸인 Bash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리눅스 시스템에 쓰이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는 X 윈도 시스템 구현체 위에 빌드된다. 근래에 리눅스 커뮤니티는 X 윈도 시스템 대신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서 웨이랜드 사용을 추구한다. 수많은 기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리눅스 시스템에 기여한다. 설치되는 리눅스 시스템 구성 요소는 다음이 포함된다: 부트로더(예: GNU GRUB, LILO, SYSLINUX, Gummiboot): 리눅스 커널을 컴퓨터의 주 메모리로 로드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켜진 다음 펌웨어 초기화가 수행된 이후 실행된다. init 프로그램(예: 전통적인 sysvinit과 더 새로운 systemd, OpenRC, Upstart): 리눅스 커널에 의해 시작되는 최초의 프로세스이며 프로세스 트리의 루트에 위치해 있다. 즉, 모든 프로세스는 init을 통해 실행된다. 시스템 서비스와 로그인 프롬프트(그래픽 또는 터미널 모드) 등의 프로세스를 시작한다.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 실행 중인 프로세스가 사용할 수 있는 코드를 포함한다. ELF 포맷 실행 파일을 사용하는 리눅스 시스템에서 동적 라이브러리 이용을 관리하는 동적 링커의 이름은 ld-linux.so이다. 사용자들이 직접 소프트웨어를 컴파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성되어 있다면 헤더 파일 또한 설치된 라이브러리의 인터페이스를 기술하기 위해 포함된다. 리눅스 시스템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 GNU C 라이브러리(glibc) 외에 SDL, 메사 등 그 밖의 수많은 라이브러리들이 존재한다. C 표준 라이브러리는 컴퓨터 시스템에서 C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라이브러리이며, 표준이 되는 GNU C 라이브러리라 할 수 있다.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musl, EGLIBC(데비안에 사용되는 glibc 포크), uClibc(uClinux용으로 설계됨) 등 다른 대안들이 개발되었으나 마지막 2개는 더 이상 유지보수되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Bionic이라는 자체 C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 표준 구현체가 되는 GNU 코어 유틸리티를 포함한 기초적인 유닉스 명령어.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카피레프트 비지박스, BSD 라이선스의 토이박스 등 다른 대안들이 존재한다. 위젯 툴킷은 응용 소프트웨어용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라이브러리이다. 수많은 위젯 툴킷을 사용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GTK, 그놈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된 클러터, Qt 프로젝트가 개발하고 Digia가 주도하는 Qt, 인라이튼먼트 팀이 주로 개발하는 인라이튼먼트 파운데이션 라이브러리(EFL)가 포함된다. dpkg, RPM 등 패키지 관리 시스템. 다른 패키지들은 바이너리나 소스 형태의 Tarball로부터 컴파일이 가능하다. 명령 셸이나 윈도 환경 등의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 사용자 인터페이스 셸로 알려진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또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일반적인 관련 하드웨어에 부착된 컨트롤일 수 있다. 데스크톱 시스템의 경우 기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그래픽이지만 터미널 에뮬레이터 창이나 별도의 가상 콘솔을 통해 CLI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CLI 셸은 텍스트 기반 사용자 인터페이스이며 입출력을 위해 모두 텍스트를 사용한다. 리눅스에 사용되는 저명한 셸은 Bash(본 어겐 셸)이며 본래 GNU 프로젝트용으로 개발되었다. 유저랜드의 다양한 부분을 포함하는 가장 낮은 단계의 리눅스 구성 요소들은 예외적으로 CLI를 사용한다. CLI는 특히 반복적이거나 지연되는 작업의 자동화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매우 단순한 프로세스 간 통신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시스템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GUI 셸이며 KDE 플라스마, 그놈, 메이트, 시나몬, LXDE, Pantheon, Xfce 등 확장 데스크톱 환경과 함께 패키징되지만 다양한 추가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이른바 X로 불리는 X 윈도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 네트워크 투명성을 제공하며 특정 시스템에서 실행 중인 그래픽 애플리케이션이 다른 시스템에서 표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용자가 애플리케이션과 통신할 수 있다. 그러나 X 윈도 시스템의 특정 확장 기능들은 네트워크를 경유하여 동작하지 못한다. 참고 구현체를 포함(가장 대중적인 것이 X.Org 서버)하여 일부 X 디스플레이 서버들이 존재한다. 서버 배포판은 개발자와 관리자들을 위해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으나 시스템의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최종 사용자를 위한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는 다른 시스템에 상주하는 클라이언트를 통해 접근되며 꼭 리눅스 기반일 필요는 없다. 일부 유형의 창 관리자는 X11용으로 존재하며, 틸팅, 동적, 스택, 컴포지트 방식이 포함된다. 창 관리자는 개별 애플리케이션 창의 위치와 모습을 제어하는 수단을 제공하며 X 윈도 시스템과 통신한다. 더 단순한 X 윈도 관리자, 이를테면 dwm, ratpoison, i3wm, herbstluftwm과 같은 것들은 미니멀리스트적 기능을 제공하지만 FVMM, 인라이튼먼트, 윈도 메이커 등의 더 세련된 창 관리자들은 내장 작업 표시줄, 테마와 같은 더 많은 기능들을 제공하지만 데스크톱 환경들과 비교할 때 여전히 가벼운 편에 속한다. 데스크톱 환경에는 자체 표준 설치본의 일부로서 Mutter(그놈), KWin(KDE), Kfwm(kfce) 등의 창 관리자를 포함하지만 사용자는 원하는 경우 각기 다른 창 관리자를 골라서 쓸 수 있다. 웨이랜드는 X11 프로토콜을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된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다. 2014년 기준으로, 폭넓게 채택되지는 못한 상황이다. X11과 달리 웨이랜드는 외부 창 관리자와 컴포지트 관리자가 필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웨이랜드 컴포지터는 디스플레이 서버, 창 관리자, 컴포지트 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웨스턴(Weston)은 웨이랜드의 참조 구현체이지만 그놈의 Mutter와 KDE의 KWin이 독립적인 디스플레이 서버 형태로 웨이랜드에 포팅되고 있다. 인라이튼먼트는 이미 버전 19부터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 비디오 입력 기반 구조 리눅스는 현재 비디오 입력 장치를 관리하기 위한 2개의 현대적 커널 유저스페이스 API를 갖추고 있다: 비디오 스트림과 라디오를 위한 V4L2 API, 디지털 TV 수신을 위한 DVB API. 장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이유로, 또 해당 API가 관리하는 수많은 포맷과 표준들로 인해 이 기반 구조는 다른 장치들과 더 잘 호환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다. 또, 양호한 유저스페이스 장치 라이브러리는 유저스페이스 애플리케이션들이 해당 장치들에 의해 지원되는 모든 포맷과 성공적으로 동작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멀티 부팅 리눅스는 부팅 수준에서 GRUB 등을 통해 여러 OS로 부팅하는 것을 지원한다. 또한 리눅스는 GRUB를 통해 콘솔모드 부팅뿐만 아니라 콘솔 모드에서 X 윈도 시스템 환경인 GUI 모드와 상호 변환을 완벽히 지원한다. 이식성 리눅스 커널은 원래 IA-32 아키텍처의 Intel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광범위한 아키텍처에 포팅된 운영 체제 중 하나이며, 포팅뿐 아니라 이러한 장치를 위한 배포판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HP 아이팩과 같은 PDA에서부터 메인프레임 최신 장비인 IBM zEnterprise Syste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에서 이용된다. 개발 리눅스와 기타 수많은 대중적인 당대 운영 체제들과의 주된 차이점은 리눅스 커널과 기타 구성 요소들이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점이다. 리눅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일한 운영 체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운영 체제이다. 일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는 카피레프트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카피레프트로 된 소프트웨어에서 파생된 작품은 그 자체가 카피레프트여야 한다는 논지이다. 가장 일반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인 GNU GPL은 카피레프트의 일종이며 리눅스 커널과 GNU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에 사용되고 있다. 리눅스 기반 배포판들은 개발자들이 다른 운영 체제 및 기반 컴퓨팅 표준들과의 상호 운용성을 위해 고안되었다. 리눅스 시스템은 POSIX, SUS, LSB, ISO, ANSI 표준을 가능한 준수하지만, 오늘날까지 오직 하나의 리눅스 배포판인 Linux-FT만이 POSIX.1 인증을 받았다. 협업을 통해 개발된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개발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가 명시적으로 재배포를 허가한다는 사실은 그러나 독립적인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되는 소프트웨어를 대형 프로젝트들이 수집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며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리눅스 배포판 형태로 이용될 수 있게 한다.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은 네트워크 연결을 경유하여 다운로드와 설치를 통해 원격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응용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수집하고 관리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들은 저만의 필요에 따라 운영 체제에 순응해나간다. 배포판들은 개인, 유동적인 팀, 자발적인 단체, 상업 단체들에 의해 유지보수된다. 배포판은 설치된 리눅스 커널의 기본 구성, 일반 시스템 보안,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을 하나의 일관된 패키지로 통합하는 일을 떠맡는다. 배포판은 일반적으로 apt, yum, zypper, 팩맨, portage 등의 패키지 관리자를 사용하여 특정 지점으로부터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설치, 제거,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하드웨어 지원 리눅스 커널은 널리 이식된 운영 체제 커널로서, 휴대 전화에서부터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치에서 이용이 가능하다. 매우 다양한 범위의 컴퓨터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는데, 여기에는 휴대용 ARM 기반 iPAQ와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 z9이나 시스템 z10이 포함된다. 주류에서 조금 벗어난 아키텍처를 위한 특수한 배포판과 커널 포크(fork)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ELKS 커널 포크는 인텔 8086이나 인텔 80286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동작하는 반면 µClinux 커널 포크는 메모리 관리 장치(MPU)가 없는 시스템에서 동작할 수 있다. 커널은 또한 매킨토시 컴퓨터(파워PC와 인텔 프로세서 모두), PDA, 비디오 게임기,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휴대 전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제조사가 만든 운영 체제의 이용을 염두에 둔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기도 한다. 프리덤HEC와 같이 리눅스 하에서 다양한 하드웨어의 지원을 유지보수하고 개선하는 일을 맡은 여러 산업 협회들과 하드웨어 콘퍼런스가 존재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눅스에서 각기 다른 하드웨어의 지원이 개선되었으며 호환성 개선이 이루어졌다. 2014년, 테스트된 모든 하드웨어 구성 데이터베이스를 자동으로 수집하기 위한 새로운 이니셔티브가 시작되었다. 이용 데스크톱과 서버에 쓰이는 범용 목적으로 설계된 리눅스 배포판 외에도 각기 다른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한 특수 제작된 배포판도 존재한다: 컴퓨터 아키텍처 지원, 임베디드 시스템, 안정성, 보안, 특정 지역이나 언어로의 지역화, 특정 사용자 그룹 타게팅, 실시간 애플리케이션 지원, 주어진 데스크톱 환경에 대한 기여. 게다가 일부 배포판은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2015년 기준으로 400개가 넘는 리눅스 배포판들이 현재 개발되고 있으며 그 중 약 12개 정도의 배포판이 범용 목적으로 대중화되어 쓰이고 있다. 한국형 리눅스 배포판 가운데에는 하모니카 등이 포함된다. 데스크톱 표준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에서 리눅스의 인기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들은 그래픽 사용자 환경을 포함하며, 2015년 기준으로 가장 대중적인 환경으로는 KDE 플라스마 데스크톱과 Xfce, 이렇게 2가지가 있다. 단독의 공식 리눅스 데스크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스크톱 환경과 리눅스 배포판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풀에서 구성 요소를 선택하며 어느 정도는 유연한 디자인 가이드를 구현하는 GUI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그놈은 인간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을 디자인 가이드로 삼고 있어서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를 중요한 역할로 제공하는데, 단순히 그래픽 디자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며 보안에도 초점을 둔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의 '협업'이라는 특징 덕분에 여러 곳에 분산된 팀들이, 사유 시스템의 지역화가 비용 효율적이지 않은 일부 리눅스 배포판의 언어 지역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 예로 싱할라어 버전의 Knoppix 배포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XP를 싱할라어로 번역하기 전까지 중요한 수준으로 취급되며 이용되었다. 이 건과 관련하여 랑카 리눅스 유저 그룹이 대학교 교수, 언어학자, 지역 개발자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져 지역화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성능과 애플리케이션 데스크톱에서 리눅스 성능은 논란의 주제로 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콘 콜리바스는 서버 위주로만 성능을 우선시한다는 이유로 리눅스 커뮤니티를 고소하였다. 그는 데스크톱에 초점을 아예 두지 않는 것에 실망감이 들어 리눅스 커널 개발을 그만두었으며 이 주제에 관한 진실을 모두 폭로하는 인터뷰를 했다. 그 뒤로 데스크톱 경험 개선에 초점을 둔 상당한 개발이 진척되었다. systemd와 Upstart(2014년 구식화됨)과 같은 프로젝트들은 더 빠른 부팅 시간에 초점을 둔다. 웨이랜드(Wayland)와 미르(Mir) 프로젝트는 X11을 대체하는 대신 데스크톱 성능, 보안, 화면 표시 부분을 개선한다. 수많은 대중적인 애플리케이션들이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이용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모질라 파이어폭스, OpenOffice.org/리브레오피스, 블렌더는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한 버전이다. 게다가 예를 들어 피진과 GIMP과 같이 일부 애플리케이션은 처음부터 리눅스용으로 개발되었는데, 이것들은 인기의 상승으로 인해 윈도우, macOS 등 다른 운영 체제들에도 이식되었다. 또, 상당한 수의 사유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 또한 리눅스에서 지원되는데, 이를테면 하이엔드 애니메이션 및 시각 효과 분야의 오토데스크 마야, 더 파운드리스 누크가 있다. 상세 내용은 리눅스용 사유 소프트웨어 목록(en)을 참고할 것. 자신들만의 또는 다른 기업들의 게임을 리눅스로 이식하는 여러 기업들 또한 존재하며, 리눅스는 저명한 스팀과 Desura 디지털 배급 서비스의 지원 플랫폼이 되었다. 그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macOS용으로 이용 가능한 수많은 유형의 애플리케이션들이 리눅스에서도 실행된다. 공통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은 다른 운영 체제에서 보이는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해당 애플리케이션이 리눅스에서 동작하는 버전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예: 스카이프, 그리고 도타 2와 팀 포트리스 2 등의 일부 비디오 게임) 게다가 와인 프로젝트는 수정되지 않은 기존 윈도우 애플리케이션들을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윈도우 호환성 계층을 제공한다. 와인의 상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코드위버스를 포함한 상업체들에 의해 후원을 받는다. 2009년 이후로 구굴은 와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오픈 소스 와인 프로젝트에 기반한 사유 솔루션 크로스오버(CrossOver)는 윈도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Intuit 애플리케이션(예: Quicken, 퀵북스), 어도비 포토샵 버전들(CS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수많은 대중적인 게임들의 실행을 지원한다. 탁상출판, 프로페셔널 오디오와 같은 부문에서 일부 소프트웨어의 리눅스 포팅판이 없는 경우에서도 리눅스에서 이용 가능한 동등한 수준의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또, 안드로이드용으로 개발된 애플리케이션은 Anbox를 사용하는 다른 리눅스 버전에서 실행이 가능하다. 구성 요소와 설치 X 윈도 매니저와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구성 요소들 외에 D-Bus나 펄스오디오와 같은 freedesktop.org가 호스팅하는 프로그램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2개의 주요 데스크톱 환경들인 그놈과 KDE는 이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각기 그에 상응하는 툴킷(GTK나 Qt)을 사용하여 개발된 그래피컬 프론트엔드를 제공한다. 디스플레이 서버는 오랜 기간 X11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 클라이언트와의 통신을 맡은 또다른 구성 요소이다. X11 통신을 하는 저명한 소프트웨어로는 X.Org 서버와 Xlib이 있다. 번거로운 X11 코어 프로토콜에 대한 실망, 특히 수많은 확장 기능으로 인해 웨이랜드라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 탄생하게 되었다. 리눅스에서 소프트웨어를 설치, 업데이트, 제거하는 일은 시냅틱 패키지 매니저, 패키지킷, Yum 익스텐더와 같은 패키지 관리자를 이용하여 수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주요 리눅스 배포판들은 광활한 저장소를 갖추고 있고 수천 수만의 패키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공식 저장소로부터 받아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자는 비공식 저장소로부터 패키지를 설치하거나 웹사이트로부터 직접 미리 컴파일된 패키지를 다운로드하거나 직접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여 쓸 수 있다. 이 모든 방식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수준의 난이도가 있다.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규 리눅스 사용자들에게는 도전 과제로 간주될 수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에서는 꼭 필수적으로 간주되지는 않으며 리눅스에 특화된 방식 또한 아니다. 넷북 리눅스 배포판들은 넷북 시장에서도 대중화되었으며 여기에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설치된 Asus Eee PC, Acer Aspire One이 포함된다. 2009년, 구글은 미니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로서 크롬 OS를 발표하였으며 이 운영 체제는 주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크롬 브라우저를 사용한다. 크롬 OS는 처음에 기 포함된 파일 관리자와 미디어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웹 기반이 아닌 애플리케이션은 아예 실행하지 못했다.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특정 수준의 지원이 이후 버전에 추가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구글은 컨테이너 안에서 리눅스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으며 크롬 OS가 다른 모든 리눅스 배포판처럼 사용될 수 있게 하였다. 이 운영 체제를 사용하는 넷북은 크롬북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2011년 6월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버, 메인프레임, 슈퍼컴퓨터 리눅스 배포판은 서버 운영 체제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으며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저명도가 있다. 넷크래프트는 2006년 9월 가장 신뢰성 높은 인터넷 호스팅 기업 10곳 중 8곳이 해당 기업들의 웹 서버에 리눅스 배포판을 구동하였다고 보고함으로써 리눅스를 최상위로 두었다. 2008년 6월,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5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2개를 차지했다. 2010년 2월 이후로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6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1개를 차지하여 리눅스가 최상위를 유지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개발자들 간 대중성을 달성하고 웹사이트 호스팅의 일반적인 플랫폼 가운데 하나가 된 LAMP 서버 소프트웨어 결합(리눅스, 아파치, 마리아DB/MySQL, 펄/PHP/파이썬)의 초석이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메인프레임에서 대중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저렴한 가격과 오픈 소스 모델 때문이다. 2009년 12월, 거대 컴퓨터 기업 IBM은 자사가 주로 메인프레임 기반 엔터프라이즈 리눅스 서버의 마케팅과 판매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리눅스콘 노스아메리카 2015에서 IBM은 리눅스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실행을 위해 설계된 메인프레임 시리즈 리눅스원을 발표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슈퍼컴퓨터용 운영 체제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500 목록에 오른 모든 슈퍼컴퓨터들은 일부 유형의 리눅스를 구동한다. 스마트 장치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가정 자동화(예: 구글 네스트) 등의 스마트 장치, 스마트TV(삼성전자와 LG 스마트 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시스템(예: 오토모티브 그레이드 리눅스)에 쓰이는 일부 운영 체제들은 리눅스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시스템을 위한 주된 플랫폼으로는 안드로이드, 파이어폭스 OS, Mer, 타이젠이 포함된다.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모바일 운영 체제가 되었는데,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에 판매된 기기 중 79.3%가 이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안드로이드 스마트 TV와 차량용 인토테인먼트 시스템 또한 시장에 등장하였다. 안드로이드가 수정된 버전의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용어가 안드로이드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는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리눅스 재단, 구글의 오픈 소스 관련 주요 인물 크리스 디보나, 여러 기자들에 따르면 안드로이드는 리눅스 배포판이다. 구글 엔지니어 패트릭 브래디와 같은 기타 인물들은 안드로이드가 전통적인 유닉스 계열 리눅스 배포판 측면의 리눅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드로이드는 GNU C 라이브러리를 포함하지 않으며(대체 C 라이브러리로 바이오닉을 사용) 리눅스 배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타 구성 요소 중 일부 또한 사용하지 않는다. 아스테크니카는 "안드로이드가 리눅스 커널 위에 빌드되긴 하지만 이 플랫폼은 전통적인 데스크톱 리눅스 스택과 공통성이 거의 없다"고 썼다. 오픈 소스 플랫폼 위에서 리눅스를 구동하는 전화와 PDA들은 2007년부터 일상화되었다. 그 예로 노키아 N810, 오픈모코의 Neo1973, 모토로라 ROKR E8을 들 수 있다. 추세에 힘입어 팜(나중에 HP가 인수)은 새로운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 webOS를 제작하여 Palm Pre 스마트폰 계열에 도입되었다. 최초의 모바일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인 노키아의 마에모는 데비안 기반이었다. 나중에 또다른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인 인텔의 모블린과 병합되어 MeeGo가 탄생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모바일 장치를 대상으로 하는 운영 체제인 타이젠을 선호하게 되면서 종료되었다. 타이젠은 리눅스 재단 내의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일부 삼성전자 제품들은 이미 타이젠을 구동하고 있는데 가장 저명한 예가 삼성 기어 2이다. 삼성 Z 스마트폰은 안드로이드 대신 타이젠을 사용한다. MeeGo의 종료에 따라 Mer 프로젝트는 모바일 지향 운영 체제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Meego 코드베이스를 포크하였다. 2012년 7월, Jolla는 Mer 기술에 기반을 둔 자신들만의 운영 체제인 세일피시 OS를 발표했다.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OS는 리눅스 커널,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 웹 표준 기반 런타임 환경, 사용자 인터페이스, 통합 웹 브라우저로 구성되어 있다. 캐노니컬은 이 모바일 운영 체제와 데스크톱 상응 운영 체제 우분투에서 사용자 경험을 컨버전스(집중)하기 위해 우분투 터치를 출시하였다. 또, 이 운영 체제는 외부 모니터와 연결될 때 온전한 우분투 데스크톱을 제공한다. Librem 5는 Purism이 개발한 스마트폰의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회사가 만든 리눅스 기반 PureOS를 사용하지만 다른 리눅스 배포판도 구동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분투 터치처럼 PureOS는 컨버전스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으므로 데스크톱 프로그램들이 스마트폰에서 실행될 수 있다. 한 예로 데스크톱 버전의 모질라 파이어폭스를 들 수 있다. 또다른 스마트폰은 컴퓨터 제조업체 파인64가 제조한 파인폰이다. 파인폰은 우분투 터치, 포스트마켓OS와 같은 다양한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할 수 있다. 임베디드 장치 낮은 비용과 커스터마이즈의 용이성 덕분에 리눅스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자주 사용된다. 모바일이 아닌 통신 장비 부문에서 고객 댁내 장치(CPE) 하드웨어 대부분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OpenWrt는 OEM 펌웨어 릴리스 다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운영하는 한 예시이다. 예를 들어 대중적인 TiVo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또한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스코/링크시스 등 제조사들의 여러 네트워크 방화벽과 라우터들 또한 그러하다. Korg OASYS, Korg KRONOS, 야마하 모티프 XS/모티프 XF 뮤직 워크스테이션, 야마하 S90XS/S70XS, 야마하 MOX6/MOX8 신시사이저, 야마하 모티프-랙 XS 톤 제네레이터 모듈, 롤랜드 RD-700GX 디지털 피아노 또한 리눅스를 구동한다. 또, 리눅스는 WholeHogIII 콘솔 등 무대 조명 제어 시스템에도 사용된다. 게이밍 과거에 즐길 수 있는 리눅스용 게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근래 수년 간 AAA 타이틀 게임 일부를 제외한 더 많은 게임들이 리눅스 지원과 함께(특히 인디 게임) 출시되었다. 리눅스 커널을 사용하는 대중적인 모바일 플랫폼 안드로이드는 많은 개발자 관심을 받았으며 아이폰과 아이패드 장치용 애플 iOS 운영 체제와 더불어 모방리 게임 개발을 위한 주된 플랫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2013년 2월 14일 밸브는 PC의 대중적인 게임 배포 플랫폼 스팀의 리눅스 버전을 출시하였다. 수많은 스팀 게임들이 리눅스로 이식되었다. 2013년 12월 13일, 밸브는 베타 테스팅을 위해 데비안 기반의 게이밍 지향 운영 체제인 스팀OS를 출시하였으며 게이밍 및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스팀 머신을 채용할 예정이다. 또, 밸브는 비디오 게임 개발에 도움을 주도록 고안된 OpenGL 디버거 VOGL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소스 게임 엔진이 데스크톱 리눅스로 포팅되었다. 밸브의 노력에 의해 도타 2, 팀 포트리스 2, 포탈, 포탈 2, 레프트 4 데드 2와 같은 일부 저명한 게임들이 데스크톱 리눅스에서 네이티브로 지원된다. 2013년 7월 31일, 엔비디아는 특수 게이밍 플랫픔으로서 안드로이드를 사용할 목적으로 실드를 출시하였다. 일부 리눅스 사용자들은 와인이나 크로스오버 리눅스를 통해 윈도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2018년 8월 22일, 밸브는 게이밍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톤(Proton)이라는 이름의 자체 와인을 출시하였다. 순수 와인에 일부 개선이 추가되었는데, 예를 들면 벌칸 기반 DirectX 11/12 구현체, 스팀 연동, 더 나은 전체 화면 및 게임 컨트롤러 지원, 멀티스레드 지원 게임의 개선된 성능을 들 수 있다. 특수 용도 리눅스의 유연성, 커스터마이즈 기능, 자유-오픈 소스의 특징 덕분에 특수 목적을 위해 상당한 튜닝을 거친 리눅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수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기 위해 2가지 주된 방식이 존재한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 범용 목적의 배포판으로부터 만드는 것 이러한 목적에 쓰이는 배포판들은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그 자체가 데비안 기반임), 아치 리눅스, 젠투, 슬랙웨어를 포함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예 처음부터 개발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범용 기반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 필수적인 구성 요소만 포함하되 배포판의 이용에 과도한 것으로 간주되는 구성 요소로 인해 발생되는 자원 부하를 회피하는 JeOS 철학에 초점을 둔다. 홈 시어터 PC 홈 시어터 PC(HTPC)는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특히 홈 시어터 시스템으로 주로 사용되는 PC를 말한다. 텔레비전에 보통 연결되며 추가적인 오디오 시스템이 포함되기도 한다.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 Kodi를 통합한 리눅스 배포판 OpenELEC는 HTPC용으로 개발된 운영 체제이다. JeOS 철학을 고수하여 개발된 이 운영 체제는 매우 가벼운 편이며 HTPC 범주에서만 사용 시 매우 적절하다. 우분투의 특별판인 Mythbuntu 등 MythTV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는 특수 에디션인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디지털 보안 칼리 리눅스는 디지털 포렌식과 침투 시험을 위해 설계된 데비안 기반 리눅스 배포판이다. 보안 취약점의 침투 시험 및 식별을 위한 여러 응용 소프트웨어가 사전 설치되어 있다. 우분투 파생판 백박스는 도덕적 해킹(화이트 해킹)을 위해 보안 및 네트워크 분석 도구들이 사전 설치되어 있다. Arch 기반 BlackArch는 침투 및 보안 연구를 위한 도구 2,100개가 포함되어 있다. 프라이버시, 기밀, 네트워크 익명성, 정보 보안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Tails, 틴햇 리눅스, 틴포일 햇 리눅스가 포함된다. 라이트웨이트 포터블 시큐리티는 아치 리눅스 기반 배포판의 하나로서, 미국 국방부가 개발한 것이다. Tor-ramdisk는 네트워크 익명 소프트웨어 토르의 호스팅 전용 목적으로 개발된 초소형 배포판이다. 시스템 복구 리눅스 라이브 CD 세션은 고장난 컴퓨터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한 도구로서, 또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다. 이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이 목적을 위한 여러 리눅스 배포판들이 등장했는데, 이 중 다수가 파티션 편집기 GParted, 그리고 추가 데이터 복구 및 시스템 수리 소프트웨어를 포함하고 있다: GParted Live GParted 프로젝트가 개발한 데비안 기반 배포판. Parted Magic 상용 리눅스 배포판. SystemRescueCD 윈도우 레지스트리 편집을 지원하는 Arch 기반 배포판 우주에서 스페이스X는 팰컨 9 로켓의 장애 허용 디자인에서 여러 비행 컴퓨터를 사용한다. 각 멀린(Merlin) 엔진은 3대의 보팅(Voting)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며 컴퓨터 1대당 2개의 물리적 프로세서는 다른 컴퓨터의 작동을 지속적으로 검사한다. 리눅스는 태생적으로 장애 허용이 아니지만 비행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이 목적을 위해 장애를 허용한다. 유연성을 위해 방사능 내성 부품 대신 출하 대기 부품들과 시스템 방사능 허용 디자인이 사용된다. 2019년 7월 기준으로 스페이스X는 2010년 이후로 팰컨 9을 76회 이상 발사하였다. 드래곤 2 크루 캡슐은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해 크로미엄 OS와 결합된 리눅스를 사용한다. 우주 정거장에서는 임무에 중요하지 않은 노트북에는 윈도우가 운영 체제로 채용되었으나 나중에 리눅스로 대체되었다. 우주의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 Robonaut 2 또한 리눅스 기반이다. 제트 추진 연구소는 무인 우주 비행 및 심해 탐험 구성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리눅스를 사용해 왔다. NASA는 화성 탐사로봇의 로봇공학에 리눅스를 사용하며 위성으로부터 오는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우분투 리눅스를 사용한다. 교육 리눅스 배포판은 학생들이 직접 코딩과 소스 코드를 다루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라즈베리 파이와 같은 장치용으로 개발되었다. 실제 장치를 개발하는 것 외에 실제 작동 원리를 학생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우분투 파생판 에듀분투와 리눅스 스쿨 프로젝트, 데비안 파생판 스콜리눅스는 교육 지향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학교 컴퓨터실과 컴퓨터 기반 교실을 관리하고 만드는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예: 리눅스 터미널 서버 프로젝트/LTSP) 기타 인스턴트 웹키오스크와 웹컨버저는 브라우저 기반 리눅스 배포판으로, 주로 키오스크와 디지털 사이니지에 사용된다. 씬스테이션은 씬 클라이언트용으로 설계된 미니멀리스트 배포판이다. 록스 클러스터 디스트리뷰션은 HPCC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정 언어나 지리에 속한 사용자처럼 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범용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중국어 사용자를 대상으로는 우분투 기린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블랙온(BlackOn)이 있다. 직무 특화 배포판들로는 미디어 제작을 위한 우분투 스튜디오, 생물정보학을 위한 DNA리눅스를 들 수 있다. 이슬람 지향 배포판 Sabily는 일부 이슬람교 도구를 제공한다. 특정 기관들은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리눅스 배포판들을 사용하는데, 프랑스 육군 현병대(National Gendarmerie)에 쓰이는 GendBuntu, 구글에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Goobuntu, 러시아군용으로 개발되는 아스트라 리눅스가 있다. 시장 점유율과 활용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여러 양적 연구는 시장 점유율과 신뢰성을 포함한 주제에 초점을 두며 수많은 연구가 리눅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리눅스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리눅스를 구동하는 서버,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의 소득은 2008년 35,700,000,000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었다. 분석가들과 지지자들은 리눅스의 상대적 성공을 보안, 신뢰성, 낮은 비용, 벤더 락인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데스크톱, 노트북 웹 서버 통계에 따르면(클라이언트 장치의 웹사이트 방문 수에 기반) 2018년 11월 기준으로 데스크톱 컴퓨터의 리눅스 추산 시장 점유율은 약 2.1%이다. 이와 비교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약 87%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macOS는 약 9.7%를 차지하고 있다. 웹 서버 W3Cook는 상위 1,000,000개 알렉사 도메인을 사용하는 통계를 출판하며, 2015년 5월 기준으로 웹 서버 중 96.55%가 리눅스를 구동하고 1.73%가 윈도우를 구동하며 1.72%가 FreeBSD를 구동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W3Techs는 매월 업데이트되는 상위 10,000,000개 알렉사 도메인을 사용하는 통계를 출판하며 2016년 11월 기준으로 웹 서버 중 66.7%가 리눅스/유닉스를 구동하며, 33.4%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구동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2008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의 당시 CEO 스티브 발머는 웹 서버 중 60%가 리눅스를 구동하였으며 40%가 윈도우 서버를 구동하였다고 언급하였다. IDC의 2007년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리눅스는 전체 서버 시장의 12.7%를 차지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 추산치는 다양한 기업에 의해 판매되는 리눅스 서버의 수에 기반을 두며 이후 리눅스가 설치된 별도 구매 서버 하드웨어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모바일 장치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둔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운영 체제가 되었다.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는 스마트폰 가운데 79.3%가 안드로이드를 사용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2013년 판매 기준 태블릿의 60% 이상이 안드로이드를 사용한다. 웹 서버 통계에 따르면 2014년 12월 기준 안드로이드는 약 46%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며 iOS는 45%를 차지하고 나머지 9%가 다양한 틈새 플랫폼이 차지한다. 영화 제작 수년 간 리눅스는 영화 산업에서 선택되는 플랫폼이 되었다. 리눅스 서버에서 제작된 최초의 메이저 영화는 1997년의 타이타닉이었다. 그 뒤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픽사, 웨타 디지털, 인더스트리얼 라인트 앤드 매직 등 주요 스튜디오들이 리눅스로 이관하였다. 리눅스 영화 그룹(Linux Movies Group)에 따르면 대형 애니메이션과 시각 효과 기업의 서버와 데스크톱 중 95% 이상이 리눅스를 사용한다. 정부에서의 사용 리눅스 배포판은 여러 지역 및 국가 정부에서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 브라질 연방 정부는 리눅스를 지원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군이 자체 리눅스 배포판을 만든다는 소식이 표면화되고 있으며 G.H.ost 프로젝트로서 성과를 얻었다. 인도 케랄라주는 주의 모든 고등학교의 컴퓨터에 리눅스 구동을 강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기술 독립 달성을 위해 Loongson 프로세서 계열을 위한 운영 체제로 리눅스를 사용한다. 스페인에서 일부 지역은 자체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고 있으며 교육과 여러 공식 기관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또한 리눅스 채택을 향한 단계를 밟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붉은별 운영 체제는 2002년 이후로 개발되고 있으며 페도라 리눅스 버전에 기반을 둔다. 금융 카카오뱅크는 2017년에 대한민국 금융권 중 최초로 전산 시스템에 리눅스를 도입하였다. 국민은행은 2020년도의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메인프레임과 함께 리눅스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는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유닉스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증권(주식) 거래소인 한국거래소(KRX)는 대한민국 자본 시장 거래 시스템 최초로 2014년에 리눅스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저작권, 상표, 이름 리눅스 커널은 GNU GPL 버전 2로 라이선스된다. GPL는 해당 라이선스의 소스 코드에 기반한 소프트웨어를 배포하는 누구든지 동일 조항으로 소스 코드(수정사항 포함)를 배포해야 한다. 일반적인 리눅스 배포판의 주된 기타 구성 요소들 또한 주로 GPL로 라이선스되지만 다른 라이선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라이선스들은 GPL보다 더 허용점이 많은 LGPL을 사용하며 X 윈도 시스템의 X.Org 구현체는 MIT 라이선스를 사용한다.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이 GPL 버전 2에서 버전 3로 이동되지 않을 것이라 언급하였다. 그는 디지털 권리 관리 내에서 소프트웨어의 이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라이선스를 싫어하였다. 수천에 달하는 모든 저작권 보유자들로부터 권한을 취득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2001년 레드햇 리눅스 7.1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30,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다. COCOMO(Constructive Cost Model) 하에서 이루어진 이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대략 인간 나이로 8000년의 개발 시간이 요구되었다. 또, 연구에 따르면 이 소프트웨어가 전통적인 사유 수단으로 개발되었다면 미국에서 개발 시 대략 $( 미국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소스 코드 대부분(71%)이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되었으나 그 외 C++, 리스프, 어셈블리어, 펄, 파이썬, 포트란, 다양한 셸 스크립트 언어를 포함한 수많은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모든 코드 줄의 절반 이상이 GPL로 라이선스되었다. 리눅스 커널 그 자체는 2,400,000개 줄로 구성되며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이후 연구에서 동일 분석이 데비안 버전 4.0에 대해 수행되었다(2007년 출시). 이 배포판은 283,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으며 전통적인 수단으로 개발한다고 보았을 때 인간 나이로 대략 7300년의 개발 시간, US$( 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 미국에서 리눅스라는 이름은 리누스 토르발스가 등록한 상표명이다. 처음에 누구도 등록하지 않다가 1994년 8월 15일 윌리엄 R. 델라 크로스 주니어는 리눅스라는 상표를 신청한 다음 리눅스 배포자들로부터 로열티를 요구했다. 1996년, 토르발스와 일부 영향을 받은 단체들은 상표가 토르발스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고소했으며 1997년 논쟁이 해결되었다. 상표의 라이선스 부여는 그 뒤로 리눅스 마크 인스티튜트(LMI)가 관리하고 있다. 토르발스는 오직 다른 사람이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칭을 등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LMI는 원래 상표의 일부로서 리눅스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명목적 2차 라이선스 비용을 청구하였으나 나중에 무료의 계속되는 전 세계적 2차 라이선스를 선호하게 되면서 이를 변경하였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리눅스 배포판을 FSF의 회장 리처드 스톨만이 1983년 시작한 GNU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눅스 커널 기반 운영 체제이기도 한 안드로이드 OS에 대해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에 대해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지 않았는데, GNU가 그 일부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톨만과 FSF 외 소수의 유명 인사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특히 데비안(1996년까지 FSF의 후원을 받음) 또한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매체와 일반 이용 시에는 운영 체제 계열을 말할 때 단순히 "리눅스"라고 부르며 이는 수세 리눅스,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처럼 수많은 대형 리눅스 배포판을 가리킬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GNU/리눅스 또는 단순히 GNU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Trisquel GNU/Linux, Parabola GNU/Linux-libre, BLAG Linux and GNU, gNewSense를 들 수 있다. 2011년 5월 기준으로, 우분투의 Natty 릴리스를 구성하는 소스 코드 줄을 셀 경우 현대 리눅스 배포판의 약 8~13%는 GNU 구성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이 범위는 그놈이 GNU의 일부에 속해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한편, 6%는 리눅스 커널이 차지하며 직접적인 의존성을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9%로 늘어난다. 같이 보기 리눅스 배포판 비교(en) 오픈 소스와 클로즈드 소스의 비교(en) 운영 체제 비교(en) X 윈도 시스템 데스크톱 환경 비교(en) 리눅스에 대한 비판(en)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 리눅스 프롬 스크래치 리눅스 소프트웨어 맵(en) 리눅스 배포판 리눅스 배포판 목록(en) 하모니카 (운영 체제) 구름 플랫폼 한컴 구름 티맥스OS 리눅스용으로 출시된 게임 목록(en) 운영 체제 목록 적재 가능 커널 모듈 각주 내용주 외부 링크 리눅스 내부 그래픽 지도 리눅스 커널 웹사이트와 아카이브 리눅스의 역사 (GIT 저장소 포맷 1992–2010) 한국어 한국 페도라 리눅스 사용자 모임 KLDP 한국 리눅스 사용자 그룹 한국데비안사용자모임 리눅스 커뮤니티 하모니카 1991년 소프트웨어 컴퓨팅 플랫폼 크로스 플랫폼 소프트웨어 핀란드의 발명품 리누스 토르발스 유닉스 계열 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운영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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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합중국(美合衆國, , USA), 약칭 합중국(合衆國, , US) 또는 미국(美國)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에 위치한 하와이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캐나다와 남쪽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닿는다. 또한 북아메리카 북서측에 있는 알래스카는 동측으로는 캐나다와 서측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 해외 영토를 보유한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 번째로 넓은 국가이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문화 국가 중 하나로, 주로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 미국의 경제는 2019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21조 4394억 달러로,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경제를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원주민들의 수는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결국엔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와 산업화된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를 선도하는 나라이다. 명칭 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 국호의 축약형인 'United States'도 표준 명칭이다. 그 밖에 흔히 쓰이는 명칭으로는 'the U.S.', 'the USA', 'America'가 있다.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이름으로는 'the U.S. of A.'와 'the States'도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명칭인 '컬럼비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말로,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도 나오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 미국인을 이를 때 데모님으로 '아메리칸'(American)을 사용한다. 또 미국의 정식 수식어는 'United States of America'이지만, 'America'나 보통 A를 제외한 'U.S.'가 가장 흔히 미국을 일컫는 수식어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서는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ㅈㅉㅌㅂ.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ㅇㅉㅌㅂ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 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거의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섬의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의 이전 수도) 등 허드슨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절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거의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 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독립과 영토 확장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 ~ 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내전과 산업화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거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인 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회의와 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냉전, 저항 정치, 사회 변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 ~ 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61년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 마틴 루서 킹 2세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이 반전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 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오늘날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21년에는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리·기후·자연 환경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000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000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주 면적은 160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또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 4위인데, 중국과 유사한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 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의 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인 미시시피 강-미주리 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 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 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은 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 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나 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 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과 워싱턴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 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 관리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 환경문제 1970년대 이후로 환경 문제가 국가 의제에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원료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논쟁, 공기와 수질 오염, 야생동물(주로 늑대나 매, 고라니, 독수리, 사슴 외)과 산림 벌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 환경갈등이 계속되었다. 환경문제는 거의 대부분 연방정부와 국가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점은 1970년대 대통령명으로 만들어진 미국 환경보호국 (ERA)이다. 1964년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토지 중 황무지를 사용하는 일환으로 원시지역 보호법을 만들었다. 1973년 절멸 위기종 보호법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 미국의 주 주(州, state)는 미국의 최고 단계 행정구역으로, 총 50개가 있다. 인구 통계 인종과 언어 미국의 인구는 2019년 기준 329,676,200명으로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이다. 2000년 조사된 인구 분포도를 보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75.1~81.1%, 흑인이 약 12.3~12.6%, 아시아계 3.7~3.9%, 미국원주민이 0.8%다.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중에서도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미국의 발전은 그 역사를 통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로부터의 이민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 이들 민족은 융합하여 새로운 아메리카 민족을 구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국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분명히 몇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백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중에서도 출신 국가별로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최초로 이주해 온 것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이 밖에 독일인 등이 추가되었지만 중심은 영국인이었으므로 현재도 미국에서는 영어가 일상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미국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어휘나 문법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는 종래의 북유럽계의 이민에 비하여 이탈리아인·슬라브인 등의 남유럽계·동유럽계 이주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할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이민을 가장 많이 온 때는 188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이며, 그 전후를 포함하여 1820년부터 1961년까지의 4,200만 명이 입국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멕시코인·쿠바인·푸에르토리코인 등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총칭하여 신이민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 이주하게 된 유대인은 특이한 존재로서, 현재 전 세계 1,500만의 유대인 중 약 550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자산가나 훌륭한 학자가 많고, 각지에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미국 사회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 비(非) 백인 가운데 가장 큰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은 히스패닉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유입 및 높은 출산율 등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소수 집단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넘어섰다. 또한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 히스패닉계 주민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그들의 거주지가 미국에 병합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남부, 북부와 중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아시아계 이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나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주류는 아니다. 한국계 주민들은 약 2백만명, 중국인은 약 3백만명, 일본인은 약 80만명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 많다. 미국 남부에는 흑인이 많이 밀집해있으며, 이 지역의 백인은 주로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다. 동북부 지역의 인종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중북부 지역은 독일계, 아일랜드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백인이, 남서부는 히스패닉이, 서부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공용어는 사실상 영어 (미국 영어)이나, 히스패닉계 인구가 많은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를, 특정 민족의 인구가 많은 구역은 그 민족의 언어를 공공 표지판 등에 병기하기도 한다.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해당하는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 그리고 이들의 현대 후손이다. 이 표현은 광범위한 부족, 국가, 민족을 포괄하며 이 중 많은 무리들은 오늘날에 정치적 공동체로 살아남았다. 도시와 지역 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 및 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는 세계대전과 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 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과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 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와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콜로라도주의 덴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 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 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 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 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 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 있다. 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고 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 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 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정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다음은 인구순으로 나열한 도시 목록이다. 국민성 다양하고 복잡한 국민성을 다음의 항목에 열거하였다. 선택의 자유와 책임감: 사상적 자유와 소비 선택, 진로 선택 등의 자유는 완벽히 보장되며 그에 따른 책임감은 항상 따른다. 독립과 자립: 미국 부모의 자녀 교육의 최고 목표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으로, 어린이는 어릴 때부터 이를 기른다. 가치의 존중과 인간애 정신 자유민주주의와 타 문화에 대한 개방성 준법정신과 국가협력적 태도 및 애국심: 교통질서뿐만 아니라, 범법적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범죄자에 대한 자비는 없다. 감옥체계가 발달되었다. 가족 중심의 사회 그리고 높은 이혼율과 가족관계의 경제적 선택: 가족이 모든 개인의 중심에 있고 서로 의지하나,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독립되어있고, 이에 따라 이혼이 쉽게 인정된다. 기독교 문화 속 휴일과 감사하는 태도: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은 국가 최대 휴일이고 광범위한 일에 걸쳐 기독교 정신이 자리 잡고있다. 남녀평등과 개방적인 성문화: 남녀의 성적 역할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나, 성적 차이는 차별받지 않으며, 성문화가 개방적이다. 물질적 번영과 미국제일주의: 높은 국민 소득과 생활 수준이 미국 것이 제일이라는 안이한 태도를 만들기도 한다. 소비 생활과 사치성 문화, 대중 문화 미국의 이민 정책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다. 초기에 미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유색인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일터에 뿌리를 내린 백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유색인 이민문호를 조절했다. 미국은 1850년 무렵부터 아시아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 조짐이 있자, 1882년 중국인 이민부터 금지시키더니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보다 앞선 1913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막았는데, 표적은 아시아계였다. 토지를 소유하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미국시민(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는데 아시아계 이민 1세는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2차 대전에서 중국과 연합국으로 싸우게 되자 중국에 이민문호를 개방한 것이 1943년, 인도가 1946년,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1952년에 와서야 이민문호를 다시 열었다. 문호를 개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민이 허용되는 숫자는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52년 개정법으로 아시아 이민 1세도 미국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투표권이 있다는 말로 크건 작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면서도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인종 문제가 사회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인종 문제 앵글로-색슨족(Saxons)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북방계의 이주자들은 이주 시기가 빨랐다는 점도 있어 일찍이 융합하였으며,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이주한 신이민들은 일반적으로 신참자(新參者)로서 생활의 기반이 약한 데다가 유대인·아시아인 등은 인종·문화가 구(舊) 이민과 이질적이어서 동화하기 어려우며, 배척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인종문제로서 최대의 문제는 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흑인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팔려 온 그들은 해방 후 전국 어느 곳에나 거주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선 교육·취직·거주 등의 분야에 불평등한 점이 남아 있고, 이에 항의하는 흑인의 행동도 차츰 격렬해지고 있어, 오늘날 미국 내에서 최대의 사회 문제로 되어 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인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절대수도 많지는 않은데 신이민으로서 흑인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상태는 차츰 사회문제화되어 가고 있다. 종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민 온 개신교 신자들 즉, 청교도들은 초기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전통종교를 배격했으며, 같은 기독교 종파들인 성공회와 천주교회도 성공회 기도서 사용 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천주교회 신자 이민거부로 배척했다. 하지만 건국 후에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미국의 특징상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지만,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 1회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가 다수며 그외 가톨릭교회 및 기타 다양한 종교가 있다. 또한 유대교도도 많아서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앙심도 미국인들은 매우 높아 신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94%에 달할만큼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천주교회와 유대인을 공격했던 시기도 있었고, 존 F. 케네디외에는 천주교 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같은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같이 종교나 민족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적지 않다. 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천주교회에서 분리된 이후,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전통들을 배척한 성경주의자들로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에 이주한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 분리주의자 형제’들을 후에 침례교 또는 침례교인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1620년 이주한 이들은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는데,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플리머스 정착지에 이주했다. 이 플리머스 정착지는 메사추세스 식민지에 흡수된다. 후에 이들을 일컬어 '필그림 파더스'라고 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되었다는 미국의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기독교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적인 신화라는 설명도 있다. 그 실례로 개혁교회 신학자이자 목사인 마이클 호턴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에서 독립혁명으로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신론자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로서 초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집례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다소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로저 윌리엄스() 前 성공회 사제는 제정분리사상 즉, 종교와 정치의 분리사상을 주장하여, 1635년 청교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로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남부에 정착하여 프로비던스(, 현재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에, 앤 허친슨처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앤 허친슨은 보스턴 주민이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26절과 디도에게 보낸 편지 2장 3~5절에 근거, 여성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추방명령을 받았고, 프로비던스로 피신했다. 물론 로저는 앤 허친슨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녀를 프로비던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의 종교적 자유 포용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절대다수 청교도들은 이것을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두려워했다. 이것은 1692년 살렘 마녀 사냥으로 폭발하는데, 메사추세스주 살렘에서 일부 시민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치사 또는 사형당한 사건으로, 50000명 중 1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초기 청교도 사회의 오점 중 하나다. 근대 미국과 유럽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기독교와 시대의 연관성을 추구했다. 특히 미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리성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는 등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미국 성공회, 감리교,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장로교는 뉴욕 유니온을 중심으로 한 축을 형성하였을 뿐 여전히 정통 칼뱅주의가 주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은 소수 보수파 칼뱅주의 감리교회와 소수의 장로교회(예:칼 매킨타이어)와 절대다수의 침례교회에서 영향력을 보였는데, 1915년 출판된 《근본》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의 재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경무오설이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특징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구원관, 음주나 흡연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신학 교육과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도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70.6%가 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46.5%며,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있다. 이중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19세기 소위 환원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발생한 자생적인 교파다. 천주교회는 20.8%로 단일 교단으로는 최대 규모다. 정교회는 3%다. 그 중 미국 그리스 정교회 관구 대교구 소속 신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들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학교 졸업식에 개신교 목사가 기도를 할 정도로 개신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다. 한편, 미국 천주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 법조계 인사들은 보수 정치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에야 차별이 완화된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법조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현재 미국 법조계 내 보수주의 대변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인데, 2005년 감리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데 이어, 또 다시 보수 천주교 신자 새뮤얼 얼리토를 대법관으로 추천하는 등 미국 보수 천주교와 보수적 복음주의간의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 그 외 미국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 성공회()가 있는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시기에는 성공회 기도서 사용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등의 탄압을 받았으나,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일부 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 관구장 즉,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얼 쇼리 주교(1957년생)다. 정치 미합중국은 1776년 성립되어,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방 국가다. 미국은 "법에 의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 최상위 법전인 헌법에 규정된 견제와 균형 체제에 따라 통제된다. 미국의 연방 제도에서 시민은 보통 세 단계의 정부 즉 연방, 주, 지역 단위에 속한다. 미국 헌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을 구성 주에서 위임받았는데, 그 가운데 국방·외교 정책·대외 무역의 조정 기능,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은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권에 속한다. 주 정부의 주요 기능은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공공안녕, 교도행정, 주내 통상의 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다. 지역 정부의 업무는 보통 각 군과 시 정부에 나눠 맡기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행정부와 입법부 공무원은 구역별로 시민의 다수 투표에 따라 선출된다.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는 없으며, 하위 정부 단위에서도 이 제도는 극히 드물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주로 정치제도나 정치행동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브리엘 앨몬드(Gabriel A. Almond)가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정치문화는 동질적이고 세속적이다.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문화·경제 등에 걸쳐서 차이가 크며 시민의 이해(利害)도 대립하기 쉽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부터 정치의 목표는 항상 현실적이며, 동의에 입각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많은 가치가 복합된 정치문화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경험적인 정치문화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무대는 마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시장을 방불케 한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정치 참여 원칙이 관철되어 왔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3권분립을 엄격히 고수하고, 독립국에 가까운 주(州)제도를 채용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분립된 3권간에는 권력의 중복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정치체제 간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중복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연방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는 구성주정부가 연방정부에 위임하는 권한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그 외의 권한은 국민과 50개의 주가 보유하고 있다. 50개주는 연방 정부와 마찬가지로 주 정부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각부는 연방 정부의 각부와 동등한 기능 및 영역을 지닌다. 각 주의 행정 수반은 주지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권력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권력 분포와 행사에 있어서 중복현상과 마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강력하다. 단지 시대적인 차원에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50개주에 포함되지 않는 괌, 북마리아나제도 등의 속령 등 해외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 군대 최고 통수권자의 직함을 가지며, 국방 장관과 합동 참모총장을 임명한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을 비롯한 군 전체를 총괄한다. 해안 경비대의 경우 평화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전시에는 미 해군에서 관할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체벌이 크게 줄었다. 현재 미국 내 학교 체벌을 적극 허용하거나 이를 규제하는 법안 및 관행이 없는 주는 19개다. 이외 31개 주에서는 공립학교에서의 체벌을 불법으로 금지, 아이오와, 몬타나, 델라웨어, 메릴랜드, 뉴저지 및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공립 뿐 아니라 사립학교에서도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 국방 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과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공군, 우주군, 해병대를 포함한 군대를 통솔한다. 해안경비대는 평상시에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전쟁 상황에는 미 해군에서 통솔한다. 2008년 현역으로 있는 군인이 140만 명을 넘겼다. 예비군과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230만 명이 넘는다. 또한 국방부는 계약직을 포함하지 않은 민간인 7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모병제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의무 징병 등록제를 통해 거의 대부분 징병제로 뽑는다. 미국 군대는 공군의 신속한 수송기, 해군의 11대 현역 항공모함, 해병 원정부대 해군 함대사령부와 태평양 함대를 통해 빠르게 투입할 수도 있다. 또한 해외에 865개의 해외 주둔 기지를 두고 있고, 25개 국가에는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주둔군은 미국 "제국의 기반"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2011년 총 국방비 지출은 7,000억 달러 이상인데, 이는 세계 국방비의 41%며 상위 14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미군 국방비는 GDP 전체의 4.7%로, 상위 15개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CIA에 따르면 2012년 GDP 대비 미국 국방비 지출은 세계에서 23번째라고 한다. 미국 국방비는 냉전 시대 이후 최근 수 십년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1953년 전체 GDP의 14.2%, 1954년 연방비 69.5%를 맡은 것에 비해 2011년에는 GDP의 4.7%, 연방비는 18.8%로 감소했다. 2012년 국방비 예산은 2011년보다 4.2% 증가한 5,530억 달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 때문에 1,180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 경제 미국의 경제 체제는 민주주의적 혼합 경제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높은 생산성을 누리고 있다. 미국이 부유한 경제를 이룩한 것은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존재와, 기술혁신이 뒷받침된 국내 산업이나 해외에서의 활발한 투자활동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것이다.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조 4128억 달러로, 시장 환율로 세계총생산(GWP)의 23%, 구매력 평가(PPP) 대비 세계총생산의 약 21%를 차지한다고 한다. 미국의 GDP는 세계 최대 규모며, 1인당 명목 GDP 9위, 구매력 평가 1인당 GDP 10위다. 미국은 세계 최대 재화 수입국이며, 수출 규모는 세계 1위인데 1인당 수입액은 비교적 낮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이 있다. 2007년, 자동차는 주요 수출입 품목이었다.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 약 6년간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2007년 12월부터 침체기를 맞고 있다. 한편 미국은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 2009년 미국 경제에서 개인 부문은 전체 중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연방 정부 활동은 24.1%, 주 및 지역 정부 활동(연방 이전액 포함)은 20.6%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탈산업화 단계로, 서비스 산업이 GDP의 67.8%를 차지하지만, 지금도 미국은 산업 강국이다. 기업 총수령액 기준 주요 사업 문야는 도소매 무역이며, 순수입 기준으로는 제조업이 주된 분야다. 화학 공학 제품은 주요 제조업 분야이다. 미국은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며,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미국은 전기 및 핵 에너지를 비롯하여 액화 천연 가스, 황, 인지질, 소금 생산에서 세계 1위다. 농업은 미국 GDP의 1%를 넘지 미국은 옥수수와 콩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달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기업이다. 2009년 3/4분기에 미국 노동 인구는 1억 5,440만 명이었다. 이 중 고용 인구의 81%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2,240만 명을 거느린 미국 정부는 주요 고용처다. 미국 노동자의 노동 조합 조직률은 12% 정도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 세계 은행은 미국을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 1위로 들었다. 1973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199시간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에 미국은 시간당 노동 생산성 면에서 십년 전까지만해도 미국보다 높던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따라 잡았다. 유럽과 견주어 미국의 자산 및 법인 소득세율은 보통 높은 편이며, 노동 특히 소비세율은 낮다. 미국은 내수경제가 튼실한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내수 위주로 산업기반을 바꾸기도 했다. 세계최대 석유 비축량에 셰일 가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최첨단 공산품을 많이 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계층이 적고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여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토는 넓고 자원은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공급된다. 교육 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 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 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와 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와 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와 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 교통 개인 교통수단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자동차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망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데 1억 3천 만개의 도로가 펼쳐져 있다.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며, 미국인 1,000명당 765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자동차 보급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용 자동차의 40%는 밴, SUV, 소형 트럭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9마일 (47 km)을 다니며 55분을 운전하는데 보낸다. 미국인 전체 출퇴근자의 9%는 매스 트랜싯을 이용한다. 철도를 이용한 화물수송은 광범위 한 반면에 여객 철도 이용률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암트랙의 국가 여객 철도 시스템의 이용자 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37%가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매년 경전철 개발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은 국토가 넓은 덕에 항공 산업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항공사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가 모두 미국에 있으며 2013년 아메리칸 항공이 US 에어웨이즈와 합병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30개 중 미국에서 가장 바쁜 공항인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포함해 16개 공항이 이름을 올렸다. 문화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이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대중 매체 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 존 웨인과 마릴린 먼로는 미국 영화 배우의 상징이며, 제작가/사업가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영화 캐릭터를 상품화 시킨 장본인이다.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들을 보유한 곳이고, 평균 일간 시청 시간은 2006년 다섯 시간으로 기록된 이후 계속해서 증가하고있다. 네 개의 주요 방송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모두 상업적인 독립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시간 30분 정도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할 정도로 크게 대중화되어 있다. 포털 사이트와 웹 검색 엔진 이외에 페이스북, 유튜브, 위키백과, 블로거, 이베이, 크레이그리스트는 매우 유명한 웹사이트들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리듬과 가사 스타일은 유럽의 전통 음악과 다르게 미국 음악의 많은 부분에 있어 깊게 영향을 끼쳤다. 블루스와 같이 포크의 한 요소로 은어로만 알려져있던 장르는 요즘에 옛날 음악의 일종으로 인식되면서 세계적인 인기 있는 장르로 변했다. 재즈는 20세기 초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과 같은 사람들이 도입해 발전시켰다. 컨트리 음악은 1920년대 발전되었고, 리듬 앤 블루스는 1940년대에 발전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는 1950년대 중반 락앤롤 장르를 대중화시켰다. 1960년대에는 밥 딜런은 포크 장르의 부흥과 함께 미국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던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펑크를 발전시켰다. 최근 미국 음악계는 힙합과 하우스 음악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마돈나와 같은 미국의 팝 스타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문학, 철학, 예술 역사를 통틀어 미국은 일단의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했다. 코튼 매더와 조내선 에드워즈의 설교집에서부터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의 불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시대와 건국 초기시대가 미국 문학 속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문학은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에밀리 디킨슨,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마크 트웨인, 헨리 제임스 등과 같은 작가들로 대변되었다. 20세기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존 스타인벡, H. L. 멘켄, F. 스콧 피츠제럴드, 노먼 메일러, 솔 벨로, 존 업다이크 등의 작가들이 이름을 떨쳤다. 희곡 작가로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시인으로는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로버트 프로스트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흑인 문학으로는 랠프 엘리슨의 《투명 인간》 (Invisible Man, 1952년)이 20세기 미국 소설 가운데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보다 최근에는 여성운동이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토니 모리슨, 앤 타일러, 루이즈 에드리히 등의 작품이 애독되었으며 여성 소설의 급속한 팽창을 경험했다. 건축 분야의 경우, 스칸디나비아에서 전해진 통나무집은 신속하게 보급되어 숲이 우거진 프런티어 지역의 상징적인 주택이 되었다. 연방양식, 그리스 부흥 양식, 고딕 양식 등 보다 정교한 건축양식이 19세기에 도시와 시골의 건축물에 이용되었다. 도시들이 소위 황금시대(Golden Age)로 접어들면서 마천루가 등장해 미국 사회의 기술적 업적과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윌리엄 러 배런 제니와 루이스 설리번은 시카고 출신의 건축가로, 그러한 건축양식의 선구자들이다. 설리번의 제자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9~1959)는 프레리 학파(Prairie School)로 알려진 새로운 건축설계운동을 시작해 20세기초에 미국 전역에 걸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후대의 주요 미국건축가로는 독일 태생의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르 로어, 그의 제자들인 필립 존슨, 로버트 벤투리 등이 있다. 1825~1870년에 유행했으며 황야 그 자체를 소재로 삼았던 허드슨 강파(Hudson River School)는 미국 미술에서 일어난 최초의 토착화 운동으로 여겨진다. 아셔 B. 듀랜드가 그 대표적인 화가다. 도시생활은 에드워드 호퍼 같은 사실주의파나 스튜어트 데이비스 같은 추상파 화가를 막론하고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20세기 중엽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로 알려진 미국의 회화양식이 결과적으로 서양미술을 압도하게 되었다. 중심인물은 잭슨 폴럭과 로버트 머더웰 등이었다. 추상표현주의의 위세도 1960년대에 또다른 미국적 양식인 팝 아트(Pop Art)의 등장으로 쇠퇴했다. 앤디 워홀과 로버트 라우셴버그 등의 팝 아티스트들은 대중문화와 상업에서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했다. 종종 조각의 발전은 회화의 발전과 병행되는 경우가 있는데, 루이즈 니벌슨과 마크 디 주베로의 추상화와 클래스 올덴버그의 팝 아트 조각이 바로 그 예다. 다양한 양식과 경향과는 대조를 이루는 특이한 예술가들이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미국 예술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다. 고립상태에서 제작된 그들의 작품들은 국가적 경험에서 발견된 본질적인 것을 표현한다. 19세기의 윈즐로 호머와 20세기의 조지아 오키페 등의 화가들이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미국인은 과소비성 소비행태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소비 행동이 절약적으로, 소량 구매, 쿠폰의 생활화가 되어 있다. 창고 세일, 일회용 상품, 패스트 푸드의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소비 생활의 흐름은 전문 유통 업체가 증가하고, 쇼핑몰이 대형화되고, 소비자의 안목이 고급화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많은 나라이고 전체적인 국민 소득 수준이 높은 관계에다 자유롭고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 등의 이유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치품을 구입하는 나라며, 각종 자원들을 엄청난 양으로 소비하는 나라다. 일부 특권층의 과소비가 악명 높으며, 중산층 역시 소비생활을 즐기는 문화 속에 살며,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는 추세다. 음식 주류 미국 요리는 다른 서양 나라들과 유사하다. 밀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곡물이다. 북미 원주민과 초기 유럽 이주민들은 전통적인 미국 요리에 칠면조, 사슴고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 메이플 시럽(캐나다의 메이플 시럽을 체출하는 나무에서 나오는 시럽)과 같은 원산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리하는 돼지고기와 소고기 바베큐, 크래브 케이크, 초콜릿 칩 쿠키는 독특한 미국 요리들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솔 푸드는 남부를 중심으로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루이지애나 크리올요리, 케이준 요리, 텍스 멕스와 같은 싱크리티즘 요리는 지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애플파이, 프라이드치킨, 피자, 햄버거, 핫도그와 같은 미국 특유의 음식은 다양한 이민자들의 레시피가 섞이면서 생겨났다. 프랑스식 감자튀김, 부리토(Burrito)와 멕시코식 타코(Taco)와 같은 멕시코 요리, 이탈리아에서 전해지면서 미국식으로 변형된 파스타 요리는 널리 퍼져있다. 미국인들은 보통 차보다 커피를 좋아한다. 미국의 기업들에 의한 마케팅은 아침 식사와 함께 오렌지 주스 또는 우유를 마시는 것이 흔한 모습이 되는데 큰 원인이 되었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시장은 세계에서 제일 큰데, 1930년대 드라이브 스루 형식을 만들어냈다. 패스트푸드의 소비는 건강에 대한 우려를 촉발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인들의 열량 섭취량은 24%가 증가했고,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자주 식사하는 것에 관련해 미국 공중 위생 관리는 "비만 유행성"이라고 부른다. 높은 당이 들은 청량음료는 널리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러한 설탕이 첨가된 음료는 미국인들의 칼로리 섭취량 9%를 차지하고 있다. 스포츠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화려한 스포츠 행사들로는 프로 야구의 월드시리즈, 대학 미식축구의 각종 볼(로즈볼), 프로 미식축구의 슈퍼볼, 미국 프로 농구협회(NBA)의 플레이오프전, 프로 아이스하키의 스탠리컵 대회, 미국 오픈 테니스 선수권 대회, 미국 프로골프인 협회 선수권 대회 등이 있다.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경주, 켄터키 더비,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 벨몬트 스테이크스, 서러브레드 경마, 프로 복싱 선수권대회([[WBA](세계복싱협회), WBC(세계복싱평의회), IBF(국제복싱연맹), 미국복싱협회](NBA: National Boxing Association))가 주도하는 대회 등도 세계적인 관심을 끈다.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미식축구, 야구, 농구, 하키, 골프, 테니스, 아이스하키 등이며 가라테를 포함하는 마셜아츠(종합격투기와 무예 등), 레슬링, 모토스포츠 등도 대중적이다. 같이 보기 한국계 미국인 다민족 국가 미국의 이민 초강대국 패권주의 미국, 400년의 도전(:en:America: The Story of Us) 북대서양 조약 각주 참고 자료 로저 윌리엄과 살렘 마녀사냥에 대한 기사는 《5시간만에 읽는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유재덕 지음/작은 행복을 근거로 작성. 외부 링크 정부 공식 홈페이지 백악관 홈페이지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주한 미국 대사관 미국 지도 모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미국편) G7 회원국 G20 회원국 유엔 회원국 영국의 옛 식민지 영어권 연방제 국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미주 기구 회원국 초강대국 G8 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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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 ,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 현대의 바이올린 테크닉을 완성하였으며, 초인적인 기교로 당시의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고,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언급할 때, '파가니니의 재래', '21세기의 파가니니' 등과 같은 타이틀을 붙이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번 등이 유명하다. 생애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결국 사망하였다.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평가 작곡가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파가니니 곡 연주 율리아 피셔 (Julia Fischer) Paganini 24 Caprices 21세기의 파가니니 로만김의 파가니니 협주곡 1번 카덴차 참고 문헌 외부 링크 1782년 출생 1840년 사망 낭만주의 작곡가 이탈리아의 클래식 작곡가 이탈리아의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 제노바 출신 클래식 기타 작곡가 19세기 클래식 작곡가 바이올린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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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크라이튼
마이클 크라이튼(John Michael Crichton, 1942년 10월 23일 ~ 2008년 11월 4일)은 미국의 과학소설가이자 텔레비전·영화 프로듀서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와 메디컬 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작품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1991)이 있다. 그는 또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텔레비전 시리즈 《ER》의 책임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 외 유명한 작품으로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69), 《스피어》(1987), 《프레이》(2002), 《콩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떠오르는 태양》, 《타임라인》 등이 있다. 앤마리 마틴과 공동으로 영화 《트위스터》(1996)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과학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자신의 자전적인 일을 다룬 《Travel》이 있다. 외부 링크 1942년 출생 2008년 사망 미국의 SF 작가 미국의 영화 제작자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 미국의 대학 교수 시카고 대학교 교수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시카고 출신 암으로 죽은 사람 에드거상 수상자 하버드 대학교 동문 쥬라기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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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윌리엄 헨리 빌 게이츠 3세(, 1955년 10월 28일 ~ )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이자 기업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자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창립했다. 그는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해석프로그램과 알테어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알테어 베이직을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면서 게이츠는 2014년 5월까지 회장, 최고경영자, 사장,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선구자이자 가장 잘 알려진 기업가 중 한 사람이다.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자란 게이츠는 1975년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설립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 최대의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었다. 게이츠는 2000년 1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회장 겸 CEO로 회사를 이끌었지만 회장으로 남아 소프트웨어 설계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2006년 6월 게이츠는 자신과 아내 멜린다 게이츠가 2000년에 설립한 개인 자선재단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전일제로 근무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파트타임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에서 물러나, 새로 임명된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를 지원하기 위한 기술자문위원직을 새로 맡았다. 1987년 이후 그는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부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95년부터 2017년까지 그는 포브스지 선정에서 4년을 제외하고 모두 세계 최고 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2017년 10월에는 아마존 창업자 겸 CEO 제프 베조스에게 추월당했다. 2020년 8월 현재 게이츠는 추정 순자산이 1,137억 달러로, 제프 베조스와 일론 머스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게이츠는 이후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제 근무를 그만둔 이후 여러 자선 활동을 추구해 왔다.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 자선단체로 알려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여러 자선단체와 과학 연구 프로그램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 2009년에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ge)를 설립했는데, 이 서약서를 통해 자신과 다른 억만장자들은 적어도 재산의 절반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 학력 레이크사이드 스쿨 (1973년 졸업) 하버드 대학교 법학예과 (1974년 중퇴) 하버드 대학교 명예 (2007년 법학박사) 생애 성장 과정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는 1955년 10월 28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시니어와 어머니 매리 맥스웰 게이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계 미국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며,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그의 가정은 상중류층으로,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한다. 또한 외할아버지인 J. W. 맥스웰은 미국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다. 게이츠에게는 누나 크리스티앤(Kristianne)과 리비(Libby)가 있었다. 그는 그의 가문에서 윌리엄 게이츠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네 번째 남자이지만 실제로는 윌리엄 게이츠 3세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에서 '3세'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그가 법조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13세 때 상류층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 단말기와 제네럴 일렉트릭 (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게이츠는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프로그래밍을 더 연습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컴퓨터를 상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다른 게임인 달 착륙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입력된 코드를 언제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 기계에 매료되었다. 게이츠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는 '그때 그 기계는 나에게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회의 기부금이 바닥나자, 게이츠와 몇몇 학생들은 DEC의 미니컴퓨터의 사용 시간을 샀다. 이 시스템 중 일부는 PDP-10이라는 것으로 컴퓨터 센터 코퍼레이션(CCC)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훗날 게이츠를 포함한 네 명의 레이크사이드 스쿨 학생(폴 앨런, 릭 와일랜드, 켄트 에번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가 가진 버그를 이용해 공짜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이 회사로부터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1달 동안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예과를 전공했으나 재학 중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 그는 사업이 안 풀리면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BASIC 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시연한 '포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 1975년 1월호를 읽고, 마이크로인스트레이팅시스템(MITS)에 연락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플랫폼용 BASIC 인터프리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현실에서 게이츠와 앨런은 알테어(Altair)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코드를 쓰지 않았다.그들은 단지 MITS의 관심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MITS의 에드 로버츠 사장을 만나 시범을 보이기로 했고, 몇 주 동안 그들은 미니컴퍼터로 작동하는 알테어 에뮬레이터를 개발한 뒤 BASIC 인터프리터를 개발했다. 시험 설명회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는 MITS 사무실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MITS와 계약으로 이어졌다. MITS는 앨런을 고용했고 게이츠는 1975년 11월 앨런과 함께 MITS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를 휴학했다. 앨런은 그들의 파트너십을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합성어인 "Micro-Soft"라고 이름 지었고, 그들의 첫 번째 사무실을 앨버커키에 위치했다. 게이츠와 앨런이 고용한 첫 번째 직원은 그들의 고등학교 협력자 Ric Weiland이다. 그들은 1년 안에 하이폰을 떨어뜨리고 1976년 11월 26일 뉴멕시코주 장관에게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라는 상호를 공식적으로 등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Altair BASIC은 컴퓨터 취미 활동가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게이츠는 시장 이전 복사본이 유출되어 널리 복사되고 배포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76년 2월, 그는 MITS 뉴스레터에 취미활동가에게 보내는 공개서신(Open Letter to Hobbyists)을 작성했는데, 이 서신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알테어 베이직의 사용자 중 90% 이상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돈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는 전문 개발업자들의 고품질 소프트웨어를 생산, 유통, 유지하도록 하는 동기를 없애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편지는 많은 컴퓨터 취미 생활자들에게 반감을 샀지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6년 말 MITS로부터 독립하였고, 다양한 시스템용 프로그래밍 언어 소프트웨어를 계속 개발하였다. 회사는 1979년 1월 1일 앨버커키에서 워싱턴 벨뷰로 이전하였다. 게이츠는 회사가 처음 5년 동안 생산한 모든 코드 라인을 개인적으로 검토하고 종종 다시 썼다고 말했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관리자 역할로 전환했고, 그 후 임원으로 전환했다. IBM과 파트너쉽 당시 컴퓨터 장비의 선도적 공급 업체였던 IBM은 1980년 7월 곧 출시될 개인용 컴퓨터인 IBM PC의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접근했다. IBM은 먼저 마이크로소프트가 BASIC 인터프리터를 쓸 것을 제안했다. IBM의 대표들도 운영체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했고 게이츠는 이를 널리 사용되는 CP/M 운영체제의 제조업체인 디지털 리서치(DRI)에 의뢰했다. 그러나 IBM와 DRI의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라이선스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IBM의 대표인 잭 샘스는 게이츠와의 후속 회의에서 라이센싱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제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몇 주 후, 게이츠와 앨런은 CP/M과 유사한 운영 체제인 86-DOS를 사용하여 시애틀 컴퓨터 제품(SCP)의 팀 패터슨이 PC와 유사한 하드웨어용으로 만들었다고 제안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SCP와 86-DOS의 독점 라이선스 에이전트로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정식 소유자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패터슨을 고용하여 PC[59]용 운영체제를 적응시켰고, 이를 일회성 수수료 5만 달러에 IBM에 PC DOS로 납품했다. 그 계약 자체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수수료를 벌 수 있었으나 그것은 IBM이 그들의 운영체제를 채택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가 소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츠는 다른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IBM의 PC 하드웨어를 복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운영체제에 관한 저작권을 IBM에 양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IBM과 호환되는 PC를 사실상의 표준인 DOS를 실행하면서 그렇게 했다. MS-DOS(IBM 이외의 고객에게 판매되는 DOS 버전)의 판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업계의 주요 주체가 되었다. 언론은 재빨리 마이크로소프트가 IBM PC에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확인했다.PC 매거진은 게이츠가 "the man behind the machine?"(기계 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게이츠는 1981년 6월 25일, 워싱턴 주에 회사를 재법인화하며 이사회 의장과 회장으로서 회사를 총괄했으며, 폴 앨런은 부회장과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1983년 초 앨런은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고 회사를 떠났고,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 대한 논쟁으로 수개월 전에 경색되었던 게이츠와 앨런의 공식적인 사업 파트너십은 사실상 종료했다. 10년 후, 게이츠는 앨런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두 사람은 함께 그들의 어린 시절 학교인 레이크사이드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게이츠는 2018년 10월 앨런이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아 있었다. WINDOWS 마이크로소프트는 1985년 11월 20일 첫 번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버전을 출시했다. 이듬해 8월 IBM과 OS/2라는 별도의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은 새 시스템의 첫 번째 버전을 성공적으로 개발했지만 의견 차이가 커져 파트너십이 틀어졌다. 경영 스타일 빌 게이츠는 미래학자 이상의 시대적 감각으로 소비자들의 요구를 컴퓨터 산업에 접목시켜왔다. 개인용 컴퓨터(PC)가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고 소프트웨어가 도약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빌 게이츠의 통찰력이 바로 성공 신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통찰력은 지속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차례 미국 서북부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은둔하면서 ‘생각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1주일 동안 가족들 방문도 차단한 채 세계 각국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성과물을 만들어 왔다. 빌 게이츠는 직원들 누구나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켜 의사소통의 장벽을 없앴다. 소비자들과 경영진의 접점에 있는 직원들이 보고서를 통해 저변의 시장흐름을 생동감 있게 전달했음은 물론이다. 철저한 고객관리와 상호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빌 게이츠 특유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이후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 업무를 그만둔 이후 자선 사업을 비롯한 프로젝트에 힘쓰고 있다. 게이츠는 2014년 3월 27일자 롤링스톤지에 실렸던 인터뷰에서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기후 변화, 그의 자선 활동, 다양한 기술 회사들과 관련자들, 그리고 미국의 상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게이츠는 50년 후를 내다볼 때 가장 두려운 것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향후 50년, 혹은 100년 안에 매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나, 나는 전세계적 유행병, 핵이나 생화학 테러 행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게이츠는 또 혁신을 '진보의 진정한 원동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이 지금까지보다 훨씬 나은 오늘을 보내고 있다"고 선언했다." 빌 게이츠는 슈퍼지능의 잠재적인 해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 기계들은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관리한다면 인공지능은 긍정적일 것이다. 그 후 몇 십 년이 지나면 인공지능은 걱정거리가 될 만큼 강력할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일론 머스크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왜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게이츠는 2015년 3월 바이두 최고경영자(CEO) 로빈 리와 함께 TED 컨퍼런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닉 보스트롬의 최근 저서인 '초지능' "매우 추천한다"고 밝혔다. 2019년 COVID-19로 인해 전세계가 펜데믹 상황에 빠지기 전에 이 회의에서 게이츠는 전세계가 유행병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게이츠는 2018년 3월 시애틀의 자택에서 사우디의 개혁적인 왕세자 겸 사실상의 통치자인 모하메드 빈 살만과 만나 사우디 비전 2030에 대한 투자 기회를 논의했다. 2019년 6월 게이츠는 안드로이드에 모바일 운영체제 경쟁에서 진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인정했다."그때 안드로이드를 쳐내야 했는데 ...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해 아쉽다. 반독점법 위반 소송 때문에 온통 정신이 팔려 모바일 시장에 집중하지 못했다. 윈도 모바일 OS를 더 잘 다듬었거나 안드로이드를 구글보다 먼저 인수했더라면 지금 모바일 시장은 (애플 iOS와 함께) 윈도 모바일이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2020년 3월 1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가 버크셔 해서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직을 떠나 기후 변화, 세계 보건 및 개발, 교육 등과 같은 자선 활동에 헌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선 활동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의 90%는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데, 이 나라들이 보유한 보건 자원은 전 세계 보유량의 10%에 불과하다.”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게이츠 재단(Gates Foundation) 또는 B&MGF는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민간 재단 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단이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에 의해 2000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게이츠 가의 관심과 열정에 의해 운영된다'. 주 운영 목적은 국제적 보건의료 확대와 빈곤 퇴치,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교육 기회 확대와 정보 기술에 대한 접근성 확대이다. 빌게이츠가 자선 활동가로 변모시킨 사람으로 세 명이 언급되는데 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그의 아내 멜린다, 석유왕 록펠러이다. 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이정표(milestone)로 1993년에 읽었던 한 보고서를 꼽는다. 이 보고서의 그래프에는 로타바이러스로 한 해 어린이 50만명이 사망한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었다. 게이츠는 “비행기 사고로 100명이 사망해도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하는데, 50만명이 사망하는 질병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본격적인 기부 활동에 나서기 전 빌 게이츠는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의 도움을 구했다. 1994년에 자선단체 ‘윌리엄 H. 게이츠 재단’을 설립한 아버지가 기부 활동에 있어서는 선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멜린다도 결혼 전까지 기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빌 게이츠를 설득해 자선가로 변신시킨 인물로 언급된다. 빌 게이츠는 지난 2010년부터 다른 백만장자들에게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권유하기 시작했는데, 이 활동에 멜린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절반의 힘(The Power of Half)’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멜린다가 게이츠에게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하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윌리엄 게이츠는 돈에 대한 아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게이츠는 부유한 변호사였지만, 돈을 그냥 물려주면 자식을 망친다는 생각으로 빌 게이츠에게 창업 자금을 주지 않았다. 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 역시 세 자녀에게 각각 1000만달러(약 108억원)씩만 물려주고 재산의 나머지 95%는 기부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게이츠 부부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과 함께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전기차 업체 테슬라 CEO 엘론 머스크, 록펠러 가문의 수장인 데이비드 록펠러, 페이스 북 CEO 마크 저커버그 등 120여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자동차왕’ 포드 등 미국의 자본주의를 개척한 초기의 부호들도 빌 게이츠의 변신에 영향을 미쳤다. 게이츠는 2013년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자선 활동과 관련, “1세대 대(大) 자선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중에서도 게이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히는 인물이 존 D. 록펠러이다. 록펠러와 게이츠는 비슷한 점이 많다. 정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록펠러는 저가 공세로 경쟁사를 차례차례 무너뜨리며 석유업계를 독점했다. 그래도 생전에 교회에 십일조는 꼬박꼬박 냈고, 이후 아들 세대에 막대한 기부를 하면서 무자비한 자본가라는 오명(汚名)을 씻었다. 게이츠가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도 초창기에는 ‘윈도’ 운영체제 안에 웹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기본 탑재해 시장을 독점한다는 논란에 시달렸다. 게이츠는 과거 인터뷰에서 “돈을 버는 것과 번 돈을 남에게 그냥 줘버리는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선가로 변신하기 전까지는 기부나 자선 활동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교육과 의료 사업에 집중적으로 기부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록펠러는 록펠러 재단을 세워 황열병 치료 등을 지원했고 시카고 대학교, 록펠러 대학교를 설립했다. 게이츠 앤 멜린다 재단의 활동도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 집중돼 있다. 저개발 국가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가 가장 큰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재단은 “특정 개인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창조적 자본주의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나 표현수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가난했고 예방할 수도 있는 병들에 시달렸으며 생명을 지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정부와 비영리 단체들이 그들을 돕는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 그 일을 하게 되면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발명품들을 만들 기술은 기업체들이 갖고 있다. 이런 기술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2008년 1월 스위스의 다보스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역설했다.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을 ‘의무’로 한층 끌어올린 개념이다. 기업 활동을 위해 돈을 버는 동시에 자선 활동도 ‘의무적’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창조적 자본주의’라고 지칭한 것이다. 자선 스포츠 행사 2017년 4월 29일, 게이츠는 시애틀의 매진된 키 아레나에서 열린 비경쟁 테니스 경기인 아프리카 4차전에서 스위스의 테니스 전설 로저 페더러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 행사는 아프리카에서 로저 페더러 재단의 자선 활동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페더러와 게이츠는 이번 10년 동안 미국 선수 1위 존 이스너와 펄 잼의 리드 기타리스트 마이크 매크레디와 맞붙었다. 그 두 사람은 6대 4로 시합에서 이겼다. 그들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200만 달러를 모금했다. 로저 페더러는 2018년 3월 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Still flying high from last night! Thanks to everyone who made the #MatchForAfrica a great success!"이라는 문구와 함께 빌 게이츠, 잭 소크와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페더러는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복식조를 구성해 잭 소크와 NBC 투데이쇼 진행자 사바나 거스리조와 자선 경기를 펼쳤다. 게이츠와 페더러는 함께 6-3으로 두 번째 경기 승리를 기록했고 경기는 25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백신개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전 세계로 확산 양상을 보이던 지난 2020년 5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설립한 재단을 통해 코로나 19 백신 개발을 위한 연구 자금으로 써 달라는 요청과 함께 한국의 바이오기업에 360만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미 4월 문 대통령과 코로나 19 대응을 위해 전화통화를 나눴던 빌 게이츠 회장은 한국의 코로나 방역과 리더십에 다시 한번 신뢰를 나타냈다. 특히 그는 코로나 백신 개발을 위해 한국정부와 기업 등과 협력을 약속하면서, 국내 바이오 기업인 에스케이(SK) 바이오사이언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코로나 백신 민간 분야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다"면서 "SK 바이오사이언스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내년 6월께 연간 2억개의 백신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를 통해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벤처 기업 투자 (부분 목록) 게이츠는 다양한 분야의 지분을 보유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를 넘어 다음과 같은 여러 벤처 사업에 투자했다. 비욘드미트(Beyond meat) 식물성 고기 제조 대체육 기업 슈뢰딩거(Schrödinger, Inc) 생명과학, 소재과학 소프트웨어 업체로 제약·바이오텍·소재 연구에 쓰이는 화학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제작 기업 웨이스트 매니지먼트(Waste Management) 폐기물 처리 업체 캐나다 국립 철도(Canadian National Railway) 1995년에 민영화된 캐니다 국립 철도 브룸(Vroom)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 스타트업 트위터(Twitter)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기업 월마트(Walmart) 미국의 다국적 유통기업 개인사생활 아내 멜린다와 결혼 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의 관계는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두사람이 만난 것은 멜린다가 MS의 제품매니저로 입사한 직후다. 그녀가 입사한 지 몇개월 후 빌은 그녀에게 첫 데이트를 신청했다. 당시 빌 게이츠가 멜린다에게 전화를 걸어와 “저기...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번호를 준다면 우린 오늘 밤부터 2주일 안에 데이트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멜린다는 진지하지 않다고 여겼고, 되물었다. 멜린다는 “나는 그에게 ‘오늘 밤으로부터 2주일 후라고요? 나는 2주일 후에 내가 뭘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나 보이지 않는군요’라고 말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빌 게이츠는 한 시간 뒤에 전화를 걸어서는 ‘이러면 당신에게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난 것처럼 보이나요?’라고 물었지요“라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그리고 그녀는 이 날 데이트에 응했다. 빌과 멜린다는 7년 간의 데이트 끝에 1994년 1월 1일 하와이의 라나이섬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리면서 결혼에 골인했다. 자녀교육 빌 게이츠는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컴퓨터를 사 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책을 사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컴퓨터 황제'로 통하는 빌 게이츠도 컴퓨터보다 책이 어린 시절 꿈과 상상력, 창의력을 키우는 데 더 중요한 무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자녀들의 컴퓨터 사용 시간을 하루 45분, 주말 1시간으로 제한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빌 게이츠가 제니퍼, 로리, 포비 자신의 3자녀에게 많은 돈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빌 게이츠는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많은 부는 그들(자녀)에게 좋지 못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게이츠는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길 꺼렸으나 신문은 게이츠가 `자녀들에게 1000만달러씩 물려줄 것`이라는 그간의 보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 정도의 돈은(1000만달러) 내 전체 재산의 아주 극소수"라며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부로 자녀들이 인생이 영향받지 않기를 원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 자녀들은 현재 집안일을 하고 용돈을 받는 평범한 아이들"이라며 "교육, 건강과 관련한 자녀들의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지만, 그들은 향후 직장에 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 "그와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는 동갑내기이며 순진하게도 낙관적이었고 커다란 회사를 세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제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모든 환상을 모두 이뤄냈다. 그리고 대부분을 라이벌 관계에서 만들어 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상대방이 아플 때에도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소통해 왔다""잡스는 천재였고 나는 그를 많이 질투했다"면서 "잡스는 사람들에게 뭔가 엄청난 동기를 부여하는 대단한 마법사였다면 나는 소소한 마법사였다"1955년생 동갑내기인 게이츠와 잡스는 젊은 시절 70년대 후반부터 30년 넘게 애증관계를 이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잡스는 캘리포니아 노동자 집안에서 자랐으며 모든 제품에 대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닫힌 생태계를 창조했으며, 디자인을 통해 제품에 프리미엄을 불어넣었다. 반면, 워싱턴주 상류층에서 자란 게이츠는 개방형 생태계를 믿었고 디자인은 중시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스타일까지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게이츠는 잡스에 대해 "기본적으로 괴짜"라며 "인간으로서는 괴상하게 흠집난 친구"라고 평가했고, 잡스는 게이츠를 "마약을 한 번 해보거나 어렸을 때 히피촌에 갔더라면 좀 더 생각이 넓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IT 산업에 있어서도 게이츠는 "잡스는 정말 IT에 대해 모른다"면서 "대신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채는 놀라운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잡스는 "빌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이 없고 아무것도 발명한 적이 없다"면서 "그래서 그가 그가 이제는 IT보다 자선사업을 더 편안하게 여길 것"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서로의 태도에 대해 애플 매킨토시 개발팀의 일원이었던 앤디 허츠펠드는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다"면서도 "하지만 스티브는 취향과 스타일 때문에 일반적으로 빌을 자신보다 약간 떨어지는 사람처럼 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빌은 프로그래밍을 못한다는 점 때문에 스티브를 무시했다"고 회상했다.하지만 2011년 잡스의 타계 이후 게이츠는 그를 그리워하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같은 해 10월5일 게이츠는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미치도록 훌륭하게 명예스러운 일(insanely great honor)이었다"면서 잡스의 표현인 '미치도록 훌륭한'이란 표현을 빌어 그를 추모했다. 당시 그는 "스티브와 나는 약 30년 전에 만나, 동료이자 경쟁자 그리고 친구로 삶의 절반 이상을 함께 보냈다"면서 "그가 많이 그리울 것이며 잡스가 세상에 미친 강력한 영향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애도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도 게이츠는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높게 평가하면서 "나는 연설을 잘하기 위해 힘들여 노력해야 했지만 잡스는 항상 자연스러웠다"면서 "내가 잡스처럼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있었다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가난 퇴치·질병 예방 연구 등 국제 사업에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잡스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진 '천재'였고, 나도 그를 따라하고 싶었다"면서 "잡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사람들이 그의 주문을 따르는 것을 봐왔다"면서 "나는 그를 너무나 질투했다"고 덧붙였다. 워런 버핏과의 관계 “난 내 친구들을 대부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워런 버핏만은 예외다. 그의 만남이 나와 아내 멀린다의 삶을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5년 전 오늘이다. 1991년 7월5일.”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1991년 7월 5일 버핏을 처음 만났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후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게이츠는 버핏이 사실상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으로 세상에 끼친 영향은 '계산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둘은 아버지뻘 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는데 빌 게이츠의 사무실 전화 단축번호에 집과 워런 버핏의 번호만 저장돼 있을 정도다. 대학 강연이나 기부 활동도 같이한다. 워런 버핏의 기부금 대부분도 빌 게이츠 부부가 설립한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으로 들어간다. ‘배움과 웃음의 25년’이란 글을 통해 “버핏은 나와 멀린다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내 삶을 바꿔줬다”며 “그는 내가 오마하에 들를 때 지금도 직접 운전해 나를 공항에 데리러 나온다”고 전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버핏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게이츠는 “컴퓨터만 아는 괴짜와 이메일 한 번 쓰지 않는 투자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버핏은 젊은 사업가에게 정중히 MS의 사업 전략에 대해 예리하게 질문했고, 두 사람은 서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대화에 빠져들었다. 게이츠는 버핏 특유의 ‘초딩 입맛’에 대해서도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는 “버핏이 우리 집에 묵었을 때 아침식사로 오레오 쿠키를 먹었다”며 “워런의 입맛은 마치 여섯 살짜리 꼬마 같다”고 전했다. 또 “햄버거나 아이스크림, 코카콜라를 달고 사는 버핏과 식사하러 나가는 게 즐겁다”며 “솔직히 젊은이들에게 그의 식단은 최악이겠지만, 왠지 그에겐 잘 통하는 식단인 것 같다”고 적었다. 독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문난 독서광이다. 그는 일 년에 50여권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블로그에 독후감을 남긴다. 미국 CNBC는 21일(현지시간) 이 억만장자 독서광이 책을 읽은 후 그 내용을 기억하는 빌게이츠 독서 비법을 소개했다. 빌 게이츠가 밝히는 독서 기억법의 핵심은 ‘맥락’이다. 그는 ‘쿼츠’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읽다보면 이 내용과 저 내용이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면서 “만일 커다란 틀을 갖고 있다면 모든 것을 그 틀 안에 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어떤 주제에 관해 기본적인 이해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다음에 새로운 정보들이 들어오면 그 위에 적절히 배치해 놓는 것이다. 게이츠는 “그러므로 계속 쌓이는 지식을 풍요롭게 유지 관리하는 것이 훨씬 덜 이용이해진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날 수 있지만 일단 그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지식의 조각들이 제 자리를 잡게 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과학과 관련된 독서를 하는 경우, 게이츠는 과학자의 역사에 관한 독서와 과학자의 업적에 관한 독서는 상호 관련되는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큰 틀이나 맥락 속에 놓고 보면 세부적인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말하자면 연대순이나 지도, 혹은 과학의 지류 등을 틀로 삼을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게이츠에게 있어서 독서는 취미나 소일거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2017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독서는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은 배움을 멈추지 않는 한 노쇠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독서가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왔다고 설명했다. “책 한권 한권이 내게 새로운 것을 일깨워주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내게 늘 책을 읽도록 격려해주신 부모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독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공급해줬다. 그 호기심이 내가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고 지금 몸담고 있는 재단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게이츠는 책을 읽을 때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는 편이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내용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끝까지 돌파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읽다가 중간에 멈추는 걸 싫어한다”면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책을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를 적느라 (좋아하는 책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밝혔다. 예술품 수집 예술품 수집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는 지난 1994년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필사본인 72쪽짜리 레스터사본(Leicester Codex)을 3,100만달러에 사들였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인 윈슬로 호머의 작품도 3,000만달러를 주고 구입한 바 있다. 유튜브 빌 게이츠가 유튜브로부터 구독자 100만명 이상 유튜버에게 수여되는 골드 버튼을 받았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빌 게이츠'서 골드버튼 언박싱 영상을 게재했다. 그리고는 구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메시지가 나온 뒤 짤막한 영상이 마무리됐다. 그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다양한 영상을 올렸다. 기타 자신이 죽을 경우 전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증하고 세 명의 자녀들에게는 1인당 1천만 달러씩만 상속한다고 밝혔다. 이는 빌 게이츠 전 재산의 0.018%에 불과한다. 영국의 YouGov에서 전세계 23개국에서 조사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에서 9.2점을 받아 남성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버락 오바마(6.4), 시진핑(5.3)이 뒤를 이었다. 2013년 4월 21일 내방 기간 동안 삼성전자 서초동 본사를 방문하였다. 뒤쪽 취재진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며 현관문을 직접 열고 건물로 들어갔다. 업적 1971년 정보 과학사 급여 산출 프로그램 개발 1972년 트래프 오 데이터('교통자료 포착'이라는 뜻)설립 1974년 베이직 개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설립 1975년 ~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 CEO 1980년 MS-DOS 개발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회사로 전환 1985년 윈도우 1.0 개발 1986년 31세의 나이로 억만장자가 됨 1987년 윈도우 2.0 개발 1990년 3월 윈도우 3.0 개발 1994년 1월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 1995년 윈도우 95 개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 개발, MSN 컴퓨터 통신시장 진출, 워렌 버핏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 1996년 인터넷 익스플로러 3.0 개발 1998년 윈도우 98 개발 2000년 ~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 2000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설립 2007년 윈도우 비스타 개발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 은퇴 2015년 클린 에너지 기금 설립 상훈 2005년 영국 명예 KBE 훈장(honorary KBE, 외국인 대상 정원외) 2010년 보이스카우트 실버 버펄로상(Silver Buffalo Award) 같이 보기 마이크로소프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워렌 버핏 스티브 잡스 IBM 테라파워(TerraPower) 토륨기반 원자력(:en:Thorium-based nuclear power) 액체불소 토륨 원자로(LFTR, :en:Liquid fluoride thorium reactor) 진행파 원자로(TWR, :en:Traveling wave reactor) 캐스케이드 인베스트먼트(:en:Cascade Investment) - 빌 게이츠가 이끌고 있는 투자회사 포시즌스 호텔 - 세계적인 캐나다의 호텔체인으로서 빌 게이츠의 캐스케이드 인베스트먼트와 사우디 왕가 기업가인 알왈리드 빈 탈랄의 킹덤 홀딩 컴퍼니(Kingdom Holding Company)가 대주주로 있다 각주 참고 서적 외부 링크 빌 게이츠 공식 사이트 – The Gates Notes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빌 게이츠 Biography of Bill Gates at Microsoft.com Forbes topic page on Bill Gates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1955년 출생 미국의 억만장자 미국의 프로그래머 미국의 인도주의자 미국의 발명가 미국의 투자가 잉글랜드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미국의 자선가 더들리윈스롭가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 컴퓨팅의 역사 명예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 하버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칭화 대학 살아있는 사람 국립 기술혁신 메달 수상자 시애틀 출신 대통령 자유 훈장 수상자 윈도우 관계자 미국의 회사 설립자 너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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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96%8F%ED%96%8F
아햏햏
아햏햏은 다양한 뜻을 지니는 대표적인 인터넷 유행어이다. 아햏햏은 2002년과 2003년에 유행하였으며 국립국어연구원에 의해 짤방과 같이 신조어로 정식 인정된 적도 있으나(2002년 신어 보고서에 수록), 2003년까지 쓰였으나 2004년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아햏햏이 만들어진 디시인사이드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아햏햏은 디시인사이드 사용자들이 이 모호하고 기분이 언짢은 상황을 표현했던 글로 의성어로는 어리석다는 뜻과 혀과 꼬이면서 당혹스러운 상황을 표현한다. 표기와 발음 한자로는 亞行杏(아행행)으로 표기하며, 로마자로는 보통 ahehheh으로 표기한다. 재미로 '아헿헿', '아핳핳', '으흫흫'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햏햏은 현대 국어에 잘 쓰이지 않는 'ㅎ' 받침을 써서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발음을 생각지 않고 태어난 신조어이니만큼 아무렇게나 발음해도 상관 없다는 의견이 있지만, 여러 의견 중에서 발음 가능한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행행] : 햏자, 수햏, 亞行杏 등의 용례를 고려한 발음이다. [아해해] : 'ㅎ' 받침을 생략한 발음이다. [아해탣] (←[아핻핻]) : 한국어 발음 규칙에 따른 발음이다. 자음의 끝소리 규칙에 따라 'ㅎ' 받침은 'ㄷ' 받침으로 발음되고, 첫 번째 '햏[핻]'의 받침은 뒤의 '햏'의 초성 'ㅎ'과 음운 동화가 일어나 'ㅌ'으로 소리난다. 이는 대구광역시 교육청 주관 2012년 고1 영남권 모의고사 국어영역 11번 문제에 '아햏햏'의 발음법에 대한 문제의 답안이 되기도 했다. 아햏햏의 유래 2002년 4월 엽기갤러리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같은 내용의 댓글만 다는 고정리플 유저들이 생겨났다. 홀맨, 피바다, 정신과전문의 표진인 등등 고정리플들을 다는 사람들이 한창 활동하던 중 한 유저가 "아햏햏 소피티아"라는 고정 리플을 달면서 엽기 갤러리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관련 용어 방법하다 (손발리 오그라진다) : 부산지역의 어떤 할머니가 자신의 방석을 돌려달라고 쓴 글을 본 사람들이 사용하게 된 것이, 사이버 시위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중세국어 법다에서 유래된 말이며, 아직까지 사투리로 일부 지역에서 사투리로 남아있다. 왜? 달아서 : 한 과일 가게에서 '포도를 잡수시고 혼수상태. 왜? 달아서', '수박을 드시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함. 왜? 달아서' 등과 같은 글을 적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함 쌔우다 : 한 가정집의 길가 화단에 '개똥 쌔우지 마세요'로 시작하는 게시물이 붙었다. 사동형 접미사 '우'는 '싸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싸게 하다'는 뜻으로 '쌔우다'를 쓰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표현이 재미있게 느껴져 널리 쓰이게 되었다. (게시물 등을) 올리다, 하다의 뜻으로 쓰임 (양심) 업ㅂ은/업ㅂ다 : 위의 '쌔우다'가 유래한 게시물의 마지막에 '이 양심업ㅂ(쌍비읍 받침)은 인간들아'라고 적힌 것을 보고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컴퓨터에 한글 받침으로 쌍비읍을 입력할 수 없기 때문에 '업ㅂ'과 같은 표기법이 생겼다. 자빠링하고싶다 하오체 : 초창기에 취화선의 포스터를 합성하면서 장승업의 말투를 따라한 것이다. 필수요소 : 합성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또는 사물을 이르는 말 햏자, 수햏, 득햏, 햏력 : 햏을 도에 비유했다. 폐인 압박(스크롤의 압박 등) : 2002년 월드컵때 코스타리카 기자의 티셔츠에 적혀있던 "코스타리카의 압박"에서 시작된 말. 압박은 기자라는 뜻의 Press를 번역기로 돌려서 나온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스압 : 스크롤바가 상당히 짧을 정도로 상당히 긴 글에 사용되는 말. 햏자 햏자[행자, 行者]는 아햏햏으로부터 파생된 말의 하나로,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던 단어이다. 이들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거나 라면을 주로 먹으며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에 "아햏햏"을 쓰는 등의 자신들의 특징을 "수햏"하는 활동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평소에 합성사진을 만들어 공유하거나 게시물에 답변을 먼저 달기 위해 경쟁하는 등수놀이, 성인물 감상 등을 즐겨하였다. 아햏햏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자신을 햏자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다(다른 사람을 부를 땐 쓴다). 햏자의 다른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혹은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파생어로 햏테(햏력 테스트=햏자 능력 테스트;짤방을 어디서 찍었는지 알아맞추는 테스트)가 있다. 파생 상품 및 인물 아햏햏 티셔츠 : T09 피터판규햏자가 만든티셔츠로, 붓글씨로 적힌 아햏햏이 새겨진 티셔츠이다. 아햏햏 D.O.G. : MSN 메신저와 연동되어 각종 상황을 소리나 진동으로 알려주는 강아지 모양의 인형이다. 아햏햏 밴드 : 정식명칭은 '저질카피밴드 아햏햏'으로 아햏햏 사이트의 햏자들(아랑쑈, 풍걸,윤득햏, 풍각, 피터판규, 오사마)이 모여서 만든 밴드이다. 관련 인물 김풍 - 웹툰 작가로, 아햏햏 문화를 배경으로 한 웹툰으로 유명해졌다. 같이 보기 스타쉬피스 각주 외부 링크 디시인사이드 - 득햏의 길 아햏햏 도원 고구마 언덕 인터넷 신조어 디시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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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C%B2%98%EB%93%9C%20%EC%8A%A4%ED%86%A8%EB%A8%BC
리처드 스톨먼
리처드 매슈 스톨먼(, 1953년 3월 16일 ~)은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심 인물이며, GNU 프로젝트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설립자이다. 그는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또한 탁월한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그는 문서 편집기인 Emacs, GNU 컴파일러 모음 컴파일러, GDB 디버거 등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이들 모두를 GNU 프로젝트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도덕적, 정치적, 법적인 기초를 세우는 데 본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며, 이는 독점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급에 대한 대안이 되었다. 살아온 길 스톨먼은 1953년 3월 16일, 엘리스 립맨과 대니얼 스톨먼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그의 고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시내에 있던 연구소인 IBM 뉴욕 과학센터에서 일하면서, 스톨먼은 고등학교 졸업 후의 여름을 보냈고 거기에서 그의 첫 번째 프로그램인 IBM 7064를 위한 전처리기(pre-processor)를 PL/I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했다. 다음과 같이 그는 회상했다. "나는 첫 프로그램을 PL/I로 작성했다. 그 뒤, 그 프로그램이 그 컴퓨터에 맞지 않을 만큼 커졌을 때 어셈블리어로 다시 고쳤다" 1971년에 하버드 대학의 신입생으로 스톨먼은 MIT 인공지능 실험실의 해커가 되었다. 해커 문화의 타락 1980년대, 스톨먼의 삶이었던 해커 공동체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업화로 인해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특히, 실험실 내의 다른 해커들은 심볼릭스(Symbolics)라는 회사를 차리고는, 기존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그들만의 독점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1983년에서 1985년 사이의 2년동안, 스톨먼은 연구실 내에서 혼자 힘으로 심볼릭스의 결과물들과 똑같은 기능의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그들의 독점을 막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그는 그의 세대 중에서 마지막 해커였다. 그는 비밀 유지 합의서에 사인하기를 요구받았으며, 그의 원칙인 다른 이들과의 공유나 이웃을 돕는 것에 위배되는 작업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 GNU를 설립하다. 1985년, 스톨먼은 GNU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유닉스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한 그의 의지와 동기를 역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비영리 기관인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는 1989년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내에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허드(Hurd) 커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GNU 시스템이 거의 동시에 완성되었다. 1991년, 리누스 토르발스는 GPL로 리눅스 커널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완벽하게 기능하는 GNU 시스템인 GNU/리눅스 운영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자유 소프트웨어 대 오픈 소스 리처드 스톨먼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동기는 그를 매우 논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코드를 공유하자는 개념에 동의하는 프로그래머들 중 많은 수가 스톨먼의 도덕주의적인 입장과 개인적인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의 한 결과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대안인 오픈 소스 운동이 생겨났다. 리눅스 SCO분쟁에 관한 리처드 스톨먼의 입장 수상경력 스톨먼은 그의 작업들로 인해 다음과 같이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1990년: 맥아더 펠로우쉽 1991년: Emacs 편집기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ACM의 그레이스 하퍼 상 수상 1996년: 스웨덴의 왕립기술연구소에서 명예 박사학위 받음 1998년: 전자 프론티어 재단의 파이오니어 상 수상 1999년: 유리 루빈스키 기념상 수상 2001년: The Takeda Techno-Entrepreneurship Award 수상 관련 서적 샘 윌리엄스 (2002년) Free as in Freedom: Richard Stallman's Crusade for Free Software, 오라일리 미디어 (웹에서 읽기 가능, 아래 링크 참조). 같이 보기 해킹 프로그래밍의 자유를 위한 연합 소프트웨어 특허 외부 링크 GNU 철학 페이지 Original GNU 공지사항 뉴스그룹 Free As In Freedom, 스톨먼의 전기. 그의 유즈넷 기고 글 195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프로그래머 미국의 해커 GNU 하버드 대학교 동문 컴퓨터 선구자 프로그래밍 언어 설계자 저작권 활동가 인터넷 명예의 전당 미국의 블로거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동문 유대계 미국인 GNU 관계자 리눅스 관계자 반출생주의자 미국의 무신론자 그레이스 머리 호퍼상 수상자 이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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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
해킹은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 침입하여 데이터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이다. 전자 회로나,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웹사이트 등 각종 정보 체계가 본래의 설계자나 관리자, 운영자가 의도하지 않은 동작을 일으키도록 하거나 체계 내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정보를 열람, 복제, 변경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또한 해킹은 크래킹과 개념이 다르다. 해킹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에 정당한 접근 권한 없이 접근하거나 허용된 접근 권한의 범위를 초과하여 침입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면, 크래킹은 그러한 불법적 접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해커는 해킹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낱말의 유래 본래 거칠게 자르거나 헤집는다는 뜻의 해크()이라는 낱말에 지금의 의미를 부여한 것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한 동아리 회원들이 자신들을 해커()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개념 정의 해킹의 정의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초기에는 '컴퓨터의 호기심이나 지적욕구의 바탕 위에 컴퓨터와 컴퓨터간의 네트워크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했다. 이후 악의적인 행동이 늘어나면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침입할 때 파괴적인 계획을 갖고 침입하는 행위'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일명 크래킹이라 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해킹이란 의미는 대체적으로 '어떠한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박연호에 침입하는 모든 행위'로서 문성혁을 통하여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엑세스 권한 없이 무단 침입하여 부당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며, 여기서 부당 행위란 불법적인 시스템 사용, 불법적인 자료 열람, 유출 및 변조 등을 뜻한다. 반면 긍정적 의미로는 '각종 정보 체계의 보안 취약점을 미리 알아내고 보완하는 데에 필요한 행위'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무선해킹 조금 더 나아가, 해킹의 형태나 방식을 알아보면 유선 네트워크 환경에서 멀웨어, DDos, 정보탈취 등 다양한 해킹 형태로 진행 중인 유선해킹과 기업 내 Wi-Fi 무선랜 환경을 통해 내부망에 접속해 위협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네트워크 해킹 그리고 무선 스파이칩 또는 비인가 장치를 바로 서버에 연결해 외부에서 무선 전파로 조종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데이터 해킹 등이 있다. 대응 방식으로 NAC(Net Access Control) IP 및 네트워크 접근제어로 유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하거나, IPS(Intrusion Prevention System) 또는 WIPS(Wireless IPS) 침해 방지 시스템을 구축하여 유무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무선 데이터 해킹으로부터의 보안을 위해서는 전체 무선 주파수를 분석하고 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선 데이터 해킹의 경우, 자연스럽게 공급되는 IT장비를 통한 위험성이 상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서버 메인보드에 스파이칩이 심어진 형태로 공급되는 경우에는 서버 설계도에 따라 부품을 하나하나 대조해 보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며, 놀랍게도 일반적인 무선 키보드나 무선 마우스 등 PC 주변 장치나 일상생활 용품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내장되어 공급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USB메모리와 달리 별다른 보안 절차 없이 서버 PC와 연결되어 해킹 도구로 사용이 가능하다. 무선 데이터 해킹 장치는 점점 고성능화 및 소형화 되는 추세이며, Wi-Fi나 Bluetooth 등을 포함해 다양한 무선통신 기술이 적용된다. 특정 무선통신기술을 활용한 제품의 경우 수십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무선해킹을 통한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하다. 이러한 무선 데이터 해킹 방식은 기업이나 기관의 외부망과 내부망을 분리하여 외부 공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춰 놓은 상태더라도 내부 서버에 무선 스파이칩만 연결하면 외부에 있는 해커가 마음대로 활동이 가능하여 기존의 보안체계가 무용지물이 될 우려가 높고, 흔적이 남게 되는 유선 해킹과는 달리, 내부망에 직접 연결하는 무선 데이터 해킹은 해커가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흔적이 남지 않아 피해 사례 파악이 어렵다. 법률적 해석 대한민국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해킹을 "침해사고"의 한 원인으로 나열하고 있다. 사회 문제 진용진은 불법 게임 핵을 성인층이 제작하고 판매하여 유통한다는 고정관념과 달리 일부 청소년층도 포함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 같이 보기 유사 개념 · 파생 개념 크래킹 웹해킹 취약점 공격(익스플로잇) 사이트 간 스크립팅(XSS) 사회 공학 iOS 탈옥 라이프핵(:en:Life hack) - 분야불문 모든 일상생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팁이나 테크닉 해커 해커 화이트햇 해커 블랙햇 해커 그레이햇 해커 레드 해커 스크립트 키디 관련 기관 · 단체 국가사이버안전센터 (국정원 소속) 사이버안전국 (경찰청 소속)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 대한민국의 해커그룹 각주 외부 링크 해킹에 관한 MIT 갤러리 hacked.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 2015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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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9%B4%EC%9A%95%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뉴욕 (동음이의)
뉴욕(New York)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뉴욕주(State of New York)는 미국의 주이다. 뉴욕 시티(New York City)는 미국 뉴욕 주의 도시이다. 뉴욕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잡지이다. 뉴욕은 미국 뉴욕 주의 도시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칵테일의 일종이다. 뉴욕은 1983년 매킨토시 글꼴이다. New York (음반)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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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A0%84
사전
사전(辭典)은 낱말의 뜻을 서술하는 것 내지는 도표와 함께 모아 놓은 것, 또는 어떤 낱말과 대응하는 다른 나라말의 낱말을 가나다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많은 사전들은 발음기호도 포함하고 있으며 응용, 역사, 어원, 그림, 사용법, 예문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는 종이로된 문서 형식의 사전을 많이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 사전의 역사 발견된 가장 오랜 사전은 기원전 2300년경 쓰인 아카드 제국의 쐐기문자 조각으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대역쌍 목록이다. 우라 후불루 용어집(Urra=hubullu glossary)이라 불리는 이 사전의 이름은 용어집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자가 붙는 채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근대 유럽의 사전들은 이중언어 사전으로 시작했다. 1502년에 나온 언어학자이자 수사인 암브로조 깔레피노(Ambrogio Calepino)의 코르누코파이아(Cornucopia)가 그것인데 이중언어사전이라기 보다는 다국어사전이다. 라틴어를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불어, 독어로 설명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은 영어사전의 역사에서 한 이정표였다. 이전까지의 사전은 대부분 유사 어휘들을 분류해서 기술하는, 기린 옆에 사자를 나열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존슨은 그 모든 어휘를 예외 없이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여 첫 번째 근대적인 사전을 완성했다. 사전의 구조 사전은 해당 항목의 대표형을 보여주는 표제어 아래 크게보아 뜻풀이와 예문 그리고 기타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뜻풀이는 해당 의미를 대상언어로 해설한 것이고 예문은 그 의미로 사용된 문장의 사례이다. 기타정보에는 발음, 품사, 통사구조, 형태정보, 관련어 등 해당 항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문법적 해설이나 부가적인 해설을 말한다. 사전의 분류 어학사전 vs 백과사전 일반사전 vs 특수사전 정의식 vs 기술식 사전은 크게 어학사전(辭典, dictionary, 말모이)과 백과사전(百科事典, encyclopedia)으로 나뉘는데 이 둘 사이에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담는 책이라는 공통점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차이점이 있다. 기존에 종이책으로만 출간이 가능했을 때에는 이러한 구분이 비교적 엄격했으나 인터넷 사전의 경우 사람들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찾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전부터 한국어의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일본어의 코지엔과 같은 어학사전들은 백과사전다운 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어학사전 어학사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뜻풀이 대상언어에 따라 일국어사전과 이중언어사전이 있다. 일국어사전은 한국어사전, 영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같은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것도 모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이 더 자상한 뜻풀이를 담고있다. 이중언어사전은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다른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국어사전이라고도 한다. 같은 영한사전이라고 해도 영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한국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편집 체제가 많이 다르다. 사전의 기술 태도에 따라서 어휘를 규정(pr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고 기술(d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다. 규정하는 것은 정의를 적고 이후 해당 정의에 해당되는 예문을 찾거나 추가설명하는 방식이고 기술하는 것은 말뭉치언어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당 어휘의 사용빈도와 사용분포를 살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는 방식이다. 이 구분은 상대적일 뿐 기술사전도 규정하는 면이 있고 또 규정사전도 기술하는 면이 있다. 범용 사전(general dictionary)은 흔히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라 부르는 언어사전을 말한다.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구분된 의미는 많이 사용되는 순서로 나열될 수도 있고, 오래된 용법 순서대로 나열될 수도 있다. 일상어를 대상으로 한다. 특수 사전(specialized dictionary)은 한정적인 분야를 다룬 사전이다. 제주어 사전이라거나 윤동주 시어사전처럼 특정 범위를 가지고 특화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전이다. 좀 더 특화된 사전들도 있다. 유의어사전(thesaurus)은 유의어, 반의어 등을 모아놓은 사전으로 글쓰기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유사한 형태로 단어의 계통을 정리해놓은 사전인 갈래사전이 있다. 자전(字典)은 한자사전을 말하는데, 한자문명권에서는 개별 한자가 특별한 형태소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한자어 말고도 개별 한자에 대한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형태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듣기, 읽기에 적합한 수동사전(passive dictionary)이 있고 말하기, 쓰기에 적합한 능동사전(active dictionary)이 있다. 이 외에도 외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특수 사전이 나오고 있다. 연어사전, 구동사사전, 관용구사전 등이 그것이다. 백과사전 용어사전(specialized dictionary 혹은 glossary)은 해당 분야의 전문용어만을 모아놓은 용어집이다. 용어사전이 많이 모이면 백과사전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백과라는 말 자체가 수많은 분야라는 의미를 가진다. 백과사전은 인간 지식중에서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균형있게 골라 서술한 책이다. 백과사전이 넓고 평평한 범위를 다루는 사전이고 용어사전은 좁고 깊은 범위를 다룬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의 가장 큰 차이라면 백과사전은 일상적인 의미를 잘 다루지 않고 개별 영역의 전문적인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다. 어학사전이 기능어를 많이 다룬다면 백과사전은 고유명사를 주로 다룬다고 해도 된다. 말뭉치언어학 같이 보기 한한대사전 전자 사전 사전 편찬 자전 한국어 사전 외부 링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개방형 인터넷 백과사전 우리말 유의어사전: 낱말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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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자료(資料, , 데이터, )는 문자, 숫자, 소리, 그림, 영상, 단어 등의 형태로 된 의미 단위이다. 보통 연구나 조사 등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말하며, 자료를 의미있게 정리하면 정보가 된다. 자료(data)와 정보(information)는 서로 교환되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료와 정보의 의미는 다르다. 즉, 자료는 또한 "주어진" 자료의 정신에 반대하여 높은 해석상의 본질을 가진 인문학 (특히 발전되어가는 digital humanities) 에 사용되어 오고있다. 가능성의 엄청난 수와 그 주의를 지향하게한 하위 집단간의 구별을 위해 Peter Checkland는 용어 "capta" ("~을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apere"로 부터온)를 소개했다.‘Johanna Drucker’는 인문학이 지식의 생성이 "놓여있고, 불완전하고, 구성적인" 과 같다고 단언함과, 자료의 사용은 별개이거나 관찰자 독립적인 현상과 같은 역효과를 일으키는 추정들을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구성요소와 같은 관찰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인 capta는 인문학에서의 시각적 묘사들을 위한 자료의 대안으로 제공되었다. 구분 자료는 질적 자료와 양적 자료로 구분된다. 질적 자료 질적 자료(qualitative data, 정성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불가능한 자료이다. 분류 자료 또는 범주형 자료(categorical data)라고도 한다. 예: 전화번호, 등번호, 성별, 혈액형, 계급, 순위, 등급, 종교 분류 등. 양적 자료 양적 자료(quantitative data, 정량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가능한 자료이다. 또는 수치적 자료(Numerical data)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 온도, 지능지수, 절대온도, 가격, 주가지수, 실업률, 매출액, 기업내 과장의 수 등. 양적자료의 한계 양적자료는 풍부한 의미를 상실할 여지를 비롯해서 수치가 갖는 약점도 있다. Parsimony(간결성)의 문제를 갖는 것이다. 수치화되지 않는 개념을 양화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측정하는 데 어떤 것을 포함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선택한 요소의 의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의미들이 배제된다. 그렇기에 어떤 정교한 양적 측정도 이에 상응하는 질적 기술에 비해 의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 같이 보기 정보 자료형 데이터 처리 데이터 마이닝 데이터 웨어하우스 각주 외부 링크 통계분석연구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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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체제
운영체제(運營 體制, ) 또는 오퍼레이팅 시스템(, )은 사용자의 하드웨어, 시스템 리소스를 제어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일반적 서비스를 지원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이다. 시스템 하드웨어를 관리할 뿐 아니라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하여 하드웨어 추상화 플랫폼과 공통 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가상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실제 하드웨어가 아닌 하이퍼바이저(가상 머신) 위에서 실행되기도 한다. 또한 입출력과 메모리 할당과 같은 하드웨어 기능의 경우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컴퓨터 하드웨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용 프로그램 코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체제는 휴대 전화, 게임기에서부터 슈퍼컴퓨터, 웹 서버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서 볼 수 있다. 운영체제는 한 면으로는 소비자를, 다른 한 면으로는 프로그램 개발자를 함께 하나의 시장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양면 플랫폼이다. 잘 알려진 현대의 PC 운영체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X, 리눅스가 있다. 이 밖에 BSD, 유닉스 등의 PC용 운영체제도 존재한다. 운영체제는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와 CPU,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더불어, 이들을 추상화하여 파일 시스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멀티태스킹을 지원하는 경우, 여러 개의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동안, 운영체제는 이러한 모든 프로세스들을 스케줄링하여 마치 그들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다. 또한 운영체제는 컴퓨터 과학의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종류 싱글태스킹 운영체제 / 멀티태스킹 운영체제 싱글 태스킹 운영체제는 한번에 오직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으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운영체제의 작업 스케줄링 하부 시스템에 의해 제각기 반복적으로 인터럽트 처리되는 여러 프로세스 사이에서 이용 가능한 프로세서 시간을 쪼개는 시분할을 통해 이루어진다. 멀티태스킹의 경우 선점형과 협동형(비선점형)이 있다. 선점형 멀티태스킹의 경우 운영체제는 CPU 시간을 쪼개어 프로그램들 각각에 슬롯을 할당해준다. 솔라리스, 리눅스, 아미가OS와 같은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들은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한다. 협동형 멀티태스킹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른 프로세스들에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각 프로세스에 의존함으로써 수행된다. 16비트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협동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32비트 버전의 윈도우 NT, 윈도우 9x의 경우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단일 사용자 운영체제 /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 단일 사용자 운영체제는 사용자 구별이 없으나 여러 프로그램이 나란히 실행하는 것은 허용한다.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는 디스크 공간과 같은 리소스와 프로세스를 식별하는 기능을 갖춘 멀티태스킹의 기본 개념을 확장하며, 여러 사용자에 속해 있으면서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시스템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한다. 시분할 운영체제들은 시스템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태스크를 스케줄링하며, 프로세서 시간, 기억 공간, 인쇄, 기타 자원을 여러 사용자에게 비용적으로 할당하기 위한 회계 소프트웨어를 포함할 수 있다. 분산 운영체제 분산 운영체제는 구별된 컴퓨터 그룹을 관리하고 이들이 마치 하나의 컴퓨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서로 연결되어 통신하는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이 개발되면서 분산 컴퓨팅이 활성화되었다. 분산되는 연산들은 하나 이상의 컴퓨터에서 수행된다.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 컴퓨터들이 협업을 할 때 분산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판형 운영체제 운영체제에서, 배포 형식 및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에서 판형은 하나의 가상 머신 이미지를 게스트 운영체제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며, 실행 중인 여러 개의 가상 머신을 위한 도구로 이를 저장한다. 이 기법은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관리에 둘 다 사용되며, 대형 서버 웨어하우스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임베디드 운영체제 임베디드 운영체제는 임베디드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PDA처럼 조그마한 기계에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제한된 수의 자원으로 동작한다. 매우 크기가 작고 극히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임베디드 운영체제의 예로 윈도우 CE와 미닉스 3이 있다. 실시간 운영체제 실시간 운영체제는 특정한 짧은 시간 내에 이벤트나 데이터의 처리를 보증하는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운영체제는 싱글태스킹일 수도 있고, 멀티태스킹일 수도 있으며 멀티태스킹의 경우 특수한 스케줄링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라이브러리 라이브러리 운영체제는 네트워크 등 일반적인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운영체제의 구성 운영체제는 많은 부분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커널인데, 커널은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프로세스를 제어한다. 얼마나 메모리를 읽고 쓸 것인지, 어느 프로세스를 실행할 것인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를 통해 어떠한 정보를 주고받을 것인지, 네트워크를 통해 받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제어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컴퓨터 사용자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어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운영체제의 기능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아이콘과 바탕 화면을 지닌 그래픽이나 명령 줄을 지닌 문자를 이룰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기능으로 API가 있는데 이것은 응용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와 코드 라이브러리가 한데 모여 있으며 운영체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운영체제에 따라 이러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가 실질적인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윈도우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운영체제의 일부로 여기는데 반해 수많은 버전의 리눅스는 그렇지 않다. 목적 운영체제의 중요한 목적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에게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쉽고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컴퓨터 시스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자원을 여러 사용자 간에 효율적 할당, 관리, 보호하는 것 운영체제는 제어 프로그램으로서 사용자 프로그램의 오류나 잘못된 자원 사용을 감시하는 것과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에 대한 연산과 제어를 관리한다. 시스템 구성 일반적인 응용 프로그램들을 제외한 컴퓨터 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세 개의 구성 요소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 세 부분은 운영체제, 셸, 그리고 (낮은 수준의) 필수 유틸리티들이다. 셸은 사용자가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본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다. 이런 셸의 행동들은 결국 운영체제에 명령을 내리는 일이 된다. bash 등의 이러한 셸은 그러나 엄밀히 운영체제의 일부가 아니며 운영체제 입장에서는 셸이나 필수 유틸리티들이나 모두 응용 프로그램일뿐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필수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하드웨어 ↔ 운영체제 ↔ 셸 / 응용 프로그램 ↔ 사용자 역사 초기의 컴퓨터들은 계산기처럼 일련의 단일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속으로 자동 실행하여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레지던트 모니터와 같이, 1950년대에는 기본적인 운영체제의 기능들이 개발되었다. 운영체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현대의 운영체제와 같이 더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드웨어 기능에 런타임 라이브러리, 인터럽트, 병렬 처리가 추가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애플, 아타리, IBM, 아미가와 같은 기업 덕택에 1980년대에 유명해졌다. 이 업체들은 한때 메인프레임과 미니 컴퓨터에 널리 쓰였던 운영체제 기능을 추가하였다. 나중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같은 수많은 기능들이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를 위해 개별적으로 개발되었다. 1950년대 초에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었다. 각 사용자는 컴퓨터만을 사용하여 예약된 시간에 천공 카드와 테이프의 프로그램과 데이터에 접근하여야 했다. 프로그램이 컴퓨터에 적재되면 컴퓨터는 프로그램이 끝나거나 충돌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 동작하였다. 토글 스위치와 패널 불빛을 이용하여 앞면 패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수 있었다. 그 뒤에 나온 컴퓨터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셈블리어로부터의 기계어 발생이나 입출력과 같은 기능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용자 프로그램을 연결해 놓은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것이 현대의 운영체제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일만 할 수 있었다. 메인프레임 1950년대를 통해 일괄 처리, 입출력 인터럽트, 버퍼링, 멀티태스킹, 스풀링, 런타임 라이브러리, 파일 정렬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한 수많은 주요 기능들이 운영체제 분야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은 프로그래머의 취향에 따라 응용 소프트웨어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포함되지 않기도 했다. 1959년에 IBM 704, 709, 7090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한 셰어 운영체제(SHARE)가 통합 유틸리티로 출시되었다. 마이크로컴퓨터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는 메인프레임과 미니컴퓨터를 위해 개발해 둔 운영체제에 대한 필요성도 그만한 용량도 없었다. 모니터스(Monitors)라는 이름의 매우 작은 운영체제가 개발되었으며 롬에서 불러들였다. 눈에 띄는 초기의 디스크 기반 운영체제로 CP/M이 있었는데 수많은 초기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지원되었으며 IBM PC에 널리 쓰였던 MS-DOS(IBM 버전의 것은 IBM DOS, 곧 PC-DOS로 불렸다)와 매우 비슷하였다. 1980년대에 애플 컴퓨터사(지금의 애플사)가 애플 II 시리즈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버리고, 혁신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맥 OS 운영체제에 갖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를 도입하였다. 32비트 아키텍처에 페이징 기능을 갖춘 인텔 80386 CPU 칩이 도입되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초기의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실행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DEC용 VMS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던 데이비드 커틀러를 해고함으로써 이러한 진행에 응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기반을 다룰 윈도우 NT 운영체제 개발을 이끌었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NeXT 컴퓨터사를 차렸고 유닉스 계열 넥스트스텝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다. 넥스트스텝은 훗날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FreeBSD 코드가 맥 OS X의 중심이 되었다.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이 사유 유닉스 운영체제를 대체하는 자유 소프트웨어를 목표로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유닉스 여러 곳의 기능을 복제하는 데 큰 성공을 이루자 GNU 허드 커널 개발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1991년 핀란드 컴퓨터 과학부 학생인 리누스 토르발스는 최초의 리눅스 커널 버전을 출시하였다. 곧 GNU 유저랜드와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병합되면서 컴퓨터 운영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BSD는 유닉스 계열로서 1970년대에 시작하여 수많은 미니컴퓨터에 포팅되었으며 마침내 FreeBSD, NetBSD, OpenBSD와 같이 개인용 컴퓨터에도 쓰이게 되었다. 운영체제의 예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 유닉스는 처음에는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다. 켄 톰프슨은 BCPL에 기반을 둔 B를 작성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닉스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멀틱스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C는 B를 대체하였으며 유닉스는 현대의 모든 운영체제에 영향을 미쳤던 크고 복잡한 계열의 상호 관련 운영체제로 발전하였다. (역사 참조)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유닉스에서 파생한 계열이며 시스템 V, BSD, GNU/리눅스,와 같은 주된 하부 분류가 몇 가지 있다. 유닉스라는 이름은 어느 운영체제와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표명한 오픈 그룹의 상표이다. 유닉스 계열은 원래의 유닉스를 닮은 커다란 집합의 운영체제들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인다.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에서 돌아간다. 이들은 비즈니스 분야의 서버와 학술 및 공학 환경에서의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쓰인다. GNU/리눅스와 BSD와 같은 자유 유닉스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HP의 HP-UX와 IBM의 AIX는 제조업체의 하드웨어에만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솔라리스와 같은 것들은 x86 서버와 PC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넥스트스텝, 마하, FreeBSD에서 파생한 하이브리드 커널 기반의 BSD류인 애플의 맥 OS X은 유닉스 계열이 아니었던 애플의 초기 맥 OS를 대체하였다. 유닉스의 정보 처리 상호 운용성은 POSIX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드러난다. POSIX 표준은 이것이 비록 다양한 유닉스 계열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다른 어떠한 운영체제에라도 적용할 수 있다. BSD 및 BSD 계열 유닉스 계열의 하부 집합 가운데 하나로 BSD 계열이 있다. 여기에는 FreeBSD, NetBSD, OpenBSD를 포함한다. 이러한 운영체제들은 웹 서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로의 역할도 한다. 인터넷은 BSD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데,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데이터를 주고 받는 데 흔히 쓰이는 현재의 프로토콜들 가운데 다수가 BSD에서 정의하여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또, 월드 와이드 웹은 넥스트스텝이라는 BSD 기반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수많은 컴퓨터에서 처음 입증되었다. BSD는 유닉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는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시간이 지나 컴퓨터 과학부의 학생들과 직원들은 그곳에서 문서 편집기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러한 것들에 일찍이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버클리 대학교가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이 설치된 새로운 VAX 컴퓨터를 1978년에 도입하였을 때 대학생들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이용하기 위하여 유닉스를 수정하였다. 미국 국방부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이에 관심을 가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교와 회사, 정부 단체들은 이를 알아채고 AT&T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인 것이 아닌 버클리 버전의 유닉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애플을 떠났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스텝이라 불리는 BSD류를 실행하는 고성능 컴퓨터를 제조하였던 기업 NeXT사를 세웠다. 이러한 컴퓨터들 가운데 하나는 팀 버너스 리가 최초의 웹 서버로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OS X 맥 OS X은 매킨토시 컴퓨터에 미리 최신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도 애플이 개발하여 판매한 사유 그래픽 운영체제이다. 맥 OS X은 1984년 이후로 애플의 사유 운영체제였던 원래의 맥 OS의 뒤를 잇는 것이다. 전작과 달리 맥 OS X은 1980년대 2/4 분기부터 애플이 1987년 초에 이 회사를 사들일 때까지 NeXT에서 개발한 기술로 만든 유닉스 운영체제이다. 이 운영체제는 1999년에 맥 OS X 서버 1.0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하였으며 그 뒤 2001년 3월에 데스크톱 지향 버전인 맥 OS X v10.0을 출시하였다. 그 뒤로 맥 OS X의 "클라이언트", "서버" 에디션 여섯 가지가 공개되었으며, 최신 제품은 2020년에 출시된 OS X 빅서이다. 서버 에디션인 맥 OS X 서버는 구조적으로 데스크톱의 것과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의 매킨토시 서버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맥 OS X은 메일 전송 에이전트, 삼바, LDAP 서버, DNS 등을 비롯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워크 그룹 관리 및 관리 소프트웨어 도구를 포함하고 있다. 플랜 9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라스 맥길로이는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운영체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벨 연구소의 프로그래머들은 현대의 배포 환경을 위해 계획된, 플랜 9와 인페르노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플랜 9는 네트워킹 운영체제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으며 당시 그래픽이 제공되지 않았던 유닉스와 달리 그래픽을 내장하였다. Lucent 공중 허가 사용 허가서 하에 출시되었다. 인페르노는 Vita Nuova Holdings에 팔려 GPL/MIT 라이선스로 배포되고 있다. 리눅스와 GNU 리눅스는 BSD 및 그 변종과 달리 실제 유닉스 코드 없이 개발된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이다. 슈퍼컴퓨터에서부터 손목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기에 쓰인다. 리눅스 커널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배포되므로 누구나 코드를 읽고 수정할 수 있다. 리눅스는 다양한 전자 기기에서 동작하도록 수정되고 있다. GNU 프로젝트는 완전한 원래의 코드를 제외하고 유닉스와 비슷하게 완전하게 자유롭고 열려 있는 운영체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프로그래머들의 협동적인 노고 그 자체이다. 이 프로젝트는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이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리눅스의 수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이 까닭에 리눅스는 GNU/리눅스로 불리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운영체제를 위한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에 배포된다. 이 가운데 리눅스 커널은 핀란드의 대학교 학생이었던 리누스 토르발스의 부차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1991년에 토르발스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학생과 프로그래머를 위한 뉴스그룹에 게시하였다. 구글 크롬 OS 크롬은 구글이 리눅스 커널을 기반으로 설계한 운영체제이다. 크롬은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으로 보내는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기술적으로는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도 없는 웹 브라우저만을 이용하며 문서 작성이나 미디어 보기와 같은 작업을 위해 웹 브라우저에 쓰이는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개인용 컴퓨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사유 운영체제 계열이다.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가장 흔한 운영체제이며 약 9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최신 버전은 개인용 컴퓨터의 경우 윈도우 11이, 서버의 경우 윈도우 서버 2019이다. 1981년에 IBM PC용의 오래된 MS-DOS 운영체제에 추가 기능으로 나온 것이 기원이다. 198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컴퓨터의 비즈니스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산업 표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윈도우 XP를 시작으로 현대의 모든 윈도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재 나오는 윈도우 버전은 IA-32와 x86-64 프로세서에서 동작하지만 그 이전에 나왔던 버전들은 다른 아키텍처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기타 틈새 시장에 존재하는 오래된 운영체제로는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OS/2, 애플 맥 OS X의 유닉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전작 맥 OS, 또 BeOS와 XTS-300이 있다. RISC OS, MorphOS, 아미가OS 4도 열성적인 커뮤니티와 전문 분야를 위한 소수 플랫폼으로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DEC의 OpenVMS도 휴렛 패커드가 계속 개발하고 있다. 도스 등의 운영체제도 FreeDOS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밖의 운영체제는 운영체제 교육용이나 학술용, 또는 운영체제 개념의 연구 등을 위해 예외적으로 쓰인다. 학술과 연구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시스템의 전형적인 예로 미닉스가 있다. 반면 순수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것으로는 싱귤래러티가 있다. 구성 요소 운영체제를 이루는 요소는 컴퓨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하게 만들기 위하여 존재한다. 금융 데이터베이스부터 영화 편집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는 모두 소프트웨어에 쓰이는 하드웨어가 단순히 마우스나 키보드만 이용하든지 아니면 인터넷 연결같이 복잡한 방식을 이용하든지 상관 없이 하드웨어를 이용하기 위하여 운영체제로 말미암아 실행해야 한다. 커널 펌웨어와 장치 드라이버의 도움을 받아 커널은 모든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에 대한 가장 기초 수준의 제어권을 제공한다. 커널은 램을 통해 프로그램을 위한 메모리 접근을 관리하며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할지를 결정하며 CPU의 동작 상태를 늘 최적으로 설정 및 초기화하고 디스크, 테이프, 플래시 메모리와 같은 매체의 파일 시스템을 갖춘 장시간 비휘발성 기억 장치를 위한 데이터를 정리한다. 운영체제 내에서의 커널의 영역과 그 구성에 따라 모노리딕 커널(monolithic kernel), 마이크로 커널(micro kernel) 등으로 분류한다. 프로그램 실행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사이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을 단순하게 하는 서비스의 집합이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운영체제가 프로세스를 만든다. 커널은 메모리와 다른 자원을 할당하여 프로세스를 만들며, 이로써 멀티태스킹 환경에서 프로세스에 대한 우선 순위를 확립하고, 메모리에 프로그램 코드를 적재하며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 뒤 프로그램은 사용자 및 장치와 상호작용한 다음 원하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운영체제는 프로세스 들을 생성하거나 삭제하고, 중단시키거나 재개시킨다. 프로세스 간의 동기화와 통신, 교착상태 처리에 관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사용자 및 시스템 프로세스의 생성과 종료 관리 프로세스의 일시 중지와 속개 프로세스 동기화를 위한 수단의 제공 프로세스간 통신을 위한 수단의 제공 교착 상태 처리를 위한 수단의 제공 인터럽트 인터럽트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데에 효율적인 방법을 운영체제에 제공하므로 운영체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작을 요구하는 이벤트(폴링)를 위한 다양한 소스의 입력을 운영체제가 감시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스택이 매우 작은 구형 운영체제에서 볼 수 있으나 스택이 큰 현대의 운영체제에서는 드문 편이다. 인터럽트 기반의 프로그래밍은 현대의 대부분의 CPU에서 직접적으로 지원된다. 인터럽트는 자동으로 로컬 레지스터 컨텍스트를 저장하고 이벤트에 반응하는 특정 코드를 실행하는 방법을 컴퓨터에 제공한다. 매우 기초적인 컴퓨터들은 모두 하드웨어 인터럽트들을 지원하며 이벤트가 발생할 때 실행될 코드를 프로그래머가 지정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운영체제에 인터럽트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하드웨어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운영체제의 커널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어권을 커널에 넘겨준다. 그 뒤 커널은 요청을 수행한다. 프로그램이 메모리(또는 공유 자원)와 같은 추가 자원이 필요하면 커널이 집중할 수 있게 인터럽트를 발생시킨다. 모드 현대의 CPU는 여러 모드의 명령을 지원한다. 이러한 기능을 지원하는 CPU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보호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는 메모리의 기록 및 삭제 방식을 제어하는 것과 그래픽 카드와 같은 장치와 통신하는 것과 같이 운영체제의 커널이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액세스해야 하는 낮은 수준의 태스크를 위해 사용한다. 반대로 보호 모드는 그 밖의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된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보호 모드 안에서 동작하며, 수퍼바이저 모드의 모든 것을 제어하는 커널과 통신해야만 하드웨어를 이용할 수 있다. CPU는 오래된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가상 모드와 같이 보호 모드와 비슷한 다른 모드들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32비트에서 16비트 프로세서를, 아니면 64비트에서 32비트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할 때) 컴퓨터가 처음 시동할 때 자동으로 수퍼바이저 모드에서 실행된다. 컴퓨터를 켜자마다 먼저 실행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들이 바이오스와 부트로더이며 운영체제는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접근한다. 그리고 운영체제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제어권을 보낼 때 CPU를 보호 모드에 놓을 수 있다. 메모리 관리 멀티프로그래밍 운영체제 커널은 현재 프로그램이 이용하는 모든 시스템 메모리를 관리해야 한다. 이로써 어느 특정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메모리와 상호 작용하지 않게 한다. 프로그램이 시분할하므로 각 프로그램은 메모리에 독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상 메모리 페이징이나 세그먼테이션과 같은 가상 메모리 어드레싱을 이용하면 커널은 어느 메모리를 각 프로그램이 주어진 시간에 사용할 수 있게 할지 설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운영체제가 여러 개의 태스크에 같은 메모리 위치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는 메모리 범위에 없는 메모리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할당되면 커널은 프로그램이 마치 할당된 메모리를 초과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터럽트 처리한다. 유닉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터럽트를 페이지 실패라고 부른다. 커널이 페이지 실패를 감지하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프로그램의 가상 메모리 영역을 수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써 요청된 메모리에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현대의 운영체제에서 자주 접근하지 않는 메모리는 일시적으로 디스크나 다른 매체에 저장하여 다른 프로그램에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이를 스왑 처리(swapping)라고 하며 이를 통해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특정한 메모리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 멀티태스킹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나의 컴퓨터에 실행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태스크들이 동시에 수행하는 것처럼 보여 준다. 대부분의 컴퓨터가 한 번에 최대 한 두개를 수행할 수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시분할을 통해 수행된다. 다시 말해 각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실행 시간의 일부를 사용한다. 운영체제 커널은 스케줄러라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각 프로그램이 실행에 소비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여기서 실행 제어권이 프로그램에 넘어갈 수 있게 한다. 제어권은 프로그램이 CPU와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커널로 말미암아 프로세스로 넘어간다.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CPU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어권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하여 커널로 반환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 간의 제어권 이동을 이른바 문맥 교환이라고 부른다. 디스크 접근 및 파일 시스템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것은 모든 운영체제의 기본 기능이다. 컴퓨터는 더 빠른 접근, 더 높은 신뢰성을 위해, 또 드라이브의 남은 공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파일을 이용하여 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파일을 디스크에 저장하는 이러한 방식을 파일 시스템이라고 부르며 파일이 이름과 특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또, 이러한 파일들을 디렉터리 트리로 정렬되는 특정 계급의 디렉터리와 폴더에 저장하게 한다. 초기의 운영체제는 일반적으로 한 종류의 디스크 드라이브와 한 종류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였다. 초기의 파일 시스템들은 용량, 속도, 또 파일 이름과 디렉터리 구조의 종류에 제한이 있었다. 이러한 제한은 설계된 운영체제의 제한에 반영되므로 특정한 운영체제가 하나 이상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더 단순한 수많은 운영체제들은 기억 장치의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한 제한된 옵션들을 지원하였는데, 유닉스와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들은 가상 파일 시스템(VFS)이라는 기술을 지원한다. 유닉스와 같은 운영체제는 공통 API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이나 디자인에 관계 없이 다양한 기억 장치를 지원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장치 접근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VFS는 다양한 파일 시스템에,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와 파일 시스템 드라이버를 사용하여 프로그램들이 무제한의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운영체제에 제공한다. 연결된 하드 드라이브와 같은 기억 장치들은 장치 드라이버를 통해 접근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드라이브의 특정한 언어를 이해하고 이 언어를 운영체제가 모든 디스크 드라이브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표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유닉스에서 이를 블록 장치의 언어라고 한다. 장치 드라이버 장치 드라이버는 하드웨어 장치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특정한 종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장치 드라이버의 주된 설계 목적은 추상화이다. 하드웨어의 모델은, 특히 같은 종류의 장치라 하더라도 각기 다르다. 제조업체들은 더 신뢰할만한,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 더 새로운 모델들을 출시하고 이러한 새로운 모델들은 다르게 동작하기도 한다. 컴퓨터들과 운영체제들은 현재든 앞으로든 모든 장치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체제들은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장치가 제어될 것인지를 지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장치 드라이버의 기능이 이러한 운영체제의 함수 호출을 장치 특유의 호출로 번역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제어되는 새로운 장치는 적절한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올바르게 동작한다. 새로운 드라이버는 운영체제의 관점에서 장치가 평소처럼 동작하과 있음을 보증하게 된다. 비스타 이전의 윈도우, 2.6 미만의 리눅스 버전에서는 모든 드라이버 실행이 협동적이어서, 드라이버가 무한 루프에 진입하면 시스템이 정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더 최근에 나온 운영체제들은 커널 선점을 사용한다. 이 경우 태스크 제공을 위해 커널이 드라이버를 간섭하며 장치 드라이버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프로세스로부터 분리시키며 더 많은 태스크를 부여할 수 있다. 네트워킹 현재 대부분의 운영체제는 다양한 통신 프로토콜, 하드웨어, 응용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다시 말해, 서로 비슷하지 않은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자원(유무선 연결을 이용한 연산, 파일, 프린터, 스캐너)을 공유하기 위해 같은 망에 참여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원격 컴퓨터의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치 리소스가 로컬 컴퓨터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는 컴퓨터의 그래픽, 사운드 하드웨어를 공유하거나 네트워킹 파일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 단순한 통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부 네트워크 서비스는 컴퓨터의 자원을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SSH는 네트워크로 이어진 사용자들이 컴퓨터의 명령 줄 인터페이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한다. 보안 컴퓨터의 보안은 수많은 기술이 올바르게 동작하고 있는 지에 달려 있다. 또, 운영체제는 보안을 위하여 특정 환경에 대한 권한을 사용자나 프로그램에 개별적으로 설정하고 인증 프로세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보안은 특히 여러 사용자가 사용하는 시스템에 적절하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각 사용자는 개인 파일을 다른 사용자가 읽을 수 없게 할 수 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어떠한 종류의 입력을 받는 모든 컴퓨터는 사람이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이를 위한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역사적으로 컴퓨터 명령어를 한 줄씩 입력해 나가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와 일반적으로 창, 단추, 아이콘을 이루는 시각 환경이 존재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나뉜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현대의 대부분의 컴퓨터 운영체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맥 OS와 같은 일부 컴퓨터 시스템에서 GUI는 커널에 통합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운영체제의 서비스가 아니지만 운영체제 커널에 통합하면 GUI가 출력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문맥 교환을 없앰으로써 GUI를 더 반응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운영체제로는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커널과 운영체제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듈성이 있다. 1980년대 유닉스에서 VMS 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운영체제였다. GNU/리눅스 및 맥 OS X 또한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 윈도우 비스타와 같은 현대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거의 사용자 공간에 위치한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지만 윈도우 NT 4.0과 윈도우 서버 2003 버전 사이의 그래픽 구현 루틴은 거의 커널 공간에 존재한다. 윈도우 9x는 인터페이스와 커널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다. 수많은 컴퓨터 운영체제는 사용자가 원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설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X 윈도 시스템을 GNOME이나 KDE와 함께 쓰면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시스템에서 이러한 설정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윈도우 셸 치환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윈도우 셸을 교체하는 방식을 쓰지만 윈도우로부터 셸 자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 실시간 운영체제 실시간 운영체제 (RTOS)는 정해진 기간 안에 수행이 끝나야 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위하여 만들어진 멀티태스킹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연산) 이러한 응용 프로그램들에는 조그마한 임베디드 시스템,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 산업 로봇, 우주선, 산업 제어 장치, 일부 대형 컴퓨터 시스템 등이 있다. 초기의 대형 실시간 운영체제는 이를테면 아메리칸 항공과 IBM이 사브레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하여 개발한 트랜잭션 프로세싱 퍼실리티(TPF)가 있다. 일부 임베디드 시스템은 실시간 연산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심비안 OS, 팜 OS, BSD,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를 이용한다. 취미 활동을 통한 운영체제 개발 운영체제 개발은 컴퓨팅에 취미를 둔 사람들이 관여하는 가장 복잡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취미로 만드는 운영체제는 기존의 운영체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코드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들과 활동 개발자들의 수는 적은 편이다. 취미 활동으로 개발된 운영체제의 예로는 ReactOS와 Syllable 등이 있다. 시장 점유율 출처: 가트너 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 범위 및 논란 운영체제는 잘 정의된 인터페이스를 가지므로 운영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만,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체제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음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1998년 미국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요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제에 너무 많은 기능을 포함시켜 응용 프로그램 제작업체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같이 보기 운영체제의 역사 운영체제 목록 운영 체제 최적화 모바일 운영 체제 범용 운영 체제 전용 운영 체제 실시간 운영 체제 (RTOS) 임베디드 시스템 객체 지향 운영 체제 각주 참고 문헌 O'Brien, J. A., & Marakas, G. M.(2011).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10e. McGraw-Hill Irwin. 외부 링크 운영체제의 동작 원리 세계 최초의 컴퓨터 운영체제 운영체제에 관한 TUNES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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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8%80%EB%82%A0
한글날
한글날() 또는 조선글날(朝鮮--)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계양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고 있다. 유래와 역사 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로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1906년에 제안했던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명명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이것은 1582년 이전의 윤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매기고, 1582년에 생략된 날짜는 고려하지 않고 잘못 환산한 것이었다. 1446년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실제로는 율리우스력으로 10월 18일이 된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기간도 그레고리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는 역산 그레고리력(proleptic gregorian calender)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합의가 나와 그에 따라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그러던중에 한글이 반포된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에 따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므로 새로이 한글날을 10월 9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16일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 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 2005년, 2011년에는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쉬었다. 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1월 16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 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되면서, 제0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 기념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과 국어기본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별표]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 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별표]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같이 보기 한글 훈민정음 국립국어원 한국어 조선어학회 대한민국의 공휴일 각주 외부 링크 한글날의 유래와 변천 - 새국어 소식 1998년 제3호 대한민국의 국경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념일 대한민국의 공휴일 한글 10월의 기념일 1월의 기념일 10월 9일 1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대한민국의 국기 게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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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9E%98%ED%94%BD%20%EC%86%8C%ED%94%84%ED%8A%B8%EC%9B%A8%EC%96%B4
그래픽 소프트웨어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람이 이미지나 모델을 시각적으로(visually)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또는 프로그램 모음을 의미한다. 화상 편집 소프트웨어라고도 한다. 크게 공간에 따라 3차원(입체)과 2차원(평면)으로 나뉘며, 좌표 설정 방식에 따라 벡터방식과 래스터(픽셀) 방식으로 나뉜다. 역사 슈퍼페인트(SuperPaint, 1973년 4월)가 최초의 그래픽 응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이다. Fauve Matisse(이후 매크로미디어 xRes로 명칭 변경)는 1990년대 초에 선구적인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객 소프트웨어 내에 레이어 개념을 도입하였다. 현재 미국에서는 어도비 포토샵이 가장 흔히 사용되고 가장 잘 알려진 그래픽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이다. 코렐드로는 유럽에서 어도비 보다 더 강력한 사용자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GIMP는 어도비 포토샵을 대체하는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예 2차원 래스터 방식의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 어도비 포토샵 페인트샵 프로 코렐 페인터 김프 ACDSee 어피니티 포토 벡터 방식의 그래픽 제작 프로그램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어도비 플래시 코렐 드로우 잉크스케이프 어피니티 디자이너 3차원 오토캐드 3D 스튜디오 맥스 마야 라이트웨이브 소프트 이미지 XSI 스케치업 ZBrush 블렌더 탁상출판 스크라이버스 페이지메이커 각주 응용 소프트웨어 컴퓨터 그래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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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A%9C%EB%A7%81%20%EA%B8%B0%EA%B3%84
튜링 기계
수학 또는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 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개론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테이프 : 테이프는 서로 연속한 단위 구간들로 나뉜다. 각각의 구간은 알파벳을 가지고, 특정 알파벳은 비어있음을 나타낸다. 테이프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임의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한번도 쓰이지 않은 구간은 비어있다는 기호로 표시된다. 어떤 테이프는 왼쪽을 고정시키고 오른쪽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반직선의 형태로 되어있다. 머리 : 기계가 머리를 읽으면 테이프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한 칸 (오직 한 칸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모델에서는 머리가 움직이고 테이프가 고정되기도 한다. 상태 기록기는 튜링 기계의 유한히 많은 상태 중 하나를 기록한다. ‘개시 상태’는 상태 기록기를 초기화시키는 특별한 상태이다. 유한한 표 (또는 행동표)는 특정한 상태(qi)에 있는 기계가 어떠한 기호(aj)를 읽을 때 해야 할 행동을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5튜플). 기호를 지우거나 적고 (aj를 aj1으로 치환) 머리를 옮긴다 (‘L’은 왼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R’은 오른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N’은 정지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같은 상태나 새로운 상태로 간다 (qi에서 qi1으로) 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 정의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 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상태들의 집합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기호와 알파벳들의 집합 는 비어있음을 알려주는 기호 (테이프 위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호) 는 입력가능한 기호들의 집합 는 초기상태 는 최종상태, 또는 수락 상태 는 부분함수 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 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기호들을 실제로 결정하는 데 많은 과정이 소모될 것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은 머리가 테이프 위에서 이동하게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튜링 기계를 만들 때 테이프가 머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테이프는 유한하지만 필요한 만큼 비어있는 상태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테이프가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고 유한한 분열의 머리가 채워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른 정의들 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를 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 (정의 1) : (qj, Sj, Sk/E/N, L/R/N, qm) (현재의 상태 qj, 읽혀진 기호 Sj,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새로운 상태 qm) 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 (정의 2) : (qj, Sj, qm, Sk/E/N, L/R/N) (현재의 상태 qi, 읽혀진 기호 Sj, 새로운 상태 qm,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0=”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k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 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 상태 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 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 튜링 머신과 동치인 다른 모델들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등이 있다. 범용 튜링 기계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 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 실제 기계와의 비교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 실제 컴퓨터가 연산할 수 있다면 튜링 기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튜링 기계의 한계는 곧 실제 컴퓨터에도 적용된다. 실제 컴퓨터와 튜링 기계의 차이점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다. 튜링 기계의 경우 무한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나, 실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유한하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에서는 튜링 기계도 실제 기계처럼 유한한 양의 데이터만 조작 가능하다. 튜링 기계처럼 실제 기계도 하드 디스크와 같은 기타 저장 매체들을 이용해 저장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저장 매체들이 구하기 힘들어진다면 튜링 기계와 실제 기계의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연산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저장 공간의 작은 크기가 아닌 느린 연산 속도이다. 실제 기계를 설명할 때 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모델을 사용한 실제 설명보다 튜링 기계를 이용한 설명이 더욱 간단하다. 만약 튜링 기계가 하나의 알고리즘을 설명하는데 몇 백개 정도의 상태가 필요하다면 같은 설명을 하는데 결정적 유한 오토마타는 수 천조의 상태가 필요하다. 튜링 기계는 얼마나 많은 메모리를 사용하는지에 관계없이 알고리즘을 설명할 수 있다. 튜링 기계는 실제 기계의 발전과 전혀 관계 없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의 설명을 간단케 한다. 튜링 동치인 추상적 기계를 사용하여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것은 실제 기계보다 훨씬 일반적이다. 실제 기계에는 메모리 공간 부족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며 또 자료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 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 역사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 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 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 산술적 함수 +, -, × (이 때의 -는 y≥0 일 때 x-y=0이 되는 적절한 뺄셈이다.) 그 어떤 일련의 연산도 하나의 연산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복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반복 (시험 T가 성공한다는 조건 하에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이동 (결과값에 따라 계산 순서가 변경) 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 판정문제 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10.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을 결정하라.임의의 주어진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정수해를 유한한 연산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가? 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 수학은 완전한가? 수학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가? 수학은 결정 가능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앨런 튜링의 a-기계 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 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 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 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로 환원시켜 생각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 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 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같이 보기 확률적 튜링 기계 양자 튜링 기계 교대 튜링 기계 범용 튜링 기계(UTM, :en:Universal Turing machine) 참고 참고 문헌 1차 저서, 재출판, 편집 B. Jack Copeland ed. (2004), The Essential Turing: Seminal Writings in Computing, Logic, Philosophy,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rtificial Life plus The Secrets of Enigma, Clarendon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UK, . Contains the Turing papers plus a draft letter to Emil Post re his criticism of "Turing's convention", and Donald W. Davies' Corrections to Turing's Universal Computing Machine 마틴 데이비스 (ed.) (1965),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Raven Press, Hewlett, NY. 에밀 포스트 (1936), "Finite Combinatory Processes—Formulation 1", Journal of Symbolic Logic, 1, 103–105, 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에 재출판됨. pp. 289ff. 에밀 포스트 (1947), "Recursive Unsolvability of a Problem of Thue", Journal of Symbolic Logic, vol. 12, pp. 1–11.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재출판됨. pp. 293ff. In the Appendix of this paper Post comments on and gives corrections to Turing's paper of 1936–1937. In particular see the footnotes 11 with corrections to the universal computing machine coding and footnote 14 with comments on Turing's first and second proofs. (and ). Reprinted in many collections, e.g. in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p. 115–154; available on the web in many places, e.g. at Scribd. 앨런 튜링, 1948, "Intelligent Machinery." Reprinted in "Cybernetics: Key Papers." Ed. C.R. Evans and A.D.J. Robertson. Baltimore: University Park Press, 1968. p. 31. F. C. Hennie and R. E. Stearns. Two-tape simulation of multitape Turing machines. JACM, 13(4):533–546, 1966. 계산 이론 Some parts have been significantly rewritten by Burgess. Presentation of Turing machines in context of Lambek "abacus machines" (cf Register machine) and recursive functions, showing their equivalence. 테일러 L. 부스 (1967), Sequential Machines and Automata Theory, John Wiley and Sons, Inc., New York. 공대 졸업생 수준의 책.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며 9장 튜링 기계는 재귀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루고 있다. . On pages 12–20 he gives examples of 5-tuple tables for Addition, The Successor Function, Subtraction (x ≥ y), Proper Subtraction (0 if x < y), The Identity Function and various identity functions, and Multiplication. . On pages 90–103 Hennie discusses the UTM with examples and flow-charts, but no actual 'code'. A difficult book. Centered around the issues of machine-interpretation of "languages", NP-completeness, etc. Distinctly different and less intimidating than the first edition. Stephen Kleene (1952), Introduction to Metamathematics,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Amsterdam Netherlands, 10th impression (with corrections of 6th reprint 1971). Graduate level text; most of Chapter XIII Computable functions is on Turing machine proofs of computability of recursive functions, etc. . With reference to the role of Turing machines in the development of computation (both hardware and software) see 1.4.5 History and Bibliography pp. 225ff and 2.6 History and Bibliographypp. 456ff. Zohar Manna, 1974, Mathematical Theory of Computation. Reprinted, Dover, 2003. 마빈 민스키, Computation: Finite and Infinite Machines, Prentice–Hall, Inc., N.J.,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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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test has ended, with the proof affirming the machine's universality. "Turing Machine Causal Networks" by Enrique Zeleny, Wolfram Demonstrations Project. Purely mechanical Turing Machine 이론 컴퓨터 과학 앨런 튜링 계산 모형 정형 기법 계산 가능성 이론 잉글랜드의 발명품 오토마타 이론 형식 언어 추상 기계 1936년 컴퓨팅 1937년 컴퓨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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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글꼴
글꼴은 컴퓨터로 보는 글자들의 모양새 또는 그 전자적 데이터 파일을 뜻한다. 표시 방식 크게 비트맵 방식과 벡터, 그리고 스트로크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비트맵 방식의 글꼴: 크기가 고정된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처리 속도가 빠르지만, 정해진 크기에서만 제대로 보이며 확대시키면 획의 둥근 부분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외곽선 방식의 글꼴: 벡터 방식이라고도 하며 크기를 변화시켜도 깨지지 않지만, 선을 그리는 데에 처리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스트로크(stroke) 글꼴은 일련의 지정된 선과 부가 정보를 사용하여 특정한 모양의 선의 프로파일, 크기, 모양을 정의한다. 과거 운영 체제에서 사용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글꼴은 벡터 방식에 비트맵 글꼴을 임베딩(추가)하여 넣는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는 비트맵 글꼴만으로는 축소, 확대, 출력에 문제가 있어(일반적으로는 확대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지 않기 때문에: 실제 글꼴 규격에는 확대, 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을 수 있다.) 벡터 방식을 같이 이용하는 것이다. 비트맵 방식은 화면에서 해당 비트맵 그대로 보이는 반면, 벡터 방식은 아웃라인이 화면에 표현되면서 왜곡이 발생하게 되고 원치 않는 형태로 깨져보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특정 크기에 맞추어 비트맵 디자인을 한 후, 벡터 방식에 임베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너비의 변화 글꼴을 글자들의 너비 변화에 따라 고정폭 글꼴과 가변폭 글꼴로 나눌 수 있다. 고정폭 글꼴: 글자에 상관 없이 일정한 너비를 할당한다. 한글 글꼴의 경우 한글 글자의 폭은 사실 영문 글자의 폭의 두배를 차지한다. 가변폭 글꼴: 글자에 따라 변화된 너비를 할당한다. 넓은 너비: W와 같은 글자에는 넓은 너비를 할당한다. 좁은 너비: i와 같은 글자에는 좁은 너비를 할당한다. 좀 더 세밀하게 모습을 조정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를테면 'VA'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커닝(자간 여백)이 많은 경우 폰트 자체에 커닝 문자 쌍의 정보가 있거나 수동으로 커닝을 직접 지정해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문자들에 따라서 가변폭 글꼴을 많이 쓰지 않거나 아예 쓰기 힘든 경우도 자주 있다. 이를테면, 한자는 가변폭 글꼴을 만들기 힘들며, 그 영향으로 가나나 한글 글꼴도 고정폭인 경우가 많다. 글꼴의 속성 글꼴은 컴퓨터에서 표시될때에 여러 가지 속성 설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크기: 글꼴의 크기는 포인트(point) 단위를 쓴다 보통 컴퓨터 글꼴에서는 9~12포인트를 많이 쓰며 6포인트 이하의 글꼴은 대단히 알아보기 힘들어 질 수 있다. 정렬: 오른쪽 줄맞춤, 왼쪽 줄맞춤, 양쪽 줄맞춤, 가운데 줄맞춤을 주로 사용한다. 과부와 고아: 어떤 단어가 문장에서 혼자 따로 떨어져서 표시되면 과부(widow)라고 하고 문단의 시작에 떨어져있으면 고아(orphan)이라고 한다. 줄길이: 문단의 줄길이는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과유불급의 원칙을 따른다. 레딩(leading): 행간 혹은 줄 사이의 수직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 글꼴 크기의 20% 정도 크게 한다. 너무 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으면 읽기 힘들어진다. 커닝(kerning): 글자간, 자간은 글자간의 수평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은 글자들을 충분히 나타낼만한 크기여야한다. 글꼴 형식 타입 1, 타입 3 글꼴 타입 1, 타입 3 글꼴은 어도비사가 전문 디지털 타이프세팅을 위하여 개발한 것이다. 포스트스크립트를 사용하면 입방 베지에 곡선의 외곽선 글꼴이 된다. 타입 1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부분집합에 제한을 받으며 어도비의 힌팅 시스템을 사용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쓰였다. 타입 3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무제한적 사용을 허용하지만 힌팅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저해상도의 기기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와 컴퓨터 화면)에서 깨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오픈타입 글꼴 오픈타입은 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설계한 스마트폰트 시스템이다. 오픈타입 글꼴은 넓은 범위의 메타데이터를 곁들여 트루타입이나 타입 1 (실제로 CFF) 포맷의 외곽선을 포함하고 있다. 트루타입 글꼴 트루타입은 애플이 개발한 글꼴 체제이다. 타입 1 글꼴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타입 1 글꼴과 달리 트루타입은 베지에 곡선으로 그려진다. 현재에 이르러 널리 쓰이고 있으며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 적용되고 있다. 메타폰트 메타폰트(METAFONT)는 다른 종류의 글꼴이다. 트루타입과 달리 벡터 글꼴의 체제를 갖추었다. 관련 기술 웹 폰트 웹 폰트는 동적 폰트(dynamic fo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동적 폰트는 글꼴이 사용자의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지 않아도 볼 수 있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안된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웹 폰트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웹 폰트의 포맷은 비트스트림의 .pfr 형식과 마이크로소프트의 .eot 형식, 이렇게 2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pfr은 넷스케이프와 모질라까지 지원하고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반면, .eo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특정 버전 이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지원되고 파일 형식은 공개되지 않아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는 사용하지 못한다. .eot 형식은 MS의 WEFT 응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으며, 웹폰트가 사용될 사이트의 URL(인터넷 주소)을 넣을 수 있어 해당 URL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불법 사용 또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웹 폰트가 사용된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웹 브라우저에서 웹폰트를 접속자의 컴퓨터에 자동으로 내려받아 해당 웹페이지를 웹폰트로 보여준다. 따라서 웹폰트의 파일 용량이 크면 클수록 내려 받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고, 실제 웹페이지가 웹 폰트로 대체되어 표시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웹 폰트를 쓰는 일부 포털에서는 해당 글꼴이 비트맵 방식이면 출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eot와 pfr 말고도 GlyphGate에서 개발한 웹 폰트 형태가 있다. 표시 기술 앤티에일리어싱 앤티에일리어싱은 높은 해상도의 신호를 낮은 해상도에서 나타낼 때 생기는 에일리어싱(깨진 패턴)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운영 체제와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 이미 이 기술을 기본 지원하고 있다. 클리어타입 클리어타입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기술로, 액정 화면에서 더욱 깨끗하게 글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액정 화면의 한 개 픽셀은 RGB(빨간색, 녹색, 파란색)의 3개의 서브픽셀(sub-pixel)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클리어타입은 가로방향으로만 RGB의 서브픽셀을 이용한 안티에일리어싱 효과가 나기 때문에, 세로방향에 대해서는 계단 현상의 느낌이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클리어타입에 세로방향으로 안티알리아싱 효과를 더한 래스터라이징 기술을 개발하여 발표하였고, 그로 인해, 외곽선의 계단현상이 최소화되어 보다 나은 래스터라이징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정확한 래스터라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힌팅 정보를 필요로 하는데 거의 모든 상용 한글 글꼴에는 제대로 된 힌팅 정보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클리어타입의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선명성에서 큰 향상은 없는 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7에 기본 글꼴로 사용되는 한글 글꼴 ‘맑은 고딕’은 한글 글꼴의 힌팅 정보를 포함하여 클리어타입 기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최초의 한글 글꼴이다. 같이 보기 글꼴 목록 오픈 폰트 라이선스 외부 링크 Font Technologies chapter of the LDP's Font-HOWTO History and technology of computer fonts, Annals of the History of Computing, IEEE, Apr-Jun 1998, Vol. 20, Issue 2, pages 30–34, ISSN 1058-6180. 글꼴 디지털 타이포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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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 인도 인민당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정당이다. 일당 독재 체제로 국가를 통치하는 공산당 가운데 하나로, 약칭은 중공()이다. 중국공산당은 1919년 공산주의 조직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인민민주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으며 천두슈와 마오쩌둥, 리다자오, 리다, 마오둔, 덩중샤, 장궈타오, 리한쥔, 위슈쑹 등이 초기 구성원이었다.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천두슈 등이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0년 10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등이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1920년 11월, 창사에서 마오쩌둥 등이 창사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1년 3월, 광저우에서 천궁보 등이 광저우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회로부터 공산당 당원의 골간을 이뤘다. 그 이후로, 중국국민당과 대립 노선을 분명히 해가고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파업을 주도해가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 옌안 공산 혁명 근거지 시기를 거쳐 1949년까지 중국국민당에 맞서 도시 노동자, 농민, 하급 지식인, 학생 등을 대거 마오쩌둥 진영에 유입시켰고, 스탈린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인민민주독재를 여러 방면으로 파급해갔으며, 두 번째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싸워 승리하며 중국 대륙 본토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상인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정치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합리적인 비판과 민주적인 토론을 통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해 나간다는 사상이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기구는 5년마다 열리는 전국대표회의로, 전국대표회의가 개회되지 않았을 때에는 중앙위원회가 최고 결정권을 가진다. 중국공산당의 당수는 중국의 최고직인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국의 군사력 자체를 총괄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가 주석 등의 자리를 모두 역임하게 되며, 결국 중국공산당의 당수가 곧 중국의 최고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2012년 18대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된 시진핑이다. 중국공산당은 공산당 주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 혁명 노선을 문화 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한 후,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목표가 된 계급 투쟁 노선의 종결을 공식 선포하고, 개혁과 개방 노선을 취해오고 있으며,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개혁과 개방 공산당 영도와 경제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정강 정책을 확립하면서, 1992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개요 중국공산당은 2014년 기준으로 86,700,000명의 당원을 거느릴 정도로 매우 거대한 규모의 정당이다. 중국은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사례로 베이징 대학 대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이유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공산당 당원이 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를 통제하는 독재적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지닌 이 정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을 계속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현대화 이후 상대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 특히 경제적인 영역에서 중국공산당 이외의 인물과 조직의 공식적인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해안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 및 그 산하 위원회가 모든 중요한 정부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에 대해 정치적인 지침을 내리고 있으므로 비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의 규율에 도전하는 자치기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정부 조직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국공산당의 통제력은 굉장히 강력하며 노동조합도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다. 연표 중화민국 1920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지도로 중국공산당 창당 조직 설립. 1920년 10월: 중화민국 베이징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 1920년 10-11월: 중화민국 후난성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 1921년 3월: 중화민국 광둥성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 1921년 7월 1일: 제1차 공산당 당대회 개최. 공식 창당. 1922년 7월: 레닌의 코민테른(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 정식가입. 1924년-1927년: 제1차 국공 합작. 1927년: 국공 합작 결렬, 국공 내전 .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설립. 1934년: 대장정, 옌안 혁명 근거지 시기. 1937년-1945년 : 옌안 본거지 시기. 제2차 국공 합작으로 중일 전쟁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참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 시작. 1949년 2월: 베이징 함락. 1949년 3월: 난징 함락. 중화인민공화국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50년 10월: 한국 전쟁 개입. 1950년-1951년: 인민민주독재 개시와 반혁명분자 재판. 1951년-1952년: 마오이즘 사상개조운동과 삼반오반운동. 1955년-1957년: 반우파운동. 1958년: 대약진 운동. 1966년-1976년: 문화 대혁명.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화궈펑 체제. 1978년: 덩샤오핑 개혁개방, 4대 현대화. 1989년: 톈안먼 사건 발발. 1992년: 남순강화와 중국 특색 사회주의 1997년: 덩샤오핑 사망, 홍콩 반환 2002년: 자본가들의 입당을 허용. 2005년: 반분열국가법 통과. 2010년: 중국의 총GDP가 2위로 상승하며 일본을 추월. 2013년: 시진핑 집권. 2015년: 국공내전이래 첫 양안회담. 2018년: 시진핑 재집권, 3연임제한 조항 폐지.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결렬, 코로나19 창궐.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 2021년: 창당 100주년을 맞이함. 역사 창당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1919년 일어난 5·4 운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급진적인 중국 엘리트층이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은 사회적 이념들을 접하며 큰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활약하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널리 펼치기 시작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공산당을 만들자는 의견이 강해지게 되었다.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가 처음으로 혁명 이론과 공산주의의 세계화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으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또다른 주요 지식인이었던 천두슈와는 다르게 중화민국 건국에 불참하지는 않았다. 다만 리다자오와 천두슈 둘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세기의 전환점이며, 이를 계기로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동일했다. 초기 중국공산당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전위당론에 입각하여 창당되었다.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이 당시에는 오직 50여 명의 당원들만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팽창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본디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되었으나, 회의 중간인 7월 30일에 프랑스 경찰의 탄압으로 인하여 상하이에서 쫓겨나 31일에는 저장성 난호 위에 떠있는 배 위에서 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때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의 탄압으로 워낙 혼란스러웠던 터라 리다자오나 천두슈도 이 회의에 참여치 못하였고, 오직 12명의 대표들만 모여 회의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회의 마지막 날이었던 31일, 대표들은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천두슈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당시 쑨원의 지휘를 받고 있던 국민당에 가입하였는데, 이를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좌익을 맡았으며, 우익 세력들과 함께 권력을 다투었다. 쑨원이 1925년 3월에 세상을 떠나자, 우익 세력의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그의 자리를 맡았다. 장제스는 성공적으로 제1차 북벌을 끝낸 이후 칼 끝을 몇 만명에 달하는 공산당 세력에게 겨누었다. 그는 우한의 국민당 중앙 간부들의 만류도 뿌리친 후 군대를 이끌고 공산당이 장악했던 상하이로 행군했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했으나, 장제스는 본심을 드러내고 5,000여 명의 공산당원들과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를 4·12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장제스는 우한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공산당 장군에 가로막혔다. 장제스와 그의 동맹들은 직후 중국 전역을 돌며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베이징에서는 군벌 장쭤린의 지시 하에 19명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암살당했으며 장사에서는 수 백명에 달하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총살당했다. 그해 5월에 이르자 몇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살해당했으며 중국공산당은 최종적으로 25,000여 명의 당원들 중 15,000여 명의 당원들을 잃으며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중국공산당은 이후에도 우한의 중화민국 정부를 계속 지지했으나, 중화민국은 1927년 7월에 모든 공산당 당적 인사들을 정부 요인 명단에서 제거하였다. 공산당은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군대인 '홍군'을 창군하며 이에 대응했다. 홍군은 국민당이 장악한 중화민국군에 대항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1927년 8월 1일에는 주더 장군이 이끄는 홍군이 난창을 공격하며 난창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막대한 공세를 퍼붓는 중화민국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공산군은 산터우로 후퇴한 이후 푸젠성 임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이 때 마오쩌둥이 홍군의 지도자로 등장했고, 장시성 일대에서 추수 봉기를 일으키며 농민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중화민국에 맞서 싸워주기를 바랐다. 그는 9월에 중화민국의 도시들을 삼면에서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으나, 중화민국과의 압도적인 전력 차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결국 패배를 시인할수 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후 1,000여 명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 동쪽으로 행군해갔다.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국공산당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은 공산당 조직 자체를 뒤흔들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민주집중제를 채택하였으며 정치국을 설립하여 각기 다른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형태로 바뀌었다. 중앙 정치국은 당의 모든 인사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분열과 내분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천두슈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자 1929년 리리싼이 일시적으로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리리싼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고 공산당은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중국공산당의 상황을 보다 못한 코민테른이 개입하여 리리싼을 쫓아낸 이후 마오쩌둥을 정치국 위원과 비공식적인 지도자로 세웠다. 당의 전 대표였던 저우언라이와 장원톈은 마오쩌둥을 옆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홍군도 이 때 재구성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중앙집중제 형태로 개편되어 마오쩌둥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군대로 바뀌었다,허나 국민당의 5차 공산당토벌로 대장정의 길을 걷고 1년을 걸어서 산시성에서 독립적인 형태로 재등장한다. 2차 중일 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손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2차 국공합작이 만들어졌고,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함께 침략군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처지가 된 것이다. 2차 국공합작은 공식적으로는 1945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실질적인 협력은 이미 1940년에 끝났다. 이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뿌리깊은 불화 때문이었기에 서로를 믿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공산당은 전쟁을 당세를 늘리고 나중에 국민당에 대항할 세력을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국민당도 공산당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1939년부터는 점차 공산당의 팽창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이때문에 종종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공공의 적인 일본이 존재하였던 탓에 이 충돌들은 크게 번지지 않고 작은 규모에서 일단락되었다. 1943년부터는 국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확장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1945년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전쟁은 본격적인 국공 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중국 내전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일본이 망한 1945년 8월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평화 협상이 종결된 1946년 6월까지이다. 1945년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에는 국민당의 중화민국 군대가 공산당보다 3배나 많은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훨씬 더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협조 하에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지역들을 큰 저항없이 장악할 수 있었으나, 이 점령지들에서 중화민국은 부패한 관료들과 무력 행사로 인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국민당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장악한 시골 지역들을 탈환하는데에 처참히 실패하였고, 공산당은 점차 소련의 원조를 받아 만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46년 7월에서 1947년 6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국민당은 중국 대륙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허나 이는 빈껍데기일 뿐이었는데, 이는 국민당 내부의 고질적인 불화와 장제스의 독재적인 면모로 인하여 국민당은 점차 내부에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47년 7월에서부터 1948년 8월까지로, 이 시기에 공산당이 점차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원을 장악하고 북부 지역을 평정하였으며 북동부 지역도 거의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편 국민당은 크게 약화되었고 대략 3백만명에 달하는 군사들을 잃으며 큰 타격을 입었을 뿐더러, 부패와 무능으로 사람들의 지지도 얻는데 실패하며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단계는 1948년 9월에서 1949년 12월까지로, 이 시기에 중국 본토가 완전히 공산당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대만으로 국부천대하며 세력이 크게 쪼그라들었다. 현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정식 선포했다. 그해 말이 되자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혔고,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공산당을 이끌어간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과 같은 핵심 인물들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러한 풍조는 단순히 이들에만 그치지 않았고, 중국의 전반적인 사회적, 정치적 지형에서 개인적인 연과 친분이 매우 중요해지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사상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지속적인 혁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반혁명분자와 지주계급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문화 대혁명을 일으키며 수 백만명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참사를 저질렀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 자리를 두고 화궈펑과 덩샤오핑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덩샤오핑이 결국 화궈펑을 누르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고, 1978년에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확고한 중국의 1인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등과 같은 개혁파의 도움에 힘입어 개방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개념을 도입하며 중국공산당을 여타 공산당과 소련과 차별화하려 노력하였다. 덩샤오핑의 통치기에 중국은 시장을 개방했는데, 이는 마오쩌둥과는 달리 자본주의화되지 않고서도 시장을 개방하여 자유로운 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은 덩샤오핑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였다. 허나 이같은 개방 조치는 마오쩌둥을 신봉하던 보수세력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에게까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는 덩샤오핑의 개혁 조치가 만족할 만큼 개방되었거나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같은 불만을 결국 1988년 천안문 사태로 폭발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무력으로 깔아뭉개며 중국의 민주화 움직임을 압살하였으나 다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큰 성취를 이루며 경제 대국으로의 길을 열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사회적 시장 경제의 개념이 등장하였고, 1997년에는 덩샤오핑주의가 아예 중국의 헌법에 못박혔다. 중국공산당의 장쩌민 주석은 1990년대에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으며, 덩샤오핑의 정책들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덩샤오핑 이전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대부분 국가 수립 이전,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고 싸웠던 급진적인 혁명가들이었던 데에 반해, 장쩌민 주석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공산당 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안정된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유능한 정치인들이었으며, 경제적, 사회적 이 두 분야 모두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은 점차 규칙과 법에 기반한 체제를 이룩하기 시작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마구잡이로 간부들을 승진시키거나 좌천하는 악습에서 벗어나 능력, 실무, 학력 등에 기반하여 간부들을 양성하고 채용하는 등 제대로 된 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군사적인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을 익힌 전문 군사 간부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점차 힘을 키우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3년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문화했다. 삼개 대표사상이란 장쩌민의 정치적 유산들 가운데 하나로, 후임자들과 미래 세대를 위하여 중국의 발전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삼개 대표사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 장쩌민의 뒤를 이어 총서기에 오린 후진타오는 2002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1인 독재를 추구하였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는 모두 집단지도체제를 중시하였으며 권력이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2000년대 중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지나치게 빠른 성장은 빈부격차, 경제 규모에 걸맞는 사회의식의 부재와 같은 부작용도 가지고 왔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후진타오 총서기은 '과학적인 발전'과 '조화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내세우며 국가의 안정을 닦고자 하였다.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 18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사임하였으며, 자신의 자리를 후임자인 시진핑에게 넘겼다. 시진핑 총서기은 집권 이후부터 강력한 반부패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전임자들과는 달리 집단지도체제를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재림이라는 평을 외신들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시진핑 총서기은 중국 국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켰으며, 201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헌법에 명기하였다. 이같은 일은 후진타오, 장쩌민 총서기도 임기 내에 하지 못한 전례없는 사건이었다. 또한 시진핑 총서기이 2022년에 10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점차 외신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조직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극좌경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재건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공의 최고 기구는 적어도 5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중공은 전국대표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이 대회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당 헌장의 변경을 추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이어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당의 전국 대표대회 이전에 이미 정해지며, 전국 대회의 주목적은 앞으로의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당의 정책과 비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하위의 당 기구들은 아래와 같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정치국 중앙서기처 중앙군사위원회 당 권력의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이다. 중앙 정치국 위원과 마찬가지로, 상임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은 전국대회와 함께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의 공식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새로운 권력 구조에 대한 내용이 간접적으로 발표된다. 상임위원회원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전에 비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2002년 16대 전국 대표대회 때 위원회의 인원은 9명으로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어가는 정치 권력 중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 두 가지 주요기관이 더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이념 최근들어 외국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은 일관된 이념이 없으며 그저 실용적으로 그때그때 가장 쓸모있는 정책들을 채택하여 사용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허나 중국공산당은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으나, 이같은 의견에 못마땅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에 '서양 세력들이 우리를 분열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또는 '서양의 국제적인 힘은 강한데 반면 중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공산당은 학교에 다니는 중국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을 들어붓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으며 스스로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하며 단순한 공산주의가 아닌, 중국만의 사회주의라고 강변하고 있다. 다만 학자들은 본디 중국에서는 절대적인 이념이 있으면 그에 따라 정책을 맞추어 가는 순서였으나, 실용성을 중시하였던 덩샤오핑의 등장과 함께 가장 실용적인 정책을 고른 후에 그 다음에 이념을 그에 맞추어 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이에 대하여 크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딱딱하고, 창의적이지 못하며 현실과 괴리된 소련의 정책들이 결국 소련의 붕괴를 불러왔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만일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안정화시키고 싶다면 이념을 상황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중국공산당의 제1 이념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이다. 중국공산당에 의하면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인간 사회의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법칙을 밝힌다'라고 한다. 또한 '현재의 불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일면을 보여주며, 미래에 세계가 맞이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성을 증명하고 있다'라고도 한다. 또한 국영 신문인 인민일보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들여와 입맛대로 변형한 마오이즘은 마르크스 레닌 주의를 중국 특성에 맞추어 변형한 한 분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고, 중국공산당이 거의 국가와 동일시되는 중국의 특성에 따라 마오이즘은 단순히 중국공산당의 이념이 아니라 중국 전체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외국의 전문가들이 대부분 마오이즘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거부하고 생겨난 일종의 변종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반해, 중국공산당 스스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쩌민이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시했을 때에 이미 중국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포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학자들은 이에 '장쩌민은 그저 사회적인 장애물을 치워버렸을 뿐, 절대로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당을 강하게 만들었다. 가장 가까운 예만 들어도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며 함부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최종 목표'는 여전히 지상에 사회주의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고,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중국이 어느정도 사회주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여긴다. 다만 몇몇 당 내 극렬적인 공산주의 학자들은 지금의 중국이 지나치게 '자본주의화'되어 있다고 여기며 이같은 주장에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 뜻을 달리하는 조금 더 온건적인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일뿐'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은 여전히 정통 사회주의 국가라고 피력한다. 14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주의가 처음으로 중국 헌법에 공식적으로 명시되었다. 이 때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회주의 초기 단계 등과 같은 단어들이 처음으로 등장했으다. 덩샤오핑주의는 크게 국가 사회주의와 통제가 굳이 경직된 사회주의 체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독점물이 아니며, 시장경제는 부패한 자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아무런 특성이 없는 중성적인 요소라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당이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한 이념에만 집착하여 일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실로부터 기반한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4회 대표대회에서 장쩌민은 덩샤오핑 전 주석의 흑묘백묘론을 언급하며, 어떤 것이 자본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 묻기 전에 그 것의 실효성과 타당성에 대하여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연설에서 밝혔다. 이후 장쩌민이 자신의 정치 유산으로 삼개대표사상을 추가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중국에 맞춘 또다른 사상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평가했으나, 정작 장쩌민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후 자신의 사상은 그저 변화하는 세계의 경제 법칙에 맞춘, 조금 더 생산적인 방식의 마르크스주의라고 주장했다. 시진핑은 2018년에 '시진핑 사상'이라고 불리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19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에 추가했으며, 이 사상도 전임자들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중국에 맞추어 개조한 사상이라고 평가받는다. 경제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국가 통제 경제와 시장 경제의 차이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정의는 계획 경제가 아니다... 시장 경제도 계획 경제의 일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사회주의 아래에서도 충분히 잘 작동할 수 있다'라고 믿었다. 장쩌민도 덩샤오핑의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고, 중요한 것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그 정책이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고, 14회 대회에서는 외교관들에게 '시장의 힘이 국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발휘하여야만 한다'라고 발언도 하였다. 다만 공산당 내부의 보수적인 세력들 탓에 완전한 시장 경제를 실현하지는 못하였고, '공공' 경제의 충분한 발전이 있은 후에야만 시장 개인 경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공산당은 세계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 두 세력으로 본다. 허나 유물사관을 신봉하는 공산당은 최종적으로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꺾고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급격한 세계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마르크스의 책을 그대로 인용하여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주도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세계화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산당에 의하면 세계화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며 중립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이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일부 도입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중국이 세계화와 국제 무역에 활발히 참여해야만 더 나은 미래를 맞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엄격한 입당 절차 중국공산당은 당원을 받아들일 때 능력이 검증된 사람만 뽑도록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중국공산당은 입당을 희망하는 자에 대해 3년 동안의 헌신과 직장에서의 능력, 타인과의 관계 등을 관찰하며 공산당 당원과 비공산당 당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입당 여부를 검토한다. 공산당원이 된 후에도 1년에 한 번씩 지난 1년 동안의 실적을 판단하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 입당 조건은 18세 이상이며, 노동에 종사하고 있어야 하지만, 2001년부터 자본가의 입당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입당 희망자는 두 명의 당원에게 추천을 받아야 한다. 추천 주체는 해당 지원자에게 당사(黨史)를 교육시켜야 한다. 교육이 완료된 지원자는 예비당원이 되며, 입당 예비 선서를 하게 된다. 예비당원이 되면 1년 동안 당 조직의 감독을 받게 되며, 당이 추진하는 교육 사업 및 활동에 참가해야 한다. 1년이 지나게 되면 지역당 조직은 예비당원이 몸담고 있는 직장을 직접 현지 조사하게 된다. 이 현지 조사에 합격하게 되면, 예비당원은 비로소 입당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지역당 조직은 입당원서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해당 예비당원에 대한 입당 비밀투표를 진행한다. 이 투표에서 입당이 허락되면 예비당원은 정식 입당 선서 과정을 거쳐서 정식당원이 된다. 개혁개방 이전 공산당 입당 심사는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성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졌으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직업 기술 및 학업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정식당원은 중국공산당 당헌에 따라 인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발전 촉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예비당원 단계에서 입당이 거절됐다면, 지원자는 1년의 심사를 다시 거치고 입당원서를 다시 제출해야 한다. 두 번 이상 불합격되면 예비당원 자격이 박탈되며, 처음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입당을 두 번 이상 실패했을 경우 영원히 당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례로 시진핑 총서기는 열 번의 입당 시도 끝에 정식당원이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입당자는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이지만, 공산주의청년단에 포함이 되었다고 해서 입당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은 당내 관료주의가 당원의 수준을 하락시키고, 당과 군중을 괴리시키는 요소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당내에는 민주적인 토론 문화가 상당히 강하며, 당직을 맡을 당원을 뽑는 과정은 입당 절차보다 까다로운데, 특히 당원의 학습 능력과 내실을 매우 중시한다. 중국공산당은 무자격자가 당원이 되고, 당직을 맡으면 당이 쉽게 부패하여 붕괴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 있기에 입당 및 당직 임명에서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은 철저히 배제된다. 입당 후에는 의무적으로 당비를 내고, 당이 주관하는 정치 행사에 참여해야 하며, 지속적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6개월 이상 이 과정을 무시할 경우 곧바로 출당 조치가 이루어진다. 또한, 중국공산당 당규에 따라 공산당원은 주식 투자를 비롯한 금융 활동, 미신을 믿는 행위, 사교 조직(교우회·학우회·향우회 등 모든 형태의 사적인 조직) 구성 및 참가 등을 할 수 없게 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종교를 믿을 수 없다. 게다가 특정 범죄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되며,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하지 않을 경우 당규에 따라 얼마든지 출당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정책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2002년 11월에 열린 제16대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 겸 비서장이 대표적인 정책 변화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는 "인민의 민주 독재" 상태이지만, 기업가와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인민들이 당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공산당 간부가 자본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2008년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는 농촌경제 성장을 위한 토지 경작권의 매매허용(토지유동화정책), 통화와 재정정책 규제완화, 경기 부양을 위한 거시 경제정책마련 등의 변화가 있었다. 비판 탄허 스님에 따르면, 현시대의 조류는 금수운(禽獸運)이다. 이하는 呑虛禪師의 四敎會通思想, 文光 著, 민족사 출판, p.369-p.370 참고바람. "유교학으로 보아도 소강절이 <황극경세서> 가운데에 시대의 조류를 평해 놓았는데, 삼황(三皇), 오제(五帝), 삼왕(三王), 오패(五覇), 이적(夷狄), 금수(禽獸)라고 했습니다. 삼황은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이며, 오제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皇帝), 요(堯), 순(舜)이며, 삼왕은 우(禹), 탕(湯), 문왕(文武)이며, 오패는 진목공(秦穆公), 진문공(晉文公), 제환공(齊桓公), 초장왕(楚莊王), 송양왕(宋襄王)이죠. 그러면 오패 때까지는 소강절이 보았다고 하지만 오패 이후는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이적운(夷狄運)은 청조가 되죠. (......) 청조의 이적운이 지나고 지금은 금수운(禽獸運)입니다." (...「皇極經世書」, 觀物外偏下, 第 9章: 但用無為則皇也, 用恩信則帝也, 用公正則王也, 用智力則霸也, 霸以下則是夷狄, 夷狄而下是禽獸也...:무위로써 통치하는 것은 皇이고, 은혜와 믿음으로 다스리는 것은 帝이며, 공평함과 바름으로 다스리는 것은 王이고, 지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霸이고, 패 이하는 오랑캐이니, 오랑캐 바로 다음은 금수이다.) 소강절은 북송 오자 중의 한 명으로, 그가 포함된 북송 오자는 주자에게 사상적,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주자는 이를 바탕으로 주자학을 집대성했다. 소강절은 역학에 능통했다. 역학은 주역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언하여 세상이 좀 더 바른 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학문이다. 그리고 위 문단은 유불선에 능통했던 탄허가 동양학 강의를 할 때 소강절이 시대를 평하고 예언한 대목을 소개한 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탄허는 20세기 중반~중후반에 활발한 강학 활동을 펼쳤으니 그가 이 말을 했을 때를 전후하여,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역대 지도부 같이 보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마오쩌둥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국공산당 혁명 근거지 인민영웅기념비 중앙인민방송 인민일보 공산당 조선 공산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 역대 선거 결과 총선 각주 외부 링크 중국공산당 뉴스--인민넷 중국공산당 공식 홈페이지 신화통신 중국공산당 관련 홈페이지 인민일보 (중국공산당 공식 기관지) 중국공산당의 한 자녀 정책 1921년 설립된 정당 공산주의 정당 사회주의 정당 코민테른 지부 역사수정주의 중화민국의 역사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중국의 공산주의 정당 중국의 공산주의 국수주의 일당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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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워싱턴(, )은 다음을 가리킨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이 수교협정한 이후 한국에는 화성돈(華盛頓)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인명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 1799)은 미국 초대 대통령이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 ~ 1915)은 미국의 교육자이다. 해럴드 워싱턴(Harold Washington, 1922 ~ 1987)의 미국의 정치인이다. 덴절 워싱턴: 미국의 영화 배우 겸 감독 워싱턴 어빙: 미국의 수필가·소설가 조지 워싱턴 카버: 미국의 농학자 코너 워싱턴: 퀸스 파크 레인저스와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케리 워싱턴: 미국의 배우 메건 워싱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 론 워싱턴: 미국의 야구인 아이제이아 워싱턴: 미국의 배우 마사 워싱턴: 초대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아내 디나 워싱턴: 미국의 가수 디절 워싱턴: 미국의 게이 포르노 배우 지역 이름 워싱턴 D.C.(Washington D.C.): 미국의 수도.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 미국의 주. 워싱턴 (노스캐롤라이나주): 미국의 도시. 워싱턴 (타인 위어주): 영국의 도시. 시티오브선덜랜드 관할. 워싱턴군 기타 《워싱턴(Washington)》: 2007년 영화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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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준
문희준(文熙晙, 1978년 3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보이 그룹 H.O.T. (High-five Of Teenagers)의 리더를 맡았으며, 팀이 해체된 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곡으로〈Alone〉, 〈Red & White〉, 〈아낌없이 주는 나무〉, 〈G선상의 아리아〉, 〈전설〉, 〈기억이란 작은 마을〉 등이 있다. 학력 서울문정초등학교 (졸업) 문정중학교 (졸업) 중산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 (전문학사)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부 연기전공 (학사) 경기대학교 대학원 레저스포츠학과 (석사과정 수료) 활동 H.O.T.와 솔로 전향 문희준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정동(현재는 송파구 관할)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송파구에서 주로 노란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가, 1996년 H.O.T.의 멤버로 데뷔한다. 한편, H.O.T.로 데뷔하기 전 남성 2인조 그룹 녹색지대 멤버가 될 뻔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불발되었다. 군 입대 이후 2005년 11월 21일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으며, 운전병으로 복무하다가 2006년에 연예병사에 지원하여 발탁되었으며 2007년 국군방송(KFN) FM 〈문희준의 Music Talk Show〉의 DJ로 진행을 맡은 바가 있다. 그의 입대는 당시 여러 남성 연예인들이 군복무 기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쳤다. 2007년 11월 20일에 전역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동년 12월 1일에 결혼하였다. 안티팬 H.O.T.에서 솔로 데뷔때부터 남성들을 중심으로한 안티 세력이 생겼다.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에는 문희준의 음악 실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대개 외모나 와전된 발언을 비하하는 인신 공격 수준의 단순한 비난이었다. 그들은 은어로 10대 열성 소녀팬들을 비하하기 위해 속칭 빠순이라 지칭하였으며, 문희준을 무뇌충(無腦蟲)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빠순이라는 은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연예 뉴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디시인사이드나 웃긴대학과 같은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속칭 필수요소가 된 문희준을 희화화한 합성사진과 유행어들이 끊임없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노래 가사 중의 일부를 따온, 뷁과 같은 부정적인 속어도 유행하였다. 한 웹사이트에서 주최한 《2003 최악의 딴따라 워스트 어워드》에서 “최악의 가수 부문” 및 무려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가수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는 특히 2002년 무렵부터 집요해졌다. 안티들의 기세에 힘입어 김구라는 자신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문희준에게 인신공격이 포함된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의 발언들은 이른바 ‘문희준 어록’이라 불리며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하지만, 그 내용중 대부분은 문희준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사실이 대부분이며 안티들이 지적하는 이른바 ‘건방진’ 언행들은 대부분 신문 기사나 네티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팬들의 웹상에서의 말 실수를 문희준의 말 실수로 오해한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무려 100만 여건의 악플이 달린 네이버 뉴스의 댓글은 국내 뉴스 댓글중 기네스에 오르며 안티계의 최고봉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안티들의 행동은 문희준이 2007년 11월 20일에 현역 만기 제대한 이후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후에, 김구라는 '문희준은 보살'이란 말과 함께 문희준에게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퍼부었던 인신공격들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혔다. 잘못된 소문에 대한 해명 제대후 MBC의 토크쇼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문희준 어록'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어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 “레드 제플린을 모른다”라는 부분은 문희준이 방송 DJ이던 시절, DJ의 입장에서 “레드 제플린에 대해 소개해 달라”라는 취지의 질문을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오이 3개만 먹고 연습했다”라는 발언은 인디 아티스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때 몸이 많이 불어나는 바람에 다이어트 차원에서 오이만 먹었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오인용 플래시에 나온 내용과 달리 문희준은 군 면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문희준의 소속사는 한때 안티팬들을 상대로 고소하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지만, 후에 오히려 본인이 고소를 취하했다. 기타 현재 문희준이 살고 있는 파주 소재의 저택은 문희준이 H.O.T. 활동을 해서 번 돈으로 구매했다. 그러나 2011년 2월 28일 《밤이면 밤마다》 방송에서 한 발언 때문에, 그 집을 1996년 당시 1억 2천만원을 주고 샀으나 10억원으로 인상됐다고 잘못 알려져, 이 점을 근거로 HOT의 1집 정산금액이 1억 2천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하지만 해당 방송을 정확히 보면 자막을 잘못 썼음을 알 수 있다. 문희준은 1996년에 샀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방송 자막이 15년전이라고 잘못 쓰여있었다. 당시 방송 내용을 보면,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는데 지금 시가로 치면 40억 정도 할거라면서, 왜냐하면 그때 내가 1억 2천 짜리 집을 샀는데 그것이 10억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 집은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을 때 산 집이지, 1996년에 산 집이 아니다. 또한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서 해명하길, 그 파주 집이 1억 2천에서 10억 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집이 그렇게 오른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6월부터 출연을 시작한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통해 기존 파주주택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공동주택으로 이사함이 공개됨에따라 파주주택 논란은 일단락됐다. 뉴스검색결과(네이버 뉴스검색시스템) H.O.T.에서 같이 활동한 바 있는 강타와는 데뷔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다. 결혼발표 후 잘못된 대처 및 팬덤 기만사건으로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2019년 달 문희율 양(태명:잼잼이)과 아내 소율의 담백한 일상을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수수하게 공개한 점과 불후의 명곡 서브 진행자로서의 진행력을 인정받아 2019 KBS연예대상에서 명예의 데뷔후 첫 연예대상을 수상했다. 앨범 H.O.T. 때의 앨범은 해당 페이지 참고. 1st Album《Alone...》(2001년 10월 5일) 2nd Album《Messiah》(2002년 7월 19일) Live Album《LIVE REVOLUTION》(2002년 12월 9일) 3rd Album《LEGEND》(2003년 7월 29일) Best Album《A Soaring For Dream》(2004년 4월 28일) 1st Single Winter Letter (2004년 12월 22일) 4th Album《Triple X》(2005년 9월 12일) Special Album《hj》(2008년 3월 10일) 1st Mini Album《LAST CRY》(2009년 6월 19일) 2nd Mini Album《BEGINS》(2013년 1월 18일) 방송 예능 KBS2 《TV는 사랑을 싣고》 MBC 《해피타임》 Mnet 《와이드 연예뉴스》 MBC 《세바퀴》 MBC 《이경규의 요리원정대》 (2016.02.06 ~ 2016.02.07 종영) JTBC 《수상한 미용실 - 살롱드림》 (2015.10.05 ~ 2015.11.09 종영) E채널 《더 맛있는 원샷》 (2015.07.16 ~ 2015.09.03 종영) KBS2 《대단한 레시피-마트에 가자》 (2015.06.04 ~ 2015.06.18 종영) KBS W 《나르는 쇼퍼맨》 (2014.11.03 ~ 2015.01.19 종영) JTBC 《동갑내기》 (2014.09.07 ~ 2014.09.08 종영) 온스타일 《위시》 (2014.07.19 ~ 2014.08.09 종영) SBS 《매직아이》 (2014.07.08 ~ 2014.11.18 종영) Mnet 《문희준의 순결한 15》 (2013.07.03 ~ 2015. 02. 11 종영) KBS2 《별친구》(2014.01.25~ 2014.02.01 종영) QTV 《미소년 통신》(2013.11.26~2013.12.25 종영) QTV 《20세기 미소년》 (2013.04.16~2013.11.19 종영)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2011.06.04~2020.8.15 하차) SBS 《강심장》(2009.10.06~2011.06.21 하차)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2007.01.13~ 2011.10.08 하차) MBC 《댄싱 위드 더 스타》(2011.6.10~2011.08.26 종영) MBC every1 《식신원정대 시즌 2》(2010.12.06~2011.05.30 종영) MTV 코리아 《아이돌 유나이티드》(2010.05.22~2010.08.07 종영) MBC 에브리원 《스타 포토그래퍼 탄생기 - 열혈포스》(2010.05.10~2010.06.28 종영) KBS Joy 《대격돌! 아이돌리그》(2010.05.04~ 2010.06.22 종영) Y-STAR 《디시인사이드 SHOW》 진행(2010.05.28 하차) MBC ESPN 《F1 스피드 레이서》(2010.03~2010.04 종영) MBC 에브리원 《블링블링 에브리쇼 - 스토커》(2010.01.22~ 2010.03.26 종영) tvN 《tVN ENEWS》월요일 패널 (2009.11.23~ 2010.08.02 하차) MBC every1 《기상천외! 묻지마 선수단》(2008.11.06~2009.01.22 종영) Mnet 《문희준의 음악반란》(2008.04.02~2008.07.09 종영) SBS 《절친노트 시즌 2》(2009.06.19~2009.12.25 종영) SBS 《절친노트 시즌 1》(2008.10.31~2009.06.12 종영) KBS2 《개그콘서트》(게스트 출연, 2009년 7월 12일 방송) 2015년 6월 15일 ~ 2018년 5월 13일 KBS 쿨FM 《정재형, 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DJ 2018년 5월 14일 ~ 2020년 3월 1일 KBS 쿨FM 《문희준의 뮤직쇼》 EBS2 《세상의 모든 법칙 Talk》 JTBC 《싱포유》 채널A 《아빠본색》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2019.06.09 ~ 2020.08.09 하차) 드라마•시트콤 1997년 MBC 《남자 셋 여자 셋》 - 1997년 8월 문화대학교 축제 초대 가수 역 (특별출연) 1998년 SBS 《순풍산부인과》(특별출연) 2009년 MBC 《태희 혜교 지현이》 2012년 tvN 《응답하라 1997》 - (목소리출연) (특별출연) 수상 경력 2001년 KMTV 가요대전 네티즌 인기상, 본상 2001년 MBC 연기대상 인기상 (라디오 진행자 부문) 2002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네티즌 인기상 2002년 SBS 가요대전 록 부문 상 2002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NATE상, 올해의 가수상 2003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시청자 인기상, 올해의 가수상 2004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파란상 2005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네티즌 인기상 2009년 SBS 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2011년 제19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예능 부문 대상 2013년 KBS 연예대상 정보 쇼.오락 부문 최고 엔터테이너상 2018년 KBS 연예대상 토크&쇼 부문 최우수상 2019년 KBS 연예대상 대상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들) 가요 프로그램 1위 가족 관계 아버지 문광식 (1955년 9월 10일 ~ ) 어머니 이희경 (1957년 9월 11일 ~ 2020년 12월 22일) : 건강 약화로 별세하였다. 여동생 문혜리 (1981년 ~ ) : 기혼, 슬하 1남 1녀 배우자 소율 (1991년 ~ ) : 걸그룹 크레용팝 출신으로 2016년 4월부터 교제하였으며, 2017년 2월 12일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녀 딸 문희율 (2017년 ~ ) : 태명은 잼잼이. 2017년 5월 12일에 첫 딸을 출산하였다. 딸과 함께 2016년 6월부터 2020년 8월까지 슈퍼맨이 돌아왔다로 가족의 일상을 공개했었다. 아들 (2022년 ~ ) : 태명은 뽀뽀. 2022년 2월에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유튜브채널-(재미하우스)를 통하여 둘째 임신사실을 알렸다.기사 2022년 9월 7일 둘째 아들을 출산하였다. 각주 외부 링크 문희준 - 공식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 내용 전문 살아있는 사람 1978년 출생 H.O.T.의 일원 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 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대한민국의 브레이크댄서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문정초등학교 동문 문정중학교 (서울) 동문 중산고등학교 (서울) 동문 서울예술대학교 동문 경기대학교 동문 경기대학교 대학원 동문 서울특별시 출신 가수 서울특별시 출신 음악가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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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보통 인터넷 게시물 밑에는 댓글란이 있어 그 게시물과 관련하여 독자는 의견을 표할 수 있다. 덧글, 코멘트(), 리플(←reply)이라고도 한다. 댓글을 통해 다양한 대화와 논리적인 토론 및 토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감정적인 반대 표현이나 지극히 단순한 맞장구와 같은 일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유래 대한민국 인터넷 초창기 시절 유즈넷(USENET)에서는 인터넷 활성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때 영문으로 되어 있는 누리집 용어를 한글화시키자는 과정에서 생긴 신종 단어이다. 유즈넷(USENET) 뉴스그룹 초창기 시절 'reply'를 '리플라이', '답장' 등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인터넷 용어 한글화를 주제로 토론을 나누는 자리에서 '리플라이', '덧글', '댓글' 등이 거론되었다. '리플라이'는 영어의 한글식 표기인 데다가 내용까지 길어져서 지지도가 약하였다. '덧글'의 경우는 '덧붙여 쓰는 글', '댓글'의 경우는 '대롱 대롱 이어지는 덧대어 쓰는 글'로 두 단어가 혼용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덧글'의 경우 글을 게시한 작성자가 추가로 덧붙여 쓰는 글의 의미가 강하여 사용이 줄어들었고 뉴스그룹 댓글 모양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어 '댓글'로 통일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댓글'은 '본문에 대어서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사용되었다. 용도 댓글 저널리즘 댓글이 네티즌들의 토론과 지식 공유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댓글 저널리즘'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형성하였다. 특히 '양방향적 속성'을 갖고 있는 댓글은 특정 이슈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뉴스 기사 등 원문을 읽고 나서 독자가 다양한 의견들을 작성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독자들에게 원문에서 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댓글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012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는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이은주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연구가 세계적인 언론학 학술지 <Columbia Journalism Review>에 소개됐다고 밝혔다. 이 학술지는 온라인 뉴스 기사의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면서 이은주의 연구를 주요 논거로 상세히 소개했다. 소개된 연구는 <Journal of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JCMC)> 2012년 10월호에 실린 이은주의 단독 논문이었다. 논문 내용은 독자의 뉴스 기사에 대한 인식이 댓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특히 기사의 이슈에 관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댓글을 접했을 경우 미디어가 왜곡돼 있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논문을 통해 이은주는 온라인 미디어 시대의 뉴스 공정성에 대한 독자의 인식은 기사 자체 뿐 아니라 댓글에도 영향을 받고 댓글이 매체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침을 보여줬다. 놀이 댓글은 기존의 답글과 기술적으로 비슷하지만, 즉각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인하여 답글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댓글은 그 웹사이트의 성격이나 유행어 등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논리적인 반박글이나 동의하는 글보다는 짧은 감상평 위주이다. 댓글이 없는 상태를 '무플'(無플←無리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무플에 댓글을 다는 '무플 방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1빠', '1등' 등과 같이 누가 먼저 댓글을 달았는지 겨루는 '등수 놀이'를 하기도 한다. 홍보 댓글에 일부 인터넷 사이트나 기업이 광고를 달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유해 웹사이트 링크를 걸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회원들 또는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 사이에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행위에 대해 그 목적이 의심될 경우 '상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댓글 문화가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댓글이 끼치는 영향을 이익과 연결하려는 현상이 발생하여 댓글 알바라는 신종 직업도 발생하였고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범죄 댓글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악의적으로 남을 공격하고 상습적으로 남을 헐뜯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댓글 문화인 '악플문화'가 발전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악플'은 '악성 리플'의 줄임말로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악성 댓글은 언어 폭력인데, 그 대상이 여성인 경우 더 악랄한 댓글이 달리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인터넷에 비방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게재해 명예훼손을 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 수 있다. 악플도 형법상 모욕죄·협박죄,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 명예 훼손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같이 보기 소셜 댓글 라이브리 우마오당 사이버 여론 조작 각주 비언어적 의사소통 인터넷 문화 인터넷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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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C%B9%BC%EB%9D%BC%EA%B3%B1
스칼라곱
선형대수학에서 스칼라곱(scalar곱, ) 또는 점곱()은 유클리드 공간의 두 벡터로부터 실수 스칼라를 얻는 연산이다. 스칼라곱이 유클리드 공간의 내적을 이루므로, 이를 단순히 '내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칼라곱의 개념의 물리학 배경은 주어진 힘이 주어진 변위의 물체에 가한 일을 구하는 문제이다. 정의 차원이 인 유클리드 공간 의 두 벡터 의 스칼라곱 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스칼라곱의 기호에는 가운뎃점 '⋅'을 사용하며, 수의 곱셈 기호와는 다르게 생략할 수 없다. 대수적 정의 두 벡터의 좌표가 각각 와 라면, 이 둘의 스칼라곱은 같은 위치의 성분을 곱한 뒤 모두 합하여 얻는 값이다. 예를 들어, 두 3차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다. 이 경우 스칼라곱의 정의는 벡터의 좌표에 의존하여 정의하지만, 에 기존의 좌표계가 아닌 새로운 좌표계를 주더라도, 이 좌표계가 정규 직교 좌표계라면, 스칼라곱을 나타내는 공식은 바뀌지 않는다. 즉, 임의의 정규 직교 좌표계 아래 스칼라곱은 위치가 같은 두 좌표의 곱을 합한 것과 같다. 유클리드 공간의 벡터는 종종 열벡터로 간주되며, 이 경우 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우변의 는 의 전치 행렬이며, 곱셈 기호가 생략된 곱셈은 행렬 곱셈이다. 이 경우 앞선 예시에서의 내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기하학적 정의 스칼라곱은 기하학적 성질인 '길이'와 '각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는 로 표기하기도 하며, 벡터 의 노름을 뜻한다. 이는 의 길이 또는 크기를 나타낸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는 두 벡터 사이의 각도이다. 이는 두 벡터가 모두 0이 아닐 때에만 정의되며, 보통 에서 값을 취한다. 는 코사인이며, 직각 삼각형의 이웃변과 빗변의 길이의 비로 정의하거나, 테일러 급수 전개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두 벡터의 길이가 모두 2이며, 둘 사이의 각도의 코사인 값이 1/2이라면, 이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2 × 2 × 1/2 = 2이다. 이 정의에서 스칼라곱은 두 벡터의 길이와 위치 관계에만 의존하므로, 스칼라곱이 좌표계와 무관함이 더욱 뚜렷하다. 반대로 두 벡터를 똑같은 등거리 변환에 의하여 변환시켰을 때,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정의로부터 자명하다. 몇 가지 특수한 각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만약 이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같다면,) 이므로, 내적은 단순히 두 벡터의 길이의 곱이다. 만약 라면, (즉, 두 벡터가 서로 수직이라면,) 이므로, 내적은 0이다. 만약 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서로 반대라면,) 이므로, 와 의 내적은 다음과 같다. 또한, 이 정의로부터 두 벡터 사이의 각도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 성질 임의의 벡터 및 스칼라 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교환 법칙 왼쪽 분배 법칙 오른쪽 분배 법칙 스칼라 곱셈의 보존 위 네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대칭 쌍선형 형식이다.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은 음이 아닌 실수이다. 영벡터와의 스칼라곱은 0이다.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이 0인 벡터는 영벡터뿐이다. 위 세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양의 정부호 형식이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반면 스칼라곱이 만족시키지 않는 성질에는 다음이 있다. 결합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두 벡터의 스칼라곱이 벡터가 아닌 스칼라이므로, 나 가 무의미한 수식이기 때문이다. 소거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에서, , , 이라면, , 이지만, 이다. 사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응용 스칼라 사영 벡터 의 벡터 위의 스칼라 사영() 은 를 로 수직 사영하여 얻는 벡터의 길이이다. 스칼라 사영은 다음과 같이 단위 벡터와의 스칼라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반대로,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스칼라 사영과 벡터의 길이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코사인 법칙 삼각형의 세 변 와 가 마주보는 각 에 대한 코사인 법칙은 스칼라곱의 성질을 통해 유도할 수 있다. 벡터 가 그림과 같다고 하면,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삼중곱 3차원 유클리드 공간 속 벡터에 대한 곱셈은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두 벡터 의 벡터곱 은 스칼라곱과 달리 두 벡터로부터 또 다른 벡터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3차원이 아닌 유클리드 공간에서 의미를 잃는다. 스칼라 삼중곱은 에서 스칼라곱과 벡터곱을 사용하여 정의된다. 세 벡터 의 스칼라 삼중곱은 로 정의된다. 벡터 삼중곱은 에서 두 번의 벡터 곱으로 정의된다. 세 벡터 의 벡터 삼중곱은 스칼라곱을 계수로 하는 선형 결합 전개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물리학 물리학의 여러 가지 개념은 스칼라곱을 통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일은 힘과 변위의 스칼라곱이며, 자기 선속은 자기 선속 밀도와 면적 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물론 변하는 힘이나 일정하지 않은 자기 선속의 경우 적분을 사용한다. 일반화 복소수 벡터의 경우 차원이 인 복소수 곱공간 속의 벡터 에 대하여 스칼라곱과 비슷한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의 (열벡터로서의) 켤레전치이며, 는 의 켤레 복소수이다. 이러한 함수는 양의 정부호성을 만족시킨다. 즉, 영벡터가 아닌 복소수 벡터와 자기 자신의 스칼라곱은 항상 실수이며 0보다 크다. 그러나 실수 벡터의 스칼라곱과 달리 쌍선형성을 만족시키지 않으며, 대신 다음과 같은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임의의 및 에 대하여, 또한 대칭성(교환 법칙) 대신 다음과 같은 켤레 대칭성을 만족시킨다. 이 경우, 영벡터가 아닌 두 복소수 벡터의 사잇각을 나타내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복소수 의 실수부이다. 만약 이 함수의 정의에서 켤레 복소수를 생략한다면, 이는 쌍선형성과 대칭성을 유지하지만 양의 정부호성을 잃는다. 이는 대략 이기 때문이다. 사실,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함수 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함수의 존재가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내적 유클리드 공간이나 복소수 곱공간의 스칼라곱을 일반화하여 내적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 실수 벡터 공간 에서, 두 벡터 로부터 실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복소수 벡터 공간 의 두 벡터 로부터 복소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에 다음과 같은 함수를 정의하면, 이는 내적을 이룬다. 함수의 경우 두 실숫값 함수 의 내적 은 급수 대신 적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숫값 함수 의 내적 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행렬의 경우 사이즈가 같은 두 실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 은 위치가 같은 두 성분의 곱들을 합한 결과이며, 대각합과 행렬 곱셈을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다음과 같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의 켤레전치이다. 각주 외부 링크 선형대수학 벡터 해석기하학 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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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D%B4%EC%95%A0%EB%AF%B8%20%EB%A7%90%EB%A6%B0%EC%8A%A4
마이애미 말린스
마이애미 말린스()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 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와 함께 후발주자로 1993년에 창단하였고, 1997년, 2003년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우승 팀이다.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를 제외하고 가장 단시간 안에 2번째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기도 하다. 또한 이 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와일드 카드로만 두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두 번 다 우승한 팀으로, 지구우승이 없지만 리그 우승이 두 번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미술수집상인 제프리 로리아가 현재 구단주로 있으며, 감독으로는 프레디 곤잘레스, 단장으로는 마이클 힐이 있으며 야구운영팀장으로는 래리 바인페스트가 있다. (직책상의 단장은 마이클 힐이지만, 실제 단장 역할은 바인페스트가 모두 하고 있다.) 콜로라도가 지난 95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데에 자극을 받아 말린스는 97년에 마이애미 출신의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 내야수 보비 보니아, 외야수 모이스 알루 등 내로라 하는 자유계약선수들을 돈으로 끌어 모았다. 흔히 '말린스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우승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97년과 2003년 둘다 당시 와일드 카드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했고, 베테랑 선수들과 루키계약을 맺고 있던 선수들의 대활약으로 우승했다는 것이다. 97년의 말린스 팀의 주축이 베테랑 위주였다면, 2003년에는 신예들이 위주였으며, 특히 이 차이는 투수력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또한 특이한 점은 97년의 겨울에 있었던 이른바 '대방출' 사건으로, 이는 말린스 주력 선수들의 재계약들이 (재계약과 메이저 리그 계약)이 이 겨울에 몰려있었던 것으로,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을 두려워한 구단주에 의해 대부분의 주력선수들이 유망주와 맞트레이드되는 조건으로 다른 구단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이 현상은 2003년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이 '대방출'은 2008년 초에 이루어진 돈트렐 윌리스와 미겔 카브레라, 이 두 선수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유망주 6명을 받고 트레이드한 것으로 다시금 마무리되었다. 2008년 3월 31일 말린스 팀 연봉은 뉴욕 양키스 선수들인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제이슨 지암비 선수의 개인 연봉보다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는 한국인 1호 타자 메이저리거 최희섭(전 KIA 타이거즈)과 김병현(전 KIA 타이거즈)가 뛰었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2시즌부터 팀명을 마이애미 말린스로 변경하고 홈구장도 말린스 파크(2011년 11월 11일에 개장한다.)로 옮겼으며 이에 앞서 2006년 초 라스베이거스 샌안토니오 포틀랜드 노퍽 북부 뉴저지 이전설이 있었으나 무산됐다. 2019시즌엔 팀 로고, 유니폼, 경기장을 새롭게 바꾸었고 팀 색상도 주황색 대신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역대 주요 선수 아모리 가르시아 존 갈 김병현 라이언 뎀스터 핸리 라미레스 존 레스터 에드가 렌테리아 이반 로드리게스 비니 로티노 카를로스 리 데릭 리 랜디 메신저 데니 바티스타 릭 반덴허크 마크 벌리 조시 베켓 히스 벨 크리스 볼스테드 두에인 빌로우 케빈 브라운 엔리케 에르난데스 오마 인판테 크리스 세든 게리 셰필드 지안카를로 스탠튼 웨스 오버뮬러 파블로 오즈나 대런 올리버 로스 울프 돈트렐 윌리스 오마 인판테 라이언 잭슨 조시 존슨 최희섭 호르헤 칸투 헤수스 타바레스 맷 트레이너 브래드 페니 호세 페르난데스 데이비드 펠프스 마이크 피아자 후안 피에르 잭 필립스 빌리 홀 영구 결번 #16 호세 페르난데스 #42 재키 로빈슨 (전 구단 공통) 역대 한국인 선수 (말린스 시절 등번호, 포지션, 말린스 소속이던 시즌) 최희섭 - 25번, 내야수, 2004년 김병현 - 23번/38번/49번, 투수, 2007년 1985년 설립 플로리다주의 야구 1993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 플로리다주의 야구팀 1993년 설립된 야구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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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B%9D
한식
한식에는 여러 뜻이 있다. 한식(韓食)은 한반도 일대 한국인의 전통요리를 통칭. 한식(韓式)은 “한국식”이란 뜻이다. 한식(寒食)은 한국의 고유 명절이다. კორეული სამზარეულო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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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9E%90%EA%B8%B0%ED%95%99
전자기학
전자기학(電磁氣學, )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장을 이룬다. 자기 현상은 이미 기원전 2000년 무렵 중국 문헌에 등장하며, 전기 역시 기원전 700년 무렵 고대 그리스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기가 전자기력이라는 동일한 기본 상호작용에 의한 현상이라는 점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전기장 양털로 만든 옷감에 플라스틱 빗을 여러 번 문지른 후 머리카락에 갖다 대면 머리카락이 빗에 달라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체가 전기를 띄게 되는 것을 대전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탈레스는 호박(琥珀)을 마찰하면 호박에 작은 물체가 달라 붙는 것을 관찰하였다. 전기를 뜻하는 는 호박을 뜻하는 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 든 예와 같이 두 물체를 마찰하여 대전된 전기를 정전기라고 하는데, 정전기가 대전되는 까닭은 물체를 이루는 원자가 지니는 전자 가운데 일부가 적은 에너지로도 쉽게 원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자로부터 벗어나 움직이는 전자를 자유 전자라고 한다. 금속과 같이 자유 전자를 많이 지닌 물질은 언제나 전자들이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대전되었더라도 다른 물체와 닿게 되면 전기가 쉽게 전달되어 버린다. 이런 물체를 도체라고 한다. 반면에 고무나 유리와 같은 물질은 자유전자가 매우 적어서 한 번 대전되면 전하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이런 물체를 부도체라고 한다. 물질 가운데에는 상태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런 물질들은 반도체라고 부른다. 반도체는 최근 여러 전자 제품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기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하가 있어서 같은 것은 밀쳐내고 다른 것과는 끌어당긴다. 18세기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두 전하를 한 쪽은 양 전하, 다른 쪽은 음 전하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척력과 인력의 크기는 물체가 갖고 있는 전하의 양과 두 물체 사이의 거리에 관계된다. 이렇게 정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쿨롱의 법칙으로 계산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대전된 한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할 때, 이 물체 근처로 지나가는 다른 대전된 물체는 쿨롱의 법칙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더 강한 힘을 받게 된다. 반대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두 전하 사이의 힘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하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전기장이라고 한다. 전기장의 세기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물체가 단위 전하당 얼마만큼의 힘을 받는지로 계산한다. 국제단위계로 나타내면 쿨롱당 뉴턴, 즉 로 나타낸다. 물체에 고여있는 정전기와 달리 전류는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흐르는 전기의 흐름이다. 1800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알레산드로 볼타는 황산 수용액에 구리막대와 아연막대를 담은 후, 두 막대를 금속선으로 이어 전지를 발명하였다. 볼타 전지는 최초로 전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장치였다. 자기장 고대 중국에서는 자석에 철이달라붙는 다는 사실과 자석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침반은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항해에 필수적인 장비가 되었다. 자석은 전하와 같이 같은 극끼리는 밀치고 다른 극끼리는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관례적으로 자석에서 북극을 가리키는 쪽을 N극, 반대편을 S극이라고 한다. 물질이 자기를 띄게 되는 것은 원자가 스스로 전류 고리를 갖기 때문이다. 원자핵의 자전과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공전과 자전때문에 원자에 전류 고리가 생기고 이 때문에 원자 자체에 N극과 S극의 성질을 나타내는 자기쌍극자가 형성된다. 전기의 기본 단위인 전하가 음전하 또는 양전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는 자기쌍극자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기초 단위에서부터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자석에 철과 같은 물질이 달라붙는 현상을 자기라고 하고, 자석에 달라붙는 물질을 자성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자성체로는 철 이외에 니켈과 같은 것이 있다. 자기에 반응하지 않는 물질은 비자성체라고 하며, 이 외에 자석에 아주 약하게 반응하는 알루미늄, 크롬과 같은 물질은 상자성체, 구리, 금, 은과 같이 자석이 가까이 가면 약하게 반발하는 물질은 반자성체라고 한다. 대부분의 물질은 원자단위의 자기쌍극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자기가 상충되어 자성을 띄지 않지만, 철이나 니켈같은 물질들은 원자의 배열이 자기가 한 쪽 방향으로 정렬되기 쉽도록 되어 있어서 쉽게 자성을 띄게 되고 한 번 자석이 되면 계속하여 자성을 유지하게 된다. 자성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는 자석을 영구 자석이라고 한다. 철 막대를 자석의 한 극으로 내려 치면 철 원자의 자기쌍극자가 한 쪽으로 정렬되어 영구 자석이 된다. 한편, 영구 자석이 된 철이라고 하더라도 약 770℃ 가 되면 자성을 잃는데, 열에 의해 원자가 무질서하게 운동하기 때문이다. 전기장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미치는 공간을 자기장이라고 한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의 단위 자극인 자하는 전하와 달리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쌍극자로 존재하므로 N극에서 나와 S극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자기 흐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되는 자기 흐름을 자기력선이라고 하는데, 자기장은 일정 공간에 자기력선이 얼마나 많이 모여있는지와 그렇게 모인 자기력선이 얼마나 센 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자기력선이 일정 공간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지는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束密度)라고 하며, 관례적으로 로 나타낸다. 한편, 특정 위치에서 자기장의 세기는 로 나타내는데, 그곳에 놓인 자하가 받는 힘을 뜻한다. 국제단위계에서는 자기장의 단위로 테슬라(T)를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우스(G)가 더 많이 쓰인다. 자기장의 경우에 자기 선속 밀도와 자기장의 세기가 다른 까닭은 자기장이 통과하는 매질마다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 자화되어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을 투자율(透磁率)이라고 하고 그리스 문자 μ로 나타낸다. 투자율은 물질마다 고유의 값이 있는데 투자율이 수백에 근접하는 강자성 물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물질은 1에 가까운 투자율을 가지고 있다. 진공 또는 자유공간의 투자율은 특히 μ 0로 나타내며, 그 값은 이다. 자기장의 자기 선속 밀도 는 자기장의 세기에 투자율 μ를 곱한 것과 같은 값을 갖는다. 즉,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전자기 유도 전기와 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현상이었지만, 이 둘이 사실은 같은 상호 작용이란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1820년 덴마크의 과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 나침반을 두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전류와 자기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프랑스의 과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논문을 읽고 자신도 같은 실험을 하여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 생기는 자기장의 방향을 관찰하였다. 앙페르는 전류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흐를 때 자기장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말아쥔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오른손 엄지를 위로 치켜 든다면 나머지 말아 쥔 네손가락은 반시계방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앙페르의 오른나사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수리 모형이 만들어져 앙페르의 회로 법칙이 수립되었다. 1824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스터전은 전류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전자석을 만들었다. 스터전이 처음 만든 전자석은 말굽 모양의 철심을 자기 코어로 이용한 것이었다. 스터전은 자기 코어에 굵은 구리 전선을 18 번 감아 전자석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절연체가 없었기 때문에 스터전은 구리 도선에 바니시를 발라 절연체로 사용하였다. 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장에서도 전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자석을 도선 가까이에서 움직이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구 자석이든, 전자석이든 자기장을 형성하는 것이기만 하면 도선가까이에서 움직이면(즉, 자기장의 변화가 일어나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정리하여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표하였다. 자기에서 전기가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것을 이용한 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자기 유도를 이용하여 교류 발전기를 발명하였다. 맥스웰 방정식 1864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기존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이론의 수리 모형들을 약 20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맥스웰은 나중에 의미가 같은 방정식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본질적인 네 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이 다루는 전자기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가우스 법칙: 가우스의 법칙은 전하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기장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이는 본질적으로 쿨롱의 법칙과 같은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가우스의 법칙은 두 개의 전하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하는 쿨롱의 법칙과 달리 하나의 전하만을 고려할 때에도 그에 따른 전하량을 계산할 수 있다. 가우스 자기 법칙: 자기는 언제나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닫힌 곡면을 지나는 자기량은 곡면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통과하여 나오는 것이 언제나 같게 된다. 자기력은 벡터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자기량과 나오는 자기력의 합은 언제나 0 이 된다.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 도선 주변에서 자기장이 변화하면 전류가 생기는데, 이렇게 전류가 발생하도록 하는 힘을 기전력이라고 한다.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은 자기 선속 밀도의 변화와 기전력의 관례를 수리적으로 정리한 법칙이다. 앙페르 회로 법칙 : 앙페르는 전류 주변에 흐르는 자기장의 세기를 예측할 수 있는 수리 모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앙페르가 만든 방정식은 불완전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맥스웰은 이를 개선하여 새로운 방정식으로 대체하였다. 이 때문에 수정된 앙페르 회로 법칙은 앙페르-맥스웰 회로 법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맥스웰은 전자기학에 대한 법칙들의 수리 모형을 정리하면서 로런츠 힘은 다루지 않았다. 로렌츠 힘은 전하를 띈 물체가 전기장 안에서 받는 힘을 뜻한다. 오늘날 전자기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맥스웰은 맥스웰 방정식을 정리한 후, 자계가 사인파와 같은 파동을 보이며 변화한다면 전계 역시 그에 따라 사인파 파동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므로, 전기와 자기의 성질을 모두 갖는 파동, 즉 전자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맥스웰이 예측한 전자파는 1888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후, 전기 회로에서 생성된 전자파를 안테나를 통해 방출하거나 수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무선 통신이나 방송과 같은 전자파를 이용한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같이 보기 전기 자기 전자기역학 고전 전자기학 양자 전기역학 이중 슬릿 실험 전자석 엑스선 광학 물리학 참고 문헌 원서: 주해 각주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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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전기(電氣, )란 전하의 존재 및 흐름과 관련된 물리현상들의 총체이다. 전기는 번개, 정전기, 전자기 유도, 전류 등 일상적인 효과들의 원인이다. 또한 전기는 전파 따위의 전자기 복사를 발산하고 또한 수집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전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하: 일부 아원자 입자가 전자기 상호작용을 결정하는 능력. 전하가 대전된 물질은 전자기장을 만들어내고, 또한 전자기장의 영향을 받는다. 전하는 음전하와 양전하가 있다. 전기장(정전기학 참조): 전하들은 전기장에 둘러싸여 있다. 전기장은 다른 전하에 가해지는 힘을 생성한다. 전기장의 변화는 광속으로 전달된다. 전위: 전기장이 전하에게 일을 하는 능력, 단위는 대개 볼트. 전류: 전하가 대전된 입자들의 운동 또는 흐름. 단위는 대개 암페어. 전자석: 움직이는 전하는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전류도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장의 변화는 전류를 만들어낸다. 전기공학에서는 전기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전력: 전류를 이용해 에너지를 공급한다. 전자공학: 진공관,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집적회로 등의 능동소자 및 관련된 수동소자 기술로 만든 회로를 다룬다. 전기는 17세기와 18세기까지 비록 과학적인 진보가 오지 않았을지라도, 고대 이래로 연구되어 왔다. 전기가 19세기 후반까지 되지 않았을지라도, 전기 기술자들은 산업적인 사용과 거주에 관한 사용에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전기 기술 발전에 있어 빠른 확장이 목격되었다. 에너지 원천으로서 전기의 비범한 융통성은 운송, 난방, 빛, 통신, 계산을 포함하는 거의 무제한으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력은 현대 산업 사회의 중추이다. 역사 전기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기물고기의 전기충격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750년의 고대 이집트 문헌에는 이 물고기들을 "나일 강의 뇌신"이라 부르며 다른 모든 물고기의 "수호자"라고 했다. 이후 1천년기가 지난 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박물학자들과 의사들도 전기물고기의 존재를 기록했다. 대 플리니우스나 스크리보니우스 라르구스 같은 고대 사람들은 전기메기 및 전기가오리의 전기충격 효과 및 그 충격이 충격을 전달(오늘날 용어로 전도)할 수 있는 물체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통풍이나 두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어 치료가 되라고 전기물고기를 만지게 하는 처방도 이루어졌다. 번개와 여타 출처의 전기가 같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아랍인들일 것이다. 15세기 이전부터 아랍어에서는 전기가오리를 가리키는 말로 "번개()라는 말을 사용했다. 지중해 주변의 고대 문화에서는 특정한 물체. 예컨대 호박을 고양이 털로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기원전 600년경 정전기에 관한 다양한 관찰을 남겼다. 그는 마찰이 호박을 자성을 띠게 하며, 이는 자철석과 같은 문지르지 않아도 자성을 가지는 광물과 대조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마찰된 호박의 인력 작용이 자성의 효과라고 생각한 점에서 틀렸다. 그러나 훗날의 과학자들은 자기와 전기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논란이 많은 학설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이 전기도금의 원리를 알고 있었지도 모른다. 1936년 발견된 바그다드 전지가 그 증거로 제시되는데, 이 유물은 마치 갈바니 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유물이 전기적 성질을 정말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전기는 단순히 지식인들의 호기심 대상에 불과했다. 1600년 잉글랜드의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와 자기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수행하여 자철석 효과와 정전기 효과는 서로 다른 것임을 구분해냈다. 길버트는 문지른 호박이 작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라틴어로 "엘렉트리쿠스( < )"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이것이 영어 낱말 "electric" 과 "electricity"의 어원이 되었으며, 이 두 낱말은 토머스 브라운의 《프세우도독시아 에피데미카》(1646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연구해보니 1646년보다 더 앞선 1435년에 안토니오 맥서니의 프라도니칸 길버르튼이라는 연구책에서 이 두 낱말을 언급한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오토 폰 게르니케, 로버트 보일, 스티븐 그레이, 샤를 프랑수아 드 시스테르네 등이 전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재를 팔아가면서 전기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프랭클린은 1752년 6월 물에 적신 연줄 끝에 금속 열쇠를 매달고 천둥치는 날 연을 띄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다만 프랭클린이 이 실험을 정말 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열쇠를 통해 그의 손등으로 전달된 스파크는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확실히 알게 하였다. 또한 프랭클린은 음전하와 양전하라는 개념을 내놓아 전하 저장 장치인 라이덴병의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질이 사실 역설이 아님을 설명해냈다. 1791년 루이지 갈바니가 생물전기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는 전기가 뉴런을 통해 근육에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는 아연판과 구리판을 겹쳐 만든 볼타 전지를 개발하여 과학자들이 그전까지 사용되던 정전기 기계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819년-1820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와 앙드레마리 앙페르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전자기 개념의 단초를 발견했다. 182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동기를 발명했고, 1827년에는 게오르크 옴이 전기회로를 수학적으로 분석해냈다. 그리고 1861년-1862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유명한 논문 〈물리적 역선에 관하여〉에서 전기와 자기(와 빛)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렇듯 19세기 초가 전기과학의 급속한 발전 시대였다면, 19세기 말은 전기공학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블라시 오토, 토머스 에디슨, 갈릴레오 페라리스, 올리버 헤비사이드, 예디크 아노이시, 켈빈 남작, 찰스 앨저넌 파슨스, 베르너 폰 지멘스, 조지프 스완, 니콜라 테슬라,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기를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부터 근대적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전환시켰고, 이는 제2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자외선을 쬔 전극이 전기 스파크를 더 잘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이산적인 양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빛의 에너지가 전자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광전효과로 인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양자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광전효과는 태양광판을 비롯한 광검출기에 이용되는 원리로서 오늘날 상업적 전기 생산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개념 전하 전하(電荷, electric charge)는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으로, 어떤 물질이 갖고 있는 전기의 양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 단위는 쿨롱이며, 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10의 18제곱 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의 양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10^-1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전류 전기의 흐름 전류는 물분자가 전하와 함께 이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전기는 물분자가 가지는 전하의 상태를 의미하고, 물분자의 수소원자의 전하가 양전하 상태를 갖고 물분자의 산소원자가 음전하의 상태를 가지며 물분자 크기 180pm이내에서 갖는 전하는 한국과학으로 직류전기로 표기되어 있다.그러므로 전류와 전기의 구분은 물분자가 전기도체인 구리선과 함께 움직이느냐와 물분자의 수소원자 전하와 산소원자의 전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기와 전류가 한국과학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기장 전기를 띤 물체 주위의 전기 작용이 존재하는 공간. 전계(電界). 전장(電場). 전위 전기적인 위치에너지 전압과 비슷한 개념이다. 전자석 철심에 코일을 감고 코일에 전류를 흘리게 되면 철심이 자성을 띄게 되는데 이것을 전자석이라고 한다. 전기화학 전기화학은 물질간의 전자의 이동과 그것들에 의한 여러 현상을 취급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화학, 분석화학, 화학공학 등과의 연관이 깊다. 전기회로 전기 회로는 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전원과 함께 설치된 닫힌 회로다. 회로에는 저항기, 축전기, 코일 등 다양한 전기적 소자가 전기 전도체인 전선에 의해 연결된다. 전력 전기에너지의 힘 직류에서의 전력 공식은 P=VI 교류에선 전력이 세가지로 피상전력,무효전력,유효전력이 있다. 전자공학 전자공학은 구동력으로서 전력을 이용하는 구성장치, 시스템 또는 여러 장비들을 개발하기 위하여 전자들의 운동에 대한 영향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공학의 한 분야이다. 전자기파 전자기파는 특정 전자기적인 과정에 의해 복사되는 에너지이다. 가시광선도 전자기파에 속하며 전파, 적외선, 자외선, X선 같은 전자기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전 역학에서 전자기복사는 동시에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구성된 전자기파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들은 진공에서 빛의 속력으로 전달된다. 두 장의 진동은 서로 수직이며 진행방향에 수직이고 횡파이다.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크거나 작은 순서대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라디오파,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이 포함된다. 생산과 이용 발전과 전달 사용 산업에 미친 영향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은 파괴적 기술이 아주 잘나가는 기업들을 몰락시키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를 조명함으로써 경제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전기화'는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기술 중 하나였다. 이는 21세기의 ICT 혁명에 따른 '디지털화'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20세기의 처음 몇십 년 동안 전기화는 미국 제조업에 마치 대량 멸종에 흡사한 위기를 야기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미국의 제조업은 '산업의 트러스트(industrial trusts)'라고 불리는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기업들은 합병을 통해 독접적 지위를 구축한 대기업들이었다. 이 대기업의 소유주들은 생산, 구매, 유통, 판매 등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용하고자 했다. 몇몇 트러스트 소유주들은 시장을 독접함으로써 가격을 결정할 힘을 확보할 만큼 거대한 기업 집단을 구축하기를 원했다. 1904년에 발표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그런 트러스트가 300개가 넘었다. 당시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장기간 동안 지배를 유지할 것처럼 보였다. 자본이 충분했고, 1세대 전문 경영자들이 운영했고, 새로운 기술에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전신을 통해 통신하고, 철도로 상품을 실어 나르는 것이 좋다는 점을 금방 알았으며, 공장을 증기력에서 전력으로 바꿀 의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화가 확산될 때 이를 계속 실행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 즉 사업 분야의 많은 영역들에서 - 모두가 자원과 역량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제학자 쇼 리버모어(Shaw Livermore)가 1935년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다르면, 1888~1905년에 설립된 산업 트러스트 중 1930년대 초에 도산한 사례가 40퍼센트를 넘었다. 또 11퍼센트는 "서류상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뒤섞인 ... '비틀거리는' 집단들이었다. ... 대체로 조사한 기간 중 최근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더 나빴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트러스트 중 대부분은 규모가 훨씬 축소되었다. 경제학자 리처드 케이브스(Richard Caves) 연구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05년에 시장 지배력을 발휘한 기업 중 49곳이 1929년에도 존속했지만, 이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은 평균 69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3분의 1 이상 감소되었다고 한다. 전기와 자연세계 심리적 효과 동물의 세계 문화적 현상 같이 보기 앙페르의 회로법칙 전기적 위치 에너지 수류의 유추 발전 각주 외부 링크 "One-Hundred Years of Electricity", May 1931, Popular Mechanics Illustrated view of how an American home's electrical system works Electricity around the world Electricity Misconceptions Electricity and Magnetism Understanding Electricity and Electronics in about 10 Minutes World Bank report on Water, Electricity and Utility subsidies 전자공학 통신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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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전하(電荷, )는 전자기장내에서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Q)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단위는 쿨롱이며, 단위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량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또한,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이렇게 전하를 띄는 물체는 대전체(帶電體)로 부른다. 개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호박을 문지르면 옷자락이나 먼지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언어들에서 전기를 뜻하는 단어들(, , )은 호박을 뜻하는 에서 기원하였다. 18세기 중엽 벤저민 프랭클린은 뇌우 속으로 연을 날리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통해 번개가 호박에 의해 발생되는 것과 동일한 전기임을 입증하였다. 같은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척력이 작용하고 다른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한다. 이 두 종류의 전하를 양전하와 음전하라고 한다. 물체가 양전하 또는 음전하를 띄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 입자의 전하 때문이다. 전자는 음전하를 띄고 두 개의 위 쿼크와 하나의 아래 쿼크로 이루어진 양성자는 양전하를 띈다. 기본 입자를 고려하지 않는 원자 단위 이상에서 전하량은 모두 전자 한 개의 전하량인 1.6021773349 에 대한 정수배로 존재한다. 즉, 일반적인 경우 전자 한 개가 갖는 전하량이 전하량의 최소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의 수가 균형을 이루어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원자의 가장 바깥 껍질에 위치한 전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마찰과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쉽게 원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전자들이 이동하게 되면 전자를 잃은 쪽 물질은 양전하를 띄게 되고 반대편의 물질은 음전하를 띄게 된다. 마찰과 같은 것에 의해 축적되어 흐르지 않는 전기를 정전기라고 한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가 마찰하면 정전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겨울철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걷는다면 마찰로 인해 우리 몸에 정전기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정전기는 자동차 문 손잡이와 같은 금속을 만나면 전기충격을 줄 수도 있다. 전하에 작용하는 힘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F=힘, Ke=쿨롱 상수, q_1 q_2=전하의 크기, r=두 전하 사이의 거리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로 이 상수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N m2 C−2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C−2 = 9 N 1000 Kg중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0t 트럭 1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전하량 하나의 전자가 갖는 전하량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전하량을 측정하는 SI 단위인 쿨롱은 6.24150962915265개의 전자가 한꺼번에 수송하는 전하량을 사용한다. 이 때 전류의 단위 암페어는 1초 동안 1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같이 읽기 기본 전하 전기장 전기 방전 주해 각주 물리량 화학적 성질 전기 전자공학 통신공학 보존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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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롱 법칙
쿨롱 법칙() 또는 쿨롱 힘 법칙()은 두 전하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정전기적 인력이 두 전하의 곱에 비례하고, 두 입자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역제곱 법칙의 하나다. 1785년 샤를 드 쿨롱이 발표했다 쿨롱의 실험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 수학적 표현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전기력 = 쿨롱 상수 · = (전하의 크기)의 곱 = 두 전하 사이의 거리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밀어내고, 다르면 끌어당긴다.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로 다음과 같다.   (N · m2 · C−2 )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Kg중)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t 트럭 10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역제곱 법칙 쿨롱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역제곱 법칙, 즉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가해지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는 공간이 3차원일 때 일정한 밀도로 퍼져나가는 전기장이 어떤 거리에서 2차원 면을 이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 같이 보기 비오-사바르 법칙 전기장 쿨롱 전자기 상호작용 각주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전기력 과학 법칙 물리학 개념 사람 이름을 딴 낱말 전자기학 정전기학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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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
전기장(electric field)은 관찰 대상인 전하를 띤 물체가 공간 상의 어느 점 P에 있는 시험 전하에 가해주는 단위 전하량 당 전기력을 뜻한다. 즉, 시험 전하가 느끼는 전기력을 시험 전하의 전하량으로 나눈 값이다. 전기장은, 어느 전하가 다른 전하에 전기력을 가할 때, 순간적인 원격 작용이 아니라 이러한 전기력을 매개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다. 즉, 전기력이 갖고 있는 원격력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전하가 주위에게 전기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위공간을 적합하게 변형시킨 것이 전기장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기장은 공간상에 전하가 존재할 때, 그 전하에 의해 생기는 공간상 각 지점의 전위의 기울기를 말한다. 전위의 기울기이기 때문에, 단위는 V/m가 된다. 또한 일반적으론, 공간상의 한 점의 전기장의 크기는 그 지점에 단위전하(+1 C)을 놓았을 때 그 전하가 받는 전기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단위는 N/C이며, 단위는 위와 동일하게 V/m이다. : 전기장 : 전하량 전기장의 단위 유도 : 변위 Displacement : 에너지 Energy : 단위 전하가 갖는 에너지 = 전위 쌍극자 사이의 전기장 가 두 전하 사이의 중점으로부터 특정 위치까지의 거리이고, 는 전기 쌍극자모멘트라고 할 때, 다음 공식이 성립한다. : 진공의 유전율 같이 보기 전하 전자기학 전기 힘 물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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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스 법칙
가우스 법칙()은 폐곡면을 통과하는 전기 선속이 폐곡면 속의 알짜 전하량과 동일하다는 법칙이다. 맥스웰 방정식 가운데 하나다. 정의 가우스 법칙은 미분 형태와 적분 형태가 있다. 두 형태는 발산정리에 대등하다. 가우스 법칙의 적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표면 A 위의 미소 면적을 나타내는 벡터 (그 지점의 접평면에서 바깥쪽을 향하는 법선 벡터), 는 폐곡면 속의 알짜 자유 전하량이다. 는 표면 A전체에 대한 면적분이다. 가우스 법칙의 미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발산 연산자,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자유 전하 밀도다. 위 공식은 자유 전하에 대한 가우스 법칙이다. 즉, 와 는 매질 속의 분극 전하를 포함하지 않는다. 분극 전하를 포함한 모든 전하에 대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알짜 전하 (분극 전하 포함), 는 전하 밀도 (분극 전하 포함)다. 는 전기장이다. 는 진공의 유전율로, 기본 상수다. 적용 (전도체 표면, σ는 단위면적당 전하량이다.) (도선, λ은 단위길이당 전하량이고, r은 가우스 표면까지의 거리이다.) (면) (구 껍질 또는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표면) (구 껍질에서, r<R인 구의 표면)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단위면적당 전하) 역사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1835년에 발견하고, 1867년에 발표하였다. 각주 같이 보기 가우스 자기 법칙 맥스웰 방정식 발산 정리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전자기학 사람 이름을 딴 낱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맥스웰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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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
전위(, ) 또는 전기 퍼텐셜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전기장에서 단위 전하가 가지게 되는 전기적 위치 에너지다. 국제단위계에서 단위는 볼트다. 정의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인데, 정전기학에서는 전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자기장이 없고, 따라서 이 값이 0이 된다. 즉 의 회전이 0이 되므로 이를 어떤 스칼라함수의 기울기로 표현할 수 있다. 보통 그 스칼라 함수를 라고 쓰고, 를 전위라고 부른다. 즉 가 된다. 위치 에너지가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두 지점 사이의 위치 에너지 차이만이 절대적인 값인 것처럼, 전위 또한 상대적인 값이다. 즉 특정 지점의 전위는 임의로 정의할 수 있고, 두 지점의 전위차만이 물리적 의미를 갖는다. (전위차는 전압이라고도 불린다.) 수학적인 이유는 에 어떤 상수를 더해준 값인 에 대해서도 가 되어 같은 전기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이론 물리학에서는 통상적으로 계에서 "무한히 먼 곳"에서의 전위를 0으로 놓는다. 전기 회로에서는 보통 접지(接地, )의 전위를 0으로 놓거나, 아니면 회로도에 어느 점의 전위를 0으로 정의하는지 표시한다. 전위는 에너지와 전하의 비(단위전하가 가지고 있는 정전기 퍼텐셜 에너지)이다. 즉, 전위의 국제 단위인 볼트는 다음과 같다. 볼트(V) = 줄(J)/쿨롱(C). (전위차의 정의) (전위의 정의) 두 점의 전위차()는 두 점 사이의 전기장을 선적분 한 값이다. 이때, 전기장은 보존장이기 때문에 적분구간의 모양은 상관 없고, 적분구간의 시작점과 끝점만 중요하다. 하나의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존재하는 점전하 q가 있을 때, 이 전하에서 r만큼 떨어진 곳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이 공식은 무한히 먼 곳의 전위를 0V라고 놓은 다음에 세운 공식이다. = 진공의 유전율 여러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공간에 점전하 n개가 존재할때, 특정 지점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구할 수 있다. = 각 전하의 전하량 = 전위를 구할 지점에서 각 전하까지의 거리 전기 쌍극자의 전위 연속적인 전하 분포 전기장과의 관계 대전입자 계의 전기 퍼텐셜 에너지 같이 보기 전기적 위치 에너지 전자기학 퍼텐셜 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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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전
축전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축전기(蓄電器): 회로에서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치 축전(祝電): 각종 오락거리가 제공되는 큰 행사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