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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만으로도 그의 야구 인생이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이를 악물었는지도 모른다. "저 친구 폼이 좋은데? 100번이면 임정인가?" "100번요? 아닙니다. 임정이 아니라 백강호입니다. 올해 들어온 육성선수입니다." "백강호? 내야 전 포지션 가능하다고 해서 계륵인줄 알았는데 수비가 괜찮아." "그러게 말입니다. 육성선수 중에서 뚜렷한 수비 포지션 없는 놈들이 얼마나 허당인가를 생각하면 제법 수비가 괜찮은 편입니다." 양용민 코치는 손성조 감독의 물음에 손에 든 명부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나레이션 : 이 정도만으로도 그의 야구 인생이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레이션 : 그래서 더욱 이를 악물었는지도 모른다. 손성조 감독 : "저 친구 폼이 좋은데? 100번이면 임정인가?" 양용민 코치 : "100번요? 아닙니다. 임정이 아니라 백강호입니다. 올해 들어온 육성선수입니다." 손성조 감독 : "백강호? 내야 전 포지션 가능하다고 해서 계륵인줄 알았는데 수비가 괜찮아." 양용민 코치 : "그러게 말입니다. 육성선수 중에서 뚜렷한 수비 포지션 없는 놈들이 얼마나 허당인가를 생각하면 제법 수비가 괜찮은 편입니다." 나레이션 : 양용민 코치는 손성조 감독의 물음에 손에 든 명부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손 감독은 마침 곁을 지나가고 있던 서학수 코치에게 손짓했다. "네, 감독님." 부름을 받은 서 코치가 다가온다.

나레이션 : 손 감독은 마침 곁을 지나가고 있던 서학수 코치에게 손짓했다. 서학수 코치 : "네, 감독님." 나레이션 : 부름을 받은 서 코치가 다가온다.

'오늘따라 감독님이 왜 이러시는 거지? 보통은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납득을 하셨는데...' 서 코치는 손 감독이 원하는 답변이 무엇인가 고민해야만 했다. 잠시 고민해 보던 그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한, 두 번 정도 올려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내야 대타가 아니라 대 수비로 쓴다는 전제조건으로 말입니다." "한, 두 번이란 말이지."

서학수 코치 : '오늘따라 감독님이 왜 이러시는 거지? 보통은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납득을 하셨는데...' 나레이션 : 서 코치는 손 감독이 원하는 답변이 무엇인가 고민해야만 했다. 나레이션 : 잠시 고민해 보던 그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서학수 코치 : "한, 두 번 정도 올려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내야 대타가 아니라 대 수비로 쓴다는 전제조건으로 말입니다." 손성조 감독 : "한, 두 번이란 말이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 중순, 대학가에 위치한 고깃집 안은 왁자지껄했다. 아직 정식 입학식을 치르기 전이었지만 사회체육학과 선배들은 후배들을 위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신입생 OT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기 굽는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식당 한가운데, 도혁은 마치 웅변대회에 나온 초등학생처럼 힘차게 외쳤다. “제 소개 하겠습니다. 이름은 이도혁, 펜싱 전공입니다. 현역이고요.” “신입아, 펜싱이면 이리 와.” 전공을 밝히자 자연스럽게 합류할 테이블이 정해졌다. 키가 유난히도 큰 남녀들이 도혁이 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도혁은 긴장한 티를 한껏 내며 한 명 한 명, 선배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유도 선수처럼 생겼는데 우리 쪽이라고 하니까 의외네.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받아라.” “아,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체대생은 몸 관리를 위해 술을 자제할 줄 알았지만 그건 바른 생활 사나이 도혁의 선입견이었다. 도혁은 비좁은 자리에 커다란 덩치를 구겨 앉은 채,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술잔을 받았다. “오늘 수강 신청은 잘했냐?” “망했습니다. 펜싱 하는 것처럼 빠르게 누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눌러 버렸어요.” “신입생들이 다 그렇지 뭐. 한 잔 받아.” “망했으면 어때. 신입생 때는 원래 엉망진창 시간표로 레고 놀이 하는 거야. 이런, 잔이 비었네.” 도혁을 끼고 앉은 펜싱 전공 선배들은 갖가지 명목을 붙여 그에게 술을 먹였다. 성인 되고 나서 몇 번 술을 먹어 보면서 내 주량은 제법 되는 게 아닐까? 자신감을 가진 그였지만 실전은 차원이 달랐다. 위장에 폭격 수준으로 알코올을 퍼붓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속이 느글거렸다. 야, 도혁아. 천천히 좀 달려. 도혁의 위장이 명령을 내렸으나 대학 생활 초보인 도혁은 술을 쉽사리 거절하기 어려웠다. “근데 너 혹시 알파니? 키도 그렇고, 태가 좀.” 시원시원한 인상의 여선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첫 만남에서 형질을 물어보는 건 어떻게 보면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어차피 앞으로 합숙을 하며 수년간 부대껴야 하는 사이라면 대놓고 정보를 까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네. 알파입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전 인류의 10%에 해당하는, 러트라 불리는 발정기가 있고 페로몬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특수 종족 알파. 그들의 페로몬은 짝이 되는 형질인 오메가를 유혹하는 데 주로 쓰였고, 베타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며, 같은 알파에게는 위압감을 줬다. 알파의 특성상 페로몬으로 상대를 지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파끼리 있을 때 짙은 페로몬을 내뿜으면 서로에게 반감을 넘어서 혐오감을 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알파끼리는 서로의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자연의 법칙이 그랬다. “체대에는 알파가 좀 있는 편이지. 주장 선배라든가.” “맞아. 예대에 오메가가 많은 것처럼.” “우리 과에는 10%쯤 되는 것 같아.” “확실히 알파들이 신체 조건이 우월하긴 하니까. 도혁이도 운동 엄청 잘하겠다. 체력 자체가 다를 것 같아.” 갑자기 화제가 형질로 튀었다. 중학생 때 알파로 발현한 이래 몇 번 겪어 본 반응이긴 했지만,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 느낌이 썩 편안하지는 않아 도혁은 슬슬 안절부절 모드로 들어가려 했다.

나레이션 :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 중순, 대학가에 위치한 고깃집 안은 왁자지껄했다. 아직 정식 입학식을 치르기 전이었지만 사회체육학과 선배들은 후배들을 위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신입생 OT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레이션 : 그리고 고기 굽는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식당 한가운데, 도혁은 마치 웅변대회에 나온 초등학생처럼 힘차게 외쳤다. 이도혁 : “제 소개 하겠습니다. 이름은 이도혁, 펜싱 전공입니다. 현역이고요.” 선배1 : “신입아, 펜싱이면 이리 와.” 나레이션 : 전공을 밝히자 자연스럽게 합류할 테이블이 정해졌다. 키가 유난히도 큰 남녀들이 도혁이 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도혁은 긴장한 티를 한껏 내며 한 명 한 명, 선배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선배1 : “유도 선수처럼 생겼는데 우리 쪽이라고 하니까 의외네.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받아라.” 이도혁 : “아,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나레이션 : 체대생은 몸 관리를 위해 술을 자제할 줄 알았지만 그건 바른 생활 사나이 도혁의 선입견이었다. 도혁은 비좁은 자리에 커다란 덩치를 구겨 앉은 채,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술잔을 받았다. 선배1 : “오늘 수강 신청은 잘했냐?” 이도혁 : “망했습니다. 펜싱 하는 것처럼 빠르게 누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눌러 버렸어요.” 선배1 : “신입생들이 다 그렇지 뭐. 한 잔 받아.” 선배2 : “망했으면 어때. 신입생 때는 원래 엉망진창 시간표로 레고 놀이 하는 거야. 이런, 잔이 비었네.” 나레이션 : 도혁을 끼고 앉은 펜싱 전공 선배들은 갖가지 명목을 붙여 그에게 술을 먹였다. 성인 되고 나서 몇 번 술을 먹어 보면서 내 주량은 제법 되는 게 아닐까? 자신감을 가진 그였지만 실전은 차원이 달랐다. 위장에 폭격 수준으로 알코올을 퍼붓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속이 느글거렸다. 나레이션 : 야, 도혁아. 천천히 좀 달려. 도혁의 위장이 명령을 내렸으나 대학 생활 초보인 도혁은 술을 쉽사리 거절하기 어려웠다. 여자선배1 : “근데 너 혹시 알파니? 키도 그렇고, 태가 좀.” 나레이션 : 시원시원한 인상의 여선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첫 만남에서 형질을 물어보는 건 어떻게 보면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어차피 앞으로 합숙을 하며 수년간 부대껴야 하는 사이라면 대놓고 정보를 까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이도혁 : “네. 알파입니다.” 여자선배1 :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나레이션 : 전 인류의 10%에 해당하는, 러트라 불리는 발정기가 있고 페로몬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특수 종족 알파. 그들의 페로몬은 짝이 되는 형질인 오메가를 유혹하는 데 주로 쓰였고, 베타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며, 같은 알파에게는 위압감을 줬다. 알파의 특성상 페로몬으로 상대를 지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나레이션 : 그래서 알파끼리 있을 때 짙은 페로몬을 내뿜으면 서로에게 반감을 넘어서 혐오감을 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알파끼리는 서로의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자연의 법칙이 그랬다. 여자선배1 : “체대에는 알파가 좀 있는 편이지. 주장 선배라든가.” 선배1 : “맞아. 예대에 오메가가 많은 것처럼.” 선배1 : “우리 과에는 10%쯤 되는 것 같아.” 여자선재1 : “확실히 알파들이 신체 조건이 우월하긴 하니까. 도혁이도 운동 엄청 잘하겠다. 체력 자체가 다를 것 같아.” 나레이션 : 갑자기 화제가 형질로 튀었다. 중학생 때 알파로 발현한 이래 몇 번 겪어 본 반응이긴 했지만,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 느낌이 썩 편안하지는 않아 도혁은 슬슬 안절부절 모드로 들어가려 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개강 첫주의 대학가 앞. 취기에 가득 찬 술집은 바로 옆 사람이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도, 고신재의 귀에 유독 박히는 문장이 있었다. 소음에도 묻히지 않을 정도로 유독 카랑카랑한 목소리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뭐어?!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러니까 소개팅 못 해.” 신재는 의자 두세 개 정도 떨어진 옆 테이블에서 듣기 싫어도 귀에 걸리는 풋풋한 대화에 턱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숨겼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을 그였지만 오늘은 별수 없었다. 무슨 애들 노는 자리에 교수가 끼겠다고…. “누, 누군데?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어?” “아니.” “학교 사람?” “아니.”

백한빈 :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나레이션 : 개강 첫주의 대학가 앞. 나레이션 : 취기에 가득 찬 술집은 바로 옆 사람이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도, 고신재의 귀에 유독 박히는 문장이 있었다. 소음에도 묻히지 않을 정도로 유독 카랑카랑한 목소리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2 : “뭐어?!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백한빈 :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러니까 소개팅 못 해.” 나레이션 : 신재는 의자 두세 개 정도 떨어진 옆 테이블에서 듣기 싫어도 귀에 걸리는 풋풋한 대화에 턱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숨겼다. 나레이션 : 평소 같았으면 절대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을 그였지만 오늘은 별수 없었다. 나레이션 : 무슨 애들 노는 자리에 교수가 끼겠다고…. 등장인물2 : “누, 누군데?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어?” 백한빈 : “아니.” 등장인물2 : “학교 사람?” 백한빈 : “아니.” 백한빈 친구1 : “그럼? 너 맨날 집에 박혀 사는 히키잖아. 백한빈, 네가 사람 만날 구석이 어딨다고?” 나레이션 : 현대무용의 미래 운운하면서 했던 말을 무한 반복하는 교수, 신입생에게 별 같잖은 추파를 던지는 선배와 동기들. 나레이션 : 거기에 낯선 누군가의 반쯤 혀가 풀린 술 취한 연애담까지. 나레이션 : 정말이지 짜증 날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없는 저녁이다. 나레이션 : 8시 10분. 나레이션 : 몇몇 통학생들은 귀가를 핑계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레이션 : 하지만 학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사는 고신재는 군복학 전에도, 또 지금도 마지막까지 교수에게 붙들려야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닐 거다. 나레이션 : 그때, 이어지는 채근을 이기지 못한 대답이 저쪽에서 웅얼대듯 흘러나왔다. 백한빈 : “게임에서 만났어.” 백한빈 친구1 : “게임? 백한빈 얘 게임도 했냐? PC방도 안 가는 놈이.” 백한빈 친구2 : “야. 너 몰랐구나. 이 새끼 게임 엄청 잘해. 우리랑 하면 속 터진다고 안 가는 걸걸. 챌린저도 찍던데.” 백한빈 친구1 : “헐.” 나레이션 : 배신자라느니, 너무하다느니 하는 술 취한 야유가 쏟아졌다. 나레이션 : 하지만 개중 좀 더 이성이 남은 누군가는 다른 쪽으로 향하려던 화제를 얼른 붙잡았다. 백한빈 친구2 : “살다 살다 너처럼 까다로운 놈이 또 없는데. 예쁘냐?” 백한빈 : “목소리가… 완전 좋아.” 백한빈 친구2 : “목소리 좋은 거 좋지. 그래서 예쁘냐고.” 백한빈 : “……으음.” 나레이션 : 연애담의 당사자는 모호한 대답 이후 더 이상 말이 없다. 나레이션 : 대신 주변에서 “야. 백한빈 이 새끼 뭔 일로 술을 이렇게 마셨냐.” 하고 혀를 차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여느 때와 똑같이 끝난 강의. 산더미 같은 과제에 가연은 울상이었다. “왜 그래? 과제 좀 도와줄까?” 바로 옆에서 강의를 듣던 한 학번 위의 선배가 가연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에이. 치킨이라도 하나 사줄게. 와서 먹고 가.” “아니에요. 오늘은 밥이 먹고 싶어요.” 선배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포기하고는 이내 자신의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가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 또한 크로스백을 메고 강의실을 나섰다. 오늘의 운세에서 귀인을 만날 거라기에 잔뜩 기대했더니만, 귀인은커녕 꾸벅꾸벅 졸다가 귀신같은 교수한테 딱 걸려서는 된통 혼난 참이었다. 그나마 오늘의 수업이 모두 끝난 게 다행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자취방으로 가서 한숨 돌릴 생각이었다. 가연은 대학교 캠퍼스를 나와 길가로 접어들었다. 학교로부터 이십 분 걸어가면 나오는 자취방까지는 한산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야 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 가연은 얇은 웃옷을 단단히 여몄다. 알록달록한 색의 낙엽이 무성한 골목길은 오늘도 역시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연은 머릿속으로 과제, 또 과제를 생각하며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다. 쾅! 갑자기 귀를 때리는 커다란 소리에 멍하니 걷던 가연은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소리의 근원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가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가려 했다. 쾅!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가연의 옆, 공사장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뭐, 뭐지?’ 가연의 마음속에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였다.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과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마음이 가연의 이성을 어지럽혔다. 결국 호기심이 이긴 탓에 가연은 고개만 살짝 내밀어 공사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에 입구에서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 생각해 보니 이곳은 여러 문제가 얽혀 공사를 멈춘 지 꽤 됐다고 들었다. ‘그런 곳에서 소리가 났다고?’

나레이션 : 여느 때와 똑같이 끝난 강의. 산더미 같은 과제에 가연은 울상이었다. 선배 : “왜 그래? 과제 좀 도와줄까?” 나레이션 : 바로 옆에서 강의를 듣던 한 학번 위의 선배가 가연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가연 :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선배 : “에이. 치킨이라도 하나 사줄게. 와서 먹고 가.” 가연 : “아니에요. 오늘은 밥이 먹고 싶어요.” 나레이션 : 선배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포기하고는 이내 자신의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가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 또한 크로스백을 메고 강의실을 나섰다. 나레이션 : 오늘의 운세에서 귀인을 만날 거라기에 잔뜩 기대했더니만, 귀인은커녕 꾸벅꾸벅 졸다가 귀신같은 교수한테 딱 걸려서는 된통 혼난 참이었다. 나레이션 : 그나마 오늘의 수업이 모두 끝난 게 다행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자취방으로 가서 한숨 돌릴 생각이었다. 나레이션 : 가연은 대학교 캠퍼스를 나와 길가로 접어들었다. 학교로부터 이십 분 걸어가면 나오는 자취방까지는 한산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야 했다. 나레이션 : 쌀쌀한 가을 날씨에 가연은 얇은 웃옷을 단단히 여몄다. 알록달록한 색의 낙엽이 무성한 골목길은 오늘도 역시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연은 머릿속으로 과제, 또 과제를 생각하며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다. 효과음 : 쾅! 나레이션 : 갑자기 귀를 때리는 커다란 소리에 멍하니 걷던 가연은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소리의 근원은 보이지 않았다. 나레이션 : 잘못 들었나. 가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가려 했다. 효과음 : 쾅! 나레이션 :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가연의 옆, 공사장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연 : ‘뭐, 뭐지?’ 나레이션 : 가연의 마음속에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였다.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과 어서 도망가야 한다는 마음이 가연의 이성을 어지럽혔다. 결국 호기심이 이긴 탓에 가연은 고개만 살짝 내밀어 공사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나레이션 :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에 입구에서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 생각해 보니 이곳은 여러 문제가 얽혀 공사를 멈춘 지 꽤 됐다고 들었다. 가연 : ‘그런 곳에서 소리가 났다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무도회장으로 가며 제이드 모건은 속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두건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숨기고 온종일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제이드 맬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제이드는 석 달 전, 라프녹스 왕국의 북쪽 영토 그레트나를 다스리는 모건 공작가의 영애로 입적했다. “들어가시죠.” 제이드의 시중을 드는 하녀 앨런이 무도회장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빈민가의 끝자락, 오두막보다 못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던 제이드는 여전히 귀족의 생활이 낯설었다. 커다란 성에는 없는 게 없었다. 반짝 거리는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황금과 거울로 장식한 무도회장은 너무 넓어서 몇 명이나 들어갈지 감도 오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네." 어정쩡하게 문 앞에 서 있는 제이드에게 모건가의 집사 어원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도 아주 예쁘십니다." "고맙습니다." 제이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칭찬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인사치레일 뿐이라고 생각 하면서도 어윈의 칭찬에는 늘 기뻤다. 제이드가 저도 모르게 어원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순간 다가온 어원의 큰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아 올렸다.

제이드 모건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레이션 : 무도회장으로 가며 제이드 모건은 속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레이션 : 두건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숨기고 온종일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제이드 맬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나레이션 : 제이드는 석 달 전, 라프녹스 왕국의 북쪽 영토 그레트나를 다스리는 모건 공작가의 영애로 입적했다. 앨런 : “들어가시죠.” 나레이션 : 제이드의 시중을 드는 하녀 앨런이 무도회장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나레이션 : 빈민가의 끝자락, 오두막보다 못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던 제이드는 여전히 귀족의 생활이 낯설었다. 나레이션 : 커다란 성에는 없는 게 없었다. 나레이션 : 반짝 거리는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황금과 거울로 장식한 무도회장은 너무 넓어서 몇 명이나 들어갈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원 : "오셨습니까? 제이드 모건 : "네." 나레이션 : 어정쩡하게 문 앞에 서 있는 제이드에게 모건가의 집사 어원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원 : “오늘도 아주 예쁘십니다." 제이드 모건 : "고맙습니다." 나레이션 : 제이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레이션 : 칭찬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나레이션 : 인사치레일 뿐이라고 생각 하면서도 어윈의 칭찬에는 늘 기뻤다. 나레이션 : 제이드가 저도 모르게 어원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레이션 : 그 순간 다가온 어원의 큰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아 올렸다.

제이드는 아침부터 어원과 앨런에게 시달렸다. 누군가는 시중을 받는 것이 편하겠지만, 지금껏 저 혼자 모든 것을 해결했던 제이드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그러나 어윈은 고용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조차 공작 영애의 소양이라고 했다. 앨런의 도움을 받아 씻고, 머리를 만지고, 화장에 쏟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어원이 추천한 옷을 입은 제이드는 거울 앞에 서고 두 눈을 의심했다. "어머." 늘 가렸던 검은 머리는 진주로 만든 장신구로 풍성하게 틀어 올렸고, 하얀 레이스를 겹겹이 덧댄 자주색 드레스는 제이드의 마른 몸을 볼륨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곁에 타서 칙칙했던 제이드의 얼굴은 화장으로 밝게 빛나고,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돋보이게 한 화장 덕분에 이목구비는 더 뚜렷하게 보였다. "기대 이상이에요.” 제이드를 바라보면서 앨런이 옆에서 손뼉을 쳤다. 그녀 뒤를 지키고 있던 어윈도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 빼면, 마음에 들어요.” 거울 속의 자신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제이드의 대답에 앨런과 어원이 작게 웃었다. 제이드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고 깡마른 몸에 거친 손은 그대로지만, 손에 레이스 장갑까지 끼니 정말 제이드 모건이 된 것 같았다. “가시죠.” 어원은 응접실로 제이드를 안내했다. 모건 공작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어원은 그들과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얼굴은 익혀 두는 게 좋다고 했다. “네가 제이드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드는 아침에 어원이 가르쳐 준 대로 예를 갖춰 모건 공작 가족에게 인사를 올렸다. 중년에 접어든 듯 보이는 모건 공작은 제이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공작 부인과 제이드 또래로 보이는 장남 데릭과 딸 레아는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빈민가의 딸을 양녀로 들인다는 것도,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도 뼛속까지 귀족인 그들에게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가문에서 흑룡의 신부가 나올 수 있도록 잘 부탁하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모건 공작은 제이드에게 말을 하면서도 계속 어원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제이드에게는 모건 공작이 저를 탐탁지 않게 여겨, 어원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원은 제이드에게 공작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어원이 욕먹게 할 수는 없었다. 제이드는 어원이 가르쳐 준 대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입가에 미소를 유지했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공작가 사람들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휴우” 제이드는 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 모건 공작은 어윈을 따로 불렀다. 아마도 제 평가를 할 터였다. 어원을 기다려야 하는 제이드는 복도 벽에 기대서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 마음과 달리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나레이션 : 제이드는 아침부터 어원과 앨런에게 시달렸다. 나레이션 : 누군가는 시중을 받는 것이 편하겠지만, 지금껏 저 혼자 모든 것을 해결했던 제이드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나레이션 : 그러나 어윈은 고용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조차 공작 영애의 소양이라고 했다. 나레이션 : 앨런의 도움을 받아 씻고, 머리를 만지고, 화장에 쏟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어원이 추천한 옷을 입은 제이드는 거울 앞에 서고 두 눈을 의심했다. 제이드 모건 : "어머." 나레이션 : 늘 가렸던 검은 머리는 진주로 만든 장신구로 풍성하게 틀어 올렸고, 하얀 레이스를 겹겹이 덧댄 자주색 드레스는 제이드의 마른 몸을 볼륨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나레이션 : 곁에 타서 칙칙했던 제이드의 얼굴은 화장으로 밝게 빛나고,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돋보이게 한 화장 덕분에 이목구비는 더 뚜렷하게 보였다. 앨런 : "기대 이상이에요.” 제이드를 바라보면서 앨런이 옆에서 손뼉을 쳤다. 그녀 뒤를 지키고 있던 어윈도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원 : "노력한 보람이 있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제이드 모건 :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 빼면, 마음에 들어요.” 나레이션 : 거울 속의 자신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제이드의 대답에 앨런과 어원이 작게 웃었다. 제이드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고 깡마른 몸에 거친 손은 그대로지만, 손에 레이스 장갑까지 끼니 정말 제이드 모건이 된 것 같았다. 어원 : “가시죠.” 나레이션 : 어원은 응접실로 제이드를 안내했다. 모건 공작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어원은 그들과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얼굴은 익혀 두는 게 좋다고 했다. 모건 공작 : “네가 제이드구나.” 제이드 모건 : “처음 뵙겠습니다.” 나레이션 : 제이드는 아침에 어원이 가르쳐 준 대로 예를 갖춰 모건 공작 가족에게 인사를 올렸다. 중년에 접어든 듯 보이는 모건 공작은 제이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공작 부인과 제이드 또래로 보이는 장남 데릭과 딸 레아는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빈민가의 딸을 양녀로 들인다는 것도,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도 뼛속까지 귀족인 그들에게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모건 공작 : “우리 가문에서 흑룡의 신부가 나올 수 있도록 잘 부탁하다.” 제이드 모건 :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나레이션 : 모건 공작은 제이드에게 말을 하면서도 계속 어원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제이드에게는 모건 공작이 저를 탐탁지 않게 여겨, 어원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레이션 : 어원은 제이드에게 공작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어원이 욕먹게 할 수는 없었다. 제이드는 어원이 가르쳐 준 대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입가에 미소를 유지했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공작가 사람들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휴우” 나레이션 : 제이드는 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 모건 공작은 어윈을 따로 불렀다. 아마도 제 평가를 할 터였다. 어원을 기다려야 하는 제이드는 복도 벽에 기대서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 마음과 달리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그 애는 시리도록 차가운 색을 띠고 있다. 탁한 구름을 머금은 성에의 색과 같다. 얼어붙기 직전의 강물과 같다. 푸르다 말하기엔 희고, 희다 말하기엔 푸른색. 손끝이 닿는 순간 찌릿한 통증이 일 듯한, 신경이 얼어붙고 살이 썩어들어 갈 듯한, 나를 괴사시킨 후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홀로 고고할 듯한 그런 색.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군들 그 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 먼지 가득한 운동장에서 그토록 예리하고 찬연한 빛을 두른 채 새처럼 달려가는 그 애를 직접 보았다면. 나는 그것을 피쉬라고 부른다. 마담의 생일파티가 끝난 것은 상가 1층 우편함으로 조간신문이 좌르륵 꽂힌 후였다. 밤새도록 붓고 마셔댔던 술의 잔해가 가게 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 미친 것들. 양주까지 다 갖다 처먹었어. 투덜거리며 술병을 치우는데 신발 끝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누군가가 고스란히 게워놓은 간밤의 흔적에 그만 어찔해진다. 멀지 않은 자리에 늘어져 있는 마담이 보였다. 텅 빈 양주병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고 세 개째의 쓰레기봉투를 갈무리했다. 마담은 이 가게의 주인은 아니다. 그냥 가게에 붙어살다시피 하는 내 친구일 뿐이다. 다만 이 가게에 드나드는 수많은 트렌스젠더 중 유일하게 수술까지 끝낸 여자라 모두가 경의를 담아 마담이라 부른다. 어제는 드디어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를 새로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본래 주홍빛에 가까웠던 색에 살짝 핑크색이 돈다. “사장님…, 몇 시예요?”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손님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혀를 끌끌 차며 벽시계를 가리켰다. 아, 어떡해. 머리를 쥐어 싸던 그는 오전 수업이 있다며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갓 대학 들어간 새내기라 했던가. 애티가 나는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노란색 피쉬가 그의 귓전을 슬렁슬렁 맴돈다. 내 시선을 느낀 손님이 돌아서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어제 그와 키스했다. 이름은 모른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오늘도 와도 돼요?” 어린 얼굴이 쑥 다가온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그럼, 와도 되죠.” 흔쾌히 대답하자 배시시 웃는다. “연락처 물어봐도 돼요?” “아뇨.” 손님이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안 돼요? 왜요?” 재차 묻는 목소리가 시무룩하다. “그냥 가게로 와요.” “에이…….” “늦겠네. 건너편에서 오는 버스 아무거나 타면 다 역으로 갈 거예요.” 썩 나가라는 의미로 문을 가리켰다. 손님은 영 아쉽다는 듯 느적느적 가게를 나섰다. 덩치 큰 연하는 완벽한 내 취향이지만 저건 어려도 너무 어리다.

나레이션 : 그 애는 시리도록 차가운 색을 띠고 있다. 나레이션 : 탁한 구름을 머금은 성에의 색과 같다. 얼어붙기 직전의 강물과 같다. 푸르다 말하기엔 희고, 희다 말하기엔 푸른색. 손끝이 닿는 순간 찌릿한 통증이 일 듯한, 신경이 얼어붙고 살이 썩어들어 갈 듯한, 나를 괴사시킨 후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홀로 고고할 듯한 그런 색. 나레이션 :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군들 그 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 먼지 가득한 운동장에서 그토록 예리하고 찬연한 빛을 두른 채 새처럼 달려가는 그 애를 직접 보았다면. 나레이션 : 나는 그것을 피쉬라고 부른다. 나레이션 : 마담의 생일파티가 끝난 것은 상가 1층 우편함으로 조간신문이 좌르륵 꽂힌 후였다. 밤새도록 붓고 마셔댔던 술의 잔해가 가게 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 미친 것들. 양주까지 다 갖다 처먹었어. 투덜거리며 술병을 치우는데 신발 끝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누군가가 고스란히 게워놓은 간밤의 흔적에 그만 어찔해진다. 멀지 않은 자리에 늘어져 있는 마담이 보였다. 텅 빈 양주병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고 세 개째의 쓰레기봉투를 갈무리했다. 나레이션 : 마담은 이 가게의 주인은 아니다. 그냥 가게에 붙어살다시피 하는 내 친구일 뿐이다. 다만 이 가게에 드나드는 수많은 트렌스젠더 중 유일하게 수술까지 끝낸 여자라 모두가 경의를 담아 마담이라 부른다. 어제는 드디어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를 새로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본래 주홍빛에 가까웠던 색에 살짝 핑크색이 돈다. 손님 : “사장님…, 몇 시예요?” 나레이션 :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손님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혀를 끌끌 차며 벽시계를 가리켰다. 아, 어떡해. 머리를 쥐어 싸던 그는 오전 수업이 있다며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나레이션 : 갓 대학 들어간 새내기라 했던가. 애티가 나는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노란색 피쉬가 그의 귓전을 슬렁슬렁 맴돈다. 내 시선을 느낀 손님이 돌아서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어제 그와 키스했다. 이름은 모른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손님 : “오늘도 와도 돼요?” 나레이션 : 어린 얼굴이 쑥 다가온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사장님 : “그럼, 와도 되죠.” 나레이션 : 흔쾌히 대답하자 배시시 웃는다. 손님 : “연락처 물어봐도 돼요?” 사장님 : “아뇨.” 나레이션 : 손님이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손님 : “안 돼요? 왜요?” 나레이션 : 재차 묻는 목소리가 시무룩하다. 사장님 : “그냥 가게로 와요.” 손님 : “에이…….” 사장님 : “늦겠네. 건너편에서 오는 버스 아무거나 타면 다 역으로 갈 거예요.” 나레이션 : 썩 나가라는 의미로 문을 가리켰다. 손님은 영 아쉽다는 듯 느적느적 가게를 나섰다. 덩치 큰 연하는 완벽한 내 취향이지만 저건 어려도 너무 어리다.

용사 비올렌 코카네스의 오래된 친구이며, 대(對)마왕군의 두뇌라고 불리는 현자 프레데리카 르데트가 마왕의 손에 들어간 건, 전투가 벌어지던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다들 제 눈앞으로 달려드는 마수를 물리치기 위해, 그리하여 용사 비올렌이 마왕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댈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피가 흐르고 살점이 터지는 전장 한복판에,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일이 없던 프레데리카가 나타났다. 심지어 그녀의 손에는 검도 없었다. 옷도 평소 군영에서 입고 있던 가벼운 차림 그대로였다. 검과 활, 창이 난무하는 그 수라장을 맨몸으로 걸으면서도 프레데리카는 두려운 기색조차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마왕만을 향한 채였다. 적의 책사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마왕 또한 프레데리카를 향한 채 서 있었다. 순간 어떤 조화가 있던 걸까. 프레데리카는 나풀나풀 한 마리 나비처럼 마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껏 본 적 없던 황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마왕이 흡족한 듯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신호라도 된 양 마수들이 프레데리카를 향해 뛰어들었다.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현자님이 위험해!” “막아! 막으라고!”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 방향으로 향했다. 마수들이 곧장 프레데리카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부러트릴 거라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오히려 그것들은 인간의 책사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주변을 감쌌다. 이어 프레데리카를 구하러 달려오는 병사들을 물어 뜯어댔다. 죽어 나자빠지는 병사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지만, 프레데리카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몸 주변에 어른대는 어두운 기운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현혹 마법이다!” “현자님이, 현혹에 걸린 거야?” “말도 안 돼……!” 그것을 목격한 비올렌은 주저 없이 곧장 프레데리카를 향해 뛰었다. 마왕의 수하들이 날카로운 이와 칼날 같은 손톱을 세우고 저희들의 가장 강대한 적의 목덜미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것들을 검으로 후려치듯 베어내며 비올렌은 뛰어나갔다. 그를 붙잡는 사람들의 비명이 등에 달라붙었지만, 비올렌은 막무가내였다. 가쁜 숨 사이로 어렵게 제 친구의 이름을 외쳤다. “프레데리카!” 그의 부름이라면 언제든 돌아보고 답하는 프레데리카였다. 하지만 비올렌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의 뒤통수뿐이었다.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저 멀리에 선 커다란 형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프레데리카를 소리높여 부른 비올렌은 이를 바득 갈았다. ‘홀린 사람처럼’이 아니지. 그는 프레데리카가 진짜로 마왕에게 홀렸음을 깨달았다. 마왕의 현혹 마법은 이토록 위험했다. 그는 새삼 어제 저녁, 프레데리카가 은밀히 자신을 찾아와서 건넸던 말을 되새겼다. ‘레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나를 믿어.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나를 믿어야 해.’ 배신.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현혹에 걸려 저렇게나 거침없이 그의 곁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비올렌은 그녀가 배신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강하고 아름다운, 그의 현자였다. 용사의 길을 열어주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프레데리카가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적에게 가고 있었다. 너를 이렇게 마왕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비올렌은 이를 악물었다.

나레이션 : 용사 비올렌 코카네스의 오래된 친구이며, 대(對)마왕군의 두뇌라고 불리는 현자 프레데리카 르데트가 마왕의 손에 들어간 건, 전투가 벌어지던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나레이션 : 처음에는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다들 제 눈앞으로 달려드는 마수를 물리치기 위해, 그리하여 용사 비올렌이 마왕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댈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레이션 : 그 피가 흐르고 살점이 터지는 전장 한복판에,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일이 없던 프레데리카가 나타났다. 나레이션 : 심지어 그녀의 손에는 검도 없었다. 옷도 평소 군영에서 입고 있던 가벼운 차림 그대로였다. 검과 활, 창이 난무하는 그 수라장을 맨몸으로 걸으면서도 프레데리카는 두려운 기색조차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나레이션 :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마왕만을 향한 채였다. 나레이션 : 적의 책사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마왕 또한 프레데리카를 향한 채 서 있었다. 나레이션 : 순간 어떤 조화가 있던 걸까. 프레데리카는 나풀나풀 한 마리 나비처럼 마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껏 본 적 없던 황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레이션 : 그것을 본 마왕이 흡족한 듯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신호라도 된 양 마수들이 프레데리카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레이션 :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등장인물1 : “현자님이 위험해!” 등장인물2 : “막아! 막으라고!” 나레이션 :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 방향으로 향했다. 나레이션 : 마수들이 곧장 프레데리카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부러트릴 거라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오히려 그것들은 인간의 책사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주변을 감쌌다. 이어 프레데리카를 구하러 달려오는 병사들을 물어 뜯어댔다. 나레이션 : 죽어 나자빠지는 병사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지만, 프레데리카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몸 주변에 어른대는 어두운 기운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등장인물3 : “현혹 마법이다!” 등장인물1 : “현자님이, 현혹에 걸린 거야?” 등장인물2 : “말도 안 돼……!” 나레이션 : 그것을 목격한 비올렌은 주저 없이 곧장 프레데리카를 향해 뛰었다. 나레이션 : 마왕의 수하들이 날카로운 이와 칼날 같은 손톱을 세우고 저희들의 가장 강대한 적의 목덜미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것들을 검으로 후려치듯 베어내며 비올렌은 뛰어나갔다. 그를 붙잡는 사람들의 비명이 등에 달라붙었지만, 비올렌은 막무가내였다. 나레이션 : 가쁜 숨 사이로 어렵게 제 친구의 이름을 외쳤다. 비올렌 : “프레데리카!” 나레이션 : 그의 부름이라면 언제든 돌아보고 답하는 프레데리카였다. 하지만 비올렌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의 뒤통수뿐이었다.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저 멀리에 선 커다란 형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레이션 : 다시 한번 프레데리카를 소리높여 부른 비올렌은 이를 바득 갈았다. 비올렌 : ‘홀린 사람처럼’이 아니지. 나레이션 : 그는 프레데리카가 진짜로 마왕에게 홀렸음을 깨달았다. 마왕의 현혹 마법은 이토록 위험했다. 그는 새삼 어제 저녁, 프레데리카가 은밀히 자신을 찾아와서 건넸던 말을 되새겼다. 프레데리카 : ‘레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나를 믿어.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나를 믿어야 해.’ 나레이션 : 배신. 나레이션 :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현혹에 걸려 저렇게나 거침없이 그의 곁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비올렌은 그녀가 배신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레이션 : 강하고 아름다운, 그의 현자였다. 용사의 길을 열어주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프레데리카가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적에게 가고 있었다. 나레이션 : 너를 이렇게 마왕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비올렌은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