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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安益泰, ,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신시내티 음악학교과 커티스 음악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때 파울 힌데미트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때부터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1937년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머물렀던 집. (Gustav-Freytag-Straße 15, Berlin-Grunewald)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주 베를린 만주 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살았다.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의 가사에는 추축국인 일본 · 독일 · 이탈리아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가 썼다고 한다. 에하라는 물밑에서 독일 내의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안익태 본인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1930년대 후반에 만났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베를린에 머물렀던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6년에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2000년에는 음악연속간행물 객석 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지휘에 대한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李京粉)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안익태의 명단 포함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성악 모음곡 한국의 생활 (이팔청춘/아리랑 고개/전원/백합화. 1934~1935) 애국가(1936) 교향시 강천성악 (관현악곡, 1936) 한국환상곡(합창과 관현악, 1936~1937) 환상곡 에텐라쿠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교향 환상곡 제 2번 교쿠토(극동)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전원곡 (Pastorale.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만주국 축전곡 (합창과 관현악, 194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논개(교향시, 1962) 애국지사 추도곡(관현악곡, 1962) 흰 백합화(성악과 기악, 1962?) 한국무곡(관현악곡, 1963) 교향시 마요르카 (관현악곡, 1948. 2006년에 자필보 발견) 교향시 포르멘토르의 로 피 (관현악곡, 1951. 2006년에 자필보 발견) 김경래,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 현암사, 1966. 롤리타 탈라베라, 《나의 남편 안익태》, 신구문화사, 1974. 최병현,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 뉴욕한인교회 70년사》, 깊은샘, 1992 전정임, 《안익태》, 시공사, 1998. 진화영, 《한국인 최초 베를린 필 지휘,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월간 객석, 2000.5월호 이규희, 《울어 버린 애국가》, 밝은미래, 2005. 송병욱,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 월간 객석, 2006.3월호 송병욱, 《안익태의 민족 정체성-어느 음악가의 정당한 평가를 위하여》, 월간 객석, 2006.4월호 박정미, 《안익태에 대한 의혹 제기와 그 오류에 대한 단상》, 월간 객석, 2007.1월호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송병욱, 《안익태 한국환상곡 초연 70주년 특별기고 1-더블린 초연 현장을 말한다》, 월간 객석, 2008.2월호 송병욱, 《안익태 한국환상곡 초연 70주년 특별기고 2-헝가리 동영상과 안익태 이해의 새 키워드》, 월간 객석, 2008.3월호 안익태 기념 재단 스페인 마요르카 안익태 거리 분류:1906년 태어남 분류:1965년 죽음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일제 강점기의 지휘자 분류:스페인의 고전 첼로 연주자 분류:일제 강점기의 바이올린 연주자 분류:트럼펫 연주자 분류:스페인의 작곡가 분류:스페인의 지휘자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곡가 분류:20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분류:프랑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분류:평양종로보통학교 동문 분류:숭실중학교 동문 분류:숭실고등학교 동문 분류:평양직할시 출신 분류:한국계 스페인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외교관 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 분류:스페인으로 귀화한 사람 분류:파리 음악원 동문 분류:국가 작곡가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분류:구니타치 음악대학 동문 분류:신시내티 대학교 동문 분류:커티스 음악원 동문 분류:스페인의 로마 가톨릭교도
서울특별시 (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이었고, 고려 때는 남경(南京)이었으며,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능산, 인왕산, 청계산 등의 여러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 km이며, 넓이는 605.25 km²이다. 면적은 대한민국 전 국토의 0.6%를 차지하지만, 약 977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어 인구밀도가 높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이며, 25개의 자치구로 이루어져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 국제적인 도시이다. 서울의 GDP는 세계 4위이다.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이 원래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金城)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신라(新羅)까지 포함하여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즉 새로운 땅 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발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후 ""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한양 이외에도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예도 있다. 그 밖의 표기 중에는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썼던 徐蔚(서울) 이 있다. 이는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서울 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강북의 성저십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 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 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京城, 일본어로는 けいじょう)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 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 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의 로마자 표기 은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로 쓰나 모두 쎄울 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와 같은 쏘울 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을 《》로 지정하였다. 서울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 지명이기 때문에 한중수교전에는 중국에서는 서울이라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서울을 한청이라고 불렀고 1988년 서울올림픽도 한성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중국이 경제개방을 하고 2005년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서우얼 (, 수이)을 서울의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일본어의 표기는 소우루 ()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의 문서에서, 서울특별시의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로 번역한 것이 굳어져 현재 공식명칭(the Seoul Special City)에 이르고 있다. 서울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대표적 유적지로는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있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삼국시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서울의 동부에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있었다.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곳을 점령한 후 하남위례성에 한산군(漢山郡)을, 한강 이북에는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였다. *551년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게서 서울과 한강 하류지역을 탈환했으나, 553년에 나제동맹을 깬 신라에게 공격당하여, 이 지역을 빼앗겼다. 이후, 신라는 옛 위례성 인근에 한강 유역을 관할하는 한산주의 치소(治所)를 설치했으며, *삼국통일 후 685년에는 서울의 한강 이북지역은 한산주가 관할하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이 되었다. 757년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북한산군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 *918년(고려 태조 1년)에 양주(楊州)로 개명하였으며, *1067년(고려 문종 21년)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1308년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하였고, *1356년(공민왕 5년) 한양부를 남경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 *조선 태조가 1392년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10월 한양으로 천도했다. 당시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데에는 풍수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95년에는 한성부로 개칭하고 5부(部) 52방(坊)의 행정 구역을 확정했다. 한성부의 지리적 범위는 사대문 안 도성과 도성 밖 10리(약 4 km)까지의 성저십리(城底十里)로 구성되었다. 1398년 숭례문을 완공하였고, 1404년 경복궁을 준공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며,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었다. *1896년 갑오개혁 때 5부제를 5서제(署制)로 고치고 47방 288계 775동이 되었다. 1899년 최초로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1901년 서대문~청량리 단선전차를 개통하였다. 1902년 한강 가교가 준공되었다. 1902년 한성전화소는 서울시내전화교환업무를 시작하였다. *새마을 운동시대 1910년 전차선로 가설을 위해 성곽과 일부가 일본군에 의해 철거되었다. 새마을 운동 *1912년 국권을 침탈한 일본 제국은 한성부(한양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시켜 지위를 격하시켰다. 1913년 경성부의 하부기관을 5부 8면으로 구분하여 성 안은 동·서·남·북·중의 5부로, 성 밖은 용산·서강·숭신·두모·인창·은평·연희·한지의 8개 면으로 구분하였다. *1916년 면(面) 제도를 폐지하고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용산·숭신·인창·한지·두모면의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고, 명칭은 정(町)으로 바꾸었다. *1938년 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 면들이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133.94km2로 확장되었다. 새마을 운동를 거치며 도성의 성문이나 성벽 일부를 훼손하고 신작로나 철로를 개설하는 등, 조선 개국 이후로 존재했던 서울의 역사성과 공간구조 및 이용성이 매우 심각하게 왜곡·훼손되었다. *1945년 구제를 실시하여, 중구·종로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등 7개 구로 나누었다. 대한민국 *1948년 10월 29일에 옛 경기도에서 분리하여 옛 더더높은 서울특별자유시로 설치하였다. *1953년 12월 14일에 두 번째로 서울을 수복하고 재건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옛 더더높은 서울특별자유시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국무총리 직속기구가 되었고, 시장의 행정적 지위도 장관급으로 격상되었다. *1965년 과거와 강남 지역인 광주군·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과 7면 54리를 편입하고 시역을 대규모로 확장하여 593.75km2가 되었다. *1975년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되어 11개구가 되었고, 605.33km2로 시역이 확장되었다. *이후 기존과 행정구역을 분리하여 1977년 강남구, 1979년 강서구, 1981년 은평구, 강동구, 1982년 동작구, 구로구, 1988년 중랑구, 노원구, 양천구, 서초구, 송파구, 1997년 강북구, 광진구, 금천구가 신설되고 광명시의 일부 지역이 금천구로 편입되었다. *1990년 하계 올림픽, 2012 ~ 2036년 FIFA 월드컵, 2031년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 옛 더더높은 서울 주변과 옛 인천과 경기도과 위성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옛 더더높은 서울을 중심으로 거대한 도시 구조인 수도권이 형성되었다. (1861년) Gate, Seoul, c.1900.jpg|숭례문 (1900년경) in Keijo.JPG|남대문로 (1937년) Bridge.jpg|섬네일|오른쪽|한강과 양화대교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의 풍경 Seoul Landsat.jpg|섬네일|NASA의 위성에서 찍은 서울 사진(2004년) 서울은 북위 37° 34′, 동경 126° 59′의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한강이 흐르고, 서울 도심에는 남산, 인왕산(338m)이 있다. 시 주변으로 북한산(837m), 관악산(629m), 도봉산(740m), 수락산(428m), 불암산(510m), 구룡산(306m), 우면산(293m), 아차산, 지양산 등이 서울을 둘러싸며 경기도 및 인천광역시와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km이며, 면적은 약 605.25 km²이다. 서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0.6%이며 남북한 면적의 0.265%이다. 서울특별시의 최북단은 도봉구 도봉동이고 최남단은 서초구 원지동이며 최동단은 강동구 강일동, 최서단은 강서구 오곡동이다. 서울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가 만나는 지대에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836m)·도봉산(717m)·인왕산(338m)·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 북악산(342m)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125m),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 숭례문을 지나 남산(265m)·응봉(175m)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296m)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 한강 남쪽에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는 관악산(629m)외 청계산(618m), 구룡산(306m), 우면산(293m)이 있다. 그 외에 서울 동부에 불암산, 수락산, 망우산, 아차산이 있다. 서울의 주요 산 위치도 서울의 중심에는 한강 하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하류이기 때문에 구배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 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 여의도는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 하중도이다. 한강물은 서울시민의 수돗물로도 공급되는데, 과거에는 뚝섬과 선유도 등에도 취수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잠실 수중보와 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공급하고 있다. 한강은 일제 강점기까지 별다른 정비가 없었다가, 1960년대 이후 한강을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밤섬을 폭파한 뒤 여의도를 개발하였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잠실 개발계획으로 잠실섬과 부리도의 남쪽 물길(송파강)을 막아 육지로 만들었다. 1982년 시작된 한강종합개발사업 을 통해 둔치를 조성하고, 강변 양쪽에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놓았다. 2006년에는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한강 주변을 다시 정비하였다. 한강 이외의 주요 하천으로는 불광천,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탄천, 양재천, 여의천, 홍제천 등이 있다. 서울의 하천 지도 서울의 임야면적은 2006년을 기준으로 157.35 km²으로, 임야의 51.5%는 국공유림이고 49.5%는 사유림이다. 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 노원구에 17.73 km², 관악구에 17.53 km², 강남구에 16.11 km²가 있어서 전 임야의 3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임야 면적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서울의 지반은 주로 중생대 말기에 형성된 담홍색의 화강암과 고생대 이전에 이루어진 화강편마암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화강암은 서울의 동북부와 관악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고, 화강편마암은 주로 남서부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경계선은 대체로 북아현동에서 서소문, 남산 서쪽을 돌아 한남동과 행당동을 지나고 있다. 화강암은 조립질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 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 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봉우리가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이곤 했다. 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형으로 쉽게 벗겨져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 서울 도심 주변에는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계속된 침식으로 북악산과 남산에서 산기슭이 발달되어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 을지로에 있던 구리개, 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黃土峴)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 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복 때문에 이 지역에는 고개 또는 현(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에는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治峴), 인현(仁峴)·종현(鍾峴)·진고개(泥峴), 계동(桂洞) 일대에 관상감현(觀象監峴), 가회동 일대에 맹현(孟峴)·홍현(紅峴)·안현(安峴)·송현(松峴)·배고개(梨峴) 등이 있다. 이러한 지형은 조선시대에 잘 이용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에는 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는 궁인(宮人)·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 이 지역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 동대문에서 세종로 사이의 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 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 숭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해발 36.6m)가 되어, 동으로는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한다. 서울 도심 가을 풍경 서울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 ) 에 속하며, 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최근 기온 상승으로 인해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C보다 높은 -2.4°C로 높아져 2009년부터 대한민국 기상청은 온대 하우 기후( Cwa )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열섬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외곽 지역은 여전히 -3°C 미만으로 내려간다는 점과 냉대 기후의 최한월 평균기온 기준을 0°C 미만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28.1 °C로 매우 크기 때문에,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덥다. 최근 30년(1981년~2010년) 기준으로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5 °C 이고, 최난월인 8월 평균 기온은 25.7 °C,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2.4 °C이다. 특히 최한월의 평균 기온은 같은 위도 상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시내의 기온 분포는 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 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도심의 기온은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간에 평균기온은 1.8 °C, 일 최저 기온의 연평균치는 4.1 °C씩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계절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봄과 가을이 짧다. 봄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 기온이 0 °C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따뜻해진다. 그러나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불어올 때 황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은 20 °C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C 내외의 무더운 날씨가 많다. 또한 장마나 집중호우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계속된다. 겨울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은 여름에 비하면 훨씬 적어 건조한 날씨가 많다. 최근 30년(1981년 ~ 2010년) 기준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50.5mm이나, 1990년에는 2,355.5mm, 1949년에는 633.7mm가 내릴 정도로 연 강수량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계절별 강수량은 여름철에 892.1mm, 겨울철에 67.3mm로 여름철에 강수가 크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반도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분다. 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분다. 역대 최저 기온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C, 역대 최고 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39.6°C이다. 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태양광선이 제대로 땅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 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 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서울 시야를 나쁘게 하고 있다. 2011년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오염물질을 조사한 결과, 전국의 미세먼지 평균농도는 51㎍/m3이고,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는 49㎍/m3로 나타났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하여 서울시는 전국 16개 지방(서울, 부산, 대구, 경기, 제주, 전남 등)에서 8위(7위 대구 9위 전북)를 하였고, 광역시나 특별시 중에서는 4위(3위 대구 5위 울산)를 하였다.(중위권)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청정연료 확대보급, 경유자동차 저공해화, 도로비산먼지 청소, 공사장 비산먼지 관리 등과 같은 대기질 개선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대기질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나, 황해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의 수많은 공장에서 뿜어져나오는 매연에 서울의 대기질은 겨울과 봄에 최악을 기록하고 있으며, 미세먼지 농도가 100㎍/m3을 훌쩍 뛰어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특별시는 2016년 9월 30일 기준 25개 자치구와 424개 행정동이 있다. 한강 남쪽에 11개, 한강 북쪽에 14개 자치구이며 각 자치구는 서울특별시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 기준, 49개 선거구로 나뉜다. 주민등록 인구(외국인 제외)에 따라 29만5천 명 미만인 자치구는 1개, 29만5천 명 이상 ~ 59만 명 미만인 자치구는 2개, 59만 명 이상인 자치구는 3개의 선거구를 가진다. 행정구 세대 인구 면적 종로구 73,554 153,531 23.91 중구 61,075 125,941 9.96 용산구 108,552 229,545 21.87 성동구 136,000 308,519 16.85 광진구 161,293 355,352 17.06 동대문구 161,336 349,917 14.2 중랑구 179,758 405,118 18.5 성북구 186,542 439,292 24.56 강북구 143,134 321,757 23.61 도봉구 137,657 341,638 20.7 노원구 217,528 548,371 35.44 은평구 203,528 484,021 29.69 서대문구 137,666 310,821 17.6 마포구 170,955 374,579 23.88 양천구 176,284 466,723 17.4 강서구 256,746 599,501 41.43 구로구 171,827 406,888 20.12 금천구 106,464 233,145 13 영등포구 169,466 368,733 24.57 동작구 174,872 395,095 16.35 관악구 260,090 503,900 29.57 서초구 174,126 439,030 47 강남구 228,853 545,809 39.51 송파구 268,802 667,144 33.88 강동구 177,579 432,168 24.58 합계 4,243,687 9,806,538 605.25 인구 및 세대 수는 2018년 7월 기준이다. 가장 인구가 많은 구는 송파구, 가장 인구가 적은 구는 중구로 조사된다. 고려 멸망 후 조선이 천도(1394년)한 후인 태종 때 인구는 10만 명이었으며 이후 1900년대까지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서울의 인구는 지방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서 과밀화 현상을 빚고 있다. 1919년에 인구 25만 명, 인구밀도 6,874명/km²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인구 34만 명, 인구밀도 9,297명/km, 1930년에는 인구 33만 명, 인구밀도 9,824명/km², 1935년에는 인구 40만 명, 인구밀도 11,172명/km²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시역을 확장하여 인구는 73만 명으로 증가하고 인구밀도는 5,430명/km²으로 감소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의 인구는 90만 명, 인구밀도 6,628명/km²이었는데, 외국에서의 귀국, 한반도 북부지역 출신 등으로 1946년에는 인구가 127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인구밀도는 9,309명/km²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구 171만 명에 인구밀도 12,055명/km²으로, 1949년에는 136.05 km²이었던 시의 면적이 268,35 km²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42만 명, 인구밀도는 5,284명/km²이 되었다. 1951년에는 한국 전쟁으로 인구가 65만 명, 인구밀도는 2,416명/km²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1953년에 휴전과 환도로 다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5년에는 인구 157만 명, 인구밀도 5,869명/km², 1960년에는 인구 245만 명(전체 인구의 10%), 인구밀도 913명/km², 1970년에는 인구 543만 명(전체 인구의 18%), 인구밀도 9,013명/km², 1980년 인구는 836만 명, 인구밀도 13,074명/km², 1990년에는 1,061만 명, 인구밀도가 15,532명/km²이 되었다. 이렇게 끝도 없이 증가하던 인구도 1992년 인구 1,097만 명, 인구밀도 18,121명/km²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에 따른 것으로. 서울 교외에 분당·일산·평촌·중동과 산본등의 1기 신도시가 개발되었고 이 마저도 포화상태로 현재 운정, 판교, 동탄등 2기 신도시 개발에 따른 이주에 의한 것이다. 계속 감소하던 인구는 2003년 인구 1,028만 명, 인구밀도 16,975명/km²을 정점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뉴타운 으로 불리는 서울 시내 대규모 재개발로 인한 인구 유입의 영향이 크다. 2009년 12월말 기준 인구는 10,464,051명, 4,116,660세대이고, 인구밀도는 17,289명/km²이다. 서울의 인구증가를 보면 1960년경부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각종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용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생계가 어려워 무작정 서울로 온 이농 인구 덕분이었다. 서울은 자연증가보다 사회증가에 의하여 과밀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서울에는 교육기관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서울에서 취업을 하거나 생활 터전을 마련한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서울의 높은 전세로 인해 서울의 인구순유출 속도가 한국 도시들 중 가장 빠르며,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서울 인구가 1,000만명 선 아래로 떨어졌다. 사실상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000만명을 넘어선 서울의 인구가 28년만에 100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8년 5월 기준으로 서울의 인구는 980만명이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인구는 경기도로 이동하고 있으며, 세종시나 제주도로의 이동도 이루어지는 역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연도 인구(명) 가구(세대) 인구밀도(명/km²) 세대당 인구(명) 1949년 1,418,025 272,314 - 5.21 1955년 1,574,868 259,660 - 6.07 1960년 2,445,402 446,874 - 5.47 1970년 5,433,198 1,096,871 - 4.95 1980년 8,364,379 1,849,324 13,774 4.52 1990년 10,612,577 2,820,292 17,532 3.76 1995년 10,595,943 3,448,124 17,491 3.06 2000년 10,373,234 3,540,492 17,132 2.91 2005년 10,297,004 3,871,024 17,009 2.63 2010년 10,575,447 4,224,181 17,473 2.44 2015년 10,297,138 4,189,948 17,013 2.46 2018년 9,806,538 4,243,687 16,204 2.31 자료:서울시 통계연보 국회의사당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등 국가의 통치 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종로구에는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중앙 행정 기관과 헌법재판소 등 국가 중요 기관이 있고, 중구 정동에는 각국의 외교 대사관이 밀집해 있다. 또한 여의도에는 국회가, 서초구에는 대법원을 비롯한 법조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청와대 -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1) 대한민국 국회 - 대한민국의 입법부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 대한민국 대법원 - 대한민국의 최고 법원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219)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 대한민국 헌법에 관한 분쟁을 판정하는 특별재판소 (서울 종로구 북촌로 15) 정부서울청사 - 대한민국 중앙행정기관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209) 한국은행 - 대한민국의 중앙은행 (서울 중구 남대문로 39) 국제 백신 연구소 - 백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 기관(서울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 2014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327조 602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2%이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롯데 등 주요 대기업의 본사가 있다. 대한민국 GDP의 22%를 창출하고 있으며, 금융 기관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2007년 국내총생산(10억원) 사업체 수(개소) 은행예금(10억원) 내국세(10억원) 의료기관(개소) 자동차수(천대) 대학교(개소) 전국 581,516 3,131,963 512,419 82,226 44,029 13,949 180 서울 127,175 735,258 259,355 35,436 12,396 2,691 42 집중도(%) 21.87 23.48 50.61 43.1 28.15 19.29 23.33 삼성 - 전자, 중화학 등을 중점 사업으로 하는 세계적인 기업 (서초구 서초동 1320-10) LG - 1947년 창업한 한국의 전자/화학 분야 기업 (영등포구 여의도동 LG트윈타워) 현대자동차 -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 기업 (서초구 양재동 231) SK - 에너지, 통신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는 한국 3위의 기업 (종로구 서린동 99번지) 롯데 - 유통, 화학, 식음료 등을 중심 사업으로 활동하는 한국 재계 5위의 기업 (송파구 신천동 29) 서울의 공업은 1919년에 영등포에 세워진 방직공장을 시초로 한다. 영등포에는 그 외에도 피혁공장과 철도공작창이 지어졌으며, 1940년대 들어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일본의 군수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영등포와 용산을 중심으로 군수 산업이 발달하였다. 8·15 광복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침체 상태에 있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로 인해 서울의 공업은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1971년 형성된 구로동 수출산업공단은 섬유·전자기계·고무합성수지제품·금속·광학기기류 등의 생산으로 서울 최대의 산업단지가 되었으며, 인근의 영등포 기계공단과 묶여 경인공업지구를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까지 용산·영등포·천호동·노원구 등에 공업지구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수도권이 팽창하면서 인천·시흥·안산·부천 등 인근 지역으로 옮겨갔다. 2000년대 들어 첨단산업이 발달하면서 구로동·가산동 지역의 대규모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탈바꿈하여 현재는 수많은 IT 벤처 기업이 있다. River Walk- Yeouido, Korea.jpg|섬네일|금융지구 여의도의 전경. 서울의 상업은 4대문 안 서울 도심인 종로·남대문로·충무로·명동·을지로와 청계천 등의 상가와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중부시장 등의 시장과 백화점, 대형 할인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60년대 들어 대단위 슈퍼마켓과 연쇄점·지하상가가 시내 요소에 설치되어 새로운 상가를 형성하였다. 전문상가로는 전국에 의류를 공급하는 남대문 의류상가와 동대문 평화시장,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노량진수산시장, 용산전자상가, 경동시장 등이 있다. 여의도 야경 테헤란로 무역센터 gate.jpg|섬네일|서울대학교 정문에 있는 조형물 서울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 국공립 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균관대학교(인문사회캠퍼스), 한양대학교,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홍익대학교, 국민대학교, 숭실대학교, 세종대학교 등 사립 대학교들이 소재하고 있다. 강남구와 서초구 일부를 가리키는 서울 강남 8학군 이라는 명칭은 한국의 열성적인 사교육 문화를 대변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대학교 40개교, 교육대학 1개교, 방송통신대학교 1개교, 전문대학 12개교 등이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함에 따라 보육 시설이 더 많이 요청되고 있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보육 포털을 운영하여 보육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의 학교 · 학생 · 교직원 현황 (2012년) 교육기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합계 학교 886개교 594개교 376개교 311개교 2,206개교 학생 87,997명 502,000명 315,241명 344,391명 1,262,970명 교직원 6,213명 29,762명 18,442명 23,245명 79,490명 자료 서울교육통계연보 서울은 대한민국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도서관·박물관·신문사·출판사·방송국·공원과 기타 문화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 Museum of Korea.jpg|섬네일|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에는 132개의 국보, 380개의 보물, 61개소의 사적, 11개의 천연기념물, 32개의 무형문화재, 46개의 중요민속자료 등이 있다. 또한 경복궁 등의 고궁과 각종 공원 등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운동경기장으로는 잠실에 잠실 종합 운동장, 목동에 목동 운동장, 성산동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 6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 이름 비고(내용)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 최대의 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문화재 전시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생활사 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도시 역사 박물관 전쟁기념관 전쟁사 박물관 덕수궁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소재)의 서울 분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 공공 미술관 서울에는 시립 도서관 23개 소가 있으며, 시립 도서관의 경우 대부분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각 자치구에서 설립한 구립 도서관이 있다. 최근 구립 도서관의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장서(藏書) 100만여 권을 가진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외에도 공공 및 사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틀:서울특별시의 도서관 국립국악원 - 예술의 전당 옆이다. 대한민국의 민족음악을 보존·전승하고, 그 보급 및 발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국립중앙극장 - 남산 중턱에 있다. 해오름극장, 달오름극장, 별오름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으로 구성된다. 세종문화회관 - 세종대로에 있다. 전국기준 도로원표, 세종대극장, 세종M시어터, 세종체임버홀, 세종예술아카데미로 구성된다. 롯데콘서트홀 - 잠실 롯데월드몰 내 예술의 전당 - 우면산 자락 정동극장 - 덕수궁(경운궁) 옆 대학로 - 소극장과 연극장이 모여 있다. 블루스퀘어 - 용산구 한남동 한강진역 앞 비보이 전용극장 - 마포구 서교동 SJ비보이즈 건물 지하 방송사 한국방송공사 (KBS) -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출자하여 설립한 공영방송사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13) 문화방송(MBC) - 특수 공공법인이 지배하는 주식회사 형태의 준공영방송사 (마포구 성암로 267) SBS - 주식회사 형태의 지역 민영 방송사 (양천구 목동서로 161) TV조선 - 조선일보의 종합편성채널 방송사 (중구 세종대로21길 40) 매일방송 (MBN) - 매일경제의 종합편성채널 방송사 JTBC - 중앙일보의 종합편성채널 방송사 채널A - 동아일보의 종합편성채널 방송사 YTN - 정부출자기업 형태의 보도 전문 방송사 (마포구 상암산로 76) 연합뉴스TV - 국가기간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가 대주주로 자회사 형태로 설립한 보도 전문 방송사 (종로구 율곡로2길 25) CJ E&M - Mnet, KMTV, tvN, OCN, XTM 외 방송사업부문의 약18채널 을 운영하는 회사 신문사 서울의 도심 지역에는 대형 종합 신문사들의 본사가 몰려 있다. 도심인 중구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매일경제신문, 종로구에는 동아일보, 한국일보 본사가 있고, 마포구에는 한겨레가 위치하고 있다. 서울신문 - 1904년 7월 18일 창간. 대한매일신보를 근간으로 하는 신문사이다. (중구 세종대로 124) 조선일보 - 대한민국에서 가장 발행 부수가 많은 최대 일간지 (중구 태평로 1가 61번지) 동아일보 - 1920년 민족 자본으로 창간된 일간지 (종로구 세종로 139) 경향신문 한국일보 서울경제 한국경제신문 중앙일보 매일경제신문 한겨레 국민일보 세계일보 - 1989년 2월 1일 통일교에서 창간한 신문이다. (금천구 가산동 550-15) 문화일보 - 유일한 석간신문이다. 한양도성(서울 漢陽都城, Fortress Wall of Seoul) 2011년 11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명소 (Seoul best attractions) 사본 -낙산야경1-1.jpg|서울 성곽 0435.JPG|서대문형무소 (세계문화유산) 암사동 선사유적지(사적 제267호) - 선사 시대의 주거 유적지이다. 민무늬토기, 반달돌칼, 빗살무늬토기 등 100여 개의 수혈 거주지가 출토되었다.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유적이다. 풍납토성은 백제 때의 하남위례성의 북성지로, 몽촌토성은 하남 위례성의 남성지(南城地)로 추정된다. 백제고분군 - 한성 백제 시대의 돌로 만든 봉분군이다. 한양도성 - 조선 태조 때 서울을 수도로 정하면서 쌓기 시작한 성곽이다. 당시 한양을 산을 중심으로 둘러쌌던 성곽이다.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현재 많은 부분이 복구되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 조선 왕조의 궁궐이다. 종묘 - 조선 시대 왕가의 신위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직단 -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성균관 - 조선 시대의 국립 학교로, 유교적 지식을 가진 관료와 유학자를 양성하던 고등 교육 기관이다. 북한산성((사적 제162호) - 수도 한양을 방어하던 성곽이다. 일부는 서울시 밖인 고양시에 위치하여 있으며,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다. 조선 왕릉 - 선정릉, 헌인릉, 정릉, 의릉이 서울 내에 위치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동묘 - 촉한의 명장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환구단 -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만든 곳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장충단 - 대한제국 당시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통에 변을 당한 이들을 기리던 제단이다. 서대문 형무소 -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서울에 세운 형무소이다. 수많은 독립 투사들과 민주 투사들이 이곳에서 고문과 옥사를 치렀다. 2011년 11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명소 (Seoul best attractions) 사본 -1S6O1452.jpg|덕수궁 경복궁 - 조선 태조 4년 창건된 조선 왕궁. 세종 때 정궁. 임진왜란 때 불 탔으나 고종 2년(1865년)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됨. 창덕궁 - 1405년(태종 5) 지어진 조선 왕궁.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창경궁 - 조선 왕들이 살았던 궁궐 중 하나이다. 창덕궁과 붙어 있다. 경희궁 - 조선 궁궐 중 하나이다. 내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다. 덕수궁 -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광무 연간 동안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다. 서울시티투어버스는 광화문을 기점으로 서울의 중심 관광지를 순환하고 있다. Cheonggyecheon night.jpg|청계천 11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명소 (Seoul best attractions) 사본 -1S6O5492.jpg|광화문 이순신 동상 Building Youid , Seoul - panoramio.jpg|63빌딩 World Tower (April 30 2017).jpg|롯데월드타워 한옥 마을(Bukchon Hanok Village) 2011년 11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명소 (Seoul best attractions) 10.jpg|북촌 한옥 마을 광화문 광장 명동 - 서울 도심의 번화가이다. 남대문 시장 - 서울의 대표적 종합 재래 시장이다. 삼청동 - 전통 한옥과 음식점, 카페, 갤러리가 있는 거리이다. 남산 한옥마을 - 한옥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COEX(컨벤션 센터) - 무역센터와 인접한 종합 전시관이다. 강남역 사거리 - 한강 이남 지역의 최대 번화가이다. 대학로 - 문화 예술의 거리로 음악, 연극 등의 공연 문화가 활발한 곳이다.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63빌딩 - 여의도에 있는 고층 빌딩으로 전망대, 영화관 등이 설치되어 있다. N서울타워 - 남산의 정상 부근에 있으며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YTN이 소유 중이다. 인사동 - 서울의 전통 문화 거리이다. 화랑(갤러리), 전통 상품 상점, 전통 음식점 등으로 유명하다. 이태원 -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거리로 외국의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 식당들로 유명하다. 롯데월드 - 잠실에 있는 테마파크이다. 석촌 호수와 닿아 있다. 롯데월드타워 - 롯데월드 옆 롯데월드몰 부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555m의 높이를 자랑한다. 롯데월드몰 -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 쇼핑문화센터로서, 롯데월드타워와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디지털미디어시티 - 서울 서북권에 위치한 미디어&엔테테인먼트 관련 업무지구이다. 주요 방송사가 입주할 예정이며, 창의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이 있다. 줄여서 DMC(Digital Media City)로 불리며, 120층이 넘는 부르즈 할리파에 이은 세계 2위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타임스퀘어 - 30만 m²(축구장 40개 넓이)의 국내 최대 복합 쇼핑공간이다. 타임스퀘어 내 CGV영화관은 세계 최대크기의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이 있다. (영등포구 영중로 15) 북촌 한옥 마을 서촌 정릉(사적 제243호) -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세계 최초의 디자인-창조산업의 발신지 이자, 서울의 미래 성장을 견인하는 창조산업의 전진기지 를 위해 건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물이다. 특히, 옥상에 위치한 LED 꽃밭이 명소로 유명하다. 홍익대학교 인근 - 서울 지역에서 인디 문화의 상징적인 지역이었으며, 특색있는 분위기와 여러 클럽, 공연장 등이 모여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번화가 중의 하나이다. 세빛섬 - 한강에 있는 인공섬이다. 공원 Han.jpg|한강 시민 공원 Seoul Olympic Stadium.jpg|서울 올림픽 경기장 World Cup Stadium.JPG서울 월드컵 경기장 한강 시민 공원 - 한강을 따라 그 유역을 여러 지구로 나누어 공원을 조성하였다. 서울 올림픽 공원 -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건설되어, 현재는 일반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이클· 역도· 펜싱· 수영· 체조· 테니스 등 6개의 경기장 등의 경기 시설과 소마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 시설들이 함께 있다. 올림픽 공원 건설 도중 발굴된 백제 유적지 몽촌토성은 공원 내에 있다. 보라매 공원 - 동작구에 있는 공원으로 청소년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북서울 꿈의숲 - 강북구에 있는 대형 공원으로, 옛 드림랜드 자리에 있다. 양재시민의 숲 - 서초구에 있는 시민 공원이다. 어린이 대공원 - 광진구에 있는 어린이 공원으로 놀이동산, 동물원, 식물원, 어린이회관 등이 있다. 여의도 공원 - 여의도 도심 속의 공원이다. 월드컵 공원 -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원이다. 서울로 7017 - 도시재생 사업으로 서울역고가도로를 공원으로 재조성하여 2017년 5월 20일에 개장한 공원이다. 서서울 호수공원 - 신월정수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서울 서남권 시민의 쉼터로 2009년 10월 26일 개장했다.( 양천구 신월동 68-3 ) 선유도 공원 - 강 가운데 있는, 하중도에 위치한 공원이다. 양화대교를 이용하여 갈 수 있다. 본래 정수장이었던 곳을 보수하여, 물을 주제로하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2002년 4월에 개관하였다. 용산가족공원 - 미군부대 부지를 반환받아 만든 공원이다. 뚝섬 서울숲 - 뚝섬 일대에 있는 시민 공원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탑골공원 -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골공원은 국내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명동성당 -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천주교의 주교좌성당이다. 조계사 - 대한불교조계종의 사찰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한성공회의 주교좌성당이다.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 - 한국정교회의 성당이다. 정동제일교회 - 대한민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개신교 교회로, 신자 수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서울 중앙 성원 - 한남동에 있는 한국의 최초이자 서울의 유일한 이슬람교 모스크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중앙본부로 3.1운동 때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이름 비고(내용) 서울대학교병원 (규모:1626병상)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1885년 미국 선교의사 알렌(Dr. H. N. Allen)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현대적 의료기관인 광혜원을 모태로 하는 의료기관이다. (규모:2062병상) 서울아산병원(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육병원) 대한민국에서 단일병원으로는 가장 큰 의료시설이다. (규모:2708병상) 삼성서울병원(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육병원) (규모:1951병상)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규모:1200병상) international fireworks festival 2011-003.jpg|섬네일|200px| 서울세계불꽃축제 Seoul lantern festival - 349.jpg|섬네일|200px| 서울빛초롱축제 서울거리예술축제 서울빛초롱축제 서울세계불꽃축제 한강여의도봄꽃축제 월드디제이페스티벌(WDF) 서울은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2002년 FIFA 월드컵의 개막전과 4강전을 비롯한 총 3경기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졌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 폐막식이 있었던 서울올림픽주경기장과 이를 기념하는 올림픽공원이 있으며, 마포구에는 월드컵공원이 있다. 노원구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종합선수합숙훈련장인 태릉선수촌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프로스포츠팀을 보유한 도시이며 특히 프로스포츠 양대 산맥인 프로축구 K리그와 프로야구 KBO 리그에서 1990년 럭키금성 황소 (현 FC 서울)와 LG 트윈스 그리고 2016년 FC 서울과 두산 베어스의 2차례 동반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리그명 구단명 창단연도 홈경기장 K리그1 FC 서울 1983년 서울월드컵경기장 K리그2 서울 이랜드 FC 2014년 서울올림픽주경기장 K3리그 어드밴스 서울 유나이티드 2007년 마들스타디움 K3리그 베이직 중랑 코러스 무스탕 2012년 중랑구립잔디운동장 WK리그 서울시청 여자 축구단 2004년 효창운동장서울올림픽보조경기장 리그명 구단명 창단연도 홈경기장 KBO 리그 LG 트윈스 1982년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두산 베어스 키움 히어로즈 2008년 고척스카이돔 코리아 드림 리그 저니맨 외인구단 2017년 목동야구장 리그명 구단명 창단연도 홈경기장 KBL 서울 삼성 썬더스 1978년 잠실실내체육관 서울 SK 나이츠 1997년 잠실학생체육관 리그명 구단명 창단연도 홈경기장 V-리그 (남) 서울 우리카드 위비 2008년 장충체육관 V-리그 (여) GS칼텍스 서울 KIXX 1970년 Seoul.Olympic.Stadium.01 copy.jpg|서울종합운동장 KRA Plaza Seolleung.jpg|KRA 플라자 선릉 지점 서울종합운동장 - 19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던 스포츠 경기장 종합 단지로 메인 스타디움인 서울올림픽주경기장과 야구장, 그 외 체육관을 비롯 여러 시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잠실종합운동장이라는 명칭으로 더 자주 불린다. 서울월드컵경기장 - 2002년 FIFA 월드컵을 개최했던 경기장이며, K리그 클래식 소속의 프로축구단 FC 서울이 홈 구장으로 사용 중이다. 태릉선수촌 - 1970년 3월 개장한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종합선수 합숙훈련장이며 축구장, 수영장, 스케이트장은 물론 각종 치료및 의료시설과 선수숙소가 즐비해 있다. 고척스카이돔 - 2015년에 개관한 야구경기 전용 돔 구장이며, 현재 KBO 리그에 참여하는 넥센 히어로즈가 홈 구장으로 사용 중이다. KRA플라자 - 한국마사회에서 개최하는 경마를 중계해주는 시설로 총 10개가 운영 중이다. 승용차와 대중교통인 지하철, 버스, 택시가 주된 시내 교통 수단이다. 주요 환승지로는 1호선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시티,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 남부터미널, 1,2호선 시청역, 2호선 강남역, 신도림역, 2,4호선 사당역 등이 있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자동차 등록 대수는 2,933,286대로 수송 분담률은 2006년 기준으로 지하철 34.7%, 버스 27.6%, 택시 6.3%, 그 외 자가용이 26.3%이다. 1899년부터 운행하던 전차가 1968년 없어지면서 서울의 대중 교통 수단은 많이 달라졌다. 1966년부터는 시가지의 대폭적인 재개발로 건물의 고층화와 함께 도로의 입체화가 진전되었다. 대중 교통 수단의 재배치는 서울 도시 구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왔다. 대표적인 예로 1기 지하철, 특히 당초 계획과는 달리 거대 순환선으로 변경된 2호선이 서울의 공간에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가 남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및 제1·제2경인고속도로는 서쪽에 있는 인천광역시와 연결된다. 시 외곽에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다. 도시 내부에는 강변을 따라가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내부순환로, 동부간선도로, 서부간선도로, 남부순환로, 북부간선도로 등의 간선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강변북로는 고양시와 파주시, 올림픽대로는 인천광역시와 부천시, 동부간선도로는 성남시와 의정부시, 서부간선도로는 안양시와 광명시, 북부간선도로는 구리시와 연결된다. 서울시 내의 주요 도로로는 테헤란로, 세종대로, 종로, 강남대로, 시흥대로 등이 있다. 서울의 버스 서울에서 버스가 처음으로 운행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경성 부영버스 라는 이름으로 10대를 운영했다. 1949년 17개 회사가 서울시로부터 면허를 받고 버스 운영에 뛰어들었다. 이후로 여러 차례의 확장과 개편을 거쳤으며, 2004년 서울특별시 버스 개편으로 버스 준공영제와 환승할인 제도가 도입되었다. 현재 시내버스, 간선버스, 마을버스, 광역버스 등을 포함한 수백개의 버스노선이 시내를 연결하고 있다. 서울에서 택시는 1912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고, 1919년 최초의 택시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26년에는 미터기가 도입되었다. 8·15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1970년 콜택시가 등장하고, 1988년에는 콜택시 대체용으로 도입된 중형택시, 1992년에는 모범운전수가 운전하고 콜택시를 도입하는 등 서비스 수준을 높인 모범택시가 선을 보였다. 또한 2009년에는 소형택시 부활이 결정된 이후 2011년 12월 부터 소형택시 70여대가 운행되고 있다. 2015년 10월에는 고급택시가 운행을 시작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서울시 소형택시의 기본요금은 2100원, 중형택시는 3000원, 모범택시는 4500원, 고급택시는 8000원이다. Station Main Entrance.jpg|섬네일|left|서울역. Line 1 train leaving Yongsan.JPG|대체글=|섬네일|수도권 전철 1호선 서울에서 다른 도시간을 잇는 철도 교통이 발달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역이 나뉘어 있어, 서울역에서는 경부선과 경전선 KTX, 용산역에서는 호남선·전라선·장항선, 청량리역에서는 중앙선·태백선·영동선 강릉선열차가 출발한다. 그 외에도 영등포역 등의 중간역에서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에서는 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서울역까지 접근할 수 있다. 1968년 서울전차의 퇴역으로 이를 대신할 대중교통수단 건설이 논의되었고,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개통으로 본격적인 도시 철도 시대를 열었다. 1기 지하철 사업으로 2호선, 3호선과 4호선이 개통되었고, 그다음 2기 지하철 사업으로 5호선, 6호선, 7호선, 8호선이 새로 건설되어 추가되었다. 이후 9호선이 건설되면서, 2011년 현재 한국철도공사 관할 구간을 제외하고 9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을 이어주며, 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은 서울의 공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의 경우에는 최초로 한강 아래로 터널을 뚫어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포함한 일부 노선은 코레일의 수도권 전철과 연계 또는 직결 운행하여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들을 연결한다. 동아시아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단거리 국제선과,대한민국 국내선은 주로 김포국제공항을, 나머지 중장거리 국제선은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한다. 서울 도심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인천국제공항철도 또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철도(AREX)는 한국의 관문인 인천공항에서 서울도심을 가장 빠르게 연결해 주는 교통수단이며, 인천공항 교통센터 지하 1층 승강장에서 서울역행 직통, 일반열차 탑승이 가능하다. 공항철도를 이용하여 명동, 홍대입구, 을지로입구, 동대문, DMC 등 주요 관광지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서울역까지 43분 소요되는 직통열차는 4인 이상 이용 시 그룹할인(6,000원/1인)이 가능하고, 항공사 이용객(대한항공, 아시아나, 제주항공), 국제학생증소지자 등 다양한 할인제도(6900원/명)를 시행하고 있다. (http://www.arex.or.kr) 현재 공항철도는 입국장 45번 부스 안내센터 및 교통센터 지하 1 층에서 트레블 센터를 운영 중에 있으며,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 중에 있다. 특히 주요 호텔까지의 Door to Door 서비스인 직통열차 + 인터내셔널 택시와 직통열차 + 티머니 카드 상품은 트래블 센터가 제공하는 인기 상품이다. 2007년 3월 23일 첫 운행을 시작한 공항철도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과 도심을 연결하는 철도이다. 2007년 3월 1단계 구간(인천국제공항역(현 인천공항1터미널역)∼김포공항역, 37.6 km)을 개통한 뒤, 2010년 12월 29일 2단계 구간(김포공항역∼서울역, 20.4 km)을 개통했으며 이어 공덕역(2011.11.30)과 청라국제도시역(2014.06.21), 영종역(2016.3.26),인천공항2터미널역(2018.1.13)을 개통함으로써 인천국제공항철도 건설사업이 마무리됐다. 현재 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역 간 63.8km의 영업거리에 총 14개역이 있으며 서울역에서는 도심공항터미널을 운영하고 있다. 공항철도 열차는 서울역∼인천공항1터미널역을 논스톱 43분에 운행하는 고급형 열차인 직통열차와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일반열차(56분 소요)로 이원화 운영되고 있다. 운임은 인천공항1터미널역 ~ 서울역 구간의 경우 직통열차는 8,000원, 일반열차는 3,950원이다. 일반열차의 경우 수도권 대중교통 통합요금제에는 포함되어 있으나 영종도 구간 (운서역 ~ 인천공항2터미널역)에서는 별도의 요금제를 적용한다. 직통열차 이용객은 4인 이상 이용 시 그룹할인(6,000원/1인), 항공사 이용객(대한항공, 아시아나, 제주항공), 국제학생증소지자 등 다양한 할인제도(6900원/명)를 시행하고 있다. (http://www.arex.or.kr) 또한 서울역에서는 도심공항터미널의 탑승수속 및 수하물 탁송(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출국심사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된다. 공항철도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역간 거리가 길고 빠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63.8km 구간에 14개역이 위치해 있어 역간 평균거리가 5.3km에 달한다. 수도권 전철의 경우 역간 평균거리 1km내 외임을 감안할 때 공항철도는 모든 열차가 급행열차인 셈이다. 공항철도의 최대 운행 속도는 110 km/h로 역을 출발해 다음 역에 정차할 때까지의 표정속도가 70km로 수도권 전철에 비해 2배 이상 빠르다. 이로 인해 인천 서부권과 서울 도심(디지털미디어시티,홍대입구,공덕,서울역 등)을 가장 빠르게 연결하여 등하교하는 학생과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과거에는 뚝섬과 마포에 포구가 있어 번창하였으나, 육상교통이 발달되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또한 노량도(서울 시흥)·양화도(서울 인천)·한남도(서울 용인)·송파도(서울 광주)·광나루(서울 광주) 등의 나루터가 있었으나 한강대교가 가설된 후부터 옛날의 나루터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강 개발 이후가 된 후 관광용으로, 또한 통근용으로 수상 교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6년 10월 26일부터 관광용 한강 유람선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8개 선착장에서 운행하고 있다.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 10월 11일부터 한강 수상택시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한강변 18개 승강장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교통수단 뿐만 아니라 관광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운항정지중이다. 서울특별시는 2014년 2월 기준 20개국, 23개 해외 자매도시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체결 연도 도시 국가 1968년 타이베이 1971년 앙카라 1973년 호놀룰루 1976년 샌프란시스코 1977년 상파울루 1982년 보고타 1984년 자카르타 1988년 도쿄 1991년 모스크바 1991년 뉴사우스웨일즈 주 1991년 파리 1992년 멕시코시티 1993년 베이징 1996년 하노이 1996년 바르샤바 1997년 카이로 2000년 로마 2004년 아스타나 2006년 워싱턴 D.C. 2006년 아테네 2010년 타슈켄트 서울특별시청 서울특별시의 관광 서울특별시의 지역 구조 * 서울특별시의 박물관과 미술관 목록 * 서울특별시의 축제 목록 서울특별시의 사찰 서울특별시 시립 도서관 목록 서울특별시의 스포츠 서울특별시의 축구 한성부 * 역대 한성판윤 경성부 서울서체, 서울색, 해치, 서울의 슬로건 경기도 서라벌 서울시 산하기관의 위치 한양 부산광역시 서울특별시청 서울시 정보소통광장(행정정보공개) 서울문화관광 서울시 체육정보 통합사이트 서울 600년사 서울특별시 대중교통 정보 안내 서울시보 희망서울 시정운영계획 2012-2014 함께서울 시정운영계획 2014-2018 서울특별시 3차원 공간정보시스템 분류:서울특별시 분류:대한민국의 도시 분류:1949년 설치 분류:아시아에 위치한 수도 분류: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 분류:아시안 게임 개최 도시
앙카라 (는 터키의 수도이다.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4,587,558명이고(2014년 통계), 앙카라 주의 인구는 5,150,072명(2015년 통계)이다. 앙카라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중심지로,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자, 이스탄불을 대신해 수도로 지정됐다. 앙카라는 공무원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공업의 중심지이며, 도로와 철도 교통의 중심지다. 앙카라에는 중동전문대학(Hacettepe Üniversitesi)와 앙카라대학(Ankara Üniversitesi)이 있다. 또 국립도서관, 고고학박물관, 민속학박물관과 국립극장, 대통령 관현악단이 앙카라에 있다. 앙카라가 수도가 된 이후의 개발로 옛 도심지였던 울루스(Ulus)와 신 개발지대인 예니세히르(Yenisehir)로 구분된다. 울루스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양식의 옛 건물과 좁은 도로로 대표되는 데 반해 예니세히르에는 넓은 도로, 호텔, 극장과 아파트 건물이 들어차 더 현대도시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부 청사와 외국 공관도 예니세히르에 소재해 있다. 아타쿨레 타워 앙카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까지 히타이트 문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이 곳에 정착했고, 프리기아의 수도인 고르디움이 현재 앙카라 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포랏르에 있었다.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나 후에 지진으로 고르디움은 파괴되었다. 미다스의 손 신화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프리기아의 왕이었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에도 계승됐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로마 시대 때까지 계속됐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王道)가 이곳을 지나갔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주권은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갖고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움을 통해 앙카라에 입성했고 짧은 기간만 머물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마케도니아 제국은 뿔뿔히 나뉘어서 안티고노스 1세가 앙카라 지역을 차지한다, 기원전 300년 경에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 폰토스가 무역거점으로 삼기위해서 이 지역에 진출했다. 그리고 앙카라의 이름의 기원이 된 안키라(Áγκυρα, 그리스어로 닻)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 후 기원전 232년경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라틴어 Tectosages)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들에 대한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 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192년 처음 기록이 남아있는 안키라 교회를 사도 바울로가 세웠다는 증거는 없고 그가 갈라티아 북부에 다녀갔다는 증거도 없다. 단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갈라디아교회와 사도 바울로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 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1073년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툴루즈의 레이몽 4세가 1101년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비잔틴 제국은 앙카라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어 그 후 셀주크 튀르크와 다른 경쟁 세력들은 앙카라를 두고 서로 싸웠다. 13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인 오르한 1세가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원정 때 앙카라를 포위 공격해 1402년 빼앗았다. 그러나 1403년에 앙카라는 다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돌아와서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의 종반 무렵, 현재의 터키 지방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터키 민족주의 지도자 케말 파샤(후의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의 저항운동 본부를 1919년 앙카라에 세웠다(터키 독립전쟁 참조).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앙카라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터키의 수도로 정해졌다. 앙카라가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된 이후, 구시가지는 울루스(Ulus)로, 신시가지는 예니셰히르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시대, 비잔틴시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유적들과 오래된 시장, 옛 관공서 등은 울루스에, 대로, 신식 호텔, 극장, 쇼핑몰, 신식 관공서, 대사관 등은 크즐라이(Kızılay)를 중심으로 하는 신시가지에 위치하게 됐다. 그 이후,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24년에는 앙카라의 인구는 3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286,781명이 사는 도시가 되었고, 2014년에는 5,150,072명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가 되었고, 현재 터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됐다. 2015년 10월 10일 현지시각 오전 10시 4분에(EEST) 앙카라 중앙역 앞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102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이 테러는 터키 공화국의 역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테러였다. 앙카라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즉 내륙에 위치하다보니 대륙성 기후를 띈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가,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주로 가을과 봄에 비가 내린다. 앙카라는 고지대에 위치하다보니 여름에는 낮에 덥고 건조하지만, 밤에는 시원하다. 연간 강수량은 402mm 이고 1월 평균기온은 0.4°C, 7월 평균기온은 23.6°C이다. 앙카라 광역권 위성사진 1923년 터키의 수도가 될 당시 앙카라는 원래 인구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로 계획이 되었다. 1927년 앙카라의 인구는 75,000명에 불과했지만,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하였다. 2013년에는 5,045,083명(남자 2,507,525명, 여자 2,537,558명)으로 집계되었다. 카바클르데르에 위치한 터키 은행감독청(BDDK) 빌딩 앙카라는 중요한 상업·공업도시이며 주변의 농업 지대에게는 중요한 시장이다. 역사적으로 앙고라 염소털로 만든 모헤어, 앙고라 토끼 털로 만든 앙고라 울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 발달했었다. 또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특히, 카바클데레 와인(Kavaklıdere wine)이 유명하다. 공업에서는 TAI(Turkish Aerospace Industries), MKE, 아셀산(ASELSAN), 하벨산(Havelsan), 로켓산(Roketsan), 누롤 마키나(Nurol Makina) 등의 항공산업 및 방위산업 관련 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하여있다. 이들 업체의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또한, 독일의 버스, 트럭 제조 회사인 MAN SE의 공장도 위치하여있다. 또한, 앙카라에 위치한 앙카라 대학교, 중동공과 대학교, 빌켄트 대학교 등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꾸준히 산업에 투입되고 있다. 전경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장은 울루스에 위치한 츠크르크츠라르 요쿠수( Çıkrıkçılar Yokuşu )로 주로 양탄자, 가죽 제품 등을 판매한다. 바클크라르 시장(Bakırcılar Çarşısı)은 장식품, 카펫, 골동품 등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앙카라성 근처에도 향신료,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다. 또한, 스히예 광장 주변에는 매일 전통시장이 열린다. 현대적인 쇼핑몰은 크즐라이나 찬카야의 투나르 힐미 에비뉴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크즐라이역 주변에는 크즐라이 쇼핑몰이 있는데 푸드코드, 스타벅스, 옷가게가 입점해있다. 아트리움 몰(Atrium Mall) 옆에 바로 옆에 있는 아타쿨레 타워의 꼭대기 층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AŞTİ역 주변에는 아르마다 쇼핑 몰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케치외렌의 에트릭 지역에 대형 슈퍼마켓, 오락실, H&M 등이 입점해있는 안타레스 쇼핑몰이 위치하고 있다. 아르마다, CEPA, 켄트파크 쇼핑 몰이 고속도로 변에 있고, 갈레리아, 알자디움, 골디온이 위밋쾨이에 위치한다. H&M, ZARA 등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앙카몰은 앙카라에서 가장 큰 쇼핑몰로 아크쾨프뤼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앙카라는 정치적으로 이슬람주의 보수당인 정의개발당(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 케말주의 중도좌파인 공화인민당(CHP, Cumhuriyet Halk Partisi) 민족주의 극우인 민족주의자운동당(MHP, Milliyetçi Hareket Partisi)가 의석을 나누어 갖고 있다. 선거구 수는 25개이다. 2014년 선거 결과 공화인민당은 2개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나, 앙카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찬카야(Çankaya)에 의석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은 2개의 의석을 갖고 있다. 전반적으로 정의개발당이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앙카라는 이즈미르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 때 앙카라에서도 이스탄불, 이즈미르 못지 않은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고, 다수의 사상자도 있었다. 메리흐 괵첵(Melih Gökçek)이 1994년부터 현재까지 앙카라의 시장으로 재임 중이며, 터키 복지당(RP, Refah Partisi)에서 선행당(FP, Fazilet Partisi)으로 그리고 정의개발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메리흐 괵첵은 1994년 선거를 시작으로 1999년, 2004년, 2009년까지 당선되었으며, 2014년 선거에서도 당선되면서 5선 시장이 되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에서 2009년 보수 정치인인 만수르 야바쉬(Mansur Yavaş)를 내세웠으나 낙선했다. 메리흐 괵첵은 2009년 선거에서 1% 차이로 승리했으며, 만수르 야바쉬는 이를 조직적인 부정 선거라고 주장했다. 만수르 야바쉬는 터키 최고선거관리위원회에 제소했으나 기각당했고, 그 후에 유럽 인권 재판소에 이를 다시 재소했다. 메리흐 괵첵이 5번이나 당선됐지만, 2009년 선거는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부정선거로 인식하고 있다. 겐츨릭 공원(Gençlik Parkı) 독립전쟁 박물관(Kurtuluş Savaşı Müzesi)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Anadolu Medeniyetleri Müzesi) 아느트카비르(Anıtkabir) 앙카라 성(Ankara Kalesi) 코자테페 모스크(Kocatepe Mosque) Gençlik Parkı.JPG|겐츨릭 공원 of Independence Museum.jpg|독립전쟁 박물관 of Anatolian Civilizations 1320588 nevit.jpg|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Ankara.jpg|아느트카비르 Castle.jpg|앙카라 성 모스크 크즐라이의 역(앙카라 지하철 M2)에서 찍은 앙카라 지하철 앙카라 지하철과 대부분의 버스는 EGO(The Electricity, Gas, Bus General Directorate)에서 운영한다. 대다수의 버스는 교통카드만을 이용해서 사용이 가능하지만, 일부 개인이 운영하는 버스에서는 현금으로만 탑승이 가능하다. 현재 앙카라에는 경전철인 앙카라이(Ankaray, A1)와 M1, M2, M3까지 3개의 지하철이 운행중이며, M4가 건설중이다. 또한, 쉔테페와 예니마할레역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도 운행 중이다. 앙카라 중앙역(Ankara Railway Station)은 터키 철도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터키 국영철도에서 앙카라에서 이스탄불, 에스키쉐히르, 시바스 등 전국 각지로 여객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신잔역(Sincan)에서부터 카야쉬역(Kayaş)까지 광역철도도 운행중이다. 2009년 3월 13일에 앙카라와 에스키쉐히르를 잇는, 2011년 8월 23일에는 앙카라와 코냐간, 2014년 7월 25일에는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3시간 30분만에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YHT(Yüksek Hızlı Tren)가 각각 개통되었다. 앙카라는 또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기에 버스 교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스 터미널인 AŞTİ(Ankara Şehirlerarası Terminal İşletmesi)는 거의 모든 노선을 갖추고 있다. 앙카라의 공항은 시 북서쪽에 위치한 에센보아 국제공항이 있다.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나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 비해 노선수가 적지만 터키 국내선과 프랑크푸르트, 모스크바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다. Arena Genel Görünüm.JPG|섬네일|앙카라 아레나 터키의 타지역처럼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1923년 창단된 겐츨레르비를리이 SK가 앙카라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으로 쉬페르리그에서 활동중이다. 겐츨레르비를리이 SK는 1987년과 2001년에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또한, 1910년 창단된 MKE 앙카라귀쥐는 가장 오래된 축구팀이지만 현재는 TTF 2. 리그에 소속되어있다. MKE 앙카라귀쥐는 1972년과 1981년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겐츨레르비르 B팀과 하제테페 SK도 쉬페르 리그에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 위의 모든 팀들은 앙카라 19 마으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한다. 또한 오스만스포르도 앙카라를 홈으로 하는 팀으로 2010년까지 쉬페르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다. 홈 구장은 예니켄트 아사쉬 스타디움으로 신잔에 위치한다. 또한, 신잔을 홈으로 하는 부그사쉬스포르, 에티메스구트를 홈으로 하는 에티메스구트 쉐케르스포르, 예니마할레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스포르, 찬카야를 홈으로 하는 앙카라 데미르스포르, 케치외렌의 케치외렌귀쥐, 케치외렌스포르, 푸르사클라르스포르, 바룸스포르, 알튼닥을 홈으로 하는 페트롤 오피시 스포르 같은 군소 팀들도 존재한다. 또한, 농구 역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앙카라에는 앙카라 아레나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과 TOBB 스포츠 홀을 홈으로 하는 카사 테드 콜레즈리레르 두 개의 농구팀이 있다. 배구에서는 할크뱅크 앙카라가 통산 6회 터키 남자 배구 리그(Türkiye 1. Voleybol Ligi)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 아이스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 경기도 앙카라 버즈 파테니 사라이(Ankara Buz Pateni Sarayı)에서 열린다. 1980년대 이후로는 스케이트 보드장도 많이 만들어졌다. 2012년 완공된 THF 스포츠 홀에서는 터키 핸드볼 쉬페르 리그(Türkiye Hentbol Süper Ligi)와 여자 핸드볼 리그(Türkiye Kadınlar Hentbol Süper Ligi)가 개최된다. 앙카라는 이스탄불과 더불어 대학교가 모여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앙카라 대학교 *바쉬켄트 대학교 *TED 대학교 *알튼 코자 대학교 *알트름 대학교 *터키 항공대학교 *빌켄트 대학교 *찬카야 대학교 *가지 대학교 *하제테페 대학교 *중동 공과대학교 *TOBB 경제 기술 대학교 *투르구트 외잘 대학교 *우푸크 대학교 *을드름 베야즈트 대학교 *귈하네 군사의학원 *터키 군사 학교 *터키 국립 경찰 학교 University of Economics & Technology.jpg|TOBB 경제 기술 대학교 ve Tarih Coğrafya Fakültesi Binası, Ankara.jpg|앙카라 대학교 역사지리대학 대학교 로스쿨 of the 중동 공과대학교 campus, as seen from its MM Building big.jpg|중동 공과대학교 강의실 내부 University Turquoise campus.JPG|찬카야 대학교 앙카라에는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울루스에 위치한 겐츨릭 공원(Gençlik Parkı)에는 놀이공원과 호수가 있어서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크즐라이에 위치한 귀벤 공원(Güven Park)에는 시미트와 꽃을 파는 행상들이 많이 있으며,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있다. 카바크르레데에 위치한 쿨루 공원(Kuğulu Park)에는 중국 정부에서 선물받은 백조와 흑조, 오리 등이 살고 있다. 알튼 공원(Altın Park)는 넓은 공원과 호수가 있으며, 배를 탈 수 있다. 앙카라 외곽지역인 에르야만에는 야경과 호수가 아름다운 괵수 공원(Göksu Park)가 있다. 또한, 앙카라 아레나 주변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터키 군인을 기리기 위한 한국 공원(Kore Bahçesi)이 있다. 겐츨릭 공원은 1952년부터 1976년까지 100 터키 리라의 뒷면에 그려져있었다. 또한, 시내에 아타튀르크 오르만 치프트리이(Atatürk Orman Çiftliği)라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농장일을하던 농원이 있는데, 이 곳에는 동물원과 농장, 레스토랑 등이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생가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은 집도 있다. 농장인 치프트릭(Çiftlik)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농장에서 생산되는 치즈, 전통 맥주, 아이스크림 등을 맛 볼수 있으며,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다. Park 2012 01.JPG|겐츨릭 공원 Kızılay square 02.jpg|귀벤 공원 아타튀르크 동상 by night 2013.jpg|괵수 공원 공원 Park in Kavaklıdere.jpg|쿨루 공원 공원 Angora in Ankara Zoo (AOÇ).JPG|섬네일|2012년 1월 앙카라 동물원의 앙고라 고양이 앙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양이 품종인 터키시 앙고라(Ankara kedisi)가 살던 지방이다. 터키시 앙고라는 주로 희고, 부드러운 긴 털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품종 개량을 통해 검은털이나 붉은털을 가진 터키시 앙고라도 많다. 터키시 앙고라는 페르시안 고양이나 터키시 밴과도 가까운 품종이다. 눈은 파랑색, 녹색, 황색인 경우도 있지만 간혹가다 한쪽 눈과 다른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도 있다. 귀는 크고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생겼다. Giant Angora Buck.jpg|섬네일|upright|앙고라 토끼 앙고라 토끼(Ankara tavşanı)는 앙카라 주변에 살던 길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이다. 앙고라 토끼는 가장 오래된 가축용 토끼 중에 하나인데, 중세시대에 프랑스 왕실의 애완용 토끼로 유명하다. 미국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앙고라 토끼는 털인 앙고라 울로 유명한데, 앙고라 울은 희고 길며 가벼워서 의복 재료에 많이 쓰인다. 앙고라 토끼를 사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앙고라 울을 얻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앙고라 토끼는 온순하지만, 주의 깊게 다뤄주어야 한다. 여름에는 털을 짧게 깎기도 하는데, 긴 털 때문에 여름에 열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타워 view of the BDDK building, Atatürk Avenue in Ankara.jpg|터키 은행감독청 lake style.JPG|에센보아 국제공항 Ulus.05.2006 resize.JPG|앙카라 팔라스 호텔 ve Heykel Müzesi Ankara.jpg|국립 미술 조각 박물관 입구 Bankası 5.JPG|지라트 뱅크 건물 파크에서 바라본 앙카라 Blu Hotel.JPG|라디슨 블루 호텔 Armada Alışveriş Merkezi.JPG|아르마다 타워와 호텔 üst kattan.JPG|아쉬티(버스 터미널) Flower street skyscraper Ankara.jpg|포르타칼 치체이 레지던스 모습 동아시아 서울 , 대한민국 베이징 , 중화인민공화국 동남아시아 방콕 , 태국 하노이 , 베트남 쿠알라룸푸르 , 말레이시아 중앙아시아 아시가바트 , 투르크메니스탄 아스타나 , 카자흐스탄 비슈케크 , 키르기스스탄 두샨베 , 타지키스탄 유럽 부쿠레슈티 , 루마니아 키예프 , 우크라이나 런던 , 영국 모스크바 , 러시아 우파 , 러시아 민스크 , 벨라루스 소피아 , 불가리아 키시너우 , 몰도바 스코페 , 마케도니아 공화국 프리슈티나 , 코소보 사라예보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티라나 , 알바니아 서남아시아 바쿠 , 아제르바이잔 쿠웨이트 시 , 쿠웨이트 이슬라마바드 , 파키스탄 마나마 , 바레인 니코시아 , 북키프로스 트빌리시 , 조지아 아메리카 산티아고 , 칠레 산토도밍고 , 도미니카 공화국 워싱턴 D.C , 미국 분류:아시아에 위치한 수도 분류:터키의 도시 분류:갈라티아 분류:프리기아
가속도 (加速度 )는 시간에 따라 속도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일반적으로 물체는 속력이나 운동방향이 바뀌면서 속도가 변하는데, 이와 같이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할 때 가속도가 있다고 한다. 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량으로 나타낸다. SI 단위로는 m/s2를 사용하며, 주로 a 라는 문자를 사용하여 가속도를 표기한다. 고전 물리학에서, 일정한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체는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해 다음 식을 만족하게 된다. 여기서 F 는 물체에 주어지는 힘을, m 은 물체의 질량을, a 는 물체의 가속도를 나타낸다. 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시간간격 동안 속도가 변한 정도 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를 평균가속도 라 한다. 어떠한 순간의 가속도는 이 시간간격을 0으로 보내는 극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하는 가속도를 순간가속도 라 한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는 어느 순간의 속도를 시간으로 미분한 것으로도 정의된다. 등속운동 은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에 비례한다. 이에 반하여 속도 혹은 속력이 시간에 따라 일정하게 증가하는 등가속운동 에서는 변위(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가속운동 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증가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때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또는 등가속운동이라 한다. 등가속운동 또는 등가속도운동 은 속도의 시간에 따른 변화 즉 가속도가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에 비례하지만 등가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뉴턴역학에서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므로, 힘과 질량이 일정하다면 물체는 가속도가 일정한 등가속운동을 한다. 지구 표면에서 물체는 일정한 가속도로 운동하며 이를 지구의 중력가속도라고 한다. 감속운동 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감소하는 운동을 말한다.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혹은 등가속운동 이라고 하는데,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감속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등감속운동 의 용어는 사용하지는 않고 음(−)의 등가속운동 으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변위 속도 가가속도 가가가속도 각가속도 중력 가속도
속도 (速度는 어떠한 물체의 위치 변화를 뜻하는 변위를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변위는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이기 때문에 속도 역시 벡터이다. 단위 시간당 변위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 국제단위계에서는 미터 매 초(m/s, 초속 미터)를 사용하며, 일상에서는 킬로미터 매 시간(km/h, 시속 킬로미터)도 자주 쓰인다. 기호로는 주로 v 를 사용한다. 속도란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므로, 시간간격 동안 위치가 변한 정도 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속도를 평균속도 라고 한다. 평균속도 는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속도는 물체가 갖는 어떠한 순간의 속도, 즉 순간속도 이다. 순간속도는 평균속도를 측정하는 시간간격을 매우 짧게 하여 0에 접근시킨 극한값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순간속도를 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와 같이 순간속도는 변위를 시간에 대하여 미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속도라고 할 때는 순간속도를 의미한다. 자동차가 커브를 돌며 움직일 때 변위와 경로의 전체 거리 사이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속도가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량인 반면, 속력은 크기만을 갖는 스칼라량이다. 속력은 물체가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에 대하여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50초 동안 앞으로 30m 전진한 다음 80m를 후진하였다고 하자. 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양으로 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음으로 나타내면 변위는 가 되지만,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는 가 된다. 따라서 이 자동차의 평균속도와 평균 속력은 다음과 같이 계산 할 수 있다. :평균 속도 :평균 속력 순간속도는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 변화가 0에 접근하기 때문에 변위와 전체 경로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순간속도를 나타내는 벡터의 크기는 순간속력과 같다. 그러나 보다 큰 시간 간격을 고려하는 평균속도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평균속력과 다르다. 상대속도는 한 좌표계 안의 두 물체의 속도를 비교한 것이다. 두 물체 A, B의 속도를 각각 , 라고 하면, 고전물리학에서는 A에 대한 B의 상대 속도를 다음과 같이 계산 한다. :A에 대한 B의 상대속도 예를 들어 두 자동차 A, B가 직선 상에서 마주 보며 달리고 있을 때 A의 속도가 3m/s 이고 B의 속도가 -5m/s 라면 A에 대한 B의 상대속도는 -8m/s 이고 B에 대한 A의 상대속도는 8m/s 가 된다. 일차원 운동만을 고려한다면 상대속도는 스칼라값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물체의 속도가 매우 빠를 때 상대속도가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관성계가 다르더라도 빛의 속도는 일정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두 물체의 속도 관계는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A에 대한 B의 상대속도 위 식에서 빛의 속도 c는 매우 큰 값이기 때문에 A와 B의 속도가 충분히 느릴 경우 는 0에 접근하게 되고 그 결과 상대속도는 고전물리학의 계산과 같아지게 된다. 미터 매 초 킬로미터 매 시간 변위 가속도 가가속도 가가가속도 내용주 참조주 분류:물리량
운동량 (運動量은 물리학 특히, 뉴턴 역학에서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운동량의 국제 단위는 뉴턴 초 (N · s) 또는 킬로그램 미터 매 초 (kg · m/s)이고, 통상적인 기호는 라틴 소문자 p 이다. 선형 운동량 () 혹은 병진 운동량 ()이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어 빠르게 움직이는 무거운 트럭 같은 물체는 운동량이 크다. 무거운 트럭을 빠른 속도까지 가속시키기 위해서는 큰 힘을 한참 동안 가해야 하고, 반대로 그 트럭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도 큰 힘을 오랫동안 가해야 한다. 트럭이 더 가볍다거나 더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만큼 운동량도 작아질 것이다. 선형 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에 의한 영향이 없는 닫힌계의 선형 운동량의 총합은 바뀌지 않는다. 고전역학에서는 선형 운동량 보존법칙이 뉴턴의 운동 법칙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공식을 약간 수정한 형태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일반화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은 적절한 정의를 이용하면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장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존 법칙이다. 고전역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갖는 벡터다. 즉, 운동량을 p , 질량을 m , 속도를 v 라고 하면, 운동량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계에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계의 총 운동량은 바뀌지 않는다. 두 물체가 충돌할 때도, 두 물체의 운동량의 합은 일정하다. 즉, 두 물체의 질량을 , , 충돌 전의 속도를 , , 충돌 후의 속도를 , 라고 하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이 때 를 반발 계수 라고 부르고, 0 이상 1 이하의 값을 가진다. 만약 e = 1인 경우의 충돌은 탄성 충돌이라고 부르고, 이 때에는 운동 에너지 보존 법칙, 즉 이 성립한다. 1차원 공간의 탄성 충돌에서, 두 물체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 반면, e 2. 상대론적 3차원 운동량은 정지 질량 과 로런츠 인자 , 속도 의 곱이다. 즉, p m 0 u . 여기서 는 신속도이다. 광자등과 같이 정지 질량이 0인 입자도 운동량을 가진다. 정지 질량이 0인 입자의 경우, 에너지 와 운동량 는 서로 비례한다. 즉 :. 양자역학에서, 운동량은 파동함수에 대한 연산자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입자의 운동량은 (입자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는 한)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정성을 갖는다. 전하와 스핀이 없는 입자의 운동량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기울기 연산자이다. 는 디랙 상수이다. 은 허수 단위이다 각운동량 분류:물리량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역학 분류:운동 (물리학) 분류:보존 법칙
도모나가 신이치로 (, 1906년 3월 31일 ~ 1979년 7월 8일)는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공로로 1965년 리처드 파인먼과 줄리언 슈윙거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06년 그는 도쿄도에서 도모나가 산주로(朝永三十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병약하였으며 1913년 부친이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교토로 이사갔다. 1937부터 1939년까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래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등에서 연구하였다.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이다. 유카와 히데키와는 제삼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동창으로, 평생의 동료이자 라이벌로 지냈다. 권위적인 유카와 히데키와 달리 도모나가는 소탈한 성품이었으며, 유카와는 직관을 중시함에 비해 도모나가는 논리적인 전개를 선호했다. 학창시절에는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성적이 더 좋았으나, 정작 노벨물리학상을 유카와 히데키가 먼저 받게 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어판 노벨상 전기 양자역학적 세계상 분류:1906년 태어남 분류:1979년 죽음 분류:일본의 물리학자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분류: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교토 대학 동문 분류:도쿄도 출신 분류:교토부 출신 분류:이화학연구소 사람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도쿄 교육대학 교수 분류:교토시 출신 분류:도쿄도 구부 출신
유카와 히데키 (, 1907년 1월 23일 ~ 1981년 9월 8일)는 일본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교토부 교토시 출신이다. 원자핵 내부에 있어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매개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1947년, 영국의 물리학자 세실 프랭크 파월이 우주선 중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 ‘유카와 이론’이 증명돼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반핵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플랑크와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렸고 중간자 이론 외에 비국소장이론, 소영역이론 등의 이론을 계속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창이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고 도모나가와 마찬가지로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고 전해진다. 교토 대학·오사카 대학 명예교수, 교토시 명예시민이었다. 1943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학위는 이학박사이다. 1907년 1월 23일, 도쿄부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이베이정(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에서 부친이자 지질학자인 오가와 다쿠지와 모친인 오가와 고유키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1살 때 부친인 다쿠지(와카야마현 출신)의 교토 제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것에 따라 가족 모두가 교토부 교토시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아자부의 집에서는 출생 후 1년 2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1살 때부터 대학까지는 교토에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잠깐 동안 오사카나 니시노미야에 있었던 적이 있으나 인생의 대부분을 교토에서 생활했다(그러나 노벨상 수상의 대상이 됐던 중간자론을 발표한 것은 유카와가 오사카 제국대학에 근무했던 때였으며 당시에는 니시노미야의 구라쿠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나의 기억은 교토로 이사왔던 때부터 시작된다. 역시 교토가 고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 외가쪽은 유카와의 외할아버지인 오가와 고마키쓰는 예전 기슈 번의 번사였으며, 또한 유카와가 자체가 선조 대대로 와카야마현 출신이었기 때문에 “와카야마 출신”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지만 유카와 본인에 의하면 교토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의 실업가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고향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출생지’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카와의 필체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유카와 본인은 와카야마에서 살았던 경험은 없다. 5, 6세 때 외할아버지인 고마키쓰에 의해서 한문 서적을 읽고 배웠다. 고마키쓰는 한학에 대한 소양이 풍부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서양학문을 배워 말년까지 계속해서 런던 타임스를 구독하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해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고쿠 보통소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교토부립 교토 제1 중학교(현 교토부립 라쿠호쿠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의 유카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는데 별명은 ‘곤베에’()였다. 또한 사춘기 때부터는 거의 말을 안들었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말 안하겠다’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등 ‘이왕 짱’()이라고 불렸지만 의외로 《바보 이반》에서 따온 별명 같다고 유카와가 스스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 말수가 적을 정도의 과묵한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다쿠지로부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홀대를 받았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낮다고 보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문학교에라도 보낼까’라고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교토 제1 중학교의 동기로는 학자가 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고 후에 학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똑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교토 제1 중학교의 1년 선배이며 제3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기였다. 1929년에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의 조수가 됐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일본 수학물리학회 연회가 열렸을 때 야기 히데쓰구와 알게됐는데 당시 오사카 제국대학의 이학부 물리학과(는 시오미 이화학 연구소)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한 야기에게 부탁해서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게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작고 강의는 꽤 난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즈음에 오사카 위장 병원(1950년에 유카와 위장 병원이라고 개칭)의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와 결혼해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가 됐다. 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 전혀 성과가 없던 유카와를 야기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주의를 준 뒤 “본래라면 도모나가를 오게 했을텐데 너의 형으로부터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채용했으니까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질책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의하면 야기는 비수같은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 1934년에 중간자 이론 구상을 했고 이듬해 1935년에는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중간자(현재의 파이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했다. 중일 전쟁 격화에 따른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던 일본인 과학자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진 않았지만 유카와는 1939년 솔베이 회의에 초청됐다. 회의 자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됐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과 친분을 가졌다. 이러한 업적에 높은 평가를 받아서 1940년에 학사원 은사상을 수상했고 1943년에는 최연소로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6월에는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한 원폭 개발 프로젝트(F연구) 회의에 초청됐으나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에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유카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전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이러한 배경을 기록한 일기가 2017년 12월 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 자료실에 공개된 바있다. 더 나아가 1947년에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실제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서 194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인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작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뒤를 이은 세 번째의 수상자였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이 뉴스는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에게 큰 힘을 주었다. 2000년에 유카와의 노벨상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후에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지만 이론적 성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한편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서는 “전하가 이나 같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또 한편으로는 반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 등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중에는 아라카쓰 분사쿠가 이끄는 교토 대학 그룹에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부인 유카와 스미와 함께(1954년) 1956년에 원자력 위원장인 쇼리키 마쓰타로의 요청으로 위원이 됐다. 그러나 유카와는 ‘원자로를 외국에서 구입해 오더라도 5년째까지는 실용적인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쇼리키의 지론에 대해 “기초 연구를 생략한 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서두르는 것은 장래에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며 거세게 반발, 하루 만에 그만두려고 했으나 모리 가즈히사 등이 만류해서 사임을 철회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대립은 깊어졌고 결국엔 건강상의 이유로 이듬해인 1957년에 재임 1년 3개월 만에 사임했다. 1956년 1월에 궁중에서 열린 가회시에 초대받았던 유카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1970년에 교토 대학을 정년 퇴임해 교토 대학의 명예교수가 됐으며 말년에는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특히 생명 현상에 있어서 정보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에도 시대 후기의 사상가인 미우라 바이엔의 심취에 깊이 빠졌다. 휘호를 부탁받으면 자주 ‘지어락’(, ちぎょらく)이라고 썼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라’()는 장자의 ‘추수’(秋水)의 마지막 한 구절이다. 1966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돼 있었다는 것이 노벨 재단이 공표한 후보자 명단에 의해 판명됐다. 교토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인 1975년에 전립선암이 발병돼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의해서 암의 진행은 막았지만 그 이후에는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하면서 학술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양국의 긴장 격화로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의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1981년 6월, 15년 만에 회의 개최가 성사됐다. 이 때 이미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서 회의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 참석해 핵폐기를 호소했다. 3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폐렴에 심부전 합병증으로 교토시 사쿄구의 자택에서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소재한 지온인에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와카바 상의 대좌에 유카와에 의한 단가로서의 명문인 ‘원자폭탄이여 다시 여기에 오지 말지어다.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만이다 여기는’()이라고 새겨져 있다. 4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힘, 약한 힘) 가운데 강한 힘을 어떻게 정식화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당시로서는 문제가 됐고 여러가지 시도가 이뤄졌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유카와는 전자의 200배의 질량을 갖는 중간자를 힘의 매개 입자(보스 입자)를 가정해서 핵력인 강한 힘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강한 힘으로부터 페르미의 약한 힘을 이끌었다. 중간자론은 약한 힘, 강한 힘,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이론으로서 당시에는 가장 기본적인 장의 이론인 것으로 간주됐다. 또한 힘을 입자가 매개하는 것도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을 정착시켰다. 단, 전자가 강한 힘을 전달한다는 생각을 하이젠베르크가 유카와 이전에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이전부터 존재가 알려지면서 이론으로서도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은 확립돼 있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나 보어는 관찰되지 않은 소립자로 장을 설명하는 유카와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보어는 유카와에게, 하이젠베르크는 도모나가에게 이것을 알리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유카와의 강한 힘을 낳는 중간자론은 소립자론의 길을 열었다고 당시에는 높이 평가했다. 유카와는 강한 힘의 중간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후의 일을 장의 양자론에서 스스로 찾아낸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다. 초다시간이론과 비국소장 - 유카와의 원 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에서의 확률 진폭을 정의하면 인과율이 파괴된다는 문제를 유카와가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생애를 걸었다(이 문제를 ‘유카와의 원()’이라고 말한다. 유카와가 이 문제를 제기한 후 폴 디랙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유카와가 주장했던 인과율의 문제를 공간적인 것으로 제한해서 인과율을 회피하여 유카와의 생각을 되살린 것이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초다시간 이론이다. 이것에 의해 장의 양자론은 상대론적으로 공변한 형태로 고쳐 쓸 수 있었다. 유카와는 이 문제를 비국소장으로서 취급했지만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도모나가의 기여는 있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주장하고 있다. 물리학은 유카와의 기본 문제를 회피하여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한다. :유카와 이전에는 일정한 시간으로 확률 진폭이 정의돼 있었다. 유카와 히데키(1951년) 이하는 일본 국내에서의 저명한 인물을 둔다. 오카 기요시 다변수복소함수론의 창시자로, 범주론의 바탕으로 되는 개념을 주장했다. 유카와나 도모나가는 수업을 듣고 매우 자극적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문제는 조건을 붙이지 않고 단번에 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소립자 관계의 동기, 제자 도모나가 신이치로 교토 제국대학 동기이다. 서로 자극을 받아 연구면에서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정도의 라이벌이었다. 그의 업적은 초다시간론, 재규격화 등 다방면에 걸친다. 강한 힘(중간자)의 현상론적인 식을 유카와에게 말했다. 고바야시 미노루 유카와의 중간자론 건설에 협력했다. 유카와 기념관, 기초 물리학 연구소의 설립, 영문 논문지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 창간에 주력했다. 사카타 쇼이치 2중간자론, 무한 발산을 막는 C중간자, 사카타 모델(쿼크의 원형), 2뉴트리노. 다니카와 야스타카 2중간자론의 원안을 제창했다. 다케타니 미쓰오 3단계론에서 방법론을 활용에 대해 논한다. 난부 요이치로가 ‘다케타니 방법론’에 영향을 받아 데이터로부터 모델을 만든다는 방법을 취하는 등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치야마 료유 게이지 이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유카와의 인과율 파괴의 중요성을 주장했던 학자 미야자와 히로나리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했다. 유카와의 인과율 파괴의 문제를 지금의 물리는 방치해 현상론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생물물리·우주물리 데라모토 에이 생물물리, 수리생물학의 개척자. 하야시 주시로 우주 물리학자. 제자의 제자에는 현재 활약하는 수많은 이론물리·물성물리·우주물리·천문·수리생물학자가 포함돼 있다. 유카와의 업적에 연관되어 원자력의 도달 거리의 기준이 되는 1fm = 10m를 ‘1 yukawa’ 라고 부르는 안이 제시됐지만 보급에는 이르지 못했다(펨토미터를 참조). Institute for Theoretical Physics 002.jpg|섬네일|220px|교토 대학 기초 물리학 연구소(유카와 기념관) 앞에 세워진 유카와의 흉상 유카와 히데키가 1949년에 받았던 노벨 물리학상 상장(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에 소장) 아버지 오가와 다쿠지(지질학자·교토 대학 명예교수) 어머니 고유키(와카야마현, 오가와 고마키쓰의 딸) 누이 가요코, 다에코 형 요시키(야금학자·도쿄 대학 교수), 가이즈카 시게키(동양사학자·교토 대학 명예교수, 문화훈장 수상) 동생 다마키(중국 문학자·교토 대학 명예교수), 마스키(제2차 세계 대전에서 종군하던 중에 병으로 사망) 처 스미(와카야마 현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아들 하루미(헤이본샤에서 근무한 뒤 근세연극연구가가 됨, 1933년 4월 8일 ~ ), 다카아키(고단샤에서 재직하던 중에 심장 발작으로 급사, 1934년 9월 29일 ~ 1971년) 먼 친척 다케다 구니오(기업인), 다이아나 유카와(바이올리니스트), 가키자와 고지(정치가), 모리 요시로(정치가, 전 내각총리대신), 미부 신야(배우) 1907년 도쿄시 아자부구(현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지질학자인 오가와 다쿠지와 오가와 고유키의 3남으로 태어남 1908년 가족 모두 교토로 이주 1919년 교고쿠 보통소학교 졸업 1923년 교토부립 교토 제1중학교(현재의 교토부립 라쿠호쿠 고등학교·부속 중학교) 졸업 1926년 제3 고등학교 졸업 1929년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졸업, 같은 대학에서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의 조수가 됨. 1932년 유카와 스미와 결혼, 동시에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가 됐음.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 1933년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 겸임 1934년 중간자 이론 구상을 발표 1935년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 1936년 오사카 제국대학 이학부 조교수 1937년 솔베이 회의에 초청을 받음 1938년 이학박사(오사카 제국대학) 학위 취득, 논문 제목은 《On the interaction of elementary particles》(소립자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1939년 교토 제국대학 교수 1942년 도쿄 제국대학 이학부 교수 1946년 제국 학술원 회원 1948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객원교수 1949년 7월 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로 취임 1950년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1953년 교토 대학 기초 물리학 연구소 초대 소장, 국제이론물리학회·도쿄 & 교토 의장 1955년 일본 유네스코 국내 위원회 위원, 사단법인 일본 물리학회 회장 1956년 원자력 위원회 위원 1957년 3월 29일 원자력 위원직에서 사임(재임 기간은 1년 3개월) 1958년 원자력 위원회에 참여 1970년 교토 대학 정년 퇴임, 동시에 교토 대학 명예교수로 부임 1981년 교토시 사쿄구의 자택에서 사망(향년 74세) 2005년 유네스코가 유카와 히데키 메달을 작성 1940년 은사상 1941년 노마 학술상 1949년 노벨 물리학상 1964년 로모노소프 황금 메달 1943년 문화훈장 1963년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선출 1967년 * 서독 푸르 르 메리트 훈장 * 로마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 훈장 1977년 훈1등 욱일대수장 1981년 종2위 물리 * 물리 사상 * * * 창조론 * * * 자서전 * * * * * , (set) * 남정순 역, 지만지(2010년) 내적 세계 * * * * * * * 에세이 * 남정순 역, 지만지(2010년) * * * * * * * * * 《 》, 소립자론 연구 1985년 70권 5호 p.307-320, 《 》, 소립자론 연구 1999년 99권 3호 p.115-142, 국립 정보학 연구소 수록 논문 - 국립 정보학 연구소 퍼그워시 회의 니시나 요시오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 - 1946년에 유카와 히데키의 요청으로 발간된 이론물리학 학술지 사와노 히사오 - 유카와의 자서전인 《나그네》의 협력자. 그 내용을 둘러싸고 유카와 부부와 대립하였고, 1967년에 모델 소설로 알려진 《산꼭대기의 의자》를 집필하여 유카와를 곤란하게 하였다. 과학계 노벨상 일본인 수상자 9인의 위업 - 유카와 히데키 - 노벨상 100주년 기념전(국립과학박물관) The Nobel Prize in Physics 1949 - Hideki Yukawa - 노벨 재단 홈페이지 - 유카와 히데키와 친분이 있던 마쓰오카 세이고에 의한 회고 교토시 명예시민 유카와 히데키 - 교토시 홈페이지 유카와 히데키 연구 Wiki 교양 특집 유카와 히데키 과학의 미래상 - NHK 명작선 - NHK 아카이브스 분류:1907년 태어남 분류:1981년 죽음 분류:20세기 물리학자 분류:일본의 물리학자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입자물리학자 분류: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분류:문화훈장 수훈자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에든버러 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분류:교토 대학 동문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이화학연구소 사람 분류:교토 대학 교수 분류:도쿄 대학 교수 분류:오사카 대학 교수 분류: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분류:한신칸 모더니즘 분류:교토시 출신 분류:도쿄도 구부 출신
정몽헌 (鄭夢憲, 1948년 9월 14일 ~ 2003년 8월 4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2002년 9월부터 대북 불법송금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도중 2003년 8월 4일 현대계동사옥 12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정몽헌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아버지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현대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는데, 이후 2002년 9월에 5억 달러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2003년에 검찰 조사를 받았고, 추진하던 대북사업의 차질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재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2003년 8월 4일, 서울시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으나 타살 의혹이 있다. 재계 인사들은 부친의 숙원 사업이었던 대북 사업 등 가업을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동기 로 추측했다. 정몽헌의 사망 후 부인 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보성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페어레이디킨슨대학교 경영대학원 DBA 1975년 11월 ~ 1977년 1월 현대중공업 차장 1977년 2월~1981년 현대건설 이사 1981년 2월~1988년 2월 현대상선 대표이사 사장 1984년 ~ 1991년 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 사장 1992년 1월 ~ 2000년 5월 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회장 1996년 현대그룹 부회장,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현대상선 대표이사 회장 1998년 현대그룹 공동 회장 1998년~2000년 현대 경영자협의회 공동 의장 (그룹 회장) 2000년 3월 현대 경영자협의회 의장 2000년 6월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2002년 3월 현대상선 비상임이사 1986년 철탑산업훈장 1995년 무역의 날 금탑 산업 훈장, 신산업 경영원 올해의 정보통신인상 1998년 한국협상학회 제3회 한국협상대상 2004년 제2회 통일문화대상 할아버지 정봉식 할머니 한성실 * 아버지 정주영 (1915 ~ 2001) * 어머니 변중석 (1921 ~ 2007) ** 형 정몽필 (1934 ~ 1982) ** 형 정몽구 (1938 ~ ) ** 형 정몽근 (1942 ~ ) ** 누나 정경희 (1944 ~ ) ** 형 정몽우 (1945 ~ 1990) ** 배우자 현정은 (1955 ~ ) *** 장녀 정지이 (1977 ~ ) *** 사위 신두식 (1974 ~ ) **** 외손녀 신혜윤 (2013 ~ ) *** 차녀 정영이 (1984 ~ ) *** 장남 정영선 (1985 ~ ) ** 동생 정몽준 (1951 ~ ) ** 동생 정몽윤 (1955 ~ ) ** 동생 정몽일 (1959 ~ ) ***여동생 그레이스 정 (1980 ~ ) ***여동생 엘리자베스 정 (1982 ~ ) 정몽헌 분류:1948년 태어남 분류:2003년 죽음 분류:하동 정씨 분류:현대가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 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 분류: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분류:자살한 기업인 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사람 분류:투신자살한 사람
한국 (韓國), 조선 (朝鮮), 또는 코리아 (Korea)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지역 또는 헌법상의 국가로, 현대사에서는 한반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근현대사에서 한국은 고종이 수립한 대한제국을 일컫는 말이었다. 넓은 의미로 한국은 고조선 이후 한반도에서 설립된 여러 한민족의 국가를 통칭하는 말이다. 한국의 역사를 한국사라고 한다. 한국의 강역은 현재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본래 한민족의 영역은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하였다. 다만 만주와 연해주는 한민족과 숙신, 말갈이 혼거하였으며, 한민족의 왕조들이 통치하였다. 12세기 초 발해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만주 일대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19세기 ~ 20세기 초에 많은 한국인들이 간도 등 만주,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48년 이후로 년 오늘날까지 한국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있다. 다만 헌법상 양측은 한나라로 여기고 있다.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면적은 약 22만 km²이며, 인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합쳐 2017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약 7천700만 명이다. 한국(韓國)이라는 말은 마한, 진한, 변한을 통칭하는 삼한(三韓)에서 비롯된 말이다. 한국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이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국호를 정할 때, 마한, 진한, 변한의 3한을 통합하여 대한 이라고 부르고, 중국의 속국이 아닌 황제의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제국(帝國)이라는 말을 붙여 대한제국 으로 정하였다. 당시 한국이라는 말은 대한제국의 약자였다. 이후 대한제국을 계승하여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국은 대한민국의 약자로 사용되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구별하기 위해, 대한제국은 구한국(舊韓國)이라고 부르고, 대한민국은 신한국(新韓國)으로 부른다.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 나라들(중국, 일본, 타이완, 베트남)에서는 한국을 기원전의 고조선과 1392년에 세워진 조선에서 나온 조선 (朝鮮)이라 부르며, 한반도는 조선반도 (朝鮮半島)라고 한다. 한국 은 한반도와 부속지역이자 남북한을 말한다. 한자 문화권 외의 국가들은 한국을 코리아(Korea), 꼬레아(Corea, Corée 계열) 등으로 고려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름은 한국의 고구려의 장수왕이 정한 국호인 고려 (高麗)에서 나온 것으로, 이미 기원전 1세기 이전부터 고려 라는 말이 쓰였다. 10세기(918년)에 왕건이 국호를 고려 로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이름이 아랍 상인들과 원나라를 통해 전해진 이후 한자 문화권 외의 국가들은 한국을 고려 로 칭하게 되었다. 한국 (韓國) - 대한민국, 중국, 일본, 타이완, 베트남에서 주로 씀. 고려 (高麗) - 유럽, 아메리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구소련 지역에서 주로 씀. 조선 (朝鮮)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일본, 타이완, 베트남 에서 주로 씀. 이밖에 한민족을 이르는 말로 근역 (槿域, 무궁화의 땅)과 중국의 입장에서 동쪽에 있다 고 하여 쓰인 동국(東國), 해동(海東), 동이(東夷), 청구(靑丘, 푸른 언덕), 진단 (震檀/壇) 등이 있다. 몽골어와 부랴트어는 한국을 설렁거스(Solongos, 무지개의 땅)라고 하며, 한국인을 사돈 이라고 부른다. 한(韓)의 어원으로 한(干)ㆍ한(汗)ㆍ한(翰) 등과 관련이 있으며, 고대의 군장(君長)을 이르던 말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일부 비주류 역사학자들은 한(韓)이라는 글자에 민족적·종교적인 어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Mountain Tianchi.jpg|섬네일|300px|left|백두산은 흔히 한민족과 만주족의 영산으로 말한다. 한국인의 뿌리 이루는 종족은 한(韓), 예(濊), 맥(貊)이다. 이들에 의해 고조선, 북부여(扶餘), 진국(辰國, 삼한 성립 이전)과 같은 초기 국가들이 생겨났다. 기원전 15세기 - 기원전 11세기쯤에는 청동기 문화가 들어왔으며 이와 함께 초기 고대 국가들이 생겨났는데 이 중 고조선(古朝鮮)이 가장 강했다. 왕검성(王儉, 고조선 수도)에서 세워진 단군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지녔고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를 만드는 등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후반과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중국 연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의 거점들을 빼앗긴 뒤 중심지를 오늘날의 평양(平壤) 지역으로 옮겨갔다. 고조선 내 세력들 중 일부는 경주(慶州) 인근 진한 땅으로 이동하여 6개 촌을 이루며 살다가 기원전 57년 사로국을 성립시켜 신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일부는 김해 지역의 변한(弁韓) 땅에 9개의 촌을 형성하여 살다가 1세기경에 구야국에서 가야로 발전하고, 일부세력은 경기도와 전라도 지역의 마한 땅에 정착하였다. 한편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부여가 형성되었으며, 부여에서 주몽 일파가 졸본 지역으로 남하하여 토착 맥족과 연합 또는 병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주몽 일파와 유리 일파가 졸본 지역으로 이동해 오자 온조와 비류 일파는 남쪽의 마한 지역으로 이동하여 마한 북부 지역의 한강 유역 일대를 중심으로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또한 북부여에서 고씨 세력에 밀린 해씨 세력 일부가 가섭원 지역으로 이주하여 물길족, 예족, 맥족 등을 병합하여 동부여를 건국하였다. 기와. 고조선 멸망 이후 1세기-3세기 북쪽에는 고구려와 동부여, 남쪽에는 가야 등이 먼저 발전하여 전기 삼국시대를 형성하였고, 4세기-6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로 대표되는 세 나라는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시켜 수세기 동안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하면서 발전했는데, 이 시기를 전기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때 크게 발전하여 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였고, 대흥안령 산맥에도 진출하였으며, 수,당과 맞서 싸우며 민족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 백제는 3세기에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루어 근초고왕때에는 요서, 산둥,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백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비옥한 땅이 신라와 고구려보다 많이 있었으며, 일본에 갖가지 문화를 전파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였으나, 고구려와 동맹하여 가야를 복속시키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며 강성해졌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및 그 북부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다. 한편, 고구려의 유장인 대조영은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거느리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며 발해를 건국하여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여 신라와 228년간 공존하였다.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발해의 영토는 한국의 역대 국가들 가운데 가장 넓었다. 통일신라보다 3~4배 넓고 고구려보다 1.5~2배에 달하는 아주 광활한 영토를 보유했다.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되찾은 것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와 헤이룽 강까지 차지하여 북쪽 영토는 옛 고구려보다 더 넓혔다. 발해는 9세기 전반에 최전성기를 맞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00년 뒤인 10세기 전반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남북국 시대도 끝이 났다. 북한에서는 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는 세 나라로 분열되는데, 이를 후삼국 시대라고 한다. 그중 궁예의 후고구려(태봉)가 가장 강력하였으나, 폭정으로 인심을 잃게 되었다. 918년에 왕건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오치고 수도를 개경으로 옮겼다. 935년에 혼란기를 겪은 신라가 고려에 귀부하였고, 다음 해에 후백제 또한 멸망하여, 한국 통일 왕조가 성립된다. 발해는 발해-요 전쟁의 패배로 인해 926년에 요 의해 멸망되었다. 이 혼란기에 건국된 고려왕조는 경쟁 세력들을 물리치고 옛 신라 강역을 확보하며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포함한 발해의 유민들도 흡수해 한국 최초로 단일 국가를 형성하여 거의 천년 동안 한국에 단일 국가가 유지하면서 고조선과 삼국 등의 다양한 전통을 계승하여 동질화된 독특한 민족 문화가 이루어졌다. 발해는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정안국(954년~986년), 후발해(929년~1114년), 흥요국(1029년~1030년), 대원국(1116년) 등의 나라를 건국하며 190년이나 저항하였다. 13세기에는 몽골이 침입하여 고려 말까지 몽골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전경.jpg|대체글=경복궁 전경|왼쪽|섬네일|300x300픽셀|경복궁. 고려는 백성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반항하면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의병운동 등 원에 저항했으나, 결국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후 공민왕은 중원에서 원나라가 약해지고 명나라가 강해지는 틈을 타서 반원 친명 정책을 펴며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실지(失地)를 수복하였다. 1392년 고려의 뒤를 이어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창건되었으며 수도를 한양(현 서울)으로 삼았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 문화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비록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조선은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Map of the Korean Empire (1897 - 1910).png|320px|섬네일|오른쪽|대한제국 한국은 1876년 일본이 운요호사건으로 체결한 강화도 조약으로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95년의 을미사변이후 1897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갔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을사늑약과 제 2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 후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본 제국 성향의 내각과 지식인층, 고위층들은 대한 제국 안의 일본 제국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과 불법적인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일본과 계속 투쟁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은 자국에 편입된 대한 제국의 효율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해 교육,의료,에너지,교통 등 사회의 소프트웨어적·하드웨어적 인프라를 구축시켰다. 그리고 일본 제국은 자국에 편입된 대한 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으로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민족을 말살, 소멸시켜서 일본 제국내의 공식·비공식적으로 차별받는 종속 천민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민족 말살정책을 집행하였다. 각종의 간악한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본제국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전례 없이 폭압적이고 악랄하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한쪽 끝,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을 양 옆에 두고기 때문에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과 대립하게된 미국은 철의 장막의 한쪽 끝인 한반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동안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자처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은 여럿있었으나, 대한민국의 헌법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음을 명시한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1945년 8월 15일 독립을 성취했다. 독립 직후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38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에 각각 진주하여 1948년까지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고, 남쪽에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북쪽에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정권이 각각 수립되어 분단되었다. 쌍방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 전쟁을 벌였고, 한국휴전협정 체결 후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휴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1990년대 초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되었으나, 한반도는 여전히 무력 대치와 이념 대결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2018년 제3차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이 65년 만에 종전 선언에 이를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황제 고종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20일 황제 순종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대한민국 (1948년 ~) 대통령 이승만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대통령 윤보선 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3일 대통령 박정희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최규하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대통령 전두환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대통령 노태우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대통령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대통령 김대중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노무현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이명박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대통령 박근혜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문재인 2017년 5월 10일 ~ 한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및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는 서쪽으로 황해(서해), 동쪽으로 동해, 남쪽으로 남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북쪽끝은 함경북도의 온성, 서쪽끝은 평안북도의 마안도, 동쪽끝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섬 독도, 남쪽끝은 마라도이다. 한국의 남부 및 서부는 대체로 평야이며, 동부 및 북부는 산지이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2,744m)이며, 관모봉(冠帽峰, 2,541m), 북수백산(北水白山, 2,522m)의 순이다. 한국 북부의 개마고원은 한국의 지붕 이라고 불리며, 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산맥인 태백산맥은 백두대간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의 유명한 섬으로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울릉도 등이 있는데, 제주도와 울릉도는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국의 황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되어 있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한국 전체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최동단지역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동도 최서단지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로동자구 최남단지역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 최북단지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유원진 대한민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최동단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동도 최서단지역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연화리 최남단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 최북단지역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영유권 밖의 최남단지역 이어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최동단지역 라선특급시 선봉군 우암리 최서단지역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로동자구 최남단지역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최북단지역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과 일본 등 이웃들과의 교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했다. 전통 음악은 풍물놀이이며, 아리랑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대체로 7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조세와 부역 등을 피하려고 호구조사를 기피하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40% 가까이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실제 인구는 조선 시대 중기에 와서 1천만 명 내외, 후기에는 약 1,300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인구는 약 1,312여만 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권 피탈 후 현대적 인구 조사를 한 1925년에는 1,900만여 명, 1935년에는 2,289만9천여 명 1944년에는 2,59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11년의 성비(여자 100명 당 남자의 수)는 110.9로 심한 남초 현상을 보였으나, 1944년에는 99.4로 여초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102.1로 남초 현상을 보이다가 1955년에는 100.1로 균형이 이루어졌다. 2017년 12월 말 기준으로 외국인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5천177만8544 명 이고, 2016년 12월 말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약 2천537만 명으로 추산된다. 약 700만 명인 해외 거주 한인(韓人) 중 400여만 명인 외국국적자를 제외한 전체 한국인 수는 약 8천만 명이다. center 반도 전체의 공용어는 한국어 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 수화를 추가 공용어로 두고 있다.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교착어로 분류되기도 하며, 또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경기 방언을 기초로 한 대한민국 표준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서북 방언을 기초로 한 문화어를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다. 훈민정음. 한국어를 표기하는 글자는 한글이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말소리를 기호로 표시하는 표음 문자이고,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는 음소 문자이며, 발음의 유사성에 따라 형태의 규칙성을 띠는 매우 정교한 자질 문자(예. ㄱ·ㅋ·ㄲ, ㅏ·ㅑ·ㅐ·ㅒ)이다. 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글자를 결합해 하나의 음절을 독립적으로 표시하는 글자를 만드는 형태로 표기한다는 점에서 다른 문자와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조선의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직접 만든 문자 체계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후 정인지·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를 만들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자(漢字)로 문서가 작성되었으나, 표의 문자인 한자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향찰, 구결, 이두 등 차자 표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지배층인 양반(兩班)층과 관공서에서는 한자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한글은 19세기까지 주로 편지글·시조·가사·한글소설 등에 사용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의 사용이 억압 받았으나 1945년 해방 후 본격적으로 널리 쓰여져 한국문화 발달의 기틀이 되었다. 최근에는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나 약어(略語)의 구별 등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글은 처음 만들었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으나, 지금은 ㅿ(반시옷), ㆆ(여린히읗), ㆁ(옛이응), ㆍ(아래아) 네 글자가 사라져서 스물네 글자가 되었다. 한국의 국립공원 한국의 산 한국의 산맥 한국의 동굴 한국의 평야 한국의 강 한국의 호수 한국의 섬 한국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므로 해당 지역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의 체계와 형식적으로 통치를 주장하는 지역의 행정구역 체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현재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로 편제되어 있다. 3단계 행정체계로 도/특별시/광역시 > 시/군/구 > 읍/면/동으로 구분된다. 다만, 서울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 이상 대도시 에는 시 아래에 행정구를 둘 수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광역시이며, 특별시, 특별자치시, 특별자치도도 존재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특별시 서울특별시 광역시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 울산광역시 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 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현재 1직할시, 3특급시, 3지구, 9도로 편제되어 있다. 또한 3단계 행정체계로 도 > 시/군 > 동/리로 구분된다. 이는 광복 직후와는 다른 것으로 면은 통합하여 군으로 승격하고, 읍은 군의 중심지역을 이르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이 외에 로동자구와 직할시에 소속된 구역 등이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직할시이며 특급시는 도에 소속되고, 지구와 함께 행정상의 특혜를 받게 되어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직할시 평양직할시 특급시 개성특급시(황해북도), 남포특급시(평안남도), 라선특급시(함경북도) 지구 개성공업지구, 금강산관광지구, 신의주특별행정구 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자강도, 량강도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이 같은 행정구역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광복 당시의 행정구역만을 인정한다(이북5도위원회). 1945년 8월 15일 인 광복 당시 한반도는 13개 도로 나뉘어 있었다.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1946년 9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평양시를 평안남도에서 분리하고 강원도를 신설하였다. 경기도 연천군과 함경남도 원산시, 문천군, 안변군을 분리해 기존 강원도에 합쳐 신설하였다. 1946년 8월 1일 에 미군정의 법률에 의해 도(島)제가 폐지되고 제주도 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14개 도가 되었다. 제주도(道)는 전라남도 제주도(島)를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으로 분리하여 묶은 것이다. 1946년 9월 28일 에 대한민국은 서울시를 서울특별자유시 로 승격하였다.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중구, 마포구, 성동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 서울특별자유시는 그 직능과 권한이 도(道)와 같았다. 따라서 한국은 14도 1특별자유시가 되었다. 1949년 1월 31일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강도 를 신설하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자성군, 후창군, 위원군, 초산군, 희천군과 함경남도의 장진군 일부를 합쳐 신설 1949년 8월 15일 에 대한민국은 일본식 행정구역명을 새로이 바꾸고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바꾸었다. 부(府)를 시(市)로, 정목(丁目)은 가(街)로, 통(通)은 로(路)로, 정(町)은 동(洞)으로 바꾸었다. 1951년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시와 개풍군을 합쳐 개성지구를 신설하였다. 개성지구는 중앙의 직속으로 두었다. 1952년 12월 22일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면 (面)을 없애고 로동자구를 설치하였다. 이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4단계 행정구역을 3단계로 축소 하였다. 1954년 10월 30일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량강도 를 신설하고 황해도를 황해남도 와 황해북도 로 분리하였다. 량강도는 함경북도의 혜산시와 10개 군을 합쳐 신설하였다. 황해북도는 사리원시와 송림시 등 16개 군을 합친 영역이며, 황해남도는 해주시와 16개 군을 합친 영역이다. 1955년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시와 개풍군, 판문군을 통합해 개성직할시로 승격하였다. 1960년 10월 12일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함흥시와 청진시를 직할시로 승격하였다. 1967년 10월에 다시 함경북도 소속의 일반시로 환원하였다. 1963년 1월 1일 에 대한민국은 부산시를 부산직할시 로 승격하였다. 부산직할시 경상남도 부산시 일원인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 부산진구, 동래구 지역 부산직할시는 정부 직할시로 그 직능과 권한이 도(道)와 같다. 따라서 한국은 1특별시 1직할시 14도가 되었다. 1977년 11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무산군과 경성군을 청진시로 편입하고 직할시로 승격하였다. 1985년 8월 2일에 청진시, 무산군, 경성군으로 분리해 함경북도로 환원하였다. 1981년 7월 1일 에 대한민국은 인천시를 인천직할시 로 승격하고, 대구시와 주변을 합해 대구직할시 를 설치하였다. 인천직할시 경기도 인천시 일원인 중구, 남구, 동구, 북구 지역 대구직할시 경상북도 대구시와 달성군의 월배읍·성서읍·공산면 및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고산면 일원을 통합 1986년 11월 1일 에 대한민국은 전라남도 광주시를 광주직할시 로 승격하였다. 1989년 1월 1일 에 대한민국은 충청남도 대전시와 주변을 합쳐 대전직할시 를 설치하였다. 당시 통합한 지역은 충청남도 대전시 지역과 대덕군 일원이며 대덕군은 폐지되었다. 단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는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되었다. 1993년 9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라진시와 선봉군을 통합해 라진선봉직할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 1월 1일 에 대한민국은 직할시를 광역시로 개칭하였다. 1997년 7월 15일 에 대한민국은 울산시를 울산광역시 로 승격하였다. 2000년 8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라진선봉직할시를 라선직할시로 개칭하였다. 2002년 9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신의주시를 중앙직속인 신의주특별행정구로 지정하였다. 2002년 10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원도 금강산 일대와 통천군 일대를 합해 금강산관광지구로 지정하였다. 2002년 11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시와 판문군 일부를 개성공업지구로 지정하였다. 2003년 6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직할시를 폐지하고 개성특급시 를 신설하였다. 개성직할시 개성시는 개성특급시로 개편하여 황해북도에 편입하고, 개풍군과 장풍군도 각각 황해북도에 편입하였다. 2004년 1월 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포직할시와 라선직할시를 폐지하고 남포특급시 와 라선특급시 를 신설하였다. 남포직할시 남포시는 남포특급시로 개편하여 대안군, 강서군, 천리마군, 용강군과 함께 황해북도에 편입하였다. 라선직할시는 라선특급시로 개편하고 모두 함경북도에 편입하였다. 2006년 7월 1일 에 대한민국은 제주도를 제주특별자치도 로 개편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하면서 제주시와 북제주군을 합쳐 제주시를,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을 합쳐 서귀포시를 두었다. 2010년 7월 1일 에 대한민국은 경상남도 창원시 전역과 진해시 일원, 마산시 일원을 합쳐 마산,창원,진해를 통합창원시 로 개편하였다. 통합창원시를 개편하면서 마산시는 마산합포,회원구로 진해시는 진해구로 창원시는 의창,성산구를 각각 두었다 2012년 7월 1일 에 대한민국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역과 공주시 일부, 충청북도 청원군 일부를 합쳐 세종특별자치시로 개편하였다. 2014년 7월 1일 에 대한민국은 충청북도 청주시 전역과 충청북도 청원군 전역을 합쳐 도농복합시 형태인 통합청주시 로 개편하였다. 중국 일본 러시아 한반도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대표 다국어 웹사이트 대한민국 전자정부 론리플래닛의 정보(남한) CIA의 세계 정보(남한편) 론리플래닛의 정보(북한편) CIA의 세계 정보(북한편) 분류:분단된 지역 분류:한국어권
200px 미분 방정식 (微分方程式, differential equation)은 미지의 함수와 그 도함수, 그리고 이 함수들의 함수값에 관계된 여러 개의 변수들에 대한 수학적 방정식이다. 미분방정식의 계수(order)는 미분 횟수가 가장 많은 독립 변수의 계수가 결정짓고, 차수(degree)는 계수를 결정 지은 독립 변수의 미분꼴이 거듭제곱된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 미분 방정식은 엔지니어링, 물리학, 경제학 등 수학 외의 학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유체역학, 천체역학 등의 물리적 현상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미분 방정식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있는 넓은 학문이다. 물체의 운동이 물체의 위치와 시간값의 변화에 따른 속도로 표현되는 고전역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물체의 미지의 위치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표현하고, 물체의 위치·속도·가속도·그리고 물체에 작용하는 힘 등을 그 함수에 대한 미분 방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이 변량들을 역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흔히 운동방정식이라고 부르는 이 미분 방정식은 아주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미분 방정식을 사용하여 실세계를 표현한 예로는, 중력과 공기저항만 고려하여 공중에서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 땅을 향한 공의 가속도는 중력에 의한 가속도 마이너스 공기저항에 의한 가속도이다. 중력은 일정하다고 치고, 공기저항은 공의 속도에 비례한다고 하자. 이것은 공의 가속도, 즉 공의 속도의 도함수가 공의 속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나타내면 이 미분 방정식을 풀 수 있다. 수학에서 미분 방정식은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는데, 대개 그 해―방정식을 만족시키는 함수의 집합―에 대한 연구가 흔하다. 명쾌한 함수의 형태로 해가 구해지는 것은 가장 간단한 미분 방정식들 뿐으로, 어떤 미분 방정식은 명확한 해를 구하지 않고, 그 특징만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만약 해를 독립적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컴퓨터를 이용해 수적 근사값을 구할 수도 있다. 동역학계 이론에서는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계의 질적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주어진 정확도 안에서 해를 구하기 위한 많은 수치 해석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의 목표는 다음 세가지 이다. # 특정한 상황을 표현하는 미분 방정식을 발견하는 것. # 그 미분 방정식의 정확한 해를 찾는 것. # 그 찾은 해를 해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 미분 방정식에 대해 해가 있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해가 유일한지 등의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들은 대개 주어진 미분 방정식을 푸는 데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고, 여기서 얻어진 해는 다리, 자동차, 비행기, 하수도 등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 이론은 잘 발전되어 왔으며, 학습을 위해 방정식의 형태에 따라 그것을 의미있게 분류시키기도 한다. 상미분 방정식 상미분 방정식은 미지 함수와 종속변수가 하나의 독립변수를 가지는 함수인 미분 방정식을 말한다. 간단한 형태로 미지함수가 실수 또는 복소수 함수 형태를 가진다. 편미분 방정식 미지 함수의 독립 변수가 둘 이상인 미분 방정식이다. 선형 미분 방정식 비선형 미분 방정식 1차 제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형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함수이며, 이 방정식은 간단히 변수를 다음과 같이 양변으로 분리하여 놓아서 풀 수 있다. 위 식을 적분하여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는 임의의 상수이다. (이 결과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이 식을 원래의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된다.) 가 상수가 아닌 함수이고, 어떤 함수의 경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더라 하더라도) 그 적분이 불가능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풀이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 1차 선형 상미분 방정식 중 일부는 위의 예처럼 분리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1차 비제차 상미분 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적분인자를 알아야 한다. 이 방법을 아래에 설명하고 있다.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적인 형태를 생각해 보자. 이 방정식을 푸는 방법은 특별한 "적분 인자", 에 달려있다. 위의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양변에 를 곱하자. 우리가 선택한 특별한 의 성질에 의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모양으로 변형된다. 미분에 대한 곱의 법칙에 의해 위 식은 다시 다음과 같이 변형된다. 양변을 적분하면, 를 얻고, 마지막으로 에 대해 풀고, 로 양변을 나누면, 를 얻는다. 는 의 함수이므로 더 이상 간단히 할 수 없다. 상미분 방정식 편미분 방정식 그린 함수 차분 방정식 분류:미적분학
각운동량 때문에 회전하는 동안에 계속 위를 바라보게 된다. 각운동량 (角運動量)은 물리학에서 어떤 원점에 대해 선운동량이 돌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각운동량은 좌표의 원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각운동량을 다룰 때에는 둘을 합하거나 그에 관련한 연산을 하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신중히 고려하며 사용해야 한다. 각운동량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여러 공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응용분야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각운동량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각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이 되기 때문이다.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간의 회전대칭성 때문이다. 이러한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animation.gif|frame|right|회전계에서 힘 (F)과 돌림힘 (τ), 그리고 운동량 벡터들 (p 와 L)의 관계 어떤 원점에 대한 입자의 각운동량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 입자의 질량 : 입자의 각운동량 : 입자의 선운동량 : 원점에서부터 입자까지의 위치벡터 : 입자의 속도 이다. 시스템이 여러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 때에는, 한 원점에 대한 총 각운동량은 각각의 각운동량을 더해서 구하거나, 좀 더 복잡한 부피를 가지는 물체의 각운동량은 미소질량에 대해 각운동량을 적분하여 얻을 수 있다. 많은 경우, 고정된 특정한 한 축에 대한 각운동량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각운동량을 3차원 벡터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반시계방향의 회전은 양으로, 시계방향의 회전은 음으로 취급하여 스칼라로 놓기도 한다. 이렇게 할 때에는 벡터곱의 크기로 각운동량을 표기하게 된다. 여기서 는 로부터 까지 재는 각도이다. 각운동량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돌림힘 가 된다. 만약 어떤 원점을 기준으로 계에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상수벡터) 이 되어 각운동량이 보존되게 된다. 이를 각운동량 보존 법칙 또는 간단히 각운동량 보존 ()이라고 부른다. 각운동량 보존 법칙은 특히 중심력이 작용하는 운동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중심력이 작용하는 입자들의 운동에서 두 입자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에서 고립된 계를 이루고, 원점은 두 입자를 잇는 선 위의 한 점으로 잡는다. 서로 작용하는 힘의 방향이 언제나 원점에서 입자들까지의 위치벡터와 같은 방향이 되므로, 앞에서 잡은 원점을 기준으로 한 알짜 토크는 언제나 0이 된다. 따라서, 각운동량은 보존된다. 일정한 각운동량을 갖는 이와 같은 경우는 행성, 위성, 보어의 원자모형등의 분석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관성 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질량과 운동량사이의 관계 와 유사하게 꼴의 식이 있다. 경우에 따라 스칼라 관성모멘트 나 관성텐서 중 하나를 사용한다. 회전축이 변하지 않는 경우에 각운동량은 간단히 스칼라 관성모멘트 와 각속도 의 곱으로 쓰일 수 있다. 위 식은 스칼라 관성 모멘트의 정의 와 각속도의 공식 (와 이 수직 일 때만 성립.) 을 사용하여 각운동량의 정의로부터 간단히 유도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입자 하나에 대해서만 유도를 하였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도 관성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이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회전축도 변하는 일반적인 회전의 경우, 각운동량과 각속도벡터는 평행하지 않다. 때문에 스칼라 관성모멘트를 사용한 식이 성립하지 않고, 좀 더 일반적인 식인 관성텐서 를 사용한 아래의 식을 사용한다. 관성텐서의 각 성분 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와 속도와 각속도의 일반적 관계 를 사용하면 각운동량과 관성텐서 사이의 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 각운동량의 정의에 이를 대입하면, 를 얻고, 여기서 삼중곱을 전개하면 아래와 같은 식을 얻는다. 이제, 을 성분 로 표현해 를 분리한다. 관성텐서의 정의를 대입하면, 가 되어 맨 처음 식이 성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고전적인 각운동량에 대응하는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은 궤도 각운동량 이다. 다른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과 마찬가지로, 궤도 각운동량의 값은 디랙 상수 의 정수 또는 반정수()배로 양자화된다.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에는 고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각운동량 항이 존재하는데, 이를 스핀 라고 한다. 관성 모멘트 운동량 일반화 운동량 스핀 각운동량 결합 분류:물리량 분류:양자역학 분류:고전역학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보존 법칙
150px3.1415926535…… 원주율 (圓周率은 원둘레와 지름의 비 즉,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수학 상수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그리스 문자 π로 표기하고, 파이 (π)라고 읽는다. 원주율은 수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상수 가운데 하나이다. 무리수인 동시에 초월수이다. 아르키메데스의 계산이 널리 알려져 있어 아르키메데스 상수 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원주율을 계산한 이후 뤼돌프 수 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주율의 값은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69... 로,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이기 때문에 근삿값으로 3.14를 사용한다. 원의 지름이 1일 때, 원주는 π이다. 유클리드 평면에서 원은 크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닮은 도형이다. 따라서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는 언제나 일정하며, 이를 원주율이라 한다. 즉, 원의 지름을 d, 둘레를 C라 하면 원주율 π는 다음의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 π는 1706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가 최초로 사용했다. 이것은 둘레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페리페레스"(περιφηρής) 또는 "페리메트론"(περίμετρον)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윌리엄 존스는 “특정 도형의 길이나 넓이를 구하는 계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원을 예로 들면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약 3.14159…= π로 표기하는 것이다.”라고 기호 π의 사용을 제안하였다. 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순환마디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비순환소수이다.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통해 만드는 난수표와 성질이 같다. 원주율은 십진법으로는 값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계산에서는 근삿값을 이용한다. 원의 넓이 = π × 반지름2 원의 둘레 = π × 지름 the circle.svg|섬네일|172px|left|원적문제 다빈치의 원의 넓이 계산 한편, 원주율은 계수가 유리수인 유한 차수 다항식의 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수를 초월수라 부른다. 이 사실은 1882년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증명하였다. 여기에서 원주율은 어떤 정수에 적당한 유리수를 곱하고 제곱근을 씌우는 등의 연산을 조합하여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주율이 초월수라는 사실을 통해, 그리스 3대 난제 중 하나였던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하여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원적문제”가 유한한 대수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원과 원주율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의 둘레를 구하는 식은 원주율의 정의와 같다. 원의 둘레 = 지름 × 원주율 원의 넓이를 구하는 방법은 아르키메데스 시대 이후 여러 가지 기법이 알려져 있다. 널리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고안한 것으로, 정육각형을 이용한 구적법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왼쪽 그림과 같이 정육각형을 이용하여 분할한 원을 직사각형으로 치환하여 원의 넓이를 계산하였다. 원의 넓이 = 원주율 × 반지름2 원주율이 보이는 복잡한 수열에 비해 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라이프니츠가 정리한 다음 계산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원주율의 값으로 3이 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원주율을 3으로 계산하였고, 구약성경 열왕기상 7장 23절과 역대하 4장 2절에는 직경과 둘레의 길이를 기술하여 원주율이 3정도 임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고대 중국의 수학책인 《구장산술》에서도 3을 원주율로 제시하였다. 《구장산술》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실려 있다. 원문 번역 今有圓田周三十步經十步問爲田幾何答曰七十五步 둘레가 30걸음, 지름이 10걸음인 원 모양의 밭이 있다면 넓이는 얼마인가? 답 75걸음² 원주율의 근삿값을 3.14로 할 때 오늘날의 계산은 원에 내접하는 정육각형 구장산술에 실린 계산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은 왼쪽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름이 1인 원에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는 3이고 실제 원의 둘레는 그것과는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문제였고 값을 보다 정확하게 구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통형 바퀴를 굴려 직접 측정해 원주율을 계산하였는데 =3.16049……를 사용하였다. 원에 외접하는 다각형과 내접하는 다각형의 둘레를 이용한 아르키메데스의 원주율 계산 한편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근대 적분이 없었던 당시에 무한소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소거법을 사용하여 의 근삿값을 계산하였다. 이 방법은 임의 차원의 미지항에 대해 극한을 취하는 것으로, 귀류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계산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해답을 얻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변이 매우 많은 다각형이 임의의 원에 내접하는 경우와 외접하는 경우를 비교하여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즉, 임의의 원의 둘레는 그것에 외접하는 다각형의 둘레보다 짧고 내접하는 다각형보다 길다. 이때 다각형의 변이 많아질수록 외접하는 경우와 내접하는 경우의 둘레 차는 작아지므로 원의 둘레에 근사한다. 즉, 지름이 d인 원에 내접하는 변의 개수가 n인 정다각형의 둘레 Pn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함수의 극한을 취하면 원주율을 얻을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정구십육각형을 이용하여 의 값을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결과에 따라 의 근삿값으로 3.1416을 제시하였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면적이 임을 증명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저서 《구와 원기둥》에서 어떠한 크기가 주어지더라도 임의의 크기에 적당한 수를 곱하여 주어진 크기를 초과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를 실수에서의 아르키메데스 성질이라고 한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 수학자 유휘는 《구장산술》에 주해를 달아 다시 출판하였는데,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원주율을 =3.14 로 계산하였다. 유휘가 계산한 원주율 근삿값은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 2세기에 들어 중국의 장형은 원주율을 3.1623으로 계산하였고 5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조충지는 3.141592로 계산하였다.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컴퓨터를 도입하기 이전에 가장 긴 자리수의 원주율을 계산한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 샹크스였다. 그는 15년이나 걸려 1873년께 소수점 이하 707자리까지 원주율 값을 계산해냈다. 하지만 후에 그 계산은 528자리까지만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1949년 9월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70시간에 걸쳐 소수점 아래 2,037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원주율 계산에 컴퓨터를 도입한 이후 원주율 계산은 단순 알고리즘의 무한 반복에 불과한 작업이 되어 수학적 의미를 잃었다. 이 계산은 종종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2005년 일본 도쿄 대학의 가네다 야스마사 교수는 컴퓨터를 601시간 56분 동안 사용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1,241,100,000,000자리까지 구하였다. 2009년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 쓰쿠바 대학 계산과학연구센터는 17일, 슈퍼컴퓨터를 사용한 원주율 계산에서, 2조 5769억 8037만 자리수의 세계기록을 수립했다고 한다. (73시간 59분 소요)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2조 7천억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2010년 8월 3일에는 일본의 회사원 곤도 시게루(近藤茂)가 소수점 이하 5조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90일 7시간 소요, 검증 기간 포함 / PC 사용) 2016년 11월 11일 스위스의 입자 물리학자인 페터 트뤼프(Peter Trüb)는 105일 동안 계산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22조 4591억 5771만 8361자리(조 개)까지 계산했다. 값의 소수점 아래 1,000자리 수는 다음과 같다. 3.1415926535 8979323846 2643383279 5028841971 6939937510 5820974944 5923078164 0628620899 8628034825 3421170679 8214808651 3282306647 0938446095 5058223172 5359408128 4811174502 8410270193 8521105559 6446229489 5493038196 4428810975 6659334461 2847564823 3786783165 2712019091 4564856692 3460348610 4543266482 1339360726 0249141273 7245870066 0631558817 4881520920 9628292540 9171536436 7892590360 0113305305 4882046652 1384146951 9415116094 3305727036 5759591953 0921861173 8193261179 3105118548 0744623799 6274956735 1885752724 8912279381 8301194912 9833673362 4406566430 8602139494 6395224737 1907021798 6094370277 0539217176 2931767523 8467481846 7669405132 0005681271 4526356082 7785771342 7577896091 7363717872 1468440901 2249534301 4654958537 1050792279 6892589235 4201995611 2129021960 8640344181 5981362977 4771309960 5187072113 4999999837 2978049951 0597317328 1609631859 5024459455 3469083026 4252230825 3344685035 2619311881 7101000313 7838752886 5875332083 8142061717 7669147303 5982534904 2875546873 1159562863 8823537875 9375195778 1857780532 1712268066 1300192787 6611195909 2164201989... 값의 소수점 아래 100만 자리, 10억 자리, 1조 자리 수는 Peter Trüb의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또는 다른 웹사이트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주율은 두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또한, 계수가 유리수인 다항식의 근이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에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람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탄젠트 함수의 연분수 전개식을 이용하여 이를 증명하였다. x가 0 이 아닌 유리수일 때 위에 전개된 연분수를 십진기수법으로 나타내면 언제나 순환하지 않는 소수이므로 항상 무리수이다. 한편, tan()=1 이므로 는 반드시 무리수여만 한다. 따라서 π 역시 무리수이다. 오일러 등식은 기초 수학의 여러 개념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원주율이 초월수임은 오일러 등식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오일러 등식은, …… (1) 이다. 이 때 π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의 근이라면 이다. 따라서 역시 성립하여야 한다. 이제 y iy 이므로, iπ는 다음 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정계수 대수방정식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제 을 ν차원의 방정식이라 하면 그 근인 y1, y2,……, yν에는 iπ가 존재하여야 하므로, 식 (1)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만족하는 대수방정식의 근이 유리수라고 가정하면 무한히 약분할 수 있어서, 이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 유리수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유리수의 정의에 어긋나므로 π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의 근이라는 최초의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원주율은 초월수이다. 자세한 증명은 링크한 주석을 참고하기 바란다. 개요에서 밝혔듯이 원주율은 반복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수열을 이룬다. 네덜란드 수학자 라위트전 브라우어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원주율 π = 3.141592…… 의 전개에서 계속되는 소수의 수열에 9가 연속적으로 100회 나타날까? 브라우어르는 이 수열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이 수열을 어느 정도까지만 확인한 결과만으로는 위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실제 소수점 이하 762번째에서부터 수열 999999 가 출현한다. 이 수열은 파인만 포인트로 알려져 있으며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수열에서 확률 0.08%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경험적 방법으로는 위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브라우어르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중률 은 유한한 개수를 대상으로 한 것에만 적용 수 있을 뿐 무한한 것에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원주율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사용해 만든 난수표의 성질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원주율의 수열이 완전한 무작위성을 보이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원주율은 무리수이기 때문에 그 값은 근삿값으로밖에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계산에는 3.14나 22/7 라는 근삿값을 사용해도 충분하다. 355/113은 외우기 좋고, 정밀도도 좋다. 좀 더 정밀한 기술의 계산에서는 3.1416 또는 3.14159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상 예보나 인공 위성 등의 계산에는 소수점 아래 30자리까지 나아간 근삿값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불규칙적인 패턴을 가지는 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규칙적인 수식을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더 정확한 값을 얻으려면 수식을 연장하기만 하면 된다. 위 식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전개한 것으로 흔히 라이프니츠의 공식이라고 부른다. 이 식 외에도 원주율을 계산하는 공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월리스 공식 1655년 ……오일러의 곱셈 공식 1735년 17세기의 프랑스 수학자 프랑수아 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무한급수로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또한, 스털링 근사를 사용해 원주율을 유도할 수도 있다. 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연분수로 표현할 수 있다. 1996년 데이빗 베일리는 피터 보어와인, 시몽 플루프와 공동으로 π에 관련된 새로운 무한급수를 발견했다. 이 식을 이용하면 2진수 그리고 16진수로 표기한 π값의 소수점 아래 n 자리 값을 n -1째 자리까지 구하지 않고 바로 계산해 낼 수 있다. 베일리의 홈페이지 에선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구현한 실제 예를 볼 수 있다. 원주율은 수학과 물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적용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원과 구의 다음과 같은 성질을 증명하였다. 반지름 r 인 원의 둘레: 반지름 r 인 원의 넓이: 반지름 r 인 구의 부피: 반지름 r 인 구의 겉넓이: 한편, 원은 이심률이 0인 타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타원 방정식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때 타원의 넓이를 A라 하면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라디안의 정의 각의 크기를 나타내는 무차원 단위인 라디안은 오른쪽 그림과 같이 정의하여 반지름과 호의 길이가 같을 때 1라디안이 된다. 따라서, 원 전체는 2π라디안이고 이를 도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π라디안 = 180° 1687년 스위스의 바젤의 수학 교수였던 야코프 베르누이와 요한 베르누이 형제는 조화급수가 발산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조화급수의 각 분모를 제곱한 다음 식을 닫힌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며 논문의 끝에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면 알려주기 바란다고 적었다.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이 문제는 바젤 문제로 알려지며 해석학자의 악몽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레온하르트 오일러로 1735년에 이 급수의 값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후일 이 급수는 다음과 같은 일반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이 리만 제타 함수이다. 리만 제타 함수는 s가 짝수일 때 위 식을 이용하여 그 값을 쉽게 계산할 수 있으나 홀수일 때는 자명하지 않다. 1978년 s가 3일 때 무리수로 수렴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수렴값은 아페리 상수라고 한다. s formula.svg|섬네일|복소평면에 그린 오일러의 공식. 각 φ 가 π 라디안(180°)으로 증가하는 동안 오일러 등식이 성립함을 보인다. 복소수 는 극좌표계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복소해석학에서 π는 복소수 변수가 지수 함수에서 보이는 행동과 연관이 있으며 오일러의 공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i 는 허수 단위이기 때문에 i 2 180°)과 함께 자연로그의 밑 e 의 지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오일러 등식을 얻는다. 따라서 n 번째 단위근은 다음과 같다. 이제 가우스 적분으로 나타내면, 이 결과는 반정수의 감마 함수가 √π의 유리수 곱임을 뜻한다. pdf.svg|섬네일| 확률 밀도 함수 f(x; x_0, γ )에 대한 코시 분포 확률과 통계에서 원주율이 등장하는 정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정규분포를 따르는 확률분포의 평균을 μ, 표준편차를 σ라 하면, 가우스 적분의 값을 상쇄하기 위해 정규분포의 확률 밀도 함수는 이 된다. 표준 코시 분포의 확률 밀도 함수 참고로, 모든 확률 밀도 함수는 다음과 같이 적분한다.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이 제기한 뷔퐁의 바늘 문제는 원주율의 근삿값을 구하는 경험주의적인 방법으로 거론된다. 길이가 L인 바늘을 일정 간격으로 그린 평행선에 떨어뜨린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평행선의 간격 S가 바늘의 길이보다 크다고 하면, 바늘을 떨어뜨린 횟수 n번에 대해 바늘이 평행선 밖으로 나간 횟수 x번(단, x>0)에는 몬테카를로 방법에 의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즉, 뷔퐁의 바늘 문제에서 바늘을 떨어뜨리는 횟수가 매우 많아지면 바늘이 평행선을 벗어나는 횟수에 대한 바늘을 떨어뜨린 전체 횟수의 비는 원주율에 근사한다. 물체에는 각속도가 있다 원주율 자체는 물리 상수가 아니지만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두루 사용한다. 이는 자연 현상의 상당수가 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전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등속원운동에서 각속도와 원주속도는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각속도를 ω (= θ / 초), 분당 회전수를 N이라 하면 이때, 반지름을 r이라 하면 원주속도 v는 이 외에 물리학에서 원주율을 사용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양자 역학적인 물리량은 동시에 정확히 관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입자의 특정 위치를 Δ x라 하고 이 때의 운동량을 Δ p 라 하면, 이 둘의 크기를 둘 다 정확히 관찰할 수는 없으며 다음 식을 사용해 확률적으로만 계산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한 아인슈타인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여기서 은 리치 곡률, 은 스칼라 곡률, 는 계량 텐서, 는 우주 상수, 는 중력 상수, 는 광속, 그리고 는 에너지-운동량 텐서이다. 원주율의 무리성 증명 파이의 날 파인만 포인트 라디안 *그레고리 수 온라인 원주율 계산기 Project Gutenberg E-Text containing a million digits of Pi From the Wolfram Mathematics site lots of formulae for π 원주율에 관한 것 Peter Trüb가 계산한 원주율 - 소수점 아래 22조 자리까지 계산 분류:비 (수학) 분류:수학 상수 분류:초월수 분류:무리수
일리야 로마노비치 프리고진 (, , 1917년 1월 25일 - 2003년 3월 28일)는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벨기에의 화학자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브뤼셀 자유대학(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산일구조(散逸構造), 복잡계, 비가역성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1977년 비평형 열역학, 특히 소산 구조론의 연구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벨기에의 보두앵 1세 국왕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확실성의 종말》( The End of Certainty ) https://web.archive.org/web/20031010111726/http://chaos.inje.ac.kr/Lec/chaos/96lec/ch2/prigogine/preg2.html http://chemistry.sogang.ac.kr/~duckhwan/essay/essay-prigogine.htm 분류:1917년 태어남 분류:2003년 죽음 분류:러시아의 화학자 분류:벨기에의 화학자 분류:노벨 화학상 수상자 분류:벨기에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브뤼셀 자유대학교 동문 분류:텍사스 대학교 분류:이론화학자 분류:모스크바 출신 분류:열역학자 분류:소련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교수 분류:러시아의 망명자 분류:유대계 러시아인 분류:유대계 벨기에인 분류:계산화학자
엔탈피 ()는 열역학적 계에서 뽑을 수 있는 에너지다. 내부 에너지와, 계가 부피를 차지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에너지(부피와 압력의 곱)의 합이다. 대기압이나 수압과 같이 압력에 둘러싸인 계를 다룰 때 쓴다. 기호는 대개 라틴 대문자 H 이다. 엔탈피는 다음 식으로 주어진다. 여기서, 계의 엔탈피 계의 내부 에너지 계의 압력 계의 부피 위의 엔탈피의 정의는 그 값이 기준을 어떤 점으로 잡느냐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쓰이는 것 보다는 엔탈피의 변화로 어떤 과정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즉, 어떠한 과정에서 압력의 변화가 0인 경우엔(ΔP=0), 엔탈피의 변화량은 계가 주변과 주고받은 에너지인 열량을 나타낸다. 따라서 주변의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반응의 전후 열량 출입을 나타내는 데에 많이 쓰인다. 계의 엔탈피는 직접 측정할 수 없으며, 계의 엔탈피 변화로 대신 측정된다 .엔탈피 변화는 다음 방정식으로 정의된다. ΔH는 "엔탈피 변화량"이다. 는 계의 최종 엔탈피이다. 는 계 의 초기 엔탈피이다. 엔탈피 변화는 화학 반응을 일으킬 때 열역적 계또는 주위에서 관찰된 엔탈피의 변화를 설명한다. 화학반응이 완료된 후 엔탈피 값은 달라진다. 이는 생성물과 반응물간의 엔탈피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엔탈피 변화값 (ΔH)은 (생성물의 엔탈피값의 총합) - (반응물의 엔탈피값의 총합)으로 나타 낼 수 있다. 일반적인 엔탈피 변화의 예로서는 표준 생성엔탈피가 있다. 이러한 엔탈피의 측정은 표준화된 환경 또는 표준 조건에서 측정하는것이 매우 일반적이다. 표준 조건 (Standard conditions)으로는 온도조건 25도씨의 온도 (298K) 압력조건 1기압 (1 atm or 101.325 kPa) 농도조건 용액 또는 화합물이 용액에 존재할 때에는 1.0M의 몰 농도 일반적인 물리적 상태의 요소 또는 화합물(즉, 표준 상태). 이 있다. 표준 엔탈피는 이러한 표준 조건에서 측정된, 다양한 상황에서의 엔탈피 변화를 총칭하는 말로 그 예시로 표준 생성 엔탈피 표준상태에서 어떤 물질 1mol이 그 성분 원소의 단체 물질에서 생성할 때의 엔탈피 변화 표준 증발 엔탈피 1기압의 압력에 있는 액체(순수한)가 1기압의 기체로 증발할때의 몰당 엔탈피 변화 표준 연소 엔탈피 화합물이 완전히 산화될때( 연소 될때)의 엔탈피 변화 등이 있다. 400x400픽셀 오늘날 중요한 물질의 엔탈피 값은 여러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얻을 수 있다. 사실상 모든 관련 물질의 상태를 표 또는 그래프 형태로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압력으로 발산하는 h–T 도표와 다양한 압력의 함수로써 h/T도표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도표가 있다. 이 T-s 곡선은 용해 곡선과 포화된 액체의 증기 값을 등압부와 함께 제공한다. 헤스의 법칙 내부 에너지, 기브스 자유 에너지,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는 엔탈피와 함께 4개의 열역학 퍼텐셜을 이룬다. 엔트로피는 엔탈피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개념이다. 분류:물리량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상태 함수
운동 에너지 (運動- , kinetic energy)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 또는 입자가 갖는 에너지이다. 주어진 물체의 어떤 속도에서의 운동에너지는 그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그 속도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의 양으로 정의된다. 가속이 되어 운동 에너지를 얻게 되면 속도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 한 그 운동에너지를 유지한다. 또한, 그 운동 상태에서 정지 상태까지 감속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 또한 원래 그 물체의 운동 에너지와 같다. 고전 역학에서 질량이 m인 비회전체의 속도의 크기가 v일 때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이다. 상대론에서는 v가 빛의 속도보다 훨씬 작을경우에 운동 에너지는 에 가깝다. 운동에너지의 표준 단위는 줄이다. 고전역학에서 E ∝ mv2 라는 원리는 처음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이 때 운동 에너지를 살아있는 힘(vis viva) 라고 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그라브산드는 이 관계의 실험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물체를 점토 블럭에 떨어뜨리면서 그라브산드는 그들의 관통 깊이가 충돌 속도 크기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브르퇴유는 실험 결과가 암시하는 바를 인지하였고 자신의 설명을 발표하였다. 운동 에너지 와 일 이라는 용어의 현대의 과학적 의미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리올리는 1829년에 Du Calcul de l Effet des Machines 를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려고 시도하였다. 윌리엄 톰슨은 약 1849-51년도에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에너지는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전자기 복사, 중력 에너지, 전기 에너지, 탄성 에너지, 핵 에너지, 정지 에너지 등과 같이 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바로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이다.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어떻게 전환이 되는지 살펴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는 음식에서 제공되는 화학 에너지를 자전거를 가속 시키는데 사용한다. 평평한 표면에서 이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저항과 마찰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을 빼면 더 이상 필요한 일이 없다. 이 과정에서 화학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지만 그 과정은 완전히 효율적인 것이 아니고 열을 부가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운동하는 사이클리스트와 자전거의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가 충분히 높은 언덕을 만나 페달을 밟지 않은 채로 언덕 정상에서 멈추게 되었다고 하자. 그럼 운동 에너지는 완전히 중력 위치 에너지로 변환되게 되고 이것은 언덕을 다시 내려오면서 운동 에너지로 바뀌게 된다. 마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이 생기므로 추가적으로 페달을 밟지 않는 한 원래의 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마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이번엔 싸이클리스트가 바퀴 하나에 발전기를 연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하강하는 과정에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게 된다. 그럼 발전기가 없었을 때보다 싸이클리스트는 언덕 아래에서 더 적은 속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에너지 일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환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브레이크를 밟게 될 경우 운동 에너지는 마찰에 의해서 열로 빠르게 전환 될 것이다. 다른 속도의 함수인 물리량과 같이 물체의 운동 에너지 또한 물체와 관찰자의 기준계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물체의 운동 에너지가 불변량인 것은 아니다. 우주선은 공전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운동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부터 얻는다. 완벽한 원 궤도의 경우 지구 근방의 우주 공간은 마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운동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다시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올 경우 운동 에너지는 열로 전환된다. 만약 궤도가 타원형이거나 쌍곡선의 형태라면 공전하는 동안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교환된다. 근일점에서 운동 에너지는 최대, 위치 에너지는 최소가 되고 원일점에서는 운동 에너지는 최소, 위치 에너지는 최대가 된다. 그렇지만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합은 보존된다.(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 에너지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달될 수 있다. 당구에서 플레이어가 당구공을 큐로 치게 되면 그 공에게 운동 에너지를 전달하게 된다. 만약 그 공이 다른 공과 충돌한다면 에너지가 전달 되기 때문에 멈춰 있던 공은 가속되고 다른 공은 급격하게 느려진다. 당구에서의 충돌은 탄성 충돌에 가깝다. 따라서 운동 에너지는 보존된다. 비탄성 충돌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열, 소리 등)로 분산된다. 플라이휠은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운동 에너지가 회전 운동의 형태로 저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물리적 상황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뉴턴 역학(고전 역학)에서의 ½mv² 공식이 가장 적합하다. 하지만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가까워지면 상대론적인 효과가 나타나며 상대성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만약 물체가 원자나 아원자 수준의 크기라면 양자 역학적인 효과가 두드러지며 양자 역학이 필요하게 된다. 고전 역학에서 점 입자(너무 작아서 질량이 한 점에 집중해 있다고 봐도 되는 물체) 혹은 비회전 강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의 속력과 질량에 의존한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과 질량의 곱에 1/2을 곱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고, 여기서 은 물체의 질량 는 물체의 속력(혹은 속도)이다. SI 단위에서 질량은 킬로그램, 속도는 m/s로 측정된다. 그리고 운동 에너지의 단위는 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80kg의 물체가 18m/s로 운동할 때 운동에너지를 계산하려고 한다면 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을 던진다면 당신은 공을 가속시키기 위해 일을 가할 것이고, 그 공이 어떤 물체에 부딪히고 그 물체를 움직이게 한다면 부딪힐 때 공이 그 물체에게 일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운동 에너지는 정지 상태에서 어떤 속력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이므로 알짜힘 x 변위 = 운동 에너지 인 것이다. 즉, 이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물체의 속력이 두 배가 된다면 운동 에너지는 네 배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차가 다른 동일한 질량의 차보다 두 배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하자. 두 차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마찰력이 동일하다고 하면 속력이 두 배 빠른 차가 네 배더 많은 거리를 브레이크를 밟아야 완전히 멈출 수 있다. 이는 감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네 배인 것을 의미한다.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또한 운동량과도 관계가 있는데, 이는 다음을 만족한다. 여기서, 는 물체의 운동량, 은 물체의 질량이다. 병진식 운동 에너지, 강체의 선형 운동에서의 운동 에너지 또한 이다. 여기서 은 물체의 질량 는 강체의 질량 중심의 속력이다.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에 의존한다. 하지만 에너지가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는 고립계에서의 전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켓 엔진에서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는 화학 에너지는 기준계에 따라 우주선체와 배기 가스에 다른게 나뉜다. 이를 오베르트 효과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떤 기준계를 선택하든지 운동 에너지, 연료의 화학 에너지 등을 포함한 전체 에너지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기준계를 따라 움직이는 서로 다른 관측자들이 관측한 전체 에너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기준계에 따라 계의 운동 에너지는 달라지는데 운동량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기준계에서 측정할 때 운동 에너지는 최소값을 가진다. 이는 이 기준계에서 계의 총 운동량이 0이기 때문이다. 극소 시간 dt 동안 입자를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은 힘 과 변위 의 내적과 같다. 따라서, 이고, 여기서 라고 가정하였다. 내적의 성질을 이용하면, 이므로, 질량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전미분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적분하여 운동 에너지를 구할 수 있게 된다. 물체가 0초 일 때 정지해있다고 가정하고 0부터 t까지 시간에 대해 적분하면 이다. 이 식은 운동 에너지( Ek )가 속도( v )와 운동량( p )의 미소 변화의 내적과 같음을 의미한다. 또한 물체는 처음에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강제 Q가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어떤 선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면 회전 운동 에너지()가 존재하게 된다. 이는 움직이는 부분들의 운동 에너지 합과 같다. 따라서, 여기서 는 물체의 각속도이다. 은 미소 질량 과 선의 거리이다. 는 물체의 관성 모멘트로 와 같다. 이 식에서 관성 모멘트는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하며 각속도 또한 그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한다. 물체의 편심된 모양때문에 생기는 떨림 운동이 있는 물체의 관한 좀더 일반적인 식도 존재한다. 계에서의 물체는 계와의 상대적인 운동에 의해 생기는 내적인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태양계에서는 행성과 미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가스 탱크 안에서는 분자들이 거의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때 계의 운동에너지는 계가 포함하는 모든 물체의 운동 에너지의 합이다. 정지한 거시적인 물체(즉, 물체의 운동량 중심을 따라 이동하는 기준계)는 원자 또는 분자 수준에서 분자의 병진, 회전, 진동이나 전자의 병진과 스핀 또는 핵 스핀 등 때문에 운동 에너지 형태의 다양한 내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이들 모두는 물체 질량을 구성하게 된다. 거시적인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때 운동 에너지는 거시적인 운동에만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형태의 내적 에너지들은 물체의 질량, 관성, 전체 에너지를 구성하게 된다. 한 물체의 속력 혹은 위치 에너지는 계에 의존적이며 어떤 관성계를 선택하든 음수가 아닌 값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측자 옆으로 총알이 지나간다고 해보자. 그럼 총알은 관측자의 기준계에서 운동 에너지를 갖게 된다. 이번엔 관측자가 총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고 해보자. 그럼 그 관측자의 기준 계에서 총알의 운동 에너지는 0이 된다. 한편, 계의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한 어떤 관성계를 선택하든 전체 운동 에너지가 0이 되도록 할 수 없다. 즉, 관성계를 정했을 때 그 안에서 모든 물체가 정지한 상태가 아니면 전체 운동 에너지는 0이 아닌 최소값을 가진다. 계의 전체 운동 에너지는 관성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운동량 중심을 기준계로 하였을 때 전체 운동에너지와 같거나 혹은 전체 질량이 질량 중심에 집중 되었을 때 그 전체 질량이 갖는 운동 에너지와 같다. 이것을 간단히 나타내보자. 를 어떤 기준계 k 에서의 질량 중심 기준계 i 의 상대적인 속도라고 하자. 그런데, 이므로 이다. 를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운동 에너지라고 한다면 는 단순히 전체 운동량이 될 것이고 이것은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 정의에 의해 0이 된다. 그리고 는 전체 질량이므로 다음을 얻는다. 그러므로 계의 운동에너지는 운동량 중심 기준계 즉, 질량 중심이 정지해있는 기준계(질량 중심 기준계 또는 다른 운동량 중심 기준계)에서 최소값을 가진다. 이외에 다른 기준계에서는 질량 중심의 속력으로 이동하는 전체 질량에 해당하는 추가적인 운동 에너지가 존재한다. 운동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계의 운동 에너지는 불변량이다. 가끔 물체의 운동 에너지를 물체 질량 중심의 병진 운동 에너지와 질량 중심에 대한 회전 에너지로 나누는 것은 편리한 방법이다. 즉, 이고, 는 전체 운동 에너지, 는 병진 운동 에너지, 은 질량 중심을 관통하는 선을 회전축으로 하는 회전 운동의 에너지이다.(질량 중심의 기준계에서 관측할 때) 만약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꽤 가까울 때, 운동 에너지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상대론을 적용해야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선형 운동량의 표현은 고전 역학에서와 다르다. 물체의 정지 질량을 , 와 를 각각 속도와 속력, 를 진공에서의 빛의 속력이라고 한다면 선형 운동량은 이다. 한편, 부분 적분에 의해 이고, 이므로 이다. 는 부정 적분의 적분 상수이다. 표현을 간단히 하면 이다. 는 일 때 인 것을 대입하면 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다. 이 공식에 의하면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도록 가속할 때 필요한 일의 양이 무한대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물체를 빛의 속도 보다 빠르게 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식의 부산물은 바로 질량-에너지 동등성-정지한 물체는 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가지고있다-이다. 일 때, 상대론적 운동 에너지는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 에너지와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이항근사나 테일러 전개의 앞 두 항만을 취할 때 얻을 수 있다. 즉, 따라서 낮은 속력에서 전체 에너지 는 정지 질량 에너지 더하기 뉴턴 운동 에너지로 나뉜다. 빛보다 매우 낮은 속력으로 운동할때(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운동), 첫 테일러 전개의 첫 두항이 지배적인 값을 차지한다. 테일러 전개의 다음항까지 근사를 하면 인데 여기서 맨 오른쪽 식의 두번째 항은 낮은 속력에서 매우 작다. 예를 들어, 10km/s로 운동하는 물체의 경우 두번째 항은 0.0417J/kg(첫번째 항은 50MJ/kg)이다. 100km/s 일때는 417J/kg(첫번째 항은 5GJ/kg)이다. 따라서 첫번째 항에 비해 매우 작은 값을 가짐을 알 수 있다. 상대론에서 운동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는 로 주어진다. 이 또한 테일러 전개를 할 수 있으며 첫번째 항이 뉴턴 역학에서의 표현과 일치한다. 양자 역학에서 운동 에너지와 같은 관측할 수 있는 물리량들은 연산자의 형태로 나타내어진다. 입자의 질량이 m 이라면 운동 에너지 연산자는 해밀토니안에서 하나의 항으로 나타나며 좀 더 기본적인 연산자인 운동량 연산자 를 사용하여 정의된다. 운동 에너지 연산자를 라고 하면, 이다. 이는 고전 역학에서 운동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 와 유사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슈뢰딩거의 묘사에서 는 각각의 위치 좌표에 대해 미분을 취한 형태인 이며, 따라서 이다.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 는 각 전자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의 합이다. 는 전자의 질량이며 는 i번째 전자에 대한 라플라시안이다. 양자 역학에서 밀도범함수 형식화(formailsm)에서는 오로지 전자 밀도에 대한 정보만 필요로한다. 다시 말해서, 보통 파동 함수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자 밀도 함수를 라고 하면,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는 알 수 없지만 1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는 바이츠제커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이다. 열을 가진 모든 입자 또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기체의 운동에너지는 몰수 n 과 절대온도 T 에 비례한다. 즉, 와 같다. 여기서 R 은 기체 상수이다. 탈출 속도 줄 (단위) 운동 에너지탄 평행축 정리 위치 에너지 옥스포드 영어사전 1998년 분류:동역학 분류:에너지
카타카나 (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음절 문자 중 하나이다. 히라가나와 함께 가나라고 부른다.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 쓰인다. 외래어, 외국인의 인명, 외국 지명 등의 고유 명사 의성어 생물, 광물의 원본명(일본명)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공식 문서(한자와 함께 사용됨) 1988년 8월 이전의 일본의 전보 및 2바이트 문자를 지원하지 않는 컴퓨터 환경 게임과 애니메이션, 만화의 경우 인간과 동떨어진 기계의 말투 가타카나와 해당하는 음을 갖는 한자의 일부분을 가져와 만들어진 것으로, 한문을 뜻으로 읽기 위해 헤이안 시대 초기에 발명되었다. 가타카나를 히라가나보다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라 일본 유아들이 가나를 배울 때 히라가나를 먼저 배운 뒤에 가타카나를 배우고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쓴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로마자 표기는 헵번 표기법을, 한글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의 어중/어말 표기법을 따랐다. (다만, 근현대에 추가된 가타카나에 대해서는 표기법에 정해진 한글 표기가 없다.) 붉은 색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들 또는 사용이 드문 글자들이다. ア a 아 イ i 이 ウ u 우 エ e 에 オ o 오 -ャ ya 야 -ュ yu 유 -ョ yo 요 カ ka 카 キ ki 키 ク ku 쿠 ケ ke 케 コ ko 코 キャ kya 캬 キュ kyu 큐 キョ kyo 쿄 ガ ga 가 ギ gi 기 グ gu 구 ゲ ge 게 ゴ go 고 ギャ gya 갸 ギュ gyu 규 ギョ gyo 교 サ sa 사 シ shi 시 ス su 스 セ se 세 ソ so 소 シャ sha 샤 シュ shu 슈 ショ sho 쇼 ザ za 자 ジ ji 지 ズ zu 즈 ゼ ze 제 ゾ zo 조 ジャ ja 자 ジュ ju 주 ジョ jo 조 タ ta 타 チ chi 치 ツ tsu 쓰 テ te 테 ト to 토 チャ cha 차 チュ chu 추 チョ cho 초 ダ da 다 ヂ ji 지 ヅ zu 즈 デ de 데 ド do 도 ヂャ ja 자 ヂュ ju 주 ヂョ jo 조 ナ na 나 ニ ni 니 ヌ nu 누 ネ ne 네 ノ no 노 ニャ nya 냐 ニュ nyu 뉴 ニョ nyo 뇨 ハ ha 하 ヒ hi 히 フ fu 후 ヘ he 헤 ホ ho 호 ヒャ hya 햐 ヒュ hyu 휴 ヒョ hyo 효 バ ba 바 ビ bi 비 ブ bu 부 ベ be 베 ボ bo 보 ビャ bya 뱌 ビュ byu 뷰 ビョ byo 뵤 パ pa 파 ピ pi 피 プ pu 푸 ペ pe 페 ポ po 포 ピャ pya 퍄 ピュ pyu 퓨 ピョ pyo 표 マ ma 마 ミ mi 미 ム mu 무 メ me 메 モ mo 모 ミャ mya 먀 ミュ myu 뮤 ミョ myo 묘 ヤ ya 야 ユ yu 유 ヨ yo 요 ラ ra 라 リ ri 리 ル ru 루 レ re 레 ロ ro 로 リャ rya 랴 リュ ryu 류 リョ ryo 료 ワ wa 와 ヰ wi 외 ヱ we 에 ヲ wo 오 ン n/nn -ㄴ 아래의 카타카나는 근현대에 들어 추가된 것으로, 주로 외국어 발음을 표기하는 데 사용한다. イェ ye 예 ウィ wi 위 ウェ we 웨 ヴァ/ヷ va 바 ヴィ/ヸ vi 비 ヴ vu 부 ヴェ/ヹ ve 베 ヴォ/ヺ vo 보 シェ she 셰 チェ che 체 ジェ ヂェ je 제 ティ ti 티 トゥ tu 투 テャ tya 탸 テュ tyu 튜 テョ tyo 툐 ディ di 디 ドゥ du 두 デャ dya 댜 デュ dyu 듀 デョ dyo 됴 ツァ tsa 싸 ツィ tsi 씨 ツェ tse 쎄 ツォ tso 쏘 ツャ tsya 쌰 ツュ tsyu 쓔 ツョ tsyo 쑈 ファ fa 화 フィ fi 휘 フェ fe 훼 フォ fo 호 フャ fya フュ fyu フョ fyo 카타카나는 만요가나에서 쓰던 한자의 일부 획을 따서 그 발음을 표시하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카)는 "加(더할 가)"의 왼쪽 부분을 따서 만들었다. 456px 히라가나 일본어 일본어 카타카나 - 50음도 카타카나 분류:한자파생문자 분류:일본어의 표기 체계
원은 모든 점에 대해서 국소적으로 직선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원은 1차원 다양체이다. 위상수학과 기하학에서, 다양체 (多樣體는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닮은 위상 공간이다. 즉, 국소적으로는 유클리드 공간과 구별할 수 없으나, 대역적으로 독특한 위상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더 정밀히 말하면, 한 n차원 다양체의 각 점이 n차원의 유클리드 공간에 대해 위상동형사상인 근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정밀한 정의에서 다양체는 n-다양체라고 불린다. 음이 아닌 정수 에 대하여, 차원 국소 유클리드 공간 (局所Euclid空間 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이다. 임의의 점 에 대하여, 과 위상동형인 근방 이 존재한다.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 에 대하여 다음 네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을 다양체 라고 한다. 는 파라콤팩트 공간이다. 는 거리화 가능 공간이다. 의 각 연결 성분은 제2 가산 공간이다. 의 각 연결 성분은 시그마-콤팩트 공간이다. 만약 어떤 위상 공간 가 차원 다양체이자 차원 다양체이며, 이라면 는 공집합이다. 모든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국소 콤팩트 공간이다. 제1 가산 공간이다. 국소 연결 공간이다. 모든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티호노프 공간이다. 모든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양체이다. 국소 유클리드 공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은 시그마-콤팩트 공간이다. 은 제2 가산 공간이다. 은 린델뢰프 공간이다. 모든 제2 가산 다양체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분해 가능 공간이다. 모든 파라콤팩트 분해 가능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시그마-콤팩트 공간이다. 린델뢰프 공간이다. 제2 가산 공간이다. 위상 공간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는 이산 공간이다. 는 0차원 다양체이다. 위상 공간 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의 모든 연결 성분은 원 또는 실수선 와 위상동형이다. 는 1차원 다양체이다. 다양체의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유클리드 공간 초구 열린 공 실수 사영 공간 이산 공간 공집합 다양체가 아닌 국소 유클리드 공간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긴 직선()은 연결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이지만, 파라콤팩트 공간이 아니다. 두 개의 원점을 갖는 직선 () 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를 주자. : :이에 대한 몫공간은 연결 제2 가산 국소 유클리드 공간이지만, 하우스도르프 공간이 아니다. 비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다양체는 (정의에 따라 파라콤팩트 공간이지만) 제2 가산 공간이 아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다양체에 대하여 제2 가산 공간인 것은 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것과 동치이다. 매끄러운 다양체 조각적 선형 다양체 리만 다양체 분류:미분위상수학 분류:기하학적 위상수학 분류:미분기하학
정주영 (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현대그룹을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전직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1940년대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 초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선출되었으며,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해 12월에 제14대 대선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을 추진하였다. 1998년 6월 16일 1차 소 500마리, 10월 27일 2차 소 5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소학교 졸업 사진(화살표로 지목된 사람)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 이 유일하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였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장부를 잘 쓸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았고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전쟁으로 인해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결국 가게를 정리하였다. 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중공업에도 진출하였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 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 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여, 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년 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에 선출되었고, 1970년대 중근동 지역 건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7년부터는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다.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올림픽의 서울특별시 유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1년 3월에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 1981년 11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통일국민당 로고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해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김영삼과의 경쟁구도 때문에 생긴 감정 때문인지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 다른 행적이 없다가, 이후 김대중정권을 적극 도우며 방북을 한다던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 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cows sent to North Korea.jpg|225px|섬네일|1998년 10월 27일 북으로 가고 있는 소 1000마리와 트럭 50대 그러나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의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1998년 6월 16일 통일소 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 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 을 성사시켜 그해 11월 18일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 한편 정주영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아내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1975년 경희대학교 명예공학 박사 1976년 충남대학교 명예경제학 박사 1982년 조지워싱턴 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1985년 연세대학교 명예경제학 박사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 박사 1990년 서강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1995년 고려대학교 명예철학 박사 1995년 존스홉킨스대학교 명예인문과학 박사 2000년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 박사 1940년 3월 합자회사 아도(Art)서비스 공장을 인수하다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 대표이사 1947년 5월 현대토건사를 설립 1950년 1월 자신이 운영하던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을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로 개편하고 대표이사 취임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 1969년 1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 회원, 바로 회장에 선출됨 1969년 12월 현대시멘트주식회사 설립, 71년에 공장으로 설립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중공업, 시멘트 등의 회사들을 한데 묶어 현대그룹으로 출범시키고 회장에 취임 1973년 12월 계열사로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 1974년 6월 한·영경제협력위원회가 새최될 때 한국측 위원장 피선 1975년 4월 현대미포조선주식회사 설립 1976년-1997년 한·아랍 친선협회 회장 피선 1977년-1987년 전경련의 13대 회장이 되다 1977년 7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 1979년-1980년 한·아프리카 친선 협회장이 되다 1981년 3월 88서울올림픽 유치 위원회 위원장 피선 1981년 11월 88서울올림픽 유치 확정, 곧바로 올림픽 조직 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다. 1982년-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 1982년-1987년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이 되다. 1983년 2월 계열사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 설립 1983년 5월 한국정보산업협회장에 추대되다. 1985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장에 재선하다 1987년 2월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 취임 1987년 5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 취임 1987년-1988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 취임 1989년-1991년 한·소(韓·蘇) 경제협회장 1992년 1월 통일국민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피선 1992년 2월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피선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당선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1993년 2월 통일국민당 탈당, 이어 국회의원직 사퇴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다. 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임되다. 1995년 자유민주연합 특임고문(1995년 4월 ~ 1995년 6월) 1998년 6월 1차 방북,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 통해 북한(한반도 북부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98년 10월 1차 방북 4개월만에 2차 방북, 소 501마리와 함께 판문점 통해 방북, 이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경협사업을 논의하다.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단지 개장에 참석하다. 2000년 병으로 입원했다가 퇴원, 자택에서 요양하였다. 2001년 3월21일 별세 1977년 명예 대영 제국 훈장 3등급(honorary CBE, 외국인대상 정원외 명예훈장) 1981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3등급) 1987년 한국경영대상 198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 1998년 IOC 훈장 1998년 노르웨이 왕실훈장 2001년 제5회 만해상 평화상 2008년 제4회 DMZ 평화상 대상 관계 이름 출생 사망 활동사항 비고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배우자 변중석 1921년 2007년 장남 정몽필 1934년 1982년 前 현대제철 회장 자부 이양자 1943년 1990년 -손녀 정은희 1971년 -손녀 정유희 1973년 차남 정몽구 1938년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자부 이정화 1939년 2009년 -손녀 정성이 1962년 이노션 고문 선두훈 대전선병원 이사장의 배우자 -손녀 정명이 1964년 현대커머셜 고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의 배우자 -손녀 정윤이 1969년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 前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의 前 배우자 -손자 정의선 1971년 현대자동차 부회장 현대가 장손 3남 정몽근 1942년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자부 우경숙 1951년 -손자 정지선 1972년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손자 정교선 1974년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 장녀 정경희 1944년 사위 정희영 1940년 4남 정몽우 1945년 1990년 前 현대알루미늄 회장 자부 이행자 1945년 -손자 정일선 1972년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차녀 구은희의 배우자 -손자 정문선 1974년 현대비앤지스틸 부사장 -손자 정대선 1977년 현대비앤지스틸 이사, 현대비에스앤씨 회장 노현정 前 KBS 아나운서의 배우자 5남 정몽헌 1948년 2003년 前 현대그룹 회장 자부 현정은 1955년 현대그룹 회장 -손녀 정지이 1976년 현대무벡스 전무 -손녀 정영이 1984년 -손자 정영선 1986년 6남 정몽준 1951년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현대중공업 회장, 현대중공업 고문 자부 김영명 1956년 김동조의 3녀 -손자 정기선 1981년 현대중공업 전무 -손녀 정남이 1983년 -손녀 정선이 1986년 -손자 정예선 1996년 7남 정몽윤 1955년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자부 김혜영 1961년 -손녀 정정이 1984년 -손자 정경선 1986년 8남 정몽일 1959년 현대기업금융 회장 자부 권준희 1961년 -손자 정현선 1989년 -손녀 정문이 1991년 차녀 정정인 (정인희) 1979년 사생아 3녀 정정임 1981년 사생아 남동생 정인영 1921년 2006년 前 한라그룹 명예회장 남동생 정순영 1923년 2004년 前 현대시멘트 명예회장, 前 성우그룹 명예회장 여동생 정희영 1925년 2015년 前 현대조선중공업 대표이사 남동생 정세영 1928년 2006년 前 현대산업개발 회장 남동생 정신영 1931년 1962년 남동생 정상영 1936년 KCC그룹 명예회장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991년 《이 땅에 태어나서》, 1998년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도서출판 솔, 2009) 정주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제삼기획, 2001) 카리스마 vs 카리스마 이병철 · 정주영 / 홍하상 著 / 한국경제신문사(정주영의 생애부분) 이종만 - 1995년 《제4공화국》 - MBC 드라마 백성현 - 2004년 《영웅시대》 - MBC 드라마 차인표 - 2004년 《영웅시대》 - MBC 최불암 - 2004년 《영웅시대》 - MBC 드라마 박종관 - 2005년 《제5공화국》 - MBC 드라마 남진복 - 2014년 《국제시장》 1992년 11월에는 MBC 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진행자의 한사람인 최병서가 사회 저명인사를 흉내, 풍자할 때 그의 성대 모사와 함께 풍자를 하기도 했다. 1992년 12월에도 14대 대통령 선거를 전에 두고 다른 대통령후보자들과 함께 최병서의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했다. 현대그룹 회장으로 재직시 아들들과 함께 평소에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본사까지 걸어서 출근하였다. 평소에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매일 아침 6시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아침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주로 미역국을 준비했으며 이 때문에 현대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2004년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영웅시대》가 제작되었다.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2대 대선 대통령 선거인 (서울 종로 1구) 12대 무소속 27.3% 5,785표 1위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14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4대 통일국민당 17.4% 3,574,419표 전국구 3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14대 대선 대통령 14대 통일국민당 16.3% 3,880,067표 3위 낙선 분류:1915년 태어남 분류:하동 정씨 분류:통천군 출신 분류: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후보 분류:현대 그룹 분류:현대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상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 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분류:개신교도 이탈자 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분류:대학 설립자 분류:울산대학교 분류:통일국민당 (대한민국) 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 분류:햇볕정책 분류:2001년 죽음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분류:명예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마틴 가드너 마틴 가드너 (Martin Gardner, 1914년 10월 21일 ~ 2010년 5월 22일)는 미국의 과학 저술가이다. 특히 유희수학(recreational mathematics) 분야의 저술로 이름이 높다. 오클라호마주 털사 태생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유희수학(recreational mathematics) 분야를 집대성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수학을 비롯한 과학뿐 아니라 마술, 문학(그는 루이스 캐롤의 전문가이다), 유사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져 6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제임스 랜디와 함께 회의주의 운동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미국 노스캐럴라이나 주의 헨더슨빌(Hendersonville)에 만년을 보내다가 2010년 5월 22일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노먼(Norman)에서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미국의 대중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1956년부터 1981년까지 수학 게임(Mathematical Games) 컬럼을 연재하였다. 그가 연재를 그만둔 후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컬럼을 물려받았는데, 마틴 가드너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수학 게임 의 애너그램인 Metamagical Themas 를 자신의 컬럼 제목으로 정하였다. 1993년이래 그의 유희수학에 대해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부정기적으로 모여 Gathering for Gardner (G4G)란 콘퍼런스를 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컬럼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주제들을 대중에 소개하였다. 플렉사곤(Flexagon) 마틴 가드너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에 처음 쓴 글이다. (1956년 12월호) 존 호턴 콘웨이의 라이프 게임 폴리오미노 소마 큐브 에셔의 작품 프랙털 65권의 책을 썼으며, 초정상주장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the Scientific Investigation of Claims of the Paranormal)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이비과학을 반박하는 책과 글을 다수 발표했다. Mathematical Games The Colossal Book of Mathematics Classic Puzzles, Paradoxes, and Problems (2001; W.W. Norton & Company; ) 〈양손잡이 자연세계〉, 과학세대 옮김, 까치 〈이야기 파라독스〉, 사계절 〈아하〉, 사계절 더 애너테이티드 앨리스, 루이스 캐럴이 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주석판 The Last Recreations 〈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원제 Did Adam and Eve Have Navels? Debunking Pseudoscience) SCIENCE GOOD, BAD AND BOGUS Fads and Fallacies in the Name of Science Relativity Simply Explained Mathematical Puzzles and Diversions (1959; Pelican, UK ) More Mathematical Puzzles and Diversions (1961; Pelican, UK ) Further Mathematical Diversions (1969; Pelican, UK ) Mathematical Carnival (1975; Pelican, UK ) Mathematical Circus (1979; Pelican, UK ) many others... please add them here... 피에트 하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구공동설 제임스 랜디 초정상주장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the Scientific Investigation of Claims of the Paranormal) Notes on Martin Gardner An Interview with Martin Gardner Short Martin Gardner Bio About Gathering for Gardner 분류:1914년 태어남 분류:2010년 죽음 분류:미국의 수학자 분류:미국의 과학 저술가 분류:미국의 문학 평론가 분류:미국의 언론인 분류:미국의 마술사 분류:게임 이론가 분류:퍼즐 디자이너 분류:대체의학 비판자 분류:이신론자 분류:미국 해군 군인 분류:오클라호마주 출신 분류:시카고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석학회원 분류: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21세기 수학자 분류:필명 분류:노먼 (오클라호마주) 출신
프리먼 존 다이슨 (, 1923년 12월 15일 ~ ) 박사는 영국 태생의 미국인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다. 프리먼 다이슨은 1923년 12월 15일 영국 버크셔주 크로손()에서 태어났다. 영국군에 입대하여제2차 세계 대전중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에서 분석가로 일했으며, 전쟁 후 미국의 프린스턴으로 이주했다. 전쟁 후 다이슨은 리처드 파인먼의 경로적분을 이용한 설명과 줄리언 슈윙거와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설명이 서로 같은 이론인 양자 전기역학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는 핵추진기를 이용한 우주비행 계획인 오리온 계획에 참여하였다. 시험 기종은 보통의 폭발물을 사용했으나, 우주에서의 핵무기 사용 금지 조약에 의해 계획은 중도에 파기됐다. 2003년 현재, 다이슨은 제러드 오닐()이 설립한 우주학 연구소() 소장이다. 1936년~1941년 윈체스터 칼리지 (졸업) 1941년~194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사) 코넬 대학교 (박사과정) 다이슨은 한 논문에서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항성계의 태양을 완벽히 둘러싸 항성에서 나오는 복사 에너지를 완전히 사용하고 바깥쪽으로는 적외선을 복사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르면 밤하늘에서 적외선을 복사하는 거대한 물체를 찾아보는 것이 외계 문명체를 탐사하는 SETI 계획의 한 방법이 된다. 다이슨은 복사 차폐물로 자그마한 운석들의 구름을 생각했지만, 과학 소설에선 이어진 고체 구조물이 선호되어 왔다. 이러한 상상 속의 구조를 종종 다이슨 스피어라고 부른다. 다이슨은 다이슨 나무라는 것도 제안해 냈는데, 이는 유전자 조작으로 혜성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다이슨은 혜성을 조작하여 내부에 생물이 숨쉴 수 있는 대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며, 태양계 밖으로 인간을 보낼 수 있는 서식지를 조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기술과 과학, 그리고 미래 사회에 대한 성찰을 내용으로 하는 책을 몇 권 출판했다. 《상상의 세계》 (Imagined Worlds) 《에로스에서 가이아까지》 (From Eros to Gaia) (원제 ) 딸 에스더 다이슨(Esther Dyson)은 유명한 기업가이자 투자자이다. 아들 조지 다이슨은 역사가로, 과학사를 다룬다. (英) 프리먼 다이슨의 홈페이지 (英) 우주 연구 재단 (Space Studies Institute) (英) 와이어드Wired 매거진과의 인터뷰 분류:1923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수학자 분류:미국의 물리학자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핵물리학자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울프상 물리학 부문 수상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 분류:코넬 대학교 동문 분류:듀크 대학교 교수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반국민주의자 분류:잉글랜드의 회고록 작가 분류:잉글랜드의 수학자 분류:21세기 수학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동문
만프레트 아이겐 (, 1927년 5월 9일 ~ 2019년 2월 6일)은 독일의 생물리학자이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괴팅겐의 막스 플랑크 생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1967년에는 매우 짧은 간격의 에너지 펄스로 유도된 극히 빠른 화학 반응에 대한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로널드 조지 레이퍼드 노리시, 조지 포터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영국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1967 - Manfred Eigen - 노벨 재단 분류:1927년 태어남 분류:2019년 죽음 분류:독일의 화학자 분류:노벨 화학상 수상자 분류:독일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 분류:물리화학자 분류:생물물리학자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교황청 과학원의 회원 분류:보훔 출신 분류: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 수훈자 분류:독일의 무신론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린 마굴리스 (Lynn Margulis, 1938년 3월 5일 - 2011년 11월 22일)는 미국의 생물학자로서 매사추세츠 대학 앰허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대학교의 지구과학과 교수이다. 세포 생물학과 미생물의 진화 연구,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굴리스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국의 지구생물학과 화학 진화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NASA의 지구생물학에 관한 실험들을 지도하였다. 마굴리스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의 기원을 진핵 세포(eukryotic cell)로 들어간 외부조직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endosymbiosis) 이러한 공생이론 같은 충격적인 가설로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100여 종의 논문과 더불어 10여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 주창한 가이아 이론을 지지하며, 가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한 칼 세이건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도리언 세이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공생자 행성 (SYMBIOTIC PLANET A New Look At Evolution) 사이언스북스, 사이언스 마스터 시리즈 15,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 지호, 섹스란 무엇인가? (What is Sex?) 지호, 분류:1938년 태어남 분류:2011년 죽음 분류:시카고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의 생물학자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 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동문 분류:보스턴 대학교 교수 분류:매사추세츠 대학교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공생 분류:유대계 미국인 분류:진화생물학자 분류:이론생물학자 분류:20세기 동물학자 분류:21세기 동물학자 분류:20세기 생물학자 분류:21세기 생물학자 분류:칼 세이건
사람 또는 호모 사피엔스 ( )는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과의 영장류 동물이다. 지구상의 사람을 통틀어 인류 (人類)라고도 한다. 사람은 스스로 하고싶은 대로 마음 껏 사유, 언어 사용, 자기반성, 문제 해결을 할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인간은 개인이 자신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나 환경의 영향에 따라 자신을 통합화 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지적, 심리적 능력과 함께, 직립 보행을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팔을 이용해 다른 종보다 훨씬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2013년 12월 기준으로 약 72억 명이다. 사람은 현재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대륙에 살고 있으며, 이 중 약 85%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프로-유라시아, 구세계)에 살고 있다. 나머지 15%만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신세계)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고등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써 자기표현, 생각의 교환, 조직화를 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비롯한 의사소통 체계를 이용하는 데 능숙하다. 사람은 가족에서 국가까지 협동·경쟁하는 많은 집단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 구조를 만들어 냈고 사회 조직 내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성이나 이름을 가지고 국가에 따라서는 계급을 가진다. 사람끼리의 사회적 상호 작용은 인간 사회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전통, 의식, 윤리, 가치, 사회 규범, 법을 만들었다. 사람의 미를 감상하는 능력과 자기표현의 욕망이 결합하여 예술, 글, 문학, 음악과 같은 문화적 혁신을 이끌었다. 사람은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영향을 미치려는 욕망 때문에 과학, 철학, 신화, 종교를 통해 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고 다루려고 한다. 이 자연스러운 호기심은 도구와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사람은 스스로 불을 만들고, 요리하고, 옷을 입으며, 수많은 기술을 다루고 발전시키는 유일한 종이 되었다. 사람은 이러한 기술과 지식을 교육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아주 신기하게 물려준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동한 단일 종이 전 세계로 이주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인류가 진화했다는 다지역 기원설 등이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같은 여러 증거를 통해 학계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한 여성과 여러 남성이 짝을 이루는 일처다부제 등의 방식이 있으며 여러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다부다처제의 경우도 나타난다.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언어와 문자를 이용한다.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6천여개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사정으로 점차 쓰이지 않는 언어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문자는 적어도 5천년 전부터 쓰여 왔다. 1977년 보이저 1호에 실려 우주로 보내진 보이저 금제 음반에는 115개의 그림과 파도, 바람, 천둥, 새와 고래의 노래와 같은 자연의 소리,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의 음악, 55개의 언어로 된 인삿말이 실려 있다. 이는 외계의 생명체에게 보내는 인간에 대한 안내서다. 사람의 뼈 키(신장)는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 성인의 경우 보통 남자는 160 cm~190 cm 여자는 145 cm~170 cm 정도이다. 직립보행으로 이동하며 손을 사용하여 물건을 이용하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뇌의 무게는 태어날 때는 약 300g이고 만 5세 무렵에 성인의 뇌 무게인 1300~1400g에 이른다. 성인 기준으로 몸무게에 대한 뇌 무게의 비율은 약 2%이다. 털은 퇴화되어, 피부 부위에 따라 털이 없거나 매우 짧아 피부를 완전히 덮지 못한다. 단, 머리 윗부분, 겨드랑이, 생식기 주위에는 각각 머리카락, 겨드랑이 털, 음모가 나 있는데 이 털은 피부를 덮을 만큼 길고 많다. 머리카락은 어린이 시기부터 있으나, 겨드랑이 털과 음모는 이차성징 이후로 자란다. 또한, 이차성징 이후로 남자에 한해서 입술과 턱 주변에 수염이 난다. 털의 색깔은 검정, 갈색, 금색, 붉은색 등으로 다양하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이르면 점차 털이 탈색되어 흰색에 가깝게 변한다. 인간의 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며, 성행위를 통해 생식한다. 성행위를 통해 수정된 배아는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임신기간을 거친다. 보통 한 번에 하나의 태아(胎兒)를 임신하며, 드물게 둘 이상의 태아를 동시에 임신하기도 하는데, 이를 쌍둥이(일명:쌍생아 (雙生兒)로, 일란성과 이란성 쌍생아로 나뉜다.)라고 한다. 임신기간은 38주 (266일)로 이 기간을 지난 태아는 출산과정을 거쳐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영아 (嬰兒)가 된다. 영아기의 사람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하며, 젖을 떼는 시기는 개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략 생후 1년에서 6년 사이의 사람을 유아(幼兒)라고 하며, 이 시기에 기초적인 언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따라 그 나라의 모국어부터 습득한다.) 습득이 이루어진다. 이후 대략 만 20세까지는 그 초기를 어린이 또는 소년, 후기를 청소년이라고 하며, 이 시기에 대부분의 외형적 성장이 끝난다. 또한 이 시기에 이차성징이 일어나 남성과 여성의 외형적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며, 초경이나 사정, 몽정을 경험하는 등 생식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후 대략 만 20세에서 만 30세 사이를 청년, 대략 만 30세에서 만 50세 사이를 장년, 대략 만 50세에서 만 60세 사이를 중년, 만 60세를 넘어서면 노년이라고 하나 이러한 시기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장이 끝난 사람은 청년기 이후로 조금씩 노화되기 시작한다. 중년에서 노년 정도가 되면 노화의 결과로 신장(身長) 축소, 각종 감각 기관 둔감, 생식 능력 감퇴 등의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생식 능력의 경우, 남성은 늦게는 70세 이후까지도 생식이 가능하나 청년기를 정점으로 고환에서 생성되는 정자의 수와 운동능력이 점차 감소하기 때문에 임신 성공 가능성도 같이 떨어지며, 여성은 중년기 (개인차가 있으나 대개 40~50세이다.)에 폐경이 일어나 난자의 배란이 중지되므로 이후 생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70세 정도(바누아투, 인도네시아 등 일부 개발 도상 국가와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를 넘는다.)이며 보통은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길다. 사람은 주행성 동물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잔다. 어릴 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 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자며 성인은 하루에 대략 6시간 ~ 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하며, 사람에 따라 (군인, 경찰관, 소방관, 경비원, 의사, 간호사, 야간 학교 재학생, 올빼미족 등)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 이 3가지를 필요로 하고, 이 외에도 미성년자에게는 교육까지 필요하다. 인체 * 피부색 * 모발 색상 * 눈 색깔 사람상과 인종 분류 * 코카서스 인종 (백인) * 몽골 인종 (황색인종) * 종색인종 (Brown (racial classification)) * 니그로 인종 (흑인) * (식인종) 종족 인류의 진화 문명 충적세 (Holocene Era) MNSU 고고학 정보 호모 파피루스 분류:유인원 분류:1758년 기재된 동물 분류:게놈 해독이 완료된 동물 분류:유독포유류
아널드 알로이스 슈워제네거 (, 영어 발음 아널드 앨로이스 시워처네거, 독일어 발음 아르놀트 알로이스 슈바르체네거, , 1947년 7월 30일 ~ )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의 배우, 보디빌더, 정치인이다. 배우가 되기 전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보디빌더로 활동했으며, 38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이기도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보디빌더로서는 전설적인 존재이며 그의 이름 자체가 근육질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탈에서, 오스트리아 헌병 부사관 출신으로 지역 경찰서장이었던 구스타프 슈바르체네거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961년 보디빌더가 됐으며 1970년까지 미스터 유니버스 1위 5회,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미스터 올림피아 1위 7회 등 역대 최다 우승 타이틀을 얻었다. 1968년 미국 이민 후 1983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불리던 슈워제네거는 1973년 기네스북에 지구상에서 상체근육이 가장 잘 발달된 사람 에 기록되기도했다. 어렸을 때 보디빌더 출신 영화 배우 레그 파크(Reg Park)가 헤라클레스 영화에 나오는 걸 보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보디빌더를 시작했다고한다. 1969년 로 데뷔했으나 초기 10여년간은 배우로서는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코난》(1982), (1984)로 할리우드에서 인기배우로 자리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1988년, 1990년, 1991년, 1994년, 1996년, 1997년, 2000년, 2003년 헐리우드 머니메이킹 1위 에 오르기도 했다 (2011년까지의 주지사 임기중에는 영화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1990년엔 최초의 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 , 이에 그치지않고 출연료가 끝없이 오르고 올라 1996년엔 최초의 2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 , 2003년엔 편당 3천 만 달러에 전 세계 흥행수익의 20%를 받아 최초의 3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 가 되어 본인 스스로가 최고 기록인 자신의 기록을 또다시 갱신하는 등 헐리우드에서 수 십년간 1인자의 위치를 지켜왔다. (1991)는 슈워제네거에게 최고의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로 꼽힌다. 액션 장르에만 만족하지않고 (1988), (1990), (1996)등의 코미디와 (1997)의 악역에도 도전하여 모두 크게 성공하여 배우로서의 연기의 폭을 넓혔다. 원래 슈워제네거는 레드 소냐를 촬영하면서 만난 브리짓 닐센과 연인 사이였으나 평소 슈워제네거는 미국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브리짓 닐센과 결별하고 1986년 존 F. 케네디의 조카이자 NBC의 유명 언론인이자 기자인 민주당파 마리아 슈라이버와 9년 동안 연애 끝에 결혼했다. 슈워제네거는 사업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다. 198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주어지는 보디빌딩 대회 아널드 클래식 을 설립하였다. 오래전부터 공화당 지지파였는데 1990년 조지 H 부시로부터 문화 체육관광부 의장 에 직접 임명되어 4년간의 임기를 지내며 미국 전국 51개주를 철통 호위를 받으며 직접 순회하기도했다. 1991년 1200만 달러 짜리 자가용 제트기를 받기도 했다. 1991년엔 실베스터 스탤론, 브루스 윌리스, 데미 무어 등과 Planet Hollywood 라는 체인 레스토랑을 설립했다. 1992년엔 자선단체 After School All Stars 설립했다.. 1997년 대형 심장 수술을 받기도 했다. 2003년10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2006년 11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민주당 후보를 56% 대 39%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영화로 축적한 부(富) 때문에 주지사 임기중 매년 연봉인 17만5천달러를 받지 않고 모두 사회에 전면 기부하기도 했다.2004년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타임지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 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2008년엔 (1984)가 역대 최고의 영화 top 10 에 선정되었으며, 美의회 도서관에 영구 보존되기 시작했다. 2008년 미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을 공식지지했다. 슈워제네거는 2010년 12월 17일 LA Times 인터뷰에서, 퇴임후 오바마 행정부에 입각할 의사도 있다고 말했다. 8년간의 주지사 임기(2003.11~2011.1) 중에는 몇몇 영화의 카메오 출연을 제외하곤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2009)를 비롯하여 모든 영화의 제의를 거절해왔다. 2011년 1월 4일 주지사에서 퇴임하였고, 다시 헐리우드 복귀를 공식 선언했는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5탄과 6탄을 비롯하여 30여편의 제의를 받아 기나긴 공백과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해 5월 일명 가정부 스캔들 로 이혼 소송제기를 받았는데 재산이 7500억원 정도(2012년 기준)로 이는 이전까지의 역대 최고의 위자료 액수였던 마이클 조던의 기록(2800억원)도 훨씬 뛰어넘는 신기록이였으며, 헐리우드 최고의 갑부로 드러났다. 첫 컴백작 (2013) 촬영에 앞서 친구 실베스터 스탤론의 요청에 따라 (2012)에 카메오로 4일간 촬영했는데 그 대가로 1천만달러(2012년 기준 약 120억원)를 받았다. 2012년 8월에는 스스로 2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남가주대 슈워제네거국가 및 국제 정책 연구소" 를 설립하여 고문위원회 회장과 교수가 되었다. 같은해 8월, The Sun 지는 "최고의 액션 히어로는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고, 슈워제네거가 최고의 액션 히어로 에 뽑혔다. 2013년 1월 개봉의 김지운 감독의 헐리우드 진출작으로도 화제가 됐던 (2013)와 실베스터 스탤론과 공동 주연을 맡은 (2013) 등을 시작으로 다시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 본격 복귀하였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새로운 리부트 3부작의 첫번째 영화 (2015)에 주인공 터미네이터로 돌아오는데, 이는 지난 2003년 개봉한 블록버스터 (2003) 이후 12년 만이다. 2015년 1월 26일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차지한다. 감독 * (1989) * > (1992) 제작 * (1993) * (2000) 주연작 * (1969) * (1977) * (1982) * (1984) * (1984) * (1985) * (1985) * (1986) * (1987) * (1987) * (1988) * (1988) * (1990) * (1990) * (1991) * (1993) * (1994) * (1994) * (1996) * (1996) * (1996) * (1997) * (1999) * (2000) * (2002) * (2003) * (2013) * (2013) * (2014) * (2014) * (2015) * (????) * (????) * (????) * (????) 조연작 * (1973) * (1976) * (1977) * (1979) * (1980) 단역작 * (1974) * (1977) * (1979) * (1980) * (2002) * (2003) 카메오 * (1989) * (1992) * (2001) * (2003) * (2004) * (2005) * (2010) * (2012) * (2014)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2003년 재선거 캘리포니아 주지사 38대 공화당 48.6% 4,206,284표 1위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2006년 선거 캘리포니아 주지사 38대 공화당 55.88% 4,850,157표 1위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분류:1947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미국의 영화 감독 분류:미국의 영화 제작자 분류:미국의 기업인 분류:미국의 투자가 분류:미국의 보디빌더 분류:미국의 자서전 작가 분류: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미국의 자선가 분류:오스트리아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오스트리아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오스트리아의 영화 감독 분류:오스트리아의 영화 프로듀서 분류:오스트리아의 기업인 분류:오스트리아의 투자가 분류:오스트리아의 보디빌더 분류:오스트리아의 자서전 작가 분류: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캘리포니아주지사 분류:그라츠 출신 분류:오스트리아계 미국인 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사람 분류:케네디가 분류: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분류:미국의 보수주의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自由文書使用許可書,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GNU FDL, GFDL , GNU FDL )는 일종의 자유문서를 위한 저작권 라이선스의 한 형태로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 Free Software Foundation )에서 GNU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착안되었다. GFDL에 따라 만든 문서는 자유롭게 복사, 수정, 재배포가 가능하며, 2차 저작물 역시 GFDL을 따라야 한다. GFDL을 따르는 문서는 기본적으로 무료로 배포되지만, 대량으로 제작된 경우 유료로 판매될 수도 있다. 현재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에 따라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가장 큰 프로젝트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바로 위키백과다. 위키백과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L)와 GNU 자유 문서(GFDL)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 사용 허가서는 소프트웨어의 문서와 다른 이와 유사한 지침서를 대상으로 한다. 이 허가서에 따르는 모든 문서의 복사 및 변경은 역시 이 사용 허가서의 규준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복사 및 변경된 소프트웨어나 자료는 다시 변경되거나 배포 및 판매될 수 있다.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1999년 말 의견 수렴을 위한 초안이 발표되었으며, 검토와 수정을 거쳐 1.1 버전이 2000년 3월에, 1.2 버전이 2002년 11월에, 1.3 버전이 2008년 11월 3일에 공표되었다. 현재의 최종 버전은 1.3이다. 여기서의 호환 이라는 의미는 다른 라이선스의 저작물을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는 저작물과 섞어 쓸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두 허가서가 비슷한 저작권 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GFDL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와 호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1.3판에서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고 있는 특정 웹 사이트의 저작권을 CC-BY-SA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 예외 조항은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GFDL 기반의 다중 저자 협력 프로젝트 사이트 (Massive Multiauthor Collaboration Site)에서 CC-BY-SA-3.0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저작물은 위키와 같은 대규모 다중 저자 협력 프로젝트에서 생성되어야 한다. 다중 저자 협력 프로젝트에 출판된 외부 저작물은 반드시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1.3으로 배포되거나 이전 버전으로 배포되고 (이후의 어떠한 버전으로도 배포됩니다) 라는 표시가 있어야 한다. 또한 어떠한 외부 표지나 변경 불가 부분이 없어야 한다. 외부 저작물의 경우 2008년 11월 1일 이전에 프로젝트에 올라온 부분만 라이선스가 변경될 수 있다. 라이선스의 재허용을 허가하는 11장의 조항은 2009년 8월 1일 이후에는 효력이 상실된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와 호환되지 않는다.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GNU GPL) 자유문서 (Free Contents)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공정 이용 (Fair Use) 아래 목록들 중 몇 가지는 GNU FDL과는 별개로 발전해 온 것들이다. 그리고 몇 가지는 GNU FDL의 결함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Creative Commons) "CC BY-SA" 라이선스 디자인 사이언스 라이선스 프리 아트 라이선스 FreeBSD 문서 라이선스 오픈 콘텐츠 라이선스 오픈 게이밍 라이선스 Open Publication License WTFPL 위키백과(위키여행,위키뉴스는 제외)를 포함하는 위키미디어 재단의 프로젝트 대부분 - 2009년 6월 15일, 제11절에 따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CC-BY-SA 라이센스와 GFDL 아래 위키 콘텐츠를 이중 라이선스(dual-license)한다. Anarchist FAQ Citizendium - 출처가 위키피디아인 기사는 GFDL을 사용한다. 자유 온라인 컴퓨팅 사전 Last.fm - 음악가 기술정보는 GFDL로 기술됨. Marxists Internet Archive PlanetMath 로제타 코드 소스워치 기업 아키텍처 프리임워크 TRAK를 정의하는 사양서로 GFDL로 배포. 버지니아 코먼웰스 대학교 수학과 Thomas W. Judson 교수가 저술한 Abstract Algebra 를 포함한 수학 교과서는 GFDL로 배포됨. Baseball-Reference BR 불펜, 공개 사용자 기여 야구 위키. GNU FDL 원문 * GNU FDL 한국어 번역문 분류:GNU 프로젝트 분류:카피레프트 분류:자유 저작물 사용권
GNU (, 그누)는 운영 체제의 하나이자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모음집이다. GNU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GNU 프로젝트의 GPL로 라이선스된다. GNU는 "GNU s Not Unix!" (GNU는 유닉스가 아니다!)의 재귀 약자이며, 이렇게 선정된 이유는 GNU의 디자인이 유닉스 계열이지만 자유 소프트웨어인 점과 유닉스 코드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을 두려는 것이다. GNU 프로젝트는운영 체제 커널, GNU HURD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에서 본래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GNU가 아닌 커널(가장 유명한 것으로 리눅스)은 GNU 소프트웨어와 함께 사용할 수도 있다. 즉, 허드(Hurd) 커널은 아직 운영용으로 준비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어떻게 GNU 시스템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GNU 소프트웨어와 리눅스 커널의 결합은 리눅스(또는 GNU/리눅스)로 알려져 있다. Stallman - Fête de l Humanité 2014 - 010.jpg|섬네일|위오른쪽|GNU 프로젝트의 설립자 리처드 스톨먼 프로젝트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GNU를 "사회에 대한 기술적 수단 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Lawrence Lessig는 스톨먼의 책 《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사회》 제2판에서 스톨먼은 소프트웨어의 사회적 관념과 어떻게 자유 소프트웨어가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조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고 언급하였다. 오늘날 GNU의 안정판은 리눅스 커널이 포함된 GNU 패키지로 구성되어 동작하며 기능적인 유닉스 계열 시스템을 만들어준다. GNU 프로젝트는 이를 GNU/리눅스로 부르며, 제공되는 기능들은 다음과 같다 GNU 패키지 (GNU 허드 제외) 리눅스 커널 비 GNU 프로그램들 GNU 자유 시스템 배포 가이드라인(GNU Free System Distribution Guidelines, GNU FSDG)은 GNU/리눅스 배포판과 같은 설치 가능한 시스템 배포판이 자유적인 특성이 있고 배포판 개발자들이 배포판들을 해당 특성에 맞출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 배포 약속이다. GNU 프로젝트가 GNU 운영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을때,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결과물 카테고리인 자유 소프트웨어 디렉터리에서 보이는 것과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추구하고 있는 바가 운영 체제의 핵심인 커널 즉, GNU 허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소프트웨어적인 면과 하드웨어적인 면을 통해 온전한 자유로운 운영 체제를 만드는 것이 GNU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한다면, GNU Hurd는 하드웨어를 통괄 제어하는 GNU 운영 체제의 커널이 되겠다. GNU 프로젝트 GNU/리눅스 GPL 자유 소프트웨어 유닉스 GNU 공식 홈페이지 GNU Korea 홈페이지 스톨먼의 최초 선언 스톨먼 자신의 프로젝트와 그 역사에 대한 긴 설명 The Free Universal Encyclopedia and Learning Resource , GNU 백과사전에 대한 스톨먼의 글 분류:GNU 프로젝트 소프트웨어 분류:유닉스 계열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
셀빅 (CellVic)은 대한민국에서 생산했던 PDA의 일종이며, jTel에서 개발하였다. 후일 코오롱이 인수한 후 Cellvic으로 개명되었다. jTel은 팜 파일럿을 벤치마크하여 한국 내 환경에 맞게 자체 O/S를 제작해 한국 내 최초의 PDA OS로서 의의를 가졌다. jTel은 1년에 4회의 애플리케이션 공모전을 통하여 애플리케이션 확보에 박차를 기했으며, 개인개발자에 대한 지원과 이에 힘입은 개인개발자들의 노력으로 다수의 애플리케이션을 확보하였다. 또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대표적인 커뮤니티로는 CoolView(후에 상표등록 문제로 셀북으로 개명됨) 제작자인 연승훈씨가 운영하는 kcug.net(현재 운영중단)을 들 수 있다. 셀빅은 팜 파일럿에 비하여 대한민국 기업의 제품인만큼 한글 지원은 원활하였다. 세계 최소, 최경량 PDA인 CellVic i부터 휴대폰과 카메라 모듈탑재가 가능한 CellVic XG, 더 발전된 형태로서 스마트 폰 mycube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으나, 코오롱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 PocketPC를 탑재한 스마트폰의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끝내 2004년부터 더 이상 후속 지원을 중단하였다. 셀빅 회사 홈페이지 - 접속불가 셀빅 이용자 모임 홈페이지 - 현재 www.kcug.net은 계정만료되어 접속불가 상태이다 다시만들어진 셀빅 이용자 홈페이지 - KCUG.NET이 폐쇄되어 부산사용자들이 모여 다시만들었다 (접속불가) 셀빅 XG/마이큐브V100 자료다운로드 - 현재 폐쇄된 상태이다. 분류:PDA
실험 도해 밀러 실험 혹은 밀러-유리 실험 (Miller-Urey experiment)은 초기 지구의 가상적인 환경을 실험실에서 만들어, 그 조건에서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가 일어나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실험이다. (오파린과 홀데인의 가설에 따르면, 원시 지구는 무기 화합물이 유기화합물로 합성되기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유리-밀러 실험은 이 가설을 검증하려 했다.) 이 실험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전적인 실험으로 여겨지며, 1953년 시카고 대학의 스탠리 밀러와 해럴드 클레이턴 유리가 처음 실행했다. 실험에는 수증기(H2O), 메테인 (CH4), 암모니아 (NH3), 수소 (H2)가 사용된다. 화학물질들은 살균된 유리관과 플라스크로 이루어진 루프형의 실험기구 안에 밀봉된다. 실험기구 중에 플라스크 하나에는 물이 반쯤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한 쌍의 전극이 들어있다. 물은 가열하여 기화시키고, 수증기가 포함된 내부 공기중에 불꽃을 튀겨, 자연의 번개를 흉내낸다. 그리고, 다시 공기는 식혀져서 수증기는 물이 되고 처음 플라스크로 돌아가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일주일 동안 계속 실험을 행한 결과, 유리와 밀러는 10 ~ 15%의 탄소가 유기물질로 합성되어 있는 것을 관찰하였다. 더욱이, 2%의 탄소는 살아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에 몇 종류의 형태라는 결과도 얻었다. 결론적으로 밀러는 원시대기의 조성을 기초하여 원시지구의 모형을 만들고 결과 반응을 조사하는 것이 연구의 테마였다. 생성된 분자들은 완전한 살아있는 생화학적 시스템을 이루기에는 상대적으로 모자란 단순한 유기물질이었다. 그러나, 실험은 이미 있는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고,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립시켰다. # 원시 대기 환경이 수소, 메테인, 암모니아 등 환원성 기체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최근 증거들과 일치하며, 초기 지구가 약하게 환원적인 대기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밀러-유리의 실험이 올바른 환경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초기 지구의 대기에 충분한 산소가 없었음을 나타내는 다양한 증거들이 있으며, 이는 원시 대기의 환원성을 더욱 확실히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현대에는 이러한 연구가 원시 생명의 탄생의 모델을 연구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 2014년 RNA합성 실험으로, 밀러-유리의 실험 결과는 다시한번 입증되었으며, 아미노산 뿐 아닌 다른 유기물이 합성되는 것도 확인되었다. # 밀러의 실험은 생명체에서 사용되는 20개 아미노산중에서 13개를 생성하였으며,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이 형성되는 과정을 최초로 알아낸데에 의의가 있다. #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하여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되는 과정을 제공했다. 이는 번개보다 에너지가 적지만 그보다 적은 에너지로도 충분히 아미노산이 합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이것이 자연환경에서도 충분히 재현 가능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탠리 밀러는 이후에 원시대기에 관한 연구를 좀더 진행하여,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하였으며, 사망시까지 연구에 손을 놓지 않았다. 밀러가 사망한 뒤 그의 제자이자 오랜 동료였던 제프리 베다 교수는 밀러의 유품에서 1950년대 실험에서 얻은 물질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담긴 박스를 발견했다. 최신 분석 장비로 이 물질의 조성을 분석한 결과 당시 밀러가 확인했던 것보다 더 많은 유기분자(아미노산 22종과 아민 5종)가 들어있음을 확인해 2008년 사이언스 에 발표했다. 2008년, 제프리 베다 교수는 화산 분출의 구조와 스파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더 많은 아미노산이 발견됨을 보여주었다. 이 실험에는 고출력의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와 질량분석기등이 이용되었다.그 결과 22가지 아미노산, 5 종류의 아민을 비롯한 수많은 수산화물이 생성되었다. 이 실험은 2010년에 황화수소 스파크 실험으로 재현되었으며, 발견된 아미노산은 아래에 표기한다. 발견된 아미노산은 으로 표기한다. 발견된 아미노산 1952년 밀러 실험 2008년 화산스파크 실험 2010년 황화수소 스파크 실험 글리신 (Glycine) 알파 알라닌 (α-Alanine) 베타 알라닌 (β-Alanine) 아스파르트산 알파 아미노낙산 세린 이소세린 베타 아미노낙산 감마 아미노낙산 알파 아미노이소낙산 베타 아미노이소낙산 발린 이소발린 글루탐산 노르발린 알파 아미노지방산 호모세린 2-메틸 이소류신 베타 수산화 아스파르트산 오르니틴 2-메틸 글루탐산 페닐알라닌 호모시스테인산 S-메틸 시스테인 메티오닌 황산 메티오닌 황화 메티오닌 류신 이소류신 에티오닌 # 2011년 발표된 네이처 논문에 의하면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지질학적 시대인 명왕누대 (冥王累代, Hadean)의 지르콘 산화량이 현재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마그마의 산화량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 논문은 지르콘의 산화량으로 미루어 볼때 지구 원시 대기가 43억년전의 환원성 대기를 가졌으며 2억년전의 비환원성 대기에 대해 주장한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이 시기가 생명의 최초 화석 발견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는데, Archea를 비롯한 고세균들은 이보다 훨씬 전에 존재해 왔던 생명체로서 화석들은 그 이전부터 발견되어 왔으며, 이는 유전학적 연구가 진행되어온 바가 있다. 또한 위의 논문에서 역시 생명의 탄생 시기가 이보다 전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 논문을 인용한 다른 논문에서 사문석화작용 (serpentinization)이 일어나는 해저지각의 성분이 명왕누대로 부터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과 함께, 36억만년전의 생명탄생 시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밀러실험의 타당성을 지적하는 것은 오류이다. 또한 환원성 인산 생명체의 발견으로서, 대기의 환원성을 다시한번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이전부터 모든 근거들은 초기 지구가 약하게 환원적인 대기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창조설자들이 직접 인용한 사람들(페리스(J. Ferris) 박사와 첸(C. Chen)박사)이 쓴 논문은 오히려 원시대기가 환원성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위의 논문에서 이들은 원시대기의 환원성이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를 수소의 적은 새어나감을 통해 제시하고 있었다. 즉, 원시 대기 조성이 환원성이라는 주장은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인용한 사람들의 논문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원시대기는 환원성이 맞음이 입증된 상태이다. 또한 두 박사의 논문은 산화성 대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며, 유리-밀러실험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이다. # 밀러의 실험에서는 D형 아미노산과 L형 아미노산이 각각 반반씩 만들어진다. 하지만 거의 모든 생명체는 L형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현상은 당연한 것으로, 이후에 생명체에서는 효소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L 형 아미노산이 사용된다. 펩티도 글리칸을 포함한 박테리아의 세포벽과 미토콘드리아의 일부 단백질은 D-형 아미노산을 사용하며,뇌의 특정 신경전달물질(NMDA)역시 D-형 아미노산을 사용한다 또한 생물로서의 역할을 위해 번역을 위한 리보솜은 세포 밖에서도 D와 L타입의 아미노산을 구분해 단백질을 생성 가능하며, 이는 RNA세계와 연동되어, 밀러 유리 실험의 타당성을 입증해준다. 일반적으로, L형과 D형의 비율 자체에 대해서 묻는 것은 밀러실험과 무관하며, 효소와의 반응에 대한 것은 단백질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D형 아미노산도 실제로 사용(박테리아의 세포벽과 미토콘드리아의 일부 단백질)이 되며, 리보자임이 존재함으로 인해 효소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주장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폭스의 실험으로 아미노산 같은 간단한 유기물은 폴리펩타이드, 핵산과 같은 복잡한 유기물로 합성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밀러(Miller, S.)와 유리(Urey, H.)의 실험은 오파린(Oparin, A. I.)과 홀데인(Haldane, J. B. S)의 원시 수프 모델에 의한 화학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국창조과학회 등의 반과학 운동 단체들이 밀러의 실험에는 오류들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타당한 근거는 없으며 모두 반박되었다. 1. 이들은 원시 대기 환경이 수소, 메테인, 암모니아 등 환원성 기체가 아닌 질소 (N2)와 이산화탄소 (CO2)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페리스(J. Ferris) 박사와 첸(C. Chen)박사가 원시 대기의 재료로 산화성 대기를 사용했고 그 결과 아미노산은 생성되지 못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원시 대기 환경은 수소, 메테인, 암모니아 등 환원성 기체로 이루어졌다. 최근 증거들은 초기 지구가 약하게 환원적인 대기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창조설자들이 직접 인용한 사람들(페리스(J. Ferris) 박사와 첸(C. Chen)박사)이 쓴 논문은 오히려 원시대기가 환원성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즉, 원시 대기 조성이 환원성이라는 주장은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인용한 사람들의 논문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원시대기는 환원성이 맞음이 입증된 상태이다. 또한 두 박사의 논문은 산화성 대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며, 유리-밀러실험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이다. 설사 지구의 전체적인 대기가, 산화도 환원도 아닌 조건이라고 해도, 활발히 활동하는 화산 근처와 같이 부분적으로 환원조건이 될 수 있는 많은 지역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시대기는 환원성 대기가 맞으며, 2014년 레이저를 이용한 RNA생성에도 성공함으로서, 밀러-유리 실험에 대한 창조설자들의 반박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확연해졌다. 2011년 발표된 네이처 논문에 의하면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지질학적 시대인 명왕누대 (冥王累代, Hadean)의 지르콘 산화량이 현재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마그마의 산화량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 논문은 지르콘의 산화량으로 미루어 볼때 지구 원시 대기가 43억년전의 환원성 대기를 가졌으며 2억년전의 비환원성 대기에 대해 주장한다고 이야기한다.여기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이 시기가 생명의 최초 화석 발견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는데, 문제는 Archea를 비롯한 고세균들은 이보다 훨씬 전에 존재해 왔던 생명체로서, 이는 유전학적 연구가 진행되어온 바가 있다. 또한 이 논문에서 역시 생명의 탄생 시기가 이보다 전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 논문을 인용한 다른 논문에서 역시 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2. 이들은 원시 지구암석에서 발견된 산소 또한 원시 대기에 포함이 된다면 밀러의 실험대로 아미노산이 생성되어도 금방 파괴되어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시대기에는 풍부한 산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된다. 초기 지구의 대기에 충분한 산소가 없었음을 나타내는 다양한 증거들이 있다. # 띠모양의 철 지층이 형성된 것은 해양의 25억년에서 18억년전 사이에서 적철광(Fe2O3) 층이나 기타 다른 철산화물이 퇴적된 것이다. 일반적인 해석은 광합성이 진화된 25억년전부터 상당한 양의 산소가 대기로 유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 해양에 녹아있던 자유상태의 철과 결합하고 침전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철이 띠 모양으로 형성된 것은 산소가 적고 철분이 많이 녹아있는 초기 지구와 산소가 많고 철분이 적게 녹은 현재의 상태와의 변환기이다. # 띠 모양의 철 지층이 보다 오래된 암석에는 uranite 와 pyrite 가 강물이나 해변가에 운반되어온 detrital grains 혹은 sedimentary grain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금속은 산소 농도가 높은 상태에서는 장기간 안정하게 있을 수 없다. # 철 산화물이 많은 육지의 퇴적물은 형성되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다. 이것은 23억년 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그 이후로는 계속 증가한다. 자유 산소는 주로 광합성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나 박테리아가 나타나기 전에는 산소를 발생시킬 원천이 없으므로 산소가 매우 적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화석(대기중에 산소가 형성되기 10억년전)은 박테리아이며, 가장 오래된 퇴적층에서 물고기, 조개, 혹은 기타 산소가 필요한 유기체는 발견할 수 없다. 3. 이들은 원시대기에는 오존층이 없었기 때문에, 대기중에서 합성된 유기물에 자외선이 쪼여지면, 복잡한 분자들이 파괴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 역시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되었다. 단순한 유기물이 예를 들어 먼지나 얼음 알갱이 등과 같이 꽤 높은 농도로 있을 수 있는 지역에 존재한다면, 자외선은 실제로는 복잡한 분자를 만드는 것을 촉진한다. 이것은 일부 결합을 끊고 새로운 결합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DNA와 RNA는 상대적으로 자외선에 강한데, 그것은 이 분자들의 일부분이 다른 분자들의 피해를 막아주기 때문이며, 염기에 손상이 오면 다른 물질로 하여금 backbone을 수리하게 만든다. 자외선은 핵산이 선택적으로 분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화학진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자들은 자외선을 오래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바다나 호수에 녹게 된다. 제안된 시나리오 중 한가지는 복잡한 유기물이, 자외선이 없는 깊은 해양의 뜨거운 지열이 방출되는 주변에서 합성된다고 한다. 1. 밀러의 실험에선 L-형 아미노산과 D-형 아미노산 두 가지가 생성되었다. 창조설자들은 D-형 아미노산은 죽은 생명체에서 L-형 아미노산이 변화하여 서로 분자의 수가 같아지는데 밀러의 실험에서도 L-형과 D-형의 아미노산이 발견되므로 생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펩티도 글리칸을 포함한 박테리아의 세포벽과 미토콘드리아의 일부 단백질은 D-형 아미노산을 사용하며,뇌의 특정 신경전달물질(NMDA)역시 D-형 아미노산을 사용한다 또한 생물로서의 역할을 위해 번역을 위한 리보솜은 세포 밖에서도 D와 L타입의 아미노산을 구분해 단백질을 생성 가능하며, 이는 RNA월드와 연동되어, 밀러 유리 실험의 타당성을 입증해준다. 2. 밀러-유우레이 실험을, 이산화탄소, 질소, 수증기로만 이루어진 조건에서 실험하면 어떠한 아미노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위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위와 같은 대기 조건에서도 아미노산이 형성된다. 3.스탠리 밀러의 오리지날 화학진화 실험은 20개의 아미노산에서 오직 4개만이 생성되었으마, 후에 그럴 듯한 조건에서 실험을 다시하여도 아미노산 20가지를 모두 생성하지는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다 밀러의 실험은 생명체에서 사용되는 20개 아미노산중에서 13개를 생성하였다. 다른 아미노산은 다른 기작으로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 공간에서 형성되어 운석과 함께, 지구에 운반되었을 수도 있다. 어떠한 아미노산이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에 꼭 필요한지는 모른다. 쉽게 생성되는 아미노산이면 충분하며, 생명체가 나중에 다른 것을 생성하고 사용하도록 진화되었을 수도 있다. 4.밀러 유우레이 실험은 시아나이드나 포름알데하이드와 같은 독성 물질을 생성하지, 아미노산을 생성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사실과 어긋난다 시아나이드와 포름알데하이드는 아미노산을 포함한 중요한 생화학 물질에 필요한 구성 물질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이것은 독성물질이 아니다. 밀러-유리 실험은 다른 화학물질은 물론 아미노산을 생성하였다Kawamoto and Akaboshi 1982 Schlesinger and Miller 1983. 창조설자들은 밀러는 원시 대기환경을 실험관에 그대로 옮긴 후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하려 했으나 밀러의 시험 장치와 실제 번개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밀러의 실험 장치 6만 볼트/200℃의 열/자외선/연속적으로 모든 공간에 작용 번개 15만 볼트/30, 000℃의 열/X선, 감마선/순간적으로 제한적 일부 공간에 작용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한 이유는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함이다. 결과로 보면, 이는 번개보다 에너지가 적지만 그보다 적은 에너지로도 충분히 아미노산이 합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스탠리 밀러 알렉산드르 오파린 화학진화 생명의 기원 https://web.archive.org/web/20020202084019/http://tefficks.dhs.org/~mia/urey.htm https://web.archive.org/web/20071225130632/http://www.talkorigins.org/faqs/wells/iconob.html#Miller-Urey Tamzek, Nic, 2002. Icon of obfuscation. http://www.talkorigins.org/faqs/wells/iconob.html#Miller-Urey http://www.icr.org/article/evolution-hopes-you-dont-know-chemistry-problem-wi/ 분류:생명의 기원 분류:생화학 분류:1952년 과학 분류:1953년 과학 분류:2008년 과학
물 (,)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화학 물질이다. 화학식 를 가지며 표준 온도 압력(STAP 섭씨 25℃ 1바)에서 무색 투명하고, 무취무미(無臭無味)하다. 물은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며, 지표면의 70% 정도를 덮고 있다.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매로 보통 액체 상태의 물을 가리키지만 고체 상태인 것을 얼음, 기체 상태인 것을 수증기라고 부른다. 흔히 김 (Steam)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수증기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으나, 김은 엄연히 액체 상태의 작은 물방울들이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수증기와는 다르다. 얼린 물병이 팽창했다. 얼음은 물보다 부피가 크다. 물 분자는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공유결합(결합 길이 0.096 nm)을 한 H-O-H의 굽은형의 물질이다. 물분자는 수소원자와 산소 원자가 각각 전자를 내놓아 전자쌍을 만들고, 이 전자쌍을 함께 나누어 가짐(공유)으로써 결합되어 있다. 화학식은 H2O이다. 물은 자연적으로 세 가지 물질의 상태로 나타나며 지구 상에서 여러 형태를 지닌다. 수증기와 구름은 하늘에 있으며 바닷물과 빙산은 극지 바다에 있고 빙하와 강은 산에 있으며 대수층의 물은 땅 속에 있다. 물은 표준 온도 압력에서 무취무미한 액체이다. 물과 얼음의 색은 본질적으로 살짝 파랗지만 물은 양이 얼마 없을 때에는 빛깔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얼음 또한 색이 없어 보이며 수증기는 기체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물은 투명하므로 햇빛이 물 속에 들어올 수 있다. 따라서 수생식물은 물 속에서 살 수 있다. (오직 강한 자외선 빛만이 살짝 흡수된다.) 비공유 전자쌍이 공유 전자쌍을 강하게 밀기 때문에 104.5˚구부러진 굽은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 분자는 선형이 아니며 산소 원자는 수소 원자보다 더 높은 전기 음성도를 갖고 있다. 산소가 수소보다 공유 전자쌍을 세게 끌어 당기므로 산소 원자가 약간의 음전하를 띠고 있는 반면 수소 원자는 약간의 양전하를 띠어 극성을 갖는다. 그 결과 물은 전기 쌍극자모멘트가 있는 극성 분자가 되므로 좋은 무기 용매(보편적 용매)이다. 따라서 극성 물질과 잘 섞이며 염화나트륨과 같은 이온성 물질(이온 결합을 한 분자들)을 잘 녹인다. 그러나 무극성 물질과는 잘 섞이지 않는다. 대전된 막대(예, 털가죽으로 문지른 에보나이트 막대)를 물줄기에 가까이 하면, 물줄기가 대전된 막대 쪽으로 끌려온다. (표면장력 참고) 물 분자는 평상시에는 수소와 산소가 쉽게 분리되지 않으나 전기분해와 같은 강한 에너지를 가해주면 분리가 가능해진다. 순수한 물은 낮은 전기전도율을 갖지만 염화 나트륨과 같은 작은 양의 이온 물질이 훨씬 더 잘 용해되게끔 만든다. 물은 3.98 °C (39.16 °F)에서 밀도가 최대이다.(1000 kg/m3) 그 원인은 온도가 더 내려가면 물 분자는 얼음과 비슷한 육각구조를 만들어 약간의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더 높은 온도가 아닌 3.98도인 이유는 온도가 더 높을 경우에는 분자의 평균 운동 속도가 증가해서 부피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은 얼음이 될 때에 생기는 것에 비하면 크지 않으나 여전히 밀도에 영향을 준다. 물(다른 액체도 포함)의 끓는점은 기압에 의존한다. 이를테면 에베레스트 산 위에서 물은 68 °C (154 °F)에 끓지만 해수면에서 100 °C (212 °F, 373.15K)에 끓어 기화되는 것과 비교된다. 이와 반대로 열수구 주위의 바다 속 깊은 데 있는 물은 100 °C가 되어도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100 °C에서 수증기의 부피는 액체 상태의 물 부피에 비해 약 1,244배 정도 증가한다. 한편 물은 다른 액체보다 끓이기 어려운데 이는 물을 끓일 때 쓰이는 에너지의 일부가 수소결합을 끊는 데 쓰이면서 완충되기 때문이다. 물 분자는 1기압 내에서 0 °C, (32 °F, 273.15 K)에서 응고된다. 물이 응결할 때는 다른 분자들과는 달리 부피가 약 10% 정도 증가하는데, 이는 물 분자 사이의 수소결합이 강해지면서 육각구조를 만들고 이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물은 에탄올과 같은 많은 물질과 가혼성을 가지므로 모든 부분에서 하나의 균질한 액체를 형성한다. 한편 물과 대부분의 기름은 섞이지 않는데 이는 가혼성이 없다고 하며 밀도에 따라 층을 형성한다. 기체로서의 수증기는 완전히 공기와 가혼성을 갖는다. 세포 안의 모든 주된 구성 요소(단백질, DNA, 다당류) 또한 물에 잘 녹는다. 물은 다른 수많은 용매와 더불어 불변 끓음 혼합물을 만든다. 물이 얼 때, 찬물보다 뜨거운 물이 먼저 언다. 이를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음펨바 효과라 부르는데 그 원인은 50년 가까이 밝혀지지 않다가 2013년 11월 싱가포르 연구진에 의해 물의 수소결합과 공유결합의 에너지 상관관계에 의한 현상임이 밝혀졌다. *물의 성질 물의 크기는 고체의 얼음 1m 가 존재하므로, 물분자의 크기를 알수있다면 1m길이의 물분자 갯수를 수학적으로 기본 계산을 할 수가 있다. 물분자는 산소원소 1개와 수소 원소 2개가 결합된 상태이므로,, 수소 원소 반지름이 25pm이고, 산소원소 반지름 60pm, 공유 결합 길이 95.84pm 이므로 수소 원소 반지름+산소원소 반지름+공유결합 길이 를 수소 원자 직경+산소 원자 직경+공유결합 길이 이렇게 더하면 물분자의 크기를 구할 수있다. 50pm+120pm+95.84pm=264.84pm 에서 공유결합 길이가 95.84pm이므로...산소원소 반지름 +수소 원소 반지름이 =95.84pm 이 성립해야 하므로..25pm(수송원소 반지름)+공유결합 길이 95.84pm+ 산소원소 반지름60pm=180.84pm 이렇게 물분자 크기를 구할 수있다. 95.84pm의 공유결합 길이가 고체의 얼음의 상태라고 한국 과학이 실증한 것이 아닌 인용한 자료를 바탕으로 수학 기본 계산을 하였으므로, 이 180.84pm이 고체 얼음의 물분자 하나의 크기 (길이 1000pm ÷180.84pm >999.999~pm 이므로, 고체의 얼음의 사각형을 가지는 상태와 육각형의 두가지 기초 공개 자료가 존재하므로, 사각 물분자 4개의 기준을 적용하면 1nm에 입체화 구조에서는 4개의 물분자 4 000 000개, 1m 4 000 000 000개 의 1m고체 얼음의 물분자 갯수 40억개를 구할 수있다. 고체의 얼음은 한국의 한강의 1월에 강물이 얼어서 1m x 1m의 고체 얼음을 만들고 있으므로 한강의 얼음의 1m x 1m의 고체 얼음의 표면의 물분자 갯수는 40억 x 40억 16 x 10^18=1.6 x 10^19 개의 한강의 1월 얼음의 1m x 1m 얼음의 표면의 갯수를 구할 수있다. 이것은 다시 물 1kg의 정의가 1900년부터 1970년까지 1kg=1L의 국제 단위로 사용되었고, 이것은 다시 물의 고체 얼음의 10cm x10cm x10cm=1kg으로 한강의 얼음을 이렇게 잘라서..1kg의 얼음을 얻을 수가 있으므로, 1kg= 10cm x 10cm x 10cm가 성립한다. 물 1m길이는 1000mm 이므로 1mm의 물분자 갯수는 4 000 000개이고 10cm=40 000 000개가 된다.1m는 mm로 변환하면 1000mm이지 100mm가 아니다. 그러므로 물 1kg의 갯수를 1nm=4개의 고체 얼음으로 고정 시키면 1kg물 질량으로 물분작 갯수를 구할수있다. 400 000 000 x400 000 000 x400 000 000 6.4 x 10^ 25 갯수의 물 1kg의 고체 얼음에서의 갯수를 찾을 수 있다. *액체의 물에 햇빛 눈에 보이는 파장 (한국과학 =가시광선)500nm의 청녹 하늘색 으로 한국의 한강에 낮 동안 비구름이 없으면 항상 고체의 1월의 얼음에 비추므로 고체의 얼음의 햇빛의 500nm청녹 하늘색 1m길이에 2 000 000개인 햇빛 500nm에 물분자 기준 갯수를 찾을 수있다. 고체의 한강 1월 얼음에서 물분자가 180pm의 크기를 갖고 있고, 1nm 입체 구조의 물분자는 물의 고체로 0도에서 한강 1월의 표면 강물을 0도의 얼음으로 만들어야 하므로, 물 분자 단독으로 고체의 얼음을 만들지 않고, 한강의 강변 모래위에 규소si의 녹는점 1430도의 도움으로 한강물이 고체 얼음의 물분자로 사각형 기본 얼음 결정을 만들고, 이것이 sio4의 결정화처럼 물분자가 si원소를 중심에 두고 물분자 4개가 규소 원소에 붙들려서 냉각이 되면, 고체의 얼음의 상태로 기본적으로 변환된다. 그러므로 1월 한강의 고체의 얼음위의 햇빛 500nm 청녹색 파장에 고체 얼음의 물분자 갯수를 찾을 수 있다. 500nm 2777. 777 777 777~ 이 되어서..500nm파장의 직경은 500nm÷3.14159 636개의 500nm청녹 하늘색 눈에 보이는 파장의 얼음위에서의 물분자 직경의 갯수를 구할 수있다.햇빛은 청녹 하늘색 500nm외에 눈에 보이는 녹색의 파장이 565.47nm 이고...이것의 직경은 180nm가 되고..물분자 180pm의 크기에서 녹색 565.57nm의 직경이 180nm이므로 햇빛의 눈에 보이는 565.47nm 직경에 물분자 고체의 얼음의 갯수는 1000개가 된다. 햇빛의 녹색 500nm파장이 한국인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물분자와 햇빛의 크기 비율이 물분자의 원소가 1000배 햇빛의 녹색 하나 파장보다 작다라는 기본 사실을 위처럼의 기본 수학으로 검증을 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기초 과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액체의 물에는 햇빛이 통과를 해서 바닷물 기준 100m아래까지 투과되고 이후에 액체의 바닷물에 완전히 흡수가 된다. 액체의 물의 상태에서 햇빛의 청녹 하늘색과 녹색의 565nm를 흡수하는 방법은 고체의 얼음에서는 물분자의 회전이 고체 얼음의 결합이므로, 햇빛을 유리처럼 유전체 통과를 하는 상태가 되고, 액체의 물분자는 sio4의 1nm로 규소와 함께 액체의 로 존재하므로, 액체의 물의 조합이 햇빛 500nm 청녹 하늘색 직경의 크기의 물분자 500nm의 액체의 물의 군집을 하면, 이동하는 햇빛을 액체의 물은 직접 흡수하여 물분자의 전하로 전환이 가능하다. 즉, 액체의 물과 수증기의 물분자는 햇빛의 파장 크기와 같은 크기를 가지면 햇빛을 흡수하여 물분자의 전하로 변환이 가능하며, 이 사실로 해서 대기압의 물의 온도가 10도에서 석양이 지는 상태의 햇빛을 흡수한 물의 평균 하루 온도는 20도 가량으로 평균 상승하는 주기를 갖는다. 햇빛이 하루 종일 쏟아져도 한강의 물의 온도가 10도 정도만 충전이 되는 이유는 1/1000으로 물분자가 햇빛크기에 비해 작기 때문이다. *물 액체 상태에서 1kg=1L 로 기본 변환이 되므로, 이것을 수도파이프로 물의 질량 1kg이나 1L의 질량을 간단하게 수도 파이프를 이용해서 질량을 축정할 수있다. 1kg (10cm x 10cm 1m x 10cm이고 이것을 수도 파이프로 기준을 바꾸면 직경이 10cm 일때 1m길이의 수도파이프에 액체의 물을 채우면 1길이의 수도 파이프에 채워진 액체의 물의 질량은 1kg=1L가 된다. 이것은 액체의 물이 수도 파이프 1m길이에 직경 10cm에 액체의 물이 채워진 1kg=1L이므로 이것을 수증기 보일러로 만들어서 연소 불꽃을 생성하여 가열을 해서 수증기로 만들수가 있고, 이 구조는 수증기 기관 보일러 혹은 난방용 보일러의 기본 수도파이프 배관이 들어간 구조가 된다. 1kg의 물을 100도의 수증기로 만들면 수증기를 수도 배관으로 모아서 수증기 기관을 가동하거나, 물이 액체 상태에서 1kg의 질량을 가지므로, 연료 1kg으로 바꾸어서 수도 파이프 10cm공간에서 연소 불꽃을 만들면 10cm를 왕복하는 동력 기관을 만들수가 있고, 수증기 변환율과 연소율을 알면, 1m를 이동한 물 1kg이 되면 1W의 일을 하는 상태가 된다. 즉...10cm직경의 1m길이에 채운 물에 추가 배관을 1673m을 연결하여 액체의 물 1kg을 1673m를 이동시키면 이 만큼의 일을 하는 단위가 된다. 물을 연료로 바꾸면 석유엔진이 되고, 휘발유로 바꾸면 휘발유 엔진으로 바뀐다. 물 1kg의 단위는 너무 크므로 1m길이의 물분자는 40억개이고 이것을 1mm단위로 변환을 다시 할 수있다. 1000mm= 1m 이므로 액체의 물 1mm 길이에 물분자 갯수가 4 000 000개이고 , 이것을 구리 1mm 둘레를 가진 구리전선에 절연체를 씌운 틈을 물분자 하나만 통과하는 상태로 두면 , 구리 원자 반지름은 135pm,구리 원자 직경 270pm이므로, 구리 원소 2개의 직경 길이 더하기는 540pm이 되고 1.080nm에 구리 원자는 4개가 들어간다...물분자가 180pm크기를 갖지만 액체의 물로 바꾸면, 액체의 물 3개크기를 더하면 540pm 6개 물분자면 1080pm(=1.080nm)가 되어서 구리금속은 구리전선의 원형 케이블 형태로 만들어서 구리전선의 둘레를 1nm로 만들면 여기에 물분자 6개가 구리 금속 전선 케이블 둘레에 자리하게 되므로, 1um=4000개의 구리 금속 둘레에 물분자 갯수 6000개이고, 1mm= 4 000 000의 구리전선 케이블에 물분자 6 000 000개의 일정한 비율로 늘어난다. 그러므로, 물분자의 액체 상태 180pm을 수증기 상태 270pm으로 바꾸면 구리 금속 전선 케이블의 크기와 갖게 된다. 즉..물분자 갯수와 구리 전선의 케이블에서 물을 수증기 상태 270pm으로 바꾸면 고체의 구리1mm둘레를 가진 구리전선의 물분자 갯수는 4000 000개로 같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구리전선 1mm둘레 기준으로 1m 구리전선의 물분자 수증기 갯수를 찾을 수있고, 1kg =1L의 물은 수증기 기체 상태로 구리전선 1mm둘레를 가진 전선의 길이로 구할 수가 있다. 이 사실 때문에 1820년의 암페어의 과학적인 국제 단위 정의가 무한히 긴1m의 전기 도체로 대단히 비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국제 단위를 만들고 있다. 물은 화학적으로 많은 성질을 갖는다. 대표적인 성질은 공유결합, 산과 염기의 생성, 그리고 금속과의 산화(결합 및 부식)이다. 물 분자 수소결합된 물 분자들 물에서의 수소결합(평균 결합 길이 0.197 nm)은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수소 원자가 약한 세기의 양이온의 성질을 띠고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산소원자가 강한 세기의 음이온의 성질을 띰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물은 극성 공유결합 물질이다. 또한, 중심 원자로 작용하는 수소 원자의 비공유 전자쌍과 산소와의 결합 고리인 수소결합(공유 전자쌍)의 작용력을 비교할 때 쌍극자 모멘트 값이 0이 아니므로 극성 분자로 분류된다. 한편 물은 높은 비열을 갖는데 이 또한 수소결합에 그 원인이 있다. 물을 가열할 때 쓰이는 에너지의 일부는 수소결합을 끊는 데 쓰이고 나머지의 에너지가 물의 온도를 높이는데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물이 다른 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정한 열에너지의 첨가로 온도를 올리기 어려운 물질이 되는 것이다. 수소결합으로 인해 물은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물질에 비해 녹는점, 끓는점, 융해열, 기화열이 크다. 물의 비열과 기화열이 크다는 점은 생물체의 수분과 체온이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물보다 얼음의 밀도가 작은 것은 수소결합에 의한 육각형 구조와 관련된다. 또한 표면장력과 모세관 현상도 수소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은 다른 분자와 달리 그 점성에 비교해 표면장력이 큰데, 표면에 있는 물 분자가 공기 중으로 끌려가지 않고 내부에 있는 물 분자의 수소결합력을 받기 때문이다. 모세관 현상은 수소나 산소원자를 포함하지 않은 물질(예 금속)에서는 잘 안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물이 모세관 현상을 일으킬 때 그 관을 이루는 분자와 수소결합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리관을 이루는 유리는 SiO2이므로 수소결합력이 작용한다.) 물은 보통 금속류를 녹여 염기를 만들고 비금속류를 녹여 산을 만든다. 산과 염기의 기준은 양이온으로 하전된 수소 이온과 음이온으로 하전된 수산화이온이며, 수소이온이 많으면 산성이고 수산화이온이 많으면 염기성이며, 두 이온의 값이 0에 가까우면 중성이 된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염산, 질산, 황산 등이 있으며 이 3가지의 산은 모두 강한 산이다. 대표적인 알칼리(염기)로는 수산화나트륨, 수산화 칼륨, 암모니아수 등이 있으며 3가지 모두 강한 염기이다. 한편 산과 염기는 수소이온이나 수산화이온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전해질이고, 이온 물질을 갖는 모든 물이 전해질이다. 물은 산소와 함께 금속을 잘 부식시키는 성질이 있다. 철의 경우 반응성이 크나 직접적으로는 산소와 잘 반응하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산화철을 생성한다. 하지만 물이 묻은 철은 상황이 다른데, 그 원인은 물이 철을 이온화하면서 전자를 내놓고 이 전자를 받은 산소원자가 양이온으로 하전된 철 분자와 결합을 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화는 물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아 결국 속까지 모두 산화시키고 만다. 금속의 산화를 막기 위해 기름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기름과 물 사이의 반발력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찬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포타슘, 칼슘, 소듐 등이 있고, 뜨거운 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마그네슘, 알루미늄, 아연 등이 있다. 수리학에서 1기압 하에서 물의 단위 중량은 보통 ω나 γw로 쓰며, 1000kg중/m³(1t중/m³=1g중/cm³)으로 나타낸다. 물은 수많은 물질을 녹일 수 있어서 맛과 냄새가 다양하다. 사람과 다른 짐승들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부패한 물을 피하기 위하여 마실 수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진보된 감각을 갖고 있다. 샘이나 광천수로 광고하는 맛은 그 안에 녹아있는 광물에서 비롯한 것이다. 순수 H2O는 무취무미하다. 물은 생명체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지구 이외의 천체에서 물이 발견되면 항상 관심을 받게 된다. 수증기는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수성 대기권 3.4%, 및 수성의 외기권에 다량의 물이 있음 금성 대기권 0.002% 지구 대기권 ~0.40% 이상 (완전 대기 기준), 일반적으로 지표에서는 1-4% 화성 대기권 0.03% 목성 대기권 0.0004% 토성 대기권 얼음에만 있음 엔셀라두스 (토성의 위성) 91% 외계 행성 (HD 189733 b, HD 209458 b) 액체로 된 물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지구 지표의 71% 달 적은 양의 물이 2008년에 발견되었다. 화성 극미량의 물이 2011년 북극해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조사중이다. 얼음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지구 주로 빙상으로 존재한다. 달 타이탄 유로파 토성의 고리 엔셀라두스 명왕성과 카론(명왕성의 위성) 혜성 및 카이퍼 대, 오르트 구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액체와 기체, 고체로서의 물은 지구 위에 사는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지구는 태양계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에 위치하여 있다. 태양으로부터 살짝 더 가까이 있거나 살짝 더 멀리 있었더라면 (약 5%, 곧 800만 킬로미터 정도) 기체, 고체, 액체라는 세 가지 형태가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 지구의 중력은 물이 대기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대기 속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는 온도에 대한 완충 작용(온실 효과)을 제공하므로 표면 온도를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지구가 더 작았더라면 대기가 더 얇아져 온도가 극단으로 치우칠 것이므로 화성과 같이 극관을 제외한 물의 형성을 막는다. 지구의 표면 온도는 들어오는 태양 복사(일사) 수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는 온실 기체와 표면 및 대기 반사가 동반되면서 지구 온도가 유동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 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를 가이아 이론이라고 부른다. 한 행성 위의 물의 상태는 주위 압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한 행성의 중력이 결정한다. 어느 행성의 용적이 충분히 크다면 그곳 위의 물은 온도가 높아도 고체 상태를 유지한다. 그 까닭은 중력이 높은 압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인데 글리제 436 b 와 글리제 1214 b 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물은 지표의 71 %를 덮고 있다. 바다는 전체에서 97.2%를 차지한다. 지구 물의 분포 그림 순환 수문학은 지구를 지나는 물의 이동, 물의 분포, 수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의 분포를 연구하는 것을 수로학이라고 한다. 물의 분포와 이동에서 지하수의 경우 수문지질학으로, 빙하의 경우 빙하학으로, 내륙수의 경우 육수학, 바다의 경우 해양학으로 부른다. 수문학을 동반한 생태학적 과정을 생태수문학이라고 한다. 한 행성의 표면 위 아래와 공중에 떠 있는 총체적인 물을 수권이라고 부른다. 지구의 물은 대체적으로 1,360,000,000 km3 (326,000,000 mi3)이다. 물은 지구에서 대부분 바다에 액체 형태로 존재한다. 인공적으로는 수소와 산소를 혼합한 뒤 방전을 일으켜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물의 분포는 바닷물 (97.33%), 빙하 (2.04%), 지하수 (0.61%), 호수와 강 (0.01%) 그리고 기타 (0.01%) 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수와 민물은 수자원으로서 인간에게 실질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유용하다. 물의 순환은 수권 안의 물이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대기, 토양의 물, 지표수, 지하수, 식물 사이에서 물은 이동한다. 물은 물의 순환 속에서 이러한 지역을 돌며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다음의 과정을 이룬다. 바다 등의 물이 공기로 증발하고 식물과 짐승으로부터 공기로 증산한다. 공기에 응축되어 있는 수증기에서 바다나 땅으로 떨어지는 강수 현상을 일으킨다. 육지로부터 보통 바다로까지 이어지는 표면 유출을 일으킨다. 표면 유출한 일부 물은 이를테면 호수와 같이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갇히게 된다. 높은 고도에서 겨울 동안 극북과 극남에서 눈은 만년설, 설괴빙원, 빙하 안에 모인다. 물은 또 땅에 스며들어 대수층으로 이동한다. 그 뒤 지하수는 샘이나 온천, 간헐천 표면으로 거슬러 흘러간다. 또, 지하수는 우물로 말미암아 인공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 이러한 물은 깨끗한 민물이며 사람과 길짐승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만큼 중요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민물은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조석은 달과 태양이 대양에 미치는 기조력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대양 표면이 오르내리는 일을 가리킨다. 조석은 바다와 삼각강 수체의 깊이 변화를 일으키며 조류를 만들어낸다. 특정 장소에서 바뀌는 이러한 조석은 지구 회전의 영향과 지역적인 수심측량에 따라, 지구 기준에서 태양과 달의 위치가 바뀌어 일어난다. 바닷물은 평균 3.5%의 염분에 적은 양의 기타 물질을 포함한다. 바닷물의 물리적 속성은 민물과 비교하여 몇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더 낮은 온도 (-1.9 °C)에서 얼고, 온도를 어는 점으로 낮추면 밀도가 올라간다. 일반적인 바다의 염도는 발트 해의 0.7% 정도에서 비롯하여 홍해, 페르시아해의 4.0%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in Lybia.JPG|섬네일|left|오아시스는 사막에 채소가 나는 격리된 수자원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물은 다른 물질과 구별되는 점으로 생명의 증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수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유기 화합물이 궁극적으로 복제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들은 물에 의존한다. 물은 체내의 수많은 용질이 녹이는 용매일뿐 아니라 또 체내의 물질대사에 필수적인 부분이므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은 광합성과 호흡에 필수적이다. 광합성을 하는 세포는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의 수소를 산소에서 분리시킨다. 수소는 기체나 물에서 흡수한 CO2와 결합하여 포도당을 형성하고 산소를 내뱉는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들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하고, 수소와 산소를 산화시켜 태양 에너지를 포획하며, 그 과정 가운데 물과 CO2를 다시 형성한다. (세포 호흡) through the microscope.jpg|섬네일|left|해양 규조류 - 주된 식물플랑크톤군 지표의 물에는 생물로 가득하다. 생물의 최초의 형태는 물에서 발생하였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예외 없이 물 속에서 살며 돌고래, 고래와 같은 수많은 종류의 해양 포유류가 있다. 양서류와 같은 특정한 종류의 짐승들은 물과 땅을 오가며 산다. 켈프, 말과 같은 식물들은 물에서 자라며 일부 물속 생태계를 위한 기반으로 자리잡혀 있다. 플랑크톤은 일반적으로 바다 먹이 사슬의 토대가 된다. 바다의 척추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산소를 보유하여야 하며 보유 방법은 다양하다. 물고기는 허파가 아닌 아가미를 가지고 있으나 폐어와 같은 어떠한 종류의 물고기들은 아가미와 허파 둘 다 지니고 있다. 돌고래, 고래, 수달, 물개와 같은 해양 포유류들은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지표로 올라와야 한다. 일부 양서류들은 피부를 통하여 산소를 마실 수 있다. 문명은 역사적으로 강과 주된 물길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왔다. 이른바 문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민족은 나일 강에 온전히 의지하였다. 로테르담, 런던, 몬트리올, 파리,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하이, 도쿄, 시카고, 홍콩과 같은 거대 도시들은 물에 다가가기 쉬운 곳에 있고 결과적으로 무역이 팽창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도 이와 같은 까닭으로 번성하였다. 물이 더 부족한 북아프리카와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은 인간 발전에 주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음료수라고 한다. 마시기에 알맞지 않은 물은 걸러내거나 정제하는 등의 다양한 물 처리로 말미암아 마실 물로 바꿀 수 있다. 마실 수는 없으나 헤엄을 치거나 몸을 씻는 데 사람에게 해가 없는 물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를 안전한 물로 부른다. 개발도상국에서 모든 폐수의 90%가 정화 및 처리되지 않은 채로 지역 강과 개울로 흘러간다. 또한 물의 섭취는 동물의 기초대사량을 증가시켜 체중감량과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농업에서 물은 관개에 이용하며 이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는 주된 요소로 자리잡혀 있다. 관개는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최대 90% 물을 차지하며 선진국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잡혀 있다. (미국의 경우 민물의 30%가 관개에 이용된다) 어린 소녀가 물병의 물을 마시고 있다. 수질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인구의 분포도가 나라별로 나타나 있다. 사람의 몸은 체형에 따라 최저 55%에서 최고 95%의 물을 지닌다.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날마다 1~5리터의 물을 마시어야 탈수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섭취하여야 하는 정확한 물의 양은 활동 수준, 온도, 습도 등의 요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은 물을 직접 마시는 것보다 음식이나 음료수를 통하여 소화시켜 물을 흡수한다. 건강한 사람이 물을 얼만큼 섭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은 없으나 날마다 6~8잔의 물 (거의 2리터)을 마시는 것이 최소한의 적절한 양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옹호자들의 생각이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는 식수에 적합한 최대의 민물 원천이다. 이곳은 소금과 칼슘이 매우 적으므로 상당히 깨끗하다. Bay Phytoplankton in Bloom.jpg|만 du midi toulouse.jpg|운하 Wellen.JPG|바다 Deep Blue Sea.jpg|대양 i vand.jpg|웅덩이 Arkansas River.jpg|강 상태에 따라 * 고체 - 얼음 * 액체 - 물 * 기체 - 수증기 기상학에 따라 * 강수에는 다음을 포함한다. 비 물보라 이슬비 눈 이슬 싸락눈 싸락우박 우박 빙정 흰서리 대기 착빙 글레이즈 아이스 구름 안개 박무 어는 비(freezing rain) 발생에 따라 * 지하수 * 민물 * 표층수 * 광천수 * 기수 * 바닷물 * 소금물 이용에 따라 * 맹물 * 음료수 * 정제수 ** 증류수 ** 탈이온화수 다른 기능에 따라 * 단물 * 센물 * 결정수 * 수화물 * 중수 미생물학에 따라 * 음료수 * 폐수 * 빗물 또는 표층수 종교에 따라 * 성수 수치료( Hydrotherapy, water cure) * 세바스찬 크나이프( Sebastian Kneipp) - 19세기 독일 발바리아 지방의 뵈리스호펜 본당 사제 신부로 수치료를 체계화함 물 부족 수자원 수질오염 일산화 이수소 물 처리 저나트륨혈증( Hyponatremia, 물 중독) 음펨바 효과 자리끼 - 밤에 자다가 수분부족 갈증으로 깨어나 마시기 위해 잠자리의 머리맡에 두는 물 OECD 물 통계 분류:무기 화합물 분류:산화물 분류:수소 화합물 분류:영양 분류:음료 분류:재료 분류:무기 용매 분류:가톨릭 전례용품
외계어 (外界語)는 통신언어의 일종으로 컴퓨터 문서상에서 쓰이는 한국어의 변칙적인 표기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2000년대 초 정보화의 발달과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화로 통신언어가 발달하였고, 통신언어의 한글 변용 정도가 심하여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를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에 빗대어 외계어라 한다. 주로 청소년 층에서 자주 쓰였으며, 일본의 갸루 문자와 유사하다. 통신언어의 일종인 외계어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모나 글자의 일부분이 닮은 모양의 다른 특수문자나 기호로 치환되는 것.( 야민정음 도 이것을 이용한다.) * 예 말하지 않아도 → 말おŀズı 않Øŀ도 맞춤법을 무시하고, 발음을 왜곡하는 것. * 예 나름대로 → 날흠뒈뤀 보통, 어미에서 -ㅗ와 -ㅛ가 -ㅓ와 -ㅕ로 변화되는 등의 통신체와 병행해서 쓰인다. 이모티콘과 닿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표현(예 ㅇㅋ, ㅋㅋㅋ)과 인터넷에서 쓰이는 유행어(예 즐) 등의 표현을 통신에서 쓰는 사람은 위의 것만을 외계어로 여긴다. 하지만 유행어와 닿소리 표현, 이모티콘까지 통틀어서 외계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외계어를 일부에서는 ‘언어 파괴’라고 비판하지만 이를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 청소년층 안에서도 외계어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비판하는 대상인 ‘외계어’의 범주의 차이는 다양하다. 외계어는 2000년대 초반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외계어에 대한 논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한편 미술가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한글이 아닌 문자로 한글을 표현하는 실험을 한다. 통신체 갸루 문자 비슷한 표기법 * 리트 * 볼라퓌크 인코딩 대한민국의 인터넷 신조어 목록 분류:인터넷 문화
유향 그래프는 콜라츠 추측의 조작에 의해 몇 개의 자연수들이 변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콜라츠 추측이 참이라면 이 그래프는 모두 1에 연결된다. 콜라츠 추측 (Collatz conjecture)은 1937년에 처음으로 이 추측을 제기한 로타르 콜라츠의 이름을 딴 것으로 3n+1 추측 , 울람 추측 , 혹은 헤일스톤(우박) 수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콜라츠 추측은 임의의 자연수가 다음 조작을 거쳐 항상 1이 된다는 추측이다. # 짝수라면 2로 나눈다. # 홀수라면 3을 곱하고 1을 더한다. # 1이면 조작을 멈추고, 1이 아니면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6 에서 시작한다면, 차례로 6, 3, 10, 5, 16, 8, 4, 2, 1 이 된다. 또, 27에서 시작하면 무려 111번을 거쳐야 1이 된다. 77번째에 이르면 9232를 정점으로 도달하다가 급격히 감소하여 34단계를 더 지나면 1이 된다. 이 추측은 컴퓨터로 20 × 258 까지 모두 성립함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모든 자연수에 대한 증명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5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던 에르되시 팔은 "수학은 아직 이런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과 같은 통계적인 설명을 생각하면 이 추측은 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콜라츠 추측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콜라츠 추측의 함수표현 공식 콜라츠 추측 공식의 합동산술(modular arithmetic) 표현식 :이면, 의 배수안에 존재하는 값만이 만들어지므로, 의 범주를 넘지 못한채로, 반복 수렴으로 에 귀결된다. :이면, 홀수에 가 곱해진 수는 짝수이므로 짝수에 을 더하면 계속해서 무한히 증가된 값의 홀수으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콜라츠 추측의 단계 진행은 작동하지 않는다. :모든 자연수가 짝수에서도 그리고 홀수에서도 을 반복한다면, 반복 수렴으로 에 귀결된다. 1 부터 200 까지 핸드링 400px 콜라츠 그래프에서 특정 짝수는 홀수에대한 의 수 이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수가 되는 분기점이 된다. :은 콜라츠 유향 그래프에서 최초의 분기점이다. 만약 콜라츠 추측이 성립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을 제외한 모든 자연수가 과 연결되기위한 마지막 분기점이다. 따라서, 홀수에대한 의 수 이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수가 되는 분기점 짝수 은 에서 의 수이다. 콜라츠 그래프의 분기점 짝수 은 :에서 규칙적으로 출현한다. 최초 출현 수열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콜라츠 그래프 분기점 수열은 6씩 증가하는 수열이다. 또한 십진수 30을 주기로 5개의 자리수 이 순환적으로 출현한다. *(매스월드)http://mathworld.wolfram.com/CollatzProblem.html Distributed computing (BOINC) project 콜라츠 추측에 대한 분산 컴퓨팅 프로젝트 분류:추측 분류:수론
BBS ANSI 로그인 화면 예시 전자 게시판 (電子揭示板, bulletin board system, BBS, 또는 computer Bulletin Board Service, CBBS)은 일반적으로 대학의 게시판 또는 중세 도시의 지역 사회 광고판을 컴퓨터 네트워크에 적용한 시스템으로, 보통 특정 전자게시판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말한다. 사용자들은 전화선과 터미널 프로그램을 써서 시스템에 접속하고 소프트웨어를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고 게임, 뉴스, 메시지 교환 등을 할 수 있다. 전성기인 1980년대 처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BBS들은 아마추어 시삽들이 여가 시간에 운영하는 무료 서비스였으며 몇몇 BBS들은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BBS는 여러 면에서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과 인터넷의 다른 프로토콜들의 전신이기도 하다. BBS는 친교 목적으로 많이 쓰였으며 논문을 발표하거나 자유 프로그램이 퍼지는 경로이며 게임과 기타 다른 응용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BBS는 인터넷 프로토콜 또는 웹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바뀌어갔다. 공개 게시판의 전신은 1973년 8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시작된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였다. 유용한 마이크로컴퓨터가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모뎀은 비싸면서도 속도가 느렸다. 이러한 까닭에 커뮤니티 메모리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구동되었으며 여러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주변 지역들에 위치한 터미널들을 통해 접근되었다. 미니텔 터미널 소프트웨어 인터넷 포럼 스레드 플로트형 게시판 제로보드 그누보드 분류:인터넷 문화
정보 (情報는 특정 목적을 위하여 광(光) 또는 전자적 방식으로 처리되어 부호, 문자, 음성, 음향 및 영상 등을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자료 또는 지식을 말한다. 정보는 일상 용어에서 전문 용어까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언어, 화폐, 법률, 자연환경 속의 빛이나 소리, 신경, 호르몬 등의 생체 신호부터 비롯한 모든 것을 정보 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에는 컴퓨터의 정보 처리를 기반으로 한 정보(데이터)가 많이 대두된다. 정보의 원래 뜻에 따라, 정보와 자료(데이터)를 구별하고, 정보를 “뜻을 가지는 자료”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러한 분야에서는 전체적으로 정보의 뜻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경우는 별로 없으므로, 특별히 정보와 자료는 구별하지 않는다. 구분하자면, 데이터를 모아 둔 것이 자료라면 자료를 특정한 목적의 의사결정을 위해 가공한 형태를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훌륭한 정보는 목적적합성과 신뢰성 및 적시성을 유지해야 한다. 적시성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첩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하며 가공을 통해 비교적 장기간 활용이 가능한 정보를 지식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정보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그 속도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개인이 하나의 정보를 선택하게 되면 변화에 의해서 불확실성이 커지게 되고, 정보의 가치가 적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된 정보보다 선택되지 않은 정보가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불안감을 갖게 한다. 맥도너(A.M.McDonough)는 정보란 사실 내지 자료에 지적인 처리를 가하여 얻어진 지식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보는 자료에 특정 의미가 주어진 것으로서 직접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모든 정보는 자료이나, 모든 자료는 모든 정보라고 할 수 없다. 포레스터(J.W.Forrester)는 경영은 정보를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과정(Process)이다. 고 하였다. 이는 경영상의 의사결정에 정보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모든 자료가 정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정보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정보는 가치지향적이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어느 정도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정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정보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정리해 놓은 자료의 집합이며,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이용자, 즉 어떤 목적을 갖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료가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보는 이용자를 위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재배열, 요약, 삭제하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 프랑스어의 renseignement(안내, 정보)를 번역한 말로 사용된 것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정보를 신식(信息)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첩보라는 뜻도 있다. 정보는 상대방에게 사건을 알릴 때 전달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집에 불이 났는지 아닌지 알리는 것도 정보 전달의 한 예이다. 전달 형태가 불이 "났는지 또는 안 났는지"의 두 가지 방법만 존재한다면 1 비트로 전달이 가능하다. 동전도 마찬가지다. 던진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알려 주면 되기 때문에 1 비트로 표현된다. 16가지의 경우가 나오는 회전 룰렛을 사용하여 경기를 한다면, 그 결과를 위해 4 비트를 할당해はたににな(やまな なやたとまとたちあなやにが‼️야 한다. 앞서 말한 3가지 사건에서 사건 요소인 는 불이 났는지, 앞면이 d던져졌는지, 회전 룰렛에서 1번 칸이 선택되었는지에 해당한다. 각각의 확률을 생각해 보면, 각 사건의 경우의 수가 가지는 확률인 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순서대로 1/2, 1/2 그리고 1/16이 된다. 이때 비트 단위 정보량은 와 같이 구해지고 각각 값은 1, 1, 4가 된다. 물론 불이 날 확률이 불이 나지 않을 확률보다 높은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불이 나지 않을 확률 이 되어, 이를 나타내는 정보량도 이 된다. 대한민국의 전자거래기본법에 따르면, “전자문서”라 함은 정보처리시스템에 의하여 전자적 형태로 작성, 송신ㆍ수신 또는 저장된 정보 를 말한다(전자거래기본법 제2조 제1호). 신용정보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융거래등 상거래에 있어서 거래상대방에 대한 식별·신용도·신용거래능력등의 판단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정보 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정보를 말한다. (동법 제2조 제1호) 자료 지식 정보 비대칭 정보 이론 정보 엔트로피 정보 시스템 정보 격차 정보 과다 결정장애 세대(Generation Maybe) 올리버 예게스(Oliver Jeges) 분류:지식
위키낱말사전 (Wiktionary 윅셔너리)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공개된 위키 형식으로 다언어 사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종 목표는 "모든 언어의 모든 낱말을 정의하는 것"이다. 대니얼 올스턴(Daniel Alston)과 몇몇을 포함한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현재의 모양새를 갖춘 프로젝트를 처음 출범시켰다. 위키낱말사전 프로젝트는 2002년 12월 12일 시작되었고, 2002년 12월 26일 공식 주소를 얻어, 2003년 6월 20일 위키미디어 재단의 일원이 되었다. 2016년 2월, 한국어 위키낱말사전은 20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었으나 2018년 7월, 21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 되었다. Wiktionary-logo-en.png|위키낱말사전 로고 WiktionaryKo.svg|한국어 위키낱말사전 로고 //www.wiktionary.org/ 위키낱말사전 대문 한국어 위키낱말사전 분류:위키미디어 프로젝트 분류:온라인 사전 분류:다언어 웹사이트
일반적인 온라인 채팅 프로그램에서 왼쪽의 창은 연락처 목록을 표시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창은 사용자와 연락처 내 인물 중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채팅 ()은 네트워크에서 두 명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글을 주고받는 행동을 말한다. 채팅은 본래 PC통신 때부터 즐겨 쓰던 방법으로, 대화방으로 사용자들이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웹캠의 발달로 음성 채팅 및 화상 채팅 등의 새로운 기술이 널리 퍼졌다. 또한, 대화방을 사용하지 않는 간편한 인스턴트 메신저도 널리 쓰인다. 최초의 온라인 채팅 시스템은 1973년 일리노이 대학교의 플라토 시스템에서 Doug Brown과 David R. Woolley에 의해 개발되었다. AOL 인스턴트 메신저 (AIM) 캠프로그 (Camfrog) 가두-가두 구글 토크 ICQ 인터넷 릴레이 챗 Jabber (XMPP) 머드 게임 MUSH 텐센트 QQ 스카이프 Talk TeamSpeak (TS) 윈도 라이브 메신저 야후! 메신저 네이트온 메신저 여러 개의 프로토콜을 지원하는 채팅 프로그램 Adium 피진 (소프트웨어) Quiet Internet Pager (QIP) 인터넷 릴레이 챗 HanIRC
기계공학에서 캠 (cam)은 동력 전달 장치의 하나로 회전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꾸는 철덩어리이다. 원동축의 정속(定速) 회전에 대응하여 종동 링크를 복잡한 경과를 더듬게 왕복직선 운동과 왕복 각운동을 부여하는 데는, 운동의 성질에 응해서 각종 기구가 쓰인다. 그중에서도 임의의 경과를 더듬는 운동을 가장 재빠르게 행하게 하는 데에는 캠장치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평면 캠과 입체 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캠은 회전운동에서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철덩어리로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예는 자동차의 캠축으로, 엔진의 회전 운동을 실린더의 흡배기 밸브 작동에 필요한 왕복운동으로 변환한다. 순/역방향 운동이나 원형운동을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크랭크라는 철덩어리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휠의 동작에 필요한 회전운동을 전환시키고,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취하는 자동차의 크랭크축은 그 예이다. 캠은 또한 저장된 정보와 도구전송 정보를 볼 수 있게 한다. 스크류 머신의 다양한 도구와 척의 움직임, 또는 뮤직 박스의 노트를 지시하는 CAM-DRUM 은 그 예이다. 캠에 의해 전송되고 저장된 정보는 ‘어떤 행동이 일어나고, 언제쯤 일어날까?’ 라는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 (이 주제를 설명하기에는, 비록 뮤직 박스 캠이 더 나은 예 일지라도, 자동차 캠 샤프트에도 본질적으로 이 물음을 답할 수 있다.) 어떤 캠은 축에 대해 회전하는 캠으로 만들어진 롤러 follower의 변화가 반영되는 변위 다이어그램에 의해서 특별할 수 있다. 이 다이어그램은 반경변위의 그 위치에서 각도 위치와 관련된다. 몇 가지 주요 용어는 플레이트 캠의 구조와 연관성이 있다. 변위 다이어그램은 전통적으로 음수가 아닌 값을 그래프로 표시된다. 섬네일 캠장치는 인도할 운동에 상응한 윤곽을 지닌 회전체(캠)을 일정한 속도로 돌리고, 둥글거나 또는 평면의 단면을 가진 종동절(從動節)을 그것에 대해 밀어붙임으로써, 필요로 하는 운동을 하게끔 한 것이다. 하트캠은 판(板)캠의 일종으로, 종동절의 끄트머리가 나이프에지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캠의 회전 중심을 통과하는 직선상으로 왕복운동 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캠장치이다. 캠은 각종 자동 기계류에 많이 쓰이고 있는데, 엔진 등의 연료판(瓣)이나 흡배기 밸브의 작동을 제어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 배력장치(倍力裝置)는 원동절(原動節)의 변위에 비교해서, 어떤 종동절의 변위가 매우 작을 경우는, 그 종동절에 현저하게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다. 엄밀히 직선을 그리는 링크장치는, 포슬리에 기구(機構) 외에 여러 종류가 있지만, 미끄럼기구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기구가 복잡하게 되므로, 기구를 간단하게 해서 근사적(近似的)인 직선운동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도 여러 종류의 기구가 있는 데 〔그림〕-39는 그 일종으로서, 점 P가 그리는 렘니스케이트곡선(雙葉曲線)의 일부가 직선을 거의 닮고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선박용 하역크레인으로 짐을 거의 수평으로 이동하도록 한 기구이다. 구면링크장치에서는, 축선(軸線)이 이루는 중심각이 평면링크장치의 링크의 길이에 상당하며, 중심각이 90°인 것은 평면링크장치의 슬라이더 즉 미끄럼자(子)에 상당한다. 구면링크장치에서도 4절(節)의 것이 기초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실제로 쓰이고 있는 것은 중심각이 90°인 링크 3개를 지니는 구면양(兩)미끄럼자 크랭크 연쇄로부터 고정링크의 교체로서 얻어지는 회전미끄럼자 기구와 요동(搖動)미끄럼자(子)기구 등이 주이다. 예전에 기차의 천장에 설치된 천장선풍기의 목흔들기 기구도 이의 응용이다. 초기 캠은 기원전 3 세기부터 헬레니즘 문명의 수력식 자동화기기에 내장되었다. 후에 캠축에 캠을 사용하는 방식이 터키 발명가 알-자자리에 의해 채용되었다. 유럽기계에는 캠 및 캠축이 14세기부터 나타났다. 톱니바퀴 분류:기계공학
PC 통신 (피시통신은 개인용 컴퓨터(PC)를 다른 컴퓨터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하여 자료를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개인용 컴퓨터끼리 서로 연결한 통신 형태도 포함되지만, 보통은 정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호스트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설치하고 여기에 가입한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로 접속하여 이용하는 형태의 전화 회선을 통한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를 가리킨다. 이때 통신 회선은 주로 전화 모뎀을 통한 전화 회선(PSTN)이 사용되지만 ISDN 등의 다른 회선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1990년대에 게시판과 대화방, 그리고 자료실을 제공하는 PC통신 서비스 회사가 설립되었다. 대한민국의 PC통신은 천리안과 하이텔 서비스로 시작되었다. 먼저 천리안은 1984년 5월에 (주)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하여, 1985년 10월 생활정보DB, 1986년 9월 화상정보서비스 천리안 , 1987년 4월 한글전자사서함 한-메일(H-mail) , 1988년 5월 문자정보서비스 천리안 II 로 이어져, 1990년 1월에는 PC-Serve 가 개통되고 1992년 12월 천리안 II 와 PC-Serve 가 통합하여 천리안이 되었다. 한편 하이텔은 1986년 11월 1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한국경제 프레스텔(Korea Economic Prestel) 을 개통하여 1987년 4월 15일 한경 KETEL 로 변경, 1987년 5월 1일에는 한경KETEL 영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1989년 11월 케텔(KETEL) 서비스를 시작한 뒤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PC통신(주)를 설립하면서 1992년 3월 서비스를 코텔(KORTEL)로 변경하고 같은 해 7월에 명칭을 하이텔(HiTEL)로 변경하였다. 케텔 당시 한국경제신문사에서는 컴퓨터 통신을 홍보하고 회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가입자들 중 추첨을 통해서 1200 BPS모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모뎀은 상당히 비싸서 10~20만원의 고가 장비였으며, 구입하여 집에 직접 와서 설치도 해주었다. 1994년 나우누리, 1996년 유니텔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PC통신 서비스는 다양해졌으며, 접속프로그램인 터미널 에뮬레이터도 큰사람 정보통신의 이야기 위주에서 새롬 데이타맨, 특정 PC통신회사의 전용 에뮬레이터 등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또한, PC통신은 MUD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즉, PC통신을 통하여 현재의 온라인 게임 및 커뮤니티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VT모드의 PC통신은 일부 기존 업체에서는 서비스가 유지되고는 있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은 PC통신 사용자가 드물다. 하이텔 서비스는 2007년 2월 28일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VT모드 텍스트 기반 서비스는 다음과 같다. 하이텔(HiTEL) - 한국PC통신(현, KTH)에서 운영하던 통신망이며, 전용에뮬레이터로도 접속이 가능하였다. 2004년 7월 17일 한미르와 통합하여 파란닷컴으로 전환되었으며, 2007년 2월 28일 VT모드 서비스 완전 종료. 천리안 - 데이콤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현재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으로 분사. 2007년 12월 27일 VT모드 서비스 중단. 2008년 4월 기준으로 전화접속도 가능하나(접속번호 01421, 1544-1421) 실제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고, 서비스 중단 안내 화면이 출력됨. 나우누리 - 나우콤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현재 나우SNT로 분사. 2013년 1월 31일 서비스 폐지. * 아이즈(Eyes) - 부일이동통신(주). 부산·경남지역. 나우누리와 연계 서비스. * 포커스(FOCUS) - (주)케이콤. 광주·전남지역. 나우누리와 연계 서비스. * 센티스(Centis) - (주)신원텔레콤. 대전·충청지역. 나우누리와 연계 서비스. 포스서브(POS-Serve) - 포스데이타에서 만든 통신망. 후에 에이텔(주)로 분사. 유니텔(UniTel) - 삼성SDS에서 만든 통신망. 현재 유니텔네트웍스로 분사. VT모드도 제공했으나 본래부터 전용 에뮬레이터 중심으로 출발하였다. 2007년 기준으로 기존 전용 에뮬레이터(유니윈) 방식 및 전화접속 유지 (접속번호 1588-1433) 키텔(KITEL) - 강원정보통신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1994년 개통. 본래는 강원지역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지역 통신망으로 출범했으나, 전국 통신망으로 성장하였다. 무료. 후에 (주)키텔로 사명 변경. 2001년 4월 30일 서비스 폐지. 그 밖에 민간주도의 지역 기반 PC통신망은 다음과 같다. 인디텔(INDITEL) - (재)인천정보통신센터. 인천 지역 정보망. (1993년 7월 19일 개통) 코코텔(KOKOTEL) - 일산정보통신센터. 경기도, 일산·고양 지역 정보망. KCnet - 광주전남네트. 전남 지역 정보망. TKNET - (주)대구종합정보센터. 대구 지역 정보망. KCTEL - 거창종합정보 전북 PC통신 에듀넷(EDUnet) -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초중등 교육 관련 정보 제공 및 초중등학교 정보화 지원 목적. 무료. 현재 웹사이트로 전환. 1999년부터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운영 중임 K.I.S. -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원래 목적은 전기사업 관련 정보 제공이나 일반적인 PC통신 서비스도 제공하였다. 무료. 서비스 폐지. 코티스(KOTIS) - 한국무역협회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무역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기본 PC통신 서비스는 무료이나, DB정보는 유료회원에게만 제공되었다. 현재 웹사이트 KITA net으로 전환. 199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전용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제공되는 인터넷 기반 통신망도 생겨났다. 채널아이 - LG인터넷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으로 이관후 2001년 3월 31일 천리안에 흡수됨. 넷츠고 - SK텔레콤에서 운영하던 통신망. 2002년 3월 31일 폐지되며 네이트로 흡수됨. 아미넷 - 현대전자에서 개통하여 현대정보기술로 이관되며 신비로로 변경. 온세통신이 인수. 이와 같은 대형 서비스 이외에도 특정 분야 또는 지역에 특화된 통신망도 존재하였고, 소규모 기업 및 단체, 심지어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BBS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사설 BBS는 개인 또는 단체가 운영하는 주로 비영리 목적의 소규모 PC통신 서비스였다. 자발적으로 발생한 이러한 사설 BBS들은 상용 PC통신 서비스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PC통신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사설 BBS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The FIRST 과 1988년 5월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 네트(Byte-Net) 가 효시로 알려져 있다. 곧이어 대구에서XENIX 환경에서 4개의 접속노드를 갖추어 다중접속자를 지원하는 달구벌 이 개설되고, 이듬해에는 엠팔(EMPal) BBS 가 개설되는데, 이 두개의 BBS는 당시 한국데이터통신에서 제공한 전자사서함 H-mail 의 사용자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또 와일드캣과 8개의 전화 회선을 이용하여 운영하는 네트워크 서울 도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사설 BBS들은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주로 와일드캣—을 한글화 해서 사용했는데,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 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주인 , 김성철의 밀키웨이 가 나왔고, 이와 별도로 1991년 최오길의 호롱불 이 등장하여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당시 유명 사설 BBS는 다음과 같다. 달구벌 엠팔(EMPal BBS) 메디네트 참세상 평화만들기 한편, 흔히 01410으로 알려진 한국통신하이텔은 전화망을 활용한 부가통신 서비스의 일종이며, 처음에는 접속번호 157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014XY 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01410을 접속번호로 하였다. 서비스 방식은 접속망 "하이텔"을 한국통신(현 KT)이 운영하면서 "인포샵"이라는 명칭으로 개별 정보제공업체(CP)이 정보서비스를 판매하는 형태이며 현재는 파우와우 로 이름이 변경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프랑스의 미니텔 서비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미니텔과 마찬가지로 문자 및 비디오텍스(VTX)가 지원되는 전용 단말기 하이텔 단말기를 도입하여 전화가입자들에게 무상임대하였다. 이 하이텔망은 인포샵 서비스 이외에도 다른 여러 PC통신 서비스의 접속 관문의 역할도 하였고, 아울러 전화접속 패킷망으로서 HiNET-P, HiNET-F 등의 네트워킹 서비스도 제공되었다. 나중에는 종량제 PPP 접속서비스도 제공된다. 서비스 명칭 "하이텔"이 PC통신 하이텔과 공유되어 있으나, 서로 구분되는 별도 서비스이다. 이 서비스 내에는 한국PC통신의 하이텔 이외에도 한국통신이 직접 운영하는 소규모 PC 통신으로 HiTEL-POP도 함께 존재했는데, 이것은 이후 미래텔로 이름이 바뀌었었다가 나중에 PC통신 하이텔로 흡수되었다. 5자리로 구성된 014XY 전화번호는 전기통신번호 관리세칙에 의한 부가통신사업자 식별번호로서, 전화회선을 이용한 데이터 통신에 할당되는 전용 접속번호이다. 처음에는 PC통신용 접속 번호로 도입되었으나 나중에는 다이얼업 PPP 접속 번호로도 활용되었고, 음성통화에 비하여 40% 요금 할인 또는 정액요금제 등의 혜택이 있었다. 현재는 광대역망의 보급으로 모뎀 사용이 격감하여 대부분의 014XY 번호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공식 서비스는 2017년 8월 31 종료되었으며 다음해까지도 01410 파우와우 서비스는 낮은 접속 성공률로 매회 수분간 접속이 되었으나 더이상 제공되는 컨텐츠와 서비스는 없었으며 , 2018년 7월 경 일자불상에 모든 014xy 전화번호가 퍠쇄되었다. 따라서 2018년 7월 현재 이하 명기된 모든 일체의 서비스는 더 이상 접속이 불가능하다.아울러, 1544 국번으로 시작하던 관련 서비스는 현재 타 기업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01410 - 한국통신의 패킷망 HiNET-P 접속번호. 한국통신 인포샵(현재 PowWow), PC통신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 등의 접속 경로로도 활용됨. 01411 - 01410의 33.6kbps 고속회선. 01412 - 천리안 접속번호 01413 - 한국통신 리빙넷(LIVINNET) 서비스 01414 - 한국통신 코넷(KORnet) PPP 01420 - 데이콤의 패킷망 DNS 접속번호. 천리안의 접속 경로로도 사용됨 01421 - 천리안 접속번호. 천리안 PPP. 01422 - 데이콤 프레임 릴레이(Frame Relay) 접속번호 01431 - 신비로 접속번호. 신비로 PPP. 01432 - 01410의 56.6kbps 고속회선 01433 - 유니텔 접속번호. 유니텔 PPP 01434 - 채널아이 접속번호. 채널아이 PPP 01436 - 한국무역협회 KOTIS 접속번호. KOTIS PPP 01438 - 아이네트 PPP 01441 - 하나로통신 하나넷 PPP 01442 - 넷츠고 접속번호. 넷츠고 PPP 01443 - 나우누리의 전용 접속번호. 나우누리 PPP 01444 - 에듀넷 접속번호. 에듀넷 PPP 01445 - 두루넷 PPP 01446 - 경기도청 경기넷 접속. 경기넷 PPP 2007년 1월 기준으로 부여되어 있는 식별번호는 다음과 같다. 사업자 식별번호 명칭 KT 01410 파우와우(Powwow) 01411 01412 01413 리빙넷 01414 코넷 LGU+ 01421 천리안넷 01422 SK브로드밴드 01441 하나넷 온세텔레콤 *01431 신비로 유니텔네트웍스 *01433 유니텔 SK텔레콤 *01442 넷츠고 경기도 *01446 경기넷 별 표시(*)는 2007년 12월 기준으로 접속 불능 ASCII 아트는 문자를 조합하여 한 화면상에 그림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문자 기반 표시장치만 존재했던 초창기 컴퓨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ANSI 아트는 터미날의 제어코드(ESC 이스케이프)를 활용하여, 색상 표시, 화면 갱신들을 이용해 동적인 화면을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미국 * 컴퓨서브(CompuServe, 후에 AOL에 인수) * 프로디지(Prodigy) * 델파이(Delphi) * AOL (America Online) 일본 * 니프티서브(NIFTY-Serve) * PC-VAN * ASCIInet KETEL의 초기화면 CONNECT 2400 i ### ketel에 연결되었습니다.(korea:pc) ### Welcome to ketel ### 서비스 명에 ketel을 입력하십시오. ### Please type "ke" for KETEL English Service. 서비스 명(login):ketel KK KKK EEEEE TTTTTTTT EEEEEE Ltm KK KK EE TT EE L KKK EEEE TT EEEE LL KK KK EE TT EE LL KK KKK EEEEEE TT EEEEEE LLLLLLLL >> 1.> 2.KETEL 전용 단말기 서비스 안내 3.>>사용자 번호 변경 업무 개시 4.>>KETEL ID 신청 메뉴 서비스 제공개시 5.> 6.> 7.한경의 기사를 공모합니다. * 공지사항을 보시겠습니까(번호/N/z)? 사용자번호 >> (TOP) 1. 서비스 안내 2. KETEL-UNICOM NEWS 11. 조선일보뉴스 12. 동아일보뉴스 13. 전남일보뉴스 14. 부산일보뉴스 15. 영남일보뉴스 19. 한국경제신문뉴스 21. 증권/금융 22. 기업/경제통제 23. 무역 24. 환율/금리 25. 중소기업지원 정보 31. 유통/물가 32. 부동산 33. 세무 34. 문화/레저 35. 날씨 41. 의/약/건강 42. 농업정보 51. 전자우편 52. 게시판 53. 토론의 광장 54. 대화실 55. 동호인 코너 56. 컴퓨터/통신 57. PC 라인 번호/명령(H,GO,PF,ME,Z,X) >> 〈인터넷과 지역정보시스템 Free-Net과 CAP 사례를 중심으로〉,《정보화 동향 (1996. 12. 30.)》. 김형민. 한국전산원, 1996. 〈통신시장 환경변화에 따른 번호관리세칙 개정 연구〉. 김창완, 김봉식. 정보통신정책연구원, 2006. 〈통신망 식별번호 현황 (2007. 1. 5.)〉. 정보통신부 통신위원회. 2007. 〈지역정보화〉,《데이터베이스백서 1998》. (재)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센터, 1998. 《한국정보통신20세기사》. 정보통신부, 2001. 《내 삶 나의 컴퓨터》. 박순백. 영진출판사. 1991. 버추얼 터미널( Virtual terminal) 텔넷 PC통신을 체험할 수 있는 사이트 하이텔 텔넷 분류:컴퓨터 통신
통신체 (通信體)는 컴퓨터를 통해 발달한 한국어의 독특한 문체와 그 형태를 의미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PC통신이 널리 쓰이던 때에는 자판을 한 번 치는 시간도 전화요금으로 청구되었다. 그래서, 시간과 돈, 노력을 절약하는 수단으로 통신체가 각광받으며 널리 퍼졌다. 당시 유행하던 통신체 로는, 어솨요(어서오세요), 리하이(리하)(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_^/^-^(재미있네요) , 방가방가(반가워요, 반가워요) 등이 있었다. 그 이후, 리니지 등의 게임이나, 디시인사이드같은 유저포탈의 생성으로 즐, 원츄, 아햏햏, 뷁 등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 문화관광부 연구보고서인 “바람직한 통신 언어 확립을 위한 기초 연구”에 따르면, 통신 언어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운영자 언어 사이트 등의 운영자들이 공지글 등에서 쓰는 언어. 게시판 언어 인터넷·통신 이용자들이 게시글에서 쓰는 언어. 대화방 언어 대화방이나 게시글에서 보이는, 구어체에 가까운 언어. 휴대전화 문자 전송 언어 휴대전화 문자에서 쓰이는 언어. 이모티콘 이정복(2000), “바람직한 통신 언어 확립을 위한 기초 연구”, 문화관광부 연구보고서. 비슷한 표기법 * 외계어 * 리트 * 볼라퓌크 인코딩 속어 대한민국의 인터넷 신조어 목록 분류:컴퓨터 통신 분류:인터넷 문화 분류:속어
네트워크 (network), 망 (網)은 다음을 가리킨다. 통신망 통신 네트워크(telecommunications network) 컴퓨터 네트워크(computer network) 무선 네트워크(wireless network) 방송망, 중계망 방송 네트워크(broadcasting network) * 라디오 네트워크(radio network) * 텔레비전 네트워크(television network) 그래프 이론 네트워크 과학 기타 뉴럴 네트워크(neural network)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 전기 회로(electrical network) 《네트워크》(network) - 1976년 미국 영화 네트워크 뮤직 그룹(Nettwerk Music Group) 영업망 교통망 네트워크 (신문)
햄버거 (는 샌드위치의 일종인 음식이다. 양념, 빵가루 등에 고기를 갈아 넣고 버무린 뒤 구워낸 햄버그 스테이크(패티)와 채소, 양념 등을 두 장 이상의 동그랗거나 길쭉한 빵 사이에 넣어 만들며, 보통 손으로 쥐면서 들고 먹는다.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판매된다. 수많은 패스트푸드 식당들은 햄버거, 감자 튀김, 콜라를 하나로 묶어서 세트로 판매하기도 한다. 독일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이 지난날 몽골에서 독일로 가져온 음식이었던 타르타르 스테이크를 모방하여 그 지역 요리사가 다진 육회를 재료로 반죽하여 뭉친 것을 불에 구운 것으로 햄버그 스테이크 또는 함부르크 스테이크 라 한다. 18세기 초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 출신 이민자들에게서 이 스테이크가 미국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함부르크에서 온 스테이크라는 음식인 햄버그 스테이크(Hamburg steak)로 불리게 된다. 이후 미국 각지에서 햄버그 스테이크를 사용하여 햄버거라는 요리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시초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을뿐 정확히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큰 이견이 없다. 햄버거의 시초를 둘러싼 주장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한 요리사가 샌드위치를 만들던 중 너무 바쁜 나머지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일반 고기 대신 샌드위치 빵에 넣어 판매한 것이 오늘날 햄버거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보통 쇠고기로 만들지만, 들어가는 패티의 원료나 양념에 따라서 치킨버거, 불고기버거, 비프버거 등으로 구별해 불리기도 한다. 또 패티 이외의 소에 따라 치즈버거 등으로도 불린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채소만 넣어 만들거나 콩을 원료로 한 패티로 만든 샌드위치(베지 버거)역시 햄버거로 불릴 때가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치의 맛을 낸 김치 버거와 밥을 뭉쳐 모양을 낸 것을 빵 대신 사용한 라이스 버거도 존재한다. 미국 요리 독일 요리 샌드위치 맥도날드 버거킹 베지 버거 밥버거 분류:함부르크의 문화 분류:패스트 푸드 분류:샌드위치 분류:미국의 샌드위치 분류:미국 요리 분류:독일 요리 분류:쇠고기
브루겔, 어린이 유희(Kinderspiele), 1560년 놀이 () 또는 유희 (遊戱)는 인간이 재미을 얻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한다. 물질적 보상 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이며 외부의 강제에 의한 행위도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이나 일과 구별되지만, 노동에도 유희적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놀이는 기분전환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 규정되며, 서양 기원의 승부와 관련 있는 놀이는 게임(game)으로 불리기도 한다. 즐거움 외에도 민첩성이나 사회성 등 성장에 필요한 경험을 얻기 위해 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놀이를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관해서는 종래 많은 학설이 있다. 잉여정력설(剩餘精力說)·생활준비설·반복설·휴양설·생물학설 등이 있다. 놀이를 작업과의 대립개념으로 했을 때 그 본질은 분명해진다. 작업은 진지한 것이며, 피곤함과 고됨이 따른다. 또한 의무적·강제적인 것임에 반해서, 놀이는 자기목적적이며, 자기충족적 운동으로, 활동에는 쾌감이 따르고, 또한 자발적·해방적인 것이다. 놀이에는 기본적인 요소로 참여자와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rule)이 추가 요소로 포함될 때도 있다. 근대의 놀이는 기본적으로 방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놀이의 핵심은 즐거움 이다. 놀이의 참여자는 놀이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여러 가지 행위를 하면서 즐거움 을 얻거나, 특정 행위 이후에 돌아오는 보상으로서 즐거움 을 얻고자 한다. 즉, 한 사람 이상의 참여자가 과정 또는 목표를 통해 즐거움 을 얻을 수 있는 행위를 놀이 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즐거움 이란, 통념상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느끼는 긴장감, 성취감, 기쁨 등의 건강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 자발성 재미와 즐거움 공정한 경쟁 규칙 준수 주체성 상호성 # 경쟁(아곤:Agon)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경기나 시합예) 축구, 농구 등 # 우연(알레아:Alea) 요행을 바라며 하는 놀이예) 주사위 게임 # 모방(미미크리:Mimicry) 특정 누군가를 흉내내는 놀이예) 역할 놀이 # 현기증(일링크스:Ilinx) 자신의 내부 기관의 혼란과 착란의 상태를 일으키면서 하는 놀이예) 놀이기구 유아기(乳兒期)에는 작업과 놀이가 미분화상태이기 때문에, 놀이에 대해서 어른의 작업에 대한 것과 같이 진지하다. 이 미분화성 때문에 이 시대에서는 놀이 가운데서 작업(간단한 심부름 등)을 시키는 일도 가능하며, 또한 완구(玩具)를 보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도구가 그 역할을 한다. 유아에게는 혼잣놀이나 평행놀이가 많다. 아동기의 중기부터 후기는 집단적 놀이가 특징이며, 소위 갱(gang)시대를 이룬다. 유희집단의 성원 수도 연령과 함께 변화한다. 집단참가의 인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2~4명이던 것이 고학년에 가서는 6~10명으로 증가한다. 그 후 청년기가 됨에 따라 다시 감소한다. 동일유희라도 발달에 따라서 그 구조가 변화한다. 오가와타로(小川太郞)에 의하면, 유희는 혼자서 가능한 조직없는 유희로부터 단순한 규칙을 가진 단순한 조직놀이로, 다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복잡한 조직놀이로 변화한다. 아동기부터 청년기에는 놀이가 집단적으로 행해지며, 규칙이 정해진 그룹조직이라든가 운동경기 등이 왕성하게 실시된다. 이 놀이집단을 통해서 협조성이나 자기통제와 같은 성격형성이 가능해지며, 신체의 훈련, 규칙 존중 등의 사회성의 증진이 학습될 가능성이 많다. 뵐러(Ch. Buhler)는 놀이를, ① 기능놀이(감각을 사용한다든지, 손발을 움직인다), ② 상상(想像)놀이(소위 경쟁놀이), ③ 구성놀이(토막쌓기·찰흙빚기·描畵 등), ④ 수용(受容)놀이(그림극·레코드 등을 보고 들으며 즐기는 것)등으로 분류하여 발달을 고찰한다. 파텐(M. B. Parten)은 사회적 행동양식에 의해서, 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행동, ② 방관적 행동, ③ 혼잣놀이, ④ 평행놀이, ⑤ 연합놀이, ⑥ 협동놀이로 분류한다. 유아기의 놀이의 형태는, 대개 유희활동의 경과형식(經過形式)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그 발달 차이를 알아보고 있다. 미분화형놀이 가장 원시적인 유희활동. 거의 2-3분 간격으로 다른 활동을 나타내며, 더욱이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유희라고 이름붙일 수 없을 정도로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1세아에 많다. 대부분 적응적 목적을 위해 습득한 어떤 하나의 기제로 순환적 반응을 반복하는 행위가 주를 이룬다. 이 시기는 심상이 아닌 기능적 동화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단계와 구별된다. 누적형놀이 단편적 유희행동이 모자이크식으로 접합한 것이다. 10분간 정도씩 유희(遊戱)가 계속되나 다음 유희와의 관계성이 없이 이루어지는 놀이 방법으로, 1시간에 4~9종의 놀이가 나타난다. 2~3세아에 가장 많다. 이 시기에 이르른 아동은 단순한 감각운동적 면에서 탈피해 상징적 가작화를 통한 놀이에 집중한다. 하지만 아동은 사진의 행동을 가작화로써 이해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의식화하는데에만 머무르며, 이는 누적형놀이와 연속형 놀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연속형놀이 같은 종류의 유희가 1시간 가까이 연속된다. 하나의 유희가 그것과 관계 있는 유희로 발전한다든지, 혹은 다른 유희를 도입하여, 잡다(雜多)하게 하나의 유희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5세아에 비교적 많다. 이 때에부터는 놀이가 습관화된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징적 도식의 형태를 취한다. 분절형놀이 정지된 유희활동이 1시간에 2가지나 3가지의 비율로 실시된다. 4~6세아에 많다. 통일형놀이 분절형의 유희가 다시 오래 계속된다. 1시간 내의 대부분이 하나의 유희이다. 분절형 놀이의 상위유희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언뜻 보기에는 연속형 놀이와 비슷해보이지만, 각각의 유희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것으로 연속형 놀이와 구분된다. 투호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없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그네, 시소, 널뛰기, 회전목마, 롤러코스터, 썰매 등 탈것에 의한 놀이 사물놀이, 탈춤 등의 공연 강강술래, 지신 밟기, 단체 춤 등 여러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놀이 실뜨기(실 모양 만들기), 퍼즐 맞추기 등 과제형 놀이 수수께끼, 스무고개 놀이 등 언어를 이용한 놀이 소꿉장난, 인형놀이, 코스프레 등 역할 놀이 모래성 쌓기, 블록쌓기 등 만들기 놀이 스쿠버 다이빙, 번지 점프 등 특수 장비가 필요한 놀이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있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가위 바위 보를 이용한 놀이 숨바꼭질 등의 단체 놀이 고무줄 놀이, 딱지치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투호, 굴렁쇠 등 도구와 숙달이 필요한 놀이 끝말 잇기, 삼육구 등 언어를 이용한 놀이 게임 취미 놀이공원 놀이터 한국의 민속놀이
비디오 게임 《루나 렌더》 비디오 게임 (video game이란 컴퓨터가 사용자의 입력을 받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처리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출력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은 글자나 그림, 소리만으로 출력될 수도 있지만, 많은 비디오 게임이 영상표시장치를 이용한 시각적 출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플랫폼"(platform)이라는 용어는 전자 부품의 특정한 조합이나 컴퓨터 하드웨어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소프트웨어와 결합하여 비디오 게임이 동작할 수 있게 한다. "시스템"(system)이라는 용어 또한 흔히 사용된다. 아래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으며 하나 이상의 플랫폼을 연결하는 게임이 있을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뿐 아니라, 게임을 즐길 수 있으나 전용 비디오 게임 머신이 아닌 다른 장치들도 존재한다. (스마트폰, PDA, 공학용 계산기) PC 콘솔 핸드헬드 (휴대용 기기) 아케이드 (전자오락) 웹 브라우저 롤플레잉 게임 (RPG) 액션 게임 대전 격투 게임 슈팅 게임 어드벤처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스포츠 게임 레이스 게임 퍼즐 게임 테이블 게임 퀴즈 게임 온라인 게임 소셜 게임 예술 형식으로서의 비디오 게임 아트 게임 비디오 게임은 여러 종류의 입력 장치를 사용하여 사람의 행위를 게임에 번역, 전달할 수 있으며, 가장 흔한 게임 컨트롤러는 PC 게임의 경우 키보드, 마우스이며, 콘솔의 경우 게임패드, 휴대용 콘솔의 경우 버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의 게임 컨트롤러는 일반적으로 레이싱 휠, 라이트 건, 댄스 패드가 있다. 디지털 카메라 또한 플레이어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게임 컨트롤러로 사용할 수 있다. 이스터 에그는 개발자들의 메인 게임의 일부가 아닌 곳에 남겨둔 숨겨진 메시지나 농담이다. 비디오 게임은 게임으로서는 드물게 혼자서 하는 게임(1인용 게임)이 많았다. 그것은 컴퓨터 자체가 여러 사람이 함께하기 어려우며,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컴퓨터가 알아서 적절한 상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게임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처리하고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서사적 특징을 띠기도 한다. 다른 참여자와의 상호 작용에 크게 의지했던 기존의 게임과는 달리, 다른 참여자가 없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게임이 제공하는 내용이 그 경험 수준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사적 특징의 하나는 주인공의 존재인데, 보통의 게임은 여러 인간 참여자가 이루어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인공이 없던 반면, 혼자 하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유일한 인간 참여자에 그 비중이 맞추어진다. 그래서 모든 게임 환경과 컴퓨터 참여자들이 주인공인 인간 참여자의 행동에 맞추어 작용함으로써 의도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나아가 컴퓨터가 더는 참여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인간 참여자 개인에 맞추어지는 환경으로서 제공되는 게임도 많다. 그를 위해 비디오 게임은 영화와 소설 등의 다른 서사 매체의 문법을 빌려와 게임 참여자에게 높은 수준의 경험을 제공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신 기술의 발달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함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온라인 게임이 대두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전의 게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사람들이 동시에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 이론》의 저자인 라프 코스터는 2007년 게임 개발자 회의에서 과거 1인용 게임들의 성행은 놀이의 기형적인 변화였고, 온라인 게임의 시대가 오면서 진정한 놀이로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비디오 게임을 새로운 서사 형태의 출현으로 보는 사람들은 혼자서 하는 비디오 게임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비디오 게임은 종종 다양한 전자 매체가 결합한 멀티미디어의 궁극적 형태로 언급된다. 현대의 비디오 게임은 영화, 문학, 음악 등 여러 표현이 모두 결합하여 상호 작용의 형태로 제공되는 경험 매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의 본질은 그 구조이며 영상과 음악, 문학 등의 표현은 그것을 돕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임의로 연산된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으로 재미를 제공하며 일련의 학습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디지털의 특성상 널리 배포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교육이나 선전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게임 콘솔 게임 게임학 컴퓨터 게임 비디오 게임 목록 카드 게임 보드 게임 분류:미국의 발명품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 (, 1941년 3월 26일~ )는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이다. 그는 1995년부터 200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중의 과학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석좌교수"직과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2009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그는 역시 많은 저명한 언론매체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엔카르타 백과사전과 진화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 무신론적 박애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수석편집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으며 과학적회의론 메가진의 창립멤버로 편집이사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왕실이 수여하는 패러데이 상의 심사위원, 영국TV 아카데미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으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생물학 부문 수장이기도 하다. 도킨스는 진화에 대한 유전자 중심적 관점을 대중화하고 밈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1976년 저서 《이기적 유전자》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1982년 그는 표현형의 효과가 유기체 자신의 신체만이 아니라 다른 유기체들의 신체를 포함한 넓은 환경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준 저서 《확장된 표현형》으로 진화생물학계에서 폭넓은 인용을 받았다. 도킨스는 무신론자 이며, 철저한 인본주의자, 회의주의자, 과학적 합리주의자 및 브라이트 운동 지지자이다. 그는 미디어에서 여러 차례 "다윈의 로트바일러" 로 불렸는데, 이는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가 자연 선택을 지지하면서 "다윈의 불독"으로 불린 것에서 유추되었다. 2006년에 발표한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초자연적 창조자가 거의 확실히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적 신앙은 굳어진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007년 11월 현재 《만들어진 신》의 영어판은 150만 권 이상 판매되어 그의 책들 중 1위를 기록했으며, 31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도킨스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대중과학서를 집필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다. 2004년 옥스퍼드의 베일리얼 칼리지(Balliol College)는 그의 이름을 딴 도킨스 상을 만들어 인간에 의해 멸종위기에 빠진 동물의 행동양식과 복지에 기여하는 논문을 발표한 사람에게 수상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1941년 3월 26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클린턴 존 도킨스는 2차대전중 연합군으로 영국에서 케냐로 이주하였으며 도킨스가 8세가 되던 1949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부모 모두 과학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도킨스의 질문들에 과학적 언어로서 답을 해 주었다고 한다. 도킨스는 그의 어린시절을 전형적인 평범한 영국 소년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략 9세 되던 무렵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자연에 있는 방향성, 규칙성, 목적성, 질서와 이런 것들의 조합등을 인식하고 다시 신의 존재를 믿도록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영국성공회의 관습들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신보다는 윤리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후에 그가 생물의 진화과정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종교적인 관점은 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 없이도 진화론의 자연선택이 생명의 복잡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 도킨스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온들 스쿨(Oundle School)을 다녔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동물학을 수학했는데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동물행태학자 니콜라스 틴버겐(Nikolaas Tinbergen)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62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그 후 틴버겐의 지도하에 옥스퍼드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1966년에 받게 된다. 틴버겐은 동물행태연구의 개척자였는데 특히 본능의 문제들, 학습과 선택에 있어 선구자이다. 이 시기에 도킨스의 연구는 동물결정모델에 관한 것이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도킨스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물학 조교수로 재직한다. 이 시기 UC 버클리에서는 당시의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운동이 거세었는데 도킨스도 행동가로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 깊이 개입했다. 그는 1970년에 다시 옥스퍼드로 동물학을 강의하러 돌아 왔으며 현재까지 옥스퍼드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5년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찰스 시모니(Charles Simonyi)가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며 기부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저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도킨스는 생명과학을 일반대중에 쉽게 설명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7년, 도킨스는 동료 학자 매리언 스탬프와 결혼했고 1984년에 이혼했다. 그 해 도킨스는 Eve Barham과 재혼했으며 사이에 딸 Juliet Emma Dawkins를 두었으나 역시 이혼했다. Barham은 1999년 암으로 사망했다. 1992년에 그는 여배우 랠라 워드(Lalla Ward)와 결혼했다. 도킨스와 워드는 그들의 공통 친구인 더글러스 애덤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워드는 도킨스 책 중 절반 이상의 삽화를 그렸으며 두 책의 오디오버전(《조상 이야기》와 《만들어진 신》)의 나레이터를 맡았다. 2009년, 그는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도킨스는 만물은 신이 창조했다는 종교적 믿음인 창조과학에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창조과학을 불합리하고 지성을 축소시키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1986년에 나온 책 《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에서 창조론자의 중요한 논점인 설계론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18세기 영국신학자 윌리엄 패일리(William Paley)의 저서 "자연신학"에서 주장되어 유명해진 시계공비유에 대해 반박했다. 패일리는 그의 저서에서 "시계는 너무 복잡하고 기능적이어서 단순히 우연의 산물로 출현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도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었다"라고 확언했다. 하지만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론의 자연선택도 생물계의 규칙성과 복잡성, 그리고 기능성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에 있어서 지성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시계제작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86년에 도킨스는 옥스퍼드 헉슬리기념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젊은 지구 창조론자인 A. E. 윌더-스미스(A. E. Wilder-Smith), 성경적창조론회 수장인 에드거 앤드루스(Edgar Andrews) 등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만약 그가 그런 토론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창조과학자들이 노리는 기독교인들로부터의 명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만류한 그의 동료 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충고를 따라 이후 창조과학자들과 공식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 도킨스는 토론을 제의하는 창조과학자들이 그런 논쟁에서 완패당하든 아니든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에 따르면 그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화학자와 논쟁을 벌임으로써 얻어지는 명성이었던 것이다. 2004년 12월 미국 언론인 빌 모이어스(Bill Moyers)와 인터뷰할때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느 과학만큼이나 확실하다." 모이어스가 그에게 "이론"이란 단어의 사용에 대해 질문했을때,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화는 이제까지 관측되어 왔다.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을 관측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그것은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경찰이 그 범인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 형사는 당연히 살인이 일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형사는 많은 실마리와 엄청난 양의 상황증거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진화는 진정한 과학자에게 마치 영어단어게임에서 하나 하나 스펠링을 불러주는 것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도킨스는 아이들의 과학교육에 지적설계를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으며 단지 종교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 진실"이란 영국단체를 강하게 비판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단체가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도록 홍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러한 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을 통해 책, DVD, 팸플릿을 제작해서 학교에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교육 스캔들"이라고도 표현했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 책인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저자 런던 대학교 교수 스티븐 로즈(Steven Rose)는 도킨스를 초다윈주의자(Ultradarwinist)로 명명하면서, 유기체가 아닌 유전자 수준에서 여러가지 자연 선택과정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도킨스의 유전자론은 유기체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유기체를 유전자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개체로 격하시켜 진화의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 도킨스는 로즈가 비판하는 유전자 결정론이란 사회생물학자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념임을 지적하고, 로즈의 주장은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다고 답했다. 책이름 출시일 페이지 판형 출판사 국제 표준 도서 번호 비고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년1989년2006년 432쪽 A5 을유문화사 한국어판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1982년 556쪽 A5 을유문화사 한국어판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1986년1991년2006년 458쪽 A5 민음사 한국어판 에덴 밖의 강River out of Eden 1995년 220쪽 A5 동아출판사 한국어판 불가능한 산 오르기Climbing Mount Improbable 1996년 - - - 무지개를 풀며Unweaving the Rainbow 1998년 488쪽 A5 바다출판사 한국어판 악마의 사도A Devil s Chaplain 2003년 487쪽 A5 바다출판사 한국어판 조상 이야기The Ancestor s TaleA Pilgrimage to the Dawn of Life 2004년 694쪽 A5 까치 한국어판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2006년 604쪽 A5 김영사 한국어판 지상 최대의 쇼 (책)The Greatest Show on EarthThe Evidence for Evolution 2009년 624쪽 A4 김영사 한국어판 · 에덴 밖의 강 은 사이언스북스에서 에덴의 강 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판했다. 도킨스는 또한 수많은 연설과 강의를 했는데 그중엔 헨리 시즈위크(Henry Sidgwick) 기념연설 (1989), 첫 번째 에라스무스 다윈(first Erasmus Darwin) 기념강의 (1990),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강의 (1991), T.H. 헉슬리 기념 강연(T.H. Huxley Memorial Lecture) (1992), 어빈 기념 강의(Irvine Memorial Lecture)(1997), 쉘든 도일강의(Sheldon Doyle Lecture) (1999), 틴베르헨 강연 (2004), 그리고 태너 강의(Tanner Lectures)(2003)등이 대표적이다. 1991년에 그는 어린이를 위한 왕실학교 크리스마스 특강을 했고 이것은 2007년에 "이 우주에서 성장한다는 것은"이란 DVD 타이틀로 나왔다. 1987년 로열 문학 소사이어티 상 1987년 BBC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눈먼 시계공 으로 올해 최고의 텔레비전 과학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과학기술상을 수상하였다. 1989년 동물학 소사이어티 은메달 1990년 마이클 패러데이 상 1990년 핀레이 혁신상 1994년 나카야마 상 1996년 미국 인도주의자협회, 올해의 인도주의자 상 1997년 국제코스모스상 2001년 키슬러 상 2001년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상 2002년 글래스고 왕립 철학회의 캘빈 200주년 상 2004년 《프로스펙트》 지 독자 선정 영국의 대중 지성 100인에 압도적 표차로 선정되었다. 2005년 과학적 지식의 간결하고 접근성있는 소개로 알프레드 톱퍼 재단의 셰익스피어 상을 수상했다. 2006년 루이스 토마스 과학 저술상 2007년 갤럭시 브리티쉬 북, 올해의 작가상 2007년 《타임》 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2007년 Deschner 상 2009년 니에런버그 공익 과학상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생물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동물학과 졸업 (이학석사, 이학박사) 영국 허더스필드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영국 더햄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영국 헐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벨기에 앤트워프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영국 애버딘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미국 오픈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벨기에 브뤼셀 브리헤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스페인 발렌시아 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영국 성 앤드류스 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리처드 도킨스 재단 도킨스 그물터 전체 책 목록 한국 무신론자 모임 분류:1941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잉글랜드의 무신론자 분류:잉글랜드의 생물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철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불가지론자 분류:진화생물학자 분류:동물행동학자 분류:반파시스트 분류:반기독교주의자 분류:자유주의자 분류:관념사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 동문 분류:나이로비 출신 분류:포스트모더니즘 비판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분류:더글러스 애덤스 분류:잉글랜드의 회고록 작가 분류:대체의학 비판자 분류:잉글랜드의 공화주의자 분류:20세기 생물학자 분류:21세기 생물학자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 교수 분류:영국의 무신론자 분류:영국의 회고록 작가
막스 루트비히 헤닝 델브뤽 (, ForMemRS, 1906년 9월 4일 ~ 1981년 3월 9일)은 독일 제국 베를린 출신의 미국의 생물학자이다. 1969년에 바이러스의 복제 기작과 유전적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앨프리드 허시,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막스 델브뤽(1940년대 촬영) 델브뤽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천문물리학을 공부하다가 이론물리로 전향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영국과 덴마크, 스위스 등 여러 나라들을 순회했다. 볼프강 파울리와 닐스 보어를 만나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32년 베를린에 돌아와 리제 마이트너의 조수가 된다.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초파리(drosophila) 유전자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며 미국에 머물렀다. 1941년 매리 브루스(Mary Bruce)와 결혼하면서 나중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네 아이를 얻었다. 1942년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박테리아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잘 조절된 변화가 아닌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공로로 1969년 앨프리드 허시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1950년대 이후 델브뤽은 유전학보다는 생리학쪽의 연구에 집중했고 또한 쾰른 대학교에 분자유전학 연구소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의 손녀였다.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1969 - Max Delbrück - 노벨 재단 분류:1906년 태어남 분류:1981년 죽음 분류:생물물리학자 분류:미국의 생물학자 분류: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독일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분류: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석학회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 분류:밴더빌트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독일계 미국인 분류:베를린 출신
수학에서, 유리수 (有理數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있는 수이다. 단, 분모가 0이 아니어야 한다. 특히, 분모가 1일 수 있으므로 모든 정수는 유리수이다. 유리수체의 기호는 볼드체 나 칠판 볼드체 이며, 몫 을 뜻하는 영어()에서 따왔다. 유리수체 는 정수환 의 분수체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유리수체 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시키는 (동형 아래 유일한) 체이다. 의 표수는 0이다. 만약 환 의 표수가 0이라면, 유일한 환 준동형 이 존재한다. 유리수체 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 를 줄 수 있다. 유리수체 는 집합으로서 몫집합 이며, 그 위의 덧셈과 곱셈은 다음과 같다. 체가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인 각종 연산 법칙과 덧셈 항등원 및 각 유리수 의 덧셈 역원 및 곱셈 항등원 및 0이 아닌 각 유리수 의 곱셈 역원 의 존재가 성립하므로, 이는 체를 이룬다. 정수환과 유리수체 사이의 표준적인 단사 환 준동형은 다음과 같다. 각 유리수 를 분수 꼴 로 나타내면, 유리수를 마치 두 정수의 비율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 유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이므로, 나눗셈 기호와 의미가 같은 분수 기호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과 3의 비를 분수로 나타내면 이다. 분자와 분모를 동시에 그 공약수로 나누어 원래와 값이 같지만 꼴이 더 단순한 분수를 얻는 과정을 약분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서로소이어서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 분수를 기약 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을 최대 공약수 6으로 나눠 약분하면 기약 분수 을 얻는다. 분자가 분모보다 작은 분수를 진분수, 작지 않은 분수를 가분수라고 한다. 가분수는 정수와 진분수의 합으로 표현한 것을 대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의 대분수 표현은 1이다. 무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분수 표현이 불가능하다. 유리수의 진법 전개는 유한 소수이거나 순환 소수이다. 십진법 전개가 가장 흔하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분수를 소수로 전환하려면 나머지 있는 나눗셈을 통해 순환 마디를 구하면 된다. 유한 소수나 순환 소수를 분수로 전환하려면 0.111..., 0.001001001... 따위를 이용하면 된다. 반면 무리수의 진법 전개는 비순환 소수이다. 유리수는 유한 연분수 표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분수를 연분수로 나타내려면, 분자와 분모에 유클리드 호제법을 응용하면 된다. 무리수의 경우, 연분수 표현은 항상 무한 연분수이다. 두 유리수가 같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유리수가 다른 어떤 유리수보다 작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두 유리수의 덧셈에는 통분 기법이 쓰이며, 이는 다음과 같다. 유리수의 반수를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두 유리수의 뺄셈은 반수를 더하는 것과 같다. 분모의 최소 공배수를 공분모로 취하여 통분하면 더 간단히 구할 수 있다. 두 유리수의 곱셈은 다음과 같다. 0이 아닌 유리수의 역수는 다음과 같다. 두 유리수의 나눗셈은 역수를 곱하는 것과 같다. 집합 는 정수의 집합 으로 만든 분수체이며, 따라서 는 사칙연산이 자유로운 체이다. 집합 는 표수가 0인 가장 작은 체이다. 즉, 표수가 0인 체는 와 동형인 체를 반드시 포함한다. 서로 다른 어떤 두 유리수 사이에도 또다른 유리수가 존재하므로 집합 는 조밀 집합이다. 그러나 와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므로, 는 가산 무한 집합이다. 유리수체에는 표준적인 절댓값과 p진 절댓값을 줄 수 있으며, 이들에 의한 완비화는 각각 실수체와 p진수체이다. 분류:분수 분류:초등 수학 분류:체론
한 피시방 피시방 (PC房은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다중 PC 카페로서, 보통 시간당 요금 또는 정액 요금을 내고 컴퓨터로 인터넷, 온라인 게임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다. 시간당 요금은 지역마다 다르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자 카페는 1988년 3월 첫 개장하여 1991년에 폐장된 엠팔의 멤버였던 안상수와 금누리가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만든 ‘일렉트로닉 카페’(전자 카페)이다. 당시 16비트 컴퓨터 두 대를 놓아 전화선으로 PC통신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카페는 1994년 4월에 정민호가 대한민국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BNC라는 이름으로 첫 개장한, 인터넷카페이다. BNC 인터넷 카페는 당시 최초의 인터넷 카페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언론에서 소개한 인터넷 카페들은 전부 "전자카페"였으나 1994년부터 "모뎀카페", "네트워크카페", "사이버카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1995년 여름에 종로 홍대 등지에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대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인터넷 카페에서는 ISDN과 전화모뎀을 이용한 PC통신으로 하이텔에 연결하여 텍스트 위주의 통신이 가능하였으며,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PC와 TV를 연결하여 모르는 사람이 통신을 이용한 바둑을 둘 수 있었고 쥬라기 공원같은 통신을 이용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그 뒤, 1996년 여름에 PC방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다음해인 1997년 11월, IMF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피시방의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 경제 상황이 IMF 라는 커다란 혼란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장인 PC방 창업에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1998년 ~ 1999년에는 창업 열풍에 맞추어 상승세를 타게 된다. 또한 1998년에 발매된 미국 블리자드사의 스타크래프트는 5년동안 대한민국의 피시방 2만 곳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PC방의 대중화로 인하여 1998년 여름부터는 PC방의 창업이 한국 컴퓨터 산업이 호황세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업체들이 PC방을 시장으로 이용하였고 많은 사업들이 성공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생각되었다. 게임산업이 발전하면서 그 게임에 맞는 컴퓨터 사양이 필요하였고 PC의 고사양화가 가속화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2001년부터는 PC방 개인사업의 통신선 설치가 일반 가정집까지 연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피시방은 미국 블리자드사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1998년 4월 발매와 동시에 엄청 난 인기를 누리며 함께 널리 퍼졌다. 따라서 대부분 인터넷에 연결되었고, 컴퓨터 게임을 하기에 적합하다. 2000년에 들어서 화상 채팅이 퍼지면서, 많은 피시방들이 웹캠을 설치했다. 또한 넷마블, 넥슨 등의 온라인 게임 서비스 업체들은 피시방을 중심으로 자사가 서비스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을 이벤트 등의 방식으로 홍보하기도 하며, 피시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이용할 경우 보너스 경험치 같은 혜택을 주기도 한다. 피시방은 컴퓨터를 비치하여 방문자가 이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스낵이나 음료수를 판매한다. 그러나, 2002년 이후 각 가정의 인터넷 접속 방법의 발달과 증가로, 현재 피시방은 사라지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이용료 인하, 시설의 고급화·대형화, 또는 플레이스테이션 2 같은 비디오 게임기를 비치하는 등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피시방은 어린 학생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이용자의 상당수가 청소년 및 어린이지만, 상당수의 피시방이 금연구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지않아 간접흡연의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인터넷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피시방에서 장시간 사용하면서 생활을 망치는 경우가 있으며, 간혹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피시방 사장들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에게 노동착취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또한 금연법의 시행으로 2014년 1월 1일부터 100m²이상의 전 사업장, 2015년 1월 1일부터는 100m²이하의 전 사업장이 실시대상이 된다. 또, 주민등록번호나 개인 정보가 유출 될 수도 있다. 일부 PC방에서는 회원가입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생일,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수집하고 있으며 PC방의 메인 관리 컴퓨터가 해킹당하거나 업주의 악의적인 이용으로 피해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14년 8월 7일부터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이 금지되면서 PC방에서의 주민등록번호 수집 역시 불법이 되었다. 이로인해 회원가입 수단이 문자 인증으로 바뀌는 추세이나 인증으로 인한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PC방 업주들이 PC방은 더 이상 청소년유해시설이 아닌데도 학교정화구역 안에 일률적으로 설치를 금지하는 것은 직업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헌재는 PC방의 학교 근방 200m이내에 설치할 수 없다는 법규가 기본권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직업수행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기간 1위 2위 3위 4위 5위 2018년 5월 배틀그라운드(36.59%) 리그 오브 레전드(25.49%) 오버워치(8.47%) 서든어택(3.08%) 스타크래프트(2.54%) 2018년 6월 배틀그라운드(32.55%) 리그 오브 레전드(26.46%) 오버워치(7.93%) 피파 온라인4(5.07%) 메이플 스토리(3.34%) 랜 게이밍센터( LAN gaming center) 인터넷 카페 분류:인터넷 카페 분류:대한민국의 문화 분류:비디오 게임 문화 분류:한국어권 밖에서도 쓰이는 한국어 낱말
Lawrence Textile Strike 1.jpg|right|300px|섬네일|1912년 미국, 로렌스 섬유 파업 당시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시위자들. 노동조합 (勞動組合, , 은 노동자들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만든 노동자의 사회단체를 말한다. 줄여서 노조 (勞組, Union)라고도 한다. 인간의 노동은 선사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것이나 임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 계급의 출현은 산업화 이후의 일이다. 노동자는 기업가와 더불어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산업혁명 초기부터 기업가에 비해 매우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후 자본가와 국가에 대하여 집단적인 조직체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시드니 웹(S.Webb)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정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노동 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 단체"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조직적인 기초가 되며, 직업·기업·산업별로 조직된다. 시드니 웹의 정의에서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계급분화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질서에 도전하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면서 협상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등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본가와 대립하는 노동자 진영의 주요 조직으로 파악한다.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의 성격을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체로서 노동자의 여러 이익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나 연합단체로 보고 있다. 1919년 미국 노동조합의 파업 집회 노동절 100주년 기념 우표(동독) 산업혁명 이후 기계에 밀려 직조공과 같은 숙련 기술자들이 사라진 대신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산업화 국가의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근로하였으나 이들은 아무런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게 되었다. 초기 노동조합 활동은 자본가와 국가의 탄압을 받았으며 법률적으로 금지되었다. 최초의 노동조합은 17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결성한 우애조합, 공제조합 등이었다. 영국 의회는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이들 조직은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띄었다. 초기 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은 일정한 조합비를 걷었다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급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였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여러 단위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자본가들은 최악의 경우 노동조합 간부를 청부살인하는 등 악랄하고 극심한 탄압을 하였으나 노동운동의 발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1869년 결성된 노동자 기사단은 후일 세계산업노동자로 개칭하였으며 이 단체의 마더 존스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은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8만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미시건 거리에서 파업집회를 가졌다. 19세기 미국 노동자들은 10-12시간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임금삭감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석유사업 및 탄광사업가인 록펠러가 고용주인 슈일킬 탄광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문제인 임금삭감에 항의하다가 주동자들이 교수형으로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즉,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한 단결이었다. 이 날 노동자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나 경찰은 이들을 폭도로 몰아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포가 있었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언론들도 미국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빨갱이 딱지 붙이기 곧 공산주의 딱지를 붙이기를 했다. 이후 제2 인터네셔널은 이날을 노동절로 기념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은 큰 사회적 반향을 가져왔고 결국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8시간 노동제가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 많은 노동자들의 노력끝에 1820년대 영국은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법률(단결금지법, 18세기 제정)을 폐지하였고 노동조합 활동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산업화된 국가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계속되어 1890년 무렵에는 서구 열강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이 합법화 되었다. 1890년 5월 1일 첫 노동절 기념집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어 노동조합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었다. 산업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노동운동 역시 파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겪은 일본은 1912년 일본 노동운동 역사 처음의 노동조합인 우애회(友愛會)가 설립되었고 1925년 무렵에는 457개 노동조합에 25만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이던 192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친목회, 노동회, 노우회와 같은 지역합동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또한 인쇄공과 같은 숙련노동자들은 직업별 노동조합을 세웠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1924년 4월 조선노동총연맹이 출범하였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인권 쟁취를 위한 단결투쟁과 함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노동계에서는 부두에서 짐을 배로 실어나르는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하는 등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이 단결투쟁만이 노동인권을 쟁취하는 수단임을 깨닫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노동조합 관련 운동으로는 1929년의 원산의 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투쟁이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가 된 제3세계에서 노동조합의 독립운동 참여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1930년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도 있다. 고무공장 주주들은 15~20%의 배당이익을 챙기면서도, 노동자 임금 10% 삭감을 결의하여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130원의 저임금을 받아 3~4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사용자들의 임금삭감은 곧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고무노조(위원장 김유창)는 단체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업투쟁으로써 단결투쟁을 하였다.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930년 8월 7일 국제고무공장을 시작으로 11개 공장 1천8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사용자들과 경찰은 대체인력 투입, 빨갱이 딱지 붙이기, 활동가 체포, 용역 불량배를 통한 폭력으로써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방해하고 탄압했으나, 노동자들은 현장복귀 거부와 선전전으로써 저항하였다. 또한 강주룡이라는 노동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미로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이들의 편에 선 관리자들로부터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였으므로,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탄압 및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악선전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인권을 쟁취하여갔다. 1980년대 노동자들도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여갔다. 당시 노동자들은 단결함으로써, 시간외 수당 또는 초과노동수당을 주지 않는 착취근절, 어용노조 폐지(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불량도시락 거부투쟁(1986년), 임금인상 투쟁(현대중공업)등을 실천하였다.하지만 노동조합 활동가에 대해 노무관리라는 구실로 회사에서 감시, 가압류, 임금에서의 불이익, 회유를 하여,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 열사가 분신자살을 하는 등 곧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자본에 의해 탄압되는 등 노동조합은 해결할 과제가 많이 있다. 20세기에 들어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이 생겨나면서 노동조합의 영향력 역시 증대되었다. 1924년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램지 맥도널드는 최초의 노동조합 출신 영국 총리가 되었다. 또한, 1919년 국제노동기구가 설립되어 국제적인 노동 인권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1930년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사회민주당의 활동과 노동조합의 활동을 전면 금지 시키는 등 독일에서는 노동조합 운동의 큰 위기가 있기도 하였으나 2차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을 기업별로 하여 결성된 노동조합을 기업별 노동조합이라 하고 산업 직군에 따라 조직된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이라 한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산별노조라고도 한다. 산업별 노조는 산업직군 곧 하는 일이 같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해 만든 노조이다. 해당 산업직군에서의 노동을 위해 구직하거나 공부하는 노동자까지도 가입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도 있다. 본문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산업별 노조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자동차, 기계, 조선업, IT, 전자, 전기같은 금속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만든 산업별 노조이다. 금속노동자들은 정규직, 사내하청 등의 비정규직, 한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구분없이 누구나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으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은 일다니는 회사에 어용노조나 유령노조가 있더라도 회사와 단체협약 곧 노동조건과 임금에 대한 약속을 체결할 수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건설업에 종사하거나 일하려는 노동자들의 산업별 노조이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들은 단체교섭을 일다니는 회사와 체결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건설노동자는 대부분 일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가 아닌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한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과 같이 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이 된다. 노동조합은 조직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클로즈드 숍 - 노동조합 조합원 자격이 고용의 조건이 되는 조직 형태이다. 조합원 자격을 상실할 경우 고용계약도 해지된다. 유니온 숍 - 채용된 노동자가 일정 기간 이내에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의무적인 형태의 노동조합이다. 에이전시 숍 - 노동조합의 가입에 대한 강제는 없으나 단체 교섭 당사자인 노동조합이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에게서도 조합비를 걷을 수 있는 형태의 노동조합이다. 오픈 숍 - 노동조합의 가입 여부와 조합비의 납부가 온전히 노동자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형태의 노동조합이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오픈 숍의 형태로 운영된다. 클로즈드 숍의 인정은 각 나라의 법률에 따라 다르다. 영국은 산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는 반면, 미국은 1935년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와그너 법을 제정하여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였으나 1947년 새롭게 제정된 노사관계법인 테프트-하틀리 법에 의해 금지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항운노조연맹이 클로즈드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노동자, 이른바 이주 노동자들은 차별, 열악한 노동환경, 대한민국 정부의 출입국 정책 등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므로 민주노총 이주노동자 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는 소속 조합원 노동자의 연령에 제한을 둔 대신 고용 형태나 소속기업을 따지지 않는 노동조합이 있는데, 대표적인 조직은 청년유니온이다. 청년유니온은 상위 노동조합 조직에 편성되어있지 않다. 전 세계 최대 노동조합 연대 기구로는 국제 자유 노동조합 연맹(ICFTU)과 세계 노동 연맹(WCL)을 합병하여 2006년 11월 결성된 국제 노동조합 연맹(ITUC)으로 전 세계 국가별 노동조합 305개, 노동자 1억 7,500만명이 151개국에서 가입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조합 국제 연대 기구는 세계 노동조합 연맹(WFTU)이 조직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다음과 같은 노동조합 연맹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 (오른쪽에는 약칭을 명기) 과거에 존재했던 노조 연맹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평" *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대한노총" * 한국노동조합연맹, "한노협"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노협" * 한국노동조합연맹, "한국노련", "한노련" 현재 존재하는 노조 연맹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노총", "민주노총"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노총", "한국노총" 노동운동 노동착취 스웻샵( Sweatshop, 노동착취 악덕기업) 최저임금 생활임금 일용직 비정규직 8시간노동제 88만 원 세대 노동 빈곤층 아웃소싱 숍제도 파업 총파업 노동조합설립신고제 사건 노동조합에 대한 사업소세 과세 사건 이근우. 《경제학 프레임》. 웅진 윙스. .
상수 는 탄젠트 곡선의 기울기에서 유도되는 특정한 실수로 무리수이자 초월수이다. 정식 용어는 자연로그의 밑 이지만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이름을 따 오일러의 수 로도 불리며, 로그 계산법을 도입한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를 기려 네이피어 상수 라고도 한다. 는 π, 1, 0, i 등과 함께 수학의 중요한 상수로 취급된다. 예컨대,오일러의 공식에서 그렇다. e 는 다음의 극한식으로 표현되는 값이다. e 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식은 테일러 급수와 이항정리로 증명할 수 있다. :은 에서 인 이다. e 는 무리수이기 때문에 십진법으로 표현할 수 없고 근삿값만을 추정할 수 있다. 소수로 나타낸 e 의 근삿값은 대략 다음과 같다. e 가 계산된 최초의 기록은 1618년 존 네이피어에 의해 발간된 로그표이다. 그러나 네이피어는 로그 계산의 과정에서 나온 결과 값만을 간단히 다루었을 뿐 e 를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네이피어의 로그는 과 동치이다. 이를 오일러가 정의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로그함수 정의로 옮기면 네이피어의 로그는 인 로그함수 이다. 위의 로그에서 사용된 밑은 e 의 역수인 와 매우 가까운 근삿값이다. 후일 윌리엄 오트리드가 네이피어의 로그표를 사용하여 로그 계산자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e 를 특별한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e 가 특정한 상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야코프 베르누이이다. 그는 복리 이자의 계산이 다음과 같은 극한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르누이는 위의 식이 수렴한다는 것과 그것이 특정한 값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 값은 e 이다. 베르누이가 정리한 위의 급수를 처음으로 상수로서 표현한 사람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이다. 라이프니츠는 1690년에서 1691년 사이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 급수를 “b”로 표현하였다. 한편, 오일러는 1727년에서 1728년 사이에 이 상수를 e 로 표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e 라는 표기가 정식 출판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36년 출판된 오일러의 《메카니카》이다. 그 이전에는 수학자 마다 여러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 상수를 표기하였으나 《메카니카》의 출판이후 e 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복리 적금의 원리합계는 다음의 식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원리 합계 = 원금 X (1 + 이율)기간 예를 들어 1,000원을 예금하였을 때의 복리 합계는 이율에 따라 다음과 같이 계산 된다. 기간 3% 4% 5% 6% 1년 1,030 1,040 1,050 1,060 2년 1,061 1,081 1,102 1,123 3년 1,093 1,124 1,157 1,191 4년 1,126 1,169 1,215 1,262 5년 1,159 1,216 1,276 1,338 6년 1,194 1,265 1,340 1,418 위의 식을 이용하면 원리합계가 목표하는 금액이 되기 위해서 얼마의 기간이 필요한 지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천원을 복리 5%로 예금할 때 원리합계가 1억원을 넘기 위해서는 236년이 걸린다. 또한, 위의 표를 보면 이율과 기간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일정 기간이 지났을 때의 원리합계는 특정한 비율을 나타내게 된다. 베르누이는 기간이 n 일때 이율을 이라 하면, 이 원리 합계의 극한이 다음과 같이 네이피어의 로그표에 사용된 밑에 점근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s formula.svg|섬네일|오일러 공식은 복소평면에서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나타낸다. 1714년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는 자연 로그 함수를 복소수로 확장할 경우 다음과 같은 삼각함수의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이 식을 지수함수로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이를 오일러의 공식이라 한다. 오일러의 공식은 복소평면에서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복소수를 복소평면 위의 한 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코츠나 오일러 모두 이러한 발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소평면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복소수를 복소평면의 한 점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오일러 공식이 발표된 뒤 50여년이 지난 때부터 였다. 오일러 공식은 테일러 급수를 통해 유도될 수 있다. 아래는 오일러 공식의 유도 과정을 소개한 것이다. 절댓값이 1 보다 작은 어떤 수 x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무한 차수 다항식이 성립한다. (단, |x| 2= -1) 위 식에서 짝수 차수 항과 홀수 차수 항을 따로 모아 정리하면 가 된다. 위 식을 살펴 보면 실수항은 코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이고 허수항은 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오일러 공식이 성립한다. 이 때, x 에 π 를 대입하면 이 되고, 이를 오일러의 등식이라 한다. e 는 대수적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 1873년 프랑스의 수학자 샤를 에르미트에 의해 e 가 초월수임이 증명되었다. e 가 초월수임을 증명하는 방식은 귀류법에 의한 것으로 만일 e 가 대수적인 수라고 가정하면 다항식을 구성하는 계수가 무한히 약분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e 는 무리수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증명은 다음과 같다. 먼저 e 의 테일러 전개는 ::이때 n까지의 부분합을 Xn라 하면, 이고, : 이 성립한다. 이제 e 를 유리수라 가정하면 양의 정수 p , q 에 대해 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어야 하고 이 부등식의 각 변에 를 곱하면 이 된다. 한편, e = 라 가정하였으므로 이 된다. 이에 따라 q ! e 와 q ! X q 는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하므로 역시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식 (1)에서 는 0보다 크고 1보다 작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자연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e 는 두 양의 정수의 비, 즉 유리수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e 의 근삿값은 다음과 같은 연분수의 전개를 통하여 계산할 수 있다. 테일러 전개를 이용한 의 근삿값 계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를 사용하여 8차항까지 더하면 : :: ::: 위 계산은 소수점 아래 4자리까지 유효하다. 계승이 증가함에 따라 역수는 빠르게 에 접근하므로 몇 차례의 계산으로도 에 매우 근접한 근삿값을 구할 수 있다. 한편 인 지수함수의 테일러 급수는 이다. e 는 함수의 미분과 적분에서 특별하게 취급된다. e 에 대한 임의 차원의 지수함수인 는 이를 미분한 도함수가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함수이다. 또한, 곡선 에 대한 에서 까지 아래 넓이는 e 이다. 먼저 의 미분을 보면, 이다. 이에 대한 증명은 다음과 같은 계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따라서, 한편 오른쪽 그림과 같은 의 그래프에서 에서 까지 아래 넓이는, e 를 밑으로 하는 로그인 자연로그는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로그함수는 정의에 의해 여러 밑을 가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밑을 따로 표기하지 않은 는 자연로그를 뜻했다. 하지만 상용로그와 헷갈리는 문제 때문에 현재는 로 표기한다. 로그함수 의 도함수는 이다. 즉, 이고, 이다. 이는 e 를 밑으로 한 자연로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수가 등차적으로 증가할 때 로그곡선의 기울기는 등비적으로 감소한다는 의미가 된다. e 를 밑으로 하는 자연로그는 여러가지 증정도과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연수에서 주어진 수가 충분히 클때 1에서 부터 주어진 수까지의 소수의 개수는 로그함수에 점근한다는 소수 정리가 있다. 리만 가설에서 출발한 이 정리는 1896년 프랑스의 자크 아다마르와 벨기에의 발레 푸생이 서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하여 증명하였다. 이외에도 자연로그는 물리와 화학 등 여러 자연 과학의 변화량에서 사용된다. 다음은 자연로그가 자연 과학에 사용된 예이다. 루트비히 볼츠만은 엔트로피 S 와 다중도 g 의 자연로그 값이 비례함을 보였다. 두 화학 물질의 1차 반응 속도에 따른 농도의 변화량은 다음의 식으로 표현된다. :0 A 0 - 초기 농도, k - 반응 계수, t - 시간, A - 해당 시간에 따른 잔여 물질의 농도 e 와 연관된 여러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문제로는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γ 가 무리수나 초월수인지를 밝히는 것인데, 아직까지 증명되지 않고 있다. γ 는 조화 급수와 자연로그의 차에 대한 극한으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e 의 소수 아래 첫 500자리는 아래와 같다. (줄당 100자리) 2. 71828 18284 59045 23536 02874 71352 66249 77572 47093 69995 95749 66967 62772 40766 30353 54759 45713 82178 52516 64274 27466 39193 20030 59921 81741 35966 29043 57290 03342 95260 59563 07381 32328 62794 34907 63233 82988 07531 95251 01901 15738 34187 93070 21540 89149 93488 41675 09244 76146 06680 82264 80016 84774 11853 74234 54424 37107 53907 77449 92069 55170 27618 38606 26133 13845 83000 75204 49338 26560 29760 67371 13200 70932 87091 27443 74704 72306 96977 20931 01416 92836 81902 55151 08657 46377 21112 52389 78442 50569 53696 77078 54499 69967 94686 44549 05987 93163 68892 30098 79312 *삼각함수 수학 상수 자연로그 레온하르트 오일러 야코프 베르누이 존 네이피어 분류:수학 상수 분류:초월수 분류:무리수 분류:레온하르트 오일러
방일영 (方一榮,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경제인·기업인이며 조선일보(朝鮮日報)의 2대 회장이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까지 근무했다. 그 밖에 일신방직의 사외이사로 초빙되기도 하였고, 각종 장학 사업을 후원하였으며 1994년에는 방일영국악상을 제정하여 매년 한국의 우수 국악인들을 시상하였고,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1945년 잠시 양주군청의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의 손자이자, 이후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방우영의 형이다. 첫째 아들 방상훈은 2006년 현재 조선일보 대표이사이며, 둘째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 호텔 대표이사이다. 밤의 대통령 , 밤의 황제 이라는 별칭이 있다. 평안북도 박천출신으로 본관은 온양이며, 아호는 우초(愚礎)이다.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변 동문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초(愚草)이다. 본관은 온양(溫陽)이고, 본적은 경기도 의정부(議政府市)이며, 출신지는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가산면(嘉山面 현 남신리)이다.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곤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삼촌 방응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방재윤은 방응모의 양자가 됐고, 그는 방응모의 손자로 출생했다. 그 뒤 할아버지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1963년 의정부시로 승격)로 이주하였다.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교 전신)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중앙대학 예과를 졸업한 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 이사 고문직을 사임할 때까지 55여 년 동안 조선일보에 몸담아 왔다. 1943년 입사, 그해 사장비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일보를 차지한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한 방재윤의 장남으로, 1943년 조부인 방응모의 비서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 때가 조선일보 폐간 시점이어서 신문 없는 조선일보사 직원이 된 셈이다. 그러나 돈이 아까운 줄 모른다는 이유로 조부에 의해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방일영은 1944년 11월 세 살 아래 박현숙과 결혼했다. 박현숙은 한학자인 부친 박순흠과 고영선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한 해 전 동생 방우영의 영어교사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방응모를 찾아온 것이 결혼으로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 당시 그도 학도병 징집 대상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방응모는 손자 방일영이 학병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병원 설립자인 고향 후배 백인제를 불러 상의했다. 이때 백인제는 방일영의 왼쪽 뺨 귀 밑에서부터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을 집도했다. 그런 뒤 방일영은 일단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를 했다.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양주군청 소속 면서기를 지냈다.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의 복간에 참여하였다. 조선일보가 복간된 뒤인 1950년 7월 사장 방응모가 납북되자 같은 해 10월 17일 취체역(이사)에 선임됐고 한국 전쟁 이후 피난했다가 휴전 후 귀환, 1954년 31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일보의 대표 취체역에 취임해 경영권을 잡았다. 그러나 방응모의 납북 9년 뒤까지는 형식적으로 방응모가 대표였고, 조선일보의 1979년 발행분까지도 발행인은 방응모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방응모 사후 몰락한 조선일보를 다시 일으켰다. 한독당원에 김구의 노선을 추종한 방응모는 야당 인사로 분류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어 사망하면서 조선일보는 몰락했으나 내분을 수습하고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1975년 방일영장학회를 조직,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1964년 11월 15일 회장에 취임하는 동시에 동생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조선일보 대표이사 겸 사장으로 임명해 일선 경영을 맡겼으며, 1970년까지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했다. 방우영은 1970년부터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기를 주도하게 된다. 1993년 3월에는 지병인 당뇨로 인해 조선일보 이사 고문직까지 사퇴하며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조선일보 재직기간 중이던 1980년대 조선일보를 급팽창시켜 발행유가부수 1위의 신문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과정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큰 밑바탕이 됐고, 코리아나 호텔 특혜 의혹 등 적잖은 시비를 낳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선거 등 주요한 정치전환기마다 강한 정파성을 드러내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족벌언론 논란에 휘말려있는 상태다. 1975년 방일영의 사재(私財)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 를 법인으로 발족했다. 방일영은 방우영과 형제가 보유한 15%를 재단의 기금으로 새로 출연하고, 20년간 운영되어 왔던 방일영장학회 의 장학기금 15억 여원을 합해 그 해 11월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방일영장학회(재단)을 설립했다. 방일영장학회는 1974년부터 서울대·연대·고대 학생들을 매년 10여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해 왔다. 지금까지 3백3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수혜 폭을 넓혔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서중회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조선일보 회장직을 사퇴, 회장직을 동생 방우영에게 넘기고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되었다.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1994년 방일영국악상 등을 제정하여 우수 국악인을 발굴하여 직접 포상하기도 했다. 그 밖에 온양방씨 중앙종친회 제3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에 대한 후원사업을 주관했다. 1999년 일신방직 사외이사에 선임되었고, 동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그해에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조선일보사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2003년 8월 8일 새벽 2시 5분경 서울대 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만81세였다. 8월 8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그 날 오후, 이복 숙부 방재선이 가족을 데리고 빈소에 조문하러 왔다가 상주들로부터 조문거부를 당하고 강제로 추방되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6월 충남 아산시 용화동 온양방씨(溫陽方氏) 중시조신단묘원 에 방일영 송덕비가 세워졌다. 언론문화의 창달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비판으로는 제3공화국, 4공화국 당시 밤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권언유착에 가담한 장본인의 한사람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 밖에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2001년 9월 숙부 방재선으로부터 호주상속권 소송을 당했다. 그러나 법원은 서자와 양손자가 있을 경우 양손자에게 호주상속권이 적용된다며 방일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방일영은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다. 사후의 유산다툼에서 장남 방상훈의 변호사는 잘 아시겠지만, 선대 회장님은 대한민국 기생들 머리를 가장 많이 올리신 분 이라고 말했다. 사후 일부 혼외자들이 조선일보와 방일영의 혼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의 장남 방상훈은 독립운동가 겸 계몽운동가 윤치호의 증손녀이자 철도청 부이사관 윤영구의 딸 윤순명과 결혼했다. 혼내자 3명(1녀 2남), 혼외자 6명(첫 번째 간통상간녀 3남, 두 번째 간통상간녀 2녀 1남)이 있다. 생조부 방응곤(方應坤, 방응모의 형) 양조부 방응모(方應謨, 1883년 ~ 1950년) * 아버지 방재윤(方在允, 1902년 ~ 1940년) * 어머니 이성춘(李成春) ** 동생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 ** 여동생 방숙영(? ~ 1951년 1월) ** 동생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 *** 조카 방성훈(方聖勳, 1973년 ~ ) ** 배우자 박현숙(朴賢淑, 1926년 ~ 1986년, 개신교 집사) *** 장녀 *** 장남 방상훈(方相勳, 1948년 ~ , 조선일보 사장) *** 자부 윤순명, 윤영구의 장녀 **** 손자 방준오(方俊吾, 1974년)) **** 손자 방정오(方政吾, 1978년)) *** 차남 방용훈(方容勳, 1952년 ~ , 코리아나 호텔 사장) ** 숙부 방재선(方在善, 1944년 ~ ) ** 숙부 방재효(方在孝, 1946년 ~ ) ** 숙부 방재규(方在奎, 1948년 ~ ) * 장인 윤영구(尹英求, 1923년 ~ 1991년, 윤치호의 손자) 1945년 경기도 양주군청 공무원 1963년 한국신문발행인 협회 이사장 1965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위원 1969년 아시아 신문재단(PFA) 부이사장 1976년 국제언론인협회(IPI)한국위원회 위원장 역임 아시아신문재단(PFA) 이사장 1993년 조선일보 명예회장 2003년 조선일보사 고문 1982년 국민훈장무궁화장 (전두환 정부) 1999년 금관문화훈장 (김대중 정부) 조선일보 월간조선 방우영 방응모 윤치호 윤영구 윤영선 윤치영 박정희 조연흥 조갑제 김대중 이도형 선우휘 방재선 안티조선 강준만 진중권 방상훈 방일영문화재단, 《격랑60년 방일영과 조선일보》 (방일영문화재단, 1999) 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방일영 네이트 인물 방일영문화재단 분류:1923년 태어남 분류:2003년 죽음 분류:박천군 출신 분류:조선일보사 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 분류:온양 방씨 분류:주오 대학 동문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사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 줄여서 FSF )은 미국의 자유 소프트웨어 관련 재단이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리처드 스톨만이 세운 재단으로, 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배포하고 수정하는 보편적인 자유를 제고한다. 설립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기금은 GNU 프로젝트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고용하는데 대부분 사용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이 재단의 직원들과 자발적인 기여자들은 대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과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를 위한 법적,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작업을 처리하고 있다. 2002년 11월 25일,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연합 멤버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목표를 지속하기 위해 오직 자유 소프트웨어만이 FSF의 컴퓨터에 사용된다. GNU 프로젝트 GNU 라이선스 GNU 프레스 자유 소프트웨어 디렉터리 자유 소프트웨어의 정의 관리 프로젝트 호스팅 정치 운동-자유 소프트웨어 운동 한 해의 상 (FSF 자유 소프트웨어 상) GNU 리처드 스톨만 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 자유 문화 운동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한국어 페이지 분류:1985년 설립 분류:재단법인 분류:국제 비정부 기구 분류:보스턴의 단체
자유 소프트웨어 ()는 복사와 사용, 연구, 수정, 배포 등의 제한이 없는 소프트웨어 혹은 그 통칭이다. 소프트웨어의 수정 및 수정본의 재배포는 인간이 해독 가능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소스 코드는 GPL 등의 라이선스를 통하거나, 혹은 드물게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되기도 한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은 초창기의 컴퓨터 사용자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1983년에 시작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자유 소프트웨어 대신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자유로운 사용을 강조하는 대신 기술적인 면에 치우친 용어라는 점에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용어 대신 "자유 소프트웨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독점 소프트웨어 혹은 비자유 소프트웨어 등의 용어도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완전히 무료로 또는 최소한의 금액만을 받고 자유롭게 배포되어야 하며 자유 소프트웨어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대개 고객 지원이나 커스터마이징 등을 통한 것들이다. 반면 독점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사용자가 합법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위한 허가를 위해서 반드시 일정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 소프트웨어와는 맞지 않는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이제 거대한 전 세계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되었으며, 개인 및 거대 단체와 정부 기관 등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파치 웹 서버나 MySQL 데이터베이스, PHP 스크립트 언어 같은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서버 측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완벽히 자유로운 컴퓨터 환경은 리눅스나 FreeBSD 등의 시스템 소프트웨어들을 기본으로 한 많은 패키지들을 통해서 구성할 수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웹 브라우저나 오피스 제품군 혹은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등의 대부분의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들을 자유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많은 영역에서 개인 사용자를 위한 이런 소프트웨어들은 경쟁 독점 소프트웨어들에 비해 미미한 시장 점유율만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온라인으로 무료로 제공되거나, 오프라인으로 적당한 가격으로 배포된다. 그러나 이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경제적 가능성은 IBM이나 레드햇,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등의 거대 회사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주력 산업이 IT 영역이 아닌 많은 회사들이 인터넷의 홍보 및 판매 사이트를 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애플리케이션을 쉽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를 선택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이외의 산업에서도 그 연구와 개발을 위해서 자유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좀 더 공개된 개발 과정을 생각하고 있었고, 마이크로칩과 같은 하드웨어들은 카피레프트 라이선스가 적용된 명세서와 함께 개발되기 시작했다.(오픈코어 프로젝트를 참조.) 크리에이티브 커먼스나 자유 문화 운동 등의 움직임들도 또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례이다. 자유 소프트웨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유에 무게중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유는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유롭게 이용함을 말한다. 자유에는 일정한 책임이 따르게 된다. 자유롭게 이용하더라도 출처를 밝히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유는 본인 혼자서 자유롭게 쓴다 하더라도 결국 재생산, 재배포 등의 활동이 수반될 수 있기 때문에 책임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 자유는 결국 책임을 수반한다고 보고 책임을 다하는 것은 출처를 밝히고 사용조건을 준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의는 남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최소한의 조건을 이행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컴퓨터 사용자들은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하게 소프트웨어를 서로 공유했고,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하드웨어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들이 제작되는 것을 기꺼워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복제권을 법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여, 사용자들이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거나 수정하지 못하도록 바이너리 형태로만 배포하는 등의 기술적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은 컴퓨터 산업의 이러한 변화에 저항해 GNU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84년에는 GNU 운영 체제의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1985년 10월에 설립되었다. 그는 카피레프트를 주창하며 자유 소프트웨어의 정의를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소프트웨어로 소개하였다. 1991년에는 핀란드에서 리누스 투르발스가 리눅스를 발표하였고 이것이 GNU 프로젝트에 통합되면서,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공중 사용 허가서 (Public license) BSD 사용 허가서 (BSD license)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GNU General Public License) 리눅스 - 운영체계 BSD - 운영체계 리브레오피스 - 오피스 제품군 오픈오피스 - 오피스 제품군 모질라 파이어폭스- 웹 브라우저 *크로미엄- 구글 크롬의 오픈 소스 버전의 웹 브라우저 이맥스 - 문서 편집기 *vi-vim 문서 편집기 김프 - 이미지 편집기 잉크스케이프 - 그래픽 편집기 *뮤즈스코어- 사운드,음악 악보 편집기 *아보가드로-전산화학, 분자모델링, 재료과학등에서 사용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급 분자편집 프로그램 *블렌더-애니메이션 , 3D 그래픽 및 영화영상 제작 프로그램 프리웨어 리처드 스톨만 GNU 사유 소프트웨어 자유 소프트웨어의 정의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GNU General Public License, GNU GPL 또는 GPL )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만든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로, 소프트웨어의 실행, 연구, 공유, 수정의 자유를 최종 사용자에게 보장한다. 대표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이용하는 사용 허가이다. GPL은 가장 널리 알려진 강한 카피레프트 사용 허가이며, 이 허가를 가진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면 파생된 프로그램 역시 같은 카피레프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철학에서 GPL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자유 소프트웨어의 권한을 누리며 카피레프트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자유가 보전되고, 이전 작업 내용을 수정하거나 다른 내용을 추가하는 것도 허용됐다. 이는 허용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사용 허가로서, BSD 사용 허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GNU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The 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 LGPL)는 이를 변형하여 더 허가된 형태로서,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GNU FDL)은 GNU 소프트웨어에 대한 문서의 사용 허가로 시작하였으나 위키백과 프로젝트와 같이 다른 문서 형태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만 현재까지 이 허가서는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 등에서만 법원의 판단 등으로 합법한 허가서로 인정받았고,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에 따른 법률적 판단을 받은 바 없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직접 이 허가서가 합법한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없었으며, 다만 허가서라는 특성상 준법행위를 하는 다수는 분쟁없이 이 허가서의 제약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한 차례 법원의 판단을 받을 뻔했던 엘림넷과 하이온넷 사건이 있었으나, 회사 기밀 유출 사건 으로 형사기소되는 바람에 중요 쟁점일 수 있었던 GPL에 대한 판단은 형사법원에서 다루지 않고 다른 이유로 1, 2심 법원에서 유죄를 판결, 최종 확정한 바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적어도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통해 표준 약관심의 따위를 받아 확정지을 필요가 있으며,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표준 허가서가 부당하다는 법률적 판단도 없으므로, 이 허가서의 조건을 위반할 시 저작자로부터 기소당할 수 있다.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는 누구에게나 다음의 다섯 가지의 의무를 저작권의 한 부분으로서 강제한다. # 컴퓨터 프로그램을 어떠한 목적으로든지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법으로 제한하는 행위는 할 수 없다. # 컴퓨터 프로그램의 실행 복사본은 언제나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와 함께 판매하거나 소스코드를 무료로 배포해야 한다. # 컴퓨터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용도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 # 변경된 컴퓨터 프로그램 역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반드시 공개 배포해야 한다. # 변경된 컴퓨터 프로그램 역시 반드시 똑같은 라이선스를 취해야 한다. 즉 GPL 라이선스를 적용해야 한다. GPL 은 미국의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이 GNU-프로젝트로 배포된 프로그램의 라이선스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이것은 Emacs, GNU 디버거(GDB), GNU 컴파일러 모음(GCC)에서 사용된 라이선스의 초기 판의 통합에 기반하고 있다. 이 라이선스들은 현재 GPL과 비슷한 조항들이 있으나, 각각의 프로그램 고유의 라이선스였다. 스톨만의 목표는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라이선스를 만들어서 여러 프로젝트에서 코드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저작권의 형태로서 GPL 이 1989년 1월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1990년에 이르자 몇몇 라이브러리에서 전략적으로 규제를 약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에 대한 조치로 라이브러리-GPL(LGPL, 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1991년 6월에 배포된 GPL의 두 번째 판을 따라 LGPL도 두 번째 판으로 같은 번호를 붙여서 두 라이선스가 상호보완적임을 나타내었다. 1999년에는 LGPL 은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Lesser General Public License)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되면서 2.1판으로 숫자를 바꾸게 되었다. GPL은 오늘날 자유 소프트웨어 저작권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고 있으며, 대부분의 GNU 프로젝트는 GPL과 LGPL의 규준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모든 LGPL의 규준에 따르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는 동시에 GPL의 규준에 따르고 있다. GPL의 버전 1은 1989년 1월에 발표되었다( GPLv1 전문). 이것은 자유 소프트웨어에서의 두 가지 중요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는데, 하나는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지 않은 채 바이너리 파일만 배포하는 것을 막는 경우로 이것을 막기 위해 GPLv1에는 프로그램을 GPLv1로 배포할 때는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소스 코드를 같이 배포해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두 번째 문제는 프로그램에 추가적인 제약을 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GPLv1 프로그램을 수정한 프로그램은 원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GPLv1을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GPL 버전 2는 1991년 6월에 발표되었다( GPLv2 전문). 중요한 변경 사항은 "자유냐 죽음이냐" Section 7에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이 내용은 GPL 프로그램을 배포하는 것을 막는 조건, 예를 들어 특허로 인하여 추가적으로 돈을 지불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여 소스 코드의 공개가 불가능하고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만 배포하려고 한다면 소스 코드 뿐만 아니라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조차 배포할 수 없도록 보완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에 대해서는 조금 약화된 GPL 라이선스가 전략적으로 더욱 유용하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이에 대한 내용을 LGPL(the 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하여, 1991년 6월에 발표된 GPLv2와 동시에 같이 발표되었다. 이 두 가지의 내용은 1999년 LGPL v2.1로 발전되었고 LGPL(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불렀다. GPL 버전 3은 2007년 6월 29일에 발표되었다. 2005년 후반에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GPL의 세 번째 판을 개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6년 1월 16일 첫 번째 초안이 발표되었다. 2판과 다른 점도 비공식적으로 나와 있다 . 2006년 2월 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FOSDEM 발표에서 리처드 스톨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뀐 점 중에서 가장 중요한 4가지를 말하자면, 소프트웨어 특허에 대처하는 것, 다른 라이선스와의 호환성, 어떤 부분의 원시 코드와 무엇이 GPL이 포함되어야 하는 원시 코드를 구성하는지와 디지털 제한 관리(Digital Restrictions Management)에 신경을 썼다. 2006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GPL의 바뀔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열두달간의 공공자문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소프트웨어 자유 법률 센터, 유럽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의견을 조정했다. 2001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인 스티브 발머가 "건드리는 모든 지적 재산권에 퍼지는 암같은 존재(a cancer that attaches itself in an intellectual property sense to everything it touches)"라며 비판했다. 2009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GPL 라이선스를 위반한 하이퍼V의 컴포넌트의 소스코드 20,000여줄을 공개했다. GNU/리눅스 자유문서 (Free Contents) GNU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LGPL)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GNU GPL 원문 * 한글판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홈페이지 유네스코 자유 소프트웨어 포털 GNU Korea 홈페이지 분류:GNU 프로젝트 분류:카피레프트 분류:자유 및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사용권 분류:자유 저작물 사용권
일본어 (는 주로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줄인 말로 일어 (日語)라고도 한다. 문자는 히라가나 가나와 한자()를 사용한다. 일본의 사실상 법적 공용어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대부분의 사람은 일본어를 모어로 한다. 일본어의 문법 체계나 음운 체계를 반영한 수화로는 일본어대응수화가 있다. 사용 인구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일본 국내의 인구 및 일본국 국외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계 외국인, 일본국이 일찍이 통치했던 지역의 일부 주민들의 수를 고려해보면 약 1억 4천만 명 이상이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통계에 따라 수치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수치가 맞다면 일본어는 모어 화자 수순 언어 목록에서 상위 10위 이내에 드는 언어다.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언어별 사용자 수에서 일본어는 아홉 번째로 사용자 수가 많다. 일본어의 음운은〈〉와〈〉을 제외하고 모음으로 끝나는 개음절 언어의 성격이 강하고, 또한 표준어를 포함해 많은 방언이 모라를 가지고 있다. 악센트는 고저 악센트를 띤다. 이와 더불어 본래의 옛 일본어인 야마토 고토바()에서는 원칙적으로 〈ら행〉음이 어두에 오지 않는다(두음법칙).(일본의 끝말잇기 놀이인 시리토리 놀이에서〈ら행〉으로 시작되는 말을 찾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낙),〈〉(나팔),〈〉(사과) 등은 야마토 고토바가 아니다.) 탁음이 어두에 오지 않는다.(〈〉(안다),〈〉(어느 것),〈〉(장소),〈〉(장미) 등은 어두에 다른 음이 있었으나 후세에 바뀐 것이다.) 동일 어근 내에 모음이 연속 되어 오지 않는다.(〈〉(푸름),〈〉(조개)는 옛날에는〈 〉,〈 〉라고 쓰였다.) 등의 특징이 있었다. 문장은 주어 - 수식어 - 술어의 어순으로 구성된다. 수식어는 피수식어의 앞에 위치한다. 또한 명사의 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순이나 어미를 바꾸는 것이 아닌 문법적인 기능을 나타내는 기능어(조사)를 뒤에 덧붙인다. 이러한 구성에 따라 언어유형론 상에서 어순적으로는 SOV형의 언어로, 형태적으로는 교착어로 분류 된다. 어휘는 옛날의 야마토 고토바 이외에 중국에서 도래한 한어(漢語)가 대다수를 차지하며, 근대 이후에 들어서는 서양어를 중심으로 하는 외래어가 증가하고 있다. 대우 표현으로는 문법적, 어휘적으로 발달한 경어 체계가 있으며, 서술되는 인물간의 미묘한 관계 차이를 나타낸다. 일본어는 지방별로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특히 류큐 제도의 방언은 다른 방언들과 차이가 두드러진다. 근세 중기 까지는 교토 방언이 중앙어의 지위에 있었지만 근세 후기에는 에도 방언의 지위가 높아졌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의 현대 일본어에서는 도쿄의 야마노테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언(야마노테코토바)을 기반으로 표준어(공통어)가 형성되었다.(〈표준어#일본〉문서 참조) 표기 체계는 그밖의 여러 언어들에 비해 복잡하다. 한자(국자를 포함한다. 음독 및 훈독으로 읽는데 쓰인다.)와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일본어에 쓰이는 주요 문자이며, 항상 이 세 종류의 문자를 짝지어 표기한다. 그밖에 로마자나 그리스 문자(의학・과학용어에 주로 이용) 등도 자주 쓰인다. 또한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병용된다.(표기 체계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일본어의 표기 체계〉문서 참조) 음운은〈자음+모음〉음절을 기본으로 하며, 모음은 다섯 종류 밖에 없는 등 알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진 한편, 직음()과 요음()의 대립,〈1음절 2모라〉의 존재, 무성화모음, 말의 구조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고저 악센트 등의 특징이 있다. 일본어는 주로 일본에서 쓰인다. 일본어 사용 인구에 대한 조사는 일본국 국내외를 불문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본국의 인구 수가 곧 화자 인구수라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더구나 田野村忠温가 1977년부터 1997년까지 간행된 10점(판의 차이를 포함하면 16점)의 자료를 조사한 결과, 저마다 기재된 일본어 화자 인구는 최소 1억 200만명, 최다 1억 2500만명 이상이었다. ( 표 (증보 2판, 2013년 12월 23일에 확인)) 일본어를 직접적으로 일본의 공용어 내지 국어로 정하는 법적 규정은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법령은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재판소법에서는 “재판소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한다.”(동법 74조)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문자·활자문화진흥법에서는 “국어”와 “일본어”를 동일시한다(동법 3조, 9조). 그밖의 많은 법령에서도 일본어가 유일한 공용어 및 국어임이 당연한 전제로 깔려 있다. 또한 법문 뿐만이 아닌 공용문은 모두 일본어만 쓰이며, 일본국의 학교 교육에서는 일본어가 “국어” 과목으로서 교육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TV나 라디오, 영화 등의 방송, 소설이나 만화, 신문 등의 출판 분야에서도 대부분 일본어가 쓰이고 있다. 일본국 외의 드라마나 영화가 방송되는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자막이 달리거나 음성이 일본어로 더빙되어 방송되는 등 시청자 및 청취자가 일본어만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러한 자막이나 더빙이 달려 방송된다. 외국어 그대로 방송되거나 출판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해외로 발표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논문이나 혹은 일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또는 외국어 학습자 등 한정된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대다수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일본 외에서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파라과이 등)나 하와이 등의 일본인 이민자 사이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관찰되지만,는 하와이의 일본계 사람의 담화 인용을 담아 보고한 저널이다.에 따르면 1979년에서 1980년까지의 조사에서 브라질의 일본계 사람 중 일본어를 유창히 사용한다 고 대답한 사람은 1950년 이전 태어난 사람의 20.6퍼센트, 이후에 태어난 사람의 8.3퍼센트이다. 일본계 사람의 3세, 4세로 세대가 내려 갈수록 비 일본어 화자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패전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한반도, 타이완, 구 만주국 영토, 사할린 섬, 남양 제도(현재의 괌,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등의 지역에서 일제 당시 일본어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중 현재에도 일본어를 기억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조사도 있다. 타이완에서는 타이완 원주민이 다른 부족과 대화할 때 일본어가 종종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팔라우의 앙가우르 주에서는 일본어를 공용어의 하나로 채용하고 있지만 현재 앙가우르 주 내에는 일본어를 일상 회화에 쓰는 주민은 존재하지 않아 실질적인 주 공용어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국과의 우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요소로만 남아 있다. 일본국 외의 일본어 학습자는 대한민국에 약 96만명, 중화인민공화국에 약 83만명, 인도네시아에 약 72만명을 비롯해 365만명에 이르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학습자 수가 전체 학습자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어 교육이 행해지는 지역은 125개국과 8지역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일본국 국내의 일본어 학습자는 아시아 지역의 학습자 약 14만명을 중심으로 약 17만명에 이른다. 일본어를 포함하는 일본어족의 계통은 분명하지 않다. 계통에 관한 몇가지 이론과 가설이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의견이 모이지 않고 있다.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설은 메이지 시대 말부터 특히 주목받았다. 이러한 설의 근거로는 고대 일본어(야마토 고토바)의 어두에 r음(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 가 보이는 점 등이 있다. 다만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 자체는 언어간의 친족 관계가 증명되어 있지 않아 고대 일본어에 위와 같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 일본어가 유형상〈알타이형〉언어 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남방계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는 음운 체계나 어휘가 유사하다고 지적되고 있지만, 그러한 예시가 충분치 않고 단순한 추정이나 불확정된 예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드라비다어족과의 관련을 주장하는 설도 있지만 이를 인정하는 연구자는 적다. 오노 스스무는 일본어의 어휘나 문법 등이 타밀어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지만 비교언어학의 방법상의 문제로 인해 비판이 많다. 여러 언어들과의 관계로서 중국어, 그중 특히 고대 중국어는 예로부터 한자, 한어를 통해 일본어의 표기나 어휘, 형태소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고, 요음 등의 음운면이나 고대 중국어의 문서에 나와 있는 문법, 어법의 모방을 통해 일본어의 문법, 어법, 문체에도 영향을 끼쳐 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자 문화권에 속한다. 다만 기초 어휘는 한자어에 대응되지 않고 문법적, 음운적인 특징도 중국어가 고립어인데 반해 일본어는 교착어이며, 일본어에는 중국어에서 보이는 체계적인 성조가 없는 등의 차이점도 있다. 이에 따라 중국어와 일본어의 계통적 관련성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아이누어는 어순(SOV형)에 있어서는 일본어와 유사하지만 문법과 형태는 유형론적으로 일본어와는 다른 포합어에 속하며, 음운 구조도 유성, 무성의 구별 없이 폐음절이 많은 등의 차이가 있다. 기초 어휘가 유사하다는 지적 도 있지만, 그 예시가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일본어와 닮아있는 아이누어 중에는 일본어에서 아이누어로 간 차용어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계통적 관련성을 나타내는 자료는 부족하다. 한국어는 문법 구조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기초 어휘가 크게 차이난다. 음운면도 고유어에 있어서 어두에 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가 보이는 점 등 앞에서 언급한 알타이어족과 공통되는 유사점이 있는 반면, 폐음절이나 자음 연결의 존재나 유성 및 무성의 없는 점 등 일본어와는 큰 차이도 있다. 한반도의 사어인 고구려어와는 수사 등 유사한 점이 있다고 일컬어지지만, 고구려어의 실태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 시점에는 계통론상의 판단 자료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렙차어, 히브리어 등과의 동계론(同系論)도 과거 존재 했지만, 대부분 의사언어비교의 범주에 머물렀다. 난세이 제도(구 류큐국 영역)의 언어는 일본어와 계통을 같이 하는 언어 중 하나(“류큐어” 내지 “류큐어족”)로 간주해 일본어와 한데 모아 일본어족으로 보는 관점과 일본어의 방언 중 하나(“류큐 방언”)로 보는 관점이 있지만, 연구자와 견해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일본어와 류큐어의 방언 표시. 같은 색으로 되어있는 지역이 같은 방언을 사용하는 지역이다. 일본어는 크게 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서일본 방언()과,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하는 동일본 방언()으로 크게 양분된다. 이즈 제도 남부에는 고대어 표현이 많이 남는 독특한 방언이 있어, 하치조어()라고 불린다. 방언에 관한 일본국의 문헌적인 기록은 현존하는 일본국의 최고의 시가집인 만요슈에서 나오는데 여기에는 아즈마 지방(현재의 간토 지방)의 방언의 노래가 있다. 나라 시대에도 이미 나라 지방을 중심으로 중앙어와 그 외 지역의 방언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국의 방언 연구는 에도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동일본 방언에는 도호쿠 방언 , 간토 방언 , 나고야 방언 등의 주부 방언 이 있고, 서일본 방언에는 호쿠리쿠 방언 , 긴키 방언 (간사이 방언), 히로시마 방언 등의 주고쿠 방언 , 시코쿠 방언 , 하카타 방언 등의 규슈 방언 등 수많은 지역성이 강한 방언이 존재한다. 특히 오사카의 방언은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온화한 인상의 도쿄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준어에 비해 오사카는 해상 교통이 있는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오사카 방언은 활발한 억양이 특징이다. 교토 방언은 ‘위쪽 말’()이라고도 하는데 수도가 오랫동안 교토에 있었다가 도쿄에 옮겨졌기 때문에 품위 있고 격조 높은 말로 여겨져 왔다. 도쿄 방언은 거의 표준어에 가깝기 때문에 표준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 에도 방언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히)와 (시)의 발음의 구별이 되지 않는 등 표준어와는 다르다. 홋카이도 방언도 거의 표준어에 가깝지만 특히 형용사 등에 홋카이도 특유의 방언이 포함된다. 현재 공식 장소 등에서는 평상시 방언을 말하는 사람도 표준어를 이용한다. right /a/ - 와 의 중간음. . 편의상 . /i/ - . /u/ - 보다 덜 원순적이고 보다 덜 평순적이다. . 편의상 또는 . /e/ - 와 의 중간음. . 편의상 . /o/ - 와 의 중간음. . 편의상 . 양순 치경 치경구개 경구개 연구개 구개수 성문 비음 파열음 마찰음 파찰음 탄음 접근음 일본어 음소는 /m/, /n/, /p/, /b/, /t/, /d/, /k/, /g/, /s/, /z/, /h/, /r/, /y/, /w/, /N/, /Q/가 있다. /m, n/ - 비음 . 변이음(allophone)으로 경구개화된 이 있다. /p, k/ - 무성 파열음 . 변이음으로 경구개화된 가 있다. - 유성 파열음 . 변이음으로 경구개화된 가 있다. 모음 사이에서는 폐쇄되지 않고 마찰음 가 될 경우도 많다. 또 의 변이음으로 비음 가 있지만 공통어에서는 거의 소멸되었다. /s, h/ - 마찰음 . 변이음으로 치경구개음 , 경구개음 가 된다. 단 /h/은 모음 앞에서는 마찰음 가 된다. /t/ - 무성 파열음 . 변이음으로 치경구개 파찰음 가 있다. 또 모음 앞에서는 파찰음 가 된다. /d/ - 유성 파열음 . /di, du, dy/는 /zi, zu, dy/와 같다. /z/ - 어두와 /N/ 뒤에서는 파찰음 이고 어중에서는 마찰음 . 변이음으로 치경구개음 가 된다. /r/ - 탄음 . 변이음으로 경구개화된 이 있다. /y/ - 반모음 . /ye/는 모음 /e/가 되고 는 외래어에만 쓰인다. /w/ - 반모음 . /wi, we, wo/는 모음 /i, e, o/가 되고 는 외래어에만 쓰인다. /N/ - 특수음. 어중 또는 어말에만 나타난다. * 비음 - 어말 또는 /s, z/ 앞에서는 구개수음이 된다. * 비음 - /p, b, m/ 앞에서. * 비음 - /t, d/, /n/ 앞에서. * 비음 - /k, g/ 앞에서. * 비모음 - 모음 앞 또는 /y, w/ 앞에서는 뒤와 같은 모음을 비음화시킨다. /Q/ - 특수음. 어중에만 나타난다. * 불파음 - /p/ 앞에서. * 불파음 - /t/ 앞에서. * 불파음 - /k/ 앞에서. * 마찰음 - /s/ 앞에서. 일본어는 고저 악센트를 가진 언어이다. 일본어로 돼 있는 컴퓨터 자판(JIS 키보드) 일본어에서는 보통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 등 세 종류의 문자를 주로 사용하여 표기되며, 그 밖에 로마자와 아라비아 숫자도 함께 사용한다. 이들 가운데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표음문자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전통적으로 메이지 시대 초반까지는 일본어의 맞춤법에서는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고 히라가나만을 사용하거나 교육용 문서에서는 단어 사이에 공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구두점 등을 사용할 때도 서양의 문장 부호들(따옴표, 물음표, 느낌표, 온점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오늘날 현대에는 대부분의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 단락 부호로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 및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이 넓게 이용되고 있다. 1951년 10월 30일, 일본국의 국어심의회 건의 제3의 5의 주2에서는 ‘,’및 ‘.’를 사용하도록 가이드라인이 짜여졌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준수되고 있지 않다. 아래는 일본어의 오십음()이다. 의 안은 국제 음성 기호(IPA) 표기이다. + (清音) あ行ø か行k さ行s た行t な行n は行h ま行m や行y ら行r わ行w あ段a あ / ア か / カ さ / サ た / タ な / ナ は / ハ ま / マ や / ヤ ら / ラ わ / ワ い段i い / イ き / キ し / シ ち / チ に / ニ ひ / ヒ み / ミ い / イ り / リ い / イ う段u う / ウ く / ク す / ス つ / ツ ぬ / ヌ ふ / フ む / ム ゆ / ユ る / ル う / ウ え段e え / エ け / ケ せ / セ て / テ ね / ネ へ / ヘ め / メ え / エ れ / レ え / エ お段o お / オ こ / コ そ / ソ と / ト の / ノ ほ / ホ も / モ よ / ヨ ろ / ロ を / ヲ + (濁音) が行g ざ行z だ行d ば行b あ段a が / ガ ざ / ザ だ / ダ ば / バ い段i ぎ / ギ じ / ジ ぢ / ヂ び / ビ う段u ぐ / グ ず / ズ づ / ヅ ぶ / ブ え段e げ / ゲ ぜ / ゼ で / デ べ / ベ お段o ご / ゴ ぞ / ゾ ど / ド ぼ / ボ + () ぱ行p ぱ / パ ぴ / ピ ぷ / プ ぺ / ペ ぽ / ポ + () が行g が / ガ ぎ / ギ ぐ / グ げ / ゲ ご / ゴ + きゃ行ky しゃ行sh ちゃ行ch にゃ行ny ひゃ行hy みゃ行my あ段a きゃ / キャ しゃ / シャ ちゃ / チャ にゃ / ニャ ひゃ / ヒャ みゃ / ミャ う段u きゅ / キュ しゅ / シュ ちゅ / チュ にゅ / ニュ ひゅ / ヒュ みゅ / ミュ お段o きょ / キョ しょ / ショ ちょ / チョ にょ / ニョ ひょ / ヒョ みょ / ミョ ぎゃ行gy じゃ(ぢゃ)行j びゃ行by あ段a ぎゃ / ギャ じゃ(ぢゃ) / ジャ(ヂャ) びゃ / ビャ う段u ぎゅ / ギュ じゅ(ぢゅ) / ジュ(ヂュ) びゅ / ビュ お段o ぎょ / ギョ じょ(ぢょ) / ジョ(ヂョ) びょ / ビョ ぴゃ行py ぴゃ / ピャ ぴゅ / ピュ ぴょ / ピョ ぎゃ行gy ぎゃ / ギャ ぎゅ / ギュ ぎょ / ギョ + N ん - さ, しゃ, ざ - ま, みゃ, ば, びゃ, ぱ, ぴゃ - た, ちゃ, だ, じゃ - か, きゃ, が, ぎゃ - あ, や + () Q っ / ッ - ぱ, ぴゃ - た, ちゃ - か, きゃ - さ - しゃ + - ー-aあ /-aー - -iい /-iー - -uう /-uー - -eい /-eー - -oう /-oー - + 외래어에만 쓰는 문자 t d s z い段i ティ ディ スィ ズィ う段u トゥ ドゥ y ky sy ty ny hy my ry gy zy by py え段e イェ キェ シェ チェ ニェ ヒェ ミェ リェ ギェ ジェ ビェ ピェ f v ts w あ段a ファ ヴァ ツァ い段i フィ ヴィ ツィ ウィ う段u ヴ え段e フェ ヴェ ツェ ウェ お段o フォ ヴォ ツォ ウォ 일본어에는 본래 일본어의 고유어인 야마토 고토바가 있었고, 한자는 뒤에 중국에서 직접 전해지거나 혹은 한반도 서해안(특히 백제 또는 고구려)을 경유하여 전래되었다. 한자를 읽을 방법은 크게, 한자와 함께 전해진 한자 본래의 음에서 온 음독( 또는 )과, 그 한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야마토 고토바()의 발음을 적용시켜 발음하는 훈독( 또는 )으로 나눌 수 있다. 같은 한자도 음독이나 훈독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본어에서는 하나의 한자에 여러개의 발음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生”(날 생)에는 47종류의 발음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水”(물 수)를 수 라고는 읽지만 물 이라고는 읽지 않는데, 그에 반해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스이(すい) 라고도 읽고 훈독으로 미즈(みず) 라고도 읽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어에서는 “金”(쇠 금, 성 김)을 금 으로, 성씨로 쓰일 때 한정으로 김 이라고는 읽으나, 쇠 라고는 읽지 않는데,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킨(きん) 혹은 콘(こん) 으로도 읽고 훈독으로 카네(かね) 라고도 읽는다. 한자의 위(세로쓰기에서는 오른쪽)에 작은 크기의 가나로 발음을 적은 것을 후리가나라고 한다. 후리가나를 붙일 때는 읽는 독음이 온요미인지 쿤요미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온요미의 경우에는 가타카나로, 쿤요미의 경우에는 히라가나로 붙이는 게 정석이나, 구별이 필요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상관없이 히라가나로 표기하기도 한다. 만요슈에는 한자를 차용하여 표음문자처럼 이용한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 한자 훈독의 예 한자 온요미 한국어 읽기 온요미 한국어 읽기 쿤요미 의미 쿤요미 의미 해(태양) 월 불 나무 돈 , 쇠 일본어와 가나를 외우기 위한 방법으로 이로하 노래()가 있다. 여기에는 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한 번씩 들어 갔으며, 일부 변형에는 도 들어가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 노래의 순서대로 가나의 순을 매기기까지 했었고 현재까지도 종종 쓰인다. 이런 종류의 문장을 팬그램이라 부른다. 그 밖에 이전에도 비슷한 방법으로 아메쓰치노우타나 대위이 노래등이 있었다. 다음은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일본어 표현들이다. 로마자 표기는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다. 아침 인사 * , ohayō gozaimasu **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세요? / 잘 잤습니까? * , ohayō (반말) 안녕./좋은 아침. 낮 인사 * , konnichiwa **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세요. * , konchiwa (반말) ** 안녕. 밤 인사 * konbanwa **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세요. * , oyasumi nasai ** 안녕히 주무세요. * , oyasumi (반말) ** 잘 자. 시간과 관련 없이 쓰는 인사 표현 * , yaa (반말) ** 안녕?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 * , shitsurei itashimasu 혹은 , shitsurei shimasu ** 실례하겠습니다 (손윗사람에게 또는 공적인 상황에서 사용한다.) * , sayōnara ** 안녕히 가세요 로도 쓰이고 안녕히 계세요 로도 쓰인다. * , sayonara (반말) ** 안녕. * , jaa 혹은 , jaa ne (반말) ** 그럼 (또는 그러면) 고마움을 표현하는 말 * , onrei mōshiagemasu ** 감사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보다 더 공손한 표현. 주로 업무상의 대화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며, 일상 생활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 , kansha itashimasu ** 감사드리겠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 , arigatō gozaimasu ** 고맙습니다. * , arigatō (반말) ** 고마워. * , arigato (반말) ** 고마워. ( 보다 더 편하게 쓰는 말) 동의, 긍정 * , hai ** 예. / 네. * , sō desu ** 그렇습니다. * , sō da yo 혹은 , sō da (반말) ** 그래. / 맞아. * un (반말) ** 응. (한국어의 응 과 사용법은 완전히 같다. 다만, 상대방 말에 수긍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짧게 한 번 "응." 하는 식으로 쓸 때가 많다.) 반대하거나 부정할 때 * , iie ** 아니오. * , ūn (반말) ** 아니. (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반말이며 발음이 비슷한 과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부정하는 태도를 가볍게 내비치며 말할 때가 많다.) * , chigaimasu ** 아닙니다. / 아니에요. * , chigau yo (반말) ** 아니야. * , chigau (반말) ** 아니. * , chau (반말) ** 아니. 이(こ),(this) / 그(そ),( it) / 저 (あ)(that) / 어느 (ど),(which) * 사물을 가리킬 때 이것(これ) / 그것(それ) / 저것(あれ) / 어느것(どれ)(どっち) * 방향을 가리킬 때 이쪽(こちら) / 그쪽(そちら) / 저쪽(あちら) / 어느쪽(どちら) * 장소를 가리킬 때 이곳(ここ) / 그곳(そこ) / 저곳(あそこ) / 어느곳(どこ) 1인칭 - 자신 : , watakushi :* 저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 하는 발언이나 송구스러워 하는 상황에 자신을 가리킨다.) : , watashi :* 나 (에서 약간 변형된 호칭.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다.) : , atashi :* 나 (에서 다시 변형된 반말 표현이며, 여성만 이 표현을 쓴다.) : , boku :* 나 (남자들이 쓰는 말, 단 일부 여성들이 이를 사용하기도 한다, 반말) : , ore :* 나 (에서 더 변형된 반말 표현이며, 거의 남성만 이 표현을 쓴다.) : , washi :* 나 (주로 할아버지들이 쓰는 말, 반말) 2인칭 - 상대방 : , anata :* 당신 (정중한 2인칭) : , kimi :* 너 / 자네 / 그대 : , omae - 남자들이 쓰는 말 / , anta - 여자들이 쓰는 말 (반말) :* 너 / 자기 / 당신 비슷한 또래인 부부나, 오래 사귄 연인, 친구끼리 부르는 말로, 한국말의 너 또는 당신 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 , koitsu (반말) :* 이 녀석 3인칭 - 대화의 주체가 아닌 다른 사람 : , ano kata :* 그 분 (정중한 3인칭) : , ano hito :* 그 사람 : , kare :* 그 : , kanojo :* 그녀 : , aitsu :* 그놈 / 그 녀석 (반말) 기수 * 0 - (,, zero) * 1 - () * 2 - () * 3 - () * 4 - ( * 5 - () * 6 - () * 7 - ( * 8 - () * 9 - ( * 10 - ()) * 20 - () * 30 - () * 40 - ( * 50 - () * 60 - () * 70 - ( * 80 - () * 90 - () * 100 - () * 1000 - () * 10000 - () * 100000000 - () * 1000000000000 - () * 10000000000000000 - () * 100000000000000000000 - () * 1000000000000000000000000 - () :300은 さんびゃく, 600은 ろっぴゃく, 800은 はっぴゃく, 3000은 さんぜん, 8000은 はっせん으로 읽는다. 일본어 고유 숫자 (서수) * 1부터 10에 대해서는 일본어 고유의 수사가 있어서 물건을 세거나 할 때 사용된다. 11 이상에서는 중세 이전에 쓰던 고어에 일본어 고유의 수사도 존재했지만, 현대의 일본어에서는 한자어 읽기밖에 이용되지 않는다. * , hitotsu - 하나 * , futatsu - 둘 * , mittsu - 셋 * , yottsu - 넷 * , itsutsu - 다섯 * , muttsu - 여섯 * , nanatsu - 일곱 * , yattsu - 여덟 * , kokonotsu - 아홉 * , tō - 열 소수() * 10% = → * 1% = → * 0.1% = → * 0.01% = → * 0.001% = → 다시 만났을 때 주고받는 인사, 혹은 소식을 묻는 말과 대답 * , ohisashiburi desu :오래간만입니다. * , ogenki desu ka :건강하십니까? / 잘 지냈어요? * , genki ka (반말) :잘 지냈어? * , hai, genki desu :네, 잘 지냈어요. * , genki da yo (반말) :잘 지냈어. 형제자매 호칭 * , ani :형, 오빠 * , ane :누나, 언니 일상 생활에서 자주 쓰는 인사말 * , itadakimasu :잘 먹겠습니다. * gochiso sama deshita :잘 먹었습니다. * gochiso sama (반말) :잘 먹었어.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7세기 이전에도 교류가 있어서 일본어를 접한 건 오래되었다. 제국주의시대 에는 강제로 교육시켜 일본 국왕을 찬양하게 강요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된 것은 조선 말기이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정부 수립 이후였다. 1970년대 초에 고등학교 교과목에 일본어가 제2외국어 중 하나로 추가되었고, 2001년에는 생활 일본어 가 중학교 교과목에 포함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 수험생들은 수능 시험 때 일본어 I을 선택할 수 있다. 국학 (일본) 고대 일본어 중고 일본어 일본어의 1인칭 일본어의 2인칭 일본어의 문어 일본어의 상용한자 반복 부호 일본어의 로마자 표기법 일본어의 한글 표기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 게센어 한국식 일본어 내용주 참조주 和風日本語 Yahoo! Japan 일본어 Ethnologue report for language codejpn 홍콩 일본어 학교 도쿄대 일본어 교육 가나 연습장 (PDF) YYNIHONGO.JP - Study elementary Japanese 히라가나 메가네 - 일본어 문장을 입력하면 한자에 히라가나를 달아주는 서비스 한글 일본어 발음 변환 - 한글 발음을 입력하면 히라가나 또는 카타카나로 변환해주는 서비스 분류:일본의 언어 분류:팔라우의 언어 분류:교착어 분류:SOV형 언어
허수 (虛數, imaginary number)는 실수가 아닌 복소수를 뜻한다. 실수의 특성상, 제곱하면 무조건 0 또는 양수가 되기 때문에 이차방정식 을 실수의 범위에서 해를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한 수직선에 모든 실수를 하나하나 대응시키면, 수직선은 빈틈없이 채워지는 것으로 볼 때,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수는 실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꼴과 같이 실수 범위에서 전혀 구할 수 없는 해를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실수의 성질로는 불가능한 제곱해서 음수가 되는 수 를 만들어내기위해 제곱하여 -1이 되는 수 를 만들어내면, 위의 이차방정식의 해는 또는이 되므로 이 수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이 수가 수학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허수 로 정의했고, 만 있으면 모든 허수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 수를 imaginary number의 앞글자를 따서 허수 단위 라고 정의했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를 포괄하는 수이며, (단, a, b 는 실수)로 나타낼 수 있고, 이때 a를 실수부, b를 허수부라 한다. b가 0일 경우 위의 수는 실수가 되고 0이 아닐때에는 허수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양수는 음수, 유리수는 무리수로 대응되는 것처럼 실수는 허수와 대응되는 관계가 있다. 허수는 단순히 억지로 만들어진 수가 아닌, 어떤 한 성질이 있는 수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수이다. 또한, 허수는 기존에 있었던 수직선, 실수축(가로)에 허수축(세로)를 덧붙여 복소수평면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허수가 정의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의 개념은 1차원적이었다. 즉, 수의 개념은 오직 수 직선 으로만 표현되었다. 그러나 허수가 정의된 후, 수의 개념은 2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즉, 수의 개념은 복소 평면 으로 표현된 것이다. 수의 틀을 직선에서 평면으로 확장시킨 것은 모두 허수 의 덕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허수로 인해 수의 틀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또 새로운 어떤 수가 발견되어 수의 틀이 입체 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허수의 발견은 복소수와 대응되는 수가 언젠가 누군가의 필요로 인해 만들어질 것임을 알려주는 위대한 발견이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헤론은 거듭제곱하여 음수가 되는 수에 대한 개념을 기록한 바 있다. 1572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라파엘 봄벨리가 허수 단위를 정의하였다. 이후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의 부록 〈기하〉()에서 상상의 수(imaginary numbers)라고 부른 데에서 허수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허수라는 이름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오일러는 허수 단위 기호로 를 도입하였다. 또한 오일러는 이것을 방정식 일때 이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때 사용하였다. 1799년 카스파르 베셀이 복소수의 기하학적 표현을 완성하였다. 1843년 윌리엄 로언 해밀턴은 복소수를 확장하여 사원수 체계를 만들었다. 미국 수학에서 허수란 형태, 즉 순허수이다. 즉 실수에 허수단위 가 곱해진 형식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제곱하면 음수가 된다. conjugate picture.svg|섬네일|left|복소평면에서 복소수의 위치 한 평면상에 직교 좌표계를 정하고 이에 대한 한 점 Z 의 위치 (x, y)를 로 정하여 복소수를 평면상의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이 때, 좌표와 복소수는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 또한, 이렇게 나타낸 점 Z(x,y)는 극좌표를 사용하여 원점에서 부터 점 Z 사이의 반지름과 각도로서도 나타낼 수 있다. 즉, 가 된다. 한편, 왼쪽의 그림과 같이 실수부는 같고 허수부의 부호만 반대인 와 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켤레복소수(복소켤레)라고 한다. 켤레 복소수는 극좌표에서 반지름이 같고 x축에 대해 대칭인 점이 된다. 복소평면에서 허수의 위치를 극좌표를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으므로, 임의의 단위 원을 그려 복소수와 삼각함수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1714년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는 자연로그가 다음과 같은 삼각함수의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이 식을 지수함수로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이를 오일러의 공식이라 한다. 수 체계에서 허수는 복소수와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복소수체라고 하며 로 나타낸다. 데카르트 허수 단위 복소수 *이항방정식 분류:수
subspaces with shading.svg|섬네일|400px|3차원 유클리드 공간 R³은 벡터 공간이고, 원점을 지나가는 직선과 평면들은 R³의 부분공간이다. 선형대수학 (線型代數學은 벡터 공간, 벡터, 선형 변환, 행렬, 연립 선형 방정식 등을 연구하는 대수학의 한 분야이다. 현대 선형대수학은 그중에서도 벡터 공간이 주 연구 대상이다. 추상대수학, 함수해석학에 널리 쓰이고 있다. 선형대수학은 자연과학과 공학에도 널리 활용된다. 선형 연립방정식을 푸는 좋은 방법으로는 소거법과 행렬식이 있다. 선형대수학은 2차원 혹은 3차원의 직교 좌표계에 대한 연구로 부터 시작되었다. 선형대수학에서 기본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벡터 크기와 방향성을 갖는 성분. 물리학에서 주로 쓰인다. 벡터 연산 두 벡터끼리의 합, 혹은 벡터와 스칼라(크기만 있고 방향성은 없는 성분)사이의 곱이 벡터의 기본 연산이다. 벡터 공간 벡터의 기본 연산을 만족하는 모든 벡터의 모음을 뜻한다. 차원 흔히 평면을 2차원, 공간을 3차원이라고 부른다. 이때 차원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3차원의 경우 x,y,z)는 서로 독립적인데 이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 것이 바로 선형대수학의 차원이다. 행렬 여러개의 숫자들을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한데 묶어 나타낸 성분. 벡터를 하나의 행 혹은 하나의 열로 구성된 행렬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행렬의 수학적으로 엄밀한 정의는 아니다. 보통 3차원까지의 벡터는 그림 등으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벡터는 벡터의 각 구성요소를 괄호 안에 나열함으로써 표기한다. 여러 가지 문제를 수학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선형대수학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데, 선형화 혹은 선형 근사를 통해, 복잡한 비선형 방정식 문제를 간단한 선형 방정식 문제로 변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형대수학의 선형성 ()이라는 성질은 직관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는 상수를, 는 변수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선형성은 변수의 지수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차함수()와 같은 형태를 가리킨다. 선형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비선형이 있는데, 등 일차함수와 같은 형태의 성질을 만족시키지 않는 함수들을 가리킨다. 선형의 직관적인 이해는 일차함수와 동일시해서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선형의 엄밀한 의미는 일차함수보다 더 확장된다. 수학적으로 정확한 선형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정의역 에서 임의의 원소 를 치역 에 대응시키는 연산 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만족시킬 때 "선형"이라고 한다.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이다. :(1) :(2) 예를 들어 일차함수 를 생각해보자. 로 (1)번 조건을 만족시키고 로 (2)번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이 함수는 선형이다. 이차함수 의 경우에는 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다른 선형연산의 예로는 회전변환, 원점을 지나는 직선에 대한 대칭변환, 어떤 벡터 공간에 대한 수직입사 등이 있다. "선형"이라는 성질은 행렬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연산이 선형이라면 그것은 행렬로 표현이 가능하며, 어떤 행렬은 반대로 어떤 선형연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선형대수학의 행렬이론은 수학의 이론뿐만 아니라 물리학, 전자공학, 컴퓨터 그래픽, 기계공학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학부과정에서 가르치는 선형대수학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 내용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가르치는 내용이며 각 학교마다 비중있게 다루는 부분이 다를 수 있고 내용을 추가하거나 뛰어넘을 수 있다. 벡터와 행렬 벡터의 개념과 행렬의 개념에 대해 강의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기초 와 행렬문서를 참고하라. 가우스-요르단 소거법 가우스-요르단 소거법은 행렬의 행 간의 연산이다. 이 연산은 행렬로 구성된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이 계산과정을 뒷받침하는 이론에 대해서도 공부하며, 소거법의 결과로 구해진 해를 해석하는 방법도 공부한다. 가우스-요르단 소거법은 방정식의 해를 보존할 수 있는 연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 가지가 존재한다. * 1. 행렬의 행을 그 행의 상수배만큼으로 대체하여도 그 행렬 방정식의 해는 보존된다. * 2. 행렬의 한 행의 상수배를 다른 행에 더하더라도 그 행렬 방정식의 해는 보존된다. * 3. 행렬의 한 행과 다른 행을 교환하더라도 그 행렬 방정식의 해는 보존된다. 행렬 연산자와 특정 형태의 행렬 행렬에 관계된 연산자들과 특정한 형태의 행렬에 대해 배운다. 전치, 트레이스, 역행렬등이 중요한 행렬연산자이다. 특정한 형태의 행렬로는 단위행렬, 상부삼각행렬, 하부삼각행렬, 대칭행렬 등에 대해 배운다. 상부삼각행렬과 하부삼각행렬을 이용해 행렬을 표현하는 LU분해법도 배운다. 선형독립 벡터들의 일차독립에 대해 가르친다. 행렬을 통한 일차독립 판별에 대해 공부한다. 행렬식(판별식) 행렬식의 정의와 행렬식을 구하는 방법을 공부한다. 또한 대수적으로 행렬식을 표현하고 행렬식에 관계된 정리들을 배운다. 고윳값과 고유벡터 행렬의 고윳값과 고유벡터에 대해 공부한다. 행렬식을 통해 고윳값을 찾고, 고윳값과 가우스 소거법을 통해 고유벡터를 찾는 과정을 익힌다. 그 외에도 고윳값과 고유벡터에 관계된 정리들에 대해 공부한다. 선형연산자 이 문서의 선형 을 참조하라.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선형연산과 행렬 간의 상호성에 대해 주의 깊게 다룬다. 직교행렬 직교화된 연산과 행렬에 대해 공부한다. 직교행렬이란 그것의 전치행렬과 그것의 역행렬이 같은 경우를 말한다. 직교화된 연산이란 연산대상 벡터의 크기가 보존되고 벡터들의 내적이 보존되는 경우를 말한다. 벡터 공간 벡터 공간을 행렬을 통해 해석하는 방법을 익힌다. 선형연산과 행렬 간의 상호성과 마찬가지로 벡터 공간과 행렬 사이에는 깊은 상호성이 있다. 중요한 개념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기저, 차원 기저란, 어떤 벡터 공간을 이루는 벡터들을 말한다. 이 벡터들은 일차독립이여야 하며, 이 벡터들의 선형조합으로 그 벡터 공간의 모든 벡터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직관적인 예를 들면 x축, y축, z축은 3차원공간의 기저이다. 차원이란 기저를 구성하는 벡터들의 숫자를 말한다. * 기본공간, 차원 정리, 계수정리, 피봇정리 기본공간은 행렬과 벡터 공간 사이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기본공간에는 영공간, 행공간, 열공간 등이 있다. 차원정리, 계수정리, 피봇정리는 이 기본공간들의 차원과 기저에 대해 유용한 알고리즘을 제공한다. * 벡터의 직교화 직교화된 벡터들에 대해 공부한다. 직교화된 벡터들이란 다른 벡터와의 내적값이 0인 벡터들을 의미한다. 그람-슈미트 직교정규화 그람-슈미트 직교정규화를 통해 주어진 벡터의 집합을 직교화된 벡터의 집합으로 변환하는 법을 다룬다. 벡터의 직교화에서 배운 개념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간다. 상사성과 대각화 상사성이란 두 행렬이 동일한 연산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즉, 두 행렬이 서로 다른 두 벡터 공간에서 동일한 연산을 처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상사성을 가진 두 행렬은 적당한 기저를 선택해서 서로를 표현할 수 있다. 대각화란 이 상사성을 계산 측면에서 응용한 것으로 특정 행렬을 대각행렬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이 외에도 복소수 고윳값, 벡터 공간의 공리 등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 ZFC 공리계 하에서 모든 벡터 공간은 기저가 존재한다. 그러나 ZF 공리계에서는 무한 차원 벡터 공간의 기저의 존재성을 보장할 수 없다. 유한 차원 벡터 공간의 기저는 선택 공리와 무관하게 항상 존재한다. 행렬의 역행렬이 존재할 필요충분조건은 행렬식의 값이 0이 아니어야 한다. 행렬의 역행렬이 존재할 필요충분조건은 행렬로 표현할 수 있는 선형 변환이 동형 사상이어야 한다. 행렬의 고윳값들의 곱은 행렬식의 값과 같으며, 합은 행렬의 대각합과 같다. 분류:수치해석학
커널이 응용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하드웨어에 연결하고 있다. 컴퓨터 과학에서 커널 ()은 컴퓨터의 운영 체제의 핵심이 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하나로, 시스템의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 운영 체제의 다른 부분 및 응용 프로그램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핵심 (核心)이라고도 한다. 커널은 운영 체제의 핵심 부분이므로, 커널의 역할 역시 운영 체제의 핵심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보안 커널은 컴퓨터 하드웨어와 프로세스의 보안을 책임진다. 자원 관리 한정된 시스템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프로그램의 실행을 원활하게 한다. 특히 프로세스에 처리기를 할당하는 것을 스케줄링이라 한다. 추상화 같은 종류의 부품에 대해 다양한 하드웨어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에 하드웨어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커널은 운영 체제의 복잡한 내부를 감추고 깔끔하고 일관성 있는 인터페이스를 하드웨어에 제공하기 위해 몇 가지 하드웨어 추상화(같은 종류의 장비에 대한 공통 명령어의 집합)들로 구현된다. 이 하드웨어 추상화는 프로그래머가 여러 장비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을 돕는다.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HAL)은 제조사의 장비 규격에 대한 특정한 명령어를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드라이버에 의지한다. 초창기의 컴퓨터에서 운영 체제 커널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초기의 프로그램은 하드웨어 추상화나 운영 체제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컴퓨터만으로 불러들인 다음 실행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초창기 컴퓨터들의 일반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가 켬으로써 다시 입력자료를 읽어들여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로더와 디버거 같은 작은 프로그램들이 상주해 있는 것이, 다른 프로그램으로 교체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더, 디버거들이 초기 운영 체제 커널의 기초가 되었다. 단일형 커널 (monolithic kernel) - 커널의 다양한 서비스 및 높은 수준의 하드웨어 추상화를 하나의 덩어리(주소 공간)로 묶은 것이다. 운영 체제 개발자 입장에서 유지 보수가 일반적으로 더 어려우나 성능이 좋다. 마이크로커널 (microkernel) - 하드웨어 추상화에 대한 간결한 작은 집합을 제공하고 더 많은 기능은 서버라고 불리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통해 제공한다. 혼합형 커널 (hybrid kernel) - 성능 향상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를 커널 공간에 넣은 점을 제외하면 많은 부분은 순수 마이크로커널과 비슷하다. 수정 마이크로커널 이라고도 한다. 나노커널 (nanokernel) - 실질적으로 모든 서비스를 책임진다. 엑소커널 (exokernel) - 낮은 수준의 하드웨어 접근을 위한 최소한의 추상화를 제공한다. 전형적으로 엑소커널 시스템에서는 커널이 아닌 라이브러리가 단일형 커널 수준의 추상을 제공한다. 단일형 커널의 구조 단일형 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을 정의한다.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은 기본 연산 집합과 관리자 모드에 작동하는 모듈인 프로세스 관리, 동시성, 메모리 관리 등의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한 시스템 콜으로 되어 있다. 이 연산들을 제공하는 모든 모듈이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더라도 모든 모듈이 같은 주소 공간에서 실행되기 때문에 코드의 집적도는 매우 조밀하며 수정하기 어렵고 한 모듈의 버그는 시스템 전반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구현이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되면 구성 요소의 내부 집적이 내부의 시스템 이용을 효과적이게 하여 좋은 단일형 커널은 높은 효율을 보인다. 단일형 커널의 지지자들은 코드의 정확성 여부와 그런 코드(부정확한 코드)가 커널에 포함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은 마이크로커널에 비해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리눅스, FreeBSD, 솔라리스와 같은 최신의 단일형 커널은 실행 모듈을 실시간으로 읽어들일 수 있다. 실시간으로 실행 모듈을 읽는 특징은 커널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손쉽게 확장할 수 있게 커널 공간의 코드의 양을 최소한으로 유지시켜 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NT 제품군(NT, 2000, XP, 2003, 비스타,7,8,8.1,10)은 처음에는 혼합형 커널이었으나 나중에 나온 것들은 단일형 커널로 바뀌었다. 윈도 NT 시리즈는 상위의 서비스들을 NT executive 이라는 서버로 구현하였다. Win32 특성은 처음에는 사용자 모드의 서버 형태로 구현되었으나, 최근 버전에서는 관리자 주소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다양한 서버들이 로컬 프로시저 콜(LPC Local Procedure Call)이라 불리는 주소 영역간 매커니즘을 통해 통신하며, 성능을 최적화하기 위해 공유 메모리를 이용한다. 주로 다음 운영 체제들의 커널이 단일형 커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닉스 BSD 리눅스 솔라리스 윈도 NT 벨로나2 AIX AGNIX 마이크로커널의 구조 마이크로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매우 간결한 추상화를 정의한다. 기본 연산 집합과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한 스레드 관리, 주소 공간, 프로세스간 통신의 작은 시스템 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커널이 제공하는 네트워킹과 같은 다른 서비스들은 사용자 공간 프로그램인 서버 로 구현한다. 운영 체제는 서버를 다른 일반적인 프로그램처럼 간단히 시작하고 끌 수 있다. 이를테면 네트워킹 지원이 필요 없는 작은 시스템에서는 간단히 서버를 끄면 된다. 이 경우 전통적인 시스템에서는 재컴파일이 필요했고 일반 사용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론적으로 마이크로커널에서 시스템은 더 안정적이다. 서버가 중단될 때 커널의 충돌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하나의 프로그램만 내려버리면 된다. 그러나 서버가 실패한 후 시스템 상태도 잃어버릴 경우 응용 프로그램이 계속 수행되는 것은 그 응용 프로그램이 막 복사된 다른 서버를 이용하게 되더라도 보통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TCP/IP 연결을 요구하는 (이론적인) 서버가 다시 시작되면 응용 소프트웨어는 연결이 "끊어졌습니다."라고 말하고 서버의 새 인스턴스를 찾아서 다시 연결한다. 그러나 파일과 같은 다른 시스템 객체는 이렇게 편리한 의미론이 없다. 이러한 편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기록할 정보들은 모두 미리 보관해 두어야 한다. 서버 간의 하나의 서버를 다시 시작할 때 중요 상태를 보호하기 위해 트랜잭션, 복제, 대조점의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은 전통적인 디자인의 수행을 잘못하고 때로는 극적이다. 이유는 응용과 서버 간의 자료 교환을 위해 커널을 출입하는 문맥 교환 때문이다. 주의 깊은 조율이 오버헤드를 극적으로 줄여줄 것으로 믿어져 왔으나 9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시도를 포기했다. 최근에 새 마이크로커널은 성능을 최우선으로 설계하며 이 문제를 넓은 부분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현재 운영 체제 시장은 자기 몸 사리며 마이크로커널 설계에 소극적이다. 마이크로커널과 마이크로커널에 기반한 운영 체제의 예 AmigaOS Amoeba ChorusOS EROS Haiku K42 LSE/OS (나노커널) KeyKOS (나노커널) L4 마이크로커널 Mach (커널) - GNU 허드, 넥스트스텝, 오픈스텝,OS X에 사용 됨. MERT 미닉스 MorphOS NewOS QNX Phoenix-RTOS RadiOS Spring operating system VSTa 심비안 OS 혼합형 커널의 구조 혼합형 커널은 본질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을 따르나, 일부 커널의 비(非)본질적 기능이더라도 사용자 레벨에서 수행될 때 성능상 느린 코드들을 커널 레벨에서 수행하도록 수정한 것을 말한다. 이는 다양한 운영 체제 개발자들이 마이크로커널 기반의 설계를 받아들이던 시점에 순수한 마이크로커널의 성능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협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OS X의 커널인 XNU는 Mach 커널 3.0 마이크로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전통적인 마이크로커널 설계의 지연 현상을 줄이기 위해 BSD 커널의 일부 코드들을 들여와 동일한 주소 영역에서 실행하고 있다. DragonFly BSD는 첫 번째 비 Mach 기반의 BSD OS로 혼합형 커널 구성을 적용한 예이다. 하이브리드 커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ReactOS BeOS 커널 넷웨어 커널 혼합형 커널이라는 말을 부팅 후에 모듈을 읽어들일 수 있는 단일형 커널과 혼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혼합형 커널은 단일형 커널과 마이크로커널 설계 양쪽의 구조적 개념과 작동방법에 대한 특히 메시지 전달과 어떤 중요하지 않은 코드는 사용자 공간에 들어가는 반면 어떤 코드는 성능의 이유로 커널 공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엑소커널의 구조 엑소커널은 운영 체제 설계에 대한 급진적인 신개념으로 말단 이론을 따르는 수직 구조의 운영 체제이다.엑소커널의 구상은 개발자에게 강제적인 추상화를 줄여 하드웨어 추상화에 대해 선택지를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엑소커널은 기능이 보호를 보장하는 것과 자원을 분배하는 것만 하기에 매우 작아 편익보다 단순함을 제공한다. 이런 특성은 오히려 모든 사용자가 각기 실제 호스트 컴퓨터의 자원을 모방한 컴퓨터를 받는VM/370 운영 체제와 비슷하다. 반면에 모놀리식 커널이든 마이크로 커널이든 전통적인 커널 설계는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HAL)이나 장치 드라이버 아래 자원을 숨김으로써 하드웨어를 추상화한다. 한 예로 전통적인 시스템에서 물리 메모리가 할당할 때 실제 위치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프셋과 기억 관리 장치를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TUNES Project 와 UnununiumOS 는 노커널 실험이다. 노커널 소프트웨어는 단일 중앙 입구의 제약이 없다. 1990년대 초기 모놀리식 커널은 진부한 것으로 여겨졌다. 리누스 토르발스와 앤드류 타넨바움간에 일어난 리눅스의 설계인 모놀리식 커널과 마이크로커널에 대한 프레임 워는 유명했다. 타넨바움과 토르발스의 토론에 제시된 두 진영의 의견은 일장일단이 있다. 두 진영의 성공 사례가 있다. 모놀리식 커널은 정확한 설계가 쉽고 마이크로커널 기반 시스템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마이크로커널은 종종 임베디드 로봇 산업이나 의료 컴퓨터 등에 이용될 수 있다. 운영 체제의 컴포넌트를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고 메모리 공간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모듈을 읽어오는 모놀리식 커널에서도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Mach는 일반적인 용도의 마이크로커널로 알려졌지만 특별한 용도로 설계된 마이크로커널도 있다. L3는 마이크로커널이 느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L4는 L3의 후예로 Fiasco 구현으로 대중적인데 L4 프로세스들과 별도의 공간에서 리눅스 구동이 가능하다. 이런 특성의 스크린숏은 freshmeat.net에서 구할 수 있다. Pistachio라 불리는 새 버전도 역시 가능하다. QNX는 1980년 초에 나타난 운영 체제로 극 최소주의 마이크로커널 설계로 이루어졌다. 이 시스템은 Mach가 목표로 했던 마이크로커널 이념을 더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QNX는 우주 왕복선의 로봇 팔과 (작은 실수가 수십억의 손실을 입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의 거울 등의) 오차에 민감한 유리를 닦는 기계에도 적용되었다. 운영 체제 셸 소스포지의 운영 체제 커널 Freshmeat의 운영 체제 커널 MIT 엑소커널 운영 체제 KeyKOS 나노커널 구조, 1992년 노르만 하르디저 넷웨어 운영 체제 개론, 1994년 Drew Major, Greg Minshall, Kyle Powell 저 (넷웨어 운영 체제 뒤의 기본 구조). 분류:운영 체제 기술
Beta 9 pre-release5 (command line interface) on Bochs sshot20040912.png|오른쪽|섬네일|400px|명령 줄 인터페이스, 디렉터리 구조, 버전 정보를 보여주고 있는 프리도스의 스크린샷. 도스 (disk operating system, DOS )는 디스크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서 디스크에 읽고 쓰기 등의 명령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명령어를 직접 치는 명령 줄 기반이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또 부분적으로 MS-DOS 기반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95, 98, 미)를 포함한 2000년까지는 MS-DOS가 IBM PC 호환기종 시장을 장악하였다. 도스는 MS-DOS, PC DOS, DR-DOS, 프리도스, ROM-DOS, PTS-DOS를 포함한 비슷한 명령 줄 시스템의 계열이다. 이 시스템들 중 어느 것도 간단히 "도스"라고 불리진 않았다. (1960년대의 이와 관련이 없는 IBM 메인프레임 운영 체제에만 사용되었음) 이와 무관한 수많은 비x86 마이크로컴퓨터 디스크 운영 체제는 "도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이들을 사용하는 컴퓨터에 대해 논할 때 단순히 "도스"라고 부르곤 했다. (아미가도스, AMSDOS, 애플 도스, 아타리 도스, 코모도어 도스, CSI-DOS, 프로도스, TRSDOS) 디지털 리서치의 CP/M이 가장 대표적인 도스의 원형이다. 8비트 개인용 컴퓨터에는 CP/M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애플 II는 독자적인 애플 도스(정식 명칭은 그냥 DOS)를, MSX는 MSX-DOS를 썼다. 이들 컴퓨터도 나중에 CP/M을 지원하지만 디스크의 포맷이 달라서 서로 바꾸어 쓸 수는 없었다. IBM-PC에서는 이를 모방한 QDOS로부터 PC-DOS와 MS-DOS가 나왔으며, 나중에 CP/M은 16비트 버전인 CP/M-86 바탕으로 DR-DOS로 나왔다. 현재는 DR-DOS의 후기작인 오픈도스와, NTFS 등을 지원하는 공개 도스 프로젝트인 프리도스가 있다. MS-DOS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도스이다. PC-DOS는 IBM의 도스이다. 버전 5.0까지는 사실상 MS-DOS와 같은 제품이었으나 그 이후 추가된 내용이 달라졌다. DR-DOS는 디지털 리서치사에서 만든 도스이다. 이것은 나중에 노벨 도스(Novell DOS)로 바뀌었다가 다시 칼데라 오픈 도스(Caldera OpenDOS)로 바뀐다. 윈도우 3.1 이하의 버전과 같이 초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별도 버전의 도스 위에서 실행되었다. 1990년대 초에 윈도우의 그래픽 셸은 도스 시스템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1995년에 윈도우 95가 별도의 도스 라이선스를 요구하지 않은 독립형 운영 체제로 번들되었다. 윈도우 95(및 이를 따랐던 윈도우 95과 ME)는 기본 OS 커널을 인계 받았지만 MS-DOS 구성 요소는 호환성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었다. 윈도우 미를 제외한 윈도우 95, 98과 더불어 MS-DOS 구성 요소는 윈도우를 시작하지 않고도 구동이 가능하였다. 윈도우 NT 계열 운영 체제가 널리 사용되면서, 윈도우 사용을 위해 더 이상 도스가 필요없게 되자 PC 사용자들 다수가 도스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2012년 기준으로, 프리도스, DR-DOS, ROM-DOS, PTS-DOS, RxDOS, REAL/32와 같은 도스 운영 체제를 이용할 수 있다. 델, HP를 포함한 일부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FreeDOS를 OEM 운영 체제를 포함한 컴퓨터들을 판매한다. 하드웨어에 직접 접근하는 도스 구조는 임베디드 장치에서 이용할 때 매우 이상적이다. 최신 판의 DR-DOS가 현재에도 이 시장에 초점을 두고 있다. ROM-DOS가 캐논 파워샷 프로 70의 임베디드 시스템에 사용되었다. 리눅스 하에서 도스 프로그램들을 거의 네이티브 속도로 구동할 수 있는 DOSEMU라는 리눅스 네이티브 가상 머신을 이용하여 여러 도스 사본들을 실행할 수 있다. 도스박스를 포함하여 여러 버전의 유닉스에서 도스를 구동하기 위한 다른 수많은 에뮬레이터들이 있다. 도스 에뮬레이터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하에서 게임이나 다른 도스용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기에 적절한 방법인데, 현대 버전은 도스와의 완전한 호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 오래된 게임을 즐기도록 고안된 도스박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PC 에뮬레이터 상에서 도스 운영 체제의 사본으로 도스 응용 프로그램들을 구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오버헤드는 증가되지만 더 나은 호환성을 제공한다. 모든 MS-DOS형 운영 체제들은 인텔 x86 호환 CPU를 갖춘 컴퓨터, 주로 IBM-PC 및 호환기종에서 동작한다. 특정 기계에 의존적인 MS-DOS 버전들은 수많은 비 IBM 호환 x86 기반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며, 여기에는 제조업체 이름을 딴 마이크로소프트의 배포판에서부터 비 IBM-PC 호환 하드웨어와 동작하도록 설계된 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응용 프로그램들이 직접 하드웨어 접근 대신 도스 API를 사용하는 한 IBM-PC 비호환 머신들에서도 실행이 가능하다. 1985년, 디지털 리서치는 또한 모토로라 68000 CPU용 컨커런트 도스 68K 버전 및 1990년대 초에 모토로라 CPU용 DOS/NT 파생 오리지널 프리도스 커널 DOS-C가 있었다. 이 시스템들이 도스 구조와 유사하긴 했지만, 응용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x86이 아닌 CPU의 비호환 명령 집합으로 인해 이진 호환성이 없었다. 그러나 고급 언어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들은 쉽게 포팅이 가능했다. 도스는 재진입성이 없는 기본 커널 기능들을 갖춘 단일 사용자, 싱글태스킹 운영 체제이다. 즉,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 해당 커널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도스 스스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을 한 번에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없다. 도스 커널은 문자 입출력, 파일 관리, 메모리 관리, 프로그램 적재 및 종료와 같이 프로그램을 위한 다양한 함수를 제공한다. 도스는 기본적으로 배치 파일(파일 확장자는 .BAT)을 통해 셸 스크립트를 위한 기능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텍스트 파일로서, 문서 편집기를 이용해서 작성이 가능하다. 컴파일된 프로그램과 동일한 방식으로 실행되며, 배치 파일의 각 줄을 명령 단위로 실행한다. 배치 파일은 또한 여러 내부 명령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GOTO와 조건문을 들 수 있다. GOSUB 및 단순 산술은 DR-DOS COMMAND.COM 및 4DOS와 같은 일부 서드 파티 셸을 통해 지원되지만, 실질적인 형태의 프로그래밍이 지원되는 것은 아니다. 이 운영 체제는 문자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을 허용하는 API를 제공하지만 그래픽 카드, 프린터, 마우스와 같은 하드웨어 대부분의 접근을 위한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머들이 직접 하드웨어에 접근하게 하려면 각 프로그램이 개별 하드웨어 주변기기에 맞는 자체 장치 드라이버를 갖추어야 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은 사양을 공개하여 대중화된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한 장치 드라이버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증해야 했다. PC 호환 컴퓨터의 부트스트랩 로더(MBR 또는 부트 섹터)는 디스크의 첫 섹터인 Track0에 위치한다. 롬 바이오스는 이 섹터를 주소 0000h:7C00h의 메모리에 불러들이고 오프셋 +1FEh의 55h AAh 서명을 보통 검사한다. 로드된 부트 섹터가 마스터 부트 레코드(MBR)로 간주되면, 그 자신을 메모리의 0000h:0600h에 재할당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 단계는 무시된다. 0000h:7C00h에 위치하는 섹터 콘텐츠는 현재 VBR을 이룬다. VBR은 운영 체제에 특화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동작이 도스 버전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른 도스 버전끼리 교환할 수 없다. VBR이 IO.SYS/IBMBIO.COM 파일의 처음 3개의 섹터만 메모리에 불러들이는 현대의 도스 버전에서는 로드된 부분에는 다른 부트 로더를 포함하며, 이는 0000h:0500h에 저장된 루트 디렉터리 정보를 이용하여 메모리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들인다. 도스 시스템 초기화 코드가 내장 장치 드라이버를 초기화한 다음 MS-DOS 시스템의 MSDOS.SYS에 위치한 도스 커널을 메모리로 불러들인다. 윈도우 9x의 경우 도스 시스템 초기화 코드와 내장 장치 드라이버와 도스 커널은 하나의 IO.SYS 파일에 병합되어 있으며 MSDOS.SYS는 텍스트 구성 파일로 사용된다. 그 뒤 CONFIG.SYS 파일을 읽어들여 구성 매개변수들을 구문 분석한다. SHELL 변수는 COMMAND.COM을 기본으로 하는 셸의 위치를 지정한다. 셸을 불러들여 실행한다. 그 뒤 시작 배치 파일 AUTOEXEC.BAT이 셸에 의해 실행된다. 도스는 8.3 파일 이름을 지원하는 파일 시스템을 사용하며, 여기에서 파일 이름이 8자, 확장자의 경우 3자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도스 2를 기점으로 계층적 디렉터리가 지원된다. 또, 각 디렉터리는 8.3 형식이지만 최대 디렉터리 경로 길이는 64자인데, 이는 도스가 관리하는 내부적인 현재 디렉터리 구조(CDs) 테이블 때문이다. 드라이브 이름을 포함하여, 도스가 온전히 지원하는 최대 길이는 마지막의 널 바이트를 포함, "드라이브:\경로\파일명.확장자"를 이용하여 80자이다. 도스는 파일 할당 테이블(FAT) 파일 시스템을 사용한다. 본래 드라이브 당 최대 4078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2였다. 도스 3.0에는 16비트 할당 엔트리를 사용하여 드라이브 당 최대 65517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6 지원을 추가하였다. 도스 3.31은 32 MB 드라이브 제한을 제거하고 최대 2 GB까지 지원하는 FAT16B의 지원을 추가하였다. 마지막으로 MS-DOS 7.1(윈도우 9x의 도스 구성 요소)은 32비트 핟랑 엔트리를 사용하는 FAT32의 지원을 추가함으로써 하드 드라이브를 최대 137 GB 이상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도스 3.1을 시작으로 파일 리다이렉터 지원이 도스에 추가되었다. 초기에 네트워킹 지원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MSCDEX를 이용한 CD-ROM 드라이브 지원에 사용되었다. IBM PC DOS 4.0 또한 IFS(installable file system)를 지원했으나 사용되지 않아 도스 5.0에서 제거되었다. 도스에서 드라이브들은 식별 가능한 문자들을 가리킨다. 표준화된 관습으로, "A 와 "B"는 플로피 드라이브를 위해 할당한다. 오직 하나의 플로피 드라이브를 가진 시스템에서 도스는 이 드라이브에 두 개의 문자를 할당하며, 프로그램들이 이들을 교체할 때 사용자에게 디스크를 스왑할 것인지 묻게 된다. 플로피에서 플로피로 복사하거나 다른 곳에서 데이터를 접근하는 동안 특정 플로피로부터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할 때 이용된다. 하드 드라이브들은 본래 문자 "C"와 "D 로 할당되었다. 도스는 드라이브 당 하나의 활성 파티션만 지원할 수 있었다. 도스에는 내부 문자 장치로 점유하고 있는 까닭에 파일 이름을 사용할 수 없는 예약 장치명이 있다. 또, 이러한 제한은 여러 윈도우 버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어떠한 경우에는 충돌이나 보안 취약성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스는 원래 인텔 8086/8088 프로세서용으로 설계되었으므로 최대 1 MB의 램에만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PC 아키텍처로 인해 최대 640 KB만 사용 가능하며(기본 메모리) 그 중 상위 384KB가 예약된다. 도스 시스템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이용한다. 프로그램들은 명령 프롬프트에서 파일 이름을 입력하여 시작할 수 있다. 도스 운영 체제들은 시스템 유틸리티와 같은 몇 가지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프로그램들과 관련되지 않는 내부 명령어라 불리는 추가 프로그램들도 제공한다. 사용자에 더욱 친숙한 환경을 제공하려는 시도 속에, 수많은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들은 메뉴나 아이콘 기반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파일 관리 프로그램들을 작성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가 잘 알려진 예인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x가 프로그램 로더를 기본 내장하면서 가장 흔히 쓰이는 PC 호환 프로그램 로더로서 도스를 대체하였다. 텍스트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들에는 Mdir, 노턴 커맨더, 도스 내비게이터, 볼코프 커맨더, 쿼터데스크 DESQview, 사이드킥이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에는 디지털 리서치의 그래픽 인바이런먼트 매니저(본래 CP/M용으로 작성됨)와 GEOS가 있다. 마침내, 주요 도스 시스템 제조업체들이 자신들만의 환경 관리자를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MS-DOS/IBM DOS 4는 도스 셸을 포함하였다. 이듬해에 출시된 DR DOS 5.0은 GEM 기반의 뷰맥스를 포함하였다. 도스는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도스는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TSR)을 제공하여 여러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에 상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시스템 타이머나 키보드 인터럽트를 후킹하여 이들이 백그라운드에서 작업을 수행하게끔 하거나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적시에 호출할 수 있게 한다. PRINT 명령어는 이를 수행하여 백그라운드 인쇄 스풀링을 구현하였다. 볼랜드 사이드킥도 이 기법을 사용한다.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들은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기능을 제공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CED와 도스키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COMMAND.COM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 이상으로 명령 줄 편집 기능을 제공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CD-ROM 확장 (MSCDEX)과 같은 프로그램들은 CD-ROM 디스크의 파일을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일부 TSR들은 초기 수준의 태스크 전환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셰어웨어 프로그램 백 앤드 포스 (1990년)은 단축키를 이용하여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의 상태를 디스크로 저장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불러와 전환할 수 있었다. 아라크네 웹 브라우저 도스는 지배적인 PC 호환 플랫폼이었으며 수많은 유명한 프로그램들이 도스를 위해 작성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을 포함한다 4DOS 더 개선된 셸 치환. 아라크네 16비트 그래픽 도스 웹 브라우저. 베이직 언어 인터프리터. BASICA, GW-BASIC이 8비트 컴퓨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베이직 인터프리터 환경을 따라하였다. dBase 초기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이다. DJGPP 32비트 DPMI 도스 포팅 gcc이다. 하버드 그래픽스 초기 프레젠테이션 그래픽스 디자인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이다. 로터스 1-2-3 , 보호 모드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으로, 기업에서 많이 이용되었고 IBM PC의 성공에 기여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매크로 어셈블러 , 마이크로소프트 C , 코드뷰 모두 마이크로소프트 개발 소프트웨어의 일부. 노턴 커맨더 , XTree 파일 관리 유틸리티. 노턴 유틸리티 디스크 및 시스템 유틸리티 모음. PC 툴스 디스크 및 시스템 유틸리티 모음. PKZIP 파일 압축을 빠르게 표준화한 압축 유틸리티. ProComm , Qmodem , Telix 모뎀 통신 프로그램. QEMM , 386MAX 도스 메모리 관리 유틸리티. 사이드킥 팝업 개인 정보 관리자. 터보 파스칼 , 터보 베이직 , 터보 C , 터보 어셈블러 모두 볼랜드의 통합 개발 환경의 일부. LIST 유틸리티 ASCII나 HEX 형태로 파일을 볼 수 있다. 워드퍼펙트 워드 프로세서의 하나로, 현재는 윈도우 플랫폼용으로 제작된다. 우드스타 초기 워드 프로세서. 도스 명령어 목록 도스 셸 cmd.exe COMMAND.COM MS-DOS API 글라도스 Timeline of DOS and Windows versions DOS - where hardware is the only limit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디스크 운영 체제
라플라스 변환 ()은 어떠한 함수 에서 다른 함수로의 변환으로, 선형 동역학계와 같은 미분 방정식을 풀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라플라스 변환을 이용하면, 미분 방정식을 계수방정식으로 변환하여, 문제들을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초깃값 문제의 경우 일차적으로 일반해를 구하는 단계가 필요없게 되고, 비제차 미분방정식의 경우에는 대응하는 제차미분방정식을 먼저 풀 필요가 없다. 라플라스 변환은 주어진 식을 간단한 식으로 변환한 뒤, 변형된 식을 푼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진 해를 다시 원식으로 변환한다. 함수 의 라플라스 변환은 모든 실수 t ≥ 0 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함수 로 정의된다. 여기서 는 를 간단히 나타낸 것이고 복소수 , σ와 ω는 실수이다. 실제 사용시에는 엄밀히 정확하지는 않지만 로 표기하기도 한다. 참고 는 층계 함수이다. 함수 의 라플라스 변환을 라 하면 다음 식을 통해 로부터 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위의 계산을 직접 하기 보다는 이미 알려져 있는 라플라스 변환들을 이용해 역변환을 구하는 것이 쉽다. 예를 들어 로 가 주어져 있는 경우 부분분수 분해를 통해 를 얻게되고 라플라스 변환의 선형성으로부터 는 다음과 같다. 다음과 같은 차 연립 상미분 방정식을 고려하자 양변에 라플라스 변환을 취하면 이고 이를 에 관해 정리하면 이다. 따라서, 는 다음과 같다. 푸리에 변환 Z변환 분류:해석학 (수학) 분류:전자공학 분류:디지털 신호 처리 분류:수리물리학
국제사무기기회사 (國際事務機器會社는 미국의 다국적 기술 및 컨설팅 회사이다. 천공카드 시스템을 고안한 허먼 홀러리스가 1896년 창설한 제표기기회사가 1911년에 국제시간기록회사·Computing Scale Company·번디 제조회사와 합병해 세운 전산제표기록회사(CTR)가 이 회사의 전신이다. 터뷰레이팅 머신의 자동 표작성기는 1890년의 미국 국세조사(國勢調査)에 사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CTR은 한때 경영 부진에 빠졌으나 1914년 토머스 J. 왓슨을 사장으로 영입해 급성장의 계기를 이룩했다. 이후 1924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토머스 왓슨의 아들 토머스 J. 왓슨 주니어의 노력으로 PC를 개발했다. IBM이 PC를 개발한 뒤 내부를 공개 하였으며 수많은 업체들은 PC의 주변기기를 개발하였고 IBM은 로열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PC의 기술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래서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PC를 사용하고 있다. IBM은 PC의 기능을 보강하여 PS/2라는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기도 하였다. PS/2에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업체들과 사용자들은 PS/2를 외면하였다. 결국 PS/2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IBM은 주로 메인프레임을 위주로 한 하드웨어 업체였으나, 1990년대부터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으로 분야를 넓혀왔다. 2000년대부터는 매출액 중 서비스/컨설팅 비중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리눅스를 강력히 지원하기 시작했다. 2002년 루이 거스너로부터 경영탑을 인수한 후 IBM를 크게 발전시킨 새뮤얼 팔미사노는 이 회사를 파멸에서 건져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론에서는 IBM사를 ‘빅 블루’라고도 부르는데, 이 회사의 로고 마크가 푸른 색으로 그려졌고, 또한 주식도 우량 주식(블루 칩) 가운데서도 뛰어난 최우량주(블루)이기 때문이다. 이 그룹은 IBM의 주된 부서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과 같은 다양한 브랜드가 존재한다 Information Management — 데이터베이스, 서버, 데이터웨어하우스, 데이터 스트리밍, 데이터 보안 및 데이터 라이프 사이클 관리 Business Analytics — 데이터 분석, 모델링, 고급 분석 인더스트리 솔루션 — 산업 특성을 고려한 산업용 인프라 소프트웨어. 로터스 소프트웨어 — 그룹웨어, 협동,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1995년에 인수. 레셔널 소프트웨어 — 소프트웨어 개발 및 응용 프로그램 수명 관리. 2002년에 인수. 티볼리 소프트웨어 — 시스템 관리. 1996년에 인수. 웹스피어 — 통합 및 응용 프로그램 인프라 소프트웨어. 이사회는 10인~14인이 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은 상황 및 추천된 후보의 자질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될 수 있다. 현재는 이사 12인(사내 1, 사외 11)이며, 2010년도 주총 이후에는 13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사무엘 팔미사노(Samuel J. Palmisano)가 이사회 의장(Chairman of the Board)과 대표이사(President), CEO를 겸하고 있다. CEO의 성과는 집행 평가 및 경영자원 위원회(Executive Compensation and Management Resources Committee)에서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이사회의 집행 부분(executive session)에서 매년 검토하며, 이사회 의장은 정기적으로 승계 계획 및 경영진 계발에 대해 보고한다. 한국IBM IBM AIX IBM OS/2 IBM PS/2 IBM PC-DOS IBM PC IBM 시스템/360 IBM 시스템/370 IBM ESA/390 IBM 시스템 z9, IBM 시스템 z10 IBM 시스템 p, POWER6 IBM 시스템 i IBM PC 호환기종 DB2 IBM 한국어 공식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분류:1911년 설립된 기업 분류:미국의 기업 분류:미국의 전자 기업 분류:반도체 기업 분류:컴퓨터 하드웨어 기업 분류:미국의 브랜드 분류:클라우드 컴퓨팅 제공자 분류:미국의 다국적 기업
CollatzFractal Julia island2 프랙탈 () 또는 프랙털 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이런 특징을 자기 유사성이라고 하며, 다시 말해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 구조라고 한다. 브누아 망델브로가 처음으로 쓴 단어로, 어원은 조각났다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fractus’이다. 프랙탈 구조는 자연물에서 뿐만 아니라 수학적 분석, 생태학적 계산, 위상 공간에 나타나는 운동모형 등 곳곳에서도 발견되어 자연이 가지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불규칙하며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을 배후에서 지배하는 규칙도 찾아낼 수 있다. 복잡성의 과학은 이제까지의 과학이 이해하지 못했던 불규칙적인 자연의 복잡성을 연구하여 그 안의 숨은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복잡성의 과학을 대표하는 혼돈 이론에도 프랙탈로 표현될 수 있는 질서가 나타난다. 프랙탈은 수학적 도형으로도 연구되고 있다. 프랙탈 도형은 종종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재귀적이거나 반복적인 작업에 의한 반복되는 패턴으로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프랙탈 도형에는 망델브로 집합, 칸토어 집합, 시에르핀스키 삼각형, 페아노 곡선, 코흐 곡선 등이 있다. 프랙탈은 결정론적이거나 추계학적일 수 있으며, 혼돈적 계와 연관지어 발생할 수도 있다. 프랙탈 기하학은 프랙탈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과학, 공학, 컴퓨터 예술에 적용되기도 한다. 자연계에서도 프랙탈 구조가 자주 발견되며, 구름, 산, 번개, 난류, 해안선 및 나뭇가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프랙탈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며, 현실 세계의 매우 불규칙한 물체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일 수 있다. 프랙탈 기법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물론, 기술적으로 이미지 압축 등에서도 사용된다. 프랙탈의 역사는 주로 이론적 연구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현대적인 적용에 이르는 길을 따르며, 그 과정에서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 공식적인 프랙탈 형태를 만들었다. Pickover에 따르면, 프랙탈의 수학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Leibniz가 반복적인 자기유사성을 생각했을 때인 17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그는 직선만이 자기 유사라고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저서에서, Leibniz는 "fractional exponents(분수적인 지수)"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기하학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실, 다양한 역사적 설명에 따르면, 그 이후로는 몇 명의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심했고, 그들에 의해 때로는 수학적 "괴물"이라고도 불리는, 낯설게 떠오르는 개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불분명했던 작업들이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1872년 7월 18일 Karl Weierstrass가 왕립 프러시안 과학 아카데미에서 오늘날 프랙탈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연속이지만 모든 곳에서 미분 불가능한, 비직관적인 특성을 가진 함수의 첫 번째 정의를 나타낸 것은 2세기가 지난 후였다. 또한 가산 지표가 커짐에 따라서 계차는 임의로 커진다. 그 뒤 1883년에 바이어 슈트라스의 강의에 참석한 Georg Cantor는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은 프랙탈로 인식되는, 지금은 칸토어 먼지로 알려진 실제 선의 하위 집합들의 예를 출판하였다. 또한, 세기 말에 펠릭스 클라인과 앙리 푸앵카레는 "self-inverse“ 프랙탈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도입했다. 다음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1904년에 온 것인데, 이 때, 푸앵카레의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바이어 슈트라스의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정의에 불만을 품은 헬 폰 코흐는, 지금은 코흐 눈꽃송이라고 불리는 비슷한 함수에 대해 손으로 그린 이미지를 포함한 더 기하학적인 정의를 내렸다. 또 다른 획기적인 사건은 10년 후인 1915년에 왔는데, 그 때 바츠와프 시에르핀스키는 그의 유명한 삼각형을 만들었고, 그 1년 후에, 시어핀스키의 양탄자를 만들었다. 1918년까지, 두 명의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파투와 가스통 쥘리아는, 독립적으로 연구했긴 했으나 복소수와 반복적 함수를 구조화하고, 더 나아가 끌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현대에는 프랙탈의 특성으로 불리는 결과에 동시에 도착했다. 그 연구가 발표된 직후 1918년 3월에 펠릭스 하우스 도프는 프랙탈이라는 정의의 발전을 위해 "차원"의 정의를 상당히 확대하여 프랙탈들이 정수 차원이 아닌 차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자기 유사 곡선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의 1938년 종이 평면이나, 공간 곡선 그리고 새로운 프랙탈 곡선과 유사한 부품들로 이루어진, 폴 레비에 의해 더 나아갔다. 다른 연구원들은 현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 초기 연구원들이 그들이 수동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들은 간단하게 사람의 손으로 그리는 반복 작업들로 만들 수 있는 것들로 제한되었고,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의 의미를 시각화하고 높이 평가할 수단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쥘리아 집합은 간단한 그림들에 대한 반복적인 수행으로 시각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누아 망델브로가 리차드손의 초기 연구에서 나아간 "영국의 해안은 얼마나 길까? 프랙탈 차원과 통계학적 자기 유사성“와 같은 논문에 자기 유사성에 대해 쓰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다. 1975년에 만델브로는 "프랙탈"이라는 단어로 수백년에 걸친 사고와 수학적 발전을 굳히고, 인상적인 컴퓨터 건축 시각화로 그의 수학적 정의를 묘사했다. 망델브로 집합과 같은 그의 공식적인 이미지들은 많은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은 반복에 기초해서 만들어졌고, 프랙탈이라는 용어의 대중적인 의미로 이끌었다. 1980년 로렌 카펜터는 SIGGRAPH에서 프랙탈로서 풍경을 만들고 표현하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였다. 프랙탈을 네 가지 생성 기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시간매개형 프랙탈(Escape-time fractals, 궤도 프랙탈) 대개 복소평면 상에서, 각각의 점이 발산하는 속도를 색으로 나타낸 이미지. 망델브로 집합 반복함수계(Iterated function system) 기하학적 대체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도형. 칸토어 집합, 시에르핀스키 삼각형과 시에르핀스키 카펫, 코흐 곡선, 페아노 곡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기이한 끌개(Strange attractors) 주어진 사상이나 방정식의 해를 이용해 초기값을 반복적으로 변환한 것이며 혼돈 이론과 관계된다. 무작위적 프랙탈(Random fractals) 결정론적이지 않고 추측 통계학적으로 만들어진 것. 이들 중 기하학적 프랙탈만이 완벽한 자기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망델브로 집합은 느슨하며,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확대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프랙탈은 자기 유사성의 강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뉠 수도 있다. 준-자기유사적 프랙탈 (통계학적 프랙탈) 자기 유사성의 강도가 가장 낮은 것이며 자연에서 찾은 프랙탈처럼 부분과 전체가 대략적으로 비슷한 것이다. 완전-자기유사적 프랙탈 (규칙적 프랙탈) 자기 유사성의 강도가 가장 높은 것이며, 부분과 전체의 모양이 정확하게 같다. 규칙적 프랙탈의 예로서 시에르핀스키 삼각형과 코흐 곡선이 있다.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은 아래 점화식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z와 c는 복소수이다. 쥘리아 집합은 정해진 c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z의 초기값을, 망델브로 집합은 정해진 z의 초기값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c를 의미한다. 발산 속도에 따라 점의 색을 다르게 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에 대해 생각해보자. 의 초기값을 로 하여 점화식을 반복하여 계산한다. 그 결과는 값에 의존한다. 즉 값에 따라 가 하나의 값으로 수렴하기도 하고 여러 값 사이를 순환적으로 맴돌기도 하고 아주 큰 값으로 발산하기도 한다. 만델브로트 집합은 초기값을 로 했을 때 을 발산시키지 않는 복소수 들의 모임이다. 를 고정했을 때 발산하지 않는 를 충만한 쥘리아 집합(filled-in julia set) 이라 한다. 쥘리아 집합은 충만한 쥘리아 집합의 경계이다. ① 가 만델브로트 집합이면, 가 수렴하는 는 충만한 쥘리아( filled in Julia set) 집합이다. ② 가 만델브로트 집합에 속하지 않으면, 비연결 쥘리아 집합 이다. ③ 쥘리아 집합은 충만한 쥘리아 집합의 경계이다. ④ 쥘리아 집합이 비연결이면 충만한 쥘리아 집합()과 쥘리아 집합()은 같아진다. ⑤ 만델브로트집합에서 나타나는 주기는 쥘리아 집합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⑥ 만델브로트 집합은 한 개이지만, 쥘리아 집합은 여러 개이다. ⑦ 쥘리아 집합은 내부가 공집합이다. ⑧ 복소수 에 대하여, 모든 쥘리아 집합은 각각 다르다. 규칙적 프랙탈.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프랙탈의 경우 대부분 부분과 전체의 모양이 대략적으로 비슷할 뿐이나 반복함수계의 경우 전체와 부분의 형태가 완전히 일치한다. 통계학적 프랙탈. 자기유사성이 핵심 개념인 프랙탈 이론은 위상수학 분야에 속하고, 초기조건의 민감성이 핵심인 카오스 이론은 미분방정식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랙탈 도형은 가까운 두 점이 가진 정보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초기조건의 민감성을 가지고 있고, 카오스 이론의 끌개는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프랙탈에서의 차원은 자가복제를 하기위해 필요한 도형의 숫자로 정의된다. 즉, 어떤 도형의 길이를 x 배 크게 하였을 때 그 도형의 면적이 n 배 증가한다면 그 도형의 차원은 log x n 으로 정의된다. 하우스도르프 차원의 개념.망델브로 프랙탈- M5 1024쥘리아 프랙탈 - J3 3s이에 따라 자연수가 아닌 차원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의 경우 프랙탈에서의 차원의 값은 log23으로 나타난다. 번개-Lightning in Zdolbuniv 강-Mandelriver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탈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Mandelbrot SET -망델브로 집합 자연에서는 자기 닮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유한한 구조물들이 자주 발견된다. 번개 번개는 같은 길을 반복해서 계단을 이루듯이 방전한다. 습도,기압,온도 등 여러 조건에 의해 복잡하게 경로가 결정되기 때문에, 일직선이 아니고 구불구불한 형태를 지닌다. 불규칙해 보이지만, 전체적인 모습과 가지 하나하나가 비슷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자기닮음의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강줄기 강의 부분과 전체는 닮았다. 나일강의 모습과 한강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비슷하고, 어느 지역에서건 강의 모습은 비슷한 형태를 지닌다. 지류와 전체적인 강줄기의 모습은 닮았다. 수많은 비가 내리면서 산에 많은 분기점이 생긴다. 이 하나하나가 작은 강이 되어 큰 줄기로 만났다가 작은 줄기로 뻗어나가는 행위를 반복한다. 나무 나무는 큰 가지가 나뉘면서 여러 가지가 생기고, 이 작은 가지에 또 여러 작은 가지들이 갈라 진다. 나무는 저마다의 프랙탈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나무의 프랙탈 형태는 물과 영양분의 운반을 전체에 고르게 보내는 역할을 한다. 뇌의 표면 뇌의 표면에는 여러 주름져 있다. 커다란 주름에 다시 작은 주름들이 계속되어 나간다. 지적 능력의 향상을 위해 여러 주름으로 최대한 공간을 만들어서 뇌세포를 배치시킨다. 이런 뇌의 주름의 패턴은 여러 주름이 자기닮음의 형식으로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프랙탈의 형식을 띠고 있다. 산호 군체들이 응집을 통해 밖으로 성장하면서 바깥쪽으로 자라나는 표면에 물질이 연속적으로 쌓인다. 나무뿌리와 비슷한 원리로 프랙탈 차원을 가진다. 구름 매우 균일한 프랙탈로, 뭉게구름의 경우 대략 1.35차원을 가진다. 무작위적으로 일어난 응결과정에서 생성된 구름은 생성된 물방울들이 주위 물방울들을 끌어모으면서 프랙탈의 형태를 띄게 된다. 프랙탈이나 혼돈 이론을 적용한 기술들은 인공 지능, 시뮬레이션, 우주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험적 예술 등에도 적용되고 있다. 프랙탈 예술의 예 프랙탈의 형태적 특징을 기하학적 조형성으로 이용하여 만든 디자인이다. 프랙탈의 성질은 형태적으로 반복 , 자기유사성 , 회전 이며, 질서, 통일, 반복, 조화같은 기본적인 디자인 원칙하에 프랙탈의 형태적 특성이 나타난다. 프랙탈 디자인에서의 자기유사성은 기본적 형태요소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배열되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런 기본형태요소는 끝없이 반복되며, 이 가운데서 통일성과 질서 조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해준다. 프랙탈 디자인은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컴퓨터 그래픽 툴로 만들 수 있다. 그래픽 툴로 프랙탈 디자인을 만드는 방법은 기본형태를 복사해서 크기를 점점 줄이거나, 점점 늘리면서 반복해서 확장시키는 것이다. 프랙탈 디자인이 적용된 대표적인 예로 존 마에다가 디자인한 Morisawa poster가 있다. Richard F.Voss와 John Clarke가 물질적인 소리 신호에 대한 수학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연구에서 파워 스펙트럼(노이즈) 중에서 주파수 변화량 f에 따라 1/f 특성을 가진 pink noise가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자연현상과 유사한 형태를 가짐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1/f 패턴을 갖는 음악을 프랙탈 음악이라 한다. Voss와 Clarke는 pink noise(프랙탈 음악)이 적절한 보통의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랙탈 음악도 자연에서의 프랙탈처럼 전체 구조와 유사한 작은 구조가, 전체 안에서 반복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프랙탈적인 공간 채움과 조화로운 음 연결도 프랙탈 음악의 특성이다. 프랙탈 음악에는 바흐가 작곡한 클래식부터 컴퓨터로 작곡한 현대 음악 등이 있다. 프랙탈과 카오스 , 안대영 교우사 (2015.3.5) 1 Fractal Geometry , by Kenneth Falconer; John Wiley & Son Ltd; (March 1990) 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 , by Benoit Mandelbrot; W H Freeman & Co; (hardcover, September 1982). The Science of Fractal Images , by Heinz-Otto Peitgen, Dietmar Saupe (Editor); Springer Verlag; (hardcover, August 1988) Fractals Everywhere , by Michael F. Barnsley; Morgan Kaufmann; 네이버 캐스트 - 갈대도 프랙탈 프랙탈 아트 갤러리 프랙탈을 찾는 사람들 Fractal Properties more information on fractals from FAQS.org Many good Fractal examples Fractal Landscapes Ultra Fractal - fractal software for Windows Fractal Dimensions Archive of Fractals published on USENET IFS Illusions 프랙탈 갤러리 Sterling2 freeware fractal generator including download, instructions and sample images. 만델브로 집합 복소수와 프랙탈
초파리 는 초파리과 (Drosophilidae) 동물의 총칭으로, 세계에 3,00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노랑초파리( Drosophila melanogaster )는 Morgan 이후 유전학 실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다세포 생물이다. 큰 이유는 초파리의 한 세대는 12일 전후로 상대적으로 짧아서 교배 실험에 효율적이다. 그리고 한 쌍의 교배로 약 500개의 알을 얻을 수 있어 고전적인 통계를 처리할 때에도 좋은 표본이 될 수가 있다. 몸집이 매우 작아서 많은 개체수를 사육 하여도 어렵지 않는 장점이 있고, 환경에서 직접 채취하여 사육하기도 쉽다. 돌연변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염색체 수가 적어서 염색체 지도를 작성하기에도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초파리의 거대 침샘염색체는 매우 잘 알려진 유전자 실험 재료다. 동양안충은 초파리를 중간숙주로 삼는 기생충이다.
2003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5일 -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2회의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하여 23명이 사망하다. 1월 25일 - 1·25 인터넷 대란 발생. 1월 31일 -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8명이 사망하다. 이 중 다수가 미국인이었다. 2월 1일 -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귀환 도중 미국 텍사스 상공에서 공중폭발하여, 타고 있던 우주인 7명 모두 사망. 2월 18일 -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발생으로 192명 사망, 151명 부상. 2월 25일 -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임기가 종료됨.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임기가 시작됨. 2월 27일 - 고건 국무총리 취임. 3월 3일 - 노르웨이 왕세자 호콘이 부왕 하랄 5세의 대리청정을 시행. 3월 19일 - 2003년 이라크 침공 미국, 이라크 침공. 4월 9일 - 2003년 이라크 침공 미국·영국, 바그다드 함락. 4월 12일 - 헝가리에서 유럽 연합 가입을 위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다. 찬성이 84%에 달한 반면, 기권도 55%에 달하였다. 4월 27일 - 아르헨티나에서 카를로스 메넴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결한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메넴이 24.14%, 키르치네르가 22.04%의 지지를 얻었다. 6월 6일 - 노무현 대통령, 일본 공식 방문. 6월 11일 - 예루살렘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17명이 사망했다. 6월 13일 - 체코에서 유럽 연합 가입을 묻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다. 55.2%의 투표율을 보였고, 77.3%가 찬성하였다. 6월 28일 - 한국철도산업노동조합 파업 시작. 철도공사법 저지를 목표로 함. 7월 8일 - 샴 쌍둥이 비자니 자매, 분리 수술 직후 사망. 7월 30일- 현대백화점 부평점 부도처리 이후 이랜드에게 매각 8월 4일 -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장 투신 자살 사건 발생(대북(對北) 송금 사건). 8월 5일 - 현대자동차, 주5일 근무제 시행 등 노사협상 타결로 47일간의 파업 마감. 8월 7일 - 한총련 소속 일부 대학생, 경기도 포천 미군 사격 훈련장 불법 진입 기습 시위. 8월 8일 - 대구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화물열차와 추돌사고로 2명 사망, 99명 부상. 8월 10일 -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 복제 망아지 ‘프로메테아’ 탄생. 8월 11일 - 권노갑 새천년민주당 전 고문, 현대 비자금 수수혐의로 긴급 체포. 8월 11일 - NATO, 아프가니스탄에서 평화 유지 활동을 시작하면서 54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유럽 외의 지역에서 작전을 개시했다. 8월 14일 - 서울지방법원, 간첩누명 쓴 수지 김 유족에 42억 국가 배상 판결. 8월 14일 - 북동쪽 미국과 중부 캐나다에서 광범위한 정전 이 일어나다. 8월 24일 - 반북 시민단체들과 제22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북한 취재기자들 간에 충돌 사건 발생. 8월 25일 - 대한민국 정부, 신용 불량자 81만 명 구제 대책 발표. 8월 27일 - 화성이 지구에 6만 년 만에 처음으로 55,758,006킬로미터까지 대접근하다. 8월 27일 - 베이징에서 남·북·러·미·일·중 여섯 나라가 모여 첫 육자 회담을 열다. 8월 28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6차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합의문 발표. 8월 29일 - 대한민국 국회, 주5일 근무제를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8월 31일 - 대한민국,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현대비자금 200억 원 수수혐의로 구속 기소. 9월 1일 - 대한민국 정부, 종합부동산세 신설 등 관련 세법 개정 추진 발표. 9월 3일 - 대한민국 국회,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9월 10일 - 멕시코 캉쿤에서 세계 무역 기구(WTO) 협상 반대 시위를 벌이던 이경해 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 할복 자살. 9월 11일 - 아르헨티나, 국제통화기금(IMF)과 3년간 채무상환 유예 등을 골자로 금융구제안에 합의. 9월 12일 - 태풍 매미가 대한민국을 강타하다. 9월 14일 - 에스토니아 국민 투표에서 유럽 연합 가입 가결. 9월 16일 - 일본, 신칸센 100계 전동차가 도쿄-신오사카행 히카리 309호 운행을 끝으로 도카이도 신칸센에서 은퇴. 9월 17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8차 남북군사실무회담에서 동·서해지구 남북관리구역 임시도로통행의 군사적 보장 위한 잠정합의서의 보충합의서 채택. 9월 20일 - 대한민국, 새천년민주당 신당파, 국민참여통합신당으로 국회에 교섭단체 공식 등록. 9월 26일 - 대한민국 국회,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9월 27일 - 러시아 플레세츠크 우주 기지에서 대한민국의 첫 과학기술위성 과학기술위성 1호, 발사 성공. 9월 28일 - 대한민국 노동부, 퇴직연금제 등 급여자 퇴직급여 보장법안 입법예고 발표. 9월 29일 - 노무현 대통령 민주당 탈당 공식 선언 10월 1일 - 한국통신, 대한민국기업사상 최대규모 5,500여 명 명예퇴직 실시. 10월 5일 -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 부분분만 낙태 금지법(Partial-Birth Abortion Ban Act)에 서명. 10월 7일 -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3국 정상회담을 갖고 14개 분야에 합의. 10월 8일 - 대한민국 검찰, 최도술이 SK그룹으로부터 11억 수수 확인. * 연예계 비리 관련 서세원, 이수만 구속. 10월 10일 - 노무현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하다. 10월 12일 - 이라크 바그다드 도심 바그다드 호텔 부근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7명이 사망하다. 10월 15일 - 중국이 선저우 5호를 발사하다. 10월 19일 - 마더 테레사 수녀가 복녀로 시복되다. 11월 5일 - 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다. 11월 11일 - 열린우리당 창당. 11월 23일 - 조지아의 세바르드나제 대통령이 퇴진하다. 11월 24일 - 신용 불량자 양산 등 자금난 문제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LG카드(현 신한카드)가 채권단으로부터 2조원의 긴급 자금을 지원하다. 11월 26일 - 콩코드 초음속 여객기가 운항을 중단하다. 12월 2일 - 장효희 목사가 간음하다 들켜 아파트에서 탈출하려고 뛰어내렸다가 사망하다. 처음에는 과로사로 발표되었으나 나중에는 추락사로 정정했다. 12월 7일 - 이을용 선수가 축구경기 도중 중국선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려 퇴장당했다. (을용타) 12월 13일 - 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 체포되다. 12월 16일 -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라왈핀디 근처의 자택에서 테러를 당했으나 부상만 당하였다. 12월 19일 - 리비아,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를 발표하다. 1월 1일 - MBC 무비스 개국. 1월 24일 - KORAIL로 CI 선포식. 4월 28일 - 애플, 아이튠즈 스토어 출시. 6월 1일 - 대한민국에서 JIBS 제주국제자유도시방송 FM 방송 개국하다. 5월 6일 - 미국 락밴드 fall out boy 데뷔 8월 18일 - 박세리, LPGA 제이미 파크로거 클래식 우승. 8월 21일 - 제22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대구광역시에서 개막. 9월 3일 - 분당선 수서역 - 선릉역 연장 개통. 9월 15일 - 드라마 대장금이 시작. 9월 16일 - 일본, 신칸센 100계 전동차가 도쿄발 신오사카행 히카리 309호를 마지막으로 도카이도 신칸센에서 완전히 은퇴하다. 10월 2일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대구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투수 이정민으로부터 56번째 홈런을 쳐내며 대한민국 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홈런 기록 10월 10일 - 대한민국 강원도에서 GTB(현 G1) Fresh-FM 라디오 개국. (주파수 춘천권 105.1MHz, 강릉권 106.1MHz) 10월 21일 -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이후 8개월 만에 중앙로역 무정차 통과 형식으로 전구간 통행 재개하다. 10월 26일 - 롯데월드에 아트란티스가 개장하였다. 11월 5일 - 대한민국, 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상 최초로 "복수 정답"을 인정했다. *12월 26일 - 대한민국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가 데뷔하였다. 12월 31일 -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이후 10개월 만에 중앙로역이 복구 공사 완료와 동시에 영업 재개하다. 교수신문이 정한 2003년의 사자성어 右往左往 1월 2일 - 미국의 배우 사이러스 아널드 1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주혜린 2월 4일 - 미국의 배우 카일라 케네디 2월 13일 - 캐나다의 배우 케나디 주르댕브롬레 3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사랑 3월 12일 - 미국의 배우 겸 모델 말리나 와이즈만 3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단율 4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겸 가수 이우진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프로미스나인의 멤버 백지헌 4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윤석 * 영국의 배우 에밀리 케리 5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동현 5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민서 5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엄지성 * 대한민국의 배우 유승용 6월 1일 - 미국의 배우 겸 모델 엠제이 앤서니 6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왕석현 7월 22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송의준 * 대한민국의 배우 전준혁 7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택현 8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양한열 8월 18일 - 미국의 배우 맥스 찰스 8월 20일 - 벨기에 왕자 가브리엘 8월 28일 - 미국의 배우 쿼벤저네이 월리스 9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즈원의 멤버 안유진 9월 14일 - 일본의 아이돌 가수 이마무라 마리아 10월 22일 - 일본의 아이돌 가수 카사하라 모모나 10월 24일 - 미국의 배우 허드슨 양 11월 8일 - 영국의 왕족 레이디 루이즈 윈저 12월 7일 - 네덜란드의 공주 오라녜 여공 카타리나아말리아 레오폴도 갈티에리 그레고리 펙 캐서린 헵번 이디 아민 1월 12일 - 아르헨티나의 前 대통령 레오폴도 갈티에리 3월 8일 - 대한민국의 시인 조병화 3월 25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이문구 3월 28일 - 러시아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 4월 1일 - 홍콩의 영화배우 장궈룽 4월 19일 - 이탈리아의 추기경 아우렐리오 사바타니 6월 13일 - 미국의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 6월 26일 - 카메룬의 축구선수 마르크비비앙 푀 6월 29일 - 미국의 배우 캐서린 헵번 7월 7일 - 미국의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 7월 8일 - 이란의 샴쌍둥이 비자니 자매 (라단 비자니, 라엘 비자니) 7월 12일 - 일본의 기업인 아시하라 요시시게 7월 16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한은진 7월 22일 -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의 두 아들 우다이 후세인(*1964)과 쿠사이 후세인 8월 4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정몽헌 8월 9일 -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8월 16일 - 미국의 무용가 그레고리 하인스 8월 19일 - 브라질의 외교관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9월 8일 - 독일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 9월 25일 - 미국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프랑코 모딜리아니 9월 28일 - 미국의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 10월 21일 - 미국의 싱어송 라이터 엘리엇 스미스 10월 23일 - 대만의 총통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극작가 이근삼 12월 2일 - 대한민국의 목사 장효희 12월 9일 -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윤석중 12월 12일 - 헤이다르 알리예프, 구 소련의 정치인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김윤환 12월 30일 - 홍콩의 영화배우 매염방 경제학상 로버트 F. 엥글(미국), 클라이브 W. J. 그레인저 (영국) 문학상 존 맥스웰 쿠치(남아프리카 공화국) 물리학상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아브리코소프 (미국), 비탈리 L. 긴즈부르크 (러시아), 앤서니 J. 레깃 (미국) 생리학 및 의학상 폴 C. 로터버 (미국), 피터 맨스필드(영국) 평화상 시린 에바디 (이란) 화학상 피터 에이그리, 로더릭 매키넌(이상 미국) 작품상 시카고 감독상 로만 폴란스키(피아니스트(2001)|피아니스트) 남우주연상 에이드리언 브로디(피아니스트(2001)|피아니스트) 여우주연상 니콜 키드먼(디 아워스) 남우조연상 크리스 쿠퍼(어댑테이션) 여우조연상 캐서린 지타존스(시카고)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대 2월 1일 을사 2월 을묘 대 3월 3일 을해 3월 병진 소 4월 2일 을사 4월 정사 대 5월 1일 갑술 5월 무오 대 5월 31일 갑진 6월 기미 소 6월 30일 갑술 7월 경신 대 7월 29일 계묘 8월 신유 소 8월 28일 계유 9월 임술 소 9월 26일 임인 10월 계해 대 10월 25일 신미 11월 갑자 소 11월 24일 신축 12월 을축 대 12월 23일 경오
1913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일본(日本) 다이쇼() 2년 1월 1일 - 한국 최초의 어린이 신문인 《붉은 저고리》가 창간되었다. 1월 5일 - 국권회복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이강덕 등이 체포되었다. 1월 15일 - 이완용, 조중응 등이 조선권업회를 조직하였다. 1월 31일 - 관부연락선인 고려마루 호 (高麗丸)가 취항하였다. 2월 2일 - 티베트와 몽골, 몽장 조약 체결. 2월 5일 - 이인직이 《매일신보》에 〈모란봉〉연재를 시작하였다. 2월 11일 - 민중데모로 가쓰라 다로 내각이 무너진다. 3월 20일 - 신민회 사건에 대한 공소심이 경성 복심원에서 열려,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등은 징역 6년, 옥관빈은 5년, 기타 99명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3월 22일 - 중국 국민당이 선거에 승리하고 피살당한 쏭자오인 사망. 이 후 원세계가 국회 해산 단행. 4월 - 최남선이 《소년》의 후신으로 월간 《새별》을 창간하였다. 4월 1일 - 조선은행 도쿄지점이 설치되었다. 4월 2일 - 김재순 전 수반판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 (독립의군부 사건) 4월 19일 - 미국 하와이에서 대한인부인회가 조직되었다. 5월 13일 *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 조중환이 《매일신보》에 〈장한몽〉연재를 시작하였다. 5월 21일 - 의병장 노병직이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5월 25일 - 한용운이 《불교유신론》을 간행하였다. 6월 10일 - 조선철도가 시베리아를 경유한 유럽 간 여객, 수하물 연락운수 사업을 개시하였다. 6월 13일 - 사립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가 사립 세브란스 연합 병원 의학교로 교명 변경. 7월 7일 - 스에마츠가 고려 때 유적인 진남포 고분을 발견하였다. 7월 10일 - 박영효, 유길준, 송병준 등이 조선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 8월 13일 - 독립의군부 사건으로 김재순 외 4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 8월 15일 - 조선에서 지세징수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다. 8월 16일 - 일본에서 최초로 도호쿠 제국대학 여자 학생 3인 입학. 9월 11일 - 양정고등보통학교 설립 인가. 현존하는 당시의 최초 남자 고등보통학교가 됨(즉 공인된 남자 중등학교가 생김) 9월 23일 - 일제 강점기 일본, 육해군형법(陸海軍刑法)을 조선에 시행하는 법률 공포 시행 10월 5일 - 국왕이었던 오토가 사촌인 섭정 루트비히 왕자에 의해 폐위되고, 루트비히가 루트비히 3세로 즉위하다. 11월 8일 - 경신학교 학생 108명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11월 - 이동휘가 간도에 항일단체 한교동사회를 조직하였다. 12월 10일 - 이석용 호남창의대장이 임실에서 체포되었다. 12월 15일 **서울에 베네딕트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한강철교 복선화가 완료되었다. 12월 27일 - 경성 광희문-왕십리-진팔리 간 전차 운행이 개시되었다. 1월 6일 - 폴란드의 정치인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1월 9일 - 리처드 닉슨,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1월 10일 -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인 구스타프 후사크. 1월 25일 - 폴란드의 작곡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2월 4일 -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 2월 18일 - 한국의 동양화가 김기창. 2월 21일 -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벤저민 블룸. 2월 27일 - 한국의 서양화가 김환기. 3월 22일 - 한국의 작곡가 김동진 3월 26일 - 헝가리의 수학자 에르되시 팔. 5월 3일 - 미국의 극작가 윌리엄 인지. 5월 21일 - 그리스의 피아노 연주자 지나 바카우어. 6월 5일 - 북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피터 도허티. 6월 30일 -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가 리처드 S. 프레이저. 7월 6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7월 14일 - 제럴드 포드, 미국 38대 대통령. 9월 12일 - 미국의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 9월 25일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요셉 비칸. 9월 29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실비오 피올라. 11월 5일 - 미국의 영화배우 비비안 리. 11월 7일 -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 11월 22일 - 영국의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김동리. 2월 22일 -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6월 8일 - 영국의 여성 인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 9월 30일 - 독일의 기술자 루돌프 디젤 (1858년생) 11월 22일 - 일본 에도 막부 15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물리학상 - 헤이커 카메를링 오너스 화학상 - 생리학·의학상 - 평화상 - 문학상 -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대 2월 6일 무오 2월 을묘 대 3월 8일 무자 3월 병진 소 4월 7일 무오 4월 정사 대 5월 6일 정해 5월 무오 소 6월 5일 정사 6월 기미 소 7월 4일 병술 7월 경신 대 8월 2일 을묘 8월 신유 소 9월 1일 을유 9월 임술 소 9월 30일 갑인 10월 계해 대 10월 29일 계미 11월 갑자 소 11월 28일 계축 12월 을축 대 12월 27일 임오
세기 18세기 19세기 - 20세기 - 21세기 22세기 연대 1930년대 1940년대 - 1950년대 - 1960년대 1970년대 해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1956 1957 1958 1959 1950년대 는 1950년부터 1959년까지를 가리킨다. *1950년 하이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제2차 국공 내전 종결. 한국 전쟁 개전. 티베트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 즉위. *1951년 콜롬보 계획 시행.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일본과 미국 간 적대 관계 종결. *1952년 유럽 방위 공동체 설립.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으로 파루크 1세가 퇴위하고 영국의 이집트 점령 종결. 조지 6세 사망.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 연방 왕국 왕으로 즉위. 에바 페론 사망. 최초의 수소폭탄 폭발. 조너스 소크의 소아마비 백신 발명. *1953년 캄보디아 독립. DNA의 이중나선 구조 규명. 최초의 에베레스트산 등정. 이란에서 모하마드 모사데그 실각. 한국 전쟁 휴전.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동독 폭동 사태로 라브렌티 베리야가 실각 후 처형되고,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니키타 흐루쇼프 간 권력 투쟁 시작.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 경력 시작. *1954년 서유럽 연합 설립. 미국 연방 대법원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국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를 금지. 소련에서 최초의 원자력 발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 알제리 전쟁 시작.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시작. *1955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바르샤바 조약 기구 설립. 제1차 수단 내전 시작.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종결. 반물질이 최초로 인공적으로 생성됨. 중앙 조약 기구 설립. *1956년 수단과 튀니지 독립.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수립. 헝가리 혁명이 소련군에게 진압됨. 가말 압델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제2차 중동 전쟁 개전. 브라질리아 건설 시작. *1957년 스푸트니크 1호 발사로 우주 시대 시작. 가나 독립. 로마 조약으로 유럽 경제 공동체 설립. 해럴드 맥밀런이 영국 총리로 취임. 최초의 경구 피임약 처방. 말라야 연방 독립.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수립. 중화인민공화국 대기근 시작. 미국 항공우주국과 연방항공국 설립. 핵군축캠페인의 상징인 평화 기호가 최초로 사용됨. 광 디스크와 콤팩트 카세트 발명. 진먼 포격전. *1959년 쿠바 혁명.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미국의 주로 승격됨. 티베트 봉기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망명. 최초의 후천면역결핍증후군 발병 보고. 최초의 달의 뒷면 촬영. 리치 밸런스와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 세계 인구 30억 돌파.
200px 200px 200px 200px 200px 200px 200px 20세기 는 1901년 1월 1일부터 2000년 12월 31일까지의 기간이며, 제2천년기의 마지막 세기이다. 20세기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발생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가 두 진영으로 갈려 싸운 전쟁이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이외에도 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전쟁과 같이 이념이나 종교, 인종의 차이를 앞세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국제 사회는 국제법을 확립하고 상호 안보 공조와 경제 협력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유엔을 만들었지만,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세계는 이념에 따라 양분되어 냉전 체제를 유지하였고 두 진영의 대리전 성격을 띈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동안 맹위를 떨쳤던 서구 열강에 의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대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고비로 쇠락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수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여 신생독립국들이 세워졌다. 식민지의 독립은 인도와 같이 평화적으로 진행된 경우도 있었으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리비아 같은 국가들 처럼 독립전쟁을 치르고서야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어느 진영에도 가입하지 않는 비동맹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냉전의 양 진영에 대비되어 흔히 제3세계로 불렸다. 한국의 역사에서 20세기는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분단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은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8,800명 밖에 남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한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3·1 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맞서는 전민족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독립운동이 있었다. 해외에서는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하는 한편 각국을 상대로한 외교적 노력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수탈에 항거하여 각종 파업과 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거세지던 냉전의 영향력 아래 단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북의 두 정권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결국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큰 피해를 남기고 휴전을 맞았고, 이후 두 국가는 체제 경쟁을 지속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쟁이후 김일성주의를 표방하고 이후 유일체제라고 불리는 주체사상을 바탕으로한 일당 독재 국가를 이루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장기 독재에 저항한 4·19 혁명이 일어났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 의한 군사 독재가 이루어졌고, 박정희의 사망 이후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에 의해 군사 독재가 지속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87년 개정 헌법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는 현행 헌법이기도 한다.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이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한편, 20세기 동안 과학, 기술은 전분야에 걸쳐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에 그레고어 멘델에 의해 발견된 멘델의 유전법칙은 20세기 초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현대 유전학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유전 물질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어 1928년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고, Downie AW (1972). "Pneumococcal transformation—a backward view. Fourth Griffith Memorial Lecture". J. Gen. Microbiol. 73 (1) 1–11. PMID 4143929. 1952년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여 DNA가 유전물질임을 증명하였으며,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혔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아인슈타인인 자신의 발견에 대해 “상대성 이론은 돌파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심각하고 깊은 옛 이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 새로운 이론은 일관성과 간결함을 유지하면서 옛 이론의 모순을 강력히 해결한다.”고 자평하였다. 로켓 공학과 무선 통신의 발달, 그리고 컴퓨터의 출현에 힘입어 인류는 처음으로 우주 공간으로 나갈 수 있었다. 1961년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1971년에는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이 달에 착륙하였다. 20세기 화학 분야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인공적인 고분자화합물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것을 꼽을 수 있다. 20세기 레오 베이클랜드가 페놀과 포름알데히드를 반응시켜 베이클라이트를 합성한 이후 다양한 플라스틱이 개발되어 생활 전반에 사용되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도구들이 등장하였다. 비행기, 냉장고, 라디오, 텔레비전, 인공위성, 이동통신, 컴퓨터, 휴대폰, 스마트폰 등 20세기와 발명품들은 오늘날에도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방송과 통신의 발달로 대중 매체가 크게 성장하였고, 이를 통해 대중음악이 세계적으로 동시에 유행하기도 하였다. 러일 전쟁(1904년~1905년) 발칸 전쟁(1912년~1913년)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 스페인 내전(1936년~1939년) 중일 전쟁(1937년~1945년) 제2차 세계 대전(1939년~1945년) * 겨울 전쟁(1939년~1940년) * 태평양 전쟁(1941년~1945년) *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1941년~1944년) 1949년 - 제1차 중동 전쟁 한국 전쟁(1950년~1953년) 알제리 독립 전쟁(1954년~1962년)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1954년) 베트남 전쟁 - (1955년~1975년) 1956년 - 제2차 중동 전쟁 1967년 - 제3차 중동 전쟁 1973년 - 제4차 중동 전쟁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년~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1988년) 르완다 분쟁(1990년~1994년) 1991년 - 걸프 전쟁 1902년 - 대서양 사이의 무선전신이 세계 최초로 이루어지다. 1904년 - 동력을 이용한 비행기 발명. 1929년 - 페니실린의 발견. 1931년 - 자기 테이프의 발명. 1940년 - 제트 엔진을 사용한 비행기가 첫 비행을 한다. 1947년 -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발명. 1956년 - 하드디스크가 세계 최초로 발명됨. 1957년 -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1968년 - 마우스 발명. 1969년 - 인간의 최초 달 착륙. 1976년 - 콤팩트디스크의 시조인 광디스크가 개발됨. 1981년 - 콤팩트디스크가 개발됨. 1983년 - 휴대 전화가 개발됨. 1989년 - 월드 와이드 웹이 개발됨. 1992년 - 리튬-이온 전지가 개발됨. 1993년 -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인 사이먼이 발명됨. 1998년 - 세계 최초의 복제 양 돌리의 탄생. 1999년 -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가 발명됨. 1905년 - 을사조약 체결. 1909년 - 청-일 간도협약 체결. 한국의 역사 중 (1910년~1947년) 1911년 - 신해 혁명. 일본, 불평등 조약 해소. 1913년 - 민중데모로 가쓰라 다로내각이 무너진다(다이쇼 정변). 1917년 - 소비에트 연방 성립. 1919년 - 베르사유 체제 출범. 1920년 - 국제연맹 성립. 1922년 -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집권. 파시즘 체제의 등장. 1928년 - 소련의 국민경제 5개년 계획. 1929년 - 대공황 1930년 -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 만주 사변 발발. 1932년 - 만주국 건국. 1933년 -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 일본, 국제연맹 탈퇴. 1937년 - 12·28 사건 1939년 - 독일, 폴란드 침공. 1940년 -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조약 체결. 1941년 - 진주만 공격. 1945년 - 유엔 성립. 1945년 - 대한민국 독립 냉전(1945년~1992년) * 1946년 - 국제연맹 해산. * 1947년 - 인도, 독립. 1948년 - 한반도 남북분단. 대한민국 정부 수립(제1공화국).제주 4·3 사건. 1952년 - 대한민국, 8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 9월 이승만 대통령 재선 . 1954년 - 대한민국, 6월 제 3대 국회의원 총선. 10월 사사오입 개헌. 1956년 -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 이승만과 장면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 1962년 - 10·20 혁명. 제2공화국의 출범. 1963년 - 5·16 군사정변. 베를린 장벽 건설. 1962년 - 쿠바 위기 1963년 - 제3공화국 출범. 1965년 - 한일기본조약.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 1967년 -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 재선. 1968년 - 프랑스 5월 혁명. 1969년 - 3선 개헌안 통과. 1971년 -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3선). 1972년 - 유신 체제 시작(제4공화국). 1973년 - 유류 파동 1977년 - 안와르 사다트, 이스라엘을 방문. 1979년 - 이란 회교도 혁명. 10·26 사태. 12·12 쿠데타. 1982년 - 광주 민주화운동. 1981년 - 제5공화국 출범. 1983년 -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1989년 - 7월 민주항쟁 1988년 - 제6공화국 출범. 1989년 - 톈안먼 사건. 철의 장막 철거 개시. 베를린 장벽 붕괴 및 동서독일 통일. 동구혁명(1989년~1990년) 1991년 - 소비에트 연방 붕괴. 1997년 - 대한민국, OECD 가입. 1999년 - 대한민국, IMF 구제 금융 신청. 고종(1852년 - 1919년) 순종(조선의 마지막 임금, 재위 1907년 - 1910년) 이승만(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48년 - 1960년) 김구(1876년 - 1949년) 김규식(1881년 - 1950년) 윤보선(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60년) 박정희(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60년 - 1979년) 최규하(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80년) 전두환(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80년 - 1987년) 노태우(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88년 - 1993년) 김영삼(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93년 - 1998년) 김대중(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 1998년 - 2003년) 김일성(1912년 - 1994년) 김정일(1942년 - 2011년) 이시영(대한민국의 부통령, 임기 1948년 - 1951년) 김성수(대한민국의 부통령, 임기 1951년 - 1952년) 장면(대한민국의 부통령, 임기 1956년 - 1960년) 프란츠 요제프 1세(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재위 1848년 - 1916년) 빌헬름 2세(3대 독일 황제, 재위 1888년 - 1918년) 선통제(부의)(청조 황제, 재위 1908년 - 1912년) 니콜라이 2세(러시아 황제, 재위 1894년 - 1917년) 쇼와 천황(일본 천황, 재위 1926년 - 1989년) 엘리자베스 2세(영국 여왕, 재위 1952년 - ) 교황 요한 23세(로마 교황, 재위 1958년 -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로마 교황, 재위 1963년 -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마 교황, 재위 1978년 - 2005년) 아돌프 히틀러(독일 총통, 재임 1934년 - 1945년)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재임 1928년 - 1943년) 네빌 체임벌린 (영국 수상, 재임 1937년 - 1940년) 윈스턴 처칠(영국 수상, 재임 1940년 - 1945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2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33년 - 1945년) 해리 S. 트루먼( 제33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45년 - 195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34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53년 - 1961년) 존 F. 케네디( 제35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61년 - 1963년) 리처드 닉슨( 제37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69년 - 1974년) 로날드 레이건( 제40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81년 - 1989년) 조지 H. W. 부시( 제41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89년 - 1993년) 빌 클린턴 ( 제42대 미국 대통령, 임기 1993년 - 2001년) 후안 페론(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호르헤 비델라(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레오폴드 갈티에리(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샤를 드 골(프랑스 대통령, 재임 1959년 - 1969년) 콘라트 아데나워(서독 연방 수상, 재임 1949년 - 1963년) 넬슨 만델라(남아프리카 대통령, 1994년 - 1999년) 블라디미르 레닌·Lenin(소련, 1917년 - 1922년) 이오시프 스탈린(소련 최고 지도자, 1922년 - 1953년) 니키타 흐루쇼프Khrushchev(소련 최고 지도자, 1953년 - 1964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 공산당 서기장, 재임 1985년 - 1991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유고슬라비아 수상·대통령, 재임 1945년 - 1980년) 자와할랄 네루-(인도 수상, 1947년 - 1964년) 쑨원(중화민국, 1912년 1월 - 1912년 4월) 마오쩌둥(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1921년 - 1976년) 장제스(중화민국 총통, 1927년 - 1949년;중화민국 총통, 재임 1950년 - 1975년) 덩샤오핑(중화인민공화국, 1981년 - 1989년) 호치민(베트남, 1945년 - 1969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말레이시아 수상, 1981년 - 2003년) 리콴유(싱가포르 수상, 재임 1959년 - 1990년) 체 게바라(아르헨티나 출신. 쿠바, 볼리비아 등) 루홀라 호메이니(이란 최고 지도자, 1979년 - 1989년) 사담 후세인(이라크 대통령, 재임 1979년 - 2003년) 오마르 봉고(가봉의 대통령) 도고 헤이하치로(1848년 - 193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1852년 - 1933년) 다카하시 고레키요(1854년 - 1936년) 하라 다카시(1856년 - 1921년) 사이토 마코토(1858년 - 1936년) 박영효(1861년 - 1939년) 니토베 이나조(1862년 - 1933년) 서재필(1864년 - 1951년) 윤치호(1864년 - 1945년) 네빌 체임벌린(1869년 - 1940년)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1869년 - 1948년) 박중양(1874년 - 1959년) 콘라트 아데나워(1876년 - 1967년) 이오시프 스탈린(1879년 - 1953년) 도고 시게노리(1882년 - 1950년) 베니토 무솔리니(1883년 - 1945년) 장제스(1887년 -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년 - 1975년) 장택상(1893년 - 1969년) 최창익(1896년 - 1957년) 김원봉(1898년 - 1958년) 윤치영(1898년 - 1996년) 김활란(1899년 - 1970년) 이케다 하야토(1899년 - 1965년) 박헌영(1900년 - 1956년) 사토 에이사쿠(1901년 - 1975년) 푸이(1906년 - 1967년) 정일권(1917년 - 1994년) 장준하(1918년 - 197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1918년 -) 마거릿 대처(1925년 - 2022년 ~ ) 유카와 히데키(1949년,노벨 물리학상 수상) 도모나가 신이치로(1965년,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병철 (삼성창업자) 정주영 (현대창업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Oren J. Turner에 의한 사진 1947년 알베르트·아인슈타인(물리학자, 상대성이론) 토머스 에디슨(발명가) 라이트 형제(비행기를 발명) 헨리 포드(포드 자동차를 발명) 존 폰 노이만(수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로켓 개발) 유리 가가린(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우주비행사) 박크민스타 풀러(건축가, 물리학자, 수학자) 모리타 아키오(소니 회장) 알란 케이 (컴퓨터 과학자, 교육자)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 루돌프 피르호 레이먼드 다트 윤일선 헬렌 켈러(미국) 마틴 루터 킹 주니어(미국) 제14대 달라이 라마(티베트) 테레사 수녀(인도) 루돌프 발렌티노(영화 배우) 파블로 피카소(화가) 살바도르 달리(화가) 앤디 워홀(미술가) 찰리 채플린(영화 감독·배우) 프란츠 카프카(소설가) 말틴·Heidegger(철학자) 나혜석(화가, 작가) 에른스트 윤가(소설가, 사상가) 월트 디즈니(레저) 아서 C 클락(소설가) 마릴린 먼로(영화 배우) 오드리 햅번(영화 배우) 제인 맨스필드(영화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가수·배우) 스티븐 스필버그(영화 감독) 제임스 카메론(영화 감독) 신성일(영화 배우) 미야자키 하야오(애니메이션 작가) 크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베르 아르노르트 시베르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송대관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안톤 베베룬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호아킨 로드리고 현제명 아람 하체트리안 안익태 존 케이지 칼하인츠 슈특크하우젠 홍난파 현인 루이 암스트롱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존 레넌(1940년 - 1980년) 폴 매카트니(1942년 - ) 존 윌리엄스(1932년 - ) 김광석(1964년 - 1996년) 베이브 루스(야구 선수) 아베베 비키라(마라톤 선수) 컬 루이스(육상 선수) 무하마드 알리(복서) 역도산(프로레슬링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축구 선수) 펠레(축구 선수) 마이클 조던(농구 선수) 아일톤 세나(카레이서) 잭 니크라스(골퍼) 아나스타샤 로마노바 영친왕 이우 영국의 웨일스 공작 부인 다이애나 알 카포네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2021 2022 2023 2024 2025 2026 2027 2028 2029 2030 2031 2032 2033 2034 2035 2036 2037 2038 2039 2040 2041 2042 2043 2044 2045 2046 2047 2048 2049 2050 2051 2052 2053 2054 2055 2056 2057 2058 2059 2060 2061 2062 2063 2064 2065 2066 2067 2068 2069 2070 2071 2072 2073 2074 2075 2076 2077 2078 2079 2080 2081 2082 2083 2084 2085 2086 2087 2088 2089 2090 2091 2092 2093 2094 2095 2096 2097 2098 2099 2100 2101 2102 2103 2104 2105 2106 2107 2108 2109 2110 2111 2112 2113 2114 2115 2116 2117 2118 2119 2120 2121 2122 2123 2124 2125 2126 2127 2128 2129 2130 2131 2132 2133 2134 2135 2136 2137 2138 2139 2140 2141 2142 2143 2144 2145 2146 2147 2148 2149 2150 2151 2152 2153 2154 2155 2156 2157 2158 2159 2160 2161 2162 2163 2164 2165 2166 2167 2168 2169 2170 2171 2172 2173 2174 2175 2176 2177 2178 2179 2180 2181 2182 2183 2184 2185 2186 2187 2188 2189 2190 2191 2192 2193 2194 2195 2196 2197 2198 2199 2200 2201 2202 2203 2204 2205 2206 2207 2208 2209 2210 2211 2212 2213 2214 2215 2216 2217 2218 2219 2220 2221 2222 2223 2224 2225 2226 2227 2228 2229 2230 2231 2232 2233 2234 2235 2236 2237 2238 2239 2240 2241 2242 2243 2244 2245 2246 2247 2248 2249 2250 2251 2252 2253 2254 2255 2256 2257 2258 2259 2260 2261 2262 2263 2264 2265 2266 2267 2268 2269 2270 2271 2272 2273 2274 2275 2276 2277 2278 2279 2280 2281 2282 2283 2284 2285 2286 2287 2288 2289 2290 2291 2292 2293 2294 2295 2296 2297 2298 2299 2300 2301 2302 2303 2304 2305 2306 2307 2308 2309 2310 2311 2312 2313 2314 2315 2316 2317 2318 2319 2320 2321 2322 2323 2324 2325 2326 2327 2328 2329 2330 2331 2332 2333 2334 2335 2336 2337 2338 2339 2340 2341 2342 2343 2344 2345 2346 2347 2348 2349 2350 2351 2352 2353 2354 2355 2356 2357 2358 2359 2360 2361 2362 2363 2364 2365 2366 2367 2368 2369 2370 2371 2372 2373 2374 2375 2376 2377 2378 2379 2380 2381 2382 2383 2384 2385 2386 2387 2388 2389 2390 2391 2392 2393 2394 2395 2396 2397 2398 2399 2400 2401 2402 2403 2404 2405 2406 2407 2408 2409 2410 2411 2412 2413 2414 2415 2416 2417 2418 2419 2420 2421 2422 2423 2424 2425 2426 2427 2428 2429 2430 2431 2432 2433 2434 2435 2436 ~ 계속만
실수을 수직선으로 나타낸 것 수학에서, 실수 (實數는 주로 실직선 위의 점 또는 십진법 전개로 표현되는 수 체계이다. 예를 들어, -1, 0, , e , π 등은 모두 실수이다. 실수에 대하여 사칙 연산(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을 실행할 수 있다. 실수는 크기 비교가 가능하며, 실직선에서 더 왼쪽에 있는 수가 더 오른쪽에 있는 수보다 작다. 특히, 실수는 0보다 큰 양수 · 0보다 작은 음수 · 0으로 분류된다. 또한, 실수는 정수의 비인 유리수와 그렇지 않은 무리수로도 분류되며, 정수 계수 다항식의 근인 대수적 수와 그렇지 않은 초월수로도 분류된다. 실직선은 복소 평면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실수는 허수와 함께 복소수를 이룬다. 공리적으로, 실수는 완비 순서체로 정의되며, 이는 동형 의미 아래 유일하다. 구성적으로, 실수는 유리수 코시 수열의 동치류 · 데데킨트 절단 · 십진법 전개의 동치류로서 구성된다. 실수의 완비성은 공집합이 아닌 실수 유계 집합이 항상 상한과 하한을 갖는다는 성질이다. 이는 유리수와 구별되는 중요한 성질이다. 실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다. 즉, 자연수 집합과 실수 집합은 둘다 무한 집합이나, 그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자연수 집합의 크기보다 크다. 연속체 가설은 자연수 집합보다 크며 실수 집합보다 작은 크기를 갖는 실수 부분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이다. 연속체 가설은 ZFC(즉, 선택 공리를 추가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으며, 연속체 가설을 만족하거나, 그 부정을 만족하는 ZFC의 모형이 모두 존재한다. 실수 체계 는 실수의 공리계를 통해 정의하거나, 구체적인 모형을 구성하여 정의할 수 있다. 실수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이다. 체를 이룬다. 즉, 덧셈과 곱셈이라고 불리는 두 이항 연산을 갖추며, 이들은 익숙한 규칙대로 작용한다. 순서체를 이룬다. 즉, 전순서를 갖추며, 이는 덧셈 및 곱셈과 호환된다. 완비적이다. 즉, 공집합이 아닌 실수 부분 집합이 상계를 갖는다면, 항상 상한을 갖는다. 마지막 완비성은 실수를 유리수와 구분짓는 성질이다. 이들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는 동형 의미 하에 유일하다. 실수는 다음과 같은 대상으로서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한 실수는 실수 공리계의 모형을 이룬다. 즉, 실수 공리계의 모든 공리들을 만족한다. 유리수 코시 수열의 "거리가 0으로 수렴"하는 동치 관계에 대한 동치류. 즉, 유리수의 표준 거리 공간에 대한 완비화이다. 유리수에 대한 데데킨트 절단. 십진법 전개의 동치류. 예를 들어, 1과 0.999...는 서로 동치이다. 실수 집합 위에는 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 ÷이 정의되어 있으며, 이들 중 덧셈과 곱셈은 교환 법칙, 결합 법칙, 분배 법칙을 만족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0과 1은 사칙 연산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과 그 반수 를 더하면 0이다. 즉, 0이 아닌 실수 과 그 역수 를 곱하면 1이다. 즉, 뺄셈과 나눗셈은 다음과 같이 덧셈과 곱셈으로 귀결된다. 양수( 0보다 큰 수) 밑, 실수 지수의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다. 실수에 대하여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실수의 완비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략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음수( 0보다 작은 수) 밑의 거듭제곱 역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유리수 지수에 한하며, 또한 이렇게 확장된 거듭제곱은 위의 연산 법칙을 비롯한 좋은 성질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실수들 사이에는 순서(즉, 크기 비교)가 존재한다. 두 실수 의 순서 의 직관은 실직선 위에서 가 더 왼쪽에, 가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다. 는 이거나 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실수의 순서는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이거나, 이거나, . 또한, 실수의 순서는 실수의 연산과 호환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양수 ()는 0보다 큰 실수를 뜻하며, 음수 ()는 0보다 작은 실수를 뜻한다. 위의 성질들에 따라, 모든 실수는 양수, 음수와 0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또한, 양수 곱하기 양수는 항상 양수이며, 양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음수이며, 음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양수이다. 특히, 임의의 실수의 제곱은 항상 음수가 아닌 실수이다. 구간은 특별한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주어진 두 실수 사이의 실수를 원소로 갖거나, 주어진 한 실수를 시작점으로 하는 반직선에 놓인 실수를 원소로 갖는다. 예를 들어, 임의의 에 대하여, 다음과 같다. 퇴화 구간은 구간과 비슷한 집합으로서, 두 끝점의 순서가 정상적인 구간의 반대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수들의 집합(예를 들어, 유리수 집합이나 실수 집합)의 모든 수들보다 작지 않은 수를 그 집합의 상계라고 한다. 이는 보통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면 여럿이 같이 존재한다. 수들의 집합에 상계들이 존재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가 존재한다면, 이를 상한이라고 한다. 실수 집합 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공집합이 아닌 실수 부분 집합 에 상계가 존재한다면, 상한 역시 존재한다. 이를 상한 공리이라고 한다. 상한 공리는 실수의 완비성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이다. 실수의 완비성은 실수의 가장 중요한 성질의 하나이다. 데데킨트 절단 ()을 통해 서술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실수 집합 의 두 부분 집합 의 쌍 이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를 의 데데킨트 절단 이라고 한다. 임의의 및 에 대하여, 는 최소 원소를 가지지 않는다. 이제, 실수의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 를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다. 실수 집합 의 데데킨트 절단 에 대하여, 는 항상 최소 원소를 가진다.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는 상한 공리와 서로 동치이다. 실수 집합은 아르키메데스 성질을 만족한다. 즉, 두 실수 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가 아무리 작고 가 아무리 크더라도, 를 충분히 많은 횟수 만큼 더하면, 를 초과한다. 즉, 실수 집합 위의 순서는 조밀 순서이다. 즉,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실수 에 대하여, 항상 그 사이에 또 다른 실수 가 존재한다. 실수 집합 위에는 표준적인 위상 공간 · 거리 공간 · 노름 공간 · 내적 공간 구조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주어진 두 실수 의 내적은 곱 이다. 주어진 실수 의 노름은 절댓값 이다. 주어진 두 실수 의 거리는 이다. 실수 집합 위의 표준적인 위상은 거리 위상이자 순서 위상이다. 실수 부분 집합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콤팩트 집합이다. 즉, 모든 열린 덮개가 유한 부분 덮개를 갖는다. 점렬 콤팩트 집합이다. 즉, 그 속의 모든 수열은 수렴 부분 수열을 갖는다. 극한점 콤팩트 집합이다. 즉, 모든 무한 부분 집합이 극한점을 갖는다. 유계 닫힌집합이다. 사실, 모든 유클리드 공간에 대하여, 위 네 조건은 서로 동치이며, 모든 거리 공간에 대하여, 앞에 세 조건은 서로 동치이다. 또한,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연결 공간이다. 경로 연결 공간이다. 호 연결 공간이다. 중간값 성질을 만족한다. 즉, 임의의 에 대하여, 이다. (퇴화 또는 비퇴화) 구간이다. 실수는 유리수와 무리수로 분류된다. 실수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는 유리수이다. 즉, 인 정수 및 이 존재한다. 는 유한 소수이거나, 무한 순환 소수이다. 즉, 다음을 만족시키는 및 가 존재한다. * 는 유한 연분수이다. 즉, 다음을 만족시키는 및 가 존재한다. * 예를 들어, 1/3 2.7182...와 π = 3.1415...는 무리수이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은 알레프 0이다. 달리 말해, 실수는 자연수 부분 집합과 일대일 대응한다. 이 둘 사이의 일대일 대응은 여러 가지 만들 수 있다. 실수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게오르크 칸토어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리수로부터 실수를 이론적으로 확장하여 그 성질을 규정짓게 된 것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게오르크 칸토어,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같은 수학자들의 공이 지대하였다. 허수 복소수 연분수 실해석학 분류:초등 수학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 약칭 한총련 )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학생운동단체이다. 표어는 1993년 창립시에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였으며 1995년에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로 변경하였다. 1992년를 마지막으로 전대협은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창립하였다. 기존의 각 대학교 총학생회장단의 협의체 수준이었던 전대협을 확대하여 전국 모든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까지를 대의원으로 하는 학생회 연합체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러나 한총련은 특유의 권위주의적 성향과 패권적 운동관으로 인해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한양대 출범식 사건으로 여러 학생운동그룹들과 상당수 학교들이 탈퇴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됐다. 당시 한총련을 탈퇴한 학생운동그룹들은 전국학생회협의회, 전국학생연대회의, 참대학 등의 독자적인 학생운동조직, 학생회협의체를 건설하였다. 한총련이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되었고 한총련에 가입한 단과대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면 자동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위반자가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 1997년 191명이 구속되어 전원 기소되었고 1998년 127명 구속되어 121명 기소, 1999년 162명 구속 149명 기소, 2000년 101명 구속 95명 기소, 2001년8월까지 13명 구속 4명 기소로 전체 594명이 구속되어 560명이 재판을 받았다.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판결이 나서 집중적으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기소한 건수가 늘었던 김대중 정부에서 전체 국가보안법위반 구속자의 53%가 한총련 대의원이다. 구체적으로 한총련 제5기(1997년) 사법처리 대상자 388명 중에 206명이 구속, 160명이 불구속되어 351명 구공판 기소, 115명 기소유예,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 22명이었으며 1998년 제6기는 301명 중에 145명이 구속되고 118명이 불구속 6명 내사종결되어 구공판기소 252명 기소유예 11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32명이며 7기(1999년)는 291명 중에 97명이 구속되고 48명이 불구속 16명 내사종결이며 구공판 137명 기소유예 8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130명으로 5~7기 전체 사법처리 대상자 980명 가운데 448명이 구속되고 740명이 재판을 받았다. 2000년 중반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었으며 2013년 기준으로는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2000년대 초반 한총련 소속 일부 세력이 독자적인 한대련을 만들고, 이후 몇년간 두조직이 함께 존재하였다. 1993년 기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약칭 전대협)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전북대학교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갖고 고려대학교에서 8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출범했다. 그러나 한총련은 1996년 여름, 연세대학교에서의 8.15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력 시위로 인하여, 정부의 대대적 제재 및 폭력 시위에 대한 학생들의 부정적 시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대법원에 의해 4기 한총련은 이적단체 로 규정되고, 학생들의 무관심이 증대되면서 한총련의 활동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또한 이후의 5기, 6기 한총련도 대법원에 의하여 이적단체로 규정되었고 10기 한총련(2002년, 서울산업대학교(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에서 출범식 개최) 또한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적(利敵)단체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선전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단체를 말한다. 2008년 3월 한총련은 신임 의장 선거에서 후보자를 찾지 못해 출범 16년 만에 처음으로 의장 선출에 실패했다. 한총련은 28일 한양대 캠퍼스에서 한총련 소속 전국 40여 개 대학교 총학생회장과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등 대의원 60여 명을 비롯해 1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긴급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김현웅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16기 한총련 투쟁본부장 으로 추대했다. 2007년 기준으로 한총련의 대표자인 의장과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 상임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 상설의결기구인 중앙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또한 집행기구로는 중앙집행위원회와 그 산하에 중앙집행국, 중앙정책위원회, 중앙조직위원회, 연대사업위원회, 사무처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특별기구로는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와 조국통일위원회를 설치하여, 학내문제와 조국통일문제를 가장 주된 과제로 밝히고 있다. 지역별로는 서울(서총련), 강원(강총련), 경기인천(경인총련), 충청(충청총련), 광주전남(남총련), 전북(전북총련), 대구경북(대경총련), 부산경남(부경총련)으로 지역별 총학생회 연합이 있으며 각 지역총련별로 지구를 둔다. 제주(제총협)지구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지역총련과 동격인 특별지구로 한다. 1987년 8월 `전남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를 계승해 출범한 단체로 1993년에 전남.광주지역 22개 대학이 가입했으며 5공화국,6공화국 청산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5.18 진상규명 및 미군 철수와 함께 북한의 핵사찰반대, 고려연방제 채택 등을 주장하는 『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남총련)은 1993년 11월 2일과 3일 광주 미문화원과 안기부 목포출장소 기습시위를 주도하는 등 1993년에 검찰청과 경찰청, 미국 관련시설,정당 당사 등을 100여차례 기습 또는 항의 방문했으며 화염병과 쇠파이프, 돌 등을 동원한 시위로 중상자 36명을 포함한 경찰관 413명이 부상을 입고 경찰차량 10대를 파손시키기도 하여 정부당국으로부터 「과격폭력집단」으로 규정받고 있다. `자주.민주.통일의 실현 `반미 자주화 외세배격 `민중생존권 쟁취 를 3대 투쟁목표로 내걸고 있는 남총련 (의장 오창규)은 2백∼1천명 단위로 연인원 2만6천여명이 54 차례에 걸쳐 가두 시위를 벌인 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 산하 지역 단체 중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를 벌여 운동권내에서 대정부 투쟁의 선봉대다. 남총련 소속 학생은 1000여명인데 시위 때 마다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 진압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극렬 선봉대원이 600여명에 이른다고 경찰은 밝혔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金在容한양대총학생회장)은 1993년 5월 29일 오전8시10분부터 고려대 학생회관 1층 생활도서관에서 제1기 출범식 행사의 하나로 마련한 북한및 해외 학생대표들과 국제전화를 통해 「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金在容한총련의장 등 남측본부 의장단 11명은 서울에서, 허창조 조선학생위원장 등 6명의 북측 본부 의장단은 중국 북경 연경호텔에서, 김창오 재일한국청년동맹위원장 등 해외본부 의장단 6명은 일본 동경에서 국제전화로 회의를 열고 스피커를 통해 공개적으로 2시간여 동안 통일방안과 제3차 청년학생통일축전 등에 대해 논의했다. 1993년 3월초 북한에 귀환한 리인모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사무총장인 임민식이 북경에서 대독한 연대사에서 "나는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다. 우리 모두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회의를 마친 뒤 남.북.해외 본부 공동의장단은 한반도 평화정착, 8.15 범민족회담 성사, 6.12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개최, 범청학련 연대강화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등의 공동 결의뮨울 채택했다. 대검 공안부(부장 최환)는 1993년 6월 13일 "그동안 한총련이 주도한 대규모 옥외집회에 대해서도 평화시위를 조건으로 개최를 허용해왔으나 한총련측이 그동안 두차례나 당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법적인 폭력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떠한 형태의 집회개최도 허용치 않기로 했다"는 이유로 김춘도 순경 사망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주관하는 옥외집회를 일체 금지했다. 학생대중단체의 분화가 잇따르고, 다양한 의견그룹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북미평화협정체결, 6·15 남북 공동선언 이행, 학원자주화 등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등과 연대하고 있다. 또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가맹단체이다. 전에는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을 한총련 의장이 겸하였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력사태다.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광복절을 기념해 북한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2명의 학생을 남측 대표로 참가시켰다. 또 두 학생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 판문점으로 행진하는 것과 연세대에서의 집회를 열기로 기획했다. 그래서 전국의 한총련 소속 학생들이 서울로 모였지만 정부는 집회를 완전 봉쇄하려 했다. 당시 연세대에는 2만 명 정도의 학생이 모였고, 정부는 서울·경기 지역의 전경을 동원해 연세대를 포위했다. 이때 연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들이 한양대, 홍익대, 동국대 등을 거점으로 삼아, 연세대에 포위된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수대를 만들어 신촌 등 연세대 주변지역에서 전경과 산발적인 싸움을 벌였다. 이후 경찰은 연세대에 진입해 학생조직을 검거하려는 당초의 시도가 실패하자 백골단을 투입해 연세대 인근에서 산발적으로 돌격하던 사수대를 제압해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어 전기, 수도, 식량 등을 차단했다. 연세대에 갇힌 2만 여명의 학생은 5일 동안 농성을 하며 버텼다. 학생들은 이과대학 입구와 생활관 각 층마다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농성을 했지만 정부는 헬리콥터를 동원해 학생들이 머문 층의 창문으로 최루탄을 살포해 제압했다. 집회와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연행됐고, 연세대 교내 시설은 크게 파손됐다. 이 같은 학교 분위기로 인해 연세대와 고려대가 해마다 치루던 정기전은 연세대가 고려대에 양해를 구해 열리지 않았다. 그해 열린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는 계기가 됐다. 창원지법 형사1부(재판장 안영율 부장판사)는 한총련이 제작한 이적표현물을 소지,배포하고 화염병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뒤 검찰이 정한 한총련 탈퇴시한을 지키지 않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추가 기소된 인제대 총학생회장 김진영씨(26·법학4)에 대해 『한총련의 이적성 여부에는 아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재판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명확하게 규정한다』라고 판단하면서 징역 2년6월에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했다 전국 법원 가운데 처음으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대법원(주심 대법관 이임수)은 1998년 7월 30일 한총련 5기 의장 강위원에 대한 상고심을 기각함으로써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확정하였다. . 2000년 대법원에 의해 제6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적화통일노선에 부합하는 폭력혁명노선을 채택함으로써 그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며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서 국가보안법 제7조가 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적 단체로 규정되었다. 그 후 2004년 대법원은 재차 10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또한 그 강령 및 규약의 일부 변경하였으나 그 사상과 투쟁목표에 있어서 종전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없어, 그 지향하는 노선이 반국가단체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노선과 그 궤를 같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거나 적어도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이적단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한총련과 전대협을 이적단체로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재야와 학생운동계에서 반발, 논란이 진행 중에 있다. 1998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 소속 대학 학생대표들은 선출되는 순간 수배자가 되어 길게는 7년까지 수배생활을 했다. 한총련 대의원 구속자는 2000년 71명, 2001년 72명, 2002년 90명이지만, 이중 실형선고를 받은 이는 2000년 1명, 2001년 3명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 출범을 전후하여 한총련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 선고를 받은 대의원 등에 대한 사면,복권 논의가 이루어졌다. 1997년 한총련 활동을 한 혐의로 인천지검에 의해 구속기소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9년 8월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되고 2000년 8월15일 잔형 집행을 면제하는 특별사면과 함께 복권 조처된 정모(30)씨에 대해 인천지검은 이어 8월22일 집행과로 정씨의 사면 사실을 통지했으나, 집행과에서 이의 기록을 누락하면서 2001년 10월 별개의 사건으로 서울지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을 때 인천지검은 서울지검에 정씨의 잔형 집행이 면제된 사실을 모르고 그 집행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정씨는 2001년 12월 당시 사건과 관련해 보석 허가를 받고도 남은 형기 79일을 수감되고난 이후인 2003년 3월 6일 형기 종료로 출소했다. 1990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한 대한민국에 대해 규약 감시기구인 유엔 인권이사회가 2005년 7월 열린 제84차 위원회에서 “한총련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한총련 대의원을 처벌하는 것은 국제인권규약 제22조가 정한 ‘결사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이는 규약 제18조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권리’에도 위배된다 한총련에 가입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에 대해 어떤 실제적인 위협이 있는지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결정했다. 인권이사회는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를 개정하고, △피해자에게 적절한 보상과 구제를 하고, △비슷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인권이사회는 1992년과 99년에도 ‘국가보안법을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2002년 8월 이정은(31·9기 한총련 대의원) 전 건국대 부총학생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김승교 변호사는 한총련의 이적단체 규정을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소했으며, 이씨는 200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한총련 관련자 사법처리 현황 1997년 제5기 한총련 사법처리 대상자 388명 중에서 구속 206명 불구속 160명으로 구공판 기소 351명 기소유예 15명 미검자 22명이다. 1998년 제6기 한총련 사법처리 대상자 301명 중에서 구속 145명 불구속 118명 내사종결 6명이었으며 구공판 기소 252명 기소유예 11명 미검자 32명이다. 1999년 1월 ~ 8월 제7기 한총련 사법처리 대상자 291명 중에서 구속 97명 불구속 48명 내사종결 16명이었으며 구공판 기소 137명 기소유예 8명 미검자 130명이다. 1997년 6월 한양대학교에서 발생한 이석 치사 사건은 선반기능공 이석이 동료 학생 길소연, 권순욱, 이호준, 정용욱 등에 의해 구타당한 사건이다. 폭행치사 혐의로 길소연, 권순욱, 이호준, 정용욱 등이 구속되었다. 이호준은 5년, 정용욱은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중 길소연과 이호준은 1999년 2월 특별사면되어 가석방되었다.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삼민투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한총련 공식 홈페이지 (2011년 8월 26일부터 방송통신위원회 명령으로 폐쇄) 분류:1993년 설립 분류:대한민국의 학생 단체 분류: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 단체 분류:대한민국 법령 지정 이적단체 분류:대한민국의 정치 분류:사회주의 분류:대한민국 제6공화국 분류:김영삼 정부 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
2000년 이후의 조선일보 메인타이틀 《 조선일보 》(朝鮮日報는 대한민국의 신문 출판 기업인 조선일보사 (朝鮮日報社가 대한민국에서 발행하는 조간 일간지이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다. 조선일보사의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 있다. 현재 대표이사는 방상훈 사장과 홍준호 부사장이다. 대한민국 신문 구독률 36.8% 가운데 조선일보는 11.9%를 차지하였으며, 구독점유율은 24% ~ 30% 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신문 구독 여부에 관계없이 지난 일주일간 어떤 신문의 기사를 봤는지를 알아보는 주간열독률 조사에서 조선일보의 열독률은 16.2%였다. 2009년 한국ABC협회가 실시한 집계에서 발행부수 1,844,783부로 집계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유료 발행 부수는 1,353,159부였다. 2011년 7월부터 가판 가격이 인상되어 현재 부당 800원이나 월 구독료는 15,000원으로 변함없다. 한국ABC협회가 2013년 발행·유료 부수 현황을 공개한 자료에서 조선일보는 177만부의 공식 발행 부수를 가진 국내 최대 신문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료부수 100만부가 넘는 신문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일보 는 발행 부수 176만9310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중앙일보(129만2498부)·동아일보(106만760부)·매일경제(83만6316부)·한국경제신문(51만7193부) 등의 순이었다. 실제 판매량을 집계하는 유료 부수에서도 조선일보 가 1위(132만5555부)였다. 2·3위인 중앙일보 , 동아일보 와는 각각 41만, 57만부 격차였다. 2014년 시사저널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설문조사의 언론 매체 영향력 및 신뢰도·열독률 조사 결과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순위 조사에서 KBS와 조선일보의 양강 체제가 굳건하였다. KBS 59.6%와 조선일보 51.2%로 네이버 32.1%, MBC 22.0%, 중앙일보 15.9% 등 다른 매체들을 압도했다. ‘가장 열독하는 언론 매체’ 조사에서는 한겨레(22.4%)와 조선일보(21.8%)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고, KBS(20.0%)가 그 뒤를 이었다. 한국갤럽이 2013년 9월 30일부터 2주간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집에서 유료로 정기구독하는 신문 을 기준으로 조사한 가구 구독률에서 조선일보는 11.9%로 압도적 1위였다. 2009년 "시사인"이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어느 매체를 가장 불신하느냐는 질문에는 중복응답을 기준으로 할 때 조선일보의 응답률이 20%에서 크게 늘어 34.2%를 차지하여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제치고 1위로 나타났다. 또한 현직 기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로는 한겨레가 15.4%, MBC 14.3%, KBS 11.2%, 경향신문 8.7%, 한국일보 4.0%에 이어서 조선일보는 2.4%를 차지하였다. 한편, 조선일보를 비롯한 중앙일보, 동아일보 지국의 98%가 신문고시를 위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2년과 2003년 ABC협회의 조사에서 발행부수중 5만 6,000여부가 부풀려져 175만 6,193부로 수치를 조작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조선일보 복간을 축하, 김구의 친필휘호1920년 3월 5일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 해 4월 28일자 에 실린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 당했고 같은 해 8월 15일에 대정실업친목회가 약속했던 자본금 불입을 하지 못해서 대정실업친목회 부회장이었던 초대 사장 조진태가 물러나고 변호사 출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한 논설을 실어서 1주간 정간을 당했다. 같은 해 9월 5일자에 실린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 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이러한 항일논조와는 달리 1921년 4월 8일 조선일보 판권을 인수한 송병준은 친일성향이었다. 3대 사장은 남궁훈이었다. 그러나 이후 1924년 9월 13일에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반일 민족주의 신문으로 변화하여 4대 사장인 이상재가 취임한 후에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문화보전에 힘썼다. 5대 사장은 신석우였다. 하지만 1931년에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6대 사장 안재홍이 연루되어 구속되고, 그 후 7대 사장 유진태 8대 사장 조만식을 거쳐 9대 사장 방응모가 취임한 후 한일 학생의 교육차별을 비판하는 논설 교육필화 로 인해 기사가 압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었지만 주로 친일 관련 찬양 논조로 변경되었다. 다만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부사장이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민족개량주의 성향을 띄었지만 1936년부터는 다시 친일 성향을 띄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사설 과 신문내용을 여러차례 보냈고, 일왕을 찬양하는 사설도 실었으며, 그 외에도 일제 황군 응원, 일장기 침략 전쟁 미화 광고 도 여러차례 보냈다. 그 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에 의해 발간을 중단하였었고, 그 이후 사주였던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창간하여 친일 행위를 계속했다. 조광에서도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의 지원하에 속간되었다.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 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사주인 방응모의 한국독립당 입당과 반탁운동 가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는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후 1948년 당시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에서 국군과 경찰을 옹호 했다. 이후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이승만 정권의 출범을 지지했지만 1948년부터 1950년, 즉 극초반기에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강력처벌과 처단을 주장했고,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을 때 그 법의 남용소지가 상당히 크다고 비판을 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에게 조선일보가 넘어가면서 한때 조선일보는 인민군 기관지로 전락했지만 그 이후 한국전쟁 이슈들을 상당히 많이 다뤘고 1951년 이후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게 된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다루지 않았으며 발췌개헌과 사사오입을 거치면서 조선일보는 1952년부터 1954년까지의 기간을 거치면서 보수색이 더더욱 강해져서 이승만 정부를 계속 지지하게 된다. 그 이후 조선일보는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이승만 정권의 친위 언론이 되어서 부산정치파동 등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 않았고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행위를 다루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을 계속 지지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진보당 사건, 진공관 구입 밀수출 사건,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금정산 공비 사건,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공안정국에는 반공주의 기준과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는 수준으로 기사를 썼다. 또 이 당시 금성사 설립 기사와 삼성 관련 기사를 상당히 많이 썼다. 또 능의선 기공식도 상당히 많이 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한글학회의 > 완간을 보도했고 가짜 이강석 사건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1960년에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그 이후 다시 이승만 정권을 맹공격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제2공화국 시기, 장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으나 1960년 당시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원노조 운동 탄압과 노동운동 탄압에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1961년 당시, 이 때 반통일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을 지지함과 동시에 1961년부터 1962년까지 5.16 군사정변을 지지 하는 신문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그 당시 공안사건들이던 민족일보 사건, 사대당 사건, 교원노조 사건, 유족회 사건 등에 대해 반공주의적 기준과 박정희 군정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또 이 당시 삼성물산 설립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문화방송, 한국방송 설립 기사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군사원호청 발족 기사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립 기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발족 기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발족 기사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다시 반정부적인 성향으로 돌아섰는데 이후 최석채 주필이 재직하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조선일보는 상당히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와 노동운동 세력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강행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미법도 주민 간첩단 사건, 제1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 사건, 분지 필화사건, 언론계 침투 무전 간첩단 사건, 경향신문 간첩사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의 사법처리 과정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삼척군 해안가 간첩 사건, 군내 반정부 음모사건, 진장언 하사 간첩사건, 송추 간첩사건 같은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반공주의적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서도 삼성을 상당히 비판하는 논조로 보도를 했다. 그리고 한국전력, 중소기업은행 설립을 호의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부터는 조금씩 다시 박정희 정부에 우호적인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박정희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고 이 시기 제2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영호남·서해안 무전 고정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언론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가게 되고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같은 공안정국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또다시 보수언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969년,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 이후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성향으로 완전히 돌아서는데 당시 유럽 간첩단 사건과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3선 개헌을 지지하는 보도 또한 여러 차례 내보냈다. 또 그 당시 대한항공 민영화 기사, 삼성전자 설립 기사, 현대자동차 설립 기사, MBC 개국, 일간스포츠 창간, 진주 남강댐 준공도 여러차례 보도했다. 1970년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기사, 사설들을 여러차례 내보냈으며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의 준공 기사와 정부중앙청사 준공 기사, 병무청 발족 기사, 남산1호터널 개통, MBC 뉴스데스크 첫 방송, 100원 주화 사용 기사 또한 여러차례 내보냈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지지하는 사설과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한 당시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 KAL기 납북미수 사건, 남파간첩 백귀남 사건 등 공안정국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실미도 사건과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일보는 이를 정부의 입장에서 보도했다. 또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2년에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서자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을 적극 찬양하고 지지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유신 체제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에서는 포항제철 설립,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남해고속도로 개통, 호남고속도로 개통, 삼성중공업 설립, 강남-여의도 개발, 각종 고층건물 건설, 대우중공업 설립 등을 상당히 보도했고 정치 면에서는 민주공화당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고 10월 유신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다. 또한 1973년 당시 발생한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때도 중앙정보부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썼으며 당시 북제주도 우도 무장 침투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귀화 간첩 사건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후 전남대 불온 삐라 살포사건,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 고려대 NH회 사건, 서울대 공대 조교수 간첩사건, 나쓰야 간첩사건, 김장현 간첩사건, 김철우 조총련계 간첩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 개장과 현대중공업 설립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유신체제 당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연이어 발생한 여간첩 채수정 사건, 대전·전주 고정간첩단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1,2호 위반 사건, 김영작 간첩사건, 김승효 간첩사건, 부산·경남 거점 고정간첩단 사건, 재일동포 진두현 간첩단 사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재일동포 김달남 간첩사건, 재일동포 유정식 간첩사건, 학원침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귀화 일본인 간첩단 사건, 박복순 남파 간첩단 사건, 겨울공화국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유신체제 당시의 공안정국 확성기 노릇을 했다. 그리고 1975년 당시에는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준공 기사와 학도 호국단 창설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 민방위대 창설과 부처님 오신 날, 어린이날 공휴일 제정, 영동고속도로 준공 등을 기사로 내보냈다. 그 뒤 1976년에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한민통 간첩사건 또한 집중적으로 보도해서 공안정국의 확성기 노릇을 계속했다. 그리고 연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보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과 문화 면에서 신용보증기금 설립 기사와 용인자연농원 개장, 반월 신도시 건설, KBS 여의도 사옥 설립, 태권V 개봉, 아이미 개발 등에 대한 기사도 여러차례 보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최은희 납북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으며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자연보호헌장 선포 등의 기사도 내보냈다. 또한 1979년에는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 재건 음모 사건, 부산·삼천포 고정 간첩단 사건 등을 여러차례 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10.26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특종 보도를 많이 했다. 1972년 3월 5일 52주년 기념호를 통해 독자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공식 선언하고, 1974년에는 미국 ASI의 조사 결과 정기구독자 비율에서 1위를 차지했다. 조선일보사는 1968년에 《주간조선》을, 1980년에 《월간조선》을 각각 발간하였고 1991년 《소년조선일보》를 창간하였다. 1999년 3월 2일에는 전면 가로쓰기 체제를 도입했다. 1995년 (주)디지틀조선일보를 설립해 인터넷 서비스를 강화하여 2008년 3월 5일부터는 조선일보 지면을 PC상에서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아이리더’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비난하는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 1920년 6월 조선일보 논설 ---- 한국어는, 한글로 표기되고 있다. 2월 14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신간회 창립 모습. 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를 모체로 조진태사장으로 시작하였으나, 자금력부족으로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1924년 남궁훈은 민족주의자였던 신석우가 인수해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 받던 이상재를 추대할 때까지 사장으로 재임한다 1924년 이 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계속적인 경영 악화로 조만식을 거쳐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 후 보수적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사를 주도하면서, 보수주의 관점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일제시대 극초기 조선일보에는 다양한 경력과 능력의 소유자들이 집결했다.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비롯해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들과 활동가들이 어울려 민족의 정신적 정부 를 자임했다.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남궁훈,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은 민족지도자들이었다.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서 일제를 규탄하고 총독 암살을 계획했던 독립운동가 방한민(方漢旻), 일제의 조선인 학살 현장에 달려가 목숨걸고 취재한 이석, 한홍정 등은 펜으로 일제의 총칼에 직접 맞선 행동파였다. 독일 유학 후 혁명의 모스크바로 파견된 김준연,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에서 화려한 학력을 쌓은 이관용, 미국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훈구, 그리고 중국 내전 현장을 누빈 이상철, 홍양명, 홍종인 등은 세계 정세와 선진 문물을 알리는 전령사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친일 신문으로 변질되었다. 조선일보사는 일간지 외에도 주간지 주간조선 , 스포츠지인 스포츠조선 , 관광 숙박시설에 대한 잡지 월간 산 , 취미 문화에 관한 잡지 월간낚시 등의 시사지와 잡지를 발행한다. 자회사로는 디지틀조선 , 월간조선 , 조선에듀케이션 , 헬스조선 등이 있으며 이 중 디지틀조선 은 코스닥에 상장하였고, 2004년부터 연간 80억 정도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1931년부터 소년조선일보 를 발행하고 있으며, 일반단행본과 백과사전들을 편집하는 출판사업도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출판한 단행본으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1998년)나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장애인 배형진씨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형진아》등이 있다. 또한 온라인버전 조선닷컴이외에 영어판, 일본어판, 중국어판 온라인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자회사 조선일보 일본어판 (구 조선일보JNS)에서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7년에 비즈니스앤을 개국하고, 2008년 11월에는 방송기자와 피디를 모집, 2008년 2월에는 대구방송, KNN과 함께 "아워 아시아"를 제작, 배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일보는 종합편성방송 심사에서 2위로 통과한 TV조선 을 소유하고 있으며, TV조선과 조선일보는 보수적 논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0년 조선일보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그 관계사를 아우르는 미디어그룹인 조선미디어 를 출범시켰다. 이외에도 주간조선 월간조선 등을 제작하는 조선뉴스프레스 라는 자회사가 있다. 한국신문협회는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를 2014년 한국신문상 뉴스취재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인 용기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며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조선일보를 높이 평가했다. 요덕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 강철환 북한전문기자가 있다. 유근일 1993년 2월 13일 ~ 현재 윤평중 2013년 4월 9일 ~ 현재 조용헌 2004년 9월 1일 ~ 현재 김대식 2012년 12월 8일 ~ 현재 최재천 1999년 1월 27일 ~ 현재 김정운 2017년 6월 24일 ~ 현재 정민 2009년 4월 30일 ~ 현재 서지문 2016년 6월 21일 김명환 1993년 5월 12일 ~ 현재 이한상 2007년 6월 18일 ~ 현재 백영옥 2006년 11월 8일 ~ 현재 팀 알퍼 2016년 1월 26일 ~ 현재 Ilbo Building.jpg contrast (5521514833).jpg 신문 언론기관 TV조선 조선일보 명조체 리빙포인트 월간조선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연세대학교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조진태 신석우 이상재 안재홍 안병훈 조만식 신간회 김구 방응모 방일영 방우영 방상훈 조갑제 선우휘 주간조선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조완구 박관수 김대중 박홍 이도형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남궁훈 방한민 조선일보 홈페이지 조선일보 모바일 홈페이지 조선일보사 분류:일제 강점기의 신문 분류:항일 매체 분류:친일 매체 분류:한국어 신문 분류:대한민국의 신문 분류:1920년 창간 분류:대한민국의 방송채널사용사업자
스칼라 ()란 크기와 방향을 가지는 벡터에 대비하는 개념으로, 크기만 있고 방향을 가지지 않는 양을 말한다. 예를 들면 속도가 방향도 포함한 벡터인데 비해, 그 절댓값인 속력은 방향을 가지지 않는 스칼라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칼라는 벡터를 정의하기 위한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스칼라의 정의는 N차원 공간에서 N의 0승개의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물리량이다. 그러므로 좌표계가 변환되어도 그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양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속도 벡터가 두 개의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x축 방향으로 100 km/h, y축 방향으로 0 km/h) 각각의 성분은 크기만을 가지고 있지만 스칼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도를 나타내기 위한 좌표계가 바뀌면 각각의 성분도 바뀌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x 축 방향으로 80 km/h, y 축 방향으로 60 km/h 라는 식으로). 변함에 따라 벡터의 각 성분은 바뀐다. 그러나 벡터의 크기는 스칼라이고 좌표계가 변해도 그 값은 불변이다. 이 그림에서 (x,y) 로 표현되는 좌표계에서 굵은 선으로 표시한 벡터의 성분은 (5,0)이지만, 벡터 자체가 변하지 않음에도 좌표계가 (x , y )으로 바뀌었을 때 각 성분은 (4,3)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두 좌표계에서 벡터의 크기는 로 불변이고 따라서 스칼라이다. 하지만 막대의 길이가 1 m이면 어느 좌표계에서 재어도 1 m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막대의 길이는 스칼라이다(단 상대론적으로 움직이는 좌표계는 논외로 한다). 수학에서도 스칼라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전산학에서는 스칼라를 단순히 하나의 숫자 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한다. 스칼라( scalar )라는 말은 사다리 를 뜻하는 라틴어 scala의 형용사형인 scalaris에서 따온 것이다. 이 용어를 수학에서 처음으로 쓴 사람은 프랑수아 비에트로, 그의 저서 《해석학입문 (In artem analyticem isagoge) (1591년)》에 쓰였다. 한편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영어에서 이를 처음 쓴 사람은 윌리엄 로언 해밀턴으로, 1846년에 사원수의 실수부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면서 사용하였다. 해밀턴의 용례는 사원수 표기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회전을 하나의 스칼라(사원수의 실수부)로 표현하고 벡터를 나머지 세개의 허수부로 표현하는 것이다. 스칼라의 다른 예로는 질량, 부피, 온도, 이동 거리 등이 있다. 스칼라곱 의사스칼라 텐서 스칼라웨이브 스칼라파 *http://mathworld.wolfram.com/Vector.html *http://mathworld.wolfram.com/Scalar.html 분류:선형대수학 분류:해석기하학
수학에서, 자연수 (自然數는 수를 셀 때나 순서를 매길 때 사용되는 수이다. 양의 정수 (陽-整數 1, 2, 3, ...로 정의되거나, 음이 아닌 정수 (陰-整數 0, 1, 2, 3, ...로 정의된다. 범자연수 (汎自然數, 라는 용어는 첫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음이 아닌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이에 대응하는 문화어와 영어는 둘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자연수의 집합은 대문자 N 을 써서 표기하며, 보통 칠판 볼드체 ℕ를 사용한다. 약수 관계나 소수 분포를 비롯한 자연수의 성질들은 수론의 연구 대상이며, 분할이나 계수를 비롯한 자연수의 문제들은 조합론의 연구 대상이다. 자연수는 많은 연산에 대하여 닫혀있지 않다. 정수는 자연수를 뺄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하여 얻는 수 체계이며, 유리수는 자연수를 추가로 나눗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수 체계이다. 실수는 추가로 코시 수열의 극한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며, 복소수는 추가로 다항식의 근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유한하지만, 무한 집합을 이룬다. 자연수의 집합은 "가장 작은 크기"의 무한 집합이며, 자연수와 크기가 같은 집합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자연수가 만족시켜야 하는 일련의 공리들을 제시하여 자연수를 일종의 무정의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수의 공리들이 이루는 체계 가운데 가장 자주 사용되는 하나는 페아노 공리계이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이론에 해당된다. 자연수를 특별한 집합으로서 간주하여 다룰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보통 자연수의 집합은 최소 재귀 집합으로 정의된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모형에 해당된다. 자연수의 수를 세는 역할을 일반화하면 기수의 개념을 얻으며, 자연수의 순서를 매기는 기능을 일반화하면 순서수의 개념을 얻는다. 자연수의 집합의 대수적 성질을 일반화하면 반환의 개념을 얻는다. 가장 통용되는 자연수 이론인 페아노 공리계는 상수 및 함수 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리들로 이루어진 2차 논리 이론 이다. 임의의 에 대하여, (는 단사 함수) 임의의 에 대하여, 이면 (수학적 귀납법) 임의의 에 대하여, 이며 이면, 이 공리들 가운데 2차 논리 공식은 셋째 공리뿐이다. 이 셋째 공리를 1차 논리 공리꼴로 대신하면, 페아노 산술을 얻으며, 이는 보다 더 약한 공리계이다. 자연수 이론의 한 가지 모형 을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이 경우, 각 자연수는 그보다 작은 자연수들의 집합이다. 예를 들어, 처음 몇 자연수는 다음과 같다. 고유 모임이 허용되는 집합론의 경우, 자연수를 유한 집합의 대등 관계에 대한 동치류로서 정의할 수 있다. 즉, 각 자연수는 그 자연수를 원소 개수로 하는 집합들의 모임이다. 즉, 이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고유 모임을 사용하므로, 분류 공리꼴을 만족시키는 집합론에서 사용할 수 없다. 자연수의 집합은 가환 순서 반환을 이룬다. 자연수의 집합 의 정의에 따라, 수학적 귀납법이 성립한다. 즉,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임의의 자연수 에 대하여, 은 성질 를 만족시킨다. 여기서 는 주어진 성질이며, 자연수 부분 집합 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명제를 증명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 즉, 0은 이 성질을 만족시킨다. 만약 라면, . 즉, 어떤 자연수가 이 성질을 만족시키면, 뒤따르는 자연수도 이를 만족시킨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귀납법에 따르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만약 라면, . 즉, 어떤 자연수보다 작은 자연수가 모두 이 성질을 만족시키면, 그 자연수 역시 이를 만족시킨다. 특히, 인 경우 이 조건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인데, 이는 이 조건의 전제가 항상 참이기 때문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재귀 정리에 따르면, 수열을 점화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즉, 집합 에서 값을 취하는 수열 은, 그 일반항을 통하지 않고서도,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줌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는 에서 값을 취하는 각 유한 수열에 의 원소를 대응시키는 함수이다. 특히, 이 점화식에서 인 경우, 이 점화식이 뜻하는 바는 공(空)수열 의 함숫값 을 첫항 으로 정의하는 식 이다. 자연수의 집합은 정렬 집합이다. 즉, 공집합이 아닌 자연수 부분 집합 은 항상 최소 원소 를 갖는다. 귀류법을 사용하여, 가 최소 원소를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이제 임을 강한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하자. 만약 라면, 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므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며, 이는 모순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에서 무한 강하법이 성립한다. 즉,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 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위에서 증명한 자연수의 정렬성을 통해 엄밀하게 증명할 수 있다. 즉, 만약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이 존재한다면, 그 수열의 항들의 집합은 자연수의 부분 집합인데, 이는 공집합이 아니면서 최소 원소를 갖지도 않으므로 모순이다. 무한 강하법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 성질 을 만족시키는 자연수 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려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라면, 인 자연수 가 존재한다. 자연수의 집합 은 무한 집합이다. 자연수의 집합의 크기를 알레프 0 으로 정의하며, 이는 최소 무한 기수이다. 즉, 임의의 무한 집합 에 대하여, 인 부분 집합 가 존재한다. 자연수의 집합과 크기가 같은 집합(=전단사 함수 가 존재하는 집합 )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리수의 집합 는 가산 무한 집합이며, 실수의 집합 는 비(非)가산 무한 집합이다. 자연수에 대한 곱셈식 이 성립할 때, 가 의 약수라고 하며, 반대로 를 의 배수라고 한다. 0은 모든 자연수를 약수로 가지며, 0의 배수는 0뿐이다. 그러나, 양의 정수의 경우만을 생각하기도 한다. 항등식 에 따라, 자연수는 항상 1과 자기 자신을 약수로 가지는데, 약수가 이들뿐인 자연수를 소수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자연수를 합성수라고 한다. 다만, 0과 1은 소수도 합성수도 아니라고 정의한다.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르면, 모든 합성수는 유한 개의 소수들의 곱으로 표현 가능하며, 이러한 표현은 소수들을 곱하는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하다. 정수 분류:기수 분류:순서수 분류:정수 분류:수론
《 스타크래프트 》()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실시간 전략 게임이다. 1998년 3월 31일 북미와 중국에, 4월 9일에는 대한민국에 발매되었다. 게임의 배경은 26세기 초반 미래의 우주로, 지구에게 버림받은 범죄자 집단인 테란()과 집단 의식을 가지고 다른 종족을 흡수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저그(), 초능력과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외계 종족인 프로토스() 사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와 그 확장팩인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는 1998년 4월(브루드 워는 11월)부터 1999년 1월까지 두달 동안 전 세계에서 150만 장 이상 판매되어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 되었고, 2007년 5월 20일 기준으로 블리자드는 950만 장 이상이 팔렸다고 집계했으며, 2009년 2월 28일까지 110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1998년 최고의 컴퓨터 전략 게임으로 오리진스 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다수의 올해의 게임, 올해의 전략 게임, 올해의 멀티플레이어 게임 상을 받았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1월 31일까지 세계 판매량의 대략 40%정도인 450만 장이 팔렸으며,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프로 선수와 팀이 생겨 스타크래프트 경기가 방송에도 중계되는 등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스타크래프트》는 LG소프트 를 통해 발매되었다. 한국어로 수정하지 않고 영문판 그대로 출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영문판을 그대로 발매함에 따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게이밍 서비스인 배틀넷에서 한글 채팅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1999년부터는 한글이 지원되는 한스타와 같은 프로그램이 배포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2005년 2월 스타크래프트의 버전이 1.12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는 2009년 1월부터 1.16.1 버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8년이 지난 2017년 3월 26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I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스타크래프트 클래식 배틀넷 - StarCraft Compendium 스타크래프트 위키 분류: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게임 분류:1998년 비디오 게임 분류:실시간 전략 게임 분류:윈도우 게임 분류:E스포츠 게임 분류:매킨토시 게임 분류:닌텐도 64 게임 분류:다중 사용자 온라인 게임 분류:SF 게임 분류:비디오 게임 시리즈 분류:미국의 비디오 게임 분류:영어 비디오 게임 분류:독일어 비디오 게임 분류:일본어 비디오 게임 분류:이탈리아어 비디오 게임 분류:MacOS 게임
그레고리 올리버 하인즈 (Gregory Oliver Hines, 1946년 2월 14일 ~ 2003년 8월 9일)는 미국인 배우이자 춤꾼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그 세대의 최고의 탭댄서로 생각하고 있다. 뉴욕주 뉴욕 태생으로, 하인즈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형에게서 탭댄싱을 배웠다. 5살이 되었을 때부터 형과 춤으로 돈을 벌었으며, 유명한 활동 무대는 할렘의 아폴로 극장이었다. 그는 영화 백야(White Nights)에서의 연기로 가장 유명할 것이다. 다른 출연작품으로는 커튼 클럽(The Cotton Club), Running Scared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다수의 TV 시리즈 물에도 출연했다. 그는 여러 번 토니상 후보에 올랐었고, 1992년 뮤지컬 "Jelly s Last Jam."으로 토니상을 수상한다. 하인즈는 암으로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57년의 생을 마친다. 분류:1946년 태어남 분류:2003년 죽음 분류:미국의 무용가 분류:토니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 분류:아프리카계 미국인 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시삽 ()은 전자 게시판(BBS)이나 온라인 서비스 가상 공동체 등 다중 사용자 컴퓨터 시스템의 관리자이다. 기타 인터넷 기반 네트워크 서비스들의 관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스템 운영자 ()의 줄임말이며, 시솝 , 시샵 이라고도 한다. 사용자들과의 창구 역할을 맡고, 시스템 상의 문제를 고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용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등의 일을 한다. 본래 기술자를 지칭하는 용어인 이 말은, 1989년 케텔의 등장 이후 PC통신 동호회들의 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오프라인에서 "동호회장"으로 불렸을 말을 "동호회 시삽"으로 부른 것인데, 처음에는 PC통신 서비스 운영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가 동호회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동호회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확장된 것이다. 이 당시의 동호회는 PC통신 내부의 단체로서 서비스 회사와 운영계약 을 체결하는 형식을 취하여, 동호회 시스템을 할당해주는 형태였고 해당 시스템의 관리자 ID도 발급되었다. (하이텔의 경우 k2****, 천리안은 ZS*** 형식으로 ****부분은 동호회 인덱스로 된 ID였다.) 따라서, 동호회 운영진은 동호회의 동호회 내에서는 시스템 관리자의 역할도 맡게 되므로 시삽으로 지칭된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동호회 운영자들을 "삽질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불렀는데, 시삽 의 "삽"에서 말을 따온 것이다. 삽질 이란 표현은 쓸데없는 노력을 일컫는 유머스러운 속어로도 쓰인다. 시스템 관리자 네트워크 관리자 분류:전자 게시판 분류:인터넷 신조어 분류:시스템 관리
8월 15일 은 그레고리력으로 227번째(윤년일 경우 228번째) 날에 해당한다. 400년 동안 이 날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 금요일은 57번, 화요일, 일요일은 56번 온다. 927년 - 사라센이 타란토를 정복하여 파괴하다. 1261년 -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다. 1415년 - 포르투갈 왕국이 세우타를 갑작스럽게 공격하다. 세우타는 하루 만에 함락되다. 1461년 -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트라페주스 제국이 무너지다. 1519년 - 파나마의 파나마 시가 세워지다. 1534년 -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수도회인 예수회가 설립되다. 1537년 -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이 세워지다. 1903년 - 대한제국, 러시아 제국 정부에 사신을 파견, 정치, 군사동맹을 요청하다. 1945년 -일본 제국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대한민국이 지배국인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다. # 소련군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일본 제국과의 전투. # 조선총독부, 송진우를 한국인 대표로 임명하여 정권인수를 제의했으나 거절당하다. 1947년 - 인도,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해 독립하다. 1948년 -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 정부 명의로 정부를 수립하다. 1953년 -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옮겼던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돌아옴. 1954년 - 대한민국 정부,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전국 댄스홀에 폐쇄령 내리다. 1966년 - 베트남 냐짱에 주월한국군 야전사령부 설치하다. 1970년 - 대한민국 정부의 평화통일구상선언 발표. 1974년 - 육영수 저격사건, 서울 광복절 기념행사장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다 부인 육영수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 육영수 여사 외에 합창단원인 장봉화 양이 사망. 1989년 - 대한민국,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거문도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 1997년 -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 광복절 기념사서 한반도 평화정착 위한 4대원칙 발표. 1998년 -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 당면한 국난극복과 민족 재도약을 위한 `제 2건국 제창. 2000년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북한 이산가족 200명 서울과 평양에서 반세기만에 혈육 상봉. 2006년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대신이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패전일인 해당 날짜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다. 2007년 - 태평양 연안에서 발생한규모 8.0의 지진이 페루를 강타해 514명이 죽고 1090명이 부상당함. 2017년 - 아프리카대륙 모리타니의 국기가 변경됨. 1914년 - 파나마 운하 완공하다. 1917년 -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혁명》 완성하다. 1948년 -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 발표하다. 1949년 -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자유시가 서울특별시로 개칭됨. 1953년 - 코리아헤럴드 창간하다. 1954년 - 대한민국 경부선 급행열차 통일호 개통(운행시간 9시간 30분)하다. 1961년 - 대한민국의 농협중앙회, 발족하다. 1970년 - * 서울 남산1호터널 개통하다. * 대한민국 병무청 발족하다. 1974년 - * 대한민국, 경부선 새마을호 개통. *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1975년 -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준공되다. 1987년 -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개관. 1995년 - 대한민국, 옛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공사 시작. 2001년 -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체코에 0:5 참패를 당함. (이 사건으로 히딩크 감독은 오대영 감독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2008년 - 제4회 ETPFEST의 둘째날이 되다. 2009년 - 제5회 ETPFEST가 개최되다. 2010년 - 대한민국의 광화문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2011년 - 구글이 휴대전화 제조회사인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하다. 2015년 - * 대한민국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표준시를 8월 15일 0시 30분에서 0시로 전환하면서 표준시를 UTC+08:30로 변경하였고, 이 표준시를 평양시 로 칭하게 된다. 2017년 -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출시했다. 1171년 -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9세 1195년 - 포르투갈의 성직자이자 프란치스코회의 수사 파도바의 안토니오 1769년 - 프랑스의 군인,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71년 -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월터 스콧 1890년 - 프랑스의 작곡가 자크 이베르. 1892년 - 프랑스의 과학자 드 브로이. 1918년 - 프랑스의 작곡가 레이몽 갈루와몽브룅. 1926년 - 대한민국의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 194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선우용녀. 1954년 - 스웨덴의 언론인, 작가 스티그 라르손. 1964년- 미국의 기업인 멀린다 게이츠. 1968년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MC 이영자. 1970년 * 대한민국의 야구 해설가, 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이종범. * 미국의 배우, 앤서니 앤더슨.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김갑중. 1972년 - 미국의 배우 벤 애플렉. 1974년 * 캐나다의 배우 너태샤 헨스트리지. *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한상규. * 대한민국의 배우 김철기. 1975년 * 일본의 축구 선수 가와구치 요시카쓰. * 대한민국의 전 양궁 선수 박경모. * 대한민국의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조진호. 1976년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바우더베인 젠던. * 대한민국의 요리사 오세득. 1980년 * 대한민국의 전 가수이자 개그맨 백보람.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광삼. 1981년 *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 오진혁. * 대한민국의 배우 송지효. * 대한민국의 배우 이상윤. * 대한민국의 배우 차수연. * 대한민국의 개그맨 박성광. 1983년 - 일본의 성우 혼다 요코. 1985년 - 미국의 배우이자 가수 에밀리 키니 1986년 * 대한민국의 배우 한그림. * 대한민국의 배우 황선희. 1988년 - 덴마크의 축구 선수 사네 트뢸스고르. 1989년 - 일본의 배우 오카다 마사키. 1990년 * 미국의 여배우 제니퍼 로렌스.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유진. 1992년 - 대한민국의 일러스트레이터 퍼엉. 1994년 * 일본의 수영선수 하기노 고스케 **대한민국의 태권도선수김태훈 1995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김류아. * 대한민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민유라. 423년 - 호노리우스, 서로마 제국의 황제. 1038년 -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 헝가리 왕국의 국왕. 1118년 - 알렉시우스 1세 - 동로마 제국의 황제. 1666년 - 아담 샬 폰 벨,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 1799년 - 프랑스의 장군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1920년 - 일제 강점기의 지방 관료 최병혁. 1967년 - 르네 마그리트, 벨기에의 화가 1974년 - 육영수, 대한민국 제5~9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자 제18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머니. 1975년 - 세이크 무지부르 라만,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 1990년 - 빅토르 초이, 러시아의 한국계 대중음악가. 2013년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및 공연제작자 백원길. 2016년 - * 대한민국의 만화가 백무현. *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데일리언 앳킨슨. * 일본의 성인 비디오 여배우 아카네 호타루. 2018년 - 일본의 만화가 사쿠라 모모코 한국에서 1945년 8월 15일은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36년간 이루어졌던 일제 강점기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Liberation Day)이다. 대한민국에서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일본에서 8월 15일은 태평양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날이라 하여 종전의 날이라고 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8월 15일은 1947년 영국의 식민통치에서의 해방을 기리는 독립기념일이다. 가톨릭에서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전날 8월 14일 다음날 8월 16일 - 전달 7월 15일 다음달 9월 15일 음력 8월 15일 모두 보기
8월 16일 은 그레고리력으로 228번째(윤년일 경우 229번째) 날에 해당한다. 기원전 1년 - 전한 애제의 죽음과 동시에 왕망이 대사마로 임명되다. 1653년 - 네덜란드의 선원 헨드릭 하멜 일행이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하다. 1819년 - 영국, 런던의 성 피터 광장에서 피털루 학살 발생. 1918년 - 일본, 조선에 대한 곡류수용령 공포. 1920년 - 클리블랜드 인디언즈의 유격수 레이 채프먼이 머리에 공을 맞고 다음 날 사망하다. 1929년 - 야마나시 한조가 조선총독에서 물러나다. 1948년 -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 이양. 1949년 - 대한민국, 세계보건기구(WHO) 가입. 1960년 - 키프로스의 독립 및 승인. 1961년 -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이병철을 회장으로 발족. 1966년 - 제네바 협약, 대한민국 내에서 발효. 1980년 - 최규하 대통령, 대규모 학생 소요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10대 대통령에서 하야. 1986년 - 신민당서 탈당한 신보수계 인사들, 유한열 의원을 총재로 민중민주당 창당. 1990년 - 걸프 전쟁 미국 해군, 이라크 및 이라크가 점령한 쿠웨이트 일대 해상 전면 봉쇄 1993년 - 퍼듀 대학의 학생이던 랜 머독에 의해 데비안 리눅스가 발표되다. 1999년 - 대한민국, 대우채권단, 대우 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 체결(사실상 그룹해체) 2001년 - 미국 연방항공청, 대한민국을 항공안전위험국(2등급)으로 분류. 1895년 - 나가사키, 부산 간 해저전선 완성. 1914년 - 경원선 전 구간(용산-원산) 개통. 1951년 - 서울 ~ 부산간 전화 개통. 1962년 - 비틀즈의 드럼 연주자 피트 베스트가 탈퇴하고 링고 스타가 합류하다. 1992년 - MBC예술단과 북한 예술단, 사할린서 제 1회 통일예술제 개최 2005년 - 프로씨름이 탄생 22년 만에 폐지되었다. 2012년 -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에서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이 종료되었다. 1378년 - 중국 명나라의 제4대 황제 홍희제 1763년 - 영국의 조지 3세의 아들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1832년 - 독일의 철학자,심리학자 빌헬름 분트. 1903년 -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양주동. 1954년 - 캐나다의 영화 감독 제임스 캐머런. 1958년 - 미국의 가수 마돈나. 1972년 - 캐나다의 배우 폴 선형 리 1978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김덕용 1980년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버네사 칼턴 1992년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스테파니 판 데르 흐라흐트. 1993년 - 일본의 가수 미카미 유아(허니팝콘리더) 1995년 - 대한민국의 가수 해빈(구구단). 1482년 -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1938년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로버트 존슨 1948년 - 미국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 1949년 - 미국의 작가 마거릿 미첼 1977년 -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 엘비스 프레슬리. 199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장현. 2016년 - 브라질의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 2018년 - 소련의 체조선수 옐레나 슈슈노바 2018년 - 미국의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 2018년 - 인도의 정치인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2018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김영춘 베닝턴 전투의 날 미국 버몬트주 고잔노 오쿠리비 일본 교토 시 어린이날 파라과이 복원의 날 도미니카 공화국 독립기념일 멕시코 전날 8월 15일 다음날 8월 17일 - 전달 7월 16일 다음달 9월 16일 음력 8월 16일 모두 보기
수학에서, 칸토어 집합 ()은 0과 1 사이의 실수로 이루어진 집합으로, 부터 시작하여 각 구간을 3등분하여 가운데 구간을 반복적으로 제외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칸토어 집합을 제작하기 위해 7번 반복한 과정입니다. 칸토어 집합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진다. # 처음 구간은 에서 시작한다. # 구간을 3등분한 후, 가운데 개구간 을 제외한다. 그러면 가 남는다. # 두 구간 , 의 가운데 구간을 제외한다. # 계속해서 반복한다. 또는, 앞 단계의 구간을 크기로 줄인 다음 두 개를 배치하는 방식으로도 같은 집합을 얻을 수 있다. 즉, 이 된다. 칸토어 집합에 포함되는 수는 삼진법 소수로 표기했을 때 모든 자릿수가 0 또는 2가 된다. 이것은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각 단계마다 자릿수에 1이 있는 수를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 번째 단계에는 가 빠지고, 두 번째 단계에는 과 가 빠지는 과정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또한 이것을 이용해 칸토어 집합의 수를 0과 1 사이의 모든 실수와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는데, 3진수 각 자릿수의 2를 2진수에서의 1로 대응한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칸토어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며, 크기가 이다.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빠지는 구간의 길이는 이 된다. 이 길이를 모두 합하면 이 된다. 즉, 칸토어 집합은 르베그 측도가 0이다. 또한, 칸토어 집합은 조밀한 곳이 없는 집합이며, 완전 집합이다. 칸토어 집합은 자기닮음 성질을 가지고 있는 프랙털이다. 칸토어 집합을 ⅓ 크기로 줄이면 원래 칸토어 집합의 왼쪽 부분과 같다. 따라서 칸토어 집합의 하우스도르프 차원은 이다.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제외되는 구간의 길이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제외되지않는 구간의 길이 :우선, 을 예약한다. 구간을 등분한 후, 가운데 구간을 제외하면 :두 구간 , 에서 또 다시 각각의 가운데 구간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반복해 나아가면,은 칸토어 집합의 원소들의 값이 되고, 따라서 따라서, 칸토어집합의 원소들의 합은 이다. 따라서, 칸토어는 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값 이 전체의 값 이 됨을 보임으로써 보다 상대적으로 큰 값 가 이 됨을 보여준다. 따라서,칸토어집합은 이면서 무한한 그리고 의 보다 작을수있는 비가산 기수의 집합을 보여준다. *진수 *삼진법 *알레프 수 분류:측도론 분류:게오르크 칸토어
수학에서, 구간 (區間은 주어진 두 실수 (또는 무한대) 사이의 모든 실수의 집합이다. 구간의 개념은 유클리드 공간과 부분 순서 집합으로 일반화된다. 두 실수 가 주어졌다고 하자. 또한 양과 음의 무한대를 와 로 표기하자. 유한한 길이의 구간은 다음 중 한 가지 형태의 실수 부분 집합이다. 무한한 길이의 구간은 다음 중 한 가지 형태의 실수 부분 집합이다. 구간 의 끝점 ()은 위 표현에 사용된 와 (또는 무한대)를 뜻한다. 이들은 구간의 하한과 상한이다. 즉, 구간 의 길이 ()는 그 오른쪽 끝점과 왼쪽 끝점의 차이다. 이는 구간의 지름이다. 즉, 구간 은 을 만족하는 실수 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다. 이 구간의 두 끝점은 1과 8이며, 길이는 7이다. 또한, 여집합은 이다. 즉, 또는 을 만족하는 실수 의 집합이다. 구간은 다음과 같은 여러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끝점 포함 여부에 따라, 열린구간 · 닫힌구간 · 반닫힌구간으로 분류된다. 유계 집합 여부에 따라, 유한 구간 · 무한 구간으로 분류된다. 구체적으로, 구간 의 두 끝점을 ()라고 하자. 구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를 열린구간 () 또는 개구간 (開區間)이라고 한다. . . 즉, 두 끝점을 포함하지 않는다. (무한대의 경우 당연히 포함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열린집합이다. 구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를 닫힌구간 () 또는 폐구간 (閉區間)이라고 한다. . . 즉, 두 끝점을 포함한다. (무한대의 경우 당연히 포함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실수 진부분집합으로서 닫힌집합이다. 구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를 반닫힌구간 (半- 또는 반열린구간 또는 반폐구간 또는 반개구간 이라고 한다. . . 즉, 두 끝점 가운데 하나만을 포함한다. (무한대의 경우 당연히 포함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열린집합도 닫힌집합도 아니다. 구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를 유계 구간 (有界區間 또는 유한 구간 (有限區間이라고 한다. . 즉, 무한대 끝점을 갖지 않는다. . 즉, 길이가 유한하다.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유계 집합이다. 구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를 무계 구간 (無界區間 또는 무한 구간 (無限區間이라고 한다. . 즉, 무한대 끝점을 갖는다. . 즉, 길이가 무한하다.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무계 집합이다. 는 열린구간이자 유계 구간이다. , , 는 열린구간이자 무계 구간이다. 는 닫힌구간이자 유계 구간이다. 와 는 반닫힌구간이자 유계 구간이다. 는 반닫힌구간이자 무계 구간이다. 실수 부분 집합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를 퇴화 구간()이라고 한다. 이거나, . 즉, 공집합이거나 한원소 집합이다. 즉, 지름이 음의 무한대이거나 0이다. 위에서 정의한 표기를 따를 때, 이게 되는 두 실수 가 존재한다. 즉, 퇴화 구간은 끝점의 크기 비교에 대한 조건에 부정을 취한, 구간 정의의 변형이다. 퇴화 구간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인 구간을 비퇴화 구간()이라고 한다. 퇴화 구간 의 길이와 분류는 다음과 같다. 퇴화 구간의 길이는 0이다. 공집합은 열린구간이자 닫힌구간이다. 한원소 집합은 열린구간이 아닌 닫힌구간이다. 퇴화 구간은 유한 구간이다. 확장된 실수 에서는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간들이 허용된다. 실수 구간과 비슷하게, 임의의 부분 순서 집합 위의 구간을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볼록 집합 분류:실수 집합
수학에서, 부등식 (不等式은 두 수 및 두 식에 대한 크기 비교를 나타내는 식이다. 부등식은 두 수 및 그 사이의 부등호 (不等號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 a > b "는 a 가 b 보다 크다는 뜻이다. 반대로, " a b > c "는 a > b 이며 b > c 인 것을 줄여 쓴 것이며, 물론 이 경우 a > c 이기도 하다. "부등식"은 한자나 영어나 문자 겉으로는 "같지 않음"을 뜻한다. 실수 집합 에서, 두 실수 에 대한 부등식 은 다음과 같다. 부등식 읽기 무변수 실례 절대 부등식 실례 가 와 같지 않다 가 보다 크다 가 보다 작다 가 보다 크거나 같다 가 보다 작거나 같다 절대 부등식 (絶對不等式)은 모든 변수의 값에 대하여 항상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을 말한다. 반면, 조건 부등식 (條件不等式)은 특정한 범위의 변수의 값 아래에서만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이다. 어떤 부등식이 절대 부등식인 것을 보이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증명 이라고 한다. 어떤 부등식이 성립할 조건을 구하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풀이 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실수 부등식 이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조건 부등식이다. 실수 부등식 가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절대 부등식이다. 코시-슈바르츠 부등식 삼각 부등식 산술-기하 평균 부등식 마르코프 부등식 체비쇼프 부등식 민코프스키 부등식 연립 부등식 횔더 부등식 토머스 해리엇()이 기호 ">" 및 "<"를 도입하였다. 분류:초등대수학
8월 13일 은 그레고리력으로 225번째(윤년일 경우 226번째) 날에 해당한다. 1521년 -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함락 되었다. 1704년 - 블렌하임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과 사보이 공작 외젠이 이끄는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프랑스, 바바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다. 이 전투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중요한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1936년 - 조선중앙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삭제함, 이 때문에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한 정간 처분을 받음 1955년 - 서울적십자병원, 대한민국 최초의 성전환 수술 시행 1959년 -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재일교포 북송 협정에 조인 1961년 - 독일민주공화국, 냉전으로 분단된 독일의 도시 베를린의 동서 구간 사이에 베를린 장벽을 세우다. 1965년 - 대한민국 국회, 야당 불참 속 월남파병 동의안 가결 1979년 - 중화인민공화국, 산아제한 정책 발표 1980년 - 대한민국,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1986년 - 대한민국,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 발족 1990년 -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스탈린 치하 희생자 전원을 복권시키는 포고령 발표. 1996년 - 한총련 연세대 점거 시위 1999년 - 신구범 축협 회장이 농협과의 통합에 반발해 국회에서 할복자살을 시도했다. 2001년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2007년 - 중도통합민주당, 중도통합민주당에서 민주당으로 당명 복구. 1889년 - 윌리엄 그레이, 주화사용 전화기로 특허취득 1935년 - 심훈의 소설 《상록수》, 동아일보 현상소설에 당선 1989년 - 대한민국,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 1994년 - 대한민국, 삼성전자, 세계 최초로 256 메가비트D램 개발 발표. 2006년 - 동인 서클 이오시스가 2집 음반 동방을녀잡자를 발매하였다. 2014년 - 2014 서울세계수학자대회가 서울에서 열리다. 1740년 - 로마노프 왕조의 5번째 군주 이반 6세. 1853년 - 이탈리아의 정치인 안토니오 사란드라. 1899년 - 미국의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1926년 - 쿠바의 정치가 피델 카스트로. 1943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봉균. 1952년 - 대한민국의 가수 양희은. 1956년 - 영국의 기업인 제러미 피스. 1963년 -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민은기. 1967년 - 중국의 트랜스젠더 무용가, 배우 진싱. 1967년 - 벨기에의 작가 아멜리 노통브. 1970년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앨런 시어러. 1973년 - 대한민국의 검사 서지현. 197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서현기. * 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선수 로만 콜론. 198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영욱. 1982년 - 미국의 빙상 선수 샤니 데이비스. 1983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신승현. 1986년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황연주. 1991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백성동.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종훈.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힐다 칼렌. 1993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윤보미 (에이핑크).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대한. * 일본의 축구 선수 요코야마 구미. 1997년 - 대한민국의 배우 여진구. 200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재민 (NCT). 2003년 - 대한민국의 배우 탕준상. 586년 - 프랑크족의 왕비이자 기독교 성인인 성녀 라드공드 1910년 - 영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1912년 -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쥘 마스네. 1921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상진. 1995년 - 미국의 야구 선수 미키 맨틀. 2016년 - 대한민국의 작사가 정두수 2016년 - 영국의 배우 케니 베이커. 2018년 - 일본의 성우 이시즈카 운쇼. 국제 왼손잡이의 날(1976년 ~ 현재) 전날 8월 12일 다음날 8월 14일 - 전달 7월 13일 다음달 9월 13일 음력 8월 13일 모두 보기
마거릿 미첼(1941년) 마거릿 머널린 미첼 (, 1900년 11월 8일 ~ 1949년 8월 16일)은 1936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이다. 그녀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애틀랜타에서 보내며 남부의 역사와 남북 전쟁 시기의 일화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독서광이었던 그녀는 애틀랜타 워싱턴 신학대학교(Atlanta s Washington Seminary)를 졸업한 후,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북부에 있는 명문 여자 대학인 스미스 대학교(Smith College)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한다. 그곳에서 헨리 라는 육군 장교와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헨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 독감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1918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고향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이 과정은 이후 그녀의 소설에 큰 영향을 준다) 그 후 애틀랜타의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던 중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남북 전쟁을 바탕으로 한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듣던 전쟁 시기의 일화와 치밀하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10년 간 집필하여 1936년 출판된 이 장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몰며 빠른 시간내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듬해 1937년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3년 뒤인 1939년 비비언 리 주연의 영화로 출시되게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미첼은 소설가로서 이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며, 1949년 8월 11일 저녁, 남편 존 마쉬(John Marsh)와 함께 영화 캔터베리 이야기를 보러가는 도중에 애틀란타 13번가의 피치트리 거리(Peachtree Street)를 건너다가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에 치었다.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5일 후 그래디 병원(Grady Hospital)에서 48세로 사망했다. 애틀랜타의 오클랜드 묘지에 묻혔다. 사라진 섬 레이즌 (첫 작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작품) 분류:1900년 태어남 분류:1949년 죽음 분류:미국의 소설가 분류:애틀랜타 출신 분류:아일랜드계 미국인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퓰리처상 수상자 분류: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분류:스미스 대학교 동문
5월 (五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5월이 가정의 달이다. 이 달과 다음 해의 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음력 3월과 음력 4월이 이 달에 있으며 5월에는 음력 3월 15~16일, 4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끼는 경우는 윤3월 혹은 윤4월인데 소만 이전은 윤3월, 소만 이후는 윤4월이다. 음력 4월 8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많은 나라에서 5월 1일에 메이 데이를 보낸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이 해부터 5월 10일에 대통령 취임식을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 임기는 5월 30일에 시작한다. 기독교에서 예수 승천일은 주로 5월에 온다. 한국에서는 5월 하순부터 여름의 시작으로 본다. 한국의 워터파크들은 5월에 야외 시설물을 개장하기도 한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등의 리그는 5월이 시즌 초에 해당한다.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 NBA 포스트시즌 FIFA 월드컵 - 1986년과 2002년의 경우. 프리미어리그 스코틀랜드 프리미어십 이집트 프리미어리그 프리메라리가 리그 1 세리에 A 에레디비시 분데스리가 쉬페르리그 풋볼 리그 웨일스 프리미어리그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 2011년에 추춘제로 변경 수페르리가 엘라다 엑스트라클라사 프리메이라리가 리가 MX - 노동절 (5월 1일) - 헌법기념일 (5월 3일) - 초록의 날 (5월 4일) , - 어린이날 (5월 5일) - 제헌절 (5월 5일) - 부처님 오신 날 (양력 5월 중 처음으로 보름달이 뜨는 날) - 부처님 오신 날 (양력 5월 중 처음으로 보름달이 뜨는 날) - 제헌절 (5월 10일) - 독립기념일 (5월 15일) - 화요일인 경우 5월 14일, 목요일인 경우 5월 16일 추가 휴무 - 제헌절 (5월 17일) - 체육의 날 (5월 19일) - 국경일 (5월 20일) - 통일기념일 (5월 22일) - 피친차 전투 기념일 (5월 24일) - 독립기념일 (5월 25일) - 메모리얼 데이 (5월 마지막 월요일) 주님 승천 대축일 - 일부 기독교 국가만.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해당된다. 부처님 오신 날 - 일부 불교권 국가 - 봄 공휴일 (5월 마지막 월요일) - 빅토리아 데이 (5월 24일 혹은 그 이전의 월요일) 아프리카 연합의 날 - 일부 아프리카 국가 5월 1일 근로자의 날 - 이날에는 관공서나 학교를 제외한 모든 기업체가 휴무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공휴일) - 토요일이나 다른 공휴일과 겹칠 경우 5월 6~7일에 대체공휴일 적용. 5월 8일 어버이날 - 공휴일 지정론 있음 5월 11일 입양의 날 5월 15일 스승의 날 5월 셋째 월요일 성년의 날 - 매년 만 19세가 되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각종 행사를 개최한다.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 5월 20일 세계인의 날 5월 21일 부부의 날 5월 25일 방재의 날 5월 31일 바다의 날 입하 5월 5일 또는 5월 6일. 소만 5월 20일 또는 5월 21일.
음수 (陰數)는 -1, -2, -, -1.414 처럼 0보다 작은 실수를 말한다. 보통 음부호(-)를 붙여서 음수임을 표시한다. 음수는 플러스 부호를 붙이는 양수와 반대로 마이너스 부호를 붙여 나타내므로 양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음수는 기상청에서 온도를 나타낼 때, 영상과 반대되는 개념인 영하 를 나타낼 때 쓰이고, 고대 중국에서는 수입과 반대되는 개념 빚 을 나타낼 때 쓰였으며, 산의 높이를 측정하는 해발과 반대되는 개념인 해저 를 나타낼 때 쓰이는 등 음수는 현대에 이르러 수와 관련된 많은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인도인인 623년경의 브라마굽타로, 단순히 음수에 대한 사칙연산만을 기술하였다. 1650년대 이후로 음수가 자유로이 사용되었지만 그 개념이나 논리적 기초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정당성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그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1657년 존 허드(John Hudde, 1633년~1704년)가 음수와 양수 모두를 표시하는 문자를 사용한 이후부터 수학자들은 자유로이 그런 방식을 따랐다. 두 음수의 더하기는 두 양수의 더하기와 매우 유사하다. :. 양수와 음수을 혼합하여 더할 때에는 음수를 차감되는 양의 값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 음수가 아닌 두 수의 빼기로 음수를 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양수의 빼기는 같은 절대값의 음수의 더하기와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그리고 반면, 음수의 빼기는 같은 절대값의 양수의 더하기와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이 아이디어는 빚의 감소는 신용의 증가와 같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리고 . 두 음수의 곱이 양수여야 한다는 관습은 곱셈이 분배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러한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이기 때문에, 곱셈 는 이어야 한다. *음의 정수 *양수 분류:실수
이디 아민을 표현한 캐리커처 (1977년)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 1923년 혹은 1925년 혹은 1928년 ~ 2003년 8월 16일)은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71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우간다 북서부의 서나일 아루아의 소부족 카크와 출신. 이슬람교도이자 농부인 아버지와 주술을 통해 사람들을 치료하는 루그바라 부족 주술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공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문맹이었던 이디 아민은 193cm의 거구였으며, 권투 챔피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디 아민은 버마 전투에 참가하고, 1946년 영국 식민지 군에 입대하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대장으로 영국군으로 마우-마우 저항진압에 가담했다. 1961년 아민은 우간다 최초의 유색 장교가 되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하고, 1964년 대령이 된 이디 아민은 1966년 밀턴 오보테와 함께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1967년에는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가 콩고 반란군 원조 문제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1971년 1월 25일 밀턴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서구 국가들에게 이 쿠테타는 안도를 주었으며,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오보테를 지지했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이러한 국가폭력으로 이디 아민은 잔인한 아프리카의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가 권력에 있던 8년간, 1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랍권의 국가들과 경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이 일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 보다 못한 흑인 취급을 받으면서 검은 히틀러 라는 별명을 불렀을 정도다. 1972년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들을 내쫓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하였는데, 그로 인해 우간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을 잃게 되었다. 1971년에 대통령과 군사령관, 1975년에는 육군원수, O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선언했다. 1978년 군 내부의 반역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수많은 반 아민 단체와 반군들이 탄자니아군과 연합해 1979년 4월 11일 반격으로 수도 캄팔라가 탄자니아군과 망명 우간다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아민은 우선 리비아로 도망치고 나중엔 이라크로 향했다가 결국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다에 그가 살 빌라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은 잘 죽었다 , 독재자 치고 평화롭게 죽었네 , 왜 살아있을 때 안 죽였냐? 고문이라도 하지? 라는 식으로 증오했다. The Idi Amin I knew, Brian Barron, BBC , 16 August 2003. Includes a video of Brian Barron interviewing Idi Amin in exile in 1980. General Idi Amin Dada A Self Portrait on Google Video (Flash Video) Love In The Time of Idi Amin - fiction set in the background of General Idi Amin s reign idiamindada.com, a website devoted to Idi Amin s legacy created by his son Jaffar Amin 분류:생년 미상 분류:2003년 죽음 분류:우간다의 대통령 분류: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분류: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우간다의 범죄인 분류:우간다의 무슬림 분류:우간다의 망명자 분류:캄팔라 출신
일본 문학 (日本文學은 일본어로 적힌 문학 작품, 또는 그러한 작품이나 작가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일본문학의 정의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어서, 언어, 발표된 지역, 문학의 형식 등 여러가지 요소가 고려된다(최근에는 외국 국적의 작가가 일본어 작품을 쓰는 사례와 같이, 국적이나 거주지가 언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어문학 이라는 호칭이 사용되는 일도 있다). 역사학과 같이 정권의 이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언제나 합당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上代)・중고(中古)・중세(中世)・근세(近世)・근현대(近現代)와 같은 구분에는 연구자에 따라 다른 의견도 있어서, 중고를 설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서 정해져 있지 않다. 마루야 사이이치는 《칙찬집》에 따라 일본문학사의 역사구분을 할 것을 제안했다. 약 나라 시대까지. 상대문학을 전기·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신화·전설·가요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문자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입으로 전달되는 구송문학(口誦文學)이 발달하여 왔다. 그러다 후기에 들어와 문학 의식이 차츰 높아짐에 따라 여러 가지 장르로 나뉘어 발달하여 원시인의 소박한 모습으로부터 차츰 높은 문예적 성격을 나타내게 됨에 따라 한자 및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기재 문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를 경유하여 한자가 유입되어, 한문과, 자신들의 말에 한자를 끼워맞춘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이 무렵 신화·전설·가요를 집대성하여 《고지키》(712년) 《니혼쇼키》(720년)와 같은 역사서가 성립되었는데 특히 와카만을 모아 엮은《만요슈》가 나와 순문학을 수립했다. 약 헤이안 시대에 해당한다. 한시・한문이 계속해서 번영을 누림과 함께, 첫 칙찬와카슈인 고킨와카슈가 편찬되고, 와카가 한시와 대등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의 공식문서는 한자로 쓰여져 있었으나, 히라가나로 된 순수한 일본어에 의한 표현이 성행하기 시작하여,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 닛키》가 쓰여짐에 이어, 세이 쇼나곤의 수필 《마쿠라노소시》,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모노가타리》 등 고전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 나타나 일본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의 특징은 주관적이고 우미적 정취(優美的情趣)에 중심을 두었다는 데 있다. 또한 고유의 문자인 가나(假名)가 발달하여 특히 여성 작가에 의해 아름답고 고운 문학작품이 만들어졌다. 약 가마쿠라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헤이안 시대 문학의 영향으로 소설·수필 등이 성행하였고 무사계급의 전란을 반영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호겐모노가타리》(保元物語) 등의 군담소설과 《호조키》(方戈記) 같은 수필문학이 나왔다. 무사들간의 전란이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에 승려와 일부 은둔자들에 의해 씌어진 작품이 많아 불교사상과 염세적 사상이 깃들여 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등에 의한 화려한 기교에 특징이 있는 《신고킨와카슈》가 편찬되었다. 또한 현대일본어의 직계 선조라 할 수 있는 와칸콘코분을 사용한 많은 작품이 나타났다. 가모노 조메이의 《호죠키》, 요시다 겐코의 《츠레즈레구사》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자 미상의 것으로 《헤이케 모노가타리》를 들 수 있다. 또한 사루가쿠의 발달이 눈에 띈다. 약 에도 시대의 문학. 오토기조시의 흐름을 따라 가나조시나 이하라 사이카쿠 등의 우키요조시가 나타났다. 또한 이제까지의 문학이 주로 귀족·승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 시대의 문학은 신흥 서민계급이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낙천적 생활을 즐겼으므로 오락적인 문학이 발달하여 새로운 문학의 장르가 나타났다. 이 때 당시 가부키나 조루리가 흥하여 인기몰이를 했다. 하이카이가 유행하여 마쓰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 등의 인물들이 활약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개국과 함께 서양의 문명이 흘러들어와 문명개화가 일어나자 일본 문학도 큰 영향을 받았다. 서양 근대소설의 이념이 유입되어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 신수》,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소설 총론》《우키구모》 등에 의한 실질적 근대 일본문학이 출발했다. 흔히 말하는 문학 이라는 개념은 이때 생겨났다. 메이지 20년 전후부터 근대문학이 싹트기 시작하여 사실주의에 이어 낭만주의가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자연주의가 들어와 문단의 주류가 되어 시단에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신이상주의문학이 일어났고, 다이쇼 말기로부터 쇼와 10년까지는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적 문학과 사회주의적 문학이 대립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에 협력하는 전쟁문학만이 허용되어 문학은 전쟁 일색으로 변하고 문학정신은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전후의 문학은 전전의 문학을 추구하여 전전(戰前)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왜곡된 점을 시정하고 자유정신을 회복하고 새 정치와 문학의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 점은 주로 근대문학에 의하여 비평가들이 정치의 우위성으로부터 문학을 탈환하여 문학의 자율성을 인정하고자 했다. 전전 일본의 지식인들이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저항운동을 조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거기에 일본인의 근대적 인간의 자아의 미성숙을 인정하려고 새로운 시대의 인간의 밑바닥에 근대적 자아의 확충을 꾀하게 됨과 동시에 전후 세대의 자기 주장과 관련된 문예비평의 전개와 호응하여 소설 분야에서도 전전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문학작품이 등장하였다. 그러한 작품들 속에 담겨진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자연주의와 사소설(私小說)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하여 비참한 전쟁을 통한 체험과 인간을 내부에서부터 포착하려는 영혼의 리얼리즘 등이 전후 작가의 필연적인 수법이 되었다. # 실존주의적 경향이다. 전시하(戰時下)에서의 극한적 체험과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여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하려는 경향이 전후문학(戰後文學) 작품에 담기게 되었다. # 평화 애호의 문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전쟁에 시달리고 지친 모든 국민과 문학가들은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 애호를 부르짖게 되고, 비키니 환초에서의 미국 원자탄 실험에 대하여 일본의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평화애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호소한 사실로서도 알 수 있다. 일본 전후 문학자 차트
수학에서, 거리 공간 (距離空間은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정의된 공간이다. 거리의 정의에 따라 표준적인 위상(위상공간)을 갖는다. 집합 위의 거리 함수 (距離函數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구분 불가능한 점의 동일성) 임의의 에 대하여, (대칭성) 임의의 에 대하여, (삼각 부등식) 임의의 에 대하여, 마지막 두 공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리로 대체시킬 수 있다. (삼각 부등식) 여기서 로 잡으면 가 되어, 대칭 공리를 얻는다. 거리 함수의 정의에서, 첫째 조건을 로 약화시키면 유사 거리 함수 의 개념을 얻는다. 거리 공간 은 거리 함수가 주어진 집합이다. 거리 공간 에서, 점 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인 열린 공 는 다음과 같다. 점 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인 닫힌 공 는 다음과 같다. 거리 공간 의 유계 집합 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이다. 인 점 가 존재한다. 거리 공간 의 거리 위상 (距離位相은 의 시작 위상이다. 즉, 열린 공들을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즉, 거리 위상에서의 열린집합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 이다. :모든 에 대하여, 인 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모든 거리 공간은 표준적으로 위상 공간을 이룬다. 모든 코시 수열이 극한을 갖는 거리 공간을 완비 거리 공간 이라고 한다. 거리 공간 의 지름 () 는 그 속의 두 점 사이의 가능한 거리들의 상한이다. 마찬가지로, 거리 공간의 부분 공간은 거리 공간을 이루므로 그 지름을 정의할 수 있다. 지름이 유한한 거리 공간을 유계 공간 이라고 한다. 거리 공간 의 임의의 부분 집합 에 대하여, 는 거리 공간을 이룬다. 모든 거리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하우스도르프 공간이다. 파라콤팩트 공간이다. T6 공간이다. 제1 가산 공간이다. 거리 공간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는 분해 가능 공간이다. 는 제2 가산 공간이다. 는 린델뢰프 공간이다. 실수 에서, 거리가 절댓값을 이용하여, 로 정의되었을 때, 는 완비 거리 공간이다. 유리수의 집합 은 실수 거리 공간의 부분 공간으로서 거리 공간을 이룬다. 그러나 이는 완비 거리 공간이 아니다. 유클리드 공간에서, 에서, 거리를 로 정의하면, 는 거리 공간이다. 이렇게 정의된 거리를 유클리드 거리 , 이 공간을 n차원 유클리드 공간 이라 하며, 보통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거리는 이 정의를 따른다. 이는 완비 거리 공간을 이룬다. 에서 을 거리로 정의하면, 는 거리공간이다. 이처럼 같은 집합에 대하여 정의가 가능한 거리는 유일하지 않다. 그러나 두 가지 거리 함수는 같은 위상을 정의한다. 노름 공간 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는 거리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노름 공간 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는 거리 공간이다. 이 거리 함수를 우체국 거리 ()라고 한다. 임의의 연결 리만 다양체 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는 거리 공간이다. 임의의 집합 및 양의 실수 에 대하여, 는 초거리 함수를 이룬다. 이를 이산 거리 함수 라고 한다. 임의의 연결 그래프 에 대하여, 두 꼭짓점 사이의 거리를 이 두 점을 잇는 경로들의 길이의 최솟값으로 정의한다면, 이는 꼭짓점들의 집합 위의 거리 함수를 이룬다. 등거리변환 리만 계량, 리만 다양체 거리화 가능 공간 초거리 공간 길이 거리 공간 분류:계량기하학
일반위상수학에서, 위상 공간 (位相空間은 어떤 점의 근처(근방)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점 사이의 거리나 넓이·부피 따위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를 사용하여, 함수의 연속성이나 수열의 극한, 집합의 연결성 등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위상수학 및 이를 기초로 하는 기하학 · 해석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된다. 위상 공간의 일반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분야를 일반위상수학이라고 한다. 집합 위의 위상 (位相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열린집합을 사용한 정의)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들의 모임 . 이 경우, 의 원소들을 열린집합 이라고 한다. * * 만약 라면, * 만약 라면, (닫힌집합을 사용한 정의)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들의 모임 . 이 경우, 의 원소들을 닫힌집합 이라고 한다. * * 만약 라면, * 만약 라면, (근방을 사용한 정의) 함수 . 이 경우 로 쓰고, 의 원소를 의 근방 이라고 한다. * 모든 에 대하여, 만약 라면 * 만약 이며 라면, * 만약 라면 * 만약 라면, 인 가 존재한다. (폐포를 사용한 정의)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 이 경우, 를 의 폐포 라고 한다. * * 모든 에 대하여, * 모든 에 대하여, * 모든 에 대하여, (내부를 사용한 정의)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 이 경우, 를 의 내부 라고 한다. * * 모든 에 대하여, * 모든 에 대하여, * 모든 에 대하여, 이 정의들은 서로 동치이다. 열린집합을 사용한 정의에서, * 닫힌집합 은 열린집합의 여집합이다. * 의 근방 의 모임은 이다. * 집합 의 폐포 는 이다. * 집합 의 내부 는 이다. 닫힌집합을 사용한 정의에서, 열린집합 은 닫힌집합의 여집합이다. 근방을 사용한 정의에서, 열린집합 은 인 집합 이다. 폐포를 사용한 정의에서, 열린집합 은 인 집합 이다. 내부를 사용한 정의에서, 열린집합 은 인 집합 이다. 즉, 근방 · 열린집합 · 닫힌집합 · 폐포 · 내부 가운데 하나를 기본 무정의 개념으로 삼고, 이로부터 나머지 개념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 은 위상을 갖춘 집합이다. 같은 집합 위의 두 위상 , 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만약 이 조건이 성립한다면 이 보다 더 섬세하다 (-纖細-고 하며, 반대로 가 보다 더 거칠다 ()고 한다. . 즉, 모든 -열린 집합은 -열린 집합이다. 모든 -닫힌집합은 -닫힌집합이다. 의 기저 및 의 기저 가 주어졌을 때, 모든 및 에 대하여, 인 이 존재한다. 주어진 위상 공간 의 열린집합들은 완비 헤이팅 대수를 이룬다. 즉, 위상 공간은 직관 논리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또한, 위상 공간은 양상 논리 S4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이 경우 양상 기호 (필연 기호)는 집합의 내부에, 양상 기호 (개연 기호)는 집합의 폐포에 대응한다. 주어진 집합 위의 위상들은 섬세성 관계에 따라서 완비 유계 격자를 이룬다. 이 격자의 최대 원소(즉, 가장 섬세한 위상)는 이산 위상이며, 최소 원소(즉, 가장 거친 위상)는 비이산 위상이다. 주어진 집합 위의 위상들의 족 의 하한(만남)은 이다. 주어진 집합 위의 위상들의 족 의 상한(이음)은 를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위상 공간과 연속 함수들은 범주를 이루며, 이 범주를 이라고 한다. 이 경우, 망각 함자 를 통해, 은 구체적 범주를 이룬다. 이 망각 함자는 좌 · 우 수반 함자를 갖는다. 여기서 은 집합을 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키고, 는 집합을 비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킨다. 은 완비 범주이며 쌍대 완비 범주이다. 즉, 모든 작은 (= 고유 모임 크기가 아닌) 극한과 쌍대극한이 존재한다. 시작 대상은 (유일한 위상을 갖춘) 공집합 이며, 끝 대상은 한원소 공간 이다. 집합 {1,2,3} 위의 집합족들 가운데, 처음 네 개는 위상이지만, 붉은색 가위표가 그려진 마지막 두 개는 위상이 아니다. 유한 집합 위의 위상의 경우, 열린집합들을 그대로 나열할 수 있다. 예들 들어, 집합 X = {1,2,3} 위에서, 다음은 위상을 이룬다. (비이산 위상) 그러나 다음은 위상을 이루지 않는다. 은 {2}와 {3}의 합집합인 {2,3}이 없으므로 위상이 아니다. 은 {1, 2}와 {2, 3}의 교집합인 {2}가 없으므로 위상이 아니다. 좀 더 복잡한 위상 공간의 경우, 다양한 구조로서 위상들을 정의할 수 있다. 전순서가 주어졌을 때, 이를 사용하여 순서 위상 을 정의할 수 있다. 실수의 집합의 표준적인 위상은 그 표준적 전순서에 대한 순서 위상이다. 거리 함수가 주어졌을 때, 이를 사용하여 거리 위상 을 정의할 수 있다. 실수의 집합이나 복소수의 집합 위에, 두 수의 차의 절댓값은 거리 함수이며, 이에 대한 거리 위상은 실수 · 복소수 집합의 표준 위상이다. 어떤 집합을 곱집합 로 나타내었을 때, 각 에 위상을 정의하면 곱집합 전체에 곱위상 이라는 위상을 줄 수 있다. 어떤 집합 위에, 열린집합으로 삼고 싶은 집합족 가 존재한다면, 이들을 포함하는 가장 거친 위상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집합족을 부분 기저 라고 한다. 어떤 집합 를 다른 집합의 부분 집합 으로 나타내었을 때, 에 위상이 존재한다면 이로부터 위에 부분공간 위상 을 정의할 수 있다. 아무런 구조 없는 집합 위에도 여러 위상을 줄 수 있다. * 모든 집합을 열린집합으로 하는 이산 위상 * 공집합과 전체 집합 밖에 열린집합이 없는 비이산 위상 * 쌍대 유한 집합 및 공집합이 열린집합인 쌍대 유한 위상 () * 보다 일반적으로, 임의의 무한 기수 에 대하여, 인 집합 및 공집합이 열린집합인 위상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들을 고려한다.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분리성 가산성 연결성 콤팩트성 기타 성질 콜모고로프 공간 T1 공간 하우스도르프 공간 정칙 공간 티호노프 공간 정규 공간 제1 가산 공간 제2 가산 공간 분해 가능 공간 연결 공간 국소 연결 공간 단일 연결 공간 축약 가능 공간 콤팩트 공간 국소 콤팩트 공간 파라콤팩트 공간 점렬 콤팩트 공간 메조콤팩트 공간 메타콤팩트 공간 린델뢰프 공간 거리화 가능 공간 다양체 폴란드 공간 CW 복합체 위상 공간은 근방의 개념 밖에는 다른 정보를 추가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하여 여러 다른 정보를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구조들을 정의할 수 있다. 두 점 사이의 거리의 개념을 추가하면, 거리 공간 을 얻는다. 집합의 넓이 · 부피의 개념을 추가하면, 보렐 측도 공간 또는 라돈 측도 공간 을 얻는다. 매끄러운 함수의 개념을 추가하면, 매끄러운 다양체 를 얻는다. 군의 구조를 추가하면, 위상군 또는 리 군 을 얻는다. 환의 구조를 추가하면, 위상환 을 얻는다. 벡터 공간의 구조를 추가하면, 위상 벡터 공간 을 얻는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인 개념이지만, 대수기하학에서는 이보다 더 일반적인 개념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열린집합들의 포함 관계에 대한 부분 순서 집합을 범주로 추상화하여, 덮개의 개념을 공리화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범주 위의 그로텐디크 위상 의 개념을 얻는다. 또한, 이를 한 단계 더 추상화하여, 공간의 열린집합들 대신 공간 위의 모든 층들의 범주의 성질을 공리화하면 토포스 의 개념을 얻는다. 범주론 대신, 위상 공간의 열린집합들의 격자론적 성질(완비 헤이팅 대수)을 공리화하면 장소 ()라는 개념을 얻는다. 1910년대 이전까지는 위상 공간의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열린집합은 거리 공간에 대해서만 정의되었다. 1908년에 리스 프리제시는 거리 함수를 사용하지 않고, 수열의 극한을 사용하여 위상 공간의 개념을 공리화하였고, 1914년에 펠릭스 하우스도르프는 근방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재정의하였다. 하우스도르프의 정의에는 오늘날 하우스도르프 공간의 정의에 들어가는 조건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이후 정의에서 제거되었다. 열린집합 닫힌집합 *내부 (위상수학) *폐포 (위상수학) *기저 (위상수학) *근방
중앙 집중식 관리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상호 연결된 노드(피어)들이 서로 간에 자원을 공유하는 P2P 네트워크. P2P (peer-to-peer network) 혹은 동등 계층간 통신망 (同等階層間通信網)은 비교적 소수의 서버에 집중하기보다는 망구성에 참여하는 기계들의 계산과 대역폭 성능에 의존하여 구성되는 통신망이다. P2P 통신망은 일반적으로 노드들을 규모가 큰 애드혹으로 서로 연결하는 경우 이용된다. 이런 통신망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는데, 오디오나 비디오, 데이터 등 임의의 디지털 형식 파일의 공유는 매우 보편적이다. 또한, 인터넷 전화(VoIP)같은 실시간 데이터 등도 P2P 기술을 통해 서로 전달될 수 있다. 순수 P2P 파일 전송 네트워크는 클라이언트나 서버란 개념 없이, 오로지 동등한 계층 노드들(peer nodes)이 서로 클라이언트와 서버 역할을 동시에 네트워크 위에서 하게 된다. 이 네트워크 구성 모델은 보통 중앙 서버를 통하는 통신 형태의 클라이언트-서버 모델과는 구별된다. FTP 서버야 말로 P2P 파일 전송 형식이 아닌, 대표적 반례로 꼽을 수 있다. 어떤 사용자가 FTP 서버에 어떤 파일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내려 받는데, 올리는 쪽과 내려받는 쪽 모두 동시에 접속하지 않아도 된다. 냅스터, 오픈냅, IRC @find) 등과 같은 네트워크과 채널은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를 검색 등과 같은 일부 기능에 쓰고, 다른 기능은 P2P 구조를 쓴다. 누텔라나 프리넷 같은 네트워크는 모든 기능에 P2P 구조를 가지는데, 비록 그 네트워크가 다른 같은 계층의 사용자들(peers)의 네트워크 주소를 알려 주는 데 디렉터리(directory) 서버에 크게 의존하긴 하지만, 때때로 진정한 P2P 네트워크으로 인용된다. P2P 네트워크 구조는 최근에 인터넷 상에서 멀티미디어 파일을 공유하는 용도로 많이 부각되긴 했지만, 1969년 4월 7일에 제정된 RFC(Request for Comments)란 인터넷 규약의 초기 버전부터 핵심적인 기술로 내제되어 있어 유래가 깊다. 최근의 P2P 서비스는 순수 파일 전송 네트워크에서 발달하여 그리드 컴퓨팅 기술로 진화해 웹하드 형태로 서비스되고 있다. 외부적으로 웹하드 형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 유저들의 저장장치에 화일이 직접 전송되어 순수 초기 P2P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유저들의 시스템에 부하를 유발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웹하드 형태의 그리드 컴퓨팅 P2P 서비스로는 피디박스, 화일아이, 아이팝 등이 있다. P2P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여러가지 형태의 리소스 (저장 공간, 씨피유 파워, 콘텐츠, 그리고 연결된 컴퓨터를 쓰고 있는 사람 그 자체)를 이용하는 일종의 응용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정된 ip 주소도 없고, 연결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분산된 리소스이다. 따라서 P2P 노드는 종래의 DNS 바깥에서 운용될 수밖에 없으며 강력한 중앙의 서버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P2P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P2P 디자이너들은 그런 특징을 활용해서 CPU 싸이클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 파일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 채팅하는 방법 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느냐이다. 냅스터나 ICQ, Popular Power, Freenet 등은 모두 기존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던 리소스를 발굴해서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러한 서비스는 다양한 형태로 인터넷에 물려 있는 수천, 수만가지의 장치들을 잘 조합하고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혹자는 P2P 디자이너들이 해결하는 이러한 연결 문제 (connectivity problem)가 단지 하나의 해프닝적인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방법을 개선하겠다 는 모토가 그 유명한 IP 주소나 DNS, 또는 그전의 TCP, 심지어는 인터넷 그 자체를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 인터넷은 결국 위에서 말한 기술이 탄생한 순간 순간이 모여서 이뤄진 것이다. 1996년 나온 ICQ는 항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와는 다른, 접속하다 끊을 수도 있는 개인용 컴퓨터들끼리 서로 접속할 수 있는 길을 처음으로 터 주었다. 모든 것이 점차 휴대화되어 가는 추세를 맞아, ICQ는 DNS를 우회해서 저만의 독자적인 프로토콜 주소 디렉터리(protocol-specific address directory)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 이를 통해 IP 주소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될 수 있었다. Groove, Napster, Netmeeting 등이 ICQ를 따라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물론 모든 P2P 시스템이 이 트릭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누텔라 (Gnutella) 나 Freenet의 경우, DNS를 우회하는 것은 이전 방식과 똑같지만 숫자로 표시되는 IP 주소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Popular Power와 SETI@Home은 각 노드가 고정된 주소에 접속할 수 있는 스케줄을 제공해서, 접속 당시의 IP 주소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Whois에 따르면 IP 주소가 처음 뿌리를 내린 1984년 이후 16년 동안 2천3백만 개의 도메인 이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냅스터는 혼자서 16개월 만에 2천 3백만 개의 비 DNS 주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만약 사용자가 모든 비 DNS 인스턴트 메시징 주소에 가입한다고 하면 동적인 IP 주소에 접근할 수 있는 P2P 주소의 개수는 모두 2억 개를 넘어선다. 평균 DNS 호스트가 10개의 second.first.com 같은 형태의 2차 주소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아도, 현재의 P2P 주소의 모든 개수는 불과 4년 뒤엔 DNS 주소의 모든 개수와 같아지게 될 것이며, 오늘날의 DNS 세계보다 훨씬 더 광대한 세계로 성장해 가게 된다는 셈이 된다. 무선 PDA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인터넷 접속 장치나 TiVo, Replay 같은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가 보급됨에 따라 이들 역시 인터넷의 중요한 일부가 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현재로는 피씨 그 자체야말로 개척되지 않은 리소스의 절대 다수를 갖고 있다. 피씨는 인터넷의 다크호스이다. 그리고 그 피씨가 갖고 있는 덜 사용된 리소스는 P2P 혁명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형식 네트워크/프로토콜 해당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응용 프로그램 목록 (사용 운영 체제) 알파벳순 표시 - 매우 비슷한 응용 프로그램 예외 Applejuice network Applejuice Client Avalanche BitTorrent network ABC, Azureus, BitAnarch, BitComet, BitSpirit, BitTornado, BitTorrent, BitTorrent++, BitTorrent.Net, G3 Torrent, mlMac, MLDonkey, QTorrent, SimpleBT, Shareaza, TomatoTorrent (Mac OS X) , TorrentStorm, µTorrent CAKE network BirthdayCAKE the reference implementation of CAKE Direct Connect network BCDC++, CZDC++, DC++, NeoModus Direct Connect, JavaDC, DCGUI-QT eDonkey network aMule (Linux, Mac OS X, others), eDonkey2000, eMule, LMule, MindGem, MLDonkey, mlMac, Shareaza, xMule, iMesh Light, ed2k (eDonkey 2000 protocol) FastTrack protocol giFT, Grokster, iMesh (and its variants stripped of adware including iMesh Light), Kazaa by Sharman Networks (and its variants stripped of adware including Kazaa Lite, K++, Diet Kaza and CleanKazaa), KCeasy, Mammoth, MLDonkey, mlMac, Poisoned FotoSwap Freenet network Entropy (on its own network), Freenet, Frost Gnutella network Acquisition (Mac OS X), BearShare, BetBug, Cabos, CocoGnut (RISC OS) , Gnucleus Grokster, iMesh, gtk-gnutella (Unix), Kiwi Alpha, LimeWire (Java), MLDonkey, mlMac, Morpheus, Phex Poisoned, Swapper, Shareaza, XoloX Gnutella2 network Adagio, Caribou, Gnucleus, iMesh, Kiwi Alpha, MLDonkey, mlMac, Morpheus, Shareaza, TrustyFiles HyperCast Joltid PeerEnabler Altnet, Bullguard, Joltid, Kazaa, Kazaa Lite Kad Network (using Kademila protocol) eMule, MindGem, MLDonkey LUSerNet (using LUSerNet protocol) LUSerNet MANOLITO/MP2P network Blubster, Piolet, RockItNet Napster network Napigator, OpenNap, WinMX Peercasting type networks PeerCast, IceShare - P2P implementation of IceCast, Freecast 프라우드넷 LiveP2P type networks CoolStreaming, Cybersky-TV WPNP network WinMX other networks Akamai, Alpine, ANts P2P, Ares Galaxy, Audiogalaxy network, Carracho, Chord, The Circle, Coral , Dexter, Diet-Agents, EarthStation 5 network, Evernet, FileTopia, GNUnet, Grapevine, Groove, Hotwire, iFolder, konspire2b, Madster/Aimster, MUTE, Napshare, OpenFT (Poisoned), P-Grid, IRC @find and XDCC, used by IRC clients including mIRC and Trillian, JXTA, Peersites , MojoNation, Mnet, Overnet network, Scour, Scribe, Skype, Solipsis a massively multi-participant virtual world, SongSpy network, Soulseek, SPIN, SpinXpress, SquidCam , Swarmcast, WASTE, Warez P2P, Winny, AsagumoWeb, OpenExt, Tesla, soribada, fileswapping, XSC, P2P 시스템의 이전 세대는 메타컴퓨팅(metacomputing)이라 불리거나 미들웨어(middleware)로 분류됨. Legion, Globus, Condor, ByteTornado === 다중 네트워크(Multi-network) 응용 프로그램 === 형식 응용 프로그램 (네트워크/프로토콜) (사용 운영 체제) (오픈 소스 여부?) eMule (Edonkey Network, Kad Network) (Microsoft Windows, Linux) (open source) aMule (EDonkey network) (Linux, Mac OS X, FreeBSD, NetBSD, OpenBSD, Windows and Solaris Operating Environment) (open source) Epicea (Epicea, BitTorrent, Edonkey Network, Overnet, FastTrack, Gnutella) (Microsoft Windows) (?) GiFT (own OpenFT protocol, and with plugins - FastTrack, eDonkey and Gnutella) (open source) xfactor (uses GiFT) (Mac OS X) (?) Gnucleus (Gnutella, Gnutella2) (Microsoft Windows) (open source) Hydranode (eDonkey2000) (Microsoft Windows, Linux, Mac OS X) (?) iMesh (Fasttrack, Edonkey Network, Gnutella, Gnutella2) (Microsoft Windows) (?) Kazaa (FastTrack, Joltid PeerEnabler) (Microsoft Windows) (closed source) Kazaa Lite (FastTrack, Joltid PeerEnabler) (Microsoft Windows) (closed source) KCeasy (Gnutella, Ares, giFT) (?) Kiwi Alpha (Gnutella, Gnutella2) (Microsoft Windows) (?) MindGem (Edonkey Network, Kademlia) (?) MLDonkey (BitTorrent, eDonkey, FastTrack, Gnutella, Gnutella2, Kademlia) (Microsoft Windows, Linux, Mac OS X) (open source) mlMac (BitTorrent, eDonkey, FastTrack, Gnutella, Gnutella2) (?) Morpheus (Gnutella, Gnutella2)(Microsoft Windows) (closed source) Poisoned (FastTrack, Gnutella, Ares, OpenFT, giftd) (Max OS X) (?) Shareaza (BitTorrent, eDonkey, Gnutella, Gnutella2) (Microsoft Windows) (open source) WinMX (Napster, WPNP) (Microsoft Windows) (closed source) XNap (OpenNAP, GiFT, Limewire, Overnet, ICQ, IRC) (Java) (open source) Zultrax (Gnutella, ZEPP) (?) 클라이언트 서버 모델 컴퓨터 클러스터 그리드 컴퓨팅 What Is P2P... And What Isn t? 분류:파일 공유 네트워크 분류:전자 상거래 분류:와레즈
선택 공리의 형상화. 선택 함수는 각 집합 를 그 속의 원소 로 대응시킨다. 집합론에서, 선택 공리 (選擇公理, , 약자 AC)는 공집합이 아닌 집합에서 한 원소를 고를 수 있으며, 또한 이를 무한 번 반복할 수 있다는 공리이다.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비직관적인 결과를 함의한다. 집합족 위의 선택 함수 (選擇函數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만약 라면, 는 물론 선택 함수를 가질 수 없다. 선택 공리 에 의하면,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 임의의 기수 에 대하여, 는 "크기가 이하인,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는 명제이다. 특히, 일 때 를 가산 선택 공리 (可算選擇公理라고 한다. 임의의 집합 및 이항 관계 가 주어졌고, 또한 이들이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고 하자. 임의의 에 대하여, 인 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의존적 선택 공리 (依存的選擇公理 에 따르면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열 이 존재한다. 임의의 에 대하여, 집합론의 언어 에 1항 연산 를 추가하자. 그렇다면, 이 언어 에서, 대역적 선택 공리 (大域的選擇公理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이 경우, 를 선택 연산 ()이라고 한다. 대역적 선택 공리는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ZF + 대역적 선택 공리는 ZFC의 보존적 확장이다. 집합족 가 주어졌으며, 각 위에 정렬 순서 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 함수 를 다음과 같이 자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특히, 만약 위에 정렬 순서가 주어졌다면, 이는 각 에 대하여 제한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선택 함수를 정의할 수 있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임의의 자연수 에 대하여 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는 유한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지만, 무한 개의 선택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무모순적이라면) 불가능하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선택 공리는 의존적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의존적 선택 공리는 가산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증명 () 집합족 이 주어졌다고 하자.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이항 관계 를 정의한다. 그렇다면, 가 존재한다. 따라서 를 사용하여 를 고른 뒤 이라고 정의하면, 이다. 따라서 는 가산 무한 집합족 의 선택 함수이다. 증명 () 집합 위의 이항 관계 가 주어졌다고 하고, 또한 가 성립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 공리에 의하여 집합족 의 선택 함수 가 존재한다. 임의의 원소 를 고르고 을 정의하면, 이는 의존적 선택 공리에 등장하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ZF)이 일관적이라면, 선택 공리는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독립적이다. 즉, 다음을 보일 수 있다. 구성 가능 전체에서는 선택 공리가 성립한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모형 이 주어졌을 때, 속의 구성 가능 전체 은 ZFC의 모형을 이룬다. 반면, 강제법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가 실패하는 모형들을 구성할 수 있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다음 명제들은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구성 가능성 공리 일반화 연속체 가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ZF)을 가정하면, 선택 공리는 수많은 동치 명제들을 가지며, 다음과 같다. 즉, 인 명제 의 예는 다음을 들 수 있다.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족 에 대하여, 이다. 초른의 보조정리 정렬 정리 티호노프 정리 (타르스키 정리 ) 임의의 무한 기수 에 대하여, 이다. (기수의 비교 가능성) 임의의 두 기수 , 에 대하여, 이거나, 이거나, 이다. (타이히뮐러-투키 보조정리 ) 임의의 유한 특성 집합족은 극대 원소를 갖는다. 모든 벡터 공간은 기저를 갖는다. 자명환이 아닌 (단위원을 갖는) 환은 극대 아이디얼을 갖는다. 망각 함자 의 상은 공집합이 아닌 모든 집합의 모임이다. (무한군에 대한) 라그랑주 정리 (군론) 모든 연결 그래프는 생성나무를 갖는다.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일관적이라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으로 다음 정리들을 증명할 수 없지만, 선택 공리를 추가하면 증명할 수 있다. 괴델의 완전성 정리 모든 체는 대수적 폐포를 갖는다. 와 는 덧셈군으로서 서로 동형이다. (닐센-슈라이어 정리) 자유군의 모든 부분군은 자유군이다. 한-바나흐 정리 베르의 범주 정리 바나흐-타르스키 역설 르베그 가측 집합이 아닌 실수 집합이 존재한다. 그러나 선택 공리를 의존적 선택 공리(또는 가산 선택 공리)로 약화시킨다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증명 불가능하다. 공식적인 형식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까지 선택 공리는 암묵적으로 수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집합 가 공집합이 아닌 집합만을 포함한다고 했을 때, 수학자들은 종종 “모든 에 포함된 (집합) 에 대해, 를 의 원소라고 하자” 라고 기술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함수) 가 선택 공리 없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했고, 그로 인해 체르멜로 이전까지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한편, 모든 함수가 선택 공리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유한 집합 의 경우, 선택 공리는 다른 집합론의 공리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각각에 적어도 하나의 물건이 담긴 (유한한) 여러 개의 상자들을 상상 해 보자. 이때 우리는 각 상자에서 정확히 하나의 물건을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상자에서 물건 한 개를 선택하고, 두 번째 상자로 옮겨 여기서도 물건 한 개를 선택한다. 그 후 세 번째 상자에서도 물건을 하나 선택하고, 이런 방식을 유한한 횟수로 반복해서, 마지막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 선택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마칠 수 있다. 이 때, 각 상자에서 하나 씩의 물건을 선택함으로서 보여지는 상자-물건의 관계를 선택 함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공집합이 아닌 집합의 모든 가산 집합족에 대해서도 선택 함수가 존재한다는, 가산 선택 공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사용될 수 없다. 같은 방법이 공집합이 아닌 집합들의 무한열에 적용될 경우, 각각의 유한한 단계에서는 함수가 정의되나 전체 집합족에 대한 함수가 정의되는 단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체계 아래서 선택 공리 없이는 어떤 “극한” 선택 함수도 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게오르크 칸토어는 선택 공리와 동치인 정렬 정리가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고 법칙"()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른 수학자들은 이 "사고 법칙"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1904년에 헝가리의 수학자 쾨니그 줄러()는 정렬 정리를 반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몇 주 뒤 펠릭스 하우스도르프가 이 "반증"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1904년에 에른스트 체르멜로는 정렬 정리를 보다 더 자명한 원리로부터 유도하기 위하여 선택 공리를 도입하였고, 이를 통해 정렬 정리를 증명하였다. 1923년에 다비트 힐베르트는 일종의 선택 연산을 포함한 논리 체계를 제시하였다. 힐베르트는 이 기호를 이라고 표기하였다. 예를 들어, 술어 에 대하여 는 (만약 라면) 를 만족시키는 집합이다. 이와 유사하게, 니콜라 부르바키는 1954년에 집합론 교재에서 선택 연산 를 사용하였다. 1924년에 알프레트 타르스키는 타르스키 정리(선택 공리가 모든 무한 집합 에 대하여 인 것과 동치)를 프랑스의 한 유명 저널에 출판하려 하였는데, 이때 원고를 심사한 모리스 르네 프레셰는 "자명하게 참인 두 명제의 동치는 출판될 가치가 없다"고 답변하였고, 반면 같은 원고를 심사한 앙리 르베그는 "자명하게 거짓인 두 명제의 동치는 출판될 가치가 없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타르스키는 결국 논문을 타 저널에 출판하였다. 1938년에 쿠르트 괴델은 내부 모형 이론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일관적임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구성 가능 전체 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모형이며, 이 모형에서는 선택 공리가 성립한다. 폴 코언은 강제법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의 부정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일관적임을 보였다. 의존적 선택 공리는 1942년에 파울 베르나이스가 도입하였다. 현재까지도, 많은 수학자들은 선택 공리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미국의 수학자 제리 로이드 보나(, 1945~)는 1977년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농담하였다. 이는 위 세 명제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서로 동치이지만 직관적으로는 그 참·거짓 여부가 모순되게 보인다는 것에 대한 농담이다. 분류:집합론 공리
불교 만자. 한반도에서도 사용된다. 불교 (佛敎, 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싯달타 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다. 불교는 그가 펼친 가르침이자 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구체적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고통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르침의 목적인데 이는 노자가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라고 한 가르침과 다르다.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까지 2,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교는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일반적으로 개조(開祖)로서의 부처, 가르침으로서의 법, 그리고 이를 따르는 공동체인 승의 삼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반야 또는 보리와 혼동하는 주장이 있다. 해탈 또는 열반은 위 설명과 같이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반야 등은 지혜를 뜻하므로 이들은 다르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열반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하다. 불교경전인 《열반경》에는 이러한 견해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은 접근의 편이성 때문에 니카야가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 경전들, 중국의 선사들이 창작한 경전들, 이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경전들을 주로 공부해 오고 있지만 이들은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에 많은 부분들이 첨삭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최근 니카야 번역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이미 영국에서는 약 한 세기 전부터 괄목할 만한 수준의 니카야 번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석가모니불 입상, 기원후 1세기 경 of Nepal showing location of Lumbini.jpg|섬네일|right|300px|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 네팔의 가운데 아래쪽의 인도와 접경 지역 가까이에 위치한다 5세기 마가다(Magadha) 왕국의 대략적인 범위 역사적으로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현 네팔과 인도 북동부 지방에 있던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싯다르타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그의 성장지는 가비라 성(迦毘羅城, Kapilavastu)이었으나 그의 종교 활동인 수도(修道), 정각(正覺), 포교(布敎)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생각된다. 싯다르타는 갠지스 강 주변의 나라였던 슈라바스티(Srāvastī) 왕국의 기원정사와 마가다 왕국의 죽림정사 같은 곳에서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석가모니 생전의 주요 제자로는 사리불, 목건련, 가섭, 아난과 같은 십대제자가 알려져 있다. 싯다르타의 인생과 관련된 주요한 장소는 팔대성지라고 부른다. 불교 인구 분포 불교의 전파 Regions in The 1st century BC (ja).png|섬네일|300px|기원전 1세기의 서역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4세기 - 2세기)의 3대 왕이었던 아소카왕은 정복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으나 전쟁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고 불교로 귀의하였다. 이에 의해 인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방 경로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간다라를 거쳐 티베트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타클라마칸 지역으로 전파 되었다. 이들 지역은 중국에서 서역이라 불리던 곳으로 대월씨(大月氏)안식(安息)강거(康居) 등의 이 지역 승려들에 의해 불경과 불상이 전래되고 경전이 한역되었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중국 고유의 도교 사상과 많은 융합이 일어났다. 한국과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한역 불경이 근간을 이루었으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 역시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거쳐 라마교라 불리게 되었으며 몽골에 전파되었고 원나라 시기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나라 멸망 후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쇠퇴하였으나 이후 청나라 시기에 황궁의 종교가 되기도 하였다. 서쪽으로 전파된 불교는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칼미크 공화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기도 한다. 북방 경로를 거쳐 전파된 불교는 북방불교 또는 대승불교라 불리기도 한다. 남방 경로 한편,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스리랑카태국캄보디아미얀마베트남 지역의 대다수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부처님 당대의 구어인 빠알리어 경전을 갖춘 상좌부 불교가 있는데, 상좌란 곧 장로라는 뜻이다. 또는, 남방불교라고 부르기도 하며, 원래 명칭 그대로 테라와다 또는 테라바다(Theravada) 불교라고도 부른다. 상좌부 불교 지역에서는 상좌부 불교를 테라바다 로, 대승불교를 마하야나 라고 부른다. 불교는 교조인 싯다르타 고타마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깨달음을 얻어 궁극적으로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도에서 불교는 원시 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의 순으로 전개되었는데 불교의 사상도 이러한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싯다르타는 당시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던 형이상학적 문제가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답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법(다르마)을 인정하였으나, 그 안에서의 총합적인 나(아트만)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아) 오히려 영원한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가 따른다고 하였다. (일체개고) 싯다르타는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열반(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에는 여러 개의 천국이 있으며, 모두 자신이 지은 업장의 결과 이다. 좋은 업장을 쌓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니르바나 Nirvana -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탈한 경지. 열반(涅槃)이라고 음사한다. 디아나 Dhyana - 명상. 갈수록 정신을 청정하게 해나가는 여덟 단계가 흔히 거론된다. 선나(禪那)라고 음사하고, 줄여서 선(禪)이라고도 한다. 보디사트바 Bodhisattva -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음사(音寫)하고, 그것을 줄여서 보통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수행을 쌓아 언제라도 부처가 될수 있는 경지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마지막 해탈을 스스로 뒤로 미루고 있는 존재. 가장 널리 알려진 보살로 아발로키테슈바라 Avalokitesvara, 즉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꼽을수 있다. 붓다 Buddha - 진리를 깨달은 이. 불타(佛陀)라고 음사하였고, 줄여서 불(佛)이라고 한다. 삼사라 Samsara - 나고 죽음을 끝없이 거듭하는 끝없는 과정으로 존재의 실상이 그렇다고 한다. 윤회(輪廻)라고 번역한다. 상가 Sangha - 부처가 세운 출가 수행자들의 공동체. 승가(僧伽)라고 음사한다. 수냐타 Sunyata - 공(空). 모든 사물과 현상은 자성(自性), 즉 고유하고 항구적인 실체가 없고 상대적이라는 의미에서 공이라 한다. 쉴라 Sila - 윤리적 미덕, 또는 그것을 장려하는 계율.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율로 오계(五戒)가 있다. 계(戒), 계율(戒律)이라 번역한다. 스투파 Stupa - 유해를 보관하는 탑. 탄트라 Tantra - 밀교(密敎). 불교 중에서도 이른바 바즈라야나(Vajrayana)의 의례집이나 신통력을 얻기 위한 비의적(秘儀的)인 방법을 가리키는 말로, 대개는 구루(guru)의 가르침을 통해 전승된다. 바즈라야나는 지금의 주로 티베트에서 신봉하며, 금강승(金剛乘)이라고 번역한다. 프라즈냐 Prajna - 진리를 깨달은 지혜. 반야(般若)라고 음사한다. 프라티티아사뭇파다 Pratityasamutpada - 모든 현상과 사물은 서로 의존적으로 생겨난다는 법칙으로, 이로 인하여 윤회하는 세상 속의 모든 일이 서로 연관된다는 것. 연기(緣起)라고 번역한다. of Buddhism.svg|섬네일|220px|세계불교도우의회에서 정한 불교기. 인도의 불교 한국의 불교 일본의 불교 중국의 불교 라마교 (티베트 불교) 20세기에 들어서부터 불교가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지역으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인도에는 현재 8,000명 정도의 승려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승려 교육 기관은 없다고 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망명 정부를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세워서, 티베트 승려가 많아짐에 따라 인도인들에게도 불교가 전파되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인도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불교를 믿으면, 불가촉천민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지식인들과 유명인사들 사이에 참선수행과 불교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불교를 널리 전한 인물로는 일본인 스즈키 다이세츠, 한국인 숭산 행원 선사 등이 손꼽힌다. 쇼펜하우어 등 불교를 이해하고 수용한 철학자, 사상가들이 있었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정치 지도자이자 세계적 불교 지도자인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가 널리 알려져 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해 온 베트남 출신의 불교지도자 틱낫한(釋一行, Thich Nhat Hanh) 스님이 이끄는 수행공동체인 Plum Village가 프랑스 보르도에 소재하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 베트남 등지의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주로 모여 있다. 대도시에는 한국 사찰이 운영하는 포교당이 있는데 교민 중심의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러시아 속에 있는 칼미키야 공화국이 유일하게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다. 그 밖에 투바 공화국이나 부랴트 공화국도 불교를 믿는다. temple-Dangganjiju flag poles-01.jpg|섬네일|150px|right|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Dangganjiju.JPG|섬네일|150px|right|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한국 사찰 건축 당간(幢竿)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 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일주문 금강문 절에서 일주문(一柱門)다음에 위치하는 문이된다. 이곳에는 불법의 수호신인 금강역사를 모신다. 대신 천왕문(天王門)이 건축되기도 한다 사천왕문 사찰 지키는 사천왕을 모시는 문이다. 즉 천왕문에 모셔져 있는 사천왕상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을 비롯해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 이 모셔진 곳이다. 불이문/해탈문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 문이다. 즉 궁극적으로 인간이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서 발생된 여러가지 모든 번뇌와 해탈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문이라고 일컫는 것 이다. 대웅전(大雄殿) 교조이신 석가모니불을 대웅(큰 영웅)으로 모신 법당을 말한다. 대적광전 화엄경에 의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영원한 진리의 빛 그 자체)을 주불로 모신 전각을 말한다 지장전 명부전이라고도 한다. 명부란 염마가 다스리는 유명계 이르는 말로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곳이다. 요사채 승려들의 일상생활을 위해 지어진 절집을 이른다. 여기에는 해당되는 공간은 참선을 하는 선방이나, 승방은 물론 곳간, 부엌, 화장실(측간)까지도 포함된다 포탈라 궁(布達拉宮.Potala Palace) 중국 티베트 시짱에 소재한 달라이 라마의 궁전으로 붉은 건물인 홍궁과 흰 건물인 백궁으로 나눈다. 포탈라는 라마교(티베트불교)의 관세음보살이 사신다는 곳을 의미한다. 호류지(法隆寺) 쇼토쿠 태자 때 백제에서 지었다. 일본 성덕종(쇼토쿠 태자 관련 종) 총본산이 된다. 로쿠온지(金閣寺) 일본 나라현 교토에 소재한 금으로 도금한 3층 사리전이다. 예전에 학승이 금각에 화재 내서 그 후 시민들의 참여로 복원되었다. 흔히 금각사로 알려진 것 그 화재를 배경으로 소설 금각사로 잘 알려져 로쿠온지가 금각사라고 불리게 된다. 불국사(佛國寺)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에 소재한 절이다. 불국사 경내에 있는 흔히 김대성이 세운 줄 알지만 서기 528년(법흥왕 15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세워졌다고 불국사고금창기에 기재 되어 있고, 또는 이 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되었다고 하고 김대성(金大城)이 크게 3창 했다고 불국사 사적에 기재되어 있다. 석굴암(石窟庵)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불이다. 통일신라 시대 김대성(金大城)이 석굴암을 중창하던 중 끝내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지만 신라가 국가사업으로 완공하였다. 사서 기록으로는 석불사(石佛寺) 라고 하였다. 불화(佛畵):불교의 회화로, 불보살, 교리 같은 것을 그림으로 비유한 것으로 고려의 불화가 유명하다. 강원, 찰을 총림이라고 하며, 해인사 해인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수덕사 덕숭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백양사 고불총림의 5대 총림이 있다. 반야심경화엄경묘법연화경부모은중경금강경법구경아함경숫타니파타공덕경관음경능엄경목련경무량수경밀란다왕문경미륵상생경미륵하생경백유경불유교경사십이장경아미타경약사경열반경원각경천수경잡아함경유마경 등이 있다. 국가별 불교( Buddhism by country) 서구권의 불교( Buddhism in the West) * 유럽의 불교( Buddhism in Europe) * 미국의 불교 www.buddhism.or.kr (대한불교 조계종) www.cheontae.org (천태종) www.jingak.or.kr (진각종) www.chongji.or.kr (불교총지종) 분류:다르마 계통의 종교
안토니오 살리에리. 안토니오 살리에리 (, 1750년 8월 18일 - 1825년 5월 7일)는 이탈리아 레가노 태생의 음악가이다. 살리에리는 당시 세간의 찬사를 얻었던 음악가였다. 유년기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766년에는 빈 궁정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그 후 빈에 머무르며, 1788년에는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며, 사망 직전인 1824년까지 그 지위에 있는다. 빈에서 작곡가로, 특히 오페라, 실내악, 종교음악에서 높은 명성을 쌓는다. 그의 43편의 오페라 중에 가장 성공한 것으론, 《Danaides》(1784)과 《Tarare》(1787)을 꼽을 수 있다. 살리에리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여, 하이든등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교류가 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는 모두 어렸을 때,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의 열등감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1790년대 빈에는 살리에리의 도작설, 독살설등의 소문이 돌았으나, 이들 중 사실로 입증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는 여러 연극, 영화의 소재가 된다. 이들 중 유명한 것이 1984년작 영화 《아마데우스》이며, 이 안에서 살리에리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주변 인물(1인자)로 인하여 2인자로서 열등감과 시기를 보이는 심리적 증상으로 살리에리 증후군 (Salieri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굿 1766년 빈에 나와 F.L.가스만에게 사사 1788년 궁정악장이 되어 빈에 정주 1784년 그루크와의 공동 작품인 오페라 다나이드 Les Danades 파리 상연 1818년까지 음악예술가협회 지휘자 겸임 1824년 은퇴 《여류문인들 Le donne letterate》(1770) 《Armida》(1771) 《베네치아의 정기시장》(定期市場, 1772 초연) 《La scuola de gelosi》(1778) 《Der Rauchfangkehrer》(1781) 《오라스 Les Horaces》(1786) 《타라르 Tarare》(1787) 《Axur, Re d Ormus》(1788) 《Palmira, Regina di Persia》(1795) 《Falstaff o sia Le tre burle》(1799) 분류:1750년 태어남 분류:1825년 죽음 분류:이탈리아의 작곡가 분류:고전주의 작곡가 분류:오페라 작곡가 분류:19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인
vapor Watt ETSIIM.jpg|섬네일|300px|근대 공업화의 단초가 된 증기기관. 공학 (工學은 과학적, 경제학적, 사회적 원리와 실용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제품, 도구 등을 만드는 것 또는 만드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공학의 영역은 넓고, 여러가지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다. 공학이라 하면 수학과 자연과학을 기초로 해서, 가끔은 인문, 사회과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공동의 안전, 건설 복지를 위해서 유용한 사물이나 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공학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공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점은 있다. 어떤 현상을 눈앞에 두고 자연과학도는, “이 현상은 어떻게 된 것 일까?”나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라고 하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에 반해, 공학은 어떻게 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나 물건을 현실에 만들 수 있을까 를 추구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어떻게 하면 목표로 하는 성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학은 안전성, 경제성, 보안성 등 실용적인 관점에서 평가 및 판단을 한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인원, 예산의 제약 속에서 공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검토와 그 평가를 공학적 타당성이라고 하며, 공학적인 성질의 분석에는 환경 적합성, 사용성, 정비성(整備性,Maintainability), 수명주기비용 등 (질량, 속도같이 즉물적으로 단순하게 측정 가능한 성질과는 다르게, 인간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평가 방법이 필요한 것이 많다. 그렇게 해서 평가방법의 개발도 공학의 중요한 분야이다. 또한 공학은 다른 학문의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이라고 하는 면에서 공동의 복지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며, 공학 각 분야의 학회에 이론적인 내용을 쌓아 놓은 신조(Creed)가 정해져 있다. 현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의미로서의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고 하는 용법은 18세기에 돼서 생겨난 것이지만 ‘엔지니어링’의 개념에 합치하는 행위는 고대부터 행해져왔다고 생각되고 있다. 공학을 실천하는 것을 엔지니어(engineer) 또는 기술자라고 부른다. ‘엔지니어링’이라고 하는 단어는 꽤 최근에 생겨난 것이지만, 그 단어가 있기 전에 엔지니어(engineer, 기술자) 라고 하는 단어는 존재해 있었다. ‘engineer’는 ‘engine’‘’에 접미사인 ‘-er’이 붙은 형태를 하고 기관을 조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engineer’가 군용 병기 제작자의 의미로 쓰인 문헌이 1325년 경에 있었다. 동시에 ‘engine’은 ‘전쟁에 사용되는 기계장치’, 즉, 무기라는 의미가 있었다. ‘engine’의 어원은 1250년 경 라틴어의 잉게니움()으로부터 생긴 말로, 잉게니움은 천성, 성질 특히 재능을 뜻하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기발한 발명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에 민간의 다리나 건축물의 건설법이 공학 분야로서 발전함에 따라 civil engineering(토목공학) 으로 불리게 되었다. 애초에 engine 이 무기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군사와는 관련이 없는 분야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civil(시민) 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8세기 이전에 군사기술만을 의미하던 engineering‘이라는 단어가 civil engineering(=군사이외의 기술) 이 발전함에 따라 에너지 등을 이용해서 편의를 얻는 기술 전반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근대적인 공학의 개념은 상기한 경위로 형성된 것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밝혀내서 찾아본다면 고대에도 근대공학과 일치하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고대 로마의 수도와 도로나 콜로세움, 마야문명, 잉카제국, 아스테카의 테오티우아칸 등의 도시나 피라미드, 만리장성 등은 고대의 공학의 정교함과 기능을 보여준다. 최초로 토목기술자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는 임호테프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인 조세르왕을 섬기면서, 기원전 2630년부터 기원전 2611년쯤 사카라에서 조세르왕의 피라미드(계단식 피라미드)의 설계와 건설 감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에는 민간용과 군사용 양쪽의 분야에서 기계가 개발되었다. 안티키테라 섬의 안티키테라 기계가 알려진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하며,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기계는 초기 기계공학의 한 예이다. 그 후로 기계에 차동기어 또는 유성기어의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그 두 가지 기계이론의 중요한 원리가 산업혁명의 기어 트레인의 설계를 도와주었으며 지금까지도 로봇공학이나 자동차공학 등 여러 가지 분야에 넓게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엔 그리스에 투석기가 개발되었고, 중국과 그리스, 로마의 삼단범선은 물론, 바리스타나 캐터펄트라고 하는 복잡한 기계식 병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중세에는 트레뷰셋이 개발되었다. 월리엄 길버트는 1600년에 De Magnete 을 저술하고, electricity(전기)라고 하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전기공학자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기계공학에서는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들었다.이 증기기관의 개발이 산업혁명을 이끌어 대량 생산의 시대를 열었다. 18세기에는 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직이 확립되고, 공학은 수학이나 과학을 응용하는 분야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군사와 토목으로 나뉘어 있던 공학에 단순한 기술로 간주되었던 기계제작까지 공학의 한 부분으로 추가되었다. 1800년대의 알렉산드로 볼타의 실험이 있고 그 후 마이클 패러데이나 게오르크 옴 등의 선구자의 실험을 거쳐 1872년에 전동기가 발명된 것이 전기공학의 발단이다.19세기 후반에는 제임스 와트, 제임스 맥스웰과 하인리히 헤르츠의 성과에 따라 전자공학이 시작되었다. 그 후,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의 발명에 의해 전자공학의 발전이 가속되어 지금은 전자공학이 공학 중에도 특히 기술자가 많은 영역이 되었다. 토마스 세이버리와 제임스 와트의 발명에 의해 기계공학의 발전이 가속되었다. 산업혁명기(期)에 각종 기계나 그 수리와 보수를 위한 도구가 발달하고, 그런 도구들은 영국으로부터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화학공학도 산업혁명기(期)였던 19세기에 기계공학과 같이 발전했다. 대량 생산은 신소재나 새로운 제조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화학물질의 대량 생산이 필수적이었고 결국 그것이 1880년 경 까지 새로운 산업으로 확립되었다. 화학공학은 그러한 화학공장이나 제조법의 설계를 맡았다. 항공공학은 항공기의 설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항공우주공학은 우주선의 설계까지 확장된 비교적 최근의 학문분야이다. 그 기원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걸쳐진 항공기의 선구적 발전이지만, 최근엔 18세기 말의 조지 케일리의 업적이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초기의 항공기는 다른 공학 분야의 개념이나 기법을 도입해서 대부분 경험론적으로 발전해갔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해서 약 10년 후에는 항공공학이 크게 발전해, 제 1차 세계대전에 군용 항공기가 발전되기까지 했다. 반면, 과학적 기초를 닦는 연구는 이론 물리학과 실험을 결합하는 것으로 행해졌다. 공학에서 컴퓨터의 역할은 커지고 있다. 공학에 관해서 컴퓨터가 지원을 하는 각종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수리모델의 구축이나, 그것을 기본으로 하는 수치해석도 컴퓨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AD소프트웨어는 3차원 모델링이나 2차원의 설계도의 작성을 용이하게 한다. CAD를 응용한 DMU(Digital Mock Up)이나 유한요소법 등을 사용한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를 사용하면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 물리적인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않아도 모델을 작성해서 해석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으로 제품이나 상품의 결함을 알아내거나, 부품끼리의 맞물림을 조사하거나, 인체공학적인 면을 연구하거나, 압력, 온도, 전자파, 전류와 전압, 유체의 흐름, 운동이나 시스템의 정적 및 동적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정 공학 분야를 위한 소프트웨어도 있다. 예를 들어, CAM소프트웨어는 CNC공작기계에 주어지는 명령렬을 생성한다. 생산 공정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로 공정관리 시스템(MPM)이 있다.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는 반도체 집적 회로나 프린트 기반이나 전자 회로의 설계를 지원한다.간접재 조달을 관리하는 MRO소프트웨어도 있다. 최근엔, 제품 개발에 관련된 소프트웨어의 집합체로 제품 수명 주기 관리(PLM)소프트웨어가 사용되고 있다. 공학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행동에 좌우된다. 현대의 제품이나 건설은 반드시 공학설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공학 설계는 환경, 사회, 경제에 변화를 미치는 도구이며, 그 응용에는 큰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많은 공학계의 학회는 행동규약을 제정하고, 회원이나 사회에 그것을 알리려고 하고 있다. 공학 프로젝트 중에는 논쟁이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핵무기개발, 중유 추출 등이 있다. 이것에 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엄한 방침을 설정해놓은 기업도 있다. 공학은 인간개발의 중요한 원동력 중 한 가지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부근의 공학적 능력은 매우 낮고, 그 때문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대개 자력으로 중요한 기반시설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밀레니엄 개발 목표의 상당부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반시설의 개발과 지속가능한 기술적 개발이 가능하기 위한 충분한 공학적 역량을 필요로 한다. 해외의 개발이나 재해 구조를 실행하는 NGO는 기술자를 다수 모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자선단체가 인류를 위해 공학으로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경없는 기술자들(Engineers Without Borders) *Engineers Against Poverty(EAP) *Registered Enginners for Disaster Relif(RedR) *Engineers for a Sustainable World (ESW) 카르만은 고전적인 공학교과서 Foundation of Solid Mechanics의 개정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학은 과학과 완전히 다르다. 과학자는 자연을 이해하려고 한다. 기술자는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려고 한다. 기술자는 발명을 강조한다. 발명을 실현화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실체화해서,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형체로 설계해야 한다. 그것은 장치, 도구, 재질, 기법, 컴퓨터 프로그램, 혁신적인 실험,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 기존의 무언가를 개량하는 것이다. 설계는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형태나 수법이나 수치가 설정되어야한다. 새로운 설계에 착수하려면 기술자는 필요한 정보가 모두 준비되어 있을 리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많은 경우 과학지식의 부족에 따라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기술자는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이나 역학을 공부한다. 그러고 나서 공학에 있어서의 필요성에 따라 관련 과학의 지식을 추가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적 방법과 공학적 방법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공학적 방법은 과학적으로는 엄밀히 해명돼있지 않은 과거의 여러 사례에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경험론적 법칙을 짜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은 현상의 정확한 관찰이다. 관찰 결과를 분석해서 전달하기 위해, 공학적 방법이든 과학적 방법이든 수학 같은 분류기준을 사용한다. Walter Vincenti의 저서 What Engineers Know and How They Know it 에 따르면, 공학의 연구는 과학의 연구와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공학은 대체로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분야지만, 문제 자체는 정확한 방법으로 풀기엔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어 항공기에 관해 공기역학적 흐름을 나비어-스톡스 방정식의 근삿값으로 나타내거나 재료의 피로(疲勞, 영어 fatigue) 손상의 계산에 마이너 법칙을 사용한다. 또한, 공학에서는 태반은 경험론적인 수업도 자주 채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학은 자연과학과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발달해 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의 효율이 관한 연구로부터 열에 관한 인식이 깊어졌다.열에 관해 자연과학에서의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에 따라 냉각기술 또한 개발될 수 있었다. 목적이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의학과 공학의 일부 분야의 공통분모로 인체의 연구가 있다. 의학에 관해선 필요하면 기술을 사용해서도 인체의 기능을 유지, 강화해서 경우에 따라 인체의 일부를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있다. 현대의학은 이미 일부의 장기의 기능을 인공의 것으로 치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심장 박동기 등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의용생체공학은 생체에의 인공물을 채워 넣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영역이다. 역으로 인체를 생물학적 기계로 취급해 연구대상으로 하는 공학 분야도 있으며, 기술로 그 기능을 진화시키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뉴런 네트워크, 퍼지 논리, 로봇 등이 있다. 공학과 의학의 학제적인 영역 또한 존재한다. 의학과 공학은 실세계에 관한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상을 좀 더 엄밀하고 과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두 분야 모두 실험이나 경험적 지식이 필수로 되어있다. 의학은 인체의 기능도 연구한다. 인체는 생체 기계로 인식했을 경우에 공학적 수법으로 모델화 가능한 다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은 펌프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골격은 지렛대와 연결된 듯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또한 뇌는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있다.이런 유사성이나 의학에 관한 공학의 응용의 중요성의 증대에 따라, 공학과 의학의 지식을 응용한 의용생체공학이 태어났다. 시스템 생물학 같은 새로운 과학 분야는 시스템의 모델링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해석 등 공학에서 사용되어 왔던 해석 수법을 채용해서 생명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공학과 예술의 사이에도 관련이 있다. 건축, 조원,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은 마치, 공학과 예술의 접점을 교환하는 분야이다. 다른 부분에도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가 있다. 시카고 미술관은 NASA의 항공우주 관련 디자인에 관한 전람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로베르 마야르가 설계한 다리는 예술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남 플로리다 주립대에서는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학부에 예술과 공학을 맞추는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기의 예술가 겸 기술자로 유명하다. 정치학에 공학 이라고 하는 말을 도입한 사회공학이나 정치공학은, 공학의 방법론이나 정치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정치구조나 사회구조의 형성을 연구한다. 공학용어집 KIST 공학의 기원 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 (NAE) American Society for Engineering Education (ASEE) The US Library of Congress Engineering in History bibliography ICES Institute for Complex Engineered Systems, Carnegie Mellon University, Pittsburgh, PA History of engineering bibliography at University of Minnesota 다층 뉴럴 네트워크와 자기조직화사상의 애플리케이션
라이너스 칼 폴링 (Linus Carl Pauling,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은 노벨 화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이다.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이 자신이 쓴 《이중 나선(Double Helix)》에서 라이너스 폴링을 "당시 생화학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62년에는 지표 핵실험을 반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마리 퀴리는 물리학상을 남편과 함께 받았고 존 바딘은 두 번의 물리학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으며 프레데릭 생어도 1980년에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다.) 폴링은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헤만 헨리 윌리엄 폴링(Herman Henry William Pauling, 1876년 - 1910년)과 루시 이사벨 벨레 달링(Lucy Isabelle Belle Darling, 1881년- 1926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 칼(Carl)과 친할아버지(Linus)를 기념하여 라이너스 칼(Linus Carl)을 따라 지어졌다. 아버지 헤만과 어머니 루시는 각각 23살, 18살에 오레건주 콘돈의 한 디너파티에서 만났고 6개월 후 그들은 결혼했다. 헤만 폴링은 미주리 주의 콘코디아에서 독일계 이주 농민으로부터의 후손이다. 칼 폴링은 가족과 함께 오레건주의 오스웨고에 정착하기전 캘리포니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주조공장의 철물상으로 일했다. 중등학교를 마친 다음 헤만 폴링은 약사가 되기위해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의 견습생 수행이 끝난다음, 그는 제과점 도매상인이 되었다. 폴링의 어머니 루시는 영국, 스코틀랜드계 후손이며 교사, 농민, 측량사, 우체국장, 변호사로으로 일한 라이너스 윌슨 달링의 딸이다. 라이너스 달링은 11세에 고아가 되었으며 학교선생이 되기 전에 제빵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는 오레건주 터너에서 온 엘리스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결국 그들은 결혼했다. 1888년 7월 17일 엘리스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으나 유산되었다. 그리고 한달이 채 가기도 전에 네명의 딸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앨리스는 사망했다. 라이너스 폴링 태어난 후 1년을 포틀랜드에서 그의 부모님과 함께 단칸방 아파트에서 보냈다. 1902년 그의 여동생 파울린이 태어난 후 폴링의 부모님은 도시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살면서 아파트는 매우 붐볐고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루시는 헤만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동안 오스웨고의 헤만의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렀다. 헤만은 Skidemore 제약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된 살렘(Salem)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1904년 루실의 출생과 함께 헤만 폴링은 오스웨고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개인 약국을 개업했다. 그러나 오스웨고의 경기는 안 좋았으며 그과 그의 가족들은 1905년 콘돈으로 다시 이주했다. 1909년 폴링의 친할아버지 라이너스는 그의 두 번째 부인과 이혼했으며 그의 딸 루시(폴링의 어머니)와 나이가 거의 같은 어린 학교선생과 재혼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신장염으로 비롯되어 합병증으로 야기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동안에, 헤만 폴링은 복부의 주기적인 심한통증과 약한 체력으로 매우 고통받고 있었다. 루시의 여형제 애비(Abbie)는 헤만의 목숨이 위태롭도록 아픈 것을 보고 즉시 가정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의사는 통증을 완화시키기위해 헤만에게 진정제를 투여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경감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가오는 몇 달동안 매우 악화되었으며, 1910년 6월 11일 그는 라이너스, 루실, 파울린을 혼자 짊어지게된 루시를 남기고 위궤양으로 결국 사망했다. 폴링은 어린 시절 대단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폴링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아버지 헤르만 폴링은 지방신문 더 오리가니안(The Oregonian)의 편집장에게 아홉 살 아들이 더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묻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폴링의 초등학교 친구인 로이드 제프레스는 자기 방에 작은 화학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프레스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은 폴링이 화학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폴링은 할아버지가 수위로 근무했던 제철 공장에서 많은 실험 기구와 재료를 몰래 운반하여 화학 실험을 계속했다. 고등학생이 된 폴링은 책과 화학실험으로 쌓아온 엄청난 양의 화학지식으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고 화학 담당 선생님의 방과후 실험을 돕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폴링은 보수도 많이 받을 수 있는 화학공학자가 되고 싶어하였고 대학에 가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어머니 벨은 아들이 생계를 꾸리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돕길 원했고 폴링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었고 철물점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고민하던 폴링은 친구 제프리스 가족의 충고를 듣고 당시 오리건농업대학 (현 오리건 주립 대학) 화학공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폴링은 15세의 3학년 1학기 이미 오리건농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점을 다 채워놓은 상태여서 대학에 진학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으나 당시 오리건 주 고등학교 3학년 1년동안 필수 학점이었던 미국사 듣지 못하였다. 폴링은 학교장에게 1학기에 일년 과정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폴링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폴링의 모교 워싱턴고등학교는 45년 뒤, 이미 폴링이 두 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후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여름에 폴링은 식료품 잡화점에서 1주일에 8달러를 벌어가면서 아르바이트일을했다. 그의 어머니는 포틀랜드의 제조공장 다수를 운영하는 Schwietzerhoff와 면담을 하여 취직하도록 시켰다. 폴링은 견습공으로 한 달에 40달러를 받으며 고용되었다. 폴링은 그의 일에 매우 능숙해서 월급이 인상되어 한 달에 50달러를 받으며 일했다. 그는 여가시간에 그의 친구 둘과 함께 사진실험실을 세우고 작은 사진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이 비즈니스를 함으로써 후에 그가 대학생활을 할 수있도록 충분한 돈을 벌수있도록 소망했다. 폴링은 오레건주 농업대학에서 입학허가 편지를 1917년 9월에 받았고 그의 어머니와 직장 사장에게 그의 대학입학계획을 알렸다. 1917년 10월, 폴링은 그가 대학생활비용으로 모아두었던 200여달러를 사용하면서 그의 사촌 Mervyn과 함께 Corvallis 캠퍼스 주변 하숙집에서 살았다. 첫 번째 학기에서 폴링은 화학과에서 두 과목, 수학에서 두 과목, 기계 제도, 현대영어산문, 체육 그리고 군 훈련을 수강신청했다. 폴링은 그의 학교 생활 초기에 1학년 여학생 이린(Irene)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폴링은 그가 저축한 150달러정도으로 그녀를 위해 쓰기도 했다. 그는 곧 여학생기숙사의 주방을 정리하는 업무와 고기를 자르고 난로의 장작을 패는 일을 한달에 100시간 정도하는 그러한 일을 했다. 시간당 25센트의 보수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재정적으로 곤란함을 겪었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캠퍼스의 식당에서 하루에 한끼 식사하는 걸로 때웠다. 폴링은 매우 대학생활을 활발히 했기 때문에, Delta Upsilon이라는 비영리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학년 이후에 어머니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포틀랜드에서 돈을 벌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는 그를 정량분석을 가르치는 위치를 그에게 권했고, 그는 마침 정량분석이라는 과목을 막 이수한 상태였다. 그는 일주일에 40시간을 실험실과 교실에서 일하여 한 달에 100달러정도 벌었다. 그리고 이러한 돈은 그가 대학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2년간의 대학생활에서 폴링은 원자와 분자의 전자구조에 대한 일을 했던 Gilbert N. Lewis와 Irving Langmuir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그의 연구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물질의 성질을 이용하여 어떻게 그것들이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구조와 관련되어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자화학이라는 새로운과학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폴링은 인류학 사회학에 대한 공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게다가 물리, 수학부의 필수과목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다루었다. Samuel Graf교수는 폴링을 높은 수준의 수학과정에서 그의 조교로서 선발했다. 4학년 겨울 무렵, 폴링은 가정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화학부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제안받았다. 그곳에서는 폴링의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인 Ava Helen Miller가 있었다. 1922년 폴링은 오레건주 주립대학을 졸업했으며 화학공학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원을 캘리포니아 주의 패서디나의 칼텍으로 지도교수인 Roscoe G. Dickinson 지휘 아래로 갔다. 그는 결정의 구조를 결정짓는 X선 회절분광법의 사용을 포함하는 연구로서 졸업을 했고 그가 칼텍에 있는동안 광물질, 무기질들의 결정구조에 관한 7장짜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에서 phD를 받았으며, 1925년에 수리물리학분야의 최고 영예와 함께 졸업했다. 1917년 폴링은 코발리스(Corvallis)에 위치한 현재 오리건 주립 대학의 전신인 오리건 농업 대학(the Oregon Agricultural College)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는 full-time 으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장작을 쪼개고, 청소를 하고, 여학생 회관의 주방에서 고기를 써는 등의 일을 하였다. 또한 2학년 여름방학에는 아스팔트 성분을 시험하는 일자리를 구했고 쓰고 남은 돈을 집에 보냈다. 그러나 2년의 학업을 마치고 어머니 벨은 아들 폴링에게 1년동안 휴학을 하고 일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폴링은 화학교수로부터 1년동안 정량화학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받게 되고 학교에 계속 남아 돈도 벌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된다. 폴링은 강의 준비에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고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점차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았다. 1922년 겨울학기 가정경제학과의 화학수업을 맞게 된 폴링은 수업에서 아바 헬렌 밀러를 만나게 되고, 둘은 1923년 6월 17일에 결혼하게 된다. OAC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에,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화학과장 길버트 루이스와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공업화학자 어빙 랭뮤어의 원자의 전자구조와 분자를 이루는 화학결합에 대한 성과를 접하게 된다. 그는 두 원자 사이에 공유 전자를 가진 화학 결합이 생긴다는 그들의 이론에 매혹되었고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원자들의 결합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자신의 주 연구분야로 하기로 하고, 양자 화학의 기초를 세운다. 1922년 폴링은 OAC를 졸업하고, 칼텍의 아더왕이라고 불리는 저명한 화학자 아더 아모스 노이즈에게 발탁되어 칼텍(California Institue of Technology, Caltech)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다. 그는 로스코 G. 디킨슨의 지도 아래 X선 구조결정학을 연구하였고 몰리브덴광을 비롯한 다섯 가지 결정의 원자구조를 밝혀냈다. 그는 1925년 물리화학과 수리물리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0년대 말에 폴링은 화학결합의 본질에 관한 논문을 내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1939년에 출판한 화학결합에 관련된 그의 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폴링이 1954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인 화학결합의 본질과 그것을 이용한 복잡한 물질들의 구조규명에 관한 연구 에 기초하고 있다. 폴링은 그의 화학결합에 관한 연구들을 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 에 집약시켜서 출판하였고 이 책은 가장 영향력이 큰 화학책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1939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를 때까지 이 책은 16000 번 이상 인용되었다. 심지어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분야에 관련된 논문들은 종종 그의 책을 인용하고는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련된 업적 중 하나는 혼성오비탈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자에 있는 전자는 s 혹은 p 오비탈등의 오비탈의 모양의 확률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원자간의 결합을 설명할 때에는 다른 종류의 오비탈의 성질을 섞은 새로운 함수를 정의하면 훨씬 설명이 편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탄소원자의 경우 한 개의 2s 오비탈과 3개의 2p 오비탈을 가지고 있는데 이 4개의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4개의 동일한 오비탈(sp3 혼성오비탈)을 만드는 것으로 메탄과 같은 탄소화합물에서 탄소가 4개의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탄소의 4개 오비탈 중 1개의 2s 오비탈과 2개의 2p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3개의 동일한 오비탈(sp2 혼성오비탈)을 형성하고 2p 오비탈 한 개는 혼성화를 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불포화 탄소화합물인 에틸렌과 같은 화합물의 결합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탄소는 다른 화합물에서 다른 형태의 혼성화를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대한 업적 중 또 하나는 이온결합과 공유결합간의 관계를 규명한 것이였다. 이온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원자간에 전자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고 공유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전자의 균일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폴링은 이 두 종류의 결합이 상극을 이루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원자간의 결합의 성격은 이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링 자신이 제창한 폴링의 전기음성도 의 개념이 쓰이게 된다. 결합을 이루는 두 원자의 전기음성도 차이가 결합의 이온성 즉 원자간의 결합이 이온결합과 공유결합중 어느 결합과 더 비슷하게 존재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한 업적 중 세 번째 것은 방향족 탄화수소의 구조를 규명하는 것이였다. 이 이전까지 벤젠의 구조에 대한 가장 나은 설명은 독일의 화학자인 케쿨레의 설명이였다. 케쿨레는 벤젠이 두 가지의 구조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 하면서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때 첫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이중결합으로 이중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으로서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폴링은 양자역학에 기초하여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벤젠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이중결합과 단일결합의 중간쯤 되는 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벤젠의 구조는 케쿨레가 제시한 두 가지 구조의 사이의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두 가지 구조가 존재하여 그 두 가지 구조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후에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공명(resonance) 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폴링의 벤젠구조에 대한 설명은 앞서 그가 제시한 오비탈의 혼성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설명 모두 여러 개의 전자구조가 합쳐저서 그러한 구조들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1952년 9월 16일에 폴링은 나는 원자핵 모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겠다 라는 문장으로 새로운 연구노트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10월 15일 폴링은 Science 지와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지에 그의 원자핵 모델인 Close-Packed Spheron Model 을 발표하였다. 이후 거의 30년동안 폴링은 1994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spheron cluster model 에 관련된 여러개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폴링의 spheron model 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은 원자핵은 중성미자 무리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은 중성미자 무리에는 중양자, 알파입자, 3중양자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짝수의 원자번호를 갖는 원자핵의 경우 알파입자의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폴링은 원자핵의 구 구조를 platonic solid 와 같은 기하적 구조로부터 도출 해내었는데 이는 이 당시의 독립 입자 모델로 부터 이를 도출해내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랐다. 또한 1990 년에 폴링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모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최근에 나는 실험적으로 측정된 들뜬 상태와 바닥상태의 진동에너지를 분석함으로써 원자핵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Physical Review Letter 나 다른 물리학 출판물을 보면서 나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핵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자 중 여태까지는 어느 누구도 내가 밝혀놓은 것까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밝힌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연구를 앞으로도 나의 속도에 맞추어 진행할 것이다. 1930년대 중반, 폴링은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비록 그가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던 것은 무기 분자 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록펠러 재단의 자연과학자금 책임자였던 위버는 폴링에게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대어 주었다. 따라서 그 돈으로 연구 건물을 새로 짓고 직원을 뽑고 장비를 구축하여 분자생물학 분야로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분야로의 연구를 위해 토마스 헌트 모건,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캘빈 브리지스, 알프레드 스터트반트와 같은 생물학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얻어나갔다. 그 당시 폴링은 생명이 없는 화학물질이 생명체로 변환되는 데에 단백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힌다면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X-ray 회절 분석을 통해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분석하려고 하였지만 단백질은 그 방법에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백질은 크기가 너무 크고 다양한 거대 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단백질은 조금만 가열해도 변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제, 분리도 어려웠다. 따라서 1930년대 영국의 결정학자 윌리엄 아스트버리가 찍은 가장 좋은 X-ray 사진에 대해 폴링은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11년이 걸렸다. 그의 수학적인 분석은 옳았지만, 아스트버리의 사진에서 단백질 분자는 예상 위치보다 기울어져 있었다. 폴링은 단백질의 변성 실험을 통해 단백질은 가역적인 약한 결합과 비가역적인 강한 결합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약한 결합을 수소결합, 강한 결합을 공유결합이라고 추정하였다. 이후 그는 미르스키와 함께 아미노산들이 공유결합의 일종인 펩티드 결합을 통해 사슬을 형성하고 이들이 약한 수소결합을 통해 특별한 모양을 가진 단백질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아미노산의 구조를 밝혀 펩티드 결합의 길이와 각도를 결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단백질의 가능한 구조의 수를 대폭으로 줄일 수 있었고 단백질의 성질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폴링은 이 연구를 통해 헤모글로빈 구조 모델에서는 원자들이 나선형 구조로 배열되어있다고 밝혔고, 이 아이디어를 일반화하여 단백질에 적용시켰다. 1951년, 아미노산과 펩티드의 구조, 그리고 펩티드 결합의 평면 성질을 기반으로 하여 폴링과 로버트 코리, 그리고 헤르만 브랜손은 단백질 2차 구조에서 1차적인 구조적 특징으로서 알파 나선과 베타 병풍 구조를 제안하였다. 1936년 폴링은 오스트리아 출신 과학자 랜스타이너를 만났고 항체에 대한 의문점을 듣게 되었다. 항체들은 모두 비슷한 크기의 단백질인데 어떻게 특정한 항원을 정확히 구별하고 결합할 수 있는가? 폴링은 이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특정한 항원만을 구별하는 항체의 특이성이 분자의 구조와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1940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항체의 한쪽 끝이 항원에 닿으면 주위에서 모양을 형성하여 수소결합이나 정전기적 인력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항체와 항원이 상보적 형태를 가지게 되어 잘 들어맞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으로 폴링은 이 분야를 이끌어갔고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단백질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낸 폴링이었지만 여전히 생명의 비밀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1952년 허쉬와 체이스의 실험 결과로 유전자는 DNA로 구성되어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나자 폴링은 DNA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는 DNA의 구조를 연구한 끝에 DNA는 삼중나선 구조라고 제안하였고, 1952년 DNA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의 모델은 기본적인 실수가 있었다. 폴링은 DNA의 염기를 중심으로부터 바깥쪽에 배치시켰고 인산기를 안쪽에 배치시켜 서로 결합한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폴링이 DNA의 구조의 분자적 모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캐번디시 연구소에 전해졌을 때, 왓슨과 크릭은 DNA의 분자적 모델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가 아직 출판하지 않은 데이터에서 도움을 얻었는데 그들의 데이터는 나선과 그 축을 따라 평면의 염기가 있음을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1953년 초,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올바른 구조로서 DNA 이중 나선을 제안하였다. 사실 왓슨과 크릭도 DNA는 삼중나선 구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생각에 대해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그들이 건넨 모형을 찢어버렸다. 그 모델의 문제점으로 음전하를 가진 인산기들이 DNA 분자 중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분자가 너무 촘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왓슨과 크릭에게 자신이 찍어낸 DNA의 X선 회절사진을 제시하였고 이 때문에 왓슨과 크릭은 바른 길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폴링은 밀도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였고 좋은 품질의 X-ray 회절 사진을 얻지 못하는 등 D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들을 인정했다. 폴링이 그 문제를 조사하는 동안, 영국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X-ray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사진은 왓슨과 크릭의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폴링은 자신의 동료 로베르트 코레이가 프랭클린의 사진 몇 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DNA 구조를 고안하기 전에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의 연구소에 방문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폴링이 DNA 삼중나선_ 이론을 급하게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얻은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9년 11월, 라이너스 폴링, 하베이 이타노, S.J. 싱어, 그리고 이베르트 웰스는 이라는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출판하였다. 이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에 의한 인간 질병의 첫 증거물이었고, 분자 수준에서 이해된 첫 번째 질병이었다. 전기영동을 통해 그들은 겸형 적혈구 빈혈증에 걸린 환자 각각은 적혈구에서 변형된 형태의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겸형 적혈구 형질을 가진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형태의 헤모글로빈 모두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멘델 유전이 단순히 단백질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의 특정한 물리적 특성까지 결정함을 보여주는 첫 증거였다. 즉, 분자유전학이 도래했음을 나타내었다. 1951년, 폴링은 “분자의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1950년대 후반, 폴링은 정신병이 효소의 기능장애로 발생한다는 믿음에 뇌의 기능에서 효소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였다. 1965년, 폴링은 아브라함 호퍼의 이라는 논문을 읽고, 비타민이 그와 관련된 결핍증의 예방과 무관하게 생화학적으로 중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1968년 폴링은 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투고하였다. 하지만 이 논문은 1970년대에 다소 논쟁이 있는 비타민 대량 투여 요법 운동을 야기했다. 폴링은 몸 속에 존재하는 물질의 농도를 변화시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실행을 언급하기 위해 “orthomolecular(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의 생각은 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 의학의 기초를 형성했으나 통상적인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실행되지 않고 강경하게 논쟁해왔다. 비타민 C에 대한 폴링의 연구는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66년 생화학자 어윈 스톤의 비타민 C 복용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가져, 폴링은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매일 비타민 C 3 g을 복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영향이 있음을 인지하고 1970년 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는 1971년 영국의 암 외과의사 카메론과 함께 말기 환자들에게 암 치료요법으로 비타민 C를 복용시키거나 정맥 주사를 통해 주입하는 장기 임상 실험을 공동으로 시작하였다. 카메론과 폴링은 그들의 관찰 결과를 담고 있는 많은 전문 논문과 >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였다. 폴링은 비타민 C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결국 비타민 C를 투여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생존 확률이 4배나 더 높다는 결과를 담고 있는, 다소 진위가 의심스러운 말기 환자들 100명 그룹에 대한 두 연구를 출판하였다. 이후 메이오 클리닉에 의해 수행된 임상 시도에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10,000 mg)은 암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플라시보 효과보다 좋지 못했고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이는 비타민 C가 암 치료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의학 협회 역시 비타민 C가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엉터리라고 결론지었다. 폴링은 그 연구 결과들을 비난하였고 최종 연구를 “사기와 계획적인 잘못된 설명”으로 간주하였으며, 비타민 C를 정맥주사를 통해 주입하지 않고 구강 복용을 시킨 연구에 대해 비판하였다. 또한 실험에서 조작 변인은 비타민 C를 복용하는 것이었고, 비타민 C 복용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메이오 클리닉을 비판하였다. 폴링은 암 환자들은 지속적으로 비타민 C를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시도에서 메이오 클리닉 환자들은 두 달 반 동안만 비타민 C를 복용하였다. 그 결과는 공개적으로 오랫동안 폴링과 카메론, 그리고 메이오 클리닉 사이에서 상당히 신랄한 논쟁이 일었다. 특히 서로 간에 위법 행위와 과학적 무능력함에 대해 비난이 일었다. 최종적으로 메이오 클리닉 연구의 결과들이 암 치료제로서의 비타민 C에 대한 관심을 종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비타민 C를 암과 감기 치료제로 진척시키기를 지속하였는데, 비타민 C를 뇌가 손상된 아이들에게 치료제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능력계발연구소 (The Institutes for the Achievement of Human Potential) 와 함께 연구하였다. 그는 이후 캐나다의 내과의사 아브람 호퍼와 함께 부가적인 암 치료법으로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을 비롯한 미량 영양소 식이요법을 공동연구를 하였다. 아서 B. 로빈슨, 그리고 다른 동료와 함께 폴링은 1973년에 캘리포니아 먼로 파크에 분자교정의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곧 라이너스 폴링 과학의학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폴링은 비타민 C에 대한 연구를 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까지 이론 화학과 물리 연구를 계속하였다. 말년에 그는 동맥경화증 예방에 대한 비타민 C의 역할의 가능성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리신과 비타민 C를 이용해 협심증을 경감시키는 사례보고 3편을 발표하였다. 1996년에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오리건 주 Corvallis로 이전하여 오리건 주립 대학교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에서 미량영양소, 피토케미컬 (식물에 있는 화학 물질), 그리고 다른 물질들을 식이요법에 적용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를 지속하였다.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가 Palo Alto에 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연구 조감독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은 연구소가 이전한 뒤에 유전 정보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폴링은 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치에 무관심하였으나, 전쟁의 여파와 아내 아바 헬렌의 평화주의는 폴링 역시 평화주의자의 길을 걷게 해주었다. 그는 대부분이 유태인인 독일의 동료과학자들이 보내는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여행에 필요한 사증을 발급받아 나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때부터 폴링은 히틀러의 독재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하였고, 1939년 유니언 나우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이 단체는 전 세계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미국의 연방제를 모형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로, 폴링은 이 단체에 가입을 하게 된 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나치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폴링은 또한 미 해군 잠수함의 산소측정기, 폭약, 로켓 추진체 등 미국의 군수 관련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맨허튼 프로젝트 초기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주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폴링을 화학분야 담당으로 초청하나 폴링은 가족과 멀리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거절한다. 전쟁 중 미국 정부가 서부해안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하는 일이 발생하자 아바 헬렌은 이것에 항의하여 미국시민 자유연맹의 감금반대 투쟁을 돕는다.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폴링을 포함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원자과학자연맹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면서 원자력기술의 공유와 원자력을 민간 통제 하에 둘 것을 요구하였다. 1946년에 아인슈타인은 대중에게 핵무기 개발의 위험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를(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 조직하였고 폴링도 이에 가입한다. 그는 그의 정치적 지지자인 아내 아바 헬렌과 함께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였다. 그러나 1946년 가을 스탈린의 동유럽 봉쇄와 중국의 공산반군 등 공산주의의 세력이 강해지자 미국인들은 반공주의로 돌아섰으며 원자기술공유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냉전체제가 강화되고 국가적으로 반공주의가 대세였던 1950년대에도 그는 반핵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미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을 거절당하기도 아였다. 그의 여권은 1954년 그의 첫 노벨상 수상에 앞서 잠시 재발급되었다. 칼텍의 많은 친구들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총장 두브리지는 폴링에게 정치적 연설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1951년 논란이 되는 단체들을 탈퇴하고 연설들을 중지하였으며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나, 언론의 비난과 국회의 의심은 계속되었다.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에는 대중과 지인의 의심이 많이 풀렸고 폴링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폴링은 다시 원자폭탄으로 인한 방사능 피폭과 낙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58년 폴링은 배리 커머너 등과 함께 방사성 동위원소 Sr-90의 유아 치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하였고 1962년에는 루이스 라이스 등과 함께 낙진으로 떨어진 Sr-90을 젖소가 먹고 젖소로부터 우유를 먹는 사람의 뼈에 축적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물리학자이자 반공주의자인 텔러와 방사능 낙진의 위험에 대한 TV토론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폴링은 1958년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중지를 청원하는 서명을 받아 서명목록을 UN에 제출하였다. 대중의 압박과 낙진의 위험에 관한 연구결과는 1963년 미국과 소련이 지하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조약은 그해 10월 10일부터 효력이 발생했고 바로 그날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폴링의 화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한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논객들은 폴링의 정치적 행보에 비판적이었으며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1960년 폴링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낙인 찍은 상원의 한 조사 소위원회에 출두를 명령받아 그토록 많은 서명들을 모은 과정에 대해 해명을 요구받았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비판적인 여론은 계속되었다. 그가 1962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자 미국 라이프 잡지사는 “노르웨이에서 온 수상한 모욕”이란 헤드라인을 냈다. 칼텍 총장 두브리지 역시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 폴링은 노벨상 상금을 가지고 평화에 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3년 10월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칼텍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1962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노벨의 유언에 적합한 평화상 후보를 찾지 못하였다. 노벨상 규정에 따라, 이 경우 1962년 노벨상 후보를 다음 년도로 미룰 수 있었다. 이 노벨평화상을 폴링이 받게 됨으로써 폴링은 1962년 노벨평화상을 1963년에 받게 된 것이다. 폴링은 1994년 8월 19일 캘리포니아주 Big Sur의 그의 자택에서 7시 20분경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비타민C 아버지 ‘라이너스 폴링’ 1922년부터 1994년 사이 폴링의 공책 46권 스캔 자료 (英) Linus Pauling Genius or Crank? a detailed overview of Pauling s work in molecular medicine and vitamin C. Linus Pauling Online a Pauling portal created by Oregon State University Libraries Francis Crick The Impact of Linus Pauling on Molecular Biology (transcribed video from the 1995 Oregon State University symposium) The Ava Helen and Linus Pauling Papers at the Oregon State University Libraries The Pauling Catalogue The Pauling Blog Linus Pauling (1901-1994)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biography Caltech oral history interview Berkeley Conversations With History interview Linus Pauling Centenary Exhibit Linus Pauling from The Dictionary of Unitarian and Universalist Biography Linus Pauling Investigates Vitamin C The Linus Pauling Institute at Oregon State University The Many Lives of Linus Pauling A Review of Reviews J. Chem. Educ. Pauling s CV Publications of Pauling Linus and Ava Helen Pauling Hall at Soka University of America, devoted to pacifism in global citizenship. The Linus Pauling Papers - Profiles in Science,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분류:1901년 태어남 분류:1994년 죽음 분류:미국의 무신론자 분류:미국의 화학자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자 분류:노벨 화학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오리건 주립 대학교 동문 분류:스탠퍼드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고 분류:물리화학자 분류:이론화학자 분류:무기화학자 분류:미국의 생화학자 분류:생물물리학자 분류:미국의 반전 운동가 분류:포틀랜드 (오리건주) 출신 분류:레닌 평화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의학자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20세기 화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윌리엄 제퍼슨 "빌" 클린턴 (, 본명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 (), , 1946년 8월 19일 ~ )은 제40대와 제42대 아칸소 주지사를 지냈으며,1993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한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다.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냉전이 끝난 시대에 대통령이 되었고, 첫 번째 베이비 붐 세대 대통령이었다. 클린턴은 새로운 민주당(New Democrat) 계열로 묘사된다. 그의 정책 중 일부인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복지 개혁은 중도주의 제3의 길 통치 철학 때문에 추진한 것으로 추정되며, 반면에 그는 다른 정책에 대해서 중도 좌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클린턴은 나중에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평화로운 경제적 확장 기간이 된 경제적 확장의 지속을 이끌었다. 의회 예산국은 2000년에 클린턴의 재임기간의 예산이 흑자라고 보고했다. 건강보험 개혁의 실패 이후에 공화당은 1994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40년만에 처음으로 승리했다. 3년 뒤 1997년에 클린턴은 재선되었고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처음으로 두 번의 임기를 채운 대통령이 되었다. 소년 시절 빌 클린턴이 살았던 집으로 아칸소 주의 호프에 있다. at Georgetown 1967.jpg|오른쪽|위오른쪽|섬네일|클린턴은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교의 외교대학에 입학했고 1968년에 학위를 받았으며, 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pres library.jpg|섬네일|왼쪽|195px|아칸소주 리틀록에 위치한 윌리엄 J. 클린턴 대통령 센터 및 공원의 모습 클린턴은 아칸소주의 호프(Hope)에서 태어나 유명한 온천 휴양도시인 핫스프링스(Hot Springs)에서 자랐다. 당시 이 지역은 도박이 난무하였던 곳으로, 후에 근절되었다. 빌 클린턴은 아칸소주 호프(Hope)에서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 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주니어는 외판원이었고 빌이 태어나기 석달전에 자동차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빌이 태어난후 그의 어머니는 간호사 공부를 위해 뉴 올리언스에 가게 되었고 빌은 마트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외조부모와 함께 호프에서 살았다. 그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차별이 있었다. 빌의 외조부모는 모든 인종의 사람들에게 신용으로 물건을 팔았다. 1950년 빌의 어머니(출생시 성명 버지니아 델 캐시디)(1923년–1994년)는 뉴 올리언스에서 돌아왔고 그해 자동차 딜러를 운영하는 로저 클린턴과 재혼하여 핫스프링스(Hot Springs)으로 이사했다. 빌의 어렸을 적 이름은 빌리였고, 어머니와 양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빌의 계부는 노름꾼에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자주 술에 취해 아내를 폭행하고 때로는 빌리의 이부(異父)동생인 로저 주니어(1956년생)나 심하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환경으로 어머니 버지니아는 빌리가 계부의 성을 따르는 것에 반대하고, 계부와 잠시 이혼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정의 안정을 위하여 모친 버지니아는 로저 클린턴과 다시 결혼하였고, 빌은 1962년 법적으로 클린턴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계부 로저 클린턴이 1967년 암으로 사망한 후, 모친 버지니아는 1969년 제프 드와이어와 재혼했다. 빌의 새 계부 제프 드와이어도 1974년 사망했고, 모친 버지니아는 1982년 딕 켈리와 재혼했다. 이와 같이 빌리의 가정은 전통적이기도 하지만, 복잡한 가정 환경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경으로 그는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를 즐겨먹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당시 아칸소 주에서 벌어지던 인종 갈등을 생생히 목격하면서 흑인 민권 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는 아칸소 주 학생 대표로 뽑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정치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어,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에서 지내고 싶다는 이유로 아칸소 주 출신의 개신교(침례교) 신자로서는 드물게 예수회에서 설립한 조지타운 대학교(워싱턴소재)에 입학했다. 핫스프링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4년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하여 1968년 국제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고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포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1970년 PPE(철학, 정치, 경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포드 대학교 재학 관계로 외국에 체류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병역의무가 면제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후에 병역을 기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여 3년 후 1973년에 J.D.(법무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예일 로스쿨 재학 중 한 학년 선배였던 힐러리 로댐을 만나게 되었고, 1975년 결혼했다. Clinton 1978.jpg|섬네일|215px|왼쪽|1978년 지미 카터를 만난 클린턴 예일 로스쿨 졸업 후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에서 교수로서 법을 가르치면서 1974년 불과 28세의 나이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낙선했다. 1975년에는 힐러리 클린턴과 결혼하였고 1976년 아칸소 주의 법무장관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에는 아칸소 주 주지사로 선출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2세로 당시 미국 최연소 주지사였다. 그러나 19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프랭크 화이트에게 패하여 낙선당했다. 1982년 다시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 1986년과 1990년 재선되어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아칸소 주의 주지사를 연임했다. 클린턴은 1992년 선거에서 현직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와 무소속 후보인 로스 페로를 꺾었다. 이 선거에서 그는 국내의 문제들에 집중하여 특히 불경기에 대한 이슈를 제기했다. 그의 선거 운동 본부의 캠페인 문구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 s the economy, stupid)였다. Clinton taking the oath of office, 1993.jpg|섬네일|왼쪽|1993년 취임식을 올리는 클린턴 클린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로 두번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그의 당선으로 인해 12년 간(1981.1~1993.1)의 연속된 공화당 정권(로날드 레이건(1981.1~1989.1), 조지 H. W. 부시(1989.1~1993.1))이 막을 내렸다. 그 선거 이후 민주당은 지미 카터의 통치 이래 최초로 의회 및 행정부를 포함한 연방정부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재임 초기 계속된 실책으로 인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크나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특히 하원에서는 40년 만에 공화당에 다수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Clinton, Yitzhak Rabin, Yasser Arafat at the White House 1993-09-13.jpg|섬네일|180px|왼쪽|1993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함께 시카고의 어느 어린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클린턴 대통령 즉각적으로 정권을 인수받은 후 클린턴은 1993년 가족의료법안에 관한 대선 공약에 즉각 서명하게 된다. 본 법안은 고용인에게 종업원의 의료문제 발생상황시 의료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근로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보호법안이었다. 이 정책이 대중적이었던 반면, 클린턴이 대선 초기에 공약했던 군대 내 동성애자 권리 정책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태도는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진보진영은 정책이 다소 실험적이라고만 주장했고 보수진영은 군생활에서 별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토의가 있은후 클린턴과 팬타곤은 일명 ‘묻지도 말고 대답도 할 필요없다’는 정책에 합의하게 되며 그것은 오바마 대통령 까지 유효하게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공약대로 연방공무원 10만명 감축 지시를 내렸고, 고어 부통령에게 정부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고어 부통령의 주도 아래 국정성과평가팀(NPR)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미국의 행정 개혁은 정보기술을 통한 정부 재구축 프로그램을 통해 공무원을 30만명 이상 감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미국 행정 개혁의 성공은 정보기술을 활용한 전자정부의 구현을 통해 이룬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클린턴이 재임하는 1990년대 동안에, 클린턴은 연속적인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클린턴 행정부의 미국의 경영 예산과에 따르면, 1991년 4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빌 클린턴은 수많은 여자들과 스캔들에 관련되어 수모를 겪었는데 1998년 특검 검사 케네스 스타의 집요한 추적으로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이 밝혀져 탄핵 직전까지 몰렸으며 3000만 달러를 부정대출로 받은 화이트워터게이트 사건 등과 폴라 존스 사건 등 각종 스캔들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클린턴 가족(왼쪽이 빌 클린턴, 오른쪽 위가 힐러리, 아래가 첼시 클린턴) 2009년 8월 4일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 여기자 억류사태 해결 협상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여기자들을 대동하여 귀국했다. 특히 그는 핵문제 해법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뜻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의 방북은 단순한 여기자 2명을 석방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북미 관계와 북핵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빌과 전 국무장관인 힐러리 사이에 1980년에 태어난 외동딸 첼시 클린턴이 있다. 백악관에서 사춘기를 보낸 첼시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옥스포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NBC 뉴스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현재 클린턴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나의 삶》, "My Life"(2004년). .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빌 클린턴 클린턴 재단(영문) Photos of Bill Clinton s actions to bring peace to the Middle East. 분류:1946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대학 교수 분류:미국의 대통령 분류:아칸소주 출신 정치인 분류:아칸소주지사 분류:예일 대학교 동문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동문 분류:조지타운 대학교 동문 분류:탄핵 절차가 진행된 공직자 분류:로즈 장학생 분류:미국의 침례교도 분류:민주당 (미국)의 정치인 분류:1992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1996년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미국의 자서전 작가 분류: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분류:미국의 회고록 작가 분류:클린턴가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아일랜드계 미국인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 분류:민주당 (미국) 대통령 후보 분류:미국의 유엔 직원 분류: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교수
레온하르트 오일러 (, , 1707년 4월 15일 ~ 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개신교 목사가 되길 바랐지만,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발탁된 후 그의 제자가 되어, 수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함수의 기호 (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와 같은 수학적 기호 및 법칙들로 인해서 뛰어난 수학자로 기억된다.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6명의 아이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바젤에서 태어났지만, 리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것은 어린 오일러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당시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했다가 탈락해서, 이 제의를 수락했다.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그 곳에 도착했고, 그는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의 딸인 카타리나 젤과 결혼했다. 그러나 너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게 된다. 백내장 수술로 잠시 앞이 보이는 행운을 맞았지만, 그 후에는 눈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다시 시력을 잃게 된다. 17년 동안이나 맹인으로 살게 됐지만, 그는 거기서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력을 잃은 후에 더 열심히 연구해서,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한다. 그는 그 어떤 수학자들보다도 많은 책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데,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광학 등의 수많은 책을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1권도 쓸모가 없는 내용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783년 9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오일러의 마지막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오전에도 오일러는 팽창하는 풍선의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으며 오후에는 동료와 함께 새로 발견된 천왕성의 궤도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린 손자들과 놀아 주던 그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몇 시간 후 사망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오일러에게 바치는 추도사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며 "그는 계산하는 것과 사는 것을 멈췄다."라고 썼다. 이 일화는 훗날, 헝가리의 저명한 수학자가 되는 에르되시 팔이 신발을 신고 죽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일러가 뇌출혈로 쓰러질 때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을 석판에 썼다거나 말로 남겼다는 설이 있다. 오일러가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쾨니히스베르크를 흐르는 강(프레겔 강)에는 7개의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들을 꼭 한 번씩 차례로 건널 수 있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오일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오일러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쉽게 대답해 주었다. "이 다리들을 한 번씩 차례대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답니다."라고 말한 후,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증명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 날에는 "한 붓 그리기"와 같은 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위상기하학이라는 분야의 태동을 알리는 문제였다. 오일러의 정리 다니엘 베르누이 오일러의 곱셈 공식(소수와 오일러-리만제타함수) 오일러 좌굴 하중 분류:1707년 태어남 분류:1783년 죽음 분류:18세기 수학자 분류:스위스의 수학자 분류:스위스의 물리학자 분류:스위스의 음악 이론가 분류:탄도학자 분류:스위스의 개신교도 분류:바젤슈타트주 출신 분류:바젤 대학교 동문 분류:스위스의 장애인 분류:시각 장애인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분류: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중국어 방 혹은 중국인 방 ()은 존 설(John Searle)이 튜링 테스트로 기계의 인공지능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이다.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모르는 중국인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중국어 질문을 이해하지 않고 주어진 표에 따라 대답할 뿐이다. 이로부터 중국어로 질문과 답변을 완벽히 한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진짜로 이해하는지 어떤지 판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능이 있어서 질문 답변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도 그것이 지능을 가졌는지는 튜링 테스트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논변의 내용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비교해보았다. 인공지능 컴퓨터 인간 중국어 방 하드웨어 인간의 외형적인 몸체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 소프트웨어 인간의 지능 중국어로 된 질문 입력(Input) 인간이 외부에서 접할 수 있는 자극 중국어로 된 답변 출력(Output) 인간이 외부에서 접한 자극에 대한 반응 질문&대답 목록 데이터베이스(Database) 습득된 기억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능 과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 이 동급의 지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인간 또한 외부에서 접한 자극의 반응으로 습득된 기억속에서 대응방식을 도출하여 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골자를 그대로 따라한 중국어 방의 핵심인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 이 인간의 지능 과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중국어 방 논변이 갖는 논리적 바탕이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는 입력되는 Data 를 받아 미리 기록된 Database 와 비교 대조를 하여 Output 을 도출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연산과정에서 input 과 output 에 대해 이해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 이는 중국어방의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중국어 질문과 답변에 대해 이해 가 아닌 모양새의 비교 대조를 통한 인지 를 하고 있으며 이는 컴퓨터로부터의 반응을 인간과 구별할 수 없다면 컴퓨터는 생각(사고, thinking)할 수 있는 것 이라고 주장하는 튜링 테스트를 전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1984년 설은 좀 더 정식적인 버전으로 ‘중국어 방’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리해서 발표했다. 그의 전제는 네 명제로 이뤄져 있다. 전제 1. 뇌는 마음을 발생시킨다. 전제 2. 통사법은 의미론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전제 3. 컴퓨터 프로그램은 전적으로 그것의 형식적이고 통사론적 구조에 의해 정의된다. 전제 4. 마음은 의미론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전제는 중국어 방을 통한 논변으로 뒷받침되었고, 때문에 존 설은 오직 형식적인 통사론적 규칙에 따르는 방을 유지시켰으며 또한 이 방 안의 존재는 중국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 설은 곧바로 세 가지의 결론을 도출했다. 결론 1.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도 그 스스로에 의해 마음의 시스템과 같은 효과를 주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프로그램은 마음이 아니다. 결론 2. 마음을 발생시키는 뇌의 기능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만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능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결론 3. 마음을 가진(혹은 마음을 발생시키는)모든 것들은 최소한 뇌와 동등한 수준의 인과력(causal powers)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설은 이 논증을 “과도하게 조야한(excessively crude)” 것으로서 기술한다. 이 논증이 실제로 타당한지에 대한 고려할 만한 논박이 존재한다. 그 논의들은 전제를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집중되어있다. 어떤 이는 전제 3이 컴퓨터 프로그램은 통사론적 내용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의미론적 내용은 포함할 수 없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전제 2, 3, 4는 타당하게 결론 1을 도출해 낸 것으로 결론낼 수도 있다. 이것은 논쟁을 컴퓨터 프로그램의 의미론적 내용의 기원으로 이끌고 간다. 이와 같은 논리를 뇌 안의 뉴런과 언어이해력에 대해 적용해 보면, 인간조차 언어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해지고 만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안의 사람과 중국어 방을 더한 총체는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실제로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법이 중국인 방 이론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예로 애플사의 시리는 본질적으로는 미리 저장된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서 입력된 문장을 분석하고 적당한 문장을 출력하는 중국인 방 이론 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리가 아주 훌륭한 인공지능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중국인 체육관 계산주의 분류:인공지능 분류:사고 실험 분류:철학적 논증 분류:심리철학에 관한 사고 실험
컴퓨터 파일 ()은 컴퓨터 등의 기기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담는 논리적인 단위이다. 하드디스크, CD, DVD 등 저장매체에 대하여 추상화된 정보 단위이다. 운영체제는 파일 조작에 관련된 기능을 API로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파일의 이름과 확장자로 식별하며, 운영 체제에 따라 대소문자를 구별하거나 구별하지 않는다. "파일"이라는 낱말은 1952년 일찍이 천공 카드에 저장된 정보를 가리키는 뜻으로 컴퓨터 기억 장치 환경에 나타났다. 이용 초기에 사람들은 콘텐츠라기 보다는 뒷받침하는 하드웨어 자체를 가리키는 개념에서 파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IBM 350 디스크 드라이브는 "디스크 파일"이라고 불렸다. 1962년의 CTSS(호환 시분할 시스템)와 같은 시스템은 여러 개의 파일들을 하나의 기억 장치에 제공하였던 파일 시스템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현대의 용어로 자리잡게 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CTSS에서의 파일 이름은 사용자가 인지할 수 있는 기본 이름(primary name)과 파일 형태를 가리키는 두 번째 이름(secondary name),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비롯한 여러 운영 체제에서 이러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용어 레지스터 파일이 파일의 초기 개념을 보여주고 있으나 점차 이러한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운영 체제와 그에 수반되는 파일 시스템에 따라 프로그램이 파일을 이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다음의 기능이 일반적으로 활용된다 주어진 이름으로 파일을 만든다. 파일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특성을 설정한다. 파일을 열어 콘텐츠를 사용한다. 콘텐츠를 읽거나 새로 고친다. 새로 고친 콘텐츠를 안정적인 기억 장소로 위임한다. 다시 열릴 때까지 접근을 못하게 하기 위해 파일을 닫아 둔다. 파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텍스트 파일 바이너리 파일(이진 파일) 텍스트 파일은 ASCII나 유니코드로 이루어진다. 보통, 텍스트 파일들은 메모장 (소프트웨어) 로 읽을 수 있다. 이진 파일은 0 또는 1의 데이터의 연속을 저장한 파일이다. 대부분의 문서 편집기에서는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글자가 깨진다. 디스크 블록 컴퓨터 파일 관리 파일 복사 파일 삭제 파일 이동 파일 디렉터리 파일 관리자 파일 이름 파일 크기 파일 시스템 플랫 파일 소프트 카피 분류:파일 시스템 분류:프로세스 간 통신
팜 파일럿 5000 개인 정보 단말기 (PDA, Personal Digital Assistant)는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사용하는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고 가벼운 컴퓨터이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계산장치라는 의미의 휴대용 소형 컴퓨터에 개인의 일정관리와 검색, 관리 기능이 있는 주소록의 기능을 추가한 것을 말한다. 또,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의 자료를 서로 주고 받기 쉽다. 현재는 PDA와 휴대 전화의 기능을 합친 스마트폰이 대중화됨에 따라서 PDA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용어는 1992년 라스베이거스 전자 전시회(CES;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선보인 애플사의 뉴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6년 Psion 3 와 팜 파일럿이 최초로 PDA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하였다. 현재 PDA의 주요 운영 체제로는 팜소스사의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CE, 리눅스, 심비안 등이 사용되고 있다. 초기에서는 개인 일정 관리 위주의 수첩 대용이었으나, PDA폰으로 대중화된 이후, 이동통신 기능뿐 아니라, 카메라, 무선랜, GPS 등의 여러 기능을 쓸 수 있게 발전하고 있다. 만약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PDA의 정의에 맞는 기기를 추적해 볼 때 현재로서 발견된 최초의 PDA는 영국의 Psion plc.가 출시한 포켓 컴퓨터 Psion Organiser이다. 이때는 PDA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Psion사는 이 제품을 "최초로 쓸만한 포켓 컴퓨터"로 정의하였다. 첫번째 모델은 현재의 공학용 계산기의 기능과 형태에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부가되어 있었으며, 개발자가 만든 프로그램의 구동이 가능하고 저장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모델은 다른 장치와 연결할 수 있었다. 1991년 HP사에서 로터스 1-2-3을 휴대하기 편리하게 쓰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만든 HP95LX은 비록 팜탑 컴퓨터였고 팜탑 컴퓨터로서 판매되었지만, 마찬가지로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역시 PDA의 정의에 부합한다. 이 제품은 모바일 OS가 아닌 MS-DOS를 사용하였고, 로터스 1-2-3과 PIMS를 롬에 내장시켰으며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비표준 디스플레이 및 카드 슬롯과 제한된 메모리 용량으로 인해 일반적인 도스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HP는 1994년에 후계작 HP200LX를 출시했다. HP200LX는 640*240 해상도의 CGA 디스플레이와, 2 메가바이트 메모리, 표준 PCMCIA 슬롯을 사용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것을 한국에서 보험설계사 공급용으로 대량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8년에 단종되었다. 키보드 입력과 텍스트 응용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PDA의 대중화에 한 몫 하였다. 최초의 PDA와 관련한 내용은 누군가 잘못된 정보로 작성된 글이 일반화되는 오류가 거듭되고 있다. 1992년 애플이 PD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는 PDA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따라서 Psion 제품을 최초의 PDA 제품이라고 할 수 없으며, HP 95LX, 200LX 제품군은 PDA가 아니라 팜탑(노트북)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모두 PDA라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PDA들은 범용성을 위해 모바일 OS와 더불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SDK를 제공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최근 스마트폰이란 용어로 통일 되었으나 1990년대 2000년대 초에는 의미가 달랐다. 과거 PDA폰은 핸드폰과 PDA 기능이 결합된 제품, 스마트폰은 핸드폰과 PDA의 기능이 결합 되었으나 기능적으로 부족한 제품들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PDA폰에는 터치 스크린이 적용된 반면 스마트폰에는 일반 스크린이 적용되었다. 하루의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알람 기능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입력 자료를 동기화시킬 수 있다. 또한 작업 스케줄을 조정하는 기능도 제공한다. 가나다/A to Z 순으로 조회를 할 수 있는 주소록은 데스크톱과 연동하여 관리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과 연동할 수 있다. 개념이 애매 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PDA는 개인 정보 관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용 컴퓨터를 대체 하기 위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용량의 한계 때문에 UMPC 등이 출시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 일반 대중에게 흥미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어 단종의 길로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기타 응용에서는 운영 체제마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원하는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산기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계산기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게임을 설치하여 휴대용 게임기로도 활용이 가능한 등, 본래 기능 이외에 부가적으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 PDA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산업용 PDA 는 산업시장에서 요구되는 휴대성·컴퓨팅 성능·높은 확장성·견고함을 충족하여 일반 PDA 및 스마트폰과 구별되는 PDA이다. IP rate (방진,방수)과 낙하충격에 대응하는 견고함과 바코드 스캐너, 내장프린터, RFID reader, 마그네틱카드리더, GPS등을 내장 혹은 외장형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업무용도로 적용될 수 있다. 현재는 다양한 vertical market에서 요구되는 제품들로 인해 굳이 산업용 (industrial PDA)라고 명명하기 어려우나 대표적으로는 industrial & enterprise PDA 또는 Rugged Mobile computer로 불리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TOP3 제조사로는 모토톨라(구 Symbol), Intermec, Honeywell(HHP를 인수)사가 있고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중 모토롤라가 전 세계 약 4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메이저 업체로는 Psion Teklogix, DataLogic, Casio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산업용 PDA 제조사가 존재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용 PDA 제조사로는 블루버드 (Bluebird)가 있고, 그 외 캐치웰(구:이노텔리텍), M3 Mobile(구 모바일컴피아), 대신정보통신, 포인트모바일, 웅진ST, 모비트론, ITwell, 비인터렉티브 등 여러 업체가 있다. 전 세계 Mobile Computer Manufacturer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 Motorola # Honeywell # Datalogic # 블루버드 (Bluebird) 개인용 스마트폰 대형 제조사 중 하나인 대만 HTC에서도 바코드 스캐너를 내장한 PDA를 런칭하였고, 중국과 인도의 중소규모 전자업체에서도 산업용 PDA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추세이나 영향력이 높지않다. 호환성 높은 포켓 PC (윈도우 CE기반) 휴대성과 간편성을 겸비한 팜 파일럿 미려한 디자인의 팜 호환 클리에 완벽한 한글 지원과 휴대성이 특징인 셀빅 리눅스 운영 체제 기반의 요피 리눅스 운영 체제 기반의 자우르스 시리즈 PDA의 운영 체제는 크게 4가지가 있다.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의 포켓 PC, 애플의 iOS 그리고 심비안의 EPOC 등 크게 3가지가 있다. 또 리눅스와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셀빅도 있다. 1996년에 처음으로 출시하였다. 팜은 세계 PDA의 약 60%를 차지한다.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많고 배터리 소비가 적으며 많은 반MS 기업과 제휴를 맺었다. (삼성, 소니 등)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PDA의 운영 체제는 윈도우 CE, 포켓 PC와 윈도우 모바일이 있다. 윈도우 CE는 PMP와 같은 기기에 주로 사용되며, 포켓 PC는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운영 체제로 구형 PDA에, 윈도우 모바일은 최근의 PDA에 사용된다. 개인용 컴퓨터용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비슷하며 대개 배터리 소모가 많다. 초기 윈도우 CE 1.0의 경우는 엄청나게 많은 전력 소모와 느린 처리 시간 때문에 외면 받았지만 많은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개선되었다. 윈도우 CE 코어를 기반으로 하는 운영 체제이다. 320x240, 640x480, 320x320의 해상도를 지원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승인을 거친 기기만 포켓 PC 라이선스를 취득할 수 있다. 2007년에 윈도우 모바일 6이 공개되면서 포켓 PC라는 명칭이 더 이상 자사 제품에 사용되지 않는다. 애플의 iOS는 맥 OS XPC판과 비슷하며, 아이폰, 아이폰 4, 아이팟터치 및 아이패드에 채용되었다. 대한민국 기업인 제이텔이 만든 PDA이자 운영 체제의 이름이다. 셀빅 OS라는 독립적인 운영 체제를 자체 개발하였는데 한글 지원이 내장되어 있어 사용하기 편하다. 셀빅 OS는 팜 OS와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이 있으나 응용 프로그램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컬러를 지원하는 2.0까지 개발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인해 현재는 사실상 회사가 없어진 상태로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리눅스를 기본 운영 체제로 탑재한 PDA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샤프(Sharp) 사에서 만든 자우루스(Zaurus)는 가장 많은 소프트웨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우루스의 운영 체제는 큐토피아(Qtopia)로 리눅스 커널 2.4.20을 기반으로 한다. 오픈 자우루스(open zaurus)로 샤프(Sharp) 사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리눅스도 있다. 또한 대한민국 벤처기업인 지메이트사에서 만든 요피(YOPY) 시리즈가 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 현재는 제품이 단종되고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참고로 요피의 운영 체제인 리누피(Linupy)는 커널 2.4 기반의 엑스 윈도우(X-Window) 시스템을 사용한다. 현재 HP iPaq, 팜 및 다른 여러 기기에 리눅스를 탑재하려는 노력이 개인 또는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개발한 운영 체제로서, 스마트폰, PDA, 스마트북 등에 사용된다. 한국 포터블 사용자 그룹 KPUG 클리에 사용자 동호회 스타트 PDA 투데이스피피씨 한국 자우루스 사용자 모임 오픈자우루스 웹페이지 한국셀빅유저그룹 KCUG 한국 핸드헬드 PC 사용자 그룹 분류:정보 기기 분류:시간 관리
100 IMG 4155.jpg|섬네일|right|350px|Smaky-100 개인용 컴퓨터 (는 기업이나 가정에서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말한다. 보통 책상 위에 놓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PC라는 이름은 1970년대 초 미국의 IBM사와 휴렛 팩커드사가 발매한 기종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때는 트랜지스터 방식이었으나 그 후 마이크로 컴퓨터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PC 시대를 맞게 되었다. PC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IBM에서 생산한 개인용 컴퓨터의 상품명인 IBM PC에서 유래하고부터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도입되어 1990년대 이후 인터넷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각종 디지털 정보의 저장·관리·통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음악 감상, 게임, 채팅 등에도 쓰인다. 최초로 상업적으로 판매된 개인용 컴퓨터는 MITs사의 Altair 8800 이었으며, 이를 본따 많은 개인용 컴퓨터가 출시되었다. 이후 애플 II컴퓨터, 코모도어 VIC-20 등이 상업화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이후, MS와 인텔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MS-DOS와 윈텔 플랫폼으로 대부분 지배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PC가 16비트에서 32비트로 개편될 조짐을 보였고, 그 후 32비트로 전환되었다. 현재는 컴퓨터 성능이 발전하여, 64비트 컴퓨터가 보급되고, 코어가 여러 개인 CPU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AIM - 65 1974 년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개인도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소형 컴퓨터가 등장했다. 개인용 컴퓨터는 1974 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Altair 8800( 앨테어 8800 )이었다. 애초에 개인용 컴퓨터 (personal computer라는 말부터 Altair 8800의 설계자인 에드 로버츠가 최초로 언급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 후 애플 컴퓨터, 탠디 라디오셱, 코모도, 아타리 등 8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이 등장했다. 특히 애플 II는 스프레드시트의 VisiCalc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어서 큰 성공을 하였다. 8 비트 시대의 개인용 컴퓨터는 CP/M이나 OS-9 또는 DISK-BASIC을 운영 체제로 사용하였다. 또한 ROM-BASIC를 표준으로 탑재한 컴퓨터가 가장 많았고, OS 부팅 디스크가 없는 경우는 ROM-BASIC이 자동으로 시작되었다. IBM PC(IBM 5150) 1981년 16 비트 IBM PC가 등장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되어, IBM PC에서 사용되는 인텔의 x86 계열의 CPU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MS-DOS가 주류(사실상 표준)로 되었다. 또한 컴팩 등으로 구성된 IBM PC 호환기종 시장이 형성되고, "개인용 컴퓨터"의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스프레드시트는 로터스 1-2-3, 워드 프로세서는 워드퍼팩트(일본에서는 이치타로)가 보급되었다. 1984 년에 등장한 매킨토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념을 크게 보급시키는 데 성공하여, 다음 세대 컴퓨터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5년 매킨토시에서 동작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이 등장했고, 그 인터페이스는 다음 윈도 응용 프로그램의 원형이 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아미가와 코모도어 64, 아르키메데스 같은 취미용의 컴퓨터는 여전히 일정한 점유율을 유지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에서 IBM PC 호환기종 및 매킨토시가 PC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 1991년에 윈도 3.0이, 1995년에 윈도 95가 출시되어 기존의 "16비트 DOS"에서 점차 "32비트 윈도"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파워 유저는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에 맞먹는 기능을 가진 OS/2나 윈도 NT, 더욱 강력한 OPENSTEP를 사용 PC에서 PC - UNIX 이용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인터넷이 급격히 발전하여, 개인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넷스케이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 등의 사이에서 웹 표준을 놓고 브라우저 전쟁이 발생했다. 1998 년 "인터넷을위한 차세대 PC"라고 이름을 붙인 iMac이 등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새로운 신기술이 사용되어 1990년경 16 - 20MHz 정도였던 PC용 CPU의 클럭은 2000 년 1GHz에 도달했다. === 2000년대 64비트 시대 상품화 및 이용 형태의 다변화 === 2001년 매킨토시 OS가 OPENSTEP 기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맥 OS X가 세상에 등장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는 윈도 NT를 기반으로 하는 윈도 XP가 출시되면 윈도 NT와 윈도 9x 계열의 제품 라인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2003년 최초의 64 비트 PC인 파워맥 G5 (PowerPC 970 포함)이 발매되고, 이어 x86의 64비트 확장 버전인 AMD64 (x86 - 64)가 등장했다. OS는 윈도가 여전히 주류이지만, 오픈 소스 GNU / 리눅스 시스템도 일부 보급되고있다. 200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 (PC / AT 호환 기종)의 상용화가 진행되었다. 독자 플랫폼을 견지하고있는 애플을 제외한 PC 제조 업체들은 가격 경쟁 격화로 인한 곤경에 몰리고 개편도 잇따랐다. 2002년 휴렛 팩커드의 컴팩 인수, 2004년 IBM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 레노버에 매각, 2007 년 에이서의 팩커드 벨 인수 등 주요 제조 업체의 재편이나 과점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세이코, 샤프, 미쓰비시 전기, 산요전기 등 개인용 컴퓨터 사업의 축소나 철수가 진행되었다. 한편, 2000년대에는 많은 개인 PC가 보급되었다 하여 PC에 연결하여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정보 기기와 가전 제품이 보급되었다.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은 컴퓨터 사용의 확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필름 카메라와 미니 디스크 (MD)의 수요의 대부분을 대체했다. 2001 년, 애플은 PC를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연결하는 허브 (중심)를 담당하는 "디지털 허브"에 자리잡는 비전을 제시하고 iPod을 윈도에 대응함으로써이 개념을 보급시켜 갔다. 다른 PC 메이커도이 기기의 정보를 저장하고 가공하는 기기로 PC를 입지 수요를 환기하고있다. 2007년부터는 최소 성능을 가진 저렴한 가격의 컴팩트한 노트북이 보급되어 후에 넷북라는 장르를 형성했다. 이 배경에는 클라이언트에서 처리는 최소화하여 네트워크 대상 서버 측에서 처리의 대부분을 클라우드 컴퓨팅 등의 보급을들 수있다. 또한 AJAX 등을 기반으로 한 클라우드 컴퓨팅의 보급을 배경으로 다시 브라우저 전쟁이 발발, 사파리, 구글 크롬을 중심으로하는 웹키트 계열 브라우저와 모질라 파이어폭스가 나타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독점하는 상황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2011년대에 들어서, 쿼드코어 CPU가 널리 보급되게 된다. 판매율은 2010년 하반기 30%에서 2011년 2월에는 46%까지 상승하였다.. computer, exploded 5.svg|300px|right|섬네일|일반적인 데스크톱 컴퓨터의 구성 디스플레이 마더보드 CPU (마이크로프로세서) 램 확장 카드 전원 공급 장치 광 디스크 장치 하드 디스크 컴퓨터 키보드 마우스 개인용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워크스테이션 데스크톱 컴퓨터 사무실 또는 일반 가정에서 흔히 사용되는 특정 자리에 고정된 컴퓨터. 넷북 울트라 모바일 PC 노트북 컴퓨터 영어권에서는 랩톱 컴퓨터라고 한다. 휴대용 가방에 휴대하여 유사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컴퓨터. 포켓 PC * PDA 역시 휴대용 컴퓨터로서 크기가 손바닥만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노트북과는 달리 기능이 제한되어 있음. 태블릿 PC 노트북 컴퓨터와 비슷하나, 태블릿 기능이 추가됨. 컴퓨터 소프트웨어란, 컴퓨터 프로그램과 절차 및 컴퓨터에 대한 지시사항울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다. 소프트웨어는 워드프로세서같은 응용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같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미들웨어로 나뉜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IBM의 PC와 애플의 매킨토시가 경쟁했다. 그러다 다른 회사에서 IBM 제품과 호환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됨으로써 PC의 기술은 많은 업체들의 경쟁으로 빠르고 폭넓게 발전해 나갔다. IBM이 PC를 개발할 때 자사의 기술은 바이오스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곧 컴팩이 특허법의 헛점을 이용하여 IBM의 바이오스를 합법적으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하여 복제해 내었다. 그로 인해 PC는 고속의 발전을 이룬다. 초기의 PC는 매킨토시보다 성능이 훨씬 떨어졌고 컬러도 아닌 흑백화면이었으나 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매킨토시 대신 PC를 사용하였다. IBM은 PC의 후속기종으로 PS/2를 만들었고 PS/2에 대해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과 업체들은 로열티를 주지 않아도 되는 PC를 계속 사용하였고 결국 PS/2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애플의 매킨토시는 잠시 사용 허가서를 다른 기업에게 넘겼지만 이내 회수했다. 이에 따라 PC는 확장이 자유로운, 매킨토시는 구성이 일관된 특징이 드러난다. 해마다 독일의 하노버에서 열리는 세빗에서는 최신 컴퓨터 모델과 미래형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플컴PC 가정용 컴퓨터 IBM PC 호환기종 매킨토시 컴퓨터 시스템 제조업체 목록 Hotmail login happy wheels happy wheels ilgeniodellostreaming altadefinizi.one 컴퓨터 조립방법 분류:컴퓨터의 유형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사무기기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한 아이가 터치스크린을 이용하여 퍼즐을 맞추고 있는 모습 터치스크린 (touchscreen은 화면을 건드려 사용자가 건드린 위치를 찾아내는 화면을 말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손가락이나 손으로 기기의 화면에 접촉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를테면 모니터에 특수 직물을 씌워 이 위를 손으로 눌렀을 때 감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터치스크린은 스타일러스와 같은 다른 수동적인 물체를 감지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키오스크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직접 손으로 짚고, PDA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스타일러스 펜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트펜과 같이 감지된 물체가 능동적이라면 터치스크린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이에 적용되지 않는다. Capacitance Touchscreen.jpg|섬네일|프로토타입 x-y 상호 정전식 터치스크린(왼쪽)은 CERN에서 1977년 네덜란드의 공학자 Bent Stumpe가 개발하였다. 자기 정전식 화면(오른쪽)은 더 발전된 형태로, 이 또한 CERN의 Stumpe이 1972년 개발하였다. E.A. 존슨은 1965년에 출간한 짧은 논문에서 정전식 터치스크린에 대한 그의 작업을 기술하였고, 그 뒤 1967년 출간한 논문에서 사진과 다이어그램과 함께 더 자세히 기술하였다. 멀티터치 기술은 1982년 시작하였고 당시 토론토 대학교의 입력 연구 그룹이 최초의 인간 입력 멀티 터치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광학식 터치스크린 은 터치스크린의 꼭짓점에 장착된 적외선 카메라와 적외선 조명이 화면을 터치하려는 물체의 그림자로 좌표를 측정하여 작동한다. LG 프라다 아이폰 아이팟 터치 멀티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