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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영 ‘평면조건’에서 최소 단위는 수직, 수평의 선과 면이다 |
작가는 검은색 바탕 위에 수많은 흰색 붓질을 중첩시켜 바탕을 지워나가면서, 한편으로는 흰색을 쌓아 올리는 작업을 한다 |
화면의 검은 선들은 백색 물감을 중첩하는 과정에서 남은 최소한의 여백이다 |
‘평면조건’을 위한 또 하나의 최소단위는 색이다 |
그가 주로 사용하는 흑색과 백색은 다른 색의 본질을 포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색이며 작가가 추구하는 평면성을 이루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색이라 할 수 있다 |
“내가 택하고 있는 중성적인 백색조는 적어도 나에게는 색채 자체가 스스로 자신에게로 수렴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색채는 그 성격적인 측면보다는 질료 자체의 추이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
마치 수직, 수평으로 가득 찬 미로의 숲에서 끊임없는 수행을 반복하듯, 부단히 이어지는 소지와의 접촉, 노증(露證)되는 감정의 진폭에 따라 점진적으로 균질로 축적되어 부침하는 평면적 매스, 그 무표정하고 무미한 층위의 지평에서 나는 나의 일상, 정신구역을 통과한 하나의 세계로서의 평면구조와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화면의 물질적 시각적 틀을 넘어 그 현존을 누릴 것이다 |
“최명영에게 평면조건이란 다름 아닌 평면으로서의 구조화를 의미한다 |
1980년대 작업에서는 화면을 고루 덮고 있는 의도적이고 규칙적이고 또 반복적인 네모꼴 틀에 의해 이룩했다 |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 현재까지 수직·수평 작업은 1980년대 초 규칙적인 네모꼴 대신 불규칙적인 선조(線條)들이 마치 사라지다만 흔적처럼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고 사라졌다 다시 드러나고 있다 |
“거기에는 이미 동일패턴의 반복은 없고, 화면에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무작위적으로 단절된 수직과 수평의 교차요 그 비(非)연속의 확산 같은 것이다 |
따라서 화면 또한 균질적인 평면은 아니다 |
실제로 최근작에로 올수록 최명영의 평면조건은 수직·수평 선조의 명멸(明滅)이 은밀해지면서 차츰 더 내재화(內化)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
수직·수평 선조들이 말하자면 유한과 무한의 공간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이와 함께 최명영 작업에 있어서 ‘호흡’은 매우 의미 있는 부분을 차지한다 |
“십자형 구도의 작업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여러 겹의 물감 층 안에 선들이 간직해 있음을 느낀다 |
그 하나하나가 수북이 쌓인 숲속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온 새싹처럼 반갑다 |
그런데 그 주위로 시선을 옮기면 그것은 최명영 작가가 말한 ‘쉼 없는 호흡과 육신의 움직임들로 충일’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
그것은 ‘그린다’고 보이기보다는 일종의 획(劃)처럼 인식된다 |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의 ‘평면조건’은 몸을 드리는 반복 작업의 수행성 다시 말해 ‘사경화(寫經畵)’로 인식되고 있다 |
“최명영의 수직·수평의 브러쉬 스트록이 만들어낸 모노크롬의 화면은 과정을 통해서 나타난 평면화된 지층이며 몸을 드리는 수행성이다 |
추사체(秋史體)가 평면위에 다양한 의미를 지닌 시방의 세계라 한다면, 최명영의 작업을 반복과 수행 속에서 시방(十方)적 층위를 이루고 있는 비이미지의 회화이며 끝없는 질문으로서 철학적 행위이다 |
그의 회화는 논리적인 현대미술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적 방법은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최명영 ‘평면조건’은 2015년 이후 평면(素地)의 바탕을 드러내어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
이른바 지문(指紋)작업은 평면과 질료, 행위의 반복을 통한 화학적 융합(融合)을 통해 정신화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
“최명영의 작업은 일반적인 문자의 체계와 달리 각각의 소리들로 나뉘지 않고 개념과 사물들이 한없이 겹쳐지면서 오히려 단순해지는 역설적 과정으로, 구체적인 발언 없이 오직 다양한 상황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담아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
단순하고, 짧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조용히 매일같이 주문하듯, 어떤 두려움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하고 있다 |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은 개념과 사물을 새롭게 생각하는 법,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유로운 그의 사유방식이다 |
“최명영 ‘평면조건’엔 동양적 사유와 절제미로 내재된 격물치지(格物致知) 그 숭엄한 비문(碑文)의 정신이 배어나온다 |
시·공을 초월해 이어오는 가장 한국적인 아이덴티티(Identity) 그 DAN가 오버랩 되고 있는 것이다 |
즉, 디지털미디어시대 ‘지문’이라는 인간의 신체성(physicality)을 통한 응축과 융합의 ‘평면조건’이 추사의 ‘일횡(一橫)’과 깊게 조우하는 내력이 되는 지점이다 |
최명영은 오리진(Origin)회화협회(1962~1993),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69~1975), 에꼴드 서울(1975~1999) 등의 미술단체 운동과 함께 70년대 중반 한국단색화 형성에 참여, 한국현대미술전개에 동참하였다 |
19혁명 이후 타성에 젖은 제도와 권위의 부조화에 따른 억압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는 ‘오리진(Origin)’미술운동은 1962년 홍익대학교 서양화(회화)과 출신들로 구성한 단체로 한국현대미술에서 가장 오래된 동인성격을 띤 단체이다 |
최명영, 권영우, 이승조, 서승원, 이상락, 김수익, 김택화, 신기옥 등이 멤버였다 |
오리진 동인들은 충동적인 표현본능이 아니라 기하학을 회화적 본령으로 삼았다 |
“오리진회화협회 창립이 1962년이고 보면, 햇수로 우리 현대미술의 역사와 거의 맞선다 |
1960년대에는 뜨거운 추상과 대척지점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이끌어 냈고, 1970년대에는 현대회화를 한국인의 미감에 가장 걸맞게 소화하는 데 성공한 단색화를, 1980년대에는 한·일 교류전, 한·중 교류전을 잇달아 열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극 사실 계열의 회화를, 1990년대에는 창립 당시 겨우 9명이던 회원이 205명으로 늘어나는 확산기로 나아갔다 |
이 시대에는 기호와 상징이 들어가고, 형상과 이미지의 수사학이 늘어나며, 질료감이 풍부한 평면회화를 각각 천착해 갔다 |
1960년대 중반 앵포르멜(informel)의 쇠락과 함께 전위적(前衛性)이고 실험정신이 강한 개념미술을 근간으로 1969년 창립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 |
G)’는 75년까지 활동했던 한국현대미술의 중요한 가교역할을 한 미술그룹운동이다 |
최명영 회화관의 단초와 성립계기는 1970년대 초 한국아방가르드협회(A |
G)운동 등을 통한 개념논리성향이나 조형에 있어서의 환원의식(還元意識), 탈 이미지경향, 오브제작업을 통한 물적 체험의 평면적 적용시도와 그 정신화의 지향 등으로 요약 가능하다 |
“최명영은 어떠한 내러티브도 배제한 채 평면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하여, 궁극적으로 공간과 합일되는 평면으로서 그 존재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현실화한 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
무엇보다 이토록 오랜 시간 그를 회화의 평면성에 몰입하게 한 실질적 힘은 물성의 체득과정에서 경험한 물질의 정신적 환원이었고, 그 정신적 환원은 평면조건들의 상호 조화와 절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
결국, 최명영 작품세계에 담긴 물질간의 적절한 관계는 우리의 지성과 작가의 지성이 상호 이해할 수 있는 물질의 근원적 형질에 다가선 작품의 진정성에 있을 것이다 |
“최명영의 그 극한의 지지체(바탕), 그는 능선에서 종래의 회화를 극복해 버리고 있다 |
그것을 극복하면서 좁은 가능성, 능선이라는 가능성의 길을 걷는 것이다 |
좁은 지평, 그리고 한정된 긍정의 지평 안에서 시도하고 있는 ‘회화’인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워커힐아트센터 |
리움삼성미술관,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동경도 미술관(일본), 미에현립미술관, 시모노세키시립미술관 |
6)이일 미술평론가-‘余白 空間’으로서의 회화세계,1992 |
11)권동철 미술전문기자, 추사 김정희 ‘一橫’과 흔적의 ‘평면조건’,더 페이지갤러리-최명영展, 이코노믹리뷰 2022 |
ref {{Cite web|title=새 앱으로 이웃 문제 보고|url=https://communities |
com:443/victoria/aurora/news/2019/08/11/report-neighbourhood-issues-with-new-app/%7C웹 사이트=Aurora|접속일자=2020년 5월 1일}</ref> |
2015년, Snap Send Solve는 Maris Sanson의 정부 뉴스 기사 '앱이 정부의 얼굴을 바꿉니다'에 실렸습니다 |
<ref> {{Cite web|date=2015-02-23|제목=Web=https://www |
au/apps-change-the-face-of-government/%7Caccess-date=date-06-06%7C웹 사이트=Government News|</refUS»Snap Send Solve와 같은 앱이 어떻게 의회가 보다 효율적인 채널로 이동하여 비용을 절감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간략히 설명합니다 |
의회가 이러한 전환을 관리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다른 많은 디지털 플랫폼이 있습니다 |
STARDUST PLANET(스타더스트 플래닛)은 소속 사무소 스타더스트 프로모션에 속하는 여성 아이돌 아티스트 부문 |
모모이로 클로버 Z, 시리츠에비스추가쿠, 초 도키메키 센덴부가 소속되어 있다 |
《난태평기》(難太平記, なんたいへいき)는, 일본 무로마치 막부 초기의 중진이었던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출가한 뒤에는 료슌了俊이라고 부름)가 오에이(応永) 9년(1402년)에 완성시킨 서적이다 |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역사와 쇼군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역사 등이 주요한 내용으로 자손에게 보이는 글로 되어 있다 |
제목의 유래는 이 책이 전반부 부분이 태평기(太平記)가 이마가와 가를 가볍게 다루고 있어 어지럽다고 (비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
그러면서도 책 제목은 후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저술 시점에서는 정해진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따라서 실제로는 태평기 그 자체를 비난한다기보다도 이마가와 씨의 역사와 종가인 아시카가 쇼군케(足利将軍家)에 대한 충성의 역사를 논하는 것이 그 주체로 되어 있다 |
사다요가 실제 현지에서 경험한 남북조 시대의 후반부터 무로마치 초기에 걸쳐 벌어졌던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
《군서유종》(群書類従) 권398에 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
레히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는 955년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벌어진 일련의 군사 교전으로, 오토 1세 대왕이 이끄는 독일 왕국이 허르커 불추와 족장 렐과 수르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를 전멸시켰다 |
이 독일의 승리로 마자르인들의 라틴 유럽 침공은 끝이 났다 |
헝가리군은 955년 6월 말이나 7월 초에 8,000-10,000명의 기마 궁수, 보병, 공성 기관을 이끌고 바이에른 공국을 침공하여 오토 1세 휘하의 독일 주력군을 들판의 전투로 끌어들이고 파괴할 계획이었다 |
헝가리인들은 레히강에서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했다 |
오토 1세는 8개 군단으로 나누어진 8,000명의 중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함께 도시를 구호하기 위해 진군했다 |
8월 10일 오토 1세가 아우크스부르크에 접근했을 때 헝가리의 기습 공격으로 보헤미아 공국 후위군이 파괴되었다 |
헝가리군은 독일군 진지를 약탈하기 위해 멈추었고 로렌 공작 콘라트는 중장 기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감행하여 헝가리군을 해산시켰다 |
그런 다음 오토 1세는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헝가리 주력군과 전투를 벌였다 |
독일 중기병은 근접전에서 경무장과 장갑을 갖춘 헝가리군을 물리쳤지만, 후자는 순조롭게 퇴각했다 |
오토 1세는 추격하지 않고 밤 새 아우크스부르크로 돌아가 전령을 보냈다 |
전 지역 독일군에게 동부 바이에른에서 도강을 감시하고, 헝가리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도록 명령했다 |
8월 11일과 12일, 폭우와 홍수가 후퇴하는 헝가리인들의 속도를 늦추고, 독일군이 그들을 추적하여 모두 죽일 수 있게 되면서 헝가리의 패배는 재앙으로 바뀌었다 |
헝가리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아우크스부르크로 끌려가 교수형을 당했다 |
독일의 승리는 독일 왕국을 보존하고, 서유럽으로의 유목민 침략을 영원히 중단시켰다 |
오토 1세는 승리 후 그의 군대에 의해 조국의 황제이자, 아버지로 선포되었으며, 레히펠트 전투 이후 강화된 지위를 바탕으로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
가장 중요한 출처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울리히가 의뢰한 논문으로 독일의 관점에서 일련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
또 다른 출처는 몇 가지 중요한 세부 사항을 제공하는 연대기 작가 코파이이의 비두킨트("Widukind of Corvey")이다 |
동프랑크 왕국의 왕 오토 1세는 그의 아들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그의 사위 로렌 공작 콘라트의 반란을 진압한 후 그의 공국인 작센으로 군대를 옮겼다 |
7월 초에 그는 평화롭게 왔다고 주장하지만 독일인들이 실제로 반란의 결과를 평가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헝가리 사절단을 영접했다 |
며칠 후 오토는 작은 선물을 가지고 보내주었다 |
곧, 오토 1세의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특사들이 도착하여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오토 1세에게 헝가리 침공을 알렸다 |
급사들은 헝가리인들이 오토 1세와의 전투를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헝가리인들은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한 번 침략한 적이 있다 |
이것은 그가 프랑코니아에서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일어났다 |
엘베강 하류에 있는 폴라비아 슬라브인들 사이의 불안 때문에 오토 1세는 그의 색슨족 대부분을 집에 두고 가야 했다 |
또한 작센은 아우크스부르크와 그 주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도착을 기다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
전투는 침공에 대한 첫 보고가 있은 지 6주 후에 일어났으며, 역사가 한스 델브뤽은 그들이 제시간에 행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왕은 그의 군대에게 노이부르크와 잉골슈타트 부근의 다뉴브강에 집중하도록 명령했다 |
그는 헝가리 통신선을 따라 행군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북동쪽을 습격하는 동안 그들을 뒤에서 붙잡기 위해 그렇게 했다 |
그것은 또한 집결하고 있던 모든 파견대가 집중하는 중심 지점이기도 했다 |
따라서 전략적으로 이곳은 오토 1세가 헝가리군에게 최후의 강하를 하기 전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
전투 과정에 영향을 준 다른 부대가 있었다 |
이전의 경우에는 예를 들어 932년과 954년에 헝가리의 침공이 있었는데 다뉴브 남쪽의 독일 땅을 침공한 후 로타링겐을 거쳐 서프랑크 왕국,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거쳐 본국으로 후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