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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간판 시리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아래 오뉴블)> 시즌 6이 지난 7월 말, 드디어 공개됐다. 사실 '드디어'라고 표현하기에 기다림이 그렇게는 길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극악의 편성과 실제작까지의 온갖 잡음이 이는 공중파 드라마에 비해 <오뉴블>의 제작 및 릴리즈 스케줄은 생각보다 순조로운 편이었으니까.
기억하시는지. <오뉴블> 시즌 5의 마지막 장면을. <오뉴블> 시즌 5를 정주행했을 당시 나는 그 마지막 장면의 여운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지하 벙커에서 마지막을 예감하고 나란히 선 그들, 끝의 끝까지 남아 불의에 저항하던 죄수들이 편과 인종에 상관없이 손에 손을 잡고 들이닥치는 진압대를 맞는. 그 장면에서는 일종의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폭동의 끝이 정말로 거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구리고, <오뉴블> 시즌 6은 그 구린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죄수들의 사회적 약자성을 정면돌파한다.
어설픈 선의 가지곤 안 될걸
<오뉴블>에 완벽히 선한 사람이란 없다. 하지만 어설프게 선한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매일 자신들이 부딪히는 부조리와 불의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를 회피하려 애를 쓰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나름의 시도라는 것도 해 본다. 문제는 고작 그 정도의 시도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뉴블> 시즌 6의 결론은 그것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리치필드 교도소의 폭동으로 바꾸어 보려는 죄수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도, 푸세를 죽인 사건의 전말에 대한 수사도 없다. 폭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살 길을 찾으라는 '현실적'인 조언에 서로를 등진다. 바뀐 것은 없다. 결국 테이스티가 조작된 혐의와 증언을 돌파하지 못하고 피스카텔라의 살인죄에 유죄를 선고받고, 간수의 돈벌이를 (본의 아니게) 위협하는 채프먼은 우스꽝스러운 수감자 채점 시스템 조작으로 조기출소하고, 리치필드로부터 멀리 이감되어버린 재소자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정의와 합리는 복원되지 않았다. 그 많은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얼핏 보면 정말 아무 일이 없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만 같은 교도소와 간수, 죄수들을 내부의 시선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오뉴블> 시즌 6는 그래서 이 드라마와 닮은 현실에 대해 더욱 날카로운 풍자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많은 것이 변하려 들지만, 그것을 여지없이 꺾어버리는 반동이 거셀 뿐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의 이면은 끝없는 반동에 지친 사람들의 타협이다.
반동
네일 살롱을 차릴 거라는 꿈을 품고 출소한 알레이다는 그의 전과 때문에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한다. 양육권을 빼앗긴 아이들을 되찾아 오려면 안정적인 직업과 거주지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출소 전에 돈과 옷가지 등을 맡겨 놓았던 사촌은 이미 다른 일에 돈을 써버린 지 오래다. 돌고 돌아 결국 최저시급을 줄 게 분명한 대형마트까지 구직을 하러 가지만, 거기서조차 거절당한다. 그런 알레이다에게 접근하는 건 다단계 판매원과 여전히 멍청하고 한심한 인생을 사는 남자들뿐이다. 사람들은 알레이다에게서 그가 보기를 원치 않는 것만 본다. 전과자, 절박한 무직자, 혹은 섹시하고 적당히 싼 여자. 그가 다시 마약 판매에 손을 대는 건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전과자의 흔한 재범죄이나, 과정은 그가 전과자로 겪은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기회의 박탈을 드러낸다.
테이스티의 부당한 2급 살인죄 혐의를 벗기려고 교도소 바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한심한 남자 조 카푸토(그가 '한심하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도저히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포르노를 보면서 공룡 자지 같은 말로 자존감을 충족하는 남자를 그 외에 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는가.)는 테이스티의 혐의를 벗겨내고 그의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일을 마치 지상목표처럼 삼고 스스로의 정의감과 '능력'에 흠뻑 취하지만, 결국 어느 누구에게서도 테이스티에게 유리한 증언과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다. 적당히 자신의 유급 정직과 그 뒤에 이어질 복직에 해가 가지 않게 여기저기 찔러보다가 결국 그는 테이스티에게 어떠한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의 어설픈 '찌름'들은 스스로의 만족감과 정의감만 충족시켜 주었을 뿐, 사실은 MCC 측에 어떤 쪽을 '관리'하고 '정리'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살아있는 단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겨우 그 싸움에도 좌절하고 분노하며, 결국 MCC에서 퇴사한다. 부조리와 불합리는 바뀌지 않았고, 조 카푸토의 경우에도 결국 어설프게 착한 사람만 그 시스템의 바깥으로 튕겨내버렸을 뿐이다.
희비극
한편 다섯 개의 전 시즌 내내 공포와 위협의 대상으로 존재했던 최고 보안 교도소로 이감된 수감자들은 '쿠키'라고 불리며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전략을 펼친다. 어떤 이는 남은 기간을 복역할 때까지 그저 죽은 듯 지내려고 애쓰고, 어떤 이는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자신의 '성질머리'를 죽여보려고 기도 모임에 나가며 종교를 믿어보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새로운 복수의 목표를 찾아 세력을 형성한다. 감옥 바깥의 바뀌지 않은 견고한 사회보다, 진짜 햇볕을 쬐는 일조차 드문 최고 보안 교도소 안의 사회가 시즌이 진행되며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모습은 오히려 바깥 세상보다 인간적이고 따듯하다.
리치필드 최고 보안 교도소엔 캐럴과 바브(원래 이름이야 바바라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니, 바브.)라는 C동과 D동 희대의 악당 겸 자매를 중심으로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오래된 대립세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그 증오를 심은 것조차 캐럴과 바브의 계획이다. 그래서 그 C동과 D동 사이의 갈등이라는 건 사실 희극에 가깝다. 아무도 증오하고 폭력을 휘두르길 원하지 않았으나, 그 증오와 폭력을 이용할 심산이었던 이들에 의해 풍선처럼 점점 부풀기만 했으니까. 그만큼 그 증오라는 것은 실체도, 이유도 없다. 캐럴과 바브가 보이지 않으니 서로 챙겨온 비장의 무기들은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고 신나게 팀 스포츠를 즐기는 시즌 6의 마지막 장면처럼. 배신과 타협, 포기가 난무하는 건 오히려 감옥 바깥 세상의 이야기다. 수감자들은 각자의 신념과 믿음, 우정에 충실하다. 그 유대를 바탕으로 어떻게든, 그저 남은 시간을 해치워버리고 싶을 뿐.
하지만 수감자들이 남은 형을 무사히 살거나, 생각보다 일찍 나오거나, 생각보다 훨씬 더 긴 형기를 추가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 점은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희비극으로 만든다. 시즌 6의 마지막에서 조기출소하게 된 채프먼은 자신의 '성실한' 행동이 조기출소를 만들어냈다고 착각하겠지만, 사실은 마약 밀반입을 방해받기 싫었던 교도관의 꼼수다. 어쩌다 주어진 행운, 혹은 모범적인 행동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겨지는 조기출소는 결국 감옥을 운영하는 MCC의 사정에 의해 결정된 일이고 말이다. 출소해선 문제없이 동생의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가는 채프먼과 동시에 출소해 MCC의 새로운 '사업'인 이민단속국에 체포되는 블랑카의 모습은 교정교화 시스템과 그 운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착한 일'은 뭘까?
무엇이 그들을 범죄자로 만드는가. 어떤 정당한 이유가 그들로부터 기본권을 앗아가는가. 그들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라 나쁜 짓을 저지르고 감옥에 갔는가. 여기까지가 <오뉴블>의 기존 시즌에서 각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내며 던진 질문이라면, <오뉴블> 시즌 6가 강조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오뉴블> 시즌 6는 결국 감옥, 혹은 감옥 '산업'에 얽힌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의미로 낡고, 지치고, 닳고,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죄수들의 행동에 일일히 점수를 매기고 그들이 자살하면 가장 큰 점수를 얻는 판타지 리그 따위를 즐기는 죄수들처럼 말이다. 무엇이 착한 일일까? 교정과 교화는 지금과 같은 제도에서 유효한가? 우리는 이 제도를 통해, 오히려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뉴블> 시즌 6는 여전히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