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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겁이 많다. 그래도 이제 어른이 되어서 바이킹도 탈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겁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을 보면 얼른 타버린다. 해버리면 별로 무섭지 않은데, 하기 전까지 떨고 있는 게 가장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번지점프도 했다. 한 번도 주춤하지 않고 하나 둘 셋 하자마자 뛰어내렸다. 한번 망설이면 그때부터는 정말 무서워져서 울면서 도로 내려올 것 같았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해버려야 한다. 가장 무서운 건 무서워하면서 떨고 있는 순간이고, 막상 해버리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
그렇다고 인생도 그렇게 용감하고 바람직하게 살진 않는다. 삶에서도 무서운 게 있으면 빨리 해치워버리긴 하는데, 문제는 무서워서 닥치는 대로 일단 끝내기만 해버린다는 거다. 대학 입학원서를 넣을 때도 경쟁률을 보기 무서워서 아무렇게나 넣어버리고 운명에 맡겼다. 국가고시를 준비할 때는 점수가 안 나올 게 무서워서 돌연 하루아침에 진로를 바꿔버렸다. 나는 회사도 그렇게 아무렇게나 들어갔다. 취업 경쟁에 뛰어들 엄두가 안 났는데 마침 오라는 데가 있었고, 그 분야에 관심도 없지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일단 입사했다.
사실은 도망친 거다.
그냥 그 초조하고 애타는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도 있지만 어쨌든 도망치다가 운이 좋아서 얻어걸린 성과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주위에서 아무리 자격이 있다고 치켜세워줘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도망치고 나면 내가 가진 것들이 다 우연이라는 생각에 더더욱 불안해진다. 도망칠수록 불안해지는 불안의 굴레 같은 거다.
연애도 그랬다.
막연히 연애는 따뜻하고 포근한 핑크빛 구름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겪게 된 연애라는 것의 첫인상은 굉장히 차갑고 무서웠다. 마치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되어 환하고 안전한 세계를 뒤로 한 채 낯선 어둠으로 한 발 내딛는 기분이었다. 연애가 원래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난 책을 읽어도 권장도서만 읽던 순종적인 아이였는데, 타락하고 불법처럼 보이는 동성연애에 빠졌으니까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애를 좋아하게 될수록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같았다. 왠지 동성애자가 되면 마귀할멈처럼 외롭게 늙어 죽게 될 것 같았다. 레즈비언 가수의 뮤직비디오에서 본, 비가 내리고 주변에 철조망이 있는 애처롭고 고립된 이미지도 떠올랐다.
위험하고 무서웠다. 그럴 때면 나는 도망치려고 애인을 밀어냈다. 애인은 이 파멸의 세계와 날 이어주는 통로였기에, 애인을 끊어내면 그 세계 전체와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이미 난 너무 무섭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애인뿐이었다. 동성애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불안함을 이야기하고 위로받을 곳이 없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도 알고 친구들도 있는 애인과 달리 나는 혼자 벽장에만 있었다. 애인이 멀어지면 끝없는 외로움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고, 그래서 서로 떨어질 수 없었다. 우리는 때때로 일상생활을 위협할 만큼 무리하면서까지 같이 있곤 했다. 애인의 기숙사 침대에 숨어 들어가 불편하게 잠들 때도 있었고 통금이 있는 애인에게 집에 가지 말고 함께 있어달라고 울면서 조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애인을 집 앞까지 바래다준 뒤, 다음 날 아침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적도 있다. 난 여기에 밤새 서 있을 테니 자고 일어나서 다시 나오라고 했다. 서로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짓이었지만, 그때는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애인은 그런 나를 매번 잘 달래서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뺐다.
사실은 시험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이 연애가 무서우니까 빨리 결말을 알고 싶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건지 결국 우리는 상처만 남기고 헤어지는지 미리 알아야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애인은 시험을 모두 잘 통과했다. 밤새 내 얘기를 잘 들어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을 거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두려워졌다. 내 안에 그 애의 자리가 커질수록 나는 도망치고 싶었고, 실제로 여러 번 도망쳤다. 우리는 여러 번 헤어졌고 폭언과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관계를 애써 기워가며 만났다. 나는 내 삶에도 확신이 없었고, 연애에도 이별에도 확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도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연애가 무서워서 이별을 택하고 이별이 무서워서 다시 연애를 택했다. 도망칠 곳도 없어서 다시 돌아오고,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또 도망쳤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다 망했다고 싸운 다음 날, 너무 보고 싶고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가서 안겼다. 울고 편지 쓰고 화해하고 또다시 울었다. 일상은 망가지고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물론 내가 디나이얼이고 호모포비아고 불안하고 의존적인 사람인 게 가장 문제였지만 우리가 유독 안 맞기도 했다. 둘 다 용기도 확신도 없는데 서로의 그런 점을 악화시키는 조합이었다.
그렇게 둘 다 지쳐가던 무렵에 나는 이번엔 제대로 도망쳤다. 남자친구를 사귄 것이다. 우리는 큰 문제없이 잘 지냈다. 그렇게 드라마를 찍을 일도 없었다. 그러자 이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꼭 이 사람이 아니라 누구여도 상관없을 것 같은, 또 확신이 없는 그런 연애였다. 헤어질 이유도 없었지만 계속 만날 이유도 없었기에 얼마 못 가 헤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도 그런 비슷한 연애를 또 몇 번씩 더 했다. 여전히 좋지도 안 좋지도 않은 게 문제거나 너무 좋아해서 파멸로 몰고 가는 것, 둘 중 하나였다. 좀처럼 극단적이고 중간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히 사람과 사람의 첫 시작은 좋아하지도 안 좋아하지도 않는 확신이 없는 상태다. 만남의 시간이 흐르며 확신이 쌓이는 건데, 그럼 나는 또 도망치고 싶어진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가 헤어질 게 무서우니까, 그전에 관계를 빨리 끝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지 않으면 문제도 없지만 딱히 계속 만날 이유도 없고, 잘 맞는 사람을 만나 좋아하게 되면 불안해서 상대를 괴롭히니까 파국을 맞는다. 애인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지만, 거기엔 꼭 불안이 따라온다. 꾹 참고 끝내버리면 조금 슬프긴 해도 더는 무섭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그리고 나는 불안한 행복보다는 확실한 불행을 택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아직 결론 없는 불안한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엔 아직 결론이 없다. 살면서 계속 생각하고 경험하고 싸우며 성장해왔다. 처음엔 사지를 잡고 흔드는 불안 때문에 계속 휘청거렸지만, 불안을 조금씩 떼어내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시간이 지나며 혼자서도 안정적으로 서 있는 법을 알았고, 이제 앞으로도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 혼자 해낼 일이 훨씬 더 많긴 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불안을 계속 파헤치고 골몰하며 노력했고 어느새 조금 떼어놓기까지 성공했지만, 모두 끝난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게 두렵고 불안하다.
얼마 전 애인과 함께 여행을 갔다. 만나기는 오래 만났지만 작정하고 여행을 가는 건 또 처음이었다. 여행 가면 싸운다는 말은 들었지만 우리는 연애 초반에 모든 주제로 사사건건 다 싸워봐서 이제 더는 싸움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여행에서 마주치는 새로운 상황들은 또 달랐다. 안 싸워본 주제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또 근본부터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뭐가 하나 안 맞으면 꼭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극단적으로 흐른다. 마음속에는 순식간에 부정적인 말들이 가득 떠다닌다. ‘그래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우리는 처음부터 그게 문제였어!’, ‘아직도 이렇게 안 맞는 게 많아!’, ‘우리는 역시 안 될 거야!’, 같은 말들이다. 그런 말들을 마주하면 우리가 슬픈 파국을 맞게 될까 두려워지고, 그럴 거면 더 정들기 전에 빨리 끝내고 싶다. 우리가 안 맞는 사람이라면 그 과정에 힘든 일이 많을 거고, 그게 무서우니까 이것저것 생략하고 얼른 결말을 향해 돌진하고 싶은 거다. 그동안 여러 연애가 그렇게 끝났다. 뭐가 좀 안 맞다 싶으면 우린 아니라고 생각하고 도망쳤다. 언제나 발단은 사소하다. ‘너는 도대체 왜 TV를 틀어놓고 머리를 말리는 건지, 시끄러운 게 두 개나 있잖아.’ 그런 생각을 하다 전애인과 헤어졌다. 아마도 그때 우린 TV와 드라이기 때문에 헤어졌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발 전의 ‘아니, 내일 떠나는 마당에 음식을 왜 사놓는 거야?’, ‘난 공항에서 헤매기 싫은데, 왜 자꾸 어디 들를 일을 만드는 거야?’ 부터 시작해서, 여행 내내 ‘너는 왜 다른 사람한테만 물어보고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여기를 가기로 했는데 왜 거기에 가는 거야?’, ‘놀러 온 건데 왜 계속 자료조사만 하는데?’, ‘일정 너무 빡빡해. 택시 타고 들어가고 싶어.’ 하다가 역시 우리는 늘 똑같은 부분에서 안 맞고 지긋지긋하며 정말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불만이 한둘이 아닌데 계속 꾹 참고 있다 보니 나만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도 온종일 그렇게 여러 가지가 쌓여 짜증을 꾹 누르던 차에 사람이 매우 많은 번화가에 들어섰다. 우리는 둘 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상황에 취약하다. 쌓인 불만이 폭발하고도 남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러지 않았다. 가보고 싶은 곳이어서 일부러 찾아간 거였는데도, 둘 다 첫발을 들여놓자마자 ‘여기서 나가고 싶어!’하고 미련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 우리가 좋아하는 건 다르지만 싫어하는 건 비슷하다. 그게 참 위안이 되었다. 더는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제야 여행 중 내가 좋아하는 빈티지 가게에 갔을 때 애인이 한참을 같이 쇼핑해준 것도 떠올랐다. 나랑 취향이 완전히 달라서 관심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숙소로 가던 중에 내 영혼의 단짝으로 보이는 원피스 가게를 발견해주기도 했다. 나 때문에 가게를 스무 개쯤 돌아다녀서 봤어도 못 본 척할 만도 한데 굳이 내 손을 이끌고 저기까지만 가보자고 해줬다. 거기서 내가 다 마음에 든다고 심각하게 괴로워하자 ‘괜찮아, 괜찮아. 다 사자. 남으면 장사하면 되지~’ 하고 부추겨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도 안 되는 말을 툭 던진 게 웃겼다. 지금까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주위에 길을 물어보고 아무렇지 않게 동선을 변경하고, 아무렇지 않게 열정적이었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 취소해버려서 화가 났었던 건데도, ‘그래, 내가 저 실없음을 좋아하지.’ 싶었다. 언제나 긴장을 느슨하게 해주는 사람이고, 사실은 나랑 달라서 좋은 점이다. 우리는 다르고 달라서 만나고 있었다.
여전히 이렇게 헤어져야겠다고 혼자서 생각했다가 그러지 말자고 또 다독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 제멋대로 흘러가는 마음들을 한 마리씩 잡아다 화해시키며 살아간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무서워도 도망치지 않기로 하는 거다. 헤어져 버리면 쉽지만, 힘들어도 하나씩 얘기하고 함께 풀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힘껏 유지해보기로 계속 다짐한다. 사실 나는 이제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안다. 이 연애에서 저 연애로 도망치고, 이별에서 관계로도 관계에서 이별로도 도망쳐봤지만 나아지는 게 없었다. 전보다 용감해졌거나 현명해진 게 아니라 이제는 도망치기에도 실패해서 꼼짝없이 기운을 내야만 하는 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무섭더라도 힘을 내서 계속 가보려 한다.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매번 도망치느라 도착해본 적 없는 어딘가에, 어쩌면 불안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지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