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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린다와 엘파바, 편견을 깨고 성장하는 캐릭터
<위키드>는 쥬디 갈란드가 도로시로 등장하는 너무나 유명한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 의 사악한 ‘서쪽 마녀’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라이만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를 기반으로 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뮤지컬과는 다르게 원작은 진지하게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급간의 투쟁 등을 심도있게 다룬다. 뮤지컬이 그보다 더 심도가 낮은 건 아니지만 노래를 부르는 형식과 제한된 상연 시간 안에서 창작자들은 집중과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엘파바 만이 아니라 글린다를 동급의 주인공으로 서장시키면서 사실상 원작소설의 기본 뼈대와 지향점을 유지한 채 새로 쓴 작품이라고 봐도 무난할 정도다.
대본 작가인 위니 홀츠만은 브로드웨이에서는 흔하지 않은 여성 작가로 이 작품을 통해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프리뷰 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현재 브로드웨이 뮤지컬 장기공연 순위 7위를 기록 중이다. (장기공연 2위 에 역시 두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시카고>가, 9위에는 중년 여성들이 주인공인 <맘마미아!>가 차지하고 있다. 21세기 초반, 브로드웨이 관객들의 취향의 변화가 롱런 중인 작품들 속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뮤지컬 ‘피핀’의 작곡가 스티븐 슈바르츠의 브로드웨이 세번째 히트작이자 그의 인생 최대 히트작이다.
줄거리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이름도 없이 ‘서쪽 마녀’라고만 불렸던 마녀에게 엘파바라는 이름을 선사하고 왜 그가 마녀로 불리기를 망설이지 않는 삶을 살았는지를 다룬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소설 <위키드>가 원작이다. 브로드웨이에서는 흔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 두 명이 주인공인 작품으로 선하지만 괴팍한 인물인 엘파바와 아름답지만 바보가 아닌 글린다를 내세워 전형적인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볍게 부숴버린다. 오즈의 마법사 주요 캐릭터들인 겁쟁이 사자, 양철 사나이, 허수아비의 뒷이야기가 에피소드에 섞여 있다. 좋은 의도로 마법을 사용하지만 마법 자체가 지닌 어두운 한계 때문에 어딘가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는 설정은 원작 소설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부분이자 오즈의 마법사의 팬들을 끌어들이는 입구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마법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되지만 오즈의 마법사의 초대로 방문한 오즈에서 마법사가 사실은 마법능력이 없어서 엘파바의 마법실력을 빌리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구나 그 목적이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던 동물들에게서 언어를 빼앗고 학대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엘파바가 분노해 에메랄드 시티를 탈출한 후 핍박받는 동물들을 도와주지만, 그는 오즈의 마법사와 마법학교장이었던 마담 모리블에 의해 사악한 마녀로 왜곡되어 널리 알려진다. 글린다는 한 눈에 반한 피예로와 억지로 약혼까지 하지만 사실 피예로의 마음은 겁장이 아기 사자를 함께 풀어준 날 이후로 엘파바에게 묶여 있는데...
What is this feeling?
두 캐릭터의 첫 만남은 강렬하다. 두 사람의 첫 듀엣인 “What Is This Feeling?”은 서로에 대한 신기한 감정이 담겨 있다. 새롭고 신기하고 맥박이 뛰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불꽃처럼 타오른다. 하지만 이들은 그 감정을 ‘혐오’라고 명명한다. 첫 장면에서 서로를 묘사하는 언어는 여성들에게 오랫동안 적용되어온 편견 그 자체다.
글린다는 초록 피부와 괴팍한 성격의 엘파바를 두고 ‘비정상적이고 과하게 특이해서 정의하긴 어려운’ 사람이라고 나름 교양 넘치게 험담을 늘어놓는데 반해 엘파바는 ‘금발’ 한 마디로 글린다에 대한 묘사를 끝내버린다. 글린다가 길게 늘어놓은 묘사를 다 합쳐도 ‘금발’만큼 명료하진 않다. 외모만 예쁘고 머리는 깡통처럼 텅텅 빈. 서구문화의 오랜 ‘금발’ 편견은 페미니즘이 두 바퀴를 다시 돌아와도 바뀌지 않을 기세다. 서로에 대한 이 묘사는 그들 스스로도 외모에 대한 편견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후 이들이 어떻게 얼마나 변화하는지가 작품을 보는 묘미 가운데 하나다.
엘파바는 두 번의 큰 감정의 기복을 맞는다. 한 번은 파티가 있던 날 글린다가 자신을 초대하며 뾰족모자를 선물했을 때, 두번째는 오즈의 마법사가 자신을 이용해 사악한 방식으로 동물들을 탄압하려고 했을 때다. 글린다를 통해 엘파바는 ‘평범’한 일상을 아주 조금 맛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랫동안 유지해온 자신의 괴팍한 개성을 버리지는 않는다.
너무나 다름에도, 너무나 다르기에
글린다가 가르쳐준 머리 쓸어올리는 법을 연습하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는 엘파바에게 ‘넌 글린다를 따라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말을 거는 사람은 이야기 안에서 글린다와 엘파바를 사랑의 라이벌로 만드는 인물인 피예로다. 하지만 엘파바가 함께 떠나자고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피예로가 아니라 글린다다. 마법사의 이중성과 꼼수를 깨달은 엘파바는 에머랄드 시티를 탈출하던 순간 글린다에게 손을 내민다. 원작에서의 글린다는 엘파바 못지않게 마법에 능하지만 뮤지컬 속의 마법 능력이 없는 글린다는 엘파바의 손을 잡지 못한다.
뮤지컬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글린다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이 갈림길 앞에서 망설일 때의 선택법과 같다. 엘파바는 태어나면서부터 주변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포기해 왔기에 두고 갈 것 자체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엘파바가 마지막 순간에 그래도 하나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 글린다였다. 글린다의 입장은 다르다. 엘파바가 자신의 세상 전부를 그 짧은 순간에 가늠해야 했을 때 글린다의 선택은 엘파바일 수가 없다.
전형적인 ‘금발’처럼 보이는 글린다는 외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는 엘파바에 비해 내적으로는 그에 상응하는 기복을 겪는다. 사랑받는 법에 익숙했던 글린다는 엘파바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와 마주치는데, 그 사람은 심지어 자신을 동경하지조차 않는다. 때문에 처음에는 엘파바에게 분수를 깨닫게 해주려는 일종의 악의를 지니고 있지만 이내 누구보다도 먼저 후회하고 엘파바에게 손을 내민다.
무엇보다도 글린다는 엘파바를 ‘엘피’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매우 잘나가는 사람의 애칭같다고 오글거려 하면서도 엘파바는 엘피라는 애칭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애칭이라는 것 자체를 가져본 적 없는 엘파바에게 애칭으로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인 글린다는 훗날 엘파바의 상징이 될 검은 뾰족모자와 검은 망토를 둘러주며 엘파바의 정체성을 확립해 준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더욱 더 사악하다고 여겨도 엘파바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글린다가 준 것들이므로. 극 중에서 글린다와 엘파바는 피예로에 대한 연정 때문에 괴롭지만 사실상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오즈의 자유와 진실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두 사람의 입장 차이다.
'메인 커플'은 글린다와 엘파바?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모토지만 이미 글린다는 첫 장면부터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피예로가 엘피를 사랑한다는 것, 엘피가 사악한 마녀로 묘사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자책감, 이 세계가 정말 괜찮은지에 대한 근심 등 모든 것들이 글린다를 괴롭히고 이 모든 의문은 도로시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집과 함께 오즈에 뚝 떨어져 엘피의 여동생 네사로즈를 ‘퇴치’ 하여 실로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 터져 나온다.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동안 들은 서로에 대한 소문과 상상만 했던 그 뒤의 일들을 두고 설전을 벌이지만 이내 글린다는 ‘엘피’를 다치게 할 수도 불행하게 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엘파바의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안다. 글린다가 오즈의 선한 마법사 역을 하는 동안 엘피는 오즈의 선한 동물들을 실제로 구하는, 일종의 역할 분담을 맡는다. 피예로가 결국 마지막에 엘파바와 함께 도망칠 수 있는 이유는 엘파바가 내민 손을 잡았기 때문이고 오랜 그리움으로 인해 엘파바가 아닌 다른 것들의 의미가 점점 옅어졌기 때문이다.
엘파바는 자신을 탈출시킨 죄로 교수형을 당하게 된 피예로를 살리기 위해 마법을 부리지만 결과는 허수아비다. 게다가 그를 직접 보기 전에는 그 결과가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허수아비든 호박왕이든 엘파바는 상관하지 않는다.
엘파바가 부리는 모든 마법이 의도와는 다르게 가혹한 댓가를 치른다는 설정은 이 작품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다. 교수형을 당해도 죽지 않는 몸은 허수아비, 심장이 없이도 죽지 않는 몸은 양철 사나이가 된다. 주문으로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부두교의 경전처럼 지엄한 법칙이다. 결국 엘파바는 그 마법책(<그래머리>)을 포기하고 마는데, 그 정도로 마법의 부작용을 보아왔다면 포기할 만도 하다.
글린다는 엘파바와 피예로를 도주시키고 오즈를 좌우했던 마담 모리블과 마법사의 비리를 폭로하고 오즈의 평화를 되찾는다.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골치 아픈 통치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 것도 글린다에게는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엘파바는 죽음을 연기하고 허수아비와 함께 잠적했기에 그들은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지만 이별을 대하는 글린다의 자세는 그보다 더 훌륭할 수가 없다. 누가 ‘금발’이 이토록 현명하다 했던가. 이 즈음 되면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글린다와 엘파바의 사랑에 피예로가 눈치도 없이 끼어든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지경이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밑거름
그동안 브로드웨이는 수많은 씩씩한 여성들이 존재해 왔지만 대부분은 캔디형이거나, 철부지형이었다가 험한 세상살이를 겪은 후 철이 드는 캐릭터거나, 타인을 변화시키는 캐릭터들이었다. 뮤지컬 <위키드는> 원작 소설 <위키드>와는 거리가 꽤 많이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창작자들은 위키드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차별의 부당함과 사랑의 다양함을 넘어서 약자이면서 강하고, 인기가 많으면서도 불안해 하고, 괴팍하면서도 정의롭고, 인생의 다양한 결을 지닌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 안에 담았다.
여담이지만 아무리 각색을 해도 허수아비의 시간은 해결이 안 된다. 도로시가 허수아비를 만나는 것은 교수형 당한 후라서 엘파바와는 마지막까지 조우할 시간이 없다. 허수아비는 엘파바의 성 밖 돌산에서 날으는 원숭이들에 의해 뱃속의 지푸라기를 제거당하고 널부러졌다가 도로시가 엘파바에게 물을 끼얹어 퇴치한 후 구하러 온 뒤에는 다시 도로시와 함께 오즈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뮤지컬 <위키드>는 결말 부분의 이러한 난감함을 마법사의 탈출로 넘어가버리지만 그 정도는 웃으면서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엘파바와 글린다가 이후 브로드웨이의 여성 캐릭터들이 더욱 다채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된 걸 생각하면. 발목을 잡아 당기는 오랜 관습과 편견의 중력을 거슬러 높이 날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주는 감동을 생각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