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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마법, 중상모략과 배신, 피와 계략, 불륜이 난무하는 HBO의 <왕좌의 게임>이 어느새 시즌 6를 마무리지었다. 원작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집중했던 시즌 1, 2, 3과 달리 시즌 4부터 <왕좌의 게임>은 드라마만의 독자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원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드라마는 팬들의 찬양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원작에서 매력적으로 묘사됐던 다수의 인물들이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다른 캐릭터와 합쳐지고, 원작에서의 비중이 그저 그랬던 인물들이 중요한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꾸준히 매력적이었다. 특히 얽히고 설킨 최종 결말으로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한 <왕좌의 게임> 시즌 6는 원작 팬에게도, 드라마 팬에게도 호평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다른 드라마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훌륭한 매력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여성이 드라마 전체를 이끈다는 것.
여성이 이끈다
시즌 6가 끝나고, 어떤 결과가 남았는지 잠시 회상해 보자.
세븐킹덤의 왕: 세르세이 라니스터
미린의 여왕 & 칼리시: 대너리스 타르가리옌
윈터펠의 군주 & 북부의 수호자: 존 스노우(와 산사 스타크)
도르네의 지배자: 엘리리아 샌드와 샌드스네이크
타이렐 가문의 맹주: 올레나 타이렐
강철군도의 군주: 유론 그레이조이
강철군도의 도망자: 야라 그레이조이 & 테온 그레이조이
시즌 6에서 이뤄진 권력 구도 재편의 핵심은 모두 여성이었다. 이들은 모두 여자가 지배하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야망을 키워 왔다. 그리고 그들의 대담한 시도는 결국 그들을 주인공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주인공이 된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들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세르세이 라니스터:
호랑이 엄마에서 여왕으로
세르세이 라니스터가 시즌이 진행될 수록 최악의 결말로 치닫는 선택을 수없이 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는 결국 영 좋지 않은 결말이 예상되는 악역이 됐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세븐킹덤 최초의 여왕이 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란성 쌍둥이이자 애인인 제이미 라니스터와 비교당하며 자랐다. 그와 제이미가 너무 어려 구분이 거의 불가능했을 때, 따라가서 함께 검술 교습을 받다가 수나 놓으라며 쫓겨났다는 어린 시절 일화는 상징적이다. 세르세이는 타이윈 라니스터가 왕의 핸드가 되어 킹스랜딩에 있을 때도 꾸준히 ‘진정한 라니스터는 제이미도, 티리온도 아닌 바로 나’라며 가주의 자리를 선망하고 가문을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음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어필한다.
하지만 타이윈 라니스터는 세르세이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고, 결국 타이윈 라니스터가 살해당한 후 라니스터 가문의 가주 자리는 잠정적으로 타이윈의 동생 케반 라니스터가 맡게 된다. 세르세이는 끊임없이 ‘남자의 자리’, 즉 지배자의 자리를 갈망하며 지배자가 되기 위한 자신의 역량을 끊임없이 선보이고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한다. (물론 실제로 증명이 잘 되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세르세이의 전략적 선택은 대부분 효율이 낮거나 매우 잘못된 판단이었다.)
엄마이고 싶었던 지배자
하지만 세르세이조차도 처음부터 세븐킹덤의 왕을 ‘감히’ 꿈꾸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 원한 것은 자신과 제이미의 아들이 세븐킹덤을 다스리는 것. 그리고 그의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 세르세이 라니스터는 자신의 세 아이를 모두 잃기 전까지 꾸준히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어머니가 되기를 원했다. 스스로를 훌륭한 전략가이자 왠만한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성애 때문에 때로는 모든 것을 놓치고 망치는 엄마. 킹스랜딩 제일의 미인이라며 추앙받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왕. 세르세이의 캐릭터는 그만큼 전통적이었다.
그의 조프리를 향한 어마어마한 사랑을 보라. 조프리 바라테온이 티리온 라니스터의 표현처럼 얼마나 “잔인하고 멍청해서” 국정을 망쳐놓는지는 심지어 세르세이조차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르세이는 조프리에게 국정을 운영하는 ‘팁’을 가르치고, 그의 매우 짧은 생각을 보완해주기도 하지만 결국 조프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하게 내버려둔다.
조프리는 그래서 마음대로 네드 스타크의 목을 쳤고, 산사 스타크를 학대했고 (세르세이의 충고를 받고 ‘보이는 부분은 때리지 않’지만) 킹스랜딩에서 전쟁을 일으킨 뒤 선봉에 나서겠다며 허세를 부리다가 제일 먼저 성 안으로 뛰어 들어와 전쟁의 승패를 뒤바꿀 뻔 했다. 세르세이는 조프리가 멍청한 결정을 할 때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가 세븐킹덤의 1인자라는 이유로 모든 멍청한 결정을 막지 못했다. 조프리의 멍청함을 막지 못한 대가는 조프리의 죽음이었다.
자식 중 장남인 조프리를 잃고도 세르세이가 시즌 5까지 끊임없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 ‘노력’하는 이유는 조프리 다음으로 왕이 된 토멘과 도르네에 보낸 미르셀라 때문이었다. 조프리가 죽고 토멘이 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세르세이는 제이미에게 말한다.
“그래, 토멘은 좋은 왕이 될 거야. 그 아이는 착하니까.”
조프리의 성격은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지만, 토멘은 잘 어스르고 타일러서 좋은 왕 (그리고 엄마 말을 잘 듣는 왕)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얼핏 보인다. 도르네에 정략적인 계산으로 보낸 미르셀라 공주 역시 밝고, 환하고, 착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미르셀라마저 엘리리아 샌드에 의해 독살당한다.
미르셀라의 장례를 치르면서 세르세이와 제이미는 다짐한다.
“우리 아닌 이들은 모두 우리의 적. 모두 죽여 버릴거야. 모두 죽여 버릴거야.”
세르세이는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제이미와의 관계를 비밀로 하려고 애썼다. 그는 비밀을 알아챈 이들에게 모두 죽음을 선사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존 아린이 죽었고 네드 스타크가 죽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세븐킹덤 전역에서 반란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세르세이와 라니스터 가문은 소문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시즌 5에서 미르셀라의 죽음을 맞으며 세르세이와 제이미는 더 이상 둘간의 깊은 애정/애증 관계와 유대감을 숨기지 않게 됐다. 마지막 남은 아들을 지키기 위한 진득한 발악이자 벼랑 끝에 몰린 이의 절망이다.
조프리, 토멘, 미르셀라
하지만 정작 마지막으로 남은 세르세이의 자식인 토멘은 ‘너무 착해서’ 엄마의 좋은 아들이 되어 주지 못했다. 토멘은 <왕좌의 게임>에서 몇 안되는 심성이 지나치게 선한 사람이다. 그래서 세르세이가 킹스랜딩으로 불러온 일곱 신 신앙에 감화된다. 그는 자신의 가문과 종교 중 종교의 편을 들어 주며 세르세이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안긴 대주교 하이 스패로우의 권위를 한껏 높인다. 그는 정말로 지나치게 순진하고 착하다. 아내가 된 마저리 타이렐을 잘 따르고, 백성들과 신도들을 정말로 걱정하고 위한다. 그래서 그는 세르세이에겐 점점 탐탁치 않은 아들이 됐다.
결국 세르세이가 자신의 종교 재판을 위해 모인 스패로우 군단, 하이 스패로우, 마저리 타이렐을 모두 한 방에 와일드파이어로 날려버렸을 때 토멘은 자살한다. (하지만 토멘의 비극적 결말과는 큰 상관없이, 시즌 6 피날레 에피소드에서 세르세이가 전략을 펼치는 순간의 영상 구성은 예술적이다. 말 한 마디 없이 그 모든 시퀀스가 완성된다. 이 영상을 토막으로 잘라 가져다 바쳐도 에미상을 탈 수 있을 것이다.) 토멘은 그렇기에 세르세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세르세이가 그가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한방에 파괴했기 때문이다. 토멘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토멘까지 죽자, 세르세이는 이렇게 생각한 듯 하다. ‘역시 엄마는 내 길이 아니었어’. 하이 셉트를 날려버리는 결정을 하며 등장하는 세르세이의 의상 변화는 이미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짧은 머리, 갑주를 닮은 어깨 견장, 어둡고 두꺼운 경갑옷같은 드레스. 세르세이는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조프리가 죽었을 때, 마르셀라가 죽었을 때와는 달리 세르세이는 별다른 애도와 슬픔을 보여주지도, 대단한 장례식을 치뤄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새 그랜드 마에스터인 카이번이 그레이트 셉트가 폭파되었으니 토멘의 장례식을 어디서 치를 지 물어도 세르세이는 별 관심이 없다. 그냥 태워버려. 그것이 세르세이의 대답이다. 조프리의 시체를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다짐하고 티리온의 목에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던 반응과는 극명히 대조된다.
그리고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순간, 세르세이는 여왕으로 스스로 등극한다. 세븐킹덤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제이미 라니스터는 임무에서 귀환하며 불타는 그레이트 셉트를 보고 이 장면을 예감했을까. 세르세이의 즉위 장면을 보며 제이미는 머리를 짚고 허탈해한다. 제이미와 세르세이의 관계가 단단한 애정에서 애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빠 제이미, 엄마 세르세이
제이미 라니스터는 가문의 장남이자 훌륭한 검사, 로드커맨더, 킹스가드 등 이미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누린 인물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 이름들이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킹스가드에서 해임된 후에 라니스터의 가주 자리를 이으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든 권위와 의무로부터의 탈주이고, 이 때문에 사소하지만 위험도가 높은 각종 미션에 스스로를 계속해 던진다. 도르네에서 미르셀라를 구출하는 임무나 블랙피쉬가 탈환한 리버런 성을 재탈환하는 임무 같은, ‘왕좌의 게임’에는 중요하지 않은 임무들이 그것이다.
그가 대단한 이름들을 버리고 도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름은 ‘아빠’였다. 아무도 모르고 본인만 알기에 편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이미는 자신의 자식인 조프리, 토멘, 그리고 미르셀라에게 세르세이만큼이나, 혹은 세르세이보다 더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남은 자식 토멘을 죽여버리고 그 자리에 앉은 세르세이가 어떻게 보일까.
세르세이-제이미는 시즌 7에서 점점 멀어질 듯 하다. 그리고 제이미와의 결합이 느슨해질수록 세르세이의 파멸도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르세이에게는 제이미조차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마침내 어릴 때 들었던 예언대로 세 명의 자식을 모두 잃고 나서야 지배자의 자리에 올랐다. 아무도 그에게 지배자의 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는 세븐킹덤에서 가장 높은 이가 됐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찰나이고, 순간인 영광일 뿐이라도 그는 결국 ‘해낸’ 것이다.
왕비에서 '여왕' 되기
세르세이의 첫 등장, 그리고 시즌 6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가 모성애를 버려온 과정과 여성성을 버리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됨을 알 수 있다. ‘남부 킹스랜딩식’ 땋은 머리, 그의 옷, 패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윈터펠까지 잔뜩 옷을 싸 들고 왔던 그의 짐. 우아하고 고고한 모습으로 <왕좌의 게임>에 처음 등장한 세르세이는 주로 붉은 계열의 옷을 즐겨 입는다. 라니스터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자 본인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드러내고 싶어서다. 그는 침착하게 ‘눈물이야말로 여자의 무기’같은 클리셰를 산사 스타크에게 가르치고, 식사를 함께 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그가 누려왔던 아름다움과 권위는 ‘속죄의 행진’(The walk of shame)에서 모두 벗겨진다. 그를 지켜 줄 옷도, 머리도 무엇도 없이 그는 킹스랜딩을 걸었다. 그 이후 세르세이는 다시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시즌 6에서 세르세이는 내내 단발이다. 그리고 입는 옷도 남색, 검은색을 거쳐 점점 단순해지고 어두워진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철왕좌에 오를 때 그의 복식은 갑옷이나 다름없다. 세븐킹덤의 아름다운 귀부인이라면 절대 입을 리 없는, 검고 단단한 옷이다.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이를 이용해 이들을 지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