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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의 편린들이 널려 있는 곳, 서울
“서울 살이 오 년, 여덟 번째 직장
혼자 사는 엄마한테 편지 한 줄 못 쓰는 내 꿈은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 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뮤지컬 <빨래>가 처음 개막했을 때, 단점이 많다고 느꼈다. 다소 짧고 내용도 산만하고 뮤지컬이라기에는 넘버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예상 외로 컸다. 강원도 출신의 나영과 몽골 출신의 솔롱고가 겪는 힘든 타지 생활의 고단함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빨래>의 창작자들은 재공연을 올릴 때마다 작품을 보완해왔다. 현재 공연되고 있는 <빨래>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야기의 짜임새를 갖추면서 새로운 넘버들도 추가됐다.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작품 속의 보증금도 오르고, 월세도 오르고, 티켓가격도 올랐지만 초기의 설정은 그대로 남았다.
줄거리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동네로 '나영'이 이사를 온다. 서로가 얼굴을 맞대고 잠을 자야 하는 비좁은 그 동네에 방 한 칸을 얻었다. 나영은 스물 일곱살의 작가가 되고 싶은 서점 직원. 일하며 대학도 가고 글도 쓰고 싶지만, 실제로는 홀어머니에게 전화할 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고단한 나날이다. 책을 가까이 하고 싶어 서점에서 일하지만 책을 진열만 할 뿐이다.
나영이 빨래를 너는 옥상에서 한 달음에 건너갈 수 있을만치 가까운 이웃집 옥상에는 솔롱고가 필리핀 노동자 마이클과 살고 있다. 솔롱고는 몽골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서 일하고 있다. 바람에 날려간 빨래가 인연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이들.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펼쳐친다. 나영이 세들어 사는 집주인 할머니는 서울 생활 45년차, 장애가 있는 딸을 숨겨놓고 돌보고 있다. 옆 방의 희정엄마는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는 돌싱 구씨와 떠들썩한 연애를 하는 사이다. 이외에도 외상값 때문에 속 썩는 수퍼마켓 아저씨, 나영이 다니는 서점 주인 빵사장 등이 현실감 있게 등장한다.
억지만 부리는 빵사장 때문에 나영이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 나영은 솔롱고와 술김에 수다를 떨다가, 솔롱고를 무시하는 솔롱고의 집주인에게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둘 다 집주인 일행에게 얻어맞고 분을 삭힌다. 직장에서는 빵사장의 갑질횡포로 물류창고로 밀려난 나영은 더러워도 때려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와 맞으면서도 대들지 못하는 솔롱고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며 연민을 느낀다. 나영은 솔롱고와 동거하기 위해 이사하면서 희정엄마와 주인할머니 등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 작품에서 분명한 이름으로 불리는 여성 배역은 나영 하나다. 빵사장에 직언을 했다가 짤리는 서점의 베테랑 직원 김지숙이 있지만, 등장 빈도도 높지 않고 나영과 심도 있는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나영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선배이기에 나영은 그저 그 선배를 우러러 볼 뿐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어쩌면 초장부터 벡델지수에 완전히 어긋나는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다른 남성 배역들의 경우 절반 정도는 이름이 불린다. 이를테면 세상 재수 없는 인물인 빵사장의 경우에도 본명이 한 번은 불리우고, 남자 주인공인 솔롱고의 룸메이트인 마이클도 그 이름이 본명이든 아니든 분명히 이름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와 희정엄마는 캐릭터의 이름으로만 남는다.
이름은 없지만
서로를 도와주는 여성들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이들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너무나 그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여성에게 자기 이름이 없던 시절, 그저 캐릭터가 이름이었던 시절의 잔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주인 할머니'와 '누구 엄마'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졌던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비록 이름은 없을지언정, 이들은 확실히 작품 속에서 연대하고, 연애가 아닌 이야기들에 시간을 보내며, 각자의 인생을 쓰던 달던 놓지 않고 움켜쥐는 인물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주인 할머니가 장애를 앓는 딸의 기저귀를 빠는 걸 보고, 희정엄마와 나영이가 스스럼 없이 도와주며 부르는 넘버 ‘빨래’다.
주인 할머니는 돈을 아끼느라 세탁기도 없이 한겨울에도 찬 물에 기저귀를 빤다. 이제 그 사연을 알게 된 희정은 할머니를 구두쇠라고 욕하기보다 도와준다. 빨래라는 ‘집안일’을 함께 하며 세 여성은 깨끗하게 씻긴 빨래처럼 자신들로 그렇게 깨끗하게 된 듯 한 기분을 느낀다. 이 장면이 바로 이 뮤지컬의 제목이 <빨래>인 이유다.
처음에는 도무지 뮤지컬의 제목 같지 않은 빨래라는 단어 때문에 거리감을 느꼈다면 공연이 끝난 후에는 어느 푸른 하늘에 내 안의 시커먼 부분을 빨아 널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미세먼지만 없다면.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뮤지컬 <빨래>에서 주인공들의 목표는 생존이다. 거기에 하나를 살짝 더 보태자면, 아주 미미한 기쁨이라도 누리기를 원한다. 그것은 돈 많은 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으로 따지면 적고, 경험으로 따지면 사소할 수도 있다. 이들에게서 거창하고 드라마틱한 목표를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존이 목표인 사람들에게는 꿈이 생존이다.
마치 오래 전 드라마 <서울의 달> 속에서 주인공들이 살던 동네를 보는 듯 한 나영의 동네는 이제 서울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는 ‘달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 몸 누일 방 한 칸을 찾아 들어오는 나영은 작가가 꿈이다.
나영의 꿈은 서울 변두리 여기 저기의 방에 흩어져 있다. 나영은 아직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없다. 문 달린 방 한 칸을 찾아 이사해 온 나영은 전기도 수도도 자신이 쓴 만큼 내지 않는다. 한 달에 얼마, 정해진 가격을 집주인에게 지불하는 방식이고, 그래서 주인 할머니는 끊임없이 전기를 끄고 수도를 끄고 다닌다. 흘러가는 물과 켜진 전기가 할머니에게는 돈이다.
이런 곳이지만 나영은 꿈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대학도 가고 싶고 글도 쓰고 싶다. 현실은 일기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지쳐 쓰러져 자는 게 고작이고, 주말이면 간신히 빨래를 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속에서도 나영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진심을 꺼내놓으며 연애도 한다.
나영에 주어진 운명이 무엇일까. 살아가는 것.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나영은 충실히,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나영에 대한 응원은 덤이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나영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이란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아주 시니컬하게 무시할 수도 있지만, 톨스토이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한 불행의 이유와 달리 행복의 이유는 대체로 간단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금전적으로 쪼들리지 않으며 건강하면 된다. 이 기반 위에서 다양한 꿈들의 변주가 이루어지고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꿈의 변주도 고달파진다. 특히나 그것이 돈과 건강일 때 불행은 각자의 꿈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재빨리 따라잡기 마련이다.
나영은 뮤지컬 <빨래>가 끝날 즈음 사랑을 획득한다. 작가가 되고 싶은 나영의 꿈은 아직 다 흘러 사라지지 않고 나영을 서점으로 이끌지만, 사장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그나마 멀고 먼 물류창고로 보내진다. 그야말로 책더미에 파묻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책 안에 인쇄된 문장을 읽을 시간은 더욱 더 멀어져만 간다. 나영의 목표인 작가는 노랫말처럼 지나온 방 어딘가에 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영의 꿈은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나영은 아직 여전히 세상에는 ‘정의’가 있다고 믿는다. 소심하지만 술기운을 빌든, 울컥하든 나영의 올바름은 숨길 수 없는 재채기처럼 튀어나온다. 빵사장이 자신의 이름도 모를 정도로 저 아래 직급이지만, 자신에게 평소에 엄하게 대했던 직장 상사의 바른 말을 거들고, 솔롱고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차별 받을 때 직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울컥 솔롱고의 편을 든다. 돌아서서는 내가 왜 그랬나, 할 수도 있겠지만. 나영의 고달픈 일상이 나영의 신념을 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나영이 정의의 화신도 아니다. 나영의 ‘올바름’의 지점은 뭔가 아슬아슬한 줄타기같은 ‘평범’의 경계에 있다. 솔롱고가 부르는 노랫가사처럼 “우리도 사람인데, 우리도 맞으면 아픈데”라는 말에 나영은 공감한다. 인간을 대하는 기본이지만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이 노래가사에 공감하는 것이 정말 인간의 평균이면 얼마나 좋을까.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나영과 같은 캐릭터를 우리는 오래 전부터 보아왔다. 우리는 그런 여성을 ‘캔디’라고 불러왔다. 이 캐릭터는 수퍼우먼 신드롬의 결정체와도 같은 인물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상냥하고 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자기 권리를 내세워야 할 때는 꾹 참고 견딘다.
이러한 모든 특징은 실제로는 사회가 ‘약자’에게서 원하는 덕목이다. 동성애자에게, 여성에게, 유색인종에게 원하는 특징이다. 착하게 살면 언젠가는 너의 가치를 인정해 주겠다는. 그러나 그들의 인정이 왜 필요한가.
나영은 착하지만 착하지 않다. 나영이 타인의 폭언을 참는 이유는 밥줄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영은 참지 못하고 밥줄을 쥔 빵사장에게, 동네 아저씨에게 대드는데, 이러한 나영의 모습에 상대방이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나영이 여자이며, 착해 보인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나영은 싹싹하게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착한 여자’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 착한 여자는 참는 여자고, 길에서 마주쳤을 때 먼저 비키는 여자고,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여자다. 그런 면에서 나영은 나쁜 여자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여자다.
나영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돈이라는 것은 슬프다. 하지만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까. 나영은 기존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나쁜 사람이고, 그래서 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솔롱고에게 먼저 손 내밀면서 나영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이 작품 안에서 나영은 몇 번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가장 마지막에 살던 방을 떠나기로 한 결정을 제외하면, 나영이 솔롱고로 인해 자신의 결정이나 마음이 휘둘리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리고 솔롱고와의 동거를 결정하는 것조차 나영의 주체적인 결정이다.
나영은 자신의 결정으로 빵사장에게 반기를 들고 자신의 판단으로 솔롱고의 편을 든다. 솔롱고는 사람들과 먼저 나서서 인사를 하는 유형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날아온 웃음에 웃음으로 답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서 이 작품에서 나영과 솔롱고의 사랑은 조금 독특하다. 솔롱고는 나영을 처음 옥상에서 본 날 ‘참 예뻐요’를 부르며 나영에게 빠져들지만, 나영에게는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다. 솔롱고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나영의 연애는 다른 영역이다.
그런데도 나영이 마지막에는 솔롱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보다는 오히려 동지애에 좀 더 가까운 듯이 보인다. 낯선 나라에 와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러시아 문학 전공자 솔롱고와, 작가가 되고 싶어하고 설혹 한 글자도 못 읽을지라도 책에 둘러싸여 일하고 싶은 나영과의 만남은 어찌 보면 식상하다 싶을 정도로 ‘운명적’이건만, 이 둘의 사이에서는 번개같은 스파크가 튀지 않는다. 스파크가 튀기에는 그들의 삶이 꽤 고달프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적인 면이, 왠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순정남 솔롱고와 만나면서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뮤지컬 <빨래>는 그러한 면에서 꿈과 사랑이 넘치는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스타일 뮤지컬이 아니다. 그런 정형성에서 벗어나면서도 어딘가 톤 다운된 한국적인 로맨틱함을 보여주는데 성공한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사람이 발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인공은 반드시 발전한다. 아니 발전해야만 한다. 비극이든 코미디든 개인의 성장은 매우 중요하다. 주변의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이 단 한계단이라도 올라서야 하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올라서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도 중요하다.
나영의 발전은 뭘까. 솔롱고와의 동거를 나영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고달픈 두 개의 삶이 합쳐졌을 때 그들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덜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외로움을 덜었다면 나영은 발전한 걸까? 이 작품이 끝났을 때의 나영과 시작할 즈음의 나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영이 겪은 가장 큰 사건은 직장에서의 좌천과 솔롱고와의 만남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나영은 자신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중년의 여성과 노년의 여성을 만나 동지애에 가까운 짧은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영은 희망적이다. 젊음이 주는 대책 없는 희망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나영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정의감과 강인함이 버티고 있다. 나영은 그 희망을 희망 없어 보이는 자신의 주변에서 찾는다. 일면식도 없던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워 주던 사람들이 나영의 희망이다. 비록 나영이 바라는 방식으로 ‘성공’할 수 없다 해도 나영은 주인집 할머니와 희정엄마 등을 통해 잃어가던 사람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다.
나영의 발전은 너무 일찍 지쳐 데쳐진 듯 시들어가던 삶을 다시 추스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실제로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에서 기쁨을 되찾곤 하듯이 나영 역시 그러하다.
종합 별점 ★★★★★
뮤지컬 <빨래>는 사실 클리셰 덩어리다. 달동네라는 클리셰와 거기 사는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살거라는 환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환상일까? 그곳이 다른 곳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덜 행복하다는 법도 없다. <빨래>는 처음에는 좀 서툴렀을지도 모르지만 십 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드럼 세탁기도, 건조기도 없이 찬 물에 빨래를 빨아 탁탁 털어 너는 삶들이 존재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