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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변화가능성을
논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느리지만 어쨌든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국내를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다. 한국의 게임 현황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단지 젠더 문제만 논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그렇다.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은 과포화, 양극화 상태다. 지난 2018년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은 상위 1~3위 게임이 전체 매출의 약 34%를, 상위 10개의 게임이 전체 매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모바일 게임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1년도 채 안 된다. 중국산 모바일 게임까지 가세하며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MMORPG 게임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는 것은 모험이고 비용도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슷한 게임 시스템과 컨셉이 차고 넘친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세계관, 익숙한 비쥬얼의 캐릭터, 진부한 스토리, 거기서 거기인 조작법. 그래서 가장 ‘가성비 좋게’ 차별성을 둘 수 있는 게 섹시함이다. 일러스트야 돈이 많이 들진 않으니까. 어차피 만들 캐릭터라면 좀 더 선정적으로 외주를 넣으면 되는 거니까. 그러나 결국 이마저도 금방 질리기 쉽상이라 유저들은 금방 떠난다. 새로운 자극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게임성 자체를 강화하지 않으면 장기 이용자를 유지하기 힘들다. 하지만 계속된 악순환 속에서, 대형 게임 회사를 제외한 중소 규모 개발사에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렇게 국내 게임은 ‘빨리 한 탕 벌어먹고 떠버리는’ 형태로 유지된다.
과시욕, 수집욕, 성적대상화
국내 모바일 게임은 소수의 헤비 유저들이 지탱하는 형태다. 이들은 정말 수백수천만 원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이런 헤비 유저들의 대부분이 남성인 것도 맞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을 정말 ‘게이머’라고 불러도 될 지 잘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 이런 게임들을 게임으로 쳐주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게임에 돈을 쓴다는 것은 게임을 즐기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과시와 욕망을 사는 것이다. 전설 아이템을 뽑으려고, 내가 원하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5성 짜리 카드를 얻으려고, 이벤트 아이템을 뽑으려고.
예를 들어, <하이퍼 유니버스>는 개발기간이 4년이나 됐으나 서비스는 1년 반 정도 유지하다가 사라졌다. 이 게임은 ‘메갈 일러레(일러스트레이터가 ‘메갈리안’인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 사건이 두 번 터졌다.
개발진은 북미 버전을 출시했을 때, 한국처럼 노골적인 노출 수위는 해외 게이머들에게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특정 신체부위의 크기와 움직임’을 축소했다. 난리가 났었다. 결과적으론 스팀 평점이 뚝뚝 떨어졌다. 반발에 당황한 개발진들이 형평성을 위해 국내에도 같은 모델링을 적용하겠다고 했더니 더 뒤집어졌다. 왜겠어, 얘네는 게임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예쁜 여자 캐릭터를 굴리고 싶었던 거니까.
<서든어택2>는 이미 까일 대로 까였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서든어택2>야 말로 한국 게임 산업의 정수였다. 여기저기 다른 게임에서 다 짜깁기 한 미션들, 고증 안 된 총기, 엉망인 그래픽 등등 <서든어택 2>는 실패작이었다. 게임이면서 게임을 위한 것들이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팬티랑 탱크탑 입고 총 쏘는 여자 캐릭터를 내세우면 다 무마될 거라는 생각의 근원은 무엇일까?
서구 게임은 여성혐오로 간을 친 느낌이라면, 국내 게임은 콘텐츠가 성적대상화 그 자체다. 게다가, 국내 게임회사들은 이런 식의 운영 방식 때문에 여성 게이머들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여자들이 제1세계 백인 부르주아 남자가 자기가 판 무기로 범죄를 저지르는 테러리스트한테 납치당한 뒤 깨달음을 얻고 천재적인 두뇌로 강철 슈트를 만들어서 인류 평화를 위해 자경단 노릇을 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을 만큼 남자를 이해하는 것에 능하다지만, 여성의 육체를 고깃덩이처럼 취급하며 팔아먹는 것까지 태연할 만큼 자기객관화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여자들이 특정 장르를 싫어하거나 서툴다는 오랜 고정관념이 있다. 폭력성이 강하거나, FPS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국내 FPS 게임들은 여성 소비자층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오버워치가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국내 여성 게임 이용자의 FPS 장르 선호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던 통계가 있다. 오버워치는 FPS를 처음 접하는 이들도 쉽게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게임 디자인이 되어있고, 조준 능력이 좋지 않은 사람도 게임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다양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게임 내에 배치해뒀다. 비매너 유저들 신고에도 (적어도 서비스 초기에는)적극적이었고 말이다.
여자들이 게임을 안 좋아하니까 남자들을 위한 게임을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 전에, 여자들이 왜 당신들의 게임을 하지 않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이돌 그룹 앨범 판매량만 봐도 알겠지만, 여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남자들보다 문화생활에 돈은 훨씬 많이 쓰는데 말이다.
남자 유저를 사로잡는 게 돈이 된다는 이유로 지금 같은 운영 방식에 계속 머무는 것은 잠재적 소비자층도 놓치고 지금의 레드 오션에서 다 같이 죽어가는 꼴이다. 국내 게임은 이 족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미래가 불투명하다.
게임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게임은 오랫동안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중독성 강한 불건전한 취미로 취급되어왔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겠다고 결정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찾아보면 게임의 순기능을 다루는 연구도 많다.
1994년 미국의 심리학자 패트리샤 그린필드는 게임의 문화적 도구로서의 효과에 주목했다. 런던 대학교와 퀸 메리 대학교의 과학자들은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지속적으로 생각을 요구하는 전략게임이 이용자의 뇌 유연성을 향상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액션 게임이 이용자로 하여금 감각 정보를 수용하고 이에 대응하는 적절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C. 션 그린 박사의 연구도 있다.
이뿐인가.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계속해서 도전할 자신감을 주고, 승리와 성취에 익숙해지도록 한다. 게임 속 사회와 메시지와 인물들의 행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컴퓨터 기술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컴퓨터 조립 같은 건 해본 적 없었을 것이다.
게임에서 지적되는 역기능의 상당부분은 게임이 갖는 남성문화에서 비롯된다. 앞서 지적해온 폭력성과 선정성이 대표적이다. 폭력성과 선정성을 무조건 지양하자는 건 아니다. 그것들 없이도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게임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 속 여성혐오를 고발하고 변화를 꾀하는 것은 단순히 여성주의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게임 산업 자체의 성장과 진보이기도 하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여성 게이머들의 연대와 담론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 게임에서 보여졌듯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페이머즈(구 전디협) 역시 트위터에서 출발한 페미니스트 게이머 단체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제시하는 대안적 가치를 게임 산업에도 적용할 수 있고, 또 그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게임은 정말 재미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이야기하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그냥 재미있는 걸로도 족하다. 적을 때려죽이는 것도, 게임 속 세상을 탐험하는 것도, 높은 난이도 때문에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게임을 좋아했던 그 많은 여자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숨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좋아하기를 그만뒀을지도. 게임은 남자애들이 하는 거라는 이야기에, 그리고 당연한 듯이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 게임 커뮤니티에 상처받아서, 자신이 게임을 안 하기로 한 건지 아니면 못하게 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태로 떠나버린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안 하던 사람이래도, 그것이 정말 관심이 없어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처음부터 그 기회를, 가능성을 박탈당한 것일 수도 있는데.
예전에, 게임을 좋아하는 내가 신기하다며 자신은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데,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의무적으로 PC방에 가서 게임을 한다고 이야기했던 남자 지인이 한 명 있었다. 누군가는 의무적으로 게임을 좋아하는 척을 해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의무적으로 게임을 싫어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임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저 남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만들어져 왔을 뿐이다. 그래서 침묵하던 이들이, 쫓겨나듯 흥미를 잃은 이들이, 관심가질 기회조차 없던 이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열아홉 살 막바지에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평생 내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 상상만 해도 인생이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