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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노동은 교육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불균등한 가사분담은 개인의 청결 기준이 아니라 의지의 차이일 뿐이다.
전담하니 익히더라
그간 남편이 불성실한 태도로 가사노동에 임했음이 입증된 건 가사분담 영역을 명확하게 나누고 난 뒤였다. 하나의 영역을 전담해보니 어떤 가르침으로도 결코 체화되지 않던 것들, 이를테면 총노동량, 몸이 아니라 머리를 써야 하는 기획과 관리, 한없이 세세한 구석구석의 프로세스들을 남편은 점차 익혔다. 여러 영역을 골고루 맡으며 전체 집안일을 파악해 나갔다. 센스나 호오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절대적으로 가사노동을 못 하는 사람은 없다.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 또한 당연히 없다.
한 번 평등한 상태를 만들어놓으니 그다음은 훨씬 유연해졌다. 지금은 각자 상황에 맞춰 노동량이나 시간, 영역이 들쑥날쑥 한데, 그게 아주 괴롭지 않다. 가사노동의 고단함을 둘 다 잘 알고 있으니 육체노동이 부족할 땐 정서노동으로라도 균형을 맞춘다. 이제 남편은 나와 거진 동등한 동료가 되었다. 우리에게 맞는 노동 방법도 찾아 나갔다. 정답이라기보다 가능한 하나의 예시로서 우리의 가사노동 규칙을 소개해본다.
첫째, 서로가 싫어하는 가사노동을 대신 수행한다. 모든 일을 다 경험해보고 나니 각자 호불호가 생겼다. 매우 세밀하게 가사노동을 조각내어 그 안에서 덜 싫은 것들을 맡는다. 내가 욕실 하수구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남편이 세제로 욕실 바닥을 닦는다. 남편이 세탁물을 털면 내가 건조대에 너는 식이다. 둘째,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한다. 어떤 일은 둘이 할 때 훨씬 품이 덜 든다. 하기 싫은 마음이 조금 덜어지기도 한다. 셋째, 가능한 한 동시에 일한다. 시작은 내게 내재된 왜곡된 책임감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동의 일을 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자연스러운 배려라 여겨졌다. 한 사람의 일이 끝나기 전까지 다른 사람도 이런저런 일을 찾아 하기로 정했다. (김은희 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이를 ‘One up, both up!’ 원칙으로 명명한다¹.)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명시적으로 정한 것으로도 의미를 갖는 규칙이 있다. 넷째, 내가 더 적은 노동량을 맡는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사노동에 관한 심리적 부담이 훨씬 더 크니, 실제로 물리적 부담을 덜 지자는 것이다. 나도 남편에게 당당하게 주장하기까지 은근한 심리적 갈등과 저항을 겪었지만, 나아가야 할 합당한 방향이라 여긴다. 누구에게는 호의이자 여차하면 미룰 수 있는 일이 누구에게는 의무가 된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는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엄밀히 말해 물리적으로 같은 양의 일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 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만 하는 노동이 있다
남편의 위생 관념에 가끔 의문이 든다. 남편은 결코 하지 않는 집안일의 리스트를 꼽아볼 때가 그렇다. 욕실의 핸드타월을 새 걸로 갈고, 거품이 잘 안 나기 시작하는 비누를 바꾸고, 봉투에 꽉 찬 쓰레기를 정리하고, 베갯잇과 이불보를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일. 내가 생각하는 주기가 남편보다 영원히 빠른 일들의 목록이다. 남편에게 왜 하지 않는지 물으면, 더 더러워지면 하려고 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의 청결 기준이 더 엄격한 걸까 자문해보지만, 아무래도 이상하다.
현관 신발 정리, 샴푸나 칫솔 같은 생필품 주문 등은 사소한 일처럼 보인다. 정말 사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소해서 넘어간다면 결국 누군가는 그 사소한 일들로 가득 찬 자루를 이고 가야만 한다. “별거 아닌데 누가 하면 어때?”라고 한다면, “그렇게 별거 아닌데 너는 왜 안 해?”로 받아칠 수밖에 없다.
덧붙이자면, 위 목록의 화룡점정은 따로 있다. 사소함의 끝처럼 보이는 일. 바로 양가 어머니에게 받은 반찬통을 만날 때 잊지 않고 돌려주는 것이다. 아무리 남편이 다 먹은 통을 직접 설거지하고, 이번에 드려야 한다고 미리 주지시켜도 내가 챙기지 않으면 반찬통은 절대 주인을 찾아갈 수 없다. 반찬통이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양가 어머니는 누가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 여길까? 남편이 여전히 자기 일로 여기지 않는 가사노동 중 하나다. 가사노동 자체가 보이지 않는 노동인데, 그 안에 더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다. 너무도 소소하지만, 결코 쉼 없는 여성만의 가사노동이 존재한다.
더 큰 문제는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해결했다. 오랜 시간과 시행착오를 거쳐 도달한 것이지만, 공평한 가사분담에 결국 도달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남편과 제법 평화롭게 가사 분담하고 있으니 이제 된 걸까? 과연 문제가 해결된 걸까?
여전히 공고한 성역할 규범
“집안일은 여자 몫이지”, 이제 누구도 이런 노골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남편이 집안일 잘 도와줘?”라고 여자에게, “와이프가 아침밥 차려줘?”라고 남자에게, 각기 다르게 묻는다. 혼자 사는 남자 방이 지저분하거나 냉동실에 인스턴트 식품이 가득한 걸 보고 사람들은 어서 장가가야겠다는 농담을 던진다. 반면, 여자가 비슷한 농담을 듣는 순간은 요리를 좋아하거나 집을 잘 꾸미거나 과일을 능숙하게 깎을 때다.
모든 말이 가사노동의 책임자로 여성을 가리키고 있다. 시대착오적이지만 동시에 시대의 반영이다. 가사노동을 아내가 주도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통계상 절반을 넘고,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하는 남편은 16%에 불과하다². 명시적으로는 ‘남녀평등시대’라지만 여전히 성차별은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이다. 아직도 ‘내조’는 자연스럽지만 ‘외조’는 특별한 시대이고, 아내가 차려준 따뜻한 아침밥이 로망이라는 남자는 넘쳐난다. 공평한 가사분담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주로 여성이라는 사실은, 가사노동의 부담이 누구 어깨에 무겁게 얹혀있는지를 확실하게 말해준다.
차별적 통념에서 자유롭기는 과거의 나 또한 쉽지 않았다. 남편이 집안일에 무지하고 무심한 것에 문제제기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가사노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과하게 미안해하고 또 과하게 고마워했다. 남편이 집안일 하는 모습이 왜 그리 사랑스러운지. ‘남자가 집안일을 할 때 섹시해보인다’는 말을 그제야 내 식대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자연스럽게 죄책감과 연결되었다. 남편은 본인 몫을 끝내면 언제든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노동량으로 따지면 분명 내가 더 많은데도 남편이 혼자 일하고 있는 순간에 안절부절못하며 공연히 다른 일을 찾아서 했다.
결혼 직후 내가 임금노동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압박감은 더욱 심했다. 나한테 가사분담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끝없이 자신을 검열했다. 비록 임금노동을 안 하면 가사노동을 도맡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한 건 아니지만,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그래도’가 존재했다. ‘그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더 긴데, 내가 조금이라도 더 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밖에서 일하고 오면 피곤할 텐데, 집안일을 강요하는 건 너무 가혹한가’, 배려의 탈을 쓴 부담감이 나를 옥죄었다.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의 상관관계?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은 별개라는 점이다. 실제로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³를 살펴보면, 부부간 가사분담에서 임금노동의 여부는 남성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편 외벌이(41분)인지 맞벌이(46분)인지에 따라 거의 차이나지 않을뿐더러, 아내 외벌이인 경우조차 남편(1시간 39분)이 아내(2시간 39분)보다 가사노동을 더 적게 하는 기가 막힌 통계를 본다면, 임금노동이란 그저 가사노동 책임을 회피하려는 남성의 변명에 불과할 뿐임을 모를 도리가 없다. (참고로 아내의 가사노동 시간은 맞벌이인 경우 3시간 13분, 남편 외벌이인 경우 6시간까지 늘어난다.)
가사노동엔 은퇴가 없다. 각자 성향과 상황에 맞춰 영역을 나누거나 시간과 체력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좀 더 맡는 식으로 노동량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가사노동은 기본적으로 한집에 사는 구성원들의 공동 책임이어야 한다. 당사자 간 합의가 아닌 고정관념, 성역할, 차별적 당위에 의한 불균형은 명백한 억압이다. 혼자 산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정 노동이 존재하지 않겠나. 타인과 같이 산다고 노동량이 그보다 적어진다면 그건 타인에 대한 착취일 뿐이다.
남성의 임금노동 핑계, 잘 모른다는 핑계, 나보다 당신이 빠르다는 핑계로 가사노동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이 더욱 황당한 건, 그토록 기를 쓰고 회피하는 가사노동을 사소하고 무가치한 일로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내가 가사노동이 힘들다고 토로하자, 한 중년남성은 내게 “네가 하는 일이 뭐가 있냐?”라고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없으면 아침마다 세탁된 양말을 어떻게 신을 것이며, 쓰레기는 어떻게 종량제 봉투에 담겨 버려지고, 화장실의 빈 휴지심은 어떻게 새 걸로 교체될까. 전업주부는 집에서 놀면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에 기생한다는 혐오에 기반한 사고방식은 가사노동의 경제적/물리적/공적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전업주부 아내에게 생활비를 줄 때마다 생색내는 남편에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아내의 가사노동 없이도 정녕 그 돈을 벌어올 수 있었겠냐고.
일 인분의 가사노동
신혼이란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생활패턴과 습관을 서로 맞추는 시기라고 하지만, 구조적으로 결혼 전의 라이프스타일을 더 많이 잃는 쪽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해오던 생활에 갑자기 추가되는, 2인분의 밥을 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장 보고 청소하는 일의 부담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느 쪽에 더 무겁게 쏠리는가. 시부모의 방문이 꺼려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정리 안 된 집에 대한 책임이 여자에게 돌아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내 집에서 가사분담이 물리적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진다고 해서 완전히 맘 놓을 수 없다.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가사노동은 아무래도 여자의 몫이라는 사회 통념을 바꾸어야 한다. 의식적으로는 부정하지만 그렇기에 더 바꾸기 어려운,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생활을 꾸려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져야 할 ‘일 인분의 가사노동’ 책임에 대한 사회적인 메시지가 절실하다.
파업할 수 없는 노동자를 사용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사회의 가사노동자가 여성이라면 사용자는 남성이다.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이나 불균등한 가사분담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실질적 변화는 쉽게 오지 않고 있다. 지금처럼 가사노동의 다양한 가치가 무시되고, ‘남자는 일, 여자는 가정’(여러모로 틀린 문장이다. 가사노동도 일이다.)이라는 고루한 차별의식이 건재하다면, 가사노동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의 선택지는 파업이 될 수 있다.
참고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칼럼, “한 사람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도 일어서자! (One up, both up!)”
통계청, “2015 일가정양립 지표”
통계청, “201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