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 ID: /fineweb-2-swissfilter-quality_10-filterrobots/filtered/07443.jsonl.gz/30

네이티브면 걱정 없을까
너는 네이티브(native)라 걱정 없겠다.
대학원 유학이 결정되어 주위에 소식을 알렸을 때, 내가 가장 자주 들었던 얘기다.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이 있으니 너는 걱정 없겠다고. 비자 문제 때문에 체류 기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미국을 오갈 때 마다 악명높은 출입국심사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것, 캠퍼스 밖에서도 일을 구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적어도 법적으로는 내가 이 나라에 대한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은 분명 크나큰 행운이고 특권이다.
너는 네이티브(native speaker)라 걱정 없겠다.
이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 즉 원어민이라 악센트나 문법적 오류 없이 영어를 하니 문제 없으리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학교엔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다른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영문과 대학원생은 전공 특성상 영문 텍스트의 질적 연구를 할 뿐만 아니라, 연구 논문이나 저서의 문학적 질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는 규칙은 아니지만, 유려하고 세련된 글을 선호하는 엘리트주의적인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있기 때문이다. 뻔한 얘기지만, 영어가 모국어이면 유리한 학문이다.
게다가 대부분 영문과 대학원생들은 학교에서 학비를 면제받고 생활비를 지원받는 대신 학부생들의 작문 수업 등을 가르치기 때문에, 원어민처럼 쓰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이점이다. 적어도 악센트나 발음을 가지고 비웃는 가장 기본적인 인종차별은 대체로 피할 수 있다.
그놈의 영어 발음
2002년에 개봉한 <여섯 개의 시선>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다. 그 중 <이상한 영어나라>라는 에피소드에, 보다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위해 설소대 수술을 강요당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영화가 개봉한 지 17년이나 지나 영화의 세부적인 묘사나 내용은 희미하지만, 근접촬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혀 수술 장면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영화는 영어, 특히 원어민스러운 영어에 대한 한국인 부모들의 비틀린 집착을 비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어와 네이티브 스피커에 대한 집착은 '극성 한국 부모'에게서만 비롯되진 않는다.
'네이티브'에 의식하고 집착하는 것은 미국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20년 가까이 살았다고 하면 미국인들(백인들) 역시 내가 얼마나 네이티브 같이 말하는 지에 대해 꼭 '칭찬'을 한다. 물론 이들은 미국이 아닌 곳에서 자란 내가 미국인처럼 영어를 한다는 사실 자체, 또 그걸 긍정적이고 인정 받을 만한 일로 평가 받는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증명이라는 생각은 절대 못한다.
한 편, 눈으로만 읽고 한 번도 발음해 본 적 없던 단어의 강세를 틀렸을 때,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내 발음을 비웃은 적도 있다(그 애들은20분간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차별적인지에 대해 토론해야 했다).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주의 어쩌구라고 외치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미국스러운 것, 특히 백인스러운 것에 천착한다.
보스턴에서 나는 주로 동양인들과 데이트를 했는데, 웃기게도 동양계 미국인 남자들은 항상 내 국적을 알아내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고는 했다. 왜들 그렇게 내 호구조사를 열심히 하나 했는데, 어느 날 다른 이들보다도 더 요령 없던 남자가 대놓고 얘기하는 바람에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학부를 한국에서 졸업한 것을 보면 미국 국적이 없는 유학생 같은데, 막상 말하는 투를 보면 네이티브 스피커 같아 긴가민가 했다는 것.
요컨대, 이 남자들은 내가 자신과 결혼해서 그린카드를 획득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 (미국은 동성결혼이 법제화 되었는데 동양계 미국인 여성들은 왜 이런 무례한 걱정이나 질문을 하지 않는지,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어쨌든, 스스로 내세울 만하다 여기는 장점이 어쩌다 태어난 나라의 시민권 뿐인 보잘것 없는 그들과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진짜 네이티브'는
백인도 영어도 아닌데
한 편으로는 미국에서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 즉 원어민에 대해 생각하면서 원주민 (Native American)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네이티브 스피커는 대부분의 경우 백인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백인성에 얼마나 근접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네이티브 같은 지가 결정된다. 동양인이나 흑인, 또는 라틴계 미국인 중 악센트 있는 영어를 하는 원어민은 얼마든지 있지만, '네이티브' 같은 발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백인 같은 발음과 발화방식을 떠올린다.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대량학살을 당한 미국 원주민을 생각하면,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이 개념은 모순적인 게 아닌가?
박사과정 2년차가 되면서 나는 수업 조교를 하게 되었다. 1년차에는 장학금(fellowship)을 수여받아 한 해 동안 수업을 듣는 것 외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2년차부터는 조교 장학금(teaching assistantship)을 통해 학비 지원 등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19세기 미국 문학을 연구하는 교수 N의 학부수업 조교를 맡게 되었고, 이젠 놀랍지 않을테지만 이 과정도 썩 순탄치는 않았다.
우리 학교의 경우 조교 배정 등 박사과정 내 온갖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은 영문과 박사과정의 학과장이다. 작은 박사과정에서 그런 결정권이 얼마나 의미가 있나 싶을 수 있겠지만 나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 학과장은 문학이론 교수 J가 나에 대해 인종차별적이고 어딜 보나 사견이 담긴 코멘트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J의 조교로 내정했다(그렇다. 1편에 등장하는 그 J다!).
J처럼 대놓고 나를 싫어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영문과의 다른 교수는 전부 놔두고 굳이 나를 그의 조교로 배정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 때 눈치챘어야 했다, 이 학과장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다음 화에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이 학과장도 내가 보스턴을 떠날 결심을 한 원인 중 하나였다. 학과장은 내가 그의 연구실로 뛰쳐들어가 J만은 싫다고 강력하게 거부하고 나서야 나를 N에게 배정했다. 뛰쳐들어갔다는 것은 사실 과장이다. 나는 비즈니스 웃음으로 무장한 채 학과장을 찾아가 최대한 차분하게 그 인선이 불편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감정적으로 상황에 대응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백인의 특권이다.
그놈의 콜롬버스
그런 과정을 거쳐 조교를 하게 된 N의 학부 수업은 제목이 무려 <미국 문학: 최초의 접촉에서 1855년까지>였다. N이 지은 것은 아니고 매해 영문과에서 대물림 되는 수업 제목이라고 한다. 해석하자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미국을 최초로 '발견' 또는 '접촉'했던 1492년부터 1855년 까지의 미국 문학을 아우르는 입문 수업인 것이다.
미국문학의 시작부터 다룬다는 이 수업에서 학생들이 가장 먼저 읽은 텍스트는 1492년 시작된 첫 항해에서의 발견을 선전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편지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콜럼버스가 현재의 미국을 발견했다는 역사는 사실 신화에 불과하다. 당시 북미에는 이미 선주민들이 있었을 뿐더러 콜럼버스는 북미에 발을 디딘 적이 생애 단 한번도 없다.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미대륙이 아니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인데, 편지에서 그는 미주지역의 원주민/선주민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인종차별과, 그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악습을 시작한다. 그런만큼 이 편지는 유구한 미국 식민주의 역사와 백인우월주의 전통에 여러모로 의미 깊은 편지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수업에서 굳이 이 편지로 미국 문학의 시작을 알린다는 점이 껄끄러웠다.
무엇보다 교재로 사용된 문집(anthology; 영문과 학생들은 벽돌이라 부른다. Norton 출판사의 문집들이 가장 유명하고 보편적이다)은 시간 순서대로 “콜롬버스 이전의 미국”과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의 창조신화”를 콜럼버스의 편지보다 먼저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강의계획서에서 N은 이 순서를 뒤집었고, 학생들은 결국 미국 원주민들의 텍스트를 읽기도 전에 원주민과 원주민의 문화를 야만적으로 묘사하는 인종차별적인 글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심지어 창조설화는 우리가 그 수업에서 유일하게 읽은 원주민의 텍스트였다.
물론 학생들은 대학 입학 전에도 미국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고 접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텍스트의 인종차별적인 내용이라기 보단 '영문학 수업'이라는 제도적인 틀 속에서 지식과 텍스트가 제시되는 순서이다. 1화의 문학이론 수업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강의계획서나 영문학 수업 같은 구조적인 틀은 결국 작게는 그 수업, 크게는 그 학문의 방향성이나 정치학을 읽는 척도가 된다.
미국 문학 수업에서 식민지 지배자의 글이 식민지의 원주민이자 피지배자의 글 보다 먼저 등장할 때 그 수업은 결국 식민지 지배자의 역사를 우선하고, 그를 위주로 역사와 문학을 재편한다.
심지어 콜럼버스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를 찾는다는 명목 하에 스페인 왕조의 후원을 받아 항해를 떠난 이탈리아 사람이다.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면 더더욱 의뭉스럽다. 원래 미국 땅에 살던 사람들의 텍스트를 두고, 대체 왜 이 사람의 글로 미국 문학을 아우르는 수업을 여는 것인지.
물리적인 '네이티브' 지우기
2019년 6월3일 월요일, #MMIWG가 실시간 트위터 트렌드에 잠시 등장했다. 캐나다에서 실종 및 살해된 원주민 여성과 소녀 (MMIWG; Missing and Murdered Indigenous Women and Girls)에 대해 국가 진상조사위가 3년에 걸친 조사를 마무리하며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여성과 소녀"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조사 대상은 이들 뿐만 아니라 트렌스젠더, 퀴어, 간성, 두개의 영혼(two-spirit) 등의 더 폭넓은 정체성을 포함한다.
MMIWG 최종 보고서는 원주민 여성과 소녀는 캐나다에서 다른 인구통계 그룹의 구성원보다 살해되거나 실종될 가능성이 12배나 높고, 백인 여성보다 살해 당하거나 실종될 가능성은 16배 더 높다고 결론지었는데, 이 사망과 실종을 대량 학살(genocide)이라고 묘사했다.
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립 법무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84%의 원주민 여성이 일생동안 물리적, 성적, 또는 심리적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 법무부의 조사에 의하면 원주민 여성 3명 중 1명이 강간을 당했거나 강간을 당할 뻔 했지만, 신고 된 성폭행 사건 중 범인이 체포된 사건은 전체 사건의 13% 불과하다. 심지어 일부 원주민 보호구역(reservation)에서는 여성들이 살해당할 가능성이 전국 평균보다 10배나 높다.
이런 뉴스를 볼 때 나는 “너는 네이티브라 걱정없겠다"던 덕담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유학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나도 많이 떠올렸던 문장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네이티브'라 걱정 없었던 것이 아니라, 원주민을 대량학살한 백인들의 언어와 문화에 한없이 가까웠기 때문에 특권을 누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작년부터 정착 식민주의와 원주민 텍스트를 더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공부 조금 더 한다고 어떤 거창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문학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문학과 전통을 우선하는 잘못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