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 ID: /fineweb-2-swissfilter-quality_10-filterrobots/filtered/07451.jsonl.gz/16

지난 11월3일 열린 제2회 여성기획자컨퍼런스(아래 여기컨)는 ‘기획자’보다 ‘여성’이 돋보이는 행사였다. 반드시 기획자가 아니더라도 IT 업계를 필두로 다양한 업계에서 일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 참가했다는 사람이 많았다. “여성을 위한 일, 일하는 여성”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았다.
궁금했다. 여기컨에 참가하는 여성들은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을까? 일하면서 만나는 가장 흔한 성차별은 무엇일까? 직장에 페미니스트 동료가 있다는 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래서 직접 물어봤다. 행사 전 1주일 간 온라인 설문, 여기컨 행사 당일 참가자 현장 설문, 행사 종료 후 추가 온라인 설문을 통해 총 79명에게 여성 기획자가 일하는 환경에 대해 물었다.
행사장에 다양한 업계 종사자가 왔던 만큼 마케터, 창업가, 디자이너 등 기획자가 아닌 여성도 일부(8명) 참여했다. 테크페미가 주관하는 행사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지인 만큼, 설문 결과도 특정 직군 여성 전체를 대변한다기보다 여기컨에 참여한 사람들의 집단적인 목소리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가장 큰 장벽은 여성 롤모델 부족
응답자 78명 중 1년차 이하가 28%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은 6년차(14%), 2년차와 3년차(11%) 등이다. 10년차 이상도 5%로 다양한 연차의 여성 기획자들이 설문에 응했다.
성차별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성차별적인 경험을
응답자 대부분에게 성차별은 아주 흔한 일이다. 전체 응답자 중 약 73%(57명)가 여성 기획자로 일하면서 성차별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성차별적인 경험을 자주 또는 항상 한다는 응답자가 약 14%(11명), 가끔 한다는 응답자가 55%(43명)였다.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람은 25%(20명), 전혀 한 적이 없다는 응답은 5%(4명)에 그쳤다.
여성 기획자가 부딪히는 장벽은?
구체적으로 여성으로서 부딪히는 가장 큰 장벽을 물었다. 절반 이상이 ‘업계에 여성 롤모델 부족(65%)’을 꼽았다. 이는 ‘결혼, 출산을 이유로 한 경력 단절(52%)’, ‘승진, 인사, 교육, 직무, 평가 등에서 남성보다 제한적인 성장 기회(50%)’라는 답변의 연장선이다.
응답자들은 주관식 답변을 통해 조직의 상위 직급이 거의 다 남자이거나, 경력 단절을 전제로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출장이나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제외되는 경험을 했다고 털어놨다. "여성은 앞으로 아예 채용하지 않겠다는 기업인." "여성의 업무 결과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남자 상사." "출장, 특진 등 성장 기회 제한." "비교적 '심각한', '진중한' 프로젝트는 꼭 남자 기획자가 담당이 된다." "PM은 나인데 상관없는 남성 상관에게 연락이 간다." 노골적이지 않은 경우에 더 해결하기 어려운 차별이다.
그 결과 ‘업계에 젠더 문제를 인식하는 멘토 부족(50%)’ 현상이 나타난다. 업계를 이끄는 사람들의 인식이 부족하니 ‘업계에 만연한 성차별적 인식(41%)’ 개선도 요원하다. 당연히 ‘남성보다 적은 발언권(32%)’을 확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여성 리더를 허락하지 않는 ‘유리천장’이 성차별 개선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외 ‘성희롱 등 성폭력에 노출’되는 점을 꼽은 응답자가 35%, ‘동일 직무에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지적한 응답자가 28%였다.
미투로 농담 좀 하지 마세요
생생한 사례들은 주관식 답변에서 터졌다. 남자들은 죽어도 직장에서 들을 일이 없는 무례한 발언들이 쏟아졌다. “윗사람이 여성분을 좋아하니 가서 자주 인사 드려라.” ”(회식 자리)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들어야지, 남자가 부르는 걸 왜 들어?” “여자가 게임 안 하잖아요.” “홍삼은 여성의 모유수유에 좋지 않다. 폐경기가 지났으면 모를까.” “여자가 이런 일 하기 쉽지 않은데.” “여성분들은 코딩을 이해하기 힘드실 텐데.” “나는 여자랑 일 못하겠어.” “여성 스타트업 대표는 부드럽고 포용적이라…” 스킨십, 외모 평가, 결혼이나 연애 관련한 무례한 질문도 흔했다.
다양한 성차별 경험 중에서 주관식 답변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사례가 있었다. ‘미투’에 대한 ‘농담’이었다. “이것도 미투하는 거 아냐?” 성범죄를 드러내고 단죄하자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폄하하고 농담거리로 삼는 것. 업계를 불문하고 정말 흔한 못난 남자들의 모습이다.
나에겐 페미니스트 동료가
나에겐 페미니스트 기획자 동료가
결국 이런 업무 환경이 여성들로 하여금 페미니스트 동료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전체 응답자 중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96%였다. 그러나 이미 페미니스트 동료가 충분히 많다는 응답자는 10%에 불과했다. 있지만 부족하다는 응답이 64%로 가장 많았고, 전혀 없다는 답변도 25%였다.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해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한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 중 하나가 ‘안전’이었다.
“서로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곁에 있을 때 숨통이 트이는 느낌…”
“안전한 공간이 필요해요.”
“안전하고 평등하며 효율적인 근로환경을 위해.”
“더 안전하고 건강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나눌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닌 건 아니라고, 불편한 건 불편하다고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싶다.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 아니었으면 한다.”
다른 직업이 아닌 기획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페미니스트 동료가 절실하다는 답변도 여럿 있었다.
“기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관점(감수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필요하다.”
“기획에는 한 서비스의 철학이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성차별주의자의 기획에는 자연스레 그 생각이 녹아 있다. 이미 세상에는 그런 게 너무 흔하다. 안 그런 것 좀 만들어도 된다.”
“성평등한 상품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기획자 동료가 필요하다.”
“서비스에 젠더 감수성이 담기냐 안 담기느냐는 페미니스트가 기획에 참여 하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같은 것을 기획할 때도 여성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필요합니다.”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과 마케팅 하는 과정, 무엇을 이슈로 보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합의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페미니스트가 필요합니다.”
“기획 일을 할 때 이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의 성격, 환경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맞춘 서비스를 기획해야 하는데 무조건 기술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회사 환경으로 힘이 듭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말했을 때 결과적으로 회사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가 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불편함을 말하는 것이 권력에 대한 저항, 상하관계에 대한 불복종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속에서 일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업무환경에서의 평등한 발언권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 필요한 때입니다.”
‘연대’도 중요한 키워드였다.
“연대가 더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롤모델과 연대에 대한 필요성.”
“연대의식으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 존중하는 사내 문화를 만들기를 기대합니다.”
“부당한 대우나 성희롱 등의 문제에서 함께 문제의식을 갖고 싸워 나갈 동료가 필요합니다.”
“지지와 연대.” “연대하고 끌어줄 동료, 선배, 후배가 필요하다.”
“조직 내에서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구조적 문제일수록 많은 의견이 모여야 한다.”
“서로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분노를 같이 생산적인 에너지로 바꿔요.”
“나의 말과 행동에 용기를 잃지 않게 해 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알탕 카르텔에 대적할 쪽수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동료는 존재 자체로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