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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배송이 일반화되면서 남의 나라 온라인 쇼핑몰 구경할 일이 많아졌다. 미국이나 유럽의 의류 쇼핑몰들은 SPA브랜드라 할지라도 반드시 드레스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서는 아무 데도 입고 나가지 못할 것 같은 드레스들을 매 시즌 여러 벌씩 판매하고 있다. 저가 브랜드라면 가격이 비싸지도 않다. 예산 200달러 정도면 드레스부터 백, 구두까지 장만할 수 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이런 걸 어디에 입고 가는 걸까?
의문은 2016년 가을에 풀렸다. 암스테르담으로 일주일간의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마침 내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는 날인 목요일 저녁에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의 시즌 갈라 쇼가 열린 것. 꽤 좋은 좌석을 골랐음에도 티켓 가격은 한국 발레단들의 갈라 쇼 가격과 비슷하거나 조금 싸게 느껴졌다. 빠듯하게 공항에 내려 캐리어를 끌고 거의 달리듯 걸어서 스토페라 극장에 도착했다.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충격적인 풍경과 마주한다.
나만 빼고 다 드레스를 입고 왔어!!
36시간 전에 감아서 떡진데다 비행기 냄새가 나는 머리카락을 뒤통수에 짜매고 청바지, 운동화, 티셔츠에 후드 짚업을 걸친 건 나뿐이었다. 과장이 아니다. 노부인들 몇몇이 바지 정장을 입고 오긴 하였으나 우아하기로는 드레스 뺨을 쳤다. 남자들 중에는 턱시도를 입고 온 사람도 많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현관 뒤에 숨어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었지만 이렇게 입고 온 건 연령을 막론하고 정말 나뿐이었다. 로비에서 시즌의 시작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나누어주길래 그걸 일단 한 잔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두 잔째를 손에 들자 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용기가 났다. 그러고 보니 드레스 차림의 여성들이 모두 값비싼 명품을 걸친 건 아니었다. 그제서야 한국의 자라, 포에버21, H&M 매장 구석에서 세일 기간에도 아무도 사가지 않은 채 걸려 있던 그 드레스들이 생각났다. 아, 가엾은 한국의 드레스들이여. 세일 기간이면 29,900원에도 구입할 수 있지만, 입고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사지 않던 옷들이여.
그런데 가만 있자, 오늘은 목요일 저녁이고 공연은 일곱 시 삼십 분에 시작되는데. 이 사람들은 오늘 다 이 차림으로 출근한 건가? 가방에 넣어 가서 회사 화장실에서 갈아 입은 건가?
두 번째 의문은 다음 날 오후에 풀렸다.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4시면 퇴근한다(정말로 자전거를 타고 퇴근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6시가 넘어도 퇴근을 못 한다. 공연이 8시에 시작한다면 한국인들은 6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극장이 있는 시내는 교통체증 또한 심각하기 때문에 택시를 탈 수도 없다. 콩나물 시루 안에 끼어서 초조해한다. 드레스는 커녕 점심때 강제로 끌려가서 먹은 김치찌개 냄새가 밴 정장을 입고. 공연이 끝나면 11시에 가깝다. 귀가하면 자정을 넘는다. 아름다운 감상을 남길 여유 같은 건 없다.
반대로 미드 주인공들은 하룻저녁에 그렇게 많은 사건들에 휘말리고도 수면 부족에 시달리지 않는다. 과연 비결은 무엇인가? 퇴근이 이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은 하교가 빠르다. <번헤드>라는 미드가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 네 명과 비범한 발레 선생님 두 명을 주인공으로 하는 TV쇼인데, 이곳의 학생들은 4시면 모든 수업을 마치는 것 같다(계절을 막론하고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귀가한다.) 어떤 학생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4시간쯤 일한다고 해도 8시면 일과가 끝난다. 이들이 사는 마을에는 훌륭한 발레 교실이 있고, 동네 아이들은 취미로 이곳에 다닌다. 그리고 마을에 행사가 있으면 공연을 한다. 실력이 뛰어나서 매번 주역을 하는 여학생도 있다. 모든 학생들은 여름이면 조프리 발레 스쿨의 오디션에 선발되어 여름 특강을 듣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한국식으로 ‘발레 전공’을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지만, 학교생활과 발레와 기타 여가시간의 밸런스를 잘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번헤드>는 TV쇼일 뿐이고, 미국의 발레 학생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쇼를 만든다면 반드시 ‘어릴 때부터 전공반에 들어가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프로 발레리나를 꿈꿀 수 없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이다. 새벽 6시에 클래스를 하나 듣고 학교에 갔다가, 보충수업과 야자를 빠진다고 선생님에게 야단맞은 뒤 발레 학원으로 달려가 왜 이렇게 늦었냐고 야단맞은 뒤 클래스 세 개를 더 듣고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는 일상 때문에 ‘드라마’를 만들 틈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학교 선배와 사귀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들은 다른 선생님과 사귀고. 역시 그래서 한국 드라마들이 모두 그 지경이 된 게 틀림없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오래 한다. 여가를 즐길 틈이 없으니 자연히 문화가 없다. 그 중에서도 클래식 시장은 더욱 협소하다. 그러나 교육열만은 높다. 우수한 학생들이 잔뜩 태어난다. 그러나 시장이 협소하므로 무대가 없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무대가 없다니. 오후 내내 전전긍긍한 끝에 겨우 퇴근해 저녁을 굶고 극장에 도착한 관객에게나, 10대 시절을 몽땅 바쳐 겨우 ‘전문 무용수’가 되는 데 성공한 예술가에게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는 일을 좀 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