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 ID: /fineweb-2-swissfilter-quality_10-filterrobots/filtered/07450.jsonl.gz/14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어릴 적, 일요일 아침이면 했던 드라마 ‘짝’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김혜수가 결혼식을 앞두고 웨딩드레스를 차례로 갈아입어 보던 장면을 말이다. 그녀는 커다란 장미꽃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빙글빙글 돌았고, 그 옆에서 엄마는 ‘우리 딸도 저런 예쁜 드레스 입고 시집가야 할 텐데’ 같은 말을 했다. 화사하고 하얗던 그 드레스들 덕분에 한동안 내 꿈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였고 내 스케치북은 드레스로 가득 찼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여러 꿈 사이를 지나쳐 왔고, 그날의 웨딩드레스도 점점 기억 속에서 흐려 져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12월의 첫째 주에 결혼하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결혼생활에 대한 로망은 있던 반면, 결혼식에 대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중 특히 난감한 것이 웨딩드레스였다. 뭔가를 대여하기보다 구매하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평생의 한 번이라는 이유로 백만 원을 호가하는 대여 비용을 낸다는 것은 과한 지출이라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66100 웨딩 특집호를 만들면서 웨딩 화보를 찍은 경험이 있는데, ‘아, 이래서 사람들이 두 번은 못할게 결혼이라고들 하는 건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촬영이라면 늘 즐겁고 신났던 내게 코르셋으로 몸을 꽉 조이고 온종일 생글생글 웃어야 했던 그 날의 촬영은 이제껏 해본 촬영 중 가장 힘들었던 촬영 탑3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평소에는 입을 일이 잘 없는 드레스를 입고 촬영을 하는 것은 분명 신나는 일이기는 했다. 그리고 그때 찍은 사진에 신랑 사진만 합성해서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니 결혼을 석 달쯤 남겨두고 본격적으로 드레스를 찾아 온 동네를 뒤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어떻게 드레스를 구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는 촬영과 메이크업은 맡기고 싶은 친구들이 있었기에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와는 맞지 않았다. 보통 플래너를 통해 예약하는데, 결혼식의 대부분을 셀프로 진행하다 보니, 드레스만 맡기거나 샵에서 개별적으로 빌릴 경우 가격이 매력적이지 않았다. 빈티지하고 독특한 드레스가 많고 가격이 저렴한 셀프 웨딩드레스 렌탈샵에는 내 사이즈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이즈가 있더라도 내가 원하는 디자인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만들어 입자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수준의 가격이었다.
결국, 남은 옵션은 해외 직구뿐. 후기를 찾아보니, 저렴한 가격과 드레스를 소장한다는 장점 때문에 꽤 많은 사람이 해외 직구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품을 입어보지 못하고 구매하기 때문에 사진과 실물이 달라 곤란을 겪는 경우도 있었고 대부분 주문제작 상품이라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반품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해외바잉 경험을 살려 인터넷의 바다를 열심히 뒤져 꽤 괜찮은 제품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 판매자에게 실물 사진을 요청하거나 후기를 참고해서 사진과 실물의 차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두 번째 문제는 ‘어떤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을까?’였다. 보통은 웨딩 촬영과 결혼식 당일에 입을 드레스까지 여러 벌의 드레스를 ‘드레스 샵 투어’를 다니며 입어 보고 결정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촬영 컨셉에 맞춰 색상과 디자인을 골라 온라인으로 드레스를 주문했다. 사실, 나도 해 보고 나서야 깨달은 거지만 드레스는 옷과는 달라서 소재와 색상, 디자인, 촬영 컨셉과 환경, 결혼식장의 조명, 신부대기실 등등 고려해야 할 점이 꽤 많다. 그래서 당신이 드레스를 생전 처음 입어보는 신부라면, 바로 구매로 들어가기보다 기존의 웨딩드레스 샵에서 피팅을 한 번이라도 해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정한 후에 온라인에서 유사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구매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조언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평생에 한 번’이라는 이름의 마법에 걸렸기 때문이다. 공주님 풍의 A라인 드레스는 정말 입고 싶지 않았는데, 사진과 분위기, 뭔지 모를 이끌림에 홀딱 빠져 본식 드레스로 A라인 드레스를 구매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환불을 할 수도 없고, 재구매를 하기엔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라 아쉬움이 더 컸다.
거기서 끝이면 참 좋겠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드레스가 도착하고 그 드레스들을 하나씩 입어보다 나는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랄까…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강박적으로 섹시한 드레스만 골라 담은 기색이 역력한 구성이랄까? 본식 드레스 선택의 보상심리였는지 촬영용 유색 드레스를 전부 머메이드 스타일로 주문한데다, 전부 오프숄더에 가슴라인이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새빨간 색, 좀 덜 빨간색, 그나마 좀 톤다운 된 버건디, 블루, 블랙… 정말이지 사람의 무의식이 이토록 무섭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촬영 날. 남들의 두 배가 넘는 벌 수의 드레스를 보통 웨딩 촬영에 쓰이는 시간의 절반도 안되는 시간 동안 갈아입고, 포즈를 취하고, 남편의 포즈를 챙기고 나니 촬영이 끝나 있었다.
사실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게 전 까지 나는 조금 불안했다.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걱정을 사서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혼자 볼 사진이 아니라 가족들도 함께 볼 사진인데 너무 과한 포즈를 취한 건 아니었을까, 좀 덜 파진 드레스를 입었어야 했나, 인생의 한 챕터를 시작하는 기념촬영인데 너무 일처럼 진행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 뒤늦게 엄습했다. 그러나 방긋방긋 웃고 공주님처럼 앉아있는 건 내 스타일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는 생각과 누가 보더라도 가장 나다운 사진이면 좋겠다는 애초의 결심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촬영한 사진이 들어간 모바일 청첩장을 사람들에게 보낸 후 피드백을 받고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런 청첩장 사진은 처음이야”, “이제껏 봤던 결혼사진 중에서 가장 섹시한 결혼사진이야!”,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은 역시 “너답다”였다. 그제야 나는 옷을 고르는 기준과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기준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부끄럽지만 그게 결혼식이든 새털같이 평범한 날이든, 가장 나를 나답게 해주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이 당연한 명제를 그놈의 ‘평생에 한 번’이라는 마법의 단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아마 나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막상 결혼을 준비하는 예비신부가 되면 당신도 ‘평생의 한 번’이라는 마법에 빠질지 모른다. 그러나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처음 결혼하는 나와는 달리 왠지 모르게 결혼에 대해서는 전지적 존재인 것만 같은 웨딩 플래너와 하필이면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서 미묘하게 서로를 비교하게 되는 친구, 걱정이 태산인 부모님과 해맑은 예비신랑 등등이 뭐라고 한들, 딱 이 세 가지만 기억하자. 그렇다면, 적어도 웨딩앨범을 볼 때마다 후회하지는 않을 테니까.
1. 많은 사람이 선택한다는 이유로 무의식중에 남들과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을 것
2. 비싼 것, 화려한 것이 아닌, 나다운 것을 고를 것
3. 평생에 한 번이라는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다시 결혼하더라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입고 싶은 드레스를 고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