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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러브 레플리카(윤이형 저, 문학동네)>>
소개팅을 닥치는 대로 한 적이 있다. 들어오는 소개팅은 마다하지 않았고 없는 소개팅도 물어가며 했다. 그때 만난 남자들 중 꽤 괜찮은 남자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문소리, 엄정화 그리고 조민수가 출연한 <관능의 법칙>이었다. 기대하지 않고 봤지만 영화는 꽤 재밌었다. 나이 든 여자들이 당당하게 사랑을 욕망하고 쟁취하는 과정은 통쾌했다. 영화 속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늙은 여자가 뭐! 늙은 여자는 이러면 안되냐?
영화를 보고 나온 소개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난 거 치곤 좀 야한 영화였나. 영화가 재미 없었나. 그 번듯한 청년을 놓칠까 신경이 쓰였지만 캐묻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선 곱창을 먹으러 갔다. 그는 영화가 어땠냐고 물었다. 물론 재밌었다. 조민수의 백치 연기와 엄정화의 당당함 그리고 문소리의 뻔뻔함은 누가 봐도 유쾌하지 않나? 사실을 말하려니 안 좋았던 그의 표정이 걸렸다. 눈치를 보며 “그냥 그랬던 것 같아요. 호호호.”라고 답했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늙은 여자들이 그러는 거 보기 안 좋아.
페미니즘의 뜻도 잘 모르던 어린 나이였지만 여대를 다닌 나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느꼈다. 그 뒤로 그와 연락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그럼 늙은 여자들은 어때야 돼요? 보기 안 좋다는 건 누구 기준인데요? 제 보기엔 너무 좋았는데요? 젊은 남자들이 늙은 여자가 어쩌고하는 것도 보기 좋진 않은데요?
늙은 여자의 사랑과 섹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나 역시 늙은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있었다. 아줌마, 할머니같은 단어가 주는 프레임에 갇혀 그들의 사랑은 어쩐지 추하다 여겼었다. 사랑이나 섹스같은 건 젊은 애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할머니가 교회에 갔다와 할아버지 장로님들 얘기를 할 때면 진짜 주책이라며 킥킥대기도 했다.
<대니>는 과거의 나를 부끄럽게 했다. 꽤 괴롭기도 했다. 친구와 점심을 먹다가도 <대니>가 생각났다. <대니>의 주인공인 할머니 생각에 울컥했다. 그 할머니때문에 이제는 세상에 없는 우리 할머니를 생각하다 또 울컥했다. 지나가는 할머니들을 보며 그들의 삶을 몰래 그려보기도 했다. <대니>가 준 먹먹함은 꽤 오랫동안 내 마음에 얹혀있었다.
<대니>엔 AI 베이비시터가 등장한다. 때문에 SF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다 보면 가까운 미래일 수 있단 생각이 든다. 보육대란, 어린이집/유치원 선생님들이 받는 불합리한 처우, 보육 시설에서의 아동 폭력과 학대 등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는 아이를 제대로 기를 수 없는 환경이다.
<대니>의 배경도 그렇다. 몇 몇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자신들이 근무하는 곳에 불을 질러 아이들 몇 십 명과 교사들이 죽는다. 그제서야 정부는 보육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다. 그 방안 중 하나가 미국에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를 한국에 맞게 개조한 것이었다. 제목인 <대니>는 영원히 스물네살일 AI 베이비시터의 이름이다.
대니는 시범적으로 극소수의 가정에만 파견됐다. 대개의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건 사람이다. <대니>의 주인공 할머니는 딸을 대신해 손주를 돌본다. 딸 가진 게 죄라는 옛 말이 맞는 걸까. <대니>에서뿐만 아니라 베이비시터가 없는 맞벌이 가정의 경우 아이들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맡겨진다. 외조부모가 맡는 경우가 더 많다. 엄마를 양육자라 상정하기 때문에 엄마가 쓴 소리를 더 잘할 수 있는 쪽인 친정에게 양육의 짐이 지워진다.
<대니>의 예순아홉 할머니도 딸아이의 부탁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사위는 “부모를 한날한시에 사고로 잃고 혼자 자란 처지”였다. 딸아이는 빚 때문에 복직을 해야겠다고 했다. 딸아이에게 엄마는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었다. 할머니는 6개월 된 손주 민우를 맡으며 한 달에 “백만원 조금 못 되는 생활비를 받아 분유와 기저귀를 사고 고기와 야채로 죽을 끓”이고 “새벽 여섯시쯤부터 자정까지” 서서 일했다. 그에게 유일한 자유시간은 딸아이가 민우를 데려가는 주말이었다. 주말마다 소주를 한 병씩 마시고 “나는 기계가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어느 날 할머니는 민우를 유모차에 태우고 놀이터에 갔다 지희의 베이비시터 대니를 만난다. 젊은 사람들을 보면 주눅이 드는 할머니는 자꾸만 자길 보고 웃는 대니에게 이상한 경계심을 느꼈다. 늙은 자신을 보며 웃고 살갑게 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생각했다. 대니는 그런 할머니에게 “아름다워”라고 말한다. ‘당연히’ 민우에게 한 말이라 생각한 할머니는 고맙다 말하지만 대니는 말한다.
아뇨, 저기, 당신이 아름답다고요.
그 날 대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종당했다. 지희 엄마가 대니에 접속해 아이를 보다 우연히 할머니를 발견했다. 지희 엄마는 몸이 불편해보이는 할머니를 보자 친정엄마 생각이 남과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저 할머니는 대니같이 잘생긴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주면 어떨까. 기운을 좀 내지 않을까. 심심한데 장난 좀 쳐볼까.
할머니는 당황했다. 처음엔 대니가 AI란 것도 몰랐고 지희 엄마가 장난을 치고 있단 것도 몰랐다. 서둘러 자리를 피했지만 할머니는 집에 와서 생각했다. 그때 내 목소리가 이상했던 것 같아. 내 목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마음에 안 들면 뭘 어째.
그 날 이후, 대니는 할머니를 보면 친한 사이처럼 굴었다. 어느 날은 할머니를 졸졸 쫓아갔다. 무겁지도 않은 짐을 들어준다고 고집을 부려 할머니에게 욕도 먹었다. 어느 날은 할머니를 도와줬다. AI라 불안한 감정이 없는 대니는 아이를 잘 달랬다. 가끔 성질을 고약하게 부리는 민우의 울음조차 그치게 했다.
할머니와 함께 시간도 보내줬다. “늙으면서 자꾸만 속에 고이는 탁한 성정을 누구와 공유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할머니는 대니와는 실없는 말들도 주고받았다. 그들은 자주 만났다. 할머니의 호칭은 ‘당신’에서 할머니로 바뀌지만 대니가 할머니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진 않는다. 대니에게 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주말까지 민우를 맡겨두고 딸아이가 여행을 갔던 날, 설상가상으로 민우가 아파 입원한 날, 딸아이가 전화기 너머로 소리를 지른 날. 그 날은 할머니의 생일이었다. 대니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낸 뒤 할머니가 좋아하는 양갱을 사들고 병원에 찾아왔다. 할머니는 괴로워한다. 후줄근한 옷차림이 신경쓰이고 주름진 손이 말라빠진 거죽같이 느껴졌다. 지금껏 한 번도 부끄러운 적 없다 생각한 늙음이 부끄러웠다. 할머니는 울면서 그만 보자고 한다. 대니는 할머니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할머니의 어깨를 안아줬다.
할머니
<대니>에 대해 쓴 건 내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할머니는 부모 대신 나와 동생을 키워줬다. 나는 민우였고 아주 자주 민우보다 심하게 성질을 부렸다. 할머니는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크게 기뻐한 적도 없었다. 하루 하루를 견디며 버텼겠지만 힘들다 말하지도 않았다. 늙으면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 수챗구멍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늙으면 감정도 욕구도 빠져나간다고. 기쁨도 슬픔도 느낄 새 없이 이 구멍 저 구멍으로 흘러간다고. 모든 일에 아무렇지 않다고. 그렇게 재미없이 남은 생을 살아간다고.
할머니는 죽기 1년 전부터 요양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부모는 부산에 있고 20대가 된 나와 동생은 학생이었다. 아무도 그를 돌볼 수 없었다. 병색은 짙어졌지만 그는 자꾸 겉모습에 신경 썼다. 미용실에 좀 가자고 했다. 옷이랑 신발 좀 가져오라고 했다. 부탁을 들어줄 시간은 있었다. 내게 돈이 없다면 할머니 돈을 쓰면 되었다. 할머니에게 쓸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병원에 있는데 무슨 파마야? 할머니 한 번 나가려면 휠체어 챙기고 가까워도 택시 타고 가야되는 거 몰라? 택시 기사님들이 욕해. 누가 본다고 옷을 갖다달래. 그냥 슬리퍼 신으면 되잖아. 할머니가 이러면 나 너무 힘들어. 내가 그에게 쓸 수 있는 마음이란 고작 이 정도였다.
<대니>를 읽고 오랫동안 먹먹하고 괴로웠던 건 그래서다. 모든 기억들이 후회로 떠올랐다. 그를 그저 늙은 환자로만 대한 거. 단 한 번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은 거. 미용실에 데려가 파마를 시켜주지 않은 거. 아름답다 말하지 않은 거. 옷과 신발을 종류별로 갖다 놓지 않은 거. 꽃들이 만개하는 봄날을 숱하게 보내면서도 바람 한 번 같이 쐬지 않은 거. 나도 동생도 부모도 “인간 감정의 팔십 퍼센트를 느끼고 재현할 수 있다”는 AI보다 못한 인간들이었다.
대니와 할머니가 자주 만나게 된 건 대니가 잘생긴 청년이여서만은 아니다. 대니는 할머니를 애 보는 기계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를 두 번째 키운대도 애 보는 건 힘든 일이란 걸 알았다. 대니는 할머니를 다른 (젊은)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 생일을 축하해줬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줬다. 실없는 말도 주고받았다. 할머니가 울면 달래줬다. 대니는 할머니를 “손주 보는 게 유일한 낙인 늙은이”란 역할로 보지 않았다. 대니에게 할머니는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늙은 여자들은 대개 아줌마, 엄마, 할머니 등으로 불린다. 사람들은 그 역할과 역할 뒤에 가려진 개인들을 동일시한다. 그들이 한 사람이고 여자라는 사실은 자주 잊혀진다. 하지만 그들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쓸 때가 있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늙는다고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까지 함께 늙어 소멸하진 않는다. 사람이라면 젊고 늙음을 떠나 모두 “울만큼 힘들 수 있”다. 늙은 여자들은 대니같은 AI도, 아이 돌보는 게 전부인 베이비시터도 아니다.
대니가 할머니에게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이 온전히 대니의 의도였다고 할 순 없다. 어쨌든 인간의 장난질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쓰지 않은 <대니>의 결말은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할머니를 각인시킨 건 지희 엄마인가, 할머니인가. 할머니에 대한 대니의 감정은 발전된 것인가, 발전한 것인가. 판단은 읽는 이의 몫이지만 읽(으려)는 이들 모두가 기억했으면 하는 게 있다.
늙은이란 역할에 가려진 할머니 개인을 편견 없이 대한 건 AI인 대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