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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의 팬의 ‘팬 활동’이란 건 생각보다 다양하다. 방송을 챙겨보는 것은 기본이고, 직접 공개방송에 참여할 수도 있고, 콘서트를 관람하러 갈 수도 있으며, 안방에 앉아 온라인으로 콘텐츠를 즐기는 ‘안방수니’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외에도 아이돌 그룹이 팬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공식 행사가 있다. 그중에서도 팬싸인회는 팬과 아이돌의 가장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기회가 많은 행사다.
팬싸인회의 비용 역학
아이돌 그룹은 주로 새로운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발매 기념 팬싸인회를 연다. 혹은 광고모델을 하고 있는 브랜드에서 이벤트로 팬싸인회를 열 때도 있다. 주로 지정된 음반매장에서 앨범을 구입하거나 해당 브랜드의 물건을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하는 방식으로 행사 응모를 할 수 있다. 주최측은 일정 기간동안 응모한 사람 중 평균 100명 내외의 인원을 추첨하여 팬싸인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프로그램으로 자동 추첨(전산 추첨)하느냐, 혹은 사람이 직접 영수증을 뽑아 추첨(손 추첨)하느냐에 따라 당첨 확률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도 있어 살 수 있는 앨범 수에 따라 매장마다 구매 전략을 달리하기도 한다. 한번에 많은 양의 앨범을 살 수 있다면 전산 추첨하는 곳에서, 적은 양 밖에 살 수 없다면 운이 상당히 작용하는 손 추첨을 하는 곳에서 구매하는 식이다. 이 과정을 통과해 팬싸인회 당첨이 되면 비로소 팬싸인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할 수 있다. 긴 테이블에 멤버가 일렬로 앉아 있으면 팬들은 줄을 서서 돌아가며 싸인을 받고, 마지막에는 질문 타임을 갖거나 한 곡정도 무대를 하거나 혹은 미션타임을 하는 것이 보통의 팬싸인회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코앞에서 멤버를 볼 수 있고,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있기 때문에 팬싸인회 응모 열기는 언제나 대단하다. ‘팬싸인회 앨범 컷이 100장’ 이라는 소리는, 100장을 사야만 팬싸인회에 한 번 당첨될 수 있다는 의미다. 앨범 한 장이 만원이라고 했을 때 팬싸인회를 한번 가기 위한 비용이 최소 100만원이라는 의미기도 하다. 그리고 이처럼 많은 비용을 지불해 온갖 기대감에 부푼 팬들이 모인 팬싸인회는 쉽게 유사연애 체험 지옥으로 둔갑한다.
극한 직업: 팬싸인회의 여성 아이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내가 돈을 지불하고 행사에 왔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겠다’는 마인드에서 출발하는 행동들이다. 물론 여성팬이 남성 아이돌 그룹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등의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싸인회에서 남성팬이 선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돌 멤버의 볼을 건드리거나, 때리려는 시늉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외모 품평을 해 결국 연예인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도 한다. AOA의 민아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팬싸인회에서) 팬에게 혼나서 울었다’고 밝힌 적도 있으며 걸그룹 우주소녀 남성 팬덤의 경우 과도한 행동으로 ‘우남빻덕’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구구단의 세정은 아이오아이 팬싸인회에서 공갈젖꼭지 모양의 사탕을 받아 입에 물거나, 수갑이 채워진 모습이 팬들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걸그룹 여자친구의 팬 싸인회에 몰래카메라까지 등장했다. 한 남성팬이 소형 몰래카메라가 장착되어 있는 안경을 쓰고 직접 팬 싸인회에 참석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멤버가 기지를 발휘해 안경을 벗게 만들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직접 항의는 못 한다. 게다가, 해당 상황이 촬영된 영상에는 ‘(해당 멤버) 영악하다’, ‘아이돌 얼굴 좀 찍으면 어때서 그러냐’ 등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여성 아이돌 멤버는 ‘몰래카메라’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기만 해도 비난을 받는다.
남성 아이돌의 한남식 유사 연애 감정
아이돌 그룹이 가장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유사 연애 감정’인 만큼, 남성 팬들이 상상하는 ‘연애’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이는 남성 아이돌 - 여성 팬덤의 경우에도 동일하지만, 그 양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대부분의 팬싸인회는 팬싸인회가 진행되는 동안 준비한 질문을 포스트잇에 적어 물어볼 수가 있는데, 이 때 유사 연애 감정이 작동할 수 있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설레는 말’을 해달라는 요구다. 이는 “‘누나가’라는 말 넣어서 설레는 말 해주세요.”등으로 변주 되기도 한다. 남성 아이돌이 이러한 요구와 기대에 부응한답시고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짧은 치마 입지말아요.”
"누나가 밥해줄래?”
심지어는 여성팬의 얼굴을 덥썩 부여잡거나 머리채를 (살살) 쥐고 흔들기까지 한 방탄소년단의 멤버도 있었다. 분명히 폭력적일 수 있는 행동이다. ‘짧은 치마 입지 말’라며 여성의 옷차림을 제한하거나, 혹은 ‘누나가 밥 해’달라며 여성의 고전적 성역할을 요구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여성 팬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는 남성 아이돌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례한 행동들에 대한 팬덤의 반응은 대체로 ‘귀엽다’거나 ‘설렌다’는 것 뿐이다. 한국에서의 ‘연애’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이랴. 남성 아이돌 팬싸인회의 경우 가수는 의자에 앉아 싸인을 하지만 팬은 직접 바닥에 무릎을 대거나 허리를 굽혀서 싸인을 받아야만 한다. 여성 아이돌 팬싸인회에서는 대체로 팬에게도 의자가 주어지는 것과 분명히 다른 양상이다.
폭력적인 연애 관계의 재현
이처럼 아이돌 팬싸인회가 유사 연애 체험장으로 변하면서 남성 팬덤은 여성 아이돌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연애 행동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남성 아이돌은 여성 팬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연애 행동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이성 연애 개념이 상당히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두 가지의 경우에서 모두 여성은 대상화되고 수동적인 존재로 읽힌다. 한국 남성이 데이트 상대인 여성에게 취하는 행동은 상당수가 여성 혐오적이다. 갑작스러운 키스, 여성을 벽으로 밀치는 것, 도시락 싸오기와 같은 고전적 성역할을 암묵적으로 기대하고 칭찬하는 것. 다 큰 성인 여성을 ‘내가 지킨다’며 과보호하거나 유아화하는 것, 그러한 과정에서 옷차림, 행동, 말투 등을 제한하는 것. 셀 수 없이 많은 여성혐오적 행동이 연애 상대에게 하는 로맨틱한 행동으로 포장된다.
사실상 다양한 팬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약자일수밖에 없는 여성 아이돌은 팬싸인회 현장에서 ‘연애 관계’라는 젠더적 불평등 상황에 다시 한번 놓이게 된다. 남성 아이돌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자본을 제공하는 팬덤보다는 약자인 남성 아이돌이 단순히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팬싸인회에서 여성 아이돌과 전혀 다른 식으로 권력을 과시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돌 팬싸인회는 유사 연애 체험 ‘지옥’이 되고, 여기서 명백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는 것은 또 다시 여성 아이돌, 혹은 여성 팬이다.기획사 입장에서는 앨범이나 광고하는 제품 판매를 촉진시키겠다는 목적만이 분명한 이런 행사에서 여성 팬덤은 돈 주고 여성혐오의 현장을 목격해야 하고, 여성 아이돌은 남성 아이돌에 비해 훨씬 고강도의 감정 노동을 견뎌내야만 한다. 가장 슬픈 것은 아이돌이든, 팬덤이든 여성은 그 어디서도 강자일 수가 없다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