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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면 졸업이다. “아직도 마음은 새내기”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생각보다 학교를 얼마 다니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끝났다는 생각은 든다. 원래 9월에 바로 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해 서둘러 졸업 신청을 했었더랬다. 계획이 완벽히 맞아떨어지진 않았지만 어찌됐건 이번 여름에는 지난 2년 반 동안 이어진 학부생으로서의 철학 공부에, 그리고 총합 6년 반에 달하는 나의 대학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지금까지 새롭게 배우고 성장하게 된 점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마음에 남는 한 가지는 역시 ‘우리 학교이기에 가능했던 경험’들일 것이다.
우리 학교는 이화여자대학교. '이화'대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자'대학이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항상 공학만 다녔었던 나에게 여대에서의 생활은 낯설고도 신기한 것이었다. 직접 여학교에서 공부하기 전까지는 같은 성별만 모여있다는 사실이 단순한 수적 지표를 넘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 7년 동안의 시간을 여대에서 보낸 지금, 여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한 명의 여자 또는 여자로 규정되어진 한 명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학교에 온 건 참 괜찮은 선택 중 하나였다고.
낯설게 보기
사회 내의 성차별이 문제라고들 하는데, 그 사회에 깊이 파묻혀 살아온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어느 선을 넘어야 차별이고 어디까지가 평등인지 판단하는 것이 까다로울 때가 많다. 또는 차별이라고 머리로는 인지를 하면서도 그것이 진짜 '문제' 혹은 '(바로잡아야 할) 이상한 것'이라는 문제의식은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직전까지도 요즘 세상에 성차별이 뭐가 그렇게 심각하다는 건지 느끼지 못했고 (물론 사회를 경험한 적 없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성평등에 대한 적극적인 요구를 유난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여학교는 이러한 사회 내 성차별구조를 인지하게 하는 데에 가히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다. 입학하자마자 곧 세상을 '낯설게' 볼 수 있으니까. 1학년 첫 학기, 연극 무대에 필요한 무거운 소품들을 선배 언니들과 함께 낑낑거리면서 옮기며 깨달았다. "아, 여기는 전부 다 여자가 하는구나!" 비단 힘쓰는 일만 말하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학교는 전부 여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어느 조직이건 고위직에 여성이 오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총장을 비롯하여 모든 고위직을—‘소수의 남성’을 제외하고는—모두 여성이 맡고 있다. 행정 조직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발표팀의 팀장부터 시작해서 과대표, 단대 대표, 총학생회장까지, 당연하게도 모두 여자다.
이러한 환경에서 몇 달 지내다 보니 우연히 지나가다 본 옆 학교의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약 대여섯 팀이 출마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단 한 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생회장 후보가 남자, 부학생회장 후보가 여자였다. 그나마도 여자가 후보에 포함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 학교는 왜 회장을 남자만 하지?" 하는 의문은 곧, 이때까지 사회에서는 이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대라는 환경이 내가 살고 있는 체계를 낯설게 하여 문제점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주요 보직이 남성에 집중된 사회는 제3의 눈으로 보았을 때 결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소위 말하는 '높은 자리'에 "여자도 앉을 수 있다—내지는 여자가 오르는 것이 가능하긴 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여자가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생각은 알게 모르게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와 방향, 그리고 그것을 위한 행동과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결국 개인의 삶의 모양을 결정하며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의 모양까지 좌우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각 기업의 여성 고위직들의 절대다수가 여대 출신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두 동등한 개체
흔히들 "이대는 개인주의가 심하다"고 말한다. 개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고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만약 “각각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한다”는 의미의 개인주의라면, 나는 맞다고 대답하고 싶다. 이화여대만큼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의 평등이 존중되는 공간은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 의견으로는 그 이유가 여학교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알게 모르게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차와 성별 간 기대되는 행동양식을 몸에 익히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성별 위계도 고정된다. 한 예로 여성에게 '애교'가 장려되고, 이를 통해 애교를 부리는 사람—주로 여성—은 상대방—주로 (애교를 받는 입장의) 남성—보다 항상 약자의 입장에 있는 구조가 공고화되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여학교는 모두 동일한 성별로 구성되어 있는 탓에 성별 위계에서 자유롭다. 개인을 억압할 수단이 하나 사라진 셈이다.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피지배 계급의 규범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통제하려고 들거나 그 규범을 강요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학교 안에서는 웬만큼 파격적인 옷차림이 아니고서야 눈길을 끌기 힘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건 아무도 눈총을 주지 않는다. 자연스레 평등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본래 평등은 자유의 밑바탕이기에, 이는 곧 자유로운 분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어디서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하며, 그런 만큼 남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혼밥'이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이대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때에 혼자라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밥을 먹고, 학과 행사나 술자리 등은 원하는 사람만 참여하는, 바깥세상에서 말하는 ‘개인주의’—그러나 당사자인 내가 보기에는 그저 ‘한없이 평등한 공동체’로서의 성격이 도드라졌다.
'사회'라는 타자 vs 나
이대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학생들은 거대한 타자와의 투쟁을 시작한다. 요즘은 페미니즘과 관련해 '여성 혐오'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된 탓인지, 아니면 국정 변화의 실마리를 이대에서 제공한 탓인지, '이대생'이라는 프레임으로 여성 혐오를 하는 빈도수가 현저하게 낮아진 것 같긴 하지만, 불과 일이 년 전만 하더라도 '이대생'이라는 단어는 재학생들에게 일단 다가올 공격에 대한 마음의 준비부터 하게 하는 단어였다. 이대라는 곳에 속하게 됨으로써 사회가 규정하는 '이대생'—'여대생'—'여자'라는 범주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범주로는 결코 규정될 수 없는 자신 사이의 격차를 인지하고, 그러한 범주화로부터 벗어나려 분투한다.
'이대생'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하는 각종 여성 혐오와 마주하다 보면 학생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더욱 이를 악물고 흠 잡히지 않으려 철저하게 노력하거나—종종 그것이 기존 체제 내 지위 상승으로 이어지기도 하고—또는 그러한 프레임을 거부하고 아예 '마이웨이'를 가거나. 어느 쪽이건, 끊임없이 규정되고 (그것이 공격의 형태라 할지라도) 그러한 규정을 통해 다시 한 번 나라는 존재를 검토하고 스스로 내 존재를 규정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의 태도를 설정하는 데에 있어서 주체적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싫어도 깨닫게 만드는 여성학 교육
다른 여학교도 동일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대에서는 어떠한 전공이건 교양이건 반드시 커리큘럼 중 일부를 여성학과 연계해야 한다. '앎'이란 무서워서, 한 번 알고 나면 이곳저곳에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더 좋은 것이 뭔지 알아버린 이상 조금 덜 좋은 것에도 만족하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위와 같은 학교의 교육방침 때문에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까지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회 및 역사 속에서의 여성들의 위치와 그 역사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보고, 여성학 등 페미니즘 관련 강의 등을 수강하면서 그에 대해 공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속한 여성이라는 그룹의 특성과 그들이 속한 현 사회의 구조에 눈을 뜨게 된다.
한 번 눈을 뜨면 돌이킬 수 없다. 일단 의식하기 시작하면 생각을 안 할 수 없고, 생각을 하게 된 이상 변화를 꿈꾸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여성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이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동안 매 순간 현실에서 경험하고 목격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원래 배운 걸 바로바로 적용할 수 있으면 그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여성학을 공부함으로써 내가 여자로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보다 높은 곳을 목표로 하게 되고,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마리들을 얻게 된다. 이건 학생들에게—여학생들에게—사회에 대한 공부이자 자기 인생에 대한 공부이기도 하다.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환경을 분석하여 보다 명석하게 아는 것은 본격적으로 세상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려는 학생들에게 '근거 있는 자신감'을 선사해주는 일이다.
큰 그림이 필요해
언젠가 여대의 필요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고 가는 가운데,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여대가 사라지면 안 된다”는 풍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 교육의 완전한 평등이 성취되지 않아서 평등교육 및 여성교육의 상징으로서 필요하다는 건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발언의 진짜 의미는 좀 더 ‘야망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단순히 성평등이라는 목표의 상징으로서 여학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학교를 통해 성취될 수 있는 학생들의 성장, 그리고 그를 통해 그 학생들이 성차별적 사회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진정한 평등을 이룩한다는 '큰 그림'이 필요한 거다. 그렇다면 그 큰 그림이 완성된 후에야—더 이상 낯설게 보기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비로소 다시 여학교의 존폐 여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