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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조선시대의 시인 허초희는 세상을 떠났을 때 스물일곱살이었다. 삼십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서둘러 가버린 이 여성은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마치 조선이라는 감옥에 유배된 신선인 듯 마지못해 산 듯이 보인다. 이승에 자신의 자취를 전혀 남기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손으로 쓴 글월도 모두 태웠다.
흔적 없이 떠나려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보다 여섯 살 어린 동생 허균이 먼저 세상 떠난 누이 초희의 시를 되살려 시집을 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허초희는 죽은 뒤 조선을 떠나 중국과 일본 등에서 더욱 유명해지지만, 여전히 남편을 이불 속으로 불러들이려 하는 음란한 여성으로 폄훼되곤 했었다. 허초희가 남긴 한시 213수 가운데 128수가 선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은 그의 현실이 얼마나 눈 둘 곳 없었는지에 대한 역설이다.
허초희의 인생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그에게서 붉은 빛을 다 가시게 했던 인생의 여정이 어떻게 담겨있을지, 그의 아름다운 시는 어떻게 노래가 되었을지,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작 무대에서 본 것은 허초희가 아니라 허균이고 이달이었으며 그들이 그리워하는 ‘이상의 여인’ 뿐이었다. 실존인물의 인생의 빈 공간을 허구로 채우고 그 허구가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수는 있다. 그럴 만큼 허초희의 인생이 이미 잘 알려진 것이었나? 아니면 허초희의 실제 인생에 드라마틱한 부분이 모자란가?
허초희를 묘사하는 글에는 늘 글재주가 출중했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리고 항상 그 증거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제시한다. 광한전을 지은 신선이 누각인 백옥루의 상량문을 지을 시인이 없자 허초희를 초대하여 상량문을 지었다는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신선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한 상량문이다. 이 상량문을 진실로 허초희가 여덟살에 썼다면 허초희는 천재이거나 전생이 신선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 상량문 하나만으로도 상상 속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펼쳐나갈 수 있을 정도다.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여성이 신선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이야기에서 이미 어린 초희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희의 아비였던 허엽은 딸의 재능을 아껴서 그 당시 당시의 명인이었던 이달을 시선생으로 붙여주었다. 어린 허균과 허초희는 함께 이달에게서 시를 배우며 일취월장 했다고 전해진다. 허초희는 조선시대의 여성으로는 드물에 두 개의 이름은 물론 자까지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동생 허균이 책에 적어 남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초희의 아버지 허엽은 딸의 재능을 키워주기는 했지만 자유롭게 살았던 가풍답게 혼인 이후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고, 결국 초희는 안동 문장가의 아들 김성립과 열 네살의 나이로 혼인을 한다. 인생의 앞쪽 절반이 자유롭게 시를 지으며 자신을 연마하는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면, 뒤쪽 절반은 배우지 않았어도 좋았을 엉뚱한 인내를 익혀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었다. 김성립은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초희에 대한 열등감으로 몸부림을 치는 인간이었다.
허초희는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세 가지로 꼽았다. "소천지(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라는 그의 한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듯 그는 자신을 둘러싼 제약 중 제도의 한계를 먼저 짚어냈다. 그 중 남편 김성립은 가장 마지막이었지만 가장 직접적이었다.
자유로웠던 가풍의 친정 아버지와 오빠들, 동생인 허균까지 하나씩 하나씩 객사에 귀양까지 가게 되자 더욱 더 기댈 곳도 없이 고립무원이 되었다. 마음 붙일 유일한 존재였던 두 자식을 연이어 잃고 뱃속의 아이까지 죽으면서 초희의 인생의 붉은 기운, 생기는 한계에 다다른다.
스물이나 일곱 송이 부용꽃은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 찬 달 아래에...
-몽유광산산夢遊廣桑山 중-
그의 유언과도 같은 시 ‘몽유광산산’을 보면 그는 삶을 이어가지 않기를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뮤지컬 <난설>은 초희가 혼인을 올리기 전까지의 삶을 다룬다. 즉 허초희가 열 넷까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때 동생인 허균의 나이는 여덟살이다.
줄거리
허균이 능지처참형에 처해지기 전 날, 그의 기억 속으로 시선생이었던 이달이 찾아와 그와 함께 누이였던 허초희를 회상한다. 허균은 누이를 떠난 이달을 질책하고, 이달은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한다.
서얼 출신 이달의 시에 매료되었던 초희는 그의 시회에 참가하기 위해 동생 균의 옷을 입고 저자거리에 나갔다가 봉변을 당하던 선비를 구해주고 그의 거문고 연주를 답례로 듣게 된다. 남들은 흥겹다는 연주에서 슬픔을 느꼈다는 초희의 말에 선비는 그를 지음이라 칭하며 통성명을 하는데, 초희는 그가 바로 자신이 동경하던 손곡 이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달에게 마음을 빼앗긴 초희는 이달을 계속 만나기 위해 동생 균에게 시를 배우라고 꼬드겨 자신도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우며 잠시간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달을 괴롭히는 정실 자손인 형과 그 일당이 초희의 몸종을 희롱하고 살해하자 초희는 이달과 함께 그들을 징벌하는 무리에 끼어든다.
초희가 짓는 신선의 시를 읽으며 안전한 방 안의 세계에 안주하려던 허균은 그들을 관아에 고발한다. 결국 사건에 휘말린 초희가 시집을 가서 불행히 죽은 것을 보며 각성한 균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멈추지 않겠다는 초희와의 약속을 지키다 인생을 마친다.
허구의 세계
우선 이 작품에는 여성 인물은 초희 단 한 명만 등장한다. 허균과 이달의 대화 속에서 몸종이 단 한 번 등장하지만 등장하지 않느니만 못할 정도로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처음 글을 배워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어 행복해 하지만, 바로 이달의 형과 그 일당들에게 희롱당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버려지는 인물이라고 묘사되는 것이다. 이달의 형이 쓰고 버리는 것과 그 인물을 각성의 도구로 대사 한 줄로 쓰고 버리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쁜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백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실제로는 최대 여덟 살이었던 허균을 십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변경해 허초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좌지우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창작진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다. ‘홍길동전’을 쓴 천재로 알려진 허균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허초희를 설정하고, 그 계기로서 이달과 초희의 사이를 질투해서 관아에 고발한 허균의 죄책감을 얹었다. 더불어 허초희의 스승이었던 이달을 평생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인생의 단 하나의 정인인 듯 그렸다.
이 허구의 세계가 실제 있었던 사실을 부인한다. 이 작품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하면서 구축한 허구의 세계는 허초희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을까?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but...
허초희의 실제 인생은 비록 조선시대, 엄한 시어머니, 자격지심 덩어리 남편이라는 엄청난 환경에 둘러싸여 인생의 후반부 13년을 보내지만, 시를 통해 다른 세계를 보고 그 자신을 현실에서 동떨어진 곳으로 이끄는 스스로의 상상력 덕분에 균형감을 유지했다. 유곽에서 술을 마시던 남편을 조롱하는 냉소적인 시를 보면 그는 현실로부터 항상 거리감을 유지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뮤지컬 <난설>속의 초희의 운명은 허균을 격려하고, 이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며, 이달에게서 배운 것을 허균에게 옮겨주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그저 모든 일이 끝난 이후 누이는 그렇게 시집을 가서 죽어버릴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뮤지컬 <난설>속의 초희가 운명에 그저 끌려가지는 않는다. 그는 남동생의 옷을 빌려 입고 남장을 하고 남성들에게만 열린 세계로 주저 없이 나아간다. 단지 좋아하는 시를 듣기 위해서다. 그 시절 여성 영웅들이 대부분 남장을 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나섰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장을 한 채로 그는 스승인 이달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달이 서얼이지만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은 후에 허균에게 이어져 홍길동전의 기본 방침이 된다.
초희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실제 그에게 주어진 자유는 남성 서자인 이달의 자유와 비교될 수도 없을만치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던 그는 이달의 처지에 금방 공감하고, 자신의 몸종을 해친 이달의 형을 습격하는 데 서슴없이 나선다.
하지만 이 일에 나서는 사연은 허초희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게 아니라 이달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이 때 궁금해진다. 왜 이토록 중요한 사건을 우리는 이달의 입을 통해 전해 들어야 하는가? 만들어진 이야기 안에서조차 허초희는 밀려나 있고, 남의 입에서 전달되는 인물이다. 두 남자가 망연히 앉아 그들이 사랑했던 초희를 떠올린다.
심지어 칼도 직접 잡았던 허초희에게 입이 없단 말인가.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을지, 그의 마음은 어땠을지, 주인공 ‘난설’은 말이 없고,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but...
실제 허초희의 관심사가 무조건 선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혼인을 하였고, 아이들을 낳았으며, 남편이 있었고, 벗어날 수 없는 시가에서 소위 ‘구박’이라는 것을 한계치에 다다를 정도로 받고 있었다. 어찌 보면 허초희의 투쟁은 혼인 이후의 삶 내내 이어졌을 것이다. 허초희가 그 모든 걸 무심하게 넘기지도 않았고 참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가 남긴 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설>은 허초희의 진짜 투쟁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한 마디로 허초희가 꽃처럼 아름답기만 하던 시절, 그리고 아직 ‘순진’했던 시절의 풋풋했던 ‘진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난설>에 따르면 그 시절의 초희의 목표는 이달의 것이다. 서얼 출신이라 그토록 시를 잘 지었지만 어느 방면으로도 출세할 길이 막힌 이달의 운명에 이입하여 그를 돕는 것이다.
초희가 여성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감옥같은 세상에 자신을 이입하는 과정보다, 이달의 부추김과 이달에 대한 애정이 더욱 크게 그려진다. 사실 이 안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허초희를 가두려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초희를 여신처럼 떠받드는 허균과 지극히 사랑하는 눈빛으로 내려다 보는 이달이 있을 뿐이다. 이 안에서 초희는 무엇과 싸울 것인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데, 그 이유는 그 적이 이달의 적이기 때문이다. 이달의 손에 거듭 상처를 내는 이달의 형이 계속 그들의 대화에 등장한다.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는 그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제 그 자체를 상징하려 만들었겠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지엽적인 인물로 주저앉는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No
초희는 첫 등장부터 남장을 하고 갓을 쓰고 나와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를 벗어날 기개로 가득찬 모습을 순진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그 초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온통 그를 둘러싼 남성들의 일이다. <난설>에서 칼까지 들고 나가 싸움을 하는 이달의 패거리에 가담하는 초희지만, 정작 그의 미래가 걸린 일에는 초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허균은 자신이 이달을 관아에 밀고하여 초희와 이달이 잡혀가자 아버지에게 읍소한다. 초희를 ‘아무도 모르게’ 빼온 것처럼 이달도 ‘아무도 모르게’ 빼와서 둘을 도망치게 해달라는 것이다. 잡혀갈 때도 아무도 모르게 잡혀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버지 허엽이 그렇게나 세도가 당당했다니 우선 놀랍다. 게다가 이 당시 실제 허균의 나이는 많이 잡아야 여덟 살이지만, 뮤지컬이니까 이 사실은 일단 잊자.
어쨌든 허균은 말과 돈까지 준비해 누이를 태워 이달을 기다리지만 이달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달은 자신이 초희를 너무 아껴서 두려웠다고 하지만, 실제 이 때 이달의 나이는 최소한 서른 후반이다. 그래도 나이는 잊자. 이것은 만들어진 이야기니까.
하지만 이 중요한, 초희의 인생을 결정하는 자리에 초희는 없다.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와 허균이다. 허균과 초희의 아버지는 이 때 단 한 번 등장하지만, 아끼던 딸을 감옥에 가게 했던 바로 그 서자인 인물과 몰래 도망을 보내는데 동의하는 놀라운 인물이다. 그리고 누이를 빼앗기기 싫어 관아에 고발했던 죄책감을 씻기 위해 누이를 이달에게 ‘양보’하는 허균이 있다.
두 남자 사이에서 초희는 말이 없다. 초희는 그저 말없이 달빛 아래 장옷을 쓰고 이달을 기다렸단 말인가? 중요한 난설의 순간마다 이 작품은 난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초희는 자신의 인생을 타인의 손에 맡기는 사람이었던가? 이토록 처절하게 초희의 캐릭터가 무너져도 될 일인가?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초희와 이달의 관계를 ‘연애’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방도가 없기에, 초희의 모든 결정은 이달에 대한 애정으로 인한 것이다. 얼굴도 모를 때부터 이달의 시를 듣기 위해 남장을 하고 집을 나섰고, 이달을 만난 이후에는 이달과 가까워지기 위해 허균의 시선생으로 이달을 들인다. 또 이달과 함께 그의 형을 습격하고, 이달이 오지 않자 결국 아버지는 서둘러 초희를 시집보내 죽게 만든다.
이달과 도망을 보내자는 허균의 말에 동의했던 아버지라면 어찌 딸을 그렇게 서둘러 시집을 보냈을까? 시아버지 김첨이 초희의 오빠와 친우였다고는 하나 심지어 허초희의 남편은 더 보수적인 남인 계열이었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서 어긋나기 시작할 때, 역사를 기반으로 한 팩션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실제의 허초희는 자신에게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한 한을 그의 시로 풀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무대 위의 초희는 그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배우들이 무대를 디디고 서서 초희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을 뿐, 실제 뮤지컬 속 초희의 가장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우리는 그 멋진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조차 없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but ...
번번이 실존인물 허초희를 떠올리는 것은 그만큼 뮤지컬 속 초희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초희는 여덟살에 처음 쓴 문장이 남아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고, 이달에게서 시를 배운 이후 일취월장 했다고 알려져 있다.
혼인을 통해 인생의 가장 큰 굴곡을 겪는 때조차도 절망하기보다는 관조하는 시를 남겼다. 누가 그보다 더 고요하고 아름답게 분노할 수 있단 말인가. 남편에 대한 애정이나 인간적인 존중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음이 그의 정교한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어린 시절 썼던 화려한 선계의 시와, 혼인 후에 쓴 몽상적인 시들 사이에서, 아이를 잃고 쓴 ‘곡자’와 같은 시는 그가 감정을 제대로 쏟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초희는 곡절마다 성장하고, 분노할 때마다 다음 스테이지로 옮겨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뮤지컬 속의 초희는 처음 등장부터 이미 매우 공평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발전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인물에 의해 휘둘리는 쪽으로 변해간다. 휘두르는 것은 물론 이달이다. 작품 속에서 끝끝내 달이 저물도록 나타나지 않은 이달의 비겁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현실 이달로 치면 마흔에 가까운 그는 이미 처자식이 생생하게 있었으므로 불가능한 도주이기도 했다.
플롯 속에서 마치 허초희는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는 것처럼, 그리고 이달과 함께 싸우러 나가는 것이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후반부의 주저앉음이 너무 급격하여, 발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정에 의한 섣부른 행동으로 보인다.
결국 누군가의 노스탤지어로 남은
뮤지컬 <난설>에 등장하는 초희는 전형적인 ‘말괄량이’의 공식을 따른다. 당대에 존재했던 다른 여성들을 한 묶음로 묶은 뒤, 허초희를 빼내서 ‘그러나 허초희는 달랐다’는 식이다. 과연 그랬을까? 허초희는 남성 복장을 하고 이달과 연애를 하고 저자거리를 누비는 ‘모험’을 하지만 그런 때조차도 그를 이끄는 것은 어른 남자이고,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어린 남자인 남동생이다. 뮤지컬 <난설>속의 초희가 뭐가 달랐단 말인가.
이 작품이 과연 ‘난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난설을 빙자해 난설 주변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일까? 여성의 이름을 내세운 작품들이 2019년에 계속 올라오고 있지만, 그 중 누구도 무대 한가운데로 나와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남성 캐릭터의 도움이 없이는 여전히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여성 인물로 하여금 자신의 발로 무대 가운데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리 힘든가? 결국 허초희는 뮤지컬 <난설>에서 이달과 허균 누구도 차지하지 못한 ‘노스텔지어’로 아련하게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