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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녀/소년에게 투표하세요!
한 방송국이 야심차게 도입한 ‘국민 프로듀서’ 시스템은 투표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연습생을 데뷔시켜줄 수 있다고 속삭인다. 티켓몬스터에 들어가서 장바구니에 원하는 연습생을 담아 결제하면, 나는 투표를 통해 누군가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연습생들은 90도 각도로 절하며 외친다. “국민 프로듀서님! 감사합니다!”
‘국민 프로듀서’들은 직접 영업사원이 되어 지하철 광고나 SNS를 이용해서 자신의 스타를 홍보한다. 방송 분량을 편집해 ‘움짤’을 만들어 계정에 올리고, 공연 영상을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린다. 사진을 찍어 홈마스터가 되는 것은 ‘떡밥’을 확산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최근에는 ‘00이는 개념돌’이라며 영업하는 사례도 생겼다. 외모나 노래, 춤만이 아니라 인성 역시 주요한 영업수단이 된 것이다. 객관화된 지표를 확보할 수 없는 인성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팬들은 마리몬드 굿즈, 희움 팔찌 등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상품을 아이돌에게 선물하고, 인증받는다. 마리몬드 옷을 입은, 희움 팔찌를 찬 아이돌은 이내 ‘개념돌’로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 오르내린다. 각종 기부와 선행 역시 팬덤 활동으로 연계된다. BTS의 한 멤버가 입었던 원폭 구름이 그려진 티셔츠는 그렇게 아이돌에게 전달되었다.
선한 이웃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liberation, patriotism, 해방을 환호하는 사람들과 원폭 구름이 그려진 티셔츠를 선물한 이유는 무엇일까? 티셔츠의 디자이너는 패션에 역사의식을 넣으면, 조금이라도 역사에 흥미를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제작했다고 밝혔다. 팬 역시 자신의 아이돌이 역사에 관심을 갖는 ‘개념돌’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물했을 것이다. 팬덤은 연예인이 성소수자 문제, 지역감정 문제, 정치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을 걱정한다. 연예인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해서도, 난민에 대한 의견을 밝혀서도 안 된다. 즉 ‘개념 있는’, ‘인성이 훌륭한’ 연예인은 교통질서를 지키고, 복지시설에 기부하는 무해한 선한 이웃으로만 존재한다. 실제로는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실은 정치적인 행위자
케이팝은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행위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 한국의 아이돌이 된다는 것은 곧 그 시장이 국경을 넘어 아시아 전역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제는 BTS처럼 미국시장까지 넘볼 수 있는 지위를 갖는다. 10대 소년소녀들을 몇 년간 훈련시킨 끝에 탄생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은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을 일깨운 존재들이었다. 청와대가 축전을 보내고, 문화훈장을 수여하였으며, 해외 언론이 앞다투어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서, 국가와 팬덤 모두 케이팝 아이돌을 일종의 국가대표로 재현해왔다. ‘아미(ARMY, BTS의 팬클럽)’가 아니더라도 ‘국가대표 아이돌’의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그들의 행보를 응원할 만큼 아이돌은 국위선양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때문에 케이팝 아이돌은 이미 정치적인 행위자가 되었다. 그들의 행동이 탈식민 민족주의를, 문화산업 대국의 국위를 대표재현하게 된 것이다.
국민 프로듀서들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을 이용해서 ‘떡밥’을 생산하고 해외팬들이 유튜브 재생이나 투표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3시즌이 일본과 한국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케이팝 산업이 발전하면서 중국, 일본, 태국 등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케이팝 아이돌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의 복잡한 지정학적 경험은 저마다 다른 결을 만들어냈다.
지난 11월 17일 대만의 영화시상식인 금마장에서 ‘대만 독립’을 언급한 사태의 여파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계 아이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웨이보를 통해 ‘중국은 조금도 작아질 수 없다’, ‘양안은 하나다’라는 메시지를 일제히 업로드하였고, 한국 네티즌들은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을 비판하는 게시물을 작성하였다. 케이팝 장 안에서 이제 케이팝은 한국이라는 일국 내 문제가 아니라 국경을 넘고 문화권을 횡단한다. 지난 2016년 쯔위의 손짓 하나에 중국과 대만 사이의 오랜 역사적 갈등이 불거진 것처럼 말이다. 국경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케이팝이지만, 실상 자본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동아시아 질서에 누구보다 크게 제약받고 있는 것이다.
'국민 프로듀서'
포스트모던 담론에서 경계 넘기는 국민과 외국인, 시민과 난민, 남성과 여성, 이성과 비이성 등을 나누는 여러 경계를 탈주하면서 의미의 장을 교란하고 그로 인해 민족국가 체제를 해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국경을 넘고 경계를 해체하면서, 탈영토화를 통해 사유의 지평을 확장할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BTS의 경우처럼, 민족 단위의 국경은 국제 사회에서 더 많이 충돌하기도 한다.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고, 전 세계에 발신되는 아이돌의 경우 그들의 행동, 입은 옷 하나하나가 문제시된다.
일본의 혐한 세력은 원폭 티셔츠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과거 화보에서 착용했던 모자의 나치 문양을 문제 삼았다. 화보는 팬들의 항의로 발매되지 못하고 폐기처분 되었으나 이번 티셔츠 사건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건은 저명한 유대인단체에서 BTS에게 공개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국민 프로듀서들은 전면에 나서 이 상황을 설명하고, BTS의 무고함을 알리고자 했다.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를 알리는 작업도 수반되었다. 결국 약 일주일간 이 모든 사태의 전면에 나선 것은 기획사도, BTS도 아닌 팬덤이었다. 소속사인 빅히트는 14일 한일 원폭피해자와 나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소속 아티스트가 입는 옷이나 착용하는 제품을 제대로 검수하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이라며, 아티스트는 잘못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팬덤이 지난 일주일간 세계 각국의 언어로 설명해온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BTS는 UN에서 연설하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에서 자신이 입을 옷에 대해서 결정할 수 없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BTS가 선택한 티셔츠가 아니고, BTS가 선택한 촬영지가 아니라는 설명은 물론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큰 그림에서 볼 때 분명한 사실이다. 빅히트가 아티스트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한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쯔위의 사과도, 빅히트의 사과도 실상 케이팝 아이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준다. 국민 프로듀서가 원하는 대로, 회사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노래하고 공연하는 존재로서 케이팝 아이돌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한 번도 물어지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