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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장애로 얻은 신체 문제 중 일부는 청각이다. 문 닫는 소리나 풍선이 터지는 소리 같이 음파를 통한 음의 크기야 뭐, 대충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할 때는 각각의 어절이 똑같은 소리로 인식해 버려서 이해하기 어렵고, 여럿이 말할 땐 누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하기도 힘들다.
대부분의 청각장애인들은 듣는 것에 어려움이 있으니 까 말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왜, 누구, 아파, 배고파" 등의 짧고 익숙한 문장은 유추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긴 문장은 유추하거나 말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할 때는 주로 필담을 주고받거나, 휴대 전화의 메모장을 이용하여 하고 싶은 말을 활자로 쓴 뒤 보여 준다.
가방 안에는 내 입과 귀를 대신해 줄 공책과 연필, 휴대 전화의 보조 배터리가 항상 구비돼 있다. (사담이지만 필담도 나름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신체 문제 중 일부는 다리. 귀로는 대충 듣기라도 하지만 다리는 굳었다. 가까운 거리를 갈 때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가는데, 부모님과 함께 멀리 가야 할 때는 수동휠체어를 타고 나가기도 한다.
다음은 나의 인생에서 포인트가 되었던 이야기이다. (저번 화에 언급한 것처럼 비장애인들이 읽기엔 다소 낯설 수도 있겠지만, 저라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니까 그저 책 읽듯 읽어 주시면 감사합니다.)
첫 번째, 장애와 함께한 유년 시절을 기억해 보면 눈물과 보낸 날들이 참 많았다. 나는 언어 발달이 더뎠다. 어린 나이에는 듣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표현하는 방법, 나의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에 한계를 만들었고, 나를 자주 울게 했고, 한참 어린 시절에 울음은 내 표현을 대체하는 수단이 되었다.
참, 그런 나에게도 귀와 입은 있었다. 엄마. 엄마는 옆에서 나를 잘 챙겨 주셨다. 울음이 나에게 의사 표현의 수단인가 하면, 엄마에게는 ‘고집 많은 아이’로 표현되는 수단이었다.
내가 울 때 엄마는 ‘고집 부리지 말라’고 손을 올리셨고, ‘경찰서나 복지관에 버릴 거야’라며 겁을 주셨고, 심지어는 마트 주차장에 부모님이 나를 버려 두고 차에 타시기도 했다. 공포는 더 심해져 분리불안을 낳았다. 엄마가 집 앞 슈퍼에 들리기 위해 현관문만 열면 나는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유년 시절을 보내자 지금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 됐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가끔 악몽처럼 기억되어 씁쓸하게 느껴진다.
물론 다 큰 나는 엄마의 고통을 이해하고 몇 번이고 안아 드리고 싶다. 엄마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제일 감사하고 존경해야 할 분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울던 나를 보살피던 당시에 엄마의 나이가 고작 30대이셨다.
엄마는 영어교육과를 나오셨고, 피아노를 잘 치신다. 다방면에서 능통한 여성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도우미 선생님(일상생활 중 장애로 인한 제한을 겪고 있을 때 도와주시는 감사한 분)을 곁에 두고서야 직장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셨다.
나는 그게 참 슬프다. 장애와 여성은 모두 사회적으로 약자에 포함된다. ‘장애 아이를 가진 30대 여성’이었던 엄마는 이 사회에 발을 들이면서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까, 나는 내 장애를 선택한 적 없고, 엄마도 여성임을 선택한 적 없음에도 우리는 어째서 누군가 정한 ‘약자’라는 범주에 포함될까, 장애를 겪는 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엄마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엄마가 나를 엄격하게 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꽤나 엄마를 힘들게 했었을지도 모르고, 사회 역시 엄마에게 엄격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나는 슬퍼진다. 어린 시절의 악몽도 엄마에게도 본인의 악몽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를 생각해 보면 본인의 청춘과 꿈을 잃은 대신 병을 얻으셨던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참 아프다.
장애 아이든, 비장애 아이든 육아의 전유물은 절대 여성의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의무적으로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보며, 복지 정책의 부모를 위한 제도를 많이 지원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모든 비장애 아이와 장애 아이, 그리고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악몽이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두 번째, 여덟 살 때는 다리수술을 크게 받았다. 어린 나는 장애가 나의 일부인 만큼 사회도 당연스럽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나를 위하여 대학 병원에 가서 수술과 재활 검사를 받았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어른들을 따랐다. 의사 선생님이 듣지 못하는 말로 무어라 하시며 내 다리를 여기저기 검사하실 때 잘은 모르지만 걷게 해 주실 거라 믿었다.
수술 때문에 두 다리에 붕대를 크게 감았던 시간이 길어졌고, 붕대만 풀면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게 굳은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무서운 지옥이었다.
가족이나 선생님들이 무서워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왜 어쩔 수 없지?’, ‘내 장애가 왜 어른들에게 아픔이고, 왜 내 두 다리를 아프게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공포스러웠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재활을 그만둬 버렸고, 그렇게 평생 휠체어를 타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두 다리를 대신하는 휠체어로 걸을 수 있다. 지금 준비 중인 사회복지사가 내 직업이 된다면, 내 휠체어로 걸어다니며 사회가 정한 약자들이 약자가 아니게 될 때까지, 악몽에서 벗어날 때까지 도움을 주고 싶다.
여성 장애인, 사회가 지정한 약자의 인생 이야기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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