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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패멀라 린던 트래버스가 쓴 <공원의 메리 포핀스>에는 춤추는 암소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메리 포핀스가 들려준 암소의 이야기는 매우 놀랍다. 송아지와 함께 들판에서 민들레 병정의 모가지를 싹둑싹둑 잘라 먹으며 세상 조신한 숙녀 중의 숙녀로 살아온 암소의 뿔에 어느 날 밤 별 하나가 내려와 앉는다. 그 이후 암소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잠시도 쉬지 못하고 앞다리 뒷다리로 껑충껑충 뛰고 온 들판을 헤매며 춤을 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송아지에게 젖을 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깊은 잠을 잘 수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도 위신이 많이 상했다.
암소는 결국 메리 포핀스에게 춤을 추며 상담을 하러 왔고 메리 포핀스는 암소의 뿔 한 쪽에 걸려 있던 작은 별 하나를 발견했다. 그 별을 떼려고 사람들이 줄줄이 달라붙어 당겨도 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포핀스가 제시한 해결책은 달을 뛰어넘어 보라는 것이었다. 될 지 안 될 지 모르지만 오래 전 문헌에 달을 뛰어넘은 암소가 있었다고. 아마도 그 문헌은 마더 구스의 자장가였을까? 암소는 들판을 날뛰며 춤추는 것과 달을 뛰어넘는 것 중 무엇이 더 체면이 상하는 일인지 고민했지만 이내 사랑하는 송아지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고 결심했다.
암소는 달렸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뛰어올랐으며 마침내 달을 뛰어넘는 순간, 머리에서 무시무시한 것이 떨어져 나가는 기운을 느꼈다. 다시 들판으로 착륙한 암소는 이제 자신이 네 발로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경꾼들도 사라졌고 사랑하는 송아지도 곁에 있고 그토록 좋아하는 민들레 병정을 마구 먹어치웠지만 이상하게도 허전해진 마음이 달래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암소는 자신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던 별이 다시 떨어지기를 바라며 별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준 다음 날 제인이 메리 포핀스에게 그 날뛰는 암소 말이에요, 하고 말을 꺼내자 메리 포핀스는 펄쩍 뛰며 자신의 먼 친척인 우아하고 예절 바른 암소에게 그게 무슨 무례한 말이냐고 모른 척 하지만. 뮤지컬 <렌트>의 등장인물인 모린은 바로 이 암소와도 같은 여성이다. 모린은 머리에 별을 달고 달을 뛰어넘기 전의 암소와도 같은 인물이다. 아니 어쩌면 그 별을 얻기 위해 달을 뛰어넘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머리에 별을 달고 춤을 추는
1990년대 중반의 뉴욕, 크리스마스 이브,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이스트 빌리지. 락 뮤지션인 로저와 영화감독 지망생 마크는 전기도 끊긴 재개발 예정 건물에서 촛불을 켠다. 같은 룸메이트였던 베니는 부자 건물주의 딸과 결혼하더니 면제해 준다던 렌트비를 갑자기 요구한다. 그리고 재개발 반대 공연을 하는 모린을 말려준다면 새 집도 주겠다며 전기를 끊어버린다.
마크는 전 애인 모린의 공연에 문제가 생겨 도와주러 나가고 혼나 남은 로저의 집 문을 미미가 두드린다. 초에 불을 붙일 성냥이 없어서. 마약중독와 에이즈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서로에게 끌린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온 콜린스는 건물 입구에서 강도를 당해 코트를 뺏기고 쓰러져 있다가 길거리에서 드럼을 치던 엔젤에게 발견된다.
모린은 이스트 빌리지의 재개발을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모린을 사이에 두고 전 애인인 마크와 현재 애인인 조안이 신경전을 벌이지만 아무 의미가 없다. 일 년간의 시간을 두고 엔젤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고 미미는 마음을 열지 않는 로저를 떠나 부자인 베니의 정부가 된다. 일년이 흐른 뒤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은 쓰러져 있는 미미를 발견한다. 죽어가던 미미는 벌떡 일어나 앉더니 엔젤을 보았노라 말한다.
언제나 탱고를 리드하는
모린은 이 작품 안에서 가장 긍정적인 캐릭터다. 오페라 <라 보엠>에 나오는 발랄한 뮤제타의 현신으로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는 인물이다. 모린이 아직 등장하기 전부터 관객들은 계속 모린에 대해 듣는다. 마크는 전 애인 모린이 도움의 탈을 쓴 호출 전화를 걸어오자 한숨을 내쉬면서도 거절 비슷한 말조차 하지 못하고 모린의 공연을 돕기 위해 달려간다.
그곳에 먼저 도착해서 음향기기와 고군분투 중인 사람은 모린의 현재 애인 조안. 하버드까지 나온 변호사지만 모린에게는 애인이자 매니저이자 무대감독이자 모든 잡일을 담당해주는 만능 파트너일 뿐이다. 전 애인과 현 애인은 썰렁한 분위기에서 만나 서로 모린에게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를 은근히 과시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그들은 꽤 죽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깨닫는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린이다. 또 모린 때문에 마음이 괴롭다는 점이다.
마크는 모린과의 관계를 탱고에 비유한다. 탱고는 리드하는 사람에 많은 부분이 달려 있는 춤이고 언제나 리드하는 것은 모린이다. 모린을 독차지 하지 못하는 조안과 마크는 닮아도 너무나 닮았다. 모린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떠올리며 두 사람이 번갈아 탱고를 리드하며 추는 "Tango Maureen"은 뮤지컬 히스토리에 남을 만한 노래다. 남성과 여성이 노래 안에서 거의 대등하게 맞서며 처음에는 사랑의 라이벌인 듯이 으르렁대지만 이내 한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동지애를 품게 된다.
흔히 뮤지컬에선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사랑을 경쟁하거나, 혹은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그 사랑이 트로피라도 되는 듯 자신의 사랑을 과시하는 노래를 부르곤 하지만 이 노래는 다르다. 일단 한 여성을 두고 여성과 남성이 노래한다. 내용의 흐름도 신선하다. 모린을 사이에 두고 마크와 조안은 모린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얼마나 자신들을 하찮게 여기는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본다. 노래의 끝에서 조안은 깨닫는다. 왜 모린이 자신의 공연에 늦는지. "바람피우네!" 마크는 새삼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조안을 본다.
보헤미안 중의 보헤미안
모린이 실제로 처음 등장해서 "Over the Moon"을 부르는 장면은 1막의 절반 이상이 지난 후일 만큼 모린은 등장이 늦다. 그러나 모린의 재개발 반대를 위한 공연은 1막의 화제이자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을 촉발하는 요소다. 한 때는 로저, 마크, 모린, 콜린스 등과 같이 살았던 베니가 부자 부동산 업자의 딸과 결혼한 후 장인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장인이 시키는대로 하기 위해 친구들을 협박하는 것도 모린의 공연 때문에 시끄러워질까봐 두려워서다. 모린이 반대 공연만 열지 않으면 친구들과 모린은 번쩍이는 새 집을 얻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도 이 제안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그 중 가장 관심 없는 사람이 모린이다. 사실 이 제안을 듣고 갈 곳 없는 로저를 위해 베니와 어울리며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불행하게도 로저를 사랑한 미미였다. 늘 그렇듯이 미미의 진심은 꽤 시간이 지나고 돌이킬 수 없이 병들었을 때야 드러난다. 모린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도 않지만,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면 그 희생을 숨길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애인이 하버드를 나오든 직업이 변호사든 상관하지 않는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콘서트에서도 웅변 대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래를 부른다. 이런 내가 살아온 공간을 파괴하지 말라는 당당함이 아찔할 정도다.
모린은 뮤지컬 <렌트>에서 ‘보헤미안’으로 그려지는 전체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보헤미안’에 가깝다. 자신의 젊음이 언젠가는 사라질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오늘 자신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똑바로 향해 간다. 문제는 모린을 사랑하고 그만큼 모린의 사랑을 돌려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늘 상처를 입는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나쁜 사람’, ‘바람둥이’가 바로 모린이다.
사람들은 날 보면 미쳐
사랑한다고 난리야
너도 그래서 내가 좋잖아?
이런 나를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든가, 떠나!
조안이 모린에게 바람 피운 걸 추궁하며 모린과 조안이 부르는 이중창 "Take Me or Leave Me" 의 가사 내용이다. 무대 버전에서는 처음 공연될 즈음에는 조안이 모린에게 매달리는 듯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이 노래는 두 여성의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사랑 싸움의 노래로 발전한다. 영화에서도 모린과 조안은 대등하게 서로에게 변화와 사랑을 요구하며 싸운다. 사랑을 한다면 내가 누구든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모린의 말도,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싶어하는 조안의 입장도 다 수긍이 간다.
주인공인 미미와 로저가 <라 보헴>이라는 고전적인 오페라의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치닫기 위해 마약의 유혹과 순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동안, 모린과 조안의 서브 플롯은 주인공들의 인생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현대적으로 펼쳐 보여준다. 모린은 ‘어르신’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철 없고 내일을 예비하지 않는 이십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당당함의 근원이 젊음이든 재능이든 무엇이든 간에, 보수적인 뮤지컬 속에서 이토록 뻔뻔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매력을 잃지 않는 인물은 흔치 않다. 뮤지컬 <렌트>에 현대성을 불어넣는 것은 진정한 보헤미안인 모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