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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싶은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서점을 둘러보다 무심코 사지 않을 수 없는 책이 눈에 밟히면 무엇에 홀린 것 마냥 종이책을 사는 그 순간을 결정하는 요소란.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저자일 수도 있고, 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꽤 많은 이들에게 그 순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바로 책의 디자인이 아닐까. <I’m a pro>의 세번째 주인공인 디자이너 이지선은 바로 그런 책들을 만들어 온 사람이다.
Q. 당신은 어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인가?
책. 처음에는 북디자이너인 오진경 씨의 사무실에서 보조디자이너로 2-3년 가량을 보내다가 회사에 들어가 보고 싶어서 문학동네 어린이팀에 입사한 게 시작이었다. 어린이팀을 구체적으로 원했던 건 아니고, 큰 규모의 출판사라서 소속된 디자이너만 스무 명 가량이 됐기 때문이다. 어깨 너머로 선배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입사하니 하필이면 그 어린이팀만 서울로 사무실을 옮겨왔더라고. 결과적으로 디자이너가 둘만 있는 사무실에 배치가 됐다. 그래도 입사를 무르긴 아까웠고. 6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그리고 은행나무로 이직해서 1년 반 정도 일하다 최근에 퇴사했다.
그래서 포트폴리오의 95%가 책이다. 학생 때 보조디자이너로 있던 곳에서는 웹과 플래시 애니메이션 등을 사용하는 교육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는데 별 재미가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출판사에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해 보니 내용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을 하는 게 재밌었다. 어쨌거나 책이 인쇄되어 나오니까, 하나의 일에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보인다는 점도 좋았고. 완성품이 손에 잡힌다는 점이 나와 잘 맞는다.
Q.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상업적인 디자인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나를 좁게 좋아한다기보단, 취향 자체가 넓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업들을 보면 디자인의 맥락을 잡고 대중화하는 작업을 잘 해놓은 결과물일 때가 많다.
대중화시키는 작업이란 건 튀어나온 장점을 다듬고 단점을 덮어 고르게 하는 작업인데, 그게 잘 되어 있는 작업은 평범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민음사에서 나온 책들. 특히 민음사의 최지은 디자이너(최근 작업물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있다)와 박연미 디자이너(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며, <릿터>를 담당했다)의 작업물을 매우 좋아한다. 그 책의 맥락을 잃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게 다듬어내는 능력이 대단하다.
Q. 어떻게 디자이너가 되었는가?
디자인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꽤 우연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사실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입시미술을 했고. 그런데 담당하던 선생님이 네 집 사정이 어렵지 않느냐며 디자인과도 하나 정도는 지원해 보라고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조언이었다. 내가 내 얘기를 풀어내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하게 되면서 제일 잘 맞는 점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작업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오진경 디자이너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다.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회사도 추천해 주시고, 커리어에 관련된 조언도 해 주셨다.
Q. 해 왔던 작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을 꼽는다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은행나무에서 작업한 <조지 R.R 마틴 걸작선>. 네 권짜리 세트다.
쉽게 나온 작업은 아니었다. 퇴사한 전임자가 하던 시안은 왕좌의 게임 시리즈와 결을 맞춘 것이었다. 작가가 같아도 장르가 다르니 그림 분위기를 바꾸고싶었다. 하지만 최종 컨펌에서 통과되지 않았고 이야기를 길게 들어보니 이 시리즈에서 강력하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명확히 있었다. 내용의 분위기보다는 작가의 이름을 먼저 보이고 싶다는 것. 제목, 부제, 그림 요소 등의 중요도 배치가 잘못돼 있었던 거다. 처음부터 모든 작업을 새로 해야 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내가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깰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전까지는 표지의 그림을 기반으로 타이틀 디자인을 많이 했는데 이 작업은 타이포그래피가 주축이 되고 그 외의 이미지 사용이 최소화된 디자인이다. 이 책을 보고 주변의 디자이너들이 ‘아, 너 이런 일 하고 싶었구나?’하고 얘기를 하더라. 그런데 나는 학교를 다닐 때부터 이런 작업을 계속 해 왔고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그때서야 내 이미지가 어떤지 깨달았다. 그래서 예전에 지원했던 회사들이 내 이력서를 보지 않았구나 싶었다. 결과물의 범주를 부러 넓혀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영화사 ‘필름봉옥’의 로고 작업이다. 첫 영화를 시작하면서 내게 찾아와 브랜딩 작업을 맡겼다. 그게 내 포트폴리오에 있는 유일한 브랜딩 작업이다. 클라이언트는 4년 정도 어린팀에서 나의 책 작업을 꾸준히 지켜보면서 자기 회사를 차린다면 내게 작업을 맡기고 싶었다고 했다. 대부분 이미지 생산자에게 작업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예전 작업과 유사한 작업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클라이언트는 내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내게 맡겼다. 책과 관련된 회사도 아닌데 내 작업을 꾸준히 봐온 것도 이상하지만 기쁜 일이었고, 내가 로고 디자인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물이 별로일 수 있다고 얘기해도 금액을 정해 와서 할 수 있다며 일을 맡긴 것도 이상하지만 기쁜 일이었다.
Q. 인하우스 디자이너와 개인 스튜디오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면?
일단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일의 시작부터 관여를 하니까 일의 스케줄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서 안정적이다. 어떤 책을 기획했다거나, 원고가 들어왔다거나, 번역을 하기로 했다는 등의 소식부터 접할 수 있어서. 외주 디자이너일 때는 맡은 디자인을 머릿속에 담고 있을 시간이 너무 적다고 느꼈다. ‘이런 원고가 있으니 두 달 뒤까지 마감해 주세요’와 같은 식으로 작업을 하게 되니까. 그럴 때엔 책의 성격을 빨리 파악해야만 하는데, 제목이라도 미리 알고 있다면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회사 안에서 일할 때는 그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다.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내용인지 같은 것. 그렇게 얘기를 들으면서 드문드문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 둘 수 있다.
중간과정을 노출하는 정도의 차이도 있다. 회사에서는 다양한 시안을 전부 까놓고 보면서 다른 시안 간의 장점과 단점을 짚어가면서 발전 과정을 함께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외주 디자이너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시안은 공유하지 않는다. 즉, 회사에서 일할 때는 시제품인 시안을 선보일 수 있지만 외주 디자이너로 일할 때는 완성품을 시안으로 보낸다.
작업 환경의 차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잡무와 안정적인 급여의 교환이다. 외주 디자이너는 책 광고작업까지는 안 맡는데,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한다. 그게 꽤 크게 시간을 잡아먹는다. 행사가 있으면 현수막도 하고, 인터넷 배너 광고도 하고, 이벤트 페이지도 짜고, 이벤트 상품도 디자인하고… 전부 북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잡무지. 하다하다 부스 3D 디자인까지 해봤다. 조경도 해봤고. 물론 재밌는 일이긴 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많이 배웠고, 스케일에 대한 감도 생겼고.
Q.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장점을 꼽는다면?
집요함. 체력도 좋고. 감각적으로 디자인을 한 번에 해버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디자이너도 있지만 나는 전혀 아니다. 나는 그보단 성실하고 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책 작업에 잘 맞는다. 예를 들자면, 본문 파일에서 띄어쓰기가 두 번 되어있으면 그게 눈에 걸린다. 1% 농도까지 잘 인쇄되는 요즘의 인쇄기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거다. 한 글자 차이, 색조 차이, 그 조금의 차이를 알아채는 게 아직까지는 인쇄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직군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편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장점이다.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지화가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랑 말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디자이너도 있으니까. 나는 생각을 말로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고, 그래서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Q. 디자이너로 일할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과 편하게 하는 것을 각각 한 가지씩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
힘들게 하는 것 한 가지는 컨펌하는 사람이 제3자에게 의견을 구할 때. 특히 그 디자인을 처음 보는 사람의 의견을 끌어올 때다. 좋다, 싫다에 관한 이유를 더 물을 수 없는 단편적인 호불호만 들을 때. 더 붙잡고 물어보면 이 디자인이 대략 좋지만 저 구석의 중요하지 않은 흰색 의자 그림이 너무너무 싫다는 소리였을 수도 있잖나. “이 색은 오렌지같다. 이건 초코 포장지같대” 같은 말들도 별 도움이 안 된다. 초코 포장지가 어떻다는 거지? 더 말해보세요!
출판사에서는 저명한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럴 때엔 의견을 내는 사람들끼리 기싸움을 할 때도 많다. 의견이 정리가 안 되니까 디자인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나를 편하게 하는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마음이 잘 맞고, 자기가 원하는 완성품의 이미지가 분명하고, 그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편집자다.
Q. 디자인 업계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고정관념을 한 가지 꼽는다면?
유행. 유행 자체는 좋다. 디자이너로서 가볍게 건드려 볼 수 있는 시각적인 룩이 있으면 감사한 일인데, 한국에서는 유행을 우상화시켜서 그걸 두 달 동안 와르르 비슷하게 만든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러다 보니 작업하면서 피로감을 느낄 때가 있다. 유행에 대한 자기복제, 혹은 적당히 베껴달라는 주문을 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게 유행이니까 다른 출판사의 전집을 베껴달라거나, 유명한 디자이너의 이 작업을 주제로 하지만 디자인은 새로 해달라거나. 복제품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다. 복제품은 잘 되도 아류다. 아류가 잘 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베껴달라는 요구는 끊임이 없다. 유행에 대한 집착을 버려줬으면 좋겠다.
Q. 앞으로 5년 후에도, 혹은 10년 후에도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책을 만드는 것만큼은 얼마든지 오래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각적인 뭔가를 만든다는 입장에선 5년 후나 10년 후에 뭘 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 때도 책만 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지를 만든다는 게 소모적인 작업이라서 한 분야에만 머물러 있으면 어느 순간에 발주 자체가 안 나가는 때가 온다. 그 때가 나에게도 올 수 있으니까 작업의 영역을 넓히고 싶다. 그래서 사실 10년 뒤는 너무 까마득하게 먼 때라고 느끼고, 5년 뒤라면 책을 기반으로 거기에 다른 일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할 수 있다. 한 가게의 전체 디자인을 한다던가.
혼자 하는 작업 말고, 여러 명이 협업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책은 작업의 크기도 작고, 시각적인 일관성이 매우 중요해서 한 사람 분의 작업에 해당한다. 다각적인 해석을 풀기에 책은 너무 조그마한 영역이고. 그래서 브랜딩을 기반으로 베리에이션을 하는 여러 사람 몫의 작업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Q. 언젠가 꼭 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같은 작업이 있다면?
스케일이 다양한 책. 전지 사이즈부터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사이즈까지 여러 권을 한 박스에 쌓아서 박스채로 파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