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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실이 늘어져있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나와 변호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변호사는 내게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는 다음 재판이 있어서 이제 가보려고요.
그와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때, 방금 전 까지 유심히 보지 않아 몰랐던 것이 보였다. 변호사의 어깨에 걸려있는 가방에는 서류 뭉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얇은 끈 두 개가 끊어질 듯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 한쪽에 걸려있는 나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소송. 변호사의 구두가 매끄러운 법원 로비와 부딪치며 경쾌하고 빠른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뒤로 하고 아이와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놀이방으로 향했다.
놀이방 문을 열자 아이가 나를 반겼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서 나를 보는 또 다른 아이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와 우리 엄마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내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우리 엄마 또래로 보이는 분이었다. 엄마는 살짝 당황하는 나를 보며 재빨리 이 상황을 설명해줬다.
두 사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녀지간이었다. 그 분은 옆에서 우리 아이와 자신의 아이가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내 또래의 여자의 일로 이 곳에 왔다고 했다.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이는 이 곳에서 노는 것이 재미있는지 좀 더 놀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우리는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됐다.
왜 따라가지 않았느냐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일도 하면서 여기까지 오는데 고생 많았겠어요. 저도 작년까지는 회사에 다녔거든요.”
“아, 언니는 작년에 일을 그만 두신 거예요?”
“애 아빠가 작년에 해외발령을 받았거든요. 안 그래도 그만두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이를 저 혼자 일하면서 보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죠. 애 아빠가 애는 진짜 예뻐하거든요. 그게 실수였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버텼어야 했는데.”
“그런 말 하지 마라. 괜히 속상하게.”
그 언니의 엄마가 끼어들어 말한다. 나의 엄마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게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그 언니는 나와 환경이 상당히 비슷했다. 아빠의 직업을 비롯한 가정환경부터 직업과 아이의 나이 게다가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의 일로 엄마와 아이를 함께 데리고 온 것 까지.
그 언니의 전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했고 그는 한 번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는 아이를 때로는 그 언니 자신보다 더 잘 돌보는 자상한 아빠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세상에 더 없을 뻔뻔하고 나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때 해외 발령 가서 일 열심히 하고 있는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애 아빠가 거기서 다른 여자를 만난 거예요. 그런데 진짜 웃긴 게 뭐냐면, 저한테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애 아빠 상사에요. 그 분도 여자고요. 차마 두고 못 볼 수준이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냥 그 사실이 믿기 싫어서 믿지 못했던 것 같다고 그랬던 것 같았다고 했다. 눈앞에 증거가 있는데도 그랬다고 했다.
심지어 그냥 다른 여자 만난 게 아니라 성매매로 만난 사람이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냥 모두 다 끝내자면서 화를 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한테 사과를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요. 당장 정리하고 한국 오겠대요. 하지만 대신 시부모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 거야.
언니는 화가 났을 것이다. 언니는 그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싶었다. 언니는 당장 집에서 나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시부모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처음 그들은 언니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뒤 그들은 태도를 바꾸었다. 언니는 해외에서 혼자 있는 게 외롭지 않았겠냐며 결국 회사도 그만 둘 거면서 왜 네가 우리 아들을 따라가지 않았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결국 그 행동들은 딱히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선택이었다.
그렇게 되고 연락이 한참 없더라고요. 저는 그냥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과하러 오려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고 나서 오히려 그 쪽에서 저한테 소송을 걸어왔어요. 유책배우자가 이혼 소송을 걸 수 있다는 사실도 그 때 알았지. 그런데 더 황당했던 건 내가 애 아빠 해외에 있을 동안 바람을 피웠다는 내용으로 이혼소송을 걸었다는 거였어요.
언니가 한숨을 쉬었다.
저보고 이혼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냥 남자들이 한 번 쯤 그런 실수 다 하니까, 애 아빠라고 생각하고 살면 된다고, 어떻게 창피하게 우리 집에서 이혼하는 사람이 나올 수가 있냐 이거였어요. 내가 널 뭘 잘못 키웠다고 그래야 하냐고요. 혹시 아버지께서 그런 말 안하셨어요?
확실히 단 한 번도 우리 아빠는 내 이혼에 대해 그런 식으로 책망한 적이 없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 처음 본 사이였지만 아무런 의식 없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곳에서 생전 처음 본 사이였지만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끼리의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 나 역시 내 이야기를 꺼냈고, 언니는 힘든 일을 겪었다며 나를 다독였다. 우리의 엄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우리 딸이 행복하길 바랐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며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 애 아빠는 아직도 꼬박꼬박 오거든요. 애랑 관계가 좋았으니까, 애가 엄청 좋아해요. 문제는 너무 잘해주니까, 애 아빠 왔다 가면 진짜 힘들어요. 애가 아빠랑 다시 같이 살고 싶다고 하거든요. 얼마 전에는 어린이집에서 무슨 발표회를 하는데, 시누이에 시부모까지 모두 와서 선물에 카메라로 사진 찍고 난리가 났어요. 애는 좋다고 신이 났고, 거기다 싫은 티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꾹 참고 가만히 보고 있는데...
언니는 그나마 애 아빠가 돈이라도 잘 벌고 있으니, 소송에서 위자료와 양육비를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며 이제는 빨리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다고 했다. 곧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 우리는 각자 집에서 우리를 기다릴 사람을 떠올리며 가정법원 1층 놀이방을 벗어났다.
들어줄 사람,
보여줄 사람,
말해줄 사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언니와 언니의 엄마는 누군가 말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언니는 주변에 이혼한 사람도 없고 이런 일을 얘기할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언니의 엄마 역시 그랬다. TV에서나 봤지 이런 일이 내 딸한테 일어날 줄 몰랐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이 곳에서 처음 만난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우리와 같은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했으리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 언니와의 대화가 머리에 맴돌았다.
나는 내 상황만 생각해봤을 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이혼하는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거나 결혼하고 이혼하게 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이혼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는 않다. 이혼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혼이 주제인 드라마를 보아도 이혼하는 사람들은 그저 법정에서 따로 나오는 것으로 끝날 뿐. 법정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이혼하게 되기까지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대체 어떤 수로 상대의 거짓에 대처해야 하는지 또 나를 그리고 나의 아이를 지키는 방법 같은 것은 도통 아무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꽤나 불편하고 괴롭다. 확실히 이 경험은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 그 대화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됐다. 누군가는 이혼을 한다. 그리고 내 경험은 분명 누군가의 결정에 어떤 종류로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의미 없는 고통이 조금 의미를 갖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상황에 잡아먹히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잡힌 조정일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