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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잘 지내요?
저는 오늘 택시를 탔어요. 늦잠을 자지도 일찍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평소보다 천천히 아침을 먹었고 아무도 모르게 집에서 나오려는 것에 실패했어요. 택시 라디오에서는 이경숙*씨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어요. 나는 얼마 전 구독을 시작한 종이 신문을 펼치려고 했지만 다시 실패했고 시멘트 냄새가나는 오늘을 가방에 대충 구겨 넣은 채 회사로 실려 가고 있었어요. 익숙한 길이에요. 기사님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젠 이것도 익숙한 일이에요. 대신 낯선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오늘은 일기를 발송하는 날이라서 무얼 쓸지 생각했어요. 일기를 쓰려면 뭔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별 볼일이 없으니까. 생각을 해내야 하니까. 아침에는 일기를 쓰지 않아요. 아침에는 눈물이 많아져서요. 무엇도 쓰지 않아요. 뭘 쓸지 그냥 생각만 해요. 그래서 휴대폰에 ‘이경숙’ 세 글자만 적어두고 창밖과 휴대폰 화면만 번갈아 쳐다봤어요.
언니 다시 안부해요. 잘 지내나요? 언니의 이름이 유모두였는지 유모든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니의 이름을 좋아했어요. 언니의 이름 안에 이미 내가 들어 있는 것 같아 포근했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언니의 이름을 기억했어요.
언니.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지난 걸까요. 그때 언니는 서른다섯 살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몇 살이 되었을까요. 언니. 언니라고 부르니까 좋네요. 하지만 언니와 만났던 일은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었을까요. 이젠 잘 모르겠습니다.
언니. 이건 저의 하루치 일기를 빙자해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언니는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없겠지만요. 저는 어쩐지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어요. 편지는 오직 둘만의 이야기니까. 하지만 언니가 이 편지를 받지 못한다면 이 편지는 결국 나만의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이야기가요. 그게 누구든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잖아요. 그래서 쓰겠습니다. 고쳐지지 않기 위해서요. 쓰지 않으면 언제든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니까요. 언니가 이 편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차마 쓸 수 없는 그런 이야기마저도 오늘은 마음껏 지어 낼 거예요.
언니 말대로 시간이 오래 지나서 저도 서른이 되었습니다. 역시나 언니 말대로 썩 특별한 일은 아니네요. 그래도. 그래도 참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서른 살의 제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요. 언니. 언니는 그때 아무런 목적도 없이 제가 사는 동네로 놀러왔다고 했잖아요. 나는 그게 진짜 웃겼어요. 진짜 골 때리는 사람이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장님에게 가서 말했어요. 사장님 저 사람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 동네로 놀러온 거래요. 사장님도 의아해했어요. 우리 동네에는 정말 볼게 없어서 다른 지역의 사람이 굳이 찾아 놀러 올 만한 곳이 전혀 아니라서. 그래서 내가 언니에게 “왜요?”라고 물었는데 언니는 기억하나요.
언니가 하필이면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 술집에 온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그 곳에 와서 사람이 없는 일층도 있는데 하필 이층으로 올라와서 바에 자리를 잡고 어떤 칵테일을 연달아 주문하고 든든하게 취하고. 물담배를 주문하고 미군들과 대화를 하고. 아무래도 물담배 호스가 고장 난 것 같다면서 나한테 한번 불어보라고 하고. 그래서 내가 부는 법을 알려주고. 언니가 다시 불고. 그렇게 호스를 부니까 물담배 연기가 엄청 많이 나와서 언니는 산타 할아버지 수염 분장이라도 한 것 같아졌잖아요. 산타! 산타! 그러면서 미군들이 막 웃고. 하나의 호스 밖에 없는 그 물담배를 처음 보는 미국인들과 마구 나누어 피우고.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고 결국엔 미국인에게 한국말을 하게하고. 일층으로 내려가 공이 하나 사라진 가짜 포켓볼을 치고 그리고 그 날의 가장 마지막 남은 손님이 되어 일층으로 설거지를 하러 내려간 나와 드디어 대화를 하게 된 일이요.
언니 아무래도 그 날은 주말이었던 것 같아요. 이층에서 스탠드 업 코미디 쇼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언니는 바에 앉아서 목젖이 보이기라도 할 것같이 마구 웃고 있었고 나는 미국인의 유머에 웃을 수 있는 한국인이 부러워서 언니를 한참동안 쳐다봤어요. 엄청 바쁜 날이었어요. 나는 그때까지 바 안에서 칵테일을 만드는 사장님을 서브하는 역할이었는데, 그 주 부터는 바 바깥으로 나가서 서빙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그게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몰라요. 바 안에 있었다면 유리컵에 얼음을 채워 넣으면서. 컵을 설거지 하면서. 틴을 헹구면서 멋진 언니와 대화를 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날은 어찌나 바쁜지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몇 잔 모히또 몇 잔 뭐 위스키 몇 잔 이런 걸 한꺼번에 한 쟁반에 다 올려놓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다니며 주문 받고 닦고 치우고…. 주문 받는 일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누구랑 대화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그곳의 노랫소리는 또 얼마나 컸던가요.
코미디 쇼가 끝나고 언니는 코미디 쇼를 진행하던 미국인 남자와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그 남자는 여러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사람들을 몇 번 웃겨주고 마침내 언니의 옆에 앉아 언니와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와 정말 멋진 언니다!” 나는 테이블을 닦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도 모르는 사람인데도 내가 다 자랑스럽고 내가 다 잘나서 그런 것처럼 어깨가 바짝 올라가는 거 있잖아요? 모르려나요. 바쁘게 일을 하고 조금 시간이 나서 언니 쪽을 쳐다봤는데 언니는 좀 취해 있었어요. 아직도 우리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오. 멋진 여자들의 만남이군.” 생각하면서 저는 두 배로 자랑스러워졌습니다. 몹시 시끄러운 가운데 멋진 두 명의 여자의 이야기가 한 잔에 담긴 칵테일처럼 섞이는 장면을 나는 아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다급히 저를 부르는 거예요.
*이경숙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던 조기정년제 폐지를 이끌어낸 여성 운동가. 여성의 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해 투쟁했고, 그 성과로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이 되었다.(참고서적: 출근길의 주문, 프롤로그(서문), 이다혜)
**정은경 현 질병관리본부 본부장
*모든 언니에게(2)에 계속 이어집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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