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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strange와 피해자 서사
시간을 여행하는 소재와 관련된 창작물은 영화, 소설, 게임 등 여러 매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자유도를 중시하는 게이머라면 ‘당신의 작은 선택이 미래에 큰 영향을 줍니다.’ 라는 문구는 굉장히 매력적인 요소로 느껴질 것이다. <Life is strange>(아래 LIS)는 어드벤처 장르나 영화 같은 전개를 좋아하는 게이머라면 한번쯤 플레이해 볼 만 하다.
주인공 맥스는 내성적이지만 사진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고등학생이다. 그는 동경하던 제퍼슨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앞으로 낼 공모전에 어떤 사진을 내야 할지 고민하던 날, 어릴 적 절친했던 친구인 클로이가 죽음의 위험에 빠진 순간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고 그 상황에서 시간을 돌려 클로이를 구한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맥스의 이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맥스의 시간을 돌리는 능력은 게이머에게 아주 많은 단서를 준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선택할 수 없던 선택지도 대화를 마친 후 시간을 되돌리면 방금 추가로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사람들과의 모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사실을 알았으면 이런 얘길 했을 텐데! 하는 후회감이 한 번쯤 들었던 적이 있다면 게임 속에서는 그 타이밍에 아낌없이 시간을 돌려 선택지를 바꾸면 된다.
LIS에서 메인 이야기가 급격히 전개되는 부분은 맥스의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적극적으로 사용될 때다. 반대로 말한다면, 맥스가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후의 전개들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맥스가 시간을 되돌릴수록 맥스가 살고 있는 아카디아 만에는 이상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고래의 사체가 해안에 떠밀려 오거나, 갑자기 죽은 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능력을 심하게 쓸수록 맥스의 몸에도 무리가 와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코에서 피를 흘린다.
이러한 전개방식은 영화 <나비효과>와 매우 유사하다.
두 주인공 모두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매개체가 존재하며 (맥스는 사진, 에반은 일기), 시간을 돌릴수록 주인공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황이 악화되어간다.
영화 <나비효과>의 과거를 바꾸려던 시도 중 우체통 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몸 일부를 잃은 에반의 모습은 LIS 챕터 3의 맥스의 시간 되돌리기로 인해 바뀐 클로이의 모습과 유사하다. 결말에서 에반은 탯줄을 감아 능력을 가진 자신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택하고, 맥스는 말 그대로 나비효과로 인해 폭풍우가 다가온 아카디아 만에서 시간을 되돌려 처음 능력이 발현되었던 클로이의 첫 번째 죽음을 방관하는 것으로 연결고리를 끝내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간 여행물의 클리셰는 주인공이 ‘여성’이 되어 특이성을 갖게 된다. LIS를 하며 절대 놓치면 안 되는 부분 중 하나는 LIS상에서 묘사되는 캐릭터들의 모습과 그들 간의 관계성이다.
LIS 스토리의 기본적인 타임라인은 다음과 같다.
- 맥스와 클로이는 어릴 적부터 함께 어울렸던 소꿉친구다.
- 클로이의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하고, 장례식 중에 맥스는 부모님과 이사를 한다.
- 고립감을 느낀 클로이는 상처가 회복되기 전에 의붓아버지를 만나며 엇나가기 시작한다.
- 그때 만난 레이첼은 클로이의 안식처가 되며 레이첼은 클로이를 사랑(동경)하게 된다.
- 둘은 이 도시를 함께 떠날 계획이었지만 어느 날 레이첼이 실종된다.
-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 맥스가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 둘은 레이첼을 찾기 위한 조사를 하며 그 과정에서 옛날처럼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 사건의 진상을 파고들수록 레이첼은 단순 실종이 아닌 성범죄와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고
- 다음 희생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둘은 사건이 예정된 현장으로 향하는데.
LIS에서 주로 언급되는 여성 캐릭터는 케이트, 레이첼, 클로이 셋이다(맥스는 주인공이니 제외하도록 하자.) LIS에서는 세 캐릭터를 통해 현실에서 성폭력이나 강간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여성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반영한다.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레이첼은 한혜원의 분류를 따르면 디지털 서사의 ‘사라진 여인’ 타입이다. 이 타입은 보통 순결하거나 순진한 성격의 소유자로 설정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동기가 되며 이 과정에서 폭력을 정당화시킨다(한혜원, <앨리스 리턴즈>,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74p). 그러나 보편적인 이미지의 사라진 여인 타입과는 달리 레이첼은 성적으로 무결하거나 순수한 성격이 아니며, 그녀의 실종은 주연인 맥스보다는 히로인인 클로이에게 더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맥스와 클로이는 세간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끝까지 레이첼을 찾으려 하며 레이첼의 죽음을 알게 된 후 클로이의 복수를 위한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공권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맥스와 같은 수업을 듣는 케이트는 레이첼과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살아남은 희생자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 하에 자라 소심한 성격이며 사건을 겪고 자신이 촬영된 비디오나 웹 사이트 주소가 학교에 유포되어 친구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해 끝에 결국 자살(선택지에 따라 자살 시도에 그친다.)을 한다. 맥스는 시간 되감기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클로이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데, 이전 에피소드에서 케이트를 위로할 때 케이트에 대해 잘 알아두지 않는다면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위로만 하게 되어 아무리 시간을 돌리더라도 케이트를 살릴 수 없다.
맥스는 여타 얻은 정보를 통해 케이트가 원치 않은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게임 내의 모든 인물은 동영상에 남아있는 케이트의 취한 모습 탓에 자살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를 피해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게임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클로이는 케이트와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그것에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케이트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약을 먹여 자신을 취하게 한 후 사진을 찍은 네이선에게 위축되지 않고 직접 찾아가 항의하며 자신때문에 일을 망치고 싶지 않거든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클로이의 평소 행실 탓에 마을에서는 클로이를 모두 문제아 취급하며 본인도 마약을 하고 있으므로 경찰이나 공권력이 자신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믿지 않는다. 피해자이지만 스스로 싸우기 위해 전면으로 나서며 그때 있었던 사건이 클로이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자극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여성이기 때문에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실종자 포스터의 주인공인 레이첼과 클로이, 그리고 맥스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 이상이다. 클로이의 비밀 아지트에는 클로이와 레이첼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맥스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 묘한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이름을 덧새긴다. 레이첼이 다른 남자와 교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을 때 클로이는 크게 충격받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레이첼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클로이와 맥스는 각각의 역할을 하며 함께 하는 동료이자 친구, 혹은 연인으로서 행동을 함께한다. 게임상의 히로인과 주인공의 권력관계는 일반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쉽지만 둘은 게임 내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채로 균형을 맞춰 움직인다.
제작사인 돈노드 측에서 이 게임을 가지고 여러 퍼블리셔를 찾았을 때 퍼블리셔들은 주인공인 ‘맥스’가 지나치게 평범한 성격과 외모로 매력이 없는 ‘여성’이기 때문에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남자로 성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다른 퍼블리셔(스퀘어 에닉스)를 통해 수정 없이 발매된 LIS는 우려와는 다르게 큰 인기를 끌었다.
맥스가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위의 관계는 모조리 뒤바뀔 것이다. 레이첼과 클로이의 특이한 관계성은 단순히 맥스의 여자친구가 될 클로이에게 신비스러운 매력을 더해주는 장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매력적이고 제멋대로인 여성 클로이에게 휩쓸려가는 평범한 삶을 살던 남성 주인공의 서사가 쉽게 완성될 것이다.
폭력에 대한 관점도 상당수 변할 것이다. 육체적인 폭력이 거의 나오지 않는 LIS에서 맥스의 친구인 워렌(남성)이 맥스를 위기에서 구해주기 위해 폭력을 쓰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오는데 맥스는 그 상황에서 통쾌함을 느끼기보다는 워렌의 낯선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다. 주인공이 남성이었다면 이런 폭력은 주인공이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직접 사용하거나,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에피소드 4 <암실> 에서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름별로 정리된 피해자들의 사진첩을 발견하게 되는데 사진첩 안의 사진들은 전부 약에 취해 죽어가거나 넋이 나간 모습이다. 악당 캐릭터의 사이코패스 같은 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여준 장치라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과한 감이 있었다. 맥스를 조작하여 피해자들의 사진을 확대된 이미지로 볼 수 있으며 주인공들이 청소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관음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장면을 더더욱 클로즈업 샷을 통해 자세히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에피소드 5 <양극화되다> 에서는 범인에 의해 잡힌 맥스의 상황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위와 마찬가지로 악당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주인공이 되어 선택지를 골라 진행하는 어드벤처 게임의 특징상 주인공의 입장에 어느 정도 이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에피소드 5에서는 불편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맥스가 벌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각도와 구도로 범인에게 감금되어 탈출하기 위한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하게끔 되어 있으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인공은 청소년이다!) 유사한 경험이 간접적으로라도 있을 유저들에게 쿠션 기능을 제대로 해 주지 못했다.
이런 점만 제외하면, LIS는 정말로 괜찮은 게임이다.
특수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맥스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게임 중 나오는 청소년 문제에 관한 현실적인 묘사는 현실에 대비하여 한 번쯤 생각해보게끔 하는 기회를 준다. 이 게임에 나온 피해자들은 사건이 해결되길 바라며 구석에서 움츠러든 채 누군가의 구원만을 바라지 않는다. 이 게임에서 여성들은 적극적인 존재로 묘사되며, 초반에 움츠러들어 있던 피해자인 케이트도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나아가는 희망적인 서사를 건넨다.
속도감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간 동안 플레이어는 느긋하게 LIS의 공간 이곳저곳을 돌아볼 수 있다. 맥스가 앉아서 기타를 치거나,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플레이어가 이 세계에 쉽게 녹아들거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몇 개의 사진을 수집했는지 보여주는 다이어리는 느긋하게 게임 속 세계를 돌아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둘러 본 정보들은 이후에 다른 캐릭터들과 대화할 때 아주 커다란 단서가 되기도 한다.
매 에피소드 플레이 후반부에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전 세계 플레이어나 자신의 친구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결과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