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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잡힌 조정기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처럼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전화가 울렸다. 오랜만에 연락 온 후배이자 B의 동기였다.
오랜만에 연락한 N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B에 대한 이야기였다. N이 해준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N은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B가 N의 친구와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N의 친구는 나와 마주친 적이 몇 번 없는 후배였다.
그 친구 말로는 B는 억울하다고 했대요. 사실 주변에도 자기가 이혼한 이유는 A언니가 B에게 전통적인 가장의 역할을 요구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했고요.
N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친구가 B 컴퓨터에서 좀 신경 쓰이는 글을 봤다고 저에게 고민 상담을 하더라고요.
N과의 전화를 끊고 잠시 뒤 내 전화로 두 개의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은 컴퓨터 모니터에 떠있는 이메일 내용을 찍은 것이었다. 바로 B의 부모가 B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첫 문장에서부터 꽃뱀이라는 단어를 보니 어이없게도 피식 웃음이 났다. B는 내가 자신보다 수입이 많은 것을 늘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중에 자신이 크게 ‘한방’을 터뜨리고 나면 내가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래, 이제야 이해가 됐다. B는 아마도 내가 얼마를 벌고 있는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내 상황을 당신들의 아들을 떠올리며 추측했겠지. 그래, 그래서 그 엉터리없는 고소장을 작성한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이었구나. 내 연봉도 안 되는 위자료를 받기 위해 결혼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하지만 실소를 터뜨리고 난 후에는 조금 심각해졌다. 그들은 B가 폭력적인 행동을 한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B의 폭력적인 행동은 동생 D도 피해갈 수 없었다. 자신의 딸에게 저지른 폭력조차 그런 정도로 넘기는 부모라면, 나에게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행동은 아주 당연한 실력행사로 보였을 것이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사실 꽤 오랜 시간동안 B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N이 보내준 그 부모가 쓴 글을 읽고 단번에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그는 그냥 그렇게 자라온 것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폭력이란 상대가 나를 화나게 했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고, 다만 폭력을 쓴 사람은 불리해지므로 참아야 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배웠던 그 동안의 내 윤리의식을 철저히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열차는 내가 내릴 역이 있는 곳에 가까워졌다. 사진을 보내준 N과 짧게 통화했다. 나는 N과 얘기하는 동안 지하에서 빠져나와 지상에 서 있었다. 퇴근 시간 도심은 늘 그렇듯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나는 잠시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저기 지나가는 사람들 중 분명 일부는 B와, 그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겠지. 누군가 나를 화나게 한다면 당연히 폭력을 쓸 수 있다고. 폭력을 쓴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분명 그 이유를 제공한 사람도 잘못이 있다고.
난 이 일이 이전에는 그렇게 상대를 바라본 적이 없다. 문득 내가 결코 안전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B덕분에 모르고 살아왔던 나의 처지를 정확히 깨닫게 됐다. 나는 언제고 나보다 육체적인 힘이 강한 사람에게 제압당할지 모르는 존재다. 상대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자신이 불리해질지 모른다는 얄팍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것은 너무나 얄팍한 이유라 내가 상대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언제고 쉽게 부서질 수 있다. 무섭다. 물론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때의 나는 B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나는 사람이 무서워졌다.
돌아온 조정기일
다시 조정기일이 돌아왔다. 나와 변호사는 또 다시 가정법원 로비에서 만났다. 변호사는 이번에도 조정위원은 그대로 일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조정실이 위치한 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걱정이 됐다.
“혹시 오늘도 안 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오늘은 아마 올 거예요. 어제 오전에 상대측에서 답변서를 제출했더라고요. 별 내용은 없는데 출력해왔으니 기다리면서 잠시 확인하시면 될 것 같아요.”
나와 변호사는 내 사건이 배당된 조정실 앞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변호사는 지난번처럼 두툼한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B와 그 변호사가 보낸 답변서는 별 내용이 없었다. 여전히 증거 하나 없지만 과거에 내가 낙태를 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내용과 그의 부모가 보내왔던 용돈 입금내역이 있는 B의 통장사본, B와 내가 좋았던 시절에 내가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적었던 SNS의 글 몇 개, 그리고 장난삼아 내가 그의 머리를 누르고 찍었던 사진을 놓고 내가 평소에 B에게 위압감을 주었다는 증거로 가져온 것이 다였다. 웃음이 났다.
이걸 증거라고 가져오네요.
변호사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뭐라도 가져다가 쓰고 싶은 거겠죠. 아마 그냥 넘어 갈거예요. 문제는 폭력의 정도가 그렇게 강하지 않고 상대측 자산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받을 수 있는 재산분할이나 위자료 금액이 크지 않을 거라는 거죠.
받아야 할 돈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꽃뱀 소리를 들은 내 처지가 어이없었다. 잠시 뒤 복도에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B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B의 변호사일 것이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순간 눈이 마주칠까 바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때 나 자신도 그 것이 무슨 감정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려웠다.
나는 B가 무서웠다. 인정하기 싫어 아니라고 믿었지만 분명 그랬다. 나는 그가 이 곳에서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르기 어렵다는 사실을 머리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과 내 속은 별개로 분주히 움직였다. 그와 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괴롭고 무서웠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그들은 우리 앞을 지나쳐 조정실에 들어간다. 조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괜찮으세요? 혹시 힘이 드시면 제가 혼자 들어가도 되는데요.
심상치 않은 반응을 알아차린 변호사가 내게 물었다. 나는 애써 그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아니요. 저도 들어갈게요.
변호사가 먼저 일어났다. 역시 전처럼 수많은 사건이 들어있는 가방이 그 어깨에 매달려있다. 나 역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