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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연극의 제목이자, 극이 상연되는 극장의 이름이다. 공연 내내 배우 이리가 홀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는 이 일인극은 그 연극이 벌어지는 극장의 이름을 그대로 딴다. 그러니까 이 극의 초연 당시 제목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였으며, 일본 요코하마 공연 때는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 가와마타 홀(BankArt Studio NYK kawamata hall)>이었다. 이번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의 일환으로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올리는 이 공연의 제목은 그래서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다.
극단 이름까지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라니, 뭔가 'what'이란 이름을 가진 애하고 이름이 뭐냐고 계속 묻는 바보 같은 게임에 걸려든 느낌이다. 제목에서부터 낌새가 느껴지지만 이 극은 연극의 공식을 가볍게 걷어차 버린 일종의 ‘초연극’의 태도를 견지한다. 어떤 가상의 플롯이나 기승전결의 흐름이 아니라, 캐리어 하나만을 들고 여러 거처를 떠돌며 어제와 오늘을 살고 있는 배우 이리가 자신의 경험과 상황을 연기하는데, 그 관계, 접점에서 만나는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 공연 내내 관객을 들었다놨다 한다. 유쾌하게 초현실과 초연극을 가로지르는 이 극은 진솔하고도 호탕한 배우의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으면서도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예술가로서, 이 땅의 마이너리티로서 살아가는 삶의 불안정함, 상실, 연민, 꿈의 편린들을 오롯이 소환한다.
이미 시작된, 아직 시작하지 않은 연극
공연 시작 15분 전, 공연장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배우가 무대 한가운데 책상에 앉아 직접 티켓팅을 한다. 줄을 선 예매자들의 이름을 묻고 리스트에 체크하고 표를 넘겨준다. 현금이 정리된 플라스틱 상자를 열어놓고. 즉석에서 표를 구입하는 사람에게는 거스름돈을 내어준다. 보통 연극이 암전의 시간과 침묵, 스포트라이트 조명 아래 등장하는 배우와 함께 시작하는 것과 달리 신선하면서도 다소 생소한 광경이다. 이 연극이 주는 신선함은 단지 배우가 직접 티켓팅을 하고, 관객을 안내한다는 연출된 궁색함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과 함께(아니, 입장 전에 이미) 연극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란 점이다.
관객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티켓팅을 마친 배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조용히 관객석을 둘러본다. 이제 진짜 연극을 시작하겠다는 시그널 같은데, 표정은 마치 오디션 참가자들의 면면을 훑어보는 심사위원처럼 시니컬하고 무표정해서 눈을 마주치는 관객들은 웃어야 할지, 정색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배우는 마치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이걸 하고 있나’ 하는 표정과 톤으로 시니컬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출이 자신의 반지하방에 찾아와서 이 극을 제안했던 상황부터 영어번역 일을 하면서 이 극을 위해 하루에 8시간씩 연습을 해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두런두런 쏟아놓는다. 그렇게 한참 떠들다가 그녀는 이따금 소리친다.
아, 연극 한 번 시작하기 되게 힘드네!
연극은 이미 시작했는데 아직 시작하지 않았단다. 그럼, 내가 보고 있는 이건 뭐지? 그녀는 담담한 투로, 때론 흥분해서 쉴 새 없이 산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이 무대가 어제도 오늘도 진행 중인 그녀의 고단한 현실의 연장임을, 또 여전히 불안정한 채 제대로 착수해보지 못한 어떤 꿈의 ‘대기실’임을 암시한다.
현실의 극장을 연극의 시공으로 설정하는 극의 제목부터 배우가 자신 그 자체를 연기하는 이 자기참조적인 이리의 일인극은 그동안 여성의 모노드라마나 정극의 독백에서 뿜어내는 우수, 혹은 아우라 따위를 상큼하게 벗어던진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에게 무덤덤한 투로 ‘그럭저럭’이라는 근황을 전달하듯, 레즈비언, 돈 없는 연극배우, 불투명한 미래, 불안정한 삶과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쏟아 놓는다.
이렇게 웃픈 너와 나의 현실
자신의 습관과 말투와 경험을 연기하는 이리의 연기는 진지하면서도 자유롭고 유쾌하면서도 강렬하다. 바쁘게 프리젠테이션 영상을 넘기고, 혼자 조명을 바꾸고, 과장된 연극적 제스처로 대사를 읊고, 격렬하게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린다. 그건 코미디와 같은 과장된 몸짓 때문이 아니다. 웃음의 포인트는 너무도 그녀의 진짜 현실,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는 웃픈 딜레마의 순간들이며, 그녀의 경험과 태도가 슬픈 공감들을 박수 치고 웃게 만드는 기억으로 전환시킨다.
그런데 그 웃음 위에다 그녀는 퀴어여성예술가로 겪는 수많은 곤경들을 무심하게 던져놓아서 관객들은 한바탕 웃음의 끝자락에서 쌉사름한 뒷맛을 느끼게 된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라는 제목으로 이 공연을 올렸던 2016년, 이리는 경희대 앞 옥탑방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공연에서도 그녀는 "홀로 거주하는 여성의 삶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불안정함과 가난함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댔다"고 한다.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의 2018년, 경희대 앞 옥탑방에서 서촌 친구집으로, 그리고 다시 성대앞 반지하로 거처를 옮겨온 그녀의 지금을 그녀가 나지막히 읊조린다.
여기까지 왔구나.
개미 몸에 갇힌 베짱이.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술가이고 예술적 성취를 원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거의 늘 영어번역 일을 해야 하는 가난한 연극 배우. 아니, 이것은 보는 이의 얄팍한 비약이고 그녀는 연극 배우로서의 성취보다 ‘섹스의 성취’를 강조한다. 여러 세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녀의 방 입구에는 가끔 음식물 쓰레기가 뒹굴고, 바퀴벌레가 꼬이고 방 안에서는 개미가 나온다. 그녀의 애인은 개미를 싫어했다. 그녀는 묻는다. “애인과 섹스를 자주하지 못한 건, 개미 때문일까?”
그녀는 섹스의 가능적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여름엔 쾌적하고, 겨울엔 입김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따뜻할 것.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이 있어서 서로를 따뜻하게 안을 수 있어야 하고, 겨울엔 뜨듯한 방에서 시원하게 벗을 수 있어야 한다. 에어컨도 없고, 개미가 기어다니고, 혹여 곱등이가 들어올까 걱정되는 반지하방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섹스불가능성을 가중시킨다. 섹스를 하고 살자면, 쾌적한 환경도 필요하고, 마음의 여유와 안정이 필요하다. (그녀는 외친다. 결혼 짱!)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가고 섹스도 할 수 있는 ‘여유’를 위해서 그녀는 연극 외에도 끊임없이 노동을 한다. 그런데 영어번역 마감과 공연일정이 겹칠 때는 위기가 닥친다. 공연을 위해 일감을 거절하면 앞으로 일이 안들어올거고, 거절을 안하고 일을 하면 공연일정 때문에 마감을 못 지킬 테고, 마감을 못 지키면 또 일이 안 들어올테고. 연극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 퇴로 없는 생존의 구조, 섹스불가능성의 구조에서 탈출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가난한 예술가의 곤경에 가난한 레즈비언 커플의 곤경이 테트리스 조각처럼 쌓인다. 그러나 그녀는 이길 승산 없는 콘솔 게임을 박차고 일어나듯 호쾌하게 외친다. 섹스는 꼭 옷 다 벗고, 좋은 여건이 갖춰져야 하는 거 아니라고. 섹스한 지 오래된 당신, 여기서 당장 나가 섹스를 하라고.
고양이들과 살았을 때는
요새는 고양이가 죽는 꿈을 자주 꿔. 한 마리도 아니고, 어린 많은 고양이가. 집에 있는 물건에 의해서. 벽난로에서 타죽거나 냉장고에서 얼어 죽거나 욕조에 빠져죽거나. 저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것 같고 나한테 요청을 했는데, 내가 못 돌봐줬을 때 그런 꿈을 꿔. 누가 나 때문에 그런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살았다. 파래와 다시마. 먹지고 않고 입지도 않고 숨만 쉬어도 한 달에 수십 만원씩 월세가 나가는 세입자 인생에 갑절의 부담을 주는 고양이 두 마리의 육아비용을 스크린에 띄우며 그녀는 투덜댔다. 그러나 그런 투덜댐은 잠시라도 정박해야 하는 행복한 이유이자 그녀가 개미처럼 일해야 하는 행복한 당위였을 터다. 경희대 앞 옥탑방을 갑자기 나와야했을 때, 그녀는 친구집에 들어가 잠시 살아야했고,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데려갈 수 없어 사촌오빠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픈 예감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고 했다.
'카샤카샤붕붕'만을 아이들의 흔적처럼 간직하고 흔들어대는 그녀가 소리 지른다. "고양이개새끼!" 돌보아야 하는 존재, 보듬어가고픈 존재들에 대한 애증으로, 그러나 그 존재를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는 탄식처럼, 떠나보냄 뒤에 마음을 거둬들일 수 없는 슬픔과 죄책감의 포효처럼 그녀는 소리친다. "고양이개새끼!" 이제 반지하방에서 지내는 지금 장마가 시작되어 물이 넘치면, “떠내려가고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 미국 캔자스주까지....”라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파래와 다시마와 살았을 때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차곡차곡 뭔가를 쌓아가는 인생, 주변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늘어놓고 늘려나가는 인생을 위해서는 어딘가에 정박해야 한다. 보험회사광고에서 보여주는 안정과 축적의 생애주기를 갱신해나가는 청사진 대신, 배우 이리는 캐리어 하나를 들고 떠밀려다니는 이 땅의 가난한 퀴어예술가의 불안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여전히 수시로 (무대 위에서도) 번역일을 하는 알바노동자로서, 가난한 연극배우로서, 월세세입자로서, 법적 결혼을 꿈꾸기 힘든 퀴어로서의 곤경을 안고, 축적과 상승의 지표가 아니라 그런 삶이 어디까지 떠내려 왔는가를 담아내는 대사들을 새로 쓴다(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은 우울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항변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대사로, 몸짓으로 직조한 자신의 이야기는 순간순간 그녀의 삶과 맞닿아있는 친구들, 연출가, 애인, 고양이, 사람들의 이야기 보푸라기로 오히려 살갑고 따스하다. 2018년의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그런 존재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분투하고, 내달리고, 노래하는 삶들의 공통적인 현실을 기워내지만, ‘운동왕, 섹스왕’ 이강아의 발동작 만큼이나 경쾌하다. 연출이 하지 말라고 말렸던 맥주 한 캔을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 놓고 극이 끝나갈 무렵 쭈욱 들이키는 귀여운 반항으로 배우 이리는 여성, 비정규직, 퀴어, 세입자, 비혼, 떠돌이로서 연극을 보러온 우리 각자에게 건배를 건넨다. 잘 개기며 살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