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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이란 말이 싫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몸이나 마음이 아플 때마다 이 단어를 떠올리며 나의 고통이 진짜인지 자꾸만 가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사 앞에선 자주 주눅 든다. 고통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의 경험인데도, 그것을 판단하는 권한이 내가 아닌 그의 손에 달린 것 같다.
엄마는 힘든 일이 생기면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옆구리와 허벅지 피부를 피가 나도록 긁어도 간지러움이 가시지 않아 잠을 자지 못하셨다. 때로는 가슴이 조여들 듯 아프고 답답하다며 숨을 잘 못 쉬었다. 병원을 여러 군데 다녀도 제대로 된 진단명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치료법도 매번 달랐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은 더욱 괴롭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미칠듯한 몸의 고통을 설명해주는 병명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는 여자들을 자주 만났다. 다발성경화증? 섬유근육통? 화병? 자신의 병명을 찾으려 애쓰는 여자는 ‘의사 쇼핑’을 한다며 비난받기도 한다.
의학의 표준이 되는
70kg 백인 남성의 몸
오랫동안 인간 몸의 원형은 남자로 여겨졌다. 표준으로 여겨지는 소위 70kg 백인 남성 외의 몸은 불완전하거나, 불안정하거나, 약한 것으로 규정되곤 했다. 여성의 몸 외에도 동양인의 몸, 흑인의 몸, 어린아이의 몸, 장애가 있는 몸 등도 표준에서 떨어져 나가 주변화된다.
여성의 몸에 관한 연구는 정말이지 너무도, 너무도 부족하다. 남성을 표준으로 둔 의학이 여성에게 그대로 적용되면 1) 과거 월경 현상을 병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것처럼 여성에게 정상적이거나 최소한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상태를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상태로 간주하게 되고 2) 반대로 여성이 겪는 질병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된다.
남성이 의학에서 기준이 될 때 여성의 몸은 과도하게 생식기관 위주로 재현되기도 한다. 여성이 겪는 질환을 자궁, 난소, 여성 호르몬 등으로 환원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여성과 남성은 몸이 다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매일 마주하는 일상이 다르기도 하다. 우울증처럼 여성의 유병률이 남성보다 높은 질환이 단순히 여성 호르몬의 문제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새로운 약물의 효능을 검토하는 임상 시험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70kg 백인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이를 일반화해왔다. 그러나 약물에 나타나는 반응은 집단에 따라 또 개인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사는 지역이나 연령대와 상관없이 여성 우울증 환자는 남성 환자보다 일관적으로 1.5배~2배가량 많지만, 대부분의 항우울제는 남성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이 이루어져 왔다(Hamilton and Parry, 1983; McGrath et al., 1990).
남성의 질환으로 여겨진
심장 질환
심장 질환은 여성 환자가 과소재현된 대표적인 질환이다. 오랫동안 심장 질환은 남성의 질환으로 여겨졌다. 1970년대 후반 활동한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와 같은 의사들이 직업적 성취가 높은 남자들이 받는 과도한 ‘스트레스’가 심장 질환을 일으킨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성이 가슴 통증 등을 호소하며 병원에 방문해도 의료진은 여성 환자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심장 질환은 진단 방법에서부터 남녀 간 차이가 존재한다. 관상동맥에 직접 조영제를 주입하여 X선을 이용해 촬영하는 ‘관상동맥 조영술’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남성 환자의 폐쇄성 관상동맥질환은 잘 진단할 수 있지만 같은 증상을 앓는 대다수의 여성 환자에게는 적용되기 어렵다(Shaw et al., 2009; Bugiardini et al., 2005). 또 관상동맥 조영술로 합병증이 유발할 수 있는데 이때 여성 환자가 남성 환자보다 취약하다(Berry et al., 2004).
같은 질환이라 해도 남녀 간 증상이 나타나는 양상이 다르기도 있다. 급성 관동맥 증후군 환자가 겪는 가장 흔한 증상은 가슴 통증이지만, 여성 환자의 경우 구토 증상과 턱 증상이 더 흔하다(Omran et al., 2006; Chen et al., 2005). 가슴 통증을 기준으로 진단을 하면 여성 환자는 놓치기 쉬워지는 셈이다.
남성의 몸에 맞추어진 의학을 여성에게 억지로 끼어 맞추느라 치료 시기를 놓치면 여자들은 더 아프고 더 많이 죽는다. 1987년과 1990년 연구에 따르면 심장병 증상이 있어 병원을 찾았던 여성 환자 가운데 4%만이 관상 동맥 수술을 해도 좋을지를 판단하는 다음 검사를 받았다. ‘엄살’이라 여겨져 집으로 돌아간 여성이 다음번 비슷한 증상으로 병원을 찾을 때는 더 늙고 병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 결과 관상 동맥 수술 도중 사망한 여성의 숫자가 남성 사망자의 수보다 거의 두 배가 되었다(Tobin et al., 1987; Khan et al., 1990).
의학은
여성의 몸을
모른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더 젊은 나이에 관상 동맥 심장 질환에 걸리는 현상 때문에 한동안 완경 전 여성에게 분비되는 에스트로겐이 심장질환을 막아준다는 가설이 생기기도 했다. 이에 완경 이후 여성들에게 에스트로겐을 함유한 호르몬 보충제 처방이 권장되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바바라 애런라이크는 <200년 동안의 거짓말> 2004년 개정판 서문에서 당시 의사들이 호르몬대체요법이 심장 질환뿐 아니라 골다공증과 알츠하이머를 예방하는 동시에 젊고 주름 없는 외모를 유지하게 해준다면서 여성들에게 호르몬대체요법을 열성적으로 권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생식 주기인 완경이 ‘에스트로겐 결핍 장애’가 되면서, 2000년에는 1500만 명이 넘는 미국 여성이 에스트로겐이 포함된 호르몬 보충제를 먹었다고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르몬대체요법이 심장 질환을 예방하기는커녕 유방암, 알츠하이머, 심근경색, 뇌졸중, 혈전증을 앓을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2011년 미국 심장학 학회는 호르몬대체요법이 심혈관계 질환의 예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Mosca et al., 2011).
그러나 이미 호르몬대체요법을 받은 수천만 명의 여성은 어찌할 것인가? 호르몬대체요법은 우울증 등 완경 이후 여성에게 발병하는 다른 질환에도 종종 권해졌다. 누가 이들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의학적 충고를 따를 때 신중해야 한다. 그 충고는 애초에 여성을 겨냥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의학은 여성의 몸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