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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을 처음 만난 건 학부 시절 <여성과 예술>이라는 수업에서였다. 미술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유명한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비판하고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여성 작가들에 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국내 작가들을 다루면서 제일 처음으로 나혜석이 언급됐다. 비난을 받으면서도 여성 해방을 위해 앞장섰던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나는 그의 삶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놀랐던 가장 큰 이유는 나혜석(1896년 출생)의 주된 활동 시기가 1900년대 초반이라는 점이었다. 여성은 인간이라는 범주에 들지도 못하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남자들과 싸우는 것도 모자라,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라는 문장이 있는 <모(母)된 감상기>를 쓴 게 나혜석이었다. 차별이 차별인 줄 모르던 세상에서 이게 바로 차별이라고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던 그는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찾은 책이 박정윤 작가의 <나혜석, 운명의 캉캉>이었다.
이 책은 소설이다. 그래서 나혜석을 시기하던 친구 엘리제 마담, 그의 딸 윤초이, 나혜석을 사랑했던 하석진과 독고휘열, 독고휘열의 아들 독고완 등 주요 인물들 중 다수가 가상 인물이지만 책의 흐름과 사건들은 많은 부분 사실에 기반한다. 이 책 초반부터 등장하는 나혜석의 죽음도 사실이다. 천재 화가였던 나혜석은 1948년 서울시립 남부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가상인물인 윤초이와 독고완은 그 의문스러운 죽음에서부터 나혜석의 삶을 파헤친다. 나는 그들이 되어 나혜석의 삶을 따라갔다. 조선 여성들은 모두 현모양처가 돼야만 하던 그 옛날부터, 싸우는 여자였던 나혜석의 삶을, 천천히, 꾹꾹 되새겼다.
싸우는 여자
나혜석은 17세가 되던 1913년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작은 오빠 나경석의 추천으로 동경 혼고 기쿠사카초에 위치한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모두가 “재봉, 자수나 편물 아니면 동양화”를 권했지만, 그는 유화부를 선택했다. 여성이 가야 할 길을 가지 않은 셈이었다. 남자들과 싸우는 일도 허다했다. 여성은 현모양처여야 한다, 여성이 뭣하러 정치까지 하냐는 말에, “남성의 시각도 변해야 한다”, “왜 현모양처는 있는데 현부양부는 없”냐, “남자보다 뛰어난 여성 인재도 많다”라고 답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00년도 더 전이었다.
동경 유학 당시 첫사랑인 최승구도 만났다. 최승구는 유부남이었지만 나혜석은 그를 사랑했다. 최승구의 집에서는 그의 이혼을 반대했고 생활비를 끊어버렸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폐병으로 죽었고 나혜석은 큰 상실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조혼(早婚)을 강요받는다. 훗날 남편이 될 김우영을 만났지만 그와 결혼에 대한 확신까지는 없었다. 나혜석의 부모님은 그를 재촉했다. 그가 조선에 돌아와 정신여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할 때도,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됐을 때도 결혼을 채근했다. 변호사였던 김우영이 괜찮은 남자이기도 했지만 20대 초반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끄러운 일인 시대였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 해도 조선에서는 한낱 여자에 불과했다.
나혜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김우영과의 결혼을 발표한다. 김우영이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이었기 때문에 <동아일보>에는 그들의 결혼이 기사로 나고 청첩장이 실리기도 했다. 사실 김우영이 아니더라도 나혜석의 결혼은 충분한 기삿거리였다. 그는 언제나 파격적인 행보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결혼도 그랬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하며 4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 번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두 번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세 번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주시오. 네 번째, 전 애인 최승구의 묘에 비석을 세워주시오. 지금으로부터 97년 전 일이다.
나혜석은 이후 남편을 따라 만주로 넘어갔고 그 곳에서, “전국에서 혜석에 대한 지지와 비판”이 쏟아진 <모(母)된 감상기>를 발표했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고 아이를 기르면서 점차 생겨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 젖을 물리는 것은 고통스럽다. 조선 사회는 여성의 고통은 이해하지 않고 당연시 여긴다. 거룩한 것이니 여자가 참아라 강요한다.”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글”이었다.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표현은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여자도 인간이라고
그는 “글로 자신의 일과 내면까지 거짓 없이 까발리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내던져 모든 모순과 부조리들을 비판했다. 많은 남성들은 그런 그를 비난했다. 여성들마저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같은 여자들조차 “자신을 까발리고 파헤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상처 받는 사람은” 나혜석 자신이었다. 쉬이 살면 될 것을, 그냥 죽은 듯 엎어져서 여자로 살면 될 것을, 여자도 인간이라며 덤비고 악을 쓴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 여성들은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이라는 나혜석을 보며 “백 년이 지나도 이 나라에서 여성은 여성일 뿐”이라고 비웃었다.
김우영과의 이혼은 그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관계때문에 결국 이혼을 한 그에게는 불륜녀, 이혼녀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금강산 작업실에는 불이 났고 미술 강사로 나가던 학교에서는 해고 통지를 받았다.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의 “싸인을 지우고” 헐값에 팔았다. 어렵게 차린 여자미술학사도 학부모들 때문에 이어갈 수 없었다. “서방질한 이혼녀”에게 자기 자식을 맡길 수 없어서였다. 선전에 작품을 내도 입상할 수 없었다. “불미한 작품에 특선 딱지를 붙여선 안된다”는 투서들이 날아왔다.
나혜석과 최린의 관계가 옳은 건 아니지만 사회의 잣대는 나혜석에게 더 엄격했다. 첩을 두, 세명씩 두었던 조선 남성들은 ‘계집질한 놈’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았다. 이혼한 김우영에게 이혼남이라고 비아냥대는 일도 없었다. 나혜석은 사회가 찍은 낙인과 무자비한 비난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가치 있는 욕을 먹는다면 좋다고 생각한다”며 조선의 “미개한 남성 중심 사회를 폭로”하는 글, <이혼고백서>를 발표했다. 모두가 변절자가 되어 황국을 찬양할 때도, “가난한 화가”가 되었으면서도, 총독부의 “학병 지원 협조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아녀자의 정조”만을 강조하는 세상에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쳤다. 총독부의 미행을 당하면서도 “틀리다고 생각하는 길”은 가지 않았다.
누가 그를 "실패한 삶"으로 만들었는가
나혜석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물이다. 그런 삶을 사는 건 2017년에도 힘든 일이다. 그가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는 “열두 살 나이에 폐렴으로” 죽은 첫 아들 선이의 묘도 가지 못 할 정도로 가족에게 외면 당했고, 말년에는 조선인들 거의 모두가 그에게 적의를 품었다. “사회가 그녀의 삶과 내장을 발라먹고 하얗게 부서지는 뼈만 광장에 내던져놓은” 순간에도 조선에서 여성의 위치는 “창녀”고, “하녀”라고, “여성이 독하게 일어서야 한다”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던 그였다. 그는 “실패한 삶”을 살았다.
나혜석은 불륜한 이혼녀라는 낙인때문에 그 어떤 작품 활동도 이어갈 수 없었다. 아이 넷을 낳았지만 아이들과 식사 한 번 할 수도 없었다. 조선 사회가 나혜석에게 찍은 낙인은 100년이 더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살아있다. 여성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언제나 조심해야 하고,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 여전히 여성은 괴롭고, 여전히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은 자신들에게 찍힌 낙인에 짓눌려 산다. 조선은 대한민국이 되었다. “뭣하러 정치를 하냐”는 소리를 듣던 여성들은 정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전보다 더 많은 낙인들은 이 땅에 촘촘히 박혀있고 차별은 그 낙인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실패하지 않은 정신
과거의 나혜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가 여전히 차별 속에 살고 있어서다. 그의 “삶은 실패”했지만 “정신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처절하지만 숭고했고 비참하지만 존엄했다. 정신은 실패해도 삶은 실패하면 안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소리친다고 누가 알아주냐. 그런다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줄 아느냐. 부당함을 주장하는 수많은 쟁의와 행진들을 보며, 세상의 모든 모순과 차별 아래 놓여진 불행들을 보며, 많은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선(善)과 정의는 그래서 생겨난다. 세상이 바뀔지는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가 될 지는 모른다. 그래도 알려줘야 한다. 우리는 그래도 싸운다고. 실패하지 않은 정신을 가진 이들이 여기 있다고 말이다.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정신을 갖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실패하지 않는다.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라고 노래 부른 이 땅의 수많은 나혜석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은 이만큼이나 전진해올 수 있었다. 실패하지 않은 정신으로 끝까지 버틴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와있다. 삶이 보잘것없더라도 정신까지는 실패하지 않기를, 모든 죽어간 이들과 아파했던 이들을 기억하며 단 한 명의 삶에서라도 희망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