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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세 명만 모여도 덕질의 장르는 메이저라며 자기 위안을 삼을 수 있다지만 주변인들의 지속적인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선을 두게 되는 나의 덕질 장르가 있다면 바로 이스포츠다. 나는 그 중에서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리그(현 League of Legends Champions Korea, 아래 LCK로 표기)를 리그가 이렇게 거창한 이름을 가지기 전부터 지켜봐 왔다. 년도로 따지자면 2010년 경, 트리비아로 따지자면 임프가 잊혀진계절로 랭크 게임 1위를 오르락내리락거렸을 때부터다.
한국이 이스포츠의 성지인 것은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생기며 당시의 게이머들이 엄청난 팬덤을 이끌고 다녔던 90년대 말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더불어 이스포츠를 즐기는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꽤 굳건히 자리잡으며 PVP가 가능한 거의 모든 게임에는 이스포츠 리그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왜 없지?
꽤 오랫동안 LCK를 지켜본 팬으로써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점이 있다면, 왜 LCK에 여성 프로게이머가 없냐는 거다. 물론 이스포츠의 역사를 되짚어 봤을 때, 여성 프로게이머가 한 명도 없었던 건 아니다. 스타크래프트 1, 2 프로리그에 등장했던 여성 프로게이머들도 있었고,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오버워치 프로게이머인 게구리(김세연) 선수가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이게 다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포츠 프로 구단은 열 네 개, 이들이 운영하는 팀은 스물 여덟 개다. 이중 대부분의 구단이 리그 오브 레전드 팀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열 네 개의 구단에 속해 있는 프로 선수는 167명, 감독/코치/스텝은 70명이다. 오버워치 프로게이머인 게구리(김세연) 선수가 현재 상하이가 연고지인 팀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한국에서 현재 활동하는 여성 프로게이머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성 프로게이머가 없는 게 나에겐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라서, 얼마 전까지 LCK 여성 프로게이머의 부재에 대해 궁금증조차 가지지 않았다. 이 의문은 이스포츠를 영업하려고 얘기를 나누던 친구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됐다.
여자 선수는 없어?
나의 초기 반응은 별다른 이유 없는 방어였다. 으래 '빻은' 점이 있는 장르를 파는 팬이 그렇듯, 어딘가 찜찜하고 구린 구석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탓에 귀동낭으로 들어왔던 각종 변론을 꺼내어 보는 것이다. 일단 상위 랭커 중에 여자가 없어. 롤하는 여자도 별로 없어. 아무래도 프로리그 환경도 여자가 선수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내가 변명을 늘어놓은 후에도 오래토록 망령처럼 나의 머릿속에 남았다.
진짜 왜 없지?
여성이 AOS 장르에 '생물학적으로 취약하다'고 주장하는 온갖 유사과학을 빌어 말하는 미신에 관해 다시 설명하고 반박하진 않겠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플레이 환경은 충분히 여성에게 적대적이다. 이에 관한 증빙 역시 지겨우니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덧붙여, 아무리 '여왕벌'이나 '버스' 같은 소리를 듣는다고 말해 봤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되풀이해 말하는 행위는 입만 아프다.) 즉, <리그 오브 레전드>에 프로게이머로 나설 만한 여성 게이머가 자생하기도 힘든 환경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른 많은 산업 분야처럼, 국내 LCK 프로게이머 씬의 환경과 프로게이머 씬이 굴러가고 성장하는 방식 역시 조직적으로 여성을 배척한다.
게임 잘하는 중고딩 - 프로게이머 - 은퇴 - (군대를 갔다 옴) - 스트리머/해설/감독 - 다시 이들이 게임 잘하는 중고딩을 뽑음
위 루트는 일반적인 프로게이머들의 '생애주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게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선천적인 재능인 경우도 있고 워낙 게임만 하다보니 잘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프로구단의 스카우트를 받고 프로게이머가 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이렇게 데뷔할 때의 평균연령이 18.3세다. 물론 데뷔를 한다고 해서 바로 프로리그 씬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리그 초창기 때야 그런 일이 드물지 않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선수들은 2군 팀에서 활동하다가 1군 팀으로 올라오거나 연습생 기간을 거쳐 데뷔한다.
그렇게 데뷔를 해서 한국 리그에서 몇 년을 버티면, 유명한 선수가 되어서 해외에서 영입을 해 가는 경우도 있고 오래토록 한국 리그의 터줏대감이 되기도 한다(얼마 전 공식전 1500킬을 달성한 프레이 선수처럼). 그들의 평균 연령은 20.3세. 형, 은퇴하고 이등병 하셔야죠. 이런 말이 부스 토크에서 농담거리로 등장한다. 현 LCK에도 소수의 선수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선수들의 연령대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20대 중반이 넘어간 게이머들은 좋게 말하면 '대선배', 현실적으로 말하면 '은퇴 직전'의 취급을 받기 일쑤다. 즉, 현역 프로게이머로 활동할 수 있는 시기는 굉장히 제한적이고 짧다. 그들은 어릴 수밖에 없다.
더욱 정확히 묘사하자면, 그들은 어린 남성이다. 그리고 어린 남성들이 모여 프로 리그에서 한때는 현역 프로게이머였던, 그랬다가 군대를 다녀온 청장년 남성의 지도를 받는다. 감독도 남자, 코칭스태프도 남자, 함께 게임하는 동료도 남자, 현장의 게임 해설도 남자다. 한때는 프로게이머로 데뷔했던 그 어린 남성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프로리그의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클이 LCK처럼, 그리고 다른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리그처럼 고착화되면 (군복무의 의무가 없는 나라에서는 은퇴 후 코칭 스태프나 감독, 해설로 휴식기 없이 곧바로 전향하는 일도 잦다) 농도 200%의 알탕 연대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남성들만의 카르텔이 적극적으로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영원한 주변인
인지조차 못하고 있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심각한 성비의 불균형이며 포괄적인 의미의 성차별이다. 프로리그에서 여성 프로게이머라는 선택지는 원천 차단되어 있다. 게임 환경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의해, 그 프로리그를 이끌고 굴려 나가는 남성들의 여성혐오에 의해. 그들에게 여성은 구단을 응원하는 팬, 통번역을 맡는 캐스터, 인터뷰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다. 여성이 그 이상의 역할을 프로리그에서 맡는 선택지는 없다.
여성은 프로리그 관객/팬의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모습으로 묘사되기 십상이고, (SKT T1과 페이커 선수를 대책없이 '빨아준다'고 말하는 것처럼) 더욱 정확히는 게임에 대해 잘 모르기를 요구받는다. 현 LCK의 선수도, 해설도, 중계도, 모두 남성. 각 프로 경기의 시작에서 팀명과 함께 "하나, 둘, 셋, (팀 이름) 화이팅!" 이라고 선창하는 목소리는 여성. 나는 그 목소리의 대비가 상당히 상징적인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프로리그에서 영원한 주변인이다. 반드시 프로게이머로서의 경험이 해설/코칭/감독/중계를 잘한다는 전제조건도 아닌데 (사실 프로게이머 출신이 아닌 남성 해설/중계진은 이미 많다) 프로게이머를 해보지 않은 여성이 해설/코칭/감독/중계를 하지 못하는 이유엔 대체 무엇이 있는가? 합숙하는 프로게이머의 숙소에 성별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성이 프로게이머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야 남자들이 드글드글한 방에 여자를 같이 재울 수는 없잖아요.'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강간문화의 산 증인이다.)
주변인으로 머무르기 싫다
'왜 여성 프로게이머가 LCK에 없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은 결국 돌고 돌아 이것이다. 하지 못하게 하니까. 게임 잘하는 여성을 받아들일 준비는 커녕, 프로리그의 중심에 여성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까. 한 해에 수백억이 쓰이는 산업에서 여성의 '응원'과 '소비'는 적극적으로 흡수하면서 그들이 주인공이 될 여지는 전혀 주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e스포츠 관계자들은 '새삼스럽게' 생각을 해 볼 이유가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