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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불황은 무슨! 이게 뭔 불황이고! 해외여행 잘들 가는구만!”
“아, 아빠.. 누구 들을까봐 쪽팔리니까 제발 그런 홍준표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그것이 2017년 아빠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불황이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대구공항은 사람으로 미어터졌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것보다 도쿄로 가는 게 더 가깝다는 걸 느낄 새도 없이, 깨달았다. 2017년 7월. 나는 ‘워킹홀리데이’(이하 워홀) 비자 소유자의 신분으로 일본에 ‘떨어졌다’.
일본에서 살려면 우선 비자를 취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비자에는 배우자 비자(일본인과 결혼하는 경우), 취로비자(就労ビザ, 주재원으로 파견을 가거나 현지 취업을 하는 경우), 유학 비자(유학생으로 가는 경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이 맨 땅에 헤딩하러 가는 20대 중반에게 선택지란 어차피 워홀과 유학,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유학비자를 생각했다. 유학비자를 얻으려면 일본의 대학에 입학하거나, 혹은 일본어학교(어학원)에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 유학생이 재적하고 있는 소속교육기관에서 발급해주는 비자로, 주로 6개월 ~ 1년 단위로 발급된다. 짧디짧은 비자 기간이 만료된 후, 다시 기한을 갱신하려면 조건이 있다. 반드시 해당 기간 동안의 출석률이 80% 이상을 넘겨야 한다. 만일, 어학원이 맘에 안 들어서 바꾸고 싶을 때는 반드시 공백기 없이 다른 유학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 나는 안 되겠군.
이 생각부터 대뜸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대학에서조차 출결 상황이 그 꼬라지였는데 유학원은 오죽하겠는가? 더군다나 월화수목금 평일 오전오후반 4시간 수업을 하는데 그걸 1년 이상 제대로 된 방학도 없이 다니라고? 무리다. 절대 못한다. 나는 소설에 가까운 자소서에조차 ‘성실함이 강점이다’라는 문장은 양심이 찔려서 못 쓰는 인간이다.
내 생활습관에 대한 불신은 둘째치더라도, 유학을 결심하기엔 당시의 집안 상황이 영 아니었다. 3년 전 자진퇴사(의 탈을 쓴 권고사직을 당)한 아버지와 2년 째 취준생인 언니, 평범한 교사인 어머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1년 동안 등록금에 준하는 비용을 얻어내가면서 기약 없는 생활, 정확히는 ‘도피 유학’을 하겠는가? 아무리 일본이 한국보다 아르바이트 시급이 높다고 해도, 유학생의 총 노동시간은 최대 주 28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장학금을 받지 않는 이상 아르바이트로 유학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튼 워홀 밖에 답이 없네!
답은 워홀로 정해져 있었지만, 막상 준비하려니 막막했다.
- ‘여자’에겐 25세까지밖에 워홀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나중에 30세 한국 워홀러를 목격함으로서 '구라'로 밝혀졌다. 이 루머의 근거는 '한국인 여성들이 일본으로 넘어와서 성매매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아, 예… 더 이상의 자세한 부연설명과 욕설은 생략한다.
- 도쿄에 사는 사촌이 있었지만, 그 집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는 2016년 말에 막 결혼을 한 신혼이었기 때문에… 이것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폰은? 집은? 알바는? 통장은? 초기 자금은? 그냥 현금으로 들고가서 브라에 차고 자야 하는 거야?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면서 무료하게 마우스를 딸깍이다가, 어떤 기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유학생들의 커뮤니티라는 다음 카페를 운영한다는 기관이었다. 유학생들의 모임이라니, 그러면 한번 가서 상담 정도는 받아봐도 되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워홀 시작부터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
일본 유학생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비영리기관일 거라고 짐작했던 내 생각과는 달랐다. 처음엔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간 시점에서 그 곳은 이미 반은 어학원 중개업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가 ‘유학생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것 자체만을 업으로 삼겠는가? 그 당시에는 절박함에 머리를 제대로 굴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일본어학원에서 중개비를 받고 그 돈으로 유학생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나 같은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신속히 유학원에 꽂아 넣어 주는 기관이었다. 간단명료하지만 확실히 돈이 되는 수익구조다.
그러니 처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15분 만에 유학비자를 권유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학을 하기엔 정말로 돈이 없었기에 한사코 거절하려고 했으나...
“그런데 몰래 씨, 일본 가서 살아본 경험도 없잖아요. 당장 알바 구한다고 해도 말부터 되겠어요?
단기간이라도 학원 다니면서 어휘력 쌓는 게 나중에 취업에도 도움될 것 같은데.”
그 말 한 마디가 나의 불안함을 직격했다. 6개월 코스는 가격(약 350만원)을 보고 바로 포기했고, 3개월 코스로 등록했다. 물론 해당 기관에서 제공해 준 팜플렛에 들어가 있는 곳 중 하나로. (그 중 그나마 수강료가 싼 곳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일본어학원이 그곳들밖에 없는 줄 알았다. 구글과 네이버를 검색해봐도 그곳들밖에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예비 워홀러들이 있다면, 광고 일색의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 첫 페이지에만 속지 마시고, 꼭 '일본어'로도 제대로 검색해 본 다음에 어학원을 결정하길 바란다.
기숙사
그 다음에는 워킹 홀리데이 예비 서류와, 유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서류, 두 개를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 이게 또 양이 어마어마하다. 워홀 서류는 일본 대사관 홈페이지에서 친절히 설명해놓았으니 그걸 참고하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워홀 준비 서류 중 ‘워홀사유설명서(워홀의 ‘지원동기’를 서술해서 제출하는 서류이다)’에 관해 중개 업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한글로 써오면 단돈 5만원에 일본어로 번역해줄 것이다, 너무 프로 느낌이 안 나게 JLPT(일본어능력시험) N2 정도 레벨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등등의 말로 무언의 압박을 가할 것이다. 하지만, 거듭 말한다. 오가는 돈이 몇 백 만원이라 작아보일진 몰라도, 여러분의 한 푼 한 푼은 소중하다. 차라리 그 돈으로 일본에 가서 중고 밥솥을 사길 추천한다.
내가 준비해야 했던 유학원 서류 중에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많다(지극히 사견이다). 학생의 성실도를 미리 심사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라고는 하지만, 굳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와 ‘모부님의 통장 사본’과 ‘주민등록등본’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대학교 성적표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통장 사본은 아마 학원비를 지불할 능력을 예측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다. 아무튼 내라니까 순순히 제출하면서도 '이거 프라이버시 침해 아닌가, 갑질 아닌가, 자기들이 비자 권한 가지고 있다고 막 하는 것 같은데?' 등등 번뇌가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고민에도 불구하고 그 절차를 꾸역꾸역 밟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기숙사.
도쿄 23구 내에서 살 만한 집에 살려면 한 달에 7~8만엔이 기본이다. 그런데 어학원 기숙사에 살면 3개월에 10만엔이라니. 쉽지 않은 기회처럼 보였다. 당장 주거가 해결되고, 어쨌든 믿을 구석이 생기는데, 일단 초기에 자리 잡기에는 이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숙사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숙사는 대충 이렇다.
1층에 계단, 공동 부엌과 화장실, 샤워실이 있고, 2층 계단을 지나면 조그만한 방 두 개가 나오는 4인 1실 구조였다. 들어서자마자 채광이 마음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방이 너무 좁았다. 정말 좁은 방에 억지로 2층 침대, 행거, 책상을 우겨넣었기 때문에 두 여자 사람과 캐리어가 들어갈 공간조차 없었다. 이래 놓고 지금 나한테서 한 달에 4만엔을 받았단 말인가? 고시원에 들어간 정몽준의 표정과 심정을 그때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전 고시원에도 살아봤는데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도쿄 땅을 밟은지 세 시간만에 분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룸메이트와의 어색한 인사도 잠시. 이윽고 둘 다 말을 잃었다. 침대에 매트리스가 없었다. 물론 침구도. 저기서 잤다간 허리 나갈 것 같은 2층 침대의 철제 프레임, 1단 행거 하나, 붙박이장이라고 뚫어놓은 것 같은 벽의 구멍이 전부. 그 와중에 에어컨 리모콘은 말을 듣지도 않았다.
“저기... C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이거 원래 없는 거에요? 그런 거에요?”
“네, 아마... 그래서 전 학원에서 미리 침구 신청하라길래 했는데요...”
“ 아니, 나는 최소한 매트리스는 있는 줄… 그래서 침구는 얼만데요?”
“다 포함해서 8천엔이요.”
아, 이걸 지금이라도 사야 하나. 더럽게 비싸네. 근데 아무 것도 모르니 뭘 사러 갈 수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짚고 있던 찰나 옆 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몰래 언니, 언니!”
“왜요.”
“에어컨에서 바퀴벌레가 떨어졌어요!”
…어디에서 뭐가 떨어져?
“그냥 저흰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틀었는데 거기서 떨어졌어요ㅠㅠㅠㅠㅠ”
…그럼 쟤는 지금 처음부터 저 송풍구에 살고 있었던 거... 아니다. 생각을 멈추자.
2분 후, 그렇게 내 검은색 삼디다스 슬리퍼는 첫 상륙일에 명을 다했다. 한국에서 바다 건너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잘 가, 친구야.
“아무튼 C 언니, 저희는 일단 이불부터 사러 가죠. 저 캐리어… 이 붙박이장에 좀 넣을게요.”
“네, 그럼 저 밑에서 기다릴게요.”
“C 언니. 붙박이장에서 이런 게 나왔어요.”
“그게 뭐에요?”
“남자 양말인데요. 그것도 겨울 양말. 여기 방 바꿀 때 청소 안해요?”
“나갈 때 청소비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청소를 하면 에어컨 송풍구에서 바퀴벌레가 강림하고 여자 방 붙박이장에서 남자 양말이 나오냐?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청소비를 횡령하고 있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이거 따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지금 이미 다 기숙사 방은 다 나가서 아마 다른 방으로 가거나 그런 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따져야죠. 일단 사무국에 가면서 이불 받으면서 말해봐요. 첫날부터 이게 말이 돼요?”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뻔했다.
“ 아 정말? 굉장히 申し訳ないんですが（죄송합니다すみません의 포멀한 어조）나중에 붙박이장 한번 더 점검해 드릴게요!”
지금 붙박이장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청소를 했나 묻고 있잖아요?
“그럼요, 나갈 때 청소비 받고 전체적으로 소독도 거치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봐~”
아, 예. 그러시구나. 알겠습니다. 착오 같은 소리 하네. 아직 일본어로 심한 욕을 할 줄 몰라서 아쉬울 뿐이었다.
그냥 나올 수도 없었다. 3개월치 기숙사비와 입회비를 한꺼번에 내고 들어왔기 때문에, 도중에 퇴실하더라도 환불이 안 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지만, 그때는 한 치 앞이 어두웠고, 이제까지 지출했던 매몰 비용이 내 발목을 묶고 있었다. 마음만은 이미 캐리어 다시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버리고 싶었지만, 아무튼 최소한 9월까지는 이 말도 안 되는 기숙사에 붙어있어야 했다.
"아무튼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져 있으니까 오전에 수업 듣고 오후에 알바하고 집 좀 알아보면 9월에는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당장 폰도 없는데… 부동산은 또 어디서 알아봐..."
"근데 제가 듣기로는, 보통은 다 오후반으로 배정한다는데요. 오전반은 이미 예전부터 이 학원에서 유학하고 있던 유학생 위주고, 웬만하면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후반으로 편입시킨다고들 하던데…”
“무슨 말이에요. 알바를 하려면 오후에 해야지, 오전에 하는 알바가 편의점이나 맥도날드 빼면 어딨어요?”
“아무튼 제가 듣기로는 그렇대요. 자세한 건 반 배정 받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벌레약부터 사러 갈래요?”
“...일단은 그 편이 좋겠어요.”
그렇게 일본 표류 첫 날이 저물었다.